• 최종편집 2022-09-27(화)

예장 고신, 제72회 총회장단 합동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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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봉덕교회, 창립 45주년 기념 임직식 및 은퇴식

예장(통합) 봉덕교회(강정식 목사)가 지난 9월 18일(주일) 오후 3시, 교회 창립 45주년을 기념해 임직 및 은퇴식을 가졌다. 당회장 강정식 목사의 집례로 드려진 1부 예배는 경남노회 부노회장 신종주 장로(하청교회)가 대표로 기도하고 동시찰장 전재성 목사(평강교회)가 성경봉독(엡4:1-4)한 후 부노회장 조신제 목사(새빛교회)가 ‘부르심’이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설교 후 이어진 2부 은퇴식에서 봉덕교회 당회서기 감규상 장로가 은퇴하는 집사와 권사를 소개하고 강정식 목사가 기도한 후 봉덕교회 은퇴집사 및 은퇴권사 된 것을 선포했다. 3부 임직식은 당회서기 감규상 장로가 임직자를 소개하고 강정식 목사가 임직자와 교우들에게 서약을 받은 후 안수기도하고 장로 1명과 집사 2명, 권사 4명에 대해 봉덕교회 장로·집사·권사 된 것을 선포했다. 또 명예권사로 추대하는 4명을 소개하고 기도한 후 명예권사 된 것을 선포했다. 은퇴 및 임직을 축하하는 4부 순서는 전임 노회장 이상택 목사(회원동부교회)가 축하의 말을 전하고 이창교 목사(상남교회)가 임직자와 교우들에게 권면의 말을 전했다. 이날 특별히 선우혜경 찬양사역자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축가를 부르며 은퇴 및 임직자들을 축하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또 봉덕교회는 임직자들에게 임직패를 전달하고 경남노회 장로회는 임직한 김삼권 장로에게 장로뱃지를 수여한 후 전임 노회장 이용우 목사(마산동부교회)가 축도함으로 모든 순서를 마무리 했다. 다음은 은퇴 및 임직자 명단이다. ▲집사은퇴 : 나재성, 구강회, 강위석 ▲권사은퇴 : 박산월, 김효동, 박덕순, 김춘자, 임덕순 ▲장로임직 : 김삼권 ▲집사안수 : 김영운, 권대삼 ▲권사임직 : 박순이, 김성덕, 장정혜, 구현정 ▲명예권사 : 김순연, 강선윤, 안순준, 강미옥

김해제일교회, 목사·장로 원로추대식

기성 김해제일교회가 지난 9월 18일(주일) 오후 4시, 안용식 목사, 이해군 장로의 원로추대식을 가졌다. 원로추대식에 앞서 드린 1부 감사예배는 치리목사 최준연 목사(창원제일성결교회)의 집례로 경남지방회 부회장 조영종 장로가 대표로 기도하고 서기 김동환 장로가 셩경봉독(마6:31-33)한 후 기성 총회장 김주헌 목사가 ‘성도의 궁극적인 관심’이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김주헌 목사는 “우리의 삶의 중심과 핵심을 잘 살펴야 한다”라며 “올바른 중심을 삶의 우선 순위에 두는 성도들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어진 원로 추대식은 최준연 목사의 집례로 지방회 회장 이충구 목사가 기도하고 원로목사로 추대되는 안용식 목사를 소개 한 후 추대사를 전하고 김해제일교회 원로 목사 된 것을 공포한 후 총회와 지방회, 교회 동기회가 준비한 추대패를 증정했다. 원로 장로로 추대되는 이해군 장로 역시 최준연 목사가 소개 후 추대사를 낭독하고 공포한 후 추대패를 증정했다. 이날 축하를 위해 참석한 김학희 목사(삼방제일교회)와 김해시기연 회장 문병율 목사, 한샘중앙교회 원로 차성훈 목사, 한누리교회 원로 조예연 목사가 축사와 권면의 말을 전하고 동기회 대표 김명숙 목사가 축시를 낭독한 후 창원교회 원로 조관행 목사가 원로 장로를 위한 축사와 권면의 말을 전하고 비전드림교회 원로 한상렬 목사가 축도함으로 모든 순서를 마무리 했다. 한편, 원로 목사로 추대된 안용식 목사는 인사말을 통해 “저의 사역에 기쁨으로 임써 동참하여 협력해 주시고, 원로 목사로 초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주님게서 원로 목사가 된 후 어떻게 사용하실지 기대하며 주님께 새로운 충성을 다짐합니다.”라며 인사의 말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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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 고신, 제72회 총회장단 합동 인터뷰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총회(총회장 권오헌 목사, 이하 고신)의 제72회 정기총회 첫날 일정이 종료한 가운데 신임 총회장단이 기자단과 인터뷰 시간을 가졌다. 이날 총회장 권오헌 목사 부총회장 김홍석 목사, 전우수 장로, 사무총장 이영한 목사, 기독교보 사장 최정기 목사, 포도원교회 담임 김문훈 목사가 참석했으며, 인터뷰에 앞서 신임 부총회장 전우수 장로가 먼저 기도하고 시작했다. ■ 질문에 앞서 인사말씀 부탁드립니다. 권오헌 목사 : 기독신문들이 와서 취재와서 감사하고 잘 부탁드립니다. 설교에서도 말했지만, 저희 교단이 큰 교단은 아니지만 한국교회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잘 보여주는 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저희 교단이 사랑이 많은 교단이었고, 교단에 대한 사랑도 있었고,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한 사랑도 있었고, 조국 교회에 대한 사랑도 있었고 기도하는 시간 마다 고신대, 신학대학원, 복음병원을 위해서 늘 기도했고, 학생신앙운동에 대해서 온 교회가 협력했던 그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지금 세월이 복잡해지고 하니까 개교회주의나 성도들이 개인주의에 많이 빠졌는데 우리 총회부터 하나님 앞에 다시 한번 서로 사랑하면 좋겠다고 그런 마음이고, 그런 마음으로 교단의 다양한 의견들을 하나로 잘 모으고, 생각이 달라도 함께 사랑하면서 교단이 할 수 있는 그런 풍토를 만들 수 있다면 한걸음이라고 그렇게 애쓰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김홍석 목사 : 선거 과정에서 염려하는 분들이 많이 있었고, 과열 양상을 실제로 보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고신 교회의 저력은 오늘 기자단이 보셨던 것처럼 ‘그것(우려했던 모습)이 우리의 수준이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총회에서 특별한 문제없이 투표 전에 특별한 문제 없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이해 관용하면서 아름다운 선거가 마무리하게 됐습니다. 저와 경쟁했던 후보 목사님도 우리는 싸운 것도 아니고 전투한 것도 아니고 단지 경쟁을 했을 뿐입니다. 다음 기회에 쓰임 받고 봉사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고신 교단의 저력을 보여준 총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총회장이 1년 동안 할 일은 다른 것은 없습니다. 총회장님을 열심히 도와드리고, 1년 동안 더 준비해서 총회장 때 섬기도록 하겠습니다. 전우수 장로 : 고신 총회에 관심을 가지고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장로부총회장으로 72회기를 섬기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고, 총대들이 선택해 주셔서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어쨌든 제가 SFC를 통해 훈련을 받고, 장로가 되어서도 전국장로회나 교단의 각 기관들을 섬겼습니다만은, 늘 부족함이 있고, 장로로서의 한계를 많이 느꼈습니다. 장로부총회장도 1년 이라는 짧은 기간에 봉사해야 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역할이 제한적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단이 처한 상황이 녹록치 않습니다. 학교문제, 병원문제, 총회 회관문제, 또 다음세대나 농어촌교회, 도시미래자립교회 이런 여러 도전적인 과제들이 많습니다. 장로로서 보는 시각과 해결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1년 동안 총회장님 잘 보필하고 도우면서 섬기겠습니다. 맡은 1년 동안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최선을 다해 할 생각입니다. 이영한 목사 : 한국교회 정체성이나 반기독교 악법이라던지 이런 것을 막기 위해 우리 총회가 최선을 다해 앞장설 생각입니다. 그리고 좋은 법이 만들어지고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우리 고신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지역사회를 위해, 기후환경을 위해 최선을 다해 앞장서서 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많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 권오헌 총회장님은 SFC 대표간사를 지내셨습니다. SFC 대표간사 출신으로 최초 총회장이 되셨는데, SFC 폐지안에 대한 견해와 해결책에 대한 방안을 피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권오헌 목사 : SFC가 더 잘하라는 소리인 것 같습니다. SFC가 더 잘하라는 뜻이라 생각합니다. 당장 폐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그러나 교단의 목회자들 가운데서는 SFC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표현하는 것이고, 그 표현이 과한 것 아니냐는 말이 있었는데 그런 표현이 있어야 각성의 계기가 될 것입니다. 신학교육부에서 잘 논의하고 처리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영한 목사 : 부연설명을 하자면 청소년 사역, 청년대학생 사역을 위해 총회에서 113명의 상근 간사들을 두고 지원해서 사역하는 총회는 우리밖에 없습니다. SFC는 다음세대를 이끌어 가기 위한 중요한 자원이고, 거기 학교와 학원 사역을 하다보니까 우리 총회 어른들이 보시기에 생각과 안 맞는 부분들이 일부 있을 수 있습니다. 총회장님 말씀대로 잘하라는 지적으로 받아드리고 앞으로 더 발전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 고신은 과거부터 고려, 합신, 순장과 교단 통합을 추진해왔고 2015년 고려와 통합을 추진했습니다. 현재 합신과 순장과의 통합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합니다. 이영한 목사 : 순장하고는 통합준비위원회로 준비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통합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고신은 남한 땅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했던 총회이고, 순장 총회는 북한 땅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가 1.4 후퇴 때 같이 내려왔던 분들이기 때문에 상징성과 역사성이 많습니다. 우리 총회와 순장 총회가 규모가 비슷하면 쉽게 성사되겠지만 일부 순장 쪽에서는 역사성이나 그동안 지켜왔던 것에 대해 ‘고신에 흡수되지 않느냐’ 하는 우려를 하시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그분들이 충분히 공감하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고, 지금 공감은 거의 된 상태입니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기 때문에 통합을 하려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끼리 함께하는 것이 한국교회 분열 속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합신과 대신의 경우에는 교류를 계속하고 있습니다만 통합을 추진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교단을 서로 인정하고 현재는 정책이나 한국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에 힘을 합해서 함께 하는 것과 협의하고 교류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 2019년 일산벧엘교회가 탈퇴하고 2021년 대구동일교회가 교단을 탈퇴했습니다. 통합 총회 경우에는 위원회를 구성해 탈퇴한 교회를 되돌리기 위해 노력하는데, 고신 총회 차원에서 그러한 노력을 할 계획이 있으신가요? 권오헌 목사 : 당연히 있습니다. (교단 탈퇴가)신앙고백이 달라서 한 것도 아니고, 행정적이라던지 입장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니까 충분히 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벧엘교회 박광석 목사님은 저와 동기기도 하고, 또 대구는 저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어떻게든 대화는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리 문제 때문에 나눠진게 아니잖아요? 가능성 있다고 생각하고 노력하려고 합니다. ■ 사회적인 섬김을 위해 교단 차원에 어떤 복안을 가지고 있으신지 질문 드리고 또 인구절벽 시대에 다음세대 복음화 전략이 무엇입니까? 권오헌 목사 : 저희 교회는 수십 년 전부터 장애인 사역을 해 왔고, 우리가 소문을 내지 않아서 그렇지 와서 보시는 분들은 모두 놀랍니다. 고신은 선전을 잘하는 것이 아니고 신학적 입장 때문에 충분히 고민하고 한번 시작하면 꾸준히 끝까지 하는 그런 특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신학적 이슈나 사회적 변화에 빨리 따라가지 못하는 것도 고민이 많아서 충분히 하나님의 뜻인지 연구하고 고민하고 기다리기 때문일 뿐입니다. 결정되면 굉장히 열심히합니다. (서울시민교회 사례 소개). 표시를 내지 않고 떠들지 않아서 그렇지 꾸준히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대사회적인 것은 총회에서도 많이 고민하고 있지만 우리가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은 조심스럽습니다. 이번에는 예배 문제 때문에 큰 소리를 냈는데, 신사참배와 같이 신앙의 본질적인 것에는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신학적 입장에서 조심스러운 입장입니다. 김홍석 목사 : 다음세대에 관해서 총회교육원에서 교재 개발이 끝나서 잘 보급되고 있고, 총회 차원에서 다음세대 교육 수립을 위한 세미나를 했었고, 내년에도 계획하고 있고 육 콘텐츠 개발 강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만족하지는 못하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영한 목사 : 다음세대 관해 우리가 최선을 다해 지원을 하고 있고, ‘교회 사역 트랜드’라는 코로나 이후 시대를 대비해서 책을 썼는데, 여러 곳에서 최우수 도서로 선정되고, 많이 읽혀지고 있습니다. 다음세대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를 굉장히 연구하고 있습니다. 인구절벽도 젊은 세대들이 아이를 갖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우리가 열심히 국회에 가서 이야기 하고 있고, 조금 더 좋은 법이 만들어 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산하제한 할 때에 유일하게 그 정책에 반대를 했던 것이 우리 교단입니다.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어떻게 지원하고 어떻게 젊은이들이 아이를 갖고 편안하게 직장생활하면서 키울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개인이 키우기 힘들 때 교회가 키워주는 방안을 연구하고 검토하고 있습니다. ■ 차별금지법에 제정 반대에 대한 입장을 계속해서 유지해 가실 예정이신가요? 권오헌 목사 : 차별금지법 제정 저지에 대해 우리 교단 대사회관계위원회에서 꾸준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차별금지’라는 말이 듣기 좋은 말이지만 법 조항에 문제가 있는 것을 계속 지적하고 있고 반대하는 활동을 하고 있고 국회의원들과 만나 면담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회의원 중 이런 독소조항이 있는 것을 잘 모르는 분들도 계십니다. 교회는 이 사회가 좋아지는 것을 바라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마치 교회가 교회의 유익을 위해 고집부리는 것처럼 비치지 않도록 섬세하게 대응해나갈 것입니다. 이영한 목사 : 부연하자면, 이미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들이 있습니다. 그런 법은 우리가 찬성을 하고 그들을 보호해야 하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성경적으로 위배 되는 일들에 대해서는 법적으로 역차별을 만드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 작은교회와 미래자립교회에 대한 대응 방법과 작은 교회 목회자 은퇴 후 교회 소멸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권오헌 목사 : 저희 교회 같은 경우에는 ‘분립개척을 하자’라고 늘 이야기 합니다. 저희는 부목사님이 개척을 할 경우 교회를 떼 주고 빨리 자립할 수 있도록 노력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제정 지원과 전문사역자를 지원하기도 합니다. 저희 교단에도 큰 교회들이 작은 교회를 돌보고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이상적인 것은 노회가 목사를 선발하고 안수하는 과정에 노회를 중심으로 교회를 개척할 수 있는 것이 좋은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이영한 목사 : 고신 총회는 미자립교회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미래자립교회라는 용어로 고치고 미래에 자립할 수 있도록 총회가 적극 지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전우수 장로 : 농어촌교회와 미래자립교회가 큰 문제가 두가지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농어촌교회는 원리 어려웠고 도시의 미래자립교회는 코로나로 많이 어려워 졌습니다. 은퇴를 몇 년 앞두고 계신 목사님들의 근본적인 고민이 은퇴 후 후임 목사를 모시기 어렵고 연속성을 가지기 어렵다는 고민입니다.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을 총회에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통합하거나 순회하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노회가 자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총회가 돌보는 것도 좋은 방안일거라 생각합니다. 다른 문제는 교회 재산권 문제가 가장 심각합니다. 유지재단에 가입은 하지 않았고 교회 재산은 있지만 교인들이 없거나 할 때 사유재산화 하려는 몇몇 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총회차원에서 가이드라인을 세워줄 필요가 있습니다. 노회와 시찰회도 팔고 가버리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잘 살펴야 합니다.

예장 재건, 제104회 정기총회 개회

대한예수교장로회(재건) 총회(총회장 김상원 목사, 이하 재건)가 지난 9월 19일(월), 서울시 영등포구 재건영등포교회(한명신 목사)에서 ‘제104회 정기총회’를 개회했다. ‘말씀으로 세워져 가는 재건교회!’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총회 개회예배는 부총회장 하성존 목사(대신동교회)의 인도로 시작해 부총회장 김효덕 장로(낙원로교회)가 대표로 기도하고 총회장 김상원 목사(은혜교회)가 ‘말씀으로 세워져 가는 교회’(행20:28-32)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설교 후 회원호명과 함께 시작한 회무에서 절차보고 후 임원선거에 들어가 총회장 김상원 목사를 재신임하여 신임 총회장에 선출하고 부총회장에 하성존 목사와 김효덕 목사를 재신임하여 1년 더 연임하기로 했다. 임원 선거 후 이어진 유안건 토의에서 총회신학원의 개혁방안으로 M.div 과정을 마친 후 Th. M 과정으로 장학제도를 구축하기로 했다. 또 은퇴 후 목회자의 은급제도를 획기적으로 개혁하여 전목회자의 연금제도 가입을 적극 추진하고 연금제도가 전체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토대를 세우기로 했다. 다음은 총회 임원 명단이다. ▲총회장 : 김상원 목사 (서울은혜) ▲부총회장 : 하성존 목사 (부산대신동), 김효덕 장로 (울산낙원로) ▲서기 : 정낙준 목사 (재건목포) ▲부서기 : 임일래 목사 (부산중앙) ▲회록서기 : 김효산 목사 (재건창원) ▲회계 : 박용학 장로 (마산재건) ▲부회계 : 최영길 장로 (서울 영등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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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성령충만(2/3)과 죄의 법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도 죄의 법은 우리에게 계명을 지킬 수 있는데 못 지켰다고 속이며 부담을 안겨 온다. 그것으로 나를 죽인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7:11).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강조한다. 신앙생활은 나의 행위를 고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다. 행위를 고치려는 신앙생활에서 빨리 빠져 나와서 자유 하라.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믿는 것이다. 생수의 근원되신 주님을 버리고,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파선 안 된다(렘2:13). 예레미야서의 주제다. 성경 전체의 주제이기도하다. 생수의 근원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신앙생활이지 내가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파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다. 나를 고치려고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님을 발견하라.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 신앙생활임을 발견하라. 당신은 이미 성령의 임재 안에 있으며 성령충만함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생명의 풍성함을 얻는다. 참 자유를 만끽하며 능력의 삶을 산다. 자신을 보며 죄책감과 죄의식을 가지느냐,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을 믿음으로 바라보느냐가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실수할 대마다 “나의 모습이 이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구나!” “오늘도 나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되겠구나! 감사하다.”는 깨달음을 가져야 한다. 보혈 앞에서는 철면피가 되어야 한다. 자신을 보면 “이래가지고 되겠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책감 죄의식 속에 사로잡히길 원하시지 않으신다. 내 속에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마음대로 잘 안 된다. 내 지체 속에는 다른 법도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의 법으로 항상 나를 사로잡아 온다. 죄의 법은 절망이다. 사망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라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 사망의 법에서 건짐을 받는 길을 발견하고 걸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죄의 법이 주는 생각을 묵상하지 않고 임마누엘을 묵상하는 것이 성령충만으로 출발하는 길이다. 당신 안에 잠자는 성령의 능력을 깨우는 길이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라고 탄식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바울을 보라. 죄의 법에서 해결 받았음을 선포하며 생각하라고 한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5)하면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라고 하는 환희를 보는가? 펄쩍펄쩍 뛰는 바울의 모습을 보는가? 이것이 나의 모습니다. 해방이다. 죄의 법에서 완전히 벗어남을 받아들이는 것이 성령충만으로 출발하는 삶이다. 성경 전체가 그렇지만 특히 로마서 전체엔 놀라운 복음이 숨어져 있다. 로마서 전체가 그렇다. 로마서 5장에서도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고 이 은혜가 많은 사람에게 넘쳤다고 고백한다(롬5:15). 이제 은혜가 왕 노릇한다고 한다(롬5:21). 성경 전부가 이 이야기다. 율법적인 눈을 걷어 버리고 은혜의 복음, 예수의 복음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한다. 생수의 근원되신 주님을 버리고, 가둘 수 없는 터진 웅덩이를 파는 일이 예레미야 시대만의 일이 아니다. 정말 안타깝다. 통탄할 일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왔다 가셨는데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이 부족하단 말인가? 우리는 주님과 하나 되어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났다(로마서 6장). 예수님과 함께 보좌 우편에 앉혔다(엡2:6).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하심을 공간의 어떤 다른 우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영의 세계는 공간과 시간과 물질의 세계가 아니다. 이해 할 수 없는 일 같지만 그렇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김 집사 몸에도, 박 집사 몸에도, 오 목사 몸에도 계신다. 나누어져 계신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의 모든 몸에 온전하게 계신다. 이것은 공간 계념이 아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우리가 사는 다른 우주적인 공간으로 승천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우리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우리 몸에 성령께서 계신다. 우리 몸에 하나님이 거하신다. 우리 몸이 성전이다. 이사야가 본 보좌가 우리 몸에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몸이 하늘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무리 일까?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위쪽만 하늘이 아니다. 옆쪽도 하늘이고 밑쪽도 하늘이다. 하늘이라는 개념이 3차원적인 공간 계념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면 하나님 계신 곳이 하늘이다.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면 예수님의 승천으로 우리 몸으로 승천하셨다고 이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승천이 우리 몸으로 하셨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 우편에 앉히심을 이해하기 위한 설명이라고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며 읽어 주길 바란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6)라는 말씀을 좀 더 생생하게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아 설명해 본 것이다. 믿음은 이것을 묵상하고 믿는 것이다. 스스로의 삶을 고치려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바른 복음을 알고 살 때 저절로 따라오는 열매임을 보아야만 한다. 회개는 나를 고치려는 것이 회개가 아니다. 회개는 예수님께서 해 두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나를 고치려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야 한다. 우리는 전에는 어두움이었다. 이제는 빛이다. 빛의 자녀들처럼 받아들이고 행하면 된다. 우리가 실수했을 때 회개하면 된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이런 또 실수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실수로 인해 죄책감에 쌓이지 않겠습니다. 용서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새 힘을 얻습니다. 주님이 승리했습니다. 주님의 승리가 저의 승리이다. 제가 오늘도 철저히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러면서 자꾸 십자가로 돌아가면 된다.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예수님과 함께 하늘 에 앉혔음을 믿는 것이 성령충만으로 출발하는 것이다.

[오태열 목사] 진짜에는 눈물이 있다

세상에는 진짜가 있으면 가짜가 있기 마련이다. 실체와 그림자, 알곡과 가라지가 쌍생하듯, 진짜와 가짜는 항상 쌍생한다. 진짜가 가짜처럼, 가짜가 진짜처럼 보일 때가 참으로 많다. 가짜는 진짜처럼 흉내 낼 수는 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곧 탄로 나고 만다. 그러나 진짜는 끝까지 간다. 가짜는 언제까지 속일 수가 없다. 왜냐면 시간이 지나면 가짜인 열매가 맺히기 때문이다. 진짜와 가짜의 열매는 각각 다르다. 신앙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다. 진짜 성도인지 가짜 성도인지의 구별은 눈물의 기도에 있다. 진실한 신앙인에게는 눈물의 기도가 있지만, 가짜 성도에게는 눈물의 기도가 없다. 눈물의 기도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는 척은 할 수 있으나 지속적인 눈물의 기도는 할 수 없다. 가짜라 해도 지속적인 눈물의 기도가 있다면 진짜가 된다. 지속적인 눈물은 절대로 가짜로 만들어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게 어느 순간부터 눈물의 기도가 사라졌다면 가짜 성도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께 눈물로 부르짖는 지속적인 기도가 있는 사람은 진실 된 신앙인이다. 다니엘은 평탄할 때도, 사자 굴에 들어가는 위기 앞에서도 정한 시간 습관에 따라 하루 세 번씩 기도하였다. 이 일로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이 무사함으로 그의 신앙이 진실임을 보여준다. 예레미야 선지자 당시에는 애국, 애족한다는 가짜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눈물의 기도가 없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눈물의 기도를 통하여 애국, 애족의 선지자임을 보여주었다. 예레미야애가 3:48-49절에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라고 하였다. 교회를 사랑하며 위한다고 말하면서 교회가 교회답지 못함을 비난한다. 현재 교회에 대한 실망으로 가나안 교인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점은 교회를 위한 눈물의 기도가 없다는 것이다. 정말 교회를 위하고 사랑한다면 교회를 위한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 불신자의 가족, 친척, 친구들의 영혼을 위하여 뜨거운 눈물의 기도가 있을 때, 그 영혼을 구원시킬 수 있다. 진짜 신앙인의 눈에는 영혼의 가련함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야지 군중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기도할 때 두루뭉실 기도하지 않는다. 이름을 부르며 구구절절이 간절히 기도한다. 전도의 대상자를 놓고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 전도할 때 앵무새처럼 달달 외워서 전할 것이 아니라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말로서 전해야 한다. 전도에는 예수 믿고 체험한 구원의 즐거움과 변화된 나의 삶, 받은 축복 등, 자기만의 간증이 있어야 한다. 진짜와 가짜가 확연히 나타나는 열매 맺는 계절이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7:18절에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하시고 20절에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 하였다. 나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내 신앙과 애국 애족, 교회 사랑과 영혼 사랑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맺고 있는 열매가 진위를 증명하여 준다. 진짜가 되어야 한다. 눈물의 기도가 꼭 있어야 한다. 눈물의 기도가 없다면 내 신앙과 교회와 영혼 사랑, 애국 애족도 모두 가짜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박봉석 목사] 가로등을 끄는 이유

미국에는 팜 스프링스라는 사막 지역의 도시가 있습니다. 이곳은 많은 노인들이 사는 실버타운으로서 유명한 휴양 도시입니다. 그런데 이곳을 가보면 이 도시만의 특별한 것을 경험하게 되는 데 그것은 특별한 구간을 제외하고는 밤에 모든 가로등의 불빛을 끈다는 것입니다. 아니 얼마든지 가로등을 환하게 켤 수 있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도시인데 왜 캄캄한 밤에 가로등을 끄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막 지대의 가장 아름다운 자연은 밤하늘입니다. 밤하늘에 아름답게 수놓은 별들을 선명하게 보기 위해서 이곳 주민들은 모두의 합의 하에 그렇게 가로등을 끄는 것입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그곳 주민들의 그런 결단을 듣고는 모두가 놀란다고 합니다. 높은 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을 잘 보기 위해서 그보다 훨씬 낮은 곳에 있는 가로등을 끄는 불편을 감수하는 주민들의 결단이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정의를 할 수 있지만 이런 정의는 어떻습니까?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서 낮은 가치를 포기할 줄 아는 사람” 바로 이 정의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치이동’을 한 사람입니다.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서 그보다 낮은 가치를 버릴 줄 아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높은 가치를 위해서 나의 이익과 명예를 기꺼이 포기할 줄 압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물질도 시간도 포기하고 내 위신과 자존심도 버릴 줄 압니다. 사도 바울이 성경 빌립보서 3장 7-8절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서 그보다 낮은 가치를 포기하는 결단을 말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영혼 구원을 위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주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 무엇을 포기했습니까? 낮은 가치를 포기하고 높은 가치를 선택할 줄 아는 사람, 땅의 것을 포기해서 하늘의 것을 얻기를 기뻐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기꺼이 마구간 말구유에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사람입니다. 봄이 되면 비슷한 시기에 피는 꽃이 있는데 벚꽃과 목련꽃입니다. 그 중에 벚꽃은 활짝 만개했다가도 질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나무 가지에서 다 떨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목련꽃은 시들어서 색깔이 변해서 거무칙칙한 색을 띠기까지 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습니다. 실제로 꽃이 질 때쯤에 목련꽃을 가까이 가서 보면 색이 바래기 까지 시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생애가 다가도록 놓아야 할 것,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인생들의 모습과 닮았다고 하겠습니다. 파스칼은 말하기를, 인간의 마음속에는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은 오직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인간들은 그 공간마저 돈과 권력과 명예로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빈 공간은 더욱 커지며 허무와 고독으로 몸서리치게 됩니다. 이 세상 많은 인생들은 포기하지 못하고 붙잡고 있는 것들 때문에 더 중요하고 존귀한 것들을 놓치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손에 꼭 쥐고 있어서 정작 하나님이 주시려는 선물은 다 받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지요. 독자 여러분, 인생의 끄트머리까지 놓지 않고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지금 붙들고 있지 않아야 하는 데 꼭 붙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기도하며 살펴보십시오. 그 붙들고 있는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포기하면 생각지 못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 진짜 내게 필요했던 신령한 복이 내게 임하는 것을 볼 것입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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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하나님 앞에 기억되는 봉사

10월 총회를 앞두고 각 교단들마다 총회에서 봉사할 주요 임원들 선거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면류관 벗어서 주 앞에 드리세”라고 찬송하면서도 자리에 오르기 위해 도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르는 선거 열풍을 느끼게 된다. 이 시점에서 우리 모두는 니고데모의 안경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기억되는 봉사”가 어떤 봉사인지를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호세아서 1장 1절에는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기록이 있다. 호세아 선지자는 남쪽 유다 출신이 아니라 북쪽 이스라엘 출신이다. 그가 활동했던 시대에 북쪽 이스라엘 왕국을 통치했던 왕들은 스가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 호세아 등 여섯 왕들이었다. 그런데 선지자 호세아는 자신의 책을 기록하면서 자기 나라의 여섯 왕들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유다의 통치자들의 이름은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왕들 중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한 사람만 언급해도 충분하다고 간주하고 있다. 이들 여섯 왕들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아주 어두웠던 한 시대를 대표해 보여주고 있다. 이들 중 거의 대부분의 왕들은 한결같이 왕을 시해하는 대역죄를 범하기를 주저하지 않은 살인자들이었다. 이스라엘의 왕권은 공평과 정의가 그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왕권은 참된 왕 되신 하나님의 통치를 대표해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보좌에 대해서 아름다운 묘사를 하면서 의와 공평이 보좌의 기초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보좌를 표현할 때 항상 율법이 새겨진 두 비석이 들어있는 언약궤 위에 놓여 있는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신정국가의 왕들로서 하나님의 왕권의 옥쇄를 가지고 있는 들로 상징되는 이들 이스라엘 왕들은 완전히 반대적인 것을 대표해 보여주었는데, 이들의 보위가 모두 인간의 피로 얼룩진 기초위에 세워져 있었다. 이것이 아마도 호세아 선지자가 이들 권세 있는 왕들을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였을 것이다. 호세아는 이들 왕들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이들 왕들의 행위가 하나님 나라에서는 완전히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호세아 선지자가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 왕들이 모두 경건한 왕들인 것은 아니다. 요담과 아하스는 불신앙으로 잘 알려져 있는 왕이었다. 호세아가 언급하고 있는 모든 왕들은 어떤 경건한 목적이든지 아니면 다른 목적으로든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하나님을 “봉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심지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여로보암에게도 해당된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여섯 왕들은 심지어 “부정적인 방법”으로도 사용하지 않으셨다.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에게 완전히 쓸모가 없는 자들이었다. 의심할 나위 없이 이 모든 왕들은 자신들을 엄청난 위엄으로 치장한 자들이다. 이 모든 왕들은 야심에 찬 왕들이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위하여 “이름”을 내고자 노력하였으며, 이스라엘을 세계 권력의 자리에 올리고자 원했던 왕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단지 자기들 스스로를 위해서, 자기들 자신만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던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명성은 사라져 갔으며, 이들의 위대함도 잊혀 버린 것이다. 선지자에게 있어서 이들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그들의 통치 연대를 언급해야 할 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이들 왕들은 아마도 자신들의 통치 시대가 역사책에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비중으로 기록되는 것을 보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 호세아는 이들을 침묵 속에 파묻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 이스라엘 왕들은 사실 언약의 백성들로서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에 이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온전히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살았던 자들이었지 하나님의 봉사에 헌신하기를 결코 배우지 않은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험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존재한다. 물론 우리가 이들 여섯 왕들처럼 왕이 되기 위해 왕을 죽이거나 이들처럼 토색하는 자들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기를 단지 공개적으로 인정된 악이나 죄인들만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외되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지옥의 불에 알맞게 만드는 죄가 무엇인가? 그것은 “열매 없음”과 하나님 나라에 아무 “쓸모없음”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존경받는 사람들도 될 수 있고, 사람들 사이에 굉장한 명성을 즐길 수도 있다. 교회의 각 기관, 노회, 총회 활동에서 자신을 드러낼 수도 있고 인정받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목전에 이름 없는 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았는지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며 우리 주님을 위해서 살았느냐 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은 자기 자신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관심을 갖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 자신들의 삶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내가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며 나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지, 아니면 나 자신을 부인하며 주님을 위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성찰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검토의 결과는 아주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위한 삶을 산다는 것은 단지 세상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불행하게도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하면서도 사실상 자신의 개인적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 사실상 인간의 마음보도도 더 악한 것은 없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Evangelia University 총장)

[김성수 총장] 나그네 인생

우리는 종종 이 세상은 우리의 본향이 아니요, 우리는 그저 나그네 인생을 살 뿐이라는 말을 합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라는 노래도 한 때 유행을 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발붙이지 않고 나그네 인생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아브라함과 신앙의 열조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히 11:9). 아브라함도 헤브론에 있는 헷 족속에게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창 23:4)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약속의 땅 가나안 아브라함의 ‘우거하는 땅’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창 17:8). 이 땅은 또한 이삭과 야곱이 우거하는 땅이기도 했습니다(창 28:4, 37:1). 우리도 이들을 모범으로 삼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상급을 생각하며 짧은 인생 나그네처럼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그네처럼 사는 삶이란 어떤 모습일까요? 이 땅은 허망한 것이니 오직 영원한 하늘 나라만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삶일까요? 나그네 삶을 살았던 아브라함과 열조들이 언제나 소위 내세의 영적인 문제에만 사로잡혀 생활 했을까요? 아브라함의 가슴을 환희와 즐거움으로 채워준 위대한 약속이 단지 하나님과 천군 천사들과 더불어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뿐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누렸던 축복은 오히려 땅의 기름진 축복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12장에서 이 내용을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은 이 지구 전체 모든 족속을 향한 큰 축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생육하고 번창하여 큰 민족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실제로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축복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왜 이 땅에서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성경은 약간의 대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창 12:6)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에 이미 거하고 있던 시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나안 족속들의 죄악과 사악함이 이미 하늘에 들렸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 땅의 거민들과는 거리를 두고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가나안 거민들은 결국 이 약속의 땅에서 물러가야 하는데 아직 그런 때가 되지 않았기에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은 그들 가운데 거하면서도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아모리 족속이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않았던 것입니다(창 15:16). 가나안 족속이 약속의 땅에 살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았다고 한다면 다윗의 시대에는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다윗이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때에 드린 그의 아름다운 기도를 생각해 봅시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대상 29:15). 여호수아와 사사기의 기록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하여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거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시대에도 가나안 족속들이 아직도 그 땅에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왕으로서의 모든 권리와 축복을 누리면서도 자신을 열조와 다름없이 나그네요 우거한 자로 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아가는 이 삶이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의 신분이어야 합니까?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이 땅은 나의 본향이 아니다”라고 노래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만을 소망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일까요? 우리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살지 않았느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8:20)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우리도 본향을 사모하며 이 땅에서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창조 세계의 회복을 소망하고 도래할 새 예루살렘과 새 땅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질문을 해 보아야 합니다. 산업화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아직도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우거하고 있는가?”라고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는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살지 않으니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인종적으로 가나안 사람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종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셈, 함, 야벳 족속을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세계는 지금 국제결혼과 문화적 교류, 그리고 세계화를 통해서 하나가 되는 지구촌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가나안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종적으로나 지리적인 구분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가나안 사람들에 저주가 임하도록 기도할 수 없습니다. 대신에 우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명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과업은 인종적으로 가나안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땅 끝까지 모든 민족과 방언과 모든 족속들을 향해 하나님 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세상 모든 족속과 민족과 방언을 향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그네요 우거자라는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야 합니다. 인종적으로 가나안인 민족들을 향해서 저주하거나 미워하거나 두려워하는 삶이 아니라 구원과 용서와 사랑을 주기 위한 그리스도의 초대를 선포하면서 다가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들을 이미 우리에게 임했고 앞으로 온전히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도록 초대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함께 죄악된 삶의 영역에서 본토인이 아니라 진정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면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진정한 왕이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땅 끝까지 선포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김성수 총장] 영유아가 나라의 미래다!

몇 년 전 미래 사회의 모습을 그린 영국의 한 소설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내용인 즉 현대사회의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로 인해서 인형과 유모차 제조 산업이 각광받는 미래 산업으로 각광받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초롱초롱한 눈빛의 아이들이 없는 텅 빈 학교 교실과 해맑은 웃음을 머금고 뛰노는 순박하기 그지없는 아이들이 없는 학교 운동장과 동네 놀이터는 조용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느껴집니다. 결혼한 젊은 부부가 유모차에 인형을 싣고 산책하는 모습을 그린 장면은 읽는 이로 하여금 소름을 끼치게까지 만듭니다. 애기를 출산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기를 갖고 양육하고 싶어 하는 모성애마저 제거할 수는 없으니 애기를 대체할 수 있는 인형산업과 유모차 산업이 각광을 받게 된다는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이 공상적인 이야기가 우리 사회에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동네 곳곳에 산아제한을 독려하는 표어들이 많이 붙어 있었습니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덮어 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이 당시에는 우리 나라의 합계출산율(가임 여성 1명이 평생 낳는 자녀수)이 6.0명이었습니다. 한 여성이 평균 6명씩 아기를 낳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끔찍한 출산제한 구호가 등장할 만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구호가 등장한지 반세기만에 우리 사회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과 가장 빠른 인구 고령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한국개발연구원의 한 보고서에 의하면 우리 사회의 합계출산율은 1970년 4.53에서 1980년 초 인구 대체율인 2.1 이하로 떨어진 후, 계속된 출산 감소로 2004년 1.15명, 2017년 1.05명, 2018년에는 0.98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합계출산율이 0명대인 국가는 우리 나라가 유일하다고 합니다. 출산율 하락은 곧 다시 학령인구 감소로 이어지게 됩니다. 학생이 없어 문을 닫는 학교가 많아지게 되고 생산연령인구 또한 감소하게 되는 암울한 전망이 현실이 되고 가고 있습니다. 학령인구가 줄어들면서 앞으로 2년 뒤에는 전국 대학 70곳 이상이 폐교 위기에 처할 것으로 교육부는 전망하고 있습니다. 의과대학과 간호대학 등 취업이 비교적 잘 되는 학과를 제외하고는 많은 학과들이 정원을 채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는 또한 건강보험 및 연금 등 과중한 노인부양 문제를 야기 시킬 뿐만 아니라, 경제성장을 뒷받침할 젊은 노동인력의 부족 등 심각한 사회 문제를 야기 시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는 다양한 방법으로 출산을 장려할 수 있는 정책을 개발해 내어야 합니다. 소득수준이나 노동시장 참여 등의 조건 없이 5세 이하의 자녀가 있는 가정에 일정액의 양육보조금을 제공하거나 출산친화적 세제 도입, 출산 및 육아 휴직 등의 방법은 출산과 노동공급을 동시에 장려하는 방안이라는 보고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자녀가 있는 경우 자녀수에 따라 과세표준을 낮춰 주는 소득공제나 세액을 감면해 주는 출산 친화적 세제는 출산 장려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적극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세제의 경우 피부양자 공제 및 교육비 공제 등으로 자녀수에 따른 공제 혜택을 주고 있으나 그 혜택은 매우 한정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이제는 미국의 자녀 및 피부양자 세액공제와 근로소득장려세제, 영국의 자녀세액공제와 근로소득장려세제 등 출산친화적 세제와 같은 다양한 방법을 도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정책 등은 정책 비교를 위한 모의실험에서도 모두 긍정적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회 문제들은 정치권이 관심을 가지고 해결해 내야 할 본질적인 문제들입니다. 그런데도 곧 물러나야 할 현직 대통령과 앞으로 5년간 국사를 맡아야 할 당선인의 힘 겨루기 모습은 국민들을 답답하게 만들고 때로는 속이 터지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대통령 집무실을 옮겨야 할 피치못할 이유가 있으면 국민들에게 좀 소상히 밝혀서 왜곡되거나 과장된,또는 가짜 뉴스가 떠 돌지 않도록해야 합니다. 봄 벗 꽃이 피기 전에 청와대를 국민들에게 돌려주지 않아도 되니까 좀 더 본질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대통령 부인 의상이 178벌이니 구두가 몇 컬레라는 허접스러운 뉴스도 정말 우리를 짜증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대통령 부인이면 더 검소한 생활 모습을 보이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등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온갖 소리들이 다 들립니다. “평생에 옷 몇 벌 갖고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마르코스 부인 이멜다하고 꼭 같네…”, “운동화한 개 사면 2년은 신는데…”, “육영수 여사가 한복 입으면 우아하기라도 한데…”, “대통령이 왜 사채는 빌려 쓰느냐?”. 정치인들의 언행도 너무 저질스럽습니다. 청와대 이전을 반대하면서 청와대 지붕을 붉은 색으로 물들여 페이스 북에 올리는 모습도 참 치졸하고, 여당과 야당 대변인들의 담화에도 합리성과 고상함이 없습니다. 이제는 정치인들은 물론 우리 모두가 좀 품격이 있는 대화를 나누고 우리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함께 고민하며 해결책을 모색하는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혼란한 국제정세를 보면서 공의와 샬롬의 가치를 구현하는 정책을 구상하고 젊은 이들이 일자리를 마련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회, 오염된 하수를 식수로 사용해야 하는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생각하고 가난과 질병에 허덕이는 지구촌의 어려운 나라 백성들을 가슴에 품을 줄 아는 선진사회의 가치관을 구현해 나가야 합니다. 출산장려의 보다 근본적인 정책도 결국은 영유아에 대한 국민 모두의 가치관 변화를 모색하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아동학대와 낙태, 어린이 유괴와 영유아 살해와 같은 생명경시 풍조를 흉악한 범죄로 단정하고 추방해야 합니다. 모든 종교는 가정을 중요시하고 자식을 귀하게 여기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자식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고 했으며,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에 있는 화살과 같아서 이것이 그의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며 성문에서 원수와 담판할 때에도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CTS(기독교TV)가 벌이는 “영유아가 나라의 미래다!”는 출산장려운동은 찬사를 보낼만합니다. 이제 한 달 안에 178벌의 옷을 정리해야 하는 대통령 부인과, 청와대 집무실 이전을 위해 예비비를 받아내야 하는 대통령 당선인 모두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젊은이들이 직장을 갖고 결혼을 하여 애기를 가지고 단란한 가정을 꾸밀 수 있는 소망 있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 지 진지하게 한번 구상해 볼 수 있기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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