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1-08(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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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선연, 제2회 선교컨퍼런스 개최

전국목회자선교연합(대표회장 조희완 목사, 이하 목선연)이 주최한 제2회 선교컨퍼런스가 지난 10월 20일 경기도 안성 사랑의교회 수양관에서 ‘연합·도약·성취’를 주제로 열렸다. 이번 컨퍼런스에는 전국 36개 지역에서 380여 명의 목회자, 선교사, 성도들이 참석해 ‘다시 땅 끝으로’의 비전을 함께 나누며 한국교회 선교의 새로운 동력을 다졌다. 이번 행사는 목선연 외에도 MMI선교회, FGMI미래세대선교회, (사)국제독립교회연합 등이 공동으로 참여했다. 지난해 ‘땅 끝 선교’의 비전을 선포하며 출범한 목선연은 창립 1주년을 맞아 이번 컨퍼런스를 통해 단체의 사역 방향과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했다. 조희완 대표회장은 개회 메시지에서 “우리는 각자 소명받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지만, 모두가 미전도 종족 전도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며 “140년 전 복음을 들고 조선을 찾아왔던 서양 선교사들처럼 우리도 복음을 모르는 열방을 향해 온 몸으로 헌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시간이 지나며 한국교회의 부흥은 물론 선교의 비전과 열정도 점차 식어가고 있다”며 “이런 때일수록 우리의 소명은 더욱 분명해진다. 다시 열방과 땅 끝을 바라보는 한국교회가 되도록 가슴에 선교의 불을 지피자”고 권면했다. 이번 컨퍼런스에는 김용의 선교사(복음의빛선교회 대표), 지용근 대표(목회데이터연구소), 유주손 선교사(MMI선교회 공동대표) 등이 주강사로 나섰으며, 박이삭 선교사(이스라엘·팔레스타인 선교사)의 간증과 이만복 목사(대흥중앙교회·백석)의 사례 발표가 이어졌다. 박이삭 선교사는 “지난 2년간 이어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으로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고 있다”며 “그럼에도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변화가 일어난다. 복음을 접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사람들이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을 본다. 복음은 두 원수인 민족을 화평케 한다”고 전했다. 김용의 선교사는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마 24:14)라는 제목으로 강의하며 “오늘날 많은 교회가 예수님께서 주신 지상명령보다 자기 신앙생활에만 집중하고 있다. 교회는 다시 주님의 명령 앞에 서서 순종해야 한다”며 “복잡한 신학 논쟁을 떠나 그리스도의 원초적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호소했다. 지용근 대표는 ‘코로나 이후 통계로 본 한국교회 선교 실태’라는 주제에서 “코로나 이후 가나안 성도의 비율이 급격히 증가했다”며 “성도들의 신앙 회복을 위해 해외 단기선교가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제언했다. 이만복 목사는 남양주지부의 사례를 발표하며 “세대 통합예배와 드림투게더 세미나, 선교사 파송 사역을 통해 지역 교회의 선교 열정을 회복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유주손 선교사는 ‘교회와 선교단체의 협력’이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MMI와 목선연의 협력은 안정적 선교의 기본”이라며 “하나님의 선교 과업 성취를 위해 교회와 단체가 더욱 유기적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목선연은 앞으로도 한국교회의 해외선교 활성화를 위한 프로그램과 선교 네트워크 확장을 추진할 계획이다. “다시 땅 끝으로”라는 주제처럼, 목선연은 한국교회가 처음 선교의 열정으로 돌아가 세계 복음화의 사명을 다시 붙잡기를 기대하고 있다. 김현주 국장

웨이크업코리아, 손현보 목사 석방 촉구 및 종교탄압 규탄대회 개최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경남김해노회, 경남남부노회, 경남마산노회, 경남중부노회, 경남서부노회 등 5개 노회가 공동 주최하고 경남김해노회가 주관한 ‘웨이크업코리아 - 손현보 목사 석방 촉구 및 종교탄압 규탄대회’가 10월 26일(주일) 오후 3시 부산 남포동 패션거리에서 열렸다. 이번 집회에는 1만여 명이 참석해 “손현보 목사님을 자유케 하라”, “Free Pastor Son”, “자유대한민국을 자유케 하라”, “Free Korean Churches” 등의 피켓을 들고 손현보 목사의 석방과 종교의 자유 수호를 외쳤다. 이날 행사는 손 목사의 1차 공판과 보석심리(10월 28일 예정)를 앞두고 열렸으며, 5개 노회를 비롯해 20여 개 기독교 시민단체가 함께 참여했다. 1부 예배는 경남기독교총연합회 회장 김석환 목사(소금과빛교회)의 인도로 드려졌다. 김 목사는 사도행전 12장 1-5절을 본문으로 ‘교회는 간절히 기도하였더라’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며 “초대교회가 박해 중에도 기도로 승리했듯이 오늘의 교회도 무릎으로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TPUSA Faith 공동의장이자 갓스피크 갈보리채플 원로목사인 랍 맥코이 목사가 영상으로 한국교회와 세계로교회를 향한 격려 메시지를 전했다. 예배는 경남김해노회장 김인호 목사(해오름교회)의 축도로 마무리됐다. 2부 집회에서는 세계로교회 윤창현 장로와 고신 각 노회장들이 인사말을 전했다. 윤창현 장로는 “법치가 무너진 현실 속에서 교회가 억압받고 있다”며 손현보 목사의 구속 경위를 설명했고, 김해중앙교회 강동명 목사가 손 목사의 옥중편지를 대독했다. 이어 김진홍 목사(동두천두레교회), 김도은 목사(미음우리교회), 이영풍 대표(이영풍TV, 전 KBS 기자), 조평세 박사(1776연구소), 황도수 교수(건국대 법대), 이성구 목사(산돌손양원기념사업회 회장) 등이 정치적 중립, 언론의 자유, 사법 정의, 교회의 책임 등을 주제로 발언했다. 또한 김문수 전 고용노동부 장관은 “법치와 삼권분립이 무너지고 있는 자유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교회가 깨어 일어나야 한다”고 호소했다. 현장에서는 소프라노 하유정과 경남바른가치연합 댄스팀, 매지현, 댄서 윤이 공연을 펼쳤다. 손현보 목사는 부산구치소에서 보낸 옥중편지를 통해 “민주당의 폭력적 국회운영 아래 자유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다”며 “3·1운동 때처럼 교회가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부산·경남의 다음 세대가 반성경적 교육을 받고 있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며 “내년 지방선거와 교육감 선거를 위해 교회가 지금부터 기도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손 목사는 “나는 감옥에 있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내년 교육감 선거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찍어주십시오’라고 전하고 있다”며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교회가 깨어야 한다”고 전했다. 이번 행사는 한국교회의 종교의 자유를 수호하고, 손현보 목사의 석방을 촉구하는 대규모 연합집회로 진행됐다. 집회 실황은 유튜브 채널 세계로교회와 펜앤드마이크를 통해 생중계되었다.김현주 대표 (자료제공 = 세계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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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회 경남지도자 초청 조찬기도회 열려…

(사)경남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박석환 목사, 이하 경남기총)와 (사)경남성시화운동본부(대표회장 이경은 목사, 이하 경남성시화)가 공동 주최하고 경남성시화가 주관하는 ‘제33회 경남지도자 초청 조찬기도회’가 11월 7일(금) 오전 7시, 창원시 의창구에 위치한 그랜드머큐어 앰배서더 창원 그랜드볼룸에서 열렸다. 이날 기도회는 도내 각 기관장과 교계 지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경남성시화 대표본부장 김우태 목사(동창원영은교회)의 인도로 시작됐다. 공동회장 박동철 장로(서머나교회 은퇴)가 대표기도를 드린 후, 서기 박재송 목사(창원성민교회)가 성경봉독(마태복음 5장 13-16절)하고, 이어 소프라노 황인진 자매(큰나라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곡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 “녹아지는 소금, 빛을 반사하는 신앙인이 되라” 말씀을 전한 경남기총 대표회장 박석환 목사(소금과빛교회)는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라’(마 5:13-16)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박석환 목사는 “인간은 동물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귀한 존재”라며 “윤리와 양심이 무너진 시대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만이 이 땅의 마지막 희망의 보루”라고 강조했다. 그는 “소금은 녹아야 제 역할을 한다”며 “우리 신앙인들이 녹아지는 소금으로 헌신할 때 세상을 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3%의 참된 신앙인만 있어도 사회는 썩지 않는다”며 “교회가 세상의 방부제이자 희망이 되어야 한다”고 전했다. 이어 박 목사는 “우리는 빛의 발광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라며 “착한 행실을 통해 복음의 빛을 드러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출산율이 0.78인데도 동성애법과 낙태법, 포괄적차별금지법을 만들려 한다”며 “이런 악법은 가정과 사회를 파괴하는 법이기에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1886년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들이 복음과 함께 학교와 병원을 세우며 한국 사회의 기초를 놓았다”며 “복음의 빛이 들어가는 곳마다 개인과 가정, 나라가 살아났다. 교회를 억압하면 사회의 균형도 무너진다”고 역설했다. 박 목사는 “우리 모두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간다면 경남은 희망의 도시, 행복의 도시가 될 것”이라며 설교를 마무리했다. 말씀 후에는 경남성시화 수석본부장 서민석 목사(새소망교회)의 인도로 합심기도가 이어졌다. 참석자들은 △국민통합과 경제발전, 평화통일을 위하여 △경남도지사·단체장·기관장 및 18개 시·군의 발전을 위하여 △경남 2,600여 교회 부흥과 민족복음화와 성시화 그리고 세계선교를 위하여 △동성애법·포괄적차별금지법·낙태법 등 악법 제정 무산을 위해 함께 기도 드리고 고문 조관행 목사(창원성결교회 원로)의 축도로 마무리됐다. 이후 2부 조찬 및 친교 순서에서는 사무총장 신지균 목사(큰나라교회)의 사회로 대표회장 이경은 목사(순복음진주초대교회)가 환영사를 전했다. 이경은 목사는 “경남의 모든 지도자들이 교회와 함께 협력하여 이 땅을 밝히는 빛의 공동체가 되자”고 당부했다. 이어 상임회장 조우성 장로(마산제일교회)가 내빈을 소개하고, 명예회장 구동태 감독(합성교회 원로)이 조찬기도를 드린 후 교제의 시간을 가졌다. 이번 조찬기도회는 도내 각 교회 지도자들과 기관장이 함께 모여 나라와 지역사회를 위해 합심 기도하는 자리로,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요, 신앙인이 녹아지는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개혁주의 신앙의 본질을 다시금 일깨운 시간이었다.

경남기독교총연합회, 11월 미스바성회 열어…

경남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박석환 목사, 이하 경남기총)는 11월 6일(목) 오전 10시, 창원성결교회(우재성 목사)에서 ‘11월 미스바성회’를 개최했다. 이날 예배는 경남기총 총무 주요한 목사(신마산교회)의 사회로 진행됐으며, 감사 황의성 장로(창원성결교회)가 대표기도하고, 사회자가 사도행전 1장 8절을 봉독했다. 이어 예장(고신) 전국장로회연합회 수석부회장 윤창현 장로(세계로교회)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는 제목으로 간증을 전했다. 윤창현 장로는 “복음을 전하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사명이며, 순종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하며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전도의 열매로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고 전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세계로교회에서 섬겨온 신앙의 여정을 회고하며 “비가 새는 예배당에서 물동이를 받던 어린 시절,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던 시절을 돌아보면, 복음은 늘 ‘내 삶의 중심’이었다”고 고백했다. 또한 그는 “목회자의 강단은 세상의 법으로 판단 받아서는 안 되며, 교회의 영권이자 대한민국의 양심”이라며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교회가 산다”고 호소했다. 이어 “전도는 순종의 문제이며, 순종할 때 역사가 일어난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통해 교회를 세우시고,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반드시 복을 주신다”고 간증했다. 윤 장로는 김해노회와 경남지역 8개 노회에서 추진한 ‘전도운동’ 사례도 소개했다. 그는 “모든 장로가 매주 전도 실적을 보고하며 서로를 격려하는 운동을 벌였다”며 “이를 통해 김해노회에서만 1년 동안 700여 명이 새롭게 복음을 들었다”고 밝혔다. 또한 “이 운동이 경남 8개 노회로 확산되어 지역 교회의 복음 열정이 다시 불붙었다”고 전하며, “다가오는 12월 전국장로연합회 회장으로 취임하게 되면, 전국 35개 노회가 함께 참여하는 전도운동으로 확대할 것”이라고 비전을 나눴다. 그는 “복음을 전할 때는 때로 손실과 희생이 따르지만, 그것이 헌신이 아니라 기쁨이 된다”며 “교회와 개인이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축복하신다”고 전하며 간증을 마쳤다. 간증 후 합심기도는 이경은 목사(순복음진주초대교회)가 인도했으며, 참석자들은 말씀 붙잡고 기도하고 합심하여 기도했다. 이어 대표회장 박석환 목사(소금과빛교회)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고, 사무총장 하동우 목사(참좋은교회)가 광고를 전했다. 이번 미스바성회는 “복음은 말이 아니라 순종으로 증명된다”는 윤창현 장로의 고백처럼, 교회가 다시금 복음 전도의 본질로 돌아가 결단을 새롭게 하는 은혜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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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영적 싸움에 “VICI(이겼노라)”가 있는가?

전쟁에는 반드시 이겨야 하듯, 영적 싸움에도 반드시 승리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종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로마 제국 시대 율리어스 카이사르(Jullius Caesar – 영어표기 시저. 성경표기 가이사)는 전쟁을 스포츠처럼 즐겼던 사람이다. 그가 남긴 명언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The dice(die) is cast. 주사위는 던져졌다. 폼페이우스가 로마 원로원과 음모를 꾸며 카이사르를 죽이려고 로마로 복귀할 때 루비콘강을 건너기 전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오라고 하였다. 명령을 받은 카이사르가 생각해 볼 때 가만히 있으면 자신은 파멸될 것이고, 무기를 들고 루비콘 강을 건너오면 로마의 역적이 될 것이므로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 카이사르는 고민하였다. 이래도 죽을 상황이고 저래도 죽을 상황인데 “죽을 때 죽더라고 싸우고 죽자” 결단을 내리고 무기를 들고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명언을 남겼는데 “주사위는 던져졌다”고하였다. 이때부터 특별한 결단을 하여 어떤 일을 할 때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왔노라[VENI-고대 라틴 발음(웨니), 현대 라틴 발음(베니), I came] 보았노라[VIDI-고대 라틴 발음(위디), 현대 라틴 발음(비디), I saw] 이겼노라[VICI-고대 라틴 발음(위키), 현대 라틴발음(비키,비치), I conquered] 이 문구는 B.C 47년 카이사르가 소아시아 파르나케스를 격파한 후 원로원에 보냈던 전승 보고서 첫 줄이다. 이 문구를 우리 한국인들이 체육대회나 단합대회 때 원문을 약간 변경하여 “왔노라 싸웠노라 이겼노라”로 사용하기도 한다. 어쨌든 인간적으로 카이사르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 그는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폭군(暴君)이 아닌 성군(聖君)의 모습으로 부하들을 다스리며 덕(德)의 정치를 했다. 카이사르의 인생철학이 있었는데 “강자에게 영예를 양보하고, 약자에게 필수품을 양보하라”였다. 인생철학 그대로 그는 전리품들을 자신이 챙기지 않고 부하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고 개인적 재산을 가지고 법률사무소, 마켓, 편의시설을 지어 제공함으로 많은 사람의 신뢰를 쌓아갔으며 자신은 검소한 삶을 살아 타인들로하여금 인정받는 지도자였다. 또한 유머 감각이 있어 부하들에게 마음의 안정을 주었고. 외부 적군들을 정복하기보다 더 힘든 내국 통치를 덕(德)의 정치로 이끌었던 지도자였다. 하지만 죄의 성향을 가진 인간들은 선한 정치를 하는 카이사르를 온전하게 두지 않았다. 카이사르와 친했던 부하 브루투스를 배신자로 만들어 음모를 꾸며 살해하도록 하였다. 믿었던 부하에게 배신당해 칼에 찔려 죽어가면서 마지막 남긴 말이 “브루투스 너마저...!” 인생 허무함으로 막을 내렸다. 훗날 카이사르에 대한 평가를 할 때에 일부 부정적 평가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좋은 평가를 하는데 로마에 수많은 지도자가 있었지만 카이사르를 “로마가 낳은 창조적 천재”라고 결론지었다. 신앙의 싸움을 하고 최후 주님 만나는 그날 주님께서 주신 사역의 현장인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VICI(이겼습니다)” 이렇게 승전 보고를 한다면 멋진 인생을 산 것이 될 것이다.

[정우승 목사]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속담은 쉽고 간결한 말로 선조들의 지혜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전해주므로, 익혀두면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아무리 쉬운 일이라도 혼자 하는 것보다는 여럿이 힘을 합하면 더욱 쉽다는 의미의 우리말 속담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가 있다. 사자성어로도 비슷한 단어가 있는데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 해서 ‘한 손으로는 소리를 낼 수 없다’라는 뜻이다. 비슷한 의미의 영어 속담도 있는데 ‘Two heads are better than one’ 두 사람의 지혜가 한 사람의 지혜보다 낫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협력(協力)’을 뜻하는 문장이 많다. 그런데 이렇게 귀한 단어가 성경전체에 딱 한 번 나온다. (빌1:27)에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그리고 협력(協力)과 비슷한 단어로 합력(合力)이 있는데 이 단어 역시 성경에 두 번 등장한다. (삼상22:17)에 “왕이 좌우의 호위병에게 이르되 돌아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그리고 (롬8:28)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놀라울 따름이다. 그만큼 ‘협력’이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함께 일을 할 신실한 동역자도 구하기 힘들다. 정말 내 마음에 꼭 맞는 사람, 평생을 두고 백지장을 맞들 한 사람을 구하기 힘들다. 사람은 많지만 정말 좋은 사람을 찾아내기 힘들다. 예수님에게도 12명의 제자가 있었다. 바울에게는 신실한 제자 디모데가 있었다. 엘리야에게는 영적인 아들 엘리사가 있었다. 이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다.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는 만능인도 없다. 함께 동역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이 잘못 되었을 때에는 ‘내 책임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동역이다. 무언가 좀 잘 했을 때에는 ‘우리가 해 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동역이다. 무언가 아주 잘 했을 때에는 ‘너희들이 해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동역이다. 추운 겨울을 남쪽 나라로 보내기 위해 달밤을 날아가는 기러기 떼는 “ㅅ”자 형으로 줄을 지어서 날아간다. 과학자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를 밝혀냈다. 모든 새들이 날기 위해 날개를 퍼덕거리면 그 뒤에 있는 새에게 양력(揚力)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ㅅ”자 대형으로 날면 혼자 가는 것보다 71% 더 날아간다고 한다. 기러기 떼 중에서 뒤에서 우는 소리를 내는 기러기가 있는데 그것은 힘들어서가 아니라 바로 앞에 가는 새에게 힘을 돋아 주기 위해 하는 ‘추임새’와 같다는 것이다. 바울은 노년에 평생의 동역자인 디모데를 보고 싶어서 (딤후4:9)에서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고 말했다. 너무도 감사한 것은 우리에게는 정말 귀한 동역자가 계신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성경이 그렇다고 말한다. (고전3:9)에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무 귀하다.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시편121:4)에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라고 약속한다. 이제 우리에게는 함께 백지장을 맞들 분이 계신다. 그의 이름은 바로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렘51:19)에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라” 아멘

[오성한 목사] 바울은 솔직했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솔직하게 표현한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낼 수 있단 말인가?”라고 탄식함을 우리는 잘 안다. (로마서 7: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그는 이 죄를 바울이 아니라고 두 번이나 말한다. 얼마나 이상한 말인가? 이것이 복음이다. (로마서 7: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로마서 7: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우리는 절대 탄식 속에서만 살아서는 안 된다. 해결의 방법이 있다. 해결 방법은 아주 쉽다. 항상 사로잡아오는 죄의 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대박이다. 한 없이 사로잡아 오는 죄의 법에서 어떻게 빠져 나와 참 평안과 영원한 행복의 삶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바울도 온전한 복음을 알고 복음의 핵심을 말한 후 로마서 7장과 8장에서 말한다. 로마서 8장의 시작을 보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선포한다. (로마서 8장1절) 우리는 이 선포를 그대로 받아 감사해야 할 일이다. 거듭난다는 것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다. 거듭났는가? 거듭났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새 생명을 소유했다. 바울은 결코 정죄함이 없는 자임을 알려주고 있다. 다음과 같이 받아들이고 주장해 보라. "나에게 새 생명이 있다. 나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했다" 로마서를 가지고 많이 기도하라. 1장부터 16장을 읽으며 영의 기도를 하는 시간은 신이 난다. 하나님께 고백하고 감사한다. 또 자신에게 말해 준다. “주님, 저에겐 생명이 있습니다. 저는 결코 정죄 받지 않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저를 해방했습니다.”라고 주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일을 50번도 100번도 올려 드려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기도의 시간이 될 것이다. 나에게도 말해 줘라. “너는 참으로 행복한 놈이구나. 너의 죄가 사해졌어. 너를 정죄할 그 누구도 없어. 너도 너를 이제부터는 정죄 하지 마! 너는 성령의 법으로 해방 된 자야!”라고 반복해서 나 자신에게 말해 보라. 얼마나 신나고 행복한 시간인지, 흥분되는 일이다. 능력으로 살 수 있는 지름길이 성경대로 나를 주장하고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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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칼빈의 추억 한 토막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 인상 깊은 장면을 회상한 것은 기록되어 있다. 테아 반 힐세마(Thea B. Van Halsema)가 저술한 『This was John Calvin(이 사람 존 칼빈)』이라는 책을 보면, 칼빈은 어머니와 함께 짧은 순례길을 걸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골짜기를 따라 두 시간을 걸은 끝에 도착한 곳은 예수의 외할머니로 여겨지는 성 안나의 유골이 안치된 사당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들어 올려, 금으로 장식된 관 안에 누워 있는 유골에 입을 맞추게 했다. 사당 안은 촛불로 밝고 향기로웠으며, 숭배하는 순례자들의 눈빛은 경건으로 가득했다. 어린 칼빈에게 그것은 아마 신비롭고 감동적인 체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이 장면을 바라볼 때,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정서 이상의 것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말 세 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성당의 종소리가 울린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성읍 생활의 중심이 되었던 중세 말 교회의 풍경은 단지 아름답고 경건한 외양만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신앙의 본질이 흐려진 채 형식과 외적 숭배에 몰두한 영적 타락이 도사리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의 형식주의와 권위주의, 성유물의 과도한 숭배, 그리고 성직자들의 탐욕은 교회의 영적 본질을 흐리고 있었다. 성 안나의 유골만이 아니라, 세례 요한의 머리카락, 예수의 치아, 오병이어 사건의 빵 부스러기, 가시관 조각과 구약시대 만나의 조각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성유물이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교회는 이러한 유물들을 통해 기적을 기대하고 은총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자극했고, 성직자들은 이를 통해 물질적 이익과 권력을 얻었다. 더 나아가 성당과 수도원은 특정 유물의 진위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다투었으며, 이 논쟁은 지역의 종교적 경쟁심을 자극했고, 프랑스 의회조차 이를 조정하지 못할 정도였다. ‘성인’의 이름을 붙인 성당이나 수도원은 유골을 소유한 장소로서의 권위를 주장했고, 이는 종종 종교적 신비주의를 이용한 경쟁과 탐욕의 장이 되었다. 말하자면, ‘거룩’은 거래되고, ‘은혜’는 판매되었으며, ‘경건’은 형식으로 포장되었다. 이 모든 모습은 한마디로 ‘거룩함의 상업화’였고, 진리 대신 형식과 기적, 외적 경건에 목을 매던 교회의 실상이었다. 이러한 부패는 개혁자들로 하여금 교회의 본질을 되묻게 했고,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잉태하게 했다. 칼빈은 단지 교리의 개혁자가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을 지닌 영적 개혁자였다. 그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함을 외쳤고, 유골과 형상과 건물 안에서가 아니라, 성령의 조명 아래 말씀과 신앙의 참된 삶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신학과 실천은 교회의 본질을 새롭게 정의했다. 교회는 권위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충실한 선포와 성례의 정당한 시행이 있는 곳이며, 무엇보다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믿는 자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문제는 과거의 부패가 오늘날에도 형태만 달리하여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교회는 더 이상 성인의 유골을 입맞추지 않지만, 또 다른 유물들을 만들어 숭배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화려한 예배당, 웅장한 무대, 감정을 자극하는 조명과 음악, 유명 목회자에 대한 절대적 의존, 그리고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역 성과들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성유물이 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때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인간의 욕망을 투영한 현대판 형식주의일 수 있다. 교회는 언제나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가시관 조각’이 있다. 그것은 더 멋진 무대, 더 화려한 예배당, 더 대형화된 사역과 같은 것들이다. 물론 이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중심이 되어 하나님을 도구화하고, 복음을 수단화하며, 인간의 만족을 위한 종교 행위로 전락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촛불 아래에서 거룩을 잃고 있는 것이다. 칼빈이 외친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는 외침은 시대를 초월한다. 이는 단지 제도 개혁의 구호가 아니라,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한 끊임없는 성찰과 순종을 요구하는 외침이다. 칼빈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은 단지 과거의 회고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거울과 같은 통찰이다. 그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성유물 앞에서 입을 맞췄던 기억은, 우리가 누구의 손에 이끌려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묻는 물음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순례 중이며, 여전히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 길 위에 서 있다.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무엇을 숭배하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멈추어 서는 것, 그리고 다시금 본질로 되돌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종교개혁의 정신이요, 오늘의 교회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길이다.

[김경헌 목사] 땅의 소산 (창세기 4장 3절)

“Why is the Firstborn Blessing Given to the Firstborn?” “왜 장자의 축복은 처음 태어난 자에게 주어지나요?” 지난 주일 설교를 들은 투코 집사님의 질문은 뜻밖이었습니다. “왜 첫째 아들이 장자여야 합니까?” 처음엔 다소 생뚱맞게 들렸지만, 곱씹을수록 그 질문은 제 마음을 크게 흔들었습니다. 그동안 성경에서 말하는 장자와 장자권에 대해 나름 분명한 기준을 갖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알고 보니 그 기준의 출발이 상식이었습니다. ‘장자라면 당연히 첫째 아들’이라는 세상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성경을 본다고 자신했지만, 출발점은 여전히 인간 중심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열네 살 많은 이스마엘을 제치고 이삭에게 장자의 축복을 전했습니다. 이삭은 쌍둥이 형 에서가 아니라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주었고, 야곱은 열두 아들 중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을 장자로 세웠습니다. 이런 장면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종종 이상하게 느낍니다. 왜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신 장자의 원리를 스스로 따르지 않으실까 하는 의문이 들지요. 그러나 그 생각의 출발 자체가 이미 인간적인 상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장자’는 단순히 먼저 태어난 자를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원을 성취하는 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족을 책임지는 자를 의미합니다. 완전한 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생명을 버리심으로 하나님의 가족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장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구원을 완성하는 직분이며, 그 직분은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소명입니다. 장자는 자신이 원해서 먼저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부모가 먼저 낳았고, 다른 이들이 ‘장자’라 불러주었을 뿐입니다. 본인은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것이라”고 하셨으니 장자이고, 하나님께서 “장자”라 부르셨으니 장자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 처음 태어난 것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다 내게 속하였음은 내가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치던 날에 그들을 내게 구별하였음이라”(민 8:17)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준이 곧 장자의 기준입니다. 이 사실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믿음의 조상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에서 대신 야곱에게, 야곱이 요셉에게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믿음으로’ 행한 일이라 증거합니다(히 11:20-21). 이렇게 보면 오히려 이삭이나 야곱, 요셉이 장자가 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볼 때는 아무런 모순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에게 의심과 원망이 생기는 이유는 언제나 기준이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장자로 세우셨지만, 그 뜻을 혈육의 서열로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장자로 부르셨으나, 그는 하늘의 예배보다 땅의 소산에 몰두했습니다. 제물을 받으시지 않자 그는 분노했고, 그 분노는 결국 동생 아벨을 죽이는 죄로 이어졌습니다(창 4:5, 8).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불신앙이며, 그 불신앙의 결과는 언제나 땅의 소산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장자로 세우신 본래의 사명, 즉 예배의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장자는 가족을 대표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존재인데, 그는 예배보다 자신의 열심과 수확을 앞세웠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이 기준이 되었고, 결국 영적 교만과 타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깨닫게 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라고 외치면서도 실상은 상식과 서열, 인간의 기준으로 말씀을 판단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조금만 어긋나도 우리는 하늘의 소산이 아니라 땅의 소산을 거두게 됩니다. 투코 집사님의 질문은 그 당연하다고 여겼던 기준이 얼마나 인간적이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도 제자들을 형제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분의 믿음의 결단이 오늘의 교회로 이어졌습니다. 함께 묵상하던 송동호 목사님이 이런 글을 남기셨습니다. “The blessing of the firstborn is not a privilege of birth, but the portion of the one who bows before God first.” “장자의 축복은 태어남의 특권이 아니라 하나님께 먼저 무릎 꿇는 자의 몫이다.” 그는 곧 이어 이렇게 정정했습니다. “The blessing of the firstborn is not a privilege of birth, but the portion of the one whom God leads to bow before Him first.” “장자의 축복은 태어남의 특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무릎 꿇게 하신 자의 몫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무릎 꿇게 하시는 자, 그가 바로 장자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은혜로 장자의 자리로 불림받았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 믿음으로 주어진 장자의 자리를 지키며, 하늘의 소산을 거두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성수 총장] 삶 전체가 예배이긴 하지만…

“삶 전체가 예배다.” 이 강렬한 개혁신학의 외침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거룩한 반란에서 비롯되었다. 요한 칼빈(John Calvin)은 인간의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살아가는 소명임을 선포했다. 성직자만 거룩하고 평신도는 영적 2등 시민으로 여겨지던 중세 교회의 위계 구조 속에서, 종교개혁자들은 가정, 직장, 시장, 농장, 사무실 등 모든 일상적 삶의 자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공간이 될 수 있음을 선언했다. 이는 캐나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가 말한 “일상의 삶의 성화(the sanctification of ordinary life)”를 의미한다. 이 위대한 개혁 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인물 중 한 사람이 바로 네덜란드의 신학자이자 정치가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라 선언하지 않은 영역은 창조 세계의 단 1인치도 없다”고 외쳤고, 하나님의 주권은 모든 영역에 미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론은 훗날 ‘카이퍼주의(Kuyperianism)’로 발전했고, 교회는 ‘제도적 교회(church as institute)’와 ‘유기적 교회(church as organism)’로 구분되어 설명되었다. 즉, 교회는 주일에 예배당에 모여 말씀과 성례를 통해 형성되며, 동시에 세상 속에서 문화와 교육, 정치, 예술의 영역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구현한다. 그런데 오늘날 ‘삶 전체가 예배다’라는 이 고상하고 심오한 구호가 아이러니하게도 원래의 본질적 의미를 상실한 채 오용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제임스 K. A. 스미스(James K. A. Smith)는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예배를 단지 ‘표현(expression)’으로 축소하면서 공예배의 자리는 점점 사라지고, 예배당은 ‘선택 사항’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실험실이나 산속의 일출, 책 읽는 순간, 일상의 루틴이 예배당보다 더 진정성 있는 예배의 장소처럼 여겨지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오해는 종종 왜곡된 카이퍼주의, 즉 “카이퍼보다 더 카이퍼적인 태도”에서 비롯된다. 삶의 다양한 ‘영역들(spheres)’을 강조하다 보니 오히려 각 영역 사이의 경계를 지나치게 감시하며, 예배당에서의 공동체적 예배는 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마치 ‘진짜 사역’은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교회의 공적인 예배 모임은 형식적 종교 활동에 불과한 것처럼 치부된다. 그러나 이것은 카이퍼의 본래 정신을 벗어난 것이다. 오히려 카이퍼는 ‘유기적 교회’는 반드시 ‘제도적 교회’로부터 양육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배는 단지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하시는 시간이다. 말씀과 성례를 통해 성령께서 우리를 ‘형성’하신다. 이 형성의 과정 없이는 아무리 열정적인 문화 변혁도 기독교적 소명의 진정성과 지속성을 잃게 된다. 교회는 바로 이 전인적인 신앙 인격 형성의 장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을 위해 준비되는 영적 훈련소다. 이것은 단순히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보수적 반동이 아니다. 오히려 ‘일상의 성화’라는 종교개혁의 유산을 올바르게 계승하려는 본질적인 지향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시는 일에 참여하길 원한다. 정의를 세우고, 문화 속에서 복음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길 원한다. 그러나 그 모든 소명이 제대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 안에서 성화되는 훈련이 필요하다. 바로 그것이 공동체적 예배다. ‘삶 전체가 예배’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먼저 예배당에서 예배를 배우는 것이다. 우리가 공예배 속에서 말씀과 성찬에 참여하고, 공동체와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령의 임재 속에 다시 세워질 때 우리는 세상 속에서 그분의 대사로 살아갈 수 있는 힘과 방향을 얻게 된다. 세상은 여전히 거칠고 불완전하다. 그래서 우리는 매주 예배당으로 돌아온다.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다시 세상으로 파송 받는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모든 삶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외치면서도, 그 삶이 예배를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져야 함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제임스 스미스 교수가 힘주어 강조하는 바와 같이, 삶 전체가 예배가 되려면 우리는 반드시 삶을 예배로 형성하는 그 거룩한 공간, 곧 예배당(sanctuary)으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탄자니아 아프리카연합대학교에서 모든 교직원들과 학생들에게 주일 공예배를 중시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유다. 김성수 목사 (탄자니아 아프리카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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