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행연월일 2026-04-16(목)

고신 경남노회, 제204회 정기노회 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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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서] 2026년 부활절 연합예배에서의 이영훈, 소강석 망언에 대한 고신애국지도자연합 성명서

부활절은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와 만왕의 왕 되심을 선포하는 날이다. 강단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만이 홀로 높임을 받아야 할 거룩한 곳이다. 그러나 2026년 부활절, 우리는 한국 교회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의 현장을 목도했다. 하나님의 집이 권력자의 이미지 세탁장으로 변질되었고, 지도자들은 복음의 예언자적 사명을 팽개치고 ‘저 여우’(눅 13:32)와 같은 권력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에 우리 고신애국지도자연합은 하나님과 고신과 한국교회 앞에 다음과 같이 엄중히 성명한다. 1. 부활절 강단에 ‘거짓의 아비’를 세운 영적 배교 행위를 강력히 규탄한다! 부활절 강단은 세상 권력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별금지법과 교회해체법을 획책하며 신앙의 자유를 억압해온 권력자를 강단에 세워 사실상의 면죄부를 준 것은 명백한 배교 행위다. 강단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권력자의 ‘정치적 슬로건’이 울려 퍼지게 한 이 사태는, 현대판 신사참배와 다를 바 없는 참담한 영적 간음이다. 교회는 권력 앞에 축복보다 책망을, 환영보다 회개를 먼저 촉구했어야 마땅하다. 2. 이영훈·소강석 목사의 굴종적 망언과 성도 유린을 강력히 규탄한다! 이영훈 목사는 권력자를 향해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지신 분”이라며 신격화에 가까운 찬사를 보냈고, 소강석 목사는 박수를 치지 않는 성도들을 향해 “이따 좀 남으라”며 신앙 양심을 겁박했다. 특히 권력자의 행보가 “한국 교회 보기에도 아름답다”는 소강석 목사의 발언은 한국 교회 전체의 명예를 실추시킨 모독이자 망언이다. 교회 지도자들이 예언자의 외침 대신 권력의 시녀가 되어 아부의 향연을 벌인 이 사태를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3. 부활절 연합예배를 주관한 ‘한교총’의 공교회적 책임 방기를 강력히 규탄한다! 금년 부활절 연합예배는 36개 주요 교단을 회원으로 가진 한국교회총연합회(한교총)이 주관하고 73개 교단이 참여한 명실상부한 한국교회 전체의 공교회적 예배였다. 감리교 대표회장 김정석 목사의 설교와 고신 전임 총회장 김홍석 목사의 축도까지 이어진 이 예배는 특정 교단의 행사가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를 대표하는 자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룩한 공교회적 강단에서 권력 미화 발언과 성도 겁박이라는 심각한 강단 훼손 행위가 발생했다. 그 결과 이영훈·소강석 목사의 발언은 개인의 발언을 넘어 한국교회 전체의 입장으로 오해되고 말았다. 이는 6·25 전쟁 당시 초량교회 예배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이 강단에 올라와 인사를 하려고 할 때 한상동 목사가 이를 제지하고 예배를 마친 후에야 그것도 강단 아래에서 인사만 하게 함으로 권력에 굴종치 않고 강단의 위엄을 지킨 신앙적 태도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한교총은 이번 부활절연합예배에서 공교회적 책임을 망각하고 권력에 아부한 잘못을 한국교회 앞에 엄중히 사과하라. 또한 향후 어떠한 권력 앞에서도 굴종하지 않겠다는 명확한 재발방지 원칙과 실행 가능한 제도적 기준을 즉각 마련하여 한국교회 앞에 공개하라. 4. 성경적 ‘직언’과 권력에의 ‘아부’를 구별 못 하는 고사모의 위선을 규탄한다! 자칭 고사모(고신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모임)는 평소 ‘정교분리’를 전매특허처럼 내세우며 동료 목회자들을 공격해왔다. 손현보 목사가 성경적 가치와 다음 세대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선지자적 직언을 쏟아낼 때, 그들은 선거법과 정교분리를 운운하며 총회 석상에서까지 칼을 휘둘렀다. 그래서 묻노라. 성경적 가치를 수호하려는 손 목사의 회개를 외치는 ‘예언자적 발언’은 정죄의 대상이고, 권력에 아부하는 이영훈·소강석의 굴종하며 아부하는 ‘거짓 선지자적 발언’은 침묵의 대상인가? 고사모의 정교분리는 원칙이 아니라 자신들의 진영 논리에 따라 펴고 접는 비겁한 고무줄 잣대였음이 증명되었다. 이 가증한 이중 잣대야말로 한국 교회를 병들게 하는 독소이며,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과거의 배교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5. 고신 정신은 권력 앞의 비겁한 침묵을 거부한다! 고신 정신은 일제 강점기 총칼의 위협 앞에서도 ‘아니오’를 외쳤던 선배들의 피 위에 서 있다. 교회 파괴자의 비위를 맞추느라 성도를 유린하고 강단을 팔아넘긴 지도자들을 향해 입을 닫고 침묵하는 것은 고신 정체성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다. 우리는 권력의 눈치를 보며 침묵하는 자칭 고사모 세력을 향해 경고한다. 당신들이 손현보 목사에게 들이댔던 그 엄격한 잣대로 이영훈·소강석 목사에게도 동일하게 회개를 촉구하라. 그렇지 않다면 당신들은 ‘고신’이라는 이름을 입에 담을 자격조차 없는 비굴한 철부지 목사와 장로들일 뿐이다. 우리의 요구 하나. 이영훈·소강석 목사는 부활절 강단을 정치 유세장으로 전락시키고 성도를 겁박한 배교적 행태에 대해 즉각 사죄하라! 하나. 자칭 고사모는 손현보 목사를 정죄했던 그 기개로 이영훈·소강석 목사의 변질된 신학을 비판하고, 즉각 규탄 성명과 시위에 나서라! 하나. 고신 총회와 한교총 및 전국의 교회는 거룩한 곳에 선 ‘멸망의 가증한 것’을 분별하고, 교회의 독립성과 강단의 순결을 회복하는 영적 개혁에 즉각 동참하라! 하나. 한국교회총연합회(한교총)는 이번 부활절 연합예배 강단 훼손 사태에 대해 한국교회 앞에 공식 사과하고, 향후 공교회적 연합예배에서 정치 권력의 강단 개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재발방지 기준과 운영 원칙을 즉각 수립하여 공개하라! 우리는 거룩한 곳에 선 가증한 무리들을 향해 다시 외친다. 강단은 세상 권력의 무대가 아니며,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광만이 선포되어야 할 곳이다. 우리 고신애국지도자연합은 이 시대의 나단과 세례 요한이 되어, 권력 앞에서도 진리를 외치는 파수꾼의 사명을 목숨 다해 완수할 것이다. 2026년 4월 11일 고신애국지도자연합 주요위원 및 장로회 임원 및 1140명 회원 일동 자문위원 : 김상석, 윤현주, 황만선, 강보형 대 표 : 이성구 실행 위원장 : 옥재부 부위원장 : 원대연 총 무 : 박경만 서 기 : 서준호 부서기 : 최병훈 회 계 : 정기준 부회계 : 김진태 전문위원 : 고명길(전문위원장), 김준성, 김한식, 박광서, 박남훈, 안상렬, 이상규, 실행위원 : 옥재부, 고명길, 김복연, 김욱동, 김종부, 김준성, 김한식, 노은환, 박광서, 박경만, 박남훈, 백홍선, 서준호, 안상렬, 오지석, 원대연, 이경우, 이명호, 이성구, 이인성, 이일호, 이재욱, 이태직, 장갑덕, 정상종, 정은웅, 차 훈, 최병훈, 최수갑, 김진태, 노태식, 서상열, 신주복, 정기준, 정명근, 한길윤 감 사 : 안용운(목사) 서상열(장로) 미래전략기획 팀장 : 이인성 대외협력 본부장, 대학청년단장 : 차 훈 협력위원 : 옥은호 고애연 장로회 임원 자문 위원장 : 신주복 자문위원 : 김삼관, 김성은, 김수관, 김정겸, 김종복(부산), 박영효, 박정수, 엄송우, 오성률 이귀석, 이우성, 임성하, 윤평원, 전우수, 정하율, 정춘덕, 조대형 회 장 : 한길윤 공동회장 : 김상수, 김종복(경산), 김호동, 김홍주, 박상구, 배영진, 정건화, 조용국, 황성진 황억규 부 회 장 : 김영익, 박칠수, 백광태, 엄득주, 연규삼, 옥금석, 이수응, 장세봉, 전옥출, 한충부 총 무 : 서상열 부총무 : 나성대 서기 : 정명근 부서기 : 노태식 회 계 : 정기준 부회계: 김진태 협동 총무 : 권오형, 김병훈, 김성식, 박광석, 박두양, 박명준, 박신득, 박원규, 박현영, 조흥수, 채덕호, 하성환, 황선영, 황해남 전문 위원 : 강동길, 강치영, 김경근, 김병조, 김점태, 변진현, 오창성, 윤종은, 이형술, 임창모, 정종택 고신애국지도자연합 1,140명 회원 일동

부산 괴정제일교회, 고신 교단 탈퇴 결의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부산노회 소속 괴정제일교회(윤석철 목사)가 교단 탈퇴를 결의했다. 괴정제일교회는 2026년 4월 5일 주일, 교인대표 최문섭 장로의 사회로 공동의회를 개최하고 교단 탈퇴 여부를 표결에 부쳤다. 이날 공동의회에는 총 381명(위임 42명 포함)이 참여했으며, 찬성 290명, 반대 71명, 기권 20명으로 교단 탈퇴안이 가결됐다. 이번 사태는 2024년 일부 장로들이 윤석철 담임목사를 부산노회에 고발하면서 시작됐다. 부산노회는 재판을 통해 윤 목사에게 6개월 정직 처분을 내렸고, 윤 목사는 2025년 3월 복귀했다. 이후 갈등이 일시적으로 봉합되는 듯했으나, 같은 해 10월 일부 장로들이 다시 진정서를 제출하면서 분쟁이 재점화됐다. 부산노회는 해당 진정을 근거로 장로 증원 청원을 거부하고 수습위원회 파송을 결의했으며, 이어 전권위원회(위원장 제인출 목사)를 구성해 대응에 나섰다. 전권위원회는 윤석철 목사의 당회장 권한과 당회 기능을 정지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이 과정에서 교인들은 교단 탈퇴를 위한 공동의회 소집을 추진했으나, 전권위원회는 이를 취소시켰다. 이후 교인 238명이 공동의회 개최를 재차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법원에 ‘공동의회 소집 허가’를 청원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법원은 교인 3분의 1 이상의 요청이 있을 경우 당회장이 이를 거부하더라도 교인 대표가 공동의회를 개최할 수 있다고 판단하며 교인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에 따라 4월 5일 공동의회가 열리게 되었고, 결국 교단 탈퇴가 결의됐다. 분쟁의 핵심, 당회와 노회 구조에 대한 문제 제기 이번 괴정제일교회 사태는 단순한 교회 내부 갈등을 넘어, 장로교 정치 구조 전반에 대한 문제를 드러냈다는 평가가 나온다. 먼저 당회 운영과 관련해, 일부 장로들의 연합이 교인 다수의 의사를 제어할 수 있는 구조적 한계가 지적된다. 실제로 괴정제일교회에서는 교인 300명 이상이 공동의회 개최를 청원하는 등 여러 차례 요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회에서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노회의 개입 방식에 대한 논란도 제기되고 있다. 부산노회는 전권위원회를 통해 당회 권한 정지, 행정 및 재정 관리 개입 등 강도 높은 조치를 시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가 교회 내부 자율성을 과도하게 침해했다는 반발이 교인들 사이에서 제기됐다. 특히 전권위원회가 본래 위임받은 진정 사안 외에 교단 탈퇴 움직임 자체를 저지하려 한 점은 권한 범위를 둘러싼 논쟁으로 이어졌다. 공동의회 소집을 막는 과정에서 결국 법원 판단까지 이어진 점은 교단 내부 해결 기능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분석도 나온다. 공동의회 정당성 논란 속 “교인 3분의 2 이상 찬성” 확인 공동의회 절차를 둘러싼 논란도 있었으나, 법원은 교인들의 소집 요구를 인정했고, 회의 자체의 정당성은 확보된 상태에서 진행됐다. 투표 방식 역시 정관에 별도 제한이 없는 경우 다양한 방식이 가능하다는 판례에 근거해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교회 측은 위임장을 제외하더라도 출석 교인 기준 3분의 2 이상이 교단 탈퇴에 찬성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번 결의가 교인 다수의 의사를 반영한 결과라고 밝혔다. 이번 공동의회를 통해 괴정제일교회는 교단 탈퇴를 공식적으로 결의하게 됐다. 그러나 이번 사안은 당회와 교인 간 갈등, 노회의 개입과 전권위원회 활동, 그리고 공동의회 소집을 둘러싼 법적 판단까지 이어지며 교단 내부 분쟁의 복잡한 양상을 드러냈다. 향후 부산노회와 괴정제일교회 간 후속 조치와 교단 차원의 대응이 어떻게 전개될지 주목된다.

제6회 고신정신회복 및 개혁주의 정치신학 여성도 세미나 성료

고신애국지도자연합(이하 고애연)은 3월 31일 부산 온천교회에서 「제6회 고신정신회복 및 개혁주의 정치신학 여성도 세미나」를 개최하고, 전국 각지에서 모인 권사 및 여성 지도자 등 약 3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마쳤다. 이번 세미나는 고신 교회의 저항정신과 개혁주의 정치신학을 여성 지도자들에게 확산하고,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의 위기 속에서 여성도들의 영적·공적 책임을 재확인하기 위해 마련됐다. 행사 전반은 참석자들의 깊은 공감과 결단이 이어지는 가운데 진지하면서도 뜨거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행사는 낮 12시 접수 및 점심식사로 시작됐으며, 개회예배는 실행위원장 옥재부 목사(고애연)의 사회와 설교로 드려졌고, 뿔라 중창단의 특별찬양이 이어졌다. 첫 번째 특강에서 손현보 목사(세계로교회)는 「미래의 한국교회를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강의하며 “예배는 국가의 허락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라며 “교회의 침묵은 결국 동조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코로나 시기 예배 제한 조치와 차별금지법 논의, 종교법인 해산 관련 입법 움직임 등을 언급하며 종교 자유의 위기를 지적하고, 여성 지도자들이 기도의 어머니로서 가정과 교회를 깨우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어 정소영 변호사(세인트폴 세계관 아카데미 대표)는 「국가가 하나님을 잊을 때」라는 제목의 강의를 통해 서구 문명의 세속화 흐름과 전체주의 확산을 분석하며 “하나님을 공적 영역에서 배제한 사회는 결국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약화시킨다”고 지적했다. 또한 차별금지법과 왜곡된 정교분리 개념이 종교의 자유를 제한하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음을 언급하며 성경적 세계관에 기초한 공적 책임 의식의 회복을 강조했다. 세 번째 특강에서 김한식 목사(고애연 전문위원)는 「깨어나라! 고신교회의 어머니들이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며 “지금은 교회의 주권과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파수꾼이 절실한 시대”라고 진단했다. 이어 에스더와 느헤미야의 신앙을 언급하며 여성 지도자들이 교회와 가정을 지키는 영적 책임자로 다시 일어설 것을 촉구했다. 네 번째 특강에서 이성구 목사(고애연 공동대표)는 「성경이 말하는 교회와 정치」라는 제목으로 강의하며 “정교분리는 종교를 배제하는 개념이 아니라 국가 권력으로부터 종교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원리”라고 설명했다. 또한 드보라와 한나, 에스더 등 성경적 여성 지도자들의 헌신을 예로 들며 오늘의 여성도들이 시대적 사명을 감당해야 함을 강조했다. 강의 후 질의응답은 전문위원장 고명길 목사(고애연)의 사회로 진행됐으며, 옥재부 목사, 이성구 목사, 김한식 목사, 강보형 목사가 패널로 참여해 참석자들의 질문에 답했다. 특히 호주에서 참석한 신숙희 박사는 해외 한인 사회의 애국운동 현황을 소개하며 고국 교회를 향한 기대를 전해 공감을 이끌어냈다. 마지막으로 실행부위원장 원대연 목사(고애연)의 인도로 한국교회와 대한민국을 위한 합심 통성기도가 이어졌으며, 참석자들은 한마음으로 기도하며 세미나를 마무리했다. 이번 세미나는 그동안 목회자와 장로 중심으로 진행되어 온 고신정신 회복 및 정치신학 운동을 여성 지도자 영역으로 확장한 첫 본격적 전환점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더한다. 특히 여성도들이 기도의 후방에 머무르지 않고 교회와 사회를 향한 신앙적 책임을 감당하는 공적 주체로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다. 고애연 관계자는 “이번 세미나는 여성 지도자들이 고신 정신 회복과 개혁주의 정치신학 실천의 주체로 일어서는 출발점”이라며 “향후 다음 세대와 평신도, 여성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정치신학 교육을 더욱 체계적으로 확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세미나는 한국교회 여성 지도자들이 다시금 시대적 사명을 자각하고, 교회와 나라를 위한 기도의 파수꾼으로 일어서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자료제공 =고신애국지도자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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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 진주노회, 제139회 정기노회 개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진주노회(노회장 동성곤 목사)는 제139회 정기노회를 지난 4월 13일(월), 진주성남교회(양대식 목사)에서 개회했다. 회무에 앞서 드린 개회예배는 노회장 동성곤 목사(금곡교회)의 인도로 시작해 부노회장 심상길 장로(상일교회)가 대표로 기도하고 노회장 동성곤 목사가 “겸손한 주님의 종”(눅17:7-10)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했다. 설교 후 증경노회장 양대식 목사(진주성남교회)가 축도함으로 예배를 마치고 증경노회장 손용우 목사(청암제일교회)의 집례로 성찬예식을 드리기도 했다. 노회장 동성곤 목사의 개회선언으로 시작한 회무에서는 회순 보고 및 각 보고 후 신임 임원 및 총회 총대 선출이 이어졌다. 이날 임원 선거에서는 신임 노회장에 이용재 목사(아림교회)가 선출되고, 부노회장에 정춘택 목사(신반교회)와 이건희 장로(남양교회)가 선출 됐다. 이후 신구 임원교체와 총회 총대 선출을 비롯한 주요 안건들이 다뤄지며 노회의 향후 방향을 가늠하는 시간이 됐다. 이번 정기노회는 말씀과 성찬을 중심으로 시작된 가운데, 질서 있는 회무 진행을 통해 노회의 정체성과 사명을 다시 확인하는 자리가 됐으며, 이후 일정은 14일 폐회예배를 끝으로 마무리 됐다. 다음은 신임 임원 및 총회 총대 명단이다. ▲노회장 : 이용재 목사(아림교회) ▲부노회장 : 정춘택 목사(신반교회), 이건희 장로(남양교회) ▲서기 : 정연진 목사(원천교회) ▲부서기 : 안영국 목사(웅양교회) ▲회록서기 : 구태훈 목사(진주중앙교회) ▲부회록서기 : 양규만 목사(대병교회) ▲회계 : 정재우 장로(칠암교회) ▲부회계 : 조정래 장로(진주성남교회) ▲목사총대 : 이용재, 동성곤, 양대식, 유홍선, 정연진, 홍명유, 한한기 ▲장로총대 : 이건희, 김영남, 김보경, 정준영, 정기근, 백승엽, 석남춘

고신 경남마산노회, 제88회 정기노회 개회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경남마산노회(노회장 전성진 목사)가 지난 4월 14일(화) 오전 9시 30분, 창원시 마산회원구에 위치한 마산성산교회에서 제88회 정기노회를 열고 개회예배와 회무를 진행한 가운데 총회 총대 선출까지 일정을 이어갔다. 회무에 앞서 드린 개회예배는 경남마산노회 노회장 전성진 목사(산호교회)의 인도로 시작됐으며, 장로부노회장 안남호 장로(산호교회)가 대표기도를 드렸다. 이어 서기 황인찬 목사(서부교회)가 사도행전 6장 1-7절을 봉독한 후, 노회장 전성진 목사가 “문제를 성숙과 기회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전성진 목사는 설교에서 “위기는 단순한 어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성숙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하며, 교회와 총회가 직면한 현실을 신앙적으로 해석해야 할 필요성을 언급했다. 특히 “교회의 위기를 다른 사람의 문제로 돌릴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성숙이 시작된다”고 말하며, 원망과 비판이 아닌 자기 성찰을 촉구했다. 또한 “오늘날 교회와 총회가 윤리 문제와 목회자 수급 문제 등 여러 위기를 겪고 있지만, 이러한 상황이 오히려 본질로 돌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도행전 6장을 언급하며 “초대교회는 위기 속에서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세움으로 문제를 해결했다”며, 오늘의 교회 역시 동일한 원리로 회복되어야 함을 밝혔다. 설교 후 이어진 성찬식은 노회장 전성진 목사가 집례 했으며, 목사부노회장 김성국 목사(군북교회)가 축도함으로 예배를 마쳤다. 예배 후 전 노회장 김종인 목사(성암교회)가 기도하고 진행된 회무에서는 각종 보고와 안건 처리가 이어졌으며, 이날 노회는 총회 총대 선출을 진행하고, 강도사 인허증 전달식과 목사 임직식을 가졌다. 이번 정기노회는 교회와 총회가 직면한 위기를 신앙적으로 성찰하며, 본질 회복과 공동체적 책임을 강조하는 가운데 진행됐다. 특히 설교를 통해 제시된 ‘위기를 성숙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메시지는 노회 구성원들에게 깊은 도전과 방향성을 제시했다. 다음은 총회 총대 명단이다.(직함 생략, 득표 순) ▲목사총대 : 강영구, 전성진, 오승균, 김종인, 정상률, 이병권, 황인찬, 이상선 ▲장로총대 : 진종신, 김도근, 서진교, 안남호, 박영태, 구영봉, 김필규, 김시갑

고신 경남노회, 제204회 정기노회 개회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경남노회(노회장 전양문 목사) 제204회 정기노회가 지난 4월 13일(월) 오후 7시, 창원시 진해구 진해웅천교회에서 개회되어 첫날 일정을 진행했다. 회무에 앞서 드려진 개회예배는 노회장 전양문 목사(방주교회)의 인도로 드려졌으며, 장로부노회장 오동환 장로(제일진해교회)가 대표기도를 맡았다. 설교는 노회장 전양문 목사가 마가복음 11장 20-25절을 본문으로 “믿음의 말을 하라”는 제목으로 전했다. 전양문 목사는 무화과나무 사건을 언급하며 “열매 맺을 때가 아닌 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은 지극히 정상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그 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라며, “이 사건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주기 위한 의도적 행위”라고 설명했다. 이어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제자들이 듣도록 하신 것은 믿음의 말의 능력을 가르치기 위함”이라며, 마가복음 11장 23절을 인용해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강조했다. 특히 전 목사는 “믿음의 말은 단순한 긍정적인 언어가 아니라 믿음에서 나온 말, 믿음이 담긴 말”이라고 설명하며, “믿음은 마음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말로 드러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들으신다”며 출애굽기와 민수기의 말씀을 언급하고,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라 하신 말씀처럼 우리의 말이 삶의 결과로 이어진다”고 권면했다. 전양문 목사는 “믿음의 말이 습관이 되어야 한다”며 “목사와 장로가 먼저 믿음의 말을 할 때 성도들이 그것을 배우게 되고, 교회와 노회, 나아가 총회가 믿음 위에 세워지게 된다”고 강조했다. 이어 “믿음의 말은 능력이며, 교회를 세워가는 도구”라고 덧붙였다. 설교 후에는 노회장 전양문 목사의 집례로 성찬식이 거행되었으며, 직전 노회장 이상영 목사(명곡교회)가 축도함으로 개회예배를 마쳤다. 이어진 회무에서는 회원점명과 개회선언, 절차보고가 진행된 후 총회 총대 선출이 이루어졌다. 총대 선출은 전자투표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노회원들의 참여 속에 질서 있게 마무리됐다. 다음은 총회 총대 명단이다. ▲목사총대 : 신진수, 황은선, 이상영, 전양문, 남일우, 변성규, 공범식, 성희찬, 강현석, 강만구, 서성헌, 최정대 ▲장로총대 : 박두양, 김수중, 오동환, 이연호, 김경회, 김회식, 신이철, 배재억, 윤용식, 박태영, 성기석, 김종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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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그렇게 실천은 하지 않으면서도 인용을 하려니 부끄러운 한자말이 있다. 백절불굴(百折不屈)인데 백번 꺾어도 굴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어떠한 어려움에도 결코 뜻한 바를 굽히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한국이 낳은 순교자이신 주기철목사님께서는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죽음을 던지는 굳건한 의지를 남겼다. 동음이의어가 있는데 의사(義士)와 의사(醫師)의 차이가 크다. 앞의 의사(義士)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는 꿋꿋한 사람을 뜻하며, 뒤의 의사(醫師)는 자기가 가진 의술로 타인을 살리는 사람이다. 한 사람은 자기가 죽는 길이요, 또 한 사람은 남을 살리는 길이다. 오늘날 청소년들에게 의사(義士)와 의사(醫師) 중에 어떤 인물이 되기를 원하느냐고 물으면 자기 목숨을 내 놓는 의사(義士)가 되려는 청소년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성경에도 뜻한 바를 굽히지 않는 결연한 인물들이 더러 나온다. 가나안 땅의 분배를 두고 갈렙은 팔십오 세의 나이로 헤브론 땅을 달라고 요구를 한다. (여호수아14:12)에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라고 마치 출정식과도 같은 연설을 쏟아내었다. 이처럼 자기가 믿는 바를 끝까지 지켜나가는 행동은 쉽지 않다. 군산지방에서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귀암(龜岩)노인이라는 한말의 병사가 있다. 아무도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고 그저 귀암에서 살다 자결했기로 귀암노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1907년 8월 1일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당한 근위 제2연대 1대대 소속 하사졸(下士卒)로 당일 해산식장에 나가기를 거부하고 항일의거에 참여한 저항군졸이다. 해산식이 있기 이전에 이미 일본군은 어깨에 견장을 떼고 은사금 명목으로 80원씩 나누어 주었다. 그는 받은 은사금을 찢어버리고 다른 군졸들과 함께 무기고를 털어 당시 서소문 안에 있었던 군영을 뛰쳐나와 남대문 근처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였다. 그 길로 일본군에게 쫓겨 창의문을 거쳐 삼남지방으로 내려가 약 2년 동안 의병으로 항일운동을 했다. 1909년 전라북도 줄포싸움에서 마지막으로 패하고, 이 때의 부상으로 평생 절름발이가 된 채 숨어 살았다. 그 무렵 금강하류 군산연안에 귀암이란 마을에는 미국의 선교사들이 많이 와서 합숙을 하면서 호남지방에 선교를 하고 있었다. 쫓기던 그는 왜경들의 치외법권 지역인 이 선교사들의 숙소로 뛰어들어가 전후사정을 이야기하고 하인으로 고용해 줄 것을 애걸하였다. 이 절름발이 병사는 그날부터 여선교사들의 숙소 경호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군영에 있을 때 차고 다녔던 장도(長刀)를 보배처럼 항상 간직하고 있었다. 서소문 탈영이래 한시도 몸에서 뗀 적이 없는 그 장도를 뽑아 어깨에 둘러메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밤마다 숙사를 순찰했던 것이다. 귀암노인은 몸에 밴 군경 생활의 습성을 조금도 고치려 하지 않았다. 새벽 해 뜨기 전에 일어나 찬물을 끼얹고, 비록 절뚝거리지만 스스로의 구령에 따라 보조를 맞추었다. 또한 몸에 밴 군기 그대로 저녁에는 왕궁이 있는 북쪽을 향해 요배하는 것을 거르는 법이 없었다. 가까이 지내는 선교사들이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는 귀암노인이 급전이 필요하여 선교사에게 돈돔 빌려줄 것을 요청한다. 선교사는 이런 기회를 타서 몸에서 떼질 않는 장도를 저당으로 내놓기만 하면 돈을 빌려 주겠다고 하였다. 귀암노인은 한 사나흘 고민하다가 근 20여년 동안 잠시도 몸에서 뗀 적이 없는 장도를 선교사에게 맡겼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후에 귀암노인은 아무말 없이 행적을 감춘 것이었다. 그의 실종과 더불어 저당으로 잡아둔 장도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장도를 놓아두었던 자리에 한 통의 편지가 놓여있었는데 펴 보니 ‘무사로서 양인 밑에 천한 삶을 이어가는 것도 치욕인데 칼마저 몸에서 떼어놓게 되었으니 이제는 잠시도 살아갈 면목이 없어졌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그날 선교사들은 귀암강 강변에서 자기의 장도로 자기 목을 찌르고 죽은 노병의 시신을 발견한 것이다. 한국의 무사정신에 강동한 선교사들은 귀암강 둔덕에 노인을 묻어주고 십자기를 세워 이 강골병사의 영혼이 영생할 것을 빌어주었다고 한다. 한 평생 다리를 절은 이 노인은 브니엘에서 천사와 씨름을 한 이후 절었던 야곱이 떠오른다. (창세기32:31)에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라고 말씀한다. 야곱 역시 백절불굴의 기백이 있었다. (창세기32:26)에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라고 말씀한다. 백암노인이 만약 천국에 갔다면 함께 다리를 절었던 야곱과 함께 좋은 친구가 되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박동철 장로] 부활절에 전쟁 속 이란교회를 위한 기도

지난 3월 17일, 이란 중심부에 미국과 이스라엘이 연합하여 폭격을 감행함으로써 발발한 이란 중동전쟁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란 지도자 하메네이와 정치 수뇌부 일부 가족이 참수되는 처참한 전쟁의 현장은, 안타깝게도 끝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란의 핵개발과 관련하여 미국과의 관계가 첨예해지면서 전쟁은 극단적인 지경에 이르렀다. 온 세계는 이란이 주도권을 갖고 있는 호르무즈 해협의 유조선 통행 통제에 직면했고, 미사일 폭격과 곳곳의 유전 폭파로 인해 에너지 비상시대를 맞고 있다.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2026년 부활절을 맞이하면서도 종전 또는 휴전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먼저 이란의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하루빨리 전장이 평화로 변하기를 간구한다. 이란이라는 나라는 오랜 역사 속에서 성경과 깊은 관계를 지니고 있다. 이란의 옛 이름은 페르시아로, 고대 이스라엘 유대인들을 70년 동안 포로로 잡아갔던 바벨론을 정복하고 그들을 풀어주었다(BC 539년, 에스라 1장 1-3절). 성경 속 ‘고레스’로 알려진 키루스 대왕은 이스라엘에게 선정을 베풀었다. 이후 페르시아는 중동 전 지역과 인도까지 확장되는 융성한 제국으로 발전했다. 또한 BC 483년 아하수에르 왕 때에는 왕의 총애를 받던 유대인 에스더 왕후가, 유대인을 몰살시키려는 하만의 음모로부터 민족을 구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처럼 이스라엘과 페르시아의 후손인 이란은 오랜 기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7세기 후반 이란이 이슬람화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이후 혁명수비대가 정치권력을 장악하며 직접 통치 체제로 접어들었고, 점차 과격하고 호전적인 국가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흐름은 중동 여러 국가의 친서방화와는 반대로, 이슬람 독재국가로 나아가는 길이었다. 이것이 오늘날 미국과 이스라엘과의 전쟁으로 이어진 원인이 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서, 페르시아 땅 이란은 한때 번창했던 기독교가 탄압받는 땅이 되어버렸다. 오늘날 이란은 북한과 함께 세계에서 교회를 가장 심하게 탄압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2026년 부활절을 맞아 우리는 이란을 깊이 묵상하게 된다. 처참한 전쟁 속에 있는 이란의 교회 형제들을 위해 한국교회는 기도한다. 여느 때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꿈과 희망을 준다. 고난주간 동안 대한민국의 교회들은 특별새벽기도로 주님의 고난을 묵상했다. 그리고 부활주일을 맞아 새벽기도와 연합예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나타난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신 지 삼일째 되는 날 새벽에 부활하셨다. 새벽은 우리 모두에게 시작과 꿈의 시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의 역사를 새벽에 시작한다. 성경의 큰 역사 또한 새벽에 일어났다. 모세의 홍해가 새벽에 갈라졌고(출애굽기 14장), 여리고 성도 새벽에 무너졌다(여호수아 6장). 인류 구원을 위한 대역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새벽에 이루어졌다(마태복음 28장 1절). 어둠은 곧 새벽을 예견한다. 이란 전쟁이라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새벽을 기대할 수 있다. 선교사들이 쫓겨나고 기독교 탄압이 계속되고 있지만, 이란의 교회는 지하에서 성령의 역사 가운데 부흥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절박할 때 기적의 역사가 나타나듯, 전쟁으로 절박한 이 땅에 복음의 새벽이 임할 것을 기대한다. 2026년 부활절, 대한민국 곳곳의 교회들은 부활의 기쁨 가운데 기도했다. 이 기도는 이란의 교회를 향한 간절한 중보로 이어지고 있다.

[조희완 목사] 집착의 허상 (출16:1-3)

미국에서 출간이 되어서 화제를 불러일으킨 <대통령을 기소하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미국의 현직 검사가 <조지 W. 부시>대통령을 법적으로 단죄해야 한다고 작심을 하고 쓴 책입니다. 그 책에서 그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일급 살인죄로 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서 4,000명이 넘는 미군 병사들과 수많은 이라크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조지 W.부시> 대통령에 대해서 또 한 가지 옳지 못한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그를 가리켜서 “휴가집착증”환자라고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조지 W.부시> 대통령은 재임기간 7년 동안 908일을 휴가로 보냈습니다. 즉 재임기간의 약 36%를 <캠프데이비드> 별장이나 <크로포트> 목장에서 휴가를 보냈는데 3일에 하루 꼴로 쉰 셈입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그렇게 수많은 날들을 휴양지에서 휴가를 지낸 것은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고, 지도자로서 실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서 “휴가집착증”환자라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격무에 시달린 나머지 휴가를 가지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유익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3일에 하루 꼴로 쉬었다는 것은 도에 지나친 것입니다. 도에 지나친 것은 좋지 않은 일입니다. - 비단 휴가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든지 정도에 지나쳐서 집착을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어떤 일에 집착을 하면 오직 그 한 가지 그 일만을 생각을 하기 때문에 생각의 폭이 좁아지고 분별력이 없어집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집착을 하면 안 되는지, 그리고 집착을 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지요? 첫째로, 과거에 집착하면 미래로 나아가지 못합니다.(출16:1-3) 둘째로, 재물에 집착하면 근심에 빠지게 됩니다.(마19:21-22) 셋째로, 쾌락에 집착하면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딤후3:4-5) 어지럽고 혼란한 이 시대에 성경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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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성은 목사] 양심을 따라 섬기는 사명자 (행 23:1-11)

사도행전 23장은 바울의 인생 가운데 가장 긴박한 순간 중 하나를 보여준다. 3차 전도여행을 마친 바울은 성령의 경고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결국 그는 체포되어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된다.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바울이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오늘 본문의 핵심이다. 목사와 장로의 자리는 세상이 주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명의 자리이다. 연약한 사람이 그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의 선한 양심에 있다. 바울은 공회 앞에서 “나는 범사의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고백한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을 때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음을 의미한다. 양심이란 하나님이 아시는 것처럼 자신을 아는 것이다. 곧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인식이다. 바울은 평생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워 두고 살아왔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선한 양심을 따라 사는 사역자는 사람의 평가나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과 판단을 기준으로 살아간다. 이러한 선한 양심은 곧 거짓 없는 믿음이며, 사역의 출발점이다. 영적 침체에 빠진 디모데에게 바울이 권면한 것도 바로 이 청결한 양심의 회복이었다. 세상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이 곧 회복이고 부흥이다. 그러나 양심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인간의 양심은 죄와 세상의 영향으로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대제사장을 향해 강하게 말한 후, 그가 대제사장인 것을 알고 즉시 태도를 바꾼 것은 말씀에 대한 순종 때문이었다. 출애굽기의 말씀처럼 지도자를 비방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태도를 바로잡은 것이다. 이 사건은 중요한 원리를 보여준다. 양심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위에 있다는 사실이다. 선한 양심은 말씀에 의해 점검되고 바로 세워져야 한다. 양심을 빌미로 자신의 확신이나 경험, 고집을 따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세상과 타협하여 무뎌진 양심도 문제이지만, 자기 확신으로 굳어진 양심 역시 위험하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앙의 핵심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복음의 본질을 붙드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죽은 자의 부활로 인해 심문을 받고 있다고 증언한다. 그는 공회 앞에서뿐 아니라 총독과 왕 앞에서도 동일하게 부활을 증거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바울의 사명이었고 그의 존재의 본질이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고백처럼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복음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핵심이다. 바울은 위기의 순간에도 이 복음에 더욱 충실했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지키시고 사명을 이어가게 하셨다. 오늘의 사역 현장 속에서도 동일한 질문이 던져진다. 우리는 복음의 본질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성공이라는 이름 아래 십자가와 부활을 뒤로하고 있지는 않은가.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의 사역의 중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어야 한다. 바울의 삶에는 깊은 밤이 찾아왔다. 육체적 피로와 두려움, 사역의 결과에 대한 고민과 미래에 대한 염려가 겹친 시간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밤에 주님이 찾아오셨다. 주께서는 바울 곁에 서서 담대하라고 말씀하시며, 예루살렘에서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하게 될 것이라는 더 큰 사명을 주셨다. 인생의 가장 어두운 밤에 주님의 위로와 약속이 임했다. 바울이 품고 있던 로마 선교의 비전은 바로 그 밤에 다시 확증되었다. 하나님은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 위로와 격려, 그리고 새로운 비전을 주신다. 오늘 이 기도회 역시 그러한 시간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회복하고, 말씀으로 자신을 점검하며,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를 세우시고, 맡기신 사명을 감당할 힘을 주실 것이다. 세상의 인기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 경험이나 고집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가는 삶, 세상적 방법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붙드는 삶이야말로 사명자의 길이다. 이러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인생의 깊은 밤에도 찾아오시는 주님의 위로를 경험하며,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게 될 것이다. ※ 위 설교문은 2026년 4월 2일 고신총회 특별기도회 설교를 정리한 것입니다.

[김경헌 목사] 빈 무덤과 사랑받는 제자(요20:1-8)

부활의 아침, 우리는 요한복음 20장에서 한 장면 앞에 서게 된다. 아직 해가 완전히 떠오르지 않은 이른 새벽, 누군가는 울며 달려왔고, 두 제자는 그 소식을 듣고 다시 달려간다. 숨이 차오를 만큼 급하게, 마음이 무너질 듯한 상태로, 그들은 빈 무덤을 향해 달려간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기록한 요한은 끝내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숨기고, 한 가지 이름만 남긴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이 이름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고백이다. 동시에 초대다.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의 품에 기대던 자리(요13:23), 십자가 아래에서 끝까지 떠나지 않던 자리(요19:26-27), 두려움 속에서도 빈 무덤을 향해 달려가던 자리(요 20:2-8), 그리고 부활하신 주를 가장 먼저 알아보던 자리(요 21:7). 그 모든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는 같은 이름으로 서 있다. “사랑받는 제자!” 요한은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그 자리를 비워 둔다. 그리고 우리를 그 자리에 앉힌다. 그래서 이 복음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서게 된다. 우리가 예수의 품에 기대는 자가 되고, 우리가 십자가 아래에 서 있는 자가 되며, 우리가 눈물로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자가 된다. 빈 무덤 앞에 도착했을 때, 사랑받는 제자는 베드로보다 먼저였다. 더 빨랐고, 더 간절했다. 그러나 그는 멈춘다. 무덤 안을 들여다보면서도, 들어가지 않는다. 숨을 고르며, 기다린다. 뒤늦게 도착한 베드로가 먼저 들어간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사랑받는 제자가 들어간다. 이 짧은 순간은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을 남긴다. 더 빨리 달려온 자가 먼저 들어가지 않는다. 더 뜨거운 마음을 가진 자가 스스로를 앞세우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열심을 내려놓고, 사도적 질서 앞에 선다. 신앙은 단순히 뜨거움이 아니다. 눈물이 많다고 해서, 더 빨리 달린다고 해서, 더 깊은 믿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종종 열심을 믿음으로 착각한다.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고 앞서 나아가는 것이 신앙의 깊이인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전혀 다른 길을 보여준다. 참된 믿음은 질서 안에 있으며, 사도들의 증언 위에 서 있다. 때로는 멈추는 것이 믿음이고,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다. 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무덤은 어디에나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무덤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단 하나의 무덤만이비어 있다. 단 하나의 무덤만이생명을 품고 있다. 만일 우리가 사도들의 증언을 떠나, 교회의 고백을 떠나, 스스로의 열심만을 붙잡고 달려간다면, 우리는 다른 무덤에 도착할 수도 있다. 그곳은 여전히 죽음이 머무는 자리다. 아무리 열심히 달려갔어도, 그 끝이 죽음이라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16:18)라고 말씀하신 것은, 교회가 사도적 고백 위에 세워진 공동체임을 드러낸다. 우리의 신앙은 개인의 열심이나 감정이 아니라, 사도들의 증언과 교회의 고백 위에 세워져야 한다. 영적으로 보면, 베드로보다 먼저 무덤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다. 그것은 믿음의 열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이고 무질서한 신앙일 수 있다. 사도들의 질서를 떠나 스스로 길을 찾는다면, 우리는 잘못된 무덤에 들어갈 위험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배운다. 믿음은 속도가 아니라, 어디에 서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부활의 아침, 우리는 다시 그 질문 앞에 선다.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나는 정말 사도의 고백 위에 서 있는가? 아니면 나의 생각과 열심이 나를 다른 곳으로 이끌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회의 질서를 신뢰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것을 넘어 스스로 길을 만들고 있는가? 교회의 방법보다 나의 방법이 더 맞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혹시 나는 도리어 베드로에게 교회를 가르치려고 하는 자의 자리에 서 있지는 않은가? 믿음이 전혀 없는 것도 위험하지만, 잘못된 믿음 또한 치명적이다. 전자는 어떤 무덤에도 이르지 못하지만, 후자는 잘못된 무덤으로 이끈다. 그러나 복음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기다림 끝에, 사도적 질서 안에서, 베드로의 증언을 따라, 사랑받는 제자는 마침내 무덤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단순히 빈 공간만을 본 것이 아니다. 그는 보았고, 믿었다. 부활은 설명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부활은 믿음으로 열린다. 눈으로 확인하기 이전에,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건이다. 그 믿음이 절망을 생명으로 바꾸고, 눈물을 소망으로 바꾼다. 그래서 이 아침, 우리도 그 자리에 서게 된다. 달려왔고, 멈추었고, 기다렸고, 이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복음은 우리에게도 같은 고백을 남긴다. 사랑받는 제자가 들어가 보고 믿었더라!

[김경헌 목사] 강도의 소굴 (눅19:45-46)

고난주간, 우리는 다시 한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주님의 발걸음을 따라간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던 환호 속에서, 마태복음 21장에 기록된 그 장면은 왕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 환호의 열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그분이 마주하신 것은 찬양이 아니라 뒤틀린 예배의 모습이었다. 주님은 성전을 보시고 이렇게 선언하신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이 말씀은 단순히 성전 앞에서 장사하던 행위를 향한 도덕적 비판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이 사건을 “교회에서 장사하면 안 된다”는 교훈이나 탐심에 대한 경고로 축소시킨다. 그러나 질문은 더 깊어야 한다. 왜 그들은 성전 앞에서 장사를 했는가? 그곳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기 때문에 장사가 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들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 필요한 짐승과 물품을 제공함으로써 예배를 “더 쉽게”, “더 편리하게” 만들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의 행위는 예배를 방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돕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것을 “강도의 소굴”이라 부르셨다. 왜일까? 그 이유는 예배의 본질이 인간의 편리함에 의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점점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이동할 때, 그 예배는 더 이상 거룩한 예배가 아니다. 편리함은 어느 순간 거룩함을 대체한다. 효율은 경외를 밀어낸다. 그렇게 성전은 기도의 집에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공간으로 변질된다. 이 장면 앞에서 우리는 오늘의 교회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교회는 얼마나 “편리한 예배”를 추구하고 있는가? 예배 시간은 성도들의 일정에 맞춰지고, 예배 순서는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조정되며, 설교는 듣기 좋은 메시지로 다듬어진다. 교회의 공간과 구조 역시 성경적 상징과 신학적 의미보다는 실용성과 효율성에 의해 결정된다.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져 온 예배에 대한 경외와 철학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실 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다. 대제사장조차 1년에 단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의 거룩함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예배 가운데 그 거룩함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과연 영적인 신을 벗고 하나님 앞에 서고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이미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단지 상인들의 행위를 지적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방식 자체를 뒤엎으셨다. 만약 오늘 주님께서 우리의 교회를 방문하신다면 어떨까? 우리의 예배와 신앙생활을 보시고 책망하시며 우리의 삶의 방식을 뒤엎으신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자리에 남아 있을까? 아니면 많은 이들이 떠나가게 될까? 불과 며칠 전까지 “호산나”를 외치던 무리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 이 극적인 변화는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처럼 살아가지 못한다. 오히려 백 데나리온을 붙들고 놓지 못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은혜를 받았지만 여전히 자기중심적이다. 모든 것이 우리 마음에 맞아야 한다. 예배조차 우리가 편해야 하며,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쉽게 외면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인가? 바로 우리가 그 “강도”이다. 그러나 고난주간의 메시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또 다른 장면을 본다.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강도들이 달려 있었다. 그들은 분명 죄인이었고, 심판받아 마땅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중 한 강도는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고백한다.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때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신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것이 은혜다. 우리가 아무리 강도와 같은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우리가 만든 예배가 아무리 왜곡되었다 할지라도, 십자가 앞에서 주님을 향해 돌아서는 자에게는 여전히 길이 열려 있다. 강도의 소굴 속에서도 은혜의 통로는 막히지 않는다. 고난주간, 우리는 묻는다. 나는 지금 호산나를 외치고 있는가, 아니면 십자가를 외치고 있는가? 나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아니면 소비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을 중심에 두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의 끝에서, 우리는 다시 십자가를 바라본다. 그곳에서 강도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은혜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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