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03-29(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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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건영남노회, 조이포유 콘서트 개최

대한예수교장로회(재건) 영남노회가 지난 3월 26일(주일), 마산재건교회(송영섭 목사)에서 ‘조이포유 콘서트’를 개최 했다. 주일 오후 예배 시간에 열린 이번 찬양콘서트는 재건영남노회가 주최하고 마산재건교회가 주관하고 경남CBS와 함께 했다. 이번 찬양 콘서트에는 CBS JOY4U에서 <최인혁의 사랑의 노래 평화의 노래>를 진행하는 찬양사역자 최인혁 목사와 MBN 라스트싱어 우승자로 알려져 CBS 새롭게하소서 등에 출연하며 찬양사역자로 활동하는 장한이 사모가 출연해 아름다운 목소리를 선보였다. 마산재건교회 브라가 찬양단의 찬양으로 시작한 예배는 송영섭 목사(마산재건교회)가 ‘들의 백합화가 말하는 복음’(마6:28-29)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송영섭 목사는 “우리 각자 모두 하나님께서 가장 영광스러운 존재로 만드신 것”이라며 “하나님이 만드신 내 모습 그대로 살아야한다. 나답게 살아갈 때 가장 가치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온 우주에 하나님이 존귀하게 만든 유일한 존재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하나님이 한사람 한사람 직접 빚으시고 만드셨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고 전했다. 말씀 후 이어진 순서에서 최인혁 목사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곡으로 첫 무대를 장식했다. 이어, ‘성령의 바람’, ‘나는 죽고 주가 살고’, ‘주여 인도하소서’라는 곡을 열창하며 큰 호응을 얻었다. 다음 무대로 장한이 사모가 ‘행복’이라는 곡으로 첫 무대를 열고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은혜’라는 곡을 연주하며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려주며 성도들의 박수와 갈채가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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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나를 보는 기준이 무엇인가?

한 흑인 선교사가 쓴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선교사님은 흑인 빈민촌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백인들이 사는 동네의 쓰레기통을 뒤져서 버려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그렇게 쓰레기통을 뒤지던 어느 날, 한 백인 부인의 눈에 띄어서 그 집의 청소부로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흑인 빈민촌 출신으로는 큰 출세를 한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첫 출근을 하고보니까 딱히 청소할 것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사는 흑인 빈민촌 움막에 비하면 모든 것이 너무나 깨끗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깨끗한데 백인 부인이 왜 자기에게 청소를 시켰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놀면서 휘파람만 불다가 그냥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날 곧장 쫓겨났습니다. 백인 부인이 보기에는 청소는 고사하고 더러운 발로 온 집안을 더럽혀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 흑인 소년이 쫓겨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준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누추한 흑인 빈민촌에 사는 소년의 기준으로 볼 때는 너무나 깨끗했지만 백인 부인의 기준으로는 온 집안이 더럽혀져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나는 무엇을 기준으로 내 삶을 평가하고 있습니까?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는 신앙이 좋은 것 같고 의로운 것 같고 깨끗한 삶을 사는 것 같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기준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언제나 그 말씀으로 나를 비쳐보고 내 자신의 모습을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바른 판단을 할 수 있고, 그래서 나를 변화시켜 갈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늘 예배 때에 말씀을 듣고 또 개인적으로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다른 사람은 기준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늘 그 말씀으로 나를 비쳐보며 나를 변화시켜 갈 때에 예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 있는 사람이 됩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서로 다른 기도를 했던 두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그리고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 바리새인의 기도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보았다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죄인 된 존재인지 알 텐데 오히려 그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여서 자신의 종교적인 탁월함과 의로움을 과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의 기도는 그와 전혀 달랐습니다. 그 당시 세리는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죄인 중의 상 죄인으로 취급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세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는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멀리 서서 기도합니다. 그것도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알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기준으로 보면 성전 가까이 갈 수도 없고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애통할 수밖에 없는 죄인 됨을 그는 알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세리는 바로 이 고백으로 말미암아 전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8장 14절에서 예수님은 이 두 사람의 기도의 결론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독자 여러분, 늘 기도는 하지만 내 마음은 한껏 높아져 있지는 않습니까? 다른 성도보다 좀 더 나은 것 같은 나의 신앙과 헌신의 모습으로 인해서 나도 모르게 교만해져 있지 않습니까? 다른 성도는 기준이 아닙니다. 기준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말씀 앞에서 참 부족함이 많은 존재들이고 죄인 된 존재임을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언제나 겸손을 잃지 않을 수 있고, 바로 그 겸손으로 말미암아 겸손한 자에게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이정희 목사] 기독교인의 용어 사용 27: 고쳐야 할 예배용어/ 예배 본다

I. 서언(序言) “잘못된 예배용어, 이것만은 고치자.”란 기사가 언젠가 국민일보에 게재된 적이 있었다. 이는 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NCCK)의 한국교회 발전연구원에서 연구 발표한 것으로서 현재 한국교회에서 잘못 사용하고 있는 예배 용어들을 바로 잡기 위한 시도였으며, 이에 관한 새 용어들을 제안했다. 구체적으로는 고쳐야 할 용어들 중에서 주로 예배용어들에 관 한 것이었다. 기도에서 9개, 예배 예식에서 31개 등 모두 40개 용어의 문제점을 설명하고 대체 용어를 제안했다. 이러한 연구와 발표는 그동안 개인 연구가나 일부 교단에서 발표해 왔다. 하지만 이러한 발표가 상당히 의미가 있는 것은 이번의 발표는 범 교단적 차원의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이루어졌다는데 있다. 또한 나름대로의 관심으로 본지의‘바로잡기’코너를 연재하는 필자로서는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본 호에서는 예배 용어 중에서 ‘예배 본다’, ‘예배 드린다’는 용어에 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II. 예배드림에 대한 용어 먼저 우리 한국교회의 예배드림에 대한 용어는 통일된 말이 없이 아주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예배 드린다’, 예배 한다’, ‘예배 본다’,‘예배 봐준다’, ‘제단을 쌓는다’등 여러 용어들이 있다. 이 중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는 ‘예배 드린다’이다. 이 중에서 어떤 용어가 가장 적합할까?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전문가들의 견해가 조금씩 차이가 있다. 먼저 장로회 신학대학원 교수를 지낸 나채운 교수는 ‘예배 본다’는 용어도 틀린 말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는 ‘보다’란 말은 문법상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그 첫째는 본동사로 쓰이는 경우로 눈으로 본다는 시각적인 의미이다. 이런 경우는 ‘예배 본다’는 용어를 쓸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두 번째의 조동사와 세 번째의 보조 형용사로 사용될 경우는‘먹어본다’는 말처럼 체험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예배 본다’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많은 교인들은 이런 복잡한 문법적인 체계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예배하다’나 ‘예배드리다’란 말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또 다른 견해는 천안대학교 기독신학대학원의 김석한 교수이다. 그는 ‘예배 하다’란 용어 외에는 어떤 말도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이유는 ‘예배 드린다’는 말은 구약시대의 제물을 드릴 때에 사용되는 용어이지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의 은총 이후에는 예수님이 단번에 드려졌기 때문에 ‘드림’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드린다는 것은 타종교들이 우상에게 드리는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이 말은 합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한 ‘예배 본다’는 말은 과거 선교사들이 처음 들어와 예배할 때 서양인에 대한 호기심과 구경꾼들로서의 예배였고 그것이 고착화 되어 ‘예배 본다’는 말이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미상으로는 시각적이기 때문에 합당하지 않다고 했다. 그다음 예배를 ‘제단 쌓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구약시대의 제단을 쌓는 행위에 국한되기 때문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예배 한다’란 용어 외에는 사용할 말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다음 장로회 통합교단에서는 2003년에 ‘예배를 봐준다’는 말은 사용할 수 없다는 결의를 했고, 이번의 ‘이것만은 고치자’에서도 재차 확인 발표를 하였다. III. 결 어 이상과 같은 각 주장들을 볼 때에 어떤 생각이 드는가? 예배 용어 하나도 아직까지는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예배 한다’는 말은 누구도 반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조심스럽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예배 드린다’는 표현도 적절하다고 본다. 물론 신약적인 개념의 말이 아니라는 견해나 타종교의 드린다는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너무 확대해석하는 것은 아닌지를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해 본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다양한 견해가 있다는 것은 발전을 위한 노력이라는 관점에서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해 보면서 하루 빨리 올바르고도 완전한 용어들이 정착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담아 기도를 드린다.

[신재철 목사] 잠복(潛伏), 사라지는 고물을 찾아서

잠복(潛伏), 사라지는 고물을 찾아서 분리수거장은 돈 주고 버리기 아까운 물건들을 내어두는 곳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돈이 되는 물건이 모이는 장소이기도 하다. 폐지는 물론이고 고철과 공병은 어떤 이의 주 수입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큰 규모의 아파트에서는 제법 큰 수익을 만들어 아파트 복지를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일하는 아파트는 규모가 작아 폐품으로 모을 수 있는 금액은 미비하다. 오히려 얼마간 돈을 만들기 위해 묵혀두었다가는 분리수거장이 냄새나고 지저분한 공간이 되어 버린다. 실제로 전임 소장님은 폐품을 관리해 월 2~3만 원의 현금을 만들기도 했다. 후문에는 그 돈은 개인 용돈이 되었다는데 확인할 길은 없다. 여하튼 모으면 돈이 될 수 있지만 내 기준에 득보다는 실이 많았다. 지역에 고물을 취급하는 사장님과 연계하여 매일 수거하는 조건으로 아파트 측에서 일절 금품을 요구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얼마간의 돈을 포기했지만, 입주민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매일 치워지는 폐품으로 아파트가 너무 깨끗해 졌다. “소장님, 요즘 폐지랑 고철이 왜 이렇게 안 나오죠?” 업체 사장님의 전화다. 매일 수거하러 와보면 돈이 되는 폐지와 고철은 없고 잡다한 물건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물건을 누가 집어갈까 싶어 며칠 더 지켜보자는 말을 전하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고물이 좀 덜 나오는 날도 있을 수 있으니 그럴 수 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확실히 이상했다. 일주일이 지나도 고물은 모이지 않았다. ‘누군가 몰래 가지고 가는구나!’ 확신이 들었다. 마침 분리수거장을 비추는 CCTV가 있어서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시간을 돌려보기 시작했다. 시간을 빠르게 돌리며 영상을 재생한다. 차곡차곡 쌓이는 폐지들. 그런데 어느 시간이 지나니 갑자기 사라진다. 그 순간을 다시 천천히 돌려본다. 새벽 시간, 어느 노인이 수레를 끌고 들어와 차분히 야무지게도 돈 되는 물건만 담아 간다. 매일매일 성실하게 찾아오셨다. 하, 고민이 깊어진다. 「잠복을 결정하다」 계약한 사장님께 미안한 마음도 들고, 분명한 절도라는 생각에 잠복을 결정했다. 반드시 잡아서 경찰에 넘길 계획이었다. 아내에게는 며칠간 못 들어 올 수도 있다는 말을 남겼다. 제법 비장하다. 밖에서 보일까, 관리실 불도 끄고 의자에 몸을 푹 묻은 상태로 새벽까지 뜬 눈으로 지켜본다. 첫날은 실패다. 반드시 다시 온다는 확신으로 둘째 날을 맞았다. 조금 지루해질 즈음에 드디어 나타났다. 영상에서 보았던 손수레와 할아버지다. 익숙하게 고물을 챙겨 담아 조용히 대로변으로 빠져나간다. 은밀히 드러나지 않게 따라가 본다. 굽은 허리로 옆 건물의 폐지도 조용히 정리하며 수레에 물건을 쌓는다. ‘이걸 어쩌지.’ 나는 무엇을 고민했을까? 할아버지와 대면하지 못하고 조용히 관리실로 돌아왔다. 사장님과 의리가 있으니 할아버지를 제재했어야 하는데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민이 깊어졌다. 날이 밝은 후 고물상 사장님과 통화하며 그간 상황을 설명했다. 상황의 난감함, 사장님께 미안함이 버무려져서 말도 조리 있게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사장님은 의외의 시원한 답으로 나의 고민을 해결해 주셨다. “아이고, 소장님. 그러면 그 영감님께 고물 다 드리세요. 우리는 여기 아파트 물건 없어도 아무 지장이 없어요.” 정말 그래도 될지, 미안한 마음에 한 번 더 되물으며 감사 인사를 드린다. 내가 감사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지만 감사했다. 이유가 뭐가 되었든. 그리고 부끄러웠다. 목사보다 사장님 마음 씀이 더 고왔다. 그리고 나는 한 번 더 잠복을 이어간다. 그 할아버지를 만나야 했다. 새벽이 되어 어김없이 할아버지가 찾아왔다. 어제처럼 익숙하게 고물을 담아 돌아가는 길을 쫒아간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본다. “어르신, 제가 여기 아파트 관리소장이에요. 저희 고물을 매일 수거해 가실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요청을 드렸고 할아버지는 신이 나서 깨끗하게 정리해 가겠다는 약속을 하신다. 이미 손수레에 실린 우리 아파트 물건은 말이 없다. 할아버지와 나 사이의 비밀은 그 녀석들만 입을 다물어 주면 아무 문제 없을 듯하다. 오늘도 이렇게 인생의 한 수(手)를 배운다. 에필로그 그 후 할아버지는 새벽이 아닌 낮 시간 당당하게 고물을 챙겨 가셨다. 입주민이 간섭이라도 할라치면 관리소장님 허락이 있었다며 당당해 하신다. 그리고 얼마지않아 다시 폐지가 쌓이기 시작했고 더 이상 치워지지 않았다. 아파트 미관상 좋지 않기도 했지만 할아버지 신상이 염려되어 동네 고물상을 찾아다니며 할아버지 안부를 물었다. 마침 한 고물상에서 할아버지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갑자기 몸이 안 좋으셔서 병원에 며칠 계시다 돌아가셨다는 이야기. 무엇을 위해 그리 고생하며 살다 가셨을까. 여전히 고물은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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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사순절

사순절 천주교와 정교회에서 사순절이라는 절기를 지킵니다. 우리 개신교는 사순절을 지키지 않습니다. 구지 그 이유를 찾으라면 사순절은 성경에서 행하라고 가르치는 절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교회가 지키라고 가르치지 않는 절기들을 우리는 이미 많이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지키라고 하시는 절기들이 많으나 사실 신약성경에서 교회가 꼭 지켜야 한다고 하는 것은 오직 성례뿐입니다. 세례와 성찬 외에는 신약성경이 지켜야 된다고 가르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키는 부활절과 성탄절도 성경이 지키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부활절과 성탄절을 예수님의 대한 아주 중요한 날들로 기념하며 지키고 있습니다. 그럼 왜 우리는 부활절과 성탄절과 같은 절기는 지키되 사순절은 지키지 않게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은 천주교에서부터 분리하고, 잘못되고 왜곡된 가르침으로부터 분리한 것입니다. 사순절을 오늘 지키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그 절기가 천주교 냄새가 너무 많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사순절에 대한 간단한 역사와 그 뒤에 있는 의미에 대하여 살펴봄으로 사순절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사순절은 먼저, 천주교나 정교회나 개신교라는 분열이 있기도 전에 초대교회가 지키던 절기였습니다. 교부들의 글들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된 절기입니다. 사순절을 지키는 방법은 부활절을 앞두고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합니다.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금식기도 하시며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이기셨다는 이유에서 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금식기도하신 것을 근거하여 부활절이 되기 40일 전에 금식기도를 하는 절기가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의 의도는 참 좋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역 핵심이 십자가와 부활이기에 그것을 기억하고 표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을 표시하는 40일 금식이 부활절로 마무리가 되는 사순절은 그 속에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이 구속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왜 개신교는 이렇게 좋은 의미를 담은 사순절을 더이상 지키지 않습니까? 그것은 시대가 지나면서, 사순절이 신명기의 말씀으로 돌아가, 구약의 말씀으로 돌아가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지 못하며, 율법주의와 기복신앙에 사로잡힌 절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본문을 보시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40일을 광야에서 금식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40일 금식기도 하시면서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생활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신8:2-3)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얻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시험하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사는지 시험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시험을 통과하면 어떠한 축복이 주어집니까? 4절부터 그 시험을 통과하면 주어지는 축복이 기록됩니다. 끝에 10절에는 이렇게 기록됩니다. (신8:10)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하나님의 광야시험을 통과하는 자에게 옥토를 주신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의 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니 성경은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결과가 부활이듯이, 십자가와 부활의 결과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옥토입니다. 사순절을 지키는 초대교회의 의도는 좋았지만, 시대가 흘러가면서 그 가르침이 참된 하늘의 옥토 즉,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하늘의 땅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옥토를 바라보고 세상의 형통함을 원하게 되어 초대교회가 지켰던 사순절의 의미가 많이 변질되어갔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실 광야의 시험은 이스라엘이나 그 어떤 사람도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였습니다. 12 정탐꾼의 보고로 그들의 믿음과 신앙의 실체가 드러났고, 여호수와와 갈렙 외에 애굽에서 나온 모든 성인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여호수와의 인도를 따라 약속의 땅에 들어갔고, 다윗을 통해 12지파를 통일하여 이스라엘이란 강대한 나라를 세웠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시험을 통과해야 옥토를 주신다고 했는데 왜 시험에 실패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허락하십니까?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였기에 그들이 차지한 땅은 하나님께서 의도한 참된 옥토가 아니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을 대표하는 모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어 광야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40일 금식기도 하심으로 이스라엘이 실패한 광야시험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의 시험을 통과하시니, 그를 믿는 자는 그와 함께 하나님께서 의도한 참된 하늘의 옥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이상 광야의 시험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혹 그 시험을 받는다고 해도 우리 가운데 그 시험을 극복하고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초대교회에 사순절은 예수님의 40일 금식을 기념하며 그의 부활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절기였는데, 시대가 지나면서 사순절은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광야의 시험을 스스로 자신의 욕심으로 차지하려고 하는 절기가 되었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구약의 율법주의와 기복신앙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변질된 사순절은, 40일 금식기도 하면서,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행(?)으로 받게 될 복을 예수님보다 더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사순절이 이렇게 변질되다보니 우리 개신교회는 더 이상 사순절을 지키지 않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솔직한 마음으로 개혁주의의 근본정신을 따라, 사순절의 본 의미를 되찾으면 좋겠습니다. 사순절을 지킴으로 예수님을 더 가까이 사랑하며 그와 함께 영적으로 동행하면 좋겠다는 믿음의 거룩한 욕심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금식하였으니, 우리도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온 교회가 함께 금식하며 부활을 기념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옥토를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시대는 사순절만 아니라, 부활절과 성탄절까지 변질되어 세상적인 이벤트가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과 멀어지는 세상에 맞서 교회는 더더욱 예수님에게 가까이할 수 있도록 교회 문화를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부활주일이 3주가 남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생활 속에 어떻게 그것을 기념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행위로 구원에 도달하는 것을 아니지만,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우리의 행동으로 사모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날 개신교회가 사순절을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초대교회의 신앙자체를 따라 예수님을 더욱더 가까이하는 생활에 노력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김성수 총장]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우리 성도들이 즐겨 부르는 복음 중에서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라는 복음 송이 있다. 분주한 생활 가운데서도 우리 모두는 한번쯤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우리 모두의 삶 속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한번쯤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 특별히 우리의 삶의 여정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정말 살아계셔서 나에게 관심이나 갖고 계시는지, 내가 당하는 삶의 고통을 알기나 하시는지, 또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인지 회의가 들 때 은혜의 문제를 한번쯤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간절히 바랬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이삭은 형 에서에게 축복을 물려주고자 했다. 그래서 야곱은 먼저 에서에게서 장자권을 빼앗았다. 형 에서의 옷을 입고 털이 많은 사냥꾼인 척하여 눈먼 아버지를 속였다.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어떻게 그렇게 빨리 사냥감을 갖고 돌아올 수 있었느냐고 물었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기까지 하였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했다. 거짓말하고, 속이고,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등 모든 일을 했다. 그래서 야곱은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아 보인다. 야곱의 계획과 간교는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만했다. 에서는 화가 나서 동생을 죽일 기회를 노렸다(창 27:41). 야곱은 목숨을 걸고 형 에서로부터 도망을 쳐야 했고, 결국 자신의 고향과 약속의 땅으로부터도 멀어져 갔다. 도망자 야곱은 자신이 떠나온 고향 집에서 며칠 거리에 있는 어떤 곳에 이르렀다. 사실 그곳은 그의 조부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이르러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던 곳이었다(12:8). 그러나 야곱은 이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는 그의 조부모와 부모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많이 들었지만 이 여호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지를 못했다. 야곱은 어쩌다가 이곳에 도착했다. 해가 지고 어두워서 더 이상 여행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진맥진한 야곱은 잠이 들었다. 이 밤에 그는 놀라운 꿈을 꾸었고, 하나님은 꿈에 야곱에게 나타나셨다. 야곱은 자신이 꿈에서 본 이상을 보고 두려워 죽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그는 방금 아버지를 속이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악행에 대해 자신을 벌하실 것인가? 여호와께서 자신을 저주하실 것인가?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야곱을 벌하거나 저주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오히려 풍성한 약속으로 그에게 복을 주셨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그의 조상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동일한 약속을 야곱에게 주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은 약속의 땅을 떠나 위험한 여행을 떠나는 야곱에게 특별한 약속을 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17:7)고 약속하셨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도망치는 교활한 야곱을 찾아서 만나시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어진 이 모든 풍성한 약속이 이제 그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 베푸신 축복을 받았다.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을 받을 만한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약속의 땅에서 도망치는 도망자가 될 뿐이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축복을 붙잡고 취할 수가 없는 존재다. 우리는 오직 믿음과 감사라는 두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갖고 하시는 일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사실 생각해 보면 내가 소유하고, 누려온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것 아니라 오직 은혜였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한 없이 연약하고 부족하고 허물이 많고, 하나님 앞에 도무지 설 수도 없는 죄인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의 행위대로 갚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모든 것이 은혜라! 모든 것이 은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삶이다. 할렐루야!

[김경헌 목사] 보시니(창1:31)

창세기 1장이 창조장이라는 것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무슨 마음으로 창조하셨을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해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일의 경중을 떠나서 무슨 일이든 목적과 의도가 있는데 모든 것의 시작이 되는 창조를 접하면서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시면서 무슨 마음으로 무엇을 목적으로 창조하셨을까?” 하는 것에는 의외로 무관심한 것 같습니다.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니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에베소서 기자는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실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우리의 구원까지 언급합니다.(엡1:4-5) 성도라고 한다면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신 사랑의 하나님 ......”이라는 기도는 너무도 자연스럽고 익숙한 표현이요, 신앙고백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다면 창세기 1장에서 창조하시면서 이 창조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셨을까요? 창조의 결정체요, 핵심인 사람이 어떻게 될지를 모르겠을까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하신 사람, 하나님 닮은 사람이 어떻게 될지 모르고 창조하셨을까요?(창1:26, 5:1) 결혼을 해서 2세를 기다리는 부부에게 임신의 징후가 보입니다. 기다리던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에 부부뿐만 아니라 양가 가족, 친구, 이웃들까지 축하하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만약 임신한 여자가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는데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중병에 걸려 있고, 태어나면 죽을 것이라는 진단을 받는다면 그 아이 부모의 심정은 어떨까요? 창세 전에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창세기 1장에 와서 창조를 시작하십니다. 우리같이 부족한 부모도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죽는다는 진단결과 앞에서 차라리 임신하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아픔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하물며 완벽한 아버지 하나님,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변함이 없으신 아버지 하나님 그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시면서 어떤 마음, 어떤 심정이셨을 것 같습니까? 자신의 형상을 따라, 자신의 모양을 한 사람이 장차 선악과를 따먹고 완전히 죽게 될 것을 다 아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심정이 어떠하셨을 것 같습니까? 빛을 창조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땅과 바다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채소와 과목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물고기와 생물들과 새들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땅의 짐승과 육축과 기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정말 좋으셨을까요? 태어날 아이를 기다리며 젖병 기저귀 속옷 겉옷 장난감을 장만하고, 모든 관심과 생각과 생활과 삶이 아이를 중심해서 달라지는데 정작 그 아이가 태어나면 죽는다고 합니다. 그 아이를 위하여 준비한 그 모든 것을 볼 때 그 부모는 좋겠습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좋으셔서 좋아하셨겠습니까? 25시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생각납니다. “웃어요, 더 크게 활짝 웃으라고요!”라고 하는 사진 기자의 요구에 이러지도 못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주인공 안소니 퀸의 일그러진 표정이 하나님의 얼굴과 오버랩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은 잔인하게도 그 장면을 아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그냥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면 안 될까요? 하나님이 그 지은 모든 것들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시면 안 될까요? 보시니!!!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보셨을까요? 무엇을 보셨기에 심히 좋으셨을까요? 창세기 1장은 너무도 슬픈 하나님의 이야기, 너무도 아프신 하나님의 이야기, 어쩌면 인간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너무도 슬프고 아프실 하나님의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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