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2-10(화)

손현보 목사, 불법 선거운동 혐의로 징역형 집행유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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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마산노회 동함안·함안시찰 신년연합부흥회 열려

예장(고신) 경남마산노회 동함안시찰과 함안시찰이 연합해 마련한 2026년 신년연합부흥회가 2월 1일(주일)부터 4일(수)까지 나흘간 함안제일교회(정진경 목사)에서 열렸다. 새해의 출발점에서 말씀과 기도로 한 해의 신앙 방향을 점검하고자 열린 이번 부흥회에는 시찰 소속 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이 함께 모여 연합의 의미를 더했다. 이번 부흥회의 주제는 “주여 오시옵소서”(계22:20)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신앙을 중심에 두고 오늘의 교회와 성도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본질을 되새기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강사로는 한진환 목사(서울서문교회 은퇴)가 초청돼 주일 집회를 시작으로 수요일 저녁까지 연속 집회를 인도했다. 재림 신앙, 오늘의 삶을 정렬하는 기준 부흥회 첫날인 2월 1일 주일 오후 집회에서 한진환 목사는 재림 신앙의 의미를 짚으며 말씀을 전했다. 한 목사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는 것은 단순한 종말 담론이나 미래의 한 사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신앙의 기준”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점점 재림에 대한 긴장감을 잃어버리고, 현실에 안주한 신앙으로 흘러가기 쉬운 모습을 경계했다. 재림의 소망은 두려움이 아니라 성도를 깨어 있게 만드는 힘이며, 교회는 이 소망 위에서 다시 거룩함과 순종의 삶을 회복해야 한다고 권면했다. “예배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만남의 자리” 2월 2일 저녁 집회에서는 요한복음 4장 23–24절 말씀을 본문으로 ‘예배, 하늘의 입맞춤’이라는 제목의 설교가 전해졌다. 한 목사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는 형식이나 외적인 분위기에 있지 않다고 강조하며, “예배는 하나님과 성도가 영과 진리로 만나는 자리”라고 말했다. 특히 설교에 대해 “설교는 인간의 의견이나 평가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목사를 통해 말씀하시는 시간”이라고 강조했다. 성도들이 설교를 점수 매기듯 듣는 태도를 경계하며, 마리아가 보여준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자세로 말씀 앞에 서야 함을 당부했다. 한 목사는 예배의 회복이 곧 교회의 회복이며, 예배가 살아날 때 성도의 삶도 함께 새로워진다고 전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 2월 3일 저녁 집회에서는 로마서 4장 18–22절을 중심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조명했다. 한 목사는 아브라함이 인간적으로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던 믿음을 강조하며, “참된 믿음은 현실을 부정하는 낙관이 아니라, 현실을 넘어 말씀을 붙드는 결단”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교회와 성도들이 환경과 조건을 기준으로 신앙을 판단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하며, 말씀 중심의 믿음으로 다시 설 것을 촉구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시며, 그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이 성도를 흔들리지 않게 세운다고 강조했다. “한 번 더 두드리는” 기도의 인내 부흥회 마지막 날인 2월 4일 저녁 집회에서는 기도의 삶을 주제로 한 설교가 전해졌다. 한 목사는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 찾아오는 낙심과 포기의 유혹을 언급하며, “그럴 때일수록 한 번 더 두드리는 인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영적 승리는 위기의 순간에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쌓아온 기도의 훈련 속에서 이미 결정된다고 설명했다. 특히 새벽기도를 단순한 습관이나 의무가 아니라, 영적 전투를 준비하는 훈련의 장으로 바라볼 것을 권면했다. 재림의 소망을 붙든 성도는 이 땅의 삶을 가볍게 여기되, 기도와 말씀으로 단단히 준비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당부로 말씀을 맺었다. 나흘간 이어진 이번 신년연합부흥회는 재림의 소망을 중심으로 예배와 말씀, 기도의 회복을 차례로 짚으며, 새해를 살아갈 성도의 신앙 방향을 분명히 제시했다. 참석자들은 말씀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한 해를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준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손현보 목사, 석방 후 첫 주일예배 설교 전해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으로 약 5개월간 구속됐다가 석방된 세계로교회 손현보 목사가 지난 2월 1일 주일, 주일예배에서 말씀을 전했다. 이날 설교는 손 목사 석방 후 첫 주일예배로, 손 목사는 누가복음 18장 9-14절 말씀을 본문으로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 기도”라는 제목의 말씀을 선포했다. 손현보 목사는 본문을 읽은 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에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에게 충격을 주는 말씀들이 많다”며 “그러나 그 말씀들은 약한 자, 가난한 자, 평민들에게는 한 줄기의 빛과 같았다”고 말했다. 이어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를 설명하며 “이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를 들으시는가’, ‘누구를 의롭다 하시는가’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언급하며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기도였다”며 “하나님께 한 기도가 아니라 사람에게 보이려는 기도였다”고 말했다. 반면 세리에 대해서는 “세리는 성전 한가운데 서지 못하고 멀리 서서, 감히 눈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했다”고 본문을 그대로 짚었다. 손 목사는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내려갔다’고 하셨다”며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였다. 이것이 충격”이라고 말했다. 이어 “세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의롭다 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내려갔을까? 아마 몰랐을 것”이라며 “하나님은 의롭다 하셨지만, 세리는 여전히 ‘나는 죄인’이라는 마음으로 내려갔을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설교 중 손 목사는 구치소에서의 경험을 직접 언급했다. 그는 “지난 5개월 동안 구치소에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며 “세상 기준으로 보면 죄인들이지만, 그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부담이 없었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곳에서는 ‘너는 나쁜 놈이다’라고 정죄하는 말을 거의 듣지 못했다.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말이 더 많았다”고 전했다. 손 목사는 교회의 현실을 돌아보며 “교회는 본래 죄인으로 시작하는 공동체인데, 시간이 지나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모습이 나타난다”고 지적했다. 그는 “믿으면 믿을수록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는 고백으로 가는 것이 정상”이라며 “교회에 오래 다녔다는 이유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 남을 판단한다면, 그 자체가 이미 잘못된 신앙의 방향”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오늘 이 말씀의 핵심은 감옥에 있는 사람이 옳다는 것이 아니다”라며 “죄는 죄다.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낮아진 마음, 애통하는 마음으로 나아오는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강조했다. 설교 말미에서 손 목사는 “높아진 마음에는 은혜가 머물지 못하고, 낮아진 마음에는 은혜가 모인다”며 “교회는 약한 자를 멸시하는 곳이 아니라, 약한 자가 숨 쉴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모든 사람을 동일한 죄인으로 바라보고 긍휼히 여길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신다”고 덧붙였다. 손 목사는 끝으로 “ ‘하나님이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기도가 우리 모두의 평생 기도가 되기를 바란다”며 설교를 마무리했다. 한편, 이날 예배에는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과 김도읍 의원, 김형찬 부산강서구청장과 시도의원들이 참석했다.

남해군기독교연합회 신년부흥회

남해군기독교연합회는 2월 2일(월)부터 사흘간 2026년 신년부흥회를 열고, 말씀과 기도를 통해 새해 사명과 믿음의 방향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 신년부흥회에는 영락교회 김운성 목사, 상덕교회 강영롱 목사, 주안장로교회 주승중 목사, 소정교회 이근형 목사, 무학교회 윤동일 목사 총 5명의 강사가 초청돼, 집회마다 말씀을 전했다. 2월 3일(화) 저녁 집회에는 주승중 목사(주안장로교회)는 “나의 당한 일과 사명”(빌1:12-14)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주승중 목사는 설교에서 “신앙의 길을 바르게 걸어가려 할수록,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일과 고난을 만날 때가 있다”며, 그러한 상황 속에서 성도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바라봐야 하는지를 사도 바울의 고백을 통해 풀어냈다. 주 목사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힌 상황을 언급하며, “바울은 자신의 현실을 두고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의 진전이 되었다’고 고백했다”고 말했다. 이는 단순한 낙관이 아니라, 고난의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신앙 고백이라는 설명이다. 특히 바울이 사용한 ‘복음의 진전’이라는 표현을 군대의 공병대가 길을 내는 장면에 비유하며, “감옥이라는 막힌 환경이 오히려 복음의 대로가 되었고, 바울의 쇠사슬은 복음을 가두지 못했다”고 강조했다. 바울이 시위대 군인들과 함께 쇠사슬에 묶인 상태에서 로마 권력의 중심부에까지 복음을 전하게 된 과정은, 인간의 계산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여주는 사례라는 것이다. 주 목사는 또 “바울은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로마의 법정과 권력의 중심에서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다”며, “그 결과 복음은 시위대뿐 아니라 로마의 고관들과 가이사의 집 사람들에게까지 전해졌다”고 말했다. 이어 디모데후서의 말씀을 인용해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매이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주승중 목사는 성도들을 향해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의 이유를 당장 알지 못해도 괜찮다”며, “중요한 것은 나의 ‘당한 일’ 뒤에 숨겨진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신뢰하며 끝까지 믿음으로 서는 것”이라고 권면했다. 남해군기독교연합회는 이번 신년부흥회를 통해 지역 교회들이 함께 말씀 앞에 서서 새해 사명과 연합의 중요성을 다시금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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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군기연, 신년연합부흥성회 열어…

고성군기독교연합회(회장 배동수 목사, 이하 고성기연)는 1월 26일부터 28일(수)까지 3일간 고성제일교회에서 ‘2026 신년연합부흥성회’를 열었다. 마지막 수요일 저녁 집회는 연합예배로 드리며 새해를 살아갈 신앙의 태도를 다시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연합예배는 고성기연 회장 배동수 목사(구만교회)의 인도로 진행됐으며, 부회장 김성덕 장로(동산성결교회)가 대표기도를 맡았다. 성경은 협동총무 강태선 목사(행복한교회)가 요한계시록 22장 10-15절 말씀을 봉독했으며, 이어 고성교회 찬양대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렸다. 강사로 초청 받아 집회 기간 말씀을 전한 서임중 목사(포항중앙교회 원로)는 “인생은 지우개가 없습니다”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인생과 신앙의 책임성을 강하게 환기시켰다. 서 목사는 “인생은 잘못을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쓰는 공책이 아니다”라며, “회개를 통해 죄 사함은 받지만, 우리가 살아온 삶의 흔적과 선택의 결과는 하나님 앞에 분명히 기록으로 남는다”고 강조했다. 서임중 목사는 요한계시록 말씀을 바탕으로,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자세를 언급하며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우리의 말과 행동, 태도까지 모두 아신다. 그러므로 오늘을 아무렇게나 살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잘못 살았다고 해서 인생을 다시 지울 수는 없지만, 지금부터 어떻게 사느냐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며 남은 삶의 책임을 강조했다. 설교 중 서 목사는 성경 속 인물들의 삶을 예로 들며, 한 번의 선택이 평생의 흔적으로 남는다는 점을 짚었다. 그는 “가인의 이름에는 살인의 흔적이 남아 있고, 고라는 하나님을 대적한 반역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며, “성경은 인물을 미화하지 않고, 그대로 기록함으로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지우지 않으시고, 그대로 남겨 후대의 교훈으로 삼으신다”고 덧붙였다. 또한 서 목사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돌아보며,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곳이지, 사람을 죽이는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말했다. 그는 “말 한마디, 평가 하나가 누군가의 인생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될 수 있다”며, “우리는 서로의 허물을 들추는 공동체가 아니라, 회복으로 이끄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권면했다. 설교 말미에는 ‘잘 사는 인생’에 대해 언급하며, “잘 산다는 것은 성공하거나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살아내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어 “특히 죄의 유혹과 직분의 유혹을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며, “직분은 높아지는 자리가 아니라 더 낮아져 섬기라고 주신 하나님의 은혜”라고 강조했다. 서 목사는 “인생에는 지우개가 없기에 오늘의 선택이 더욱 중요하다”며, “새해를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기록을 남기는 성도들이 되길 바란다”고 권면했다. 이날 예배에서는 고성기연 회계 서정은 장로(고성제일교회)가 헌금기도를 드렸으며, 총무 허성녕 목사(월흥교회)가 광고를 전하고 전 회장 김종철 목사(고성제일교회)가 축도함으로 모든 순서를 마쳤다. 고성군기독교연합회는 이번 신년연합부흥성회를 통해 지역 교회들이 다시 한 번 연합하여 말씀과 기도로 새해를 출발할 것을 다짐했으며, 고성 지역 복음화와 교회의 공적 책임을 감당하는 사역을 이어갈 뜻을 모았다.

기성 경남지방 장로회 및 남전도회 정기총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 경남지방 장로회(회장 정진흥 장로, 이하 장로회)와 남전도회연합(회장 황건진 집사, 이하 남전도회)가 지난 1월 25일(주일) 오후 5시, 김해제일교회(김신일 담임목사)에서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회무에 앞서 공동 개회예배를 드리며 새해 사역의 방향과 신앙적 사명을 되새겼다. 이날 개회예배는 장로회 회장 정진흥 장로(김해제일교회)의 인도로 드려졌으며, 남전도회 회장 황건진 집사(창원제일교회)가 대표기도를 맡았다. 성경봉독은 남전도회 총무 여인동 집사(창원교회)가 예레미야 9장 23–24절 말씀을 봉독했다. 이날 말씀을 전한 김해제일교회 유승재 목사가 “이것으로 자랑할지니”라는 제목으로 전했다. 유승재 목사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부르심과 고백을 중심으로, “지혜나 용맹, 재물을 의지하며 자랑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을 유일한 자랑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장로회와 남전도회가 연합으로 모인 목적은 영향력을 드러내는 데 있지 않고,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교회와 지역을 섬기는 데 있다”고 권면했다. 설교 후 장로회 총무 박희양 장로(김해제일교회)가 광고를 전하고 유승재 목사가 축도함으로로 예배를 마무리 했다. 개회예배 후 진행된 정기총회에서는 장로회와 남전도회연합회가 각각 회무를 처리했으며, 임원 개선을 통해 새 임원진을 선출하고 2026년도 사역을 위한 조직을 정비했다. 이날 51차 정기총회를 가진 남전도회연합회는 임원 개선을 통해 안태환 장로(김해제일교회)를 신임 회장으로 선출했으며, 장로회 역시 김영재 장로(김해활천교회)를 신임 회장으로 선출하고 새 임원 체제를 갖춰 한 해 사역을 시작하게 됐다. 다음은 신임 임원 명단이다. ■ 경남지방 장로회 ▲ 회장 : 김영재 장로(김해활천) ▲ 부회장 : 채상우 장로(예수정), 박희양 장로(김해제일) ▲ 총무 : 최형규 장로(김해활천) ▲ 서기 : 안태환 장로(김해제일) ▲ 부서기 : 김영환 장로(밀양) ▲ 회계 : 정지영 장로(창원) ▲ 부회계 : 김부교 장로(창원제일) ▲ 간사 : 하민구 장로(밀양), 정명복 장로(창원제일), 이귀수 장로(시온중앙), 김판주 장로(진영), 서언 장로(장유) ▲ 감사: 오영식 장로(김해대성), 정진흥 장로(김해제일) ■ 경남지방 남전도회연합회 ▲ 회장 : 안태환 장로(김해제일) ▲ 부회장 : 김성권 장로(창원), 차정석 장로(장유바울), 여인동 집사(창원) ▲ 총무 : 이청원 집사(시온중앙) ▲ 서기 : 김영국 집사(창원제일) ▲ 부서기 : 이은광 집사(김해제일) ▲ 회계 : 김성훈 집사(김해제일) ▲ 부회계 : 손태영 집사(창원) ▲ 감사 : 박상번 집사(김해활천), 황건진 집사(창원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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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훈제(燻製) 고구마를 먹어 보았는가?

성경을 영안으로 자세히 보면 잠언 32:1(?)에 “훈제 고구마를 먹어 보지 못하고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다. 훈제(燻製)란 말은 한자로 “연기 훈(燻)” 자를 넣어 음식의 재료를 연기와 열에 노출시켜 수분을 제거하고 향을 입히며 보존성을 높이는 조리 방법을 말한다. 훈제의 기원은 언제부터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옛날 시골에 불을 때는 아궁이나 모닥불 또는 동굴 속에서 고기나 생선을 훈제하면 맛이 있고 오래 보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자연히 유행된 조리법이다. 요즘에는 고급 요리법으로 오리 훈제, 연어 훈제 등 다양하게 훈제 음식들이 소개되고 있다. 훈제하면 대부분 육류 훈제, 아니면 생선 훈제를 떠올린다. 그러나 필자는 어린 시절부터 훈제 고구마를 직접 만들어 먹었다. 그것도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에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궁금해 할 것이다. 지금은 문화가 발달해서 어린이들이 노는 문화가 고급화되고 수준이 높지만 옛날 50~60년대(그 이전에도 그렇게 놀았겠지만) 시골 아이들은 노는 곳이 뻔했다. 논, 밭, 들, 산, 바다... 특히 가을 고구마밭에서 생고구마를 캐서 날것으로 씹어 먹었다. 그렇게 먹고 나면 입술은 새까맣게 물들어 있고 고구마에서 나오는 진(sap, resin)은 옷에 다 묻고 정말 장난 아니었다. 동네 아이들이 개구쟁이처럼 놀면서 단순히 생고구마를 먹을 것이 아니라 색다른 고구마를 만들어 보자는 발상을 했었다. 방법은 빈 밭 공터에 땅을 파고 나뭇가지를 갖다가 불을 피우고 열기가 올라갈 때 그 위에 생소나무 가지를 덮으면 연기가 피어오른다. 소나무 가지 위에 떡갈잎을 펼치고 고구마를 올려놓고 연기 나는 상태에서 흙으로 덮어버리면 연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속에서 연기와 열기 속에 고구마는 익게 된다. 이것이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훈제 고구마이다. 말도 안 되는 것이라 반박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필자의 어린 시절 경험이요 팩트(fact)다. 훈제 고구마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목회를 하면서 가끔 훈제 고구마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훈제 고구마는 자신을 희생하여 아이들에게 간식거리가 되었다. 불과 연기를 통과한 고구마가 진한 향기를 내어 유익한 존재가 되듯이 우리 인생도 불과 연기를 통한 인내의 연단이 있어야 정금 같이 나오게 된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흙 속에 묻혀있는 고구마처럼 답답하고 질식할 것 같은 삶이지만 그 과정이 연기의 아름다운 향이 고구마에 배이듯 나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가 몸에 배이는 시간이고 신앙 인격이 다듬어지는 시간인 것이다. 훈제 고구마를 만들면서 또 깨달은 것이 있다. 불에 너무 오래 두면 타버린다는 것과 덮은 흙을 너무 일찍 제거하면 고구마가 익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빨리 먹고 싶은 욕심에 아이들이 너무 일찍 흙을 파헤치고 먹으려다 실패한 적이 많다. 인생에게 기다림의 시간이 꼭 필요한 이유는, 기다림은 낭비가 아니라 성숙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너무 조급해도 안 되며 너무 지체해도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늘 빠름에 익숙해 있다. 그래서 기다림은 손해처럼 느껴지고, 빠른 속도는 능력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빠름’이 답이 아니라 ‘바름’이 답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잘 익은 훈제 고구마의 삶이 되기를 바란다.

[정우승 목사] 이군불사(二君不仕)

신앙생활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저 주일에 예배에 참석하는 종교인 말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또한 십자가를 지고 좁을 길을 걷는다는 것은 엄청난 자기부인과 희생이 따른다. (마태복음6:24)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라고 말씀한다. 한 발은 교회에, 또 다른 한 발은 세상에 양다리를 걸쳐놓고 기회를 보면서 계산기를 두드리는 성도가 있다. 모세의 뒤를 이은 지도자 여호수아는 신앙의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결단을 촉구한 적이 있다. (여호수아24:15)에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당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라고 말씀한다. 이렇듯 신앙에 있어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옛날 표현으로 하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이군불사(二君不仕)’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 한국선비의 근본사상을 풀이하는데 충(忠)이란 말뜻의 풀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 글자를 뜯어보면 가운데 중(中)과 마음 심(心)의 합성어임을 알게 된다. 중(中)이란 한복판을 뜻하지만 아울러 가운데가 가득찬 상태, 가슴 속이 꽉 차 빈틈이 없는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허위가 없는 충실한 참 마음이 중심이요, 충이다. 이 빈틈없는 참마음은 단지 나라에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투사체가 달라짐에 따라 가치 또한 달라진다. 이를테면 의로운 일에 투사되었을 때는 절(節)이라 부르고, 부모에게 투사되었을 때는 효(孝)가 되며, 다른 사람에게 투사되었을 때는 인(仁)이 되고, 도덕적 규범에 투사되었을 때는 예(禮)가 된다. 옛 선비 중에 이군불사(二君不仕)의 귀감이 되는 한 선비가 있는데 바로 홍언충(洪彦忠, 1473-1508)이다. 많은 무고한 선비가 죽어갔던 갑자사화 때 그 화에 말려든 대제학 홍언충이란 선비가 있었다.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옥문 밖에 버려져 있었다. 그 옥문 앞을 때마침 김안로(金安老)가 지나갔다. 이 두 사람은 어릴 적 글 공부를 같이 한 막역한 사이다. 이 처참한 꼴을 본 김안로가 ‘참혹하다. 이게 웬일인가’, 이에 피범벅이 된 홍언충은 ‘홍문관의 물이 묻어 그렇네’ 라고 대답했다. 홍문관은 글 읽는 학교다. 곧 홍문관의 물이라면 학문에서 익힌 의리를 홍문관의 물로 비긴 것이다. 바꿔 말하면 홍문관에서 익힌 의리를 굽힐 수 없어 이 처절한 꼴을 당했으며 고문을 당하고 범벅이 된 피고 곧 홍문관의 물이란 뜻이다. 결국 홍언충은 진보 땅으로 귀양하게 되었다. 당시 연산군은 사람을 죽일 때 귀양을 보내 놓고 귀양가는 도중에 사약을 내려 죽이는 것이 상투적인 수법이다. 그러기에 홍언충은 금부도사가 오늘 내려오려나 내일 내려오려나 하면서 귀양길을 가고 있었다. 자기가 죽을 것을 알고 품속에 미리 묘비 문까지 지니고 있었다. ‘한평생 우활하고 옹졸함은 학문의 공이라. 서른 두 살에 세상을 마치니 명이 어찌 그다지 짧으며 뜻은 어지 그다지 긴고. 천추만세 뒤에 누기 이 들판을 지날는지 이곳을 가리키고 배회하며 슬퍼하는 사람이 있을지어다’ 라는 내용의 비문이다. 이 같은 비문을 지니고 문경새재를 넘어 대탄원에서 쉬고 있는데 기다리고 있던 사신행렬이 뒤따라 달려왔다. 사약을 들고 오는 금부도사인줄 알았더니 의외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반정했다는 소식과 새 조정에서 급히 돌아오라는 매우 기쁜 전갈이었다. 죽음의 길이 영광의 길로 돌변한 것이다. 한데 홍언충은 이 기쁜 소식을 듣고 마냥 구슬피 울었다. 새 임금을 위해서 우는 기쁜 울음이 아니라 옛 임금을 위해 우는 슬픈 울음이었다. 홍언충은 영광의 길을 등지고 귀양길을 택한다. 그리고 고향에 가서 지내며 거듭된 조정의 부르심을 거절하였다. 이 선비의 행동은 현대인에게는 쉽게 납득은커녕 이해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의를 위해 가혹한 고난을 당해가며 불의와 싸워 이겨놓고는 승자의 개선길을 등지고 패자의 길을 택하는 이 선비의 소행을 무엇으로 풀이할 수 있겠는가? 홍문관의 물을 피보다 진하다고 했다. 홍언충에게는 또 다른 대의, 바로 이군불사(二君不仕) 정신이 있었다. 홍언충은 낙향한 이후에도 연산군이 유배되어 있는 강화도를 향해 매일 절을 올렸다고 한다. 거듭되는 조정의 입사를 끝내 거절하고, 그를 죽이려 했던 연산군을 향해 절개를 지키다 죽어갔다. 오늘날 한국의 목회자에게 꼭 필요한 한 가지를 들라면 나는 조금도 주저함 없이 홍언충과 같은 이군불사(二君不仕) 정신이라고 말하겠다.

[이정희 목사] 연말, 연시 용어3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의 유래와 의미

1. 서언(序言) 새해가 되면 우리는 흔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말로 서로를 축복하면서 덕담을 나눈다. 이는 신정과 구정(설날)을 함께 의미 있는 날로 지내는 우리나라의 경우, 설날이 지난 정월대보름까지 이러한 인사를 나누는 데서 잘 나타난다. 그런데 이 인사말은 단순한 덕담을 넘어 오랜 역사와 나름의 의미를 담고 있다. 본 호에서는 이러한 한국적인 복의 개념과 더 나아가 세계 여러 나라의 인사말, 그리고 우리의 신앙적 관점은 어떠한지를 논하고자 한다. 2. 한국적인 복의 개념과 성경의 복 이 주제에 관해서는 오래전 기고에서 기술한 일이 있지만, 우리 민족은 고대로부터 복(福)에 대한 관심이 유별났다. 그중에서도 다섯 가지 복인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 등을 특별히 좋아했다. 이러한 복에 대한 기대 심리는 전통적인 거의 모든 종교에 영향을 주었으며, 우리의 기독교 신앙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복에 대한 성경 말씀을 찾아보면 총 32,569번이나 기록될 정도로 아주 많은 말씀이 있다. 이렇게 볼 때 이러한 신년의 덕담과 인사는 교인이든 아니든 아주 좋은 새해 인사라고 볼 수 있다. 3. 우리나라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란 말의 유래 복에 대한 개념과 기대는 신년이 되면 더욱 커지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로 표현된다. 그렇다면 이 말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 유래를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1)고려시대 : 이러한 새해 인사는 대략 고려시대부터로 추정하고 있다. 이때에는 새해가 되면 왕이 신하들에게 복을 내리는 의미에서 상을 내리는 행사가 있었고, 백성들도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말을 사용한 데서 시작되었다. 2) 조선 시대 : 고려시대보다 좀 더 널리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는 조선 시대의 유교적 예절이 새해에는 왕과 신하들의 군신 관계 속에서 새해 인사를 주고받는 것이 상례화되면서 더욱 일반 국민에게까지 중요한 의례적인 인사로 덕담을 나누게 되었기 때문이다. 3) 현대의 의미 : 이러한 새해 인사는 현대에 이르러 스마트폰 등의 다양한 기기의 발달과 현대적 문화의 현실 속에서 여러 형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전통적인 연하장을 비롯해 카카오톡 인사, 각종 이모티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새해 인사를 하고 있다. 4. 여러 나라의 새해 인사말 신년에 덕담을 나누는 인사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거의 비슷한 유형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에 각 나라의 새해 인사와 새해 풍습 및 행위를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다만 지면 관계상 몇 나라만 소개하고자 한다. 아울러 이하의 원문과 내용은 AI 자료에 의거했음을 먼저 밝혀둔다. 1) 중국: 춘절인 새해의 인사말은 ‘新年快乐’이며, 춘절은 중국의 가장 중요한 명절이다. 대청소로 집을 정리하며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교자나 만두, 어묵 등 특색 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또한 홍바오라 불리는 빨간 봉투에 돈을 넣어 아이들에게 주며 행운과 번영을 기원한다. 폭죽과 불꽃놀이로 악귀를 쫓고, 사자춤 등 새해 공연도 열린다. 2) 영국과 미국 등의 영어권 나라: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Happy New Year’로 서로 인사한다. 송구영신의 의미로 12월 31일 자정에 카운트다운 이벤트를 하며, 불꽃놀이 등의 거리 축제와 샴페인으로 새해를 맞이하고 새로운 결심을 한다. 3) 스페인: 영어권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송구영신 시간에 종을 울리며 포도 12알을 차례로 먹으면서 소원을 빌고 ‘¡Feliz Año Nuevo!’라는 새해 인사를 한다. 4) 인도: 새해 인사말은 ‘नया साल मुबारक हो (Naya Saal Mubarak Ho)’이다. 축하 방식은 지역과 종교(힌두교, 시크교 등)에 따라 새해 축하 방식이 조금씩 다르며 매우 다양하다. 남인도에서는 새해 첫날 집을 청소하고 코코넛이나 쌀과 같은 전통 음식을 나누며, 도시 지역에서는 서구식 새해 카운트다운 파티와 불꽃놀이 등 일반적인 행사를 하기도 한다. 5. 신앙적 의미와 결론 및 제언 이상에서 살펴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새해 인사에 대한 각 나라와 우리나라의 전통과 의미를 볼 때, 이는 우리 기독교적 의미에서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좋은 덕담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복이 새해에도 임하시기를 바라는 기도가 이 인사말 속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지나친 기복적 의미와 기대를 담아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서 이러한 우려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새해에 하나님의 복을 기원하는 이러한 덕담의 인사말은 얼마든지 사용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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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선 목사] 욥기 30:16-23

욥기 42장입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배웁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죄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기의 전체 내용은 신앙인들이 꼭 한번 확인하고 가야 될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둥과 같은 내용으로 성립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설교를 하기 전에 잠깐 말씀드릴 게 있고 집중하게 하겠습니다. 지금 교회 밖에서도, 또 교회 안에서조차 저에 대한 공격이 많아서 설명할 길도 없고, 무슨 대답을 하면 전부 악의적으로 반응이 오니까 손해를 교인들이 보더라고요. 교회가 다들 오기 싫어지고, 다른 교회로 가고 하는 일들이 생겨서 제가 이 짐을 지고 그만두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결심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제 이름으로 우리 교회까지 망신당하는 자리엔 가지 말게 하자 하는 게 결심이고, 또 하나의 부탁은 그러니까 오늘 마지막으로 하는 설교니까 처절하고 진지하게 집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자, 그럼 욥기의 결론을 봅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었는데 이제는 눈으로 봅니다.” 무슨 말일까요? 귀로 듣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의 차이를 아십니까? 귀로 들으려면 순서대로 들어야 되고, 보는 건 한꺼번에 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 속에서 우리가 신앙을 쌓아갈 때 시간 속에서 쌓아간다는 사실 때문에 어느 정도 단계에 이르면 다음 단계가 나타나서 이제껏 가졌던 신앙으로는 답이 되지 않는 일을 만나게 됩니다. 거기서 발전해야 되는데 다음 단계로 발전해야 되는데, 한국 교회는 교회사가 짧은 관계로 미처 그 다음 설명, 해설을 하는 일을 아직까지 잘 못 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제가 이 인물을 맡아서 여기까지 오늘 하게 돼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욥은 아시는 바와 같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당대의 최고의 의인입니다. 복을 받고 있고 사람들한테 존경을 받는 사람인데 하루아침에 느닷없이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자녀들이 죽고 본인은 병들어 눕게 됩니다. 그가 당한 불행에 대하여 본인도 이해할 수 없고 주변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자 먼 곳에서 친구들 셋이 찾아와서 그를 위로하려고 했지만 너무 실상이 처참해서 위로를 못 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근데 그 기다리는 모습에서 뭔지 욥이 화를 내기 시작합니다. 욥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히 이겁니다. “하나님, 제가 뭘 잘못했길래 이러십니까?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 말을 하는 게 된 동기는 그 옆에 와서 들어온 친구들의 눈빛이 편을 들어오는 게 아니라 “야, 너… 빨리 회개해라. 잘못한 거 회개하면 형통해진다” 그 말로 째려봤으니까, 이제 욥이 분통을 터뜨려서 화를 내고 “죽여 주십시오”까지 갑니다. 그 친구들이 “너 그건 말이 되냐? 하나님이 어찌 네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화를 내리시겠느냐? 너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 봐라.” 욥은 “난 잘못한 거 없다.” 그러자 “그 다음으로 말하는 것만 봐도 너는 교만한 거다.” 이렇게 되지요. 그러는 과정에서 7장에 집에 가서 보시면 “하나님, 내가 뭐길래 이렇게 나한테 집중하십니까? 하나님 더 큰 일 보시고 나는 버려 두십시오. 내가 죽으면 어떻고 내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덕이 되겠습니까? 내버려 둬 주십시오.” 이렇게까지 얘기를 해서, 제가 즐겨 사용했던 본문에 의하면 “어찌 나 같은 것을 침 삼킬 동안도 놓아두지 않으십니까?” 이게 제가 신학교 들어갔을 때 처지였습니다. 근데 하나님이 이제 앞으로 답을 주십니다. 그래서 그 세 친구가 돌아가면서 그를 궁박하고 도전하고 또 (회개를) 얻어내려고 하는데 도무지 말을 안 듣자 나중에 나가떨어지고 그 다음 타자로 엘리후가 등장합니다. 엘리후는 뭘 가지고 욥을 구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너에게 주인이시며 너는 그가 만든 한 작품에 불과한데 네가 어떻게 전능자한테 감히 누가 맞냐 따져보자 그런 말을 할 수 있냐, 말이 되는 소리냐”라고 권세와 지위의 차이로 욥을 항복시키려고 합니다. 그러자 38장에 하나님이 이렇게 등장하십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동이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이게 누구한테 호통을 치는 것 같습니까? 욥의 불평에 대해서 호통을 치는 것 같습니까? 욥을 공박하는 친구들에 대해서 호통을 치는 것 같습니까? 이것은 친구들에게 하는 호통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답을 내려고 하지 마라.” 그리고 욥에겐 뭐라고 얘기해요?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동이고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라.” 무슨 뜻이죠? 욥은 그의 목적이고 그의 첫 번째 대상이고, 하나님이 그에게 하나님이 되시고, 그가 하나님의 자녀요 복된 존재인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다른 말, 잘잘못으로, 규칙으로 그를 심판하고 권세로 그를 심판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쳐 들어오시는 것이 “폭풍 가운데”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욥에게 자신을, 혹은 욥의 지금 현실을 어떻게 납득시키느냐 하면 38장과 39장 두 장에 걸쳐서 창조 세계를 보이십니다. 창조 세계의 장엄함을 보라. 그 무궁무진한 존재들의 가치와 그 존재들의 영광을 보라. 그리고 그들의 존재에 있는 질서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보라. 이게 38장과 39장의 얘기입니다. 그리고 나서 40장 1절.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이르시되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내가 나와 싸우자 그러고 네가 옳고 내가 틀리다 그러는데, 할 말 있으면 해 봐라”라고 얘기하자 욥의 답이 신기합니다. “겁 주시면 저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한테 기회를 주셔야지 공간 협박으로 저를 짓눌러 버리시겠다고요?” 이렇게 답을 합니다. 신기하죠? 그래서 6절에 “그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이르시되” 다시 폭풍 가운데서 벼락같이, 38장에서 친구들의 말이 안 되는 증거를 쳐 보신 것처럼, 욥의 침묵으로 말미암는 반항과 항복하지 않는 고집을 내려면서 뭐라고 말을 하느냐 하면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동이고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할지니라.”라고 대화를 드십니다. 굉장하죠. 그러니까 욥에겐 겁을 주고 그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욥을 세우기 위해서 앞에서 친구들을 후려치신 하나님이 폭풍 가운데서 “네가 전능자와 다투겠단 말이냐? 너 그럴 수 있느냐?” 하니까, “맘대로 하세요. 저는 그렇게 항복 못 합니다”라고 하자, 그의 허리띠를 잡아 일으켜 세우면서 “너만 내 자식이야. 내가 말할 테니까 들어봐.” 이렇게 그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폭풍 가운데서 임하시는 하나님의 현전이요 임재요, 우리의 질문에 답하시는 주인이십니다. 10절부터 보시죠. “너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지니라. 너의 넘치는 노를 비우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모두 낮추되… 악인을 그들의 처소에 짓밟을지니라…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묘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 영광을 입어라. 존귀해져라. 그리고 도덕을 지켜라. 그리고 악당들을 다 심판해라.”라고 얘기하십니다. 우리 세상 살면서, 우리 역사 속에서 듣는 하나님의 질문이 바로 이겁니다. 우리는 언제나 현실에 불의가 많고 부패가 많고 거짓이 많아서 정의를 원합니다. 평등을 원합니다. 하나님이 이걸 약속하셨고, 우리도 우리 인생 속에서 이걸 만들고 싶어 해서 언제나 부패한 정권은 뒤집어집니다. 그때 뒤집는 세력이 언제나 내거는,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명분이 뭐냐 하면 “정의를 실현하자”입니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에서 보듯이 부패한 정권을 없애고 혁명이 일어나자 무엇부터 합니까? 악당들을 다 죽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영광을 얻고 우리가 도덕을 지킴으로써 받는 보상은, 악당을 죽이는 것 외에는 다른 보상이 없지 않느냐, 라고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무슨 얘기를 하느냐 하면 하마와 악어 얘기를 길게 하는데, 하마와 악어 얘기가 왜 길어지냐면 “너 하마를 길들여서 밭을 갈 수 있느냐? 너 악어를 길들여서 집에 반려…(반려를) 삼겠느냐?” 그렇게 묻습니다. “모든 것을 힘으로 평정하거나 답을 얻을 수 없느니라.”라고 얘기함으로써, 욥이 이제 항복하는 42장에 이릅니다.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창조 세계와 우리가 조작할 수 없는 힘의 실체들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을 보는 것 같이, 우리가 우리의 인생과 우리가 소원하는 것을 힘으로 만들어낼 재주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뭐라고 말하죠?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린 자가 누구니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나도 이해가 안 가서 그렇습니다. 내가 소원하는 것이 뭔지조차 정할 수가 없습니다. 밤낮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서만 헤어나게 해 주십시오. 이 문제만 해결해 주십시오.” 이게 우리 인생의 소원인데, 내가 얼마나 인간답고 존재 가치가 있는가는 상상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결론이 뭐냐면 “답을 얻었다”가 아니라 “물어보겠습니다. 가르쳐 주십시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죄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가 무슨 말이냐면, 내가 아는 건 나 하나에게도 답이 되지 못합니다. 나는 다 타버린 재와 같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나셨고 나를 하나님 믿게 하셨으니 내가 묻고 하나님 답해 주십시오. 그것이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결론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뭘 묻고 뭘 답을 얻었는지는 건너뛰고 7절로 갑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대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친구들은 하나님 대신에 규칙이었고, 하나님 대신 권력이었습니다. 욥은 끝까지 상대로 하나님을 모셨습니다. 여기가 다른 겁니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답을 찾고 있는 겁니다.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수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뭐죠? 답이 “용서”하랍니다. 일차적으로 네 분노를 풀려고 하지 말고 용서부터 배워라. 용서부터 배우라는 게 무슨 뜻이죠? 화해해라. 너와 네 친구들이 왜 싸우게 되었느냐?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로 싸우게 됐는데, 싸워서 등 돌리지 말고 제대로 알아서 화해해라.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하나님의 자기 증명은 이 욥기에서도, 집에 가서 보세요. “하나님께 내가 묻겠사오니 겁 주지 마시고 대답 좀 해 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이 대답을 안 하셔서, 23장에 가면 “내가 하나님을 찾고 찾으나 앞으로 가도 없고 오른쪽으로 가도 없고 뒤돌아서도 없더라.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것인가.” 이게 욥의 고난, 고통입니다. 친구들은 “빨리 회개하라.” 엘리후는 “빨리 무릎꿇어라.”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그게 아니라 “나를 알아라. 나를 알아라. 그리고 네가 나에게 누구인가 알아라.”입니다. 우리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 모든 질문의 시작은 뭐냐 하면, 우리 모두가 겪는 것 같이 인생을 살면서 당하는 말이 안 되는 고난 속에서 이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난 뭐야? 나라는 존재는 뭐야?” 예수를 믿으니까 그다음 질문이 나오죠.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왜 이렇게 하십니까? 어쩌란 말입니까?” 현실은 어떻죠? 그 둘을 이을 수가 없죠. 왜 이을 수가 없죠? 내 기대와 다르니까. 정성을 바쳐도, 모든 종교 행위를 해도 바라는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약 성경 내내 왜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겼지요? 자기가 원하는 걸 해 주는 신을 만들었지요. 하나님은 안 해 주시니까. 왜 안 하시죠? 하나님이 목적한 것이 우리의 운명이니까, 내가 해 달라는 것으로 타협하거나 떼울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자, 우리 다 아는 구절들이니까 신약의 설명들이 이 배경 속에서 어떻게 터지나 봅시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빌립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보여 주시면 족하겠나이다.” 왜 그런 질문이 나왔죠? 예수님이 죽은 자도 살리고 폭풍도 가라앉히고 문둥병도 고치고 소경의 눈도 뜨게 하셨는데, 로마를 뒤집지 않아요. 세상 권력이 되질 않아요. 자기에게 필요한 현실적 해답이 되시질 않아요. “아버지를 보여 주옵소서.” 답이 뭐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아버지가 십자가에 죽는 모습으로 우리 편을 들고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대상과 목적으로 만들겠다가 예수의 성육신입니다. 신이 인간이 되어 인간 보고 신성에 참여하라고 붙잡으러 온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 확신이 중요한 눈금이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어디까지 밀고 올라가야 되냐? 이런 정체론, 존재론, 그리고 현실—하나님이 나를 만들어 가는 현실에 대하여 분별과 지혜로 우리에게 열매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오심은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이렇게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에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제발 형통, 안심, 승부에서 이기는 것에 팔아먹지 말라고 말합니다. 잘 아시는 요한복음 3장 16절은 뭐였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믿으면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를 선포하고 있는 겁니다. “안 믿어도 됩니다. 안 믿고 못 배기게 하겠다.” 17절.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인하여 세상이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내가 믿지 않아도 된다”라고 왜 고함을 질러야 했느냐? 믿었으니까 “다다” 그러고 있지 말고 그러란 말이에요. 믿은 자의 변화와 새 사람과 새 생명이 되란 말이에요. 꼭 고함을 질러야 돼요. 누가복음 22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자리에서 누가 더 크냐?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때 누가 좌편에 앉고 누가 오른편에 앉을 것인가 싸웁니다. “하나님 나라는 섬기는 나라다. 세상은 다스리는 나라지만 하나님 나라는 섬기는 나라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에 함께한 자들인즉 하나님이 내게 그 나라를 맡기신 것처럼 내가 너희에게 하늘 나라를 맡기노라.” 예수님의 시험은 뭐였습니까? 십자가에서 보여줬죠. “네가 남은 살렸으면서 너는 왜 못 살리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내려와 보라.”를 겪으십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여기에 와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복음 17장에 있었던 이 중요한 말씀: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시옵고 사랑하신 것을 알게 하옵소서.” 이게 교회입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손가락질하는 일 맞지 마시고, 끌어안는 일로 여러분의 인생과 여러분 자신의 존재에 명예와 영광을 담으셔서 하나님 영광의 찬송이 되시기 바랍니다. ※ 위 설교문은 남포교회 주일예배 (26.02.01) 설교를 남포교회 유튜브를 통해 옮긴 것입니다.

[김성수 총장] 예배 공동체의 신비와 은혜

성도들은 주일이 되면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예배의 자리로 나아온다. 이 복된 자리로 나아오는 우리의 발걸음은 분명 가볍고 즐거운 걸음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예배당으로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이 언제나 경쾌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복잡한 내면을 안고 있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때도 많이 있다.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는 자들이 완전한 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 흔들리고, 사랑이 미약하며,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영적 감각이 둔해진 상태로 예배당의 문턱에 들어선다. 마음속에는 여전히 죄의 흔적이 요동치며, 영적 실패의 기억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영적으로 깊은 사람일수록 자신의 부패와 결함을 더 예민하게 감지하며 스스로를 정죄하는 고통 속에 빠져들기도 한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곧 ‘성도’라 불리지만 그 이름을 감당하기엔 자신이 너무도 부적합하다고 여길 때가 많이 있다. “성도”라고 불리지만, 본능적으로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성도’에 포함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배의 자리에 모인 이 무리는 바로 “성도의 교제”라는 사실이다. 이 모순은 신학적으로 실로 깊은 신비를 품고 있다. 사도 바울은 각 지역 교회를 향하여 서신을 쓸 때마다, 그들이 비록 수많은 문제와 결함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호칭한다. 고린도 교회처럼 분열과 음행, 영적 혼란이 만연한 교회조차도 여전히 하나님의 성도들로 불렸다. 에베소, 골로새, 그리고 데살로니가의 교인들이 만약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고 그들과 하나라면 사도는 어떻게 이들을 “거룩한 백성”이라고 부를 수 있었는가? 그 근거는 너무도 분명하다. 이는 곧 ‘성도됨’이 인간의 도덕적 완성이나 경건의 성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분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신학적 긴장을 목도하게 된다. 눈에 보이는 회중은 죄 많고 연약한 사람들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거룩한 무리요,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다. 이 긴장은 인간의 자기 인식과 하나님의 선언 사이의 충돌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자기 안의 죄악과 결핍을 바라보며 “나는 성도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너는 내 거룩한 백성”이라고 선언하신다. 이러한 긴장은 단지 심리적 불편함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이 드러나는 자리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격이 아닌,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가 회중을 성도로 세우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요,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예배는 완전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가 아니라, 불완전한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신비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대속의 죽음, 부활, 그리고 하늘 성소로의 승천은 회중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열어 주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며, 화목제물이시고, 교회의 머리이시다. 회중은 오직 이 한 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묶이며, 그분의 피로 정결케 되며, 그분을 통해 아버지께 인도함을 받는다. 이 신학적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예배의 본질을 다시 보게 만든다. 예배는 감정적 고양의 시간이 아니며, 단순한 종교 행위도 아니다. 예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거룩함을 받은 회중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나아가는 신비로운 은혜의 시간이다. 회중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와 예배가 이루어질 수 있는 근거는 단 하나,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이 신비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으며,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우리 눈앞에 드러나지 않지만, 매 예배 속에서 그는 여전히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끌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회중의 결함을 보며 낙심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중보를 바라보며 소망해야 한다. 진정한 회중은 도덕적 엘리트의 집합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모인 죄인들의 교제이며, 그 안에서 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의 거룩한 백성을 세우시고 영광을 받으신다. 예배는 회중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된 존재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다. 우리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성도로 부르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함께 모이게 하신다. 이 신비는 우리에게 참된 겸손과 동시에 무한한 은혜와 큰 용기를 준다. 그러기에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모든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 은혜를 따라, 믿음의 눈을 들어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안에서 진정한 ‘화해된 회중’으로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간다.

[신년 묵상] 최성은 목사 - 상생의 아름다움과 복(시133: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6년 새해를 맞아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역 위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새해를 시작하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큰 은혜요, 기적이며, 하나님의 기쁨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지난 한 해 수많은 어려움과 위험한 순간들을 지나 이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과정을 통과해 함께 예배드리는 이 시간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특별히 지난 한 해는 정치·경제·사회적으로 갈등과 불안이 가중된 시간이었고, 경북 산불과 경남 집중호우 등 여러 자연재해가 겹쳐 찾아온 해였습니다. 현장을 직접 보며 막막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함께 예배의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본문 시편 133편은 ‘성전에 오르는 노래’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이 노래는 시편 120편,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라는 고백으로 시작됩니다. 곧 성전에 오르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수많은 혼란과 환난을 이기고 예배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입니다. 시편 133편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터져 나오는 시인의 감격의 탄성입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이 감격과 감사가 오늘 우리에게도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지난 한 해의 환란을 지나 2026년을 새롭게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 찬양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시편 133편은 세 절에 불과한 짧은 시이지만, 하나님께서 연합하여 동거하는 교회 공동체에 주시는 복, 곧 상생의 복을 가장 아름답게 노래하는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의 공동체가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 연합의 공동체, 상생의 공동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형제 된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보시고 상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을 이처럼 아름답게 보시고 복을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연합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연합은 단순히 한 집안의 형제들이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 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그 출신 배경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본부인의 자녀도 있었고, 여종의 몸에서 난 자녀도 있었으며, 요셉 지파는 애굽 여인에게서 태어난 후손이었습니다. 분열하기에 너무나 쉬운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 곧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배하는 하나님은 성부·성자·성령, 한 분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연합은 그들이 예배하는 하나님을 닮은 연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교회를 세우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우리가 하나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고, 사도 바울 역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권면했습니다. 형제의 연합은 하나님께 선한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형제가 함께 동거하며 상생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의 본질입니다. 탐욕과 이기주의가 만연한 이 시대에, 하나님을 닮은 교회들이 연합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복음의 영광을 이 땅에 드러내실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연합한 공동체에 주시는 복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회복의 복입니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라는 말씀은 대제사장의 임직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대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용서와 회복을 선포하는 존재였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모습을 대제사장의 임직에 비유한 것은, 함께하는 곳에 회복의 능력이 임한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풍성한 생명의 복입니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물이 귀한 이스라엘 땅에서 헐몬산의 이슬은 온 땅을 적셔 생명과 열매를 맺게 하는 은혜였습니다. 시인은 형제가 함께하며 상생하는 모습을 이 헐몬의 이슬에 비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 되는 곳, 상생하는 공동체에 임하셔서 풍성한 생명의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초대교회가 언제 강한 교회로 세워졌습니까? 거대한 건물이나 체계적인 조직이 있어서가 아니라, 함께 모여 한마음으로 기도할 때였습니다. 한 마음으로 예배하고, 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상생으로 함께할 때 오늘도 성령 하나님께서 교회 위에 풍성한 생명의 능력을 부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설 수 없다.” 말씀을 맺습니다. 지난 경남 지역 집중호우 당시, 총회 긴급구조단이 산청의 한 피해 현장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물에 잠긴 비닐하우스와 진흙에 뒤덮인 작물을 보며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그 현장의 한 장로님께서 오히려 “괜찮습니다. 천국 소망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위로하러 갔던 우리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경험하고 돌아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지난 한 해의 모든 시련을 믿음으로 통과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새해를 맞아 형제 되어 함께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회복의 복과 풍성한 생명의 복을 더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2026년,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으로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보시는 교회, 상생으로 세상을 섬기는 성도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위 설교문은 1월 2일, 고신 지도자 초청 신년 인사회에서 최성은 목사의 설교를 옮긴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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