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5-24(화)

살림목회연구원, 창립예배 및 심포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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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내삼교회, 목사위임 및 임직 예배

김해내삼교회(도성은 목사)가 지난 5월 22일(주일) 오후 4시, 김해시 주촌면 김해내삼교회에서 도성은 목사 위임 및 장로·집사·권사 임직 예배를 드렸다. 위임국장을 맡은 강홍석 목사의 인도로 시작한 1부 예배는 시찰 서기 김지환 목사가 대표로 기도하고 경남김해노회장 윤은수 목사가 ‘좋은교회, 좋은성도’(수1:16-18)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이어진 2부 위임식은 강홍석 목사의 집례로 위임 받은 도성은 목사와 성도들에게 서약을 받고 위임기도 후 김해내삼교회의 위임목사 된 것을 공포하고 위임패 수여와 임정순 목사가 권면의 말을 전했다. 3부 임직식은 위임 목사로 강단에 선 도성은 목사가 임직하는 장로·집사·권사와 교인들에게 서약을 받고 안수 및 임직기도 후 김해내삼교회의 일꾼 된 것을 공포한 후 고신대학교 이신열 교수와 심재휘 목사가 권면과 축사를 각각 전했다. 4부 축하에서는 교회와 임직자가 예물을 교환하고 기념패를 임직자들에게 증정한 후 김해노회 장로회가 장로로 임직한 강광용, 주진일 장로에게 뱃지를 수여하고 노회장 윤은수 목사가 축도함으로 모든 순서를 마무리 했다. 다음은 위임 및 임직자 명단이다. ▲목사위임 : 도성은 ▲장로임직 : 강광용, 주진일 ▲집사임직 : 전영준 ▲권사임직 : 최경자, 김원주 설재규 기자

산창교회, 생명 나눔 바자회 개최

산창교회(조희완 목사)가 지난 5월 21일(토)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 창원시 마산회원구 산창교회 비전센터 주차장에서 ‘생명 나눔 바자회’를 개최했다. 산창교회는 매년 단기 선교 후원금을 마련하기 위해 전 성도들이 참여하여 가졌던 바자회가 코로나 사태가 위중함에 따라 최근까지 열지 못하고 있다가 이번에 재게할 수 있었다. 이날 바자회에는 산창교회 성도들이 옷 신발 가방 모자 책 뿐만 아니라 청국장과 밑반찬 등 여러 가지 물품들을 준비해 찾아오는 성도와 이웃주민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여 수익을 올렸고, 한켠에서는 부침개와 국수, 닭꼬치 구이 등 먹거리도 풍성하게 마련해 많은 성도와 이웃 주민이 바자회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조희완 목사(산창교회)는 “오늘 바자회에서 판매한 수익은 모두 여름 방학 단기선교를 떠날 다음세대에게 후원하는 선교비로 사용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많은 다음세대들이 직접 선교 지역에서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이 그들의 영성 성장과 세계 복음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한다”라고 전했다. 한편, 산창교회는 매년 다음세대들이 초단기 선교부터 장·단기 선교 등 해외 선교에 직접 참여하며 세계 선교 활동을 감당하고 있다. 설재규 기자

살림목회연구원, 창립예배 및 심포지엄

살림목회연구원(원장 김문훈 목사)이 지난 5월 19일(금), 부산시 포도원교회 드림센터에서 창립예배와 함께 “살리는 목회, 살아나는 교회”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을 가졌다. 1부 창립예배는 전남수 목사의 개회기도와 정다윗 목사의 대표기도로 시작해 살림목회연구원장 김문훈 목사(포도원교회)가 요한복음 6장 57절 말씀을 본문으로 말씀을 전했다. 김문훈 목사는 “예수님은 살리시고 풍성하게 하신다는 점에서 사탄 마귀와 구별된다”라며 “욕 먹지 않으려고 소극적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안타까운 한국교회 현실과 조용히 목회나 하지 살리긴 뭘 살리냐며 비아냥 거리는 사람들이 있어 안타깝다”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살림목회연구원을 통해 코로나 블루, 만성 무기역에 빠진 목회 생태계를 살릴 것”이라고 의지를 나타냈다. 설교 후 전남수 목사가 연구원 로고와 연구원 소개 후 위촉패를 증정하고 광고를 전한 후 전임 고신 총회장 김철봉 목사(사직동교회 원로)가 축사 후 축도 함으로 예배를 마쳤다. 이어진 2부 심포지엄에서는 주제강의 발제자로 나선 최병락 목사(강남중앙침례교회)가 ‘Life Giving Church’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최병락 목사는 미국 세미한교회 창립부터 성장과정에서 ‘W.O.R.L.D’사역과 성전 건축, 리더십 이양 등을 전하고 강남중앙침례교회에 청빙 온 이후 시작한 ‘W.O.R.L.D’사역을 설명하며 살리는 목회에 대해 전했다. 이후 시간에는 강동명 목사(김해중앙교회)가 ‘목회’, 채혁수 교수(영신대 기독교교육학 교수)가 ‘교육’, 채경락 목사(분당샘물교회)가 ‘설교’, 전남수 목사(미국 제자들교회)가 ‘회복’에 대한 주제로 특강 시간을 가진 후 김철봉 목사가 맺는 말씀과 함께 기도하고 모든 순서를 마무리 했다. 한편, 김문훈 목사는 “목회자들은 살리는 목자로서의 일들을 충성되이 감당해야 한다. 앞으로 주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연구원을 세워 나갈 것”이라고 전했다. 설재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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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교총, 제44회 정기총회 개최

부산교회총연합회(대표회장 김경헌 목사, 이하 부교총)이 지난 5월 20일(금), 부산시 고신교회(김경헌 목사)에서 ‘제44회 정기총회’를 개최했다. 공동회장 황재열 목사의 인도 시작한 1부 예배는 부기장총 대표회장 강치영 장로가 대표로 기도하고 기침 전국여선교회 증경회장 정영란 권사가 성경봉독(욥8:7)한 후 고신교회 중창단이 특송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증경회장 이재완 목사가 ‘심히 창대하심’이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설교 후 명예대표회장 김종후 목사가 축도함으로 예배를 마쳤다. 2부 사무처리에서는 회순에 따라 진행 됐으며, 신임 대표회장에는 김경헌 목사가 연임하는 것으로 만장일치로 결정됐다. 김경헌 목사는 인사를 통해 “부교총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는 신앙 고백으로 분열과 코로나 팬데믹을 극복하는 복음의 백신이 되길 소망한다”라고 전했다. 또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악과 불의와 이단과 무개념 사상과 속설을 폐하며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 꿇게 하는 그리스도 좋은 군사로 살기를 고백함으로 부교총이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예수님을 친히 뵈옵는 현장이 되어 부산의 모든 교회가 회복되는 출발이 되길 소망한다.”라고 전했다. 설재규 기자

경남성시화, 경남지도자초청 조찬기도회

사단법인 경남성시화운동본부가 주관하고 사단법인 경남기독교총연합회, 사단법인 CBMC경남연합회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제25회 경남지도자 초청 조찬기도회’가 지난 5월 13일(금) 오전 7시, 창원시 그랜드머큐어앰배서더 창원에서 있었다. 경남성시화 대표본부장 김종준 목사(홍대교회)의 인도로 시작한 1부 예배는 CBMC경남 수석부회장 박성환 장로(남산교회)가 대표로 기도하고 경남성시화 서기 서민석 목사(새소망교회)가 성경봉독(빌2:50한 후 임마누엘교회 우리엘중창단이 ‘주의 크신 사랑의 힘으로’라는 곡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렸다. 이날 명예회장 구동태 감독(합성교회 원로)이 ‘이 마음’이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하고 사무총장 김우태 목사(동창원영은교회)의 인도로 △ 새 정부의 성공과 공정한 지방선거를 위햐여 △국민 통합, 경제 회복, 평화 통일을 위하여 △경남의 도정, 시정, 군정을 위하여 △경남 2600여 교회의 부흥과 성시화를 위하여 합심하여 기도하고 명예회장 윤희구 목사(한빛교회 원로)가 축도함으로 모든 순서를 마쳤다. 이어진 2부에서는 상임회장 조우성 장로(마산제일교회)가 참석한 내빈 소개를 하고 회계 최동수 장로(생초교회)가 조찬기도 후 모든 순서를 마무리 했다. 한편, 경남기독교총연합회 주관의 ‘제26회 경남기도자 초청 기도회는’ 오는 7월 8일(금) 열릴 예정이며, CBMC경남연합회가 주최하는 CBMC경남포럼이 오는 6월 25일(토)에 열릴 예정이다. 김현주 국장

경남 교계, 차금법 제정 반대 집회

사단법인 경남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이경은 목사)와 사단법인 경남성시화운동본부, 바른가치수호경남도민연합(상임대표 원대연 목사)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반대 연합집회를 오는 5월 22일(주일) 오후 3시, 창원시 성산구 용지문화공원에서 가진다. 행사 주최 측은 “현재 국회에서 진보 성향의 정당과 의원들을 중심으로 포괄적 차별금지법(평등법) 제정을 시도하고, 법제사법위원회에서는 공청회 개최를 합의함에 따라 언론에서도 드라마, 뉴스, 예능 등의 대중매체를 통하여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여론을 띄우고 있습니다.”라고 전했다. 이에 “차별금지법은 창조질서를 파괴하여 동성애를 조장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 교회를 해체시키고, 표현과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고 국민 대다수를 역 차별하는 악법입니다. 지금은 경남의 모든 교회가 모여서 회개하며 주님의 긍휼과 권능을 구할 때입니다.”라며 행사 취지를 전했다. 그러면서 “경남의 모든 교회 목사님들, 성도님들은 오후(저녁)예배 대신 가정, 교회, 나라를 살리는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 연합집회에 동참하여 주시기를 간청하고 간청합니다.”라며 연합 집회 행사에 함께 해줄 것을 당부했다. 이날 행사는 오후 3시 용지문화공원에서 순복음진주초대교회 찬양단의 찬양과 경남기총 대표회장 이경은 목사의 기도회 인도로 시작해 강사로 초청한 법무법인 아이앤에스 대표 변호사 조영길 장로가 차금법과 관련한 강의 진행 후 창원시청 광장 방향으로 도로 행진을 이어갈 예정이다. 한편, 바른가치수호경남도민연합 상임대표 원대연 목사는 개인 SNS를 통해 해당 연합 집회를 홍보하며 “제정되고 후회하지 맙시다. 1만 명 이상 모입시다”라며 참여를 독려했다. 설재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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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교회를 끊다

# 교회를 끊다. 앞집, 방 한 칸에 혼자 사는 아저씨. 나는 그 아저씨를 ‘농협 아저씨’라고 불렀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 아저씨가 농협에 출근하고 있었기 때문. 시골 살이, 재미있는 게 별로 없었던 내게 자주 놀러오라는 아저씨 말에 민폐인줄도 모르고 거의 매일 문을 두드렸다. 거기에는 맛있는 빵도 있고 뭔가 분위기 있는 음악이 흐르는 라디오가 있었다. 우리 집과 다르게 연탄 따위는 아끼지 않는 훈훈함이 있었고 이불 위에서 뒹구는 여유는 어린 내게도 충분히 쉼이 되었다. 분위기 최고다. “재철아, 교회 가보지 않을래?” 함께 교회 다녀보지 않겠냐는 제안.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인데 두렵기 보다는 뭔가 모를 설렘에 냉큼 엄마에게 물어본 후 허락을 받았다. 그렇게 나는 주일학교 예배를 참석하게 되었다. 교회는 농협 아저씨 방보다 더 좋았다. 친절했던 농협 아저씨 같은 사람들이 무지하게 많았다. 화장품 향 짙었던 선생님. (알고 보니 그 선생님은 화장품 방문판매 일을 하시는 분이었다.) 뭔가 분위기 있는 양복 입은 부장 선생님. 앞에서 멋지게 노래 부르는 선생님까지. 커다란 종이에 그려진 악보를 보며 큰 소리로 따라 부르던 노래도 재미났다. 교회에서 보고 들은 것을 집에 와서 재잘거리자 엄마는 100원을 주시며 예배에는 헌금이 필요하다는 말씀과 함께 남들 다 하는데 가만히 있지 말고 꼭 헌금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교회에 다녔더니 100원이 생겼다. 그것도 매주. 매 주 100원 들고 향하는 교회. 중간에 잠시 오락실 들러 50원은 오락 한 판하고, 남은 50원은 헌금하고. (엄마 죄송해요. 사실 하나님보다 엄마에게 더 미안하다.) 마룻바닥에서 나는 것인지, 방석에서 나는 것인지 모를 그 냄새도 참 좋았다. “흰 구름 뭉게뭉게 피는 하늘에!” 힘차게 한 곡 부르고 나면 간식도 먹고 몇 명씩 모여 성경을 공부했다. 성경 말씀을 듣고 공부하는 시간이 내게는 제법 묵직하게 다가왔다. 부모님 따라 교회 나오는 친구들을 보면 설교든, 공부시간이든 늘 장난스러웠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린 것들... “아, 믿음이 이렇게 자라는 것인가?” 시간이 흘러... 교회 앞마당에 들어서는 내 발걸음은 당당했고 능숙하게 신발장에 신을 넣고 방석을 깔고 앉아 기도를 한다. 기도 내용은 별 거 없다. “하나님, 저 왔어요.” 선생님이 그렇게 하면 된다고 하셨다. 뭔가 대단한 아이들이나 하는 것으로 보였던 헌금 위원 순번에 들어가게 되었다. 성경공부 시간에 선생님과 나누는 이야기도 많아졌다. 그렇게 교회 생활도 익숙해지고 있었다. 교회 다니며 맞는 첫 성탄절, 우리 주일학교는 분주하게 연극을 준비했다. “마구간에 오신 예수님” 이야기를 친구들과 함께 연극으로 꾸며야 했다. 각 자에게 배역이 주어지는 시간. 별 거 없는 아기 예수님 역할 (이 역은 진짜 그냥 누워만 있으면 된다.), 그냥 뒤에 탈을 쓰고 서 있으면 되는 동물들, 동방박사, 목자들, 그리고 요셉과 마리아. 누가 봐도 주인공은 요셉과 마리아다. 최근 교회 인싸로 등극한 나는 배역에 욕심이 생겼다. 요셉까지는 아니라도 박사 역할 정도는 주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동물 3” 내게 주어진 역할이다. 얼굴도 나오지 않는다. 대사도 없다. 그냥 탈을 쓰고 잘 서 있으면 된단다. 쓰린 속과 다르게 최대한 웃으며 첫 연습에 참여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일정을 소화했다. 나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니깐. 그리고 성탄 행사가 잘 끝나고 나는 교회를 끊었다. 더 이상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많은 친구들과 선생님의 연락에도 더 이상 교회에 가지 않았다. “아, 믿음이 이렇게 별거 없구나.” epilogue 고향집 방문할 때면 조용히 그 교회를 찾습니다. 지금은 현대식으로 바뀐 예배당에 들어가 잠시 기도하고, 주변을 괜히 살피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추억 한 자락 있을까 싶은 마음일까요. 그러다가 고향교회 담임목사님을 만나 초등학교 시절 1년 출석했던 주일학교 학생이라고, 지금은 목회를 하고 있다며 어색한 인사를 합니다. 그 목사님은 제가 교회를 다닐 당시 첫 부임하신 아주 젊은 목사님이셨는데 지금은 은퇴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궁금해서 이름도 모르는 농협 아저씨를 아시는지 목사님께 여쭈었습니다. 어디 계신지는 모르지만 지금 어느 시골에서 목회를 하시고 계시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보고 싶습니다. 그 아저씨가. 꼭 감사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9

I. 서언(序言) 언젠가 모 교단의 노회장이 정기노회 개회예배 설교 시에‘명문노회가 되는 길’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어떤 신문에서 이를 기사화 하면서‘명품노회 되기 위한 노력 다짐’이란 제목을 달았다. 같은 내용을 말하면서 왜 다른 용어로 표기했을까? 또 어떤 대선 후보를 지지하는 글에‘명품을 통해 명인으로 인정받고, 명품은 장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에 답하는 그 대선후보는‘명품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함께하겠다.’는 말을 했다. 여기에서의 ‘명품 대한민국’이란 말은 옳은 용어인가? 또한 어떤 도시에서는 발전하자는 표어를 내걸면서 ‘명품 00 도시를 만들자’고 했고, 또 어떤 도시는‘명품 도시’가 아닌, ‘명문 00 도시’라고 했다. 창원시의 경우도 ‘명품 창원시’라고 했다. 이러한 표현들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이름 있는 목회자는 자신의 위임식 때 감사인사를 하는 자리에서‘본 교회와 교인은 명품이지만 저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겸손한 모습의 말로서 좋아 보이지만, 명품이란 말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게 느껴진다. 이에 본 호에서는 이 두 용어의 차이점을 논하여 보고자 한다. II. 명품(名品)과 명문(名門)의 차이점 두 용어를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명품’이란 단어이다. 한자의 뜻으로는 이름 名(명)과 물건 혹은 품위 品(품)자 이다. 사전적인 뜻은‘뛰어나거나 이름난 물건이나 작품’등을 말한다. 즉, 명품은 주로 사람을 대상으로 사용되는 말이 아니라 사물 등의 뛰어난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용어인 것이다. 두 번째는‘명문’이란 단어이다. 한자의 뜻을 보면, 이름 명(名), 집의 두 문을 의미하는 문 문(門)자 이다. 사전적인 뜻은 ‘이름 있는 문벌(門閥), 문벌이 있는 집안, 명가(名家)’를 의미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명문은 사물이 아닌, 사람의 모임으로 이루어진 가정이나 가문, 모임, 단체 등의 뛰어남을 말할 때 사용되어지는 말인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평소 자주 사용하는 명문과 명품의 구별은 분명하다. 하지만, 실제로 사용되어지는 경우들을 보면 이 두 용어의 차이를 큰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다. 앞에서 예를 든 경우가 다 그러하다. 심지어 대선후보 진영에서나 각 도시들에서도, 또 교계의 중진들까지도 이를 명확하게 잘 구분하지 못하고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뿐 아니라 이와 비슷한 의미의 용어들도 많이 있다. 명성이 있는 가문을 뜻하는 명가(名家), 명문에 속한 집안을 뜻하는 명문가(名文家), 정치를 잘하는 이름 있는 관원을 뜻하는 명관(名官), 문화를 높이고 정치를 잘하는 군주를 뜻하는 명군(名君), 이름난 선비를 말하는 명사(名士), 문벌이 좋은 집안을 뜻하는 명벌(名閥) 등 비슷하거나 뜻을 같이하는 여러 용어들이 있다. III . 결 어(結語)와 제언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명품과 명문의 경우처럼 왜 사람들은 단어의 뜻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면서도 이런 용어들을 자주 사용하는 것일까? 란 의문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언어문화 사대주의 사상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한문을 선호하고 국어를 경시하는 풍조는 훈민정음을 만든 세종대왕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한글 창제에 있어서 당시 집현전 학자였든 ‘최만리’, ‘정창손’등은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물론 나름대로의 시대적인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문 선호 사상은 조선시대 5백 년 동안 뿐 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그 잔재는 계속 남아 있다. 그렇다고 한자어를 사용하지 말자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그 이유는 한자어를 알지 못하고는 우리의 일상용어를 바로 분석하고 알기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두 용어처럼 애매모호한 말이나 뜻도 알지 못하면서 사용하는 용어들은 순수한 우리말이나 알기 쉬운 용어로 사용하면 좋지 않을까 라는 제언을 해본다. 예를 들면, 위의 두 용어 대신 ‘좋은 가문’, ‘좋은 노회’, ‘좋은 도시’, ‘좋은 대한민국’등이나 ‘이름 있는’, ‘아름다운’등의 표현을 쓰면 어떠할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 일컬어지는 현대에서는 알기 쉽게, 듣기 좋게, 보기 좋게 쓰는 말이 더 아름답고 좋은 말이기 때문이다.

[최호숙 목사] 영적 피톤치드(Phytoncide)로 회복하라

우리 인생은 육적으로 영적으로 연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육신이 병들고 나약해지면 어떤 통로를 통해서든지 치유 받고 건강하게 되어 행복한 삶을 누리려고 한다. 치유 방법 중에 “피톤치드(Phytoncide) 치유법”이 있다. 피톤치드는 합성어인데 식물을 뜻하는 ‘피톤(phyton), 과 살해, 죽이다를 뜻하는 ‘치드(cide)’를 합하여 만든 단어이다. 편백 나무를 비롯한 여러 나무가 자신을 위협하는 세균들과 해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 내는 천연물질 성분이 숲속의 향을 만들어 내는데 그 향이 피톤치드인 것이다. 사람들은 피톤치드 치료를 통해 건강한 삶을 회복하기 위해 우거진 숲을 찾아 휴양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육을 위한 피톤치드 요법이 있듯이 영적인 삶을 회복하기 위한 치료법도 있어야 한다. ‘회복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포카디스테미(ἀποκαθίστημι)’이다. ‘아포카디스테미’는 두 개의 단어가 결합 된 것인데, ‘아포(ἀπό)’는 ‘~ 로부터’ 떨어지게 하다.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이며, 카디스테미(καθίστημι)는 임명하다, 되게 하다, 원래 상태로 돌리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회복은 이전의 악한 상태를 떠나 원래 상태로 되돌아오는 것을 회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경 역사를 볼 때 위대한 지도자들도 연약한 모습을 지닌 회복의 대상이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은 나이 많아 늙었고,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받았을 때 달변이 아닌 자신의 어눌함과 애굽과 바로에 대한 ‘트라우마(trauma)’로 하나님의 소명을 거듭 부정했던(출 4:10-17) 사람이었고, 다윗은 간음했을 뿐 아니라 온갖 가정 문제를 갖고 있었으며, 육체의 가시(고후 12:7)라는 질병을 포함한 신체적 연약함(갈 4:14), 그리고 능하지 못한 언변에 대한 타인의 지적(고후 10:10)을 스스로도 인정해야 했던(고후 11:6) 사도 바울, 즉흥적이고 성격이 급한 불같았던 베드로 등등... 이런 약점이 있으면 당연히 열등감으로 연결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대하게 이끈 능력자들이었다. 왜냐하면 약하고 부족한 이들 안에서 역사하시는(고전 고후 13:3) 하나님은 그 약함을 강함으로 선용(고후 12:9)하실 뿐 아니라 우리 안의 손상되고(broken) 손실된(lost) 부분까지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회복의 주체는 우리 주님이시다. 주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회복도 기대할 수 없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숲에서 주님의 향기를 맛보며 살아가면 회복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회복을 위한 기도를 하였다.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난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시 39:13) 이 기도를 응답해 주셨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날까지 왕의 직분을 견고하게 감당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에게 회복을 주시는 이유는 먼저 회복된 우리가 주위 사람들의 회복 과정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예배 및 집회 금지 요청에 따라 한국 교회는 공적인 예배 중단의 위기까지 겪어야 했으며, 온라인 예배부터 인터넷 성찬식까지 다양한 신학적, 목회적 의견의 충돌로 목회자와 성도들에게는 더욱 어려운 시간이었다. 우리는 이제 “어두움을 저주하기보다는 한 줄기 빛을 비추라”라는 말처럼, 오늘날 교회에 필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우려 섞인 비판이 아니라 다시 한 번 회복할 수 있는 소망의 빛을 붙드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치료하시는 여호와라파 하나님의 의로운 오른손의 역사가 가정과 섬기는 교회 위에 충만하게 넘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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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영유아가 나라의 미래다!

몇 년 전 미래 사회의 모습을 그린 영국의 한 소설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내용인 즉 현대사회의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로 인해서 인형과 유모차 제조 산업이 각광받는 미래 산업으로 각광받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초롱초롱한 눈빛의 아이들이 없는 텅 빈 학교 교실과 해맑은 웃음을 머금고 뛰노는 순박하기 그지없는 아이들이 없는 학교 운동장과 동네 놀이터는 조용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느껴집니다. 결혼한 젊은 부부가 유모차에 인형을 싣고 산책하는 모습을 그린 장면은 읽는 이로 하여금 소름을 끼치게까지 만듭니다. 애기를 출산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기를 갖고 양육하고 싶어 하는 모성애마저 제거할 수는 없으니 애기를 대체할 수 있는 인형산업과 유모차 산업이 각광을 받게 된다는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이 공상적인 이야기가 우리 사회에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동네 곳곳에 산아제한을 독려하는 표어들이 많이 붙어 있었습니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덮어 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이 당시에는 우리 나라의 합계출산율(가임 여성 1명이 평생 낳는 자녀수)이 6.0명이었습니다. 한 여성이 평균 6명씩 아기를 낳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끔찍한 출산제한 구호가 등장할 만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구호가 등장한지 반세기만에 우리 사회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과 가장 빠른 인구 고령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한국개발연구원의 한 보고서에 의하면 우리 사회의 합계출산율은 1970년 4.53에서 1980년 초 인구 대체율인 2.1 이하로 떨어진 후, 계속된 출산 감소로 2004년 1.15명, 2017년 1.05명, 2018년에는 0.98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합계출산율이 0명대인 국가는 우리 나라가 유일하다고 합니다. 출산율 하락은 곧 다시 학령인구 감소로 이어지게 됩니다. 학생이 없어 문을 닫는 학교가 많아지게 되고 생산연령인구 또한 감소하게 되는 암울한 전망이 현실이 되고 가고 있습니다. 학령인구가 줄어들면서 앞으로 2년 뒤에는 전국 대학 70곳 이상이 폐교 위기에 처할 것으로 교육부는 전망하고 있습니다. 의과대학과 간호대학 등 취업이 비교적 잘 되는 학과를 제외하고는 많은 학과들이 정원을 채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는 또한 건강보험 및 연금 등 과중한 노인부양 문제를 야기 시킬 뿐만 아니라, 경제성장을 뒷받침할 젊은 노동인력의 부족 등 심각한 사회 문제를 야기 시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는 다양한 방법으로 출산을 장려할 수 있는 정책을 개발해 내어야 합니다. 소득수준이나 노동시장 참여 등의 조건 없이 5세 이하의 자녀가 있는 가정에 일정액의 양육보조금을 제공하거나 출산친화적 세제 도입, 출산 및 육아 휴직 등의 방법은 출산과 노동공급을 동시에 장려하는 방안이라는 보고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자녀가 있는 경우 자녀수에 따라 과세표준을 낮춰 주는 소득공제나 세액을 감면해 주는 출산 친화적 세제는 출산 장려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적극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세제의 경우 피부양자 공제 및 교육비 공제 등으로 자녀수에 따른 공제 혜택을 주고 있으나 그 혜택은 매우 한정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이제는 미국의 자녀 및 피부양자 세액공제와 근로소득장려세제, 영국의 자녀세액공제와 근로소득장려세제 등 출산친화적 세제와 같은 다양한 방법을 도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정책 등은 정책 비교를 위한 모의실험에서도 모두 긍정적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회 문제들은 정치권이 관심을 가지고 해결해 내야 할 본질적인 문제들입니다. 그런데도 곧 물러나야 할 현직 대통령과 앞으로 5년간 국사를 맡아야 할 당선인의 힘 겨루기 모습은 국민들을 답답하게 만들고 때로는 속이 터지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대통령 집무실을 옮겨야 할 피치못할 이유가 있으면 국민들에게 좀 소상히 밝혀서 왜곡되거나 과장된,또는 가짜 뉴스가 떠 돌지 않도록해야 합니다. 봄 벗 꽃이 피기 전에 청와대를 국민들에게 돌려주지 않아도 되니까 좀 더 본질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대통령 부인 의상이 178벌이니 구두가 몇 컬레라는 허접스러운 뉴스도 정말 우리를 짜증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대통령 부인이면 더 검소한 생활 모습을 보이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등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온갖 소리들이 다 들립니다. “평생에 옷 몇 벌 갖고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마르코스 부인 이멜다하고 꼭 같네…”, “운동화한 개 사면 2년은 신는데…”, “육영수 여사가 한복 입으면 우아하기라도 한데…”, “대통령이 왜 사채는 빌려 쓰느냐?”. 정치인들의 언행도 너무 저질스럽습니다. 청와대 이전을 반대하면서 청와대 지붕을 붉은 색으로 물들여 페이스 북에 올리는 모습도 참 치졸하고, 여당과 야당 대변인들의 담화에도 합리성과 고상함이 없습니다. 이제는 정치인들은 물론 우리 모두가 좀 품격이 있는 대화를 나누고 우리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함께 고민하며 해결책을 모색하는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혼란한 국제정세를 보면서 공의와 샬롬의 가치를 구현하는 정책을 구상하고 젊은 이들이 일자리를 마련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회, 오염된 하수를 식수로 사용해야 하는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생각하고 가난과 질병에 허덕이는 지구촌의 어려운 나라 백성들을 가슴에 품을 줄 아는 선진사회의 가치관을 구현해 나가야 합니다. 출산장려의 보다 근본적인 정책도 결국은 영유아에 대한 국민 모두의 가치관 변화를 모색하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아동학대와 낙태, 어린이 유괴와 영유아 살해와 같은 생명경시 풍조를 흉악한 범죄로 단정하고 추방해야 합니다. 모든 종교는 가정을 중요시하고 자식을 귀하게 여기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자식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고 했으며,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에 있는 화살과 같아서 이것이 그의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며 성문에서 원수와 담판할 때에도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CTS(기독교TV)가 벌이는 “영유아가 나라의 미래다!”는 출산장려운동은 찬사를 보낼만합니다. 이제 한 달 안에 178벌의 옷을 정리해야 하는 대통령 부인과, 청와대 집무실 이전을 위해 예비비를 받아내야 하는 대통령 당선인 모두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젊은이들이 직장을 갖고 결혼을 하여 애기를 가지고 단란한 가정을 꾸밀 수 있는 소망 있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 지 진지하게 한번 구상해 볼 수 있기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김성수 총장] 공의가 하수 같이…

현대사회는 과학과 과학 기술 등 여러 면에서 굉장한 승리를 쟁취한 사회이면서도 동시에 전례 없는 부정과 부패, 불공정, 불의, 고통 그리고 비극에 깊이 빠져있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방대한 선택의 범위를 구가하면서 자국의 시민들은 거대한 자유를 누리게 하는 바로 그 정부가 전 세계적으로 수십억에 달하는 사람들을 영속적인 가난의 상태에 머물도록 만들고,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정치테러와 고문이 그들의 항존적 환경이 되도록 지원하거나 그러한 불의를 자행하는 부정의한 현실이 바로 현대사회의 한 심각한 비극이기도 합니다. 우크라이나의 비극을 보면서 우리 모두는 함께 분노하고 가슴 아파하며 하나님의 공의가 하수 같이 흐르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하늘의 평강(샬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공의가 없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평강의 삶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기쁨과 떨림과 환희가 있는 샬롬은 공의로운 상태 하에서만 피어날 수 있습니다. 평화를 깨뜨리는 많은 조건들과 상황들은 공의도 마찬가지로 깨뜨려 버립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공의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상호간의 의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회는 공의를 추구하는 사회입니다. 이와 같은 사회는 언제나 샬롬의 사회를 지향합니다. 그러나 공의를 추구하지 않는 사회는 샬롬의 성취를 가로막습니다. 예를 들어, 방직 공장 안에 어린아이들을 가두고, 자연 자원들을 함부로 낭비함으로 후손들로부터 그것을 착취하며, 자국 영토의 확장을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국가는 불의한 국가이며, 이와 같은 사회와 국가는 공의를 파괴하며 필연적으로 샬롬의 성취를 가로막는 흑암의 세력입니다. 그렇다면 공의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공의라는 단어를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냉담하고 원칙을 고수하는 비인간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합니다. 공의와 관련하여 연상되는 것은 재판 과정, 법적 절차, 감옥 등과 같은 단어들입니다. 그러나 공의는 본질상 권리와 관계가 있습니다. 공의와 권리는 사실상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자신의 권리를 향유할 수 있을 때 그 사회는 공의로운 사회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권리라는 단어 역시 공의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다소 냉담하고 비인간적인 어떤 것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권리와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연상하는 것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 천부적 인권, 유엔 회원국의 권리, 권리 헌장 등과 같이 다소 추상적이며 고양된 권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권리의 의미를 공의와 관련하여 아주 다른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개인이 어떤 것에 대해 권리를 가진다라고 할 때 그것은 윤리적으로 합법적인 권리, 그것을 실제로 향유함에 대한 주장, 그리고 그 어떤 것을 누림에 있어서 직면할 수 있는 위협으로부터 보장받을 것에 대한 주장을 의미합니다. 권리는 다른 이에 대해 윤리적으로 합법적인 권리입니다. 권리는 다른 이에 대해 의무와 책임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모든 책임이 권리와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모든 권리는 책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권리는 또한 그것을 실제로 누림에 대한 주장입니다.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된다고 하더라도 그 권리를 실제로 향유하지 못하면 그 법은 공허한 것입니다. 그리고 권리는 그 어떤 것을 누릴 때에 일반적이거나 심각한, 그러나 고쳐질 수 있는 위협으로부터의 사회적보장을 주장합니다. 위협에 대해서 보장하라는 주장을 권리로 보는 것은 권리가 사회에서 약자와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상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권리를 우리는 자기 방어의 권리, 자유의 권리, 발언과 참여의 권리, 그리고 안전과 생계의 권리라는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안전과 생계의 권리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안전과 생계권은 그것이 없다면 모든 다른 권리가 의미가 없어지며, 기본적인 삶을 보장하는 권리라는 의미에서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대부분의 다른 권리들보다 더 근본적입니다. 언론의 자유는 그것이 얻어지는 만큼 삶에 유익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이도 많은 다른 권리를 즐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안전과 생계권보다는 임의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전과 가난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관용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안전을 위협받는 자들과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은 살롬의 성취를 위한 필수적인 조건과 같은 것입니다. 부유한 자가 기아에 있는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을 알고 도울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는 육체적으로 그 어려운 자를 공격하는 것만큼 그 주린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인식한다는 것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겠지만, 이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공의에 관한 책입니다. 구약의 모세 오경과 선지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공의를 요구하시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서 공의에 대해 말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사람들은 고아와 과부들, 나그네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한 사회에 공의가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실제적 원칙은 공의가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미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공의가 요구하는 것은 고아와 과부들, 나그네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과 같이 한 사회의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그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지고 자신의 공정한 몫을 갖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해하는 공의의 본질은 현대 서구사회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공의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우리는 공의와 권리의 문제를 인간 존재의 아주 섬세한 조직과 같이 가장 근원적인 것에서부터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무참하게 짓밟히고 있는 작금의 국내외 정세를 보면서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희생 제물이나 감언이설의 의식이 아니라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흐르게 하라”(암 5:24)는 것임을 갈파했던 아모스 선지자의 호소를 다시금 가슴에 새길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김성수 총장] 경향성 학습의 의미와 중요성

미국 그랜드 래피즈(Grand Rapids) 주 미시간(Michigan)에 소재하고 있는 칼빈대학교(Calvin University)의 이념적 기초를 놓은 학자로 존중받고 있는 니콜라스 월터스톨프(Nicholas Wolterstorff) 박사는 1970년대에 경향성 학습(Tendency Learning)을 강하게 주창한바 있습니다. ‘경향성’이란 나타나 있는 어떤 모습이라기 보다는 숨어 있는 속성입니다. 이것은 평소에는 표면적으로 잘 나타나지 않지만 어떤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나타나는 특성과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설탕을 물에 넣으면 설탕이 녹고, 유리에 압력이나 충격을 가하면 유리가 깨어지며, 자석에 쇠붙이를 가까이 하면 자석은 그 쇠붙이를 끌어 당깁니다. 이때 ‘녹는 성질’, ‘깨어지는 성질’, ‘끌어당기는 성질’ 등이 바로 경향성이라는 속성입니다. 경향성 학습이란 ‘학습이나 훈련 과정의 결과로 학습자편의 이와 같은 어떤 경향성을 증진시키거나 감소시키는 학습’을 의미합니다. 월터스톨프가 경향성 학습을 주창한 이유는 교육의 목적은 단순히 관점이나 사고를 형성해 주는 것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형성해 주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외형적 표식을 떠벌리거나 자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 시장으로 재직 당시 부산지역 교계 지도자 초청만찬회에 강사로 초청된 자리에서 “커피 한 잔 놓고 오랫동안 기도하는 분들 중에 신뢰할 수 있는 분은 주변에서 별로 보지 못했다”고 말하여 폭소를 자아낸 적이 있습니다. 평소 바쁜 일정 속에 시장실에 찾아 온 교계 인사 가운데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길게 기도할 때는 정말 답답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냥 흘러듣기에는 무엇인가 뼈가 있는 말처럼 들립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유별스럽게 표시를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을 실천해야 하는 어떤 상황이 갖추어졌을 때 그리스도인 됨의 숨은 속성을 어김없이 나타내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준 사마리아인에 대한 주님의 비유는 바로 우리의 신앙이 행동하는 경향성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중요하게 제기되는 문제는 인간의 행동 경향성을 어떻게 책임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월터스톨프에 의하면 여기에는 훈육, 모델링, 그리고 이유 제공이라는 세 가지 중요한 전략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의 행동 방식에 영향을 주기를 원한다면, 긍정적인 행동에는 보상을 주고 부정적인 행동에는 불유쾌한 결과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 분명히 도움이 됩니다. 또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모범적인 행동은 학습자의 경향성을 형성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는 이유와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방법 역시 경향성 형성에 도움을 줍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문제들 중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전체 인구의 25%를 차지하고 교회 수도 날마다 늘어가고 있는데 우리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교회의 영향력은 점점 더 감소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미국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넓고 깊은 바닷물을 짜게 하는 것은 0.3%의 소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를 표방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나 행사가 없어도 신앙을 실천해야만 하는 어떤 상황에 부딪쳤을 때 자신의 신앙을 삶 속에서 어김없이 구현할 수 있는 행동 경향성을 나타내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야 부패해가는 사회와 문화를 변혁시킬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차세대를 향해서 이와 같은 행동 경향성을 형성시켜줄 수 있는 효율적인 학습 전략을 구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성세대는 다음 세대를 훈육할 수 있는 권위를 상실해 버렸으며, 말과 행동에서 모범을 보여줄 수 있는 모델링으로서의 역할도 상실했고, 또 왜 그런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거나 행동하지 않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는 능력도 상실해 버렸습니다. 지금은 언약의 자녀들을 위한 신앙교육에 관심을 갖는 부모와 교사된 우리들이 경향성 학습의 의미와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현대교회는 특별히 세상을 향해서 잘못된 행동을 꾸짖고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선지자적 용기와 권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삶의 현장 속에서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모델링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우리의 신앙은 세상과 절연되거나 세상도피적인 삶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그리고 세상을 통해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우크라이나 백성들이 악마와도 같은 한 사람 독재자로 인해 어린아이들을 포함해서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금 받은 고귀한 생명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모델링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어야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유별나게 떠벌리지 않아도 자신들의 신앙을 구현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치게 되면 그리스도인 됨의 정체성을 어김없이 드러낼 수 있는 신앙의 용사들로 양육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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