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11-30(수)

진해기연, 성탄트리 점등예배 드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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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동광교회, 장로·집사·권사 임직식

예장(고신) 마산동광교회(강영구 목사)가 지난 11월 20일(주일) 오후 2시, 장로·장립집사·권사 임직식을 가졌다. 당회장 강영구 목사(마산동광교회)의 집례로 드려진 1부 예배는 경남마산노회 부노회장 배광석 장로(서부교회)가 대표로 기도하고 서기 정상률 목사(마산삼일교회)가 성경봉독(왕상7:21-22)한 후 총회 학교법인 고려학원 이사장 김종철 목사(고성제일교회)가 ‘교회의 기둥’이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김종철 목사는 말씀에서 교회에 헌신해도 자기의 공을 드러낸다면 오히려 교회에 해가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며 “이 성전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이 교회를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시며 주인이신분도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명심해야 교회에 복이 된다.”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교회는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어주실 때 부흥을 허락 하신다.”라며 “아무리 사람이 노력해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으시면 교회가 교회다워 질 수 없다.”고 당부했다. 말씀 후 강영구 목사의 인도로 통성으로 기도하고 임직식을 시작했다. 임직식에서는 강영구 목사가 임직하는 장로·장립집사·권사와 성도들에게 서약을 받고 장로·장립집사에게 안수 후 마산동광교회 직분자 된 것을 공포하고, 권사로 임직하는 자들도 강영구 목사가 기도하고 공포함으로 마산동광교회 직분자가 되었다. 이어진 축하와 감사의 순서에서는 이영진 목사(유로교회)가 임직자들에게 “교회의 직분자는 헌신해야 할 때 가장 먼저 나서는 사람”이라며 “죽도록 충성하라는 사실을 마음에 꼭 새기시길 바란다.”라고 권면하고 오승균 목사(마산성산교회)가 교우들에게 ‘해야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을 구분해 설명하며 권면의 말을 전했다.또 경남마산노회 부서기 전성진 목사(산호교회)가 축사를 통해 진심으로 축하의 말과 인사를 전했다. 이어, 임직자 대표로 천갑성 장로가 답사를 통해 인사와 함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노회장 최경진 목사(칠원교회)가 축도함으로 예배를 마쳤다. 다음은 임직자 명단이다. ▲장로 장립 : 천갑성, 서영태, 김삼복, 박성수 ▲집사 장립 : 김종민, 이병하, 송영은, 박광희, 송성곤, 김민석, 김민수, 성호철 ▲권사 임직 : 김영희, 김기난, 강정이, 김금호, 안명옥

포도원교회, 유니온비전미션에 3억 전달

부산 포도원교회(김문훈 목사)가 지난 11월 20일(주일), 포도원교회 주일 저녁 예배시간에 예배당 3000개 건축과 학교 300개 세우기 운동인 유니온비전미션(김성관 목사)에 건축헌금 3억을 전달했다. 포도원교회는 유니온비전미션을 통해 50개 교회를 세웠으며, 지난 21년 10월에는 유니온비전미션 동아프리카 1000개 교회당·학교 건축기념 감사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20일 주일 저녁 예배 때 유니온비전미션 김성관 목사 “크신 하나님으로 인하여 큰 비전을 가지고 큰 사역을 감당하하고 있다”라며 아프리카 우간다 현지에서 사역하고 있는 김진현 선교사의 선교 보고를 영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이번 건축헌금으로 3억을 전달한 포도원교회는 해외 선교인 바울선교회, 국내 선교인 베드로선교회, 기관·단체 선교인 오네시모선교회, 방송·문화 선교인 요한선교회, 그리고 아프리카선교를 해고 있다. 아프리카 튀니지에 선교사 부부를 파송하여서 양계장 사역과 특수 선교를 하고 있으며, 시에라리온에는 의료선교사 부부를 파송하여 수 해 동안 사역하였고, 지금은 싱글선교사를 파송하여 고아원사역을 중심으로 교회건축, 어린이 사역을 하고 있다. 또 우간다에는 목회자들을 모아서 성경 집중 강좌를 하고 그 중에서 열심이 특심인 사역자들에게 교회 건축을 해주고, 그들 중에서 부흥에 열매가 있는 목회자들을 선발해서 내년 9월에는 국내로 초청 연수를 할 계획이다. 이번 3억 원의 헌금도 신학대학과 사범대학의 필요성으로 학교 부지를 구입하는데 헌금하게 되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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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기연, 성탄트리 점등예배 드려

진해기독교연합회(회장 전성환 목사, 이하 진해기연)가 지난 11월 27일(주일) 오후 5시, 창원시 진해구 중원로터리 광장에서 ‘2022 성탄트리 점등 예배’를 드렸다. 점등식에 앞서 드린 점등예배는 회장 전성환 목사(진해반석교회)의 사회로 시작해 부회장 박명도 장로(재건자은교회)가 대표로 기도하고 전성환 목사가 성경봉독(마1:18-23)한 후 진해침례교회 믿음의형제들 찬양팀이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진해기연 수석부회장 서성기 목사(명동교회)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서성기 목사는 말씀에서 “콘서트 티켓을 산 사람은 어렵게 구한 티켓으로 매우 기쁘다. 공연까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도 기쁘고 설레인다.”라며 “표만 사도 이렇게 기쁜데 공연 하는 날은 얼마나 더 기쁘겠습니까. 우리가 기쁨과 기대로 성탄절을 기다리는 것은 예수님이 오실 것을 믿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성탄절이 우리를 위한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고 나와 함께 하는 복음이 되시길 바랍니다.”라고 전했다. 설교 후 진해기연이 준비한 사랑의 쌀 100포를 진해구 김동환 구청장을 통해 기탁하고 직전회장 강형열 목사(재건자은교회)가 축도함으로 예배를 마쳤다. 이어진 2부 점등식은 총무 배영록 목사(광림교회)의 사회로 시작해 참석한 내빈을 소개하고 진해기연 임원과 내빈이 함께 점등하며 중원로터리 광장의 성탄 트리를 밝혔다.

창원기연, 2022년 성탄트리 점등

창원기독교연합회(회장 최정규 목사, 이하 창원기연)가 지난 11월 27일(주일) 오후 4시 30분, 창원시 시청 앞 광장에서 ‘2022 성탄트리 점등 감사예배 및 점등식’을 가졌다. 점등에 앞서 드린 1부 점등 감사예배는 창원기연 회장 최정규 목사(창원제일감리교회)의 인도로 시작해 부회장 박두양 장로(창원세광교회)가 대표로 기도하고 서기 이대현 목사(순복음창원교회)가 성경봉독(눅2:8-14)한 후 가음정교회 맑은물소리 어린이찬양대(지휘 김순매 권사)와 시온·샤론 연합찬양대(지휘 정태성 집사)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하나님께 찬양으로 영광돌렸다. 이어, 직전회장 제인호 목사(가음정교회)가 ‘성탄이 갖는 두 가지 의미’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하고 창원특례시기독교연합회장 이창교 목사(상남교회)가 축도함으로 예배를 마쳤다. 예배 후 총무 이광훈 목사(창원중앙교회)가 광고를 전하고 성탄트리 점등 등에 협력한 경남은행에 감사패를 수여하고 창원특례시 조명래 제2부시장과 김영선 국회의원이 축하메시지를 전했다. 2부 점등식은 수석부회장 신진수 목사(한빛교회)의 사회로 상남교회 예사랑색소폰앙상블과 창원중앙교회 다드림워쉽찬양단이 아름다운 악기연주와 워쉽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점등식을 축하하고 마산기독교연합회 회장 김종준 목사(홍대교회)가 점등감사 기도 후 크리스마스 트리를 점등했다. 한편, 올 해 설치된 성탄 트리는 15.5미터의 높이에 원지름 40미터로 창원특례시 예산과 경남은행 및 창원시 성산구·의창구 지역 교회의 후원으로 설치 됐으며, 창원특례시청 앞 광장에서 오는 2023년 1월 3일까지 아름다운 빛을 밝히며 예수 탄생을 축하하며 그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될 예정이다.

경남도민, ‘2022 교육과정 개정안 폐기 촉구 나서

지난 11월 25일(금) 오전 10시, 바른가치수호경남도민연합과 경남기독교총연합회, 경남성시화운동본부 등 도내 120여 개 시민 단체와 학부모연대들이 경상남도 교육청 앞 도로에서 ‘2022개정 교육 과정(교과서) 시안 및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 폐기 촉구 경남대회’를 가졌다. 바른가시수호경남도민연합 박성환 장로의 사회로 시작한 1부 예배는 사랑샘교회 윤수은 목사가 대표로 기도하고 경남성시화 대표본부장 김종준 목사가 창세기 1장 27-28절을 본문으로 말씀을 전했다. 김종준 목사는 미성년 자녀를 둔 성전환자도 성별 변경을 허용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에 대한 뉴스를 언급하며 “성경은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시되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고 말한다.”라며 “사단의 앞잡이는 사람이 그 성을 결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치려고 한다.”라고 격노했다. 그러면서 “교회는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곳이다. 이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고 불법 서적으로 만들고자하는 것들이 사단의 뜻이다.”고 전했다. 말씀 후 주님의교회 이성완 목사의 인도로 합심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고 소금과빛교회 박석환 목사와 임마누엘교회 이종승 목사가 격려사를 통해 대회에 참여한 성도와 시민들을 격려하고 경남기총 대표회장 이경은 목사가 축도함으로 예배를 마쳤다. 이어진 2부에서는 바른가치수호연합 상임대표 원대연 목사와 길원평 한동대 석좌교수, 박은희 전국학부모연합 대표, 박민정 대한민국교원조합 교사, 백정혜 경남교과서연구소 대표 등이 단상에 올라 “헌법적 가치와 교육기본법에 명시된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고 정파적 편향성과 특정 이념을 추종하는 내용으로 가득한 2022 개정 교육과정(교과서) 시안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개정 교육과정에는 ▲성 해방 ▲성 혁명사상 ▲문화 마르크시즘 ▲페미니즘 ▲젠더리즘 등을 반영하고 있으며 일부 단어를 교묘히 바꿔 기독교와 바른 교육 신념을 가진 사람들의 눈을 속이려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헌법에 명시된 양성평등의 가치를 무시하고 과학적이고 생물학적 성 구분을 사회문화적 성과 수행으로서의 성인 젠더로 대체한다”며 “동성애 미화 방송과 영화 등 매체 영향으로 성 정체성에 혼란이 온 아이들에게 제3의 성, 다양한 성 정체성에 대해 탐색해보게 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또 문화 다양성 교육이란 이름 아래 불교 6쪽, 기독교 2쪽, 이슬람 18쪽의 불균등 쪽수 배정과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라 미화하는 내용도 담겨 있는 것에 대해 비판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파괴하려는 교육부의 어떠한 시도에도 저항할 것”이라며 “현 개정안 시안을 완전히 폐기하고 교과서 집필진을 새롭게 구성해 다시 집필하라”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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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애착

북극의 에스키모 인들에게는 늑대를 사냥하는 독특한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시퍼런 칼날에 짐승의 붉은 피를 묻혀 꽁꽁 얼게 합니다. 그리고 늑대가 서식하는 곳으로 가서 칼날은 밖으로 나오게 한 채 땅바닥에 파묻습니다. 그러면 이내 피 냄새를 맡은 늑대들이 몰려옵니다. 그리고는 피 묻은 칼날을 정신없이 핥기 시작합니다. 북극은 기온이 매우 낮기 때문에 혓바닥이 둔해져서 자기가 핥고 있는 것이 예리한 칼날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합니다. 그렇게 칼을 핥다가 시간이 지나면 늑대의 혀에 상처가 생겨서 피가 흐릅니다. 그런데도 늑대는 그 피가 자기 혀에서 나오는 피인 것을 모르고 정신없이 그것을 핥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늑대는 피를 너무 흘려서 탈진 상태에 빠져서 죽고 맙니다. 칼날에 묻은 약간의 피를 욕심내어서 그것을 향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다가 스스로의 목숨을 삼키게 되는 것입니다. 한 젊은이가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서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수도를 하며 세상에 대한 애착을 아무리 떨쳐버리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이 그를 사로잡고서 놓아주지를 않았습니다. 그 문제로 고심하던 그는 수도원 원장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원장님, 제가 속세를 떠나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기 위해서 수도원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떨쳐버리려고 해도 세상이 나를 놓아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수도원 원장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그를 데리고 수도원 뒤뜰로 갔습니다. 그곳에는 아름드리나무가 여러 그루 서 있었습니다. 원장은 그 가운데 한 나무 앞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를 자기의 양팔로 꽉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원장은 자기의 몸을 몇 번 뒤척뒤척하더니 그 젊은이를 향해서 말했습니다. “여보게, 이 나무가 갑자기 나를 붙들고서는 놓아주지를 않네. 나를 좀 도와주게. 이 나무에서 나를 좀 떼어주게나.” 젊은이는 원장의 그 말에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하였습니다. 그러자 수도원 원장은 더 다급한 소리로 외쳤습니다. “아니, 무엇을 하고 있나? 이 나무가 나를 붙들고서 놓아주지 않는데 왜 그냥 보고만 있는 것인가?” 계속된 원장의 요청에 그는 마지못해서 수도원 원장을 그 나무에서 떼어 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무에서 원장을 떼어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원장은 더 안간힘을 쓰면서 나무를 놓지 않으려고 오히려 더 꽉 끌어안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원장에게 말했습니다. “원장님, 그 손을 놓으세요! 지금 나무가 원장님을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고 원장님이 나무를 붙들고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듣고 수도원 원장은 그제야 손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자네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이제는 깨닫겠는가? 세상이 자네를 붙들고 있는 것이 아니고 실상은 자네가 세상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네. 자네 마음속의 세상을 향한 애착이 자네를 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임을 왜 모르는가?” 독자 여러분, 세상은 내가 원하지 않는데 나를 붙들지 않습니다. 내가 세상의 것들에 대한 애착으로 인해서 세상을 붙들고 있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내 안의 욕심으로 인해서 아직도 놓지 못하고 동행하고 있는 세상의 것이 무엇입니까? 이제 그만 그것을 놓으십시오. 예수님은 성경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쉽게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의 것을 동시에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것에 대한 애착을 끊지 못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지금 내게 우상이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습니다. 이제 끈질기게 이어온 세상에 대한 애착을 단호히 끊고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보시지 않겠습니까?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조희완 목사] 사모할 대상 (시19:7-14)

어쩌다가 신세가 처량하게 된 사람을 가리켜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라고 말을 합니다. “낙동강 오리알”이란 말에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담겨있습니다. 6.25전쟁 당시 우리나라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에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각오로 결사항전의 결의를 다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 1개 대대규모의 인민군이 필사적으로 우리 아군을 공격하기 위해서 낙동강 도하 작전을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치열한 총격전이 계속되고 있을 때 유엔군 전투기에서 네이팜탄을 퍼부어서 적진지를 불바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때 우리 아군 중에 한 대대장이 전투기에서 떨어지는 포탄을 바라보면서 너무 신이 나서 “야! 낙동강에 오리 알이 떨어진다.”고 소리를 쳤습니다. 물론 낙동강을 건너려고 필사의 노력을 하던 인민군들도 다 몰사를 당했습니다. 그 때 낙동강을 건너려다가 죽음을 당한 인민군들을 조롱하는 말로 “낙동강 오리알 신세”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무모한 도전을 하거나,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사랑하거나, 믿어서는 안 될 대상을 믿다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는 헛되고 무가치한 우상을 섬기다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일생 다가도록 사랑하고 섬겨도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분이 있으니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헛된 우상과는 달리 살아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로 후회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이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가 신앙생활 가운데 특별히 사모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시19:9-10)(벧전2:2) 둘째는, 성전과 예배를 사모해야 합니다.(시84:1-4) 셋째는, 영원한 천국을 사모해야 합니다.(히11:16) 사모할 것을 더욱 사모하므로 멋진 인생 사시기 바랍니다.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21

I. 서언(序言) 세월이 유수같이 흐른다고 했던가? 벌써 한 해의 마지막 달력을 넘겨야 되는 날이 가까웠고, 필자가 섬기는 교회에선 이번 주간에 신년 달력을 배포했다. 이런 즈음에 문득 달력이란 용어는 어떤 역사적인 유래와 배경 하에서 시작되었고, B.C와 A.D같은 그리스도를 중심한 연호는 어떻게 제정되었는지, 또한 매달의 이름과 한 주간의 요일별 이름은 어디에서 유래되었는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졌다. 필자로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이에 대한 연구를 시도하면서 자료를 수집해 오기도 했다. 이에 이번 호부터는 몇 차례로 나누어 이에 대한 유래와 용어들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한 가지 밝혀둘 것은 이를 시도하는 이유는 이런 달과 연호와 요일의 명칭이 기독교식이란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세계적으로 거의 공통으로 사용하는 용어들이기에 고칠 수는 없으나 바로 알고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해서 이를 논하고자 하는 것이다. II. 달력과 기독교적 연호 사용의 유래 1. 달력의 유래 : 달력(calendar)이라는 말은 라틴어로‘흥미있는 기록’ 또는 ‘회계장부’라는 뜻의 ‘칼렌다리움(calendarium)’과 고대 로마에서 매월 초하루의 날짜를 ‘calend’라고 한데서 출발했다고 한다. 이는 월 초를 매우 중요한 기점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연(年) 월(月) 일(日)은 각각 독립된 주기이지만, 이런 각 주기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은 역서(曆書)를 만들었고, 이를 주로 일상생활이나 종교의식을 치를 때 사용하였다. 또한 이러한 역서(曆書)는 달의 규칙적인 변화를 중심으로 해서 만든 태음력(太陰曆)이었기 때문에 이를 달력(月曆)이라고 불렀다. 또 하나의 역서는 고대 이집트 문명에서 태양의 규칙적인 움직임을 토대로 한 태양력(太陽曆)이 사용되었다. 그 이후 이집트를 정복한 쥴리아스 시저(Caius Julius Caesar)가 BC 45년에 그곳에서 사용하는 간편한 양력역법을 보고 그대로 사용하였는데 이를 율리우스력(Julius Calendar)이라 한다. 이는 태양의 공전주기에 맞춘 것이었는데, 16세기까지 천년 이상 사용되었다. 하지만 여러 면에서 오차가 생겨졌고, 이를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새롭게 개정해 달력을 만들었고, 이를 그레고리우스력(Gregorius Calender)이라 했다. 이는 지금까지 우리 나라를 포함해서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단군고기(檀君古記)에 의하면 B.C 4000년 경 환웅이 달력을 만들었고, 단군 4년(B.C 2096년)에 60갑자를 활용하여 책력을 제작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지금은 앞서 밝힌 대로 거의 모든 세계와 함께 그레고리우스력을 사용하고 있다. 2. 기독교적 연호(A.D) 사용의 유래 : ‘A.D’란 연호의 처음 사용은 주후 6세기경의 동로마 황제인‘저스틴 1세’때부터 였다. 그는 당시의 수도사였던 ‘디오니시우스’로 하여금 세계에서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연호를 연구하게 했다. 이에 그는 깊은 명상 중에 예수님 탄생의 해를 기점으로, 그 이전은 before Christ의 약자인 ‘B.C’로, 이후는 Anno Domine의 약자인 ‘A.D’로 정했다. 또한 이를 황제에게 보고했고, 황제는 이를 선포하여 오늘까지 거의 세계 모든 나라들이 사용하는 연호로 확정되었다. 우리나라의 연호의 사용은 옛날부터 단기(檀紀)와 60갑자(六十甲子)인 육갑연호를 사용해 왔다. 또한 일본 통치하에서는 명치(明治)라는 연호를 사용했고, 해방 후에는 서양의 영향을 받아 서력기원(西曆紀元)이란 뜻의 서기(西紀)의 연호를 사용함으로서 자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인 B.C와 A.D를 인정하는 겪이 되고 있다. III. 결 어 이상에서 논한 대로 위의 용어들과 유래는 주전(B.C)와 주후(A.D)를 제외하고는 반 기독교적인 용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기독교적인 용어도 아니다. 다음호부터 논할 12개월의 월별 이름과 한 주간 7일의 요일 별 용어들은 더욱 더 그러하다. 하지만 서론에서 논한 대로 이런 용어들은 세계적으로 거의 공통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고칠 수도 없고, 또한 심각한 반기독교적인 용어는 아니기 때문에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바로 알고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해서 이를 계속 논해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B.C와 A.D같은 신앙적인 연호가 세계 공용어로 된 것은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이다. 부디 이런 연호를 널리 사용함으로서 기독교적 언어문화를 창출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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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당신의 마음을 감사로 채우십시오

몇 주 전에 플로리다(Florida)주에서 열린 미국 학위인증기구인 TRACS(Transnational Association of Christian Colleges and Schools) 연례 모임에 참석했을 때 칼빈대학교 커뮤니케이션 학과 교수인 쿠엔틴 슐츠(Quentin Schultz) 박사의 “섬김의 가르침”(Servant Teaching)이라는 책을 소개받고 읽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교사와 목회자는 물론 우리 모두가 이 내용들을 깊이 묵상하고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섬기는 사역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하기에 우리의 일상의 사역을 성찰해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앞으로 몇 회에 걸쳐서 슐츠 박사의 글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이번 호에서는 우리의 마음을 감사로 채워보기를 바라며 제1장의 내용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나는 학생들에게 만나서 반갑다고 말하면서 매 수업을 시작한다. 나는 그들에게 수업에 와줘서 고맙다는 말로 모든 수업을 마친다. 한 학생이 나에게 그렇게 하는 이유를 물었다. 나는 “여러분들이 수업에 올 때마다 나는 영광스럽고 축복받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그 학생은 자신은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나 역시 섬기는 교사로서의 소명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다. 섬기는 교육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감사다. 우리의 마음이 감사로 가득 차 있을 때, 우리는 학생들과 우리의 일을 멋진 선물로 보게 된다. 우리는 학문의 세계를 감염시킬 수 있는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태도에 대한 면역성을 구축하고 있다. 감사는 기독교 교육학의 책에서 놓치고 있는 첫 번째 장이라고 생각한다. 가르치는 기술을 연마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마음을 준비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을 하나님의 선물로 보는 대신 우리에게 부과된 부담으로 여길 수도 있다. 우리의 일이 선물이라기보다는 의무에 가깝고, 모험이 되기보다는 매너리즘에 빠지는 일상에 가까워지고 있다. 우리로 하여금 섬길 수 있는 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또한 우리 학생들, 우리를 고용한 기관,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 우리의 능력, 우리를 도와주는 교직원들, 학위를 취득할 수 있도록 도와준 교사와 저자, 멘토, 우리를 지원하고 격려하는 동료들로 인해서 주님께 감사하자. 심지어는 실수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해서도 감사하자.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다 더 큰 그림을 그려 보자. 다시 말하면, 우리를 구원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고 있는 자들이다. 우리는 동일한 언약적 사랑에 접 붙여진 사람들을 가르치도록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우리 학생들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다. 요한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심이라”(요일4:19)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구원의 기쁨을 잃으면 우리 자신이 기쁨이 없는 스승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학생들은 이것을 감지한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말과 비언어적으로 우리 자신을 제시하는 방식은 그들이 배우는 동작을 하는 것처럼 우리가 단순히 가르치는 동작을 하고 있음을 의미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선한 은사에 비추어 우리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새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생활 실천이 필요하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또 다른 삶의 날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나는 그날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 생각은 다가오는 시간의 집안일과 스트레스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내 기도는 송영 없는 단순한 간구가 되어 버린다. 나는 캠퍼스 입구 표지판을 하나님의 선하심과 연관시킨다. 매일 매일 하루를 시작하면서 나는 모든 건물과 가르침과 배움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되새긴다. 나는 나의 일터 그곳에 하나님으로부터 초청 받은 사람으로 부름을 받고 준비되어 있다. 캠퍼스 간판을 보면 나의 마음은 설레어지고 봉사를 위한 준비로 고양된다. 나는 집 서재에 ‘감사 게시판’을 하나 만들었다. 코르크 판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격려의 글, 성경 말씀, 사진, 아이디어, 찬송가, 티켓, 그리고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상기 시켜 주는 다른 여러 기념 조각들을 붙여 놓는다. 그 중 한 장의 사진은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의 무덤에서 아버지의 학대를 용서하는 나를 보여주는 사진도 있다. 아버지에 대한 원한을 극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다. 나는 ‘감사 게시판’ 아래 소파에서 낮잠을 자며 게시판에 있는 것들을 음미하며 잠이 든다. 나는 서재를 나설 때마다 잘 볼 수 있는 벽에 감사 게시판을 걸어 두었다. 연구실에서 무엇을 하고 있든, 퇴근할 때는 하나님께서 나를 책임지고 계시며 내 삶을 축복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다. 결국, 감사 게시판은 내가연구실을 나설 때,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내 방을 나선다는 사실을 상기 시켜 주는 이른바 나를 향한일종의 축복 기도의 역할을 한다. 여러분과 나는 많은 선물을 받은 사랑받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이것을 더 많이 인식하면 인식할수록 우리는 학생들을 위해 봉사하는 데 더 감사하면서 우리의 삶을 바칠 수 있을 것이다. Clairvaux의 Bernard(1090-1153)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수록 사랑에 대한 보답을 더 쉽게 찾을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감사는 쇠렌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가 배은망덕의 "질병"이라고 부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예”라고 말하는 우리의 방법이다. 감사는 섬김의 가르침을 키워준다. 비밀 공식은 없다. 우리의 감사는 온 마음을 다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다. (빌4:4). 구속주를 향한 우리의 태도에 감사가 부족하다면 학생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그러할 것이다. 시편 기자는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라고 묻고 있다(시116:12). 우리는 섬기는 교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포함하여, 모든 좋은 선물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응답한다. 감사하는 섬김의 교사가 되는 데 도움이 되는 실천 사항은 무엇이며, 당신의 감사 게시판에는 어떤 항목을 붙여 놓겠는가?

[김성수 총장] 주님의 뜻에 대한 상반된 반응

주님의 뜻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상반된 두 사람의 반응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엘리 제사장의 경우다. 그는 주님의 뜻 앞에서 전적으로 순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무엘이 세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니라”. 엘리는 실로의 대제사장이었는데, 그의 두 아들들도 역시 제사장들로서 봉사하였다. 이 두 아들들도 성경에 기록될 정도로 걸출한 인물들이었는데, 그것은 이들의 경건한 행동 때문이 아니라, 비할 수 없는 악행과 불경스런 행동들 때문이었다. 물론, 엘리제사장은 이들의 악한 행동에 동참하지 않았고, 이들의 행동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아들들이 그러한 길에서 돌이키도록 단순히 훈계하는 정도의 행동을 취했을 뿐 그 행동을 중단시키려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이제 엘리의 집을 심판하실 날을 세기 시작했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선지가가 전했을 때도 엘리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제 엘리 제사장이 아주 늙고 시력이 좋지 않아 잘 보지도 못할 때에 그는 성전에서 자기를 도우는 사무엘이라는 소년을 두었다. 주님은 어느 날 밤에 이 사무엘을 불러서 그를 통해 엘리에게 마지막 경고를 주었다. 엘리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다. “가로되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삼상 3:17).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에게 말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의 가정을 영영토록 심판하시겠다는 메시지를 무거운 마음으로 전했다. 그런데 이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에 대해서 엘리 제사장은 놀라울 정도의 무감각한 반응을 보였다. 아마도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장 무감각한 반응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반응이었는가? “사무엘이 세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 엘리의 이 말이 무슨 말인가? 그것은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질지어다“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을 행하시도록 계획하시든지 간에 엘리에게는 괜찮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것이 자신과 자기 가족의 파멸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태도다. 이 얼마나 감히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무관심이 아닌가? 주님의 뜻은 엘리 제사장의 가정을 파멸시키는 것이었다. 우리는 엘리의 가정의 일어난 무서운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엘리의 두 아들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엘리가 이 소식을 듣고 의자에서 넘어져서 목이 부러져 죽었다. 그의 며느리 역시 아기를 낳는 과정에서 죽었다. 그녀는 죽으면서 “이가봇”-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울부짖었다. 엘리 제사장이 말한 “주님의 뜻대로 될지어다”는 말은 절대로 우리가 따라야 할 경건의 본보기가 되지 못한다. 왜 그렇게 수동적인 자세를 취했는가? 왜 그는 자기 자신의 영적 상태와 자기 아들들의 영적 상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가?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 명확하게 답변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아는 것은 엘리 제사장에게는 자기 자신이 따를 수 있었던 한 모범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엘리 제사장만이 징계와 파멸과 실망스런 메시지를 들어야 했던 유일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모세의 경우를 보면 주님의 뜻에 대한 반응에 있어서 엘리 제사장의 경우와 엄청난 대조를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큰 죄악에 빠졌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악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조롱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이 곧은 백성들이라고 불평하면서 모세에게 말하기를,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 32:10)고 하셨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모세는 경건하게 머리를 숙이고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고 말하지 않았다. 결코 그렇게 하지 않다. 모세는 주님께 빌었다. 주님께 사정했다. 주님께서 마음을 돌이키도록 빌었던 것이다. 모세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논증을 하면서 사정을 하였다. 모세의 이런 간청 때문에 하나님은 마침내 그 뜻을 돌이키셨다. 모세를 향한 주님의 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이르렀을 때 그들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전에 죽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이러한 심판에 대해서 단순히 경건하게 머리 숙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지어다”라고 하지 않았다. 모세를 향한 주님의 뜻은 쓰라린 실망이었다. 그래서 모세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호소하였다. 모세의 이런 완강한 간청 때문에 모세는 느보산의 꼭대기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볼 수 있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언약의 후예로서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리와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호소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모세는 성경에서 위대한 선지자로 칭찬받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뜻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기계적으로 따라야만 하는 어떤 것인가? 엘리제사장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파멸하려고 하시는 주님의 메시지를 받고, 그 앞에서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수동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지 않았다. 주님께 매달리고 간구하면서, 오히려 뜻을 돌려 달라고 논증하고 따지고 간청했다. 주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어떠해야 할지를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김성수 총장] 주님의 뜻, 무엇인가?

김성수 총장(에반겔리아대학) 주님의 뜻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다. 신실한 성도들은 언제나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고, 그 뜻을 순종하는 일에 최우선권을 부여해야 한다. 그런데, 주님의 뜻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올바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려운 어떤 일을 당할 때 주님의 뜻을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성도들이 나그네의 삶과도 같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어떤 위기나 슬픔의 순간을 당했을 때 주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강화시키려고 하는 노력은 전적으로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갑작스런 어떤 사고나 질병, 사업의 실패, 또는 가까운 친구나 친지의 죽음과 같은 일들을 당해서 우리는 자주 주님의 뜻을 이야기할 때가 많이 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종종 자신을 향해서나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그것은 주님의 뜻이었습니다”고 말하고 위로를 받는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뜻과 관계해서 어떤 오해를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서 모든 것이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으로 주님의 뜻을 보는 관점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어떤 책이 있는데,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악과 실망스러운 일들도 모두가 결국은 이 책에 기록된 대로 일어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잘못이다. 이런 잘못된 시각에 가장 잘 인용되는 성경 귀절이 바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29-31)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 말씀이 마치 하나님께서 허락해야 참새 한 마리도 죽고,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공과 실패 등 모든 것을 일일이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가르치는 것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참새가 날개가 부러져 죽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날개로 하늘을 훨훨 나르는 것이다. 마태복음 10장 전체의 내용을 볼 때, 우리는 이 말씀을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거기에도 하나님이 계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없이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는데 머리털까지 세실 정도로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너희와 함께 하시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누가복음은 이 내용을 더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떨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그런데,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그 곳에도 계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그 때에는 아들과 함께 하시지 않았다. 그래서 주님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아버지,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부르짖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그것은 아들을 십자기에 죽게 하시면서까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며,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이다. 성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주님의 뜻을 어떤 숙명주의, 팔자소관, 또는 운명주의와 같은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주님의 뜻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릉도원과 같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뜻대로 이 창조 세계를 다스리고 있다. 주님은 달과 별, 태양, 바위, 강, 바다, 바람과 같은 무생물의 세계를 자신의 뜻대로 다스리고 있다. 주님은 또한 동식물의 세계를 자신의 뜻대로 다스리고 있다. 만약 이 세계가 주님의 뜻대로 다스려지지 않으면 정말 문제가 생겨나게 될 것이다. 주님은 또한 우리의 가정, 학교, 교회, 직장, 국가에 대해서도 자신의 뜻을 가지고 계시며, 이 모든 사회와 문화 현상들이 주님의 뜻대로 운영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 학교, 교회, 직장, 국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게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주님의 뜻은 질서와 조화, 평강과 즐거움, 선함과 거룩함과 같은 것이지 무질서와 분쟁, 괴로움, 악함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건강하고 영원히 즐겁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실패하고 병들고 죽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비극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침입자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다시금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나라를 만드시고, 우리로 하여금 실패와 고난과 시련이 없이 건강하고 즐겁게 영원토록 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주의 뜻이 이루어질지어다”라고 말하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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