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2-04(목)

통합 경남노회 목사회, 2025 정기총회 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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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경남노회 목사회, 2025 정기총회 개회

예장(통합) 경남노회 목사회(회장 이상근 목사)가 지난 12월 4일(목) 오전 11시, 창원시 성산구 상남교회(이창교 목사)에서 ‘2025 정기총회’를 열고 말씀과 기도로 한 해의 사역을 돌아보며 새로운 회기를 시작했다. 회무에 앞서 드린 1부 예배는 목사회 수석부회장 이상현 목사(대합교회)의 인도로 진행되었으며, 부회장 이창교 목사(상남교회)가 대표로 기도하고 총무 이상철 목사가 성경봉독(전4:9-12)한 후 회장 이상근 목사(호계문창교회)가 “우리가 연합하면”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했다. 이상근 목사는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은 것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기 때문”이라며 “연합과 협력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통로이며, 예수님도 요한복음 17장에서 교회의 하나 됨을 피땀 흘려 기도하셨다”고 강조했다. 또한 “우리 목사회가 ‘각자도생’을 내려놓고 서로 협력하며 연합할 때, 하나님께서 삼겹줄과 같이 끊어지지 않는 강한 공동체로 세우실 것”이라고 전하며 목사들의 연합과 일치를 촉구했다. 기도 후에는 부회장 권영균 목사(길선교회)와 이현 목사(두동교회)의 인도로 △경남노회를 위해 △목사회를 위해 각각 기도하고 대표총무 김영암 목사(경화교회)가 광고를 전한 뒤 전 회장 조신제 목사(새빛교회)가 축도함으로 예배를 마무리 했으며, 경남노회장 신종주 장로(하청교회), 경남노회 장로회장 김용언 장로(하청교회), 남선교회·여전도회 대표 등이 축사를 통해 목사회의 사역을 격려했다. 이어진 2부 회무에서 목사회는 회칙 일부를 개정하고 새 회기 임원을 추대했다. 이날 총회에서는 수석부회장 이상현 목사(대합교회)를 신임 회장으로 추대했으며, 그 뒤를 이어 이창교 목사(상남교회)를 신임 수석부회장으로 추대했다. 이외의 실무 임원들은 전원 연임하기로 결의하며 회무의 연속성과 안정성을 유지했다. 총회는 신임 회장의 인사와 직전 회장에 대한 감사패 전달 후 모든 회무를 은혜롭게 마치고 폐회했다. 경남노회 목사회는 새 회기에도 연합과 협력의 정신을 따라 노회와 지역 교회의 영적 성장을 섬기는 사명을 계속해 나갈 것을 다짐했다.

한국교회언론회, 오세택 목사 ‘인공기’ 발언 강력 비판

한국교회언론회(대표 임다윗 목사)는 11월 29일 논평을 발표하고, 최근 오세택 목사(가나안농군학교 일가수도원)가 한 포럼에서 “서울의 대형교회에 태극기가 걸려 있다면 북한의 인공기(人共旗)를 게양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했다. 언론회는 해당 발언을 “북한 공산주의를 상징하고 반기독교적 체제를 대표하는 인공기를 교회에 걸어야 한다는 부적절한 주장”이라고 규정하며, “이를 들으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한국교회가 다시 정신을 차려야 함을 절감한다”고 밝혔다. 이어 “공산주의는 명백한 ‘적그리스도’ 사상이며,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훼파하며 신앙인들을 박해해 온 체제”라고 강조했다. 또한 공산주의의 이념적 본질을 “무신론·유물론·계급투쟁을 기반으로 한 종교적 성격의 이념 체계”로 설명하며, “겉으로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상은 허울뿐”이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언론회는 “가장 악독한 공산주의 체제인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의 깃발을 교회에 달아야 한다는 발상을 한 목회자가 과연 ‘하나님의 종’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오 목사가 오랫동안 ‘교회 개혁’을 주장해 왔다는 점과 관련해서도 언론회는 “그들이 말한 개혁이 결국 교회를 사상과 이념의 하수인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는가 의문”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언론회는 목회자의 역할에 대해 “목회자의 말은 하늘의 소리를 대변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적 교리에 부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번 발언은 “성경적·신학적·신앙적·지도자적·양심적·도리적·교단적으로도 맞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이어 “목회자에게도 생각과 견해는 있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면 더 이상 하나님의 종이라 할 수 없다”며 “차라리 그 자리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직설적으로 지적했다. 또한 사도 바울의 고백을 인용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겨 그리스도를 얻는다”(빌3:8)는 말씀을 언급하며, “이제는 배설물로 여겨야 할 것에 집착해 교회와 성도들을 미혹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한국교회가 반기독교적 주장과 혼란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언론회의 일관된 입장이다. 아래는 한국교회언론회가 발표한 논평 전문이다. 목회자의 말은 천금(天琴)과 같아야 한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 옹호가 가당한가? 어느 시대에나 국가나 공동체나 집단에는 위기와 기회가 찾아온다. 그런데 아무리 큰 위기가 찾아온다고 하여도, 공동체가 한마음이 되고, 지혜와 힘을 모은다면, 능히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겉으로는 평온한 것 같아도 공동체가 사분오열되고 허무는 세력이 난무하면 그 공동체는 무너지고 만다. 우리는 세계 역사에서 그런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또 우리나라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그런 예는 너무나도 많다. 그리고 성경에서도 그런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들이 있는데, 기회를 방치하면 위기가 닥칠 수도 있음을 성찰해야 한다. 그런데 성경적 교훈은 지도자들의 타락, 그로 인하여 백성들이 함께 타락하게 될 때, 그 공동체는 여지없이 무너지는 경우들이 많다. 반면에 참된 지도자가 있으면, 그 시대와 공동체는 무너지지 않았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물론, 교회도 위기라고 진단하는 사람들이 많다. 왜 위기인가? 성경의 진리와 가르침과 가치관을 외면하고, 사회적, 이념적, 문화적, 반기독교 정서를 따라가기 때문이다. 참된 선지자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 줄고, 거짓 선지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교회뿐만 아니라 그 사회, 그 신앙의 공동체는 점점 희망을 잃어가게 된다. 최근 어느 교단 포럼에서 한 목회자가 서울의 대형교회에 태극기가 걸린 것을 지적하면서, 그곳에 북한의 소위 인공기를 게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공기(人共旗)가 무엇인가? 북한 공산주의를 상징하는 것이고, 반기독교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공기를 교회에 걸어야 된단 말인가? 이 소식을 들으며, 한편으로는 깜짝 놀라고, 한편으로는 한국교회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 된다는 생각이 든다. 공산주의는 ‘적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교회들을 훼파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 공산주의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종교(기독교)는 아편이라’고 했다. 공산주의는 철저하게 무신론(無神論) 유물론(唯物論) 계급 투쟁, 하나님 대신 인간을 신(神)으로 만드는 일종의 이념적 종교이다. 그들은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허울뿐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지구상에서 공산주의 가운데에서도 가장 악독한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의 깃발을 교회에 매달아야 한다는 발상과 표현을 한 목회자는 ‘하나님의 종’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십 수년간 ‘교회 개혁’을 한다고 했던 인물인데, 그들이 말하는 개혁은 결국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사상과 이념의 하수인으로 만들려는 행동이었던가? 목회자의 말은 하늘의 소리를 대변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적 교리에 부합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그의 말은 성경적·신학적·신앙적·지도자적·양심적·도리적·교단적으로 맞지 않는다. 목회자도 생각이 있고, 주장이 있고, 견해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잘못된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볼 수 없다. 차라리 ‘하나님 종’의 자리를 내려놓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길 때, 그리스도를 얻는다’(빌3:8)고 고백한다. 벌써 배설물(排泄物)로 여겨야 할 것에 집착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와 성도들을 미혹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더 이상 한국교회에서 반기독교적인 일들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거제·통영 연합 찬양콘서트 ‘RE:PLAY 재생’, 신현교회에서 열려…

예장(통합) 신현교회(서용진 목사) 청년부가 지난 11월 28일 오후 7시, 신현교회 은혜홀(2층)에서 ‘RE:PLAY(再生·재생)’라는 주제로 거제·통영 연합 찬양콘서트를 열었다. 신현교회 HAIM 청년부가 주최한 이번 찬양집회는 찬양팀 히스플랜(HISPLAN)이 함께하며, 지역 청년과 성도들이 모여 자유로운 예배의 기쁨을 나누는 시간이 되었다. 이날 찬양콘서트는 설교 없이 찬양과 묵상, 간증이 중심이 되어 진행됐다. 참석자들은 찬양을 통해 하나님 앞에 마음을 열고 각자의 어려움과 연약함을 내려놓으며 회복을 구했다. 특히 ‘너는 꽃이야’라는 찬양을 함께 부르며 서로를 향해 “당신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라는 축복을 나누는 시간이 마련되었고, 청년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위로와 격려를 전하며 은혜를 나누었다. 현장에서는 자연스러운 고백과 기도가 이어졌다. 한 참석자는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시선, 그 조건 없는 사랑을 기억하자”고 격려하며, 청년들이 흔들림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도록 도전을 전했다. 이어진 묵상 찬양에서는 “내 죄에서 나를 정결케 하옵소서… 주님은 나의 전부이십니다”라는 회중의 고백이 울려 퍼졌다. 이어, 신현교회 서용진 목사가 잠시 단상에 올라 참석자들을 환영했다. 서 목사는 “할렐루야, 잘 오셨습니다”라고 인사하며, “새로운 음악과 사운드가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젊은 세대가 하나님을 향해 찬양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며 큰 은혜를 받았다”고 말했다. 또 “변화가 있어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중심은 흔들리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이날 예배는 청년들의 간단한 광고와 안내 후 찬양 드리며 마무리되었으며, 참석자들은 찬양과 기도로 가득한 밤을 통해 서로를 격려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는 시간을 가졌다. 신현교회는 앞으로도 다음세대와 청년들이 예배로 세워지는 다양한 찬양 모임과 연합 행사를 지속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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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군기연, 제39회 정기총회 개회

창녕군기독교연합회(회장 이재격 목사, 이하 창녕기연)가 지난 12월 3일(수) 오전 11시, 창녕군 창녕교회(안덕수 목사)에서 ‘제39회 정기총회’를 열고 2026년도 연합회 사역을 위한 새로운 임원을 조직했다. 이날 총회에서는 수석부회장 안덕수 목사(창녕교회)가 신임 회장으로 선출됐다. 예배는 창녕기연 회장 이재격 목사(창녕제일교회)의 인도로 드려졌으며, 부회장 임석민 목사(창녕중앙교회)가 대표로 기도하고, 수석부회장 안덕수 목사(창녕교회)가 ‘그리스도의 마음’(빌2:1-4)을 주제로 말씀을 전했다. 안덕수 목사는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정체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며 “긍휼이 있는 곳에 반드시 치유와 기적이 일어난다. 나사로와 오병이어의 사건 모두 긍휼에서 시작되었다”고 전했다. 이어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교회가 따뜻한 친밀감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에게 먼저 흘러올 때 지역과 교회 안에도 회복이 일어난다”며 연합회의 사명을 재확인하도록 권면했다. 설교 후 전 회장 함창진 목사(창녕감리교회)의 축도로 예배가 마무리되었다. 총회 회무는 전회의록과 각종 보고를 모두 접수한 가운데, 임원 개선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총대들은 만장일치로 안덕수 목사를 신임 회장으로 추대했다. 이후 신·구 임원 교체가 이뤄졌으며, 참석자들은 내년 창녕지역 복음화와 연합 사역을 위해 계속 협력해 나갈 것을 다짐했다. 다음은 신임 임원 명단이다. ▲회장 : 안덕수 목사(창녕교회) ▲총무 : 박성익 목사(계성교회) ▲서기 :김연석 목사(남지교회) ▲부서기 : 이영호 목사(구미교회) ▲회계 : 윤창원 장로(창녕교회)

진주기연, 제44회 정기총회 개회

진주기독교연합회(회장 박형호 목사, 이하 진주기연)가 지난 12월 2일(화), 진주시 순복음진주초대교회(이경은 목사)에서 ‘제44회 정기총회’를 개최했다. 진주기연은 이번 총회를 통해 신임 회장에 이경은 목사(순복음진주초대교회)를 선출하고 주요 실무 임원은 연임하기로 결의했다. 회무에 앞서 드린 개회 예배는 총무 박정국 목사의 인도로 진행됐으며, 부회장 이상의 목사가 대표기도를 드렸다. 성경봉독은 서기 이시봉 목사가 출애굽기 6장 6~9절을 봉독하고, 수석부회장 이경은 목사가 “복을 받읍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이경은 목사는 설교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구속의 복, 소유의 복, 천국의 복으로 이어진다”며, “믿음의 사람들이 복을 누리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마음이 상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이어 “마음을 지키면 생명의 근원이 나온다(잠4:23)”를 인용하며 “부드러운 마음, 순종하는 마음을 성령께서 주실 때 복이 회복된다”고 강조했다. 설교 후 박정국 목사가 광고를 전하고 직전회장 한성수 목사가 축도함으로 예배를 마쳤다. 이어진 회무는 회장 박형호 사회로 진행됐으며, 회원점명, 회순채택, 사업·재정·감사보고 등 정기총회 안건이 순조롭게 처리됐다. 이어 임원개선하고 직전회장이 된 박형호 목사에게 감사패를 전달했다. 이번 진주기연 총회는 만장일치로 이경은 목사를 신임 회장으로 선출했다. 이경은 목사는 “진주 지역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해 섬기겠다”고 인사하며 회무 의지를 밝혔다. 이밖에 총무·서기·회계 등 실무 임원은 모두 연임하기로 결의해 조직의 안정성을 이어가기로 했다. 이날 점심식사 및 친교는 순복음진주초대교회가 정성껏 준비했으며, 총회 장소 제공과 섬김에 대해 진주기연은 교회와 성도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식사 후에는 제1차 임원·실행위원 모임이 이어지며 총회 전체 일정을 마무리했다.

2025 사천시 성탄트리 점등식, 시민과 함께 성탄의 빛 밝혀…

2025 사천시 성탄트리 점등식이 지난 12월 1일(월) 오후 5시, 사천시청 광장에서 진행됐다. 사천시기독교연합회와 (사)사천YWCA가 주관한 이번 행사는 지역 교회와 시민이 함께 성탄의 기쁨을 나누며 희망의 불빛을 밝히는 시간으로 이어졌다. 1부 예배는 사천시기독교연합회(이하 사천기연) 부회장 김기홍 목사(용강제일교회)의 인도로 드려졌다. 회계 최용운 장로(사천읍교회)가 대표로 기도한 후 수석부회장 하태경 목사(삼한교회)가 ‘빛으로 오신 예수님’(요1:1-5)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했다. 하태경 목사는 “할렐루야는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이고, 샬롬은 육신과 영혼의 온전한 평안을 의미한다”며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평안이 임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또한 사천시 공무원들의 노고를 언급하며 “성도들은 시장님과 공직자들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지역이 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함께 기도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세상을 움직이는 힘을 돈, 권력, 지식, 정보로 오해하기 쉽다고 지적하며 “이 모든 것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어둠의 세력, 곧 죄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어둠을 이길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빛이며, 그 참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포했다. 하 목사는 “수만 년 동안 캄캄하던 동굴도 한순간 빛이 들어오면 어둠이 물러난다. 예수님이 임하시면 우리의 마음과 가정도 즉시 밝아진다”고 설명했다. 하 목사는 마태복음의 말씀을 인용해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추었다”고 전하며, “예수님은 세상의 어둠과 부패와 절망을 몰아내는 유일한 희망이며 사천시와 우리의 가정에도 동일하다”고 말했다. 또한 “예수님은 베들레헴의 구유라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태어나셨기에,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든 마음을 열기만 하면 기쁘게 오실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이라고 강조했다. 하 목사는 “오늘날 사람들이 빛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예수님 없는 곳에는 결국 어둠과 절망만 남는다. 그러나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희망과 장래와 영원한 소망이 있다”고 말했고, “성탄트리의 불빛이 사천시와 모든 가정과 마음에 예수님의 빛으로 비추기를 바란다”고 축복했다. 설교 후 김기홍 목사가 광고를 전하고 김영성 목사(사천읍교회교회)가 축도 함으로 예배를 마쳤다. 2부 점등식은 사천YWCA 강류안 사무총장의 사회로 진행 돼, 구영화 회장이 개회사를 전하고 사천시 박동식 시장, 김규헌 사천시의회 의장, 김진우 사천경찰서장이 축사를 통해 시민들에게 성탄의 기쁨과 평화를 기원했다. 이후 카운트다운과 함께 성탄트리가 점등되며 광장이 따뜻한 빛으로 밝아졌고, 시민들은 환한 트리 아래에서 연말의 정취를 함께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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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바른 신학 바른 신앙 바른 삶

신앙이라는 것이 열정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신학도 지식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바른 신학은 바른 신앙을 낳고 바른 신앙은 바른 삶으로 이어진다. 신학만 있고 신앙이 없으면 메마른 지식인이 되고, 신앙만 있고 신학이 없으면 방향 없는 열정 자가 된다. 균형 잡힌 사람은 말씀으로 생각하고 성령의 인도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형태와 자세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 리액션 (reaction)=反射的(반사적)으로 사는 삶 길거리를 지나거나 혹은 버스나 지하철을 탔을 때 실수로 부딪치거나 어떤 사람이 내 발등을 밟을 수 있다. 순간 소리를 지르고, 눈을 부릅뜨고, 욕을 퍼붓고, 당장 손이 올라갈 것 같이 행동하는 사람이다. 강아지의 꼬리를 밟을 때 제 주인이건 남이건 상관하지 않고 물려고 덤벼드는 것과 같은 반사작용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둘째 : 리스판스 (response)=應答的(응답적)으로 사는 삶 발을 밟힐 때 아프겠지만 “저 사람이 일부러 밟았겠는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자기도 모르게 밟았겠지... 내가 아프다고 얼굴을 찡그리면 저 사람의 마음이 괴롭겠지...”라고 생각하며 참고 견디려고 한다. 저쪽에서 “미안합니다” 하면 “저도 종종 남의 발등을 밟거든요”하고 대답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응답적으로 사는 삶의 형태이다. 사람과 동물은 여러 가지의 차이가 있는데 사람은 응답으로 살고, 동물은 반사적으로 산다고 하는 것이다. 반사적으로 사는 사람은 보이는 대로 생각하고, 들리는 대로 판단하고, 느끼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다. 사랑받으면 사랑하고, 미움받으면 미워하고, 맞으면 반사적으로 때리는 식의 삶의 형태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필자가 사는 아파트 위층에는 주말마다 어린 손자 손녀들이 와서 신명(?)나게 뛰고 난리를 부린다. 그때마다 위층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아래층에 신경이 쓰이고 미안함 때문에 필자를 만나면 “우리 손주들이 쿵쾅거리며 뛰어서 시끄럽지요?”하고 마치 죄인처럼 말씀하신다. 그때 저의 대답은 “어린애들이니까 뛰지 어른이면 뛰겠습니까? 괜찮습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손주들이 와서 좋으시겠습니다.” 제 대답에 마음이 푸근해지는 모양이다. 저를 만날 때마다 깍듯이 인사하고 예우를 갖추어 말씀하신다. 어느 교회 여집사님이 남편에게 맞아 눈이 밤탱이(?)되어 목사님께 상담차 왔더란다. “목사님, 제 남편이 저를 구타해서 조폭 같은 남편이랑 도저히 못 살겠습니다.” 목사님 왈 “집사님이 남편에게 맞을 때 뭐라고 대꾸하셨습니까?” 여집사님 왈 “죽여라 죽여! ...” 목사님 왈 “남편은 착하신 분입니다. 왜냐하면 죽이라고 했는데도 죽이지 않고 때리기만 했으니까요.” 성경은 우리의 삶의 자세 가운데 바른 응답적으로 사는 비결을 가르쳐 준다. 잠 15:1에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고 하였다. 구약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경에서는 “분노는 슬기로운 사람조차 미치게 하느니라” 이 말씀을 추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삶에 대한 사람의 응답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볼 수 있다. 동물은 육체적 존재이기에 사물에 대하여 반사하고 살지만, 사람은 영적인 존재이기에 생각하고 난 후 자기의 느낌으로 반응하면서 말하고 행동하기에 만물의 영장인 것이다.

[정우승 목사]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우리나라 가훈(家訓)에서 제일 많은 것 중의 하나가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일 것이다. 즉 가정이 화목하면 모든 일이 잘 되어간다는 뜻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화목(和睦)은 개인과 가정 그리고 사회에서 최고의 덕으로 칭송을 받고 있다. 예수님 역시 예물보다 우선시되는 것은 화목이라고 말씀하신다. (마태복음5:24)에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특히 중국은 예로부터 화(和)를 인간관계에서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 논어(論語)에 ‘화이부동(和而不同)’이란 말이 있다. 군자는 사람과 화합하는 것이지 뇌동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타인과 진실로서 화목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맹자(孟子)에도 ‘하늘의 별은 땅의 이(利)에 미치지 못하고, 땅의 이(利)는 화(和)에 미치지 못 한다’고 했다. 또한 중용(中庸)에는 ‘화이부류(和而不流)’라 곧 <모든 사람과 조화를 갖는다는 것이 세상 풍조에 휩쓸려 가는 것은 아니다>는 의미이다. 인간사회도 자신의 활동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하지만 자기 밖의 어떤 다른 힘과의 조화 때문에 움직이고 있음을 모른다. 곧 인간 사회는 이 자신에의 집착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으며, 항상 어떤 관계 이상의 화를 모색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승패가 중요한 전쟁을 하는데 있어서도, 아무리 전승에의 좋은 기회를 잡았다 해도 사람의 화(和)만은 못하다고까지 생각했다. 오자(吳字)는 ‘싸움에 이써 화(和)한 것보다 더 이기는 것이 없다’ 하였고, ‘도를 얻은 왕자는 그 백성을 다스리는데 먼저 화하고, 그 후에 큰일을 이룬다’고 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화를 이루기 위한 방법으로 설득을 아주 중요시 여긴다. 중국인은 무슨 일이든지 설득을 하려 한다. 중국인들은 오른쪽을 가리키며, 오른쪽으로 가라 한다 해서 모두가 그에 따르는 법은 없다. 왜 오른쪽으로 가는가 잘 설명을 듣고 납득하지 않고는 안 간다. ‘호떡 집에 불 난 것 같다’는 속담도 중국인이 말이 많다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임진왜란 때의 명장 이시송(李始松)은 ‘궁적물추(窮寂勿追)’의 전력으로 유명한데 이는 ‘너무 몰아붙이면 오히려 반항심 때문에 세력이 커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도망가는 왜군을 다 섬멸하기보다 공격을 중지하고, 성 밖으로 적군을 철수시키고, 적이 도망갈 길을 터주었다. 그렇다면 화목(和睦)에 대한 성경은 가르침은 어떠한가? 성경도 화목하기가 정말 어렵다고 인정하고 있다. (잠언18:19)에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보다 어려운즉 이러한 다툼은 산성 문빗장 같으니라” 라고 말씀한다. 사도 바울에 화목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로마서12:18)에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라고 말씀한다. 그럼 화목에 대한 예수님의 지혜를 들어보자. (마가복음9:50)에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는 소금을 ‘청결’의 뜻으로 보아야 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예로부터 이 세상에서 소금보다 청결한 물건은 없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소금은 두 개의 가장 깨끗한 것, 즉 ‘태양과 바다’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소금이 비추는 흰 색깔 그 자체가 청결의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깨끗하게 하는 힘을 가져라. 이기심, 비통, 분노, 질투로부터 깨끗함을 받아라. 이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너희는 이웃과 화목할 수 있다’ 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부터 깨끗함을 받아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면 다른 사람들과 진실한 교제 안에서 살수 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화목’을 강조하실 수 있는 것은 본인이 스스로 화목제물이 되셨기 때문이다. (로마서3:25)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라고 말씀한다.

[이정희 목사] 불교에서 유래된 용어들: ‘뒷바라지’는 사용해도 되는 말인가?

1. 서언(序言) 얼마 전 수능시험을 치르고 이제는 본격적으로 대학 입학을 위한 본고사에 대한 두려움과 눈치 작전이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학부모들의 고충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때 학부모들의 수고를 ‘자식들 뒷바라지한다’, ‘아이들 뒤치다꺼리한다고 정신이 없다’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런데 이런 말도 불교적인 용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이렇게 볼 때 정말 우리들이 평소 사용하는 말에는 타 종교, 특히 불교적인 용어가 많다. 본 호에서는 이에 대한 어원과 유래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과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서재생 목사의 『교회 속 불교·도교 용어들』을 참고했음을 먼저 알려둔다. 2. 뒷바라지는 무슨 말인가? 사전적 정의: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뒷바라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뒤에서 돌보거나 보살피는 일’을 의미한다. 주로 가족, 특히 자녀나 배우자, 또는 소속 조직의 구성원을 위해 지원하고 도와주는 일을 뜻하고 있다. 특히 이 말은 희생과 헌신의 이미지와 감성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폭넓은 의미의 용어이다. 어원의 구조: 이 말은 ‘뒤+바라지’의 합성어로서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뒷’: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곳’, 또는 ‘보이지 않는 후방’이란 뜻으로, 위치적 의미를 넘어서 눈에 보이지 않게 몰래 혹은 뒤에서 묵묵히 지원하는 이미지의 접두어이다. (2) ‘바라지’: 돌보거나 돕는다는 의미의 동사로서 ‘바라다’의 명사형에서 온 단어이다. 또한 ‘바라지’는 ‘바래다’, ‘보살피다’, ‘수발하다’는 의미와 비슷하며, 전통적으로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돌보거나, 여성이 가족을 챙기는 행위를 ‘바라지’라고 했다. (3) ‘뒷바라지’: 이상으로 볼 때 이 말은 ‘뒤에서 돌보는 것’이란 은유적 의미를 지닌 말로, 겸손하고 조용한 지원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즉 드러나지 않는 공로, 보이지 않는 노동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겸손함, 희생, 수고함이 포함된 단순한 ‘도움’이 아닌 특별한 돌봄의 의미를 뜻한다. 그 반대의 말은 ‘바라지 않다’로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3. 불교적 의미의 뒷바라지 이 용어는 원래 불교에서 유래된 말로서 원뜻은 ‘절에서 영혼을 위해 시식할 때 시식 법사가 앉아 송구의 경문을 읽으면 옆에서 그다음의 송구를 받아 읽는 사람, 또는 그 시식을 거들어 주는 사람’을 뜻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기술하면, 죽은 자의 영혼이 극락왕생하도록 법주승이 절에서 영산재(靈山齋: 사람이 죽은 지 49일째에 죽은 사람을 위한 천도재)를 행할 때 곁이나 뒤에서 경을 읽고 목탁을 치면서 법주승을 도와주는 또 다른 승려를 이르는 말이다. 다른 말로 ‘바라승’이라고도 하며, 바라지(바라승) 승려는 법주승의 곁(뒤)에서 같이 목탁을 치고 경을 읊으며 향을 피우고 차를 올리는 잡무와 궂은일을 하면서 법주승을 돕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뜻에서 ‘바라지하다’ 혹은 ‘뒷바라지하다’라는 말이 유래된 것이다. 또한 무당의 굿을 할 때도 으뜸 무당이 부르는 노래 사이에 뜻 없는 말로 장단을 맞추어 주는 사람을 의미하기도 한다. 4. ‘뒷바라지’와 혼용되는 말과 제언 뒷바라지와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단어로는 ‘뒤치다꺼리’, ‘수발’, ‘보살핌’ 등이 있다. ‘뒤치다꺼리’는 다소 부정적인 느낌으로, 뒤처리하는 번거로운 일을 뜻하기도 하지만 어떤 일의 뒷수습이나 뒷정리 등의 좋은 의미로도 많이 사용된다. ‘수발’은 주로 환자나 노인을 돌보는 행위로 사용되고, ‘보살핌’은 심리적 돌봄을 중심으로 한 단어이다. 결론적으로 ‘뒷바라지’는 다양한 희생적 의미의 말로서, 특히 한국 문화에서는 부모의 역할이 단순한 경제적 지원을 넘어서 정서적 보살핌과 희생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나중에는 자녀가 다시 부모를 돌보는 유교적 효(孝)의 사상과 깊이 연결되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용어들을 우리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먼저 이 말은 불교에서 유래된 말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가 수용하지 못할 잘못된 교리적인 용어는 아니며, 일반적으로 좋은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거부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하지만 ‘뒤에서 돕는다’, ‘부양하다’, ‘헌신하다’, ‘후원하다’, ‘지지하다’ 등의 다른 좋은 말들도 많이 있는데, 구태여 ‘바라지’와 같은 불교에서 유래된 말을 사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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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

오늘날 ‘선교’라는 단어는 그 본래의 깊이와 폭을 회복해야 할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다. 과거 수세기 동안 많은 교회들과 선교 단체들은 ‘선교’, ‘선교사’, ‘선교지’와 같은 용어를 주로 지리적 확장의 관점에서 이해해 왔다. 즉, 서구 기독교가 비(非)서구 세계로 복음을 확장해 나가는 일방향적인 운동으로 선교를 정의한 것이다. 이 개념 속에서 ‘선교사’는 복음을 확장하는 주체요, ‘선교지’는 그 확장의 수혜 대상인 미개척지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선교 개념은 더 이상 시대와 현실을 설명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 특별히 두 가지 결정적인 요인이 전통적인 선교 이해방식의 수정과 재정립을 요구하고 있다. 첫째, 이전 시대에 선교 대상으로 여겨졌던 지역 교회의 급속한 성장이다. 과거에는 복음의 수혜자로 간주되던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교회들이 이제는 전 세계 기독교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필리핀, 인도, 나이지리아, 케냐 같은 나라들은 과거에는 선교사의 활동 무대였으나 이제는 적극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들로 전환되고 있다. 2021년 세계 복음주의 연맹(WEA)의 보고에 따르면, 전 세계 타문화 선교사 중 약 40% 이상이 이제 비서구권 국가들에서 파송되고 있으며, 특히 브라질, 인도, 필리핀, 나이지리아는 선교사 파송국 상위 10위 안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아프리카 대륙의 복음주의 교회는 지난 100년간 1900년 약 900만 명에서 2020년 기준 약 6억 명 이상으로 성장하였으며, 이는 기독교 전체 인구 증가율보다 훨씬 빠른 속도이다. 이러한 수치는 선교를 '서구에서 비서구로'의 흐름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둘째, 서구 교회의 급격한 쇠퇴이다. 기독교 통계학자 데이비드 바렛(David Barrett)에 따르면, 1980년대에 서구 교회는 매일 7,600명의 신자를 잃고 있었고, 오늘날도 그 추세는 가속화되고 있다. 미국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의 2021년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인의 기독교 신앙 소속 비율은 2007년 78.4%에서 2021년 63%로 급격히 감소했고, 무종교(종교 없음, 비신자) 인구는 같은 기간 동안 16.1%에서 29%로 증가하였다. 유럽도 마찬가지다. 영국 국교회(Anglican Church)는 성찬례 참여율이 10년 사이에 절반 이하로 떨어졌으며,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기독교가 문화적으로는 남아 있지만 실질적인 신앙 참여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게다가 서구 교회 내의 많은 신자들이 세속주의와 인본주의 세계관에 쉽게 타협하고 있으며, 타문화 선교에 대한 헌신 역시 현저히 감소하고 있다. 미국 내 선교 단체의 보고에 따르면, 코로나 팬데믹 이후 선교사 지원금은 평균 20% 이상 감소했으며, 신규 선교사 헌신도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선교지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지게 만든다. 복음의 빛이 희미해진 유럽의 도시들, 종교적 냉소주의가 만연한 북미 사회, 그리고 다양한 문화 속에서 정체성을 잃어가는 서구 사회야말로 오늘날의 ‘선교지’일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선교의 정의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선교는 단순한 ‘지리적 확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을 구속하고 회복하시는 사역에 동참하는 거룩한 부르심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회복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교회는 그 구속의 역사에 동참하는 증언 공동체다. 이 관점에서 선교는 특정 지역이나 사람만의 책임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과 모든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다. 물론, 19세기와 20세기의 선교운동이 이룬 열매를 폄하해서는 안 된다. 복음이 한 번도 전해지지 않은 지역에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과 헌신은 여전히 오늘날 선교의 중심적인 동력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정신을 이어가되, 형태와 방향에 있어서는 더욱 성숙하고 성경적인 선교 이해를 정립해야 한다. 결국 선교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가시는 사역이며, 하나님은 국경과 문화, 인종과 언어를 초월하여 모든 민족 가운데서 일하고 계신 분이다. 교회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세상의 어느 곳이든 복음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어떤 문화든지, 어떤 계층이든지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새롭게 받아야 할 선교의 이해이다. 김성수 목사 (탄자니아 아프리카 연합대학교 총장)

[김성수 총장] ‘모’(Meaux)의 우물

물 한 모금이 목마른 자에게 생명을 주듯,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의 갈증을 해갈하게 한다. 16세기 유럽에서 개혁의 불씨가 타오르던 그 시절, 사람들의 심령은 메마른 광야와 같았고,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다시 솟아난 생명의 샘물이었다. 프랑스의 작은 읍 ‘모’(Meaux)에서 일어난 감동적인 말씀 회복의 역사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다시금 성경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 중세 천년 동안 성경은 성직자들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일반 신자들은 말씀을 직접 접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1516년 에라스무스가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출간하며 ‘잃어버린 책’이 세상에 다시 나타났다. 이 책은 종교개혁의 불쏘시개가 되었고, 말씀의 회복은 곧 교회의 회복으로 이어졌다. 스위스 취리히에서는 울리히 츠빙글리가 면죄부 장사를 비판하며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한 설교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때까지 들어본 적 없는 생생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잊혀졌던 성경이 다시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도 말씀이 일으킨 놀라운 일이 있었다. 파리 소르본 대학의 노교수 자크 르페브르는 70세에 이르러 성경의 진리를 재발견하고, 바울 서신들의 라틴어 번역과 주석을 출간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오직 은혜로 구원을 베푸신다”고 외쳤다. 그를 따르던 젊은 제자 파렐은 “모든 것이 은혜일 뿐”이라는 스승의 말을 듣고 회심했다. 그날 이후로 그는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파렐은 거침없고 열정적인 복음 전도자가 되었고, 르페브르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장차 세상을 개혁하실 텐데, 자네는 살아서 그것을 보게 될 걸세”라고 말했다. 이런 말씀이 변화의 바람을 몰고 간 곳이 바로 파리 근교의 ‘모’(Meaux)였다. 브리소네 주교는 성경을 열어 새로운 답을 발견했고, 자기에게 속한 회중을 개혁하기 시작했다. 교황의 교회에서는 들을 수 없던 하나님의 진리를 설교했고, 놀랍게도 왕의 누이 마르가리타가 복음을 받아들였다. 브리소네는 성경을 그녀의 손에 들려주며 말씀을 가까이하게 했다. 르페브르는 신약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일반 민중들이 직접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했고, 그 역시 ‘모’에서 활동했다. 파렐도 그곳에 와서 복음을 열심히 전했다. 직조공, 농부, 포도 재배자들 모두가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서로 이야기했다. 교회가 바뀌었고, 사람들의 삶이 바뀌었다. 성경이 실제로 그들을 새롭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성경을 믿는 신앙으로 개종한 이들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는 ‘모’의 우물을 마셨다.” 이 표현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생명의 말씀이 실제로 그들의 영혼을 적셨고, 삶을 변화시켰다는 고백이었다. 그들에게 성경은 선택적인 신앙의 참고서가 아니라, 삶의 중심이자 방향이었고, 사랑이자 능력이었다. 그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시작했고, 그 결과 교회는 다시 교회가 되었고, 신자는 다시 살아 있는 신자가 되었다. 말씀이 빠진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고, 살아내는 공동체만이 참된 교회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중심이 될 때, 이제는 더 이상 세상의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사람의 삶을 이끌어 가게 된다. 말씀은 단순히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새롭게 빚어낸다. 르페브르가 말한 “모든 것이 은혜일 뿐”이라는 고백은, 말씀이 인간의 자랑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주권만을 드러낸다는 믿음의 고백이었다. 오늘 우리는 다시 말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디지털 미디어와 소셜 네트워크가 우리의 귀를 어지럽히는 이 시대, 우리는 다시 ‘모의 우물’을 파야 한다. 말씀을 가까이하는 사람,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순종하는 사람만이 이 혼탁한 세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 교회는 다시 말씀이 중심이 될 때에만 진짜 교회로서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다. ‘모의 우물’에서 일어난 말씀의 기적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도 말씀은 살아 있으며, 듣는 자에게 생명을 주고, 따르는 자의 삶을 새롭게 한다. 우리가 다시 그 우물을 마신다면, 우리 안에서 시작된 개혁은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까지 번져 나갈 것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 119:105) 그 등불을 다시 손에 들 때, 우리의 길은 다시 생명으로 연결된다. ‘모의 우물’을 마신 이들처럼, 오늘 우리도 말씀을 마시고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김경헌 목사] 땅의 소산(창세기 4:3)

완전한 아벨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 하셨다. 주님은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다. 날마다 죽으라고 하셨다. 이는 날마다 원망이 도사리고 있음을 뜻한다. 시도 때도 없이 원망이 내 속에서 고개를 들기 때문이다. 사탄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라 하신 말씀처럼, 성도의 신앙과 교회 생활 속에서 언제나 틈을 노린다. 원수 마귀는 교회 안에도 가라지를 뿌린다(마13:26-29). 그러니 범사에 감사할 일만 있을 수 없고, 원망거리가 늘 있게 마련이다. 주님의 명령은 바로 이 현실을 향한 해답이다. 원망을 이기는 길은 원망에 대하여 내가 죽는 것이다. 한 번 원망을 들으면 한 번 죽고, 두 번 들으면 두 번 죽어야 한다. 그렇게 죽지 않으면 원망의 친구가 되고, 결국 원망의 숙주가 된다. 교회에는 여러 직분이 있지만, 원망을 가장 많이 듣는 직분이 목사와 사모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누구보다 많이 죽어야 한다. 장로와 집사 또한 교회의 여러 일 속에서 원망을 듣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더 많이 죽어야 한다. 교회 안의 원망 앞에서 자신이 제물이 되어 죽을 때,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보존된다. 아벨이 가인의 원망에 대해 죽음으로 제물이 되었듯이, 오늘의 중직자들은 아벨의 뒤를 따라 교회를 위한 제물이 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교회를 보존하시기 위해 택하신 자들이 오히려 원망의 주동자가 될 때, 하나님은 그 교회를 위하여 진노하시고 징계하신다. 우는 사자나 가라지가 원망하는 것은 당연하나, 교회의 중직자들이 그 원망에 미혹되어 스스로 원망할 때 하나님은 심각하게 개입하신다. 모세는 고라와 무리들에게 “하나님이 너와 네 모든 형제 레위 자손으로 너와 함께 가까이 오게 하신 것이 작은 일이 아니어늘… 아론은 어떠한 사람이관대 너희가 그를 원망하느냐”(민16:10-11)고 책망했다. 모세는 그들의 원망을 여호와를 거스르는 일이라 했다. 고라와 250명의 지도자들의 원망은 하나님께서 주신 제사 직분, 곧 예배의 사명에 대한 원망이었다.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일을 세상적 서열로 본 것이 문제였다. 직분은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다. 제사와 예배의 직분을 인간의 기준으로 바라볼 때, 그것은 곧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이 된다. 성경이 말하는 장자권은 단순한 혈통이 아니라, 메시아를 바라보는 신앙과 예배의 권세를 의미한다. 장자권은 곧 제사권, 예배권이다. 구약의 족장들에게 주어진 장자권의 시험은 모두 예배와 관련된 믿음의 난관이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과 이삭, 이삭에게는 에서와 야곱, 야곱에게는 요셉과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인간적인 서열과 감정을 넘어서는 믿음을 보였다. 눈이 어두운 이삭이 “믿음으로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히11:20)라고 한 대로, 장자권은 혈육의 질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계승되는 것이다. 야곱은 형의 분노를 피해 도망해야 했지만, 결국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믿음을 잇는 자가 되었다. 요셉과 에브라임을 장자로 인정한 그의 결정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믿음으로 가능했다. 이처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모든 여정은 장자권, 곧 예배권의 계승이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조상들의 길을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장자로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인처럼 원망하며 예배의 본질을 거스르는 길을 갔다. 성경은 인류의 시작에서부터 이 장자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구약은 완전한 장자이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마무리되고, 신약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그 장자권을 계승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그러므로 오늘 교회와 성도는 예배를 지키고 계승하는 일에 부름 받았다. 예배를 잘 드리고, 예배를 잘 지켜내는 것이 곧 장자의 사명이다. 이 사명은 자기부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받으신 아벨의 제사는 자기부인의 제사였다. 가인의 제사는 자기 십자가가 없는, 자기를 부인하지 않은 예배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벨을 받으시고 가인을 받지 않으셨다. 예배는 언제나 가인과 아벨로 나뉜다. 가인과 같은 자는 자기주장을 세우고, 아벨과 같은 자는 죽는 순간까지 자기부인으로 십자가를 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자기부인의 완성이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2:24) 죄 없으신 주님이 죄인으로 죽으셨다. 그분의 죽음이야말로 자기부인의 최고봉이다. 장자권의 계승은 바로 이 자기부인의 완성이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자기를 죽이는 자리이며, 십자가에 완전히 못 박는 현장이다. 결국 가인의 제사는 땅의 소산이었고, 아벨의 제사는 하늘의 소산이었다. 하나님은 땅의 소산을 받지 않으시고, 하늘의 소산을 받으신다. 오늘도 예배는 땅과 하늘, 가인과 아벨로 나뉜다. 가인과 같은 자들은 자기주장을 앞세우고, 아벨과 같은 자들은 침묵 속에 자신을 부인하며 죽는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 곧 자기부인의 제사를 드려 아벨의 뒤를 잇는 믿음의 장자들이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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