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0-02(수)

통합, 김영걸 신임 총회장 추대 및 주요 내용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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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서울-인천 제4차 로잔대회, 개막

2024 서울-인천 제4차 로잔대회가 지난 9월 22일(주일), 인천 송도컨벤시아에서 개막했다. 로잔 운동은 ‘온 교회가 온전한 복음을 온 세상에 전하라(Calling the Whole Church to Take the Whole Gospel to the Whole World)’는 세계 복음화를 위한 비전으로 시작 돼, 첫 로잔 대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복음 전도의 우선성을 확고히 표방했다. 첫 대회가 열린 장소인 ‘로잔(Lausanne)’이라는 도시의 이름은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용어가 됐고, 거대화된 조직 대신 ‘운동(movement)’으로 이어지면서 세계 복음주의를 이끌고 있다. 제2차 로잔대회는 1989년 필리핀 마닐라에서 170개국 3,000여 명이 모였고,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197개국 4,700명이 모인 제3차 로잔대회가 각각 이어졌다. 첫 로잔대회 50주년을 맞아 열리는 이번 대회에는 목회자와 선교사들뿐 아니라 기업인과 정치인, NGO, 예술가, 법률가, 교육자, 환경운동가 등 222개국에서 각 분야 복음주의 지도자 5천여 명이 참여하고 온라인으로 5천여 명이 참여한다. ‘교회여, 함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나타내자(Let the Church Declare and Display Christ Togeth)’를 주제로 열린 이번 제4차 로잔대회의 개회식은 싱가포르의 사이먼 서우(Simon Seow, CRU 선임 디지털 전략가 / Indigitous 공동 설립자), 카메룬의 델핀 판폰(Delphine Fanfon, Me4Real International CEO / 아프리카·아시아 LeadersSource 지역 디렉터)의 사회로 진행됐다. 문화체육관광부 제1차관이 대독한 축사를 통해 윤석열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자유의 가치로 눈부신 번영을 이룬 길에는, 한국교회 성도들의 뜨거운 기도와 자유를 향한 정신, 헌신과 봉사가 있었다”며 “세계교회 역시 자유 국가들과 연대해 대한민국을 든든히 해 줬다. 국제사회와 협력해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키고, 인류가 직면한 도전을 극복하며 평화와 번영의 길을 열어가겠다”고 전했다. 이번 제4차 로잔대회의 ‘서울 선언’(초안)은 “개인이 창조성과 무관하게 젠더를 결정할 수 있다는 개념을 거부한다”며 “상황과 경험에 따라 성 정체성이나 성별 표현이 유동적이라는 주장도 거부한다”는 분명한 입장을 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태어날 때 성이 명확하지 않은 사람들이 중대한 심리적, 사회적 어려움에 처해 왔다”라며 “오늘날 이와 유사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향해 긍휼과 존중으로 응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동성애에 대해서는 “창조주의 선한 설계를 왜곡 하는 것”이라며 죄악이라는 결론에 이른다고 서술 됐다.

[기자수첩] 에반겔리아 박사학위는 무슨 돈으로? (수정)

교단 내 장로를 네 차례 고발한 사건에 이어 이번에는 사장의 업무상 배임 의혹으로 조사가 시작됐다. 지난 9월 24일 고신총회 총회유지재단 이사장 이취임식 후 첫 이사회에서 이같은 결의가 있었다는 전언이다. 지난해 제73회 총회에서 사장연임이 되었을 당시 사장 이력에 ‘2022년 2월 14일 에반겔리아대학교 박사과정 입학(기독교 교육학)’을 추가시키면서 불거진 이 문제는 확인결과 입학시점이 에반겔리아대학교 입학광고가 나간 2022년 1월 15일자를 시작으로 1475호 1501호 145호에 전면광고와 유관해 보인다는 의혹이 한 기독 신문에 의해 제기됐다. 이 모든 광고는 사장이 직접 지시를 했다는 것이다. “한 관계자는 ‘에반겔리아대학교는 재정상태가 힘들어 이렇게 전면광고를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 전면광고료는 1회에 5백만 원이라는데 지금까지 나간 금액만 2천만 원을 넘어섰지만 확인결과 광고료는 현재까지 입금이 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지난 9월 24일 74회기 첫 이사회가 구성되면서 이 문제가 감사에 의해 제기됐고, 조사는 언론분과에 맡겨졌다고 한다. 에반겔리아대학과 박사학위 과정에 대한 의혹은 본인이 입학금 송금내역이나 영수증 등으로 소명할 수 있는 확실한 물증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이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닌 형사사건으로 확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소송문제 등의 여러 의혹에 대해 묵묵부답이었던 종전 이사회 이사들이 6명이 대거 교체되면서 새 인물들로 구성되고 첫 이사회에서 나온 문제여서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한편 교단지 언론사의 기자(편집국장 대행)가 교단 장로를 명예훼손으로 네 차례 고발(S경찰서, 창원지방검찰청, 부산고등검찰청,부산고등법원)하고 모두 무혐의와 기각 처분을 받는 사건이 진행되었고, 74회 고신총회에서 언론사 관리감독을 책임지는 유지재단 감사보고에서 이 문제가 제기됐지만 “조사위원회를 내자”는 안도 유야무야 됐다. 고소당사자는 편집국장대행에서 내려오고, 관리책임자인 사장에게는 아무런 인사조치도 없어 솜방망이 처벌이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흘러나온 바 있다. 고신총회가 정치적 이해 관계로 묵인하느냐 치리회 기능이 살아있느냐는 이번 사건의 진행방식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김현주 국장 ※ 본 기사가 나간 후 여러 반향이 있음을 밝힙니다. 기자수첩은 기자들이 취재현장에서 일어나는 폭넓은 일들을 듣고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란입니다. 본 기사가 나간 후 단어 하나로 여러 얘기가 오가는 걸로 확인했습니다. '결의한 바는 없다'는 말이라고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취재 당시 관계자에게 들은 바로는 '결의'라고 표현했으나, 이야기만 되었다는 식으로 수정하여 전해왔음을 밝혀 둡니다.

모 목사, 횡령과 직권 남용으로 정직 6개월

부산의 모 교단 산하 A노회가 노회 재판국을 열어 노회 산하 B교회 담임목사에게 ‘횡령’과 ‘직권남용’을 이유로 정직 6개월을 선고 했다. A노회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B교회의 담임 목사가 “교회 부속건물의 임대료 및 관리비 명목으로 7년 2개월 동안 1,450만원을 받았는데 이 사실을 교회에 알리지 않고 임의로 관리하고 지출하였으며 코로나 지원금 잔액 135만원도 재정부에 반환하지 않고 임의로 지출하였다. 비록 사무 간사를 통해 관리해 왔고, 선한 목적을 위해 사용했다고 하나 이는 횡령에 해당하며 교회법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판결했다. 또 “직원 퇴직금을 당회와 제직회의 허락 없이 연금 상품에 가입하고, 당회나 제직회가 알지 못하는 통장을 개설하고 관리하였으며, 회계 전산 프로그램에 접근하여 항목을 조정하고 1,875,100원 송금을 지시하는 등 목사로서 본연의 직무를 벗어나서 교회 재정관리 전반을 직접적으로 관리하였는데 이는 담임목사로서 직권을 남용한 일”이라고 판시했다. 노회 재판부는 이외 ‘소송당사자 관계인 피고가 두 번의 당회를 소집하고, 임시당회장을 청한 것’과 ‘(교회 부속건물의 임대료 및 관리비)통장을 임의로 해지 한 것이 증거인멸의 의도가 없다고 보기 어렵다’며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목사라는 점을 감안 할 때 중벌을 면키 어렵다고 판단했다. 다만 횡령한 대부분의 금액을 선한 목적으로 사용한 점과 늦게라도 직원 퇴직금을 지급하기 위해 187만원을 교회통장에 입금한 점, 그리고 선처를 요구하는 220명의 자필 탄원을 고려하여 주문(정직 6개월)과 같이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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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김영걸 신임 총회장 추대 및 주요 내용 정리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총회장 김의식 목사, 이하 통합)이 지난 9월 24일(화), 창원시 성산구 양곡교회(지용수 목사)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부흥하는 교회’를 주제로 제109회 총회를 개최했다. 이날 총회장 김의식 목사의 총회 참석 여부에 많은 관심이 쏟아졌으나 김의식 목사는 개회예배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하지만 개회 직전 단상에 등장해 총대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일부 총대는 단상 앞으로 나와 항의하고 몇몇 목사는 단상에 올라가 김 목사가 발언할 수 없도록 제지하기도 했다. 또 일부 총대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려와’를 연신 외치고 일부 목회자 단체들의 지침대로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부르며 항의했다. 부총회장 김영걸 목사는 “총회장이 개회 선언을 하지 않으면 총회 개회를 할 수 없다”며 총대들을 진정시키고 “개회 선언 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당부 했으나 총대들은 아랑곳 없이 ‘내려와’를 외쳤다. 실랑이 끝에 마이크를 잡은 총회장 김의식 목사는 ‘총회 개회 선언’과 함께 모든 회무 절차 진행을 부총회장 김영걸 목사에게 위임하겠다고 전한 후 의사봉을 두드리고 단상에서 빠져 나갔다. 소요 끝에 개회한 회무에서는 부총회장 김영걸 목사를 신임 총회장에 추대하고 3파전으로 치러진 목사부총회장 선거에서는 여천교회 정훈 목사가 2차 결선 끝에 당선 됐다. 장로부총회장은 윤한진 장로가 단독 후보로 나와 무리 없이 당선 됐다. 신임 총회장으로 선출된 김영걸 목사는 취임사를 통해 “우리는 지금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할 필연적 시대적 사명을 가져야 합니다. 이번 대한예수교 장로회 109회 총회는 그렇게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총회가 될 것입니다.”라며 “위기가 기회가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이 필요합니다. 저부터 하겠습니다. 여기 계신 총대님들부터 함께 하십시다. 100년 후 한국교회는 세속화의 위기 속에서 아름답게 새로운 부흥의 시대를 맞이했다고, 오늘을 기억하기를 소망합니다.”라고 전했다. 통합 총회 헌의안 중 관심을 끌었던 일명 ‘세습금지법’ 폐지에 대한 안건은 지난 회기 1년간 헌법위원회가 연구하는 것으로 결정 됐었다. 이번 회기에서는 헌법위원회가 세습금지법의 시행과정에서 폐해가 발생했다며 폐지 청원을 올렸으나 반대 661표, 찬성 370표로 부결됐다. 헌법위원회는 “교회 간 합병 및 교단 탈퇴 등의 방법으로 사실상 법 적용이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현재까지도 이와 관련한 교단 내에 논란과 갈등을 야기하고 있어 이를 치유하고 개교회의 독립성과 교인들의 대표자 선정에 관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삭제 개정안을 제출한다”라고 청원 이유를 밝혔으나 ‘교회의 사유화’를 우려하는 총대들의 압도적인 반대가 많았다. 또 통합 총회는 “총회장·부총회장 후보자는 동성애, 동성결혼, 젠더주의 등에 반대하는 입장을 서면으로 의무 제출해야 한다.”는 신설 규칙이 통과됐다. 이와 관련, 총회 산하 7개 직영 신대원 입학 및 취확 희망자와 목사 고시 응시자들도 동성애 관련 반대 입장을 서면으로 의무 제출해야 하는 개정안도 신설됐다. 규칙부는 “학교의 정관이기 때문에 총회가 개정할 수 없고 각 학교의 이사회에서 가능하다. 각 학교가 정관 개정 후 총회 보고하면 규칙부가 다시 판단하겠다”고 설명했다. 한편, 숭실대 이사장 자격으로 참석한 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는 “전 세계적인 성오염으로부터 한국교회와 다음세대를 지킬 수 있는 골든타임이다. 한국교회가 힘을 합쳐 기도해야 한다”며 “지금 백석총회와 합동총회는 물론이고 고신과 침례도 결의했다. 통합총회의 참여를 부탁드린다”고 통합교단의 ‘한국교회 200만 연합예배’ 동참을 촉구했다. 오 목사는 현장에서 연합예배 참여 결의를 청원했고, 총대들은 한목소리로 찬성의견을 모았다. 예장 통합 총회장 김영걸 목사는 “세부적인 방안은 임원회에서 결정하겠다. 적극 동참할 것”이라고 밝혔다.

합동, 김종혁 신임 총회장 선출 등 주요 내용 정리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총회장 김종혁 목사, 이하 합동)가 지난 9월 23일, 울산 우정교회에서 전국 164개 노회의 총대들이 모인 가운데 개회했다. 합동 총회는 회무를 통해 울산 명성교회 김종혁 목사를 신임 총회장으로 선출했다. 신임 총회장 김종혁 목사는 “장로교 정치를 실현해 변화와 성숙을 이루고, 성경적 가치관을 따라 대사회적 책무와 시대적 사명을 감당 하겠다”면서 “총회장으로서 믿음의 선대들이 일구어놓은 총회 전통을 계승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또 “총회 장학재단을 설립해 수년 내 300억 장학기금을 마련해 다음세대 일꾼을 길러내고, 총회 산하 교육을 통해 일체와 연합을 잇기 위한 미래교육을 설립하겠다”고 총대들에게 약속했다. 합동 총회는 총회 세례교인헌금 결의를 통해 세례교인 1인당 서울지역은 1만원에서 1만1천원, 도시지역은 7,000원에서 8,000원으로 인상했으며, 농어촌지역은 현행대로 5,000원을 유지하기로 했다. 장로 총대의 은급기금 의무가입 면제하기로 결의하며, 이로 인해 부족해지는 기금은 세례교인헌금 수입의 5%에서 6% 인상으로 보전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가장 관심이 쏠렸던 여성 사역자에 대한 강도권 또는 목사 안수에 대한 건에 대해선 여성사역자특별위원회TFT가 △여성사역자들의 실질적 처우 개선 연구 △여성사역자의 강도권 및 강도사고시 허락과 관련한 헌법 개정 청원 △여성사역자특별위원회 상설위원회 전환 등 3가지 사항을 청원했다. 보고를 받은 총대들은 강도권과 성례권이 없는 여성 사역자들이 교단을 떠나는 실정에 공감하고 이에 경각심 또한 나타냈으며, 그 결과 “여성사역자들의 실질적 처우 개선”에 대해선 만장일치 가결이 나왔다. “여성사역자의 강도권 및 강도사고시 허락과 관련한 헌법 개정 청원”은 정치부가 여성사역자특별위원회TFT가 보고한 내용대로 ‘허락’ 할 것을 보고하고 총대들이 동의했다. 여성 사역자 강도권은 이번 회기 동안 여성 강도권과 관련된 헌법 개정안이 만들어져 내년 제110회 정기총회에 보고, 개정안이 수용된다면 노회 수의 등 아직 여러 절차가 남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빠르면 제111회 정기총회 이후에는 여성 사역자들에게도 강도권이 부여될 것으로 전망한다. 이로 인해 여성 사역자들에게도 강도사의 호칭을 부여할 순 있게 됐다. 또 다른 관심사였던 목회자 정년 연장안은 치열한 격론 끝에 표결을 거쳐 부결 됐다. 올해 총회에서는 목회자 정년을 73세 또는 75세로 연장하자는 헌의안과 65세로 단축하자는 헌의안을 21개 노회에서 상정 했다. 농어촌·미자립교회의 현실적 어려움과 정년 이후 목회자들의 교단 탈퇴 등을 근거로 정년 연장을 찬성하자는 측과 교회의 젊은 역동성과 추후 교회 분쟁 가능성 등을 이유로한 반대 의견이 충돌하며 오랜 시간 토론을 거친 합동 총회는 거수 투표 후 반대가 많아 부결되며 현행 70세 정년이 유지된다. 그 밖에 총회 상비부 21개를 16개로 축소하고 상설위원회도 6개 줄이는 기구 개편 결의와 교회와 성도들의 상황에 맞게 주일에 위임·임직 등의 예식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또 강도사 고시 시험 과목 변경도 있었다. 필수로 제출한 논문은 ‘AI 논문 표절’이 빈번하다는 지적으로 논문 제출을 논술 시험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고시부는 헌법 정치 제14장 4조 고시 종목에 논문, 주해, 강도로 명시돼 있는 관계로, 논문을 논술로 대체해 평가할 수 있도록 총회에 청원하고 총대 다수의 결의로 논물을 논술로 대체하기로 했다.

합신, 제109회 총회 성료

대한예수교장로회(합신) 총회(총회장 변세권 목사, 이하 합신)가 지난 9월 24일(화)부터 26일(목)까지 강원도 정선 하이원 팰리스호텔에서 제109회 정기총회를 개회했다. 회무에 앞서 열린 개회예배는 총회장 변세원 목사의 인도로 시작해 부총회장 양일남 장로가 대표로 기도하고 서기 박혁 목사가 성경봉독한 후 부총회장 박병선 목사가 ‘내 양을 먹이라’(요 21:15-17)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박병선 목사는 말씀을 통해 “때론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나님이 부르시고 세우셨으니 강한 손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고 감당할 힘과 능력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주님의 말씀에 붙잡혀 순종함으로 나아가자”라고 전했다. 설교 후 변세권 목사의 집례로 성찬식을 갖고 증경총회장 박병식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2부 회무에서는 목사·장로 총대 224명 참석을 확인 하고 변세권 목사가 개회선언 함으로 시작했다. 이날 옵서버 노회였던 태평양노회가 정회원으로 자격을 인정받아 합신 총회 20번째 노회로 등록됐다. 별도의 후보 등록 없이 현장에서 모든 총대가 후보가 되는 합신 총회의 임원 선거에서는 직전 부총회장 박병선 목사가 192표를 얻어 신임 총회장에 선출되고 목사부총회장은 3차 투표 끝에 121표를 얻은 김성규 목사가 선출 됐다. 장로부총회장은 165표를 얻은 장대윤 장로가 선출됐다. 한편, 합신 총회가 발표한 교세 통계에 따르면 합신의 총 교회수는 1천 개로 지난 해 보다 3개 교회 증가했으며 전체 교인 수는 12만 8천 1백 11명으로 작년 보다 300여 명이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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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이승만의 기독신앙과 제임스게일 선교사 이야기

영화 건국전쟁에서 이어지는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재조명이 더욱 확산되고 있다. 그동안 정치적 공과(功過)가 무시되고 독재 부정선거의 역사에 매몰되어 왔다. 이로 인해 건국의 역사까지 국민담론애서 우왕좌왕해 왔다. 이제 정확한 역사 이해를 위한 국민정서가 확산되면서 이승만 기념관 건립 또한 추진되고 있어 고무적인 일이다. 물론 반대적 의견도 있겠지만 나라 최고 지도자에 대한 정확한 역사이해를 통해 나라의 미래 그리고 비전을 세워나가는 일이야말로 중요한 일이다. 필자는 2024년 10월을 맞으면서 특히 이승만의 기독신앙에 깊은 관계성을 품고 있는 제임스 게일 선교사 이야기를 함께 풀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겨난다. 역사 기록을 읽고 종합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서 태어난 출생기록을 두고 있다. 어릴 때 한성부로 이주한 이승만은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한학으로 과거급제의 꿈을 꾸고 살았다. 망해가는 조선의 역사격동기에 과거등급의 기회가 없었다. 20세 때 아펜젤러 선교사가 세운 배제학당에 입학한게 큰 역사의 반전이다. 한때 신학문에 불만을 가지기도 했다. 영어에 탐닉하면서 서구 신학문에 앞서나갔다. 이때 무능한 조선 왕정에 저항감을 품고 여러 주장으로 주목을 받았다. 당대 선각자 이상재 선생을 따르며 나중에 입헌군주제의 만민공동회 운동에 참여하면서 체포돼 한성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때 제임스 게일선교사와 운명적 만남으로 국가 최고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 첫걸음이 된다. 이승만은 영양대군 16대손의 전주 이씨인데도 조선의 썩은 왕조로서는 나라가 망할 것을 예언하고 강한 진보적 주장을 쏟아냈다. 1895년 배제학당을 졸업하고 민주공화정 이념의 만민공동회 적극 활동으로 1898년 한성감옥에 수감된다. 여러 동지들과 한성감옥에 있는 동안 게일선교사의 복음 활동이 왕성했다. 게일선교사는 기라성 같은 미래 지도자들을 모두 감옥에서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주로 출옥과 함께 연못골교회 지금의 연동교회 교인으로 동록케 했다. 이승만은 늦게 1904년 러일전쟁과 함께 출옥하기까지 게일선교사와 깊은 교분을 가졌다. 옥중에서 함께 기도하면서 사실상 이승만과 사역을 함께했다. 옥중 진리학교 옥중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게일선교사는 1863년 캐나다서 출생 1884년 토론토대학 입학하여 학생으로서 1888년2월15일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부산에 들어온다. 곧 황해도까지 가서 선교역사의 소래마을에서 서상윤, 이창직과 함께 조선어 공부를 하면서 한글 한국역사문화에 매료되어버린다. 인문학 천재의 기질에 따라 게일은 한국인보다 한글을 더 사랑하고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욱 사랑하는 선교사가 되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한글로 번역하고 구운몽을 영어로 번역하는 등 조선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데 온몸을 던졌다. 게일은 옥중 이승만을 주목했다. 거장은 거장을 알아봤다. 장차 조선을 이끌 지도자가 될 것을 예상하고 1904년 이승만이 출옥하자 미국 유학을 권했다. 이승만 또한 인문학 천재 게일선교사를 멘토로 하여 미국유학을 알선하도록 했다. 이승만이 워싱턴대학 하버드 대학 유학길을 터주고 현지 학자금지원 받을 수 있는데도 도움을 줬다. 이승만이 미국서 유학중 게일과 편지소통을 계속 했다. 그리고 1910년 귀국 후 이승만이 YMCA에 일할 수 있도록 게일선교사가 주선을 하기도 했다. 청년 이승만이 조선말 격동기 그리고 일정시기 독립운동에 참여하는데 게일선교사가 밑자락을 깔았다. 중요한 것은 이승만이 성령을 받고 회심하고 기독교 청도교 정신으로 대한민국 건국의 자리를 깔아나가는데 제임스 게일 선교사의 풍성한 이야기가 있다. 게일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칼빈주의 복음훈련을 받은 선교사였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건국이념을 깔아내는데 하나님의 대역을 했던 것이다. 10월7일부터 창원문화원에서 경남바른가치수호연합회 주최 이승만 사진전이 열린다. 이승만의 역사 특강행사도 열린다. 그리고 오는 10월9일은 578돌 한글날이다. 이승만과 게일선교사의 위대한 복음역사를 알게하는 하나님의 시간이 아닐까.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 하느님인가, 하나님인가?(1)

I. 서언(序言) 어떤 용어이든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말들의 유래는 한자이거나 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것이다. 이는 우리 기독교 용어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용어는 원래 구약은 히브리어, 신약은 헬라어로 되어 있었지만, 이를 각국의 언어로 번역하였고, 우리 한국교회의 용어는 주로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영어권 용어들이 많다. 또한 이를 전통적인 한자로 번역하다 보니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기독교 용어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용어들이 신학적으로나 한글의 문법적으로 적절하지 않은 경우들도 많다. 이런 이유로 때로는 그 적절성을 두고 논란이 일어나는 경우들도 많다. 그중의 하나가 지난 호에서 언급한 귀신 신(神)자였고, 또 이번 호에서 논하고자 하는 하나님과 하느님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본 호에서는 의미는 거의 같으나 사용은 다른 이 두 용어의 유래와 그 적법성을 논하고자 한다. 먼저 이하의 내용들은 서울 장로회 신학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김중은 교수의 “하느님인가, 하나님인가?”와 기타 몇 가지 자료를 참조하면서 필자의 소견을 더하였음을 밝혀 둔다. II. 두 용어의 국어 사전적 의미 두 용어 다 어원은 같으며, ‘하늘’의 옛말인 ‘하ᄂᆞᆯ’에 ‘-님’이 더해져 나타났다. 본디 지역을 가리지 않고 ‘하ᄂᆞ님’이라고 하였으나 아래아(ㆍ)가 소멸함에 따라 '하나님'과 ‘하느님’으로 분화한 것이다. ①하느님 1)범 종교적-신앙의 대상. 인간을 초월한 위력을 가진 절대자로서 명명(冥冥)한 가운데 존재하며 우주를 창조하고 주제(主帝)하며 불가사의한 능력으로 인간의 善과 惡을 판단하고, 화복(禍福)을 내리는 존재. 2)가톨릭- 전지 전능하고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로 다스리는 유일한 주제자이다. ②하나님: 하느님과 어원이 같으며, ‘하늘’의 옛말인 ‘하ᄂᆞᆯ’에 ‘-님’이 더해져 나타났다. 원래는 구분없이 ‘하ᄂᆞ님’이라고 하였으나 아래아(ㆍ)가 소멸함에 따라 ‘하나님’과 ‘하느님’으로 분화되었다가 개신교의 용어로 정착됐다. III. 한글 성경 번역사에서 본 하나님의 명칭의 유래 한국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신(神)의 명칭 중에 하느님은 가톨릭과 정교회, 성공회 등이고, 개신교는 하나님을 사용한다.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그 유래와 의미를 논하면 다음과 같다. 1. 1882년 스코틀랜드 출신 선교사이며, 한글 띄어쓰기를 최초로 도입한 이는 존 로스이다. 그가 번역한 최초의 한글 성경인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서”에서 처음 사용한 神의 명칭이 바로 ‘하늘의 님’이란 뜻의 ‘하느님’이었다. 이는 당시 중국어 성경이 상제(上帝)였던 것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에 큰 의미가 있다. 그다음 1883년부터는 ‘하나님’으로, 1887년부터의 발행에서는 공식적인 명칭으로 ‘하나님’이라고 했다. 2. 1884년 이후 언드우드 등의 본격적인 선교활동과 성경번역 활동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이는 그동안의 로스와 이수정의 역본이 개인적인 성격이 강했다면, 1893년 ‘공인번역위원회’의 출범 후부터는 공식적인 역본이 되면서 ‘하ᄂᆞ님’이라고 했다. 하지만 언드우드는 위원으로서 ‘하ᄂᆞ님’을 반대하고 ‘샹뎨, 샹쥬, 턴쥬, 챰신’등으로 표기했으나 1906년 런던의 영국성서공회가 한국어 성경에는 ‘하ᄂᆞ님’을 사용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대해서 위원이었던 ‘게일’ 선교사는 ‘하ᄂᆞ님’의 의미는 ‘하늘의 주’(主)란 의미와 ‘하나’와 ‘크다’란 의미로 ‘유일하신 창조주’란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했다. 이러한 명칭으로 계속 되어오다가 1938년 출간한 “셩경개역”에서 ‘개혁철자법’을 적용해서 ‘하ᄂᆞ님’을 하나님으로 표기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IV. 한글 성경 번역사에서 본 하느님의 명칭과 결어(結語) 이상에서 논한 대로 하느님과 하나님의 명칭은 가톨릭의 ‘천주’와 함께 같이 사용했으나, 대한성서공회가 1977년 구교와 신교가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성서에서 ‘천주’도 ‘하나님’도 아닌 제3의 어휘인 ‘하느님’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당시의 공동번역성서를 채택한 천주교와 한국 성공회와 한국 정교회도 '하느님'을 표준 용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수정의 神자에 대한 논란이나 “하느님”과 “하나님”의 논란 등은 결국 어원적으로는 동일하기 때문에 이러한 논쟁은 불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다음호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하기로 하겠다.

[오성한 목사] 나에게 능력이 있다!

이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안에서부터 정복한 모습을 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요5:19)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다. 우리와 동일한 사람으로 오셨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표적과 기사를 베풀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셨다. 믿음으로 하신 것이다. 믿음으로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먼저 보셨다. 보신 것을 그대로 따라 하셨다. 하나님의 뜻은 복잡하지 않다. 단순하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을 먼저 보신 후 행하셨다. 우리도 먼저 보여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충격을 주기 전에 먼저 내가 충격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먼저 보면 그렇게 된다. 우리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먼저 본다면 믿음과 담대함이 말씀으로 풀어지게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 믿음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는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육의 눈에는 안 보여도, 영의 세계는 현실과 동일하다. 지금도 우리 곁에 천사들이 즐거워하고 있다. 하나님의 보좌는 우리 몸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임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 살고 있다. 나는 자주 자주 이 세계를 그려 본다. 실재이기에 믿음으로 실재를 본다. 바른 정체성의 회복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임마누엘의 정체성은 필수다. 영원히 함께하시는 성령의 사람인 바른 정체성 말이다. 어떤 것을 명할 때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생긴다. 당연히 생겨야 된다. "아, 내가 부족한데 될까"라는 생각이 없어지고, 오히려 분명한 확신이 온다. 의심을 품고 기도하는 것은 바다 물결이 요동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응답을 기대하지 말라고 했는데 온전한 복음을 만나면 의심이 사라져 버린다. 너무 간단한 것 같지만 사실이다. 기도하면 기도한대로 모든 것이 움직이게 되어 있다. 복음이 믿어지면 온전한 정체성과 더불어 자녀에게 주신 권세를 알게 되고, 예수 믿는 것은 실재가 된다.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어 놓으신 것을 분명히 믿고, 받아들이게 되면 정체성이 분명해 지는데 바른 정체성은 우리를 능력 있는 크리스천이 되게 한다. 십자가 부활로 이루신 온전한 복음의 소식을 얻은 사람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을 보고 행한다. 이 땅에서 예수를 믿고 능력 있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다. 꼭 그렇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정체성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자녀가 아닌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렇지만 우리가 어떤 자녀인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이 땅에서 삶이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자녀에게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을 보라고 하신다. 보고 너도 따라하라고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삶이다. 그렇다면 이제 바른 정체성을 갖고, 능력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에겐 엄청난 능력이 있다. 예수능력은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의 능력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되면 이 땅의 삶이 아주 명랑하고, 밝고, 사회에 나가서도 주눅 들지 않고,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원활해진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정체성이 좋은 어린이는 인사도 잘한다.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에게 친구처럼 다가온다. 명랑하다. 담대함이 있다. 밝은 얼굴이 있다. 세계적인 글로벌리더가 될 수가 있고, 뛰어난 리더십을 가지고 세계를 이끌어 갈 수 있다. 이것은 ‘공부를 잘하느냐, 못하느냐’와는 다른 문제다. ‘많이 가졌는가, 가난한가?’와도 다른 문제다. ‘지금 내가 부자인가, 가난한가?’와는 다른 이야기다. 잘 살고 못 살고가 정체성의 기준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이 필요하다. 그래야 이미 주신 능력의 삶을 살 수 있다. 자신이 자신을 아는 정체성과 남들이 나를 알아주는 정체성은 항상 변한다. 시간과 환경에 따라 항상 바뀐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는 것을 기반으로 둔 정체성은 흔들리지 않는다. 날이 갈수록 더욱 확고해 지고 믿음이 더 생긴다. 감사와 감격의 삶을 살게 하고, 승리의 깃발을 흔들며 살게 한다. 거듭난 정체성을 말한다.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아는 정체성이다. 항상 힘이고 능력이 있다. 정체성을 바로 알고 확신할 때 능력 있는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새롭게 새우신 새 언약을 통해 내가 하나님과 하나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바른 정체성이 더욱 확고해 진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통해서 새 언약을 맺으셨다. 바른 정체성을 갖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새 언약의 비밀을 몰라서 그렇다. 새 언약의 비밀을 깨달으면 어떤 일 앞에서도 하나님의 완벽한 인도를 보고 담대해 진다. 어떤 질병 앞에서도 담대해 진다. 질병 앞에서 ‘어떻게 할까’가 아니다. 가난 앞에서도 담대해 진다. 항상 자유를 누린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실재가 된다. 기쁨과 감사와 환희가 마음에서 항상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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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일상사, 세계관, 그리고 신앙의 문제

지난 호에서 문화 인류학자 마가렛트 미드(Margaret Mead)가 1959년에 제작한 영화에 나오는 인상 깊은 장면 즉, 일본과 캐나다의 아기 목욕 문화에 대해서 잠시 언급한 바 있다. 이 두 가정의 장면에서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가치관이 표현되어 아이들에게 전달된다. 영화에 나오는 일본 가정의 경우를 먼저 생각해 보자. 여기서는 의존성, 온화함, 자기 희생과 같은 가치관이 두드러지게 표출된다. 반면, 캐나다 가정의 경우는 독립성, 자기 주장 및 자신의 관심사와 유익과 같은 가치관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관들 뒤에는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종교적 신앙이 기초해 있음을 추적해 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불교, 신토주의, 그리고 유교적 신앙의 결합이 가족과 국가의 통합적 정체성에 대한 믿음을 생겨나게 한다. 개인은 집단의 충성된 구성원이 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조화는 이타심과 유순함에서 생겨난다. 이기심, 독립심, 그리고 자기 주장과 같은 가치관은 이러한 공동체의 조화를 파괴한다고 믿는다. 캐나다에서는 계몽주의적 인본주의로 물들어진 기독교를 통해 하나님은 개인을 돌보시며, 인류의 본성과 운명은 자율적인 각자 개인의 성취에 달려 있으며, 개인의 자기 유익과 관심이 이와 같은 성취를 가능하게 하는 자연스러운 수단이라고 믿는다. 일본의 할머니와 캐나다의 어머니에게 왜 그들이 자신들의 특별한 방법으로 아기를 목욕시키는지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그들은 아마도 선뜩 이유를 대지 못할 것이다. 아기를 그런 방식으로 목욕시키는 것은 상식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아기를 목욕시키는 방식이고 지금까지 항상 그렇게 해 오고 있는 방식이라고 말할 것이다. 가치관과 그 가치관 뒤에 숨어 있는 종교적 신념은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가 암묵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어떤 것이다. 이와 같은 가치와 신념은 수년에 걸쳐 우리가 언제나 초점을 맞추는 핵심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서 삶의 한 방식으로 구현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와 신념은 당대뿐만 아니라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에 걸쳐 대대로 전승되고 이어진다. 마가렛트 미드의 영화는 또한 우리가 그 신앙을 완전히 인식하든 인식하지 않든지 간에 종교적 신앙이 우리가 자녀를 양육하는 방식을 포함하여 일상생활의 가장 일상적인 활동을 어떻게 강력하게 지시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종교적으로 영감을 받은 충성심, 의존성, 소속감이라는 동일한 충동은 현대 일본의 여러 회사에서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노동자와 경영진이 경쟁 권력 집단으로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관리자들은 현대 서구 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방식으로 근로자들의 개인적, 사회적, 종교적 필요를 돌보아 준다. 실제로 회사는 기업이라기보다는 확대된 대가족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의존성, 충성심, 소속감이라는 종교적 영감을 받은 가치는 자신들의 관습에 맞게 옷과 헤어스타일을 신중하게 선택하여 함께 찍는 동양 문화의 가족사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가족 구성원들 각자가 자신의 개성과 독립성을 표현하기 위해 옷과 헤어스타일을 선택하는 서양 문화의 가족사진과 대조해 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삶을 모든 면에서 아주 강력한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믿음이라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종교적 신앙이란 실제로 감정적 필요의 투영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은 어린 아이일 때는 아버지가 곁에 있으면 안전하다고 느끼고, 아버지가 없으면 두려움을 느낀다. 그런데 아이가 커가면서 아이는 자신의 삶에 다가오는 불안과 두려움이 때로는 너무 커서 아버지조차도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런 다음 아이는 강력한 대리 아버지 형상을 '하늘로' 투사한다. 이처럼 아버지도 도와줄 수 없을 정도의 불안과 두려움에 대처하려면 인간은 신이 존재한다는 환상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들은 믿음을 성육신이나 삼위일체, 인간의 타락,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과 같은 특정 교리에 대한 믿음이나 지적 동의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견해에 따르면 믿음은 과학적 지식과는 대조가 된다. 과학적 지식은 우리에게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을 제공한다고 생각된다. 반면에 신앙은 의지의 행위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종교적 교리는 과학적 증거에 개방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서 이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4) (민12:11-16)

(민12:15)이에 미리암이 진영 밖에 이레 동안 갇혀 있었고 백성은 그를 다시 들어오게 하기까지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미리암이 고침을 받는 동안 이스라엘의 진행이 멈추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세움 받은 자들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기록은 “미리암이 진영 밖에 이레 동안 갇혀 있었고”입니다. 진영 안에 갇힌다는 표현이 맞습니까? 진영 밖에 갇힌다는 표현이 맞습니까?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집을 떠나면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혹 성도들 가운데서도 교회를 떠나면 자유라고 생각하시는 분 없습니까? 가끔 자녀들은 부모가 출타하면 자유하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교회가 감옥처럼 여겨지는 분은 없습니까? 주일 지키는 것을 감옥 가는 것으로 생각하시는 분은 없습니까? 교회가 세상 속에 갇힌 것이 아니라 세상이 감옥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주일은 6일 동안 세상에 갇혀 있다가 자유를 얻는 날입니다. 성도는 주의 날을 맞아 세상의 감옥에서 특별사면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맛집 찾는다고 정신들이 없는 것 같습니다. 수십 년, 평생을 교회 다니고 교회를 사랑한다면서도 자기 입맛에 안 맞으면 평생을 살아왔던 신앙생활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오늘날 성도들이라고 한다면 너무 과한 표현이겠습니까? 이러니 교회가 세상과 똑같아 져버렸습니다. 오늘날 교회 속에는 애굽 제국과 같은 세상 제국이 세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에 들어와서도 제각기 자기라는 바벨탑을 우뚝우뚝 세우고 있습니다. 자기만의 방법으로 하늘에 닿을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아니 자기만의 방법이 하늘에 닿은 유일한 길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다른 사람들을 현혹하며, 더 높이 바벨탑을 쌓자고 충동질합니다. 바벨탑에 갇히는 결과가 되지만, 더 무서운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임합니다. (창11:9)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말씀을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설교가 들리지 않습니다. 온갖 혼잡한 소리들만 귀에 들립니다. 이 소리에 기우뚱, 저 소리에 기우뚱 좌우로 치우치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라는 바벨탑을 쌓는 교만한 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저주요 심판입니다. 미리암은 자기라는 감옥에 갇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까지도 망각해버렸습니다. 그런 미리암은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고, 진영 밖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혹시 진영 밖이 자유로운 분은 없습니까? 진영 밖에 갇혀 있는데도, 진영 밖으로 풀려난 것으로 착각하시는 분은 없습니까? 교회 오면 갇히는 것 같고, 세상으로 가면 자유로운 분은 없습니까? 집에 가면 갇히는 것 같고, 집 밖으로 나가면 자유로운 분은 없습니까? 부모님이 있으면 갇히는 것 같고, 부모님이 없으면 자유로운 분은 없습니까? 무서운 저주와 심판 가운데 있는 상태입니다. 불신앙의 바벨탑을 쌓은 결과입니다. 교만이라는 바벨탑을 쌓은 결과입니다. 모세가 미리암을 고쳐달라고 기도했던 주일은 교회로 와서 예배의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문둥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하는 날입니다.

[김성수 총장] 믿음, 우리 모두의 궁극적 관심사

종교적 신화는 생명의 기원과 의미에 관한 이야기다. 종교적 신화는 삶에 대해서 우리 모두가 근본적으로 제기하는 ‘큰 질문’, 곧 세계관적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해 주려고 한다.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가? 잘못된 것을 치유해 줄 수 있는 해결책은 무엇인가?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와 같은 삶의 근원적인 질문과 해답이다. 예를 들어 황소 자그레우스(Zagreus)의 신화에 의하면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천상의 신들 사이의 우주적 전투의 결과로 이곳에 왔다고 말한다. 인간의 삶에서 잘못된 것은 근본적으로 악이 우리 인간 본성의 육체적 측면에 내재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철학자 플라톤이 나중에 철학적으로 정교한 것과 같이, 우리의 신성한 부분인 영혼이 신들과 함께 진정한 본향으로 돌아갈 때 곧 우리가 죽을 때까지 우리의 육체의 악한 본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삶에 대한 세계관적 ‘큰 질문’들에 대한 답은 그 어떠한 언어 형태로도 적절하게 답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주로 이야기 형태로 구현된다. 과학적인 언어는 이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과 대답을 제공하기에는 확실히 부적절하다. 종교적 신화는 삶에 관한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과학적인 의미에서 진실 또는 거짓으로 검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세계의 본질을 다른 세계의 기원과 비교하기 위해 과학적 실험을 고안해 낼 수가 없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세계는 하나뿐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어떤 특정 신화에 매력을 느끼고 끌릴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우리의 궁극적 관심사인 믿음의 행위로 그것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지난호에서 생각해 본 바와 같이 삶에 대한 분열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가 믿음의 행위로 황소 자그레우스의 신화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인가? 그렇지 않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종교적 신화 이야기를 앞에 두고 앉아서 그것을 믿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태어난 사회 속에서 우리가 성장하고 교육을 받는 등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인생의 큰 질문에 대해서 종교적 신화가 제공하고 있는 해답을 흡수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주변의 공기로부터 이러한 대답을 들이마시며 성장하고 살아가고 있다. 개인으로서 우리는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세계관의 근본적인 신화에 대해서 의식적인 신앙 헌신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의식하던 못하던 간에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사회가 우리를 대신해서 그런 일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돌이 가라앉은 후에도 오랜 시간 동안 잔물결이 계속해서 물을 가로질러 움직인다.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종교적 신화의 파문은 신화가 잊혀진 후에도 오랫동안 인류 역사를 통해 계속해서 움직인다. 자그레우스 신화의 경우, 이제는 오랫동안 잊혀진 이 고대 신화가 수많은 세대에 걸쳐 사람들이 삶을 바라보는 분열된 방식을 계속해서 형성해 왔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삶에 대해 이러한 분열된 관점을 계속해서 견지하고 있는 한, 비록 이 믿음이 현재 암묵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유지되고 있더라도,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것을 묵인함으로써 실제로는 원래의 그 종교적인 근본 신화에 믿음을 두는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무의식적이며 암묵적으로 견지하는 믿음이 한 사회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리고 그에 따른 세계관이 어떻게 세대를 거쳐 전달되는지에 대한 놀라운 예는 인류학자 마가레 미드(Margaret Mead)가 1959년에 제작한 영화에서 잘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인도, 프랑스, 일본, 그리고 캐나다의 네 가족들이 하루를 보내는 삶에 관한 이야기고 구성되어 있다. 영화의 한 부분은 아기의 목욕 시간에 관한 내용이다. 일본 가정에서는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아기를 맡긴다. 큰 욕조에 앉아 있는 할머니는 아이를 가슴에 꼭 안고 물을 떠 올려준다. 나중에 아이는 가정의 모든 아이들이 함께 소유하고 공유하는 매우 섬세한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나중에는 자장가 소리를 들으며 가족 침실에 잠자리에 든다. 이와 대조적으로 캐나다에서는 엄마가 아이 스스로 욕조에 들어가게 한다. 엄마와 아이 사이에 목욕 수건을 사용하는 작은 줄다리기 게임이 진행되다가, 아기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체계적으로 문지른다. 그 다음에 아이는 자신의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자기 침실에서 잠자리에 든다. 이제 불이 꺼지고 방문이 닫힌다. 다음 호에서는 이와 같은 두 종류의 이야기가 어떻게 서로 다른 가치관을 전수하고 세계관을 형성하며, 궁극적 관심사인 믿음의 문제로 연결되는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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