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10-18(월)

고신, 2021년 가을 정기노회 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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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파교회연구소, 제9회 법통포럼 개최

한빛교회서, 김재윤 박사 초청 한국인 학생·차범수 학생 장학금 수여 고려파교회연구소(소장 황권철 목사, 이하 고려파연구소)가 지난 10월 5일(화), 한빛교회(신진수 목사)에서 ‘제9회 법통포럼’을 개최했다. ‘개혁주의 고려파 신학의 왕적 사명에 대한 연구’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포럼에 앞서 드린 경건회는 예장(고신) 경남노회 노회장 차광진 목사(본포제일교회)가 성경본문 출애굽기 3장 13~14절로 말씀을 전하고, 고려파연구소 부이사장 김정식 장로(동산세광교회)가 대표로 기도한 후 마산대 간호학과 1학년 한국인 학생(창원영광교회)와 창원봉림고 3학년 차범수 학생(성산한빛교회)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경건회 후 강사로 초청한 고려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 김재윤 박사가 ‘그 왕을 위하여 : 그리스도 중심으로 개혁주의 문화관과 예배’라는 주제로 특강을 전했다. 김재윤 박사는 ‘그 왕을 위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개혁주의 문화관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사관임을 밝히고 루터의 종교개혁으로부터 그리스도 왕권의 실현을 기술하고, 아르라함 카이퍼가 주장한 그리스도의 왕권과 스킬더를 통한 문화명령에 대해 전했다. 이어, 발제자 발표에서는 △시찰 없이는 노회는 없다.(성희찬 목사) △교회법에 관한 소고(강종환 장로) △개혁주의 고려파 신학의 왕적 사명에 대한 연구(황권철 목사) 발표가 있었다. 연구위원 성희찬 목사(작은빛교회)는 시찰회 태동과 그 배경 등을 설명하고 성경적 원리로 돌아가기 위한 몇 가지 관점에 대해 설명했다. 연구위원 강종환 장로(가음정교회)는 교회법의 의의를 소상히 밝히며 교회법의 개념과 목적, 장로교 교회법의 신학적 관점에 대해 전하고 교회법의 보완점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끝으로 소장 황권철 목사(밀알교회)는 구속사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주권사상에 대해 설명하고 이근삼 박사의 칼뱅주의 주권사상에 대한 이해를 전했다. 또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회의 사명에 대해서도 전한 후 사무총장 신진수 목사(한빛교회)의 광고로 모든 순서를 마쳤다. 설재규 기자

주기철 목사 일대기 담은 오페라 ‘일사각오’

창작 오페라 ‘항일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 일대기, 일사각오’(이하 일사각오)가 지난 10월 2일(토), 창원시 성산아트홀 대극장에서 그 무대를 선보였다. 창원시기독교장로총연합회(대표회장 임명곤 장로, 이하 창기장총)와 항일독립운동가주기철목사순교기념사업회(이사장 이정희 목사, 이하 사업회)가 공동 주최하고 일사각오창작오페라 조직위원회(위원장 최주철 장로, 이하 조직위)가 주관하는 이번 창작오페라 ‘일사각오’는 애국애족 및 독립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도민과 함께하는 나라사랑 오페라’로써 지난 2019년 영상음악회와 2020년 갈라오페라를 거져 3년 만에 완성된 창작오페라로 창원대 교수 김동순 장로(서머나교회)가 총감독을 맡고, 창기장총 최문욱 장로(양곡교회)가 총괄기획을 맡았다. 이번 ‘일사각오’ 오페라는 글로리페스티벌오케스트라(지휘 배우민)의 연주에 맞춰 경남과 창원 지역의 우수한 성악가들과 경남장로합창단(지휘 조충환)이 오페라에 참여했으며, 이를 위해 경상남도와 창원시(허성무 시장), BNK경남은행, (주)기산산업이 특별 후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경남 교계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힘을 보태었다. 2일(토), 3시와 7시에 두 번에 걸쳐 연주된 ‘일사각오’ 오페라는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항일운동을 펼쳐온 독립운동가 주기철 목사의 삶과 ‘일사각오’로 믿음을 지킨 순교자의 삶을 조명했다. ‘일사각오’ 오페라를 준비한 창기장총 대표회장 임명곤 장로(창원세광교회)는 “오늘의 ‘일사각오’ 오페라를 통해 나를 버리고 나라를 사랑한 주기철 목사님의 애국애족의 나라사랑, 일사각오의 순교신앙을 본 받아 강한 믿음으로 기도하는 진정한 다짐의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라며 인사를 전했다. 또 기념사업회 이사장 이정희 목사(진해영광교회)는 “이 일의 시작과 과고 오늘을 이루어 내신 모든 관계자들의 수고와 노력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오늘의 감동의 앙상블을 창조했습니다.”라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한 진심으로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라고 전했다. 또 조직위 최주철 장로(서머나교회)는 “(오페라가) 연속성있는 행사로 자리매김되고 지방 문화 창달과 창원시 공연 예술의 브랜드 마크와 문화자산이 되기를 소망합니다.”라고 전했다. 설재규 기자 <사진제공=창원시기독교장로총연합회>

여의도순복음, 조용기 목사 별세

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가 9월 14일 오전, 향년 8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조용기 목사가 오전 7시 13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에서 사망했다고 밝혔다. 조 목사는 지난해 7월 교회 집무실에서 출입문에 머리를 부딪친 사고로 병원 치료를 받았다. 같은 달 22일 뇌출혈 증세를 보여 수술을 받았고 지금까지 입원치료를 받아 왔다. 조 목사의 유족은 조희준, 조민제(국민일보 회장), 조승제(한세대 이사) 3남으로 아내 김성해(한세대 총장)는 지난 2월 79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조용기 목사의 빈소는 여의도순복음교회 베다니홀에 마련됐다. 장례예배는 18일 오전 8시 한국교회장으로 여의도순복음교회 대성전에서 진행된다. 장례위원장은 한국교회총연합 공동대표회장 소강석·이철·장종현 목사가 맡는다. 하관 예배는 18일 오전 10시 장지 파주시 오산리 최자실국제금식기도원 묘원에서 가질 예정이다. 조용기 목사는 경남 울주군에서 1936년 5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1958년 순복음신학교를 졸업한 뒤 최자실 전도사(1915~1985)와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서 천막 교회를 세웠다. 1973년 교회를 여의도로 옮겨 입당 예배 때 1만 명이던 교인은 1979면 10만 명, 1984년 40만 명을 넘어섰다. 1992년에는 70만 명을 넘어 1993년 세계 최대 교회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조 목사는 1966년부터 1978년까지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기하성) 총회장을 역임했으며, 2008년 5월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됐다. 2008년 원로목사로 추대된 이후 지금까지 영산조용기자선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조 목사는 굿피플, 사랑과행복나눔재단, 심장병어린이돕기운동, 영산조용기자선재단 설립, 사회복지법인 엘림복지회 운영, 평양조용기전문심장병원 건립 운동 뿐만 아니라 한세대, 순복음영산신학원, 미국 베데스다대, 국민일보, 신앙계, FGTV, 굿티비 기독교복음방송 등을 설립하며 신학교육과 문서·방송 선교에도 힘썼다.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 국제교회성장연구원 등으로 한국 교계를 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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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 경상노회, 제195회 정기회 개회

예장(합동) 경상노회(노회장 김성곤 목사)가 지난 10월 12일(화) 오후2시, 창원시 내서읍 산성교회(이채웅 목사)에서 1박 2일의 일정으로 ‘제195회 정기회’를 개회했다. 코로나19 방역 수칙 준수와 함께 개회한 이번 노회의 회무에 앞서 드린 개회 예배는 노회장 김성곤 목사(진해사랑의교회)의 인도로 시작해 장로부노회장 김진곤 장로(창원왕성교회)가 대표로 기도하고 김성곤 목사가 성경본문 시편6편 1-10절 말씀으로 은혜의 설교를 전했다. 김성곤 목사는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모든 곳이 혼란스러운 이때에 우리가 모두 함께 살고 있다.”라며 최근 넷플리스에서 세계적 화제를 몰고 있는 ‘오징어게임’이라는 드라마 속의 기독교인과 세상이 바라보는 기독교인에 대해 전하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그러면서 “말로만 성노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의가 실현되는 노회가 되길 바랍니다.”라고 전했다. 김 목사는 “세상이 드라마를 통해 우리를 비판하는 시대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악한 것을 물러가게 하고 더 좋은 노회가 되길 기대하는 이번 노회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전했다. 설교 후 목사부노회장 양충만 목사(창원왕성교회)가 축도함으로 예배를 마치고 2부 회무처리에 들어갔다. 중남시찰장 배명식 목사(빛과소금교회)의 기도와 함께 시작한 2부는 서기 조성래 목사(사랑의엘림교회)가 회원호명 후 김성곤 목사가 개회선언 함으로 회무에 들어가 회의순서 보고 및 광고 및 질서위원을 선정하고 공천부 보고 및 각부소회와 헌의부 부고 후 정회했다. 설재규 기자

합동 진주노회, 제130회 정기회 개회

예장(합동) 진주노회(노회장 신유항 목사)가 지난 10월 11일(화) 오후 1시, 진주 칠암교회(조영래 목사)에서 제130회 정기회를 개회했다. 회무에 앞서 드린 개회예배는 노회장 신유항 목사(진주남교회)의 인도로 시작해 회계 강태구 장로(동진주교회)가 대표로 기도한 후 신유항 목사가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삼하19:32-33)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설교 후 축도함으로 예배를 마치고 코로나19 확산방지와 방역 수칙 준수를 위해 성찬식은 생략하고 2부 회무에 들어갔다. 서기 홍명유 목사(창선교회)의 회원 점명 후 성수가 됨을 확인한 신유항 목사가 개회 선언을 하고 회의순서 보고 후 사찰 및 광고위원 선정에 들어갔다. 이어 헌의부·고시부·정치부 보고를 받고 정회에 들어갔다. 오후 순서에서는 목사 장립식을 가졌다. 신유항 목사의 사회로 드려진 장립식은 장로부노회장 김영남 장로(사천교회)가 대표로 기도하고 홍명유 목사가 성경봉독 한 후 목사부노회장 유홍선 목사(미조교회)가 말씀을 전하고 안수 받는 목사에게 서약을 받은 후 안수 했다. 이어 증경 노회장 양석봉 목사(한누리교회)가 안수 받은 목사에게 권면의 말을 전하고 증경노회장 김종운 목사(지족교회)가 축하의 말을 전한 후 증경총회장 김동권 목사(진주교회 원로)가 축도함으로 목사장립식을 마쳤다. 장립식 후 속회한 회무에서는 각 부 보고 및 시찰회·위원회 보고를 받고 총회 총대가 총회 결과를 보고 한 후 신 안건 토의에 들어갔다. 이어, 회의록 채택 후 폐회예배 하고 하루 일정의 정기회를 모두 마무리 했다. 김현주 국장

고신, 2021년 가을 정기노회 개회

□ 경남(법통)노회, 제195회 정기노회 예장(고신) 경남노회(노회장 차광진 목사)가 지난 10월 12일(화) 오후 1시, 창원시 가음정교회(제인호 목사)에서 ‘제195회 정기노회’를 개회했다. 고신 총회의 역사와 전통성을 가진 의미로 법통노회라고도 부르는 경남노회는 코로나19의 방역 지침 준수와 확산방지를 위해 2일간의 노회 일정을 하루로 축소해 진행하며 회무에 앞서 드린 개회예배는 노회장 차광진 목사(본포제일교회)의 인도로 시작해 장로부노회장 김정식 장로(동산세광교회)가 대표로 기도하고 차광진 목사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롬8:28-30)이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설교 후 직전노회장 전성환 목사(진해반석교회)가 축도함으로 예배를 마치고 회무처리에 들어갔다. 회무처리에서는 서기 제인호 목사(가음정교회)가 회원 호명 후 차광진 목사가 195회 정기노회가 개회됨을 선언하고 절차보고 후 임원개선을 했다. 임원개선에서는 신임 노회장으로 신진수 목사(한빛교회)를 선출하고 부노회장에 최정대 목사(미래로교회)와 오재형 장로(명곡교회)를 선출했다. 다음은 신임 임원 명단이다. ▲노회장: 신진수 목사(한빛) ▲부노회장: 최정대 목사(미래로), 오재형 장로(명곡) ▲서기: 류제완 목사(가술) ▲부서기: 구자민 목사(주영광교회) ▲회록서기: 정용기 목사(하늘샘) ▲공범식 목사(자여) ▲회계: 오동환 장로(제일진해) ▲부회계: 배재억 장로(진영) □ 경남김해노회, 제71회 정기노회 예장(고신) 경남김해노회(노회장 박석환 목사)가 지난 10월 11일(월), 오후 2시부터 동서남북교회(하영운 목사)에서 ‘제71회 정기노회’를 개회했다. 단축된 일정만큼 저녁까지 진행됐던 경남김해노회 정기노회의 개회예배는 노회장 박석환 목사(소금과빛교회)의 인도로 시작해 장로부노회장 정인규 장로(꿈이있는교회)가 대표로 기도하고 목사부노회장 윤은수 목사(드림교회)가 성경봉독(딤후1:3-8)한 후 박석환 목사가 ‘다시 불일 듯 일어나는 교회’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하고 축도함으로 예배를 마쳤다. 2부 회무에서는 부서기 황선욱 목사(칠산교회)가 회원호명 후 노회장 박석환 목사가 개회선언하고 절차 보고 및 임원·감사 후보 보고를 했다. 이어, 임원 개선에 들어가 신임 노회장에 윤은수 목사를 선출하고 부노회장에 이수재 목사(지구촌교회)와 송재철 장로(모든민족교회)를 선출했다. 다음은 신임 임원 명단이다. ▲노회장: 윤은수 목사(드림) ▲부노회장: 이수재 목사(지구촌), 송재철 장로(모든민족) ▲서기: 황선욱 목사(칠산) ▲부서기: 김길우 목사(대저제일) ▲회록서기: 김일국 목사(늘푸른전원) ▲부회록서기: 김도은 목사(미음우리) ▲회계: 하광수 장로(안디옥) ▲부회계: 윤창현 장로(세계로) ▲감사: 심재휘 목사(김해예닮), 신말성 장로(지구촌) □ 경남남마산노회, 제71회 정기노회 예장(고신) 경남남부노회(노회장 원대연 목사)가 지난 10월 11일(월) 오후1시, 마산성막교회(이상철 목사)에서 제71회 정기노회‘를 개최했다. 하루 일정으로 치러진 이번 노회의 개회 예배는 노회장 원대연 목사(마산교회)의 인도로 시작해 장로부노회장 신종기 장로(마산중부교회)가 대표로 기도하고 원대연 목사가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마5:13-16)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설교 후 회계 윤종은 장로(신광교회)가 헌금기도하고 문병석 목사(곡안교회 은퇴)가 축도함으로 예배를 마쳤다. 이어진 2부 회무는 서기 임태혁 목사(온세계교회)가 회원호명 후 노회장 원대연 목사가 개회선언함으로 시작해 소집공고와 절차보고 후 임원선거에 들어갔다. 임원 선거에서 부노회장 진창설 목사(신광교회)가 신임 노회장으로 선출되고 부노회장에는 김영락 목사(또감사교회)와 노영환 장로(마산성막교회)가 선출됐다. 다음은 신임 임원 명단이다. ▲노회장: 진창설 목사(신광) ▲부노회장: 김영락 목사(또감사), 노영환 장로(마산성막) ▲서기: 임태혁 목사(온세계) ▲부서기: 박봉석 목사(마산중부) ▲회록서기: 변인섭 목사(경남) ▲부회록서기: 정태진목사(지산) ▲회계: 이재광 장로(새소명) ▲부회계: 박정규 장로(마산성막) □ 경남남부노회, 제33회 정기노회 예장(고신) 경남남부노회(노회장 천창수 목사)가 지난 10월 11일(월), 오전10시, 거제시 염광교회(김명식 목사)에서 ‘제33회 정기노회’를 개회 했다. 코로나19의 확산 속에서 방역에 만전을 기한 경남남부노회는 염광교회의 헌신으로 교회 입구와 주차장에서 자가진단키트로 검사를 마친 후 음성으로 확인 사람만 입장 할 수 있도록 하고 지정된 좌석에서 노회에 참여 할 수 있도록 했다. 회무에 앞서 드린 개회 예배는 노회장 천창수 목사(지세포제일교회)의 인도로 시작해 장로부노회장 문홍진 장로(거제열린교회)가 대표로 기도하고 목사부노회장 양경수 목사(술역교회)가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룻1:6-14)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설교 후 정명채 은퇴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치고 2부 회무처리에 들어갔다. 회무처리는 노회장 천창수 목사의 사회로 서기 김경식 목사(충무제이교회)가 회원점명하고 189명 참석으로 성수가 됨으로 천창수 목사가 개회선언을 했다. 이어, 회의순서 및 절차보고 후 임원개선에 들어가 신임 노회장으로 양경수 목사를 선출하고 부노회장에 김경식 목사와 조용국 장로(연초중앙교회)를 선출했다. 다음은 신임 임원 명단이다. ▲노회장: 양경수 목사(술역) ▲부노회장: 김경식 목사(충무제이), 조용국 장로(연초중앙) ▲서기: 김명식 목사(염광) ▲부서기: 임두식 목사(성산) ▲회록서기: 장종환 목사(영운) ▲부회록서기: 김윤수 목사(사랑샘) ▲회계: 신승서 장로(염광) ▲부회계: 최상림 장로(청광) □ 경남마산노회, 제79회 정기노회 예장(고신) 경남마산노회(노회장 허성동 목사)가 지난 10월 12일(화) 오전 9시 30분, 마산동광교회(강영구 목사)에서 ‘제79회 정기노회’를 개회 했다. 회무에 앞서 노회장 허성동 목사의 인도로 드린 개회 예배는 장로부노회장 김종원 장로(마산삼일교회)가 대표로 기도하고 서기 최경진 목사(칠원교회)가 성경봉독(시119:67-71)한 후 노회장 허성동 목사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설교 후 전임노회장 옥치인 목사(마산회원교회 원로)가 축도함으로 예배를 마치고 회무처리에 들어갔다. 회무처리는 서기 최경진 목사가 회원 점명 후 노회원 150명 출석을 확인한 허성동 목사가 성수가 됨으로 정기노회 개회를 선언했다. 이어, 절차보고 후 투표 및 개표위원 선정을 하고 임원개선에 들어갔다. 신임 임원 개선에서는 이성규 목사(중리교회)가 선출되고 부노회장에는 최경진 목사와 김봉수 장로(군북중앙교회)가 선출됐다. 다음은 신임 임원 명단이다. ▲노회장: 이성규 목사(중리) ▲부노회장: 최경진 목사(칠원), 김봉수 장로(군북중앙) ▲서기: 권창영 목사(유원) ▲부서기: 정상률 목사(마산삼일) ▲회록서기: 전성진 목사(산호) ▲부회록서기: 김성국 목사(군북) ▲회계: 배광석 장로(서부) ▲부회계: 진종신 장로(마산동광) ▲감사: 허성동 목사(제일문창), 임영도 장로(평기) □ 경남서부노회, 제72회 정기노회 예장(고신) 경남서부노회(노회장 장영달 목사)가 지난 10월 11일(월) 오후 7시부터 이튿날 12일(화) 오후6시까지 일정으로 경남 합천교회(김대근 목사)에서 ‘제72회 정기노회’를 개회했다. 노회장 장영달 목사(신원교회)의 인도로 시작한 개회예배는 장로부노회장 박창열 장로(함양중앙교회)가 대표로 기도하고 서기 이충헌 목사(입석교회)가 성경봉독(수5:13-15)한 후 목사부노회장 김대근 목사(합천교회)가 ‘모세와 같이 여호수아에게도’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설교 후 선교부장 박도운 목사가 선교헌금기도를 하고 장영달 목사가 축도함으로 예배를 마쳤다. 이어진 회무처리에서는 이충헌 목사의 회원점명 후 노회장이 개회선언하고 임원선거에 들어가 신임 노회장에 김대근 목사를 선출했다. 또 부노회장에는 이충헌 목사와 심재수 장로(합천교회)를 선출했다. 다음은 신임 임원 명단이다 ▲노회장: 김대근 목사(합천) ▲부노회장: 이충헌 목사(입석), 심재수 장로(합천) ▲서기: 이종민 목사(도탐) ▲부서기: 김은삼 목사(가천) ▲회록서기: 박용부 목사(마리) ▲부회록서기: 한동근 목사(삼가) ▲회계: 권충호 장로(개평) ▲부회계: 정일영 장로(전원) □ 경남중부노회, 제59회 정기노회 예장(고신) 경남중부노회(노회장 신병진 목사)가 지난 10월 11일(월) 저녁 7시, 밀양 삼문교회에서 ‘제59회 정기노회’를 개회 했다. 노회장 신병진 목사(칠성교회)가 인도하는 개회 예배는 부노회장 구양서 장로(창녕제일교회)가 대표로 기도하고 신병진 목사가 ‘죽음 앞에서 일어나라’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설교 후 신병진 목사의 집례로 성찬식을 갖고 최정윤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치고 회무에 들어가 신임 임원개선을 했다. 다음은 신임 임원 명단이다. ▲노회장: 윤종국 목사(예림중앙) ▲부노회장: 송동호 목사(영광), 진극권 장로(창녕제일) ▲서기: 이태훈 목사(대평) ▲부서기: 박동순 목사(미소짓는) ▲회록서기: 최희석 목사(태동) ▲부회록서기: 박성익 목사(계성) ▲회계: 박정림 장로(밀양센텀) ▲부회계: 이혜영 장로(삼문) □ 경남진주노회, 제130회 정기노회 예장(고신) 경남진주노회(노회장 문장환 목사)가 지난 10월 11일(월) 오후2시, 진주삼일교회(문장환 목사)에서 ‘제132회 정기노회’를 가졌다. 1박 2일간의 일정으로 진행 된 정기노회의 개회예배는 장로부노회장 한신조 장로(금산교회)가 대표로 기도하고 회계 박대식 장로(남부교회)가 성경봉독(마18:21-35)한 후 문장환 목사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 비유’라는 제하의 말씀을 전했다. 설교 후 서보권 목사(진주북부교회 원로)가 축도함으로 예배를 마쳤다. 2부 회무처리에서는 서기 하태경 목사(삼한)가 회원점명 후 노회장 문장환 목사가 개회선언 함으로 회무를 시작해 절차 및 서기 사무 보고 후 임원 공천보고와 함께 신임 임원 선거에 들어갔다. 이번 임원선거에서는 신임 노회장에 공은성 목사(삼천포교회)를 선출하고 부노회장 권동진 목사(진교교회)와 이수환 장로(진주중부교회)를 선출했다. 다음은 신임 임원 명단이다. ▲노회장: 공은성 목사(삼천포) ▲부노회장: 권동진 목사(진교), 이수환 장로(진주중부) ▲서기: 김성준 목사(임마누엘) ▲부서기: 한상철 목사(문산) ▲회록서기: 윤영준 목사(신촌) ▲부회록서기: 박천수 목사(남해성남) ▲회계: 장돈식 장로(삼천포) ▲부회계: 박환수 장로(진주삼일) 김현주 국장, 설재규 기자<가나다 순 배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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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 호주 장로교회의 형성과 경남지역 선교

1. 시작하면서 오늘 이렇게 뜻 깊은 2021년 경남선교의 날 감사예배에 초청해 주신 점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부산경남 지방에 기독교 복음을 전해준 호주장로교와 미국북장로교 선교부의 활동을 소개하되, 특히 부산경남지방 선교를 꿈꾸며 이 곳에 왔던 첫 호주 선교사들의 경남지역에서의 선교활동에 대해 소개할까 합니다. 저는 이 분야 최초의 연구자로서 호주의 여러 도서관, 고문서관을 다니며 각종 문헌을 섭렵하였고 여러 자료를 수집하였으므로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지만 오늘은 편안한 마음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는 미국 북장로교회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였고 주로 부산 경남지역에서 활동했는데, 이들의 활동에 대해 말씀 드리기 전에 먼저 부산과 경남 지역에서의 기독교의 연원을 소개하고, 어떻게 부산경남 지방은 호주장로교와 미국북장로굫회의 공동선교구역이 되었는가를 말씀리고자 합니다. 그 후에 호주 선교부를 중심으로 이 지방에서의 활동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2. 부산, 경남지방으로 전래되는 기독교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성경반포사업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 지방에 복음을 전하려는 최초의 노력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가 시도한 성경반포사업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는 1882년 심양(瀋陽)의 문광셔원에서 로스역(Ross Version) 『예수 셩교 누가복음 젼셔』와 『예수셩교 요안나 복음젼셔』를 각각 3,000권씩 출판했는데 이중 3분의 1을 일본 요꼬하마 주재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총무인 톰슨(J. Austin Thomson)에게 보내어 조선에 반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본주재 동 성서공회는 1883년 일본인 나가사까(長坂)를 부산에 파견하여 성경반포사업을 시작했는데, 이 일은 이 지방에서의 최초의 복음운동이었습니다. 이때의 반포사업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때의 결실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월푸의 조선선교 시도 부산과 경남지방에서의 두 번째 기독교 복음과의 접촉은 영국성공회의 영국교회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 소속 월푸(Archdeacon John R. Wolfe) 선교사를 통해서였습니다. 월푸는 중국에서 사역한지 22년이 지난 1884년, 청불(淸佛)전쟁으로 야기된 불안한 정세 하에서 건강이 좋지 못해 의사로부터 일정기간 휴양을 권고 받고 일본 나가사끼(長埼)를 방문한 후, 1884년 10월 24일경 부산을 방문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당시 부산에는 약 2천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고, 일본인 거주지 내에 은행과 병원, 그리고 학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푸초로 돌아간 후 ‘남지나 선교회’(The South China Mission) 연례 지방대회에서 조선방문의 결과를 보고하면서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호소가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885년 11월 말경 두 사람의 중국인 전도자와 함께 다시 부산에 왔습니다. 이것이 이 지방에서의 선교를 위한 두 번째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선교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고 아무런 기록도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때는 아직 기독교 선교가 금지되어 있었고 활동도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선교활동이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의 부산 방문은 후일 두가지 결실을 가져오는데, 첫째는 한국에서의 성공회 선교운동의 한 동기를 부여하였고, 둘 째는 호주 장로교의 한국 선교의 길을 열였습니다. 즉 월푸는 조선 방문 후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서신을 보냈는데, 이 편지는 멜버른의 코필드(Caulfield)에 위치한 성 메리교회(St. Mary Church)의 메칼트니(H. B. Macartney) 목사가 편집, 방행하는 「국내 국외 선교」(The Missionary at Home and Abroad)에 발표되었고, 이 호소는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의 내한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습니다. 게일과 하디의 부산에서의 선교 우리 지방에 왔던 세 번째 개신교 전도자는 캐나다인 게일(James Scarta Gale, 奇一, 1863-1937)이었습니다. 그는 토로토대학 YMCA의 파송으로 내한하여 1889년 7월부터 1891년 봄까지 부산에서 사역하였는데, 그는 한국의 역사와 언어, 풍습에 관한 주목할 만한 저서를 남겼던 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게일이 부산에서 일했던 기간 중의 선교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당시 상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의 부산 체류기간이 짧았고 특히 부산에서 체류 기간 중에는 한국어 공부에 전념했던 점을 고려해 볼 때 선교를 위한 구체적인 노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단지 부산에 주제한 첫 개신교 선교사로써 부산과 경남 지역 선교를 위한 탐색과 연구의 기간을 보낸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 뒤 역시 캐나다 출신 의사인 하디 의사(Dr. Robert A. Hardie) 부부가 부산지방에서의 의료 활동을 했습니다. 토론토 의과대학 출신인 그는 내한하여 1892년 11월 부산을 떠나 원산으로 가기까지 약 2년 동안 부산에 체류하며 게일과 함께 선교사역에 종사하였습니다. 이들이 부산지방의 초기 선교사들이었습니다. 데이비스의 내한, 부산도착, 죽음 그러다가 1889년 10월 2일 호주 장로교 출신인 해리 데이비스(Rev. J. H. Davies, 1856-1890)가 부산으로 오게 되는데, 이것이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의 한국 선교의 시작이 됩니다. 이 때는 알렌이 입국한지 5년이 지난 때였는데, 데이비스는 누나인 메리와 함께 1889년 8월 21일 멜버른을 떠나 한국으로 향했는데, 10월 2일 부산을 거쳐, 10월 4일 인천에 도착했고, 그 다음날 오후 늦게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때로부터 5개월 간 서울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인천, 과천, 수원, 공주를 경유하여 경상도 땅을 지나 1890년 4월 4일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20여일 간에 걸쳐 약 500km에 달하는 긴 여행을 마치고 목적지인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무리한 도보 여행으로 인해 폐렴에 감염되었고 천연두까지 겹쳐 마지막 5일간은 아무 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데이비스가 부산에 도착한 날은 1890년 4월 4일 금요일이었는데, 그 다음날인 4월 5일, 오후 1시경 부산에서 사망합니다. 한국에 온지 6개월 된 때였습니다. 부산지방 선교의 꿈을 안고 부산으로 내려왔으나 그 꿈은 그 자신의 생애 속에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의 죽음은 호주 장로교회의 한국선교, 곧 부산, 경남지역 선교의 동기가 됩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국 북장로교 부산지역 선교 그렇다면 미국북장로교는 어떻게 부산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을까요? 본래 미국북장로교 선교부의 초기 선교사들은 서울에 정착하였습니다. 알렌이나 언더우드, 헤론 등이 그들입니다. 그런데 선교사 수가 많아지자 서울 외의 다른 지역에도 선교지부를 설치하기로 하고 두 지역을 개척하기로 했는데, 그 지역이 평양과 부산이었습니다. 평양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사무엘 마펫(Rev. Samuel Moffett)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부산지부를 개척하기 위해 파송된 사람이 윌리엄 베어드(Rev. William Baird)였습니다. 그래서 마펫은 1891년 평양으로 가서 사역한 결과 1893년 평안도 지방 최초의 교회인 장대현교회가 설립되었고, 후에 장대현 교회에서 평양야서문밖교회, 평양남문밖교회, 창동교회,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산정현교회가 1906년 개척된 것입니다. 부산으로 파송된 윌리엄 베어드는 19891년 9월 부산으로 와 부산 영선현에서 두 필지 땅을 사서 선교관을 건축하고 선교하기 시작하여 미국북장로교 선교부도 부산에서 사역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부산은 미국 북장로교와 호주장로교 공동선교구역이 된 것입니다. 물론 양 선교부 간의 협의와 합의를 거쳐 선교지역 분담이 이루어졌습니다만, 호주 선교부는 부산진, 고관을 거쳐 경남동부지역, 곧 해운대 기장 언양 양산 울산 등지를, 미국북장로교회는 부산의 서부지역인 부산 중앙동 영도 남포동 김해 밀양 등지에서 활동했습니다만 그 후에 선교지역 더 확대됩니다. 참고로 북장로교 부산경남지방 선교에 대해 더 말씀드리면, 베어드에 이어 두 번째로 부산에 부임한 북장로교선교사는 휴 브라운(Dr. Hugh M. Brown) 의사 부부였습니다. 이들은 1891년 12월에 부산에 와서 자기 집에 작은 시약소(dispensary)를 설치하고 의료선교사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였으나 브라운 의사의 예기치 못한 결핵의 감염으로 부산에 온지 2년 후인 1894년 1월 8일 귀국했고, 본국으로 돌아간 후 2년이 못 되어 1896년 1월 6일 뉴욕에서 병사했습니다. 1893년 11월에는 어빈의사(Dr. Charles. H. Irvin, 漁乙彬)가 내한했는데, 이듬해 3월 부산으로 와 브라운의 뒤를 이어 의료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어빈은 이때로부터 1911년까지 약 17년간 선교사로 일하고, 그해 4월 1일자로 선교사직을 사임합니다. 그러나 그는 동광동 5가 영선고개에 어을빈의원을 개원하고 계속 부산에 체류하였습니다. 1895년 5월 29일에는 아담스(Rev. James E. Adams, 安義窩) 부부가 부산에 파견되었는데, 그가 1897년 대구로 옮겨가 대구지부를 개척하였고, 1923년까지 한국선교사로 일했습니다. 그 후에 부산에는 미국북장로교의 로스목사 부부(Rev. Cyril Ross, 盧世永, 1897-1902), 시더보탐 목사(Rev. Richard H. Sidebotham, 史保淡, 1900-1909) 부부, 스미스 목사(Rev. Walter E. Smith, 沈翊舜, 1902-1912) 부부, 윈목사(Rev. George H. Winn, 魏喆治, 1909-1914) 목사 등이 활동했는데, 북장로교는 1913년 말까지 일하고 부산경남지방에서 완전히 철수합니다. 호주 선교사 수가 많아지니 북장로교는 구태어 부산경남지방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미국 북장로교가 부산 경남지방에 파송한 선교사 수는 21명이었는데, 1914년 이후에는 부산과 경남 전 지역이 호주 선교부 관할이 되었고 호주 선교의 영향 하에 있게 됩니다. 저는 어떻게 경남지방이 호주장로교와 미국북장로교 공동 지역이 되었는가를 말씀 드린 것입니다. 2.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PCV)의 형성 영국인의 이민으로 시작된 호주는 사회의 모든 분야가 영국의 영향권 하에 있었고, 특히 장로교회의 경우 모교회(母敎會)라고 할 수 있는 스코틀랜드교회의 역사와 유산을 답습, 계승하고 있습니다. 빅토리아주의 경우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해 온 첫 목사는 제임스 클로우(James Clow) 목사였는데, 그는 1837년 10월 24일 빅토리아주에서의 첫 예배를 인도하였고, 그 다음해인 1838년 1월 28일 시드니로부터 멜버른으로 이주해온 제임스 폽스(James Forbes, 1823-1851) 목사는 멜버른에 정착하여 공식적으로 목회를 시작한 첫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공식적인 첫 예배 인도는 1839년 2월 3일이었다. 이때로부터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여러 교파의 목사와 신자들이 이주해 와서 각기 다른 교회조직을 유지해 오다가 1850년대에는 이들 교회 조직들 간의 교단 통합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빅토리아에는 대표적인 세 개의 장로교회(敎團)이 있었는데, 첫째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The Established Church of Scotland)를 계승한 교회로서 1840년부터 1854년까지는 ‘호주대회’(Synod of Australia)로 불리다가 1854년 4월 ‘빅토리아대회’(Synod of Victoria)란 이름으로 독립한 교회, 둘째는 스코틀랜드에서 1843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 분립하여 ‘스코틀랜드자유장로교회’(Free Church of Scotland)가 형성되자 이로부터 3년 후인 1846년 호주 빅토리아주에서도 ‘호주대회’부터 분립하여 조직된 ‘빅토리아 자유 장로교회’(Fre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 셋째로는 1847년 이래로 스코틀랜드의 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 of Scotland)의 목사들이 빅토리아로 이주해 옴으로 1850년 1월 22일 조직된 ‘빅토리아 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가 그것입니다. 이 세 장로교단은 약 10년간의 교회연합을 위한 토의와 회합 거쳐 1859년 4월 7일 드디어 ‘빅토리아 장로교회’라는 이름하에 통합하게 됩니다. 물론 세 교단의 완전한 통합은 아니었지만 매우 획기적인 연합이었습니다. 이렇게 조직된 교회가 빅토리아주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인데 간단하게 PCV라고 부릅니다. 이 교회는 호주 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장로교단이 되었고 후일 경남선교를 주도한 교단이 된 것이다. 비록 PCV는 1859년에 구성되지만, 그 연원은 제임스 클로우(James Clow) 목사가 호주 빅토리아주에서 첫 예배를 인도했던 1837년이기 때문에 과거 호주장로교회는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1937년 호주 장로교 100주년 해사를 했고, 당시 경남지방의 대표적인 목회자였던 이약신 목사를 초청하여 강연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곡 50년이 지난 1987년 제가 멜버른 교외의 하이델베르그라는 곳의 장로교회에 갔을 때 70세가 넘으신긴 장로님이 저 더러 “약신 리를 아느냐”고 물었는데 그 분은 청년 때 이약신 목사의 설교와 강연을 들었다고 이야기 하여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와서는 PCV가 조직된 1859년을 기점으로 2009년 호주장로교회가 150주년 행사를 했는데 부족한 저를 초청해 주어 짧은 인사를 하고, 또 저의 영어 책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바 있습니다. 3. 빅토리아장로교회의 선교운동과 한국선교의 동기 저명한 교회사학자인 케네스 라토렛(K. S. Latourette, 1884-1968)은 19세기는 의심할 여지없이 ‘기독교 선교의 위대한 세기’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 시기의 선교운동은 특히 독일 경건주의 운동, 모라비안들의 선교 열정, 앵글로 색슨 세계의 영적 각성이 아우러져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비기독교 세계로 혹산되었습니다. 그래서 19세기 이후 선교운동이 큰 영향을 기쳤고 여러나라에 영향을 주었는데, 호주교회는 이런 19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선교사상 혹은 선교운동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빅토리아 장로교회(PCV)가 총회 내에 해외선교부(Foreign Mission Committee)를 조직했을 때는 교단이 조직된 이듬해인 1860년이었습니다. 당시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동기에서 선교운동이 시작되었는데 당시만 하더라고 ‘해외선교’(Foreign Mission)란 말보다는 ‘이교도 선교’(Heathen Mission)란 말이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빅토리아 장로교회는 크게 두개 지역, 곧 지금은 바누아투(Vanuatu)라고 불리는 뉴 헤브리디즈(New Hebrides)와 호주 원주민 선교에 치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850년대 소위 골드 러쉬로 인한 중국인의 대거 유입 이후에는 빅토리아주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에 대한 선교가 제3의 선교로 대두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빅토리아 장로교회가 조직된 지 약 30 여년 후인 1889년 데이비스를 한국에 파송하게 되는데, 이때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선교운동에 영향을 몇 사람의 영웅적인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존 게디(John Geddie), 하겐아우어(F. A. Hagenaur), 존 페이톤(John Paton, 1824-1907) 같은 선교사였습니다. 이들이 빅토리아 선교운동의 선구자들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페이톤은 선교지의 사회개량운동에도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선교사역과 활동은 빅토리아 교회의 선교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가 1865년 선교기금 확보를 위한 일환으로 영 연방에 속한 여러 국가들을 순방하던 중 멜버른을 방문했는데, 이때의 강연과 집회를 통해 호주 교회에 선교에 대한 각성과 선교적 책임을 환기시켜 주었고, 유능한 선교사들을 발굴하는 개기가 됩니다. 후일 부산에 와서 나병환자들을 위해 일한 매켄지(J. N. Mackenzie), 마산 창신학교 교장을 지낸 리알(D. M. Lyall), 마산에서 의신여학교 월영유치원에서 가르치며 문창교회 주일학교 와 반주자로 일한 엘리스(C. Ellis) 등은 페이톤의 영향으로 선교사로 자원하였던 이들입니다. 1925년 이전까지 경남도청 소재지였던 진주에 세워진 ‘배돈병원’은 페이톤의 아내였던 마가렛 화이트크로스를 기념한 병원(Mrs. Margaret Whitecross Paton Memorial Hospital)이었습니다. 페이튼이라는 여어이름을 한국말로 적당히 취음하여 배돈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선구적인 선교사들의 활동과 선교보고, 선교운동은 1890년대 호주장로교회에도 큰 영향을 주었고 이후 한국선교를 가능케 했던 정신적 동력이 된 것입니다. 호주교회가 한국선교를 시작하게 된 보다 직접적인 동기는 해리 데이비스(J. H. Davies)의 자원과 한국에서의 짧은 사역, 그그리고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었습니다. 호주장로교회는 한국선교에 대한 아무런 계획이 없었습니다. 오직 바누아투, 빅토리아 주에 거주한 중국인, 그리고 호주 원주민들이 선굣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데이비스가 난데없이 한국선교를 자원하였을 때 빅토리아 장로교회는 한국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선교 구상도 없었습니다. 한국은 호주 기독교 세계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고, 조선은 여전히 입국이 허락되지 않는 땅(terra incognito), 은둔국(Hermit nation)이었습니다. 그래서 데이비스가 조선으로 가겠다고 하니 그를 선교사로 인준은 했으나, 선교비를 지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재정적으로 후원해 준 이는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휘하 조직인 몇몇 청년연합회 회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데이비스의 자원과 내한(1889년 10월 2일), 그의 갑작스런 죽음(1890년 4월 5일)은 호주장로교회가 한국에 선교사역을 시작하는 중요한 동기가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헌신과 죽음이 교회의 선교 방향을 바꾸게 된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데이비스는 어떻게 조선을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데이비스가 한국선교를 자원한 배경에는 중국 복주(福州, Foochow)에서 선교하던 월푸(John R. Wolfe) 주교의 영향이 컸습니다. 영국교회 선교단체인 ‘영국교회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 소속 선교사였던 월푸는 1885년과 1887년 한국 부산을 방문한 일이 있는데 그는 한국방문 결과를 보고하면서 한국선교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호소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씨 엠 에스 선교관계자의 관심을 얻지 못했고, 그의 편지는 호주로 보내졌는데 당시 멜버른의 코필드에 있는 성 메리교회의 메칼트니(H. B. Macartney) 목사가 편집, 발행하는 『국내·국외선교』(The Missionary at Home and Abroad)에 발표되었습니다. 당시 데이비스는 카오필드에 있는 성 메리교회(성공회)에 출석하면서 메칼트니 목사와 깊은 친교를 맺고 있었습니다. 월푸의 이 편지가 데이비스에게 한국에 대한 관심과 소명을 갖게 한 것입니다. 인도에서 단기간(1876-1878) 선교사로 일한 바 있는 데이비스는 본래 인도로 돌아가려했으나 월푸의 편지를 읽고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이다. 데이비스가 읽고 조선 선교를 자원하게 했던 그 편지를 제까 연전에 「기독공보」에 소개한 바 있습니다. 데이비스가 한국에 오고 사망 한 이후 불과 10여년이 지난 191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은, 한국보다 50년 앞서 시작된 뉴 헤브리디즈나 중국인 혹은 원주민 선교를 제치고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가장 성공적인, 가장 중요한, 가장 역점을 두는 선교지역(mission field)이 되었고, 1920년대에는 빅토리아장로교회의 해외 선교비의 70% 상당이 한국 선교를 위해 사용될 정도가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산배분은 한국선교의 성과와 관심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한국, 아니 부산경남선교운동이 시작되었고, 이 선교운동이 유지, 계승, 확장되는 과정에서 빅토리아장로교회 ‘해외선교부’와 함께 선교사 파송단체였던 ‘청년연합회’(Young Men's Fellowship Union)와 ‘여전도회연합회’(Presbyterian Women's Missionary Union)의 기여와 역할이 지대하였습니다. 4. 첫 선교사 데이비스의 내한 이제 내한한 첫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의 데이비스와 그의 큰 누나 메리(Mary T. Davies)는 미국 북장로교회의 알렌 의사가 입국한지 5년 후인 1889년 10월 2일 부산항으로 입국합니다. 이때로부터 호주장로교회는 1945년 해방이전까지 78명이, 해방 이후 1947년에 다시 한국선교를 계시하였고, 1977년 이후에는 호주 연합교회가 한국선교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데이비스가는 영국에서 온 이민자인데, 1856년 뉴질랜드 왕가라이(Wangarai)에서 출생하였습니다. 4살 때인 1860년 부모를 따라 호주 빅토리아주로 이주했습니다. 1876년, 곧 그의 나이 20세 때 호주 CMS(영국교회 선교회) 파송으로 인도 선교사로 인도에서 21개월간 일했습니다. 그러나 건강상의 이유로 1878년 5월 21일 멜버른으로 돌아왔고, 그 후 멜버른대학에서 수학하고 1881년 4월에는 코필드문법학교(Caulfield Grammar School)을 설립하여 1888년까지 교장으로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 인도로 돌아가기를 원했으나 앞서 언급한 월푸의 편지를 읽고 조선이 더 시급한 선교지라고 확신하고 조선선교를 자원하게 된 것입니다. 성공회 신자였던 그는 한국 선교사가 되기 위한 목적으로 성공회를 떠나서 빅토리아주 장로교회로 이적하였는데, 이때 투락이란 지역의 투락장로교회의 젊은 목사였던 이윙(John F. Ewing)의 역할이 컸습니다. 그는 데이비스를 장로교회로 인도하였고, 1888년 11월 22일 장로교 총회에 전(前)일본 선교사였던 딕슨(W. G. Dixon)과 맥크라렌(S. G. McLaren)을 포함하여 17명의 지도급 총대원들의 서명을 받아 데이비스를 한국 선교사로 갈 수 있도록 인준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 결과 데이비스가 목사안수에 필요한 기본교육을 마치고 시험에 합격하면 목사로 안수하기로 가결하게 됩니다. 데이비스는 ‘멜버른남노회’의 목사후보생으로 허입되었고, 안수에 필한 공부를 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로 갔고 에딘버러의 뉴칼리지(New College)에서 6개월간의 신학공부를 합니다. 필요한 과정을 마치고 1889년 5월 13일 멜버른으로 돌아왔고, 멜보른 남노회가 실시한 목사고시에 합격합니다. 그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빅토리아주 장로교회 설립 50주년을 기념한 특별기간 중인 1889년 8월 2일 청년연합회의 지원을 약속받고 8월 5일에는 목사안수를 받게 됩니다. 목사안수를 받고 선교사로 임명된 그는 청년연합회의 재정지원 하에 한국선교사로 향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의 누나인 메리(Mary T. Davies)도 동행하였다. 많은 이들이 메리가 데이비스의 동생이라고 말하는데 동생이 아니라 누나입니다. 메리는 뜻있는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멜보른교외기독교연합회’(Suburban Christian Union)의 지원 하에 함께 한국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데이비스 남매는 1888년 8월 16일 금요일 저녁 멜버른 시내 YMCA홀에서 거행된 환송회를 끝으로 8월 21일 멜버른을 떠나 시드니로 갔고, 그곳에서 며칠을 보낸 후 다시 8월 28일 증기선 ‘치난(S. S. Tsinan)호로 시드니를 떠나 한국으로 향하는 긴 여정에 올랐습니다. 이로부터 40여일 간에 걸친 항해를 끝내고 10월 2일 이른 아침 부산항에 입항한 것입니다. 항해 도중 데이비스 남매는 일시 본국에 귀국했다가 다시 임지인 서울로 돌아가는 당시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였던 벙커(D. A. Buncker) 내외를 만나 한국의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벙커의 안내로 부산을 둘러본 후 다시 출항하여 4일 오전 11시에 제물포에 도착하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말을 타고 인천을 떠나 그날 오후 늦게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때로부터 북장로교의 언더우드와 함께 거하면서 서울에서 5개월을 지내게 되는데, 이 5개월간 데이비스는 한국어 공부에 주력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변 지역을 순회하고 어더우드와 같이 전도여행을 다닌 일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조선어 공부에 열중하였고 그 때 공부한 노트 일부를 제가 복사하여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조선말 공부에 바빠 가족들에게 편지 쓸 시간조차 없다”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약 5개월 후 일상의 대화가 가능하게 되었을 때 그는 누나는 서울에 남겨두고 부산으로의 여행을 시작합니다. 그는 바울의 선교 원리를 따라 일단 선교사가 없는 지역으로 가서 일하기로 작정하고, 한때는 군산지방으로 가서 선교할 것을 신중히 고려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만일 군산으로 갔었다면 호주교회의 한국 선교의 판도가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데이비스는 1890년 3월 14일, 어학 선생과 하인, 그리고 매서할 문서와 약간의 약품 등을 준비하여 서울을 떠나 수원, 과천 등 경기도 지방과 공주 등 충청도 지방을 거쳐 경상도 지방까지 300마일에 이르는 약 20일 간의 답사여행을 마치고 4월 4일(금) 목적지인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천연두에 감염되었고, 곧 폐렴이 겹쳐 부산 도착 다음 날인 4월 5일 34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조선 땅을 밟은 지 6개월,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183일만이었습니다. 그 부산에 체제하던 게일은 데이비스의 시신을 부산항이 굽어보이는 부산 동광동 뒷산인 복병산에 안장하였습니다. 이 때의 상황을 서울에 남아 있는 메리에게 알리는 게일의 긴 편지가 남아 있습니다. 데이비스의 죽음과 함께 그의 누나 메리도 폐렴으로 얼마간 고생했으나 헤론 의사의 치료로 회복한 다음 한국을 떠나 그해 7월 18일 멜버른으로 돌아감으로써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한국선교는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데이비스의 죽음은 호주 교회의 한국선교를 시작하는 동기가 됩니다. 선교사는 살아서도 일하지만 죽어서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5. 선교사파송기관 호주 장로교회의 한국선교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데이비스의 개인적인 자원과 결단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이후의 한국선교는 빅토리아장로교회 ‘청년 연합회’(YMFU)와 ‘여전도히연합회’(PWMU)의 후원과 지원으로 계승됩니다. 빅토리아장로교 총회 해외선교부는 이들 두 기관보다 후기에 한국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하고, 두 선교기관을 관장하게 됩니다. 청년연합회의 창립과 첫 선교사의 파송 먼저 청년연합회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청년연합회는 맥길리버리(McGillivray) 씨의 발의로 1888년 조직되었습니다. 처음에는 Young Men's Sabbath Morning Fellowship Uniond라고 불렸는데 1876년 뉴 사우스웰즈(NSW)주에서 처음 조직되었고, 그후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는데 빅토리아주에서는 1888년 7월 27일 준비모임이 소집되어 회칙 초안 등 총회 조직준비에 착수하였고, 동년 8월 17일에는 11개 개체교회 청년들을 창립위원으로 하여 역사적인 빅토리아주 청년연합회를 조직하게 됩니다. 이때 로버트 길레스피(Robert Gillespie)는 회장으로 선임되었고, 빅토리아주 장로교 신학교의 초대교수였던 렌틀(J. Laurence Rentoul), 투락교회의 이윙 목사(J. F. Ewing), 호손(Hawthorn)장로교회 장로 던칸 러브(Duncan Love), 그리고 첫 제안자였던 맥길리버리(M. McGillivary)는 부회장으로 피선되었고, 후일 뉴 사우스 웰즈주에서 장로교회 목사가 된 스틸(James Steels)씨는 총무가 됩니다. 조직 당시는 남․여 혼성으로 구성되었으나 후일 여전도회연합회가 창립된 이후 점차 남 청년들의 연합체로 발전되었습니다. 이 모임은 원래 주일 아침 함께 모여 성경공부와 기도 등을 통해 영적 성장을 도모하고 친목과 교제를 위한 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데이비스를 한국에 파송, 지원하는 일을 계기로 선교운동단체로 발전하였고, 주일 아닌 평일에 회합하는 경우가 많아짐에 따라 이 연합체의 이름도 후일 Young Men's Fellowship Union으로 변경되었고, 후에는 The Presbyterian Fellowship of Victoria로 변경됩니다. 이 모임이 처음 조직될 당시에는 11개 교회 청년들로 구성되었으나, 일년 안에 598명의 회원을 가진 26개 교회연합체로 성장하였고, 1889년 8월 2일 장로교 창립 50주년 기념대회 기간 중에 모인 특별회의에서는 한국선교사로 자원한 데이비스 목사를 지원하기로 정식 결의하게 된 것입니다. 청년연합회는 1889년 데이비스를 파송한 이래 1891년에는 멕카이(James Mackay) 목사 부부를, 1894년에는 아담슨(Andrew Adamson) 목사 부부를, 1903년에는 커를(Dr. H. Currell) 의사 부부를, 1910년에는 왕대선(R. D. Watson) 목사 부부를, 1916년에는 도별익(F. J. Thomas) 목사 부부를, 1929년에는 부오란(F. T. Borland) 목사 부부를 각각 파송하고 지원하였습니다. 특히 1921년 도별익 목사가 사임한 후 마산 창신학교 교사였던 김호열 씨를 초청하여 멜버른대학에서 유학토록 지원하였으나, 건강 악화로 수년 후 사망하여 좋은 결실을 얻지 못했습니다. 김호열은 호주에서 유학한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여전도회연합회의 창립과 한국선교 지원 데이비스의 죽음은 ‘여전도회연합회’(PWMU) 창립에도 중요한 동기를 부여하였습니다. 여전도회 연합회는 호주교회의 선교사 파송기관 중 가장 많은 수의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였고 한국선교를 지원했던 영향력 있는 단체였습니다. 여전도회 연합회는 딘우디(C. Dinwoodie) 양이 익명으로 헌금한 50파운드, 한국선교사를 지원하는 사람을 위해 써 달라고 50파운드를 기증한 메리 데이비스(Mary T. Davies), 한국선교가 재개되기를 바란다며 역시 50파운드를 기증한 쿠리부인(Mrs Currie)의 숨은 공로와 함께 여전도회의 조직을 위한 여러 갈래의 시도가 어우러져서 1891년 여전도회연합회를 공식적으로 창립하게 됩니다. 멜버른시에서는 1890년 7월 29일 투락교회에 출석하던 하퍼 부인의 집에서 이방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장로교 여전도연합회 창립의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한 모임이 회집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여성연합회 조직을 위한 일련의 노력은 빅토리아주의 3개 지역에서 동시에 일어났는데, 이는 당시 교회여성들의 선교에 대한 일반적인 의식을 반영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즉 멜버른에서의 준비 모임과 더불어 발라랏에서는 케언스(Mrs. Cairns) 부인이, 질롱에서는 데이비스(Mrs J. Davies) 부인이 각기 별도의 조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상과 같은 이 일련의 움직임이 어우러져서 1890년 8월 25일 멜버른 시내의 장로교 총회회관(Assembly Hall)에서 정식으로 여전도회연합회를 조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첫 내한 선교사가 데이비스의 두 여동생과 제수씨가 이 조직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점이다. 발라랏의 케언주 부인은 데이비스의 여동생이었고, 질롱의 데이비스 부인은 첫 선교사 데이비스의 동생 존 데이비스의 부인이었으니 첫 서뇨사 데이비스의 재수씨였습니다. 이 점은 데이비스의 한국에서의 죽음이 가져온 분명한 영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전도회연합회가 조직된 다음 해인 1891년 멘지스(Miss Belle Menzies), 페리(Miss Jean Perry), 그리고 퍼셋(Miss Fawcett) 등 3 미혼여선교사를 부산으로 파송하였고, 이때부터 해방 전까지 35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는데, 이는 동일기간 내한한 호주선교사 총수의 60%에 달합니다. 이들 중에는 데이비스의 두 조카인 마가렛 데이비스(Miss Margaret Davies, 대마가례, 사역기간, 1910-1940년)와 진 데이비스의사(Dr Jean Davies, 대지안, 1918-1941년)도 약 30년간 한국선교사로 일했다. 두 조카라 바로 첫 선교사 데이비스의 동생 존 데이비스의 딸입니다. 총회 해외선교부 헌국에 선교사를 파송했던 또 하나의 기관이 빅토리아장로교 해외선교부(Foreign Mission Committee)였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선교사의 인준과 관리 등 총회 해외 선교부가 총괄하였으나 초기에는 청년연합회와 여전도회 연합회가 직접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재정적 지원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00년대 이후부터 총회 선교부가 직접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청년연합회의 경우 자체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는 일은 점차 총회선교부 사역 속에 흡수되었습니다. 6. 선교지부의 설치, 선교사들의 활동, 선교정책 첫 선교사의 내한과 죽음, 1891년의 제 2진 선교사 5명의 내한, 그리고 초기 소규모의 인적 구성과 내분, 선교사의 사임 혹은 사망 등 여러 어려움이 있었으나 1900년대를 거쳐 가면서 주한 호주선교부의 활동이 정착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그 동안 부산,경남지역은 호주장로교선교부와 미국북장로교 선교부의 공동선교지역이었습니다. 예양협정(禮讓協定)에 따라 양 선교부가 함께 부산과 경남지역에서 사역한 것입니다. 물론 호주선교부는 부산 초량과 부산진 좌청동을 비롯하여 경남 동부지역을, 북장로교 선교부는 지금의 중앙동, 영도를 비롯하여 김해 등 서부지역을 맡습니다만 1901년 이래로 양 선교부 간의 계속적인 대화와 경남지역에서의 선교지역 분담과 재조정이 있어왔습니다. 그러다가 1913년 말에는 미국 북장로교선교부가 부산, 경남지방에서 완전히 철수함으로서 1914년 이후에는 경남지역 전역은 호주 장로교 선교부의 관활 하에 있게 됩니다. 당시 부산과 경상남도의 인구는 약 150만으로 추산되는데, 더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 호주장로교 해외선교부는 1910년 ‘전진운동’(Forward Movement)을 전개하여 1910년에서 1914년 어간에 8명의 남자(목사, 의사) 선교사와 9명의 미혼여선교사를 부산 경남지방에 파송하였습니다. 그동안 호주장로교선교부는 부산진과 초량 등 부산지부(1891) 중심으로 사역했으나 곧 이어 진주(1905), 마산(1911), 통영(1913)과 거창(1913)에 선교지부(Mission Station)를 열었고 이 5개 지부를 중심으로 경남지역 전역에서 사역하였는데, 이들 선교지부의 관활 지역을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부산(진)지부: 초량일원, 동래, 기장, 언양, 울산 양산, 김해, 울릉도, 밀양, 영산, 창녕, 진주지부: 진주일원, 사천, 곤양, 하동, 남해, 삼가, 산천, 의령 마산지부: 마산일원, 함안, 창원, 웅천, 칠원 거창지부: 거창일원, 안의, 함양, 합천, 초계 통영지부: 통영일원, 거제, 고성, 진해, 용남 호주선교부는 이들 5개 지역에서 만이 아니라 평양과 서울에서도 활동했는데, 왕길지(Gelson Engel)선교사는 1906년부터 평양신학교 강사로, 1919년부터 은퇴할 때인 1935년까지는 신학교의 교수로 봉사하였습니다. 평양신학교는 주한 4 선교부의 연합교육기관이었으므로 호주선교부는 왕길지 선교사를 교수로 파송하였던 것입니다. 또 의료선교사인 마라연(Dr Charles McLaren)는 당시 한국에서의 유일한 신경정신과 의사였는데, 1923년부터 1938년까지 세브란스병원과 의전(醫專)에서 진료와 교육을 담당하였습니다. 호주선교부도 사도시대 이후 선교사역의 가장 주요한 전도, 교육, 의료 등 3대 분야에서 활동하였고, 한가지 더하여 자선과 구제 사역을 전개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사역하는 동안 네비우스 정책을 존중했고, 순회 게척전도를 중시하였습니다. 전도사역은 목사 선교사들과 미혼 여선교사들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었고, 이 사역은 선교지부를 중심으로 관할지역을 정해 순회전도와 양육, 교회 돌봄, 동사(同事) 혹은 당회장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은 6개월을 단위로 해 관할지역을 순회하고 양육과 교육, 성례를 담당하였습니다. 호주선교부의 중요한 정책이 교육활동인데, 특히 부녀자와 아동 교육을 강조하였고, 여성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 점은 호주 선교부에서 미혼 여성선교사율이 높았기 때문에 부녀자와 아동 등 여성교육을 강조하게 된 것입니다. 해방 전 호주 선교사 총 78명 중 남성은 24명, 선교사 부인 19명을 포함하여 여성은 54명이었습니다. 이중 미혼 여선교사는 35명이었는데 전체 선교사의 60%에 달했습니다. 이런 여선교사 비율은 다른 선교부보다 훨씬 높은 비율이었습니다. 경남지방은 경기 이북지방에 비해 보수적이었음으로 여성교육에 대한 무관심이 더욱 심했습니다. 그래서 여성 교육은 시급했고 이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호주선교부는 각 선교지부에 남, 여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남자학교는 정상 궤도에 오르면 해 지역 교회에 경영권을 넘겨주는 것을 고려했으나 여자학교는 선교부가 운영하도록 했습니다. 특히 호주선교부는 부산의 일신여학교(1895), 진주 시원여학교(1906), 마산 의신여학교(1913), 통영에 진명여학교(1914)를 설립하고 여성교육에 힘썼는데, 일신(日新)여학교는 한강 이남에서 가장 오래된 여자 학교로서 명성을 얻었고, 지금은 동래 여자중고등학교로 존속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통영과 동래에 실업학교(Industrial, Vocational 혹은 Farm school)를 설립하여 가난한자, 장애인, 혹은 불우한 여인들의 생계를 위한 직업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호주선교사들은 근대적 의미의 교육활동, 곧 교육은 특수한 일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교육이 대상이며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는 점, 또 그 교육의 목표는 과거급제나 공직에 나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건실한 사회인, 교양 있는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함양하는 것이라는 점을 고양하고 유치원 교육, 여성교육을 중요시하고 또 실용적인 직업교육을 통해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삶의 길을 제시한 것은 큰 공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주선교부의 의료 활동은 타 선교부에 비해 미진하였습니다. 78명의 내한 호주선교사 중에서 목사 선교사는 20명에 달했으나, 의료선교사는 11명에 불과했습니다. 이 중 의사는 4명이었고 간호사는 7명이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호주 장로교회는 다방면의 의료활동을 전개할 만큼 재정적으로 부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주를 의료 활동의 중심지로 삼고 그곳에 배돈(培敦)병원을 설립하였습니다. 이 병원은 경남지방의 유일한 병원으로 이 지방민들에게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 대신 부산과 통영에는 아동 건강관리소(Baby Welfare Center)를 운영하였다. 특히 통영지부에서는 작은 선박을 이용하여 위급한 섬사람들을 진주로 후송하여 치료받도록 배려하였습니다. 호주선교부의 의료 혹은 자선사업 중에서 중요한 한 가지는 부산의 나환자 보호병원(Leprosy Asylum)을 운영한 일었습니이다. 이 일은 1910년부터 시행되었는데, 수용시설의 책임자는 매견시(J. N. MacKenzie) 목사였습니다. 그는 단기간 의학교육을 받았던 목사였고, 후일에는 독학으로 의학 공부를 이수하고 의사자격을 얻기도 했는데, 인간이 당하는 가장 큰 고통을 가슴에 안고 사랑으로 이들을 보살폈습니다. 그의 이러한 기여 때문에 일본 천황과 조선총독으로부터 몇 차례 훈, 표창을 받기도 했고, 귀국 후 1939년에는 호주빅토리아장로교 총회장으로 추대되기도 했습니다. 부산의 일신병원을 설립한 매혜란, 매혜영은 바로 매견시 선교사의 장녀와 차녀입니다. 7. 선교사들의 철수 1939년은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가 데이비스에 의해 시작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 이지만 불행하게도 이 해는 선교사들의 내키지 않는 철수가 시작되었던 해였습니다. 일제의 탄압은 심화되었고, 일제는 대동아권공영권이라는 이름으로 침략 야욕을 드러내고 이 강산에 전운이 감돌았습니다. 한국인들과 서구인들의 접촉이 감시의 대상이 되었고, 호주선교사 유영완(Rev Esmond New)는 영국 간첩이라는 소문과 함께 그는 특별 감시를 받았습니다. 그는 내한하기 전 해군장교로 근무한 바 있었기 때입니이다. 호주선교부에 의해 설립된 유구한 역사를 지닌 진주교회는 일제의 끈질긴 요구와 협박 때문에 “진주교회가 보내는 선언문”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호주선교부를 배척하고 관계를 단절한다는 선언과 함께, 소위 일본적 기독교를 추구하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문서를 발표한 일도 있었습니다. 등사판으로 만든 이 문서는 일제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일제의 한국교회에 대한 탄압 또한 심화되었습니다. 설교는 제한을 받았고, 찬송가 중에서도 일부는 부를 수 없도록 금지되었습니다. 집회도 제한적으로 허용되었고, 배교행위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1940년 9월에 이르러서는 선교는 크게 제한되었습니다. 미국 영사관은 모든 미국인의 철수를 명하였고, 11월 16일에는 미국 정부가 특별히 준비한 마리포사(S. S. Mariposa)호로 미국인 선교사와 자녀들 219명이 한국을 떠났습니다. 호주선교사들에게도 철수가 권장되었고, 어떤 이는 안식년으로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나오지 못했습니다. 1940년 말에는 이미 90%의 외국 선교사들이 다 한국을 떠났습니다. 예견했던 대로 1940년 12월 선교사역의 종말이 왔습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서 태평양 전쟁(대동아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호주선교사들도 다 돌아가고 마지막 5명이 남았는데, 그들이 마라연(Dr McLaren), 예원배 부부(Rev & Mrs Wright), 나례인 부부(Rev & Mrs Lane)였습니다. 이들은 가택연금 되었다가 1942년 6월 2일 일본으로 추방되었고, 일본에서 2개월 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포로교환 형식으로 포르투갈 영 동부 아프리카를 거쳐 호주로 돌아갔습니다. 결국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는 1941년으로 원치 않게도 중단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호주 장로교회의 한국선교에 대한 이 개괄적인 안내가 부산 경남 지역에서의 기독교의 기원을 헤아리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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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생의 삶에 수많은 사건, 고난, 즐거움 등이 있는데 지나고 보면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의 삶에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셨지만 수많은 고난도 있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서의 삶, 억울하게 누명쓰고 감옥에 들어가고, 가까운 형제들에 의해 구덩이에 빠져 죽게될 위기, 애굽으로 팔려 간 일...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고난이 오히려 요셉의 삶에 유익을 얻게 된 것을 요셉은 깨달았습니다.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합니다. 요셉은 수많은 고난 후에 리더십이 견고해졌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는 어려움 때문에 죄수들을 만나게 되고 꿈을 해몽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계기가 되어 총리가 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때 요셉의 깨달음은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시구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체험하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속에 고난을 당할 때는 “왜 내게 이런 고난이 있는가?” 원망하기도 하는데 지나고 보면 그때 고난이 내게 유익했구나!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신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삶속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나중에 하나님께서 합동하여 유익을 이루시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지막 결과를 더 유익하게 해주십니다. 요셉의 신앙,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요셉이 자기를 구덩이에 빠뜨려 죽이려고 했던 형제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비결은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 어떤 반응을 나타내게 될까요? 마음이 넓어지며 용서하게 됩니다. 미움보다 사랑하게 됩니다. 긍정적으로 되며 매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염려가 적어지게 됩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안이 임합니다.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합동하여 유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고난도 지나고 보면 감사제목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는 자기를 힘들게 한 사람까지 위로해주고 격려해 줍니다. 창세기 50: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고난중에 있는 요셉의 삶을 위로해 주시고 총리가 되는 상을 주셨습니다. 요셉이 축복받음으로 요셉을 죽이려고 했던 형제들도 잘 사는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선하고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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