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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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수 총장] 현대 공교육의 기초:인간의 전적 자율권
    현대 공교육의 기초:인간의 전적 자율권 오늘은 내 친한 친구이자 동역자인 호주의 리챠드에들린(Richard Edlin) 박사가 저서 “The Cause of Christian Education”에서 소개한 TV 인터뷰 한 기사를 소개하면서 현대공교육의 문제점을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아주 오래 전에 미국에서 발간되는 선정적인 잡지 <포럼>(Forum)의 편집장과 십대 학생들간의 인터뷰가 방영된 적이 있었습니다.인터뷰에 참여한 십대들 대부분은 기독교 가정의 학생들로 기독교 학교가 아닌 일반 공립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이었습니다. 포럼(Forum)의 편집장은 논의의 전제가 되는 질문을 학생들에게 제시함으로써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인간이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은 선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율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학생들은 잠시 생각한 후 이 전제에 대해 모두 수긍했으며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이내 인간의 성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었는데 편집장은 자신이 수 년 동안 여자친구와 “계약결혼” 중에 있으며 공식적인 결혼계약 없이 함께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과 여자친구가 서로 사랑하고 있으며 현재의 동거 관계가 가장 적합한 것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더군다나 아이도 없기 때문에 만약 관계를 청산해야한다고 느끼면 어떠한 법적 제재 없이 간단하게 헤어질 수 있다고 하며 토론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이런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습니다. 즉각적으로 몇몇 학생들이 결혼과 관련된 성경구절과 교훈을 이야기하며 편집장을 설득하려 했으나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학생들이 이야기할 때마다 편집장은 인터뷰 시작 시 학생들이 동의했던 부분, 즉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인간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전제를 상기시켰습니다. 그리고는 이 전제에 동의한 이상 학생들이 이야기하는 성경말씀과 모순은 되지 않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상당시간 이 모순에 대한 토론이 진행되었는데, 기독 학생들은 성경말씀을 인용하여 이 “계약결혼”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제시하려 했지만 이미 인정해버린 인간의 자율권과 대치됨으로 인해 전전긍긍하였습니다. 적어도 이 상황에서는 기독 학생들이 자신들에게 제시된 실제 삶의 모습을 기독교적으로 분석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기게 되었을까요? 문제는 기독 학생들이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존재를 전혀 고려치 않은 채 인간의 전적 자율권을 인정한 것에서부터 혼돈이 시작된 것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혼돈을 자주 겪게 됩니다. 우리가 실제 경험하게 되는 구체적인 상황들과 기독교 신앙은 별개인 것처럼 생각하도록 하는 유혹으로 인해 이러한 혼돈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편집장이 제시한 비 성경적인 견해를 기독 학생들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는 것에서부터 중요한 문제가 시작된 것입니다. 학생들이 비 성경적인 견해를 그대로 수용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에들린 박사에 의하면 그들이 다니고 있는 공립학교의 교육을 가장 큰 원인으로 보았습니다. 학교는 단순히 ‘사실’(facts)만을 가르치는 곳이 아닙니다. 학교는 이러한 ‘사실’이 이해되어지는 삶에 대한 접근과 태도를 가르치는 곳입니다. 이는 교사가 가르치는 교육과정에 명확하게 언급될 수도 있고 언급이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와 같은 학교의 역할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공립학교 교육현실이 어떠합니까? 사회학, 과학, 언어학 등 몇몇 학과목 바탕에 깔린 기본 전제를 살펴보면 인간이 결정하는 것에는 어떤 한계를 그을 수 없고, 또 이를 제한하는 권위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중심 가치로 삼고 있습니다. 인간이 이 세계의 중심이 되어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공립학교의 기초를 이루는 이러한 세계관에서 말하는 진리라는 것은 인간 개개인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인간 밖의 어떤 존재로부터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철학은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며 살 합법적인 자율권을 인간이 소유하고 있다는 사상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전제에서부터 인간은 자유롭게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고 행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교육의 모든 과정에서 비록 말로 명확히 표현되지는 않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이러한 원리는 인간이 아무런 제한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미 역사를 통해 인간 본성이 어떠한지를 명확히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란 존재가 마음의 병, 빈곤, 무지들의 문제를 지혜롭고 이타적인 선택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존재이며 모든 사람 나아가 온 세상을 보다 좋게 발전시킬 수 있는 존재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으로 보는 타락한 인간 본성, 하나님으로부터 근거한 인간행동에 대한 법률, 규범, 가치는 이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선포적이며 직접적으로 온 세계를 유지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세계를 주관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현대 공교육의 비 성경적인 관점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는 우리의 귀한 언약의 자녀들이 성경적 세계관을 통해 세상을 올바로 바라보면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성장해 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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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14
  • [신기성 장로] 하늘빛 닮아 가야 할 우리
    얼마 전 국내 유명 어느 배구선수가 경기 중 게임이 뜻대로 안 풀리자 순간적으로 욕을 하는 일이 발생했는데 이를 지켜본 기자가 입 모양을 보고 이 선수의 무안함을 두둔해주려고 ‘식빵’이라 했다고 둘러대어 그 일 이후 그 선수는 ‘식빵 언니’라고 불리고 있다고 한다. 필자도 가끔씩 지인들과 운동을 가는 경우가 있는데 동반자마다 본인의 게임이 뜻대로 잘 안되면 순간적으로 욕을 내뱉는 경우를 종종 듣게 된다. 지금은 고인이 된 착하기 이를 데 없는 분이 있었는데 운동하면서 욕을 다 배웠다고 웃으면서 말하곤 했었다. 욕, 그 자체는 비신사적이고 반사회적 언어로 분명 비난 받을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겠다. 그런데도 욕을 일상의 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내뱉는 사람의 마음을 시원케하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측면도 있다고 한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전문화될수록 욕이라는 언어를 많이 쓰는 모양이다. 최근 어느 카드회사에서는 욕에 가까운 발음의 시발(始發)카드를 출시해서 젊은이들의 카타르시스를 자극하고 구매 욕구를 높이려는 얄팍한 상술을 드러내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욕을 상술이나 그들의 카타르시스를 해소하는 수단으로 억지 변명을 한다 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언어생활은 어떨까? 오래전 부흥회에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유명 강사 목사님을 모셨는데 식사를 가면서 자기 교회 부목사와 통화를 짜증스럽게 끊으면서 “XX가 말귀를 못 알아들어~” 하면서 흥분하던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그 일로 부흥회 내내 무슨 설교를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고 전혀 은혜가 되지 못했던 씁쓸한 기억이 있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엠 4:29)” 어디 그뿐인가? 주님은 (우리에게) 형제에 대하여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나가라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무릇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닮아 가는 사람들이다. 또한 하늘을 닮은 사람들이다. 세상 속에서도 진실한 말, 감사의 말을 해야 하는 사명을 지닌 사람이 곧 우리들이다. 하물며 교회 안에서는 오죽하겠는가? 상대방을 인정하고 덕을 세우며 존중히 여길 때 곧 그곳이 진정한 교회며 그곳에 주님이 계실 것이다. 이 가을에 아직은 세상은 힘들 수는 있겠지만 하늘을 우러러보며 우리의 마음도, 우리의 언어도 하늘빛 닮아 가는 모두가 되어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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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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