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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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17
    I. 서언(序言) “복음의 메카(Mecca)는 예루살렘이다.”란 말을 어떤 칼럼에서 읽어본 적이 있다. 아무리 이해하면서 보려고 했지만 정말 이건 잘못된 말이었다. 흔히들 어떤 중심지를 말하고자 할 때 메카란 말을 많이 쓴다. 근래에 본 각 언론사에서 이 말을 사용한 것을 나열해 보면, ‘경제 문화의 메카OOO’, ‘게임의 메카’, ‘유기농 산업의 메카’, ‘패션의 메카 밀라노’등이었다. 이런 말은 이미 사회적 통용 언어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다. 이는 ‘나락’, ‘야누스’등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기독교 단체와 성도들이 사용 할 말은 아니다. 이에대하여 이 용어들의 어원을 논하고자 한다. II. ‘메카’,‘나락’,‘야누스’의 의미와 유래 1. 메카(Mecca)의 유래 : ‘메카’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도시 이름이며,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Muhammad)’의 고향인 동시에 이슬람교의 발생지이며 중심지이다. 또한 ‘무함마드’ 이전에도 메카는 다신 숭배의 중심지였다. 이런 이유로 흔히들 중심지를 말할 때는 무슬림(Muslim)들 뿐만이아니라 일반인들도 ‘메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서두에서 논한 대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는 일이다. 더군다나 ‘복음의 중심은 예루살렘이다.’라고 해야 될 것을 좀 더 유식하게 말한다고 ‘복음의 메카는 예루살렘이다.’라고 표현한 것은 너무 잘못된 말이다. 2. 나락(那落, 奈落, naraka)의 유래 : 얼마 전에 어떤 책임 있는 기독교계 방송국에서 ‘오늘날 교회의 신뢰도가 나락으로 떨어졌다.’라는 보도를 했다. 여기의 나락이란 말도 흔히 사용하는 국어사전에 등제되어 있는 용어이기 때문에 이 말을 방송용어로 사용한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락(那落, 奈落)이란 말의 유래를 안다면, 기독교계 용어로서는 옳지 않는 말이다. 나락이란 말은 원래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의 ‘나라카’(naraka)를 음역한 말로, 본래 ‘밑이 없는 구멍’을 뜻하며, 지옥(地獄) 또는 괴로움을 받는 곳을 말하는 전형적인 불교 용어이다. 또 이 말은 일반적인 지옥의 의미보다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극한적인 상황을 비유해서 설명할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이로 볼 때 이런 완전한 불교의 교리적 용어를 교회적인 사항을 이야기를 할 때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는 일이다. 3. 야누스(Janus)의 유래 : 오래전 ‘욕망의 두 얼굴’이란 영화가 개봉된 적이 있다. 내용은 바로이 두 얼굴의 양면성을 나타내는 ‘야누스’ 이야기이다. 그 어원을 구체적으로 논한다면, ‘야누스’는 로마의 출입문과 아치형의 다리를 지키는 신의 이름이다. 또한 이 신은 양면(兩面)의 얼굴과 머리 혹은 4개의 얼굴을 가진 형상도 있다. 하지만, 이중에서 어떤 얼굴을 보느냐에 따라 행운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불운을 주기도 한다고 믿고 있다. 또한 이 말에서 한해의 끝과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Janualy'란 1월 달의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이로 볼 때 이 말도 로마 신화에 나오는 미신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인이 즐겨 사용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III . 결 어(結語) 이상으로 몇 가지 용어들을 논하면서 느끼는 것은 ‘왜 사람들은 단어의 뜻을 명확히 구분하지못하면서도 이런 용어들을 자주 사용할까?’라는 의문을 가져 볼 때가 많다. 그 중요한 이유 중의하나는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언어 사대주의 사상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과거부터 중국의 한문을 선호해 온 것이나 현대에선 영어권이나 외래어를 선호하는 것과 아예 우리 국어를 경시하는 풍조가 이런 애매모호한 용어들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타종교적인 용어들의 역사가 길게는 수천 년에 이르고, 거기에 비례해서 그 용어들이 우리말에 너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구분해서 사용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대로 그 유래와 뜻도 모르면서 계속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복음의 메카(Mecca)는 예루살렘이다.’라고 하거나, ‘오늘날 교회의 신뢰도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야누스의 두 얼굴’이란 신앙적인 용어가 아닌 말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 있는 말이 아니라면, 될 수 있는 대로 신앙적으로 알맞은 용어들을 알기 쉽게, 듣기 좋게, 보기 좋게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가장 아름답고 좋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언어의 품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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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 [오성한 목사] 성령충만(2/3)과 죄의 법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도 죄의 법은 우리에게 계명을 지킬 수 있는데 못 지켰다고 속이며 부담을 안겨 온다. 그것으로 나를 죽인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7:11).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강조한다. 신앙생활은 나의 행위를 고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다. 행위를 고치려는 신앙생활에서 빨리 빠져 나와서 자유 하라.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믿는 것이다. 생수의 근원되신 주님을 버리고,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파선 안 된다(렘2:13). 예레미야서의 주제다. 성경 전체의 주제이기도하다. 생수의 근원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신앙생활이지 내가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파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다. 나를 고치려고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님을 발견하라.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 신앙생활임을 발견하라. 당신은 이미 성령의 임재 안에 있으며 성령충만함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생명의 풍성함을 얻는다. 참 자유를 만끽하며 능력의 삶을 산다. 자신을 보며 죄책감과 죄의식을 가지느냐,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을 믿음으로 바라보느냐가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실수할 대마다 “나의 모습이 이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구나!” “오늘도 나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되겠구나! 감사하다.”는 깨달음을 가져야 한다. 보혈 앞에서는 철면피가 되어야 한다. 자신을 보면 “이래가지고 되겠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책감 죄의식 속에 사로잡히길 원하시지 않으신다. 내 속에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마음대로 잘 안 된다. 내 지체 속에는 다른 법도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의 법으로 항상 나를 사로잡아 온다. 죄의 법은 절망이다. 사망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라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 사망의 법에서 건짐을 받는 길을 발견하고 걸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죄의 법이 주는 생각을 묵상하지 않고 임마누엘을 묵상하는 것이 성령충만으로 출발하는 길이다. 당신 안에 잠자는 성령의 능력을 깨우는 길이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라고 탄식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바울을 보라. 죄의 법에서 해결 받았음을 선포하며 생각하라고 한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5)하면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라고 하는 환희를 보는가? 펄쩍펄쩍 뛰는 바울의 모습을 보는가? 이것이 나의 모습니다. 해방이다. 죄의 법에서 완전히 벗어남을 받아들이는 것이 성령충만으로 출발하는 삶이다. 성경 전체가 그렇지만 특히 로마서 전체엔 놀라운 복음이 숨어져 있다. 로마서 전체가 그렇다. 로마서 5장에서도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고 이 은혜가 많은 사람에게 넘쳤다고 고백한다(롬5:15). 이제 은혜가 왕 노릇한다고 한다(롬5:21). 성경 전부가 이 이야기다. 율법적인 눈을 걷어 버리고 은혜의 복음, 예수의 복음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한다. 생수의 근원되신 주님을 버리고, 가둘 수 없는 터진 웅덩이를 파는 일이 예레미야 시대만의 일이 아니다. 정말 안타깝다. 통탄할 일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왔다 가셨는데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이 부족하단 말인가? 우리는 주님과 하나 되어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났다(로마서 6장). 예수님과 함께 보좌 우편에 앉혔다(엡2:6).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하심을 공간의 어떤 다른 우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영의 세계는 공간과 시간과 물질의 세계가 아니다. 이해 할 수 없는 일 같지만 그렇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김 집사 몸에도, 박 집사 몸에도, 오 목사 몸에도 계신다. 나누어져 계신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의 모든 몸에 온전하게 계신다. 이것은 공간 계념이 아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우리가 사는 다른 우주적인 공간으로 승천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우리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우리 몸에 성령께서 계신다. 우리 몸에 하나님이 거하신다. 우리 몸이 성전이다. 이사야가 본 보좌가 우리 몸에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몸이 하늘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무리 일까?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위쪽만 하늘이 아니다. 옆쪽도 하늘이고 밑쪽도 하늘이다. 하늘이라는 개념이 3차원적인 공간 계념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면 하나님 계신 곳이 하늘이다.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면 예수님의 승천으로 우리 몸으로 승천하셨다고 이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승천이 우리 몸으로 하셨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 우편에 앉히심을 이해하기 위한 설명이라고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며 읽어 주길 바란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6)라는 말씀을 좀 더 생생하게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아 설명해 본 것이다. 믿음은 이것을 묵상하고 믿는 것이다. 스스로의 삶을 고치려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바른 복음을 알고 살 때 저절로 따라오는 열매임을 보아야만 한다. 회개는 나를 고치려는 것이 회개가 아니다. 회개는 예수님께서 해 두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나를 고치려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야 한다. 우리는 전에는 어두움이었다. 이제는 빛이다. 빛의 자녀들처럼 받아들이고 행하면 된다. 우리가 실수했을 때 회개하면 된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이런 또 실수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실수로 인해 죄책감에 쌓이지 않겠습니다. 용서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새 힘을 얻습니다. 주님이 승리했습니다. 주님의 승리가 저의 승리이다. 제가 오늘도 철저히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러면서 자꾸 십자가로 돌아가면 된다.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예수님과 함께 하늘 에 앉혔음을 믿는 것이 성령충만으로 출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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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 [오태열 목사] 진짜에는 눈물이 있다
    세상에는 진짜가 있으면 가짜가 있기 마련이다. 실체와 그림자, 알곡과 가라지가 쌍생하듯, 진짜와 가짜는 항상 쌍생한다. 진짜가 가짜처럼, 가짜가 진짜처럼 보일 때가 참으로 많다. 가짜는 진짜처럼 흉내 낼 수는 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곧 탄로 나고 만다. 그러나 진짜는 끝까지 간다. 가짜는 언제까지 속일 수가 없다. 왜냐면 시간이 지나면 가짜인 열매가 맺히기 때문이다. 진짜와 가짜의 열매는 각각 다르다. 신앙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다. 진짜 성도인지 가짜 성도인지의 구별은 눈물의 기도에 있다. 진실한 신앙인에게는 눈물의 기도가 있지만, 가짜 성도에게는 눈물의 기도가 없다. 눈물의 기도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는 척은 할 수 있으나 지속적인 눈물의 기도는 할 수 없다. 가짜라 해도 지속적인 눈물의 기도가 있다면 진짜가 된다. 지속적인 눈물은 절대로 가짜로 만들어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게 어느 순간부터 눈물의 기도가 사라졌다면 가짜 성도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께 눈물로 부르짖는 지속적인 기도가 있는 사람은 진실 된 신앙인이다. 다니엘은 평탄할 때도, 사자 굴에 들어가는 위기 앞에서도 정한 시간 습관에 따라 하루 세 번씩 기도하였다. 이 일로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이 무사함으로 그의 신앙이 진실임을 보여준다. 예레미야 선지자 당시에는 애국, 애족한다는 가짜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눈물의 기도가 없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눈물의 기도를 통하여 애국, 애족의 선지자임을 보여주었다. 예레미야애가 3:48-49절에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라고 하였다. 교회를 사랑하며 위한다고 말하면서 교회가 교회답지 못함을 비난한다. 현재 교회에 대한 실망으로 가나안 교인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점은 교회를 위한 눈물의 기도가 없다는 것이다. 정말 교회를 위하고 사랑한다면 교회를 위한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 불신자의 가족, 친척, 친구들의 영혼을 위하여 뜨거운 눈물의 기도가 있을 때, 그 영혼을 구원시킬 수 있다. 진짜 신앙인의 눈에는 영혼의 가련함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야지 군중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기도할 때 두루뭉실 기도하지 않는다. 이름을 부르며 구구절절이 간절히 기도한다. 전도의 대상자를 놓고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 전도할 때 앵무새처럼 달달 외워서 전할 것이 아니라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말로서 전해야 한다. 전도에는 예수 믿고 체험한 구원의 즐거움과 변화된 나의 삶, 받은 축복 등, 자기만의 간증이 있어야 한다. 진짜와 가짜가 확연히 나타나는 열매 맺는 계절이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7:18절에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하시고 20절에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 하였다. 나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내 신앙과 애국 애족, 교회 사랑과 영혼 사랑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맺고 있는 열매가 진위를 증명하여 준다. 진짜가 되어야 한다. 눈물의 기도가 꼭 있어야 한다. 눈물의 기도가 없다면 내 신앙과 교회와 영혼 사랑, 애국 애족도 모두 가짜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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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 [박봉석 목사] 가로등을 끄는 이유
    미국에는 팜 스프링스라는 사막 지역의 도시가 있습니다. 이곳은 많은 노인들이 사는 실버타운으로서 유명한 휴양 도시입니다. 그런데 이곳을 가보면 이 도시만의 특별한 것을 경험하게 되는 데 그것은 특별한 구간을 제외하고는 밤에 모든 가로등의 불빛을 끈다는 것입니다. 아니 얼마든지 가로등을 환하게 켤 수 있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도시인데 왜 캄캄한 밤에 가로등을 끄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막 지대의 가장 아름다운 자연은 밤하늘입니다. 밤하늘에 아름답게 수놓은 별들을 선명하게 보기 위해서 이곳 주민들은 모두의 합의 하에 그렇게 가로등을 끄는 것입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그곳 주민들의 그런 결단을 듣고는 모두가 놀란다고 합니다. 높은 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을 잘 보기 위해서 그보다 훨씬 낮은 곳에 있는 가로등을 끄는 불편을 감수하는 주민들의 결단이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정의를 할 수 있지만 이런 정의는 어떻습니까?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서 낮은 가치를 포기할 줄 아는 사람” 바로 이 정의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치이동’을 한 사람입니다.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서 그보다 낮은 가치를 버릴 줄 아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높은 가치를 위해서 나의 이익과 명예를 기꺼이 포기할 줄 압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물질도 시간도 포기하고 내 위신과 자존심도 버릴 줄 압니다. 사도 바울이 성경 빌립보서 3장 7-8절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서 그보다 낮은 가치를 포기하는 결단을 말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영혼 구원을 위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주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 무엇을 포기했습니까? 낮은 가치를 포기하고 높은 가치를 선택할 줄 아는 사람, 땅의 것을 포기해서 하늘의 것을 얻기를 기뻐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기꺼이 마구간 말구유에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사람입니다. 봄이 되면 비슷한 시기에 피는 꽃이 있는데 벚꽃과 목련꽃입니다. 그 중에 벚꽃은 활짝 만개했다가도 질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나무 가지에서 다 떨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목련꽃은 시들어서 색깔이 변해서 거무칙칙한 색을 띠기까지 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습니다. 실제로 꽃이 질 때쯤에 목련꽃을 가까이 가서 보면 색이 바래기 까지 시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생애가 다가도록 놓아야 할 것,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인생들의 모습과 닮았다고 하겠습니다. 파스칼은 말하기를, 인간의 마음속에는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은 오직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인간들은 그 공간마저 돈과 권력과 명예로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빈 공간은 더욱 커지며 허무와 고독으로 몸서리치게 됩니다. 이 세상 많은 인생들은 포기하지 못하고 붙잡고 있는 것들 때문에 더 중요하고 존귀한 것들을 놓치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손에 꼭 쥐고 있어서 정작 하나님이 주시려는 선물은 다 받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지요. 독자 여러분, 인생의 끄트머리까지 놓지 않고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지금 붙들고 있지 않아야 하는 데 꼭 붙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기도하며 살펴보십시오. 그 붙들고 있는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포기하면 생각지 못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 진짜 내게 필요했던 신령한 복이 내게 임하는 것을 볼 것입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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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 [신재철 목사] 잘못된 만남
    잘못된 만남 복학 후 교내 크고 작은 예배 모임과 지역교회 집회에 초대받아 함께 예배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인근에 있는 대학에서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예배특강 요청을 받기도 했다. 신학대학원 학생들을 상대로 찬양 콘티 작성법과 예배 인도법에 관한 2시간짜리 특강이다. 마침 신혼여행 일정과 맞물려 고민이 되었는데 선하신 아내님의 허락으로 여행을 1주일 미루고 참여할 수 있었다. 교회 사역을 포함해서 일주일에 찬양 인도를 다섯 번 이상은 고정으로 하는 것 같다. 학교에 수업을 들으러 다니는 것인지 찬양을 섬기러 다니는 것인지 모를 정도의 일정에 고단함도 있지만 좋다. 철가방, 방범대원, 대리운전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교회 청년부예배 강사로 초대를 받았다. 찬양과 말씀을 함께 섬겨달라는 요청이다. 초청해주신 교회의 청년들과 찬양을 연습하며 집회를 준비하는데 담당 교역자가 슬며시 다가와 귓속말을 한다. 부장 집사님 집에서 간단히 식사하고 집회를 시작하자는 제안이 왔다. 강사로 사역을 섬길 때 식사 초대는 여러모로 부담이 있다. 무엇보다 시간이 여유롭지 못함이 가장 큰 이유다. 찬양팀과 맞춰야 할 시간도 부족하고, 배가 부르면 사역에 불편함이 생겨 대부분 식사는 정중히 거절한다. 하지만 난감해하는 청년부 사역자를 보며 식사 자리에 함께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만난 부장 집사님은 이미 안면이 있는 분이다. 칼국수 집에서 일하며 철가방을 들고 다니던 시절. 대부분 배달처는 대학병원이나 사무실이었다. 가정집 배달이 있지만 얼마 되지 않았다. 그중 늘 불평이 많고 배달원을 함부로 대했던 손님. 그 집 배달 요청이 오면 늘 불편했고 인상부터 찌푸려졌다. 피하지 못해 배달을 가 현관문을 열면 ‘예수만 섬기는 집’임을 드러내는 상징이 많았다. ‘벽의 그림, 말씀 액자. 테이블에 올려둔 십자가.’ 은혜로운 셋팅과 다르게 집주인은 고약했다. 늘 음식 타박에 배달원을 무시하는 말투. “예수 믿고도 저 모양이니 예수님이 욕을 먹지.” 빈 배달통을 들고나오며 늘 혀를 찼던 기억이 난다. 배달 일을 그만둔 지가 벌써 몇 년인데 나는 그 아저씨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 내가 다시 이 집에 오게 될 줄이야!’ 둘은 단박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고약한 집주인과 배달부. 아니 이제는 청년부 부장집사와 집회 강사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더 무슨 말을 할까? 형식적인 말들로 식사 자리를 채운다. 애매하고 묘한 감정을 애써 감추며 식사가 시작되었다. “요즘도 칼국수 좋아하세요?” 이 말을 하고 싶었지만 꾹 눌러 담았다. 우리는 잘못된 만남이었다. 한 상 잘 차린 식사도, 오가는 은혜로운 말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이미 서로의 민낯을 보았기에 잔뜩 꾸며진 겉치레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집회 시작을 앞두고 잡힌 식사였기에 긴 시간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짧은 시간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예배는 시작되었고 찬양은 참 은혜로웠다. 청년들은 적극적으로 반응했고 나 역시 행복했다. 찬양, 말씀, 기도. 모든 것이 은혜였고, 행복했고, 감사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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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 [조희완 목사] 봉사의 자세 (벧전4:7-11)
    옛날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제(1825년-1855년)가 나라를 다스리던 때 그 나라에 한 충성된 군인 장교가 있었는데 이런 저런 일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많은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막사(幕舍)에서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갚아야 할 빚의 액수를 종이에 적어보다가 액수가 너무 많아서 자기 능력으로는 도저히 그 빚을 갚을 수가 없음을 알고 크게 낙담을 했습니다. 그래서 빚의 액수를 적은 끝에다가 “이 태산 같은 빚을 누가 갚아 줄 이가 있겠는가?”라고 탄식(歎息)하는 글귀를 적어 놓고 잠자리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니콜라이> 황제가 종종 군대를 시찰하고 다녔는데, 마침 황제가 그 부대를 시찰하다가 사병들의 막사를 둘러보던 중에 그 장교가 책상 위에 적어 놓은 탄식하는 글귀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태산 같은 빚을 누가 갚아 줄 이가 있겠는가?”라는 글귀를 읽고 감동이 되어서 그 밑에다가 “니콜라이 황제”라고 적어 놓고 나갔습니다. 이튿날 아침 그 장교가 일어나서 종이 위에 적혀있는 황제의 이름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바로 그날 밤에 <니콜라이> 황제가 다시 그 부대를 찾아와서 그 장교가 걱정하고 탄식하던 빚을 다 갚을 만 한 돈을 하사해 주었습니다. 그 장교는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황제와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남은 생애를 다 바쳐서 충성을 했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그 보다 더 충성된 믿음으로 헌신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보다 더 엄청난 관심과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반드시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싶은 마음과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봉사를 하되 어떻게 봉사해야 할까요? 첫째는, 겸손한 마음으로 봉사해야 합니다.(벧전4:10-11) 둘째는, 받은바 은사대로 봉사해야 합니다.(롬12:4-8) 셋째는, 믿음의 분량대로 봉사해야 합니다.(눅10:40-42) 우리 모두 봉사하는 아름다운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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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 [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10
    사랑과 미움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자주 바뀝니다. 사랑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미워하는 마음은 사단이 주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면 관계가 좋아지고 미워하면 관계가 깨집니다. 사랑하면 행복해지고 미워하면 불행해집니다. 사랑과 미움은 대조적이며 결과는 큰 차이를 가져옵니다. 사랑하면서 사는 자는 자신이 먼저 기쁘고 감사합니다. 사랑은 사람을 얻게 됩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면 마음이 부드럽고 말이 부드럽게 됩니다. 남을 미워하면 마음에 기쁨이 없게 됩니다. 미워하게 되면 마음이 거칠고 언어가 거칠게 됩니다 미움은 살인의 시작입니다. 미움으로 가득찬 리더가 있다면 공동체가 분열되고 무너지게 됩니다. 사랑의 삶을 사는 자는 인생의 마지막이 아름답게 마무리 됩니다. 미움과 시기로 가득 차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닌 사울의 마지막은 비참하게 끝이 났습니다. 사랑의 가족, 공동체 교회 공동체가 축복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교회는 부흥합니다. 사랑이 교회 성장의 비결입니다. 서로 미워하면 갈등이 일어나고, 분열되고, 다투고, 싸우게 되어 공동체가 무너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의 마음이냐, 사단이 주는 미움의 마음이냐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넓은 마음입니다. 미움은 죄성이고 시기 질투입니다. 천국은 사랑만 있고 영원히 사랑하면서 사는 나라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미운 마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편애하지 말고 골고루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가운데서 용납하라 사랑은 용납하는 것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주는 것이 넉넉한 사랑입니다. 사람을 무시하지 않고 받아주는 마음이 사랑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죄인들까지 품으시고 받아주는 사랑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를 초청하시고 예수님께로 오면 거절하지 않고 받아주시는 사랑의 예수님이십니다. 믿음 약한 자, 의심하는 자, 죄짓고 방황하는 자를 용납하고 받아주는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 사랑의 마음입니다. 사랑은 편애하거나 차별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편견을 갖지 말고, 편애하지 말고, 인종차별 하지 않아야 합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귀한 자임을 알고 귀히 여기고 받아주는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은 받아줍니다. 용납합 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용납하고 받아들이셨습니다. 인간은 무시당하고 배척당할 때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됩니다. 이단은 받아들이지 말아야 하나 사람들은 받아주고 용납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탕자가 돌아올 때 받아주고 용납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교회 문턱을 낮추고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올 때 환영해 주고, 받아주고, 용납해 주는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의 마음은 넓은 마음, 인간의 영혼을 귀히 여기고 용납하고 받아주는 마음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입니다. 인간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것은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 오피니언
    • 논문/책
    2022-09-23
  • [김성수 총장] 하나님 없는 종교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잘 알려져 있고,많은 가정의 거실 벽에 결려 있기도 하지만 그 본래의 의미가 완전히 상실되어질 위험에 있는 성경 귀절들이 많이 있다.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이 그 중 하나이다.이와 같은 귀절들의 의미는 거기에 나오는 단어들의 아름다움에 가려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아모스 선지자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를 열심히 찾고 있었던 같아 보인다.벧엘에 세워졌던 성소가 그렇게 분주한 적도 없었다.아모스시대 만큼 그렇게 많은 동물들이 희생 제물로 바쳐진 적이 없었다.사람들은 여호와를 찾기 위해 벧엘에만 간 것이 아니라 더 멀리 길갈에까지 갔었다.길갈은 거기에서 할례가 행해졌기 때문에 여호수아 시대 이후로 아주 거룩한 장소로 여김을 받는 곳이었다.그런데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수많은 순례자의 무리들이 정기적으로 브엘세바로 순례를 떠나기도 했다. 이것은 북 이스라엘로부터 온 순례자들에게는드고아를 지나야 브엘세바로 갈 수 있는 여정이었다.브엘세바는 유다의 최남단에 있었기 때문에 이 여정은 이스라엘 국경 밖으로 나가는 긴 여정이었다.그러나 순례자들은 여기에 대해서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다.브엘세바는 성지가 아닌가!여호와께서 거기서 오래 전에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던가!어떤 가치있는 전통이 브엘세바와 관련되어 있지 않는가!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조망해 볼 때 이스라엘이여호와를 찾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종교적 열정,희생 제물,그리고 순례는 오히려 이들이 영적으로 건강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그러나 이 모든 행동은 “하나님 없는 종교”의 한 부분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하나님은 벧엘,길갈,그리고 브엘세바와 관계된 그 어떤 것도 원치 않으셨다.거기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아니었다.하나님은 인간들이 그들의 설계에 따라 하나님을 위해 지은 집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집에 거하셨다.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만든 종교들을 인정하기를 거절하시는 분이다.그것들은 하나님의 눈에 가증스러운 것일 뿐이다. 아모스는 가능한 한 가혹하게 심판을 알리기 위해 예리한 대조를 하고 있다: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리라.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아모스5:5). 이스라엘의 겉치레뿐인 경건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구하는 경건과는 완전히 정반대였다.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얼굴을 돌리는 것을 의미했다.우리의 종교를 우리 자신에게 맞도록 바꾸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에 대해서 이보다 더 날카로운 비판은 없을 것이다. 벧엘,길갈, 그리고 브엘세바에서 드리는 제사는 여호와를 찾는 참된 경건의 행위가 아니라 단지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이교적 행위였을 뿐이다.의식 중심의 모든 종교는 신들의 총애를 얻기 위해서 희생 제물을 드린다는 이교적 원리에 의존해 있다.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속에 있던 생각도 바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빚을 지게 하는 것이었다.다시 말하면 여호와께 많은 헌물을 드림으로써 그들 자신의 소원의 수레에 여호와를 얽매이게 하는 것이었다.이런 생각은 여호와의 사랑을 받는 경건의 모습에 접근해 가고자 함이 아니고 단지 그분의 은사를 나누어 갖고자 함이었다.이것이 그들이 훌륭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한 종교의 모습이었다.이런 종교는 실제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다.하나님은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돌보실 것이라고그들은 믿었다.하나님은 자신에게 바쳐진 많은 희생 제물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이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중심에 하나님이 없는 종교를 개발했던 것이다. 종교적 열심과 종교는 전적으로 범주가 다른 두 가지 행위라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교훈이다.예배에 단순히 참석하고 헌물을 드리며, 위계적 직분을 감당하는 행위가 여호와를 전심으로 찾는 경건의 행위와 같을 수가 없다.전자는 후자가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우리 시대에 넘쳐 나는 교회당에서 우리는 실제로는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서도 교회와 교단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많은 말을 할 수가 있다.교회와 교단, 심지어는 선교지에서도 많은 종교적 활동을 하고 있지만 여호와를 찾는 모습만 가질 뿐 실제로는 이기심을 채우는 하나님 없는 종교적 행위에 몰두할 수도 있다.분주하게 희생 제물을 드리고 기도하는 열렬한 종교적 활동 가운데서 우리 모두는 여호와를 대신하여 말씀하는 아모스 선지자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벧엘을 찾지 말라!”.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2-09-23
  • [황권철 목사] 빌립(Philip's Behind Stories)-전도의 사도
    정직한 고백자 빌립 그는 현실적으로 이해타산이 빠른 자이다. 주님이 벳새다 들녘에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일 때였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마 14:16; 막 6:37; 눅 9:13)고 했다. 공관복음서의 기자들은 동일한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요한은 빌립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는 “빌립을 시험고자 하심이라”(요 6:6)고 했다. 그러나 전후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면 빌립이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사고로 매도할 수 없는 사건이다. 빌립은 다른 제자들 앞서 이 무리들에게 먹일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요 6:5). 다른 제자들이 침묵하고 있을 때 빌립은 무리를 먹일 것에 대해 구체적인 걱정을 하게 되었고 그것을 계수해 보니 적어도 200데나리온의 떡이 필요함을 알았다. 우리가 어려운 일을 직면할 때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계산 하는 것은 잘못 된 것이 아니다. 현명한 지각이다. 우리는 빌립의 냉철한 판단력을 배워 더 구체적인 기도로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는 매사에 신중하게 생각한 전략가였다. 유월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들 중에 헬라인 몇이 빌립을 찾아와서 예수를 만나보려고 하는데 주선을 좀 해 달라고 했다. 그때 그는 주님에게 바로가지 않고 안드레에게 말하여 안드레와 함께 예수께 나아갔다(요 12:20-22). 단순하게 읽어 넘기면 빌립이 굉장히 소심한 사람같이 보인다. 그러나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고 제자들의 역학관계를 알고 나면 빌립이 대단히 지혜로운 전략가임을 알 수 있다. 첫째, 헬라인들이 빌립에게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빌립은 교육 수준이 비교적 높은 레벨, 상위 그룹에 속한 자임을 알 수 있다. 헬라어를 구사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둘째, 주님에게는 친한 그룹이 존재했다. 일명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라는 핵심그룹이다. 다르게는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이라는 선두 그룹이다. 이들은 다 같은 동네이며 혈연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무슨 일을 하려면 이 두 그룹을 거쳐야 주님에게로 접근이 가능하다. 이들을 통하지 않고 주님에게로 나아가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 했는지도 모른다. 셋째, 그 중에 안드레를 선택한 전략이다. 베드로나 야고보나 요한을 선택하면 주도권을 잃을 위험성도 있다. 그러나 안드레는 조금 다르다. 인지적 지각이나 리더십 면에서 빌립이 자기 위치를 확보하는데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음을 알았기에 안드레를 대동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빌립이 탁월한 전략가임을 알 수 있다. 그는 거룩한 의문을 가진 영성의 소유자이다. 주님은 대속제물이 될 구원사역을 앞에 두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아버지께로 갈 때가 다가왔다. 그때 빌립이 물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 14:8). 그 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 14:9)고 했다. 주님의 마지막 고별인사와도 같다. 이 때 입을 연 자가 세 제자였다. 도마가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고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 라고 물었으며, 다대오가 “왜 이 일을 세상에는 알리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다. 이들 세 제자만 몰랐을까? 주님이 십자가 지는 사건 앞에 이 비밀을 안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은 주님 부활하신 이후 오순절 성령이 강림한 이후였다. 이들의 물음은 거룩한 영성을 소유한 정직한 고백이었다. 이삭줍기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빌립은 아시아에서 크게 각광 받는 자였다. 그는 두 미혼의 딸과 함께 부르기아 등지에서 선교하다가 히에라폴리스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예수님 승천 후 빌립은 제자들 중 최초로 갈릴리에서 설교하고 이적을 행하였다고 한다. 그는 그리스 지역을 광범위하게 여행하면서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세례를 베풀었다. 또한 지금의 터키, 갈라디아 지방에서 주로 사역하다가 87세의 나이로 브루기아의 히에라볼리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히에라볼리에서 뱀을 숭배하는 이교도들은 빌립과 나다나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빌립은 이교도들의 회심을 위해 기도했고, 이때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 이에 놀란 이교도들은 빌립과 나다나엘(바돌로매)을 십자가에서 내렸다. 이때 나다나엘은 살았으나 빌립은 이미 죽은 뒤였다. 나다나엘은 수많은 이교도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으며, 빌립과 함께 선교여행을 다녔던 빌립의 누이 마라안나는 히에라볼리에 빌립의 시신을 묻고 나다나엘과 함께 아르메니아로 가서 전도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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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 [하수룡 장로] 후손
    내가 섬기는 교회에 믿음이 좋은 장립집사님이 한 분 계시는데 아들을 장가보낸 뒤에 손자를 기다리는 마음이 남달리 급한 것을 볼 수 있었다. 보통 분들은 손자이든 손녀이든 무엇이든 주시는 대로 감사하겠다고 말하는데 이 분은 꼭 손자를 주셔야하고 주실 것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헌금을 했다. 어떤 의미로 손자를 기다리는 사람은 조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금보다 귀한 손자를 좀 더 고상한 말로는 후윤이라고도 하는 것을 보아도 후손은 정말 귀중하다. 어느 기업체에서 독립운동가의 후손 가정의 노후 된 집들을 개보수해 주는 것을 보고 참으로 뜻 깊은 훌륭한 사업이라 생각했다. 친일을 한 사람의 후손은 호의호식하며 잘 배워 지금은 잘 살고 있지만 독립투사의 후손은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나라를 지킨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가진 것이 없어 배움의 기회가 상실된 상처뿐인 삶으로 100년을 살아온 것이다. 이들 후손들은 아버지에게서 가훈의 교육은커녕 경제적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오늘에야 조상이 가치 있는 독립운동의 주체적인 사람으로 후손들에게는 존경받는 인물로 존재하는 것은 참 잘된 일이다. 가인은 악을 선택하여 사탄의 종이 되어 아벨을 살해하고 땅의 저주를 받는 최악의 후손으로 전략하였다. 오늘날도 가인처럼 자기만의 성을 쌓으면서 선하신 하나님과 교제는 단절하고 자기의 영역이 침범 당할까봐 늘 염려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아담은 의로운 후손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여 셋을 허락하심으로 큰 기쁨을 얻는다. 아벨 대신 다른 의로운 씨로 아들을 내려주신 것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며 악을 다스리라는 깊은 뜻이 있다. 또한 하나님을 잘 섬기는 믿음의 가문으로 후손을 잘 가르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잘 알아야 한다. 요즘 믿음의 친구들이 모이면 간절히 바라는 공통분모가 자녀 손들이 믿음으로 잘 살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마음이다. 자녀들이 어릴 때에는 좋은 대학을 진학하고 선망의 직업을 가지는 것만이 간절한 소원이었지만 막상 세월이 지나 만족한 직업을 가진 후에는 제대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죄악이 관영한 시대에 믿음의 조상격인 부모가 자기 후손에게 하나님을 공경하고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정상적인 신앙인의 믿음이고 올바른 생각이라 믿는다. 이스라엘은 후손교육 실패로 부패하고 타락하여 강대국으로부터 침략당하고 왕을 비롯하여 백성들이 이방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는 치욕을 겪었다. 손자가 탄생된 기쁨보다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는 믿음을 갖고 지혜롭게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기독교인이 많은 내 나라, 나의 자녀손들이 사는 이 땅에 올바른 후손교육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안전을 보장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로 잘 가르치고 어떤 것이 더 가치가 있는지를 가르치면 성공한 후손들의 모습을 오랫동안 늘 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 오피니언
    • 초장칼럼
    2022-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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