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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침묵의 유익 (수6:8-11)
“침묵이 좋은 몇 가지 이유”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침묵은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는 것을 도와줍니다. 침묵은 입에서 나오는 거친 말을 예방합니다. 침묵은 후회할 말들을 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침묵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줄 수 있게 합니다. 침묵은 언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바로 기도하게 해줍니다. 침묵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합니다. 침묵은 당신이 무식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합니다.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을 잘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것이 훨씬 더 무게가 있고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 공동체에서의 모든 문제들은 다 말 때문에 발생합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연산군은 모든 신하들에게 “구시화지문 설시참신도”(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 / 입은 화를 초래하는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라는 글이 새겨진 목패(木牌)를 목에 걸고 궁중 출입을 하도록 엄명을 했다고 합니다. 그 만큼 말로 인하여 조정에 혼란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에 예방차원에서 그런 조치를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이목구비(耳目口鼻)를 만드실 때 눈도 귀도 두 개씩을 만들어 주신데 반해서 입은 한 개만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보는 것과 듣는 것에 비해서 말을 조금씩 하라는 뜻이고, 꼭 필요한 말만 하면서 살라고 하신 의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뿐인 입으로 너무 많은 말을 하고 너무 불필요한 말을 하려다 보니까 오해가 생기고, 문제가 생기고, 시끄럽고 혼란한 일들이 많이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많은 말을 해도 될 때가 있지만 지금은 우리가 말을 절제하고 침묵해야 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왜 침묵이 필요하고 유익한 것일까요? 첫째는, 침묵은 질서유지의 비결입니다.(수6:10) 둘째는, 침묵은 지혜로운 삶의 비결입니다.(잠17:28) 셋째는, 침묵은 원수를 대적하는 비결입니다.(사53:7) 사회적으로 혼란한 일이 많은 이때에 침묵하며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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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첫사랑의 선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릴 때나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마음을 주어 좋아하거나 사랑을 나누었던 경험은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첫사랑은 맨처음 느끼거나 맺은 사랑으로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쉽게 말할 수 없겠지만 상대가 주님이든 사람이든 인생의 제일 처음 순수하게 사랑했던 마음을 잊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상대방을 사랑하게 되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은밀히 속삭인다. 온 세계를 다 얻은 느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서 하늘에 떠 있는 별도 따 와서 선물할 것처럼 모든 것을 상대방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언약을 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핑크빛 미래를 말하면 그 순간만은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내 것 인양 나만이 가지는 이 세상의 최고의 행복과 인생의 아름다움을 만끽한다고 착각한다. 세상엔 영원한 것은 없고 늘 새로운 것이 아니기에 분명히 변하기 마련인 것을! 처음에 기대하고 믿었던 상대방은 변질되어 열애 때의 그 마음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헤어짐의 결론에 도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동안 사랑했던 마음은 완전히 사라지고 원망하며 증오 속에 미련과 후회만 남기고 이별을 하는 것이 첫사랑이다. 꿈결 같은 열애의 시간에는 얼마나 멋지고 희망에 부푼 가슴으로 그 사람만 바라보고 보랏빛 미래를 꿈꾸고 살지 않았던가! 나중에는 순결한 첫사랑이 이별로 끝나버려 세상을 다 잃어버린 느낌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경우도 있다. 처음 시작할 때는 큰 기대에 찼었으나 사랑의 마지막 선물은 후회와 상처만 남아 아픈 기억으로 인생 속에 녹아있는 것이 인간들의 첫사랑이다. 우리 주님과의 첫사랑은 세상의 것과는 전혀 다르다. 살아가고 있는 지금까지 우리는 잊고 살지라도 시종 변함없이 안아 주시고 위로를 선물해주시는 사랑의 주님은 존경할 위대한 분이시다. 우리가 주님을 처음 만나 첫사랑을 경험한 것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모태신앙이건 체험으로 늦게 첫사랑의 주님을 만난 분이건 간에 그때 주님의 뜨거운 가슴을 느끼며 구원과 은혜의 선물을 받고 사랑에 얼마나 감격하여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가! 주님을 향한 뜨겁고 고마운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 역시 우릴 얼마나 뜨거운 가슴으로 안아 주시지 않았던가! 주님과의 첫사랑은 정말 깨끗하고 순결하여 세상의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는 잡히지 않는 순수 결정체다. 그때 주님의 사랑은 세상의 어떤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감격스럽고 정말 내가 가진 목숨까지도 다 내어놓고 싶은 거룩한 마음이 아니었던가! 그분을 생각만 해도 늘 기쁨과 감사가 넘치고 그분의 이름만 들어도 무조건 행복한 마음이 저절로 생성된 것이 사실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여 나의 몸과 나의 가진 모든 것이 그분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도리이다. 남녀 간의 첫사랑은 어떠한 좋은 선물로 증표를 주고 맹세해도 언젠가는 변질되어 그리움과 상처만 남는다. 그러나 주님과의 첫사랑은 새 생명을 선물의 증표로 주시고 끊임없는 은혜로 사는 날 동안 늘 변함없이 첫사랑의 선물이 제공되고 있음을 잊으면 안 된다. 내가 바로 주님의 첫사랑의 대상이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주님은 절대 변하지 않으신다. 오직 불변하시는 첫사랑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만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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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15년을 더 산 사람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히스기야 왕의 스토리는 참으로 흥미롭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15년 더 연장해 주셨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이사야 선지자는 병든 히스기야 왕에게 찾아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한다. (왕하20:1)에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느낌을 왕은 받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형선고를 받은 히스기야 왕은 얼굴을 벽으로 향한 다음에 사력을 다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왕하20:3)에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 라고 말씀한다. 왕은 살려달라는 직접적인 표현 대신 주 앞에서 진실되게 살아온 것을 기억해 달라고 간구했다. 이런 자신만만한 기도는 평생을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진실되게 살려고 애쓴 자만이 할 수 있는 기도로 보인다. 이 기도 후에 곧바로 하나님의 응답이 이사야 선지자에게 임한다. (왕하20:5-6)에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라고 말씀하셨다. 절대절명의 위기 앞에서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 앞에 내 놓은 카드는 지금까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왔던 선한 행실이었음을 기억하자. 우리나라 야사(野史)에도 히스기야 왕처럼 15년을 더 살았던 인물이 전해진다. 조선 명종 때 유명한 맹인 점장이, 홍계관(洪繼寬)이란 이가 있었다. 그가 사람의 앞날에 대해서 일러주는 족족 다 맞았기에 고관대작들이 앞 다투어 그를 극진히 대접하고, 자신의 앞날을 물어보곤 하였다. 당시 높은 벼슬에 있는 상진(尙震) 정승은 홍계관에게 자신의 죽을 해를 점쳐 알고 있었다. 그가 예언한 죽을 해를 당하여 상진 정승은 신변을 정리하고 재산처분을 한 다음 조용히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해가 다 지나도록 아무런 변고가 없었다. 새해가 들어서면서 홍계관이 매우 이상하게 생각해서 상진 정승을 찾아갔다. 상진 정승은 “내가 너의 점괘를 믿고 작년에 명이 다할 줄 알고 기다렸는데 어찌 맞지 않는가?” 라고 물었다. 이에 홍계관은 “혹 음덕(陰德)으로 수명을 연장할 수 있으니 대감께서도 반드시 그런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라고 대답을 하였다. 음덕(陰德), 다시 말해서 남모를 큰 선행을 뜻한다. 상진 정승은 옛날 자기가 수찬(修撰) 벼슬에 있을 때 큰 잘못을 범한 대전 수랏간 별감을 용서해 준 일을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난 후 홍계관은 ‘대감의 수명이 연장된 것은 반드시 이 음덕으로 응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을 하였다. <연려실기술>이라는 문헌에 상진 정승의 증조부인 상영부(尙英孚)가 재물이 많아서 주위 사람들에게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었는데 말년에 차용증서들을 다 불태웠다. 그렇게 한 마음의 동기를 묻자 ‘혹 이 선행으로 후손들이 잘 될는지 누가 알겠소?’ 라고 대답했고, 얼마 후에 상진(尙震)이 태어났다고 한다. 서양 사람들은 기독교 윤리에 입각해서 자선을 하고 봉사를 하지만 우리 한국인은 덕을 쌓고, 그 음덕으로 복과 영달을 누린다고 생각했다. 곧 서양 사람은 내세에서 자신의 선행으로 보상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반면, 동양 사람들은 현세에서 보상을 받거나 아니면 후손이 대신 보상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성경도 선행에는 반드시 보상이 있다고 말한다. (잠언19:17)에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또한 성도의 선행은 하나님께서 다 보신다. (딤전5:25)에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선행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라. (마태5:16)에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라는 말씀을 꼭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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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52 : 연기설(緣起說)의 인연(因緣)은 쓸 수 있는 말인가?
I. 서언(序言) 얼마 전 몇 사람의 목회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인연(因緣)이란 말을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실제로 우리 교인들도 흔히 인연이란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이 말은 불교의 가장 중심적인 교리 중의 하나인 연기설에서 나온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면서도 인연이란 말은 수도 없이 많이 한다. 그렇지만 이런 말들의 유래와 그 근본 의미를 안다면, 이는 반드시 금지해야 할 용어이다. 이에 본 호에서는 인연의 모체가 되는 연기설과 인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연기설(緣起說)이란?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 중의 하나는 바로 연기설이다. 이는 ‘세상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영원불변한 실체는 아무것도 없다’는 이론이다. 또한 연기설에는 세 가지의 근본 원리가 있는데, 첫째는 ‘인과(因果)의 법칙’으로서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에 의해서 반드시 결과가 온다는 이론이다. 둘째는 ‘인연의 법칙’으로서 세상 만물의 변화에는 인과 연, 즉 원인과 조건의 작용에 의한다고 했다. 셋째는 ‘상호 관계성의 법칙’인데 개개의 사물들은 서로 의존하여 존재하는 관계에 있다는 이론이다. 이상의 연기설은 세계와 인생의 모든 현상을 12연기(十二緣起)로 설명하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과거에 지은 업(業)에 따라 현재의 과보(果報)를 받게 되며, 현재의 업에 따라서 미래의 고(苦)를 받으면서 12가지 인연을 맺게 된다. 곧,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근(六根)·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 등으로서 이를 십이 인연(十二因緣), 십이지(十二支)라고도 한다. 특히 11번째의 생(生)은 업(業)의 인연으로 미래의 생을 받게 된다는 이론으로 전생과 관계가 있다. III. 인연(因緣)이란? 앞에서 논한 연기론의 세 가지 근본 원리 중에서 두 번째의 ‘인과(因果)의 법칙’중에 ‘인연의 법칙’이 있다. 한자어로는 원인 인(因), 묶음 연(緣)이며, 국어사전의 뜻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사람이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인 因과 간접적인 원인인 緣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말은 서론에서 언급한 대로 불교의 가장 기본적 교리인 연기론(緣起論)에서 유래된 용어이다. 불교에서는 인연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인연은 어떤 결과를 만드는 조건으로서, 직접적인 조건은 因으로서 원인을 이루는 근본 동기가 되며, 간접적인 조건은 緣으로서 원인을 도와서 결과가 생기게 하는 조건이라고 한다.’ 즉, 여러 가지 원인 중에서 주된 것은 因이고, 보조적인 것을 緣으로 여긴다. 결국 모든 사물은 이러한 인과 연의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만 변화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이 있다. 이는 서로의 인연이 맺어지기 위해서는 전생에서 두 사람이 무려 3천 번의 인연이 있어야 되는데, 그 직접적인 조건은 因이고, 옷깃을 스치는 것은 간접적인 조건인 緣이라고 했다. IV. 적절성과 대안적인 용어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인연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은 불교의 세계관인 전생(前生)을 인정하는 경우가 될 뿐 아니라 연기론, 즉 인연 사상을 그대로 인정하는 결과가 된다. 결국 인연이란 우리 기독교인은 반드시 삼가야 될 말인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적인 용어는 무엇인가? 우리 기독교에서는 불교적인 인연의 관계는 일단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대안적인 용어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국어사전적인 인연의 의미는 ‘수많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원인과 결과’를 말하기 때문에 불교적인 요소를 제외한다면 인연은 사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연의 한자어나 우리말이 불교의 용어와 동일하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 기독교적 용어를 굳이 찾는다면, ‘하나님께서 자연과 인간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원리와 법칙’을 의미하는 ‘섭리’를 말할 수 있으나 그 말도 인연과 반드시 같은 말은 아니다. 이상으로 볼 때 인연은 전통적으로 모두 다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말할 수는 있지만, 이는 분명히 금지해야 할 불교의 교리적인 용어로 반기독교적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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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생각
성령님의 하시는 일 중 가장 큰 일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시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영과 육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 안에 만끽하며 살도록 생각을 바꾸시는 일을 하신다.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셔서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만드셨다. 성령님은 하나님을 떠나 버린 인간의 생각을 바꾸어, 하나님과 함께 삶을 깨닫게 하는 일이 주사역이시다. 예수께서 임마누엘로 오셨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소개하고, 기억나게 하시고, 알게 하여 임마누엘을 누리게 하신다. 성경의 핵심인 로마서 8장을 통해 크게 깨달았다. 믿음은 생각이라고 말하고 있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란다. 성경 전체를 통해 설명해 놓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벽하게 재창조하신 세상에 우리를 옮겨 놓으셨다고 반복해서 설명하신다. 나는 이 말씀에 큰 믿음을 가지고 큰 믿음이 있다고 고백하며 부르짖는다. 주님께도 말씀드리고 나에게도 말을 한다. 나는 기도하는 시간을 그렇게 보낸다. 나는 “영의 생각”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나는 기도가 재미있는 것 같다. 말씀에 있으면 크게 믿는다고 하나님께도 고백하고 나에게도 인식시키는데 집중한다. “성한아, 너는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이야! 그래 맞아 나는 영의 생각을 하는 성한이야!”라고 주장한다. 나는 나에게 “성한아, 너는 예수님을 통해 완벽한 영의 세상에 옮겨졌으니 마음껏 그 안에서 살아라. 알겠지.”라고 말해 준다. 우리는 생명을 얻어 풍성한 삶을 살도록 이미 마련되었다. 이미 그 안에 모든 것이 있다고 말씀 하신다. 성령님은 우리가 영의 세계에 태어났음을 알도록 성령님은 도우신다. 성령님은 예수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을 바르게 받아들이도록 도우신다.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시는 음성에 반응해야 한다. 나는 성령의 사람이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 기록된 성령의 음성에 반응한다. “주님, 저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이미 영생이 있습니다.” “주님, 풍성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풍성합니다.” “주님, 항상 임마누엘 합니다.” “성령님, 저에게 임마누엘의 생각으로 살라고 하시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이러한 고백들이 나의 힘이다. 성령님의 주 사역이 로마서 8장의 “영의 생각”을 하게 한다고 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했다. 성령의 주 사역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성령님의 사역에 반응하는 것을 항상 즐기려 한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성령님은 믿음을 더해 주신다. 영의 생각을 더해 주신다. 그러니 나는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살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자주 정말 자주 쉬지 않고 사로잡아오는 죄의 법이 아닌 영의 생각,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음”을 큰 믿음으로 인정하고 선포한다. 감사와 신나는 시간이다. 성령님과 함께 딩구는 시간이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능력의 사람이 되는 이유다. 성령님은 바른 생각을 하게 하신다. 성경에 기록하여 뚜렷이 말씀하신다. 반응을 적극적으로 하라. 믿음이 적다고 말하는 것은 굉장한 실례의 말이다. 믿는다고 말하라. 크게 믿는다고 선포하라. 영의 생각을 한다고 주장하라. 그것이 성령님께 반응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크게 기뻐하실 것이다. 성령님은 십자가에서 이미 모든 것이 성취되었음을 믿게 하신다. 크게 믿는다고 고백하라. 나는 그렇게 하는데 너무 좋다. 믿음이 더 생김을 본다. 이것이 영의 생각이다. 성경의 핵심인 로마서 8장 말씀은 “이 생각이 믿음이라”고 강조한다. 성령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당신의 생각을 영의 생각을 하도록 바꾸시는 작업을 하신다. 성령님의 작업에 적극적인 반응했더니 너무 신바람이 난다. 적극적으로 권한다. 해보라. 필요하시면 기사와 표적도 저절로 주시기도 하신다. 성령님의 주 사역인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역해 보라. 신나는 일이다. 사단의 주 사역도 생각을 변화시켜 성령의 일을 적극적으로 방해 한다. 사단은 “육의 생각”을 하도록 전력을 다 한다. 죄의 법으로 사로잡아 육의 생각을 하게하면 사단은 성공한 것이다. 생각만 바뀌면 믿음에서 떠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고 한다. 생명의 근원이 마음, 즉 생각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단은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을 제시한다. “이 땅이 네가 처한 세상이다. 너는 이 세상 중심으로 살 때 문제가 해결된다”라고 다른 해결책을 제시한다. 예수님께도 천하만국을 보이며 세상을 택하게 하려 했다. 생각을 속인다. 육지에서 활보하며 공기를 마시며 살면 되는데 물속이 신비롭고, 좋다고 속인다. 물속에서 눈을 떠보면 물속의 세상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그러나 잠시 뿐이다. 자유롭지도 못하고 숨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만약 물속에서 올라 올 수 없다면 고통은 극에 달하게 된다. 곧 생명을 잃고 말 것이다. 사단이 주는 쾌락은 순간적일 뿐이다. 그 결과는 비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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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관계가 깨지는 이유 (2)
관계가 소중합니다. 목회는 관계입니다. 관계는 세우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나 깨지는 것은 순간입니다. 사탄은 관계를 깨뜨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관계 회복 능력입니다. 관계가 깨지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관계가 깨지는 데는 둘 다 책임이 있습니다. 관계가 깨지는 데는 수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관계의 깨짐은 비극이요, 불행이요, 아픔입니다. 죄 때문에 관계가 깨집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를 깨뜨립니다. 죄를 멀리해야 하고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욕심, 분노, 이기주의, 미움, 저주, 좁은 마음, 이해심 부족, 시기, 질투, 잘못된 언어, 교만, 융통성 부족 등 때문에 인간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인간관계가 깨지는 이유를 찾아 고쳐야 합니다. 관계가 깨지는 이유의 반대가 되는 삶을 살아야 관계가 잘됩니다. 관계가 깨지는 이유에 대해 남을 탓하거나 변명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관계 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인간관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사소한 것 때문에 관계가 깨지고, 오해 때문에 관계가 깨집니다. 소심하고, 예민한 자는 사소한 것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관계를 깨뜨립니다. 마음에 상처가 많고, 의심이 많고, 공격적이며, 남을 비판하기 좋아하면 관계가 깨집니다. 관계가 깨지지 않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목회자와 성도와의 관계가 깨지면 목회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건강한 관계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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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3일천하 ‘갑신정변 140년’ 이 땅 복음의 큰길 열었다
- 1884년 12월 4일 밤 10시경. 이날은 최초로 지금의 체신청 우정국 개청식이 있는 날이었다. 행사를 마친 후 내·외 귀빈이 함께하는 저녁 연회가 열리던 시각. 갑자기 ‘불이야’ 하는 소리와 함께 총소리가 들리고 비명소리가 진동했다. 당시 김옥균, 홍영식, 서재필 등 젊은 엘리트 개화파 세력들이 정변을 일으킨 현장의 이야기다. 고종 즉위 20년 되는 해 일본은 개화 후 나날이 발전하고 중국과 서양 제국들이 조선의 개화와 통상압박을 하던 혼돈의 시기였다. 조선 26대 왕 고종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은 갈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급진개화를 주장하는 김옥균 파와 점진적 개화를 주장하던 민영익 등 세력 간 갈등 속에 급진개화파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정변이었다. 올해 12월 4일은 갑신정변 1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갑신년 쿠데타는 성공하는 듯 했으나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개입 3일 만에 평정하고 주모자들은 멸문지화 되거나 일본으로 도피했다. 갑신정변은 당시 일본의 지원으로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갑신정변이 성공했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됐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운명이 외세 강국에게 점령당할 수밖에 없는 비운의 상황이었다고 사가들은 말하고 있다. 역사적 평가와 상황을 접어두고 당시 사건의 현장을 통해 하나님이 이 나라 복음을 위해 위대한 계획을 펼치고 있었던 은혜를 찾아 보고자한다. 불을 지르고 쿠데타 세력들이 반대세력들에게 총을 쏘며 공격을 하는 통에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칼에 난자되어 중상을 입었다. 죽을 수 밖에 없던 상황에 연회에 참석했던 미국 루시어스 푸트(Lucius H. Foote) 공사가 긴급히 미국에서 두 달 전에 선교사로 입국한 한사람을 찾는다. 바로 최초의 의사선교사 호러스 알렌 선교사를 찾아 치료함으로써 민영익은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알렌 선교사는 누구인가? 우리의 기독교사에 거장으로 남아있는 알렌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중국으로 파송되었다. 이즈음 1882년 조미(朝美)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선교사의 마음에 조선의 선교사가 되고 싶어 자원한다. 갑신정변 두 달 전 1884년 10월 6일에 한양으로 입국한 선교사이다. 알렌의 치료로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살아남으로써 3일 천하정변은 끝이 나고 고종의 권력은 유지 될 수 있었다. 민영익을 살린 알렌에게 고종은 무엇을 원하냐고 물었다. 당연히 알렌은 병원을 지어 달라고 했다. 고종에게는 너무 쉬운 요청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변의 주동자 홍영식의 가족들이 처단되고 폐허된 집을 병원으로 개원하게 했다. 바로 최초의 병원 광혜원(나중 제중원)이다. 알렌선교사가 병원을 짓고 자유롭게 선교를 하게 되는 큰길이 열리게 된다. 하나님의 역사는 벼락처럼 전개 된다고 했다. 1885년 봄 일본에 머물러있던 아펜젤러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함으로써 조선 땅의 예수 복음이 날개를 달았다. 언더우드는 오늘의 연세대와 알렌 선교사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을 세우는 엄청난 일을 했다. 아펜젤러는 이승만을 탄생케 한 배제학당을 세운다. 뒤이어 스크렌턴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와 이화학당을 세우고 천대받던 조선의 여성들이 눈을 뜨게 했다. 조선역사가 망해가던 시기 비운의 시간표가 돌았지만 선교사들을 통해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게 하는 복음의 역사(役事)가 역동 했던 것이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축복이다. 한 나라를 부흥 발전시키는 무한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조선 5백 년의 역사는 정말 캄캄한 세상이었다. 사대부들이 타락한 유풍(儒風)의 문화 속에서 백성을 착취하고 나라의 발전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나라가 망해가는 때 나라를 살리고자 급진개혁세력들이 일으킨 정변은 사람의 위대한 뜻에도 불구하고 3일천하로 끝난다. 뒤이은 역사는 결국 일본의 36년 종살이해야 하는 비운의 역사를 겪어야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70년 종살이 후 회복의 역사를 썼다. 우리는 140년 전 위대한 영적 거장 몇 분의 선교사들이 오늘의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들어내는 초석을 낳았던 역사를 돌아본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가. 세계 10대강국을 자랑한다. 희망 속에 겪는 사회문화의 심각한 갈등을 보면 나라가 망할 것 같은 위기다. 이런 위기 때 그때의 역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야 할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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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3일천하 ‘갑신정변 140년’ 이 땅 복음의 큰길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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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2) (민12:11-16)
- 미리암은 위대한 믿음의 여인이 맞습니다. 하지만 여선지자라는 위대한 칭호를 받은 후 신앙이 제자리걸음을 했습니다. 미리암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역사에 발맞추지 못하고 여전히 애굽에서의 사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모세가 없는 40년 동안 여자로서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진짜 지도자인 줄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진짜 지도자인 모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교만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40년 만에 나타난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기절초풍할 일들을 일으킵니다. 세계 최강의 애굽과 바로도 모세 앞에 쩔쩔맵니다. 애굽을 초토화 시켜버렸고, 애굽의 장자를 죽여 씨를 말려버렸습니다. 여호와의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임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만 대면하시고 바다까지 갈라 마른 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미리암은 40년 동안 여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을 영도해 왔지만 40년 만에 갑자기 등장한 모세의 위용 앞에서 입도 벙긋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선지자의 위치에서 볼 때 비록 인간적으로는 누나요 동생이지만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적 권위를 지닌 모세였기에 고개 들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교회들끼리, 특히 목회자들끼리 묘한 질투심과 경쟁심이 있습니다. 곁의 교회가, 다른 교회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갖습니다. 잘못되면 입은 안타깝다고 하면서 속은 이유 없이 고소하고 상대적인 만족을 얻습니다. 교회의 주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망각한 무서운 죄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이 교인들 사이에서도 발생합니다. 곁의 성도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잘못되면 입은 위로하는 것 같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자신의 신앙과 믿음이 좋은 것으로 위로받고 착각합니다. 아주 나쁜 모습입니다. 악한 모습입니다. 교만의 극치입니다. 어쩌면 이것보다 더한 것이 목회자들끼리의 보이지 않는 견제와 경쟁입니다. 주변의 교회가 갑자기 성장하면 상대적 박탈감을 가집니다. 사람이다 보니 비교가 안 될 수 없습니다. 특히 가까운 교회에서 독보적인 성장을 보이면 심각한 스트레스까지 받습니다. 목사 자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의 중직자들이나 성도들도 자연스럽게 목회자에게 압박을 가합니다. 자신은 1년이 가도 전도 한 명 하지 않으면서 교회 부흥을 입에 올립니다. 십일조나 감사헌금은 고사하고 선교나 불우이웃이나 개척교회, 농어촌교회, 은퇴하신 목사님, 가난한 신학생들을 위해 특별헌금 한 푼도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재정을 입에 올립니다. 더 심각한 것은 설교자들의 교만입니다. 설교하는 사람이다 보니 설교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설교자의 훌륭한 설교에 은혜받기는커녕 허점과 잘못을 찾기에 바쁩니다. 그러니 설교에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현상은 모세를 대적하는 미리암의 아류들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땀방울 하나, 눈불 방울 하나 다 주의 것입니다. 우리는 비교 대상도 아니요, 경쟁상대도 압니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며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자들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특히 목회자들은 아바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평생 잊어선 안 됩니다. 물론 아바타라 하지만 예수님의 아바타니 영광스럽습니다. 진짜 선지자, 진짜 목회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미리암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사실 미리암은 누구보다도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몰라서 범한 죄도 무섭지만, 알고도 범하는 죄는 더 무섭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단순히 그 사람의 성향이나 기질을 나타내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모세의 통치를 방해했고, 이스라엘의 진행을 가로막았습니다. 감히 모세의 영적 권위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감히 같은 선지자였지만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교만은 이 모든 영적 권위 앞에서도 원망과 비방의 고개를 들게 합니다. 호시탐탐 모세의 허점과 실수를 염탐합니다. 교회도 은혜를 계산하는 성도가 있고, 실수와 잘못을 찾아내는 성도가 있습니다. 기회가 왔습니다. 구스 여자가 돌아왔습니다. 이전에 이미 정리된 문제인데도 교만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영적분력을 상실했습니다. 미리암은 십보라가 돌아오자 속에 숨겨놓았던 원망과 불평을 표출합니다. 원망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사실까지 망각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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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2) (민1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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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1)
- 성경 어디에도 미디안의 제사장 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는데 문제 삼은 장면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실에 대해 그 어디에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하는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사건 때문에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백성들이 구스 여인 십보라를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통치에 십보라를 문제 삼지 못하도록 아예 입도 벙긋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버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명을 주셨고, 그 사명 감당하기 위해 애굽으로 오는 길에 느닷없이 모세를 죽이시려고 한 것은 구스 여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임이 분명합니다. 분명한 이유는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것에 있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 같은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발견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려 하셨습니다. 완전한 모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이셨습니다. 완전히 죽이셨습니다. 그래도 십보라는 할례언약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긴박한 순간에 할례를 행하면 남편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과 비교도 되지 않는 신분입니다. 단순히 액면가로 볼 때 우리는 시아버지와 관계한 여인입니다. (마1:3)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우리는 우상의 신전에서 몸을 팔던 기생이었습니다. 우리는 과부요,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남편을 사지로 몰고 왕과 간음한 유부녀였습니다. (마1:5-6)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인데 죄인인 줄도 모르는 죄인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답도 없으면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제 딴에 잘 사는 줄 알지만 무익한 인생이요, 단 하나도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혀에는 속임만 있습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입에는 저주와 악독만 가득합니다. (롬3:10-14)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런 우리가, 그런 우리의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도 달렸고, 예수님의 부활에 나도 부활했다고 고백합니다. 사탄이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의를 제기하고 문제 삼을 것이 수두룩한 우리입니다. 아니 우리는 문제 그 자체들입니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합니다. 십보라가 할례 언약을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십보라가 할례를 행하여 남편을 살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불가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입으로 시인합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보라가 할례언약을 아는 것과 할례를 행하는 것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서십니다. (마10: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눅12: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합니다. 문제 제기도 못합니다. 입도 벙긋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의 예배 자리에, 예수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앉혀주십니다. (계12:22-23)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이런 은혜를 받은 성도입니다. 그래도 원망하고 비방하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완전한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할례를 시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에 거하며, 주일마다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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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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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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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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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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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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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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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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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침묵의 유익 (수6:8-11)
- “침묵이 좋은 몇 가지 이유”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침묵은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는 것을 도와줍니다. 침묵은 입에서 나오는 거친 말을 예방합니다. 침묵은 후회할 말들을 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침묵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줄 수 있게 합니다. 침묵은 언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바로 기도하게 해줍니다. 침묵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합니다. 침묵은 당신이 무식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합니다.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을 잘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것이 훨씬 더 무게가 있고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 공동체에서의 모든 문제들은 다 말 때문에 발생합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연산군은 모든 신하들에게 “구시화지문 설시참신도”(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 / 입은 화를 초래하는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라는 글이 새겨진 목패(木牌)를 목에 걸고 궁중 출입을 하도록 엄명을 했다고 합니다. 그 만큼 말로 인하여 조정에 혼란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에 예방차원에서 그런 조치를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이목구비(耳目口鼻)를 만드실 때 눈도 귀도 두 개씩을 만들어 주신데 반해서 입은 한 개만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보는 것과 듣는 것에 비해서 말을 조금씩 하라는 뜻이고, 꼭 필요한 말만 하면서 살라고 하신 의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뿐인 입으로 너무 많은 말을 하고 너무 불필요한 말을 하려다 보니까 오해가 생기고, 문제가 생기고, 시끄럽고 혼란한 일들이 많이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많은 말을 해도 될 때가 있지만 지금은 우리가 말을 절제하고 침묵해야 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왜 침묵이 필요하고 유익한 것일까요? 첫째는, 침묵은 질서유지의 비결입니다.(수6:10) 둘째는, 침묵은 지혜로운 삶의 비결입니다.(잠17:28) 셋째는, 침묵은 원수를 대적하는 비결입니다.(사53:7) 사회적으로 혼란한 일이 많은 이때에 침묵하며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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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침묵의 유익 (수6: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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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첫사랑의 선물
-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릴 때나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마음을 주어 좋아하거나 사랑을 나누었던 경험은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첫사랑은 맨처음 느끼거나 맺은 사랑으로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쉽게 말할 수 없겠지만 상대가 주님이든 사람이든 인생의 제일 처음 순수하게 사랑했던 마음을 잊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상대방을 사랑하게 되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은밀히 속삭인다. 온 세계를 다 얻은 느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서 하늘에 떠 있는 별도 따 와서 선물할 것처럼 모든 것을 상대방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언약을 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핑크빛 미래를 말하면 그 순간만은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내 것 인양 나만이 가지는 이 세상의 최고의 행복과 인생의 아름다움을 만끽한다고 착각한다. 세상엔 영원한 것은 없고 늘 새로운 것이 아니기에 분명히 변하기 마련인 것을! 처음에 기대하고 믿었던 상대방은 변질되어 열애 때의 그 마음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헤어짐의 결론에 도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동안 사랑했던 마음은 완전히 사라지고 원망하며 증오 속에 미련과 후회만 남기고 이별을 하는 것이 첫사랑이다. 꿈결 같은 열애의 시간에는 얼마나 멋지고 희망에 부푼 가슴으로 그 사람만 바라보고 보랏빛 미래를 꿈꾸고 살지 않았던가! 나중에는 순결한 첫사랑이 이별로 끝나버려 세상을 다 잃어버린 느낌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경우도 있다. 처음 시작할 때는 큰 기대에 찼었으나 사랑의 마지막 선물은 후회와 상처만 남아 아픈 기억으로 인생 속에 녹아있는 것이 인간들의 첫사랑이다. 우리 주님과의 첫사랑은 세상의 것과는 전혀 다르다. 살아가고 있는 지금까지 우리는 잊고 살지라도 시종 변함없이 안아 주시고 위로를 선물해주시는 사랑의 주님은 존경할 위대한 분이시다. 우리가 주님을 처음 만나 첫사랑을 경험한 것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모태신앙이건 체험으로 늦게 첫사랑의 주님을 만난 분이건 간에 그때 주님의 뜨거운 가슴을 느끼며 구원과 은혜의 선물을 받고 사랑에 얼마나 감격하여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가! 주님을 향한 뜨겁고 고마운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 역시 우릴 얼마나 뜨거운 가슴으로 안아 주시지 않았던가! 주님과의 첫사랑은 정말 깨끗하고 순결하여 세상의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는 잡히지 않는 순수 결정체다. 그때 주님의 사랑은 세상의 어떤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감격스럽고 정말 내가 가진 목숨까지도 다 내어놓고 싶은 거룩한 마음이 아니었던가! 그분을 생각만 해도 늘 기쁨과 감사가 넘치고 그분의 이름만 들어도 무조건 행복한 마음이 저절로 생성된 것이 사실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여 나의 몸과 나의 가진 모든 것이 그분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도리이다. 남녀 간의 첫사랑은 어떠한 좋은 선물로 증표를 주고 맹세해도 언젠가는 변질되어 그리움과 상처만 남는다. 그러나 주님과의 첫사랑은 새 생명을 선물의 증표로 주시고 끊임없는 은혜로 사는 날 동안 늘 변함없이 첫사랑의 선물이 제공되고 있음을 잊으면 안 된다. 내가 바로 주님의 첫사랑의 대상이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주님은 절대 변하지 않으신다. 오직 불변하시는 첫사랑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만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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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첫사랑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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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15년을 더 산 사람
-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히스기야 왕의 스토리는 참으로 흥미롭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15년 더 연장해 주셨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이사야 선지자는 병든 히스기야 왕에게 찾아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한다. (왕하20:1)에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느낌을 왕은 받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형선고를 받은 히스기야 왕은 얼굴을 벽으로 향한 다음에 사력을 다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왕하20:3)에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 라고 말씀한다. 왕은 살려달라는 직접적인 표현 대신 주 앞에서 진실되게 살아온 것을 기억해 달라고 간구했다. 이런 자신만만한 기도는 평생을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진실되게 살려고 애쓴 자만이 할 수 있는 기도로 보인다. 이 기도 후에 곧바로 하나님의 응답이 이사야 선지자에게 임한다. (왕하20:5-6)에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라고 말씀하셨다. 절대절명의 위기 앞에서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 앞에 내 놓은 카드는 지금까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왔던 선한 행실이었음을 기억하자. 우리나라 야사(野史)에도 히스기야 왕처럼 15년을 더 살았던 인물이 전해진다. 조선 명종 때 유명한 맹인 점장이, 홍계관(洪繼寬)이란 이가 있었다. 그가 사람의 앞날에 대해서 일러주는 족족 다 맞았기에 고관대작들이 앞 다투어 그를 극진히 대접하고, 자신의 앞날을 물어보곤 하였다. 당시 높은 벼슬에 있는 상진(尙震) 정승은 홍계관에게 자신의 죽을 해를 점쳐 알고 있었다. 그가 예언한 죽을 해를 당하여 상진 정승은 신변을 정리하고 재산처분을 한 다음 조용히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해가 다 지나도록 아무런 변고가 없었다. 새해가 들어서면서 홍계관이 매우 이상하게 생각해서 상진 정승을 찾아갔다. 상진 정승은 “내가 너의 점괘를 믿고 작년에 명이 다할 줄 알고 기다렸는데 어찌 맞지 않는가?” 라고 물었다. 이에 홍계관은 “혹 음덕(陰德)으로 수명을 연장할 수 있으니 대감께서도 반드시 그런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라고 대답을 하였다. 음덕(陰德), 다시 말해서 남모를 큰 선행을 뜻한다. 상진 정승은 옛날 자기가 수찬(修撰) 벼슬에 있을 때 큰 잘못을 범한 대전 수랏간 별감을 용서해 준 일을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난 후 홍계관은 ‘대감의 수명이 연장된 것은 반드시 이 음덕으로 응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을 하였다. <연려실기술>이라는 문헌에 상진 정승의 증조부인 상영부(尙英孚)가 재물이 많아서 주위 사람들에게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었는데 말년에 차용증서들을 다 불태웠다. 그렇게 한 마음의 동기를 묻자 ‘혹 이 선행으로 후손들이 잘 될는지 누가 알겠소?’ 라고 대답했고, 얼마 후에 상진(尙震)이 태어났다고 한다. 서양 사람들은 기독교 윤리에 입각해서 자선을 하고 봉사를 하지만 우리 한국인은 덕을 쌓고, 그 음덕으로 복과 영달을 누린다고 생각했다. 곧 서양 사람은 내세에서 자신의 선행으로 보상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반면, 동양 사람들은 현세에서 보상을 받거나 아니면 후손이 대신 보상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성경도 선행에는 반드시 보상이 있다고 말한다. (잠언19:17)에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또한 성도의 선행은 하나님께서 다 보신다. (딤전5:25)에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선행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라. (마태5:16)에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라는 말씀을 꼭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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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15년을 더 산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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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52 : 연기설(緣起說)의 인연(因緣)은 쓸 수 있는 말인가?
- I. 서언(序言) 얼마 전 몇 사람의 목회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인연(因緣)이란 말을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실제로 우리 교인들도 흔히 인연이란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이 말은 불교의 가장 중심적인 교리 중의 하나인 연기설에서 나온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면서도 인연이란 말은 수도 없이 많이 한다. 그렇지만 이런 말들의 유래와 그 근본 의미를 안다면, 이는 반드시 금지해야 할 용어이다. 이에 본 호에서는 인연의 모체가 되는 연기설과 인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연기설(緣起說)이란?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 중의 하나는 바로 연기설이다. 이는 ‘세상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영원불변한 실체는 아무것도 없다’는 이론이다. 또한 연기설에는 세 가지의 근본 원리가 있는데, 첫째는 ‘인과(因果)의 법칙’으로서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에 의해서 반드시 결과가 온다는 이론이다. 둘째는 ‘인연의 법칙’으로서 세상 만물의 변화에는 인과 연, 즉 원인과 조건의 작용에 의한다고 했다. 셋째는 ‘상호 관계성의 법칙’인데 개개의 사물들은 서로 의존하여 존재하는 관계에 있다는 이론이다. 이상의 연기설은 세계와 인생의 모든 현상을 12연기(十二緣起)로 설명하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과거에 지은 업(業)에 따라 현재의 과보(果報)를 받게 되며, 현재의 업에 따라서 미래의 고(苦)를 받으면서 12가지 인연을 맺게 된다. 곧,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근(六根)·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 등으로서 이를 십이 인연(十二因緣), 십이지(十二支)라고도 한다. 특히 11번째의 생(生)은 업(業)의 인연으로 미래의 생을 받게 된다는 이론으로 전생과 관계가 있다. III. 인연(因緣)이란? 앞에서 논한 연기론의 세 가지 근본 원리 중에서 두 번째의 ‘인과(因果)의 법칙’중에 ‘인연의 법칙’이 있다. 한자어로는 원인 인(因), 묶음 연(緣)이며, 국어사전의 뜻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사람이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인 因과 간접적인 원인인 緣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말은 서론에서 언급한 대로 불교의 가장 기본적 교리인 연기론(緣起論)에서 유래된 용어이다. 불교에서는 인연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인연은 어떤 결과를 만드는 조건으로서, 직접적인 조건은 因으로서 원인을 이루는 근본 동기가 되며, 간접적인 조건은 緣으로서 원인을 도와서 결과가 생기게 하는 조건이라고 한다.’ 즉, 여러 가지 원인 중에서 주된 것은 因이고, 보조적인 것을 緣으로 여긴다. 결국 모든 사물은 이러한 인과 연의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만 변화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이 있다. 이는 서로의 인연이 맺어지기 위해서는 전생에서 두 사람이 무려 3천 번의 인연이 있어야 되는데, 그 직접적인 조건은 因이고, 옷깃을 스치는 것은 간접적인 조건인 緣이라고 했다. IV. 적절성과 대안적인 용어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인연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은 불교의 세계관인 전생(前生)을 인정하는 경우가 될 뿐 아니라 연기론, 즉 인연 사상을 그대로 인정하는 결과가 된다. 결국 인연이란 우리 기독교인은 반드시 삼가야 될 말인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적인 용어는 무엇인가? 우리 기독교에서는 불교적인 인연의 관계는 일단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대안적인 용어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국어사전적인 인연의 의미는 ‘수많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원인과 결과’를 말하기 때문에 불교적인 요소를 제외한다면 인연은 사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연의 한자어나 우리말이 불교의 용어와 동일하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 기독교적 용어를 굳이 찾는다면, ‘하나님께서 자연과 인간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원리와 법칙’을 의미하는 ‘섭리’를 말할 수 있으나 그 말도 인연과 반드시 같은 말은 아니다. 이상으로 볼 때 인연은 전통적으로 모두 다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말할 수는 있지만, 이는 분명히 금지해야 할 불교의 교리적인 용어로 반기독교적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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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52 : 연기설(緣起說)의 인연(因緣)은 쓸 수 있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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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생각
- 성령님의 하시는 일 중 가장 큰 일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시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영과 육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 안에 만끽하며 살도록 생각을 바꾸시는 일을 하신다.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셔서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만드셨다. 성령님은 하나님을 떠나 버린 인간의 생각을 바꾸어, 하나님과 함께 삶을 깨닫게 하는 일이 주사역이시다. 예수께서 임마누엘로 오셨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소개하고, 기억나게 하시고, 알게 하여 임마누엘을 누리게 하신다. 성경의 핵심인 로마서 8장을 통해 크게 깨달았다. 믿음은 생각이라고 말하고 있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란다. 성경 전체를 통해 설명해 놓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벽하게 재창조하신 세상에 우리를 옮겨 놓으셨다고 반복해서 설명하신다. 나는 이 말씀에 큰 믿음을 가지고 큰 믿음이 있다고 고백하며 부르짖는다. 주님께도 말씀드리고 나에게도 말을 한다. 나는 기도하는 시간을 그렇게 보낸다. 나는 “영의 생각”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나는 기도가 재미있는 것 같다. 말씀에 있으면 크게 믿는다고 하나님께도 고백하고 나에게도 인식시키는데 집중한다. “성한아, 너는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이야! 그래 맞아 나는 영의 생각을 하는 성한이야!”라고 주장한다. 나는 나에게 “성한아, 너는 예수님을 통해 완벽한 영의 세상에 옮겨졌으니 마음껏 그 안에서 살아라. 알겠지.”라고 말해 준다. 우리는 생명을 얻어 풍성한 삶을 살도록 이미 마련되었다. 이미 그 안에 모든 것이 있다고 말씀 하신다. 성령님은 우리가 영의 세계에 태어났음을 알도록 성령님은 도우신다. 성령님은 예수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을 바르게 받아들이도록 도우신다.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시는 음성에 반응해야 한다. 나는 성령의 사람이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 기록된 성령의 음성에 반응한다. “주님, 저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이미 영생이 있습니다.” “주님, 풍성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풍성합니다.” “주님, 항상 임마누엘 합니다.” “성령님, 저에게 임마누엘의 생각으로 살라고 하시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이러한 고백들이 나의 힘이다. 성령님의 주 사역이 로마서 8장의 “영의 생각”을 하게 한다고 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했다. 성령의 주 사역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성령님의 사역에 반응하는 것을 항상 즐기려 한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성령님은 믿음을 더해 주신다. 영의 생각을 더해 주신다. 그러니 나는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살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자주 정말 자주 쉬지 않고 사로잡아오는 죄의 법이 아닌 영의 생각,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음”을 큰 믿음으로 인정하고 선포한다. 감사와 신나는 시간이다. 성령님과 함께 딩구는 시간이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능력의 사람이 되는 이유다. 성령님은 바른 생각을 하게 하신다. 성경에 기록하여 뚜렷이 말씀하신다. 반응을 적극적으로 하라. 믿음이 적다고 말하는 것은 굉장한 실례의 말이다. 믿는다고 말하라. 크게 믿는다고 선포하라. 영의 생각을 한다고 주장하라. 그것이 성령님께 반응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크게 기뻐하실 것이다. 성령님은 십자가에서 이미 모든 것이 성취되었음을 믿게 하신다. 크게 믿는다고 고백하라. 나는 그렇게 하는데 너무 좋다. 믿음이 더 생김을 본다. 이것이 영의 생각이다. 성경의 핵심인 로마서 8장 말씀은 “이 생각이 믿음이라”고 강조한다. 성령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당신의 생각을 영의 생각을 하도록 바꾸시는 작업을 하신다. 성령님의 작업에 적극적인 반응했더니 너무 신바람이 난다. 적극적으로 권한다. 해보라. 필요하시면 기사와 표적도 저절로 주시기도 하신다. 성령님의 주 사역인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역해 보라. 신나는 일이다. 사단의 주 사역도 생각을 변화시켜 성령의 일을 적극적으로 방해 한다. 사단은 “육의 생각”을 하도록 전력을 다 한다. 죄의 법으로 사로잡아 육의 생각을 하게하면 사단은 성공한 것이다. 생각만 바뀌면 믿음에서 떠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고 한다. 생명의 근원이 마음, 즉 생각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단은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을 제시한다. “이 땅이 네가 처한 세상이다. 너는 이 세상 중심으로 살 때 문제가 해결된다”라고 다른 해결책을 제시한다. 예수님께도 천하만국을 보이며 세상을 택하게 하려 했다. 생각을 속인다. 육지에서 활보하며 공기를 마시며 살면 되는데 물속이 신비롭고, 좋다고 속인다. 물속에서 눈을 떠보면 물속의 세상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그러나 잠시 뿐이다. 자유롭지도 못하고 숨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만약 물속에서 올라 올 수 없다면 고통은 극에 달하게 된다. 곧 생명을 잃고 말 것이다. 사단이 주는 쾌락은 순간적일 뿐이다. 그 결과는 비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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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관계가 깨지는 이유 (2)
- 관계가 소중합니다. 목회는 관계입니다. 관계는 세우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나 깨지는 것은 순간입니다. 사탄은 관계를 깨뜨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관계 회복 능력입니다. 관계가 깨지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관계가 깨지는 데는 둘 다 책임이 있습니다. 관계가 깨지는 데는 수많은 이유가 있습니다. 관계의 깨짐은 비극이요, 불행이요, 아픔입니다. 죄 때문에 관계가 깨집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를 깨뜨립니다. 죄를 멀리해야 하고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욕심, 분노, 이기주의, 미움, 저주, 좁은 마음, 이해심 부족, 시기, 질투, 잘못된 언어, 교만, 융통성 부족 등 때문에 인간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인간관계가 깨지는 이유를 찾아 고쳐야 합니다. 관계가 깨지는 이유의 반대가 되는 삶을 살아야 관계가 잘됩니다. 관계가 깨지는 이유에 대해 남을 탓하거나 변명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관계 잘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인간관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사소한 것 때문에 관계가 깨지고, 오해 때문에 관계가 깨집니다. 소심하고, 예민한 자는 사소한 것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관계를 깨뜨립니다. 마음에 상처가 많고, 의심이 많고, 공격적이며, 남을 비판하기 좋아하면 관계가 깨집니다. 관계가 깨지지 않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목회자와 성도와의 관계가 깨지면 목회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건강한 관계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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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관계가 깨지는 이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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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진짜 부족한 것이 맞습니까?
-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주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나 또는 다른 교우들과 대화를 할 때에 내 자신의 부족함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하나님, 이 부족한 종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는 “나 같은 부족한 사람을 구원해 주시고 써 주시니 참 감사하지.” 뭐 그런 말들을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내 자신을 돌아보며 생각해 봅시다. 진짜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저 내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에게 겸손하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말은 아닙니까?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었고 또 한 사람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불신 친구가 예수님을 믿는 친구를 찾아갔는데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불현듯 지금 이 시간쯤이면 친구가 교회당에서 기도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당으로 달려갔습니다. 정말 그 친구는 교회당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그 친구는 이렇게 진지하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부족한 놈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 부족한 사람을 구원해 주신 은혜가 너무나 크고 감사합니다.” 불신 친구는 그 기도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네가 부족하다고, 진짜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한 번 테스트 해볼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불신 친구는 교회당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기도를 끝내고 나오는 친구를 붙들고는 “야 이 부족한 놈아!”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자마자 그 예수님을 믿는 친구가 뭐라고 말을 했을까요? “뭐 어째, 야 이 놈아, 내가 뭐가 부족해? 너보다는 백 배 천 배 낫지.”라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우리의 대부분의 모습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자신이 부족하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이 대단한 신앙과 인격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더 나아가서 우리는 늘 내 자신이 죄인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누가 나를 보고 죄인 취급하면 그것을 못 견뎌하지는 않습니까? 그저 말이나 모양내기만이 아니라 내 평소의 삶의 모습이 진정으로 나의 부족을 알고 또 내가 죄인 됨을 아는 모습일 때에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진정한 겸손으로 여겨주시고 은혜를 내려 주실 것입니다. 음악의 귀재였던 모차르트에게는 많은 사람이 음악을 배우려고 찾아왔다고 합니다. 모차르트는 그 사람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반드시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당신은 음악을 잘 알고 있습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재능 있는 젊은이가 자신만만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쳤고 바이올린도 10년 이상 배웠습니다.” 모차르트는 그 청년에게 정해진 수업료보다 두 배를 내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한 젊은이가 면접을 보았는데, 이 청년은 자신이 음악을 잘 모르지만 열심히 하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모차르트는 그에게는 수업료의 반값만 내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것을 알고는 먼저 온 청년이 부당한 처사라며 모차르트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그러자 모차르트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음악을 좀 안다는 사람을 가르칠 때는 그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인식시키고 그것을 바로잡아 주는 데 더 많은 힘이 들어간다네. 그러나 스스로 음악을 잘 모른다고 생각하고 처음부터 바르게 배우려는 사람은 가르치는 것이 쉽지.” 철학자 소크라테스는“나는 다른 이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늘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 다른 이들과의 차이점이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자기의 것을 굳게 쥐고 있는 사람은 더 높은 차원의 것을 배우기가 매우 어렵듯이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란 참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내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그저 말로만이 아니라 나의 삶과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는 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래야 겸손한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비로소 내게 임하게 됩니다. 독자 여러분, 진짜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진심이면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십시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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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진짜 부족한 것이 맞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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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일상의 삶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임재
-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기를 소망한다. 날마다 순간마다 그분과 동행하기를 원하며, 그분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복을 누리기를 소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분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마귀의 거짓말’에서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잠언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잠9:10).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길 때,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성경 말씀과 신앙 공동체를 통해 양육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더 잘 인식하기 시작한다. 예수님은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요10:4)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는 무생물 속에서도 분별할 수 있다. 시편 기자는 푸른 나무, 겨울에 내리는 흰 눈, 비바람과 폭풍우 속에서도 이 모든 것들을 존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감지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과학적 세계관을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스스로 설명할 수 있는 닫힌 체계로 간주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오래 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읽는 경향이 있다. 현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시작하시고 난 후 이제는 자연이 스스로의 ‘자연 법칙’에 따라 움직이도록 만들고 자신은 창조 세계의 무대 뒤로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이 매일, 매 순간 계속해서 창조 사역을 이루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의 명령을 땅에 보내시니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눈을 양털 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 같이 흩으시며 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뿌리시나니 누가 능히 그의 추위를 감당하리요”(시147:15-17). 우리는 시편 기자가 보았던 성경적 안복으로 창조 세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쉽게 감지하지 못하는 것은 성경과 이질적인 세계관이나 믿음의 강력한 영향력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무와 동물을 보면서 그것들이 ‘자연’이라는 자율적 실체에 속한다고 여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매 순간, 숨결처럼 우리 가까이 계셔서 그것들을 생명으로 부르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 그것들이 창조 세계에 존재함으로써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과학과 기술이 압도하는 세계관에 매몰된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와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기 위해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구약성경 시대 살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다. 성경적 세계관은 과학적 탐구를 조롱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물에 신실하시기 때문에 과학이 견고한 기초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 세계를 약속하신 대로 계속해서 질서 있게 유지하시고 보존하실 것이다(시148:1-6). 인간 삶에 대한 이원론적 관점은 하나님과 세상을 양립할 수 없는 두 영역으로 나누려고 한다. 신체적 치유의 경우를 한 예로 들어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이 일반적인 의학적 방법을 통해 치유되면 우리는 이를 ‘자연적’ 치유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안수 기도를 통해 치유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를 ‘초자연적’으로 치유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현실을 단순히 자연적 영역과 초자연적 영역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친구 디도가 단순히 자신을 방문했을 때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고후7:6). 바울은 디도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조종되는 꼭두각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디도가 자신의 ‘자연적인’ 자유 의지로 방문을 결심하고 준비했음을 알았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손길이 그 방문 뒤에 있었음을 알았다. 이것은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동시에 둘 다였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모든 치유를 어떤 수단이든 ‘초자연적’이면서도 동시에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한 신학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이스라엘에게는 단 하나의 경험 세계만 있었다. 세상의 경험은 항상 하나님의 경험이기도 했고, 하나님의 경험은 세상의 경험이기도 했다.” 우리 모두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풍성하게 경험하는 복을 향유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원한다. 김성수 목사 (아프리카 탄자니아 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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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일상의 삶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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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엘리압(4) (삼상17:28-40)
- 그렇다면 엘리압은 누구처럼 살아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다름이 아닌 이삭처럼, 므낫세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이삭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아직 수혼 제도가 세워지기도 전입니다. 자신을 대신할 동생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 아브라함이 다시 아들을 낳아 자신의 이름을 끊어지게 하지 않을 방법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삭은 순종했습니다. 엘리압은 어떻습니까? 일곱 명의 동생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일곱이란 의미를 우리는 잘 압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엘리압은 수혼 제도를 통해서 자신의 이름이 영영토록 끊어지지 않을 보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일곱 명의 동생 중에는 하나님께서 기름까지 부어주신 동생 다윗도 있었습니다. 엘리압은 부활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엘리압은 부활의 신앙을 가졌던 완전한 아버지 아브라함의 언약을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이 자신의 이름 속에 담겨 있습니다. 엘리압의 형제가 몇 8명입니다. 안식후 첫날, 주일, 부활의 날, 할례할 8일 이 모든 의미가 엘리압이라는 이름 속에, 엘리압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야말로 엘리압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름이 끊어지지 않고, 죽어도 살아나는 부활의 약속으로 겹겹이 둘러 싸여져 있었습니다. 자신이 이름으로도, 자신의 형제들로도 장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함에 눈곱만큼도 하자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엘리압은 골리앗 앞에서 겁에 질려 기가 죽어있었다 해도 다윗의 등장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신앙과 본분을 찾았어야 했습니다. 엘리압은 자신의 이름 속에 있는 뜻처럼 당당히 이삭의 길을 갔어야 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엘리압이 골리앗 앞으로 가야 했습니다. 이삭이 자신의 발로, 아니 아버지 아브라함을 도와 모리아산 제단 위로 올갔던 것처럼 엘리압은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있는 다윗의 등장으로 정신을 차리고 골리앗 앞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세움받은 목사와 장로들은, 먼저 된 자들은 정신 바짝 차리고 이 장면을 죽을 때까지 잊어선 안 됩니다. 부족하여 엘리압처럼 골리앗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었다 해도, 순간적으로 자신의 사명과 직분의 이름을 망각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는 다윗의 등장으로 반드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다윗의 등장 앞에서 자신의 오랜 경륜과 경험과 연륜과 위치를 가지고 화를 내고, 지적하고, 억 박 지르는 엘리압이 되어선 안 됩니다. 자기가 부인되지 않으면, 자기가 죽지 않으면 엘리압이 됩니다. 먼저 된 자는, 교회의 진정한 장자는 먼저 죽는 자입니다. 교회 안에서 진정한 장자는 누구입니까? 먼저 된 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자기를 태워 죽일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으로 오르는 자입니다. 제 발로 죽음의 제단 위로 올라가는 자입니다. 이 사실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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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엘리압(4) (삼상17: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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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영화 하얼빈,영웅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공부하다
- 국내 전역에서 절찬리에 상영 중인 영화 ‘하얼빈’을 가족과 함께 보았다. 우리의 가슴 아픈 역사 속에 있는 기록영화 하얼빈은 지금 우리가 맞은 이즈음 던지는 메시지가 컸다. 영웅 안중근의 역사·문화적 관련 작품이 많이 나와 실제 역사 스토리를 음미할 기회가 많았지만 이번 영화를 감상하면서 우리들에게 엄청난 과제를 던져주는 느낌을 받았다. 탑배우 현빈이 분장한 영화의 스토리는 일제 36년 조선 땅 강점의 시작의 역사초기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이토 히로부미의 시대를 구가하던 때 러일전쟁까지 일본이 승리를 이끌면서 사실상 조선 땅 지배가 시작되었다. 일본의 주인공은 총리내무대신 이토 히로부미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일제는 당시 대한제국 국모 명성황비를 시해하고 고종을 강제 폐위하는 잔인한 짓거리를 일삼고 있었다. 그 주인공이 이토 히로부미 총리다. 이 자가 러시아 땅을 둘러보고 뤼순으로 가는 일정이 있었다. 만주 땅 이역만리에서 독립운동에 온몸을 던지고 있던 안중근이 동지들과 이토를 잡는 스토리의 영화다. 동지들과 벌이는 극중 휴먼스토리가 있지만 역사의 시간표에 집착한다. 1909년 1월 26일 오전9시 하얼빈 역에서 일본인들의 환영을 받기위해 이토는 열차에서 내렸다. 손을 들어 근엄하게 환영인파에 답했다. 잠복해있던 영웅 안중근은 좀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오른손을 들었다. 벨기에산 권총으로 정확히 세발로 원수 이토를 쓰러뜨렸다. ‘늙은 도적’ 이토는 쓰러졌다. ‘코레아 우라!’ 러시아어로 ‘대한제국 만세’를 영웅은 외쳤다. 영화의 전말을 꾸미는 여러 스토리가 있지만 영화를 본 후 가슴을 아프게 하고 영화에서 얘기 못한 역사를 성급하게 찾아보고 싶었다. 약관 30세에 조국 대한제국을 찬탈한 이토를 죽이고 교수형을 받기까지 영웅은 뤼순 감옥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눈물 흘리게 하고 남긴 감동의 스토리가 있다. 이 젊은 청년이 짧은 몇 달 동안 조국과 세계에 던지고 간 엄청난 메시지가 있다. 당시 누구도 상상 못할 ‘동양평화론’이다. 영웅은 교수형을 받기 전 잠시 간수들에게 몇 가지 남기고 싶은 묵필과 저서를 쓸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때 주옥같은 강한 필치 200여 편의 묵필과 완성하지 못한 저서 ‘동양평화론’을 남겼다. 영화를 즐긴 후 서재에서 역사서를 찾아 뒤적였다. 영웅은 미완의 저서 동양평화론에 무엇을 적었을까. 자료를 찾아 읽어가는 순간 가슴을 멎게 했다. 어렴풋이 알고 있던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는 엄청난 논지의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당시 아시아 전 지역을 점령하고 대한제국을 침탈하고 있던 일본제국에 대해 영웅은 크고 깊은 제안을 던졌다. 몇 가지를 추려본다. 첫째 조선·일본· 청나라 3국이 협력 공존하는 협력기구를 만들자. 둘째 3국이 공동은행을 설립 공동운영할 것. 셋째 3국이 연합하여 서양 침입에 공동대처할 것. 넷째 3국의 경제개발을 일본에서 배우자 다섯째 상호주권을 존중하고 평화적 관계 유지할 것. 다섯 개 항의 동양평화론을 주창했다. 이른바 이웃나라를 침탈하지 말고 선린으로 공동체로 공존하자라는 제안이다. 얼마나 위대한 평화주의자인가. 위대한 제안을 일본제국이 받을 리 있겠는가. 그러나 이후 많은 일본인들이 영웅의 동양평화론에 감동했다. 그리고 일본전역에 안중근 현상이 있었다고 역사서는 적고 있다. 오늘날 한반도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혼란의 지경이 5천 5백만의 국민가슴을 찢고 있다. 일정36년 억압의 역사를 극복하고 6.25의 비극으로 비록 남북이 갈라졌지만 ‘할 수 있다 하면 된다’의 한국민 근성으로 위대한 역사를 이뤘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고 세계 탑 클라스의 경제 강국이라는 대한민국이 성숙한 사회발전으로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120여 년 전과 같은 강대국 사이에서 동양의 평화는커녕 동북아는 추악한 패권 전쟁 속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동양평화론의 희망을 찾아야한다. 영웅이 부르짖었던 동양평화론을 교회에서 찾아야한다. 곧 바로 강력한 복음운동이다. 한국교회가 세속화되고 많은 교회지도자들이 비판받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교회만이 위대하신 하나님의 권능으로 가능하다. 복음의 평화공동체를 위해 신발을 벗고 무릎을 꿁고 외쳐야할 때임이 분명하다. 정답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갖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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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영화 하얼빈,영웅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공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