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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호숙 목사] 영적 풍요 속의 빈곤
    인생을 살다 보면 풍요 속의 빈곤을 많이 체험하게 된다. 풍요 속의 빈곤이란 뜻은 “부유한 사회가 오히려 소비보다는 저축을 더 하려고 하는 경향 때문에 빈곤해질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풍요 속의 빈곤”이란 용어를 처음 언급한 사람이 있었다. 미국 대통령인 케네디로 그는 부통령인 존슨에게 편지를 보내었으며 이 편지 내용은 가장 부유한 나라인 우리 미국이 인구의 1/6이 절대빈곤을 경험하고 있으며 이는 곧 풍요 속의 빈곤이며 이는 우리가 해결 해야 할 문제 중 하나라고 밝혔다. 원인은 수입과 지출의 큰 불균형 때문이었다. 쉬운 예로 어떤 여인이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게 되어 혼자 생각하길 “부잣집으로 시집을 왔으니 이것저것 다 살 수 있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시아버지가 얼마나 짠 구두쇠인지 1,000원짜리 하나 내어 주는 것도 너무나 아까워서 손을 떨면서 줄 정도였다는 것이다. 어떤 할머니는 악착같이 돈을 모아 억대의 부자가 되었는데 독거노인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어 사망원인을 조사해보니 영양실조로 죽었다는 것이다. 돈은 있으나 그 돈을 어떻게 써야 유익하고 의미가 있고 가치 있는 것인지를 잘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요즘에 포미(FOR ME) 족(族)이 생겨나게 되었다. 포미족이란 “자기 자신에게 가치 있고 만족을 주는 것이라면 다소 비싸더라도 과감히 지출하여 구매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건강(for health), 싱글(one), 여가(recreation), 편의(more convenient), 고가(expensive)의 머리글자를 따온 말이다. 필자가 섬기는 교회를 중심으로 분석을 해보면 중직자의 직분을 받고도 성수 주일의 의미를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주일에도 돈 벌러 가는 권사님이 계셨다. 여자 임에도 불구하고 용접기술 자격증을 가지고 있어 남자들보다 돈을 더 많이 받는다는 즐거움 때문에 신앙은 뒷전이고 오직 돈만 벌었다. 교회를 위한 봉사도 선교를 위한 헌금도 친교를 위한 모임 및 찬조도 공동체에서 함께 누리는 유익함을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하고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지금은 병들어 폐인처럼 지내고 있으며 예배 참석도 힘들어 겨우 가물에 콩 나듯 참석하는 상태다. 얼마나 가련한 삶인가? 우리는 여기서 영적 풍요와 빈곤의 삶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요즘은 설교 말씀 홍수 시대, 곧 말씀 풍요시대이다. 본교회 목사님의 설교도 있고 기독교 방송 cts, cbs 설교도 있고 개교회 방송채널, 한창 유행인 유튜브 설도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러나 이 시대 성도들이 영적 풍요 속의 빈곤한 삶을 살고 있다. 설교 듣기보다 세상 것에 취해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표현한 대로 듣기는 들어도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아(히4:2) 내 속에서 영적인 역사가 일어나지 않고 참된 유익이 없으며 의의 열매를 거두지 못하는 영적으로 빈곤한 삶을 사는 시대로 전락하고 있다. 돈은 많은데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곳에 투자하지 못했는가? 많은 달란트 재능은 있는데 썩히고 활용하지 못하여 무익한 삶이었는가? 강단설교 및 방송 채널을 통해 설교는 무한정 쌓여 있는데 내 삶에 영적 양식으로 삶지 못하여 영적 빈곤자로 살고 있는가? 생각의 전환과 더불어 이제는 유익하고 의미 있는 삶에 무엇인가 투자를 할 때이다. 나를 위한 유익한 삶을 지나 타인을 위한 헌신의 삶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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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8
  • [오성한 목사] 최고 시급한 일
    시급한 일이 있다. 미루면 안 될 일이 있다. 8살 정도 되었을 때 일이었는데 개울가에 놀다가 옆을 보니, 흐르는 물살에 검은 머리만 보이는 아이가 떠내려가고 있었다. 5살 아래의 여동생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슴까지 오는 물이었지만, 동생에겐 깊었다. 잊지 못할 기억이다.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급히 뛰어가 동생을 힘껏 들어 올렸다. 물속이라 가벼워 쉽게 안고 나올 수 있었다. 그 후 수년 동안 그 광경이 어른거리고, 사라지지 않았다. 자주자주 떠올라 섬뜩한 생각이 들곤 했다. 만약 그때 동생을 못 보았더라면, 만약 그때 급히 건져내지 못했더라면,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영원히 이 땅에서 보지 못했을 것이다. 종종 그때 일이 생각나곤 한다. 생명을 살리는 일 만큼 급한 일은 없다. 불 신앙은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을 불신앙 이라고 한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했다. 상대를 존중히 여길 때 상대는 기뻐한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큰일 난다. 마귀에게 속아 살다,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인생에 가장 시급한 일이 있다. 구원받는 것이다.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관심 때문이다. 믿는 자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에게 무관심하다면, 그 사람은 복음을 듣지 못할 것이다. 복음을 듣는 본인이 복음에 무관심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복음을 듣는 본인이 무관심한 것은 어쩔 수 없다 할지라도, 믿는 우리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 무관심해 그들이 영원한 지옥에 가게 된다면,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할까? 믿는 자는 시급한 일을 위해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우리는 전도자로 부름을 받은 시급한 일을 하는 사람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인정해 드리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일을 높여 드리고, 인정해 드리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 왜 이 땅에 왔다 가셨는가? 십자가를 지신 결과가 무엇인가? 예수께사 하신 일을 그대로 인정해 드리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예수님은 죄 없는 분으로 죄가 되심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고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셨다(고린도후서 5:21 참고). 예수께서 하신 일을 그대로 인정해 드리는 것이 믿어드리는 것이다. 사단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못 오시도록, 그대를 끊어 놓으려고 온갖 술수를 벌였지만,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매사건 마다 오히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며 지켜 내셨다. “내가 예수를 꼭 보내주마. 내가 메시아를 꼭 보내주마.”하시면서 대가 끊어지지 않도록 지켜 오셨다. 오히려 그러한 사건마다 더욱 분명한 구원의 길이 유일한 한 가지 길밖에 없음을 강조하며 보여주셨다. 사단은 지금도 이 길을 방해하고 있다. 사단의 어떤 방해도 이기고 우리는 예수만 믿어야 하고, 예수만 믿게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급한 일이다. 우리 안에 잠재운 성령의 능력을 복음으로 깨우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킬 때 10가지 재앙을 통해 보여주신 메시지도 그러하다. 출애굽 할 수 있는 것은 9가지 재앙으로 바로의 마음이 점점 열려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10번째 유월절 사건으로만이 출애굽 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메시지다. 예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선포하는 메시지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숨겨져 있다. 문설주에 피를 바르고, 고기를 먹는 그 날, 도저히 불가능했던 출애굽의 기적을 경험한 것이다. “문설주에 피 바르고, 피 바른 집 안에 들어가서 양고기를 먹어라. 양고기를 먹는데 그냥 먹지 말고 출발할 준비를 잘해라. 허리띠를 띠고, 신을 신고, 지팡이를 잡고, 그렇게 양고기를 먹어라”라고 했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예수께서 하신 말씀대로 내 살과 피를 먹고, 나갈 준비를 하라는 말이다. 피를 발라야 나올 수 있다. 유월절 어린양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죄악에서 건짐을 받는다는 것이다. 다른 길은 없다고 선언하고 있다. 시급한 구원의 길은 한 길뿐이다. 구원의 길은 다른 길이 없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 죄를 용서했음을 마음에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구원을 얻는다(로마서 10:10 참고).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만한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사도행전 4:12 참고). 홍해가 앞을 가로막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달려왔지만, 홍해를 건너게 하신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기꺼이 인도하시고, 지키신다는 것이다. 홍해를 건너게 하신다.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게 하신다. 돌아갈 수 없는 강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건널 수 없는 강이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인간이 건널 수 없는 강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너가게 하심으로 마귀의 손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다. 다른 길은 없다. 마귀는 오늘날도 다른 길이 있다고 속인다. 속지 말아야 한다. 시급하게 알려야 한다. 홍해를 건넘은 세례를 상징한다. 죽었다가 부활함을 상징한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었다가 살았다고 말씀하신다(로마서 6장 참고).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을 찬양하자. 홍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장애가 아니었다. 애굽에게는 심판의 장소였다. 홍해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을 가르셔서, 우리의 길이 되셨음을 상징한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히브리서 10:20)였다. 놀라운 구원이 아닌가! 이것을 알리는 일이 시급하다. 모든 사람은 마귀의 손에서 출애굽 해야 한다. 홍해를 건너야 한다. 인간의 힘으로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야 한다. 유월절을 통과해야만 건널 수 있다. 사단은 지금도 이 길이 열리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막아선다. 그러나 포기할 일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를 전해야 한다. 복음만 말해야 한다. 영혼을 구원할 일이 시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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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8
  • [김성수 총장]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사셨고, 성령으로 인치신 주님께 속하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사회 어떤 조직과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독특한 공동체는 성령의 변화시키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별과 신분, 빈부와 지식, 언어와 종족의 장벽을 넘어 ‘오직 하나님의 은혜’(Sola gratia)라는 수단에 의해서 이곳 저곳에서 불러냄을 받은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고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Lordship)과 성령님의 역사하시는 사역 위에 설립되지 않은 “교회”를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이 곳 저 곳에서 불러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라는 말은 원래 ‘불러내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에클레시아(ekklesia)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에클레시아, 즉 모임 또는 회집의 기능과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모임이 없는 교회를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모여야 합니다. 동서남북으로부터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하고 찬양하며 친교하고 교육받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더욱 더 돈독하게 키워 나가야 합니다. 모여서 예배하는 일을 등한시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 집단을 교회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모이는 일에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우리는 모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물론 교회는 감염예방준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집단감염의 진원지가 되지 않도록 예방수칙을 준수하는데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마치 교회의 예배가 바이러스 감염의 주범인 것처럼 매도하는 것은 사실과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잘못된 이유를 근거로 예배 모임 자체를 획일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교회가 ‘정치 방역’으로 의심을 받을 수도 있는 정부의 요구에 너무 쉽게 굴복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모이는 교회가 아무리 중요해도 그 모임이 자기 만족과 자기 봉사에만 스스로를 진력해 버리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모이는 교회는 다시금 이웃과 지역사회를 봉사하고 흩어지는 디아스포라(diaspora)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흩어져서 이웃을 봉사하고 지역사회를 섬기는 사회적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는 어두움 속에 헤매고 있는 이웃과 세상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안에만 있는 진리의 빛을 비추고, 절망 속에 있는 인간에게 하늘의 소망을 심어주며,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선포하는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오늘날과 같은 장수 시대에는 노인대학을 통해서 지역사회를 봉사하는 사역이 세상을 향하여 기독교신앙을 변증하고 전하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서의 짧은 사역이후 자신을 비방하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향해 어떤 깊이 있는 신학적 변증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하여 자신의 삶 자체가 어떠했는가를 회상시켜주는 아주 단순한 방법으로 자신을 변호하였습니다. 세상은 더 이상 이론적 논증과 장황한 설교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세상은 여전히 그리스도인의 삶과 생활, 행동에서 나오는 살아있는 설교를 듣고자 하는 귀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더 이상 우리의 율법과 고백을 듣지 않으려고 해도 세상은 여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증거에 주의를 기울이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모이는 교회로서의 에클레시아가 개인적 차원의 구속적 삶에 관심을 둔다면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디아스포라는 사회적 차원의 구속적 삶에 관심을 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보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을 모이는 교인과 흩어지는 제자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교인의 형태와 제자의 형태, 이 둘의 기능과 책무는 어느 하나가 우선될 수 없고 동일한 비중의 중요성과 관심을 가지고 수행되어야 합니다.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개인적 차원에서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이웃과 지역사회를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수 십년동안 지역사회를 효과적으로 봉사해 오던 프로그램을 교회의 당회가 주도적으로 폐쇄해 버리고도 전도 프로젝트를 운운하는 교회가 있다면 지탄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한국교회는 그 동안 개인적 차원에서의 신앙은 잘 감당해 왔을지 모르지만 사회적 차원에서의 책무는 잘 감당하지 못해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가 교회를 보는 눈이 비판적인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모이는 교회가 흩어지는 비전을 가지지 못하면 자기 도취적인 만족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러한 교회는 자기들만의 개교회주의와 같은 형태로 교회의 담을 높이 쌓고 이기적인 신앙으로 폐쇄적인 집단으로 전락하기가 쉽습니다. 이러한 교회는 결코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이아닙니다.교회는 모이는 교회로만 존재할 수도 없고 흩어지는 교회만으로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의 참된 모습은 마치 우리의 심장과도 같아서 새로운 피는 생산하여 계속적으로 유기체로 내보내고 더러운 피는 정화하는 역할을 감당해 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참된 역할입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열심히 모여서 모이는 교회를 이룩해야 합니다. 함께 모여서 열심을 다해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배우며 교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흩어지는 교회로서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지역사회 속에서 제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기적인 자기치장과 자기 만족의 삶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포효하는 사자처럼 세속화의 거센 바람을 집어삼키고 정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인은 많으나 제자가 없고, 모이는 교회는 있으나 흩어지는 교회가 없는 이때에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신앙 고백적인 결단과 희생이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절실히 필요합니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현 미국 에 반겔리아 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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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30
  • [김성수 총장] 밤은 어둡고 깊어만 가는데. . .
    세월이 참 빠르게 지나갑니다. 한 해를 시작한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가을을 맞고 있습니다. 한 해를 시작할 때마다 무언가 달라지겠지 하는 기대와 소망으로 시작하지만 실망과 후회로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하는 것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오늘날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이제는 새로운 기대와 소망을 가지는 것 자체가 사물을 잘못 보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갖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과 과학기술의 발달이 인류를 새로운 유토피아로 인도해 줄 것으로 기대하면서 진보 그 자체에 대한 신앙도 가졌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욱 방황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발달과 문명의 진보가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해 준 점도 많이 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인류 전체가 멸망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조성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인간은 스스로가 발전시킨 과학기술 앞에 벌벌 떨고 있는 무력한 모습을 보이며, 자기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현대인은 과학과 과학기술이라는 새로운 우상 앞에 노예가 되어 꼼짝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인간의 이러한 지식과 기술이 인간의 삶의 질과 가치를 고양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저급한 욕구 충족과 도덕과 윤리의 퇴폐적 생활로 끊임없이 인도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찍이 자연주의 철학자 루소(J.J. Rousseau)는 드죵의 현상 논문을 통해서 인간의 과학과 문화의 발전이 인간 사회를 도덕적으로 고양시키기보다는 오히려 타락하게 만든다고 주장하면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갈파하였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확실히 어두움을 향해서 계속해서 질주해 가고 있습니다. 청소년의 일탈 행동은 갈수록 폭력과 퇴폐성으로 얼룩지고 있고, 기성사회는 정신적인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언론을 통해서 보도되는 모든 사회적 현상들은 희망보다는 실망과 좌절감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도무지 소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시대상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날이 임박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언제 주의 날이 우리에게 임하도록 계획되어 있는지 말하지 않지만 주의 날에 관해서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날이 밤에 도적같이 임할 것이라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 진술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주의 날이 해가 떠 있는 낮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캄캄한 밤에 올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밤에 올 것이라고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고 있지만 그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님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영적으로 어두운 밤에 재림할 것이라는 사실을 바울은 밤에 임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아무리 과학의 빛이 찬란하게 빛난다고 할지라도 도덕적, 영적인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의 삶은 더욱 더 어두운 밤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점점 더해져 가는 어두움이 시야를 가리우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죄와 불의가 점점 더 깊어 가는 흑암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습니다. 주님은 영적인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가 밤 12시를 치기까지 기다리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빛들이 꺼지고 죄악이 극도로 관영할 때까지 인내하면서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의 저녁 시간즈음에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두움이 점점 더 깊어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알리는 시계가 밤 12시를 알리기까지 얼마 남아있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는 모든 장소들, 극장과 술집, 환락가들이 사람들로 가득 차 붐비고, 인간이 만든 조명들이 찬란하게 빛날 그 때에, 사람들이 자신들이 이룩한 과학 기술 문명의 발전을 스스로 찬양하면서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말하고 있을 바로 그 때에 주님은 홀연히 재림하실 것입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주의 날(DAY of the Lord)이 밤(Night)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 얼마나 놀라운 대조인가!! 하늘과 땅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위대한 날에, 어두움이 흑암을 뒤덮고 있을 그 때에 하나님은 “빛이 있어라!”고 다시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그 날에는 밤이 낮이 될 것입니다. 이제 이 날은 다시는 밤이 찾아오지 않는 영원한 낮이 될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다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뒤덮지 못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이 주의 날은 캄캄한 밤에 빛과 같이 오게 된다고 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빛은 어두운 모든 구석을 다 비추며, 어두운 구석에 감추어져 있던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드러나도록 만들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을 정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진솔한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나의 가정과 나의 마음의 모든 구석이 어두움이 없이 낮의 광명한 빛이 찬란하게 비치고 있는가? 우리가 악의 장막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아직도 이 악의 장막에 속하고 있지는 않는가? 언약의 물로 씻음 받기는 했지만 아직도 여전히 어두움의 자녀로 남아있지는 않는가? 밤은 어둡고 깊어만 가는데 우리 주님의 은혜의 빛이 나의 삶에 드리워져 있는 죄악의 어두움을 대항해 싸워서 그 어두움을 깨뜨리도록 살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화가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어두운 시대에 빛의 자녀들로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을 소원합니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에반겔리아 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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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8
  • [김성수 총장] 그리스도인 정치가들에게 바란다!
    경남기독신문 독자들 중 혹 기억하고 계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재임 당시에 ‘Again 1907 in Seoul - 서울에서 예루살렘까지’라는 기독청년집회에 참석하여 “서울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서”를 낭독한 것이 언론에 기사화되어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청계천 복원과 함께 이명박 전 시장의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당시 서울시 교통체계개편에 따른 혼란과 함께 이 시장을 이중으로 아주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이 시장은 “흐르는 역사 속에서 서울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하심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면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거룩한 도시이며, 서울의 시민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서울의 교회와 기독인들은 수도 서울을 지키는 영적 파수꾼임을 선포하며, 서울의 회복과 부흥을 꿈꾸고 기도하는 서울 기독 청년들의 마음과 정성을 담아 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합니다”는 내용의 봉헌서를 ‘서울특별시장 이명박 장로 외 서울의 부흥을 꿈꾸며 기도하는 서울 기독 청년 일동’의 이름으로 낭독하였습니다. 이 내용이 〈오마이뉴스〉를 통해 보도되자 네티즌들의 비난이 봇물을 쳤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역시 규탄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이 시장의 사과를 요구하였고, 정치인들은 호기를 놓칠세라 무참한 정치적 일격을 가하였습니다. 당시에 유인태 의원은 “그나 저나 서울이 이제 하나님 것이 됐으니 수도를 옮기긴 옮겨야 겠어요”라고 정치적 폄하 발언을 하였고, 임채정 의원은 “사람 땅으로 옮겨야지요”라고 응답하였습니다. 배기선 의원은 “아니 자기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좋은데 왜 자기 것도 아닌 걸 바친다고 하느냐”고 비아냥거렸다. 급기야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도 이 시장의 발언이 “사려 깊지 못한 처사”라는 공식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을 대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좀더 성숙한 신앙생활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램과 함께, 언론계와 정치계와 종교계를 망라한 우리 사회 전반이 말초적이고 지엽적인 것보다는 보다 더 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의연하고 성숙한 사회가 될 수 없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사실 당시 기도집회는 도덕과 윤리가 붕괴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이 사회가 복음으로 회복되기를 간구하면서 기독청년들로서의 책임을 통감하며 회개하는 순수한 기도모임이었습니다. 이 집회에서 이명박 당시 서울 시장은 행사 주최측이 작성한 내용을 주최측의 요구로 그대로 읽었을 뿐입니다. 집회에 참석하여 ‘서울 봉헌서’의 내용을 처음 본 이 시장이 그대로 낭독하겠다고 동의한 것도 집회 자체가 정치적인 모임이 아니라 기독청년들의 순수한 기도 모임임을 알았기 때문이며, 동시에 봉헌서의 내용도 정치적 의미가 담긴 것이 아니라 서울이라는 도시의 가치관과 문화가 도덕과 윤리적 가치 차원에서 바뀌어야 한다는 공통의 바램을 표현한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표현도 서울 시장으로서 자신이 주체가 되어 서울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표현으로 해석해서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하지말고, 서울을 기독교적 가치관에 입각하여 깨끗하고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드는데 진력해 달라는 기독청년들의 마음을 서울 시장에게 전달하는 지극히 종교적이며 수사학적인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사건을 다시금 회고해 보면서 진솔한 자기 성찰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기도하는 모임이나 연합 집회를 정치화하거나 이벤트화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과 이웃의 죄와 허물로 인해 애통하며 사죄의 은총을 구하는 제사장의 모습과, 지도자들의 죄를 지적하며 공의를 요구하는 선지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종교적 행사를 통해 권력자들을 위무하고 그들의 잘못에 면죄부를 부여해주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모습이 거침없이 나타나고 있음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젊은이들의 순수한 기도회에 참석하여 “서울시 봉헌사”를 낭독한 이명박 장로가 혹시라도 당시 행사를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한 홍보의 장으로 활용하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오산이었을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한 정치인이 단순히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표를 몰아줄 정도로 유치한 수준에 머물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 정치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조찬기도회 개최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에서 자신의 신앙을 어떻게 표출할 것인가하는 고민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건전한 사회 질서와 건강한 사회라는 한계 내에서 다른 사람들의 신념과 종교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리차드 마우(Richard Mouw)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무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성과 세상의 도성이 지상에서 자유롭게 공존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월터스톨프(Wolterstorff)의 표현대로 모든 것을 기독교화해야 하는 ‘성례적 사회’(sacral society) 또는 중립적인 삶에 종교를 추가하는 ‘중립적 사회’(neutral society)가 아니라, 종교적으로 헌신된 다양한 집단과 기관이 공평하게 취급을 받는 ‘다원주의적 사회’(pluralistic society)를 추구해야 합니다. 당시 서울 시장 이명박 장로의 서울시 봉헌 발언이 정치판에서 필요이상으로 폄하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대선후보들은 물론 가족들의 일거수일투족까지 우리 모두의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다.이 중대한 시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 세계관의 틀을 통해서 후보들의 인물됨과 자질을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온갖 종류의 왜곡, 거짓 선동, 음모에 현혹되지 않아야 합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인 정치가들도 이제는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통해서 자신이 믿고 고백하는 신앙을 제도교회의 문턱을 넘어 공의와 평강을 추구하는 합리적인 정책으로 구현해내어 국민들로부터 좋은 평가와 지지를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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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1-08-11
  • [신재철 목사] 안녕, 대전(大田) : “전학왔니더”
    “푸를 청(靑), 소나무 송(松). 청송에서 대전으로 전학왔니더.” 전학 수속이 끝나고 들어간 교실. 담임 선생님께서 친구들에게 자기소개를 해보라 말씀하셨다. 나는 큰 소리로 나의 고향 이름을 소개하며 인사했다. 아이들이 나의 인사보다 더 크게 웃는다. 왜 웃을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선생님께서 정해주신 빈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와 다르게 아이들 얼굴이 뽀얗다. 우리 엄마가 읍내에서 사준 이랜드 옷이 촌스럽게 느껴졌다. 어쩐지 다들 공부도 잘 할 것 같다. 주눅과 함께 찾아든 두려움도 잠시. 쉬는 시간에 몰려든 아이들의 질문 세례에 정신이 없었다. 자꾸 말을 시킨다. 그리고 아이들은 더 크게 웃는다. 아마도 나의 사투리가 재미있고 신기했던 것 같다. 대놓고 놀리는 것은 아닌데 뭔가 찝찝하다. 촌놈 하나 전학 오니 신기해서 구경하러 온 느낌이다. “뭐여~ 내가 언제~” “니가 그랬잖여~ 왜그랴~” 나를 구경하러온 친구 무리와 떨어진 곳에서 조금 큰 소리가 난다. 제법 덩치 큰 남자 아이 둘이서 대화를 하고 있다. 내게 몰려든 아이들이 이제 그쪽으로 몰려간다. 아직은 인사도 제대로 못한 옆 짝에게 상황을 물어보았다. 큰소리로 대화하는 두 명의 친구, 그곳으로 몰려드는 아이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첫인상이 좋았던 짝은 웃으며 답한다. “응, 쟤들 싸우는 거야. 그래서 구경 간거지모.” 응? 싸우는 것이라고? 저렇게 느린 말로, 저렇게 너그러운 톤으로 싸움이 가능하단 말인가? 내가 있던 경상도에서는 싸움이 나면 일단 말로 여럿 죽인다. 목소리도 얼마나 큰지 말한 대로 곧 실천할 것 같은 위협이 느껴진다. 경상도 말은 나름 살가운 인사도 종종 살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오해를 받기도;; 뭔가 대전 친구들은 푸근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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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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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수 총장] 기독교 교육에 대한 오해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누구나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주일 하루 교회에서 받는 신앙 교육만 아니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받는 학교교육도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교육을 받기를 소원할 것입니다.기독교 학교는 바로 신자 부모들의 이런 바램을 채워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학교라고 불려지는 사립학교들 중에도 실제로는 기독교 학교가 아닌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학교의 경우도 어떤 면에서는 기독교적 헌신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그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기독 교사를 채용하기도 하고, 정기적인 예배를 통해 찬양하고 말씀을 들으며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또한 학생들이 학교 생활을 하며 힘든 점들에 대해 의논하고 함께 기도할 수 있는 교사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성경 과목을 정식 교육과정의 한 부분으로 가르치기도 합니다. 또 정직, 성실, 근면과 같은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가르치는 좋은 교육을 시행하고 있음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학교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기본적인 교육과정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구성되고 진행된다면 이런 학교를 바람직한 기독교 학교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 학교는 예배시간에는 하나님의 왕 되심을 선포하면서도 실상 교실에서 창조 세계를 설명하고 가르침에 있어서는 바로 그 하나님을 배제하는 모순을 범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교육은 비 기독교적인 교육을 감추기 위한 겉치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세속적인 교육의 케이크 위에 기독교적 모양의 크림을 발라 덮어 버리는 격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았을 때 실제 교육의 구성이나 운영, 교육 내용과 방법은 비 기독교적이면서 단지 예배 시간이나 성경 공부 시간을 갖는다고 해서 그것을 기독교 교육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또 기독교 학교가 ‘현실 세계’로부터 학생들을 격리시킨다는 우려를 하기도 합니다. 기독교 학교는 사탄이 우는 사자처럼 먹이를 찾아 헤매는 타락한 세상에서 악의 세력을 대항할 수 있도록 학생들을 준비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온실 속의 도피자로 만든다고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세상이 너무나도 타락했기에 기독교 학교가 더욱 절실히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온실은 어린 화초를 잘 가꾸어 온실 밖에 내놓았을 때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튼튼하게 잘 견디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기독교 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 학교의 역할 역시 언약의 자녀들이 말씀의 기초 위에서 잘 성장, 발달하도록 돕고, 이 세상에 대해 배워가며 자신의 사명을 위해 준비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독교 학교가 ‘온실’의 역할을 한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학교 뿐만 아니라 양육기관으로서 모든 학교가 온실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기독교 학교는 모든 교육과정과 삶을 통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그리고 온 세계는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올바로 이해되고 배울 수 있다는 우주적 진리를 선포한다는 점이 다를 뿐입니다. 또한 기독교 학교는 하나님의 계시와 각 사람을 향한 부르심에 대해 기꺼이 그리고 순종적으로 반응하는 것만이 학생들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올바르게 준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이 세상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세상을 가장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본주의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는 공립학교의 “온실” 속에서는 하나님을 세상과 전혀 관계없는 존재로 간주하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 중심의 기독교 학교에서는 창조, 타락, 구속 그리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 이 세상을 알아가고, 세상 가운데서의 자신의 역할과 사명을 알아가도록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반 학교들은 세상과 삶에 대해 잘못된 세계관을 바탕으로 교육하고 있습니다. 세속적 인본주의적 교육은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에게도 잘못된 세계관을 갖도록 해 줍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학교가 아닌 공립학교에서는 기독교 교육이 전혀 실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신자 부모들은 심각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공립학교는 세속 인본주의라는 원칙을 따르고 있어서 하나님은 세상의 학문과 세상에서의 삶과는 관련이 없다고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공립학교 안에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수행하며 헌신하고 있는 기독 교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의 힘으로 공립학교의 기초를 이루는 잘못된 세계관을 바꾸는 일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사역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공립학교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여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중심으로 세상과 그 속에서의 역할을 언약의 자녀들이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한 주장이 너무 비현실적이고 과격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사립학교법 개정으로 인해서 기독교학교들이 교육과정 편성권은 고사하고 이제는 교사채용권 마저도 박탈당하게 되는 현실에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교육의 본질과 의미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분명히 이해하고,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참되고 올바른 교육을 받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원하며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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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4
  • [신재철 목사] 아버지의 현장(2) : 지붕 위의 아버지
    학교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은 재미없다. 늘 보던 시골의 풍경과 익숙한 모습은 지루함을 더한다. 재미난 것이 없을까를 고민하며 걷던 중에 번뜩이며 떠오르는 것이 있다. ‘아빠가 일하는 곳에 가보자!’ 우리 아빠는 온 동네 페인트 일을 도맡아서 하신다. 저기 군청도, 저기 파출소도, 저기 단독주택도, 저기 빌라도. 다 우리 아빠가 했을 것이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그런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동네를 누비며 걸을 때 건물의 페인트 상태를 보는 버릇이 생겼다. 우리 아빠가 칠했을 것 같으니 자꾸 눈이 간다. 그렇게 걷다보면 종종 어른들이 나의 정체를 물어보곤 하신다. 나는 망설임 없이 내 소개를 한다. “종합페인트, 신희목 사장님이 우리 아빠에요.” 특이한 내 소개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니 우리 아빠가 유명하긴 한가보다. 그렇게 나는 이곳저곳을 걸으며 아빠가 계실 현장을 찾는다. 분명 이 근처에서 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확히 알지 못하는 현장을 찾아 기웃거리며 시멘트가 드러나 있을 공사현장을 찾아본다. ‘찾았다!’ 오래지 않아 지붕 위에서 긴 장대 롤러를 가지고 작업하는 아빠가 보인다. 시커멓게 탄 모습이 멀리서 보기에도 고생스러워 보인다. 땀범벅에 표정도 무겁다. 안쓰러움을 가져야 했을까? 하지만 내 몸과 표정은 반대로 반응했다.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큰 소리로 아빠를 불렀다. “아빠!” 아빠의 현장으로 뛰어가 일하는 삼촌과 인사를 하고 ‘새참’으로 나왔을 빵도 얻어먹으며 지루하지 않은 하루를 만들어 내기에 성공했다. 역시 현장은 이 맛에 찾는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 아빠의 마음을 다른 분을 통해 듣게 되었다. 아빠의 친구들은 대부분 현장 일을 하신다. 폼 나는 정장이 아닌 작업복, 스킨 향이 아닌 땀내가 아빠와 친구들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자녀들이 종종 현장에서 일하는 아빠를 보면 모른척하며 길을 돌아간다고 한다. 그래서 아빠의 친구들은 속이 상하면서도 미안해진다고... 그런데 지붕에서 땀 흘리고 있는 아빠를 발견하고 반갑게 현장으로 뛰어오는 아들의 모습에 너무 고마웠단다. ‘에이~ 뭘 그런 걸로’ ^^ 내가 나이는 어리지만 아빠가 왜 위험하고 냄새나는 곳에서 일하는지 안다. 그렇게 고생하셔야 내가 좋아하는 고기도 먹고, 간식도 먹는다. 내 가방에서 덜그럭 거리는 변신 필통도 아빠가 흘리는 땀의 대가다. 학교에서 배우기를 피부색은 멜라닌 색소 영향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봐도 멜라닌과 무관할 것 같은 아빠의 검은 피부가 내게는 훈장처럼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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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4
  • [최호숙 목사] 기독교인으로 살 것인가, 개독교인으로 살 것인가?
    어느 젊은 부부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사는듯했지만 첫째 아이를 출산하고부터는 남편이 술만 먹으면 폭행을 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아이가 자기를 닮지 않았다는 것이고, 아이의 혈액형이 문제였다. 부인은 A형, 남편은 B형인데 아이는 RH+B형이라 남편 수준의 생각에 확률적으로 나올 수 없는 혈액형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유전자 검사를 하게 되었단다.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결과가 말하겠지만 이처럼 모든 부모는 자식이 자기 닮기를 원하고 자식은 부모를 닮아야 한다. 동물도 마찬가지로 새끼는 어미를 닮게 되어 있다. 닭 새끼는 병아리, 소 새끼는 송아지, 말 새끼는 망아지, 개 새끼는 강아지, 그렇다면 호랑이 새끼는 무엇이며, 곰 새끼는 무엇이라 부를까? (정답은 칼럼 뒤에... ) 남해안을 중심으로 서식하는 어종(魚種) 중에 전갱이(일본어로 아지)가 있는데 새끼를 ‘매가리’라고 한다. 명태 새끼는 ‘노가리’, 고등어 새끼는 ‘고도리’라고 한다. 이 새끼들은 모두 어미를 닮았고 어미처럼 살아간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닮고 그리스도처럼 살아야 정상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명칭은 사도행전 11장 25~26절에 기록되어 있다. 안디옥 교회에서부터 나온 것인데 그 당시 안디옥에서 많은 손해와 고난을 감수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무리에게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부르던 용어가 그리스도인이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다른 삶을 사는 안디옥 교인들을 보고 구별하기 위해 지칭한 말로써 초기에는 조롱하고 경멸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불렀으나 후대에 영광스런 명칭이 되었다. 헬라어로 ‘Christianos-크리스티아노스), 라틴어로 ‘Christianus-크리스티아누스’인데 단어 어미에 붙는 헬라어 ‘~ianos’ 라틴어 ~ianus’는 ~의 새끼를 나타내는 말이다. 사람이기 때문에 어감이 이상하여 ~닮은 자, ~에 종속된 자로 해석한다. 사람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 또는 ‘그리스도를 닮은 자’를 뜻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닮은 자가 되어야 한다. 생각이 닮아야 하며, 언어가 닮아야 하며, 삶이 닮아야 한다. 사도 바울이 고백하기를 자신은 예수님 닮은 삶을 산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고백하기를 그리스도의 심장(빌 1:8)을 가지고 사역한다고 고백하였다. 최용덕씨의 복음성가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찬양 가사를 보면 2절 중반에 “나의 입술은 주님 닮은 듯하나 내 맘은 아직도 추하여 받을 사랑만 계수하고 있으니 주님여, 나를 도와주소서~~♬♪♬♩” - 작사자도 온전히 예수님 닮은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말뿐이고 마음은 여전히 세속 된 마음 그대로 임을 고백하며 고쳐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주님께 간구하고 있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말로는 예수님 닮았다고 하지만 삶은 구별되지 못한 개처럼 살아간다는 것을 강조하며 조소(嘲笑)하는 뜻에서 부르는 명칭이다. 앞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녀답게 언행일치의 삶을 살아가길 노력해야 할 것이다. (호랑이 새끼 : 개호주, 곰 새끼: 능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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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4
  • [박무열 목사] 선한 영향력을 지속시키자
    본 교회에서 추수감사절을 맞이하여 주민들을 초청하여 함께 예배를 드리고 식사를 하고 작은 선물을 손에 들려 보냈다. 필자가가 부임이후 11년 동안 지속적으로 주민들을 초청하고 복음을 전하며 주역주민과 유대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가고 있다. 참 쉬운 일은 아니다. 미 자립교회에서 어떤 행사를 시행한다는 것은 재정적 부담감이 늘 따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복음을 전하고 주민들과 교류할 수 있는 필요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금년에는 코로나19 영향으로 주민들을 초청하지 않고 선물을 준비하여 각 가정에 돌리려는 저의 생각을 교회 앞에 내어놓으니 목사님 그동안 많이 나누어주고 그로 인해 교회에 대해 좋은 인식들을 가지고 있는데 이제는 초청해서 오시는 분들에게 대접하고 선물을 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내심 마음으로는 성도들의 성숙에 감사하면서도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조심스럽기도 하고 누가 음식을 만들고 차량으로 주민들을 모셔오고 하는 복잡한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갔다. 지금까지는 평일 행사를 함으로 이웃 교회의 도움을 받아서 차량운행이 가능했는데 주일이라 완전히 독자적으로 한다는 것이 저에게는 부담이 되었습니다. 저의 생각을 추스르기 전에 성도들 간에 메뉴가 정해지고 각자 분담해서 준비하자는 이야기 까지 진행되므로 중간에 저의 생각을 개입시킬 타이밍을 놓쳐 버렸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럼 그렇게 하면 되겠네요. 올해는 특이한 사항이 누구도 금전적으로나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에 그저 놀랄 뿐 이였다. 순식간에 차량 담당 까지 정해졌다. 매주 금, 토요일은 전도하는 날이다 혹서기 2주간을 빼고는 코로나19 상황이지만 쉬지 않고 전도했다. 전도 팀에게 참석인원이 얼마나 되는 지 파악하고 준비하기로 결정이 되었다. 저에게 주어진 분담은 식자재를 제외한 물품을 마트에 가서 구매해오는 것 이었습니다. 참 감사한 일이지요. 그렇게 해서 추수감사절 감사예배와 주민들을 모셔놓고 아름다운 식탁을 나누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교제를 나누는 은혜의 날 이었다. 처음에는 성도들이 행사를 기획하고 교회 앞에 내어놓으면 돈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다고 교회에 옵니까? 라는 부정적인 시각이었는데 이제는 저들이 절기가 되면 목사님 이번에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라고 역으로 되묻는 것입니다. 매번 행사를 기획하고 참석 인원을 예상하고 준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한 번도 예상인원이 미달하여 음식이 남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번에도 예상 인원 많큼 참석했다. 일기예보에 비가 잡혀 있어서 연기하시는 게 어떻겠냐고 하시는 걱정이 있었다. 저는 기도합시다. 하나님 오전에는 비가 오지 않고 저녁 늦게나 다음날 비가 내리게 해 주세요. 저의 아내가 목사님 기도대로 비가 저녁 늦게부터 온 다네요. 우리의 기도대로 비는 오지 않고 전형적인 가을 날 이었다. 이처럼 우리가 기도하고 기대하면 응답되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교회의 상황에 맞게 행사를 진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속시키는 것은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시기가 되면 주민들이 기대한다는 것이다. 상황을 유지시키고 지속시키는 것이 진짜 능력이다. 흔히 사람들은 “초심을 잃지 말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다보면 처음의 열정과 결심이 흔들리고 흐지부지하게 되는 것을 봅니다. 이는 신뢰성을 상실하게 되는 주요 요인이 됩니다. 어렵고 힘들수록 지켜나가면 지역민들로부터 신뢰를 쌓게 되고 관계가 형성되게 되는 기반을 마련하는 좋은 계기가 된다. 선한 영향력을 가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속시키고 유지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신앙의 길은 우리의 영과 육신의 생명과 삶의 전부를 들려서 가야하며 손해를 보더라도 주님 영광을 위해 옥합을 깨뜨리는 순수한 헌신이 있어야합니다. 여러분. 일을 사랑하십니까? 사랑으로 일 하십니까? 지속적인 선한 영향력을 드러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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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4
  • [하수룡 장로] 천국 환송 콘서트
    늦은 가을에 94세를 향유하시고 생을 마감하신 어머니를 천국으로 보내드리고 남은 온 가족이 지상천국을 경험했다. 장례식장에서 오랫동안 도우미로 섬겼던 분들의 말씀이 한결같이 한 가정의 장례는 식장에서 ‘모가 아니면 도’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의 장례가 주일이 끼어 4일장 치루는 동안에 옆 상가에서 고성이 오갔고 새벽까지도 시끄러워 눈을 붙일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됨을 목도했다. 분명한 것은 사람이 죽기 전에 금전 문제와 복잡한 문제 등을 내려놓으면 되는데 그 쉬운 것을 꽉 쥐고 있기 때문에 사후에 시끄러운 결과를 낳게 된다. 보통 어른들은 사후에 남아있는 후손들의 가정의 평안과 형제우애로 가정천국을 원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사실 경제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재산이 존재하지 않으면 사후에 큰 걱정이 없다. 우리 가정에도 막내 남동생에게 어머니가 천국환송이 되기 전에 소유한 적은 재산을 모두 내어 주었더니 노환으로 고생하실 것을 미리 알고 효심을 발휘하여 모든 형제자매를 안심시킨 것이다. 진심으로 고생한다고 격려해주었고 다른 형제에게도 우리가 할 일을 대신함으로써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이 한결 용이하게 되었음을 깨닫게 하여 고마운 마음을 갖게 했다. 늘 어머니는 병상에서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라 찬송하셨고 크게 배우지는 못했지만 성경을 필사하신다고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놀라운 사실은 노환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입관 예배를 드릴 때 유가족이 망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모두들 인자한 모습에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얼마나 평안하셨던지 천사의 얼굴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30년 동안 장로로 시무하면서 돌아가신 많은 분들의 얼굴을 보았지만 이렇게 맑고 온화한 모습을 처음 접한 것이다. 유능한 목회자도 돌아가실 때 천국이 없는 것처럼 절규하였고, 유명한 장로도 마지막에 병석에서 벌떡 일어나 ‘예수고 뭐고 다 귀찮소.’라고 말하고 숨을 거두었는데 한낱 이름 없는 평신도의 마지막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아마 막내아들의 효심과 사랑이 어머니를 만족하게 했고 성령 하나님의 위로와 역사하심이 분명했다. 어머니의 주검을 자랑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유가족이 어머니가 천국으로 환송된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함으로 내세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소유한 것이다. 어머니는 네 자녀와 일곱 손자들을 남겨두고 만족한 마음으로 천국 가셨다. 모두들 기쁜 마음으로 어머니의 천국환송 길을 배웅하였다. 발인 전날 저녁에 자연스럽게 가족이 모여 어머니의 천국환송을 축하하는 콘서트가 열린 것이다. 뮤지컬 배우인 외손녀가 축하 송을 시작으로 유일하게 아직 예수를 영접하지 못한 둘째아들의 ‘참 아름다워라’가 모인 회중을 압도하고 감동을 주었다. 한 달 동안을 연습했단다. 때를 놓치지 않고 이제는 예수를 영접하도록 권유하여 믿기로 약속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 날 천국환송 콘서트의 열기 속에서 자녀 손들과 도우미들까지 입을 모아 천국 환송곡을 부르면서 지상천국을 맛보았다. 35년 전에 천국가신 아버지의 한 줌의 흙을 모셔와 어머니와 함께 상복원에 나란히 모셨다. 천국시민권을 가진 우리는 천국환송을 위한 아름다운 환경을 꼭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잊지 말자.
    • 오피니언
    • 논설
    2021-11-18
  • [김상규의 경제이야기] 음식점 총량제의 문제점
    여당의 유력 대선후보인 이재명 전 경기지사가 “선량한 정부의 선량한 규제는 필요하다”며 음식점 총량제를 제안했다. 선량한 목표를 내걸지 않는 정부가 어디 있으며, 어떠한 규제도 그 목적은 선량하지 않을까? 과도해지면 악마의 수단으로 변할 뿐이다. 직업선택과 영업의 자유를 침해한다거나 대장동을 회피하려는 꼼수란 비판이 쏟아지자 논의를 위한 것이라며 꼬리를 내렸다. 정치인은 말로 승부를 하는 존재다. 대통령이 되려하는 여당 대선후보의 발언으로는 너무 가볍게 느껴진다. 또 이재명후보는 자살할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며 총량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최근 음식점 경영주들이 자살한 것은 총량제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동안 코로나19 방역규제로 2인을 초과한 저녁모임을 금지하고 저녁 9시까지만 영업을 허가하기도 했다. 그 결과 장사를 제대로 할 수 없어 빚은 늘어나고 절망 속에서 자살을 한 것이다. 자영업자 협의회에 의하면 코로나19 발생 이후 자영업 점포 45만개가 문을 닫았다고 한다. 혹자는 우리나라에서 음식점 허가를 너무 쉽게 내준다고 한다. 그동안 규제완화와 프렌차이즈 방식의 확대로 창업이 쉬워진 것은 사실이다. 다만, 우리나라의 자영업 비중이 높다고 해서 무조건 줄여야 한다는 생각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음식점 수는 그 나라의 문화와 밀접히 관련되기 때문이다. 서양은 근무시간이 9 to 5다. 딱히 점심시간이라는 것이 없다. 말 그대로 마음에 점을 찍듯이 샌드위치나 커피로 때운다. 반면 우리는 국물문화의 영향으로 점심시간에 음식점을 찾게 된다. 장시간 근로와 잦은 회식도 음식점에 대한 수요를 늘린다. 우리나라의 외식시장은 2020년 기준으로 138조로 상당히 큰 규모이다(농산식품유통공사 추계). 시장을 받쳐줄 수요가 71만개라는 음식점을 낳은 것이다. 음식점이 많다 적다는 판단은 시장이 하는 것이다. 2020년 통계를 보면 음식점의 폐업도 많았지만(54,437개), 창업은 더 많았다(65,806개). 어쩌면 음식점이 많은 것은 우리 음식문화의 풍성함을 나타내는 게 아닐까. 송나라시대에는 사람들이 집에서 밥을 해 먹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부유했기에 모두들 외식을 했고 중국음식을 다채롭게 발달시켰다. 음식점이 많은 것이 반드시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게다가 포장마차 등 음식점은 어려운 사람들의 마지막 생계수단이기도 하다. 6.25로 고향을 잃은 이북사람들이 생계수단으로 팔기 시작한 평양과 함흥냉면이 국민음식으로 정착되었고 고향을 떠난 호남사람들이 조리한 홍어음식을 모든 국민들이 즐기게 되었다. 이 후보의 음식점 총량제는 자다가 봉창두드리는 격이다. 자영업자 간담회에서 방역규제의 합리적 개선을 제안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방역규제로 자살한 사람들이 늘었는데 총량제를 그 해법으로 제시했으니 답답할 뿐이다. 글. 김상규 -. 제32대 조달청장(차관급) -. 감사원 감사위원(차관급) 전_ -. 기획재정부 재정관리관(1급) 전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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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5
  • [김현철 목사] 메타버스를 활용한 다음세대 사역
    메타버스 영역별 사역 실제 <메타버스> 라는 용어를 들으면, 일반적으로 특정한 장비를 장착하고 가상공간에서의 활동하는 것을 떠올린다. 이를 오해하여, 메타버스란 가상공간에서의 모임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메티버스 교회사역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는 경우들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메타버스의 전부가 아니다. 메타버스는 아래와 같은 4가지 영역으로 나누어진다. 메타버스 교회학교 사역이란, 메타버스의 각 영역의 특성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교회교육을 활발하게 적용하는 것이다 <가상현실> : 메타버스에서 <가상현실>(VR)의 영역이란, 디바이스를 통하여 가상의 세계에 접속하여 서로가 교통하는 것이다. 2018년에 개봉된 <레디 플레이어 원>이 그 특징을 잘 보여준다. 서로가 직접 만나지 않고 비대면으로 각기 접속한 공간에서 만나는 것이 가상현실의 영역이다. 이는, 제페토나 포트나이트 같은 가상공간뿐 아니라, zoom 과 같은 연결 어플을 통해서 만나는 것도 <가상현실>을 활용한 메타버스 영역에 해당된다. <가상현실>(VR)을 활용하여 행복나눔교회에서는 이렇게 사역을 하고 있다. 1) 정기모임 (줌일학교) “zoom으로 만나는 주일학교”라는 뜻을 담아 <줌일학교>라고 명명하였다. 모임시간은, 모두의 의견을 모아, 매주일 밤 8시로 확정했다. 모든 참가자가 zoom을 통하여 접속하면, 서로 축복하고, 가벼운 게임으로 마음의 문들을 연다. 한 주간 큐티내용을 요약한다. 그리고 서로의 기도제목을 나누고 축복하는 시간으로 마무리를 한다. 언택트 상황에서 zoom을 통해 학생들과 교사가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점이 좋다. 불신가정에서 출석하는 초등학교 3학년 여학생은 홀로 그 가정에서 스마트폰으로 접속을 한다. 이 학생이 너무 즐겁게 반응하고, 교회에서 다양한 선물을 챙겨주면서, 교회를 다니지 않는 부모도 적극적으로 이 모임에 참여하도록 협조를 하기까지 한다. 이전에는 자녀들이 스마트폰을 가지고 유투브나 게임에 몰두하였다. 하지만 이제는 zoom일학교를 통하여 교사들과, 친구들과 소통을 하면서, 아이가 밝아졌다며 감사인사를 전해오기까지 했다. zoom일학교를 진행하기 이전에 주일 밤은 교회와는 상관이 없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요란한 TV의 예능 프로그램을 온 식구가 보던지, 각자 게임이나 스마트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주일밤 8시에 각 가정에 교회가 작동되게 되었다. 가정이 교회가 되는 의외의 효과가 나타나며, 교회와 주일학교가 학생들을 책임진다는 강력한 의지를 경험하면서, 성도들은 교회에 대한 신뢰가 더욱 커졌다. 이로 인하여, 코로나 상황이 개선되었을 때에, 성도들이 다시 모일 때에, 서먹함이 아닌, 반가움으로 만날 수 있었다. 온라인을 통해서라도 서로가 지속적인 만남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2) 온라인 여름성경학교 <향기나무>에서 구매한 3주간의 성경학교 교육자료를 사용하여 각 가정별로 준비를 했다. 또한 각 가정이 여름성경학교가 되도록, 여름성경학교 장식용 자료를 준비하여 배달했다. 교육국장으로 섬겨주시는 장로님과 유초등부 부장님과 함께 학생들의 가정을 방문하면서 배부하였다. 학생들은 부모님과 함께 장식을 하면서, 각 가정을 “여름성경학교”교실로 바꾸었다. 각 가정이 단지 주거공간의 영역을 넘어, 거룩한 하나님의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놀라운 순간이었다.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공간이 찬양, 말씀, 활동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험하는 특별한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이전에는 교회버스를 타고서야 교회를 갔지만, 이제는 메타버스를 타고, 가정속에서 교회학교가 진행되었다. 온라인으로 인하여 집중력이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말끔히 사라지는 특별한 성경학교가 되었다. 가정의 온 식구가 함께하는 게임을 통해서, 주일밤이 놀라운 회복의 시간으로 변했다. 놀이공원을 가야만 가족간의 유대감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여름 성경학교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행복한 시간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그렇다, 메타버스를 타고 가정이 천국을 누리게 되었다 3) 온라인 글로벌 캠프 코로나가 진정되지 않고 더욱 확산되면서 선교 프로그램도 전면 중단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너무 안타까워 하던 전주의 선교단체 다세모(대표: 윤석호 목사)와 함께 의논하던중, 글러벌 캠프를 기획하게 되었다. 해마다 필리핀 선교를 가는 지역의 교회들도 캠프에 대한 필요성을 갈급하고 있던 상황에서, 온라인으로 랜선 글로벌 캠프를 준비하게 되었다. 강사들을 선정하고, 통역으로는 다세모에서 활동중인 필리핀 현지인 크리스틴이 섬기는 컨셉으로 진행하였다. 전주초청교회당을 메인 스테이지로 설정하고 온라인 사역을 전문적으로 함께 섬겨 섬겨온 크루들(정도환 목사,제주경목사)이 그동안의 경험을 발판으로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 필리핀에서 1,200명의 현지인들과 한국학생들이 참여하고, 국내에서는 12개교회 350명이 함께 참여하는 글로벌 캠프가 진행되었다. 한국어로 집회가 진행되고, 영어와 따갈로그로 통역하며 진행된 올라인 글로범 캠프는 기대 이상의 엄청난 열매들이 나타났다. 조그만 폰 하나에 온가족이 집중하고, 모니터 하나에 교회에 모인 현지인들이 집회에 초집중하고, 기도하는 모습은 정말 뜨거운 감동 그자체였다. 오프라인으로 선교프로그램을 진행할 때의 경비들은 현지의 학생들이 식사하고, 다른 프로그램을 진행하도록 지원되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선교여행은, 많은 경비와 시간을 헌신하고 진행되었다. 하지만 메타버스를 통하여서는 시간과 경비의 지출을 최소화하고, 이를 더욱 효과적인 선교에 지원하면서 새로운 페러다임의 선교사역이 가능하게 되었다 <증강현실> : 증강현실은 현실속에서 디바이스를 통하여 정보를 확인하는 영역이다. ‘포켓몬고’ 같은 게임은 스마트폰을 활용하여 현실에서 가상의 이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카메라 어플을 활용하여 다양한 모습들로 교제하는 것도 충분히 효과적인 증강현실 활용법이다. 가상공간을 현실에서 경험하는 메타버스의 기능을 활용하여 프로그램들을 준비하였다 1) 랜선 성지순례 2021년의 종려주일, 고난주간, 부활주일이 다가오면서, 주일학교 학생들에게 좀 특별한 의미의 프로그램들을 제공하고 싶었다. 펜데믹으로 인하여 해외여행이 차단된 상황에서, 해외 현지의 가이드분들이 카메라로 촬영한 내용들을 나누는 <랜선투어>가 새로운 아이템으로 떠오른다는 상황에 착안하여 <랜선 성지순례>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되었다. 특히 고난주간에 맞추어 “십자가의 길”을 주제로 삼았다. 예루살렘 현지에 계시는 분들께, 영상자료 도움을 청하였다. 십자가의 길 14개 처소들을 소개하면서, 건물을 확인하는 것이 아닌, 성경 자체의 메시지를 나누도록 하였다.서울, 용인, 인천, 대구, 진주, 부산, 심지어 남아공에서까지 문의가 왔다. 특히 시골교회에서도 이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연로하신 성도님들이 평생의 꿈인 성지순례를 모니터를 통해서이지만 참여하게 되었다. 그로인한 감격을 담은 후기는 메타버스를 통하여 어떤 일들까지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를 알게 한다 2) QR 방탈출 게임 메타버스 교회학교 프로그램을 나름대로 기획하여 집행하지만, 어느새 하나의 일과로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다. 온라인으로만 계속해서 모이는 것에 만족한다면, 교회당에 관한 관심이 옅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가 있었다. 메타버스 교회학교의 핵심은 균형적인 교육이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균형적으로 진행되어야 효과적이다. 그러한 고민 끝에 생각해낸 것이 <방탈출 게임>이었다. 몇 가지 단서로 방에서 탈출하는 게임은 최근의 트렌드중의 하나이다. 이를 응용하여 학생들이 교회에 와서 단서들을 찾아서 미션들을 풀어나가는 프로그램을 고안했다. 학생들이 자기들의 가진 폰으로 QR코드를 인식하면 정답을 찾을 수 있다. QR코드를 찍으면 문제의 답이 있는 웹페이지로 연결된다. 웹 페이지 안에서 정답을 확인 후 정답을 카카오톡으로 보내는 것이 첫 미션이다. 학생은 마지 자신의 게임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진지하게 문제를 풀기 시작하고 정답을 보낸다. 정답을 보낸 친구에게는, 다음 퀘스트의 단서를 스마트폰으로 발송해준다. 이러한 과정들을 모드 마친 친구들은 간식과 함께 포장한 장소의 약도를 보게 된다. 마치 보물찾기를 하듯이 약도를 따라서 찾아가면, 박스안에 준비된 간식과 큐티 교재를 만나게 된다. 학생들은 미션을 무사히 마쳤다는 성취감에 크게 환호를 했다. <라이프로깅> : <라이프로깅>은 SNS에 기록을 남기고,이를 통하여 서로 소통하는 것이다. 메타버스 시대의 학생들은 실제로 대면하여 소통을 하는 것보다 비대면으로 소통하는 것을 더욱 선호한다. 이러한 상황을 응용하여 다양항 교육 프로그램들을 만들 수 있다 1) 큐티 단톡방운영 2020년 2월 말부터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할 즈음에, 8개월동안의 큐티훈련 이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교회에 가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학생들은 큐티를 통하여 성경을 지속적으로 익히게 되었다. 주일에는 유튜브로 설교를 송출하는데, 일주일간 큐티한 내용을 바탕으로 전하였기에 학생들과 의사소통을 하기가 훨씬 수월했다. 큐티를 단체 카톡방에 인증하는 ‘큐티톡톡’을 시작했다. 카톡의 단톡방을 큐티나눔방으로 운용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부모, 교사를 단체대화방에 초대하고, 매일 큐티한 내용을 사진으로 찍어 업로드한다. 스마트폰이 없는 어린이는 부모님이 대신 올리게 하였다. 이 프로그램이 잘 정착되도록 ‘강화’가 필요하여, 첫 주에는 매일 인증하는 친구들에게 치킨쿠폰을 상품으로 걸었다. 그 효과로 평소 참여가 저조하던 어린이들도 열심히 큐티를 하고 인증샷을 올렸다. 매일 큐티를 인증하는 학생들이 특별한 상을 받았다. 그 상은 교장선생님이 주는 ‘큐티잘했상’이다. 큐티를 꾸준히 하는 학생들에게 감동한 담임목사님이 상장의 이미지를 만들어 단체 채팅방에 공유해주셨다. 이러한 위로와 격려가 가득한 큐티 단톡방은 메타버스 교회학교의 엔진으로 강력하게 진행중이다 2) 일상속 십자가 찾기 2021년도 고난주간에 <행복나눔교회 교회학교>에서는. 메타버스 교회학교를 통해서 진행될 수 있는 특별한 순서들을 준비했다. 유초등부에서는 <생활속의 십자가> 찾기 프로그램을 했다. 고난주간동안 주변에서 십자가의 무늬를 찾아서 사진을 찍어 단톡방에 올리는 것이었다. “ 과연, 유초등부 학생들이 어느 정도 소화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고가 나간 종려주일 오후부터 단톡방에는 불이 나기 시작했다. 하루에 1장씩 올린다는 규칙을 듣지 못한 가정에서 십자가 사진들을 폭탄투하를 한 것이었다. 이것이 마중물이 되어 다른 학생들도 열심히 십자가의 무늬를 찾도록 찾아서 단톡방에 탑재하였다. 이러한 십자가 무늬 찾기는 고난주간 한 주간 동안 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부모님들의 증언에 의하면 학생들이 한 주간동안 온통 십자가를 찾는 것에 집중하여서 찾아내는 것을 보면서 정말 감사하면서도 신기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자녀들이 먹을 것과 놀 것에만 집중하더니, 일상속에서 십자가를 찾으려고 집중하는 모습이 정말 감동이었다고 알려 주었다. 생활속에서 십자가 무늬를 발견하면, 마치 네잎 클로버를 발견한 것처럼 환성을 지르며 기뻐하고, 촬영하는 뒷모습이 정말 대견해 보였다고 했다. 십자가 무늬를 정성스럽게 촬영하고, 단톡방에 탑재하는 것을 보면서, 그 자녀의 인생속에 언제나 십자가를 품고 살기를 기도하였다는 고백에는 그저 감사할 뿐이다. 3) 고난주간 브이로그 만들기 <행복나눔교회 중고등부>에서는 조금 수준을 높여 학생들에게 <각자의 고난주간의 동영상>을 제작하여 제출하도록 진행하였다. 자기의 관심사 외에는 관심을 잘 기울이지 않는 요즈음 청소년들이 이 과제를 수행할 수 있을까? 라는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고난주간이 지나면서 정말 놀라운 결과물을 보면서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평소에는 묻는 말에도 대답을 잘 하지 않던 학생들이 저마다의 독특한 <고난주간>을 보낸 동영상을 탑재했다. 고2 남학생은 한 주간 고난주간 특새에 참석하는 상황을, 잠에서 깨어 일어나 교회당에 착석하는 상황을 브이로그로 만들어 올렸다. 고2 여학생은 한 주간 온라인으로 특새에 참가하는 과정을 동영상으로, 고3 여학생은 고난주간의 기도문을 낭송하는 동영상을 올렸다. 학생들이 제출한 동영상을 중고등부 담당간사님이 교회밴드에 올리자, 학부모님들과 성도들님이 신선한 충격을 받으면서, 정말 감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메타버스는 위기에서 기회를 발견한다 “이전에는 교회버스를 타고 교회에 갔지만, 이제는 메타버스를 타고 교회에 간다”. 코로나 이전에는 다양항 방식으로 교회학교가 부흥되었지만, 펜데믹 이후에는 메타버스를 적절하게 활용한 교회는 오히려 더욱 강한 활력으로 부흥하게 되는 결과들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7월 8일에 발간한 책 <메타버스 교회학교>에서는 그러한 내용들을 중점적으로 설명하였으며 책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내용들과 급속히 변화된 메타버스 플랫폼들에 대하여는 <교회, 메타버스를 탑승하다> 세미나를통해 좀 더 심층적인 내용을 강의로 전달하고 있다. 1부에서는 메타버스의 개념과 메타버스를 활용한 교회교육 프로구램들을 설명한다. 2부에서는 메타버스 시대의 세대들에 대한 이해를, 3부에서는 메타버스 시대에 필요한 능력들은 무엇이며, 이를 교회가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를 나눈다.이러한 세미나를 통하여 더욱 입체적인 메타버스를 활용한 교회교육의 전략을 수립하는데 도움을 주려고 하고 있다. 메타버스 시대에 움츠리지 말고 더욱 활발한 사역들이 일어나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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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1
  • [오성한 목사] 지키려 하지 말라.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예수님께서 지키셨음을 믿고,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지킬 수 없음을 깨달으라고 주셨다. 깨닫고 예수님께 와서 구원받으라고 주셨다. 예수님 만이 길임을 알라고 주셨다. 예수님께도 오라고 주셨다. 율법을 지키려 하지 말고, 예수께로 가면 된다. 지키려고 하면 약해진다. 예수님을 찾아 왔던 부자 청년처럼 지킨다고 생각하면 속이는 것이다(마가복음 10:23 참고). 우리가 지킨다고 말하며,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다(요한일서 1:8 참고). 예수께로만 가지 않는 사람이기에 교만한 사람이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멸망은 예수께서 죽으셔야 만 한다는 이야기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망할 수밖에 없고, 망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유다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하심은 돌아올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하신 말씀이다. 유다와 이스라엘이 순종할 수 있는데 불순종해서 망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만 보면 진노의 하나님으로만 보게 되는 실수를 저지른다. 하나님을 진노의 하나님으로 보면 성경을 정확히 볼 수 없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야기는, 인간이 절대 하나님을 잘 섬길 수도 없고, 섬기고 싶은 마음조차 가질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다. 인간은 도저히 가망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어떤 노력이나 사건도 순종하게 할 수 없음을 말씀하고 있다. 인간의 완전한 타락을 보여주고 싶으신 것이다. 인간의 완전한 멸망을 말하고 있다. 성경 이야기는 왜 예수 그리스도가 꼭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그들에게 선지자를 보내 줘도 순종할 수 없고, 기적이 일어나도 순종할 수 없고, 그 어떤 것으로도 순종할 수 없는 죄인이기에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유다와 이스라엘의 멸망은 예수님께서 멸망하셔야만 하는 당위성을 보여주신 역사다. 구원의 유일한 길을 말씀하고 계신다. 율법을 지켜서 가 아닌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음을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려면 예수님께서 완전히 죽으셔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예수님은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다. 부활하셔서 인간에게 의를 주시고, 생명을 주시고 회복하셨다. 예레미야는 25장과 29장에서 70년 만의 회복을 분명하게 선포한다. ‘70’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완전수로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이 차면, 완전한 회복이 있을 것이라는 선포다. 바벨론 포로지에 있던 다니엘은 이 말씀을 보고 놀란다. 하나님의 언약을 잡은 다니엘은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감사해서, 금식하며 기도한다(다니엘 9:2 참고). 다니엘이 기록된 말씀을 믿고 하나님께서 스스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 앞에 감사하고, 감격할 때 계시를 크게 열어 주신 것이다.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구원을 깨닫게 해 주신 것이다. 금식이란 말이 나왔으니 잠시 언급하고 지나가겠다. 금식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고 있다. 금식은 하나님께 공들이는 시간이 아니다. 금식은 하나님을 설득하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음식은 생명을 다해 주님을 사랑한다는 표현이다. 먹지 않으면 죽는다. 금식은 하나님을 생명보다 사랑하고, 더 믿는다는 고백이다. 다니엘의 금식은 발견한 말씀을 믿는 믿음의 고백이었고 감사의 표현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니엘이 금식했기 때문에 이루어 주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금식해야 더 잘 들어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말씀을 믿고 감격하고, 감사할 때 기뻐하시고 더 큰 계시의 문을 열어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멸망 당하셨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그린 역사이다.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왔다 가셨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반드시 망할 수밖에 없다. 망해야 한다. “유다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잘 섬겼으면 안 망했을 텐데”라는 주제로만 성경을 보지 말아야 한다. 우리도 그렇다. 우리도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율법을 지키려고 하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젖어 주님을 뜨겁게 사랑만 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인 율법은 저절로 지킬 힘이 생기게 된다. 바울은 계명을 우리가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속는 것이고, 죄가 우리를 죽이려는 것이라고 했다(로마서 7:11 참고). 지킬 수 있었는데 못 지켰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 율법을 지키지 못할 때마다 잘못을 고백하고, 그곳에 자신이 묶이지 말고 빨리 주님의 용서하심에 감사와 감격을 받아들여라.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함을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은 지킬 수 없다. 지키지 못한 것 때문에 묶이거나, 율법을 지키는 것에 온 힘을 다 쏟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죄책감을 이길 수 없다. 강력한 복음증거를 위해 복음을 붙잡아야 한다. 시간을 아껴야 한다. 주님이 다 이루신 것을 감격으로 인정하고 우리는 이제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을 다해야 한다. 다시 말한다. 당신을 고치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고쳐 놓으신 주께서 하신 일을 받아들이고, 능력 있는 복음증거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당신 안에 잠재운 성령의 능력을 복음으로 깨우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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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1
  • [박봉석 목사] 거룩의 길
    <종교개혁주일을 지나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톨릭의 한 대주교가 미사를 드리기 위해 준비를 하다가 사람들에게 자신을 좀 더 거룩하게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날 미사에서는 다른 날과 달리 하나님을 부르면서 좀 더 장엄한 목소리로 “오 거룩하신 아버지여!”를 세 번이나 반복해서 불렀습니다. 그렇게 세 번 반복해서 하나님을 부르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오냐, 내가 여기 듣고 있느니라.” 그 소리를 듣자마자 그 대주교는 그만 그 자리에서 까무러치고 말았다고 합니다. 독자 여러분, 거룩이란 말도 아니고 모양도 아닙니다. 즉 내가 거룩한 말을 하고 거룩한 모습을 한다고 내가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거룩은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 보혈로서 죄를 씻음 받고 거룩하게 된 사람이라야 비로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즉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하기 위해서 신앙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거룩하게 된 자로서 나를 거룩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헛되지 않도록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원래 가톨릭 사제였습니다. 그 시대에는 ‘빌라도의 계단’이라고 부르는 28계단이 있었습니다. 이 계단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 유대 총독이었던 본디오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던 곳입니다. 그런데 이 계단이 기적적으로 예루살렘에서 로마의 라테란 성당으로 옮겨져서 성당의 입구에 설치되었습니다. 그 후로 이 계단을 맨 무릎으로 올라가며 주기도문을 외우면 죄를 사함 받고 거룩하게 된다고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허무맹랑한 미신을 신앙인 것처럼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일부러 무릎을 까서 피가 나도록하면서 그 계단을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더 감동하시고 자신은 더 거룩하게 되리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가톨릭 사제인 루터도 반복해서 그것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렇게 계단을 맨 무릎으로 올라가는 그의 뇌리에 섬광처럼 스치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이었습니다. 이때에 그는 순간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고, 놀라고 의아해 하는 다른 고행자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그 계단에서 뛰어내려왔습니다. 그리고 그는 고민하던 중에 스승인 슈타우피츠를 찾았습니다. 슈타우피츠는 그에게 말을 해주었습니다. 죄를 지었을 때 회초리를 의지하지 말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고 계시는 예수님을 쳐다보라고 말입니다. 그는 그 말에 어떤 빛을 발견하고 부지런히 성경 로마서를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해서 깨달은 그의 결론은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의 깨달음이 그의 존재를 뒤흔들었고 결국에는 위대한 종교개혁의 깃발을 들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인인 사람이 죄를 용서 받아 거룩하게 되어 구원 받는 것은 어떤 행위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루터가 깨달은 것처럼 오직 믿음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그 십자가의 피가 나의 죄를 씻어 거룩하게 하고, 그리고 그 거룩하게 된 자가 구원을 받고 비로소 이 세상에서도 구원 받은 자로서의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도’라는 말을 늘 사용합니다. 이 말은 헬라 원어로 ‘하기오스’라는 말로서, 가톨릭에서 성(saint) 바울, 성(saint) 어거스틴이라고 말할 때의 그 ‘성(saint)’이라는 말이 바로 이것과 똑같은 원어의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과연 성(saint)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인가?”라고 말입니다. 구약에서 ‘성물(saint)’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구별하여 쓰기 위해서 기름을 발라 구별한 물건에 대하여 그렇게 불렀습니다. 흔한 나무 조각이라도 기름을 발라서 구별하여 쓰면 성물(saint)이 됩니다. 즉 나무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구별해서 사용하는 것이기에 거룩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인 것은 세상 다른 사람들과 똑같으나 하나님은 우리를 불러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를 씻어 구별하여 주셨기에 거룩한 백성 즉 성도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사람과 다른 삶, 즉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세상 사람과 다른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 맞습니까? 칼럼의 완본은 gncnews.net 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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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1
  • [양대식 목사] 원망을 들으시는 하나님
    인간은 누구나 원망하면서 살아갑니다. 원망은 인간의 죄성입니다. 원망보다 감사해야 합니다. 원망도 습관입니다. 원망을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기 16:8-9, “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잊어버리고 지금 힘들다,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하였습니다.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모세를 원망하는 것은 모세를 세우신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입니다. 우리가 불평하고 원망하는 말을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원망은 전염됩니다. 가정에서 한 사람이 원망하면 나중에 모든 사람들이 원망하게 됩니다. 욕심이 많은 자가 원망을 많이 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원망은 불신앙입니다. 믿음이 적어질 때,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원망 대신 감사하는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말도 들으십니다. 감사의 말, 감사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할 때 원망을 버리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들고, 시험에 들면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원망은 부정적인 삶이고, 감사는 긍정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원망이 없는 삶 전체이셨습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감사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6:7,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원망하느냐” 원망 제목을 찾지 말고 감사 제목을 찾아야 합니다. 믿음이 병들고 식어질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하고, 환경을 원망합니다. 빌립보서 2: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베드로전서 4: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고린도전서 10: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야고보서 5: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원망을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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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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