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1-2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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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대식 목사] 관계 회복
    관계가 깨져서 스트레스받는 자가 많습니다. 사탄은 관계를 깨뜨립니다. 관계는 세우기보다는 깨지기가 쉽습니다. 사소한 것 때문에 관계가 깨집니다. 깨진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깨진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관계가 깨지면 고통이요 불행입니다. 깨진 관계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왜 관계가 깨졌는가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면서 관계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도 들으시고 회복시킵니다. 관계 회복이 은혜요 축복입니다. 관계 회복이 부흥이요 복입니다. 원수 맺고 사는 자가 회복되어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막힌 관계의 담이 무너져야 합니다. 깨진 관계의 회복은 부흥이요 축복입니다. 서로 용서하고 화해함으로 인간관계가 회복됩니다. 깨진 관계가 회복되지 않고 서로 미워하며 사는 것은 저주요 불행입니다. 관계 회복이 기회요 은혜입니다. 서로 막히면 기도 응답이 없습니다. 가능하면 관계가 회복되어 행복하게 후회가 없이 살아야 합니다. 관계를 회복시키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관계 회복의 소망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관계를 회복시킬 수 없으나 하나님은 회복시키십니다. 관계 회복의 의지를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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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문/책
    2025-11-18
  • [최호숙 목사] 영적 싸움에 “VICI(이겼노라)”가 있는가?
    전쟁에는 반드시 이겨야 하듯, 영적 싸움에도 반드시 승리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종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로마 제국 시대 율리어스 카이사르(Jullius Caesar – 영어표기 시저. 성경표기 가이사)는 전쟁을 스포츠처럼 즐겼던 사람이다. 그가 남긴 명언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The dice(die) is cast. 주사위는 던져졌다. 폼페이우스가 로마 원로원과 음모를 꾸며 카이사르를 죽이려고 로마로 복귀할 때 루비콘강을 건너기 전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오라고 하였다. 명령을 받은 카이사르가 생각해 볼 때 가만히 있으면 자신은 파멸될 것이고, 무기를 들고 루비콘 강을 건너오면 로마의 역적이 될 것이므로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 카이사르는 고민하였다. 이래도 죽을 상황이고 저래도 죽을 상황인데 “죽을 때 죽더라고 싸우고 죽자” 결단을 내리고 무기를 들고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명언을 남겼는데 “주사위는 던져졌다”고하였다. 이때부터 특별한 결단을 하여 어떤 일을 할 때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왔노라[VENI-고대 라틴 발음(웨니), 현대 라틴 발음(베니), I came] 보았노라[VIDI-고대 라틴 발음(위디), 현대 라틴 발음(비디), I saw] 이겼노라[VICI-고대 라틴 발음(위키), 현대 라틴발음(비키,비치), I conquered] 이 문구는 B.C 47년 카이사르가 소아시아 파르나케스를 격파한 후 원로원에 보냈던 전승 보고서 첫 줄이다. 이 문구를 우리 한국인들이 체육대회나 단합대회 때 원문을 약간 변경하여 “왔노라 싸웠노라 이겼노라”로 사용하기도 한다. 어쨌든 인간적으로 카이사르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 그는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폭군(暴君)이 아닌 성군(聖君)의 모습으로 부하들을 다스리며 덕(德)의 정치를 했다. 카이사르의 인생철학이 있었는데 “강자에게 영예를 양보하고, 약자에게 필수품을 양보하라”였다. 인생철학 그대로 그는 전리품들을 자신이 챙기지 않고 부하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고 개인적 재산을 가지고 법률사무소, 마켓, 편의시설을 지어 제공함으로 많은 사람의 신뢰를 쌓아갔으며 자신은 검소한 삶을 살아 타인들로하여금 인정받는 지도자였다. 또한 유머 감각이 있어 부하들에게 마음의 안정을 주었고. 외부 적군들을 정복하기보다 더 힘든 내국 통치를 덕(德)의 정치로 이끌었던 지도자였다. 하지만 죄의 성향을 가진 인간들은 선한 정치를 하는 카이사르를 온전하게 두지 않았다. 카이사르와 친했던 부하 브루투스를 배신자로 만들어 음모를 꾸며 살해하도록 하였다. 믿었던 부하에게 배신당해 칼에 찔려 죽어가면서 마지막 남긴 말이 “브루투스 너마저...!” 인생 허무함으로 막을 내렸다. 훗날 카이사르에 대한 평가를 할 때에 일부 부정적 평가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좋은 평가를 하는데 로마에 수많은 지도자가 있었지만 카이사르를 “로마가 낳은 창조적 천재”라고 결론지었다. 신앙의 싸움을 하고 최후 주님 만나는 그날 주님께서 주신 사역의 현장인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VICI(이겼습니다)” 이렇게 승전 보고를 한다면 멋진 인생을 산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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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며 생각하며
    2025-10-30
  • [양대식 목사] 관계 전도
    전도는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전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됩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관계전도가 있습니다. 관계전도는 좋은 관계를 통해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웃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가 좋아야 전도할 때 효과가 나타납니다. 입으로 만의 전도가 아니고 삶으로 전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고 선행의 실천으로 전도하는 것입니다. 삶이 나쁘고 태도가 나쁘면 관계전도가 안 되고 전도가 방해됩니다. 전도하는 자는 세상에서 향기가 되어 좋은 냄새를 내고 좋은 소문이 나야 합니다.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전도한 것은 가까운 관계에서의 관계전도이고 예수님께서 우물가의 여인 죄 많은 여인 고독한 여인을 전도한 것은 따뜻한 사랑과 섬김 대화로 관계를 맺고 전도한 관계전도입니다. 관계전도의 비결은 사랑의 마음과 따뜻한 마음입니다. 사람에 대해 정죄하거나 비판하는 마음이 있으면 관계전도가 될 수 없습니다. 누구를 대하든지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대해 주어야 합니다. 사랑과 섬김으로 인간관계 맺고 인간관계가 잘되어 전도할 때 전도의 효과가 큽니다. 덕을 세우지 못하고 나쁜 이미지를 주면 관계가 안 되고 관계가 나쁘면 전도가 안 되고 전도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관계전도는 선행의 삶을 실천하면서 전도하는 전도의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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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30
  • [김성수 총장] 칼빈의 추억 한 토막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 인상 깊은 장면을 회상한 것은 기록되어 있다. 테아 반 힐세마(Thea B. Van Halsema)가 저술한 『This was John Calvin(이 사람 존 칼빈)』이라는 책을 보면, 칼빈은 어머니와 함께 짧은 순례길을 걸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골짜기를 따라 두 시간을 걸은 끝에 도착한 곳은 예수의 외할머니로 여겨지는 성 안나의 유골이 안치된 사당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들어 올려, 금으로 장식된 관 안에 누워 있는 유골에 입을 맞추게 했다. 사당 안은 촛불로 밝고 향기로웠으며, 숭배하는 순례자들의 눈빛은 경건으로 가득했다. 어린 칼빈에게 그것은 아마 신비롭고 감동적인 체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이 장면을 바라볼 때,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정서 이상의 것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말 세 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성당의 종소리가 울린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성읍 생활의 중심이 되었던 중세 말 교회의 풍경은 단지 아름답고 경건한 외양만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신앙의 본질이 흐려진 채 형식과 외적 숭배에 몰두한 영적 타락이 도사리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의 형식주의와 권위주의, 성유물의 과도한 숭배, 그리고 성직자들의 탐욕은 교회의 영적 본질을 흐리고 있었다. 성 안나의 유골만이 아니라, 세례 요한의 머리카락, 예수의 치아, 오병이어 사건의 빵 부스러기, 가시관 조각과 구약시대 만나의 조각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성유물이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교회는 이러한 유물들을 통해 기적을 기대하고 은총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자극했고, 성직자들은 이를 통해 물질적 이익과 권력을 얻었다. 더 나아가 성당과 수도원은 특정 유물의 진위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다투었으며, 이 논쟁은 지역의 종교적 경쟁심을 자극했고, 프랑스 의회조차 이를 조정하지 못할 정도였다. ‘성인’의 이름을 붙인 성당이나 수도원은 유골을 소유한 장소로서의 권위를 주장했고, 이는 종종 종교적 신비주의를 이용한 경쟁과 탐욕의 장이 되었다. 말하자면, ‘거룩’은 거래되고, ‘은혜’는 판매되었으며, ‘경건’은 형식으로 포장되었다. 이 모든 모습은 한마디로 ‘거룩함의 상업화’였고, 진리 대신 형식과 기적, 외적 경건에 목을 매던 교회의 실상이었다. 이러한 부패는 개혁자들로 하여금 교회의 본질을 되묻게 했고,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잉태하게 했다. 칼빈은 단지 교리의 개혁자가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을 지닌 영적 개혁자였다. 그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함을 외쳤고, 유골과 형상과 건물 안에서가 아니라, 성령의 조명 아래 말씀과 신앙의 참된 삶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신학과 실천은 교회의 본질을 새롭게 정의했다. 교회는 권위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충실한 선포와 성례의 정당한 시행이 있는 곳이며, 무엇보다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믿는 자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문제는 과거의 부패가 오늘날에도 형태만 달리하여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교회는 더 이상 성인의 유골을 입맞추지 않지만, 또 다른 유물들을 만들어 숭배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화려한 예배당, 웅장한 무대, 감정을 자극하는 조명과 음악, 유명 목회자에 대한 절대적 의존, 그리고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역 성과들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성유물이 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때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인간의 욕망을 투영한 현대판 형식주의일 수 있다. 교회는 언제나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가시관 조각’이 있다. 그것은 더 멋진 무대, 더 화려한 예배당, 더 대형화된 사역과 같은 것들이다. 물론 이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중심이 되어 하나님을 도구화하고, 복음을 수단화하며, 인간의 만족을 위한 종교 행위로 전락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촛불 아래에서 거룩을 잃고 있는 것이다. 칼빈이 외친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는 외침은 시대를 초월한다. 이는 단지 제도 개혁의 구호가 아니라,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한 끊임없는 성찰과 순종을 요구하는 외침이다. 칼빈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은 단지 과거의 회고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거울과 같은 통찰이다. 그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성유물 앞에서 입을 맞췄던 기억은, 우리가 누구의 손에 이끌려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묻는 물음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순례 중이며, 여전히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 길 위에 서 있다.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무엇을 숭배하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멈추어 서는 것, 그리고 다시금 본질로 되돌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종교개혁의 정신이요, 오늘의 교회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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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30
  • [박동철 장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다시 논하다
    지난 9월 3일 전국 신문 1면 톱뉴스를 장식한 중국 베이징에서 보내온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중국 전승절 8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중국 시진핑, 러시아 푸틴, 북한 김정은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서늘한 기운으로 다가왔다. 마치 한반도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음흉한 모습이랄까. 아무튼 중국 전승절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답답하지만, 중국은 한 장의 사진으로 대한민국을 비롯한 서방권 제국들에게 도전하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작금의 세계 정세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후 강한 드라이브로 관세폭탄을 세계 각국에 던지면서 ‘강한 미국’을 시현하고 있다. 이에 대한 사회주의 동맹의 이들 세 나라는 단합의 자세를 즉각 보이는 것으로,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한참 국민 정서를 흐트려놓았다. 문제는 이날 사진 한 장에서 세계는 지금 경제전쟁과 이념패권이 깊어지고 있다는 진단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세계를 주도하는 미국의 경제력에 부단히 따라붙고 있는 중국을 미국은 본격 견제하기 시작했다. 세계 각국 언론사 탐사취재팀은 오늘의 중국이 시진핑의 장기집권을 비판하면서 위기로 치닫고 있다는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반면에 중국의 건재함을 진단하면서 미국의 경제력을 압도해 간다는 보도를 내기도 한다. 세계 새로운 산업 트렌드인 AI 산업시대는 중국이 세계를 이끌 것이라는 학자들의 진단도 있다. 등소평 후 개혁개방의 대전환이 이제 자본주의의 현장 미국을 넘어설 것인가. 아니면 공산사회주의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이끄는 데 한계가 왔다는 주장이 맞을 것인가. 쉽게 전망할 수 없는 형편 아니겠는가. 상황의 전개가 어찌되든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야욕에 대해 쉽게 시선을 돌릴 수 없다.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북한의 3각 대응이 우리에게는 조선 말 위기의 한반도가 되지 않을까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해방 후 좌우 대립에서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가 아닌가. 주변 강대국이 새롭게 이념전쟁화하는 신냉전시대, 우리는 갈 길을 모르고 깊은 내전(內戰)에 휩싸여 있다. 필자는 얼마 전 우리의 근대사 영웅 안중근이 1907년 하얼빈에서 원수 일본 총리 이토를 쓰러뜨린 후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주창했던 이야기를 영화 《하얼빈》을 통해 소개한 바 있다. 다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오버랩된다.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은 이 비상하고 위험한 정세일지라도 복음의 실크로드를 열심히 닦아내는 것이다. 이 사명의 복음운동에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의 길이 열릴 것이다. 사형집행을 앞둔 차디찬 감옥 바닥에서 그는 5가지의 평화제안을 했다. 첫째, 조선·일본·청나라 3국이 연합하여 협력공존의 협력기구를 만들자. 둘째, 3국이 공동은행을 설립·운영하자. 셋째, 3국이 공동연합하여 서양 침입에 공동대처하자. 넷째, 3국의 경제개발 지혜를 일본에서 배우자. 다섯째, 상호 존중하고 평화를 유지하자. 어쩌면 굴욕 같지만 일본에 대해 조선을 식민지화하지 말고 아시아를 평화의 공동지대로 만들자는 혁신적 제안이었다. 일본에 36년간 식민지 지배를 받고 해방되어 6·25를 겪으며 처참한 빈국이 되었던 나라, 이 나라가 자유민주의 자본시장경제의 기틀에서 세계 10위 내 경제 강국으로 성장했다. 성공과 부흥 끝에 다가오는 또 다른 위기인가. '경제 보물섬'이 되어버린 지금의 대한민국에 대해 눈독으로 가득 찬 주변 나라들을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한국교회가 강력한 복음운동으로 나가야 한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동아시아에 새롭게 심도록 해야 한다는 논지이다. 먼저 동아시아 복음평화운동으로 한반도의 복음통일을 이루는 데 부단한 사명 수행이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동아시아 복음평화운동에 주변 모든 나라의 교회가 연합하는 새로운 역사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약관의 나이에 오직 식민지를 꿈꾸는 적장을 총탄으로 쓰러뜨리고 위대한 동양평화론을 주창할 수 있었을까. 젊은 영웅이 피를 토하듯 던진 이 어록(語錄)을 깊게 되새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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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22
  • [김성수 총장] 무관심의 절정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 “멍 때린다”는 표현이 있다. 고유한 우리말인 이 표현은 “아무 생각 없이 한곳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의식이 잠시 멈춘 듯한 상태로 가만히 있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아무 뉴스에도 반응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한 적이 있을 것이다. 어느새 멍하니 휴대폰을 스크롤하고 있지만, 거기 담긴 전쟁과 죽음, 기후 위기와 삶의 절망적인 광경 앞에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현상을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현대 사회는 너무 많은 것을 너무 자주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감정이 교묘하게 조작되며, 반응은 형식화된다. 심지어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피곤한 시대다. 바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그 시점이다. 이것을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무관심의 절정’이라고 불렀다. 이 무관심은 감정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감정을 과잉 소비한 끝에 마비된 상태다.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을 이미지화하고, 의미로 포장하고,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한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많은 자극과 너무 많은 반응이 반복되다 보면 오히려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감정이 남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관심이 있던 자리에 무감각이 남고, 연대하려던 마음은 차가운 피로감으로 굳어버린다. 오늘 우리는 매일같이 뉴스, 광고, SNS, 알림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지구 반대편의 절망도, 이웃의 눈물도 잠시 울컥했다가 이내 다른 화면으로 스치듯 지나간다. 더군다나 진짜는 없고 이미지만 판을 친다. 이제는 인간의 슬픔도, 정의도, 연대도 모두 기호화된 감정이다. 그것은 진짜처럼 보이지만 반복되고 조작되고 연출된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이것이야말로 현대인의 감정 소진이며, 이 무감각이야말로 가장 극단적인 무관심이라고 말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감정 소진 상태가 점점 자연스러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무관심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여긴다. 냉소와 피상적 반응은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 된다. 지금 이 시대는 누군가를 위해 슬피 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슬퍼 보이는 모습”을 공유하는 것으로 충분한 시대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도다 함과 같도다.”(마태복음 11:16-17) 보드리야르가 진단한 것은 이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것이다. 사회가 감정을 조작하고, 욕망을 설계하며, 공감의 언어마저 포장하는 구조 속에서 우리는 반응하는 법을 잃고 느끼는 법을 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조가 너무 익숙해져서 더 이상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 진짜 위기가 시작된다. “무관심의 절정”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각성해야 한다. 피로한 감정이 일상이 되었고, 감정 없는 반응이 습관이 되었을 때 우리는 진지하게 성찰하고 질문해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아니, 나는 아직도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가? 희망은 물음에서 시작된다. 감정을 회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감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아파할 수 있는 능력, 누군가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일 수 있는 여백, 눈물이 마르지 않은 마음을 회복하는 것, 기호와 이미지에 휩쓸리지 않고 실재를 붙들 수 있는 용기를 갖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아직도 누군가의 고통 앞에 멈출 수 있다면 완전히 늦은 것은 아니다. 무관심의 절정 한가운데서 우리는 다시 ‘느끼는 연습’이 필요하다. 다시 사랑하고, 다시 분노하고, 타인의 고통에 다시 공감하고 연대하는 감정의 회복, 그것은 거창한 변혁이 아니라 아주 작은 감각의 틈에서 시작된다. 눈앞의 사람을 다시 바라보는 것, 뉴스 속 타인을 내 삶 안으로 초대하는 것, 멀리 있는 고통을 내 언어로 말해보는 것, 그렇게 우리는 다시 공감의 감정을 살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우리를 조금씩 움직이게 한다. 반응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다시 붙들게 한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자리에서 다시 울컥하게 만들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게도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지금, 우리는 감정을 회복해야 할 시간 한가운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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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5-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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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긴급 논평] 정교분리를 오독한 권력의 폭거 이재명 정권의 ‘교회 전쟁’ 선포를 규탄한다
    지난 1월 21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한 종교의 자유를 근본에서 뒤흔드는 발언을 공개 석상에서 내놓았다. 그는 이른바 ‘정교유착’을 “나라가 망하는 길”, “반란 행위”로 규정하며, “큰 돌부터 집어낸 다음 자갈과 잔돌을 집어내는 단계가 올 것”이라는 표현으로 개신교를 향한 단계적 수사와 탄압을 노골적으로 시사했다. 이는 단순한 법 집행의 의지 표명이 아니다. 정권에 비판적인 종교 세력을 구조적으로 제거하겠다는 의도가 담긴, 명백한 ‘종교를 향한 전쟁 선포’에 해당한다. 1. 정교분리 원칙에 대한 치명적 오독과 대통령의 무지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정교분리 원칙에 대한 중대한 오해이자 왜곡에 기초해 있다. 대한민국 헌법이 말하는 정교분리는 종교가 정치 현실에 대해 침묵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 권력이 특정 종교를 국교화하거나 종교 영역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원칙이다. 정교분리는 권력의 방패가 아니라 신앙의 보루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이 원칙을 정반대로 전도하여, 종교인이 정치 권력을 비판하면 처벌하겠다는 입막음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헌법 정신에 대한 정면 위반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권의 정책 실패와 도덕적 문제를 지적하는 목회자들의 발언을 ‘반란 행위’로 규정하고 수사의 대상으로 삼겠다고 공언한 점이다. 신앙과 양심에 따른 공적 발언을 범죄로 둔갑시키는 이러한 발상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에게서 나올 수 없는 독재적 사고다. 대한민국은 천부인권 사상 위에 세워진 나라이지, 권력 비판을 반란으로 규정하는 체제가 아니다. 2. 역사 속 종교 탄압 정권들의 공통된 말로 역사는 종교를 억압하고 교회를 적으로 돌린 정권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를 분명히 증언한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국가 의례라는 이름으로 강요하며 교회를 굴복시키려 했다.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수많은 성도들이 투옥되고 순교했지만, 교회는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신앙의 자유를 유린한 일제는 결국 역사 속에서 패망했다. 나치 독일 역시 교회를 국가 이데올로기에 종속시키려 했다. 그러나 고백교회와 본회퍼 목사를 중심으로 한 신앙의 저항은 끝내 꺾이지 않았다. 교회를 통제하려던 나치 체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추악한 범죄 집단으로 기록되며 붕괴했다. 소련과 공산권 국가들 또한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규정하고 교회를 파괴했지만, 국민의 영혼까지 통제하는 데는 실패했다. 종교 탄압으로 유지되던 체제는 내부로부터 붕괴되었다. 이재명 정권의 현재 태도는 이러한 전체주의 정권들이 반복해 온 종교 통제의 전형적인 수순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3. 왜 개신교인가: 권력의 불안이 드러난 ‘돌 깨기’ 전략 이 대통령이 “큰 돌부터 잡겠다”고 공언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개신교가 가진 공적 발언의 힘과 사회적 결집력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스스로 고백한 것이다. 정권의 부정부패, 정책 실패, 자유민주주의의 훼손을 가장 집요하게 비판해 온 집단이 교회라는 사실을 권력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수사’라는 칼을 먼저 휘두르며 공포를 조성하려는 것이다. 특정 목회자를 먼저 표적 삼아 교계 전체를 위축시키려는 이 방식은 비겁한 갈라치기 전략이다. 그러나 한 명의 목회자를 탄압하는 순간, 그것은 곧 수많은 성도와 한국 교회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행위가 된다. 신앙 공동체는 공포로 해체되지 않는다. 4. 결론: 한국 교회의 각성과 행동을 촉구한다 지금은 침묵할 때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의 성벽이 무너지는 순간, 교회는 파수꾼의 자리에서 나팔을 불어야 한다. 정교분리에 대한 왜곡을 방치하는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동조다. 오늘 강단의 자유가 무너지면, 내일은 신앙의 자유 자체가 위협받게 된다. 한국 교회는 권력의 협박 앞에 고개 숙이지 말고 진리와 공의의 목소리를 더욱 분명히 내야 한다. 일제의 칼날 앞에서도 신앙을 지켰던 선조들의 정신을 기억해야 한다. 천부인권을 부정하는 권력 앞에서 교회는 기도의 무릎과 행동하는 양심으로 동시에 서야 한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종교 자유 침해의 현실을 국제사회와 자유 진영에 알리고, 자유와 인권이라는 보편 가치 위에서 연대해야 한다. 거짓과 탄압은 결코 진리와 자유를 이길 수 없다. 이재명 대통령은 역사의 교훈을 직시하고 종교 탄압의 칼춤을 즉각 멈춰야 한다. 한국 교회는 신앙의 깃발 아래 다시 하나로 일어서, 대한민국과 교회의 자유를 지켜낼 것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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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22
  • [박동철 장로] 배우 안성기가 남긴 ‘세상에 필요한건 착한사람’
    1994년 개봉되었던 베트남 전쟁사 이야기 ‘하얀전쟁’은 한국 사회에 큰 화두를 던졌다. 우리의 아픈 역사 속에 남은 베트남전쟁에 우리의 젊은이들이 많이 참전했다. 전쟁이 전쟁으로 끝나지 않고 그 속에 응어리로 남는 비극이 바로 전쟁의 트라우마다. 적을 죽여야 하는 전쟁의 사명 뒤에 인간의 순수 심성이 양심을 괴롭힐 때가 많다. 그 큰 응어리는 전쟁을 치르고 나면 남는다. 그렇다고 우리의 역사 속에 전쟁 없이 살아온 인류사는 없다. 영화 하얀전쟁의 이야기는 적을 죽이는 전장에서 겪는 사람의 양심과 선한 심성에서 겪는 괴로움이 쉬 가시지 않음을 보여준다. 국민배우 고 안성기가 주연으로 이야기를 그려냈다. 사람은 누구나 착한 심성이 있지만 배우 안성기는 아역 배우에서부터 70평생 수많은 작품을 쏟아내면서 착한 심성의 캐릭터를 잃지 않았다. 국민들의 애도 속에 세상을 떠나고 나니 안성기의 심성을 남기는 어록(語錄)이 회자되고 있다. 아들이 어릴 때 아버지에게서 받은 편지 속에 “아들 다빈아, 이 세상은 착한 사람이 필요하단다”라는 말이 담겨 있다. 아들에게 착한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의 말이지만, 세상을 떠난 후 안성기가 남긴 말이 큰 울림이 되면서 특히 오늘의 세상을 가르치고 있다. 세상이 날로 악해지고 범죄 문화가 선함을 덮어가는 세상이 되고 있다. 급속한 발전의 뒷면에서 겪는 영악(獰惡)의 극치가 슬픈 현실로 자리 잡는 암울한 사회문화의 트렌드를 부정할 수 없다. 특히 사회 각계 지도층들이 보여주고 있는 선함을 가장하고 부패의 심성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문화 속에 우리가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밀려오는 때가 많다. 어떠한 범죄 윤리적 갈등 속에서도 뚜렷한 죄 앞에서 반성이 없다. 온갖 생떼를 쓰고 위기를 넘기면 사회적 예우로 회복되어 위선적 위치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파렴치한 일들을 너무 많이 보고 있다. 옛 유교문화 시대에도 사회 윤리적 작은 범죄에 처벌이 가혹했다. 그리고 신분을 다시 회복하는 데에도 엄청난 시간이 소요됐다. 성경으로 돌아가 보자. 하나님의 세상 통치의 신본문화 속에 있는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우상의 범죄는 차치하자. 일상에서 겪는 소위 세상에 넘치는 자범죄(自犯罪) 앞에서 우리는 신앙의 양심에서 회심의 단계를 겪는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가장 큰 울림이 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갚으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이러한 양심의 작동은 어디에서 나올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왔다. 바로 십자가의 도에서 출발하여 땅끝까지 이어지는 복음의 사명에 있다. 성도는 처음에도 선이요, 마지막에도 선으로 마무리해야 하는 길이 진리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교회는 선과 양심의 ‘생산공장’이라고 해야 할까. 바울 선생은 디모데전서에서 아들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져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사회를 탓하기 전에 곳곳의 교회 현장에서 선함과 착함의 능력이 사라지고 세속적 다툼으로 승부를 내려는 교회 문화를 많이 볼 수 있다. 한국 사회를 일으킨 원동력은 고귀한 복음의 능력이었다. 140년 전 기라성 같은 선교사들이 캄캄한 한국 땅을 깨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을 실현함으로써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는 축복을 누렸다. 지금 세상이 필요한 것은 성경이 가르친 선한 양심의 작동 그리고 회복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날로 약해져 가는 세태를 방관하지 말고 한국 교회가 교회로 밀려오는 세속문화를 밀어내고 양심과 착함으로 불의와 부당함을 이기는 본을 보여야 할 것이다. 한 사람 국민배우가 남긴 어록에 감동되는 동기도 중요하다. 더더욱 중요한 일은 교회가 더욱 세상을 리드하는 양심과 착한 문화의 생산공장이 되도록 확장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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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20
  • [독자기고] 국내전도위원회를 해산하라(7)
    8. 결론: 용기와 분별, 그리고 개혁의 길로 나아가야 할 때 고신 교단은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이 선택은 단지 행정적 방향을 정하는 문제가 아니라,교단의 미래,교회의 지속성,다음 세대의 신앙,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순종이 걸린 문제입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교회는 교회 개척을 성장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그 시대에는 그것이 옳았고, 실제로 효과도 있었습니다.그러나 2020년대를 살아가는 지금, 한국 사회는 그때와 완전히 다릅니다. 인구는 줄어들고 청년들은 교회를 떠나고 교회의 고령화는 가속화되고 신자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하며 사회 전체는 급속하게 탈 기독교화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 변화 속에서도과거 전략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은성경적 충성도, 개혁주의적 보수성, 교회의 지혜가 아닙니다. 그것은 맹목이고,역사적 무지이며,결국 교회의 미래를 잃어버리는 선택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합니다. 문제 앞에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 논의하라고. (행 15) 시대를 분별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 알라고. (대상 12:32) 남은 것을 정리하고 구조를 재정비하라고. (딛 1:5) 다수의 지혜로 교회를 지키라고. (잠 11:14) 교회를 하나로 세우고 강하게 하라고. (엡 4:11–13) 이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전략적 리더십의 본질입니다. 개혁주의 전통은 더욱 분명히 말합니다. “교회의 상태를 살피라.” — 존 녹스 “시대를 슬기롭게 분별하라.” — 『제2치리서』 “시대의 위험을 관찰하라.” — 조지 질스피 “시대에 맞는 방향을 제시하라.” — 새뮤얼 러더포드 “각 시대를 위해 다른 결정을 하라.” — 웨스트민스터 총회 이것이 바로 장로교 정치의 핵심 정신이며,고신 교단이 따라야 할 신학적 정체성입니다. 고신 교단이 회복해야 할 것 고신 교단이 진정으로 지켜야 할 것은: 과거 방식의 반복이 아니라 성경적 분별이며 무조건적 확장이 아니라 지혜로운 재건이며 개척의 숫자가 아니라 교회의 건강이며 독립의 자유가 아니라 장로교적 연합과 협력이며 구조적 관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찾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조직 개편이 아니라,영적 각성이며신학적 회복이며개혁의 정신을 다시 붙드는 일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지금 고신 교단에 필요한 것은 단순한 행정 결정이 아닙니다.필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멈출 용기 질문할 용기 진단할 용기 과거를 내려놓을 용기 미래를 새롭게 설계할 용기 성경 앞에서 결단할 용기 성경은 과거로 돌아가라 하지 않습니다.성경은 지금 이 시대를 분별하고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을 행하라고 합니다. 마지막 권면: 고신 교단이여, 시대를 분별하라 오늘 고신 교단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점에 서 있습니다.만약 우리가 지금 필요한 개혁을 이루지 못한다면,10년 후, 20년 후, 고신 교회들은유럽의 교회처럼 문을 닫게 될 것입니다.이것은 비판이 아니라 예언적 경고입니다. 그러나 고신 교단이성경의 지혜,개혁주의 전통의 정신,그리고 시대를 분별하는 통찰을 붙든다면,앞으로의 10년, 20년은 새로운 부흥과 건강한 재건의 시대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개척의 시대가 아니라, 개혁의 시대이다. 지금은 확장의 시대가 아니라, 분별의 시대이다. 지금은 숫자의 시대가 아니라, 복음의 시대이다. 고신 교단이 이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기도합니다.그리고 이 시대에 다시 한번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귀한 도구로 쓰임 받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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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19
  • [기고 ] 한동훈의 몰락과 자유의 윤석열의 사형 구형 배신이 완성한 대한민국의 참혹한 비극
    괴물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랜 시간 반복된 선택과 방조, 자기기만, 그리고 권력 엘리트의 오만이 켜켜이 쌓여 완성된다. 그리고 그 괴물이 정체를 드러내는 순간은 역사의 한 페이지에 선명한 날짜로 기록된다. 2026년 1월 13일. 어제 대한민국 정치사는 거대한 분기점을 통과했다. 한쪽에서는 국민의힘 전 대표 한동훈이 당 윤리위원회에서 ‘제명’이라는 최고 수위의 징계를 받았고, 같은 시각 서울중앙지법에서는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전 대통령 윤석열에게 특검이 ‘사형’을 구형했다. 이 두 사건은 결코 별개의 사건이 아니다. 배신의 시작과 그 처참한 최종 결과가 같은 날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1. 배신의 서막: 익명 뒤에 숨은 조롱과 기만 이 모든 비극의 파편은 한동훈 전 대표와 그 가족이 연루된 ‘당원 게시판’의 충격적인 문장들에서 시작되었다. “건희는 개목줄 채워서 가둬놔야 돼.” “윤석열은 알코올성 치매 같고 김건희는 걸레짝 같습니다.” 당무감사와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문장들은 단순한 감정의 배설이 아니었다. 특정 IP 대역에서 가족 명의 계정들을 동원해 조직적으로 반복 작성된 ‘여론 조작’의 산물이었다. 법과 정의를 수호해야 할 검찰 엘리트 출신의 당대표가 익명성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자신을 발탁한 주군과 동지들을 향해 혐오의 칼날을 휘두른 것이다. 사태가 불거지자 그는 부인했고, 정황이 드러나자 가족의 소행이라며 비겁하게 숨었다. 증거 인멸을 방불케 하는 새벽 시간대의 대규모 게시물 삭제는 그가 그토록 외치던 ‘법치’가 사실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음을 방증한다. 2. 구조적 배신: 보수의 궤멸과 ‘수사 정치’의 부메랑 한동훈의 배신은 개인적 일탈을 넘어 구조적이었다. 그는 검찰 권력을 정치의 중심부로 끌어들여 보수 진영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파괴했다. 정치의 사법화: 수사를 정책보다 앞세우며 보수 진영의 인물들을 연이어 사법의 도마 위에 올렸다. 그 결과 보수는 ‘범죄 집단’이라는 낙인을 얻었고, 이 틈을 타 이재명 정부가 탄생하는 토양이 마련되었다. 엘리트주의의 오만: 법을 독점한 소수 엘리트가 도덕과 정치를 재단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겸비해야 할 인간이 스스로 심판자의 자리에 앉았을 때, 공동체는 분열되기 시작했다. 3. 주군을 향한 칼끝, 그리고 사형 구형 역사는 배신을 기억한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를 찔렀고, 유다는 예수를 팔았다. 그러나 한동훈의 배신은 한 개인을 넘어 자유 대한민국의 체제와 보수의 가치를 무너뜨렸다. 정의의 칼이라 믿었던 것은 결국 주군을 향한 비수가 되었다. 어제(13일), 조은석 내란 특검팀은 12·3 비상계엄을 헌법 파괴로 규정하며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한때 자유의 상징으로 추앙받던 인물이 ‘내란의 수괴’로 호명되는 참담한 광경 앞에서, 그를 보좌하며 권력을 누렸던 이들의 ‘배신’과 ‘방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배신자는 당에서 쫓겨났고, 주군은 형장의 문 앞에 서게 된 이것이 바로 배신이 완성한 최종적 풍경이다. 4. 한국 교회와 국민을 향한 호소 이 사태는 단순히 정당 내부의 분쟁이나 특정 정치인의 몰락이 아니다. 대한민국 검찰 엘리트주의의 민낯이며, 지난 수년간 ‘적폐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정치 수사가 가져온 피의 청산서다. 이제 질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국민에게 던져진다. 우리는 이 기만과 파국의 과정을 보고도 침묵할 것인가. 1919년 3·1운동이 신앙적 양심의 각성이었듯, 오늘날 대한민국에는 거짓과 배신을 걷어내고 진실을 바로 세울 ‘제2의 영적 각성 운동’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공의가 하수같이 흐르지 않는다면, 이 나라는 법의 이름을 빌린 증오와 보복에 의해 계속해서 파괴될 것이다. 한국 교회가 깨어나야 한다. 침묵을 신앙으로 포장하는 비겁함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진실의 편에 서야 한다. 이 땅에 하나님의 은혜로 공의와 회복이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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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15
  • [기고] 손현보·전광훈 목사 구속과 윤석열 사형 구형: 자유민주체제의 위기
    지난해 ‘예배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앞장섰던 손현보 목사가 구속되었다. 그리고 어제, 광화문에서 현 정권의 폭주를 비판해 온 전광훈 목사마저 구속되었다. 거의 동시에,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는 검찰이 내란죄를 적용해 사형을 구형했다. 이 세 사건은 결코 서로 무관한 개별 사건이 아니다. 이것들은 하나의 선으로 꿰어져 있다. 그리고 그 선이 가리키는 방향은 분명하다. 대한민국이 지금 자유민주주의의 궤도를 이탈하여, 점점 더 깊은 ‘공산 전체주의적 통치 체제’의 늪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단순한 정치적 위기가 아니라, 체제의 위기이며, 국가의 성격이 바뀌고 있다는 위험한 신호다. 나는 지금 대한민국이 직면한 이 위기의 실체를 다음 네 가지로 고발하고자 한다. 1. 본질을 가리는 ‘낙인의 정치’와 법치주의의 붕괴 손현보 목사와 전광훈 목사는 무장봉기를 획책한 적도 없고, 국가기관을 점거한 적도 없으며, 폭력을 선동한 적도 없다. 그들이 한 일은 오직 헌법이 보장한 ‘말할 권리’를 행사하며, 신앙의 양심에 따라 이 나라의 타락과 폭주를 향해 예언자적 경고를 보낸 것뿐이다. 그런데 정권은 그들에게 ‘체제 위협 세력’이라는 굴레를 씌워 감옥으로 보냈다. 이것은 법치가 아니라, 정치다. 그것도 가장 저급한 형태의 정치, 즉 반대파를 범죄자로 만드는 정치다.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사형 구형은 이 광기의 정점을 보여 준다. 쿠데타도 없었고, 무장 반란도 없었으며, 국가 전복의 실체는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도 국가 전복 세력에게나 적용되는 ‘내란죄’를 끌어와 사형을 구형한다. 이것은 법 집행이 아니라 정치적 보복이며, 이것은 재판이 아니라 사실상 정치적 처형의 예고다. 2. 역사의 반복: 나치와 홍위병의 수법이 다시 살아났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극우”라는 낙인 프레임이 거의 마술처럼 작동하고 있다. 이 딱지가 붙는 순간, 그는 더 이상 보호받아야 할 시민도, 존중받아야 할 목회자도, 심지어 전직 대통령도 아니다. 그는 곧바로 “제거해도 되는 대상”으로 전락한다. 이것은 우리가 역사에서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전체주의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나치는 유대인을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여 대중의 증오를 조직했고, 문화혁명기의 중국은 지식인과 종교인을 “인민의 적”으로 몰아 홍위병을 동원해 숙청했다. 지금 한국에서 난무하는 “극우”, “내란”, “체제 위협”이라는 언어는, 정권에 비판적인 인물들을 하나씩 격리하고, 침묵시키고, 제거하기 위한 숙청의 언어와 다르지 않다. 단지 총 대신 판결문을 들었을 뿐, 작동 원리는 동일하다. 3. 십자가 대신 홍위병의 완장을 찬 일부 목회자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참담하고 더 부끄러운 장면은, 일부 목회자들이 이 광기의 선봉에 서 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고사모’ 목사 장로들은 동료 목회자를 향해 “극우”라는 낙인을 찍으며 구속을 정당화하고, 오늘 아침 한 목사는 전직 대통령을 향해 “사형이 마땅하다”고 외친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나치 시대의 선동가를 본다. 나는 그들의 언어에서 문화혁명의 홍위병을 본다. 복음을 선포해야 할 입술이 고발과 선동의 도구가 되었고, 교회는 권력을 향해 예언자적으로 외쳐야 할 자리에서 권력의 확성기로 전락하고 있다. 광화문 성도들이 들었던 것은 총과 폭탄이 아니라 태극기와 찬송가였다. 그들의 요구는 단 하나, 이 나라가 자유민주주의의 길에서 이탈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을 향해 돌을 던지는 자들이 바로 교회 안에서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 교회의 깊은 영적 타락을 보여 주는 증거다. 4. 지금 멈추지 않으면, 대한민국에는 미래가 없다 손현보 목사 구속, 전광훈 목사 구속, 윤석열 전 대통령 사형 구형. 이 세 사건은 대한민국이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명확한 이정표다. 우리는 지금 자유에서 통제로, 민주에서 관리로, 공화국에서 전체주의 체제국가로 급속히 이동하고 있다. 역사는 준엄하게 경고한다. 이 길의 끝에는 결코 정의도, 평화도, 인권도 없다. 이 길의 끝에는 언제나 공포와 침묵, 그리고 뒤늦은 후회만이 남았다. 지금 이 광풍을 멈추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은 머지않아 “생각이 다르면 제거되는 나라”, “말하면 잡혀가는 나라”로 완전히 변해 버릴 것이다. 그리고 오늘 동료를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들 역시, 머지않아 그 돌을 맞는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코람데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우리는 진리의 편에 서 있는가, 아니면 광기의 확성기가 되어 있는가.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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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14
  • [독자기고] 국내전도위원회를 해산하라(6)
    7. 고신 교단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 한국 사회의 변화는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 변화에 무기력하게 휩쓸릴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교회가 더욱 성경적이고, 더욱 개혁주의적이며, 더욱 전략적인 길을 선택해야 할 때입니다. 한국 교회와 고신 교단이 다시 살아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순히 교회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구조를 재정비하는 ‘지혜로운 전략’입니다. 아래는 고신 교단이 시대에 맞게 반드시 선택해야 할 7가지 방향입니다. A. 국내 교회 개척 프로그램의 일시적 중단 개척을 멈춘다는 것은 선교를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오히려 지금의 혼란 속에서 더 바른길을 찾기 위한 신앙적 결단입니다. 한국 사회의 인구 구조 분석 기존 교회의 건강 평가 지역별 실제 수요 조사 개척이 아닌 통합·강화 전략 필요성 확인 사역자 배치 구조 재점검 총회는 이러한 작업을 위해 개척을 일시적으로 멈추고,오히려 더 깊이 있는 연구와 토론을 해야 합니다. 성경적 명령은 “계속 진행하라”가 아니라,“모여서 논의하라”(행 15)입니다. B. 다음 세대 복음화에 교단적 역량 집중 한국의 미래 교회는 다음 세대 사역에 달려 있습니다.지금 고신 교단이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은 청년·청소년·어린이 사역의 재건입니다. 대학·캠퍼스 선교 강화 청년 신앙 공동체 회복 어린이/청소년 교육 커리큘럼 재정비 디지털·미디어 기반 복음 전도 가정 사역 및 부모 교육 지원 한국의 다문화·외국인 가정 자녀 선교 다음 세대를 잃으면, 교회 전체를 잃습니다.개척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세대를 복음으로 세우는 일입니다. C. 교회 통합(합병)을 적극 추진하여 건강한 공동체로 재편 지금 한국은 교회를 늘릴 때가 아니라, 건강한 교회를 만들 때입니다.작고 분산된 교회를 합쳐 하나의 강하고 지속되는 공동체로 만드는 것이 성경적이며 개혁주의적 전략입니다. 교회 통합은 다음과 같은 열매를 가져옵니다. 목회자와 성도의 피로 감소 사역의 집중과 다양성 확보 다음 세대 사역 강화 재정 효율성 증가 지역 내 건강한 교회 생태계 조성 서로 고립되지 않는 장로회적 협력 구조 회복 이는 바울이 디도에게 말한 “남은 것을 정리하라”(딛 1:5)는 명령을 오늘 교회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D. 기존 교회를 강화하는 데 집중하기 새로운 교회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이미 있는 교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고신 교단은 다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교회 리더십 교육 강화 목회자 재교육 및 코칭 제도 평신도 신학 교육 및 사역 훈련 교회의 재정·행정 구조 개선 지역 공동체 봉사 및 선교 활성화 현대 문화에 맞는 예배 및 교육 개편 건강한 교회는 성장합니다.그러나 약한 교회가 많아진다고 해서 성장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E. 목회자를 ‘시대를 해석할 수 있는 지도자’로 양성하기 오늘의 목회자는 성경 지식뿐 아니라,시대 분석 능력, 문화 이해, 미디어 활용, 사회 구조 이해, 가정·심리·교육에 대한 통찰이 필요합니다. 고신 교단은 목회자를 아래와 같은 분야로 훈련해야 합니다. 인구 구조 변화 분석 현대 청년 문화 이해 디지털 시대의 목회 다문화 사회에 대한 이해 지역 선교 전략 실제적 교회 구조 개혁 방법론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때를 알고 이스라엘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아는 자들”(대상 12:32)의 역할입니다. F. 한국의 새로운 선교지를 향한 전략적 전환 한국은 이제 더 이상 단일 민족·단일 문화 사회가 아닙니다.오히려 다음과 같은 새로운 선교 기회가 열린 시대입니다.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 가정 국제 학생 난민 사역 디아스포라 귀환자 온라인·디지털 세대 고신은 한국 안에서 새로운 열방(mission field)을 발견해야 합니다.이는 고신 교단 전체의 미래 사역 방향을 확장할 기회입니다. G. 장로교 정치의 본질 회복 — ‘독립’이 아니라 ‘연합’에 서기 교회 개척이 ‘독립’과 ‘자율성’의 기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장로교 정치의 정신은: 서로 연결되고 서로 돕고 서로 보호하고 하나의 교회 됨을 실현하는 것 여기에 있습니다. 고신이 교회를 강하게 만들고 싶다면,더 많은 작은 교회가 아니라, 더 강한 연합의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요약: 지금 고신에게 필요한 것은 ‘양적 확대’가 아니라 ‘질적 재건’이다 지금 고신 교단의 사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개척을 잠시 멈추고 교단의 전체 구조를 분석하며 기존 교회를 재건하고 다음 세대를 복음으로 세우며 새로운 선교지를 향해 사역을 확장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경적이고,개혁주의적이며, 2026년 한국 사회의 현실에 맞는고신 교단의 참된 길입니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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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13
  • [신년 묵상] 최성은 목사 - 상생의 아름다움과 복(시133: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6년 새해를 맞아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역 위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새해를 시작하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큰 은혜요, 기적이며, 하나님의 기쁨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지난 한 해 수많은 어려움과 위험한 순간들을 지나 이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과정을 통과해 함께 예배드리는 이 시간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특별히 지난 한 해는 정치·경제·사회적으로 갈등과 불안이 가중된 시간이었고, 경북 산불과 경남 집중호우 등 여러 자연재해가 겹쳐 찾아온 해였습니다. 현장을 직접 보며 막막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함께 예배의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본문 시편 133편은 ‘성전에 오르는 노래’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이 노래는 시편 120편,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라는 고백으로 시작됩니다. 곧 성전에 오르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수많은 혼란과 환난을 이기고 예배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입니다. 시편 133편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터져 나오는 시인의 감격의 탄성입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이 감격과 감사가 오늘 우리에게도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지난 한 해의 환란을 지나 2026년을 새롭게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 찬양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시편 133편은 세 절에 불과한 짧은 시이지만, 하나님께서 연합하여 동거하는 교회 공동체에 주시는 복, 곧 상생의 복을 가장 아름답게 노래하는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의 공동체가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 연합의 공동체, 상생의 공동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형제 된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보시고 상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을 이처럼 아름답게 보시고 복을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연합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연합은 단순히 한 집안의 형제들이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 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그 출신 배경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본부인의 자녀도 있었고, 여종의 몸에서 난 자녀도 있었으며, 요셉 지파는 애굽 여인에게서 태어난 후손이었습니다. 분열하기에 너무나 쉬운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 곧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배하는 하나님은 성부·성자·성령, 한 분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연합은 그들이 예배하는 하나님을 닮은 연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교회를 세우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우리가 하나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고, 사도 바울 역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권면했습니다. 형제의 연합은 하나님께 선한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형제가 함께 동거하며 상생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의 본질입니다. 탐욕과 이기주의가 만연한 이 시대에, 하나님을 닮은 교회들이 연합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복음의 영광을 이 땅에 드러내실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연합한 공동체에 주시는 복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회복의 복입니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라는 말씀은 대제사장의 임직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대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용서와 회복을 선포하는 존재였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모습을 대제사장의 임직에 비유한 것은, 함께하는 곳에 회복의 능력이 임한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풍성한 생명의 복입니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물이 귀한 이스라엘 땅에서 헐몬산의 이슬은 온 땅을 적셔 생명과 열매를 맺게 하는 은혜였습니다. 시인은 형제가 함께하며 상생하는 모습을 이 헐몬의 이슬에 비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 되는 곳, 상생하는 공동체에 임하셔서 풍성한 생명의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초대교회가 언제 강한 교회로 세워졌습니까? 거대한 건물이나 체계적인 조직이 있어서가 아니라, 함께 모여 한마음으로 기도할 때였습니다. 한 마음으로 예배하고, 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상생으로 함께할 때 오늘도 성령 하나님께서 교회 위에 풍성한 생명의 능력을 부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설 수 없다.” 말씀을 맺습니다. 지난 경남 지역 집중호우 당시, 총회 긴급구조단이 산청의 한 피해 현장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물에 잠긴 비닐하우스와 진흙에 뒤덮인 작물을 보며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그 현장의 한 장로님께서 오히려 “괜찮습니다. 천국 소망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위로하러 갔던 우리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경험하고 돌아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지난 한 해의 모든 시련을 믿음으로 통과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새해를 맞아 형제 되어 함께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회복의 복과 풍성한 생명의 복을 더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2026년,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으로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보시는 교회, 상생으로 세상을 섬기는 성도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위 설교문은 1월 2일, 고신 지도자 초청 신년 인사회에서 최성은 목사의 설교를 옮긴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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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6-01-12
  • [특별기고] 교회와 성도의 정치참여에 대하여
    들어가며 필자의 고향은 진주시 정촌면 관봉리에 있는 진주 강씨의 집성촌이며, 우리 가정이 복음화된 것은 1932년경으로 추정된다. 할머니가 가장 먼저 결신 하신 후 증조할머니를 설복하셨으며 할머니와 증조할머니가 주일 옥봉리교회(현 진주교회)로 발걸음을 옮기시면서 우리 가정에 복음의 역사가 시작하였다. 할머니는 주변 친척들에게 복음을 전하셨고 그 와중에 불치의 병을 갖고 있던 어린 시조카가 계셨는데 그분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며 복음을 전하셨다. 그분은 저에게는 3종 숙이 되시며 후일 저명한 목사님이 되셨다. 두 분이 함께 고향 동네의 뒤편 작은 골짜기의 굴에서 함께 기도하면서 당시 치유가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병이 치유되었다. 이로 인하여 그 가정이 복음화되었으며 또 믿는 친척이 늘어 갔다. 할머니는 우리 집 텃밭에 교회당을 세웠는데 그 교회가 지금 정촌면 관봉리에 있는 관봉교회로 1934년에 세워졌다. 그 교회에서 복음을 받아들인 친척들과 함께 옥봉리교회당에서 나오신 조사(?)의 인도로 예배를 드렸는데 누군지 알고 싶어서 확인하였더니 진주교회의 초기기록이 6.25 전쟁으로 불타 누군지 밝힐 수 없었다. 그런데 방해자가 생겼다. 집안의 촌수가 머지않은 친척 어른 세 분이 예수 믿는다고 우리 집으로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교회당을 파손하기도 하고 집에 와서 그들에게 집안 형님이 되시는 저의 할아버지에게 폭언하는 일을 여러 차례 되풀이하였다. 문제는 이들이 나중 알고 보니 공산주의자들(속칭 지방빨갱이)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보도연맹 사건 때 몸을 피해 숨어있다가 동네를 인민군이 점령한 후 붉은 완장을 차고 나타났다. 인민군 치하에서 할머니는 교회에서 혼자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며 성경을 읽고 계셨고, 아버지는 현재의 이장 격인 구장을 하시면서 젊은이가 피난을 가고 남은 가정 - 집성촌이니 결국 집안사람들 - 을 돌보고 계셨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1950년 가을 추석 직전에 인민군들이 도주하였는데 이때 이들도 함께 도주하였으며 곧이어 국군과 경찰이 진주해 들어 왔다. 어떤 연유인지 국군과 경찰은 교회를 지키고 계셨던 할머니와 구장을 하던 아버지를 부역 혐의자로 체포하였고 추석 후 즉결 처형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인민군들이 급히 도주하면서 남겨 놓고 간 문서 중에 할머니와 아버지를 추석 후에 인민재판을 통하여 처형하기로 한 내용의 인민재판 문서가 발견되어 할머니와 아버지는 국군 지휘관의 사과와 함께 석방되었다. 놀랍게도 그 고발자들은 할머니가 예수 믿는다고 우리 집과 관봉교회에 와서 행패를 부리던 그들 3인이었다. 아버지는 촌수가 머지않은 친족으로부터 배신당했다는 충격으로 고향을 떠나기로 하고 우리 가정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마산으로 거주를 옮겼다. 지금의 마산합포구 성호동 산비탈에 주거를 정하였는데 출석할 수 있는 교회는 문창교회였다. 당시 문창교회는 총회파와 고려파가 교회당 소유권을 갖기 위하여 소송이 시작된 교회였다. 총회파는 김석찬 목사님이셨고 고려파는 송상석 목사님이셨는데 피난민으로 문창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은 대부분 총회파를 지지하였으나, 할머니는 일제 하의 경험으로 신사참배는 철저히 회개해야 한다는 현재의 고신 교회인 고려파 신앙을 택하셨고 우리 가정은 고려파의 교인이 되었다. 따라서 나는 태어나면서 고려파 교인이었고 지금까지 한 번도 고려파 교인이 아닌 적이 없었으며, 고려파가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고려파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공산주의자들로부터 핍박받은 간접 경험자, 또 해방 후 6.25 전쟁이 마칠 때까지 공산주의가 나라 전체뿐만 아니라 교회에 어떤 핍박을 하였는지 역사와 교회사를 통하여 알고 있으므로 필자는 분명히 반공주의자이다. 이렇게 나 자신을 밝히는 것은 이 글에 따른 불필요한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함이다. 보수개혁주의 신앙인으로 드리는 질문 나는 고신 교회의 보수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을 신봉함을 다시 한번 밝히면서 최근 고신 교회 내부에서 이른바 교회의 정치참여에 관한 논쟁에 관하여 필자의 의견을 밝히고자 한다. 이 논쟁의 시발점이 어디서부터인가 하는 것은 관점에 따라 다르다. 먼저 ‘포괄적차별금지법’이 대두되면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분이 계신다. 포괄적차별금지법의 일부 내용은 성경의 가르침을 직접적으로 위배하였으므로 기독교계가 함께 거부해야 할 법안임은 틀림없다. 물론 그 법안의 내용 중 당연하고 긍정적인 내용이 함께 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 법안의 목표는 동성애를 묵인하고 오히려 보호하기 위하여 이해하기 어렵고 생소한 단어인 ‘성적지향’을 보호하는 해괴한 내용을 넣는 것이 주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논의되고 있는 교회의 정치참여 문제는 직접적으로는 지난해 10월 27일 한국교회 연합예배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 집회는 ‘예배’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하였으나 자타가 정치적 목적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대통령의 탄핵 과정,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한국교회와 고신 교회의 일부 목회자와 교회가 국힘의 김문수 후보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후로도 많은 교회 지도자가 보수 정치세력을 지지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실정법 위반이 문제 되었으며 그 중 손현보 목사님이 구속되어 지금 재판에 계류되어 있다. 그리고 이 문제가 주제가 되어 제19회 미래교회포럼에서는 ‘설교와 정치참여’란 주제로 포럼이 개최되었다. 백석대 김윤태 교수는 [정치참여적 설교의 긍정성과 부정성]이란 제목의 글에서 ‘정치나 정부정책과 관련된 어떤 현실 이슈가 언급될 때마다 지역적 이념적 정치적 입장에 따라 정교분리의 원칙이 편파적이고 선택적으로 적용됨으로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현재 ‘진영논리’라고 부르는 우리나라의 극단적인 분열이 교회 내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국가나 정치의 목적은 사람들의 행복한 삶을 유지 보존 증진시키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질서와 문화를 조장 보호하고 법과 제도를 통하여 사회적 국가적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국가와 정치가 존재하는 이유이고 목적이다’라고 국가와 정치의 사명과 목적을 정의하였다. 또 교회의 사회적 사명에 대하여는 ‘교회 또한 하나님의 뜻이 교회와 국가를 통해 이 땅에 이루어짐을 믿으며 하나님의 의의 통치의 실현을 위해 이 땅에 평화와 공의의 증진을 위해 노력한다. 교회는 이를 위해 신자들에게 이런 기독교 시민의식을 가르치고 실천하도록 장려한다’라고 정의하였다. 따라서 목사의 설교는 ‘당연히 이러한 부분을 포함하여야 하며 이는 교회의 대 사회적 활동의 주요한 목적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 교회는 사회적 공공성의 의미를 가지며 사회적 순기능을 담당해야 한다.’고 신자의 삶을 통한 설교의 대 사회적 기능을 밝혔다. 그리고 교회의 정치참여에 대하여는 ‘교회와 목사는 정당들 간의 투쟁과 경쟁에 대해서는 중립을 지켜야 마땅하지만, 그럼에도 목사는 선거철을 맞아 신자들에게 정부와 정치의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의미를 알게 하고 그럼으로 시민으로서 신자들이 바른 정치참여를 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정의하였다. 따라서 ‘공의롭고 질서 있는 사회를 위해 바른 정책을 추구할 수 있는 후보자를 선택할 수 있도록 목사는 성경적 가치와 기준을 가르쳐 줌으로 신자들이 바른 선택을 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설교의 기준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종교의 자유에 관하여 ‘국가권력이나 정치세력은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서 행하는 정당한 비판을 제한하거나 금해서는 안 된다. 목사가 기독 신자에게 시민으로서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행해야 할 것을 설교하는 것은 목사의 권리이며 이를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것은 종교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라고 설교와 종교의 자유와의 관계를 결론하고 있다. 김 교수는 국가와 정치, 교회의 사명, 정치에 관한 목사의 설교 한계, 교회의 정치참여, 설교와 종교의 자유에 관한 탁월한 의견을 제시해 주셨다. 김 교수가 제시한 이러한 몇 가지 원칙에 관하여 아무도 달리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원칙에 따라 최근 기독교의 정치참여에 관한 부분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 상당수 교회는 보수적인 정치세력 – 지난 대선 때는 김문수 후보를, 이후 사실상 보수 정치세력인 국민의 힘에 지지를 보내고 있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교회와 성도들이 보수정치를 지지하기 때문에 김문수 후보를 지지하였고 국민의 힘이 보수 정치세력이기 때문에 지지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들의 정치지향점이나 정책이 이 나라에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데 상대적으로 가깝거나 적합하기 때문인지 묻고 싶다. 이 질문은 비슷한 것 같지만 출발점을 완전히 달리한다. 아마도 이 질문에 백이면 백 모두 후자의 이유로 보수 정치세력을 지지한다고 할 것이다. 즉, 보수정당이 또는 보수 정치세력이 하나님의 공의를 이 땅에 세우고 교회의 사명을 이루는데 상대적으로 적합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국민의 힘 핵심 인사들이 이단 세력인 통**와 교류하고 그들로부터 정치자금이 아니라 뇌물로 보이는 물품을 건네받은 것에 대하여 왜 침묵하고 있는가?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해도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그들은 종교를 표방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기존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되고 대다수 국민이 그렇게 알고 있는 집단에서 불의한 것을 매개체로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정치세력의 핵심에 접근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지금 이 문제는 여야 양측 모두에게 위법한 사실이 나타나 언론에 집중하여 보도되고 있으며 날이 갈수록 점차 그 규모가 커지고 있다. 아마도 이 문제가 어쩌면 현재의 정치구조에도 큰 타격을 입힐 공산이 크다.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는데 상대적으로 적합하다고 믿은 정치세력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파괴하고 오용하는 자들과 불법적인 거래가 있었다면 마땅히 비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대하여 보수 정치세력을 지지하는 교회와 단체는 왜 침묵하고 있는가? 마 5:37은 이렇게 말씀한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반공주의자로서 드리는 말씀 – 오세택 목사님의 인공기 발언에 대해 필자는 또 반공주의자로서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앞서 말씀드린 제19차 고신미래포럼에서 오 모 목사님의 놀라운 발언을 지상을 통하여 보았다. 오 목사님의 발언은 위 포럼에서 자료로 배포한 발제문 ‘설교와 정치참여’에 있는 내용과는 결을 달리하는 다른 내용이다. 왜 발제문과 전혀 관계없는 내용을 말씀하셨는지 내가 직접 포럼에 참석하지 못하여 오 목사님의 발언을 전체적으로 듣지 못하였으므로 깊은 뜻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크리스찬투데이’에 보도된 그대로를 몇 개 인용한다. 당시 사랑의교회가 태극기를 내건 모습을 언급하면서 “개혁주의 입장에서 교단 정신으로 보면 그게 정당한가? 민족주의인가, 국수주의인가? 하나님 나라는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것” “모든 지상의 국가를 섬기고 복음을 전하고 구원한다는 의미에서, 달려면 만국기를 붙여야 할 것 아닌가? 성조기를 붙이면 美 문화원인가 할 것이고, 일장기를 붙이면 더 이상할 것” “공간이 부족하면 하나님 나라를 지향한다는 상징으로 붙일 한 국가 깃발이 있다. ‘북한 인공기’다. 붙이려면 그걸 붙여야 한다”며 “그럼, 사람들이 ‘저게 뭐냐’라고 할 것 아닌가? 그때 얼마나 (설명할) 기회가 좋은가? 복음은 좌우를 넘어, 위에서 내려다봐야 한다. 좌우의 관점을 가지고 보면 교회는 분열할 수밖에 없다”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태극기는 비록 음양과 팔괘의 사상이 들어 있지만 조선 말 고종황제 때 기본이 만들어지고 이후 조금씩 변화하면서 항일 독립투쟁 때부터 우리의 상징으로 여겨졌으며 자연스럽게 우리의 국기가 되었고 이에 대하여 아무도 거부하지 않는다. 사랑의 교회가 태극기를 게양한 것은 나라 사랑의 의미가 아닌가? 심지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수립 직후인 1946년 2월 16일부터 1948년 7월 10일까지 북한도 태극기를 사용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인공기는 다르다. [나무위키]의 해설에 따르면 인공기의 의미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인공기가 제작되었을 당시의 북조선인민위원회가 내세운 인공기의 의미는 “인공기 위와 아랫부분 파란색은 한반도 좌우에 있는 동해와 서해를 의미하고 빨간색 별은 공산주의, 그리고 빨간색 별을 둘러싼 흰색은 공산주의를 지킨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당연히 태극기의 파란색, 빨간색과는 뜻이 다르다.” 다음은 김일성종합대학의 기사에서는 또 다르게 언급되는데 이는 북한 외무성에서 밝히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날 어버이 수령님께서는 국기의 색갈을 붉은색, 흰색, 푸른색으로 하니 좋다고, 국기의 붉은색은 항일 선렬들과 조선의 애국자들이 흘린 피와 공화국의 주위에 굳게 뭉친 우리 인민의 불패의 위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된다시며 국기의 흰색은 우리나라가 한 강토에서 하나의 혈통과 언어, 문화를 가지고 결백하게 살아온 단일민족국가라는 것을 상징하며 푸른색은 민주주의 새 사회건설을 위하여 투쟁하는 우리 인민의 씩씩한 모습과 세계의 평화와 진보를 위하여 투쟁하는 조선인민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말할수 있다고 하시였다.” (공화국기에 드리는 경의 —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부 박사 부교수 박희순) 그러나 이에 그치지 않는다. [히스토리의 역사산책]이라는 다음(daum.net)의 블러그에서는 인공기는 북한공산주의와 김일성 주체사상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다. ‘위와 아래에 파란색이 있고 그 사이에 넓은 빨간색이 있으며 그 안에 하얀 동그라미와 붉은 별이 있다. 빨간색은 공산주의와 혁명 그리고(김일성의 독재 이후에는) 주체사상을 상징한다고 설명하고 있으며 파란색은 평화에 대한 염원과 인민의 희망을 뜻한다고 한다. 그리고 하얀색은 광명 및 음양사상을 상징한다. 하얀 원 안에 있는 붉은 별은 한반도 전체의 공산주의 건설을 뜻하는데 조선인민군의 상징으로도 통한다고 한다’ 위 세 가지 인공기의 의미 중 어느 것을 택하여도 인공기는 공산주의 이념과 주체사상을 상징하기 위해 또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인공기는 어떤 경우에도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오 목사님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함을 보이기 위해, 복음이 좌우를 넘어 위에서 보듯이 하기 위해 인공기를 게양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고, 제발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며 “사상과 이념을 넘어 사회주의·공산주의·자본주의·민주주의를 넘어 우주적 관점으로 사랑하자는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고 해명하였다고 한다. 그런 뜻이라고 하더라도 인공기를 게양하자는 말씀을 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북한 공산주의자도 용서의 대상이며 복음이 전해져야 하며 구원의 대상인 점은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들이 저지른 죄에 대하여 내려놓고 참회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혜는 죄의 고백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다. 오 목사님이 인공기를 붙이자고 하신 것은 자칫하면 공산주의자들이 우리의 현대사에 씻을 수 없는 엄청난 죄악들에 대하여 묵인하고 관용을 베풀자는 뜻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북한 공산주의자에 대한 관용보다 그들로 인하여 고통받는 동포들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는 해방 후 분단의 공간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저질은 수많은 끔찍한 범죄 – 이른바 적색테러, 6.25 전쟁의 참화, 그 후의 각종 침략행위를 기억하고 있다. 지금도 북한에는 공산정권에 의하여 수많은 동포가 삶의 고통을 겪고 있으며, 그들의 삶의 고통을 외면하고 엄청난 재원을 대량 학살 무기 등 군비를 갖춤에 사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여순반란 사건 때 반란군들이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 동신과 동인을 모르고 죽였을까? 아니다. 그들은 손양원 목사님이 누군지 알고 있었고, 동신과 동인을 손 목사님의 아들인 것을 알고 죽였다. 이 땅에서 가장 비천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한센병 환자를 돌보는 목사님의 아들을 그들과 뜻을 함께할 수 없음을 알고, 그들의 뜻에 방해된다고 죽인 것이다. 6.25 전쟁 때에는 손양원 목사님 역시 공산군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한센병 환자와 함께 아무도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성자(聖者)와 같은 삶을 사시는 목사님을 역시 그들의 뜻에 방해되고 뜻을 함께할 수 없음을 알고 죽인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6.25 전쟁 때 공산군들은 이 땅의 수많은 목사님 등 기독교인을 죽였고 교회당을 불태웠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때보다 10배가 넘는 순교자의 이름이 합동 측에서 발간한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100년사』 2권 88면과 747면에 명시되어 있다. 교파별로 모두 조사하여 정리하면 엄청난 수가 될 것이다. 그들은 미군을 점령군, 소련군을 해방군이라고 한다. 그러나 전 세계 역사를 다 찾아봐도 목사를 학살하고 교회를 불태우는 해방군은 없다. 그 전쟁범죄자의 후계자들이 그들의 목표를 위하여 상징으로 내세우는 것이 인공기이다. 그런데도 인공기를 게시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과거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에도 있었지만, 최근의 노동운동 현장에서 북한 공산주의에 영합하는 듯한 구호와 주장들이 나타나고 있다. 백번 양보해서 민주화를 위한 학생운동도 좋고 노동자의 이익을 위한 노동운동도 좋으나 그 주장이 북한 공산주의를 이롭게 하는 구호와 주장은 결코 잘못된 것이다. 부패한 자들이 통치하는 사회주의는 부패한 자본주의보다 국민의 모든 삶을 훨씬 힘들게 한다. 중국과 북한, 남미의 여러 나라 사례를 우리는 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모습을 우리의 경험으로 여겨야 한다. 마치면서 필자의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교회와 신자는 정치와 단절될 수 없다.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고 신자 역시 시민으로서 국가의 통치체제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교회와 국가를 통해 이 땅에 이루어짐을 믿으며, 신자는 하나님의 의의 통치의 실현을 위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신자는 선거 때마다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투표로 나타내어야 한다. 이를 위하여 교회와 목사님은 신자들이 바르게 정치참여를 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성경적 가치와 기준을 제시하고 가르쳐 줄 뿐이지 직접적으로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에 대한 찬반을 거론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국가의 정책 역시 그러하다. 분명히 성경적 가치관과 배치된다면 그 부분에 대하여 반대해야 하지만 국가의 정책은 대부분 항상 양면을 가지고 있으므로 전문적인 지식과 깊은 성찰이 없다면 쉽게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추구하는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한 정치를 이루는 것은 우리의 정치적 전략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는 이유 하나로 가이사의 것을 쉽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롬 13:1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고 가르쳤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 말씀을 기록할 때 로마제국이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권력이 정당하고 타당해서 복종하라고 한 것은 아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악한 체제하에서 살아가고 있었지만 복종하라고 가르쳤다. 그것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교회와 목사님, 그리고 모든 성도가 교회와 성도의 정치참여에 대해 깊은 성찰이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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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8
  • [황권철 목사] 교회순방: 무성교회(41)
    무성교회(이수건 목사)는 경남 창원시 의창구 동읍 무성길47번길 16-10에 있다. 이 교회는 본래 고신교회 출신으로써 덕산재건교회를 출석하여 집사로 장립 받아 섬기던 박만석 집사가 자신이 살던 동네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자기 집터 일부와 돼지를 기르던 돈사 부지를 교회 기증하여 1991년 10월 1일 창원군 동면 무성리 195-1에서 당시 가술교회 시무하던 원대연 목사의 명의로 무성교회(종교단체)로 등록하였다가 1992년 7월 2일 경남(법통)노회로부터 교회 설립을 허락받았다. 지금의 교회당은 2009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2011년에 완공하고 2013년 11월 14일에 입당감사예배를 드렸다. 교역자로는 1992년 6월 18일 이상철 목사가 부임한 이래 이학재 목사, 안영원 목사, 그리고 이한성 목사가 섬기다가 현재는 이수건 목사가 경남(법통)노회 제192회 때 전임 목사로 허락받아 2020년 5월 3일 부임하여 섬김으로 교회가 새롭게 부흥하고 있다. 이수건 목사는 고려신학대학원 45회 졸업하였고 진주노회 아름다운 교회에서 사역하다가 청빙을 받았다. 이 목사는 부임한 이후 창원동부시찰 교역자들을 초청하여 “무성교회 과거 현재,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자신의 목회 사역을 소개했다. 지난날 교회 설립 때 가술교회(원대연 목사)를 비롯한 여러 교회가 도와주셨고, 새 예배당 건축할 때는 덕산교회(안은준 목사)를 비롯한 시찰 산하 여러 교회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무성교회는 본동의 아파트에 입주한 분들을 전도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새 예배당을 짓고 헌신적으로 섬겨 왔기에 건강한 교회로 자라가고 있다. 무성교회 미래는 초대 예루살렘교회를 본받아 닮아 가기를 소원한다. 초대교회가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한 것처럼 무성교회를 설립한 분도 자신의 가옥 일부를 받침으로 시작되었다. 또한 초대 예루살렘교회에 열심인 여성도들과 헌신자 바나바와 청년 마가가 있었던 것처럼 무성교회에도 이름 없이 헌신하는 여종들과 바나바 같은 헌신자와 다음 세대를 이끌어 갈 청년들의 섬김으로 건강한 교회로 세워가고 있다. 금주의 주신 말씀의 제목은 창세기 32장 24절로 28절 말씀으로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이다. 지금 야곱은 일생에서 가장 큰 위기에 직면한 순간이다. 그는 일생을 살면서 몇 번의 위기를 맞았다. 형의 미움을 받아 집을 떠날 때와 외삼촌의 재산을 가지고 탈출할 때,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올 때 얍복 나루에서 20년간 한을 품고 기다린 형이 400군대를 거느리고 복수하러 옴으로 진퇴양난의 위기에 직면했다. 이러한 위기를 대처하는 야곱은 어떠했는가? 우선 가축을 두 떼로 나누었다. 한 떼를 치면 다른 한 떼와 도피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부인과 아이들을 먼저 보내어 형의 마음을 풀게 하고자 했다. 그러고 보니 결국 자기 혼자만 남게 되었다. 왜 혼자 남았을까? 위기의 때 가족을 버리고 도망가기 위함인가? 형과 대면할 자신이 없는 두려움 때문인가? 물론 그러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보면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였다. 성도는 위기의 때 기도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 여호사밧은 아람 전투에서 위기를 직면했을 때 오직 주만 바라보았다(대하 20:12). 그는 전쟁의 승패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대하 20:15) 오늘 하나님이 야곱에게 주신 질문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 질문과 나타난 대답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먼저, 나는 연약한 존재란 말이다. 야곱은 본래 가정에서 어머니 치마폭에서 자란 유약한 사람이다. 에서와 전혀 다른 사람이다. 에서는 사냥에 익숙한 들 사람이요 야성적인 사람이다. 거기에 비하면 야곱은 가정에서 어머니 그늘에서 자랐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버러지와 지렁이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사 41:4).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도와주시겠다고 했다. 날카로운 타작 기계처럼 만들어 주셨다.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보라 내가 너를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로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서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을 겨같이 만들 것이라”(사 41:14-15) 야곱이 비록 지정이 같고 버러지 같은 존재이지만 하나님이 도우심으로 열방을 다스릴 왕국으로 세움을 받았다. 다음, 나는 하나님 없이는 못 사는 존재란 말이다. 야곱은 출생 때 형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다. 야곱은 출생 때부터 형을 잡고 나와 결국 형의 장자권을 빼앗았다. 그러나 이제 그는 형의 위협 앞에 하나님을 붙잡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제 하나님을 붙잡은 손을 놓는 순간 그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야곱이다’는 말은 이제 하나님의 발꿈치를 잡은 인간이라는 말이다. 전에는 사람을 붙잡고 살았으나 이제는 하나님을 붙잡고 산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사람을 신뢰하는 것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고관들을 신뢰하는 것보다 낫도다”(시 118:8-9) 이젠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전에는 형을 붙들고 살았으나 이제는 하나님을 붙잡고 사는 인생이다. 마지막, 저는 불구자 인생이란 말이다, 야곱은 천사와 씨름하다가 허벅지 관절이 위골 되었다. 하나님은 반칙을 써서 야곱의 환도뼈를 쳤다. 야곱은 천사와 씨름하면서 환도뼈가 위골됨으로 일평생 다리를 저는 절름발이 장애자로 살았다. 그는 절뚝거리며 불구의 몸이 되어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었다. 이후 야곱은 완전히 변하여 형 앞으로 나아갈 때 일곱 번 절하며 나아갔다. 이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을 향해 하나님은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물었을 때 “나는 야곱이니이다.” 대답했다. 이는 곧 나는 연약한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 없이 못 사는 불구자 인생이요 절름발이 인생이라는 말이다. 이 한 주간도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마흔한 번째로 무성교회를 찾았다. 주일 아침 예배 15분 전에 도착하여 예배실로 들어서니 이수건 목사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로님과 집사님들을 소개하고 앞 자석으로 안내해 주었다. 2009년도에 지은 새 예배당에 1층은 교회학교와 교육관 및 식당으로, 2층은 예배실로 잘 꾸며져 있었다. 찬양 인도가 끝나고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 목사님의 설교는 너무도 차분하게 정제되고 논리적이며 체계적으로 준비한 본문의 성구를 액정 화면에 띄우면서 모든 성도가 쉽게 알 수 있도록 설득력 있게 선포했다. 모두가 말씀의 은혜를 받고 예배 후 식당으로 가서 목사님과 함께 식사하면서 장로님과 집사님들, 그리고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면서 밀알교회를 섬긴 장로님의 동향을 비롯한 귀한 사역자들을 만나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었다. 이후 목사님과 교우들의 배웅 인사를 받으면서 오후 메트로 병원 선교 사역의 현장으로 돌아왔다. 2024년 10월 27일 주일 오전 11시 예배 고려파교회연구소장 교육학박사 황권철 목사(밀알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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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8
  • [하수룡 장로] 원 가 지
    호야라는 식물을 거제 동생집에서 가져와 꺾꽂이를 해 심어놓았던 것이 잘 자라더니 갑자기 시들시들해지기 시작했다. 가만히 살펴보았더니 작은 벌레들이 호야를 괴롭히면서 크지도 않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극단의 조치를 취해 원가지를 사정없이 다 쳐버리고 약간의 음지인 뒷 베란다에 놓아 두고 일 년을 키웠더니 잘랐던 원가지 옆 부분에서 곁가지가 나와 엄청 무성하게 잘 자라 이젠 예쁜 꽃까지 피워 우릴 즐겁게 해 주고 있다. 매일 물과 거름도 넉넉히 주었더니 더 충실하여 어떤 식물보다 관심을 더 가지게 되어 주인인 우리 부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잘려 버리게 된 참 감람나무의 원가지인 유대인이 떨어져 나가고 그 덕택으로 곁가지 이방인인 우리가 풍성한 구원의 은혜의 복을 누리고 잘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후 천육백 년이란 역사의 소용돌이가 지나간 후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고 그동안의 소회를 말씀하셨으나 피폐한 삶을 살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답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 다소 냉소적이며 원망이 가득한 반응을 보인 것을 알았다. 아마도 유일하게 선택한 원가지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답에 하나님은 큰 충격을 받으신 것이 틀림이 없다 그 후 하나님은 4백 년 동안을 침묵하셨다. 갑갑한 세월이 흐른 후 하나님은 원가지인 이스라엘 항변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세상에 보내주셨다. 하나님께 감정의 골이 깊어서인지 그들은 수많은 선지자의 예언과 예수님의 기적과 표적을 보았는데도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기는 커녕 십자가에 못 박고 만 것이다. 많은 민족 중에 열악한 환경 속에 살아가던 유대민족을 감람나무의 원가지로 선택하셨으나 그들의 실족 때문에 큰 덕을 본 사람은 바로 돌감람나무의 곁가지로 접붙임을 받은 이방인인 우리들이 아닌가! 이방인 사도로 큰 쓰임을 받은 바울은 동족에 대한 안타까움이 늘 가슴 속에 있어 돌감람나무 이방인인 우리에게 ‘교만치 말라.’라고 줄곧 경고하고 있는 음성에 귀를 기울려야 한다. 예수를 믿는 돌감람나무인 우리는 참 감람나무의 찍혀버린 그 자리에 접붙임 받은 것을 망각하고 하나님이 처음으로 선택한 원가지인 것처럼 내가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곁가지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우리가 한 번쯤 믿음으로 돌아보아야 할 때임을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제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안타까운 것은 참감람나무 원가지인 유대인들은 아직까지도 주님 오신지 2천 년이 지난 현재에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모세에게만 붙들여 있다는 사실이다. 돌감람나무였던 곁가지인 구원받은 우리 역시 세상 것을 더 사랑하고 자기가 가장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문제다. 2026년 새해에는 다른 사람이 아닌 구원받은 내가 야생 기질을 지닌 못 먹는 곁가지 돌감람나무임을 꼭 깨닫고 세상을 위해 작은 선행이라도 하면 주님이 기뻐하실 것이다. 참감람나무 원가지에서 올라오는 진액을 마음껏 흡수하여 푸른 잎과 꽃, 그리고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고 은혜를 베푸신 우리 하나님만 바라보고 늘 감사하고 찬양을 돌리면 참 좋겠다. 2026.01.06. 경남기독신문 초장컬럼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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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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