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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재철 목사] 교회를 끊다
    # 교회를 끊다. 앞집, 방 한 칸에 혼자 사는 아저씨. 나는 그 아저씨를 ‘농협 아저씨’라고 불렀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 아저씨가 농협에 출근하고 있었기 때문. 시골 살이, 재미있는 게 별로 없었던 내게 자주 놀러오라는 아저씨 말에 민폐인줄도 모르고 거의 매일 문을 두드렸다. 거기에는 맛있는 빵도 있고 뭔가 분위기 있는 음악이 흐르는 라디오가 있었다. 우리 집과 다르게 연탄 따위는 아끼지 않는 훈훈함이 있었고 이불 위에서 뒹구는 여유는 어린 내게도 충분히 쉼이 되었다. 분위기 최고다. “재철아, 교회 가보지 않을래?” 함께 교회 다녀보지 않겠냐는 제안.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인데 두렵기 보다는 뭔가 모를 설렘에 냉큼 엄마에게 물어본 후 허락을 받았다. 그렇게 나는 주일학교 예배를 참석하게 되었다. 교회는 농협 아저씨 방보다 더 좋았다. 친절했던 농협 아저씨 같은 사람들이 무지하게 많았다. 화장품 향 짙었던 선생님. (알고 보니 그 선생님은 화장품 방문판매 일을 하시는 분이었다.) 뭔가 분위기 있는 양복 입은 부장 선생님. 앞에서 멋지게 노래 부르는 선생님까지. 커다란 종이에 그려진 악보를 보며 큰 소리로 따라 부르던 노래도 재미났다. 교회에서 보고 들은 것을 집에 와서 재잘거리자 엄마는 100원을 주시며 예배에는 헌금이 필요하다는 말씀과 함께 남들 다 하는데 가만히 있지 말고 꼭 헌금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교회에 다녔더니 100원이 생겼다. 그것도 매주. 매 주 100원 들고 향하는 교회. 중간에 잠시 오락실 들러 50원은 오락 한 판하고, 남은 50원은 헌금하고. (엄마 죄송해요. 사실 하나님보다 엄마에게 더 미안하다.) 마룻바닥에서 나는 것인지, 방석에서 나는 것인지 모를 그 냄새도 참 좋았다. “흰 구름 뭉게뭉게 피는 하늘에!” 힘차게 한 곡 부르고 나면 간식도 먹고 몇 명씩 모여 성경을 공부했다. 성경 말씀을 듣고 공부하는 시간이 내게는 제법 묵직하게 다가왔다. 부모님 따라 교회 나오는 친구들을 보면 설교든, 공부시간이든 늘 장난스러웠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린 것들... “아, 믿음이 이렇게 자라는 것인가?” 시간이 흘러... 교회 앞마당에 들어서는 내 발걸음은 당당했고 능숙하게 신발장에 신을 넣고 방석을 깔고 앉아 기도를 한다. 기도 내용은 별 거 없다. “하나님, 저 왔어요.” 선생님이 그렇게 하면 된다고 하셨다. 뭔가 대단한 아이들이나 하는 것으로 보였던 헌금 위원 순번에 들어가게 되었다. 성경공부 시간에 선생님과 나누는 이야기도 많아졌다. 그렇게 교회 생활도 익숙해지고 있었다. 교회 다니며 맞는 첫 성탄절, 우리 주일학교는 분주하게 연극을 준비했다. “마구간에 오신 예수님” 이야기를 친구들과 함께 연극으로 꾸며야 했다. 각 자에게 배역이 주어지는 시간. 별 거 없는 아기 예수님 역할 (이 역은 진짜 그냥 누워만 있으면 된다.), 그냥 뒤에 탈을 쓰고 서 있으면 되는 동물들, 동방박사, 목자들, 그리고 요셉과 마리아. 누가 봐도 주인공은 요셉과 마리아다. 최근 교회 인싸로 등극한 나는 배역에 욕심이 생겼다. 요셉까지는 아니라도 박사 역할 정도는 주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동물 3” 내게 주어진 역할이다. 얼굴도 나오지 않는다. 대사도 없다. 그냥 탈을 쓰고 잘 서 있으면 된단다. 쓰린 속과 다르게 최대한 웃으며 첫 연습에 참여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일정을 소화했다. 나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니깐. 그리고 성탄 행사가 잘 끝나고 나는 교회를 끊었다. 더 이상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많은 친구들과 선생님의 연락에도 더 이상 교회에 가지 않았다. “아, 믿음이 이렇게 별거 없구나.” epilogue 고향집 방문할 때면 조용히 그 교회를 찾습니다. 지금은 현대식으로 바뀐 예배당에 들어가 잠시 기도하고, 주변을 괜히 살피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추억 한 자락 있을까 싶은 마음일까요. 그러다가 고향교회 담임목사님을 만나 초등학교 시절 1년 출석했던 주일학교 학생이라고, 지금은 목회를 하고 있다며 어색한 인사를 합니다. 그 목사님은 제가 교회를 다닐 당시 첫 부임하신 아주 젊은 목사님이셨는데 지금은 은퇴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궁금해서 이름도 모르는 농협 아저씨를 아시는지 목사님께 여쭈었습니다. 어디 계신지는 모르지만 지금 어느 시골에서 목회를 하시고 계시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보고 싶습니다. 그 아저씨가. 꼭 감사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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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7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9
    I. 서언(序言) 언젠가 모 교단의 노회장이 정기노회 개회예배 설교 시에‘명문노회가 되는 길’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어떤 신문에서 이를 기사화 하면서‘명품노회 되기 위한 노력 다짐’이란 제목을 달았다. 같은 내용을 말하면서 왜 다른 용어로 표기했을까? 또 어떤 대선 후보를 지지하는 글에‘명품을 통해 명인으로 인정받고, 명품은 장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에 답하는 그 대선후보는‘명품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함께하겠다.’는 말을 했다. 여기에서의 ‘명품 대한민국’이란 말은 옳은 용어인가? 또한 어떤 도시에서는 발전하자는 표어를 내걸면서 ‘명품 00 도시를 만들자’고 했고, 또 어떤 도시는‘명품 도시’가 아닌, ‘명문 00 도시’라고 했다. 창원시의 경우도 ‘명품 창원시’라고 했다. 이러한 표현들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이름 있는 목회자는 자신의 위임식 때 감사인사를 하는 자리에서‘본 교회와 교인은 명품이지만 저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겸손한 모습의 말로서 좋아 보이지만, 명품이란 말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게 느껴진다. 이에 본 호에서는 이 두 용어의 차이점을 논하여 보고자 한다. II. 명품(名品)과 명문(名門)의 차이점 두 용어를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명품’이란 단어이다. 한자의 뜻으로는 이름 名(명)과 물건 혹은 품위 品(품)자 이다. 사전적인 뜻은‘뛰어나거나 이름난 물건이나 작품’등을 말한다. 즉, 명품은 주로 사람을 대상으로 사용되는 말이 아니라 사물 등의 뛰어난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용어인 것이다. 두 번째는‘명문’이란 단어이다. 한자의 뜻을 보면, 이름 명(名), 집의 두 문을 의미하는 문 문(門)자 이다. 사전적인 뜻은 ‘이름 있는 문벌(門閥), 문벌이 있는 집안, 명가(名家)’를 의미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명문은 사물이 아닌, 사람의 모임으로 이루어진 가정이나 가문, 모임, 단체 등의 뛰어남을 말할 때 사용되어지는 말인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평소 자주 사용하는 명문과 명품의 구별은 분명하다. 하지만, 실제로 사용되어지는 경우들을 보면 이 두 용어의 차이를 큰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다. 앞에서 예를 든 경우가 다 그러하다. 심지어 대선후보 진영에서나 각 도시들에서도, 또 교계의 중진들까지도 이를 명확하게 잘 구분하지 못하고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뿐 아니라 이와 비슷한 의미의 용어들도 많이 있다. 명성이 있는 가문을 뜻하는 명가(名家), 명문에 속한 집안을 뜻하는 명문가(名文家), 정치를 잘하는 이름 있는 관원을 뜻하는 명관(名官), 문화를 높이고 정치를 잘하는 군주를 뜻하는 명군(名君), 이름난 선비를 말하는 명사(名士), 문벌이 좋은 집안을 뜻하는 명벌(名閥) 등 비슷하거나 뜻을 같이하는 여러 용어들이 있다. III . 결 어(結語)와 제언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명품과 명문의 경우처럼 왜 사람들은 단어의 뜻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면서도 이런 용어들을 자주 사용하는 것일까? 란 의문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언어문화 사대주의 사상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한문을 선호하고 국어를 경시하는 풍조는 훈민정음을 만든 세종대왕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한글 창제에 있어서 당시 집현전 학자였든 ‘최만리’, ‘정창손’등은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물론 나름대로의 시대적인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문 선호 사상은 조선시대 5백 년 동안 뿐 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그 잔재는 계속 남아 있다. 그렇다고 한자어를 사용하지 말자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그 이유는 한자어를 알지 못하고는 우리의 일상용어를 바로 분석하고 알기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두 용어처럼 애매모호한 말이나 뜻도 알지 못하면서 사용하는 용어들은 순수한 우리말이나 알기 쉬운 용어로 사용하면 좋지 않을까 라는 제언을 해본다. 예를 들면, 위의 두 용어 대신 ‘좋은 가문’, ‘좋은 노회’, ‘좋은 도시’, ‘좋은 대한민국’등이나 ‘이름 있는’, ‘아름다운’등의 표현을 쓰면 어떠할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 일컬어지는 현대에서는 알기 쉽게, 듣기 좋게, 보기 좋게 쓰는 말이 더 아름답고 좋은 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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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7
  • [최호숙 목사] 영적 피톤치드(Phytoncide)로 회복하라
    우리 인생은 육적으로 영적으로 연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육신이 병들고 나약해지면 어떤 통로를 통해서든지 치유 받고 건강하게 되어 행복한 삶을 누리려고 한다. 치유 방법 중에 “피톤치드(Phytoncide) 치유법”이 있다. 피톤치드는 합성어인데 식물을 뜻하는 ‘피톤(phyton), 과 살해, 죽이다를 뜻하는 ‘치드(cide)’를 합하여 만든 단어이다. 편백 나무를 비롯한 여러 나무가 자신을 위협하는 세균들과 해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 내는 천연물질 성분이 숲속의 향을 만들어 내는데 그 향이 피톤치드인 것이다. 사람들은 피톤치드 치료를 통해 건강한 삶을 회복하기 위해 우거진 숲을 찾아 휴양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육을 위한 피톤치드 요법이 있듯이 영적인 삶을 회복하기 위한 치료법도 있어야 한다. ‘회복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포카디스테미(ἀποκαθίστημι)’이다. ‘아포카디스테미’는 두 개의 단어가 결합 된 것인데, ‘아포(ἀπό)’는 ‘~ 로부터’ 떨어지게 하다.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이며, 카디스테미(καθίστημι)는 임명하다, 되게 하다, 원래 상태로 돌리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회복은 이전의 악한 상태를 떠나 원래 상태로 되돌아오는 것을 회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경 역사를 볼 때 위대한 지도자들도 연약한 모습을 지닌 회복의 대상이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은 나이 많아 늙었고,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받았을 때 달변이 아닌 자신의 어눌함과 애굽과 바로에 대한 ‘트라우마(trauma)’로 하나님의 소명을 거듭 부정했던(출 4:10-17) 사람이었고, 다윗은 간음했을 뿐 아니라 온갖 가정 문제를 갖고 있었으며, 육체의 가시(고후 12:7)라는 질병을 포함한 신체적 연약함(갈 4:14), 그리고 능하지 못한 언변에 대한 타인의 지적(고후 10:10)을 스스로도 인정해야 했던(고후 11:6) 사도 바울, 즉흥적이고 성격이 급한 불같았던 베드로 등등... 이런 약점이 있으면 당연히 열등감으로 연결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대하게 이끈 능력자들이었다. 왜냐하면 약하고 부족한 이들 안에서 역사하시는(고전 고후 13:3) 하나님은 그 약함을 강함으로 선용(고후 12:9)하실 뿐 아니라 우리 안의 손상되고(broken) 손실된(lost) 부분까지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회복의 주체는 우리 주님이시다. 주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회복도 기대할 수 없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숲에서 주님의 향기를 맛보며 살아가면 회복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회복을 위한 기도를 하였다.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난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시 39:13) 이 기도를 응답해 주셨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날까지 왕의 직분을 견고하게 감당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에게 회복을 주시는 이유는 먼저 회복된 우리가 주위 사람들의 회복 과정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예배 및 집회 금지 요청에 따라 한국 교회는 공적인 예배 중단의 위기까지 겪어야 했으며, 온라인 예배부터 인터넷 성찬식까지 다양한 신학적, 목회적 의견의 충돌로 목회자와 성도들에게는 더욱 어려운 시간이었다. 우리는 이제 “어두움을 저주하기보다는 한 줄기 빛을 비추라”라는 말처럼, 오늘날 교회에 필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우려 섞인 비판이 아니라 다시 한 번 회복할 수 있는 소망의 빛을 붙드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치료하시는 여호와라파 하나님의 의로운 오른손의 역사가 가정과 섬기는 교회 위에 충만하게 넘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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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7
  • [조희완 목사] 대접의 기쁨 (히13:1-2)
    우리나라에서 최고급 호텔하면 롯데호텔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 호텔은 수준이 있는 만큼 전 세계에서 유명한 분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습니다. 방송에서 그 롯데 호텔 총주방장으로 근무하시는 분 이병후 씨의 일상을 본적이 있습니다. 총주방장이 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지났고 많은 경력이 있는 분인 만큼 그 분이 만들어 내는 요리는 요리라기보다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는 생각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취재진이 그에게 질문하기를, 최고급호텔 총주방장으로서 가장 보람을 느낄 때가 언제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을 한번 예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유명한 요리사이기 때문에 자신이 만든 예술작품 같은 요리를 손님들이 맛보고 감탄할 때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최고급호텔인 만큼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을 위해서 아주 특별한 음식을 만들 때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한 달에 한 번씩 양로원(養老院)을 방문해서 소박하게 만든 음식으로 어른들을 대접할 때 가장 기쁘고 보람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화려한 호텔 요리에 비해서 양로원 음식은 너무 초라하지만 그래도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서 노인들을 대접할 때 너무 기쁘다고 했습니다. 남을 대접하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이고 보람 있는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받는 사람보다 하는 사람의 마음이 더 기쁜 것이 바로 대접(待接)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남을 대접하는 것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서로 대접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일 뿐 아니라 피차에 기쁨이 되고 서로 대접하는 마음이 풍성할 때 관계가 좋아지고 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서로 식사대접은 기쁨이 됩니다.(히13:1-2) 둘째는, 서로 인사대접은 기쁨이 됩니다.(잠15:23) 셋째는, 서로 기도대접은 기쁨이 됩니다.(엡6:18-19) 사회적으로 메말라 가는 시대에 서로 아름다운 대접으로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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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7
  • [오성한 목사] 당신 안에 기름부음이 있다.
    믿음의 출발이 중요하다. 믿는 자에게 기름부음이 있다는 것을 믿고 출발해야 한다. 당신에게 기름부음이 넘쳐난다. 기름부음을 이해하고 믿는 것은 능력의 출발이 된다. 기름부음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도록 도우시는 성령님의 인격적인 가르침이고, 동력이라고 표현해도 좋다. 기름부음은 어떤 능력 그 이상이다. 기름부음은 믿는 자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활동하심이다. 영계는 보이 세계 속에 함께 존재하는 세계다. 영계를 모르는 사람은 예수 믿으면서도 두려움이 떤다. 엘리사의 사환은 눈이 열리기 전에는 천군 천사들이 그렇게 많이 와 있는데도 모르고 떨었다. 큰일이라고 야단이었다. 골리앗이 앞에 있다고 두려움이 우리의 것인가? 영계가 안 보이는 사람은 어두움 속에 총을 쏘는 것과 같다. 안 보이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과 똑같다. 영계가 열려 정확하게 보고, 정조준하면 한방이면 끝난다. 놀라운 사실이다.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그런 축복이다. 성경은 같은 말씀을 계속 반복해서 하고 있다. 왜 이렇게 반복해서 보여주시는 것인가? 보고 듣고 믿으라는 것이다. 한 사건만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시고 끝내면 될 텐데 여러 사건으로 반복하시는 것은 믿지 못할까봐 거듭거듭 우리에게 배려해 주시는 사랑이다. 생명 걸고 이루어 놓은 업적을 인정해 주면 상대를 인격적으로 인정해 주는 일이 된다. 상대방이 생명 걸고 이룬 일을 몰라준다면 그 사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인정 할 때도 마찬가지다. 다른 것보다 예수님을 통해 성취하신 것을 인정해 드리고, 믿어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까지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나?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것만으로는 완전한 대답이 아니다. 주님은 왜 우리의 죄를 없애셔야만 하셨나? 그것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다. 우리의 죄를 청산하신 이유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함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승천이 끝이 아니다. 다시 오셨다. “내가 너희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고 하셨다. 그 분이 다시 오셨다. 성령으로 다시 오신 그 분을 인정하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를 속량하셨다. 육신의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우리가 잊고 살면 안 된다. 늘 우리 마음속에 “영원토록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영원토록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고하셨다. 임마누엘 하나님에 대해서 모셔 들이고, 받아들이고, 환영하고 영접하고 늘 그분과 대화해야한다. 기름부음이 있다. 확신을 가져라. 당신 안에 기름부음이 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후13:5)고 했다. 자신을 확증해야 한다.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한다.”고 했다(요일2:20,27). 기름부음이 없으면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다. 예수를 믿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동정녀의 몸에서 예수님이 태어났음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사람의 힘이 아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이것은 성령의 기름부음의 결과다. 그러기에 성경은 기름부음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한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요일2:27)라고 말씀한다.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있다고 말씀하셨다. 능력의 출발은 믿음에서 출발 된다. 기름부음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믿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 물을 마셔라.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는 그 배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되고, 마시기만하면 영원토록 생수의 강이 흐를 것이다.”고 하셨다. “마셔라”는 말과 “먹어라”는 말은 “믿어라”는 말이다. 예수님을 믿어라. 예수를 믿으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른다. 말씀대로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하는 것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모셔 들이는 것이다. 지금도 당신 뱃속에 끊임없이 흐르는 한강보다 더 놀라운 성령의 강물이 흐르고 있다.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다(요7:39). 예수를 믿는다면 성령의 역사가 당신에게 있다. 기름부음이 당신 안에 있다. 당신에게 기름부음이 넘쳐난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의 기초다. 성령 충만이 신앙생활의 종점이 아니고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기름부음을 더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기름부음이 넘쳐나고 있음을 발견하고 믿는 것이 기름부음에 장악되게 된다.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온전히 계실 뿐 아니라 성령의 생수의 강이 철철 흘러넘침을 믿을 때 기름부음에 장악된다. 기름부음이 넘치고 있음을 말고 믿음의 확증을 가지고 사는 것이 당신 안에 잠자는 성령의 능력을 깨우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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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7
  • [김성수 총장] 세상 뉴스, 이렇게 보자!
    요즘 언론을 통해서 보도 되는 국내외 많은 뉴스들은 우리 모두를 정말 짜증스럽게 만들고, 때로는 분노하거나 안타깝고 슬프게 만들고 있습니다. 집무실을 굳이 용산으로 옮기겠다는 대통령 당선인, 용산 이전을 인정하고 예비비까지 책정해 놓고도 떠나기 며칠 전에 굳이 한마디 초를 쳐서 불화를 자초하는 ‘내로남불’과 자화자찬 대통령, ‘검수완박’을 위한 위장탈당 국회의원, 걸핏하면 국민을 위한다는 쓰레기 같은 일부 정치인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대통령의 애끓는 호소에는 경청은 커녕 자리를 메꾸어 주는 예의도 보이지 않으면서 자기들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한 법안의 편법통과를 위해서는 새벽에도 꽉 차게 모여 혈투를 벌이는 깡패 집단 같은 국회를 보면서 적어도 자유 대한민국에는 국회를 해산해 버리는 것이 세금도 아끼고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 길이라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합니다. 국제적으로는 독재자 푸틴의 우크라이나 불법 침략, 천인공노할 잔인한 만행의 뉴스들이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세상 뉴스를 우리는 어떤 가치관의 틀을 통해 바라보고 들어야 할까요? 러시아군대가 우크라이나 마리우폴 도시 전체를 황폐화시키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아이들까지 무참히 살상하며 부녀자들을 성폭행하는 짐승보다 못한 행동을 하고 있을 때, 어떤 자리에 모인 한국 아줌마들이 “나는 러시아 산 말린 생선을 고추장에 찍어 먹는 걸 참 좋아하는데 전쟁 때문에 앞으로 생선 값 오를까 걱정이다”고 말하는 “대갈통 텅 빈” 소리를 들을 때는 오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 씌우고 싶었을 뿐 정말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때 미국 TV 뉴스에는 바이든 대통령이 미국 국민들을 향해서 이제 러시아산 가스 수입을 중단하는 조처를 취해야 하는데 “자유에는 희생이 따른다”는 진리를 생각하며 석유 값 인상의 작은 고통을 감내해 달라고 호소하는 연설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국내 정치를 포함한 세상 온갖 뉴스를 대하면서 단순히 주가 폭락, 가스 값 인상, 생선 값 폭등이라는 피상적인 수준이 아니라, 창조와 타락과 구속이라는 니고데모의 안경을 통해 듣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등질 때 이렇게도 악할 수 있다는 인간 타락의 참혹함을 볼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 세계와 인간의 문명을 이렇게도 잿더미로 만들 있는 인간의 사악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 아파하는 그리스도의 마음, 인간의 사악함 너머에 있는 그리스도의 긍휼, 위로, 궁극적인 심판, 하늘의 평강으로 충만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소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사의 배후에서 지금도 역사하는 영적인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위대한 설교자였던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자주 말하기를 자신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통치하시는가를 보기 위해서 신문을 읽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뉴스를 접하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문이나 텔레비젼을 통해 방영되는 소식을 듣고 보면서 우리는 너무 실망하거나 분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스펄전의 방법을 따른다고 하면 우리는 대중매체를 통해 보도되는 모든 재난들과 전쟁 범죄, 또는 정부의 실책들에 관해서 읽고 들으면서도 여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손길이 이 모든 인간사들을 인도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국내외 소식들은 성경이 이미 오래 전에 우리에게 가르쳐준 어떤 진리를 확증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는 필연적으로 끝없는 진보가 아니라 필연적인 쇠퇴의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수많은 다양한 세상 제국들간의 힘의 투쟁은 궁극적으로 이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 사이의 투쟁으로 바뀌어지게 될 것입니다. 모든 지상의 세력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대항하는 전면전으로 바뀔 때는 자유 민주국가와 공산주의 국가들간의 대립도, 동서양의 대립도, 또는 문명간의 충돌도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 사이의 투쟁이라는 거대한 무대의 배경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 사이의 절대적인 대립은 시간이 흐를수록 꾸준히 그리고 계속적으로 첨예화되어갈 뿐입니다. 시간이 지나게 되면 다양한 형태의 세속 권력들은 결국 반기독교적인 세력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엄청난 투쟁 후에 이 모든 세상 세력들은 결국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기름 부은 자에게 굴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 역사의 주요 사건들을 사건들 그 자체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면 그 사건의 구속사적 의미를 올바로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다니엘은 흉흉하는 바다에서 나타나는 각기 다른 네 마리의 짐승들을 보았습니다. 이들 짐승들은 동시에 한꺼번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차례차례 나타납니다. 이것은 마치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다양한 세상 제국들이 차례로 나타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의 거대한 세력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져 없어지고 또 다른 세력들이 그 뒤를 계승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주신 계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은 이 지상의 국가들과 권력 있는 통치자들은 궁극적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 즉, 하나님의 백성들과 그리스도의 교회를 대항하는 세력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왕국은 다른 왕국보다도 그 가면을 훨씬 더 빨리 일찍 벗을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것은 단지 시간상의 문제일 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민족들로부터 미움을 당할 것입니다. 심지어는 종교적 자유를 위해서 투쟁한다고 주장하는 나라들로부터도 미움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은 쇠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모든 인간 나라들의 종말을 장식하게 될 것이며, 이 때에 모든 지상의 세력들은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숨길”에 의해서 녹아지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세계관의 틀을 통해서 번잡한 세상 뉴스들을 접하면서도 하늘의 위로와 평강을 맛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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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03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신재철 목사] 교회를 끊다
    # 교회를 끊다. 앞집, 방 한 칸에 혼자 사는 아저씨. 나는 그 아저씨를 ‘농협 아저씨’라고 불렀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 아저씨가 농협에 출근하고 있었기 때문. 시골 살이, 재미있는 게 별로 없었던 내게 자주 놀러오라는 아저씨 말에 민폐인줄도 모르고 거의 매일 문을 두드렸다. 거기에는 맛있는 빵도 있고 뭔가 분위기 있는 음악이 흐르는 라디오가 있었다. 우리 집과 다르게 연탄 따위는 아끼지 않는 훈훈함이 있었고 이불 위에서 뒹구는 여유는 어린 내게도 충분히 쉼이 되었다. 분위기 최고다. “재철아, 교회 가보지 않을래?” 함께 교회 다녀보지 않겠냐는 제안.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인데 두렵기 보다는 뭔가 모를 설렘에 냉큼 엄마에게 물어본 후 허락을 받았다. 그렇게 나는 주일학교 예배를 참석하게 되었다. 교회는 농협 아저씨 방보다 더 좋았다. 친절했던 농협 아저씨 같은 사람들이 무지하게 많았다. 화장품 향 짙었던 선생님. (알고 보니 그 선생님은 화장품 방문판매 일을 하시는 분이었다.) 뭔가 분위기 있는 양복 입은 부장 선생님. 앞에서 멋지게 노래 부르는 선생님까지. 커다란 종이에 그려진 악보를 보며 큰 소리로 따라 부르던 노래도 재미났다. 교회에서 보고 들은 것을 집에 와서 재잘거리자 엄마는 100원을 주시며 예배에는 헌금이 필요하다는 말씀과 함께 남들 다 하는데 가만히 있지 말고 꼭 헌금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교회에 다녔더니 100원이 생겼다. 그것도 매주. 매 주 100원 들고 향하는 교회. 중간에 잠시 오락실 들러 50원은 오락 한 판하고, 남은 50원은 헌금하고. (엄마 죄송해요. 사실 하나님보다 엄마에게 더 미안하다.) 마룻바닥에서 나는 것인지, 방석에서 나는 것인지 모를 그 냄새도 참 좋았다. “흰 구름 뭉게뭉게 피는 하늘에!” 힘차게 한 곡 부르고 나면 간식도 먹고 몇 명씩 모여 성경을 공부했다. 성경 말씀을 듣고 공부하는 시간이 내게는 제법 묵직하게 다가왔다. 부모님 따라 교회 나오는 친구들을 보면 설교든, 공부시간이든 늘 장난스러웠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린 것들... “아, 믿음이 이렇게 자라는 것인가?” 시간이 흘러... 교회 앞마당에 들어서는 내 발걸음은 당당했고 능숙하게 신발장에 신을 넣고 방석을 깔고 앉아 기도를 한다. 기도 내용은 별 거 없다. “하나님, 저 왔어요.” 선생님이 그렇게 하면 된다고 하셨다. 뭔가 대단한 아이들이나 하는 것으로 보였던 헌금 위원 순번에 들어가게 되었다. 성경공부 시간에 선생님과 나누는 이야기도 많아졌다. 그렇게 교회 생활도 익숙해지고 있었다. 교회 다니며 맞는 첫 성탄절, 우리 주일학교는 분주하게 연극을 준비했다. “마구간에 오신 예수님” 이야기를 친구들과 함께 연극으로 꾸며야 했다. 각 자에게 배역이 주어지는 시간. 별 거 없는 아기 예수님 역할 (이 역은 진짜 그냥 누워만 있으면 된다.), 그냥 뒤에 탈을 쓰고 서 있으면 되는 동물들, 동방박사, 목자들, 그리고 요셉과 마리아. 누가 봐도 주인공은 요셉과 마리아다. 최근 교회 인싸로 등극한 나는 배역에 욕심이 생겼다. 요셉까지는 아니라도 박사 역할 정도는 주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동물 3” 내게 주어진 역할이다. 얼굴도 나오지 않는다. 대사도 없다. 그냥 탈을 쓰고 잘 서 있으면 된단다. 쓰린 속과 다르게 최대한 웃으며 첫 연습에 참여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일정을 소화했다. 나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니깐. 그리고 성탄 행사가 잘 끝나고 나는 교회를 끊었다. 더 이상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많은 친구들과 선생님의 연락에도 더 이상 교회에 가지 않았다. “아, 믿음이 이렇게 별거 없구나.” epilogue 고향집 방문할 때면 조용히 그 교회를 찾습니다. 지금은 현대식으로 바뀐 예배당에 들어가 잠시 기도하고, 주변을 괜히 살피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추억 한 자락 있을까 싶은 마음일까요. 그러다가 고향교회 담임목사님을 만나 초등학교 시절 1년 출석했던 주일학교 학생이라고, 지금은 목회를 하고 있다며 어색한 인사를 합니다. 그 목사님은 제가 교회를 다닐 당시 첫 부임하신 아주 젊은 목사님이셨는데 지금은 은퇴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궁금해서 이름도 모르는 농협 아저씨를 아시는지 목사님께 여쭈었습니다. 어디 계신지는 모르지만 지금 어느 시골에서 목회를 하시고 계시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보고 싶습니다. 그 아저씨가. 꼭 감사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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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7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9
    I. 서언(序言) 언젠가 모 교단의 노회장이 정기노회 개회예배 설교 시에‘명문노회가 되는 길’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어떤 신문에서 이를 기사화 하면서‘명품노회 되기 위한 노력 다짐’이란 제목을 달았다. 같은 내용을 말하면서 왜 다른 용어로 표기했을까? 또 어떤 대선 후보를 지지하는 글에‘명품을 통해 명인으로 인정받고, 명품은 장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에 답하는 그 대선후보는‘명품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함께하겠다.’는 말을 했다. 여기에서의 ‘명품 대한민국’이란 말은 옳은 용어인가? 또한 어떤 도시에서는 발전하자는 표어를 내걸면서 ‘명품 00 도시를 만들자’고 했고, 또 어떤 도시는‘명품 도시’가 아닌, ‘명문 00 도시’라고 했다. 창원시의 경우도 ‘명품 창원시’라고 했다. 이러한 표현들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이름 있는 목회자는 자신의 위임식 때 감사인사를 하는 자리에서‘본 교회와 교인은 명품이지만 저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겸손한 모습의 말로서 좋아 보이지만, 명품이란 말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게 느껴진다. 이에 본 호에서는 이 두 용어의 차이점을 논하여 보고자 한다. II. 명품(名品)과 명문(名門)의 차이점 두 용어를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명품’이란 단어이다. 한자의 뜻으로는 이름 名(명)과 물건 혹은 품위 品(품)자 이다. 사전적인 뜻은‘뛰어나거나 이름난 물건이나 작품’등을 말한다. 즉, 명품은 주로 사람을 대상으로 사용되는 말이 아니라 사물 등의 뛰어난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용어인 것이다. 두 번째는‘명문’이란 단어이다. 한자의 뜻을 보면, 이름 명(名), 집의 두 문을 의미하는 문 문(門)자 이다. 사전적인 뜻은 ‘이름 있는 문벌(門閥), 문벌이 있는 집안, 명가(名家)’를 의미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명문은 사물이 아닌, 사람의 모임으로 이루어진 가정이나 가문, 모임, 단체 등의 뛰어남을 말할 때 사용되어지는 말인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평소 자주 사용하는 명문과 명품의 구별은 분명하다. 하지만, 실제로 사용되어지는 경우들을 보면 이 두 용어의 차이를 큰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다. 앞에서 예를 든 경우가 다 그러하다. 심지어 대선후보 진영에서나 각 도시들에서도, 또 교계의 중진들까지도 이를 명확하게 잘 구분하지 못하고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뿐 아니라 이와 비슷한 의미의 용어들도 많이 있다. 명성이 있는 가문을 뜻하는 명가(名家), 명문에 속한 집안을 뜻하는 명문가(名文家), 정치를 잘하는 이름 있는 관원을 뜻하는 명관(名官), 문화를 높이고 정치를 잘하는 군주를 뜻하는 명군(名君), 이름난 선비를 말하는 명사(名士), 문벌이 좋은 집안을 뜻하는 명벌(名閥) 등 비슷하거나 뜻을 같이하는 여러 용어들이 있다. III . 결 어(結語)와 제언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명품과 명문의 경우처럼 왜 사람들은 단어의 뜻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면서도 이런 용어들을 자주 사용하는 것일까? 란 의문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언어문화 사대주의 사상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한문을 선호하고 국어를 경시하는 풍조는 훈민정음을 만든 세종대왕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한글 창제에 있어서 당시 집현전 학자였든 ‘최만리’, ‘정창손’등은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물론 나름대로의 시대적인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문 선호 사상은 조선시대 5백 년 동안 뿐 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그 잔재는 계속 남아 있다. 그렇다고 한자어를 사용하지 말자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그 이유는 한자어를 알지 못하고는 우리의 일상용어를 바로 분석하고 알기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두 용어처럼 애매모호한 말이나 뜻도 알지 못하면서 사용하는 용어들은 순수한 우리말이나 알기 쉬운 용어로 사용하면 좋지 않을까 라는 제언을 해본다. 예를 들면, 위의 두 용어 대신 ‘좋은 가문’, ‘좋은 노회’, ‘좋은 도시’, ‘좋은 대한민국’등이나 ‘이름 있는’, ‘아름다운’등의 표현을 쓰면 어떠할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 일컬어지는 현대에서는 알기 쉽게, 듣기 좋게, 보기 좋게 쓰는 말이 더 아름답고 좋은 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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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7
  • [최호숙 목사] 영적 피톤치드(Phytoncide)로 회복하라
    우리 인생은 육적으로 영적으로 연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육신이 병들고 나약해지면 어떤 통로를 통해서든지 치유 받고 건강하게 되어 행복한 삶을 누리려고 한다. 치유 방법 중에 “피톤치드(Phytoncide) 치유법”이 있다. 피톤치드는 합성어인데 식물을 뜻하는 ‘피톤(phyton), 과 살해, 죽이다를 뜻하는 ‘치드(cide)’를 합하여 만든 단어이다. 편백 나무를 비롯한 여러 나무가 자신을 위협하는 세균들과 해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 내는 천연물질 성분이 숲속의 향을 만들어 내는데 그 향이 피톤치드인 것이다. 사람들은 피톤치드 치료를 통해 건강한 삶을 회복하기 위해 우거진 숲을 찾아 휴양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육을 위한 피톤치드 요법이 있듯이 영적인 삶을 회복하기 위한 치료법도 있어야 한다. ‘회복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포카디스테미(ἀποκαθίστημι)’이다. ‘아포카디스테미’는 두 개의 단어가 결합 된 것인데, ‘아포(ἀπό)’는 ‘~ 로부터’ 떨어지게 하다.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이며, 카디스테미(καθίστημι)는 임명하다, 되게 하다, 원래 상태로 돌리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회복은 이전의 악한 상태를 떠나 원래 상태로 되돌아오는 것을 회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경 역사를 볼 때 위대한 지도자들도 연약한 모습을 지닌 회복의 대상이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은 나이 많아 늙었고,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받았을 때 달변이 아닌 자신의 어눌함과 애굽과 바로에 대한 ‘트라우마(trauma)’로 하나님의 소명을 거듭 부정했던(출 4:10-17) 사람이었고, 다윗은 간음했을 뿐 아니라 온갖 가정 문제를 갖고 있었으며, 육체의 가시(고후 12:7)라는 질병을 포함한 신체적 연약함(갈 4:14), 그리고 능하지 못한 언변에 대한 타인의 지적(고후 10:10)을 스스로도 인정해야 했던(고후 11:6) 사도 바울, 즉흥적이고 성격이 급한 불같았던 베드로 등등... 이런 약점이 있으면 당연히 열등감으로 연결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대하게 이끈 능력자들이었다. 왜냐하면 약하고 부족한 이들 안에서 역사하시는(고전 고후 13:3) 하나님은 그 약함을 강함으로 선용(고후 12:9)하실 뿐 아니라 우리 안의 손상되고(broken) 손실된(lost) 부분까지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회복의 주체는 우리 주님이시다. 주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회복도 기대할 수 없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숲에서 주님의 향기를 맛보며 살아가면 회복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회복을 위한 기도를 하였다.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난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시 39:13) 이 기도를 응답해 주셨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날까지 왕의 직분을 견고하게 감당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에게 회복을 주시는 이유는 먼저 회복된 우리가 주위 사람들의 회복 과정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예배 및 집회 금지 요청에 따라 한국 교회는 공적인 예배 중단의 위기까지 겪어야 했으며, 온라인 예배부터 인터넷 성찬식까지 다양한 신학적, 목회적 의견의 충돌로 목회자와 성도들에게는 더욱 어려운 시간이었다. 우리는 이제 “어두움을 저주하기보다는 한 줄기 빛을 비추라”라는 말처럼, 오늘날 교회에 필요한 것은 현실에 대한 우려 섞인 비판이 아니라 다시 한 번 회복할 수 있는 소망의 빛을 붙드는 일이어야 할 것이다. 치료하시는 여호와라파 하나님의 의로운 오른손의 역사가 가정과 섬기는 교회 위에 충만하게 넘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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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7
  • [조희완 목사] 대접의 기쁨 (히13:1-2)
    우리나라에서 최고급 호텔하면 롯데호텔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 호텔은 수준이 있는 만큼 전 세계에서 유명한 분들이 많이 이용하고 있습니다. 방송에서 그 롯데 호텔 총주방장으로 근무하시는 분 이병후 씨의 일상을 본적이 있습니다. 총주방장이 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지났고 많은 경력이 있는 분인 만큼 그 분이 만들어 내는 요리는 요리라기보다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는 생각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취재진이 그에게 질문하기를, 최고급호텔 총주방장으로서 가장 보람을 느낄 때가 언제냐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을 한번 예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유명한 요리사이기 때문에 자신이 만든 예술작품 같은 요리를 손님들이 맛보고 감탄할 때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최고급호텔인 만큼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을 위해서 아주 특별한 음식을 만들 때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한 달에 한 번씩 양로원(養老院)을 방문해서 소박하게 만든 음식으로 어른들을 대접할 때 가장 기쁘고 보람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화려한 호텔 요리에 비해서 양로원 음식은 너무 초라하지만 그래도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서 노인들을 대접할 때 너무 기쁘다고 했습니다. 남을 대접하는 것은 참 아름다운 일이고 보람 있는 일입니다. 어떻게 보면 받는 사람보다 하는 사람의 마음이 더 기쁜 것이 바로 대접(待接)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남을 대접하는 것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서로 대접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일 뿐 아니라 피차에 기쁨이 되고 서로 대접하는 마음이 풍성할 때 관계가 좋아지고 복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서로 식사대접은 기쁨이 됩니다.(히13:1-2) 둘째는, 서로 인사대접은 기쁨이 됩니다.(잠15:23) 셋째는, 서로 기도대접은 기쁨이 됩니다.(엡6:18-19) 사회적으로 메말라 가는 시대에 서로 아름다운 대접으로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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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7
  • [오성한 목사] 당신 안에 기름부음이 있다.
    믿음의 출발이 중요하다. 믿는 자에게 기름부음이 있다는 것을 믿고 출발해야 한다. 당신에게 기름부음이 넘쳐난다. 기름부음을 이해하고 믿는 것은 능력의 출발이 된다. 기름부음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도록 도우시는 성령님의 인격적인 가르침이고, 동력이라고 표현해도 좋다. 기름부음은 어떤 능력 그 이상이다. 기름부음은 믿는 자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활동하심이다. 영계는 보이 세계 속에 함께 존재하는 세계다. 영계를 모르는 사람은 예수 믿으면서도 두려움이 떤다. 엘리사의 사환은 눈이 열리기 전에는 천군 천사들이 그렇게 많이 와 있는데도 모르고 떨었다. 큰일이라고 야단이었다. 골리앗이 앞에 있다고 두려움이 우리의 것인가? 영계가 안 보이는 사람은 어두움 속에 총을 쏘는 것과 같다. 안 보이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과 똑같다. 영계가 열려 정확하게 보고, 정조준하면 한방이면 끝난다. 놀라운 사실이다.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 그런 축복이다. 성경은 같은 말씀을 계속 반복해서 하고 있다. 왜 이렇게 반복해서 보여주시는 것인가? 보고 듣고 믿으라는 것이다. 한 사건만으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보여주시고 끝내면 될 텐데 여러 사건으로 반복하시는 것은 믿지 못할까봐 거듭거듭 우리에게 배려해 주시는 사랑이다. 생명 걸고 이루어 놓은 업적을 인정해 주면 상대를 인격적으로 인정해 주는 일이 된다. 상대방이 생명 걸고 이룬 일을 몰라준다면 그 사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인정 할 때도 마찬가지다. 다른 것보다 예수님을 통해 성취하신 것을 인정해 드리고, 믿어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까지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나?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것만으로는 완전한 대답이 아니다. 주님은 왜 우리의 죄를 없애셔야만 하셨나? 그것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다. 우리의 죄를 청산하신 이유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함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다. 승천이 끝이 아니다. 다시 오셨다. “내가 너희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고 하셨다. 그 분이 다시 오셨다. 성령으로 다시 오신 그 분을 인정하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를 속량하셨다. 육신의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우리가 잊고 살면 안 된다. 늘 우리 마음속에 “영원토록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영원토록 내가 너와 함께하리라.”고하셨다. 임마누엘 하나님에 대해서 모셔 들이고, 받아들이고, 환영하고 영접하고 늘 그분과 대화해야한다. 기름부음이 있다. 확신을 가져라. 당신 안에 기름부음이 있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후13:5)고 했다. 자신을 확증해야 한다.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한다.”고 했다(요일2:20,27). 기름부음이 없으면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다. 예수를 믿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동정녀의 몸에서 예수님이 태어났음을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사람의 힘이 아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이것은 성령의 기름부음의 결과다. 그러기에 성경은 기름부음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한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요일2:27)라고 말씀한다.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있다고 말씀하셨다. 능력의 출발은 믿음에서 출발 된다. 기름부음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믿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 물을 마셔라.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는 그 배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되고, 마시기만하면 영원토록 생수의 강이 흐를 것이다.”고 하셨다. “마셔라”는 말과 “먹어라”는 말은 “믿어라”는 말이다. 예수님을 믿어라. 예수를 믿으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른다. 말씀대로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하는 것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모셔 들이는 것이다. 지금도 당신 뱃속에 끊임없이 흐르는 한강보다 더 놀라운 성령의 강물이 흐르고 있다.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다(요7:39). 예수를 믿는다면 성령의 역사가 당신에게 있다. 기름부음이 당신 안에 있다. 당신에게 기름부음이 넘쳐난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의 기초다. 성령 충만이 신앙생활의 종점이 아니고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기름부음을 더 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기름부음이 넘쳐나고 있음을 발견하고 믿는 것이 기름부음에 장악되게 된다.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온전히 계실 뿐 아니라 성령의 생수의 강이 철철 흘러넘침을 믿을 때 기름부음에 장악된다. 기름부음이 넘치고 있음을 말고 믿음의 확증을 가지고 사는 것이 당신 안에 잠자는 성령의 능력을 깨우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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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7
  • [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1)
    사랑의 리더십 사랑이 제일입니다.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사랑이 중요한 것을 아는데 사랑하기가 힘듭니다. 사랑은 성령충만의 열매입니다. 성령충만해야 사랑하게 됩니다. 리더는 사랑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사랑이 많은 리더가 좋은 리더입니다. 사랑의 리더십이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사랑으로 무슨 일을 하면 부작용이 적고 열매가 좋게 맺힙니다. 사랑의 리더가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이 지혜요, 능력이요, 리더십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 받고 싶어합니다. 사랑해 주는 자를 좋아하고 따르게 됩니다. 사랑이 인간관계를 잘 되게 합니다. 미움은 관계를 깨뜨립니다. 미움을 가진 리더는 무너지고 실패합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사랑의 리더십, 관계 리더십입니다. 사랑은 심는 것입니다. 사랑을 심어야 사랑을 거두게 됩니다. 누가 큰 자일까요? 사랑이 많아 사랑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사랑의 리더십이 최고의 리더십입니다. 사랑은 좋은 영향력을 주고 감동을 줍니다. 사랑하면 이해합니다. 대화합니다. 관심을 가지고 기도해 줍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사랑 받고 섬김, 대접 받으면 기쁘고 행복합니다. 사랑하면 후회가 없게 되고,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면 후회하게 됩니다. 사랑이 식어진 시대입니다. 인간은 사랑에 목말라 합니다. 사랑 받기만 바라지말고 내가 먼저 사랑하는 것이 삶의 지혜, 관계의 지혜입니다. 사랑이 많은 리더는 사랑하는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리더가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사랑하면서 사는 사랑의 리더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는 지혜자이고 미워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리더십으로 좋은 영향을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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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7
  • [황권철 목사] 베드로(Peter's Behind Stories)-열정의 사도
    베드로(Peter's Behind Stories)-열정의 사도  베드로는 주님의 공생애 초기에 부름 받았다. 그러나 장소와 상황에 있어 다소 차이가 있다. 공관복음서에서는 그 장소가 갈릴리 바닷가에서 이루어 진 사건이라고 한다. 마태와 마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바닷가에 거니시다가 시몬과 안드레를 처음으로 부르셨으며 야고보와 요한도 불렀다. 그들은 즉시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다(마4:18-22, 막1:16-20). 누가복음에는 부르신 장소는 일치하나 안드레에 대한 언급이 없고, 야고보와 요한도 별로 중요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눅5:1-11). 요한복음은 안드레와 형 시몬이 세례요한의 제자였음을 말하고 있다. 주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는 것을 보고 메시야이심을 알게 되어 그의 제자들이 예수를 따를 것을 권고했다(요1:35-42). 공관복음서와 요한복음인 사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주님을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 안드레이며 그곳은 요단 남쪽 골짜기였다(요1:28). 안드레는 그 형 시몬에게 말했고 그들이 어느 날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던 중 주님을 만나 주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를 따랐다. 이런 면에서 베드로는 열두 제자의 부르심에서 처음으로 부름 받은 자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열두 제자 중에 언제나 그 이름이 첫 번째 불리게 된다(마10:2, 막3:16, 눅6:14, 행1:13).  베드로는 형제 안드레와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 잡는 어부였다. 호수 북쪽에 있는 가버나움이 그의 고향이었다(막1:21, 29). 요한에 의하면 빌립의 거주지 벳세다가 안드레와 베드로의 동리였다(요1:44). 이는 갈릴리 바다의 서북쪽 거주 지역을 갈릴리라고 하는 일반적 의미에서 벳새다도 갈릴리에 있는 한 동리로 요한이 생각한 것으로 본다. 예수께서 전도하실 당시에는 이들 형제의 집이 가버나움에 있었으며 그곳에서 그들은 고기 잡는 일에 있어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동업자들이었다(눅5:10).  누가는 베드로의 소명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 초기에 베드로와 안드레는 세베대의 아들들과 더불어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었다. 그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마4:18). 즉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고기를 잡지 못해서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때 주님은 그들에게 다가오셔서 그물을 다시 내릴 것을 명령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려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다. 이 사건에서 베드로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그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5:8)라고 고백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제 이후로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5:10)는 주님의 말씀처럼 제자가 되었다. 베드로는 부름 받을 당시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다(마8:14, 막1:30, 눅4:38). 본문을 보면 마태가 그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 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후에 사도시대에 이르러 바울은 게바가 그의 아내와 여러 교회의 선교 여행에 함께 했음을 진술하고 있다(고전9:5). 그러므로 로마 카톨릭이 사제들의 결혼을 금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베드로의 인간성    그의 성품은 다혈질적이었다.4 생각하기 이전에 행동하는 단순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님의 제자가 된 이후에도 많은 실수로 넘어지기도 했다. 베드로의 성급하고 변덕스러운 면모를 잘 보여 주는 사례는 그가 물 위로 걷고자 했던 사건이다. 주님은 그의 믿음이 작은 것을 책망하셨다(마14:28-32). 그러나 그는 제자들 중 최초로 주님에 대한 훌륭한 신앙고백을 했다(마16:16). 하지만 곧 이어 주님께서 자신의 수난을 예고하시자 격렬한 태도로 반대했다(마16:22). 이런 베드로를 보시고 예수님은 사단이라고 말씀하셨다(마16:23). 또한 다락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실 때 베드로는 이를 완강히 거부했지만 예수님은 다시 베드로의 생각을 바로 잡아 주셨다(요13:4-11). 주님이 감람산으로 가는 도중에 모든 제자가 예수를 버리게 될 것이라는 말씀하자 베드로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감 있는 태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다(요18:25-27).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이 사건은 4복음서 기자들 모두가 기록하고 있다. 마태와 마가에 의하여 이르되 주님에 대한 베드로의 세 번째 부인은 저주와 맹세로써 이루어졌다.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울더라”(마26:74).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명세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막14:71)하니 닭이 두 번 울었다. 그는 곧 바로 자신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으며 얼마나 비겁한 자였는지를 통곡하며 회개했다. 그러나 베드로가 이같이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은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막14:72) 했고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께 받은 말씀을 들어야 기억이 나고 깊이 생각할 때 회개할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연약함 가운데서 지도력이 개발되었다. 그가 물 위로 걸어간 사건이나(마14:28),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메시야이심을 강조한 고백이나(마16:16, 막8:29, 눅9:20), 그 외에 형제가 범죄 했을 때 몇 번 용서해 주리이까(마18:21)라 하고 묻는 질문에서 베드로가 항상 제자들을 대변하는 대표자 같이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열두 사도의 중심인물을 언급할 때도 베드로는 항상 선임으로 언급되고 있다. 베드로의 우위성은 다른 여러 방식으로 나타난다. 주님은 제자들 중 가장 먼저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에 가셨으며(마8:14, 막1:29, 눅4:38), 갈릴리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도 베드로의 배를 띄우게 하셨고(눅5:3), 결정적인 중요한 때 예수 부활의 첫 목격자로서 베드로에게 보이셨다(눅24:34, 고전15:5). 이는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이후에도 그의 동료인 주님의 제자들을 다시 모으는 임무를 베드로가 맡게 되었다(눅22:31-32). 그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랐으며, 또한 초대교회 중심적인 지도자였다. 베드로가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교회의 지도자로서 준비되어 있지 못했다. 그러나 부활신앙으로 베드로와 모든 제자들은 사도적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다. 이 같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먼저 본 자가 사도 중에 으뜸이 되는 것과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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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2022-05-17
  • [박동철 장로] 성경의 ‘라마나욧’과 오늘의 대한민국 ‘광화문’
    이스라엘이 사사 시대를 지나면서 대선지자 사무엘이 늙어 고향 라마에 머물 때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사무엘에게 나라의 왕을 세울 것을 요청한다. 이때 사무엘이 여호와께 기도하면서 오가는 하나님과의 대화가 흥미롭다. 사무엘상 8장을 보면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울 것을 요청하니 사무엘은 기뻐하지 않으면서 여호와께 기도한다. 또한 여호와는 사무엘에게 백성의 말을 들으라고 하면서 백성들이 당신을 버리고 자기들의 왕을 세우려고 하는데 섭섭함을 토로한다. 그리고 여호와는 사무엘에게 백성에게 잘 경계하게 하고 왕의 제도를 알려준다. 그리고 사무엘은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함께 이스라엘 왕을 준비케하고 사울을 택하여 라마에서 기름 부어 세워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세운다. 성경에 나타났듯이 사울은 이스라엘을 통치하는데 처음에는 당시 이웃 강대국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전의 공적을 세우고 통치를 잘했으나 갈수록 사울의 이스라엘 통치는 잘못되어갔다. 무엇보다 우상에 의지하는 죄를 범했으며 왕이라는 자기 본위의 통치에 머물면서 여호와에 대한 의지를 잃어갔다. 당시 이스라엘은 블레셋을 비롯한 주변국과의 전쟁사 이야기가 모든 역사였다. 큰 문제가 생긴 것은 다윗이 새롭게 등장함으로써 사울과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사울은 악신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어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은 어린 목동이었으나 불타는 애국심에 철천지원수 블레셋의 장군 골리앗을 죽이고 일약 이스라엘의 대스타로 떠오른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질투와 핍박에 시달렸으며 왕이 되기까지 쫓겨 다녀야 했다. 선지자 사무엘은 사울의 실패의 국가관리에 실망하고 다시 고향 '라마'로 돌아가 거기서 '나욧'이란 학교를 세워 후진 양성에 힘쓴다. 이즈음 다윗이 사울을 피해 라마로 도망가 사무엘을 만나고 학교 라마나욧에서 사무엘의 지도를 받게 된다.(삼상19:18) 그리고 다시 사울에게 쫓겨다닌다. 여호와는 가만 있지 않으시고 사무엘에게 사울의 끝을 경고하고 다윗에게 왕의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2대 왕으로 세울 것을 명령한다. 사무엘은 베들레헴으로 찾아가 다윗에게 기름 부어 왕을 세우게 된다. 성경 사무엘상과 하에 기록된 사무엘과 사울 다윗의 이스라엘 왕정국가의 초기 개략적인 이야기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사무엘의 라마나욧에서 사울이 그리고 다윗이 왕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서 하나님이 한 나라와 지도자를 만들어가는데 깊고 오묘한 뜻이 있음을 은혜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본래 뜻이 아닐지라도 백성이 원할 때 허락하시고 또 시간과 공간을 채워가는 과정에서 주인공들을 세워 오늘날 우리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엮어가심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인본주의에 치우친 사울과 신본 주의에 성실한 다윗이 세상을 관리하는데 성패의 결과를 달리 낸다는 점이다. 좀은 비유가 다를 수 있겠지만 대한민국 민주주의가 정점인 이때 광화문에서 대통령을 만들어내는듯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민중의 공동체 힘이 민주주의 선거의 결과를 낸다. 5년 전 문재인 전 대통령이 선출됨이 이러한 과정이다. 촛불 혁명의 힘이 광화문에서 시작되어 한 사람의 대통령을 만들어냈다. 여기서 잘잘못의 평가를 논할 필요는 없다. 윤석열 현 대통령 또한 광화문의 애국운동의 불씨에서 민주주의 과정을 거쳐 일약 대통령이 되었다. 대한민국 미래에 행복을 줄 것인가, 불행이 될 것인가 아직은 모를 수밖에 없다. 역사의 발자취를 잘 읽고 복리민복의 대한민국을 만들어 가길 기대할 뿐이다. 다만 정권의 전환기에 너무 거친 말들이 오고 간다. 적폐 청산이 화두가 되고 적폐가 또 적폐를 만들어 반복되는 슬픈 정치 현실이 되고 있다. 제발 우리 여호와 하나님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보우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덧붙이자면 위정자들이 성경 사무엘서를 읽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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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4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8 : “중보기도(仲保祈禱)”란 용어의 논란
    I. 서언(序言) ‘어떤 말이 바른 말일까?‘우리 기독교인들이 사용하기에 가장 적합한 말들은 어떤 것일까?’ 또 ‘잘못사용하고 있는 말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본지에서 이를 계속 연제하고 있는 필자로서는 이런 질문 앞에 항상 나름의 사명감을 가지고 연구하는 마음을 가져본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은 우리가 가장 흔히 사용하고 있는 ‘중보기도(仲保祈禱)’란 말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중보기도(仲保祈禱)”, 무엇이 문제인가? 먼저 밝혀두고 싶은 것은 이 용어에 대해 논하는 것은 필자 나름대로는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이 용어의 어원의 뜻으로 본다면 분명히 잘못된 표현이기 때문이다. 또한 국어사전에도 등제되어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아닌 교인의 입장에서 이 용어의 사용은 분명히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은 교계에서 이미 널리 통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문제점을 지적하는 필자 자신도 무의식적으로 이 용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할 때가 많다. 그 많 큼 이 말은 보편화 되어 있기 때문에 차라리 의미는 맞지 않을지라도 아예 기독교적 전문용어로 사용해 버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할지라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바로 알고 사용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되어 다소는 무거운 마음으로 이 용어를 논하고자 한다. 먼저 중보자(仲保者)란 용어는 예수님에 대한 또 다른 이름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하시어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다는 의미에서 중보자로 호칭하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절대적인 의인으로서 죄인인 인간을 위해서 절대적 사랑을 베푸시어 하나님과 가까워지도록 중보자의 역할을 담당하신 것이다. 또한 디모데전서 2장 5절에는“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또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하여 중보의 유일성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중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중보기도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닌 것이다. 다만 천주교에서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교황이나 사제가 중보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목회자나 교인이 중보자의 역할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이런 이유로 합동 교단에서는 2002년 9월 총회에서 이 말을 쓰지 않도록 결의 한 바 있고, 여러 신학자들도 이 용어의 문제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하거나 어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중보가 아닌 중재(仲裁)라는 말이 합당하다. 또한 이것이 기도로 연결될 때 그것은 “중재 기도”가 된다. 하지만 중재기도란 말이 한국교회에 익숙하지 않다보니 사용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이유로 본다면 어떤 용어가 적합할까? 여기에 대한 성경적인 용어는 디모데전서 2장 1절에 나오는 “도고(禱告)”라는 말이다. 원어의 뜻은“다른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용어가 가장 적합할 수도 있다. 그 외에도“이웃을 위한 기도”, “도움 기도” 등도 적합한 좋은 말일 것이다. III . 결 어(結語) 결론적으로 다시 한 번 필자의 고민을 피력하자면, 너무 국어 사전적인 어법과 신학적인 잣대로 용어를 구별하다 보니 말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마땅히 대안으로 내 놓을 말도 많이 없다는 점이다. 이러한 면은 지금까지 논한‘중보기도’도 마찬가지다. 이미 한국교회 안에서 중요한 기독교적인 용어로 고착화 되어버린 말을 지금 와서 바로 고친다고 해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용어를 계속 지적하고 논하는 이유는, 어쩔 수 없이 습관적으로 이런 용어를 계속 사용한다 할지라도 무엇이 올바른 말인지는 분별하고 바로 알고 있어야 된다는 의미에서 이런 논의를 계속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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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03
  • [신재철 목사] 학교 괴담
    전학 오기 전 시골학교에서도 이상한 소문은 있었다. 밤 12시만 되면 교내 모든 동상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이야기.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 싸움을 한다. 책 읽는 소녀의 책장이 넘어간다. 해태 동상이 운동장을 뛰어다닌다.’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가 아무렇지 않게 아이들 입을 통해 전해졌다. 얼마나 오래된 소문인지 확인조차 어렵다. 이야기를 들을 때면 잠깐의 오싹함은 있지만 관심이 지속되지는 않았고 해가 진 후 학교에 오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전학을 온 대도시의 학교에도 같은 소문이 돌았다.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동상이 움직이고 운동장은 또 다른 존재들로 시끌벅적 하다는 이야기. 이제 머리가 조금 더 커서 그런지 의심이 더 크게 작용했다. 실체를 확인하고 싶은 호기심에 용기까지 더해졌다. 밤 12시가 되면 정말 우리 학교는 그렇게 변할까?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친구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관심 받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친구들에게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 소문이 진짜든 아니든. “그래, 한번 직접 확인해 보자.” 늦은 밤 찾아간 학교, 진실을 찾아서 난 이곳에 왔다. 너무 캄캄하다. 오늘 길 문방구도, 오락실도 불이 꺼지고 학교에는 중앙 현관 불만 켜져 있다. 주무시던 할머님께 아무 말도 없이 나온 것이 조금 죄송스럽지만 오늘 나는 꼭 ‘진짜’를 봐야만 했다. 여름인데 몸이 떨리는 것을 보니 이상한 소문을 나도 믿는 걸까? 빈 운동장과 스탠드, 그리고 동상의 적막함이 더 무섭다. 차라리 술 취한 아저씨나 불량스런 형들의 떠드는 소리가 있었다면 덜 무서웠을 것 같은데... 조금만 참자. 그럼 모든 것이 밝혀진다. “12시” 여전히 고요하다. 스탠드에 혼자 앉아 있는 내가 누군가에게는 더 무서운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옆의 동상도 그대로다. 운동장에는 아무 움직임도 없다. 가끔 바람에 움직이는 그네가 내 닭살을 돋게 만들었지만 직접 다가가 그네를 흔들어 보고는 안심이 되었다. 더 확실히 해야 한다는 생각에 주변을 어슬렁거려 본다. 이제 제법 용기가 났을까? 학교 뒤편의 동물 사육장도 가보고, 자그마한 인공 호수에도 가본다. 그렇게 한 시간을 보낸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나는 집으로 돌아와 조용히 할머니 곁에 누워 다시 잠을 청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으니깐. 다음날, 나는 친구들을 불러 당당히 어제의 무용담을 나누었다. 밤 12시, 학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안전한 곳이라는 것을 알렸다. 친구들은 황당하게 나를 바라보며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를 보였다. 믿지 않는 아이들에게 큰 소리를 낼 필요도 없다. 그냥 담담히 상황을 그대로 이야기 하고, 나는 내 할 일을 할 뿐이다. 내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다시 확인할 친구도 없었다. 학교의 이순신 장군님과 세종대왕님은 싸우지 않는다. 책 읽는 소녀는 내가 졸업 때까지 여전히 책장을 넘기지 못했다. 그렇게 학교는 밤새 안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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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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