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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동철 장로] 감림산 기도원 ‘유엔 평화마을’ 꿈 이뤄지길
    양산 ‘감림산 기도원’ 하면 한국 기독교 교계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저변에 잘 알려져 있다. 감림산 기도원은 경부고속도로 양산 구간 서쪽 영취산 자락에 자리한 국내서 범교단 큰 규모의 개신교 기도원이다. 오가는 길 눈에 잘 띄고 많은 집회가 연중 열리는 등 모범이 되는 기도원으로 유명하다. 감림산기도원이 더욱 이름난 것은 이옥란 원장의 헌신적 기도원운영으로 한국 개신교 교계에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가족과 함께 가끔 휴가 겸 기도원 집회에 몇 번 참석한 기억이 있다. 최근 들어 감림산 기도원 새로운 소식을 접하고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오랫동안 기도원을 헌신적으로 섬기고 있는 지인을 통해서이다. 이옥란 원장의 근황과 앞으로 기도원이 세계 복음화를 위해 계획하고 있는 프로젝트 계획을 들을 수 있었다. 감림산기도원이 계획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기도원 주변에 소유하고 있는 2만여 평의 부지를 출연하여 ‘유엔 평화마을’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지나가는 소식으로 들을만했다. 감림산 기도원의 비전을 구체적으로 듣게 된 것은 기도 후원을 요청하는 지인과 함께 기도원을 방문한 자리에서다. 그리고 이 대형 사업이 꼭 성공하기를 바라는 소망이 생겼다. 며칠 전 기도원 방문자리에서 이옥란 원장을 만날 수 있었고 지인들과 차담을 두어 시간 가졌다. 이 원장은 50년 넘게 사역하며 팔순을 훨씬 넘긴 할머니인데도 불구 그 자리서 열정적으로 그동안의 기도원 사역을 설명해주었다. 자서전도 냈고 전국의 유명 부흥강사목사들이 칭찬하는 기도원원장이라 많이 알려져 있지만 필자가 이 원장의 지나온 사역의 발자취를 듣고 은혜가 되었다. 그리고 남은 여생 계획하고 있는 ‘유엔평화마을’ 조성의 취지를 듣고 감동을 받았다. 이 원장은 55년 전 1968년 10월 당시 수도사로서 평생 나환자를 섬기며 살기로 했다. 어느 날 양산 영취산을 바라보고 지나면서 생각 없이 산으로 들어가 세 평 정도의 땅을 얻어 기도로 무작정 기도원사역을 시작했다고 한다. 55년 기도원사역을 돌아보면서 한 날도 한 시간도 예수님 생각을 잊어본 적이 없고 나라 사랑의 마음을 놓쳐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러한 원장의 믿음이 마지막 사역 ‘유엔평화마을을 조성해보자’는 뜻이라고 밝혔다. 55년 기도원 사역기간동안 수많은 어려움과 함께 기도와 눈물의 광야였지만 80년부터 뜨겁게 몰려오는 기도의 사람들과 함께 큰 규모의 공동체가 되어 복지원과 청소년사역 해외 선교지등의 사역의 열매를 얻었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이 원장은 불타는 나라 사랑의 소망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온 세상이 물질로만 풍요하고 감사가 사라져가고 있다는 영적양심의 마음으로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을 토로했다. 이 원장은 지금껏 하나님이 주신 기도원 주변 넓은 땅을 출연하여 감사해야할 우선순위를 소망하고 있다고 했다. 바로 6.25 참전 나라의 참전 용사와 후손들에게 감사의 공동체를 만들어보자는 마음을 솔직히 설파했다. 이곳에 ‘유엔평화마을’을 만들어 한국전쟁에 헌신해준 16개국에 감사할 수 있는 시스템과 공동체를 조성한다는 계획이었다. 팔순을 넘은 할머니가 어마어마한 이러한 계획을 생각하다니 혼돈이 되었다. 이 원장은 설명 한마디 한마디에 물러섬이 없었다. 6.25 전쟁 70년 국민소득 4만 불을 바라 본 선진국이 된 이 나라가 전쟁 참전국과 당사들에게 감사한 것이 없는 것이 늘 맘 아프다고 했다. 이 프로젝트는 반듯이 나라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질문에 이원 장은 10년이 지나도 이 나라는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민간차원에서 이들 참전국을 섬기고 후손들에게 다시 복음의 정신으로 다가가자는 소망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재산 출연과 함께 정부에 법인 설립 요청을 했으나 별관심이 없음을 개탄하기도 했다. 한 평생 기도원 사역을 통해 한국기독교 부흥의 밀알이 되었고 기도원사역이 점차 사라져가는 이때 일 년 내내 매일 기도집회를 지금껏 잇고 있는 이옥란 원장의 유엔평화마을 섬김의 꿈이 꼭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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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02
  • [박동철 장로] 2022년 성탄절 “신앙의 우울증”
    2022년 성탄절을 보냈다. 교회는 온종일 성탄 예배를 통해 기쁘고 감사했다. 세상 사람들도 성탄일에는 이 땅 예수 탄생의 의미를 한 번쯤 생각해 본다. 올해는 주일과 겹쳐 성탄절이 공휴일 대접을 받지 못했다. 교회도 성탄 예배의 특별함을 맛보지 못했지만 세상 사람들도 특별한 휴일의 특혜를 누리지 못했다. 어김없이 성탄절이 달력에 새겨져있고 거리에도 캐럴이 울리고 있다. 예수 탄생의 역사를 어떻게 다시 설명하랴. 이 땅과 우주 만상의 창조주가 말씀으로 이 땅에 강림하신 로고스(Logos)의 역사이다. 이 위대한 역사의 중심이 예수 탄생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 예수가 태어나서 병들고 약한 자 억압받는 자들을 위로하고 해방 시킨 성인으로 존경을 보낸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 강림의 위대함에 이해가 다르다. 이 땅이 죄악으로 가득 차 멸망의 길로 가는 순간을 예수가 돌이켜 놓은 것이다. 창조주 본인 예수그리스도가 말씀으로 인카네이션(incarnation 成肉身)하셔서 인류의 대역사(大役事)를 쓰게 된 것이다. 우리는 단지 예수의 이 땅 탄생에 흥분하고 문화적으로 즐기고 있다. 예수의 탄생과 공생애 3년에서 남긴 메시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의 도를 행하셨던 과정, 그리고 부활의 길을 우리 마음에서 우려내야 한다. 성탄절의 기쁨과 함께 십자가의 도를 생각해야 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 말하고 있다. 인류는 온통 죄악의 현장이 되어버린 이곳을 바꿀 수가 없었다. 사람은 불가능한 일이다. 창조주 본인이 직접 내려와 세상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실행이 십자가의 도(道)이다. 당시 시대상이 말해주고 있다. 예수의 육적 동족 이스라엘을 둘러싼 배경은 악(惡)의 최악이었다. 로마제국의 모든 억압과 학정에 이스라엘 민족이 모두 눌리어 있었다. 예수는 그 속으로 태어나 로마를 뒤집는 말씀을 전파했다. 당연히 예수는 십자가에 달릴 수밖에 없었다. 최고의 형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다. 예수는 이 땅에 온지 33년 삼 일 만에 세상 바꿈을 단번에 이루었다. 예수의 십자가도의 역사는 발전해갔다. 천년 제국 로마가 서서히 망하고 세기의 역사는 예수로 바뀌었다. 바로 복음의 역사에 세계 역사가 얽혀 발전해 왔다. 사람 사는 온 세상에 눈물이 있고 고난과 기쁨은 있어왔다. 그러나 역사는 교차하면서 복음의 역사는 계속 쓰여가고 있다. 유럽의 복음은 문예부흥과 산업혁명을 이끌어냈다. 유럽의 기독교는 타락하고 순교의 종교개혁으로 발전하고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에서 탈출한 청교도는 신대륙에 미주의 프로테스탄트를 이뤄냈다. 미국의 개신교 프로테스탄트는 미국을 민주주의 나라 세계의 중심국이 되게 했다. 130년 전 대한민국에 닿은 20대 벽안의 젊은 선교사들의 발길은 복음 전파와 순교의 역사를 쓰면서 캄캄한 한반도를 깨웠다. 우상과 게으름 나태한 문화 속에 나라마저 강탈당한 한반도 이 땅이 복음의 눈을 뜨고 예수 십자가의 도를 깨달았다. 광복과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고 서서히 일어선 이 나라는 복음이 능력이 되었다. 산업화의 기회, 강력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국민 갈등의 위기에서 민주화를 이루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은 복음을 이룬 가나안에서 보이지 않는 전쟁의 나라가 되었다. 두 동강 난 나라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뤘지만 통일의 한반도기적을 앞두고 복음을 침탈하고 있다. 온갖 악령의 문화들이 교회를 공격하고 악한 공산 사회주의 이념과 전쟁이 계속된다. 인본주의 문화가 홍수처럼 양산되고 있다. 정치적 이념 대립이 교회와 기독교 교계에서 공격적 적대를 하고 있다. 이것이 2022년 성탄절에 느껴지는 우울증이다.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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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7
  • [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16)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인간은 어리석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감사할 줄 모릅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천국을 준비하시고, 재림하십니다. 우리의 편이 되시어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을 위하지 않으시고 나를 위하여 모든 것 행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죄성, 이기심은 나를 위하여 사는 이기주의적인 삶입니다.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아낌없이 주게 됩니다.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 구원과 영생을 선물로 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가장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시고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정죄하지 않으시고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심판하거나 정죄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를 사랑해서 다시 사신 예수님입니다.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동기가 사랑이십니다.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마무리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넉넉히 이기게 됩니다. 사랑으로 이깁니다. 사랑은 승리의 열쇠입니다. 어떤 것도, 어느 누구도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해서 부르시고 선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과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약하여 범죄 했을 때 사단 마귀가 하나님께 참소한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자녀의 사랑의 관계를 누구도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 변하지 않으시는 신실한 사랑입니다.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안전하고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의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 제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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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7
  • [특별기고] 통합 기념 한마음교회 유감
    폭염입니다. 여름의 태양이 작열하는 계절! 이 여름에 우리 주님 다시 오신다면 태양처럼 뜨거운 신앙 열정을 가진 사람을 찾으실 것 같습니다. 사역의 현장마다 여름 태양보다 더 뜨거워서 주님의 칭찬을 받는 우리 교단 교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듯이 우리는 성공적인 교단통합을 이었습니다. 그 통합기념으로 한마음교회를 설립한 것입니다. 전국 노회와 교회들이 마음과 기도와 물질을 모아 세운 기념비적 통합기념교회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통합기념 한마음교회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는지요? 통합기념 한마음교회는 고신교단의 여러 어른들과 선배 목사님들 그리고 총회 임원들 그리고 (구)고려의 선배들과 임원들이 힘들게 이루어낸 통합의 금자탑이며 결정체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 교회의 지 교회가 되어있습니다. 교단통합을 하면서 기념으로 교회를 설랍(립)하되 (구)고려측의 목회자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설립한 교회가 바로 한마음교회입니다. 그런데 (구)고려측의 일대 한마음교회 전임목사는 당회장권 한번 갖지 못하고, 고초를 겪다가 사임하였습니다. 한마음교회 담임목사에게 이러저런 이유로 당회장권을 이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2년 동안 무려 6번이나 당회장을 바꾸면서 힘들게 했습니다. 이런 상식 밖의 이상한 일이 통합기념 한마음교회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안양일심교회 부목사로 사역했던 이 모 목사가 담임으로 있습니다. 안양일심교회가 물심양면으로 많은 부분을 헌신한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전국 노회와 교회의 헌금으로 세운 통합기념교회를 일심교회 40주년 지교회로 삼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결과론적으로 유감스럽게도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위한 목적헌금이 한 교회의 지교회를 설립하는데 사용되는 어처구니 없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교단 전체가 바로 알고, 바로 잡아야 하겠다는 결연한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우리가 하나의 교단으로 통합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처음의 약속과 결의가 깨짐으로 아름다운 통합정신이 훼손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지만, 특히 (구)고려 측 형제들에게 깊은 상처를 준 아픔이 된 것입니다. 이런 사태로 인해 안양일심교회와 당회장은 (구)고려 측 형제들로부터 신뢰를 잃었고,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미안했던지, 무마하려고 (구)고려의 어려운 분들을 후원하겠다고 접촉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고려 목사들은 의도가 순수하지 못한 후원금을 받을 리 없지 않습니까? 지난해부터 제안하는 후원금을 거부해 왔습니다. 올해 들어와서 또다시 (구)고려 동문회에 7천만원 정도를 후원하겠다고 제의를 해왔지만 코로나로 인해 어려운 교회와 선교사들이 많이 있었지만 통합기념교회를 세우려는 큰 뜻이 있기에 거절했던 것입니다. 급기야는 비공식 채널을 통해 기어코 후원을 했습니다. 공식적으로 거부했는데도 비공식체널을 통해 기어코 다수의 교회에 상당한 후원을 감행한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저도 부교역자 약 10년, 한 교회 담임목회를 27년째 하니 37년 사역을 하며 산전수전공중전까지 다 겪은 사람입니다. 교회의 내부 사정이 있어 그렇겠거니, 일면 이해가 가지만, 그렇지만 한마음교회의 문제는 양 교단 통합기념 교회인만큼 그냥 넘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전국 노회와 교회의 헌금은 통합기념교회를 설립하기 위한 목적 헌금입니다. 그 목적대로 쓰이지 않았다면 바로 잡는 것이 마땅합니다. 따라서 교단 70주년을 맞아 통합기념교회를 다시 세우려는 계획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국 노회와 교회의 후원금 13억여원은 교단통합의 정신과 기념을 담는 명실공히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위해 쓰여져야 할 것입니다. 안양일심교회는 고신교단의 대표적인 큰 교회 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당회장 김홍석목사님은 앞으로 총회에 큰 일을 감당해야할 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중대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고 교단의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안양일심교회 김홍석목사는 통합기념 교회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하는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보여할 것입니다. 이것이 (구)고려측 대부분 형제들의 일치된 생각입니다. “순교자의 고장! 진리의 파숫군! 경건자의 훈련소, 예수의 제자들이 일어나는 산실!” 그 교단이 우리 고신 입니다. 저는 우리 교단의 일원이고 교단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고신의 목사로 함께 사역함이 늘 감사합니다. 저는 고신인이 된 것이 좋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뒤를 이어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 정신을 이어가는 우리 교단이 좋고 자랑스럽습니다. 그 어떤 일보다도 고신과 고려의 통합이 자랑스럽습니다. 통합 후 (구)고려 동문들이 연합하여 학원이사로, 고신세계선교회 이사로, 이단사이비연구소장으로, 동문회 임원으로. 각 상비부에서... 각처에서 활약하는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운 하모니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통합입니다. 이렇게 배려해 주고, 사랑해주는 우리 ‘고신’이라는 이름이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따라서 통합기념교회가 다시 설립되어 통합정신이 훼손되지 않고 계승되어 아름다운 교단을 잘 보전하고, 또 더 아름답게 발전되기를 기원하는 바램을 담아 이 글을 씁니다. *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이행하라! * 전국 노회와 교회의 목적 헌금을 반환하라! 2022년 7월 중순 신앙 열정이 여름 태양처럼 뜨겁기를 기도하며... ※ 기고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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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02
  • [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6)
    하나님을 아는 자는 사랑한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미움은 사단에게 속한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아는 자는 사랑하면서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사랑하지 못하며 미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알고 거듭난 자, 은혜받은 자는 사랑의 중요성을 알고 사랑하면서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것이 미워하는 것보다 더 쉽고 즐겁습니다. 사랑은 선택이 아니고 필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고 하나님 자녀의 삶은 사랑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거짓말하는 것이고 거짓 된 신앙인격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의 사랑은 지식적으로만 아는 사랑이 아니고, 마음과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행동하는 사랑, 실천하는 사랑, 행함과 진실함으로 실천합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한다고 하고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거짓 사랑이요 위선입니다. 잘 가르치고 설교를 잘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위선이요 가짜입니다. 참된 사랑은 행동으로 보여주고 실천에 옮기는 사랑입니다. 리더는 사랑의 불을 붙여주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미움은 살인입니다. 사랑하며 사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자요 하나님께 속한 자입니다.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미움은 사망이요 사랑은 생명입니다. 사랑은 자신도 살고 남고 살리는 생명 사역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는 자요 미워하 는 자는 어둠에 있는 자입니다. 말세는 사랑이 식어진다 예수님은 말세의 여러 가지 징조를 말씀하시면서 말세는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진다고 예언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예언은 이루어집니다. 미움으로 가득차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말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이 없습니다. 냉정하고 마음이 따뜻하지 못합니다. 말세는 자 기를 사랑합니다. 사랑이 없는 삶은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말세는 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이 식어지고, 세상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합니다. 이기주의 자신만 사랑할 때 삶이 삭막해지고 관계가 깨어집니다. 사랑이 식어지고 사람들이 사납고 악합니다. 정죄하고, 고소하고, 죽이는 일까지 행합니다. 사랑이 식어진 가정과 교회는 행복하지 못 합니다. 사랑이 부흥과 화목, 행복의 열쇠가 됩니다. 말세의 징조, 사랑이 식어진 시대에 첫 사랑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성령 받아 사랑의 열매 맺고 사랑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삶, 미움이 가득 찬 삶은 잘못된 영, 악령의 지배를 받는 삶입니다. 이단의 특징 중의 하나가 악하고, 사납고, 거짓되고, 미움이 가득하고, 사랑이 없습니다. 이단의 잘못된 점을 알고 빠져 나올려고 할 때 협박합니다. 만물의 마지막때, 말세에 정신 차리고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말세에 적극적으로 더욱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사랑만이 모든 문제의 해결 열쇠입니다. 사랑이 제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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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27
  • [박동철 장로] 인공위성 누리호의 승천(昇天)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昇天)
    지난 6월 21일 쏘아 올린 인공위성 누리호 2호가 정상궤도에 안착하여 쌍방향 교신에 성공했다. 이로써 지난해 10월 21일 1차 발사의 3단계 과정에서 실패로 정상궤도 오르지 못하고 절반의 성공에 그쳤던 누리호의 인공위성은 이번 2차 발사 성공으로 우리 자체 기술로 세계 7번째로 인공위성 성공의 나라가 되었다. 필자는 2주 전 6월 21일 오후 4시 누리호 2차 발사 장면을 지켜보며 감동을 가누지 못했다. 굉음과 함께 무려 1톤의 무게를 가진 쇳덩이가 공중으로 승천(昇天)하는 모습을 보고 인간이 만들어낸 과학기술에 경외감을 느꼈다. 순간 스치는 우리의 심령에서 울어대는 2천 년 전 예수그리스도의 승천(昇天) 모습이 떠올랐다. 예수그리스도의 위대했던 승천. 누가복음 24장 말미에 “축복하실 때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라”라고 부활 후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 1장 9절에도 “저희가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그리스도의 승천모습을 당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리워 가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 숫자는 70명의 제자들이라고도 하고 500명의 제자들에게 일시에 보이셨다고 한다.(고전15:6) 승천을 본 사람의 숫자가 중요하랴. 부활하신 예수가 하늘 승천하심은 분명하고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다시 재림하여 우리에게 구원의 완성을 이루시고 이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밝히고 있다.(마:24:30) 다시 우리가 인공위성 누리호의 발사 승천을 지켜본 그림으로 돌아가 보자. 이날 누리호의 승천을 지켜본 숫자는 대한민국 국민 5천만 명이다. 5천만 백성은 가슴 졸이며 누리호의 승천 장면을 지켜보고 환호했지만 700Km 우주상공 궤도의 한계를 얼마나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후 우리의 우주과학 기술이 더욱 발전하여 경제를 발전시키고 우리를 먹여 살리는데 크게 기여했으면 하는 마음이 전부일 것이다. 혹여 달나라 혹은 화성에 우주도시 건설이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감뿐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하늘로 올리었다는 기적의 그림은 제자들은 물론 지금 우리가 함께 느끼는 감탄과 경외 그리고 감동의 차원을 크게 넘은 위대한 복음의 깨달음을 던져준다. 먼저 예수그리스도의 승천은 이 땅에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이고 구원의 마지막 사역까지 이루겠다는 증표이기도 하다. 더욱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요한복음 16장에 기록되어 있다. 부활 후 제자들에게 땅끝까지의 복음 사명을 당부한 후 중요한 말씀을 남긴다. 16장 7절의 말씀이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했다. 무슨 말씀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이 세상에 대해, 우리 모두에 대해 마지막까지 감당해야할 시공(時空)의 사역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는 가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혼돈한다. 왜 삼위일체일까. 삼위일체의 분명한 주님의 사역을 선포하는 말씀이다. 승천하시고 마지막 사역 재림과 심판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죄와 싸우고 마귀와 대적하는 일이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의 좋은 일만 도우시는 착각에 빠질 때가 많다. 아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 우리는 보혜사성령의 도우심으로 죄에서 자유하고 성화(聖化)하고 영화하여 주님을 만날 시간과 공간을 보장받은 것이다. 인공위성 누리호의 발사승천을 보고 문득 예수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 그리고 보혜사 성령을 깊게 만나게 된 순간이 되었다. 그 은혜는 수천억 원이 투입된 누리호의 가치가 너무 싸게 계산이 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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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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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동철 장로] 교회를 넘보는 마약이 판치는 세상
    ‘마약’판치는 세상, 이를 우습게 여기는 요즘 정치권 지난해 연말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의 의정 활동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 급증하고 있는 마약사범 관련 잘잘못을 따지는 가운데 볼썽사나운 모습이 있었다.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위가 열려 따가운 질의응답이 있는 중, 이태원 참사를 사전에 막지 못한 원인이 마약 단속 때문이라는 의원의 질문이 있었다. 당시 경찰이 마약단속에 대거 동원되는 통에 사고가 커졌다고 따지는 야당의원들의 발언이었다. 사고 발생 후에도 이런 발언들이 정치권에서 요란하더니 국정조사 과정에서도 불거져 나왔다. 이태원 참사의 불행했던 사정을 폄하할 수 없지만 당시 공권력이 마약 단속에 너무 쏠렸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사고조사를 접근하는 태도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대한민국에 급격히 퍼지는 마약 실태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마약중독의 실상이 심각해졌다는 통계가 속속 발표되고 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마약상습 중독자들의 문제가 있었지만 쉽게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만에 마약 구하기가 아주 쉽고 이에 주변 마약중독자가 폭증하고 있다. 단적인 예가 최근 5년 동안 관세청에서 대마 밀수량이 500배로 늘어났다는 공식통계가 있다. 필로폰 코카인등 치명적 중독성 마약이 옛날에도 있어왔지만 구하기가 어렵고 아주 고가였다. 최근에는 이러한 마약유통이 너무 흔해졌고 세계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유통문화가 되어버렸다. 최근 검찰청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전국 마약 단속령을 내리면서 검찰총장이 설명하는 내용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청소년들도 피자 한 판 값이면 쉽게 중독성 마약을 구해서 집단으로 마약을 즐긴다(?)고 했다. 그래서 마약사범 중 30%가 20대들이라는 통계를 설명했다. 그야말로 마약이 세상에 판치는 요즘이 되어버렸다. 마약의 유행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온라인 구매가 쉽고 급속도로 세계로 확산되는 이 세상의 마약 풍속도를 어떻게 해야 할까. 마약의 세상 유행은 곧 교회를 넘보게 된다. 교회가 열린 세상에서 가장 경계의 대상을 꼽는다면 동성애와 마약 등 사회악을 초래하는 원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 세상 동성애 합법화가 세계 대부분의 나라로 퍼지고 마약사범이 온 사회를 뒤덮어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교회는 이를 방어할 한계를 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 끔찍한 세상의 미래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는 진단이다. 성경 창세기 30장에 야곱의 가족 레아와 라헬이 신랑 야곱을 차지하기위해 합환채라는 마약성 최음제를 두고 다툼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합환채는 당시 이롭게 쓰였는지 알 수 없지만 학자들은 최음제로 설명한다. 아무튼 이로 인해 야곱의 복잡한 가정이 분란의 씨가 되었는지 또한 알 수 없으나 야곱의 가족은 자녀들 속에 복잡한 삶의 이야기에 들어간다. 사람은 절대 주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야하는 우리의 운명에 순종하지 못하는 죄 성이 있다. 그래서 틈만 나면 타에 쉽게 의존하고자 하는 습관이 나온다. 마약이 대중화하는 데는 인간이 약물에 의존하면서 고통을 잊고자하는데 있다. 여기에 가장 빠르게 약효를 내어주는 것이 요즘 유행하는 중독성 마약이다. 이러한 마약은 극히 일부 중병의 치료에도 쓰이지만 음란한 성문란 행위에 쓰이면서 중독되고 사회 전반을 병들게 한다. 더더욱 위험한 것은 마약의 중독성은 치명적이다. 주로 폭력배 강도행각 성행위에 쓰이면서 마약이 판치는 문화가 심각하다는 데 있다. 마약이 유행하는 사회를 정화시키는 데는 국가 공권력이 강력한 행사를 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저변 치료와 치유의 기능이 살아있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일정 부문 복음의 대상이 되어 치유의 전파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에 홍수처럼 범람하는 마약의 사회악이 교회를 되려 넘보고 있는 세태가 너무나 무섭고 걱정이다. 마약의 형편이 한계를 잃고 있을 때 하나님이 이를 포기해버릴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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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25
  • [안동철 목사] 성도의 슬기로운 명절 생활
    우리나라 최고의 명절인 설 명절입니다. 그동안 바쁘게 살면서 잊고 있었던 가족과 친척을 돌아볼 수 있는 행복한 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탄과 그의 졸개인 귀신들이 성도와 가정을 공격하는 ‘특별부흥회’(?)로 모이는 때입니다. 많은 가정이 이런 명절을 전후에 위기를 맞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우리 가정을 깨뜨리려는 사탄의 집중적인 공격이 있을 것을 생각하고 명절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명절을 어떻게 보낼지 몇 가지로 정리해 봅니다. 첫째, 제사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조상의 은덕을 기리는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로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사는 중국에서 건너온 중국문화로, 유교, 특별히 성리학이 지배한 조선의 500년의 역사를 통해 이 땅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 근본 정신을 살펴보면 거짓과 신분 상승에 대한 인간의 탐욕이 결탁된 제도입니다. 기독교는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섬기고, 나아가 죽은 자가 아닌 살아 있는 부모와 어른을 공경할 것을 명령합니다(출 20:12). 제사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가지고 겸손하되, 당당히 대처하십시오. 둘째, 명절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을 해야 합니다. 구약 율법의 해설서인 <미드라쉬>에 의하면 “험담은 세 사람을 죽인다. 말하는 사람, 험담의 대상이 되는 사람, 그리고 듣는 사람이다.”라고 합니다. 슬기로운 명절 생활을 위해서는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말, 정치 이야기, 돈 이야기, 신변잡기 이야기, 결혼과 취업 등의 이야기는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 말이 우리 모두를 죽입니다. 명절에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사람을 격려하고 살리는 말입니다. 셋째, 명절 일은 함께 분담해서 해야 합니다. 명절의 많은 일들을 여성에게만 맡기고 남성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결코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지 않습니다. 성경은 남자와 여자, 주인과 종, 어른과 아이,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과 차별이 없음을 선포합니다(갈 3:28). 우리 모두는 주 안에서 하나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존재입니다(엡 2:22). 그렇기에 모든 명절 일은 분담하여 함께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연약한 성도를 돌아보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명절이 되면 더욱 외로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작은 선물을 보내거나 따뜻한 문자를 보내봅시다. 병원에 있는 분들에게 사랑의 전화를 합시다. 고향교회를 방문하여 축복하고, 헌금을 하는 것도 좋습니다. 오늘 한국의 도시교회는 시골교회의 눈물과 희생으로 세워진 것을 잊지 마십시다. 행복한 설명절, 주님 안에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보내시기를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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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20
  • [하수룡 장로] 올림픽 선수
    고대올림픽은 주전 776년에 그리스에서 제1회로 시작하여 주후 393년까지 거의 1천2백 년 동안 4년마다 개최된 체육대회가 293회에 이르렀다. 이것이 제우스 신역인 올림프스 산기슭에서 행해졌다고 해서 올림피아라 했다. 391년 로마 황제 데오도시우스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올림피아를 이교인 제우스신에게 봉납하는 제전이기 때문에 금지시켜 293회를 마지막으로 고대올림픽은 막을 내렸다. 올림피아 신전은 훼파되고 제우스 신상은 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뜰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렇게 고대올림픽이 1천5백 년 동안 중단되었다가 1894년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결성하여 1896년에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서 제1회 근대올림픽 대회가 열렸다. 4년마다 세계 각 도시에서 개최되었는데 1,2차 대전 중에는 3번 중단되었으나 세계 청년들의 우호를 돈독히 하고 국제 평화를 위해 정기적으로 개최되어 세계인의 환호를 자아내고 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올림픽 선수로 참전하여 경험한 내용을 토대로 올림픽을 비유를 들었기 때문에 올림픽의 종주국인 그리스인들도 심오하기 이를 데 없는 기독교의 진리를 터득하기가 쉬웠을 것이란 결론에 도달한다. 먼저 누구든지 월계관을 받아쓰려면 올림픽 선수로 택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승리한 영광의 면류관도 쓸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이 천 년 전에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인류 문화의 기원은 고대올림픽에서 시작되었고 전 세계가 공통으로 쓰고 있는 기원은 예수가 탄생한 해로부터 잡고 있다. 그런데 예수의 조국인 이스라엘은 2천 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리스도인이 전체인구의 1%도 되지 못하는데 이방인의 나라 그리스는 90%가 훨씬 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니 인간적으로는 정말 이해가 안 된다. 아마 신약의 절반 이상을 저술한 바울 본인이 올림픽에 직접 참가하여 승리의 영예를 누려본 경험을 올림픽과 연계하여 그 내용을 성경에 기록했기 때문에 올림픽의 종주국인 그리스인들이 기독교의 진리를 알고 어렵지 않게 예수를 받아들인 것이 틀림없다. 인간의 구원은 먼저 올림픽에서 바울처럼 선수로 선택되어야 하듯이 믿는 자 모두가 확실하게 자비하신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 달려갈 길을 마음껏 달려가고 절제하면서 말씀으로 승리를 얻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행복한 천국의 올림픽 선수로 선택을 받았다. 선수는 푯대만 향하여 능하신 심판자인 하나님의 말씀대로 규칙을 지키며 달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격이고 모든 것이 허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린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올림픽 선수다. 월계관은 아무에게나 씌어 주지 않는다. 규칙을 어기지 않고 전력을 다해 달려가야 주어진다. 바울은 많은 비유를 들면서 올림픽 선수에게 땀과 눈물과 피의 고된 대가로 받은 금메달로만 만족하면 안 되고 내세에도 빛나는 면류관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간곡한 권면을 한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육체의 훈련보다 더한 경건한 생활로 현세와 내세의 월계관까지 하나님에게서 확실한 약속을 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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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박봉석 목사] 깊은 곳과 오른쪽
    신약 성경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갈릴리 바다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두 군데 나옵니다. 첫 번째는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것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을 때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밤이 새도록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질을 했지만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한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그의 배를 빌려 타시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물고기를 잡으라.”고 말씀을 하셨지요.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서 갈릴리 바다를 손바닥 보듯이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의 그 말씀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순종하였고 그래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는 그 길로 예수님 앞에 부복하고 예수님을 따라 제자의 길로 갔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요한복음은 21장에 나오는 사건으로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난 후에 실망하여서 원래 자신들이 하던 어부의 일로 돌아갔던 베드로와 몇 명의 제자들은 밤 시간에 물고기를 잡으러 갈릴리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밤도 그랬습니다. 갈릴리 바다에 대해서 잘 아는 전문 어부였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역시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인간이란 그런 것입니다. 제 아무리 뭔가에 대해서 뛰어나고 탁월하다 해도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불완전성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의 일에 대해서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의 그 실패의 현장에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예수님의 말씀에 역시 그대로 순종하였고 그로 인해서 그물을 들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이 사건을 곁에서 보았던 갈릴리의 다른 어부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어부는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사건을 보고는 “나도 이제부터는 깊은 데로만 가서 그물을 내려 물고기를 잡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어부는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예수님 부활 후의 사건을 보고는 “나는 이제부터 배 오른편에만 그물을 던져서 물고기를 잡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독자 여러분, 만일에 진짜 이런 결심을 한 어부들이 있었다면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분명히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어떤 곳에 던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던지라는 곳에 던진 그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물고기를 잡은 것인데 오히려 그물을 던진 장소가 사람들에게 중요하게 인식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한 장소가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는 깊은 데가, 또 어떤 사람에게는 오른편이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장소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이 나라 기독교 안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경험한 신앙체험이 진리가 되어버린 경우가 있었습니다. 한 병든 사람이 어떤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여서 병이 나았더라는 소문이 나면 그 기도원은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기도를 명하신 주님 말씀에 순종하여서 나음을 얻은 것인데 오히려 기도한 장소가 마치 성지처럼 중요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십자바위(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있는 무학산의 한 바위)에 올라가서 기도해서 아들의 취업에 대한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소문이 난다면 아마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 십자바위에 올라가서 기도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뭡니까? 기도를 명하신 주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기도한 장소가 기도 응답의 통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한국 교회 역사 가운데는 그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독자 여러분, 어디서 기도한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언제 기도했는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성경에서 가르쳐 주시는 기도의 지침과 방법을 잘 배워서 그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바로 그것이 주님 약속대로 응답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체험에 의존하는 신앙생활은 위험합니다.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 말씀을 의지하여 그 말씀에 대한 순종의 길로만 가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최선의 길이 있습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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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25: 설날의 세시풍속과 용어들의 고찰
    I. 서언(序言) ‘까치 까치설날은 어저께고요’ 올해도 벌써 우리나라 고유의 명절인 설날이 눈앞에 다가왔다. 이런 날들이 되면 어렸을 때의 설레는 마음으로 손꼽아 기다리든 그 날에 대한 추억들이 아련하게 떠오르곤 한다. 하지만, 필자의 경우는 당시 부모님들이 불신자였기 때문에 차례를 지내는 일들이나 믿음에 배치되는 세시풍속들 때문에 어린 마음에도 갈등이 있기도 했다. 이런 경우는 짝 믿음을 가진 현재의 성도들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오늘은 설날을 전후한 세시풍속과 이에 대한 용어들에 대해서 우리 기독교적인 입장에서는 어떻게 볼 것인가를 논하고자 한다. II. 설날의 유래와 어원과 뜻 1. 뜻과 어원: 설날의 사전적인 뜻은 ‘새해의 첫날’이다. 또 음력 정월 초하룻날이기 때문에 원단(元旦), 세수(歲首), 정초(正初)라고도 한다. 또한‘사린다. 사간다’에서 온 말로 ‘조심하다’란 뜻도 있다. 또 이 말은 ‘섧다. 슬프다’란 말에서 왔다고도 한다. 이러한 뜻은 다소 의외로 보여 지기도 하지만, 이는 설이란 그저 기쁜 날로 들뜨기 보다는 한 해의 첫날부터 모든 일에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첫발을 내 딛는 것이 좋다는 의미에서 설날을‘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란 뜻의 신일(愼日)이라고도 한다. 이런 뜻으로 볼 때 설날이란 말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사용해도 전혀 문제가 없는 용어이다. 2. 유래: 설날의 유래에 관하여는 시작이 언제부터인지 아직 분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이 달의 주기로 만든 태음력(太陰曆)과 이집트인들이 지구가 태양을 회전하는 주기로 만든 태양력(太陽曆)이 사용되든 때부터 일 것으로 추측한다. 그 이유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해의 시작 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기념하는 것은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설날을 지키는 직접적인 영향은 중국의 춘절(春節)일 것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춘절은 우리의 설날과 거의 비슷한 형태로 지켜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7세기경 중국의 역사서에‘신라에서 지켜진 설날에 대한 기록’이라는 데서 찾아 볼 수 있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고이왕(A.D 238년) 정월에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현대의 설날로 볼 수는 없으나 새해를 맞이하여 지냈든 제사라고 볼 때 비슷한 경우로 볼 수 있다. 이로 볼 때 설은 아주 옛날부터 이어져온 민족의 명절인 것을 알 수 있다. 근래에 와서는 처음에는 양력의 1월 1일과 구분하여 민속의 날로 정했으나, 1989년부터 본래 이름인 설날로 다시 정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III. 설날의 세시풍속과 용어들 설날에 행해지는 각종 세시풍속은 주로 차례(茶禮), 복조리 달기, 한 해 운수를 점치는 토정비결(土亭秘訣), 청참(聽讖), 설빔, 세찬(歲饌), 세주(歲酒), 세화(歲畵), 음복(飮福), 덕담, 새해 성묘 등 많은 세시풍속들과 용어들이 있다. 이 중에는 사회적인 아름다운 미풍양속으로 충분히 계승하고 장려할 일들도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설날을 전후하여 행해지는 세시풍속에는 성도들이 그대로 행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는 일들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차례의식이다. 차례는 원래 하늘에 천신(天神)혹은 상제(上帝)의 존재를 믿고 제사를 지낸 천신제사였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유교의 영향으로 죽은 조상제사(자신으로부터 4대위 조상까지)로 바뀌어졌다. 이는 같은 문화 영향권 아래 있는 중국과 일본에도 없는 극히 한국적인 제사 형식이다. 또한 차례의 어원은 원래 다례(茶禮)였다. 지금은 제사상에 술을 올려놓지만 원래는 차를 올렸다. 그래서 다례 혹은 차례라고 한 것이다. IV. 결어와 제언 이상에서 논한 설 명절에 대한 우리 기독교인의 입장은 어떠해야 할까? 먼저는 앞에서 논한 대로 설은 새 출발을 뜻하는 날이기 때문에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될 것이다. 또한 부모와 어른들을 섬기는 세배나 서로 덕담을 나누는 풍습은 교회 속에서도 더 계승 발전시켜나가야 할 좋은 미덕이다. 하지만 이것이 조상숭배의 모습으로 바뀌어 진 불신자의 세시풍속 많 큼은 결코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교회도 이제 선교 140주년에 가까운 역사 속에서 설날을 아름다운 기독교문화로 바꿀 필요가 있다. 그래서 명절이 성도들에게 더 이상 고민과 갈등을 주는 것이 아닌, 온전히 하나님께 감사하고 온가족과 일가친척들 간의 아름다운 화목의 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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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오성한 목사] 영의 생각이 능력이다(1)
    우리가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은 영의 생각을하는 것이다. 로마서 8장은 생각이 믿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죄의 법이 사로잡아 오지만 사로잡으려하는 죄의 법에 묶이면 안 된다. 죄의 법이 사로잡아 올 때 그 실패의 생각을 묵상하지 말고 회개한 후 영의 생각을 더 깊게 해야 한다.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은 이루어졌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그대로를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믿어야 한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17:21-23). 예수님은 우리로 알게 하시기를 소원하신다. 주님과 부부로 사는 그 자체가 초자연적인 삶이다. 당신은 초자연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키가 작은 사람이 키가 커지는 것만이 초자연적인 역사가 아니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삶을 살고 있다. 초자연적인 삶을 살고 있음을 믿고 살 때 초자연적인 역사도 현실로 나타난다. 믿음대로 되기 때문이다. 모든 부분이 그렇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죄라고 생각하는 죄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죄는 다르다.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다. 우리는 죄에서 벗어났다. 죄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주님을 믿는 말이다. 주님이 해 놓으신 모든 것이 내 것으로 믿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든 문제는 해결 되었다. 믿음으로 받아 들이여야 한다. 여러분은 죄에서 벗어났다.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가 단순히 죄일 뿐이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6:9).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14:23). 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믿지 않고 행하는 모든 것은 죄다.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는 죄는 죄 일뿐이다. 죄는 동사가 아니라 명사다. 죄는 죄로 존재하는 것이다. 어두움은 어두움이다. 우리는 생각이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은 나쁜 일을 많이 해서 더 어두워진다는 착각한다. 아니다. 세상은 나쁜 일을 더 하기 때문에 더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좀 착한 일을 하면 조금 밝아지는 것도 아니다. 어두움은 어두움이다. 착한 일을 하고 세상이 도덕적인 세상이 되었다고 밝아진 세상이 아니지 않는가? 죄인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인이 될 수 있다. 거듭남으로 의인이 된다. 어떤 착한 행위로는 절대로 의로워질 수 없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세상을 대하는 경우를 본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 다른 길은 없다. 믿음은 그 사람의 생각에 있다. 믿음의 성장은 생각의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5~8). 영의 생각을 하라. 영의 생각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신앙훈련은 생각의 훈련이다. 생각차이가 믿음 차이다. 영의 생각이 중요하다. 영의 생각을 하려면 생각 속에 말씀을 많이 집어넣어야 한다. 다른 방법이 없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해야 한다. 주야로 묵상해야 한다. 살리는 것은 주님이 이른 말씀이기 때문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 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육은 무익하다. 무익한 육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육신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는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 할 수도 없다. 나는 로마서 8장을 암송하며 선포하며 나의 것을 심는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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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오태열 목사] 작은 자에 대한 관심
    신부이며 작가인 H. Nouwen(1932-1996년)은 현대인의 불행은 무관심과 분노에서 온다고 하였다. 어떤 목자에게 양 100마리가 있는데 한 마리의 양이 낙오가 되었다. 내버려두면 사나운 짐승의 밥이 될 수밖에 없다. 목자는 남아 있는 99마리를 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 헤매게 된다. 이것이 길 잃은 양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이요 사랑이다. 목자의 마음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게 있었다. 99마리의 양이 있다고 위안을 삼지 않았다. 현대인들은 오히려 하나에 관심을 쏟는 것을 비판하고 분노해 버린다. 하나 때문에 전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하나를 쉽게 포기한다. 사람은 숫자에 매인다. 긍휼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불행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잃어버린 그 하나에 있었다. 이는 숫자의 개념도, 재산의 문제도 아닌 마음의 문제다. 현대인은 어느새 물질화, 물량화, 숫자화, 경영화 되어 하나를 소중히 여기려는 마음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사회가 살벌해진다. 목자는 무리를 떠난 양에게 정죄와 책망, 책임도 묻지 않았다. 사랑이란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는 조건을 거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멜로 영화의 고전인 러브스토리에서 여자주인공은 아버지를 미워하여 단절하고 있는 남자친구에게 화해를 권면하면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과 그 주변 환경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라고 충고한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이다. 한 마리의 양은 이유야 어떠하였든 목자와 무리를 떠남으로 길을 잃어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왜 그랬느냐고 물을 필요가없다. 물어서도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왜 그랬느냐? 그러면 되겠느냐며 따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조건과 까닭을 묻지 말아야 한다. 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집 떠나, 유흥비로 돈을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는 왜냐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죽은 이내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고 기뻐하며 동네잔치를 베푼다. 이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는다. 내 모습 이대로 받으시고 사랑한다. 예수께서 세리 마태가 회개할 때 제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세관 현장에서 그 모습대로 부르셨다. 그리고 그의 집에 들어가 식사하실 때,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다고 비난하면서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죄인이 죄인과 함께하면 죄를 더 지을 수밖에 없지만, 의인과 함께하면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7:14절에 ‘믿지 않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않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적인 사랑이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데 사랑받을 수 있는 자격자로 만드시고, 사랑한다. 마태는 훗날 마태복음의 저자가 되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교만한 의인보다 겸손한 죄인을 더 사랑하신다”고 하였다. 부모는 병들어 아파하는 자식을 더 사랑하듯, 예수님은 고난 당하고 병든 영혼에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베푸신다. 사회 약자들인 고아와 과부, 지극히 작은 소자들, 이들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까지라 하였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찾아 헤매시고 찾아서 벗들과 함께 기뻐하는 목자,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다. 목사인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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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조희완 목사] 성장의 기쁨 (벧전2:1-10)
    성경에서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시127:3) 그런데 저는 첫 번째 아이를 낳았을 때 그 말씀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가 정상적으로 태어나지 않고 난산에다 미숙아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보통 첫 아이가 태어나면 기쁘다는데 저는 몸무게가 2kg도 채 못 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기쁨은커녕 이 아이가 과연 살 수 있을 것인가 죽을 것인가 그것이 궁금할 뿐이었습니다. 인큐베이터에 아이를 넣어야 하는데 그 당시 제가 가난한 신학생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막대한 병원비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 큰 부담이었습니다. 병원 측에서 저의 형편을 알고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믿음으로 키우라고 했을 때, 이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과연 살 릴 수가 있을 것인지 몹시도 걱정이 되고 낙담이 되었습니다.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린 줄을 알고 그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정말 눈물의 기도로 키웠습니다. 우유를 먹일 때마다 혹시 이 아이가 숨이 넘어갈까봐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아이의 몸무게가 드디어 2kg을 넘어설 때 얼마나 대견하고 기쁘던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상적인 아기들은 태어날 때 몸무게가 3kg이 넘지만 우리 아이는 태어난 지 100일이 다 되어서야 드디어 몸무게가 3kg을 넘어섰을 때 얼마나 대견하고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지금은 키가 169cm나 되는 큰 아이로 자랐고, 결혼을 해서 잘 살고 있습니다. 저는 아이를 키우면서 성장의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체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그렇게 성장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성장하는 것은 대견한 것이고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믿음이 성장할 수가 있을까요? 첫째로, 버릴 것을 버려야 믿음이 성장합니다.(1) 둘째로, 먹을 것을 먹어야 믿음이 성장합니다.(2) 셋째로, 힘쓸 것을 힘써야 믿음이 성장합니다.(9)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우리의 믿음이 자라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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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김성수 총장] 끝없이 고르기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는 인간을 자율적인 존재(autonomous being)로 규정하며, ‘자율성’을 가장 고귀한 가치로 숭상하고 있다. ‘자율’(autonomy)이라는 단어는 ‘auto’(자동/스스로)와 ‘nomus’(규범/법)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다. 인간이 자율적인 존재라는 말은 인간은 자기 스스로가 규범이 되고 법이 되는 존재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오늘 우리는 자신의 말이 법이고, 자신의 행동이 규범이라고 주장하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권위를 제외한 모든 형태의 권위를 허물어뜨리고, 모든 반응은 단순히 선호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런 행위를 표현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로 포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권위의 지배를 받는 존재”에서 자신이 선호하는 것을 “끝없이 고르는 존재”가 되도록 인도해 가고 있다. 기독교 신앙에는 권위의 문제가 핵심이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권위들이 머리를 숙여야 하는 절대지고의 권위이며 세상 모든 권위의 원천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속력을 갖고 있는 권위 있는 진리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읽던 성경에는 “가라사대”라는 표현이 있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예수님이 가라사대-”라는 말씀을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였다. 구약 레위기의 많은 교훈들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명하시되”라는 세 구절로 시작하며, 이 구절은 모든 사랑과 친근감의 어조를 띄지만 반박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위를 강조한다. 오스기니스(Os Guinness)가 말한바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권위 아래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초월적 위대하심 앞에서 그분의 권위와 말씀의 권위를 기꺼이 인정하고 신뢰하며 그런 삶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 창조된 존재가 아니며, 따라서 자아 충족적이지 않고 스스로가 자신에게 법이 되는 자율적인 존재가 아님을 기쁘게 인정한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권위에 대한 이와 같은 시각을 경직되고 낡은 고루한 생각으로 치부해 버린다. 현대성은 교묘하지만 체계적인 수많은 방법으로 이런 시각을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잘못인 양 만들어 버린다. 심지어는 성경의 신적 권위를 지고의 권위로 고백하며 가르쳐야 할 신학교의 교수들 중에도 “아직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느냐? 아직도 성령의 존재를 믿느냐? 성령이 있으면 한번 가져와서 보여 보아라!”고 순박한 신학생의 신앙을 송두리째 망가뜨리고 있는 패역한 시대다. 신적 권위를 비롯하여 그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자율적인 개인의 선택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추구한다. 오늘 우리가 선택해야 할 수많은 것들이 있다면 내일은 훨씬 더 많아질 것이며, 이런 사회가 바로 인류 모두가 바라는 유토피아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수많은 선택 거리는 슈퍼마켓이나 쇼핑몰에 가면 확연히 드러난다.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끝없는 선택과 쉴 새 없는 변화가 확대되고 증가해 가는 선택의 부추김은 이제 소비 시장의 담장을 뛰어넘어 광범위한 영역으로 확산되었다. 고급 레스토랑의 뷔페식단에서부터 인생의 자립을 돕는 기법과 철학들에 이르기까지 우리 앞에는 끝없는 선택이 놓여있다. 코로나 시대에는 교회에 가서 대면예배를 드리며 설교를 듣지 않아도 집에서 안락한 소파에 편하게 앉아서 소위 유명 설교자들의 설교를 취향에 따라 골라가며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하나님도 소비자의 한 선택 품목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끝없이 고르기가 미덕이고 지혜가 되는 세상에서는 한 가지 선택을 고수하는 행위는 더 이상 지적 확신의 문제가 아니라 어리석고 소심하다는 증거다. 현대인의 자유는 선택의 옳고 그름이나 어리석고 우둔함에 관계없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선택이다. 진리, 선함, 권위는 선택이라는 핵심적 행위와 아무 상관이 없다. 주권적 선택자로서 당신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선택하고 또 선택할 수 있는 주권적 권리를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다. 다원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선택하고 결단하는 행위를 한다. 누군가는 이런 선택을 하고 또 누군가는 저런 선택을 한다. 우리는 모두 다르게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은 본질적으로 세상의 선택과는 다른 선택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선택은 주권적 선택자는 격상시키고 선택 내용은 가치절하해서 선택을 선호의 문제로 만들어 버리는 “끝없는 고르기식”의 선택이 아니다. 믿음의 걸음은 선택과 결단의 걸음이다. 그러나 결단의 행위로써 선택을 과도하게 강조하면 선택이라는 행위 자체가 전부가 된다. 그럴 경우, 믿음의 선택도 수많은 현대적 선택의 숙명처럼 구속력을 갖지 못하고 쉽게 바꾸어도 상관없는 상태로 쪼그라들 수 있다. 믿기로 선택한다는 이유로 믿음을 결단한 사람들은 반대 상황이 될 때 그만큼 쉽게 믿음을 저버릴 수 있다. 오늘날 “끝없는 고르기”식의 선택은 구속력이 없어 편리할 수 있지만 우리가 해야 하는 믿음의 선택은 다르다. 자신을 예수님께 바치는 것이므로 큰 대가를 각오해야 하는 언약적 선택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여기까지 왔고 더 이상 돌아갈 길이 없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원래 선택하는 백성(choosing people)이 아니라 선택된 백성(chosen people)이다. “끝없이 고르기”가 미덕이 되어가는 세상에서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우리를 골라 선택해 주신 그분의 대속적 선택을 생각하면서 무게 없는 우리의 경박한 선택 행위를 다시금 성찰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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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김성수 총장] 교회를 향한 새해의 기대
    세월은 정말 화살처럼 빨라 2022년을 시작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23년 새해를 맞았다. 비록 전도자의 가르침과 같이 하늘아래 새 것이 없고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진리를 세월과 더불어 실감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이렇게 한 해를 보내고 또 새로운 한 해를 맞을 때 마다 새로운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기도하면서 출발한다. 새해를 맞을 때 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신을 향한 기대와 다짐도 있고, 사랑하는 가족을 향한 기대와 다짐도 있을 것이다. 번번이 우리를 실망시키고 좌절감을 갖게 하지만 사회와 정부를 향한 기대와 소망도 있을 것이다. 2023년 새해를 맞으면서 나는 한국 교회를 향한 기대를 새롭게 가지면서 기도의 제목으로 삼고 싶은 강한 소망과 기대를 가져 본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한국 교회도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의 성장과 저력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한때는 기독교 국가라고 말할 정도로 청교도 신앙 정신을 계승하고 교육과 문화, 심지어는 정치 영역에서도 기독교적 가치관을 반영해 오던 미국 사회는 안타깝게도 이제 더 이상 기독교적 가치관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세속화되어 버렸다. 구주 성탄을 축하하는 성탄의 계절에도 ‘Merry-Christmas’ 는 사라지고 ‘Happy Holiday’라는 단어가 대신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트리도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다. 외양만 보면 한국이 더 기독교 국가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을 처음 방문하는 외국인들 가운데는 도심지 곳곳에 세워져 있는 교회의 십자가를 보고 마냥 놀라워한다. 붉은 네온사인의 십자가 불빛은 한국이 마치 기독교 국가라는 착각을 갖게 할 정도다. 기독교 선교 2세기를 맞는 한국 교회는 그동안 급격한 양적 성장을 하였다. 이와 같은 양적 성장과 더불어 한국사회 초창기의 교회는 문맹 퇴치와 교육, 선진 과학 기술의 보급, 의료사업을 통한 사회 봉사, 여성의 인권 고양 등 사회를 계몽하고 인도하는 사회 봉사적 기능을 잘 수행하였다. 어두운 사회 구석을 밝히며, 차원 높은 윤리 의식을 고양하는 등 그야말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였다. 그러나 언제부터 인지 모르지만 교회가 더 이상 이러한 사회 선도적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자성의 소리들이 교회 안 밖으로부터 들려오고 있다. 교회가 사회를 향해 주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기껏해야 각종 모임으로 인한 교통 혼란과 소음, 교회 인근의 집 값 하락뿐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를 인식한 의식 있는 교회들은 노인대학 운영, 노숙자 보살피기, 소년소녀 가장 돕기와 같은 사회 봉사활동을 통해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 교회로 자리 매김 하려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새해에는 이런 의식 있는 교회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청소년들을 위한 건전한 문화 행사, 독서 교실, 주차장 개방, 결혼식장 제공 등을 통해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일에 앞장서는 교회가 많아져야 한다. 잘 운영되던 노인대학 프로그램을 없애 버리고 자기들만의 폐쇄적인 예배 공간을 만들어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는 교회는 지역사회를 향해 던져줄 선지자적 메시지를 선포하지 못한다. 이런 신앙공동체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람직한 신앙공동체의 모습이 아니다. 가난하고 소외 받는 자들의 이웃이 되는 교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교회의 바람직한 모습일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세계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세계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환경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식목일에 나무를 심고, 낙동강과 수영천을 살리는 일은 구청에서 관심을 갖기 전에 교회가 먼저 관심을 갖고 앞장서서 실천해야 한다. 환경을 가꾸고 보존하는 운동과,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 재활용을 위한 쓰레기 분리 수거 운동은 교인들이 솔선수범해야 할 일이다. 교회 건물을 좀더 환경 친화적인 건물로 아름답게 건축하는 일에도 이제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신들의 사례금에서 소득세를 자진 신고하여 세금을 납부하는 목회자들이 있다면 교회는 정말 사회를 인도하는 지도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신앙의 의미를 협의적 의미의 경건 생활 또는 교회 생활에만 제한시키지 않고 정치와 사회, 경제, 교육, 예술 등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구현해야 한다는 의식의 전환이 있다면 교회는 사회를 향해 고상한 두려움을 주는 독특한 신앙 공동체가 될 것이다. 이런 교회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성장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교회는 더 이상 지역 주민들의 관심과 유리된 채 지역 사회 속의 고립된 섬처럼 존재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들은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 삶”(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을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을 향해 문을 열어야 한다. 폐쇄적인 교회는 자기 집단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익 단체로 전락할 뿐이다. 2023년 새해 벽두에 한국교회가 성경적 세계관을 구성원들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구현하도록 인도하는 의식 있는 신앙 공도체로 성장해 갈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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