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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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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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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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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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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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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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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오태열 목사] 초인이 되라
    神(신)은 죽었다는 말로 유명한 F. Nietzsche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에서 神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함께 神과 대립되는 초인을 꿈꾸었다. 그는 초인이 되지 못한 채 정신병에 걸려 초라하게 죽었지만, 오늘날 이 꿈은 수 많은 사람들의 로망이 되고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강한 자, 힘 있는 자가 되고자 한다. 이 욕구를 이용하여 현대인들을 미혹하고 있는 자들이 뉴 에이지들이다. 이들이 내세우는 자기개발, 초능력, 깨달음, 영적 각성, 자아 통제력, 자기 스스로 창조자가 되라는 창조적 인생 등이 초인을 향해 다가서게 하는 사상들이다. 현대인들은 힘을 생명처럼 여긴다. 본능이기에 이 자체를 탓할 수는 없지만, 문제는 왜 현대인들이 이런데 매력을 느끼며 빠져들고 있는가이다. 그 이유는 첫째, 현대인들은 심리적, 정신적, 영적 갈증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화를 통하여 절대 빈곤에서 벗어난 현대인들은 물질적 풍요로움을 느끼게 되자 이 공허함을 기성 종교가 채워주지 못함에 따른 반작용이다. 둘째, 절대가치의 부정 때문이다. 탈근대사회의 특징 중 하나가 통합이다. 한쪽에 중요성을 두지 않는다, 절대란 절대로 없다고 한다. 절대적인 것이 없기에 모든 종교도 하나라 한다. 절대적 가치의 부정은 현대인의 마음을 공허하게 만들어 마음 둘곳과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무엇을 찾아 헤매게 한 결과이다. 셋째, 윤리적 해방감을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천국과 지옥을 부정함으로써 죄책감에 시달려온 기성 종교인들을 해방시켜주며, 세속적 오락과 쾌락을 즐기며 살라고 부추긴다. 넷째, 자기 자신이 인생의 창조자가 될 수 있다고 한다. 건강, 성공, 감정의 조절, 능력개발 등은 삶의 우선으로 취급하는 분야로 이 욕구의 충족을 잠재적 능력개발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선전한다. 다섯째, 카타르시즘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심리학, 두뇌 과학, 최면술, 영매술 등을 통하여 일시적 행복과 평안과 기쁨을 느끼게 해주는 일종의 마약 같은 환각 현상을 가져다준다. 여섯째, 인생의 의미를 찾게 해주는 착각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등 인생의 근본 문제를 던지면서 해답을 주는 것처럼 유혹하고 나름대로 설명해 줌으로써 그동안 찾지 못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찾은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며,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믿고 추종하게 한다. 이러한 뉴 에이지 운동은 반기독교적 운동으로써 기독교 신앙과 상충하는 우주관, 신관, 구원관을 가지고 현대인들에게 교묘하게 파고들고 있다. 우리의 고민은 이러한 현대인들을 어떻게 신앙적, 성경적으로 욕구를 충족시켜 주며 완성시켜 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 답이 성경은 성령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구약의 요셉 모세 사사 다윗 등은 모두 초인들인데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영”에 크게 감동받은 자들로 특별한 소수들만이 누리는 특권이었다. 이런 와중에 요엘이 나타나 일대 전환을 예고한다. 요엘 2:28- 32절에 ‘말세에 만민에게 성령을 부어 주리니 자녀들은 예언하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고, 청년들은 환상을 보리라’ 하였다. 이 예언은 장차 누구나 성령을 받게 될 것이고, 성령 받으면 누구나 초인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이 성취가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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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2-12-27
  • [하수룡 장로] 기 쁨
    노년이 되면 크게 웃을 일이 없는 것이 정상이다. 그래도 부부가 같이 살아가면 그런대로 웃을 일을 만들고 웃게 되는 경우가 있으나 노후에 혼자되면 그렇게 기뻐할 일이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즐거움은 쾌의 감정으로 낙이란 감각적 차원의 쾌감이지만 기쁨은 즐거움이 동반된 쾌감으로 다분히 영적인 요소가 짙다. 즐거움은 쉽게 사라지지만 기쁨은 오래 지속된다. 오래전에 필자는 영남사람으로 여수에 사는 호남인을 전도하여 현재 집사에 이르게 된 분이 있는데 다른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만큼 기쁨 속에서 친밀하게 잘 지내고 있다. 서로의 삶이 일그러진 오이지의 모습이 아니라 확 펴진 보름달처럼 늘 즐겁고 웃는 모습을 유지하며 살려고 노력한다. 오랜 교분 동안 통화가 되면 상대방의 목소리만 들어도 기분이 좋고 몸이 아프다가도 저절로 회복될 정도로 서로가 쾌유의 은총을 누리기도 한다. 이것은 예수 안에서 찐 사랑의 대화를 나누기 때문에 기쁨이 최고조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좋은 날이거나 보고 싶으면 직접 상대방의 가정을 방문하여 며칠 쉬기도 하고 중간 위치의 만나기 쉬운 곳을 정하여 음식을 나누거나 차를 마시면서 기쁨을 나눈다. 만나기만 하면 누가 보든 상관 않고 부부가 교차로 안고 춤을 추며 뛰고 난리다. 처음 계획에는 2박 3일간 동해안 여행을 떠났다가 4박 5일로 연장하여 여행하기도 했다. 서해안과 남해안 여행도 2박 3일의 여행을 떠나 즐거움을 가득 안고 돌아와 기쁨이 넘치는 생활로 행복하게 산다. 이것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우리만이 누리는 최고의 기쁨이다. 게다가 마음을 담아 택배로 유기농 열매를 호남에서 보내기도 하고 철에 맞는 열매를 영남에서 사랑을 담아 보낼 때가 있다. 여수 땅을 방문할 계획이면 벌써 며칠 전에 낚시하여 맛있는 고기를 냉동고에 준비해 놓기도 한다. 그곳에 당도하면 낚시할 도구가 준비되어 오랜 시간 동안 낚시터에서 세월을 낚기도 한다. 좋은 자연환경 속에서 좋은 사람과 어울려 시간을 보내는 그 기쁨은 그 누구도 맛보지 않고는 모른다. 오직 사랑의 끈으로 연결된 정 때문에 즐거움이 꽉 찬 쾌감이 서로에게 최고의 기쁨을 생산하게 만든다. 주님으로 인하여 만남이 성사되었고 그 사귐이 일회성이 아닌 10여 년간 지속 되어 상대방을 서로 신뢰하고 좋은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챙겨주고 싶은 관계가 된 것은 최고의 기쁨이고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서로가 항상 좋은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나의 것을 아끼지 않고 마음을 다해 베푼다. 사진만 보여줘도 행복한 결과가 얻어진다는 데레사 효과(Theresa Effect)처럼 가정에서 일어나는 좋은 일이나 생활에서 생기는 아름다운 일들을 서로 소개하고 보여주어 진심으로 축하하며 기쁨에 찬 행복감을 맛보기도 한다. 믿음은 나 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주님 중심은 주님을 잘 섬긴다는 것이다. 주님 섬김은 결국 형제를 정성으로 잘 섬기는 것이다. 그 열매는 전도한 사람과 전도된 사람을 한 형제로 살아가는 기쁨을 누리고 행복하게 해 주신다. 영하의 날씨 속에서도 우리 주님의 훈기가 가득한 남향집에서 해마다 보내주는 맛있는 여수 갓김치의 냄새를 마음껏 누리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기쁨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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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장칼럼
    2022-12-27
  • [오성한 목사] 정체성(1)
    우리의 영은 점점 더 새로워져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거하실 만큼 완전하다. 믿는 자의 영은 살았다. 완전한 영으로 예수와 함께 부활하여 창조 되었다. 우리의 영은 점점 성장하여 온전한 곳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온전한 영으로 사랑하는 예수님을 모시고 있다. 우리의 영은 죄가 없이 온전하다. 능력의 삶은 출발이 중요하다. 바른 믿음에서 출발하는 것은 언제나 담대하게 해 준다. 거듭난 사람이 가장 먼저 가져야 할 일은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영이다. 영이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산다. 팔 다리가 없어도 온전한 사람인 것은 육이 사람이 아님을 증명한다. 사람이 가진 혼은 훈련되는 대로 형성된다. 어릴 때 늑대 소년 이야기가 있었다. 늑대에게 양육 받은 두 아이는 늑대의 모습으로 산다. 기록에 보니 1년 반 정도 살다가 죽었단다.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죽었단다. 침대를 갖다 놓으면 침대 밑에 구석에 들어간다. 음식을 먹는 교육이 안 된다. 그래도 사람이다. 그런데 혼이 어떻게 훈련 되었나? 사람일지라도 무슨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 혼이 형성된다. 한국말을 할 수 있는 것은 한국말을 어릴 때부터 배웠기 때문이다. 미국 아이가 영어를 잘 하는 것은 영어를 배웠기 때문이다. 혼은 훈련되는 대로형성 된다. 혼이 영적 훈련을 받으면 영적인 사람이 된다. 혼이 형성되면 형성 된 대로 행하며 산다. 그런데 진짜 나는 영이다. 영이 혼을 가지고 있고 영과 혼이 육을 입고 있다. 훈련되어 나타나는 혼이 내가 아니다. 진짜 나는 영이다. 진짜 나를 하나님은 온전하게 하셨다. 온전한 나의 영에 하나님이 계신다. 영은 육을 입고 있다. 그래서 육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혼에게 진짜 나를 인식 시켜야 한다. 혼이 영적인 생각으로 살게 되면 육은 따라 가게 되어 있다. "나는 영이다." 우리의 영은 온전하다. 거듭난 영은 흠이 없다. 할렐루야! 흠도 없고 점도 없다. 당신의 영은 성령님과 하나가 되었다. 능력이 넘쳐난다. 혼이 훈련이 안되어 있기 때문에 온전한 능력을 모를 뿐이다. 영적인 생각을 하라는 말은 혼을 훈련하라는 말이다. 마음을 훈련하라는 말이다. 혼적인 훈련을 하라는 것이다. 거듭난 나를 바르게 아는 것이 정체성이다. 나는 영이다. 영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할 때 영으로 대한다. 사실은 안 보이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는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같은 공간에 공존하는 세계다. 영혼육도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이다. 같다고 보아도 된다. 그러면서도 분리된다. 이것이 영적의 신비다. 영육으로 나누어 생각하면 혼은 육에 속하는 부분이다. 영이 진짜 우리이기 때문에 육에 진짜인 나를 인지시키고 말씀과 기도로 훈련 시켜야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우리의 육을 보시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을 보신다. 영이 진짜나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고후5:21). 육을 고치는 것은 영인 나를 인지시키는 것이다. 나의 진짜는 영이 나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다.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내가 성령의 사람이라는 인식이 신앙생활의 첫 단추다. 당신 안에 잠자는 성령의 능력을 깨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당신이 성령의 사람이라는 100%의 믿음이 없다면 믿음으로 행할 수 없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육은 무익하다"는 말은 우리의 육체, 고깃덩어리가 무익하다는 말이 아니다. 육적인 생각이 무익하다는 말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다. 주님의 말이 생명이다. 주님의 말이 영이고 생명이다. 그러기에 주님의 말을 생각하는 것이 영적인 생각이다. 영인 주님의 말이 나를 살린다. 생명의 삶을 살게 한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만이 자신이 성령의 사람임을 확신하게 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롬8:5). 주님의 말이 아닌 다른 생각은 육의 생각이다. 육은 무익하다. 이 말을 잘 못 이해하면 육신을 자학하게 된다. 중세시대에는 이러한 현상이 강했다. 잘 믿으려면 수도를 해야 하는 것인 줄 착각했다. 먹는 것 참고, 잠도 참고, 스스로의 정욕을 죽이기 위해 육신을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수도사들은 자신의 육체를 학대했다. 육신의 생각을 하면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롬8:7). 육신적인 사람과 자기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은 복음을 받을 때 거부반응이 온다.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며, 할 수 있게 된 것은 은혜다. 한없이 주신 은혜다. 감사 할 일이다.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고집 센 사람일지라도 주님 말씀하시면 "주님, 그렇습니까? 아멘입니다."라고 한다. 성경을 읽으면서 복음의 문이 열릴 때마다 감격하는 것은 정말 감사할 일이다.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가르침을 받고 있는 성령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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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7
  • [신재철 목사] 엄마 앞에서는 전도사 하지 마
    “미안해요. 우리 교회는 더 사역자 두기가 어려워서요.” 낮, 밤 가리지 않고 일하며 버틴 휴학 생활. 학업 중에도 간간이 이어오던 아르바이트.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은 것이 있다. 청소년부 교사로, 청년부 찬양인도자로, 모든 예배 참석으로 최선을 다해 살았다. 과한 노동으로 때때로 병이 나 예배 참석을 못하면 이상한 소문에 시달리기도 했다. “신학생이 믿음이 없어서 일하다가 예배도 빠지네.” 교회에서 장학금을 받는다는 친구의 이야기가 왜 이리 속상하게 들리는지. 하지만 지금 있는 공동체가 너무 좋아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고 싶어서 그렇게 살아갔다. 조금 일렀지만, 일을 그만하고 사역자로 훈련받고 싶은 마음에 모든 아르바이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사역지가 필요했고 그곳이 지금 있는 교회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내 마음과 교회 형편이 일치하지 못했고 나는 사역지를 찾아 교회를 떠나게 된다. 그렇게 타 교단의 작은 교회. 경기도 외각에 위치한 사역자 두기가 어려운 교회를 섬기는 교육전도사가 된 것이다. 스물두 살의 전도사는 괴롭다. 매주 3시간 버스를 갈아타며 기타 들고, 가방 메고 교회 가는 길이 쉽지 않다. 들고 다닐 손이 없어 대충 구겨 넣은 셔츠도 참 볼품없다. 평일에는 학교, 주말에는 교회. 체력이 충전될 시간이 없다. 고생과 수고는 더 커졌지만, 주머니는 더 가벼워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어려운 것은 사람들이 나를 전도사로 부르는 것이다. ‘척’ 삶이 고단하고 무거운데 괜찮은 ‘척’ 하기가 어렵다. 하나님의 뜻을 다 아는 ‘척’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어렵다. 주어진 과업을 잘 진행하는 ‘척’ 능력자 코스프레가 어렵다. 여유로운 공강 시간, 캠퍼스를 걷는다. 마음도 그런데 비까지 온다.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어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공중전화 부스에 몸을 밀어 넣는다. 엄마는 내게 여전히 밝으셨고 일상을 궁금해하셨다. 내 안부, 내 건강이 최고인 분이다. 갑자기 왜 그랬을까? 통화하며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팔자타령’을 하고 싶었을까? “엄마, 나 사실 너무 힘들어. 몸도 아프고 돈도 없고 교회에서 괜찮은 ‘척’ 어른스러운 ‘척’ 하기도 너무 싫어. 근데 엄마가 신학 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런 거 말하면 속상해할까 봐, 교회 안 다닐까 봐 말도 못 했어.” 브레이크 고장 난 자동차가 되었다. 폭풍처럼 눈물이 쏟아진다. 정리되지도, 뒤를 생각하지도 않는 말들이 쏟아지는데 어머니는 말씀이 없으시다. 아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 나에게 실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지금은 어머니 배려할 여력이 없다. 얼마간 내 감정은 필터링 없이 분출되었다. 시간이 지나 말은 없어지고 흐느낌만 남는다. “아들, 엄마 앞에서도 전도사 할 거야? 그냥 아들이잖아. 이렇게 말하고 울어. 그래도 괜찮아.” 울보 전도사는 그 뒤에도 얼마간 수화기를 붙잡고 눈물을 훔친다. 엄마가 있어서 참 좋다. 성도가 아닌 엄마라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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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7
  • [조희완 목사] 선교의 사명 (마28:18-20)
    여러분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기억하십니까?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5분경, 서울 강남의 고급 백화점으로 꼽히던 삼풍백화점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 붕괴사고로 무려 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하였고, 1,000여명의 중상자들이 발생하는 대참사였습니다. 그 사고는 우리나라가 해방된 이후에 단일 참사로는 최대 사망자수를 기록한 끔직한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고의 책임을 물어서 그 백화점 회장(이준)과 사장(이현상)을 구속하였습니다. 회장과 사장은 아버지와 아들사이입니다. 그 사고가 있은 뒤 아버지와 아들은 감옥에서 복역 기간을 다 채우고 출소(出所)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고가 그 아들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그는 교도소에서 복음을 들었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출소한 후 무엇으로 자신의 죄를 속죄할까 기도하다가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50세에 선교사 훈련을 받고 지금은 가난한 나라 몽골에서 열심히 선교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복음의 일꾼(worker)으로 부르시는 과정을 살펴보면 참 다양하고 기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순탄하게 부르셔서 별 어려움 없이 선교의 일꾼으로 쓰시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온갖 역경과 시련과 연단의 과정을 거친 후에 부르셔서 선교의 일꾼으로 쓰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지금은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복음 전할 일꾼을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방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선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직접 가는 선교사가 되든지 아니면 있는 곳에서 보내는 선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선교는 예수님의 절대명령입니다.(마28:18-20) 둘째로, 선교는 신앙생활의 필수과목입니다.(고전9:16-18) 셋째로, 선교는 하나님께 빚을 갚는 것입니다.(롬1:14-15)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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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7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23: 한 주간 요일 명칭의 유래
    I. 서언(序言) 연말연시의 때를 맞이하여 일 년 12달의 태양력과 월별 명칭에 대한 유래를 지난 호까지 논하여 보았다. 오늘의 본 호에서는 한 주간의 요일의 명칭은 어디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뜻은 무엇인지를 논하고자 한다. II. 7요일의 유래 1. 유래: 한 주간의 7요일은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반영된 유대인의 전통에서 온 것이다. 이는 창세기 1장의 내용에서 하나님이 6일간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정한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는 모세에 의해 유대 민족의 월력이 확립될 때 7요일이 도입되었다. 하지만, 이때는 요일별 명칭은 없었고, 성경에 있는 대로 첫째 날, 둘째 날 등으로 구분해왔으며, 기독교와 이슬람교를 통해서 전해져 왔다. 현대와 같이 각 요일의 이름이 태양계 안에 있는 별들의 이름으로 된 것은 A.D 321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였고, 정식 채택은 로마제국이 전 유럽을 통치하던 서기325년 니케아종교회의에서이다. 2. 7요일의 명칭의 유래: 7요일의 영어식 표기는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와 북유럽의 게르만 민족의 신화와 신앙에서 유래되었다. 주로 천체(天體)의 이름과 민족 신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서 그 의미는 항성인 태양과 행성인 달과 여러 별들의 이름을 중심으로 정해졌다. 1)일요일(Sunday): 태양의 날로서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태양을 신으로 여겼고, 이를 Sol이라 했다. 또한 이를 섬기는 날을 라틴어로 dies solis라고 했고, 이를 영어로 day of son으로 했다가 지금은 로마인이 섬기는 태양의 신의 날인 Sunday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2)월요일(Monday): 달의 날로서 처음에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달의 여신인 셀레나를 뜻하는 Luna로 했다가 게르만 족의 용어인 Mane로 변경됐다. 그 후에 현재의 Monday로 사용 되었다. 3)화요일(Tuesday): 화성의 날로서 그리스 신화의 Tiw’s day에서 온 말로서, 사람들이 화성의 붉은 색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 전쟁의 신인 마르스(Mars)라고 했다. 이후에 게르만 민족들이 자신들의 전쟁의 신인 Tyr로 불렀다가 점차 변형되어 오늘날의 Tuesday가 되었다. 4)수요일(Wednesday): 수성의 날로서 폭풍의 신인 Wodin(북유럽 신화의 Odin)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리스 로마에서는 수성의 신인 Mercury로 바뀌었다가 게르만 족들이 자신들의 폭풍의 신인 Wodin로 불렀다. 이후 점차 변형되어 오늘날의 Wednesday가 되었다. 5)목요일(Thursday): 목성의 날로서 그리스 로마의 벼락의 신인 Jupiter라 했으나 게르만 족들이 자신들의 폭풍의 신인 Thor로 불렀다. 이후 점차 변형되어 오늘날의 Thursday가 되었다. 인기 영화의 주인공인 어벤져서, 토르 등의 내용에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기도 하다. 6)금요일(Friday): 금성의 날로서 금성은 가장 아름다운 빛을 낸다고 해서 그리스 로마신화에서는 사랑과 미의 여신인 Venus라 했고, 게르만 족들은 자신들의 사랑의 신인 Freya 로 불렀다가 점차 변형되어 오늘날의 Friday가 되었다. 7)토요일(Saturday): 토성의 날로서 그리스 로마신화나 게르만 족들의 농업의 신이 동일하게 Saturn이었던 관계로 변형 없이 Saturn으로 불렀다가 점차 변형되어 오늘날의 Saturday가 되었다. III. 우리나라의 7요일의 유래와 결어 7요일제의 달력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17세기경에 전래된 가톨릭의 영향으로 생각되며, 공식적으로 쓰인 것은 갑오경장 이후인 1895년부터였다. 원래 우리나라 전래의 한주는 목화토금수의 오행만을 채택한 5일이었는데, 전통시장이 5일장인 것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또한 요일의 한문표기는 음양오행에 따른 것이기도 하다. 즉, 해는 양이고 달은 음이며, 수.화,목.금,토는 오행에서 온 것이다. 이는 다음호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하고자 한다. 이상에서 본 대로 한 주간의 요일의 유래와 명칭도 그리스 로마제국과 게르만 민족의 전통적인 신화와 그들의 신앙에서 비롯되었으며, 또한 여기에 동양의 음양오행설이 포함되어 있다. 워낙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것이기 때문에 고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유래와 명칭의 뜻은 알고 사용하는 것이 좋을 듯하며 계속해서 논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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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7
  • [기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다시 성탄절 주후 2022년의 크리스마스입니다. 사전적 의미의 성스러운 사람의 탄생을 축하하는 명절이 크리스마스라고 말하지만 정작 이 날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에 대하여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9:2) 이 빛은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나심으로 임하시고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창3:15)이라는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여자에게서 나셨으며 그리스도의 본질을 순전하고 흠 없이 보전하기 위하여 아담의 허리로부터가 아닌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음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날이며 “때가 차매, 아버지가 정하신 결정적인 시간,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갈4:4) 하신 날입니다.” 모든 구약의 율법이 우리를 붙들어 그리스도를 뵈옵게 하심으로 우리를 지으신 분이 우리를 다시 지으신 날(딛3;4~7)입니다. 그러나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합니다.”(요1;5) 이 어둠의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빛이 비쳐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 즉 세상은 자기 생활방식을 사랑합니다. 인간이 어둠 속에 있을 뿐 아니라 어둠이 인간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는”(고전1:21) 우리에게 저녁 서늘한 무렵 하나님께서 동산에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즉 타락한 에덴동산에 빛이 비친 것입니다. 이 빛은 120년간 방주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호소한 노아의 빛으로 소돔과 고모라에서 탄식했던 롯의 빛으로 아브라함과 족장들, 이스라엘 민족과 선지자들, 믿음의 선진들을 통해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그 빛이 계속 비친 것입니다. 모든 빛은 그에게서 나오고 빛의 본질이 그에게 있습니다. 그 분이 빛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시기까지 사백여년의 어떤 선지자도 메시지도 없는 암흑시대를 지나 마침내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사9:6) 곧 진정한 빛, 주님이 우리에게 임한 방식입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의 포문을 여는 첫 장 마태복음 1장의 1절의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펼쳐집니다.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열네 대,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 일곱 대가 여섯 번 있었고 그래서 예수님은 일곱 번째 일곱의 시작이 되십니다. 성경에서 7은 의미가 깊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고 모세의 율법에 따라 농부들은 일곱째 해마다 땅을 쉬게 하는 안식을 취했습니다. 레 25장의 일곱 번째 일곱 해 중에서 마지막 해인 49년째 되는 해는 희년으로 모든 노예가 해방되고 모든 빚이 탕감되는 해였습니다. 마태복음 1장은 낳고, 낳고, 낳고의 연속이지만 이 안식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온다는 것을 보여주며 문제는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안식을 함께 누릴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크리스마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강조하지만 어쩌면 이렇게 '내려오심'(강림)의 의미가 더 크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주목해볼 것은 이 족보에 상상할 수 없는 다섯 여인이 이름을 올려놓고 있습니다. -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마리아' 그들은 성전에 들어가 예배조차 드릴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대부분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다말과 라합은 가나안 여인들이었고, 룻은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근친상간을 거론하는 다말, 물론 수혼제로 해석이 됩니다. 매춘부인 라합, 이름을 밝히지 않고 우리야의 아내라고 명시함으로 다윗의 치부를 여실히 드러내게 되는 밧세바, 사회 계층상 밑바닥에 가까웠던 겨우 15살의 어린 소녀 마리아... 심지어 헤롯왕이 그리스도께 보인 반응조차도 실은 이 모두가 다 우리의 영적 모습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어둠의 자식들이었고 세상에서 소망이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주일 하루 예배자의 모습을 드러내지만 교회 문을 나서기 바쁘게 세상과 영적 간음의 배교의 자식들이고 항상 내 생각이 아버지의 말씀 위에 두는 자들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2:12) 이러한 우리에게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를 외면하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시고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찾아오시어 “우리가 누구였든지, 어떤 사람이었든지” 이전의 우리를 개의치 않으시고 주님의 자녀로 가족 삼아 주신다는 겁니다. 여기 다섯 명의 여인들 딱 중간에 룻이 자리하면서 에브라임지파와 유다지파를 하나로 모읍니다. 요셉은 유다지파 사람이고 고향이 베들레헴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나사렛에서 나셨을까 생각해 보게 합니다. 성경에서 유다에게는 하나님께서 왕의 축복을 해주셨고 에브라임에게는 장자의 축복을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한다면 이 두 축복을 다 가지고 있어야함을 봅니다. 신약시대의 시작을 예수님의 계보로 시작함은 복음은 삶의 도움이 되는 정도의 상담이나 충고 정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와 그의 모든 행하심에는 역사적 근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이야기가 그냥 영웅담이 아니듯이 예수님의 탄생, 그의 성육신은 허구가 아니라 실제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세계 방방곡곡의 크리스마스는 이제 연말 파티용으로 전락되어 우리끼리 먹고 마시는 금송아지 파티를 하고 있습니다. 다시, 크리스마스입니다.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는 우리에게 또 어김없이 빛이 비칩니다.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라”(눅 2:11)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성육신 하셨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가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 분이 우리 삶에 들어오시기 전까지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는 스스로 알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 고백함으로 십자가를 알기도 전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성육신 하신 주님도 훗날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아갑니다. 전쟁과 기근과 역병이 돌고 돌아도 하늘의 문은 닫히지 않습니다. 유한하고 제한적인 땅으로부터 고개를 들어 영원한 하늘을 바라보며 위의 것을 찾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소망하며 코로나를 함께 겪어 나가며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처방은 최신의 백신이나 해독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사9:6)된 이 은혜의 선물, 이 빛을, 나의 예수님을 우리 함께 온전히 받아 누리는 복된 크리스마스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글. 이정은 사모(부산 고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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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1
  • [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15)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생각이 중요합니다. 생각이 악하면 악인이고 생각이 선하면 의인입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면 좋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좋은 생각을 하게 되면 좋은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는 악을 싫어하고 악은 모양이라도 버립니다. 악은 죄요 죄는 관계를 깨트립니다. 악을 생각하는 자가 리더가 되면 공동체가 무너지게 됩니다. 사랑의 리더는 선을 추구하고 선한 것을 생각합니다. 선한 것을 생각하고, 선한 것을 말하고 행동하게 되니 관계가 잘 됩니다. 악의 소속은 사단이고 선의 소속은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해야 합니다. 사랑을 가진 자는 선한 것만 생각하기에 지혜 자입니다. 사랑이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는 악한 생각을 조절 합니다. 미워하는 악의 생각을 버리고 사랑하는 선한 생각을 합니다. 사랑의 사람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좋은 것을 생각하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좋은 것을 생각할 때 좋은 열매 맺게 됩니다. 사 랑하면 좋은 결과가 나타납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의로우십니다. 말씀이 진리이고 의로운 말씀입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는 마음이 온유하면서 불의, 죄와 타협하지 않습니다. 불의에 대하여는 NO 라고 말합니다. 인간은 죄가 있고 불의합니다. 세상은 정의가 없고 불의함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싫어하고 진리를 추구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진리는 예수님, 말씀, 진실입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는 진실, 공의, 정의를 추구합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불의를 멀리하며, 진리를 구하는 리더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리더입니다. 사랑이 없고 불의를 행하며, 진실, 진리를 버리는 자가 리더가 되면 공동체는 무너지게 됩니다. 리더가 누구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불의, 거짓을 기뻐하는 리더는 타락한 리더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불의와 거짓은 관계를 깨뜨립니다. 의와 진리, 진실은 오래가며 관계를 세우는 지혜입니다. 리더는 어떤 상황에서도 진리 가운데서 진실해야 합니다. 불의를 기뻐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랑이 최고의 지혜요 리더십입니다. 사랑이 능력이요, 영향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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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7
  • [황권철 목사] 선교지에서 순교한 도마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도마는 바벨론으로 갔다. 아마 바벨론에 최초의 기독교회를 세운 이가 도마였던 것으로 보인다. 도마는 또한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까지 가서 많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했다.1 도마가 인도 남부의 케랄라에서 최초로 기독교를 전했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인도 남부 지역의 7개 초대교회는 도마가 세운 것으로 기독교 사역의 집중력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인도에서 고난을 당하고 창에 찔려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시신은 현재 마드라스 교회 지역의 마알라토르에 묻혔다고 한다.2 도마는 두려움이 없는 전도자였으며 위대한 교회 개척자로 알려졌다. 도마가 기도하던 지하의 작은 굴 안에는 작은 바위 하나가 있었다. 그 바위에는 두 개의 작은 홈이 파져 있는데 그것은 바로 도마가 양팔을 대고 기도하다가 생긴 홈이라고 한다.  도마는 인도 오토 릭샤로 첸나이 시가지로 20분쯤 달리면 성 토마스 마운틴(St. Tomas Mountian) 입구에 도착한다. 사도 도마가 원래 순교한 곳은 첸나이 시내와 공항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이다. 계단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모사의 순교지에 세웠다는 “도마순교기념교회”가 있다. 교회 내부는 아치형 천장으로 성당처럼 꾸며져 있는데 생각보다는 초라하다. 교회 양쪽 벽면에는 주님과 열두 제자들의 순교 장면이 그림으로 그려진 액자가 걸려 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순교 했는지 기록도 있다. 교회 내부 앞 쪽에는 도마가 암석에 직접 새겼다는 돌 십자가상이 있다. 성 도마교회 안에 모셔져 있는 도마의 유해, 돌 십자가 옆에는 도마의 뼈 조각이 액자 안에 있었다. 사도 도마는 창에 찔려 순교했다. 산 정상에서 교회를 바라보면 마리나 해변의 해안선이 보이고 첸나이 시내가 한 눈에 보인다. 1.5Km 정도 거리에 첸나이 국제공항이 있다. 무덤 교회는 순교지로부터 15분 정도 떨어져 있다. 도마의 순교지와 무덤은 다른 곳에 있었다. 무덤교회는 마리나 해변 근처로 5분 정도 거리에마리나 해변이 있었다. 순교 기념교회에 비하면 웅장한 건물이다. 흰색 고딕으로 건축된 성당 양식이다. 성전 내부에는 오래 되어서 칠한 곳이 벗겨져 있었고 군데군데 빗물이 흘러내린 흔적이 있었다. 성전에서 나와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면 단층 조그마한 건물에 유물을 전시 한 박물관이 있었다. 이곳에는 사도 도마와 함께 했던 자들의 생활도구들의 유물이 있다.  1949년 6월 10일 카이로의 프랑스 판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이 정부는 이 귀중한 문서를 찾고자 애쓰고 있다.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지금까지 이집트 땅에서 보존되어 오다가 발견된 가장 귀한 것 중 하나며, 그 학문적 중요성은 투탄카멘 왕의 무덤을 발견한 것과 같은 극적인 발견보다 더한 것이라고 한다. 위 기사가 언급한 귀중한 문서란 나그함마디 문서(Nag Hammadi Library)3를 가리킨다. 최근 신약 학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도마복음(Gospel of Thomas)에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는데 도마복음은 나그함마디 문서가 전한 작품이다. 또한 고대 그리스어원문을 콥트어(Coptic)로 번역한 것으로 보이는 완전한 콥트어 판본이 이집트 나그함마디에서 발견되었다.4 비록 정경과 같이 믿을 수는 없으나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삭줍기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표적을 보고 믿었다(요 2:23). 그래서 그들은 표적 보여주기를 원했고 주님은 요나의 표적 외에 보여 줄 것이 없다고 하셨다. 표적 중에 표적이 사실 십자가의 표적인데 주님이 그것을 보여 주었을 때 그들은 정작 다 도망가 버리고 말았다. 십자가는 당대 사람들로 하여금 실족하여 넘어지게 하는 스칸달론(헬, 올무, 추문)이었다. 그러나 도마는 정면승부를 걸고 주님 앞으로 다가가서 그 현장을 확인하고자 했다. 오늘날 우리가 표적만을 구하는 신앙에 머문다면 그 표적이 눈앞에서 사라질 때 신앙 또한 처참히 무너지고 말 것이다. 신앙은 지성을 희생하고서 얻은 것이 아니라 지성이 없는 믿음, 회의가 용납되지 않는 믿음이 오히려 위기를 자초하는 법이다.5 도마는 주님 앞으로 나아가 십자가 현장을 확인하려고 했으나 그는 표적에 머물지 않고 표적을 행하신 주님에게 나아가 완전한 신앙을 고백했다. 그는 의심을 통해 더욱 확실한 고백의 자리로 나아가는 정직한 고백자였다. 우리에게 도마 같은 정직한 고백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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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7
  • [김성수 총장] 성탄의 계절에 ‘주는 사랑’을!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이 세상에 아름다운 말들이 많이 있지만 ‘사랑’(Love)이라는 말만큼 아름다운 말도 없을 것이다. 사랑은 결코 “눈물의 씨앗”이 아니다.그런데 우리는 사랑이 진정 무엇인지를 이해하거나 사랑을 실천하기 보다는 오히려 사랑에 관해서 말을 하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또 어떤 사람과 더불어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을 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자기들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애국자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나라 사랑을 맹세하며 노래한다. 낭만적인 시인들도 사랑이 가득 찬 용어들을 구사하며 사랑을 노래한다. 이런 사랑들은 모두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랑이다. 그러나 이 모든 종류의 사랑은 결국 따지고 보면 두 가지 종류의 사랑으로 나뉘어 진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필요에 의한 사랑’(need-love)이고, 다른 하나는 ‘주는 사랑’(gift-love)이다. 필요에 의한 사랑은 우리가 어떤 것 또는 어떤 사람이 없이는 지낼 수가 없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사랑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나의 필요를 채워주고, 나를 안전하게 해주고, 나를 행복하게 해 준다고 느낄 때 그 사람을 필요로 하고 사랑한다. 필요에 의한 사랑의 대표적인 경우는 낭만적인 사랑이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에 빠져 있을 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간 느끼는 낭만적인 사랑은 ‘필요에 의한 사랑’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주는 사랑’은 이와는 거의 정반대의 사랑이다. ‘주는 사랑’은 내가 아니라 상대방을 완전하게 해 주고,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 그 사람에게 가치 있는 어떤 것을 가져다주기를 원할 때 우리가 느끼는 종류의 사랑이다. 필요에 의한 사랑은 자기 자신의 필요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주는 사랑은 다른 사람의 필요에 관심을 갖는다. 필요에 의한 사랑은 충족되어도 결국 공허하며, 더 충족되기를 원하는 사랑이다. 그러나 주는 사랑은 넘쳐나는 사랑이며, 비어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을 채워주기를 원하는 사랑이다. 필요에 의한 사랑은 받기를 원하는 사랑이다. 그러나 주는 사랑은 계속해서 주기를 원하며, 베풀기를 원하는 사랑이다. 필요에 의한 사랑은 다른 사람을 강렬하게 갈망하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가지고 자기를 꾸며주기를 바라는 사랑이다. 그러나 주는 사랑은 다른 사람을 돌보는 능력이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꾸며주기를 원하는 사랑이다. 건전한 인간관계는 이 각각의 사랑을 모두 조금씩 가지고 있다. 사실 두 종류의 사랑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사람은 결코 유아독존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교제하기를 원하며,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 존재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질 때, 또는 가족이나 이성을 그리워할 때, 이러한 그리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원하게 만드신 것은 무엇이나 선한 것이다. ‘주는 사랑’ 역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가도록 하셨으며, 하나님은 이러한 사랑의 본을 실제로 보여주셨다. 성탄을 기념하며 축하하는 계절을 맞고 있다.성육신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선물로 주신 ‘주는 사랑’의 가장 완전하며 대표적인 사건이다. 속죄사역 역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죄인을 위해 희생 제물로 아낌 없이 내어 주신 사랑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조금이라도 행하는 모든 ‘주는 사랑’의 원형이다. 우리의 사랑은 단지 인간적인 복사판일 뿐이다. 그러나 이 복사품과도 같은 우리의 ‘주는 사랑’도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온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라고 요약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십계명은 바로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순종과 충성과 헌신적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공의롭게 행하는 것과 주는 사랑은 동일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빚을 지고 있다. 우리는 이것 이상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다른 인간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하는 것 이상을 줄 수 있다. 5계명부터 마지막 10계명까지는 이것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두 가지 사실들을 의미하고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 공평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그들을 돌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그들을 꾸며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정한 사랑은 단순히 공평하게 대하는 정도를 한 걸음 더 넘어서 ‘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6계명은 우리가 살인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 경우에 있어서 공의란 나의 이웃의 삶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처받은 나그네를 그냥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공의롭게 행동했다. 이들은 그 나그네를 헤치지 않았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사랑을 보여주었다. 그는 나그네를 보살펴 주었다. 그는 나그네에게 시간과 에너지와 물질을 베풀어주는 일을 하였다. 공의는 나로 하여금 도적질을 하지 않게 해 준다. 그러나 사랑은 이러한 공의를 넘어서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물질을 베풀어주는 일을 한다. 공의는 나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지 않게 지켜준다. 그러나 사랑은 공의를 넘어 나로 하여금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수 있게 인도해 준다. ‘필요에 의한 사랑’은 자연적으로 온다. 사람들에게 사랑에 빠지도록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그냥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주는 사랑’은 반드시 배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법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이유이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자신의 하나 뿐인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 주신 성탄의 계절에 우리 모두 ‘주는 사랑’을 조금이라도 배우고 실천하면 우리 사회는 더욱 더 훈훈해 질 것이다.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 공동체는 ‘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모범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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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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