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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지금이 놀러 갈 때 인가? K언론사
K교단 언론사 직원들이 부부 동반으로 이태리로 8박 9일간 놀러갔다는 전언이다. 지금이 한가하게 놀러 갈 때인가? 물론 말은 직원연수로 포장하겠지만. 탄핵정국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이고, 교단 한 쪽에서는 S목사를 징계하라고 주장하고 있고, 다른 한 쪽에서는 지지하고 있는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그 뿐인가? 총회장의 헛발질로 뜬금없이 급작스럽게 이뤄진 모 교단과의 교류로 교단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이 나오는 쏟아져 나오는 상황이다. 언론사 사장이 내년으로 임기가 종료되는 시점이라 선심성 외유라는 얘기가 나온다. 이번 여행을 위해 유력한 교회에 1천 만 원 그리고 여러 명에게 손을 벌려 몇 백 만 원을 스폰 받았다고 한다. 이 언론사는 목사가 사장이 된 후 5년간 1주일에 한번 이상 사장 얼굴이 등장하고있다. 사장얼굴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신문은 기네스북 기록감일 정도다. 또 1면에는 누가 문서선교헌금으로 얼마를 냈다고 부각시키는 면이기도 하다. 사장 임기 내내 1면에 얼굴 내는 재미로 후원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그럼 그 많은 후원금은 어디에 쓰였을까? 시쳇말로 삥 뜯듯 거둔 돈은 세금에는 잡혀져 있는지? 어떻게 기장했을까? 이렇게 거둔 후원금으로 직원들에게 상여금으로 지불했다(실제로 사장이 이 돈을 챙겨가기 위해 직원들 상여금을 주는 형태를 취한것이란)는 얘기가 들릴 뿐이다. 어느 언론사가 후원금 거둬 직원들 상여금을 주는 곳이 있을까? 기사를 써서 구독자를 늘리고 광고 수주하는 땀흘리는 보편적 언론사와는 많이 다른 기형적 형태적이고, 편의적이다. 이게 가능한 교단이다. 세금을 피하기 위해 사장급여 조작(실제로 받는 급여+협동 목사로 받는 돈 축소 의혹 등) 여러 편법을 쓴다는얘기도 들린다. 관할세무서는 뭐하나 이런 곳에 세무조사도 안나가고. 이 언론사가 속해있는 총회는 지난해 총희석상 에서 언론사가 어려우니 헌금해 달라고 총회석상에서 헌금 하게하고, 몽땅 언론사에서 가져갔다. 이 헌금도 현 총회장이 언론사에 전달했다. 그 돈으로 사장은 바로 미국으로 가서 최근 사장의 광고 유용 배임의혹(모 대학 박사과정 입학은 했는데 입학금 영수증 없어 광고로 퉁쳤다는 의혹)을 해결하러 갔다는 소리까지 들린다. 결국 총회는 사장 증거인멸하라고 비행기 티켓팅을 해 준셈인가? 이렇게 쓰는게 헌금 목적으로도 맞는가? 이 교단은 도대체 종잡을 수 없다. 이 교단의 변질은 언론사로부터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매번 총회임원으로 출마예정인 사람에게 다가가 광고청탁이나 후원금 청탁을 한다. 후보는 마지 못해 거액의 후원을 하고, 또는 후보자도 이런 제안을 이용할 속셈으로 광고에 응하거나 광고에 동의한다. 언론사가 나서서 금권선거를 조장하는 셈이다. 말이 좋아 문서선교 헌금이고 후원금이지 그 내역을 들여다 보면 기가 막히다. 그 많은 돈 거둬서 어디다 썼는지 공개해야한다. 그리고 그렇게 불법 모금하는 것 역시 후원금 모금법 위반이다.(현행법에 따르면, 1000만원 이상 기부금품을 모집하려는 경우 모집자의 정보와 모집액·사용계획 등을 행정안전부장관이나 관할 등록청에 신고해야 한다. 신고 없이 기부금을 모집하는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 언론사 사장의 모 대학 박사과정 입학금 공금유용과 후원금 내역 사용처를 밝힐 수 있는 방법은 세무조사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정도로 이 교단은 무감각인가! 왜 이 교단은 언론사에게 꼼짝없이 당하기만 하고 있는데도 호의적일까? 이 언론사를 관리 감독해야 할 이사회는 찍소리도 못하는 걸 보면 무슨 약점이 잡혔든지, 같은 부류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교회 돈을 펑펑 써가면서 교단의 이권을 차지하는 물질 만능의 교단으로 변색된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목사가 사장이 된 이후 언론사에서 일어난 변화들이다. 이 언론사는 직원과 짬짜미가 되어 소속 교단 장로를 이사로 출마하지 못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다가 이를 문제삼은 전국남전도회 회장을 4차례 고소하고도 책임질 사람 하나 없으면서 ‘교단화합의 초석’이란다. 사장과 당시 편집국장 대행이 여러 차례 내용증명을 보내다가 이사회 허락 받았다고 고발한 사건이다. 총회석상에서 문제를 삼자. 내용도 모르는 다수에게 징계를 한듯 얘기했지만 정작 당사자에게는 사과 한마디없다. 사장은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고, 편집국장 대행만 포지션 이동이 있었을 뿐이다. 사장의 무소불위의 정치력을 실감하는 부분이다. 총회 총대들은 뭐하는 사람들인지 모르겠다. 이런 언론사에 포악질에도 불구하고 아무소리도 내지 못한다. 이 교단 다수는 순한양 내지 호구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니 후원금 내라면 내 주고, 놀러 간다고 스폰하라면 하는 건가? 이 시간에도 생활고에 시달리는 가난한 목회자들의 탄식소리는 들리지 않는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어간 선배들의 피끓는 절규가 드리지 않는가? 소리 지를 돌도 없는 K교단이여 제발 선배팔이만 하지 말고 목사 장로 기도회때 제대로 회개해라.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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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한반도 이념 패권전장(戰場), ‘문화 막시즘의 황혼’
서점가를 돌다 신간(新刊) 책 한 권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신학과 인문학의 전문작가로 유명한 정일권 작가가 쓴 ‘문화 막시즘의 황혼’을 구입했다. 최근 우리 국가사회가 속앓이 하는 절박한 즈음에 읽어볼만한 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좀은 이론적으로 엮어져 읽기에 부담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지금 한국사회에 던지는 강한 메시지가 있었다. 문화 막시즘이란 단어부터 좀 생경하지만 찬찬히 읽어 내려가면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막시즘이란 칼 마르크스가 제창한 사회주의에 근간한다. 유럽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기층 민중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해나가는 사상이다. 근저에는 민중 구제를 위한 평등사회 공산사회주의경제 이념이 깔려있다. 이런 이상적 이론 때문에 청년 때 마르크스 이념서적에 대부분 빠져볼 수 있다. 그러나 칼 마르크스의 막시즘은 자본주의 사회 유럽사회를 정복하지 못하고 근세에 소련이 분열되는 등 시대의 사조에 쇠퇴했다. 칼 마르크스의 포스트 이념으로 살아난 새로운 사조의 사상이 ‘문화 막시즘’이다. 초기이론가는 이탈리아 공산당 창설자 안토니아 그람시라는 사람이다. 개괄적 이론은 부르주아 권력을 빼앗기 위해서는 정치 사회 학계 문화계 모든 분야에 침투하여 민중을 포섭하고 네트워크를 조작점령, 사회주의 사상으로 학습시켜야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전체주의 독재국가화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은 자유민주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탁월한 성과로 반세기만에 세계 10대강국이 되었다. 세계의 주목 속에 시장경제 강국이 된 것은 대한민국 건국 즈음 남북이 갈라지긴 했지만 크게 발호했던 공산사회주의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제 21세기 자유민주 한국사회에 문화 막시즘이 파고 들고 있는 분명한 진단이 노출되고 있다. 정치이념이 보수 진보라는 좌우의 선의적 이념경쟁은 매몰되었다. 우리가 겪고 있는 탄핵정국의 도가니에서 드러나고 있는 뚜렷한 우리 스스로의 문제인 듯하다. 문화 막시즘의 대표적 악폐는 건강한 기독교문화를 파괴하는데 있다. 그리고 동성애합법화는 물론 마약사회를 야기 할 만큼 모든 자에게 인권이란 미명으로 자유방임의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민중을 포섭 막시즘 사회를 만들어가는 수단이다. 그런데 이 책에는 이러한 문화 막시즘의 현상을 설명하면서 이 사조는 빠른 시간에 황혼을 맞고 있다고 강조했다. 눈에 강력히 들어오는 대목이다. 문제는 문화 막시즘의 큰 흐름을 타고 한국사회가 멍들고 있는 진단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한국 기독교를 악의 세력으로 치부 하면서 지난날 민주화 운동의 끈을 억지로 끌고 와 합리화하고 권력을 취하려는 사회현상에 서있다. 진보가 나쁜 좌파로 진화하여 문화 막시즘 세상을 만들고자하는 현상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탄핵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갈 바를 잃고 있다. K-클라스라는 코리아 브랜드는 높아졌지만 국가권력의 패권경쟁이 극단에서 위기를 맞고 있다. 여기에서 좀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극단의 패권경쟁은 문화 막시즘의 수단 하이브리드 전쟁이다. 문화 막시즘의 침투는 온 세계로 확산되었다. 유럽은 물론 미국 캐나다 등도 포함된다. 디지털 전산 고도화로 다양한 문화메커니즘에 침투해서 비정상을 정상으로 둔갑시키는 전략이 현실이 되었다. 해킹과 그 데이터로 공작과 조작의 기술로 한 나라를 점령해버리는 무서운 오늘에 서있다. 민족의 개념에서 한반도 남북의 코리아는 지난날 조선말 겪었던 주변 열강의 도가니 속에 갇혀있다. 북한은 우크라이나 러시아전쟁에서 비참하게 이용당하고 있는 모습들을 보고 있다. 남쪽 코리아 대한민국은 미중 패권의 틈새와 중국의 거대한 속방야욕에 태워져있다. 이에 편승, 중국공산당의 문화 막시즘의 패권수단에 얹혀 등을 타고 권력을 잡으려고 하는 종중(從中) 문화막시즘 인사들이 정말 나라를 살릴 수 있겠는가. 기독교문화를 훼파하고 복음을 통제하려는 정치권력은 황혼을 맞을것이다. 이제 세계강국 대한민국은 세계 속에서 아시아 리더로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한다. 대한민국의 사명이다. 그 어떤 주변 강국에 추종함으로써 국가권력을 잡으려는 정치세력은 경계해야한다. 제발 위대한 자유대한민국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문화 막시즘 사회현상이 빨리 황혼을 맞았으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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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관계대학
가칭 ‘관계대학’이라는 성경공부 과정을 가지고 훈련해야 합니다. 관계대학은 교회에서의 다양한 성경공부를 통한 ‘관계 훈련 과정’입니다. 교회 형편에 맞게 성경공부 과정 커리큘럼을 짜고 성경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1년에 두 학기 과정을 두고 여름과 겨울은 단기 특강을 하면 유익합니다. 3월에서 5월, 9월에서 11월, 약 10주에서 12주 과정 성경공부를 진행해야 합니다. 다양한 성경공부를 가지고 소그룹 형식으로 성경공부를 진행해야 합니다. 소그룹 인도자는 규모가 있는 교회에서는 부교역자가 인도하고, 담임목사도 인도해야 합니다. 소그룹 성경공부의 목적도 성경 지식만 얻게 하는 것이 아니고, 소그룹 안에서 성도와 교제하고 성도들과의 좋은 관계를 맺는데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주일 오후 예배가 있으면 담임목사가 직접 성경공부식 설교나 강의를 하면 유익합니다. 성경공부 교재를 가지고 설교식 성경공부를 인도해야 합니다. 성경공부의 여러 교재가 있으나 담임목사가 직접 쓰거나 준비한 성경공부 교재를 가지고, 성경공부 인도하면 더욱 유익합니다. 성경공부 교재선택이 중요합니다. 평신도 중에 소그룹 인도자를 양육하고 키워야 합니다. 단기 혹은 장기, 관계대학 성경공부 훈련 과정을 신설하여 지속적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관계에 대한 세미나나 훈련, 성경공부 교재를 가지고 공부하게 해야 합니다. 새가족 훈련 과정을 마치면 적당한 기간동안 관계에 대한 성경공부나 관계 세미나 혹은 관계 훈련을 해야 합니다. 여름이나 겨울 특강은 외부 강사를 불러 강의를 듣게 하는 것도 유익합니다. 관계대학 성경공부의 비전과 목적은 아름다운 관계 활성화와 성숙한 그리스도인 양육에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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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인간 창조물의 득(得)과 실(失)
이 시대 사람들은 메타버스(Metaverse), 인공지능(AI-artificial intelligence)이라는 용어에 익숙해 있으며 교회 안에도 그런 영향들이 장점으로 또는 단점으로 미치고 있다. 메타버스(Metaverse)는 가상, 초월 등을 뜻하는 영어 단어 ‘메타(Meta)’와 우주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 현실과 같은 사회·경제·문화 활동이 이뤄지는 3차원의 가상 세계를 말한다. 메타버스라는 말은 1992년 미국 SF작가 닐 스티븐스가 소설 ‘스노 크래시(Snow Crash)’에 언급하면서 처음 등장한 개념인데, 이 소설에서 메타버스는 아바타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가상 세계를 가리켰다. 특히 유통업계에서는 상품 판매를 위한 다른 공간으로 활용된다. 이런 메타버스의 활용이 각 분야에서 적용되고 있는데, 예를 든다면 “메타버스 세종학당”은 외국인 한국어 학습자들을 위해 구축한 플랫폼이다. 이 공간에서 한국문화를 경험하고 한국어로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런 현상을 따라 메타버스 교회가 생겼다. 그래서 메타버스가 서서히 종교적(기독교를 포함해 모든 종교) 믿음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종교는 역사적으로 공동체와 연결되고 개인의 영적 필요를 충족시키는데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과 함께 종교 활동이 전통적인 물리적 공간을 벗어나 메타버스로 이동하고 있다. 이는 가상의 환경에서 예배를 드리거나 영적 체험을 공유하거나 새로운 형태의 신앙을 탐구하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특히 "메타버스는 신체적 어려움으로 거동이 불편한 분들께 직접 교회에 가는 것보다 쉽게 공동체에 참가하는 정서적 유용성을 제공해 줄 수 있는 만큼 노년층을 위한 메타버스 목회가 된다면 하나의 장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오용의 소지도 있다. 이제부터는 AI 전성시대다. AI 챗봇의 상용화 및 일상화가 되면서 모든 분야에서 획기적인 변화와 발전이 계속되고 있다. AI는 이미 세계 모든 사람에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 주며 또한 편리함을 가져다주고 있다. 가톨릭 신학자인 마르코 슈미드가 인공지능 예수를 만들어 고해성사를 대신하게 하도록 하였다. 심지어 목회자들 세계에서도 AI가 설교 준비 다 해준다고 말하는 자도 있다. 편리함은 있지만 인간 창작물의 노예화 되어가는 것이다. 지금까지 세계는 인류 역사를 BC와 AD, 곧 예수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로 구분했다. 앞으로 미래세대는 인류 역사를 AI 이전과 AI 이후로 구분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의 창조는 AI 기반의 “디지털 신(神)”을 만들었다. “디지털 신(神)”은 기존 종교적 교리를 따르거나 특정 철학에 기반한 영적 지침들을 제공할 수 있고, 디지털 신은 복잡한 삶의 문제에 대해 조언을 해준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다. AI 기술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모방과 창조 능력의 산물 중 하나이기에 잘 사용하면 복이지만 성경적 기준 없이 무분별 사용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21세기의 바벨탑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가짜와 진짜를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실재적(實在的) 하나님이시고, 인격적 하나님이시다. 나도 또한 감정과 인격을 가진 실재적 인간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실재와 실재가 연관되어야 참 신앙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과 관련하여 생명체 없는 비 본질적인 것에 매이기 보다는 살아계시고 인격적인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얻으며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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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침착한 대응 (욥23:1-17)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나그네가 쫓아오는 호랑이를 피해서 도망을 가다가 절벽 낭떠러지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마침 절벽에 뻗어 있는 칡넝쿨을 잡고 벼랑 끝에 매달려서 겨우 호랑이의 추격을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밑을 내려다보니까 커다란 뱀이 입을 벌리고 자기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놀란 나그네가 위를 쳐다보니까 간신히 붙잡고 있는 칡넝쿨을 흰 쥐와 까만 쥐가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평안하고 좋은 날을 만날 때도 있지만 톨스토이가 표현한 것 같은 그런 극한 상황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길을 걸어가다 보면 내리막길이 있는가 하면 오르막길이 있는 것처럼, 우리 인생길에는 평안할 때도 있지만 역경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상반된 두 가지 상황을 만날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은 “형통할 때는 기뻐하고 곤고할 때는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전7:14). 형통할 때 기뻐하라는 것은 알겠는데 “곤고할 때 생각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 말의 의미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곤고한 일이 닥쳐올 때 당황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침착하게 왜 이런 곤고한 일이 닥쳐왔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곤고한 일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어려운 일을 만날수록 당황하지 말고 침착해야 합니다. 침착하면 반드시 피할 길이 보입니다. 옛말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방이 가로막힌 것 같아도 반드시 피할 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특별히 침착해야 할 때가 언제일까요? 첫째로, 고난을 당할 때 침착해야 합니다.(욥23:8-9) 둘째로, 위기를 만날 때 침착해야 합니다.(행27:20,25) 셋째로, 비난을 당할 때 침착해야 합니다.(느4:1-4) 지금은 우리가 처한 모든 상황들이 침착함을 요하고 있습니다. 항상 침착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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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손금을 봐 드립니다
사람은 호기심의 동물이다. 이제 겨우 말을 시작하는 유아들부터 백수(白壽)를 눈앞에 두고 있는 어르신에 이르기 까기 사람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각 나라마다 한 사람의 앞길을 예견하는 점술가들이 꼭 있게 마련이다. 우리나라 역시 일찍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주역(周易)이 발달되어 있다. 흔히 사주(四柱)라고 말하는 것을 가지고 한 사람의 장래를 예견한다. “사주”라 함은 그 사람의 출생의 년(年), 월(月), 일(日) 시(時) 즉 네 개의 큰 기둥에 따라서 한 사람의 운명을 알아맞추는 것이다. 이 “사주” 역시 맞지 않다.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쌍둥이를 보아서 안다. “사주”에 따라서 그의 장래가 결정된다면 쌍둥이들은 거의 같은 삶을 살고 있어야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사주로 점을 치는 것 외에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으로 한 사람의 생명선과 재물선이 그려져 있다고 믿는 손금에 대해 알아보자. 손금을 전문으로 보는 역술인들은 사람의 손금만으로 그 사람의 생명의 길이와 재물의 넓이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어떻게 한 사람의 생명과 재물이 그 조그만 손바닥에 다 들어있단 말인가? 그리고 운명론에 빠져서 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않고 그냥 주어진 대로만 체념하는 것이 지각이 있는 사람의 도리일까? 나는 손금을 믿고 싶지 않다. 손에 각인된 생명선과 재물선이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믿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성경은 과연 우리의 생명과 재물에 대해서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욥30:23)을 보니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끌어 가시리이다” 정말 그렇다. 사람의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 손에 달려있다. 그러기에 지금 내가 이 땅에서 숨 쉬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금 생명을 붙잡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언제까지 살지 혹은 몇 살에 죽을 지 계산하지 말자.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보관하고 있으니 안심하자. 그럼 재물은 어떠한가? 재물은 사람의 손에 달려있다. 물론 재물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성경구절도 많다. 그러나 필자는 재물이 사람의 손에 달려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시128:2)에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라” 그렇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피나는 노력과 수고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신다. 우리나라 갑부였던 정주영씨는 자신의 재물을 노력으로 일군 사람이다. 정주영씨가 우리나라 자동차 대형면허 제 1호 취득자라고 한다. 그가 얼마나 노력하는 사람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 그 작은 한라체급으로 백두체급의 장사들을 넘긴 이만기씨와 악수를 한 적이 있다. 그 분의 손에 정말 거북이 등 같은 굳은살이 깊이 베어져 있었다. 씨름선수의 손바닥은 손등보다 더 거칠다. 아름다운 자태로 감미로운 음악에 맞추어 자신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는 발레리나의 발을 직접 본 적이 있다. 발은 정말 너무 형편없었다. 그들이 발끝으로 걷는 연습을 많기 했기 때문이다. 늘 공을 던지는 투수들은 오른팔이 왼팔보다 약 10cm이상 길다고 한다. 이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한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성공은 천부적인 재능도 중요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단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매 해가 시작되면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나에게 좀 좋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까 궁금해 하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장래에 대해서 못 박아 말하고 있다. (전도서8:7)에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야고보서4:14)에는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작은 손금을 들여다보면서 앞날을 구상하지 말아야 하겠다. [생명선]은 하나님께서 잡고 계신다. 그러기에 오늘 하루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한 것으로 만족하자. [재물선]은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 그러기에 손바닥을 보면서 작은 손금에 우리의 재물을 맡길 것이 아니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산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틀림없이 성공일 것이다. 남들은 혹 나를 성공한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더라도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성공의 확신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요동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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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3일천하 ‘갑신정변 140년’ 이 땅 복음의 큰길 열었다
- 1884년 12월 4일 밤 10시경. 이날은 최초로 지금의 체신청 우정국 개청식이 있는 날이었다. 행사를 마친 후 내·외 귀빈이 함께하는 저녁 연회가 열리던 시각. 갑자기 ‘불이야’ 하는 소리와 함께 총소리가 들리고 비명소리가 진동했다. 당시 김옥균, 홍영식, 서재필 등 젊은 엘리트 개화파 세력들이 정변을 일으킨 현장의 이야기다. 고종 즉위 20년 되는 해 일본은 개화 후 나날이 발전하고 중국과 서양 제국들이 조선의 개화와 통상압박을 하던 혼돈의 시기였다. 조선 26대 왕 고종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은 갈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급진개화를 주장하는 김옥균 파와 점진적 개화를 주장하던 민영익 등 세력 간 갈등 속에 급진개화파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정변이었다. 올해 12월 4일은 갑신정변 1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갑신년 쿠데타는 성공하는 듯 했으나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개입 3일 만에 평정하고 주모자들은 멸문지화 되거나 일본으로 도피했다. 갑신정변은 당시 일본의 지원으로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갑신정변이 성공했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됐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운명이 외세 강국에게 점령당할 수밖에 없는 비운의 상황이었다고 사가들은 말하고 있다. 역사적 평가와 상황을 접어두고 당시 사건의 현장을 통해 하나님이 이 나라 복음을 위해 위대한 계획을 펼치고 있었던 은혜를 찾아 보고자한다. 불을 지르고 쿠데타 세력들이 반대세력들에게 총을 쏘며 공격을 하는 통에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칼에 난자되어 중상을 입었다. 죽을 수 밖에 없던 상황에 연회에 참석했던 미국 루시어스 푸트(Lucius H. Foote) 공사가 긴급히 미국에서 두 달 전에 선교사로 입국한 한사람을 찾는다. 바로 최초의 의사선교사 호러스 알렌 선교사를 찾아 치료함으로써 민영익은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알렌 선교사는 누구인가? 우리의 기독교사에 거장으로 남아있는 알렌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중국으로 파송되었다. 이즈음 1882년 조미(朝美)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선교사의 마음에 조선의 선교사가 되고 싶어 자원한다. 갑신정변 두 달 전 1884년 10월 6일에 한양으로 입국한 선교사이다. 알렌의 치료로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살아남으로써 3일 천하정변은 끝이 나고 고종의 권력은 유지 될 수 있었다. 민영익을 살린 알렌에게 고종은 무엇을 원하냐고 물었다. 당연히 알렌은 병원을 지어 달라고 했다. 고종에게는 너무 쉬운 요청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변의 주동자 홍영식의 가족들이 처단되고 폐허된 집을 병원으로 개원하게 했다. 바로 최초의 병원 광혜원(나중 제중원)이다. 알렌선교사가 병원을 짓고 자유롭게 선교를 하게 되는 큰길이 열리게 된다. 하나님의 역사는 벼락처럼 전개 된다고 했다. 1885년 봄 일본에 머물러있던 아펜젤러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함으로써 조선 땅의 예수 복음이 날개를 달았다. 언더우드는 오늘의 연세대와 알렌 선교사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을 세우는 엄청난 일을 했다. 아펜젤러는 이승만을 탄생케 한 배제학당을 세운다. 뒤이어 스크렌턴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와 이화학당을 세우고 천대받던 조선의 여성들이 눈을 뜨게 했다. 조선역사가 망해가던 시기 비운의 시간표가 돌았지만 선교사들을 통해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게 하는 복음의 역사(役事)가 역동 했던 것이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축복이다. 한 나라를 부흥 발전시키는 무한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조선 5백 년의 역사는 정말 캄캄한 세상이었다. 사대부들이 타락한 유풍(儒風)의 문화 속에서 백성을 착취하고 나라의 발전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나라가 망해가는 때 나라를 살리고자 급진개혁세력들이 일으킨 정변은 사람의 위대한 뜻에도 불구하고 3일천하로 끝난다. 뒤이은 역사는 결국 일본의 36년 종살이해야 하는 비운의 역사를 겪어야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70년 종살이 후 회복의 역사를 썼다. 우리는 140년 전 위대한 영적 거장 몇 분의 선교사들이 오늘의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들어내는 초석을 낳았던 역사를 돌아본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가. 세계 10대강국을 자랑한다. 희망 속에 겪는 사회문화의 심각한 갈등을 보면 나라가 망할 것 같은 위기다. 이런 위기 때 그때의 역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야 할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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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3일천하 ‘갑신정변 140년’ 이 땅 복음의 큰길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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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2) (민12:11-16)
- 미리암은 위대한 믿음의 여인이 맞습니다. 하지만 여선지자라는 위대한 칭호를 받은 후 신앙이 제자리걸음을 했습니다. 미리암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역사에 발맞추지 못하고 여전히 애굽에서의 사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모세가 없는 40년 동안 여자로서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진짜 지도자인 줄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진짜 지도자인 모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교만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40년 만에 나타난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기절초풍할 일들을 일으킵니다. 세계 최강의 애굽과 바로도 모세 앞에 쩔쩔맵니다. 애굽을 초토화 시켜버렸고, 애굽의 장자를 죽여 씨를 말려버렸습니다. 여호와의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임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만 대면하시고 바다까지 갈라 마른 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미리암은 40년 동안 여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을 영도해 왔지만 40년 만에 갑자기 등장한 모세의 위용 앞에서 입도 벙긋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선지자의 위치에서 볼 때 비록 인간적으로는 누나요 동생이지만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적 권위를 지닌 모세였기에 고개 들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교회들끼리, 특히 목회자들끼리 묘한 질투심과 경쟁심이 있습니다. 곁의 교회가, 다른 교회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갖습니다. 잘못되면 입은 안타깝다고 하면서 속은 이유 없이 고소하고 상대적인 만족을 얻습니다. 교회의 주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망각한 무서운 죄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이 교인들 사이에서도 발생합니다. 곁의 성도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잘못되면 입은 위로하는 것 같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자신의 신앙과 믿음이 좋은 것으로 위로받고 착각합니다. 아주 나쁜 모습입니다. 악한 모습입니다. 교만의 극치입니다. 어쩌면 이것보다 더한 것이 목회자들끼리의 보이지 않는 견제와 경쟁입니다. 주변의 교회가 갑자기 성장하면 상대적 박탈감을 가집니다. 사람이다 보니 비교가 안 될 수 없습니다. 특히 가까운 교회에서 독보적인 성장을 보이면 심각한 스트레스까지 받습니다. 목사 자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의 중직자들이나 성도들도 자연스럽게 목회자에게 압박을 가합니다. 자신은 1년이 가도 전도 한 명 하지 않으면서 교회 부흥을 입에 올립니다. 십일조나 감사헌금은 고사하고 선교나 불우이웃이나 개척교회, 농어촌교회, 은퇴하신 목사님, 가난한 신학생들을 위해 특별헌금 한 푼도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재정을 입에 올립니다. 더 심각한 것은 설교자들의 교만입니다. 설교하는 사람이다 보니 설교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설교자의 훌륭한 설교에 은혜받기는커녕 허점과 잘못을 찾기에 바쁩니다. 그러니 설교에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현상은 모세를 대적하는 미리암의 아류들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땀방울 하나, 눈불 방울 하나 다 주의 것입니다. 우리는 비교 대상도 아니요, 경쟁상대도 압니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며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자들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특히 목회자들은 아바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평생 잊어선 안 됩니다. 물론 아바타라 하지만 예수님의 아바타니 영광스럽습니다. 진짜 선지자, 진짜 목회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미리암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사실 미리암은 누구보다도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몰라서 범한 죄도 무섭지만, 알고도 범하는 죄는 더 무섭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단순히 그 사람의 성향이나 기질을 나타내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모세의 통치를 방해했고, 이스라엘의 진행을 가로막았습니다. 감히 모세의 영적 권위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감히 같은 선지자였지만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교만은 이 모든 영적 권위 앞에서도 원망과 비방의 고개를 들게 합니다. 호시탐탐 모세의 허점과 실수를 염탐합니다. 교회도 은혜를 계산하는 성도가 있고, 실수와 잘못을 찾아내는 성도가 있습니다. 기회가 왔습니다. 구스 여자가 돌아왔습니다. 이전에 이미 정리된 문제인데도 교만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영적분력을 상실했습니다. 미리암은 십보라가 돌아오자 속에 숨겨놓았던 원망과 불평을 표출합니다. 원망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사실까지 망각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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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2) (민1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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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1)
- 성경 어디에도 미디안의 제사장 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는데 문제 삼은 장면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실에 대해 그 어디에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하는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사건 때문에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백성들이 구스 여인 십보라를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통치에 십보라를 문제 삼지 못하도록 아예 입도 벙긋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버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명을 주셨고, 그 사명 감당하기 위해 애굽으로 오는 길에 느닷없이 모세를 죽이시려고 한 것은 구스 여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임이 분명합니다. 분명한 이유는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것에 있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 같은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발견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려 하셨습니다. 완전한 모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이셨습니다. 완전히 죽이셨습니다. 그래도 십보라는 할례언약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긴박한 순간에 할례를 행하면 남편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과 비교도 되지 않는 신분입니다. 단순히 액면가로 볼 때 우리는 시아버지와 관계한 여인입니다. (마1:3)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우리는 우상의 신전에서 몸을 팔던 기생이었습니다. 우리는 과부요,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남편을 사지로 몰고 왕과 간음한 유부녀였습니다. (마1:5-6)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인데 죄인인 줄도 모르는 죄인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답도 없으면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제 딴에 잘 사는 줄 알지만 무익한 인생이요, 단 하나도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혀에는 속임만 있습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입에는 저주와 악독만 가득합니다. (롬3:10-14)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런 우리가, 그런 우리의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도 달렸고, 예수님의 부활에 나도 부활했다고 고백합니다. 사탄이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의를 제기하고 문제 삼을 것이 수두룩한 우리입니다. 아니 우리는 문제 그 자체들입니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합니다. 십보라가 할례 언약을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십보라가 할례를 행하여 남편을 살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불가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입으로 시인합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보라가 할례언약을 아는 것과 할례를 행하는 것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서십니다. (마10: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눅12: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합니다. 문제 제기도 못합니다. 입도 벙긋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의 예배 자리에, 예수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앉혀주십니다. (계12:22-23)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이런 은혜를 받은 성도입니다. 그래도 원망하고 비방하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완전한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할례를 시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에 거하며, 주일마다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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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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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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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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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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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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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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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50 : 대림절과 성탄절의 올바른 용어들은 무엇인가?
- I. 서언(序言) 다사다난 했던 2024년 한해도 저물어 가면서 교회 절기로는 성탄절을 기다리는 절기인 ‘대림절(待臨節)’과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시기가 되면 용어에 대한 관심이 많은 필자로서는 과연 이러한 절기들의 용어가 올바른가? 라는 의문이 들 때가 많다. 이에 본 호에서는 오래전 기고에서 부분적으로 논한 바 있지만, 다시한번 대림절과 성탄절에 관한 여러 용어들을 분석하면서 어떤 말들이 적합한지를 논하고자 한다. II. 대림절? 대강절? 강림절? 구주 강림절? 올바른 절기 명칭은? 대림절에 관한 용어들을 보면, ‘대강절’(待降節)’, ‘대림절(待臨節)’로 표현하기도 하고, 과거의 개편 찬송가에는 그 분류나 교독문의 제목을 ‘강림절(降臨節)’로 했다가 지금의 찬송가에는 ‘구주 강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용어의 불일치 때문에 어떤 이는 ‘대강절은 성탄절 앞에 지키는 절기이고, 대림절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릴 때이다’라는 자의적인 해석을 하는 경우도 보았다. 이런 같은 한 절기를 두고도 각각 다른 용어들 때문에 예배학 등의 실천신학과 국문학을 전공하고 실천신학을 강의하기도 하는 필자의 경우도 이런 난립한 용어들 때문에 고민할 때가 많다. 결국 2006년 9월에 한국 찬송가 공회에서 발간했고, 거의 전국교회에서 사용하는 현재 찬송가의 교독문 제목과의 통일성을 위해서 본 교회는 구주 강림절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한국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절기 명칭은 ‘대림절’인 것 같다. 이에 본 지면에서는 대림절로 통일해서 논하도록 하겠다. 대림절은 어떤 절기인가? 먼저 전체 교회력에 의하면, 큰 두 주기를 중심으로 한 여섯 절기가 있다. 즉, 부활절과 성탄절 주기인데, 부활절 주기는 사순절과 부활절을 지나 오순절로 마무리 된다. 반면 성탄절 주기는 지금의 절기인 대림절로 시작하여 성탄절과 주현절로 끝이 난다. 이 중에서 대림절의 유래를 보면, 전통적으로 성 안드레 기념일(S.t. Andrew's Day)인 11월 30일을 기준으로 이날에 가장 가까운 주일로부터 시작한다. 주로 11월 27일에서 12월 3일 사이의 한 날로부터 시작되어 성탄절 전날까지 22일에서 28일 정도 지켜지며, 주일로는 성탄절 4주 전부터 시작된다. 대림절의 뜻은 라틴어로 Advent인데 ad와 venire의 합성어이며, 영어로는 ‘to come to’로 ‘오다’란 뜻이다. 즉 대림절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다’는 뜻이다. 한자로는 이런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의미에서의 ‘기다릴 대(待)’와 오신다는 뜻의 ‘임할 臨(림)’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대림절은 이미 오신 성탄절을 기다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더 나아가 앞으로 다시 오실 재림 예수님을 대망하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이에 대림절은 이미 오신 초림이나 오실 재림을 기다리는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다. 또한 이런 의미에서 ‘내려올 降(강)’, ‘임할 臨(림)’의 ‘강림(降臨)’도 적합하다. 이에 현재의 찬송가는 ‘구주 강림’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III. 성탄절에 관한 용어와 결론 “정부가 성탄절을 기독 탄신일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맞느냐?” 어떤 목사님이 울분을 토하면서 필자에게 한 말이다. 어법상 잘못된 말은 아닌 것 같아서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좀 더 알아보겠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각종 자료와 나름대로의 연구를 해 본 결과 성탄절 용어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먼저 가장 보편적인 명칭은 ‘거룩할 성(聖)’, ‘태어날 탄(誕)’, ‘계절 절(節자)’의 성탄절이다. ‘거룩한 분이 태어나신 절기’라는 말이다. 그다음 근래에 와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명칭은 ‘크리스마스’(Christmas)이다. 이는 라틴어인 Christ(그리스도)와 예배란 뜻인 Missa(미사)의 합성어였다가 영어로 표기되면서 Christmas가 되었다. 정확한 뜻은 “그리스도에게 드려지는 예배”이다. 간혹 “크리스마스 예배드린다”고 하는데 이는 Missa(미사)와 예배가 중복된 것으로 바른 표현이 아니다. 또 하나의 명칭은 ‘X-mas’이다. 여기의 ‘X’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희랍어 ‘Kristovs’(크리스토스)의 첫 글자인 ‘X’를 사용하면서 생겨난 용어이기 때문에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X는 미지수나 부정적인 기호에 많이 사용되기 때문에 오해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기독 탄신일은 어떨까? 기독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한자음이기 때문에 문제는 없다. 단지 평소 사용하지 않는 단어라서 어색하게 느껴질 뿐이다. 결론적으로 모두가 잘 아는 대림절과 성탄절 용어들까지 그 정확한 의미와 사용에는 혼란이 있다. 이는 큰 문제는 아니지만, 절기에 대한 바른 의미와 인식, 또한 용어 통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다. 올바른 기다림과 기쁜 성탄절이 되시기를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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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50 : 대림절과 성탄절의 올바른 용어들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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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하나님을 위한 아웃사이더
-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자주 사용되는 신조어 중에 ‘인싸’와 ‘아싸’가 있다. ‘인싸’는 인사이더의 줄임말로 쉽게 말해 사교성이 좋고 인기가 많은 사람이다. 항상 무리의 중심에 있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기질이다. 반대로 ‘아싸’는 아웃사이더의 줄임말로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무리에 잘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특히 조용히 자기만의 세계를 즐기는 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 아웃사이더란 말은 중세 시대에 기독교 국가에서 기독교인들이 이방인들을 아웃사이더라고 불렀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의 젊은 평론가인 콜린 윌슨은 이 말을 어떤 시대의 사회 가치 체계의 상식 밖에서 사는 사람으로 새 뜻을 부여하였다. 이방인, 이교도 외에도 소외자, 부적응자, 반역자 등 그 사회의 부정적인 면을 의식적으로 사는 사람을 뜻하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현대적 이미지의 아웃사이더란 자기 자신의 양심에 자기가 아웃사어더라는 것에 갈등을 느껴서는 안 되며 또 그 가치 세계에서는 아웃사이더로 사는 것이 자신에게 비단 육체적으로 괴롭더라도 정신적으로는 편해야 한다. 한국사에도 이런 아웃사이더로 살았던 인물이 많지만 그 전형적 인물로 세조정란에 저항한 김시습을 들 수 있다.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일찍이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 어느 날 세조가 원각사에서 수륙제(水陸齊)를 베푸는데 신승으로 부름을 받았다. 하얀 누비옷을 입고 청어 한 두름을 가지고 임금 앞에 나갔다. 중과 고기라는 상반된 시위로 풍자를 한 것이다. 그러자 세조가 미친 중이라 하여 내쫓았다. 후세의 유학자들은 김시습에 있어 체질적으로 싫은 불의를 기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중이라는 형태를 택했을 뿐이라고 평가한다. 그를 참 스승이라 하여 많은 중들이 추켜올리고 가르침을 내려달라고 했을 때, 그는 소 한 마리와 소 먹일 꼴을 가져오게 하여 그 꼴을 소 뒤에 놓아두고 깔깔 웃으며 방으로 들어가 버린 일이 있었다. 이를 두고 ‘소 뒤에 꼴 두기’라 해서 사람이 희미하고 어둡고 무식한 것을 이르는 속담으로 전해진다. 자신에게 불도를 배우려는 어리석음을 이와 같이 표현한 것이다. 옛날 재상들이 행차를 할 때는 벽제(辟除)라 하여 사람들의 왕래를 금지시킨다. 서거정이 벽제 행차 때 남루한 차림의 김시습이 불쑥 나와서 ‘야, 서거정 편안한가?’ 하며 재상의 법도에 저항하기도 하였다. 김시습은 야밤에 <이소경>을 소리 높여 읽었다. 그리고는 엎드려 흑흑 울었다. 이와 같은 김시습의 울음은 암울한 시대를 향한 울음이었다. 아웃사이더로서 고독을 우는 것이었으며, 스스로를 소외시킨 책임을 우는 것이었다. 성경에도 아웃사어더로 자처한 인물이 있다. 바로 사도 바울이다. 바울을 고소하는 자들이 벨릭스 각하 앞에서 바울을 평가하는 말이 참 놀랍다. (사도행전24:5)에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라고 평가한다. 한 마디로 바울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걱정이다. 그리고 다음 종교재판을 위해서 받기 위해서 베스도 각하 앞에 서게 된다. 전후 사정을 다 들어본 후 베스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바울의 행동에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는 말이 (사도행전26:24)에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라고 말씀하다. 이에 바울은 그렇지 않음을 말하는데 (사도행전26:25)에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라고 답변을 이어간다. 바울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향해서 ‘미쳤다’는 소리를 하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만일 자기가 미쳤다면 하나님을 위해서 미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5:13)에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라고 말씀한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을 위한 아웃사이더로 사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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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하나님을 위한 아웃사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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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충성의 보상 (느9:7-8)
- 영국 北部에 위치하고 있는 <리버풀>에는 영국 제2의 국립미술관인 <워커>미술관이 있는데, 그 미술관에는 보는 이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만한 유명한 그림 한 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그림은 바로 <콘터러>라는 화가가 그린 “충성”이라는 그림입니다. 이탈리아의 <베스비우스> 화산이 폭발을 해서 <폼페이> 도시가 화산재와 용암으로 뒤덮이는 장면을 그린 그림입니다. 화산재와 뜨거운 용암(鎔巖)이 <폼페이>를 향해서 흘러내릴 때 수많은 사람들이 탈출을 하느라고 도시 전체가 아비규환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장면은 바로 그런 아비규환의 혼란 속에서도 성문(城門) 곁에 묵묵히 서있는 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 사람은 바로 그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입니다. 뜨거운 용암이 강물처럼 흘러내리고 화산재가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는 그런 절대 절명의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맡은 일인 성문을 지키는 일에 충성을 다하는 자세로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그 한 폭(幅)의 그림을 통해서 충성(忠誠)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와도 서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아무리 손해를 보더라도 내게 맡겨진 일을 묵묵히 감당하는 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환경에 따라서 요동을 치더라도 내 자리를 지키는 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충성은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충성하는 자를 기억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충성 없는 신앙생활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충성 없는 신앙생활은 형식에 그칠 뿐입니다. 하나님은 충성을 요구하시고 충성하는 자에게 반드시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첫째로, 충성하면 자손이 복(福)을 받습니다.(느9:7-8) 둘째로, 충성하면 상(床)을 받습니다.(마25:23) 셋째로, 충성하면 관(冠)을 받습니다.(계2:10) 우리 모두 충성하는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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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충성의 보상 (느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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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선한 양심
- 2005년 1월 초 중서유럽 5개국을 여행할 때 로마에서 정말 웃어넘기기에는 놀라운 사실을 목격하고 아직도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로마의 진실의 입(Bocca della Veria)은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이걸 보기 위해 보통 1시간 이상 줄을 서야 한다. 진실의 입은 예술성보다는 영화 로마의 휴일에 나왔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보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더 보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인천에서 온 초등학생이 큰소리로 ‘아니야, 난 넣을 수 없어.’ 하고 엉엉 울면서 부모님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아마 거짓말을 하고 진실의 입에 손을 넣으면 손이 끊어진다는 말을 들었나 보다. ‘난 세 번 거짓말을 했단 말이야! 손을 넣을 수 없어.’하고 고함치며 큰 울음소리로 관광현장을 떠들썩하게 한 순진한 선한 양심의 현장을 목격한 것이 나에게 큰 감명으로 지금도 잊지 못한다. 요즘 들어 부쩍 공정과 정의라는 말을 언론에서 많이 듣게 된다. 정직과는 조금 다른 뜻을 가지고 있지만 통하는 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정직한 사람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스컴에서 ‘기억나지 않는다.’ ‘모른다.’고 일관하여 답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서울 초등학생의 ‘진실의 입’앞에서의 행위는 아니더라도 약간의 순진한 모습조차 찾을 수 없는 현실이 슬프다. 심지어 식당도 믿지 못하여 많은 사람들이 국내산으로 만드는 정직한 밥상을 찾는 것은 나는 비록 부정직해도 마음속 깊이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을 찾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범죄 심리학 폴 에크만 박사는 사람은 8분마다 한 번씩 거짓말을 한다고 밝혔다. 거짓말을 할 때 코 주변의 온도가 올라간다고 하는 데 이를 ‘피노키오 효과라고 부른다. 보통 거짓말은 얼굴을 마주 보고 하는 말하는 것보다 문자메시지로 대화할 때 더 빈도수가 증가한다고 한다. 영상통화를 할 때가 그래도 낫다고 하는 것은 눈을 마주 바라보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게 되면 자기의 양심의 소리가 피노키오 코처럼 얼굴의 표면에서 나타나게 되어 다른 사람에게 들키게 된다. 옛날부터 거짓말은 계속 연습을 하면 할수록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이 는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어떤 일을 추진하는 단체나 불리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그들의 목적을 달성키 위해 거짓말을 참말같이 하고 상대방을 지독하게 몰아붙이는가 보다. 선한 양심을 생명처럼 중요시하고 이것을 최고의 이념으로 여겨야 할 교회도 거짓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성직자가 자기의 일에 책임질 위기에 놓였을 때 양심에 화인 맞은 것처럼 아무런 죄의식 없이 자기 방어를 위해 거짓말을 상습화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교회의 중직자도 자기의 사업을 위해 거리낌 없이 예수 빙자로 자기의 뛰어난 말재주를 가지고 사기 행각을 벌이는 것을 우리가 직접 목도하고 얼마나 실망했는가! 물론 선한 거짓말이 위기 상황을 피하는 데도 간혹 도움이 될 때도 있다. 양심을 속이는 것은 나를 감싸주고 있는 옷과 같지만 진실의 비바람 속에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 인천 초등학생과 같이 ‘진실의 입’앞에서 거짓말을 토해 낸 것같이 선한 양심으로 정직하게 살자. 정직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1000번 이상 연습하고 다짐을 하자. 그리하면 분명히 행복해진다. 2024.12.16 경남기독신문 초장컬럼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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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선한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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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복음 전도 치유 실행 2. 빛
- 빛이 되려고 한다고 빛이 되는 것이 아니다. 빛이 되려고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미 빛이다. 일어나 빛을 발하라고 하신다.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다”라고 하신다(사60:1). 빛으로 만들어 놓으셨음을 감사와 감격으로 받도록 믿음으로 생각을 바꾸게 하면 된다. 우리는 빛이 아니었다. 오직 여호와가 “네 위에” 임하셨단다.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셨단다(사60:2). 우리는 빛이다. 우리 위에 임한 주님의 임재가 빛이 되게 하셨다. 우리가 빛이 되려고 노력해서 빛이 된 것이 아니다. 우리를 빛이 되게 하셨기에 일어날 수 있고, 빛을 발할 수 있다(사60:1). 우리가 빛인 줄 몰라도 우리는 빛이다. 그분의 영광이 임했기 때문이다(사60:2). 빛을 발하는 것은 빛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빛인 줄 알고, 빛의 삶을 적용하면 된다. 존귀한 사람인 줄 알고, 존귀한 사람답게 살면 된다. 빛으로 만드신 과정을 알고 믿으면, 감사와 가격과 흥분이 올 수밖에 없다. 빛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빛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 당신께서 빛이신데 우리 위에 강림하셨다. 회개는 잘못을 뉘우치고 예수를 믿는 것이다. 우리의 힘으로 죄를 조금도 해결하지 못하기에 예수께서 이 땅에 왔다 가셨다. 예수께서 희생하심으로 이루어 놓으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회개다.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를 인정하는 것은 예수께서 해 놓으신 일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해 놓으신 것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일을 인정해 주는 것을 기뻐하신다. 우리는 믿음으로 은혜 안에 있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드러내는 것이 빛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의 할 일은 하나님의 은혜만 드러내면 된다. 그러면 행복하다. 그러면 신난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난다. 우리가 할 유일한 일은 예수께서 하신 일만 받아 적용할 일이다. 이사야 시대를 생각해 보라. 선지자가 활동한 시대는 언제나 어두움이 깊은 시대였다. 스스로 빛이 될 수 없는 시대임을 절실히 보여 주신다. 이 어둠의 때에 하나님께서 임하시겠단다. 그것이 이사야의 예언의 핵심이다. 주님만이 빛이시다. 그 분이 우리 위에 임했기에 우리가 빛이다. 십자가 부활로 그렇게 하셨다.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왕이 통치할 때 이사야는 활동했다(사1:1). 웃시야는 하나님을 거역하다 나병에 걸려 죽었다. 왕실의 묘실에도 장사지내어지지 못했다. 아하스 왕 때는 온갖 이방 우상을 섬기며, 타락의 극치를 달렸던 때다. 아하스가 극심한 범죄에 빠졌을 때 이스라엘과 아람을 연합시키셔서 유다의 아하스를 치게 하셨다. 아하스는 숲의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듯 떨렸다(사7:2).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보내 말씀하신다. “아하스야, 너 나와 교제하자. 나를 의지해 보아라. 이미 너에게 약속한 것이 있다.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는데 증표를 구해보라”고 하셨다. 그러나 아하스는 증표를 구하지 않았다. 안타까웠던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아하스의 상태와 상관없이 영원한 증표를 주셨다. 스스로 빛으로 임재하심을 선포하시고 싶으셨다. 제발 “하나님의 임재를 알고 살라”고 애타하셨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다”(사7:14)라고 하신다. 무슨 말인가 철저히 빛이 아닌 아하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너를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너를 버릴 수 없다. 내가 너와 함께한단다. 영원토록 함께 한단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믿어라”는 것이다. 아하스야 “너는 임마누엘로 살아라”는 말씀이다. “너는 빛이다”고 선언하신 최고의 장면이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랑엔 두려움이 없다. 임마누엘을 믿으면 두려움이 없어져 믿음으로 살 수 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없어 두려운 것이다. 두려움 때문에 모든 범죄가 일어난다. 근본적으로 두려움 때문에 명예가 있어야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명예욕이 생긴다. 물질도 많아야 불안하지 않다. 두려움 때문에 욕심이 생긴다. 모든 죄의 근원에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마태복음 5장의 핵심은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두려움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임마누엘 한 것을 알면, 두려움 없이 담대하고 행복하다. 심령이 가난해 진다. 마음이 청결해 진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다.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다(딤후1:7). 빛이 되는것은 쉽다. 예수를 믿으면 빛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할 일을 어렵게 만들어 시키시는 분이 아니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빛이다. 믿는 것은 쉽다. 그것이 복음이다. 그래서 복음을 가르쳐 내야한다. 임마누엘 하시고 싶으셔서 십자가를 지셨다. 우리가 빛이 아닌데 주께서 스스로 꺼진 등불에 불이 되셨다. 그래서 빛이 되는 것은 쉬운 정도가 아니라 저절로 된다. 저절로 보다 수운 것은 없다. 저절로 과실을 맺는다(요15장). 내 안에 빛 되신 주님이 불이 되어 등불이 비췸을 알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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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복음 전도 치유 실행 2.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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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9)
- 사도바울이 쓴 서신서에 보면 바울이 관계의 중요성을 알고 관계 회복을 위해 편지를 쓰고 관계의 비결에 대해 글을 쓴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가 많았던 고린도교회는 관계 문제가 핵심입니다. 분쟁과 갈등, 소송 등 문제의 원인은 관계의 깨어짐에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깨어진 관계 회복을 위해 권면과 격려의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3-4 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분쟁이 있는 것을 보시고 싸우거나 다투지 말고 좋은 관계가 되어야 한다. 분쟁으로 인한 관계의 깨어짐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사랑의 편지입니다. 분쟁하면 관계가 깨지고 교회가 무너지기도 합니다. 관계가 좋으면 교회가 평안하고 부흥합니다. 관계는 교회 성장의 비결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도바울의 팀 사역은 관계 사역이요 관계 목회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인간관계가 중요합니다. 사탄은 관계를 깨뜨립니다. 에베소교회, 빌립보교회 로마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도 관계에 관한 편지를 썼습니다. 관계가 중요합니다. 목회는 관계입니다. 목회의 실패는 관계의 실패입니다. 에베소서 4:1-4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성령은 하나 되게 하시고 겸손과 온유는 관계의 비결입니다. 빌립보서 2:2-5 2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마음이니 같은 사랑, 같은 마음, 겸손, 다투지 않음,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들은 인간관계의 비결입니다. 로마서 12:13-21 13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체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18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대접, 축복해 주기,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 선한 일, 돌봄, 화목, 보복하지 않는 것 등은 관계의 비결입니다. 사도바울은 관계의 중요성을 알고 관계의 비결, 관계 회복을 위해 편지를 썼습니다. 관계가 전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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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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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 어느 교회 예배 시간에 한 남성이 모자를 쓰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목사님은 예배를 인도하면서 계속해서 그 사람이 눈에 거슬렸습니다. 그래도 참고 예배를 인도하고는 예배 후에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예배 태도를 바르게 해야 하겠습니다. 왜 모자를 쓰고 예배를 드리지요?” 그 말에 그 사람은 오히려 목사님에게 이렇게 반문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왜 안경을 쓰고 예배를 인도하십니까?” 그 말에 목사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야 내 눈이 나빠서 그렇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겸연쩍은 듯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도 머리가 나빠서 모자를 썼습니다. 저는 교회 옆 병원에서 항암치료 중에 있는데 머리 모양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 흉한 것 같아서 모자를 쓴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은 한 청년이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앞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청년이 계속 눈에 거슬리던 한 장로님이 예배를 마친 후 청년에게 다가 가서 물었습니다. “너 그 머리 색깔이 뭐니? 그 모습으로 예배를 드려서야 되겠니?” 그 질문에 그 청년은 도리어 장로님에게 반문했습니다. “장로님도 머리 염색을 하셨잖아요? 장로님은 왜 염색을 하셨습니까?” 장로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야 내 머리가 백발이라 검게 염색을 한 것이지.”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이 웃으면서 말을 했습니다. “검은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것과 백발을 검게 염색한 것을 똑같은 것으로 봐주십시오. 제가 사업을 새로 시작했는데 그 사업의 주 고객이 청소년들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머리를 염색했으니 양해해 주십시오.” 진실은 겉으로 드러나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다 알 수 없는 것임을 알게 해 주는 이야기들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틀린 말입니다. 하나만 보고는 그 사람의 면면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의 단편적인 모습을 보고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단정해버립니다. 그러나 그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다른 좋은 면들이 훨씬 더 많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에 대해서 어느 한 단면만을 보고 그 사람을 다 판단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것은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잘 모르면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 복음서에 보면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 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그 때 배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면서 “주님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그들의 믿음이 작은 것을 책망하시고는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서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그 장면을 본 제자들은 마태복음 8장 27절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고 말입니다.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그 분의 말씀과 능력을 늘 접했으면서도 예수님을 예수님답게 알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것이 아니라 열을 보고도 진짜 알아야 하나를 알지 못했던 것이지요. 독자 여러분, 인간이란 그런 존재인데 어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속담을 진리로 받아들인 자들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나타내 보이기도 전에 사람들에게 정죄 받고 거부당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사람에 대해서도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생각으로 대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열을 봐도 진짜 알아야 할 하나를 알지 못할 수 있다.”는 겸손함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에 대해서 중단 없이 말씀을 통해서 배워갈 수 있고, 또 사람에 대해서는 섣불리 판단하여 단정해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인간은 한계를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이나 사람에 대해서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열을 봐도 진짜 알아야 할 하나를 알지 못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언제나 그 겸손함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그리고 사람을 대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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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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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일상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지혜와 부르심
-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인간됨의 한 본질이다.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적으로 응답함으로써 인간됨의 본질을 유지할 수도 있고 하거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불순종적으로 응답함으로써 인간됨의 본질을 왜곡시키거나 상실할 수도 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책임 없는 다국적 기업을 통해 약소국들을 짓밟거나, 하나님은 없고 인간이 과학과 기술을 통해서 만물을 다스리는 주인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며, 경제적 탐욕으로 창조세계를 오염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창조세계를 경작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을 수는 없는 존재다. 어느 작가의 말처럼, 인간은 문화적 활동과 창조세계의 발전을 통해 하나님께 주어진 지구를 다스리는 권세를 증명한다. 이것은 우리가 단지 종교적 행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삶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함을 의미한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창조 세계 안에서 인간과 함께 걸으셨음을 보여주고 있다(창3:8).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위해 세상을 떠나 어떤 내면의 성소로 도피할 필요가 없음을 알려준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가장 평범한 일들 속에서도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이사야 선지자는 농부가 씨를 심고 타작하는 지혜조차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말한다(사28:24-29). 농사를 짓는 기술조차 하나님의 지혜에서 비롯된다면,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과 관계 맺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현실 세계를 떠나 성경 속 인물들과 함께 마치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이 있다. 이는 성경을 오용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현실 세계 속에서 하나님을 찾도록 인도하는 삶의 지침이다. 잠언은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의 일상, 우리의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들려올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잠8:1-3). 하나님은 가장 예상치 못한 장소와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기도 하신다. 선지자 이사야는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을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부르며, 하나님께서 이교도 왕의 정치적 행동 속에서도 일하신다고 선언한다(사45:1). 심지어 잠언 30장에는 비이스라엘 왕의 지혜가 기록되어 있고, 민수기에는 발람의 나귀조차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듣는 모든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사상가든 작가든 예술가든 정치인이든, 하나님은 다양한 도구와 사람을 통해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물론, 모든 것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지혜롭지 않다. 잠언은 세상에 지혜뿐 아니라 어리석음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 있다(잠9:14-16). 참 된 지혜는 오직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어리석음은 우리의 잘못된 선택과 욕망에서 비롯될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분별력 있는 태도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일상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하는 영성이다. 인공지능이 가르쳐 주는 의미 있는 예화를 하나 소개해 보고자 한다. 한 작은 마을에 빵집을 운영하는 한 신실한 크리스천 주인이 있었다. 그는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반죽을 만들고 빵을 구우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곤 했다. 어느 날, 그는 목사님을 찾아가 자신의 일상이 하나님께 의미 있는 일인지 물어 보았다. “목사님, 저는 매일 빵을 굽는 단순한 일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어떤 가치가 있을까요? 저는 성경을 가르치거나 선교를 다니는 분들처럼 거룩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목사님은 잠시 빵집 주인의 손을 바라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당신의 빵을 먹고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당신의 손은 성전의 제사장이 드리는 예물처럼 하나님께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빵을 통해 이웃을 섬기는 것을 통해도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날 이후로 빵집 주인은 자신의 일을 하나님이 주신 부르심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는 단지 빵을 구울 때조차도 기도하며, 빵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나누는 삶을 살았다. 이 빵집은 단순히 빵을 사는 곳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와 평안을 경험하는 장소가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우리를 부르신다. 그분은 단지 종교적 의식 속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직업, 인간관계, 문화 활동, 창조세계 속에서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분별력으로 세상의 모든 음성을 경청하며, 창조세계를 경작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쁨으로, 그리고 순종적으로 응답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기독교인의 삶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영적인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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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일상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지혜와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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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은 목사] 성탄 축하 메시지 - 이 땅에 왕으로 오신 예수님
-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탄생하신 것을 기념하는 성탄절이 다가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실 구원자로 이 땅에 오셨을 뿐만아니라,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왕으로 오셨습니다(마 2:1-2). 죄 가운데 태어난 모든 인간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요,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엡 2:3).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죄인을 위해 죽는 자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롬 5:7-8).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왕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는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서 그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왕왕왕왕 나는 왕자다 하나님 나라에 나는 왕자다. 공공공공 나는 공주다 하나님 나라에 나는 공주다” 이 찬양가사처럼 예수 믿는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왕자요, 공주된 권세를 가진 자들입니다. 이는 곧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권세가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의 자녀인 우리가 진정한 왕자와 공주의 권세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왕의 통치를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왕의 통치를 받지 않는 자는 왕의 백성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 갈 때에야 비로소 왕의 자녀로서 권세를 누릴 수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약속은 조건이 따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 이처럼 하나님께서 명하신 조건을 따라 행할 때 우리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난 자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번 성탄절을 통하여 정말 나의 왕이신 예수님의 통치를 받고 살아가고 있는지, 즉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과 뜻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을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다스림을 받을 때, 하나님 나라의 왕자와 공주로서의 권세를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왕의 통치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하는 삶을 살아가기를 다짐하며,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가 넘치는 기쁜 성탄절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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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은 목사] 성탄 축하 메시지 - 이 땅에 왕으로 오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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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49 : 기도했습니다? 기도합니다? 와 설교 후의 기도
- I. 서언(序言) 오랫동안 본지를 통하여 기독교인의 생활 용어 바로 사용하기 코너를 연재해 오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타종교에서 유래된 용어를 바로 사용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우리 기독교 용어도 바로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너무 많다는 것도 문제였다. 이런 차원에서 본 호에서는 잘못 사용하고 있는 기도 용어 중에서 기도의 종결 의미인 ‘기도했습니다’와 ‘기도합니다’에 대한 내용과 설교자의 설교 후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 기도의 종결 의미는 과거형인가 현재형인가? 우리가 늘 기도드리는 용어 중에 기도를 마칠 때 종결 의미의 내용이 여러 형태가 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예를 들면 과거 시제인‘기도했습니다’와 ‘드렸습니다’등의 경우와 ‘기도합니다’와 ‘기도드립니다’의 현재 시제로 마치는 경우이다. 어떤 경우가 적합한가 를 논한다면 다음과 같다. 1. 기도했습니다와 기도드렸습니다의 경우: 이 두 가지 경우는 시제로 볼 때는 앞에서 기록한대로 과거형이다. 어떤 면으로 볼 때는 기도의 시작이 10분 전이나 5분 전이었다면 마칠 때는 기도한 내용이 이미 과거가 되기 때문에 과거 완료형인 앞의 경우가 문법적으로는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도는 그 성격상으로 볼 때는 거의 다 하나님께 현재의 형편과 미래를 향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기도의 종결 의미는‘했습니다, 드렸습니다’ 등의 과거 시제형의 종결 의미는 적합하지 않다. 2. 기도합니다와 기도드립니다의 경우: 앞에서 논한 대로 기도의 모든 내용은 현재와 미래 를 향한 내용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종결 의미는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형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도의 마침은 항상 현재형인 ‘기도합니다’와 ‘기도드립니다’로 되어야 한다. 그래야 기도한 내용이 현재와 미래지향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III. 하나님께 설교하는 형태인 ‘합니다’는 올바른 기도인가? 설교가 끝난 후 많은 설교자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조금 전 설교한 내용을 다시 요약해서 반복하는 형태의 기도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설교 후의 기도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설교한 내용을 들은 교인들이 지키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부 설교자들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간구형이 아닌 하나님께 다시 설교하는 것과 같은 형태일 때가 많다. 이는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예를 들면, 설교가‘서로 사랑해야 된다’는 내용이었다면, 기도는‘하나님,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하게 해주시옵소서’ 라는 바람의 내용이 되어야 될 것이다. 하지만 여러 경우들을 보면, ‘하나님,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하나님,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라는 등의 기도를 함으로서 마치 하나님께 설교하는 듯한 내용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필자도 간혹 그런 경험들이 있다. 왜 그랬을까? 를 생각해 보면 20~30분 동안 교인들에게 선포형의 설교를 계속하다가 바로 이어서 기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도 계속 습관적으로 설교형 기도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런 내용은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께 설교하는 형 태가 되기 때문에 매우 합당하지 못한 경우이다. IV. 맺는 말 서론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기독교 용어 중에서도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흔히 하는 말로 ‘바른 말인 것 같지만 바르지 않는 말’들이 너무 많다. 그 이유는 우리의 한글날이‘세계 국어의 날’로 선정될 정도로 매우 우수한 말이기는 하지만, 형용사와 한자어가 많고, 다른 언어에는 거의 없는 경어(敬語)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항상 강단에 서서 많은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에게 있어서는 항상 사용하는 단어나 문구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항상 드리는 기도의 내용도 다시 한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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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49 : 기도했습니다? 기도합니다? 와 설교 후의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