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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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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오피니언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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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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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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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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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신지균 목사포토묵상에세이]하루
    <하 루> 하루를 넘겼을 뿐인데 새해라고 한다. 하루를 넘겼을 뿐인데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 이렇게 하루하루 넘긴다면 주님 만난 날 있겠지 새해 마라나타 하루 만에 천국 되겠지
    • 오피니언
    • 기고
    2021-01-04
  • [문보민 목사] 다른 복음을 매력적으로 느끼는 기독교인들에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익숙한 것보다 새로운 것에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그 이유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가지고 있지 않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것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습과 같이, 교회에서도 유일한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주어졌음에도, 영적 목마름과 공허함을 새로운 것으로부터 채우려는 모습으로 인해, 이단들의 비성경적 가르침과 메시지에 성도들이 미혹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교회에 주어진 유일한 진리가 아닌 새로운 것을 추구하다 다른 길에 빠진 성도들에게 간절한 마음을 담아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1.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신천지에 빠진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확신에 찬 모습으로 가르치는 신천지 강사들의 모습에 큰 매력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에게 구원의 확신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심과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다는 진리를 확신할 때 신앙이 더욱 견고해지고 실제적 삶의 태도가 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구원의 확신 없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번에 해결하시고 이루셨음을 확신함으로 고백되어져야 합니다. 2.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합니다. 화려하고 멋진 스포츠카의 성능을 결정하는 것은 경쟁사보다 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가 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빠르더라도 목적지에 가지 못하는 자동차는 실생활에서 무용지물입니다. “교회를 얼마나 일찍 출석했는지-얼마나 성경을 빠르게 많이 읽었는지-얼마나 빨리 직분을 받았는지-얼마나 봉사를 빨리 시작했고 많이 했는지”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신앙의 목적지를 향한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입니다. 이단들은 종교적 열심이 매우 강합니다. 그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포교-선교-구제’와 다양한 사회적 활동들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열심과 믿음이 대단할 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방향성을 잃어버린 길은 멸망의 길일뿐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증거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3. 진리의 싸움은 소속의 싸움입니다. 신천지에 소속된 신도들은 교주의 말에 절대 복종합니다. 다른 이단의 신도들도 자신이 속한 단체가 진리라 여기며 교주의 말에 절대 복종합니다. 우리의 소속은 어디인가요?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존재이기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절대 진리입니다. 유명 강사 혹은 타인의 말이 진리가 될 수 없으며, 타인의 체험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진리의 기준은 성경이 되어야 하며,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목회자들은 성경을 기준으로 진리를 분명히 전하고 가르쳐야 하며, 성도들은 성경을 기준으로 자신의 신앙과 믿음을 철저히 돌아보며 점검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진리를 바로 세우고 진리로 무장하여 우는 사자와 같이 할 수 있으면 믿는 자라도 넘어뜨리고 삼키려는 이단들을 대처해야 합니다. 새롭게 들리고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다른 복음으로 우리를 미혹하고 유혹하는 이단들을 단호히 뿌리치고 예수 그리스도에 속함으로 끝까지 승리하며 나아가는 우리 되길 함께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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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30
  • 생각한토막[김문훈 목사] 요셉 양육기
    성경에서 예수님을 가장 닮은 인물이 요셉이다. 많은 사람들이 롤 모델로 삼는 사람이 요셉이다. 요셉에게서는 결점을 찾아보기 힘들다. 어떻게 해서 요셉은 이런 인물이 되었을까요? 사랑스러운 요셉 만들기 구약성경 최고의 사랑꾼인 야곱을 아버지로 태어난 요셉은 어릴때부터 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어릴 때 엄마를 잃고 청소년기에 형님들에게 버림 받고 십년 동안 충성을 다한 주인에게 누명을 받았지만 세상에 정을 끊고 하나님만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길고도 먼 과정을 살았다. 미움과 원망의 쓴 뿌리가 아니라 자기를 팔아버린 형님들을 먹여 살렸다. 죽을 때 애굽에서 성공한 비석을 세우지 않고 뼈라도 남기지 않고 고향으로 가져가라고 하면서 가족사랑, 나라사랑, 하나님 사랑의 요셉이 되었다. 꿈을 통한 요셉 만들기 하나님이 주신 황당한 꿈 이야기를 하다가 숱한 고생을 했지만 결국 꿈 꾼대로 되었다. 꿈을 주신 하나님은 그 꿈이 이루기까지 끝장을 보신다. 형통의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요셉의 길이 전반전은 완전 내리막길이었지만 나중은 좋게 되었으니 형통이다. 거목 요셉 키우기 오셉 가지는 샘 곁에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어서 글로벌 리더가 되었다. 요셉이 거목이 되기까지 하나님께서는 무지막지하게 가지치기를 하셨다. 요셉 총리 만들기 17세에 강제로 애굽에 팔려가고, 억울한 왕실의 감옥생활을 2년 하고, 예수님처럼 30세가 되어서 총리가 되었다. 멘탈 갑 요셉 만들기 요셉은 어릴 때 어머니를 잃고 형제들에게 버림받으며 사람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신뢰하는 법을 배웠다. 세상 줄 끊고 사람에게 정을 떼고 처절한 세월을 살았기에 요동치 않는 인격이 되었다. 큰 그릇 요셉 만들기 막둥이 아들이 원수 갚지 않고 온 가족을 먹여 살렸다. 요셉 얼굴 성형하기 요셉은 일그러진 영웅이 아니라 용모가 준수하고 아름다웠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가장 닮은 사람이 되었다. 나는 아직 공사중이라서 미완성입니다! 나는 아직 천국가기 전까지 성화중입니다! 성령님께서 고장난 나를 견인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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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9
  • 생활용어 바로잡기[이정희 목사] 도교에서 유래된 용어들 : 좌청룡 우백호와 청와대 논란
    I. 서언(序言) 우리의 전통 중에서 민간 신앙으로 뿌리내린 여러 가지 중에서 지난 호에서 논한 풍수사상은 역사적으로도 많은 폐단을 낳았다. 지금도 선거철이 되면, 최고위층의 위정자들도 풍수가들을 대동하고 명당을 찾아서 조상의 무덤까지 이장하는 경우들도 흔히 볼 수 있다. 이런 해프닝 속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좌청룡 우백호’이다. 이는 비기독교인들 뿐 만 아니라 정상적인 교인들까지도 ‘좌청룡 우백호’에 관심을 두고 있기도 하고, 오랜 신앙생활을 한 교인들도 간혹 ‘무덤을 잘 써야 후손이 잘된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에 본 호에서는 이런 풍수사상의 용어에 대한 어원과 구체적인 내용을 찾아서 논하고자 한다. II. ‘좌청룡 우백호’란 말은 무엇인가? 이를 논하기 전에 지난 호에서 논한 풍수의 유래를 조금 더 살펴보면, 그 시작이 옛날 고대인들의 무덤인 ‘고인돌’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당시에 시신을 매장할 시에는 무덤에다 현무(玄武- 거북으로 상징되는 북방을 지키는 신)와 주작(朱雀-봉황으로 상징되는 남방을 지키는 신), 동쪽은 청룡, 서쪽은 백호, 태양과 달, 토끼 등의 동물들의 그림을 채색하여 그려 넣어서 이들의 기운을 지킴으로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한다는 신앙이 있었다. 이런 민간 신앙과 사상이 풍수의 사신도(四神圖)의 기초가 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영향을 받은 중국에서는 산세의 위치를 조망하여 뒷산의 주봉은 현무, 남쪽은 주작, 청룡, 서쪽은 백호로 칭하였다. 좌청룡 우백호란 말도 여기에서 나왔다. 즉, 좌 쪽의 산이 청룡의 형상이고, 오른쪽의 산이 백호의 형상이 되는 자리의 산세가 잘 배치된 중앙에 있는 땅(穴)이 명당이라 했다. 또한 지난 호에서 언급한 대로 이런 명당에 조상의 묘를 쓰면 자손은 그 정기를 그대로 받아 부귀복수(富貴福壽)를 누리게 된다고 믿는다. 이에 이를 믿는 자들은 사력을 다하여 명당 찾기에 혈안이 되기도 하고, 필자가 어린 시절에 본 바로는 이런 명당에 오래된 무덤이 있으면, 그 묘를 파묘해서 유골을 유기하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조상의 무덤을 쓰는 만행을 일삼는 일들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이뿐 아니라 풍수지리의 좌청룡 우백호의 명당에 대한 기대는 국운(國運)을 좌우한다고 믿고 있으며, 이로 인한 수많은 논란과 사건들을 양산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현재의 청와대는 길지(吉地)인가? 흉지(凶地)인가? 에 대한 논쟁이다. 먼저 흉지로 보는 어떤 풍수가의 견해이다. 그의 주장은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125m)은 너무 낮고 약해서 흉풍(凶風)이 불어와도 혈(穴)인 청와대를 막아주지 못하고,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340m)은 너무 크고 높아서 오히려 혈인 청와대를 겁박하고 있다고 했다. 이로 인해서 역대 대통령들이 순탄한 마무리를 하지 못하고 불운이 계속되고 있으므로 청와대를 빨리 옮겨야 된다고 했다. 그다음 길지(吉地)로 보는 풍수가의 견해는 이러하다. 청와대는 원래 경복궁터로서 세종대왕이 당시의 많은 풍수가들이 길지라고 해서 정했고, 길지의 장애가 되는 요소는 모두 수정 보완했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다. 또한 우리나라가 10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것은 청와대가 명당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III. 현대인들에게 주는 영향과 결론 이상의 풍수지리설에 의한 좌청룡 우백호의 명당에 대한 웃지 못 할 청와대 논란까지 볼 때 어떤 생각을 가져볼 수 있는가? 믿지 않는 일반인들의 관점에서는 흥미로울 수 있고, 지나친 맹신까지 가져올 수 있는 사안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라보시는 관점과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이런 혹세무민(惑世誣民)도 없을 것이라고 통탄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런 잘못된 도참사상(圖讖思想)이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의 명당에 대한 기대와 언어들이 우리들의 기본신앙과 용어들까지 흔들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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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9
  • 마음을 여는 시[신광열 목사] 응답 應答
    하나님은 누구에게 숨어 있을까 누구에게 하나님은 침묵하실까 누구에게 하나님은 꼼짝도 하지 않으실까 그리고 왜 누구에겐 기다리고 있었듯이 얼른 대답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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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0-12-09
  • 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주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
    또 산에 오르사 주님은 구원역사를 위해서 어떤 구체적인 방법을 사용하셨는가? 주님은 지상교회를 세우시고 가장 본질적인 목양 사역으로서 제자훈련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막3:13-16) 그렇다면 제자훈련의 목적은 무엇인가? 첫째, 자신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제자훈련은 지식을 전달하는 단순한 학습훈련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변화를 주는 인격적 사역훈련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과 같이 있으면서 24시간 주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대로 보고 생활 속에서 삶을 배우는 인격훈련이었다. 세인들처럼 삶을 베일에 가려 놓고 교안만 가져와서 세미나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생활하면서 앞장서서 본을 보이는 모범적인 삶이었다. 둘째, 세상을 향한 파송이다. 오늘날 교회는 부르는 초청에는 관심이 많으나 세상을 향해 내어 보내는 파송에는 너무도 인색하다. 이제 우리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처 땅 끝까지 가야 한다. 목숨을 요구하는 사역의 현장에라도 가야한다. 이것이 전도자의 사명이다. 주님은 하늘보좌를 버리고 이곳까지 오셨다. 셋째, 귀신들을 내어 좇는 권세이다. 주님은 우리를 보내실 때에 거저 보내지 않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어서 보내셨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주님은 우리에게 사단의 권세를 제압하는 능력을 주어서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자로 나아가면 사단의 권세가 우리 앞에 굴복하게 된다. 집에 들어가시니 마지막으로 이제 주님은 하산하여 어느 집으로 들어가셨다. 주님이 어디를 가든지 가는 곳마다 무리들이 모여 들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들은 주님을 체포하러 온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은 다름 아닌 주님의 친족들이다. 이들은 주님을 알기로 가정을 버리고 방랑자처럼 떠돌아다니는 미친 자로 알았다. 사실 주님의 구원사역이 얼마나 외롭고 고달픈 길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사명자의 길은 이처럼 외로운 것이다. 주님이 전도현장에서 받은 몇 가지 아픔들은 어떠했는가? 첫째, 무리들에 의한 쉼 없는 사역이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식사할 틈이 없을 정도로 분주한 사역이니 한 순간도 쉴 틈이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제자로서 목양 사역에 수종을 들다보면 때로는 밤과 낮의 구분이 안 될 때가 많다. 둘째, 친족들에 대한 오해와 불신이다.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막3:21)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 그리고 가까운 친척들이 주님을 데리려 왔다.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난 때 집안의 장남인 주님이 공생애 사역으로 전도하려 나오니 이를 이해하지 못한 동생들과 친족들이 예수를 미쳤다고 오해했다. 그러나 주님은 거룩한 구원사역을 혈육의 정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다. 셋째, 성령을 훼방하는 사역이다. 주님이 이 본문에서 말씀하신 성령 훼방 죄가 무엇인가? 지금 더러운 귀신이 주님을 보는 순간에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면서 하나님의 아들 됨을 고백하고 떠나간다. 그런데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도 잘 아는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고 사단의 사역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거룩한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므로 이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라고 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서기관들의 잘못이 우리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을 때가 많다. 아무리 하나님의 아름답고 큰 역사라도 나와 좋은 관계에 있지 아니한 자가 행한 것이면 비판하고 정죄하여 사단의 역사로 몰아붙이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훼방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지체와 동역자들의 거룩한 사역을 칭찬하고 격려하고 협력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 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의 형제와 자매 본 문단은 앞 문단과 연결되어 있다. 20-21절에서 예수의 가족이 등장한다. 그들은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들 듣고 예수를 잡으러 가버나움으로 향했다. 예수를 오해한 혈통적인 가족들이 서기관과 바알세불 논쟁을 벌이고 있는 현장에 나타났다. 그때 무리들 중에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당신을 찾는다고 했다. 주님은 자신을 찾는 가족들을 향해 참 가족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어떤 분이 가족이란 영어 단어 이니셜을 따서 이렇게 풀이 했다. “아빠 엄마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성경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주님은 구약의 율법을 사랑이란 새 계명 하나로 다 이루셨다. 십자가는 사랑의 결정체이다. 주님은 십자가라는 고통의 쓴 잔을 앞에 높고 자신의 의지가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소원했다. 저자의 허락에 의해 일부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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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2020-12-09
  • 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꾸지 아니하게 하시는 하나님
    돈을 빌려 주면서 사는 자가 있고, 돈을 빌려 달라고 하면서 사는 자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행을 통해 돈을 빌려 쓰면서 살아갑니다. 빚을 지면서 사는 것은 큰 부담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복 주셔서 서서히 은행 빚을 갚아가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으면 꾸어줄지라도 꾸지 아니하고 살아갑니다. 꾸지 아니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통치할지라도 너는 통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신15:6)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신28:12) 하나님께서 재물의 복을 주시면 가난한 자가 없어집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신15:4-5) 가난이 죄는 아니지만 축복은 아닙니다. 가난을 원하는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재물의 복을 주시면 빚지지 아니하고, 꾸지 아니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살다보면 빚지기도 합니다. 은행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빚을 다 갚고 꾸어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꾸어주고 나누어주고 사는 삶이 축복입니다. 꾸어주고 살지언정 꾸지 아니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꾸지 아니하고 살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반드시 복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꾸어주면서 살지언정 꾸지 아니하고 살 수 있는 은혜와 축복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꾸어주며 나누면서 살아갈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사람들에게 덕이 됩니다. 남에게 꾸어달라고 구걸하면서 살 때 전도문이 막히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 수 있게 됩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7-9) 하나님께 복을 받아야 합니다. 축복을 받으면 꾸지 아니하고, 꾸어주고 나누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복 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에게 다양한 복을 주십니다.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축복의 내용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복 주시는 하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칼럼의 완본은 gncnews.net 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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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9
  • [조희완 목사] 노력하며 삽시다.(막1:1-12)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인 <코카서스>산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산은 너무 높아서 언제나 구름이 봉우리를 가리고 있습니다. 용감한 독수리 한 마리가 그 산을 정복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날아올랐지만 여러 차례 실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드디어 독수리가 그 산 꼭대기에 오르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정상에 오른 독수리는 대단한 성취감에 젖어서 자신의 자랑스러운 날개를 활짝 뻗으면서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거미 한 마리가 나무 가지에 거미줄을 치면서 낄낄대며 웃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독수리는 속으로 “아니 저 거미가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지?”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자 거미가 독수리를 바라보면서 말하기를 “너는 여기까지 죽을 고생을 하면서 올라왔지만 나는 네 날개 아래 붙어서 하나도 힘을 들이지 않고 올라 왔단다!”하면서 독수리를 놀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세차게 불어온 바람에 그만 거미가 산 밑으로 굴러 떨어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에 담겨있는 뜻은 바로, “내가 노력하지 않고 얻은 기쁨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직접 수고하고 노력해서 얻은 기쁨이라야 오랫동안 누릴 수 있는 것이지, 노력하지 않고 얻은 기쁨은 오래 갈 수가 없습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수고하고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야 가치가 있는 것이지 수고하지 않고 불로소득으로 얻은 물질은 가치가 없고 도리어 해(害)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땀 흘리고 노력해서 얻은 것이 좋은 것이지만 노력 없이 얻은 것은 별로 좋은 것이 못됩니다. 노력하면 반드시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것도 다같이 함께 노력하면 더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함께 노력할 때 어떤 결과가 있습니까? 첫째로, 함께 노력하면 기적을 불러옵니다.(막2:1-5절) 둘째로, 함께 노력하면 승리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대하20:20-23) 셋째로, 함께 노력하면 부흥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행6:1-7) 온 교회가 함께 노력하셔서 큰 역사 이루어 가시기 바랍니다. 칼럼의 완본은 gncnews.net 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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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9
  • [최호숙 목사] 삶을 “단디하라”
    목회자를 세우는 노회 목사 안수식에 설교 부탁을 받았다. 코로나 감염시대에 설교를 길게 할 수는 없고 짧고 핵심적인 것을 해야 한다고 판단되어 부교역자들에게 좋은 방법을 물었더니 경상도 출신 부교역자가 좋은 의견을 주었다. “목사님, 이 말 한마디면 끝납니다.” “그 말이 뭡니까?” “여러분, 목회 단디하십시오...” 정말로 목사 안수식 당일에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으면 “단디 하라”는 메시지를 전했는데 그 말씀이 인상이 깊었는지 단상에서 내려온 후에도 사람들의 입에서 “단디하라” 이 말을 되씹어 가며 서로가 서로에게 각인시키는 것을 보았다. 필자가 경상도 지역에서 목회를 시작한 지가 23년의 세월이 흘렀다. 자주 듣는 사투리 중에 “단디하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는데 이 말의 원래 표준어 의미는 “단단히”란 뜻이다. 하지만 경상도 지역에서 ‘단디’란 말은 폭넓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수능을 보는 입시생들에게 “이번 시험 단디 봐라” 이 말은 실수하지 말라는 말이다. 초보 운전자에게 “운전 단디 해라” 이 말은 좌우 잘 살피고 교통사고 내지 말라는 뜻이다. 외출하는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집 단디 봐라” 이 말은 집에 무슨 불상사가 생기지 않도록 잘 지키라는 말이다. 코로나 시대 “마스크 단디 해라” 이 말은 맨 입으로 다니지 말고 꼭 착용하여 병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뜻이다. 추운 겨울에 “겉옷 단디 해라” 이 말은 춥지 않게 따뜻한 옷 잘 챙겨 입으라는 뜻이다. 이처럼 모든 영역에 ‘단디’란 말만 넣으면 만사 OK 이다. 우리 인생의 육적인 삶도 영적인 삶도 단디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탄이 우리의 삶을 항상 훼방 놓기 때문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리 안에서 견실하게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꼴을 보지 못한다. 사탄은 우리가 단디 하는 삶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우리를 유혹한다. 물질로 유혹하며, 육정에 빠지도록 하며, 명예욕에 빠지도록 한다. 우리는 보통 어려운 일을 극복하기 위하여 서로가 힘을 합하게 되는데 이것을 연대의식이라고 한다. 이 연대의식은 불행한 시기에, 고통의 시기에 잘 형성된다. 그러나 행복한 순간에는 연대의식보다 분열이 생긴다. 그 이유는 불행한 시기가 끝나고 무엇인가를 성공적으로 이루면 그 다음에는 성공에 기여한 공로자가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동체를 단디하는 것에서 무너지게 하는 방법은 성공이라는 선물을 안겨주면 명예욕에 서서히 공동체는 무너진다는 것이다. 말세를 살아가는 인생의 모든 삶의 영역에 있어서 무너지지 않고 단디하는 비결이 많지만, 예수님의 동생 유다의 교훈을 적용해 보면, 세 가지를 단디하라고 하였다. 첫째는, “가인처럼 살지 말라” 이것은 시기 질투 분노의 삶이다. 둘째는, “발람처럼 살지 말라” 이것은 물질적인 것에 유혹을 받는 삶이다. 셋째는, “고라처럼 살지 말라” 이것은 명예욕에 사로 잡히는 패역한 삶이다. (유 1:11)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유혹을 받으며 살고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성도들이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하여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시험(temptation-유혹)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주님의 능력으로 삶을 단디하여 승리하는 믿음의 챔피온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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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9
  • [농촌 목회 스토리] 덕을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골 농촌교회 목회는 섬김과 사랑으로 덕을 세워가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마을어르신들과 사랑의 교제와 식탁 나눔을 통해서 알게 되어 진 마을의 쓴 뿌리는 다름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이 마을에 덕을 세우지 못했던 일련의 일들이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거친돌이 되고 교회를 배척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세대가 지나간 일들임에도 여전히 회자되며 복음의 문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닫게 하고 있다. 작은 말 한마디, 작은 일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님을 깨닫게 한다. 작은 일에 큰 상처를 받고 작은 일에 큰 기쁨을 느끼는 것처럼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고 살피는 것이 목회의 한 측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을목회를 하면서 작고 세세한 것에 관심을 갖고 돌아볼 때 그들의 닫혔던 마음의 문들이 하나둘 열려지고 이웃으로서의 자리매김이 되는 것을 느끼며 교회와 마을을 섬겨가고 있다. 돌아보면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아픈 상처들을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을 관과 해서는 안 된다.그들의 상처가 나의 아픔으로 와 닿고 그 아픔에 함께 아파하며 그들의 필요를 적게나마 나눌 때 비로써 마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드려 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처음에는 굴러온 돌, 언젠가는 떠나갈 사람이고, 우리에게 예수 믿으라고 귀찮게 하는 사람으로 치부하며 관계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마을 이장이 되어 마을을 섬기며 마을의 대변인으로 저들의 문제들을 하나둘 해결해가면서 마음의 문들을 열고 이웃으로 목사를 받아주는 것을 경험하며 나름 행복한 목회를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제는 저를 이장이라 부르지 않고 목사님으로 호칭이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독거노인인 한 어르신은 목사님 제가 죽기 전에는 교회를 떠나지 마세요라고 말씀하신다. 왜요 라고 반문하면 살며시 웃으면서 나 장례를 목사님이 치러 주셔야합니다. 꼭요... 가슴 한 곁에 미여오는 아픔을 느끼게 한다. 내가 뭐라고, 내가 무슨 능력이 있다고 다만 감사할 뿐이다. 우리 마을에는 한창 김장을 하고 있다. 마을 주민들이 교회의 연약함을 알기 때문에 누가 목사님 김치를 담아주겠습니까. 라면서 집집이 한통씩 가져오고, 맛보라고 가져오므로 김치 냉장고를 가득 채우게 되었다. 소박한 시골사람들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 한다. 나는 참 행복한 목사이다. 오늘 아침에 글을 쓰고 있는데 모회사 부사장님이 저희 집에 찾아 오셨다. 이유인즉 목사님이 좋은 일을 많이 하신다는데 크리스마스에 교회와 마을을 위해 도울 것이 없습니까? 라는 것입니다. 저들의 마음을 열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할 뿐이다. 돌아보면 일련의 일들은 작은 것을 살피고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서 흘린 땀과 눈물의 기도를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부족한 종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축복과 보상임을 새삼 느끼게 한다. “사람들은 의미보다 재미를 추구하고 평안보다 편안을 추구하며 큰 곳으로 몰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큰물에서 노는 삶’보다 ‘큰물을 지향하는 삶’이 복된 삶이고 ‘큰 것을 누리는 삶’보다 ‘작은 것을 살피는 삶’이 복된 삶이다.” 작다고 등한시하고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목회자는 어디를 가든지 작은 것을 살피고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서 공동체를 살리는 밑거름이 되는 삶처럼 복되고 보람된 삶은 없을 것이다. 서로를 향하여, 세상을 향하여, 사랑과 섬김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고 그들은 육체적 궁핍을 돕기 위해 구제하는 일, 이 모든 일들은 교회와 목회자가 마땅히 해야 할 선한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에 앞서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우리교회가 마을에서 외면당하고 목회자를 불신하는 풍토는 지역사회에 본이 되지 못했고, 덕을 끼치지 못한 결과의 산물임을 자성해본다. 덕을 세우는 것은, 곧 믿음을 세우고 견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칼럼의 완본은 gncnews.net 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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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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