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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I. 서언(序言) 종려주일이 지나고 가장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의 십자가 지심을 생각하는 고난주간이다. 그런데 이런 절기들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유래 되었을까? 이에 본 호에서는 이런 절기 중에서 지난 종려주일의 의미와 명칭, 또한 이번 주간의 고난주간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두 절기는 유대인들의 절기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유대인들이 지켜온 가장 전통적이면서 대표적인 절기는 유월절과 맥추절(칠칠절), 수장절(초막절)의 3대 절기이다. 이는 “매년 세 번 절기를 지키라”(출23:14-17)는 말씀에 따른 것이다. 또한 새해의 개념을 포함한 나팔절과 죄를 속죄하는 속죄일, 오순절과 민족의 위기를 극복한 날인 부림절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유월절은, 고난주간 중의 십자가 지심과 유월절 만찬을 상징하는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과 3일 만의 부활과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III.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의 유래와 명칭 기독교의 절기는 성탄절과 1월 6일부터 8주 동안 지키는 현현절(epiphany),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로 시작하는 사순절과 그 일정 중에 포함된 종려주일과 고난주간, 그 뒤를 이은 부활절, 또한 오순절과 연관된 성령강림절, 맥추감사절과 추수감사절, 종교개혁주일 등의 여러 절기가 있다. 이 중에서 종려주일의 유래와 명칭, 또한 이와 연관된 고난주간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1. 종려주일의 의미와 유래: 예수님께서 마지막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 종려주일이다. 이때 많은 이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치며 환영했다. 이런 행위가 기념 주일로 정해진 유래는 A.D 385년 에게리아(Egeria)의 순례집에 최초로 기록된 것으로서, 동로마교회에서 예루살렘에 직접 가서 예수님 때와 같이‘종려 행렬’을 행한 일에서 출발했다. 서로마 교회들의 경우는 6세기경의 스페인 의식서에 의하면, 축하 분위기가 아닌 애도의 분위기를 담아서 고난주간의 의미를 같이 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이후 중세시대에는 예배드린 다음, 가까운 교회까지 행진하는 종려주일 관습을 가졌다. 이때 성도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되새겼다. 그 이후 가톨릭에서는 성례에 쓰이는 물건 등을 정해진 의식을 통해 성스러운 것으로 구별하는 축성(祝聖)의식을 행하였고, 그때 축성된 종려나무 가지는 귀신 추방이나 질병의 치유와 재앙을 막는 능력이 있다고 믿으면서 종려주일을 지키고 이를 행하기도 했다. 2.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의 명칭: 먼저 부활절을 1주일 앞둔 주일을 전통적인 교회력으로‘종려주일(Palm Sunday)’했으며, 그다음 월요일부터 성금요일을 지나 부활절 전날까지는 ‘고난주간(passion week)’이라고 했다. 하지만 가장 쉽게 간과하고 넘어가는 절기가 바로 종려주일이다. 필자의 경우도 종려주일이 되면 예배와 말씀의 중심을 고난과 예루살렘 입성 중에 어디에 맞출 것인가를 고민하기도 한다. 또 한 가지는 종려주일이란 명칭은 합당한가에 대한 의문이다. 그 이유는 한글 성경에는 종려나무로 번역됐지만 실제로는 대추야자 나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종려나무로 번역된 이유는 중국에서 자라는 ‘당종려 나무’의 이름을 그대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종려주일이란 명칭보다 호산나 주일 등이 오히려 더 좋지 않을까도 고민해 볼 수 있지만, 전통적으로 종려주일이라고 해 왔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IV. 두 절기의 구분과 맺는말 이상과 같은 이유로 볼 때 또 한 가지 애매모호한 일은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의 경계에 대한 것이다. 이는 서로 다른 교회의 전통 때문인데, 동·서로마 교회는 고난주간에 종려주일을 포함하지만, 그리스 정교회는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분리해서 일요일은 종려주일, 월요일부터는 고난주간으로 지키고 있다. 우리 한국교회는 이런 두 계통의 전통에서 명확하게 개념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보니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을 분명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제 우리는 종려주일을 지나서 고난주간 속의 날들을 지내고 있다. 이에 그 의미를 되새기면서 보다 경건한 자세로 주님의 십자가 지심을 가슴에 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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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지면부지호(知面不知乎), 알면서도 모른다
세조 때 이조판서 이승소(李承召, 1422-1484)는 판서 벼슬에 있으면서도 겨우 세칸되는 초가에서 살았다. 임금이 불러 국사를 의논하는 자리에 당시 병조판서였던 자가 입궐하였다. 병조판서는 이승소와 앞뒤 집에 사는 친한 사이였다. 그런데도 이승소는 병조판서를 보고도 모른 체 한지라 세조가 이상하게 여겨 ‘이판은 병판을 모르는가?’ 하고 물었다. 이때의 이승소의 대꾸가 유명하다. ‘알지만 모릅니다.’ 지척지간에 있는 6명의 판서이기에 서로를 잘 안다. 한데 병조판서가 어느 날 누각 같은 호화주택을 짓는지라, 이승소는 높은 벼슬에 있으면서 주택사치를 한다는 건 그만큼 벼슬을 모독하고 백성의 원성을 일으키니 삼가라고 충고를 했다. 한데 병조판서는 선비로서 정신적 기틀이 잡히지 않았던지 이 충고를 묵살하고 그 집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이 이후부터 이승소는 자신의 조언을 어기는 병조판서와는 상종할만한 선비가 못되며 소인이라 간주하고 모른 체한 것이다. 이 사연을 알고 난 세조는 알면서도 모른다는 뜻인 ‘지면부지호(知面不知乎)’란 문장을 씀으로써 선비정신에 어긋난 행위를 곧잘 채근했다고 한다. 성경에도 그 사람을 알면서도 모른다고 부인한 사건이 나온다. 바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잡아뗀 사건이다. (마태복음26:72)에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그리고 (마태복음26:74)에도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라고 말씀한다. 베드로는 3년간 모셨던 예수님께서 잡혀가는 순간에 예수님과 엮이고 싶지 않았던 옹졸한 마음에 3년간 함께하며 생명의 말씀을 배웠던 예수님을 알면서도 모른다고, 즉 ‘지면부지호(知面不知乎)’ 했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에 베드로가 얼마나 통곡하며 회개를 하였음은 모두가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다. 과거 우리의 선비들은 도리가 맞지 않는 것이 있다면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눈감아 주는 법이 없고, 직언을 곧잘 하였다. 비록 친구간의 우정에 금이 가더라도 충정의 말을 해 주었다. 이 같은 악을 방관하지 않는 선비의 기품, 그리고 악을 지탄받고도 상대방에 악의를 품지 않는 선비의 기품은 유교의 교리에서도 터득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 중종 이래로 풍미했던 향약의 교화에 의한 것으로 보여 진다. 이 향약은 향리 자체로 서로의 도덕과 규범을 구제하는 것으로 한족의 선비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교화요소였던 것이다. 향약의 기본 개념이 네 가지가 있는데 <덕업상권(德業相勸) 좋은 일을 서로 권하고, 과실상규(過失相規) 과실은 서로 다스리며, 예속상교(禮俗相交) 예의는 서로 나누고, 환난상휼(患難相恤) 어려움은 서로 돕는다> 이다. 이같이 이웃의 과실에는 상규할 의무가 주어졌으며, 이러한 과실을 알고도 묵과하는 것 또한 과실로써 지탄받았던 것이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할 때 정승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은 을사사화가 일어났을 때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당하고 진도에서 19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갖은 고생을 다 겪어야만 했다. 당시 노수신을 감시하던 진도군수 홍인록(洪仁祿)은 당시 규례대로 집행하였다. 이불을 덥고 자면 죄인이 따숩게 자라는 법이 없다고 이불을 빼앗아갔고, 쌀밥을 먹으면 죄인이 무슨 쌀밥이냐고 밥상을 엎곤 하였다. 후에 노수신은 석방되어 돌아와서 다시 높은 벼슬을 두루 거쳤는데, 당시 조정에서는 진도군수였던 홍인록을 징계해서 여러 해 동안 벼슬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말을 들은 노수신은 홍인록이야말로 법도대로 유배죄인을 다스렸으며, 잘못한 건 죄인인 나였지 그는 떳떳하다고 일부러 불러들여 벼슬을 한층 높여 풍천관사에 임명했던 것이다. 이 같은 선비의 품도는 어느 개인에 국한된 속성이 아니라 선비사상의 기조를 이루는 서로 과실을 규제하는 ‘과실상규’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한 것에 반해 예수님께서도 나는 너를 모른다고 말할 대상이 있음을 밝혀두신 적이 있다. (마태복음7:23)에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런 저런 사역을 하였지만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불법이라면 예수님은 그런 자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니’ 즉 ‘지면부지호(知面不知乎)’ 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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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선한 양심(良沁)이 작동되고 있는가?
현시대를 화인(火印) 맞은 양심의 시대라고 한다. 특히 정치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법적으로 판단해 보는데 같은 법을 놓고도 서로 다른 입장이라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법-꾸라지’, 또는 ‘비 양심가’라고 한다. 양심(良心)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구별하는 도덕적 의식이나 마음씨”를 말한다. 보편적으로 양심은 “선량한 마음”을 의미하지만, 헌법상의 양심의 자유에서와 같이 법률적 의미로는 ‘사상, 신념’과 가깝다. 예를 들면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에서는 “양심이란 어떠한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데 있어 그렇게 행동하지 아니하고서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강력한 마음의 소리”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 양심은 선천적인가, 아니면 후천적인가?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양심을 선천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경험론 철학자 존 로크(John Locke)가 주장한 ‘백지설’(theory of tabula rasa , 白紙說)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천부적으로 주어진 본유관념(本有觀念)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관념은 후천적(後天的, a posteriori)인 경험을 통해서 이룩된다고 보았다. 양심이라는 뜻의 헬라어 ‘쉬네이데시스(συνείδησις)’는 ‘함께(συν-쉰)’와 ‘알다(οιδα-오이다)’의 합성어로 ‘함께 알다’라는 뜻이다. 영어로 ‘양심(Conscience)’도 어원적으로 ‘무엇과 함께 알다’라는 뜻이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은 말하기를 “율법의 내용은 본래 인간의 양심에 다 들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양심이 부패해졌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행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양심에 본래부터 들어 있는 것을 들어내어 중요한 몇 가지 만을 가시적으로 돌판에 새겨 놓은 것이 율법이다. 즉 율법은 돌판에 새겨 놓은 양심이고 양심은 마음속에 새겨 놓은 돌판이다. 성경을 통하여 볼 때에 양심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 안에 넣어주신 도덕적 자각인 것이다(로마서 2:15). 우리 마음에 선한 양심은 작동되고 있는가? 바울은 디모데에게 화인 맞은 양심을 가진 자들에 대하여 경각심을 갖도록 하였다.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1~2).” 어느 아메리칸 인디언 부족은 양심을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삼각형으로 형상화했다. 나쁜 짓을 하면 가슴이 떨리고 불편한 이유는 삼각형의 모서리가 심장의 벽을 마구 찔러댔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양심에 반하는 일을 반복적으로 하면 날카로운 모서리가 닳아서 둥글어지고, 심장의 벽에도 굳은살이 생겨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은 어린아이의 양심은 삼각형으로, 어른의 양심은 원형으로 표시했다고 한다. 어린아이의 양심은 작동이 되고 있고, 어른이 될수록 다 닳아버린 원형이 되어 더 이상 제 기능을 못 한다는 뜻이다. 양심이 마비되면 양심(良心)이 사탄의 마음인 앙심(怏心)으로 변하게 된다. 하나님은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내 속에 양심이 자리 잡고 있는지 사탄의 마음인 앙심이 자리 잡고 있는지를 아시고 선악 간에 심판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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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거듭남
거듭났는지, 아닌지 헛갈려 하지 마라. 거듭남의 확신이 없으면 영적성장이 더디다. 거듭난 확신이 없으면 마음으로 입으로 시인할 수 없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구원이 이루어져 성장이 있다.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거듭난 자다. 헛갈려 할 필요가 없다. 믿는 우리는 거듭났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믿어야 한다. 거듭났다면 거듭남의 축복이 어떠함을 정확히 알고 고백하고 자신에게 반복해서 각인시켜 영의 생각만 하도록 만들어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기막힌 사실이 무엇을 위함이었는지를 정확히 알면 알수록 신바람이 날 것이다. 거듭났음을 확신하고 거듭난 당신이 받은 복을 확신하라는 말이다. 주신 복으로 인해 고함을 질러도 좋다. 우리가 받은 복을 말로 다 표현 못한다. 어떤 행위로도 표현 할 수 없다. 어떤 감격으로도 다 표현 못할 엄청난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다. 우리의 마음을 다해도 그 놀라운 사랑을 다 표현 할 수 없다. 힘을 다해도 다 표현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 할 수 있다. 마음에 새기고, 부지런히 자녀에게 가르칠 수밖에 없도록 넘쳐나야 한다. 집에 앉아 있어도, 길을 걸어도, 누워있어도, 일어날 때에도 이 복음을 소리치고 싶도록 해야 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라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태어났다. 점점 좋아져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다. 태어나서 자녀 되었다. 아들을 영접하고 믿을 때 아들 예수님은 우리 안에 들어오신다. 그 분은 영원히 떠나지 않으신다. 영접한 사람, 아들이 있는 사람은 아들의 생명이 있는 자다.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한일서 5:11-12) 나는 이 말씀을 수만 번 고백하며 기도했다. 어느 새벽기도 시간에 나는 고함치며 기도했다. 입술에서 터진 소리가 있다. “주님, 저는 아들이 있습니다. 주님, 저는 아들의 생명이 있는 자네요.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네요. 감사해요. 감사해요. 주님, 감사해요.”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주님, 사단은 착한 일하게 해서 지옥 보내네요. 착한 일로 자신들을 속여 아들이 없어도 만족하게 하네요. 아들만 없도록 하네요. 저에겐 아들이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아들이 있어요.”라고 고백했다. “오성한, 이 놈아, 너는 하나님의 자녀야! 오성한, 너에겐 아들이 있어. 오성한, 너에게 생명이 있어.” “그래, 맞아! 난 아들이 있는 자야! 난, 예수 생명이 있어. 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분명해!”하고 눈물로 고백을 했다. 이런 기도는 새벽마다 계속 되었다. 단순한 고백이었는데 나는 펄펄 살아나는 것을 경험했다. 새벽마다 이 고백을 하는 것이 기도하는 재미였다. 얼마나 신이 나든지, 얼마나 만족하든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성령님께서 내 안에 춤을 추시는 것 같았다. 요한은 거듭난 우리에게 ‘영생’이 있다고 알려준다. 이 성경을 기록한 것은 영생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려 주기 위해 기록했단다(요일5:13). 그러니 성경을 읽고 영생이 있음을 고백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는 하나님께 고백을 올려 드리고, 나에게 주장해 준다. 나는 기도하다가 내 이름을 부르며 나 자신에게 이 놀라운 사실들을 각인 시키는 일을 자주 한다. 나 자신에게 인정해 준다. 그러다 믿음으로 감정이 업(Up)되는 때가 많은데 그 때는 신난다. 기도하다 찬양을 하기도 하고, 박수를 치기도 하고, 몸을 흔들기도 하고, 팔을 젖기도 하고, 고개를 흔들기도 하고, 일어서서 춤을 추기도 한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영생이 있음을 꼭 믿어야만 한다. 이 ‘영생’을 ‘생명’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생명’이 어떤 생명인가?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 생명’이다.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에게 주신 생명이 예수님의 생명과 똑같은 생명이라는 말이다. 이 생명은 바로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 생명이라고 했다.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거듭남의 신비다. 이 믿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가진 생명은 예수님의 생명과 똑 같은 생명이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 이 말씀을 보면 아들이 우리의 생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생명은 예수님이다. 우리가 사는 것은 예수님이다. "영접하고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누구든지 마음의 문을 여는 자는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게 된다. 하나님께서 거듭난 우리 안에 함께 먹으며 함께 사신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주님은 우리를 영원히 떠나지 않으신다. 이것이 거듭 자에게 있는 복이다. 거듭난 자신임을 알고 사는 것은 능력의 삶을 살게 할 것이다. 이 땅의 복 덩어리로 복음을 증거하며 사는 자가 될 것이다. 당신은 거듭난 자다 거듭난 자임을 확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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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연대하기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당하심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은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핵심적인 의미를 갖는 중요한 사건이다. 특별히 고난 주간은 시간과 문화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려 깊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그분의 구속적 희생을 되새기는 의미 있는 시간이며, 동시에 예수님의 고난을 단순히 성례전적으로 기념하는 행사에 그치지 않고, 우리 모두가 고통 속에 있는 이들과 함께하는 법을 배우고, 그들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공유하는 시간을 갖는 기회이기도 하다. 특히 아프리카 탄자니아와 같은 나라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소외 받는 이웃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감당하는 사역자들에게 고난주간은 더욱 의미 깊은 시간이 될 수 있다. 탄자니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은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풍부한 문화유산을 자랑하지만,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전히 심각한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빈곤과 싸우며 살아가고 있고, 기본적인 천부적 인권과 교육, 문화, 보건, 의료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도 많이 있다.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는 자원의 고갈과 기후 변화로 인한 가뭄과 홍수로 일상의 삶이 더욱 힘겨워지고 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고난주간을 맞이하는 탄자니아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 소식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 그들의 현실과 맞닿아 있는 살아있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아픔을 이해하고, 그들의 억눌린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감당키 어려웠던 그 고통은 단지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모든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분의 고난은 단순히 육체적인 고통에 그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한 숭고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러기에 고난주간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 모두가 사랑의 가슴을 가지고 다른 이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그 고통을 나누는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가 예배하고 섬기는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님은 고통 받고 억압당하는 이들의 아픔을 이해하시며, 그들과 함께 하셨다. 교회의 몸 된 지체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다른 이들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그들의 고통을 나누며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영위하도록 이끌어 간다. 우리는 탄자니아의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고난과 연대할 수 있는 보다 더 구체적인 기회를 가질 수 있다. 빈곤과 질병, 강대국의 착취, 그리고 교육의 기회 부족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고난은 <탄자니아 아프리카 연합대학교>(The United African University of Tanzania)가 지향하는 교육선교와 미디어선교의 중요성을 더욱 크고 벅찬 사명감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어 주고 있다. 감사한 것은 고난주간을 지나며 부활절을 맞이하는 여정이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슴에 품고 사는 탄자니아 사람들에게도 죽임 당하신 어린 양의 부활 소식은 그들이 열악한 아프리카 대륙에서 당하고 있는 고난과 고통이 자신들의 삶의 여정에 있어서 끝이 아니라, 새로운 소망의 삶의 지평을 열어주는 시작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고난은 단순히 죽음에 그친 것이 아니라, 부활을 통해 생명의 승리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부활의 소식은 아프리카 탄자니아 사람들에게도 희망과 소망의 메시지로 다가온다. 고난이 끝난 자리에 새로운 생명이 찾아오듯, 그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 안에서 새로운 삶을 기대할 수 있다. 탄자니아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일상 속에서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 단지 현재에 그치지 않음을 확실히 믿고 있다. 이들도 자신들이 당하는 고난이 끝난 후, 하나님의 나라에서 경험할 완전한 치유와 회복을 기대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들에게 새로운 삶에 대한 확신과 희망을 주는 메시지다. 그러기에 부활을 노래하는 이들의 합창과, 몸으로 드리는 아프리카 특유의 찬양은 함께 예배하는 한국인 사역자들의 가슴을 진한 감동으로 물들게 한다. 탄자니아에서 기념하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탄자니아의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사랑의 가치를 가르쳐 주며, 부활의 승리는 희망을 주는 소망의 메시지로 더 강하게 다가온다. 우리 모두의 삶도 고난과 순종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탄자니아 아프리카 연합대학교의 모든 교직원들과 학생들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으며, 이 세상의 고난이 결국 승리로 끝날 것을 확신하고, 오늘도 지구촌 곳곳에서 고통 받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부활의 소망이 넘쳐 나기를 소망한다. 김성수 목사 (탄자니아 아프리카 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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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환 장로] 감사와 은혜를 잃어버린 세대
(삿 2:1-10)“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말하되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으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고 그들이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들의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 백성이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들이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으매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그 세대의 사람도 다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1. 들어가며 사사기의 무대가 되는 사사시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께서 멸하라 하신 가나안 족속들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간 시대를 말한다. 오늘 성경 말씀은 그 사사시대가 시작되는 배경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우리는 위 말씀을 통하여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주변 가나안 족속처럼 살아가게 되었는지 살펴보고 이 일을 통하여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받아야 하는지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고 본다. 위 성경 말씀은 짧지만 세 세대에 대한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먼저 1절을 살펴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더 설명할 것도 없이 출애굽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으며 이들을 편의상 ‘제1세대’ 또는 ‘출애굽 세대’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다. 두 번째는 6절에서 나타난다.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들의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이 말씀은 출애굽 세대의 뒤를 이어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하여 가나안 정복 전쟁에서 승리하고 가나안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를 세울 터전으로 삼은 ‘제2세대’, 즉 ‘가나안 정복 세대’이다. 세 번째는 10절의 말씀으로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제3세대’로서 ‘감사와 은혜를 잃어버린 세대’를 말한다. 2. 본문의 역사적 탐방 가. 출애굽 세대 이제 우리는 위 성경 말씀의 시간적 범위에서 본문의 기록을 역사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출애굽 사건을 애굽의 제18왕조 기간의 파라오인 아멘호텝 2세(B.C. 1448-1424년) 때에 있었으며 B.C 1446으로 추정한다.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여 가데스바네아에 도착하기까지 약 2년 정도 걸렸다고 보고 있다. 채 2년이 걸리지 않은 기간을 통하여 가데스바네아에 도착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을 정벌하기 위하여 12명의 정탐꾼을 선발하여 가나안 땅을 정탐한다. 그 결과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 믿음을 잃어버린 10명의 정탐꾼 말을 믿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데,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가 애굽땅에서 죽었거나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극언까지 하게 된다.(민 14:1-4) 출애굽 직전,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리신 10가지 재앙, 특히 10번째 재앙으로 신분을 가리지 않은 애굽의 모든 장자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였고(출 11:4-10), 애굽을 떠난 후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으며,(출 13:17-22)홍해가 마른 땅으로 변하여 건넜고,(출 14:21-25)뒤따라온 애굽 군대가 멸하여 짐을 보았으며,(출 14:26-31)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굶주리지 않았고,(출 16:12-24)목마를 때 반석에서 물을 얻었으며,(출 17:1-7)길을 가로막은 아말렉을 물리치게 하심(출 17:8-13), 또 금송아지를 통한 배신과 징벌(출 32장)을 직접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이었다. 특히 하나님께서 신분을 가리지 않은 애굽의 모든 장자를 생명을 취하신 것은 그들 모두의 생명이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장자는 그 가정의 내일의 대표자이기 때문이다. 바로가 9개의 재앙까지 버텼으나 장자가 죽임을 당하자 하나님의 권능 앞에 무릎을 꿇고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 하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만났을 때 홍해는 마른 땅 같이 갈라졌다. 우리가 영화나 그림을 통해서는 홍해의 물결이 갈라선 물의 벽 사이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는 것으로 표현하지만 그 표현은 상징적인 표현이다.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라고 하였으니 실제 인구는 200만 명이 넘었을 것이다. 또 그들과 함께 가는 가축의 수는 얼마나 되었을까? 이 엄청난 수의 사람과 짐승이 지나는 홍해의 갈라짐은 영화와 그림과는 달리 완전히 다른 어마어마한 모습으로 아마 갈라진 홍해는 끝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난 후 끝없이 갈라진 홍해를 보고 애굽의 군대가 아무런 의심 없이 추격하였다가 모두 수장된 것을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사건은 너무 엄청난 일이므로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가나안을 정탐한 12명의 정탐꾼 중 10명은 가나안의 높은 성벽, 무장을 잘 갖춘 군사들, 스스로 자신을 메뚜기로 여길 만큼 본 거인들을 보았다. 그리고 이를 보고 기겁을 한 10명의 보고를 듣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난 2년 동안 하나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은혜를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반면 그들에게 지금까지 권능과 은혜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믿고 가면 이길 수 있다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간절한 호소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말았다. 출애굽 세대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이치에 맞는 10명의 의견을 택하여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한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권능을 뒤로 하고 사람의 생각과 판단을 따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배은망덕한 출애굽 세대를 징벌하셔서 38년간 광야에서 헤매게 하셨으며, 그들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성인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음을 맞게 되었으며 다음 세대인 가나안 정복 세대가 성장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애굽에서 힘든 노예 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을 눈앞에 둔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려 가나안에 들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다. 출애굽 세대는 이렇게 막을 내린다. 나. 가나안 정복 세대 모세가 호렙산에서 죽음을 맞고 모세의 지도력은 여호수아에게 계승되었다.(수 1:1-9)가나안 정복세대가 여호수아의 지도에 따라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 전쟁을 시작한 것이 B.C 1405년경이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지나 가나안에 들어갈 때 홍해가 갈라졌던 것처럼 요단강이 그들의 눈앞에서 갈라졌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하며 기념하는 돌을 세운다.(수 4:9)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거대한 여리고성이 가로막았다. 그들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여리고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오직 하나님의 권능으로 무너졌다. 그다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지파별로 나누고 본격적으로 가나안땅을 정복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대부분을 정복하고 정착하기 시작한 것이 B.C 1390년으로 가나안 정복전쟁은 약 15년이 걸렸다. 그렇다면 출애굽으로부터 시작하여 가나안 정복전쟁을 마치기까지 약 60년이 걸렸다. 비록 아이성의 실패가 있기는 하였지만, 높은 성벽을 보호막으로 정착문화를 이루고 강한 병사를 가진 가나안 족속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하나님과 함께 한 이스라엘 앞에서는 패하고 말았다. 그렇게 가나안을 정복한 가나안 정복세대에 대하여 성경은 여호수아가 사는 동안 또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이 사는 동안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다(삿 2:7)고 기록하고 있다. 다.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다. 오늘 본문 10절 후반부에는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란 가나안 정복전쟁을 마치고 정착한 후의 다음 세대라고 보아야 한다.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그들의 앞 세대인 가나안 정복세대가 경험했던 경험들, 어쩌면 그들의 어린 시절에 어렴풋이나마 보았던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로 앞 세대의 시대에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권능도 이스라엘의 죄악을 징벌하신 일을 잊어버리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그 후에 일어난 다음 세대’에 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기록한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주위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라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삿 2:11-13) 출애굽의 연대가 기원전 1446년, 가나안 정복전쟁의 끝이 기원전 1390년 계산해보면 불과 60년 정도이다. 여기에 여호수아와 함께 한 그 세대의 사람이 다 떠나간 기간을 보태면 80년 정도라고 보아도 될 것 같다. 이 짦은 시간에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가 시작되었으며 그 결과 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게 되었다. 참으로 무서운 결과가 일어났다. 3.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 그들은 왜 하나님을 잊었을까? 가. 가르치지 않고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 앞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모세를 통하여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기억하라 네 아비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이르리로다’(신명기 32:7)말씀하셨지만 그 말씀은 외면되었다. 가나안을 정복했던 세대는 가나안을 정복하고 자신들은 하나님을 잘 섬겼으나 자신의 자녀 세대와 후에 일어날 세대에게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가르치지 않았다. 또 다음 세대는 앞선 세대로부터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가 무엇인지 배우거나 알려고 하지 않았다. 가르치지 않고 배우려고 하지 않으면 당연히 역사를 잃어버리고 깨닫지 못한다. ‘그 후에 일어난 다음세대’는 역사를 잃어버린 백성이 된 것이다. 나. 가치관이 바뀌었다.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지켜오던 귀중한 가치관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 광야에서의 유랑생활에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재산은 천막, 개인 식기, 최소한의 의복밖에 없었을 것이다. 유목생활은 겉옷을 이불로 사용했으니 침구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정복과정에서 가나안인들이 가지고 있던 물질의 부요함을 보고 노예 생활과 광야 생활 동안 가지고 있었던 말씀 중심의 가치관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즉, 눈에 보이는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등 뒤로 돌린 것이다. 가나안 정복전쟁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만든 우상을 다 파멸하며 산당을 다 훼파하고 그 땅을 취하라’.(민 33:51-53) 또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 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 옆구리를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민 33:55) 하시며 경고하셨다. 가나인들만 쫓아낼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체계와 그 근원까지 다 일소하지 않으면, 즉 그들의 삶과 완전히 단절하지 않으면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 대표적 사례가 아이성 전투이다. 여리고를 무너뜨린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그만 아이성에서 패한 원인이 거기에 있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성 정벌을 앞두고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였다. ‘이 성과 그 가운데 모든 물건은 여호와께 바치되 ---,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수 6:17-18)경고하셨다. 그런데 아간이 하나님께 바칠 물건을 탐하여 감추었다. 이로 인하여 아이성 전투는 패했고 여호수아는 이 일에 대한 책임을 아간에게서 찾아 처벌하였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이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간 뿐만이 아닌 것 같다. 수 7:1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들이바친 물건을 인하여’라고 기록하고 있고, 7:11을 보면 ‘그들이바친 물건을 취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이 ‘들’이란 접미사가 붙으면 복수를 의미한다. 이는 아간의 범죄를 이스라엘 전체의 책임으로 돌린 의미도 있지만 최소한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에라도 탐욕이 생겼거나 백성 중 일부가 규모의 차이가 있더라도 아간과 같은 범죄를 저질렀음을 의미한다. 백성 중 아간의 가족만 변한 것이 아닐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 생활과 방랑 생활의 어려움 가운데 있다가 가나안의 부요함을 보고 말씀을 중시하였던 지금까지 가졌던 가치관이 변하였으며 이에 따라 여호수아의 경고를 외면하거나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4. 우리의 현대사는 어떠한가? 가. 우리나라의 건국은 기도로 출발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일제의 강점에서 해방되었으며 지금이 그때로부터 80년이 된다.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은 1948년 8월 15일이다. 그때를 기준으로 하면 77년이 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겪은 60여 년의 역사에 ‘그 후에 일어난 다음 세대’의 성장 기간을 더한다면, 1945년 해방된 우리의 80년 현대사와 비슷한 기간이 되면서 서로 닮은 역사의 흐름이 나타난다. 해방된 지 3년 후인 1948년 5월 10일 우리나라는 처음으로 보통, 평등, 직접, 비밀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을 선출하였다. 그때 당선된 국회의원들은 당시 많은 정치지도자가 바라보는 가운데 5월 31일 오전 10시 대한민국이 출발하는 제헌국회를 개회하였다. 국회가 개회하는 첫 시간,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의장석에 등단하여 이렇게 첫 발언을 한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우리가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당시 제헌국회의 의원 중에는 불교 승려도 있었고, 대종교, 천주교의 중심인물이 있었다. 그런데 국민의 첫 대표인 제헌국회의 임시의장 이승만을 통해서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나라를 세우게 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선포하고 고백한 것이다. 이 요청을 받아 단상에 오른 이윤영 의원은 기도의 첫 서두를 이렇게 시작하였다.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선림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을 하나님의 선림이 세계만방에 정시하신 것으로 저희들은 믿나이다.” 1948년 7월 17일 헌법을 공포하였으며 8월 15일 대한민국이 국가의 요건을 갖추어 정식으로 출범한다. 새로이 국가가 출발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출발한 나라는 미국 외에는 대한민국이 처음일 것이다.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청교도에 의하여 독립하여 세운 기독교 국가였고 우리나라는 일제의 강점에서 해방되면서 새롭게 세운 나라이지만 신앙으로 세워진 나라가 아니었다. 그러함에도 우리 대한민국이 법적으로 출발하는 날, 이 나라를 대표하는 모든 정치인이 함께 모여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기도하며 시작하였는데 이를 역사의 한순간으로만 치부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 나. 지난 80년 동안 하나님은 우리나라에 어떤 은혜를 베푸셨을까? 큰 흐름으로 보면 먼저 1948년 비록 38선 이남에 한하지만 신앙의 자유가 있는 대한민국을 수립할 수 있었다. 그다음으로6.25 전쟁에서 지켜 주셨다.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당시 선조들이 나라 이름도 모르던 곳에서 군인이 파병되었다. 그 전쟁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의 전사자만 175,801명이다. 민간인 사망, 학살, 행불자가 약 760,000여 명이다. 거의 100만이 생명을 잃은 전쟁이었다. 그 전쟁 기간 우리나라의 보잘 것 없던 기초산업시설은 물론 삶의 모든 터전이 철저히 파괴되었으며, 종교 특히 기독교는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단적인 예를 들면 지금의 마산이 도시였지만 전기를 가져올 발전시설이 없어 미군의 발전선이 전쟁 후에도 남아 전기를 공급했으며 그 발전선을 기초로 마산화력발전소가 세워졌다. 매립을 하여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지만 지금 경남대학교 앞 교차로 부근이 발전선이 머문 장소이고 발전소가 있던 곳이다. 또 하나 예를 든다면 6.25 전쟁 당시 북한 공산주의 정권을 피하여 수많은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가 남쪽으로 내려왔고 지금도 그분들은 북한 땅에 있었던 지명으로 노회를 만들어 유지하고 있다. 합동 측 총회 자료에 따르면 순교자 72명 중 61명이 공산당 박해로 순교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해방 후 북한 땅에서 있었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의 구체적인 여러 부분은 여러 자료에 다 나타나 있다. 1953년 휴전이 되었으나 일제 침략으로 인한 수탈, 6.25 전쟁으로 인한 파괴는 이 나라를 가난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척박한 광야를 다닌 것처럼 6.25 전쟁을 마친 후 우리는 오랜 기간 배고픔과 추위, 위생 상태의 부족으로 인한 콜레라 같은 전염병에 시달렸다. 이른바 보릿고개를 넘기지 못하여 각지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그 세대가 바로 우리의 윗세대이다. 우리나라의 자동차공업의 시초는 자동차의 외관을 고칠 때 드럼통을 잘라 두드려 평탄하게 한 다음 그것으로 차량의 외부 수리를 하고 비슷한 색의 페인트를 바르는 것에서 출발하였다. 필자가 어릴 때 본 모습이다. 1980년대 지금은 사용하지도 않는 녹음테이프의 재생을 위한 데크라는 부품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만들지 못해 일본의 전자회사에서 그것도 만들지 못하느냐는 비웃음을 받으며 울며 겨자 먹기로 필요 없는 부품까지 끼워서 수입해야 했다. 이를 수입하는 기업의 총수가 그 보고를 받으며 분함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지금 우리의 공업력, 기술력은 어떤가? 세계 최고의 조선기술, 반도체산업, 자동차, 정책에 의해 잠시 주춤했으나 최고의 원자로 기술,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몇 가지 군사 장비 등 남부러울 것 없이 발전해 가고 있다. 이미 순수 우리 기술에 의한 우주로켓이 발사되어 지구궤도를 돌고 있다. 특히 앞으로 우리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4차 산업혁명에서 핵심이 될 반도체는 세계 최고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 아까 이야기한 우리 기업인의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던 일본의 기업, 지금은 수준이 떨어져 우리가 상대도 하지 않고 있다. 교회는 어떤가? 1876년 백홍준 등 네 사람의 청년이 만주에 가서 로스 선교사를 만나 복음을 받아들여 스스로 교회를 세운 지 140년이 지났다. 교회와 교인의 수는 현재 감소추세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전 세계 기독교 선교역사에 없는 기록이다. 가난하고 힘들 때 우리 앞선 세대는 땀 흘려 수고하였고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응답하시어서 앞 세대들이 흘린 땀과 눈물의 열매를 주셔서 그 은혜로 오늘날 우리나라가 이렇게 발전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다. 이제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아야 할 때이다. 그러나오늘날 이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이 나라의 백성들에게 제헌의회 때 고백한 감사의 정신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기독교인들도 이 나라의 현대사에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를 얼마나 기억하고 그 감사가 남아있는지 엄격히 돌아보아야 할 때이다. 안타깝게도 이 나라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80년이 채워지는 동안 감사의 정신을 잃었다. 교회도 성도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지 못했던 이스라엘의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를 닮아 가고 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던 잘못이 지금 우리에게도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가나안을 정복했던 세대가 가나안을 정복하여 물질의 부요함을 물려주었으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임을 가르치지 않았다. 자신들의 믿음은 지켰지만 다음 세대에게 바른 신앙관, 가치관을 물려주지 못한 것처럼 우리의 기성세대도 같은 실수를 하고 있다. 지금 많은 젊은 세대들은 우리가 가지고 누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조들의 피땀 흘린 노력의 대가임을 알지 못하고 본래부터 있은 양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의 기성세대는 가난하고 힘들었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무릎 꿇고 기도하고 수고하고 땀을 흘렸다. 또 상당 부분 성공하고 자신들의 믿음을 잘 지켰다. 그러나 그 가운데 반드시 지켜야 할 귀중한 가치관과 신앙관을 다음 세대에 전하는 것을 놓쳤다. 가르치지 않고 배우려고 하지 않으면 당연히 역사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 지금 이 세대가 역사를 잃어가고 있다. 라.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 지금 우리 사회는 신앙 이전에 사회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하여 바탕이 되어야 할 이해와 배려, 포용, 섬김이라는 가치관은 형편없이 무너졌고, 대신 우리 사회는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곳곳에 분열과 갈등, 탐욕과 이기심이 만연하다. 특히 진영논리라는 이분법적 사고는 상처를 더 깊게 만들고 있다. 지난 국회의원 선거로부터 시작하여 최근 우리나라의 정치판을 흔든 탄핵까지 정치인들이 보인 모습을 따라 대부분 국민이 갈등의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아마 이러한 분열과 갈등은 쉽게 해결되지 않고 더욱 깊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어쩌면 이러한 분열과 갈등의 계속으로 어쩌면 이 나라의 내일을 가늠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 이와 함께 모든 분야에서 도덕적 타락과 윤리의 무너짐도 심각하다. 이에 따라 지금 이 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윤리 등 모든 분야에서 하나님의 뜻과 정반대의 모습들이 점차 강해지고 있으며 이러한 거대한 파도 앞에 교회도 힘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은 외면적으로는 반일과 반공의 이념이 대립하고, 경제적으로는 기회의 공정과 결과의 공평이 대립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 지역과 계층 간의 갈등이 함께 하고 있으며, 또 이 뒤편에서 정치지도자들은 통합보다 편 가름의 유리함을 취하여 왔다. 반일에 초점을 맞추는 이들은 반공을 경시하고 반공을 중시하는 측에서는 반일을 가벼이 여기고 있으며, 기회의 공정은 성장에, 결과의 공정은 분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모두는 우리가 합리적으로 다듬어야 할 과제임이 틀림없다. 일제의 국권 찬탈과 억압은 다시 반복되지 않아야 할 부정적인 역사이지만 일제의 통치는 과거의 것이고 우리가 극복해야 할 역사이다. 물론 가해자인 일본이 이에 대하여 진심으로 뉘우치지 않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국력과 군사력은 과거와 달리 일본이 우리를 좌지우지하던 시대가 지났으며 부분적으로 앞서나가고 있다. 오히려 우리가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는 전쟁을 일으키고 이 나라 전체를 파괴하고 수많은 생명을 희생시킨 북한의 공산주의이다. 여기에 소련과 중국의 현대판 제국주의적 행태가 가세하고 있다. 지금도 북한은 무력을 통한 위협과 이 나라를 삼키려는 노력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있다. 특히 친북 이념을 가진 자들을 통한 이념의 공세도 늦추지 않고 있다. 지금도 이 땅에는 미군은 점령군, 소련군은 해방군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몰라도 해방군인지 점령군인지 딱 한 가지 결과만 보면 알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얼마만큼 법과 제도로 정착시켰는지 아닌지 살펴보면 된다. 앞서 순교자 통계를 제시했듯이 해방군이 박해하여 종교가 쫓겨나고 종교지도자를 순교자를 만드는 그런 해방군은 없다. 오히려 북한 공산주의의 위협 때문에 극복해야 할 일본과 군사적 협력을 하여야 하고 경제발전을 위해 일본과 교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사회의 경제적 불균형은 많은 사람, 특히 젊은이, 근로자들을 ‘공평’이란 주제로 내몰고 있다. 그러나 역사, 특히 맑스와 레닌 이후의 역사는 ‘공평’이란 주제를 목표로 삼아 사회주의를 택하여 몰락해간 여러 나라를 보면 답은 하나이다. 구소련, 현재의 중국, 남미의 여러 나라, 경제적 발전을 하지 못한 채 제자리걸음을 하는 동남아의 여러 나라를 보면 ‘공평’이 정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이기적이고 탐욕을 가진 존재임을 무시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마. 이 시대 교회의 사명 복음화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우리의 주변 사회 모든 영역에서 보편적 진리로 받아들일 때 이루어진다. 이를 위해 교회의 선한 영향력이 주변 사회에 범위를 넓혀 가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오히려 교회가 배척되고 말씀의 가르침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여기에는 교회의 잘못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불신자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엄청난 교회의 분열, 이단들의 반사회적인 행태로 기성 교회까지 영향을 받는 것, 일부 교회 지도자들의 타락, 성도들의 가치관이 변하여 삶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한 것 등 여러 이유가 있다. 여기에 교회마저 정치 앞에 분열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날 유신 치하에서, 전두환 군사정권 하에서 교회는 친정부와 반정부로 분열되었다. 최근의 탄핵 정국에서도 교파 간, 교회 간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이러한 분열 앞에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현 정국을 주도하고 있는 양 정당의 국회의원과 지도급 인사 가운데 분명 교회의 중직자들이 포진하고 있지만 그들은 자신이 속한 정당의 하수인이 되고 말았다.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죄인인 사람 사이에 화평을 세우고자 하셨던 예수님의 결단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이 이 땅에서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분열과 갈등의 치유를 위해 부족하였음과 이 사회의 윤리적 타락에 책임이 있음을 통회하고 자복하는 길이다. 교회가 교회다운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점차 교회의 위축은 물론 그로 인하여 지금까지 지켜온 진리가 세상과 타협하여 진리가 왜곡되어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는(삿 2:13)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 5. 나가면서 우리의 앞선 세대가 힘든 과정을 헤쳐 나온 것에 대해서는 존경과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세계 최고의 빈국을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시킴에는 그분들의 엄청난 땀과 수고가 필요로 했다. 그러나 최소한 기독교인이라도 이와 같은 발전이 사람의 뜻과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을 믿고 고백하고 감사해야 한다. 기독교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제헌의회 때 하나님께 함께 감사하며 기도드렸던 그 감사의 정신은 우리의 주변 사회 곳곳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범위가 교회 내부에서조차 줄어들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이 세대가, 바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한 세대가 되었기 때문이다.(삿 2:10) 지금 우리 사회는 4차 산업혁명에 의한 초고도 사회로 접어들고 있다. 지난 80년 우리나라가 가난에서 벗어나 부요를 이룬 것과는 차원이 다른 변화가 눈앞에 와 있다. 지금보다도 더 물질문명이 주도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물질문명의 강화는 과학적 사고와 합리성이라는 전제 앞에 다원주의의 철학과 사고가 지배하고 급기야 정신문명의 자리를 약하게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켜야 할 보편적 가치관은 물론 신앙도 지켜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은혜와 감사를 지켜내지 못하고 이어가지 못하는 순간 다음 세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기듯 주변 세상이 섬기는 우상을 함께 섬기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정치지도자, 기업인, 교회, 모든 국민과 기독교인 모두가 지난날 우리의 앞 세대가 겪었던 고난과 좌절, 희생과 눈물을 기억하고 지금 우리의 위치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우리의 자녀와 다음 세대에게도 이를 가르쳐야 한다. 지금 우리가 지난날을 버리고 바로 서지 않으면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는 기회가 없을지 모른다는 절박한 심정을 가져야 한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여기에 앞장서야 한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은혜와 감사를 지켜나간다면 우리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가 지켜지고 우리나라와 주변 사회가 변하고 회복되리라 믿는다. 특히 정치와 경제, 사회지도층에 있는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그곳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고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결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대한민국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하는 그런 세대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며, 주변 사회를 이끌어 이 나라를 변화시키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감사를 이어가시는 귀한 세대, 또 이를 후대에 물려주는 세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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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칭찬이 보약 (마15:21-28)
- 오랫동안 목회를 하시던 목사님과 총알택시 운전사가 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자기가 당연히 총알택시 운전사 보다 훨씬 더 칭찬을 받을 것으로 기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보다 총알택시 운전사를 더 칭찬하셨습니다. 목사님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하나님께 “왜 총알택시 운전사를 더 칭찬하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그 동안 설교를 하면서 항상 사람들을 졸게 했지만 이 총알택시 운전사는 그 동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긴장시키고 기도하게 했기 때문 이니라”고 말씀하시더랍니다. 저는 이다음에 하나님께 칭찬받는 목사가 되기를 원합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인간의 욕구 중에 생리적인 욕구 다음으로 강한 욕구가 바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학생은 선생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성도는 목사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목사는 성도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여인을 보시고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자존감이 낮아져 있던 그가 얼마나 자존감이 높아지고 행복했을까요? 믿음이 칭찬을 받은 결과 그의 고민거리가 해결되었고, 자기 힘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께 칭찬 받은 그날을 그는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칭찬은 사람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삶의 활력을 불어 넣어 줍니다. 칭찬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이 정말 대단합니다. 첫째는, 칭찬은 귀로 먹는 보약입니다.(잠언16:24절) 둘째는 칭찬은 사람을 춤추게 합니다.(전8:15) 셋째는 칭찬은 사랑의 비타민입니다.(잠15:23) 우리 모두 칭찬 보약을 많이 먹고, 칭찬 비타민을 많이 먹고, 건강한 인생 춤추는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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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칭찬이 보약 (마15: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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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기독사학이 살아야 대한민국 미래가 있다
- 교육강국 대한민국의 초석을 놓은 근대 선각자 세분을 꼽으라면 우남 이승만, 도산 안창호, 남강 이승훈 선생을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이승만 건국 대통령에 대해서는 붙여 얘기할 필요가 있겠는가. 치적의 하나인 토지개혁을 단행하면서 대지주들에게 땅을 사립학교 설립에 유도하고 평생 운영을 맡겼다. 바로 대한민국 인재를 양성한 사학제도이다. 한국 공교육을 폄하하지 않는다. 한데 한국 사학들이 70년대 이후 뜨거운 교육열 속에 향학의 경쟁문화를 통해 수많은 인재양성 바로 산업일꾼들을 키워냈다. 근대역사 속에 독립 운동가이자 교육자 도산 안창호 선생은 미국등지 유학을 통해 선진문화를 보고 조국의 교육진흥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후세들을 위해 배워야 만 살아갈 수 있다는 연설을 당시 후학들에게 설파했다. 자신의 호 도산(島山)을 지은 것도 태평양 바다 속 우뚝 솟은 하와이를 보고 교육을 상징하는 의미로 지었다고 한다. 신민회 조직은 물론 지금까지 이어오는 흥사단 등 독립운동과 조국의 미래를 위해 교육을 강하게 주창한 선각자이다. 남강 이승훈 선생은 유명한 오산학교를 설립했으며 3.1운동 33인의 한분으로 독립운동을 하신분이다. 거장 세분의 선각자는 모두 기독교 이념의 서구교육으로 조국 발전의 밑자락을 놓은 선각자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학 중 광복이후에도 많은 선교사를 비롯 교회에서 기독사학을 설립했다. 그리고 건학이념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건강한 교육을 선양해왔다. 산업화 민주화과정에서도 기독사학들이 인재양성에 많은 기여를 하면서 명성 있는 사학들을 육성했다. 그리고 상시 채플시간 교목들의 복음 활동을 통해 80년대 한국기독교 부흥에 한축 기둥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기독사학들이 급격히 사양의 길을 걷고 있다는 분석이 모두를 안타깝게 한다. 광역단체 교육수장들이 선출직이 되면서 다양한 교육이념의 정책이 도입되고 있다. 획일적 교과서에 다양성을 도입하고 있다. 학생인권을 우선시하는 인권시대의 권리남용이 교육현장을 어지럽히고 있다는 슬픈 현실이다. 우선 교목들의 복음채플시간이 크게 줄고 있다는 최근 비공식 통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전국 사립중은 632개, 사립고는 945개소이다. 이중 기독사학을 보면 기독사학중학교가 135개, 고등학교가 185개소이다. 이 중 교목을 둔 기독사학은 중학교 79개, 고등학교 139개 학교로 알려졌다. 기독사학들이 갈수록 교목을 두지 않거나 계속 줄여나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왜 일까. 진보정치성을 띤 교육수장들이 보이지 않게 기독사학들의 복음 활동을 억압하고 있다는 말이다. 교육청에서 지원하는 학교지원예산을 들고 직간접으로 묘한 억압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기독사학의 건학 이념에 채플참여 의무시간이 있다. 이것도 자율 선택권을 두어 채플 의무시간을 자유하게 하는 추세다. 한국 기독교가 복음의 큰 사명 앞에 슬픈 현실이 되고 있다. 그동안 사학에 투자한 많은 기독사학의 주인들이 학교를 넘기거나 포기하는 사례까지 생겨나고 있다. 조국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게 한 교육의 원천이 되었던 기독사학들이 겪는 이 아픔이 아픔이 아니다. 기독사학이 무너지면 조국의 미래를 생각할 수 없다. 기독사학이 온 세상 구원의 지경을 확장하는 역할을 했던 것만 아니다. 중고를 비롯 대학의 현장까지 젊은이들이 가져야하는 건강한 정신을 함양하는데 기독사학들이 희생해왔다. 이러한 교육원천이 조국 대한민국의 비전이자 미래이다. 그러나 한국기독사학의 사양화는 다시말해 조국의 미래를 말할 수 없게 한다는 점이다. 모두가 한 번 더 새겨보고 강구책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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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기독사학이 살아야 대한민국 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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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나비 논평] 2025년 사순절을 맞는 교회와 신자의 자세
- <2025년 사순절을 맞는 교회와 신자의 자세> 사순절 기간 한국교회는 문화적 회개, 금식, 휴대폰 절제를 통한 성화의 삶을 실천하자 사순절을 맞이하여 우리 욕망을 절제하며 사회적인 소외자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펼치자 사순절(四旬節, 영어: Lent)은 부활절을 맞이하기 앞서서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정결하게 준비하기 위하여 주일을 제외한 40일간 갖는 금식과 금욕의 기간을 말하는데, 이 기간에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낮아지심과 고난을 기억하면서 회개와 기도 등 영적 훈련에 힘씀으로 경건한 삶과 영적 성장을 위한 특별한 훈련의 기회를 가진다. 사순절은 초대교회 때부터 내려오는 교회의 전통이다. 일찍부터 초대교회는 부활절에 앞서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기간을 가지는 것이 신자들의 경건과 영성 훈련에 필요함을 인식하고 부활절 전 얼마의 기간을 정해 이를 실천해 오다가, 마침내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부활절과 더불어 사순절을 교회의 절기로 지킬 것이 결정되었다. 사순절은 비록 성경에 근거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아직 교회가 동.서방 교회로 분열되기 전 모든 교회가 하나로 연합하여 결정한 우주적 교회의 결정으로, 이는 교회적 권위를 가지는 보편교회의 규례이며, 기일과 방식에 다소간 차이가 있을지라도 동.서방 교회 모두가 지키는 교회적 전통이다. 매년 맞는 사순절이지만, 2025년의 사순절은 현직 대통령 탄핵 사태라는 사상 초유의 상황 속에서 연일 전국적인 대규모 찬반 집회가 이어지고 좌우진영간 극단적 대립이 지속되고 있는 국민적 분열의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그 어느 해와도 다른 사순절을 맞게 하고 있다. 이에 샬롬나비는 2025년의 특별한 사순절을 맞아 다음과 같이 우리의 입장을 밝힌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모든 교만을 내려놓고 겸비한 마음을 갖는 사순절이 되도록 하자. 사순절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겸손히 자신을 낮추신 것과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난을 기억하는 절기이다. 성육신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본성(본체)으로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나 그러한 하나님의 지위를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발적으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그가 이처럼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신 것은 죄인된 우리를 동정하셔서 자신을 우리와 동일시 하심이었다(빌 2:5-8).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 또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기 위하여 죄인된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허물과 죄를 마치 자신의 것처럼 짊어지신 것이었다. 사순절은 그리스도의 이러한 겸손과 고난의 의미를 묵상하는 절기이다. 그러므로 2025년 사순절을 맞아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더 낮은 마음과 가난한 마음을 갖는 자세를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대통령 탄핵 사태를 맞아 우리 사회 국민은 진보와 보수의 입장에 따라 탄핵 찬반으로 갈라진 채 상호 적대적 비방과 혐오의 수준이 도를 넘어서고 있으며, 향후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서는 자칫 불복(不服) 충돌 사태로까지 치달을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더해 날로 어려워져만 가는 국내외 경제 여건 속에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와 민생의 어려움은 서민들의 삶을 더욱 힘들게 하며 미래를 절망하게 함으로 사람들의 마음에는 온통 불안과 불만과 불평이 가득한 사회가 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이념과 지역에 따른 편가르기, 서로를 향한 적개심과 투쟁 속에 나라가 질곡의 고통과 혼란 속에 있다. 이런 가운데 수많은 소시민들이 삶의 희망을 찾지 못한 채 충동적 살인과 자살이 증가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 사순절을 맞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적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는 이러한 상황 가운데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교만한 마음과 공격적 태도를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를 동정하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비록 겸손한 삶의 실천으로 자신이 억울한 손해를 보게 되더라도 죄 없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함으로 할 수 있는 대로 화평을 도모하며 사회적 화합과 통합을 이루는 일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 또한 우리는 같은 선상에서 헌법재판소에서 국회측과 대통령측이 이런 국민들의 고통과 혼란을 돌아봄으로 국가의 대의를 위하여 당사자들이 서로 겸손한 자세와 서로를 이해하려는 관용과 열린 마음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본다. 그리스도인 정치인들은 정치권 또한 여야가 상대 당에 대해 겸손한 자세를 가짐으로 상호 존중과 이해 속에 대화와 상생의 정치가 실현되게 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2.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의 삶을 사는 회개와 성화의 삶을 다짐하자. 사순절은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죄를 애통하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간절히 구함으로 신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기에 필요한 영적 변화와 성장의 기회를 가지는 기간이다. 특별히 그동안 죄의식을 가지면서도 해결하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지나쳐 온 죄나 은밀하게 행한 죄를 회개하며 새사람의 삶을 살기를 다짐하는 기간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자신 안에 있는 어찌할 수 없는 죄성을 슬퍼함으로 옛사람(죄성)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의의 본성)의 옷으로 갈아 입는 성화의 삶을 훈련하는 기간이다(엡 4:22-24). 죄를 버리고 민족의 죄를 교회가 책임지는 자세로 기도해야 하겠다. 오늘 대한민국이 이러한 국론분열과 정치 사회적으로 국민간의 대립이 심화되는 속에는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서로 상대방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 비판하는 자세가 자리잡고 있다. 오늘의 나라의 혼란 속에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잘못과 책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죄와 잘못을 하나님 앞에서 깊이 회개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돌아서야 하겠다. 3. 탐욕, 과소비, 향락을 멀리하고 물질적 금식 뿐 아니라 문화적 금식을 실천하자. 역사 이래 대한민국이 오늘 시대만큼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세계 속에 우뚝 선 나라가 되었던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국민은 국가의 번영 가운데에서 행복을 느끼기보다는 일부는 자유 대한민국을 비판하고 “헬조선”이라고 부르면서 세계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 시대만큼 탐욕과 과소비 향락이 만연한 시대도 찾기 어렵다. 기독교인들은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던 대한민국이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기까지에는 기독교와 신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과 더불어 오늘날 대한민국에 만연한 국가적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교회의 책임의식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순절 기간동안 기독교인들은 금식과 특별새벽기도 등 영적인 절제와 청빈의 삶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 더해 음식과 의복 그리고 생활방식 등에서도 비싸고 화려한 것들을 피하는 등 육적인 절제와 청빈의 삶도 실천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육체적 쾌락과 만족을 구하는 오락이나 유흥 향락을 피하고 문화적 금식을 함으로 영적 육적 경건의 훈련을 하여야 한다. 휴대폰 사용도 절제하고,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곤 휴대폰 사용 유보, 인터넷 오락 사용 유보를 실천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도록 하자. 4. 가난한 이웃, 소외계층, 외국인, 탈북민을 돌아보아 구제에 힘쓰자. 사순절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과 낮아지심과 희생과 고난을 기억하는 기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에 있어서는 하나님이시지만 자신의 하나님 됨을 주장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 곧 죄로 더럽고 비참하고 하나님과 소외된 형편에 있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공감하심으로 자신을 우리와 동일시하신 것이다. 사순절 기간 동안 교회와 신자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낮아지심의 의미를 기억함으로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들을 돌아보아 그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기초생활수급자, 차상위계층, 실직자 가족 등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들; 고아, 독거노인, 가출 청소년, 청소년 가장, 노숙자, 쪽방촌 등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와 이주민, 탈북민 등 이러한 사회적 약자들과 소외계층에 있는 사람들 또는 이들을 지원하는 단체들을 찾아 사랑의 나눔과 구제를 실천하여야 한다. 그리고 전 세계에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우리의 작은 것들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야 하겠다. 5. 한국교회는 사순절 기간 동안 깊은 통회의 기도와 회개를 통해 세상의 빛으로 거듭나자 주님이 우리를 위해 받으신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사순절을 보내며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주님이 우리의 모습을 보시며 어떻게 생각하실지를 깊이 묵상해야 하겠다. 주님을 따라오려면 네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라 오라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십자가를 지기보다는 영광을 원했고 주님의 은혜 속에 우리의 꿈을 이루고자 노력한 모습을 회개해야 한다. 우리 주변의 연약한 자를 돌보기보다는 자신의 부를 쌓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회가 갈라지고 분열할 때 주님이 원하시는 희생과 사랑을 통한 연합의 길을 걷지 못했다. 한국교회는 진보와 보수가 애국심을 다르게 표시하여 찬성과 반대로 나누어져 기도회를 가졌다. 탄핵찬성파들은 반대파를 “극우들”이라고, 반대파들은 찬성파를 “빨갱이”라고 비방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를 향하여 하나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한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모습 때문에 주님이 이름이 조롱당했고 교회는 사회가 기대하는 신뢰를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길에서 벗어난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회개하며 주님의 참된 제자되기 위해 우리의 죄악된 모습을 회개해야한다. 우리는 다음같이 기도했으면 한다: ‘주님께서 긍휼을 베푸사 우리의 연합과 상호 신뢰를 회복시켜 주소서. 그리하여 한국교회가 절망과 아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소망의 등불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분열된 한국사회 안에 예수 샬롬과 화목을 이루는 모판(母板)이 되게 하옵소서.’ 2025년 3월 31일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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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나비 논평] 2025년 사순절을 맞는 교회와 신자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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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3일천하 ‘갑신정변 140년’ 이 땅 복음의 큰길 열었다
- 1884년 12월 4일 밤 10시경. 이날은 최초로 지금의 체신청 우정국 개청식이 있는 날이었다. 행사를 마친 후 내·외 귀빈이 함께하는 저녁 연회가 열리던 시각. 갑자기 ‘불이야’ 하는 소리와 함께 총소리가 들리고 비명소리가 진동했다. 당시 김옥균, 홍영식, 서재필 등 젊은 엘리트 개화파 세력들이 정변을 일으킨 현장의 이야기다. 고종 즉위 20년 되는 해 일본은 개화 후 나날이 발전하고 중국과 서양 제국들이 조선의 개화와 통상압박을 하던 혼돈의 시기였다. 조선 26대 왕 고종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은 갈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급진개화를 주장하는 김옥균 파와 점진적 개화를 주장하던 민영익 등 세력 간 갈등 속에 급진개화파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정변이었다. 올해 12월 4일은 갑신정변 1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갑신년 쿠데타는 성공하는 듯 했으나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개입 3일 만에 평정하고 주모자들은 멸문지화 되거나 일본으로 도피했다. 갑신정변은 당시 일본의 지원으로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갑신정변이 성공했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됐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운명이 외세 강국에게 점령당할 수밖에 없는 비운의 상황이었다고 사가들은 말하고 있다. 역사적 평가와 상황을 접어두고 당시 사건의 현장을 통해 하나님이 이 나라 복음을 위해 위대한 계획을 펼치고 있었던 은혜를 찾아 보고자한다. 불을 지르고 쿠데타 세력들이 반대세력들에게 총을 쏘며 공격을 하는 통에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칼에 난자되어 중상을 입었다. 죽을 수 밖에 없던 상황에 연회에 참석했던 미국 루시어스 푸트(Lucius H. Foote) 공사가 긴급히 미국에서 두 달 전에 선교사로 입국한 한사람을 찾는다. 바로 최초의 의사선교사 호러스 알렌 선교사를 찾아 치료함으로써 민영익은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알렌 선교사는 누구인가? 우리의 기독교사에 거장으로 남아있는 알렌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중국으로 파송되었다. 이즈음 1882년 조미(朝美)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선교사의 마음에 조선의 선교사가 되고 싶어 자원한다. 갑신정변 두 달 전 1884년 10월 6일에 한양으로 입국한 선교사이다. 알렌의 치료로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살아남으로써 3일 천하정변은 끝이 나고 고종의 권력은 유지 될 수 있었다. 민영익을 살린 알렌에게 고종은 무엇을 원하냐고 물었다. 당연히 알렌은 병원을 지어 달라고 했다. 고종에게는 너무 쉬운 요청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변의 주동자 홍영식의 가족들이 처단되고 폐허된 집을 병원으로 개원하게 했다. 바로 최초의 병원 광혜원(나중 제중원)이다. 알렌선교사가 병원을 짓고 자유롭게 선교를 하게 되는 큰길이 열리게 된다. 하나님의 역사는 벼락처럼 전개 된다고 했다. 1885년 봄 일본에 머물러있던 아펜젤러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함으로써 조선 땅의 예수 복음이 날개를 달았다. 언더우드는 오늘의 연세대와 알렌 선교사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을 세우는 엄청난 일을 했다. 아펜젤러는 이승만을 탄생케 한 배제학당을 세운다. 뒤이어 스크렌턴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와 이화학당을 세우고 천대받던 조선의 여성들이 눈을 뜨게 했다. 조선역사가 망해가던 시기 비운의 시간표가 돌았지만 선교사들을 통해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게 하는 복음의 역사(役事)가 역동 했던 것이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축복이다. 한 나라를 부흥 발전시키는 무한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조선 5백 년의 역사는 정말 캄캄한 세상이었다. 사대부들이 타락한 유풍(儒風)의 문화 속에서 백성을 착취하고 나라의 발전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나라가 망해가는 때 나라를 살리고자 급진개혁세력들이 일으킨 정변은 사람의 위대한 뜻에도 불구하고 3일천하로 끝난다. 뒤이은 역사는 결국 일본의 36년 종살이해야 하는 비운의 역사를 겪어야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70년 종살이 후 회복의 역사를 썼다. 우리는 140년 전 위대한 영적 거장 몇 분의 선교사들이 오늘의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들어내는 초석을 낳았던 역사를 돌아본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가. 세계 10대강국을 자랑한다. 희망 속에 겪는 사회문화의 심각한 갈등을 보면 나라가 망할 것 같은 위기다. 이런 위기 때 그때의 역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야 할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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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3일천하 ‘갑신정변 140년’ 이 땅 복음의 큰길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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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2) (민12:11-16)
- 미리암은 위대한 믿음의 여인이 맞습니다. 하지만 여선지자라는 위대한 칭호를 받은 후 신앙이 제자리걸음을 했습니다. 미리암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역사에 발맞추지 못하고 여전히 애굽에서의 사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모세가 없는 40년 동안 여자로서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진짜 지도자인 줄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진짜 지도자인 모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교만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40년 만에 나타난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기절초풍할 일들을 일으킵니다. 세계 최강의 애굽과 바로도 모세 앞에 쩔쩔맵니다. 애굽을 초토화 시켜버렸고, 애굽의 장자를 죽여 씨를 말려버렸습니다. 여호와의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임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만 대면하시고 바다까지 갈라 마른 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미리암은 40년 동안 여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을 영도해 왔지만 40년 만에 갑자기 등장한 모세의 위용 앞에서 입도 벙긋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선지자의 위치에서 볼 때 비록 인간적으로는 누나요 동생이지만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적 권위를 지닌 모세였기에 고개 들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교회들끼리, 특히 목회자들끼리 묘한 질투심과 경쟁심이 있습니다. 곁의 교회가, 다른 교회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갖습니다. 잘못되면 입은 안타깝다고 하면서 속은 이유 없이 고소하고 상대적인 만족을 얻습니다. 교회의 주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망각한 무서운 죄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이 교인들 사이에서도 발생합니다. 곁의 성도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잘못되면 입은 위로하는 것 같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자신의 신앙과 믿음이 좋은 것으로 위로받고 착각합니다. 아주 나쁜 모습입니다. 악한 모습입니다. 교만의 극치입니다. 어쩌면 이것보다 더한 것이 목회자들끼리의 보이지 않는 견제와 경쟁입니다. 주변의 교회가 갑자기 성장하면 상대적 박탈감을 가집니다. 사람이다 보니 비교가 안 될 수 없습니다. 특히 가까운 교회에서 독보적인 성장을 보이면 심각한 스트레스까지 받습니다. 목사 자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의 중직자들이나 성도들도 자연스럽게 목회자에게 압박을 가합니다. 자신은 1년이 가도 전도 한 명 하지 않으면서 교회 부흥을 입에 올립니다. 십일조나 감사헌금은 고사하고 선교나 불우이웃이나 개척교회, 농어촌교회, 은퇴하신 목사님, 가난한 신학생들을 위해 특별헌금 한 푼도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재정을 입에 올립니다. 더 심각한 것은 설교자들의 교만입니다. 설교하는 사람이다 보니 설교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설교자의 훌륭한 설교에 은혜받기는커녕 허점과 잘못을 찾기에 바쁩니다. 그러니 설교에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현상은 모세를 대적하는 미리암의 아류들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땀방울 하나, 눈불 방울 하나 다 주의 것입니다. 우리는 비교 대상도 아니요, 경쟁상대도 압니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며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자들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특히 목회자들은 아바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평생 잊어선 안 됩니다. 물론 아바타라 하지만 예수님의 아바타니 영광스럽습니다. 진짜 선지자, 진짜 목회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미리암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사실 미리암은 누구보다도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몰라서 범한 죄도 무섭지만, 알고도 범하는 죄는 더 무섭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단순히 그 사람의 성향이나 기질을 나타내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모세의 통치를 방해했고, 이스라엘의 진행을 가로막았습니다. 감히 모세의 영적 권위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감히 같은 선지자였지만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교만은 이 모든 영적 권위 앞에서도 원망과 비방의 고개를 들게 합니다. 호시탐탐 모세의 허점과 실수를 염탐합니다. 교회도 은혜를 계산하는 성도가 있고, 실수와 잘못을 찾아내는 성도가 있습니다. 기회가 왔습니다. 구스 여자가 돌아왔습니다. 이전에 이미 정리된 문제인데도 교만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영적분력을 상실했습니다. 미리암은 십보라가 돌아오자 속에 숨겨놓았던 원망과 불평을 표출합니다. 원망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사실까지 망각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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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2) (민1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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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1)
- 성경 어디에도 미디안의 제사장 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는데 문제 삼은 장면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실에 대해 그 어디에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하는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사건 때문에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백성들이 구스 여인 십보라를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통치에 십보라를 문제 삼지 못하도록 아예 입도 벙긋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버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명을 주셨고, 그 사명 감당하기 위해 애굽으로 오는 길에 느닷없이 모세를 죽이시려고 한 것은 구스 여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임이 분명합니다. 분명한 이유는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것에 있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 같은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발견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려 하셨습니다. 완전한 모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이셨습니다. 완전히 죽이셨습니다. 그래도 십보라는 할례언약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긴박한 순간에 할례를 행하면 남편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과 비교도 되지 않는 신분입니다. 단순히 액면가로 볼 때 우리는 시아버지와 관계한 여인입니다. (마1:3)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우리는 우상의 신전에서 몸을 팔던 기생이었습니다. 우리는 과부요,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남편을 사지로 몰고 왕과 간음한 유부녀였습니다. (마1:5-6)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인데 죄인인 줄도 모르는 죄인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답도 없으면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제 딴에 잘 사는 줄 알지만 무익한 인생이요, 단 하나도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혀에는 속임만 있습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입에는 저주와 악독만 가득합니다. (롬3:10-14)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런 우리가, 그런 우리의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도 달렸고, 예수님의 부활에 나도 부활했다고 고백합니다. 사탄이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의를 제기하고 문제 삼을 것이 수두룩한 우리입니다. 아니 우리는 문제 그 자체들입니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합니다. 십보라가 할례 언약을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십보라가 할례를 행하여 남편을 살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불가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입으로 시인합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보라가 할례언약을 아는 것과 할례를 행하는 것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서십니다. (마10: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눅12: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합니다. 문제 제기도 못합니다. 입도 벙긋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의 예배 자리에, 예수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앉혀주십니다. (계12:22-23)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이런 은혜를 받은 성도입니다. 그래도 원망하고 비방하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완전한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할례를 시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에 거하며, 주일마다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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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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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낙엽이 아닌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
- 낙엽이 아닌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 벚꽃 필 때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꽃잎을 잡는다. 그렇다면 떨어지는 낙엽을 잡으면 무엇이 이루어지는가? 일반적으로 낙엽은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에 아무도 잡는 사람이 없다. 벌써 나무들이 하나둘씩 낙엽 되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게 되는 12월이다. 육신의 인생도 낙엽과 같은 존재이다. 때가 되면 벌거벗은 나무처럼 나뭇잎은 낙엽 되어 다 떨어지게 된다. 우리는 보통 나체(裸體)하면 사람의 벌거벗은 몸을 연상하는데 원래는 나무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자로 “나(裸 벗을 나)”자는 나무에 잎사귀가 낙엽이 되어 다 떨어졌다는 뜻이다. 한자 적(赤)자도 “벌거벗은”이라는 뜻이 있어, 적나(赤裸), 적신(赤身)도 같은 의미로 쓰이나 근래에는 사용 빈도가 적지만 한자어 “적나라(赤裸裸)하다”는 것은 “다 까발려진”과 같은 비유적인 의미와, “다 벗다”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영어로는 ‘naked’와 ‘누드(nude)’가 있는데 둘 다 나체라는 의미이기는 하나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있다. ‘naked’는 자연 그대로의 나체를 뜻하고, ‘nude’는 예술이라는 옷을 입은 나체를 뜻한다고 정의했다.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 세계의 순리를 따라 단풍이 낙엽 되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필자가 목회하는 이곳 통영에도 한 잎 두 잎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쓸쓸한 인생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된다. 단풍이 드는 속도가 다르게 나타나는데 성목(成木) 보다는 묘목(苗木)이 빠르고, 맨땅보다는 화분이 빠르게 물들기 시작한다. 원인은 뿌리 온도와 관계된 것이라고 한다. 뿌리가 추위를 느끼면 더 빠른 단풍이 들게 된다. 성목(成木)보다 묘목(苗木)의 흙의 양(量)이 적기에 뿌리가 온도변화를 더 빨리 느끼고, 맨땅보다는 화분이 더 민감하기 마련이다. 우리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다. 믿음의 뿌리가 깊고 말씀의 흙이 많은 성도는 세상에 쉽게 물들지 않고 자신을 지켜나간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세상에 쉽게 동화되어 세속적인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런 원리를 알기 때문에 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 “교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사랑의 뿌리가 깊이 내려지기를(엡 3:17)”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우리는 낙엽과 인생에 대한 비유적 의미를 또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 육은 낙엽처럼 쓸쓸히 떨어져 없어질지 몰라도 영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로 옷 입음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고 하였고,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후패하나) 우리의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영원히 낙엽 되지 않는다. 믿음의 뿌리가 깊어지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게 되고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왕 노릇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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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낙엽이 아닌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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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 8
- 관계 신학 관계는 실천신학 분야의 학문입니다. 관계는 성경적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신 후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관계는 소통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최고의 관계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은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될 때 열매 맺게 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분 하나님이지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관계성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부부관계의 중요성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과의 관계, 수많은 관계를 성경은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로 인해 깨어진 관계 회복 능력입니다. 인생의 문제는 죄의 문제이고, 죄 때문에 관계가 깨집니다. 성경은 관계의 책입니다. 관계 신학을 세우고 관계를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와의 관계, 성령님과의 관계, 영적 리더와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사탄은 관계를 깨뜨립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열쇠이고 소통입니다. 대화하는 것은 관계 맺는 것의 기초요 중심입니다. 성경은 인간관계의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샬롬’도 관계에서 오는 평안입니다. 관계는 행복의 열쇠입니다. 관계를 통해 축복을 받게 됩니다. 사도바울의 신학도 관계 신학입니다. 바울서신에 보면 관계의 중요성을 가르쳐 줍니다. 관계 신학은 실천신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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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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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창조’(Creation)의 풍요한 의미
-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는 식물, 동물,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창조로 우리를 안내한다. ‘있으라, 생겨라’와 ‘그 종류대로’라는 반복되는 구절은 지음 받은 모든 것에 대한 창조주의 주권적 권능뿐만 아니라, 창조 세계의 다양성과 다원성에 대한 창조주의 지혜와 신비함을 남겨 주고 있다. 더욱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구절의 반복은 이 다양성의 선함과 아름다움을 확증해 주고 있다. 창조된 생명의 다양성은 개별 창조물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한 그루의 나무를 생각해 보자. 우리가 나무가 생명을 가지고 자라는 것을 본다. 나무의 색깔과 여름의 풍성한 잎사귀, 겨울의 앙상한 가지도 우리로 하여금 다른 감정과 기분을 갖게 만든다. 새가 가지에 앉고, 우리는 나무를 사용하여 집을 지을 수 있다. 나무 한 그루조차 그냥 단순하지 않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훨씬 더 많은 것이 나무 한 그루를 구성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는 구절의 풍요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창조에도 생명의 다양성이 나타난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피조물이 믿고, 느끼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놀고, 노래하고, 춤추고, 성장하고, 창조하고, 물건을 사고팔며, 양심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대상을 예배하는 등 수 많은 활동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인간 본성에 대한 이러한 그림은 자그레우스의 신화에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그림과 현저히 대조된다. 거기에서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은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다. 이 신화의 영향을 받아 일부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함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특정한 차원을 과소평가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이들은 놀이가 신앙과 개인적 도덕성만큼 좋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 피조물에게 부여해 주신다소 익살스러운 ‘장난기’를 표현할 수 있도록 축하, 노래, 춤, 축제적 활동의 즐거움과 아름다음을 기록하고 있다(출15:20; 레23:39-41; 눅15:25-32). 기독교 철학자 칼빈 시어벨트(Calvin Seerveld)가 말했듯이, “주님은 유머 감각, 날개 달린 말에 대한 환상, 아이들이 ‘집에서 놀 때’와 같이 꾸며낸 이야기의 재미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이 좋다고 보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또한 느끼고 생각하고 성장하고 창조하는 공간을 마련하셨고, 하나님께서는 이것들도 좋다고 보셨다고 덧붙일 수 있다. 창조 세계서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 본성의 일부 측면을 열등한 위치로 격하하는 것은 나무의 선함이 아름다움보다는 건물을 짓는 데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는 창조 세계의 일부 측면이나 인간 본성을 다른 측면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라는 가르침을 결코 주지 않는다. 창조 이야기는 오히려 우리의 인간 본성을 구성하는 모든 창조된 측면이 좋다고 확언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피조물성의 한 가지 중요한 차원은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창조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임무를 주셨다는 사실이다.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아담, 즉 ‘땅의 사람’은 창조물을 가꾸고 경작하고 돌보라는 사명을 부여 받았다(창1:28, 2:15). 우리에게 주어진 이 하나님의 부르심은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창조된 인간 본성의 한 본질적인 측면이기 때문이다. 선하든 악하든 우리는 창조물을 경작할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이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의 역사다. 인간의 문화는 인간이 창조물을 돌보고 경작한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정부, 만찬, 우리가 입는 옷, 교회, 술집, 축구 경기장, 원자 폭탄 등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좋든 나쁘든 창조물을 경작하고 돌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의 증거다. 이는 또한 참된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그 결과가 어떠해야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동시에, 삶의 모든 차원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적으로 응답하지 못한 결과가 얼마나 파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새로운 안목으로 볼 수 있도록 도전하고 있다. 김성수 목사 (탄자니아 아프리카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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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창조’(Creation)의 풍요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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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엘리압(2)
- 골리앗과 싸우려고 하는 다윗을 향해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엘리압과 사울을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살펴보십시다. 엘리압은 누구입니까? 엘리압은 이새의 장자입니다. 사무엘이 기름을 붓기 위하여 이새의 집에 갔을 때 엘리압을 보자마자 이 사람이다 싶을 정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삼상16:6)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하지만 결과는 기름부음 받을 사람이라고 모두가 생각지도 않았던 다윗에게 사무엘은 기름을 붓게 됩니다. (삼상16:12)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 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이런 상황에서 가장 불쾌할 것 같은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물론, 일곱 형들이 다 기분 나쁘겠지만 누가 봐도 제일 적임자요, 당연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장자 엘리압일 것입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우리는 에브라임의 형 므낫세의 믿음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창48:13-14)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이 장면을 본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팔을 옮기려고 시도했습니다. (창48:18-20)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하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므낫세 입장에서는 영문도 모르는 일이요, 억울하기 그지 없는 상황입니다. 또 아버지 요셉이 나서서 오히려 자신을 두 번 죽이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에서 이런 장면이 나타나면 대부분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니 일상 교회생활이나 신앙생활에 쉽게 발생하는 일이며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구지 설명하지 않아도 어떻게 나타나는지 잘 압니다. 그러다보니 믿음의 족장 야곱에 대한 평가도 부정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에 전혀 언급이 없고, 성경의 맥락과도 맞지 않은 야곱의 트라우마를 거론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므낫세는 단 한마디의 부정적인 반응도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엘리압도 막내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골리앗이라는 대적으로 인해 나라의 존폐라는 위기 앞에서 생뚱맞게 표출된 엘리압의 분노를 봤을 때 엘리압은 자신에게 기름을 붓지 않은 사무엘 선지자와 그것을 결정하셨던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평을 가슴에 담았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교회생활 가운데 쉽게 가질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과연 과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므낫세와 엘리압은 똑같은 상황을 만났고, 당시에는 두 사람다 아무 말 없이 똑같은 반응을 보였지만 두 사람이 가졌던 마음은 정반대였고 그 결과도 정반대였습니다. 두 번 죽임을 당한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므낫세는 어떤 자세였는지 그 결과가 므낫세의 믿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계7:5-8)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므낫세의 이름은 여섯 번째로 아버지 요셉보다 먼저 기록되어 있습니다. 므낫세의 이름은 아버지와 큰아버지들과 작은 아버지 베냐민과 어깨를 나란히 함께하며 당당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므낫세 자신과 동생 에브라임을 앉혀놓고 벌어졌던 할아버지 야곱과 아버지 요셉의 일방적인 행동이 정작 므낫세 자신에게는 어떠했을까요? 단 한마디 반응이 없지만 이 장면을 직접 당하는 므낫세, 그 후 동생 에브라임과 성장하면서 이 사건은 순간순간 므낫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훗날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도 므낫세 지파는 요단강을 경계로 므낫세 반지파는 이곳, 므낫세 반지파는 저곳으로 나누어져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하지만 계시록에 완성된 12지파의 이름에 므낫세가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는 장면으로 오늘날 믿음으로 므낫세와 같이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무한한 감사와 감동의 장면임이 분명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는 장면에서 므낫세의 순종을 완성해 주셨습니다. [행8:32]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우리의 신앙생활, 교회생활 저변에 깔려있는 비교의식이 얼마나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지도 발견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뒤바뀐 순서만 비교하다보니 므낫세가 얻은 비교할 수 없는 복과 특권을 보는 눈이 어두워져버린 것입니다. 동생에게 형의 자리를 빼앗긴 것이 큽니까? 아버지와 같은 향렬, 아버지의 형제가 된 것이 큽니까? 에브라임의 형이라는 위치가 위대합니까? 이스라엘의 12지파 중 하나라는 자리가 위대합니까? 오늘날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와 원망은 이 눈이 어두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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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엘리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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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인공지능을 활용한 목회와 교회교육
- “목사가 설교 준비할 때, 컴퓨터와 인터넷을 사용하다니, 믿을 수가 없네. 목사가 설교를 준비할 때는, 노트에 펜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야지, 컴퓨터 자판으로 설교문을 두드려 작성한다는 것은 불경하기 이를 데 없네” “ 목사가 설교를 준비할 때는, 요즘 만년필로 쓴다는 신식 목사들이 있다는데, 참으로 통탄스럽구먼. 자고로 목사가 설교를 준비할라치면, 먹을 갈면서 마음을 다지고, 붓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다하여 작성하는 법이거늘, 참 말세일세” 이 이야기는, 문명의 변화에 적응이 더딘 것을 빗대어 인터넷에서 유행하던 이야기였다. 한국 교회는 복음이 전해졌던, 구한말부터 다양한 문화와 문명의 보급처였다. 세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다양한 신문물이 교회로부터 일반인들에게로 전달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이들이 교회라고 하면, 시대를 앞서가는 리더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199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1980년대에 한국 교회 교회학교에서“융판설교, 인형극, 문학의 밤” 같은 프로그램들은 많은 학생들을 교회로 이끌어 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교회학교의 부흥과 교회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1990년대에는 한국 교회에 액정비전이 도입되면서, 예배를 드릴 때에 성도들이 성경책 찬송가를 읽고 부르기 위하여 시선을 아래로 두지 않고, 찾는 데에 시간을 쓰지 않고, 즉각적으로 앞을 바라보면 예배하는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이 같은 사실을 홍보하여, 액정 비전의 판매가 급증하였다). 하지만 2000년대가 되면서 과학기술이 급속도로 변화하면서 문명의 흐름이 시시각각 변화하고, 교육공학을 필두로 다양한 이론들이 도입되면서 시대는 이전의 그 어떤 변화들보다 급변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2020년 코로나를 전후하여 메타버스와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인하여 하나의 기술에 적응하기도 전에, 새로운 도구들과 개념들이 쏟아지고, 이러한 변화는 다양한 영역들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인공지능을 활용한 교육기법이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으며, 가전제품에 인공지능이 기본적으로 탑재되기 시작했다. 2018 년 10월에 인공지능(AI)이 그린 그림이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4억 9천5백만 원에 낙찰되었다. 2024년 11월에는 인공지능을 탑재한 휴머노이드 로봇이 붓으로 그린 그림이 국제 경매기업 소더비스에 의해 경매에 출전돼 전 세계로부터 27건 이상의 입찰이 들어갔다. 이 그림의 예상 가격은 1억 7천만 원 정도였는데, 최종 낙찰된 가격은 18억 원이었다. 또한 법조계, 제조업, 미디어 산업에도 인공지능의 역할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인공지능이 경쟁력과 실용적인 측면에서 압도적인 효율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공지능에 의해 달라지는 변화는, 카페와 식당에서도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인공지능의 대표주자로 알려진 공개된 챗GPT 3.5는 2022년에는 미국 변호사 시험을 통과하였지만, 2023년 3월 업그레이드된 챗GPT 4.0은 상위 10%의 성적을 기록할 만큼 월등한 향상을 보였으며 챗GPT는 챗GPT 4o, 챗GPT 4 o1으로 더욱 업그레이드되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자랑하고 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누가복음 16:8) 라는 말씀과 같이 세상 문명은 급속도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며, 능률을 고도로 높이기 위하여 다양한 활동들을 하게 된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들이 이러한 변화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면서, 한국 교회는 낡은 것으로 치부되는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물론 하나님의 교회는 복음과 영성으로 세워진 하나님의 집이며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디모데전서 3:15). 하지만 기술과 도구는 가치중립적이다. 새로이 도입된 기술과 생성된 도구가 어떤 이들에 의하여 사용되는가에 따라서 그 효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승합차가 한국교회에 얼마나 요긴하게 사용되었는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하지만 승합차가 범죄집단에 사용될 때 심각한 부작용과 손해를 입히게 된다. 이는 인공지능에도 마찬가지이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도입될 때 이에 적응하지 못하였던 목회자들도, 점차 사용하게 되면서 그 편리한 성능으로 목회와 교회교육에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 인공지능은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얻은 효율성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기능들을 보유하고 있다. 필자는 인공지능이 본격적으로 소개될 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하면서 큰 도움을 얻었고, 2023년과 2024년에 <어린이 다니엘 기도회>에서 설교할 때에도 큰 도움을 얻었다. 현장에서 600명의 유치부에서 초등학교 6학년과 온라인으로 참석하는 16,000명의 학생과 효과적으로 소통하기 위하여 인공지능 챗GPT를 활용하여 PPT 슬라이드 365장을 제작하여, 60분간의 설교 시간에 활용하였다. 인공지능은 비단, 이러한 부분뿐만 아니라 목회현장에서, 교회교육의 여러 영역에 탁월한 도움을 주고 있음을 필자는 직접 체험하였다. 이러한 경험들과 인공지능을 교회에서 활용할 때 유용한 실제적인 방법들을 나누고 싶어서 “나는 챗GPT를 이렇게 사용한다.”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소개하였다. 이 책이 출간되고 난 이후에도 인공지능은 급속도로 변모하면서 새로운 기술이 연이어 소개되기에, 이러한 내용들을 소개하기 위한 세미나를 준비하고 있다. 요셉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천문학을 활용하여 관개시설을 관리하여 농업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던 애굽제국에서, 그 누구도 예측조차 못한 7년 풍년, 7년 흉년을 하나님의 지혜로 예견하고, 이 시기들을 지혜롭게 극복하게 하였다. 다니엘은 당시로서는 가장 발달한 문명을 가진 바벨론의 점성학도 예측못할 세계역사의 미래를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하면서 증거하였다. 하나님은 역사와 시대의 주인이시기에, 인공지능의 시대에도 당연히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 급변하는 시대에 불변의 복음을 전하려면 다양한 시대의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필요한 것은, 종교개혁시대의 루터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활용한 것에 우리는 충분한 교훈을 얻는다. 그러므로 인공지능의 시대에 인공지능을 이해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들의 시대적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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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인공지능을 활용한 목회와 교회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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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3일천하 ‘갑신정변 140년’ 이 땅 복음의 큰길 열었다
- 1884년 12월 4일 밤 10시경. 이날은 최초로 지금의 체신청 우정국 개청식이 있는 날이었다. 행사를 마친 후 내·외 귀빈이 함께하는 저녁 연회가 열리던 시각. 갑자기 ‘불이야’ 하는 소리와 함께 총소리가 들리고 비명소리가 진동했다. 당시 김옥균, 홍영식, 서재필 등 젊은 엘리트 개화파 세력들이 정변을 일으킨 현장의 이야기다. 고종 즉위 20년 되는 해 일본은 개화 후 나날이 발전하고 중국과 서양 제국들이 조선의 개화와 통상압박을 하던 혼돈의 시기였다. 조선 26대 왕 고종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은 갈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급진개화를 주장하는 김옥균 파와 점진적 개화를 주장하던 민영익 등 세력 간 갈등 속에 급진개화파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정변이었다. 올해 12월 4일은 갑신정변 1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갑신년 쿠데타는 성공하는 듯 했으나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개입 3일 만에 평정하고 주모자들은 멸문지화 되거나 일본으로 도피했다. 갑신정변은 당시 일본의 지원으로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갑신정변이 성공했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됐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운명이 외세 강국에게 점령당할 수밖에 없는 비운의 상황이었다고 사가들은 말하고 있다. 역사적 평가와 상황을 접어두고 당시 사건의 현장을 통해 하나님이 이 나라 복음을 위해 위대한 계획을 펼치고 있었던 은혜를 찾아 보고자한다. 불을 지르고 쿠데타 세력들이 반대세력들에게 총을 쏘며 공격을 하는 통에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칼에 난자되어 중상을 입었다. 죽을 수 밖에 없던 상황에 연회에 참석했던 미국 루시어스 푸트(Lucius H. Foote) 공사가 긴급히 미국에서 두 달 전에 선교사로 입국한 한사람을 찾는다. 바로 최초의 의사선교사 호러스 알렌 선교사를 찾아 치료함으로써 민영익은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알렌 선교사는 누구인가? 우리의 기독교사에 거장으로 남아있는 알렌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중국으로 파송되었다. 이즈음 1882년 조미(朝美)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선교사의 마음에 조선의 선교사가 되고 싶어 자원한다. 갑신정변 두 달 전 1884년 10월 6일에 한양으로 입국한 선교사이다. 알렌의 치료로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살아남으로써 3일 천하정변은 끝이 나고 고종의 권력은 유지 될 수 있었다. 민영익을 살린 알렌에게 고종은 무엇을 원하냐고 물었다. 당연히 알렌은 병원을 지어 달라고 했다. 고종에게는 너무 쉬운 요청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변의 주동자 홍영식의 가족들이 처단되고 폐허된 집을 병원으로 개원하게 했다. 바로 최초의 병원 광혜원(나중 제중원)이다. 알렌선교사가 병원을 짓고 자유롭게 선교를 하게 되는 큰길이 열리게 된다. 하나님의 역사는 벼락처럼 전개 된다고 했다. 1885년 봄 일본에 머물러있던 아펜젤러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함으로써 조선 땅의 예수 복음이 날개를 달았다. 언더우드는 오늘의 연세대와 알렌 선교사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을 세우는 엄청난 일을 했다. 아펜젤러는 이승만을 탄생케 한 배제학당을 세운다. 뒤이어 스크렌턴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와 이화학당을 세우고 천대받던 조선의 여성들이 눈을 뜨게 했다. 조선역사가 망해가던 시기 비운의 시간표가 돌았지만 선교사들을 통해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게 하는 복음의 역사(役事)가 역동 했던 것이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축복이다. 한 나라를 부흥 발전시키는 무한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조선 5백 년의 역사는 정말 캄캄한 세상이었다. 사대부들이 타락한 유풍(儒風)의 문화 속에서 백성을 착취하고 나라의 발전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나라가 망해가는 때 나라를 살리고자 급진개혁세력들이 일으킨 정변은 사람의 위대한 뜻에도 불구하고 3일천하로 끝난다. 뒤이은 역사는 결국 일본의 36년 종살이해야 하는 비운의 역사를 겪어야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70년 종살이 후 회복의 역사를 썼다. 우리는 140년 전 위대한 영적 거장 몇 분의 선교사들이 오늘의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들어내는 초석을 낳았던 역사를 돌아본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가. 세계 10대강국을 자랑한다. 희망 속에 겪는 사회문화의 심각한 갈등을 보면 나라가 망할 것 같은 위기다. 이런 위기 때 그때의 역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야 할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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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3일천하 ‘갑신정변 140년’ 이 땅 복음의 큰길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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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48 : 기독교? 천주교? 개신교? 구교? 신교? 등의 차이는?
- I. 서언(序言) “당신의 종교는 무엇인가?”란 질문에 흔히들 우리는 “기독교를 믿는다”라고 답하는 경우가 많다. 평생 교회를 섬기는 목사이지만 이런 면으로는 답변을 하기가 애매할 때가 종종 있다. 예를 들면 천주교를 말할 때도 가톨릭(Catholic), 구교, 천주교 등의 여러 명칭들이 있고, 우리 개신교도 신교, 예수교, 기독교, 개신교 등으로 말한다. 왜 이렇게 다양할까? 더 나아가 어떤 명칭이 올바른 것일까? 란 의문이 든다. 이에 본 호에서는 이들 명칭의 유래와 그 의미를 논하여 보면서 우리 자신들의 올바른 용어를 정립해 보고자 한다. 또한 본 기고의 내용들은 김석한 교수의 ‘교회 용어 바로쓰기’와 강춘오 목사의 교회연합신문의 이에 관련된 사설의 내용과 기타 자료들을 일부 참고하였음을 밝혀둔다. II. 각 명칭들의 유래와 의미 분석과 차이점 1. 그리스도교(Christianity)와 가톨릭 교회(Catholic church)란?: 교회 명칭이 처음 사용된 계기는 안디옥에서 일반인들이 교인들을 맨 처음으로 부를 때 ‘그리스도인’이라고 했기 때문에(행11:26) 그 이후로 ‘그리스도교’란 이름이 붙여졌다. 하지만 로마 제국이 AD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부터 교회는 5대 교구로 나눌 정도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교구와 지역에 따라 이에 대한 의견을 달리하는 교회들이 생겨지게 되었고, 이에 대한 하나됨을 위해서 ‘보편성’이란 뜻인 ‘가톨릭’을 넣어서 ‘거룩한 가톨릭 교회’(The hory Catholic church)라고 했다. 그렇지만 1054년 동서교회의 분리가 되면서 서쪽은 ‘로마 가톨릭’, 동쪽은 ‘희랍정교회’로 교회의 명칭도 나누어졌다. 2. 예수교(耶蘇敎)와 기독교(基督敎)란?: 중세시대에 와서 가톨릭 교회의 부패로 인한 교회 개혁이 일어나면서 개혁자들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했다. 이를 유럽의 칼빈주의 교회들은 주로 ‘개혁교회’라고 불렀고, 영어를 사용하는 칼빈주의 교회에서는 ‘장로교회’라고 했다가 이 둘을 합쳐서 부를 때는 모두 개혁교회라 했다. 그 이후 개혁자들의 일부가 중국 등의 아시아권으로 선교하면서 ‘예수님’의 한자의 음역(音譯)을 따라서 야소교라 했고, 이는 바로 ‘예수교’가 되었다. 또한‘그리스도’도 음역에 맞추어‘기리사독’이라 했다가 나중에 기독교(基督敎)라는 명칭으로 사용했다. 3. 개신교(改新敎)와 천주교(天主敎), 신교(新敎)와 구교(舊敎)란?: 우리나라의 경우는 1945년 해방 이후에 예수교에서는 가톨릭교회를 ‘로마교’라고 불렀으며, 당시의 국가적인 표준어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구분하기 위해서 구교와 신교로 불렀다. 하지만 천주교 측은 구교란 이미지가 오래된 구습이고 신교는 새로운 신선한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고 불평했다. 이에 가톨릭은 한자어의 음역인 상제(上帝)와 천주(天主) 둘 중에서 천주를 택했다. 그 이유는 당시의 교황청이 라틴어인 Deus를 ‘천주’로 번역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를 당시의 천주교 신자였던 ‘장면’총리가 1960년에 이를 받아들여 정부의 공식 명칭으로 구교를 천주교로, 신교를 개신교로 바꿈으로서 지금까지 표준 명칭어로 사용되고 있다. III. 제언과 결어(結語)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이런 명칭들의 유래와 의의에는 나름대로의 논리성이 있다. 하지만 천주교와 우리와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됨은 확실하다. 다만 우리의 교회에는 어떤 명칭이 적합할까? 김석한 교수는 개신교보다는 ‘개혁교회’라고 해야 한다고 했고, 강춘오 목사는 ‘신교’가 더 적합한 말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적인 표준 명칭으로 본다면 천주교와 개신교를 합쳐서 기독교로 하고 있고, 우리 스스로를 개신교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모두 한자어의 음역이기 때문에 원어와 영어식 표현을 제외하고는 우리 한국어로는 한자어로 음역한 그대로 개혁교회이든 개신교이든 구분을 두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작은 소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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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48 : 기독교? 천주교? 개신교? 구교? 신교? 등의 차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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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최선의 결과 (막2:1-12)
-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인 <코카서스>산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산은 너무 높아서 언제나 구름이 봉우리를 가리고 있습니다. 용감한 독수리 한 마리가 그 산을 정복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날아올랐지만 여러 차례 실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드디어 독수리가 그 산 꼭대기에 오르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정상에 오른 독수리는 대단한 성취감에 젖어서 자신의 자랑스러운 날개를 활짝 뻗으면서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거미 한 마리가 나무 가지에 거미줄을 치면서 낄낄대며 웃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독수리는 속으로 “아니 저 거미가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지?”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자 거미가 독수리를 바라보면서 말하기를 “너는 여기까지 죽을 고생을 하면서 올라왔지만 나는 네 날개 아래 붙어서 하나도 힘을 들이지 않고 올라 왔단다!”하면서 독수리를 놀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세차게 불어온 바람에 그만 거미가 산 밑으로 굴러 떨어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에 담겨있는 뜻은 바로, “내가 노력하지 않고 얻은 기쁨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직접 수고하고 노력해서 얻은 기쁨이라야 오랫동안 누릴 수 있는 것이지, 노력하지 않고 얻은 기쁨은 오래 갈 수가 없습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수고하고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야 가치가 있는 것이지 수고하지 않고 불로소득(不勞所得)으로 얻은 물질은 가치가 없고 도리어 해(害)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땀 흘리고 노력해서 얻은 것이 좋은 것이지만 노력 없이 얻은 것은 별로 좋은 것이 못됩니다. 노력하면 반드시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것도 다같이 함께 노력하면 더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함께 노력할 때 어떤 결과가 있습니까? 첫째로, 최선을 다하면 기적을 보게 됩니다.(막2:1-5) 둘째, 최선을 다하면 영광을 얻게 됩니다.(대하20:20-23) 셋째로, 최선을 다하면 부흥이 일어납니다.(행6:1-7) 금년에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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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최선의 결과 (막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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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탄탈로스(tantalus)를 아십니까?
- 영어 단어 중에 탄탈리아즈(tantalize)가 있다. 우리말로 해석하면 “애타게 하다, 감질나게 하다” 라는 뜻으로 옥스퍼드 사전에는 ‘얻을 수 없는 것을 보여주며 괴롭히거나 장난치다’ 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인물 탄탈로스(tantalus)에서 유래하였다. 탄탈로스는 제우스의 아들이며, 현재 터키의 고대도시 시필로스의 통치자였다. 그가 하늘에서 알게 된 비밀들을 폭로한 이후 신들의 분노에 직면하게 된다. 탄탈로스가 신들의 음식인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훔쳐 인간 세상으로 가져오려 했기 때문에 신들의 심판을 받게 된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아들을 죽인 후 시신을 조각 내어 신들에게 음식으로 바치려고까지 했다. 그는 신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범죄를 저질렀지만 신들이 그에게 내린 잔인한 처벌은 항상 똑같았다. 즉 탄탈로스는 목까지 차는 물속에서 한 모금의 물도 마실 수 없었으며, 저승에서는 달콤한 과일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그는 결코 한 입도 먹을 수 없었다. 물과 음식이 손에 닿을 위치에 있었지만 탄탈로스는 영원한 목마름과 허기짐이라는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손이 닿을 듯 말듯 애타게 하면서, 결국 얻을 수 없는 것을 보여주며 괴롭히는 고통”을 일컬어서 영어단어 탄탈리아즈(tantalize)를 탄생시켰다. 또한 이 단어에서 유래된 것이 있는데, 물이나 액체가 부풀어 오르다가 일정 한계에 이르면 그 모두가 쏟아져버리는 화학실험기구인 ‘탄탈로스의 접시’가 이로부터 유래하였다. 이와 유사한 기능을 가진 술잔으로 계영배(戒盈杯)가 있다. 즉 넘침을 경계하는 잔이다. 이 잔은 술을 어느 선 이상 따르면 술이 밑으로 흘러 나간다. 이 술잔에는 작은 구멍이 있어서 술이 약 70% 정도 차면 작은 구멍을 통해서 술이 잔 밖으로 새어나가도록 만들었다. 이는 술잔을 가지고 과음을 경계하기 위한 것으로 일명 절주배(節酒杯)라고도 한다. 중국의 공자가 제나라 환공을 찾아갔는데 환공은 늘 계영배를 손에 들고 있었다. 환공은 이 계영배를 ‘늘 곁에 두고 보는 그릇’이라 하여 <유좌지기(宥坐之器>라고 불렀고, 공자도 이를 본받아 항상 곁에 두고 스스로를 가다듬으며 과욕과 지나침을 경계했다고 한다. 과거에 우리나라 선비들도 연잎들이 빗방울을 아래 쏟아버리는 것을 보고 ‘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빗방울만 싣고 있다가 그 이상으로 되면 미련없이 비워버린다’는 말을 하면서 정신수양을 했다. 또한 기품이 높은 선비들은 집에서 학(鶴)을 길러, 그의 지조에 나쁜 영향을 줄 어떤 사람이 찾아오면 구구하게 연설로 변명하느니 그저 학을 어깨에 얹고 나감으로써 무언의 항변을 했던 것이다. 진주에 낙향에 있던 영남의 선비 최영경(1529-1590)을 영의정 유성룡이 찾아갔을 때 남루한 토의에 짚신을 신은 최영경이 학(鶴) 한 마리를 어깨에 얹고 나와서 맞이했다. 이를 보고 영의정 유성룡은 백 마디 말보다 더 깊은 뜻을 미리 헤아리고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돌아 나왔다고 한다. 정말 멋있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에 넘치는 것들에게 대해서 많은 경고문을 날리고 있다. (딤전6:6)에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유익이 되느니라” 라고 말씀한다. 자족하는 마음이란 남의 것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이 내게 주신 것을 감사하며 누리는 삶이다. 또한 자족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세상 정욕을 거슬러 올라가는 저항의 몸짓이다. 김용삼의 시 <호박꽃 감사>를 보라. “장미처럼 예쁘지 않아도 노란 별 모양이 된 것 감사, 종종 내게 날아와 귓가에 윙윙 노래를 불러주는 꿀벌 친구가 있어 감사, 밤이면 둥근 달 쳐다보며 둥근 열매의 꿈을 꾸게 한 것 감사, 그리하여 가을 농부의 얼굴에 웃음꽃 피우게 하는 것 감사”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바울의 힘찬 외침을 들어보라 (고후6:10)에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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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탄탈로스(tantalus)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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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이중금고
- 나의 아내가 사용하는 화장대가 보통 사용하는 설합과 다르게 안쪽으로 손잡이가 없는 비밀스러운 작은 함이 있어 평소에 아끼고 귀중하게 사용하는 보석을 담는 것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중장치로 안쪽 깊숙한 곳에 함을 설치하여 다른 사람이 잘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여 보석이나 귀중한 물건을 잘 보관하는 것을 보고 이중 금고는 신기한 느낌마저 들었다. 병원이나 약국에서는 마약 성분의 약을 보관할 때에는 반드시 이중 금고에 잠금장치가 된 곳에 보관한다고 한다. 책임 관리자가 이중 금고에 넣어둔 치료 약을 목적에 맞게 사용하지 않으면 사회에 큰 해악을 끼쳐 사회적 문제가 발생한다. 이중 금고에는 비밀스럽게 귀중한 것을 보관하지만 그중에 위험한 마약을 보관하기 때문에 분명한 것은 선용하지 못하고 악한 쪽으로 마음이 뺏기면 본인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패망을 가져다준다. 성경에 어느 부자가 소출이 풍성하여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어 자기 곡간을 헐고 이중 금고처럼 비밀스럽게 창고를 지어 평안히 먹고 즐겁게 살 것을 획책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아가면 비밀스럽게 모아둔 재물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다. 세상의 귀중한 재물을 가지면 모두가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고 하나님께 부요한 자가 되지 못하여 불행을 자초한다. 기독교인이나 자기의 일을 도모하는 어떤 사람도 이중 금고를 만들어 하나님의 눈을 속이면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져 침륜과 멸망에 빠지고 만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아간도 물질에 미혹되어 탐심을 품어 망했다. 그가 노략한 외투 한 벌은 차치하더라도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의 금덩이를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금덩이를 깊이 묻고 그 위에 은을 묻는 치밀한 인간계획을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중 금고를 만들어 다른 사람이 금을 찾지 못하도록 이중으로 땅속 깊은 금고에다 꼭꼭 숨겨 놓은 것이다. 한 사람의 탐욕이 빚은 죄로 인하여 아이성 전투의 패배는 우리에게 큰 두려움과 교훈으로 다가온다. 이중 금고로 인한 탐욕은 죄를 낳고 처참한 심판을 받는다. 이 심판의 골짜기가 바로‘아골 골짜기’다. 우리에게 어느 부자나 아간은 탐욕에 대한 경종을 울려준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그리스도인은 아골 골짜기의 비극을 초래하는 주인공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됨을 명심하고 또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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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이중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