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4-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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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희완 목사] 칭찬이 보약 (마15:21-28)
    오랫동안 목회를 하시던 목사님과 총알택시 운전사가 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자기가 당연히 총알택시 운전사 보다 훨씬 더 칭찬을 받을 것으로 기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보다 총알택시 운전사를 더 칭찬하셨습니다. 목사님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하나님께 “왜 총알택시 운전사를 더 칭찬하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그 동안 설교를 하면서 항상 사람들을 졸게 했지만 이 총알택시 운전사는 그 동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긴장시키고 기도하게 했기 때문 이니라”고 말씀하시더랍니다. 저는 이다음에 하나님께 칭찬받는 목사가 되기를 원합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인간의 욕구 중에 생리적인 욕구 다음으로 강한 욕구가 바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학생은 선생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성도는 목사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목사는 성도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여인을 보시고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자존감이 낮아져 있던 그가 얼마나 자존감이 높아지고 행복했을까요? 믿음이 칭찬을 받은 결과 그의 고민거리가 해결되었고, 자기 힘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께 칭찬 받은 그날을 그는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칭찬은 사람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삶의 활력을 불어 넣어 줍니다. 칭찬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이 정말 대단합니다. 첫째는, 칭찬은 귀로 먹는 보약입니다.(잠언16:24절) 둘째는 칭찬은 사람을 춤추게 합니다.(전8:15) 셋째는 칭찬은 사랑의 비타민입니다.(잠15:23) 우리 모두 칭찬 보약을 많이 먹고, 칭찬 비타민을 많이 먹고, 건강한 인생 춤추는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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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2025-04-17
  • [박동철 장로] 기독사학이 살아야 대한민국 미래가 있다
    교육강국 대한민국의 초석을 놓은 근대 선각자 세분을 꼽으라면 우남 이승만, 도산 안창호, 남강 이승훈 선생을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이승만 건국 대통령에 대해서는 붙여 얘기할 필요가 있겠는가. 치적의 하나인 토지개혁을 단행하면서 대지주들에게 땅을 사립학교 설립에 유도하고 평생 운영을 맡겼다. 바로 대한민국 인재를 양성한 사학제도이다. 한국 공교육을 폄하하지 않는다. 한데 한국 사학들이 70년대 이후 뜨거운 교육열 속에 향학의 경쟁문화를 통해 수많은 인재양성 바로 산업일꾼들을 키워냈다. 근대역사 속에 독립 운동가이자 교육자 도산 안창호 선생은 미국등지 유학을 통해 선진문화를 보고 조국의 교육진흥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후세들을 위해 배워야 만 살아갈 수 있다는 연설을 당시 후학들에게 설파했다. 자신의 호 도산(島山)을 지은 것도 태평양 바다 속 우뚝 솟은 하와이를 보고 교육을 상징하는 의미로 지었다고 한다. 신민회 조직은 물론 지금까지 이어오는 흥사단 등 독립운동과 조국의 미래를 위해 교육을 강하게 주창한 선각자이다. 남강 이승훈 선생은 유명한 오산학교를 설립했으며 3.1운동 33인의 한분으로 독립운동을 하신분이다. 거장 세분의 선각자는 모두 기독교 이념의 서구교육으로 조국 발전의 밑자락을 놓은 선각자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학 중 광복이후에도 많은 선교사를 비롯 교회에서 기독사학을 설립했다. 그리고 건학이념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건강한 교육을 선양해왔다. 산업화 민주화과정에서도 기독사학들이 인재양성에 많은 기여를 하면서 명성 있는 사학들을 육성했다. 그리고 상시 채플시간 교목들의 복음 활동을 통해 80년대 한국기독교 부흥에 한축 기둥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기독사학들이 급격히 사양의 길을 걷고 있다는 분석이 모두를 안타깝게 한다. 광역단체 교육수장들이 선출직이 되면서 다양한 교육이념의 정책이 도입되고 있다. 획일적 교과서에 다양성을 도입하고 있다. 학생인권을 우선시하는 인권시대의 권리남용이 교육현장을 어지럽히고 있다는 슬픈 현실이다. 우선 교목들의 복음채플시간이 크게 줄고 있다는 최근 비공식 통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전국 사립중은 632개, 사립고는 945개소이다. 이중 기독사학을 보면 기독사학중학교가 135개, 고등학교가 185개소이다. 이 중 교목을 둔 기독사학은 중학교 79개, 고등학교 139개 학교로 알려졌다. 기독사학들이 갈수록 교목을 두지 않거나 계속 줄여나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왜 일까. 진보정치성을 띤 교육수장들이 보이지 않게 기독사학들의 복음 활동을 억압하고 있다는 말이다. 교육청에서 지원하는 학교지원예산을 들고 직간접으로 묘한 억압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기독사학의 건학 이념에 채플참여 의무시간이 있다. 이것도 자율 선택권을 두어 채플 의무시간을 자유하게 하는 추세다. 한국 기독교가 복음의 큰 사명 앞에 슬픈 현실이 되고 있다. 그동안 사학에 투자한 많은 기독사학의 주인들이 학교를 넘기거나 포기하는 사례까지 생겨나고 있다. 조국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게 한 교육의 원천이 되었던 기독사학들이 겪는 이 아픔이 아픔이 아니다. 기독사학이 무너지면 조국의 미래를 생각할 수 없다. 기독사학이 온 세상 구원의 지경을 확장하는 역할을 했던 것만 아니다. 중고를 비롯 대학의 현장까지 젊은이들이 가져야하는 건강한 정신을 함양하는데 기독사학들이 희생해왔다. 이러한 교육원천이 조국 대한민국의 비전이자 미래이다. 그러나 한국기독사학의 사양화는 다시말해 조국의 미래를 말할 수 없게 한다는 점이다. 모두가 한 번 더 새겨보고 강구책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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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5-04-15
  • [샬롬나비 논평] 2025년 사순절을 맞는 교회와 신자의 자세
    <2025년 사순절을 맞는 교회와 신자의 자세> 사순절 기간 한국교회는 문화적 회개, 금식, 휴대폰 절제를 통한 성화의 삶을 실천하자 사순절을 맞이하여 우리 욕망을 절제하며 사회적인 소외자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펼치자 사순절(四旬節, 영어: Lent)은 부활절을 맞이하기 앞서서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정결하게 준비하기 위하여 주일을 제외한 40일간 갖는 금식과 금욕의 기간을 말하는데, 이 기간에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낮아지심과 고난을 기억하면서 회개와 기도 등 영적 훈련에 힘씀으로 경건한 삶과 영적 성장을 위한 특별한 훈련의 기회를 가진다. 사순절은 초대교회 때부터 내려오는 교회의 전통이다. 일찍부터 초대교회는 부활절에 앞서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기간을 가지는 것이 신자들의 경건과 영성 훈련에 필요함을 인식하고 부활절 전 얼마의 기간을 정해 이를 실천해 오다가, 마침내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부활절과 더불어 사순절을 교회의 절기로 지킬 것이 결정되었다. 사순절은 비록 성경에 근거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아직 교회가 동.서방 교회로 분열되기 전 모든 교회가 하나로 연합하여 결정한 우주적 교회의 결정으로, 이는 교회적 권위를 가지는 보편교회의 규례이며, 기일과 방식에 다소간 차이가 있을지라도 동.서방 교회 모두가 지키는 교회적 전통이다. 매년 맞는 사순절이지만, 2025년의 사순절은 현직 대통령 탄핵 사태라는 사상 초유의 상황 속에서 연일 전국적인 대규모 찬반 집회가 이어지고 좌우진영간 극단적 대립이 지속되고 있는 국민적 분열의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그 어느 해와도 다른 사순절을 맞게 하고 있다. 이에 샬롬나비는 2025년의 특별한 사순절을 맞아 다음과 같이 우리의 입장을 밝힌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모든 교만을 내려놓고 겸비한 마음을 갖는 사순절이 되도록 하자. 사순절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겸손히 자신을 낮추신 것과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난을 기억하는 절기이다. 성육신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본성(본체)으로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나 그러한 하나님의 지위를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발적으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그가 이처럼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신 것은 죄인된 우리를 동정하셔서 자신을 우리와 동일시 하심이었다(빌 2:5-8).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 또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기 위하여 죄인된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허물과 죄를 마치 자신의 것처럼 짊어지신 것이었다. 사순절은 그리스도의 이러한 겸손과 고난의 의미를 묵상하는 절기이다. 그러므로 2025년 사순절을 맞아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더 낮은 마음과 가난한 마음을 갖는 자세를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대통령 탄핵 사태를 맞아 우리 사회 국민은 진보와 보수의 입장에 따라 탄핵 찬반으로 갈라진 채 상호 적대적 비방과 혐오의 수준이 도를 넘어서고 있으며, 향후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서는 자칫 불복(不服) 충돌 사태로까지 치달을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더해 날로 어려워져만 가는 국내외 경제 여건 속에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와 민생의 어려움은 서민들의 삶을 더욱 힘들게 하며 미래를 절망하게 함으로 사람들의 마음에는 온통 불안과 불만과 불평이 가득한 사회가 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이념과 지역에 따른 편가르기, 서로를 향한 적개심과 투쟁 속에 나라가 질곡의 고통과 혼란 속에 있다. 이런 가운데 수많은 소시민들이 삶의 희망을 찾지 못한 채 충동적 살인과 자살이 증가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 사순절을 맞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적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는 이러한 상황 가운데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교만한 마음과 공격적 태도를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를 동정하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비록 겸손한 삶의 실천으로 자신이 억울한 손해를 보게 되더라도 죄 없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함으로 할 수 있는 대로 화평을 도모하며 사회적 화합과 통합을 이루는 일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 또한 우리는 같은 선상에서 헌법재판소에서 국회측과 대통령측이 이런 국민들의 고통과 혼란을 돌아봄으로 국가의 대의를 위하여 당사자들이 서로 겸손한 자세와 서로를 이해하려는 관용과 열린 마음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본다. 그리스도인 정치인들은 정치권 또한 여야가 상대 당에 대해 겸손한 자세를 가짐으로 상호 존중과 이해 속에 대화와 상생의 정치가 실현되게 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2.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의 삶을 사는 회개와 성화의 삶을 다짐하자. 사순절은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죄를 애통하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간절히 구함으로 신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기에 필요한 영적 변화와 성장의 기회를 가지는 기간이다. 특별히 그동안 죄의식을 가지면서도 해결하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지나쳐 온 죄나 은밀하게 행한 죄를 회개하며 새사람의 삶을 살기를 다짐하는 기간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자신 안에 있는 어찌할 수 없는 죄성을 슬퍼함으로 옛사람(죄성)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의의 본성)의 옷으로 갈아 입는 성화의 삶을 훈련하는 기간이다(엡 4:22-24). 죄를 버리고 민족의 죄를 교회가 책임지는 자세로 기도해야 하겠다. 오늘 대한민국이 이러한 국론분열과 정치 사회적으로 국민간의 대립이 심화되는 속에는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서로 상대방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 비판하는 자세가 자리잡고 있다. 오늘의 나라의 혼란 속에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잘못과 책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죄와 잘못을 하나님 앞에서 깊이 회개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돌아서야 하겠다. 3. 탐욕, 과소비, 향락을 멀리하고 물질적 금식 뿐 아니라 문화적 금식을 실천하자. 역사 이래 대한민국이 오늘 시대만큼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세계 속에 우뚝 선 나라가 되었던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국민은 국가의 번영 가운데에서 행복을 느끼기보다는 일부는 자유 대한민국을 비판하고 “헬조선”이라고 부르면서 세계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 시대만큼 탐욕과 과소비 향락이 만연한 시대도 찾기 어렵다. 기독교인들은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던 대한민국이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기까지에는 기독교와 신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과 더불어 오늘날 대한민국에 만연한 국가적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교회의 책임의식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순절 기간동안 기독교인들은 금식과 특별새벽기도 등 영적인 절제와 청빈의 삶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 더해 음식과 의복 그리고 생활방식 등에서도 비싸고 화려한 것들을 피하는 등 육적인 절제와 청빈의 삶도 실천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육체적 쾌락과 만족을 구하는 오락이나 유흥 향락을 피하고 문화적 금식을 함으로 영적 육적 경건의 훈련을 하여야 한다. 휴대폰 사용도 절제하고,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곤 휴대폰 사용 유보, 인터넷 오락 사용 유보를 실천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도록 하자. 4. 가난한 이웃, 소외계층, 외국인, 탈북민을 돌아보아 구제에 힘쓰자. 사순절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과 낮아지심과 희생과 고난을 기억하는 기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에 있어서는 하나님이시지만 자신의 하나님 됨을 주장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 곧 죄로 더럽고 비참하고 하나님과 소외된 형편에 있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공감하심으로 자신을 우리와 동일시하신 것이다. 사순절 기간 동안 교회와 신자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낮아지심의 의미를 기억함으로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들을 돌아보아 그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기초생활수급자, 차상위계층, 실직자 가족 등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들; 고아, 독거노인, 가출 청소년, 청소년 가장, 노숙자, 쪽방촌 등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와 이주민, 탈북민 등 이러한 사회적 약자들과 소외계층에 있는 사람들 또는 이들을 지원하는 단체들을 찾아 사랑의 나눔과 구제를 실천하여야 한다. 그리고 전 세계에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우리의 작은 것들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야 하겠다. 5. 한국교회는 사순절 기간 동안 깊은 통회의 기도와 회개를 통해 세상의 빛으로 거듭나자 주님이 우리를 위해 받으신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사순절을 보내며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주님이 우리의 모습을 보시며 어떻게 생각하실지를 깊이 묵상해야 하겠다. 주님을 따라오려면 네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라 오라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십자가를 지기보다는 영광을 원했고 주님의 은혜 속에 우리의 꿈을 이루고자 노력한 모습을 회개해야 한다. 우리 주변의 연약한 자를 돌보기보다는 자신의 부를 쌓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회가 갈라지고 분열할 때 주님이 원하시는 희생과 사랑을 통한 연합의 길을 걷지 못했다. 한국교회는 진보와 보수가 애국심을 다르게 표시하여 찬성과 반대로 나누어져 기도회를 가졌다. 탄핵찬성파들은 반대파를 “극우들”이라고, 반대파들은 찬성파를 “빨갱이”라고 비방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를 향하여 하나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한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모습 때문에 주님이 이름이 조롱당했고 교회는 사회가 기대하는 신뢰를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길에서 벗어난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회개하며 주님의 참된 제자되기 위해 우리의 죄악된 모습을 회개해야한다. 우리는 다음같이 기도했으면 한다: ‘주님께서 긍휼을 베푸사 우리의 연합과 상호 신뢰를 회복시켜 주소서. 그리하여 한국교회가 절망과 아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소망의 등불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분열된 한국사회 안에 예수 샬롬과 화목을 이루는 모판(母板)이 되게 하옵소서.’ 2025년 3월 31일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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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02
  • [박동철 장로] 3일천하 ‘갑신정변 140년’ 이 땅 복음의 큰길 열었다
    1884년 12월 4일 밤 10시경. 이날은 최초로 지금의 체신청 우정국 개청식이 있는 날이었다. 행사를 마친 후 내·외 귀빈이 함께하는 저녁 연회가 열리던 시각. 갑자기 ‘불이야’ 하는 소리와 함께 총소리가 들리고 비명소리가 진동했다. 당시 김옥균, 홍영식, 서재필 등 젊은 엘리트 개화파 세력들이 정변을 일으킨 현장의 이야기다. 고종 즉위 20년 되는 해 일본은 개화 후 나날이 발전하고 중국과 서양 제국들이 조선의 개화와 통상압박을 하던 혼돈의 시기였다. 조선 26대 왕 고종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은 갈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급진개화를 주장하는 김옥균 파와 점진적 개화를 주장하던 민영익 등 세력 간 갈등 속에 급진개화파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정변이었다. 올해 12월 4일은 갑신정변 1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갑신년 쿠데타는 성공하는 듯 했으나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개입 3일 만에 평정하고 주모자들은 멸문지화 되거나 일본으로 도피했다. 갑신정변은 당시 일본의 지원으로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갑신정변이 성공했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됐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운명이 외세 강국에게 점령당할 수밖에 없는 비운의 상황이었다고 사가들은 말하고 있다. 역사적 평가와 상황을 접어두고 당시 사건의 현장을 통해 하나님이 이 나라 복음을 위해 위대한 계획을 펼치고 있었던 은혜를 찾아 보고자한다. 불을 지르고 쿠데타 세력들이 반대세력들에게 총을 쏘며 공격을 하는 통에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칼에 난자되어 중상을 입었다. 죽을 수 밖에 없던 상황에 연회에 참석했던 미국 루시어스 푸트(Lucius H. Foote) 공사가 긴급히 미국에서 두 달 전에 선교사로 입국한 한사람을 찾는다. 바로 최초의 의사선교사 호러스 알렌 선교사를 찾아 치료함으로써 민영익은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알렌 선교사는 누구인가? 우리의 기독교사에 거장으로 남아있는 알렌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중국으로 파송되었다. 이즈음 1882년 조미(朝美)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선교사의 마음에 조선의 선교사가 되고 싶어 자원한다. 갑신정변 두 달 전 1884년 10월 6일에 한양으로 입국한 선교사이다. 알렌의 치료로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살아남으로써 3일 천하정변은 끝이 나고 고종의 권력은 유지 될 수 있었다. 민영익을 살린 알렌에게 고종은 무엇을 원하냐고 물었다. 당연히 알렌은 병원을 지어 달라고 했다. 고종에게는 너무 쉬운 요청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변의 주동자 홍영식의 가족들이 처단되고 폐허된 집을 병원으로 개원하게 했다. 바로 최초의 병원 광혜원(나중 제중원)이다. 알렌선교사가 병원을 짓고 자유롭게 선교를 하게 되는 큰길이 열리게 된다. 하나님의 역사는 벼락처럼 전개 된다고 했다. 1885년 봄 일본에 머물러있던 아펜젤러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함으로써 조선 땅의 예수 복음이 날개를 달았다. 언더우드는 오늘의 연세대와 알렌 선교사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을 세우는 엄청난 일을 했다. 아펜젤러는 이승만을 탄생케 한 배제학당을 세운다. 뒤이어 스크렌턴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와 이화학당을 세우고 천대받던 조선의 여성들이 눈을 뜨게 했다. 조선역사가 망해가던 시기 비운의 시간표가 돌았지만 선교사들을 통해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게 하는 복음의 역사(役事)가 역동 했던 것이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축복이다. 한 나라를 부흥 발전시키는 무한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조선 5백 년의 역사는 정말 캄캄한 세상이었다. 사대부들이 타락한 유풍(儒風)의 문화 속에서 백성을 착취하고 나라의 발전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나라가 망해가는 때 나라를 살리고자 급진개혁세력들이 일으킨 정변은 사람의 위대한 뜻에도 불구하고 3일천하로 끝난다. 뒤이은 역사는 결국 일본의 36년 종살이해야 하는 비운의 역사를 겪어야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70년 종살이 후 회복의 역사를 썼다. 우리는 140년 전 위대한 영적 거장 몇 분의 선교사들이 오늘의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들어내는 초석을 낳았던 역사를 돌아본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가. 세계 10대강국을 자랑한다. 희망 속에 겪는 사회문화의 심각한 갈등을 보면 나라가 망할 것 같은 위기다. 이런 위기 때 그때의 역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야 할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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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5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2) (민12:11-16)
    미리암은 위대한 믿음의 여인이 맞습니다. 하지만 여선지자라는 위대한 칭호를 받은 후 신앙이 제자리걸음을 했습니다. 미리암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역사에 발맞추지 못하고 여전히 애굽에서의 사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모세가 없는 40년 동안 여자로서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진짜 지도자인 줄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진짜 지도자인 모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교만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40년 만에 나타난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기절초풍할 일들을 일으킵니다. 세계 최강의 애굽과 바로도 모세 앞에 쩔쩔맵니다. 애굽을 초토화 시켜버렸고, 애굽의 장자를 죽여 씨를 말려버렸습니다. 여호와의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임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만 대면하시고 바다까지 갈라 마른 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미리암은 40년 동안 여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을 영도해 왔지만 40년 만에 갑자기 등장한 모세의 위용 앞에서 입도 벙긋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선지자의 위치에서 볼 때 비록 인간적으로는 누나요 동생이지만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적 권위를 지닌 모세였기에 고개 들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교회들끼리, 특히 목회자들끼리 묘한 질투심과 경쟁심이 있습니다. 곁의 교회가, 다른 교회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갖습니다. 잘못되면 입은 안타깝다고 하면서 속은 이유 없이 고소하고 상대적인 만족을 얻습니다. 교회의 주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망각한 무서운 죄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이 교인들 사이에서도 발생합니다. 곁의 성도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잘못되면 입은 위로하는 것 같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자신의 신앙과 믿음이 좋은 것으로 위로받고 착각합니다. 아주 나쁜 모습입니다. 악한 모습입니다. 교만의 극치입니다. 어쩌면 이것보다 더한 것이 목회자들끼리의 보이지 않는 견제와 경쟁입니다. 주변의 교회가 갑자기 성장하면 상대적 박탈감을 가집니다. 사람이다 보니 비교가 안 될 수 없습니다. 특히 가까운 교회에서 독보적인 성장을 보이면 심각한 스트레스까지 받습니다. 목사 자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의 중직자들이나 성도들도 자연스럽게 목회자에게 압박을 가합니다. 자신은 1년이 가도 전도 한 명 하지 않으면서 교회 부흥을 입에 올립니다. 십일조나 감사헌금은 고사하고 선교나 불우이웃이나 개척교회, 농어촌교회, 은퇴하신 목사님, 가난한 신학생들을 위해 특별헌금 한 푼도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재정을 입에 올립니다. 더 심각한 것은 설교자들의 교만입니다. 설교하는 사람이다 보니 설교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설교자의 훌륭한 설교에 은혜받기는커녕 허점과 잘못을 찾기에 바쁩니다. 그러니 설교에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현상은 모세를 대적하는 미리암의 아류들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땀방울 하나, 눈불 방울 하나 다 주의 것입니다. 우리는 비교 대상도 아니요, 경쟁상대도 압니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며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자들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특히 목회자들은 아바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평생 잊어선 안 됩니다. 물론 아바타라 하지만 예수님의 아바타니 영광스럽습니다. 진짜 선지자, 진짜 목회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미리암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사실 미리암은 누구보다도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몰라서 범한 죄도 무섭지만, 알고도 범하는 죄는 더 무섭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단순히 그 사람의 성향이나 기질을 나타내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모세의 통치를 방해했고, 이스라엘의 진행을 가로막았습니다. 감히 모세의 영적 권위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감히 같은 선지자였지만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교만은 이 모든 영적 권위 앞에서도 원망과 비방의 고개를 들게 합니다. 호시탐탐 모세의 허점과 실수를 염탐합니다. 교회도 은혜를 계산하는 성도가 있고, 실수와 잘못을 찾아내는 성도가 있습니다. 기회가 왔습니다. 구스 여자가 돌아왔습니다. 이전에 이미 정리된 문제인데도 교만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영적분력을 상실했습니다. 미리암은 십보라가 돌아오자 속에 숨겨놓았던 원망과 불평을 표출합니다. 원망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사실까지 망각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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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07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1)
    성경 어디에도 미디안의 제사장 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는데 문제 삼은 장면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실에 대해 그 어디에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하는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사건 때문에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백성들이 구스 여인 십보라를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통치에 십보라를 문제 삼지 못하도록 아예 입도 벙긋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버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명을 주셨고, 그 사명 감당하기 위해 애굽으로 오는 길에 느닷없이 모세를 죽이시려고 한 것은 구스 여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임이 분명합니다. 분명한 이유는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것에 있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 같은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발견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려 하셨습니다. 완전한 모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이셨습니다. 완전히 죽이셨습니다. 그래도 십보라는 할례언약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긴박한 순간에 할례를 행하면 남편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과 비교도 되지 않는 신분입니다. 단순히 액면가로 볼 때 우리는 시아버지와 관계한 여인입니다. (마1:3)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우리는 우상의 신전에서 몸을 팔던 기생이었습니다. 우리는 과부요,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남편을 사지로 몰고 왕과 간음한 유부녀였습니다. (마1:5-6)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인데 죄인인 줄도 모르는 죄인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답도 없으면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제 딴에 잘 사는 줄 알지만 무익한 인생이요, 단 하나도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혀에는 속임만 있습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입에는 저주와 악독만 가득합니다. (롬3:10-14)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런 우리가, 그런 우리의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도 달렸고, 예수님의 부활에 나도 부활했다고 고백합니다. 사탄이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의를 제기하고 문제 삼을 것이 수두룩한 우리입니다. 아니 우리는 문제 그 자체들입니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합니다. 십보라가 할례 언약을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십보라가 할례를 행하여 남편을 살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불가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입으로 시인합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보라가 할례언약을 아는 것과 할례를 행하는 것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서십니다. (마10: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눅12: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합니다. 문제 제기도 못합니다. 입도 벙긋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의 예배 자리에, 예수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앉혀주십니다. (계12:22-23)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이런 은혜를 받은 성도입니다. 그래도 원망하고 비방하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완전한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할례를 시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에 거하며, 주일마다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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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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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호숙 목사] 낙엽이 아닌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
    낙엽이 아닌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 벚꽃 필 때 떨어지는 꽃잎을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꽃잎을 잡는다. 그렇다면 떨어지는 낙엽을 잡으면 무엇이 이루어지는가? 일반적으로 낙엽은 죽음을 상징하기 때문에 아무도 잡는 사람이 없다. 벌써 나무들이 하나둘씩 낙엽 되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게 되는 12월이다. 육신의 인생도 낙엽과 같은 존재이다. 때가 되면 벌거벗은 나무처럼 나뭇잎은 낙엽 되어 다 떨어지게 된다. 우리는 보통 나체(裸體)하면 사람의 벌거벗은 몸을 연상하는데 원래는 나무를 의미하는 것이다. 한자로 “나(裸 벗을 나)”자는 나무에 잎사귀가 낙엽이 되어 다 떨어졌다는 뜻이다. 한자 적(赤)자도 “벌거벗은”이라는 뜻이 있어, 적나(赤裸), 적신(赤身)도 같은 의미로 쓰이나 근래에는 사용 빈도가 적지만 한자어 “적나라(赤裸裸)하다”는 것은 “다 까발려진”과 같은 비유적인 의미와, “다 벗다”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영어로는 ‘naked’와 ‘누드(nude)’가 있는데 둘 다 나체라는 의미이기는 하나 세부적으로는 차이가 있다. ‘naked’는 자연 그대로의 나체를 뜻하고, ‘nude’는 예술이라는 옷을 입은 나체를 뜻한다고 정의했다.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 세계의 순리를 따라 단풍이 낙엽 되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필자가 목회하는 이곳 통영에도 한 잎 두 잎 낙엽이 되어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쓸쓸한 인생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 된다. 단풍이 드는 속도가 다르게 나타나는데 성목(成木) 보다는 묘목(苗木)이 빠르고, 맨땅보다는 화분이 빠르게 물들기 시작한다. 원인은 뿌리 온도와 관계된 것이라고 한다. 뿌리가 추위를 느끼면 더 빠른 단풍이 들게 된다. 성목(成木)보다 묘목(苗木)의 흙의 양(量)이 적기에 뿌리가 온도변화를 더 빨리 느끼고, 맨땅보다는 화분이 더 민감하기 마련이다. 우리 성도의 삶도 마찬가지다. 믿음의 뿌리가 깊고 말씀의 흙이 많은 성도는 세상에 쉽게 물들지 않고 자신을 지켜나간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은 세상에 쉽게 동화되어 세속적인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이런 원리를 알기 때문에 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기도할 때에 “교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사랑의 뿌리가 깊이 내려지기를(엡 3:17)”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우리는 낙엽과 인생에 대한 비유적 의미를 또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 육은 낙엽처럼 쓸쓸히 떨어져 없어질지 몰라도 영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로 옷 입음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 3:27)”고 하였고,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후패하나) 우리의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 4:16)”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영원히 낙엽 되지 않는다. 믿음의 뿌리가 깊어지고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천국에서 해같이 빛나게 되고 주님과 더불어 영원히 왕 노릇 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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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며 생각하며
    2024-12-04
  • [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 8
    관계 신학 관계는 실천신학 분야의 학문입니다. 관계는 성경적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신 후 관계를 맺으셨습니다. 관계는 소통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최고의 관계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은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될 때 열매 맺게 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분 하나님이지만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관계성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부부관계의 중요성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과의 관계, 수많은 관계를 성경은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로 인해 깨어진 관계 회복 능력입니다. 인생의 문제는 죄의 문제이고, 죄 때문에 관계가 깨집니다. 성경은 관계의 책입니다. 관계 신학을 세우고 관계를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와의 관계, 성령님과의 관계, 영적 리더와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사탄은 관계를 깨뜨립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열쇠이고 소통입니다. 대화하는 것은 관계 맺는 것의 기초요 중심입니다. 성경은 인간관계의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샬롬’도 관계에서 오는 평안입니다. 관계는 행복의 열쇠입니다. 관계를 통해 축복을 받게 됩니다. 사도바울의 신학도 관계 신학입니다. 바울서신에 보면 관계의 중요성을 가르쳐 줍니다. 관계 신학은 실천신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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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문/책
    2024-12-04
  • [김성수 총장] ‘창조’(Creation)의 풍요한 의미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는 식물, 동물,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창조로 우리를 안내한다. ‘있으라, 생겨라’와 ‘그 종류대로’라는 반복되는 구절은 지음 받은 모든 것에 대한 창조주의 주권적 권능뿐만 아니라, 창조 세계의 다양성과 다원성에 대한 창조주의 지혜와 신비함을 남겨 주고 있다. 더욱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구절의 반복은 이 다양성의 선함과 아름다움을 확증해 주고 있다. 창조된 생명의 다양성은 개별 창조물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한 그루의 나무를 생각해 보자. 우리가 나무가 생명을 가지고 자라는 것을 본다. 나무의 색깔과 여름의 풍성한 잎사귀, 겨울의 앙상한 가지도 우리로 하여금 다른 감정과 기분을 갖게 만든다. 새가 가지에 앉고, 우리는 나무를 사용하여 집을 지을 수 있다. 나무 한 그루조차 그냥 단순하지 않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훨씬 더 많은 것이 나무 한 그루를 구성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는 구절의 풍요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창조에도 생명의 다양성이 나타난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피조물이 믿고, 느끼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놀고, 노래하고, 춤추고, 성장하고, 창조하고, 물건을 사고팔며, 양심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대상을 예배하는 등 수 많은 활동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인간 본성에 대한 이러한 그림은 자그레우스의 신화에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그림과 현저히 대조된다. 거기에서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은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다. 이 신화의 영향을 받아 일부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함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특정한 차원을 과소평가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이들은 놀이가 신앙과 개인적 도덕성만큼 좋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 피조물에게 부여해 주신다소 익살스러운 ‘장난기’를 표현할 수 있도록 축하, 노래, 춤, 축제적 활동의 즐거움과 아름다음을 기록하고 있다(출15:20; 레23:39-41; 눅15:25-32). 기독교 철학자 칼빈 시어벨트(Calvin Seerveld)가 말했듯이, “주님은 유머 감각, 날개 달린 말에 대한 환상, 아이들이 ‘집에서 놀 때’와 같이 꾸며낸 이야기의 재미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이 좋다고 보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또한 느끼고 생각하고 성장하고 창조하는 공간을 마련하셨고, 하나님께서는 이것들도 좋다고 보셨다고 덧붙일 수 있다. 창조 세계서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 본성의 일부 측면을 열등한 위치로 격하하는 것은 나무의 선함이 아름다움보다는 건물을 짓는 데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는 창조 세계의 일부 측면이나 인간 본성을 다른 측면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라는 가르침을 결코 주지 않는다. 창조 이야기는 오히려 우리의 인간 본성을 구성하는 모든 창조된 측면이 좋다고 확언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피조물성의 한 가지 중요한 차원은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창조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임무를 주셨다는 사실이다.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아담, 즉 ‘땅의 사람’은 창조물을 가꾸고 경작하고 돌보라는 사명을 부여 받았다(창1:28, 2:15). 우리에게 주어진 이 하나님의 부르심은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창조된 인간 본성의 한 본질적인 측면이기 때문이다. 선하든 악하든 우리는 창조물을 경작할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이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의 역사다. 인간의 문화는 인간이 창조물을 돌보고 경작한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정부, 만찬, 우리가 입는 옷, 교회, 술집, 축구 경기장, 원자 폭탄 등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좋든 나쁘든 창조물을 경작하고 돌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의 증거다. 이는 또한 참된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그 결과가 어떠해야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동시에, 삶의 모든 차원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적으로 응답하지 못한 결과가 얼마나 파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새로운 안목으로 볼 수 있도록 도전하고 있다. 김성수 목사 (탄자니아 아프리카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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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04
  • [김경헌 목사] 엘리압(2)
    골리앗과 싸우려고 하는 다윗을 향해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엘리압과 사울을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살펴보십시다. 엘리압은 누구입니까? 엘리압은 이새의 장자입니다. 사무엘이 기름을 붓기 위하여 이새의 집에 갔을 때 엘리압을 보자마자 이 사람이다 싶을 정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삼상16:6)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하지만 결과는 기름부음 받을 사람이라고 모두가 생각지도 않았던 다윗에게 사무엘은 기름을 붓게 됩니다. (삼상16:12)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 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이런 상황에서 가장 불쾌할 것 같은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물론, 일곱 형들이 다 기분 나쁘겠지만 누가 봐도 제일 적임자요, 당연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장자 엘리압일 것입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우리는 에브라임의 형 므낫세의 믿음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창48:13-14)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이 장면을 본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팔을 옮기려고 시도했습니다. (창48:18-20)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하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므낫세 입장에서는 영문도 모르는 일이요, 억울하기 그지 없는 상황입니다. 또 아버지 요셉이 나서서 오히려 자신을 두 번 죽이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에서 이런 장면이 나타나면 대부분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니 일상 교회생활이나 신앙생활에 쉽게 발생하는 일이며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구지 설명하지 않아도 어떻게 나타나는지 잘 압니다. 그러다보니 믿음의 족장 야곱에 대한 평가도 부정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에 전혀 언급이 없고, 성경의 맥락과도 맞지 않은 야곱의 트라우마를 거론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므낫세는 단 한마디의 부정적인 반응도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엘리압도 막내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골리앗이라는 대적으로 인해 나라의 존폐라는 위기 앞에서 생뚱맞게 표출된 엘리압의 분노를 봤을 때 엘리압은 자신에게 기름을 붓지 않은 사무엘 선지자와 그것을 결정하셨던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평을 가슴에 담았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교회생활 가운데 쉽게 가질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과연 과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므낫세와 엘리압은 똑같은 상황을 만났고, 당시에는 두 사람다 아무 말 없이 똑같은 반응을 보였지만 두 사람이 가졌던 마음은 정반대였고 그 결과도 정반대였습니다. 두 번 죽임을 당한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므낫세는 어떤 자세였는지 그 결과가 므낫세의 믿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계7:5-8)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므낫세의 이름은 여섯 번째로 아버지 요셉보다 먼저 기록되어 있습니다. 므낫세의 이름은 아버지와 큰아버지들과 작은 아버지 베냐민과 어깨를 나란히 함께하며 당당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므낫세 자신과 동생 에브라임을 앉혀놓고 벌어졌던 할아버지 야곱과 아버지 요셉의 일방적인 행동이 정작 므낫세 자신에게는 어떠했을까요? 단 한마디 반응이 없지만 이 장면을 직접 당하는 므낫세, 그 후 동생 에브라임과 성장하면서 이 사건은 순간순간 므낫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훗날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도 므낫세 지파는 요단강을 경계로 므낫세 반지파는 이곳, 므낫세 반지파는 저곳으로 나누어져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하지만 계시록에 완성된 12지파의 이름에 므낫세가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는 장면으로 오늘날 믿음으로 므낫세와 같이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무한한 감사와 감동의 장면임이 분명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는 장면에서 므낫세의 순종을 완성해 주셨습니다. [행8:32]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우리의 신앙생활, 교회생활 저변에 깔려있는 비교의식이 얼마나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지도 발견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뒤바뀐 순서만 비교하다보니 므낫세가 얻은 비교할 수 없는 복과 특권을 보는 눈이 어두워져버린 것입니다. 동생에게 형의 자리를 빼앗긴 것이 큽니까? 아버지와 같은 향렬, 아버지의 형제가 된 것이 큽니까? 에브라임의 형이라는 위치가 위대합니까? 이스라엘의 12지파 중 하나라는 자리가 위대합니까? 오늘날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와 원망은 이 눈이 어두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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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04
  • [독자기고] 인공지능을 활용한 목회와 교회교육
    “목사가 설교 준비할 때, 컴퓨터와 인터넷을 사용하다니, 믿을 수가 없네. 목사가 설교를 준비할 때는, 노트에 펜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야지, 컴퓨터 자판으로 설교문을 두드려 작성한다는 것은 불경하기 이를 데 없네” “ 목사가 설교를 준비할 때는, 요즘 만년필로 쓴다는 신식 목사들이 있다는데, 참으로 통탄스럽구먼. 자고로 목사가 설교를 준비할라치면, 먹을 갈면서 마음을 다지고, 붓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다하여 작성하는 법이거늘, 참 말세일세” 이 이야기는, 문명의 변화에 적응이 더딘 것을 빗대어 인터넷에서 유행하던 이야기였다. 한국 교회는 복음이 전해졌던, 구한말부터 다양한 문화와 문명의 보급처였다. 세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다양한 신문물이 교회로부터 일반인들에게로 전달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이들이 교회라고 하면, 시대를 앞서가는 리더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199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1980년대에 한국 교회 교회학교에서“융판설교, 인형극, 문학의 밤” 같은 프로그램들은 많은 학생들을 교회로 이끌어 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교회학교의 부흥과 교회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1990년대에는 한국 교회에 액정비전이 도입되면서, 예배를 드릴 때에 성도들이 성경책 찬송가를 읽고 부르기 위하여 시선을 아래로 두지 않고, 찾는 데에 시간을 쓰지 않고, 즉각적으로 앞을 바라보면 예배하는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이 같은 사실을 홍보하여, 액정 비전의 판매가 급증하였다). 하지만 2000년대가 되면서 과학기술이 급속도로 변화하면서 문명의 흐름이 시시각각 변화하고, 교육공학을 필두로 다양한 이론들이 도입되면서 시대는 이전의 그 어떤 변화들보다 급변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2020년 코로나를 전후하여 메타버스와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인하여 하나의 기술에 적응하기도 전에, 새로운 도구들과 개념들이 쏟아지고, 이러한 변화는 다양한 영역들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인공지능을 활용한 교육기법이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으며, 가전제품에 인공지능이 기본적으로 탑재되기 시작했다. 2018 년 10월에 인공지능(AI)이 그린 그림이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4억 9천5백만 원에 낙찰되었다. 2024년 11월에는 인공지능을 탑재한 휴머노이드 로봇이 붓으로 그린 그림이 국제 경매기업 소더비스에 의해 경매에 출전돼 전 세계로부터 27건 이상의 입찰이 들어갔다. 이 그림의 예상 가격은 1억 7천만 원 정도였는데, 최종 낙찰된 가격은 18억 원이었다. 또한 법조계, 제조업, 미디어 산업에도 인공지능의 역할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인공지능이 경쟁력과 실용적인 측면에서 압도적인 효율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공지능에 의해 달라지는 변화는, 카페와 식당에서도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인공지능의 대표주자로 알려진 공개된 챗GPT 3.5는 2022년에는 미국 변호사 시험을 통과하였지만, 2023년 3월 업그레이드된 챗GPT 4.0은 상위 10%의 성적을 기록할 만큼 월등한 향상을 보였으며 챗GPT는 챗GPT 4o, 챗GPT 4 o1으로 더욱 업그레이드되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자랑하고 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누가복음 16:8) 라는 말씀과 같이 세상 문명은 급속도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며, 능률을 고도로 높이기 위하여 다양한 활동들을 하게 된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들이 이러한 변화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면서, 한국 교회는 낡은 것으로 치부되는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물론 하나님의 교회는 복음과 영성으로 세워진 하나님의 집이며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디모데전서 3:15). 하지만 기술과 도구는 가치중립적이다. 새로이 도입된 기술과 생성된 도구가 어떤 이들에 의하여 사용되는가에 따라서 그 효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승합차가 한국교회에 얼마나 요긴하게 사용되었는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하지만 승합차가 범죄집단에 사용될 때 심각한 부작용과 손해를 입히게 된다. 이는 인공지능에도 마찬가지이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도입될 때 이에 적응하지 못하였던 목회자들도, 점차 사용하게 되면서 그 편리한 성능으로 목회와 교회교육에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 인공지능은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얻은 효율성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기능들을 보유하고 있다. 필자는 인공지능이 본격적으로 소개될 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하면서 큰 도움을 얻었고, 2023년과 2024년에 <어린이 다니엘 기도회>에서 설교할 때에도 큰 도움을 얻었다. 현장에서 600명의 유치부에서 초등학교 6학년과 온라인으로 참석하는 16,000명의 학생과 효과적으로 소통하기 위하여 인공지능 챗GPT를 활용하여 PPT 슬라이드 365장을 제작하여, 60분간의 설교 시간에 활용하였다. 인공지능은 비단, 이러한 부분뿐만 아니라 목회현장에서, 교회교육의 여러 영역에 탁월한 도움을 주고 있음을 필자는 직접 체험하였다. 이러한 경험들과 인공지능을 교회에서 활용할 때 유용한 실제적인 방법들을 나누고 싶어서 “나는 챗GPT를 이렇게 사용한다.”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소개하였다. 이 책이 출간되고 난 이후에도 인공지능은 급속도로 변모하면서 새로운 기술이 연이어 소개되기에, 이러한 내용들을 소개하기 위한 세미나를 준비하고 있다. 요셉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천문학을 활용하여 관개시설을 관리하여 농업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던 애굽제국에서, 그 누구도 예측조차 못한 7년 풍년, 7년 흉년을 하나님의 지혜로 예견하고, 이 시기들을 지혜롭게 극복하게 하였다. 다니엘은 당시로서는 가장 발달한 문명을 가진 바벨론의 점성학도 예측못할 세계역사의 미래를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하면서 증거하였다. 하나님은 역사와 시대의 주인이시기에, 인공지능의 시대에도 당연히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 급변하는 시대에 불변의 복음을 전하려면 다양한 시대의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필요한 것은, 종교개혁시대의 루터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활용한 것에 우리는 충분한 교훈을 얻는다. 그러므로 인공지능의 시대에 인공지능을 이해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들의 시대적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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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6
  • [박동철 장로] 3일천하 ‘갑신정변 140년’ 이 땅 복음의 큰길 열었다
    1884년 12월 4일 밤 10시경. 이날은 최초로 지금의 체신청 우정국 개청식이 있는 날이었다. 행사를 마친 후 내·외 귀빈이 함께하는 저녁 연회가 열리던 시각. 갑자기 ‘불이야’ 하는 소리와 함께 총소리가 들리고 비명소리가 진동했다. 당시 김옥균, 홍영식, 서재필 등 젊은 엘리트 개화파 세력들이 정변을 일으킨 현장의 이야기다. 고종 즉위 20년 되는 해 일본은 개화 후 나날이 발전하고 중국과 서양 제국들이 조선의 개화와 통상압박을 하던 혼돈의 시기였다. 조선 26대 왕 고종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은 갈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급진개화를 주장하는 김옥균 파와 점진적 개화를 주장하던 민영익 등 세력 간 갈등 속에 급진개화파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정변이었다. 올해 12월 4일은 갑신정변 1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갑신년 쿠데타는 성공하는 듯 했으나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개입 3일 만에 평정하고 주모자들은 멸문지화 되거나 일본으로 도피했다. 갑신정변은 당시 일본의 지원으로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갑신정변이 성공했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됐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운명이 외세 강국에게 점령당할 수밖에 없는 비운의 상황이었다고 사가들은 말하고 있다. 역사적 평가와 상황을 접어두고 당시 사건의 현장을 통해 하나님이 이 나라 복음을 위해 위대한 계획을 펼치고 있었던 은혜를 찾아 보고자한다. 불을 지르고 쿠데타 세력들이 반대세력들에게 총을 쏘며 공격을 하는 통에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칼에 난자되어 중상을 입었다. 죽을 수 밖에 없던 상황에 연회에 참석했던 미국 루시어스 푸트(Lucius H. Foote) 공사가 긴급히 미국에서 두 달 전에 선교사로 입국한 한사람을 찾는다. 바로 최초의 의사선교사 호러스 알렌 선교사를 찾아 치료함으로써 민영익은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알렌 선교사는 누구인가? 우리의 기독교사에 거장으로 남아있는 알렌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중국으로 파송되었다. 이즈음 1882년 조미(朝美)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선교사의 마음에 조선의 선교사가 되고 싶어 자원한다. 갑신정변 두 달 전 1884년 10월 6일에 한양으로 입국한 선교사이다. 알렌의 치료로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살아남으로써 3일 천하정변은 끝이 나고 고종의 권력은 유지 될 수 있었다. 민영익을 살린 알렌에게 고종은 무엇을 원하냐고 물었다. 당연히 알렌은 병원을 지어 달라고 했다. 고종에게는 너무 쉬운 요청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변의 주동자 홍영식의 가족들이 처단되고 폐허된 집을 병원으로 개원하게 했다. 바로 최초의 병원 광혜원(나중 제중원)이다. 알렌선교사가 병원을 짓고 자유롭게 선교를 하게 되는 큰길이 열리게 된다. 하나님의 역사는 벼락처럼 전개 된다고 했다. 1885년 봄 일본에 머물러있던 아펜젤러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함으로써 조선 땅의 예수 복음이 날개를 달았다. 언더우드는 오늘의 연세대와 알렌 선교사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을 세우는 엄청난 일을 했다. 아펜젤러는 이승만을 탄생케 한 배제학당을 세운다. 뒤이어 스크렌턴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와 이화학당을 세우고 천대받던 조선의 여성들이 눈을 뜨게 했다. 조선역사가 망해가던 시기 비운의 시간표가 돌았지만 선교사들을 통해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게 하는 복음의 역사(役事)가 역동 했던 것이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축복이다. 한 나라를 부흥 발전시키는 무한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조선 5백 년의 역사는 정말 캄캄한 세상이었다. 사대부들이 타락한 유풍(儒風)의 문화 속에서 백성을 착취하고 나라의 발전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나라가 망해가는 때 나라를 살리고자 급진개혁세력들이 일으킨 정변은 사람의 위대한 뜻에도 불구하고 3일천하로 끝난다. 뒤이은 역사는 결국 일본의 36년 종살이해야 하는 비운의 역사를 겪어야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70년 종살이 후 회복의 역사를 썼다. 우리는 140년 전 위대한 영적 거장 몇 분의 선교사들이 오늘의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들어내는 초석을 낳았던 역사를 돌아본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가. 세계 10대강국을 자랑한다. 희망 속에 겪는 사회문화의 심각한 갈등을 보면 나라가 망할 것 같은 위기다. 이런 위기 때 그때의 역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야 할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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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5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48 : 기독교? 천주교? 개신교? 구교? 신교? 등의 차이는?
    I. 서언(序言) “당신의 종교는 무엇인가?”란 질문에 흔히들 우리는 “기독교를 믿는다”라고 답하는 경우가 많다. 평생 교회를 섬기는 목사이지만 이런 면으로는 답변을 하기가 애매할 때가 종종 있다. 예를 들면 천주교를 말할 때도 가톨릭(Catholic), 구교, 천주교 등의 여러 명칭들이 있고, 우리 개신교도 신교, 예수교, 기독교, 개신교 등으로 말한다. 왜 이렇게 다양할까? 더 나아가 어떤 명칭이 올바른 것일까? 란 의문이 든다. 이에 본 호에서는 이들 명칭의 유래와 그 의미를 논하여 보면서 우리 자신들의 올바른 용어를 정립해 보고자 한다. 또한 본 기고의 내용들은 김석한 교수의 ‘교회 용어 바로쓰기’와 강춘오 목사의 교회연합신문의 이에 관련된 사설의 내용과 기타 자료들을 일부 참고하였음을 밝혀둔다. II. 각 명칭들의 유래와 의미 분석과 차이점 1. 그리스도교(Christianity)와 가톨릭 교회(Catholic church)란?: 교회 명칭이 처음 사용된 계기는 안디옥에서 일반인들이 교인들을 맨 처음으로 부를 때 ‘그리스도인’이라고 했기 때문에(행11:26) 그 이후로 ‘그리스도교’란 이름이 붙여졌다. 하지만 로마 제국이 AD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부터 교회는 5대 교구로 나눌 정도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교구와 지역에 따라 이에 대한 의견을 달리하는 교회들이 생겨지게 되었고, 이에 대한 하나됨을 위해서 ‘보편성’이란 뜻인 ‘가톨릭’을 넣어서 ‘거룩한 가톨릭 교회’(The hory Catholic church)라고 했다. 그렇지만 1054년 동서교회의 분리가 되면서 서쪽은 ‘로마 가톨릭’, 동쪽은 ‘희랍정교회’로 교회의 명칭도 나누어졌다. 2. 예수교(耶蘇敎)와 기독교(基督敎)란?: 중세시대에 와서 가톨릭 교회의 부패로 인한 교회 개혁이 일어나면서 개혁자들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했다. 이를 유럽의 칼빈주의 교회들은 주로 ‘개혁교회’라고 불렀고, 영어를 사용하는 칼빈주의 교회에서는 ‘장로교회’라고 했다가 이 둘을 합쳐서 부를 때는 모두 개혁교회라 했다. 그 이후 개혁자들의 일부가 중국 등의 아시아권으로 선교하면서 ‘예수님’의 한자의 음역(音譯)을 따라서 야소교라 했고, 이는 바로 ‘예수교’가 되었다. 또한‘그리스도’도 음역에 맞추어‘기리사독’이라 했다가 나중에 기독교(基督敎)라는 명칭으로 사용했다. 3. 개신교(改新敎)와 천주교(天主敎), 신교(新敎)와 구교(舊敎)란?: 우리나라의 경우는 1945년 해방 이후에 예수교에서는 가톨릭교회를 ‘로마교’라고 불렀으며, 당시의 국가적인 표준어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구분하기 위해서 구교와 신교로 불렀다. 하지만 천주교 측은 구교란 이미지가 오래된 구습이고 신교는 새로운 신선한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고 불평했다. 이에 가톨릭은 한자어의 음역인 상제(上帝)와 천주(天主) 둘 중에서 천주를 택했다. 그 이유는 당시의 교황청이 라틴어인 Deus를 ‘천주’로 번역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를 당시의 천주교 신자였던 ‘장면’총리가 1960년에 이를 받아들여 정부의 공식 명칭으로 구교를 천주교로, 신교를 개신교로 바꿈으로서 지금까지 표준 명칭어로 사용되고 있다. III. 제언과 결어(結語)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이런 명칭들의 유래와 의의에는 나름대로의 논리성이 있다. 하지만 천주교와 우리와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됨은 확실하다. 다만 우리의 교회에는 어떤 명칭이 적합할까? 김석한 교수는 개신교보다는 ‘개혁교회’라고 해야 한다고 했고, 강춘오 목사는 ‘신교’가 더 적합한 말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적인 표준 명칭으로 본다면 천주교와 개신교를 합쳐서 기독교로 하고 있고, 우리 스스로를 개신교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모두 한자어의 음역이기 때문에 원어와 영어식 표현을 제외하고는 우리 한국어로는 한자어로 음역한 그대로 개혁교회이든 개신교이든 구분을 두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작은 소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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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1
  • [조희완 목사] 최선의 결과 (막2:1-12)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인 <코카서스>산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산은 너무 높아서 언제나 구름이 봉우리를 가리고 있습니다. 용감한 독수리 한 마리가 그 산을 정복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날아올랐지만 여러 차례 실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드디어 독수리가 그 산 꼭대기에 오르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정상에 오른 독수리는 대단한 성취감에 젖어서 자신의 자랑스러운 날개를 활짝 뻗으면서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거미 한 마리가 나무 가지에 거미줄을 치면서 낄낄대며 웃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독수리는 속으로 “아니 저 거미가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지?”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자 거미가 독수리를 바라보면서 말하기를 “너는 여기까지 죽을 고생을 하면서 올라왔지만 나는 네 날개 아래 붙어서 하나도 힘을 들이지 않고 올라 왔단다!”하면서 독수리를 놀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세차게 불어온 바람에 그만 거미가 산 밑으로 굴러 떨어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에 담겨있는 뜻은 바로, “내가 노력하지 않고 얻은 기쁨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직접 수고하고 노력해서 얻은 기쁨이라야 오랫동안 누릴 수 있는 것이지, 노력하지 않고 얻은 기쁨은 오래 갈 수가 없습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수고하고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야 가치가 있는 것이지 수고하지 않고 불로소득(不勞所得)으로 얻은 물질은 가치가 없고 도리어 해(害)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땀 흘리고 노력해서 얻은 것이 좋은 것이지만 노력 없이 얻은 것은 별로 좋은 것이 못됩니다. 노력하면 반드시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것도 다같이 함께 노력하면 더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함께 노력할 때 어떤 결과가 있습니까? 첫째로, 최선을 다하면 기적을 보게 됩니다.(막2:1-5) 둘째, 최선을 다하면 영광을 얻게 됩니다.(대하20:20-23) 셋째로, 최선을 다하면 부흥이 일어납니다.(행6:1-7) 금년에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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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1
  • [정우승 목사] 탄탈로스(tantalus)를 아십니까?
    영어 단어 중에 탄탈리아즈(tantalize)가 있다. 우리말로 해석하면 “애타게 하다, 감질나게 하다” 라는 뜻으로 옥스퍼드 사전에는 ‘얻을 수 없는 것을 보여주며 괴롭히거나 장난치다’ 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인물 탄탈로스(tantalus)에서 유래하였다. 탄탈로스는 제우스의 아들이며, 현재 터키의 고대도시 시필로스의 통치자였다. 그가 하늘에서 알게 된 비밀들을 폭로한 이후 신들의 분노에 직면하게 된다. 탄탈로스가 신들의 음식인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훔쳐 인간 세상으로 가져오려 했기 때문에 신들의 심판을 받게 된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아들을 죽인 후 시신을 조각 내어 신들에게 음식으로 바치려고까지 했다. 그는 신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범죄를 저질렀지만 신들이 그에게 내린 잔인한 처벌은 항상 똑같았다. 즉 탄탈로스는 목까지 차는 물속에서 한 모금의 물도 마실 수 없었으며, 저승에서는 달콤한 과일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그는 결코 한 입도 먹을 수 없었다. 물과 음식이 손에 닿을 위치에 있었지만 탄탈로스는 영원한 목마름과 허기짐이라는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손이 닿을 듯 말듯 애타게 하면서, 결국 얻을 수 없는 것을 보여주며 괴롭히는 고통”을 일컬어서 영어단어 탄탈리아즈(tantalize)를 탄생시켰다. 또한 이 단어에서 유래된 것이 있는데, 물이나 액체가 부풀어 오르다가 일정 한계에 이르면 그 모두가 쏟아져버리는 화학실험기구인 ‘탄탈로스의 접시’가 이로부터 유래하였다. 이와 유사한 기능을 가진 술잔으로 계영배(戒盈杯)가 있다. 즉 넘침을 경계하는 잔이다. 이 잔은 술을 어느 선 이상 따르면 술이 밑으로 흘러 나간다. 이 술잔에는 작은 구멍이 있어서 술이 약 70% 정도 차면 작은 구멍을 통해서 술이 잔 밖으로 새어나가도록 만들었다. 이는 술잔을 가지고 과음을 경계하기 위한 것으로 일명 절주배(節酒杯)라고도 한다. 중국의 공자가 제나라 환공을 찾아갔는데 환공은 늘 계영배를 손에 들고 있었다. 환공은 이 계영배를 ‘늘 곁에 두고 보는 그릇’이라 하여 <유좌지기(宥坐之器>라고 불렀고, 공자도 이를 본받아 항상 곁에 두고 스스로를 가다듬으며 과욕과 지나침을 경계했다고 한다. 과거에 우리나라 선비들도 연잎들이 빗방울을 아래 쏟아버리는 것을 보고 ‘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빗방울만 싣고 있다가 그 이상으로 되면 미련없이 비워버린다’는 말을 하면서 정신수양을 했다. 또한 기품이 높은 선비들은 집에서 학(鶴)을 길러, 그의 지조에 나쁜 영향을 줄 어떤 사람이 찾아오면 구구하게 연설로 변명하느니 그저 학을 어깨에 얹고 나감으로써 무언의 항변을 했던 것이다. 진주에 낙향에 있던 영남의 선비 최영경(1529-1590)을 영의정 유성룡이 찾아갔을 때 남루한 토의에 짚신을 신은 최영경이 학(鶴) 한 마리를 어깨에 얹고 나와서 맞이했다. 이를 보고 영의정 유성룡은 백 마디 말보다 더 깊은 뜻을 미리 헤아리고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돌아 나왔다고 한다. 정말 멋있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에 넘치는 것들에게 대해서 많은 경고문을 날리고 있다. (딤전6:6)에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유익이 되느니라” 라고 말씀한다. 자족하는 마음이란 남의 것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이 내게 주신 것을 감사하며 누리는 삶이다. 또한 자족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세상 정욕을 거슬러 올라가는 저항의 몸짓이다. 김용삼의 시 <호박꽃 감사>를 보라. “장미처럼 예쁘지 않아도 노란 별 모양이 된 것 감사, 종종 내게 날아와 귓가에 윙윙 노래를 불러주는 꿀벌 친구가 있어 감사, 밤이면 둥근 달 쳐다보며 둥근 열매의 꿈을 꾸게 한 것 감사, 그리하여 가을 농부의 얼굴에 웃음꽃 피우게 하는 것 감사”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바울의 힘찬 외침을 들어보라 (고후6:10)에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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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1
  • [하수룡 장로] 이중금고
    나의 아내가 사용하는 화장대가 보통 사용하는 설합과 다르게 안쪽으로 손잡이가 없는 비밀스러운 작은 함이 있어 평소에 아끼고 귀중하게 사용하는 보석을 담는 것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중장치로 안쪽 깊숙한 곳에 함을 설치하여 다른 사람이 잘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여 보석이나 귀중한 물건을 잘 보관하는 것을 보고 이중 금고는 신기한 느낌마저 들었다. 병원이나 약국에서는 마약 성분의 약을 보관할 때에는 반드시 이중 금고에 잠금장치가 된 곳에 보관한다고 한다. 책임 관리자가 이중 금고에 넣어둔 치료 약을 목적에 맞게 사용하지 않으면 사회에 큰 해악을 끼쳐 사회적 문제가 발생한다. 이중 금고에는 비밀스럽게 귀중한 것을 보관하지만 그중에 위험한 마약을 보관하기 때문에 분명한 것은 선용하지 못하고 악한 쪽으로 마음이 뺏기면 본인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패망을 가져다준다. 성경에 어느 부자가 소출이 풍성하여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어 자기 곡간을 헐고 이중 금고처럼 비밀스럽게 창고를 지어 평안히 먹고 즐겁게 살 것을 획책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아가면 비밀스럽게 모아둔 재물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다. 세상의 귀중한 재물을 가지면 모두가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고 하나님께 부요한 자가 되지 못하여 불행을 자초한다. 기독교인이나 자기의 일을 도모하는 어떤 사람도 이중 금고를 만들어 하나님의 눈을 속이면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져 침륜과 멸망에 빠지고 만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아간도 물질에 미혹되어 탐심을 품어 망했다. 그가 노략한 외투 한 벌은 차치하더라도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의 금덩이를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금덩이를 깊이 묻고 그 위에 은을 묻는 치밀한 인간계획을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중 금고를 만들어 다른 사람이 금을 찾지 못하도록 이중으로 땅속 깊은 금고에다 꼭꼭 숨겨 놓은 것이다. 한 사람의 탐욕이 빚은 죄로 인하여 아이성 전투의 패배는 우리에게 큰 두려움과 교훈으로 다가온다. 이중 금고로 인한 탐욕은 죄를 낳고 처참한 심판을 받는다. 이 심판의 골짜기가 바로‘아골 골짜기’다. 우리에게 어느 부자나 아간은 탐욕에 대한 경종을 울려준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그리스도인은 아골 골짜기의 비극을 초래하는 주인공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됨을 명심하고 또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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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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