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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5 : 성경에서의 용납과 용서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지나면서 주님께서 십자가 지심을 믿음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데 먼저 감사를 드리면서 문득 그게 용서인가 용납인가? 두 단어는 같은 말인가 다른 말인가? 라는 용어적 의미와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흔히들 많은 교인들은 이 두 단어를 구분 없이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 찬송가 569장 3절에도‘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가 있다. 하지만 엄격히 보면 같은 듯 다른 말이다. 본 호에서는 그 차이점이 어떤지를 분석하여 논하고자 한다. II. 용납(容納)과 용서(容恕)의 단어 분석 1. 용납이란? : 헬라어로는 ‘아네레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바칠 납(納)이다.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남의 말이나 행동을 받아들임’, ‘어떤 물건이나 상황을 받아들임’이라 했고, 금성사 국어대사전에는 ‘부정적인 것을 그냥 받아들이거나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했다. 국문학 교수를 역임한 최태영 장로는 ‘교회용어 이대로 좋은가?’란 그의 저서에서 ‘이 용납은 허용(許容)과 거의 같은 뜻으로 부정적인 요소, 모자라는 점이 있지만, 그것을 탓하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며 받아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이를 우리 개신교적인 의미로 보면, ‘우리의 죄는 용납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시지 이를 긍정적으로 이를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용납하시는 분은 아니시다.’라고도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어떤 잘못이 있을 때는 그 일에 대한 회개 기도가 필요하며,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성경에서도 용납은 죄의 개념으로 표현되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면,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고후11:1).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 구나’(고후11: 19). ‘사랑가운데 서로 용납하라’(엡4:2)고 했다. 여기에서의 용납이란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가 아니라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상대방을 너그럽게 보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2. 용서란? : 헬라어로는 파레시스 로서 ‘놓아줌’, ‘해산’, ‘처벌의 보류’등의 뜻이 있고, 로마서 3:25절에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하여 지은 죄를 용서함’이란 뜻으로 말씀하고 있고 수많은 용서에 대한 말씀도 거의 동일하다. 한자어로는 얼굴 용(容), 용서할 서(恕)이며,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에는 ‘지은 죄나 잘못한 일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덮어줌’이라 했다. 이상으로 볼 때 성경적 의미나 각종 사전적 의미로 볼 때도 용서의 의미는 거의 동일하다. 이렇게 볼 때 용서란, 인간은 죄를 지을 수밖에 없고, 또 스스로 죄를 해결할 방법은 없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믿고 회개 기도할 때 비로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용서는 상호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용납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회개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용서인 것이다. III. 결론과 제언 서론에서 언급한 찬송가 569장 3절에 ‘흠이 많고 약한 우리를 용납하여 주시고’란 가사를 다시한번 생각해 보면, 용서와 용납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어서 다소의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앞에서 논한 대로 실제로는 같은듯하나 다른 의미이다. 여기서는 용납이 아니라 용서로 표현함이 옳을 것이다. 이 두 단어 외에도 관용(寬容)(사전적 뜻: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이란 용어도 있다. 어쩌면 용납과 용서를 다 포함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고민과 염려가 되는 것은 이런 문자적인 구분을 지나치게 하다 보면, 문자적 율법주의에 빠져서 본질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정확한 의미를 알고 사용하는 것은 더 좋은 일이기 때문에 바로 알고 바로 사용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 용어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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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삶의 현실에 대한 인간의 태도
인생의 삶을 사는데 현실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 태도가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태도(attitude)가 고도(altitude)를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비행기가 아래로 향하느냐 위로 향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고도가 결정되듯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따라 방향과 높이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누구나 높이 오르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높이 오르는 것은 아니다. 오를 수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히말라야 고산족들은 양을 매매할 때 가파른 산비탈에 양을 놓아두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지켜본다고 한다. 비탈 위로 풀을 뜯으러 올라가면 값이 비싸고, 비탈 아래로 내려가면 값이 싸진다고 한다. 그 이유는 위로 올라가려는 양은 현재 힘이 들더라도 넓은 산허리에 이르게 되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양은 현재 수월하나 협곡 바닥에 이르러서는 굶주려 죽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다. 항상 높이 계신 주님을 바라보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오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려움이 있을 때 예루살렘을 떠나 내려가는 자들이 있다. 어려운 시기에 갈렙은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믿음의 태도를 가졌던 사람이다. 그는 85세의 나이에도 아직도 정복되지 않은 가나안 땅에 잔류하고 있는 아낙 사람들이 사는 산악지대를 정복하고자 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곳에는 아낙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분명 함께 하실 것이니, 내가 반드시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수 14장 12절)” 갈렙의 신앙은 능동적 신앙의 삶이었다. 45년 전에도 다른 사람들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후퇴 반응을 보였지만 갈렙은 가나안 땅으로 올라가자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벌써 85세 고령인데도 여전히 적극적인 Next Vision 성취를 지향하며 살았던 것이다. 맥도널드 햄버거를 창업하기 전 레이 크록은, 53세 나이에 겨우 밀크쉐이크와 함께 30년 동안 종이컵을 파는 세일즈맨으로 반평생을 보냈다. 그래도 그는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는 30년이라는 기나긴 밤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서 성공을 한 것이다. 인도의 벵골 호랑이는 먹이 사냥에서 사냥감을 잡는데 약 스무 번의 시도 끝에 한 번 성공한다고 한다. 그는 실패 앞에 포기가 아니라 도전의 태도를 가져 그 도전이 성공을 이루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한 번 실패하면 쉽게 단념하고 한탄한다. 잃은 것 때문에 원망하지 말고 지금 있는 것이 자산이 되어 다시 도약해야 한다. 열정을 가진 사람으로 다시 일어나면 되는 것이다. 슈베르트는 가난한 음악가였다. 31세로 죽을 때까지 방 한 칸 없었고, 그토록 필요한 피아노 한 대 없는 불우한 음악가였다. 어느 날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데 악상이 떠올랐다. 그는 오선지를 찾았다. 친구가 레스토랑 메뉴판에 오선지를 그려주었다. 그것이 유명한 아베마리아 세레나데이다. 환경에 낙심할 필요 없다. 주위 시선에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다. 폭풍이 일어도 지구는 돌고 있는 것이다. 고난 속에 신앙의 열정을 가지고 가면 길이 열린다. 신앙의 열정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능력 주시고 그 능력 안에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나니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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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정의(JUSTICE)가 없어지는 대한민국 사회인가?
세계 지성인들을 넘어 일반인들에까지 베스트셀러가 된 마이클 센델의 ‘정의는 무엇인가’(JUSTICE)의 책을 읽으면 다소 어렵고 혼란스럽다. 그런데 급변하는 세계 정치 경제 사회 현장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의문들을 진지하게 풀어낸 가히 세계 베스트 셀러의 가치가 있다. 27세에 미국 명문 하버드 대학 교수가 된 마이클 교수가 강의 현장에서 수많은 학생들과의 강의와 질문 그리고 토론 심지어 강의장에서 논제를 놓고 투표를 하면서 정의를 찾으려는 몸부림이 살아있는 저서에서 읽히고 있다. 이 책에는 수많은 역사속의 사회 정치 경제 석학들을 소환한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을 토론하고 결론을 내려고 애쓴다. 필자가 느끼기에는 별다른 결론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온 세계 인류 보편적 행복을 위한 정의의 뜻을 독자 나름대로 찾을수 있다. 그렇다면 사회 정의(JUSTICE)는 어떻게 재단되고 사회 현장에 적용해야 하는가. 보편적 사회 기능에 도덕적으로 마땅히 받을 권리를 찾는다. 그리고 재화의 분배를 통해 포상과 장려의 삶의 문화를 위해 법치가 기능을 한다. 이에 따른 사회 공공선을 이뤄감이 이상일 것이다. 그것이 사회 정의를 지켜내는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회 정의가 이때만큼 혼란스러울 때가 있을까 하는 자괴감이 생겨나고 있다. 갈등과 분열의 사회현상에서 더욱 뜨거워지는 사회정의의 담론이 우리 앞에서 서있다. 22대 국회의원총선을 겪으면서 정의와 불의가 혼돈되고 있다. 보편적 정의란 무엇인가의 담론에서 찾아낼 수 없는 심각한 사회병리현상이 무섭다. 사회 지도자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법과 도덕의 적응도에 의심의 여지가 없어야한다. 그것이 안 되면 국가관리의 지도자 되기를 포기하고 양보해야한다. 그래서 국회의원을 선량(選良)이라고 칭하지 않는가. 전과 기록은 이제 불필요하다. 너무나 무섭고 부끄러운 사회 범죄를 행하고도 정치 권력에 탐욕을 내는 군상들이 사회 정의를 짓뭉개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성경 창세기에서 보듯 창조주의 형상대로 지어졌기에 공동체의 선을 함께 이뤄 가려고 최대한 노력한다. 구원의 목적을 위해 심판 현장에서도 사랑과 용서를 통해 하나님은 공동체 선을 위해 작업하신다. 선악과를 만드시고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한다. 그러나 먹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먹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인본주의 신봉자들이 세상을 덮어 가고 있다. 기독교 사회 운동가 스콧 D 알렌은 ‘사회 정의는 성경적 정의인가?’라는 저서에서 설파했다. 사회 정의가 성경적 정의와 일치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오늘날 이미 죽었다고 하는 인본주의 막시즘이 문화 막시즘으로 다시 살아나 인류를 혼돈하게 한다고 했다. 마르크스의 사회경제학은 이미 실패로 끝났지만 새로운 인본주의 이념으로 정의의 가치를 흔들고 있다. 기독교 세계관에서 보는 것에만 나온 진단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주변 정세에서 흘러들어오는 정의의 가치를 깨고 있는 전체주의 이념의 위험한 수용이 우리사회를 흔들고 있다. 정의사회의 위험한 시대 우리는 어떻게 할 것 인가. 오직 복음 전파의 가치관이다.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의 정의가 세계 복음화와 함께 인류 번영을 이끌 수 있는 새로운 무브(move)가 필요하다.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료하는 기독교 기본 핵심이 온 세계 복음으로 전파될 때 이 땅은 그래도 공동선의 문화가 세계를 리드하지 않겠는가. 정의(JUSTICE)가 살아있는 진정 행복의 땅이 되지 않겠는가. 정의가 메말라버리는 세상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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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4 : 예배와 예식, 집회와 기도회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40년이 넘는 목회 생활과 일정 기간 국문학과 실천신학을 전공한 필자이지만, 실제적인 표현에서는 혼동이 되는 말들이 너무 많다. 이번 호에서 논하고자 하는 예배인가? 예식인가? 또 예배 형식을 갖춘 집회와 기도회는 예배인가 집회와 기도회인가? 이런 명제 앞에서도 때로는 구분이 쉽지는 않다. 이에 본 호에서는 이를 분석하고 논하고자 한다. II. 예배와 예식, 집회와 기도회의 용어분석 1. 예배(禮拜)란? : 일반적인 사전적 뜻은 ‘초월적 존재 앞에 공경하는 마음으로 경배하는 의식’이다. 이를 우리 개신교적인 의미로 보면, 거의 대부분 예배학자들은 ‘성경을 읽고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대한 존경과 숭배를 나타내는 의식’이라고 했다. 또한 예배는 그 대상이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정의하고 있다. 예를 들면, 주일 오전 예배, 주일 찬양 예배 등이다. 2. 예식(禮式)이란: 사전적인 뜻은 ‘예법에 의해 행해지는 식’으로 결혼식, 장례식 등을 예를 들고 있다. 개신교적 의미로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많은 길흉사에서 하나님께 예배형식을 갖추는 것’이라 했다. 이는 기존 예배와는 달리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이 중심이 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 중심이라 본다면, 예식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일에서 하나님께 예배 형식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모양은 같은듯하나 대상은 다른 것이다. 예를 들면, 결혼예식, 장례예식, 각종 임직식, 첫돌, 회갑, 입학, 졸업, 취업, 개업, 첫돌예배 등 인간 중심으로 발생하는 많은 예식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3. 집회(集會)란? : 사전적인 뜻은 ‘특정한 공동목표를 위하여 여러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모인 모임’이다. 개신교적 의미로는 ‘교인들의 믿음의 증진을 위하여 모이는 일체의 모임’등을 말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여러 유형의 부흥회, 수련회 등으로 사람이 중심이다. 4.기도회(祈禱會)란? : 먼저 祈禱의 일반적인 뜻은 ‘자신이 믿는 신에게 비는 행위’를 말한다. 祈禱會란 이런 기도를 하기 위해 모인 모임이다. 우리 개신교적 의미로도 일반적인 뜻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 소원을 빌기 위해 모임’을 말한다. 전통적인 경우는 수요기도회. 금요 철야기도회, 새벽기도회 등이 있다. III.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 먼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교단에서 정리한 표준예식서에 의하면, 이 4가지 용어는 각각 그 대상과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구분해서 사용해야 된다고 정의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예배는 그 대상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일이 중심인 예식과는 형식은 비슷하지만,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했다. 기도회와 집회도 마찬가지로 말하고 있다. 이 두 경우도 예배 형식은 있지만, 그 성격이 인간의 일이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모인 성격에 따라 기도회와 집회라고 해야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예배 신학자인 정장복 교수도 이 4가지 유형은 모두 성격과 목적과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많은 현대 교회의 예배들이 위의 이런 4가지 유형들이 혼합되어 저마다의 본질이 퇴색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이상과 같은 견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정장복 교수와 같은 장로회 신학대학원 교수이면서 국문학자인 故 나체운 교수는 4가지 유형의 행위들이 모두 성격이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예배라는 성격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구태어 구분하는 것은 오히려 더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모두 다 그 본질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면 어떤 용어든지 구태어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IV. 결론과 제언 올바른 용어 사용에 대한 기고를 계속하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영어나 원어로 말하면 간단한 것을 우리는 뜻글자인 한문과 변화무쌍한 소리 글자인 한글을 사용하다보니 통일된 용어 사용이 매우 어렵다는 느낌이다. 더군다나 같은 교단의 교수들과 표준 예식서 마저도 견해가 일치 못하고 있다. 이에 필자는 이런 제안을 해본다. 이미 많은 교회들이 시행하고 있지만, 1부는 예배, 2부는 그 성격과 목적에 맞춘 순서를 진행하면 큰 문제는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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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구원이 은혜인 이유
대서양에서 폭풍우를 만나 오랫동안 표류한 선박이 드넓은 브라질의 아마존 강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선원들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선원들은 오랜 선상생활로 너무나 지쳐 있었는데, 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못해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여객선 한 척이 지나갔습니다. 선원들은 여객선을 향해 외쳤습니다. “우리에게 물을 좀 주시오. 우리는 갈증 때문에 죽어가고 있소.” 그러자 그 여객선의 승객들이 소리쳤습니다. “당신들은 지금 맑은 물이 흐르는 강 한복판에 와 있소. 그대들이 바라보는 푸른 물은 바닷물이 아니라 아마존의 강물이오. 물통을 내려 물을 퍼 올리기만 하면 되오.” 곧 고난주간이 다가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시고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사람들은 지금 구원의 맑은 강물 위에 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람들이 할 일은 믿음의 물통을 내려서 그 구원의 강물을 퍼 올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은 믿음의 물통을 내리기를 거부하거나, 아니면 그것이 구원의 강물인 것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전도자가 전도대상자에게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전하자 그는 “저는 살면서 공짜로 무엇을 얻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그 값을 지불했지요. 대가를 치르지 않고 무엇을 받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전도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저 찬란한 태양 빛을 늘 받으면서 그 대가를 지불했습니까? 매일 마시는 공기의 값을 지불했습니까?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대가를 지불했습니까?” 그 물음에 그 사람은 “그것은 너무 비싼 것이라서 값을 지불할 수 없지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대답을 듣고 전도자는 다시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너무 비싸서 그 대가를 지불할 수 없는 것은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햇빛과 공기를 만드신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 대속의 죽음에 내어 주신 그 사랑은 너무 비싸서 오직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한 목사님이 유럽으로 여행을 가서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된 박물관을 가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이름난 화가들의 명작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책에서만 볼 수 있었던 유명한 작품들을 모두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작품들 앞에는 그 그림들의 판매 가격이 각각 붙어 있었습니다. 가령 르느와르의 “독서하는 소녀”는 칠백만 달러 정도를 호가하며, 렘브란트의 그림은 천 이백만달러 내외였고, 루벤스라는 화가의 그림은 천만 달러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작품 중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그림은 과연 얼마나 될까 궁금해서 그 앞으로 가보니 ‘priceless'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값을 매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값으로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가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작품들은 가격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나 진짜 좋은 작품은 값이 없습니다.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값을 지불하지도 않았고 지불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값을 매길 수 없는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받은 구원을 공짜라고 표현하면 안 됩니다. 은혜는 공짜가 아닙니다. 독자 여러분, 우리의 부모님이 우리를 얻기 위해서 얼마만큼의 가격을 지불하셨겠습니까? 독자 여러분의 자녀들을 얼마의 돈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그 귀한 자녀들의 가격을 정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없죠! 정말 소중한 것은 값이 없습니다. 값으로 매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그 모진 고통과 수치를 다 받으시며 고귀한 자신의 생명을 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구원 받은 것입니다. 즉 그 어떤 가치로도 매길 수 없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공짜가 아닙니다. 그것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라는 말은 공짜라는 말이 아니라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억만금으로도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공짜가 아니고 그 은혜이니 우리는 우리 평생 그 은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믿음을 얻게 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다시 한 번, 아니 나의 숨이 다하는 날까지 감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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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훈 목사] 부으소서, 채우소서, 흐르게 하소서
포도원교회가 창립 44주년이 되었다. 부산 변두리 구포에서 100여평의 작은 교회에서 40년만에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어서 1만 가정, 3만 성도, 10만 선교, 100만 전파를 코로나 때 이루었고 덕천성전, 화명성전, 드림센터, 양산 선교센터 4개의 성전을 갖추었다. 교단과 부산을 대표하는 교회가 되었으니 이 또한 감사, 찬양, 영광, 존귀를 주님께 돌려드린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이고 주께서 하셨다. 시23편을 통하여 다윗의 노래, 다윗의 축복을 볼 수 있다. 부으소서 큰 복은 하나님이 위로부터 부어 주시고, 작은 복은 사람이 오두방정 떨어서 챙길 따름이다(약1:17). 말세에 고통의 때가 오지만 주께서 남종과 여종들에게 물 쏟듯이 성령을 부어주신다(욜2:28~29).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없다. 오직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 된다(행1:8). 한계를 뛰어 넘고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면 주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 주셔서 산과 골짜기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된다(신11:8~14). 다윗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이후에 승승장구 했고 범죄시 성신을 거두지 말라고 울면서 회개했다. 채우소서 예수님께서 때가 차매 이 땅에 오셨듯이(갈4:4) 성도는 서러울 때, 가난한 때, 고통의 때를 채워야 된다. 춘하추동 사시사철이 지나야 농사가 된다. 눈물 병을 채울 때에(시56:8) 응답이 이루어진다. 찬송이 하늘에 사무치고 기도가 주께 상달되고 아랫물이 윗물이 된다. 다윗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하였다. 은혜의 잔을 채우소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항아리의 물을 아귀까지 채울 때 기적이 일어났다(요2:7). 마음은 비우는 것이 아니고 채우는 것이다. 빈 깡통이 시끄럽다. 회개하며 더러운 것을 토설하고 성령 충만, 은혜 충만, 진리 충만으로 채워야 된다. 넘쳐흐르게 하소서 물은 막히면 기다렸다가 마침내 가득 채운 후 넘쳐서 흘러간다. 무엇이든지 서두르면 사고 나고 조급하면 실수하고 성급하면 후회한다. 억지로 안 된다. 눈물이 고이고 기도가 쌓여서 마침내 내 잔이 넘쳐야 된다. 임계점을 넘어 서야 물이 끓는다. 샘물은 막힘없이 중단 없이 멈춤 없이 퐁퐁 솟아나서 넘쳐흐른다. 역사는 민심이라는 강물이 어떻게 흘러가고 어떻게 출렁이는지를 볼 수 있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주께 받은 은혜를 사해 바다가 아니라 갈릴리 바다같이 흘려보내라. 축복의 통로가 되라. 법(法)은 물 흐르듯이 가는 것이다. 주께서 기름 부어 주시고 흔들어 넘치게 복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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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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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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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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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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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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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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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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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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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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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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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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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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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말씀은 주야로 묵상해야한다.
- 성경이 “말했구나.” 정도가 아니다. “주야로 묵상해.” “이 말씀을 붙잡아”, “이 말씀은 귀해”, “이 말씀을 들어라”고 하신다. 목사의 설교만 들어선 안 된다. 성령님께 직접 설교를 들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설교하신다. “하나님께서 메세지 하시구나”하는 것을 말씀을 통해 발견해야 한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할 때 하나님의 말씀은 들린다. 주야로 묵상하자. 자나 깨나 묵상한다는 말이다. 이 율법 책을 네게서 떠나지 말게 하라고 했다.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고 했다. “행하라”를 “믿어라”로 읽어야 한다. 그리하면 어떻게 되는가? “네 길이 평판하게” 된다. “형통하게” 된다. 하나님이 말씀은 진실이다. 평탄한 길, 형통한 길이 여기 있다. 평탄하고 형통하고 싶어 노력만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윗은 말씀을 묵상하다가 실재가 되었다. 믿음으로 기름 부음을 유지할 뿐 아니라 선포를 했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지만...”라고 마음에 있는 것을 읊조리고 선포를 하는 것이다. 마음에 있는 것을 선포를 하는 일을 하려면 말씀이 우리에게서 떠나지 말게 해야 한다.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라고 하신다. 묵상이란 깊이 생각하고 깨달은 것을 입으로 읊조리는 것을 말한다. 읊조리는 것, 자꾸 말해야 한다. 입을 가지고 말을 해야 한다. 말을 온전하게 하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 땅의 아무리 좋은 말도 온전한 말은 없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온전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읊조릴 때 온전한 말이다. 말씀을 말하는 사람은 온전한 자라고 성경이 말한다.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고 하셨다. “내가 온전하니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씀을 믿음으로 거룩해질 수 있다. 말씀을 말함으로 온전 해 질 수 있다. 우리는 “이 율법 책을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겠다.”라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러면 반드시 오늘 이후로부터 응답의 문이 열린다. 형통하다. 평탄하다. 문이 열린다. 형통한 길 평탄한 길이 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1:8)라고 하셨다. 놀라운 말씀이 아닌가! 말씀을 다섯 가지 방법으로 가까이하길 권한다. 읽기, 듣기, 공부하기, 암송하기, 묵상하기이다. 말씀을 읽는 시간을 꼭 정하길 권한다. 작정해 보라. 말씀이 읽어질 것이다. 읽기만 할 것이 아니라 공부하기도 해야한다. 말씀은 들음에서 믿음이 생긴다. 말씀을 듣는 일에 귀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지는 것은 중요하다. 말씀을 듣는데 어떤 말씀을 듣느냐는 중요하다. 정확한 복음을 들어야 한다. 참고로 유튜브 <오복음tv>를 활용해 보라. 유튜브 <오복음tv>를 들어보라. 힘이 생길 것이고, 행복의 문이 열릴 것이다. 삶 속에 흔들 깃발이 생길 것이다. 성경 공부하기를 재미있고 쉽게 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싶다. 유튜브 <오복음tv>를 활용해 보라.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장별로 복음으로 볼 수 있도록 영상으로 잘 만들어져 있다.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가능하다면 로마서를 먼저 공부한 후 창세기부터 노트에 필기도해 가면서 공부할 것을 권한다. 암송하기에도 도전해 보라. 암송은 암송할 수 있다는 생각이 중요하다. “나는 성경을 암송할 거야”라는 말을 1,000번을 해 보라. 쉽게 암송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성경을 암송할 거야”라는 말을 억지로 하지 말고 그냥 수시로 그렇게 해 보라. 1,000번을 말하면 무엇이든지 쉬워진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말씀을 묵상하라. 읽고, 듣고, 공부하고, 암송한 말씀을 생각하고, 되새기고, 주장하면 마음속에서부터 올라오는 환희와 함성이 생길 것이다.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말씀을 만드는 일을 묵상이라고 한다. 그것이 기도하게 될 때 놀라운 능력의 삶은 나타나게 될 것이다. 다시 당부드린다. 생동감 있는 삶을 위해 유튜브 <오복음tv>를 활용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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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말씀은 주야로 묵상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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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강한 자와 싸우라
-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평탄한 삶을 축복이고 험악한 삶을 불행이라 생각한다. 험악한 삶에는 강한 대적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광야로 이끄시고 강한 대적들을 만나게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다. 결론적으로 더 큰 승리를 주시기 위함이다. 약한 상대는 이기기가 쉽다. 쉽게 이기는 싸움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강한 상대를 만나 이겼을 때, 기쁨과 영광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때부터 일약 스타가 되고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는다. 모세가 바로 왕에게 내 백성을 해방시켜 달라고 하니 바로 왕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래 모든 편이를 봐 줄 테니 데리고 가라 하였다면 얼마나 무미건조하겠는가? 바로는 착한 자가 아니라 완악한 자로서 그의 완악함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10가지 재앙의 기적을 보여주는 원인이 된다. 우리의 삶에 완악한 바로를 만나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 큰 승리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바로의 완악함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출애굽이 가능하였다. 애굽에 430년간 노예로 산 이스라엘 백성들은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애굽화 되어버렸다. 이런 이들이 모세의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을 버리고 애굽을 떠나겠는가? 바로의 완악함이 애굽에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지긋지긋한 환경을 만들었기에 미련 없이 애굽을 떠나게 된 것이다. 나쁜 환경은 약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을 쉽게 포기하게 만든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죽을 때 병들어 고생하다가 죽는다. 천국을 사모하라는 뜻도 있지만, 본인도 가족 식구에게도 떠나게 하기 위함이다. 이명박 대통령 시절 우리 지역에 국회위원 선거가 있었다. 당시 국회위원은 정치 거물인 한나라 당 사무총장인 이○호 씨였고 맞서는 자는 이름 없는 민노당 강○갑 씨였다. 내게 지지를 부탁할 때, 나는 당신의 싸움은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다.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인지도와 조직, 선거 자금 면에서 모두가 불리한데 무엇으로 어떻게 그를 이길 것인가 라고 물으니 그는 위에 계시는 하나님이 도와주신다면 이라고 한다. 나는 교만과 자만에 빠져 지역구를 잘 돌아보지 않는 그의 약점을 파고들어 유권자 한 사람이라도 더 만나라고 조언하였다. 결과는 예상을 뒤엎고 승리하여 전국의 뉴스감이 되었다. 당선 후 그는 승리의 요인 다섯 가지 중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았다면 진 선거라고 하였다. 사무엘상 17장에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나온다. 객관적으로 다윗이 골리앗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사울 왕은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하였다. 결과는 다윗의 일방적 승리로 끝난다. 이때부터 다윗의 명성은 이스라엘 전역과 주변국까지도 알려지게 되어 마침내 이스라엘 2대 왕이 된다. 강한 자에게도 약점이 있기 마련이다. 자만심과 교만이다. 상대를 얕잡아보고 방심한다. 사무엘상 17:42절에 골리앗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이 약점이 다윗에게 패하게 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도 토끼가 이길 수밖에 없는 신체적 조건을 가졌으나, 자만심과 교만으로 질 수 없는 경주에서 거북이에게 지고 말았다. 이같이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지는 이유가 바로 자만심과 교만임을 말해준다. 그래서 사도바울 고린도전서 10:12절에서 이런 자들에게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충고하면서, 자신은 약함을 자랑한다고 하였다(고후11:30). 약할 그때가 곧 강해짐을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전도서 9:11절에 ‘빠른 경주자들이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용사들이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였다. 이왕 싸운다면 약자와 싸울 것이 아니라 강자와 싸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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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강한 자와 싸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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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관리실에 에어컨이 생기다!
- 솔직히 너무 덥다. 컨테이너로 제작된 좁은 관리실은 숨이 막힐 지경이다. 한여름이지만 오히려 바람이 살랑이는 밖이 더 형편이 나았다. 그래서 전에 근무하시던 분은 여름이면 집으로 올라가셨다고 한다. 그래, 여기 있다가는 요리가 될 것 같다. 앞으로 누가 근무하든 냉난방이 전혀 안 되는 작은 컨테이너 사무실은 사람이 상주할 수 없을 것 같다. 상주는커녕 필요한 업무를 위해 잠시 머무는 것도 불가능하다. 지금 아파트의 큰 이슈는 승강기 공사다. 제법 큰 지출이 예상되었기에 몇 곳에서 견적도 보고 온라인에서 상담도 받아 본다. 아파트 관리실은 이런 문제로 언제든 시끄러울 여지가 있다. “소장이 돈을 얼마 받았다, 부실 업체를 선정했다, 업무 처리가 미흡하다.” 여러 말 듣기가 싫어 최대한 신경 쓰며 진행하게 된다. 업체 선정은 다행스럽게도 기존에 관리하던 업체에서 맡게 되었다. 우리 시설을 가장 잘 알았기에 이 업체가 했으면 싶었는데 마침 견적도 가장 낮은 가격을 제시했다. 입주민 대표도 오케이. 그렇게 공사가 진행되었다. “소장님, 공사 기간 고생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사 후 건네진 봉투. 내가 고생한 것이 없는데 사례라며 봉투가 전해진다. “??” 평소보다 조금 더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던 것이 고생이라면 고생이랄까? 하지만 봉투 받을 내용은 아니다. 웃으며 거절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사장님은 조금 놀란 듯 표정을 보이셨다. 다른 아파트 소장님들도 이 정도는 다 받으니 받아도 된다는 말씀을 하시며 봉투 전달을 포기하지 않으신다. 처음에는 소장님이라 하더니 이제는 목사님이라 부르며 몇 번 설득하는데, 목사라 부르니 더 받기 어려워진다. “정직한 비용으로 꼼꼼하게 작업해 주시느라 사장님이 고생하셨죠. 저는 여기 일하며 절대 따로 봉투를 받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앞으로도 안전한 시설 되도록 잘 부탁드립니다.” 사람 사는 정이 그런 것이 아니라며 몇 번이나 나를 설득하셨지만, 이거 받는 순간 내 명예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생각에 미소는 짓되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장님께 제안. “사장님, 저는 어차피 몇 년 후 여기 떠날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사장님은 여기 소장 바뀌어도 계속 관리 이어가셔야죠. 관리실이 여름이면 찜통입니다. 그런데 에어컨 하나 사지 못하고 있어요. 차라리 사장님 이름으로 에어컨을 기증해 주시며 어떨까요? 그럼 입주민들이 사장님을 좋게 보실 것 같은데.” 순간적인 아이디어였지만 사장님도 나도 만족스러운 대안이었다. 즉시 일은 진행되었고 제법 넉넉한 용량의 에어컨이 설치되었다. 나는 입주민들에게 은근히 소문을 냈다. 승강기 용역회사에서 관리실에 에어컨을 기증했다고. 나의 계획대로 입주민들은 승강기 사장님을 칭찬했고 사장님은 계속 아파트 업무를 이어가고 있다. 그래, 그거면 된 거다. 그렇게 설치된 에어컨 덕에 가장 신난 건 나다. 한낮 사무실 업무가 가능해진 것은 물론이고 야외 업무 후 잠시 땀을 식히기에도 그만이다. 하지만, 나도 눈치가 있지. 에어컨 실외기 돌아가는 소리에 입주민이 불편해할까 신경이 쓰인다. 에어컨 바람에 열 좀 식히고 있을 때 멀리서 누군가 다가온다. 관리실 방향이다. 큰일이다! 지금 사무실이 지나치게 시원하다. 나는 급하게 리모컨을 집어 들어 에어컨 전원을 껐다. 눈치 좀 보면 어떤가. 아무렴 에어컨 있는 사무실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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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관리실에 에어컨이 생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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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유앙겔리온
-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 중에 중요한 한 가지는 오직 한 가지 일에만 전념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세계 곳곳에 안 들어간 데가 없고 심지어 이 세상에서 가장 폐쇄된 나라인 북한에까지도 거침없이 들어간 미국의 대표적인 기업이 있습니다. 바로 코카콜라입니다. 그렇습니다. 코카콜라는 공산권이든 제3세계 국가이든 구별 없이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심지어 아프리카 칼라하리의 부시맨의 손에도 코카콜라 병이 들려있었던 것을 옛날에 부시맨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봤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 회사 사장의 불타는 집념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코카콜라의 판매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 정열을 바치고, 거기에 아예 자기 목숨을 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코카콜라의 판매에만 전념했기에 누구를 만나든지 무엇을 하든지 항상 코카콜라만 생각하고 코카콜라만 말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어느 때는 기자들과 만나서 자신의 기업 경영에 대하여 인터뷰를 했는데, 그 인터뷰를 마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 혈관 속에 흐르는 것은 피가 아니라 코카콜라입니다.”그는 정말 완전히 코카콜라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어떤 기업도 넘볼 수 없는 세계 제1의 기업 브랜드의 아성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위대한 아성을 쌓은 사람이 성경에 나옵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쌓은 것은 위대한 복음의 아성이었습니다. 코카콜라 사장의 비유대로 하면 아마 그의 혈관에는 피가 아니라 복음이 흐르고 있다고 말해야 될 것 같습니다. 바울이 코카콜라 사장과 다른 점이 있다면 코카콜라 사장은 썩어질 것에 정열을 바치고 집중한 사람이지만 바울은 영원한 것에 헌신하고 집중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이 복음에 그렇게 자신을 불태웠을까요? 신약 성경의 언어인 헬라어로 복음을 ‘유앙겔리온’이라고 합니다. 풀이하면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 이 단어는 로마 황제와 관련된 용어였습니다. 새로운 황제가 등극할 때 또는 황제가 자신이 다스리는 식민지나 도시를 방문할 때에 백성들은 그것을 ‘유앙겔리온’이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황제가 등극하면 일반 죄수들에게 특별사면을 시행했고, 또 황제가 어느 곳에 가면 신하들과 시민들은 기념 하사품이나 선물, 특식 등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기쁜 소식 즉 유앙겔리온이었습니다. 그것을 우리나라로 말하자면 저 옛날 일제 강점기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일본천황이 항복을 했다는 소식, 바로 그것이 유앙겔리온이었습니다. 옛날 시대를 살았던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1945년 8월15일에 라디오를 통해서 침울한 일본천황의 그 항복 선언을 듣는 순간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해방이구나. 이제는 자유이구나.”하는 생각에 많은 사람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유앙겔리온 있습니다. 죄로 인해 영원한 멸망의 포로가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소식은 온 인류가 기뻐해야 할 진정한 유앙겔리온입니다. 사람들을 마귀가 장악한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구원 하는 것은 유앙겔리온 즉 복음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복음에 자신의 생애를 바쳤던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원 받은 인생에게 가장 가치 있는 삶은 내 자신을 구원한 바로 그 복음을 전하는 유앙겔리온의 전달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건강, 지식, 지혜, 재물 등을 바로 그것을 위해서 사용할 때 우리는 가장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게 되고 그래서 저 하늘의 상급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몸에도 사도 바울처럼 유앙겔리온의 뜨거운 피가 흐르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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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유앙겔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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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신뢰의 결과 (대하20:20-23)
- 한 TV방송 프로그램 중에 시골에서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부부를 방송국 스튜디오에 모시고 퀴즈 대회를 진행하는 프로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카드에 적힌 단어를 설명하면 할머니가 알아맞히는 내용이었습니다. 한 할아버지가 차례가 되어서 카드에 적힌 단어를 열심히 할머니에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 날 할아버지가 설명하고 할머니가 알아맞혀야 할 단어는 “천생연분”(天生緣分)이라는 단어였습니다. 그런 방송 프로에 익숙하지 못한 할아버지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할머니가 동문서답(東問西答)만 하시고 알아맞히지를 못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너무 답답하셔서 “당신하고 나 사이를 뭐라고 혀?”라고 힌트를 드렸더니 할머니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이 “원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민망해진 할아버지가 “그것 말고 네 글자로 말해봐!”라고 다시 힌트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이번에 할머니 입에서 튀어나온 대답이 “평생원수!”라고 하셨습니다. 그 방송을 시청하고 있던 방청객들과 전국의 시청자들이 배꼽을 잡고 웃은 적이 있습니다. 그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참 대단하시다는 생각이었고, 또 하나는 안타깝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원수 같이 여기면서도 평생을 함께 살아오셨으니까 대단한 것이고, 부부이면서도 평생을 그렇게 원수같이 여기고 살았으니까 안타까운 것입니다. 부부는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평생이 즐겁고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부부사이보다 우리가 더욱더 신뢰해야 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할 때 어떤 결과가 따르게 되는 것일까요? 첫째는, 신뢰하는 자를 견고케 하십니다.(대하20:20-23) 둘째는, 신뢰하는 자를 책임져 주십니다.(렘39:15-19) 셋째는, 신뢰하는 자를 구원해 주십니다.(사30:15-17) 하나님을 더 깊이 신뢰하시므로 복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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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신뢰의 결과 (대하20: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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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인의 용어 사용 32: 높임말(경어), 이대로 좋은가? (4)
- I. 서언(序言) ‘이런 세계화 시대에 과연 높임말이 필요한가?’‘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처럼 높임말이 없어야 진정한 상호간의 소통이 된다.‘높임말을 하려거든 제대로 하지 그게 뭐냐?’는 등의 높임말에 대한 많은 찬반양론이 세간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 호에서는 지면을 통하여 높임말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높임말이 어려운 이유 높임말이 어려운 이유는 앞에서 논한 대로 체계와 구조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집사님이 “목사님, 오는 토요일에는 저희 선친의 생신이어서 고향에 가야하기 때문에 오는 주일날은 고향교회에 참석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했다. 여기서 이 집사님의 말에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선친이란 표현은 아주 잘못된 말이다. 왜냐하면, 선친(先親)이란 돌아가신 아버지를 지칭하는 말이고 생존 시에는 가친(家親)이라고 해야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집사님의 선친께서”라는 경우도 있는데 이도 잘못된 말이다. 왜냐하면 선친이라는 말은 자신의 돌아가신 아버지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는 어머니에 대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생존 시에는 자친(慈親), 돌아가신 때는 현비(顯妣)라고 지칭해야 한다. 하지만 현대인들에게는 이런 말은 생소한 말이기도 하고 강요할 수 있는 말도 아니다. 솔직히 필자의 경우도 이런 용어는 사용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왜냐하면 본인은 알아도 다른 사람이 모르면 소통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굳이 선친, 가친 또는 자친, 현비 등의 어려운 말들을 하기 보다는 저희 아버지, 저희 어머니 등의 누구든지 알 수 있는 용어로 호칭과 지칭하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호칭을 조금 더 논한다면, 어릴 때는 아버지의 애칭어인 ‘아빠’라고 불러도 문제는 없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 아빠라고 하거나 어머니에게도 어릴 때는 엄마라고 할 수 있지만 장성해서는 어머니라고 고쳐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결혼 후에는 어떨까? 미혼 일 때는 어머니라고 하다가 결혼 후에는 어떻게 호칭해야 할지 당황하는 경우들도 본다. 예를 들어 결혼한 새색시가 맏동서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았다. “동서야? 난데 내일 저녁 먹자, 어머님께서 올라오셨어.” “어머니께서요? 언제요?”라고 했다. 이에 맏동서가 “아니 막내 동서는 어머니가 뭐니? 어머님이라고 해야지”라고 핀잔을 주었다. 이 대화에는 어떤 문제가 있을까? 시어머니를 어머니라고 하면 오히려 더 친근감이 들 수도 있고, 요즈음 같이 높임말에 대한 체계가 없는 때는 별로 큰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아직은 결혼 초기여서 시댁과의 관계가 어려울 수 있기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언어 예절을 갖춘 시어머니는 어머님으로, 시아버지는 아버님으로 호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반면, 시부모가 며느리를 부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흔히들 이런 경우는 ‘아가’, ‘새아가’, ‘어미야, 어멈아’, ‘예야’ 등이 있다. 하지만, 이 중에서‘예야’로 부르는 것은 어조에 따라서는 며느리가 불쾌하게 여길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서 해야 할 말이다. 그렇지만 이런 말들도 상황에 따라서 달라진다. 예를 들어 자신의 며느리에게는 ‘아가’, ‘새아가’, ‘철수 어미(어멈)’, ‘너’로 말할 수 있다. 또한 자신의 부모와 배우자에게 며느리를 지칭할 때는 ‘며늘애’, ‘새아가’와 아이의 이름을 넣은 ‘철수 어미(어멈)’, 아들의 이름을 넣은 ‘철수 댁’, ‘철수 처’ 등으로 말한다. 또한 ‘며느리’는 남의 며느리를 지칭하는 느낌도 있고, 어른 앞에서는 며느리를 낮추는 것이 예이기 때문에 ‘며느리’로 하지 않고 ‘며늘애’로 지칭하는 경우도 많다. 친척에게 며느리를 지칭할 때는 ‘며느리’, ‘며늘애’, ‘철수 어미’, ‘철수 댁’, ‘철수 처’ 등으로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친척 중 윗사람에게는 ‘며늘애’가 가능하지만, 아랫사람에게는 ‘며느리’로 부르는 것이 좋다. 또 하나는 며느리의 친부모인 사돈에게는 며느리를 어떻게 지칭해야 할까? 아이가 없을 때는‘며늘애’로 하고, 아이가 있을 때는 ‘철수 어미’로 지칭하는 것인 옳은 표현이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우리가 가장 흔히 쓰는 가정의 호칭어, 지칭어들도 바로 쓰지 못하는 경우들도 너무 많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간의 따뜻한 사랑의 마음이다. 예를 들면, 며느리가 친정어머니 대하듯 시어머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이런 원칙은 때로는 무시되어도 좋을 것이다. 문제는 상호간의 마음이다. 서로가 신뢰하고 사랑한다면, 약간의 어법에 오류가 있을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무튼, 오늘도 오고가는 서로 존중하고 높이는 말들 속에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하루가 되기를 기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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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인의 용어 사용 32: 높임말(경어), 이대로 좋은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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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거짓은 악마를 불러들이는 초인종
- 얼마 전 목회자 모임이 있어 창원 명서동에 있는 어느 곰탕집을 찾게 되었다. 식당 벽에 큰 문구가 적혀있는데 나의 눈길을 끌었다. “여기서는 국물의 맛을 내기 위하여 일체 프리마나 기타 첨가물을 쓰지 않으며, 첨가물을 발견하시는 손님께는 1억을 배상하겠습니다.” 다수의 사람이 진실하지 못하고 손님들을 속이는 경우가 많다는 증거이다.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궤변에 이런 말이 있는데 “하나님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사자에게 발톱과 이빨을 주었고, 소에게는 뿔을 주었고, 문어에게는 먹물을 주었고, 인간에게는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기교를 주었다”고 하였다. 궤변이지만 의미 있는 말이기에 생각해 보는데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거짓에 위선으로 사는 진실 실종의 시대인 것이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거짓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용한다면 세상은 혼돈의 세계로 빠져 갈 것이다. 나 자신을 속일 수 있으며, 상대방을 속일 수 있다. 그러나 진리의 영이신 하나님 앞에 속일 수가 없다. 영어 단어의 진실을 설명하는 단어 “sin care”는 라틴어 시네 세라(sine cera)에서 왔다. 이 말은 “밀초를 칠하지 않은”이라는 뜻이 있다. 영어로 번역하면 “sun tested”, 즉 "햇빛에 시험해 보다"라는 말이다. 이 말이 생기게 된 것은 고대 도자기 산업이 발달하면서 생긴 단어이다. 진실한 도공은 도자기에 금이 가면 깨어버린다. 그러나 진실하지 못한 도공은 금이 간 도자기에 밀을 칠하여 감춘다. 그것을 실험하기 위하여 햇빛에 비추면 흠집이 보이거나 밀촛물이 녹아 흘러내림으로 거짓은 드러나게 되는데 여기서 나온 말이 라틴어 진실 “시네 세라(sine cera)”이다. “절반은 진실이다”라는 말은 전체가 거짓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거짓을 섞어 탄 진리는 없기 때문이다. 여러 사람이 같은 말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꼭 진실이라고 할 수 없다. 거짓은 아무리 모여도 진실이 될 수 없다. 진실은 잠시 가려져 드러나지 않을 때가 있으나 언젠가는 반드시 그 진가를 발휘한다. 하나님께서는 진실과 거짓을 놓고 선택을 요구하신다. 이 선택은 날마다 시간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옛날 사막을 여행하던 사람들에게 있어 신기루의 존재는 그리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판별할 겨를이 없이 단지 눈앞에 보이는 신기루만을 좇다가 점차 진짜 오아시스와는 거리가 멀어져 결국 물도 없는 사막에서 말라 죽게 되는 것이다. 진실은 악마를 쓸어내는 빗자루이다. 거짓은 악마를 불러들이는 초인종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교훈을 심비에 새겨야 할 것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므로 너희 아비의 욕망들을 행하려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요 자기 속에 진리가 없으므로 진리 안에 거하지 아니하고 거짓말을 할 때에 자기의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라(요8:44). 평생 마귀의 종으로 거짓과 함께 살기보다는 진리의 영이신 주님의 교훈대로 산다면 마음의 평안과 복된 삶을 이루게 될 것이다. 마귀에게서 난 자는 그의 아비의 욕망을 따라 행하므로, 그 역시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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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거짓은 악마를 불러들이는 초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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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종교전쟁
- 아파트에서 근무해 보니 세상에는 정말 많은 종교가 있다는 것을 체감하게 된다. 학교 다닐 때 수업을 통해서 세계 종교를 배웠고, 타 종교를 두고 기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교회에 주로 머물던 내가 다른 신앙을 가진 분들을 실제로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파트에서 수개월 근무 해보니 알려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입주민의 종교의 영역까지 알게 되었다. 「개신교」 개신교 신자는 가장 쉽게 파악이 가능하다. 내가 목사라는 것을 알고 반갑게 인사 나누는 것? 그런 것 없다. 오히려 감추려는 듯 침묵하는 사람이 더 많다. 하지만 결코 숨길 수 없는 증거가 있다. 현관문에 붙여진 교패. ‘순복음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다양하기도 하다. 이분들에게는 관리소장이 목사라는 사실이 어느 누구보다 불편할 수 있겠다 싶다. 같은 편이라 생각했고 조금은 다를 줄 알았는데 실망감도 컸다. 「천주교」 목사를 대하는 태도가 부드럽다. 솔직히 가끔은 ‘오죽 못났으면 목사가 이런 일을 하나?’라는 눈빛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겉으로는 온화하고 예의가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 한 가지. 삶에서 신앙인의 티를 안 낸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지 않는다고!’ 개신교 입장에서는 불편한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는 삶에서 신앙을 드러내며 얼마나 많은 욕을 먹고 있는가! 차라리 신앙을 누군가에게 강요하지 않는 신사적인 가톨릭 신자들이 사회에서 더 인정받고 있다. 「재림교 (안식교)」 미국과 한국을 번갈아 오가며 사시는 멋진 노부부가 있다. 늘 자비로운 미소로 남에게 피해 주기를 꺼리는 분이다. 절대 타인에게 나쁜 말을 하지도 않는다. 1년 중 2개월 정도 한국에 들어와 쉬었다 가시는데 들어오시면 꼭 나를 불러 선물을 나누어 주신다. 아이들 쿠키, 커피, 초콜릿 등등. 커피 한 잔을 나누며 그동안 안부와 아파트 근황을 물어오신다. 교회를 다닐 것 같은 느낌인데. 하지만 내가 목사라는 것을 알면서도 종교에 관련된 질문이 없다. 목사인 관리소장이 불편해서 감추는 걸까? 그렇다면 이렇게 따로 초대하지도 않았을 텐데. 차를 마시며 집안을 슬며시 살펴본다. 달력이 보인다. 가장 아래에 글자가 많다. 익숙한 느낌. 어느 교회를 다니시는 걸까? 오래된 인터폰의 상태를 살피는 척 가까이 다가가 달력을 본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이 멋진 노부부는 안식교인이었다. 「남묘호렌게쿄」 익숙지 않은 종교지만 주변에 신도가 생각보다 많다. 일본에서 창시된 불교인 것 같은데, 사실 잘 모르겠다. 다만 군에서 만난 간부 한 분이 이 종교에 심취해 있었는데 묘한 주문 같은 것을 자주 외우고 요가 같은 독특한 자세를 종종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 아파트에도 있다. 허허실실(虛虛實實). 사람 좋아 보이는 노부부지만 일 처리가 정확하다. 관용적인 말로 허술해 보이지만 만만치 않다. 드러나지는 않지만 철저하게 신앙 생활하는 느낌이 난다. 그냥 그렇다. 더는 알 수 없다. 그 외에도 다양한 종교, 신앙을 가진 분들이 있다. 아파트 현관문에 누가 봐도 주술과 연관이 있는 물건을 걸어두고 협박 문구를 써 둔 사람도 있다. ‘이 물건을 가지고 가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처음에 보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나를 늘 괴롭게 하는 그 아주머니는 호텔을 경영한다고 하더니 주변 입주민들에게 들어보니 이름을 지어주고 돈을 받는 사람이라고 한다. 다행이다. 나는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일까 걱정했다. 「여호와 증인」 늘 다정해 보이는 젊은 부부. 그들은 여호와 증인이다. 정확히 직업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낡은 승합차를 타고 어딘가 봉사하러 자주 다닌다. 왕국회관이 가까워서 우리 아파트로 이사 왔다는 이야기도 우연히 듣게 되었다. 교회 옆으로 이사 온 신앙.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리고 늘 사람을 챙기는 친절함까지 갖추었다. 아파트 물난리가 난 날. 들어온 물과 폐기물을 치워야 했기에 기술보다는 손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재난 상황을 혼자 수습할 수 없어서 입주민들에게 도움을 구했다.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그럴 수 있다.’ 생각하며 주섬주섬 일하고 있을 때. 장갑에 양동이를 들고 이 부부가 나타난다. “목사님,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 주세요.” 이 사람들은 나를 목사라고 부른다. 지나다 아파트 청소하는 나를 발견하면 간식거리를 사다주고 가는 사람들이다.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여호와증인, 당신들이 이겼다! “늘 고생 많으시죠? 저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승강기를 함께 타게 되었다. 인사치레일지 모를 말이지만 큰 위로가 된다. 내가 고생하는 것을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격려가 되었다. 고마웠던 마음을 한껏 담아 건넨 말. 추호도 다른 의도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잠시 어색하게 되었다. “역시! 이렇게 고생하는 사람 곁에는 알아주는 증인이 있어야 한다니깐!” 아, 증인에게 증인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렇게 실례가 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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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종교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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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복음실천 강한명령 받는 집회였다
- 어게인 1973년. 50년 전 ‘빌리 그래함 여의도 전도대회 50주년 기념대회’가 지난 6월 3일 서울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렸다. 그동안 우리들의 귀에 많이 들어온 여의도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1973년 5월30일부터 6월3일까지 5일간 320만 명이 전국에서 여의도 광장에 모여 한국 기독교 부흥의 대역사를 썼다. 필자는 당시 고교를 갓 졸업했고 교회를 한두번 가봤으나 기독교를 전혀 모르는 때 뉴스를 접해도 실감을 못했다. 당시 고1 학생으로 참석했던 아내 덕에 당시의 뜨거웠던 부흥의 함성을 자주 듣곤 했다. 그동안 은혜로 크리스챤이 되고 교회 중직자가 되고 창원극동방송 운영위원으로 섬기면서 당시 통역으로 유명했던 김장환 목사님도 만나면서 당시 장면을 생생히 그려낼 수 있었다. 그로부터 50년, 한국기독교가 세계 속의 기독교 부흥 국가로 발전했다. 이 뿐이랴. 한국교회는 자부한다. 1973년의 여의도 기도 함성이 교회의 부흥과 함께 대한민국을 축복의 나라로 이끌었다. 50년 전 당시 여의도 광장은 먼지가 흩날리는 맨땅이었다. 아무 편의 시설 없이 매일 100만이 넘는 인파가 몰렸던 것은 기적이었다고 당시 참석자들이 말하고 있다. 이후 급속도로 대형 교회가 곳곳에 서게 되고 부흥의 불길은 전국으로 확산됐다. 다음세대의 선교를 이끈 CCC(대학생선교회) 맴버들의 눈물겨운 봉사활동을 필자는 많이 들은바 있다. 그리고 이후 CBMC(한국기독교실업인회)역시 여의도 집회 봉사자들이 많이 주축이 되어 조직 발전, 지금도 선교봉사활동이 왕성하다. 50년이 지난 이날 경남에서도 수십 대의 대형버스가 줄지어 서울로 향했다. 필자는 우선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은혜를 받고자 부푼 마음으로 동행했다. 집회장은 축구 경기장이지만 은혜의 찬양이 행사 초입부터 가득 차 넘쳤다. 영상에 대비되는 당시 현장의 그림과 이 시간 펼쳐지고 있는 집회 현장은 많은 회한을 그려냈다. 먼지가 바람에 흩날리는 그때 그 현장에 어떻게 저렇게 사람이 많이 몰렸을까. 그리고 우리는 50년간 어떻게 살았는가. 저마다 대비되는 그림만 보고도 숙연해지고 눈물이 났다. 모든 것이 은혜였음을 울리는 특별찬양의 가사가 모든 사람들의 심령을 울렸다. 이날 이현장에 사람들은 기껏 7만여 명, 1만 명 찬양단이 경의롭지만 50년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드디어 초청강사 프랭클린 그래함 목사의 설교가 시작되었다. 강사의 설파는 처음부터 복음이었다. 우리의 한 생명은 온 세상 보다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주인은 오직 여호와께 있습니다. 강사의 설교에서 머리를 때리고 잡힌 것이 있었다. 50년 전 아버지 빌리 그래함의 설교 또한 오직 복음이었다. 우리의 생명은 오직 여호와께 있습니다. 우리는 형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합니다.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 당시 설교 녹음을 다시 들어 보면 같은 말, 같은 뜻이었다. 집회를 마쳐가는 중 가슴을 때리는 기도 제목이 있었다. 말미에 함께 올리는 통성기도회 시간 강조된 “한국교회 촛대를 주님 옮기지 마옵소서” 우리는 뜨겁게 기도했다. 1000만 한국 기독교는 지금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신가. 가끔 이러한 생각이 든다. 축복의 산물 물질 풍요의 시대, 우리는 사명의 영성을 지키고 있는가. 하나님 임재의 바로미터 정결 성결의 영성이 흩날리고 있는지 눈물 흘리며 돌아보아야 한다. 이제 동성애 합법화, 마약천국, 이단미신의 미화 그리고 공산사회주의의 이념 혼돈에서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한국 교회는 변함없는 복음을 말로만 하지 말고 간절함의 순종과 행함의 주님 도움의 손길을 만나야 할 때임을 느끼게 하는 귀한 집회였다. 복음을 행하라는 강한 울림을 강하게 내리꽂는 모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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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복음실천 강한명령 받는 집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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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지 목사] 그린청지기로 살라(창 1:26-31)
- 지구는 지금 무서운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지구 곳곳에서 폭염과 가뭄, 홍수와 태풍 등으로 인해 수많은 생명들을 한 순간에 죽음과 고통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상이변으로 인한 인명과 재산상의 피해, 알 수 없는 질병으로 인한 고통으로 지구촌 곳곳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만이 아니라 수많은 생물들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지구온난화에 대해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지구온도가 섭씨 1.1도 상승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만약 섭씨 1.5도로 상승하면 생물종의 10%가 사라지고 섭씨 3도 이상 오르면 40-70%가 멸종된다고 보고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국제사회가 지구 온도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전 세계 195개국이 이산화탄소 감축노력이 시급하다고 경고했습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는 지난 3월 19일에 스위스 인터라켄에서 열린 총회에서 기후 위기의 시급성을 강조한 'IPCC 제6차 평가보고서 종합보고서'를 만장일치로 승인했다고 밝혔습니다. IPCC는 “온난화를 제한하려면 이산화탄소를 포함한 온실가스 배출이 탄소제로가 되어야 한다. 2030년까지 전 세계가 온실가스 배출량을 적어도 45% 줄이고 2050년까지 탄소제로 선언을 해야 한다”고 권고한 데 따라 유럽국가들을 필두로 많은 나라들, 우리나라도 이미 2050년까지 탄소제로를 달성하겠다고 선언한 상태입니다. 문제는 현재의 화석연료 인프라를 그대로 활용할 경우 예상되는 이산화탄소 잠재 배출량은 5년 내에 깨질 확률을 98%, '1.5도 마지노선'이 뚫릴 확률을 66%로 분석했습니다. 10년안에 그냥 이대로 노력하지 않으면 1,5도가 아니라 섭씨 5도까지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원래 온실가스 누적배출량을 살펴보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국가 대부분이 선진국입니다. 그리고 최근 개발도상국의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크게 증가하면서 지구온난화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구온난화가 가속화된다면 상상하시는 것, 그 이상 더 많은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지구온난화 피해 사례에 이야기하면, 1. 녹고 있는 빙하와 만년설 빙하가 녹으면 해수면이 상승하게 됩니다. 현재 그린란드와 남극에 있는 빙하가 빠른 속도로 녹아내리며 급격한 해수면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만약 그린란드에 위치한 빙하가 다 녹아 사라지게 된다면 전 세계에 있는 해수면이 급속하게 상승하게 됩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된다면 섬나라들은 해수면의 상승으로 인해 국토 전체가 물에 잠기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10년안에 인천공항과 김포공항, 부산 같은 낮은 곳이 다 바닷물에 잠길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실제로 남태평양에 위치한 섬나라 "투발루"는 벌써 국토 전체가 물에 잠기고 있어서 다른 나라로 이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2. 질병의 증가 북극권 지역에 포함되는 알래스카와 시베리아 등의 지역의 빙하의 땅이 지구온난화로 인해 빙하가 녹으면서 지표면의 균열로 산사태가 발생하고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땅밑에 있던 시신들이 올라오면 거기에 감추어 있던 바이러스, 병원균, 세균 들이 새롭게 퍼지게 된다는 합니다. 실제로 지구온난화로 인해 지난 30년 동안 30가지 이상의 새로운 질병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코로나도 그 가운데 한 종류에 불과한 것입니다. 3. 온갖 자연 재해가 증가 가뭄과 폭염, 폭우와 홍수, 폭풍과 해일, 산불입니다. 예를 들면 영상 50도로 넘어서는 뜨거운 폭염, 작년에 인도를 비롯한 유럽에서 나타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또 미국의 테네시주의 멤피스는 영하 54도까지 급강하했습니다. 중국 역시 작년에 영하 50도로 내려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추위를 겪었습니다. 이처럼 기후변화로 인해 세계곳곳에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난 해 파키스탄은 홍수로 나라의 3분의1이 물에 잠기는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작년에 기록적 폭우로 인해 서울 뿐 만 아니라 전국 곳곳이 물에 잠겨 고통을 겪었습니다. 방글라데시 역시 매년 홍수피해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8월 여름에 패딩을 입을 정도로 춥고 10월에는 여름처럼 뜨거웠다는 것입니다. 중국은 전체면적의 27%가 이미 사막화되었고 매년 서울시 면적의 3배 정도에 해당하는 면적이 사막화되고 있습니다. 내몽고지역의 마을들은 10년 전만해도 푸른 산과 초원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지금은 모래바람이 휘날리는 사막지역으로 바뀌었습니다. 또 그로 인해 우리나라도 그 어느 때보다도 심하게 황사로 인해 미세먼지, 초미세먼지로 마스크를 쓰고 살아야 할 정도로 공기오염이 심각하게 빈도가 늘어나고 그 강도가 세지고 있습니다. 이 황사는 온갖 오염물질을 몰고 와 오늘 우리의 생활환경과 건강에 큰 위협이 되고 있습니다. 4. 오존층 파괴 지표면에서 상공 10-50km에 있는 성층권에는 오존(O₃)기체가 있습니다. 이 오존층은 태양빛 안에 있는 자외선을 흡수하여 지표면에 있는 생물들을 보호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오존층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냉장고나 에어컨 등에 사용되는 냉매용 기체인 프레온가스가 오존층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오존층이 파괴되면 지표면에 도달하는 자외선이 늘어나고, 이 자외선이 각종 생물의 세포를 파괴합니다. 자외선을 쏘인 생물체는 세포가 파괴되어서 죽거나, 기형이 됩니다. 사람의 경우에는 피부에 검버섯이 생기고, 피부암, 백혈병, 백내장 등의 질병을 일으킵니다. 오존층이 1% 감소되면 자외선이 2% 증가하고 피부암은 5-6%가 증가하여 전 세계적으로는 환자가 약 20만명이 증가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외에 식물에도 악영향을 주어서 오존층이 감소하면 수확량이 감소하고 수확물의 질도 떨어집니다. 이처럼 지구온난화는 뜨거운 재앙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오고 있습니다. 지구온난화, 그 불편한 진실 앞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대로 가면 우리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세상을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놓고 말게 될 것입니다. 아니 사람뿐 아니라 그 어떤 생물체도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을 만들어놓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만드신 세상을 파괴하는 커다란 범죄인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맞서는 일입니다. 창세기 1장에 계속 반복되는 말씀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만드신 세계를 보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시고 너무 기뻐하셨습니다. 빛도 아름다웠고 땅도 바다도 아침과 저녁도 아름다웠습니다. 지으신 모든 식물과 자연들이 보기에 심히 좋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시고 그 모든 피조된 세계를 맡기시고 돌보게 하셨습니다. 창1:28“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잘 다스려라 잘 보살피고 돌보아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을 관리하고 보전하는 청지기의 책임을 맡기신 것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소유를 맡아서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청지기가 빠지기 쉬운 유혹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맡은 것을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즉 자신을 주인으로 여기는 착각입니다. 다른 하나는 맡은 책임을 소홀히 하는 게으름입니다. 세상과 자연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선악과는 바로 그의 상징이었습니다. 다 먹어도 이것만은 절대 먹지 말아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그런데 인간은 그것을 먹고 주인이 되고 싶어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고 청지기임을 쉽게 잊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사는 지구,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그것이 사람들의 생명까지도 위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으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는 현재 진행중입니다. 예를 들면 지구의 허파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아마존의 그 울창했던 열대우림들이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점점 사라져가고 지구는 급속하게 자체 정화능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일찍이 보았던 세상의 재난이 오늘 우리 앞에서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4]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25]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렘 4:23-25) 무슨 말씀입니까? 땅이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산성화가 가속되었습니다. 무분별한 개간으로 수많은 밀림들이 사라지고 또한 제초제와 농약으로 땅은 병들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땅에서 생산되는 식물들도 믿고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릴 적에 보았던 그 아름다운 은하수를 볼 수 없게 된 것이 꽤 오랜 옛날같습니다. 별들이 점점 사라지고 하늘이 어두워졌습니다. 공해물질로 오존층은 파괴되었고 대기오염은 심각한 지경이 되었습니다. 산들은 잘려 나가고 나무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철따라 찾아오던 새들도 이제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산과 들, 강과 바다, 어디가나 인간이 버린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오늘의 현실입니다. 오늘의 현실을 이미 오래전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미 경고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자연의 그린청지기로서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회개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회개는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내가 주인되어 내 욕심을 따라 생각없이 살아왔던 모든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죄의 본질은 자기 사랑입니다. 딤후 3:1 이하에 보면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자기가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세계의 중심이 자기라고 생각하는 자기 교만, 죄성이 우리가운데는 있습니다. 이러한 자기 사랑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는 내가 주인이 아님을 인정하고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맡겨주신 자연을 사랑하고 아끼고 지키는 그린청지기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린 청지기는 지구를 지켜야 합니다. 지구를 아끼고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린청지기입니다. *당신은 그린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지구가 뜨거워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지구의 열을 내리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충성된 그린 청지기가 될 수 있습니다. 열이 올라 몸살하고 있는 지구를 식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먼저 그린 청지기로서 다이어트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생활 속에서 이산화탄소라고 하는 CO2다이어트입니다. CO2는 에너지를 사용할 때 나오는 찌꺼기를 말합니다. 우리가 생활 속에서 편리하게 사용하는 모든 에너지에는 CO2가 배출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CO2는 지구의 온도를 높이는 주범입니다. 그러기에 지구를 식히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 CO2의 양을 줄여야 합니다. 생활 속 CO2다이어트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쓰지 않는 가전기기는 꼭 플러그를 빼놓습니다. 냉난방을 적절하게 해야 합니다. 항상 쓸데없이 불이 켜져 있는지를 확인하고 방을 쓰고 나갈 때는 꼭 불을 끄고 냉난방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물을 적게 쓰면 그만큼 CO2를 줄일 수 있습니다. 수돗물을 만들고 공급하는 과정에서 전력이 많이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웬만한 거리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도록 합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좋습니다. 우리 땅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먹는 것입니다. 수입하는 수송연료를 줄일 수 있고 환경제품을 사용하면 좋습니다. 환경마크가 부착된 물건을 사용하고 포장을 줄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대로 나무를 많이 심고 돌보는 것입니다. 나무 한 그루는 하루 4키로그램, 연간 1톤의 CO2를 흡수한다고 합니다. 일회용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면서 사용하고 쓰레기를 버릴 때는 반드시 재활용할 수 있도록 분리수거를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를 잘 돌보고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는 그린청지기들입니다. 충성된 그린 청지기가 되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지구를 아름답게 보존하고 후손들에게 좋은 환경을 물려줄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에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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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지 목사] 그린청지기로 살라(창 1:26-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