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

실시간뉴스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오피니언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기독교인 생활용어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오성한 목사] 기름 부음(1)
    우리는 앞의 글에서 기름 부음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요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기름 부음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성령님이 하게 하시는 것이다. 성령님이 오신 이유는 우리가 한 번 체험하고 기분 좋게 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마음을 뜨겁게 하는 일시적인 일을 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다. 성령님께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오셨다. 성령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목적이 있다. 그것은 구속을 이루기 위함이다. 구원을 이루기 위함이다. 구원을 누구를 통해 이루는가? 예수님을 통해 이룬다. 구원은 복합적이다. 겨우 천국 가는 것이 구원이 아니다. 구원은 천국 가서 앞으로 누릴 것만이 구원이 아니다. 구원은 천국 가는 것 뿐 아니라 이 땅에서 믿는 자의 권세를 누리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왔다 가심으로 구원은 이루어 졌다. 구원이 천국 가서 누리는 것일까, 지금 누리는 것일까? 지금 누리는 것이다. 성경의 약속은 앞으로 우리가 죽어서 천국가면 누리는 축복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땅에서 나와 아무 상관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빨리 죽는 것이 복일 것이다. 구원은 이 땅에서도 누리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성령님이 이루어 놓으신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구속 사역을 믿게 하는 것이다. 이미 완성시켜 놓은 구속의 회복을 드러내시는 사역을 돕기 위해 오신 것이다. 기름 부음이라는 말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능력을 우리 속에 부어 주시는 것이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예수 믿는 일이다. 예수 믿는 일이 우리 힘으로 안 된다. 죽었던 우리가 살아나는 일은 생명을 주셔야 살아 날 수 있다. 사람이 생명을 만들 수 없다. 물에 빠진 사람이 자기가 스스로 머리를 잡아당긴다고 나와지는 것이 아니다. 죽음의 물에 빠진 자를 주님은 건지러 오셨다. 성령님은 가르쳐 깨닫게 하시고 생각을 바꾸시러 오셨다(요14:26).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성령님께서는 하시는 것이다.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자가 성령이 아니고는 할 수 없다고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서 말씀했다. 내가 예수님을 주로 믿는 것과 성경을 볼 때 "참으로 놀라운 말씀이구나"하고 믿어지는 것은 내 힘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성령의 역사이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 안에는 이미 기름 부음이 있다. 간절히 성령의 도우심을 믿으며 말씀을 본다면 기름 부음은 나타나게 되어 있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라고 하신다.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는데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자가 없다는 말이다. 성령께서만이 가르치실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말씀이다. 기름 부음으로만이 진리를 가르쳐 내신다는 말씀이다. 영적인 세계는 아무도 가르칠 자가 없다. 예수님의 말이 영이다. 성령의 기름 부음만이 예수님의 말씀을 가르치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기를 집중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요14:26)라고 하셨다. 또 성령님은 기름 부음으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14:26)라고 하셨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기억나게 하시고, 가르쳐 주신다. 성령님은 지금도 우리 안에서 그렇게 하신다. 말씀과 기도로 성령님을 의지하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생각나게 하신다는 것을 믿어라. “성령님, 오늘도 가르쳐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성령님, 오늘도 생각나게 하셔서 사역하심을 감사드립니다.”라고 자는 자주 고백한다. 그리고 성령께서 나를 가르치시고 생각을 주심을 믿고 산다. 성령님은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하신다. 믿는 일을 우리가 할 수 없다. 또 예수 이름으로 나타나는 능력들을 우리가 할 수 없다. 성령님은 예수님께 대해서 가르쳐 주신다. 예수가 믿어지는가? 그렇다면 기적이다. 어떻게 처녀의 몸에서 예수님이 태어났다는 것이 믿어지냐는 말이다. 말씀으로 천지 창조했다는 것이 믿어진다는 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다. 홍해가 갈라져 물이 쌓였다고 했다. 이런 것들이 하나도 의심이 없이 믿어지는 것은 성령의 기름 부음의 역사이다. 그래서 우리 안에는 서열의 기름 부음이 있다. 하나님의 활동하시는 강력한 능력이 있다(엡1:19). 오병이어의 기적이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믿어지겠는가? 그러니 예수 믿어지는 것은 놀라운 기적 중의 기적이다. 당신이 예수를 믿는다면 당신에겐 성령의 기름 부음이 말씀대로 거한다. 그 기름 부음이 오늘도 당신을 가르치심을 믿어라. 당신은 좋은 스승을 둔 제자다. 자부심과 당당함을 가질 수 있다. 할렐루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것은 성령의 기름 부음의 사역이다. 말씀과 기도로 많이 깨닫게 해 주심을 받아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는 일은 성령의 역사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2023-05-25
  • [오태열 목사] 우리의 도피처
    도피처란 도망하여 몸을 피하는 곳으로 매우 부정적인 말이다. 실제 도피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면 연관 검색어로 “비열한, 소심한”이 뜬다. 그래서 치열한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요즘 사람들에게는 도피는 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앞만 보고 나가야 하는 사회 속에서 잠깐 멈추어서는 것조차 부담이 되어버린 현실이 씁쓸하다. 삶 속의 스트레스가 극심해질 때마다 우리에게도 도피처가 필요하다. 사람들 대부분은 피시방, 노래방, 술집, 산을 도피처로 삼지만, 도서관이나 서점을 도피처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책을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점 자체의 고요함과 따뜻한 분위기가 감성에 적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임경선 작가는 자신의 에세이 집에서 “카페”라는 공간을 정의하기를 불필요한 마음의 짐을 들고, 머릿속을 비워내고,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새로움의 힘을 얻어가는 곳이라 하였다. 경쟁이 치열한 현실 속에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쉬어갈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 일상 속 혼자 조용히 있을 곳이라면 도피처로 족하리라 생각된다. 도피는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를 찬탈한 태종 이방원이 싫어 깊은 산속에 들어간 생육신들과 같은 현실 도피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도피처는 절대 소심하고 비겁한 자들이 찾는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한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에너지를 충전시킬 수 있는 곳, 불안해진 마음을 달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라야 한다. 구약성경에 하나님께서 부지중에 실수하여 사람을 죽인 과실 치사범의 생명을 보존시켜 주시고자 도피성 제도를 두게 하였다. 도피성이란 히브리어로 이르 미클라트라는 말로써 “받아들이는 성읍”이라는 뜻인데 살인한 사람을 받아들여 그에게 안전을 보장해주는 장소이다. 그러나 아무런 기준 없이 살인자를 다 받아주는 것이 아니라, 비고의적인 살인자 곧 과실 치사 자의 경우에만 해당 되었다. 이 도피성은 요단강을 중심으로 동쪽에 3개, 서쪽에 3개가 있었다. 이스라엘 전역에서 누구든지 사고가 나면 도피성으로 빠르게 도망할 수 있도록 잘 보이는 언덕 위에 세워져 있었고 길도 넓게 잘 정비하여 두었다. 도피성에는 유대인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 속에 거류하는 거류민과 이방인들도 들어갈 수 있었다. 이는 “구원의 포괄성”을 의미한다. 구원은 유대인들이 오해한 것처럼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혈연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열려 있었다. 내게도 도피처가 있다. 고향의 바다이다. 목회가 힘들고 어려울 때, 힘든 선택을 해야 할 때와 심한 고독이 나를 짓 누를 때에는 고향의 바다를 찾는다. 이곳은 나의 어린 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는 곳이며 기도의 처소였다. 바닷가를 거닐며 상념에 잠길 때, 과거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고향의 바다는 삶에 지친 나의 몸과 마음을 포근히 품어주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곳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2023-05-25
  • [박봉석 목사] 세상에 묻지 않는 기도
    한 증기선이 캐나다의 뉴펀들랜드 섬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 날은 수요일이었는데 바다에 안개가 너무 많이 끼어서 배는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승객이 선장을 찾아와서 묻습니다. 죠지 뮬러 목사님이었습니다. “선장님, 저는 토요일 오후까지 퀘벡에 도착해야 합니다. 그 때까지 그 곳에 배가 도착할 수 있을까요?” 선장은 단호한 어투로 “불가능합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 대답을 들은 뮬러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저는 평생 동안 약속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습니다. 정말 불가능한가요?” 그 물음에 선장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저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만 지금으로서는 도리가 없군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뮬러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함께 기도합시다.” 선장은 이 같은 상황에서 난데없이 기도를 말하자 뮬러 목사님을 이상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지금 안개가 얼마나 짙은 지 안 보이십니까? 이런 상황에서 무슨 기도를 한다 말입니까?” 그 선장에 말에 뮬러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내 눈은 안개가 얼마나 짙은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을 움직이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고 있소.” 그렇게 말을 하고 목사님은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뜻에 합당하다면 이 안개를 5분 내에 걷어주십시오. 퀘백에서의 약속을 하나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그는 그 불가능하다 하는 상황에서도 담대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그가 기도를 마치자마자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교회의 집회를 위해 퀘백으로 가는 중이었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그렇게 놀랍게 응답하시고 그가 감당해야 할 사명의 길을 열어주셨던 것입니다. 필자는 기도하면 무조건 하나님이 들어 주신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뮬러 목사님의 기도는 세상에 묻지 않는 기도였습니다. 즉 세상의 상황에 구애 받는 기도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세상에 상황을 초월하여서 오직 자신에게 사명을 주신 하나님만 믿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늘 기도하는 여러분, 기도하면서 세상에 묻지 마십시오. 내가 기도하는 제목이 꼭 기도해야 할 제목이라는 확신이 들면 세상의 모든 불가능성을 초월하여서 기도하십시오. 6·25전쟁 때 국군으로 참전한 한 장로님의 간증입니다. 장로님 마을에 북한군이 들이닥쳤습니다. 당시 중학생이던 장로님은 잡히면 의용군에 끌려갈 것이니 급히 낟가리 속에 숨었습니다. 북한군은 집집마다 뒤지며 젊은이들을 끌어냈고, 장로님이 숨어있던 낟가리를 대검으로 찔렀습니다. 칼끝이 가슴 바로 앞까지 오기도 했습니다만 장로님을 찌르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죽이시지 않으면 죽지 않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나를 지키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북한군이 떠나지 않고 며칠 동안 그 집에 머무는 바람에 낟가리에서 나올 수도 없었습니다. 중학생 나이인지라 얼마나 배가 고팠겠습니까? 그러다 문득 하늘을 보니 까마귀가 날아다니는 것이 보였습니다. 장로님은 문득 교회에서 배운 성경에 나오는 한 사건을 기억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에게 까마귀가 음식을 물어다 준 것이 생각이 났던 것입니다. 장로님은 지금 세상에도 그런 일이 있을까라고 생각하며 머뭇거리지 않고 그 즉시 기도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 아버지, 엘리야를 먹이신 것처럼 제게도 먹을 것을 좀 주세요.” 그런데 기도가 끝나자마자 까마귀가 아니라 마당에 있던 암탉이 갑자기 낟가리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낟가리 안에다가 알을 낳는 것입니다. 따끈따끈한 생달걀이었습니다. 장로님은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에 즉시 응답해 주신 것이 너무 신기해서 그 달걀을 먹으며 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암탉이 또 여기다가 알을 낳게 해주세요.”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북한군이 있는 동안 암탉은 매일 아침 낟가리로 들어와서는 신선한 달걀을 낳고 가는 것입니다. 북한군이 떠나자 장로님은 숨어있던 낟가리에서 나왔고, 그렇게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을 체험한 것이 평생의 간증이 되었다고 합니다. 기도는 세상에 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즉 기도는 세상의 가능성에 기대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의 모든 불가능성을 넘어서 얼마든지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신앙과 삶
    2023-05-25
  • [신재철 목사] 아파트 순찰
    “소장님, 어디 공사 있나요? 너무 시끄러운 소리가 계속 나요.” 아파트 내 크고 작은 공사가 있으면 보통은 관리실에 신고한다. 공용 부분의 공사는 물론이고 세대 내 리모델링 공사를 진행하더라도 관리실에서 모를 수 없다. 그런데 공사하는 소리가 난다는 민원에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신고가 안 된 공사가 있었나? 확인해 봐야겠군.’ 어차피 늘 있던 아파트 순찰이 오후에 있던 터라 점심 식사를 서둘러 마쳤다. 승강기 12층을 눌러 가장 위에서부터 계단을 타고 내려오며 각 층을 확인한다. 1층 출입구 비밀번호를 어찌 알았는지 동네 마트 광고지가 세대마다 현관에 붙어 있다. 그냥 둬봐야 입주민에게도, 붙여둔 알바에게도 좋을 것이 없다. 내려오며 하나씩 수거. 바닥에 떨어진 마스크도 줍고. 갑자기 비가 올 수도 있으니 열어둔 창문도 닫는다. 1~2라인에는 공사 흔적이 없다. 골치 아픈 상황도 없다. 땡큐. 옆 라인을 살피기 위해 12층에 올라간다. 문이 열리며 몹시 당혹스러운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할머니 한 분이 얇은 옷 하나만 걸치고 채소를 현관에 풀어둔 채 다듬고 있다. 양도 엄청나다. 이곳은 계단과 이어지는 공용 현관인데 여기서 뭐 하는 건가 싶지만 당황하지 않은 척 안부 인사를 드린다. 당황하지 않은 표정과 다르게 총총거리며 속히 아래층으로 걸음을 옮긴다. 가득 쌓인 채소를 보니 떠오르는 엉뚱한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난다. 나도 관리인 다되었네. ‘음식 쓰레기통 금방 차겠구나.’ 몇 층 내려가지 못하고 다시 걸음이 멈춰진다. 할머니 한 분이 나를 보자 잘 만났다며 잠시 들어와 보라 하신다. 집안의 소소한 일을 자주 문의하시는 분이라 내심 긴장된다. ‘이번에는 무슨 일일까?’ 재촉하시는 소리에 따라 들어가 보니 텔레비전이 안 나온단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며 좀 봐달라고. 나라고 뭐 아나. 그냥 이리저리, 집에서 하듯이 만져본다. 셋톱박스 확인하고, 선을 다시 연결해보고. 문제를 찾지 못하며 끙끙거리다가 통신사에 전화를 걸어 겨우 해결을 한다. 휴, 일단 해결은 했다. 시원한 거 한잔하고 가라는 어르신을 뒤로한 채 얼른 집을 나선다. 더 앉아 있다가는 집안 가구를 옮겨야 할지도 모르기에. 계단을 내려오며 몇 분의 입주민, 몇 건의 민원과 더 마주한다. “요즘 계단에서 냄새가 나요.” “위층의 에어컨 물이 자꾸 떨어져요.” “건너편 고물상 못 쫓아냅니까?” 관리소장은 슈퍼맨인가? 종류도, 난이도도 다양한 일들과 매번 마주한다. 단지 12층을 내려왔을 뿐인데 진이 빠진다. 내 체력이 문제인지, 사람들과 접촉이 문제인지 모르겠다. 40세대의 크고 작은 민원을 받아내다 보면 경험치는 올라가지만, 기력은 소진된다. 태극권의 고수처럼 물 흐르듯 흘려보내야 할 텐데 아직 내게는 그만한 내공과 기술이 없다. 만신창이가 되어 관리실에 도착한다. 잠시 의자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보며 충전. 얼마지 않아 돼지국밥집을 운영하시는 입주민이 나를 큰 소리로 부르신다. 아주 밝게 웃으시지만 나는 그 미소의 의미를 경험상 이미 알고 있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보이는 나의 미소가 어쩐지 억지스럽다. “어이~ 신소장.”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2023-05-25
  • [조희완 목사] 승리의 비결 (삼상7:3-11)
    전쟁 영화를 보다보면 항상 들을 수 있는 말이 있는데 “D-day”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공격을 개시하는 “중요한 날” 혹은 “결정적인 날”이라는 뜻입니다. 세계적인 신학자 <오스카 쿨만>이 말하기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D-day와 V-day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D-day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초림하셔서 사단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준 날이고, V-day는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성도들이 완전히 승리하는 날을 가리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D-day와 V-day 중간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 두 Day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가 힘써서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선한 싸움을 잘 싸우는 사람들이 V-day에 승리의 주인공들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요한계시록에 보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우고 승리하는 자들에게 승리의 면류관을 씌워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신앙이 퇴보되기 딱 좋은 시대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의 취미생활이 아닙니다. 지옥과 천국이 달린 문제이고, 천국에서 영생의 복락을 누리느냐 지옥에서 고통과 형벌을 받느냐가 달린 문제로서 인생 최대의 급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믿던 안 믿던 지옥과 천국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정하던 안하던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가고 안 믿으면 지옥에 갑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은 다 소홀히 하더라도 신앙생활만큼은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신앙생활을 승리해야 하겠는데 어떻게 하면 승리할 수가 있을까요? 본문 말씀에 그 승리의 비결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영적인 구별은 승리의 비결입니다.(3-4) 둘째로, 믿음의 기도는 승리의 비결입니다.(5-8) 셋째로, 믿음의 예배는 승리의 비결입니다.(9-11) 우리 모두 사탄 마귀와의 영적 전쟁을 승리하고 하나님 앞에 서기를 바랍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2023-05-25
  • [이정희 목사] 높임말(경어), 이대로 좋은가? (3)
    I. 서언(序言) ‘목사님 한국말은 너무 어려워요’. 이 말은 필자가 시무하는 교회에 다니는 필리핀에서 온 다문화 가족 중 한 여자 성도의 말이다. 필리핀에서는 기자 생활도 했고 교육수준이 상당히 있는 엘리트이지만, 우리 한국어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말을 처음 배울 때는 어렵지 않다.‘슬기로운 사람은 아침을 마치기 전에 배울 수 있고,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다.’는 말처럼 아주 쉽고 과학적으로 잘 되어 있다. 또한 소리로 표현되는 언어 중에 한글은 11,000개 이상이고, 일본어는 300개, 중국어는 400개 정도이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란 말대로 너무 발달되어 있다 보니 외국인이 배우기로는 아주 어렵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외국인 가장 어려워하는 말 중 하나는 요즈음 계속 논하고 있는 높임말이다. II. 높임말이 어려운 이유 높임말이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지난 호에서 논한 대로 높임말의 체계와 구조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외국어 중에는 우리 국어처럼 사회계층, 지위, 연령, 성별에 따라 화법이 구분되는 언어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어권에서는 상대방을 부를 때 남녀노소 구분 없이 2인칭인 ‘You’ 라고 한마디만 해도 거의 통한다. 하지만, 우리 한국어는 그렇지 않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부름말은 각각 다르다. 예를 들어 동료나 아랫사람에겐 ‘너’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이나 윗사람에게 영어식대로 ‘You’ 라고 했다가는 큰일 날 것이다. 이건 1인칭 ‘I’ 도 마찬가지다. 대화하는 상대방에 따라 ‘내가’, ‘나는’, ‘저는’, ‘제가’ 등 여러 용어들을 쓴다. 그러다 보니 외국인들에게는 아주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는 외국인 뿐 아니라, 현대 이 시대의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다. 높임말에 대한 교육을 별도로 받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높임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필요성도 별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떤 유명인은 자신의 칼럼에서“현시대에 있어서 높임말은 필요 없다. 오늘날의 국제화 시대에 계속 높임말을 강조하면 많은 소통의 문제가 생긴다. 국제 관계나 남녀노소간의 소통에도 그러하다. ‘공자가 죽어야 산다.’는 말처럼 높임말의 강조는 많은 국익의 손실을 가져올 뿐 아니라 시대착오적인 일이다.”라고 했다. 이상의 주장은 한편으로는 옳은 말이다. 실제로 높임말 때문에 소통의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높임말은 지난 호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나라 고유의 미덕일 뿐 아니라, 우리말의 우수성을 세계 속에 자리매김하는 또 하나의 국가적 위상이요 한류열풍을 가져오는 수단이다. 그 하나의 증거로 지금 우리 한국어는 세계 언어 중 가장 우수한 언어로 인정받고 있다. 2013년 태국에서 개최된 ‘세계문자 올림픽’에서 우리말은 당당히 금메달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국어의 날을 우리나라의 한글날인 10월 9일로 정하기 도 했다. 그리고 지금 우리 한국어 사용 인구수는 세계 12위로 되어 있다. III. 결어 이상으로 볼 때 우리 한국어는 국익의 손실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언급한 대로 세계 속에서 한국의 위상을 더 높이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보물인 것이다. 하지만, 세계 속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높임말은 우리 사회,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 있어서도 하나의 거추장스러운 걸림돌이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어느 사회를 불문하고, 특히 다양한 계층이 모여 있는 교회에서는 최소한의 예의는 반드시 있어야 될 것이고, 이를 잘 이행할 때 이 사회 속에서 올바른 높임말 하나로도 아름다운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기독교인 생활용어
    2023-05-25
  • [최호숙 목사] 아라페시 현상(現想)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사상가인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교육의 위대함에 대해 명언을 남겼는데 “식물은 재배(栽培)에 의하여 식물다워지고, 사람은 교육(敎育)에 의하여 사람다워진다”고 하였다. 시골에 농부들이 호박순이 나오면 주인이 그 호박순을 동쪽으로 돌려놓으면 그 호박순은 동쪽으로 뻗어나간다. 나팔꽃도 주인이 어떤 모습으로 순(筍)을 돌려놓는가에 따라 성장 방향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런 원리를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아이들에게 쉐마교육을 하였다. “이스라엘아 들으라(쉐마 이스라엘)...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 이 사상을 교육받았기 때문에 평생 여호와를 사랑하는 신앙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인류학자 마거릿 머드(Margaret Mead)는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연구하기 위하여 남태평양을 중심으로 한 오지 마을들을 찾아다니며 평생 연구에 몰두했다. 연구 중 뉴기니섬의 아라페시족과 문두구머족의 종족을 연구한 결과 같은 지역에 사는데 두 종족의 성격 기질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두구머족 사람들은 남자든 여자든 성격이 난폭하고 호전적인 반면에 아라페시족 사람들은 온순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원인은 어린아이를 양육하는 근본적 방식의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문두구머족 엄마들은 아이를 양육할 때 거친 바구니에 넣어 등에다 메고 다니며 양육을 했기 때문에 아이는 어머니와 피부 접촉도 단절, 대화도 단절, 만질 수 있는 것은 거친 바구니 밖에 만질 수 없었다. 이런 과정에 성장한 아이는 난폭하고 거친 성격의 소유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반대로 아라페시족의 엄마들은 아이를 앞가슴에 매어 달고 다니며 양육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이는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느끼고 젖꼭지도 만지고 대화도 하고 서로의 교감이 있어 온화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아라페시족 사람들의 삶 가운데 발견한 것은 그들이 사냥을 하다가 상처를 입거나 사고로 인하여 상처를 입었을 경우에 마을 사람들에게 자신의 상처를 공개하고 다닌다. 그러면 마을 사람들이 서로 공감해 주고 아픈 고통에 참여해 주고 위로해 주고 그 고통의 감정에 호응함으로써 서로 간에 상처와 불행을 증발시켜 정서적으로 안정을 되찾고 회복하는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마가릿 머드는 아라페시 현상(現像)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아라페시 현상은 “개인이 받은 상처와 고통을 집단에 알리므로 그 집단은 그 사람의 상처와 고통에 호응하고, 위로해 주며 그 감정에 동감함으로 각자의 상처와 불행을 증발시켜 서로가 안정을 되찾는 현상”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공연장에서 볼 수 있는데 대중가요의 대부분은 사랑에 실패하고 배신, 눈물, 상처로 얼룩진 노래들이 많다. 그래서 대중 가수가 노래를 부를 때 그 가수의 감정을 청중들이 듣고 공감하고 응어리진 마음을 서로 회복하게 되는 아라페시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또한 기독교 간증자가 자신의 과거 고통, 실패하였던 경험을 간증하면 성도들이 그것을 듣고 그 고통과 실패 경험에 공감하며 서로가 상처를 증발시키게 되는데 여기서도 아라페시 현상이 나타난다.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 주고 사랑해 주는 마음은 어린 시절 어떤 문화 속에서 양육을 받았느냐가 중요하다.
    • 오피니언
    • 칼럼
    • 살며 생각하며
    2023-05-10
  • [이정희 목사] 높임말(경어), 이대로 좋은가? (2)
    I. 서언(序言) 우리나라를 일컬어 옛날부터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이라 칭하였다. 이는‘동쪽에 있는 예절의 나라’라는 뜻으로, 그 유래는 중국 공자의 7대손인 공빈이 쓴 ‘동이열전’에 기록됨으로서 유래된 말이다. 이는 당시 우리나라를 제후국 정도로 취급하던 중국에서 조차 우리의 예의범절을 아주 좋은 면으로 평가하는 자랑스러운 말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의 하나는 옛날부터 우리나라 언어의 고유한 특징 중의 하나인 높임말(경어)의 우수성과 사용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지난 호에서 밝힌바 있지만 높임말에 대한 사용은 심각할 정도로 잘못사용하거나 오염되어 있다. 필자 자신도 높임말을 해놓고 나중에 보면 잘못 사용했음을 알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에 본 호에서는 지난 호에 이어서 계속 높임말에 대한 올바른 사용을 논하고자 한다. II. 높임말의 분류 높임말을 제대로 잘못 사용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높임말의 체계와 구조가 복잡하고 어려운 면도 있지만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학습이 없다보니 더욱 그러하다. 이에 본 호에서는 높임말의 일반적인 개념 중에서 혼돈하기 쉬운 높임법의 분류, 즉 주체높임법과 객체높임법, 상대 높임법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1. 주체높임법 : 이는 말하는 자가 서술하는 주체에 대하여 높여서 말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목사님의 말씀이 타당하십니다.’란 말을 한다고 하자. 여기에서의 주체는 ‘목사님’이다. 또한 주체인 목사님을 높이는 말은 선어말 어미(先語末語尾)인 ‘-시’와 높임접미사 ‘-님’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경우를 주체높임법이라고 한다. 2. 객체높임법 : ‘목사님’을 높이는 주체 높임법과는 달리 말의 목적어나 부사어가 지시하는 대상, 곧 객체에 대해서 높이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면 ‘나는 장로님을 모시고 교회로 왔다.’에서 말하는 주체는 나이다. 하지만 나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인 동시에 말의 목적어인 장로님을 높이는 경우이기 때문에 ‘모시다’란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이런 경우를 객체 높임법이라 한다. 3. 상대높임법 : 이 경우는 국어의 높임법 가운데 가장 발달되어 있는 것으로서, 말하는 자가 상대방에 대해 높이거나 낮추어 말하는 경우이다. 주로 종결 표현에 많이 나오는데, 크게는 격식체와 비격식체로 나뉘고, 높임의 정도에 따라서 네 단계로 나누기도 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면, 격식체는 높임 표현에서는‘이 성경책을 읽으십시오.’의 아주 높임의 ‘합쇼체’와‘이 성경을 읽으세요.’의 예사 높임의 ‘하오체’가 있다. 또한 격식체의 낮춤 표현에서는‘이 성경책을 읽게’의 예사 낮춤의 ‘하게체’와 ‘이 책을 읽으라.’의 아주 낮춤의‘해라체’가 있다. 이런 경우 모두를 격식체라고 한다. 반면 비격식체에 대해서 논한다면, ‘이 성경책을 읽어요.’의 두루 높임의 ‘해요체’가 있고, ‘이 성경책을 읽어’의 두루 낮춤의 ‘해체’가 있다. III. 결 어 높임말에 있어서는 이상과 같은 세 종류만 잘 구분해도 대부분의 높임말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논한 것만 해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게 들려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들로 인하여 앞에서 논한 대로 높임말 사용이 지금은 심각한 수준에 와 있다. 더군다나 상하관계나 기본질서 개념이 분명치 않는 ‘해체주의(포스터모더니즘)’시대 속에서 높임말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어떤 이의 말처럼 동방예의지국이 아닌 동방무례지국(東方無禮之國)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특히 이런 면으로 가장 먼저 선도해야 할 교회에서 조차 바른 높임말을 잘 하지 못하다보니 많은 우려가 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을 ‘예수’라 하고 성령님을 ‘성령’이라 하거나, 목사님, 장로님 등의 호칭에서 ‘-님’이란 존칭 접미사를 아예 무시하고, 바로 OOO 목사, OOO 장로 등으로 호칭하는 경우도 너무 많이 볼 수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의 올바른 언어 사용과 예의 있는 높임 말 사용은 또 다른 측면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아름다운 오고가는 따뜻한 말과 적절하게 서로 높이는 경의 사용으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언어문화를 형성하고 선도해 나가야 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기독교인 생활용어
    2023-05-10
  • [조희완 목사] 순종의 결과 (삼상15:17-23)
    이스라엘에 있는 사해(死海) 바다는 일반 바닷물에 비해서 염도(鹽度)가 약 10배가량 높기 때문에 사람이 누우면 가라앉지 않고 뜨게 됩니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물에 누워서 신문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이 전혀 위험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곳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물에 들어갈 때 반드시 지켜야 할 안전 수칙이 있습니다. 그 안전 수칙은 바로 “절대로 헤엄을 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염도가 높기 때문에 물에 몸을 맡기고 가만히 누우면 부력(浮力)에 의해서 저절로 몸이 뜹니다. 그러나 물에 빠질까봐 걱정을 해서 몸에 힘을 주게 되면 몸의 균형을 잃고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특히 수영을 한다고 첨벙거리다가는 다량의 광물질(鑛物質)이 함유된 소금물이 눈에 들어가거나 입으로 들이키게 되어서 자칫 큰 해를 입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해진 안전 수칙대로 몸에 힘을 빼고 가만히 바닷물에 몸을 맡기고 누워야 합니다. 그 정해진 안전 수칙에 따르기만 하면 누구나 안전하게 사해 바다의 즐거움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전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한 법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마음대로 행동하지 말고 인생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신학자 <앤드류 머레이>는 말하기를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순종의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은 곧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는 올바른 신앙생활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순종의 학교>에 입학한 그리스도인들답게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의 원칙이 되고 그 원칙에 순종함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순종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삼상15:22) 둘째로, 순종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출23:22) 셋째로, 순종하면 하나님이 해결하십니다.(요2:1-11) 항상 순종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2023-05-10
  • [오성한 목사] 내 말에 주의, 눈, 귀, 마음속에!
    말씀과 기도를 통해 기름 부음이 나타난다. 그러기 위해 믿는 자에게 이미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다는 것을 믿는 바른 믿음이 중요하다. 기름 부음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성령께서 하게 하시는 능력이다. (요일2:27)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분명히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라고 하셨다. 믿는 자에게는 이미 기름 부음이 있다. 기름 부음이 없이는 예수를 믿을 수 없다. 성령의 도움이 아니고는 예수가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사람의 생각으로 동정녀 탄생을 믿을 수 있겠는가? 사람의 힘으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고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믿을 수 없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라고 했다. 우리에게 거하는 기름 부음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이 복음을 받고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나는 복음을 믿는데 왜 내 삶 속에 능력으로 나타나지 않는가, 복음이 이론인가?”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복음을 들을 때 기분은 좋은데 실재가 되지 못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 성령의 기름 부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이제 나타내야 되겠다. 기름 부음이 우리에게 있다는 먼저 믿어야 한다. 믿음을 가지면 우리 속에 기름 부음이 유지가 된다. 기름 부음을 유지할 뿐 아니라 기름 부음을 나타내며 복음을 전해야 한다. 초대교회는 그렇게 했다. 기름 부음이 나타나는 방법이 있다. 기름 부음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 나타난다. 제자들이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이유를 예수님께 물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은 기도 외에 방법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라고 하셨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기름 부음이 타나난다. 기름 부음이 역사하는 길을 깨닫고 그 따르는 표적으로 확실히 증언하심을 이 시대에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하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셨다”(막16:20).“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잠4:20-22)라고 하셨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하심이다. "내 말에 주의하라"는 말은 말씀에 주의하라는 말씀이다. "내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라"고 했다. 말씀이다 ."또 그것을 네 눈에서"이다. 그러니깐 말에 주의하고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눈에서 떠나지 말게 하고 마음속에 지켜야 한다. 마음속에 지킨다는 말은 내 마음에 믿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늘 마음에 있어야 한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요6:63)라고 하셨다. 살리는 것이 영이다. 영만이 살린다. 살리는 영을 붙잡아야 한다. 영이 무엇인가? “내가 이른 말”이 영이다. 생명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린다. 말씀과 기도로만이 거룩해진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한 삶이 나타난다는 말씀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함을 주셨는데 거룩해진다는 말은 거룩한 삶이 타나나게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딤전4:5). 이미 우리 거룩함이 있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룩함을 주셨다. 이 거룩함이 나타나는 방법이 말씀과 기도의 충만이다. 나는 다음 구절을 수백 번, 수천 번 암송하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주장하고 고백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하고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막11:23). 당신도 이 구절을 철저히 암송하고 주장해 보라. 신나는 일이 아니가!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된단다.
    • 오피니언
    • 칼럼
    2023-05-10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