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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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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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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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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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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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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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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박봉석 목사] 나를 보는 기준이 무엇인가?
    한 흑인 선교사가 쓴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선교사님은 흑인 빈민촌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백인들이 사는 동네의 쓰레기통을 뒤져서 버려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그렇게 쓰레기통을 뒤지던 어느 날, 한 백인 부인의 눈에 띄어서 그 집의 청소부로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흑인 빈민촌 출신으로는 큰 출세를 한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첫 출근을 하고보니까 딱히 청소할 것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사는 흑인 빈민촌 움막에 비하면 모든 것이 너무나 깨끗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깨끗한데 백인 부인이 왜 자기에게 청소를 시켰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놀면서 휘파람만 불다가 그냥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날 곧장 쫓겨났습니다. 백인 부인이 보기에는 청소는 고사하고 더러운 발로 온 집안을 더럽혀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 흑인 소년이 쫓겨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준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누추한 흑인 빈민촌에 사는 소년의 기준으로 볼 때는 너무나 깨끗했지만 백인 부인의 기준으로는 온 집안이 더럽혀져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나는 무엇을 기준으로 내 삶을 평가하고 있습니까?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는 신앙이 좋은 것 같고 의로운 것 같고 깨끗한 삶을 사는 것 같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기준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언제나 그 말씀으로 나를 비쳐보고 내 자신의 모습을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바른 판단을 할 수 있고, 그래서 나를 변화시켜 갈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늘 예배 때에 말씀을 듣고 또 개인적으로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다른 사람은 기준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늘 그 말씀으로 나를 비쳐보며 나를 변화시켜 갈 때에 예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 있는 사람이 됩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서로 다른 기도를 했던 두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그리고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 바리새인의 기도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보았다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죄인 된 존재인지 알 텐데 오히려 그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여서 자신의 종교적인 탁월함과 의로움을 과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의 기도는 그와 전혀 달랐습니다. 그 당시 세리는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죄인 중의 상 죄인으로 취급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세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는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멀리 서서 기도합니다. 그것도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알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기준으로 보면 성전 가까이 갈 수도 없고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애통할 수밖에 없는 죄인 됨을 그는 알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세리는 바로 이 고백으로 말미암아 전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8장 14절에서 예수님은 이 두 사람의 기도의 결론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독자 여러분, 늘 기도는 하지만 내 마음은 한껏 높아져 있지는 않습니까? 다른 성도보다 좀 더 나은 것 같은 나의 신앙과 헌신의 모습으로 인해서 나도 모르게 교만해져 있지 않습니까? 다른 성도는 기준이 아닙니다. 기준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말씀 앞에서 참 부족함이 많은 존재들이고 죄인 된 존재임을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언제나 겸손을 잃지 않을 수 있고, 바로 그 겸손으로 말미암아 겸손한 자에게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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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2
  • [이정희 목사] 기독교인의 용어 사용 27: 고쳐야 할 예배용어/ 예배 본다
    I. 서언(序言) “잘못된 예배용어, 이것만은 고치자.”란 기사가 언젠가 국민일보에 게재된 적이 있었다. 이는 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NCCK)의 한국교회 발전연구원에서 연구 발표한 것으로서 현재 한국교회에서 잘못 사용하고 있는 예배 용어들을 바로 잡기 위한 시도였으며, 이에 관한 새 용어들을 제안했다. 구체적으로는 고쳐야 할 용어들 중에서 주로 예배용어들에 관 한 것이었다. 기도에서 9개, 예배 예식에서 31개 등 모두 40개 용어의 문제점을 설명하고 대체 용어를 제안했다. 이러한 연구와 발표는 그동안 개인 연구가나 일부 교단에서 발표해 왔다. 하지만 이러한 발표가 상당히 의미가 있는 것은 이번의 발표는 범 교단적 차원의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이루어졌다는데 있다. 또한 나름대로의 관심으로 본지의‘바로잡기’코너를 연재하는 필자로서는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본 호에서는 예배 용어 중에서 ‘예배 본다’, ‘예배 드린다’는 용어에 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II. 예배드림에 대한 용어 먼저 우리 한국교회의 예배드림에 대한 용어는 통일된 말이 없이 아주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예배 드린다’, 예배 한다’, ‘예배 본다’,‘예배 봐준다’, ‘제단을 쌓는다’등 여러 용어들이 있다. 이 중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는 ‘예배 드린다’이다. 이 중에서 어떤 용어가 가장 적합할까?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전문가들의 견해가 조금씩 차이가 있다. 먼저 장로회 신학대학원 교수를 지낸 나채운 교수는 ‘예배 본다’는 용어도 틀린 말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는 ‘보다’란 말은 문법상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그 첫째는 본동사로 쓰이는 경우로 눈으로 본다는 시각적인 의미이다. 이런 경우는 ‘예배 본다’는 용어를 쓸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두 번째의 조동사와 세 번째의 보조 형용사로 사용될 경우는‘먹어본다’는 말처럼 체험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예배 본다’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많은 교인들은 이런 복잡한 문법적인 체계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예배하다’나 ‘예배드리다’란 말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또 다른 견해는 천안대학교 기독신학대학원의 김석한 교수이다. 그는 ‘예배 하다’란 용어 외에는 어떤 말도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이유는 ‘예배 드린다’는 말은 구약시대의 제물을 드릴 때에 사용되는 용어이지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의 은총 이후에는 예수님이 단번에 드려졌기 때문에 ‘드림’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드린다는 것은 타종교들이 우상에게 드리는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이 말은 합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한 ‘예배 본다’는 말은 과거 선교사들이 처음 들어와 예배할 때 서양인에 대한 호기심과 구경꾼들로서의 예배였고 그것이 고착화 되어 ‘예배 본다’는 말이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미상으로는 시각적이기 때문에 합당하지 않다고 했다. 그다음 예배를 ‘제단 쌓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구약시대의 제단을 쌓는 행위에 국한되기 때문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예배 한다’란 용어 외에는 사용할 말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다음 장로회 통합교단에서는 2003년에 ‘예배를 봐준다’는 말은 사용할 수 없다는 결의를 했고, 이번의 ‘이것만은 고치자’에서도 재차 확인 발표를 하였다. III. 결 어 이상과 같은 각 주장들을 볼 때에 어떤 생각이 드는가? 예배 용어 하나도 아직까지는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예배 한다’는 말은 누구도 반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조심스럽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예배 드린다’는 표현도 적절하다고 본다. 물론 신약적인 개념의 말이 아니라는 견해나 타종교의 드린다는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너무 확대해석하는 것은 아닌지를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해 본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다양한 견해가 있다는 것은 발전을 위한 노력이라는 관점에서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해 보면서 하루 빨리 올바르고도 완전한 용어들이 정착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담아 기도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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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2
  • [신재철 목사] 잠복(潛伏), 사라지는 고물을 찾아서
    잠복(潛伏), 사라지는 고물을 찾아서 분리수거장은 돈 주고 버리기 아까운 물건들을 내어두는 곳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돈이 되는 물건이 모이는 장소이기도 하다. 폐지는 물론이고 고철과 공병은 어떤 이의 주 수입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큰 규모의 아파트에서는 제법 큰 수익을 만들어 아파트 복지를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일하는 아파트는 규모가 작아 폐품으로 모을 수 있는 금액은 미비하다. 오히려 얼마간 돈을 만들기 위해 묵혀두었다가는 분리수거장이 냄새나고 지저분한 공간이 되어 버린다. 실제로 전임 소장님은 폐품을 관리해 월 2~3만 원의 현금을 만들기도 했다. 후문에는 그 돈은 개인 용돈이 되었다는데 확인할 길은 없다. 여하튼 모으면 돈이 될 수 있지만 내 기준에 득보다는 실이 많았다. 지역에 고물을 취급하는 사장님과 연계하여 매일 수거하는 조건으로 아파트 측에서 일절 금품을 요구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얼마간의 돈을 포기했지만, 입주민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매일 치워지는 폐품으로 아파트가 너무 깨끗해 졌다. “소장님, 요즘 폐지랑 고철이 왜 이렇게 안 나오죠?” 업체 사장님의 전화다. 매일 수거하러 와보면 돈이 되는 폐지와 고철은 없고 잡다한 물건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물건을 누가 집어갈까 싶어 며칠 더 지켜보자는 말을 전하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고물이 좀 덜 나오는 날도 있을 수 있으니 그럴 수 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확실히 이상했다. 일주일이 지나도 고물은 모이지 않았다. ‘누군가 몰래 가지고 가는구나!’ 확신이 들었다. 마침 분리수거장을 비추는 CCTV가 있어서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시간을 돌려보기 시작했다. 시간을 빠르게 돌리며 영상을 재생한다. 차곡차곡 쌓이는 폐지들. 그런데 어느 시간이 지나니 갑자기 사라진다. 그 순간을 다시 천천히 돌려본다. 새벽 시간, 어느 노인이 수레를 끌고 들어와 차분히 야무지게도 돈 되는 물건만 담아 간다. 매일매일 성실하게 찾아오셨다. 하, 고민이 깊어진다. 「잠복을 결정하다」 계약한 사장님께 미안한 마음도 들고, 분명한 절도라는 생각에 잠복을 결정했다. 반드시 잡아서 경찰에 넘길 계획이었다. 아내에게는 며칠간 못 들어 올 수도 있다는 말을 남겼다. 제법 비장하다. 밖에서 보일까, 관리실 불도 끄고 의자에 몸을 푹 묻은 상태로 새벽까지 뜬 눈으로 지켜본다. 첫날은 실패다. 반드시 다시 온다는 확신으로 둘째 날을 맞았다. 조금 지루해질 즈음에 드디어 나타났다. 영상에서 보았던 손수레와 할아버지다. 익숙하게 고물을 챙겨 담아 조용히 대로변으로 빠져나간다. 은밀히 드러나지 않게 따라가 본다. 굽은 허리로 옆 건물의 폐지도 조용히 정리하며 수레에 물건을 쌓는다. ‘이걸 어쩌지.’ 나는 무엇을 고민했을까? 할아버지와 대면하지 못하고 조용히 관리실로 돌아왔다. 사장님과 의리가 있으니 할아버지를 제재했어야 하는데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민이 깊어졌다. 날이 밝은 후 고물상 사장님과 통화하며 그간 상황을 설명했다. 상황의 난감함, 사장님께 미안함이 버무려져서 말도 조리 있게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사장님은 의외의 시원한 답으로 나의 고민을 해결해 주셨다. “아이고, 소장님. 그러면 그 영감님께 고물 다 드리세요. 우리는 여기 아파트 물건 없어도 아무 지장이 없어요.” 정말 그래도 될지, 미안한 마음에 한 번 더 되물으며 감사 인사를 드린다. 내가 감사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지만 감사했다. 이유가 뭐가 되었든. 그리고 부끄러웠다. 목사보다 사장님 마음 씀이 더 고왔다. 그리고 나는 한 번 더 잠복을 이어간다. 그 할아버지를 만나야 했다. 새벽이 되어 어김없이 할아버지가 찾아왔다. 어제처럼 익숙하게 고물을 담아 돌아가는 길을 쫒아간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본다. “어르신, 제가 여기 아파트 관리소장이에요. 저희 고물을 매일 수거해 가실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요청을 드렸고 할아버지는 신이 나서 깨끗하게 정리해 가겠다는 약속을 하신다. 이미 손수레에 실린 우리 아파트 물건은 말이 없다. 할아버지와 나 사이의 비밀은 그 녀석들만 입을 다물어 주면 아무 문제 없을 듯하다. 오늘도 이렇게 인생의 한 수(手)를 배운다. 에필로그 그 후 할아버지는 새벽이 아닌 낮 시간 당당하게 고물을 챙겨 가셨다. 입주민이 간섭이라도 할라치면 관리소장님 허락이 있었다며 당당해 하신다. 그리고 얼마지않아 다시 폐지가 쌓이기 시작했고 더 이상 치워지지 않았다. 아파트 미관상 좋지 않기도 했지만 할아버지 신상이 염려되어 동네 고물상을 찾아다니며 할아버지 안부를 물었다. 마침 한 고물상에서 할아버지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갑자기 몸이 안 좋으셔서 병원에 며칠 계시다 돌아가셨다는 이야기. 무엇을 위해 그리 고생하며 살다 가셨을까. 여전히 고물은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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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2
  • [조희완 목사] 소중한 평안 (시122:1-9)
    만약 죽었다가 잠간 다시 살아난다고 가정을 할 때,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게 될까요? 사람에 따라서 하는 말들이 다를 수 있을 것인데, 아마 살아생전에 가슴에 한이 맺혔던 말씀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자녀들에게 “제발 예수를 믿어라”고 하실 분도 있을 것이고, “제발 다투지 말고 화목하게 지내라”고 하실 분들도 있을 것이고, “아프지 말고 건강해라”고 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을 때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두 번이나 연거푸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요20:19,21). 다른 하실 말씀이 참으로 많으셨을 법한데 평강을 말씀하신 것은 곧, 평소에 예수님께서 가장 원하셨던 것이 바로 평안과 평강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평안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샬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평안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평안하기를 원하시는지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습니다(살후3:16).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 날 사람들이 이 소중한 평안을 다 빼앗겨 버리고 불안하고 불편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평안이 가득해야 할 곳에 평안은 사라지고 대신 반목과 다툼과 불협화음이 가득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너무나 흔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평강의 왕이셨던 것처럼, 그 분을 믿는 우리도 평안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영역 중에서 어떤 곳이 평안하기를 힘써야 할까요? 첫째는, 교회가 평안해야 합니다.(시122:6-7) 둘째는, 가정이 평안해야 합니다.(잠17:1,21:9) 셋째는, 나라가 평안해야 합니다.(딤전2:1-2) 날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는 삶이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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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 칼럼
    2023-03-22
  • [오성한 목사] 소망을 넘어 믿음
    기도를 많이 하고 노력을 해야 생수의 강이 넘쳐흐르는 줄 알았다. 아니다. 누구든지 목말라 이 물을 마시면, 예수를 믿으면 그 배에서 영생하도록 흐르는 생수 강이 생긴다. 나는 이것을 깨달은 날 이후 늘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음을 믿는다. 자유하게 되었다. 감사하게 되었다. 흥분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춤추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성령도 능력도 믿음으로 받았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갈3:5). 대답해 보라. 성령의 능력을 믿음으로 받는다. “성령을 받는 것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라고 묻는다. 듣고 믿음으로이다. 너희에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려면 기도를 세 시간 이상해야 나타난다고 하지 않았다. 이미 받았음을 믿고 감사하고 인정하고 기도하면 된다. 기도를 하루 5시간 해야 능력을 주겠다고 그러지 않았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렇다고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더 기도하게 된다. 이것을 믿고 기도하면 기도가 더 힘이 있고 재미가 넘친다. 기도를 10시간 해야 성령의 능력을 주겠다고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 이미 주신 것을 알고 기도하라고 하신다. 믿음으로 현실을 장악하라.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4-25). 믿음과 소망은 다르다. 지금 믿음으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앞으로 성령 충만을 소망하지 말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믿음으로 충만해야 한다. 지금 충만해야 한다. "하나님 저는 앞으로 성령 충만할 것입니다. 내일 충만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샘물이 나는가? 물론 우리가 내일도 그렇게 될 소망을 가진다. 충만 위에 더 충만할 것을 소망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성령 충만함을 믿어야 한다. 소망은 있어야 하지만 지금 믿음을 가져야 한다. 지금 당신은 성령 충만하다. 당신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 당신은 굳은 마음이 부드러워진 사람이다. 새 마음이 있고 새 영이 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36:26-27)라고 약속하셨다. 믿음으로 간구하면 주신다. 소망과 믿음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지금 믿어야 한다. 동시에 소망도 가져야 한다. 지금 충만을 주셨고 앞으로도 더 충만케 하실 것이다. 지금 우리가 구원 받았고, 앞으로도 구원 받을 것이다. 이것을 "이미, 아직"이라는 표현을 한다. 이미 주셨고 아직 주실 것이다. 그것이 믿음과 소망이다. 우리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사랑 속에 살아야한다. 믿음과 소망은 다르다. 엄밀히 말해서 소망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을 소망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 소망만으로는 믿음의 역사를 일으킬 수 없다. 쉽게 말하면 성령 충만한 것을 믿기 전에는 죽을 때까지 소망만 갖고 성령 충만 만 바라보다 죽을 것이다. 그래서 한 번도 완벽한 성령 충만함을 믿지 못하고 이 땅을 떠나는 사람이 많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내가 이 사실을 깨닫고는 부들부들 떨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 내가 믿는 줄 알았는데 소망만 가졌었구나! 나는 성령 충만을 믿지를 못했었구나. 큰 일 날 뻔 했구나. 죽을 때까지 바라기만 하다가 한 번도 성령 충만을 모르고 살 뻔 했구나. 능력을 바라기만 했지 능력이 나에게 넘쳐 남을 믿지 못했구나"하고 놀랐다. 복음을 믿음으로 깨닫고, 온전한 복음의 문이 열리던 날 감격과 기쁨과 함께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이 급해졌다. 모르고 평생을 살았다면 큰일 날 뻔 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십자가를 믿는 다고 하면서도 십자가에서 이미 다 이루어 놓으신 일을 믿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주님 저는 앞으로 복음만 말하겠습니다. 온전한 복음, 이미 이루신 복음의 소식을 말해 믿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자연스럽게 결단하게 되었다. 나는 그 후 기회만 있으면 시자가의 복음만 말하고 있다. 믿음과 소망은 다른 것이다. 이것을 몰랐다면 죽을 때까지 “오, 주님 성령 충만을 주세요.”라는 기도만 하다가 갈 뻔 했다. 생각 만해도 소름이 돋는다. 큰 일 날 뻔 했다. 당신은 안 그런가? "오, 하나님 복음만 전하다가 가겠습니다."라고 결단하게 된 강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이 방법이 아니면 성령 충만함에 도달하지 못할 사람이다. 그런데 성경은 다 주셨으니 믿음으로 받으라고 한다. 소망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믿음의 역사를 일으킬 수 없다. 무슨 말 인지 알겠는가? 모든 부분이 그렇다. 성령 충만 뿐 아니라 모든 부분이 그렇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다. 현재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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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2
  • [최호숙 목사] 주님이 원하시는 대학(大學)
    요즘 사람들이 유머 섞인 joke(농담)를 할 때 “한국에서 가장 빡신(?) 대학은 삼청교육대, 해병대, 들어가기 힘든 대학은 SKY대(스카이대:서울대 고대 연대)”... 웃자고 하는 말이다. 한국의 입시 제도 실태를 보는 외국인들의 눈은 예사롭지 않다. 예비고사, 학력고사, 수학능력고사(수능) 시대마다 용어가 달라졌을 뿐 진통을 겪는 양상은 마찬가지이다. 외국의 언론들이 한국의 수능시험 현장을 보고 보도하기를 “사생결단의 시험(Do-or-Die Exam)” 즉, 시험을 치르는 목적이 사느냐 죽느냐를 결판내는 시험이라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기에 세계 사람들이 한국의 대학입시제도를 보고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인터뷰하는 학생들의 대답은 한결같다. “이 수능시험 망치면 제 인생 끝장나는 겁니다...” 이것은 인생 도미노 이론이다. 시험 망치면 나쁜 대학(bad college), 나쁜 대학 나오면 나쁜 직업(bad job)...이런 상황에서의 대학 입시는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밥’의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대학 입시는 입시 자의 기(氣)살리기 아니면, 기(氣)죽이기식의 상황이 주어진다. 필자가 목회하는 곳은 통영 경상대학교 해양과학대학 후문에 자리 잡고 있다. 대학교를 끼고 있기에 학기마다 대학 신입생 또는 복학생들이 교회 나와 등록도 하고 등록 없이 예배만 드리고 가기도 하고 다양한 학생들이 오는데 이번 주에는 신입생이 등록을 했다. 집이 부산인데 부모님께서 친히 아들 등록을 위해 이곳까지 찾아와 예배에 동참한 것이다. 외적으로 판단해볼 때, 특별한 사정이 있는지도 몰라도 보편적으로 부산에서 이곳 통영까지 대학을 왔다는 것은 일류대 갈 성적은 안 되기 때문에 이곳까지 온 것이라 추론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학생 부모님과 대화를 통해 깨달은 것은 부모님의 신앙과 아들의 신앙이 참으로 돈독하다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다. 비록 육신의 성적은 SKY(스카이 대)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 천국 대학에서는 수석 입학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삿포로 농학교의 초대 교장인 윌리엄 클라크 박사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립대 교수 시절 일본의 초청을 받아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 근대화에 일조한 인물인데 그의 교훈 중 유명한 교훈이 있다. “Boys, be ambitious!”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그런데 원래는 뒤에 ‘in Christ’라는 단어가 더 있었는데 그 단어가 누락이 되어 전해지고 있다. 윌리엄 클라크는 세상 적인 야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천국의 꿈, 소망 이것이 본질인 것을 교훈하려고 했던 것이다. 인생의 최종 대학인 천국 대학은 어떠한가? 이 대학은 인간의 노력과 행위, 술수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가는 곳이고, 인간의 공로를 자랑할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만이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천국대학 입학 자격을 얻고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지극한 사랑에 근거하여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겸손하게 살아가며 소망 중에 승리해야 할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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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14
  • [이정희 목사] 숫자에 대한 호불호(好不好) 2/ 13일의 금요일
    I. 서언(序言) 기피하는 숫자 4(四)에 대해서 몇 주 전에 논한바 있었다. 이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한자문화권에서 주로 금기시하는 숫자였고, 서양의 경우에 가장 기피하는 숫자는 13일의 금요일이다. 반면 7은 행운의 숫자로 여기고 즐겨 사용한다는 사실을 지난 번 논한 바 있다. 이런 숫자에 대한 호불호는 전혀 근거 없는 어리석은 행위이며 미신적인 행위이다. 이런 면에서 본 호에서는 주로 서양권에서 기피하는 13일의 금요일에 대해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II. 13일의 금요일을 금기시하는 이유 1. 13에 대한 금기시 하는 보편적 현상: 숫자 13에 대한 공포증을 ‘트리스카이데카포비아)’라고 한다. 이러한 13에 대한 공포는 오늘날의 현대 문화 속에서도 여전히 존재한다. 예를 들면, 고층 빌딩에서 80%이상은 13층이 없다. 또한 많은 병원에는 13호실이 없으며, 프랑스와 이탈리아에는 주소에도 13번지가 거의 없다. 또한 공항에도 13번 게이트가 없거나 비행기 좌석에도 13번열이 없는 경우도 많다. 이런 현상은 ‘13일의 금요일’ 때는 항공사에서는 약 9억 달러의 손실이 생기기도 하는데, 이는 사람들이 재수 없는 13일에는 비행기를 타거나 금융거래를 피하려는 이유 때문이다. 2. 13에 대한 금기시의 유래: 황당하기 이를 때 없는 이런 미신적인 기피현상은 어디서부터 왔을까? 그 유래에 대한 민속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기독교 이전의 고대 스칸디나비아 신화에서부터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신화의 내용에 의하면, 12명의 신들이 그들의 천국에 건설된 발할라(Valhalla)란 신전에서 저녁 만찬을 즐기고 있었는데, 그 자리에 ‘로키(Loki)’라는 초대받지 않은 13번째 신이 도착했다. 장난을 좋아하는 로키는 어둠의 신 호더(Hoder)로 하여금 겨우살이나무로 만든 화살을 기쁨의 신 볼더(Balder)에게 쏘도록 일을 꾸민다. 결국 볼더(Balder)는 화살에 맞아 죽고 세상은 어둠에 덮였다는 것이다. 이런 유래로 13에 대한 기피현상이 생겼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외에도 13이란 숫자가 언제나 예언과 운명으로 느껴지게 된 것은 기독교의‘최후의 만찬’역시 이 신화의 구조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유다는 예수의 제자 중에 마지막으로 만찬장에 나타난 제자이며, 13번째로 식탁에 앉았다. 다음날 그는 예수를 배신했으며, 또 13일의 금요일에 예수님이 못 박히셨으므로 더욱더 좋지 않은 날로 여겨진 것이다. 또한 고대 로마에서 마법사들의 모임은 보통 12명의 마법사들로 구성되었고, 13번째 참가자는 악마였다고 한다. 이런 이유들로 13에 대한 기피증이 생겨났다. 또한 숫자로 점을 치는 사람에 의하면 12 다음에 나오는 13은 불운을 가져오는 숫자라고 여겼다. 그 이유는 완전수인 12는 반으로도 나눌 수 있고, 3과 4로도 균등하게 나눌수 있다. 또한 12는 예수님의 제자들, 별자리, 1년의 달, 올림퍼스 산의 신, 헤라클레스의 노역, 이스라엘 지파, 그리고 배심원의 숫자가 모두 12이다. 하지만 여기에 하나를 더해서 13이 되면, 12의 완전함이 깨어지면서 불균형을 가져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견해는 고대 이집트에서는 인간의 모든 삶은 12단계를 거쳐야 되고, 13번째 단계는 내세의 생으로서 신비롭게 생각했고,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고 믿으면서 내세를 상징하는 숫자 13에 대한 일종의 경외감을 갖게 되었다. 결국 13은 죽음에 대해 그들이 느끼는 전반적인 두려움의 일부분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13이란 숫자는 고대 이집트보다 더 먼 고대의 여성의 힘과 연관되어 있었고, 당시의 여신 숭배문화에서 13이라는 숫자는 더 신성시되었다고 보고 있다. 왜냐하면 이 숫자는 1년 동안 도는 달의 회전수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즉, 13×28=364일이었다. 또한 프랑스 라스코(Lascaux)동굴에 있는 27,000년 전에 조각된‘대지의 어머니 러셀(the Earth Mother of Laussel)’은 13개의 새김 눈(notch)이 있는 뿔을 들고 있는 여인의 형상이다. 이것은 여성의 힘을 정복하거나 수용할 수 없었던 무능력과 전반적 여성에 대한 두려움이 13이라는 숫자에 투영된 것이라고 추측된다. III. 결 어 어떤 조사에 의하면, 13일의 금요일에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미국에서는 1,700만에서 2,100만 명의 사람들이 고통 받는다고 한다. 이 공포증은 숫자 13에 대한 공포와 금요일에 관한 미신이 결부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고대 스칸디나비아의 전설이 진짜 근원일 수도 있다. 즉, 금요일(Friday)은 하늘의 여신 프리가(Frigga)의 이름에서 나왔는데, 기독교가 전파된 후부터 프리가는 마녀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그 후 수세기 동안 금요일을 ‘마녀의 안식일’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13일의 금요일의 시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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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14
  • [신재철 목사] 관리소장, 태풍과 만나다.
    “오늘 잠 자기는 틀렸네.” 태풍 소식에 긴장이 된다. 건물 관리가 안 된 아파트이기에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태풍, 장마와 같은 가혹한 상황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길 수 있기에 잠을 포기하기로 했다. 물론 내가 자지 않는다고 해서 폭풍 중에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잠을 잘 수 없는 것은 관리소장의 책임감이랄까? “순찰이나 한 번 돌아볼까?” 새벽 1시. 예보된 것보다 밖은 더 요란하다. 집 안에서도 태풍의 무서움이 느껴진다. 아파트 옥내 순찰이라도 돌아보자는 마음으로 몸을 일으킨다. 어차피 다 젖을 것 같아 가벼운 복장에 우의를 걸치고 슬리퍼를 끌며 밖을 나선다. 사람들이 오가는 유리 자동문은 뿌려지는 비를 맞으며 요란스럽게 흔들리고 있다. 이러다 부서지는 것 아닌가 싶은 불안감에 적당한 거리를 두며 살핀다. “어? 장난이 아니네?” 밖이 보이는 주차장에 서서 태풍에 버티며 몸을 가눈다. 큰 도로 상황이 어떤지 보려는 것이다. 보통이 아니다. 왕복 6차선이 작은 수영장이 된 듯 가로등 불빛이 물에 일렁인다. 이사 와서 이 정도 상황을 본 적이 없었기에 잠시 물구경 하듯 살피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함을 느낀다. “지하 주차장! 괜찮을까?!” 헐거운 슬리퍼를 급하게 끌며 계단을 뛰듯 지하로 내려간다. ‘앗!’ 몸이 잠시 뜨더니 계단에 그대로 고꾸라졌다. 슬리퍼가 물기 있는 계단에서 이렇게 위협적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본능적으로 팔을 내어주고 허리와 머리를 지켰다. 일어나기 힘든 고통에 잠시 웅크리고 앉아 있어 보지만 드라마에서처럼 누군가 나타나 위로하거나 돕는 일 따위는 없다. 몸을 일으킨다. 주차장 상황을 봐야만 했다. “아... 이게 뭐야.” 내 생에 이런 광경은 처음이다. 지하주차장 진입로는 계곡이 되어 있었다. 물이 쏟아져 내려오고 주차장 바닥은 이미 발목까지 물이 차 올랐다. 배수펌프 한 개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역류되어 그마저도 주차장으로 다시 들어왔다. 얼어붙은 듯 서 있다가 주차된 차량 먼저 빼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급히 차주들에게 전화를 돌리며 차량 이동이 시작되었다. 마치 군사작전같이 긴박하다. 남자 입주민 몇이 함께 붙어 주차장 입구에 모래주머니를 쌓아보지만 역부족이다. 이미 통제할 수준을 넘었고 차오른 물로 인해 자칫 감전되지 않을까 두려움도 생겼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느끼고 일단 퇴각한다.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황망한 상황에 차라리 여기가 군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중대, 소대 인력이 함께 한다면 수습이 빠를 텐데, 이걸 어떻게 나 혼자 정리를 한단 말인가? 이미 승강기 지하는 물이 가득하다. 배수펌프 고장으로 물을 뺄 방법도 없다. 119는 계속 먹통이다. 무력감에 기계적인 못 짓으로 떠다니는 쓰레기를 치우며 생각이 깊어진다. 인생 별 경험을 다한다는 생각에 눈물이 난다. 다행스럽게도 평소 친분이 있던 업체 사장님이 배수펌프를 가지고 와서 승강기부터 물을 퍼내며 진척이 보인다. 영화의 좀비처럼 생각 없는 몸놀림으로 계속해서 치우고 버리고 퍼낸다. “아! 진짜!” 오늘은 주일이다. 벌써 시간은 10시. 갑자기 짜증이 난다. 대강 물은 뺐지만 일이 정리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목사가 예배 인도를 안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홀딱 젖은 옷에 누더기가 된 슬리퍼. 내 차림이 처량하다. 팔은 여전히 욱신거리고 몸은 천근만근이다. 그래도 예배는 가야지. 급하지만 느리게 몸을 이끌고 집으로 가 샤워를 한다. 개척하면 목사는 강단에서 많이 울어야 한다는데. 나는 왜 자꾸 엉뚱한 곳에서 눈물이 날까. 샤워기 물인지 눈물인지 자꾸 흘러내린다. 누구 들으라는 듯 혼자 중얼거려 본다. ‘나 부르신거 맞죠? 개척교회 잘 할 수 있는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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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07
  • [박동철 장로] 대한민국 인구위기, 출생대책 교회가 앞장서야하는 이유
    인구위기가 닥쳐오고 있다. 전 세계 각 나라별 인구대책이 다르다. 대한민국의 인구 위기는 눈앞에 닥쳤다.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출생아 수를 합계출산율이라 한다. 2022년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0.78명으로 세계 최저 수준으로 밝혀졌다. 보통 서구 여러 나라 인구대책을 잘 세우고 실행한 나라들의 합계출산율 1.3(핀란드) 1.6(미국) 1.3(일본)에 비하면 정말 위기를 실감 할 수 있다. 깜짝 놀라울 일은 그동안 인구 저출산 대책으로 쏟아부은 정부 재정이 200조 원을 넘었다는 사실이다. 정부가 정책으로 해결할 수 없음이 드러났다. 이렇게 시간이 가면 2050년이 되면 대한민국 인구가 거의 소멸된다는 끔찍한 예측이 나오고 있다. 세상이 세태에 따라 급변하는 모습이 의아하지만 만군의 하나님의 섭리를 어찌 알겠는가. 불과 30여 년 전만해도 정부의 인구정책은 저출산을 위해 힘을 쏟았다. 한 가정 2명의 자녀를 권장했다.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셋 낳으면 삼천만의 나라가 망한다.’ 등의 구호가 유행했다. 필자의 30대 예비군 훈련 시 정관 시술의 특혜를 주는 문화가 유행했다. 사람은 한 시대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음을 고백해야 한다. 이것이 인구 절벽 앞에 선 우리의 고백이어야 할 것 같다. 인구대책에는 세상의 학자들의 고견도 들어볼 필요가 있다. 한 나라가 선진국으로 가는 길에 인구의 감소 정책이 필요하다는 고전 인구경제학자들의 역설적 주장이 한때 대세를 이뤘다. 미국 록펠러대 조엘 코헨교수는 한나라의 안정적인 인구유지의 출산율을 2.1로 봤다. 적정하게 인구 증가 속도가 느려지면 1인당 GDP가 오른다. 그리고 유한한 상태에서 경쟁자가 줄고 선진국에 진입하게 된다는 이론이다. 극히 상식적인 이 이론이 오늘날 유럽 선진국에 적용되어 국가 정책에 반영되었다. 그리고 선진국이 되었다. 문제는 선진국의 나라 형편이 잘 살게 될 때 ‘아이를 낳지 않는 문화의 급속한 변화’가 큰 문제를 낳는다. 오늘날 대한민국 앞에 놓인 형편이다. 소위 대한민국이 겪는 물질의 축복 속에 진통하는 저출산 문제이다. 복음의 바탕위에 세워진 대한민국, 급속 압축 성장에 성공한 경제대국이 되었지만 가정 가정에 아이를 안 낳는 문화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경제발전과 생육번성의 균형 잡힌 풍조가 깨져버렸다. 이것이 대한민국 인구위기 저출생 대책에 한국 교회가 앞장서야 하는 이유다. 기독교 선교방송 CTS가 앞장서 저출생대책국민운동본부를 조직하여 대한민국 교회가 앞장설 것을 외치고 있다. 필자는 경남지역 저출생대책본부 위원으로 위촉받아 참여하고 있다. 아직 출범 단계이고 많은 실행 계획을 수립 중에 있다. 몇 번 세미나 등에 참여해 보니 한국 기독교 교회가 나서지 않으면 국가차원의 출생대책은 제자리걸음에서 머물 수 밖에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문화의 사회 지배 힘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한 명령을 받았다. 창세기 문화 명령, 생육하고 번성하여 이 땅을 정복 하라는 위대한 말씀 앞에 경건히 서야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없는 갈라파고스는 너무 끔찍한 일이다. 저출생경남본부는 지난해 경남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을 역임한 순복음진주초대교회 이경은 목사께서 본부장을 맡아 열정을 내고 있다. 본부장을 맡은 이 목사는 지난 세미나 때 기억나는 멘트를 남겼다. 교회가 한국 인구위기 출생대책에 앞장서야하는 이유는 교회는 생육하고 번성하되 사람 같은 사람을 양육하는 교육의 요람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기억에 남기는 멘트였다. CTS의 저출생대책본부 조직과 경남지역본부에서의 열정의 활동이 대한민국을 살리는 모델이 되었으면 하는 강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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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28
  • [조희완 목사] 소싯적 예수 (눅2:41-51)
    과수재배 과정을 보면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파종을 해서 묘목을 기르는 묘목기와 꽃이 피는 개화기와 열매를 맺는 결실기로 구분이 됩니다. 이 과정을 인생으로 비유하면 어린 시절을 묘목기라고 할 수 있고 청년기를 개화기라고 할 수 있고 장년기를 결실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정을 거치면서 과일이 익어가듯이 과정을 거치면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어린 청소년기는 인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시기입니다. 왜냐하면 어린 시절을 어떤 환경에서 어떤 영향을 받고 자라느냐에 따라서 울고 웃는 인생으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말 속담에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듯이 어릴 때 보고 듣고 경험하는 것이 그 사람의 전체 인생에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말이 있듯이 자녀들이 훌륭한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란다면 좋은 환경을 접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자녀 교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자녀가 어릴 때 가정과 회당을 중심으로 율법을 가르치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합니다. 절대로 어린 자녀를 세상경쟁 구도 속으로 내몰리지 않고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게 해주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토라(율법) 교육을 시킵니다. 그렇게 교육을 받고 자란 탓에 두각을 나타내고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들이 탄생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은 과연 어떠했을까? 성경에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관한 기록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짧은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충분히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배를 중요시 하는 삶을 사셨습니다.(41,42) 둘째는, 성전을 중요시 하는 삶을 사셨습니다.(48,49) 셋째는, 효도를 중요시 하는 사람을 사셨습니다.(50-51) 그렇게 성장을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을 받으셨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예수님의 삶을 닮은 아이들로 자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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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 칼럼
    2023-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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