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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4 : 예배와 예식, 집회와 기도회의 차이점은?
I. 서언(序言) 40년이 넘는 목회 생활과 일정 기간 국문학과 실천신학을 전공한 필자이지만, 실제적인 표현에서는 혼동이 되는 말들이 너무 많다. 이번 호에서 논하고자 하는 예배인가? 예식인가? 또 예배 형식을 갖춘 집회와 기도회는 예배인가 집회와 기도회인가? 이런 명제 앞에서도 때로는 구분이 쉽지는 않다. 이에 본 호에서는 이를 분석하고 논하고자 한다. II. 예배와 예식, 집회와 기도회의 용어분석 1. 예배(禮拜)란? : 일반적인 사전적 뜻은 ‘초월적 존재 앞에 공경하는 마음으로 경배하는 의식’이다. 이를 우리 개신교적인 의미로 보면, 거의 대부분 예배학자들은 ‘성경을 읽고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께 대한 존경과 숭배를 나타내는 의식’이라고 했다. 또한 예배는 그 대상이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정의하고 있다. 예를 들면, 주일 오전 예배, 주일 찬양 예배 등이다. 2. 예식(禮式)이란: 사전적인 뜻은 ‘예법에 의해 행해지는 식’으로 결혼식, 장례식 등을 예를 들고 있다. 개신교적 의미로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많은 길흉사에서 하나님께 예배형식을 갖추는 것’이라 했다. 이는 기존 예배와는 달리 인간의 삶에서 일어나는 일이 중심이 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 중심이라 본다면, 예식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일에서 하나님께 예배 형식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 모양은 같은듯하나 대상은 다른 것이다. 예를 들면, 결혼예식, 장례예식, 각종 임직식, 첫돌, 회갑, 입학, 졸업, 취업, 개업, 첫돌예배 등 인간 중심으로 발생하는 많은 예식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3. 집회(集會)란? : 사전적인 뜻은 ‘특정한 공동목표를 위하여 여러 사람들이 일시적으로 모인 모임’이다. 개신교적 의미로는 ‘교인들의 믿음의 증진을 위하여 모이는 일체의 모임’등을 말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여러 유형의 부흥회, 수련회 등으로 사람이 중심이다. 4.기도회(祈禱會)란? : 먼저 祈禱의 일반적인 뜻은 ‘자신이 믿는 신에게 비는 행위’를 말한다. 祈禱會란 이런 기도를 하기 위해 모인 모임이다. 우리 개신교적 의미로도 일반적인 뜻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 소원을 빌기 위해 모임’을 말한다. 전통적인 경우는 수요기도회. 금요 철야기도회, 새벽기도회 등이 있다. III.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 먼저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교단에서 정리한 표준예식서에 의하면, 이 4가지 용어는 각각 그 대상과 성격이 다르기 때문에 구분해서 사용해야 된다고 정의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예배는 그 대상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의 일이 중심인 예식과는 형식은 비슷하지만,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했다. 기도회와 집회도 마찬가지로 말하고 있다. 이 두 경우도 예배 형식은 있지만, 그 성격이 인간의 일이 중심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모인 성격에 따라 기도회와 집회라고 해야 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예배 신학자인 정장복 교수도 이 4가지 유형은 모두 성격과 목적과 형태가 다르기 때문에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아울러 많은 현대 교회의 예배들이 위의 이런 4가지 유형들이 혼합되어 저마다의 본질이 퇴색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이상과 같은 견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정장복 교수와 같은 장로회 신학대학원 교수이면서 국문학자인 故 나체운 교수는 4가지 유형의 행위들이 모두 성격이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예배라는 성격을 모두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구태어 구분하는 것은 오히려 더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모두 다 그 본질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면 어떤 용어든지 구태어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IV. 결론과 제언 올바른 용어 사용에 대한 기고를 계속하면서 항상 느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영어나 원어로 말하면 간단한 것을 우리는 뜻글자인 한문과 변화무쌍한 소리 글자인 한글을 사용하다보니 통일된 용어 사용이 매우 어렵다는 느낌이다. 더군다나 같은 교단의 교수들과 표준 예식서 마저도 견해가 일치 못하고 있다. 이에 필자는 이런 제안을 해본다. 이미 많은 교회들이 시행하고 있지만, 1부는 예배, 2부는 그 성격과 목적에 맞춘 순서를 진행하면 큰 문제는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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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구원이 은혜인 이유
대서양에서 폭풍우를 만나 오랫동안 표류한 선박이 드넓은 브라질의 아마존 강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선원들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선원들은 오랜 선상생활로 너무나 지쳐 있었는데, 오랫동안 물을 마시지 못해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여객선 한 척이 지나갔습니다. 선원들은 여객선을 향해 외쳤습니다. “우리에게 물을 좀 주시오. 우리는 갈증 때문에 죽어가고 있소.” 그러자 그 여객선의 승객들이 소리쳤습니다. “당신들은 지금 맑은 물이 흐르는 강 한복판에 와 있소. 그대들이 바라보는 푸른 물은 바닷물이 아니라 아마존의 강물이오. 물통을 내려 물을 퍼 올리기만 하면 되오.” 곧 고난주간이 다가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시고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의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을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사람들은 지금 구원의 맑은 강물 위에 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람들이 할 일은 믿음의 물통을 내려서 그 구원의 강물을 퍼 올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은 믿음의 물통을 내리기를 거부하거나, 아니면 그것이 구원의 강물인 것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전도자가 전도대상자에게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전하자 그는 “저는 살면서 공짜로 무엇을 얻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그 값을 지불했지요. 대가를 치르지 않고 무엇을 받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전도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저 찬란한 태양 빛을 늘 받으면서 그 대가를 지불했습니까? 매일 마시는 공기의 값을 지불했습니까?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대가를 지불했습니까?” 그 물음에 그 사람은 “그것은 너무 비싼 것이라서 값을 지불할 수 없지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대답을 듣고 전도자는 다시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너무 비싸서 그 대가를 지불할 수 없는 것은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햇빛과 공기를 만드신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 대속의 죽음에 내어 주신 그 사랑은 너무 비싸서 오직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한 목사님이 유럽으로 여행을 가서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된 박물관을 가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이름난 화가들의 명작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책에서만 볼 수 있었던 유명한 작품들을 모두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작품들 앞에는 그 그림들의 판매 가격이 각각 붙어 있었습니다. 가령 르느와르의 “독서하는 소녀”는 칠백만 달러 정도를 호가하며, 렘브란트의 그림은 천 이백만달러 내외였고, 루벤스라는 화가의 그림은 천만 달러가 넘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작품 중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그림은 과연 얼마나 될까 궁금해서 그 앞으로 가보니 ‘priceless'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값을 매길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값으로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가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작품들은 가격이 매우 높습니다. 그러나 진짜 좋은 작품은 값이 없습니다.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값을 지불하지도 않았고 지불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값을 매길 수 없는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받은 구원을 공짜라고 표현하면 안 됩니다. 은혜는 공짜가 아닙니다. 독자 여러분, 우리의 부모님이 우리를 얻기 위해서 얼마만큼의 가격을 지불하셨겠습니까? 독자 여러분의 자녀들을 얼마의 돈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그 귀한 자녀들의 가격을 정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없죠! 정말 소중한 것은 값이 없습니다. 값으로 매길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그 모진 고통과 수치를 다 받으시며 고귀한 자신의 생명을 주심으로 인해서 우리가 구원 받은 것입니다. 즉 그 어떤 가치로도 매길 수 없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공짜가 아닙니다. 그것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라는 말은 공짜라는 말이 아니라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억만금으로도 살 수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공짜가 아니고 그 은혜이니 우리는 우리 평생 그 은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믿음을 얻게 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다시 한 번, 아니 나의 숨이 다하는 날까지 감사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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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훈 목사] 부으소서, 채우소서, 흐르게 하소서
포도원교회가 창립 44주년이 되었다. 부산 변두리 구포에서 100여평의 작은 교회에서 40년만에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어서 1만 가정, 3만 성도, 10만 선교, 100만 전파를 코로나 때 이루었고 덕천성전, 화명성전, 드림센터, 양산 선교센터 4개의 성전을 갖추었다. 교단과 부산을 대표하는 교회가 되었으니 이 또한 감사, 찬양, 영광, 존귀를 주님께 돌려드린다. 모든 것이 주의 은혜이고 주께서 하셨다. 시23편을 통하여 다윗의 노래, 다윗의 축복을 볼 수 있다. 부으소서 큰 복은 하나님이 위로부터 부어 주시고, 작은 복은 사람이 오두방정 떨어서 챙길 따름이다(약1:17). 말세에 고통의 때가 오지만 주께서 남종과 여종들에게 물 쏟듯이 성령을 부어주신다(욜2:28~29).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없다. 오직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 된다(행1:8). 한계를 뛰어 넘고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면 주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 주셔서 산과 골짜기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된다(신11:8~14). 다윗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이후에 승승장구 했고 범죄시 성신을 거두지 말라고 울면서 회개했다. 채우소서 예수님께서 때가 차매 이 땅에 오셨듯이(갈4:4) 성도는 서러울 때, 가난한 때, 고통의 때를 채워야 된다. 춘하추동 사시사철이 지나야 농사가 된다. 눈물 병을 채울 때에(시56:8) 응답이 이루어진다. 찬송이 하늘에 사무치고 기도가 주께 상달되고 아랫물이 윗물이 된다. 다윗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하였다. 은혜의 잔을 채우소서. 가나 혼인 잔치에서 항아리의 물을 아귀까지 채울 때 기적이 일어났다(요2:7). 마음은 비우는 것이 아니고 채우는 것이다. 빈 깡통이 시끄럽다. 회개하며 더러운 것을 토설하고 성령 충만, 은혜 충만, 진리 충만으로 채워야 된다. 넘쳐흐르게 하소서 물은 막히면 기다렸다가 마침내 가득 채운 후 넘쳐서 흘러간다. 무엇이든지 서두르면 사고 나고 조급하면 실수하고 성급하면 후회한다. 억지로 안 된다. 눈물이 고이고 기도가 쌓여서 마침내 내 잔이 넘쳐야 된다. 임계점을 넘어 서야 물이 끓는다. 샘물은 막힘없이 중단 없이 멈춤 없이 퐁퐁 솟아나서 넘쳐흐른다. 역사는 민심이라는 강물이 어떻게 흘러가고 어떻게 출렁이는지를 볼 수 있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는다. 주께 받은 은혜를 사해 바다가 아니라 갈릴리 바다같이 흘려보내라. 축복의 통로가 되라. 법(法)은 물 흐르듯이 가는 것이다. 주께서 기름 부어 주시고 흔들어 넘치게 복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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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주기철목사 순교 80주년, ‘깨진 향유병’ 조형미술전
창원 진해 출신 영적 거장 소양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한지 올해 80주년을 맞았다. 1897년 진해 웅천에서 태어나 1944년 소천 하셨다. 주 목사님은 일생을 일정시대 주의 종으로서 2천만 조선 백성들을 깨우고 복음을 전파하시었다. 일제 신사참배강요에 끝까지 저항하다 5년 동안 옥살이중 해방을 1년 앞두고 47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며 순교하신다. 오산학교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마산문창교회 부산초량교회 산정현교회에 시무하면서 올곧은 신앙의 모본을 보였던 우리들에게 영원한 영적 스승이다. 올해 순교80주년을 맞아 주기철 목사 기념 사업회(이사장 이상택목사)는 여러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진해 웅천에 생가 복원 사업을 추진하고 주기철 목사 신앙을 주제로 학술심포지엄도 4월에 진행된다. 여러 행사 중 눈길을 끄는 특별한 기획미술전이 지난 16일 웅천 주기철 목 사기념관 특별 전시실에서 막이 올랐다. 한국 미술계에서 조형미술의 독특한 장르를 이끌고 있는 최선혜 작가의 '깨진 향유병'이란 주제의 조형미술전이다. 하나의 질그릇이 완성되기까지 는 작업의 여정이 예사롭지않다. 작가의 손끝에서 땀방울의 열매로 하나의 그릇이란 작품이 완성된다. 우주만상의 작가 창조주 손끝에서 한생명이 창조되듯이 그릇은 1천도의 화열 속에서 달구어지며 창조된다. 그 뜨거운 열정의 과정에서 조심스레 완성된 그릇이 깨어져서는 안 되는게 일반적 관념이다. 그래서 최고조의 긴장이 따른다. 그런데 최선혜 작가는 고귀하게 완성된 그릇을 과감히 깨어버린다. 역설적인 예술의 작업이다. 그리고 깨어진 조각을 한편 한편 맞추어 새로운 그릇의 완성체로 재창조한다. 이 대역설의 예술작업의 사유(思惟)가 우리들에서 강한 작동을 통해 은혜의 말씀으로 다가오게 한다. 마리아는 향유옥합을 들고 십자가를 준비하는 예수님을 찾았다. 그리고 향유옥합을 깨뜨렸다. 값비싼 향유가 쏟아졌다. 비싼 향유를 쏟은 어리석음을 조롱하는 한 제자의 언어가 쏟아졌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을 칭찬했다. 값비싼 향유옥합이 깨어져 예수님 십자가 생명을 축복했다. 깨어져 향유를 쏟은 그때 그 깨어진 향유병은 인류에게 거대하고 영원한 복음으로 지금도 들리게 한다. 예수님이 마리아를 크게 칭찬한 진정한 뜻이다. 최 작가의 이날 특별 기획 전시회는 깨어진 향유병이 품고 있는 거대한 함의를 풀어냈다. 최 작가는 직접 예수의 육적 고향 이스라엘에서 구해온 향유병을 깨뜨리는 퍼포먼스를 실행했다. 십자가를 오르기 위해 준비하는 마리아의 깨어진 향유병의 메시지는 값비싼 향유를 버림이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도에 축복의 메시지가 모든 제자들의 깨어짐에 있다. 이 땅에 남긴 예수의 말씀, 위대한 복음의 흐름 앞에 우리는 깨어지지 않으려는 관성에서 살아간다. 한마디로 죄인들의 삶이다. 우리의 스승 주기철 목사님은 철저히 깨어져버렸다. 말씀에 다하고, 순종에 다하고 끝까지 우상과 싸워 이겨낸 당신의 삶의 여정이 깨어짐에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오르기 전 마리아로부터 향유병의 깨어짐을 보여주고 본을 보여주셨다. 복음의 생명 자신의 깨어짐을 실천하신 주기철 목사님의 순교 80년에 한 작가의 심혈을 쏟아 기획하고 실행한 '깨어진 향유병'의 조형예술이 새로운 생명의 물길질로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졌다. 예수님은 진리의 말씀을 전할 때 많은 사유의 길을 안내한다. 예수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방법론이다. '내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이 쉴 곳 없네'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 시 노래 처럼 우리는 우리 안에 나를 너무 채우고 살아간다. 나를 비우게 하는 그릇의 깨어짐은 아름다운 주의 종, 주기철 목사님 순교80주년에 어울리는 예술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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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3
I. 서언(序言) “기독교인의 생활 용어 바로잡기”라는 코너로 그동안 타 종교권이나 일반적인 용어들에서 그 말에 대한 바른 인식과 잘못 사용하고 있는 내용들을 발췌하여 논하였다. 특히 그동안은 우리 한국어만의 특징인 경어 사용에 대하여 논하였다. 이제는 다시 종전에 연재해왔던 교회용어들 중에서 그 의미 분석이나 잘못 사용하고 있는 말들을 발췌하여 논하고자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 본 호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용어 중의 하나이면서도 혼란을 일으키는 교회당(성전, 예배당)에 대한 바른 용어를 논하고자 한다. II. ‘성전’, ‘교회당’,‘예배당’의 용어 분석 교회 용어 중에 가장 애매모호하게 사용되는 용어 중의 하나는 곳곳에 세워진 교회당을 교회, 교회당, 성전, 예배당 등 각기 생각대로 사용함으로서 통일된 용어가 되지 못하고 있다. 물론 건물을 보고 교회라고 칭하는 것은 가장 많이 사용하지만, 잘못된 표현임을 거의 대부분 알기 때문에 여기에는 생략하고 나머지 용어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1. 성전(聖殿)의 용어 분석 : 많은 사람들이 성전, 성전 건축이란 말을 한다. 성전이 무엇인가? 히브리어로 ‘헤칼’로 궁전, 큰집, 성전이란 뜻이며, 헬라어로는 ‘히에론’, ‘나오스’로서 거룩한 곳, 성소, 제단이란 뜻이다. 하지만 이 성전이란 용어는 거의 모든 종교의 신전을 말할 때도 같은 단어로 사용하고 있다. 사도행전 19장 27절의 아데미 여신의 신전도 ‘히에론’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서 성경의 자자들은 여호와의 성전, 주의 성전 등으로 우상숭배의 신전과 구분하고 있다. 한자어로는 거룩할 성(聖), 궁궐 전(殿)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근본적인 용어의 뜻은 뒤로 두고라도 성전은 구약의 성막과 솔로몬 성전, 스룹바벨 성전, 헤롯 성전의 개념이 주를 이루고 있다. 2. 교회당(敎會堂)의 용어 분석 : 보편적으로 잘 알고 있는 대로 교회는 신약에서만 주로 사용하는 용어로 ‘에클레시아’로 교회, 회중을 뜻한다. 회중의 뜻을 가진 ‘쉬나고게’와도 거의 같은 뜻이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가 다 교회란 의미도 있다. 한자어로는 가르칠 교(敎), 모일 회(會)로 사용하고 있다. 이런 모든 뜻을 합쳐서 교회들이 모이는 집이란 뜻에서 집 堂자를 쓰서 교회당이라고 말하고 있다. 3. 예배당(禮拜堂)의 용어 분석: 구약에서의 예배 용어는 찾는다의 뜻인 ‘다라쉬’. 일하다, 섬긴다의 뜻인 ‘아바드’. 엎드리다의 뜻인 ‘사가드’ 등의 여러 용어들이 있다. 신약에서도 구약의 개념을 그대로 이어 받은 ‘레이투르기아’, ‘세보마이’‘라트레이아’등의 많은 용어들이 있다. 한자어로 예배는 예절 예(禮), 절할 배(拜)를 사용하여 위의 원어적 뜻을 그대로 내포하고 있다. 또한 이런 행위를 하는 곳을 집 당(堂)자로 표기하고 있다. III. ‘성전’, ‘교회당’,‘예배당’의 적합성 필자의 어린 시절에는 거의 예배당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지금은 주로 교회당으로 사용하거나 교인들만의 대화에서는 성전으로 말하기도 한다. 문제는 어떤 용어가 적합한가이다. 먼저 성전이란 용어는 앞에서 논한 대로 구약의 제사장이 행하는 성전의 개념이 강하기 때문에 주님이 십자가로 여신 만인제사장 시대인 신약시대 이후인 현대에서는 다양한 개념의 교회당을 성전이라는 용어로 국한시켜 사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교회당과 예배당은 어떠한가? 여기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연신대 등에서 강의한 최성수 교수는 ‘교회당’으로, 천안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한 김석한 교수는 예배당으로 하되 ‘OO 교회 예배당’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IV. 결론과 제언 서론에서 언급한 대로 아직까지 우리는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용어조차도 성전과 교회, 교회당, 예배당 등으로 통일성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아직도 우리는 구약의 성전 개념대로 거룩한 장소인 성전으로 말하고 있고, 또한 건물 안에서 가르치는 일도 행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당도 적합한 말이고, 예배도 드리기 때문에 예배당도 옳은 말이다. 그만큼 복합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필자의 견해로는 꼭 어떤 용어가 적합하다고 볼 수는 없는 일로 여겨진다. 단지 제언하는 바는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용어가 현재로는 교회당이기 때문에 이를 주로 사용하는 것이 어떠할까 라는 것이며, 너무 용어의 율법주의에 빠져 이것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오류는 범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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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1 : 정월 대보름과 세시풍속 용어들 2
I. 서언(序言) 오는 24일은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지켜오는 정월 대보름 날이다. 이런 날이 되면 동심에 젖은 어린 시절, 설날과 함께 마냥 기뻐하며 뛰놀던 그날들을 추억하게 된다. 그때 그 시절, 아침에는 오곡밥과 견과류를 먹으며 복 조리개로 또래들과 집집을 방문했고, 저녁에는 달집을 태우는 동시에 불붙는 관솔가지를 휘휘 돌리며 온 논두렁에다 불을 붙이는 쥐불놀이를 했다. 지금도 우리의 고장인 마산 진동의 정월대보름 달집 태우기와 줄다리기는 매년 성대하게 열린다. 이는 필자의 경우에도 아련하게 떠오르는 동심의 추억으로 가슴에 수를 놓아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정월 대보름의 유래와 풍속들은 어떤 것들이 있으며, 그것이 우리 기독교의 신앙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러한 면에서 오늘의 지면에서는 여기에 대한 풍속들과 그 용어들을 논하고자 한다. II. 정월 대보름의 유래와 여러 풍속들 그 유래는 언제부터인지는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을 많 큼 오랜 전통을 가진 대동제 행사의 하나였던 것은 분명하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날에 행해지는 풍속들과 그 용어들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볼 수 있다. 1. 개인의 복을 비는 풍속들: 먼저는 부스럼이 나지 말라고 밤, 잣, 호두 등 단단한 견과류를 먹는 ‘부름(부스름의 준말) 깨물기’, 그다음은 보름날 해뜨기 전 다른 사람에게 더위를 파는 ‘더위팔기’, 다섯 가지 이상의 곡물로 지은 오곡밥을 먹는 일, 좋은 것만 들으라는 의미에서 찬술을 마시는 ‘귀밝이 술’, 액(厄)을 날리기 위한 ‘액막이 연날리기’ 등이 있다. 2. 집단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풍속들: 먼저는 마을의 안녕을 위해 공동으로 지내는 동제(洞祭), 그다음은 줄다리기, 12 다리를 밟으면 액을 면하고 다리 병을 앓지 않는다고 하는 다리밟기, 고싸움, 쥐불놀이, 탈놀이, 별신 굿 등이 있으며, 마을의 풍물패가 가가호호 방문하여 땅을 밟아 주어 복을 빌어주는 지신밟기 등이 모두 다 그런 전통적인 풍습들이다. 3. 달집태우기: 대보름 풍속 중 가장 큰 대미를 장식하는 행사는 아무래도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달집태우기’ 일 것이다. 대보름 날의 달을 보면서 소원을 빌고, 한 해의 농사와 각종 자신의 소원을 빌고 점치는 대표적인 세시풍속이다. III.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본 정월대보름의 여러 풍속들과 결론 앞서 소개한 여러 풍속들 중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주의해야 될 점은 이런 행위들이 거의 모두 미신적인 방법으로 악귀를 쫓아내는 ‘액(厄)막이’ 행사라는데 있다. 그러므로 신앙적인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거나 동참할 수 없는 행위들도 많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앞에서 언급한 달집태우기와 쥐불놀이 이다. 이는 한해의 풍년과 받을 복을 위해 악귀를 불로서 물리치려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는 불꽃놀이로 유명한 중국인들이 빨강색을 유난히 많이 사용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영향을 받은 우리 한국전통에서도 이런 예들이 아주 많다. 부적의 빨간 글, 동지 때의 붉은 팥죽을 끓이는 일, 담장 밑에 빨간 봉선화를 심거나, 그 즙으로 손톱에 빨간 물을 들이거나 신부의 양쪽 볼에 빨간 연지와 이마에 곤지를 찍는 이유도 출발하는 새 가정에 귀신이 붙지 말라는 시도인 ‘액막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이런 행위들이 악귀를 물리치려는 조상들의 의지가 담겨있어서 아름다워 보이기는 하지만, 기독교 신앙적인 면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행위들이 많다. 하지만 이런 전통문화를 무조건 배척하기보다는 역이용하여 정월대보름에 오히려 아름다운 기독교적인 행사를 많이 만들어서 승화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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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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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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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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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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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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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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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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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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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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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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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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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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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개식용 금지법과 인본주의속 애견문화
- 문헌이 많은 중국 역사 속에 개에 대한 고사(古史)가 많다. 한자에 개를 나타내는 두 글자가 있다. 狗(개 구)와 犬(개 견)이다. 狗와 犬의 개 표기에는 차이를 두고 쓰여졌다고 여러 문헌에 기록 돼 있다. 犬으로 표현되는 개는 사람과 친숙하고 사람에 충성하는 개로 표기 되고 있다. 충견(忠犬)이 있고 견마지로(犬馬之勞)라는 숙어가 있다. 狗로 표현되는 데는 주로 고기로 표현되는 양두구육(羊頭狗肉) 토사구팽(兎死狗烹)등의 숙어가 있다. 이를 두고 볼 때 狗의 개는 식용으로, 犬의 개는 평생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개로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들 또한 이 같은 설명을 하는 예 또한 있다. 어쨌든. 국민적 많은 논란가운데 있던 개 식용 금지법이 국회를 통과, 법제화됐다. 2027년부터 아마 우리나라에도 개고기를 볼 수 없을 것 같다. 개고기에 대한 많은 논란과 담론이 있다. 찬반과 논쟁을 떠나 개와 개고기에 대한 역사적 고찰(考察)을 해보면 개라는 동물을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개 식용금지에 대해 동물 애호가들은 대찬성이고 개고기를 즐기는 자들은 아쉬움이 있을 것이다. 어느 때 이든지 문화적 차원에서도 대세가 있을 수 있다. 이제 우리나라도 서양처럼 개고기를 즐기는 사람은 미개인이라는 딱지가 붙을만 하다. 그러나 개고기가 깊은 병환 후 또는 몸이 허약할 때 먹어본 사람은 그 약효가 대단하다고 하는 실례가 많다는 점도 있다. 필자가 칼럼을 통해 주장하고자 하는 논지가 있다. 그동안 경제 발전과 함께 생활 문화 속에 애견(愛犬)문화가 너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한 집 건너 개를 키우는 애견 인구가 크게 늘었다. 개를 키워보면 사람과의 흐르는 정리가 너무 따뜻하고 아무 이해 없이 주인만 사랑하는 그 맛을 본 사람은 개가 그냥 좋다는 것이다. 실제 우울증 환자 또 홀로 사는 분들은 애견과 가족이 되는 것이 치료에 큰 효과가 있다고 전문가들 또한 설명한다. 문제는 애견 문화 사회가 너무 지나쳐가고 있지 않나하는 우려 또한 있다. 우선 앞으로 개의 동물적 개체수가 과잉되어 새로운 사회문제로 등장할 전망이 분명하다. 필자가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들 교회를 섬기고 예수님만 바라보는 믿음의 공동체가 너무 애견문화에 편승 하는 것은 스스로 인본주의 문화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얼마 전 목회를 잘하시는 유명한 목사님과 대화에서 은혜 되는 이야기를 들은바 있다. 그 목사님 가정에 애견을 키우는데 아침마다 목사님에게 사랑을 주는 눈길이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눈을 맞추지 않고 교회로 출근하는데 아주 힘들다는 우스운 이야기를 했다. 그 이유는 교회공동체 교인들보다 눈앞에 개가 아른거려서 억지로 개를 무시하는 노력을 한다는 고백(?)을 했다. 교회공동체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애견문화의 지나침은 예수님만 바라보고 이웃 사람을 바라봐야하는 교회를 공격하는 인본주의의 산물이 될 수 있다. 벌써 애견가정과 교인들을 위해 교회 내에 애견 센터를 시설하여 예배시간 애견들을 모시고와서 보호해주는 교인 마케팅 하는 교회 또한 생겨나고 있다. 이것은 애견 문화가 우상시되는 지나침이라고 본다. 교회는 경우가 합당한 정신과 믿음으로 세상 문화 트랜드를 리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펴고 싶다. 사람을 무한대 편하고 즐겁게 하기위해 홍수처럼 쏟아지는 다양한 문화들은 인본주의의 산물이다. 무작정 흘러들어오는 인본주의 문화들을 거르지 않고 받아들이는 교회공동체, 잘 살펴봄이 필요한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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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개식용 금지법과 인본주의속 애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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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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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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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어떤 눈입니까?
- 어느 집의 아버지가 두 아들을 데리고 주말여행을 떠났습니다. 한참을 달려서 수려한 경관이 일품인 계곡에 도착했습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텐트를 칠 만한 자리를 찾아보라고 일렀습니다. 그러자 첫째가 근처에 있는 큰 바위를 보고는 그곳으로 냅다 달려가며 말했습니다. “아버지, 여기가 좋아요.” 그러자 둘째가 대꾸했습니다. “아니에요. 거기는 평평하고 넓기는 하지만 약간 경사가 져서 안 좋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한 소나무 밑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아버지, 여기가 그늘이 있고 참 좋아요.” 그러자 이번에는 첫째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그 나무에는 송충이가 있을지 몰라요.”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들은 더 나은 곳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습니다. 한참을 텐트 칠 장소를 물색하던 두 아들은 한 물가에 다다랐습니다. 바로 그곳에 첫째가 말했습니다. “아버지, 여기가 어떨까요?” 그러나 그 말에 둘째가 받아서 말했습니다. “아까 형이 말했던 그 바위보다 훨씬 못한 걸.” 그래서 세 사람은 그곳에서도 자리를 잡지 못하고 다시 맨 처음에 봐두었던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첫째가 봐두었던 바위 위도 그리고 둘째가 봐두었던 소나무 밑도 벌써 다른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불편한 곳에서 텐트를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텐트를 다 치고는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말을 했습니다. “아들들아 똑똑히 들어 두어라. 더 나은 것은 더 나은 마음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아버지의 말에 아들들이 물었습니다. “더 나은 마음이란 어떤 마음인가요?” 그 물음에 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장점을 크게 보고 단점을 작게 볼 줄 아는 마음이니라.”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일부러 세관을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세관에서 일하는 세리들을 로마의 권세를 등에 업고 민족의 피를 빨아 먹는 매국노로 취급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일부러 그 세관을 찾아가셨습니다. 왜요? 바로 그곳에 제자로 불러야 할 마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당시 다른 유대인들의 세리를 보는 눈은 가혹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예수님의 눈은 그들의 눈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그 세리도 기꺼이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세리 또한 사랑의 눈, 긍휼의 눈으로 보아주셨습니다. 간혹 성도들에게서 그런 말을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그 인간 다시는 안 볼 거야.” 마음이 상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아십니까?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그것보다 훨씬 더 나쁜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나를 사랑스런 눈빛으로 봐 주셨습니다. 나를 만나주시고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 또한 예수님의 눈을 닮은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함께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된 서로를 향해서 단점이 아닌 장점을 크게 볼 줄 아는 사랑의 눈, 긍휼의 눈을 떠야 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눈이 예수님을 닮으면 닮을수록 여러분으로 인해서 더 많은 성도들과 다음 세대들이 격려를 받고 힘과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장점도 주고 단점도 주었습니다. 장점만 있는 사람은 없고 반대로 단점만 있는 사람도 없다 하겠습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구성원이 다 그렇습니다. 장점만 있는 성도도 없고 단점만 있는 성도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보는 눈입니다. 우리가 자꾸 다른 성도의 단점만 크게 보기 시작하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그리고 교회에는 불신이 가득하게 됩니다. 반대로 장점을 크게 보고 단점은 감싸 안는 분위기가 되면 교회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넘치고 소망이 가득하게 됩니다. 나는 지금 다른 성도의 무엇을 주로 보고 있습니까? 장점을 더 크게 보는 당신의 눈이 다른 성도를 살리고, 더 나아가서 그런 눈으로 당신의 배우자와 자녀를 볼 때에 당신은 배우자와 자녀를 살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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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어떤 눈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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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먼저 보라(2)
-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라고 하셨다.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똑같이 행한다”라고 하셨다(요 5:19).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셨다. 무엇으로 보셨을까? 믿음의 눈으로 보셨다. 영의 눈으로 보셨다. 영의 생각으로 보셨다. 행하실 때도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을 행하셨다. 먼저 보시고 행하셨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을 땅에서도 행하셨다. 우리도 먼저 보아야 한다.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를 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 쉽게 보인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아야 한다. 영의 세계가 땅과 하나이기에 영의 세계를 보는 것은 이 땅을 사는데 있어서 중요하다. 흥분되지 않는가? 그러니 믿음으로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놀라운 일을 끌어 낼 수 있다.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개발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충격을 주기 전에 먼저 자신에게 충격을 줘야 한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의 충격을 받을 때, 그 믿음의 담대함은 말씀을 풀어 놓게 한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음의 눈으로 먼저 보여야 한다. 말씀과 기도로 그렇게 할 수 있다. 말씀을 기도로 부르짖을 때,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은 풍랑이 잠잠하게 되는 것을 미리 보셨다. 나사로가 살아 나오는 것을 미리 보시고 말씀하셨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고 말씀 하실 수 있으셨다. 미리 보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다. 우리는 빛 가운데 있기 때문에 보려고 하면 믿음으로 볼 수 있다. 말씀을 기도로 뿜어내라. 차츰 차츰 안개는 걷히고 뚜렷이 보일 것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자주 본다. 믿음으로 본다. 그리고 하나님께 주장한다. 동시에 나에게 말해 준다. 말씀이 나의 생각을 장악하도록 반복해서 자신에게 말해 주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오성한, 너는 예수님처럼 할 수 있어.” “네가 나의 일을 하겠고 더 큰일을 하리라”고 했다고 자신에게 말하고 하나님께 고백한다.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모든 계시는 육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실재 있는 세계다. 게하시는 아람 군대를 보고 떨고 있었다. 그러나 엘리사는 보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가? 게하시가 눈이 열렸을 때 그는 두려움이 사라졌다. 게하시가 눈이 열리기 전에도 천군천사들이 그 곳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꼭 육의 눈에 보여야 있는 것인가? 아니다. 육의 눈에 보이지 않아도 있다. 게하시가 보기 전에도 천국 천사는 그 곳에 있었다. 그래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는 하나라고 하는 것이다. 말씀을 주장하며 부르짖어 기도하면 쉽게 보인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 지기 때문이다(딤전4:5). 예를 들면 믿는 자에게 이런 표적이 따른다고 함을 붙잡고 반복해서 기도하고, 주장하고, 마음에 그려지게 될 때까지 영의 생각을 하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 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자에게 손을 얻은즉 나으리라”는 말씀이 실재로 나에게 먼저 보여야 한다. 보이는가?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하시지 않으셨다. 우리는 보지 않았으면서 하려한다. 아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먼저 내 속에서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하셨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해 놓으신 일이 말씀에 기록되어 있다. 기도는 말씀을 붙잡고 하는 것이다. 반복해서 주장하고 인정하고 부르짖어 보라. 마음에 뚜렷이 보여 지는 것 때문에 흥분이 일어나게 하라. 용기가 생기고 말하고, 싶도록 까지 말씀으로 기도하라. 손만 뻗어도 역사가 있겠다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나는 악수만 해도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럴 땐 반드시 기적을 본다. 실재로 악수하다가 기적이 많이 일어났다. 믿음으로 먼저 보기만 하면 된다. 먼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면 그대로 할 수 있다. 믿음으로 보는 훈련의 개발이 필요하다. 말씀과 기도로 계발할 수 있다. 이사야는 계시의 눈이 열려 보좌가 높이 들린 것을 보았다. 보좌에 하나님께서 앉으셨고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함을 보았다. 우리도 이 광경을 믿음으로 지금도 볼 수 있다. 성전에서 천사와 함께 화답할 때 문지방이 떨렸고, 영광의 구름은 성전을 가득 덮었다. 우리도 천사와 화답할 수 있다. 이 일은 먼 우주 속에 있는 일이 아니다. 지금도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하나님이 계신 하늘이 우리의 몸이라는 사실이 놀랍지 않는가? 우리 몸이 성전이다. 우리의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이사야가 본 광경이다. 놀랍지 않는가?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3:16).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가 하나이기 때문에 이것은 보이는 현실 속에서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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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먼저 보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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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직장에서의 상호간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을 어떻게 할까?
- I. 서언(序言) 우리의 일상용어 중에 가장 많은 대화의 대상은 가족 일가친척보다 늘 같은 공간에서 머리를 맞대고 일하는 같은 직장인들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상호간의 의사소통이나 호칭과 지칭어의 바른 사용은 매우 중요한 사항이 되고 있다. 더군다나 현대는 여성들의 사회참여가 당연시되는 현실에서 직장 관계나 일반 사회생활 속의 바른 생활 용어의 정립은 더 절실하게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차원에서 2011년 12월에 국어심의회를 통하여 확정된 ‘표준 언어 예절’에 근거하여 직장의 상사, 직급이 같은 동료, 아래 직원,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에 대한 호칭과 지칭어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직장에서의 호칭과 지칭 1. 직함이 있는 상사에 대한 경우 :주로 상사의 직함에다 존칭 접미사 ‘님’자를 붙여서 ‘부장님’, ‘과장님’ 등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과장이나 부장이 여러 명 한자리에 같이 앉아 있어서 구분해야 할 경우는 직함의 부서나 이름을 붙여서 ‘총무 부장님’, ‘김정희 부장님’ 등으로 호칭 것이 좋다. 2. 자신과 직급이 같은 동료의 경우 : 그런 경우는 보통 ‘김OO 씨’, ‘OO 씨’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 자신이 과장이면, 같은 동료 과장에게는 ‘김 과장’으로 부르거나, 자신과 직급은 같지만 나이가 많은 경우에는 ‘김 과장님’, ‘김OO 과장님’ 등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3. 직함이 없는 동료의 경우: 남녀를 불문하고 ‘김OO 씨’로 부르거나 상황에 따라서는 ‘OO 씨’로 부를 수도 있다. 서로 친한 경우에는 ‘OO야’라고 이름만 부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석에서는 그런 호칭도 무방하지만, 공적인 직장 안에서는 적절하지는 않다. 4. 직함이 없는 선배 또는 나이가 많은 동료 직원의 경우 :‘님’자를 붙여서 ‘선배님’, ‘김OO 선배님’ 등으로 호칭하는 것이 좋다. 간혹 직장에서 ‘형’, ‘언니’ 등으로 호칭하는 경우도 있어나 직장 안에서는 적절하지 못한 표현이다. 5. 상사가 직함이 없는 아랫사람을 호칭할 경우 :‘OO 씨’, ‘김OO 씨’로 부르는 것이 좋다. 하지만, 직급이 아랫사람이라도 나이가 많은 경우에는 ‘김OO 선생님’으로 불러서 존중하는 용어들이 일반적이다. 6. 외국어와 우리말 혼용어의 경우 :직장에서 가장 흔히 사용하는 호칭어 중에는 영어와 우리말을 같이 혼용하는 경우가 많다. ‘미스 김’, ‘미스터 김’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거의 보편화 되어 있어서 상용어가 되어 있지만, 이런 경우는 혼용이기 때문에 원론적인 면에서는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III . 결 어 ‘목회자 세계에는 선후배가 없다.’, ‘교인들에게는 남녀노소 위아래가 없다.’는 말을 가끔씩 듣는다. 이런 말을 들을 때 너무 근거 없는 혹평을 당하는 것 같아서 언짢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하지만 때로는 그 말이 옳은 말로 들려지기도 해서 필자 자신도 일반 직장관계는 아니지지만, 교계나 섬겨왔던 교회 안의 각종 인간관계에서의 호칭과 지칭했던 많은 언행(言行)을 돌아보기도 하고, “벌써 나도 나이가 들어서 과거 어른들처럼 ‘요즈음 젊은 사람들은 예의가 없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누가 어떤 말로 어떤 관점에서 평가하든 우리의 직장 아닌 교계와 교회 안에서의 언어생활이 반듯하고, 예의에 벗어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남녀노소가 같이 어울려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 공동체에서는 더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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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직장에서의 상호간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을 어떻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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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용서의 이유 (마18:21-35)
- 1999년 7월 4일 이었습니다. 그날은 미국 독립기념일이면서 주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인디애나 주립대학에서 석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던 아주 장래가 촉망되는 <윤원준>이란 한국학생이 있었습니다. 그가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불루밍턴>에 있는 한 교회로 들어가던 중에 난데없이 날아온 총탄에 맞아서 영문도 모른 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벤자민 스미스>라는 백인 우월주의자가 무차별로 난사한 총에 맞아서 사망한 것입니다. 며칠 뒤에 그의 장례식이 열렸는데, 그 자리에는 미국 국무장관을 비롯해서 약 1,500여명의 조객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참석을 했습니다. 장례식 순서 가운데 그의 형이 조문객들에게 다음과 같은 인사를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벤자민 스미스>를 용서하며, 미국을 용서하겠다는 그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우리는 동생을 죽인 <벤자민 스미스>와 미국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합니다.” 그 장례식에 참석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인사말을 들으면서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히면서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리고 장례식이 끝난 후 미국 사람들이 “그의 인사말을 들으면서 마치 온 몸이 감전된 것처럼 전율을 느꼈습니다.”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이처럼 용서는 아름다운 것이고, 용서는 전율을 느끼게 할 만큼 위대한 것입니다. 기독교를 가리켜서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사랑의 뿌리가 바로 용서입니다. 용서가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며, 용서가 없는 사랑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남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원수까지도 용서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남을 용서해야 할까요? 첫째는, 용서는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마18:21-35) 둘째는, 용서는 용서받을 수 있는 조건이기 때문입니다.(막11:25-26) 셋째는, 용서는 승자 인생이 되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창45:1-15)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롭게 한 해를 시작하는 이때에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그에 따르는 은혜와 평강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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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용서의 이유 (마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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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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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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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당신은 내 인생의 로또(Lotto)
- 인생은 삶이 어려울수록 복권에 집착한다. 왜냐하면 복권 한번 당첨되면 대박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로또(Lotto)” 하면 자동으로 연상되는 단어는 “대박(大舶)”이다. 어느 부부가 결혼하고 보니 맞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성격이 다르고 취미가 다르고 살아온 문화가 다르고 생각하는 논리 구조가 다르고 삶의 수준이 다르고... 그래서 의견 충돌로 자주 부부싸움을 했다. 그날도 의견 충돌로 부부싸움을 하던 남편이 분에 못 이겨 뛰쳐나갔다가 한참 후에 돌아와서 툭 내뱉는 말 “당신은 내 인생에 로또(Lotto)야!” 이렇게 말을 한 것이다. 아내가 생각하기를 남편이 자신을 자기 인생의 대박으로 생각하는 줄 알았다. 내심 기뻐하며 “저 인간이 찬바람 쐬고 돌아오더니 정신이 돌아왔나...”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로또는 수십 번 구매해도 딱 맞아 당첨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남편이 아내를 향하여 “당신은 내 인생에 로또(Lotto)야!” 이 말의 뜻은 “당신과 나는 아무리 살아도 맞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며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인생은 대박을 꿈꾸는데 ‘대박(大舶)이란 말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흥부전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흥부가 제비 다리를 고쳐주었더니 제비가 박씨를 물어다 주어서 그 박씨를 심어 박을 수확하여 톱으로 켰더니 박 속에서 금은보화가 나와 큰 부자가 되었다는데서 유래하였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서양 제국주의 시대 어부들이 원양어선(遠洋漁船)을 타고 나가 고기를 많이 잡아 큰 배에 싣고 와 팔면 평생 먹고 사는 돈이 생기게 되는데 그 큰 배가 “대박(大舶)”이다. 박(舶)은 큰 배를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번에 대박 맞으면 평생 먹고 산다는 뜻에서 생겨난 말이다. 어떤 것이 맞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두 사건의 공통점은 한 번에 부자가 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유래와 관계없이 한 번에 부자가 되고 형통한 길이 열린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생은 신분여하 노소를 불문하고 대박이란 말을 다 좋아하기 때문에 고객관리 차원에서 “고객님~ 대박나세요, 사장님~ 대박나세요...” 이런 멘트를 날리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게 대박은 무엇일까?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우리 인생에게 대박은 메시야”라고 선포하였다. 왜냐하면 그 분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자에게 놓임을, 슬픈 자에게 위로를, 재(灰)대신 화관(花冠)을 주시는 분(사 61:1~3)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이 땅에 오셨고, 지금은 보혜사(保惠師)로 우리 곁에 항상 계시며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신다. 보혜사(保惠師, 헬라어: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는 헬라제국 시대에 그들의 문화 속에서 대언 자, 변호사, 중재자, 협조자, 위로자, 상담자, 안내자, 돕는 자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하였다. 사도 요한은 이 파라클레토스를 요 14:16~17에 적용하면서 예수가 또 다른 보혜사로 언급하였다. 성경 번역판마다 사용하고 있는 용어에 다소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한글 성경의 개역한글 판과 표준 새번역판에서는 보혜사로 번역하고 있으며, 공동번역판에서는 협조자로, 가톨릭성경판에서는 보호자로 번역하고 있다. 영문성경의 킹제임스판과 YLT에서는 Comforter(위로자)로, NIV와 RSV에서는 Counselor(상담자)로, NRSV에서는 Advocate(변호사)로, NASB에서는 Helper(돕는 자)로 번역하고 있다. 의미를 종합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시는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대박인 것이다. 세상으로 만족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대박의 만족을 누리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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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당신은 내 인생의 로또(Lot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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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부모가 자녀들을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하는가?
- I. 서언(序言)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말이지만, 가장 틀리기 쉽고 혼돈하기 쉬운 용어들 중 하나가 가족들 과 일가친척들과의 지칭어와 호칭어들이다. 오늘의 주제는 이런 용어들 중에서 부모가 자녀를 부를 때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되는지에 대한 용어들을 계속 논하고자 한다. II. 경우에 따른 호칭과 지칭 1. 자녀 혼인 전과 혼인 후 :가장 일반적인 것은 아들의 경우 혼인하기 전에는 ‘철수야’처럼 이름을 부른다. 하지만 혼인한 후에는 직접 이름을 부를 수 있으나, 아이를 낳으면 ‘아비’라고 부르거나 손자의 이름을 넣어서 ‘OO 아비’라고 부르는 것이 좋다. 미혼의 아들을 가족과 친척에게 지칭할 때는 호칭어인 ‘OO’를 그대로 불러도 좋다. 하지만 지칭하는 아들보다 아랫사람에게는 그들이 부르는 호칭인 ‘너희 형’, ‘너희 오빠’, ‘너희 삼촌’ 등으로 말한다. 아들의 직장인들에게는 ‘OO씨’, 또는 성이나 성명에 직함을 붙여서 ‘김철수 과장’ 혹은 ‘김 과장’으로, 타인에게는 ‘우리 OO’, ‘우리 아들’로 지칭하는 것이 좋다. 2. 교회 안에서 가족들 :이런 경우는 앞에서 말한 원리대로 아들이 교사나 집사 등의 어떤 직함을 가지고 있으면, ‘김OO 선생’, ‘김OO 집사’라든지 ‘김 선생’, ‘김 집사’라고 지칭하면 된다. 이런 면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조선시대에는 아들이 당상관(堂上官: 조선시대 정삼품 이상의 벼슬에 있는 자) 이상이면 공석에서는 앞에서와 같이 직함으로 호칭이나 지칭했다고 한다. 이런 면은 교회에서도 아들이나 가정 식구들의 직함을 그대로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필자의 어머니가 교회당 안에서 교인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우리 목사님’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아무리 목사라도 존칭인 ‘님’자는 붙이지 않음이 좋고, 또 그것이 자랑한다는 느낌이 들도록 해서는 안 된다. 어떤 드라마에서 부모가 아들을 계속 ‘우리 이 박사’, ‘이 박사’라고 부르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다분히 아들을 자랑하려는 의도가 있어 보이기 때문에 좋은 호칭과 지칭은 아니다. 또한 가정에서 식구들끼리 모인 자리에서는 아무리 목회자라도 목사라는 호칭이 아닌 자연적인 부모와 자식 간의 호칭이 되어야 할 것이다. 3. 며느리와 시부모님 사이: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새색시가 맏동서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았다. “동서야? 난데 내일 우리 집에 와서 저녁 먹어, 어머님께서 올라오셨어.” “어머니께서요? 언제요?”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맏동서가 “아니 막내 동서는 어머니가 뭐니? 어머님이라고 해야지”라고 하며 핀잔을 주었다. 그렇다면 시어머니에 대해서 어머니라고 호칭하면 안 되는 것일까? 요즈음 같이 높임말에 대한 체계가 흐트러진 현실에서는 별로 큰 문제가 될 것은 없다. 하지만 일반적인 높임말은 존칭 접미사 ‘님’자를 붙여서 어머님으로, 시아버지에게는 아버님으로 호칭해야 하는 것이 바른 말이다. 반면, 시부모가 며느리를 부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흔히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부르는 말은 ‘아가’, ‘새아가’, ‘어미야, 어멈아’, ‘예야’ 등이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 ‘예야’로 부르는 것은 어조에 따라서는 며느리가 불쾌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또한 이런 말들도 상황에 따라서는 ‘아가’, ‘새 아가’, ‘OO 어미야(어멈)’, ‘너’로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부모와 배우자에게 며느리를 지칭하는 말로는 ‘며늘애’, ‘새아가’와 아이의 이름을 넣은 ‘OO 어미(어멈)’, 아들의 이름을 넣은 ‘OO 댁’, , ‘OO 처’ 등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며느리’는 남의 며느리를 지칭하는 느낌도 있고, 어른 앞에서는 며느리를 낮추는 것이 예로 여겨왔기 때문에 ‘며느리’로 하지 않고 ‘며늘애’로 지칭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요즈음은 이상의 용어들이 오히려 서로가 어색하게 느껴져서 모든 것을 무시하고 며느리의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경우들도 많이 본다. III. 결 어 어떤 국어학자는 ‘현재 우리 국어의 어려움과 혼란은 서울시내의 교통 혼잡보다 더 풀기 어려운 심각한 상태’라고 우려했다. 부족하지만 생활용어를 연구하며 이 글을 연재하는 필자가 볼 때도 충분히 공감되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때는 이런 글을 쓰면서도 오히려 독자들에게 더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이상에서 논한 모든 내용들이 다 그러하다. 하지만, 고치지는 못하더라도 알고는 있어야 된다는 심정으로 오늘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늘 사용하는 용어의 실제에 대해서 논하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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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부모가 자녀들을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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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교회 이사 가요
- 교회 2층에는 태권도 학원이 있다. 수업이 끝날 때면 아이들이 입구에서 우르르 쏟아진다. 조용한 동네에 이 아이들이 다 어디 있다 나왔을까 싶다. 아이를 데리러 오신 어머님들은 현관 앞에 서 기다리다 내려오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 어머니도 그렇게 만났다. 이제 겨우 넘어지지 않을 정도의 걸음을 하는 어린아이와 함께 어머니 한 분이 교회 앞 현관에 있다. 아이도 어머니도 너무 심심해 보여 인사를 드리며 말을 붙여본다. “큰 애가 여기 태권도 다녀요. 둘째가 너무 재촉해서 늘 이렇게 일찍 나와서 기다리네요.” 조금은 어눌한 한국말. 외국에서 오신 분인지, 강원도 사투리가 심한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굳이 물어보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아니니깐. 그늘도 없는 곳에서 기다리느라 고생하는 것이 안타까워 만화방으로 안내했다. 아이도 아장거리며 들어와 만화도 보고 엄마와 시간을 보냈다. 그 후 어머니는 편하게 교회에 들어오셔서 커피도 마시고 아이와 잠시 놀다가 큰아이가 끝날 시간이면 돌아갔다. 언제부터인가 태권도가 끝나면 큰아이도 함께 들어와 한참을 책보며 놀다 가곤 했다. 그렇게 편안하게 교회에 들어오셨던 분. 아니, 만화방에 오신 것이 맞겠지? 뭐가 되었든 이렇게 찾아주는 분들 덕에 나는 개척의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코로나가 길어지며 만화방을 열지 못한 지 오래다. 교회 사무실에서 업무 처리할 때, 잠시 조용히 기도할 때 가는 정도. 목사로서 부끄럽다. 그날도 업무를 보러 가는 길에 그분과 마주했다. 겨우 걸음을 옮기며 아장이던 아이는 제법 많이 컸지만, 여전히 형을 기다리며 길에서 엄마와 놀고 있었다. 반갑게 인사 나누기도 잠시. 코로나로 교회가 힘들지 않은지 무거운 표정으로 안부를 물어온다. “저희 이사 가요.” 코로나 상황이 길어지는데 임대료까지 올라가게 되어 이사를 결정했다는 근황을 전했다. 많이 아쉬워하며 걱정한다. “교회가 많이 어려워지며 떠나시나요? 동네 들어와서 고생만 하다가 나가시는 것 아니세요?” 진심이 느껴진다. 내가 이웃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비록 먼 곳으로 떠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 만남이 마지막일 것 같다. 나중에 놀러 오시라는 인사를 나누어 보지만 코끝이 찡해진다. 이사할 곳에서 만날 사람들이 기대된다. 하지만 떠나는 걸음이 더 무겁고 속상하다. 2년 넘게 함께 했던 상가 사장님들이 보고 싶을 것 같다. 목소리 큰 부동산 소장님, 무뚝뚝한 미역 창고 사장님, 해물 된장찌개가 끝내주는 식당 사장님, 언제나 바쁜 간판집 사장님, 우리 교회를 라면 맛집으로 알고 놀러 오시는 태권도 관장님. “모두 행복하세요. 너무 감사했습니다.”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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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교회 이사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