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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수룡 장로] 3초 미학
    코로나 때문에 산업현장이 마비되어 어려워진 때가 있었다. 몇 년 전 강원도의 한 농촌에서 수확한 많은 양의 감자의 판매 길이 막혀 큰 걱정을 했을 때 방송이 나간 직후 바로 주문이 들어와 30분 만에 감자가 다 팔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러나 어떤 한 가정에서 감자를 전화로 구입하려고 머뭇거리다 잠깐 사이에 판매가 방금 마감되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넘 아쉬움만 더했다. 강원도 감자가 순식간에 주문이 완료되어 구입 기회를 놓친 것이다. 3초만 더 빨리 전화기의 버튼을 눌렸다면 상황이 바뀌었을 텐데. 시간 중에 초 단위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으나 3초 빨리 서두는 것과 3초를 더 기다리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3초를 빨리 서두르면 큰 일을 성사시킬 수도 있지만 3초를 기다리고 행동할 때 더 좋은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조금 성격이 급한 경향이 있어 생각할 여유도 없이 바로 말하거나 행동을 하기 때문에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행동하기 전에 하나, 둘, 셋 동안 잠깐 생각하고 말하면 저절로 좋은 분위기가 만들어진다고 믿어진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다. 대화를 할 때 짧은 시간인 3초만 참다가 부드러운 말을 하면 부부싸움도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살다 보면 한 사람이 툭 내뱉는 말 때문에 상처를 입고 마음이 상하여 오랜 시간 동안 냉전이 지속되는 것이다. 요즘같이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시기에는 사소한 작은 것 하나 때문에 흥분하며 욕을 하는 경우가 있다. T.V에서 특정 인물이 나오면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를 하는 상대방을 보고 이제 ‘3초만 참고 말하기’를 약속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입에서 정화된 말이 나오지 못하면 사회는 저절로 욕설로 오염되어 사회가 온통 엉망이 될 것이 틀림없다. 차 운행할 때도 참아야 한다. 현직에 있을 때 여자직원이 자기 어린 아들을 태우고 차를 운행하면서 상대방 차가 난폭하게 운전하든지 끼워들기를 하면 ‘개**’ 라고 하는 말을 무심코 했던 것이다. 시어머니인 할머니가 오셔서 차를 같이 타고 마트에 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끼워드는 차를 보자 어린 손자가 ‘엄마, 또 개** 라고 해’라고 하는 바람에 부끄러워 낯이 뜨거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린아이라 잘 감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예사롭게 내뱉은 말을 아이가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적어도 3초만 참았다가 품격에 맞는 말을 했다면 그런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에서도 교인들이 목회자의 설교가 끝나면 친한 사람들끼리 비평을 하게 되는 것을 종종 목격할 때가 있다. 부정적인 말을 하기 전에 3초만 생각하고 지혜롭게 말을 하든지 침묵하면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터인데 정말 안타까울 뿐이다. 3초 미학. 3초만 꾹 참자! 툭 내뱉지 말고 잠깐만 참으면 후회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말하고 싶어도 3초만 참고 생각해서 온유한 말을 하든지 말하지 않으면 은혜로운 분위기가 틀림없이 조성된다. 3초는 하나, 둘, 셋 하면 끝나는 정말 짧은 시간이다. 말하기 전에 3초만 기다렸다가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격에 맞는 품위 있는 말과 행동을 하자. 즉시 말하는 습관을 버리고 3초를 참았다가 말하는 행동을 실천하기만 하면 아름답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 가는 주인공이 바로 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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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7
  • [하수룡 장로] 일견
    재미있게 쓴 좋은 글 중에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두 마리의 개를 키운다고 한다. 물론 한자어는 다르지만 하나는 선입견이고 또 다른 하나는 편견이라 말한다. 인간은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거대한 감옥 속에서 살아간다고 했다. 이 두 마리의 개를 쫓아버리는 특별한 한 마리의 개가 바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말했다. 직접 보지 않고 들은 얘기로 상대를 판단하면 큰 실수를 범하게 된다고 했다. 물론 한자어는 전혀 다르지만 일견을 키우면서 상대를 바르게 보는 혜안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도 제대로 된 일견을 가지지 못하여 실수할 때가 많다. 우리의 실수 중 가장 큰 과오는 부모의 신앙이나 자녀의 직업과 외모만 믿고 일을 추진하는 경우다.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일을 추진해야 마땅한데 그렇지 못한데서 큰 문제가 발생한다. 분명히 부모와 자녀의 신앙은 다른데 응당 어른이 좋으니까 자녀가 좋을 것이라는 막연한 선입견이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새 신자가 찾아와 자리를 잡을 때쯤 되면 자신이 드려온 예배의 형식이나 용어가 다를 경우에는 이단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선입견을 가진 것도 문제가 된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부터 인상이 다른 사람에 비해 좋다고 여겨지면 좋은 사람으로 여기고 그를 무조건 인정하는 주관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우린 얼마나 다른 사람을 흠담하길 좋아하고 좋은 내용이든 나쁜 내용이든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는 선입견을 가진 특별한 민족이 아니던가! 이런 환경 속에서 사는 우리는 자연적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선입견이 마음속에 자리를 잡게 되어 잘못된 편견으로 불공정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성경에서도 잘못된 일견으로 주님을 실망시키는 제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주님께서 도마에게 찾아와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시고 상처 난 손을 보여주시므로 부활의 확신을 심어주셨다.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배하는데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도 있었다. 꼭 보아야 믿겠다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별수 없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한낱 연약한 인간임을 알 수 있다. 신앙의 관점에 어떤 이는 보지 않고도 믿고, 어떤 이는 도마처럼 보여주어도 믿지 못한다. 주님이 주신 일견으로 무엇이든지 먼저 정확하게 보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공정하고 정의로움이 드러나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면 믿을 만한 것이 도저히 없다. 믿음으로 바라보는 눈이 절대 필요한 시기가 오늘날이 아닐까? 선입견과 편견의 오염으로 공의롭지 못한 세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면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성경에서 명령하고 계신다. 세상에서는 한 번 보고 도저히 믿을 만한 것이 없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은 오직 일견으로 충분하다. 우리의 일생을 주님의 한 말씀을 일견으로 믿고, 또 다른 말씀을 일견으로 확신하면서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것이 최고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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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5
  • [하수룡 장로] 자 유
    다니엘 기도회 때 정요한 집사와 김예나 집사의 간증집회에서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에 온 것을 간증하는 것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소위 금수저 집안의 아들딸인데도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 목숨 건 탈출로 자유 찾은 기쁨을 간증할 때 자유가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보통 자유라 하면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영어에서 말하는 Liverty는 사회적 권리로서의 자유를 말하고, Freedom은 본질적인 개인의 자유에 해당한다고 정의한다. 시민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들은 만민평등 사상에 입각하여 개인의 권리를 당연한 기본권리(Liberalism)로 주장한 것이다. 북한의 주민들이 사선을 넘어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양의 언저리에서 서식하는 앨버트로스라는 새는 폭풍우를 뚫고 대양을 가로질러 수 만 킬로를 이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새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고향하늘과 고향의 숲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탈북하여 자유를 찾은 정요한 집사 역시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사람으로 조부인 장로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잘 하시던 조부님이 손자인 정요한 집사를 어릴 때부터 ‘너는 하나님의 귀한 백성이다.’라고 가르쳐 주면서 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하며 축복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북한에서 명문가정에 태어나 좋은 학교를 거쳐 최고의 코스를 마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김정일 전용악단 단장을 맡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마음속에 조부께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고향하늘과 숲을 그리워하면서 자유의 나래를 펼치도록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셨던 것이다. 독일에 교환교수로 출장 중에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어떤 교수가 얼굴색이 좋지 못하니 교회에 한 번 가보라는 말씀을 듣고 간 것이 수 만 킬로를 가로질러 자유 대한민국의 하늘과 숲으로 날아 와 둥지를 틀은 것이다. 우리가 볼 때에는 우연이라 생각할 줄 몰라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정요한 집사가 자유를 찾도록 길을 열어주신 것이라 믿는다. 서울 사람이 작곡한 사향가와 샤르사테곡을 연주하여 온 회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간증 중에 3800여 개의 교회를 훼파하고 그 자리에 김일성 동상을 세워 놓았으니 하나님께서 엄청 슬퍼하고 계실 텐데 하루 빨리 모든 자유가 회복되어 교회당을 다시 세우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금도 수많은 북한의 지하교인이 억압 속에서 해방과 자유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그들은 죽지 못해 살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눈물을 지우는 것을 목격했다. 자유 대한민국에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넘어온 탈북민 33,000여 명이나 되는 그 새터민들에게도 사랑과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 날 카네기 홀이나 세종 문화 회관에서도 도저히 감상할 수 없는 귀한 부부 집사의 현란한 기악연주를 선물로 받고 큰 감동을 받았다. 우리가 감동받은 이상으로 자유를 갈망하는 많은 탈북민들은 북한 땅이 하루바삐 자유의 물결로 하나님의 사랑과 빛과 생명으로 채워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북한의 백성들이 진리를 알고 진리가 그들을 자유하게 함을 알도록 평화의 복음을 힘써 전하여 그 땅이 해방과 자유가 넘치도록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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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25
  • [하수룡 장로] 3분 기적
    2020년 들어 온 나라를 뒤집어 놓은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미스터트롯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아 온 국민이 집안에서 TV만을 친구삼아 살아가던 그 때에 미스터트롯이란 신생아가 나타나 두 시간 반 동안 어린아이를 비롯한 전 국민의 시선을 떼지 못하도록 사로잡은 것이다. 요즘같이 마음을 위로해 줄 것이 없는 시기에 얼마나 좋은 청량음료인지 고마운 프로라 생각하게 되었다. 항상 어떤 일을 해보면 그 속에 주인공을 비롯한 인기 있는 화제의 인물이 탄생되는 것이 일반 법칙이다. 최고의 스타가 나오고 그와 못지않게 멋진 인물이 나타나 자기와 딱 맞는 사람에게 관심을 지대하게 가지게 되는 것이다. 화제의 인물은 TOP7인데 그들은 겸손할 뿐만 아니라 트롯이면 무슨 장르의 노래라도 잘 소화하여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단 3분간의 짧은 시간을 노래로 보답하는데 관중이 매료되어 노래에 빠지고 결국 특정 가수를 그 어떤 분보다 좋아하며 섬기게 되는 것이다.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서울에서 게릴라 팬 미팅을 가지면 공간의 한정으로 정한 수만 받았는데 뜨거운 태양이 내려쬐는 것도 아무런 불평도 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남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베트남에서 일하던 어떤 분은 서울에서 암 수술을 한 뒤 우울증과 인생을 포기한 상태로 있었으나‘나는 살고 싶다.’로 바뀌었고, 부부가 이혼하기로 결심하고 법원으로 가는 도중에 차안에서 노래 한 곡을 듣고 이혼을 포기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도 있었다. 제주도에서 첫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도착한 후 렌트카로 어린아이처럼 들뜬 기분으로 축하장에 도착하여 만남을 가졌고, 나이는 어리지만 내가 최고로 존경하는 분으로 손수 초상화를 그려 선물하기도 했고, 어떤 한 가정은 4대가 모두 팬이 되어 축하를 해주는 모습을 보고 딱 3분의 짧은 노래가 대단하다 못해 기적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다. 끝없는 축하와 사랑으로 팬 미팅은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으나 아무런 불평 없이 감격하여 울고 기쁨의 함성을 지르는 기적의 현장이 되었다. 3분 기적의 주인공은 팬에게 보답을 하듯 겸손하게‘한 분 한 분이 나의 보약 같은 존재.’라고 진실한 마음을 전했다. 3분은 짧은 시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수가 부르는 3분 정도의 노래에 열광하듯 하나님의 말씀에 매일 3분만 집중하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잘 아는 천지창조의 미켈란젤로는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끌어안고 슬퍼하는 ‘피에타’상을 제외하고는 어느 작품에도 사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시고도 어디에도 자신의 솜씨라고 흔적을 남기지 않았는데 나는 기껏 작은 벽화 하나 그려놓고 나를 자랑하려 서명을 하다니... .’이것은 평소 매일 성경에 집중하고 잠간 묵상했던 말씀이 바로‘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였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가도 잠간의 말씀 묵상으로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 깨닫고 이를 잘 실천하였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주님의 제자다. 그 분의 말씀에 매일 단 3분만 집중하여 묵상하고 기도하면 기적은 분명히 일어난다. 그리고 반드시 나를 높여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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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04
  • [하수룡 장로] 소 원
    실제 말기 암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예쁜 부인과 사랑스런 자녀인 남매를 두어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갑자기 찾아온 중병으로 유전적이고 환경적인 요인을 물려준 부모애 대한 원망이 가득 차 있었다. 왜 하필이면 내가 중병으로 죽어야 하며 이런 병에 걸리도록 어릴 때 극한 환경에서 자라도록 한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했다. 아버지의 젊은 날에는 날마다 술과 세상의 열락으로 가정을 돌보지 않아 성장기에 스트레스를 준 것이 원인임을 확신하게 된다. 물론 어머니의 가출에 대한 실망감도 증오의 대상이 되어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빠를 찾는 어린 자식들에게는 ‘아빠는 소풍 가셨다.’고 둘러대며 달래어 보았지만 중병은 시간이 갈수록 상태가 악화되어만 간 것이다. 이제 위기의 순간에 이별의 시간이 가까이 와 있음을 직감하고 지난 일들을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섭섭하고 미운 생각만 주마등처럼 지나갔으나 그래도 죽기 전에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뭔가를 남기고 가야한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살날이 짧지만 자기가 위로받고 가족들에게 오랫동안 기념이 될 만한 일이 하나라도 있어야 되겠다는 강렬한 욕구가 그를 사로잡았다.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인생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마음이 더해 왔던 것이다. ‘나는 왜 이리 복도 없을까?’하고 탄식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갑자기 죽음이 몰려 왔을 때 ‘정말 꼭 남기고 가야할 것이 없을까?’하고 무언가를 골몰히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나 특별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새벽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지금까지 부모님과 대화와 사랑을 나누며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었던 것을 기억해 낸 것이다. ‘그렇다! 다정한 모습을 하고 있는 가족사진을 만드는 것이다.‘ 그 날 이후 자기를 중심으로 가족사진을 촬영하는 일을 최고의 소원으로 삼고 이 역사적인 일을 추진하였다. 웬만한 가정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것이지만 주인공인 말기 환자에게는 최고의 소원이 된 것이다. 의료진과 협력하여 소원을 이루기 위해 온힘을 다 쏟았다. 이혼한 부모님은 이제 죽음을 앞둔 자식에게 꼭 소원을 풀어 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이혼하여 서먹한 관계였지만 사랑으로 꽉 찬 모습으로 보일 수 있도록 가족사진을 만드는 일에는 한마음이 되었다. 그 아들의 소원을 이루는 날에 이혼한 부모와 죽음을 앞둔 아들, 세 사람 모두 그 동안 참고 있었던 눈물보가 터져버려 사진관이 온통 눈물바다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제대로 된 일반 가정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사소한 일이지만 ‘가족사진’이 소원이 된 이 가정에는 특별하고도 안타까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인생의 마지막 위기가 찾아 왔을 때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면 진정 우리의 소원은 무엇이 되어야 할지 도전을 받게 된다. 인생의 장막이 무너지는 순간이 오기 직전에 말기 암 환자는 ‘가족사진’이 최고의 소원이었지만 믿는 기독 신자인 우리는 인생의 종점에서 꼭 실현해야 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귀한 일을 성취할 수 있도록 신실한 종으로서 ‘기도의 제물’이 되고자하는 소원이 가장 좋은 소원 중의 소원이 되어야 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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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5
  • [하수룡 장로] 신발
    인류의 조상 아담이 태어난 시기에는 옷은 물론 신을 신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신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1700년경 이집트에서 발견된 끈 달린 샌들이다. 아마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에게서 소명을 받을 때와 비슷한 시기라 역사적으로도 증명되는 내용이다. 이집트를 비롯한 그리스시대에도 사람들은 짐승의 가죽이나 나무, 풀잎에다 끈을 달아 발에 걸었다. 고대에 샌들을 신었던 사람들은 주로 사제나 귀족층이었고 서민들은 식물의 줄기로 만든 신발을 신거나 맨발로 다녔다. 예수님이 오신 당시에도 샌들은 질긴 가죽으로 바닥을 만들어 가죽 끈을 고정시켰고 유대인들은 우리의 풍습과 마찬가지로 집안에서는 신을 신지 않았다. 이동할 때만 신발을 사용한 한 것이다 신발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오늘에서 내일로, 익숙한 곳에서 낯선 곳으로 움직여 변화해 주길 원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신발을 만들어 신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분명한 것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어떤 좋은 신발도 인생의 죽음에서 다 끝이 나고 만다는 사실이다. 신발은 인간의 몸을 땅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최초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발을 신고 다닐 때 값진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발을 벗는 것은 잘못 살아온 과거에서부터 탈출한다는 의미가 있고 곧 옛사람을 버린다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죽음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때 묻은 신발을 꼭 벗어야 할 때에는 오직 순종으로 그 분의 뜻을 겸손하게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모세에게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구절에 신발을 벗는 행위는 하나님의 소명에 부응하여 예의를 갖추어 하나님에 대한 절대 경외심을 표시한 것이다. 또한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와에게 신을 벗으라고 했을 때 선 곳이 전능자의 거룩하심을 나타나는 장소라 생각하여 말씀에 순종하고 따른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이다. 돌아온 탕자에게 종을 시켜 가장 좋은 옷과 신발을 신기라는 부친의 명에서 아들이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포함되어있다. 신발을 신는다는 것은 신체를 보호하는 의미 외에도 변화를 바라고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의 기원이나 거듭난 삶을 살라는 깊은 뜻이 있다. 반면 신을 벗는다는 행위는 절대 순종하겠다는 의미나 경건한 자세로 상대방을 절대 존중하겠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신데렐라와 콩쥐의 이야기에서 신발 때문에 인생이 달라지는 것처럼 하나는 본인을 증명하는데 사용되고 다른 하나는 인생을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인생으로 변화시키고 영원한 복을 누릴 수 있는 구원의 신발을 신겨주셨다. 인간은 평안의 신발을 신고 안락한 생활을 하는 탓에 현실에 안주하려는 속성이 있어 신발을 계속 신고 벗으려 하지 않는다. 다른 신발을 바꾸어 신어야 할 때가 되면 그에 따른 행동이 우선되는 것이 맞다. 거룩한 곳에서 부름이 있을 때에는 옛 신발을 벗고 그 분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오직 순종해야 하고, 우리에게 명하는 말씀이 임하면 사명의 신발을 신고 오로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수룡 목사(마산회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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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장칼럼
    2020-02-19

실시간 초장칼럼 기사

  • [하수룡 장로] 하 나
    5월이 되면 가정의 달로 5월 21일이 둘이 하나 되는 부부의 날로 이날을 잘 보내려고 애를 쓰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다. 주님은 몸 된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이 분리되지 아니하고 하나 되기를 지금도 간절히 소원하고 계신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통일되고 하나 되는 모체가 교회라면 개인과 가정 역시 성전 같은 교회로 하나 되는 것이 옳은 것이라 믿는다. 그러면 왜 성도인 우리는 하나가 되어야 하나? 수많은 교회나 단체가 교리나 개인의 이익과 생각 때문에 하나가 되지 못하여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예수 안에서 사랑 가운데 거하는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찢어질 때 주님은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 아버지 하나님께 속해 있는 우리가 하나 되지 못하여 갈등과 아픔을 겪는 것은 큰 죄를 짓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 몸 된 교회나 가정의 구성원인 지체들이 충돌하고 한뜻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면 결국 자기가 자신을 상처 내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부르심에 한 소망을 갖고 사는 우리는 성령도 구속해 주신 분도 오직 예수님뿐이시고, 하나님도 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명령을 따라 하나 되는 것이 마땅하다. 어떻게 하면 하나가 될 수 있을까? 한 마디로 우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해야 한다. 부르심은 성도답게 구원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백성은 겸손으로 무장해야 한다. 먼저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정말 내가 죄인이다.’ 하고 솔직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다음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생각과 행위가 앞서야 한다. 교회에서 조금 일을 하면 시끄러워 눈살을 찌푸릴 때가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내가 일을 하면 얼마나 할까? 자기의 무력함과 무지함을 깨닫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겸손이 얼마나 필요한데 말이다. 겸손과 가장 통하는 사촌이 되는 말이 온유인데. 온유는 정말 하나님께는 기쁘게 순복하며 사람에 대하여는 남의 약점을 흠잡지 말고 부드럽게 말하는 것으로 우리가 가져야 할 귀한 태도이다. 루터는 ‘사탄은 인간을 단번에 쓰러뜨리지 못할 때는 동일한 시험을 여러 번 가해온다고 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 있어 겸손한 가운데 인내해야 사탄의 장기적 시험을 이길 수 있다고 말했다. 겸손으로 무장하여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할 때 교회와 가정은 하나로 일치된다. 작금에 수많은 교회와 가정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에 우린 눈과 귀를 기울인다. 주님이 계시는 곳은 반드시 겸손함으로 하나 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기계적으로나 무력이 아니고 다양한 은혜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옳다. 분량대로 은혜를 주신 목적을 알고 신앙의 일치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면 최고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일치가 그 근본 조건이 된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성장이 없는 신앙생활은 퇴보되고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간사한 유혹에 빠지거나 교회를 해치는 사탄에게 속아 넘어가면 절대 안 된다. 신자 된 우리가 먼저 주님의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고 진실 되게 살자. 분명히 겸손으로 무장하여 살 때 오직 하나 되어 은혜로운 가정과 교회가 된다는 것을 꼭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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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장칼럼
    2023-05-25
  • [하수룡 장로] 굄을 얻는 자
    굄은 유난히 귀엽게 여겨 사랑함이란 뜻인데 요즘은 잘 사용하지 않지만 참 아름다운 순수한 우리의 말이다. 동생 집의 정원 가운데 밀감나무가 해마다 열매를 많이 맺고 탐스럽게 잘 자라 정말 주인의 굄을 얻고 좋은 나무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유독 마음이 가는 나무는 좋은 거름과 맑은 물을 공급받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랑스러워 무엇이든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성경에 에스더라는 분이 왕후가 되기 전의 삶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굄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르드게를 보내어 에스더의 삶을 하나님의 백성 중에 고귀한 사람이 되도록 훈련을 시킨 것이다. 그가 에스더를 잘 기르고 보이지 않게 항상 도와주는 역할을 감당한 것이 결국 왕의 굄을 얻어 여성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리게 한 것이다. 물론 복음적으로 볼 때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적용된 것이지만 성령 역사임이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중요한 것은 자기를 절대 나타내지 않도록 가르치면서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도록 지도한 것이 왕후 에스더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모든 일은 오직 하나님의 방법만이 성공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에스더를 훈련시킨 모르드게는 베냐민의 자손 기스의 증손으로 능력의 뜻이 있고 시므이의 손자이며 야일의 아들로 그가 들으셨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아버지인 야일은 아들 모르드게의 앞날을 밝게 하여 주님의 굄을 받게 하려는 노력이 엿보여 고금을 통하여 부모의 마음은 똑같다.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에게 유다 왕 여고냐와 함께 모르드게가 사로잡혀 포로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르드게는 예수님의 예표로 이미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모르드게를 통해 에스더가 굄을 크게 받는 자로 살아가도록 믿음의 역사를 이룬 내용을 기록하여 남긴 것이라 믿는다. 에스더의 역사적인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주님에게서 굄을 얻기 위해서는 복음으로 보혈과 십자가를 자랑하고 귀한 예물로 그분을 조용한 가운데 잘 섬겨야 한다. 에스더가 도성 수산에 나아갔을 때 궁중대신 헤개라는 분이 몰약과 향품을 주어 몸을 정결하도록 했다. 따라서 우리의 더러워진 심령을 내놓고 주님의 보혈로 깨끗이 씻지 않으면 굄을 받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일곱 궁녀는 도우시는 성령님을 예표한 것이라 믿어진다면 에스더처럼 그분과 늘 동행하는 삶을 영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세상에서 믿는 자의 아름다운 처소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가족이 있는 가정과 함께 모이는 교회 역시 우리가 스스로 연단할 수 있는 최고의 장소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신 불신 간에 전능자에게서 굄을 얻고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이치다. 분명한 것은 사랑받을 짓을 해야 주님의 굄을 받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성도는 에스더처럼 자기 자신을 직장과 교회뿐만 아니라 어떤 장소에서도 절대 나타내어서는 안 된다. 어렵더라도 나를 죽이고 주님만 드러내는 믿음이 절대 요구된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살아가기만 하면 우리 주님의 굄을 얻는 자가 틀림없이 된다는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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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19
  • [하수룡 장로] 맛
    보통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손맛 눈맛 입맛 때문에 바다를 찾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고 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기 위해 교회를 끊임없이 찾게 된다. 마산지방에 문창이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는 1901년에 최초로 설립되어 120여 년 동안 하나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맛본 교회로 자랑스럽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다. 사막 같은 불모의 땅 마산지방에 문창이라 이름을 가진 교회가 지금까지 이 지역에 변함없이 맑은 물이 흐르도록 한국교회의 오아시스를 견지해 온 것이다. 1919년 추산동의 옛 지명인 문창리에 석조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이사했고 이때 교회명을 문창교회로 개칭했다. 선교사 아담슨 선교사의 지원을 받아 성호리에 독서숙을 세우게 되는데 1909년 대한제국의 인가를 받아 마산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창신학교로 발전했다. 이어 의신 여학교를 세우면서 남녀가 모두 신식교육을 받게 되고 1924년에 유치원을 설립하여 일찍부터 교육의 혜택을 받아 신문화의 맛을 보게 된 것이다.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나는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 이때 비로소 신식교육의 맛을 보게 되어 근대화를 이루는 주역들이 생산되고 일찍부터 이 지역이 다른 곳보다 깨어있는 선진인물이 많이 배출된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 수많은 교회가 있지만 문창교회(제일문창)는 다른 교회가 갖고 있지 못한 차별화된 복음적 특징이 있다. 1919년 3월 초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상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져와 이 교회 장로이자 창신학교 학감인 이상소와 의신 여학교 교사 임학찬에게 전달했다. 이로써 창신학교 교사인 최용규, 의신여학교 교사인 김필애, 박순천 등이 준비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마산 장날 독립 만세 시위에 사제가 함께하여 독립 만세를 외친 것은 물론 주의 나라를 선포하고 의를 맛본 것이다. 복음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교회 내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거나 복음의 사회적 공적 영역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 교회사에서 기독 신자라면 내세울 자랑스러운 주기철 목사님이 1931년 7월에 부임하여 1936년 7월에 평양 산정현 교회로 이임할 때까지 이곳 문창리에서 사역하셨다. 일제강점기에 주 목사님은 대한의 독립과 신앙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것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과 함께 투옥되어 끝까지 굽히지 않는 굳건한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셨고 사악한 일제는 망한다는 확신으로 투쟁하였기에 바울과 같은 큰 인물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악령의 포로가 되어버린 사람들을 그것에서부터 자유케 하시려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러 오신 것이다. 예수만 믿으면 모든 것이 잘되고 천국 간다는 싸구려 구원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서 미리 맛본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해야 할 신앙공동체임을 자각하고 이를 실천해야 한다. 일제강점기와 군사 독재 시대 선배들의 신앙심에 간접적이지만 참맛을 보았다. 이제는 교회를 향해 소리치는 아우성을 들어야 한다. 세상의 수많은 교회들이 오염되어 제구실을 못한다 할지라도 사막의 오아시스의 역할을 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본 문창이 있는 이 지역 교회들만은 하나님의 통치에 순응하며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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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2
  • [하수룡 장로] 유 산
    얼마 전에 아버지가 남긴 재산 때문에 큰아들과 작은아들 간에 다툼으로 살인사건이 터진 것을 보고 안타까움을 금치 못한 적이 있었다. 물론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일을 잘 처리했다면 큰 문제 아닌데 어른이 훌쩍 떠나버리고 나니까 큰일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몇 년 전에 필자가 잘 아는 친구에게 살아 있을 동안 두 아들에게 보유한 재산을 적당하게 잘 배분해야 나중에 후환이 없다고 했더니 일을 처리하여 자녀 간에 약간의 불평은 있었으나 서로를 인정하고 협력도 잘 한다고 했다. 물론 재산은 중요한 물질적인 유산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정신적인 유산을 잘 물려주어야만 미래가 있는 것이다. 윗대가 남긴 가치 있는 정신적 유산인 믿음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잘 물려주어야 할 소중한 유산 중에 유산이다. 현대는 젊은이들이 하나님보다 세상 쪽에 더 마음이 쏠려 있어 자칫하면 하나님을 멀리할 우려가 있어 더욱 그렇다. 현재를 사는 부모들이 신불신간 자녀들에게 공부를 잘하여 세상에서 잘되기만 바라기 때문에 자녀들이 성공한 후에 가정과 사회에 문제가 된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에만 가치를 두다 보면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친다. 평소 쉽고 편하게 사용하는 우리말 한글만 해도 그렇다. 조상이 물려준 좋은 유산인데도 너무 소홀히 다루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진정 과학적인 한글은 소리글자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자산으로 유네스코는 역사의 유산으로 남기려 한다. 일제강점기에도 평양은 제2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만큼 기독교가 부흥했던 곳으로 웃어른이 믿음의 유산을 자녀들에게 남기는 것을 최고의 명예로 여겼다. 80년 이상을 공산 독재 속에서도 신앙의 자유가 전혀 허락되지 않는 북한 땅이지만 아직도 지하교인이 20만이 훨씬 넘는다고 하니 정말 경이롭다. 믿음의 선배들이 믿음이라는 유산을 물려주어 지하 가정교회가 건재해 있는 것은 놀랍기보다 고마워 눈물이 날 정도다. 최근 탈북하여 목사의 부인이 된 김은진 씨가 수많은 북한 기독교인들의 참혹한 현실을 소상히 밝히는 것을 보고 정말 가슴이 아팠다. 독재 치하에서 그 자매의 부모님은 할머니의 올바른 신앙관으로 공산주의의 압제 속에서도 기독교 집안끼리 사돈을 맺어 하나님을 떠나지 않겠다는 살아있는 믿음에 경의를 표해야 한다. 할머니의 독실한 신앙심 때문에 자녀손들에게 믿음을 유산으로 남기고 떠나야겠다는 강한 집념으로 최근까지 비밀리에 성경을 가르치고 찬송으로 영광을 돌리도록 한 것은 대단하다. 북한 보위부의 수사가 시작되자 가족들의 안위 때문에 성경책을 태워 흔적을 없애고 살아남기 위해 온갖 지혜를 발휘했다. 그러나 결국 오지로 추방당하여 인간 이하의 삶을 살다가 목숨 걸고 탈북하여 지금은 전 가족이 자유의 품에 안긴 사실에 온 마음으로 박수를 보낸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 신앙의 자유가 없고 인간다운 삶이 없는 암흑의 땅에서도 하나님을 신앙하고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도록 가르친 어른들의 아름다운 믿음의 유산이 그 후손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게 하신 것이다. 최고의 자유 속에서 후손이 잘되길 바라는 성도인 우리는 과연 무엇을 확실하게 유산으로 남겨야 할지를 도전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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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22
  • [하수룡 장로] 올림픽 선수
    고대올림픽은 주전 776년에 그리스에서 제1회로 시작하여 주후 393년까지 거의 1천2백 년 동안 4년마다 개최된 체육대회가 293회에 이르렀다. 이것이 제우스 신역인 올림프스 산기슭에서 행해졌다고 해서 올림피아라 했다. 391년 로마 황제 데오도시우스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올림피아를 이교인 제우스신에게 봉납하는 제전이기 때문에 금지시켜 293회를 마지막으로 고대올림픽은 막을 내렸다. 올림피아 신전은 훼파되고 제우스 신상은 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뜰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렇게 고대올림픽이 1천5백 년 동안 중단되었다가 1894년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결성하여 1896년에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서 제1회 근대올림픽 대회가 열렸다. 4년마다 세계 각 도시에서 개최되었는데 1,2차 대전 중에는 3번 중단되었으나 세계 청년들의 우호를 돈독히 하고 국제 평화를 위해 정기적으로 개최되어 세계인의 환호를 자아내고 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올림픽 선수로 참전하여 경험한 내용을 토대로 올림픽을 비유를 들었기 때문에 올림픽의 종주국인 그리스인들도 심오하기 이를 데 없는 기독교의 진리를 터득하기가 쉬웠을 것이란 결론에 도달한다. 먼저 누구든지 월계관을 받아쓰려면 올림픽 선수로 택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승리한 영광의 면류관도 쓸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이 천 년 전에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인류 문화의 기원은 고대올림픽에서 시작되었고 전 세계가 공통으로 쓰고 있는 기원은 예수가 탄생한 해로부터 잡고 있다. 그런데 예수의 조국인 이스라엘은 2천 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리스도인이 전체인구의 1%도 되지 못하는데 이방인의 나라 그리스는 90%가 훨씬 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니 인간적으로는 정말 이해가 안 된다. 아마 신약의 절반 이상을 저술한 바울 본인이 올림픽에 직접 참가하여 승리의 영예를 누려본 경험을 올림픽과 연계하여 그 내용을 성경에 기록했기 때문에 올림픽의 종주국인 그리스인들이 기독교의 진리를 알고 어렵지 않게 예수를 받아들인 것이 틀림없다. 인간의 구원은 먼저 올림픽에서 바울처럼 선수로 선택되어야 하듯이 믿는 자 모두가 확실하게 자비하신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 달려갈 길을 마음껏 달려가고 절제하면서 말씀으로 승리를 얻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행복한 천국의 올림픽 선수로 선택을 받았다. 선수는 푯대만 향하여 능하신 심판자인 하나님의 말씀대로 규칙을 지키며 달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격이고 모든 것이 허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린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올림픽 선수다. 월계관은 아무에게나 씌어 주지 않는다. 규칙을 어기지 않고 전력을 다해 달려가야 주어진다. 바울은 많은 비유를 들면서 올림픽 선수에게 땀과 눈물과 피의 고된 대가로 받은 금메달로만 만족하면 안 되고 내세에도 빛나는 면류관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간곡한 권면을 한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육체의 훈련보다 더한 경건한 생활로 현세와 내세의 월계관까지 하나님에게서 확실한 약속을 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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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하수룡 장로] 기 쁨
    노년이 되면 크게 웃을 일이 없는 것이 정상이다. 그래도 부부가 같이 살아가면 그런대로 웃을 일을 만들고 웃게 되는 경우가 있으나 노후에 혼자되면 그렇게 기뻐할 일이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즐거움은 쾌의 감정으로 낙이란 감각적 차원의 쾌감이지만 기쁨은 즐거움이 동반된 쾌감으로 다분히 영적인 요소가 짙다. 즐거움은 쉽게 사라지지만 기쁨은 오래 지속된다. 오래전에 필자는 영남사람으로 여수에 사는 호남인을 전도하여 현재 집사에 이르게 된 분이 있는데 다른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만큼 기쁨 속에서 친밀하게 잘 지내고 있다. 서로의 삶이 일그러진 오이지의 모습이 아니라 확 펴진 보름달처럼 늘 즐겁고 웃는 모습을 유지하며 살려고 노력한다. 오랜 교분 동안 통화가 되면 상대방의 목소리만 들어도 기분이 좋고 몸이 아프다가도 저절로 회복될 정도로 서로가 쾌유의 은총을 누리기도 한다. 이것은 예수 안에서 찐 사랑의 대화를 나누기 때문에 기쁨이 최고조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좋은 날이거나 보고 싶으면 직접 상대방의 가정을 방문하여 며칠 쉬기도 하고 중간 위치의 만나기 쉬운 곳을 정하여 음식을 나누거나 차를 마시면서 기쁨을 나눈다. 만나기만 하면 누가 보든 상관 않고 부부가 교차로 안고 춤을 추며 뛰고 난리다. 처음 계획에는 2박 3일간 동해안 여행을 떠났다가 4박 5일로 연장하여 여행하기도 했다. 서해안과 남해안 여행도 2박 3일의 여행을 떠나 즐거움을 가득 안고 돌아와 기쁨이 넘치는 생활로 행복하게 산다. 이것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우리만이 누리는 최고의 기쁨이다. 게다가 마음을 담아 택배로 유기농 열매를 호남에서 보내기도 하고 철에 맞는 열매를 영남에서 사랑을 담아 보낼 때가 있다. 여수 땅을 방문할 계획이면 벌써 며칠 전에 낚시하여 맛있는 고기를 냉동고에 준비해 놓기도 한다. 그곳에 당도하면 낚시할 도구가 준비되어 오랜 시간 동안 낚시터에서 세월을 낚기도 한다. 좋은 자연환경 속에서 좋은 사람과 어울려 시간을 보내는 그 기쁨은 그 누구도 맛보지 않고는 모른다. 오직 사랑의 끈으로 연결된 정 때문에 즐거움이 꽉 찬 쾌감이 서로에게 최고의 기쁨을 생산하게 만든다. 주님으로 인하여 만남이 성사되었고 그 사귐이 일회성이 아닌 10여 년간 지속 되어 상대방을 서로 신뢰하고 좋은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챙겨주고 싶은 관계가 된 것은 최고의 기쁨이고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서로가 항상 좋은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나의 것을 아끼지 않고 마음을 다해 베푼다. 사진만 보여줘도 행복한 결과가 얻어진다는 데레사 효과(Theresa Effect)처럼 가정에서 일어나는 좋은 일이나 생활에서 생기는 아름다운 일들을 서로 소개하고 보여주어 진심으로 축하하며 기쁨에 찬 행복감을 맛보기도 한다. 믿음은 나 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주님 중심은 주님을 잘 섬긴다는 것이다. 주님 섬김은 결국 형제를 정성으로 잘 섬기는 것이다. 그 열매는 전도한 사람과 전도된 사람을 한 형제로 살아가는 기쁨을 누리고 행복하게 해 주신다. 영하의 날씨 속에서도 우리 주님의 훈기가 가득한 남향집에서 해마다 보내주는 맛있는 여수 갓김치의 냄새를 마음껏 누리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기쁨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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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7
  • [하수룡 장로] 낙 엽
    인생의 황혼기를 보통 낙엽에 비유할 때가 많다. 나무가 새싹이 나고 푸른 잎으로 무성해지는 기간을 지나 열매를 맺고 나면 나무의 할 일은 거의 마무리되고 떨어지는 낙엽으로 가득 차게 된다. 새로 이사를 온 후 마트에 가보면 유독 혼자 다니는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노인이 마트의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수년 동안 보았는데 요즘은 통 보이지 않아 천국으로 가셨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나이가 들면 노인들이 갈 곳이 없다. 그래도 친구가 있고 용돈이라도 있으면 나으련만 그렇지 못하고 식당이나 시식하는 코너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모습은 처량하다 못해 불쌍한 느낌마저 드는 것은 필자의 지나친 측은지심 때문일까? 늙은이가 병으로 고통당하지 않고 노후를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이 살아가면서 주님 의지하며 자녀들과 소통을 통하여 외롭지 않으면 정말 축복을 받은 삶이라 말할 수 있다. 게다가 노탐이라 할까 아니면 노욕을 버리면 그보다 더 좋은 이상적인 삶은 없다. 일본에서는 나이가 든 주부들이 정년퇴직을 하고 집안에서 죽치고 들어앉은 늙은 남편을 ‘오치 누레바’라고 부른다고 한다. 우리말로 ‘젖은 낙엽’이라는 뜻으로 늙은 남편이 집에 딱 붙어 나가지 않아 부담스러운 존재로 비유한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당사자인 노인들에게는 심히 모욕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현대사적으로 우리나라는 오랜 시간 동안 남편이란 존재의 의미는 가족을 위해 밤잠을 모르고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그 주역들이 바로 오늘날의 늙은이들이다. 이웃 나라 일본과는 사뭇 다른 문화를 가진 우리나라이기 때문에 일본처럼 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은 있다. 국민소득 50달러에서 이제 3만 달러로 600배로 성장시킨 주역이 바로 현재의 노인들이 아닌가! 이제는 세계 유력한 이름 있는 기구에서 한국을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격상시킨다는 뉴스가 나오자 전 세계가 놀라고 칭찬을 보낸 사실을 기억하자. 노인은 세월이 흘러 주름이 많이 생긴 것은 틀림이 없으나 계절이 끝나 쓸모없이 버려지는 낙엽은 분명 아니다. 그 동안 피땀 흘려 이루어 놓은 업적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고 노인들을 절대 홀대하거나 폄하해서는 안 된다. 나이든 나뭇잎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가을 산에 단풍이 되어 울긋불긋하게 물들었을 무렵 비에 젖었을 때이다. 저녁노을이 드리어 질 때 물든 낙엽은 신비하기도 하고 보석처럼 아름다워 흥분하기도 한다. 정말 쓸모없는 찌꺼기도 없고 깨끗한 순수함 그 자체다. 늙은이를 가을 노을에 물든 낙엽이라고 말하고 싶다. 허리가 굽도록 새벽별을 보고 나가 저녁달이 뜰 때 돌아왔던 노인들을 먼저 가족들이 그 노고를 알아주어야 한다. 믿는 자이면 더욱 배우자가 손을 더 내밀어야 하고 자녀들이 존경의 마음으로 다가서야 한다. 늙었다고 기죽지 말고 주님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내가 살아 있는 인생으로 살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한다. 누가 뭐라 해도 인생의 노년은 경륜으로 젖은 단풍처럼 찬란하게 빛난다. 그래서 노인은 낙엽이라도 노을에 물든 단풍처럼 귀히 여김을 받고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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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11
  • [하수룡 장로] 장로는 목사안수에 손을 얹을 수 없는가?
    몇 년 전에 우리 노회에서 장로 부 노회장이 목사 안수하는 곳에 올라가 안수하는 일에 참여했다고 원로목사에게 노회석상에서 혼쭐이 나고 노회장도 문책을 받아야 한다고 해 노회가 술렁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장로들은 불합리하고 너무 형평성에 맞지 않다고 이구동성으로 불평했다. 우리 고신 총회는 초창기부터 미국 북.남 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목사와 장로가 동등한 장로라는 것을 전제하였으나 1992년과 2011년 교회정치에서는 목사, 장로, 집사 세 직분을 엄격하게 구별하였다. 이것은 목사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일은 목사가 하고 장로는 어디까지나 치리장로로만 존재하게 하여 장로들에게 큰 불만을 안겨주었다. 기관이나 모든 회의 책임자도 목사가 하도록 정해 놓은 것이 문제다. 고신총회 헌법해설서에서 장로가 목사 안수에 참여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디모데 전서 4:14의 ‘장로의 회에 목사를 포함하여 지금의 장로가 포함될 수 있는가?’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디모데 전서 3장에 나오는 '감독은 목사만 가리키는가? 장로도 포함되는가?' 가 관건이다. 이제는 장로를 목사와 동등의 위치에 놓고 부부관계로 협력을 유지하는 것이 현실적이 아닌가 싶다. 성경적인 직분 관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한 미국정통장로교회와 미국장로교회들은 장로를 목사와 동일한 감독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교파는 우리 고신총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 장로도 장로회의 동등한 일원으로서 목사와 함께 목사안수에 참여하는 것이 마땅한 일로 여긴다. 사도들이 일곱 집사를 안수하였고 장로들이 디모데에게 안수했으며 바울 장로가 디모데에게 안수하는 등 임직은 사도와 장로가 했다. 목사와 장로는 부부관계로 목사는 장로가 협력을 해 주길 바라지만 형평성이 없는 불만이 있는 가운데 장로는 어쩔 수 없는 입장에서 같이 따라가고 있는 형편이다. 장로가 목사와 협력하여 주의 뜻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게 현실에 맞게 헌법을 다시 만드는 것이 옳다. 고신총회에 ‘목사안수에 장로가 손을 얹을 수 없다’는 것을 법이니까 그대로 따르는 것이 순리라고 고집할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지 않는 한 장로를 목사와 같이 목사안수에 동참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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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장칼럼
    2022-10-05
  • [하수룡 장로] 후손
    내가 섬기는 교회에 믿음이 좋은 장립집사님이 한 분 계시는데 아들을 장가보낸 뒤에 손자를 기다리는 마음이 남달리 급한 것을 볼 수 있었다. 보통 분들은 손자이든 손녀이든 무엇이든 주시는 대로 감사하겠다고 말하는데 이 분은 꼭 손자를 주셔야하고 주실 것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헌금을 했다. 어떤 의미로 손자를 기다리는 사람은 조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금보다 귀한 손자를 좀 더 고상한 말로는 후윤이라고도 하는 것을 보아도 후손은 정말 귀중하다. 어느 기업체에서 독립운동가의 후손 가정의 노후 된 집들을 개보수해 주는 것을 보고 참으로 뜻 깊은 훌륭한 사업이라 생각했다. 친일을 한 사람의 후손은 호의호식하며 잘 배워 지금은 잘 살고 있지만 독립투사의 후손은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나라를 지킨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가진 것이 없어 배움의 기회가 상실된 상처뿐인 삶으로 100년을 살아온 것이다. 이들 후손들은 아버지에게서 가훈의 교육은커녕 경제적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오늘에야 조상이 가치 있는 독립운동의 주체적인 사람으로 후손들에게는 존경받는 인물로 존재하는 것은 참 잘된 일이다. 가인은 악을 선택하여 사탄의 종이 되어 아벨을 살해하고 땅의 저주를 받는 최악의 후손으로 전략하였다. 오늘날도 가인처럼 자기만의 성을 쌓으면서 선하신 하나님과 교제는 단절하고 자기의 영역이 침범 당할까봐 늘 염려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아담은 의로운 후손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여 셋을 허락하심으로 큰 기쁨을 얻는다. 아벨 대신 다른 의로운 씨로 아들을 내려주신 것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며 악을 다스리라는 깊은 뜻이 있다. 또한 하나님을 잘 섬기는 믿음의 가문으로 후손을 잘 가르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잘 알아야 한다. 요즘 믿음의 친구들이 모이면 간절히 바라는 공통분모가 자녀 손들이 믿음으로 잘 살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마음이다. 자녀들이 어릴 때에는 좋은 대학을 진학하고 선망의 직업을 가지는 것만이 간절한 소원이었지만 막상 세월이 지나 만족한 직업을 가진 후에는 제대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죄악이 관영한 시대에 믿음의 조상격인 부모가 자기 후손에게 하나님을 공경하고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정상적인 신앙인의 믿음이고 올바른 생각이라 믿는다. 이스라엘은 후손교육 실패로 부패하고 타락하여 강대국으로부터 침략당하고 왕을 비롯하여 백성들이 이방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는 치욕을 겪었다. 손자가 탄생된 기쁨보다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는 믿음을 갖고 지혜롭게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기독교인이 많은 내 나라, 나의 자녀손들이 사는 이 땅에 올바른 후손교육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안전을 보장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로 잘 가르치고 어떤 것이 더 가치가 있는지를 가르치면 성공한 후손들의 모습을 오랫동안 늘 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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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 [하수룡 장로] 욱 여 쌈
    '욱여쌈'이란 말은 바울이나 요셉에게 어울리는 말로 정말 헤어 나오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을 때 사용하면 적격이다. 이 말은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는 말로 ‘안쪽으로 조금 우그러져 있다.’는 형용사‘욱다’와 ’싸다‘라는 동사와 어울려 만들어진 순수한 우리나라의 말로 물건을 안에 넣고 보이지 않게 씌어 가리거나 둘러 말다는 뜻이다. 물건이나 물체가 아닌 사람이 욱여쌈을 당한다면 포도즙을 짤 때 포도를 짓누르는 것과 같이 엄청난 고통을 당하여 사방이 캄캄하고 터질 것 같은 답답함으로 생을 포기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통 욱여쌈을 당한 사람하면 조선시대 이 순신 장군을 떠올리게 된다. 조정은 조정대로 위태한 나라를 위해 적극 힘을 보태주지 못하여 방해꾼이 되었고 아군은 아군대로 지도자가 자기의 공을 드러내기 위해 싸움은 뒤로한 채 허위보고와 헐뜯는 일에 몰두하여 적군 아닌 적군이 되었다. 지원군인 명나라도 일본과의 약은 정치로 군대 해산과 적대 행위 종료와 귀향을 명령하여 돕는 아군이 아니라 방해하는 적군이 되어버린 것이다. 진짜 적군인 왜군은 어찌하든지 이 순신 장군을 죽이고 조선 수군을 멸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던 것이다. 돕는 이 하나 없는 이 순신 장군은 아마 온 천지가 적들에게 포위되어 욱여쌈을 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왜군과 명군은 돌아갈 고향이 있었으나 아군은 돌아갈 고향이 없다고 탄식했던 것이 아닐까? 결국‘죽으면 살리라.’라는 담대한 마음으로 적의 종자를 멸할 것을 명령하여 왜란을 승리로 이끌게 되어 역사의 한 장을 기록한 것이다. 작금에 우리나라의 형편은 국내외적으로 욱여쌈을 당한 형국에 처해졌다. 정파는 정파대로 교파는 교파대로 편을 나누어 국론이 통일되지 못하여 유대나라처럼 온통 찢어진 상태로 분열된 느낌이다. 북한은 시간만 나면 무력으로 남한을 접수하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주위의 강대국들은 한국이 부강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아 보이지 않게 방해 공작을 멈추지 않는다. 특히 젊은이와 믿는 백성들까지도 방황하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많은 것을 포기하려 한다. 게다가 기상이변과 코로나까지 더 심해져 어려운 형국을 맞아 일제강점기의 최악의 순간처럼 도저히 미래가 암담하다. 일자리는 줄어들어 일하고 싶어도 일할 자리가 없어 직장도 결혼도 미루거나 포기한다. 한국이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축하하지만 시국적으로 현재는 어려운 시기로 개인도 국가도 욱여쌈을 당하여 어려운 상태에 처해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순신 장군도 바울도 요셉도 욱여쌈을 당하여 도저히 인간적으로 ‘바람 앞의 등불’같이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죽기로 각오하면 살리라.’하고 상황을 대처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살려 주시고 높여 주셨다. 우리의 현실은 지금 가정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모든 분야에 욱여쌈을 당한 상태로 어려운 위기의 비상상황임을 기독교인이 먼저 절감해야 한다. 우선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진정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빛이 되었는지 자성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개체인 나라는 존재는 극히 작지만 예수님은 어떤 일도 다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 성질이 날 때 내가 나를 죽이고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도 나를 죽여야 한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고 불평과 불만의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와도 나를 죽이자. 그리하면 그 분이 내 안에 계셔서 크게 역사해 주시고 위기에서 구해 주신다. 지금은 온 세계가 코로나와 전쟁 때문에 경제 침체의 욱여쌈을 당하여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상황이다. 다른 방법이 없다.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나만 죽으면 전능자는 삽니다. 나 자신을 죽이세요. 그 분이 모든 환난을 감당하십니다.’라고 외쳐야 한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해도 그 분이 환난을 능히 감당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절대 필요한 때다. 위기는 또 하나의 기회임을 명심하자. 2022.08.22. 경남기독신문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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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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