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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2) (민12:11-16)
    미리암은 위대한 믿음의 여인이 맞습니다. 하지만 여선지자라는 위대한 칭호를 받은 후 신앙이 제자리걸음을 했습니다. 미리암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역사에 발맞추지 못하고 여전히 애굽에서의 사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모세가 없는 40년 동안 여자로서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진짜 지도자인 줄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진짜 지도자인 모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교만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40년 만에 나타난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기절초풍할 일들을 일으킵니다. 세계 최강의 애굽과 바로도 모세 앞에 쩔쩔맵니다. 애굽을 초토화 시켜버렸고, 애굽의 장자를 죽여 씨를 말려버렸습니다. 여호와의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임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만 대면하시고 바다까지 갈라 마른 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미리암은 40년 동안 여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을 영도해 왔지만 40년 만에 갑자기 등장한 모세의 위용 앞에서 입도 벙긋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선지자의 위치에서 볼 때 비록 인간적으로는 누나요 동생이지만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적 권위를 지닌 모세였기에 고개 들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교회들끼리, 특히 목회자들끼리 묘한 질투심과 경쟁심이 있습니다. 곁의 교회가, 다른 교회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갖습니다. 잘못되면 입은 안타깝다고 하면서 속은 이유 없이 고소하고 상대적인 만족을 얻습니다. 교회의 주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망각한 무서운 죄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이 교인들 사이에서도 발생합니다. 곁의 성도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잘못되면 입은 위로하는 것 같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자신의 신앙과 믿음이 좋은 것으로 위로받고 착각합니다. 아주 나쁜 모습입니다. 악한 모습입니다. 교만의 극치입니다. 어쩌면 이것보다 더한 것이 목회자들끼리의 보이지 않는 견제와 경쟁입니다. 주변의 교회가 갑자기 성장하면 상대적 박탈감을 가집니다. 사람이다 보니 비교가 안 될 수 없습니다. 특히 가까운 교회에서 독보적인 성장을 보이면 심각한 스트레스까지 받습니다. 목사 자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의 중직자들이나 성도들도 자연스럽게 목회자에게 압박을 가합니다. 자신은 1년이 가도 전도 한 명 하지 않으면서 교회 부흥을 입에 올립니다. 십일조나 감사헌금은 고사하고 선교나 불우이웃이나 개척교회, 농어촌교회, 은퇴하신 목사님, 가난한 신학생들을 위해 특별헌금 한 푼도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재정을 입에 올립니다. 더 심각한 것은 설교자들의 교만입니다. 설교하는 사람이다 보니 설교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설교자의 훌륭한 설교에 은혜받기는커녕 허점과 잘못을 찾기에 바쁩니다. 그러니 설교에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현상은 모세를 대적하는 미리암의 아류들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땀방울 하나, 눈불 방울 하나 다 주의 것입니다. 우리는 비교 대상도 아니요, 경쟁상대도 압니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며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자들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특히 목회자들은 아바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평생 잊어선 안 됩니다. 물론 아바타라 하지만 예수님의 아바타니 영광스럽습니다. 진짜 선지자, 진짜 목회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미리암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사실 미리암은 누구보다도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몰라서 범한 죄도 무섭지만, 알고도 범하는 죄는 더 무섭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단순히 그 사람의 성향이나 기질을 나타내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모세의 통치를 방해했고, 이스라엘의 진행을 가로막았습니다. 감히 모세의 영적 권위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감히 같은 선지자였지만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교만은 이 모든 영적 권위 앞에서도 원망과 비방의 고개를 들게 합니다. 호시탐탐 모세의 허점과 실수를 염탐합니다. 교회도 은혜를 계산하는 성도가 있고, 실수와 잘못을 찾아내는 성도가 있습니다. 기회가 왔습니다. 구스 여자가 돌아왔습니다. 이전에 이미 정리된 문제인데도 교만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영적분력을 상실했습니다. 미리암은 십보라가 돌아오자 속에 숨겨놓았던 원망과 불평을 표출합니다. 원망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사실까지 망각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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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07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1)
    성경 어디에도 미디안의 제사장 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는데 문제 삼은 장면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실에 대해 그 어디에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하는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사건 때문에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백성들이 구스 여인 십보라를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통치에 십보라를 문제 삼지 못하도록 아예 입도 벙긋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버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명을 주셨고, 그 사명 감당하기 위해 애굽으로 오는 길에 느닷없이 모세를 죽이시려고 한 것은 구스 여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임이 분명합니다. 분명한 이유는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것에 있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 같은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발견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려 하셨습니다. 완전한 모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이셨습니다. 완전히 죽이셨습니다. 그래도 십보라는 할례언약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긴박한 순간에 할례를 행하면 남편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과 비교도 되지 않는 신분입니다. 단순히 액면가로 볼 때 우리는 시아버지와 관계한 여인입니다. (마1:3)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우리는 우상의 신전에서 몸을 팔던 기생이었습니다. 우리는 과부요,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남편을 사지로 몰고 왕과 간음한 유부녀였습니다. (마1:5-6)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인데 죄인인 줄도 모르는 죄인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답도 없으면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제 딴에 잘 사는 줄 알지만 무익한 인생이요, 단 하나도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혀에는 속임만 있습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입에는 저주와 악독만 가득합니다. (롬3:10-14)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런 우리가, 그런 우리의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도 달렸고, 예수님의 부활에 나도 부활했다고 고백합니다. 사탄이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의를 제기하고 문제 삼을 것이 수두룩한 우리입니다. 아니 우리는 문제 그 자체들입니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합니다. 십보라가 할례 언약을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십보라가 할례를 행하여 남편을 살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불가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입으로 시인합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보라가 할례언약을 아는 것과 할례를 행하는 것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서십니다. (마10: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눅12: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합니다. 문제 제기도 못합니다. 입도 벙긋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의 예배 자리에, 예수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앉혀주십니다. (계12:22-23)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이런 은혜를 받은 성도입니다. 그래도 원망하고 비방하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완전한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할례를 시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에 거하며, 주일마다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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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0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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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2
  • [김성수 총장]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
    모든 사람은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지 간에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worldview)을 가지고 있다.세계관은 개인이 소유하지만 공동체적으로 공유하기도 한다.우리는 세계관의 틀(framework)을 통해서 사물을 바라보고 행동한다.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세계관은 삶의 양식으로 표출되는데 이것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그러므로 한 개인과 공동체가 어떤 세계관을 소유하고 공유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삶의 양태가 나타나고, 한 사회의 문화와 제도도 생성하고 발전하며 쇠퇴하기도 한다. 인간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의 역할은 역사를 통해서 확연히 볼 수 있다.이것은 근대 문화 형성의 근간이 되는 로마의 역사와 문화에서는 잘 나타나고 있다.기독교 세계관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일찍이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시대부터 노예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법률이 통과되었다. 영아 살해의 관습 역시 십자가형과더불어,보다 더 극적으로는 낙태와 함께 금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검투사 시합도 종말을 고했는데, 그 이유는 텔레마코스(Telemachus)라는 용감한 수도승이검투 경기에서 일어나는 잔인한 살인을 막으려고 경기장 바닥으로 내려갔고,그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로마 사회의 변화는 비록 점진적이긴 했지만 로마 제국 전역에서 인간 생명의 가치가 점점 더 인식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로마 제국 자체는 결국 곤경에 처해 있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을 지배했떤 세속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세계관으로 말미암아 로마 사회는 너무 오랜 세기 동안 쾌락과 반 출생주의적인 비성경적 삶의 양태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물론,이와 같은 저 출산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소위 그들이 야만인이고 불렀던 비게르만족들을 향한 이민문호를 폭넓게 개방하기는 했지만 이민에 대한 높은 의존도가 로마 사회의 인구 격차를 메우기에 역부족이었다.여기에 행정적, 군사적 실수가 결합되어 이주하는 인근의 다른 부족들에게도 제국의 국경을 활짝 열어 놓게 되었다.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부 지역에서 로마의 권위는 자신의 무능함과 게르만 부족의 공격으로 붕괴되었다. 로마, 게르만, 그리고 기독교 전통의 궁극적인 융합은 비록 완만한 전환의 과정이긴 했지만 중세 유럽에 새로운 문화와 세계관의 출현을 가져왔다. 우리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의 역할에 대해서 한 가지 예를 더 살펴 보기로 하자.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삶을 영위하기를 소망한다.그런데 영적인 삶의 영위에 향한 우리의 소망과 삶의 양태 역시 영적인 삶에 대한 관점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예를 들어,인간의 정신은 고상하고 거룩하고 선한 반면에 육체는 저급하고 속되고 악하다고 보는 이원론적 인간관을 견지하게 되면 육체적 고행이 하나님과 더 연합하는 삶이라고 보게 되고,따라서 우리가 신앙적이고 영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한 육체적인 본능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역사적으로 보면,결국 이러한 종류의 인간관에 기초한 금욕적 실천은 사람들이 '생활의 법칙'에 따라 공동체로 살아가는 수도원주의(monasticism)로 발전했다. 수도원은 일반적으로 독신 생활과 엄격한 생활 방식을 요구했다.수도승과 수녀는 체계적인 기도, 연구, 그리고 생산적인 노동의 삶을 영위하였다. 수도승과 수녀들에게는 관상기도의 기초로서 연구 활동이 특별히 중요했다. 이미 5세기 초에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라는 로마 원로원 의원은 자신이 비바리움(Vivarium)에 설립한 수도원에서 기독교와 이교 사상가들에 대한 텍스트 복사와 연구를 수도원 생활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삼았다. 카시오도로스와 그의동료들은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그 연구는 영적 발전의 길이라고 믿었다. 모든 초기 수도원들이 카시오도루스의 관점을 따른 것은 아니지만, 몇 세기 안에 그의 사상과 독서 목록은 수도원 영성의 중추를 제공하게 되었다. 수도승들은 기도나 연구와 같은 보다 분명한 “영적인 활동”들과 함께, 생산적인 노동에도 참여해야 했다. 로마 사회의 세계관 노동을 비하하고 노예들에게 노동을 강요했을지 모르지만 수도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비록 부분적으로는 겸비의 덕을 장려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수도승이 일해야 한다는 생각은 주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성경적 사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도 역시 일해야 한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었다. 창세기에서 아담은 죄를 짓기 전에 동산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므로 일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행하도록 만들어진 한 부분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은 삶의 목적에 대한 현저하게 다른 견해로 이어지게 되었다. 세계관 변화의 이러한 특별한 요인은나중 서구의 경제적 성공과 활력의 토대를 놓았다. 저출산,도덕성의 일탈,경제 문제,환경 파괴,정치 불신과 혐오 현상,남북간의 긴장 등 이 모든 문제들의 근본 뿌리는 왜곡된 세계관이다. 2024년도 새해를 맞았다.올 한 해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형성하는 올바른 세계관의 정립 운동이 범 국민 운동으로 펼쳐지기를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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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9
  • [김성수 총장]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요즘 언론을 통해 중국의 시진핑과 러시아의 푸틴, 그리고 북한의 김정은과 같은 독재자 한 사람의 잘못된 가치관과 이로 인한 횡포로 인해 그들 자국 인민들이 겪는 불행과 고통은 물론, 예측할 수 없이 소용돌이치는 국제 정세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번씩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를 떠 올리게 된다. 시진핑, 푸틴, 김정은과 같은 악랄한 독재자 대신 기독교 신앙에 좀 우호적인 지도자가 등장하면 자국민들도 좀 더 행복할 것이고 세계 질서도 달라질 것인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앞으로 한 두 번 정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황제에 대해서 잠시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주후 313년에 밀라노 칙령(the Edict of Milan)을 발표하면서 로마 제국 내에서는 기독교의 상황과 법적 지위가 획기적으로 바뀌어졌다. 일 년 전, 밀비안 다리 전투(the Battle of the Milvian Bridge) 직전에 콘스탄티누스는 하나님으로부터 환상을 보았는데 예수께서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그가 해야 할 일을 설명하셨다고 주장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병사들에게 방패에 기독교 상징을 그리게 했고, 적의 우세한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을 때 이를 하나님의 표징으로 받아들여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 후 곧 바로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만드는 밀라노 칙령이 공포되었다. 이 칙령은 이교(paganism)를 불법화하거나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콘스탄틴의 개종으로 인해 확실히 기독교는 박해 받던 위치에서 선호 받는 종교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이 진짜였는지 아니면 정치적 계산의 산물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당시 기독교는 도시를 중심으로 고도의 조직성을 갖춘 성장하는 종교였다. 따라서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가 의지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할 수 있었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인기가 없었으며, 추산에 따르면 로마 세계의 약 10~15%에 불과했다. 이는 결코 압도적인 숫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은 313년 이전에도 군대에 복무했다는 증거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평화주의자였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포용함으로써 실질적인 정치적 이점이 있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황제로서 콘스탄티누스의 행동은 그의 개종에 대한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우선, 그는 아버지 하나님을 자신이 총애했던 “정복되지 않는 태양”(the Unconquered Sun)인 솔 인빅투스(Sol Invictus)와 구분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태양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세상의 빛, 또는 의의 태양 등으로 예수를 묘사하는 기독교인들의 관습에 영향을 받아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또한 자신의 "개종" 후에도 거의 한 세기 동안 자신의 주화에 이교 신들을 계속 사용했으며, 나중에 교황이 차지한 로마 이교 대제사장의 칭호인 폰티펙스막시무스(Pontifex Maximus)라는 칭호도 유지하고 있었다. 기독교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우 일찍부터 개입했다. 첫 번째 도전은 도나투스파(Donatists)와 관련이 있는데, 이들은 박해 중에 굴복하고 배교했던 사제들은 박해 중에도 믿음을 지키며 신실하게 남아 있었던 주교의 승인과 용서를 받지 않는 한 진정한 사제들이 아니라고 믿었던 집단이다. 법정과 콘스탄틴은 이에 대응하여 폭동을 일으킨 도나투스파에 대해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무력으로 보복했다. 그는 탄압이 효과가 없다고 보고 그 후 도나투스파에 적대적인 법령을 철회했지만, 그의 행동은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강압의 선례를 남겼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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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1
  • [김성수 총장] 복음의 능력과 문화의 변혁
    서기 303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별로 매력적이지 못하고 변방 종교였던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이 박해는 처음에는 기독교도들의 예배 처소인 교회당을 파괴하고 기독교 서적을 불태우는 것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성직자들을 투옥하고, 고문하며, 때로는 잔혹하게 사형에 처하는 등 성직자들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평신도들에게도 이러한 공격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박해가 시작된 지 불과 10년 후인 313년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서 이전처럼 범죄 집단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독교는 오히려 로마 제국 안에서 다수의 종교가 되었고, 결국 로마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후기 로마 제국의 세계관을 형성하여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과 삶의 방식을 변화시켰다. 복음의 능력이 사람들의 세계관을 변혁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이렇게도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으로 나타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졌던 성경적 세계관, 특별히 성경적 신관이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당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로마제국 내에서 독특한 신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로마에 있던 다른 인종 집단들이 견지하고 있었던 신관 사이의 명백한 차이점은 유대인들은 급진적인 일신론자라는 점이었다. 이들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라는 구약의 성경적 신앙을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믿고 섬기며 경배하는 신이 유일신이냐 아니면 다신론이냐는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섬기는 신이 어떤 본성과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믿느냐는 문제였다. 모든 이방 종교는 신 또는 신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신의 기원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 유대교적 또는 성경적 신관은 이런 이방 종교의 신관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떤 다른 것에서 기원한 존재가 아니라 단순히 영원부터 존재하셨고 지금도 계시고 영원히 계실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존재하는”(I Am who I Am)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과 별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자연계의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섭리자요 주권자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연신”(nature god)이나 “자연의 힘과 관련된 신”(god associated with the forces of nature)이 아니라 오히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 응답해야 하는 창조주시다. 이와 같은 신관은 얼핏 신 플라톤적(Neoplatonic)인 신관과 흡사해 보이기도 한다. 피상적으로 보면, 성경의 하나님이 마치 존재의 위계를 형성하는 “단일자”(One)로부터 유출된 만물의 기원이며, 초월적 존재인 “하나” 곧 단일자(One)를 신이라고 보는 신 플라톤적 개념과 다소 비슷해 보일 수도 있다. 사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와 같은 일부 유대인 사상가들은 플라톤 철학의 렌즈를 통해 유대교를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적 신관과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신 개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신 플라톤주의자들의 신은 의지가 없는 비인격적인 신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며 자발적인 행위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또한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우주는 영원하다. “단일자”(One)라는 신이 존재하는 동안 우주도 존재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우주 만물은 비인격적인 신으로부터 유출된 것이 아니라, 역사의 특정한 시점에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말씀으로 지은 바 된 피조물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인격적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독특한 성경적 인간관을 형성해 준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 세계를 보호하고 다스리며 감독하는 청지기적 사명을 주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 자신을 대신하여 에덴의 동산을 다스리는 사명을 인간에게 부여해 주셨다. 창조 질서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이와 같은 고유한 위치는 인간에게 특별하고 고귀한 가치를 부여해 주고 있다. 하나님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하나님의 섭정자인 인간을 공격하는 행위는 하나님 자신을 공격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들은 당시 로마의 쾌락 문화 사회에서 공공연히 행해졌던 영아 살해 행위,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Tacitus)가 “불길하고 역겨운” 일이라고 묘사했던 영아 살해 행위를 단호하게 거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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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3-06-08

실시간 설교/강의 기사

  • [김성수 총장] 일상사, 세계관, 그리고 신앙의 문제
    지난 호에서 문화 인류학자 마가렛트 미드(Margaret Mead)가 1959년에 제작한 영화에 나오는 인상 깊은 장면 즉, 일본과 캐나다의 아기 목욕 문화에 대해서 잠시 언급한 바 있다. 이 두 가정의 장면에서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가치관이 표현되어 아이들에게 전달된다. 영화에 나오는 일본 가정의 경우를 먼저 생각해 보자. 여기서는 의존성, 온화함, 자기 희생과 같은 가치관이 두드러지게 표출된다. 반면, 캐나다 가정의 경우는 독립성, 자기 주장 및 자신의 관심사와 유익과 같은 가치관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관들 뒤에는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종교적 신앙이 기초해 있음을 추적해 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불교, 신토주의, 그리고 유교적 신앙의 결합이 가족과 국가의 통합적 정체성에 대한 믿음을 생겨나게 한다. 개인은 집단의 충성된 구성원이 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조화는 이타심과 유순함에서 생겨난다. 이기심, 독립심, 그리고 자기 주장과 같은 가치관은 이러한 공동체의 조화를 파괴한다고 믿는다. 캐나다에서는 계몽주의적 인본주의로 물들어진 기독교를 통해 하나님은 개인을 돌보시며, 인류의 본성과 운명은 자율적인 각자 개인의 성취에 달려 있으며, 개인의 자기 유익과 관심이 이와 같은 성취를 가능하게 하는 자연스러운 수단이라고 믿는다. 일본의 할머니와 캐나다의 어머니에게 왜 그들이 자신들의 특별한 방법으로 아기를 목욕시키는지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그들은 아마도 선뜩 이유를 대지 못할 것이다. 아기를 그런 방식으로 목욕시키는 것은 상식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아기를 목욕시키는 방식이고 지금까지 항상 그렇게 해 오고 있는 방식이라고 말할 것이다. 가치관과 그 가치관 뒤에 숨어 있는 종교적 신념은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가 암묵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어떤 것이다. 이와 같은 가치와 신념은 수년에 걸쳐 우리가 언제나 초점을 맞추는 핵심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서 삶의 한 방식으로 구현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와 신념은 당대뿐만 아니라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에 걸쳐 대대로 전승되고 이어진다. 마가렛트 미드의 영화는 또한 우리가 그 신앙을 완전히 인식하든 인식하지 않든지 간에 종교적 신앙이 우리가 자녀를 양육하는 방식을 포함하여 일상생활의 가장 일상적인 활동을 어떻게 강력하게 지시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종교적으로 영감을 받은 충성심, 의존성, 소속감이라는 동일한 충동은 현대 일본의 여러 회사에서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노동자와 경영진이 경쟁 권력 집단으로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관리자들은 현대 서구 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방식으로 근로자들의 개인적, 사회적, 종교적 필요를 돌보아 준다. 실제로 회사는 기업이라기보다는 확대된 대가족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의존성, 충성심, 소속감이라는 종교적 영감을 받은 가치는 자신들의 관습에 맞게 옷과 헤어스타일을 신중하게 선택하여 함께 찍는 동양 문화의 가족사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가족 구성원들 각자가 자신의 개성과 독립성을 표현하기 위해 옷과 헤어스타일을 선택하는 서양 문화의 가족사진과 대조해 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삶을 모든 면에서 아주 강력한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믿음이라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종교적 신앙이란 실제로 감정적 필요의 투영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은 어린 아이일 때는 아버지가 곁에 있으면 안전하다고 느끼고, 아버지가 없으면 두려움을 느낀다. 그런데 아이가 커가면서 아이는 자신의 삶에 다가오는 불안과 두려움이 때로는 너무 커서 아버지조차도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런 다음 아이는 강력한 대리 아버지 형상을 '하늘로' 투사한다. 이처럼 아버지도 도와줄 수 없을 정도의 불안과 두려움에 대처하려면 인간은 신이 존재한다는 환상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들은 믿음을 성육신이나 삼위일체, 인간의 타락,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과 같은 특정 교리에 대한 믿음이나 지적 동의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견해에 따르면 믿음은 과학적 지식과는 대조가 된다. 과학적 지식은 우리에게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을 제공한다고 생각된다. 반면에 신앙은 의지의 행위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종교적 교리는 과학적 증거에 개방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서 이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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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2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4) (민12:11-16)
    (민12:15)이에 미리암이 진영 밖에 이레 동안 갇혀 있었고 백성은 그를 다시 들어오게 하기까지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미리암이 고침을 받는 동안 이스라엘의 진행이 멈추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세움 받은 자들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기록은 “미리암이 진영 밖에 이레 동안 갇혀 있었고”입니다. 진영 안에 갇힌다는 표현이 맞습니까? 진영 밖에 갇힌다는 표현이 맞습니까?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집을 떠나면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혹 성도들 가운데서도 교회를 떠나면 자유라고 생각하시는 분 없습니까? 가끔 자녀들은 부모가 출타하면 자유하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교회가 감옥처럼 여겨지는 분은 없습니까? 주일 지키는 것을 감옥 가는 것으로 생각하시는 분은 없습니까? 교회가 세상 속에 갇힌 것이 아니라 세상이 감옥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주일은 6일 동안 세상에 갇혀 있다가 자유를 얻는 날입니다. 성도는 주의 날을 맞아 세상의 감옥에서 특별사면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맛집 찾는다고 정신들이 없는 것 같습니다. 수십 년, 평생을 교회 다니고 교회를 사랑한다면서도 자기 입맛에 안 맞으면 평생을 살아왔던 신앙생활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오늘날 성도들이라고 한다면 너무 과한 표현이겠습니까? 이러니 교회가 세상과 똑같아 져버렸습니다. 오늘날 교회 속에는 애굽 제국과 같은 세상 제국이 세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에 들어와서도 제각기 자기라는 바벨탑을 우뚝우뚝 세우고 있습니다. 자기만의 방법으로 하늘에 닿을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아니 자기만의 방법이 하늘에 닿은 유일한 길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다른 사람들을 현혹하며, 더 높이 바벨탑을 쌓자고 충동질합니다. 바벨탑에 갇히는 결과가 되지만, 더 무서운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임합니다. (창11:9)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말씀을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설교가 들리지 않습니다. 온갖 혼잡한 소리들만 귀에 들립니다. 이 소리에 기우뚱, 저 소리에 기우뚱 좌우로 치우치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라는 바벨탑을 쌓는 교만한 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저주요 심판입니다. 미리암은 자기라는 감옥에 갇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까지도 망각해버렸습니다. 그런 미리암은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고, 진영 밖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혹시 진영 밖이 자유로운 분은 없습니까? 진영 밖에 갇혀 있는데도, 진영 밖으로 풀려난 것으로 착각하시는 분은 없습니까? 교회 오면 갇히는 것 같고, 세상으로 가면 자유로운 분은 없습니까? 집에 가면 갇히는 것 같고, 집 밖으로 나가면 자유로운 분은 없습니까? 부모님이 있으면 갇히는 것 같고, 부모님이 없으면 자유로운 분은 없습니까? 무서운 저주와 심판 가운데 있는 상태입니다. 불신앙의 바벨탑을 쌓은 결과입니다. 교만이라는 바벨탑을 쌓은 결과입니다. 모세가 미리암을 고쳐달라고 기도했던 주일은 교회로 와서 예배의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문둥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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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2
  • [김성수 총장] 믿음, 우리 모두의 궁극적 관심사
    종교적 신화는 생명의 기원과 의미에 관한 이야기다. 종교적 신화는 삶에 대해서 우리 모두가 근본적으로 제기하는 ‘큰 질문’, 곧 세계관적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해 주려고 한다.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가? 잘못된 것을 치유해 줄 수 있는 해결책은 무엇인가?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와 같은 삶의 근원적인 질문과 해답이다. 예를 들어 황소 자그레우스(Zagreus)의 신화에 의하면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천상의 신들 사이의 우주적 전투의 결과로 이곳에 왔다고 말한다. 인간의 삶에서 잘못된 것은 근본적으로 악이 우리 인간 본성의 육체적 측면에 내재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철학자 플라톤이 나중에 철학적으로 정교한 것과 같이, 우리의 신성한 부분인 영혼이 신들과 함께 진정한 본향으로 돌아갈 때 곧 우리가 죽을 때까지 우리의 육체의 악한 본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삶에 대한 세계관적 ‘큰 질문’들에 대한 답은 그 어떠한 언어 형태로도 적절하게 답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주로 이야기 형태로 구현된다. 과학적인 언어는 이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과 대답을 제공하기에는 확실히 부적절하다. 종교적 신화는 삶에 관한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과학적인 의미에서 진실 또는 거짓으로 검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세계의 본질을 다른 세계의 기원과 비교하기 위해 과학적 실험을 고안해 낼 수가 없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세계는 하나뿐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어떤 특정 신화에 매력을 느끼고 끌릴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우리의 궁극적 관심사인 믿음의 행위로 그것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지난호에서 생각해 본 바와 같이 삶에 대한 분열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가 믿음의 행위로 황소 자그레우스의 신화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인가? 그렇지 않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종교적 신화 이야기를 앞에 두고 앉아서 그것을 믿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태어난 사회 속에서 우리가 성장하고 교육을 받는 등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인생의 큰 질문에 대해서 종교적 신화가 제공하고 있는 해답을 흡수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주변의 공기로부터 이러한 대답을 들이마시며 성장하고 살아가고 있다. 개인으로서 우리는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세계관의 근본적인 신화에 대해서 의식적인 신앙 헌신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의식하던 못하던 간에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사회가 우리를 대신해서 그런 일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돌이 가라앉은 후에도 오랜 시간 동안 잔물결이 계속해서 물을 가로질러 움직인다.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종교적 신화의 파문은 신화가 잊혀진 후에도 오랫동안 인류 역사를 통해 계속해서 움직인다. 자그레우스 신화의 경우, 이제는 오랫동안 잊혀진 이 고대 신화가 수많은 세대에 걸쳐 사람들이 삶을 바라보는 분열된 방식을 계속해서 형성해 왔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삶에 대해 이러한 분열된 관점을 계속해서 견지하고 있는 한, 비록 이 믿음이 현재 암묵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유지되고 있더라도,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것을 묵인함으로써 실제로는 원래의 그 종교적인 근본 신화에 믿음을 두는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무의식적이며 암묵적으로 견지하는 믿음이 한 사회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리고 그에 따른 세계관이 어떻게 세대를 거쳐 전달되는지에 대한 놀라운 예는 인류학자 마가레 미드(Margaret Mead)가 1959년에 제작한 영화에서 잘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인도, 프랑스, 일본, 그리고 캐나다의 네 가족들이 하루를 보내는 삶에 관한 이야기고 구성되어 있다. 영화의 한 부분은 아기의 목욕 시간에 관한 내용이다. 일본 가정에서는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아기를 맡긴다. 큰 욕조에 앉아 있는 할머니는 아이를 가슴에 꼭 안고 물을 떠 올려준다. 나중에 아이는 가정의 모든 아이들이 함께 소유하고 공유하는 매우 섬세한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나중에는 자장가 소리를 들으며 가족 침실에 잠자리에 든다. 이와 대조적으로 캐나다에서는 엄마가 아이 스스로 욕조에 들어가게 한다. 엄마와 아이 사이에 목욕 수건을 사용하는 작은 줄다리기 게임이 진행되다가, 아기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체계적으로 문지른다. 그 다음에 아이는 자신의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자기 침실에서 잠자리에 든다. 이제 불이 꺼지고 방문이 닫힌다. 다음 호에서는 이와 같은 두 종류의 이야기가 어떻게 서로 다른 가치관을 전수하고 세계관을 형성하며, 궁극적 관심사인 믿음의 문제로 연결되는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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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8-1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2) (민12:11-16)
    미리암은 위대한 믿음의 여인이 맞습니다. 하지만 여선지자라는 위대한 칭호를 받은 후 신앙이 제자리걸음을 했습니다. 미리암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역사에 발맞추지 못하고 여전히 애굽에서의 사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모세가 없는 40년 동안 여자로서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진짜 지도자인 줄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진짜 지도자인 모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교만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40년 만에 나타난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기절초풍할 일들을 일으킵니다. 세계 최강의 애굽과 바로도 모세 앞에 쩔쩔맵니다. 애굽을 초토화 시켜버렸고, 애굽의 장자를 죽여 씨를 말려버렸습니다. 여호와의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임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만 대면하시고 바다까지 갈라 마른 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미리암은 40년 동안 여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을 영도해 왔지만 40년 만에 갑자기 등장한 모세의 위용 앞에서 입도 벙긋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선지자의 위치에서 볼 때 비록 인간적으로는 누나요 동생이지만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적 권위를 지닌 모세였기에 고개 들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교회들끼리, 특히 목회자들끼리 묘한 질투심과 경쟁심이 있습니다. 곁의 교회가, 다른 교회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갖습니다. 잘못되면 입은 안타깝다고 하면서 속은 이유 없이 고소하고 상대적인 만족을 얻습니다. 교회의 주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망각한 무서운 죄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이 교인들 사이에서도 발생합니다. 곁의 성도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잘못되면 입은 위로하는 것 같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자신의 신앙과 믿음이 좋은 것으로 위로받고 착각합니다. 아주 나쁜 모습입니다. 악한 모습입니다. 교만의 극치입니다. 어쩌면 이것보다 더한 것이 목회자들끼리의 보이지 않는 견제와 경쟁입니다. 주변의 교회가 갑자기 성장하면 상대적 박탈감을 가집니다. 사람이다 보니 비교가 안 될 수 없습니다. 특히 가까운 교회에서 독보적인 성장을 보이면 심각한 스트레스까지 받습니다. 목사 자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의 중직자들이나 성도들도 자연스럽게 목회자에게 압박을 가합니다. 자신은 1년이 가도 전도 한 명 하지 않으면서 교회 부흥을 입에 올립니다. 십일조나 감사헌금은 고사하고 선교나 불우이웃이나 개척교회, 농어촌교회, 은퇴하신 목사님, 가난한 신학생들을 위해 특별헌금 한 푼도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재정을 입에 올립니다. 더 심각한 것은 설교자들의 교만입니다. 설교하는 사람이다 보니 설교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설교자의 훌륭한 설교에 은혜받기는커녕 허점과 잘못을 찾기에 바쁩니다. 그러니 설교에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현상은 모세를 대적하는 미리암의 아류들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땀방울 하나, 눈불 방울 하나 다 주의 것입니다. 우리는 비교 대상도 아니요, 경쟁상대도 압니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며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자들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특히 목회자들은 아바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평생 잊어선 안 됩니다. 물론 아바타라 하지만 예수님의 아바타니 영광스럽습니다. 진짜 선지자, 진짜 목회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미리암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사실 미리암은 누구보다도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몰라서 범한 죄도 무섭지만, 알고도 범하는 죄는 더 무섭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단순히 그 사람의 성향이나 기질을 나타내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모세의 통치를 방해했고, 이스라엘의 진행을 가로막았습니다. 감히 모세의 영적 권위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감히 같은 선지자였지만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교만은 이 모든 영적 권위 앞에서도 원망과 비방의 고개를 들게 합니다. 호시탐탐 모세의 허점과 실수를 염탐합니다. 교회도 은혜를 계산하는 성도가 있고, 실수와 잘못을 찾아내는 성도가 있습니다. 기회가 왔습니다. 구스 여자가 돌아왔습니다. 이전에 이미 정리된 문제인데도 교만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영적분력을 상실했습니다. 미리암은 십보라가 돌아오자 속에 숨겨놓았던 원망과 불평을 표출합니다. 원망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사실까지 망각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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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8-07
  • [김성수 총장] 이원론적 관점의 근원적인 뿌리
    헬라의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은 인간의 본성이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요소, 즉 지성으로 식별되는 순수한 불멸의 영혼과 불순한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했다. 그래서 그는 구원이라는 것은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육체의 사슬에서 영혼이 해방’함으로서 온다고 믿었다. 인간 본성에 대한 현대적 관점, 즉 인간의 지성을 모든 진리의 중재자의 위치로 격상시키는 세속적 관점은 플라톤의 저술이 담고 있는 한 중요한 관점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과업은 육체로부터 영혼을 순수하게 정화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플라톤을 따라서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의 지성을 ‘신성’(divine)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여기에 깊은 영향을 받은 기독교인들도 인간의 구원을 “천국을 위해 영혼을 구원”하는 관점에서 보았다. 육체와 관련된 것들에 저항하고, ‘진리’에 대한 지적인 명상에 전념함으로써 영혼의 구원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헬라의 이교적인 관점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어서 성경을이와 같은 이교적인 틀에 맞추어 해석하는 ‘기독교화’된 버전이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육신”과 관계되는 일을 피하고 개인적인 경건을 추구하는 데 전념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는 생활을 강조하는 비 성경적인 가르침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플라톤은 아마도 우리가 때때로 이 땅의 것들을 멸시하고, 허무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며 진리에 대해 사색하며 영원한 것 만을 추구하는 노래를 부를 때 아주 만족해 할 것이다. 플라톤의 견해가 아직도 여전히 기독교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또 다른 증거는 사도 바울이 사용한 ‘‘육체’와 ‘영’이라는 용어를 우리가 오해하는 방식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바울은 이 용어들을육체와 영혼을 분리시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우리의 육신의 삶이 하나님의 영(성령)에 의해 지배와 영향을 받는 삶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등지는 우상의 거짓 영에 의해 지배와 영향을 받는 삶인지를 지칭하기 위해 이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심지어 어떤 영어 번역 성경까지도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육체”와 “영”을 “높은 것”(Higher)과 “낮은 것”(Lower)으로 잘못 번역하고 있다. 성경신학자 레안드캑(Leander Keck)이 말했듯이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것은 이것이 아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영혼’이라는 용어는 ‘자아’(self)를 의미하는 시적 용어이다. 마리아가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누가복음 1:46)라고 말할 때, ‘나, 라는 의미는 자신의 온 존재로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뜻이다. 시편 기자가 “나의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만 안식을 찾나이다…”(시 62:1)라고 말할 때 그는 “나 곧 나의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쉼을 얻는다”는 의미다. 플라톤은 실제로 삶에 대한 현대의 분열된 관점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을 그가 창안한 것은 아니다. 플라톤 당시에는 이미 삶에 대한 이와 같은 분열된 관점이 사회 전반에 팽배해 있었다. 그는 단지 여기에 철학적인 표현을 했을 뿐이다. 신약성경 신학자 조지 엘돈 래드(George Eldon Ladd)는 자신의 저서 <신약성서 진리의 패턴>(The Pattern of New Testament Truth)에서 플라톤이 오르페우스파 신학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기원전 6세기부터 이 신학은 그리스 세계와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오르페우스 신학은 황소 자그레우스(Zagreus)의 종교 신화에 구현되어 있다. 자그레우스는 위대한 신 제우스의 아들이었다. 제우스의 사악한 적인 타이탄과의 전투에서 자그레우스는 황소로 변했다. 타이탄은 그를 갈가리 찢어서 먹었다. 분노한 제우스는 하늘에서 벼락을 내려 타이탄들을 쳐서 잿더미로 만들었는데, 바로 이 잿더미 속에서 인간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그레우스의 신성한 부분인 영혼과 타이탄의 사악한 부분인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결국, 플라톤의 사상에서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있고, 또한 우리 삶에 너무나도 만연해 있는 삶에 대한 분열된 관점은 종교적 신화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음이 참으로 놀랍기도 하다. 우리는 다음 호에서 이것이 갖는 중요한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한다. 김성수 목사 (탄자니아 아프리카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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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0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1)
    성경 어디에도 미디안의 제사장 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는데 문제 삼은 장면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실에 대해 그 어디에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하는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사건 때문에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백성들이 구스 여인 십보라를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통치에 십보라를 문제 삼지 못하도록 아예 입도 벙긋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버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명을 주셨고, 그 사명 감당하기 위해 애굽으로 오는 길에 느닷없이 모세를 죽이시려고 한 것은 구스 여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임이 분명합니다. 분명한 이유는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것에 있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 같은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발견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려 하셨습니다. 완전한 모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이셨습니다. 완전히 죽이셨습니다. 그래도 십보라는 할례언약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긴박한 순간에 할례를 행하면 남편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과 비교도 되지 않는 신분입니다. 단순히 액면가로 볼 때 우리는 시아버지와 관계한 여인입니다. (마1:3)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우리는 우상의 신전에서 몸을 팔던 기생이었습니다. 우리는 과부요,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남편을 사지로 몰고 왕과 간음한 유부녀였습니다. (마1:5-6)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인데 죄인인 줄도 모르는 죄인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답도 없으면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제 딴에 잘 사는 줄 알지만 무익한 인생이요, 단 하나도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혀에는 속임만 있습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입에는 저주와 악독만 가득합니다. (롬3:10-14)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런 우리가, 그런 우리의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도 달렸고, 예수님의 부활에 나도 부활했다고 고백합니다. 사탄이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의를 제기하고 문제 삼을 것이 수두룩한 우리입니다. 아니 우리는 문제 그 자체들입니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합니다. 십보라가 할례 언약을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십보라가 할례를 행하여 남편을 살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불가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입으로 시인합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보라가 할례언약을 아는 것과 할례를 행하는 것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서십니다. (마10: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눅12: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합니다. 문제 제기도 못합니다. 입도 벙긋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의 예배 자리에, 예수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앉혀주십니다. (계12:22-23)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이런 은혜를 받은 성도입니다. 그래도 원망하고 비방하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완전한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할례를 시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에 거하며, 주일마다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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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0
  • [김성수 총장] 왜곡된 이원론의 뿌리
    오늘 우리 사회와 문화에는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고, 따라서 영적인 일과 육적인 일, 세상과 교회, 하나님의 일과 나의 일, 신앙과 이성, 종교와 과학의 영역을 잘못 분리하는 이원론적 사고가 팽배해 있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배경으로 우리는 왜곡된 이원론이 어디에 연유해서 오늘 우리의 사회 문화 전반에 스며들어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대 철학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에이어(A.J. Ayer)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종교인들의 주장은 타당할 수도 없고, 타당하지 않을 수도 없다. 이들은 세상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이 설령 거짓된 말이나 근거가 부족한 말을 한다고 해서 정당하게 비난받을 수 없다.” 에이어는 신이 없다고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는 단순히 과학적 실험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를 논의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그의 관점은 사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르네 데카르트(Rene Decartes) 역시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하였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또한 작가 칼 스턴(Karl Stern)이 ‘두려운 소외’(a fearful estrangement)라고 부르는 상황으로 이끌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마음, 또는 영혼은 비유하자면 마치 하나의 ‘기계와 같은 거대한 세계”에 내장되어 있는 어떤 것과 같다고 보았다. 인간의 영혼은 인간의 육체라는 기계 안에 집을 지어 둥지를 틀고 자리를 잡고 있는 어떤 것으로 보았다. 칼 스턴 역시 스스럼없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연을 실험적으로 분해하고, 수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고, 또 실행할 수 있지만 모든 통일성을 상실한 하나의 거대하고 확장된 영혼 없는 기계에 불과하다고 생각해보라!” 칼 스턴은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관점에 대해서 데카르트의 개인적인 성경과 생활이 어떤 영향을 미쳤다는 흥미 있는 주장을 하고 있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신체적인 조건, 자신의 감정, 그리고 특히 여성과의 관계가 전혀 편안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지성에서 피난처를 찾도록 강요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항상 감기 때문에 대해 고생을 하고 있었고 불평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몸을 따뜻하게 유지하려고 ‘난로 곁에 앉아’ 있는 동안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지적 발견을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데카르트는 여성과의 관계에서 결코 만족스럽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스웨덴의 크리스티나(Christina) 여왕에게 수학을 가르치던 중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수업을 시작하기 위해 선생이 추운 아침 시간에도 일어나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의 이원론적인 현대 과학의 세계관이 부분적으로 한 사람의 신경증에서 유래했을 수도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생각이다! 우리는 삶에 대한 분열된 관점이 기독교 세계와 비기독교 세계에 만연해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현상을 보다 더 완전하게 이해하려면 이러한 관점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인용문이 핵심이다. “우리의 육체는 단지 음식이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우리에게 끝없는 문제를 야기한다. 우리의 육체는 또한 참된 존재를 추구하는 우리를 덮치고 방해하는 질병에도 걸리기 쉽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를 삶과 정욕, 두려움과 온갖 종류의 공상과 끝없는 어리석음으로 가득 채우고, 실제로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에게서 사고의 능력 자체를 전혀 앗아 간다. 전쟁과 다툼과 파벌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이 육체와 육체의 정욕이 아니고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전쟁은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발생하며, 돈은 육체를 위해,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 획득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장애물들 때문에 우리는 사고하는 ‘철학적 활동’에 전념할 시간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여가 시간을 갖고 어떤 사고에 몰두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육체는 항상 우리에게 침입하여 우리의 탐구에 혼동과 혼란을 야기하고, 우리를 너무나도 놀라게 하여 진실을 볼 수 없게 만든다.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한 순수한 지식을 가지려면 육체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 경험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대신에 이제는 영혼이 그 자체로 모든 것을 보아야 한다. 김성수 목사 (탄자니아 아프리카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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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6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0)
    (출4:24)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먼저는 모세가 많이 놀랐을 것입니다. 떨기나무에 불로 임재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갑니다. 애굽으로 가는 길에 숙소를 들리게 되는데 밑도 끝도 없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려고 한 이유는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모세를 죽이시려고 하신 것에 분명 다른 목적이 있겠지만 이런 장면에서도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자들은 방심하면 안 됩니다.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명을 맡겼으니 그 어느 누구도 함부로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함부로 못하시겠지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목이 날아갑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맡은 자의 목은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지만 동시에 사명을 맡은 자의 목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잊어선 안 됩니다. 그래서 사명자는 다른 사람과 상황과 형편과 처지를 보기 전에 먼저 항상 하나님의 기색을 살펴야 합니다. 동시에 원수 사탄 마귀 역시 우리의 시선을 빼앗기 위해 끊임없이 집요하게 달려듭니다. (벧전5:8)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그래서 틈을 주어선 안 됩니다. (엡4:27)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틈을 주지 말라”는 것은“발 디딜 곳을 주지 마라”는 뜻입니다. 원수 사탄 마귀의 눈치를 보거나 겁내는 순간 틈을 주게 되고 이미 패배한 것입니다. 원수 사탄 마귀는 대적의 대상입니다. (벧전5:9-10)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성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은 자들은 그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 항상 원수 마귀로부터 잠깐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에 하나님께서는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사명자는 반드시 승리하게 됩니다. 이 말씀에 또 하나 중요한 적용이 있습니다. 사탄은 교회와 성도의 궁극적인 대적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느 누구라도 사탄의 편에 서는 순간 그 사람은 교회와 성도의 대적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문제는 자신이 사탄의 편에 서 있으면서도 대부분이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줄 착각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불신앙에 사로잡혀 반역을 주도하는 무리들이 백성들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충분한 명분을 제시하여 현혹하기 때문입니다. (민12:2)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민16:3)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그래서 교회 안에서의 분쟁과 싸움이 극렬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분쟁과 싸움을 하는 양 진영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와 복음과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한다고 주장합니다. 비슷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주장이 아예 극과 극, 전부가 다 반대입니다. 그런데 명분 하나만은 동일합니다. 소용돌이 속에 있는 성도들은 대부분이 한쪽에 속해 있지만 갈등합니다. 하나님과 성경과 복음과 성도를 위한다는 똑같은 명분을 주장하지만 자신들이 서 있는 위치는 극과 극 대치점입니다. 분명한 것은 한쪽은 하나님 편이고, 한쪽은 사탄 편입니다. 사람들은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명확하고 단호하십니다. (민16:2)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 성경은 모세를 반대한 자들이 잘못되었다고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꽤나 이름이 있는 지휘관들입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이백오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뜻을 모았습니다. 이 정도 되면 누가 봐도 그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얼마나 많은 모임과 회의를 거듭하고 수많은 연구에 연구를 거쳐 백성들이 동의하고 인정할 만한 안건을 들고나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많은 사람이 동조했습니다. (민16:35)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오십 명을 불살랐더라 (민16:49)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염병에 죽은 자가 만 사천칠백 명이었더라 그들은 모세를 거스르는 것인 줄 알았는데,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을 불살라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세 치 혀에 미혹 받아 불신앙과 반역의 편에 섰던 14700명을 염병으로 죽여버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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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6
  • [김성수 총장] 현대 문화 속에 만연해 있는 이원론적 사고
    지난 호에서 다룬 바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삶을 영위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잘못하면 왜곡된 영성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성공적인 기독교 음악가는 단순히 기독교 하위 문화 내에서 세속적인 생활 방식과 가치관을 모방하거나 기독교인의 삶은 서로 다른 두 세계에 각각 발을 딛고 살아가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제시하게 된다. 이 모든 왜곡된 영성 전략의 근본적인 문제는 ‘영적’(spiritual)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단순히 성경 읽기, 기도, 신앙 고백, 그리고 전도와 같은 종교적 활동을 의미한다는 잘못된 가정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영성을 이런 종류의 활동만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관점은 자신이 로마서 12장 1절과 같은 구절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도무지 맞지 않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몸’은 우리의 ‘영혼’과 구별되는 ‘육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 전체’ 또는 총체적인 ‘자아’를 의미한다. 바울의 강조하는 요점은 우리의 삶 전체, 즉 우리의 모든 활동이 영적인 예배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삶에 대해 분열된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현대 작가 어니스트 베커(Ernest Becker)는 그의 수상작품인 『죽음의 부정(The Denial of Death)』에서 다음과 같이 인간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묘사하고 있다: “인간은문자 그대로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인간은 첨탑과 같이 우뚝 솟은 위엄을 가지고 자연 밖으로 튀어나오는 자신의 찬란한 독특함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맹목적이고도 멍청하게 땅속으로 몇 피트 돌아가 영원히 썩고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이 사라지는 존재 안에 있어야 하고 또 그와 더불어 함께 살아야하는 것은 무서운 딜레마입니다.” 베커(Becker)는 문화를 발생시키는 것은 인간 본성의 이중성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건축, 사회제도, 예술은 우리보다 오래 지속될 업적을 통해 우리 자신을 불멸로 만들려는 시도라고 그는 주장한다. 이와 같은 정신적이며 문화적인 활동과 성취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육신 자체가 우리가 죽을 운명임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소위 ‘자기 치유’의 문제를 다루는 많은 책자들이 출판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주제를 다루는 많은 저자들은 거의 공통적으로 이원론적 인간관에 기초하여 자신들의 관점과 이론들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 인간의 본질이며 실체인 ‘영혼’은 불멸하며, 우리가 일시적이며 덧없는 부분이라고 의식하는 육체는 비유하자면 여행을 위해 타는 말이나 사용하는 도구처럼 일시적인 것'이라는 세계관적 관점에 기초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서구사회는 물론 특별히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은 부분적으로는 ‘세속적 육체’로부터 ‘성스러운 영혼’을 분리시키는 이원론적 관점이 배경이 되고 있다. ‘성스러운 영혼’이라는 부분은 일반적으로 지성으로 식별되며, 동시에 보다 우수한 남성 자질로 간주되고, ‘세속적 육체’라는 다른 한 부분은 일반적으로 욕정과 관능으로 식별되며, 보다 열등한 여성 자질로 간주된다. 이와 같은 관점을 견지하게 되면 우리는 당연히 모든 것을 다 얻는다고 해도 ‘영혼을 잃어버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작가 수잔 그리핀(Susan Griffin)에 의하면 심지어 포르노물의 핵심도 알고 보면 남성이 여성에게 자신의 신체에 대한 두려움과 경멸을 투사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과학과 기술 문명의 극치를 자랑하는 현대 문화는 인간을 총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단순히 육체라는 두 다리 위에 달려 있는 ‘머리’만을 중시하고 있다. 현대 문화 속에 만연해 있는 이와 같은 비 성경적인 인간관은 이미 고대 헬라 사회로부터 기원하여 특별히 지성과 신체를 근본적으로 분리한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1596-1650)에 의해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완전히 객관적일 때만 세상에 대한 진실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육체로부터 마음을 들어’ 내어야만 진정한 객관성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야만 우리는 주변 세계에서 얻은 모든 주관적이고 잘못된 믿음, 의견, 감각적 인상으로부터 우리의 생각을 정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객관성’은 현대 문화와 과학의 분명한 외침이 되었지만 이로 말미암아 소위 ‘객관적’인 과학과 ‘주관적’인 종교 사이에는 또 다른 분열이 생겨났다. 그래서 과학자는 이렇게 외친다. ‘필요하다면 주관적인 종교적 신념을 가지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진리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과학만이 참과 거짓의 문제를 다룰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우리 모두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문화 속에 만연해 있는 이와 같은 이원론적 세계관을 니고데모의 안경을 통해서 분별하고 문화를 거스르고 변혁하는 성경적인 지혜자의 삶을 영위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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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6-1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9) (민12:1-3, 신24:9)
    오랜 시간은 미리암의 원망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모세가 비워둔 40년의 세월, 이스라엘에 있어서 가장 힘들었을 40년의 세월을 훌륭하게 소화해 낸 위대한 여 선지자 미리암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세례요한과 같은 인물이 미리암입니다. (출15:20)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그런데 안타깝게도 미리암은 이스라엘이 행진하는 믿음의 길에 원망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신24:9)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할지니라 우리는 미리암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아니 이미 미리암일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미리암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소지가 있는 사람이 바로 우리입니다. 미리암이 여 선지자였으니 어쩌면 오늘날 목사를 비롯하고 교회에 중직을 맡은 자들이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살전5:18)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구지 감사하라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감사할 일이라면 감사하라고 하지 않아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본질은 물에 빠져 죽을 사람 구해 줬는데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는 사람들이니 어쩌면 감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는 완전한 원망의 사람 미리암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살아야 할 우리가 안타깝게도 완전한 미리암이 될 가능성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그것을 증명하기에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원망의 아이콘인 미리암이 되지 않도록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리도 미리암의 한계를 벗어나기 불가능하지만, 더 문제는 사탄이 우리의 원망, 우리의 미리암으로 끊임없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감사의 탈을 쓴 미리암이 되지 않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리암을 빌미로 사탄이 우리 발목에 올무를 걸지 못하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눅5:32)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눅13:3)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엑소시스터라는 영화를 보면 사탄이 사람 몸에 들어가고, 그 사탄과 싸우는 신부가 등장합니다. 그때 신부는 계속해서 사탄은 우리의 죄를 물고 늘어질 것이라고 말하면서 사탄과 싸우기 전에 먼저 자신의 죄를 고해, 회개합니다. 신부 두 명 서로 고해를 받아주고 용서를 선포합니다. 그랬는데도 사탄은 신부의 숨겨진 죄를 들추어내어 정신을 흩트리려고 합니다. 그때 신부는 사탄에게 그 죄는 이미 종결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그 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받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는 회개의 능력이 대단한 것 아닙니다. 우리의 하찮은 회개, 기가 찬 회개, 뻔뻔한 회개지만 그 회개를 받아 용서해 주시고, 씻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대단합니다. 눈 감고 기도할 때마다 회개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십시오. 그래야 사탄의 미혹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항상 우리의 죄를 이용하여 우리를 다스리려고 합니다. (창4: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할 때 사탄은 우리의 죄를 다 알고 있고, 미혹하지만 그 죄로 우리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아니 우리가 죄를 범한 것은 분명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했기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때문에 사탄이 죄를 이용하여 우리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우리의 회개가 대단해서 사탄이 꼼작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때문에 사탄이 꼼짝을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회개하십시오.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용서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사탄이 우리의 죄를 빌미로 미혹해 올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그 죄를 용서받았노라고 당당히 선포하십시오. 원망과 불평을 가슴 속에 넣어두면 사탄의 올무에 걸립니다. 사탄이 우리를 다스릴 빌미를 주게 됩니다. 원망과 불평을 가슴 속에 넣어두면 안타깝게도 마지막 순간에 미리암처럼 됩니다. 직분과 사명의 완성(은퇴)이라는 위대하고 복된 옷을 입어야 하는 순간에 원망과 불평이라는 자신의 옷을 입은 미리암과 같은 성도가 되어선 안 됩니다. 주일에 드려지는 예배의 강단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지 못할 때, 강단에는 바벨탑이 세워지게 될 것이고, 금송아지가 만들어지게 될 것이고, 느부갓네살의 금신상이 우뚝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주일, 예배의 시간에 하나님을 나타내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지 못할 때 내가 바벨탑이 되고, 금송아지가 되고, 금신상이 될 것입니다. 평생토록 교회 다니고 직분을 맡아 “자기의 소견에 틀린 대로”가 아니라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그리스도와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사노라고 다짐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이 금송아지가 되는 완전한 미리암의 길을 가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이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시34:18)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마음을 보시고, 마음의 소리를 들으시고,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순간순간을 통회하는 자세로 살 때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우리의 걸음을 미리암의 걸음이 되지 않도록 선히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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