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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현령비현령(5) -전관예우(前官禮遇)
두런두런 둘러앉은 장로님들의 담소 가운데 20만 원짜리 봉투 하나면 “총회에서 발언해 줄 목사들 많다” 아니 “발언 안 할 사람 거의 없다”라는 말로 폭소가 터져 나옵니다. 참 검소한 고신 교단의 목사들입니다. 상임위나 특별국의 자리 하나면 평생 다져왔던 인간관계나 의리는 배설물처럼 여기는 결단력 있는 고신 교단의 목사들입니다. 이렇게 다루기 좋은 목사 장로이니 계파나 진영의 의도를 가지고 매관매직하면 오늘날 고신에 만연되어있는 계파와 진영의 골은 더욱 깊어질 것이 자명합니다. 아니 혹자는 이미 보수는 죽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보수를 만들어 개혁을 견제하고 균형을 맞추자고 주장합니다. 뼛속까지 개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총회 임원으로 만들어 죽어가는 보수를 살려야 한다고 평생 개혁에서 쌓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작금의 정치행태에 발맞추어 가능한 봉투가 되는 자리를 만들고, 그곳에서 천년만년 누리고 싶어 하는 형국입니다. 20만 원짜리 봉투와 자리의 맛을 봐 버린 소위 보수라는 자들은 아예 정치적인 의리와 명분은 상실되어버렸고, 보수라는 가면만 쓰고 있을 뿐 언제든지 개혁도 되고, 진보도 되어 그동안 누리던 봉투의 자리를 놓칠까 전전긍긍하며 그 신보수라는 새 배에 올라타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최근 들어 고신교단 내에 계파와 진영의 골이 더욱 깊어지고 커진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가 서울의 L 목사님께서 열변을 토하신 것처럼 총회 서기 출신 카르텔입니다. 총회 부회록 서기가 되기 전에 총회 준비를 위한 총회 서기부 MT라는 명목으로 그 해 부회록 서기 후보의 물망에 오르는 사람을 부부 동반 모임에 참여시킵니다. 그러니 총회 임원에 입성하기 위해서 그 계파 사람이 아니면 시작부터 불가능합니다. 지금 총회 서기부에 포진한 분들을 보십시오. 계파 색채가 엷고, 계파를 싫어하고, 보수성향이 있는 사람도 일단은 그 진영에 몸을 기대고 양다리를 걸쳐야 시작이 됩니다. 균형 있는 총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분명한 명분으로 다리만이라도 걸치고 시작했는데, 회록 서기를 지나면서 하체가 들어가고, 부서기를 지나면서 몸통이 들어가고, 서기가 되면 총회를 손에 쥐고, 서기를 마치면서 그 영향력은 한국교회로 확대됩니다. 사욕에 치우친 사람이 총회 임원, 특히 총회장이 되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4년 동안 총회 서기부를 거치면서는 구석구석을 너무도 잘 알게 된 서기부 임원들이 총회장단이 되었을 때, 유익한 점보다 작금의 현상처럼 위험하고 무법천지가 될 위험성이 훨씬 높습니다. 소위 서기 카르텔이라는 것을 반드시 총회적으로 다루어 이 카르텔로 인한 계파와 진영을 넘어 안하무인의 정치로 흘러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서기부를 거치지 않아도 총회장단에 오를 정도의 사람이면, 이미 노회와 목회에 상당한 경험과 식견을 가진 분들로서 충분한 자질이 검증되었고, 사무총장 이하 직원들의 훌륭한 보좌가 있기에 1-2년의 총회장단 사명은 충분히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한국교회에서의 우리 교단의 몫이 있습니다. 교단의 위상을 생각해서 대부분이 총회장을 역임하신 분들이 이사로 가십니다. 총회 서기부를 마치고는 특별국이나 상임위에는 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고 총회 임원회에서 의논이 있었다지만 관례처럼 총회 서기를 마치면 총회를 잘 안다는 빌미로 감사국에 들어갑니다.(현재 감사국원 3명은 최근 총회 서기역임) 총회 감사국인지 총회 서기 지내신 분들의 친목회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입니다. 총회 감사국이 총회 서기부의 연장선 조직입니다. 총회 감사국은 별정직처럼 그 기능상 법적 전문가, 재정 전문가, 행정 전문가 정도는 배치해야 합니다. 차라리 총회를 잘 아는 서기부 출신들로 총회를 하나 만드시지요. 총회 총대로 나올 정도가 되면 기본적인 자격과 능력을 갖춘 분들인데, 총회 서기 출신들이 꼭 해야 한다는 논리는 총대들을 얼마나 무시하는 처사인지 총대들은 알아야 합니다. 총대들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당근 하나 던져주면 입을 다무는 총대들이니 무시당하는 줄도 모를 수 있습니다. 유일하게 서기를 마치고 임원회에서 의논한 대로 그 어느 상임위도, 틀별국도, 이사도 가지 않은 분이 고 신수인 총회장이십니다. 최근 총회 서기를 지낸 분 들 중 유일하게 보수진영의 고 신수인 총회장님께서 약속을 지켰습니다. 소위 개혁진영의 서기들은 단 한 명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너무 개혁을 잘하셔서 말입니다. 처음 시작할 땐 훌륭하셔서 선출되셨습니다. 그런데 4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니 자연스럽게 욕심이 생긴 것입니다. 여기엔 그 어떤 사람도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총회가 훌륭한 분들로 보호해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총회장의 사역이 끝날 무렵 고 신수인 총회장님께서는 당신의 몫인 “CBS이사”를 제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당연히 총회장님께서 가셔야 교단 권위와 위상이 서게 된다고 고사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렇게 전달하여 CBS에서는 제가 이사로 갈 것 다 알고 전화까지 왔었습니다. 물론 개혁에 몸을 담았던 총회장 출신은 선배 총회장 출신 목사님의 이사 자리를 빼앗아서라도 반드시 그 자리에 갑니다. 말 그대로 개혁 정신이 투철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난 후 고 신 총회장님께로부터 “미안하다”고 하는 전화가 왔습니다.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너무 힘들게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원래 그 자리는 제자리가 아닙니다. 총회장님 자리니 총회장님 편하신 대로 하시라”고 대답했고, 현제 이사로 있는 당시 총회 서기가 고집을 부려 그 자리로 갔습니다. 사욕에 눈이 뒤집히면 세상이 말하는 윤리도 도덕도 질서도 없습니다. 현재 우리 고신총회가 한국교회에 파송하는 이사는 CBS, 성서 공회, 찬송가 공회, CTS, 군선교 위원회입니다. 현재 이사를 하고 있는 분들은 다 총회 임원 출신이고, 목사인 경우는 다 총회 서기 출신입니다. 고 신수인 총회장님을 분기점으로 해서 그동안 관례로 총회장을 역임했던 분들이 가던 이사를 총회 서기를 마치고 가는 아주 개혁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총회를 잘 아는 것을 넘어 총회 울타리 밖에 있는 이권도 잘 알게 된 것입니다. 총회장단이 갖는 위엄과 일반 목사와 비교할 수 없는 혜택에 눈이 멀어 목사의 정년까지 희생해 가며 자리에 오르고 “내 때만 망하지 않기를 소망”하면서 그동안 꿈꾸어 왔던 즐거움을 만끽하게 됩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문제는 그런 세월이 가는 동안 고신의 신앙과 정신은 오물통이 되어 썩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위기가 아니라고 했다가 집권을 하게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위기라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이 역시 진영논리로서 총대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속임수입니다.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을 고신의 교회들에게 떠넘기는 기가 찬 술수이지요. 그리고 뒤에서는 몇 년 세월을 통해 달인의 경지에 오른 실력으로 소위 봉투가 되는 일에는 탁월한 안목으로 몇 수를 내다보는 행보를 하게 됩니다. 총회 서기부는 총회 서기단 활동으로 총회 임원회 자리를 끝내야 합니다. 총회장단은 시대 시대마다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바라보며 영적으로 한국교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장자 고신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인물을 세워야 합니다. 총회가 평안하고 태평성대일 때는 농어촌에서 목회하시는 훌륭한 목사님도 총회장을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고신이 위기라고 특별기도회를 하는 상황이라면 총회장 되기 위해 몇 해 동안 수천, 수억을 쓸 것이 아니라 총회장에 된 후 수억을 총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인물을 총회장으로 세워야 합니다. 고신이 위기라고 기도회를 하면서, 1) 눈 감고 아웅 하지 말고 2) 순수한 교회들과 성도들의 주머니를 갈취하지 말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또 이미 그 자리에 오르신 분이라 해도 위기의 총회를 위하여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분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이 정말 고신을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전관예우(前官禮遇)’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전적 의미는 장관급 이상의 고위 관직에 있었던 사람에게, 퇴임 후에도 그의 공직에 대한 헌신을 기려 예의를 갖추어 존중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관리는 개인의 행복에 우선해서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재능과 노력을 바쳤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자세로 일한 관리가 퇴직했을 때 그를 예우함은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흔히 쓰이는 전관예우라는 말의 뜻은 본래의 뜻과는 거리가 멉니다. 가장 잘못된 사례가 법조계의 전관예우입니다. 전직 판사와 검사가 퇴직 후에 변호사가 된 사람을 현직 검사나 판사가 예우해 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변론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관(前官)이라는 이유로 유리한 결과를 얻는다는 것은 공정을 생명으로 하는 법정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총회 감사국은 서기부 출신의 ‘전관예우’의 자리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그러니 총회 피감 기관들을 공정하게 제대로 감사할 기능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관예우 받았으니 밥값을 해야겠지요?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신을 대표하는 한국교회의 자리도 서기부 출신의 “전관예우”의 자리로 자리매김해 버렸습니다. 당연히 사리사욕이 목구멍까지 차오릅니다. *묻고 싶습니다. 앞서 언급한 총회를 대표하여 파송하는 이사직에 어떤 근거로, 어떤 기준으로 파송하는지, 서기 출신이 총회를 대표할 자격이 있는 것인지, 총회 임원회는 총대들이 납득 할 수 있는 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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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이현령비현령(4) - 가스라이팅 (gaslighting)
고신!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이름입니다. 고신!고운 정보다 미운 정이 더 무섭다고 했습니까! 고신!순교자의 정신,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노래하지만 지나가던 개가 고신을 비웃어도 고신에 속한 사람들 중 몇 명이나 당당하게 반론을 제시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 개가 고신을 비웃어도 관심을 가질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고신!그래도 고신이 고신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고신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고신! 내가 부르다 죽을 이름이여! 고신! 고난도 슬픔도 그 이름 아래 묻을 수 있는 아름다운 이름이여! 고신에는 각계각층에 많은 인재들이 있습니다. 의외로 인재들이 많습니다. 우리 선배들의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라는 철저한 신앙교육으로 훈련받은 인물들이 아직도 곳곳에 건재합니다. 오늘 우리는 선배들의 신앙과는 너무 멀어져 있어 다음 세대에는 과연 얼마만큼의 인재들이 양산될지는 극히 우려스럽습니다. 위기의 고신이라지만 마지막 희망 하나가 있다면 그렇게 훈련받아 각계각층에서 묵묵하게 고신의 신앙을 지켜가는 인재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왕상19:18)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문제는 그 인재들이 교단 내에서는 대부분 소위 정치를 등지고 살고 있습니다. 허물어져 가는 위기의 고신을 위하여 두 팔을 걷어붙이고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희생과 수고를 하다가도 시도 때도 없이 여리고성과 같은 절벽을 만나게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제 내 교회나 잘 섬기다가 가리라!”라는 푸념을 내놓게 됩니다. 교단 외부에 있는 인재들은 고신을 사랑하는 신앙과 정신이 소외되었다는 안타까움과 서러움과 절박함으로 오히려 원한이 되고, 원성이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뿌리가 고신이요, 고신 신앙이기에 고신이 문을 열고 불러만 준다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신의 품으로 달려올 자들이 분명합니다. 고신대, 복음병원의 위기를 위기라고 말들 하지만 어쩌면 이 위기가 진짜 위기인지 모릅니다. 오랜 세월 이러한 위기가 있어 왔기에 오늘과 같은 고신대, 복음병원의 위기는 불을 보듯 자명한 사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고신 내부에 있는 인재들과 고신 외부에 있는 인재들이 왜 이렇게 산화하여 떠돌고 있을까요? 세월이 가면 나이를 먹듯이 자연스러운 질서나 예상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하면 바른 기준과 질서에 따라 책임과 권한이 주어져야 합니다. 총회 산하 기관에 몸을 담고, 고신의 식구로서 고신의 교회와 기관을 위해 한 몸 불사르겠노라고 하는 청운의 꿈을 다짐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줄을 서야 되는지를 눈치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고신의 기관에 몸을 담은 식구들은 이 눈치, 저 눈치, 이 계파, 저 계파, 이 진영, 저 진영, 이 집안, 저 집안을 의식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낼 때 자연스럽게 진급을 하고 책임 있는 사명과 자리로 옮겨가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고, 일을 잘해도 소용없다고 합니다. 위기를 직시하고 위기를 부르짖으면 오히려 경계의 대상이 되고, 다 같이 헌신해서 위기를 돌파하자고 외치면 손해 보기 싫어하는 동료들도 외면할 뿐 아니라 집행부에서는 다루기 힘든 사람으로 낙인을 찍어버립니다. 그러니 제일 잘하는 방법, 제일의 능력은 비위를 맞추고 손을 비비면 됩니다. 급기야 직원들에게 보직과 사명을 맡기면서 “어느 계파에 속해 있느냐? 누구와 가깝느냐? 어느 진영 사람이냐?”가 결정적인 기준이 된다고 합니다. 이해하기 좋게 최근의 있었던 일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평생을 고신대를 위해서 온갖 어려운 일 마다하지 않고 봉사한 이명호 장로의 일입니다. 이 장로는 고신대 기독교교육학과(82학번)를 졸업하고, 1989년 고신대에 몸을 담아 35년째 근무하고 있습니다. 2022년 6월 처장으로 보직을 받아 올해 2024년 12월에 퇴직(은퇴)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퇴직을 앞에 두고서 6개월 휴가(공로)를 주는데 이렇게 볼 때, 올해 2024년 6월 30일까지 3달만 더 근무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장로는 3달도 채 남지 않은 4월 3일에 처장에서 해임되어 학술정보관장(구. 문헌정보관장)으로 밀려(인사발령)나게 되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당사자는 정작 “이유를 모르겠다, 이유라도 알려주면 좋겠다.”라고 합니다. 이 장로는 한평생 고신대에 몸을 담았고, 고신의 장로로서 “기독교 대학으로 바르게 성장해 가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하면 정말 사람이 없어진다. 안타깝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 장로는 현재 총장의 직계 후배입니다. 작년에 현 총장이 총장으로 선임된 후 “얼마 남지 않았으니 잘 도와달라 끝까지 함께 가자”고 부탁을 했고 이 장로도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다고 했는데 결과는 위와 같습니다. 필자가 알고 있는 총장은 그렇게 하라고 해도 못 할 사람입니다. 고신의 장로 아들로 누구보다도 고신을 잘 알고 후배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총장이 되고 나서 사람이 달라진 것입니까? 겨우 몇 달 사이에 말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 이 총장으로서는 얼마나 든든하고 믿을 수 있는 후배가 아닙니까? 한평생의 일을 마무리하는 이 장로 역시 무슨 욕심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2달도 남지 않은 이 장로를 보직해임 시키고 학술정보관장(구. 문헌정보관장)으로 물러나게 했습니다. 과연 총장이 그렇게 했겠습니까? 총장의 평소 인품을 잘 아는 필자는 절대로 그렇게 할 사람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학교 구성원들은 총장은 허수아비요, 다른 사람이 실제 총장이라 말한다고 합니다. 학원 이사는 물론이요, 법인 사무실의 직원이 학교와 병원을 좌지우지한다고 입을 모은다고 합니다. 학교와 병원의 보직 인선에 총장이나 병원장의 의중보다는 외부의 입김이 더 크다고 교직원들은 말합니다. 최근에 있었던 일이지만 고신과 고신대를 위기로 몰아넣은 오늘까지의 악습이요, 안하무인입니다. 이런 상황에 기관의 구성원들은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 같습니까? 아니 어떤 자세를 취할 것 같습니까? 학원 이사들은 위기라고 소리치며 교회의 호주머니를 노릴 것이 아니라 정신을 차리고 산하 기관의 식구들이 정당하게 일하고 정당하게 대우받을 수 있는 예상 가능한 행정을 집행하기 바랍니다. 도대체 하나님을 영광을 위한 기관을 누가 이렇게 똥 칠을 하고 있습니까?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해도 우리 사람으로 불렀으면 적어도 1-2년은 전권을 주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왜 사람을 불러 놓고 이런 말을 듣게 하고, 이런 식으로 손발을 자르고, 얼굴마담 노릇을 하게 합니까? 기준이 허물어지면 이렇게 됩니다. 법을 집행하는데 “법은 아니라 해도 우리가 다 찬성하면 할 수 있다”고 하는 결과가 바로 이것입니다. 총장을 정당한 방법으로, 정당한 법으로 초빙했어야 합니다. 억지로 총장을 불러오기 위하여 학원이사회와 총회를 운영하는 자들은 총회와 총대들을 속이고 기만한 결과가 이런 폐단을 만들었습니다. 불법적인 정관개정 고려학원 이사회는 지난 73회 총회에 고려학원 정관개정을 의뢰했고 총회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총회에 상정되는 안건은 정확하고 정당한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개인이라면 당회와 노회를 거치고, 법인이라면 법인 이사회에서 충분히 논의하고 결정한 안건을 상정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총회는 바로 그 안건을 접수하여 다루어야 합니다. 지난 73회 총회는 고려학원 이사회의 이 정관개정 안건을 접수했고, 정관을 개정했습니다. 그런데 이 정관개정 논의를 위한 임시이사회는 정작 총회를 파한 후 3개월이 지난 2023년 연말에 열렸고, ‘사후 인준’이라는 명목으로 통과시켰습니다. 이것이 총회 법을 따른 정당한 절차입니까? 총회는 결과적으로 이사회가 제대로 논의하지 않은 안건을 접수, 논의, 개정했고, 고려학원 이사회는 총회와 교단을 기만했습니다. 이런 불법적인 개정안으로 총장 공모는 이전에 하고, 총장 선출은 개정된 법으로 집행했습니다. 총장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불법으로 총장에 오르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사욕의 의도를 가진 불의한 자들이 총장의 발목을 잡은 결과입니다. 총장의 발목을 잡은 총회의 몇몇 실권자들이 고신의 미래요, 자랑이자 자부심이기도 한 고신대와 복음병원을 세상보다 더 저질 기관으로 만들고 있음을 자인하고 책임져야 합니다. 총회와 총대를 기만하고 속인 학원 이사들은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한다. 아니 총회는 이것이 사실일 경우 모든 이사들을 반드시 소환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을 결정하게 된 총회 임원회도 당연히 책임져야 합니다. “나는 몰랐다, 모른다”고 하는 총대들 역시 책임을 통감해야 합니다. 해결을 위해 발 벗고 나서든지 자신이 없으면 이번 총회 총대를 포기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자세일 것입니다. 고신을 위해 하나님으로 부름을 받은 고신의 총대들이여 정신을 차릴 때가 되었습니다. (살전5:6)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벧전4:7)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란 말이 있습니다. 대상에게 정서적인 학대를 지속하여 대상이 자신의 판단력이 매우 낮다고 스스로 믿게 만들어, 그가 행위자에게 의존하게끔 만드는 세뇌의 일종입니다. 가해자에게만 이득이 되는 교묘한 궤변, 날조, 선동, 정치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총회 곳곳에서 정권(?)을 잡고 있는 실세들은 총회와 산하기관들을 “가스라이팅(gaslighting)”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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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3) - 녹비왈자(鹿皮曰字)
“법은 아니라 해도” 총회 본회 석상에서 “법은 아니라 해도 우리 총대원들이 다 동의하면 할 수 있다!”고 했던 총회장의 발언이 그다음 총회장의 입에서도 “법은 아니라 해도 우리 총대원들이 다 동의하면 할 수 있다고 했으니 하면 된다!”는 식으로 공회에서 공포가 된 이후로 총회 내 많은 결정들이 기준을 잃어버리고 좌충우돌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경북의 모 노회에서는 이단과 관련된 문제가 제기되어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교리적이고 본질적인 이단 문제를 계파 갈등으로 호도하여 전권위원회 보고를 받지 않으려는 시도가 있었고, 한 표 차이로 전권위원회의 보고가 받아졌습니다. 당시 모 노회원은 이 상황을 놓고 “한 표는 하나님께서 던지신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정작 더 한심한 것은 전권위원회 보고를 받아놓고서도 재판국 구성에 대해서 법제위에 질의 해 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법에 대한 기준을 무시하는 것은 사탄의 계략입니다. 교회 헌법은 그 기초가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원 중 어느 누구라도 법에 근거하여 “법이요!”하면 모두가 입을 다무는 것입니다. 교회를 바르게 세우는 성경의 정신이기 때문입니다.이래서 공회가 중요한 것입니다. 나무둥치가 조금만 흔들려도 높이 뻗어 있는 나뭇가지는 미친 듯이 흔들립니다. 제발 총회가 매관매직의 행태로 특별위원회를 구성한다거나 사욕이나 진영논리에 빠져 땜빵 식으로 결정을 하면 산하 노회를 물론이요, 개 교회나 성도들에게서는 미친 듯이 흔들림이 작용한다는 것을 명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불과 몇 년 전 총회를 사회하는 총회장이 생각 없이 한 말이 오늘날 고신총회의 전반적인 불법과 혼란을 야기하는 단초가 되고 있음을 반면교사(反面敎師) 삼기를 바랍니다. 작금의 이런 불법적이요 비상식적인 난국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첫 단추는 총회 선거관리위원회가 올바르게 선거법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현재 고신총회의 선거법이 법대로 집행되지 않음으로써 선출되는 사람들을 불법자로 만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선거조례 제6장 선거운동에 대한 규제, 제15조(규제) 1. 입후보자 또는 그 지지자는 노회 추천일로부터 총회 선거 완료 시까지 선거와 관련된 다음의 행위는 할 수 없다. 1) 접대, 기부, 상대방 비방, 유인물 배포, 각종 방문, 인터넷 언론사 광고, 집단 결의 2) 노회 및 교회의 공금 사용 및 모금을 위한 후원회 결성 3) 다른 후보자를 사퇴시키기 위하여 회유, 매수하거나 입후보 등록을 방해하는 행위를 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총회 선거 일정에 따라 노회가 추천하기 전까지는 위의 행위를 해도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가 제기되니 규제보완을 내놓았습니다. 제5장 선거운동, 제8조(규제보완) 선거조례 제15조의 불법선거운동 규정을 다음과 같이 보완한다. 1. 접대 :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 선거당사자나 관계자로부터 식사비나 교통비를 수수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2. 기부행위 : 당해 연도에 선거당사자나 각종 기관이나 단체 등의 기부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당해 연도에는 출마자가 위와 같은 행위를 했을 때는 불법선거운동이라고 명시했습니다. 그럼 현재 부총회장으로 출마의 뜻을 비치고 움직이고 있는 분들은 불법선거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선관위는 해 노회나 당회에 통보하여 시벌하도록 해야 합니다. 선거조례 제6장 선거운동에 대한 규제, 제15조(규제) 1항에 “집단 결의”를 할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제5장 선거운동 제8조(규제보완) 8번 집단 적으로 특정 후보자 지지를 결의할 경우에는 관계자를 해당 노회에 통보하여 시벌토록 하며 ...... 그렇다면 당연히 선관위는 해 노회에 통보하여 시벌하도록 해야 합니다. 최소한 세상 선거법에서 규정하는 것보다는 엄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2월 23일 오전 11시 하늘샘교회당에서 있었던 “고신교단을 사랑하는 목사 장로 기도회”는 부총회장 출마를 위한 J 목사의 출정식이었습니다. 3월 25일 “한국기독신문”에 “43회 동기회 내에서 무슨일 ... ?”이라는 기사와 함께 J 후보를 부총회장 후보로 지지하는 “48명의 집단결의 성명서”가 보도되었습니다. 어제 4월 4일 오후 4시 천안 신대원 내 고신영성원에서 있었던 “고신총회 미래를 위한 기도회” 역시 부총회장 출마로 이미 행보를 보인 C 목사의 출정식입니다. 이 출정식 역시 집단결의입니다. “집단 결의”가 신문 지상에 광고로 올라왔으니 선관위가 법대로 한다면, 어쩔 수 없어서라도 부정선거요, 불법이라고 명시할 것 같은데 과연 이번에는 제대로 할지 의문입니다. 선관위가 “집단 결의”를 “불법으로 규정”을 한다고 해도 그다음 예상 시나리오가 눈에 훤하게 보입니다. 먼저는 그 사실에 대해 고발자가 있으면 조치할 것이라 할 것이고, 고발자가 있으면 정식으로 고발 서류를 제출하라고 할 것입니다. 고발자가 나오기도 어렵지만 고발자가 나와 고발장을 제출한다고 해도, 전례를 볼 때 총회 임원회에 올리고 총회 임원회는 진의를 알아본다는 명목으로 시간을 끌 것 같습니다. 그렇게 서류가 선관위로, 총회 임원회로, 재판국으로 두세 번 왔다 갔다 하다가 법제위로 문구 해석을 요청하는 수순으로 끝을 낼 것 같습니다. 본인은 끝까지 법을 준수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만약에 선관위에서 집단결의를 하는 기도회에 대한 조치가 없고, 불법이 아니라고 한다면 저도 두 번이나 낙마한 사람으로서 대대적인 출정식을 위한 “한국교회를 위한 기도회”를 하고자 합니다. “법은 아니라 해도” 전례를 볼 때, 선관위도 그 길을 따라갈 것 같습니다. 부정적인 예상은 항상 잘 맞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번만은 꼭 아니길 바랍니다. 녹비왈자(鹿皮曰字)란 말이 있습니다. 부드러운 사슴 가죽에 쓴 “가로 왈(曰)” 자를 위아래로 잡아당기면 “날 일(日)” 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이번만은 선관위가 녹비왈자(鹿皮曰字)하지 않기를 기대해 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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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2) - 양두구육(羊頭狗肉)
선거조례 제6장 선거운동에 대한 규제, 제15조(규제) 1. 입후보자 또는 그 지지자는 노회 추천일로부터 총회 선거 완료 시까지 선거와 관련된 다음의 행위는 할 수 없다. 1) 접대, 기부, 상대방 비방, 유인물 배포, 각종 방문, 인터넷 언론사 광고, 집단 결의 2) 노회 및 교회의 공금 사용 및 모금을 위한 후원회 결성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총회 선거 일정에 따라 노회가 추천하기 전까지는 1) 접대, 기부, 상대방 비방, 유인물 배포, 각종 방문, 인터넷 언론사 광고, 집단 결의 2) 노회 및 교회의 공금 사용 및 모금을 위한 후원회 결성 3) 다른 후보자를 사퇴시키기 위하여 회유, 매수하거나 입후보 등록을 방해하는 행위를 해도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뜻인지요? 만약에 법에 저촉이 되지 않는다면 지난 글에서 언급한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2023년에 고신포럼 주최로 기도회 한 것을 선거관리위원회는 어떤 법적 근거에 따라 기독교보에 글을 올려 부총회장으로 출마한 저와 함께 한 분들을 불법을 자행하는 사람들로 오해받게 해서 선거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것도 선거관리위원회에서 결정이 되지 못하니 선거관리위원회 임원회 이름으로 올리는 묘수(?)까지 부려야 했던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또 선거관리위원회 <임원회> 결정과 선거관리위원회 <전체> 결정과의 차이는 무엇이며 법적인 권한의 차이는 무엇인지요? 임원회 독단적으로 사안을 결정할 <권한과 범위>는 선거관리위원회 규칙 어느 조항에 있는지요? 지난해 선거관리위원회의 기준에 따라 고신포럼에서 주최한 기도회가 기독교보에 경고가 될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면 이번 2월 23일 부산서부노회 모교회에서 있었던 “고신교단을 사랑하는 목사 장로 기도회(사실은 부총회장 출정식)”에 대해서는 왜 묵인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지난번에 보완한 규정을 살펴봅시다. 제5장 선거운동, 제8조(규제보완) 선거조례 제15조의 불법선거운동 규정을 다음과 같이 보완한다. 1. 접대 :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 선거당사자나 관계자로부터 식사비나 교통비를 수수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2. 기부행위 : 당 해 연도에 선거당사자나 각종 기관이나 단체 등의 기부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1번 접대는 노회 추천일 전까지는 해도 불법이 아니며, 2번 기부행위는 노회 추천일과 상관없이 당해 연도에 다 적용되는 것인지요? 지난해 선관위의 관례로 볼 때 제8조 규제보완은 당해 연도로 적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부총회장으로 하마평에 오르고 있는 분들의 행보는 이미 모두 불법입니다. 지난 경험으로 볼 때, 이것에 대한 질의를 공식적으로 해 본들 서류가 총회 임원회와 선관위로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법제위원회에 문항 해석을 요구할 것이고, 올해 총회 마치고 나면 유야무야 되겠지요. 2024년 3월 25일 한국기독신문에 “43회 동기회 내에서 무슨 일...?”이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또 “고려신학대학원 43회 동기회 입장”이라는 광고가 올라왔습니다. 선거조례 제6장 선거운동에 대한 규제, 제15조(규제) 1항에 “집단 결의”를 할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사에는 “43기를 대표하여 정00 목사를 추대한다는 결의를 한 바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선거법에 저촉이 되는 것은 아닌지요? 입장문에 따르면 43회 동기회는 “2022년 2월 7일에 결의”했다고 하지만, 결의를 재확인하는 행위도 당 해 년도에 결의하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법에 충실해야 할 선거관리위원회가 상황에 따라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한다면 선거관리위원회는 양의 머리를 걸어 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뜻인 ‘양두구육(羊頭狗肉)’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선거관리위원회가 기준을 잘 세우고 공명정대하게 적용하여 고신을 바르게 하는 첫걸음이 되길 소망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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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정년제 폐지 – 본립도생(本立道生)(2)
지난 3월 18(월)-19(화)일에 있었던 제6회 고신포럼에서 총신대 서창원 교수와 오태균 교수를 모셔 정년제에 관한 연구발표를 들었습니다. 서창원 교수는 성경에 근거하여 정년제 폐지를 주장했고, 오태균 교수는 사회학적 접근으로 정년제 유지를 주장했습니다. 일전에 제가 소속된 부산서부노회에서는 성경을 기준으로 현재 교회 구성원들의 상황을 고려해 교회 전 직원과 직분자의 정년 연장을 총회에 상정한 적이 있습니다. 농어촌교회가 장로를 세우지 못해 폐 당회가 되는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은 도시에 있는 교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최소한의 기준을 세워도 그 기준에 맞는 직분자를 세우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름을 받아 175세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창25:7)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창 25장 전반부가 아브라함의 죽음을 기록하는데, 아브라함의 뒤를 잇는 이삭의 기록은 급하게 야곱에게로 전개되어버립니다. 25장 후반부는 이삭이 에서와 야곱을 낳는 것을 끝으로 에서가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야곱에게 팔아버리는 사건으로 넘깁니다. 그리고는 창 26장은 1절에 “아브라함 때에”라고 언급하면서 이삭의 행전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삭은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고, 장자의 축복을 받은 야곱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집을 떠나 고난의 삶이 시작되는 것으로 이삭의 행전은 짤막하게 막을 내립니다. 성경의 기록으로만 보아도 아브라함은 창 12장에서 부름을 받아 창 25장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삭은 창 25장 중후반부에 등장하여 27장까지 나타나고 있지만, 이것은 이삭에 대한 기록이라기보다는 야곱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창 28장부터는 본격적으로 야곱에 대한 기록이 시작됩니다. 그러다가 창 35장에서 야곱이 20년 만에 집으로 돌아올 때 성경은 이삭의 죽음을 기록합니다. (창35:28)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봤습니다. 이삭이 40세에 결혼을 하고 60세에 에서와 야곱을 낳았는데, 이때 아브라함은 160세였습니다. 아브라함이 175세에 죽었으니 15년 동안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과 함께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삭의 때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삭은 60세에 에서와 야곱 두 아들을 보았습니다. 장자의 축복 사건을 시작으로 야곱이 집을 나간 후 이삭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훗날 야곱은 죽은 줄만 알았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애굽으로 내려가 바로 앞에 서게 됩니다. 성경은 굳이 야곱의 나이가 130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47:8-9)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짧고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요셉은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창41:46)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총리가 되어 풍년의 세월 7년을 끝내고 흉년의 세월이 시작된 후 약 2~3년 후 야곱은 바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야곱이 130세일 때, 요셉은 39세였습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90세쯤 요셉을 보았다고 하면 야곱이 아버지 이삭의 집에서 형 에서를 피하여 도망쳐 나온 때가 적어도 70세 중후반의 나이였습니다. 야곱은 애굽에서 17년을 살다가 147세에 죽습니다. (창47:28) 야곱이 애굽 땅에 십칠 년을 거주하였으니 그의 나이가 백사십칠 세라 이삭이 야곱을 60세에 낳았으니 야곱이 120세 되던 해 180세에 이삭은 죽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삭은 손자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던 즈음에 총리가 된 줄도 모르고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 오묘합니다.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멈추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믿음의 위대한 족장들을 언급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직분을 따라 그 기한을 정합니다. 아브라함이 살아 있었지만, 이삭의 때에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이삭이 살아 있었지만, 야곱의 때에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입각한 교회의 전통을 볼 때도, 신약의 사도들과 전도자들, 그리고 교회사적으로 속사도 시대의 교회 일군들, 감독들 및 종교 개혁자들, 청교도들, 및 20세기에 들어와서 1980년대 중반(합동은 1988년에 처음 정년제 시행)에 오기까지 성직자 정년제가 없었습니다. 정년 연장이냐? 정년 유지냐? 정년 폐지냐? 정년 축소냐? 과연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까? 나이가 그 기준이 되어선 안 됩니다. 직분과 그 직분에 따르는 사역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장로교의 원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노회가 목사를 세우고, 노회가 목사의 은퇴를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목사의 정년은 노회의 소관이 되어야 합니다. 노회에 “목사(목회) 상담센터” 혹은 “목사 사역 검진 위원회” 같은 기관을 구성해서 그 기관이 노회 산하에서 목사 상담과 각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조정하고 연구해서 문제들을 안정화하고 각 그 교회의 성도들과 당회의 의견을 모아 교회의 존립을 최우선으로 하되 목사도 살리고 성도들도 살리는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정기적인 상담을 통해서 목회자의 심리와 정신적인 건강도 검사하고, 소명에 대한 열정도 확인하고, 그 목회자 본인의 의향도 고려하여, 각 교회와 교인들의 상황에 맞춰 정년을 노회가 정할 권한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노회가 목사의 은퇴를 선언하면 기본권은 물론이요, 목사에 대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후배들에게 계승해야 합니다. 본립도생(本立道生), 근본을 지키면 길이 보입니다. 은퇴 목사의 투표권은 기본권이라고 합니다. 이 기본권은 어디서 온 기본권입니까? 목사의 기본권을 유지함은 나이에 상관없이 여전히 목사로서 판단력과 리더십을 인정하는 총회 헌법 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총회 헌법의 근본정신에 맞게 목회자의 정년제는 폐지되어야 합니다. 또한, 총회 헌법의 근본정신은 성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퇴 목사의 기본권을 지키는 정도로 끝낼 것이 아니라, 정년제 자체를 폐지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으로 돌아가는 또 하나의 길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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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본립도생(本立道生)
몇 해 전에 신대원을 부산으로 내려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가 수도권 목사님들에게 집중 포화를 맞은 적이 있습니다. 신대원을 부산으로 이전한다는 주장은 수도권 정서를 봤을 때 계파와 진영을 초월하여 반대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총회 임원으로 출마하려는 필자를 위하여 그런 주장을 하면 수도권에서 단 한 표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조언으로 한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필자의 이 주장 역시 교회 중심이 그 이유입니다. 신대원의 제일 목적은 목회자를 양성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부름이 없으면 목사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대원은 당연히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신학생을 교육해야만 합니다. 교회를 위하지 않는 신학생, 교회와 상관없는 목사가 왜 필요할까요? 천안이라는 지역에 신대원이 있으면 수도권의 교회들과 목회자에게 왜 좋을까요? 무엇 때문에 신대원을 부산으로 옮기면 안 된다는 정서가 있을까요? 필자가 신대원을 부산으로 이전하자고 한 것은 신대원 학생들을 교회 품속에서 교육하자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이수해야 할 학업이 방대하지만 그 학업들 역시 교회와 접목시키고, 과목 하나 하나가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필요한 도구가 될 수 있도록 하자는 목적이었습니다. 공부하면서 가능한 교회와 함께 움직이고, 자신이 소속된 교회에서 목회를 배우면서 공부를 하자는 이유였습니다. 공부를 하다가도 교회에 급한 일이 발생하면 교회로 달려가고, 교회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잠시라도 책을 덮고 교회를 위해 희생하는 산 교육을 병행하자는 뜻이었습니다. 신대원생들이 공부하는 목적과 관심이 교회로 집중되어 교육이 될 때, 신대원을 졸업하면 자연스럽게 교회의 옷을 입고 목회자의 길을 걸어가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수도권의 정서가 그렇다면 아예 총회회관이나 수도권의 중심에 있는 교회에서 신학교육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고신의 교회 분포도가 아무래도 부산을 중심으로 영남에 집중되어 있고, 호남의 교회들에 소속된 신학생들이 부산으로 오는 것이 훨씬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장은 몇 년 전의 주장입니다. 이제는 이 주장도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목회자를 희망하는 학생 자체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신대원은 목회자를 길러내는 것이 우선이지, Th M이나 박사과정, 여 신원이 목적이 아닙니다. 이제는 한 해에 목사 후보생을 100명도 배출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대도시라도 대형교회를 제외하고는 부교역자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형편입니다. 목사들이 만나면 부 교역자 좀 구해달라는 말이 인사를 대신하는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는 어쩌면 이전처럼 수도권에, 충청권에, 호남권에, 경남권에, 경북권에, 부산권에 신대원 강의실을 개설하여 교수들이 학생을 찾아가는 방법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교회들이 교역자를 수급하는 일은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변화하는 오늘날의 상황을 볼 때, 중년에 접어들어 인생 후반기를 교회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기를 원하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분들은 어느 정도 생활력이 뒷받침되고 어려워져 가는 교회 형편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어 이들을 위해 야간반이라도 신설하는 극단의 대책들을 세워야 합니다.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도 임시방편의 처방으로 “내 때만 안 망하면 된다!”는 사고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입학정원의 문제는 이제 노력의 차원과 상관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부산에 학생이 없습니다. 46만이던 영도인구가 약 11만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앞으로 부산의 26개 대학이 7개 대학으로 살아남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전의 사고방식으로는 그 어떤 해결방안도 모색하지 못합니다. 분위기를 조성하고 성도들의 주머니를 여는 방법으로는 더더욱 안 됩니다. 이 또한 해결의 출발점은 교회 중심입니다. 학교와 병원을 위해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위해 학교와 병원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학교와 병원을 위해 기도하고 필요에 따라 돕고 함께 하는 것입니다. 총회 임원으로 출마를 고려하면서 내 걸었던 명분은 “바르게 해 보자, 법대로 해 보자” 였습니다. 그런데 표를 얻어야 임원이 될 수 있고, 임원이 되어야 일을 진행할 수 있기에 정서에 눈치를 보고, 분위기에 따라 표를 의식하며 할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총회장이 되었지만 정작 기독교보의 발행인이라고 기재할 수 없는 상황을 지적하지 못했고, 경남의 모 노회가 총대 투표 개표에 부정이 있었음을 알고도 표를 의식하여 입을 다물었고, 인천의 모 회원이 총회 앞에 나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고신이 이래서 안 된다고 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20년이 지난 사건을, 그것도 이미 부산서부노회가 무혐의처분을 내리고 원상 복귀로 결정 난 일을 부총회장이 되겠다는 욕심 하나로 자신이 속한 노회 임원회까지 움직여 들추어내고, 포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이에나와 같아 달려들어 각본을 쓰고, 전국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내 이미 소천하신 아버지의 이름에 먹칠을 했음도 불구하고 대승적인 차원, 포용하는 넓은 가슴이라는 알량한 이유를 달아 표를 의식했던 불효자식이었습니다. 작년 총회를 마치고 부총회장에서 떨어진 것보다 “바르게 해 보겠다고, 법대로 해 보겠다고” 주장하면서도 받지도 못할 표를 의식하며 침묵해야 했던 일이 너무도 괴로웠습니다. 기도하려고 눈만 감아도 “너도 똑같은 놈이다!!! 아니 너는 더한 놈이다!!! 너는 바르게 하겠다고 해 놓고 바르게 하지 않았으니 더 나쁜 놈이다!!!”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많은 회개의 시간을 가지고 내린 결론입니다. 단 한 표를 얻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바르게 하겠습니다!” “법대로 하겠습니다!” “오늘까지 들은 욕의 100배 1000배를 듣는다고 해도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오해와 음해와 손가락질을 받는다고 해도 눈곱만큼의 사욕도 버리고 고신을 위해 소리 지르겠습니다.” 본립도생(本立道生), 기본이 서면 나아갈 길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신학이어야지 신학을 위한 교회가 되어선 안 됩니다. 교회 중심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법대로 해야 합니다. 문제만 제기되면 문제는 보지 않고 계파와 진영과 사욕에 눈이 멀어 법제위에 문구 해석을 의뢰하여 시간을 끌고, 물타기를 하며 지연 작전을 펼쳐 본질을 벗어나는 작태를 그만두어야 합니다. 이구동성으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합니다.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고신은 본립도생(本立道生)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부활하시고 재림하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죽어 나흘이 되어 썩고 냄새가 나는 실정이라고 해도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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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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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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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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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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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신, 우이독경(牛耳讀經) 교단과 대학교
- 지난 글에 대한 반론이 나왔습니다. 고신대학교 모 교수님이 쓴 글입니다. 반론이라는 말 자체는 없지만, 내용을 보면 반론이 확실합니다. 아무런 반응이 없을 것이라 짐작했던 터라 이 반론이 참 반갑기도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내용은 ‘우이독경(牛耳讀經)’,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지난 글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염려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본질을 흐리는 말싸움, 감정싸움으로 비치지 않길 바랍니다. 한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이번에 나온 반론도 ‘위기’, ‘골든타임’을 표면적으로는 인정하는 듯 보이니까 말입니다.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지난 글에서 지적하고자 했던 것은 간단합니다. “언제까지, 얼마가 필요한가?” 다시 설명해 드립니다. ‘골든타임’으로 접어든 ‘위기’의 고신대학교에 관한 교단 지도자들의 책임 있는 대안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교단 지도자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작금의 이런저런 노력이 귀하지 않다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와 성도를 설득해 기부금을 받는 정도의 방법이 주요 대안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본질을 해결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고신 내부의 큰 소리를 들어달라는 겁니다. 지금까지 고신교단의 교회는 고신대학교를 위해 헌신해 왔습니다. 그런데 ‘위기’와 ‘골든타임’이라는 상황에 다시 더 큰 기부금을 요청하며 걷고 있습니다. 기도회를 하면서 말입니다. 저의 제안은 언제까지, 얼마를 기부해야 하며,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묻는 것입니다.그것이 어떤 것이든, 이제는 정확한 판단과 분석이라는 것을 보고 싶고, 봐야 할 때라서 그렇습니다. 저는 저의 이 제안이 간단명료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론을 보니 제 제안이 어려운 모양입니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장황하지도 않은 장황한 역사만늘어놓았습니다. 2003년, 2014년, 2015년의 이야기가 지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본질을 흐리고 있습니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73회 총회가 드디어 제대로 된 대책을 내며 일을 시작했다는 생색뿐입니다. 과거의 장황한 역사를 꼬집은 것은 이 ‘생색’을 돋보이게 하는 양념이었군요. 책임져야 할 자들은 따로 있는데, 왜 ‘우리’(?)에게 말하느냐는 마음이 행간에 엿보입니다. 설명이 어려운 듯하여 다시 설명해 드립니다. 과거에는 전혀 기부금이 없었습니까? 역대 최고 수준의 기부금을 언급하는데, 이것이 고신대학교를 살릴 수 있습니까? 이 노력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된 판단과 분석을 토대로 노력하자는 겁니다. 본질을 흐리지 마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고신대학교의 상황에 관한 미화뿐입니다. 과거에는 전혀 기부금이 없었고, 과거에는 교직원들의 헌신이 없었습니까? 교수의 81%, 직원의 42%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면, 교수의 19%와 직원의 58%와는 갈등이 없습니까? 내부적으로 나오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겁니까? 아니면 듣기 싫은 겁니까? 지금 모든 지방 사립 대학은 연합 대학을 통해서라도 글로컬 대학에 진입하는 일에 대학의 사활을 걸고 있는데(참고, https://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558472), 글로컬 대학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주장은 도대체 어떤 근거와 데이터를 가지고 하는 말입니까? 대학에 몸담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본질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카테고리가 헷갈리거나, 아니면 호도(糊塗)하는 유희삼매(遊戱三昧)만있습니다. 교육부와 지자체가 발주하는 사업에 참여한 결과로 받은 금액이 64억 중 교직원 인건비, 학교 운영비로 지출된 금액이 1원이라도 있습니까? 이 금액은 그야말로 프로그램을 위한 비용입니다.혹시 64억을 받아 학교 살림이 나아졌는데도 ‘위기’와 ‘골든타임’에 동조하며 계속 모금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계시는 겁니까? 반론자도 고신대학교의 문제가 학령인구 감소와 그에 따른 재정위기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안으로 학생들이 공부와 자기 발전을 위해 열심히 하는 것을 제시하다니요? 또한, 구조조정을 언급하면서 실제적인 문제를 언급하는 일반적인 상식은 ‘세속적인 사고방식’으로 무시하면서 교직원 연봉의 십일조를 자발적으로 기부하는 것을 언급하다니요? 도대체 구조조정과 연봉의 십일조 기부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이것이 어떻게 전체 고신대학교를 위한 상생이 되는지요? 수익 구조 다각화에 대한 노력과 5년 재정 구조에 대한 정밀 시뮬레이션 완성? 좋습니다. 바로 이런 대책을 내놓으라는 겁니다. 본질을 흐리지 말고, 그 방법을 고신대학교를 위한 더 큰 헌신과 헌금을 요구하는 고신 교회 앞에 설명해 주십시오. “모금하다가 안 되면 할 수 없고”라는 식의 미봉책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동참하지 않는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의 염려와 중심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분들의 ‘고신 사랑’을 폄하하지 마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가짜 뉴스라는 지적만있습니다. “재학생 등록률과 신입생 충원 결과를 보면 1년 100억 적자가 날 것이 분명한 사실인데”라는 표현이 가짜 뉴스인가요? 제 나름대로 정보를 통해 파악한 금액입니다. 저의 부족함 때문에 계산상 조금의 오류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정확한 정보를 주는 이가 없으니 그럴 수 있지요. 그런데 이게 가짜 뉴스라고 지적받을 표현인가요? 그렇다면 반론자는 자료를 다루는 교수 아닙니까? 병원의 적자는 어떻습니까? 학교법인 고려학원의 적자가 100억 이상 나는 것이 가짜 뉴스라면, 본질을 흐리지 말고, 진짜 뉴스로 ‘정확한 적자 금액’을 분명히 밝혀주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오히려 가짜 뉴스만 있을 뿐입니다. “혹자는 의대와 복음병원을 헐값에 인수하려는 사람들과 모의를 벌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동안 위기라고 말만 하면서 오히려 잘못된 과장 정보로 위기를 부풀리기만 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면...”??? 신학교수인 반론자는 정말 신앙 양심에 화인을 맞았습니까? 십계명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동료를 향한 가짜 뉴스를 은근히 양산하는 말장난을 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잘못된 과장 정보로 위기를 부풀렸다면, 지금 반론자가 말하는 위기와 골든타임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이 정도 매너의 교수가 신학교수로 학교 강단에 있는 고신의 현실이 개탄스럽기까지 합니다. 본질을 흐리는 공격을 멈추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책임질 수도 없고, 책임질 생각도 없는 나팔수의 아부만 있을 뿐입니다. 도대체 교수님은 우리 고신교단과 고신대학교에서 어떤 책임 있는 자리에 있습니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개진하는 것은 신자 개인의 자유이나, 총회와 고신대학교를 대변하는 듯한 이런 주장으로 교단과 고신대학교를 갈라치기 하는 (파탄 내는) 논쟁으로 몰아가는 것은 나팔수의 아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이것이 극단적인 분리주의 사고방식인 것은 모르실 리 없겠지요. 본질을 흐린 채 말장난, 정중하고 정확한 논의를 촉구합니다. 정확한 사실을 제시하는 책임 질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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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신, 우이독경(牛耳讀經) 교단과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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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통합 기념 한마음교회 유감
- 폭염입니다. 여름의 태양이 작열하는 계절! 이 여름에 우리 주님 다시 오신다면 태양처럼 뜨거운 신앙 열정을 가진 사람을 찾으실 것 같습니다. 사역의 현장마다 여름 태양보다 더 뜨거워서 주님의 칭찬을 받는 우리 교단 교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듯이 우리는 성공적인 교단통합을 이었습니다. 그 통합기념으로 한마음교회를 설립한 것입니다. 전국 노회와 교회들이 마음과 기도와 물질을 모아 세운 기념비적 통합기념교회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통합기념 한마음교회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는지요? 통합기념 한마음교회는 고신교단의 여러 어른들과 선배 목사님들 그리고 총회 임원들 그리고 (구)고려의 선배들과 임원들이 힘들게 이루어낸 통합의 금자탑이며 결정체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 교회의 지 교회가 되어있습니다. 교단통합을 하면서 기념으로 교회를 설랍(립)하되 (구)고려측의 목회자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설립한 교회가 바로 한마음교회입니다. 그런데 (구)고려측의 일대 한마음교회 전임목사는 당회장권 한번 갖지 못하고, 고초를 겪다가 사임하였습니다. 한마음교회 담임목사에게 이러저런 이유로 당회장권을 이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2년 동안 무려 6번이나 당회장을 바꾸면서 힘들게 했습니다. 이런 상식 밖의 이상한 일이 통합기념 한마음교회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안양일심교회 부목사로 사역했던 이 모 목사가 담임으로 있습니다. 안양일심교회가 물심양면으로 많은 부분을 헌신한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전국 노회와 교회의 헌금으로 세운 통합기념교회를 일심교회 40주년 지교회로 삼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결과론적으로 유감스럽게도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위한 목적헌금이 한 교회의 지교회를 설립하는데 사용되는 어처구니 없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교단 전체가 바로 알고, 바로 잡아야 하겠다는 결연한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우리가 하나의 교단으로 통합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처음의 약속과 결의가 깨짐으로 아름다운 통합정신이 훼손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지만, 특히 (구)고려 측 형제들에게 깊은 상처를 준 아픔이 된 것입니다. 이런 사태로 인해 안양일심교회와 당회장은 (구)고려 측 형제들로부터 신뢰를 잃었고,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미안했던지, 무마하려고 (구)고려의 어려운 분들을 후원하겠다고 접촉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고려 목사들은 의도가 순수하지 못한 후원금을 받을 리 없지 않습니까? 지난해부터 제안하는 후원금을 거부해 왔습니다. 올해 들어와서 또다시 (구)고려 동문회에 7천만원 정도를 후원하겠다고 제의를 해왔지만 코로나로 인해 어려운 교회와 선교사들이 많이 있었지만 통합기념교회를 세우려는 큰 뜻이 있기에 거절했던 것입니다. 급기야는 비공식 채널을 통해 기어코 후원을 했습니다. 공식적으로 거부했는데도 비공식체널을 통해 기어코 다수의 교회에 상당한 후원을 감행한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저도 부교역자 약 10년, 한 교회 담임목회를 27년째 하니 37년 사역을 하며 산전수전공중전까지 다 겪은 사람입니다. 교회의 내부 사정이 있어 그렇겠거니, 일면 이해가 가지만, 그렇지만 한마음교회의 문제는 양 교단 통합기념 교회인만큼 그냥 넘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전국 노회와 교회의 헌금은 통합기념교회를 설립하기 위한 목적 헌금입니다. 그 목적대로 쓰이지 않았다면 바로 잡는 것이 마땅합니다. 따라서 교단 70주년을 맞아 통합기념교회를 다시 세우려는 계획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국 노회와 교회의 후원금 13억여원은 교단통합의 정신과 기념을 담는 명실공히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위해 쓰여져야 할 것입니다. 안양일심교회는 고신교단의 대표적인 큰 교회 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당회장 김홍석목사님은 앞으로 총회에 큰 일을 감당해야할 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중대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고 교단의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안양일심교회 김홍석목사는 통합기념 교회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하는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보여할 것입니다. 이것이 (구)고려측 대부분 형제들의 일치된 생각입니다. “순교자의 고장! 진리의 파숫군! 경건자의 훈련소, 예수의 제자들이 일어나는 산실!” 그 교단이 우리 고신 입니다. 저는 우리 교단의 일원이고 교단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고신의 목사로 함께 사역함이 늘 감사합니다. 저는 고신인이 된 것이 좋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뒤를 이어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 정신을 이어가는 우리 교단이 좋고 자랑스럽습니다. 그 어떤 일보다도 고신과 고려의 통합이 자랑스럽습니다. 통합 후 (구)고려 동문들이 연합하여 학원이사로, 고신세계선교회 이사로, 이단사이비연구소장으로, 동문회 임원으로. 각 상비부에서... 각처에서 활약하는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운 하모니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통합입니다. 이렇게 배려해 주고, 사랑해주는 우리 ‘고신’이라는 이름이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따라서 통합기념교회가 다시 설립되어 통합정신이 훼손되지 않고 계승되어 아름다운 교단을 잘 보전하고, 또 더 아름답게 발전되기를 기원하는 바램을 담아 이 글을 씁니다. *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이행하라! * 전국 노회와 교회의 목적 헌금을 반환하라! 2022년 7월 중순 신앙 열정이 여름 태양처럼 뜨겁기를 기도하며... ※ 기고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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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통합 기념 한마음교회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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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안녕, 대전(大田) : “전학왔니더”
- “푸를 청(靑), 소나무 송(松). 청송에서 대전으로 전학왔니더.” 전학 수속이 끝나고 들어간 교실. 담임 선생님께서 친구들에게 자기소개를 해보라 말씀하셨다. 나는 큰 소리로 나의 고향 이름을 소개하며 인사했다. 아이들이 나의 인사보다 더 크게 웃는다. 왜 웃을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선생님께서 정해주신 빈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와 다르게 아이들 얼굴이 뽀얗다. 우리 엄마가 읍내에서 사준 이랜드 옷이 촌스럽게 느껴졌다. 어쩐지 다들 공부도 잘 할 것 같다. 주눅과 함께 찾아든 두려움도 잠시. 쉬는 시간에 몰려든 아이들의 질문 세례에 정신이 없었다. 자꾸 말을 시킨다. 그리고 아이들은 더 크게 웃는다. 아마도 나의 사투리가 재미있고 신기했던 것 같다. 대놓고 놀리는 것은 아닌데 뭔가 찝찝하다. 촌놈 하나 전학 오니 신기해서 구경하러 온 느낌이다. “뭐여~ 내가 언제~” “니가 그랬잖여~ 왜그랴~” 나를 구경하러온 친구 무리와 떨어진 곳에서 조금 큰 소리가 난다. 제법 덩치 큰 남자 아이 둘이서 대화를 하고 있다. 내게 몰려든 아이들이 이제 그쪽으로 몰려간다. 아직은 인사도 제대로 못한 옆 짝에게 상황을 물어보았다. 큰소리로 대화하는 두 명의 친구, 그곳으로 몰려드는 아이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첫인상이 좋았던 짝은 웃으며 답한다. “응, 쟤들 싸우는 거야. 그래서 구경 간거지모.” 응? 싸우는 것이라고? 저렇게 느린 말로, 저렇게 너그러운 톤으로 싸움이 가능하단 말인가? 내가 있던 경상도에서는 싸움이 나면 일단 말로 여럿 죽인다. 목소리도 얼마나 큰지 말한 대로 곧 실천할 것 같은 위협이 느껴진다. 경상도 말은 나름 살가운 인사도 종종 살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오해를 받기도;; 뭔가 대전 친구들은 푸근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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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안녕, 대전(大田) : “전학왔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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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여는 시 [신광열 목사] 걱정
- 사람이 없어 걱정이다 강 같은 어머니가 없고 산 같은 아버지도 없다 길 같은 선생님도 별 같은 지도자도 흙 같은 목회자가 없어 참으로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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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여는 시 [신광열 목사]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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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나는 정치 안 한다!
- “나는 정치 안 한다”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이 말 속에는 정치를 나쁘게 평가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정치 목사’라는 말도 좋은 의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도 오늘날 목사와 장로들의 사리사욕과 그것을 위한 안하무인의 협착 행태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나는 정치 안 한다”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현실의 안타까운 모습들 때문에 “나는 정치 안 한다.”라고 해야 건전하게 목회하는 목사처럼 보입니다. 우리 헌법 제2부 관리표준을 보면 예배지침에 이어 교회정치가 나옵니다. 교회정치는 교회, 교인, 교회 직원, 목사, 장로, 집사 및 권사, 준직원과 임시직원, 교회 치리회, 당회, 노회, 총회, 교회 회의 및 소속기관, 선교 및 대외교류, 재산, 각종 고시, 헌법개정 등, 교회를 구성하는 전부를 총망라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만 살펴보아도 “나는 정지 안 한다”는 주장이 무엇을 뜻하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정치 안 하면 목회를 못 합니다. 정치 안 하면 교회를 바르게 세우지 못합니다. 인간의 교만한 속성상 바른 정치를 하다가 힘을 쥐게 되면 정치꾼으로 변질되는 안타까운 일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타락한 본질적 속성 때문에 교회를 바르게 세우는 정치를 안 한다고 하는 것은 불완전한 사람이기에 목사를 그만둔다는 것보다 못한 선택임을 자인하는 결과입니다. 홍해를 건너 해방된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은 시작되었습니다. 아무리 잘 봐 준다 해도 하나님의 심판이 확실한 상황에 모세는 자신의 목숨으로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막아보려고 합니다.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민11:14-15) “당신 새끼지 내 새끼요?”, “저 새끼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하소!”, “그 전에 내부터 죽이소!”, 아들의 잘못에 대해 엄마로서 더 이상 방법이 없을 때 마지막으로 하는 모습이 쉽게 연상됩니다. 사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완전한 장자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생들인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되도록 기도하시면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시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마음을 발견하기에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 백성의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을 향해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여 몸 된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와 정치를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바른 정치는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이 자기 목숨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바른 정치는 완전한 장자이신 예수님을 따라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목숨을 희생하는 하늘의 장자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를 불리기 위한 정치라는 발상 자체가 불신앙입니다. 하나님 역시 이스라엘을 심판하여 멸망시키는 것이 본심이 아니셨기에 모세의 희생적인 중심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보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노여움을 푸시고 모세를 축복하며 그의 짐을 들어주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에 네가 알기로 백성의 장로와 지도자가 될 만한 자 칠십 명을 모아 내게 데리고 와 회막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민11:16-17) 70명의 지도자가 세워졌다고 해서 하나님의 통치 방법이 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방법은 동일합니다. 70명의 지도자를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수행하는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라고 세운 지도자들이 오히려 모세의 짐이 되어버렸습니다. “너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능력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며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자를 살펴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 그들이 때를 따라 백성을 재판하게 하라 큰 일은 모두 네게 가져 갈 것이요 작은 일은 모두 그들이 스스로 재판할 것이니 그리하면 그들이 너와 함께 담당할 것인즉 일이 네게 쉬우리라”(출18:21-22) 모세의 일을 쉽게 하기 위하여, 모세가 감당해야 할 짐을 함께 지기 위하여 지도자들이 세워졌습니다. 교회 내에 조직이 생겼고, 시스템이 만들어졌습니다. 소위 정치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잊어서 안 되는 것이 이스라엘의 통치는 하나님의 손 하나에 달려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정치를 넘어 정치꾼이 되어버리니 하나님의 손을 자신들의 손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끊임없이 선악과에 손을 대고, 바벨탑을 쌓아 올렸습니다. 사람을 만드시면서 만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셨는데, 다스리는 자가 아니라 정치꾼이 되어버렸습니다. 부부관계도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바른 정치가 있어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부부가 됩니다. 가족이나 구역, 기관, 교회, 당회는 언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의 통치를 위한 바른 정치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정치한다, 안 한다.” 해도 사실 모든 목사는 정치하고 있습니다. 정치해야 하나님의 교회를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 정치를 안 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깨끗한 척, 거룩한 척 외식하는 바리새인 화 되어버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혹은 불신앙적인 책임회피의 말인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이미 고도의 정치꾼이 되어있다는 뜻인지도 모릅니다. 보수 재건?? 신 보수?? 개혁에 몸담고 개혁에 표 던진 이들의 모임 2-3년 전에 신보수라는 말이 등장하더니 급기야 지난 연말을 시작으로 새해 벽두에 보수재건이라는 대단한 주장이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자신의 입으로 뼛속까지 개혁이라고 주장하던 자들이 신보수를 만들어 보수를 재건하겠다고 하더니 이제는 보수와는 전혀 상관없이 평생을 소위 개혁으로 살던 사람들이 신보수의 등에 올라타고 고신을 위한 보수재건을 외치고 있습니다. 현재 고신이 개혁이라는 계파로 완전히 기울어 법도 필요 없는 상황까지 와 버렸으니 다시 보수를 일으켜 세워 한쪽으로 기울어진 교단을 바로 세우고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고 거룩한 희생의 명분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변을 확대해야 한다고 합니다. 상황에 따라 뼛속까지 개혁이 되기도 하고, 뼛속까지 보수가 되기도 하는 자를 중심으로 고신을 위하여 보수를 재건해야 한다고 합니다. 평생토록 개혁진영에 있던 사람들이 고신을 위한 보수가 되어야 한다고 기치를 내겁니다. 오늘날 내로남불의 세상 정치도 이 정도는 아닙니다. 이런 주장을 내세우며 저변확대를 위해 마치 대단한 희생이라도 하는 듯 들러리를 섭니다. 보수재건을 위하여 말입니다. 입각하지 못하면 사람이 모이지 않기에 입각의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내세워 입각을 시키고 사람들을 불러모아 보수를 재건하자는 주장입니다. 천국에 계신 전임 신총회장님께서 탄식을 할 것 같습니다. 이러니 많은 목사의 입에서 “나는 정치 안 한다.”라는 탄식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뼛속까지 개혁인 사람, 한평생 개혁진영에서 일한 사람들, 보수진영에 있었지만 자신의 이익 추구에만 혈안이 되어 언제든지 변질을 일삼아 왔던 자들이 이제 고신의 균형발전을 위하여 보수를 재건해야 한다는 위대한 명분을 내세워 당당하게 주장하는 모습들이 정말 가관입니다.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입니다. 입각해서 사람들이 모이면 한 자리씩 주어 조직을 키우면 힘 있는 보수가 됩니까? 지금 교단을 지탱하는 힘이 매관매직에 있는 것 같은데 보수재건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꼴입니다. 그런 식으로 보수가 재건되지도 않겠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오히려 개혁의 대상이 될 뿐입니다. 정치는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입니다. 오늘날 세상 정치의 타락은 교계 정치가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요, 결과입니다. 교단을 위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정치한다는 자들이 세상 정치하는 자들보다 하나님을 더 의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이름까지 망령되이 사용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나는 정치 안 한다.”라고 하면서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목숨을 걸어야 하는 책임을 회피하고 거룩한 외식에 만취되어 있습니다. 고신의 동지 여러분 위기라고 말만 하지 말고 제대로 합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마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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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나는 정치 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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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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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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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세상의 빛 : 명곡교회
- 명곡교회(이상영 목사)는 경남 창원시 의창구 원이대로 219번길 12에 있다. 명곡이란 명서동과 봉곡동을 연합한 지역 이름이다. 명곡교회는 1984년 2월 5일에 설립되었기에 올해 4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명곡교회는 1991년 1월 2일 지금의 예배당이 있는 곳에 건축하여 오기 전에 1987년 1월 24일 봉곡동 36-3 승창상가 3층에 있었다. 필자가 1991년 6월 30일 바로 그곳을 임대하여 할렐루야교회를 개척하여 설립예배를 드렸다. 그러고 보니 필자가 경남법통노회에서만 34년 목회를 한 셈인데 그때 명곡교회는 창원시찰 산하 교회들 중에 중간 레벨에 속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독립군 같은 한 젊은이가 우리 시찰에 나타났다. 그가 바로 2004년 2월 8일에 위임을 받은 명곡교회 이상영 목사였다. 너무도 주관과 소신이 분명한 목회자였기에 당시로써 선배들과 어른들의 눈 밖에 나 있었던 특별한 친구였다. 그런데 이 목사는 교회를 사랑하고 지역을 품고 목회하는 비전이 남달랐다. 이제 와서 그가 사역한 목장의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세간에 그를 보는 안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창원시찰과 노회와 지역사회를 대표하는 교회로 자리매김했다. 필자는 2023년 12월 30일 밀알교회 은퇴를 하면서 원로목사로 추대를 받았다. 이때 이 목사가 당회장을 맡아 너무도 은혜롭게 일을 처리해 주었고, 은퇴예식을 감동의 장으로 집례 해 주어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은퇴를 하고 이제 고려파교회연구소 사역을 하며 지역교회를 돌아보기 위해 작은빛교회(성희찬 목사)에 이어 두 번째 순방으로 명곡교회를 찾았다. 목회자가 지역에 같이 있으면서도 자신의 교회를 섬겨야 하기 때문에 주변 교회를 잘 모른다. 그러므로 그 교회의 예배모범이나 그 지역의 맞춤형 목회전략을 보기 위해서는 온 회중이 함께 예배하는 주일예배를 보면 쉽게 진단을 할 수 있다. 필자는 오늘 명곡교회 11시 예배에 참석하여 받은 감동을 다음 몇 가지로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예배가 밝은 축제의 장이었다. 필자는 11시 예배에 맞추어 20여분 전에 교회 도착하니 주차장이 가득 차 있어 주변 주택가에 주차하고 교회당으로 갔다. 입구 로비로부터 2층 예배실로 안내 하는 위원들의 복장과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뭔가 처음 오는 새가족들에게 설레임과 기대감을 주기에 충분한 교회였다. 주보를 받아 보니 전면에 커피 잔 같이 생긴 호야 등 아래로 THE LIGHT(세상의 빛)란 금년 한 해를 시작하는 주제가 선명하게 각인되어 다가왔다. 마지막 폐이지를 보니 “명곡교회는 지역의 가로등입니다”타이틀에 걸맞게 예배에서 느낀 감동이 너무도 잘 맞는 조화(concept)였다. 다음, ‘리셋 버튼 누르기’의 설교 제목이다. THE LIGHT(세상의 빛)이란 주제에 걸맞게 새해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는 역동성이 너무도 돋보인다. 이 목사는 주보에 요약(summary)한 설교 본문을 보면 첫째, 하나님께 새로운 다름의 첫 출발의 간구이다. 이를 위해 새로운 품격, 성품, 새사람으로 덧입기를 간구하라고 했다. 둘째, 지금 당장 실천 가능한 것부터 구체적으로 고백하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라면 리셋 버튼이 필요 없는 완전한 사람은 없다고 했다. 셋째, 새 출발을 위해 곁에서 세워 줄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하라. 새로운 다름의 새 출발이란 결코 나 홀로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 넷째, 내게 유익하지 못한 나쁜 습관을 제거하라. 새로운 다름의 가장 큰 방해물은 건강하지 못한 중독된 습관이라고 했다. 이 목사는 새해를 시작하는 신년 백두에 이 같은 설교를 시리즈로 계속해서 변화를 통해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닮아가는 새 사람을 입어 새로운 다름의 세계로 나아가는 변화를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설득력 있게 설교했다. 마지막, 이 목사는 언어 구사능력이 탁월한 리더이다. 그의 남다른 탁월함이란 언어구사능력이다. 이것은 리더의 자질이다. 리더는 대중의 신비에 각인될 한 마디로 표현하는 기술을 가진 자이다. 이런 면에서 이 목사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용어를 조금 다르게 표현해 청중들의 귀에 전혀 새로운 단어로 각인될 뿐 아니라 그것을 거듭 반복하는데도 늘 새로운 신선함을 더해 주는 언어창조능력을 가진 자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면서 말씀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영육이 혼재된 특별한 피조물이다. 인간은 언어로 하나님과 피조세계와 소통하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이 같은 언어를 잘 사용하는 리더가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리더요 목양자이다. 에필로그로 아우는 역시 탁월한 목회전략을 가진 자이다. 예배는 엄숙하고 경건하면서도 거룩한 축제의 장이다. 안내, 찬양, 기도, 설교, 방송자막, 손님배려, 그리고 마침인사와 식탁의 섬김 모든 것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래 전에 읽은 존 웨슬리(John Wesley)가 한 말이 기억난다.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가능한 모든 방법을 사용하여, 가능한 모든 장소에서, 가능한 모든 시간에, 가능한 모든 사람에게, 그것이 가능할 때까지,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선한 일을 하라.”마지막 축도를 하고 나서 김수중 장로의 안내를 받아 식사를 하고 커피 한잔을 들고 명곡교회를 축복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2024년 1월 14일 11시예배 순방 고려파교회연구소장 교육학박사 황권철 목사(밀알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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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세상의 빛 : 명곡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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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1)
-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다”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마음이 급하다고 서두르면 오히려 일을 그르치게 된다는 뜻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맞는 말입니다. 지금 고려학원 이사회가 이런 모습입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이해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총장이 중도 사임했습니다. 대학교의 특성상 여러 중요한 일에 총장 부재로 인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위기의식으로 인한 발 빠른 대처가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하는” 모습이어서는 큰일입니다. 논문표절이라는 윤리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을 총장에 선임했습니다. 이를 위해 불법적으로 정관을 개정했습니다. 총회운영위원회가 이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여하튼 이것을 인준하였습니다. “오히려 일을 그르치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무너져가는 고신대학교를 살리겠다는 방법이 심폐소생술에도 못 미치는 듯 보입니다. 각종 기도회와 모금 운동이라는 획기적 자구책 없는 손 벌리는 방식으로 위기를 땜질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급해도(1) : 불법적인 정관개정 고려학원 이사회는 지난 73회 총회에 고려학원 정관개정을 의뢰했고 총회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총회에 상정되는 안건은 정확하고 정당한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개인이라면 당회와 노회를 거치고, 법인이라면 법인 이사회에서 충분히 논의하고 결정한 안건을 상정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총회는 바로 그 안건을 접수하여 다루어야 합니다. 지난 73회 총회는 고려학원 이사회의 이 정관개정 안건을 접수했고, 정관을 개정했습니다. 그런데 이 정관개정 논의를 위한 임시이사회는 정작 총회를 파한 후 3개월이 지난 2023년 연말에 열렸고, ‘사후 인준’이라는 명목으로 통과시켰습니다. 이것이 총회 법을 따른 정당한 절차입니까? 총회는 결과적으로 이사회가 제대로 논의하지 않은 안건을 접수, 논의, 개정했고, 고려학원 이사회는 총회와 교단을 기만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정관개정을 서둘렀습니까? 총장선임과 관련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에서 설명하겠습니다. 이사회는 책임져야 합니다. 총회 정관에 따른 이사소환뿐만 아니라 법적인 책임을 물어 향후 몇 년간 총회 총대건 제한도 뒤따라야 합니다. 이것을 재단에서 몇 사람이 무리하게 진행했다면 그 관계자도 파면해야 합니다. 이런 방식은 반드시 책임져야 하는, 세상에서도 볼 수 없는 불법이요 기만한 속임수입니다. 또한, 총회 임원회나 운영위원회가 이 일을 알고 있었다면 이들도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술 담배나 주일성수에 목숨을 걸고 심하게 다루던 총회가 거짓말에는 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급해서 그렇습니까? 위기 상황이라서 그렇습니까? 위기라면 거짓말과 불법적인 결정을 죄의식 없이 해도 됩니까? 우리가 신사참배 반대 출옥 성도의 후손이 맞습니까? 아무리 급해도 우리가 너무 거짓말을 죄의식 없이, 부담감 없이 해서입니까?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아무리 급해도(2) : 총장 공모와 선출투표 따라서, 정관개정 절차가 끝난 후, 총장 공모를 다시 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정관개정 이전에 총장 공모를 했기 때문입니다. 개정된 법에 따라서 총장을 다시 공모하고, 개정법에 따라 투표해야 합니다. 만일 개정된 법으로 총장을 뽑아야 한다면 총회가 파한 후 총장 공모를 다시 해야 총장으로 입후보하고 싶었던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이전 법을 따라 공모한 대로 지원한 후보를 놓고 투표한다면, 공모 당시의 법으로 투표해서 총장을 다시 선출해야 합니다. 총회가 소집되기 전에 이미 공모되었고 총회 시 정관이 개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총장 공모는 이전에 하고, 법은 개정한 것을 따른다? 혹시라도 불법으로 뽑힌 현재 총장을 지지하던 사람들이 교묘하게 총회가 파한 후 서류를 접수해서 총장 선출을 위한 투표를 한 것입니까? 그렇다면 이는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사사로운 생각으로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했다면 정말 불행한 일이며 그것이 아니길 바랍니다. 고신총회는 이와 비슷한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선출직에 출마하고 당선된 사람들이 임기를 마치기 전 사퇴하고 다른 선출직에 출마할 수 없다고 72회 총회에서 결정했습니다. 그런데 그 법을 소급적용할 수가 없다고 해석하고선 선출직에 있었던 사람이 그사이 사퇴했고, 다시 73회 총회 임원에 출마하여 현재 임원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개정된 법은 개정된 이후부터 적용되는 것이 일반적인 법 상식입니다. 이를 무시하고 강행한 고려학원 이사회는 “알고 그랬을까요? 모르고 그랬을까요?” 몰랐다면 무능한 부적격자들입니다. 알고도 그렇게 했다면 정상적인 고신인이라 할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정관개정은 총장 선출투표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이전 정관에 따르면, 총장 선임 시 이사회의 3분의 2를 득표해야 합니다. 하지만 개정안은 1차는 3분의 2를, 2차는 과반을 요구합니다. 물론 법리적인 해석에 따라, 보는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평생 교회를 섬기며 이런 일을 다룬 목사들이 아닙니까? 왜 이 정관은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하는 것이 안 됩니까? 1차가 3분의 2, 2차가 과반이라면 1차에 찬성이 반대보다 많은 경우에 2차 투표를 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하지만, 언론에 이미 공개된 대로 1차에 5대 6으로 반대표가 많았던 가운데 2차 투표(7대 4)를 해서 뒤집었습니다. 1차에 반대가 많다는 것은 2차 투표를 실시할 수 없는 부적격자라는 말입니다. 교회 직분자 선거도 이런 방식으로 운영하지 않습니다! 그럼 1차 투표에 단 한 표 받은 직분자 후보도 2차에 올리시지요? 수치 문제가 아니라, 법 정신의 문제입니다. 결국, 신임 총장을 반드시 총장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로 이 모든 불법적인 과정을 만들어냈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코람데오’를 이념으로 삼는 고려학원이 ‘하나님 앞에서’ 총회와 교단을 기만한 것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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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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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신, 우이독경(牛耳讀經) 교단과 대학교
- 지난 글에 대한 반론이 나왔습니다. 고신대학교 모 교수님이 쓴 글입니다. 반론이라는 말 자체는 없지만, 내용을 보면 반론이 확실합니다. 아무런 반응이 없을 것이라 짐작했던 터라 이 반론이 참 반갑기도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내용은 ‘우이독경(牛耳讀經)’,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지난 글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염려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본질을 흐리는 말싸움, 감정싸움으로 비치지 않길 바랍니다. 한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이번에 나온 반론도 ‘위기’, ‘골든타임’을 표면적으로는 인정하는 듯 보이니까 말입니다.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지난 글에서 지적하고자 했던 것은 간단합니다. “언제까지, 얼마가 필요한가?” 다시 설명해 드립니다. ‘골든타임’으로 접어든 ‘위기’의 고신대학교에 관한 교단 지도자들의 책임 있는 대안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교단 지도자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작금의 이런저런 노력이 귀하지 않다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와 성도를 설득해 기부금을 받는 정도의 방법이 주요 대안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본질을 해결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고신 내부의 큰 소리를 들어달라는 겁니다. 지금까지 고신교단의 교회는 고신대학교를 위해 헌신해 왔습니다. 그런데 ‘위기’와 ‘골든타임’이라는 상황에 다시 더 큰 기부금을 요청하며 걷고 있습니다. 기도회를 하면서 말입니다. 저의 제안은 언제까지, 얼마를 기부해야 하며,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묻는 것입니다.그것이 어떤 것이든, 이제는 정확한 판단과 분석이라는 것을 보고 싶고, 봐야 할 때라서 그렇습니다. 저는 저의 이 제안이 간단명료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론을 보니 제 제안이 어려운 모양입니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장황하지도 않은 장황한 역사만늘어놓았습니다. 2003년, 2014년, 2015년의 이야기가 지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본질을 흐리고 있습니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73회 총회가 드디어 제대로 된 대책을 내며 일을 시작했다는 생색뿐입니다. 과거의 장황한 역사를 꼬집은 것은 이 ‘생색’을 돋보이게 하는 양념이었군요. 책임져야 할 자들은 따로 있는데, 왜 ‘우리’(?)에게 말하느냐는 마음이 행간에 엿보입니다. 설명이 어려운 듯하여 다시 설명해 드립니다. 과거에는 전혀 기부금이 없었습니까? 역대 최고 수준의 기부금을 언급하는데, 이것이 고신대학교를 살릴 수 있습니까? 이 노력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된 판단과 분석을 토대로 노력하자는 겁니다. 본질을 흐리지 마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고신대학교의 상황에 관한 미화뿐입니다. 과거에는 전혀 기부금이 없었고, 과거에는 교직원들의 헌신이 없었습니까? 교수의 81%, 직원의 42%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면, 교수의 19%와 직원의 58%와는 갈등이 없습니까? 내부적으로 나오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겁니까? 아니면 듣기 싫은 겁니까? 지금 모든 지방 사립 대학은 연합 대학을 통해서라도 글로컬 대학에 진입하는 일에 대학의 사활을 걸고 있는데(참고, https://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558472), 글로컬 대학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주장은 도대체 어떤 근거와 데이터를 가지고 하는 말입니까? 대학에 몸담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본질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카테고리가 헷갈리거나, 아니면 호도(糊塗)하는 유희삼매(遊戱三昧)만있습니다. 교육부와 지자체가 발주하는 사업에 참여한 결과로 받은 금액이 64억 중 교직원 인건비, 학교 운영비로 지출된 금액이 1원이라도 있습니까? 이 금액은 그야말로 프로그램을 위한 비용입니다.혹시 64억을 받아 학교 살림이 나아졌는데도 ‘위기’와 ‘골든타임’에 동조하며 계속 모금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계시는 겁니까? 반론자도 고신대학교의 문제가 학령인구 감소와 그에 따른 재정위기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안으로 학생들이 공부와 자기 발전을 위해 열심히 하는 것을 제시하다니요? 또한, 구조조정을 언급하면서 실제적인 문제를 언급하는 일반적인 상식은 ‘세속적인 사고방식’으로 무시하면서 교직원 연봉의 십일조를 자발적으로 기부하는 것을 언급하다니요? 도대체 구조조정과 연봉의 십일조 기부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이것이 어떻게 전체 고신대학교를 위한 상생이 되는지요? 수익 구조 다각화에 대한 노력과 5년 재정 구조에 대한 정밀 시뮬레이션 완성? 좋습니다. 바로 이런 대책을 내놓으라는 겁니다. 본질을 흐리지 말고, 그 방법을 고신대학교를 위한 더 큰 헌신과 헌금을 요구하는 고신 교회 앞에 설명해 주십시오. “모금하다가 안 되면 할 수 없고”라는 식의 미봉책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동참하지 않는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의 염려와 중심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분들의 ‘고신 사랑’을 폄하하지 마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가짜 뉴스라는 지적만있습니다. “재학생 등록률과 신입생 충원 결과를 보면 1년 100억 적자가 날 것이 분명한 사실인데”라는 표현이 가짜 뉴스인가요? 제 나름대로 정보를 통해 파악한 금액입니다. 저의 부족함 때문에 계산상 조금의 오류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정확한 정보를 주는 이가 없으니 그럴 수 있지요. 그런데 이게 가짜 뉴스라고 지적받을 표현인가요? 그렇다면 반론자는 자료를 다루는 교수 아닙니까? 병원의 적자는 어떻습니까? 학교법인 고려학원의 적자가 100억 이상 나는 것이 가짜 뉴스라면, 본질을 흐리지 말고, 진짜 뉴스로 ‘정확한 적자 금액’을 분명히 밝혀주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오히려 가짜 뉴스만 있을 뿐입니다. “혹자는 의대와 복음병원을 헐값에 인수하려는 사람들과 모의를 벌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동안 위기라고 말만 하면서 오히려 잘못된 과장 정보로 위기를 부풀리기만 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면...”??? 신학교수인 반론자는 정말 신앙 양심에 화인을 맞았습니까? 십계명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동료를 향한 가짜 뉴스를 은근히 양산하는 말장난을 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잘못된 과장 정보로 위기를 부풀렸다면, 지금 반론자가 말하는 위기와 골든타임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이 정도 매너의 교수가 신학교수로 학교 강단에 있는 고신의 현실이 개탄스럽기까지 합니다. 본질을 흐리는 공격을 멈추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책임질 수도 없고, 책임질 생각도 없는 나팔수의 아부만 있을 뿐입니다. 도대체 교수님은 우리 고신교단과 고신대학교에서 어떤 책임 있는 자리에 있습니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개진하는 것은 신자 개인의 자유이나, 총회와 고신대학교를 대변하는 듯한 이런 주장으로 교단과 고신대학교를 갈라치기 하는 (파탄 내는) 논쟁으로 몰아가는 것은 나팔수의 아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이것이 극단적인 분리주의 사고방식인 것은 모르실 리 없겠지요. 본질을 흐린 채 말장난, 정중하고 정확한 논의를 촉구합니다. 정확한 사실을 제시하는 책임 질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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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신, 우이독경(牛耳讀經) 교단과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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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교회 순방 - 작은빛교회
- 믿는 도리를 묻고 답하는 교회 작은빛교회(성희찬 목사)는 경남 창원시 의창구 원이대로 210번길 67-10에 있다. 이 교회당은 필자가 밀알교회를 개척하여 건축한 교회당이라 남다른 애정이 있는 교회이다. 2018년 8월 7일 경남법통노회 제188-1회 임시노회에서 밀알교회가 한사랑교회와 합병건이 결의됨으로 성산구 남양동 한사랑교회당으로 이동한 이후 마산제일교회를 시무했던 성희찬 목사가 중심이 되어 작은빛교회를 개척했다. 2023년 12월 30일(토) 목양 44년, 밀알교회 개척 28년, 그리고 고려파교회연구소 사역 7년째 현장 목회를 내려놓고 은퇴를 하면서 원로목사로 추대를 받았다. 마침 교회가 준비한 사택과 연구소가 작은빛교회와 인접해 있기에 매일같이 만나는 좋은 이웃으로 지나게 되어 너무도 감사하다. 그간 임상목회현장에서 고려파교회연구소 사역을 겸하여 하니 노회와 총회 산하 교회를 돌아볼 기회가 없었는데 은퇴와 함께 원로목사로 추대를 받고 본 교회를 후임자에게 맡기고 보니 가벼운 마음으로 연구소 사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은퇴를 하고 첫 주일을 맞이하는 주간으로 작은빛교회를 순방하게 되었다. 작은빛교회를 담임한 성희찬 목사는 네덜란드 아펠도른 신학대학에서 유학하여 개혁교회 전통을 고수하는 목회자이다. 2024년 표어가 “믿는 도리를 묻고 답하는 교회”로 정한 것을 보아 뭔가 독특한 점이 돋보인다. 이 교회는 대부분 한국교회가 장로교전통을 고수하는 입장에서 개혁교회의 전통을 그대로 지켜 가려고 몸부림치는 교회이다. 필자가 예배에 출석하고 보니 거룩한 영성과 순결한 말씀인 언약사상이 예배 중에 강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필자가 처음으로 참석한 작은빛교회 예배를 통해 받은 임펙트는 다음과 같다. 먼저, 개혁교회 전통을 올곧게 지켜가는 교회였다. 한국장로교회는 여러 가지 면에서 장로교회와 개혁교회의 전통이 공존하고 있다. 사실상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를 구분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 보편적으로 보면 교회정치 부분은 장로교회 제도를 따르며,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은 개혁교회 전통을 따른다고 볼 수 있다. 장로교회는 노회중심의 치리회 기능이 강화 된 반면에 개혁교회는 당회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개혁교회는 예배시 시편 찬송을 즐겨 부르며 신조와 교리공부를 강화한다. 작은빛교회는 예배시 시편 찬송을 즐겨 부르고 예배 중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묻고 답하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 오늘날과 같은 세속적인 가치관이 교회로 침투해 들어오는데 이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 지각과 통찰력을 가지게 하는 것은 일반교회에서 볼 수 없는 거룩한 도전이었다. 다음, 온 세대가 함께 하는 예배였다. 보편적으로 장로교 전통을 따라 한국교회는 주일학교 혹은 교회학교로 이름 하여 유초등부와 중고등부(SFC), 그리고 대학, 청년부로 나누어서 예배한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언약사상을 중시하여 온 세대가 함께 예배한다. 장로교 정치제도를 중시하는 교회는 예배를 세대별로 구분하여 드림으로 교육적인 면에서 효율성을 강조하기도 하나 개혁교회는 온 세대가 연합하여 한 자리에서 예배함으로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는 예배자로 자라가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작은빛교회는 주일 11시 예배에 온가족이 함께 예배한다. 시편을 찬송하고, 요리문답을 묻고 답하고, 그리고 시편 교독을 낭송하는 것이 성인이나 유아 구별 없이 온 세대가 언약 아래서 하나임을 가르치는 다음세대를 세워 가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마지막, 성 목사의 설교에 묻어나는 독특한 영성의 설교 화법이었다. 예배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종합예술이다. 하나님은 다양한 채널을 통해서 인간을 만나 주신다. 그러나 보편적으로는 예배를 통해서 만나 주시고, 예배 가운데서는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신다. 이런 면에서 예배에 있어서 목사의 설교는 너무도 중요하다. 성 목사는 성도들이 일상생활에서 변화된 삶을 살기 위해 언약사상에 있어서 너무도 확고한 비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었다. 마침 이번 주간이 한해를 열어가는 신년예배인지라 에베소서 4장 17절에서 24절 말씀으로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할 이유”에 대하여 성도들이 세속적인 삶의 가치관으로 물들지 않고 심령의 변화를 통해 언약 위에 굳게 설 것을 강하게 말씀하셨다. 헤럴드 마이라와 마셜 셸리가 지은 『리더십 시크릿』이론 중에 현명한 목회자가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조건 중에 첫째가 ‘학자의 두뇌’요 둘째가 ‘아이의 마음’이요 그리고 셋째가 ‘철면피 같은 얼굴’이라고 했다. 이 셋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철면피 같은 얼굴”이라고 했는데 이는 유대종교지도자들처럼 외식적인 종교인이 되라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부족과 연약성으로 양심을 짓눌려 와도 언약에 굴절됨이 없이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이다. 작은빛교회는 규범이 실종 된 오늘날에도 살아있는 언약의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이기에 2024년 한 해 동안 강력한 부흥운동이 일어나기를 기도하면서 축도를 하고 예배실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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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교회 순방 - 작은빛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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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위기의 고신대학교, 교단의 책임 있는 대안이 필요하다!
- 개인적인 이야기로 이 글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저는 수년 동안 고려학원이 위기라고 주장했습니다. 지난 두 번의 고신총회 부총회장에 출마하면서도 계속 ‘골든타임’을 외쳤습니다. 하지만 제게 돌아온 반응은 “고려학원은 그렇게 심각한 상황이 아니다.”, “얼마든지 살릴 수 있다.”, 혹은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위기를 조장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수년 동안 이사회 내에서도 위기론을 외치며 투쟁한 분들이 있었음에도 정치논리에 의해 철저히 외면당한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최근 “고려학원이 그렇게 심각한 상황이 아니다”라고 주장하셨던 분들이 ‘위기론’을 언급하며 대처하는 모습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도회를 하고, 모금 운동을 하며, 구조조정을 비롯한 혁신을 강조합니다. 이제라도 “고신호가 침몰하고 있다.”라는 위기를 인정하고, 공감하며, 노력하고 있으니 한편으로는 다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교단 지도자들의 작금의 이러한 노력이 정말 우리 교단의 현안을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인지는 의문입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로 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몇 가지를 짚어 봅니다. 교직원에게 헌신을 요청할 수는 있으나,일정 부분 강요하는 것은 법적으로도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구조조정을 앞두고 계약직에게 헌신을 요구한다는 것은 일종의 횡포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런 방식으로 교직원의 기부금을 모금해도 한 달 치 급여 이상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이것이 고신대의 재정 파탄 문제의 근본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요? 매년 전 교직원에게 기부를 요구하고, 강의료와 연구비, 그리고 각종 수당을 삭감하며, 구조조정을 연례행사로 하면 학교를 정상화할 수 있습니까? 재학생 등록률과 신입생 충원 결과를 보면 매년 100억 이상의 적자가 날 것이 분명한 사실인데, 전체 고신 교회가 다 달라붙어 매년 100억 원의 헌금을 할 수 있습니까? 한다면 학교를 살릴 수 있겠습니까? 정원을 감축하고, 학과를 통폐합하며, 행정 조직을 개편하는 구조조정에는 사실 막대한 예산이 필요합니다. 이런 예산 확보 없이 소위 정직원을 해고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같으면 해고되는 대로 따를 수 있습니까? 결국, 일부 계약직과 일용직을 정리하는 선에 그치는 구조조정이라는 것을 시작부터 알 수 있는 데, 이것이 과연 고신총회 앞에 내어놓는 책임 있는 대안입니까? 고신대학교의 재정 악화로 의대생들의 등록금이 의대 운영비로 사용되지 못하는 가운데 영도와 송도 간의 갈등이 야기되었습니다. 이런 부분들을 지적해온 직전 의대 집행부는 고려학원 이사장과 이사회에 의해 특별감사를 받고 물러나 갈등의 골이 더 깊어진 상황입니다. 또한, 부산의 다른 14개 대학들은 함께 조직을 구성하여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보조를 맞추고 있습니다. 여기에 고신대학교의 이름은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 고신대학교는 하버드대학교 총장이 자진 사임한 바로 그와 같은 부담을 안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은 언급하지 않고, 심도 있게 논의하지도 않으면서 기도회와 교회 모금 운동만을 벌이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를 기만하는 무책임한 행위입니다. 저를 기도회를 헐뜯는 사람으로 몰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정성 어린 사랑을 깎아내리는 사람으로 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확한 진단과 분석 없이 기약도 없는 교회의 고혈을 짜는 외식적인 퍼포먼스와 눈속임을 중단하자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 기관이 존재하지, 기관을 위해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질문과 제안을 합니다. 첫째, 교육부를 비롯한 부산광역시의 대학지원 예산 수주 없이 1년에 100억 이상을 매년 총회 산하 교회들이 감당할 수 있습니까? 이번만 모금 운동에 참여하면 괜찮아집니까? 언제까지, 얼마를 모금하실 계획입니까? 정확한 데이터와 근거가 없다면 자신의 임기만 넘기자는 식의 대처 방안을 즉시 중단해야 합니다. 교회를 기만하는 행위를 멈추고, 제대로 된 분석과 진단을 고신교단 앞에 내어놓으십시오.교육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요구하는 조건을 맞추어 지원받는 방법을 신중하게 고려하여 반드시 수주해 내도록 해야 합니다. 수주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면 이사회와 총회 차원에서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둘째, 고신대학 전체 학생 수 3,300여 명 중, 의대와 간호대를 제외하면 몇 명이나 등록했으며, 또 할 수 있는지요? 총 2,000-2,500여 명의 학생으로 대학 운영이 가능합니까? 가슴 아프지만, 학생 수가 줄었다면 그에 상응하는 교수의 수적인 조절은 필수입니다. 이를 위한 재원 마련 대책이 당연히 따라야 합니다. 신학대학원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생 수에 정비례하여 신대원 교수를 줄일 수는 없겠지만, 전체적으로 교수의 수를 조정하고, 신학대학원의 규모를 줄여 운영할 대책을 내어놓아야 합니다. 셋째, 이런 내용을 기반으로 정확한 분석과 전망을 제시해 주십시오. 이것을 바탕으로 전체 고신교단이 이해할 수 있는 단기, 중장기 발전계획을 제시해 주십시오. 그래야 “눈 가리고 아웅” 하는미봉책으로 인한 외줄 타기 교단이 아니라 후대에 부끄럽지 않은 책임 있는 교단이 될 것입니다. 나가면서 ‘미봉책’으로는 침몰하는 고신호를 구할 수 없습니다. 어떤 잘못을 미봉으로 적당히 넘어가면 그 잘못을 다시 반복하기 쉽습니다. 일은 근본을 살펴서 대책을 세워야 허술함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이 일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은 고신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의 알 권리를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모든 사실을 알리고, 함께 해결책을 모색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고신총회, 고려학원 이사회, 그리고 고신대학교 집행부 모두가 무거운 책임감으로 맡은 역할에 충실하면서, 누군가는 반드시 그 책임을 지고 앞장설 때 고신대학교와 우리 고신교단은 회생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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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위기의 고신대학교, 교단의 책임 있는 대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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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제3회 경남퀴어문화축제’를 대응하는 기독교의 입장
- 경남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에서는 2023년 11월 25일(토) 롯데마트 옆 중앙대로에서 각종 참여형 부스를 설치, 공연, 거리 행진, 런웨이 등의 방법으로 추최측 추산 1천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제3회 경남퀴어문화축제’를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도내 종교계, 시민단체등은 심각한 우려를 표하며 행정당국인 창원시청에 행사를 불허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상태이다. 정통 개혁주의기독교 입장에서의 퀴어는 반성경적이고, 하나님의 창조섭리에도 맞지 않는 이단성의 분야이다. 하나님은 레위기를 통해 남색하는 자들에 대해 ‘돌로 치라’는 명령을 사용하시며, 그 일이 분명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파괴하는 위법행위임을 분명히 하셨다. 경남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의 의도는 명확하다. ‘퀴어’의 의미를 좋은 의미로 바꾸겠다는 것일 것이다. ‘퀴어’(queer)라는 용어는 ‘낯설고 이상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를 대중에게 노출시키고 친숙화 시켜 좋은 의미로 - 또는 무감각해지게 하기위해 – 바꾸어 대중 앞에 당당하게 서기 위한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기독교 내에서도 이를 보완해 주기 위해 퀴어신학이 나올 지경이다. 물론 퀴어신학계 내부에서 조차 통일된 신학이 나오진 않았으나 이는 분명 기독교의 이미지에 손상을 주기에는 충분했고. LGBT에게는 천군만마와도 같은 것일 것이다. 예장통합의 총회에서 보고된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에 대한 연구보고서’에서는 “1980년대 일단의 사람들은 본래 부정적으로 사용되던 ‘퀴어’라는 용어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면서, 동성애를 비롯한 성소수자들의 논리에 비판적이었던 기독교 전통신학에 맞서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주요 개혁주의교단들은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먼저 합동의 경우는 명확하다. 예장합동 총회(총회장 전계헌 목사)는 제102회 총회를 통해 동성애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구체적으로 정리하였는데, 총대들은 신학부 청원 사안인 "동성애자와 동성애 동조자 및 옹호자의 본 교단 신학교 입학을 금지하고 동성애 신학을 지지하거나 가르치는 교직원의 임용을 금지한다. 사후에 적발되었을 시 학교 상벌위원회와 총회에서 징계 시벌한다"는 내용을 결의했다. 더불어 헌법개정위원회가 제출한 헌법 개정안 가운데 '목사의 직무'를 규정한 기존의 조항(정치 제3조 제1~6항)에 "동성애자와 본 교단의 교리에 위배되는 이단에 속한 자가 요청하는 집례를 거부할 수 있고, 교회에서 추방할 수 있다"는 내용을 삽입하기로 했다. 고신 총회(예장고신·박영호 총회장(당시)) 또한 교단 소속 목회자·신학생·교수들의 사상을 전방위적으로 검증하고, 그 결과를 2020년 9월 22일 열린 제70회 총회에 보고했다. 보고서에 다르면 ▶전북노회는 '동성애 반대 법제화 및 전수조사' 청원을 받아 각 부서를 통해 사상 검증을 지시▶신학위원회에는 신대원 교수들 입장을 확인 ▶전국 노회에도 공문을 보내 목사 후보생들을 전수조사 ▶법제위원회(김하연 위원장)에는 동성애 지지자들을 처벌하는 관련 법규 제정을 검토하게 했다. 구체적으로 △강도사·목사 후보생 중 동성애·차별금지법·성평등법 개정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자에 대해서는 목사 고시와 신학 입학·계속 허락 청원 시 불합격 처리하도록 고시부 내규를 정하고 △신대원 교수는 이사회가 임용할 때 동성애 관련 옹호자들을 임용하지 않고 임용 후에도 동성애 관련 옹호를 할 때는 사직하겠다는 취지의 서약서를 받는 지침을 마련하며 △이미 목사나 교수가 된 사람이 동성애 관련 옹호를 할 때는 권징 조례에 의해 시벌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또한 예장통합도 같은 입장이다. 앞서 언급한 ‘퀴어신학(동성애, 양성애, 성전환)에 대한 연구보고서’ 결론에 “퀴어신학은 성경의 규범적 권위를 부인하며, 자의적 해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또한 성소수자의 성애를 자연스러운 질서로 보며 더 나아가 성정체성의 구분마저 부인하여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상대화한다. 더 나아가 인본주의적 가치관과 기준에 의하여 전통적인 신학의 체계와 가치관을 파괴하는 세속화된 신학이다. 따라서 퀴어신학은 이단성이 매우 높은 신학이다. 이러한 이유로 본 교단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퀴어신학의 논리에 현혹되지 않도록 경계 해야 하고, 신학교에서도 신학도들에게 이 위험성을 교육하여 퀴어신학의 확산을 막아야 하며 퀴어신학을 옹호하는 어떠한 신학적 입장도 용납될 수 없다.”고 그 입장을 명확히 하였다. 우리 기독교의 생각은 일치되어야 하며, 혹시 일부 자유주의 신학이나 퀴어신학, 통일신학 등으로 인해 오염된 신앙들이 교회에 들어온다면 우리는 단호히 이를 부정해야 할 것이다. 금번 경남퀴어문화축제를 바라보며 심한 우려의 마음이 든다. 또한 ‘죄가 관영’하기까지 참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실지 마음은 참담하기만 하다. 다행히 도민적 여론은 반대의 여론이 높다고 하니 마음이 놓이지만 25%나 되는 사람들이 이를 찬성하고 있다고 하니 이 또한 간절한 기도가 필요한 순간이라 하겠다. 김해기독교연합회 동성애대책위원회 유충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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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제3회 경남퀴어문화축제’를 대응하는 기독교의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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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용사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위엄을 입으소서!(시45:3)
- 교회를 통해 각 세대마다 당신의 일을 위해 성령께서는 오순절에 교회를 탄생시키시고 시대마다 위대한 믿음의 조상들을 통해 언약 하나님의 변함 없으신 사랑을 각인시켜 주시며 이 땅의 수많은 무명의 바울들과 무명의 다윗들과 그 용사들이 지금도 묵묵히 교회를 파수하며 믿음의 계승을 이어가고 있음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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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용사여, 칼을 허리에 차고 왕의 위엄을 입으소서!(시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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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교회 정치를 교회 정치 되게 하라!
- 교회 정치는 교회 직분자 손에 맡겨진 교회의 고유 권한에 속하는 부분이지만, 철저하게 성경과 신앙고백서에 근거해야 한다(참조. WC 25, 30-31장; 고신헌법전문 3항 교회 정치). 이런 점에서 교회 문서로서의 교회 정치는 비록 교회 안에서 그 사역적 권위가 인정되어야 하지만, 언제나 성경과 신앙고백서 아래에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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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교회 정치를 교회 정치 되게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