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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이현령비현령(2) - 양두구육(羊頭狗肉)
선거조례 제6장 선거운동에 대한 규제, 제15조(규제) 1. 입후보자 또는 그 지지자는 노회 추천일로부터 총회 선거 완료 시까지 선거와 관련된 다음의 행위는 할 수 없다. 1) 접대, 기부, 상대방 비방, 유인물 배포, 각종 방문, 인터넷 언론사 광고, 집단 결의 2) 노회 및 교회의 공금 사용 및 모금을 위한 후원회 결성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총회 선거 일정에 따라 노회가 추천하기 전까지는 1) 접대, 기부, 상대방 비방, 유인물 배포, 각종 방문, 인터넷 언론사 광고, 집단 결의 2) 노회 및 교회의 공금 사용 및 모금을 위한 후원회 결성 3) 다른 후보자를 사퇴시키기 위하여 회유, 매수하거나 입후보 등록을 방해하는 행위를 해도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는 뜻인지요? 만약에 법에 저촉이 되지 않는다면 지난 글에서 언급한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2023년에 고신포럼 주최로 기도회 한 것을 선거관리위원회는 어떤 법적 근거에 따라 기독교보에 글을 올려 부총회장으로 출마한 저와 함께 한 분들을 불법을 자행하는 사람들로 오해받게 해서 선거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것도 선거관리위원회에서 결정이 되지 못하니 선거관리위원회 임원회 이름으로 올리는 묘수(?)까지 부려야 했던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또 선거관리위원회 <임원회> 결정과 선거관리위원회 <전체> 결정과의 차이는 무엇이며 법적인 권한의 차이는 무엇인지요? 임원회 독단적으로 사안을 결정할 <권한과 범위>는 선거관리위원회 규칙 어느 조항에 있는지요? 지난해 선거관리위원회의 기준에 따라 고신포럼에서 주최한 기도회가 기독교보에 경고가 될 정도로 심각한 문제였다면 이번 2월 23일 부산서부노회 모교회에서 있었던 “고신교단을 사랑하는 목사 장로 기도회(사실은 부총회장 출정식)”에 대해서는 왜 묵인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지난번에 보완한 규정을 살펴봅시다. 제5장 선거운동, 제8조(규제보완) 선거조례 제15조의 불법선거운동 규정을 다음과 같이 보완한다. 1. 접대 : 개인적으로나 단체적으로 선거당사자나 관계자로부터 식사비나 교통비를 수수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2. 기부행위 : 당 해 연도에 선거당사자나 각종 기관이나 단체 등의 기부하는 행위를 포함한다. 1번 접대는 노회 추천일 전까지는 해도 불법이 아니며, 2번 기부행위는 노회 추천일과 상관없이 당해 연도에 다 적용되는 것인지요? 지난해 선관위의 관례로 볼 때 제8조 규제보완은 당해 연도로 적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부총회장으로 하마평에 오르고 있는 분들의 행보는 이미 모두 불법입니다. 지난 경험으로 볼 때, 이것에 대한 질의를 공식적으로 해 본들 서류가 총회 임원회와 선관위로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법제위원회에 문항 해석을 요구할 것이고, 올해 총회 마치고 나면 유야무야 되겠지요. 2024년 3월 25일 한국기독신문에 “43회 동기회 내에서 무슨 일...?”이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또 “고려신학대학원 43회 동기회 입장”이라는 광고가 올라왔습니다. 선거조례 제6장 선거운동에 대한 규제, 제15조(규제) 1항에 “집단 결의”를 할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사에는 “43기를 대표하여 정00 목사를 추대한다는 결의를 한 바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선거법에 저촉이 되는 것은 아닌지요? 입장문에 따르면 43회 동기회는 “2022년 2월 7일에 결의”했다고 하지만, 결의를 재확인하는 행위도 당 해 년도에 결의하는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법에 충실해야 할 선거관리위원회가 상황에 따라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한다면 선거관리위원회는 양의 머리를 걸어 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뜻인 ‘양두구육(羊頭狗肉)’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선거관리위원회가 기준을 잘 세우고 공명정대하게 적용하여 고신을 바르게 하는 첫걸음이 되길 소망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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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정년제 폐지 – 본립도생(本立道生)(2)
지난 3월 18(월)-19(화)일에 있었던 제6회 고신포럼에서 총신대 서창원 교수와 오태균 교수를 모셔 정년제에 관한 연구발표를 들었습니다. 서창원 교수는 성경에 근거하여 정년제 폐지를 주장했고, 오태균 교수는 사회학적 접근으로 정년제 유지를 주장했습니다. 일전에 제가 소속된 부산서부노회에서는 성경을 기준으로 현재 교회 구성원들의 상황을 고려해 교회 전 직원과 직분자의 정년 연장을 총회에 상정한 적이 있습니다. 농어촌교회가 장로를 세우지 못해 폐 당회가 되는 현실입니다. 이런 상황은 도시에 있는 교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최소한의 기준을 세워도 그 기준에 맞는 직분자를 세우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부름을 받아 175세에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창25:7) 아브라함의 향년이 백칠십오 세라 창 25장 전반부가 아브라함의 죽음을 기록하는데, 아브라함의 뒤를 잇는 이삭의 기록은 급하게 야곱에게로 전개되어버립니다. 25장 후반부는 이삭이 에서와 야곱을 낳는 것을 끝으로 에서가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야곱에게 팔아버리는 사건으로 넘깁니다. 그리고는 창 26장은 1절에 “아브라함 때에”라고 언급하면서 이삭의 행전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삭은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하고, 장자의 축복을 받은 야곱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집을 떠나 고난의 삶이 시작되는 것으로 이삭의 행전은 짤막하게 막을 내립니다. 성경의 기록으로만 보아도 아브라함은 창 12장에서 부름을 받아 창 25장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삭은 창 25장 중후반부에 등장하여 27장까지 나타나고 있지만, 이것은 이삭에 대한 기록이라기보다는 야곱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리고 창 28장부터는 본격적으로 야곱에 대한 기록이 시작됩니다. 그러다가 창 35장에서 야곱이 20년 만에 집으로 돌아올 때 성경은 이삭의 죽음을 기록합니다. (창35:28)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아브라함이 100세에 이삭을 봤습니다. 이삭이 40세에 결혼을 하고 60세에 에서와 야곱을 낳았는데, 이때 아브라함은 160세였습니다. 아브라함이 175세에 죽었으니 15년 동안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과 함께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삭의 때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삭은 60세에 에서와 야곱 두 아들을 보았습니다. 장자의 축복 사건을 시작으로 야곱이 집을 나간 후 이삭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훗날 야곱은 죽은 줄만 알았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애굽으로 내려가 바로 앞에 서게 됩니다. 성경은 굳이 야곱의 나이가 130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47:8-9)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짧고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요셉은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창41:46)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총리가 되어 풍년의 세월 7년을 끝내고 흉년의 세월이 시작된 후 약 2~3년 후 야곱은 바로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야곱이 130세일 때, 요셉은 39세였습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90세쯤 요셉을 보았다고 하면 야곱이 아버지 이삭의 집에서 형 에서를 피하여 도망쳐 나온 때가 적어도 70세 중후반의 나이였습니다. 야곱은 애굽에서 17년을 살다가 147세에 죽습니다. (창47:28) 야곱이 애굽 땅에 십칠 년을 거주하였으니 그의 나이가 백사십칠 세라 이삭이 야곱을 60세에 낳았으니 야곱이 120세 되던 해 180세에 이삭은 죽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삭은 손자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던 즈음에 총리가 된 줄도 모르고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 오묘합니다.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멈추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믿음의 위대한 족장들을 언급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직분을 따라 그 기한을 정합니다. 아브라함이 살아 있었지만, 이삭의 때에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이삭이 살아 있었지만, 야곱의 때에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 입각한 교회의 전통을 볼 때도, 신약의 사도들과 전도자들, 그리고 교회사적으로 속사도 시대의 교회 일군들, 감독들 및 종교 개혁자들, 청교도들, 및 20세기에 들어와서 1980년대 중반(합동은 1988년에 처음 정년제 시행)에 오기까지 성직자 정년제가 없었습니다. 정년 연장이냐? 정년 유지냐? 정년 폐지냐? 정년 축소냐? 과연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어떤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까? 나이가 그 기준이 되어선 안 됩니다. 직분과 그 직분에 따르는 사역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장로교의 원리를 따르고 있습니다. 노회가 목사를 세우고, 노회가 목사의 은퇴를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목사의 정년은 노회의 소관이 되어야 합니다. 노회에 “목사(목회) 상담센터” 혹은 “목사 사역 검진 위원회” 같은 기관을 구성해서 그 기관이 노회 산하에서 목사 상담과 각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조정하고 연구해서 문제들을 안정화하고 각 그 교회의 성도들과 당회의 의견을 모아 교회의 존립을 최우선으로 하되 목사도 살리고 성도들도 살리는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정기적인 상담을 통해서 목회자의 심리와 정신적인 건강도 검사하고, 소명에 대한 열정도 확인하고, 그 목회자 본인의 의향도 고려하여, 각 교회와 교인들의 상황에 맞춰 정년을 노회가 정할 권한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노회가 목사의 은퇴를 선언하면 기본권은 물론이요, 목사에 대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후배들에게 계승해야 합니다. 본립도생(本立道生), 근본을 지키면 길이 보입니다. 은퇴 목사의 투표권은 기본권이라고 합니다. 이 기본권은 어디서 온 기본권입니까? 목사의 기본권을 유지함은 나이에 상관없이 여전히 목사로서 판단력과 리더십을 인정하는 총회 헌법 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총회 헌법의 근본정신에 맞게 목회자의 정년제는 폐지되어야 합니다. 또한, 총회 헌법의 근본정신은 성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퇴 목사의 기본권을 지키는 정도로 끝낼 것이 아니라, 정년제 자체를 폐지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으로 돌아가는 또 하나의 길입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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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본립도생(本立道生)
몇 해 전에 신대원을 부산으로 내려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가 수도권 목사님들에게 집중 포화를 맞은 적이 있습니다. 신대원을 부산으로 이전한다는 주장은 수도권 정서를 봤을 때 계파와 진영을 초월하여 반대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총회 임원으로 출마하려는 필자를 위하여 그런 주장을 하면 수도권에서 단 한 표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조언으로 한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필자의 이 주장 역시 교회 중심이 그 이유입니다. 신대원의 제일 목적은 목회자를 양성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부름이 없으면 목사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대원은 당연히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신학생을 교육해야만 합니다. 교회를 위하지 않는 신학생, 교회와 상관없는 목사가 왜 필요할까요? 천안이라는 지역에 신대원이 있으면 수도권의 교회들과 목회자에게 왜 좋을까요? 무엇 때문에 신대원을 부산으로 옮기면 안 된다는 정서가 있을까요? 필자가 신대원을 부산으로 이전하자고 한 것은 신대원 학생들을 교회 품속에서 교육하자는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이수해야 할 학업이 방대하지만 그 학업들 역시 교회와 접목시키고, 과목 하나 하나가 주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필요한 도구가 될 수 있도록 하자는 목적이었습니다. 공부하면서 가능한 교회와 함께 움직이고, 자신이 소속된 교회에서 목회를 배우면서 공부를 하자는 이유였습니다. 공부를 하다가도 교회에 급한 일이 발생하면 교회로 달려가고, 교회가 필요한 일이 있으면 잠시라도 책을 덮고 교회를 위해 희생하는 산 교육을 병행하자는 뜻이었습니다. 신대원생들이 공부하는 목적과 관심이 교회로 집중되어 교육이 될 때, 신대원을 졸업하면 자연스럽게 교회의 옷을 입고 목회자의 길을 걸어가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수도권의 정서가 그렇다면 아예 총회회관이나 수도권의 중심에 있는 교회에서 신학교육을 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고신의 교회 분포도가 아무래도 부산을 중심으로 영남에 집중되어 있고, 호남의 교회들에 소속된 신학생들이 부산으로 오는 것이 훨씬 용이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장은 몇 년 전의 주장입니다. 이제는 이 주장도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목회자를 희망하는 학생 자체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신대원은 목회자를 길러내는 것이 우선이지, Th M이나 박사과정, 여 신원이 목적이 아닙니다. 이제는 한 해에 목사 후보생을 100명도 배출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대도시라도 대형교회를 제외하고는 부교역자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형편입니다. 목사들이 만나면 부 교역자 좀 구해달라는 말이 인사를 대신하는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는 어쩌면 이전처럼 수도권에, 충청권에, 호남권에, 경남권에, 경북권에, 부산권에 신대원 강의실을 개설하여 교수들이 학생을 찾아가는 방법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교회들이 교역자를 수급하는 일은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변화하는 오늘날의 상황을 볼 때, 중년에 접어들어 인생 후반기를 교회와 복음을 위해 헌신하기를 원하는 분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분들은 어느 정도 생활력이 뒷받침되고 어려워져 가는 교회 형편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어 이들을 위해 야간반이라도 신설하는 극단의 대책들을 세워야 합니다.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도 임시방편의 처방으로 “내 때만 안 망하면 된다!”는 사고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입학정원의 문제는 이제 노력의 차원과 상관없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부산에 학생이 없습니다. 46만이던 영도인구가 약 11만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앞으로 부산의 26개 대학이 7개 대학으로 살아남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전의 사고방식으로는 그 어떤 해결방안도 모색하지 못합니다. 분위기를 조성하고 성도들의 주머니를 여는 방법으로는 더더욱 안 됩니다. 이 또한 해결의 출발점은 교회 중심입니다. 학교와 병원을 위해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위해 학교와 병원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학교와 병원을 위해 기도하고 필요에 따라 돕고 함께 하는 것입니다. 총회 임원으로 출마를 고려하면서 내 걸었던 명분은 “바르게 해 보자, 법대로 해 보자” 였습니다. 그런데 표를 얻어야 임원이 될 수 있고, 임원이 되어야 일을 진행할 수 있기에 정서에 눈치를 보고, 분위기에 따라 표를 의식하며 할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총회장이 되었지만 정작 기독교보의 발행인이라고 기재할 수 없는 상황을 지적하지 못했고, 경남의 모 노회가 총대 투표 개표에 부정이 있었음을 알고도 표를 의식하여 입을 다물었고, 인천의 모 회원이 총회 앞에 나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고신이 이래서 안 된다고 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20년이 지난 사건을, 그것도 이미 부산서부노회가 무혐의처분을 내리고 원상 복귀로 결정 난 일을 부총회장이 되겠다는 욕심 하나로 자신이 속한 노회 임원회까지 움직여 들추어내고, 포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이에나와 같아 달려들어 각본을 쓰고, 전국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내 이미 소천하신 아버지의 이름에 먹칠을 했음도 불구하고 대승적인 차원, 포용하는 넓은 가슴이라는 알량한 이유를 달아 표를 의식했던 불효자식이었습니다. 작년 총회를 마치고 부총회장에서 떨어진 것보다 “바르게 해 보겠다고, 법대로 해 보겠다고” 주장하면서도 받지도 못할 표를 의식하며 침묵해야 했던 일이 너무도 괴로웠습니다. 기도하려고 눈만 감아도 “너도 똑같은 놈이다!!! 아니 너는 더한 놈이다!!! 너는 바르게 하겠다고 해 놓고 바르게 하지 않았으니 더 나쁜 놈이다!!!”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많은 회개의 시간을 가지고 내린 결론입니다. 단 한 표를 얻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바르게 하겠습니다!” “법대로 하겠습니다!” “오늘까지 들은 욕의 100배 1000배를 듣는다고 해도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어떤 오해와 음해와 손가락질을 받는다고 해도 눈곱만큼의 사욕도 버리고 고신을 위해 소리 지르겠습니다.” 본립도생(本立道生), 기본이 서면 나아갈 길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한 신학이어야지 신학을 위한 교회가 되어선 안 됩니다. 교회 중심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법대로 해야 합니다. 문제만 제기되면 문제는 보지 않고 계파와 진영과 사욕에 눈이 멀어 법제위에 문구 해석을 의뢰하여 시간을 끌고, 물타기를 하며 지연 작전을 펼쳐 본질을 벗어나는 작태를 그만두어야 합니다. 이구동성으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합니다.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지를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제라도 고신은 본립도생(本立道生)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유일한 희망이 있다면 부활하시고 재림하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죽어 나흘이 되어 썩고 냄새가 나는 실정이라고 해도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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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선거관리위원회,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하지 않기를!
우리 총회는 여러 종류의 상비부와 특별부서들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특별위원회는 왜 그리도 많은지! 비슷한 기능을 가진 위원회와 상비부는 하나의 위원회로 통폐합해야 할 필요가 있고 유명무실한 기관은 과감히 정리해야합니다. 물론 각종 위원회 역시 교회 중심이어야 합니다. 전체를 다루고 싶지만 선거관리위원회만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 총회 선거관리위원회는 총회 내의 선거관리를 위해서 많은 수고를 해온 것이 사실입니다. 수고하신 분들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한편으로 아쉽게 생각되는 부분에 대해서 쓴 소리를 하고자 합니다. 고신총회의 선거는 헌법을 기본으로 하고, 고신총회 선거관리위원회의 선거조례와 시행세칙에 따라서 진행됩니다. 총회 산하 기관은 그 나름대로의 선거기준과 원칙에 따라 진행되어집니다. 총회 산하 모든 선거에 있어서 선거조례나 시행세칙대로 시행되면 좋겠습니다. 균형을 잃었다고 생각되는 작년의 일이 떠오릅니다. 2023년 3월 제가 섬기고 있는 고신포럼에서 교단을 위한 기도회를 했습니다. 혹 불필요한 오해나 말들이 생길까 기도회를 준비한 실행위원들이 총회 출마자들은 그곳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저는 지난해 목사 부총회장 후보로 출마를 했기에 그 기도회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기도회는 선거관리위원회가 정한 조례나 시행세칙에 명시된 공식선거 기간도 아니었고, 출마자들도 참여를 하지 않았기에 선거관리위원회가 이 일에 대해 기독교보에 경고를 할 정도의 위법한 일도 아니었으며, 선거관리위원회가 그렇게 간섭해야 할 일도 아니었습니다. 들리는 말에 선거관리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그런 경고(?)를 하려고 할 때 찬반 의견이 팽팽하여 결정하지 못하게 되니까 듣도 보도 못한 임원회의 이름으로 꼼수 경고를 하는 기가 찬 일이 발생했습니다. 기도회를 주관한 고신 포럼에서는 전혀 그런 의도가 없었지만 선거관리위원회가 바르게 하려고 하는 정신 하나만 믿고 크게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선관위는 그런 정신을 끝까지 이어가야만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지난해 8월 전국장로 수양회가 마치는 날 경주에서 40명이 골프 운동을 했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출마자도 다수가 있었고 선거관리위원도 있었다는데 누군가 형평성을 이야기하니 정식으로 고발하면 문제 삼겠다고 고발하라고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있었던 후보들이나 선거관리위원의 그런 태도에 경악을 금치 못할 뿐 아니라 그런 소식을 전한 사람의 실명이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외부에 유출되어 소문이 나게 한 것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되지 않는 부분 입니다. 고신포럼의 기도회는 공식 선거기간도 아니었고 출마자도 아무도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공개적으로 경고 했는지요? 그렇다면 전국장로회 수양회를 마치고 운동을 한 것은 왜 침묵하시는지요? 침묵 정도가 아니라 그 소식을 전한 사람의 실명을 외부로 유출해서 그 제보자를 힘들게 했는지요? 그럼에도 공정한 선거관리위원회라 말할 수 있을까요? 전국장로회 수양회를 폄하 하거나 잘못된 것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거관리위원회의 행동에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전에 다른 선거관리위원회는 전국장로회 수양회 기간에 출마자들이 그곳을 방문 조차 못하게 했는데 작년에는 공명 선거 선서식이나 기호 추첨을 아예 그 수련회 장소에서 실시했습니다. 이것은 이 전의 선관위의 결정과는 180도 다른 결정으로서, 이런 일을 할 때는 충분한 공감대와 공정성을 지키며 진행되는 것이 기본입니다. 선관위의 구성원에 따라 너무 다른 결정을 하는 것은 신중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방법이 좋아보여도 기본적인 기준을 상실해서는 안 됩니다. 전국장로회는 우리 고신총회의 임의단체입니다. 물론 그 기관의 위치나 그 구성원의 중요성 등을 무시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전국장로회 수양회가 총회를 앞두고 소위 ‘정치나 선거운동’의 근거지라는 말도 많은데 그런 오해를 불사하면서까지 꼭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요? 그리고 장로들에게만 그런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어떤 기준이며 공정한지요? 그러면 장로가 아닌 고신의 성도들에겐 어떤 알 기회를 제공했는지요? 선거관리위원회가 작년에 지역공청회라는 좋은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그 공청회에 참가 자격을 총대라고 했고 처음에는 총대에게만 여비를 지급하기로 할 정도로 총대 중심이었습니다. 전국장로회 수양회는 부부로 모이기 때문에 총대 숫자보다 비 총대 숫자가 훨씬 많습니다. 왜 이분들에게만 “특혜”에 가까운 기회를 제공해야 할까요? 분명히 말합니다. 목사 장로 편 가르기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전국 목사 부부들에겐 왜 이런 기회가 없었을까요? 부부 수양회니 당연히 거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은 여성들입니다. 총대가 아닌 장로나 가족들에게 선거 후보들이 인사하는 것은 어느 선거 규칙에 따른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형평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그리했다고 해도 그 의도를 순수하게 보기가 어렵습니다. 각종 방문 선거 규칙에는, ‘선거와 관련하여 입후보자나 지지자들의 지역 방문(지역별 체육대회, 전국장로회 수양회, 총동창회 각종 세미나 등)을 금하며, 각종 모임에 화환이나 선물을 제공할 수 없으며 인터넷 영상물의 이용을 금한다. 단 꼭 필요한 경우는 서면으로 선거관리위원장에게 신청한 후 선거관리위원회 고소 고발소위원회의 서면 답변을 얻어야한다.(65회 총회 수정)’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렇게 공명선거 선서식을 하고 기호추첨을 한 어느 후보는 아예 그곳에 머무르며 버젓이 선거운동(?)을 했다는데, 특정인에게 그 기회를 주기 위해서 그렇게 했는지요? 그 이전 해에는 동일직에 출마한 두 후보 모두에게 설교나 강의 등 동일 한 조건으로 순서를 맡기는 것도 혹시라도 부정 선거운동이나, 빌미를 제공할까 못하게 막았는데, 작년에는 선관위의 규정이 발전한 것인지요? 아니면 변질된 것인지요? 불법적인 기부행위 지난해 총회 선거에 지역공청회를 도입하므로 입후보자는 출마소견을 유권자들에겐 후보자를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 받아서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작년에는 옥의 티 같은 일이 있음에도 선관위는 침묵했습니다. 어느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본인이 당선되면 엄청난 후원금을 내겠다는 공약 아닌 공약을 발표해도 선관위는 제재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올해 초에는 고신대학을 위한 기도회를 하고 모금 활동도 했는데, 이때 교회, 혹은 개인이 기부행위를 했습니다. 총회 선거관리위원회의 5장 선거운동 제8조 2항에 보면 “기부행위: 당 해 연도에 선거당사자나 각종 기관이나 단체 등의 기부하는 행위를 포함한다.”라고 명시함으로서 출마자나 기관이 할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부산의 어떤 분은 노회의 어떤 행사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출마를 선언하면서 ‘교회가 선거를 위해 예산을 배정 해 두었다’고 말했으며, 이와 유사한 일이 있었는데 선관위는 선거조례를 지킬 의사가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몇 가지 물어보십시다. 몇 해 전엔 선거관리위원회가 제출서류가 하나라도 부족하거나 기한을 맞추지 못한 것이 있으면 자격박탈을 했는데, 작년에는 몇 차례 공청회 장소에서 버젓이 거짓 자료를 올려놓아도 침묵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선거조례 6장 15조 2항에 “입후보자의 등록서류 중 허위 사실 또는 전항을 위배한 사실이 확인될 때에는 총회 재판국에 고발한다”고 되어 있는데, 모 후보의 허위사실이 우리의 눈에만 보이고 선거관리위원회의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까? 이런 사실도 고발자가 나와야 선관위는 조치할 수 있는 것입니까? 몇 해 동안 출마자들의 생년월일이 늘 소개되었는데 유독 작년 2023년 총회출마자들에 대해서는 생년월일이 삭제된 홍보물이 제공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언론사의 독단적인 결정이나 실수입니까? 작년의 고신포럼에서 실시한 기도회(30명 미만 참석, 참석자 여비 미 제공)가 신문지상에 경고를 할 만큼 심각한 일로 판단했었다면, 올해 어느 교회에서 기도회(100명 이상 회집, 참석자 여비제공)로 모여 출정식(?)을 한 것은 왜 지적하지 않고, 선거조례나 선거관리위원회의 결정사항대로 시행하지 않는지요? 올해도 선관위 뜻대로, 선관위의 좋은 의도대로 시행할 것인지요? 아니면 총회가 만들어놓은 선거조례나 시행세칙을 지켜가며 시행할 것인지요? 선거관리위원회는 비상 계엄군이 아니라 총회를 섬기는 조직으로 특히 선거 과정을 공정하게 하여 불미한 일을 미 연에 방지하는 일을 하는 기관입니다. 바라기는 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조례와 시행세칙대로 기준과 중심을 공정하게 잡고 바르게 해주기를 바랍니다. 지난날 잘못된 것이 있다면, 인정하고 사과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아 야합니다. 모 총회장이 공식적으로 ‘법은 못 하게 해도 모두가 찬성하면 할 수 있다.’는 발언 이후 총회는 총체적으로 기준과 공정을 상실한 것 같습니다. 법적 용과 해석도 본래 정신을 실현하기보다는 계파나 진영에 따라 말꼬리를 무는 억지 행각이 비일비재합니다. 교회 헌법은 세상 헌법과 그 기본과 정신이 다릅니다. 교회 헌법은 성경의 원리를 따르며 성경에 기초합니다. 그래서 “법이요!”하면 모두가 순복하는 것입니다. 이 정신이 상실되니 걸핏하면 법제부에 법 해석을 요구하고 시간 끌기를 하며 본질을 희석시키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이란 말이 있습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뜻으로 어떤 사실이 말하는 사람의 뜻에 따라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선관위가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하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모든 총대원 들과 고신의 목사 장로들이 성경의 정신을 벗어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선관위가 비상계엄군처럼 협박하는 위치가 아니라, 공정한 선거를 관리하며, 선거의 부정적 요소를 근본적으로 해결함으로서, 고신을 바르게 세우는데 앞장서고 책임지는 섬김이 가 되시길 바랍니다. “총회는 헌법대로, 선거는 선거조례대로”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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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선거, 또 다른 분열의 시작인가?
역사관 역사는 어제로부터 시작하여 오늘로 또 내일로 이어지므로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은 누구나 어제를 생각하고 평가하여 교훈을 얻으려 한다. 인간과 인간들이 모인 공동체는 부족함에 따르는 내재적인 한계로 인하여 개인으로부터 국가사회까지 어제의 평가에 따른 이해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같은 상황에서는 통상 같은 반응을 보이므로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교훈을 받기 위함일 것이다. 본래 어제에 대한 전체적 평가는 먼저 개인과 각 개별사회가 자신들의 몫을 평가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전체적인 역사의 평가에 편입되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 그리고 어제의 역사에서 받은 교훈을 오늘과 내일에 적용하여 긍정적인 부분은 더 확장하고 부정적인 부분은 개혁하여 바꾸도록 하는 것이 역사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자가 가지는 사명이다. 문제는 역사에 대한 평가에 특정한 의도와 목적이 스며들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느냐에 있다. 역사를 바라보고 평가함에 목적과 의도가 개입하면 그 틀을 통하여 역사를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역사를 사실 그대로 보지 못하고 그 목적의 틀과 달리하는 부분은 삭제하거나 변형하고 목적의 틀에 맞는 부분만으로 역사를 살피고 판단하게 되므로 그 결과 역사는 전체적으로 왜곡되게 된다. 이를 위하여 어제의 역사를 ‘점령’하기 위해 애를 쓰고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는 말이 생기게 된 것이다. 권력과 정치가 역사를 ‘점령’하여 틀을 만든 후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하여 자신들이 가진 권력의 힘으로 이러한 틀을 사실상 강요하게 될 때 역사관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내일을 바라보는 시각도 이러한 틀에 의하여 제한되므로 내일 역시 왜곡된 역사관으로 맞추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된다. 분열의 두 주제 지금 우리나라는 정치로부터 사회 곳곳에 ‘분열’이라는 분명한 잘못에 빠져들고 있다. 분열은 공동체 모두에 불이익을 준다. 작게는 공동체의 발전을 막지만 크게는 공동체를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한다. 우리 역사에서 ‘분열’이 국가적인 비극으로 이어진 대표적 사건을 예로 들자면, 임진왜란을 앞두고 이이(율곡)가 주장한 십만 양병은 동인과 서인의 치열한 당파싸움으로 무산되고 그 대가로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의 참화를 겪게 되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인한 국가의 극심한 쇠약으로 병자호란까지 겪어야 했다. 또 해방 후 공산주의자에 의하여 장악된 북한과 달리 남한은 위로는 정치인들로부터 시작하여 아래로 폭력배까지 온 나라의 각 분야뿐만 아니라 좁은 지역까지 좌우로 나누어진 적이 있었다. 이렇게 되자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남로당의 수괴 박헌영은 북한의 김일성이 오판하도록 부추겼고 그 결과 공산주의의 팽창을 도모하던 스탈린, 이에 동조하던 모택동, 한반도의 적화를 획책하던 김일성의 야욕은 함께 어우러져 6.25 전쟁이 발발하였고 신생 독립국인 이 나라에 엄청난 참화를 가져왔다. 이처럼 분열은 무서운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에 다시 ‘분열’의 망령이 온 나라를 덮고 있으며 이 분열에 대하여 ‘진영논리’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다. 진영논리는 ‘자신이 속한 쪽의 이념과 행위는 무조건 옳고, 다른 쪽의 이념과 행위는 무조건 배척하는 논리’를 말하며 분열의 극치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 분열의 주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반일’(또는 항일)이냐 ‘반공’이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장’이냐 ‘분배’냐 하는 문제이다. 그런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두 문제가 무슨 까닭인지 우리 사회에서 함께 얽혀 있다. 즉, ‘반일’을 주장하는 측 대부분은 ‘분배’를 우선하고 있으며 자신들을 스스로 ‘진보’라고 이름하고 있고, ‘반공’을 외치는 대부분은 ‘성장’을 우선으로 하고 있으면서 스스로 ‘보수’라고 하고 있다. 이 네 개의 주제가 짝을 지어 나누어져 양극으로 분열이 공고히 되면서 진영논리가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해방공간에서의 분열 우리나라가 전 근대적인 왕조의 국가로부터 현대 시민사회로 변화하는데 걸린 기간은 채 50년 정도이다. 그 50년은 우리나라보다 일찍 현대 시민사회로 발전한 서구 여러 나라에 비해서는 굉장히 빠른 기간이었다. 그런데 그 기간에 우리는 국가적으로 두 번의 큰 비극이 있었다. 하나는 일제의 침략에 의한 국권의 상실이고, 다른 하나는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채 5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 북한 공산주의자의 침략에 의한 동족상잔의 6.25 전쟁이 있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6.25 전쟁이 있은 지 7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사회는 ‘어제’ 있었던 두 비극의 역사를 두 개의 틀로 나누어 보고 있다. 이 나눔의 하나는 ‘반일’, 다른 하나는 ‘반공’이라는 두 개의 역사관이 기초하고 있다. 이 두 역사의 유산은 분명히 우리가 함께 물려받아 서로 다듬어 가야 할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나누어지고 말았으며 오늘날 우리 사회 분열의 큰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문제는 ‘반일’의 틀에서는 ‘반공’의 가치를 낮추고 ‘반공’의 틀에서는 ‘반일’의 가치를 유보하려는데 있다. 이를 상징하며 극단적으로 대조하며 상징할 수 있는 두 인물이 있는데 ‘김원봉’과 ‘노덕술’이다. 김원봉은 광복군에 참여한 항일투쟁의 중심인물 중 한 사람이지만 해방 후 북한 공산정권에 참여하여 반공과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노덕술은 일제하 경찰 간부를 지낸 친일파였으나 해방 후 경찰과 군인의 길을 걸으면서 반공주의자로 살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김원봉’을 지지하는 세력과 ‘노덕술’을 옳다고 하는 세력으로 나뉘고 있는데 이 나눔에 앞장선 것이 정치인과 정치세력이고 이에 휘둘린 것이 국민이다. 우리는 김원봉의 항일은 인정하되 그가 걸었던 공산주의자의 길은 거부해야 하고 노덕술의 친일은 거부하고 반공에 대하여는 인정하면서 함께 갔어야 했다. 그런데 ‘냉전’이라는 세계질서의 재편과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6.25 전쟁의 직접적인 참화로 인하여, 초기 대한민국을 이끌었던 정치세력 역시 반일보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현실적 위협 앞에 반공을 더 앞세웠다. 우리는 반공이 ‘국시’(國是)가 되었고 ‘노덕술’의 길에 더 기울어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반공’을 국시로 하던 정치세력들이 장기집권과 독재의 길을 걸어 반공의 가치를 훼손시켰고, 이에 저항하던 이른바 민주화 세력은 무슨 까닭인지 반공보다 반일을 내세우면서 역사관이 나누어지게 되었으며 국민도 함께 나누어졌다. 이렇게 나누어진 역사관을 가진 두 정치세력으로 인하여 어느 정치세력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반공과 반일이 시소게임처럼 오르내리게 되었다. 해방에 공헌한 두 세력과 6.25 전쟁 우리나라의 해방에는 두 세력의 공헌이 있다. 즉, 일제 강점하에서 만주를 중심으로 무장투쟁을 하던 무장 항일투쟁 세력과 미국을 중심으로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이던 세력이다. 항일무장투쟁 세력은 지역적인 원인에 의하여 공산주의 국가가 된 소련과 사실상 공산주의 국가가 되기 직전의 중국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당시 그들은 소련 및 중국의 공산주의자들과 ‘항일’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독립투쟁을 하였기 때문에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크게 없었으며 사실상 공산주의의 실체가 무엇인지 깊이 살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해방 후 좌우가 나누어진 공간에서 무장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많은 이들이 공산주의를 택하였으며 그들은 발걸음을 북으로 향하였거나 발걸음을 미처 옮기지 않았더라도 그들의 눈과 마음은 평양으로 향하였다. 반면 서재필, 이승만을 위시하여 미국을 중심으로 외교적인 항일을 한 독립운동 세력이 존재하였다. 이들은 3.1 독립만세운동을 기점으로 미국에 사실상의 임시정부를 세우고 일제의 강점으로 인한 각종 폐해와 조국의 힘든 모습을 언론과 외교적 접촉을 통해 서방세계에 전하면서 꾸준히 독립을 외쳐왔다. 이윽고 8.15해방이 되고 군사적 목적으로 남북이 분할되었을 때 북에는 항일무장투쟁을 지향했던 공산주의자들이 사실상 지배하는 구도가 되었고, 남에는 미군의 지원으로 이승만을 중심으로 외교적인 항일투쟁을 하던 세력이 사실상 지배하는 구도가 되었다. 그런데 점령군을 위한 사실상의 분단 5년 동안 북은 김일성에 의하여 공산주의에 반하는 세력이 철저히 괴멸되었으나 남에는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세력이 합법적 또는 불법적으로 공존하게 되었다. 이 두 정치세력은 각기 남한과 북한을 기반으로 정통성을 부르짖었다. 그러나 이 두 세력은 각기 정통성에 대하여 서로의 결함을 하나씩 품고 있었다. 항일무장투쟁 세력은 활동 범위가 사실상 남만주와 소련의 연해주로 거의 소련과 중국에서 싸웠다. 그들이 독립의 의기를 높이 들고 일본군과 피 흘리며 싸운 것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귀중한 가치이며 희생이 틀림없으나 그 희생에서 실질적으로 도움을 받은 것은 중국과 소련이다. 중국과 소련은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데 자신들의 군대 외에 우리의 독립군이 조력한 것이다. 반대로 외교투쟁 세력은 일본군을 상대로 생명을 건 직접적인 희생이 따르는 투쟁은 없었다. 아깝게도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으로 흘러간 국제정세의 흐름, 즉 공산주의의 팽창과 이를 저지하려는 서방 제국 사이에서 우리의 두 독립운동 세력은 서로를 인정하고 타협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 버렸다. 6.25 전쟁은 공산주의의 팽창을 노리던 소련과 적화통일을 꾀하던 북한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남한에서 공산주의를 지향하던 자들의 공통적인 지향점을 향한 비극이었다. 그러나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세계의 도움으로 공산주의를 지향하던 자들의 꿈은 깨어지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북한은 ‘반일’ 외에 ‘반미’도 자신들의 역사관에 새로이 삽입하여 저항 세력이 없도록 사상적 통일을 이루었으며, 남한은 6.25 전쟁을 통하여 공산주의를 지향하던 남로당 세력이 거의 뿌리를 뽑히게 되는 결과가 이루어졌다. 물론 그 과정에서 ‘보도연맹사건’이란 비극이 개입하였다. 이 보도연맹사건과 4.19 민주혁명의 희생은 대한민국의 건국에 절대적 공헌을 하였던 외교투쟁 세력의 건국에 대한 공헌을 부정하는 요인이 되었다. ‘반공’의 쇠퇴와 ‘반일’의 오류 앞서 지적하였듯이 ‘반공’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던 정치세력은 부패와 함께 불법적인 장기집권을 꾀하면서 정치적 독재 세력이 되어 ‘반공’의 가치를 훼손하였다. 그리고 민주화를 위하여 국민은 저항하게 되었는데 민주화 시위에 앞장서 ‘민주’를 부르짖던 대학생 등의 구호에 공교롭게도 ‘반미’가 함께 등장하였다. 이 ‘반미’ 구호의 등장은 미국이 독재 정부를 옹호한 것에 대한 반발인지 또 다른 뿌리 깊은 연유가 있는지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반미’를 외치던 일부 ‘운동권’의 이탈된 모습은 ‘반공’을 우리나라를 지키는 제일의 가치로 여기던 많은 국민에게 ‘운동권’, 즉 민주화 세력에 대한 사상적 불신을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대표적 사건으로 민주화를 주장하던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의 약칭)에서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학생대표를 파견하였고 그 자격으로 북의 계획에 따라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이란 것을 발표하여 충격을 주었다. 세월이 지나고 이를 주도하던 ‘운동권’ 중 상당수는 선거를 이용하여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정치세력에 가담하였으며 그들의 속한 정당은 세 차례 집권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집권하고 있는 동안 주변에 자신들의 우호 세력을 양성하고 지지하였으며 그들에 의해 ‘반일’의 역사관을 국민과 학생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하였는데 공교롭게도 그만큼 ‘반공’의 가치가 훼손되었다. 우리나라는 평양의 김일성과 그 후손들의 최우선 과제인 ‘적화통일’ 앞에 놓여 있음에도 왜곡된 역사의 틀로 ‘반공’을 훼손시킨 것이다. 당연히 국민은 ‘반일’의 역사관과 ‘반공’의 역사관으로 분열되었다. 이 분열은 이에 편승한 정치인의 ‘정치’에 의하여 더욱 깊어져 가고 있으므로 이에 편승한 정치인들이 도태되고 국민 스스로가 자각하지 않는 한 계속될 것이다. 이 상황에서 최근 두 사건은 국민의 잠재적인 반일 의식을 불러일으켰다. 수년 전 있었던 태평양 전쟁의 전범 기업에 대한 손해배상 판결은 법의 해석을 빌어 지난 역사로 인하여 우리 국민에게 잠재되어 있던 반일의 역사관을 교묘하게 깨웠다. 그 결과 국민의 반일 감정은 절정에 이르렀고 우리나라에 진출해 있던 일본의 소비재 기업 중 하나는 매장을 상당수 철수하기도 하였다. 물론 일제의 강압 통치로 인하여 희생된 분들과 후손들, 그중 지금도 생존해 계시는 분들의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기업에 대한 손해배상 판결이 국민의 항일감정은 충족시켰을지는 몰라도 해방 후 7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실정법으로 일제의 강압 통치와 그로 인한 제 문제를 다루는 것이 법적 타당성이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여기에 불에 기름을 더한 듯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오염수(일본은 정화수라고 부른다)의 방류이다. ‘반일’을 외치던 그들은 그 오염수로 인하여 당장 우리 국민이 수산물을 먹기만 하면 모두 방사능으로 인하여 큰 문제가 생길 것처럼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의견을 나타내었다. 그런데 정작 일본의 동쪽, 즉 후쿠시마 앞을 지나는 쿠로시오해류는 주 방향이 베링해를 향하고 있고 베링해를 지나 태평양을 한 바퀴 돌아오면서 5-7년, 또는 그 이상의 기간동안 태평양의 바닷물과 섞여 희석되게 된다. 이 쿠로시오해류에 의해 방사능 오염수(일본은 정화수라고 이름한다)가 가장 먼저 닿은 곳은 베링해와 캐나다, 미국의 서해안인데 사실상 그들은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오염수가 우리에게 전혀 영향이 없다고 단언할 수 없으나 이는 과학에 맡겨야 할 문제이지 우리의 감정에 맡겨야 할 문제는 아닐 것이다. 정작 그들은 중국의 동해안에 산재한 원자력발전소와 발해만과 황하강, 양자강에서 나오는 각종 오염에 대해서는 아무런 시비를 말하지 않고 있다. 유독 먼 바다를 향하는 후쿠시마 오염수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자신들의 ‘반일’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한 방책이 아닌가 의심된다. 그런데 지금 일본의 유명관광지에는 우리나라 관광객이 넘쳐나고 유명 골프장에는 골프를 즐기는 우리나라 골퍼들이 원정 골프를 즐기고 있다. 심지어 오염수를 들먹이며 반일 감정을 부추기는 정치세력에 속한 정치인 중 이미 일본에서 아** 맥주를 들고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건배하는 사진을 자신의 인스타에 올렸었다. 그렇다면 지금에 와서 그들이 외치는 ‘항일’은 누구를 위한 항일이고 무엇을 위한 ‘항일’이었던가? 참으로 모순된 모습이 아닐 수 없다.(이에 대하여 언론에 보도되었음에도 당사자는 이에 대하여 유감의 표시를 한 적이 없다) 교회는 분열에서 자유로운가? 이제 얼마 후에는 또 선거를 치르게 된다. 이 선거기간 ‘정책’이 아니라 국민을 혼돈에 빠뜨리는 ‘구호’가 등장하고 있다. 여기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우리나라 선출직 공무원의 대표 격인 국회의원은 국민(지역구)으로부터 존중과 존경을 받아 선출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거의 양당 정치로 이루어진 정치구조에서 우리는 동의할 수 없거나 못마땅한 부분이 있어도 어쩔 수 없이 노선에 따라 투표하게 되고 그에 따른 지지로 선출되는 것이다. 즉, 정치인은 존경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지지, 즉 투표로 선출된다. 따라서 정치인은 가치 있는 정책을 입안하고 소신을 세우기보다 ‘정치’를 통한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 그렇다면 (당선을 위해) 지지를 더 얻고 지지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때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가치를 외면하기도 한다. 선거의 위험성이 여기에 있다. 대표적인 예가 기독교인의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에서 선출되고 국회의원, 도의원 중 교회 중직자의 비율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정당에서 ‘성적지향’을 교묘하게 감춘 차별금지법과 그 유사한 법률, 교사의 권위를 침해하여 결국 사회 전반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학생인권조례 등과 관련한 입법 활동이 가장 활발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는 어떤가? 지난날 민주화 운동이 한창일 때 교파별로 집권 정부를 지지하느냐 민주화 운동을 지지하느냐로 나누어졌던 한국교회이다. 지금의 분열 상황에서도 교회는 자유스럽지 못하다. 신사참배에 따른 신앙 문제로 ‘반일’을 외칠 수 있고 유물사관을 반대하면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직접적 피해로 ‘반공’도 외칠 수 있는 교회지만 역시 같은 구도로 분열되어 있다. 일부라고 하지만 목회자와 장로는 은연중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어 성도들에게 영향을 미치려 하고 있고 교인들도 교회 내에서 자신의 정치 성향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하나님 말씀을 따라야 할 교회 역시 진영논리와 정치 성향에 따라 나누어지는 비극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 4월에 있을 총선에서 양측은 건곤일척의 대결을 할 것이다. 대통령을 탄생시켰으나 국회의 소수당인 집권당은 당연히 그 구도를 바꾸려 할 것이고 외형상 야당이지만 국회의 압도적 다수로 사실상 집권당처럼 행세하는 야당은 이 구도가 변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거대 양당에서 과반수가 나오지 않으면 소수의 야당은 이 틈새에서 자신들이 과반수를 만드는데 수를 보태는 대신 과도한 정치적 이익을 가지려 할 것이다. 이 선거기간 동안 정치세력은 어떤 명분으로도 교회를 이용하려 할 것이고 이는 개교회 내부의 분열, 교회 간 분열, 교파끼리의 잠재적 분열까지 가져올 위험이 있다. 한국교회는 이제 깨어야 한다. 분열 앞에서 교회는 하나님 말씀 앞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정치적으로 진영이 나누어진 현실에서 그리스도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제한된 안타까움이 있어도 교회와 교회의 지도자가 말씀의 가르침과 한계를 벗어나 정치와 가까이하게 되면 교회가 또 하나의 분열의 원인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교회가 말씀의 진리를 굳건히 세우지 못하고 교회답지 못할 때 주변 사회는 끊임없이 교회에 도전해 오고 교회의 자리를 좁히려 할 것이다. 이제 교회의 지도자와 모든 교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이 나라의 분열을 해소할 수 있도록 깊은 성찰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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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폐지, 파사현정(破邪顯正)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 성경 중심이라는 구호는 너무도 당연하고 단순해 보이는 구호이지만 신앙의 핵심이요, 기초요, 뿌리다. SFC를 고향으로 여기는 고신의 중장노년들에게는 옆구리만 쿡 찔러도 자동적으로 복창하는 구호다. 그런데 이제는 이 구호가 아련하게 느껴진다. 신앙의 정통과 계승의 위기를 논할 때 간혹 세대차를 거론하면서 달라진 신세대를 향하여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과연 그럴까? 신사참배반대와 공산당의 총부리의 위협 앞에서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진 우리의 선배를 잘 모르는 신세대가 신앙의 정통이 허물어지고 계승의 단절에 대한 전적인 책임이 있는 것일까?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모토로 SFC라고 하면 절대적인 거품을 무는 세대의 끝자락을 잡고 있는 우리 중장노년들에게는 과연 책임이 없을까? 필자도 1983년 동부산노회 진지구 SFC 위원장으로 정통 SFC 맨이다.당시에 진지구 SFC가 수백명씩 월례모임에 모이고 왕성한 활동을 보이니 지방 SFC임원들이 비결을 알기 위해 방문한 적이 있었다. 현재 필자가 목회하는 고신교회는 언젠가 부터 자연스럽게 불려지고 있는 “학생회”라는 용어를 “학신회”로 바꾸고 SFC강령과 칼빈주의 5대 교리를 교육관에 부착하여 고신신앙의 뿌리라고도 할 수 있는 SFC를 복원해 보려고 발버둥을 쳐 보지만, 신앙의 계승이 결코 쉽지 않음을 체감한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SFC라고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시는 중장노년의 SFC맨들이여 정말 SFC를 사랑하시는가? SFC 신앙 계승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SFC를 핑계로 한 시대를 그저 풍미하고 즐기기만 하시지는 않으셨는가? 그 결과가 오늘의 SFC라고 한다면 또 “SFC폐지”한다고 손가락질 하시겠는가?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 안에서는 그 어떤 것도 교회가중심되지 않으면 변질되고 불신앙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오늘 고신은 과연 교회 중심이 맞는가?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보자. 동일한 교회 안의 조직인 남전도회와 여전도회가 MOU를 맺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1남 전도회와 청년회가 MOU를 맺는다는 것이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되는가? 작금의 고신총회는 그런 짓을 자랑스럽게 하고 있다. 고신총회 안에 있는 조직인 KPM과 SFC가 MOU를 맺는 것이이해가 되고 상식적인가? 일반 성도들과 총대들이 잘 모르는 물밑 의도가 없다면 이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교회중심이라는 강령을 가진 중장노년층에 있는 SFC맨들이 일삼는 오늘날의 모습이다. (마8:32)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학원SFC라는 위대한 명분을 걸고 불순한 목적을 수행하고 있는 지도급에 있는 인사들이 대부분 순수한 SFC맨들의 열정을 이런 작태로 통째로 몰살시키고 있다고직고한다면또 “SFC폐지”를 주장한다고 손가락질 할 것이 분명하다. 학원복음화!!! 대부분의 SFC간사들은 학원복음화를 이루어 미래를 준비하자는 구호 아래 복음의 열정으로 청춘과 인생을 헌신하고 있다. 자랑스러운 SFC동문들 역시 자신의 인생에 최고의 가치를 SFC에 두고 헌신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필자는 학원복음화라는 명분을 내세웠던 시작부터 순수하게 볼 수 없다. 학원복음화도 교회가 해야 한다. 학원복음화도 교회중심이어야 한다. 교회중심 SFC를 학원으로 분리시켜 나간 것은 불건전한 의도가 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며, 한 걸음 더 나아가 불신앙적인 행태다. 소위 지방 SFC, 학원 SFC, 주류 SFC, 비주류 SFC, PK SFC, TK SFC라고 하는 말들은 학원복음화라는 가면을 쓰고, 시작부터 불건전하고 불신앙적인 의도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열매들이다. 누가 SFC ‘폐지’를 외쳤던가? 필자는 “SFC를 ‘교회로 돌려달라”고 하는 것이지 SFC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천명하는 바이다. SFC를 본래의 자리인 교회로 반드시 복귀시켜야 한다. 방법의 문제가 아니다. 정책의 문제가 아니다. 본질적인 문제요, 성경적인 문제다. SFC가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는가? KPM이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는가? 국내전도위원회가 교회를 개척할 수 있는가? 선교사를 파송하고 교회를 세우는 것은 ‘공교회’가 하는 것이성경적이다. ‘교회 중심’으로 ‘개체교회와 노회’가하는 것이 우리가 신앙고백하는 정신이다. 중장노년에 계시는 SFC맨들이여 그대들이 이 모든 일들을 주관하고 계시지 않는가? SFC정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대들이 SFC의 이름을 망령되이 이용하여 사욕을 취하고 있다고 직고한다면 또 “SFC 폐지”한다고 손가락질 하실 것인가? 도대체 무엇을 위한 헌신이고, 무엇을 위한 희생인가? 10년 후면 청소년 세대 인구가 반토막 난다. 오래 전에 대구경북지역 SFC간사를 지내셨고 총회장 출신의 목사님께서 2년동안 2억을 투자했는데 2명 전도했다고 탄식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래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복음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기에 우리는 SFC에 소망을 두어야 한다. 그 첫걸음은 SFC를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탕자가 되어 도무지 방법이 없어보여도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면 가능하다. 하나님과 교회에 죄를 얻었음을 고백하고 품군의 하나가 되겠다는 자세로 돌아와야 한다. 이 방법 밖에는 없다. (눅15:20)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우리가 다시 시작하는 방법은 없다. 우리에게는 0.1%의 가능성도 없다. 아버지께서 달려오셔서 안고 입을 맞추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교회가 두 팔을 벌리고 탕자를 안아 주는 것 외에 그 어떤 시작도 불가능하다. 중장노년의 SFC맨들이여! 대부분 SFC맨들의 순수한 열정을 돼지에게 넣어 떼로 몰살시키고 있는SFC 지도자들이여! 무지와 무능을 인정하고, 사리사욕에 붙잡힌 불순한 동기를 인정하고, 비본질적이며 비성경적이며 탈 교회적인 불신앙을 인정하고 더 이상 SFC를 인질로 잡고 있지 마시길 조심스럽게 부탁해 본다. 또 이런 주장을 “SFC폐지”라는 누명을 씌워 순수한 SFC 동문들에게 문자 보낼 것이고, 순수한 SFC동문들 역시 그 문자를 받고 돼지 떼에서 몰살당하는 순간까지 “SFC 폐지”한다고 손가락질할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하지만SFC가 교회로 돌아오는 것이 성경적이요, 유일한 방법이기에 “SFC폐지”라는 손가락질을 받는다할지라도다시 한 번 아픈 고함을 질러본다. SFC가 교회중심으로 돌아와 옛적같은 고신신앙을 회복하고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계승할 수만 있다면 “SFC 폐지”라는 소리를 천번 만번 듣는다 해도내 기꺼이 감당하리라 다짐한다. 파사현정(破邪顯正), ‘물이 빠지고 나니, 돌이 드러난다’는 뜻이다. 사탄의 전략핵심은 탈교회운동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중심하지 않는 것의 결과는 자동적으로 거짓과 탐욕, 불의와 부정이 판치는 행보를 걷게 된다. 이런 SFC의 현실을 보며 파사현정하는 심정으로 호소한다. 이제는 SFC가 ‘변질’의 길에서 돌아서서 진정한 개혁주의 신앙으로 ‘변화’되기를 갈망하며 저와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 함께 파사현정(破邪顯正)하는 일을 감당하기를 진심으로 소망해본다. ※ 독자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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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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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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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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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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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신, 우이독경(牛耳讀經) 교단과 대학교
- 지난 글에 대한 반론이 나왔습니다. 고신대학교 모 교수님이 쓴 글입니다. 반론이라는 말 자체는 없지만, 내용을 보면 반론이 확실합니다. 아무런 반응이 없을 것이라 짐작했던 터라 이 반론이 참 반갑기도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내용은 ‘우이독경(牛耳讀經)’,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지난 글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염려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본질을 흐리는 말싸움, 감정싸움으로 비치지 않길 바랍니다. 한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이번에 나온 반론도 ‘위기’, ‘골든타임’을 표면적으로는 인정하는 듯 보이니까 말입니다.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지난 글에서 지적하고자 했던 것은 간단합니다. “언제까지, 얼마가 필요한가?” 다시 설명해 드립니다. ‘골든타임’으로 접어든 ‘위기’의 고신대학교에 관한 교단 지도자들의 책임 있는 대안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교단 지도자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작금의 이런저런 노력이 귀하지 않다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와 성도를 설득해 기부금을 받는 정도의 방법이 주요 대안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본질을 해결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고신 내부의 큰 소리를 들어달라는 겁니다. 지금까지 고신교단의 교회는 고신대학교를 위해 헌신해 왔습니다. 그런데 ‘위기’와 ‘골든타임’이라는 상황에 다시 더 큰 기부금을 요청하며 걷고 있습니다. 기도회를 하면서 말입니다. 저의 제안은 언제까지, 얼마를 기부해야 하며,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묻는 것입니다.그것이 어떤 것이든, 이제는 정확한 판단과 분석이라는 것을 보고 싶고, 봐야 할 때라서 그렇습니다. 저는 저의 이 제안이 간단명료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론을 보니 제 제안이 어려운 모양입니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장황하지도 않은 장황한 역사만늘어놓았습니다. 2003년, 2014년, 2015년의 이야기가 지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본질을 흐리고 있습니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73회 총회가 드디어 제대로 된 대책을 내며 일을 시작했다는 생색뿐입니다. 과거의 장황한 역사를 꼬집은 것은 이 ‘생색’을 돋보이게 하는 양념이었군요. 책임져야 할 자들은 따로 있는데, 왜 ‘우리’(?)에게 말하느냐는 마음이 행간에 엿보입니다. 설명이 어려운 듯하여 다시 설명해 드립니다. 과거에는 전혀 기부금이 없었습니까? 역대 최고 수준의 기부금을 언급하는데, 이것이 고신대학교를 살릴 수 있습니까? 이 노력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된 판단과 분석을 토대로 노력하자는 겁니다. 본질을 흐리지 마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고신대학교의 상황에 관한 미화뿐입니다. 과거에는 전혀 기부금이 없었고, 과거에는 교직원들의 헌신이 없었습니까? 교수의 81%, 직원의 42%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면, 교수의 19%와 직원의 58%와는 갈등이 없습니까? 내부적으로 나오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겁니까? 아니면 듣기 싫은 겁니까? 지금 모든 지방 사립 대학은 연합 대학을 통해서라도 글로컬 대학에 진입하는 일에 대학의 사활을 걸고 있는데(참고, https://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558472), 글로컬 대학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주장은 도대체 어떤 근거와 데이터를 가지고 하는 말입니까? 대학에 몸담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본질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카테고리가 헷갈리거나, 아니면 호도(糊塗)하는 유희삼매(遊戱三昧)만있습니다. 교육부와 지자체가 발주하는 사업에 참여한 결과로 받은 금액이 64억 중 교직원 인건비, 학교 운영비로 지출된 금액이 1원이라도 있습니까? 이 금액은 그야말로 프로그램을 위한 비용입니다.혹시 64억을 받아 학교 살림이 나아졌는데도 ‘위기’와 ‘골든타임’에 동조하며 계속 모금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계시는 겁니까? 반론자도 고신대학교의 문제가 학령인구 감소와 그에 따른 재정위기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안으로 학생들이 공부와 자기 발전을 위해 열심히 하는 것을 제시하다니요? 또한, 구조조정을 언급하면서 실제적인 문제를 언급하는 일반적인 상식은 ‘세속적인 사고방식’으로 무시하면서 교직원 연봉의 십일조를 자발적으로 기부하는 것을 언급하다니요? 도대체 구조조정과 연봉의 십일조 기부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이것이 어떻게 전체 고신대학교를 위한 상생이 되는지요? 수익 구조 다각화에 대한 노력과 5년 재정 구조에 대한 정밀 시뮬레이션 완성? 좋습니다. 바로 이런 대책을 내놓으라는 겁니다. 본질을 흐리지 말고, 그 방법을 고신대학교를 위한 더 큰 헌신과 헌금을 요구하는 고신 교회 앞에 설명해 주십시오. “모금하다가 안 되면 할 수 없고”라는 식의 미봉책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동참하지 않는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의 염려와 중심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분들의 ‘고신 사랑’을 폄하하지 마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가짜 뉴스라는 지적만있습니다. “재학생 등록률과 신입생 충원 결과를 보면 1년 100억 적자가 날 것이 분명한 사실인데”라는 표현이 가짜 뉴스인가요? 제 나름대로 정보를 통해 파악한 금액입니다. 저의 부족함 때문에 계산상 조금의 오류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정확한 정보를 주는 이가 없으니 그럴 수 있지요. 그런데 이게 가짜 뉴스라고 지적받을 표현인가요? 그렇다면 반론자는 자료를 다루는 교수 아닙니까? 병원의 적자는 어떻습니까? 학교법인 고려학원의 적자가 100억 이상 나는 것이 가짜 뉴스라면, 본질을 흐리지 말고, 진짜 뉴스로 ‘정확한 적자 금액’을 분명히 밝혀주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오히려 가짜 뉴스만 있을 뿐입니다. “혹자는 의대와 복음병원을 헐값에 인수하려는 사람들과 모의를 벌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동안 위기라고 말만 하면서 오히려 잘못된 과장 정보로 위기를 부풀리기만 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면...”??? 신학교수인 반론자는 정말 신앙 양심에 화인을 맞았습니까? 십계명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동료를 향한 가짜 뉴스를 은근히 양산하는 말장난을 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잘못된 과장 정보로 위기를 부풀렸다면, 지금 반론자가 말하는 위기와 골든타임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이 정도 매너의 교수가 신학교수로 학교 강단에 있는 고신의 현실이 개탄스럽기까지 합니다. 본질을 흐리는 공격을 멈추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책임질 수도 없고, 책임질 생각도 없는 나팔수의 아부만 있을 뿐입니다. 도대체 교수님은 우리 고신교단과 고신대학교에서 어떤 책임 있는 자리에 있습니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개진하는 것은 신자 개인의 자유이나, 총회와 고신대학교를 대변하는 듯한 이런 주장으로 교단과 고신대학교를 갈라치기 하는 (파탄 내는) 논쟁으로 몰아가는 것은 나팔수의 아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이것이 극단적인 분리주의 사고방식인 것은 모르실 리 없겠지요. 본질을 흐린 채 말장난, 정중하고 정확한 논의를 촉구합니다. 정확한 사실을 제시하는 책임 질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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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신, 우이독경(牛耳讀經) 교단과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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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통합 기념 한마음교회 유감
- 폭염입니다. 여름의 태양이 작열하는 계절! 이 여름에 우리 주님 다시 오신다면 태양처럼 뜨거운 신앙 열정을 가진 사람을 찾으실 것 같습니다. 사역의 현장마다 여름 태양보다 더 뜨거워서 주님의 칭찬을 받는 우리 교단 교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듯이 우리는 성공적인 교단통합을 이었습니다. 그 통합기념으로 한마음교회를 설립한 것입니다. 전국 노회와 교회들이 마음과 기도와 물질을 모아 세운 기념비적 통합기념교회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통합기념 한마음교회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는지요? 통합기념 한마음교회는 고신교단의 여러 어른들과 선배 목사님들 그리고 총회 임원들 그리고 (구)고려의 선배들과 임원들이 힘들게 이루어낸 통합의 금자탑이며 결정체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 교회의 지 교회가 되어있습니다. 교단통합을 하면서 기념으로 교회를 설랍(립)하되 (구)고려측의 목회자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설립한 교회가 바로 한마음교회입니다. 그런데 (구)고려측의 일대 한마음교회 전임목사는 당회장권 한번 갖지 못하고, 고초를 겪다가 사임하였습니다. 한마음교회 담임목사에게 이러저런 이유로 당회장권을 이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2년 동안 무려 6번이나 당회장을 바꾸면서 힘들게 했습니다. 이런 상식 밖의 이상한 일이 통합기념 한마음교회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안양일심교회 부목사로 사역했던 이 모 목사가 담임으로 있습니다. 안양일심교회가 물심양면으로 많은 부분을 헌신한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전국 노회와 교회의 헌금으로 세운 통합기념교회를 일심교회 40주년 지교회로 삼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결과론적으로 유감스럽게도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위한 목적헌금이 한 교회의 지교회를 설립하는데 사용되는 어처구니 없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교단 전체가 바로 알고, 바로 잡아야 하겠다는 결연한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우리가 하나의 교단으로 통합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처음의 약속과 결의가 깨짐으로 아름다운 통합정신이 훼손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지만, 특히 (구)고려 측 형제들에게 깊은 상처를 준 아픔이 된 것입니다. 이런 사태로 인해 안양일심교회와 당회장은 (구)고려 측 형제들로부터 신뢰를 잃었고,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미안했던지, 무마하려고 (구)고려의 어려운 분들을 후원하겠다고 접촉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고려 목사들은 의도가 순수하지 못한 후원금을 받을 리 없지 않습니까? 지난해부터 제안하는 후원금을 거부해 왔습니다. 올해 들어와서 또다시 (구)고려 동문회에 7천만원 정도를 후원하겠다고 제의를 해왔지만 코로나로 인해 어려운 교회와 선교사들이 많이 있었지만 통합기념교회를 세우려는 큰 뜻이 있기에 거절했던 것입니다. 급기야는 비공식 채널을 통해 기어코 후원을 했습니다. 공식적으로 거부했는데도 비공식체널을 통해 기어코 다수의 교회에 상당한 후원을 감행한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저도 부교역자 약 10년, 한 교회 담임목회를 27년째 하니 37년 사역을 하며 산전수전공중전까지 다 겪은 사람입니다. 교회의 내부 사정이 있어 그렇겠거니, 일면 이해가 가지만, 그렇지만 한마음교회의 문제는 양 교단 통합기념 교회인만큼 그냥 넘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전국 노회와 교회의 헌금은 통합기념교회를 설립하기 위한 목적 헌금입니다. 그 목적대로 쓰이지 않았다면 바로 잡는 것이 마땅합니다. 따라서 교단 70주년을 맞아 통합기념교회를 다시 세우려는 계획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국 노회와 교회의 후원금 13억여원은 교단통합의 정신과 기념을 담는 명실공히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위해 쓰여져야 할 것입니다. 안양일심교회는 고신교단의 대표적인 큰 교회 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당회장 김홍석목사님은 앞으로 총회에 큰 일을 감당해야할 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중대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고 교단의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안양일심교회 김홍석목사는 통합기념 교회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하는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보여할 것입니다. 이것이 (구)고려측 대부분 형제들의 일치된 생각입니다. “순교자의 고장! 진리의 파숫군! 경건자의 훈련소, 예수의 제자들이 일어나는 산실!” 그 교단이 우리 고신 입니다. 저는 우리 교단의 일원이고 교단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고신의 목사로 함께 사역함이 늘 감사합니다. 저는 고신인이 된 것이 좋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뒤를 이어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 정신을 이어가는 우리 교단이 좋고 자랑스럽습니다. 그 어떤 일보다도 고신과 고려의 통합이 자랑스럽습니다. 통합 후 (구)고려 동문들이 연합하여 학원이사로, 고신세계선교회 이사로, 이단사이비연구소장으로, 동문회 임원으로. 각 상비부에서... 각처에서 활약하는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운 하모니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통합입니다. 이렇게 배려해 주고, 사랑해주는 우리 ‘고신’이라는 이름이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따라서 통합기념교회가 다시 설립되어 통합정신이 훼손되지 않고 계승되어 아름다운 교단을 잘 보전하고, 또 더 아름답게 발전되기를 기원하는 바램을 담아 이 글을 씁니다. *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이행하라! * 전국 노회와 교회의 목적 헌금을 반환하라! 2022년 7월 중순 신앙 열정이 여름 태양처럼 뜨겁기를 기도하며... ※ 기고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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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통합 기념 한마음교회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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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안녕, 대전(大田) : “전학왔니더”
- “푸를 청(靑), 소나무 송(松). 청송에서 대전으로 전학왔니더.” 전학 수속이 끝나고 들어간 교실. 담임 선생님께서 친구들에게 자기소개를 해보라 말씀하셨다. 나는 큰 소리로 나의 고향 이름을 소개하며 인사했다. 아이들이 나의 인사보다 더 크게 웃는다. 왜 웃을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선생님께서 정해주신 빈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와 다르게 아이들 얼굴이 뽀얗다. 우리 엄마가 읍내에서 사준 이랜드 옷이 촌스럽게 느껴졌다. 어쩐지 다들 공부도 잘 할 것 같다. 주눅과 함께 찾아든 두려움도 잠시. 쉬는 시간에 몰려든 아이들의 질문 세례에 정신이 없었다. 자꾸 말을 시킨다. 그리고 아이들은 더 크게 웃는다. 아마도 나의 사투리가 재미있고 신기했던 것 같다. 대놓고 놀리는 것은 아닌데 뭔가 찝찝하다. 촌놈 하나 전학 오니 신기해서 구경하러 온 느낌이다. “뭐여~ 내가 언제~” “니가 그랬잖여~ 왜그랴~” 나를 구경하러온 친구 무리와 떨어진 곳에서 조금 큰 소리가 난다. 제법 덩치 큰 남자 아이 둘이서 대화를 하고 있다. 내게 몰려든 아이들이 이제 그쪽으로 몰려간다. 아직은 인사도 제대로 못한 옆 짝에게 상황을 물어보았다. 큰소리로 대화하는 두 명의 친구, 그곳으로 몰려드는 아이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첫인상이 좋았던 짝은 웃으며 답한다. “응, 쟤들 싸우는 거야. 그래서 구경 간거지모.” 응? 싸우는 것이라고? 저렇게 느린 말로, 저렇게 너그러운 톤으로 싸움이 가능하단 말인가? 내가 있던 경상도에서는 싸움이 나면 일단 말로 여럿 죽인다. 목소리도 얼마나 큰지 말한 대로 곧 실천할 것 같은 위협이 느껴진다. 경상도 말은 나름 살가운 인사도 종종 살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오해를 받기도;; 뭔가 대전 친구들은 푸근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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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안녕, 대전(大田) : “전학왔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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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여는 시 [신광열 목사] 걱정
- 사람이 없어 걱정이다 강 같은 어머니가 없고 산 같은 아버지도 없다 길 같은 선생님도 별 같은 지도자도 흙 같은 목회자가 없어 참으로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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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여는 시 [신광열 목사]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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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50원만 빌려주세요.”
- 나는 유치원을 다녀보지 못했다. 아침에 노란 가방을 매고 내가 알지 못하는 곳을 향하던 소수의 친구들이 조금 부러웠다. 얼핏 구경을 해보니 유치원은 노래를 부르고, 놀이를 하고, 그림도 그리는 곳이었다. 나는 그 시간이 되면 동생과 함께 시장터를 누비고 다니거나 빈 땅에 구멍을 만들어 구슬을 던지고 놀았다. 하지만 나도 이제 정해진 시간이 되면 당당히 가방을 매고 갈 곳이 생겼다. 어머님께서 일 나가시기 전에 왼쪽 가슴에 달아주신 손수건. 자그마한 플라스틱 통에 밥과 반찬 두세 가지를 넣어 챙겨주신 도시락. 나는 이제 자랑스러운 ‘청송국민학교’ 학생이 된 것이다. 유치원을 다녔던 친구도, 나와 함께 동네를 누비던 친구도, 같은 동네 살면서도 얼굴을 잘 몰랐던 친구도. 이제는 같은 공간에 모여 함께 공부하고 노래하고 공을 찼다. 오늘은 엄마가 아프다. 늘 힘든 일을 하시더니 병이 나신 것 같다. 학교를 오기는 했는데 오늘은 도시락을 준비하지 못했다. 점심을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다가 즐기지는 않지만 오늘은 빵으로 한 끼를 해결할까 싶다. 나의 플라스틱 필통은 수납공간이 많다. 버튼을 누르면 여기저기 문이 열린다. 늘 지우개를 넣어두던 그곳을 열어보니 50원이 나온다. 우유는 학교에서 받은 것이 있고, 빵만 사면 되는데 50원이 부족하다. “선생님요, 50원만 빌려주면 안돼요?” 교탁 옆 개인책상에 앉아계신 담임 선생님께 당당하게 요구했다. 어떤 자신감이고 무슨 여유였을까? 분명한 것은 선생님이라는 분은 그 정도 재력은 있다고 믿었고 나에게 빌려주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뻔뻔함도 늘 누울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었으니깐. 선생님께서는 50원의 용처를 물으셨고 역시나 당당하게 내가 가진 50원에 보태어 빵을 사먹으려고 한다고 대답했다. 50원은 내 손에 쥐어졌다. 성공. “선생님, 내일 엄마한테 받아서 꼭 갚을게요.” 그렇게 빵으로 한 끼를 해결하고 온 아들을 맞이하는 어머님 표정이 묘했다. 담임 선생님께서 집에 전화를 하셨단다. 어머님은 너무 부끄러웠다며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 타이르신다. 하지만 돈도 잘 갚고 내 배도 채운 아름다운 상황에서 나는 아직도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다. <삽화작가 : 김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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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50원만 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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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선생님요, 청소 다했니더
- 이제 익숙해진다. 등굣길, 학교 앞 문방구, 버스타고 30여분 가면 나오는 시내라는 곳. 그리고 아이들의 사투리까지도. 요즘 나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절대 사투리를 배우지 않겠다는 것. 물론 지금 내가 사용하는 경상도 말도 사투리다. 하지만 이곳에서 다시 배우는 말은 사투리가 아니면 좋겠다. 그래서 결심했다. 표준어를 배우기로. 대전생활이 시작되었지만 이곳 말을 배우지 않기 위해 나는 좋은 표준어 선생님을 모셨다. “텔레비전”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서울말을 쓴다. 유심히 살펴보며 조용히 따라해 본다. ‘에잇 닭살!’ 어색하고 좀 부끄럽다. 경상도 사투리가 익숙한 내가 표준어 연습을 하고 있으니 스스로가 용서가 안 되는 느낌이다. 고향을 배신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 삶을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계속 텔레비전 앞에서 자리를 지킨다. “기여?” - “그래요?” 대전에서 아이들이 자주 쓰는 말을 일부러 표준어로 바꿔서 다시 연습해 본다. 절대 “기여?” 이 말은 안 쓸 것이다. 이 말을 쓰는 순간 나는 그냥 충청도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반드시 이 기회에 표준어를 배우리라. 제법 학교 적응도 잘되고 있고, 염려했던 것들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학업 성적도 1-2등을 유지할 수 있었고... 물론 내 성적이 발표될 때 담임 선생님과 친구들이 많이 놀랐다. 조금 불쾌했다. 왜 놀라지? 나는 이제 ‘시골에서 전학 온 애’에서 ‘시골에서 전학 왔는데 공부 잘하는 애’가 되었다. 그리고 여자 아이들이 주번이라서 무거운 물주전자를 들고 오면 대신 들어주기도 하는 매너남이 되었다. 모든 아이들이 청소를 안 하고 도망가도 남아서 청소의 끝을 보는 성실남이 되어 있었다. 오늘도 함께 청소해야 하는 아이들은 도망갔고 기다란 학교 스탠드를 혼자 모두 쓸어냈다. 청소가 끝났으니 이제 교무실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한다. “선생님요~ 청소 다했니더.” 아, 나는 오늘도 말 한마디에 교무실 선생님들을 다 웃겨버렸다. 완벽한 표준어를 구사하셨던 텔레비전의 스승님들께 면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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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선생님요, 청소 다했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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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안녕, 대전(大田) : “전학왔니더”
- “푸를 청(靑), 소나무 송(松). 청송에서 대전으로 전학왔니더.” 전학 수속이 끝나고 들어간 교실. 담임 선생님께서 친구들에게 자기소개를 해보라 말씀하셨다. 나는 큰 소리로 나의 고향 이름을 소개하며 인사했다. 아이들이 나의 인사보다 더 크게 웃는다. 왜 웃을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선생님께서 정해주신 빈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와 다르게 아이들 얼굴이 뽀얗다. 우리 엄마가 읍내에서 사준 이랜드 옷이 촌스럽게 느껴졌다. 어쩐지 다들 공부도 잘 할 것 같다. 주눅과 함께 찾아든 두려움도 잠시. 쉬는 시간에 몰려든 아이들의 질문 세례에 정신이 없었다. 자꾸 말을 시킨다. 그리고 아이들은 더 크게 웃는다. 아마도 나의 사투리가 재미있고 신기했던 것 같다. 대놓고 놀리는 것은 아닌데 뭔가 찝찝하다. 촌놈 하나 전학 오니 신기해서 구경하러 온 느낌이다. “뭐여~ 내가 언제~” “니가 그랬잖여~ 왜그랴~” 나를 구경하러온 친구 무리와 떨어진 곳에서 조금 큰 소리가 난다. 제법 덩치 큰 남자 아이 둘이서 대화를 하고 있다. 내게 몰려든 아이들이 이제 그쪽으로 몰려간다. 아직은 인사도 제대로 못한 옆 짝에게 상황을 물어보았다. 큰소리로 대화하는 두 명의 친구, 그곳으로 몰려드는 아이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첫인상이 좋았던 짝은 웃으며 답한다. “응, 쟤들 싸우는 거야. 그래서 구경 간거지모.” 응? 싸우는 것이라고? 저렇게 느린 말로, 저렇게 너그러운 톤으로 싸움이 가능하단 말인가? 내가 있던 경상도에서는 싸움이 나면 일단 말로 여럿 죽인다. 목소리도 얼마나 큰지 말한 대로 곧 실천할 것 같은 위협이 느껴진다. 경상도 말은 나름 살가운 인사도 종종 살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오해를 받기도;; 뭔가 대전 친구들은 푸근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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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안녕, 대전(大田) : “전학왔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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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안녕, 청송(靑松) : 촌놈 유학을 떠나다
- 1년에 한두 번, 외가댁에 갈 일이 아니면 지나지 않는 길이다. 오르락내리락, 구불구불, 휘청휘청. 아스팔트와 푸른 산만 보이는 이 길은 여전하다. 여전한 것이 또 하나 있다. 늘 그 지점이 되면 어머님이 아버지를 황급히 부르며 차를 세우신다. “차 좀 세워줘!” 참지 못하고 오늘도 엄마는 멀미의 끝을 보여주신다. 늘 같은 지점에서 그러는 엄마가 어린 내 눈에도 신기하다. 온 가족이 그런 엄마를 놀린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엄마가 차에 다시 타시고도 여전히 삼부자는 유일한 여성인 ‘한정혜’씨를 놀려먹는다. 차는 다시 그렇게 대전을 향해 출발한다. 나는 오늘 전학을 간다. 고향과 부모님과 이별을 하게 되었다. 두 살 어린 동생과 함께 대전이라는 낯선 곳에서 외할머니와 생활을 하게 되었다. 어머님은 그것을 유학이라고 하셨다. 입학 후 5학년까지 늘 최상위 학업성적을 유지하며 반장을 한 번도 놓치지 않은 아들이 시골에서 살기에는 아까우셨단다. “대전에서 동생과 같이 살 수 있겠어? 엄마, 아빠는 너희가 가서 공부도 잘하고 성공한 사람이 되면 좋겠어.” 우리 부모님은 인격적이시다. 우리에게 의견을 물어오셨고 나는 크게 망설임 없이 가겠다고 대답했다. 두렵지는 않았다. 가서도 공부 잘 할 자신이 있었고, 부모님이 보고 싶어서 징징거리지도 않을 것 같았다. 다만 전교어린이회장을 못해보고 떠나는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게 1톤 트럭은 어느 때 보다 가볍게 우리 네 식구를 태우고 열심히 달린다. 카세트에는 구수한 ‘김란영 카페음악’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늘 나오던 노래였기에 나도 익숙함에 같이 흥얼거린다. ‘안녕, 청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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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철 목사] 안녕, 청송(靑松) : 촌놈 유학을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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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코미디 리그’ 같은 총동창회 임시총회
- 정기총회의 공과 지난 5월 총동창회 정기총회는 그동안 총동창회를 위해 수고한 임원들의 공을 무시하거나 부인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이전까지의 특별한 사정으로 인해 간접추천, 추인 등의 절차를 따라 임원들이 세워질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이해된다. 총동창회 회원들의 미온적인 협력이 결국은 그런 행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이해된다. 그러나 이제는 한 번 바꿔볼 때도 되었다. 마치 어느 특정한 그룹의 밀실 야합적인 모습으로 임원들을 줄 세우기식으로 추천하였고, 총동창회를 위해 적극적으로 일을 해 보고자 하는 회원들의 임원출마가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 이러한 절차를 따른 총동창회의 임원선거는 동창회의 발전적인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뜻있는 회원들이 공회 앞에 합법적인 발언 기회를 얻어 의제를 제시하였고, 의제에 대한 다양한 토론과 격론 끝에 상정된 의제를 표결에 붙여서 회칙이 수정되었다. 개정된 임원선거 규칙은 공천위원 추천제에서 본회에서 직접추천, 혹은 자원하는 방식으로 바꾼 것이다. 개정된 규칙에 따라 적법하게 임원선거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를 문제 삼는다면, 이는 분명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는가? 아니나 다를까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특정인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정치적인 입김으로 이상한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정기총회를 통하여 선출된 회장을 불신임하는 형태를 취하고 다시 추대하여 보선한 초법적인 행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적법한 정기총회를 뒤집은 불법적인 임시총회 총동창회는 2021년 5월 24일 오후1시 신대원101호 강의실에서 개최한다고 공고하였고, 그 일정에 따라 총동창회 정기총회는 회집된 회원으로 개회되었다. 총회는 회순에 따라 적법하게 진행되었고 임원 개선과 안건을 다루고 폐하였다. 그런데 전임회장단은 총동창회 회칙 12조 2항에 수석부회장을 수정하지 않아 그대로 살아 있고, 13조 1항에 ‘수석부회장은 당연직으로 추대’로 전년도 총동창회 총회에서 받았는데, 이를 지키지 않은 것은 불법이라고 주장하면서 200여명의 서명을 받아 임시총회를 요구하였고, 그에 따라 총동창회 임원회는 임시총회를 받아 들여 공고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정기총회를 불법적인 임시총회로 뒤집은 초유의 사태이다. 무엇보다 지난 정기총회는 수석부회장을 당연직으로 추대하는 것을 본회에서 직접 추천하여 투표하도록 개정하였기 때문에 적법한 절차를 밟은 것이다. 만일 그것이 부당하다면 당시 정기총회에서 의견을 개진하여 관철시켜야 마땅한데, 정기총회가 폐한 후에 문제를 삼아 임시총회를 요구한 것은 다분히 정략적이며 정당하지 못한 처사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임시총회를 적어도 1주일 전에는 공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보에 7월10일자에 공고하여 절차에 문제가 있다. 그리고 임시총회 소집 요건에 보면 1)적법절차에 따른 임원 구성(보선)과 2)회칙보완 수정이라고 명시 했다, 그런데 어떻게 적법한 절차에 따라 선출된 회장을 다시 받을 수 있는가? 그 자체가 불법일 뿐 아니라 상정된 안건도 아니기 때문에 초법을 자행한 것이다. 따라서 이는 명백한 불법이다. 이렇게 볼 때, 불법적인 방법으로 선출된 현 회장은 그 정당성을 상실했다. 그리고 서명한 회원200명에 절반도 못 미치는 61명(전임회장 9명과 임원 14명, 담임목사, 부목사)이 참석하여 정기총회를 한지 불과 한 달 남짓 만에, 재론하여 회칙을 수정하고, 임원을 개선하는 불법적인 전횡을 저지른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임시총회소집이란 말은 이미 정기총회를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임시총회를 주장하는 이들은 이미 스스로 정기총회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만약 정기총회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불법총회로 규정하고 정기총회 소집을 요구해야 마땅하지 않는가? 이상한 임시총회 사회 금번 총동창회 임시총회(21.07.16) 개회 시 지난 정기총회를 통해 선출된 회장으로 하여금 회의를 주재하게 한 것은 이미 정기 총회에서 선출된 회장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임시총회는 임원 개선에 들어가면서 정기총회에서 선출된 회장을 단상에서 내려오게 하고, 전임 회장이 회의를 진행하고 임원 개선을 했다. 이는 법과 상식을 뛰어넘는 불법적인 임시총회이다. 전임회장은 이미 정기총회를 통하여 그 실효가 상실되었다. 그런데 적법한 회장을 의장석에서 내리고 무슨 자격으로 버젓이 회의를 주재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권한남용이라는 말 자체를 사용하기도 부끄럽다. 그리고 전임회장이 의장석을 차지하고 회칙을 수정하는 것을 주재하였고, 임원을 개선하였다. 더욱이 해괴한 일은 다른 임원 개선한 것은 차제하고 전년도 회칙을 들어서 수석부회장으로 있었던 김홍석 목사를 회장으로 추대한 후에 본인이 출석하지 않았기에 사의한 것으로 하고 정기총회에서 선출된 회장을 다시 받았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이상한 임원개선이며, 이는 총동창회의 정기총회를 기만하였고, 또 총동창회 자체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회의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비상식적이며, 불법적인 처사임이 분명하다. 코미디 같은 이 회의 진행에 동의하고 박수를 친 회원들은 상식과 법을 어떻게 알고 동의한 것인지 진심으로 물어 보고 싶다. 전임회장들의 놀이터가 된 임시총회 어느 모임이든 전임회장들은 그 경륜으로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 영향은 미미하면 미미할수록 좋다. 한 교회에 원로목사는 담임목사가 전체적으로 교회를 이끌어나가도록 온전히 뒤에서 기도하며 도우는 것이 은혜로운 교회이고 정상적이 아닌가. 이런 상식과 윤리가 지켜지지 않고 문제되어 상당한 어려운 교회들을 종종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총동창회에서도 전임회장들은 그야말로 전임회장이어야 한다. 전임회장이 상왕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금번 임시총회 건에도 전임회장들이 소위 총동창회를 바르게 세운다는 미명 하에 도에 넘치는 개입으로 총동창회를 불법의 장으로 만들어 버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차하면 세력으로 임시총회를 요구하여 정기총회를 완전히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아주 나쁜 선례를 만들었다. 설령 지난 5월 개최된 정기총회가 본인들의 생각에 못 미치는 것이라 할지라도(결코 그렇지 않지만), 전례 없는 임시총회 개최를 조종하여 코로나 상황에서 진행한 행동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임시총회가 전임회장들 발언의 전유물처럼 여기고 전횡을 휘두르므로 총동창회의 격을 완전히 실추시켰다. 적어도 전임회장들이라면 정기총회에서 진행된 것을 존중하고, 문제점이 있을 때 그것을 차기 총회에서 정당하게 처리하도록 지도하는 것이 전임회장의 처신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총동창회 재정 통장 관리의 이중성 총동창회의 재정운영은 노회에 참여하는 목사회원들에게 소위 협동총무라는 굴레를 씌워 그들로 하여금 반강제적으로 각출하게 하여 회비를 수령하고 있다. 장학금 등으로 후배들과 신학교를 위해 사용한다니 대부분의 목사들은 아무런 반론 없이, 회비 각출에 순응하여 지불한다. 총동창회의 운영을 위한 수입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신대원 장학금 명목으로 전체 회원을 상대로 봄. 가을 노회 시마다 일년에 두 번씩 거두어 가는 회비이고, 둘째는, 임원들의 임원 회비이고, 셋째는, 총동창회 부부수련회를 위한 목사들과 전국교회 후원금이다. 이 세 종류의 수입에 관하여 정기총회에서 종류별로 상세하게 보고되지 않고 있다, 임원회비는 용인된다 할지라도, 총동창회 부부수양회 시에 전국 교회에서 부담한 후원금은 결국 총동창회의 공적인 재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재정의 지출에 대해 정기총회에서 공개적, 구체적, 객관적인 보고를 해야 할 것이다. 총동창회의 공식 행사에 대한 재정보고는 반드시 총회에서 보고되어야 할 것이다. 개정된 회칙은 즉시 발효되는 것이 통상이다. 어떤 회든지 개회가 선언되고, 절차에 따라 진행될 경우 회칙수정을 하고, 그 수정된 회칙에 따라 임원개선이나 사업 등이 논의된다. 회칙수정이 앞부분인 것은 그 수정된 것으로 회의를 진행하기 위한 것이 주 이유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정된 회칙은 즉시 발효한다고 것이 회칙의 통상이다. 그런데 즉시 발효하도록 개정한 것을 두고, 악의적인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한 회기, 아니 체 두 달이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몇 몇의 입김에 의해 종잇장 뒤집듯이 뒤집는 것은, 그야말로 전제정치가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고려신학대학원 총동창회는 어떤 특정한 그룹의 전유물이 아니다. 어떤 특별한 힘이 있는지 모르나 왜 이렇게 전임회장들이 그 입김을 행사하려고 하는지, 그것이 진정한 애정인지, 아니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묻고 싶다. 순수한 친목 단체인 총동창회를 정치 단체로 이용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한다. 어디든 완전한 것은 없다. 불완전한 것이라도 인정하고, 순리를 따라 시간을 갖는 것이 더 옳은 방법이다. 이번 임시총회는 코미디 중의 코미디를 보는 것 같았다. 이렇든 저렇든 원하는 바를 얻게 되었다고 자위하는 부류들도 있겠지만,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차후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전임회장들이 행동한다면 향후 총동창회에 일어나는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인지해야 할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 코로나19의 변종으로 인해 교회의 예배가 위협을 받는 상황에, 당장 오는 주일 예배가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 심각한 상황에 총동창회가 모여야 할 명분이 무엇인가? 예배를 지키기 위하여 헌법소원을 하며 사투를 벌이는 상황보다도 어떤 더 중요한 명분이 있는지를 묻고 싶다. 만약에 감염의 문제가 발생하면 학교와 고신교회의 치명적인 타격이 분명한데도, 예배보다도 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겁쟁이 고신의 목사들이 그렇게 용감하게 모여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 기고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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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코미디 리그’ 같은 총동창회 임시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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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신 총동창회의 순수성이 그대로 유지되길 바라며
- 총동창회 총회가 지난 4월26일 있었다. 이미 한 달이 지나갔다. 여러 가지 논란들이 지면상으로 오갔지만, 동창회원들의 각자의 판단에 맡기고 새롭게 출발한 임원들이 총동창회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도록 힘을 실어주어야 할 시점이다. 그런데 그 날 41회 총회가 어떻게 진행 되었는지 정확한 사실과 절차 과정을 직접 보지도 않고 제삼자와 지면으로만 접한 회원이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하고 있음에 진실로 총동창회를 위한 순수한 뜻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인지 그 저의가 의심스럽다.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SNS상으로 퍼 날라 총동창회에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에 부득이 엄중한 마음으로 총동창회의 순수성이 그대로 유지되길 바라며 당시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1. 41회 총동창회 총회는 적법한 절차에 따랐다. 총회는 상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회의 규칙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다. 그 적법한 절차에 의해서 진행되었기에 41회 총동창회는 매우 상식적이었다. 만약 총회 회의 진행상 어떤 불법이 있었다면 그 현장에서 불법성을 따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미 끝난 총회를 장외에서 진행 과정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것은 그 자체가 다분히 다른 <정치적인> 의도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갖게 만든다. 총동창회 회칙의 임원 선출 1항에 보면 ‘수석부회장은 당연직으로 추대하여 총회에서 인준을 받는다.’ 고 규정하고 있는 것은 자동으로 회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추대하여 인준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 만약 인준을 받지 못하면 회장이 될 수 없다. 그리고 41총회는 회칙의 심의와 변경 절차를 거쳐서 “임원 선출 (1)회장 1인, 부회장 10명 내외, 총무1인, 부총무 약간 명, 서기1인, 부서기 1인, 회계1인, 부회계 1인으로 한다. (2) 모든 임원은 본회에서 추천을 받아 직접 선출한다.” 로 개정되었고, 그 개정된 회칙에 따라 회장이 선출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 현장에서 전년도 총회를 존중하여 수석부회장을 회장으로 추천했지만 본인이 본회 앞에서 고사한 것이다. 결코 그 당사자를 배제하지 않았다는 점을 밝혀 둔다. 차제에 아주 중요한 원칙을 밝혀 두고자 한다. 적법하게 개정된 신법은 구법에 우선하는 것이 신법 우선원칙이고 질서의 원칙이고 상식이다. 이러한 법리를 무시하는 그 자체가 지극히 비상식이며 이를 문제 삼는 것은 법질서를 범한 것에 준하므로 자숙하기 바란다. 2. 총회에서 회칙심의와 변경은 정상적인 절차인데, 이를 문제 삼는 것이 비정상이며,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지 강한 의구심이 든다. 제41회 총회에서 회칙 제13조 (임원의 선출) 1항 회장 1인, 부회장 10명 내외, 총무1인, 부총무 약간 명, 서기1인, 부서기 1인, 회계1인, 부회계 1인으로 한다고 개정되었기 때문에 “제12조 (임원) 2항은 해당 없으므로 자동으로 삭제되는 것이다. 그 조항이 그대로 있다면 수정 과정의 오류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를 근거로 ‘선거 결과 자체를 무효로 만들 만큼 심각한’ 흠결이 있는 것처럼 적시한 것은 매우 경솔하고 과장된 주장이며, 총동창회 총회의 권위를 훼손할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을 주지하기 바란다. 그리고 법이 개정되면 즉시 발효되는 것이 상식이다. 차기 총회부터 발효된다는 것은 결코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이는 필시 의도하는 바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공천위원의 병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공천위원을 두는 것은 자기들만의 리그로 만들고 싶은 발상이었다고 본다. 그 대표적인 예가 수년간 실무임원으로 큰 과오 없이 헌신적인 봉사한 회원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사람을 세우기 위해 결격 사유가 없는데도 임원에서 제외했다. 이것이 바로 명백한 공천에 평형성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2012년 제32회 총동창회 이전과 제33회 총동창회 이후 임원선출회칙이 완전히 바뀌어졌다. 제32회 이전에는 총회에서 부회장을 직접 선출하고 그 중에 다 득표자가 수석부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런데 제33회부터는 전임회장단이 공천하여 총회의 인준을 받는 형식으로 변경되었다. 짐작컨대 제33회 그 당시에도 총동창회를 섬기고 싶은 마음에서 회원들의 지지를 받으려는 회원도 있었을 텐데, 회칙 수정됨으로 원천적으로 그 기회가 차단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잡음과 문제를 제기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신사적으로 수용했다는 빙거가 아닌가? 그것이 성숙한 모습이 아닌가? 그런데 왜 제41회 총회의 회칙 심의와 변경을 문제 삼는 것인가? 적법한 절차에 따라 개정된 회칙에 따라 진행된 총회의 임원 선출을 존중하고 협력하는 것이 성숙한 회원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를 제기하는 당사자는 순수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이를 악용하여 본질을 호도하는 자들이 있음을 주지하시길 바라마지 않는다. 3. 이제 총동창회가 순수한 그 목적대로 그 임무를 감당하도록 협력해야 한다. 총동창회원은 각 노회 회기마다 협동총무들의 수고로 거의 대부분 회비를 납부했지만, 그 동안 총동창회에 대한 무관심으로 참석이 저조하여 임원선출에 어려움이 있어 부득불 종전의 회칙을 따라야 했던 점도 충분히 이해된다. 그리고 그간의 임원들의 노고와 헌신에 대하여 깊이 감사드리고 그 공을 인정한다. 또한 임원 선출과 배분을 부분적으로 노회와 신학교, 기수별로 안배하려고 고뇌 한 점도 높이 사고 충정을 이해해 드리고 싶다. 그렇지만 총동창회 운영상에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을 많은 회원들이 인식하고 있었지만 손댈 수 없는 성역처럼 되어 의견 개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폐쇄적인 임원 선거 구조를 개방적인 구조로 바꾼 것은 뜻이 있는 회원들이면 누구나 능동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헌신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번 총회에 ‘특정한 노회가 그동안 총회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은 목사들을 동원했다.’고 하면서 마치 참석할 자격이 없는 자가 한 참석 한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유감이며 분명 선치 못하며, 설사 처음 참석한 회원이 다소 있었다 하더라도 문제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참석을 권장해야 옳지 않는지 되묻고 싶다. 이런 일련의 일을 두고 ‘동창회비 거부 운동’, ‘총회의 파행’, ‘사전모의나 편법’ 등을 운운하면서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다짐을 공적으로 선언하라는 식의 협박성 선동과 자극은 그 자체가 바로 정치꾼들이 던지는 화두가 아닌지 되물어 보고 싶다. 어떤 법이든 완벽한 것은 없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발전되고, 시정된다. 기도하면서 오늘의 부족한 것을 내일에 시정하고 보완하면 될 일이다. 차제에 당부 드리고 싶다. 총동창회가 동창회답게 회원들의 친목 도모와 모교의 발전을 위한 본래의 순수한 목적대로 움직여 가도록 현 임원진들을 응원하고 기도해 주는 것이 총동창회의 순수성을 지키는 길이니 적극 협력하자. 그리고 정확한 팩트도 아닌 것을 제기하여 여론을 호도하는 뻔히 보이는 속보이는 정치 행위를 즉각 중단하기 바란다. 끝으로 좀 더 슬기롭게, 좀 더 지혜롭게 좌우를 살펴서 의견을 개진하지 못하여 마음을 상하게 했다면, 이 점 대하여 회원의 일원으로서 유감을 표하며, 모든 동창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총동창회에 적극 협력을 잘 하는 계기가 되길 소망한다. 김일영 목사(신광교회, 서울남부노회 서기) ※ 기고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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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신 총동창회의 순수성이 그대로 유지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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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고신, ‘개혁주의’를 절대 포기할 수 없다!
- <특별 기고> 필자는 고신포럼의 한 일원으로서 고신포럼의 이념구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고신포럼으로부터 그 어떤 권위도 부여받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의 글은 철저히 필자 개인 의견이며, 그 책임은 전적으로 필자 개인에게 있음을 밝혀 두는 바이다. (그리고 장문이라 서두에 단락의 제목을 밝히고 그 순서에 따라 의견을 펼침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1) 우리는 개혁주의 노선을 추구한다. 우리 고신이 개혁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이유는, 지난날 종교적 혼합과 세속적 타락으로부터 오직 하나님 말씀 앞에서 반드시 걸어야 할, 말씀중심의 길을 끊임없이 찾고자 하는 선진들의 생명을 건 투쟁에서 비롯된 것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Protestant 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2) 개혁주의는 전 고신 인이 추구해야 할 정신이다. 그런데 이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이는 어떤 특정한 집단이나 인물만이 취급할 수 있는 전유물인양 주장하는 전제를 필자는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라면 누구나 이 점에 관하여 깨어있어야 하고, 특히 고신 인이라면 이 개혁주의 노선을 반드시 지켜야하고 그 길을 가야 할 길이 아닌가? 그래서 필자는 그 권위와 지위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그것에 대하여 논하고 바른길을 찾는 것에는 예외일 수 없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3) 고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회복하는 길은 신학적 논리로 풀어야 한다. 그런데 최근 정00 목사가 고신의 정체성과 개혁주의 신앙과 관련하여 제기한 신학적 이슈에 관련하여, 첫째는 제기된 문제의 팩트를 확인하고, 둘째는 그 오류가 무엇인지 근거와 논리로 반박하고, 셋째는 그 제기된 문제가 분명 신학적 문제가 있다고 하면, 소위 목회적 경험과 전문적 지식을 가진 분들이 냉정한 판단을 통하여 바로잡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모 교수와 모 목사는 본질적인 문제 보다 비본질적인 문제로 접근하여 본질을 희석시키려고 정치 논리로 몰아가는 것이 아닌지 자못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결코 신학적 문제는 정치적 논리로 풀어서는 안 된다. 고신을 걱정하는 순수한 의도를 지닌 개혁주의 신앙을 걸어가는 자로서, 제시한 문제점들을 향하여 소위 ‘일개 목사’를 운운하면서 무시하는 처사는 결코 고신인답지 않는 처사이다. 적어도 고신포럼이 어떤 정치적인 사익을 챙기기 위한 것이었다면, 분명한 증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며, 비도적인 집단으로 매도한 모 목사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적인 관점에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거기에 대한 오류를 수정해야지 어떤 정치적 프레임을 둘러씌워, 하나님 앞에서 불타는 열정을 가진 한 목사를 매도하거나, 더욱이 우리 교단에 소속된 수백 명의 회원을 가진 고신포럼을 아무 근거 없이 정치적으로 몰아 공격하고 있는 현실에 심히 우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4) 고신포럼은 고신의 그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고신포럼은 성경과 개혁주의 신앙고백의 가르침을 따라 개혁주의 교회 건설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친목을 위한 소모임이 아니며, 엄연히 대표를 비롯한 조직을 갖추고 있어, 모 목사가 폄하할 정도가 결코 아님을 밝혀 둔다. 그런데 모 목사는 고신포럼에서 '고신' 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 근거로 ‘고신몰’ 폐쇄에 대한 이야기를 들고 있다.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고신몰은 고신교회와 성도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교회 관련 물품들을 공급하여 상생하는 길을 찾으려 하였으나 이용자가 너무 적어서 그 존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폐쇄하는 방향’으로 결정하고 내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모 목사의 말한 것처럼 따끔한 질책을 한 후에 폐쇄했다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며, 이를 근거로 목사들의 학문토론을 지향하는 고신포럼의 폐쇄를 운운하는 것에 심히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고신포럼의 주제와 강사선정까지 간섭하는 듯한 발언은 그 정도를 넘어선 발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고신포럼을 ‘정치모임, 자기편을 만드는 도구의 장, 정치화시키려는 장을 삼으려는 합리적 의심이 간다’는 식으로 폄하하는 정치적 프레임에 대해서야 말로 고신포럼이 엄중히 경고하고 사과를 받아야 할 사안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단체의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할 경우에는 그 단체의 이름을 사칭하여 사리사욕을 취하거나, 그 단체의 이름을 사용함으로 명예를 훼손하고 심각한 폐회를 끼친 경우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고신포럼에서 고신의 이름에 어떻게 명예를 훼손했으며, 심각한 폐해를 끼쳤는지 그 근거를 들어 제시해야 할 것이며,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고신’, 그 자랑스러운 이름은 고신 인이라면 누구나 자랑스럽게 사용해야 할 것이며, 그것에 자부심을 가져야 마땅한 일이며 오히려 권장할 일이다. 물론 개혁주의 입장에서 학문적인 따끔하고 아픈 지적은 언제든지 겸허히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은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랑스러운 ‘고신’의 이름을 가슴에 품고 전진하는 ‘고신포럼’ 을 향해, 자신의 생각이나 입맛에 맞지않다고 하여 고신포럼을 공격하는 것이야말로 정치 놀음이 아닌지 정말 안타까울 뿐이다. 5) 올바른 신학적 논쟁으로 고신 정체성을 회복하자 지금 우리는 시대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교회가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위기를 극복하고 반석 위에 교회를 든든히 세워야 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선 우리 안으로부터 성숙한 신학적 논쟁으로 바른 신앙과 신학을 회복시켜 가야 할 시점이라고 본다. 그런데 ‘어떻게 아무런 알맹이 없는 발언으로 비난을 쏟아내는가?’, ‘어떻게 정당하게 신학적인 논쟁을 통해 해결할 생각보다는 정치적 논리로, 위협에 가까운 말들을 할 수 있는가?’를 되묻고 싶다. 그렇다. 존경과 공경은 중요한 윤리적인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치열하고 성숙한 논쟁은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하는 가치요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 교단에서 누가 보더라도 정치적인 인물일 수밖에 없는 목사의 글에서, 순수하게 학문적, 신학적 문제를 제기한 후배 목사를 향하여, 정치적 배경을 운운하는 것이야말로 적반하장이 아닌지 되묻고 싶을 뿐이다. 교단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한 목사의 열정을 꺾어 버리고 상처를 준다면 교단의 미래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를 계기로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자유롭게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고, 논쟁하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미래 지향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옳지 않는가? 비난이 아니라 생산적인 비평의 장, 정치적 프레임이 아니라 순수한 신학적 논쟁의 장, 권위의식으로 무시할 것이 아니라 겸허하게 수용하고 바로 잡고자 하는 것이 바로 개혁주의 정신의 장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장이 가감하게 마련되길 바란다. 6) 따라서 ‘교단신학과 정체성 회복을 위한 대토론회’ 를 제안한다. 제3회 고신포럼을 개최하면서 상당히 미묘한 주제라는 것을 인지한 준비위 측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주장을 가진 특정인에게도 동일한 시간을 배정하여 강의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개인적인 사정으로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통보받았다. 그리고 정상적인 절차를 따라 제안한 것은 아니지만, 모 목사가 ‘그렇다면 이슈의 중심이 된 모 목사와 정당하게 공개 토론의 장을 가져보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그 제안에 대해 ‘격이 떨어진다.’는 식의 회피성 발언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격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격을 인정받게 될 것인데, 그 논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 차제에 소위 말하는 고신 신학의 바른 정립을 위하여 격을 높여 한 번 진중하게 대내외적인 장에서 공개 토론을 하면 어떨까 제안한다. 발제자를 3-4명 정도로 하고, 발제 주제 전문을 발제 전에 다른 발제자들이 공유하게 하고, 그 발제 후는 ‘일대일’, 또 ‘일대다’의 형식으로 적어도 3차례의 반론기회를 부여하여 분명하게 대토론회를 가져보면 좋겠다. 이것을 고신포럼이 주최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코로나 시대에 한국교회에 신선한 충격을 줄 것이고, 누구든지 당당하게 신학을 논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모든 목회자들과 소위 젊은 신학자들에게 줄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그래도 배움에 자부심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얕은 신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한 젊은 목사에게 완전히 굴복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너무나 뿌듯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적어도 필자에게 ‘고신신학이 이래서는 안 된다.’ 라는 것까지는 분명하게 알려주었다. 그렇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고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지켜나가야 할 적기라고 생각한다. 이 일이 일부의 불필요한 오해와 왜곡된 시각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기를, 또한 고신 신학의 발전적인 기회를 놓치므로 후회할 일이 없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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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고신, ‘개혁주의’를 절대 포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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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여는 시 [신광열 목사] 걱정
- 사람이 없어 걱정이다 강 같은 어머니가 없고 산 같은 아버지도 없다 길 같은 선생님도 별 같은 지도자도 흙 같은 목회자가 없어 참으로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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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여는 시 [신광열 목사]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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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대학교복음병원 노동조합 보도 관련 기고문
- 본지는 언론의 책임인 사실확인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 노동조합 측에 유감의 뜻을 표합니다. 경남기독신문은 홈페이지 오피니언세션에 “전 행정처장” 곽춘호, 미완으로 끝난 복음병원 노조 개혁”이라는 제목으로 고 곽춘호 사무국장이 노동조합과의 법적 소송, 고발 및 갈등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사망하였다고 보도하였고, 노동조합이 낙하산인사로 약점을 잡아 이사장 및 재단관계자들이 친노동조합적 행보를 하게 함으로 병원개혁과 경영합리화를 하지 못하게 하여 상급종합병원 평가에서도 탈락하였으며, 불법적 편의시설 운영하여 노조의 활동자금으로 쓰는 부도덕한 노동조합으로 기사를 게재하였다. 본 노동조합은 언론사의 책무인 사실확인을 하지 않은 17가지의 사항에 대해 언론중재위원회에 언론중재신청을 했으며 일부 정정보도가 나갔다. 기사 내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노동조합의 입장을 밝히는 바이다. 1. 노동조합과의 법적 소송, 고발 및 갈등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사망한 것처럼 기사가 났지만 고신대복음병원 노동조합은 곽○○국장과 법적소송을 진행한 적이 없으며 매점소송과 관련하여서는 강○○ 전 이사장이 소송을 진행하였고 곽국장은 2016년 6월 당시 해임되어있던 상태로 소송을 진행 할 수 있는 직위가 없었다. 노동조합은 곽국장을 형사 고발한 사실이 없고, 따라서 검찰과 법원에서 무혐의 판결이 난 적도 없다. 그리고 이사회는 여러 가지 비위사안으로 곽국장을 해임징계하였고 부산지방노동위원회는 징계의 사유는 정당하나 양정이 과하다고 결정한 것이지 징계위원회의 해임결정 자체가 부당하다고 하지 않았다. 또한, 곽국장의 사망원인으로 보도한 ‘뇌출혈’은 전혀 사실 무근이며 직접적인 사인은 ‘심근경색’이었다. 위와 같이 전혀 사실이 아닌 내용으로 곽국장의 사망의 원인이 노동조합에 있는 것처럼 호도하였다. 2. 환자보다 직원이 많은 병원이라고 기사에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다른 상급종합병원들보다 환자수 대비 직원수가 적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고신대학교복음병원 노동조합이 전국보건의료노조안에서도 목소리가 큰 거대 공룡 노조인 것처럼 표현하였으나, 전국보건의료노조 조합원수 71,125명 중 1,396여명(약2%)정도의 비율을 가진 지부가 거대 공룡 노조이고 목소리가 크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다. 3. 역대 이사장들이 노동조합의 편을 들고 곽○○국장을 외면했다고 기사에 나와 있으나 이사장과 이사회는 여러 가지 비위로 해임 징계 처분을 받은 곽국장을 오히려 재단 법인 사무국장으로 승진시켰다. 이에 대해 노동조합은 이의를 제기 했지만 이사장 및 이사회는 침묵, 방관으로 곽국장의 편을 들었다. 4. 병원이 노조에 약점이 잡혀 재단 관계자들은 자기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노조에 계속 끌려 다니는 형국이고 지금의 재단 이사장도 노조지부장이 자기 교회에 출석하기에 친 노조 행보를 보인다라는 내용으로 기사가 났다. 하지만, 지부장은 현 이사장이 담임하는 교회에 등록교인일 뿐이며 현 이사장도 곽국장에 대한 노동조합의 이의 제기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5. 여기에 역대 재단 이사장마다 노조의 손을 들어주는 비상식을 자행하는 사례가 빈번하여 사태는 더욱 악화되고 노조를 중심으로 한 병원 개혁은 빈번이 물 건너가는 형국은 물론이고 상급종합병원 재지정 탈락되는 수모까지 당하게 된 샘. 이미 외부의 진단에서도 방만한 경영으로 인한 적자 누적 해결책은 인력 구조조정뿐이라는 지적이 나왔다고 보도하였다. 하지만 역대 재단이사장이 노동조합 편을 든 적이 없고 노동조합이 어떠한 행위로 경영을 어렵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구체적 사실이 없다. 또한, 엘리오 경영진단 7대 전략영역과 25가지 실행과제에 ‘적자 누적 해결책은 인력 구조조정’이라는 언급은 없었다. 6.노동조합이 병원의 매점·분식점을 운영해 활동자금으로 사용한 것처럼 기사에 나와 있지만 사실 노동조합은 매점·분식점 임대료 수익을 전액 조합원 및 조합원이 아닌 직원들까지 포함하여 설, 추석 등의 명절 선물비용 및 직원 복지비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임대료 수익만으로는 비용을 충당하기 어려워 조합원들이 낸 조합비로 모자란 부분을 충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7. 매점·분식점 소송과 관련하여 결정문 중 “노동조합법 제81조 제4호 본문에서 금지하는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한다고 봄이 상당하므로”을 인용하여 노동조합의 매점·분식점 운영이 불법인 것처럼 표현하였다. 하지만 노동조합법 제81조의 입법취지는 사용자(병원)가 노동조합의 조직운영이나 사업에 대한 지원을 하여 노동조합 활동을 지배, 개입하여 노동조합의 자주성을 침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고, 헌법재판소 결정(2018.05.31. 선고 2012헌바90 결정)은 부당노동행위가 아니라는 판결취지이며 개정 법률안을 통해 더 명백해졌다. 부당노동행위라는 주장은 제81조 제4호의 「또한 근로자의 후생자금 또는 경제상의 불행 기타 재액의 방지와 구제등을 위한 기금의 기부와 …예외로 한다.」의 법문구의 취지와 충돌한다. 더군다나 소송은 현재 항소 진행 중으로 완전히 결정이 나지도 않았다. 8. 기사에 ‘민노총의 만행으로 만들어진 지나친 악법들-최저임금제나 주52시간 근무, 노조의 회사경영 참여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시행 등’이라고 민주노총의 활동을 만행으로 표현하였다. 민주노총은 제1노총이며 노동계를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조직으로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고 있다. ‘민노총의 만행’이라는 표현은 민주노총을 전혀 존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근거없는 주장이다. 최저임금제나 주52시간 근무, 노조의 회사경영 참여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등은 국제적 기준에도 못미치는 법으로 사회적 약자를 위한 보호법이며, 악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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