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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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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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황권철 목사] 유다 다대오(Jude Thaddaeus'Behind Stories)-동역의 사도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요14:22). 성경에 유다란 이름을 가진 자가 많으나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은 세 명이었다.  첫째, 예수의 동생 유다이다. “이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마13:55). 그는 초기에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았다. 예수님과 한 형제이지만, 같은 배에서 나왔으나 씨가 다른 형제였다. 그가 어린 시절에는 형 예수에 대해 잘 몰랐다. 그래서 예수님이 공생애를 위해 집을 나갔을 때 많은 박해를 했다. 그러다가 부활하신 후에 형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믿었고 비록 사도는 아니었지만 명분상 사도적 반열에 참여하여 예수가 메시야라는 언약의 복음 유다서를 기록했다.  둘째, 예수를 판 가룟 유다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유다의 이름 앞에 꼭 붙이는 한 단어가 있는데 예수를 판 자 라는 말이다.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마10:4),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막3:19),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눅6:16). 요한은 가룟인 아닌 유다가 라고 하였다(요14:22). 가룟 유다는 이 땅에서 가장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남긴 불행한 자였다.  마지막 셋째, 본문에 나오는 다대오 유다이다. 마태와 마가는 다대오라고 불렀다. 요한은 왜 유다를 가룟이 아닌 유다라고 불렀을까? 신약성경이 쓰여 질 때 예수를 판 가룟 유다 때문에 유다란 치욕스러운 이름이 되어 버렸다. 그 이전 구약에서 유다 이름의 뜻은 찬송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자들이 유다라는 이름으로 불러지기를 좋아했다. 예수님도 유다의 가문을 통해서 오셨다. 그러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이후로 유다란 이름은 치욕스러운 이름이 되어 버렸다. 그 이후로 아무도 유다란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 그 이름을 가진 자들도 가룟 유다와 구별하여 불렀다. 다대오 유다는 시몬과 함께 열심당원이었다.   주님의 고민에 동참한 다대오    주님의 구원사역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그러나 제자들도 주님의 죽으심을 잘 모르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그의 괴로운 심정의 비밀을 토로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요13:21). 이제 주님이 마지막 십자가 지실 사실을 말씀하셨다. 이것이 너무도 가슴 아픈 심령의 괴로움이었다. 물론 십자가 지는 육체적인 고통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이지만 그보다 더 큰 아픔과 괴로움은 이 사실을 곁에 있는 제자들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일은 외부에서 일어날 일이 아니고 조직 내에서 반역자가 생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개적으로 떠벌려 말하기도 곤란하여 지금까지 미루어 왔던 것이다.  이젠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 이 사실을 말씀하셨다. 할 수 없이 조직 내에 반란자가 있음을 애기했다.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 이는 제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삼년 동안 훈련하여 준비해 왔는데 그것도 외부에서가 아닌 조직 내에서 반동분자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앞으로 조직의 붕괴마저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떠나가는 것도 문제이지만 자신이 떠난 이후 제자들이 서로 분쟁하여 붕괴될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이 더욱 가슴 아픈 일이었다. 이것은 제자들 상호간에 불신을 조장하는 공동체의 마비현상이 생길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요13:22). 당장에 이 같은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  그때 성미 급한 베드로가 단호하게 말했다.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요13:24). 그는 분노하여 누가 감히 그런 일을 꾸미느냐 하고 분개했다. 그때 가룟 유다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내가 떡 한 조작을 적셔서 주는 자가 그니라”고 하시면서 가룟 유다에게 주셨다. 유다는 그때가 회개 할 절호의 기회였으나 오히려 괴심한 생각을 품어 주님을 팔 생각을 했다. 그때 사단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곳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13:27). 유다는 그 조각을 받고 나간 그날이 영원한 밤이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요13:30). 다대오 유다는 이 같은 주님의 아픈 마음을 다 헤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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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28
  • 바이블큐티[황권철 목사] 전도에 불을 붙이라
    교회는 전도함으로 존재한다 호주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소녀가 골수염으로 두 다리를 자르게 되었는데 병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손으로 옮겨져 두 손까지 자르게 되었다. 겨우 생명은 건졌으나 죽은 사람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두 팔과 두 다리를 잃어 몸통만 남게 된 그는 남의 도움이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죽고 싶으나 죽을 수도 없었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비참한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 소녀가 복음을 받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후 새로운 생명력이 움트기 시작했다. 생명이 있는 동안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전도편지를 쓰기로 결심했다. 그 날부터 그녀는 팔뚝에 연필을 매어 글쓰기를 연습했다. 피나는 연습 끝에 누워서 편지 쓰는 법을 배웠다. 그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시작으로 감사편지를 쓰게 되었다. 교회에 출석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예배에 참석하도록 복음편지를 썼다. 온 몸을 다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쓴 편지에 감동받은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마가복음 6장을 함께 읽고 묵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본문은 주님이 하신 갈릴리갈릴리 전도사역을 통해서 사명자의 전도훈련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특별히 본문은 다양한 삶의 환경에서 전도자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고향에서 선지자의 사명 예수님이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에 갔다. 이전에 자신을 잡아가려 하던 자들이 이젠 많이 변한 것 같다. 아마 버린 자식으로 체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때 주님을 따랐던 열두 제자들도 동행했다. 어찌 보면 이들은 패거리 건달과 비슷했다. 이들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바로 그곳에는 그의 친동생들과 나사렛 주변 사람들이 와 있어 그의 가르침과 권능을 보고 심히 놀랐다. 그때 그 동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바로 목수 집안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 동생들이 지금 우리와 함께 있는데 어디서 저런 권능을 행하느냐고 했다. 그때 주님이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선지자가 고향과 친척과 자기 집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왜 선지자가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가? 첫째, 혈통적인 뿌리 때문이다. 고향이란 핏줄로 얽혀진 공동체이다. 나의 핏줄이고 집안이고 친척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선지자를 나와 동일시함으로 존경심이 사라진다. 그래서 주님은 구원이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둘째,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전통이 강하게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강하다. 변화를 통해서 그 동안 쌓아 놓은 기득권을 상실하기 때문에 수하에 어리고 젊은 자를 선지자로 모신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다. 셋째, 유대의 율법적인 전통 때문이다. 유대 사회에서 율법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일은 서기관이나 율법학자들의 몫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예수가 성전에서 율법을 가르치는데 그 권능이 서기관들과 비교할 수 없으니 주님을 더욱 시기했다. 그래서 주님은 그곳을 떠나 갈릴리 여러 촌으로 두루 다니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기억할 사실이 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가정의 복음화가 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에게 가장 큰 선물로 주신 것이 가정 구원의 사명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세상을 향한 전도의 사명 주님은 제자들을 불러서 둘씩 둘씩 전도하러 보냈다. 먼저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들린 자를 내어 쫓는 권세를 주셨다. 우리는 영혼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복음을 들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 시대에도 그러하지만 주님이 오셨던 그 시대에는 특별히 더러운 귀신 들린 자들이 너무 많았다. 메시야가 직접 이 땅에 오셨으니 사단 권세가 발악했다. 그래서 주님은 가는 곳마다 귀신 들린 자들을 온전케 하셨다. 그러면서 주님은 전도자가 금해야 할 몇 가지를 당부했다. 양식과 돈, 그리고 두벌 옷이다. 이것은 나그네에게 의식주의 대용품으로 여행자로서 반드시 지참해야 할 최소한의 생활필수품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금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도자는 이미 주님께 부름 받은 자로서 소속과 신분이 다른 자이다. 하나님은 구약에 레위 지파에게 땅의 기업을 주지 않았다. 군사로 부름을 받은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적절히 공급해 주신다. 바울은 전도 여행을 통해서 수 없이 많은 이 같은 사례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면 전도자가 명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하여는 마태가 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 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첫째, 성에서 복음의 합당한 자를 찾는 일이다. 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지만 충성된 사명자가 있다. 전도자는 충성된 청지기를 먼저 찾아야 한다. 둘째, 어느 집이나 성으로 들어가면서 먼저 평안을 빌라. 그들이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면 은혜를 입어서 다시 베풀 것이요 거절하면 그 평안이 자신에게로 돌아와 성령의 도우시는 위로를 받게 된다. 셋째, 거절할 때는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라. 그 성이나 집이 복음을 받지 않으면 그 곳을 떠날 때 발에 먼지를 떨어버려 심판 때에 증거를 삼으라고 했다. 주님은 전도자가 금해야 할 몇 가지를 당부했다. 양식과 돈, 그리고 두벌 옷이다. 이것은 나그네에게 의식주의 대용품으로 여행자로서 반드시 지참해야 할 최소한의 생활필수품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금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도자는 이미 주님께 부름 받은 자로서 소속과 신분이 다른 자이다. 하나님은 구약에 레위 지파에게 땅의 기업을 주지 않았다. 군사로 부름을 받은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적절히 공급해 주신다. 바울은 전도 여행을 통해서 수 없이 많은 이 같은 사례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면 전도자가 명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하여는 마태가 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마10:11-14) 첫째, 성에서 복음의 합당한 자를 찾는 일이다. 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지만 충성된 사명자가 있다. 전도자는 충성된 청지기를 먼저 찾아야 한다. 둘째, 어느 집이나 성으로 들어가면서 먼저 평안을 빌라. 그들이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면 은혜를 입어서 다시 베풀 것이요 거절하면 그 평안이 자신에게로 돌아와 성령의 도우시는 위로를 받게 된다. 셋째, 거절할 때는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라. 그 성이나 집이 복음을 받지 않으면 그 곳을 떠날 때 발에 먼지를 떨어버려 심판 때에 증거를 삼으라고 했다. 악한 세력 앞에서 순교의 사명 주님이 갈릴리 각 지역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며 능력을 행하시니 헤롯 왕가에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서 왔다고 했다. 이 사실이 헤롯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래서 헤롯은 필요 이상의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헤롯이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이것이 범죄한 죄인에게 고발하는 선한 양심의 소리이다. 세례 요한은 비록 짧게 살고 비참한 죽음을 죽었으나 가장 값지고 고귀한 삶을 살았다. 우리는 순교자 세례 요한을 통해서 전도자의 사명을 배우게 된다. 첫째, 그는 광야의 소리로 살았다. 그는 당시 세속적으로 누릴 수 있는 아주 좋은 가문에 태어나 출세할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을 타고났다. 그러나 그는 지명예루살렘예루살렘 성과 성전과 율법적인 권위를 버리고 광야의 소리로 복음을 위해 이슬로 사라졌다. 둘째,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다. 광야는 도시와 같이 길이 있는 곳이 아니다. 누가 만들기 전에는 걸어갈 수 없는 너무도 불편한 곳이다. 그는 주님을 위하여 친히 이 길을 닦았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헤롯 왕들은 주님의 길을 막는 세력들이다. 이런 자들과 싸워서 주님의 길을 평탄케 하셨다. 셋째, 그는 주님만이 흥하기를 소원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 한 마디가 세례 요한의 신앙과 생활의 고백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사명자로 세례 요한의 고백을 배워서 우리도 이런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양 무리를 위한 긍휼의 사명 먼저 제자들은 전도의 현장에서 돌아와 주님께 사역의 보고를 한다. 보고를 받고 주님은 얼마간 쉼을 얻기 위해서 한적한 곳으로 가게 했다. 그런데 무리들이 먼저 알고 모든 고을에서 걸어서 앞서 가셨다. 주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오병이어로 장정만 오천 명을 먹였다. 이 사건은 너무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복음서 기자가 한 분도 빠트림이 없이 다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영적 비밀한 계시가 무엇인가? 이 사건이 구원사역에서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첫째, 무리를 불쌍히 여기는 목자의 마음이다. 주님은 이들의 영적 목마름을 보셨다.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들이라고 했다. 헤롯이나 가이사 황제나 당시 대제사장들은 그들의 진정한 목자가 아니다. 그들은 양 무리의 피를 빨아먹는 이리와 같은 자들이다. 주님은 그들의 목자로 오셔서 그들만이 먹을 수 있는 비유로 천국의 비밀을 말씀해 주셨다. 둘째, 오병이어의 헌신이다. 이를 주님에게로 가져온 자는 어른도 아닌 어린 아이였다.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질병에서 치유함을 받았으나 정작 주님이 요구하실 때 헌신하는 무리는 없었다. 이 소년이 바친 오병이어는 그가 받은 은혜일뿐 아니라 그의 신앙고백이었다. 자신의 손에서는 오병이어이지만 주님의 손에서는 200데나리온 보다 더 풍성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셋째, 온전한 순종이다. 때가 저물고 빈들이라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나가면 반드시 기적은 일어난다. 오병이어를 주님에게 가져간 제자는 계산에 능한 빌립이 아니라 어리석게 보이는 안드레였다. 사역자의 제일가는 사명은 온전한 순종이다. 마지막 넷째, 다 배불리 먹이심이다. 주님이 베푼 잔치에는 모자람이 없다. 연회장에 준비된 가나 혼인잔치에는 포도주가 떨어졌으나 주님이 계신 곳에는 넉넉함이 있다. 모든 무리가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작이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셨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바구니에 ‘차게’거두었으며 라고 하심은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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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4
  • 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주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
    또 산에 오르사 주님은 구원역사를 위해서 어떤 구체적인 방법을 사용하셨는가? 주님은 지상교회를 세우시고 가장 본질적인 목양 사역으로서 제자훈련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막3:13-16) 그렇다면 제자훈련의 목적은 무엇인가? 첫째, 자신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제자훈련은 지식을 전달하는 단순한 학습훈련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변화를 주는 인격적 사역훈련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과 같이 있으면서 24시간 주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대로 보고 생활 속에서 삶을 배우는 인격훈련이었다. 세인들처럼 삶을 베일에 가려 놓고 교안만 가져와서 세미나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생활하면서 앞장서서 본을 보이는 모범적인 삶이었다. 둘째, 세상을 향한 파송이다. 오늘날 교회는 부르는 초청에는 관심이 많으나 세상을 향해 내어 보내는 파송에는 너무도 인색하다. 이제 우리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처 땅 끝까지 가야 한다. 목숨을 요구하는 사역의 현장에라도 가야한다. 이것이 전도자의 사명이다. 주님은 하늘보좌를 버리고 이곳까지 오셨다. 셋째, 귀신들을 내어 좇는 권세이다. 주님은 우리를 보내실 때에 거저 보내지 않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어서 보내셨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주님은 우리에게 사단의 권세를 제압하는 능력을 주어서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자로 나아가면 사단의 권세가 우리 앞에 굴복하게 된다. 집에 들어가시니 마지막으로 이제 주님은 하산하여 어느 집으로 들어가셨다. 주님이 어디를 가든지 가는 곳마다 무리들이 모여 들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들은 주님을 체포하러 온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은 다름 아닌 주님의 친족들이다. 이들은 주님을 알기로 가정을 버리고 방랑자처럼 떠돌아다니는 미친 자로 알았다. 사실 주님의 구원사역이 얼마나 외롭고 고달픈 길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사명자의 길은 이처럼 외로운 것이다. 주님이 전도현장에서 받은 몇 가지 아픔들은 어떠했는가? 첫째, 무리들에 의한 쉼 없는 사역이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식사할 틈이 없을 정도로 분주한 사역이니 한 순간도 쉴 틈이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제자로서 목양 사역에 수종을 들다보면 때로는 밤과 낮의 구분이 안 될 때가 많다. 둘째, 친족들에 대한 오해와 불신이다.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막3:21)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 그리고 가까운 친척들이 주님을 데리려 왔다.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난 때 집안의 장남인 주님이 공생애 사역으로 전도하려 나오니 이를 이해하지 못한 동생들과 친족들이 예수를 미쳤다고 오해했다. 그러나 주님은 거룩한 구원사역을 혈육의 정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다. 셋째, 성령을 훼방하는 사역이다. 주님이 이 본문에서 말씀하신 성령 훼방 죄가 무엇인가? 지금 더러운 귀신이 주님을 보는 순간에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면서 하나님의 아들 됨을 고백하고 떠나간다. 그런데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도 잘 아는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고 사단의 사역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거룩한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므로 이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라고 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서기관들의 잘못이 우리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을 때가 많다. 아무리 하나님의 아름답고 큰 역사라도 나와 좋은 관계에 있지 아니한 자가 행한 것이면 비판하고 정죄하여 사단의 역사로 몰아붙이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훼방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지체와 동역자들의 거룩한 사역을 칭찬하고 격려하고 협력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 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의 형제와 자매 본 문단은 앞 문단과 연결되어 있다. 20-21절에서 예수의 가족이 등장한다. 그들은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들 듣고 예수를 잡으러 가버나움으로 향했다. 예수를 오해한 혈통적인 가족들이 서기관과 바알세불 논쟁을 벌이고 있는 현장에 나타났다. 그때 무리들 중에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당신을 찾는다고 했다. 주님은 자신을 찾는 가족들을 향해 참 가족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어떤 분이 가족이란 영어 단어 이니셜을 따서 이렇게 풀이 했다. “아빠 엄마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성경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주님은 구약의 율법을 사랑이란 새 계명 하나로 다 이루셨다. 십자가는 사랑의 결정체이다. 주님은 십자가라는 고통의 쓴 잔을 앞에 높고 자신의 의지가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소원했다. 저자의 허락에 의해 일부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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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9
  • 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예수를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라
    미국 하버드대학교 폴 케네디교수는 “한국이 21세기의 세계 중심국가가 될 수밖에 없는 5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 한의 문화이다. 한 민족은 5천년 역사 속에서 수많은 외침으로 고통을 당해왔다. 그래서 민족의 저변에 한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한이 1919년 3월 1일 태극기로 독립만세운동을 하게 했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배후에 촛불혁명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둘째, 가족 문화이다. 가족 중심의 정문화가 감수성에 예민한 민족으로 만들었다. 특별히 어머니 품에서 모유를 먹고 자란 세대는 감성이 풍부하다. 21세기를 감성의 시대라고 말한다. 이런 때 한민족의 효 문화가 세계 열방을 선도할 강점이 되었다. 셋째, 엘리트 의식이다. 한 민족은 어떤 민족보다 자부심이 강한 민족이다. 이런 자부심이 하나의 긍정적인 목적으로 작용할 때 놀라운 힘을 발휘하게 된다. 넷째, 모험정신이다. 적극적인 모험정신은 어떤 일이든 신속하게 해 낼 수 있는 최고의 경쟁력이다. 마지막 다섯째, 단일민족의 정체성이다. 단일민족 단일 언어로 뭉쳐진 공동체의 저력은 다이나믹한 폭발력을 발휘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폐쇄적일 수도 있으나 이를 긍정적인 목적을 향해 나아갈 때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므로 폭발적인 에너지를 결집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오늘은 마가복음 2장의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은혜를 받고자 한다. 예수님은 모든 인생의 주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 고장 난 인생이 새롭게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난다. 우리에게도 이런 변화가 일어나길 바란다. 예수를 만나면 모든 문제에서 해결을 받는다. 인간은 사고뭉치이다. 중풍병자가 예수를 만남으로 참 자유를 얻었다. 마태는 세관에서 돈으로 얻을 수 없었던 참 평안을 예수를 만남으로 누렸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얽매여 억지 금식을 했으나 주님은 그들에게 금식을 통한 참된 기쁨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음을 보고 정죄한 바리새인들에게 참 안식이 무엇인지도 가르쳐 주셨다. 가버나움의 중풍병자 본문 1절에서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고 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서북 지역의 해변가에 있는 마을이다. “수 일 후에”라고 하심은 성구막 1:21막 1:21절에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가르치시고 동네에서 복음을 전한 후 갈릴리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전도했다. 그러다가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갔던 때가 다음 안식일이 이르기 전이었다. 주님이 가버나움에 온 이후로 온 동네에 대 소동이 일어났다. 열병으로 앓아 누었던 자가 일어나고, 귀신들린 자들이 온전해지고, 각색 병든 자가 와서 많은 사람이 고침을 받았다. 소문을 들은 온 동네 사람들이 주님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때 주님이 다시 오시자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그때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다. 이런 상황에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다. 그때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다. 우리는 중풍병자를 데리고 주님에게로 나온 그들의 믿음을 배워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믿음을 가졌는가? 첫째,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 그들은 주님이 일차 가버나움을 다녀간 이후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주님이 오셨고 그들은 병자를 침상에 메고 주님을 만나러 왔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이와 같이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둘째, 불가능한 환경 앞에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이 중풍병자를 매고 가는 사이에 벌써 사람들이 먼저 와서 꽉 들어 차 있어 문 앞까지 들어 설 틈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이런 불가능한 환경 앞에 뒤로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셋째, 적극적으로 길을 찾는 것이다. 동서사방으로 다 막혀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구멍을 내어 환자를 달아 내리기로 했다. 매사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길이 열린다. 넷째, 지붕에 구멍을 뚫는 일이다. 사실 이 일은 아주 심각한 사건이다. 우선 남의 재산권을 침해하고 가옥을 파괴하는 범죄행위가 될 수 있는 일이다. 만일 위험한 사태가 발생하면 구속도 될 수 있는 엄청난 위험부담까지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중풍환자를 주님에게로 지명인도인도하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고자 하는 온전히 헌신된 마음이 있었다. 우리가 영혼구원을 위해서 이런 헌신과 희생을 한다면 어떤 중풍병자라도 주님에게로 지명인도인도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혼연일체 된 마음이다. 그들이 지붕으로 올라갈 때도 그러했지만 최후의 순간 환자를 주님 앞으로 달아 내릴 때는 한 순간의 방심도 용납할 수 없는 초긴장 된 순간이었다. 이렇게 해서 중풍환자가 주님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주님은 바로 그들이 가진 이런 믿음의 행위를 보셨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이런 중풍병자가 많이 있다. 제 발로 걸어서 주님 앞으로 나아올 수 없는 자들은 다 영적 중풍병자이다. 이들을 위해 공동체가 합동작전을 해야 한다. 땀 흘리는 수고와 함께 물질적인 헌신도 감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중풍병자를 말씀 앞으로 지명인도인도할 수 있다. 중풍병자는 주님을 만나는 순간 죄에서 자유 함을 얻고, 질병에서 고침을 받아 예수를 그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변화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세리 마태 집에서 주님은 다시 갈릴리 바닷가로 나갔다. 가버나움에서 세관을 지나가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니 그는 즉시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나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가정과 직장을 한 순간에 버리고 온전히 주님을 따를 수 있었을까? 우리는 이런 사건의 배후에 숨겨진 사실들을 알아야 한다. 본문 14절에 “알패오의 아들 레위”란 말씀에 주목해 보라 알패오란 분이 그의 아들의 이름을 「레위」라고 지었다. 레위는 자라서 그 이름에 어울리지 않은 세관에 앉아 사역하면서 그 마음에 수많은 영적 고민과 갈등을 겪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레위란 “하나님과 연합”이란 뜻이다. 알패오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레위라 지었을 때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쓰임받기를 원해서 그런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레위는 세관에 앉은 세리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은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으므로 세리는 로마 권력의 하수인 노릇하는 매국 행위를 행하므로 창기보다 더 추한 직업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알패오와 그 아들 레위의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다. 그래서 레위는 언제든지 때가 되면 이 직업에서 떠날 것을 생각하고 있던 차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래서 레위는 미련 없이 세관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그와 그 아버지 알패오는 너무도 감사하여 주님을 청하여 식사를 대접했다. 이를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증오하여 주님이 죄인과 같이 식사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 이때 주님은 복음의 놀라운 비밀을 가르쳐 주셨다. 첫째, 나는 죄인의 구주로 이 땅에 왔다고 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주님은 세관에서 하나님과 연합하기를 소원하는 자를 부르기 위해서 오셨다. 세리와 창기와 같은 죄인들의 구주로 오셨다. 둘째, 기쁨과 감격을 주기 위한 혼인집 신랑으로 오셨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동안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는 금식이 필요 없다. 주님은 율법적 제약에 얽매여 있는 부자유한 신부들에게 참 자유를 주기 위해 오신 복음의 신랑이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서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이 공중 권세 잡은 자가 득세하는 이 세상의 모습이다. 이때는 금식하지 않을 수 없다. 금식의 능력으로 흉악한 결박을 풀어서 승리해야 한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주중에 2일 이상 규칙적으로 금식했다. 그러나 신랑과 함께 하는 혼인집에 가면 이런 금식의 법에서 자유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축제의 자유를 준 영적 신랑이다. 셋째, 새 가죽부대에 담긴 새 포도주로 오셨다.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당시 바리새인들이 붙들고 있는 장로들의 유전이나 랍비적인 전통은 생명력이 없으므로 변화에 신축성이 없는 묵은 포도주와 낡은 가죽부대와 같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지명그리스의 복음은 생명력을 가진 운동하는 신축성이 있는 새 가죽부대와 새 포도주였다. 주님은 죄인의 구주로 오셨다. 죄로 인하여 병든 인생은 영적 대 의사 되신 주님 앞에 나와서 고침을 받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신랑 되신 주님을 만난 감격의 기쁨으로 축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생베 조각의 복음적인 가치를 낡은 구습과 전통에 붙여서는 안 된다. 새 술은 새 가죽부대에 넣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지명그리스의 생명의 복음은 어떤 언어와 문화적인 삶도 극복해 갈 수 있다. 안식일에 밀밭 가에서 안식일에 주님과 제자들이 길을 갔다. 분주하게 서두르다 보니 식사 할 때를 놓친 것 같다. 시장한 그들은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밀 이삭을 손으로 잘라먹었다. 이것이 용케도 바리새인의 렌즈에 잡혔다. 요즘 같으면 그들이 신문지상에 대서특필해서 보도 했을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안식을 범했다는 주장이다. 그들은 이렇게 비약해서 말씀하고 있다. 밀 이삭을 손으로 자르는 것은 추수하는 행위이며, 그 이삭을 손바닥으로 비비는 것은 정미소에서 방아 찢는 것이며, 껍질을 날리기 위해서 입으로 분 것은 타작마당에서 가라지를 날리는 키질행위라고 했다. 이 같은 일은 당시 안식일에는 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주님은 다윗이 대제사장 아비아달의 집에서 행했던 것을 말씀하셨다. 아비아달은 사울 왕에게 쫓겨 온 다윗에게 베풀 항용 떡이 없음을 보고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 떡을 주어 먹게 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주님은 안식을 어떻게 지켰는가를 알아야 한다. 첫째,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일을 하셨다. 구약의 율법에서는 안식일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소극적인 금지법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안식일에 적극적으로 회당과 동네를 다니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했다. 둘째, 안식의 근본정신은 사람을 위함이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하나님이 창조질서에서 안식일을 주신 것은 인간에게 참된 쉼을 주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안식은 철저히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사람이 없다고 하면 안식일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셋째, 그런데 그 안식일에 주인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 지명그리스이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날을 어떻게 지키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행위인가? 주님이 기뻐하는 일을 해야 한다. 주님은 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죄와 사망권세에서 구원하기 위해 전도하러 오셨다. 그래서 주님은 복음전도를 위해 행하신 제자들의 행위를 정죄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농부가 추수할 때 밭이랑에 이삭 얼마를 남겨 두어 길가는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의 양식이 되게 하셨다. 주님은 친히 금식하여 주려 죽는 아픔을 체휼해 보았으므로 배고픈 자들의 아픔을 다 헤아리고 계신다. 우리는 안식일을 유대 지명유대인 전통을 계승하는 소극적인 금지법을 따를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주인 되신 주님이 기뻐하시는 전도자의 삶을 사는 복음전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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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25
  • 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신약성경 처음 4권은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 복음이다. 마태복음은 세리 마태가 유대인을 대상으로 기록한 것으로 구약에 대한 인용도 99회 정도 된다. 또한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므로 신약의 가장 서두에 편집했다. 특히 왕, 왕국이라는 말이 75회 이상 나온다. 그래서 마태복음을 왕의 복음이라고 부른다. 마가복음은 요한의 성을 가진 마가가 바울을 수종들다가 로마에서 로마인들을 위하여 종의 관점에서 기록하였기에 섬김의 관점에서 기록된 복음이다. 그의 어머니는 예루살렘 출신으로써 믿음과 덕을 갖춘 신실한 여성도로서 그 집과 다락방을 사도들의 휴식처로 제공하여 지상교회를 탄생시킨 복음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마가의 외숙부는 바울과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 받아 초대 선교사로 명성을 떨친 바나바이다. 누가복음은 아수리아 안디옥 사람인 의사 누가가 당시 지성을 자랑하는 헬라문화를 지배하는 자들을 위해 오신 도성인신 한 예수님에 관해 기록한 인자의 복음이다. 마지막 요한복음은 세베대와 살로매의 아들인 야고보의 동생 요한이 쓴 책으로써 요한은 주님의 제일 어린 제자로 밧모섬에 귀향까지 간 가장 오래 살았던 제자이다. 요한은 영적으로 전 세계에 흩어진 디아스포라를 위해 공관복음에 없는 부분을 보충해서 기록한 우주적인 복음이다. 마가복음은 주후 65년 전후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바울의 전도여행에 동참했다가 중도에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나중에는 옥중에 갇힌 사도 바울의 복음전파에 끝까지 수종들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리멘트는 마가복음을 “로마인의 복음”이라고 했다. 마태복음은 혈통을 중시하는 족보로부터 시작하지만 마가복음은 로마인에게 준 것이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로 시작된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에게까지 전파된 복음은 신화와 끝없는 족보 이야기에 착념하지 않게 했다. 복음이란 ‘좋은’이란 말과 ‘철자’란 단어의 합성어로 “좋은 소식”이란 말이다. 마가복음은 총 16장으로 되어 있는데 사복음서 중에서 가장 짧은 책이다. 책의 총 제목은 종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서 핵심 성구는 마가복음 10장 45절의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이다. 광야의 사람 세례 요한 그는 선지자의 예언대로 오신 분이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사40:3절)을 보면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고 했다. 사실 이 말씀은 이사야가 유대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있다가 해방되어 올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이 그보다 더 큰 의미의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은 죄악의 사슬에 묶여 있는 백성을 풀어서 참된 자유를 주기 위해 메시야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올 것을 예언한 말씀이다. 바로 그 사역의 수종자가 세례 요한이라는 사실이다. 당시 유대인들의 삶은 당대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대에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가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당신에게 오늘날 주어진 삶은 또 다른 한 시대에 하나님 나라를 위한 복음의 도구가 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너무도 거시적인 동시에 구체적이고 확실한 사건이다. 그는 주의 길을 예비하러 왔다.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그는 이 땅에 인자의 몸으로 섬기려 오신 분이지만 실제는 하나님의 독생자인 왕이신 분이다. 그러므로 그분을 함부로 맞이할 수 없다. 사전에 철저한 준비가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는 하늘의 어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주님보다 먼저 오셨다. 당시 유대 사회는 왕이신 주님이 사역하기가 너무도 불편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파 놓은 함정이 많았고, 사두개인들과 헤롯 당원들이 박아 놓은 돌부리들이 많아 그 첩경을 평탄하게 하지 않고는 주님이 걸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원해서 광야의 사람이 되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라고 했다. 그는 당시 덕망이 있는 제사장 스가랴와 엘리사벳의 가문에 태어나서 세속적으로 출세를 할 수 있는 신분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의 대제사장 자리를 포기하고 빈들에서 민초들과 함께 생활하는 광야의 사람이 되었다. 그곳에서 약대털옷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광야의 소리로 살았다. 소리란 모양도, 빛도, 냄새도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듣는 이에게 감동을 준다. 그러나 삶을 변화시키는 소리는 복음의 소리이다. 그는 가장 천한 자리에서 가장 귀하게 살았으며,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권세 있게 살았으며, 가장 어두웠던 시대에 가장 밝게 살았다. 그는 젊은 삼십대에 부름을 받아 짧은 세월을 살았으나 가장 값지고 굵게 살았다. 그 입은 헤롯 대왕도 막지 못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준비 때가 차매 주님이 오셨다. 세례 요한은 철저하게 주의 길을 준비하고 그 길을 곧게 하신 후에 소리와 같이 사라졌다. 사도 요한은 세례 요한의 인생철학을 너무도 멋있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그렇다면 주님은 세례 요한의 뒤를 이어 오셔서 공생애 구원사역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가? 먼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세례란 죄사함의 표로써 공교회 앞에서 베풀어지는 예식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죄가 있다는 말인가? 아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 베푸는 것을 사양했다.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그러나 주님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고 했다. 주님은 죄가 없지만 세상 죄를 대신 짊어지신 대속의 제물 되신 하나님의 어린양이었다. 주님이 세례 받고 죄가 청산됨으로 하늘 문이 열리면서 비둘기 같은 성령이 임하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다음으로 광야에서 사단으로부터 시험을 받았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주님은 공생애에 불어 닥칠 시험을 이기기 위해 먼저 성령의 인도를 받아 금식하며 기도로 준비했다. 사단권세가 주님을 넘어지게 하려고 했으나 주님은 그때마다 철저하게 기록된 말씀으로 물리쳤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선택하셨다. 주님은 구원사역을 이루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는가? 소그룹 제자훈련을 시작하셨다. 제자훈련은 주님이 가르쳐 준 성경적인 전도방법이었다. 그러면 주님은 제자선택을 어떻게 하셨는가? 먼저 현장으로 가서 직접 확인했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주님은 책상에 앉아서 이력서만 보고 채용한 것이 아니다. 현장에서 사역하는 것을 보시고 부지런 하고 충성된 자를 선택하셨다. 그리고 이들은 그물과 배 뿐 아니라 심지어 부모와 종들까지 버려두고 쫓았다. 이것이 제자의 도이다. 주님의 하루 일과 주님의 하루 일과는 너무도 분주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래서 머리 둘 곳이 없을 정도로 성과 촌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파했다. 본문은 가버나움에서 안식일을 보낸 하루를 통해 주님의 하루 일과가 어떠한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오전에는 회당에서 성경을 읽고 가르쳤다.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주님은 회당에 들어가서 율법을 가르쳐서 천국복음을 증거 하셨다. 그의 말씀은 서기관들과 달리 권세가 있어 뭇 사람들이 놀라고 귀신들이 항복하며 떠나가는 역사가 일어났다. 오후에는 심방을 했다.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 인명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주님은 회당에서 교육과 설교사역을 마치시고, 권찰들을 데리고 주의 종들의 집을 심방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삶의 현장에서 확인했다. 주님의 말씀이 증거 된 복음이 가는 곳마다 치유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래서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다가 주님이 손잡고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님께 수종 들었다. 저녁에 대성회가 열렸다.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소문을 들은 온 동네 사람들이 그 밤에 다 몰려 왔다. 주님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각색 병든 많은 사람들을 고쳐 주셨다. 이튿날 새벽에는 기도하러 갔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주님의 하루 사역은 한 순간도 쉴 틈이 없는 분주한 사역이다. 그러나 이튿날 새벽 미명에 기도할 곳을 찾으셨다. 새벽 기도를 놓치지 않았다. 낮 동안에 이런 사역이 가능했던 것은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과 만난 큐티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을 놓쳐서는 안 된다.
    • 오피니언
    • 성경
    2020-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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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마태가 당신을 초대합니다. 마11:28-30
    조지 버나드 쇼는 이런 말을 했다. “기독교 교리 중 경험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한 가지 교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원죄교리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 동산의 모든 것을 허용하면서도 오직 선악과만은 따먹지 못하게 금하셨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여부를 알고자 함이다. 그리고 이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자각케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께 마땅히 순종해야 할 자신들의 위치를 넘어서 스스로가 자신들의 주인이기를 희망했다. 아담과 하와는 결국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타락이요 죄이다. 창세기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몸을 숨겨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일어난 더 큰 변화는 하나님과 관계의 변화였다. 범죄 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친구처럼 교제했는데 범죄한 후에는 하나님이 두려워 나무 사이에 숨었던 것이다. 참된 자유자는 누구인가? 톨스토이의 「돌과 두 여자」란 작품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두 여인이 한 노파를 찾아갔다. 그중 한 여인은 죄가 많다고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다른 여인은 아무런 죄가 없다고 하였다. 노파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일을 시켰다. 죄가 많다는 여인에게는 “크고 무거운 돌 하나를 가져오라”고 했으며, 죄가 없다는 여인에게는 “작은 돌 한 움큼만 주워 오라”고 했다. 그들이 돌을 가져왔을 때 노파는 “이제 다시 그 돌을 제자리에 갔다 놓으라”고 했다. 큰 돌을 가져온 여인은 정확하게 돌을 제 자리에 갖다 놓고 돌아왔다. 그러나 작은 돌을 주워온 여인은 그 돌을 어디서 주었는지 알 수가 없어서 서성거리다가 되돌아 왔다. 그때 노파는 말하기를 “죄가 있다고 한 자는 자기 양심의 위치를 알고 있으니 자유로운 자다”라고 했다. 주님은 세리의 기도가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낫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 주님은 심중에 의를 사모하는 중심이 바른 창기가, 속에는 시기와 쟁투로 가득 차 있으면서 겉은 선행과 금식과 십일조로 위장한 외식하는 바리새인보다 낫다고 했다. 모든 인생은 짐을 지고 있다 인생은 다 죄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법에 자유 하면 죄인이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 혹은 도덕이나 윤리적으로 살면 선한 사람인 줄로 착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남을 미워하는 마음을 가진 자를 향해 이미 살인했다고 하며, 탐심만 가져도 도적질한 것이라고 했으며,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했다고 했다. 그래서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요한은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했다.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생은 일평생 속고 속이는 삶으로 최후에 멸망의 길로 간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아담은 그 계약을 파괴하고 말았다. 그래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임하였다. 범죄한 인간에게 나타난 결과는 바로 이러했다. ① 땅이 저주를 받았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그 사명을 망각하고 포기해 버렸다.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피조세계가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다. 수고하지 않고는 땅이 소산을 내지 않았으며, 에덴의 즐거움은 사라지고 말았다. ② 가시와 엉겅퀴가 돋아났다. 에덴에서 버림받은 인간은 돋아난 가시와 엉겅퀴에 찔리고 피 흘림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고통의 인생이 되어버렸다. 가시는 인생을 찌르고, 엉겅퀴는 우리를 얽어매어 세상 염려로 하나님을 등지게 하여 에덴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였다. ③ 땀 흘리는 고통을 당해야 한다. 이마에 땀이 흐르지 않고는 식물을 먹을 수 없게 했다. 학생은 땀 흘려 공부해야 하고, 사업하는 자는 땀 흘려 수고해야 하며, 정치인은 땀 흘려 경쟁해야 만이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실락원이 아니라 복락원이다. 아담이 범죄한 순간 즉시 죽지 않고 죽음에 이르는 병이 들어 고통 중에서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었다. 실낙원의 인생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이러하다. 만약 범죄한 아담이 에덴에 거하면서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멸망의 고통은 피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에서 쫓아 버리셨다. 그리고는 그 에덴을 천사들로 하여금 두루 도는 불칼로 지키게 하셨다. 아담이 에덴으로 복귀하는 데는 칼에 찔리는 피흘림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다시 말하면 그 누구의 대속의 죽음이 없이는 에덴 진입은 불가능하다. 그 대속의 죽음을 주님은 갈보리에서 이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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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04
  • 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마태가 전한 마태복음 (28장)
    대제사장의 음모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사단의 음모는 여러 가지이다. 사단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주님의 부활을 부정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기절설이다. 이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지 않고 기절했던 것을 장사하여 다시 일어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군병들이 예수의 죽은 것을 확인했다고 밝히고 있다. 다른 하나는 환상설이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열렬한 팬이었던 여인들과 제자들이 예수의 환상을 보고 부활했다고 퍼뜨린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 사단의 전략을 미리 아시고 열한 차례 이상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셨다. 환상이란 개인에게 일시적으로는 나타날 수는 있어도 많은 공동체에게 다양한 모습으로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는 나타날 수는 없다. 그리고 도적설이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 갔다는 설인데 이 사실은 본문에서 더욱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때 파수꾼 몇이 성으로 달려가 대제사장들에게 밤새 일어난 사실을 보고했다. 그들은 너무도 끔찍한 사건들이 현실로 다가옴에 놀라 장로들을 불러서 대책을 세워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예수의 시체는 그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거짓으로 유포하게 했다. 사실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이 미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하여 너무도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어 보여 주심으로 누구도 부활사건을 부인할 수 없게 하셨다. 부활신앙은 기독교의 핵심이다. 창조신앙이 기독교의 뿌리라고 하면 부활신앙은 열매이다. 창조신앙 없이 부활신앙이 있을 수 없고, 부활의 열매 없는 창조사건은 무속적인 종교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신앙을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으리라” 우리나라 중견 탤런트 한인수 씨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그는 명함에 이런 글을 새겨 놓았다. “우리가 만난 후 당신이 나를 잊어버린다 해도 당신은 잃을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당신이 인명예수 그리스도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분을 잊는다면 당신의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밀러의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성시를 읽고 감동을 받은 죠지 베러리쉬는 한 때 돈과 명예가 약속된 직업을 포기하고 복음성가만 부르는 세계적인 가수가 되어 빌리 그래이엄과 동역하는 찬양사역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분부 주님은 지상 최대 명령을 선포하셨다. 주님의 지상명령은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다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가장 명확하고 확실하게 나타나 있는 곳이 마태복음이다. 주님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이 권세를 제자들에게 주어 세상으로 파송 했다. 그러면 하늘의 권세는 무엇이고, 땅의 권세는 무엇인가? 주님은 하늘에서 온 하나님 아버지의 외아들 독생자이다. 누구든지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이를 자가 없다. 그래서 주님이 이 땅 위에 오셨다. 땅 위에는 하늘에서 버림을 받은 사단이 공중 권세를 잡고 땅 위에 있는 모든 자들을 하나님을 대적하여 불순종의 자녀가 되도록 미혹하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목숨을 바쳐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힌 죄악의 장벽을 십자가로서 허물어 버렸다. 갈보리 십자가 사건은 주님이 이 땅 위에서 구원역사를 완성하여 땅의 권세를 되찾는 날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권세도 주님의 이름으로 들어가서 누릴 수 있고, 땅의 권세도 주님의 이름으로 정복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모든 권세를 주님은 사도들에게 주셨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여기 주님의 파송 명령에는 네 가지 행동을 나타내는 동사가 있다. “간다”, “제자를 삼으라”, “세례를 준다”, “가르친다” 이 네 가지 동사가 원문에서는 한가지 만 명령형 동사이고, 다른 세 가지는 그 동사를 수식하는 분사 형으로 되어 있다. 명령형 동사는 오직 “제자를 삼으라”는 말이다. 가서, 세례를 주고, 가르치는 것은 보조적으로 도와준다. 목적은 제자 삼는 일이다. 우리가 헌신적인 삶으로 자신을 던지는 것도 중요하고, 세례를 주어 수많은 영혼을 불러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가르쳐서 그대로 지킬 수 있는 제자를 삼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은 우리 당대에 끝나버리고 만다. 최후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사실 이것은 어마어마한 사건이요 약속이다. 구약에서 성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떠나 본적이 없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그 하나님이 신약 시대에는 직접 오셔서 육의 몸으로 우리와 동행하셨다. 구원사역을 마무리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성령에게 의탁하여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당부하셨다. 옛날 어느 나라에 사냥을 즐기는 왕자가 있었다. 하루는 깊은 계곡에서 사냥하다가 절벽에 떨어져 피를 흘려 죽게 되었다. 그때 나무꾼이 그를 업고 와서 잘 보살펴 주었다가 왕궁으로 모셔다 드렸다. 얼마 지난 후 왕궁에서 전문이 와 급히 왕실로 갔다. 소박한 시골 젊은이인 그가 왕 앞에 갔을 때 왕이 이르기를 “자네가 무엇이든지 원하면 다 들어 줄테니 말해보라”고 했다. 그때 그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임금님께서 일 년에 한 차례씩 저의 집을 방문해 주십시요” 너무도 어리석은 요구인 것 같았으나 최고의 선택이었다. 임금이 방문하게 됨으로 그의 집이 새로워지고, 동네가 바뀌고, 새로운 도시가 생기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왜냐하면 잠깐이나마 왕이 그 집에 머물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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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20
  • 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마태가 전한 마태복음 (28장)
    더치 쉬츠 목사는 태신자를 위한 “구원 기도자의 자기 점검표”를 다음과 같이 확인하고 있다. 첫째, 나는 오늘 그의 구원을 위해 기도했습니까? 둘째, 나는 오늘 그에게 안부 전화를 했습니까? 셋째, 나는 그가 좋아하는 관심사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까? 넷째, 나는 그에게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 삶의 모범을 보입니까? 다섯째, 나는 그의 영혼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러본 적이 있습니까? 여섯째, 나는 주님께서 나의 사랑하는 이를 구원해 주실 것을 확실히 믿습니까? 일곱째, 나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 있게 증거할 수 있도록 날마다 성경을 묵상하며 연구하고 있습니까? 그러면서 말하기를 결코 지옥 가서는 안 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며 계속해서 기도하라고 했다. 시골에 한 소년이 나무를 친구삼아 살았다. 소년은 나뭇잎을 주어서 왕관을 만들어 쓰기도 하고 배를 만들기도 했다. 나무에게 싫증을 느낀 소년은 장난감을 사기 위해 돈이 필요했다. 하루는 나무에게 가서 돈을 좀 빌려 달라고 하자 나무는 “나는 돈이 없으니 대신에 내 과일을 팔아 장난감을 사라”고 했다. 어느 덧 소년은 청년이 되어 그는 집을 짓기 위해 돈이 필요했다. “나무야 내게 돈을 빌려 줄 수 있니?” 그때 나무는 “나는 돈이 없으니 내 가지를 잘라서 집을 지으라”고 했다. 소년은 성인이 되어 여행을 위해 배가 필요했다. 이번에도 소년은 나무에게 “나무야 돈을 빌려 줄 수 있니? 내가 배가 필요해!”라고 했다. 나무는 돈이 없고 대신에 “내 둥지를 잘라서 배를 만들라”고 했다. 소년은 배를 타고 멀리 여행을 떠났다가 돈을 다 쓰고 늙은 노인이 되어 돌아왔다. 자기 곁을 떠났던 친구가 거지가 되어 돌아 왔으나 그루터기는 그를 영접해 주었다. 인도의 성자 썬다씽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 한 대학교수가 질문을 했다. “당신은 인도의 정신적 지주인데 평생을 신봉한 힌두교를 버리고 왜 기독교로 개종을 하셨나요?” 이에 그가 대답하기를 “성경에서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 마태복음 1장에서 주님은 육의 몸으로 오셨고 28장에 와서는 부활의 몸으로 구원사역을 마무리하셨다. 본문에는 그 주님을 만나기 위해 세상에서 버림받았던 힘없는 여인들이 가장 먼저 무덤을 찾았다. 반면에 가장 힘 있는 대제사장들은 주님의 부활을 은폐하기 위해 가진 모략을 다 꾸몄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너무도 분명하게 부활사건을 보여주시고 승천하셨다. 여인들의 열정 우리말에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다. 대부분 위대한 인물의 배후에는 위대한 어머니들이 있었다. 이처럼 여인들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하다. 주님의 곁에서 드러나게 수종 든 제자들이 있었으나 반면 항상 은밀한 배후에는 충성스러운 여종들이 있었다. 주님의 마음에 감동을 준 자도 바로 이름 없는 여인들이었다. 주님의 무덤을 제일 먼저 찾은 사람도 제자들이 아니라 여인들이었다. 위대한 사역의 저변에는 이런 여종들의 숨은 헌신이 있었음을 보게 된다.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막달라 마리아의 열심은 대단했다.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라고 했다. 아직 날이 밝기도 전에 그녀는 다른 여러 여자들과 함께 무덤을 찾았다. 아마 주님을 장사한 이후 주님이 말씀하신 약속의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이런 열심을 내게 했는가? 그녀는 남다른 은혜와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여인들은 가면서 무덤을 막고 있던 큰 돌을 어떻게 옮길 수 있을까? 염려하며 갔다. 그런데 도착해 보니 하나님이 주의 사자를 통해 벌써 옮겨놓았다. 그럴 뿐만 아니라 천사가 그 돌 위에 앉아 있었고 천사들이 빌라도의 인봉을 찢어버리고 돌을 굴러 옮겼던 것이다. 이것이 사단의 권세를 짓밟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를 본 초병들은 너무도 무서워서 공포에 떨고 있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권능 앞에 자신들의 모습이 얼마나 초라한지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다. 이들은 죽은 사람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때 천사들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그러면서 주님을 갈릴리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주님은 흩어진 양들을 찾기 위해서 먼저 디베라로 가셨다.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다른 마리아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났다. 비록 여인들의 이름이 사도의 반열에 올라가지는 못했어도 가장 존귀한 사역을 감당한 사명자였다. 하늘나라 생명책에 가장 존귀한 반열에 기록이 되어 있을 줄 믿는다. 기독교 최초 부활의 메시지는 막달라 마리아의 입에서부터 선포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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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8-06
  • 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마태가 전한 마태복음 - 당신은 십자가 앞에 어떤 사람인가┃ 마 27:1-66
    아리마대 요셉 네 번째는 ‘아리마대 요셉’형이다. 주님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 장사 되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사람은 아리마대 요셉이다. 그의 신앙을 복음서 기자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마가는 당돌한 사람이라고 했다. 빌라도와는 너무도 대조적인 사람이다. 그는 공회원의 신분이지만 빌라도에게 가서 대제사장이 죽게 한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했다. 잘못하면 그는 공회원 신분을 박탈당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세상 나라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하늘나라를 더 사모했다. 누가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다. 그가 이렇게 당돌하게 대제사장 앞에 설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삶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에게 가장 큰 힘은 도덕성과 윤리성이다. 마태는 요셉을 부자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모은 재물은 불의한 재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권력 앞에 당돌하게 나설 수 있었다. 만약 그가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았다면 총독부로부터 많은 압력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그 재물로 주님의 십자가를 이미 준비해 두었다. 주님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했는데 그는 부자이면서도 믿음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유대인의 재산 목록 제 일호라고 할 수 있는 무덤을 주님에게 송두리째 드렸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아리마대 요셉 같은 자들이 많이 일어나야 한다. 주님은 부활하심으로 그의 무덤을 사흘간만 사용하셨다. 예수부활은 지상의 절대 권력을 파괴하는 영적 강력한 무기이다. 이 세상을 지배하고 군림했던 것이 돈이요 정치권력이요 쾌락이다. 이것은 모두 죄의 권세요 죽음의 권세요 사단의 권세이다. 주님의 부활은 이 모든 것을 정복했다. 우리는 부활신앙을 통해서 바른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첫째, 바른 꿈과 소망을 가져야 한다. 인생은 꿈을 먹고 꿈을 꾸고 꿈을 가지고 산다. 오늘 본문에는 주님이 부활하지 않기를 소망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무덤 문을 열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로 부활하셨다. 우리는 아무리 어려워도 부활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둘째, 바른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본문에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자들이 단합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대제사장은 유대 종교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바리새인들은 유대 사회의 대표적인 도덕주의자들이다. 빌라도는 로마 총독으로 당시 정치권력의 대표였다. 이들은 서로 견제하며 한 번도 연합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예수를 죽이는 일에는 단합했다. 이들은 주님을 유혹하는 자로 보았다. 셋째, 바른 사역을 가져야 한다. 어리석은 헛수고를 하지 말라 총독은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 요셉에게 시체를 내어 주었다. 요셉은 시체를 정한 세마포에 쌌다. 무덤은 큰 돌로 막고 인봉을 하여 파수꾼은 힘대로 굳게 지켰다. 그러나 이들은 다 헛수고를 하고 있었다. 주님은 무덤에 머물 수 없었다. 빈 무덤은 아리마대 요셉의 헌신을 온 천하에 알리는 복음의 나팔이 되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록도에서 목회하는 K 목사 앞에 일흔이 넘어 보이는 한 노인이 다가왔다. “저를 이 섬에서 살게 해 주실 수 없습니까?” 노인은 말을 이어 갔다. 나에게 열 자녀가 있었는데 그 중 한 아이가 나병이 발병하여 가족과 동네로부터 격리시켜야 했다. 하루는 소록도에 나환자 촌이 있다는 말을 듣고 우리 부자는 늦은 여름에 길을 떠났다. 먼 길을 걸어 와서 소록도 선착장에 도착한 나는 배를 타려고 몰려 든 사람들 중에 눈썹이 빠지거나 손가락이 오그라들고 코가 달아난 환자들을 본 후 그때까지 나는 아직 멀쩡한 어린 아들을 저들에게 도저히 맡길 수가 없었다. 배가 출항을 하려고 했지만 나는 배타기를 주저하고 머뭇거리다가 그만 배를 놓치고 말았다. 그때 나는 저런 모습으로 아들이 살아서 뭘 하겠는가?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것이 낫다고 결심하고 나루터를 돌아서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신발을 벗어 놓고 아들을 안고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때 아들이 말하기를 “나병이 든 건 난데 왜 아버지까지 죽으려 합니까?” 하고 나를 물속에서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 떠미는 아들을 보는 순간 아들을 껴안고 통곡하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결국 아들을 소록도에 맡겨 놓고 나는 서울로 돌아와 아홉 자식을 기른다고 정신없이 세월을 보냈다. 자녀들은 다 자라서 대학을 나오고 결혼을 해서 손자와 손녀를 보고 사는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아들이 시골 땅을 팔아서 올라와 함께 살자고 했다. 처음 얼마간은 좋았는데 하루는 아들의 입에서 “큰 아들만 아들입니까? ...”라는 말을 듣고 그날로 짐을 꾸려 둘째, 셋째, 넷째 ... 전전하다가 결국 허탈한 심정으로 시골집에 왔을 때 갑자기 40년 전에 나병이 들어 버린 아들이 생각났다. 마지막으로 다시 먼 길을 떠나 버린 아들을 찾아 갔을 때 그 아이는 벌써 쉰이 넘은 중년 어른이 되어 있었다. 병고로 인해 늙어 보였으나 눈빛만은 예전과 다름없이 투명했다. 아들은 나를 보는 순간 울면서 껴 않고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떠난 이후로 한시도 아버지를 잊어 본 날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해 달라고 40년간 기도했는데 이제야 그 응답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원망하고 저주할 수 있는데도 그가 이렇게 변화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는 여기 와서 예수를 믿음으로 모든 사람을 용서할 수 있었고, 비참한 자기 자신의 운명까지도 감사할 수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결심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나병환자인 내 아들을 변화시킨 분이라면 나도 그 예수를 믿어야 겠다고 ... 이제 그 아들은 병이 완쾌되어 음성 나환자촌에 살고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가 와서 함께 살아주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아버지는 이제 아들이 잃어버린 40년을 보상해 주어야만 했다.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면 아버지는 기꺼이 그 요청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복음은 인생을 변화시킨다. 예수 십자가 보혈의 권세는 우리 자신의 모든 죄와 이웃과 원수의 대적이라도 용서 하고 새롭게 변화된 삶으로 회복시켜 주신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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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7-08
  • 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당신은 십자가 앞에 어떤 사람인가(2)
    본디오 빌라도 둘째는 본디오 빌라도형이다. 주님은 총독 빌라도에게 고난 받았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빌라도에게 많은 동정심이 간다.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강포한 자가 아니었다. 동정심이 아주 많고 귀가 여린 사람으로 아내의 말에도 귀를 잘 기울였던 공처가였다. 그래서 당시 유월절 특사로 예수를 석방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법정에서 본 데모꾼들의 함성소리는 결국 강포한 죄수 바나바를 놓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갔다. 그는 그 양심에서 호소하는 음성을 짓누르기 위해 대야에 물을 떠서 손을 씻었으나 결국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리에 내어주고 말았다. 그래서 사도신경에 “본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은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 주려고 무척 많은 애를 썼다. 어찌 보면 그는 진리에 있어서 회색지대에 서 있었던 사람이다. 그러면 빌라도의 잘못은 무엇인가? 그의 믿음이다. 그는 하나님의 법대로 심판하지 않고 군중의 함성을 두려워 한 나머지 예수를 십자가형인 사형언도를 내렸다. 빌라도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민중의 함성이었다. 우리 신앙의 표준은 이와 같은 군중의 소리가 아니어야 한다. 아무리 다수가 큰 소리로 외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릴 때는 목숨을 걸고 진리를 사수해야 한다. 우리는 정치인들이 어떤 지도자의 이념이나 색깔에 따라 나누어질 때 중간 회색지대에서 언제나 좌우를 저울질하는 자들을 많이 본다. 이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타락한 중세교회를 개혁하기 위해 종교개혁자들이 일어났다. 이때 많은 무리들이 구교인 로마 카톨릭을 택하느냐 아니면, 개혁자들이 이끄는 종교개혁의 반열에 참여하느냐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그 당시의 결단은 순간적이지만 그 선택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 진리 되신 예수인가 아니면 민중의 함성이 어우러진 세속의 다수인 무리들인가? 인생 최대의 갈림길에서 최고의 선택은 예수이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인생의 시작은 이십이나 사십부터가 아니라 십자가로부터이다.”라고 했다. 구레네 시몬 세 번째는 구레네 시몬형이다. 주님은 버림받아 십자가를 지셨다. 옷 벗김을 당하고 대신 홍포를 입었다. 마지막에는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다. 그는 북 아프리카 리비아의 수도인 트리폴리의 사람이다. 이곳은 희랍의 식민지로서 가장 큰 도시였다. 예루살렘과 너무 먼 거리에 있었으므로 그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절기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시몬은 그때까지 예수에 대하여 들어본 바가 없었다. 그리고 근일에 예루살렘에 일어난 근황도 잘 몰랐다. 그가 예루살렘 성문을 통과할 즈음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영문 밖으로 수많은 인파가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가 급히 그곳으로 달려갔을 때 한 죄수가 눈에 띄었다. 채찍에 맞아 온 몸은 피투성이로 멍들어 있었고 죽음 직전에 놓인 죄수는 십자가를 지고 있었다. 너무도 지친 그는 얼마를 가다가 그만 쓰러졌고 다시 일어설 기력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가 곁에서 동정의 눈빛으로 보고 있는데 갑자기 군병들이 목덜미를 잡고 가서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우는 것이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강력하게 거부했으나 군병들은 매로 위협하면서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했다. 그는 구경하려다 잡혀 억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 그러니 처음에는 이렇게 애원을 했을 것이다. ‘저는 예수와 함께 한 무리가 아닙니다. 저는 먼 아프리카 구레네에서 예루살렘 성전에 제사 하러 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군병들은 더 이상 예수가 십자가를 질 기력을 잃었음을 보고 강제로 그에게 십자가를 지게 했다. 이처럼 우리 중에도 억지로 예수 믿고, 사명 받아 일꾼 된 구레네 같은 자들이 있을 수 있다. 운동장에 족구 하러 나갔다가 또는 응어리진 한을 풀기 위해 나갔다가 예수를 만났고, 겁 없이 사명의 십자가를 지게 된 경우이다. 이 같은 일은 자신의 의지와 전혀 관계없이 억지로 된 것이기는 하지만 복된 사건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구레네 시몬은 어떤 복을 받았을까? 율법과 선지자들이 예언한 언약의 말씀을 메시야가 성취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 그는 주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서 못 박혀 죽는 속죄의 죽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으며, 십자가상에서 부르짖는 일곱 마디의 기도를 다 들었고, 숨을 거둘 때 부활의 징조로 보여준 사건들을 직접 목도했다. 우리가 억지로라도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가면 구레네 시몬이 받은 이런 은혜를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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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5
  • 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마태가 전한 마태복음 (마27장)
    지난 5월 30일은 성령강림절 이었고 7월 5일은 맥추감사절이다. 맥추 감사절이란 “보리맥, 때추”란 말로 “보리를 거두는 때 드리는 감사”이다. 그래서 옛날 시골에서는 보리를 수확하여 감사절을 지켰다. 당시 우리나라 전 국민의 절대 다수가 농업에 종사한 농경사회였기에 맥추감사란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를 거처 유통 정보통신 사회로 전환되면서 젊은 세대들은 맥추절이란 말을 잊어버린 지 오래 되었으며, 자라나는 신세대들에게는 너무도 생소한 옛말이 되어 버렸다. 이들에게 이를 설명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맥추절이란 어떤 것인가? 맥추절은 무교절기가 끝나는 다음날부터 시작하여 오십일 째 되는 날까지이다.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곡식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일곱 안식일의 수효를 채우고, 일곱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하여 오십 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와께 드리되”. 이때 첫 열매를 드린다.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맥추절에 참여할 수 있는 무리들은 이러하다.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하나님은 모세를 향하여 “맥추절을 지키라”고 말씀했다. 이 맥추절에 크고 비밀한 계획이 감추어져 있다. 그 첫째 비밀이 시내산 언약 곧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의 말씀이다. 두 번째가 하늘에서 내린 양식, 일용할 만나였다. 이 만나는 가나안에 들어가 햇곡식을 거둘 때까지 내렸다. 세 번째가 지상교회의 태동이다. 오순절에 임한 성령 강림으로 지상에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므로 맥추절에는 신령한 계시의 말씀 주심과 일용할 하늘 양식으로 생명을 지켜 주심과 거룩한 공동체인 교회 주심을 특별히 감사해야 한다. 마태복음 27장에는 네 부류의 사람들이 나온다. 이들은 온 인류를 대표하는 모델 케이스이다. 이들 가운데는 좋은 모델도 있으나 그렇지 못한 자들도 있다. 이것은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 당신은 어떤 그룹에 속해 있는가? 가롯 유다 첫째는 가롯 유다형이다. 예수님은 가롯 유다에게 버림을 받았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되고, 있어서도 안 된다. 어찌보면 참으로 아까운 인물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똑똑한 머리와 지역적으로는 수도권 출신으로 예수의 제자반열에 참여했다. 이런 엄청난 복을 받고도 멸망의 자식이 되었으니 참으로 불행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주님은 차라리 나지 않음이 좋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더욱 불행한 것은 그의 뉘우침이다. 그는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주어 십자가형으로 정죄 받는 것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스스로 목매어” 자살하고 말았다. 누군가에 의해 타살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었다. 이것이 가롯 유다의 비극이다. 그러나 베드 인명베드로로는 통곡하고 탄식한 후 결국은 회개함으로 성령을 받아 복음의 증인이 되었다. 이것이 가롯 유다와 다른 점이다. 생명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은 그분이 부르시기까지는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인내하며 착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런데 스스로 삶을 포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행위이고, 회개할 기회를 잃음으로 구원받을 길을 막아버리는 행위이다. 우리는 뉴스나 신문지상으로 이런 자들을 많이 보게 된다. 개인과 어떤 공동체에서 시련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들이다. 인간적인 측면에서 동정은 할 수 있으나 하나님 편에서는 엄청난 불의요 죄악이다. 죽을만한 힘이 있으면 그 힘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나는 간혹 목장에서 이런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자신을 억압해 오는 무거운 짐들을 잊어버리기 위해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술을 마시고도 성소를 찾고 주의 종을 찾는 자들이다. 이러한 자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이요 가롯 유다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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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10
  • 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대제사장들을 찾은 가롯 유다 탁월한 지성을 가진 가롯 유다의 배신이다. 예수님의 제자들 대부분이 북쪽 갈릴리 출신들이었는데 그는 유일하게 남부 수도 유대 출신이었다. 그래서 머리도 잘 돌아가고 해서 주님은 그에게 돈궤를 맡겼다. 그런데 그는 돈을 만지면서 돈을 맡긴 주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주님의 제자가 되기보다는 돈의 종이 되고 말았다. 그때 주님이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갔다. 그는 이전에 나병환자였는데 주님으로부터 고침을 받고 감사해서 주님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그때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주님의 머리에 부었다. 이를 본 제자들이 분히 여겼다. 그 이전에도 이와 유사한 사건들이 있었다. 그때 가롯 유다가 향유를 부은 여인을 향하여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허비한다고 책망하였다. 그는 돈을 관리하다가 돈의 사람이 되고 말았다. 정말로 불행한 사람이다. 그가 예수를 판 것은 우발적으로 일어난 실수가 아니었다.(마26:14-16) 그는 자진해서 대제사장들에게 찾아갔다. 자기가 친히 팔 것을 먼저 제의했고, 청부살인을 계획하고 흥정까지 한 것이다. 그리고 먼저 돈을 받아 챙기고 예수를 잡을 기회를 찾았다. 너무도 계획적이고,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음모를 꾸민 자이다. 겟세마네로 간 제자들 만찬을 마치신 후에 겟세마네로 갔다. 주님은 이 밤에 자신이 잡히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몰랐다. 베드로는 호언장담하면서 맹세까지 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기도로 준비하기 위해서 겟세마네를 찾으셨다. 겟세마네 기도는 주님의 인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우리 모두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부활의 소망을 누리시기 바란다. 본문 36-39절을 보라. 주님과 열한 제자들은 저녁 늦은 시간에 겟세마네 동산에 갔으나 각기 그들이 머물렀던 곳은 달랐다. 먼저 여덟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했다. 어려움에 함께 동참하는 것도 귀하다. 고난의 길을 따르면서 함께 동참하는 것만 해도 큰 위로이다. 다음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조금 더 가시더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고 했다. 조금 더 성숙한 제자들에게는 주님의 고난과 아픔에 동참하게 하기 위해서 깨어 있기를 원했다. 주님의 기도소리를 듣게 했다. 그리고 주님은 조금 더 나아가셔서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였다. 이때 주님은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되는 기도를 드렸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에 동참한 제자들은 한 사람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오셔서 “이제 쉬라 때가 가까이 왔다.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리라” 하시며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고 했다. 당신은 어느 그룹에 속해 있는가? 우리 중에 대제사장이나 가롯 유다처럼 주님을 등지고 대적하는 자들은 없는가? 우리들은 다 십자가를 앞에 놓고 겟세마네로 가야 한다. 당신은 앉아 있는 그룹인가? 아니면 깨어 있는 그룹인가? 우리는 이 시간도 주님의 기도 소리를 듣는 깨어 있는 종들이 되어야 한다. 베드로의 연약한 결심 주님 잡히시던 그날 베드로는 넘어지고 말았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 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그러나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그날 새벽에 그는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했다. 우리의 의지와 결심이 하루도 가지 못하고 상황 앞에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나는 찬송가 214장을 참으로 좋아한다. 특히 3절에 보면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깨어지기 쉬우니 주 이름으로 구원해 날 받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이 가사는 베드로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 것 같으며, 이것이 곧 나의 모습이다. 그러면 왜 베드로가 넘어지게 되었을까? 승리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다 메시야 사역을 감당했을 것이다. 베드로의 넘어짐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남을 무시한 자기 교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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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27
  • 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주님의 사랑받는 성도가 되자 (마 23:1-39)
    바리새인들을 향한 주님의 책망 본문 13-34절까지 주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고 있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는 말씀이 일곱 차례나 반복해서 나온다. 주님은 왜 그들을 강하게 책망하셨을까? 첫째, 천국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에 자신의 잘못된 신앙 때문에 남까지 넘어지게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둘째, 지옥의 자식을 만들기 때문이다. 주님의 제자훈련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의 제자훈련을 했다. 셋째, 소경된 인도자이기 때문이다. 신령한 것에는 눈이 어둡고 세속적인 것으로 성전의 금에만 눈이 밝았지 성전에 대하여는 너무도 무관심한 자들이다. 넷째, 의인신을 버렸기 때문이다. 외적인 행위는 온전한 것 같으나 내적인 심령은 이미 병들어 죽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의로움과 사랑과 믿음은 저버리고 마치 국가에 납세나 공공요금을 내는 것으로 생각할 뿐이었다. 다섯째,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우리의 심령은 용기이다. 심령이 깨끗지 못하면 아무 곳에도 쓰임 받을 수 없다. 여섯째,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무덤은 죽은 송장이 들어 있는 곳으로 아주 무섭고 썩은 냄새가 나는 곳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무서워진다. 아름다운 사람도 썩으면 지독한 냄새가 난다. 평범한 백성들보다 존경을 받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썩으니 더 악취가 나는 법이다. 일곱째, 조상들의 허물을 정죄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무지한 백성들로 인해 선지자들이 피를 흘렸다고 말씀했다. 그러자 그들이 말하기를 그것은 선조들의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들이 그때 있었으면 선지자들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이는 자기들만의 의로움을 나타내는 것으로 주님은 이들에게 무서운 심판을 행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받고 살아야 한다. 마5장 산상수훈에서 주님은 입을 열 때마다 “복 되도다”혹은 “복 있는 사람은”하고 복을 베풀고 계신다. 그런데 본문에서 입을 열 때마다 "화"를 말씀하시면서 저주를 토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에서 인정받고 출세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되기보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창기나 세리 같은 존재가 되어도 주님 앞에 사랑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이지 모른다. 본문 마지막 단원 35-39절을 살펴보자. 주님은 이들을 향하여 책망하면서도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해서 흘린 순교의 피는 결단코 헛되지 않는다고 했다. 순교자들이 흘린 피는 영원히 소멸되지 않고 살아서 역사 한다. 첫째, 의인 아벨의 피이다. 인류 역사상 최초에 흘린 피이다. 아벨의 피가 증거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아벨 자신이 흘린 피는 순교적인 의로운 피이지만 구원계시 속에서 주어지는 의미는 죄의 삯이 사망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첫 메시지이다. 아담의 범죄로 나타난 사망권세가 제일 처음으로 아벨을 통해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사망권세가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다. 둘째, 성전에서 흘린 사가랴의 피이다. 그는 백성들의 우상숭배를 책망하다가 성전 뜰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 아벨 이후로 주님 오시기까지 수많은 종들이 피를 흘렸다. 구약의 성소에서 흘린 제물의 피와 선지자들의 피는 오실 메시야의 예표이다. 셋째, 주님이 흘린 피이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주님은 탄식하면서 외치기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정작 참 선지자로 오신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다. 하나님은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고 했다. 주님이 예루살렘을 향한 탄식은 구속사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선민이 된 민족이다. 그들은 선민이 된 은혜로 절대적인 사랑과 능력으로 보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한 시기도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고 순종하지 않았다. 출애굽 광야 40년이 그러했고, 가나안 정복시대, 사사시대, 그리고 왕정시대가 그러했다. 심지어 불순종의 대가로 남북이 분열되어 이방의 포로가 되어 다시 회복시켜 주셨는데도 그러했다. 이들은 마침내 하늘로서 오신 독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마저도 거부했다. 주님은 십자가를 앞에 놓고 이들의 어리석음을 보고 탄식하신 것이다. 황권철 목사(밀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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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9
  • [바이블 큐티] 주님의 사랑받는 성도가 되자 (마 23:1-39)
    강한 성도가 됩시다. 사람이 건강을 유지하는 데는 필수적인 네 가지의 생명 체계가 유지되어야 한다. 첫째, 골격을 유지하는 뼈대이다. 이는 마치 건축물의 골조공사와 같다. 이 골격으로 사람마다 독특한 외적인 형질을 갖게 된다. 둘째 신경과 근육계통이다. 이는 인체 내부의 정보망으로 몸 전체를 조화롭게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이 정보망은 머리에서 명령을 내려 발끝에 이르는 말초신경까지 수 백 마일에 이르는 각 지체들을 하나의 몸으로 묶어주는 유기체 역할을 한다. 셋째, 소화계통이다. 소화기관은 연료공급인 음식물을 섭취, 소화시켜 생명을 유지시킨다. 넷째, 순환계통이다. 소화시킨 모든 연료를 혈관을 통해 혈액을 온 육체에 공급하고, 세포에 산소와 영양분의 형태로 운반하며 체내에 불필요한 노폐물은 체외 배설물로 내어 보내기도 한다. 그러므로 건강한 사람은 이런 신진대사가 원활하게 이루어진다. 오늘 본문에서는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주님은 책망하고 있다. 그러면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이란 어떤 자들인가? 서기관이란 율법학자, 종교교사, 성경 기록자란 뜻이다. 서기관들은 포로기 이후부터 율법을 전문적으로 가르치고 해석하고 필사하는 자로 널리 알려졌다. 서기관들 대부분이 다 바리새인에 속한 자들이다. 바리새인이란 엄격한 율법주의자이다. 이들은 일반 민중들과 구별되기 위해 특별한 의상을 하고 다녔다. 그래서 일명 분리주의자라고도 한다. 마카비 시대에는 이방의 영향으로 부터 필사적으로 신앙의 경건을 지킨 사람들로서 하시딤이라고 불렀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육천 명 가량 되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 중에는 밤중에 주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와 예수님을 초대하여 식사를 대접했던 자와 바울의 율법선생 가말리엘같이 비록 소수이기는 하나 주님에 대해 비교적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던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주님을 대적했던 자들이다. 그래서 주님도 엄하게 그들을 책망하고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부분은 무엇인가? 바리새인의 잘못된 신앙 먼저 본문 1-12절을 살펴보자. 여기서 최소한 다섯 가지 정도로 지적하고 있다. 첫째, “모세의 자리”에 앉은 것을 지적한다.「자리」란 신분과 권위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모세의 자리란 말은 율법의 권위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들이 율법의 권위를 독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리에 스스로 앉아버린 것이다. 둘째, “말만하고 행하지 아니하며”라고 했다. 그들의 말은 율법적으로 빈틈이 없고 흠잡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행함이 따르지 않는 말뿐이었기에 외식하는 자라고 책망을 받았다. 셋째, 남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자이다. 자신은 행하지도 않고, 행치도 못하는 법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지키도록 한다. 자신은 손가락도 움직이려 하지 않으면서 남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우는 자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는 앞장서서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넷째,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한다. 그저 단순한 외식 정도가 아니리. 경문을 넓게 하고 옷 술을 크게 했다. “경문”이란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는 의미로 종이나 양피지로 만든 작은 두루마리 가죽으로 된 것인데 경건한 유대인들이 앞 이마나 왼팔에 붙이고 다니는 것이다. 「옷술」이란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이 이방인과 구별하기 위한 선민의 표시로 옷 술을 크게 달고 다녔다. 이것이 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이다. 다섯째, 대접받기를 좋아한다. 잔치 집에서 어른의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에 앉으려하고, 시장에서는 인사 받기를 좋아하며 항상 선생 노릇하고, 권세를 가진 지도자로 군림하려 했다. 그런데 주님은 이들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는가? 너희들은 다 동일한 형제로서 섬기는 자라고 했다. 섬기는 자로서 주의할 점은 무엇인가? 공동체로서 지체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랍비로 대접받기 보다는 형제와 자매를 섬기고 돌보아야 한다. 혈육의 정으로 맺어진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뜨거운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하나 된 하나님의 자녀로서 계약의 백성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원한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 모두는 예수 안에서 하나 된 하나님의 백성이다. 황권철 목사(밀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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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2020-02-12
  • [바이블 큐티]천국잔치를 거부한 자들이 누구인가(마 22:1-46)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이런 우화가 있다. 어떤 분이 지옥에 갔는데 식사 시간이 되니 종이 울렸다. 그때 바싹 마른 사람들이 자기보다 큰 숟가락을 메고 들어와 상에 놓인 음식을 먹으려고 애를 쓰셨지만 한 술도 입에 넣지 못했다. 허기진 배를 움켜지고 돌아가다가 눈을 들어 천국을 보았다. 천국에는 건강하고 웃음을 띤 자들이 자신들과 꼭 같은 큰 숟가락을 가졌는데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숟가락으로 건너편에 있는 이웃들에게 서로 먹여 주었다. 이들은 식사를 마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즐겁게 떠났다. 이것은 천국과 지옥 같은 삶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우화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며 살아야 한다. 창공을 나는 새들은 대기권을 벗어나 살아갈 수 없고, 대양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는 물을 떠나서 살아갈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는 살아갈 수 없다. 사람은 사랑을 먹고사는 존재이다. 러시아의 문호인 세계적인 인도주의자인 톨스토이가 “사람이 무엇으로 사느냐?”는 질문에 대답하기를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산다”고 결론을 내렸다. 오늘 읽은 본문은 우리에게 천국의 비밀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 나라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다. 그러므로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그 신분을 회복하는 길은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 대신 죄를 속죄해 주신 분을 찾아야 한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을 우리 마음에 모심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우리는 아버지 품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런데 이 놀라운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천국을 거부하는 자들이 있었으니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 행위인가? 주님은 이런 사실을 비유로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다음 비유를 통해서 천국을 거부한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 살펴보자. 천국을 거부한 자들 주님은 한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신다. 어떤 임금이 아들을 위해 혼인잔치를 베풀었다.그리고는 많은 사람들을 초청했다. 그런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어떻게 임금이 왕자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었는데 백성들이 이를 거부할 수 있는가?” 그런데 실제 그런 일이 유대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었으며, 그 사회 뿐 아니라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그러면 이를 거부한 자들은 누구인가? 한 마디로 말해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어떻게 거부했는가? ① “오기를 싫어하거늘”. 이들은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복음에 대하여 전혀 무관심한 자들이었다. 내세와 영생에 관하여는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자들이다. ②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이들은 완전히 세상에 집착한 자들이다. 철저하게 세속적인 가치관에 물들어 살아가는 자들이다. ③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이들은 잔치를 파괴하는 악랄한 자들이다. 아마 당시 해롯 같은 박해자가 이 유형에 속할 것이다. 그래서 임금은 사거리로 가서 닥치는 대로 데려오게 했다. 그러면 거리에 버려진 자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 버림을 받은 세리와 죄인들이다. 결국 천국 잔치에는 이들이 참여하게 된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건이 있다. 나중에 임금이 손님을 보러 나와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책망했다. 결국 그들은 수족을 결박되어 바깥 어두움에 버림을 당했다. 근동 지역에는 잔치에 초대를 받으면 초대받는 자에게 주는 예복이 있는데 이를 반드시 대문 앞에서 갈아입고 들어가야 한다. 마치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때 입어야 할 세마포 예복과 같다. 그런데 이를 거부했다는 것은 자기의 의로 들어가려는 것과 같다. 가롯 유다와 같은 자들이 예복 없이 혼인 잔치에 참여한 자이다. 황권철 목사(밀알교회) ※ 저자의 허락에 의해 일부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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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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