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5-24(화)
 
이상규 교수님 저서(신간).jpg
▲ 이상규 교수 저서 / SFC출판부 / 287면 / 15,000원

 

 

기독교의 가장 소중한 언어, 평화 

 

광야. 외치는 자의 소리.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3:2)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의 자녀라고 부르실 것이다.”(마5:9)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5:44)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그가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어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0~21)

 

마치 광야에서 들려오는 외치는 자의 소리처럼, 이 책의 저자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라고 기도하듯이 기독교계에 평화론을 선물하였다.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는 비단 2천 년 전, 유대 광야에서만 목격되었던 낯선 광경이 아니다. 여기저기서 평화의 소식이 들리는 듯하지만, 2022년 한반도의 상황 역시 광야이기는 마찬가지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만큼 평화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여전히 낯설다.

그 이유는 한때 바보새 함석헌이 목놓아 울부짖었던 것처럼, 우리가 “나라의 절반을 꺾어 한 배 새끼가 서로 목을 찌르고 머리를 까고 세계의 모든 나라가 거기 어우름을 하여 피와 불의 회오리바람을 쳐 하늘에 댔던 그 무서운 난리” 이후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를 이야기하면 자동으로 “평화”라는 단어를 “통일”로 이해했던 현실이 70년의 세월이었다. 대한민국의 국민은 두 세대를 훌쩍 넘기는 세월 동안 평화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평화맹’으로 살아왔고, 변함없이 남북관계에 모든 것을 저당 잡혀 일상의 평화를 맘껏 누리지 못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종교도 예외일 수 없고, 교회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

이러한 때에, 성경이 말하는 “예수의 평화.” “Pax Romana”가 아닌 예수의 평화, 하나님의 평화에 기반한 목소리를 내는 일은 소중하다. 거기에다 듣고 싶어하지 않는 목소리를 낸다는 일은 더없이 소중하다. 이상하리만큼 한국교회의 강단에서는 은혜와 사랑의 언어는 넘쳐났지만, 평화의 언어는 갈 길을 몰랐다. 평화를 설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한 후에 늘 따라붙는 수식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다릅니다.”였고, 결어는 항상 “우리나라를 방어해야 하는 전쟁의 시기가 온다면 우리는 보다 현실적이 되어야만 합니다”였다. 교계에서만이 아니라 신학계에서도 평화의 목소리는 언제나 소수의 목소리였고, 그 작은 목소리나마 신학적 사유의 빈곤에 제대로 싹을 틔우지 못하고 척박한 토양 탓으로 돌리기 일쑤였다. 때로 간신히 틔운 싹조차 말라버리거나 기형적으로 웃자랐던 것이 우리의 현주소였다. 평화신학을 이야기하면 좌우 이념 대립과 정치적 편향성으로 갈등이 표출되기에 십상이었고, 불편함을 끝내 이기지 못해 마음으로는 평화를 원하지만, 차마 목구멍 앞쪽으로 평화의 언어를 뱉어내지 못하였다. 떼제의 유명한 찬양 “Dona Nobis Pacem 주여,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는 기도회나 개인의 영성에 도움은 되었지만, 국가 차원의 평화는커녕 가정, 교회, 회사, 학교라는 일상 공동체의 문턱조차 넘지 못하였다. 그렇게 평화는 거대담론의 주제였으나 마음대로 이야기하지 못하는 암묵적 금기사항 혹은 기피 주제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 기독교 평화론의 역사』를 받아든 소감은 말 그대로 “감개무량”이었다. 평생 신학교 강단에서 교회사를 강의하던 저자의 수고로 “드디어” 기독교 평화론의 역사를 한 줄에 꿸 수 있다니! 가뭄에 단비를 만난 느낌이다.

평화학을 잘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평화에 관한 연구의 끈을 부여잡고 싶은 사람으로서 그리고 부끄럽지만, 일선에서 평화를 이야기하는 한 명의 기독교인으로서 평화관련 책을 읽다 보면 늘 아쉬운 것이 있었다. 그것은 교재로 쓸만한 ‘기독교 평화론’ 책 한 권 찾기가 힘들다는 점이었다. 그 이유는 평화학이 최근에서야 조명을 받기 시작한 낯선 학문이며 학제 간 융합학문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신학계에서 평화학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던 것이 현실이었다. 물론 평화를 주제로 한 논문이나 번역서가 없진 않지만, 교재로 추천하거나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정리한 ‘기독교 평화론’ 관련 서적은 채 몇 손가락으로 꼽기도 힘들 정도로 희귀한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과거 한국역사와 통일 평화론에 기여한 기독교의 목소리가 확실하고 분명하게 존재하지만, 기독교 평화주의를 대표할만한 필독서와 교재로 쓸 만한 책이 마땅치 않았던 터라,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 기독교 평화론의 역사』의 가치는 말로 다 할 수 없다 하겠다.

하여, 서평자로 비평의 말을 앞세우기보다는 이렇게 이 책을 상찬(賞讚)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2000년대 이후, 사회의 변화와 더불어 평화의 담론이 다양한 얼굴의 일상 평화로 이해되고 있을 때 출간되었다는 시의적절성이다. 앞서 표현한 것처럼 기독교인들에게 부담 없이 얼른 한번 읽어보라고 추천할만한 평화입문서가 부족한 현실에 교과서적인 성격을 부여해도 과하지 않을 만큼 이 책은 성경과 역사에 드러난 전쟁과 평화를 아주 간명하게 정리하였다는 것이 상찬의 첫 번째 이유이다.

둘째, 이 책은 다수의 기독교인이 궁금해 하는 성경의 중요한 주제인 ‘평화’를 ‘로마의 평화’와 ‘예수의 평화’로 병치시켜 설명하고 있다. 그만큼 평화에 대한 메시지가 명징하다. 신약과 구약이 다루는 전쟁과 평화의 난제들을 비켜 가지 않으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예수의 평화’ 즉 사랑과 용서, 화해와 평화라는 성경의 핵심 가치를 끌어안음으로써 폭력이나 전쟁이 아닌 비폭력 평화주의를 기독교 정신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pp.51~52).

셋째, 신구약의 대립적 시각에 이어 초기 교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발전해온 기독교 평화론의 역사를 1) 어떤 경우에도 전쟁은 안 된다며 비폭력, 비전, 반전이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믿는 ‘평화주의 pacifism’ 2) 가능한 전쟁을 피해야 하지만 불가피한 몇 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때 전쟁이 의로운 것으로 용인될 수 있다는 ‘정당전쟁론 just war theory’ 3) 그리고 전쟁은 현실적으로 불가피한데 힘의 균형을 유지함으로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기독교 현실주의 Christian realism’으로 압축 설명하였다. 이는 초기 기독교의 전쟁과 평화 이해, 기독교 국교화와 더불어 발전하게 된 정당한 전쟁론에 대한 설명, 중세시대의 성전론과 이후의 발전사로서 특히 메노나이트 교회사가이자 평화학자였던 가이 허쉬버거의 『전쟁, 평화, 무저항』(1944)의 연구나, 예일대에서 교회사를 가르친 종교개혁 연구의 권위자이자 교회사가였던 롤란드 베인턴의 『전쟁, 평화, 기독교』 (1979)과 전체 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더 나아가 인도적 평화주의, 실용적 평화주의, 기독교 평화주의로 분류한 ‘평화주의 유형분류’도 독자들의 이해를 도와줄 뿐만 아니라, 더 깊이 연구하고 싶은 궁금증을 유발하기에 충분하다(p.277).

넷째, 짧은 책임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 이후에 논의되었던 개혁자들의 평화에 대한 관점을 간단하면서도 명쾌하게 정리하였다. 우리가 잘 아는 종교개혁과 개혁자들, 즉 에라스무스, 루터, 츠빙글리, 칼빈이 토대를 두었던 것이 정당한 전쟁론이었음을 밝히는 가운데 이들이 견지한 평화에 대한 작고 큰 차이점들을 명확하게 제시하였다. 우선, 에라스무스는 정당한 전쟁론을 수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인도주의적 평화주의자로 전쟁의 폐해를 신랄하게 지적하며 군주, 귀족, 성직자, 지식인들에게 평화를 호소했다. 루터는 기본적으로 정당한 전쟁론과 두 왕국 이론에 근거하여 국가의 공권력을 하나님께서 위임한 것으로 보았다. 즉 권력 행사의 정당성, 군인의 직제 인정 등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물론 폭력이나 전쟁을 맹목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으나, 루터를 평화주의자라고 볼 수는 없다고 보았다. 스위스 취리히의 개혁자 츠빙글리는 전쟁의 해악이나 폐해를 지적하기는 하였으나, 정당한 전쟁론에 근거하여 복음과 교회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결국 그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간에 벌어진 카펠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기독교강요』의 저자로 잘 알려진 칼빈 역시, 정당한 전쟁론에 의거하여 합법적 국가 권력의 법 집행은 정당한 것으로 이해했다. 당연히 전쟁도 합법적이라고 보았다. 개혁교회의 세례를 가장 잘 받은 한국교회가 왜 정당한 전쟁 외에 다른 평화주의자들의 처지를 생각하기 힘들었는지, 독자로서 일말의 단서라도 발견한 느낌이 들 수도 있는 대목이다(7장).

다섯째, 다른 책과 차별성이 돋보이는 장으로서 개혁가들의 관점에서 곧바로 계몽주의 시대로 책장을 넘기지 않고, 재세례파와 평화주의를 소개하였다. 개혁가들과 동시대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과 전적으로 대비되는 재세례파의 연원, 신학, 특성, 평화주의 입장을 짧지만 굵게 소개하였다. 재세례파는 급진적(근원적) 개혁운동이다. 운동 초기부터 주장했던 1) 교회와 국가와의 분리 2) 유아세례 거부 3) 신자들의 세례 4) 폭력과 전쟁을 반대한 메노 시몬스의 평화주의 운동 5) 슐라이트하임 신앙고백서 등을 통해 이들의 비폭력 사상을 역사적 흐름을 따라가며 일목요연하게 보여주었다. 이뿐 아니라, 20세기 초에 결성된 ‘역사적 평화교회 historic peace church’ 운동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어떻게 평화주의 이상을 지켜왔는지를 설명하였다. 평화사를 통해 들여다본 아나뱁티스트 약사로 소개해도 손색이 없다(8장).

여섯째, 이 책은 단순히 기독교 평화주의를 넘어 계몽주의 평화사상가들과 운동의 맥을 잘 짚어 주었다. 루소의 국제평화에 대한 개념이라든가,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평화 사상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록이기에 더욱 값지다. 퀘이커를 비롯하여 재세례파의 영향을 받은 다양한 계열의 평화교회들과 톨스토이, 간디, 안중근, 니버, 요더 등의 평화주의자들을 간략하게 소개한 것도 인상 깊다. 오기로 생각되지만, 282페이지에 평화론을 제시한 이들 중, 윌리엄 펜, 톨스토이, 존 요더 등을 “광의의 정당전쟁론 전통에 서 있다”라고 표현한 부분은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톨스토이는 국가를 폭력으로 규정할 정도로 무정부주의에 가까울 뿐 아니라 애국심, 충성심, 군대조직을 적극적으로 반대한 인물이자 그 어떤 폭력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며 단 하나의 영구적인 혁명으로 도덕적인 혁명과 영혼의 갱생을 주장했다.(『국가는 폭력이다』 참고) 윌리엄 펜은 퀘이커 신자로서 미국의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거룩한 실험’을 시도할 정도로 기존의 세속 정부와는 다른 기독교 대안정치를 꿈꾸었고, 그런 의미에서 단순히 정당전쟁론 전통으로 분류할 수 없다. 존 하워드 요더는 아나뱁티스트 전통에 속한 기독교 윤리학자로서 종교적 평화주의 유형분류를 시도한 저명한 학자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의 윤리를 기반으로 한 비폭력 무저항 평화주의를 설파했을 뿐만 아니라, 정당한 전쟁론의 허상을 가장 명확하게 비판한 메노나이트 교회 학자이기에 정당전쟁론과는 거리가 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참고)

마지막 일곱 번째로 짧은 지면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흐름을6·25 이후부터 최근의 평화통일론까지 잘 정리하였다. 통일 담론으로 이승만의 북진통일론, 박정희 정권의 선 건설 개발 후 통일론(후에 선평화 후통일로 발전), 1972년의 7.4남북공동성명, 1988년의 7.7선언, 1991년의 남북한 UN동시가입, 1992년의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과 공동선언,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최근의 종교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에 이르기까지 핵심을 잘 다루었다. 물론 전두환 정권의 ‘통일헌법’ 제안이라든가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과 한민족 공동체 통일방안, 김영삼 정부의 단계적 통일방안, 노무현 정부의 동북아 평화체제에 대한 구상, 이명박 정부의 ‘통일준비론’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통해 통일평화담론에 대한 내용이 조금 더 세부적으로 정리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그러나 이 책의 목적이 통일담론 이해가 아니므로 이 몫은 한반도에 사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두어도 좋을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세상의 평화에 기독교가 이바지하려면 한반도의 역사이해와 평화담론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런 맥락에서 11장 ‘한국에서의 전쟁과 평화’는 평화담론을 기독교 안에만 머물지 않고 복음주의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차원을 놓치지 않고자 심혈을 기울인 기독교 역사가의 배려가 잘 드러난 장이라 할 수 있다.

 

책 끝부분에 던져진 “교회가 어떻게 평화를 이루어 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독자를 넘어 한국교회가 끝까지 끌어안아야 할 큰 질문이자 과제다. 저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시종일관 ‘로마의 평화’가 아닌 ‘예수의 평화’를 추구함으로써 교회가 평화를 위한 노력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피력하고 있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는 그간 인류가 걸어온 평화사를 큰 시각으로 전망하도록 돕고자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 평생 교회사를 연구하고, 강의하고, 몸으로 실천해 온 교회사가의 저술이기에 이처럼 일목요연하고, 명료하고, 구체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 아닌가 싶다.

그동안 기독교인으로서 알게 모르게 ‘평화맹’으로 살아왔다면 이제는 이 한 권의 책으로 평화맹을 탈출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다만 한가지 이 책이 우리에게 평화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주고 뼈대를 잘 형성해 주었다면, 앞으로 좀 더 포괄적이면서도 구체적인 평화사 책이 나와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욕심이 생겼다. 그렇게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고, 전쟁의 소문이 꽉 들어찬 광야와 같은 세상에 평화의 좋은 소식이 메아리쳤으면 좋겠다. 그 예수의 평화가 모든 이들의 메마른 마음과 삶을 촉촉이 적셔줄 수 있으면 좋겠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는 하나님의 딸이요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마5:9)

 

글. 김복기 (캐나다 메노나이트 교회, 봄내시민평화센터)

태그

전체댓글 0

  • 89154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이상규 교수,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 – 기독교 평화론의 역사" 출판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