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6-2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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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에반겔리아 대학교)

  우리는 종종 이 세상은 우리의 본향이 아니요, 우리는 그저 나그네 인생을 살 뿐이라는 말을 합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라는 노래도 한 때 유행을 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발붙이지 않고 나그네 인생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아브라함과 신앙의 열조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히 11:9). 아브라함도 헤브론에 있는 헷 족속에게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창 23:4)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약속의 땅 가나안 아브라함의 ‘우거하는 땅’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창 17:8). 이 땅은 또한 이삭과 야곱이 우거하는 땅이기도 했습니다(창 28:4, 37:1). 우리도 이들을 모범으로 삼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상급을 생각하며 짧은 인생 나그네처럼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그네처럼 사는 삶이란 어떤 모습일까요? 이 땅은 허망한 것이니 오직 영원한 하늘 나라만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삶일까요? 나그네 삶을 살았던 아브라함과 열조들이 언제나 소위 내세의 영적인 문제에만 사로잡혀 생활 했을까요? 아브라함의 가슴을 환희와 즐거움으로 채워준 위대한 약속이 단지 하나님과 천군 천사들과 더불어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뿐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누렸던 축복은 오히려 땅의 기름진 축복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12장에서 이 내용을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은 이 지구 전체 모든 족속을 향한 큰 축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생육하고 번창하여 큰 민족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실제로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축복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왜 이 땅에서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성경은 약간의 대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창 12:6)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에 이미 거하고 있던 시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나안 족속들의 죄악과 사악함이 이미 하늘에 들렸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 땅의 거민들과는 거리를 두고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가나안 거민들은 결국 이 약속의 땅에서 물러가야 하는데 아직 그런 때가 되지 않았기에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은 그들 가운데 거하면서도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아모리 족속이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않았던 것입니다(창 15:16).

가나안 족속이 약속의 땅에 살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았다고 한다면 다윗의 시대에는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다윗이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때에 드린 그의 아름다운 기도를 생각해 봅시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대상 29:15). 여호수아와 사사기의 기록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하여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거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시대에도 가나안 족속들이 아직도 그 땅에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왕으로서의 모든 권리와 축복을 누리면서도 자신을 열조와 다름없이 나그네요 우거한 자로 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아가는 이 삶이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의 신분이어야 합니까?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이 땅은 나의 본향이 아니다”라고 노래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만을 소망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일까요? 우리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살지 않았느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8:20)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우리도 본향을 사모하며 이 땅에서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창조 세계의 회복을 소망하고 도래할 새 예루살렘과 새 땅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질문을 해 보아야 합니다. 산업화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아직도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우거하고 있는가?”라고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는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살지 않으니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인종적으로 가나안 사람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종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셈, 함, 야벳 족속을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세계는 지금 국제결혼과 문화적 교류, 그리고 세계화를 통해서 하나가 되는 지구촌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가나안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종적으로나 지리적인 구분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가나안 사람들에 저주가 임하도록 기도할 수 없습니다. 대신에 우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명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과업은 인종적으로 가나안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땅 끝까지 모든 민족과 방언과 모든 족속들을 향해 하나님 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세상 모든 족속과 민족과 방언을 향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그네요 우거자라는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야 합니다. 인종적으로 가나안인 민족들을 향해서 저주하거나 미워하거나 두려워하는 삶이 아니라 구원과 용서와 사랑을 주기 위한 그리스도의 초대를 선포하면서 다가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들을 이미 우리에게 임했고 앞으로 온전히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도록 초대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함께 죄악된 삶의 영역에서 본토인이 아니라 진정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면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진정한 왕이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땅 끝까지 선포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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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나그네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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