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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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에반겔리아대학)

   10월 총회를 앞두고 각 교단들마다 총회에서 봉사할 주요 임원들 선거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면류관 벗어서 주 앞에 드리세”라고 찬송하면서도 자리에 오르기 위해 도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르는 선거 열풍을 느끼게 된다. 이 시점에서 우리 모두는 니고데모의 안경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기억되는 봉사”가 어떤 봉사인지를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호세아서 1장 1절에는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기록이 있다. 호세아 선지자는 남쪽 유다 출신이 아니라 북쪽 이스라엘 출신이다. 그가 활동했던 시대에 북쪽 이스라엘 왕국을 통치했던 왕들은 스가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 호세아 등 여섯 왕들이었다. 그런데 선지자 호세아는 자신의 책을 기록하면서 자기 나라의 여섯 왕들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유다의 통치자들의 이름은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왕들 중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 한 사람만 언급해도 충분하다고 간주하고 있다.

 

  이들 여섯 왕들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아주 어두웠던 한 시대를 대표해 보여주고 있다. 이들 중 거의 대부분의 왕들은 한결같이 왕을 시해하는 대역죄를 범하기를 주저하지 않은 살인자들이었다. 이스라엘의 왕권은 공평과 정의가 그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왕권은 참된 왕 되신 하나님의 통치를 대표해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보좌에 대해서 아름다운 묘사를 하면서 의와 공평이 보좌의 기초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보좌를 표현할 때 항상 율법이 새겨진 두 비석이 들어있는 언약궤 위에 놓여 있는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신정국가의 왕들로서 하나님의 왕권의 옥쇄를 가지고 있는 들로 상징되는 이들 이스라엘 왕들은 완전히 반대적인 것을 대표해 보여주었는데, 이들의 보위가 모두 인간의 피로 얼룩진 기초위에 세워져 있었다.


  이것이 아마도 호세아 선지자가 이들 권세 있는 왕들을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 이유였을 것이다. 호세아는 이들 왕들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이들 왕들의 행위가 하나님 나라에서는 완전히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호세아 선지자가 이름을 언급하고 있는 왕들이 모두 경건한 왕들인 것은 아니다. 요담과 아하스는 불신앙으로 잘 알려져 있는 왕이었다. 호세아가 언급하고 있는 모든 왕들은 어떤 경건한 목적이든지 아니면 다른 목적으로든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하나님을 “봉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심지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여로보암에게도 해당된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여섯 왕들은 심지어 “부정적인 방법”으로도 사용하지 않으셨다.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에게 완전히 쓸모가 없는 자들이었다.

 

  의심할 나위 없이 이 모든 왕들은 자신들을 엄청난 위엄으로 치장한 자들이다. 이 모든 왕들은 야심에 찬 왕들이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위하여 “이름”을 내고자 노력하였으며, 이스라엘을 세계 권력의 자리에 올리고자 원했던 왕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단지 자기들 스스로를 위해서, 자기들 자신만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던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명성은 사라져 갔으며, 이들의 위대함도 잊혀 버린 것이다. 선지자에게 있어서 이들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그들의 통치 연대를 언급해야 할 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이들 왕들은 아마도 자신들의 통치 시대가 역사책에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비중으로 기록되는 것을 보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 호세아는 이들을 침묵 속에 파묻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들 이스라엘 왕들은 사실 언약의 백성들로서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에 이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온전히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면서 살았던 자들이었지 하나님의 봉사에 헌신하기를 결코 배우지 않은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험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여전히 존재한다. 물론 우리가 이들 여섯 왕들처럼 왕이 되기 위해 왕을 죽이거나 이들처럼 토색하는 자들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기를 단지 공개적으로 인정된 악이나 죄인들만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외되는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지옥의 불에 알맞게 만드는 죄가 무엇인가? 그것은 “열매 없음”과 하나님 나라에 아무 “쓸모없음”이다. 우리는 교회에서 존경받는 사람들도 될 수 있고, 사람들 사이에 굉장한 명성을 즐길 수도 있다. 교회의 각 기관, 노회, 총회 활동에서 자신을 드러낼 수도 있고 인정받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목전에 이름 없는 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았는지 아니면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며 우리 주님을 위해서 살았느냐 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은 자기 자신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관심을 갖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 자신들의 삶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내가 나 자신만을 위해서 살며 나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고 있는지, 아니면 나 자신을 부인하며 주님을 위한 삶을 살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성찰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검토의 결과는 아주 고통스러울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의 명예와 이익을 위한 삶을 산다는 것은 단지 세상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불행하게도 주님을 위해서 산다고 하면서도 사실상 자신의 개인적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치고 있다. 사실상 인간의 마음보도도 더 악한 것은 없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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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하나님 앞에 기억되는 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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