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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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에반겔리아대학)

    주님의 뜻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상반된 두 사람의 반응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엘리 제사장의 경우다. 그는 주님의 뜻 앞에서 전적으로 순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무엘이 세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니라”. 엘리는 실로의 대제사장이었는데, 그의 두 아들들도 역시 제사장들로서 봉사하였다. 이 두 아들들도 성경에 기록될 정도로 걸출한 인물들이었는데, 그것은 이들의 경건한 행동 때문이 아니라, 비할 수 없는 악행과 불경스런 행동들 때문이었다. 물론, 엘리제사장은 이들의 악한 행동에 동참하지 않았고, 이들의 행동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아들들이 그러한 길에서 돌이키도록 단순히 훈계하는 정도의 행동을 취했을 뿐 그 행동을 중단시키려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이제 엘리의 집을 심판하실 날을 세기 시작했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선지가가 전했을 때도 엘리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제 엘리 제사장이 아주 늙고 시력이 좋지 않아 잘 보지도 못할 때에 그는 성전에서 자기를 도우는 사무엘이라는 소년을 두었다. 주님은 어느 날 밤에 이 사무엘을 불러서 그를 통해 엘리에게 마지막 경고를 주었다. 엘리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다. “가로되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삼상 3:17).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에게 말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의 가정을 영영토록 심판하시겠다는 메시지를 무거운 마음으로 전했다.

그런데 이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에 대해서 엘리 제사장은 놀라울 정도의 무감각한 반응을 보였다. 아마도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장 무감각한 반응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반응이었는가? “사무엘이 세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 엘리의 이 말이 무슨 말인가? 그것은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질지어다“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을 행하시도록 계획하시든지 간에 엘리에게는 괜찮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것이 자신과 자기 가족의 파멸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태도다. 이 얼마나 감히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무관심이 아닌가?

주님의 뜻은 엘리 제사장의 가정을 파멸시키는 것이었다. 우리는 엘리의 가정의 일어난 무서운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엘리의 두 아들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엘리가 이 소식을 듣고 의자에서 넘어져서 목이 부러져 죽었다. 그의 며느리 역시 아기를 낳는 과정에서 죽었다. 그녀는 죽으면서 “이가봇”-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울부짖었다.

엘리 제사장이 말한 “주님의 뜻대로 될지어다”는 말은 절대로 우리가 따라야 할 경건의 본보기가 되지 못한다. 왜 그렇게 수동적인 자세를 취했는가? 왜 그는 자기 자신의 영적 상태와 자기 아들들의 영적 상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가?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 명확하게 답변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아는 것은 엘리 제사장에게는 자기 자신이 따를 수 있었던 한 모범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엘리 제사장만이 징계와 파멸과 실망스런 메시지를 들어야 했던 유일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모세의 경우를 보면 주님의 뜻에 대한 반응에 있어서 엘리 제사장의 경우와 엄청난 대조를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큰 죄악에 빠졌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악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조롱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이 곧은 백성들이라고 불평하면서 모세에게 말하기를,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 32:10)고 하셨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모세는 경건하게 머리를 숙이고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고 말하지 않았다. 결코 그렇게 하지 않다. 모세는 주님께 빌었다. 주님께 사정했다. 주님께서 마음을 돌이키도록 빌었던 것이다. 모세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논증을 하면서 사정을 하였다. 모세의 이런 간청 때문에 하나님은 마침내 그 뜻을 돌이키셨다.

모세를 향한 주님의 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이르렀을 때 그들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전에 죽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이러한 심판에 대해서 단순히 경건하게 머리 숙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지어다”라고 하지 않았다. 모세를 향한 주님의 뜻은 쓰라린 실망이었다. 그래서 모세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호소하였다. 모세의 이런 완강한 간청 때문에 모세는 느보산의 꼭대기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볼 수 있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언약의 후예로서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리와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호소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모세는 성경에서 위대한 선지자로 칭찬받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뜻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기계적으로 따라야만 하는 어떤 것인가? 엘리제사장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파멸하려고 하시는 주님의 메시지를 받고, 그 앞에서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수동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지 않았다. 주님께 매달리고 간구하면서, 오히려 뜻을 돌려 달라고 논증하고 따지고 간청했다. 주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어떠해야 할지를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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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주님의 뜻에 대한 상반된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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