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크기변환_황권철.jpg
황권철 목사(밀알교회)

   나다나엘(Nathanael)이란 이름은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께서 주심”이라는 뜻이다. 그는 갈릴리 가나 출신이다(요 21:2). 나다나엘은 정직하고 신실한 사람이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 주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특히 바돌로매(Batholomew)라는 이름은 그의 부계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바돌로매는 공관복음서에 열거된 열두 제자의 목록 중에서 빌립 다음에 나온다(마 10:3; 막 3:18; 눅 6:14).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요 1:45). 그는 열두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마 10:2-3). 바돌로매는 나다나엘과 동일인물이다(마 10:3, 막 3:1, 눅 6:14, 행 1:13).

 

빌립의 전도를 받은 나다나엘


빌립은 갈릴리의 벳세다(Bethsaida) 사람으로 안드레(Andrew),베드로(Peter)와는 동향인이었다(요 1:44). 그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였다. 즉각적으로 응답하였다는 것은 사전에 예수에 관하여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뜻한다. 그는 불타는 마음과 감격으로 나타나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전한다(요 1:45). 빌립의 이런 자세로 보아 적어도 구약성경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고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메시야 대망 속에 있었던 차에 그가 예수를 만남으로 너무도 감격하여 하나님이 보내 주신 메시야를 친구 나다나엘에게 전했던 것이다.

빌립의 전도전략은 매우 날카로웠다, 마치 매가 사냥하는 방법과 같다. 매가 사냥을 할 때 하늘을 느린 속도로 빙글빙글 돈다. 이는 먹이 사냥을 위해 준비하는 운동이다. 그러다가 먹잇감을 발견하면 곧 바로 수직강하 하여 매섭게 낚아챈다. 나다나엘이 빌립을 만나기 전에는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율법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가 빌립을 통해 예수를 소개받았다. 그는 나사렛이란 선입감 때문에 율법을 묵상하면서 빙빙 우회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빌립이 “와서 보라”는 수직강하와 같은 한 마디에 완전히 매료당하고 말았다. 그는 바로 가서 보고 메시야임을 확인하고 주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단했다.

나다나엘은 AD 1세기 중반 이후까지 활동한 인물이다. 당시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던 유대인들 사이에는 여러 형태의 종말론적인 메시야 대망 사상이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기대한 메시야는 정치적 메시야로서 이스라엘을 세계 최강국으로 만들어 행복을 누리게 할 자였다. 그러나 나다니엘과 같은 일부 경건한 사람들은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대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장차는 천국으로 인도하실 메시야를 기다렸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메시야를 기다렸다. 그는 나사렛에서 메시야가 나올 가능성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자기가 무화과나무 밑에 있는 것을 보시고 이미 그를 알고 계셨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유대인에게 무화과나무는 율법연구나 번영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초자연적 능력의 계시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고백했다. 이것은 마음에 간사함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고백이었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메시야를 이스라엘에게만 국한 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도는 그에게 더 큰 일 즉, 하늘과 모든 인류를 연결시키는 인자를 보게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요 1:45-51). 그는 디베랴 바닷가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목격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요 21:2).

 

나사렛 출신을 불신한 나다나엘

메시야와 나사렛은 부조화이다.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던 당대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나사렛이란 지명과 메시야는 도저히 하나로 묶을 수 없는 조합이다. 예수님이 태어나서 자란 나사렛을 비옥한 이스라엘 평원이 멀리보이는 해발 380미터 가량의 언덕 위에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다. 메시야가 그런 촌구석에서 나올 수 없다는 편견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는 나사렛이란 말에 콧방귀를 뀌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뒤 그러한 편견을 깨고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요1:49)라는 놀라운 고백을 했다. 이 고백의 주인공이 바로 나다나엘이다.

처음에 그는 빌립의 예수에 대한 증거를 불신했다. 물론 그도 메시아가 오리라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나사렛과 같은 보잘 것 없는 작은 마을에서 메시야가 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나사렛에 대한 고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사렛에서 메시야가 나온다는 예언이 없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믿지 않았다. 나다나엘이 성경을 근거로 빌립의 말을 믿지 못한 것은 그가 늘 성경을 묵상하는 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고 말한 것은 하나님은 장소나 혈연의 관계없이 은총을 베푸신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편 예수는 나사렛에서 자라기는 했지만, 구약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몰랐던 나다나엘의 나사렛에 대한 편견은 구약 예언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 것이다.

메시야가 나사렛으로 온다는 것은 구약에서 이미 예언된 것이다.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는 나사렛에서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예수님 탄생 예고를 전해 들었다.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으며 탄생하신 후에는 헤롯왕의 어린아이 대학살을 피해 잠시 부모님과 함께 이집트로 피신해 거기서 사셨다. 그 후에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와서 소년 시절을 거쳐 메시야로서의 공적인 직무를 시작하시기 직전까지 그곳에 사셨다. 한편으로 나사렛은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의 공적인 직무를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예수님과 주님의 공생애 사역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배척하기까지 했다.

주님의 인정을 받은 나다나엘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라”고 했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직접 와서 확인해 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나다나엘은 빌립의 말대로 예수가 메시아인가를 확인하러 예수께 나아왔다. 그는 모든 행동에 있어서 신중했다. 그가 예수를 만나고자 나왔을 때 예수는 나다나엘을 가리켜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고 말씀하셨다.예수님은 나다나엘에 대해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계셨다. 빌립의 말을 반박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나다나엘은 겸손하고 말씀에 충실하며 경건함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나다나엘은 자기를 아는 그리스도의 전능하심에 매우 놀랐다(요1:48). 나다나엘은 놀람과 겸손한 마음으로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라고 예수님께 질문했다. 예수님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부르기 전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셨다(요1:49). 무화과나무 아래 있다는 것은 평화와 번영의 상징일 수도 있고(왕상5:5), 율법 연구의 상징일 수도 있다.3 이 점에서 나다나엘은 열심히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과 깊이 교제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은 나다나엘의 지각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사실임을 능히 알았으므로 더욱 놀란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주님과 나눈 대회에서 언약사상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되었다. 비록 그가 초기에는 몇 가지 편견을 가지고 있었으나 주님을 만난 후 모든 잘못된 편견을 버릴 수 있었다. 그의 고백은 첫째, 예수를 선생님이라고 고백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기능에 대한 고백이다. 둘째, 그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했다. 이는 예수가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으나 신의 능력을 가진 신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셋째, 예수를 이스라엘 왕이라 고백했다.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이스라엘 왕이며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야임을 고백하는 말이다. 나다나엘의 고백은 베드로의 고백과 동일하다(마16:16). 그가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의 사랑과 나다나엘의 준비된 신앙인의 자세에서 나온 것이다.

태그

전체댓글 0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황권철 목사] 나다나엘(Nathanael's Behind Stories)-정직의 사도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