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3-02-02(목)
 

"악이여, 너는 나의 선이 될지어다''

존 밀턴이 '실낙원'에서 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1:18)


제가 목사님을 통하여 가르침을 받은 바울 사도의 이 말씀은 그 순서가 매우 중요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건하지 않음'이 첫 번째이고 '불의'가 두 번째입니다. 이 순서를 깨닫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한 지난 세월의 실수들이 낳은 소위 위대한 사상가들 - 다윈, 헉슬리, 스펜서...복음의 어그러진 사상가들, 그 추종자들 또한 신앙의 확신이 없어 그들을 마땅히 책망하지 못하고 심지어 그들의 가르침이 교회의 메세지에까지 침투해 들어오도록 내버려둔 소심한 교회의 지도자들 - 우리는 그들을 숭배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은 그냥 자연 그대로일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여기에 사람의 의지가 들어갈 때 "사람은 자연보호” “자연은 사람보호”라는 말이 나옵니다.


성소수자들의 퀴어 축제, 동성애 차별금지법, 인간복제, 트랜스젠더, 그들의 인공 자궁이식, 할로윈파티, 여성목사안수...등등


 문제는 “왜 이런 것이 시대마다 계속 되어져 나오고 목소리가 커져갈까? 왜 그리스로인들 마저 어정쩡한 모습일까?”입니다. 가만 살펴보면 어떤 이들이, 성경에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그 중에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요소들을 다 몰아내고 하나님을 실제 살아계신 분으로 믿지 않아도, 성경속에 너무나 훌륭한 도덕적, 윤리적 가르침은 얼마든지 지킬 수 있다는 겁니다.


경건과 도덕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것을 꼭 알아야합니다. 경건을 버리는 즉시 불의가 들어옵니다. 이것은 말씀이 우리를 깨우치게 해주는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세상은 법을 내세우지만 성경은 죄를 다룹니다. 세상이 죄의 개념에 반발하는 것입니다. 죄의 개념을 지워나가며 병적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점점 절대적 기준이란 없다고 못을 박습니다, 그럼 어디에서 기준을 찾습니까? 하나님도 몰아내고, 십계명도 몰아내면 대체 무엇으로 기준을 삼습니까? 이에 대한 사람들의 대답은 각자의 의견이 기준이라는 겁니다.


나와 다른 이들에게 최대의 행복을 주는 일이 곧 옳은 일임을 믿으라고 아주 진지하게 가르치며 반드시 행복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쾌락주의자들(Epicurianism)과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즉, 좋은가, 나쁜가, 옳은가, 그른가를 따지는 대신 전반적으로 효과가 있는가를 묻자는 공리주의자들(Utilitarianism), 여기에 더나아가 신학적 공리주의 교리는 “인간의 행동이 순전히 행복 추구”에 있다는 것입니다. 공리주의를 낳은 영국의 빅토리아인들이 광적으로 숭배한 존 스튜어트 밀은 그리스도인도 아니었고, 사상적으로는 니체와 반대사상을 가진 자였지만 그렇다고 유신론자라고도 할수 없는 자였습니다. 그저 그것이 유익한가, 효과가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공리주의를 나름 수정한것이 편의주의(Opportunism)인데 절대적인 기준 같은 것은 없다는 주의이고, 무엇이 효과가 있는지 판단해야하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즉 목적이 바람직하면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대중적인 견해로 자리잡아 예수회(Society of Jesus)를 비롯한 여러 단체와 국가가 채택하고 있는 이론이기도 해서 '사회복지' 분야에서도 인기 있는 프레임입니다.


이 편의주의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한다”면 “힘이 곧 정의다” “내 힘으로 원하는 목적을 이룰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도 된다”는 파시즘(Facism)의 철학이고 알다시피 여기서 아돌프 히틀러가 나왔습니다. 그는 편의주의의 창시자는 아니지만 그가 따른 철학은 편의주의였고 편의주의는 파시즘의 철학입니다. 히틀러를 비롯한 수많은 사례가 보여주듯이 고의적인 거짓말과 속임수를 국가의 합법적 수단으로 옹호하는 무서운 결과가 초래된 것입니다. 이러한 발상은 기준이 없기 때문에 훈육, 권징(discipline)에 대한 개념이 없어지고 그에 따른 벌(punishment)이라는 것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결국 상황이 훨씬 더 복잡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명하는 기본적이고 영원하고 절대적인 기준을 버린 탓에 '도덕 기준'이 시대에 따라 계속 바뀐다는 것입니다 정말 심각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는 순간 각자 다른 기준을 갖게될 뿐만 아니라 공적인 기준 또한 바뀐다는 것입니다.


1957년 9월 영국의 '동성애 및 매춘 위원회'에서 제출한 울펜덴 보고서(Wolfenden Report)가 있습니다. 그것의 중대한 논지는 “항상 그 시대 사람들 다수의 견해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존 밀턴의 말이 생각나게 합니다. 

"악이여, 너는 나의 선이 될지어다!"


문제는 세상이 율법을 무시하도록 조장해온 복음주의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율법은 설교하지마라,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비난하지말고 그리스도께 나아오도록 초.청.만 하라”

“하지 말라”라고 금하는 대신 "이렇게 하는 편이 훌륭하지 않겠는가? 옳지 않겠는가? 좋지 않겠는가?”라고 귄.하.라.는 겁니다. 

비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한.테.나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라고 권하는 것은 성경의 진리를 부인하는 짓입니다. 정죄를 모르는 자들에게 은혜와 진리를 전하는 것은 치명적인 잘못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17:9) 결국 비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적인 호소를 하는 것만큼 잘못된 일은 없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이 땅의 많은 성도(장로, 권사, 집사, 일반 성도)가 이 땅의 많은 목사, 신학자가 '하나님에 대한' 말은 많이 하지만 허나 ‘하나님께 나아가지는 않음’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습니다. 나라가 안정되고 고요하고 평온하고 질서가 있고 국민이 행복하고, 정부가 원하고, 편하게 목회하고 등등...그래서 동성애도 차별금지법도 여성안수도 더한 것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 이런 주장을 하는 목.사.님들도 분명 알 것이라 여깁니다.


궁극적으로 평화주의는 이단입니다. 평화주의는 비 그리스도인들에게, 어정쩡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적인 행동을 기대합니다. 중생치 못한 자들에게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원리들을 적용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이단적인 생각입니다. 물론 다툼과 분쟁, 전쟁은 악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시람들이 은혜아래 들어 올때까지 율법 아래 가두어야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롬13:4)


기독교로 가장하고 있으나 사실은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거짓 이상주의에 현혹되지 않도록 목사님들은 저희들을 가르치고 가르치고 또 가르쳐야합니다.


사도 요한은 아니 성경 어느 책을 대하든 던지는 질문은 “이 복음서는, 이 말씀을 쓴 이유가 무엇일까?”입니다. 수많은 박해와 시련과 어려움에 직면해있는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은 단순히 위로를 건네는 것이 아니라 물론 궁극적인 의미에서 교회는 위로를 줍니다. 그러나 교회는 심리치료를 받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교회는 깃발을 든 군대로써 말씀 기록자는 일반적인 위로를 건네지도, 호소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가.르.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0:31)


말씀을 말씀으로 풀어주는 이가 없으면 

가시채를 뒷발질합니다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행9:5, 26:14)


하나님의 율법과 싸우지 말라는 것, 하나님은 반드시 법을 집행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 형벌을 정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그대로 실행하시는 분입을 가르쳐 주십시오.


복음의 위로는 직접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간접적으로 오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말씀 사역자님들의 주된 임무는 감성적이고 감정적인 위로를 원하는 상냥한 사람들에게 한 스푼의 설탕을 맛보게 하는것이 아니라 형제보다 친밀한 친구께 이끌어 가는데 있습니다.(잠18:24)


말씀만 말씀하여 주옵소서. 

말씀만 가르쳐 주옵소서 제발. 

저희들이 듣겠나이다.


피렌체에서 한달살이를 하면서 이들 속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느끼는 것들은 너무 많지만 그 중에 특히 르네상스의 꽃으로 불리는 피렌체의 중심지에서 눈만 뜨면 들려오는 성당의 종소리와 수많은 아이콘들과 골목길을 들어서면 세상끝날까지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자태를 드러내는 두오모 대성당을 바라보며 장엄하고 웅장하며 화려함의 극치를 드러내었던 그 옛날의 대로마제국을 상상해보며 과연 저들 속에 하나님은 계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헬라인들이 볼 때,  그의 죽음은 너무도 어리석은 것이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구원은 나무에 달려 죽는 사건으로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라 철학과 사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입니다 예수를 알지만 선생으로 존경하기는 하지만 영접하지는 않음을 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1:2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 

깨닫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정은  사모 (고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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