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 To be ignorant of what occurred before you were born is to remain always a child
  • - Marcus Tullius Cicer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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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백석대 석좌교수)

시작하면서

마틴 로이드 존스(1899-1981)는, “나는 성경 다음으로 교회사를 선택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목회자들의 교회사에 대한 무지를 통탄히 여겼고 설교자들에게 역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강조한 인물이었다. 그는 특히 부흥(Revival)과 청교도(Puritans)에 대한 깊은 식견을 가진 인물이었는데, 그가 쓴 The Puritans을 보면 교회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 특히 청교도 역사와 인물에 대한 깊은 식견을 볼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신앙과 교회의 삶은 역사의 사건에 기초하고 있다.” 마틴 로이드 존스와 같은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가 역사에 대한 지식이 교회적 삶을 위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다는 점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는 항상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를 숙고하였다. 그래서 “역사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를 마틴 로이드 존스 보다 더 잘 아는 이가 없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제임스 패커, 존 스탓트 등도 설교자에게 있어서 교회사의 주요성을 강조한 인물이었다.

위대한 설교자 스펄전(C. H. Spurgeon, 1834-1892) 또한 교회사를 중시한 인물인데 그에게는 약 2만5천권의 장서가 있었는데 이중 6천권 정도는 청교도 관련 서적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교회사 특히 청교도에 대해 박식했다. 그는 설교자에게 있어서 역사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설교계의 양대 거목이라 불리는 19세기 영국의 찰스 스펄전과 20세기 마틴 로이드 존스가 이처럼 교회사를 중시했다는 사실은 설교자에게 있어서 교회사의 중요성을 대변해 준다. 이 글에서는 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가에 대해 답하면서 역사이해 혹은 인식과 관련된 주변의 몇 가지 사항에 대해 답해 보고자 한다. 이 글은 급하게 쓴 미완성의 글이라는 점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강의를 이끌어가기 위한 작은 안내일 뿐이다.

 

1.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歷史, ὶστορια)를 뜻하는 History나 Historia 라는 말은 그리스어(ὶστορια, ὶστορεω)에서 유래했는데 ‘연구,’ ‘탐구,’ ‘조사’ 혹은 ‘탐구하여 획득된 지식’, ‘연구하여 얻어진 지식’을 의미한다(갈1:18). 예컨대 헤로도투스(Herodotus, 484-425 BC)는 그의 『역사Histories』에서 인간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들이 소멸되어 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저자가 조사한 내용을 역사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역사’를 과거에 대한 지식이란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세기부터였다. 로마의 역사가 폴리비우스(Polybios, 203-120 BC)는 그의 『역사Histories』에서 역사를 ‘과거에 대한 지식’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우리가 보통 역사라고 할 때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사건(events)으로서의 역사(Geschichte)와 기록(record)으로서의 역사(Historia)이다. 사건으로서의 역사는 우리의 인식과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수많은 역사의 창고에서 현재나 미래에 유용하다고 판단되는 것을 선택하여 기록한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 기록을 통해 과거를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역사를 ‘인간의 집단적 경험에 대한 기록’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그 역사를 기록한 역사가가 인식한 바에 의한 주관적 성격을 지닌다. 이를, 헤겔은 “역사란 말은 객관적 의미와 주관적 의미를 종합하고 있는데, ‘사건’(res gestae)을 의미하는 동시에 ‘사건의 기술’(historia rerum gestarum)을 의미한다.”고 했다. 시간 세계 안에 일어난 모든 사건는 절대적이며 객관적인 것이지만(사건으로서의 역사), 그것을 인식하고 기술하는 것(기록으로서의 역사)에는 주관적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 역사가의 관점, 곧 세계관이 반영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한다’라고 말할 때 사실은 역사에 대한 기록을 공부한다는 의미가 있다.

정리하면, 역사란 고고학적 자료나 문헌자료, 혹은 현존하는 자료에 대하여 과학적 방법에 의해 수집된 조직적인 자료에 기초하되 사회적으로 중요한 인간의 과거에 대한 해석된 기록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2. 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가?

 

‘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가’라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인류가 이룬 그 풍성한 유산을 모른다는 것은 나 자신을 알지 못하는 것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특히 지난 2천간 서양과 동양사회에엄청난 영향을 준 교회의 역사를 모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역사를 공부한 가장 큰 이유는 기원 혹은 연원에 대한 관심, 곧 호기심 때문이었다. 지난 과거를 알고 싶은 호고주의(好古主義)는 역사 공부의 출발점이었고 그 결과는 기쁨과 위안이었다. 이런 점에서 역사연구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점은 사소한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몇 가지 실제적인 이유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인간 존재에 대한 확인

 

역사를 ‘인간의 집단적 기억’이라고 말하는데, 이 기억 곧 기록이 없다면 우리는 누구이며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으며 어떻게 존재해 왔는가를 알 수 없게 된다. 이는 마치 인류가 집단적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우리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결국 인간은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역사는 개인과 집단, 부분과 전체를 아우르는 인간 삶의 기원과 연원, 변화와 발전, 흥망성쇠를 통해 개인, 민족, 국가, 사회제도, 문화, 종교를 알게 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준다. 곧 역사는 시간, 장소, 사회발전과 각종 제도들을 전체적인 맥락에서 인식하게 함으로서 정체성을 확인시켜 준다. 그래서 얼 케언즈(Earle E. Cairns)는 교회사란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도구’라고 불렀다.

역사 연구는, 오늘 우리가 누리는 앞선 세대가 물려준 위대한 유산들을 알게 해 준다. 그래서 오늘 우리로 하여금 앞선 시대에 대하여 감사하게 하고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 준다. 우리가 파지 않는 우물물를 마시며, 심지 않는 포도원의 열매를 먹으며, 건축하지 않는 도시에 살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되기(신6:10-11)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역사발전은 우리보다 앞선 세대의 희생과 수고, 헌신의 결과임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2)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

 

구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역사 즉 5대제국(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기에 역사를 안다는 것은 구약을 이해하는데 절대적인 도움을 준다. 신약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예수님이 빌라도 앞에서 심문받으실 때,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를 인정하고(요18:38, 19:4, 6) 그를 석방하려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忠臣)이 아니니이다”(요 19:12)라는 말을 듣고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내어준다. 그런데 여기서 ‘가이사의 충신’은 바른 번역이 아니다. 바르게 번역하면 ‘가이사의 친구(φίλος τοῦ Καίσαρος)’로 번역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친구’를 ‘충신’으로 의역했을까? 한글성경 번역자들이 역사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문대로 ‘친구’라고 번역하지 않고 ‘충신’이라는 말로 의역한 것이다. 여기서 친구라는 단어는 보통명사가 아니라 당시의 직위 혹은 자격을 말하는 고유명사였다. 당시 로마 황제는 지극히 신임하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친구’라는 칭호를 수여했는데 이 칭호를 받은 자는 사전 내락 없이 황궁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자격을 지닌다. 빌라도는 당시 황제였던 티베리우스(재임기간 14-37년)로부터 ‘친구’라는 칭호를 수여 받았는데, 군중으로부터 “예수를 석방하면 그 친구라는 칭호를 잃게 된다”는 말을 듣고 무죄한 자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준 것이다. 정리하면, 성경 번역자들이 로마제국의 역사를 몰랐기 때문에 성경을 의역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를 아는 것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3) 역사로부터의 교훈

 

역사 연구의 필요성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고대와 중세, 그리고 근대역사가들은 역사는 개인과 집단에게 교훈을 준다고 가르쳤다. 동양문화권에서도 역사를 거울(鑑)이라고 보았다. 중국에는 자치통감(資治通鑑), 우리나라에는 동국통감(東國通鑑)이 있는데, 이 역시 역사를 거울이라고 본 것이다. 명심보감(明心寶鑑)은 역사로부터 도출된 예문을 통해 교훈과 훈계를 주기 위해 편집된 책인데, 역사를 거울로 본 것이다. 성경도 역사의 교훈을 말하고 있는데,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구약의 출애굽 사건들)이 거울이 되어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다”(고전10:11)고 말하고 있다. 역사는 거울처럼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교훈과 훈계를 주기 때문에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바울도 로마서에서, 역사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for our learning) 기록했다(롬15:4)고 말하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키케로는, “당신이 출생하기 전의 일에 대하여 무지하다면 어린아이로 사는 것과 같다”(Nescire autem quid ante quam natus sis acciderit, id est semper esse puerum)고 했다. 스페인의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 또한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자들은 그것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Those who cannot remember the past are doomed to repeat it)”고 했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사례(examples)를 가지고 가르치는 설교’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의 역사서, 특히 사무엘서, 열왕기서, 역대기서는 이스라엘 왕조시대 역사인데, 여기에 여러 왕들의 영욕의 자취가 기록되어 있고 오욕의 역사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런 역사적 사례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교훈하고 있다. 역사는 삶을 위한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랄프 윈터(Ralph Winter)는 “신구약성경은 하나님의 책 제1권이고, (교회)역사는 하나님의 책 제2권이다”라고 말한바 있다.

역사는 ‘과거의 산물인 동시에 미래의 씨앗이다.’ 그래서 역사는 교훈을 주기도 하지만 미래를 어느 정도 예측하게 해 준다. 우리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할 때 이 말에는 역사는 어느 정도 반복한다는 점을 전재로 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역사는 반복하는 가? 이 점에 대해서는 차항에서 검토하고자 한다.

 

4) 거시적(巨視的) 혹은 통시적(通時的) 안목

 

역사공부는 역사적 안목, 곧 거시적 혹은 통시적 안목을 갖게 해 준다. 역사에 무지하면 어린아이로 살뿐 아니라 역사를 조망해 보는 안목을 가질 수 없다. 이는 마치 우물 안의 개구리(井中之蛙)처럼 밖의 세계를 볼 수 없다. 그러나 역사 연구는 우물 밖의 세계를 보게 해 준다. 즉 타자의 인식을 주관화함으로서 역사를 거시적 안목으로 보게 해 준다. 1989년 시한부종말론이 유행했을 때 역사에 무지하면 당시 풍미하던 거짓 종말론이 한국교회의 특이한 현상이라고 여기지만, 이런 류의 시한부 종말론은 초대교회시대, 중세시대, 16세기 종교개혁시대, 그리고 19세기 미국에서도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것의 한계와 기만성을 깨닫게 된다. 윌리엄 밀러(William Miller)의 그리스도 재림론(1843)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시한부종말론이 가져오는 사회병리적 현상에 놀라지 않게 된다. 말하자면 역사에 대한 이해는 과거와 현재를 조망해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하고, 역사를 원근법적으로 파악하게 도와준다.

그래서 영국의 교회사학자인 제프리 빙햄(Jeffrey Bingham)은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역사가여야 한다. 과거로부터 자양분을 얻는다면 더 높은 곳에 앉아 더 멀리까지, 그리고 더 넓은 전경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결국 역사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준다.

 

5) 역사연구와 오늘의 현실

 

역사연구는 우리 우리의 현실을, 그리고 우리의 실제 모습을 깨닫게 해 준다. 특히 교회사 연구는 오늘의 교회가 본래적 교회로부터 얼마나 부합하는지 혹은 이탈했는지를 깨닫게 해 준다. 그래서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은 자신들이 주장하는 복음주의 신앙을 첫째는 성경에 호소하여 그 정당성을 주창했고, 둘째는 역사에 기대어 당시 교회가 얼마나 본래적 교회, 본래적 신앙에서 이탈했는가를 제시하고 자 했던 것이다. 역사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척도였다.

우리는 역사연구를 통해 4세기 이후 교회가 본래적 교회로부터 이탈하여 속화의 길을 가게 되었고, 6세기 이후 교리적 변질을, 9세기 이후 성직매매가, 그리고 11세기 면벌부가 소개되었고, 14세기 이후 교회가 타락하여 성직자들이 윤리적 타락이 심각했음을 알게 된다. “성직자의 삶은 평신도의 복음이다”(Vita clerici est evangelium laice)는 경구가 나온 배경을 알게 해 준다.

교회사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 혹은 특성을 이해하는데 가장 적합한 수단이 된다. 역사, 역사적 연구는 교회의 본질과 사명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진정한 교회상을 제시해 준다. 또 역사를 통해 우리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와 섭리를 헤아릴 수 있다.

 

6) 설교자, 역사(교회사)의 유용성

 

그렇다면 역사에 대한 지식은 설교자에게 어떤 유용성을 지니는가? 두 가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로, 역사는 설교자들에게 유용한 예화(사례)를 제공한다. 지난 2천여 년 간의 교회사에는 본받거나 경계해야 할 많은 사례가 있는데, 그것이 오늘 삶에 유용한 가르침을 준다. 이보다 더 좋은 사례집이 있을까? 역사에 대한 지식은 설교자에게 유용한 예화를 제시한다는 점에서 이를 ‘역사의 예화적 기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역사에 대한 지식은 설교자들을 풍요롭게 해 준다.

둘째, 역사(교회사)는 성경의 가르침을 확증해 준다. 예를 들면, 성경은 인간은 타락했고 전적으로 타락했다(롬3:10, 20, 1:18-3:18)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진실로 인간은 타락했고,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역사는 성경의 가르침이 옳다는 것을 확증하는 기능을 한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사례를 가지고 가르치는 설교라고 할 수 있다. 역사는 누구에게나 소중한 자료가 되지만 특히 설교자들에게는 성경의 가르침을 확인해 주는 기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3. 역사는 반복하는가?

 

우리가 주변에서 늘 듣는 말이 ‘역사는 반복한다’는 말이다. 전도사 기자도 “해 아래 새것이 없다”(전1:9)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는 실제로 반복하는가? 고대 그리스인들이나 로마인들도 그렇게 믿었다. ‘명상록’을 썼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우리가 과거에 일어난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기 위해서는 오직 40년만이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역사는 40년을 주기로 반복한다는 의미였다. 그런가 하면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 에밀리아누스(Scipio Aemilianus)는 힘겹게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나서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역사는 반복하기 때문에 지금은 로마가 정복했지만, 언젠가 로마가 동일한 방법으로 정복당하게 될 것을 예견하고 통곡한 것이다. 역사의 반복을 믿었던 것이다. 실제로 역사는 반복할까?

만일 반복이 없다면 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역사 연구는 결국 교훈을 얻기 위한 것인데 과거의 일이 다시 반복하지 않는다면 구태여 지난 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역사는 어느 정도 반복한다는 점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영국의 존 버리(John B. Bury) 같은 역사가는 역사는 반복한다고 믿었기에 역사에서 법칙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역사는 과학,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History is a science, no less and no more)’라고 말한 바가 있다. 자연과학의 법칙이란 반복된 사실에서 얻는 정리(定理)인데, 그는 역사도 자연과학처럼 동일한 사건이 반복된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역사는 반복하는 것일까?

정확하게 말하면, 역사는 어느 정도 반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동일한 사건의 재현은 없습니다. 예컨대 칸트와 견해가 똑같은 철학자가 후대에 나올 수 있어도 그 동일한 칸트가 다시 태어날 수는 없다. 이렇게 볼 때 역사는 반복한다고 할 수 없고, 이런 점에서 역사는 개별성과 특수성을 지닌다.

그렇지만 역사는 동일한 사건이 수없이 많이 발생한다. 그래서 역사는 반복하는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는 반복하지 않고 반복되는 것처럼 보일 따름이다. 왜 그럴까? 인간의 본성(human nature)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동일한 본성을 가진 인간에 의해서는 시대와 상황은 달라도 유사한 사건이 반복적으로 발생한다. 로마 시대에도 권력을 가진 자는 그 권력을 유지하고 싶어 했고, 권력을 잃은 자는 그 권력을 되찾고 싶어 했다. 이런 권력에의 욕망은 고대에도 있었고, 16세기에도 있었고 우리 시대에도 동일하다. 고대 로마만이 아니라 아시아나 유럽 사회에서도 동일한 현상이었다. 이런 인간의 동일한 본성 때문에 유사한 사건이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결국 역사는 인간의 본성이 어떠한가를 보여 준다. 비록 동일한 사건의 재현(再現)은 아니지만 유사한 사건이 거듭 반복되기 때문에 역사는 교훈을 주고, 역사를 공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또 유사한 사건이 반복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법칙성을 발견할 수 있고, 그래서 (어느 정도) 사회과학적 예측이 가능한 것이다.

 

4. 하나님은 역사에 개입하시는가?

 

하나님(神)은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3가지 견해가 있는데, 실증주의(Leopord von Ranke, Karl Marx), 관념론(I. Kant, Johann Gottlieb Fichte) 그리고 기독교적 이해가 있는데, 기독교회는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 곧 하나님의 섭리 혹은 경륜을 말한다. 그것은 인간역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에 대한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말 하나님은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고 간섭하시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악이 존재하며, 의로운 사람이 고통당하고, 불의와 부정의가 활개치고, 참학과 광포가 줄을 잇고, 무죄한 자가 칼날에 쓰러지고, 의로운 외침이 곡절되고, 공의를 외치는 이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가?

이런 의문은 오랜 역사가 있다. 기원전 12세기경에 살았던 욥은 ‘왜 의인이 고통당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했고, 덕천막부(德川幕府) 치하 일본의 천주교도들도 동일한 질문을 했다. 나치 하에서 유대인들의 의문도 동일했다. 만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하나님은 이 살육의 현장에서 침묵하시는가? 아우슈비츠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한 엘리 비젤(E. Wiesel)은 그의 책 <밤, Night>에서 이렇게 물었다.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우리라고 이런 의문이 없을 수 없다. 실제로 인간의 역사에는 우리가 답할 수 없는 문제가 수없이 많다. 루터는, 이런 일들을 우리는 다 알 수 없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숨은 뜻이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고 간섭하시고 다스리신다고 말하고 있다. 세상의 모든 일이 저절로 되거나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役事)라는 믿음을 섭리라고 말한다. 영국의 이신론(deism)은 하나님의 창조는 인정하되 창조된 이후에는 만물이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인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창조한 세계에 오셔서 간섭하시고 다스리시고 통치하신다고 가르친다(창45:5-8, 50:15-21). 하나님은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이셨고(대하36:22, 스1:1), 포로된 자기 백성을 귀환하게 하셨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마10:29)고 말한다. 볼테르(Voltaire, 1694~1778)는 ‘역사는 인간의 그림자’라고 하여 인간이 역사의 주체라고 부장했으나, 성경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체이며 지금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신다고 가르친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특정한 사건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증명할 수 있을까?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1588년 7월 스페인의 무적함대라고 불리던 아르마다 함대(Armada)가 영국을 침공했다. 교황청과 관계를 단절한 영국을 다시 천주교로 복귀시키려는 의도였다. 아르마다 함대는 130척의 배와 8,000명의 해군, 19,000명의 보병으로 구성된 대군이었는데, 도버해협에 도착한 날은 7월 27일이었다. 영국은 속수무책이었는데, 오직 한 가지 희미한 가능성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실한 영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을 걸고 기도했을 때 청명하던 하늘에 먹구름이 일기 시작했고, 바다에 폭풍이 몰아쳤다. 예기치 못한 기상 이변에 당황한 아르마다함대는 결국 패전하고 오직 30여 척만이 도버해협을 넘어 도망갔다. 이 사건을 역사가들은 ‘개신교의 바람(the wind of Protestantism)’이라고 부른다. 무적함대라고 불리던 아르마다 함대가 패배한 것은 커다란 이변이었고, 이 사건 이후 영국이 해상권을 장악하고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해 갔다. 그래서 아르마다 함대를 물리친 것은 하나님이 섭리하신 특별한 사건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을 하나님의 섭리였다고 증명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건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었다고 증명할 수 있을까? 이 역시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의 신념 체계, 곧 성경에 근거한 믿음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실증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믿음으로,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고 믿는 것이다.

마르크시스트들은 신(神)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 간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사건은 역사 내적인 원인과 결과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역사 외적인 개입이나 간섭은 인정하지 않는다. 실증주의도 이와 다르지 않다. 실증주의는 역사의 동인(cause)이나 과정을 현상세계 안에서, 곧 역사 내적인 인과론에서 찾기 때문에 하나님의 간섭이나 통치 혹은 섭리는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역사의 궁극적인 의미를 묻는 질문은 역사가의 영역 밖의 문제라고 말한다. 랑케(Leopold von Ranke)와 같은 실증주의 전통을 따르는 이른바 ‘과학적 역사가들(scientific historians)’은 기독교 신앙과 역사는 관련성이 없다고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 간섭을 인정하지 않는다.

 

5. 기독교는 역사를 어떻게 보는가?: 역사관의 문제

 

고대 그리스인(희랍인)들은 역사는 끝도 시작도 없는 무한한 반복으로 보았고, 그 역사 과정은 맹목적인 순환으로 보았다. 이를 회귀론 혹은 순환사관(循環史觀)이라고 말한다. 농경 문화권 속에서 계절의 순환을 보고 살았던 저들은 역사를 맹목적인 순환의 과정으로 이해했다. 즉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는 반복된 자연의 순환에서 역사의 순환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불트만(Rudolf Bultmann, 1884~1976)은 그리스인들은 역사를 본 것이 아니라 자연을 보았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스인들은 역사를 맹목적인 순환의 과정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역사에서 새로운 것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역사는 지향하는 목표도 없고 발전이라는 개념도 없다. 결국 역사과정은 운명론적인 영원한 회귀(回歸)일 뿐이다. 그래서 그리스 철학의 근저에는 운명론(μοῖρα)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이 그리스적인 회귀론을 극복했다. 그리스인들과는 달리 유목민이었던 히브리인들은 새로운 목초지를 따라 이동해 가면서 직선적 역사관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그리스인들과는 달리 역사의 분명한 시작과 역사의 목표를 상정했다. 즉 역사란 하나님의 창조와 더불어 시작되었고, 하나님이 정하신 종말로 나아가는 과정, 곧 역사란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이 전개되는 과정으로 이해했다. 역사는 하나님이 정하신 목표를 향하는 과정이었다. 그 역사는 모든 인류를 포용하는 일원론적이었다. 히브리인들은 역사의 무한한 회귀만을 믿었던 운명론적 역사이해와는 달리, 역사는 분명한 목표를 향한 선적인 과정, 곧 직선적 역사관을 가지게 된 것이다. 히브리인들은 자연은 신비로운 자존실체(自存實體)가 아님을 알게 되어 자연 중심 사상을 탈피할 수 있었고, 역사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았기에 자연을 비신격화 할 수 있었다. 자연은 신비로운 정영(精靈)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無)에서 창조하신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었고, 역사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된 것이다.

정리하면,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역사 과정은 의미 없는 반복이 아니라 유의미한 진보이며, 분명한 종말을 향해 가는 목적 있는 과정이라고 본 것이다. 이것이 히브리적 역사이해였다. 이런 히브리적 역사관을 계승한 것이 기독교 역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의 역사이해는 근본적으로 다음의 3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역사는 하나님의 창조, 인간의 타락,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계획이 펼쳐지는 과정이라는 점이다. 이와 같은 역사에 대한 관점을 구원사관 혹은 구속사관이라고 한다. 둘째, 모든 역사 과정은 맹목적이거나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개입하시고 간섭하시고 섭리하신다는 점이다. 이를 섭리사관(攝理史觀)이라고 말한다. 말씀을 통해서 무에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피조된 세계를 지탱하시며, 모든 것과 동행하시며, 모든 것이 그가 정한 목적을 향해 발전하도록 섭리하신다. 셋째, 역사는 분명한 시작과 함께 분명한 목표, 곧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사관을 목적론적 사관이라고 한다. 역사는 맹목적인 반복이 아니라 하나님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과정이며, 역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목표를 행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기독교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라는 점을 확신하고 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피조된 세계를 다스리시고 유지하신다. 지구궤도를 돌고 있는 수많은 별들과 자연계의 미미한 현상들, 그리고 복잡한 인간의 삶이 다 그의 다스림 아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이 세상에 왜 그토록 심각한 악이 활개 치며, 공의가 무너지고 의로운 자가 핍박당하는가? 이 모든 문제는 범죄한 인간의 악함 때문이다. 인간의 죄와 그로 인한 욕망, 곧 악함이 자연을 파괴하고 불의를 행하고 인간 생명을 살상하고 있다. 우리의 현실을 보면 마치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 마틴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하나님의 일식(日蝕) 현상’이라고 불렀다. 하나님이 역사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시지만 마치 달이 해를 가려 해가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루터는 ‘인간사의 불의가 하나님의 역사 간섭을 부인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현실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숨은 뜻이 있다’고 보았고, 그 숨은 뜻을 ‘하나님의 마스크’라고 불렀다. 부정하고 싶은 것이 사실이지만, 일제의 식민 지배나 8‧15 광복, 그리고 6‧25 동란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 뜻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은 각기 다를 수 있지만 숨은 뜻이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사실 우리에게는 역사를 긴 안목으로 헤아리는 안목이 없다. 눈앞의 현실만 인식할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를 통시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우리의 단견으로는 하나님의 침묵을 읽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긴 안목으로 역사를 굽어보는 안목이 필요하다. 지금은 이해할 수 없으나 먼 훗날 하나님의 인내와 침묵, 인간의 악행을 허용하신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낙담하고 절망하기도 한다. 우리의 시각으로 볼 때 우리의 현실은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불의와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침묵이 너무 긴 길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때’에 대한 우리의 개념일 뿐이다. 지금 우리는 헤아리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역사를 당신의 거룩한 뜻 안에서 이루어 가실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는 역사를 원근법으로 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 우리의 날들은 오직 주의 선하신 손안에 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My times are in thy hands, 시31:15)”라고 고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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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 왜 역사(교회사)를 공부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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