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도를 많이 하고 노력을 해야 생수의 강이 넘쳐흐르는 줄 알았다. 아니다. 누구든지 목말라 이 물을 마시면, 예수를 믿으면 그 배에서 영생하도록 흐르는 생수 강이 생긴다. 나는 이것을 깨달은 날 이후 늘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음을 믿는다. 자유하게 되었다. 감사하게 되었다. 흥분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춤추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성령도 능력도 믿음으로 받았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갈3:5). 대답해 보라. 성령의 능력을 믿음으로 받는다. “성령을 받는 것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라고 묻는다. 듣고 믿음으로이다. 너희에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려면 기도를 세 시간 이상해야 나타난다고 하지 않았다. 이미 받았음을 믿고 감사하고 인정하고 기도하면 된다. 기도를 하루 5시간 해야 능력을 주겠다고 그러지 않았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렇다고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더 기도하게 된다. 이것을 믿고 기도하면 기도가 더 힘이 있고 재미가 넘친다. 기도를 10시간 해야 성령의 능력을 주겠다고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 이미 주신 것을 알고 기도하라고 하신다.
믿음으로 현실을 장악하라.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4-25).
믿음과 소망은 다르다. 지금 믿음으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앞으로 성령 충만을 소망하지 말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믿음으로 충만해야 한다. 지금 충만해야 한다. "하나님 저는 앞으로 성령 충만할 것입니다. 내일 충만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샘물이 나는가? 물론 우리가 내일도 그렇게 될 소망을 가진다. 충만 위에 더 충만할 것을 소망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성령 충만함을 믿어야 한다. 소망은 있어야 하지만 지금 믿음을 가져야 한다. 지금 당신은 성령 충만하다. 당신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 당신은 굳은 마음이 부드러워진 사람이다. 새 마음이 있고 새 영이 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36:26-27)라고 약속하셨다. 믿음으로 간구하면 주신다.
소망과 믿음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지금 믿어야 한다. 동시에 소망도 가져야 한다. 지금 충만을 주셨고 앞으로도 더 충만케 하실 것이다. 지금 우리가 구원 받았고, 앞으로도 구원 받을 것이다. 이것을 "이미, 아직"이라는 표현을 한다. 이미 주셨고 아직 주실 것이다. 그것이 믿음과 소망이다. 우리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사랑 속에 살아야한다. 믿음과 소망은 다르다. 엄밀히 말해서 소망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을 소망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 소망만으로는 믿음의 역사를 일으킬 수 없다. 쉽게 말하면 성령 충만한 것을 믿기 전에는 죽을 때까지 소망만 갖고 성령 충만 만 바라보다 죽을 것이다. 그래서 한 번도 완벽한 성령 충만함을 믿지 못하고 이 땅을 떠나는 사람이 많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내가 이 사실을 깨닫고는 부들부들 떨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 내가 믿는 줄 알았는데 소망만 가졌었구나! 나는 성령 충만을 믿지를 못했었구나. 큰 일 날 뻔 했구나. 죽을 때까지 바라기만 하다가 한 번도 성령 충만을 모르고 살 뻔 했구나. 능력을 바라기만 했지 능력이 나에게 넘쳐 남을 믿지 못했구나"하고 놀랐다.
복음을 믿음으로 깨닫고, 온전한 복음의 문이 열리던 날 감격과 기쁨과 함께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이 급해졌다. 모르고 평생을 살았다면 큰일 날 뻔 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십자가를 믿는 다고 하면서도 십자가에서 이미 다 이루어 놓으신 일을 믿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주님 저는 앞으로 복음만 말하겠습니다. 온전한 복음, 이미 이루신 복음의 소식을 말해 믿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자연스럽게 결단하게 되었다. 나는 그 후 기회만 있으면 시자가의 복음만 말하고 있다. 믿음과 소망은 다른 것이다.
이것을 몰랐다면 죽을 때까지 “오, 주님 성령 충만을 주세요.”라는 기도만 하다가 갈 뻔 했다. 생각 만해도 소름이 돋는다. 큰 일 날 뻔 했다. 당신은 안 그런가? "오, 하나님 복음만 전하다가 가겠습니다."라고 결단하게 된 강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이 방법이 아니면 성령 충만함에 도달하지 못할 사람이다. 그런데 성경은 다 주셨으니 믿음으로 받으라고 한다. 소망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믿음의 역사를 일으킬 수 없다. 무슨 말 인지 알겠는가? 모든 부분이 그렇다. 성령 충만 뿐 아니라 모든 부분이 그렇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다. 현재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