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9(금)
 
김경헌 목사 고신교회(230510변경).jpg
김경헌 목사(부산 고신교회)

남편과 한 몸을 이루어 하나님 구원을 향한 “여자의 후손이신 메시아”를 향하여 한결같이 순종했던 사라였습니다.

자신이 돕는 배필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할 것 같아 아내의 자리까지도 양보하는 결단까지 내립니다.

 

(창16:2-3)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출산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니 원하건대 내 여종에게 들어가라 내가 혹 그로 말미암아 자녀를 얻을까 하노라 하매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들으니라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그 여종 애굽 사람 하갈을 데려다가 그 남편 아브람에게 첩으로 준 때는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지 십 년 후였더라

 

그 어떤 희생이나 양보를 다 한다 해도 여자로서, 특히 아내로서 불가능한 부분입니다. 이 사실만 보아도 메시아를 바라보는 언약은 아브라함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라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진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사라의 이 장면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돕는 배필(창2:18)”의 핵심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한 것도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있는 성도들은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서 복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특권 중의 특권이요 복 중의 복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 믿어서 복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위 성경 구절에서 또 한 번 사라 할머니가 우리를 안타깝게 하고 가슴 아프게 하는 장면이 “가나안 땅에 거주한 지 십 년 후”라는 부분입니다.

 

65세에 부름을 받아 10년 동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렸습니다. 단순히 10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표현이 사라 할머니의 심정이라고 한다면 과언일까요? 사라는 열 손가락을 다 꼽아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렸습니다. 장차 오실 여자의 후손 메시아를 바라보는 신앙으로 아들을 기다린 세월이 10년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셨으니 사라의 나이 75세, 아브라함의 나이 85세입니다. 그런데 사라가 자신의 여종 하갈을 남편에 첩으로 넣어주자마자 하갈은 임신합니다.

 

(창16:4) 아브람이 하갈과 동침하였더니 하갈이 임신하매 그가 자기의 임신함을 알고 그의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참 기가 찰 노릇입니다. 여종을 첩으로 넣어주자마자 임신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아브라함에게는 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마치 사라에게 문제가 있어 임신하지 못한 것임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어쩌면 이때까지는 사라가 아이를 가질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 일이 있은 지 14년 후 이삭을 임신할 때 가서 성경은 사라의 생리가 끊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창18: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이 정도 되면 예수 믿어도 별수 없다는 말이 나올 것 같지 않습니까? 목사, 장로, 집사, 권사, 성도가 되어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교회와 사명을 위하여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았는데 이런 결과가 주어 지면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보고 미련하다고 비아냥거리지 않겠습니까?

 

(창16: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여기서 참 재미있는 장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갈이 임신한 후 14년 후에 사라도 임신합니다. 사라가 90세에 이삭을 낳았으니, 사라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보며 14년이라는 세월을 더 기다려야 합니다. 당연히 이스마엘과 이삭의 나이는 14살 차이입니다. 14년이라는 세월을 그냥 무심히 지나갈 수도 있지만, 14는 하나님의 안식 우리의 구원을 뜻하는 7의 2배입니다. 마1장 이스라엘 왕의 역사, 하나님 나라인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14대를 3번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마1:17) 이렇게 볼 때, 성경에서 14라는 수는 7의 갑절로 믿음의 세월,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 역사, 성도로서의 세월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는 "고통의 길, 슬픔의 길"이라는 뜻으로, 예수님께서 재판받으신 후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까지 걸어가신 길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길을 14처소로 기념하고 있는 것은 그냥 우연일까요?

 

남편을 따라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온 지 10년 세월. 첩과 첩의 자식을 통해 멸시를 받고 살았던 믿음의 세월 14년.

  이런 세월을 살았던 믿음의 여인 사라,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될 교회를 예표하는 여인 사라가 127세를 살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이 결혼하는 것도 보지 못하고 죽게 하셨을까요? 왜 성경은 그렇게 필요해 보이지 않는 사라의 나이, 사라가 죽은 나이를 기록해서 우리를 안타깝게 할까요? 3년만 더 살려 주시면 며느리라도 보고 죽을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사라에게 이러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사라에게 이렇게 잔인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라가 죽은 나이를 기록만 하지 않았어도 안타까움이 덜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성경이 장차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예표하는 사라의 죽은 나이를 기록하여 오늘 사라의 후예가 된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복음은 무엇일까요?

태그

전체댓글 0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김경헌 목사]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3)(창23:1)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