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헌 목사] 노아의 술주정
우리 칼빈주의자들은 수많은 이단과 불건전한 무리들, 특히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변질된 신학과 교리로 인한 피해들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것 외에 취급하거나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더할까? 혹은 제할까? 하는 두려움이 그 근거가 됩니다.
(신4:2)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잠30:6)너는 그의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계22:18-19)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그러다 보니 분명 문제가 있어 보이는데 성경은 그 사실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때, 그것조차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라고 강조합니다.
포도주에 만취하여 벌거벗었던 노아의 사건 역시 무엇인가 내막은 있는 것 같은데 성경은 일체 함구하고 있습니다. 결론은 술에서 깨어난 노아가 손자 가나안을 저주하는 것입니다.
과연 가나안은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까요? 왜 할아버지는 사랑하는 손자를 저주했을까요? 분명히 사건이 있는데 성경은 그 내용에 대해선 함구하고 마치 잘못한 것 같은 가나안을 저주하는 것으로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성경에 관심 있는 자들은 당연히 이 사건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습니다.
가나안이 저주받을 짓을 했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노아가 저주했을 것입니다. 과연 가나안이 저주를 받을 정도로 잘못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래서 어떤 연구가들은 손자 가나안이 할아버지 노아의 성기를 거세했을 가능성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이 사건 이후에 노아가 아들을 낳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족장 시대와 그 이전 시대 믿음의 사람에 대한 특징을 한마디로 표현하라면 메시아를 대망하는 아들을 낳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 노아가 이 사건 이후로 아들을 낳지 않은 것을 보면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칼빈주의자들은 이런 해석을 조심합니다. 실제로 이런 해석이 확대되어 수많은 이단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렇다 보니 고신교회는 성경에 대해 질문하는 것 자체도 마치 믿음이 없는 것처럼 취급합니다.
“무조건 믿고 순종하면 된다!” 참 아름답고 위대한 고백입니다.
한 가지 질문을 던져봅시다.
“내가, 우리가 무조건 믿는다고 믿어지는가?”
믿음 역시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잘 몰라도, 이해가 안 되어도 무조건 믿으면 된다고 주장합니다. 마치 내가 그렇게 믿을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왜 이렇게 믿음 좋은 고신교회 성도들이 이단으로 많이 넘어갈까요?
질문하는 것조차 믿음 없는 것으로 볼 정도로 신앙이 좋았던 고신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불건전한 것들에게 그렇게 쉽게 미혹되고 넘어갈까요?
성경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계속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고전13:11)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성경에 대해서 질문조차 금기시하다 보니 상황이 발생하면 대부분 상식으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전례를 따라, 이전에 해 오던 것을 기준 삼아 결정해 버립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갈빈주의자들의 심각한 오류와 이율배반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그토록 조심하며 언급을 피하면서도 성경의 인물이나 사건의 정황을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상식적인 기준에 맞추어서 쉽게 평가한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없는데도 결론을 너무도 당당하게 내려버립니다.
그런 결론의 대표적인 사건이 노아의 술주정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벌거벗은 것에 대해 지적하거나 책망하거나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칼빈주의자들은 그 장면을 노아의 잘못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런 유형의 대표적인 것이 있다고 한다면 아브라함의 거짓말입니다.
(창12:13)원하건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그대로 말미암아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말미암아 보존되리라 하니라
이 사건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창12:17)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아브라함의 거짓말이요, 잘못이라면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이러시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아브라함의 이런 거짓말은 한 번이 아닙니다.
(창20:2)그의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 하였으므로 그랄 왕 아비멜렉이 사람을 보내어 사라를 데려갔더니
아브라함이 거짓말 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이러시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창20:7)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반드시 죽을 줄 알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가 거짓말해도 보호해 주시고 거짓말에 속은 사람에게는 심판하신다고 결론을 내려도 됩니까?
하나님의 공의를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다루어 보겠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라는 위대한 족장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까지 얻은 위대한 믿음의 족장 야곱에 대한 평가는 야박할 정도로 심각합니다.
(창37:3)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야곱이 요셉을 편애하여 요셉이 형제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했고, 형제들 간의 불화를 조성했다고 설교합니다.
그런 요셉이 지혜롭지 못하게 꿈 이야기를 해서 더 미움을 받았으니 믿음의 사람은 입조심 해야 한다고 설교합니다.
(창37:5)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그런 야곱에 대해, 그런 요셉에 대해 성경에 잘못했다고 지적한 부분이 있습니까? 그런데 왜 오늘날 칼빈주의자들은, 특히 저와 같이 고신에서 태어나고 고신에서 자란 장로교 성도들은 당연히 야곱과 요셉의 실수와 잘못으로 알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왜 성경에 기록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질문조차 믿음 없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믿음의 사람들을 평가할 때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는데도 지적하고 비판하고 정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모세오경의 저자는 모세입니다. 모세는 야곱의 6대 손입니다. 야곱의 증손자의 손자인 모세가 바로 그 할아버지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킨 장본인입니다. 성경의 원저자이신 성령님까지는 놓친다 해도 손자인 모세가 할아버지 야곱에 대해 기록할 때 어떤 마음으로, 어떤 관점으로 기록했을까? 정도만 생각한다면 인물과 사건을 보는 관점이 많이 달라질 것 같습니다.
다음 기회에 살펴보겠지만 믿음의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도 쉽게 지적하고 평가하고 정죄하는 장면들이 한결같이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렇다 보니 가나안 저주사건 역시 노아의 잘못으로 쉽게 인정해 버립니다.
믿음의 사람도 실수하고 잘못할 수 있다. 술을 마시고 벌거벗은 것부터가 노아에게 문제가 있고, 가나안을 저주한 것은 전적 노아의 잘못입니다.
특히 술 담배를 해서는 안 되는 고신교회는 너무도 쉽게 술 마신 노아, 술에 만취한 노아, 벌거벗은 노아......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필자는 이런 주장에 대해 전적으로 반대합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도 인정한 사람입니다. 함부로 평가절하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창6:8-10)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세 아들을 낳았으니 셈과 함과 야벳이라
더욱이 이 사건이 발생한 상황이 그렇습니다.
무시무시한 홍수로 사람으로 인하여 땅에 붙어 있던 저주가 씻겨져 나갔습니다.
(창8:21)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그래서 노아 홍수는 장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홍수로 진짜 땅인 사람에게 붙어 있는 저주를 씻어낼 것을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아담인 노아에게 하늘에 활을 걸어두심으로 언약을 갱신하셨습니다.
(창9:11-13)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한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
이 언약이 체결된 후 노아는 농사를 시작하는데 느닷없이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창9:20)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홍수 심판이 끝난 후 굳이 농사를 언급한다면 주식에 관한 농사를 짓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노아가 농사를 시작했는데 생뚱맞게 포도나무를 심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매우 함축적이요 의도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부터 사람에게 경작하라고 하셨습니다.
(창2: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선악과 사건 이후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 사람에게도 땅을 경작하게 하셨습니다.
(창3: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이 정도만 봐도 농사짓는 것, 사람이 하는 일, 직업은 단순한 세상살이에서 먹고 살기 위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를 결정짓는 중요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홍수 심판으로 땅에 붙어 있던 저주가 씻겨져 나간 후 노아가 포도농사를 짓는 장면은 에덴동산의 경작을 연상하게 한다면 무리한 주장이라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 포도주에 대취하여 벌거벗게 되었습니다.
(창9:20-21)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이 장면도 우리의 윤리적이고 도덕적이고 상식적인 관점으로 접근해서는 답을 얻기가 불가능합니다.
주변에 술에 취한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술에 만취한 자들이 술 주정을 하고, 행패를 부리고, 정신줄을 놓아 버리는 경우는 볼 수 있지만, 술을 마셨다고 해서 벌거벗는 것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이 정도만 정리하고 다시 노아의 모습으로 돌아가 봅시다.
노아는 저주가 풀어진 땅에 농사를 시작했는데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그 나무에서 나온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취했습니다. 그리고 장막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아니, 노아는 처음부터 장막 안에서 포도주를 마셨을 것이고, 취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벌거벗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성경이 그 상황을 벌거벗을 것으로 표현했을 수도 있습니다.
인류라고 해도 노아의 식구들 뿐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 장막 안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구원의 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책입니다. 단순히 노아의 술 습관을 기록하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땅에 저주가 풀렸으니 에덴동산을 연상하기에 어렵지 않습니다.
홍수 심판으로 8식구가 살아났으니 장차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주어질 부활을 연상하기에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활 언약(무지개 언약)을 주셨습니다.
새롭게 창조된 노아가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에덴동산의 경작이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게 회복되었습니다. 노아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하는 포도주에 취하였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생뚱맞게 노아가 벌거벗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벌거벗었습니다. 부끄럽고 수치스럽습니까?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옷을 입고 있는 것이 수치스럽고 우스꽝스럽습니까? 옷을 벗고 있는 것이 수치스럽고 우스꽝스럽습니까?
우리는 매 주일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 계신 천상으로, 하늘나라로, 완전한 에덴동산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옷을 벗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라는 옷을 절대로 벗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가죽옷으로 아무리 껴입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눈에 가릴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다음 말씀의 결론은 일상생활의 적용이 아니라 이와 같은 예배에 관한 부분일 것 같습니다.
(눅9:23)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가 부인되지 않으면 결코 온전한 예배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발가벗겨질 때, 완전히 벌거벗을 때 완전한 가죽옷이신 그리스도로 입혀 주십니다.
(갈3:27)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이렇게 볼 때 노아가 벌거벗은 것이 단순히 술주정, 나쁜 술버릇이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