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단어 중에 탄탈리아즈(tantalize)가 있다. 우리말로 해석하면 “애타게 하다, 감질나게 하다” 라는 뜻으로 옥스퍼드 사전에는 ‘얻을 수 없는 것을 보여주며 괴롭히거나 장난치다’ 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인물 탄탈로스(tantalus)에서 유래하였다.
탄탈로스는 제우스의 아들이며, 현재 터키의 고대도시 시필로스의 통치자였다. 그가 하늘에서 알게 된 비밀들을 폭로한 이후 신들의 분노에 직면하게 된다. 탄탈로스가 신들의 음식인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훔쳐 인간 세상으로 가져오려 했기 때문에 신들의 심판을 받게 된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아들을 죽인 후 시신을 조각 내어 신들에게 음식으로 바치려고까지 했다.
그는 신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범죄를 저질렀지만 신들이 그에게 내린 잔인한 처벌은 항상 똑같았다. 즉 탄탈로스는 목까지 차는 물속에서 한 모금의 물도 마실 수 없었으며, 저승에서는 달콤한 과일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그는 결코 한 입도 먹을 수 없었다.
물과 음식이 손에 닿을 위치에 있었지만 탄탈로스는 영원한 목마름과 허기짐이라는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손이 닿을 듯 말듯 애타게 하면서, 결국 얻을 수 없는 것을 보여주며 괴롭히는 고통”을 일컬어서 영어단어 탄탈리아즈(tantalize)를 탄생시켰다.
또한 이 단어에서 유래된 것이 있는데, 물이나 액체가 부풀어 오르다가 일정 한계에 이르면 그 모두가 쏟아져버리는 화학실험기구인 ‘탄탈로스의 접시’가 이로부터 유래하였다.
이와 유사한 기능을 가진 술잔으로 계영배(戒盈杯)가 있다. 즉 넘침을 경계하는 잔이다. 이 잔은 술을 어느 선 이상 따르면 술이 밑으로 흘러 나간다. 이 술잔에는 작은 구멍이 있어서 술이 약 70% 정도 차면 작은 구멍을 통해서 술이 잔 밖으로 새어나가도록 만들었다. 이는 술잔을 가지고 과음을 경계하기 위한 것으로 일명 절주배(節酒杯)라고도 한다.
중국의 공자가 제나라 환공을 찾아갔는데 환공은 늘 계영배를 손에 들고 있었다. 환공은 이 계영배를 ‘늘 곁에 두고 보는 그릇’이라 하여 <유좌지기(宥坐之器>라고 불렀고, 공자도 이를 본받아 항상 곁에 두고 스스로를 가다듬으며 과욕과 지나침을 경계했다고 한다.
과거에 우리나라 선비들도 연잎들이 빗방울을 아래 쏟아버리는 것을 보고 ‘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빗방울만 싣고 있다가 그 이상으로 되면 미련없이 비워버린다’는 말을 하면서 정신수양을 했다.
또한 기품이 높은 선비들은 집에서 학(鶴)을 길러, 그의 지조에 나쁜 영향을 줄 어떤 사람이 찾아오면 구구하게 연설로 변명하느니 그저 학을 어깨에 얹고 나감으로써 무언의 항변을 했던 것이다. 진주에 낙향에 있던 영남의 선비 최영경(1529-1590)을 영의정 유성룡이 찾아갔을 때 남루한 토의에 짚신을 신은 최영경이 학(鶴) 한 마리를 어깨에 얹고 나와서 맞이했다. 이를 보고 영의정 유성룡은 백 마디 말보다 더 깊은 뜻을 미리 헤아리고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돌아 나왔다고 한다. 정말 멋있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에 넘치는 것들에게 대해서 많은 경고문을 날리고 있다. (딤전6:6)에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유익이 되느니라” 라고 말씀한다. 자족하는 마음이란 남의 것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이 내게 주신 것을 감사하며 누리는 삶이다. 또한 자족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세상 정욕을 거슬러 올라가는 저항의 몸짓이다.
김용삼의 시 <호박꽃 감사>를 보라. “장미처럼 예쁘지 않아도 노란 별 모양이 된 것 감사, 종종 내게 날아와 귓가에 윙윙 노래를 불러주는 꿀벌 친구가 있어 감사, 밤이면 둥근 달 쳐다보며 둥근 열매의 꿈을 꾸게 한 것 감사, 그리하여 가을 농부의 얼굴에 웃음꽃 피우게 하는 것 감사”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바울의 힘찬 외침을 들어보라 (고후6:10)에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