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3-20(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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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고신교회)

그렇다면 엘리압은 누구처럼 살아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다름이 아닌 이삭처럼, 므낫세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이삭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아직 수혼 제도가 세워지기도 전입니다. 자신을 대신할 동생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 아브라함이 다시 아들을 낳아 자신의 이름을 끊어지게 하지 않을 방법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삭은 순종했습니다.

 

엘리압은 어떻습니까? 일곱 명의 동생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일곱이란 의미를 우리는 잘 압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엘리압은 수혼 제도를 통해서 자신의 이름이 영영토록 끊어지지 않을 보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일곱 명의 동생 중에는 하나님께서 기름까지 부어주신 동생 다윗도 있었습니다.

 

엘리압은 부활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엘리압은 부활의 신앙을 가졌던 완전한 아버지 아브라함의 언약을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이 자신의 이름 속에 담겨 있습니다.

 

엘리압의 형제가 몇 8명입니다. 안식후 첫날, 주일, 부활의 날, 할례할 8일 이 모든 의미가 엘리압이라는 이름 속에, 엘리압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야말로 엘리압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름이 끊어지지 않고, 죽어도 살아나는 부활의 약속으로 겹겹이 둘러 싸여져 있었습니다.

 

자신이 이름으로도, 자신의 형제들로도 장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함에 눈곱만큼도 하자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엘리압은 골리앗 앞에서 겁에 질려 기가 죽어있었다 해도 다윗의 등장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신앙과 본분을 찾았어야 했습니다. 엘리압은 자신의 이름 속에 있는 뜻처럼 당당히 이삭의 길을 갔어야 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엘리압이 골리앗 앞으로 가야 했습니다.

이삭이 자신의 발로, 아니 아버지 아브라함을 도와 모리아산 제단 위로 올갔던 것처럼 엘리압은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있는 다윗의 등장으로 정신을 차리고 골리앗 앞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세움받은 목사와 장로들은, 먼저 된 자들은 정신 바짝 차리고 이 장면을 죽을 때까지 잊어선 안 됩니다.

 

부족하여 엘리압처럼 골리앗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었다 해도, 순간적으로 자신의 사명과 직분의 이름을 망각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는 다윗의 등장으로 반드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다윗의 등장 앞에서 자신의 오랜 경륜과 경험과 연륜과 위치를 가지고 화를 내고, 지적하고, 억 박 지르는 엘리압이 되어선 안 됩니다.

 

자기가 부인되지 않으면, 자기가 죽지 않으면 엘리압이 됩니다.

 

먼저 된 자는, 교회의 진정한 장자는 먼저 죽는 자입니다.

 

교회 안에서 진정한 장자는 누구입니까? 먼저 된 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자기를 태워 죽일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으로 오르는 자입니다. 제 발로 죽음의 제단 위로 올라가는 자입니다.

 

이 사실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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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엘리압(4) (삼상17: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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