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1-08(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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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마산회원교회 원로)

보통 옛날 부자라 함은 백만장자를 부의 대명사로 쓰였으나 돈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21세기에는 억만장자가 되어야만 부자의 대열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부모를 잘 만나 불로소득으로만 평생 돈 걱정 없이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을 부자라고도 한다. 그래서 어린아이도 돈 많은 사람을 부러워하고 열심히 노력하여 부자가 될 꿈을 가지기도 하는 것이다.

경주를 여행하는 중에 교촌이란 마을에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이 마을은 신라 신문왕 때 최초의 국립대학인 국학이 세워지고 고려 때는 향학, 조선 때는 향교로 이어진 곳이다. 특히 향교와 고택이 많이 있었지만 참 부자의 모습을 보여 준 최 부자의 고택이 있어 마을이 더욱 고귀하고 빛났다. 가진 재물을 12대 400년 동안 만석의 재산을 지켰고 9대 진사를 배출한 가문으로도 유명하다. 가난한 소작인을 나의 진정한 이웃으로 사랑하고 사회에 책임을 다한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귀한 집안이다. 물론 그 시대는 기독교가 없었지만 원래 타고날 때부터 천성이 선한 사마리아인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성경에 어리석은 부자와 부유한 관원 등은 모두 그들의 가진 것에 대한 욕심 때문에 베풀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부요치 못한 자가 된 것이다. 자기가 가진 것을 헌신적으로 버리고 예수를 쫓으라고 했지만 물질의 노예가 되어버려 걱정 근심만 하다가 인생을 마감한 사실이 안타깝다. 자기 소유의 땅을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는 이기적인 행동을 한 사람도 베드로가 성령을 속인다고 책망하니 혼이 떠나 버리는 참극이 벌어지는 것을 보면서 가진 부를 가지고 잘못하면 결국 망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물론 경주 최부자 집안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그네를 잘 대접하고 백리 안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해야 한다고 가훈을 삼을 정도로 선행을 한 것이 참부자의 모습이었다. 최부자 댁이 처음부터 부자로 산 것은 아니다. 중세시대 지주에게 8할을 바치는 것을 5할로 낮춰 준 것이 오히려 부를 더 불러오는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한 해의 소출이 만석 이상이 되면 그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고, 흉년에는 어려운 사람의 땅을 사서 늘리는 일이 없도록 엄격하게 제한했다. 벌써 수백 년 전에 이미 최부자 집은 예수님의 베품의 원리를 스스로 알고 애민정신으로 사랑을 실천한 것은 우리에게는 큰 교훈으로 다가온다. 최부자의 중시조도 나라에서 내리는 큰 벼슬을 사양한 것이 집안 전통으로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않았고, 시집온 며느리는 3년 간 무명옷을 입는 것이 가풍이었다. 집안 어른들의 호 역시 대우헌이나 둔차를 쓰면서 부자이지만 항상 겸손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다.

최 부자 댁은 1700년경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99칸으로 알려진 사랑채에는 항상 수많은 손님들이 머물렀으며 흉년이 들면 굶주린 백성을 위해 곳간을 열어 두었다고 한다. 교촌마을 최 부자 집안의 구석구석 빛바랜 곳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흔적을 발견하면서 신자인 우리도 참 부자가 되어 겸손함과 이타적인 행동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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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참 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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