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남기독문화원 ·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 공동기획
- 부산경남 선교 140년 고귀한 복음유물 보호길 나서야
- 선교 140년 고귀한 복음의 유물 보호돼야
- 국가 지방유산 등재사업 추진 필요
1)진주교회 3.1운동 울린 교회 종(鐘)
나라 살린 ‘민심의 종’ 타지역에서 보관
진주교계와 시민들 진주환원 여론 비등
부산·경남지역 최초의 선교사는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가 파송한 데이비스 선교사이다. 데이비스 선교사는 1889년 부산에 들어와 이듬해 34세로 병사했다. 이후 그의 가족들을 비롯해 127명의 호주 선교사들이 경남지역 곳곳에 들어와 복음을 전했다.
경남 진주지역에는 1905년 의사였던 커를(거열휴) 선교사가 처음 진주교회를 세우고, 광림학교와 배돈병원을 설립했다고 진주교회가 발간한 《복음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부터 일본의 조선 침탈이 시작되었으며, 1910년 을사늑약 후 일본은 조선을 완전히 삼켰다. 그러나 조선 백성들의 독립의 외침은 불길처럼 타올랐다.
1919년 3월 1일, 우리 역사 속에 화산같은 3.1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진주지역 항일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찾아보면 눈물겨운 이야기들이 많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들불처럼 번졌다. 그날이 바로 1919년 3월 18일 진주 장날이었다. 봉래동 진주교회 종소리에 맞춰 1만 명의 군중이 일제히 모였다.
1936년 당시 경상남도경찰부가 기록한 ‘고등경찰관계적록’에 따르면 “주모자들이 3월 18일 진주 장날에 즈음하여 예수교 예배당(진주교회)에서 알리는 정오 종소리에 맞춰 일제히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약 1만 군중이 모여…”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이 바로 진주교회 종소리가 위대한 역사를 낳은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진주지역은 올해 선교 120주년을 맞았다. 복음화율이 다소 낮은 진주지역에서 다시 한번 복음운동으로 나아가기 위한 범교회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진주선교 120주년 학술세미나’와 실내체육관 연합부흥회가 10월 중 추진된다.
커를 선교사가 세운 진주교회는 이후 급격히 부흥하면서 당시 천대받던 백정과 한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 등 사회·문화 변혁을 이룬 훌륭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진주지역 복음의 주춧돌이 된 봉래동 진주교회 앞마당에는 ‘3.1운동 기념 종탑’이 서 있다.
초라하게 서 있는 기념종탑이지만, 설명을 들어보면 안타까움을 느낀다. 기념탑에 걸려 있는 종은 당시 3.1운동 때 민심을 울렸던 그 종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때의 종은 유실되었을까?
사실은 유실될 뻔했다. 『진주교회 25년사』에 따르면 진주교회에 있던 오래된 종을 산청 신등교회로 보내고, 진주교회는 새 종을 구입하기 위해 모금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신등교회에서는 그 종을 마당에 버렸다가 담임목사가 보관하였고, 이후 충남 천안시에 있는 고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 기증되어 고신역사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야말로 국가 보물급 유물이 유실될 뻔한 것이다. 진주지역 시민들은 이 종을 진주로 환원해 보존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다행히 실제 3.1운동을 울렸던 교회종이 존재한다는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다.
이 종(鐘)은 언젠가 국가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영구히 보전될 수 있다. 진주지역 선교 120주년에 즈음하여,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낸 진주교회 3.1운동의 ‘민심을 울린 종(鐘)’이 반드시 보호되어야 할 것이다.
글. 박동철 장로(서머나교회 은퇴)
[자문]
이상규 백석대 석좌교수
박시영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 회장
조헌국 진주교회장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