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행연월일 2026-07-2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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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부산 은파교회)

눈물은 단순한 슬픔이나 기쁨 같은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우리 눈을 보호하고 건강상태를 유지하는 생체방어 시스템이기도 하다. 눈물은 겉보기에는 투명한 물 같지만, 사실은 우리 눈의 건강을 지탱하는 복합적인 액체이다. 눈물의 주성분은 98%가 물이며, 나머지 2%가 눈을 보호하고 영양을 공급하는 핵심성분들로 채워져 있다.


  또한 눈물은 발생원인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한다. (1) 기본눈물은 눈을 촉촉하게 하고 각막에 영양을 공급하며, 이물질과 박테리아로부터 눈을 하루 종일 보호하는 필수적인 눈물이다. (2) 반사눈물은 눈에 들어온 유해한 이물질이나 자극 물질을 씻어내기 위해 다량으로 분비된다. 항체 성분이 포함되어 감염방지에도 도움이 된다. (3) 감정눈물은 심리적으로 스트레스 호르몬 배출을 돕고, 사회적으로는 도움을 요청하거나 유대감을 촉진하는 신호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같은 눈물이라도 이 감정눈물에는 교감신경의 활성화로 인해 염분 농도가 더 많아서 짠맛을 잘 느낀다.


  흥미로운 것이 있는데 우리 선조들은 흐르는 눈물과 고여 있는 눈물을 구분하였다. 흐르는 눈물은 누(㴃)자를 쓰고, 고여 있는 눈물은 누(泪)자를 썼다. 왜 같은 음인데 구지 다른 단어를 사용했을까? 흐르는 눈물을 뜻하는 누(㴃)자는 상형(象形)으로 미루어 흐르는 눈물 형상이다. 눈 모양의 호(戶)자 아래에 눈물방울을 연상시키는 점이 있고, 그 점 아래 큰 대(大)자가 크게 흐르는 눈물 자국과 같은 복합된 인상을 준다. 그래서 줄줄 흐르는 눈물의 누(㴃)인 것이다. 이에 반해 고여 있는 눈물을 뜻하는 누(泪)는 물 수(水)변이 눈물을 흐르지 않는 상형으로서 누(泪)인 것이다. 즉 눈물이 나긴 나는데, 눈의 경계를 넘어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상태의 그런 눈물이다.


  서울 서대문 밖에 ‘눈물의 다리’란 옛 지명이 남아 있다. 지금은 복개되었지만 작은 개천에 나무다리가 걸려 있었고, 그 다리를 예로부터 눈물의 다리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눈물의 다리가 한자어로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눈물을 뜻하는 누교(泪橋)로 표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교(泪橋)는 어떤 사연의 다리이기에 그 다리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게 울어야 했던 것인가?

  이 누교 건너편은 바로 서소문 형장(刑場)이었다. 1801년, 1838년 그리고 1866년에 걸친 천주교 박해 때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던 바로 그 형장이다. 그 순교자의 가족이나 친지들은 이 다릿목에서 이별을 해야 했다. 그 처절한 죽음의 비명 소리에 귀를 막고 몸부림을 치던 바로 그곳이다. 처형이 끝나고 다리 쪽으로 실려오는 시체를 향해 달려가 쓰러져 울고 또 울던 그런 다리이다.


  산 자와 죽은 자의 한계를 그었던 다리,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잠시 후 피범벅이 된 시신으로 돌아와서 맞이해야만 하는 그런 눈물의 다리였다. 그런데 그 눈물의 다리가 왜 흐르는 눈물이 아닌, 고여 있는 눈물을 뜻하는 누교(泪橋)라고 표기한 것일까? 왜 정든 자와 사별하는 그런 극한 상황에서까지 눈물을 속으로만 흘려야 했던가? 옛날 우리의 어머니들은 결코 눈물을 흘리며 울지 않았다. 고여 있는 눈물을 닦을 때도 손수건이 아닌, 옷고름이나 행주치마 끝으로 살며시 눌렀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눈물이 아닐까? 회개가 사라진 지 오래 되었고,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설교를 들으려고도, 하려고도 하지 않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무감각한 시대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11:17)에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우리들은 다윗의 기도를 익히 알고 있다. (시편 56:8)에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 땅에서 우리들은 많이 울어야 할 것이다. 왜 그런가? 천국에는 더 이상이 눈물이 없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21:4)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라고 말씀한다. 오늘 하루 ‘하나님이여 나에게 누(泪)가 아닌 누(㴃)의 눈물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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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눈물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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