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인 1표는 어디로?
- 투표용지 부족 사태, 국민의 참정권 짓밟고 대의민주주의 기반 흔들어…
국민의 한 표는 민주주의의 가장 작은 단위이면서도 가장 무거운 권리다. 국민은 선거를 통해 권력을 위임하고, 선출된 권력은 그 위임을 바탕으로 국가를 운영한다. 대의민주주의는 바로 이 한 표 위에 서 있다.
그런데 지난 6월 3일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도저히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1차 자체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선거 당일 부족분을 채우기 위해 투표용지가 추가로 송부된 투표소는 전국 67곳에 달했다. 이 가운데 50곳에서는 추가로 보낸 용지가 실제로 사용됐으며, 22곳에서는 투표가 잠시라도 중단됐다.
정해진 시간 안에 투표소를 찾고도 장시간 기다려야 했던 유권자들이 있었고, 기다리다 발길을 돌린 시민들도 있었다. 일부 투표소에서는 투표가 종료되지 않은 상태에서 방송사의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됐고, 다른 지역에서는 개표가 진행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국가가 국민에게 투표용지를 충분히 제공하는 일은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업무가 아니다. 선거인 수와 사전투표율을 파악하고, 필요한 수량을 준비하고, 부족 상황에 대비하는 것은 선거관리기관이 수행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책무다.
선관위는 사전투표율 증가에 따라 투표용지 인쇄 수량을 줄였으며, 관내 투표소별 선거인 수와 사전투표 결과, 선거 당일의 투표 진행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결국 가장 기본적인 수요 예측과 현장 대응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는 단순한 행정 착오로 축소할 일이 아니다. 국민이 투표소에 도착하고도 투표하지 못했다면, 그 순간 국민의 참정권은 실질적으로 침해된 것이다. 투표함 안에 들어간 표를 정확히 세는 것만큼이나, 국민의 한 표가 투표함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보장하는 일도 중요하다.
특정 후보의 당락이 달라졌는지 여부만을 기준으로 이번 사태의 심각성을 판단해서도 안 된다. 민주주의는 결과만 맞으면 과정의 오류를 눈감아도 되는 제도가 아니다.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규모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국가기관의 관리 부실로 단 한 명의 국민이라도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지 못했다면 결코 가볍게 넘어갈 수 없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이번 일이 선관위에 대한 불신이 오랫동안 누적된 상황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지난 대통령선거 당시에는 코로나19 확진자의 기표된 투표지를 플라스틱 바구니와 종이상자 등에 담아 운반한 이른바 ‘소쿠리 투표’ 사태가 발생했다. 이후 선관위 고위직 자녀 특혜채용 문제와 전산 보안 취약점 논란도 이어졌다.
선관위를 둘러싼 각종 의혹을 근거 없이 확대해서는 안 된다. 보안 취약점이 발견됐다는 사실만으로 실제 선거 조작이 있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일부 주장이 과도하다는 이유로 확인된 관리 부실과 정당한 검증 요구까지 모두 ‘음모론’으로 치부해서도 안 된다.
선거관리기관은 국민에게 막연한 신뢰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신뢰는 명령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투명한 공개와 검증, 분명한 책임과 재발 방지 대책을 통해 쌓아야 한다.
문제의 본질은 분명하다. 국가기관이 국민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를 충분히 보장하지 못했다. 투표용지가 부족했고, 투표가 중단됐으며, 일부 유권자는 기다리다 돌아갔다. 일부 지역에서는 투표가 계속되는 동안 방송사의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다른 지역의 개표가 진행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이 사실만으로도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
선관위는 투표소별 선거인 수와 최초 배부한 투표용지 수량, 추가 인쇄 및 이송 경로, 투표 중단 시간, 현장 대응 과정, 연장 투표가 진행되는 동안 개표가 시작된 경위 등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책임자의 문책과 조직 문화의 쇄신, 외부 검증 체계의 강화도 뒤따라야 한다.
선관위의 독립성은 존중돼야 한다. 선거관리기관이 행정부나 특정 정당의 영향 아래 놓이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독립성은 외부의 질문을 차단하기 위한 성벽이 아니다. 무능과 방만함을 보호하기 위한 방패도 아니다. 독립기관일수록 더욱 높은 수준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보여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공정과 공의를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공의는 추상적인 구호가 아니다. 힘 있는 자가 자신의 권한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고, 공적 권한을 위임받은 기관이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책임을 다하는 데서 드러난다.
성경은 “공의를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아모스 5:24)라고 말씀한다. 국민의 참정권을 보장해야 할 국가기관이 기본적인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면, 그 책임을 분명히 밝히는 것은 공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이는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문제가 아니다. 어느 지역에 살든, 어느 후보를 지지하든, 모든 국민의 한 표는 동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 공정은 선택적으로 적용될 수 없으며, 공의는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달라져서도 안 된다.
국민의 권리를 가볍게 여긴 잘못이 있다면 분명히 밝히고, 책임질 일이 있다면 엄중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국민의 참정권은 국가기관이 편의에 따라 제한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기반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투표소를 찾은 국민이 아무런 방해 없이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신뢰 위에 세워진다.
선관위가 지켜야 할 것은 투표함만이 아니다. 국민이 그 투표함을 믿을 수 있도록 만드는 신뢰까지 지켜야 한다. 그 신뢰가 무너지면 대의민주주의의 기반도 함께 흔들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