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4(수)
 

순교자기념주일 설교(2020. 6. 14)

 

 

충성된 증인 (계 2:8-10)

             제공자: 이상규 교수

 

 

 

시작하면서

오늘 6월 둘째 주일은 우리 교단 총회의 결정에 따라 ‘순교자기념 주일’로 지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전국의 고신 교회가 똑같이 공동설교문으로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늘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을 기억하고 그들이 남겨주신 신앙의 유산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분주한 일상에서 순교자들의 숭고한 신앙을 잊어버리고 사는 일이 많았습니다. 오늘 순교자기념 주일을 지키면서 오늘 하루만이라도 순교자들의 거룩한 열정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순교자들은 한결같은 주님 사랑과 자기 목숨까지 바쳐 복음을 증거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먼저 순교가 무엇인가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그러고 나서 역사 현장 속에 나타난 사례를 소개하고, 성경 본문이 주는 교훈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헌신하며 기꺼이 순교자의 길을 갔던 이들을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을 점검하고 새롭게 결단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순교의 의미

우리가 ‘순교’(殉敎)라고 말할 때 이 말은, 사전적으로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한 죽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순교자’라고 할 때 이 말은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한자문화권에서 ‘순(殉)’이라는 말은 거룩하고 고상한 죽음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위한 죽음을 순국(殉國), 직책에 충실하여 목숨을 바침을 순직(殉職)이라 합니다. 순교란 말의 순(殉)자는 죽을 사(死)와 열흘 순(旬)이 합쳐진 말로서 “죽은 사람(死)의 뒤를 이어 열흘(旬) 안에 따라 죽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순(殉)은 ‘함께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말하는 순교(殉敎)는 동양 문화권에서 말하는 의미와는 다른 뜻이 있습니다. 순교를 뜻하는 영어(martyrdom)는 라틴어 ‘마르티리움’(martyrium)에서 왔고, 마르티리움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말투리온(μαρτύριον)인데, 이 말은 흔히 ‘순교’로 번역되지만 본래의 의미는 ‘증언’ 또는 ‘증거’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약에서 ‘순교’라는 개념은 따로 없었고, ‘증언’ 혹은 ‘증거’라는 말이 후에 ‘순교’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말투리온이라는 말은 ‘증거,’ 혹은 ‘증인’을 의미하는 동시에 ‘순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 헬라어 마르투스(μἀρτυς)는 흔히 ‘순교자’로 번역하지만, 본래는 ‘증인’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이를 증거 하다가 죽은 이들을 ‘증인’(μάρτυρός)이라고 표현했습니다(행22:20, 딤전6:13, 계17:6). 그래서 말트리온은 ‘증거,’와 ‘순교’를, 마르투스는 ‘증인’이라는 의미와 ‘순교자’라는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순교자들이 다 복음의 증거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행 22:20 또 주의 증인(ma,rturo,j) 스데반이 피를 흘릴 때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 줄 그들도 아나이다

딤전 6: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딤전 6: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o`mologi,an

계 17: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martu,rwn

 

정리하여 말씀드리면, ‘증거’라는 말이 ‘순교’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증거가 곧 순교라는 의미가 된 것입니다. 말씀을 바르게 증거 하는 일은 목숨을 건 행위였기에 ‘증거’가 곧 ‘순교’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마르투스(μάρτυς)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하는 사도들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13절을 보면 믿음을 버리지 않고 죽임을 당한 안디바를 “나의 충성된 증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충성된 증인이 바로 순교자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서는 “죽도록(죽기까지) 충성하라”라고 하여 죽음이 이르기까지 증인이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스데반에 대해 말하면서, “당신의 ‘증인’ 스데반이 피를 흘렸다.”(행22:20)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증거와 피흘림을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해 죽음을 불사한 경우를 말하고 있는 이런 사례들은 ‘마르투스’라는 단어가 증거가 곧 순교라는 점을 의미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피흘림의 증거가 곧 ‘순교’라는 의미로 인식되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그리스도를 위해 증거 하되 피 흘리기까지 증거하는 그 행위가 바로 순교라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부터, 피흘리기까지 복음을 증거한 이들을 순교자라고 불러왔고, 이들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들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에는 복음과 관련하여 3가지 용어를 구별하여 사용했습니다. 복음을 위해 목숨까지 버린 이들을 ‘순교자’라고 불렀고, 복음을 위해 증거 했으나 죽지는 않았으나 끝까지 믿음을 지킨 이들을 ‘고백자’(告白者, confessor)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증거 때문에 체포되어 고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목숨을 잃지 않고 풀려난 이들에 대한 칭호였습니다. 반면에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못하고 복음을 저버린 이들을 가리켜 ‘배교자’ 혹은 ‘변절자’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렇게 3가지 용어로 구분 한 것은 배교자들과는 달리 고백자들과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고 기리기 위한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목숨을 버린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주일에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합니다.

 

역사적 사례1 초기 기독교

기독교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라고 할 만큼 순교로 이어진 역사였습니다.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의 순교에서 시작해 기독교가 전파되는 곳마다 순교의 피가 흘렀고, 그 피가 오늘의 교회를 지켜온 든든한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2세기 당시 교회 지도자였던 테르툴리아누스(터툴리안)는 “순교자의 피가 교회 성장의 씨앗”이라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순교자의 피는 실로 교회의 기초이다. 죽음으로써 우리는 이긴다. 우리가 목숨을 버리는 순간 우리는 승리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말했습니다.

신약성경 이후 최초의 순교자는 프로코피우스(Procopius)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로마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는 것을 거부하여 집정관 앞에 끌려왔습니다. 그는 황제 이름으로 제물을 바치도록 요구받았으나 이를 거부함으로 즉각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곧 팔레스틴의 다른 감독이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피부를 가르듯이 수없이 많은 채찍을 맞고, 고문을 당하여 손마디가 어긋나기까지 했으나 꿋꿋이 참았다고 유세비우스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황제는 교회 지도자를 배교케 함으로써 기독교운동을 말살하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유세비우스는 성경밖의 인물로서 최초의 순교자는 프로코피우스(Procopius)였다고 말한다. 유세비우스는 그의 <팔레스틴의 순교자들>(The Martyrs of Palestine) 제 1장에서 그를 “순교자들 중의 첫 사람”이라고 불렀다. 황제숭배를 거부하여 집정관 앞에 끌려온 그는 황제이름으로 제의(祭儀, libations)를 행하도록 요구받았으나 이를 거부함으로 즉각 처형되었다고 한다. 곧 팔레스틴의 다른 감독이 체포되었다. 이상규]

역사가 유세비우스의 책에 보면, 안디옥에서 로마누스(Romanus)라는 청년이 체포되었습니다. 심문관이 곧 화형을 당하게 될 것이라 말했을 때, 그는 두려워 하기보다는 기쁨으로 죽음을 받아들였고, 그를 나무에 묶고 주변에 나무 단을 쌓아 두었을 때, “이제 나를 태울 불은 어디 있느냐”고 했을 만큼 당당했다고 합니다. 그는 고문을 당해 혀가 짤리기까지 했으나 끝까지 인내하고 순교자의 길을 갔습니다.

초기 기독교회의 ‘이그나티우스’는 117년 11년 10월 17일, 로마에서 맹수에게 잡혀 먹는 형벌인 맹수형으로 순교했고, ‘폴리카루프스’(폴리캅)는 155년 2월 23일 서머나에서 화형을 당합니다. 그 때 폴리캅 감독의 나이 86세였습니다. 서머나의 존경받던 지도자였던 ‘폴리카루프스’는 단 한 번만 그리스도을 부인하면 그것을 근거로 석방해 주겠다고 했을 때, “나는 86년간 주님을 섬겼으나 주님은 한 번도 나를 모른다고 한 일이 없는데, 내가 어찌 내 주 그리스도를 부인하리요”라고 대답하면서 이를 거부합니다. 고령인데다 인품이 훌륭하여 집정관도 그를 살려주고 싶어서 다시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화형을 당할 것인데, 그때의 고통을 생각해 보라”고 권유했으나 폴리캅은 “육체의 아픔은 순간이지만 영혼의 아픔은 영원하다”고 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화형대에 올랐던 것입니다. 임신 중이었던 귀부인 페르페투아라는 여성은 데시우스 황제 치하에서 기독교 금지명령을 어겼고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체포되어 8일 후에 출산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하인이었던 펠리시타스와 함께 원형경기장에서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고, 250년 이후 로마제국 전역에서는 혹독한 박해가 시작되었고, 1천여 명에 달하는 이들이 순교자의 길을 갔습니다.

초기 기독교 당시의 몇 가지 사례를 소개했습니다. 중세시대 종교개혁시대, 그 이후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복음이 전파되면서 수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 순교의 결과로 기독교가 알려지고 교회가 설립되어 오늘의 교회를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서양교회에서 고난받은 교회를 ‘십자가 아래에 있는 교회’(Church under the Cross)라 불렀고, 기독교인들을 처형했던 법정을 ‘불타는 법정’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신앙을 지켰던 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말했던 것처럼, 이 땅에 대한 연민이나 이 땅에 소망을 두지 않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기 때문이었습니다(히11:40).

히 11: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역사적 사례2ㅡ 한국교회

이제 우리나라의 경우를 간략하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기독교가 한국에 소개된 이후 복음 때문에 목숨을 버린 이들이 얼마나 될까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만 천주교를 제외하고 개신교의 경우 대체로 1천 명에서 1만 명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북한 공산정권 하에서 신앙 때문에 죽임을 당한 이들까지 계산한다면 더 많겠지만 지금은 그 수를 알 수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순교자 수는 1천 명에서 1만 명 정도로 추정합니다. 하지만 명단 작성이 가능한 인물은 850명 정도이고, 현재 유족을 통해 확인된 경우는 250여 건 정도에 불과합니다. 일제 강점기에서 신사참배 반대로 순교한 이가 50여 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최봉석 목사, 최상림 목사, 주기철 목사, 박관준 장로, 이현속 장로, 조용학 영수, 김윤섭 전도사, 안영애 전도부인 등입니다.

6.25 전쟁 기간 중 많은 이들이 신앙 때문에 죽임을 당했으나 그 자취를 추적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중에서도 일부는 그 자취가 남아 있습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인민군들은 여러 지역에서 기독교인들을 미제의 앞잡이라며 몽둥이로 때러 갈비뼈를 으스러지게 하는 등 고통을 가하고 어린 자식들까지 온 가족을 생매장했습니다.

전라북도 김제 봉남면에는 봉산교회가 있었습니다. 이 교회 김형배 집사는, 좌익활동을 한 일로 수감되어 있던 사촌들을 백방으로 노력하여 풀려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일어나고 두 달이 못되 인민군이 들어오자 사촌들이 앞장서 교인들을 상대로 인민재판을 열었습니다. 심지어 자신들을 구해준 김형배 집사까지 고발하고 밧줄로 묶어두고 몽둥이로 죽도록 때렸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두 눈을 꼬챙이로 파내고는 모래사장에 생매장했다고 합니다. 그 교회 학생회장의 형이 국군장교라는 이유로 어린 중학생을 끌고 가 처형을 했습니다. 이날이 8월 26일이었습니다. 그 교회 청년들이 함께 찍은 사진에는 ‘청년면려회’라고 씌어 있었으나 좌익들은 ‘공산당 멸사회’로 고쳐 쓰고는 사진 속의 청년들이 자기들을 반대했다며 인민재판에 넘겨 죽게 했습니다. 생매장 당한 김형배 집사의 동생 김형좌 목사의 증언으로 이런 악행이 밝혀지게 된 것입니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월평리의 월평교회’는 조용한 농촌교회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6.25 전후 6명의 신자들이 남로당 좌익분자들에게 처참하게 피살되었습니다. 첫 피해자는 우두봉 집사였습니다. 최재선 권사의 남편인 우재만, 우재만의 동생 우성만, 그리고 정두란, 조재년, 조말복 성도가 그 뒤를 이어 피를 토하고 죽었습니다. 유동댁으로 불리던 정두란은 20대의 만삭의 부인이었는데, “젊은이들 예수 믿고 회개하고 부모님 만나 자유롭게 살다가 천당 가자”고 설득했으나 허사였습니다. 교회가 치술령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비들의 표적이 되었고, 어렵게 건축했던 교회당마저 인민군의 방화로 불타고 동네에는 잿가루가 가득했습니다.

경남 거창군의 가천교회 전도사였던 박기천은 인민군에 의해 잡혀가 40여 일간 구금되어 있던 중, 끝까지 신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박기천 전도사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해 27세의 나이로 순교자의 길을 갔습니다. 부인이 빨치산의 계속된 위협으로 심장병에 걸려 별세한 지 두 달 후였습니다. 겨우 4살이었던 아들은 졸지에 고아가 되었습니다. 박기천 전도사의 아들이 박래영 목사입니다.

경남 합천군 묘산면 관기리 하양교회의 배추달 집사는 8월 7일 묘산초등학교 뒷산에서 24세의 나이로 인민군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성수주일을 위해 인민군에게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때가 성경을 더 공부하겠다며 거창성경학교에 입학하여 겨우 한 학기를 마친 뒤였습니다. 경남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에 소재한 사촌교회 설립자 조동규의 장남 조용석 장로는 피난갈 수 없는 85세의 노모를 보살피던 중 9월 17일 인민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그 후 군북면 오곡리 소재 오곡금광(烏谷金鑛)으로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박곡리 남강변에서 총살당했습니다. 이때 나이는 46세였습니다.

여수 애양원의 손양원 목사는 6.25 동란이 일어났을 때 피난을 권했지만 행동이 자유롭지 못한 나환자들을 두고 혼자 피할 수 없다며 피난을 거부했습니다. 억지로 배를 태워 피난지 부산으로 보내려 했으나 기어이 손 목사는 배에서 내렸습니다. 환자들을 두고 나만 살겠다고 피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손목사님이 유명한 말을 합니다. “세상에 피난처가 어디 있는가! 피난처는 오직 주님 품뿐이다.” 나환자들의 벗이 되어 강단을 사수하던 그는 교회 내의 고발자에 의해 공산당원에게 체포되었고, 9월 28일 밤 순천으로 끌려가던 중 미평(美坪)의 과수원에서 총살되었습니다. 이때 이미 턱뼈가 개머리판에 맞아 으스러진 후였습니다. 이때 손목사님의 나이는 만 45세였습니다.

복음성가의 아버지로 불리는 화단(火壇) 유재헌 목사는 1950년 5월에는 삼각산에 임마누엘 수도원을 설립하고 민족 복음화를 꿈꾸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처 피난 가지 못하고 기도원에서 안식을 구하는 이들에게 복음으로 위로하며 유목사님도 피난을 마다했습니다. 그런데 제자 중 한 사람의 밀고로 기도원까지 급습한 인민군에게 잡혀 정치보위부로 끌려갔고, 그 후 생사를 알 길이 없습니다. 그때 그는 46세였습니다. 6.25 전쟁 중 살해된 기독교 교직자는 이름이 확실히 밝혀진 사람만 176명에 달하고, 납북된 교직자는 194명에 달합니다. 밝혀지지 않는 이들까지 합치면 엄청난 수의 그리스도인들이 피살되었습니다.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피살된 수는 1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역사적 사례를 소개했습니다만 기독교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였습니다. 이들 순교자들의 피가 오늘의 교회 성장의 씨앗이 되고 밑거름이 된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계2:8-10)

이제 오늘 성경 말씀을 살펴봅시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 말씀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 중 사도 요한이 서머나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서머나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와 더불어 아무런 책망을 받지 않고 칭찬만 들은 교회입니다. 서머나는 지금은 이즈미르라고 불리는데, 일곱 교회 중 유일하게 지금도 주요 도시로 남아 있습니다. 앞에서 소개한 폴라카루프스(폴리캅)가 순교한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본문 9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서머나교회 성도들이 겪는 아픔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안다’는 말씀은 계시록 2-3장에만 7번 나타납니다(2:2,9,13,19, 3:1,8,15). 하나님은 전지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서머나 교회 성도들이 당하는 환란도 다 아셨습니다. ‘환란’이란 말은 여기서 ‘박해’를 뜻하는 말입니다. 서머나 교회가 극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저들의 궁핍함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가난도 극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그러나(이 말은 번역되지 않았음) 너희는 부요하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영적인 반전(反轉)을 봅니다. 서머나교회는 물질적으로는 빈곤했으나 영적으로는 부요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유대인들로부터 비방도 받았는데 주님은 이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비방’이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적대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영적으로는 부요했습니다.

10절을 보시면 주님께서는 앞으로 닥칠 핍박을 예고하면서 마음을 준비시키고 있습니다.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능히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마10:28).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시험을 받게 하리니’에 해당하는 원문은 ‘히나 페이라스테테’(i[na peirasqh/te)는 정확하게는 ‘시험을 받도록’이다. 마귀가 몇 사람을 감옥으로 던져 넣는 목적은 시험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 마귀는 성도를 시험하려고 합니다. 성도는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비록 마귀가 고통을 주고 시험해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습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10절의 ‘열흘 동안’은 해석하기 어려운 말인데, 제한된 짧은 기간, 곧 한정된 박해의 기간이 있을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10절 서두에서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역사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핍박, 가난과 궁핍, 그리고 앞으로도 환란이 있겠지만 한 가지 중요한 권면을 하십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자칫 오해하기 쉬운데, ‘충성하라’고 번역된 단어는 ‘기누 피스토스’(gi,nou pisto.j)이고, 원문은 ‘되다’는 뜻을 가진 ‘기노마이’(givnomai)의 명령법 현재 2인칭 단수인 ‘기누’(gi,nou)에 ‘신실한’이라는 뜻을 가진 ‘피스토스’(pisto.j)가 결합된 형태입니다. 이는 무엇을 행하라는 말씀이라기보다는 ‘신실한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기독교 신앙으로 박해 받는 현장에서도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은 박해와 순교를 각오하라는 말씀이고, 박해와 시련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증인으로서 사명을 감당하라는 명령입니다.

오늘 본문은 복음의 신실한 증인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하십니다. (면류)관은 고대 사회에서 승리, 축제, 영예를 의미했습니다. 신실한 성도들에게 주시는 영원한 상급을 뜻합니다.(고전9:25, 딤후4:8).

고전 9: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주후 64년 로마 대화재로 말미암아 교회가 누명을 쓰고 박해를 받을 때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순교를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죽음 이후의 세계를 다음과 같이 일러줍니다.

딤후 4:6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딤후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바울은 자신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님 앞에 갔습니다. 제자 디모데도 자신의 달려갈 길을 다 달리고 주님 앞에 갔습니다. 성경을 읽는 모든 독자들, 신약교회의 앞서간 성도들이 디모데 후서를 읽고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살다가 주님 앞에 갔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역사에서 본 것처럼, 한국복음전래 초기와 일제강점기와 6.25 동란에서 공산당에게 순교한 성도들이 모두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다가 주님 앞에 갔습니다. 이제 우리가 달려가야 할 차례입니다.

 

정리하면서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증거가 곧 순교라는 점을 말씀드렸고, 서양과 한국의 순교자들을 소개했습니다.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복음의 적대적 개인이나 집단에 의한 죽음이 바로 순교입니다. 우리는 이런 죽음을 당한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을 기억하고 우리 또한 죽음에 이르기까지 신실해야 하겠습니다. 신실하다는 말은 복음증거자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정치적 박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박해도 있을 수 있습니다. 물리적인 박해가 없다면 정신적이거나 심리적인 박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비기독교적이거나 반기독교적인 악법이 제기되고 있고 복음 증거를 방해하거나 복음정신을 훼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하면서 복음의 신실한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에게도 생명의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이런 확신으로 오늘을 살되 신실한 증인으로 살기위해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태그

전체댓글 0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순교자 주일 기념 설교문] 충성된 증인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