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9(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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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그리스도인들은 ‘CTR’(Creation-Fall-Redemption/창조-타락-구속)이라는 렌즈를 장착한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는 누구이며, 나는 어디에 있는가?’와 같은 세계관적 질문에 답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창조입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라는 이 한 구절은 짧지만 엄청나게 심오하고 풍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창조주(Creator)이시고,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creatures)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창조주와 피조물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주와 피조물을 반드시 구분해야 합니다.

‘구분하는 것’(to distinguish)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서로 다르게 인식하고 다르게 대한다는 의미입니다. 구분하는 것은 인간의 아주 중요한 인식 행위입니다. 어린아이는 성장하면서 구분하기를 배웁니다. 처음에는 사람들의 얼굴을 구분합니다.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구분하고, 엄마와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구분합니다. 그래서 낯선 사람의 얼굴을 가릴 줄 압니다. 유치원에 가면 숫자(1,2,3,4…)와 색깔(빨강, 주황, 노랑, 초록…)과 도형(동그라미, 삼각형, 사각형…)을 구분하는 것을 배웁니다. 나중에는 ‘이것’(this)과 ‘저것’(that)이 다르다는 것을 배우고, ‘이 방법’(this way)과 ‘저 방법’(that way)이 다르다는 것도 배우게 됩니다. 학년이 올라가고 배움의 내용이 심화될수록 이 구분의 학습 과정도 아주 복잡해지고 난해하게 됩니다. 교육은 결국 학습자들로 하여금 구분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행위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구분 행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조주(Creator)와 피조물(creatures)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구분을 대문자 ‘C’와 소문자 ‘c’를 구분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를 좋아합니다. 이 구분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지혜는 지식과는 다릅니다. 아무리 지식이 풍부해도 지혜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자신의 깊고 풍부한 지식을 자랑해도 창조주와 피조물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배우지 못하고 세상 지식이 좀 부족해도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만드신 다른 모든 피조물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이런 분들이 귀한 분들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간에는 엄격한 구분의 선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선을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소문자 c(피조물)를 대문자 C(창조주)의 자리로 올리게 되면 그것이 바로 우상(idol)이 됩니다. 피조물이 아무리 신비하고 귀하고 아름답다고 해도 피조물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라고 하셨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고, 그것들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고 절하거나 섬기지 말라’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출 20:4-5)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만이 홀로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대문자 C(창조주)를 소문자 c(피조물)의 자리로 끌어내려서도 안됩니다. 이것은 동양사상과 뉴 에이지(New Age) 사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범신론적(pantheism) 사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가 아무리 아름답고 신묘막측해도 그것이 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피조물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이 나의 종교이고, 지구는 나의 성전이다.”(Nature is my religion. The earth is my temple!)라고 주장하는 범신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산스크리트어로 “나마스테”(Namaste)라고 인사를 합니다. ‘나마’(Namah)는 ‘경배한다’ 또는 ‘인사한다’는 말이고, ‘아스테’(Aste)는 ‘당신에게’라는 의미입니다. 나마스테는 “내 안의 신이 그대 안의 신에게 인사합니다.”라는 인사 방법입니다. 불교도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절대로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지식을 더해가도 인간은 언제나 인간이며 피조물의 자리에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구분을 잘하기 위해서는 빛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제대로 볼 수도 없고 따라서 명확한 구분을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어두운 곳에서는 손으로 더듬어 가면서 대충 구분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헬라 철학자들의 사상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헬라의 철학자들은 관찰과 이성을 통해서 세상과 세상의 자연 질서를 면밀히 살피기 시작하며 철학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빛 아래서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서 진리를 더듬어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탈레스(Thales)는 지구가 엄청난 양의 물 위에 뗏목처럼 떠 있다고 생각하면서 “모든 것이 물이며, 세상은 신들로 가득하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아낙시메네스(Anaximenes)는 모든 것이 공기(air)며 공기가 바로 신이라고 주장했고, 피타고라스(Pythagoras)는 수(number)가 우주의 본질이며 원리라고 주장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과학적 관점에서 볼 때 우주의 기원을 공기나 물 또는 수로 설명하는 것이 좀 우습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교주의 사상이 오늘도 우리 주위에 활발히 살아 있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진화론적 자연주의가 바로 그러합니다.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시119:105)의 조명 하에만 창조주와 피조물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고, 우주의 질서도 창조 세계를 그분의 임재와 말씀으로 신실하게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진리를 알게 됩니다.

 

 

 

 

 

김성수 목사(전 고신대학교 총장,현 미국 에반겔리아 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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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가장 중요한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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