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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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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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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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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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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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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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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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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최호숙 목사] 당신은 내 인생의 로또(Lotto)
    인생은 삶이 어려울수록 복권에 집착한다. 왜냐하면 복권 한번 당첨되면 대박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로또(Lotto)” 하면 자동으로 연상되는 단어는 “대박(大舶)”이다. 어느 부부가 결혼하고 보니 맞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성격이 다르고 취미가 다르고 살아온 문화가 다르고 생각하는 논리 구조가 다르고 삶의 수준이 다르고... 그래서 의견 충돌로 자주 부부싸움을 했다. 그날도 의견 충돌로 부부싸움을 하던 남편이 분에 못 이겨 뛰쳐나갔다가 한참 후에 돌아와서 툭 내뱉는 말 “당신은 내 인생에 로또(Lotto)야!” 이렇게 말을 한 것이다. 아내가 생각하기를 남편이 자신을 자기 인생의 대박으로 생각하는 줄 알았다. 내심 기뻐하며 “저 인간이 찬바람 쐬고 돌아오더니 정신이 돌아왔나...”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로또는 수십 번 구매해도 딱 맞아 당첨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남편이 아내를 향하여 “당신은 내 인생에 로또(Lotto)야!” 이 말의 뜻은 “당신과 나는 아무리 살아도 맞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며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는 뜻이다. 인생은 대박을 꿈꾸는데 ‘대박(大舶)이란 말은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흥부전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흥부가 제비 다리를 고쳐주었더니 제비가 박씨를 물어다 주어서 그 박씨를 심어 박을 수확하여 톱으로 켰더니 박 속에서 금은보화가 나와 큰 부자가 되었다는데서 유래하였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서양 제국주의 시대 어부들이 원양어선(遠洋漁船)을 타고 나가 고기를 많이 잡아 큰 배에 싣고 와 팔면 평생 먹고 사는 돈이 생기게 되는데 그 큰 배가 “대박(大舶)”이다. 박(舶)은 큰 배를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번에 대박 맞으면 평생 먹고 산다는 뜻에서 생겨난 말이다. 어떤 것이 맞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두 사건의 공통점은 한 번에 부자가 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유래와 관계없이 한 번에 부자가 되고 형통한 길이 열린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생은 신분여하 노소를 불문하고 대박이란 말을 다 좋아하기 때문에 고객관리 차원에서 “고객님~ 대박나세요, 사장님~ 대박나세요...” 이런 멘트를 날리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게 대박은 무엇일까? 이사야 선지자는 말하기를 “우리 인생에게 대박은 메시야”라고 선포하였다. 왜냐하면 그 분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시고,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자에게 놓임을, 슬픈 자에게 위로를, 재(灰)대신 화관(花冠)을 주시는 분(사 61:1~3)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이 땅에 오셨고, 지금은 보혜사(保惠師)로 우리 곁에 항상 계시며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신다. 보혜사(保惠師, 헬라어: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ος)는 헬라제국 시대에 그들의 문화 속에서 대언 자, 변호사, 중재자, 협조자, 위로자, 상담자, 안내자, 돕는 자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하였다. 사도 요한은 이 파라클레토스를 요 14:16~17에 적용하면서 예수가 또 다른 보혜사로 언급하였다. 성경 번역판마다 사용하고 있는 용어에 다소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한글 성경의 개역한글 판과 표준 새번역판에서는 보혜사로 번역하고 있으며, 공동번역판에서는 협조자로, 가톨릭성경판에서는 보호자로 번역하고 있다. 영문성경의 킹제임스판과 YLT에서는 Comforter(위로자)로, NIV와 RSV에서는 Counselor(상담자)로, NRSV에서는 Advocate(변호사)로, NASB에서는 Helper(돕는 자)로 번역하고 있다. 의미를 종합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시는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대박인 것이다. 세상으로 만족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대박의 만족을 누리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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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이정희 목사] 부모가 자녀들을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하는가?
    I. 서언(序言)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말이지만, 가장 틀리기 쉽고 혼돈하기 쉬운 용어들 중 하나가 가족들 과 일가친척들과의 지칭어와 호칭어들이다. 오늘의 주제는 이런 용어들 중에서 부모가 자녀를 부를 때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되는지에 대한 용어들을 계속 논하고자 한다. II. 경우에 따른 호칭과 지칭 1. 자녀 혼인 전과 혼인 후 :가장 일반적인 것은 아들의 경우 혼인하기 전에는 ‘철수야’처럼 이름을 부른다. 하지만 혼인한 후에는 직접 이름을 부를 수 있으나, 아이를 낳으면 ‘아비’라고 부르거나 손자의 이름을 넣어서 ‘OO 아비’라고 부르는 것이 좋다. 미혼의 아들을 가족과 친척에게 지칭할 때는 호칭어인 ‘OO’를 그대로 불러도 좋다. 하지만 지칭하는 아들보다 아랫사람에게는 그들이 부르는 호칭인 ‘너희 형’, ‘너희 오빠’, ‘너희 삼촌’ 등으로 말한다. 아들의 직장인들에게는 ‘OO씨’, 또는 성이나 성명에 직함을 붙여서 ‘김철수 과장’ 혹은 ‘김 과장’으로, 타인에게는 ‘우리 OO’, ‘우리 아들’로 지칭하는 것이 좋다. 2. 교회 안에서 가족들 :이런 경우는 앞에서 말한 원리대로 아들이 교사나 집사 등의 어떤 직함을 가지고 있으면, ‘김OO 선생’, ‘김OO 집사’라든지 ‘김 선생’, ‘김 집사’라고 지칭하면 된다. 이런 면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조선시대에는 아들이 당상관(堂上官: 조선시대 정삼품 이상의 벼슬에 있는 자) 이상이면 공석에서는 앞에서와 같이 직함으로 호칭이나 지칭했다고 한다. 이런 면은 교회에서도 아들이나 가정 식구들의 직함을 그대로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필자의 어머니가 교회당 안에서 교인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우리 목사님’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아무리 목사라도 존칭인 ‘님’자는 붙이지 않음이 좋고, 또 그것이 자랑한다는 느낌이 들도록 해서는 안 된다. 어떤 드라마에서 부모가 아들을 계속 ‘우리 이 박사’, ‘이 박사’라고 부르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다분히 아들을 자랑하려는 의도가 있어 보이기 때문에 좋은 호칭과 지칭은 아니다. 또한 가정에서 식구들끼리 모인 자리에서는 아무리 목회자라도 목사라는 호칭이 아닌 자연적인 부모와 자식 간의 호칭이 되어야 할 것이다. 3. 며느리와 시부모님 사이: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새색시가 맏동서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았다. “동서야? 난데 내일 우리 집에 와서 저녁 먹어, 어머님께서 올라오셨어.” “어머니께서요? 언제요?”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맏동서가 “아니 막내 동서는 어머니가 뭐니? 어머님이라고 해야지”라고 하며 핀잔을 주었다. 그렇다면 시어머니에 대해서 어머니라고 호칭하면 안 되는 것일까? 요즈음 같이 높임말에 대한 체계가 흐트러진 현실에서는 별로 큰 문제가 될 것은 없다. 하지만 일반적인 높임말은 존칭 접미사 ‘님’자를 붙여서 어머님으로, 시아버지에게는 아버님으로 호칭해야 하는 것이 바른 말이다. 반면, 시부모가 며느리를 부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흔히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부르는 말은 ‘아가’, ‘새아가’, ‘어미야, 어멈아’, ‘예야’ 등이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 ‘예야’로 부르는 것은 어조에 따라서는 며느리가 불쾌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또한 이런 말들도 상황에 따라서는 ‘아가’, ‘새 아가’, ‘OO 어미야(어멈)’, ‘너’로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부모와 배우자에게 며느리를 지칭하는 말로는 ‘며늘애’, ‘새아가’와 아이의 이름을 넣은 ‘OO 어미(어멈)’, 아들의 이름을 넣은 ‘OO 댁’, , ‘OO 처’ 등으로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며느리’는 남의 며느리를 지칭하는 느낌도 있고, 어른 앞에서는 며느리를 낮추는 것이 예로 여겨왔기 때문에 ‘며느리’로 하지 않고 ‘며늘애’로 지칭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요즈음은 이상의 용어들이 오히려 서로가 어색하게 느껴져서 모든 것을 무시하고 며느리의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경우들도 많이 본다. III. 결 어 어떤 국어학자는 ‘현재 우리 국어의 어려움과 혼란은 서울시내의 교통 혼잡보다 더 풀기 어려운 심각한 상태’라고 우려했다. 부족하지만 생활용어를 연구하며 이 글을 연재하는 필자가 볼 때도 충분히 공감되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때는 이런 글을 쓰면서도 오히려 독자들에게 더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때도 많다. 이상에서 논한 모든 내용들이 다 그러하다. 하지만, 고치지는 못하더라도 알고는 있어야 된다는 심정으로 오늘도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늘 사용하는 용어의 실제에 대해서 논하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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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9
  • [신재철 목사] 교회 이사 가요
    교회 2층에는 태권도 학원이 있다. 수업이 끝날 때면 아이들이 입구에서 우르르 쏟아진다. 조용한 동네에 이 아이들이 다 어디 있다 나왔을까 싶다. 아이를 데리러 오신 어머님들은 현관 앞에 서 기다리다 내려오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 어머니도 그렇게 만났다. 이제 겨우 넘어지지 않을 정도의 걸음을 하는 어린아이와 함께 어머니 한 분이 교회 앞 현관에 있다. 아이도 어머니도 너무 심심해 보여 인사를 드리며 말을 붙여본다. “큰 애가 여기 태권도 다녀요. 둘째가 너무 재촉해서 늘 이렇게 일찍 나와서 기다리네요.” 조금은 어눌한 한국말. 외국에서 오신 분인지, 강원도 사투리가 심한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굳이 물어보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아니니깐. 그늘도 없는 곳에서 기다리느라 고생하는 것이 안타까워 만화방으로 안내했다. 아이도 아장거리며 들어와 만화도 보고 엄마와 시간을 보냈다. 그 후 어머니는 편하게 교회에 들어오셔서 커피도 마시고 아이와 잠시 놀다가 큰아이가 끝날 시간이면 돌아갔다. 언제부터인가 태권도가 끝나면 큰아이도 함께 들어와 한참을 책보며 놀다 가곤 했다. 그렇게 편안하게 교회에 들어오셨던 분. 아니, 만화방에 오신 것이 맞겠지? 뭐가 되었든 이렇게 찾아주는 분들 덕에 나는 개척의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코로나가 길어지며 만화방을 열지 못한 지 오래다. 교회 사무실에서 업무 처리할 때, 잠시 조용히 기도할 때 가는 정도. 목사로서 부끄럽다. 그날도 업무를 보러 가는 길에 그분과 마주했다. 겨우 걸음을 옮기며 아장이던 아이는 제법 많이 컸지만, 여전히 형을 기다리며 길에서 엄마와 놀고 있었다. 반갑게 인사 나누기도 잠시. 코로나로 교회가 힘들지 않은지 무거운 표정으로 안부를 물어온다. “저희 이사 가요.” 코로나 상황이 길어지는데 임대료까지 올라가게 되어 이사를 결정했다는 근황을 전했다. 많이 아쉬워하며 걱정한다. “교회가 많이 어려워지며 떠나시나요? 동네 들어와서 고생만 하다가 나가시는 것 아니세요?” 진심이 느껴진다. 내가 이웃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 준다. 비록 먼 곳으로 떠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 만남이 마지막일 것 같다. 나중에 놀러 오시라는 인사를 나누어 보지만 코끝이 찡해진다. 이사할 곳에서 만날 사람들이 기대된다. 하지만 떠나는 걸음이 더 무겁고 속상하다. 2년 넘게 함께 했던 상가 사장님들이 보고 싶을 것 같다. 목소리 큰 부동산 소장님, 무뚝뚝한 미역 창고 사장님, 해물 된장찌개가 끝내주는 식당 사장님, 언제나 바쁜 간판집 사장님, 우리 교회를 라면 맛집으로 알고 놀러 오시는 태권도 관장님. “모두 행복하세요. 너무 감사했습니다.”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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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9
  • [오성한 목사] 먼저 보라(1)
    거듭나는 것은 신비다. 언제 어떻게 거듭나는지는 알 수 없다. 바람이 부는 것을 보고 바람을 알 뿐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보이지 않는다. 거듭남도 그러하다(요3:8). 거듭나면 분명히 거듭났음을 알 수 있다. 거듭남이보이지 않는다고 헛갈려서는 안 된다. 예수가 믿어진다면 거듭난 증거다. 예수가 믿어진다면 거듭났음을 확신하라. 거듭났다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가 있음을 확신하라. 우리가 지금 사는 곳이 하나님 나라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보고, 있고 살고 있다. “와우!” 거듭나게 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먼저 해야 하는 일이다. 거듭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어둠 속에 있기에 아무리 하려 해도 할 수 없다. 거듭나면 빛의 세계에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셨다(요3:5). 이 말씀을 하실 때 “진실로진실로”라는 말씀을 하면서 하셨는데, 이 말은 억 만 번을 강조해도 부족하다는 뜻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가 동일함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는 분명히 있다. 그런데 이 두 세계는 분리 된 것 같으나 하나의 세계다. 설명하기 위해 분리하여 설명하는 것뿐이다. 이것을 알아야 신앙생활을 잘 한다. 초자연적인 삶을 이해 할 수 있는 비결이 된다. 거듭남은 하늘의 일이라고 하셨다(요3:12). 하늘의 일과 땅의 일은 하나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니 영의 세계와 육의 세계는 하나님 안에서는 같은 세계다. 영의 세계가 육의 세계가 하나라는 것을 정확히 아는 것은 놀라운 능력의 통로가 된다. 하나님의 나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선하시고, 어두움의 왕국을 통치하는 마귀는 악한 자다. 거듭난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 나라에 들어 왔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고, 마귀는 나쁜 마귀다. 좋으신 하나님이 나쁜 것을 줄 수 없고, 나쁜 마귀가 좋은 것을 줄 수 없다. 철저하게 나쁜 마귀는 나쁜 것만 준다. 이것이 영적 세계다. 영적인 세계는 육의 세계와 하나이기에 누구의 영향을 받느냐 따라 이 땅에서도 엄청난 차이의 결과가 있다. 마귀는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이다. 주님은 생명을 주시고 더 풍성히 주신다(요10:10).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다.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일 뿐이다(요8:44). 그러므로 우리는 풍성함이 있다. 마귀는 지금도 속이고 있다. 거듭난 자에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가려놓았다. 하나님의 나라를 먼 미래의 불확실한 일로 우리를 속인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거듭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다. 먼 미래에 죽은 다음 그렇게 되겠다는 말이 아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면서 살아야 한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 믿음은 알고 본다. 천국을 산다. 천국에는 고통이 없다. 천국에는 눈물이 없다. 천국에는 행복하다. 천국에는 절름발이가 없다. 천국에는 소경이, 벙어리가, 병든 자가 없다. 천국에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바로알고 누리며 살자. 영이 죽은 사람은 육의 삶에도 동일한 영향을 받는다. 그 아비가 마귀다. 그 아비의 욕심대로 행한다(요8:44). 영과 육은 분명히 연결된 하나다. 성령의 사람은 이 땅에서도 성령의 영향을 그대로 받는 것이다. 이 사실은 확실히 믿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와 하나다. 우리의 영적인 모습이 보이는 세계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본다. 우리는 하나님나라에 사는 자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는 자다. 우리 몸은 성령의 전이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우리의 몸을 성전 삼으시고 임마누엘 하셨다. 우리 몸 안에 하늘의 보좌가 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는 나라지만 보이는 세계와 동일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는 세계에도 믿음 속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한다고 하신다(눅17:20-21). 육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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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9
  • [조희완 목사] 오해와 이해 (수22:10-34)
    제주도의 한 교회에 새로 부임하신 목사님께서 어느 날 성도의 가정을 심방하려고 동네를 지나가다가 동네 할머니 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목사님을 보고 “목사님, 어디 감수꽈?”하고 인사를 하기에 “예, 심방갑니다”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아주 의아한 표정을 지으시면서 “목사님도 신방 감수꽈?”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동네에 “교회에 새로 오신 목사님이 무당 집에 다닌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목사님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자초지종을 알아보았더니 며칠 전 심방 가다가 만난 동네 할머니가 원인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심방”(尋訪)간다고 한 말을 할머니가 “신방”(神房)에 간다는 말로 오해를 하셔서 소문을 퍼트렸던 것입니다. 제주도에서는 무당 집을 가리켜서 “신방”(神房)이라고 합니다. 목사님이 한 말을 할머니가 잘 이해를 못한 나머지 오해를 했던 것입니다. 오해는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인간관계 속에서 생각지도 않은 일 때문에 오해를 받기도 하고, 또 남을 오해하기도 합니다. 오해를 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남을 오해하는 것도 나쁜 것이고, 남이 나를 오해하는 것도 괴로운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가면 언젠가는 오해가 풀리게 되지만 그러나 오해를 하는 동안은 마음이 참 괴롭고 불편합니다. 그러므로 오해를 하거나 오해를 받는 일이 없어야 하고, 오해를 하더라도 빨리 풀어야 합니다. 본문 말씀은, 가나안 땅 정복을 끝내고 자기 곳으로 돌아가던 용사들이 요단강 언덕에 기념으로 큰 제단을 쌓았는데 그것이 그만 큰 오해의 불씨가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왜 오해를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오해를 풀 수 있었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오해는 속단에서 비롯됩니다.(10-20) 둘째로, 대화하면 오해가 풀어집니다.(13,14,26,27) 셋째로, 오해가 풀어지면 즐겁습니다.(32,33) 주님의 몸 된 교회 공동체 안에 서로 오해하고 반목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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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9
  • [박봉석 목사] 여백(餘白)
    필자는 목사입니다. 설교 원고를 작성하고 프린터를 해 보면 항상 설교 원고의 위와 아래 그리고 좌우 옆으로 여백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컴퓨터 한글 프로그램이 그렇게 설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에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여백이 없도록 설정을 하고 프린트를 해 보면 어떨까 하고 말입니다. 독자 여러분은 어떨 것 같습니까? 종이 한 가득 빽빽하게 적힌 글자로 인해서 읽기가 싫을 것입니다. 그처럼 여백이란 필요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은 무엇에든지 꼭 필요한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바쁜 현대의 삶 가운데서 너무 여러분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힘들고 탈진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상태가 문제가 되는 것은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수렁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는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와의 기도의 대결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가 문제였습니다. 악독한 우상 숭배자였고 악녀였던 왕비 이세벨이 엘리야 선지자를 찾아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열왕기상 19장 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엘리야는 그 이세벨의 위협에 낙담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광야로 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간구하는 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바로 얼마 전에 그렇게 영적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왕비 이세벨의 위협 앞에 그렇게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엘리야 선지자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그런 것입니다. 아무리 강한 것 같아도 한계가 있고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이 지쳐서 갈멜산의 그 놀라운 승리는 온데간데없고 그렇게 죽기를 간구할 만큼 한 없이 약해졌던 엘리야 선지자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엘리야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천사를 보내셔서 그를 위로하시고 두 번이나 구운 떡과 물을 주어서 먹게 하시고 오랫동안 잠을 자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시고 그의 삶에 여백을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를 푹 쉬게 하시고 다음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던 것이지요. 이 하나님의 지혜가 놀랍고 감사합니다. 연약함을 가진 우리 인간은 그렇습니다. 삶의 여백이 없이 달리기만 하다가는 인간의 한계로 인해서 치명적인 실수를 하거나 나락을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시고 엘리야를 그렇게 위로하고 먹이고 재웠던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을 알고 목표만을 바라보며 삶의 여백이 없이 달려가는 것을 잠시 멈추십시오. 그리고 나를 돌아보며 삶의 여백을 가지십시오. 육신과 정신이 쉬게 하면서 영적으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우리는 살면서 그런 경우를 만납니다. 지치고 낙심된 상황에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모로 기진맥진하거나 마음이 힘든 상태에서 내리는 결정은 그렇게 열에 아홉은 어리석은 결정이 됩니다. 그리고 조급한 마음으로 바쁘게만 나를 몰다보면 앞만 보이고 옆도 뒤도 돌아볼 여유가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돌아볼 여유도, 내 도움이 필요한 곳을 돌아볼 여유도 없어집니다. 그러한 삶은 성공적인 삶인 것 같지만 가장 피폐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삶의 여백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바쁜 공생애의 삶 가운데서 많은 일을 하셨지만, 조용히 성부 하나님과 기도의 교제를 하는 시간도 빠뜨리지 않으셨습니다. 폭풍같이 영혼을 향한 능력의 사역을 하시면서도 고요한 하늬바람처럼 물러날 줄도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닮으십시오. 예수님보다 더 열심인척 하지 마십시오. 이제 달리기만 하는 삶을 잠시 중단하고 삶의 여백을 만드십시오. 삶의 여백, 그것은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의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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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9
  • [박봉석 목사] 종교개혁주일을 보내며 … 무덤과 비석
    종교개혁주일을 보내며 … 무덤과 비석 종교개혁자 존 칼빈이 세계 기독교 역사에 기여한 공로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죽음을 앞두고 결코 자신의 무덤을 치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무덤을 조금이라도 우상시할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유언을 중시하여서 스위스 제네바의 공동묘지에 묘비도 없이 묻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세월이 흐르면서 후세의 사람들은 칼빈이 어디에 묻혔는지조차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830년, 칼빈을 깊이 흠모하던 네델란드인이 수소문 끝에 그의 무덤을 찾아내었습니다. 그리고 유언 때문에 비석을 세울 수는 없었지만 비석 대신에 존 칼빈의 이니셜인 J. C.를 새긴 붉은 벽돌을 박아 두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비로소 칼빈이 묘는 그 위치가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칼빈이 죽은 지 435주년이 되는 때에, 스위스 제네바 시의회 의원인 미셸로제티라는 사람이 그 칼빈의 묘를 대대적으로 보수했습니다. 무덤 주위에 대리석을 깔고 철책을 두른 다음에 그 앞에 정식으로 동판까지 설치했습니다. 그 동판은 “위대한 개혁자, 존 칼빈”이라고 쓰인 동판이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얼마 후 샤를 죠르지라는 이름의 한 제네바 시민이 동판을 설치한 미셸로제티를 고발했습니다. 그 고발 내용은 칼빈의 유언을 무시하고 그분의 묘를 치장했다는 죄목이었습니다. 고발을 접수한 제네바 주 정부 검찰총장은 개인의 유언이 과연 형사고발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심사숙고하겠다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독자 여러분, 이런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기독교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운 분의 묘지를 꾸미고 동판을 세운 것은 잘 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의 뜻은 다릅니다. 자신이 종교개혁의 과업을 위해서 일한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믿음 때문에 결코 자신을 기념하는 무덤의 비석을 세우지 말 것을 유언했고, 그리고 동판을 세운 사람을 고발한 사람은 바로 그 칼빈의 숭고한 뜻을 받들고자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필자는 그분들의 이런 옥신각신 하는 모습이 부럽습니다. 왜 우리나라에는 기독교 선조의 생가나 묘지를 거의 신성시하고 그것을 대대적으로 꾸미고 기념물로 삼으려고 하는지 마음이 씁쓸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을 바친 그분들의 신앙을 더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닌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일제강점기 시절에 신사참배의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며 옥고를 치르다가 해방이 되어서 출옥을 하신 고 한상동 목사님은 사역을 다 마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별세하시기 전, 후배 목사님들과 가족들에게 이런 유언을 했다고 합니다. “내가 죽고 나면 나에 대해서 기록하고 나에 대해서 말한 모든 문서들이나 사진들은 객관적인 역사적 자료로 남겨야 될 만한 몇 가지만 최소한으로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모아서 불태워 없애버리도록 하라.” 왜 한 목사님이 이런 유언을 하신 것일까요? 자신이 복음과 한국 교회를 위해서 일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자신이 기념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천명한 것입니다. 세상이 역사적 인물의 동상이나 기념비를 세우는 것은 그 인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고백하기에 그런 기념물을 세우지 않습니다. 순교와 헌신의 역사는 책이나 기록을 통해서 후대에 전하는 것으로 배움과 귀감이 되게 하면 됩니다. 그 이외에 신앙의 선조들을 기리기 위해서 동상을 세우거나 생가를 복원하여서 기념하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자신을 드린 선조들의 신앙을 오히려 욕되게 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늘 기념하고 감사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여야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의 사도 바울의 고백을 반추해 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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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5
  • [이정희 목사]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호칭과 지칭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I. 서언(序言) ‘우리 말 바르고 아름답게’란 표어를 본 적이 있다. 이런 면으로 관심이 있는 필자로서는 ‘정말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이 표어와 함께 오늘도 올바른 호칭과 지칭어에 대한 내용으로 논하고자 한다. 먼저 본 호에서는 2011년 12월에 국어심의회를 통하여 확정된 ‘표준 언어 예절’에 근거하여 조부모(祖父母/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주 사이의 호칭어와 지칭어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호칭과 지칭의 뜻과 유래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손주를 돌보는 조부모들이 시댁이나 친정의 구분 없이 많아졌다. 필자의 경우도 그러했고, 주변에서도 이런 경우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이에 손주의 입장에서 조부모님들을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하는지의 구분이 필요하게 되었다. 1. 뜻과 유래 :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한자어는 조부와 조모이다. 그 뜻은 조상 조(祖), 아비 부(父), 어미 모(母)자 이다. 순수한 우리말로는 할아버지, 할머니,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이다.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도 문제는 없지만, 오늘날에 있어서는 조모, 조부보다는 주로 할머니 할아버지로 호칭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용어들을 논할 때마다 의문이 되는 것은 한자 용어와 순수한 우리말의 어원이나 발음이 전혀 다른 말들이 많다는 것이다. 앞에서 논한 용어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면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란 순수한 우리말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할아버지에 대한 친족용어가 수록된 가장 오래된 문헌은 고려시대 때 송나라의 사신으로 왔던 ‘손목’이 편찬한 ‘계림유사’란 책에 ‘한아비’라는 호칭으로 기록된 것이 최초이다. 그다음은 1527년 최세진의 ‘훈몽자회’에서는 ‘하나비’로 표기하였고, 친족용어들을 모아서 정리한 ‘최재석’의 ‘한국의 친족용어’에 의하면 할아버지, 할아버님, 할아범, 할애비, 조부, 조부님, 조부주, 현조부, 가조부, 조고 등의 여러 용어들이 있었으나, 결국 중세국어의 음운 변천 과정을 겪으면서 지금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로 되었다. 2. 경우에 따른 호칭과 지칭 :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할까? 먼저 아버지의 부모님을 부를 때는 ‘할머니, 할아버지’이고, 어머니의 부모님을 부를 때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로 부른다. 하지만 양가의 조부모님들이 모두 한자리에 있을 때는 구분을 위해서 ‘외’자를 붙여서 호칭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구분 없이 ‘할아버지, 할머니’로 호칭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즈음은 장수하는 경우가 많아서 아버지의 할아버지 할머니도 생존해 있는 경우들도 많이 있다. 이런 경우에는 ‘증조(曾祖)’라는 말을 붙여서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로 부른다. 그러나 외가의 증조부들에게는 ‘진외(陳外)’자를 부쳐서 ‘진외증조 할아버지’, ‘진외증조 할머니’로 부르기도 한다. 여성의 경우에 결혼해서 시댁의 조부모님들을 부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서는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존칭어인 ‘님’자를 붙여서 할아버님, 할머님으로 부르면 된다. 하지만 친정 식구들에게 시댁의 조부모님들을 소개할 때는 ‘시 할아버님’, ‘시 할머님’으로 지칭한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손주와 외손주를 호칭하고 지칭할 때는 어떠할까? 누구든지 마찬가지지만 조부모의 손주 사랑은 아주 각별하다. 요즈음은 휴대폰에 손자 손녀의 사진을 배경 그림으로 넣을 정도로 유별나다. 그렇다면 이런 사랑스러운 손주를 부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에 대해서는 특별한 호칭과 지칭보다는 그냥 가장 친근한 손주의 이름을 부르면 된다. 그러나 손주가 결혼해서 자녀가 생기면 그 아이의 이름뿐만 아니라 ‘OO 아범, OO 어멈’, ‘OO 아비, OO 어미’ 등으로 부를 수 있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이런 친족용어의 호칭어와 지칭어들은 흔히 사용하는 익숙한 말들이지만, 실제로 사용하다 보면 혼돈이 올 때도 있다. 하지만 조금씩 더 노력한다면, 가족 상호간의 아름다운 위계질서와 집안의 화목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 바람직한 가족 간의 언어문화 창달에 앞장설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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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인 생활용어
    2023-11-15
  • [오성한 목사] 말씀을 네 마음속에 지켜라.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21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22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잠4:20-22) ‘마음’은 바로 당신 존재의 핵심을 의미한다. “내가 주께 범죄 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119:11). 사람이 죄를 이길 수 없다. 죄를 이기는 방법은 주의 말씀을 마음에 두는 것이다. 말씀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이것이 죄를 끝내는 유일한 방법이다. 토의가 쓸모없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육간의 건강이다. 말씀이 약이다. 모든 육체에 약이다. “내가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요6:63). 케네스 헤긴의 고백을 더 들어 보자. 그가 몸이 찌부둥 할 때는 “나는 약을 두 배로 먹는다. 복용량을 배로 늘인다.” “성경읽기를 두 배로 더한다. 그 말씀은 이적을 일으킨다.”고 했다. 잠언의 말씀은 하나님의 약을 반복해서 강조한 것이다. 마음(heart)에 적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마음에 항상 품으라는 말씀이다. 늘 주의하라는 말씀이다. 보통 사람들은 말씀에 주의하지 않고 산다. 그러나 말씀으로 마음을 고치라고 하신다. ‘마음을 고쳐라’고 하면 기분 상해하기도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더 좋은 휴대폰 앱(app.어플)을 소개하면서 바꾸라고 한다고 기분 나빠하지 않는다. 마음을 바꾸라는 말은 자신을 바꾸라는 말과 같기에 기분 상해한다. 나를 완전히 죽인다는 말이고 죽일 뿐 아니라 말씀으로 채우라고 하니 맘을 상해 할 수 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2)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약은 영이요 생명이다(요6:63). 믿을 뿐만 아니라 영에 적용해야 한다. 어떤 약속을 읽고 외울 수 있겠지만 그 말씀이 실제로 이미 영에 있다. 주님의 말씀은 영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은 영이 아주 기뻐한다. 영이 기뻐함을 알고 행하려고 노력하라. 말씀이 영(heart)에 있지만 인지하지 못하고 머리만 두려고 노력한다. 이미 암송하고 있는 말씀을 더욱 반복해서 암송하거나 읽어라. 그리고 마음에서 터져 나오는 묵상이 되게 하라. 기도는 마음에서 터져 나오는 말씀의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케네스 헤긴은 딸의 눈 옆에 종기가 자라는 것을 보고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두기로 결단했다. 그는 “병 고침에 관한 성경 말씀을 한 시간 동안 읽어야겠다.”고 결단했다. 그는 병 고침에 대한 말씀을 거의 다 암송하고 있었다. 또 성경에 줄이 모두 그어져 있었다. 그래도 그는 그렇게 했다. “여기 한 시간만 누워 이 말씀들을 중얼거리며 읊조려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했다. ‘묵상하다(meditate)’라는 단어는 ‘낮은 소리로 읊조리다, 중얼중얼 거리다(mutter)’라는 뜻이다. 그는 피곤이 몰려 올 때 “한 시간 자고 나서 일어나 또 한 시간 이 구절들을 읊조려야지, 그리고 또 한 시간 자고 일어나 또 한 시간 읊조리고 아침까지 해야지.”라고 말하며 실천했다. 그에게 그 때 필요한 것은 딸의 치유였기에 다른 것을 읊조릴 필요가 없었다고 말한다. 말씀은 반복해서 읽고 묵상해야 한다. 말씀으로 인해 마음속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 기도인데 말씀이 기도되게 해야 한다. 케네스 헤긴은 다음 날도 읽고 묵상하길 반복했다. 그는 2+2=4이고, 3+6=9인 것을 아는 것처럼 딸의 치유를 마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는 아내에게 편지를 써서 딸에게 “2+2=4이고, 3+6=9인 것처럼 너는 나았단다.”라고 전하라고 했다. 딸은 이 말을 듣고 잠깐 서있더니 “아빠가 그랬으면 그렇겠지.”라고 하곤 나가 놀았다. 의사에게 경과를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그는 “약을 나의 영에 장착했다. 딸은 치유되었다.”고 고백한다. 음식을 아무리 많이 본다고 배부르지 않다. 성경이 바로 그렇다. 토론을 하고 외우기도 하고 공부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 영 깊이 뿌리내리지 않는다면 말씀이 우리에게 그대로 역사하지 않는 것이다. 계속 말씀을 먹어라. 항상 말씀을 마음에 장전하라. 말씀이 마음에서 터져 나오도록 하겠다고 생각하며 맘을 열어 놓으라. 강한 믿음을 지키려면 말씀을 계속 먹으라. 믿음의 말씀을 끊임없이 먹으라. 음식을 한 번만 먹는다고 건강해지지 않는다. 몸은 먹는 대로 만들어진다. 운동도 해야 한다. 계속 먹고 운동해야 한다. 믿음과 치유의 말씀 구절을 계속 먹으라. 매일 믿음과 치유의 말씀을 계속 읽으라. 다른 사람에게 그런 역사가 있으니 나에게도 그런 역사가 일어날 것을 단순히 믿고 말씀을 장착하라.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 지는 것은 진리다(딤전4:5).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약을 당신의 영에 장착시켜라! 앞에서 언급한 마가복음 속의 예수님의 사역의 말씀을 암송하여 마음에 창착해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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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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