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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동철 장로] 기독사학이 살아야 대한민국 미래가 있다
    교육강국 대한민국의 초석을 놓은 근대 선각자 세분을 꼽으라면 우남 이승만, 도산 안창호, 남강 이승훈 선생을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이승만 건국 대통령에 대해서는 붙여 얘기할 필요가 있겠는가. 치적의 하나인 토지개혁을 단행하면서 대지주들에게 땅을 사립학교 설립에 유도하고 평생 운영을 맡겼다. 바로 대한민국 인재를 양성한 사학제도이다. 한국 공교육을 폄하하지 않는다. 한데 한국 사학들이 70년대 이후 뜨거운 교육열 속에 향학의 경쟁문화를 통해 수많은 인재양성 바로 산업일꾼들을 키워냈다. 근대역사 속에 독립 운동가이자 교육자 도산 안창호 선생은 미국등지 유학을 통해 선진문화를 보고 조국의 교육진흥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후세들을 위해 배워야 만 살아갈 수 있다는 연설을 당시 후학들에게 설파했다. 자신의 호 도산(島山)을 지은 것도 태평양 바다 속 우뚝 솟은 하와이를 보고 교육을 상징하는 의미로 지었다고 한다. 신민회 조직은 물론 지금까지 이어오는 흥사단 등 독립운동과 조국의 미래를 위해 교육을 강하게 주창한 선각자이다. 남강 이승훈 선생은 유명한 오산학교를 설립했으며 3.1운동 33인의 한분으로 독립운동을 하신분이다. 거장 세분의 선각자는 모두 기독교 이념의 서구교육으로 조국 발전의 밑자락을 놓은 선각자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학 중 광복이후에도 많은 선교사를 비롯 교회에서 기독사학을 설립했다. 그리고 건학이념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건강한 교육을 선양해왔다. 산업화 민주화과정에서도 기독사학들이 인재양성에 많은 기여를 하면서 명성 있는 사학들을 육성했다. 그리고 상시 채플시간 교목들의 복음 활동을 통해 80년대 한국기독교 부흥에 한축 기둥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기독사학들이 급격히 사양의 길을 걷고 있다는 분석이 모두를 안타깝게 한다. 광역단체 교육수장들이 선출직이 되면서 다양한 교육이념의 정책이 도입되고 있다. 획일적 교과서에 다양성을 도입하고 있다. 학생인권을 우선시하는 인권시대의 권리남용이 교육현장을 어지럽히고 있다는 슬픈 현실이다. 우선 교목들의 복음채플시간이 크게 줄고 있다는 최근 비공식 통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전국 사립중은 632개, 사립고는 945개소이다. 이중 기독사학을 보면 기독사학중학교가 135개, 고등학교가 185개소이다. 이 중 교목을 둔 기독사학은 중학교 79개, 고등학교 139개 학교로 알려졌다. 기독사학들이 갈수록 교목을 두지 않거나 계속 줄여나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왜 일까. 진보정치성을 띤 교육수장들이 보이지 않게 기독사학들의 복음 활동을 억압하고 있다는 말이다. 교육청에서 지원하는 학교지원예산을 들고 직간접으로 묘한 억압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기독사학의 건학 이념에 채플참여 의무시간이 있다. 이것도 자율 선택권을 두어 채플 의무시간을 자유하게 하는 추세다. 한국 기독교가 복음의 큰 사명 앞에 슬픈 현실이 되고 있다. 그동안 사학에 투자한 많은 기독사학의 주인들이 학교를 넘기거나 포기하는 사례까지 생겨나고 있다. 조국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게 한 교육의 원천이 되었던 기독사학들이 겪는 이 아픔이 아픔이 아니다. 기독사학이 무너지면 조국의 미래를 생각할 수 없다. 기독사학이 온 세상 구원의 지경을 확장하는 역할을 했던 것만 아니다. 중고를 비롯 대학의 현장까지 젊은이들이 가져야하는 건강한 정신을 함양하는데 기독사학들이 희생해왔다. 이러한 교육원천이 조국 대한민국의 비전이자 미래이다. 그러나 한국기독사학의 사양화는 다시말해 조국의 미래를 말할 수 없게 한다는 점이다. 모두가 한 번 더 새겨보고 강구책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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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5
  • [박동철 장로] 3일천하 ‘갑신정변 140년’ 이 땅 복음의 큰길 열었다
    1884년 12월 4일 밤 10시경. 이날은 최초로 지금의 체신청 우정국 개청식이 있는 날이었다. 행사를 마친 후 내·외 귀빈이 함께하는 저녁 연회가 열리던 시각. 갑자기 ‘불이야’ 하는 소리와 함께 총소리가 들리고 비명소리가 진동했다. 당시 김옥균, 홍영식, 서재필 등 젊은 엘리트 개화파 세력들이 정변을 일으킨 현장의 이야기다. 고종 즉위 20년 되는 해 일본은 개화 후 나날이 발전하고 중국과 서양 제국들이 조선의 개화와 통상압박을 하던 혼돈의 시기였다. 조선 26대 왕 고종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은 갈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급진개화를 주장하는 김옥균 파와 점진적 개화를 주장하던 민영익 등 세력 간 갈등 속에 급진개화파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정변이었다. 올해 12월 4일은 갑신정변 1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갑신년 쿠데타는 성공하는 듯 했으나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개입 3일 만에 평정하고 주모자들은 멸문지화 되거나 일본으로 도피했다. 갑신정변은 당시 일본의 지원으로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갑신정변이 성공했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됐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운명이 외세 강국에게 점령당할 수밖에 없는 비운의 상황이었다고 사가들은 말하고 있다. 역사적 평가와 상황을 접어두고 당시 사건의 현장을 통해 하나님이 이 나라 복음을 위해 위대한 계획을 펼치고 있었던 은혜를 찾아 보고자한다. 불을 지르고 쿠데타 세력들이 반대세력들에게 총을 쏘며 공격을 하는 통에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칼에 난자되어 중상을 입었다. 죽을 수 밖에 없던 상황에 연회에 참석했던 미국 루시어스 푸트(Lucius H. Foote) 공사가 긴급히 미국에서 두 달 전에 선교사로 입국한 한사람을 찾는다. 바로 최초의 의사선교사 호러스 알렌 선교사를 찾아 치료함으로써 민영익은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알렌 선교사는 누구인가? 우리의 기독교사에 거장으로 남아있는 알렌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중국으로 파송되었다. 이즈음 1882년 조미(朝美)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선교사의 마음에 조선의 선교사가 되고 싶어 자원한다. 갑신정변 두 달 전 1884년 10월 6일에 한양으로 입국한 선교사이다. 알렌의 치료로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살아남으로써 3일 천하정변은 끝이 나고 고종의 권력은 유지 될 수 있었다. 민영익을 살린 알렌에게 고종은 무엇을 원하냐고 물었다. 당연히 알렌은 병원을 지어 달라고 했다. 고종에게는 너무 쉬운 요청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변의 주동자 홍영식의 가족들이 처단되고 폐허된 집을 병원으로 개원하게 했다. 바로 최초의 병원 광혜원(나중 제중원)이다. 알렌선교사가 병원을 짓고 자유롭게 선교를 하게 되는 큰길이 열리게 된다. 하나님의 역사는 벼락처럼 전개 된다고 했다. 1885년 봄 일본에 머물러있던 아펜젤러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함으로써 조선 땅의 예수 복음이 날개를 달았다. 언더우드는 오늘의 연세대와 알렌 선교사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을 세우는 엄청난 일을 했다. 아펜젤러는 이승만을 탄생케 한 배제학당을 세운다. 뒤이어 스크렌턴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와 이화학당을 세우고 천대받던 조선의 여성들이 눈을 뜨게 했다. 조선역사가 망해가던 시기 비운의 시간표가 돌았지만 선교사들을 통해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게 하는 복음의 역사(役事)가 역동 했던 것이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축복이다. 한 나라를 부흥 발전시키는 무한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조선 5백 년의 역사는 정말 캄캄한 세상이었다. 사대부들이 타락한 유풍(儒風)의 문화 속에서 백성을 착취하고 나라의 발전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나라가 망해가는 때 나라를 살리고자 급진개혁세력들이 일으킨 정변은 사람의 위대한 뜻에도 불구하고 3일천하로 끝난다. 뒤이은 역사는 결국 일본의 36년 종살이해야 하는 비운의 역사를 겪어야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70년 종살이 후 회복의 역사를 썼다. 우리는 140년 전 위대한 영적 거장 몇 분의 선교사들이 오늘의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들어내는 초석을 낳았던 역사를 돌아본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가. 세계 10대강국을 자랑한다. 희망 속에 겪는 사회문화의 심각한 갈등을 보면 나라가 망할 것 같은 위기다. 이런 위기 때 그때의 역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야 할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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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5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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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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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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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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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실시간 칼럼 기사

  • [오성한 목사] 보이지 않는 세계
    보이는 세계와 안 보이는 세계는 하나다. 히스기야 왕이 기도할 때 185,000명의 앗수르 군대가 모두 다 시체가 되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일로 인해 앗수르는 망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영적인 세계에서의 일이 보이는 육적인 세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하나임을 보여주는 예이다. 보이는 세계에서 하는 일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도 하고, 슬픔이 되기도 함을 볼 때,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분리해서 보지 말아야 한다. 만약 보이지 않는 세계의 원리를 바르게 알고 사용할 수만 있다면 놀라운 일이 있을 것이다. 두 세계가 하나임을 알 때 영적인 초자연적인 역사들을 끌어 올 수 있다. 안 보이는 세계를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성경을 보면 된다. 하늘보좌도 기록되어 있다. 천상의 세계와 영적인 세계가 그려져 있다. 나는 성경에 기록된 세계를 실제로 보는 훈련을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 그 세계를 그대로 인정하며 강하게 주장한다. 예수님이 사역 하실 때 하신 말씀을 그대로 따라하려고 외우고 묵상한다. 외워 주장하고 상상하며 기도하곤 한다. 한 두 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시간을 그렇게 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지만 보이는 세계 속에도 실재임을 믿고 외치며 말한다. 그대로 이루어짐이 보이도록 말씀을 주장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신이 난다. 내가 그 현장에 있는 것 같고, 그 현장을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킬 것 같아진다. 정말 흥분이 된다. 그리고 감사하다고 고함을 치기도 한다. 당신도 한 번 해보라. 성령님께서 기뻐하심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원리를 그대로 살고 있다. 공기를 마시고 살게 만드신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그냥 그 안에 살면 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왜 꼭 땅에서만 살아야 하느냐, 나는 물속에서 살 거야!”하고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물속에서 살려고 한다면, 1분 정도는 물속에 신기하고 재미있을 것이다. 그러나 곧 호흡이 가쁘고 빨리 물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불행의 결과를 맞이하고 말 것이다. 영적인 세계도 하나님께서 다 만들어 놓으셨다. 거부하지 말고 그냥 그 안에 살면 행복의 문이 열린다. 나는 예수께서 이루신 영적인 일들을 내 것으로 주장하고, 외우고, 나 자신에게 소리 질러 주장하는 일을 자주하는데 이 일 또한 신난다. “와우! 성한아,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 성한아, 너는 예수님의 신부다. 성한아, 너 안에 성령님이 항상 계신다. 성한아, 그래서 너는 성령의 사람이다.”고 나에게 말해 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생생하게 나에게 말해 준다. 실재라고 말한다. 저자 소개에서 나는 성령의 사람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것이 이런 것에 근거를 둔 말이다. 나는 예전에는 “나는 성령의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교만인줄 알았다. 교만한 말이 아니다. 성령의 사람이라는 말은 오히려 겸손한 말이다. 성령님 없이는 못사는 사람이라는 표현이다. 성령님만 생각한다는 사랑의 고백이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나는 당신만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으로 충만합니다.”라는 말은 교만이 아니다. 당연히 그렇게 말해야 한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나는 당신도 좀 생각했지만 옆집 아가씨도 좀 생각을 했습니다.”라고 하면 안 된다. 사랑하는 성령님께 “나는 성령님으로 충만합니다.”라고 고백하며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교만이 아님을 나는 알게 되었다. 나는 이런 고백을 즐긴다. “저는 믿음이 큰 사람입니다”는 말도 예전엔 교만한 말인 줄 알았다. 절대 교만한 말이 아니다. 속은 것이다. 담대하게 당신은 믿음이 큰 사람이라고 말해야 한다. 예수님을 정말 믿는다고 고백하라는 말이다. 우리가 사람에게도 “저는 목사님에 대한 믿음이 큽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목사님께 “목사님, 저는 목사님에 대한 믿음이 적습니다. 믿음을 갖도록 믿을 수 있는 일을 좀 하세요.”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혹시 그런 마음이 있어도 그렇게 말하면 싸움을 거는 말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예사로 “믿음이 없으니, 믿을 수 있는 짓을 좀 해서 나로 믿게 해보시오”라고 항의를 하는 것과 같은 발언을 한다. 나는 믿음이 큰 사람이라고, 주님께도 말하고 사람들에게도 말하고 싶어 한다. 물론 사람들이 나를 오해할까봐 설명을 덧붙이기도하고, 설명을 하며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주님께도, 사람들 앞에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크다고 고백해야 함은 마땅한 일이다. 이해가 된다면 이제부터 당신도 믿음이 큰 사람이라고 주장하라. 성령의 사람이라고 주장하라. 이것을 보고 은혜 속에 산다고 말한다. 은혜는 공짜를 말한다. 은혜 속에 산다는 말은 공짜로 주신 것을 그대로 믿는다는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사는 방법도 역시 창조주의 창조원리를 따라 그대로 믿는 큰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살면 된다. 회복된 영은 풍성하고, 밝고, 맑고, 생명력과 환희와 기쁨이 넘친다. 우리의 영을 하나님은 이미 완전하게 만들어 놓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벽하게 다 이루어 놓으셨다. 주님이 완벽하게 만들어 주셨다. 새로운 피조물인 나를 그대로 믿는 큰 믿음의 사람임을 선포하라.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 누릴 수 없다. 주님 주신 것을 발견하고 믿음으로 그 안에 있기만 하면 모든 것을 다 누릴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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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09
  • [박동철 장로] 동북아 패권전쟁과 한국교회의 위기
    세계에서 일본을 우습게 보는 나라는 한국과 중국이고 중국을 '장깨'라고 비하 하는 나라는 한국뿐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한국이 중국 일본에 시달려온 역사가 있지만 한국의 '깡'있는 기질을 얘기한다. 최근 조문영 등 13명의 작가가 직접 중국에서 탐사 취재 한 '민간중국'이란 책에서 이러한 얘기와 함께 오늘의 중국 사정을 소상히 기록했다. 사실 백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은 세계대국이었다. 오욕의 역사와 공산혁명 후 찌그러들었다가 등소평의 개혁개방으로 지금은 14억 인구의 G2의 위용을 떨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중국에 자만심이 있다. 우리의 경제발전 노하우를 모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10위권 산업의 다각화된 보물섬과 같은 오늘의 대한민국경제 강국에 중국이 지금 혀를 날름거리고 있다. 1992년 한중수교 후 한미일 중심의 산업발전이 중국과의 통상급증으로 다양한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바로 친중 진보정치세력의 등장이다. 친미 자유민주주의 정치경제 사회발전 근간의 한국사회에 친중 진보세력이 침투, 갈등의 한국사회가 조성되었다. 요즘 탄핵정국에서 여실히 나타난 현상은 사실 미중(美中)의 동북아지역의 패권전쟁의 영향이다. 우선 상황이 극도의 위험에 봉착해있다. 미중패권의 이치 핀(each pin)이 된 대한민국의 5천만 국민을 공포와 불안으로 몰아넣고 있다.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와 탄핵, 좌파와 자유우파의 내전이 되어버린 비극의 한국사회가 되어버렸다. 한국 민주주의 현장 선거에 중국의 직간접 개입 의혹이 짙어지면서 갈등의 블랙홀이 되고 있다. 한국의 공중에 '부정선거'의 화두가 높게 드리운 것은 누구든 치명타를 입는 제로섬 게임이다. 국민 모두가 이성을 잃어가는 듯 온갖 극단의 수단으로 주도권을 뺏으려고 하는 정치세력들 속에 국민이 불쌍해지고 있다. 우리끼리 쥐어뜯고 싸우고 있는데 정작 패권전쟁의 주인공 중국 그리고 미국은 지금 호시우보(虎視牛步)의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한반도 주변에는 항공모함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우리들의 추한 싸움질을 더 말하고 싶지 않지만 믿음으로 사는 교회를 섬기는 우리들이라도 복음과 나라를 생각하고 기도하고 있을 뿐이다. 나라와 국민이 갈라져가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눈물 흘려야한다. 아니 한국교회의 미래가 암울하기 때문이다. 지금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광장에서 밤을 새우며 투쟁하는 선한 성도들이 극단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참 불쌍하기도 하다. 오늘의 한국사회에 닥친 극단의 분열은 나라가 망하겠다는 비관이 앞선다. 그러나 더욱 큰 걱정은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 러시아 중국의 한반도에 대한 탐욕이 한계의 모호성으로 치달으면서 한 치 앞을 예단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에 국제전문가들은 잘못하면 3차 대전의 진원이 될 수 있다는 충격적 예단도 있다. 그야말로 전지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의 손길을 붙잡아야하는 일뿐이다. 한국교회는 복음의 권능으로 대한민국의 경제 사회 발전을 이끌었다. 부인하겠는가. 대한민국이 일본의 36년간 지배에서 독립운동을 했고 6.25전쟁의 폐허에서 나라를 리빌딩 했다. 그리고 정치적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성경적 사회기반을 다지는데 정신적 운동권이었다. 당연히 급진 진보와의 갈등에서 복음의 자유를 위해 자유민주를 지키려고 한다. 그래서 교회가 가능한 정치적 진영에 팬덤화 하지는 않고 있다. 그러나 교회가 복음의 침해를 맞으면 그냥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정치권에 많은 크리스챤과 교회 직분자들이 있지만 정치적 역할기능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만약 친중 정치세력이 득세한다면 한국교회의 복음의 자유를 살려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캄캄한 대한민국 정치실종에서 어느 교회 설교가는 진보정치권이 정권을 잡아 한국교회의 복음을 살리는 보장이 있다면 적극 지지하겠는 의사를 밝히는 말씀을 들었다.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이 겪는 이 추악한 정치판을 누가 해결하겠는가. 우리들에게 악한 죄를 값없이 씻겨주신 하나님뿐이다. 항상 역사의 우편에 계시는 하나님이 그립다. 한국 교회가 멀지않은 시간에 탄압 받는 시대가 될 수 있다는 위기를 맞았다. 이 혼탁한 한국사회를 정결케 할 카이로스의 시간이 언제일까. 답답함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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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06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50 : 대림절과 성탄절의 올바른 용어들은 무엇인가?
    I. 서언(序言) 다사다난 했던 2024년 한해도 저물어 가면서 교회 절기로는 성탄절을 기다리는 절기인 ‘대림절(待臨節)’과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시기가 되면 용어에 대한 관심이 많은 필자로서는 과연 이러한 절기들의 용어가 올바른가? 라는 의문이 들 때가 많다. 이에 본 호에서는 오래전 기고에서 부분적으로 논한 바 있지만, 다시한번 대림절과 성탄절에 관한 여러 용어들을 분석하면서 어떤 말들이 적합한지를 논하고자 한다. II. 대림절? 대강절? 강림절? 구주 강림절? 올바른 절기 명칭은? 대림절에 관한 용어들을 보면, ‘대강절’(待降節)’, ‘대림절(待臨節)’로 표현하기도 하고, 과거의 개편 찬송가에는 그 분류나 교독문의 제목을 ‘강림절(降臨節)’로 했다가 지금의 찬송가에는 ‘구주 강림’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용어의 불일치 때문에 어떤 이는 ‘대강절은 성탄절 앞에 지키는 절기이고, 대림절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릴 때이다’라는 자의적인 해석을 하는 경우도 보았다. 이런 같은 한 절기를 두고도 각각 다른 용어들 때문에 예배학 등의 실천신학과 국문학을 전공하고 실천신학을 강의하기도 하는 필자의 경우도 이런 난립한 용어들 때문에 고민할 때가 많다. 결국 2006년 9월에 한국 찬송가 공회에서 발간했고, 거의 전국교회에서 사용하는 현재 찬송가의 교독문 제목과의 통일성을 위해서 본 교회는 구주 강림절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한국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절기 명칭은 ‘대림절’인 것 같다. 이에 본 지면에서는 대림절로 통일해서 논하도록 하겠다. 대림절은 어떤 절기인가? 먼저 전체 교회력에 의하면, 큰 두 주기를 중심으로 한 여섯 절기가 있다. 즉, 부활절과 성탄절 주기인데, 부활절 주기는 사순절과 부활절을 지나 오순절로 마무리 된다. 반면 성탄절 주기는 지금의 절기인 대림절로 시작하여 성탄절과 주현절로 끝이 난다. 이 중에서 대림절의 유래를 보면, 전통적으로 성 안드레 기념일(S.t. Andrew's Day)인 11월 30일을 기준으로 이날에 가장 가까운 주일로부터 시작한다. 주로 11월 27일에서 12월 3일 사이의 한 날로부터 시작되어 성탄절 전날까지 22일에서 28일 정도 지켜지며, 주일로는 성탄절 4주 전부터 시작된다. 대림절의 뜻은 라틴어로 Advent인데 ad와 venire의 합성어이며, 영어로는 ‘to come to’로 ‘오다’란 뜻이다. 즉 대림절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다’는 뜻이다. 한자로는 이런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린다는 의미에서의 ‘기다릴 대(待)’와 오신다는 뜻의 ‘임할 臨(림)’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대림절은 이미 오신 성탄절을 기다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더 나아가 앞으로 다시 오실 재림 예수님을 대망하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이에 대림절은 이미 오신 초림이나 오실 재림을 기다리는 두 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다. 또한 이런 의미에서 ‘내려올 降(강)’, ‘임할 臨(림)’의 ‘강림(降臨)’도 적합하다. 이에 현재의 찬송가는 ‘구주 강림’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III. 성탄절에 관한 용어와 결론 “정부가 성탄절을 기독 탄신일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맞느냐?” 어떤 목사님이 울분을 토하면서 필자에게 한 말이다. 어법상 잘못된 말은 아닌 것 같아서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좀 더 알아보겠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각종 자료와 나름대로의 연구를 해 본 결과 성탄절 용어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먼저 가장 보편적인 명칭은 ‘거룩할 성(聖)’, ‘태어날 탄(誕)’, ‘계절 절(節자)’의 성탄절이다. ‘거룩한 분이 태어나신 절기’라는 말이다. 그다음 근래에 와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명칭은 ‘크리스마스’(Christmas)이다. 이는 라틴어인 Christ(그리스도)와 예배란 뜻인 Missa(미사)의 합성어였다가 영어로 표기되면서 Christmas가 되었다. 정확한 뜻은 “그리스도에게 드려지는 예배”이다. 간혹 “크리스마스 예배드린다”고 하는데 이는 Missa(미사)와 예배가 중복된 것으로 바른 표현이 아니다. 또 하나의 명칭은 ‘X-mas’이다. 여기의 ‘X’는 ‘그리스도’를 뜻하는 희랍어 ‘Kristovs’(크리스토스)의 첫 글자인 ‘X’를 사용하면서 생겨난 용어이기 때문에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X는 미지수나 부정적인 기호에 많이 사용되기 때문에 오해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기독 탄신일은 어떨까? 기독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한자음이기 때문에 문제는 없다. 단지 평소 사용하지 않는 단어라서 어색하게 느껴질 뿐이다. 결론적으로 모두가 잘 아는 대림절과 성탄절 용어들까지 그 정확한 의미와 사용에는 혼란이 있다. 이는 큰 문제는 아니지만, 절기에 대한 바른 의미와 인식, 또한 용어 통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다. 올바른 기다림과 기쁜 성탄절이 되시기를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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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19
  • [정우승 목사] 하나님을 위한 아웃사이더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자주 사용되는 신조어 중에 ‘인싸’와 ‘아싸’가 있다. ‘인싸’는 인사이더의 줄임말로 쉽게 말해 사교성이 좋고 인기가 많은 사람이다. 항상 무리의 중심에 있고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기질이다. 반대로 ‘아싸’는 아웃사이더의 줄임말로 혼자 있기를 좋아하고, 무리에 잘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특히 조용히 자기만의 세계를 즐기는 성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 아웃사이더란 말은 중세 시대에 기독교 국가에서 기독교인들이 이방인들을 아웃사이더라고 불렀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후 영국의 젊은 평론가인 콜린 윌슨은 이 말을 어떤 시대의 사회 가치 체계의 상식 밖에서 사는 사람으로 새 뜻을 부여하였다. 이방인, 이교도 외에도 소외자, 부적응자, 반역자 등 그 사회의 부정적인 면을 의식적으로 사는 사람을 뜻하게 된 것이다. 그러기에 현대적 이미지의 아웃사이더란 자기 자신의 양심에 자기가 아웃사어더라는 것에 갈등을 느껴서는 안 되며 또 그 가치 세계에서는 아웃사이더로 사는 것이 자신에게 비단 육체적으로 괴롭더라도 정신적으로는 편해야 한다. 한국사에도 이런 아웃사이더로 살았던 인물이 많지만 그 전형적 인물로 세조정란에 저항한 김시습을 들 수 있다.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일찍이 출가하여 중이 되었다. 어느 날 세조가 원각사에서 수륙제(水陸齊)를 베푸는데 신승으로 부름을 받았다. 하얀 누비옷을 입고 청어 한 두름을 가지고 임금 앞에 나갔다. 중과 고기라는 상반된 시위로 풍자를 한 것이다. 그러자 세조가 미친 중이라 하여 내쫓았다. 후세의 유학자들은 김시습에 있어 체질적으로 싫은 불의를 기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중이라는 형태를 택했을 뿐이라고 평가한다. 그를 참 스승이라 하여 많은 중들이 추켜올리고 가르침을 내려달라고 했을 때, 그는 소 한 마리와 소 먹일 꼴을 가져오게 하여 그 꼴을 소 뒤에 놓아두고 깔깔 웃으며 방으로 들어가 버린 일이 있었다. 이를 두고 ‘소 뒤에 꼴 두기’라 해서 사람이 희미하고 어둡고 무식한 것을 이르는 속담으로 전해진다. 자신에게 불도를 배우려는 어리석음을 이와 같이 표현한 것이다. 옛날 재상들이 행차를 할 때는 벽제(辟除)라 하여 사람들의 왕래를 금지시킨다. 서거정이 벽제 행차 때 남루한 차림의 김시습이 불쑥 나와서 ‘야, 서거정 편안한가?’ 하며 재상의 법도에 저항하기도 하였다. 김시습은 야밤에 <이소경>을 소리 높여 읽었다. 그리고는 엎드려 흑흑 울었다. 이와 같은 김시습의 울음은 암울한 시대를 향한 울음이었다. 아웃사이더로서 고독을 우는 것이었으며, 스스로를 소외시킨 책임을 우는 것이었다. 성경에도 아웃사어더로 자처한 인물이 있다. 바로 사도 바울이다. 바울을 고소하는 자들이 벨릭스 각하 앞에서 바울을 평가하는 말이 참 놀랍다. (사도행전24:5)에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라고 평가한다. 한 마디로 바울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걱정이다. 그리고 다음 종교재판을 위해서 받기 위해서 베스도 각하 앞에 서게 된다. 전후 사정을 다 들어본 후 베스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바울의 행동에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는 말이 (사도행전26:24)에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라고 말씀하다. 이에 바울은 그렇지 않음을 말하는데 (사도행전26:25)에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라고 답변을 이어간다. 바울은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향해서 ‘미쳤다’는 소리를 하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만일 자기가 미쳤다면 하나님을 위해서 미친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5:13)에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라고 말씀한다. 이제 우리도 하나님을 위한 아웃사이더로 사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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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19
  • [조희완 목사] 충성의 보상 (느9:7-8)
    영국 北部에 위치하고 있는 <리버풀>에는 영국 제2의 국립미술관인 <워커>미술관이 있는데, 그 미술관에는 보는 이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만한 유명한 그림 한 점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그 그림은 바로 <콘터러>라는 화가가 그린 “충성”이라는 그림입니다. 이탈리아의 <베스비우스> 화산이 폭발을 해서 <폼페이> 도시가 화산재와 용암으로 뒤덮이는 장면을 그린 그림입니다. 화산재와 뜨거운 용암(鎔巖)이 <폼페이>를 향해서 흘러내릴 때 수많은 사람들이 탈출을 하느라고 도시 전체가 아비규환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을 관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장면은 바로 그런 아비규환의 혼란 속에서도 성문(城門) 곁에 묵묵히 서있는 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 사람은 바로 그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입니다. 뜨거운 용암이 강물처럼 흘러내리고 화산재가 우박처럼 쏟아져 내리는 그런 절대 절명의 위급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맡은 일인 성문을 지키는 일에 충성을 다하는 자세로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그 한 폭(幅)의 그림을 통해서 충성(忠誠)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어려운 일이 닥쳐와도 서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아무리 손해를 보더라도 내게 맡겨진 일을 묵묵히 감당하는 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환경에 따라서 요동을 치더라도 내 자리를 지키는 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충성은 너무나 귀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반드시 충성하는 자를 기억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오늘날 신자들은 충성 없는 신앙생활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충성 없는 신앙생활은 형식에 그칠 뿐입니다. 하나님은 충성을 요구하시고 충성하는 자에게 반드시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첫째로, 충성하면 자손이 복(福)을 받습니다.(느9:7-8) 둘째로, 충성하면 상(床)을 받습니다.(마25:23) 셋째로, 충성하면 관(冠)을 받습니다.(계2:10) 우리 모두 충성하는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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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19
  • [오성한 목사] 복음 전도 치유 실행 2. 빛
    빛이 되려고 한다고 빛이 되는 것이 아니다. 빛이 되려고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미 빛이다. 일어나 빛을 발하라고 하신다.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다”라고 하신다(사60:1). 빛으로 만들어 놓으셨음을 감사와 감격으로 받도록 믿음으로 생각을 바꾸게 하면 된다. 우리는 빛이 아니었다. 오직 여호와가 “네 위에” 임하셨단다.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셨단다(사60:2). 우리는 빛이다. 우리 위에 임한 주님의 임재가 빛이 되게 하셨다. 우리가 빛이 되려고 노력해서 빛이 된 것이 아니다. 우리를 빛이 되게 하셨기에 일어날 수 있고, 빛을 발할 수 있다(사60:1). 우리가 빛인 줄 몰라도 우리는 빛이다. 그분의 영광이 임했기 때문이다(사60:2). 빛을 발하는 것은 빛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빛인 줄 알고, 빛의 삶을 적용하면 된다. 존귀한 사람인 줄 알고, 존귀한 사람답게 살면 된다. 빛으로 만드신 과정을 알고 믿으면, 감사와 가격과 흥분이 올 수밖에 없다. 빛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빛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 당신께서 빛이신데 우리 위에 강림하셨다. 회개는 잘못을 뉘우치고 예수를 믿는 것이다. 우리의 힘으로 죄를 조금도 해결하지 못하기에 예수께서 이 땅에 왔다 가셨다. 예수께서 희생하심으로 이루어 놓으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진정한 회개다.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를 인정하는 것은 예수께서 해 놓으신 일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해 놓으신 것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일을 인정해 주는 것을 기뻐하신다. 우리는 믿음으로 은혜 안에 있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드러내는 것이 빛으로 사는 것이다. 우리의 할 일은 하나님의 은혜만 드러내면 된다. 그러면 행복하다. 그러면 신난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난다. 우리가 할 유일한 일은 예수께서 하신 일만 받아 적용할 일이다. 이사야 시대를 생각해 보라. 선지자가 활동한 시대는 언제나 어두움이 깊은 시대였다. 스스로 빛이 될 수 없는 시대임을 절실히 보여 주신다. 이 어둠의 때에 하나님께서 임하시겠단다. 그것이 이사야의 예언의 핵심이다. 주님만이 빛이시다. 그 분이 우리 위에 임했기에 우리가 빛이다. 십자가 부활로 그렇게 하셨다.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왕이 통치할 때 이사야는 활동했다(사1:1). 웃시야는 하나님을 거역하다 나병에 걸려 죽었다. 왕실의 묘실에도 장사지내어지지 못했다. 아하스 왕 때는 온갖 이방 우상을 섬기며, 타락의 극치를 달렸던 때다. 아하스가 극심한 범죄에 빠졌을 때 이스라엘과 아람을 연합시키셔서 유다의 아하스를 치게 하셨다. 아하스는 숲의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듯 떨렸다(사7:2).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보내 말씀하신다. “아하스야, 너 나와 교제하자. 나를 의지해 보아라. 이미 너에게 약속한 것이 있다.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는데 증표를 구해보라”고 하셨다. 그러나 아하스는 증표를 구하지 않았다. 안타까웠던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아하스의 상태와 상관없이 영원한 증표를 주셨다. 스스로 빛으로 임재하심을 선포하시고 싶으셨다. 제발 “하나님의 임재를 알고 살라”고 애타하셨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다”(사7:14)라고 하신다. 무슨 말인가 철저히 빛이 아닌 아하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너를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이다. “나는 너를 버릴 수 없다. 내가 너와 함께한단다. 영원토록 함께 한단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믿어라”는 것이다. 아하스야 “너는 임마누엘로 살아라”는 말씀이다. “너는 빛이다”고 선언하신 최고의 장면이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사랑엔 두려움이 없다. 임마누엘을 믿으면 두려움이 없어져 믿음으로 살 수 있다. 사랑이신 하나님이 없어 두려운 것이다. 두려움 때문에 모든 범죄가 일어난다. 근본적으로 두려움 때문에 명예가 있어야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명예욕이 생긴다. 물질도 많아야 불안하지 않다. 두려움 때문에 욕심이 생긴다. 모든 죄의 근원에는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마태복음 5장의 핵심은 염려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두려움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임마누엘 한 것을 알면, 두려움 없이 담대하고 행복하다. 심령이 가난해 진다. 마음이 청결해 진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다.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다(딤후1:7). 빛이 되는것은 쉽다. 예수를 믿으면 빛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할 일을 어렵게 만들어 시키시는 분이 아니다.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빛이다. 믿는 것은 쉽다. 그것이 복음이다. 그래서 복음을 가르쳐 내야한다. 임마누엘 하시고 싶으셔서 십자가를 지셨다. 우리가 빛이 아닌데 주께서 스스로 꺼진 등불에 불이 되셨다. 그래서 빛이 되는 것은 쉬운 정도가 아니라 저절로 된다. 저절로 보다 수운 것은 없다. 저절로 과실을 맺는다(요15장). 내 안에 빛 되신 주님이 불이 되어 등불이 비췸을 알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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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19
  • [박봉석 목사]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어느 교회 예배 시간에 한 남성이 모자를 쓰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목사님은 예배를 인도하면서 계속해서 그 사람이 눈에 거슬렸습니다. 그래도 참고 예배를 인도하고는 예배 후에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예배 태도를 바르게 해야 하겠습니다. 왜 모자를 쓰고 예배를 드리지요?” 그 말에 그 사람은 오히려 목사님에게 이렇게 반문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왜 안경을 쓰고 예배를 인도하십니까?” 그 말에 목사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야 내 눈이 나빠서 그렇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겸연쩍은 듯이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도 머리가 나빠서 모자를 썼습니다. 저는 교회 옆 병원에서 항암치료 중에 있는데 머리 모양이 다른 사람이 보기에 흉한 것 같아서 모자를 쓴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은 한 청년이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앞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청년이 계속 눈에 거슬리던 한 장로님이 예배를 마친 후 청년에게 다가 가서 물었습니다. “너 그 머리 색깔이 뭐니? 그 모습으로 예배를 드려서야 되겠니?” 그 질문에 그 청년은 도리어 장로님에게 반문했습니다. “장로님도 머리 염색을 하셨잖아요? 장로님은 왜 염색을 하셨습니까?” 장로님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야 내 머리가 백발이라 검게 염색을 한 것이지.”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이 웃으면서 말을 했습니다. “검은머리를 노랗게 염색한 것과 백발을 검게 염색한 것을 똑같은 것으로 봐주십시오. 제가 사업을 새로 시작했는데 그 사업의 주 고객이 청소년들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머리를 염색했으니 양해해 주십시오.” 진실은 겉으로 드러나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다 알 수 없는 것임을 알게 해 주는 이야기들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부분에서 틀린 말입니다. 하나만 보고는 그 사람의 면면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의 단편적인 모습을 보고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단정해버립니다. 그러나 그것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다른 좋은 면들이 훨씬 더 많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에 대해서 어느 한 단면만을 보고 그 사람을 다 판단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것은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잘 모르면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 복음서에 보면 그런 장면이 나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 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그 때 배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면서 “주님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그들의 믿음이 작은 것을 책망하시고는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서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그 장면을 본 제자들은 마태복음 8장 27절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라고 말입니다.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그 분의 말씀과 능력을 늘 접했으면서도 예수님을 예수님답게 알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 것이 아니라 열을 보고도 진짜 알아야 하나를 알지 못했던 것이지요. 독자 여러분, 인간이란 그런 존재인데 어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속담을 진리로 받아들인 자들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나타내 보이기도 전에 사람들에게 정죄 받고 거부당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사람에 대해서도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생각으로 대해서는 안 되고, 오히려“열을 봐도 진짜 알아야 할 하나를 알지 못할 수 있다.”는 겸손함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에 대해서 중단 없이 말씀을 통해서 배워갈 수 있고, 또 사람에 대해서는 섣불리 판단하여 단정해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인간은 한계를 가지고 있기에 하나님이나 사람에 대해서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열을 봐도 진짜 알아야 할 하나를 알지 못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언제나 그 겸손함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그리고 사람을 대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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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19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49 : 기도했습니다? 기도합니다? 와 설교 후의 기도
    I. 서언(序言) 오랫동안 본지를 통하여 기독교인의 생활 용어 바로 사용하기 코너를 연재해 오면서 항상 느끼는 것은 타종교에서 유래된 용어를 바로 사용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우리 기독교 용어도 바로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너무 많다는 것도 문제였다. 이런 차원에서 본 호에서는 잘못 사용하고 있는 기도 용어 중에서 기도의 종결 의미인 ‘기도했습니다’와 ‘기도합니다’에 대한 내용과 설교자의 설교 후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 기도의 종결 의미는 과거형인가 현재형인가? 우리가 늘 기도드리는 용어 중에 기도를 마칠 때 종결 의미의 내용이 여러 형태가 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예를 들면 과거 시제인‘기도했습니다’와 ‘드렸습니다’등의 경우와 ‘기도합니다’와 ‘기도드립니다’의 현재 시제로 마치는 경우이다. 어떤 경우가 적합한가 를 논한다면 다음과 같다. 1. 기도했습니다와 기도드렸습니다의 경우: 이 두 가지 경우는 시제로 볼 때는 앞에서 기록한대로 과거형이다. 어떤 면으로 볼 때는 기도의 시작이 10분 전이나 5분 전이었다면 마칠 때는 기도한 내용이 이미 과거가 되기 때문에 과거 완료형인 앞의 경우가 문법적으로는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도는 그 성격상으로 볼 때는 거의 다 하나님께 현재의 형편과 미래를 향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기도의 종결 의미는‘했습니다, 드렸습니다’ 등의 과거 시제형의 종결 의미는 적합하지 않다. 2. 기도합니다와 기도드립니다의 경우: 앞에서 논한 대로 기도의 모든 내용은 현재와 미래 를 향한 내용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종결 의미는 과거가 아닌 현재와 미래형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기도의 마침은 항상 현재형인 ‘기도합니다’와 ‘기도드립니다’로 되어야 한다. 그래야 기도한 내용이 현재와 미래지향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III. 하나님께 설교하는 형태인 ‘합니다’는 올바른 기도인가? 설교가 끝난 후 많은 설교자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조금 전 설교한 내용을 다시 요약해서 반복하는 형태의 기도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설교 후의 기도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설교한 내용을 들은 교인들이 지키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부 설교자들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간구형이 아닌 하나님께 다시 설교하는 것과 같은 형태일 때가 많다. 이는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예를 들면, 설교가‘서로 사랑해야 된다’는 내용이었다면, 기도는‘하나님,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하게 해주시옵소서’ 라는 바람의 내용이 되어야 될 것이다. 하지만 여러 경우들을 보면, ‘하나님,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하나님,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라는 등의 기도를 함으로서 마치 하나님께 설교하는 듯한 내용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필자도 간혹 그런 경험들이 있다. 왜 그랬을까? 를 생각해 보면 20~30분 동안 교인들에게 선포형의 설교를 계속하다가 바로 이어서 기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도 계속 습관적으로 설교형 기도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런 내용은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께 설교하는 형 태가 되기 때문에 매우 합당하지 못한 경우이다. IV. 맺는 말 서론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기독교 용어 중에서도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흔히 하는 말로 ‘바른 말인 것 같지만 바르지 않는 말’들이 너무 많다. 그 이유는 우리의 한글날이‘세계 국어의 날’로 선정될 정도로 매우 우수한 말이기는 하지만, 형용사와 한자어가 많고, 다른 언어에는 거의 없는 경어(敬語)가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항상 강단에 서서 많은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에게 있어서는 항상 사용하는 단어나 문구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항상 드리는 기도의 내용도 다시 한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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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04
  • [오성한 목사] 복음 전도 치유 실행 - 권능의 삶
    성경에 약속하신 약속이 죽음 이후에 이루어질 약속인가, 지금 주신 축복인가? 예수께서는 천국을 가져오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하신 말씀은 천국을 주시겠다는 말씀이었다. 천국은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다. 천국은 지금 우리 안에 있다.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보좌가 우리 몸 안에 있다. 마귀는 이미 용서받은 죄를 더 구체화하며,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릴 수 없다고, 거짓 생각을 확신시킨다. 죄의식과 죄책감으로 사람을 사로잡아 버린다. 우리는 성령님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에게 주신 것을 누리며, 영의 생각으로 풍성해져야 한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필수다. 능력의 통로이며 하나님의 뜻이다. 성령님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신다. 우리를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셨음을 말씀을 통해 조명하실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아는 것은 언제든지 담대히 하나님의 보좌로 나갈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의롭게 된 자신을 확신하면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보좌를 볼 수 있다. 의로운 자는 언제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보좌에 담대히 나갈 수 있고, 성경의 모든 약속이 자신의 것임을 확신하게 된다. 성령님의 중요한 사역은 우리 자신이 의로운 자임을 확신하게 하시는 것이다. 의로운 자는 그 몸이 성전이다. 그 몸에 보좌가 임했다. 그 몸에 천국이 임한 것이다. 이것을 성령님은 보게 하신다. 성령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믿게 하신다. 믿음은 생각이기 때문에 성령님은 생각을 바꾸신다.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으로 바꾸려고 동의만 하면 된다. 질문에 답하며 당신의 생각을 확인해 보라. 천국을 실재로 지금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죽어 가는 천국에 가서야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걸까? 우리는 죽어 가는 천국에 가면 승리를 하는가? 우리는 죽어 가는 천국에 가면 정복자가 되는가? 우리는 죽어 가는 천국에 가면 주신 능력을 모두 발휘할 수 있는가? 우리는 죽어 가는 천국에 가서야 실패하지 않는 것인가? 완전한 속량을 죽음 이후로 미뤄놓을 때가 많다. 이 땅은 연약한 것뿐일까? 죽어서 천국가면 강해지는 것일까?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라는 말씀이 우리가 언제 충만해 진다는 말인가? 이 땅에서 인가? 죽어 가는 천국에서 충만해 진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7)라는 말씀은 우리가 언제 넉넉히 이긴다는 말인가? 지금인가? 나중에 죽음 이후란 말인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라고 했다. 언제 모든 것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먼 훗날 죽어 가는 천국에서 그렇게 되겠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8:1)라고 했습니다. 언제 우리는 정죄함이 없는 것인가? 그런데 우리에게 정죄만 강하게 들려오고 있지 않는가? 언제 우리는 정죄함 없게 되는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려야 한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일방적인 화평의 해결책을 그냥 받아들여라”는 말이다. “이미 내가 너를 정죄함 없는 곳에 두었으니 그 안에 그냥 살아라.”는 말씀이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미 나를 새로운 피조물로 우리를 빚으셔서 새로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음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이다. 언제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는가? 죽음에 이르러서야 우리에게 실현되는 것인가, 아니면 지금인가?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하심이라"(고후 5:21) 우리는 언제 하나님의 의가 되었는가? 주님이 이루신 일은 추상적인 일이 아니다. 만약 그분이 지금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을 주실 수 없고, 죽음 이후에 주실 수 있다면 죽음이 구원자가 되어야 하는 우스운 일이 벌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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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04
  • [정우승 목사] 봉황은 본시
    옛말에 <봉황은 본시 죽순이 아니면 먹지를 않고, 오동나무가 아니면 집을 짓지 않는다>는 글이 있다. 봉황은 신비롭고 고귀한 뜻을 지닌 상상의 새이다. 고대 중국에서 신성시했던 상상의 새로 ‘기린, 거북, 용’과 함께 사령(四靈)의 하나로 여겼다. 수컷을 봉(鳳), 암컷을 황(凰)이라고 하는데 그 생김새는 문헌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봉황은 동방 군자의 나라에서 나와서 사해(四海)의 밖을 날아 곤륜산(崑崙山)을 지나 지주(砥柱)의 물을 마시고 약수(弱水)에 깃을 씻고 저녁에 풍혈(風穴)에 자는데, 이 새가 세상에 나타나면 천하가 크게 안녕하다고 한다. 다른 것보다는 전설의 새 봉황은 ‘아무 것이나 먹지를 않고, 아무 곳에나 앉지를 않는다’는 것에 읽는 이로 하여금 잠시 생각에 잠기게 한다. 사람으로 치면 강직하다고 할까? 올곧다고 할까? 좋은 게 좋다거나 두루뭉술한 사람은 아닌 게 확실하다. 조선시대에 성리학(性理學)이 있었다. 중국 남송의 주희가 집대성한 학파이다. 도덕의 실천과 인격과 학문의 정진을 추구하였는데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기에 들어와서 조선의 통치이념이 되었다. 길재, 정도전, 권근, 김종직에 이어서 이이, 이황에 이르러 조선 성리학으로 체계화되었다. 이 성리학의 가르침을 뼈 속 깊이 실천한 선비들이 많았다. 평택에 우거했던 우남양은 하루 종일 집안에서 독서만 했고, 제삿날 제주를 손수 뜨기 위해 문밖을 나가는 이외에는 볼 수도 없었다. 친구도 어찌나 가리는지 서경덕과 최수성 이외에는 확인시켜 집에 들이지도 않았다고 한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그 잘못됨을 통탄하여 오랜 단식 끝에 굶어서 죽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성리학에서는 철저히 ‘존우비좌(尊右卑左)’를 지켰다. 그러기에 명문이나 명족을 우성(右姓)이라고 하고, 학문을 숭상한다는 말을 우문(右文)이라고 했다. 반면에 바른 가르침이 아닌 것을 좌도(左道)라고 하고, 나쁜 관직으로 옮겨가는 것을 좌천(左遷)이라 했다. 영어에서도 오른쪽(right / left)과 바른(right / wrong)이 같은 단어이다. 이와 같은 존우사상은 한국 선비의 생활습속에 여러모로 규제되어 왔다. 이를테면 광화문같이 세 개의 문이 있는 궐문을 드나들 때에도 중문은 왕과 중국 사신의 전용문이고, 사대부나 양반은 오른쪽 문으로, 중인 이하의 서민들은 왼쪽 문으로 드나들었다. 한말까지 종로에서는 천민은 좌측통행을 했고, 양반은 우측통행을 했다. 노비를 매매할 때에도 왼손잡이면 반값으로 떨어졌다고 하니 웃지 못할 일이다. 필자가 성리학을 찬양한다거나 오른 쪽이 더 낫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님을 알 것이다. 배운 것을 실천에 옮기려고 작은 것까지 조심하였던 조선시대 선비정신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우리 조상들은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위패(位牌)는 반드시 밤나무로만 만들었다고 한다. 성경을 배우고, 성경대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선비들이 배웠던 성리학을 생활 속에 강직하게 실천한 만큼 오늘날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좋겠다. 성리학자들이 좌우를 조심스럽게 구분하였던 것처럼 성경도 이와 비슷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신명기5:32)에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여호수아1:7)에도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라고 말씀한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답답할 만큼 지켜나가는 성도들이 있다. 그런 성도들을 향하여 같은 교인들이 너무 지나치다고 험담을 하기도 한다. 과연 예수님도 그런 험담을 하실까? 지금 성도는 너무 세상과 잘 어울리고 있다. (요한일서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 말씀을 오늘 하루 만이라도 문자 그대로 실천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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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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