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11-29(금)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실시간뉴스
  • [박동철 장로] 3일천하 ‘갑신정변 140년’ 이 땅 복음의 큰길 열었다
    1884년 12월 4일 밤 10시경. 이날은 최초로 지금의 체신청 우정국 개청식이 있는 날이었다. 행사를 마친 후 내·외 귀빈이 함께하는 저녁 연회가 열리던 시각. 갑자기 ‘불이야’ 하는 소리와 함께 총소리가 들리고 비명소리가 진동했다. 당시 김옥균, 홍영식, 서재필 등 젊은 엘리트 개화파 세력들이 정변을 일으킨 현장의 이야기다. 고종 즉위 20년 되는 해 일본은 개화 후 나날이 발전하고 중국과 서양 제국들이 조선의 개화와 통상압박을 하던 혼돈의 시기였다. 조선 26대 왕 고종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은 갈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급진개화를 주장하는 김옥균 파와 점진적 개화를 주장하던 민영익 등 세력 간 갈등 속에 급진개화파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정변이었다. 올해 12월 4일은 갑신정변 1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갑신년 쿠데타는 성공하는 듯 했으나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개입 3일 만에 평정하고 주모자들은 멸문지화 되거나 일본으로 도피했다. 갑신정변은 당시 일본의 지원으로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갑신정변이 성공했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됐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운명이 외세 강국에게 점령당할 수밖에 없는 비운의 상황이었다고 사가들은 말하고 있다. 역사적 평가와 상황을 접어두고 당시 사건의 현장을 통해 하나님이 이 나라 복음을 위해 위대한 계획을 펼치고 있었던 은혜를 찾아 보고자한다. 불을 지르고 쿠데타 세력들이 반대세력들에게 총을 쏘며 공격을 하는 통에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칼에 난자되어 중상을 입었다. 죽을 수 밖에 없던 상황에 연회에 참석했던 미국 루시어스 푸트(Lucius H. Foote) 공사가 긴급히 미국에서 두 달 전에 선교사로 입국한 한사람을 찾는다. 바로 최초의 의사선교사 호러스 알렌 선교사를 찾아 치료함으로써 민영익은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알렌 선교사는 누구인가? 우리의 기독교사에 거장으로 남아있는 알렌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중국으로 파송되었다. 이즈음 1882년 조미(朝美)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선교사의 마음에 조선의 선교사가 되고 싶어 자원한다. 갑신정변 두 달 전 1884년 10월 6일에 한양으로 입국한 선교사이다. 알렌의 치료로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살아남으로써 3일 천하정변은 끝이 나고 고종의 권력은 유지 될 수 있었다. 민영익을 살린 알렌에게 고종은 무엇을 원하냐고 물었다. 당연히 알렌은 병원을 지어 달라고 했다. 고종에게는 너무 쉬운 요청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변의 주동자 홍영식의 가족들이 처단되고 폐허된 집을 병원으로 개원하게 했다. 바로 최초의 병원 광혜원(나중 제중원)이다. 알렌선교사가 병원을 짓고 자유롭게 선교를 하게 되는 큰길이 열리게 된다. 하나님의 역사는 벼락처럼 전개 된다고 했다. 1885년 봄 일본에 머물러있던 아펜젤러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함으로써 조선 땅의 예수 복음이 날개를 달았다. 언더우드는 오늘의 연세대와 알렌 선교사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을 세우는 엄청난 일을 했다. 아펜젤러는 이승만을 탄생케 한 배제학당을 세운다. 뒤이어 스크렌턴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와 이화학당을 세우고 천대받던 조선의 여성들이 눈을 뜨게 했다. 조선역사가 망해가던 시기 비운의 시간표가 돌았지만 선교사들을 통해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게 하는 복음의 역사(役事)가 역동 했던 것이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축복이다. 한 나라를 부흥 발전시키는 무한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조선 5백 년의 역사는 정말 캄캄한 세상이었다. 사대부들이 타락한 유풍(儒風)의 문화 속에서 백성을 착취하고 나라의 발전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나라가 망해가는 때 나라를 살리고자 급진개혁세력들이 일으킨 정변은 사람의 위대한 뜻에도 불구하고 3일천하로 끝난다. 뒤이은 역사는 결국 일본의 36년 종살이해야 하는 비운의 역사를 겪어야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70년 종살이 후 회복의 역사를 썼다. 우리는 140년 전 위대한 영적 거장 몇 분의 선교사들이 오늘의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들어내는 초석을 낳았던 역사를 돌아본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가. 세계 10대강국을 자랑한다. 희망 속에 겪는 사회문화의 심각한 갈등을 보면 나라가 망할 것 같은 위기다. 이런 위기 때 그때의 역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야 할 때가 아닌가.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11-25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2) (민12:11-16)
    미리암은 위대한 믿음의 여인이 맞습니다. 하지만 여선지자라는 위대한 칭호를 받은 후 신앙이 제자리걸음을 했습니다. 미리암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역사에 발맞추지 못하고 여전히 애굽에서의 사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모세가 없는 40년 동안 여자로서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진짜 지도자인 줄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진짜 지도자인 모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교만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40년 만에 나타난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기절초풍할 일들을 일으킵니다. 세계 최강의 애굽과 바로도 모세 앞에 쩔쩔맵니다. 애굽을 초토화 시켜버렸고, 애굽의 장자를 죽여 씨를 말려버렸습니다. 여호와의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임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만 대면하시고 바다까지 갈라 마른 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미리암은 40년 동안 여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을 영도해 왔지만 40년 만에 갑자기 등장한 모세의 위용 앞에서 입도 벙긋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선지자의 위치에서 볼 때 비록 인간적으로는 누나요 동생이지만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적 권위를 지닌 모세였기에 고개 들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교회들끼리, 특히 목회자들끼리 묘한 질투심과 경쟁심이 있습니다. 곁의 교회가, 다른 교회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갖습니다. 잘못되면 입은 안타깝다고 하면서 속은 이유 없이 고소하고 상대적인 만족을 얻습니다. 교회의 주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망각한 무서운 죄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이 교인들 사이에서도 발생합니다. 곁의 성도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잘못되면 입은 위로하는 것 같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자신의 신앙과 믿음이 좋은 것으로 위로받고 착각합니다. 아주 나쁜 모습입니다. 악한 모습입니다. 교만의 극치입니다. 어쩌면 이것보다 더한 것이 목회자들끼리의 보이지 않는 견제와 경쟁입니다. 주변의 교회가 갑자기 성장하면 상대적 박탈감을 가집니다. 사람이다 보니 비교가 안 될 수 없습니다. 특히 가까운 교회에서 독보적인 성장을 보이면 심각한 스트레스까지 받습니다. 목사 자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의 중직자들이나 성도들도 자연스럽게 목회자에게 압박을 가합니다. 자신은 1년이 가도 전도 한 명 하지 않으면서 교회 부흥을 입에 올립니다. 십일조나 감사헌금은 고사하고 선교나 불우이웃이나 개척교회, 농어촌교회, 은퇴하신 목사님, 가난한 신학생들을 위해 특별헌금 한 푼도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재정을 입에 올립니다. 더 심각한 것은 설교자들의 교만입니다. 설교하는 사람이다 보니 설교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설교자의 훌륭한 설교에 은혜받기는커녕 허점과 잘못을 찾기에 바쁩니다. 그러니 설교에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현상은 모세를 대적하는 미리암의 아류들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땀방울 하나, 눈불 방울 하나 다 주의 것입니다. 우리는 비교 대상도 아니요, 경쟁상대도 압니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며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자들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특히 목회자들은 아바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평생 잊어선 안 됩니다. 물론 아바타라 하지만 예수님의 아바타니 영광스럽습니다. 진짜 선지자, 진짜 목회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미리암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사실 미리암은 누구보다도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몰라서 범한 죄도 무섭지만, 알고도 범하는 죄는 더 무섭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단순히 그 사람의 성향이나 기질을 나타내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모세의 통치를 방해했고, 이스라엘의 진행을 가로막았습니다. 감히 모세의 영적 권위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감히 같은 선지자였지만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교만은 이 모든 영적 권위 앞에서도 원망과 비방의 고개를 들게 합니다. 호시탐탐 모세의 허점과 실수를 염탐합니다. 교회도 은혜를 계산하는 성도가 있고, 실수와 잘못을 찾아내는 성도가 있습니다. 기회가 왔습니다. 구스 여자가 돌아왔습니다. 이전에 이미 정리된 문제인데도 교만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영적분력을 상실했습니다. 미리암은 십보라가 돌아오자 속에 숨겨놓았던 원망과 불평을 표출합니다. 원망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사실까지 망각해버렸습니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4-08-07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1)
    성경 어디에도 미디안의 제사장 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는데 문제 삼은 장면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실에 대해 그 어디에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하는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사건 때문에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백성들이 구스 여인 십보라를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통치에 십보라를 문제 삼지 못하도록 아예 입도 벙긋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버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명을 주셨고, 그 사명 감당하기 위해 애굽으로 오는 길에 느닷없이 모세를 죽이시려고 한 것은 구스 여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임이 분명합니다. 분명한 이유는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것에 있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 같은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발견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려 하셨습니다. 완전한 모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이셨습니다. 완전히 죽이셨습니다. 그래도 십보라는 할례언약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긴박한 순간에 할례를 행하면 남편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과 비교도 되지 않는 신분입니다. 단순히 액면가로 볼 때 우리는 시아버지와 관계한 여인입니다. (마1:3)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우리는 우상의 신전에서 몸을 팔던 기생이었습니다. 우리는 과부요,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남편을 사지로 몰고 왕과 간음한 유부녀였습니다. (마1:5-6)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인데 죄인인 줄도 모르는 죄인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답도 없으면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제 딴에 잘 사는 줄 알지만 무익한 인생이요, 단 하나도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혀에는 속임만 있습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입에는 저주와 악독만 가득합니다. (롬3:10-14)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런 우리가, 그런 우리의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도 달렸고, 예수님의 부활에 나도 부활했다고 고백합니다. 사탄이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의를 제기하고 문제 삼을 것이 수두룩한 우리입니다. 아니 우리는 문제 그 자체들입니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합니다. 십보라가 할례 언약을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십보라가 할례를 행하여 남편을 살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불가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입으로 시인합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보라가 할례언약을 아는 것과 할례를 행하는 것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서십니다. (마10: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눅12: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합니다. 문제 제기도 못합니다. 입도 벙긋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의 예배 자리에, 예수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앉혀주십니다. (계12:22-23)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이런 은혜를 받은 성도입니다. 그래도 원망하고 비방하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완전한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할례를 시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에 거하며, 주일마다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4-07-10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오피니언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독자기고] 인공지능을 활용한 목회와 교회교육
    “목사가 설교 준비할 때, 컴퓨터와 인터넷을 사용하다니, 믿을 수가 없네. 목사가 설교를 준비할 때는, 노트에 펜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야지, 컴퓨터 자판으로 설교문을 두드려 작성한다는 것은 불경하기 이를 데 없네” “ 목사가 설교를 준비할 때는, 요즘 만년필로 쓴다는 신식 목사들이 있다는데, 참으로 통탄스럽구먼. 자고로 목사가 설교를 준비할라치면, 먹을 갈면서 마음을 다지고, 붓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을 다하여 작성하는 법이거늘, 참 말세일세” 이 이야기는, 문명의 변화에 적응이 더딘 것을 빗대어 인터넷에서 유행하던 이야기였다. 한국 교회는 복음이 전해졌던, 구한말부터 다양한 문화와 문명의 보급처였다. 세상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다양한 신문물이 교회로부터 일반인들에게로 전달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이들이 교회라고 하면, 시대를 앞서가는 리더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추세는 199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1980년대에 한국 교회 교회학교에서“융판설교, 인형극, 문학의 밤” 같은 프로그램들은 많은 학생들을 교회로 이끌어 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는 교회학교의 부흥과 교회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1990년대에는 한국 교회에 액정비전이 도입되면서, 예배를 드릴 때에 성도들이 성경책 찬송가를 읽고 부르기 위하여 시선을 아래로 두지 않고, 찾는 데에 시간을 쓰지 않고, 즉각적으로 앞을 바라보면 예배하는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이 같은 사실을 홍보하여, 액정 비전의 판매가 급증하였다). 하지만 2000년대가 되면서 과학기술이 급속도로 변화하면서 문명의 흐름이 시시각각 변화하고, 교육공학을 필두로 다양한 이론들이 도입되면서 시대는 이전의 그 어떤 변화들보다 급변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2020년 코로나를 전후하여 메타버스와 인공지능의 등장으로 인하여 하나의 기술에 적응하기도 전에, 새로운 도구들과 개념들이 쏟아지고, 이러한 변화는 다양한 영역들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인공지능을 활용한 교육기법이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으며, 가전제품에 인공지능이 기본적으로 탑재되기 시작했다. 2018 년 10월에 인공지능(AI)이 그린 그림이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4억 9천5백만 원에 낙찰되었다. 2024년 11월에는 인공지능을 탑재한 휴머노이드 로봇이 붓으로 그린 그림이 국제 경매기업 소더비스에 의해 경매에 출전돼 전 세계로부터 27건 이상의 입찰이 들어갔다. 이 그림의 예상 가격은 1억 7천만 원 정도였는데, 최종 낙찰된 가격은 18억 원이었다. 또한 법조계, 제조업, 미디어 산업에도 인공지능의 역할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인공지능이 경쟁력과 실용적인 측면에서 압도적인 효율을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공지능에 의해 달라지는 변화는, 카페와 식당에서도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인공지능의 대표주자로 알려진 공개된 챗GPT 3.5는 2022년에는 미국 변호사 시험을 통과하였지만, 2023년 3월 업그레이드된 챗GPT 4.0은 상위 10%의 성적을 기록할 만큼 월등한 향상을 보였으며 챗GPT는 챗GPT 4o, 챗GPT 4 o1으로 더욱 업그레이드되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을 자랑하고 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누가복음 16:8) 라는 말씀과 같이 세상 문명은 급속도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며, 능률을 고도로 높이기 위하여 다양한 활동들을 하게 된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들이 이러한 변화를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면서, 한국 교회는 낡은 것으로 치부되는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물론 하나님의 교회는 복음과 영성으로 세워진 하나님의 집이며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디모데전서 3:15). 하지만 기술과 도구는 가치중립적이다. 새로이 도입된 기술과 생성된 도구가 어떤 이들에 의하여 사용되는가에 따라서 그 효과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승합차가 한국교회에 얼마나 요긴하게 사용되었는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하지만 승합차가 범죄집단에 사용될 때 심각한 부작용과 손해를 입히게 된다. 이는 인공지능에도 마찬가지이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도입될 때 이에 적응하지 못하였던 목회자들도, 점차 사용하게 되면서 그 편리한 성능으로 목회와 교회교육에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 인공지능은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얻은 효율성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기능들을 보유하고 있다. 필자는 인공지능이 본격적으로 소개될 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하면서 큰 도움을 얻었고, 2023년과 2024년에 <어린이 다니엘 기도회>에서 설교할 때에도 큰 도움을 얻었다. 현장에서 600명의 유치부에서 초등학교 6학년과 온라인으로 참석하는 16,000명의 학생과 효과적으로 소통하기 위하여 인공지능 챗GPT를 활용하여 PPT 슬라이드 365장을 제작하여, 60분간의 설교 시간에 활용하였다. 인공지능은 비단, 이러한 부분뿐만 아니라 목회현장에서, 교회교육의 여러 영역에 탁월한 도움을 주고 있음을 필자는 직접 체험하였다. 이러한 경험들과 인공지능을 교회에서 활용할 때 유용한 실제적인 방법들을 나누고 싶어서 “나는 챗GPT를 이렇게 사용한다.”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소개하였다. 이 책이 출간되고 난 이후에도 인공지능은 급속도로 변모하면서 새로운 기술이 연이어 소개되기에, 이러한 내용들을 소개하기 위한 세미나를 준비하고 있다. 요셉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천문학을 활용하여 관개시설을 관리하여 농업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던 애굽제국에서, 그 누구도 예측조차 못한 7년 풍년, 7년 흉년을 하나님의 지혜로 예견하고, 이 시기들을 지혜롭게 극복하게 하였다. 다니엘은 당시로서는 가장 발달한 문명을 가진 바벨론의 점성학도 예측못할 세계역사의 미래를 하나님의 지혜를 받아,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하면서 증거하였다. 하나님은 역사와 시대의 주인이시기에, 인공지능의 시대에도 당연히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 급변하는 시대에 불변의 복음을 전하려면 다양한 시대의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필요한 것은, 종교개혁시대의 루터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활용한 것에 우리는 충분한 교훈을 얻는다. 그러므로 인공지능의 시대에 인공지능을 이해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목회자와 그리스도인들의 시대적 사명이다
    • 오피니언
    • 기고
    2024-11-26
  • [박동철 장로] 3일천하 ‘갑신정변 140년’ 이 땅 복음의 큰길 열었다
    1884년 12월 4일 밤 10시경. 이날은 최초로 지금의 체신청 우정국 개청식이 있는 날이었다. 행사를 마친 후 내·외 귀빈이 함께하는 저녁 연회가 열리던 시각. 갑자기 ‘불이야’ 하는 소리와 함께 총소리가 들리고 비명소리가 진동했다. 당시 김옥균, 홍영식, 서재필 등 젊은 엘리트 개화파 세력들이 정변을 일으킨 현장의 이야기다. 고종 즉위 20년 되는 해 일본은 개화 후 나날이 발전하고 중국과 서양 제국들이 조선의 개화와 통상압박을 하던 혼돈의 시기였다. 조선 26대 왕 고종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은 갈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급진개화를 주장하는 김옥균 파와 점진적 개화를 주장하던 민영익 등 세력 간 갈등 속에 급진개화파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정변이었다. 올해 12월 4일은 갑신정변 1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갑신년 쿠데타는 성공하는 듯 했으나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개입 3일 만에 평정하고 주모자들은 멸문지화 되거나 일본으로 도피했다. 갑신정변은 당시 일본의 지원으로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갑신정변이 성공했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됐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운명이 외세 강국에게 점령당할 수밖에 없는 비운의 상황이었다고 사가들은 말하고 있다. 역사적 평가와 상황을 접어두고 당시 사건의 현장을 통해 하나님이 이 나라 복음을 위해 위대한 계획을 펼치고 있었던 은혜를 찾아 보고자한다. 불을 지르고 쿠데타 세력들이 반대세력들에게 총을 쏘며 공격을 하는 통에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칼에 난자되어 중상을 입었다. 죽을 수 밖에 없던 상황에 연회에 참석했던 미국 루시어스 푸트(Lucius H. Foote) 공사가 긴급히 미국에서 두 달 전에 선교사로 입국한 한사람을 찾는다. 바로 최초의 의사선교사 호러스 알렌 선교사를 찾아 치료함으로써 민영익은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알렌 선교사는 누구인가? 우리의 기독교사에 거장으로 남아있는 알렌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중국으로 파송되었다. 이즈음 1882년 조미(朝美)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선교사의 마음에 조선의 선교사가 되고 싶어 자원한다. 갑신정변 두 달 전 1884년 10월 6일에 한양으로 입국한 선교사이다. 알렌의 치료로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살아남으로써 3일 천하정변은 끝이 나고 고종의 권력은 유지 될 수 있었다. 민영익을 살린 알렌에게 고종은 무엇을 원하냐고 물었다. 당연히 알렌은 병원을 지어 달라고 했다. 고종에게는 너무 쉬운 요청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변의 주동자 홍영식의 가족들이 처단되고 폐허된 집을 병원으로 개원하게 했다. 바로 최초의 병원 광혜원(나중 제중원)이다. 알렌선교사가 병원을 짓고 자유롭게 선교를 하게 되는 큰길이 열리게 된다. 하나님의 역사는 벼락처럼 전개 된다고 했다. 1885년 봄 일본에 머물러있던 아펜젤러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함으로써 조선 땅의 예수 복음이 날개를 달았다. 언더우드는 오늘의 연세대와 알렌 선교사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을 세우는 엄청난 일을 했다. 아펜젤러는 이승만을 탄생케 한 배제학당을 세운다. 뒤이어 스크렌턴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와 이화학당을 세우고 천대받던 조선의 여성들이 눈을 뜨게 했다. 조선역사가 망해가던 시기 비운의 시간표가 돌았지만 선교사들을 통해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게 하는 복음의 역사(役事)가 역동 했던 것이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축복이다. 한 나라를 부흥 발전시키는 무한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조선 5백 년의 역사는 정말 캄캄한 세상이었다. 사대부들이 타락한 유풍(儒風)의 문화 속에서 백성을 착취하고 나라의 발전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나라가 망해가는 때 나라를 살리고자 급진개혁세력들이 일으킨 정변은 사람의 위대한 뜻에도 불구하고 3일천하로 끝난다. 뒤이은 역사는 결국 일본의 36년 종살이해야 하는 비운의 역사를 겪어야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70년 종살이 후 회복의 역사를 썼다. 우리는 140년 전 위대한 영적 거장 몇 분의 선교사들이 오늘의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들어내는 초석을 낳았던 역사를 돌아본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가. 세계 10대강국을 자랑한다. 희망 속에 겪는 사회문화의 심각한 갈등을 보면 나라가 망할 것 같은 위기다. 이런 위기 때 그때의 역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야 할 때가 아닌가.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11-25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48 : 기독교? 천주교? 개신교? 구교? 신교? 등의 차이는?
    I. 서언(序言) “당신의 종교는 무엇인가?”란 질문에 흔히들 우리는 “기독교를 믿는다”라고 답하는 경우가 많다. 평생 교회를 섬기는 목사이지만 이런 면으로는 답변을 하기가 애매할 때가 종종 있다. 예를 들면 천주교를 말할 때도 가톨릭(Catholic), 구교, 천주교 등의 여러 명칭들이 있고, 우리 개신교도 신교, 예수교, 기독교, 개신교 등으로 말한다. 왜 이렇게 다양할까? 더 나아가 어떤 명칭이 올바른 것일까? 란 의문이 든다. 이에 본 호에서는 이들 명칭의 유래와 그 의미를 논하여 보면서 우리 자신들의 올바른 용어를 정립해 보고자 한다. 또한 본 기고의 내용들은 김석한 교수의 ‘교회 용어 바로쓰기’와 강춘오 목사의 교회연합신문의 이에 관련된 사설의 내용과 기타 자료들을 일부 참고하였음을 밝혀둔다. II. 각 명칭들의 유래와 의미 분석과 차이점 1. 그리스도교(Christianity)와 가톨릭 교회(Catholic church)란?: 교회 명칭이 처음 사용된 계기는 안디옥에서 일반인들이 교인들을 맨 처음으로 부를 때 ‘그리스도인’이라고 했기 때문에(행11:26) 그 이후로 ‘그리스도교’란 이름이 붙여졌다. 하지만 로마 제국이 AD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부터 교회는 5대 교구로 나눌 정도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교구와 지역에 따라 이에 대한 의견을 달리하는 교회들이 생겨지게 되었고, 이에 대한 하나됨을 위해서 ‘보편성’이란 뜻인 ‘가톨릭’을 넣어서 ‘거룩한 가톨릭 교회’(The hory Catholic church)라고 했다. 그렇지만 1054년 동서교회의 분리가 되면서 서쪽은 ‘로마 가톨릭’, 동쪽은 ‘희랍정교회’로 교회의 명칭도 나누어졌다. 2. 예수교(耶蘇敎)와 기독교(基督敎)란?: 중세시대에 와서 가톨릭 교회의 부패로 인한 교회 개혁이 일어나면서 개혁자들을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했다. 이를 유럽의 칼빈주의 교회들은 주로 ‘개혁교회’라고 불렀고, 영어를 사용하는 칼빈주의 교회에서는 ‘장로교회’라고 했다가 이 둘을 합쳐서 부를 때는 모두 개혁교회라 했다. 그 이후 개혁자들의 일부가 중국 등의 아시아권으로 선교하면서 ‘예수님’의 한자의 음역(音譯)을 따라서 야소교라 했고, 이는 바로 ‘예수교’가 되었다. 또한‘그리스도’도 음역에 맞추어‘기리사독’이라 했다가 나중에 기독교(基督敎)라는 명칭으로 사용했다. 3. 개신교(改新敎)와 천주교(天主敎), 신교(新敎)와 구교(舊敎)란?: 우리나라의 경우는 1945년 해방 이후에 예수교에서는 가톨릭교회를 ‘로마교’라고 불렀으며, 당시의 국가적인 표준어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구분하기 위해서 구교와 신교로 불렀다. 하지만 천주교 측은 구교란 이미지가 오래된 구습이고 신교는 새로운 신선한 이미지를 연상케 한다고 불평했다. 이에 가톨릭은 한자어의 음역인 상제(上帝)와 천주(天主) 둘 중에서 천주를 택했다. 그 이유는 당시의 교황청이 라틴어인 Deus를 ‘천주’로 번역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를 당시의 천주교 신자였던 ‘장면’총리가 1960년에 이를 받아들여 정부의 공식 명칭으로 구교를 천주교로, 신교를 개신교로 바꿈으로서 지금까지 표준 명칭어로 사용되고 있다. III. 제언과 결어(結語)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이런 명칭들의 유래와 의의에는 나름대로의 논리성이 있다. 하지만 천주교와 우리와는 엄격히 구분되어야 됨은 확실하다. 다만 우리의 교회에는 어떤 명칭이 적합할까? 김석한 교수는 개신교보다는 ‘개혁교회’라고 해야 한다고 했고, 강춘오 목사는 ‘신교’가 더 적합한 말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적인 표준 명칭으로 본다면 천주교와 개신교를 합쳐서 기독교로 하고 있고, 우리 스스로를 개신교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모두 한자어의 음역이기 때문에 원어와 영어식 표현을 제외하고는 우리 한국어로는 한자어로 음역한 그대로 개혁교회이든 개신교이든 구분을 두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작은 소견이다.
    • 오피니언
    • 칼럼
    • 기독교인 생활용어
    2024-11-21
  • [조희완 목사] 최선의 결과 (막2:1-12)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인 <코카서스>산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산은 너무 높아서 언제나 구름이 봉우리를 가리고 있습니다. 용감한 독수리 한 마리가 그 산을 정복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날아올랐지만 여러 차례 실패를 하고 말았습니다.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드디어 독수리가 그 산 꼭대기에 오르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정상에 오른 독수리는 대단한 성취감에 젖어서 자신의 자랑스러운 날개를 활짝 뻗으면서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거미 한 마리가 나무 가지에 거미줄을 치면서 낄낄대며 웃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독수리는 속으로 “아니 저 거미가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지?”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자 거미가 독수리를 바라보면서 말하기를 “너는 여기까지 죽을 고생을 하면서 올라왔지만 나는 네 날개 아래 붙어서 하나도 힘을 들이지 않고 올라 왔단다!”하면서 독수리를 놀리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세차게 불어온 바람에 그만 거미가 산 밑으로 굴러 떨어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에 담겨있는 뜻은 바로, “내가 노력하지 않고 얻은 기쁨은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직접 수고하고 노력해서 얻은 기쁨이라야 오랫동안 누릴 수 있는 것이지, 노력하지 않고 얻은 기쁨은 오래 갈 수가 없습니다. 물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수고하고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야 가치가 있는 것이지 수고하지 않고 불로소득(不勞所得)으로 얻은 물질은 가치가 없고 도리어 해(害)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땀 흘리고 노력해서 얻은 것이 좋은 것이지만 노력 없이 얻은 것은 별로 좋은 것이 못됩니다. 노력하면 반드시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것도 다같이 함께 노력하면 더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함께 노력할 때 어떤 결과가 있습니까? 첫째로, 최선을 다하면 기적을 보게 됩니다.(막2:1-5) 둘째, 최선을 다하면 영광을 얻게 됩니다.(대하20:20-23) 셋째로, 최선을 다하면 부흥이 일어납니다.(행6:1-7) 금년에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합시다.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2024-11-21
  • [정우승 목사] 탄탈로스(tantalus)를 아십니까?
    영어 단어 중에 탄탈리아즈(tantalize)가 있다. 우리말로 해석하면 “애타게 하다, 감질나게 하다” 라는 뜻으로 옥스퍼드 사전에는 ‘얻을 수 없는 것을 보여주며 괴롭히거나 장난치다’ 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인물 탄탈로스(tantalus)에서 유래하였다. 탄탈로스는 제우스의 아들이며, 현재 터키의 고대도시 시필로스의 통치자였다. 그가 하늘에서 알게 된 비밀들을 폭로한 이후 신들의 분노에 직면하게 된다. 탄탈로스가 신들의 음식인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훔쳐 인간 세상으로 가져오려 했기 때문에 신들의 심판을 받게 된다. 그래서 그는 자기 아들을 죽인 후 시신을 조각 내어 신들에게 음식으로 바치려고까지 했다. 그는 신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범죄를 저질렀지만 신들이 그에게 내린 잔인한 처벌은 항상 똑같았다. 즉 탄탈로스는 목까지 차는 물속에서 한 모금의 물도 마실 수 없었으며, 저승에서는 달콤한 과일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그는 결코 한 입도 먹을 수 없었다. 물과 음식이 손에 닿을 위치에 있었지만 탄탈로스는 영원한 목마름과 허기짐이라는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손이 닿을 듯 말듯 애타게 하면서, 결국 얻을 수 없는 것을 보여주며 괴롭히는 고통”을 일컬어서 영어단어 탄탈리아즈(tantalize)를 탄생시켰다. 또한 이 단어에서 유래된 것이 있는데, 물이나 액체가 부풀어 오르다가 일정 한계에 이르면 그 모두가 쏟아져버리는 화학실험기구인 ‘탄탈로스의 접시’가 이로부터 유래하였다. 이와 유사한 기능을 가진 술잔으로 계영배(戒盈杯)가 있다. 즉 넘침을 경계하는 잔이다. 이 잔은 술을 어느 선 이상 따르면 술이 밑으로 흘러 나간다. 이 술잔에는 작은 구멍이 있어서 술이 약 70% 정도 차면 작은 구멍을 통해서 술이 잔 밖으로 새어나가도록 만들었다. 이는 술잔을 가지고 과음을 경계하기 위한 것으로 일명 절주배(節酒杯)라고도 한다. 중국의 공자가 제나라 환공을 찾아갔는데 환공은 늘 계영배를 손에 들고 있었다. 환공은 이 계영배를 ‘늘 곁에 두고 보는 그릇’이라 하여 <유좌지기(宥坐之器>라고 불렀고, 공자도 이를 본받아 항상 곁에 두고 스스로를 가다듬으며 과욕과 지나침을 경계했다고 한다. 과거에 우리나라 선비들도 연잎들이 빗방울을 아래 쏟아버리는 것을 보고 ‘연잎은 자신이 감당할 만한 빗방울만 싣고 있다가 그 이상으로 되면 미련없이 비워버린다’는 말을 하면서 정신수양을 했다. 또한 기품이 높은 선비들은 집에서 학(鶴)을 길러, 그의 지조에 나쁜 영향을 줄 어떤 사람이 찾아오면 구구하게 연설로 변명하느니 그저 학을 어깨에 얹고 나감으로써 무언의 항변을 했던 것이다. 진주에 낙향에 있던 영남의 선비 최영경(1529-1590)을 영의정 유성룡이 찾아갔을 때 남루한 토의에 짚신을 신은 최영경이 학(鶴) 한 마리를 어깨에 얹고 나와서 맞이했다. 이를 보고 영의정 유성룡은 백 마디 말보다 더 깊은 뜻을 미리 헤아리고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돌아 나왔다고 한다. 정말 멋있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에 넘치는 것들에게 대해서 많은 경고문을 날리고 있다. (딤전6:6)에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유익이 되느니라” 라고 말씀한다. 자족하는 마음이란 남의 것을 바라보지 않고 주님이 내게 주신 것을 감사하며 누리는 삶이다. 또한 자족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세상 정욕을 거슬러 올라가는 저항의 몸짓이다. 김용삼의 시 <호박꽃 감사>를 보라. “장미처럼 예쁘지 않아도 노란 별 모양이 된 것 감사, 종종 내게 날아와 귓가에 윙윙 노래를 불러주는 꿀벌 친구가 있어 감사, 밤이면 둥근 달 쳐다보며 둥근 열매의 꿈을 꾸게 한 것 감사, 그리하여 가을 농부의 얼굴에 웃음꽃 피우게 하는 것 감사”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바울의 힘찬 외침을 들어보라 (고후6:10)에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아멘
    • 오피니언
    2024-11-21
  • [하수룡 장로] 이중금고
    나의 아내가 사용하는 화장대가 보통 사용하는 설합과 다르게 안쪽으로 손잡이가 없는 비밀스러운 작은 함이 있어 평소에 아끼고 귀중하게 사용하는 보석을 담는 것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중장치로 안쪽 깊숙한 곳에 함을 설치하여 다른 사람이 잘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여 보석이나 귀중한 물건을 잘 보관하는 것을 보고 이중 금고는 신기한 느낌마저 들었다. 병원이나 약국에서는 마약 성분의 약을 보관할 때에는 반드시 이중 금고에 잠금장치가 된 곳에 보관한다고 한다. 책임 관리자가 이중 금고에 넣어둔 치료 약을 목적에 맞게 사용하지 않으면 사회에 큰 해악을 끼쳐 사회적 문제가 발생한다. 이중 금고에는 비밀스럽게 귀중한 것을 보관하지만 그중에 위험한 마약을 보관하기 때문에 분명한 것은 선용하지 못하고 악한 쪽으로 마음이 뺏기면 본인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패망을 가져다준다. 성경에 어느 부자가 소출이 풍성하여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어 자기 곡간을 헐고 이중 금고처럼 비밀스럽게 창고를 지어 평안히 먹고 즐겁게 살 것을 획책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아가면 비밀스럽게 모아둔 재물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다. 세상의 귀중한 재물을 가지면 모두가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고 하나님께 부요한 자가 되지 못하여 불행을 자초한다. 기독교인이나 자기의 일을 도모하는 어떤 사람도 이중 금고를 만들어 하나님의 눈을 속이면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져 침륜과 멸망에 빠지고 만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아간도 물질에 미혹되어 탐심을 품어 망했다. 그가 노략한 외투 한 벌은 차치하더라도 은 이백 세겔과 오십 세겔의 금덩이를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금덩이를 깊이 묻고 그 위에 은을 묻는 치밀한 인간계획을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중 금고를 만들어 다른 사람이 금을 찾지 못하도록 이중으로 땅속 깊은 금고에다 꼭꼭 숨겨 놓은 것이다. 한 사람의 탐욕이 빚은 죄로 인하여 아이성 전투의 패배는 우리에게 큰 두려움과 교훈으로 다가온다. 이중 금고로 인한 탐욕은 죄를 낳고 처참한 심판을 받는다. 이 심판의 골짜기가 바로‘아골 골짜기’다. 우리에게 어느 부자나 아간은 탐욕에 대한 경종을 울려준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그리스도인은 아골 골짜기의 비극을 초래하는 주인공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됨을 명심하고 또 명심하자.
    • 오피니언
    2024-11-21
  • [양대식 목사] 베스트관계목회(7)
    관계 교육 공부하고 교육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관계에 대해 가르치고 교육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관계라는 렌즈를 끼고 읽고 공부해야 합니다. 성경은 ‘관계의 책’이라고 불릴 정도로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관계, 수많은 관계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관계의 하나님이십니다. 관계의 중요성 관계 맺는 비결 등 관계에 대해 성경을 공부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관계 특강, 관계 세미나 등 다양하게 관계에 대해 교육해야 합니다. 왜 관계가 깨지는지 연구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관계가 중요한데 관계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목회자는 관계를 가르치고 교육해야 합니다. 관계에 대해 가르치고 교육하는 지혜 중 하나가 좋은 관계 맺는 삶의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목회는 관계입니다. 관계가 잘 될 때 설교를 잘 듣고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평소에 교회와의 관계, 성도와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관계가 나쁘고 깨지면 설교를 듣지 않고 가르침 받는 것을 거절합니다. 목회에서 관계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사탄은 사소한 것 가지고 관계를 깨뜨립니다. 인간에 대해 기대치를 줄이고 사랑으로 대해 주어야 합니다. 관계를 배우고 교육해야 합니다. 관계 리더십의 핵심 ‘리더는 누구인가’가 중요하고 리더십이 중요합니다. 목회자는 ‘영적 리더’인데 리더십이 좋아야 합니다. 리더가 누구냐에 따라 공동체의 성패가 결정됩니다. 리더십은 영향력인데 목회자는 리더로서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리더요 최고의 리더십으로 최고의 영향을 끼쳤습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을 공부하고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섬김과 사랑의 리더십인데 한 마디로 관계의 리더십입니다. 사랑과 섬김으로 관계를 맺으시고 관계 리더십으로 많은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관계 리더십으로 많은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관계 리더십의 핵심은 세 가지입니다. 1. ‘준다’는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주는 헌신과 희생의 삶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다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주신 희생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관계 목회는 주는 것입니다. 마음과 시간 내어 주고 모든 것을 영혼 구원을 위해 주어야 합니다. 목회는 희생입니다. 2. ‘살린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살려 주는 리더십입니다. 병든 자, 낙심된 자, 죽은 자를 살려주신 예수님이십니다. 사탄은 도둑질을 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살아나는 기적이 있었습니다. 관계 리더십은 살려 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3. ‘세운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세우는 리더십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세우시고, 전도인을 세우시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관계 리더십은 세우는 것입니다. 사탄은 파괴자입니다. 예수님의 관계 리더십을 배워야 합니다. 관계 맺는 목적 관계 맺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인맥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한번 맺은 인연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좋은 사람과 관계 맺는 것이 축복입니다.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관계 맺은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관계가 잘되면 행복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관계가 무너지면 불행해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관계 맺는데도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관계 맺는 목적이 사람을 얻고 영혼 구원에 있어야 합니다. 만나서 관계 맺고, 먹고 마시고, 교제하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영혼 구원하는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관계 맺는 것이 전도여야 합니다 좋은 인간관계가 되면 전도가 됩니다. 사도바울도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서 융통성의 리더십을 가지고 한 영혼이라도 더 얻고자 했습니다. 사람을 실족시키지 말고 덕을 세우고 남에 대해 배려와 친절로 전도의 효과가 나타나야 합니다. 관계를 위해 시간을 내고, 섬기고, 대접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을 얻고 영혼 구원하는데 있어야 합니다. 좋은 인간관계는 전도의 비결입니다.
    • 오피니언
    • 논문/책
    2024-11-21
  • [박봉석 목사] 버렸습니까?
    필자는 계절 중에 가을을 참 좋아합니다. 여름이 지나서 시원한 바람이 부는 계절이라서 좋고 또 다른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가을의 나무들이 필자에게 좋은 메시지를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가을이 되면 단풍이 들었다가 낙엽이 집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낙엽이 지는 것을 보고 잎이 떨어진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우리 인간의 눈에 보이는 대로 말하는 것일 뿐 나무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다를 것입니다. 나무로서는 잎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잎을 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잎을 버리지 않으면 겨울철 딱딱한 땅에서 빨아들이는 적은 수분과 양분으로는 나무 전체가 온전히 생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버릴 것을 버려서 자신을 줄여야만 겨울을 견디어내고 다음 해 다시 새롭게 충만한 잎들을 피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옹기를 만드는 도공 중에는 일류 도공이 있고 삼류 도공이 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삼류 도공은 자기가 만든 작품이 아까워서 만드는 대로 시장에 내다 팝니다. 그래서 그가 만든 것은 대부분 싸구려일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일류 도공은 아무리 아까워도 완벽한 작품이 나올 때까지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이라도 깨어 버립니다. 그렇게 해서 만든 것이야말로 오래도록 사람들의 찬사를 받는 예술 작품이 됩니다. 일류 소설가와 삼류 소설가의 차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삼류 소설가는 자기가 취재한 것, 자기가 알고 있는 것들을 아까워서 하나도 버리지 못합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것들을 자신의 소설 속에 넣으려고 합니다. 그런 소설은 초점이 명확하지 않고 산만한 그저 그런 소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일류 소설가는 취재한 것이 많고 지식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과감히 버리고 포기할 줄 압니다. 꼭 필요한 내용만 절제된 언어로 표현하여 소설을 써 내려가서 결국에는 명작 소설이 됩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대리석이 있다 할지라도 대리석 그 자체로 내버려두면 그것은 단순한 돌덩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각가가 그 대리석을 다듬으면 훌륭한 예술 작품이 됩니다. 다듬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버릴 것을 버릴 줄 아는 것을 말합니다. 대리석 돌덩이를 정으로 쪼개어서 버릴 것을 다 버릴 때에 비로소 조각가가 원하는 작품이 나오게 됩니다. 버리지 않은 부분이 한 부분이라도 있을 때는 그 작품은 온전한 작품이 되지 못합니다. 언젠가 매스컴에서 자기 집에 온갖 물건들을 산더미처럼 쌓아놓아서 마치 집이 고물상 같이 된 집을 보여 준 적이 있습니다. 그 집의 주인은 별 필요 없는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아까워서 버리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집 안이 쓰레기 더미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언제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믿은 지가 오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예수님 믿기 전에 가지고 있던 죄 된 습관이나 성품이나 말이 내게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자리매김할 수 없습니다. 이제 무엇을 더 얻기 위해서 기도하기 전에 내가 버릴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버릴 때에 비로소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온전히 나타나서 하나님께 영광 된 삶을 살고 또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나오는 ‘자기를 부인하고’라는 말을 쉽게 말하자면 ‘버릴 것은 버리고’ 바로 그 말입니다. 즉 주님이 주신 사명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려는 자는 먼저 주님의 제자에게 있어서는 안 될 것들을 버려야 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지는 마음으로 사명을 감당해도 내 마음에 기쁨이 없고 제대로 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가 혹시 주님의 제자로서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한 것에 있지 않습니까? 독자 여러분, 지금 버릴 것이 뭐 없습니까? 주님의 제자로서 버리지 못한 것이 내게 무엇이 있는지 지금 나를 돌아보십시오. 버릴 것을 버릴 때에 진정으로 얻어야 할 것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버릴 것을 버릴 줄 아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비로소 진정으로 필요한 것들을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 오피니언
    • 칼럼
    • 신앙과 삶
    2024-11-21
  • [김성수 총장] 이 같이 놀라운 창조와 구원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과 그로 인해 철저하게 오염된 창조 세계를 그대로 내 버려 두시지 않고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놀라운 일을 하셨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유일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타락한 인간과 만물을 구속하셨고, 자신과 화해시키는 일은 실로 엄청나고도 신비한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도 놀라는 고백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원하시고 그가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인도하셨으니, 우리는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다. 하나님은 그의 충만함이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흘린 그의 피로 화평을 이루심으로써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그를 통하여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셨다(골1:13-20). 우리 모두의 궁극적인 관심사가 제기하는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답은 창조(Creation), 타락(Fall),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Redemption through Jesus Christ)이라고 하는 우주적 드라마를 기록하고 있는 성경에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신실하게 살기를 소원하는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창조, 타락, 구속의 의미와 그 상호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왜곡되고 불완전한 삶은 많은 경우 성경이라는 드라마의 기본적인 틀을 잘못 이해하는데 많이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먼저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언제나 창조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구원을 창조의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고 단순히 죽음 이후에 누리는 어떤 복락으로만 생각하게 되면 그것은 구원에 대해서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전부가 아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은 하나님이시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를 통하여 만물이 만들어졌고 그가 없이는 만들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요1:1-3). 요한복음의 서두 구절은 창세기의 서두 구절에서 극적으로 이야기되는 창조 이야기를 다시 포착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창조한 동일한 말씀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너희의 구속주, 너희를 모태에서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 나는 만물을 지으신 여호와요, 홀로 하늘을 펴신 이요, 나 홀로 땅을 펴신 이니라. 땅 끝까지 다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요,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사44: :24, 45:22)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우리를 만드신 분이시다. 성경은 창조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신약성경에서는 이 가르침을 재확인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삶에 대한 이원론적이며 분열된 견해에 너무 사로잡혀서 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너무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그 진정한 의미를 간과하고 있다. 그래서 구원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 세상을 건강과 새 생명으로 회복하는 관점보다는 세상에서 도피하는 관점에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함으로써 창조와 구원 사이의 관계에 쐐기를 박아버린다. 사도 바울 역시 구원을 창조 세계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가르치고 있다. 창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창조물 자체도 썩어짐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로 인도될 것이다(롬8:19-21). 세상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고 따라서 구원받을 수 없는 곳이 아니다. 세상은 선하고 아름다운 곳이며 지금도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인간의 타락과 창조 세계의 본질을 분명히 분리해야 한다. 타락과 창조 세계를 동일시하거나 하나를 다른 것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본질적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창세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세상을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인식하게 되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구원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남아있는 유일한 선택은 세상을 가라앉는 배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는 이 세상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이 세상을 넘어선 피안의 세상만을 기대하는 종교로 전락한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구원을 창조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일부 현대 신학자들처럼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창조, 또는 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삶 자체가 구원은 아니다. 구원을 오로지 ‘삶의 과정에 따라 흐르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면, 끊임없는 변화와 성장을 구원의 핵심으로 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여정을 인도할 초월적인 창조주는 사라지고 피조물인 인간이 삶에 대한 자체 규칙과 신념을 만들고 변경해야 한다. 창조와 구원의 의미는 참으로 놀라고 신비하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4-11-21
  • [김경헌 목사] 엘리압(1) (삼상17:28-40)
    본문 앞장에서 하나님의 명을 받은 사무엘은 다윗에게 왕의 기름을 붓습니다. (삼상16:12-13)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 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성경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예고라도 하듯이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아 여호와의 영, 성령으로 크게 감동되는 동시에 사울에게서 여호와의 영이 떠나가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하16:14)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쉽게 입에 올리고 실생활가운데서도 빗대어 표현할 정도로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내용압나다. 오늘 본문은 다윗과 골리앗이 싸움을 벌이 전에 발생한 일압나다. 그런데 의외로 그 장면을 성경은 매우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냥 쉽게 본문을 접하면 소위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이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기적과 같은 승리로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통해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단순히 세상살이에서 골리앗과 같은 상황을 기적과 같이 이기게 되는 복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직전에 전개된 오늘 본문의 기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그 구원을 향한 성도들의 믿음과 오늘날 성도들의 일상생활, 신앙생활, 교회생활 가운데서 쉽게 발생할 수 있는 일들과 상황들을 발견하게 합니다. 먼저 성경은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는 일에 앞서 엘리압과 사울을 등장시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앞서 등장하는 엘리압과 사울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엘리압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화를 냅니다. (삼상17:28)큰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그런데 엘리압의 말을 한 번만 더 들여다보면 철부지한 막내 동생의 어리석음을 꾸짖거나 동생이 무모한 싸움에서 목숨을 잃을 까봐 걱정을 해서 하는 말 같지는 않습니다.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뭔가 다윗에게 쌓인 것이 많은 투입니다. 엘리압은 동생 다윗에 대해 평소 생각보다 욱한 심정을 많이도 눌러 왔던 것 같아 보입니다. 사울의 반응은 엘리압과 정반대로 보입니다. 철부지한 어린 다윗을 타이르는 듯 해 보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떼를 쓰는 다윗에게 못 이긴 듯 최선을 다해 배려하는 듯합니다. (삼상17:37하반절-38)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 투구를 그의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 나라의 존망이 걸려 있는 상황입니다. 골리앗이라는 거대한 이방 장군 앞에 하나님 나라의 군대가 쩔쩔매고 있습니다. 아니 곧 패배하고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이 망할 상황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십대 소년이 나타나 그 위급한 상황을 주도한다는 설정 자체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당나라 군대라고 해도 이런 상황은 전개될 수 없습니다. 더 가관인 것은 엘리압과 사울의 행동입니다. 얼핏보면 엘리압은 이치에 맞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동생 다윗의 목숨 때문에 화를 내는 것 같지 않습니다. 평소에 장남으로서 동생 다윗에게 자격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엘리압 자신이 전쟁을 구경하고 있으면서 동생 다윗에게 나라의 존패가 걸린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의 울분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사울은 왕으로서 많은 배려를 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군복과 놋 투구와 갑옷 까지 입혀주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은 전쟁이 일어나면 말을 타고 제일 앞장을 서는 사람입니다. 이런 장면은 훗날 다윗이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는데도 출전을 하지 않고 궁전에 머물다가 밧세바와의 사건이 터진 것을 발견하기에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엘리압과 사울의 행동이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똑같습니다. 엘리압은 하나님 나라가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고, 이 전쟁의 결과에 따라 자신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그 전쟁을 빌미로 숨겨두었던 자신의 감정을 다윗에게 불같은 화로, 진노로 표출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마치 다윗을 걱정하고 위하는 것처럼 하지만 결국 다윗을 사지로 내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인간적인 배려를 가면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왕의 사명을 자진해서 어린 소년 다윗에게 이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군대로 부름을 받은 성도들 중 특히 오늘날 목사와 장로, 집사와 권사, 중직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그리스도와 복음과 교회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철저히 자기자신의 감정을 우선시 합니다. 항상 자신이 교회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을 다하는 것처럼 떠들다가도 막상 위급한 상황이 발생한다거나 부담스운 부분을 담당해야 할 때는 대단한 아량과 선심을 베푸는 것처럼 위장하여 자신이 해야 마땅한 사명을 다른 사람에게 짐지우는 경우가 교회 안에서 허다이 발생합니다. 평소 교회 안에서 먼저된 자로서, 장자이면서 장자답지 못한 행동으로 동생에게 밀려나 말은 못하지만 분노를 쌓아오다가 어느 순간 교회의 위기, 교회에 문제가 닥치면 교회는 안중에도 없으면서 그것을 빌미로 분노와 악감정을 드러내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4-11-21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