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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권철 목사] 유다 다대오(Jude Thaddaeus'Behind Stories)-동역의 사도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요14:22). 성경에 유다란 이름을 가진 자가 많으나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은 세 명이었다.  첫째, 예수의 동생 유다이다. “이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마13:55). 그는 초기에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았다. 예수님과 한 형제이지만, 같은 배에서 나왔으나 씨가 다른 형제였다. 그가 어린 시절에는 형 예수에 대해 잘 몰랐다. 그래서 예수님이 공생애를 위해 집을 나갔을 때 많은 박해를 했다. 그러다가 부활하신 후에 형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믿었고 비록 사도는 아니었지만 명분상 사도적 반열에 참여하여 예수가 메시야라는 언약의 복음 유다서를 기록했다.  둘째, 예수를 판 가룟 유다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유다의 이름 앞에 꼭 붙이는 한 단어가 있는데 예수를 판 자 라는 말이다.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마10:4),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막3:19),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눅6:16). 요한은 가룟인 아닌 유다가 라고 하였다(요14:22). 가룟 유다는 이 땅에서 가장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남긴 불행한 자였다.  마지막 셋째, 본문에 나오는 다대오 유다이다. 마태와 마가는 다대오라고 불렀다. 요한은 왜 유다를 가룟이 아닌 유다라고 불렀을까? 신약성경이 쓰여 질 때 예수를 판 가룟 유다 때문에 유다란 치욕스러운 이름이 되어 버렸다. 그 이전 구약에서 유다 이름의 뜻은 찬송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자들이 유다라는 이름으로 불러지기를 좋아했다. 예수님도 유다의 가문을 통해서 오셨다. 그러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이후로 유다란 이름은 치욕스러운 이름이 되어 버렸다. 그 이후로 아무도 유다란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 그 이름을 가진 자들도 가룟 유다와 구별하여 불렀다. 다대오 유다는 시몬과 함께 열심당원이었다.   주님의 고민에 동참한 다대오    주님의 구원사역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그러나 제자들도 주님의 죽으심을 잘 모르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그의 괴로운 심정의 비밀을 토로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요13:21). 이제 주님이 마지막 십자가 지실 사실을 말씀하셨다. 이것이 너무도 가슴 아픈 심령의 괴로움이었다. 물론 십자가 지는 육체적인 고통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이지만 그보다 더 큰 아픔과 괴로움은 이 사실을 곁에 있는 제자들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일은 외부에서 일어날 일이 아니고 조직 내에서 반역자가 생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개적으로 떠벌려 말하기도 곤란하여 지금까지 미루어 왔던 것이다.  이젠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 이 사실을 말씀하셨다. 할 수 없이 조직 내에 반란자가 있음을 애기했다.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 이는 제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삼년 동안 훈련하여 준비해 왔는데 그것도 외부에서가 아닌 조직 내에서 반동분자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앞으로 조직의 붕괴마저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떠나가는 것도 문제이지만 자신이 떠난 이후 제자들이 서로 분쟁하여 붕괴될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이 더욱 가슴 아픈 일이었다. 이것은 제자들 상호간에 불신을 조장하는 공동체의 마비현상이 생길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요13:22). 당장에 이 같은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  그때 성미 급한 베드로가 단호하게 말했다.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요13:24). 그는 분노하여 누가 감히 그런 일을 꾸미느냐 하고 분개했다. 그때 가룟 유다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내가 떡 한 조작을 적셔서 주는 자가 그니라”고 하시면서 가룟 유다에게 주셨다. 유다는 그때가 회개 할 절호의 기회였으나 오히려 괴심한 생각을 품어 주님을 팔 생각을 했다. 그때 사단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곳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13:27). 유다는 그 조각을 받고 나간 그날이 영원한 밤이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요13:30). 다대오 유다는 이 같은 주님의 아픈 마음을 다 헤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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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2023-02-28
  • [김경헌 목사] 지팡이니이다!(출4:1-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심장부에 넣어 보호하셨습니다. 보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위용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출범할 하나님의 시간이 도래했습니다. 출애굽이란 성도 개인에게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출애굽이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는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의 출범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80년 전에 구체적으로 그 일을 진행하셨습니다. 성경은 모세를 “아름답다, 잘 생겼다”고 기록하면서 하나님의 소명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출2:1-2) 모세의 어머니와 누나의 치밀한 계획 하에 모세를 바로의 궁정에 침투시키게 됩니다. 4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모세는 어느 정도 완벽에 가까운 준비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출애굽이라는 거사를 실행에 옮겨야 할 상황이 되었는데 모세는 상상도 못했던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대였습니다. 불 신앙과 반역의 역사는 항상 에덴동산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대가 두려워 미디안으로 도망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또 다른 40년 동안의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고, 하나님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못하겠다고 버팁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시기 위하여 보여주신 표적이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과 손에 문둥병이 생긴 것입니다. 얼핏 보면 모세가 빼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확인에, 확인을 하는 장면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지팡이가 뱀이 되고, 뱀의 꼬리를 잡으니 지팡이가 되는 표적을 보여주십니다. 애굽의 요술사들도 그들의 요술로 할 수 있는 요술이요, 마술입니다. 이스라엘을 탈출시키는, 해방시키는, 출애굽시키는, 우리의 입장에서 구원이 시작되는 장면에 하나님께서는 왜 애굽의 요술사도 할 수 있는 표적을 모세에게 보이고 있을까요? 모세의 사역 전부는 지팡이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작부터 지팡이, 10가지 재앙도 지팡이, 출애굽할 때 홍해를 가르던 지팡이의 장관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습니다.(출14:16) 지팡이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지팡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지팡이가 모세의 손에서 떨어지니 뱀이 되었습니다. 구지 성경은 땅에 던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던지면 당연히 땅에 떨어질 것인데 성경이 왜 불필요하게 땅에 던졌다고 표현하고 있을까요? 땅은 뱀의 주 무대입니다.(창3:14) 자신을 지키는 지팡이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 자신을 물고, 자신을 죽이는 뱀이 되었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에서 떨어져 땅으로 가는 순간 뱀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목사를 잡을 때, 목사는 성도들을 물어 죽이는 뱀이 됩니다. 장로가 목사를 잡을 때 목사는 장로들을 물어 죽이는 뱀이 됩니다.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삼위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시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중요한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가 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십니다.(출4:4) 뱀 꼬리를 잡았다가는 순식간에 물려 죽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독이 센, 가장 위험한 뱀이었던 우리의 꼬리를 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물려 죽으셨다. 말씀을 선포하고 목회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뱀꼬리를 잡는 사역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뱀이었던 성도들이 목회자의 손에 들려지면 지팡이가 됩니다. 목회자는 성도라는 지팡이, 교회라는 지팡이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목회자들을 향한 매우 무서운 경고가 있음도 잊어선 안 됩니다. 모세는 이 지팡이를 잘못 사용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심판을 받았습니다.(민20:11-13) 목회자가 손에 들려진 성도라는 지팡이를 맘대로 사용했다가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죽습니다. 목회자의 손에 들려진 교회라는 지팡이를 맘대로 사용했다가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죽습니다. 목회자는 주님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입니다. 모든 능력은 주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지팡이는 지팡일 뿐입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질 때 주님의 지팡이가 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하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의 지팡이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루신 구원은 완전합니다. 오늘의 목회자들은, 교회를 위해 세움 받은 자들은 주님의 손에 들려진 구원의 지팡이입니까? 땅에 떨어져, 땅을 기어 다니며 성도들을 물어 죽이는 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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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3-02-28
  • [박봉석 목사] 이러한 때에도 나를 믿겠느냐?
    한 미국인 선교사 부부가 남미의 아우카라는 곳의 인디언 마을에 가서 선교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선교지의 사정상 한 동안 서로 떨어져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으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받았습니다. 남편이 선교하는 인디언 지역에 대홍수가 나서 그 지역은 완전히 물바다가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1년 동안 온 힘을 다해서 건축하여 거의 완성단계에 있던 선교교육센터가 몽땅 홍수에 무너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부인 엘리자베스는 남편이 1여 년 동안 이 선교센터를 짓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그 모든 노력과 수고의 결실을 볼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마지막 즈음에 송두리째 물에 휩쓸려가 버렸던 것입니다. 남편이 얼마나 실망할까 생각을 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이 소식을 접하고는 망연자실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제 남편이 무슨 잘못을 한 것입니까? 아니면 제가 무엇을 잘못한 것입니까? 제가 이해할 수 있게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런데 얼마 후 남편으로부터 소식이 왔습니다. 남편은 지금 그곳의 상황을 이야기 하면서 소식의 끝을 이렇게 맺고 있었습니다. “절망의 눈으로 선교교육센터를 무너뜨리고 도도히 흘러가는 홍수의 물결을 보고 있는데 주님이 음성이 들려왔소. ‘나의 종아, 이러한 때에도 나를 믿겠느냐?’ 바로 그 때 내 심령이 열리며 나는 감격하여 무릎을 꿇었소. ‘주여, 내가 믿나이다.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주님을 향하여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소.” 독자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습니까? 믿는다면 어떤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까? 내 기대대로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순적하게 이루시는 하나님만을 믿었던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내가 원하는 대로 전혀 안 될 때에도, 내가 계획했던 것과 다르게 일이 이루어져 갈 때에도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까?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기대와 소망이 다 무너질 때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지식과 지혜를 가진 존재라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온전히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존재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유한한 인간은 결코 무한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온전히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이해되어지는 신은 신이 아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무한 세계의 존재이고 우리는 유한세계의 존재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과는 다른 무한한 존재임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에서 나를 이해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나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으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한 존재인 하나님에 대하여 할 일은 따지고 증명하여서 다 이해해보려는 교만이 아니라 어떠한 때에도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내가 모르고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있지만 내가 믿는 하나님은 그것을 다 아시고 계십니다. 그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삶의 상황 가운데서도 낙망하지 않고 그 하나님을 믿고 묵묵히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이러한 때에도 나를 믿겠느냐” 그 하나님의 물음에 “예, 하나님 믿습니다. 어떠한 때에도, 아니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때에도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 대답이 독자 여러분의 대답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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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27
  • [박동철 장로] 교회를 넘보는 마약이 판치는 세상
    ‘마약’판치는 세상, 이를 우습게 여기는 요즘 정치권 지난해 연말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의 의정 활동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 급증하고 있는 마약사범 관련 잘잘못을 따지는 가운데 볼썽사나운 모습이 있었다.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위가 열려 따가운 질의응답이 있는 중, 이태원 참사를 사전에 막지 못한 원인이 마약 단속 때문이라는 의원의 질문이 있었다. 당시 경찰이 마약단속에 대거 동원되는 통에 사고가 커졌다고 따지는 야당의원들의 발언이었다. 사고 발생 후에도 이런 발언들이 정치권에서 요란하더니 국정조사 과정에서도 불거져 나왔다. 이태원 참사의 불행했던 사정을 폄하할 수 없지만 당시 공권력이 마약 단속에 너무 쏠렸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사고조사를 접근하는 태도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대한민국에 급격히 퍼지는 마약 실태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마약중독의 실상이 심각해졌다는 통계가 속속 발표되고 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마약상습 중독자들의 문제가 있었지만 쉽게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만에 마약 구하기가 아주 쉽고 이에 주변 마약중독자가 폭증하고 있다. 단적인 예가 최근 5년 동안 관세청에서 대마 밀수량이 500배로 늘어났다는 공식통계가 있다. 필로폰 코카인등 치명적 중독성 마약이 옛날에도 있어왔지만 구하기가 어렵고 아주 고가였다. 최근에는 이러한 마약유통이 너무 흔해졌고 세계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유통문화가 되어버렸다. 최근 검찰청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전국 마약 단속령을 내리면서 검찰총장이 설명하는 내용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청소년들도 피자 한 판 값이면 쉽게 중독성 마약을 구해서 집단으로 마약을 즐긴다(?)고 했다. 그래서 마약사범 중 30%가 20대들이라는 통계를 설명했다. 그야말로 마약이 세상에 판치는 요즘이 되어버렸다. 마약의 유행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온라인 구매가 쉽고 급속도로 세계로 확산되는 이 세상의 마약 풍속도를 어떻게 해야 할까. 마약의 세상 유행은 곧 교회를 넘보게 된다. 교회가 열린 세상에서 가장 경계의 대상을 꼽는다면 동성애와 마약 등 사회악을 초래하는 원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 세상 동성애 합법화가 세계 대부분의 나라로 퍼지고 마약사범이 온 사회를 뒤덮어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교회는 이를 방어할 한계를 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 끔찍한 세상의 미래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는 진단이다. 성경 창세기 30장에 야곱의 가족 레아와 라헬이 신랑 야곱을 차지하기위해 합환채라는 마약성 최음제를 두고 다툼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합환채는 당시 이롭게 쓰였는지 알 수 없지만 학자들은 최음제로 설명한다. 아무튼 이로 인해 야곱의 복잡한 가정이 분란의 씨가 되었는지 또한 알 수 없으나 야곱의 가족은 자녀들 속에 복잡한 삶의 이야기에 들어간다. 사람은 절대 주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야하는 우리의 운명에 순종하지 못하는 죄 성이 있다. 그래서 틈만 나면 타에 쉽게 의존하고자 하는 습관이 나온다. 마약이 대중화하는 데는 인간이 약물에 의존하면서 고통을 잊고자하는데 있다. 여기에 가장 빠르게 약효를 내어주는 것이 요즘 유행하는 중독성 마약이다. 이러한 마약은 극히 일부 중병의 치료에도 쓰이지만 음란한 성문란 행위에 쓰이면서 중독되고 사회 전반을 병들게 한다. 더더욱 위험한 것은 마약의 중독성은 치명적이다. 주로 폭력배 강도행각 성행위에 쓰이면서 마약이 판치는 문화가 심각하다는 데 있다. 마약이 유행하는 사회를 정화시키는 데는 국가 공권력이 강력한 행사를 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저변 치료와 치유의 기능이 살아있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일정 부문 복음의 대상이 되어 치유의 전파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에 홍수처럼 범람하는 마약의 사회악이 교회를 되려 넘보고 있는 세태가 너무나 무섭고 걱정이다. 마약의 형편이 한계를 잃고 있을 때 하나님이 이를 포기해버릴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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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25
  • [박동철 장로] 감림산 기도원 ‘유엔 평화마을’ 꿈 이뤄지길
    양산 ‘감림산 기도원’ 하면 한국 기독교 교계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저변에 잘 알려져 있다. 감림산 기도원은 경부고속도로 양산 구간 서쪽 영취산 자락에 자리한 국내서 범교단 큰 규모의 개신교 기도원이다. 오가는 길 눈에 잘 띄고 많은 집회가 연중 열리는 등 모범이 되는 기도원으로 유명하다. 감림산기도원이 더욱 이름난 것은 이옥란 원장의 헌신적 기도원운영으로 한국 개신교 교계에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가족과 함께 가끔 휴가 겸 기도원 집회에 몇 번 참석한 기억이 있다. 최근 들어 감림산 기도원 새로운 소식을 접하고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오랫동안 기도원을 헌신적으로 섬기고 있는 지인을 통해서이다. 이옥란 원장의 근황과 앞으로 기도원이 세계 복음화를 위해 계획하고 있는 프로젝트 계획을 들을 수 있었다. 감림산기도원이 계획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기도원 주변에 소유하고 있는 2만여 평의 부지를 출연하여 ‘유엔 평화마을’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지나가는 소식으로 들을만했다. 감림산 기도원의 비전을 구체적으로 듣게 된 것은 기도 후원을 요청하는 지인과 함께 기도원을 방문한 자리에서다. 그리고 이 대형 사업이 꼭 성공하기를 바라는 소망이 생겼다. 며칠 전 기도원 방문자리에서 이옥란 원장을 만날 수 있었고 지인들과 차담을 두어 시간 가졌다. 이 원장은 50년 넘게 사역하며 팔순을 훨씬 넘긴 할머니인데도 불구 그 자리서 열정적으로 그동안의 기도원 사역을 설명해주었다. 자서전도 냈고 전국의 유명 부흥강사목사들이 칭찬하는 기도원원장이라 많이 알려져 있지만 필자가 이 원장의 지나온 사역의 발자취를 듣고 은혜가 되었다. 그리고 남은 여생 계획하고 있는 ‘유엔평화마을’ 조성의 취지를 듣고 감동을 받았다. 이 원장은 55년 전 1968년 10월 당시 수도사로서 평생 나환자를 섬기며 살기로 했다. 어느 날 양산 영취산을 바라보고 지나면서 생각 없이 산으로 들어가 세 평 정도의 땅을 얻어 기도로 무작정 기도원사역을 시작했다고 한다. 55년 기도원사역을 돌아보면서 한 날도 한 시간도 예수님 생각을 잊어본 적이 없고 나라 사랑의 마음을 놓쳐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러한 원장의 믿음이 마지막 사역 ‘유엔평화마을을 조성해보자’는 뜻이라고 밝혔다. 55년 기도원 사역기간동안 수많은 어려움과 함께 기도와 눈물의 광야였지만 80년부터 뜨겁게 몰려오는 기도의 사람들과 함께 큰 규모의 공동체가 되어 복지원과 청소년사역 해외 선교지등의 사역의 열매를 얻었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이 원장은 불타는 나라 사랑의 소망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온 세상이 물질로만 풍요하고 감사가 사라져가고 있다는 영적양심의 마음으로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을 토로했다. 이 원장은 지금껏 하나님이 주신 기도원 주변 넓은 땅을 출연하여 감사해야할 우선순위를 소망하고 있다고 했다. 바로 6.25 참전 나라의 참전 용사와 후손들에게 감사의 공동체를 만들어보자는 마음을 솔직히 설파했다. 이곳에 ‘유엔평화마을’을 만들어 한국전쟁에 헌신해준 16개국에 감사할 수 있는 시스템과 공동체를 조성한다는 계획이었다. 팔순을 넘은 할머니가 어마어마한 이러한 계획을 생각하다니 혼돈이 되었다. 이 원장은 설명 한마디 한마디에 물러섬이 없었다. 6.25 전쟁 70년 국민소득 4만 불을 바라 본 선진국이 된 이 나라가 전쟁 참전국과 당사들에게 감사한 것이 없는 것이 늘 맘 아프다고 했다. 이 프로젝트는 반듯이 나라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질문에 이원 장은 10년이 지나도 이 나라는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민간차원에서 이들 참전국을 섬기고 후손들에게 다시 복음의 정신으로 다가가자는 소망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재산 출연과 함께 정부에 법인 설립 요청을 했으나 별관심이 없음을 개탄하기도 했다. 한 평생 기도원 사역을 통해 한국기독교 부흥의 밀알이 되었고 기도원사역이 점차 사라져가는 이때 일 년 내내 매일 기도집회를 지금껏 잇고 있는 이옥란 원장의 유엔평화마을 섬김의 꿈이 꼭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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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02
  • [박동철 장로] 2022년 성탄절 “신앙의 우울증”
    2022년 성탄절을 보냈다. 교회는 온종일 성탄 예배를 통해 기쁘고 감사했다. 세상 사람들도 성탄일에는 이 땅 예수 탄생의 의미를 한 번쯤 생각해 본다. 올해는 주일과 겹쳐 성탄절이 공휴일 대접을 받지 못했다. 교회도 성탄 예배의 특별함을 맛보지 못했지만 세상 사람들도 특별한 휴일의 특혜를 누리지 못했다. 어김없이 성탄절이 달력에 새겨져있고 거리에도 캐럴이 울리고 있다. 예수 탄생의 역사를 어떻게 다시 설명하랴. 이 땅과 우주 만상의 창조주가 말씀으로 이 땅에 강림하신 로고스(Logos)의 역사이다. 이 위대한 역사의 중심이 예수 탄생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 예수가 태어나서 병들고 약한 자 억압받는 자들을 위로하고 해방 시킨 성인으로 존경을 보낸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 강림의 위대함에 이해가 다르다. 이 땅이 죄악으로 가득 차 멸망의 길로 가는 순간을 예수가 돌이켜 놓은 것이다. 창조주 본인 예수그리스도가 말씀으로 인카네이션(incarnation 成肉身)하셔서 인류의 대역사(大役事)를 쓰게 된 것이다. 우리는 단지 예수의 이 땅 탄생에 흥분하고 문화적으로 즐기고 있다. 예수의 탄생과 공생애 3년에서 남긴 메시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의 도를 행하셨던 과정, 그리고 부활의 길을 우리 마음에서 우려내야 한다. 성탄절의 기쁨과 함께 십자가의 도를 생각해야 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 말하고 있다. 인류는 온통 죄악의 현장이 되어버린 이곳을 바꿀 수가 없었다. 사람은 불가능한 일이다. 창조주 본인이 직접 내려와 세상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실행이 십자가의 도(道)이다. 당시 시대상이 말해주고 있다. 예수의 육적 동족 이스라엘을 둘러싼 배경은 악(惡)의 최악이었다. 로마제국의 모든 억압과 학정에 이스라엘 민족이 모두 눌리어 있었다. 예수는 그 속으로 태어나 로마를 뒤집는 말씀을 전파했다. 당연히 예수는 십자가에 달릴 수밖에 없었다. 최고의 형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다. 예수는 이 땅에 온지 33년 삼 일 만에 세상 바꿈을 단번에 이루었다. 예수의 십자가도의 역사는 발전해갔다. 천년 제국 로마가 서서히 망하고 세기의 역사는 예수로 바뀌었다. 바로 복음의 역사에 세계 역사가 얽혀 발전해 왔다. 사람 사는 온 세상에 눈물이 있고 고난과 기쁨은 있어왔다. 그러나 역사는 교차하면서 복음의 역사는 계속 쓰여가고 있다. 유럽의 복음은 문예부흥과 산업혁명을 이끌어냈다. 유럽의 기독교는 타락하고 순교의 종교개혁으로 발전하고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에서 탈출한 청교도는 신대륙에 미주의 프로테스탄트를 이뤄냈다. 미국의 개신교 프로테스탄트는 미국을 민주주의 나라 세계의 중심국이 되게 했다. 130년 전 대한민국에 닿은 20대 벽안의 젊은 선교사들의 발길은 복음 전파와 순교의 역사를 쓰면서 캄캄한 한반도를 깨웠다. 우상과 게으름 나태한 문화 속에 나라마저 강탈당한 한반도 이 땅이 복음의 눈을 뜨고 예수 십자가의 도를 깨달았다. 광복과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고 서서히 일어선 이 나라는 복음이 능력이 되었다. 산업화의 기회, 강력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국민 갈등의 위기에서 민주화를 이루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은 복음을 이룬 가나안에서 보이지 않는 전쟁의 나라가 되었다. 두 동강 난 나라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뤘지만 통일의 한반도기적을 앞두고 복음을 침탈하고 있다. 온갖 악령의 문화들이 교회를 공격하고 악한 공산 사회주의 이념과 전쟁이 계속된다. 인본주의 문화가 홍수처럼 양산되고 있다. 정치적 이념 대립이 교회와 기독교 교계에서 공격적 적대를 하고 있다. 이것이 2022년 성탄절에 느껴지는 우울증이다.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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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7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특별기고] 이스라엘, 튀르키예 성지순례기
    마산동부교회 창립 50주년을 맞아 2022년 9월에 성지순례팀을 조직하고 교우들을 대상으로 팀원을 모집하여 10월에 32명을 확정하고 12월부터 수요예배후 1시간씩 8차례 이스라엘과 튀르키예의 순례 할 곳을 공부하였고 기도회를 통하여 은혜로 준비 하였다. 드디어 2023년 2월 20일(월) 오후 2시 교회 앞마당에서 출발기도와 단체 촬영후 출발하여 인천공항에 8시 도착 수속하고 가이드 선교사님의 안내로 2시 15분 터키항공으로 출국하여 이스탄불을 경유하여 텔아비브 벤구리온 공항에 21일 아침에 도착하여 현지 가이드 목사님을 만나서 첫 일정을 시작했다. 첫 순방지 가이샤라로 가게 되었는데 헤롯왕은 가이사랴 항구를 건축할 당시 황제 가이사 아우구투스의 이름을 따서 가이사랴로 명명했고 로마 총독부가 있었고 그 곳에서 본디오 빌라도라는 석판이 발견되어 빌라도 총독 관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바울이 로마로 압송되기 전 여기에 머물러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그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 여정으로 갈멜산 엘리야 기념교회를 방문 했는데 많은 순례객들이 단체로 찬양하며 기도하는 모습에 주님을 섬기는 일에는 인종과 나라와 민족을 초월 한다는 마음이 들었다. 기념교회 옥상에서 바라본 넓은 이스르엘 평원과 그 너머 스불론 땅과 므깃도 사마리아로 이어지는 산맥들을 보면서 성경의 지명들을 한꺼번에 보게되는 감격과 이 땅을 차지하기위해 치열하게 싸운 이유를 알것 같았다. 다음으로 므깃도 성채로 가서 말들을 훈련시킨 흔적들과 지하 우물 저장고를 보면서 이곳이 솔로몬 시대에 전략적 요충지였고 계시록의 아마겟돈이 이 지역임을 설명해 주었다. 다음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전해준 나사렛 수태고지 기념교회를 방문하였고 세계 각국에서 보내온 성화 중 한복을 입은 마리아와 한글로 예수님을 경배하는 글을 보게 되고 원뿔모양의 천장에서 빛이 제단으로 비치면서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암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예수님이 첫 기적을 베푸신 가나 혼인 기념교회는 늦은 시각이어서 교회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문을 잡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며 하루를 마감했다. 22일 수요일 버스 안에서 기도로 일정을 시작하면서 성지순례 팀웍과 섬김과 사랑을 위하여 비밀기도 짝 마니또를 정했는데 한국에서 품은 기도짝에 대한 간증과 새로운 기도짝을 추첨하면서 서로를 많이 이해하고 교회 안에서 서로 서먹했던 관계를 해소 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을 가졌다. 바알을 위해 제단을 쌓았던 가이샤라 빌립보로 가서 당시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한 흔적들을 보게 되었고 근처에 현재의 지명 바니야스로 명명된 바니야스 폭포를 보면서 헐몬산에서 지하로 물이 흘러 솟아나와 샘을 이루고 흐르는 현장에서 사막에 강을 내겠다는 말씀이 실감나게 다가 왔다. 근처에 예수님이 선포한 산상수훈을 기념한 팔복교회로 가게 되었고 교회 내부는 팔각형 모양으로 의자를 놓아 두었고 우리 일행 32명은 “심령이 가난한 자”시작하는 팔복 찬양을 감격해서 부르며 흘러 내리는 눈물을 주체 할 수 없었고 주위의 순례객들도 우리 찬양을 경건하게 듣는 참 은혜로운 시간 이었다. 여로보암 왕이 세운 우상이 있는 텔단으로 가서 그곳에서 발원하여 요단강으로 흐르는 물의 근원지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갈릴리 바다 근처 막달라 마리아가 살았던 마을에 있는 식당에서 베드로고기라 칭하는 생선튀김을 점심으로 먹고 갈릴리 바다에 손과 발을 담가보며 예수님이 수많은 무리에게 말씀을 전하시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오병이어 기념교회에서 모자이크에 빵이 4개만 그려져 있어서 1개가 어디 있는지 궁금했는데 가이드 목사님이 그 한 개는 예수님 자신을 가르키지 않았나 하시며 예수님 자신이 “나는 생명의 떡이다” 라고 하신 말씀을 상기 시켜 주었다. 근처 베드로 수위권 교회가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시나고그(유대인 회당)에 대한 설명을 듣고 유대인들이 회당을 중심으로 생활했음을 알게 되었고 베드로 장모가 살았던 집터위에 세워진 교회와 황금열쇠를 지닌 베드로 동상을 보면서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진면목을 보게 되었고 예수님의 사역이 가버나움을 중심으로 많이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었다. 갈릴리 바다에서 배를 타고 국기 상기식과 애국가를 부르는데 옆 배에서도 스웨덴과 이탈리아 국기가 게양되는 것을 보며 다양한 나라에서 순례의 길을 동참하구나 하는 느낌을 안고 선상에서 드리는 수요 예배에 은혜와 감격이 넘쳤고 유창근 목사님의 설교가 예수님 당시 주님이 선포하시는 모습을 떠올리며 진정한 예배자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23일 목요일 맛사다로 향해 가는 길에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던 요단강 세례터에 들러서 손에 물을 적시며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맛사다는 히브리어 어근 자체가 요새라는 뜻을 가졌고 난공불락의 성채였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데 요새 아래에서 걸어서 올라가는 단체팀은 대부분 이스라엘 학생들로 역사공부겸 여행을 와서 조상들의 민족정신을 느끼는 현장학습의 연장으로 느껴졌다. 3단으로 된 헤롯궁과 물 저장 장치, 곡식 저장고등을 둘러보고 정상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니 로마군대가 쌓아놓은 토성의 흔적들이 군데군데 보여서 여기가 로마군의 공격을 피해서 마지막 항전을 한 곳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쿰란으로 가서 구약성서 사본들이 집중해서 발견된 쿰란의 1~9동굴중 사본이 가장 많이 발견된 4동굴을 멀리서 보면서 발견된 사해 사본이 현재 사용되고 있는 성경과 완벽하게 일치하고 구약성서 전권이 900여 두루마리로 항아리 속에 보존되었고 에스더서만 빠져 있다는 내용도 듣게 되어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오묘하며 성경의 일점일획도 틀리지 않음을 현장에서 느꼈다. 예수님이 40일 금식후 시험 받았던 시험산에서 주님이 말씀으로 세 번 마귀를 물리친 현장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을 더욱 붙들어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근처 15분 거리에 있는 유대 광야를 걸으며 찬양하고 정상 계단에 모여 서쪽 노을을 바라보며 앞으로 순례일정과 두고 온 교회와 가정을 생각하며 기도하는 은혜의 시간을 가졌고 베들레헴 지역에 있는 숙소로 와서 1박을 하였다. 24일 금요일 베들레헴에서 이스라엘 지역으로 나가는데 분리장벽이 7M 정도 높이 서 있고 검문검색이 까다로워 30분 이상 기다리며 휴전선이 분리장벽이 아닌가하는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 보았다. 버스로 약 2시간 정도 이동해서 브엘세바로 가면서 드넓은 평원에 밀보리 밭을 보면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떠올리며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번제단 모형과 당시 주거지 형태가 남아 있는 현장을 둘러 보았다. 점심식사 후 차에서 잠깐내려 다윗과 골리앗이 싸운 엘라 골짜기 지형을 보며 와 닿는 것이 있었고 그 위쪽 소라땅과 소렉 골짜기, 단지파 땅들을 둘러보고 그곳에서 많이 자생하는 합환채 설명을 듣고 열매하나를 따서 목사님께 드리면서 출산 장려를 위해 설교 자료로 유용하게 사용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들의 목자교회와 보아스 광야를 거쳐 베들레헴 예수 탄생교회에 들어가서 예수님이 태어나신 동굴을 보았고 그곳에 아르메니아 정교회와 그리스 정교회가 각각 자리를 차지하여 기념하는 것이 이색적 이었다. 25일 토요일 예루살렘으로 가서 먼저 예수 승천교회를 방문 했는데 사순절 기간이라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고 감람산에서 황금돔이 있는 다윗성과 예루살렘 성전을 보며 사진으로만 보던 역사의 현장을 눈으로 그 실체를 보며 감격하였다. 주기도문 교회에 각국의 언어로 번역된 주기도문 비가 있고 우리는 한글로 된 주기도문 앞에서 주기도송을 부르며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시간을 가졌다. 힌놈의 골짜기를 내려다보고 겟세마네 벳바게의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기도하신 곳에서 합심해서 기도하고 베드로 통곡교회를 향하였다. 베다니 마가요한의 집터위에 세워진 교회 꼭대기에는 닭 모양의 형상이 표현되어 있었고 예수님이 안장된 곳에는 수많은 참배객이 기도하고 예배하고 있으며 빌라도 법정에서 출발하여 비아돌로사 14 지점을 순례하며 십자가를 지시고 힘들게 걸어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묵상 하였다. 오늘 일정 마지막으로 유대인의 성지인 통곡의 벽으로 가서 저들이 진지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두루마리 성경을 열어서 낭송하고 다시 닫아 벽장 속에 넣는 경건한 의식을 통해 구약시대 제사장들도 저렇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 해 보았다. 그곳에서 조금 내려와 Dong Door(분문)가 있어 성경에서 읽은 분문을 직접 보고 신기해 했다. 26일 주일 아침 일찍 이스탄불 시내를 통과해서 보스포러스 해협의 두 다리를 지나 아시아 지역과 유럽 지역을 둘러보고 근처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선상에서 주일예배를 드리며 순례길에 참여한 이유와 목적을 되새기게 되었다. 성소피아 성당으로 들어가는 길에 줄이 길어 한참을 기다리고 전에는 박물관으로 사용 되었는데 현재는 모슬렘 예배처소로 사용되고 있었서 많은 부분이 가려져 있고 제한되어 있어 안타까웠다. 점심식사를 하고 이스탄불 공항으로 가서 카이세리행 비행기를 타고 다시 버스로 갑바도기아로 이동하였고 순례일행중 생일을 맞은 세분을 위해 생일파티를 열어주며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하였다. 27일 월요일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갑바도기아 괴뢰메 동굴을 지프를 타고 가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형성해 놓은 동굴교회와 주거형태 생활 모습을 보았고 파사바계곡의 수많은 동굴 거주지와 교회를 보면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많은 고난과 위험을 감내하면서 생활했던 모습에 숙연함을 느꼈다. 데린구유는 지하7층까지 미로처럼 만들어 놓고 그곳에서 환란과 핍박을 피하여 신앙의 정조를 지킨 믿음의 선배들의 살아있는 숨결을 느끼며 통성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28일 화요일 호텔을 출발하여 버스로 2시간 거리에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가서 바울 기념교회를 둘러보고 눈 덮인 설산과 호수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에서 사진을 찍으며 잠깐 숨고르기를 하였고 점심식사 후 라오디게아교회를 둘러보고 근처 히에라폴리스로 가서 드넓은 유적지를 살피고 언덕위에 있는 빌립 기념교회에서 묵상하였고 조금 지쳐 있지만 다시 힘을 내어 파묵칼레로 가서 따뜻한 온천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서 여행의 피로를 풀고 회복하는 시간을 가졌다. 3월1일 수요일 버스 안에서 찬양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주택가에 거대한 돌기둥 세 개만 남아있는 빌라델비아교회를 방문하니 입구에 사도요한 기념교회라는 표지석이 있었다.사데지역으로 가서 사데교회의 흔적을 보고 가이드 목사님이 초대 일곱교회 중에 책망받은 교회 지역은 폐허가 되었는데 칭찬받은 두 교회 서머나와 빌라델비아 지역은 번성하다고 설명 하였다. 누가의 무덤 터를 둘러보고 빌립기념교회와 히에라볼리에 있는 사도요한 무덤교회를 들리고 에베소에 있는 셀수스 도서관 거쳐 원형 경기장에서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이동환 가이드 선교사가 중후한 목소리로 찬양 할 때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광대하심에 전율을 느꼈다. 3월2일 목요일 튀르키예에서 마지막 일정을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님 크신 은혜”로 찬양하면서 시작하고 초대교회 어렵게 신앙생활을 했던 두아디라교회를 방문하고 버가모(버가마)교회터 위에서 한국교회가 처한 현실을 상기 해 보았다. 갑바도기아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장시간 이동하여 이스탄불 보스포러스 해협 선상 근처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이스탄불공항으로 이동하여 새벽 2시25분 출발하여 인천공항에 3일 오후6시30분에 도착하여 버스로 마산에 내려오니 4일 새벽 1시 정도 되었다. 마중 나온 가족과 성도들을 만나 긴 여정의 일정을 모두 마무리 하였다. 11박 12일의 순례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새삼 느끼게 되었고 성경의 역사와 지명들을 알고 느끼고 체험하면서 큰 은혜와 감동의 시간이었슴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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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9
  • [김경헌 목사] 사순절
    사순절 천주교와 정교회에서 사순절이라는 절기를 지킵니다. 우리 개신교는 사순절을 지키지 않습니다. 구지 그 이유를 찾으라면 사순절은 성경에서 행하라고 가르치는 절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교회가 지키라고 가르치지 않는 절기들을 우리는 이미 많이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지키라고 하시는 절기들이 많으나 사실 신약성경에서 교회가 꼭 지켜야 한다고 하는 것은 오직 성례뿐입니다. 세례와 성찬 외에는 신약성경이 지켜야 된다고 가르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키는 부활절과 성탄절도 성경이 지키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부활절과 성탄절을 예수님의 대한 아주 중요한 날들로 기념하며 지키고 있습니다. 그럼 왜 우리는 부활절과 성탄절과 같은 절기는 지키되 사순절은 지키지 않게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종교개혁의 정신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은 천주교에서부터 분리하고, 잘못되고 왜곡된 가르침으로부터 분리한 것입니다. 사순절을 오늘 지키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그 절기가 천주교 냄새가 너무 많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사순절에 대한 간단한 역사와 그 뒤에 있는 의미에 대하여 살펴봄으로 사순절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사순절은 먼저, 천주교나 정교회나 개신교라는 분열이 있기도 전에 초대교회가 지키던 절기였습니다. 교부들의 글들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된 절기입니다. 사순절을 지키는 방법은 부활절을 앞두고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합니다.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금식기도 하시며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이기셨다는 이유에서 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금식기도하신 것을 근거하여 부활절이 되기 40일 전에 금식기도를 하는 절기가 사순절입니다. 사순절의 의도는 참 좋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사역 핵심이 십자가와 부활이기에 그것을 기억하고 표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을 표시하는 40일 금식이 부활절로 마무리가 되는 사순절은 그 속에 예수님의 사역의 핵심이 구속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왜 개신교는 이렇게 좋은 의미를 담은 사순절을 더이상 지키지 않습니까? 그것은 시대가 지나면서, 사순절이 신명기의 말씀으로 돌아가, 구약의 말씀으로 돌아가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지 못하며, 율법주의와 기복신앙에 사로잡힌 절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본문을 보시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40일을 광야에서 금식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40일 금식기도 하시면서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생활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신8:2-3)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얻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시험하신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사는지 시험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시험을 통과하면 어떠한 축복이 주어집니까? 4절부터 그 시험을 통과하면 주어지는 축복이 기록됩니다. 끝에 10절에는 이렇게 기록됩니다. (신8:10)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하나님의 광야시험을 통과하는 자에게 옥토를 주신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언약의 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니 성경은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결과가 부활이듯이, 십자가와 부활의 결과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옥토입니다. 사순절을 지키는 초대교회의 의도는 좋았지만, 시대가 흘러가면서 그 가르침이 참된 하늘의 옥토 즉,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신 하늘의 땅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옥토를 바라보고 세상의 형통함을 원하게 되어 초대교회가 지켰던 사순절의 의미가 많이 변질되어갔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실 광야의 시험은 이스라엘이나 그 어떤 사람도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였습니다. 12 정탐꾼의 보고로 그들의 믿음과 신앙의 실체가 드러났고, 여호수와와 갈렙 외에 애굽에서 나온 모든 성인은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시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여호수와의 인도를 따라 약속의 땅에 들어갔고, 다윗을 통해 12지파를 통일하여 이스라엘이란 강대한 나라를 세웠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광야의 시험을 통과해야 옥토를 주신다고 했는데 왜 시험에 실패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허락하십니까?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였기에 그들이 차지한 땅은 하나님께서 의도한 참된 옥토가 아니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을 대표하는 모세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어 광야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40일 금식기도 하심으로 이스라엘이 실패한 광야시험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의 시험을 통과하시니, 그를 믿는 자는 그와 함께 하나님께서 의도한 참된 하늘의 옥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이상 광야의 시험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혹 그 시험을 받는다고 해도 우리 가운데 그 시험을 극복하고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초대교회에 사순절은 예수님의 40일 금식을 기념하며 그의 부활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절기였는데, 시대가 지나면서 사순절은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광야의 시험을 스스로 자신의 욕심으로 차지하려고 하는 절기가 되었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구약의 율법주의와 기복신앙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변질된 사순절은, 40일 금식기도 하면서, 예수님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행(?)으로 받게 될 복을 예수님보다 더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사순절이 이렇게 변질되다보니 우리 개신교회는 더 이상 사순절을 지키지 않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솔직한 마음으로 개혁주의의 근본정신을 따라, 사순절의 본 의미를 되찾으면 좋겠습니다. 사순절을 지킴으로 예수님을 더 가까이 사랑하며 그와 함께 영적으로 동행하면 좋겠다는 믿음의 거룩한 욕심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금식하였으니, 우리도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여 온 교회가 함께 금식하며 부활을 기념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옥토를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시대는 사순절만 아니라, 부활절과 성탄절까지 변질되어 세상적인 이벤트가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과 멀어지는 세상에 맞서 교회는 더더욱 예수님에게 가까이할 수 있도록 교회 문화를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부활주일이 3주가 남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생활 속에 어떻게 그것을 기념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행위로 구원에 도달하는 것을 아니지만,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우리의 행동으로 사모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날 개신교회가 사순절을 지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초대교회의 신앙자체를 따라 예수님을 더욱더 가까이하는 생활에 노력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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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3
  • [박봉석 목사] 나를 보는 기준이 무엇인가?
    한 흑인 선교사가 쓴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선교사님은 흑인 빈민촌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백인들이 사는 동네의 쓰레기통을 뒤져서 버려진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것이 일과였습니다. 그렇게 쓰레기통을 뒤지던 어느 날, 한 백인 부인의 눈에 띄어서 그 집의 청소부로 취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흑인 빈민촌 출신으로는 큰 출세를 한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첫 출근을 하고보니까 딱히 청소할 것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사는 흑인 빈민촌 움막에 비하면 모든 것이 너무나 깨끗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깨끗한데 백인 부인이 왜 자기에게 청소를 시켰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놀면서 휘파람만 불다가 그냥 집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날 곧장 쫓겨났습니다. 백인 부인이 보기에는 청소는 고사하고 더러운 발로 온 집안을 더럽혀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 흑인 소년이 쫓겨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요? 기준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누추한 흑인 빈민촌에 사는 소년의 기준으로 볼 때는 너무나 깨끗했지만 백인 부인의 기준으로는 온 집안이 더럽혀져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나는 무엇을 기준으로 내 삶을 평가하고 있습니까?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는 신앙이 좋은 것 같고 의로운 것 같고 깨끗한 삶을 사는 것 같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기준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언제나 그 말씀으로 나를 비쳐보고 내 자신의 모습을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바른 판단을 할 수 있고, 그래서 나를 변화시켜 갈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늘 예배 때에 말씀을 듣고 또 개인적으로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다른 사람은 기준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늘 그 말씀으로 나를 비쳐보며 나를 변화시켜 갈 때에 예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 있는 사람이 됩니다. 누가복음 18장에는 서로 다른 기도를 했던 두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그리고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이 바리새인의 기도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보았다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죄인 된 존재인지 알 텐데 오히려 그는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여서 자신의 종교적인 탁월함과 의로움을 과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의 기도는 그와 전혀 달랐습니다. 그 당시 세리는 동족인 유대인들로부터 죄인 중의 상 죄인으로 취급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세리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는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멀리 서서 기도합니다. 그것도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알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기준으로 보면 성전 가까이 갈 수도 없고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애통할 수밖에 없는 죄인 됨을 그는 알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세리는 바로 이 고백으로 말미암아 전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은혜를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8장 14절에서 예수님은 이 두 사람의 기도의 결론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독자 여러분, 늘 기도는 하지만 내 마음은 한껏 높아져 있지는 않습니까? 다른 성도보다 좀 더 나은 것 같은 나의 신앙과 헌신의 모습으로 인해서 나도 모르게 교만해져 있지 않습니까? 다른 성도는 기준이 아닙니다. 기준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말씀 앞에서 참 부족함이 많은 존재들이고 죄인 된 존재임을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언제나 겸손을 잃지 않을 수 있고, 바로 그 겸손으로 말미암아 겸손한 자에게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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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2
  • [이정희 목사] 기독교인의 용어 사용 27: 고쳐야 할 예배용어/ 예배 본다
    I. 서언(序言) “잘못된 예배용어, 이것만은 고치자.”란 기사가 언젠가 국민일보에 게재된 적이 있었다. 이는 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NCCK)의 한국교회 발전연구원에서 연구 발표한 것으로서 현재 한국교회에서 잘못 사용하고 있는 예배 용어들을 바로 잡기 위한 시도였으며, 이에 관한 새 용어들을 제안했다. 구체적으로는 고쳐야 할 용어들 중에서 주로 예배용어들에 관 한 것이었다. 기도에서 9개, 예배 예식에서 31개 등 모두 40개 용어의 문제점을 설명하고 대체 용어를 제안했다. 이러한 연구와 발표는 그동안 개인 연구가나 일부 교단에서 발표해 왔다. 하지만 이러한 발표가 상당히 의미가 있는 것은 이번의 발표는 범 교단적 차원의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이루어졌다는데 있다. 또한 나름대로의 관심으로 본지의‘바로잡기’코너를 연재하는 필자로서는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본 호에서는 예배 용어 중에서 ‘예배 본다’, ‘예배 드린다’는 용어에 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II. 예배드림에 대한 용어 먼저 우리 한국교회의 예배드림에 대한 용어는 통일된 말이 없이 아주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예배 드린다’, 예배 한다’, ‘예배 본다’,‘예배 봐준다’, ‘제단을 쌓는다’등 여러 용어들이 있다. 이 중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용어는 ‘예배 드린다’이다. 이 중에서 어떤 용어가 가장 적합할까?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전문가들의 견해가 조금씩 차이가 있다. 먼저 장로회 신학대학원 교수를 지낸 나채운 교수는 ‘예배 본다’는 용어도 틀린 말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이유는 ‘보다’란 말은 문법상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그 첫째는 본동사로 쓰이는 경우로 눈으로 본다는 시각적인 의미이다. 이런 경우는 ‘예배 본다’는 용어를 쓸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두 번째의 조동사와 세 번째의 보조 형용사로 사용될 경우는‘먹어본다’는 말처럼 체험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에 ‘예배 본다’는 말을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많은 교인들은 이런 복잡한 문법적인 체계를 잘 모르기 때문에 ‘예배하다’나 ‘예배드리다’란 말을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또 다른 견해는 천안대학교 기독신학대학원의 김석한 교수이다. 그는 ‘예배 하다’란 용어 외에는 어떤 말도 사용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이유는 ‘예배 드린다’는 말은 구약시대의 제물을 드릴 때에 사용되는 용어이지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의 은총 이후에는 예수님이 단번에 드려졌기 때문에 ‘드림’이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드린다는 것은 타종교들이 우상에게 드리는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이 말은 합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한 ‘예배 본다’는 말은 과거 선교사들이 처음 들어와 예배할 때 서양인에 대한 호기심과 구경꾼들로서의 예배였고 그것이 고착화 되어 ‘예배 본다’는 말이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미상으로는 시각적이기 때문에 합당하지 않다고 했다. 그다음 예배를 ‘제단 쌓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구약시대의 제단을 쌓는 행위에 국한되기 때문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에 ‘예배 한다’란 용어 외에는 사용할 말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다음 장로회 통합교단에서는 2003년에 ‘예배를 봐준다’는 말은 사용할 수 없다는 결의를 했고, 이번의 ‘이것만은 고치자’에서도 재차 확인 발표를 하였다. III. 결 어 이상과 같은 각 주장들을 볼 때에 어떤 생각이 드는가? 예배 용어 하나도 아직까지는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예배 한다’는 말은 누구도 반대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조심스럽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예배 드린다’는 표현도 적절하다고 본다. 물론 신약적인 개념의 말이 아니라는 견해나 타종교의 드린다는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이라는 견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너무 확대해석하는 것은 아닌지를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해 본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다양한 견해가 있다는 것은 발전을 위한 노력이라는 관점에서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해 보면서 하루 빨리 올바르고도 완전한 용어들이 정착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담아 기도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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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2
  • [신재철 목사] 잠복(潛伏), 사라지는 고물을 찾아서
    잠복(潛伏), 사라지는 고물을 찾아서 분리수거장은 돈 주고 버리기 아까운 물건들을 내어두는 곳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돈이 되는 물건이 모이는 장소이기도 하다. 폐지는 물론이고 고철과 공병은 어떤 이의 주 수입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큰 규모의 아파트에서는 제법 큰 수익을 만들어 아파트 복지를 위해 사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일하는 아파트는 규모가 작아 폐품으로 모을 수 있는 금액은 미비하다. 오히려 얼마간 돈을 만들기 위해 묵혀두었다가는 분리수거장이 냄새나고 지저분한 공간이 되어 버린다. 실제로 전임 소장님은 폐품을 관리해 월 2~3만 원의 현금을 만들기도 했다. 후문에는 그 돈은 개인 용돈이 되었다는데 확인할 길은 없다. 여하튼 모으면 돈이 될 수 있지만 내 기준에 득보다는 실이 많았다. 지역에 고물을 취급하는 사장님과 연계하여 매일 수거하는 조건으로 아파트 측에서 일절 금품을 요구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얼마간의 돈을 포기했지만, 입주민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매일 치워지는 폐품으로 아파트가 너무 깨끗해 졌다. “소장님, 요즘 폐지랑 고철이 왜 이렇게 안 나오죠?” 업체 사장님의 전화다. 매일 수거하러 와보면 돈이 되는 폐지와 고철은 없고 잡다한 물건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물건을 누가 집어갈까 싶어 며칠 더 지켜보자는 말을 전하며 통화를 마무리했다. 고물이 좀 덜 나오는 날도 있을 수 있으니 그럴 수 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확실히 이상했다. 일주일이 지나도 고물은 모이지 않았다. ‘누군가 몰래 가지고 가는구나!’ 확신이 들었다. 마침 분리수거장을 비추는 CCTV가 있어서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시간을 돌려보기 시작했다. 시간을 빠르게 돌리며 영상을 재생한다. 차곡차곡 쌓이는 폐지들. 그런데 어느 시간이 지나니 갑자기 사라진다. 그 순간을 다시 천천히 돌려본다. 새벽 시간, 어느 노인이 수레를 끌고 들어와 차분히 야무지게도 돈 되는 물건만 담아 간다. 매일매일 성실하게 찾아오셨다. 하, 고민이 깊어진다. 「잠복을 결정하다」 계약한 사장님께 미안한 마음도 들고, 분명한 절도라는 생각에 잠복을 결정했다. 반드시 잡아서 경찰에 넘길 계획이었다. 아내에게는 며칠간 못 들어 올 수도 있다는 말을 남겼다. 제법 비장하다. 밖에서 보일까, 관리실 불도 끄고 의자에 몸을 푹 묻은 상태로 새벽까지 뜬 눈으로 지켜본다. 첫날은 실패다. 반드시 다시 온다는 확신으로 둘째 날을 맞았다. 조금 지루해질 즈음에 드디어 나타났다. 영상에서 보았던 손수레와 할아버지다. 익숙하게 고물을 챙겨 담아 조용히 대로변으로 빠져나간다. 은밀히 드러나지 않게 따라가 본다. 굽은 허리로 옆 건물의 폐지도 조용히 정리하며 수레에 물건을 쌓는다. ‘이걸 어쩌지.’ 나는 무엇을 고민했을까? 할아버지와 대면하지 못하고 조용히 관리실로 돌아왔다. 사장님과 의리가 있으니 할아버지를 제재했어야 하는데 차마 말이 나오지 않는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고민이 깊어졌다. 날이 밝은 후 고물상 사장님과 통화하며 그간 상황을 설명했다. 상황의 난감함, 사장님께 미안함이 버무려져서 말도 조리 있게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사장님은 의외의 시원한 답으로 나의 고민을 해결해 주셨다. “아이고, 소장님. 그러면 그 영감님께 고물 다 드리세요. 우리는 여기 아파트 물건 없어도 아무 지장이 없어요.” 정말 그래도 될지, 미안한 마음에 한 번 더 되물으며 감사 인사를 드린다. 내가 감사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지만 감사했다. 이유가 뭐가 되었든. 그리고 부끄러웠다. 목사보다 사장님 마음 씀이 더 고왔다. 그리고 나는 한 번 더 잠복을 이어간다. 그 할아버지를 만나야 했다. 새벽이 되어 어김없이 할아버지가 찾아왔다. 어제처럼 익숙하게 고물을 담아 돌아가는 길을 쫒아간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본다. “어르신, 제가 여기 아파트 관리소장이에요. 저희 고물을 매일 수거해 가실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요청을 드렸고 할아버지는 신이 나서 깨끗하게 정리해 가겠다는 약속을 하신다. 이미 손수레에 실린 우리 아파트 물건은 말이 없다. 할아버지와 나 사이의 비밀은 그 녀석들만 입을 다물어 주면 아무 문제 없을 듯하다. 오늘도 이렇게 인생의 한 수(手)를 배운다. 에필로그 그 후 할아버지는 새벽이 아닌 낮 시간 당당하게 고물을 챙겨 가셨다. 입주민이 간섭이라도 할라치면 관리소장님 허락이 있었다며 당당해 하신다. 그리고 얼마지않아 다시 폐지가 쌓이기 시작했고 더 이상 치워지지 않았다. 아파트 미관상 좋지 않기도 했지만 할아버지 신상이 염려되어 동네 고물상을 찾아다니며 할아버지 안부를 물었다. 마침 한 고물상에서 할아버지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갑자기 몸이 안 좋으셔서 병원에 며칠 계시다 돌아가셨다는 이야기. 무엇을 위해 그리 고생하며 살다 가셨을까. 여전히 고물은 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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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2
  • [조희완 목사] 소중한 평안 (시122:1-9)
    만약 죽었다가 잠간 다시 살아난다고 가정을 할 때,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하게 될까요? 사람에 따라서 하는 말들이 다를 수 있을 것인데, 아마 살아생전에 가슴에 한이 맺혔던 말씀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자녀들에게 “제발 예수를 믿어라”고 하실 분도 있을 것이고, “제발 다투지 말고 화목하게 지내라”고 하실 분들도 있을 것이고, “아프지 말고 건강해라”고 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을 때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두 번이나 연거푸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요20:19,21). 다른 하실 말씀이 참으로 많으셨을 법한데 평강을 말씀하신 것은 곧, 평소에 예수님께서 가장 원하셨던 것이 바로 평안과 평강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평안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샬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평안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평안하기를 원하시는지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습니다(살후3:16).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 날 사람들이 이 소중한 평안을 다 빼앗겨 버리고 불안하고 불편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평안이 가득해야 할 곳에 평안은 사라지고 대신 반목과 다툼과 불협화음이 가득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너무나 흔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평강의 왕이셨던 것처럼, 그 분을 믿는 우리도 평안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영역 중에서 어떤 곳이 평안하기를 힘써야 할까요? 첫째는, 교회가 평안해야 합니다.(시122:6-7) 둘째는, 가정이 평안해야 합니다.(잠17:1,21:9) 셋째는, 나라가 평안해야 합니다.(딤전2:1-2) 날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는 삶이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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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2
  • [오성한 목사] 소망을 넘어 믿음
    기도를 많이 하고 노력을 해야 생수의 강이 넘쳐흐르는 줄 알았다. 아니다. 누구든지 목말라 이 물을 마시면, 예수를 믿으면 그 배에서 영생하도록 흐르는 생수 강이 생긴다. 나는 이것을 깨달은 날 이후 늘 내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음을 믿는다. 자유하게 되었다. 감사하게 되었다. 흥분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춤추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성령도 능력도 믿음으로 받았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갈3:5). 대답해 보라. 성령의 능력을 믿음으로 받는다. “성령을 받는 것과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라고 묻는다. 듣고 믿음으로이다. 너희에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려면 기도를 세 시간 이상해야 나타난다고 하지 않았다. 이미 받았음을 믿고 감사하고 인정하고 기도하면 된다. 기도를 하루 5시간 해야 능력을 주겠다고 그러지 않았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렇다고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더 기도하게 된다. 이것을 믿고 기도하면 기도가 더 힘이 있고 재미가 넘친다. 기도를 10시간 해야 성령의 능력을 주겠다고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다. 이미 주신 것을 알고 기도하라고 하신다. 믿음으로 현실을 장악하라.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4-25). 믿음과 소망은 다르다. 지금 믿음으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앞으로 성령 충만을 소망하지 말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믿음으로 충만해야 한다. 지금 충만해야 한다. "하나님 저는 앞으로 성령 충만할 것입니다. 내일 충만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샘물이 나는가? 물론 우리가 내일도 그렇게 될 소망을 가진다. 충만 위에 더 충만할 것을 소망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성령 충만함을 믿어야 한다. 소망은 있어야 하지만 지금 믿음을 가져야 한다. 지금 당신은 성령 충만하다. 당신은 성령 충만한 사람이다. 당신은 굳은 마음이 부드러워진 사람이다. 새 마음이 있고 새 영이 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36:26-27)라고 약속하셨다. 믿음으로 간구하면 주신다. 소망과 믿음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지금 믿어야 한다. 동시에 소망도 가져야 한다. 지금 충만을 주셨고 앞으로도 더 충만케 하실 것이다. 지금 우리가 구원 받았고, 앞으로도 구원 받을 것이다. 이것을 "이미, 아직"이라는 표현을 한다. 이미 주셨고 아직 주실 것이다. 그것이 믿음과 소망이다. 우리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사랑 속에 살아야한다. 믿음과 소망은 다르다. 엄밀히 말해서 소망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을 소망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 소망만으로는 믿음의 역사를 일으킬 수 없다. 쉽게 말하면 성령 충만한 것을 믿기 전에는 죽을 때까지 소망만 갖고 성령 충만 만 바라보다 죽을 것이다. 그래서 한 번도 완벽한 성령 충만함을 믿지 못하고 이 땅을 떠나는 사람이 많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내가 이 사실을 깨닫고는 부들부들 떨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 내가 믿는 줄 알았는데 소망만 가졌었구나! 나는 성령 충만을 믿지를 못했었구나. 큰 일 날 뻔 했구나. 죽을 때까지 바라기만 하다가 한 번도 성령 충만을 모르고 살 뻔 했구나. 능력을 바라기만 했지 능력이 나에게 넘쳐 남을 믿지 못했구나"하고 놀랐다. 복음을 믿음으로 깨닫고, 온전한 복음의 문이 열리던 날 감격과 기쁨과 함께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마음이 급해졌다. 모르고 평생을 살았다면 큰일 날 뻔 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십자가를 믿는 다고 하면서도 십자가에서 이미 다 이루어 놓으신 일을 믿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주님 저는 앞으로 복음만 말하겠습니다. 온전한 복음, 이미 이루신 복음의 소식을 말해 믿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자연스럽게 결단하게 되었다. 나는 그 후 기회만 있으면 시자가의 복음만 말하고 있다. 믿음과 소망은 다른 것이다. 이것을 몰랐다면 죽을 때까지 “오, 주님 성령 충만을 주세요.”라는 기도만 하다가 갈 뻔 했다. 생각 만해도 소름이 돋는다. 큰 일 날 뻔 했다. 당신은 안 그런가? "오, 하나님 복음만 전하다가 가겠습니다."라고 결단하게 된 강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이 방법이 아니면 성령 충만함에 도달하지 못할 사람이다. 그런데 성경은 다 주셨으니 믿음으로 받으라고 한다. 소망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믿음의 역사를 일으킬 수 없다. 무슨 말 인지 알겠는가? 모든 부분이 그렇다. 성령 충만 뿐 아니라 모든 부분이 그렇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다. 현재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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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2
  • [하수룡 장로] 맛
    보통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손맛 눈맛 입맛 때문에 바다를 찾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다고 한다.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기 위해 교회를 끊임없이 찾게 된다. 마산지방에 문창이라는 이름을 가진 교회는 1901년에 최초로 설립되어 120여 년 동안 하나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맛본 교회로 자랑스럽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다. 사막 같은 불모의 땅 마산지방에 문창이라 이름을 가진 교회가 지금까지 이 지역에 변함없이 맑은 물이 흐르도록 한국교회의 오아시스를 견지해 온 것이다. 1919년 추산동의 옛 지명인 문창리에 석조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이사했고 이때 교회명을 문창교회로 개칭했다. 선교사 아담슨 선교사의 지원을 받아 성호리에 독서숙을 세우게 되는데 1909년 대한제국의 인가를 받아 마산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창신학교로 발전했다. 이어 의신 여학교를 세우면서 남녀가 모두 신식교육을 받게 되고 1924년에 유치원을 설립하여 일찍부터 교육의 혜택을 받아 신문화의 맛을 보게 된 것이다.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나는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 이때 비로소 신식교육의 맛을 보게 되어 근대화를 이루는 주역들이 생산되고 일찍부터 이 지역이 다른 곳보다 깨어있는 선진인물이 많이 배출된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 수많은 교회가 있지만 문창교회(제일문창)는 다른 교회가 갖고 있지 못한 차별화된 복음적 특징이 있다. 1919년 3월 초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상이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져와 이 교회 장로이자 창신학교 학감인 이상소와 의신 여학교 교사 임학찬에게 전달했다. 이로써 창신학교 교사인 최용규, 의신여학교 교사인 김필애, 박순천 등이 준비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마산 장날 독립 만세 시위에 사제가 함께하여 독립 만세를 외친 것은 물론 주의 나라를 선포하고 의를 맛본 것이다. 복음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교회 내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거나 복음의 사회적 공적 영역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 교회사에서 기독 신자라면 내세울 자랑스러운 주기철 목사님이 1931년 7월에 부임하여 1936년 7월에 평양 산정현 교회로 이임할 때까지 이곳 문창리에서 사역하셨다. 일제강점기에 주 목사님은 대한의 독립과 신앙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것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과 함께 투옥되어 끝까지 굽히지 않는 굳건한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셨고 사악한 일제는 망한다는 확신으로 투쟁하였기에 바울과 같은 큰 인물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악령의 포로가 되어버린 사람들을 그것에서부터 자유케 하시려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러 오신 것이다. 예수만 믿으면 모든 것이 잘되고 천국 간다는 싸구려 구원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교회는 세상을 향해서 미리 맛본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해야 할 신앙공동체임을 자각하고 이를 실천해야 한다. 일제강점기와 군사 독재 시대 선배들의 신앙심에 간접적이지만 참맛을 보았다. 이제는 교회를 향해 소리치는 아우성을 들어야 한다. 세상의 수많은 교회들이 오염되어 제구실을 못한다 할지라도 사막의 오아시스의 역할을 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본 문창이 있는 이 지역 교회들만은 하나님의 통치에 순응하며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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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2
  • [양대식 목사] 리더십에 대하여
    마음을 지켜야 한다 성경에서는 마음에 대해 가장 많이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매우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마음은 심장입니다. 심장같이 중요한 것이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마음을 보십니다. 리더는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마음 단속, 마음의 운전을 잘해야 합니다. 좋지 않은 마음을 가지면 사고가 일어납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지키고, 관리하는 자가 리더이고 지혜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을 지키게 됩니다. 사단이 우리의 마음을 흔듭니다. 나쁜 마음, 거짓된 마음, 강퍅한 마음을 가지면 망하게 됩니다. 악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마음에 분노가 가득 찰 때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이 우울하고 슬플 때 기도하면 성령님께서 위로해 주십니다. 마음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결정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마음이 선하고 신실해야 합니다. 두 마음을 품지 않아야 하며,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마음의 염려는 하나님께 맡기고 담대해야 합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 차야 합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입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스트레스가 적어지고 건강에 매우 유익합니다. 마음이 병들면 영육이 병들 수 있습니다. 성령 받으면 마음에 기쁨이 넘칩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마음에서 우러나와 사람을 사랑할 때 관계가 깨지지 않습니다. 마음에서 말이 나옵니다. 마음이 선하면 좋은 말을 하게됩니다. 사람들 마다 마음의 전쟁이 있습니다. 자기 마음을 지키고 다스려야 승리하게 됩니다. ‘성령님, 마음을 지키게 해주세요.’ 순간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미운 마음을 버리고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 찬 리더가 좋은 리더입니다. 인간을 알아야 한다 리더는 인간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아는 데서 관계가 시작됩니다. 인간의 심리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죄인이고 마음이 전적으로 부패했습니다. 죄짓고 사는 인생들입니다. 죄인들이기에 기대하지 않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리더는 긍휼의 마음,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 차야 합니다. 인간은 연약합니다. 나그네, 풀, 안개 같은 인생입니다. 영육이 약하고 마음도 약합니다. 약한 인간이기에 병들 때 고통당합니다. 마음이 약하고 소심하여 말 한마디 때문에 상처받고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인간을 두려워하지 말고 때때로 사람 앞에서 담대해야 합니다. 담대함이 리더십 입니다. 인간은 위기와 고난의 때에 약해집니다. 강하고 위대하신 하나님만 신뢰해야 합니다. 인간은 내일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들입니다. 리더는 내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 주어진 시간에 충실하고 감사하면서 사는 자입니다. 인간은 욕심이 많고 이기적입니다. 누구나 욕심이 많고 자기중심적, 이기주의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욕심 부리고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을 보면서 “나도 저들과 똑같은 자이지” 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내버려 두어야 합니다. 욕심 부리고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스트레스 받지 말고 이해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욕심 부리고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충고해도 듣지 않고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성품, 기질이 있는데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인간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고 사랑의 대상입니다. 리더는 인간에 대해 기대하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는 관계에서 평안을 누립니다. 인간에 대해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도 믿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주어야 합니다. 인간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경제 문제, 은퇴 문제, 관계 깨짐, 죽음, 미래, 건강 등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돈 많은 부자, 지식인들, 아이들까지 인생의 삶은 두려움으로 가득 찬 삶입니다. 소심하고 두려움 속에 사는 인생입니다. 리더는 두려움 속에 사는 인생임을 알고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를 주어야 합니다. 성경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365번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려워 하는 마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만듭니다. 리더는 용기와 담대함으로 도전하는 자입니다. 인간은 변합니다. 인간의 감정, 마음, 약속이 변합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습니다.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기에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수시로 변합니다. 변하는 인간이기에 신뢰할 수 없습니다. 리더는 변하는 인간을 알고, 인간을 믿 거나 기대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하나님만 믿고 의지합니다. 변할 수 있기에 인간이 변할 때 크게 실망하지 않아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유익이 안 되면 변할 수 있다, 배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명예를 구하고, 인정받고 싶고, 성공하고 싶어합니다. 인정받을 때 행복합니다. 인간을 대할 때 인정해 주고, 칭찬해 주고, 축복해 주어야 합니다. 지혜로운 리더는 인간을 알고 잘 대처해 나가는 지혜, 관계 리더십을 가진 자입니다. 하나님과 좋은 관계에 집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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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3-22
  • [김성수 총장]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우리 성도들이 즐겨 부르는 복음 중에서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라는 복음 송이 있다. 분주한 생활 가운데서도 우리 모두는 한번쯤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우리 모두의 삶 속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한번쯤 묵상해 볼 필요가 있다. 특별히 우리의 삶의 여정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정말 살아계셔서 나에게 관심이나 갖고 계시는지, 내가 당하는 삶의 고통을 알기나 하시는지, 또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도와주실 수 있는 분인지 회의가 들 때 은혜의 문제를 한번쯤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간절히 바랬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이삭은 형 에서에게 축복을 물려주고자 했다. 그래서 야곱은 먼저 에서에게서 장자권을 빼앗았다. 형 에서의 옷을 입고 털이 많은 사냥꾼인 척하여 눈먼 아버지를 속였다. 아버지 이삭이 그에게 어떻게 그렇게 빨리 사냥감을 갖고 돌아올 수 있었느냐고 물었을 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기까지 하였다. 야곱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했다. 거짓말하고, 속이고, 심지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등 모든 일을 했다. 그래서 야곱은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이 그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아 보인다. 야곱의 계획과 간교는 오히려 역효과를 내기만했다. 에서는 화가 나서 동생을 죽일 기회를 노렸다(창 27:41). 야곱은 목숨을 걸고 형 에서로부터 도망을 쳐야 했고, 결국 자신의 고향과 약속의 땅으로부터도 멀어져 갔다. 도망자 야곱은 자신이 떠나온 고향 집에서 며칠 거리에 있는 어떤 곳에 이르렀다. 사실 그곳은 그의 조부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이르러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던 곳이었다(12:8). 그러나 야곱은 이 하나님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는 그의 조부모와 부모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많이 들었지만 이 여호와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지를 못했다. 야곱은 어쩌다가 이곳에 도착했다. 해가 지고 어두워서 더 이상 여행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진맥진한 야곱은 잠이 들었다. 이 밤에 그는 놀라운 꿈을 꾸었고, 하나님은 꿈에 야곱에게 나타나셨다. 야곱은 자신이 꿈에서 본 이상을 보고 두려워 죽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그는 방금 아버지를 속이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악행에 대해 자신을 벌하실 것인가? 여호와께서 자신을 저주하실 것인가?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야곱을 벌하거나 저주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오히려 풍성한 약속으로 그에게 복을 주셨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그의 조상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동일한 약속을 야곱에게 주신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은 약속의 땅을 떠나 위험한 여행을 떠나는 야곱에게 특별한 약속을 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17:7)고 약속하셨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도망치는 교활한 야곱을 찾아서 만나시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어진 이 모든 풍성한 약속이 이제 그를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 베푸신 축복을 받았다. 야곱은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을 받을 만한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약속의 땅에서 도망치는 도망자가 될 뿐이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축복을 붙잡고 취할 수가 없는 존재다. 우리는 오직 믿음과 감사라는 두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갖고 하시는 일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사실 생각해 보면 내가 소유하고, 누려온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것 아니라 오직 은혜였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한 없이 연약하고 부족하고 허물이 많고, 하나님 앞에 도무지 설 수도 없는 죄인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의 행위대로 갚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모든 것이 은혜라! 모든 것이 은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삶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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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3-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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