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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영적 싸움에 “VICI(이겼노라)”가 있는가?
전쟁에는 반드시 이겨야 하듯, 영적 싸움에도 반드시 승리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종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로마 제국 시대 율리어스 카이사르(Jullius Caesar – 영어표기 시저. 성경표기 가이사)는 전쟁을 스포츠처럼 즐겼던 사람이다. 그가 남긴 명언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The dice(die) is cast. 주사위는 던져졌다. 폼페이우스가 로마 원로원과 음모를 꾸며 카이사르를 죽이려고 로마로 복귀할 때 루비콘강을 건너기 전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오라고 하였다. 명령을 받은 카이사르가 생각해 볼 때 가만히 있으면 자신은 파멸될 것이고, 무기를 들고 루비콘 강을 건너오면 로마의 역적이 될 것이므로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 카이사르는 고민하였다. 이래도 죽을 상황이고 저래도 죽을 상황인데 “죽을 때 죽더라고 싸우고 죽자” 결단을 내리고 무기를 들고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명언을 남겼는데 “주사위는 던져졌다”고하였다. 이때부터 특별한 결단을 하여 어떤 일을 할 때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왔노라[VENI-고대 라틴 발음(웨니), 현대 라틴 발음(베니), I came] 보았노라[VIDI-고대 라틴 발음(위디), 현대 라틴 발음(비디), I saw] 이겼노라[VICI-고대 라틴 발음(위키), 현대 라틴발음(비키,비치), I conquered] 이 문구는 B.C 47년 카이사르가 소아시아 파르나케스를 격파한 후 원로원에 보냈던 전승 보고서 첫 줄이다. 이 문구를 우리 한국인들이 체육대회나 단합대회 때 원문을 약간 변경하여 “왔노라 싸웠노라 이겼노라”로 사용하기도 한다. 어쨌든 인간적으로 카이사르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 그는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폭군(暴君)이 아닌 성군(聖君)의 모습으로 부하들을 다스리며 덕(德)의 정치를 했다. 카이사르의 인생철학이 있었는데 “강자에게 영예를 양보하고, 약자에게 필수품을 양보하라”였다. 인생철학 그대로 그는 전리품들을 자신이 챙기지 않고 부하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고 개인적 재산을 가지고 법률사무소, 마켓, 편의시설을 지어 제공함으로 많은 사람의 신뢰를 쌓아갔으며 자신은 검소한 삶을 살아 타인들로하여금 인정받는 지도자였다. 또한 유머 감각이 있어 부하들에게 마음의 안정을 주었고. 외부 적군들을 정복하기보다 더 힘든 내국 통치를 덕(德)의 정치로 이끌었던 지도자였다. 하지만 죄의 성향을 가진 인간들은 선한 정치를 하는 카이사르를 온전하게 두지 않았다. 카이사르와 친했던 부하 브루투스를 배신자로 만들어 음모를 꾸며 살해하도록 하였다. 믿었던 부하에게 배신당해 칼에 찔려 죽어가면서 마지막 남긴 말이 “브루투스 너마저...!” 인생 허무함으로 막을 내렸다. 훗날 카이사르에 대한 평가를 할 때에 일부 부정적 평가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좋은 평가를 하는데 로마에 수많은 지도자가 있었지만 카이사르를 “로마가 낳은 창조적 천재”라고 결론지었다. 신앙의 싸움을 하고 최후 주님 만나는 그날 주님께서 주신 사역의 현장인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VICI(이겼습니다)” 이렇게 승전 보고를 한다면 멋진 인생을 산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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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회개의 결과 (시32:1-5)
한 여학교 기숙사에 어느 날 도둑이 들어왔습니다. 여학생들을 위협하면서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물건들을 다 내놔”라고 하면서 그 방에 값나갈 만한 물건들을 챙겨서 나가려고 하는데 한 여학생이 “아저씨 중요한 물건을 다 내놔라고 하면서 왜 중요한 저 책은 안 가지고 가세요?”라고 하면서 자신의 성경책을 건네주었습니다. 도둑은 훔쳐간 물건들을 모아서 내다 팔려고 하는데 다른 물건은 다 사 가는데 그 성경책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도데 체 아무도 안 사가는 이 책이 무슨 중요한 책이란 말인가?”하며 그 책을 시간 나는 데로 들쳐보면서 읽었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지만 그 여학생이 “굉장히 중요한 책인데 왜 안가지고 가느냐?”라는 말이 귓전을 맴돌아서 계속 반복해서 읽다가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실이 얼마나 잘 못된 것인지를 깨닫고 철저히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한 교회로부터 부흥회 초청을 받고 가서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그는 자신이 예수를 믿게 된 동기에 대해서 간증을 하는데 한 중년 부인이 흐느끼면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자기의 설교에 은혜를 받고 우는 줄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설교가 끝난 후에 그 중년 부인이 다가와서 자기가 바로 그 기숙사에서 성경책을 건네 준 그 여학생 이었노라고 하는 말을 듣고 감격을 했다는 것입니다. 죄는 인생을 망가지게 하지만 회개는 망가진 인생을 회복시킵니다. 죄는 사람을 부패시키는 바이러스라고 한다면 회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백신이기 때문에 사람을 새롭게 합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할 때 어떤 역사가 있게 되는지 함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회개하면 용서의 은혜를 주십니다.(시32:1-5) 둘째로, 회개하면 환경의 축복을 주십니다.(대하7:13-14) 셋째로, 회개하면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행2:37-38) 우리 모두 회개의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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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속담은 쉽고 간결한 말로 선조들의 지혜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전해주므로, 익혀두면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아무리 쉬운 일이라도 혼자 하는 것보다는 여럿이 힘을 합하면 더욱 쉽다는 의미의 우리말 속담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가 있다. 사자성어로도 비슷한 단어가 있는데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 해서 ‘한 손으로는 소리를 낼 수 없다’라는 뜻이다. 비슷한 의미의 영어 속담도 있는데 ‘Two heads are better than one’ 두 사람의 지혜가 한 사람의 지혜보다 낫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협력(協力)’을 뜻하는 문장이 많다. 그런데 이렇게 귀한 단어가 성경전체에 딱 한 번 나온다. (빌1:27)에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그리고 협력(協力)과 비슷한 단어로 합력(合力)이 있는데 이 단어 역시 성경에 두 번 등장한다. (삼상22:17)에 “왕이 좌우의 호위병에게 이르되 돌아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그리고 (롬8:28)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놀라울 따름이다. 그만큼 ‘협력’이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함께 일을 할 신실한 동역자도 구하기 힘들다. 정말 내 마음에 꼭 맞는 사람, 평생을 두고 백지장을 맞들 한 사람을 구하기 힘들다. 사람은 많지만 정말 좋은 사람을 찾아내기 힘들다. 예수님에게도 12명의 제자가 있었다. 바울에게는 신실한 제자 디모데가 있었다. 엘리야에게는 영적인 아들 엘리사가 있었다. 이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다.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는 만능인도 없다. 함께 동역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이 잘못 되었을 때에는 ‘내 책임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동역이다. 무언가 좀 잘 했을 때에는 ‘우리가 해 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동역이다. 무언가 아주 잘 했을 때에는 ‘너희들이 해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동역이다. 추운 겨울을 남쪽 나라로 보내기 위해 달밤을 날아가는 기러기 떼는 “ㅅ”자 형으로 줄을 지어서 날아간다. 과학자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를 밝혀냈다. 모든 새들이 날기 위해 날개를 퍼덕거리면 그 뒤에 있는 새에게 양력(揚力)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ㅅ”자 대형으로 날면 혼자 가는 것보다 71% 더 날아간다고 한다. 기러기 떼 중에서 뒤에서 우는 소리를 내는 기러기가 있는데 그것은 힘들어서가 아니라 바로 앞에 가는 새에게 힘을 돋아 주기 위해 하는 ‘추임새’와 같다는 것이다. 바울은 노년에 평생의 동역자인 디모데를 보고 싶어서 (딤후4:9)에서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고 말했다. 너무도 감사한 것은 우리에게는 정말 귀한 동역자가 계신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성경이 그렇다고 말한다. (고전3:9)에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무 귀하다.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시편121:4)에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라고 약속한다. 이제 우리에게는 함께 백지장을 맞들 분이 계신다. 그의 이름은 바로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렘51:19)에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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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바울은 솔직했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솔직하게 표현한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낼 수 있단 말인가?”라고 탄식함을 우리는 잘 안다. (로마서 7: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그는 이 죄를 바울이 아니라고 두 번이나 말한다. 얼마나 이상한 말인가? 이것이 복음이다. (로마서 7: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로마서 7: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우리는 절대 탄식 속에서만 살아서는 안 된다. 해결의 방법이 있다. 해결 방법은 아주 쉽다. 항상 사로잡아오는 죄의 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대박이다. 한 없이 사로잡아 오는 죄의 법에서 어떻게 빠져 나와 참 평안과 영원한 행복의 삶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바울도 온전한 복음을 알고 복음의 핵심을 말한 후 로마서 7장과 8장에서 말한다. 로마서 8장의 시작을 보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선포한다. (로마서 8장1절) 우리는 이 선포를 그대로 받아 감사해야 할 일이다. 거듭난다는 것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다. 거듭났는가? 거듭났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새 생명을 소유했다. 바울은 결코 정죄함이 없는 자임을 알려주고 있다. 다음과 같이 받아들이고 주장해 보라. "나에게 새 생명이 있다. 나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했다" 로마서를 가지고 많이 기도하라. 1장부터 16장을 읽으며 영의 기도를 하는 시간은 신이 난다. 하나님께 고백하고 감사한다. 또 자신에게 말해 준다. “주님, 저에겐 생명이 있습니다. 저는 결코 정죄 받지 않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저를 해방했습니다.”라고 주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일을 50번도 100번도 올려 드려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기도의 시간이 될 것이다. 나에게도 말해 줘라. “너는 참으로 행복한 놈이구나. 너의 죄가 사해졌어. 너를 정죄할 그 누구도 없어. 너도 너를 이제부터는 정죄 하지 마! 너는 성령의 법으로 해방 된 자야!”라고 반복해서 나 자신에게 말해 보라. 얼마나 신나고 행복한 시간인지, 흥분되는 일이다. 능력으로 살 수 있는 지름길이 성경대로 나를 주장하고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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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땅의 소산 (창세기 4장 3절)
“Why is the Firstborn Blessing Given to the Firstborn?” “왜 장자의 축복은 처음 태어난 자에게 주어지나요?” 지난 주일 설교를 들은 투코 집사님의 질문은 뜻밖이었습니다. “왜 첫째 아들이 장자여야 합니까?” 처음엔 다소 생뚱맞게 들렸지만, 곱씹을수록 그 질문은 제 마음을 크게 흔들었습니다. 그동안 성경에서 말하는 장자와 장자권에 대해 나름 분명한 기준을 갖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알고 보니 그 기준의 출발이 상식이었습니다. ‘장자라면 당연히 첫째 아들’이라는 세상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성경을 본다고 자신했지만, 출발점은 여전히 인간 중심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열네 살 많은 이스마엘을 제치고 이삭에게 장자의 축복을 전했습니다. 이삭은 쌍둥이 형 에서가 아니라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주었고, 야곱은 열두 아들 중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을 장자로 세웠습니다. 이런 장면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종종 이상하게 느낍니다. 왜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신 장자의 원리를 스스로 따르지 않으실까 하는 의문이 들지요. 그러나 그 생각의 출발 자체가 이미 인간적인 상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장자’는 단순히 먼저 태어난 자를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원을 성취하는 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족을 책임지는 자를 의미합니다. 완전한 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생명을 버리심으로 하나님의 가족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장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구원을 완성하는 직분이며, 그 직분은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소명입니다. 장자는 자신이 원해서 먼저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부모가 먼저 낳았고, 다른 이들이 ‘장자’라 불러주었을 뿐입니다. 본인은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것이라”고 하셨으니 장자이고, 하나님께서 “장자”라 부르셨으니 장자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 처음 태어난 것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다 내게 속하였음은 내가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치던 날에 그들을 내게 구별하였음이라”(민 8:17)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준이 곧 장자의 기준입니다. 이 사실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믿음의 조상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에서 대신 야곱에게, 야곱이 요셉에게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믿음으로’ 행한 일이라 증거합니다(히 11:20-21). 이렇게 보면 오히려 이삭이나 야곱, 요셉이 장자가 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볼 때는 아무런 모순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에게 의심과 원망이 생기는 이유는 언제나 기준이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장자로 세우셨지만, 그 뜻을 혈육의 서열로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장자로 부르셨으나, 그는 하늘의 예배보다 땅의 소산에 몰두했습니다. 제물을 받으시지 않자 그는 분노했고, 그 분노는 결국 동생 아벨을 죽이는 죄로 이어졌습니다(창 4:5, 8).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불신앙이며, 그 불신앙의 결과는 언제나 땅의 소산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장자로 세우신 본래의 사명, 즉 예배의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장자는 가족을 대표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존재인데, 그는 예배보다 자신의 열심과 수확을 앞세웠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이 기준이 되었고, 결국 영적 교만과 타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깨닫게 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라고 외치면서도 실상은 상식과 서열, 인간의 기준으로 말씀을 판단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조금만 어긋나도 우리는 하늘의 소산이 아니라 땅의 소산을 거두게 됩니다. 투코 집사님의 질문은 그 당연하다고 여겼던 기준이 얼마나 인간적이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도 제자들을 형제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분의 믿음의 결단이 오늘의 교회로 이어졌습니다. 함께 묵상하던 송동호 목사님이 이런 글을 남기셨습니다. “The blessing of the firstborn is not a privilege of birth, but the portion of the one who bows before God first.” “장자의 축복은 태어남의 특권이 아니라 하나님께 먼저 무릎 꿇는 자의 몫이다.” 그는 곧 이어 이렇게 정정했습니다. “The blessing of the firstborn is not a privilege of birth, but the portion of the one whom God leads to bow before Him first.” “장자의 축복은 태어남의 특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무릎 꿇게 하신 자의 몫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무릎 꿇게 하시는 자, 그가 바로 장자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은혜로 장자의 자리로 불림받았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 믿음으로 주어진 장자의 자리를 지키며, 하늘의 소산을 거두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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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고귀한 기독문화 유산 보호의 길 찾자
얼마 전 지역 유력 일간지를 통해 경남도의 싱크탱크인 경남연구원 김진형 연구원의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100년 후 보물급 문화유산을 보호할 수 있는 ‘미래유산제도’를 만들어가자는 취지의 주장이었다. 김 연구원의 주장을 다시 살펴보면, 곳곳에 산재한 국가문화유산을 미래유산으로 지정하고 동판을 붙여 보호하자는 논지다. 국가유산으로 등록되기 전 ‘미래유산제’를 설치해 함부로 유실되지 않도록 하자는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하고 있다. 필자는 이 칼럼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우리 교회도 기독교 문화유산 보호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싶다. 그동안 경남 지역 각 교회를 돌아볼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독교의 고귀한 문화유산이 제대로 보호되지 못하고 유실되고 있는 실정을 목도했다. 한국 기독교가 선교 140년을 맞았으며, 국내 1천만에 달하는 기독교 인구로 인해 ‘기독교 강국’, ‘선교 강국’이 되었다. 여러 지역의 100년 이상 된 초대교회를 방문해보면 국가보물급이 될 만한 유산들이 흩어져 있으나, 체계적인 보호의 손길 없이 유실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가까운 경남 지역만 하더라도 100년 이상의 역사를 품은 교회가 100여 개소에 달한다. 1888년 캐나다 제임스 게일 선교사와 미국 북장로교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 이후, 당시 경남 부산 지역에는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이 줄을 이어 들어와 부산·마산·진주 등 경남 전역 마을마다 교회를 세웠다. 경남성시화운동본부는 10여 년 전 호주 선교사 역사관을 마산에 세우고 여러 유산을 모아 성역화해 놓았다.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진주 지역은 올해 선교 120년을 맞아 서부경남 부흥의 비전을 세우는 연합집회와 학술세미나를 이어 개최하고, 진주지역 기독역사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역사관을 짓고 유산을 모아 보관·관리하는 길도 매우 좋은 일이다. 그러나 정작 보물급 기독유산들은 각 지역 교회가 관리하거나 흩어져 방치되고 있는 경우가 수없이 많다. 먼저 각 교회가 관리하고 소장한 유무형의 유산들을 정리하고 집대성하여, 국가기관의 미래유산제도에 편입시켜 제도적 보호장치를 마련하는 길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의 고귀한 유산이 단번에 국가유산으로 등록되어 영구히 보호받는 길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취지에서 선교 120년을 맞은 진주 지역의 초대교회, 진주교회를 찾아 유산이 될 만한 소장·관리 유물을 살펴봤다. 당장 눈에 띄는 유물이 있었다. 120년 전 호주 커렐 선교사가 진주교회를 세우고 교회가 부흥했으나, 곧 일제의 침탈을 당했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 전국의 교회들이 분연히 일어섰던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다. 1919년 3월 18일 진주 고을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날 때, 일제히 모이는 신호가 당시 진주교회 종탑에서 울렸다. 얼마나 위대하고 엄청난 복음의 숨결이 있었던가. 나라를 살리기 위해 초대교회 종탑의 종이 진주 고을 백성을 모아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 종이야말로 국보급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구국의 종이 이후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다. 다행히 현재 천안의 고신대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국민적 공감대를 모아 국가유산으로 등재하고, 국가 차원의 보호를 받아야 함이 당연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3·1운동 참여 등 역사 발전의 굴절마다 교회의 흔적이 위대한 역사 속 숨결로 숨어 있다. 이것은 하나의 중요한 예에 불과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경남·부산 선교 140년이 다가오고 있다. 이 즈음에 기독교 문화유산을 집대성하고 고증을 거쳐, 국가 미래유산제도와 유산등록의 정책적 관리를 위해 능동적으로 나서야 하지 않을까 하는 강한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지역 교계가 한마음으로 뭉치고, 이 일을 함께 살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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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영적 싸움에 “VICI(이겼노라)”가 있는가?
- 전쟁에는 반드시 이겨야 하듯, 영적 싸움에도 반드시 승리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종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로마 제국 시대 율리어스 카이사르(Jullius Caesar – 영어표기 시저. 성경표기 가이사)는 전쟁을 스포츠처럼 즐겼던 사람이다. 그가 남긴 명언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The dice(die) is cast. 주사위는 던져졌다. 폼페이우스가 로마 원로원과 음모를 꾸며 카이사르를 죽이려고 로마로 복귀할 때 루비콘강을 건너기 전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오라고 하였다. 명령을 받은 카이사르가 생각해 볼 때 가만히 있으면 자신은 파멸될 것이고, 무기를 들고 루비콘 강을 건너오면 로마의 역적이 될 것이므로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 카이사르는 고민하였다. 이래도 죽을 상황이고 저래도 죽을 상황인데 “죽을 때 죽더라고 싸우고 죽자” 결단을 내리고 무기를 들고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명언을 남겼는데 “주사위는 던져졌다”고하였다. 이때부터 특별한 결단을 하여 어떤 일을 할 때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왔노라[VENI-고대 라틴 발음(웨니), 현대 라틴 발음(베니), I came] 보았노라[VIDI-고대 라틴 발음(위디), 현대 라틴 발음(비디), I saw] 이겼노라[VICI-고대 라틴 발음(위키), 현대 라틴발음(비키,비치), I conquered] 이 문구는 B.C 47년 카이사르가 소아시아 파르나케스를 격파한 후 원로원에 보냈던 전승 보고서 첫 줄이다. 이 문구를 우리 한국인들이 체육대회나 단합대회 때 원문을 약간 변경하여 “왔노라 싸웠노라 이겼노라”로 사용하기도 한다. 어쨌든 인간적으로 카이사르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 그는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폭군(暴君)이 아닌 성군(聖君)의 모습으로 부하들을 다스리며 덕(德)의 정치를 했다. 카이사르의 인생철학이 있었는데 “강자에게 영예를 양보하고, 약자에게 필수품을 양보하라”였다. 인생철학 그대로 그는 전리품들을 자신이 챙기지 않고 부하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고 개인적 재산을 가지고 법률사무소, 마켓, 편의시설을 지어 제공함으로 많은 사람의 신뢰를 쌓아갔으며 자신은 검소한 삶을 살아 타인들로하여금 인정받는 지도자였다. 또한 유머 감각이 있어 부하들에게 마음의 안정을 주었고. 외부 적군들을 정복하기보다 더 힘든 내국 통치를 덕(德)의 정치로 이끌었던 지도자였다. 하지만 죄의 성향을 가진 인간들은 선한 정치를 하는 카이사르를 온전하게 두지 않았다. 카이사르와 친했던 부하 브루투스를 배신자로 만들어 음모를 꾸며 살해하도록 하였다. 믿었던 부하에게 배신당해 칼에 찔려 죽어가면서 마지막 남긴 말이 “브루투스 너마저...!” 인생 허무함으로 막을 내렸다. 훗날 카이사르에 대한 평가를 할 때에 일부 부정적 평가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좋은 평가를 하는데 로마에 수많은 지도자가 있었지만 카이사르를 “로마가 낳은 창조적 천재”라고 결론지었다. 신앙의 싸움을 하고 최후 주님 만나는 그날 주님께서 주신 사역의 현장인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VICI(이겼습니다)” 이렇게 승전 보고를 한다면 멋진 인생을 산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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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영적 싸움에 “VICI(이겼노라)”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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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관계 전도
- 전도는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전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됩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관계전도가 있습니다. 관계전도는 좋은 관계를 통해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웃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가 좋아야 전도할 때 효과가 나타납니다. 입으로 만의 전도가 아니고 삶으로 전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고 선행의 실천으로 전도하는 것입니다. 삶이 나쁘고 태도가 나쁘면 관계전도가 안 되고 전도가 방해됩니다. 전도하는 자는 세상에서 향기가 되어 좋은 냄새를 내고 좋은 소문이 나야 합니다.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전도한 것은 가까운 관계에서의 관계전도이고 예수님께서 우물가의 여인 죄 많은 여인 고독한 여인을 전도한 것은 따뜻한 사랑과 섬김 대화로 관계를 맺고 전도한 관계전도입니다. 관계전도의 비결은 사랑의 마음과 따뜻한 마음입니다. 사람에 대해 정죄하거나 비판하는 마음이 있으면 관계전도가 될 수 없습니다. 누구를 대하든지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대해 주어야 합니다. 사랑과 섬김으로 인간관계 맺고 인간관계가 잘되어 전도할 때 전도의 효과가 큽니다. 덕을 세우지 못하고 나쁜 이미지를 주면 관계가 안 되고 관계가 나쁘면 전도가 안 되고 전도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관계전도는 선행의 삶을 실천하면서 전도하는 전도의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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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논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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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관계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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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칼빈의 추억 한 토막
-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 인상 깊은 장면을 회상한 것은 기록되어 있다. 테아 반 힐세마(Thea B. Van Halsema)가 저술한 『This was John Calvin(이 사람 존 칼빈)』이라는 책을 보면, 칼빈은 어머니와 함께 짧은 순례길을 걸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골짜기를 따라 두 시간을 걸은 끝에 도착한 곳은 예수의 외할머니로 여겨지는 성 안나의 유골이 안치된 사당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들어 올려, 금으로 장식된 관 안에 누워 있는 유골에 입을 맞추게 했다. 사당 안은 촛불로 밝고 향기로웠으며, 숭배하는 순례자들의 눈빛은 경건으로 가득했다. 어린 칼빈에게 그것은 아마 신비롭고 감동적인 체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이 장면을 바라볼 때,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정서 이상의 것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말 세 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성당의 종소리가 울린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성읍 생활의 중심이 되었던 중세 말 교회의 풍경은 단지 아름답고 경건한 외양만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신앙의 본질이 흐려진 채 형식과 외적 숭배에 몰두한 영적 타락이 도사리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의 형식주의와 권위주의, 성유물의 과도한 숭배, 그리고 성직자들의 탐욕은 교회의 영적 본질을 흐리고 있었다. 성 안나의 유골만이 아니라, 세례 요한의 머리카락, 예수의 치아, 오병이어 사건의 빵 부스러기, 가시관 조각과 구약시대 만나의 조각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성유물이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교회는 이러한 유물들을 통해 기적을 기대하고 은총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자극했고, 성직자들은 이를 통해 물질적 이익과 권력을 얻었다. 더 나아가 성당과 수도원은 특정 유물의 진위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다투었으며, 이 논쟁은 지역의 종교적 경쟁심을 자극했고, 프랑스 의회조차 이를 조정하지 못할 정도였다. ‘성인’의 이름을 붙인 성당이나 수도원은 유골을 소유한 장소로서의 권위를 주장했고, 이는 종종 종교적 신비주의를 이용한 경쟁과 탐욕의 장이 되었다. 말하자면, ‘거룩’은 거래되고, ‘은혜’는 판매되었으며, ‘경건’은 형식으로 포장되었다. 이 모든 모습은 한마디로 ‘거룩함의 상업화’였고, 진리 대신 형식과 기적, 외적 경건에 목을 매던 교회의 실상이었다. 이러한 부패는 개혁자들로 하여금 교회의 본질을 되묻게 했고,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잉태하게 했다. 칼빈은 단지 교리의 개혁자가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을 지닌 영적 개혁자였다. 그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함을 외쳤고, 유골과 형상과 건물 안에서가 아니라, 성령의 조명 아래 말씀과 신앙의 참된 삶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신학과 실천은 교회의 본질을 새롭게 정의했다. 교회는 권위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충실한 선포와 성례의 정당한 시행이 있는 곳이며, 무엇보다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믿는 자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문제는 과거의 부패가 오늘날에도 형태만 달리하여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교회는 더 이상 성인의 유골을 입맞추지 않지만, 또 다른 유물들을 만들어 숭배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화려한 예배당, 웅장한 무대, 감정을 자극하는 조명과 음악, 유명 목회자에 대한 절대적 의존, 그리고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역 성과들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성유물이 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때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인간의 욕망을 투영한 현대판 형식주의일 수 있다. 교회는 언제나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가시관 조각’이 있다. 그것은 더 멋진 무대, 더 화려한 예배당, 더 대형화된 사역과 같은 것들이다. 물론 이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중심이 되어 하나님을 도구화하고, 복음을 수단화하며, 인간의 만족을 위한 종교 행위로 전락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촛불 아래에서 거룩을 잃고 있는 것이다. 칼빈이 외친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는 외침은 시대를 초월한다. 이는 단지 제도 개혁의 구호가 아니라,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한 끊임없는 성찰과 순종을 요구하는 외침이다. 칼빈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은 단지 과거의 회고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거울과 같은 통찰이다. 그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성유물 앞에서 입을 맞췄던 기억은, 우리가 누구의 손에 이끌려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묻는 물음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순례 중이며, 여전히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 길 위에 서 있다.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무엇을 숭배하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멈추어 서는 것, 그리고 다시금 본질로 되돌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종교개혁의 정신이요, 오늘의 교회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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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칼빈의 추억 한 토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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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다시 논하다
- 지난 9월 3일 전국 신문 1면 톱뉴스를 장식한 중국 베이징에서 보내온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중국 전승절 8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중국 시진핑, 러시아 푸틴, 북한 김정은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서늘한 기운으로 다가왔다. 마치 한반도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음흉한 모습이랄까. 아무튼 중국 전승절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답답하지만, 중국은 한 장의 사진으로 대한민국을 비롯한 서방권 제국들에게 도전하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작금의 세계 정세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후 강한 드라이브로 관세폭탄을 세계 각국에 던지면서 ‘강한 미국’을 시현하고 있다. 이에 대한 사회주의 동맹의 이들 세 나라는 단합의 자세를 즉각 보이는 것으로,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한참 국민 정서를 흐트려놓았다. 문제는 이날 사진 한 장에서 세계는 지금 경제전쟁과 이념패권이 깊어지고 있다는 진단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세계를 주도하는 미국의 경제력에 부단히 따라붙고 있는 중국을 미국은 본격 견제하기 시작했다. 세계 각국 언론사 탐사취재팀은 오늘의 중국이 시진핑의 장기집권을 비판하면서 위기로 치닫고 있다는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반면에 중국의 건재함을 진단하면서 미국의 경제력을 압도해 간다는 보도를 내기도 한다. 세계 새로운 산업 트렌드인 AI 산업시대는 중국이 세계를 이끌 것이라는 학자들의 진단도 있다. 등소평 후 개혁개방의 대전환이 이제 자본주의의 현장 미국을 넘어설 것인가. 아니면 공산사회주의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이끄는 데 한계가 왔다는 주장이 맞을 것인가. 쉽게 전망할 수 없는 형편 아니겠는가. 상황의 전개가 어찌되든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야욕에 대해 쉽게 시선을 돌릴 수 없다.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북한의 3각 대응이 우리에게는 조선 말 위기의 한반도가 되지 않을까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해방 후 좌우 대립에서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가 아닌가. 주변 강대국이 새롭게 이념전쟁화하는 신냉전시대, 우리는 갈 길을 모르고 깊은 내전(內戰)에 휩싸여 있다. 필자는 얼마 전 우리의 근대사 영웅 안중근이 1907년 하얼빈에서 원수 일본 총리 이토를 쓰러뜨린 후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주창했던 이야기를 영화 《하얼빈》을 통해 소개한 바 있다. 다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오버랩된다.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은 이 비상하고 위험한 정세일지라도 복음의 실크로드를 열심히 닦아내는 것이다. 이 사명의 복음운동에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의 길이 열릴 것이다. 사형집행을 앞둔 차디찬 감옥 바닥에서 그는 5가지의 평화제안을 했다. 첫째, 조선·일본·청나라 3국이 연합하여 협력공존의 협력기구를 만들자. 둘째, 3국이 공동은행을 설립·운영하자. 셋째, 3국이 공동연합하여 서양 침입에 공동대처하자. 넷째, 3국의 경제개발 지혜를 일본에서 배우자. 다섯째, 상호 존중하고 평화를 유지하자. 어쩌면 굴욕 같지만 일본에 대해 조선을 식민지화하지 말고 아시아를 평화의 공동지대로 만들자는 혁신적 제안이었다. 일본에 36년간 식민지 지배를 받고 해방되어 6·25를 겪으며 처참한 빈국이 되었던 나라, 이 나라가 자유민주의 자본시장경제의 기틀에서 세계 10위 내 경제 강국으로 성장했다. 성공과 부흥 끝에 다가오는 또 다른 위기인가. '경제 보물섬'이 되어버린 지금의 대한민국에 대해 눈독으로 가득 찬 주변 나라들을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한국교회가 강력한 복음운동으로 나가야 한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동아시아에 새롭게 심도록 해야 한다는 논지이다. 먼저 동아시아 복음평화운동으로 한반도의 복음통일을 이루는 데 부단한 사명 수행이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동아시아 복음평화운동에 주변 모든 나라의 교회가 연합하는 새로운 역사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약관의 나이에 오직 식민지를 꿈꾸는 적장을 총탄으로 쓰러뜨리고 위대한 동양평화론을 주창할 수 있었을까. 젊은 영웅이 피를 토하듯 던진 이 어록(語錄)을 깊게 되새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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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다시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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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무관심의 절정
-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 “멍 때린다”는 표현이 있다. 고유한 우리말인 이 표현은 “아무 생각 없이 한곳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의식이 잠시 멈춘 듯한 상태로 가만히 있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아무 뉴스에도 반응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한 적이 있을 것이다. 어느새 멍하니 휴대폰을 스크롤하고 있지만, 거기 담긴 전쟁과 죽음, 기후 위기와 삶의 절망적인 광경 앞에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현상을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현대 사회는 너무 많은 것을 너무 자주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감정이 교묘하게 조작되며, 반응은 형식화된다. 심지어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피곤한 시대다. 바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그 시점이다. 이것을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무관심의 절정’이라고 불렀다. 이 무관심은 감정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감정을 과잉 소비한 끝에 마비된 상태다.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을 이미지화하고, 의미로 포장하고,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한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많은 자극과 너무 많은 반응이 반복되다 보면 오히려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감정이 남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관심이 있던 자리에 무감각이 남고, 연대하려던 마음은 차가운 피로감으로 굳어버린다. 오늘 우리는 매일같이 뉴스, 광고, SNS, 알림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지구 반대편의 절망도, 이웃의 눈물도 잠시 울컥했다가 이내 다른 화면으로 스치듯 지나간다. 더군다나 진짜는 없고 이미지만 판을 친다. 이제는 인간의 슬픔도, 정의도, 연대도 모두 기호화된 감정이다. 그것은 진짜처럼 보이지만 반복되고 조작되고 연출된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이것이야말로 현대인의 감정 소진이며, 이 무감각이야말로 가장 극단적인 무관심이라고 말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감정 소진 상태가 점점 자연스러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무관심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여긴다. 냉소와 피상적 반응은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 된다. 지금 이 시대는 누군가를 위해 슬피 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슬퍼 보이는 모습”을 공유하는 것으로 충분한 시대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도다 함과 같도다.”(마태복음 11:16-17) 보드리야르가 진단한 것은 이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것이다. 사회가 감정을 조작하고, 욕망을 설계하며, 공감의 언어마저 포장하는 구조 속에서 우리는 반응하는 법을 잃고 느끼는 법을 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조가 너무 익숙해져서 더 이상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 진짜 위기가 시작된다. “무관심의 절정”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각성해야 한다. 피로한 감정이 일상이 되었고, 감정 없는 반응이 습관이 되었을 때 우리는 진지하게 성찰하고 질문해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아니, 나는 아직도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가? 희망은 물음에서 시작된다. 감정을 회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감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아파할 수 있는 능력, 누군가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일 수 있는 여백, 눈물이 마르지 않은 마음을 회복하는 것, 기호와 이미지에 휩쓸리지 않고 실재를 붙들 수 있는 용기를 갖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아직도 누군가의 고통 앞에 멈출 수 있다면 완전히 늦은 것은 아니다. 무관심의 절정 한가운데서 우리는 다시 ‘느끼는 연습’이 필요하다. 다시 사랑하고, 다시 분노하고, 타인의 고통에 다시 공감하고 연대하는 감정의 회복, 그것은 거창한 변혁이 아니라 아주 작은 감각의 틈에서 시작된다. 눈앞의 사람을 다시 바라보는 것, 뉴스 속 타인을 내 삶 안으로 초대하는 것, 멀리 있는 고통을 내 언어로 말해보는 것, 그렇게 우리는 다시 공감의 감정을 살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우리를 조금씩 움직이게 한다. 반응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다시 붙들게 한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자리에서 다시 울컥하게 만들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게도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지금, 우리는 감정을 회복해야 할 시간 한가운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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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무관심의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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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숙 권사] 다시 뛰게 하시는 하나님
- 지금, 다시 일어서야 할 누군가에게 우리는 모두 한 번쯤, 삶의 무게에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 설명할 수 없는 억울함, 그리고 말하지 못한 상처가 마음을 짓누를 때, 어디서 다시 힘을 얻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그런 때를 겪은 사람들에게도 말을 건넵니다. 이사야서 33장은 그런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주전 8세기 말, 남유다 왕국은 앗수르 제국의 위협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당대의 앗수르는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고 조공을 강요하며 공포로 지배하던 강대국이었습니다. 남유다 또한 그들의 침공 앞에서 불안에 떨고 있었고, 때때로 생존을 위해 조공을 바쳐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그 위기의 시기에, 이사야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황충의 때 같이 사람이 너희의 노략물을 모을 것이며, 메뚜기가 뛰어오름 같이 그 위로 뛰어오르리라.”(이사야 33:4) 이 구절에서 ‘사람’은 바로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 곧 지금까지는 억눌리고 침묵했던 남유다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고난을 겪고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되찾는 주체로 바뀝니다. 반대로 ‘너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앗수르 제국을 지칭합니다. 그들이 강제로 빼앗고 축적한 부와 권세는 결국 하나님의 공의로 인해 무너지게 될 운명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노략질했던 것들이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회복의 선언입니다. 또한 ‘메뚜기’는 그 당시 중동에서 파괴력 있는 집단 행동의 상징이었지만, 여기서는 회복된 유다 백성의 힘찬 움직임과 생동감 있는 회복의 이미지로 사용되었습니다. 작고 연약한 메뚜기처럼 보였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제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다시 일어나는 존재로 변모합니다. 마지막으로 ‘그 위’는 앗수르가 차지하고 있었던 권세와 재물, 전리품이 놓여 있던 자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위로 뛰어오른다는 것은 단지 물리적 회복이 아니라 위치의 역전, 즉 억압에서 회복으로의 전환을 뜻하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던 자들이 결국 무너지고, 그들이 빼앗은 것들을 백성들이 되찾게 되는 회복의 약속입니다. 황충과 메뚜기, 작고 연약한 존재 같지만 그들이 몰려올 때 그 힘은 대단합니다. 하나님은 그 이미지를 사용하셔서 “나의 백성들이 마침내 일어나 다시 뛰게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십니다. 혹시 지금 억울한 일을 겪고 계신가요? 말 못 할 상처나, 기대했던 것이 무너져 침묵 속의 눈물을 흘리고 계신가요? 사람들은 몰라도, 주님은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회복시키겠다. 네가 빼앗긴 것을 다시 뛰어오르게 하겠다.” 이사야 33장 4절은 단순한 문학적 이미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회복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억압을 꺾으시고, 넘어진 자들을 다시 일으키십니다. 사람 눈에는 우리가 작은 메뚜기처럼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우리는 회복의 주인공이 됩니다. 오늘도 믿음으로 이렇게 고백해 봅시다. “주님, 제가 다시 일어서겠습니다. 주님이 회복하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백을 들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뛰는 날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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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숙 권사] 다시 뛰게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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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영적 싸움에 “VICI(이겼노라)”가 있는가?
- 전쟁에는 반드시 이겨야 하듯, 영적 싸움에도 반드시 승리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종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로마 제국 시대 율리어스 카이사르(Jullius Caesar – 영어표기 시저. 성경표기 가이사)는 전쟁을 스포츠처럼 즐겼던 사람이다. 그가 남긴 명언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The dice(die) is cast. 주사위는 던져졌다. 폼페이우스가 로마 원로원과 음모를 꾸며 카이사르를 죽이려고 로마로 복귀할 때 루비콘강을 건너기 전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오라고 하였다. 명령을 받은 카이사르가 생각해 볼 때 가만히 있으면 자신은 파멸될 것이고, 무기를 들고 루비콘 강을 건너오면 로마의 역적이 될 것이므로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 카이사르는 고민하였다. 이래도 죽을 상황이고 저래도 죽을 상황인데 “죽을 때 죽더라고 싸우고 죽자” 결단을 내리고 무기를 들고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명언을 남겼는데 “주사위는 던져졌다”고하였다. 이때부터 특별한 결단을 하여 어떤 일을 할 때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왔노라[VENI-고대 라틴 발음(웨니), 현대 라틴 발음(베니), I came] 보았노라[VIDI-고대 라틴 발음(위디), 현대 라틴 발음(비디), I saw] 이겼노라[VICI-고대 라틴 발음(위키), 현대 라틴발음(비키,비치), I conquered] 이 문구는 B.C 47년 카이사르가 소아시아 파르나케스를 격파한 후 원로원에 보냈던 전승 보고서 첫 줄이다. 이 문구를 우리 한국인들이 체육대회나 단합대회 때 원문을 약간 변경하여 “왔노라 싸웠노라 이겼노라”로 사용하기도 한다. 어쨌든 인간적으로 카이사르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 그는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폭군(暴君)이 아닌 성군(聖君)의 모습으로 부하들을 다스리며 덕(德)의 정치를 했다. 카이사르의 인생철학이 있었는데 “강자에게 영예를 양보하고, 약자에게 필수품을 양보하라”였다. 인생철학 그대로 그는 전리품들을 자신이 챙기지 않고 부하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고 개인적 재산을 가지고 법률사무소, 마켓, 편의시설을 지어 제공함으로 많은 사람의 신뢰를 쌓아갔으며 자신은 검소한 삶을 살아 타인들로하여금 인정받는 지도자였다. 또한 유머 감각이 있어 부하들에게 마음의 안정을 주었고. 외부 적군들을 정복하기보다 더 힘든 내국 통치를 덕(德)의 정치로 이끌었던 지도자였다. 하지만 죄의 성향을 가진 인간들은 선한 정치를 하는 카이사르를 온전하게 두지 않았다. 카이사르와 친했던 부하 브루투스를 배신자로 만들어 음모를 꾸며 살해하도록 하였다. 믿었던 부하에게 배신당해 칼에 찔려 죽어가면서 마지막 남긴 말이 “브루투스 너마저...!” 인생 허무함으로 막을 내렸다. 훗날 카이사르에 대한 평가를 할 때에 일부 부정적 평가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좋은 평가를 하는데 로마에 수많은 지도자가 있었지만 카이사르를 “로마가 낳은 창조적 천재”라고 결론지었다. 신앙의 싸움을 하고 최후 주님 만나는 그날 주님께서 주신 사역의 현장인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VICI(이겼습니다)” 이렇게 승전 보고를 한다면 멋진 인생을 산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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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영적 싸움에 “VICI(이겼노라)”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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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회개의 결과 (시32:1-5)
- 한 여학교 기숙사에 어느 날 도둑이 들어왔습니다. 여학생들을 위협하면서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물건들을 다 내놔”라고 하면서 그 방에 값나갈 만한 물건들을 챙겨서 나가려고 하는데 한 여학생이 “아저씨 중요한 물건을 다 내놔라고 하면서 왜 중요한 저 책은 안 가지고 가세요?”라고 하면서 자신의 성경책을 건네주었습니다. 도둑은 훔쳐간 물건들을 모아서 내다 팔려고 하는데 다른 물건은 다 사 가는데 그 성경책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도데 체 아무도 안 사가는 이 책이 무슨 중요한 책이란 말인가?”하며 그 책을 시간 나는 데로 들쳐보면서 읽었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되었지만 그 여학생이 “굉장히 중요한 책인데 왜 안가지고 가느냐?”라는 말이 귓전을 맴돌아서 계속 반복해서 읽다가 은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실이 얼마나 잘 못된 것인지를 깨닫고 철저히 회개하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한 교회로부터 부흥회 초청을 받고 가서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서 그는 자신이 예수를 믿게 된 동기에 대해서 간증을 하는데 한 중년 부인이 흐느끼면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자기의 설교에 은혜를 받고 우는 줄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설교가 끝난 후에 그 중년 부인이 다가와서 자기가 바로 그 기숙사에서 성경책을 건네 준 그 여학생 이었노라고 하는 말을 듣고 감격을 했다는 것입니다. 죄는 인생을 망가지게 하지만 회개는 망가진 인생을 회복시킵니다. 죄는 사람을 부패시키는 바이러스라고 한다면 회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백신이기 때문에 사람을 새롭게 합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할 때 어떤 역사가 있게 되는지 함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회개하면 용서의 은혜를 주십니다.(시32:1-5) 둘째로, 회개하면 환경의 축복을 주십니다.(대하7:13-14) 셋째로, 회개하면 성령을 선물로 주십니다.(행2:37-38) 우리 모두 회개의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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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회개의 결과 (시3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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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속담은 쉽고 간결한 말로 선조들의 지혜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전해주므로, 익혀두면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아무리 쉬운 일이라도 혼자 하는 것보다는 여럿이 힘을 합하면 더욱 쉽다는 의미의 우리말 속담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가 있다. 사자성어로도 비슷한 단어가 있는데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 해서 ‘한 손으로는 소리를 낼 수 없다’라는 뜻이다. 비슷한 의미의 영어 속담도 있는데 ‘Two heads are better than one’ 두 사람의 지혜가 한 사람의 지혜보다 낫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협력(協力)’을 뜻하는 문장이 많다. 그런데 이렇게 귀한 단어가 성경전체에 딱 한 번 나온다. (빌1:27)에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그리고 협력(協力)과 비슷한 단어로 합력(合力)이 있는데 이 단어 역시 성경에 두 번 등장한다. (삼상22:17)에 “왕이 좌우의 호위병에게 이르되 돌아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그리고 (롬8:28)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놀라울 따름이다. 그만큼 ‘협력’이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함께 일을 할 신실한 동역자도 구하기 힘들다. 정말 내 마음에 꼭 맞는 사람, 평생을 두고 백지장을 맞들 한 사람을 구하기 힘들다. 사람은 많지만 정말 좋은 사람을 찾아내기 힘들다. 예수님에게도 12명의 제자가 있었다. 바울에게는 신실한 제자 디모데가 있었다. 엘리야에게는 영적인 아들 엘리사가 있었다. 이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다.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는 만능인도 없다. 함께 동역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이 잘못 되었을 때에는 ‘내 책임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동역이다. 무언가 좀 잘 했을 때에는 ‘우리가 해 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동역이다. 무언가 아주 잘 했을 때에는 ‘너희들이 해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동역이다. 추운 겨울을 남쪽 나라로 보내기 위해 달밤을 날아가는 기러기 떼는 “ㅅ”자 형으로 줄을 지어서 날아간다. 과학자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를 밝혀냈다. 모든 새들이 날기 위해 날개를 퍼덕거리면 그 뒤에 있는 새에게 양력(揚力)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ㅅ”자 대형으로 날면 혼자 가는 것보다 71% 더 날아간다고 한다. 기러기 떼 중에서 뒤에서 우는 소리를 내는 기러기가 있는데 그것은 힘들어서가 아니라 바로 앞에 가는 새에게 힘을 돋아 주기 위해 하는 ‘추임새’와 같다는 것이다. 바울은 노년에 평생의 동역자인 디모데를 보고 싶어서 (딤후4:9)에서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고 말했다. 너무도 감사한 것은 우리에게는 정말 귀한 동역자가 계신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성경이 그렇다고 말한다. (고전3:9)에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무 귀하다.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시편121:4)에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라고 약속한다. 이제 우리에게는 함께 백지장을 맞들 분이 계신다. 그의 이름은 바로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렘51:19)에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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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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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바울은 솔직했다.
-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솔직하게 표현한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낼 수 있단 말인가?”라고 탄식함을 우리는 잘 안다. (로마서 7: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그는 이 죄를 바울이 아니라고 두 번이나 말한다. 얼마나 이상한 말인가? 이것이 복음이다. (로마서 7: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로마서 7: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우리는 절대 탄식 속에서만 살아서는 안 된다. 해결의 방법이 있다. 해결 방법은 아주 쉽다. 항상 사로잡아오는 죄의 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대박이다. 한 없이 사로잡아 오는 죄의 법에서 어떻게 빠져 나와 참 평안과 영원한 행복의 삶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바울도 온전한 복음을 알고 복음의 핵심을 말한 후 로마서 7장과 8장에서 말한다. 로마서 8장의 시작을 보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선포한다. (로마서 8장1절) 우리는 이 선포를 그대로 받아 감사해야 할 일이다. 거듭난다는 것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다. 거듭났는가? 거듭났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새 생명을 소유했다. 바울은 결코 정죄함이 없는 자임을 알려주고 있다. 다음과 같이 받아들이고 주장해 보라. "나에게 새 생명이 있다. 나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했다" 로마서를 가지고 많이 기도하라. 1장부터 16장을 읽으며 영의 기도를 하는 시간은 신이 난다. 하나님께 고백하고 감사한다. 또 자신에게 말해 준다. “주님, 저에겐 생명이 있습니다. 저는 결코 정죄 받지 않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저를 해방했습니다.”라고 주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일을 50번도 100번도 올려 드려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기도의 시간이 될 것이다. 나에게도 말해 줘라. “너는 참으로 행복한 놈이구나. 너의 죄가 사해졌어. 너를 정죄할 그 누구도 없어. 너도 너를 이제부터는 정죄 하지 마! 너는 성령의 법으로 해방 된 자야!”라고 반복해서 나 자신에게 말해 보라. 얼마나 신나고 행복한 시간인지, 흥분되는 일이다. 능력으로 살 수 있는 지름길이 성경대로 나를 주장하고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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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바울은 솔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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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관계 전도
- 전도는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전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됩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관계전도가 있습니다. 관계전도는 좋은 관계를 통해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웃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가 좋아야 전도할 때 효과가 나타납니다. 입으로 만의 전도가 아니고 삶으로 전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고 선행의 실천으로 전도하는 것입니다. 삶이 나쁘고 태도가 나쁘면 관계전도가 안 되고 전도가 방해됩니다. 전도하는 자는 세상에서 향기가 되어 좋은 냄새를 내고 좋은 소문이 나야 합니다.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전도한 것은 가까운 관계에서의 관계전도이고 예수님께서 우물가의 여인 죄 많은 여인 고독한 여인을 전도한 것은 따뜻한 사랑과 섬김 대화로 관계를 맺고 전도한 관계전도입니다. 관계전도의 비결은 사랑의 마음과 따뜻한 마음입니다. 사람에 대해 정죄하거나 비판하는 마음이 있으면 관계전도가 될 수 없습니다. 누구를 대하든지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대해 주어야 합니다. 사랑과 섬김으로 인간관계 맺고 인간관계가 잘되어 전도할 때 전도의 효과가 큽니다. 덕을 세우지 못하고 나쁜 이미지를 주면 관계가 안 되고 관계가 나쁘면 전도가 안 되고 전도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관계전도는 선행의 삶을 실천하면서 전도하는 전도의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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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관계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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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칼빈의 추억 한 토막
-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 인상 깊은 장면을 회상한 것은 기록되어 있다. 테아 반 힐세마(Thea B. Van Halsema)가 저술한 『This was John Calvin(이 사람 존 칼빈)』이라는 책을 보면, 칼빈은 어머니와 함께 짧은 순례길을 걸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골짜기를 따라 두 시간을 걸은 끝에 도착한 곳은 예수의 외할머니로 여겨지는 성 안나의 유골이 안치된 사당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들어 올려, 금으로 장식된 관 안에 누워 있는 유골에 입을 맞추게 했다. 사당 안은 촛불로 밝고 향기로웠으며, 숭배하는 순례자들의 눈빛은 경건으로 가득했다. 어린 칼빈에게 그것은 아마 신비롭고 감동적인 체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이 장면을 바라볼 때,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정서 이상의 것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말 세 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성당의 종소리가 울린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성읍 생활의 중심이 되었던 중세 말 교회의 풍경은 단지 아름답고 경건한 외양만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신앙의 본질이 흐려진 채 형식과 외적 숭배에 몰두한 영적 타락이 도사리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의 형식주의와 권위주의, 성유물의 과도한 숭배, 그리고 성직자들의 탐욕은 교회의 영적 본질을 흐리고 있었다. 성 안나의 유골만이 아니라, 세례 요한의 머리카락, 예수의 치아, 오병이어 사건의 빵 부스러기, 가시관 조각과 구약시대 만나의 조각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성유물이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교회는 이러한 유물들을 통해 기적을 기대하고 은총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자극했고, 성직자들은 이를 통해 물질적 이익과 권력을 얻었다. 더 나아가 성당과 수도원은 특정 유물의 진위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다투었으며, 이 논쟁은 지역의 종교적 경쟁심을 자극했고, 프랑스 의회조차 이를 조정하지 못할 정도였다. ‘성인’의 이름을 붙인 성당이나 수도원은 유골을 소유한 장소로서의 권위를 주장했고, 이는 종종 종교적 신비주의를 이용한 경쟁과 탐욕의 장이 되었다. 말하자면, ‘거룩’은 거래되고, ‘은혜’는 판매되었으며, ‘경건’은 형식으로 포장되었다. 이 모든 모습은 한마디로 ‘거룩함의 상업화’였고, 진리 대신 형식과 기적, 외적 경건에 목을 매던 교회의 실상이었다. 이러한 부패는 개혁자들로 하여금 교회의 본질을 되묻게 했고,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잉태하게 했다. 칼빈은 단지 교리의 개혁자가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을 지닌 영적 개혁자였다. 그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함을 외쳤고, 유골과 형상과 건물 안에서가 아니라, 성령의 조명 아래 말씀과 신앙의 참된 삶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신학과 실천은 교회의 본질을 새롭게 정의했다. 교회는 권위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충실한 선포와 성례의 정당한 시행이 있는 곳이며, 무엇보다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믿는 자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문제는 과거의 부패가 오늘날에도 형태만 달리하여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교회는 더 이상 성인의 유골을 입맞추지 않지만, 또 다른 유물들을 만들어 숭배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화려한 예배당, 웅장한 무대, 감정을 자극하는 조명과 음악, 유명 목회자에 대한 절대적 의존, 그리고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역 성과들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성유물이 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때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인간의 욕망을 투영한 현대판 형식주의일 수 있다. 교회는 언제나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가시관 조각’이 있다. 그것은 더 멋진 무대, 더 화려한 예배당, 더 대형화된 사역과 같은 것들이다. 물론 이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중심이 되어 하나님을 도구화하고, 복음을 수단화하며, 인간의 만족을 위한 종교 행위로 전락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촛불 아래에서 거룩을 잃고 있는 것이다. 칼빈이 외친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는 외침은 시대를 초월한다. 이는 단지 제도 개혁의 구호가 아니라,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한 끊임없는 성찰과 순종을 요구하는 외침이다. 칼빈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은 단지 과거의 회고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거울과 같은 통찰이다. 그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성유물 앞에서 입을 맞췄던 기억은, 우리가 누구의 손에 이끌려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묻는 물음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순례 중이며, 여전히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 길 위에 서 있다.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무엇을 숭배하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멈추어 서는 것, 그리고 다시금 본질로 되돌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종교개혁의 정신이요, 오늘의 교회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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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설교/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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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칼빈의 추억 한 토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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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땅의 소산 (창세기 4장 3절)
- “Why is the Firstborn Blessing Given to the Firstborn?” “왜 장자의 축복은 처음 태어난 자에게 주어지나요?” 지난 주일 설교를 들은 투코 집사님의 질문은 뜻밖이었습니다. “왜 첫째 아들이 장자여야 합니까?” 처음엔 다소 생뚱맞게 들렸지만, 곱씹을수록 그 질문은 제 마음을 크게 흔들었습니다. 그동안 성경에서 말하는 장자와 장자권에 대해 나름 분명한 기준을 갖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알고 보니 그 기준의 출발이 상식이었습니다. ‘장자라면 당연히 첫째 아들’이라는 세상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성경을 본다고 자신했지만, 출발점은 여전히 인간 중심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열네 살 많은 이스마엘을 제치고 이삭에게 장자의 축복을 전했습니다. 이삭은 쌍둥이 형 에서가 아니라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주었고, 야곱은 열두 아들 중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을 장자로 세웠습니다. 이런 장면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종종 이상하게 느낍니다. 왜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신 장자의 원리를 스스로 따르지 않으실까 하는 의문이 들지요. 그러나 그 생각의 출발 자체가 이미 인간적인 상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장자’는 단순히 먼저 태어난 자를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원을 성취하는 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족을 책임지는 자를 의미합니다. 완전한 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생명을 버리심으로 하나님의 가족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장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구원을 완성하는 직분이며, 그 직분은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소명입니다. 장자는 자신이 원해서 먼저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부모가 먼저 낳았고, 다른 이들이 ‘장자’라 불러주었을 뿐입니다. 본인은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것이라”고 하셨으니 장자이고, 하나님께서 “장자”라 부르셨으니 장자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 처음 태어난 것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다 내게 속하였음은 내가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치던 날에 그들을 내게 구별하였음이라”(민 8:17)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준이 곧 장자의 기준입니다. 이 사실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믿음의 조상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에서 대신 야곱에게, 야곱이 요셉에게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믿음으로’ 행한 일이라 증거합니다(히 11:20-21). 이렇게 보면 오히려 이삭이나 야곱, 요셉이 장자가 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볼 때는 아무런 모순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에게 의심과 원망이 생기는 이유는 언제나 기준이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장자로 세우셨지만, 그 뜻을 혈육의 서열로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장자로 부르셨으나, 그는 하늘의 예배보다 땅의 소산에 몰두했습니다. 제물을 받으시지 않자 그는 분노했고, 그 분노는 결국 동생 아벨을 죽이는 죄로 이어졌습니다(창 4:5, 8).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불신앙이며, 그 불신앙의 결과는 언제나 땅의 소산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장자로 세우신 본래의 사명, 즉 예배의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장자는 가족을 대표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존재인데, 그는 예배보다 자신의 열심과 수확을 앞세웠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이 기준이 되었고, 결국 영적 교만과 타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깨닫게 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라고 외치면서도 실상은 상식과 서열, 인간의 기준으로 말씀을 판단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조금만 어긋나도 우리는 하늘의 소산이 아니라 땅의 소산을 거두게 됩니다. 투코 집사님의 질문은 그 당연하다고 여겼던 기준이 얼마나 인간적이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도 제자들을 형제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분의 믿음의 결단이 오늘의 교회로 이어졌습니다. 함께 묵상하던 송동호 목사님이 이런 글을 남기셨습니다. “The blessing of the firstborn is not a privilege of birth, but the portion of the one who bows before God first.” “장자의 축복은 태어남의 특권이 아니라 하나님께 먼저 무릎 꿇는 자의 몫이다.” 그는 곧 이어 이렇게 정정했습니다. “The blessing of the firstborn is not a privilege of birth, but the portion of the one whom God leads to bow before Him first.” “장자의 축복은 태어남의 특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무릎 꿇게 하신 자의 몫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무릎 꿇게 하시는 자, 그가 바로 장자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은혜로 장자의 자리로 불림받았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 믿음으로 주어진 장자의 자리를 지키며, 하늘의 소산을 거두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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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땅의 소산 (창세기 4장 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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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고귀한 기독문화 유산 보호의 길 찾자
- 얼마 전 지역 유력 일간지를 통해 경남도의 싱크탱크인 경남연구원 김진형 연구원의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100년 후 보물급 문화유산을 보호할 수 있는 ‘미래유산제도’를 만들어가자는 취지의 주장이었다. 김 연구원의 주장을 다시 살펴보면, 곳곳에 산재한 국가문화유산을 미래유산으로 지정하고 동판을 붙여 보호하자는 논지다. 국가유산으로 등록되기 전 ‘미래유산제’를 설치해 함부로 유실되지 않도록 하자는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하고 있다. 필자는 이 칼럼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우리 교회도 기독교 문화유산 보호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싶다. 그동안 경남 지역 각 교회를 돌아볼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독교의 고귀한 문화유산이 제대로 보호되지 못하고 유실되고 있는 실정을 목도했다. 한국 기독교가 선교 140년을 맞았으며, 국내 1천만에 달하는 기독교 인구로 인해 ‘기독교 강국’, ‘선교 강국’이 되었다. 여러 지역의 100년 이상 된 초대교회를 방문해보면 국가보물급이 될 만한 유산들이 흩어져 있으나, 체계적인 보호의 손길 없이 유실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가까운 경남 지역만 하더라도 100년 이상의 역사를 품은 교회가 100여 개소에 달한다. 1888년 캐나다 제임스 게일 선교사와 미국 북장로교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 이후, 당시 경남 부산 지역에는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이 줄을 이어 들어와 부산·마산·진주 등 경남 전역 마을마다 교회를 세웠다. 경남성시화운동본부는 10여 년 전 호주 선교사 역사관을 마산에 세우고 여러 유산을 모아 성역화해 놓았다.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진주 지역은 올해 선교 120년을 맞아 서부경남 부흥의 비전을 세우는 연합집회와 학술세미나를 이어 개최하고, 진주지역 기독역사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역사관을 짓고 유산을 모아 보관·관리하는 길도 매우 좋은 일이다. 그러나 정작 보물급 기독유산들은 각 지역 교회가 관리하거나 흩어져 방치되고 있는 경우가 수없이 많다. 먼저 각 교회가 관리하고 소장한 유무형의 유산들을 정리하고 집대성하여, 국가기관의 미래유산제도에 편입시켜 제도적 보호장치를 마련하는 길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의 고귀한 유산이 단번에 국가유산으로 등록되어 영구히 보호받는 길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취지에서 선교 120년을 맞은 진주 지역의 초대교회, 진주교회를 찾아 유산이 될 만한 소장·관리 유물을 살펴봤다. 당장 눈에 띄는 유물이 있었다. 120년 전 호주 커렐 선교사가 진주교회를 세우고 교회가 부흥했으나, 곧 일제의 침탈을 당했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 전국의 교회들이 분연히 일어섰던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다. 1919년 3월 18일 진주 고을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날 때, 일제히 모이는 신호가 당시 진주교회 종탑에서 울렸다. 얼마나 위대하고 엄청난 복음의 숨결이 있었던가. 나라를 살리기 위해 초대교회 종탑의 종이 진주 고을 백성을 모아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 종이야말로 국보급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구국의 종이 이후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다. 다행히 현재 천안의 고신대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국민적 공감대를 모아 국가유산으로 등재하고, 국가 차원의 보호를 받아야 함이 당연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3·1운동 참여 등 역사 발전의 굴절마다 교회의 흔적이 위대한 역사 속 숨결로 숨어 있다. 이것은 하나의 중요한 예에 불과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경남·부산 선교 140년이 다가오고 있다. 이 즈음에 기독교 문화유산을 집대성하고 고증을 거쳐, 국가 미래유산제도와 유산등록의 정책적 관리를 위해 능동적으로 나서야 하지 않을까 하는 강한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지역 교계가 한마음으로 뭉치고, 이 일을 함께 살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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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고귀한 기독문화 유산 보호의 길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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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우리
- TV에서나 일상적인 대화에서 ‘우리 남편’ ‘우리 마누라’라는 말을 예사로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고쳐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다. 왜 ‘내 남편’이고 ‘내 마누라’ 인데 ‘우리’라는 말을 붙여 사용하는지 그 까닭을 몰라 우리의 어원을 살펴보았더니 울다의 ‘울’과 사람이라는 ‘이’가 합성하여 ‘울이’가 우리로 변하였는데 특별히 한국 사람이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만일 외국인에게 자기 남편을 our husband로 소개한다면 부인이 여럿이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약소국이라 외세의 침략을 수백 번 당하여 개인이 불행한 일을 맞게 되면 정말 자기를 위해 울어 줄 사람이 필요해서 운명공동체의 용어인 우리가 절대 필요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남편, 우리 마누라라는 말은 어떻게 보면 같이 살아가는 동반자로 어떤 어려움이나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되면 나를 대변하고 울어 줄 사람으로 생각하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것이 아닐까. 내 입장을 변명해 주는 대변자가 ‘우리’라고 생각하면 상대를 위해 크게 울부짖는 자, 새가 노래한 것처럼 나를 위해 즐겁게 노래하는 자, 즉 자기를 위하여 주장하는 자가 바로 우리인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가 노래를 부를 때 노래를 부르는 자와 즐기는 자가 하나 되는 것과 똑같은 이치가 ‘우리’가 되는 것이라 믿어진다. 한 가정에 외동딸이나 외동아들도 혼자지만 우리 아빠, 우리 엄마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도 아빠와 엄마는 하나님과 같이 전능자는 아니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같이 울어주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가장 가까운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리라. 성경의 주기도문 속에서도 ‘우리’라는 말이 6번이나 나온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은 모두 ‘우리’가 되는 것이다. 그 세 분의 우리는 공동체인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모든 악에서 구하여 주시는 것이다. 성삼위 하나님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나 사람에게 있어서나 모든 것이 그분의 뜻 안에 있기 때문에 그분이 원치 않는다면 그분의 마음을 따라가는 것이 마땅하다. 성삼위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따르게 되면 완전 사랑이 되고 능력이 될 수 있다. 성삼위의 하나님께서 인간인 우리에게 어울리는 아름다운 것을 그렇게 많이 창조하여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한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분으로 인간인 우리의 행위에 따라 삼위 하나님이 웃을 수도 있고 슬퍼하여 울 수도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인간인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울어주시는 성령님이 계신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사람을 위해 울어 줄 사람만 있어도 든든한데 성삼위 하나님이 우릴 위해 마음 아파 울어주시는데 우리는 그분 안에 살면서 그분에게 집중하는 것이 마땅하다. 주님이 원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생명이 없고 아무런 가치가 없다. 하나님의 뜻대로 그분과 내가 하나 되어 우리가 되는 것만이 그 어떤 것에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것이 됨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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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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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화목의 영역 (잠17:1)
- 이솝 우화에 “세 마리의 소와 사자”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시골 농가(農家)에 검은 소, 붉은 소, 얼룩 소 세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 마리의 소는 유난히 사이가 좋아서 어딜 가던지 항상 함께 다녔습니다. 사자가 그 소를 잡아먹고 싶어서 매일같이 기회를 엿보지만 세 마리의 소가 함께 다니면서 사자가 덤벼들면 함께 힘을 합쳐서 대항(對抗)을 하기 때문에 잡아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풀밭에 얼룩소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사자가 가까이 다가가서 말하기를 “붉은 소가 그러는데 세 마리의 소 가운데 가장 힘센 소는 자기라고 하면서 뽐내더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얼룩소가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사자가 붉은 소에게 다가가서 “얼룩소가 그러는데 세 마리 소 가운데 가장 힘센 소가 자기라고 하면서 뽐내더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붉은 소 역시 기분이 불쾌했습니다. 사자의 말을 들은 세 마리의 소는 서로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나서 크게 싸움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부터 세 마리의 소는 함께 다니지 않고 따로따로 다녔습니다. 결국 세 마리의 소들은 다 사자에게 잡혀 먹히고 말았습니다. 이 우화에 담겨있는 뜻은, 화목하지 못하고 마음이 나뉘고 관계가 깨지면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영국의 속담(俗談)에 “지푸라기가 많으면 코끼리도 묶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약할지라도 서로 화목하고 힘을 합하면 큰일도 능히 감당할 수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화목은 꼭 필요한 것이고 참 좋은 것입니다. 화목하지 못한 삶을 산다는 것은 참 불행한 일입니다. 특히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관계가 화목해야 할까요? 첫째로, 가족 간에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잠17:1) 둘째로, 교인 간에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살전5:12-13) 셋째로, 이웃 간에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막9:50) 각박한 시대에 배려와 섬김으로 서로 화목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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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화목의 영역 (잠17: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