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2-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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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대식 목사] 관계 회복
    관계가 깨져서 스트레스받는 자가 많습니다. 사탄은 관계를 깨뜨립니다. 관계는 세우기보다는 깨지기가 쉽습니다. 사소한 것 때문에 관계가 깨집니다. 깨진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깨진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관계가 깨지면 고통이요 불행입니다. 깨진 관계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왜 관계가 깨졌는가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면서 관계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도 들으시고 회복시킵니다. 관계 회복이 은혜요 축복입니다. 관계 회복이 부흥이요 복입니다. 원수 맺고 사는 자가 회복되어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막힌 관계의 담이 무너져야 합니다. 깨진 관계의 회복은 부흥이요 축복입니다. 서로 용서하고 화해함으로 인간관계가 회복됩니다. 깨진 관계가 회복되지 않고 서로 미워하며 사는 것은 저주요 불행입니다. 관계 회복이 기회요 은혜입니다. 서로 막히면 기도 응답이 없습니다. 가능하면 관계가 회복되어 행복하게 후회가 없이 살아야 합니다. 관계를 회복시키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관계 회복의 소망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인간의 힘으로 관계를 회복시킬 수 없으나 하나님은 회복시키십니다. 관계 회복의 의지를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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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문/책
    2025-11-18
  • [최호숙 목사] 영적 싸움에 “VICI(이겼노라)”가 있는가?
    전쟁에는 반드시 이겨야 하듯, 영적 싸움에도 반드시 승리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종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로마 제국 시대 율리어스 카이사르(Jullius Caesar – 영어표기 시저. 성경표기 가이사)는 전쟁을 스포츠처럼 즐겼던 사람이다. 그가 남긴 명언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The dice(die) is cast. 주사위는 던져졌다. 폼페이우스가 로마 원로원과 음모를 꾸며 카이사르를 죽이려고 로마로 복귀할 때 루비콘강을 건너기 전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오라고 하였다. 명령을 받은 카이사르가 생각해 볼 때 가만히 있으면 자신은 파멸될 것이고, 무기를 들고 루비콘 강을 건너오면 로마의 역적이 될 것이므로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 카이사르는 고민하였다. 이래도 죽을 상황이고 저래도 죽을 상황인데 “죽을 때 죽더라고 싸우고 죽자” 결단을 내리고 무기를 들고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명언을 남겼는데 “주사위는 던져졌다”고하였다. 이때부터 특별한 결단을 하여 어떤 일을 할 때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왔노라[VENI-고대 라틴 발음(웨니), 현대 라틴 발음(베니), I came] 보았노라[VIDI-고대 라틴 발음(위디), 현대 라틴 발음(비디), I saw] 이겼노라[VICI-고대 라틴 발음(위키), 현대 라틴발음(비키,비치), I conquered] 이 문구는 B.C 47년 카이사르가 소아시아 파르나케스를 격파한 후 원로원에 보냈던 전승 보고서 첫 줄이다. 이 문구를 우리 한국인들이 체육대회나 단합대회 때 원문을 약간 변경하여 “왔노라 싸웠노라 이겼노라”로 사용하기도 한다. 어쨌든 인간적으로 카이사르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 그는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폭군(暴君)이 아닌 성군(聖君)의 모습으로 부하들을 다스리며 덕(德)의 정치를 했다. 카이사르의 인생철학이 있었는데 “강자에게 영예를 양보하고, 약자에게 필수품을 양보하라”였다. 인생철학 그대로 그는 전리품들을 자신이 챙기지 않고 부하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고 개인적 재산을 가지고 법률사무소, 마켓, 편의시설을 지어 제공함으로 많은 사람의 신뢰를 쌓아갔으며 자신은 검소한 삶을 살아 타인들로하여금 인정받는 지도자였다. 또한 유머 감각이 있어 부하들에게 마음의 안정을 주었고. 외부 적군들을 정복하기보다 더 힘든 내국 통치를 덕(德)의 정치로 이끌었던 지도자였다. 하지만 죄의 성향을 가진 인간들은 선한 정치를 하는 카이사르를 온전하게 두지 않았다. 카이사르와 친했던 부하 브루투스를 배신자로 만들어 음모를 꾸며 살해하도록 하였다. 믿었던 부하에게 배신당해 칼에 찔려 죽어가면서 마지막 남긴 말이 “브루투스 너마저...!” 인생 허무함으로 막을 내렸다. 훗날 카이사르에 대한 평가를 할 때에 일부 부정적 평가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좋은 평가를 하는데 로마에 수많은 지도자가 있었지만 카이사르를 “로마가 낳은 창조적 천재”라고 결론지었다. 신앙의 싸움을 하고 최후 주님 만나는 그날 주님께서 주신 사역의 현장인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VICI(이겼습니다)” 이렇게 승전 보고를 한다면 멋진 인생을 산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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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며 생각하며
    2025-10-30
  • [양대식 목사] 관계 전도
    전도는 주님의 지상명령입니다. 전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됩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관계전도가 있습니다. 관계전도는 좋은 관계를 통해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이웃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가 좋아야 전도할 때 효과가 나타납니다. 입으로 만의 전도가 아니고 삶으로 전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고 선행의 실천으로 전도하는 것입니다. 삶이 나쁘고 태도가 나쁘면 관계전도가 안 되고 전도가 방해됩니다. 전도하는 자는 세상에서 향기가 되어 좋은 냄새를 내고 좋은 소문이 나야 합니다.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전도한 것은 가까운 관계에서의 관계전도이고 예수님께서 우물가의 여인 죄 많은 여인 고독한 여인을 전도한 것은 따뜻한 사랑과 섬김 대화로 관계를 맺고 전도한 관계전도입니다. 관계전도의 비결은 사랑의 마음과 따뜻한 마음입니다. 사람에 대해 정죄하거나 비판하는 마음이 있으면 관계전도가 될 수 없습니다. 누구를 대하든지 친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대해 주어야 합니다. 사랑과 섬김으로 인간관계 맺고 인간관계가 잘되어 전도할 때 전도의 효과가 큽니다. 덕을 세우지 못하고 나쁜 이미지를 주면 관계가 안 되고 관계가 나쁘면 전도가 안 되고 전도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관계전도는 선행의 삶을 실천하면서 전도하는 전도의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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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문/책
    2025-10-30
  • [김성수 총장] 칼빈의 추억 한 토막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 인상 깊은 장면을 회상한 것은 기록되어 있다. 테아 반 힐세마(Thea B. Van Halsema)가 저술한 『This was John Calvin(이 사람 존 칼빈)』이라는 책을 보면, 칼빈은 어머니와 함께 짧은 순례길을 걸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골짜기를 따라 두 시간을 걸은 끝에 도착한 곳은 예수의 외할머니로 여겨지는 성 안나의 유골이 안치된 사당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들어 올려, 금으로 장식된 관 안에 누워 있는 유골에 입을 맞추게 했다. 사당 안은 촛불로 밝고 향기로웠으며, 숭배하는 순례자들의 눈빛은 경건으로 가득했다. 어린 칼빈에게 그것은 아마 신비롭고 감동적인 체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이 장면을 바라볼 때,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정서 이상의 것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말 세 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성당의 종소리가 울린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성읍 생활의 중심이 되었던 중세 말 교회의 풍경은 단지 아름답고 경건한 외양만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신앙의 본질이 흐려진 채 형식과 외적 숭배에 몰두한 영적 타락이 도사리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의 형식주의와 권위주의, 성유물의 과도한 숭배, 그리고 성직자들의 탐욕은 교회의 영적 본질을 흐리고 있었다. 성 안나의 유골만이 아니라, 세례 요한의 머리카락, 예수의 치아, 오병이어 사건의 빵 부스러기, 가시관 조각과 구약시대 만나의 조각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성유물이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교회는 이러한 유물들을 통해 기적을 기대하고 은총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자극했고, 성직자들은 이를 통해 물질적 이익과 권력을 얻었다. 더 나아가 성당과 수도원은 특정 유물의 진위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다투었으며, 이 논쟁은 지역의 종교적 경쟁심을 자극했고, 프랑스 의회조차 이를 조정하지 못할 정도였다. ‘성인’의 이름을 붙인 성당이나 수도원은 유골을 소유한 장소로서의 권위를 주장했고, 이는 종종 종교적 신비주의를 이용한 경쟁과 탐욕의 장이 되었다. 말하자면, ‘거룩’은 거래되고, ‘은혜’는 판매되었으며, ‘경건’은 형식으로 포장되었다. 이 모든 모습은 한마디로 ‘거룩함의 상업화’였고, 진리 대신 형식과 기적, 외적 경건에 목을 매던 교회의 실상이었다. 이러한 부패는 개혁자들로 하여금 교회의 본질을 되묻게 했고,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잉태하게 했다. 칼빈은 단지 교리의 개혁자가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을 지닌 영적 개혁자였다. 그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함을 외쳤고, 유골과 형상과 건물 안에서가 아니라, 성령의 조명 아래 말씀과 신앙의 참된 삶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신학과 실천은 교회의 본질을 새롭게 정의했다. 교회는 권위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충실한 선포와 성례의 정당한 시행이 있는 곳이며, 무엇보다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믿는 자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문제는 과거의 부패가 오늘날에도 형태만 달리하여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교회는 더 이상 성인의 유골을 입맞추지 않지만, 또 다른 유물들을 만들어 숭배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화려한 예배당, 웅장한 무대, 감정을 자극하는 조명과 음악, 유명 목회자에 대한 절대적 의존, 그리고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역 성과들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성유물이 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때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인간의 욕망을 투영한 현대판 형식주의일 수 있다. 교회는 언제나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가시관 조각’이 있다. 그것은 더 멋진 무대, 더 화려한 예배당, 더 대형화된 사역과 같은 것들이다. 물론 이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중심이 되어 하나님을 도구화하고, 복음을 수단화하며, 인간의 만족을 위한 종교 행위로 전락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촛불 아래에서 거룩을 잃고 있는 것이다. 칼빈이 외친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는 외침은 시대를 초월한다. 이는 단지 제도 개혁의 구호가 아니라,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한 끊임없는 성찰과 순종을 요구하는 외침이다. 칼빈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은 단지 과거의 회고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거울과 같은 통찰이다. 그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성유물 앞에서 입을 맞췄던 기억은, 우리가 누구의 손에 이끌려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묻는 물음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순례 중이며, 여전히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 길 위에 서 있다.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무엇을 숭배하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멈추어 서는 것, 그리고 다시금 본질로 되돌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종교개혁의 정신이요, 오늘의 교회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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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30
  • [박동철 장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다시 논하다
    지난 9월 3일 전국 신문 1면 톱뉴스를 장식한 중국 베이징에서 보내온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중국 전승절 8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중국 시진핑, 러시아 푸틴, 북한 김정은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서늘한 기운으로 다가왔다. 마치 한반도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음흉한 모습이랄까. 아무튼 중국 전승절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답답하지만, 중국은 한 장의 사진으로 대한민국을 비롯한 서방권 제국들에게 도전하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작금의 세계 정세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후 강한 드라이브로 관세폭탄을 세계 각국에 던지면서 ‘강한 미국’을 시현하고 있다. 이에 대한 사회주의 동맹의 이들 세 나라는 단합의 자세를 즉각 보이는 것으로,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한참 국민 정서를 흐트려놓았다. 문제는 이날 사진 한 장에서 세계는 지금 경제전쟁과 이념패권이 깊어지고 있다는 진단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세계를 주도하는 미국의 경제력에 부단히 따라붙고 있는 중국을 미국은 본격 견제하기 시작했다. 세계 각국 언론사 탐사취재팀은 오늘의 중국이 시진핑의 장기집권을 비판하면서 위기로 치닫고 있다는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반면에 중국의 건재함을 진단하면서 미국의 경제력을 압도해 간다는 보도를 내기도 한다. 세계 새로운 산업 트렌드인 AI 산업시대는 중국이 세계를 이끌 것이라는 학자들의 진단도 있다. 등소평 후 개혁개방의 대전환이 이제 자본주의의 현장 미국을 넘어설 것인가. 아니면 공산사회주의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이끄는 데 한계가 왔다는 주장이 맞을 것인가. 쉽게 전망할 수 없는 형편 아니겠는가. 상황의 전개가 어찌되든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야욕에 대해 쉽게 시선을 돌릴 수 없다.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북한의 3각 대응이 우리에게는 조선 말 위기의 한반도가 되지 않을까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해방 후 좌우 대립에서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가 아닌가. 주변 강대국이 새롭게 이념전쟁화하는 신냉전시대, 우리는 갈 길을 모르고 깊은 내전(內戰)에 휩싸여 있다. 필자는 얼마 전 우리의 근대사 영웅 안중근이 1907년 하얼빈에서 원수 일본 총리 이토를 쓰러뜨린 후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주창했던 이야기를 영화 《하얼빈》을 통해 소개한 바 있다. 다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오버랩된다.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은 이 비상하고 위험한 정세일지라도 복음의 실크로드를 열심히 닦아내는 것이다. 이 사명의 복음운동에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의 길이 열릴 것이다. 사형집행을 앞둔 차디찬 감옥 바닥에서 그는 5가지의 평화제안을 했다. 첫째, 조선·일본·청나라 3국이 연합하여 협력공존의 협력기구를 만들자. 둘째, 3국이 공동은행을 설립·운영하자. 셋째, 3국이 공동연합하여 서양 침입에 공동대처하자. 넷째, 3국의 경제개발 지혜를 일본에서 배우자. 다섯째, 상호 존중하고 평화를 유지하자. 어쩌면 굴욕 같지만 일본에 대해 조선을 식민지화하지 말고 아시아를 평화의 공동지대로 만들자는 혁신적 제안이었다. 일본에 36년간 식민지 지배를 받고 해방되어 6·25를 겪으며 처참한 빈국이 되었던 나라, 이 나라가 자유민주의 자본시장경제의 기틀에서 세계 10위 내 경제 강국으로 성장했다. 성공과 부흥 끝에 다가오는 또 다른 위기인가. '경제 보물섬'이 되어버린 지금의 대한민국에 대해 눈독으로 가득 찬 주변 나라들을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한국교회가 강력한 복음운동으로 나가야 한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동아시아에 새롭게 심도록 해야 한다는 논지이다. 먼저 동아시아 복음평화운동으로 한반도의 복음통일을 이루는 데 부단한 사명 수행이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동아시아 복음평화운동에 주변 모든 나라의 교회가 연합하는 새로운 역사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약관의 나이에 오직 식민지를 꿈꾸는 적장을 총탄으로 쓰러뜨리고 위대한 동양평화론을 주창할 수 있었을까. 젊은 영웅이 피를 토하듯 던진 이 어록(語錄)을 깊게 되새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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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22
  • [김성수 총장] 무관심의 절정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 “멍 때린다”는 표현이 있다. 고유한 우리말인 이 표현은 “아무 생각 없이 한곳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의식이 잠시 멈춘 듯한 상태로 가만히 있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아무 뉴스에도 반응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한 적이 있을 것이다. 어느새 멍하니 휴대폰을 스크롤하고 있지만, 거기 담긴 전쟁과 죽음, 기후 위기와 삶의 절망적인 광경 앞에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현상을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현대 사회는 너무 많은 것을 너무 자주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감정이 교묘하게 조작되며, 반응은 형식화된다. 심지어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피곤한 시대다. 바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그 시점이다. 이것을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무관심의 절정’이라고 불렀다. 이 무관심은 감정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감정을 과잉 소비한 끝에 마비된 상태다.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을 이미지화하고, 의미로 포장하고,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한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많은 자극과 너무 많은 반응이 반복되다 보면 오히려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감정이 남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관심이 있던 자리에 무감각이 남고, 연대하려던 마음은 차가운 피로감으로 굳어버린다. 오늘 우리는 매일같이 뉴스, 광고, SNS, 알림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지구 반대편의 절망도, 이웃의 눈물도 잠시 울컥했다가 이내 다른 화면으로 스치듯 지나간다. 더군다나 진짜는 없고 이미지만 판을 친다. 이제는 인간의 슬픔도, 정의도, 연대도 모두 기호화된 감정이다. 그것은 진짜처럼 보이지만 반복되고 조작되고 연출된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이것이야말로 현대인의 감정 소진이며, 이 무감각이야말로 가장 극단적인 무관심이라고 말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감정 소진 상태가 점점 자연스러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무관심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여긴다. 냉소와 피상적 반응은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 된다. 지금 이 시대는 누군가를 위해 슬피 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슬퍼 보이는 모습”을 공유하는 것으로 충분한 시대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도다 함과 같도다.”(마태복음 11:16-17) 보드리야르가 진단한 것은 이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것이다. 사회가 감정을 조작하고, 욕망을 설계하며, 공감의 언어마저 포장하는 구조 속에서 우리는 반응하는 법을 잃고 느끼는 법을 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조가 너무 익숙해져서 더 이상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 진짜 위기가 시작된다. “무관심의 절정”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각성해야 한다. 피로한 감정이 일상이 되었고, 감정 없는 반응이 습관이 되었을 때 우리는 진지하게 성찰하고 질문해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아니, 나는 아직도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가? 희망은 물음에서 시작된다. 감정을 회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감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아파할 수 있는 능력, 누군가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일 수 있는 여백, 눈물이 마르지 않은 마음을 회복하는 것, 기호와 이미지에 휩쓸리지 않고 실재를 붙들 수 있는 용기를 갖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아직도 누군가의 고통 앞에 멈출 수 있다면 완전히 늦은 것은 아니다. 무관심의 절정 한가운데서 우리는 다시 ‘느끼는 연습’이 필요하다. 다시 사랑하고, 다시 분노하고, 타인의 고통에 다시 공감하고 연대하는 감정의 회복, 그것은 거창한 변혁이 아니라 아주 작은 감각의 틈에서 시작된다. 눈앞의 사람을 다시 바라보는 것, 뉴스 속 타인을 내 삶 안으로 초대하는 것, 멀리 있는 고통을 내 언어로 말해보는 것, 그렇게 우리는 다시 공감의 감정을 살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우리를 조금씩 움직이게 한다. 반응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다시 붙들게 한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자리에서 다시 울컥하게 만들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게도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지금, 우리는 감정을 회복해야 할 시간 한가운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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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5-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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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자기고] [미국 제74회 국가조찬기도회]기독교적 가치수호를 위한 트럼프 연설, 현대판 고레스라는 평가.
    1. 트럼프 대통령 연설 주요 내용 2026년 2월 5일, 트럼프 대통령은 워싱턴 D.C.에서 열린 제74회 국가조찬기도회에 참석하여 약 1시간 동안 신앙과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1) 기도는 미국의 슈퍼파워: “기도는 위로를 주고, 치유하며, 힘을 실어줍니다. 간단히 말해서, 기도는 미국의 슈퍼파워(America's superpower)입니다.” 2) 종교적 자유의 회복: 과거 교회 등의 정치적 발언을 제한했던 ‘존슨 수정안’을 무력화한 성과를 강조하며, 신앙인들이 공적 광장에서 더 당당히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3) 천국행에 대한 확신: “제가 천국에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완벽한 후보는 아닐지 몰라도, 신앙인들을 위해 정말 많은 선한 일을 해냈기 때문입니다.”라며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행위구원론자로 비판치 말것). 4) 학교 내 기도 보호: 공립학교 내에서 학생들이 자유롭게 기도할 수 있는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새로운 교육 지침을 발표하며 ‘하나님 아래 한 국가’의 가치를 재확인했다. 2. 미국 내 긍정적 반응: 우리 시대의 고레스왕 보수적인 기독교계와 공화당 지지층은 이번 연설에 열광하며 그를 현대판 고레스왕(Cyrus the Great)에 비유하고 있다. 현대판 고레스왕이란, 성경 속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이방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아 유대인들을 해방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도록 도왔던 데서 유래한 표현이다. 이처럼 트럼프가 비록 전통적인 성직자 스타일은 아닐지라도, 기독교적 가치를 정책적으로 수호하고 종교적 자유를 되찾아주는 선택받은 지도자라는 믿음이 투영된 것이다. 복음주의 지도자들의 찬사도 이어졌다. 폴라 화이트 목사 등 주요 종교 지도자들은 트럼프를 말뿐인 정치인이 아니라 행동으로 신앙을 증명하는 인물로 평가하며, 낙태 반대 정책과 이스라엘 지원, 종교 자유 확대 등을 근거로 전폭적인 지지를 표하고 있다. 지지자들은 또한 그가 정치적 올바름에 맞서 “메리 크리스마스”를 되찾아주었고, 공공장소에서 신앙의 표현을 정상화했다는 점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3. 공화당원 및 핵심 지지층의 지지율 현황 현재 트럼프 대통령은 전체 지지율의 등락과는 별개로, 당내와 핵심 종교 지지층에서는 압도적이고 견고한 지지를 유지하고 있다. 2026년 2월 초 기준 공화당원들 사이에서의 지지율은 약 73~90퍼센트에 달하며, 이는 당내에서 그의 영향력이 여전히 절대적임을 보여준다. 백인 복음주의자 가운데 약 72~76퍼센트가 그의 국정 수행을 지지하고 있으며, 응답자의 70퍼센트 이상이 그를 미국의 위대함을 회복할 강력한 리더로 신뢰하고 있다. 정책적 신뢰 측면에서도 지지층의 약 75퍼센트는 관세 정책과 연방 공무원 개혁, 그리고 교육 분야에서의 종교 자유 강화 정책에 대해 강력한 찬성 의사를 보이고 있다. 요약하자면, 이번 기도회는 트럼프 대통령이 단순히 정치인이 아닌, 보수 기독교 가치를 수호하는 현대판 고레스왕으로서의 입지를 굳히는 자리였다.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하지만, 공화당과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결집력이 강해진 모습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연설은 자신의 정치적 행보를 성경 속 인물에 투영하며 지지층의 결속을 다진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4. 트럼프의 기독교적 가치가 미칠 영향 트럼프의 종교 중시 정책은 미국 국내에 국한되지 않고 국제 관계 전반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최근 한국 기독교계의 큰 관심사였던 손현보 목사의 석방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핵심 인사인 J.D. 밴스 부통령과 마르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손 목사의 가족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면담을 진행했고, 한국 정부에 종교적 자유 침해에 대한 우려를 전달하는 등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과거 북한에 억류되었던 임현수 목사나 해외 선교사들의 석방에 관여했던 전례와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이러한 행보는 트럼프가 자신의 우방인 보수 기독교계의 목소리를 외교 정책의 우선순위에 두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종교적 자유와 보수적 가치를 공유하는 한국 내 기독교 세력과의 유대가 강화될수록, 한미 외교는 경제나 안보 중심의 동맹을 넘어 가치 동맹의 성격을 더욱 강하게 띠게 된다. 손현보 목사 사례에서 확인되듯, 트럼프 행정부는 우방국 내부의 종교적 이슈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는 기조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이는 한국 정부의 대미 외교 전략에 있어 새로운 고려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에게 이번 국가조찬기도회는 자신이 신의 도구로서 미국의 위대함을 회복하고 있다는 확신을 지지자들에게 분명히 각인시킨 자리이다. 현대판 고레스왕을 자처하는 그의 리더십은 미국 대선 판도를 흔들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한국을 포함한 동맹국들과의 관계에서도 새로운 외교적 문법을 만들어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변화의 방향과 파급력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https://www.facebook.com/share/p/1Umicri64o/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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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0
  • [박영선 목사] 욥기 30:16-23
    욥기 42장입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배웁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죄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기의 전체 내용은 신앙인들이 꼭 한번 확인하고 가야 될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둥과 같은 내용으로 성립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설교를 하기 전에 잠깐 말씀드릴 게 있고 집중하게 하겠습니다. 지금 교회 밖에서도, 또 교회 안에서조차 저에 대한 공격이 많아서 설명할 길도 없고, 무슨 대답을 하면 전부 악의적으로 반응이 오니까 손해를 교인들이 보더라고요. 교회가 다들 오기 싫어지고, 다른 교회로 가고 하는 일들이 생겨서 제가 이 짐을 지고 그만두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결심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제 이름으로 우리 교회까지 망신당하는 자리엔 가지 말게 하자 하는 게 결심이고, 또 하나의 부탁은 그러니까 오늘 마지막으로 하는 설교니까 처절하고 진지하게 집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자, 그럼 욥기의 결론을 봅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었는데 이제는 눈으로 봅니다.” 무슨 말일까요? 귀로 듣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의 차이를 아십니까? 귀로 들으려면 순서대로 들어야 되고, 보는 건 한꺼번에 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 속에서 우리가 신앙을 쌓아갈 때 시간 속에서 쌓아간다는 사실 때문에 어느 정도 단계에 이르면 다음 단계가 나타나서 이제껏 가졌던 신앙으로는 답이 되지 않는 일을 만나게 됩니다. 거기서 발전해야 되는데 다음 단계로 발전해야 되는데, 한국 교회는 교회사가 짧은 관계로 미처 그 다음 설명, 해설을 하는 일을 아직까지 잘 못 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제가 이 인물을 맡아서 여기까지 오늘 하게 돼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욥은 아시는 바와 같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당대의 최고의 의인입니다. 복을 받고 있고 사람들한테 존경을 받는 사람인데 하루아침에 느닷없이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자녀들이 죽고 본인은 병들어 눕게 됩니다. 그가 당한 불행에 대하여 본인도 이해할 수 없고 주변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자 먼 곳에서 친구들 셋이 찾아와서 그를 위로하려고 했지만 너무 실상이 처참해서 위로를 못 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근데 그 기다리는 모습에서 뭔지 욥이 화를 내기 시작합니다. 욥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히 이겁니다. “하나님, 제가 뭘 잘못했길래 이러십니까?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 말을 하는 게 된 동기는 그 옆에 와서 들어온 친구들의 눈빛이 편을 들어오는 게 아니라 “야, 너… 빨리 회개해라. 잘못한 거 회개하면 형통해진다” 그 말로 째려봤으니까, 이제 욥이 분통을 터뜨려서 화를 내고 “죽여 주십시오”까지 갑니다. 그 친구들이 “너 그건 말이 되냐? 하나님이 어찌 네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화를 내리시겠느냐? 너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 봐라.” 욥은 “난 잘못한 거 없다.” 그러자 “그 다음으로 말하는 것만 봐도 너는 교만한 거다.” 이렇게 되지요. 그러는 과정에서 7장에 집에 가서 보시면 “하나님, 내가 뭐길래 이렇게 나한테 집중하십니까? 하나님 더 큰 일 보시고 나는 버려 두십시오. 내가 죽으면 어떻고 내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덕이 되겠습니까? 내버려 둬 주십시오.” 이렇게까지 얘기를 해서, 제가 즐겨 사용했던 본문에 의하면 “어찌 나 같은 것을 침 삼킬 동안도 놓아두지 않으십니까?” 이게 제가 신학교 들어갔을 때 처지였습니다. 근데 하나님이 이제 앞으로 답을 주십니다. 그래서 그 세 친구가 돌아가면서 그를 궁박하고 도전하고 또 (회개를) 얻어내려고 하는데 도무지 말을 안 듣자 나중에 나가떨어지고 그 다음 타자로 엘리후가 등장합니다. 엘리후는 뭘 가지고 욥을 구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너에게 주인이시며 너는 그가 만든 한 작품에 불과한데 네가 어떻게 전능자한테 감히 누가 맞냐 따져보자 그런 말을 할 수 있냐, 말이 되는 소리냐”라고 권세와 지위의 차이로 욥을 항복시키려고 합니다. 그러자 38장에 하나님이 이렇게 등장하십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동이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이게 누구한테 호통을 치는 것 같습니까? 욥의 불평에 대해서 호통을 치는 것 같습니까? 욥을 공박하는 친구들에 대해서 호통을 치는 것 같습니까? 이것은 친구들에게 하는 호통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답을 내려고 하지 마라.” 그리고 욥에겐 뭐라고 얘기해요?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동이고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라.” 무슨 뜻이죠? 욥은 그의 목적이고 그의 첫 번째 대상이고, 하나님이 그에게 하나님이 되시고, 그가 하나님의 자녀요 복된 존재인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다른 말, 잘잘못으로, 규칙으로 그를 심판하고 권세로 그를 심판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쳐 들어오시는 것이 “폭풍 가운데”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욥에게 자신을, 혹은 욥의 지금 현실을 어떻게 납득시키느냐 하면 38장과 39장 두 장에 걸쳐서 창조 세계를 보이십니다. 창조 세계의 장엄함을 보라. 그 무궁무진한 존재들의 가치와 그 존재들의 영광을 보라. 그리고 그들의 존재에 있는 질서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보라. 이게 38장과 39장의 얘기입니다. 그리고 나서 40장 1절.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이르시되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내가 나와 싸우자 그러고 네가 옳고 내가 틀리다 그러는데, 할 말 있으면 해 봐라”라고 얘기하자 욥의 답이 신기합니다. “겁 주시면 저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한테 기회를 주셔야지 공간 협박으로 저를 짓눌러 버리시겠다고요?” 이렇게 답을 합니다. 신기하죠? 그래서 6절에 “그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이르시되” 다시 폭풍 가운데서 벼락같이, 38장에서 친구들의 말이 안 되는 증거를 쳐 보신 것처럼, 욥의 침묵으로 말미암는 반항과 항복하지 않는 고집을 내려면서 뭐라고 말을 하느냐 하면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동이고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할지니라.”라고 대화를 드십니다. 굉장하죠. 그러니까 욥에겐 겁을 주고 그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욥을 세우기 위해서 앞에서 친구들을 후려치신 하나님이 폭풍 가운데서 “네가 전능자와 다투겠단 말이냐? 너 그럴 수 있느냐?” 하니까, “맘대로 하세요. 저는 그렇게 항복 못 합니다”라고 하자, 그의 허리띠를 잡아 일으켜 세우면서 “너만 내 자식이야. 내가 말할 테니까 들어봐.” 이렇게 그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폭풍 가운데서 임하시는 하나님의 현전이요 임재요, 우리의 질문에 답하시는 주인이십니다. 10절부터 보시죠. “너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지니라. 너의 넘치는 노를 비우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모두 낮추되… 악인을 그들의 처소에 짓밟을지니라…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묘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 영광을 입어라. 존귀해져라. 그리고 도덕을 지켜라. 그리고 악당들을 다 심판해라.”라고 얘기하십니다. 우리 세상 살면서, 우리 역사 속에서 듣는 하나님의 질문이 바로 이겁니다. 우리는 언제나 현실에 불의가 많고 부패가 많고 거짓이 많아서 정의를 원합니다. 평등을 원합니다. 하나님이 이걸 약속하셨고, 우리도 우리 인생 속에서 이걸 만들고 싶어 해서 언제나 부패한 정권은 뒤집어집니다. 그때 뒤집는 세력이 언제나 내거는,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명분이 뭐냐 하면 “정의를 실현하자”입니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에서 보듯이 부패한 정권을 없애고 혁명이 일어나자 무엇부터 합니까? 악당들을 다 죽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영광을 얻고 우리가 도덕을 지킴으로써 받는 보상은, 악당을 죽이는 것 외에는 다른 보상이 없지 않느냐, 라고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무슨 얘기를 하느냐 하면 하마와 악어 얘기를 길게 하는데, 하마와 악어 얘기가 왜 길어지냐면 “너 하마를 길들여서 밭을 갈 수 있느냐? 너 악어를 길들여서 집에 반려…(반려를) 삼겠느냐?” 그렇게 묻습니다. “모든 것을 힘으로 평정하거나 답을 얻을 수 없느니라.”라고 얘기함으로써, 욥이 이제 항복하는 42장에 이릅니다.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창조 세계와 우리가 조작할 수 없는 힘의 실체들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을 보는 것 같이, 우리가 우리의 인생과 우리가 소원하는 것을 힘으로 만들어낼 재주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뭐라고 말하죠?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린 자가 누구니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나도 이해가 안 가서 그렇습니다. 내가 소원하는 것이 뭔지조차 정할 수가 없습니다. 밤낮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서만 헤어나게 해 주십시오. 이 문제만 해결해 주십시오.” 이게 우리 인생의 소원인데, 내가 얼마나 인간답고 존재 가치가 있는가는 상상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결론이 뭐냐면 “답을 얻었다”가 아니라 “물어보겠습니다. 가르쳐 주십시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죄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가 무슨 말이냐면, 내가 아는 건 나 하나에게도 답이 되지 못합니다. 나는 다 타버린 재와 같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나셨고 나를 하나님 믿게 하셨으니 내가 묻고 하나님 답해 주십시오. 그것이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결론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뭘 묻고 뭘 답을 얻었는지는 건너뛰고 7절로 갑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대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친구들은 하나님 대신에 규칙이었고, 하나님 대신 권력이었습니다. 욥은 끝까지 상대로 하나님을 모셨습니다. 여기가 다른 겁니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답을 찾고 있는 겁니다.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수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뭐죠? 답이 “용서”하랍니다. 일차적으로 네 분노를 풀려고 하지 말고 용서부터 배워라. 용서부터 배우라는 게 무슨 뜻이죠? 화해해라. 너와 네 친구들이 왜 싸우게 되었느냐?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로 싸우게 됐는데, 싸워서 등 돌리지 말고 제대로 알아서 화해해라.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하나님의 자기 증명은 이 욥기에서도, 집에 가서 보세요. “하나님께 내가 묻겠사오니 겁 주지 마시고 대답 좀 해 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이 대답을 안 하셔서, 23장에 가면 “내가 하나님을 찾고 찾으나 앞으로 가도 없고 오른쪽으로 가도 없고 뒤돌아서도 없더라.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것인가.” 이게 욥의 고난, 고통입니다. 친구들은 “빨리 회개하라.” 엘리후는 “빨리 무릎꿇어라.”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그게 아니라 “나를 알아라. 나를 알아라. 그리고 네가 나에게 누구인가 알아라.”입니다. 우리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 모든 질문의 시작은 뭐냐 하면, 우리 모두가 겪는 것 같이 인생을 살면서 당하는 말이 안 되는 고난 속에서 이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난 뭐야? 나라는 존재는 뭐야?” 예수를 믿으니까 그다음 질문이 나오죠.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왜 이렇게 하십니까? 어쩌란 말입니까?” 현실은 어떻죠? 그 둘을 이을 수가 없죠. 왜 이을 수가 없죠? 내 기대와 다르니까. 정성을 바쳐도, 모든 종교 행위를 해도 바라는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약 성경 내내 왜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겼지요? 자기가 원하는 걸 해 주는 신을 만들었지요. 하나님은 안 해 주시니까. 왜 안 하시죠? 하나님이 목적한 것이 우리의 운명이니까, 내가 해 달라는 것으로 타협하거나 떼울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자, 우리 다 아는 구절들이니까 신약의 설명들이 이 배경 속에서 어떻게 터지나 봅시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빌립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보여 주시면 족하겠나이다.” 왜 그런 질문이 나왔죠? 예수님이 죽은 자도 살리고 폭풍도 가라앉히고 문둥병도 고치고 소경의 눈도 뜨게 하셨는데, 로마를 뒤집지 않아요. 세상 권력이 되질 않아요. 자기에게 필요한 현실적 해답이 되시질 않아요. “아버지를 보여 주옵소서.” 답이 뭐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아버지가 십자가에 죽는 모습으로 우리 편을 들고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대상과 목적으로 만들겠다가 예수의 성육신입니다. 신이 인간이 되어 인간 보고 신성에 참여하라고 붙잡으러 온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 확신이 중요한 눈금이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어디까지 밀고 올라가야 되냐? 이런 정체론, 존재론, 그리고 현실—하나님이 나를 만들어 가는 현실에 대하여 분별과 지혜로 우리에게 열매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오심은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이렇게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에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제발 형통, 안심, 승부에서 이기는 것에 팔아먹지 말라고 말합니다. 잘 아시는 요한복음 3장 16절은 뭐였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믿으면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를 선포하고 있는 겁니다. “안 믿어도 됩니다. 안 믿고 못 배기게 하겠다.” 17절.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인하여 세상이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내가 믿지 않아도 된다”라고 왜 고함을 질러야 했느냐? 믿었으니까 “다다” 그러고 있지 말고 그러란 말이에요. 믿은 자의 변화와 새 사람과 새 생명이 되란 말이에요. 꼭 고함을 질러야 돼요. 누가복음 22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자리에서 누가 더 크냐?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때 누가 좌편에 앉고 누가 오른편에 앉을 것인가 싸웁니다. “하나님 나라는 섬기는 나라다. 세상은 다스리는 나라지만 하나님 나라는 섬기는 나라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에 함께한 자들인즉 하나님이 내게 그 나라를 맡기신 것처럼 내가 너희에게 하늘 나라를 맡기노라.” 예수님의 시험은 뭐였습니까? 십자가에서 보여줬죠. “네가 남은 살렸으면서 너는 왜 못 살리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내려와 보라.”를 겪으십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여기에 와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복음 17장에 있었던 이 중요한 말씀: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시옵고 사랑하신 것을 알게 하옵소서.” 이게 교회입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손가락질하는 일 맞지 마시고, 끌어안는 일로 여러분의 인생과 여러분 자신의 존재에 명예와 영광을 담으셔서 하나님 영광의 찬송이 되시기 바랍니다. ※ 위 설교문은 남포교회 주일예배 (26.02.01) 설교를 남포교회 유튜브를 통해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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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3
  • [논단] “병사 적금도 못 주는 나라, 이게 국가인가?” 국방 예산 파탄 낸 이재명 정부의 무능과 안보 포기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책무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안보다. 성경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디모데전서 5장 8절)고 말한다. 국가라는 공동체를 책임진 정부가 나라를 지키는 젊은 장병들의 먹거리와 미래를 위한 적금조차 챙기지 못한다면, 그 정부는 국가로서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다. 최근 이재명 정부의 국정 운영은 임계점을 넘어 ‘안보 파탄’의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장성민 전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대한민국 창군 이래 전례가 없던 국방 예산 미지급 사태가 현실화되었다. 1. 창군 이래 초유의 국방 예산 미지급 사태 지난달 말, 정부는 한국은행으로부터 이른바 ‘마이너스 통장’ 방식의 일시 대출로 5조 원에 달하는 급전을 사용했다. 그러나 정작 국방 예산 집행에는 1조 3천억 원 규모의 심각한 공백이 발생했다. 이는 단순한 행정 착오가 아니라, 국가 재정 운용의 붕괴를 상징하는 사건이다. 2. 군인 밥값과 적금까지 체불한 나라 이 예산 공백으로 인해 최전방에서 복무하는 병사들의 봉급과 적금 지급이 지연되었고, 심지어 급식 조달 비용까지 제때 지급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국가는 부르면 응답한 청년들의 헌신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현 정부는 그 최소한의 책무조차 저버렸다. 나라를 믿고 청춘을 바친 장병들에게 돌아가야 할 기본적 보상마저 지키지 못하는 정부를 국민이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 3. 방산 업체 대금 미지급, K-방산의 근간을 흔들다 문제는 병영 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국방 예산 체불은 방위산업체 대금 미지급으로 직결되며, 대한민국 안보의 또 다른 축인 방위산업 생태계를 위협하고 있다. 전 세계가 K-방산의 경쟁력과 신뢰성에 주목하는 시점에, 정부의 예산 집행 불능은 우리 방산 기업들을 내부에서부터 고사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는 단순한 재정 문제가 아니라, 국가 방위 역량을 스스로 훼손하는 행위다. 4. 군 무력화의 우연인가, 의도인가 더욱 심각한 것은 현 정부의 일관된 안보 인식이다. 보안법 약화 시도, 북한 노동신문 개방, 대북 접촉의 무분별한 허용 등은 이미 국민적 우려를 낳아 왔다. 여기에 전방 장병들에게 총 대신 삼단봉을 지급하고, 대북 자극 자제만을 강조하는 현실은 이번 국방 예산 사태가 단순한 실수인지, 아니면 체계적인 군 무력화의 일환인지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5. 결론: 위정자는 하나님과 국민 앞에 책임져야 한다 위정자는 국민이 위임한 권력을 통해 공동체를 보호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현 정부는 5조 원의 급전을 어디에 사용했기에, 국가의 최후 보루인 국방 예산마저 지급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는지 명확히 답해야 한다. 군 통수권자로서 대통령은 이 사태에 대해 국민 앞에 분명한 책임을 져야 한다. 성벽 위를 지키는 파수꾼이 잠들거나, 파수꾼에게 줄 양식이 없어 그를 굶긴다면 그 성은 머지않아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재명 정부는 지금이라도 안보 무능과 예산 파탄의 현실을 직시하고, 국가의 근간을 허무는 일련의 행위들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두려움 없이 행하는 정부의 끝은 결코 평안하지 않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 독자의 논단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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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30
  • [김성수 총장] 예배 공동체의 신비와 은혜
    성도들은 주일이 되면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예배의 자리로 나아온다. 이 복된 자리로 나아오는 우리의 발걸음은 분명 가볍고 즐거운 걸음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예배당으로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이 언제나 경쾌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복잡한 내면을 안고 있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때도 많이 있다.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는 자들이 완전한 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 흔들리고, 사랑이 미약하며,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영적 감각이 둔해진 상태로 예배당의 문턱에 들어선다. 마음속에는 여전히 죄의 흔적이 요동치며, 영적 실패의 기억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영적으로 깊은 사람일수록 자신의 부패와 결함을 더 예민하게 감지하며 스스로를 정죄하는 고통 속에 빠져들기도 한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곧 ‘성도’라 불리지만 그 이름을 감당하기엔 자신이 너무도 부적합하다고 여길 때가 많이 있다. “성도”라고 불리지만, 본능적으로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성도’에 포함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배의 자리에 모인 이 무리는 바로 “성도의 교제”라는 사실이다. 이 모순은 신학적으로 실로 깊은 신비를 품고 있다. 사도 바울은 각 지역 교회를 향하여 서신을 쓸 때마다, 그들이 비록 수많은 문제와 결함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호칭한다. 고린도 교회처럼 분열과 음행, 영적 혼란이 만연한 교회조차도 여전히 하나님의 성도들로 불렸다. 에베소, 골로새, 그리고 데살로니가의 교인들이 만약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고 그들과 하나라면 사도는 어떻게 이들을 “거룩한 백성”이라고 부를 수 있었는가? 그 근거는 너무도 분명하다. 이는 곧 ‘성도됨’이 인간의 도덕적 완성이나 경건의 성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분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신학적 긴장을 목도하게 된다. 눈에 보이는 회중은 죄 많고 연약한 사람들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거룩한 무리요,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다. 이 긴장은 인간의 자기 인식과 하나님의 선언 사이의 충돌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자기 안의 죄악과 결핍을 바라보며 “나는 성도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너는 내 거룩한 백성”이라고 선언하신다. 이러한 긴장은 단지 심리적 불편함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이 드러나는 자리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격이 아닌,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가 회중을 성도로 세우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요,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예배는 완전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가 아니라, 불완전한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신비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대속의 죽음, 부활, 그리고 하늘 성소로의 승천은 회중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열어 주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며, 화목제물이시고, 교회의 머리이시다. 회중은 오직 이 한 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묶이며, 그분의 피로 정결케 되며, 그분을 통해 아버지께 인도함을 받는다. 이 신학적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예배의 본질을 다시 보게 만든다. 예배는 감정적 고양의 시간이 아니며, 단순한 종교 행위도 아니다. 예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거룩함을 받은 회중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나아가는 신비로운 은혜의 시간이다. 회중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와 예배가 이루어질 수 있는 근거는 단 하나,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이 신비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으며,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우리 눈앞에 드러나지 않지만, 매 예배 속에서 그는 여전히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끌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회중의 결함을 보며 낙심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중보를 바라보며 소망해야 한다. 진정한 회중은 도덕적 엘리트의 집합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모인 죄인들의 교제이며, 그 안에서 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의 거룩한 백성을 세우시고 영광을 받으신다. 예배는 회중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된 존재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다. 우리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성도로 부르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함께 모이게 하신다. 이 신비는 우리에게 참된 겸손과 동시에 무한한 은혜와 큰 용기를 준다. 그러기에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모든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 은혜를 따라, 믿음의 눈을 들어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안에서 진정한 ‘화해된 회중’으로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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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6-01-29
  • [최호숙 목사] 훈제(燻製) 고구마를 먹어 보았는가?
    성경을 영안으로 자세히 보면 잠언 32:1(?)에 “훈제 고구마를 먹어 보지 못하고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다. 훈제(燻製)란 말은 한자로 “연기 훈(燻)” 자를 넣어 음식의 재료를 연기와 열에 노출시켜 수분을 제거하고 향을 입히며 보존성을 높이는 조리 방법을 말한다. 훈제의 기원은 언제부터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옛날 시골에 불을 때는 아궁이나 모닥불 또는 동굴 속에서 고기나 생선을 훈제하면 맛이 있고 오래 보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자연히 유행된 조리법이다. 요즘에는 고급 요리법으로 오리 훈제, 연어 훈제 등 다양하게 훈제 음식들이 소개되고 있다. 훈제하면 대부분 육류 훈제, 아니면 생선 훈제를 떠올린다. 그러나 필자는 어린 시절부터 훈제 고구마를 직접 만들어 먹었다. 그것도 국민학교(초등학교) 시절에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궁금해 할 것이다. 지금은 문화가 발달해서 어린이들이 노는 문화가 고급화되고 수준이 높지만 옛날 50~60년대(그 이전에도 그렇게 놀았겠지만) 시골 아이들은 노는 곳이 뻔했다. 논, 밭, 들, 산, 바다... 특히 가을 고구마밭에서 생고구마를 캐서 날것으로 씹어 먹었다. 그렇게 먹고 나면 입술은 새까맣게 물들어 있고 고구마에서 나오는 진(sap, resin)은 옷에 다 묻고 정말 장난 아니었다. 동네 아이들이 개구쟁이처럼 놀면서 단순히 생고구마를 먹을 것이 아니라 색다른 고구마를 만들어 보자는 발상을 했었다. 방법은 빈 밭 공터에 땅을 파고 나뭇가지를 갖다가 불을 피우고 열기가 올라갈 때 그 위에 생소나무 가지를 덮으면 연기가 피어오른다. 소나무 가지 위에 떡갈잎을 펼치고 고구마를 올려놓고 연기 나는 상태에서 흙으로 덮어버리면 연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고 속에서 연기와 열기 속에 고구마는 익게 된다. 이것이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훈제 고구마이다. 말도 안 되는 것이라 반박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필자의 어린 시절 경험이요 팩트(fact)다. 훈제 고구마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목회를 하면서 가끔 훈제 고구마 생각이 떠오르기도 한다. 훈제 고구마는 자신을 희생하여 아이들에게 간식거리가 되었다. 불과 연기를 통과한 고구마가 진한 향기를 내어 유익한 존재가 되듯이 우리 인생도 불과 연기를 통한 인내의 연단이 있어야 정금 같이 나오게 된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흙 속에 묻혀있는 고구마처럼 답답하고 질식할 것 같은 삶이지만 그 과정이 연기의 아름다운 향이 고구마에 배이듯 나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향기가 몸에 배이는 시간이고 신앙 인격이 다듬어지는 시간인 것이다. 훈제 고구마를 만들면서 또 깨달은 것이 있다. 불에 너무 오래 두면 타버린다는 것과 덮은 흙을 너무 일찍 제거하면 고구마가 익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빨리 먹고 싶은 욕심에 아이들이 너무 일찍 흙을 파헤치고 먹으려다 실패한 적이 많다. 인생에게 기다림의 시간이 꼭 필요한 이유는, 기다림은 낭비가 아니라 성숙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너무 조급해도 안 되며 너무 지체해도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늘 빠름에 익숙해 있다. 그래서 기다림은 손해처럼 느껴지고, 빠른 속도는 능력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빠름’이 답이 아니라 ‘바름’이 답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잘 익은 훈제 고구마의 삶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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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며 생각하며
    2026-01-29
  • [조희완 목사] 험담 부작용 (잠26:20-28)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동물의 왕인 사자가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숲속에 살고 있는 모든 동물들이 문병을 왔는데 여우만 오질 않았습니다. 그러자 평소에 여우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늑대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지금이 바로 여우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자에게 “숲속의 왕이시여, 여우가 문병을 오지 않은 것은 필경 사자님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벌을 내리셔야 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마침 여우가 도착을 했습니다. 사자가 크게 노를 발하면서 “네 이놈, 왜 이리 늦었느냐? 네가 나를 무시하는거냐?”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자 눈치가 빠른 여우가 분위기를 파악하고 꾀를 냈습니다. “예, 제가 이렇게 늦은 것은 우리 사자님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는 약을 알아보느라고 늦었습니다.” 그러자 사자가 “그래, 그 약이 무엇이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우가 “예, 늑대의 가죽을 벗겨서 그것을 뒤집어쓰시면 병이 금방 낫게 된답니다.” 그러자 사자는 앞에 있던 늑대를 잡아서 가죽을 벗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 담겨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남을 험담하거나 중상모략을 하면 반드시 자기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남을 칭찬하면 반드시 칭찬이 돌아오게 되고, 내가 남을 험담하면 반드시 험담이 돌아오게 됩니다. 마치 부메랑을 던지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내 입에서 나간 말은 반드시 내게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을 중상모략하거나 험담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하는 것이나, 험담하는 것이나, 중상모략 하는 것을 삼가라고 말씀합니다. 험담이 가져오는 결과가 나쁘고 부작용이 너무 큽니다. 첫째로, 험담은 다툼을 일으키는 원인입니다.(잠26:20,21) 둘째로, 험담은 비밀을 누설하는 원인입니다.(잠20:19) 셋째로, 험담은 사이를 갈라놓는 원인입니다.(잠16:27,28) 불필요한 말로 인한 공해가 너무 극심한 이 시대에 험담을 줄이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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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2026-01-29
  • [정우승 목사] 이군불사(二君不仕)
    신앙생활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저 주일에 예배에 참석하는 종교인 말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또한 십자가를 지고 좁을 길을 걷는다는 것은 엄청난 자기부인과 희생이 따른다. (마태복음6:24)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라고 말씀한다. 한 발은 교회에, 또 다른 한 발은 세상에 양다리를 걸쳐놓고 기회를 보면서 계산기를 두드리는 성도가 있다. 모세의 뒤를 이은 지도자 여호수아는 신앙의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결단을 촉구한 적이 있다. (여호수아24:15)에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당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라고 말씀한다. 이렇듯 신앙에 있어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옛날 표현으로 하면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이군불사(二君不仕)’의 정신이 있어야 한다. 한국선비의 근본사상을 풀이하는데 충(忠)이란 말뜻의 풀이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 글자를 뜯어보면 가운데 중(中)과 마음 심(心)의 합성어임을 알게 된다. 중(中)이란 한복판을 뜻하지만 아울러 가운데가 가득찬 상태, 가슴 속이 꽉 차 빈틈이 없는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허위가 없는 충실한 참 마음이 중심이요, 충이다. 이 빈틈없는 참마음은 단지 나라에만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투사체가 달라짐에 따라 가치 또한 달라진다. 이를테면 의로운 일에 투사되었을 때는 절(節)이라 부르고, 부모에게 투사되었을 때는 효(孝)가 되며, 다른 사람에게 투사되었을 때는 인(仁)이 되고, 도덕적 규범에 투사되었을 때는 예(禮)가 된다. 옛 선비 중에 이군불사(二君不仕)의 귀감이 되는 한 선비가 있는데 바로 홍언충(洪彦忠, 1473-1508)이다. 많은 무고한 선비가 죽어갔던 갑자사화 때 그 화에 말려든 대제학 홍언충이란 선비가 있었다.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옥문 밖에 버려져 있었다. 그 옥문 앞을 때마침 김안로(金安老)가 지나갔다. 이 두 사람은 어릴 적 글 공부를 같이 한 막역한 사이다. 이 처참한 꼴을 본 김안로가 ‘참혹하다. 이게 웬일인가’, 이에 피범벅이 된 홍언충은 ‘홍문관의 물이 묻어 그렇네’ 라고 대답했다. 홍문관은 글 읽는 학교다. 곧 홍문관의 물이라면 학문에서 익힌 의리를 홍문관의 물로 비긴 것이다. 바꿔 말하면 홍문관에서 익힌 의리를 굽힐 수 없어 이 처절한 꼴을 당했으며 고문을 당하고 범벅이 된 피고 곧 홍문관의 물이란 뜻이다. 결국 홍언충은 진보 땅으로 귀양하게 되었다. 당시 연산군은 사람을 죽일 때 귀양을 보내 놓고 귀양가는 도중에 사약을 내려 죽이는 것이 상투적인 수법이다. 그러기에 홍언충은 금부도사가 오늘 내려오려나 내일 내려오려나 하면서 귀양길을 가고 있었다. 자기가 죽을 것을 알고 품속에 미리 묘비 문까지 지니고 있었다. ‘한평생 우활하고 옹졸함은 학문의 공이라. 서른 두 살에 세상을 마치니 명이 어찌 그다지 짧으며 뜻은 어지 그다지 긴고. 천추만세 뒤에 누기 이 들판을 지날는지 이곳을 가리키고 배회하며 슬퍼하는 사람이 있을지어다’ 라는 내용의 비문이다. 이 같은 비문을 지니고 문경새재를 넘어 대탄원에서 쉬고 있는데 기다리고 있던 사신행렬이 뒤따라 달려왔다. 사약을 들고 오는 금부도사인줄 알았더니 의외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반정했다는 소식과 새 조정에서 급히 돌아오라는 매우 기쁜 전갈이었다. 죽음의 길이 영광의 길로 돌변한 것이다. 한데 홍언충은 이 기쁜 소식을 듣고 마냥 구슬피 울었다. 새 임금을 위해서 우는 기쁜 울음이 아니라 옛 임금을 위해 우는 슬픈 울음이었다. 홍언충은 영광의 길을 등지고 귀양길을 택한다. 그리고 고향에 가서 지내며 거듭된 조정의 부르심을 거절하였다. 이 선비의 행동은 현대인에게는 쉽게 납득은커녕 이해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의를 위해 가혹한 고난을 당해가며 불의와 싸워 이겨놓고는 승자의 개선길을 등지고 패자의 길을 택하는 이 선비의 소행을 무엇으로 풀이할 수 있겠는가? 홍문관의 물을 피보다 진하다고 했다. 홍언충에게는 또 다른 대의, 바로 이군불사(二君不仕) 정신이 있었다. 홍언충은 낙향한 이후에도 연산군이 유배되어 있는 강화도를 향해 매일 절을 올렸다고 한다. 거듭되는 조정의 입사를 끝내 거절하고, 그를 죽이려 했던 연산군을 향해 절개를 지키다 죽어갔다. 오늘날 한국의 목회자에게 꼭 필요한 한 가지를 들라면 나는 조금도 주저함 없이 홍언충과 같은 이군불사(二君不仕) 정신이라고 말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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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29
  • [이정희 목사] 연말, 연시 용어3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의 유래와 의미
    1. 서언(序言) 새해가 되면 우리는 흔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말로 서로를 축복하면서 덕담을 나눈다. 이는 신정과 구정(설날)을 함께 의미 있는 날로 지내는 우리나라의 경우, 설날이 지난 정월대보름까지 이러한 인사를 나누는 데서 잘 나타난다. 그런데 이 인사말은 단순한 덕담을 넘어 오랜 역사와 나름의 의미를 담고 있다. 본 호에서는 이러한 한국적인 복의 개념과 더 나아가 세계 여러 나라의 인사말, 그리고 우리의 신앙적 관점은 어떠한지를 논하고자 한다. 2. 한국적인 복의 개념과 성경의 복 이 주제에 관해서는 오래전 기고에서 기술한 일이 있지만, 우리 민족은 고대로부터 복(福)에 대한 관심이 유별났다. 그중에서도 다섯 가지 복인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 등을 특별히 좋아했다. 이러한 복에 대한 기대 심리는 전통적인 거의 모든 종교에 영향을 주었으며, 우리의 기독교 신앙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복에 대한 성경 말씀을 찾아보면 총 32,569번이나 기록될 정도로 아주 많은 말씀이 있다. 이렇게 볼 때 이러한 신년의 덕담과 인사는 교인이든 아니든 아주 좋은 새해 인사라고 볼 수 있다. 3. 우리나라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란 말의 유래 복에 대한 개념과 기대는 신년이 되면 더욱 커지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로 표현된다. 그렇다면 이 말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그 유래를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1)고려시대 : 이러한 새해 인사는 대략 고려시대부터로 추정하고 있다. 이때에는 새해가 되면 왕이 신하들에게 복을 내리는 의미에서 상을 내리는 행사가 있었고, 백성들도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말을 사용한 데서 시작되었다. 2) 조선 시대 : 고려시대보다 좀 더 널리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는 조선 시대의 유교적 예절이 새해에는 왕과 신하들의 군신 관계 속에서 새해 인사를 주고받는 것이 상례화되면서 더욱 일반 국민에게까지 중요한 의례적인 인사로 덕담을 나누게 되었기 때문이다. 3) 현대의 의미 : 이러한 새해 인사는 현대에 이르러 스마트폰 등의 다양한 기기의 발달과 현대적 문화의 현실 속에서 여러 형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전통적인 연하장을 비롯해 카카오톡 인사, 각종 이모티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새해 인사를 하고 있다. 4. 여러 나라의 새해 인사말 신년에 덕담을 나누는 인사는 동서양을 불문하고 거의 비슷한 유형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에 각 나라의 새해 인사와 새해 풍습 및 행위를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다만 지면 관계상 몇 나라만 소개하고자 한다. 아울러 이하의 원문과 내용은 AI 자료에 의거했음을 먼저 밝혀둔다. 1) 중국: 춘절인 새해의 인사말은 ‘新年快乐’이며, 춘절은 중국의 가장 중요한 명절이다. 대청소로 집을 정리하며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교자나 만두, 어묵 등 특색 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또한 홍바오라 불리는 빨간 봉투에 돈을 넣어 아이들에게 주며 행운과 번영을 기원한다. 폭죽과 불꽃놀이로 악귀를 쫓고, 사자춤 등 새해 공연도 열린다. 2) 영국과 미국 등의 영어권 나라: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Happy New Year’로 서로 인사한다. 송구영신의 의미로 12월 31일 자정에 카운트다운 이벤트를 하며, 불꽃놀이 등의 거리 축제와 샴페인으로 새해를 맞이하고 새로운 결심을 한다. 3) 스페인: 영어권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송구영신 시간에 종을 울리며 포도 12알을 차례로 먹으면서 소원을 빌고 ‘¡Feliz Año Nuevo!’라는 새해 인사를 한다. 4) 인도: 새해 인사말은 ‘नया साल मुबारक हो (Naya Saal Mubarak Ho)’이다. 축하 방식은 지역과 종교(힌두교, 시크교 등)에 따라 새해 축하 방식이 조금씩 다르며 매우 다양하다. 남인도에서는 새해 첫날 집을 청소하고 코코넛이나 쌀과 같은 전통 음식을 나누며, 도시 지역에서는 서구식 새해 카운트다운 파티와 불꽃놀이 등 일반적인 행사를 하기도 한다. 5. 신앙적 의미와 결론 및 제언 이상에서 살펴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새해 인사에 대한 각 나라와 우리나라의 전통과 의미를 볼 때, 이는 우리 기독교적 의미에서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좋은 덕담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복이 새해에도 임하시기를 바라는 기도가 이 인사말 속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만 지나친 기복적 의미와 기대를 담아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서 이러한 우려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새해에 하나님의 복을 기원하는 이러한 덕담의 인사말은 얼마든지 사용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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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29
  • [양대식 목사] 나와의 관계
    수많은 관계 가운데 나와의 관계가 있습니다. 나와의 관계가 깨지면 삶이 불행해집니다. 불평하고 비난하고 열등의식을 가지고 사는 이유는, 나와의 관계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나를 내가 사랑해야 합니다. 교만해서는 안 되나 자존감을 가져야 합니다. 자존감이 낮으면 자신감이 없고 나와의 관계가 깨집니다. 관계에 있어서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아야 합니다. 비교의식은 사탄이 주는 마음입니다. 나는 나이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와 똑같은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나를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했습니다. 내가 나와의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내가 나를 귀히 여기고 축복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와 전 세계와 바꿀 수 없습니다. 사탄은 나를 향해 약점을 잡고 공격합니다. 죄를 지었을 때 참소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향해 존귀한 자 택한 자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나와의 관계가 건강하면 행복합니다. 나 자신에 대해 좋은 자화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목회자는 나와의 관계가 잘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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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문/책
    2026-01-29
  • [긴급 논평] 정교분리를 오독한 권력의 폭거 이재명 정권의 ‘교회 전쟁’ 선포를 규탄한다
    지난 1월 21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한 종교의 자유를 근본에서 뒤흔드는 발언을 공개 석상에서 내놓았다. 그는 이른바 ‘정교유착’을 “나라가 망하는 길”, “반란 행위”로 규정하며, “큰 돌부터 집어낸 다음 자갈과 잔돌을 집어내는 단계가 올 것”이라는 표현으로 개신교를 향한 단계적 수사와 탄압을 노골적으로 시사했다. 이는 단순한 법 집행의 의지 표명이 아니다. 정권에 비판적인 종교 세력을 구조적으로 제거하겠다는 의도가 담긴, 명백한 ‘종교를 향한 전쟁 선포’에 해당한다. 1. 정교분리 원칙에 대한 치명적 오독과 대통령의 무지 이 대통령의 발언은 정교분리 원칙에 대한 중대한 오해이자 왜곡에 기초해 있다. 대한민국 헌법이 말하는 정교분리는 종교가 정치 현실에 대해 침묵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 권력이 특정 종교를 국교화하거나 종교 영역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원칙이다. 정교분리는 권력의 방패가 아니라 신앙의 보루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이 원칙을 정반대로 전도하여, 종교인이 정치 권력을 비판하면 처벌하겠다는 입막음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헌법 정신에 대한 정면 위반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권의 정책 실패와 도덕적 문제를 지적하는 목회자들의 발언을 ‘반란 행위’로 규정하고 수사의 대상으로 삼겠다고 공언한 점이다. 신앙과 양심에 따른 공적 발언을 범죄로 둔갑시키는 이러한 발상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대통령에게서 나올 수 없는 독재적 사고다. 대한민국은 천부인권 사상 위에 세워진 나라이지, 권력 비판을 반란으로 규정하는 체제가 아니다. 2. 역사 속 종교 탄압 정권들의 공통된 말로 역사는 종교를 억압하고 교회를 적으로 돌린 정권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를 분명히 증언한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국가 의례라는 이름으로 강요하며 교회를 굴복시키려 했다.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수많은 성도들이 투옥되고 순교했지만, 교회는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신앙의 자유를 유린한 일제는 결국 역사 속에서 패망했다. 나치 독일 역시 교회를 국가 이데올로기에 종속시키려 했다. 그러나 고백교회와 본회퍼 목사를 중심으로 한 신앙의 저항은 끝내 꺾이지 않았다. 교회를 통제하려던 나치 체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추악한 범죄 집단으로 기록되며 붕괴했다. 소련과 공산권 국가들 또한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규정하고 교회를 파괴했지만, 국민의 영혼까지 통제하는 데는 실패했다. 종교 탄압으로 유지되던 체제는 내부로부터 붕괴되었다. 이재명 정권의 현재 태도는 이러한 전체주의 정권들이 반복해 온 종교 통제의 전형적인 수순과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3. 왜 개신교인가: 권력의 불안이 드러난 ‘돌 깨기’ 전략 이 대통령이 “큰 돌부터 잡겠다”고 공언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개신교가 가진 공적 발언의 힘과 사회적 결집력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스스로 고백한 것이다. 정권의 부정부패, 정책 실패, 자유민주주의의 훼손을 가장 집요하게 비판해 온 집단이 교회라는 사실을 권력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수사’라는 칼을 먼저 휘두르며 공포를 조성하려는 것이다. 특정 목회자를 먼저 표적 삼아 교계 전체를 위축시키려는 이 방식은 비겁한 갈라치기 전략이다. 그러나 한 명의 목회자를 탄압하는 순간, 그것은 곧 수많은 성도와 한국 교회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행위가 된다. 신앙 공동체는 공포로 해체되지 않는다. 4. 결론: 한국 교회의 각성과 행동을 촉구한다 지금은 침묵할 때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의 성벽이 무너지는 순간, 교회는 파수꾼의 자리에서 나팔을 불어야 한다. 정교분리에 대한 왜곡을 방치하는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동조다. 오늘 강단의 자유가 무너지면, 내일은 신앙의 자유 자체가 위협받게 된다. 한국 교회는 권력의 협박 앞에 고개 숙이지 말고 진리와 공의의 목소리를 더욱 분명히 내야 한다. 일제의 칼날 앞에서도 신앙을 지켰던 선조들의 정신을 기억해야 한다. 천부인권을 부정하는 권력 앞에서 교회는 기도의 무릎과 행동하는 양심으로 동시에 서야 한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종교 자유 침해의 현실을 국제사회와 자유 진영에 알리고, 자유와 인권이라는 보편 가치 위에서 연대해야 한다. 거짓과 탄압은 결코 진리와 자유를 이길 수 없다. 이재명 대통령은 역사의 교훈을 직시하고 종교 탄압의 칼춤을 즉각 멈춰야 한다. 한국 교회는 신앙의 깃발 아래 다시 하나로 일어서, 대한민국과 교회의 자유를 지켜낼 것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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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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