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행연월일 2026-07-2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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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속기고9] 자학적 사관의 종착역: 인공기 옹호와 북한 독재를 향한 신학적 굴복
    서론: 이만열·손봉호의 가르침이 낳은 기형적 괴물들 지난 연재들을 통해 우리는 이만열의 역사 왜곡과 손봉호의 인본주의 윤리가 어떻게 고신의 뿌리를 갉아먹었는지 살펴보았다. 이제 그 독소들이 실질적으로 어떤 파멸적 결과를 낳았는지 직시해야 할 때다. 소위 이만열·손봉호 키즈라 불리는 이들은 이제 강단을 넘어 포럼과 SNS에서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심지어 기독교의 가장 잔혹한 박해자인 북한 정권의 상징을 미화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들의 외침은 단순한 개인의 견해가 아니라, 수십 년간 주입된 자학 사관이 고신의 심장부에서 터져 나온 사상적 고름이다. 1. 인공기를 하나님 나라의 상징으로 둔갑시킨 사상적 반역 최근 고신 내 일부 목회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지향한다는 상징으로 북한의 인공기를 달아야 한다”는 경악스러운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과 신앙의 자유를 상징하는 태극기를 민족주의적 우상으로 몰아세우면서, 정작 성경을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 신자를 처형하는 북한 전체주의의 깃발을 신앙적 가치로 치환하는 영적 간음이다. 이만열이 깔아준 “대한민국은 불의하게 세워진 나라”라는 전제가 없었다면, 감히 목사가 인공기를 하나님 나라와 연결하는 망언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세택: “태극기를 붙이고 있는 교회... 우리 교단 정신으로 보면 그게 정당한 겁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한다는 상징으로 붙일 국기가 하나 있습니다. 북한의 인공기입니다.” (출처: 2025.11.24. 고신 미래교회 포럼 발언) [비평]: 이는 신학·역사·국가관을 통째로 왜곡한 심각한 사상적 반역이다. 태극기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는 체제의 상징인 반면, 인공기는 십자가를 철거하고 목회자를 학살한 체제의 상징이다. 본인은 강연 중 비유로 인용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목사가 태극기를 우상숭배라 비난하면서 인공기를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이는 민족주의 비판을 빙자하여 자유민주주의 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김일성 일가주의를 신성화하는 종북적 사고의 극치다. 기독교인을 가장 잔혹하게 죽인 체제의 깃발을 교회에 걸자는 주장은 히틀러의 스와스티카를 십자가 옆에 달자는 것에 비견될 만큼 충격적인 발언이다. 2. 애국 목사를 ‘극우’로 몰아 징계를 요구하는 위선적 윤리 이만열·손봉호의 사상적 자녀들은 성경적 진리를 사수하며 국가적 위기 앞에 목소리를 내는 손현보 목사와 같은 애국 목회자들을 ‘극우’라는 낙인을 찍어 공격하고 있다. 권수경, 이세령 목사 등은 고신 총회에 손 목사에 대한 징계를 요청하며 교단 내 사상적 검증 요구를 제기했다. 올해 들어서는 전국을 순회하며 고사모 전국 순회 토론회까지 개최하고 있다. 정병오가 이끄는 기윤실도 이에 동조하며 보수적 신앙 가치를 수호하는 움직임을 ‘반윤리적’인 것으로 몰아세운다. 손봉호 교수는 이러한 이들의 외침을 정당한 비판인 양 비호하며, 정작 교단을 무너뜨리는 좌파적 탈선에는 침묵하고 있다. 손봉호 키즈(권수경, 이세령 등): “손현보 목사의 행보는 극우적이며 교단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있다. 총회 차원의 엄중한 징계가 필요하다.” (출처: 고신 총회 징계 요청 및 관련 기고문 요약) [비평]: 인공기를 달자는 자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면서, 차별금지법을 막고 예배의 자유를 지키려는 목사에게 ‘극우’ 딱지를 붙여 징계를 요구하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윤리인가? 이것이야말로 손봉호가 심어놓은 ‘선택적 도덕성’의 폐해다. 그들은 성경적 정의가 아니라 좌파적 이데올로기를 잣대 삼아 동료 목회자들을 사상적으로 숙청하려 하고 있다. 더구나 2026년 4월 2일 고신총회 임원회가 발표한 「목회자 및 교역자 윤리강령」 제9항은 교회가 “사회와 국가에 대한 책임”을 지며 “모든 구조적 악에 대해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분명히 선언하였다. 그렇다면 차별금지법, 교회 해체법, 설교의 자유 침해와 같은 구조적 문제 앞에서 외친 설교자를 향해 징계를 요구한 행위는 무엇인가. 이는 윤리강령의 정신을 실천한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거스른 것이다. 윤리강령 제9항을 문자 그대로 적용한다면, 예언자적 설교자를 징계하려 한 자들이야말로 먼저 윤리적·교회정치적으로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이다. 정당한 국가관과 신앙 수호 의지를 극우로 몰아세우는 행태는, 고신 총회를 좌경화된 시민단체의 하부 조직으로 만들려는 고도의 전략이다. 3. 전체주의를 옹호하며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신학적 실책 이만열 사관의 종착역은 결국 북한 정권에 대한 도덕적 면죄부와 대한민국 건국 정통성의 완전한 붕괴다. 이들은 성조기나 일장기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면서 인공기에 대해서는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라는 고귀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는 칼 마르크스와 레닌주의적 사유가 한국 교회 안에 스며든 전형적인 형태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의와 평강이 아닌, 사회주의적 평등과 전체주의적 통제로 오해하고 있다. 이로 인해 고신의 젊은 세대들은 대한민국을 지켜야 할 조국이 아닌 타도해야 할 불의한 세력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만열·손봉호 키즈들의 논리: “미국 중심의 세계관(성조기)에서 벗어나야 하며, 진정한 평화와 하나님 나라는 분단을 극복하는 북한과의 연대(인공기 상징)에 있다.” (출처: 성서한국 및 기윤실 포럼 주요 논지) [비평]: 하나님의 나라는 자유와 생명을 상징하지만, 인공기는 인권 말살과 세습 독재를 상징한다. 이 두 가치는 결코 화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인공기를 옹호하는 것은 그들의 신학이 이미 개혁주의 고신의 신학을 이탈했음을 증명한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골 2:8)는 말씀처럼, 이들은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며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놓은 자유의 토대를 허물고 인공기의 그늘로 들어가려는 이들의 시도는 영적 간음이자 역사적 자살 행위다. 결론: 고신 총회여, 독보리들을 솎아내고 신앙의 야성을 회복하라! 오세택 목사의 인공기 발언과 손현보 목사를 향한 권수경, 이세령 목사 등의 징계 요구는 현재 고신 총회가 직면한 위기가 얼마나 엄중한지를 보여준다. 이만열·손봉호가 심어놓은 독보리들이 이제는 아예 밭 전체를 차지하려 들고 있다. 고신 총회는 더 이상 우유부단하게 이들의 망언을 묵과해서는 안 된다. 인공기를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라 부르는 자들이 어떻게 고신의 강단을 지킬 수 있는가? 이제 우리는 이들의 오만하고 반성경적인 생각을 단호히 배격하고, 선배들이 피로 지킨 자유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개혁주의 신앙의 야성을 회복해야 한다. 회개하지 않는 사상적 침투 세력을 솎아낼 때 비로소 고신의 등불은 다시 켜질 것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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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6-11
  • [기고] 침묵 속에 핀 신앙의 꽃: 히라도와 나가사키 순례 기행
    *여정의 서막: 설렘으로 빚은 여섯 명의 기도 “경남 CBS 개국 25주년 기념 일본 순교지 순례”의 길을 떠나기 전, 우리 새누리 교회 6명의 일행은 마치 첫사랑을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가슴 설레는 마음으로 이번 순례길을 준비했습니다. 각자의 삶은 분주했지만, 일본 땅에 숨겨진 신앙의 발자취를 찾아 나선다는 공통의 목적 아래 우리는 하나가 되어 기도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그 옛날 척박한 땅에서 복음을 지켰던 이들의 뜨거움을 우리도 만나게 하소서”라는 간절한 고백은 순례길에 오르기 전부터 이미 우리 마음 속에 작은 불꽃을 지피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설렘과 기대로 가득 찬 새누리 교회 순례팀은 소망의 닻을 올리고 큐슈의 서쪽 끝, 히라도와 나가사키를 향해 발을 내디뎠습니다. *선상부흥회: 바다 위에서 울려 퍼진 영혼의 울림 이번 순례의 시작과 끝은 푸른 바다 위에서 드려진 “선상부흥회”로 더욱 특별했습니다. ‘이경은 목사님’과 ‘정태진 목사님’께서 이끄신 부흥회는 순례의 길목마다 우리 영혼의 지표가 되었습니다. 목사님들의 뜨거운 설교는 배 안을 성령의 뜨거운 열기로 가득 채웠으며 우리 일행 6명 모두는 일본 땅을 밟기 전 이미 성령의 뜨거운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망망대해에서 들려온 생명의 말씀은 우리가 순례지로 향하는 이유를 분명히 깨닫게 도와주었으며, 돌아오는 길에는 그 감동을 일상의 사명으로 승화시키는 귀한 영적 동력이 되었습니다. *히라도: 고난의 현장, “후미에”의 통곡과 “스즈타 감옥”의 침묵 둘째 날 순례 중 머문 “야이자 화형장”은 마음 한 구석이 칼로 오려내는 듯한 아픔의 현장이었습니다. 당시 신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후미에(성화상 밟기)” 체험 앞에 섰을 때, 생존과 신앙 사이에 갈등했을 그들의 처절한 고뇌가 전해져 발바닥에 닿는 못 판의 아픔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이어 다음 날 마주한 “오무라 스즈타 감옥터”는 순교의 역사가 얼마나 처절했는 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두 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서 수십명의 신자가 갇혀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던 그곳, 서서 용변을 보며, 서서 잘 수 밖에 없던 그곳에서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악취와 추위 속에서도 서로를 격려하며 신앙을 고백했던 그들의 흔적을 묵상하며, 우리가 누리는 신앙의 자유가 얼마나 많은 선조의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인지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나가사키: 26인 성인, 고난 위에 피어난 영광의 찬미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선교사와 일본인 신자 26명이 니시자카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한 곳으로, 추운 겨울날 귀가 잘린 채 800km를 맨발로 걸어 온 이들 중에는 12세, 13세의 어린 소년들도 있었습니다. 십자가형을 앞두고도 “천국이 가깝다”며 노래했던 12세 “루도비코 이바라키”, 이 소년들이 바로 일본 땅에 심겨진 가장 순결한 밀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흘린 피는 오늘날 일본 기독교 역사의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었음을 가슴깊이 새겼습니다. *나가사키 수요예배: “이 땅의 밀알이 되라”는 부르심 이번 순례의 영적 정점 중 하나는 나가사키에서 드린 “수요예배”였습니다. “후쿠오카 비전 처치”를 섬기시고 계시는 김주영 선교사님, “한 알의 밀알이 열어준 길 – 그분을 따라 이 땅의 밀알이 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수 백년 전 이 땅에 떨어져 썩어짐으로 무수한 신앙의 열매를 맺게 한 순교자들의 삶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알의 밀알”을 따른 길이었음을 깨달으며, 우리 일행은 단순히 유적을 돌아보는 관광객이 아닌 ‘복음의 빚진 자’로서 깊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귀국의 길: 풍랑 속에서 외친 간절한 기도 모든 일정을 마치고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을 때, 바다는 마치 우리의 믿음을 마지막으로 시험하려는 듯 거센 풍랑을 일으켰습니다. 배 안의 많은 사람이 극심한 멀미로 토하고, 어지러워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이 한계에 다다랐지만, 우리는 입을 모아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주여, 이 풍랑을 잠재워 주소서.” 갈릴리 호수의 풍랑을 잠재우셨던 주님을 의지하며 올린 그 밤의 기도는, 박해의 폭풍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던 순교자들의 기도와 닮아 있었습니다. 그 간구 속에 거칠었던 파도는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고, 우리는 비로소 짧은 시간이지만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여정을 갈무리하며: 삶의 순례자로 다시 서기 5일간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우리 새누리 교회 6명의 마음에는 떠나기 전의 설렘보다 더 묵직하고 단단한 사명이 채워졌습니다. 순교자들이 밀알이 되어 열어 준 이 길을 이제는 우리가 이어가야 한다는 거룩한 부담감이었습니다. 야이자 화형장과 스즈타 감옥터의 통곡, 나가사키 수요예배에서 받은 말씀의 은혜, 26성인의 순교 현장 그리고 마지막 배 안에서의 간절했던 기도를 기억하며 이제 우리는 각자의 삶이라는 순례길로 다시 돌아갑니다. 이번 순례를 허락하시고 풍랑 속에서도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2026. 0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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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30
  • [정우승 목사] 눈물의 의미
    눈물은 단순한 슬픔이나 기쁨 같은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우리 눈을 보호하고 건강상태를 유지하는 생체방어 시스템이기도 하다. 눈물은 겉보기에는 투명한 물 같지만, 사실은 우리 눈의 건강을 지탱하는 복합적인 액체이다. 눈물의 주성분은 98%가 물이며, 나머지 2%가 눈을 보호하고 영양을 공급하는 핵심성분들로 채워져 있다. 또한 눈물은 발생원인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한다. (1) 기본눈물은 눈을 촉촉하게 하고 각막에 영양을 공급하며, 이물질과 박테리아로부터 눈을 하루 종일 보호하는 필수적인 눈물이다. (2) 반사눈물은 눈에 들어온 유해한 이물질이나 자극 물질을 씻어내기 위해 다량으로 분비된다. 항체 성분이 포함되어 감염방지에도 도움이 된다. (3) 감정눈물은 심리적으로 스트레스 호르몬 배출을 돕고, 사회적으로는 도움을 요청하거나 유대감을 촉진하는 신호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같은 눈물이라도 이 감정눈물에는 교감신경의 활성화로 인해 염분 농도가 더 많아서 짠맛을 잘 느낀다. 흥미로운 것이 있는데 우리 선조들은 흐르는 눈물과 고여 있는 눈물을 구분하였다. 흐르는 눈물은 누(㴃)자를 쓰고, 고여 있는 눈물은 누(泪)자를 썼다. 왜 같은 음인데 구지 다른 단어를 사용했을까? 흐르는 눈물을 뜻하는 누(㴃)자는 상형(象形)으로 미루어 흐르는 눈물 형상이다. 눈 모양의 호(戶)자 아래에 눈물방울을 연상시키는 점이 있고, 그 점 아래 큰 대(大)자가 크게 흐르는 눈물 자국과 같은 복합된 인상을 준다. 그래서 줄줄 흐르는 눈물의 누(㴃)인 것이다. 이에 반해 고여 있는 눈물을 뜻하는 누(泪)는 물 수(水)변이 눈물을 흐르지 않는 상형으로서 누(泪)인 것이다. 즉 눈물이 나긴 나는데, 눈의 경계를 넘어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상태의 그런 눈물이다. 서울 서대문 밖에 ‘눈물의 다리’란 옛 지명이 남아 있다. 지금은 복개되었지만 작은 개천에 나무다리가 걸려 있었고, 그 다리를 예로부터 눈물의 다리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눈물의 다리가 한자어로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눈물을 뜻하는 누교(泪橋)로 표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교(泪橋)는 어떤 사연의 다리이기에 그 다리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게 울어야 했던 것인가? 이 누교 건너편은 바로 서소문 형장(刑場)이었다. 1801년, 1838년 그리고 1866년에 걸친 천주교 박해 때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던 바로 그 형장이다. 그 순교자의 가족이나 친지들은 이 다릿목에서 이별을 해야 했다. 그 처절한 죽음의 비명 소리에 귀를 막고 몸부림을 치던 바로 그곳이다. 처형이 끝나고 다리 쪽으로 실려오는 시체를 향해 달려가 쓰러져 울고 또 울던 그런 다리이다. 산 자와 죽은 자의 한계를 그었던 다리,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잠시 후 피범벅이 된 시신으로 돌아와서 맞이해야만 하는 그런 눈물의 다리였다. 그런데 그 눈물의 다리가 왜 흐르는 눈물이 아닌, 고여 있는 눈물을 뜻하는 누교(泪橋)라고 표기한 것일까? 왜 정든 자와 사별하는 그런 극한 상황에서까지 눈물을 속으로만 흘려야 했던가? 옛날 우리의 어머니들은 결코 눈물을 흘리며 울지 않았다. 고여 있는 눈물을 닦을 때도 손수건이 아닌, 옷고름이나 행주치마 끝으로 살며시 눌렀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눈물이 아닐까? 회개가 사라진 지 오래 되었고,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설교를 들으려고도, 하려고도 하지 않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무감각한 시대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11:17)에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우리들은 다윗의 기도를 익히 알고 있다. (시편 56:8)에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 땅에서 우리들은 많이 울어야 할 것이다. 왜 그런가? 천국에는 더 이상이 눈물이 없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21:4)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라고 말씀한다. 오늘 하루 ‘하나님이여 나에게 누(泪)가 아닌 누(㴃)의 눈물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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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29
  • [부활절 메시지] 창원기총 이병권 목사
    ‘욜로(YOLO)’의 시대를 넘어, 부활의 참된 소망으로 요즈음 우리 사회에는 ‘욜로(YOLO)’라는 말이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You Only Live Once’의 앞 글자를 딴 이 말은 “인생은 한 번뿐이니 하고 싶은 대로 즐기며 살자”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 땅의 삶이 전부인 양, 오늘을 마음껏 소비하고 즐기라고 부추깁니다. 하지만 길어진 100세 시대라 할지라도 지나고 보면 인생은 옛 어른들의 말씀처럼 날아가는 화살과 같이 쏜살같이 흘러갑니다. 만약 이렇게 빠르게 지나가는 이 땅의 삶이 우리 인생의 전부라면 그 짧은 여정의 끝에 남는 것은 결국 지독한 허무와 공허 그리고 죽음 앞의 우울함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핵심인 ‘부활’은 이 허무한 인생의 마침표를 영원한 생명의 쉼표로 바꾸어 놓습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겨울이 되어 얼어붙었던 가지에 봄이 되면 다시 잎새가 싹트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자들도 부활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너머에 영원한 삶이 예비되어 있다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부활의 신앙은 단지 죽음 이후의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현재의 삶’을 완전히 뒤바꾸는 강력한 원동력입니다. 슬픔을 사명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꿉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의 설립자 릴런드 스탠퍼드는 수재였던 외아들을 갑자기 잃고 극도의 슬픔 속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꿈속에서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 곁에 있으니 저 대신 세상의 청년들을 도와주세요”라는 아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그의 인생관은 완전히 바뀝니다. 아들이 천국에 살아있다는 부활의 소망을 품게 된 그는 당시 2천만 달러라는 거액을 헌납해 오늘날의 명문 스탠퍼드 대학을 세웠습니다. 부활의 믿음이 개인의 절망을 넘어 수많은 젊은이를 살리는 위대한 헌신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어느 호스피스 병동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젊은 어머니가 어린 딸에게 남긴 편지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아가, 엄마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향해 가는 문이란다. 기나긴 겨울을 이기고 봄에 피어나는 저 꽃들처럼 우리도 눈물 없는 그곳에서 반드시 다시 만날 거야." 이처럼 부활의 소망은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는 위대한 사랑과 용기를 현재의 삶 속에 불어넣습니다. 성경은 부활한 우리가 누릴 미래에 대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 21:4)”라고 약속합니다. 부활은 눈물도 사망도 애통함도 없는 완벽하고 행복한 삶이 열리는 기적입니다. 이 땅의 쾌락만을 좇는 ‘욜로’의 허무함을 넘어 영원을 바라보며 오늘을 가치 있게 살아가는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2026년 부활절을 맞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주는 참된 기쁨과 미래에 대한 찬란한 소망이 상처받고 지친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가득 울려 퍼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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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8
  • [부활절 메시지] 합천기연 정순철 목사
    부활절을 맞이하는 믿음의 독자들에게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오셔서 세번의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ㅡ.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신 후 처음의 사람에게 1.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창1;28 하나님이 아닌 존재인 뱀이 처음의 사람에게 찾아와 그들의 욕구를 채우도록하고 뱀의 사상을 따르게 한 후..세상은 어둡게 변해 버렸던 사실을 알려줍니다. 2.정녕 죽으리라..ㅡ창2;17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찌니라,ㅡ창3;19 이마에 땀을 흘려야 겨우 먹고 살고, 밭은 소출을 내지 않고 행복했던 가정에 행복은 간 곳 없고, 형이 동생을 해하고 장례를 치르고 부부는 갈등을 겪고,,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 한을 품고 살아가는 인간 세상에, 지금도 전쟁으로 고통을 당하고, 영생의 나라를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 3.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ㅡ 요11;25-26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시고,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려주시고 ㅡ무덤에서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하십니다.ㅡ요528. 죽음으로 가는 모든 이들에게 소망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ㅡ 요3;16 여기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죄의 댓가를 치르고서야 우리 믿는 자들이 영생의 복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ㅡ그가 찔리고 그가 상하고 그가 징계를 받고, 그가 체찍에 맞음은 우리 허물과 죄와 불안과 걱정과 공포, 병 때문인 것을 성경은 알려주고 있습니다.ㅡ사53;5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라고 하셨고. 사53;6. 예수님을 믿으면 사람들의 저주가 그를 믿음으로 물러가는 복된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갈3;13-14 이 말씀이 부활절을 맞이하는 모든 독자들에게 힘이 되고 복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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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5
  • [부활절 메시지] 하동기연 권동진 목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베드로전서 1:3) 할렐루야!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영원한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온 마음 다해 찬양합니다. 2026년의 봄 만물이 생동하는 이 계절에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와 성도님들, 그리고 사랑하는 이웃들의 삶 위에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죽음의 권세도 이길 수 있다는 강력한 선언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것처럼 온 세상 가운데 전쟁으로 인한 공포와 경제적인 어려움들로 인하여 고통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음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빈 무덤의 승리를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소망과 회복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거룩한 백성된 우리는 생명의 부활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하나 되어 이번 부활절을 시작으로 경남 지역 구석구석에 산 소망을 전하는 통로로 소외된 이웃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무너진 마음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사랑하는 경남 지역의 모든 교회와 성도 여러분! 부활의 아침은 어둠이 지나고 반드시 빛이 온다는 하나님의 약속이자 확증입니다. 비록 현실의 고난이 여전히 우리 곁에 있을지라도, 부활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심을 신뢰하고 절망이 있는 곳에 소망을 갈등이 있는 곳에 화해를 심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갑시다. 다시 한번 우리 주님의 부활을 축하하며 이 기쁜 소식이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그리고 우리들이 섬기는 교회 위에 충만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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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5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경남기독신문 창간 20주년 기념] 말씀의 거울을 들고 시대의 파수대에 서라!
    경남기독신문 창간 2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한 언론이 스무 해 동안 자신의 자리를 지켜 왔다는 것은 단순한 시간의 축적이 아니다. 수많은 사건과 사람을 기록하며 한 시대의 기억을 보존하고,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침묵할 것인지를 끊임없이 선택해 온 역사이다. 더욱이 교회를 섬기는 기독 언론이 스무 해의 길을 걸어 왔다는 것은 사람의 수고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동안 경남기독신문이 지역교회의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누고, 교계의 크고 작은 소식을 전하며, 이름 없이 복음의 자리를 지켜 온 목회자와 성도들의 수고를 기록한 일에 깊이 감사드린다. 어려운 언론 환경 속에서도 사명을 감당해 온 모든 임직원과 관계자들의 노고에도 존경을 표한다. 그러나 창간 20주년은 지나온 역사를 자축하는 데 머무는 시간이 아니라, 앞으로 어떤 신문으로 서야 할지를 다시 묻는 성찰의 시간이어야 한다. 스무 해의 역사는 자랑의 면류관인 동시에 더욱 무거운 책임을 요구하는 부르심이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현실은 결코 가볍지 않다. 성경은 교회를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부른다. 교회는 세상의 흐름을 좇는 공동체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시대의 방향을 바로잡아야 하는 공동체이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세상을 염려하기에 앞서 오히려 세상의 염려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 공의를 외치면서도 가까운 사람의 불의에는 침묵하고, 타인의 허물에는 엄격하면서 자신의 허물에는 관대하며, 상대의 잘못은 확대하면서 자신이 속한 진영의 잘못은 축소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여 왔다. 이른바 ‘내로남불’은 세속 정치만의 병폐가 아니라, 말씀 앞에서 자신을 살피지 않을 때 교회 안에서도 드러나는 오래된 죄의 얼굴이다. 세상이 교회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복음의 진리가 낡았기 때문이 아니다. 복음을 맡은 우리가 그 진리의 무게에 합당한 삶을 충분히 보여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회가 진리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것은 권력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을 말씀에 복종시키는 것이다. 교회가 진리로 자신을 다스릴 때 비로소 세상을 향한 외침도 권위를 얻게 된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기독 언론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 기독 언론은 교계의 행사와 인물 동정을 전달하는 게시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교회의 아름다운 사역을 알리고 이름 없이 헌신하는 이들을 격려하는 동시에, 교회가 길을 잃을 때는 말씀의 빛으로 방향을 비추고, 교회의 양심이 무디어질 때는 경종을 울려야 한다.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교회의 모든 일을 무조건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상처를 덮어 곪게 하는 것이 아니라, 빛 가운데 드러내어 치료받게 하는 것이 참된 사랑이다. 그러므로 기독 언론은 교회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따뜻한 동역자인 동시에, 모두가 잠든 밤에도 깨어 나팔을 부는 신실한 파수꾼이어야 한다. 그러나 기독 언론이 경종을 울린다는 것은 스스로 재판장의 자리에 앉아 교회를 심판한다는 뜻이 아니다. 신문은 교회의 주인이 아니며, 언론의 펜이 성령의 검을 대신할 수도 없다. 언론의 사명은 없는 죄를 만들어 사람을 정죄하는 데 있지 않고, 이미 드러난 사실과 말과 행동이 무엇을 증언하는지를 정직하게 보여 주는 데 있다. 욥기 15장 5-6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좋아하는구나.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네 입술이 네게 불리하게 증언하느니라.” 이 말씀은 사람의 말과 행동이 결국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을 드러내며, 때로는 자신의 입술이 자신의 불법과 거짓을 증언하게 된다는 엄중한 사실을 보여 준다. 지도자의 공적 발언과 교회의 결정, 교단이 채택한 문서와 결의는 그 공동체가 무엇을 믿고 어떤 가치를 따르는지를 증언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 언론은 판결문을 작성하는 법관이라기보다 말씀의 거울을 들어 주는 봉사자에 가깝다. 거울은 얼굴의 흠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다만 이미 있는 모습을 감추지 않고 비추어 줄 뿐이다. 개인과 교회와 교단이 그 거울을 통해 자신의 죄와 실수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서 돌이키도록 돕는 것이 기독 언론의 사명이다. 따라서 경남기독신문의 펜은 사람을 찌르는 창이 아니라 병든 곳을 치료하는 의사의 수술 도구가 되어야 한다. 비판에는 진실의 날카로움이 있어야 하지만, 그 목적은 반드시 회개와 회복이어야 한다. 진리를 말하되 사랑 안에서 말하고, 잘못을 밝히되 회개의 문을 닫지 않아야 한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12문은 제9계명의 뜻을 설명하면서 진리를 사랑하고 정직하게 말할 뿐 아니라, 이웃의 명예와 평판을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가르친다. 문: 제9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답: 내가 누구에게도 거짓 증언을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말을 왜곡하지 않으며, 험담하거나 비방하지 않고, 또한 직접 듣지 않고서 성급하게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피하기 위하여, 마귀의 고유한 일인 모든 거짓과 속임수를 멀리해야 합니다. 재판이나 그 밖의 모든 경우에도 진리를 사랑하고 정직하게 말하며 고백해야 하고, 할 수 있는 대로 이웃의 명예와 평판을 보호하고 높여 주어야 합니다. 이는 기독 언론이 붙들어야 할 중요한 균형이다. 사랑을 명분으로 진실을 덮어서도 안 되며, 진실을 명분으로 사람을 함부로 파괴해서도 안 된다. 경남기독신문은 교회와 협력하고 교회를 섬겨야 한다. 교회의 선교와 교육과 구제와 연합을 널리 알리고, 지역교회들이 함께 복음의 길을 걸어가도록 연결해야 한다. 동시에 진리와 거짓 사이에서 중립일 수 없고, 공의와 불의 사이에서 침묵할 수 없다. 사람과 진영에 따라 판단의 기준을 달리하지 않고, 동일한 말씀의 잣대를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적용해야 한다. 창간 20주년을 맞은 경남기독신문이 이제 더욱 높은 파수대에 서기를 바란다. 그 자리는 사람들의 박수를 받는 연단이 아니라, 밤바람과 비를 견디며 깨어 있어야 하는 자리이다. 모두가 잠들어 있을 때 시대의 징후를 살피고, 위험이 다가올 때 분명히 나팔을 불며, 새벽이 올 때 누구보다 먼저 빛을 알리는 자리이다. 교회의 선한 소식에는 따뜻한 전령이 되고, 교회의 아픔에는 함께 우는 동역자가 되며, 교회의 잘못 앞에서는 침묵하지 않는 충성된 파수꾼이 되기를 바란다. 또한 크고 화려한 사역뿐 아니라 농어촌과 도시의 작은 교회에서 이름 없이 충성하는 목회자와 성도들의 이야기를 소중히 기록하기를 바란다.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 오늘의 시대가 교회와 기독 언론을 향하여 묻고 있다. 밤이 깊을수록 파수꾼은 더욱 깨어 있어야 하며, 어둠이 짙을수록 등불은 더욱 밝게 타올라야 한다. 경남기독신문이 사람의 박수보다 하나님의 판단을 두려워하고, 시대의 유행보다 영원한 말씀을 신뢰하며, 교회와 함께 걷되 교계의 바른 소식을 전하는 정직한 기록자요, 교회의 양심을 깨우는 맑은 종소리요, 말씀의 거울을 들고 시대의 성벽을 지키는 충성된 파수꾼으로 쓰임 받기를 기도한다. 경남기독신문 창간 20주년을 다시 한번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그 모든 걸음 위에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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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6-07-20
  • [최호숙 목사] 분기탱천(憤氣撐天) 의미를 되새기며
    사람이나 짐승이나 공통점이 있다면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세계나 동물 세계에 불합리한 일들로 인하여 분한 감정이 하늘을 찌를 듯이 올라와 극한의 대립 상태가 되어 크고 작은 전쟁이 되는 것이다. 분함의 예를 보면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 분노가, 판결의 불공평을 볼 때, 권력 남용으로 인한 불이익이 주어졌을 때, 약자로 눌림을 당할 때, 개인 사적인 이익을 위해 탐욕 품는 것을 볼 때 등등 분노가 일어나게 된다. 그 분함의 정도가 극에 도달한 상태를 사자성어로 “분기탱천(憤氣撐天)”이라고 하는데 탱(撐)의 의미는 받쳐 올리다, 버티다, 찌르다의 의미를 가진다. 고로 “분한 기운이 하늘을 찌르듯 최고조의 상태에 이름”을 뜻하는 말이다. 중국 삼국 시대(위, 촉한, 동오)에 유비가 당시 형주(지금의 후베이성)를 발판으로 정치적 야망을 키우려고 했지만 그곳 관리들은 유비를 끝까지 지지하지 못해 형주를 잃게 되었고 정치적 야망도 사라지게 되었다. 유비는 형주가 자기를 배신했다고 생각하여 분기탱천하게 되었고 복수의 날을 기다렸다. 진(秦)나라의 영정도 신하들에 의하여 배신당하였을 때 그 마음이 크게 분노하여 천지를 뒤흔들 정도였다고 한다. 요즘 우리 대한민국이 북중미 월드컵을 보면서 축구 국가대표팀의 32강 탈락이라는 결과 때문에 각계각층 사람들이 분기탱천하고 있다. 경로당 할머니 할아버지들까지도 분개할 정도면 그 여파가 어느 정도 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원인이야 무엇이든지 간에 현실의 기분이 그렇다는 것이다. 분노는 두 가지로 나눈다. 개인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사적인 분노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분노, 일명 의로운 분노도 있다. 출 32:19에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 숭배에 빠졌을 때 모세는 분노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의분(義憤)이었다. 민 25:11에 이스라엘 거룩한 공동체 속에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들어와 음행의 모습을 보였을 때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와 분노를 대신하여 그 음행한 남자 시므리와 미디안 여인 고스비를 죽였다. 거룩한 분노인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질투와 분노를 가지고 음행 당사자를 죽인 일에 대하여 칭찬하며 평화의 언약으로 그의 후손들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허락하였다. 느 5:7, 13장에 느혜미야의 거룩한 분노가 나온다. 당시 유다의 귀족들 민장들이 가난한 자들의 것을 착취하고 있었으며, 백성들은 안식일을 더럽히고 이방 문화가 성전에 들어온 것에 대하여 의분을 발했다. 예수님께서도 성전 정화를 위해 의분을 발하셨고 외식하는 바리새인 서기관들을 향하여서도 의분을 발하셨다. 의분이 되려면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며 하나님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인생을 살다가 보면 우리의 삶 속에 분노의 대부분은 나의 교만과 나의 자랑과 과시와 욕심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에게 면에서 교훈하고 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20), 분노의 시대에 마음을 잘 다스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분노에는 앞장을 서고, 자신의 유익을 위한 분노는 다스려 가는 지혜자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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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며 생각하며
    2026-07-17
  • [조희완 목사] 놀라운 감사 (합3:16-19)
    KBS TV에서 방영되는 <생로병사의 비밀>이라는 프로가 있는데 건강 상식에 관한 의학정보를 다루고 있는데 매우 유익한 내용입니다. 그 방송 내용 중에 “100세 인생 건강관리 방법”이라는 내용을 관심 있게 시청을 했습니다. 100세까지 건강을 유지할 수 잇는 방법 주에 첫째는, 규칙적인 생활 둘째는, 긍정적인 마음 셋째는, 적당한 운동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두 번째로 말한 긍정적인 마음이란 감사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감사는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행복해지고 싶으면 감사의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에는 마귀가 불행의 씨를 뿌리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비록 불행한 일이 닥쳐왔어도 감사하는 말을 계속할 때 불행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물러가게 됩니다. 모든 최상의 조건 속에서 살아도 불평하는 사람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좋은 형편이 아니어도 감사하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북한에 억류되었던 캐나다에서 이민목회를 하시던 임현수목사님이 949일 만에 석방이 되어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곳에서의 억류생활을 한 마디로 최악의 상황이었고 북한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돕다가 강제로 억류되었기 때문에 억울함과 배신감이 컸습니다. 언제 풀려날 수 있을는지 기약이 없는 캄캄한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곳에서 매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날마다 감사했습니다. 그 결과 949일 만에 석방되어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감사는 불행이 물러가게 하고 기적을 불러옵니다. 행복한 사람들의 비밀은 긍정적인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많은 것을 가졌어도 불평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작은 것을 인하여도 감사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박국>선지자가 놀라운 감사의 사람인 까닭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고통 중에 감사했기 때문입니다.(16) 둘째는 없는 중에 감사했기 때문입니다.(17) 셋째는 소망 중에 감사했기 때문입니다.(19) 감사가 식어져 가는 이 시대에 감사하므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 오피니언
    • 성경
    2026-07-17
  • [정우승 목사] 어리석은 자가 되라
    지혜의 사람인 바울은 (고전3:18)에서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는 모호한 말씀을 하였다. 과연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바울의 행간이 궁금해진다. 바울은 생생한 어구를 사용하면서 지혜로운 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어리석은 자가 되라고 권면한다. 그것은 겸비하게 배우는 자가 되라는 권면을 신선하게 표현한 것이다. 더욱이 벌써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에게는 아무도 무엇을 가르칠 수 없다. 플라톤은 ‘자기는 지혜를 배우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인간이다’ 라는 철학적인 말을 남겼다. 쿠인틸리안 역시 ‘자기들의 학식에 대해 그처럼 자신을 가지지 못했더라면 틀림없이 훌륭한 학자들이 되었을 터인데’ 라고 한 제자에게 말한 적이 있다. 또한 서양 속담에 ‘무지하면서도 자기의 무지를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피하라. 무지하지만 자기의 무지를 아는 사람은 지혜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가르쳐주라’ 는 말도 있다. 그러므로 지혜있는 사람이 되는 유일한 길은 자기가 어리석은 자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혜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자기의 무지를 고백하는 것이다. 옛 선비들에게도 이러한 어리석음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었다. 영등포 가리봉동을 지나 시흥에 이르는 중간지점, 왼편에 그리 높지 않는 야산이 있다. 그 산 이름이 독산(禿山, 민둥산)이며, 이 산 이름이 연유가 되어 그 인근 마을을 독산동이라고 한다. 이 산은 예부터 벌거벗었기로 그 같은 슬픈 이름을 얻은 것 같다. 그런데 조선시대 초기에 이곳에 살았던 유명한 선비 강의(姜艤)의 호가 독산(禿山)이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강의를 찾아와 자네가 호를 독산이라고 한 것은 살고 있는 지명을 따른 것인가 아니면 딴 뜻이라도 있는 것인가 하고 물었다. 이에 그는 자기 호가 왜 독산이라고 지었는지 늘어놓았다. ‘내 집 지은 곳에 산 하나가 있는데 활딱 벗겨져서 나무가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독산이라 한다. 어찌 이 산은 본래부터 나무가 없어 그러하리오. 한성 외곽에 자리잡은 까닭으로 도끼로 찍히고 소나 염소 따위에게 먹히는 것이 나날이 심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이 산 밑에서 성장하면서 개연히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탄식하면서 그 독산의 처지와 나의 처지를 비교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의 본성도 또한 이 산의 나무와 같은 것인데 진실로 그 마음을 바로 다스리지 못하면 뭇 사욕이 엄습해 오는 것과 바로 이 산의 나무를 도끼와 소나 염소가 해치는 그것과 같다. 감히 이것으로 표준하여 스스로 나의 마음을 경계하는 것이다’ 마음에 나무가 없다는 독산의 말은 어쩌면 현대인에게 공통된 상황의 날카로운 지적으로 보인다. 사욕의 도끼날에 남벌되어 메마르고 벌거숭이가 되어버린 민둥산, 너도 독산이요, 나도 독산이다. 우리 옛 선조들은 이 같은 마음의 벌거숭이, 마음의 어리석음을 자처하는 것으로 사리에 겸손하게 대하는 정신적 전통을 지니고들 살아왔던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도 이 같은 어리석음의 가치를 두는 인간을 찾아볼 수 있다. 삼성산이 시흥 쪽으로 뻗어오다가 부러질 듯 단절된 목에 형세가 뛰어나갈 것 같은 험한 바위가 바로 호암이다. 범이 달리는 형세의 바위라 그 기세를 누리기 위해서 호압사를 짓고, 다시 그 북쪽에 호랑이를 위업하는 사자암을 지은 것이다. 지금도 그 지점에 호압사며, 사자암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애써 어리석음에 가치를 두었던 흔적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율법에 능통하였던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참 진리를 발견한 이후에 이전에 자기가 알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지혜를 포기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혀지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의를 포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바울처럼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립보서3:8-9),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 젊은 시절 한 때 ‘성경박사가 아니라 성경밖에 모르는 바보’ 라는 좌우명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그 시절이 그립다. 세상의 수많은 때가 묻어있는 나 자신을 볼 때 심히 부끄러움을 금치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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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7-17
  • [이정희 목사] 무속 신앙에서 유래된 용어들 2: 용어의 의미로 본 무교의 명칭
    1. 서언(序言) 우리 말에는 종교적으로 영향받은 용어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다. 이는 오랜 역사 동안 뿌리내린 불교, 유교, 도교 등의 영향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건국 신화인 단군신화와 여기에 등장하는 용어들도 실제로는 무속적인 내용이 많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기고를 했으며, 또한 이런 용어들은 우리의 기독교 언어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기도 하다. 본 기고에서는 이를 발췌하여 비교 분석하면서 사용할 수 있는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을 구분하여 올바른 우리의 기독 언어생활을 도모하고자 한다. 2. 무속 신앙을 표현하는 여러 용어 1) 샤머니즘(shamanism): 이 말은 무속 신앙을 대변하는 전 세계적인 통용어로서 종교학자들이 무속 신앙을 종교적인 관점에서 독립된 종교로 존중하려는 의도에서 주로 사용해 오는 말이다. 본래 이 말은 17세기에 시베리아 퉁구스계 민족이 주술사를 의미하는 샤만(Shaman)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유럽의 독일 지역으로 전해졌다가 영어권에서 shamanism으로 정착된 말로 유추하고 있다. 뜻은 퉁구스의 어원인 샤(scha)의 의미인“생각하다, 알다, 이해하다”로 보고 있으며, 또한 샤먼은 초자연적 힘을 가진 사람이나 신령(神靈)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 사람으로서 질병 치료사, 마술사의 역할도 한다고 여기고 있다. 2) 한국에서의 용어 : 전통적 용어는 무속(巫俗), 무교(巫敎), 무(巫)라고 하는데, 무속(巫俗)은 불교학자 이능화가 이를 전통적인 관습으로 이해하여 처음 사용한 말이며, 지금은 국문학자들과 민속학자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다. 무교(巫敎)는 개신교 신학자 유동식 교수가 처음 사용한 말로 우리 기독교에서 주로 사용하는 말이다. 무(巫)는 인류학자 조흥윤이 사용한 말이며, 한국의 샤머니즘을 독특한 개성을 가진 전통으로 존중한다는 뜻이 있다. 또는 무술(巫術)은 신적인 존재를 불러들이는 무당(巫堂)을 중심으로 한 신앙 체계이며, 이들은‘이상 심리 상태’에서 신령이나 정령 등 초자연적 존재와 직접 교류하고, 이 사이에 예언, 탁선, 복점, 치병, 제의 등을 행하여 샤머니즘 신앙의 중심이 되는 말이다. 3) 한국의 무속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용어: 우리나라의 무속인들은 과거부터 자신들을 당골, 당골네, 당골 애미로 호칭되기를 좋아했다. 그 이유는 당골은 제정일치 사회였던 고조선 시대의 단군(檀君)과 고대 신라 왕의 명칭인 차차웅(次次雄)의 어원을 가진 역사적인 말로서, 무속인 스스로 자신들을 그 시대처럼 신의 대리인으로 선택받은 귀한 존재임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다. 3. 맺는말과 제언 불교적 용어에 비해서 무속적인 말들은 과거부터 무속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 때문에 일반 용어에서 구분이 힘들 정도의 용어들이 많은 것은 아니다. 앞서 소개한 샤머니즘이나 무속 등의 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용어들은 그들의 종교적이거나 신앙적인 용어들로 치부하고 다소 비판적인 말로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문제 의식을 가지고 구분할 말도 아니다. 그래도 이런 용어들을 분석하고 소개하는 것은, 이런 말들의 실체와 이런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적시하고자 하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으로, 앞으로도 계속 이러한 무속적인 용어를 논하면서 우리 믿음의 정체성과 소중성을 밝히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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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7-17
  • [오성한 목사] 나는 누구인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며 살아갑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학력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직업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재산과 성공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이런 것들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건강도 잃을 수 있고, 재산도 없어질 수 있으며, 명예도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존재가 이런 것들 위에 세워져 있다면 우리는 늘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전혀 다른 정체성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종교를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매우 놀라운 선언입니다. 우리가 지혜를 얻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지혜가 되십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기 위해 스스로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의가 되십니다. 우리가 거룩해지기 위해 자신의 힘으로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거룩함이 되십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구속이 되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하나님께 인정받을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바라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은혜를 믿는 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그리스도인의 자랑은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내 능력이 아닙니다. 내 열심이 아닙니다. 내 공로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은 교만을 버리고 비굴하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담대한 삶을 살라는 초청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우리의 능력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실수해도 소망을 잃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신분이 우리의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묻습니다. “너는 무엇을 가졌는가?” “너는 얼마나 성공했는가?” 그러나 복음은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너는 누구 안에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립니다. 자신을 증명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남과 비교하며 살지 않습니다.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지혜가 되시고, 나의 의가 되시며, 나의 거룩함이 되시고, 나의 구속이 되셨음을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복음이 주는 새로운 삶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입술에 이런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나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합니다. 그분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 고백이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참된 능력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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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7-17
  • [양대식 목사] 매달리지 말아야 한다
    인간관계가 스트레스이나 중요합니다. 무엇인가에 매달리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원수가 되고, 오늘의 원수가 내일의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인간을 의지하지 않아야 합니다. 인간은 사랑해 주어야 할 대상이지 의지의 대상은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은 수시로 변합니다. 나의 마음도 변하기에 믿을 수 없습니다. 변하는 인간의 마음에 매달리지 않아야 합니다. 과거의 상처, 현재의 상처에 매달리지 말아야 합니다. 상처가 치유되어야 합니다. 과거의 상처 받음에 매여 살지 않아야 합니다. 상처 때문에 큰 고통을 겪었지만, 상처 때문에 기도하게 되고, 성장하고 성숙해졌습니다. 받은 상처는 치유된 후 삶의 간증 거리로 삼아야 합니다. 내게 상처를 준 자를 잊어버리고,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가 인간관계의 열쇠입니다. 성령 받으면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남들의 평가에 매달리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평가에 관심 가져야 합니다. 좋은 평가 받으려고 과잉 친절하고, 욕심부리다가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잘했다 못했다는 인간의 평가에 매달리지 않아야 합니다. 인간의 평가는 불완전하고 공평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평가에만 관심 가지고 순수하게 섬기고, 사랑하고, 마음 비우고 인간에게 매달리지 않아야 관계가 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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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문/책
    2026-07-17
  • [김성수 총장] 한국 교회와 정치적 언어의 오용
    오늘날 한국 사회와 교회 안에서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적 언어가 일상적인 대화와 판단의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용어들이 언제부터,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었는지를 묻지 않고,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도 못한 채, 마치 영적 분별력의 기준이라도 되는 것처럼 남을 판단하고 선 긋는 데 활용되는 현실은 심각한 문제를 내포한다. 더구나 이런 언어들이 복음의 본질을 흐리게 하거나 신자의 정체성을 정치적 진영 논리로 가둬 버리는 일까지 발생하고 있음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교회 안에서 “보수”는 종종 정통 신앙, 바른 신학, 성경 중심이라는 뜻으로 등치되며, 동시에 정치적 “우파”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반면 “진보”는 자유주의 신학이나 교회 해체적 사상과 동일시되며, 정치적 “좌파”와 혼합되어 경계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있으며, 성경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시의 정치 진영(열심당,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 모든 정치적·종교적 진영 논리를 초월하여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선포하셨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종종 당시 사회 구조의 근간을 흔들었고, 때로는 보수적 전통을 해체하며, 때로는 율법의 정신을 더욱 깊이 회복시키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그는 복음으로 급진적이셨고,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질서 안에서 거룩한 보수주의자이기도 하셨다. 이처럼 복음은 좌우 이념의 잣대로 포섭될 수 없는 초월성과 급진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 “좌파”와 “우파”는 프랑스 대혁명 시기의 국회 좌석 배치에서 기원한 분류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복지, 경제 정책, 국가 권력의 역할, 젠더 이슈, 외교안보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나뉜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는 상대적이며 문화적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미국에서 진보적이라 여겨지는 가치가 유럽에서는 보수에 속하기도 하고, 한국에서는 특정한 역사적 경험(예를 들면, 6·25 전쟁과 반공주의, 군사독재와 민주화 운동)을 통해 더욱 복합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이러한 정치적 용어를 성경과 신앙에 무비판적으로 이식하게 되면, “우리는 우파니까 하나님 편”이라는 착각, 혹은 “진보가 약자 편이니까 교회도 좌파여야 한다”는 이념적 오류에 빠지기 쉽다. 한국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오류가 나타난다. ‘보수 교회’는 종종 교리적 정통성과 정치적 반공주의를 동일시하고, ‘진보 교회’는 사회 참여나 인권 감수성을 복음 실천으로 등치시킨다. 그러나 복음은 이 두 영역 모두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보수주의가 가진 물질주의적 탐욕, 국가주의적 배타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관심은 성경의 정의와 자비의 명령에 어긋나며, 진보주의가 갖는 도덕적 상대주의, 인간 중심주의, 성 윤리 해체는 창조 질서와 성경적 인간관에 반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고 말씀하시며, 정치 권위에 대한 순종과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동시에 선언하셨다. 사도 바울 역시 국가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하늘에 시민권을 둔 자’로서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삶을 강조한다. 이는 기독교 신앙이 정치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회피하라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진영 논리에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모든 이념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시험하고 분별하라는 뜻이다. 따라서 교회는 성경에 비추어 좌파의 가치도, 우파의 가치도 모두 복음의 관점에서 비판하고 수용해야 한다. 이는 ‘중립적’이라는 말과는 다르다. 교회는 언제나 예언자적이어야 하며, 권력과 체제에 대해 진리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의 좌우 이념을 넘어서는 복음의 길을 제시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명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첫째, 정치적 언어를 사용할 때 반드시 맥락과 정의를 분명히 하고, 성경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둘째, 교회가 정치 참여를 할 때는 정당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자비, 창조 질서의 회복이라는 목적에 따라 선택과 행동을 해야 한다. 셋째, 좌우를 가르는 진영 논리로 사람을 분별하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보는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 넷째, 신학교와 교회 교육 현장에서 ‘정치신학’과 ‘공공신학’에 대한 성경적 토대를 세워야 하며, 신자들이 비판적으로 세상 담론을 바라볼 수 있도록 지적 분별력을 길러 주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지금, 복음을 정치 이념의 도구로 사용하는 유혹 앞에 서 있다. 그러나 교회가 회복해야 할 정체성은 ‘우파 교회’도, ‘진보 교회’도 아닌 ‘하나님 나라의 백성 공동체’다. 이 공동체는 정의와 평화, 진리와 은혜로 세상을 비추되, 어느 정치 진영에도 복속되지 않는다. 그 길은 외롭고 손해 보는 길일 수 있으나, 바로 그 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가신 십자가의 길이며, 참된 자유와 소망이 있는 길이다. 김성수 목사(탄자니아 아프리카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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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6-07-17
  • [박동철 장로]경남교회가 새 교육감에게 거는 기대
    6·3 지방선거가 끝나고 지자체별로 선출 단체장들의 취임식과 함께 새로운 지방자치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경남 지역에서는 특별히 교육 현장의 수장 경남도교육감 선거에 관심을 끌었다. 대부분 교회에서 새 교육감 선출에 더한 관심이 있었다. 왜냐하면 지난 12년 동안 진보 성향의 교육감이 선출되어 교육행정을 펴왔다. 이에 따라 교회와 일부 갈등의 부분이 있었던 기간이 있었다. 광역지자체 교육감 선출은 정당 공천이 없다. 다만 보수와 진보의 정책 색깔을 분명히 하면서 선거를 하고 있고 교육행정을 펴고 있다. 그래서 선출된 이후에도 정책 성향이 뚜렷이 다르게 적용되어 왔다. 지난 12년 동안 경남도교육감은 진보 교육정책을 많이 폈다. 교사의 인권보다 학생 인권을 중시하고 교실에서 경쟁보다 협력을 중시하는 진보 교육정책이 많이 도입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수월성 교육을 지양하고 평등과 협력을 중시함으로써 평균 기초학력이 떨어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학생 인권을 중시함으로써 교육 현장에 참다운 인성교육이 하향했다는 지적도 많았다. 무엇보다 학생 인권을 중요시함으로써 나쁜 문화가 학생들에게 파고들 때 제어 기능이 약화되는 역기능이 생겨나는 일을 낳기도 했다. 경남 교육 현장에서는 지난 2019년 경남학생인권조례 제정 추진을 두고 특히 교회가 연합하여 반대 운동을 펼쳤다. 경남에서 유일하게 반대 투쟁을 통해 무산시킨 사례를 만들었다. 당시 교회는 경남도교육청이 추진하는 학생인권조례 제정이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첫째는 학생 인권 중시의 현장에 교회의 보편적 복음 활동을 하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에게 마음껏 복음을 전하고 학교 담장 밖 교회에서 복음을 듣고 인격을 도야할 수 있는 지금껏 한국 사회의 보편적 인격 양성의 사회적 기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교회가 더욱 걱정하는 부분은 진보 교육의 학생 인권 중시에서 학교폭력을 막을 수 있다고 하지만 자못 역기능을 낳을 수 있는 점도 중요하다. 학교폭력을 막기 위해서는 교회 활동 등 신앙생활을 통해 인격을 성숙해 가는 과정을 만들 수 있다. 셋째, 마약, 동성애 등 나쁜 문화 물결이 학교 현장으로 침투할 때 학생 인권이 이를 제어하는 데 힘들게 된다. 젠더 문화의 확산이 우리의 가족 문화, 더 나아가 전통적 가정의 문화를 파괴하는 현장이 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이미 건강한 경쟁 문화를 통해 인재를 발굴하고 첨단으로 치닫는 소위 AI 산업 문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경남은 특히 역사적으로 선각자들이 많고 구국에 몸을 던진 거장들이 많았던 곳이다. 이에 나라를 사랑하고 세계를 선도할 수 있는 글로벌 인재를 키우는 요람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다. 이에 따라서 경남의 청소년 교육 현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짐작할 수 있다. 경남의 새 교육감은 이러한 보편적 교육 지향점 앞에서 교육정책 수립에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보여진다. 진보 성향의 교육정책을 깡그리 무시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권순기 교육감은 그동안 수월성 교육을 받고 최고의 학력을 이수한 경남의 큰 인재이시다. 국립대학교 총장을 두 번 역임하고 과학자로서 인문학에 조예를 갖춘 교육 현장의 지도자로 손색이 없는 분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경남 지역 교회가 그동안 경남 지역 교육 현장이 더욱 건강해지도록 많은 애를 쓴 사례들을 이해하고 있을 줄 알고 있다. 교회가 단순히 학교 현장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제반 여건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가 아님을 알고 있을 것이다. 교회 복음이 들어가고 교회와 소통하는 교육 현장이야말로 나라의 미래 동량들을 양성하는 지름길이 된다는 사실을 지난 우리의 역사에서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130여 년 전 캄캄한 조선 땅에 선교사들의 교육사업 헌신과 사랑의 섬김이 오늘의 대한민국 자양분이 되었다는 점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청소년 한 생명의 바른 교육이 나라의 미래 큰 비전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새로운 교육정책을 펼쳐주시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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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7-14
  • [선교 기고-김계환 목사] 제일신마산교회 선교 이야기
    제일신마산교회는 2023년, 제6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저와 함께 새로운 선교의 여정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수십 년 동안 묵묵히 다져온 국내 선교의 든든한 토대 위에 이제는 열방을 향한 해외 선교의 돛을 올리며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오랜 세월 동안 지역사회와 국내의 어려운 교회들을 섬기며 이웃 사랑을 실천해 왔습니다. 그 중심에는 제4대 담임목사이셨던 강호준 목사님의 분명한 목회 철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강 목사님께서는 늘 “우리 주변에도 힘든 교회가 많은데 해외보다 국내 선교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목회 철학 아래 제일신마산교회는 수십 년 동안 지역사회와 미래자립교회를 섬기는 일에 전심전력했습니다. 가까운 이웃의 눈물을 닦아 주고 어려움 가운데 있는 교회들을 돕는 것은 우리 교회의 소중한 사명이었으며, 지금도 자랑스럽게 이어져 내려오는 아름다운 유산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를 돌아보면, 77년이라는 긴 역사에 비해 해외 선교의 발자취는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해외에 세워진 교회는 단 세 곳에 불과했습니다. 국내 선교에 쏟은 열정에 비하면 해외 선교는 오랫동안 새로운 도약을 기다리는 영역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 부임했을 때에도 교회의 분위기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의 관심은 여전히 지역사회와 국내 선교에 집중되어 있었고, 해외 선교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높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해외 선교지에서 오랜 시간 사역했던 저는 한 가지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는 교회는 결코 쇠퇴하지 않는다.” 복음은 본질적으로 흘러가야 하며, 교회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확신으로 부임 후 2년이 되었을 때 당회원들과 새로운 비전을 나누었습니다. “앞으로 1년에 한 교회씩 해외에 교회를 세워 봅시다. 1년이 어렵다면 2년이 걸려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복음의 통로가 되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당회원들은 이 비전에 한마음으로 동참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연말이 되어 교회 앞에 선교 비전을 선포하며 해외 교회 건축을 위한 선교헌금 작정을 요청했습니다. 그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비전이 선포되자마자 한 은퇴 권사님께서 해외 선교지 교회 건축을 위해 큰 금액을 헌금하신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셨다는 듯한 순간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순종하는 한 사람을 통해 시작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당회는 이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권사님의 헌신을 기념하여 그분의 이름으로 즉시 교회를 건축하기로 결의했습니다. 이후 네팔 지역에 교회 건축을 추진하고 있던 코이노니아선교회 김경헌 목사님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교회의 비전과 현재 준비된 상황을 나누었을 때, 비록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만 함께 믿음으로 시작해 보자는 격려를 받았고, 결국 네팔 파티가운 지역에 교회를 세우기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건축 진행 상황을 성도들과 함께 나누었고, 온 교회가 한마음으로 네팔과 파티가운 교회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하나님께서는 더욱 놀라운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는 가운데 많은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선교헌금에 동참했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헌금이 이어졌고, 첫 번째 교회 건축뿐 아니라 두 번째와 세 번째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재정까지 마련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성도들의 마음이었습니다. 해외 선교는 더 이상 몇몇 사람의 특별한 사명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성도가 함께 품고 기도해야 할 교회의 사명이 되었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해외 선교에 큰 관심이 없었던 교회가 이제는 열방을 품고 기도하며 기쁨으로 헌신하는 선교하는 교회로 변화되었습니다. 오늘의 제일신마산교회는 새로운 부흥의 계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한쪽에는 오랜 세월 지켜온 국내 선교라는 든든한 날개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새롭게 펼쳐진 해외 선교라는 힘찬 날개가 있습니다. 가까운 이웃을 향한 세밀한 사랑과 열방을 향한 복음의 열정이 함께 어우러져 건강한 선교 공동체를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제일신마산교회는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일에 더욱 힘쓸 것입니다. 지역사회를 섬기며 국내 교회를 돕는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는 동시에, 열방 가운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도 지속적으로 헌신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선교의 사명을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갈 때, 제일신마산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고 참된 평안을 나누는 행복한 공동체로 더욱 아름답게 세워질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써 내려가실 복음의 역사를 기대하며 담대히 전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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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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