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4-0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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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사] 경남기독신문 15주년을 축하합니다.[이상택 목사]
    경남기독신문 15주년을 축하합니다. 창간 후 지난 15년의 세월, 쉼 없이 달려온 경남기독신문 직원들에게 박수와 격려와 위로를 보냅니다. 또한 그 노고가 얼마나 귀한지 짐작하기에, 새삼 감사함을 표합니다. 그동안 복음의 황무지와 같이 척박한 경남지역에서 경남지역 최초의 기독신문을 창간하고 지난 15년 동안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제 지역을 넘어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의 새로운 시대를 향해 복음 신문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신문 일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를 정화시키는 맑은 샘물과 같은, 꽃향기와 같은 신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계속해서 경남 복음화와 교회를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가 되어 주시고, 정확하고 신속한 교계 뉴스를 전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이슈, 교육, 문화, 가슴 따뜻한 사랑과 나눔의 소식을 제공하면서 지역 사회를 더욱 밝게 만들어가는 신문이 되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좌·우로 치우침 없이 경남 복음화와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언론의 역할을 잘 감당해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기사를 써 주시길 당부합니다. 종이 매체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현실에서 꿋꿋하게 경남 기독교의 사랑을 대변해 주는 경남기독신문이 되어 주길 바라며 바라기는 교계 미담의 발굴로 세상을 밝게 만드는 통로가 되기를 부탁합니다.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이 시대에 스마트폰과 연동하여 교회와 성도들에게 신속한 교계의 정보를 손으로 볼 수 있도록 어플리케이션의 많은 홍보가 있었으면 합니다. 또 SNS 등으로 빠른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 이 때에 스마트폰 교육을 경남기독신문이 실시하여 독자들과 함께 정보를 공유하고 교계의 정보를 쉽게 그리고 신속 정확하게 알아도록 도와주는 경남기독신문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기독 청년들이 읽을만한 소식이 적어 아쉬움으로 남는데, 교회 안에서 청년들이 경남기독신문 기사로 소통하는 일들이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경남기독신문과 직원 여러분, 독자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가득하시기를 기도하며, 창간 15주년을 지나 새 시대를 맞는 경남기독신문이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더 높이 비상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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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7
  • [축사] 경남기독신문 15주년을 축하합니다. [임명곤 장로]
    경남기독신문 창간 15주년을 축하하며! 여러분들의 그동안의 노고에 먼저 격려와 감사를 드립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이제까지 지나온 것 하나님의 은혜라.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하면서 겸손히 문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를 바라면서 앞으로의 30주년, 50주년, 100년을 내다보면서 변화에 잘 적응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바라시고 기뻐하시는 좋은 신문이 계속 발간되기를 기도합니다. 15년 전 어느 날 이종승 목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마산 성은교회에서 만나자고 해서 갔더니 경남기독신문을 법인으로 설립하는 이사회에 동참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목사님의 부탁이라 힘은 없지만 장로님 두 분과 함께 이사로 참여한 후 이제까지 신문사에 관심과 기도를 해 오고 있은지가 벌써 15년이 되었습니다. 시간은 참으로 빨리도 지나갔습니다. 사훈을 ‘복음. 섬김. 연합’으로 정한 신문사가 우여곡절의 아픔을 겪어 오면서 오늘을 맞은지라 경남기독신문의 감회가 더욱 새롭습니다. 코로나19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에 살아가면서 우리의 존재의 나약함을 실감하면서 겸손히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기대해 봅니다. 이제는 신문이 전국에 배포됨으로 창원과 경남의 교계소식뿐만 아니라 지역의 아름다운 소식도 실어 주면 좋겠습니다. 코로나19와 같은 전시상태와 같은 이때에 기독언론으로서 교회의 형편을 정부에도 소통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봅니다. 코로나19 가운데 15주년을 맞지만 위축되지 말고 위기를 기회로 삼아 오직 복음으로 섬기고 연합하는 사훈을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또 30주년에는 어떤 모습일까 기대하며, 이 시간에도 경남기독신문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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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7
  • 바이블큐티[황권철 목사] 전도에 불을 붙이라
    교회는 전도함으로 존재한다 호주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소녀가 골수염으로 두 다리를 자르게 되었는데 병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손으로 옮겨져 두 손까지 자르게 되었다. 겨우 생명은 건졌으나 죽은 사람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두 팔과 두 다리를 잃어 몸통만 남게 된 그는 남의 도움이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죽고 싶으나 죽을 수도 없었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비참한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 소녀가 복음을 받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후 새로운 생명력이 움트기 시작했다. 생명이 있는 동안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전도편지를 쓰기로 결심했다. 그 날부터 그녀는 팔뚝에 연필을 매어 글쓰기를 연습했다. 피나는 연습 끝에 누워서 편지 쓰는 법을 배웠다. 그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시작으로 감사편지를 쓰게 되었다. 교회에 출석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예배에 참석하도록 복음편지를 썼다. 온 몸을 다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쓴 편지에 감동받은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마가복음 6장을 함께 읽고 묵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본문은 주님이 하신 갈릴리갈릴리 전도사역을 통해서 사명자의 전도훈련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특별히 본문은 다양한 삶의 환경에서 전도자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고향에서 선지자의 사명 예수님이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에 갔다. 이전에 자신을 잡아가려 하던 자들이 이젠 많이 변한 것 같다. 아마 버린 자식으로 체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때 주님을 따랐던 열두 제자들도 동행했다. 어찌 보면 이들은 패거리 건달과 비슷했다. 이들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바로 그곳에는 그의 친동생들과 나사렛 주변 사람들이 와 있어 그의 가르침과 권능을 보고 심히 놀랐다. 그때 그 동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바로 목수 집안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 동생들이 지금 우리와 함께 있는데 어디서 저런 권능을 행하느냐고 했다. 그때 주님이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선지자가 고향과 친척과 자기 집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왜 선지자가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가? 첫째, 혈통적인 뿌리 때문이다. 고향이란 핏줄로 얽혀진 공동체이다. 나의 핏줄이고 집안이고 친척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선지자를 나와 동일시함으로 존경심이 사라진다. 그래서 주님은 구원이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둘째,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전통이 강하게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강하다. 변화를 통해서 그 동안 쌓아 놓은 기득권을 상실하기 때문에 수하에 어리고 젊은 자를 선지자로 모신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다. 셋째, 유대의 율법적인 전통 때문이다. 유대 사회에서 율법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일은 서기관이나 율법학자들의 몫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예수가 성전에서 율법을 가르치는데 그 권능이 서기관들과 비교할 수 없으니 주님을 더욱 시기했다. 그래서 주님은 그곳을 떠나 갈릴리 여러 촌으로 두루 다니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기억할 사실이 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가정의 복음화가 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에게 가장 큰 선물로 주신 것이 가정 구원의 사명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세상을 향한 전도의 사명 주님은 제자들을 불러서 둘씩 둘씩 전도하러 보냈다. 먼저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들린 자를 내어 쫓는 권세를 주셨다. 우리는 영혼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복음을 들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 시대에도 그러하지만 주님이 오셨던 그 시대에는 특별히 더러운 귀신 들린 자들이 너무 많았다. 메시야가 직접 이 땅에 오셨으니 사단 권세가 발악했다. 그래서 주님은 가는 곳마다 귀신 들린 자들을 온전케 하셨다. 그러면서 주님은 전도자가 금해야 할 몇 가지를 당부했다. 양식과 돈, 그리고 두벌 옷이다. 이것은 나그네에게 의식주의 대용품으로 여행자로서 반드시 지참해야 할 최소한의 생활필수품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금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도자는 이미 주님께 부름 받은 자로서 소속과 신분이 다른 자이다. 하나님은 구약에 레위 지파에게 땅의 기업을 주지 않았다. 군사로 부름을 받은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적절히 공급해 주신다. 바울은 전도 여행을 통해서 수 없이 많은 이 같은 사례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면 전도자가 명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하여는 마태가 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 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첫째, 성에서 복음의 합당한 자를 찾는 일이다. 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지만 충성된 사명자가 있다. 전도자는 충성된 청지기를 먼저 찾아야 한다. 둘째, 어느 집이나 성으로 들어가면서 먼저 평안을 빌라. 그들이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면 은혜를 입어서 다시 베풀 것이요 거절하면 그 평안이 자신에게로 돌아와 성령의 도우시는 위로를 받게 된다. 셋째, 거절할 때는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라. 그 성이나 집이 복음을 받지 않으면 그 곳을 떠날 때 발에 먼지를 떨어버려 심판 때에 증거를 삼으라고 했다. 주님은 전도자가 금해야 할 몇 가지를 당부했다. 양식과 돈, 그리고 두벌 옷이다. 이것은 나그네에게 의식주의 대용품으로 여행자로서 반드시 지참해야 할 최소한의 생활필수품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금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도자는 이미 주님께 부름 받은 자로서 소속과 신분이 다른 자이다. 하나님은 구약에 레위 지파에게 땅의 기업을 주지 않았다. 군사로 부름을 받은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적절히 공급해 주신다. 바울은 전도 여행을 통해서 수 없이 많은 이 같은 사례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면 전도자가 명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하여는 마태가 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마10:11-14) 첫째, 성에서 복음의 합당한 자를 찾는 일이다. 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지만 충성된 사명자가 있다. 전도자는 충성된 청지기를 먼저 찾아야 한다. 둘째, 어느 집이나 성으로 들어가면서 먼저 평안을 빌라. 그들이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면 은혜를 입어서 다시 베풀 것이요 거절하면 그 평안이 자신에게로 돌아와 성령의 도우시는 위로를 받게 된다. 셋째, 거절할 때는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라. 그 성이나 집이 복음을 받지 않으면 그 곳을 떠날 때 발에 먼지를 떨어버려 심판 때에 증거를 삼으라고 했다. 악한 세력 앞에서 순교의 사명 주님이 갈릴리 각 지역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며 능력을 행하시니 헤롯 왕가에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서 왔다고 했다. 이 사실이 헤롯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래서 헤롯은 필요 이상의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헤롯이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이것이 범죄한 죄인에게 고발하는 선한 양심의 소리이다. 세례 요한은 비록 짧게 살고 비참한 죽음을 죽었으나 가장 값지고 고귀한 삶을 살았다. 우리는 순교자 세례 요한을 통해서 전도자의 사명을 배우게 된다. 첫째, 그는 광야의 소리로 살았다. 그는 당시 세속적으로 누릴 수 있는 아주 좋은 가문에 태어나 출세할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을 타고났다. 그러나 그는 지명예루살렘예루살렘 성과 성전과 율법적인 권위를 버리고 광야의 소리로 복음을 위해 이슬로 사라졌다. 둘째,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다. 광야는 도시와 같이 길이 있는 곳이 아니다. 누가 만들기 전에는 걸어갈 수 없는 너무도 불편한 곳이다. 그는 주님을 위하여 친히 이 길을 닦았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헤롯 왕들은 주님의 길을 막는 세력들이다. 이런 자들과 싸워서 주님의 길을 평탄케 하셨다. 셋째, 그는 주님만이 흥하기를 소원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 한 마디가 세례 요한의 신앙과 생활의 고백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사명자로 세례 요한의 고백을 배워서 우리도 이런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양 무리를 위한 긍휼의 사명 먼저 제자들은 전도의 현장에서 돌아와 주님께 사역의 보고를 한다. 보고를 받고 주님은 얼마간 쉼을 얻기 위해서 한적한 곳으로 가게 했다. 그런데 무리들이 먼저 알고 모든 고을에서 걸어서 앞서 가셨다. 주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오병이어로 장정만 오천 명을 먹였다. 이 사건은 너무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복음서 기자가 한 분도 빠트림이 없이 다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영적 비밀한 계시가 무엇인가? 이 사건이 구원사역에서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첫째, 무리를 불쌍히 여기는 목자의 마음이다. 주님은 이들의 영적 목마름을 보셨다.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들이라고 했다. 헤롯이나 가이사 황제나 당시 대제사장들은 그들의 진정한 목자가 아니다. 그들은 양 무리의 피를 빨아먹는 이리와 같은 자들이다. 주님은 그들의 목자로 오셔서 그들만이 먹을 수 있는 비유로 천국의 비밀을 말씀해 주셨다. 둘째, 오병이어의 헌신이다. 이를 주님에게로 가져온 자는 어른도 아닌 어린 아이였다.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질병에서 치유함을 받았으나 정작 주님이 요구하실 때 헌신하는 무리는 없었다. 이 소년이 바친 오병이어는 그가 받은 은혜일뿐 아니라 그의 신앙고백이었다. 자신의 손에서는 오병이어이지만 주님의 손에서는 200데나리온 보다 더 풍성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셋째, 온전한 순종이다. 때가 저물고 빈들이라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나가면 반드시 기적은 일어난다. 오병이어를 주님에게 가져간 제자는 계산에 능한 빌립이 아니라 어리석게 보이는 안드레였다. 사역자의 제일가는 사명은 온전한 순종이다. 마지막 넷째, 다 배불리 먹이심이다. 주님이 베푼 잔치에는 모자람이 없다. 연회장에 준비된 가나 혼인잔치에는 포도주가 떨어졌으나 주님이 계신 곳에는 넉넉함이 있다. 모든 무리가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작이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셨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바구니에 ‘차게’거두었으며 라고 하심은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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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4
  • 마음을 여는 시 [신광열 목사] 걱정
    사람이 없어 걱정이다 강 같은 어머니가 없고 산 같은 아버지도 없다 길 같은 선생님도 별 같은 지도자도 흙 같은 목회자가 없어 참으로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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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음을 여는 시
    2021-03-24
  • [김성수 총장] 오늘도 그분의 임재하심 안에서…
    김성수 목사(전 고신대학교 총장,현 미국 에반겔리아 대학교 총장) ‘세계관’(worldview)이란 문자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세계관의 관건은 어떤 관점에서 이 세상을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을 올바로 구분하고 올바로 대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세상과의 관계를 올바로 알지 못하면 이 세상을 올바로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비교할 다른 창조주가 없는 오직 한 분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느9:6).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아무것도 없는 상태 즉, ‘무에서’(ex. nihilo)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이미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태초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창조관의 특징입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는 많은 창조 설화들이 있었습니다. 헬라의 철학자인 플라톤(Plato)도 ‘데미우르고스’(Demiourgos)라는 창조의 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데미우르고스’는 없는 것으로부터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신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바꾸는 신을 말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우주의 창조신은 무질서(chaos, 혼돈)로 해체되는 성형을 지닌 물질을 원형인 이데아에 맞춰서 질서(cosmos)를 지닌 존재자로 만들어 내는 것을 창조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하나님도 이미 존재했던 어떤 영원한 질료를 원료로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이러한 이단들에 대항해야 했습니다. 이교적인 신화와 사상에 영향을 받아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는 이 선언은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 2절의 말씀 즉,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는 표현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혼돈’이라는 의미 즉, ‘어떤 사물이나 생각들이 뒤엉켜 있는 무질서의 상태’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질서한 혼돈의 상태’로부터 질서 있는 우주(cosmos)를 만들어 내는 분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에서 질서를 만드시는 분이며,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무질서한 혼돈 상태를 정돈하여 질서 있는 상태로 만들어 주신다고 힘주어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너무 피상적인 해석이며 잘못된 적용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그 창조된 하늘과 땅의 상태가 혼돈하고 무질서하며, 아무런 의미가 없이 공허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혼돈과 무질서와 무의미를 창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질서의 하나님입니다. 창세기 1:1-2절의 말씀은 지상의 질서를 향한 첫 번째 단계를 묘사한 것입니다. ‘혼돈하다’는 것은 아직 ‘모양이 없다’(formless) 또는 ‘모양이 주어지지 않았다’(unformed)는 뜻이지 ‘모양이 왜곡되었다’(deformed)는 뜻이 아닙니다. 비유하건데 그것은 앞으로 더 구체적인 세부 사항을 채워 넣고 색상을 칠해야 할 화가의 스케치와도 같은 것입니다. 또 다른 비유를 든다면 골조 공사만 끝나고 마무리 공사와 내장 공사를 기다리고 있는 신축 건물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 11:3)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지어졌다”로 번역된 단어는 다른 곳에서 진흙 덩어리로 토기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의 행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모양이 아직 주어지지 않은 땅으로 장인의 걸작을 빚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는 처음부터 혼돈이나 무질서가 아니라 질서와 의미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자신이 창조하신 우주 만물을 질서 있게 보존하며 통치하고 계십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을 구분한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드신 세계와 언제나 저 멀리 동떨어진 곳에 계시면 피조물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고 이 세상이 그냥 자동으로 굴러가도록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이신론자들(deists)들은 시계를 만든 후에 그 시계가 감아 놓은 태엽에 따라 돌아가도록 버려두고 잠자고 있는 시계공 할아버지처럼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이신론의 신관은 창조 세계가 존속하는데 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이 필요 없게끔 하나님이 창조 세계 속에 ‘자연법’을 내장해 놓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붙들고 계시며, 세상에는 그분의 임재와 영광과 능력과 계시가 충만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과 그 안의 만물을 창조하셨고, 모든 인간에게 생명과 호흡과 그 밖의 모든 것을 주시고, 역사를 주관하고 다스리시며, 모든 나라를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그러한 활동을 하심은 만백성이 그분을 구하고, 그분께 손을 내밀고 그분을 찾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에게 가까우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8). 세상이 하나님의 임재로 흠뻑 젖어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성경적 세계관의 한 기초석입니다.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의 표현대로 하나님은 워낙 깊이 창조 세계와 관계하시고 그 안에 임재하시고 그것을 섭리하시고 감화하시고 그 속에 영향을 미치시므로 그분을 조금이라도 묵상하지 않고는 창조 세계를 제대로 묵상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주에 임재하신다면 세상은 그분의 영광과 위엄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 하나님의 창조 세계 속에서 그분의 지혜와 솜씨를 바라보면서 그분의 임재하심 안에서 살아가는 진정한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영위해 가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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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1-03-24
  • [오성한 목사] 당신은 전도자다
    당신은 전도자임을 발견해야 한다. 당신이 전도자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이다. 전도자인 것을 믿지 못하는데 전도자로 살 수 없다. 소개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는 전도자입니다.”라고 소개할 수 있을 정도로 전도자라는 의식 속에 잠겨야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아는 것은 그런 삶이 나오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예수 믿은 자가 이 땅을 사는 이유는 유일하다. 전도하기 위해 이 땅을 사는 것이다. 어디를 가든지 전도자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전도를 많이 해야 전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태복음 4:19)라고 하셨다. 우리는 말씀에 기록한 대로 나는 보고 믿어야 한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사람 낚는 어부다. 임마누엘을 인정하며 복음의 감격으로 열심히 숨 쉬고 살기만 하면 전도하는 것임을 알자. 요셉을 보라. 요셉은 이집트로 혼자 팔려갔다. 우울증에 걸릴 조건은 충분했다. 그러나 그는 임마누엘의 기쁨이 있었다. 모여서 예배를 하거나 함께 찬양을 할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지만, 임마누엘을 만끽하며, 열심히 살았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자체가 전도자의 삶이다. 성령 충만의 임마누엘의 사람은 요셉에게 하나님과 함께함을 보았던 사람들처럼 세상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임을 보게 될 것이다. 전도는 내가 전도자임을 알 때 삶이 재미있고 행복할 것이다. 다시 한번, 기억하라. 내가 노력해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된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었더니, 주님께서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셨다. 그래서 당신은 전도자다. 전도자임을 기도로 부르짖고 주장하며 전도자라고 말하며 이 땅을 사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시골교회 담임으로 갔다. 당시 나는 성경 읽기와 기도로 불이 붙어 있었다. 예배당 바로 옆집에 인사도 드리고, 전도하러 갔다. 옆집 아저씨는 교회 욕을 하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시끄럽다는 둥, 여름에 문을 못 연다는 둥,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며 나를 공격하는데 전도하러 갔던 나는 언어장애인 되어 버렸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하면서 전도해야 할지 몰라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쫓겨나다시피 돌아왔다. 너무나도 비참했다. 전도할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전도 못 하는 장애인 같아 보였다. “주님, 저는 전도 못 하는 영적 장애인입니다.”라고 부르짖어 기도하며, 전도 훈련이라도 시켜달라고 답답한 마음으로 기도한 일이 있다. 전도할 줄 아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전도 현장에서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교회 한 번 와 보세요.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을 하고 나서는 더 할 말이 없었고, 상대방의 공격적인 말에 정신마저 몽롱해졌다. 상대방의 강한 어조에 멍해진 것이다. 넋 놓고 돌아와서는 주님 앞에 울기 시작했다. “주님 저는 전도할 줄 아는 줄 알았는데, 전도할 줄 모르는 영적 불구입니다.” “주님, 저를 전도 훈련 좀 시켜주세요.”라고 통곡을 했던 일이 있다. 돌이켜 보니 그때는 전도자라고 생각하고 살지 못했다. 당시 성령의 만지심이 있고 난 뒤 3년을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만 읽는다고 정신이 없었던 기간이었으니 마음만 뜨거웠던 것 같다. 전도 훈련받을 곳을 찾기 시작했다. C.C.C에서 교역자를 대상으로 NLTC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너무 반가웠다. 처음 받아보는 전도 훈련이었다. 사영리를 철자 한자 안 틀리게 암송하며, 훈련을 받고 현장을 나갔다. 훈련을 받는 내내 마음에 올라오는 감격이 있어 마음으로 울면서 전도 훈련을 받았던 것 같다. “주님, 신학교에 전도 훈련이 없습니다. 이런 전도 훈련이 신학교에도 들어가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수없이 했던 것이 기억난다. 마음에 흐르는 눈물은 다른 사람이 볼 수는 없었지만, 나에겐 감동의 시간이었다. 그 이후 많은 전도 훈련을 받았다. 수천 명에게 전도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일 천명 이상에게 예수님을 영접시켜, 하나님의 자녀로 살도록 도와줄 수 있었는데 너무 감사한 일이다. 나는 오늘도 전도자임을 알고 산다. 기회만 있으면 전도자임을 믿기에 전도하며 산다. 우리 교회 안에도 여러 사람이 나를 통해 예수를 믿게 된 분들이 있다. 그분들을 뵐 때마다 감사한 간증 거리가 된다. 당신이 전도 훈련을 받지 못했어도 당신은 전도자다. 주님께서 전도자로 만드셨다. 전도자임을 믿어라. 철저하게 전도자임을 인정하라. 전도자임을 믿는 것이 전도의 출발이다. 손을 뻗어 전도자임을 취하라. 천국은 손을 뻗어 취하는 자의 것이다. 또 전도 훈련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기회를 내어 전도 훈련도 받을 수 있으면 받아보라. 도움이 될 수 있다. 가장 좋은 전도 훈련은 직접 전도하는 것이다. 전도엔 왕도가 없다. 간절한 마음만 있으면 성령께서 전도를 도와주시고, 천사들도 도와준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전도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전도자임을 알고 전도하다 보면 나만의 전도 방법이 생김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 전도자다. 전도자임을 알고, 믿고, 깨닫고, 살면 억지로 전도하지 않는다 해도 전도의 기회가 온다. 준비된 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내게 좌우명같이 여기는 말이 있다. “기회는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지나간다. 기회는 준비된 자만 볼 수 있고, 잡을 수 있다.”라는 말이다. 당신도 전도자임을 알고, 마음으로 준비하고, 훈련의 기회를 만들어 준비하라. 전도자임을 알고 기도로 준비하고 있으면, 전도의 기회는 반드시 온다. 또 전도할 때 성령께서 도우실 것이다. 전도자라는 생각을 잊지 말라. 당신을 통해 전도할 때 역사하실 성령님을 기대하라. 전도하는 것에 겁을 내지 말라. 전도는 내가 아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가장 좋다. 내가 아는 사람, 내가 만난 사람에게 예수 믿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가지고, 기도해 보라. 나는 일대일 전도의 기회를 제일 좋아한다. 제일 열매가 좋기 때문이다. 전도는 이러한 성경에서 말하는 분명한 믿음, 당신이 전도자라는 믿음을 가질 때 저절로 전도하는 당신을 발견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
    2021-03-24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축사] 경남기독신문 15주년을 축하합니다.[이상택 목사]
    경남기독신문 15주년을 축하합니다. 창간 후 지난 15년의 세월, 쉼 없이 달려온 경남기독신문 직원들에게 박수와 격려와 위로를 보냅니다. 또한 그 노고가 얼마나 귀한지 짐작하기에, 새삼 감사함을 표합니다. 그동안 복음의 황무지와 같이 척박한 경남지역에서 경남지역 최초의 기독신문을 창간하고 지난 15년 동안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제 지역을 넘어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의 새로운 시대를 향해 복음 신문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신문 일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를 정화시키는 맑은 샘물과 같은, 꽃향기와 같은 신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계속해서 경남 복음화와 교회를 위해,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가 되어 주시고, 정확하고 신속한 교계 뉴스를 전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이슈, 교육, 문화, 가슴 따뜻한 사랑과 나눔의 소식을 제공하면서 지역 사회를 더욱 밝게 만들어가는 신문이 되어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좌·우로 치우침 없이 경남 복음화와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언론의 역할을 잘 감당해 주시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기사를 써 주시길 당부합니다. 종이 매체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현실에서 꿋꿋하게 경남 기독교의 사랑을 대변해 주는 경남기독신문이 되어 주길 바라며 바라기는 교계 미담의 발굴로 세상을 밝게 만드는 통로가 되기를 부탁합니다. 너무 빠르게 지나가는 이 시대에 스마트폰과 연동하여 교회와 성도들에게 신속한 교계의 정보를 손으로 볼 수 있도록 어플리케이션의 많은 홍보가 있었으면 합니다. 또 SNS 등으로 빠른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 이 때에 스마트폰 교육을 경남기독신문이 실시하여 독자들과 함께 정보를 공유하고 교계의 정보를 쉽게 그리고 신속 정확하게 알아도록 도와주는 경남기독신문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기독 청년들이 읽을만한 소식이 적어 아쉬움으로 남는데, 교회 안에서 청년들이 경남기독신문 기사로 소통하는 일들이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경남기독신문과 직원 여러분, 독자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늘 가득하시기를 기도하며, 창간 15주년을 지나 새 시대를 맞는 경남기독신문이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더 높이 비상하길 기도합니다.
    • 오피니언
    • 기타
    2021-04-07
  • [축사] 경남기독신문 15주년을 축하합니다. [임명곤 장로]
    경남기독신문 창간 15주년을 축하하며! 여러분들의 그동안의 노고에 먼저 격려와 감사를 드립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이제까지 지나온 것 하나님의 은혜라.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하면서 겸손히 문서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기를 바라면서 앞으로의 30주년, 50주년, 100년을 내다보면서 변화에 잘 적응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바라시고 기뻐하시는 좋은 신문이 계속 발간되기를 기도합니다. 15년 전 어느 날 이종승 목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마산 성은교회에서 만나자고 해서 갔더니 경남기독신문을 법인으로 설립하는 이사회에 동참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목사님의 부탁이라 힘은 없지만 장로님 두 분과 함께 이사로 참여한 후 이제까지 신문사에 관심과 기도를 해 오고 있은지가 벌써 15년이 되었습니다. 시간은 참으로 빨리도 지나갔습니다. 사훈을 ‘복음. 섬김. 연합’으로 정한 신문사가 우여곡절의 아픔을 겪어 오면서 오늘을 맞은지라 경남기독신문의 감회가 더욱 새롭습니다. 코로나19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에 살아가면서 우리의 존재의 나약함을 실감하면서 겸손히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기대해 봅니다. 이제는 신문이 전국에 배포됨으로 창원과 경남의 교계소식뿐만 아니라 지역의 아름다운 소식도 실어 주면 좋겠습니다. 코로나19와 같은 전시상태와 같은 이때에 기독언론으로서 교회의 형편을 정부에도 소통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봅니다. 코로나19 가운데 15주년을 맞지만 위축되지 말고 위기를 기회로 삼아 오직 복음으로 섬기고 연합하는 사훈을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또 30주년에는 어떤 모습일까 기대하며, 이 시간에도 경남기독신문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겠습니다.
    • 오피니언
    • 기타
    2021-04-07
  • 바이블큐티[황권철 목사] 전도에 불을 붙이라
    교회는 전도함으로 존재한다 호주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소녀가 골수염으로 두 다리를 자르게 되었는데 병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손으로 옮겨져 두 손까지 자르게 되었다. 겨우 생명은 건졌으나 죽은 사람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두 팔과 두 다리를 잃어 몸통만 남게 된 그는 남의 도움이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죽고 싶으나 죽을 수도 없었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비참한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 소녀가 복음을 받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후 새로운 생명력이 움트기 시작했다. 생명이 있는 동안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전도편지를 쓰기로 결심했다. 그 날부터 그녀는 팔뚝에 연필을 매어 글쓰기를 연습했다. 피나는 연습 끝에 누워서 편지 쓰는 법을 배웠다. 그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시작으로 감사편지를 쓰게 되었다. 교회에 출석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예배에 참석하도록 복음편지를 썼다. 온 몸을 다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쓴 편지에 감동받은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마가복음 6장을 함께 읽고 묵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본문은 주님이 하신 갈릴리갈릴리 전도사역을 통해서 사명자의 전도훈련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특별히 본문은 다양한 삶의 환경에서 전도자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고향에서 선지자의 사명 예수님이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에 갔다. 이전에 자신을 잡아가려 하던 자들이 이젠 많이 변한 것 같다. 아마 버린 자식으로 체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때 주님을 따랐던 열두 제자들도 동행했다. 어찌 보면 이들은 패거리 건달과 비슷했다. 이들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바로 그곳에는 그의 친동생들과 나사렛 주변 사람들이 와 있어 그의 가르침과 권능을 보고 심히 놀랐다. 그때 그 동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바로 목수 집안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 동생들이 지금 우리와 함께 있는데 어디서 저런 권능을 행하느냐고 했다. 그때 주님이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선지자가 고향과 친척과 자기 집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왜 선지자가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가? 첫째, 혈통적인 뿌리 때문이다. 고향이란 핏줄로 얽혀진 공동체이다. 나의 핏줄이고 집안이고 친척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선지자를 나와 동일시함으로 존경심이 사라진다. 그래서 주님은 구원이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둘째,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전통이 강하게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강하다. 변화를 통해서 그 동안 쌓아 놓은 기득권을 상실하기 때문에 수하에 어리고 젊은 자를 선지자로 모신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다. 셋째, 유대의 율법적인 전통 때문이다. 유대 사회에서 율법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일은 서기관이나 율법학자들의 몫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예수가 성전에서 율법을 가르치는데 그 권능이 서기관들과 비교할 수 없으니 주님을 더욱 시기했다. 그래서 주님은 그곳을 떠나 갈릴리 여러 촌으로 두루 다니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기억할 사실이 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가정의 복음화가 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에게 가장 큰 선물로 주신 것이 가정 구원의 사명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세상을 향한 전도의 사명 주님은 제자들을 불러서 둘씩 둘씩 전도하러 보냈다. 먼저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들린 자를 내어 쫓는 권세를 주셨다. 우리는 영혼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복음을 들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 시대에도 그러하지만 주님이 오셨던 그 시대에는 특별히 더러운 귀신 들린 자들이 너무 많았다. 메시야가 직접 이 땅에 오셨으니 사단 권세가 발악했다. 그래서 주님은 가는 곳마다 귀신 들린 자들을 온전케 하셨다. 그러면서 주님은 전도자가 금해야 할 몇 가지를 당부했다. 양식과 돈, 그리고 두벌 옷이다. 이것은 나그네에게 의식주의 대용품으로 여행자로서 반드시 지참해야 할 최소한의 생활필수품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금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도자는 이미 주님께 부름 받은 자로서 소속과 신분이 다른 자이다. 하나님은 구약에 레위 지파에게 땅의 기업을 주지 않았다. 군사로 부름을 받은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적절히 공급해 주신다. 바울은 전도 여행을 통해서 수 없이 많은 이 같은 사례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면 전도자가 명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하여는 마태가 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 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첫째, 성에서 복음의 합당한 자를 찾는 일이다. 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지만 충성된 사명자가 있다. 전도자는 충성된 청지기를 먼저 찾아야 한다. 둘째, 어느 집이나 성으로 들어가면서 먼저 평안을 빌라. 그들이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면 은혜를 입어서 다시 베풀 것이요 거절하면 그 평안이 자신에게로 돌아와 성령의 도우시는 위로를 받게 된다. 셋째, 거절할 때는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라. 그 성이나 집이 복음을 받지 않으면 그 곳을 떠날 때 발에 먼지를 떨어버려 심판 때에 증거를 삼으라고 했다. 주님은 전도자가 금해야 할 몇 가지를 당부했다. 양식과 돈, 그리고 두벌 옷이다. 이것은 나그네에게 의식주의 대용품으로 여행자로서 반드시 지참해야 할 최소한의 생활필수품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금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도자는 이미 주님께 부름 받은 자로서 소속과 신분이 다른 자이다. 하나님은 구약에 레위 지파에게 땅의 기업을 주지 않았다. 군사로 부름을 받은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적절히 공급해 주신다. 바울은 전도 여행을 통해서 수 없이 많은 이 같은 사례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면 전도자가 명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하여는 마태가 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마10:11-14) 첫째, 성에서 복음의 합당한 자를 찾는 일이다. 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지만 충성된 사명자가 있다. 전도자는 충성된 청지기를 먼저 찾아야 한다. 둘째, 어느 집이나 성으로 들어가면서 먼저 평안을 빌라. 그들이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면 은혜를 입어서 다시 베풀 것이요 거절하면 그 평안이 자신에게로 돌아와 성령의 도우시는 위로를 받게 된다. 셋째, 거절할 때는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라. 그 성이나 집이 복음을 받지 않으면 그 곳을 떠날 때 발에 먼지를 떨어버려 심판 때에 증거를 삼으라고 했다. 악한 세력 앞에서 순교의 사명 주님이 갈릴리 각 지역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며 능력을 행하시니 헤롯 왕가에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서 왔다고 했다. 이 사실이 헤롯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래서 헤롯은 필요 이상의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헤롯이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이것이 범죄한 죄인에게 고발하는 선한 양심의 소리이다. 세례 요한은 비록 짧게 살고 비참한 죽음을 죽었으나 가장 값지고 고귀한 삶을 살았다. 우리는 순교자 세례 요한을 통해서 전도자의 사명을 배우게 된다. 첫째, 그는 광야의 소리로 살았다. 그는 당시 세속적으로 누릴 수 있는 아주 좋은 가문에 태어나 출세할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을 타고났다. 그러나 그는 지명예루살렘예루살렘 성과 성전과 율법적인 권위를 버리고 광야의 소리로 복음을 위해 이슬로 사라졌다. 둘째,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다. 광야는 도시와 같이 길이 있는 곳이 아니다. 누가 만들기 전에는 걸어갈 수 없는 너무도 불편한 곳이다. 그는 주님을 위하여 친히 이 길을 닦았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헤롯 왕들은 주님의 길을 막는 세력들이다. 이런 자들과 싸워서 주님의 길을 평탄케 하셨다. 셋째, 그는 주님만이 흥하기를 소원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 한 마디가 세례 요한의 신앙과 생활의 고백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사명자로 세례 요한의 고백을 배워서 우리도 이런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양 무리를 위한 긍휼의 사명 먼저 제자들은 전도의 현장에서 돌아와 주님께 사역의 보고를 한다. 보고를 받고 주님은 얼마간 쉼을 얻기 위해서 한적한 곳으로 가게 했다. 그런데 무리들이 먼저 알고 모든 고을에서 걸어서 앞서 가셨다. 주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오병이어로 장정만 오천 명을 먹였다. 이 사건은 너무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복음서 기자가 한 분도 빠트림이 없이 다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영적 비밀한 계시가 무엇인가? 이 사건이 구원사역에서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첫째, 무리를 불쌍히 여기는 목자의 마음이다. 주님은 이들의 영적 목마름을 보셨다.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들이라고 했다. 헤롯이나 가이사 황제나 당시 대제사장들은 그들의 진정한 목자가 아니다. 그들은 양 무리의 피를 빨아먹는 이리와 같은 자들이다. 주님은 그들의 목자로 오셔서 그들만이 먹을 수 있는 비유로 천국의 비밀을 말씀해 주셨다. 둘째, 오병이어의 헌신이다. 이를 주님에게로 가져온 자는 어른도 아닌 어린 아이였다.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질병에서 치유함을 받았으나 정작 주님이 요구하실 때 헌신하는 무리는 없었다. 이 소년이 바친 오병이어는 그가 받은 은혜일뿐 아니라 그의 신앙고백이었다. 자신의 손에서는 오병이어이지만 주님의 손에서는 200데나리온 보다 더 풍성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셋째, 온전한 순종이다. 때가 저물고 빈들이라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나가면 반드시 기적은 일어난다. 오병이어를 주님에게 가져간 제자는 계산에 능한 빌립이 아니라 어리석게 보이는 안드레였다. 사역자의 제일가는 사명은 온전한 순종이다. 마지막 넷째, 다 배불리 먹이심이다. 주님이 베푼 잔치에는 모자람이 없다. 연회장에 준비된 가나 혼인잔치에는 포도주가 떨어졌으나 주님이 계신 곳에는 넉넉함이 있다. 모든 무리가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작이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셨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바구니에 ‘차게’거두었으며 라고 하심은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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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경
    2021-03-24
  • 마음을 여는 시 [신광열 목사] 걱정
    사람이 없어 걱정이다 강 같은 어머니가 없고 산 같은 아버지도 없다 길 같은 선생님도 별 같은 지도자도 흙 같은 목회자가 없어 참으로 걱정이다
    • 오피니언
    • 기고
    • 마음을 여는 시
    2021-03-24
  • [김성수 총장] 오늘도 그분의 임재하심 안에서…
    김성수 목사(전 고신대학교 총장,현 미국 에반겔리아 대학교 총장) ‘세계관’(worldview)이란 문자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세계관의 관건은 어떤 관점에서 이 세상을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을 올바로 구분하고 올바로 대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세상과의 관계를 올바로 알지 못하면 이 세상을 올바로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비교할 다른 창조주가 없는 오직 한 분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느9:6).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아무것도 없는 상태 즉, ‘무에서’(ex. nihilo)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이미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태초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창조관의 특징입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는 많은 창조 설화들이 있었습니다. 헬라의 철학자인 플라톤(Plato)도 ‘데미우르고스’(Demiourgos)라는 창조의 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데미우르고스’는 없는 것으로부터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신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바꾸는 신을 말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우주의 창조신은 무질서(chaos, 혼돈)로 해체되는 성형을 지닌 물질을 원형인 이데아에 맞춰서 질서(cosmos)를 지닌 존재자로 만들어 내는 것을 창조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하나님도 이미 존재했던 어떤 영원한 질료를 원료로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이러한 이단들에 대항해야 했습니다. 이교적인 신화와 사상에 영향을 받아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는 이 선언은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 2절의 말씀 즉,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는 표현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혼돈’이라는 의미 즉, ‘어떤 사물이나 생각들이 뒤엉켜 있는 무질서의 상태’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질서한 혼돈의 상태’로부터 질서 있는 우주(cosmos)를 만들어 내는 분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에서 질서를 만드시는 분이며,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무질서한 혼돈 상태를 정돈하여 질서 있는 상태로 만들어 주신다고 힘주어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너무 피상적인 해석이며 잘못된 적용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그 창조된 하늘과 땅의 상태가 혼돈하고 무질서하며, 아무런 의미가 없이 공허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혼돈과 무질서와 무의미를 창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질서의 하나님입니다. 창세기 1:1-2절의 말씀은 지상의 질서를 향한 첫 번째 단계를 묘사한 것입니다. ‘혼돈하다’는 것은 아직 ‘모양이 없다’(formless) 또는 ‘모양이 주어지지 않았다’(unformed)는 뜻이지 ‘모양이 왜곡되었다’(deformed)는 뜻이 아닙니다. 비유하건데 그것은 앞으로 더 구체적인 세부 사항을 채워 넣고 색상을 칠해야 할 화가의 스케치와도 같은 것입니다. 또 다른 비유를 든다면 골조 공사만 끝나고 마무리 공사와 내장 공사를 기다리고 있는 신축 건물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 11:3)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지어졌다”로 번역된 단어는 다른 곳에서 진흙 덩어리로 토기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의 행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모양이 아직 주어지지 않은 땅으로 장인의 걸작을 빚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는 처음부터 혼돈이나 무질서가 아니라 질서와 의미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자신이 창조하신 우주 만물을 질서 있게 보존하며 통치하고 계십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을 구분한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드신 세계와 언제나 저 멀리 동떨어진 곳에 계시면 피조물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고 이 세상이 그냥 자동으로 굴러가도록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이신론자들(deists)들은 시계를 만든 후에 그 시계가 감아 놓은 태엽에 따라 돌아가도록 버려두고 잠자고 있는 시계공 할아버지처럼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이신론의 신관은 창조 세계가 존속하는데 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이 필요 없게끔 하나님이 창조 세계 속에 ‘자연법’을 내장해 놓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붙들고 계시며, 세상에는 그분의 임재와 영광과 능력과 계시가 충만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과 그 안의 만물을 창조하셨고, 모든 인간에게 생명과 호흡과 그 밖의 모든 것을 주시고, 역사를 주관하고 다스리시며, 모든 나라를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그러한 활동을 하심은 만백성이 그분을 구하고, 그분께 손을 내밀고 그분을 찾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에게 가까우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8). 세상이 하나님의 임재로 흠뻑 젖어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성경적 세계관의 한 기초석입니다.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의 표현대로 하나님은 워낙 깊이 창조 세계와 관계하시고 그 안에 임재하시고 그것을 섭리하시고 감화하시고 그 속에 영향을 미치시므로 그분을 조금이라도 묵상하지 않고는 창조 세계를 제대로 묵상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주에 임재하신다면 세상은 그분의 영광과 위엄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 하나님의 창조 세계 속에서 그분의 지혜와 솜씨를 바라보면서 그분의 임재하심 안에서 살아가는 진정한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영위해 가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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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4
  • [오성한 목사] 당신은 전도자다
    당신은 전도자임을 발견해야 한다. 당신이 전도자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이다. 전도자인 것을 믿지 못하는데 전도자로 살 수 없다. 소개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는 전도자입니다.”라고 소개할 수 있을 정도로 전도자라는 의식 속에 잠겨야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아는 것은 그런 삶이 나오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예수 믿은 자가 이 땅을 사는 이유는 유일하다. 전도하기 위해 이 땅을 사는 것이다. 어디를 가든지 전도자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전도를 많이 해야 전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태복음 4:19)라고 하셨다. 우리는 말씀에 기록한 대로 나는 보고 믿어야 한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사람 낚는 어부다. 임마누엘을 인정하며 복음의 감격으로 열심히 숨 쉬고 살기만 하면 전도하는 것임을 알자. 요셉을 보라. 요셉은 이집트로 혼자 팔려갔다. 우울증에 걸릴 조건은 충분했다. 그러나 그는 임마누엘의 기쁨이 있었다. 모여서 예배를 하거나 함께 찬양을 할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지만, 임마누엘을 만끽하며, 열심히 살았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자체가 전도자의 삶이다. 성령 충만의 임마누엘의 사람은 요셉에게 하나님과 함께함을 보았던 사람들처럼 세상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임을 보게 될 것이다. 전도는 내가 전도자임을 알 때 삶이 재미있고 행복할 것이다. 다시 한번, 기억하라. 내가 노력해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된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었더니, 주님께서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셨다. 그래서 당신은 전도자다. 전도자임을 기도로 부르짖고 주장하며 전도자라고 말하며 이 땅을 사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시골교회 담임으로 갔다. 당시 나는 성경 읽기와 기도로 불이 붙어 있었다. 예배당 바로 옆집에 인사도 드리고, 전도하러 갔다. 옆집 아저씨는 교회 욕을 하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시끄럽다는 둥, 여름에 문을 못 연다는 둥,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며 나를 공격하는데 전도하러 갔던 나는 언어장애인 되어 버렸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하면서 전도해야 할지 몰라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쫓겨나다시피 돌아왔다. 너무나도 비참했다. 전도할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전도 못 하는 장애인 같아 보였다. “주님, 저는 전도 못 하는 영적 장애인입니다.”라고 부르짖어 기도하며, 전도 훈련이라도 시켜달라고 답답한 마음으로 기도한 일이 있다. 전도할 줄 아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전도 현장에서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교회 한 번 와 보세요.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을 하고 나서는 더 할 말이 없었고, 상대방의 공격적인 말에 정신마저 몽롱해졌다. 상대방의 강한 어조에 멍해진 것이다. 넋 놓고 돌아와서는 주님 앞에 울기 시작했다. “주님 저는 전도할 줄 아는 줄 알았는데, 전도할 줄 모르는 영적 불구입니다.” “주님, 저를 전도 훈련 좀 시켜주세요.”라고 통곡을 했던 일이 있다. 돌이켜 보니 그때는 전도자라고 생각하고 살지 못했다. 당시 성령의 만지심이 있고 난 뒤 3년을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만 읽는다고 정신이 없었던 기간이었으니 마음만 뜨거웠던 것 같다. 전도 훈련받을 곳을 찾기 시작했다. C.C.C에서 교역자를 대상으로 NLTC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너무 반가웠다. 처음 받아보는 전도 훈련이었다. 사영리를 철자 한자 안 틀리게 암송하며, 훈련을 받고 현장을 나갔다. 훈련을 받는 내내 마음에 올라오는 감격이 있어 마음으로 울면서 전도 훈련을 받았던 것 같다. “주님, 신학교에 전도 훈련이 없습니다. 이런 전도 훈련이 신학교에도 들어가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수없이 했던 것이 기억난다. 마음에 흐르는 눈물은 다른 사람이 볼 수는 없었지만, 나에겐 감동의 시간이었다. 그 이후 많은 전도 훈련을 받았다. 수천 명에게 전도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일 천명 이상에게 예수님을 영접시켜, 하나님의 자녀로 살도록 도와줄 수 있었는데 너무 감사한 일이다. 나는 오늘도 전도자임을 알고 산다. 기회만 있으면 전도자임을 믿기에 전도하며 산다. 우리 교회 안에도 여러 사람이 나를 통해 예수를 믿게 된 분들이 있다. 그분들을 뵐 때마다 감사한 간증 거리가 된다. 당신이 전도 훈련을 받지 못했어도 당신은 전도자다. 주님께서 전도자로 만드셨다. 전도자임을 믿어라. 철저하게 전도자임을 인정하라. 전도자임을 믿는 것이 전도의 출발이다. 손을 뻗어 전도자임을 취하라. 천국은 손을 뻗어 취하는 자의 것이다. 또 전도 훈련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기회를 내어 전도 훈련도 받을 수 있으면 받아보라. 도움이 될 수 있다. 가장 좋은 전도 훈련은 직접 전도하는 것이다. 전도엔 왕도가 없다. 간절한 마음만 있으면 성령께서 전도를 도와주시고, 천사들도 도와준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전도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전도자임을 알고 전도하다 보면 나만의 전도 방법이 생김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 전도자다. 전도자임을 알고, 믿고, 깨닫고, 살면 억지로 전도하지 않는다 해도 전도의 기회가 온다. 준비된 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내게 좌우명같이 여기는 말이 있다. “기회는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지나간다. 기회는 준비된 자만 볼 수 있고, 잡을 수 있다.”라는 말이다. 당신도 전도자임을 알고, 마음으로 준비하고, 훈련의 기회를 만들어 준비하라. 전도자임을 알고 기도로 준비하고 있으면, 전도의 기회는 반드시 온다. 또 전도할 때 성령께서 도우실 것이다. 전도자라는 생각을 잊지 말라. 당신을 통해 전도할 때 역사하실 성령님을 기대하라. 전도하는 것에 겁을 내지 말라. 전도는 내가 아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가장 좋다. 내가 아는 사람, 내가 만난 사람에게 예수 믿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가지고, 기도해 보라. 나는 일대일 전도의 기회를 제일 좋아한다. 제일 열매가 좋기 때문이다. 전도는 이러한 성경에서 말하는 분명한 믿음, 당신이 전도자라는 믿음을 가질 때 저절로 전도하는 당신을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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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4
  • [조희완 목사] 확신하며 삽시다.(요5:19-29)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에 미국 대표로 참가했던 토비 도슨 선수가 한국에 있는 친 아버지를 찾아서 만났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그는 세살 때 길을 잃어버렸는데 부산의 한 보육원에서 생활을 하다가 미국 콜로라도에서 스키 강사로 일하는 사람의 집으로 입양이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열렸던 동계 올림픽에 미국 대표선수로 참가했다가 동메달을 땄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국에 살고 있는 친 부모를 찾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보도가 나가자 우리나라 전국에서 약 25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자신이 친 아버지라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자기가 친 아버지라고 주장을 했지만 막상 DNA(유전자)검사를 실시하자고 했을 때 선뜻 나서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산에서 시내버스 기사로 일하고 있는 김재수 씨 만큼은 달랐습니다. DNA검사를 하나마나 토비 도슨은 분명히 자기 아들이라고 자신 있게 주장을 했습니다. 그가 확신한 바대로 토비 도슨은 그의 아들임이 입증이 되었고, 서울에서 극적으로 상봉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재수 씨가 토비 도슨을 보고 “저 아이는 틀림없는 내 아들이다”라고 확신한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실 때 “누가 뭐라고 해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확신하실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네가 과연 내 아들인지 아닌지 아주 많이 헷갈린다.”라고 하신다면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 사랑하는 자녀들로 확신하시려면, 먼저 우리에게 몇 가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확신이 있으면 틀림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첫째는,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요5:19-29) 둘째는, 천국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요14:1-3) 셋째는, 응답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요일5:14-15)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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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4
  • 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시]모든 대적을 멸하시는 하나님
    인생의 삶에 우리를 해하려고 하는 자, 원수, 대적자를 만나기도 합니다. 사단 마귀가 우리의 대적자입니다. 다윗의 삶에도 다윗을 해하려고 하는 대적자들이 많았습니다. 모든 대적을 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의 이름 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대상 17:8)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사단과의 영적전쟁입니다. 사단은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활동합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의롭게 살고 믿음으로 사는데도 원수, 대적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를 해하려고 하는 대적과 다투거나 싸우지 않아야 합니다. 서로 다투거나 싸우면 서로 망합니다. 대적 원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대적을 멸하여 다윗이 승리하게 해주셨습니다. 남을 해하려고 하고 대적하는 자의 삶은 악인의 삶이고 악인의 마지막은 멸망이요 심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남을 살리고 남에게 선을 행해야 합니다. 다윗의 대적을 하나님께서 다 처리해 주셨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대적, 사울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정리해 주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적에서 상을 베풀어 주셨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7-21) 우리의 삶에 원수가, 대적들이 있어 우리를 해하고 죽이려고 하지만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대적들을 처리해주시고 해결하여 주십니다. 의인은 일곱 번째 넘어져도 여덟 번째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십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8-10) 믿음으로 살고 의롭게 살려고 했던 요셉도 그의 삶에 대적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대적들을 해결해 주시고 요셉을 높이 세워주셨습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려는 대적들, 하나님께서 멸하여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기도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처리해 주십니다. 대적을 멸하여 주시고 존귀한 자로 세워주십니다. 이기게 해주십니다.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매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대상18:13) 양대식 목사(진주성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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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4
  • [최호숙 목사] 경남기독신문 15주년을 축하합니다.
    할렐루야! 경남기독신문 창간 15주년을 맞게 됨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급변하는 각종 미디어 환경 속에서 문서선교 언론사로서 15년이라는 기간 동안 이어온 것은 결코 사람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돕는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지금까지 인도해 주신 에벤에셀의 하나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현재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기독교 TV방송을 비롯해 유튜브 방송을 통한 다양한 채널과 각 기독교단 신문과 지역 신문들이 있기 때문에 소규모 지역 언론사로써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멀어질 수 있는 상황이지만 존폐 위기를 넘어 건재함을 나타낼 수 있어서 정말 감사할 일입니다. 그동안 이사장님 그리고 국장님 이하 모든 분의 일심단결한 동역의 모습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경남 기독신문이 건재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필자가 경남 기독신문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유는 창립 시 세웠던 목표와 방향성을 잃지 않고 기독교 정신 본질 그대로를 일깨워 주고 겸손히 하나님의 의도를 나타내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는 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언론 매체 이름을 내 달았지만 이단 사상도 많고, 건전치 못하거나 덕을 세우지 못하는 언론 매체들도 많고, 본질을 왜곡시키는 일들도 많고, 편파적인 보도 개인과 교회 단체에 명예를 실추케 하는 일들이 빈번하여 언론의 순기능적 요소보다는 역기능적 요소가 많은 점도 있었는데 우리 경남 기독신문은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여러 현안과 이슈(issue)에 대하여 사실과 진실만을 말하는 정론 언론사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자랑할 만한 일입니다. 기독신문은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편지요 나팔수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껏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사람에게는 유익함만 나타내는 복된 신문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COVID-19로 경제적 위기와 교회들의 신앙침체 심리적 불안 기독교에 대한 비판 등 여러 악조건 속에 신문사 경영이 어려울 수 있겠으나 하나님 마음에 합한 언론사로서 정도를 걸어가면 분명 하나님의 돕는 은혜가 임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앞으로 이 경남기독신문을 통해 지역사회 복음화에 이바지하고, 지역 교회들에게는 힘이 되고 목회자들에게는 소통의 장이 되는 신문사가 되기를 기대하며 축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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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11
  • [조관행 목사] 경남기독신문 15주년을 축하합니다.
    할렐루야! 경남기독신문 15주년을 맞이하여 그간 수고한 이사님들과 사장님과 모든 직원에게 먼저 축하하고 노고를 치하하고 싶습니다. 15주년이 되었다니 나의 기억도 15년 전부터 생각하여 보니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경남기독신문이 시작은 참 미약했지요 그래서 창대케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며 지혜를 모으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15주년이 되었다니 그간 어려움을 기도로 극복하며 노력하여 오늘에 이룬 줄 알기에 축하를 합니다. 요사이는 목사님들이 모이면 교회의 앞날을 걱정하며 말을 잇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예배조차 자유롭게 드리지 못하는 처지이기 때문이요 교회가 세상을 구원할 동역을 잃어 세상이 교회를 잊을까 걱정을 했습니다. 걱정 끝에 그래도 교회는 묵묵히 정도를 걸어야 한다는 말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교회는 본질과 사명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우리가 이제껏 접해보지 못했던 시대가 지속한다고 해도 교회를 교회답게 하기 위하여 목회자는 하나님 편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남기독신문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신문이 독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채우는 데 노력도 해야겠지만 먼저 하나님 앞에서 기독신문도 정체성을 잊지 말고 교회와 가까워야 합니다. 원하는 것은 경남기독신문이 하나님과 경남기독신문을 사랑하는 독자들 앞에서 정체성을 잃지 않고 그리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여 20주년도 30주년도 함께 할 수 있기를 소원하면서 축사를 마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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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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