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Home >  오피니언
-
[독자기고] 지금이 놀러 갈 때 인가? K언론사
K교단 언론사 직원들이 부부 동반으로 이태리로 8박 9일간 놀러갔다는 전언이다. 지금이 한가하게 놀러 갈 때인가? 물론 말은 직원연수로 포장하겠지만. 탄핵정국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이고, 교단 한 쪽에서는 S목사를 징계하라고 주장하고 있고, 다른 한 쪽에서는 지지하고 있는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그 뿐인가? 총회장의 헛발질로 뜬금없이 급작스럽게 이뤄진 모 교단과의 교류로 교단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이 나오는 쏟아져 나오는 상황이다. 언론사 사장이 내년으로 임기가 종료되는 시점이라 선심성 외유라는 얘기가 나온다. 이번 여행을 위해 유력한 교회에 1천 만 원 그리고 여러 명에게 손을 벌려 몇 백 만 원을 스폰 받았다고 한다. 이 언론사는 목사가 사장이 된 후 5년간 1주일에 한번 이상 사장 얼굴이 등장하고있다. 사장얼굴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신문은 기네스북 기록감일 정도다. 또 1면에는 누가 문서선교헌금으로 얼마를 냈다고 부각시키는 면이기도 하다. 사장 임기 내내 1면에 얼굴 내는 재미로 후원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그럼 그 많은 후원금은 어디에 쓰였을까? 시쳇말로 삥 뜯듯 거둔 돈은 세금에는 잡혀져 있는지? 어떻게 기장했을까? 이렇게 거둔 후원금으로 직원들에게 상여금으로 지불했다(실제로 사장이 이 돈을 챙겨가기 위해 직원들 상여금을 주는 형태를 취한것이란)는 얘기가 들릴 뿐이다. 어느 언론사가 후원금 거둬 직원들 상여금을 주는 곳이 있을까? 기사를 써서 구독자를 늘리고 광고 수주하는 땀흘리는 보편적 언론사와는 많이 다른 기형적 형태적이고, 편의적이다. 이게 가능한 교단이다. 세금을 피하기 위해 사장급여 조작(실제로 받는 급여+협동 목사로 받는 돈 축소 의혹 등) 여러 편법을 쓴다는얘기도 들린다. 관할세무서는 뭐하나 이런 곳에 세무조사도 안나가고. 이 언론사가 속해있는 총회는 지난해 총희석상 에서 언론사가 어려우니 헌금해 달라고 총회석상에서 헌금 하게하고, 몽땅 언론사에서 가져갔다. 이 헌금도 현 총회장이 언론사에 전달했다. 그 돈으로 사장은 바로 미국으로 가서 최근 사장의 광고 유용 배임의혹(모 대학 박사과정 입학은 했는데 입학금 영수증 없어 광고로 퉁쳤다는 의혹)을 해결하러 갔다는 소리까지 들린다. 결국 총회는 사장 증거인멸하라고 비행기 티켓팅을 해 준셈인가? 이렇게 쓰는게 헌금 목적으로도 맞는가? 이 교단은 도대체 종잡을 수 없다. 이 교단의 변질은 언론사로부터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매번 총회임원으로 출마예정인 사람에게 다가가 광고청탁이나 후원금 청탁을 한다. 후보는 마지 못해 거액의 후원을 하고, 또는 후보자도 이런 제안을 이용할 속셈으로 광고에 응하거나 광고에 동의한다. 언론사가 나서서 금권선거를 조장하는 셈이다. 말이 좋아 문서선교 헌금이고 후원금이지 그 내역을 들여다 보면 기가 막히다. 그 많은 돈 거둬서 어디다 썼는지 공개해야한다. 그리고 그렇게 불법 모금하는 것 역시 후원금 모금법 위반이다.(현행법에 따르면, 1000만원 이상 기부금품을 모집하려는 경우 모집자의 정보와 모집액·사용계획 등을 행정안전부장관이나 관할 등록청에 신고해야 한다. 신고 없이 기부금을 모집하는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 언론사 사장의 모 대학 박사과정 입학금 공금유용과 후원금 내역 사용처를 밝힐 수 있는 방법은 세무조사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정도로 이 교단은 무감각인가! 왜 이 교단은 언론사에게 꼼짝없이 당하기만 하고 있는데도 호의적일까? 이 언론사를 관리 감독해야 할 이사회는 찍소리도 못하는 걸 보면 무슨 약점이 잡혔든지, 같은 부류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교회 돈을 펑펑 써가면서 교단의 이권을 차지하는 물질 만능의 교단으로 변색된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목사가 사장이 된 이후 언론사에서 일어난 변화들이다. 이 언론사는 직원과 짬짜미가 되어 소속 교단 장로를 이사로 출마하지 못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다가 이를 문제삼은 전국남전도회 회장을 4차례 고소하고도 책임질 사람 하나 없으면서 ‘교단화합의 초석’이란다. 사장과 당시 편집국장 대행이 여러 차례 내용증명을 보내다가 이사회 허락 받았다고 고발한 사건이다. 총회석상에서 문제를 삼자. 내용도 모르는 다수에게 징계를 한듯 얘기했지만 정작 당사자에게는 사과 한마디없다. 사장은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고, 편집국장 대행만 포지션 이동이 있었을 뿐이다. 사장의 무소불위의 정치력을 실감하는 부분이다. 총회 총대들은 뭐하는 사람들인지 모르겠다. 이런 언론사에 포악질에도 불구하고 아무소리도 내지 못한다. 이 교단 다수는 순한양 내지 호구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니 후원금 내라면 내 주고, 놀러 간다고 스폰하라면 하는 건가? 이 시간에도 생활고에 시달리는 가난한 목회자들의 탄식소리는 들리지 않는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어간 선배들의 피끓는 절규가 드리지 않는가? 소리 지를 돌도 없는 K교단이여 제발 선배팔이만 하지 말고 목사 장로 기도회때 제대로 회개해라.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박동철 장로] 한반도 이념 패권전장(戰場), ‘문화 막시즘의 황혼’
서점가를 돌다 신간(新刊) 책 한 권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신학과 인문학의 전문작가로 유명한 정일권 작가가 쓴 ‘문화 막시즘의 황혼’을 구입했다. 최근 우리 국가사회가 속앓이 하는 절박한 즈음에 읽어볼만한 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좀은 이론적으로 엮어져 읽기에 부담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지금 한국사회에 던지는 강한 메시지가 있었다. 문화 막시즘이란 단어부터 좀 생경하지만 찬찬히 읽어 내려가면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막시즘이란 칼 마르크스가 제창한 사회주의에 근간한다. 유럽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기층 민중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해나가는 사상이다. 근저에는 민중 구제를 위한 평등사회 공산사회주의경제 이념이 깔려있다. 이런 이상적 이론 때문에 청년 때 마르크스 이념서적에 대부분 빠져볼 수 있다. 그러나 칼 마르크스의 막시즘은 자본주의 사회 유럽사회를 정복하지 못하고 근세에 소련이 분열되는 등 시대의 사조에 쇠퇴했다. 칼 마르크스의 포스트 이념으로 살아난 새로운 사조의 사상이 ‘문화 막시즘’이다. 초기이론가는 이탈리아 공산당 창설자 안토니아 그람시라는 사람이다. 개괄적 이론은 부르주아 권력을 빼앗기 위해서는 정치 사회 학계 문화계 모든 분야에 침투하여 민중을 포섭하고 네트워크를 조작점령, 사회주의 사상으로 학습시켜야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전체주의 독재국가화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은 자유민주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탁월한 성과로 반세기만에 세계 10대강국이 되었다. 세계의 주목 속에 시장경제 강국이 된 것은 대한민국 건국 즈음 남북이 갈라지긴 했지만 크게 발호했던 공산사회주의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제 21세기 자유민주 한국사회에 문화 막시즘이 파고 들고 있는 분명한 진단이 노출되고 있다. 정치이념이 보수 진보라는 좌우의 선의적 이념경쟁은 매몰되었다. 우리가 겪고 있는 탄핵정국의 도가니에서 드러나고 있는 뚜렷한 우리 스스로의 문제인 듯하다. 문화 막시즘의 대표적 악폐는 건강한 기독교문화를 파괴하는데 있다. 그리고 동성애합법화는 물론 마약사회를 야기 할 만큼 모든 자에게 인권이란 미명으로 자유방임의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민중을 포섭 막시즘 사회를 만들어가는 수단이다. 그런데 이 책에는 이러한 문화 막시즘의 현상을 설명하면서 이 사조는 빠른 시간에 황혼을 맞고 있다고 강조했다. 눈에 강력히 들어오는 대목이다. 문제는 문화 막시즘의 큰 흐름을 타고 한국사회가 멍들고 있는 진단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한국 기독교를 악의 세력으로 치부 하면서 지난날 민주화 운동의 끈을 억지로 끌고 와 합리화하고 권력을 취하려는 사회현상에 서있다. 진보가 나쁜 좌파로 진화하여 문화 막시즘 세상을 만들고자하는 현상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탄핵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갈 바를 잃고 있다. K-클라스라는 코리아 브랜드는 높아졌지만 국가권력의 패권경쟁이 극단에서 위기를 맞고 있다. 여기에서 좀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극단의 패권경쟁은 문화 막시즘의 수단 하이브리드 전쟁이다. 문화 막시즘의 침투는 온 세계로 확산되었다. 유럽은 물론 미국 캐나다 등도 포함된다. 디지털 전산 고도화로 다양한 문화메커니즘에 침투해서 비정상을 정상으로 둔갑시키는 전략이 현실이 되었다. 해킹과 그 데이터로 공작과 조작의 기술로 한 나라를 점령해버리는 무서운 오늘에 서있다. 민족의 개념에서 한반도 남북의 코리아는 지난날 조선말 겪었던 주변 열강의 도가니 속에 갇혀있다. 북한은 우크라이나 러시아전쟁에서 비참하게 이용당하고 있는 모습들을 보고 있다. 남쪽 코리아 대한민국은 미중 패권의 틈새와 중국의 거대한 속방야욕에 태워져있다. 이에 편승, 중국공산당의 문화 막시즘의 패권수단에 얹혀 등을 타고 권력을 잡으려고 하는 종중(從中) 문화막시즘 인사들이 정말 나라를 살릴 수 있겠는가. 기독교문화를 훼파하고 복음을 통제하려는 정치권력은 황혼을 맞을것이다. 이제 세계강국 대한민국은 세계 속에서 아시아 리더로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한다. 대한민국의 사명이다. 그 어떤 주변 강국에 추종함으로써 국가권력을 잡으려는 정치세력은 경계해야한다. 제발 위대한 자유대한민국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문화 막시즘 사회현상이 빨리 황혼을 맞았으면 한다. .
-
[양대식 목사] 관계대학
가칭 ‘관계대학’이라는 성경공부 과정을 가지고 훈련해야 합니다. 관계대학은 교회에서의 다양한 성경공부를 통한 ‘관계 훈련 과정’입니다. 교회 형편에 맞게 성경공부 과정 커리큘럼을 짜고 성경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1년에 두 학기 과정을 두고 여름과 겨울은 단기 특강을 하면 유익합니다. 3월에서 5월, 9월에서 11월, 약 10주에서 12주 과정 성경공부를 진행해야 합니다. 다양한 성경공부를 가지고 소그룹 형식으로 성경공부를 진행해야 합니다. 소그룹 인도자는 규모가 있는 교회에서는 부교역자가 인도하고, 담임목사도 인도해야 합니다. 소그룹 성경공부의 목적도 성경 지식만 얻게 하는 것이 아니고, 소그룹 안에서 성도와 교제하고 성도들과의 좋은 관계를 맺는데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주일 오후 예배가 있으면 담임목사가 직접 성경공부식 설교나 강의를 하면 유익합니다. 성경공부 교재를 가지고 설교식 성경공부를 인도해야 합니다. 성경공부의 여러 교재가 있으나 담임목사가 직접 쓰거나 준비한 성경공부 교재를 가지고, 성경공부 인도하면 더욱 유익합니다. 성경공부 교재선택이 중요합니다. 평신도 중에 소그룹 인도자를 양육하고 키워야 합니다. 단기 혹은 장기, 관계대학 성경공부 훈련 과정을 신설하여 지속적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관계에 대한 세미나나 훈련, 성경공부 교재를 가지고 공부하게 해야 합니다. 새가족 훈련 과정을 마치면 적당한 기간동안 관계에 대한 성경공부나 관계 세미나 혹은 관계 훈련을 해야 합니다. 여름이나 겨울 특강은 외부 강사를 불러 강의를 듣게 하는 것도 유익합니다. 관계대학 성경공부의 비전과 목적은 아름다운 관계 활성화와 성숙한 그리스도인 양육에 있어야 합니다.
-
[최호숙 목사] 인간 창조물의 득(得)과 실(失)
이 시대 사람들은 메타버스(Metaverse), 인공지능(AI-artificial intelligence)이라는 용어에 익숙해 있으며 교회 안에도 그런 영향들이 장점으로 또는 단점으로 미치고 있다. 메타버스(Metaverse)는 가상, 초월 등을 뜻하는 영어 단어 ‘메타(Meta)’와 우주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 현실과 같은 사회·경제·문화 활동이 이뤄지는 3차원의 가상 세계를 말한다. 메타버스라는 말은 1992년 미국 SF작가 닐 스티븐스가 소설 ‘스노 크래시(Snow Crash)’에 언급하면서 처음 등장한 개념인데, 이 소설에서 메타버스는 아바타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가상 세계를 가리켰다. 특히 유통업계에서는 상품 판매를 위한 다른 공간으로 활용된다. 이런 메타버스의 활용이 각 분야에서 적용되고 있는데, 예를 든다면 “메타버스 세종학당”은 외국인 한국어 학습자들을 위해 구축한 플랫폼이다. 이 공간에서 한국문화를 경험하고 한국어로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런 현상을 따라 메타버스 교회가 생겼다. 그래서 메타버스가 서서히 종교적(기독교를 포함해 모든 종교) 믿음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종교는 역사적으로 공동체와 연결되고 개인의 영적 필요를 충족시키는데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과 함께 종교 활동이 전통적인 물리적 공간을 벗어나 메타버스로 이동하고 있다. 이는 가상의 환경에서 예배를 드리거나 영적 체험을 공유하거나 새로운 형태의 신앙을 탐구하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특히 "메타버스는 신체적 어려움으로 거동이 불편한 분들께 직접 교회에 가는 것보다 쉽게 공동체에 참가하는 정서적 유용성을 제공해 줄 수 있는 만큼 노년층을 위한 메타버스 목회가 된다면 하나의 장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오용의 소지도 있다. 이제부터는 AI 전성시대다. AI 챗봇의 상용화 및 일상화가 되면서 모든 분야에서 획기적인 변화와 발전이 계속되고 있다. AI는 이미 세계 모든 사람에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 주며 또한 편리함을 가져다주고 있다. 가톨릭 신학자인 마르코 슈미드가 인공지능 예수를 만들어 고해성사를 대신하게 하도록 하였다. 심지어 목회자들 세계에서도 AI가 설교 준비 다 해준다고 말하는 자도 있다. 편리함은 있지만 인간 창작물의 노예화 되어가는 것이다. 지금까지 세계는 인류 역사를 BC와 AD, 곧 예수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로 구분했다. 앞으로 미래세대는 인류 역사를 AI 이전과 AI 이후로 구분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의 창조는 AI 기반의 “디지털 신(神)”을 만들었다. “디지털 신(神)”은 기존 종교적 교리를 따르거나 특정 철학에 기반한 영적 지침들을 제공할 수 있고, 디지털 신은 복잡한 삶의 문제에 대해 조언을 해준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다. AI 기술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모방과 창조 능력의 산물 중 하나이기에 잘 사용하면 복이지만 성경적 기준 없이 무분별 사용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21세기의 바벨탑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가짜와 진짜를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실재적(實在的) 하나님이시고, 인격적 하나님이시다. 나도 또한 감정과 인격을 가진 실재적 인간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실재와 실재가 연관되어야 참 신앙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과 관련하여 생명체 없는 비 본질적인 것에 매이기 보다는 살아계시고 인격적인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얻으며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
[조희완 목사] 침착한 대응 (욥23:1-17)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나그네가 쫓아오는 호랑이를 피해서 도망을 가다가 절벽 낭떠러지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마침 절벽에 뻗어 있는 칡넝쿨을 잡고 벼랑 끝에 매달려서 겨우 호랑이의 추격을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밑을 내려다보니까 커다란 뱀이 입을 벌리고 자기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놀란 나그네가 위를 쳐다보니까 간신히 붙잡고 있는 칡넝쿨을 흰 쥐와 까만 쥐가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평안하고 좋은 날을 만날 때도 있지만 톨스토이가 표현한 것 같은 그런 극한 상황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길을 걸어가다 보면 내리막길이 있는가 하면 오르막길이 있는 것처럼, 우리 인생길에는 평안할 때도 있지만 역경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상반된 두 가지 상황을 만날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은 “형통할 때는 기뻐하고 곤고할 때는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전7:14). 형통할 때 기뻐하라는 것은 알겠는데 “곤고할 때 생각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 말의 의미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곤고한 일이 닥쳐올 때 당황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침착하게 왜 이런 곤고한 일이 닥쳐왔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곤고한 일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어려운 일을 만날수록 당황하지 말고 침착해야 합니다. 침착하면 반드시 피할 길이 보입니다. 옛말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방이 가로막힌 것 같아도 반드시 피할 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특별히 침착해야 할 때가 언제일까요? 첫째로, 고난을 당할 때 침착해야 합니다.(욥23:8-9) 둘째로, 위기를 만날 때 침착해야 합니다.(행27:20,25) 셋째로, 비난을 당할 때 침착해야 합니다.(느4:1-4) 지금은 우리가 처한 모든 상황들이 침착함을 요하고 있습니다. 항상 침착하시기 바랍니다.
-
[정우승 목사] 손금을 봐 드립니다
사람은 호기심의 동물이다. 이제 겨우 말을 시작하는 유아들부터 백수(白壽)를 눈앞에 두고 있는 어르신에 이르기 까기 사람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각 나라마다 한 사람의 앞길을 예견하는 점술가들이 꼭 있게 마련이다. 우리나라 역시 일찍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주역(周易)이 발달되어 있다. 흔히 사주(四柱)라고 말하는 것을 가지고 한 사람의 장래를 예견한다. “사주”라 함은 그 사람의 출생의 년(年), 월(月), 일(日) 시(時) 즉 네 개의 큰 기둥에 따라서 한 사람의 운명을 알아맞추는 것이다. 이 “사주” 역시 맞지 않다.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쌍둥이를 보아서 안다. “사주”에 따라서 그의 장래가 결정된다면 쌍둥이들은 거의 같은 삶을 살고 있어야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사주로 점을 치는 것 외에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으로 한 사람의 생명선과 재물선이 그려져 있다고 믿는 손금에 대해 알아보자. 손금을 전문으로 보는 역술인들은 사람의 손금만으로 그 사람의 생명의 길이와 재물의 넓이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어떻게 한 사람의 생명과 재물이 그 조그만 손바닥에 다 들어있단 말인가? 그리고 운명론에 빠져서 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않고 그냥 주어진 대로만 체념하는 것이 지각이 있는 사람의 도리일까? 나는 손금을 믿고 싶지 않다. 손에 각인된 생명선과 재물선이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믿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성경은 과연 우리의 생명과 재물에 대해서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욥30:23)을 보니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끌어 가시리이다” 정말 그렇다. 사람의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 손에 달려있다. 그러기에 지금 내가 이 땅에서 숨 쉬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금 생명을 붙잡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언제까지 살지 혹은 몇 살에 죽을 지 계산하지 말자.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보관하고 있으니 안심하자. 그럼 재물은 어떠한가? 재물은 사람의 손에 달려있다. 물론 재물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성경구절도 많다. 그러나 필자는 재물이 사람의 손에 달려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시128:2)에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라” 그렇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피나는 노력과 수고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신다. 우리나라 갑부였던 정주영씨는 자신의 재물을 노력으로 일군 사람이다. 정주영씨가 우리나라 자동차 대형면허 제 1호 취득자라고 한다. 그가 얼마나 노력하는 사람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 그 작은 한라체급으로 백두체급의 장사들을 넘긴 이만기씨와 악수를 한 적이 있다. 그 분의 손에 정말 거북이 등 같은 굳은살이 깊이 베어져 있었다. 씨름선수의 손바닥은 손등보다 더 거칠다. 아름다운 자태로 감미로운 음악에 맞추어 자신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는 발레리나의 발을 직접 본 적이 있다. 발은 정말 너무 형편없었다. 그들이 발끝으로 걷는 연습을 많기 했기 때문이다. 늘 공을 던지는 투수들은 오른팔이 왼팔보다 약 10cm이상 길다고 한다. 이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한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성공은 천부적인 재능도 중요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단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매 해가 시작되면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나에게 좀 좋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까 궁금해 하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장래에 대해서 못 박아 말하고 있다. (전도서8:7)에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야고보서4:14)에는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작은 손금을 들여다보면서 앞날을 구상하지 말아야 하겠다. [생명선]은 하나님께서 잡고 계신다. 그러기에 오늘 하루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한 것으로 만족하자. [재물선]은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 그러기에 손바닥을 보면서 작은 손금에 우리의 재물을 맡길 것이 아니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산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틀림없이 성공일 것이다. 남들은 혹 나를 성공한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더라도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성공의 확신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요동칠 것이다.
-
-
[박동철 장로] 3일천하 ‘갑신정변 140년’ 이 땅 복음의 큰길 열었다
- 1884년 12월 4일 밤 10시경. 이날은 최초로 지금의 체신청 우정국 개청식이 있는 날이었다. 행사를 마친 후 내·외 귀빈이 함께하는 저녁 연회가 열리던 시각. 갑자기 ‘불이야’ 하는 소리와 함께 총소리가 들리고 비명소리가 진동했다. 당시 김옥균, 홍영식, 서재필 등 젊은 엘리트 개화파 세력들이 정변을 일으킨 현장의 이야기다. 고종 즉위 20년 되는 해 일본은 개화 후 나날이 발전하고 중국과 서양 제국들이 조선의 개화와 통상압박을 하던 혼돈의 시기였다. 조선 26대 왕 고종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은 갈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급진개화를 주장하는 김옥균 파와 점진적 개화를 주장하던 민영익 등 세력 간 갈등 속에 급진개화파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정변이었다. 올해 12월 4일은 갑신정변 1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갑신년 쿠데타는 성공하는 듯 했으나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개입 3일 만에 평정하고 주모자들은 멸문지화 되거나 일본으로 도피했다. 갑신정변은 당시 일본의 지원으로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갑신정변이 성공했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됐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운명이 외세 강국에게 점령당할 수밖에 없는 비운의 상황이었다고 사가들은 말하고 있다. 역사적 평가와 상황을 접어두고 당시 사건의 현장을 통해 하나님이 이 나라 복음을 위해 위대한 계획을 펼치고 있었던 은혜를 찾아 보고자한다. 불을 지르고 쿠데타 세력들이 반대세력들에게 총을 쏘며 공격을 하는 통에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칼에 난자되어 중상을 입었다. 죽을 수 밖에 없던 상황에 연회에 참석했던 미국 루시어스 푸트(Lucius H. Foote) 공사가 긴급히 미국에서 두 달 전에 선교사로 입국한 한사람을 찾는다. 바로 최초의 의사선교사 호러스 알렌 선교사를 찾아 치료함으로써 민영익은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알렌 선교사는 누구인가? 우리의 기독교사에 거장으로 남아있는 알렌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중국으로 파송되었다. 이즈음 1882년 조미(朝美)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선교사의 마음에 조선의 선교사가 되고 싶어 자원한다. 갑신정변 두 달 전 1884년 10월 6일에 한양으로 입국한 선교사이다. 알렌의 치료로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살아남으로써 3일 천하정변은 끝이 나고 고종의 권력은 유지 될 수 있었다. 민영익을 살린 알렌에게 고종은 무엇을 원하냐고 물었다. 당연히 알렌은 병원을 지어 달라고 했다. 고종에게는 너무 쉬운 요청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변의 주동자 홍영식의 가족들이 처단되고 폐허된 집을 병원으로 개원하게 했다. 바로 최초의 병원 광혜원(나중 제중원)이다. 알렌선교사가 병원을 짓고 자유롭게 선교를 하게 되는 큰길이 열리게 된다. 하나님의 역사는 벼락처럼 전개 된다고 했다. 1885년 봄 일본에 머물러있던 아펜젤러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함으로써 조선 땅의 예수 복음이 날개를 달았다. 언더우드는 오늘의 연세대와 알렌 선교사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을 세우는 엄청난 일을 했다. 아펜젤러는 이승만을 탄생케 한 배제학당을 세운다. 뒤이어 스크렌턴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와 이화학당을 세우고 천대받던 조선의 여성들이 눈을 뜨게 했다. 조선역사가 망해가던 시기 비운의 시간표가 돌았지만 선교사들을 통해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게 하는 복음의 역사(役事)가 역동 했던 것이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축복이다. 한 나라를 부흥 발전시키는 무한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조선 5백 년의 역사는 정말 캄캄한 세상이었다. 사대부들이 타락한 유풍(儒風)의 문화 속에서 백성을 착취하고 나라의 발전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나라가 망해가는 때 나라를 살리고자 급진개혁세력들이 일으킨 정변은 사람의 위대한 뜻에도 불구하고 3일천하로 끝난다. 뒤이은 역사는 결국 일본의 36년 종살이해야 하는 비운의 역사를 겪어야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70년 종살이 후 회복의 역사를 썼다. 우리는 140년 전 위대한 영적 거장 몇 분의 선교사들이 오늘의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들어내는 초석을 낳았던 역사를 돌아본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가. 세계 10대강국을 자랑한다. 희망 속에 겪는 사회문화의 심각한 갈등을 보면 나라가 망할 것 같은 위기다. 이런 위기 때 그때의 역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야 할 때가 아닌가.
-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
[박동철 장로] 3일천하 ‘갑신정변 140년’ 이 땅 복음의 큰길 열었다
-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2) (민12:11-16)
- 미리암은 위대한 믿음의 여인이 맞습니다. 하지만 여선지자라는 위대한 칭호를 받은 후 신앙이 제자리걸음을 했습니다. 미리암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역사에 발맞추지 못하고 여전히 애굽에서의 사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모세가 없는 40년 동안 여자로서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진짜 지도자인 줄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진짜 지도자인 모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교만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40년 만에 나타난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기절초풍할 일들을 일으킵니다. 세계 최강의 애굽과 바로도 모세 앞에 쩔쩔맵니다. 애굽을 초토화 시켜버렸고, 애굽의 장자를 죽여 씨를 말려버렸습니다. 여호와의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임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만 대면하시고 바다까지 갈라 마른 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미리암은 40년 동안 여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을 영도해 왔지만 40년 만에 갑자기 등장한 모세의 위용 앞에서 입도 벙긋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선지자의 위치에서 볼 때 비록 인간적으로는 누나요 동생이지만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적 권위를 지닌 모세였기에 고개 들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교회들끼리, 특히 목회자들끼리 묘한 질투심과 경쟁심이 있습니다. 곁의 교회가, 다른 교회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갖습니다. 잘못되면 입은 안타깝다고 하면서 속은 이유 없이 고소하고 상대적인 만족을 얻습니다. 교회의 주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망각한 무서운 죄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이 교인들 사이에서도 발생합니다. 곁의 성도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잘못되면 입은 위로하는 것 같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자신의 신앙과 믿음이 좋은 것으로 위로받고 착각합니다. 아주 나쁜 모습입니다. 악한 모습입니다. 교만의 극치입니다. 어쩌면 이것보다 더한 것이 목회자들끼리의 보이지 않는 견제와 경쟁입니다. 주변의 교회가 갑자기 성장하면 상대적 박탈감을 가집니다. 사람이다 보니 비교가 안 될 수 없습니다. 특히 가까운 교회에서 독보적인 성장을 보이면 심각한 스트레스까지 받습니다. 목사 자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의 중직자들이나 성도들도 자연스럽게 목회자에게 압박을 가합니다. 자신은 1년이 가도 전도 한 명 하지 않으면서 교회 부흥을 입에 올립니다. 십일조나 감사헌금은 고사하고 선교나 불우이웃이나 개척교회, 농어촌교회, 은퇴하신 목사님, 가난한 신학생들을 위해 특별헌금 한 푼도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재정을 입에 올립니다. 더 심각한 것은 설교자들의 교만입니다. 설교하는 사람이다 보니 설교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설교자의 훌륭한 설교에 은혜받기는커녕 허점과 잘못을 찾기에 바쁩니다. 그러니 설교에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현상은 모세를 대적하는 미리암의 아류들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땀방울 하나, 눈불 방울 하나 다 주의 것입니다. 우리는 비교 대상도 아니요, 경쟁상대도 압니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며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자들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특히 목회자들은 아바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평생 잊어선 안 됩니다. 물론 아바타라 하지만 예수님의 아바타니 영광스럽습니다. 진짜 선지자, 진짜 목회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미리암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사실 미리암은 누구보다도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몰라서 범한 죄도 무섭지만, 알고도 범하는 죄는 더 무섭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단순히 그 사람의 성향이나 기질을 나타내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모세의 통치를 방해했고, 이스라엘의 진행을 가로막았습니다. 감히 모세의 영적 권위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감히 같은 선지자였지만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교만은 이 모든 영적 권위 앞에서도 원망과 비방의 고개를 들게 합니다. 호시탐탐 모세의 허점과 실수를 염탐합니다. 교회도 은혜를 계산하는 성도가 있고, 실수와 잘못을 찾아내는 성도가 있습니다. 기회가 왔습니다. 구스 여자가 돌아왔습니다. 이전에 이미 정리된 문제인데도 교만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영적분력을 상실했습니다. 미리암은 십보라가 돌아오자 속에 숨겨놓았던 원망과 불평을 표출합니다. 원망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사실까지 망각해버렸습니다.
-
- 오피니언
- 설교/강의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2) (민12:11-16)
-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1)
- 성경 어디에도 미디안의 제사장 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는데 문제 삼은 장면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실에 대해 그 어디에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하는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사건 때문에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백성들이 구스 여인 십보라를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통치에 십보라를 문제 삼지 못하도록 아예 입도 벙긋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버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명을 주셨고, 그 사명 감당하기 위해 애굽으로 오는 길에 느닷없이 모세를 죽이시려고 한 것은 구스 여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임이 분명합니다. 분명한 이유는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것에 있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 같은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발견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려 하셨습니다. 완전한 모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이셨습니다. 완전히 죽이셨습니다. 그래도 십보라는 할례언약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긴박한 순간에 할례를 행하면 남편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과 비교도 되지 않는 신분입니다. 단순히 액면가로 볼 때 우리는 시아버지와 관계한 여인입니다. (마1:3)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우리는 우상의 신전에서 몸을 팔던 기생이었습니다. 우리는 과부요,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남편을 사지로 몰고 왕과 간음한 유부녀였습니다. (마1:5-6)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인데 죄인인 줄도 모르는 죄인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답도 없으면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제 딴에 잘 사는 줄 알지만 무익한 인생이요, 단 하나도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혀에는 속임만 있습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입에는 저주와 악독만 가득합니다. (롬3:10-14)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런 우리가, 그런 우리의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도 달렸고, 예수님의 부활에 나도 부활했다고 고백합니다. 사탄이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의를 제기하고 문제 삼을 것이 수두룩한 우리입니다. 아니 우리는 문제 그 자체들입니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합니다. 십보라가 할례 언약을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십보라가 할례를 행하여 남편을 살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불가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입으로 시인합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보라가 할례언약을 아는 것과 할례를 행하는 것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서십니다. (마10: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눅12: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합니다. 문제 제기도 못합니다. 입도 벙긋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의 예배 자리에, 예수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앉혀주십니다. (계12:22-23)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이런 은혜를 받은 성도입니다. 그래도 원망하고 비방하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완전한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할례를 시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에 거하며, 주일마다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
- 오피니언
- 설교/강의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1)
-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
- 오피니언
- 설교/강의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
- 오피니언
- 칼럼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
[독자기고] 지금이 놀러 갈 때 인가? K언론사
- K교단 언론사 직원들이 부부 동반으로 이태리로 8박 9일간 놀러갔다는 전언이다. 지금이 한가하게 놀러 갈 때인가? 물론 말은 직원연수로 포장하겠지만. 탄핵정국으로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이고, 교단 한 쪽에서는 S목사를 징계하라고 주장하고 있고, 다른 한 쪽에서는 지지하고 있는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그 뿐인가? 총회장의 헛발질로 뜬금없이 급작스럽게 이뤄진 모 교단과의 교류로 교단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이 나오는 쏟아져 나오는 상황이다. 언론사 사장이 내년으로 임기가 종료되는 시점이라 선심성 외유라는 얘기가 나온다. 이번 여행을 위해 유력한 교회에 1천 만 원 그리고 여러 명에게 손을 벌려 몇 백 만 원을 스폰 받았다고 한다. 이 언론사는 목사가 사장이 된 후 5년간 1주일에 한번 이상 사장 얼굴이 등장하고있다. 사장얼굴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신문은 기네스북 기록감일 정도다. 또 1면에는 누가 문서선교헌금으로 얼마를 냈다고 부각시키는 면이기도 하다. 사장 임기 내내 1면에 얼굴 내는 재미로 후원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그럼 그 많은 후원금은 어디에 쓰였을까? 시쳇말로 삥 뜯듯 거둔 돈은 세금에는 잡혀져 있는지? 어떻게 기장했을까? 이렇게 거둔 후원금으로 직원들에게 상여금으로 지불했다(실제로 사장이 이 돈을 챙겨가기 위해 직원들 상여금을 주는 형태를 취한것이란)는 얘기가 들릴 뿐이다. 어느 언론사가 후원금 거둬 직원들 상여금을 주는 곳이 있을까? 기사를 써서 구독자를 늘리고 광고 수주하는 땀흘리는 보편적 언론사와는 많이 다른 기형적 형태적이고, 편의적이다. 이게 가능한 교단이다. 세금을 피하기 위해 사장급여 조작(실제로 받는 급여+협동 목사로 받는 돈 축소 의혹 등) 여러 편법을 쓴다는얘기도 들린다. 관할세무서는 뭐하나 이런 곳에 세무조사도 안나가고. 이 언론사가 속해있는 총회는 지난해 총희석상 에서 언론사가 어려우니 헌금해 달라고 총회석상에서 헌금 하게하고, 몽땅 언론사에서 가져갔다. 이 헌금도 현 총회장이 언론사에 전달했다. 그 돈으로 사장은 바로 미국으로 가서 최근 사장의 광고 유용 배임의혹(모 대학 박사과정 입학은 했는데 입학금 영수증 없어 광고로 퉁쳤다는 의혹)을 해결하러 갔다는 소리까지 들린다. 결국 총회는 사장 증거인멸하라고 비행기 티켓팅을 해 준셈인가? 이렇게 쓰는게 헌금 목적으로도 맞는가? 이 교단은 도대체 종잡을 수 없다. 이 교단의 변질은 언론사로부터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매번 총회임원으로 출마예정인 사람에게 다가가 광고청탁이나 후원금 청탁을 한다. 후보는 마지 못해 거액의 후원을 하고, 또는 후보자도 이런 제안을 이용할 속셈으로 광고에 응하거나 광고에 동의한다. 언론사가 나서서 금권선거를 조장하는 셈이다. 말이 좋아 문서선교 헌금이고 후원금이지 그 내역을 들여다 보면 기가 막히다. 그 많은 돈 거둬서 어디다 썼는지 공개해야한다. 그리고 그렇게 불법 모금하는 것 역시 후원금 모금법 위반이다.(현행법에 따르면, 1000만원 이상 기부금품을 모집하려는 경우 모집자의 정보와 모집액·사용계획 등을 행정안전부장관이나 관할 등록청에 신고해야 한다. 신고 없이 기부금을 모집하는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 언론사 사장의 모 대학 박사과정 입학금 공금유용과 후원금 내역 사용처를 밝힐 수 있는 방법은 세무조사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정도로 이 교단은 무감각인가! 왜 이 교단은 언론사에게 꼼짝없이 당하기만 하고 있는데도 호의적일까? 이 언론사를 관리 감독해야 할 이사회는 찍소리도 못하는 걸 보면 무슨 약점이 잡혔든지, 같은 부류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교회 돈을 펑펑 써가면서 교단의 이권을 차지하는 물질 만능의 교단으로 변색된 것 같다. 이 모든 것이 목사가 사장이 된 이후 언론사에서 일어난 변화들이다. 이 언론사는 직원과 짬짜미가 되어 소속 교단 장로를 이사로 출마하지 못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다가 이를 문제삼은 전국남전도회 회장을 4차례 고소하고도 책임질 사람 하나 없으면서 ‘교단화합의 초석’이란다. 사장과 당시 편집국장 대행이 여러 차례 내용증명을 보내다가 이사회 허락 받았다고 고발한 사건이다. 총회석상에서 문제를 삼자. 내용도 모르는 다수에게 징계를 한듯 얘기했지만 정작 당사자에게는 사과 한마디없다. 사장은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고, 편집국장 대행만 포지션 이동이 있었을 뿐이다. 사장의 무소불위의 정치력을 실감하는 부분이다. 총회 총대들은 뭐하는 사람들인지 모르겠다. 이런 언론사에 포악질에도 불구하고 아무소리도 내지 못한다. 이 교단 다수는 순한양 내지 호구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니 후원금 내라면 내 주고, 놀러 간다고 스폰하라면 하는 건가? 이 시간에도 생활고에 시달리는 가난한 목회자들의 탄식소리는 들리지 않는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죽어간 선배들의 피끓는 절규가 드리지 않는가? 소리 지를 돌도 없는 K교단이여 제발 선배팔이만 하지 말고 목사 장로 기도회때 제대로 회개해라.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 오피니언
- 기고
-
[독자기고] 지금이 놀러 갈 때 인가? K언론사
-
-
[박동철 장로] 한반도 이념 패권전장(戰場), ‘문화 막시즘의 황혼’
- 서점가를 돌다 신간(新刊) 책 한 권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신학과 인문학의 전문작가로 유명한 정일권 작가가 쓴 ‘문화 막시즘의 황혼’을 구입했다. 최근 우리 국가사회가 속앓이 하는 절박한 즈음에 읽어볼만한 내용이 눈길을 끌었다. 좀은 이론적으로 엮어져 읽기에 부담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지금 한국사회에 던지는 강한 메시지가 있었다. 문화 막시즘이란 단어부터 좀 생경하지만 찬찬히 읽어 내려가면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막시즘이란 칼 마르크스가 제창한 사회주의에 근간한다. 유럽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기층 민중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해나가는 사상이다. 근저에는 민중 구제를 위한 평등사회 공산사회주의경제 이념이 깔려있다. 이런 이상적 이론 때문에 청년 때 마르크스 이념서적에 대부분 빠져볼 수 있다. 그러나 칼 마르크스의 막시즘은 자본주의 사회 유럽사회를 정복하지 못하고 근세에 소련이 분열되는 등 시대의 사조에 쇠퇴했다. 칼 마르크스의 포스트 이념으로 살아난 새로운 사조의 사상이 ‘문화 막시즘’이다. 초기이론가는 이탈리아 공산당 창설자 안토니아 그람시라는 사람이다. 개괄적 이론은 부르주아 권력을 빼앗기 위해서는 정치 사회 학계 문화계 모든 분야에 침투하여 민중을 포섭하고 네트워크를 조작점령, 사회주의 사상으로 학습시켜야한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전체주의 독재국가화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은 자유민주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탁월한 성과로 반세기만에 세계 10대강국이 되었다. 세계의 주목 속에 시장경제 강국이 된 것은 대한민국 건국 즈음 남북이 갈라지긴 했지만 크게 발호했던 공산사회주의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제 21세기 자유민주 한국사회에 문화 막시즘이 파고 들고 있는 분명한 진단이 노출되고 있다. 정치이념이 보수 진보라는 좌우의 선의적 이념경쟁은 매몰되었다. 우리가 겪고 있는 탄핵정국의 도가니에서 드러나고 있는 뚜렷한 우리 스스로의 문제인 듯하다. 문화 막시즘의 대표적 악폐는 건강한 기독교문화를 파괴하는데 있다. 그리고 동성애합법화는 물론 마약사회를 야기 할 만큼 모든 자에게 인권이란 미명으로 자유방임의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민중을 포섭 막시즘 사회를 만들어가는 수단이다. 그런데 이 책에는 이러한 문화 막시즘의 현상을 설명하면서 이 사조는 빠른 시간에 황혼을 맞고 있다고 강조했다. 눈에 강력히 들어오는 대목이다. 문제는 문화 막시즘의 큰 흐름을 타고 한국사회가 멍들고 있는 진단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한국 기독교를 악의 세력으로 치부 하면서 지난날 민주화 운동의 끈을 억지로 끌고 와 합리화하고 권력을 취하려는 사회현상에 서있다. 진보가 나쁜 좌파로 진화하여 문화 막시즘 세상을 만들고자하는 현상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탄핵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갈 바를 잃고 있다. K-클라스라는 코리아 브랜드는 높아졌지만 국가권력의 패권경쟁이 극단에서 위기를 맞고 있다. 여기에서 좀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극단의 패권경쟁은 문화 막시즘의 수단 하이브리드 전쟁이다. 문화 막시즘의 침투는 온 세계로 확산되었다. 유럽은 물론 미국 캐나다 등도 포함된다. 디지털 전산 고도화로 다양한 문화메커니즘에 침투해서 비정상을 정상으로 둔갑시키는 전략이 현실이 되었다. 해킹과 그 데이터로 공작과 조작의 기술로 한 나라를 점령해버리는 무서운 오늘에 서있다. 민족의 개념에서 한반도 남북의 코리아는 지난날 조선말 겪었던 주변 열강의 도가니 속에 갇혀있다. 북한은 우크라이나 러시아전쟁에서 비참하게 이용당하고 있는 모습들을 보고 있다. 남쪽 코리아 대한민국은 미중 패권의 틈새와 중국의 거대한 속방야욕에 태워져있다. 이에 편승, 중국공산당의 문화 막시즘의 패권수단에 얹혀 등을 타고 권력을 잡으려고 하는 종중(從中) 문화막시즘 인사들이 정말 나라를 살릴 수 있겠는가. 기독교문화를 훼파하고 복음을 통제하려는 정치권력은 황혼을 맞을것이다. 이제 세계강국 대한민국은 세계 속에서 아시아 리더로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내야 한다. 대한민국의 사명이다. 그 어떤 주변 강국에 추종함으로써 국가권력을 잡으려는 정치세력은 경계해야한다. 제발 위대한 자유대한민국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문화 막시즘 사회현상이 빨리 황혼을 맞았으면 한다. .
-
- 오피니언
- 칼럼
- 교회와 세상
-
[박동철 장로] 한반도 이념 패권전장(戰場), ‘문화 막시즘의 황혼’
-
-
[양대식 목사] 관계대학
- 가칭 ‘관계대학’이라는 성경공부 과정을 가지고 훈련해야 합니다. 관계대학은 교회에서의 다양한 성경공부를 통한 ‘관계 훈련 과정’입니다. 교회 형편에 맞게 성경공부 과정 커리큘럼을 짜고 성경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1년에 두 학기 과정을 두고 여름과 겨울은 단기 특강을 하면 유익합니다. 3월에서 5월, 9월에서 11월, 약 10주에서 12주 과정 성경공부를 진행해야 합니다. 다양한 성경공부를 가지고 소그룹 형식으로 성경공부를 진행해야 합니다. 소그룹 인도자는 규모가 있는 교회에서는 부교역자가 인도하고, 담임목사도 인도해야 합니다. 소그룹 성경공부의 목적도 성경 지식만 얻게 하는 것이 아니고, 소그룹 안에서 성도와 교제하고 성도들과의 좋은 관계를 맺는데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주일 오후 예배가 있으면 담임목사가 직접 성경공부식 설교나 강의를 하면 유익합니다. 성경공부 교재를 가지고 설교식 성경공부를 인도해야 합니다. 성경공부의 여러 교재가 있으나 담임목사가 직접 쓰거나 준비한 성경공부 교재를 가지고, 성경공부 인도하면 더욱 유익합니다. 성경공부 교재선택이 중요합니다. 평신도 중에 소그룹 인도자를 양육하고 키워야 합니다. 단기 혹은 장기, 관계대학 성경공부 훈련 과정을 신설하여 지속적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관계에 대한 세미나나 훈련, 성경공부 교재를 가지고 공부하게 해야 합니다. 새가족 훈련 과정을 마치면 적당한 기간동안 관계에 대한 성경공부나 관계 세미나 혹은 관계 훈련을 해야 합니다. 여름이나 겨울 특강은 외부 강사를 불러 강의를 듣게 하는 것도 유익합니다. 관계대학 성경공부의 비전과 목적은 아름다운 관계 활성화와 성숙한 그리스도인 양육에 있어야 합니다.
-
- 오피니언
- 논문/책
-
[양대식 목사] 관계대학
-
-
[최호숙 목사] 인간 창조물의 득(得)과 실(失)
- 이 시대 사람들은 메타버스(Metaverse), 인공지능(AI-artificial intelligence)이라는 용어에 익숙해 있으며 교회 안에도 그런 영향들이 장점으로 또는 단점으로 미치고 있다. 메타버스(Metaverse)는 가상, 초월 등을 뜻하는 영어 단어 ‘메타(Meta)’와 우주를 뜻하는 ‘유니버스(Universe)’의 합성어로, 현실과 같은 사회·경제·문화 활동이 이뤄지는 3차원의 가상 세계를 말한다. 메타버스라는 말은 1992년 미국 SF작가 닐 스티븐스가 소설 ‘스노 크래시(Snow Crash)’에 언급하면서 처음 등장한 개념인데, 이 소설에서 메타버스는 아바타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가상 세계를 가리켰다. 특히 유통업계에서는 상품 판매를 위한 다른 공간으로 활용된다. 이런 메타버스의 활용이 각 분야에서 적용되고 있는데, 예를 든다면 “메타버스 세종학당”은 외국인 한국어 학습자들을 위해 구축한 플랫폼이다. 이 공간에서 한국문화를 경험하고 한국어로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런 현상을 따라 메타버스 교회가 생겼다. 그래서 메타버스가 서서히 종교적(기독교를 포함해 모든 종교) 믿음의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종교는 역사적으로 공동체와 연결되고 개인의 영적 필요를 충족시키는데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기술의 발전과 함께 종교 활동이 전통적인 물리적 공간을 벗어나 메타버스로 이동하고 있다. 이는 가상의 환경에서 예배를 드리거나 영적 체험을 공유하거나 새로운 형태의 신앙을 탐구하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특히 "메타버스는 신체적 어려움으로 거동이 불편한 분들께 직접 교회에 가는 것보다 쉽게 공동체에 참가하는 정서적 유용성을 제공해 줄 수 있는 만큼 노년층을 위한 메타버스 목회가 된다면 하나의 장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오용의 소지도 있다. 이제부터는 AI 전성시대다. AI 챗봇의 상용화 및 일상화가 되면서 모든 분야에서 획기적인 변화와 발전이 계속되고 있다. AI는 이미 세계 모든 사람에게 다양한 정보를 제공해 주며 또한 편리함을 가져다주고 있다. 가톨릭 신학자인 마르코 슈미드가 인공지능 예수를 만들어 고해성사를 대신하게 하도록 하였다. 심지어 목회자들 세계에서도 AI가 설교 준비 다 해준다고 말하는 자도 있다. 편리함은 있지만 인간 창작물의 노예화 되어가는 것이다. 지금까지 세계는 인류 역사를 BC와 AD, 곧 예수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로 구분했다. 앞으로 미래세대는 인류 역사를 AI 이전과 AI 이후로 구분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의 창조는 AI 기반의 “디지털 신(神)”을 만들었다. “디지털 신(神)”은 기존 종교적 교리를 따르거나 특정 철학에 기반한 영적 지침들을 제공할 수 있고, 디지털 신은 복잡한 삶의 문제에 대해 조언을 해준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다. AI 기술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모방과 창조 능력의 산물 중 하나이기에 잘 사용하면 복이지만 성경적 기준 없이 무분별 사용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21세기의 바벨탑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가짜와 진짜를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실재적(實在的) 하나님이시고, 인격적 하나님이시다. 나도 또한 감정과 인격을 가진 실재적 인간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실재와 실재가 연관되어야 참 신앙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과 관련하여 생명체 없는 비 본질적인 것에 매이기 보다는 살아계시고 인격적인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얻으며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
[최호숙 목사] 인간 창조물의 득(得)과 실(失)
-
-
[조희완 목사] 침착한 대응 (욥23:1-17)
-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나그네가 쫓아오는 호랑이를 피해서 도망을 가다가 절벽 낭떠러지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마침 절벽에 뻗어 있는 칡넝쿨을 잡고 벼랑 끝에 매달려서 겨우 호랑이의 추격을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밑을 내려다보니까 커다란 뱀이 입을 벌리고 자기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놀란 나그네가 위를 쳐다보니까 간신히 붙잡고 있는 칡넝쿨을 흰 쥐와 까만 쥐가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평안하고 좋은 날을 만날 때도 있지만 톨스토이가 표현한 것 같은 그런 극한 상황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길을 걸어가다 보면 내리막길이 있는가 하면 오르막길이 있는 것처럼, 우리 인생길에는 평안할 때도 있지만 역경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상반된 두 가지 상황을 만날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은 “형통할 때는 기뻐하고 곤고할 때는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전7:14). 형통할 때 기뻐하라는 것은 알겠는데 “곤고할 때 생각하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 말의 의미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곤고한 일이 닥쳐올 때 당황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침착하게 왜 이런 곤고한 일이 닥쳐왔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곤고한 일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어려운 일을 만날수록 당황하지 말고 침착해야 합니다. 침착하면 반드시 피할 길이 보입니다. 옛말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방이 가로막힌 것 같아도 반드시 피할 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특별히 침착해야 할 때가 언제일까요? 첫째로, 고난을 당할 때 침착해야 합니다.(욥23:8-9) 둘째로, 위기를 만날 때 침착해야 합니다.(행27:20,25) 셋째로, 비난을 당할 때 침착해야 합니다.(느4:1-4) 지금은 우리가 처한 모든 상황들이 침착함을 요하고 있습니다. 항상 침착하시기 바랍니다.
-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
[조희완 목사] 침착한 대응 (욥23:1-17)
-
-
[정우승 목사] 손금을 봐 드립니다
- 사람은 호기심의 동물이다. 이제 겨우 말을 시작하는 유아들부터 백수(白壽)를 눈앞에 두고 있는 어르신에 이르기 까기 사람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각 나라마다 한 사람의 앞길을 예견하는 점술가들이 꼭 있게 마련이다. 우리나라 역시 일찍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주역(周易)이 발달되어 있다. 흔히 사주(四柱)라고 말하는 것을 가지고 한 사람의 장래를 예견한다. “사주”라 함은 그 사람의 출생의 년(年), 월(月), 일(日) 시(時) 즉 네 개의 큰 기둥에 따라서 한 사람의 운명을 알아맞추는 것이다. 이 “사주” 역시 맞지 않다.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쌍둥이를 보아서 안다. “사주”에 따라서 그의 장래가 결정된다면 쌍둥이들은 거의 같은 삶을 살고 있어야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사주로 점을 치는 것 외에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으로 한 사람의 생명선과 재물선이 그려져 있다고 믿는 손금에 대해 알아보자. 손금을 전문으로 보는 역술인들은 사람의 손금만으로 그 사람의 생명의 길이와 재물의 넓이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어떻게 한 사람의 생명과 재물이 그 조그만 손바닥에 다 들어있단 말인가? 그리고 운명론에 빠져서 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않고 그냥 주어진 대로만 체념하는 것이 지각이 있는 사람의 도리일까? 나는 손금을 믿고 싶지 않다. 손에 각인된 생명선과 재물선이 그 사람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믿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성경은 과연 우리의 생명과 재물에 대해서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가? 생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욥30:23)을 보니 “내가 아나이다 주께서 나를 죽게 하사 모든 생물을 위하여 정한 집으로 끌어 가시리이다” 정말 그렇다. 사람의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 손에 달려있다. 그러기에 지금 내가 이 땅에서 숨 쉬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금 생명을 붙잡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언제까지 살지 혹은 몇 살에 죽을 지 계산하지 말자.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보관하고 있으니 안심하자. 그럼 재물은 어떠한가? 재물은 사람의 손에 달려있다. 물론 재물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성경구절도 많다. 그러나 필자는 재물이 사람의 손에 달려있음을 강조하고 싶다. (시128:2)에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라” 그렇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피나는 노력과 수고를 결코 저버리지 않으신다. 우리나라 갑부였던 정주영씨는 자신의 재물을 노력으로 일군 사람이다. 정주영씨가 우리나라 자동차 대형면허 제 1호 취득자라고 한다. 그가 얼마나 노력하는 사람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 그 작은 한라체급으로 백두체급의 장사들을 넘긴 이만기씨와 악수를 한 적이 있다. 그 분의 손에 정말 거북이 등 같은 굳은살이 깊이 베어져 있었다. 씨름선수의 손바닥은 손등보다 더 거칠다. 아름다운 자태로 감미로운 음악에 맞추어 자신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는 발레리나의 발을 직접 본 적이 있다. 발은 정말 너무 형편없었다. 그들이 발끝으로 걷는 연습을 많기 했기 때문이다. 늘 공을 던지는 투수들은 오른팔이 왼팔보다 약 10cm이상 길다고 한다. 이들은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한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성공은 천부적인 재능도 중요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단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매 해가 시작되면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나에게 좀 좋은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까 궁금해 하며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장래에 대해서 못 박아 말하고 있다. (전도서8:7)에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야고보서4:14)에는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작은 손금을 들여다보면서 앞날을 구상하지 말아야 하겠다. [생명선]은 하나님께서 잡고 계신다. 그러기에 오늘 하루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한 것으로 만족하자. [재물선]은 우리의 손에 달려있다. 그러기에 손바닥을 보면서 작은 손금에 우리의 재물을 맡길 것이 아니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산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틀림없이 성공일 것이다. 남들은 혹 나를 성공한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더라도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는 거역할 수 없는 성공의 확신이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요동칠 것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
[정우승 목사] 손금을 봐 드립니다
-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 대중연설(大衆演說)이란 말의 적절성
- I. 서언(序言) 요즈음 국가적인 혼란 속에서 전국적으로 대형 집회가 열리고 있다. 이때 강사들의 강연 을 보통 ‘대중연설’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말도 ‘불교에서 유래된 수많은 용어 중에 하나’라고 단정적으로 말을 하면, ‘그 말도 그래?’라는 의문이 먼저 들 것이다. 그 정도로 이 말은 우리에게 익숙한 보편적인 용어이다. 이에 본 제목에서는 대중연설에서의 대중(大衆)과 연설(演說)로 나누어서 각각의 유래와 그 사용성에 대한 적합성을 논하고자 한다. II. 대중연설(大衆演說)이란? 1. 대중(大衆): 민중서관 편집의 국어사전에 보면 대중으로 시작되는 단어가 대중가요, 대중문학, 대중음식점 등 23가지가 나올 정도로 많다. 사전적인 의미의 첫째로는, ‘수많은 사람의 무리’, ‘사회의 대다수를 이루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바로 이런 의미가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대중이란 말이다. 반면 두 번째의 뜻은, 불교적인 의미로 ‘많이 모인 승려, 또는 비구(比丘), 비구니(比丘尼), 우바새(優婆塞), 우바이(優婆夷) 등의 사부(四部)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바로 이 두 가지 의미가 본 제목에서 논하고자 하는 대중이란 불교적인 용어이다. 대중에 대한 좀 더 불교적 의미를 구체적으로 논하면, 앞에서 본대로 부처를 따르는 ‘사부대중(四部大衆)’을 일컫는 말인데 그 약자가 ‘대중’이다. 그렇다면 사부대중이란 말은 무엇인가? 여기의 사부(四部)는 먼저 출가와 재가, 그다음 남자와 여자에 따른 구분인데 출가(出家)는 비구(比丘=남자)와 비구니(比丘尼=여자)를 의미하는데 이는 출가자로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승려를 말한다. 재가(在家)는 ‘산스크리트어’의 우바새(남자)와 우바이(여자)로서 삼보(三寶)에 귀의하여 오계(五戒)를 받은 불교 신자들을 말한다. 즉, 사부대중은 출가한 승려뿐만 아니라 가정에서 일반 사회생활을 하면서 불교를 믿는 신도들을 통틀어서 말한다. 2. 연설(演說): 국어사전에는 ‘여러 사람 앞에서 자기의 주의나 주장 또는 의견을 진술하는 일’로 되어 있다. 한국어로 ‘연설’, ‘웅변’, ‘변론’등으로 각각 다른 용어를 사용하지만, 수사학(修辭學; Rhetoric)으로 지칭되는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연설, 식장 연설, 법정 연설로 세 구분한 것을 비롯하여, 로마에서는 ‘키케로’등으로 대표되는 연설가들이 ‘오라티오’(oratio)란 용어로 모든 학문 중의 최우선으로 여길 정도로 이를 중요시했다. 현재 우리가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연설은 그리스와 로마의 수사학적인 연설을 주로 의미한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연설이란 개념은 불교의 설법을 강연하는 수단으로서 출발했다. 하지만 그것을 그냥 설법(說法)이라 하지 않고, ‘멀리 흐른다. 통하다. 윤택하다. 스며들다’의 의미를 가진 연(演)을 덧붙여 연설이라고 한 것이다. 3. 강당(講堂): 국어사전의 일반적인 의미는 ‘강의나 의식 따위를 행할 때 쓰는 건물이나 큰 방’을 의미하는데, 현재는 학교나 관공서 등에서 많은 사람들이 한 군데 모여 의식이나 강연 등을 들을 수 있는 큰 장소를 말한다. 하지만, 이 말도 원래는 불교적인 용어로 ‘강경(講經)하는 방’이란 뜻으로 ‘설법을 강(講)하던 장소’라는 의미에서 왔다. III. 기독교인으로서 대안적인 용어와 맺는말 이상과 같은 여러 용어들을 종합해서 볼 때 강당에서 대중연설을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일단 이 말의 유래는 앞에서 논한 대로 사부대중들이 모인 일정한 장소에서 불교의 교리를 설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강당에서 대중연설을 한다는 말은 기독교인인 우리들이 분별없이 사용하기로는 조금은 자존심이 상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 용어는 앞에서 논한 연기설에서 말하는‘인연’처럼 우리가 받아들이기 힘든 불교의 근본 교리적인 용어는 아니다. 또한 이 말은 현대에 와서는 그 근본적인 의미와는 다르게 “많은 사람들에게 연설을 하는 일과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 기독교 교리와 배치되지 않는 말이고, 또 이미 사회적인 용어로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불교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될 수 있으면 ‘강당에서 대중연설 한다’는 말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장소에서 강의한다’로 말한다면 더 좋을 것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기독교인 생활용어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 대중연설(大衆演說)이란 말의 적절성
-
-
[오성한 목사] 기름부음
- 기름부음이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이다. 예수를 믿는 것은 사람의 생각이나, 동감되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 믿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 놓으신 일을 믿는 것이다. 이 일은 성경에 상세히 기록되어져 있다. 성경말씀은 우리가 마음을 열면 성령의 도우심으로 믿어지게 된다. 예수를 믿는 자체가 기름부음이 있다는 증거다. 예수를 믿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예수 믿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다. 예수 믿는 일은 최고의 일이다. 사람의 힘으로 예수를 믿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예수를 믿을 수 없다. 절대 이성만 가지고는 예수를 믿을 수 없다. 생각해 보라. 어떻게 사내를 알지 못하는 처녀의 몸에 아기가 탄생된단 말인가? 어떻게 홍해가 갈라져 물이 벽돌처럼 쌓일 수 있단 말인가? 액체는 쌓이는 것이 아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훨씬 넘는 무리가 나누어 먹고도 열 두광주리가 남았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인가?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믿고 있다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다. 기름부음의 결과다. 기름부음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게하시는 성령님의 능력이다. 예수를 믿는다면 기름부음이 우리 안에 거하는 증거다(요일2:27). 분명 예수를 믿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요, 축복 중의 축복이다. 그러니 가장 큰 기름부음은 예수를 믿는 기름부음이다. 예수를 믿는 당신에게 엄청난 큰 기름부음이 있다. 당신에겐 큰 믿음과 큰 기름부음이 있다는 것을 믿어라.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한일서2:27)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을 인정하듯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기름부음도 주장하고 인정해야 한다. 말씀은 나에게 믿음의 근거가 된다. 말씀은 성령의 음성이다. “주님, 기름부음이 제 안에 넘쳐납니다.”고 고백하며 감사를 드려라. 자랑하라는 것이 아니다. 모두에게 성령님을 보내 주셨다. “믿는 자에게는 이런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다. 예수를 믿는가? 그렇다면 성령님을 보내 주셨다. 주장하고 믿어라 그러면 믿음이 확고해 짐을 볼 것이다. 능력의 사람임도 믿어질 것이다. “너희 안에 강한 능력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기를 원한다.”고 하셨다(참고 엡 1:19 새번역). “아주 강한 능력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 있음”을 알기 원하신다. 알아드린다고 대답하라. 이 말씀을 사실로 믿어 보라. 신이 날 것이다. “내 안에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자신에게도 말해 줘라. “성한아, 너 안에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있단다.”라고 소리쳐라. 하하하하! 주장하고 성령님의 음성에 동역하라. 신나지 않는가? 분명한 것은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말씀대로 믿어야 한다. 감정을 믿지 말아야 한다. 믿음으로 감정을 불러 일으켜야지, 감정이 믿음을 약하게 하도록 버려두면 안 된다. 말씀이 없어 무너진 감정을 묵상해서는 안 된다. 말씀을 묵상해 감정을 흥분되게 해야 한다. 나는 믿음으로 기대되어 흥분되는 시간이 좋다. 기름부음은 이미 내 안에 있다. 뿐만 아니라 아무것도 가르칠 필요가 없고 그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가르친다. 기름부음으로 깨달아지는 것은 사람이 가르칠 수 없다. 누가 예수 믿는 것을 가르쳐서 성령의 도움 없이 믿게 할 수 있는가 말이다. 예수 믿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요,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적의 사람들이다. 기적을 경험한 사람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있다면 큰 기름부음을 받은 것이다. 우리에게 기름부음이 있다는 것을 일단 받아들여라. 기름부음을 인정하는 믿음이 중요한 믿음이다. 우리는 보통 사람이 아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는 기름부음이 당신 안에 있는 사람이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도 하셨다. 여기서 보면 “거듭난다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다. 거듭난다는 것은 성령, 기름부음으로 된다. 물은 말씀인데 말씀과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거듭난다는 말이다. 성경에서 물은 주로 하나님의 말씀을 뜻한다. 에스겔에도 생수의 강에 대한 말씀이 있다. 요한복음에는 우리 배에서도 끝없는 생수의 강물이 흘러나온다고 말씀했다. 이 때 물은 살아 있는 말씀을 말한다. 에스겔이 본 환상 가운데 성전 동문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발목에 찼다. 일천 척을 측량하니 무릎으로, 무릎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창일함으로 넘쳐 나는 생수의 강을 볼 수 있다. 이 환상은 생명의 말씀이 점점 넘쳐 남을 나타낸 말씀이다. 측량한다는 말은 묵상하고, 세밀히 살펴 주의하며, 약속의 말씀을 믿는다는 말이다. 그렇게 할 때 생수의 강은 점점 더 깊어진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성령의 기름부음의 역사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말씀의 샘이 깊어지고 넓어진다는 말씀이다. 언제든지 기름부음의 충만함으로 우리는 들어 갈 수 있는 비결을 발견 할 수 있는 말씀이다.
-
- 오피니언
- 칼럼
- 목회 칼럼
-
[오성한 목사] 기름부음
-
-
[김성수 총장] 탄자니아, 아름다움 속의 상처와 우리의책임
- 하나님의 강권적인 인도하심으로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와서 사역을 시작한지도 벌써 한 해가 흘러가고 있다. 처음에는 더위와 말라리아 등 열악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견딜 수 있겠나 막막하기만 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곳으로 나를 인도하시는지 불평도 참 많이 해 보았다. 그러나 일 년이 지나면서 나는 이 나라에 대해서 점점 더 매력을 느끼고 빠져들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의 아름다움과 상처, 그리고 우리가 감당해야 할 책임까지도 볼 수 있는 것 같다. 탄자니아는 대자연의 신비와 깊은 역사, 그리고 다양한 문화가 조화를 이루는 땅이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킬리만자로, 세계적인 야생동물 보호구역인 세렝게티 국립공원, 그리고 인도양의 보석이라 불리는잔지바르-탄자니아는 그 자체로 하나의 경이로운 세계다. 그러나 탄자니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대륙은 오랜 세월 동안서방제국들로부터 약탈당한 땅이다. 응고롱고로 분화구와 같은 천혜의 자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시대 동안 외부의 힘에 의해 자원을 빼앗겼고, 오늘날에도 다국적 기업과 강대국들의 경제적 지배 속에서 풍요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아름다운 휴양지 잔지바르는 단순한 휴양지가 아니다. 이곳은 과거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노예무역 중심지 중 하나였다. 스톤 타운(Stone Town)의 골목길을 걷다 보면, 화려한 건축물 뒤에 감춰진 아프리카인들의 아픔과 눈물의 역사를 느낄 수 있다.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이곳에서 납치되어 중동과 유럽, 아메리카로 팔려 나갔다.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착취 중 하나였던 노예무역은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탄자니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국가들이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격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아직도 아프리카 국가들은 강대국들의 경제적 착취 속에서 자국의 자원을 온전히 활용하지 못하고 단순히 원자재를 공급하는 역할에 머물러 있으며, 정작 그 자원의 이익은 외부로 흘러가고 있다. 아프리카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의식한다면 탄자니아를 단순한 관광지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곳은 대자연과 인간의 역사가 맞닿은 곳이며, 희망과 도전이 공존하는 땅이다. 탄자니아는 약탈당한 대지이지만, 결코 무너진 나라가 아니다. 이제 우리가 손을 내밀어야 한다. 더 이상 탄자니아를 약탈의 땅으로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함께 성장할 수 있으며,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 진정한 아프리카를 경험하고 싶다면, 단순한 여행자가 아닌 이들의 친구, 협력자, 그리고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단순한 원조를 넘어, 이들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면서 탄자니아와 아프리카 대륙의 국가들은 더 이상 약탈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성장할 파트너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 이곳을 아름다움을 소비하는 단순한 여행자의 관점이 아니라, 이 나라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함께 고민하는 동반자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탄자니아의 자연과 문화를 보호하면서도, 현지인들이 직접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공정한 무역과 지속 가능한 관광을 촉진해 줄 수 있어야 한다. CTS(한국기독교텔레비전)가 지향하는 교육 선교와 미디어 선교, 그리고 보건 의료 선교를 확장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탄자니아와 함께 나아가야 할 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를 단순히 동정심을 가지고 ‘도와주어야 할 대상’ 정도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방적인 시각이다. 탄자니아는 우리가 함께 배우고 함께 성장해야 할 동반자이며,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회복해야 할 땅이다. 아름다움과 상처가 공존하고 있는 아프리카 대륙의 모든 나라들이 단순히 경제적 성장을 넘어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넘쳐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어야 한다. 복음 송 가사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이 땅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아직도 이 땅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상처도 깊지만 아름다움도 깊은 탄자니아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공의를 회복하는 그날까지, 내가 총장으로 봉사하고 있는 <탄자니아 아프리카 연합대학교>(The United African University of Tanzania>는 오늘도 기도를 쉬지 않고, 찬양을 멈추지 않고, 예배에 집중하며, 말씀을 붙잡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한 분 하나님만 바라보며 나아갈 것이다. 김성수 목사 (탄자니아 아프리카 연합대학교 총장)
-
- 오피니언
- 설교/강의
-
[김성수 총장] 탄자니아, 아름다움 속의 상처와 우리의책임
-
-
[독자기고] 고신 현안 극복을 위한 공동포럼
- 참 감사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고신포럼과 교회비전연구원이 주최하는 고신 현안 극복을 위한 공동포럼이 3월 27일(목)-28일(금) 양일에 걸쳐 경주에서 열립니다. 고신교단이 직면한 여러 가지 현안에 관해 허심탄회하게 대화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장이 드디어 펼쳐졌습니다. 주지하다시피 고신교단은 내외부적인 극심한 위기 속에 있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모두가 교단의 미래를 염려합니다. 매년 교단 총회마다 이에 관한 직간접적 의견이 나옵니다. 그간 간헐적이고 지엽적인 논의와 토론의 장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힘이 미비했고, 지속적이지 못했습니다. 중, 장기적인 로드맵을 제시하지도 못했고, 할 수 있는 구조도 아니었습니다. 이제 이 현안들을 수면 위로 올려 함께 고민하고 방향을 찾아갈 용기를 낸 것 같습니다. 제법 큰 규모로 장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포럼’의 이름을 빌리고 있지만, 일반적인 포럼과는 다릅니다. 정해진 전문가가 발표하고, 그에 관한 질의응답이 오가는 방식이 아닙니다. 교단을 염려하고 사랑하는 참여자라면 누구라도 이미 잘 알려진 교단의 내외부적인 문제에 관해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습니다. 지역, 나이, 선, 후배 상관없이 말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보완하는 의견이나 반론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관심은 있었지만, 문제점을 잘 인지하지 못한 분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야말로 난상 토론을 통해 모두가 느끼는 문제점을 확인하며, 나아갈 방향을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과거, 우리 교단에 이런 장을 열었던 적이 있었습니까? 또 다른 의미에서도 이 공동포럼은 역사적인 자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 교단에는 보수와 개혁이라는 양대 계파가 있습니다. 때론, 쉬쉬하기도 하지만, 이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계파 정치가 성경과 신앙고백적으로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현실 교회 정치의 속성상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상황입니다. 양 계파 모두 고신을 사랑하고, 그 정체성을 사랑합니다. 다만, 추구하는 지향점에 약간의 차이점이 있는 듯합니다. 그러다 보니 갈등도 있고, 분쟁도 있습니다. 그런데, 교단의 미래를 위해 한마음을 모은 것입니다.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는 의견 차이와 갈등도 잠시 접어둘 수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과거, 우리 교단에 이런 장을 열었던 적이 있었던가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도 갈등과 분쟁이 끝을 달리는 중인데, 이런 가운데 감정을 잠시 내려놓고 주 안에서 연합할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 고신교단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분명 아름다운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편한 마음으로 많은 참여와 후원, 그리고 관심 부탁드립니다. 함께 모여 주 안에서 교제를 나누는 가운데, 허심탄회한 대화와 토론을 기대합니다. 이렇게 모여진 의견과 방향이라면 미래를 위한 충분한 동력이 될 것입니다. 교회비전연구원과 고신포럼이 힘을 모아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경헌 목사 (고신교회)
-
- 오피니언
- 기고
-
[독자기고] 고신 현안 극복을 위한 공동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