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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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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4-12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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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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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교회와 세상
    2024-03-04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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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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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3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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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4-02-09

실시간 오피니언 기사

  • [박봉석 목사] 밑가지
    살아 있는 나무는 계속 자랍니다. 나무는 줄기가 있고 그리고 가지가 있습니다. 나무가 자라는 데 따라서 가지에게는 변화가 있습니다. 원래는 윗가지였는데 나무줄기가 자람에 따라서 자기 위에 새로운 윗가지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 윗가지 역시 나중에는 또 다른 윗가지가 생겨남에 따라서 그 가지의 밑가지가 됩니다. 성숙한 교회에는 윗가지가 기꺼이 밑가지가 될 줄 아는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교회 문턱을 갓 넘어 온 새 가족들이 마음껏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윗가지 같은 성도들이 기꺼이 밑가지가 되어 줍니다. 좋은 교회가 되는 중요한 길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내가 늘 윗가지로 남으려고 하는 성도들이 많은 교회일수록 좋은 교회로 가는 길이 막히게 됩니다. 교회의 분란은 너도나도 윗가지가 되려는 교인들로 인해서 일어납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기꺼이 다른 성도의 밑가지가 되려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늘 윗가지로 남으려고 용을 쓰는 사람입니까? 그것은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가정이 좋은 가정입니까? 가족들 서로서로 밑가지가 되어 주는 가정입니다. 자식이 어릴 때에는 부모가 자식의 밑가지가 되어주고, 자식이 장성한 뒤에는 그 자식이 연로한 부모를 위한 밑가지가 되어주는 가정, 그리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서로 밑가지가 되어 주려고 애쓰는 가정, 바로 그 가정이 아름다운 사랑이 넘치는 좋은 가정입니다. 직장에서도 내가 직위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동료들의 밑가지가 되어주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동료들의 존경을 받고 그리고 내가 속한 직장을 아름답고 함께 하고 싶은 공동체가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결코 인간들의 윗가지가 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생들의 밑가지가 되어서 섬기기 위해서 이 땅에 성육신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장 밑가지의 자리인 십자가의 자리에까지 낮아지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 말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바로 그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 받은 나는 지금 기꺼이 밑가지로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윗가지가 되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성경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이 말씀 가운데서 서로 종노릇하라는 말씀이 바로 서로의 밑가지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즉 십자가의 자리에까지 낮아지심으로 우리의 가장 밑가지가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서로서로에게 섬김의 밑가지가 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내가 다른 성도의 섬김을 받아야하고 당연히 다른 사람보다 높임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주님의 십자가를 입으로만 고백하고 내 삶에서는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나아가 애통하는 마음으로 그 섬김의 십자가 밑을 통과해야만 할 사람입니다. 독자 여러분, 여러분의 배우자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그것은 수없는 잔소리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일목요연한 가르침으로도 바뀌지 않습니다. 바로 섬김으로만 바꿀 수 있습니다. 잔소리하기 전에, 가르치려하기 전에, 내가 그 사람의 섬김의 밑가지가 될 때에 그 사람을 변화로 인도하는 길을 닦게 되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기꺼이 여러분이 속한 곳의 섬김의 밑가지가 되어 보십시오. 그리할 때에 나의 섬김으로 나의 배우자가 변하고, 나의 섬김으로 가정이 변하고, 나의 섬김으로 교회가 변하고, 나의 섬김으로 세상이 변화되는 것을 볼 것입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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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앙과 삶
    2024-07-10
  • [김성수 총장] 이원론적 관점의 근원적인 뿌리
    헬라의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은 인간의 본성이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요소, 즉 지성으로 식별되는 순수한 불멸의 영혼과 불순한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했다. 그래서 그는 구원이라는 것은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육체의 사슬에서 영혼이 해방’함으로서 온다고 믿었다. 인간 본성에 대한 현대적 관점, 즉 인간의 지성을 모든 진리의 중재자의 위치로 격상시키는 세속적 관점은 플라톤의 저술이 담고 있는 한 중요한 관점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과업은 육체로부터 영혼을 순수하게 정화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플라톤을 따라서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의 지성을 ‘신성’(divine)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여기에 깊은 영향을 받은 기독교인들도 인간의 구원을 “천국을 위해 영혼을 구원”하는 관점에서 보았다. 육체와 관련된 것들에 저항하고, ‘진리’에 대한 지적인 명상에 전념함으로써 영혼의 구원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헬라의 이교적인 관점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어서 성경을이와 같은 이교적인 틀에 맞추어 해석하는 ‘기독교화’된 버전이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육신”과 관계되는 일을 피하고 개인적인 경건을 추구하는 데 전념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는 생활을 강조하는 비 성경적인 가르침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플라톤은 아마도 우리가 때때로 이 땅의 것들을 멸시하고, 허무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며 진리에 대해 사색하며 영원한 것 만을 추구하는 노래를 부를 때 아주 만족해 할 것이다. 플라톤의 견해가 아직도 여전히 기독교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또 다른 증거는 사도 바울이 사용한 ‘‘육체’와 ‘영’이라는 용어를 우리가 오해하는 방식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바울은 이 용어들을육체와 영혼을 분리시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우리의 육신의 삶이 하나님의 영(성령)에 의해 지배와 영향을 받는 삶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등지는 우상의 거짓 영에 의해 지배와 영향을 받는 삶인지를 지칭하기 위해 이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심지어 어떤 영어 번역 성경까지도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육체”와 “영”을 “높은 것”(Higher)과 “낮은 것”(Lower)으로 잘못 번역하고 있다. 성경신학자 레안드캑(Leander Keck)이 말했듯이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것은 이것이 아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영혼’이라는 용어는 ‘자아’(self)를 의미하는 시적 용어이다. 마리아가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누가복음 1:46)라고 말할 때, ‘나, 라는 의미는 자신의 온 존재로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뜻이다. 시편 기자가 “나의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만 안식을 찾나이다…”(시 62:1)라고 말할 때 그는 “나 곧 나의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쉼을 얻는다”는 의미다. 플라톤은 실제로 삶에 대한 현대의 분열된 관점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을 그가 창안한 것은 아니다. 플라톤 당시에는 이미 삶에 대한 이와 같은 분열된 관점이 사회 전반에 팽배해 있었다. 그는 단지 여기에 철학적인 표현을 했을 뿐이다. 신약성경 신학자 조지 엘돈 래드(George Eldon Ladd)는 자신의 저서 <신약성서 진리의 패턴>(The Pattern of New Testament Truth)에서 플라톤이 오르페우스파 신학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기원전 6세기부터 이 신학은 그리스 세계와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오르페우스 신학은 황소 자그레우스(Zagreus)의 종교 신화에 구현되어 있다. 자그레우스는 위대한 신 제우스의 아들이었다. 제우스의 사악한 적인 타이탄과의 전투에서 자그레우스는 황소로 변했다. 타이탄은 그를 갈가리 찢어서 먹었다. 분노한 제우스는 하늘에서 벼락을 내려 타이탄들을 쳐서 잿더미로 만들었는데, 바로 이 잿더미 속에서 인간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그레우스의 신성한 부분인 영혼과 타이탄의 사악한 부분인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결국, 플라톤의 사상에서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있고, 또한 우리 삶에 너무나도 만연해 있는 삶에 대한 분열된 관점은 종교적 신화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음이 참으로 놀랍기도 하다. 우리는 다음 호에서 이것이 갖는 중요한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한다. 김성수 목사 (탄자니아 아프리카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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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7-10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1)
    성경 어디에도 미디안의 제사장 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는데 문제 삼은 장면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실에 대해 그 어디에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하는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사건 때문에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백성들이 구스 여인 십보라를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통치에 십보라를 문제 삼지 못하도록 아예 입도 벙긋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버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명을 주셨고, 그 사명 감당하기 위해 애굽으로 오는 길에 느닷없이 모세를 죽이시려고 한 것은 구스 여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임이 분명합니다. 분명한 이유는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것에 있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 같은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발견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려 하셨습니다. 완전한 모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이셨습니다. 완전히 죽이셨습니다. 그래도 십보라는 할례언약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긴박한 순간에 할례를 행하면 남편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과 비교도 되지 않는 신분입니다. 단순히 액면가로 볼 때 우리는 시아버지와 관계한 여인입니다. (마1:3)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우리는 우상의 신전에서 몸을 팔던 기생이었습니다. 우리는 과부요,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남편을 사지로 몰고 왕과 간음한 유부녀였습니다. (마1:5-6)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인데 죄인인 줄도 모르는 죄인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답도 없으면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제 딴에 잘 사는 줄 알지만 무익한 인생이요, 단 하나도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혀에는 속임만 있습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입에는 저주와 악독만 가득합니다. (롬3:10-14)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런 우리가, 그런 우리의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도 달렸고, 예수님의 부활에 나도 부활했다고 고백합니다. 사탄이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의를 제기하고 문제 삼을 것이 수두룩한 우리입니다. 아니 우리는 문제 그 자체들입니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합니다. 십보라가 할례 언약을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십보라가 할례를 행하여 남편을 살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불가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입으로 시인합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보라가 할례언약을 아는 것과 할례를 행하는 것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서십니다. (마10: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눅12: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합니다. 문제 제기도 못합니다. 입도 벙긋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의 예배 자리에, 예수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앉혀주십니다. (계12:22-23)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이런 은혜를 받은 성도입니다. 그래도 원망하고 비방하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완전한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할례를 시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에 거하며, 주일마다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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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7-10
  • [독자기고] 불의가 법이 될 때, 저항은 의무가 된다
    최근 (사)경남성시화운동본부는 심각한 갈등 국면에 들어갔다. 복음화율이 8.6%로 제주도(7.2%)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복음화율이 가장 낮은 경남지역 목회자와 평신도 리더들이 2009년 1월에 ‘경남성시화운동본부’를 창립하고 320만 경남 도민에게 복음을 전하고 20개 시·군마다 깨끗하고 사랑이 넘치는 성시를 만들 것을 다짐하면서 출발했다. 그동안 참으로 많은 일들을 했었고, 또 《경남 기독교 뿌리 찾기운동》을 펼쳐 〈순직호주선교사묘원〉 조성과 〈경남선교120주년기념관〉 건립, 그리고 〈애국지사 손양원 목사 생가복원〉 등 뜻깊은 성과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성과들은 곧바로 한 인간의 자랑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내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린도전서 10:12) 성경 말씀은 언제나 ‘진리’이다. 인간은 본래부터 ‘악한 존재’이다. 그래서 장로교는 전적 부패(total depravity)를 인정한다. 전적 부패는 근본적 부패(radical corruption) 내지 온 데 퍼진 부패(pervasive depravity)라고 불린다. 그러기에 우리는 언제든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조금만 잘되면 자신의 성과 자랑, 업적 과시로 이어진다. 15년이 지난 작금의 경남성시화운동본부의 모습이 진정 그러하다.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하고, 인간의 교만을 경계했었어야만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어떤 모임이든지 부패와 교만으로 이어지기 쉬운 인간의 연약성을 경계하기 위해 최소한의 규칙이 있다. 경남성시화에도 규칙, 즉 「회칙」과 「정관」이 있다. 지킬려고 세운 이 회칙과 정관은 그동안 철저하게 무시되었다. ‘은혜’라는 거짓 포장지로 진짜 포장지를 벗겨 버렸었다. 거짓된 ‘은혜’ 로 포장된 작금의 우리의 모습은 정말 실망스럽다. 한 사람의 전횡(專橫)은 우리의 공동체성을 심각하게 손상시키고 있다. 「회칙」이 규정한 경남성시화운동본부의 ‘대표 회장’은 이사회의 의장 곧 이사장이 되게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한 개인이 이 규칙을 깨고 2년 임기의 이사장 직임을 수행하게 되었다(2019년~2020년). 그리고 아무런 선임 결의도 없이 또 2년의 임기를 수행했다(임의 수행, 2021~2022년), 그런데 또 2년의 임기를 더 연장해서 연임했다(임의 수행, 2023~204). 그동안 단 한 차례도 제대로 된 이사회를 가진 적이 없었다(아예 이사회록도 없음). 명색이 경상남도가 승인한 「사단법인」인데 이렇게 운영해도 되는 것인가? 더 기가 막히는 것은 6년 동안 한 번도 지키지 않고 무시해 온 그 「정관」을 개정해 3년 임기의 이사장직을 더 수행하고자 이번에는 불법 이사회와 불법 정기총회를 감행했다. 필자가 불법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절차와 요건을 갖추지 못한 채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이었던 토머스 제프슨은 “불의가 법이 될 때, 저항은 의무가 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래서 이제 필자는 이렇게 저항하는 것이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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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4-07-09
  • [독자기고] 태풍이 지나가야 바다가 깨끗해집니다.
    저는 경남성시화운동본부가 <사단법인>으로써 사단법인답지 못한 행태에 대해 항거하고자 합니다. 저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항의자, 항거자)입니다. <사단법인>의 운영은 반드시 법적인 절차를 준수해야 하고 이사회의 결의에 의해서 모든 일들이 진행되어집니다, 그래서 경상남도가 이러한 엄격한 법 준수에 의해서 진행될 단체라는 의미에서 <사단법인>을 승인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경남성시화운동본부’는 <사단법인>으로서의 의무를 준수하지 않고 있고, 일 인의 전횡에 의해 운영되고 있습니다. 저는 등기된 이사 중 한 사람으로서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는 생각에 이제 ‘항거자’로 나섭니다. <사단법인>으로써 그 ‘정관’을 철저하게 준수해야 함에도 그 ‘정관’은 아예 무시되고 있고, ‘대표회장’이 정관상 ‘이사회 대표’(일명 이사장)임에도 지난 6년 동안 정관을 아예 무시하고 일방적인 ‘이사 대표’가 경남성시화운동본부에서 전횡을 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단법인 등기에 명시된 <5천만 원>의 예치금도 ‘이사회 결의’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누가 결재를 했고, 어디에 집행 했는지에 대해서 그 누구도 제대로 해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등기된 사단법인의 예치금을 함부로 집행해도 된다는 말입니까? 저는 사법 당국과 관리 주체인 경상남도 문화예술과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합니다. 사단법인이<이사회록>도 없습니다. 참으로 웃기는 일입니다. 이사회 소집도 ‘등기’로 해야 하는데 SNS메신저 ‘카카오톡’으로 하고, 아예 ‘직인 생략’이라는 요상한 공문이 날라 옵니다. 어떤 법인이 이렇게 법적인 질서를 어기면서 법인을 운영합니까? 저는 법인 이사회의 이사로서 몇 개의 법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법인들은 이사회를 소집할 때마다 ‘등기’로 된 소집통보를 받고 있습니다. 또 이사회를 참여할 때마다 ‘인감 도장’으로 결의사항에 대해 날인하고 있습니다. 또 엄격히 예산의 수립과 집행 그리고 결산에 참여합니다. 경남성시화운동본부는 사단법인으로 출범한 이래로 단 한차례도 ‘결산 보고’를 한 적이 없습니다. 물론 이사회조차 열리지 않았으니 더 말할 필요는 없겠죠. 금번에 <경남·부산·울산 기독교 뿌리 찾기 백서>를 발행하면서도 이사회의 결의를 통해서 이 사업을 결정하고, 또 출판사 선정 시 사단법인은 2천만 원 이상일 경우 ‘경쟁 입찰’을 해야 함에도 그 어떠한 결정 과정에 대한 이사회 소집과 그 결정 단계를 거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억 원 이상의 예산 집행에 대해서 ‘결산보고’도 없었습니다. 이는 등기 이사들을 기망하는 일이고, 법적인 절차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당사자들은 마치 옳은 일이나 한 것처럼 우쭐거립니다. 참으로 ‘가관(可觀)’입니다. 그리고 점입가경(漸入佳境)입니다. 저는 등기 이사로서 6년 만에 열린 이사회에서 회의 진행 절차에 이의를 제기하다 퇴장을 명 받았습니다. 뭐 이사회의 대표는 퇴장도 명할 수 있나봅니다. 축구 심판 처럼요. 저도 이런 불법적인 이사회에서 나오고 싶었으니 이 문제는 문제 삼지 않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나 <사단법인>의 면모에 걸맞지 않은 모든 절차와 과정에 대해서 주무 부서인 경상남도 문화예술과에 이의를 제기하겠습니다. ‘진짜 심판’에게 제대로 한번 물어봐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사단법인 예치금 5천만 원의 용처에 대해서는 사법당국에 수사를 요청하겠습니다. 물론 숙의 기간도 드리겠습니다. 30일입니다. 물론 그전에 경상남도에는 이 불법적인 결의가 승인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바다는 태풍이 한번 지나가야 깨끗해집니다. 우리 경남성시화운동본부도 태풍이 한번 지나가야 깨끗해질 것입니다.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에 불어라...”제가 좋아하는 복음송인데... “예수 향기”를 날려야 할텐데...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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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2
  • [오성한 목사] 기도하면 봄바람이 불어온다
    나는 예수님처럼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먼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려고 애쓴다. 다른 사람에게 영적인 충격을 주기 전에 먼저 내가 충격을 받길 갈망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보게 되면 반드시 충격을 받고, 흥분이 될 수밖에 없다. 성령님은 흥분을 주셔서 일하게 하신다. 하나님의 영이 부은바 되면 자녀들이 장래 일을 예언하고, 늙은이는 꿈을 꾸고, 젊은이들이 이상을 보는 흥분이 일어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우리 몸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성령님께서 영원토록 함께하신다. 주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주님 안에 있다. 성령과 우리가 하나 됨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과 우리를 동일시하는 놀라운 말씀이다. 주신 것에 눈을 떠보자. 기도로 성령님께 예민하여 날마다 흥분 속에 살게 하는 생생한 말씀을 가져 보자. 우리 안에 영생하도록 솟는 샘물이 있다. 주야로 생명의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기도로 고집해 보자. 생수의 강이 우리에게 넘쳐나고 있다. 다음과 같이 주장하며 기도해보라. “오늘도 나는 성령으로 생수의 강이 넘쳐난다. 한강보다 더 크고 엄청나게 긴 강물이 나에게 있다. 생수의 강이 오늘도 나에게 넘쳐난다.”고 기도하며 소리 질러 보자. 기도한 후 나는 자주 나에게 각인 시키며 고백한다. “말씀의 강이 나에게 넘친다.”고 반복하고 반복해서 고백하고, 주장한다. 주야로 묵상하고, 쉬지 말고 부르짖어 고백할 것을 결단한다. 마음속에 흥분이 일어나기까지 집중하며, 기도하려 한다. 믿음으로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내가 먼저 보고 싶다. 마음속에 믿음의 확신이 넘치고 싶다. 기대가 넘쳐나고 싶다. 우리는 거듭났다. 조금만 변화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 상태에서 조금씩 변화되어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다.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람으로 바뀌었다. 말씀을 주장하며 기도하면 아무리 차갑게 얼어붙었던 마음일지라도 봄바람을 불어온다는 사실을 아는가? 빛에 들어왔으면 눈을 떠야 한다. 보려고 해야 한다. 빛 안에 있다하더라도 눈을 감고 있으면 여전히 안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빛 안에 있으면서도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거듭나기 전과 동일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눈을 뜨지 않아서 그렇다. 말씀으로 눈을 뜨라. 기도의 눈을 뜨라. 우리가 이전에 어두울 때 눈을 감고 있는 것에 습관이 되어서 그렇다. 믿음의 의지를 발휘해서 눈을 떠야 한다. 말씀에 “아멘”하고 반복적으로 취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눈을 억지로 벌려준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억지로 벌린 눈은 바로 감겨 버릴 수 있다. 내가 의지를 발휘해 눈을 열고, 떠야 한다. 내가 의지적으로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말씀대로 주장하고, 내세우며 스스로 부르짖어 놀라운 세계가 보일 때까지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주장하며 받아들여야 한다. 눈을 감고 있으면서 안 보인다고 야단들이다. 눈만 뜨면 보인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내게 있음을 눈을 뜨고 보라. 말씀의 눈으로 보면 흥분하지 않을 수 없다. 말씀을 가졌다고 주장하라. 성령님을 모신 성령의 사람임을 주장하라. 하나님께 푹 빠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주장하라. 큰 믿음이 있다고 말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인 것을 주장하고, 고백하라. 성령님께 붙잡힌 사람임을 주장하고 기도하라. 그것이 말씀에서 말하고 있는 바가 아닌가!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해 목숨을 버리신 주님의 사랑에 빠져 들어 사랑하는 자가 되라.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자주 말해보라. 적극적으로 말씀을 무조건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눈을 뜨는 가장 빠른 길이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한복음 4:14)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요한복음 7:38) 무엇이라고 하는가? 지금도 우리의 배에선 생수의 강이 넘쳐흐르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열심히 할 때 생수의 강이 흐른다고 하지 않았다. 마시기만 하면 된단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생수의 강이 영원히 흐른다. 잠을 자고 일어나도 우리의 머리 위엔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덮여 있다는 것을 아는가? 나는 예전엔 자고 일어나서 기도 시간을 풍성히 가져야 성령의 생수의 강이 흐르는 줄 알았다. 그래서 많은 고생을 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만히 있는데도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다(롬4:5). 우리가 가는 곳 마다 생수의 강이 흘러들어 가고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이 시간, 이 사실을 인정하라. 이것이 성경에서 하는 말씀이다. 우리에게 생수이 강이 있다. 우리가 가는 곳에 생수의 강으로 소성함이 있음을 먼저 보아야 한다. 생수의 강이 닿는 곳마다 살아남이 보여야 한다. 병이 치료되고, 귀신이 도망가는 모습의 실재를 먼저 영의 생각으로 보여야 한다. 손만 뻗어도 기적이 상식적으로 일어남을 영의 눈에 먼저 보여야 한다. 말씀을 주장하고, 취하는 부르짖음이 있어야 육의 생각이 떠나고, 영의 생각을 할 수 있다. 우리가 영의 생각을 하고 싶어도, 힘으로 안 되는 일이다. 성령님의 도우심만이 말씀을 그대로 믿게 한다. 그래서 성령님과 인격적인 대화가 필요한 것이다. 기도만 한다면 봄바람은 불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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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6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5 : 성경과 성서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I. 서언(序言) 가끔 ‘성경과 성서는 같은 말인가 아닌가?’란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여기에 대한 필자의 답변은 성경이라고 말하지만, 때로는 의문이 생길 때도 있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중국에서는 성경, 일본에서는 성서라고 하고 있고,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모든 성경을 성경전서라고 하면서 통상적으로 성경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신학교에서는 과목명을 성서신학이라고 하고 있다. 또한 일부 진보 성향의 교단에서는 성서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성서는 성경전서의 약자라고 하기도 한다. 이에 본 호에서는 이 두 용어에 대한 문자적 해석과 일부의 의견들을 논하고자 한다. II. 성경(聖經)과 성서(聖書)의 문자적 차이 1. 국어 사전의 경우: 먼저 성경(聖經)은 종교상 최고의 법전이 되는 책. 기독교의 신구약 성서, 불교의 팔만대장경, 유교의 사서오경, 회교의 코란 등으로 되어 있다. 반면 성서(聖書)는 1)성인(聖人)이 지은 서책. 2)불교는 교리를 기록한 경전(經典), 기독교는 성전(聖典), 성경(聖經)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로 볼 때 우리나라의 사전에는 성경을 모든 종교의 경전을 성경으로 통칭하고 있다. 2. 한자와 영어의 경우: 먼저 한자의 경우는 성경은 성스러울 성(聖)과 글 경, 경서(經). 성서는 성스러울 성(聖)과 글 서(書)이다. 영어로는 성경은 Holy bible, 성서는 Holy book이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에서는 다른 종교의 경전과 구별하기 위해서 정관사 The를 붙여서 The Holy bible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영어권 교회에서는 Holy book이 아닌 The Holy bible로 함으로서 성서가 아닌 성경으로 사용하고 있다. III. 한국 교회에서의 성경(聖經)과 성서(聖書)의 구분 1. 민영진 박사의 견해 : 전 대한성서공회 총무를 역임한 그의 견해를 국민일보에 게제 된 내용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의 경전을 전통적으로 중국에서는 성경, 일본에서는 불경을 성경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것과 구별하기 위해서 성서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 두 전통을 융합해서 '성경전서'란 표현을 하고 있다.”고 했다. 2. 최태영 박사의 견해 : 전 숭실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그의 견해는 이러하다. “성서에서의 서(書)는 일반적으로 모든 책을 다 포함하고 있는 반면, 경(經)은 주로 경건의 의미로 주로 사용되기 때문에 성경이라고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했다. 3. 한국 개신교의 두 용어의 변천사: 1880년대에 낱권으로 나온 성경은 ‘예수 셩교셩서’라고 했다. 하지만 1938년부터 ‘개역성경전서’라고 함으로서 그 이후의 성경들은 모두 다 성경전서라고 함으로서 성경이란 용어로 거의 통일 되었다. VI. 결 어(結語) 성서인가? 성경인가? 아직도 구교에서는 성서라고 하고 있고, 1977년 신·구교 공동으로 편찬한 성경은 ‘공동번역성서’라고 했다. 또한 개신교의 진보 교단의 일부에서는 성서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성경과 성서는 용어상 큰 차이는 없다 할지라도 보다 더 경건한 의미와 역사성과 차별함이 있는 성경으로 통일함이 더 옳을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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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6
  • [조희완 목사] 조급한 결과 (출32:1-6)
    <알렉산더>대왕이 친한 친구로부터 귀한 사냥개 두 마리를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사냥하는 것을 아주 좋아하던 <알렉산더>대왕은 너무나 기뻐하면서 그 두 마리의 개를 데리고 사냥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숲 속에서 토끼 한 마리가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웬 일인지 사냥개는 본 척도 안하고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알렉산더>대왕은 그런 사냥개에게 너무나 실망을 한 나머지 화를 참지 못하고 그 사냥개 두 마리를 다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사냥개를 선물한 친구에게, “토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형편없는 개를 선물했는가?”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너무나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친구여, 그 사냥개는 토끼를 잡기 위해서 훈련된 개들이 아니라 호랑이와 사자를 잡기 위해서 오랜 기간 동안 훈련된 값비싼 개란 말 일세”라고 말했습니다. 친구의 말을 들은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의 성급한 행동에 대해서 크게 후회를 했다는 것입니다. 외국 사람들의 눈에 비쳐진 우리 한국 사람들의 모습은 바로 너무 조급하고 성급하다는 것입니다. 너무 조급하고 성급한 나머지 매사에 “빨리빨리”라는 말을 늘 입에 달고 사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이집트를 갔었는데 공항에서 입국수속을 하면서 패스포트를 내밀자 입국 심사관이 나를 힐끔 쳐다보면서 “오, 빨리빨리!”라고 하더군요. 그 만큼 한국 사람들은 조급한 민족으로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인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모르고 조급해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조급함과 성급함을 조심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첫째로, 조급하면 범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출32:1) 둘째로, 조급하면 실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잠19:2) 셋째로, 조급하면 불행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잠21:5) 모든 것이 급하게 진행되고 불안하게 하는 이 때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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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6
  • [하수룡 장로] 하모니
    오래전 큰아들이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을 때의 일이다. 휴가로 교회 앞에서 기쁨과 감사로 가족 찬송과 더불어 악기 연주를 했는데 큰아들은 플롯, 딸은 바이올린을 맡기로 했으나 막내아들은 초등학교 갓 입학해 악기 연주가 불가능하니까 “나를 빨리 낳지... .”하고 불평했다. 형과 누나와의 나이 차로 온전히 주께 감사와 가족의 화평을 노래하는 본질적인 하모니를 이루지 못해 어린 마음에 불만을 토로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오늘날 빈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는 독일의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평가받는다. 처음부터 대중의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다. 왕족 등의 높으신 분들의 전유물이었지만 본질적인 것이 아니면 양보하여 상설적인 콘서트로 발돋움하게 했다. 새로 만든 콘서트에는 프로는 물론 아마추어 음악가들로 하모니를 이루었다. 1824년 베토벤 교향곡 9번 초연 때 모든 것을 초월한 오케스트라의 조직에서부터 1842년 지휘자 니콜라이의 주도하에 빈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는 악기들을 총동원하여 아름다운 하모니를 자랑하는 연주로 자리 잡게 되어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에서 고려를 하나로 모아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이끈 고려 황제 현종과 고려의 총사령관인 강감찬의 이야기에서 제3의 인물인 양규와의 아름다운 하모니는 칭송의 대상이다. 역사학자들은 양규를 이순신 장군과 비견될 만큼 뛰어난 전략가로 평가하고 있다. 거란과의 전쟁에서 세 사람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면 자기 소리를 내지 않고 오케스트라처럼 호흡이 멋진 완벽한 하모니가 되어 거란 전쟁을 승리로 끝낸 것은 우리의 가슴을 충분히 뛰게 하고 남는다. 성경에서도 소아시아 7교회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에서 바리새파에서 나온 거짓교사들의 어지럽힘을 바나바와 바울의 하모니에서 이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는 절대 양보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다는 사실이다. 신앙의 본질에 대한 타협은 절대 없었고 비본질적인 것은 사랑과 관용의 아름다운 하모니로 어지러운 교회의 형편을 질서 있게 잘 처리하여 화평을 이룬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가정이든 교회든 국가이든 간에 본질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자기를 비우고 양보하면 하모니를 이루게 되고 어떤 어려운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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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장칼럼
    2024-06-26
  • [박봉석 목사] 세상과 그리스도인
    배(船)는 물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배는 물과 함께 있을 때 그 존재 의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배는 물과 함께 있지만 물이 배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배는 물 위에 떠 있어야지 물이 배 안으로 들어오면 그 배는 가라앉고 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삽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살지만 세상을 자신 안에 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하되 세상이 자신 안에 들어오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즉 세상에 영적인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야 하되, 세상을 닮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사명이라 하고, 세상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는 것을 타락이라고 말을 합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지금 사명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타락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흔히 범하는 두 가지 오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속주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은둔주의입니다. 세속주의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을 내 안에 들이는 것이고, 은둔주의는 사명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가지를 다 배격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것에 대해서 요한복음 17장 16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그렇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 세상의 타락한 풍속을 사랑하여서 세상을 내 안에 들이는 세속주의 삶을 살면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라고 해서 세상을 등지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왜요? 요한복음 17장 1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의 파송을 받고 이 세상에 오신 것처럼 그 분을 믿는 그리스도인들 또한 예수님의 파송을 받고 이 세상을 사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은둔주의자들이 되면 안 되고, 오히려 이 세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서 주님이 주신 사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자매가 목사님을 찾아와서 상담을 요청하였는데,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우리 회사의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듭니다. 너무 어둡습니다. 아무래도 그 회사를 그만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목사님이 뭔가 생각하더니 그 자매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자매님, 자매님이 등불을 켠다면 어디에 켜야 할까요?” 그 말을 들은 그 자매는 “그야 어두운 곳이겠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은 재차 묻습니다. “그렇다면 언제 등불을 켜야 하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그 자매는 “당연히 어두운 때이겠지요.”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대답을 듣고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자매님의 회사의 분위기가 어둡다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자매님을 그 회사의 등불로 보내셨습니다.” 목사님은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속한 세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전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할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세속주의에 물들었습니까? 아니면 은둔주의자로 살고 있습니까? 성경적인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주의와 은둔주의를 다 같이 거부해야 합니다. 오히려 나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헛되지 않도록 이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다운 거룩한 삶을 살면서, 그리고 그 세상 속에서 내게 주신 사명을 다함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세상을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 방식이며 가치입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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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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