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행연월일 2026-04-2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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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샬롬나비 논평] 2025년 사순절을 맞는 교회와 신자의 자세
    <2025년 사순절을 맞는 교회와 신자의 자세> 사순절 기간 한국교회는 문화적 회개, 금식, 휴대폰 절제를 통한 성화의 삶을 실천하자 사순절을 맞이하여 우리 욕망을 절제하며 사회적인 소외자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펼치자 사순절(四旬節, 영어: Lent)은 부활절을 맞이하기 앞서서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정결하게 준비하기 위하여 주일을 제외한 40일간 갖는 금식과 금욕의 기간을 말하는데, 이 기간에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낮아지심과 고난을 기억하면서 회개와 기도 등 영적 훈련에 힘씀으로 경건한 삶과 영적 성장을 위한 특별한 훈련의 기회를 가진다. 사순절은 초대교회 때부터 내려오는 교회의 전통이다. 일찍부터 초대교회는 부활절에 앞서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기간을 가지는 것이 신자들의 경건과 영성 훈련에 필요함을 인식하고 부활절 전 얼마의 기간을 정해 이를 실천해 오다가, 마침내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부활절과 더불어 사순절을 교회의 절기로 지킬 것이 결정되었다. 사순절은 비록 성경에 근거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아직 교회가 동.서방 교회로 분열되기 전 모든 교회가 하나로 연합하여 결정한 우주적 교회의 결정으로, 이는 교회적 권위를 가지는 보편교회의 규례이며, 기일과 방식에 다소간 차이가 있을지라도 동.서방 교회 모두가 지키는 교회적 전통이다. 매년 맞는 사순절이지만, 2025년의 사순절은 현직 대통령 탄핵 사태라는 사상 초유의 상황 속에서 연일 전국적인 대규모 찬반 집회가 이어지고 좌우진영간 극단적 대립이 지속되고 있는 국민적 분열의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그 어느 해와도 다른 사순절을 맞게 하고 있다. 이에 샬롬나비는 2025년의 특별한 사순절을 맞아 다음과 같이 우리의 입장을 밝힌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모든 교만을 내려놓고 겸비한 마음을 갖는 사순절이 되도록 하자. 사순절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겸손히 자신을 낮추신 것과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난을 기억하는 절기이다. 성육신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본성(본체)으로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나 그러한 하나님의 지위를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발적으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그가 이처럼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신 것은 죄인된 우리를 동정하셔서 자신을 우리와 동일시 하심이었다(빌 2:5-8).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 또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기 위하여 죄인된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허물과 죄를 마치 자신의 것처럼 짊어지신 것이었다. 사순절은 그리스도의 이러한 겸손과 고난의 의미를 묵상하는 절기이다. 그러므로 2025년 사순절을 맞아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더 낮은 마음과 가난한 마음을 갖는 자세를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대통령 탄핵 사태를 맞아 우리 사회 국민은 진보와 보수의 입장에 따라 탄핵 찬반으로 갈라진 채 상호 적대적 비방과 혐오의 수준이 도를 넘어서고 있으며, 향후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서는 자칫 불복(不服) 충돌 사태로까지 치달을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더해 날로 어려워져만 가는 국내외 경제 여건 속에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와 민생의 어려움은 서민들의 삶을 더욱 힘들게 하며 미래를 절망하게 함으로 사람들의 마음에는 온통 불안과 불만과 불평이 가득한 사회가 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이념과 지역에 따른 편가르기, 서로를 향한 적개심과 투쟁 속에 나라가 질곡의 고통과 혼란 속에 있다. 이런 가운데 수많은 소시민들이 삶의 희망을 찾지 못한 채 충동적 살인과 자살이 증가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 사순절을 맞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적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는 이러한 상황 가운데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교만한 마음과 공격적 태도를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를 동정하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비록 겸손한 삶의 실천으로 자신이 억울한 손해를 보게 되더라도 죄 없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함으로 할 수 있는 대로 화평을 도모하며 사회적 화합과 통합을 이루는 일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 또한 우리는 같은 선상에서 헌법재판소에서 국회측과 대통령측이 이런 국민들의 고통과 혼란을 돌아봄으로 국가의 대의를 위하여 당사자들이 서로 겸손한 자세와 서로를 이해하려는 관용과 열린 마음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본다. 그리스도인 정치인들은 정치권 또한 여야가 상대 당에 대해 겸손한 자세를 가짐으로 상호 존중과 이해 속에 대화와 상생의 정치가 실현되게 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2.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의 삶을 사는 회개와 성화의 삶을 다짐하자. 사순절은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죄를 애통하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간절히 구함으로 신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기에 필요한 영적 변화와 성장의 기회를 가지는 기간이다. 특별히 그동안 죄의식을 가지면서도 해결하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지나쳐 온 죄나 은밀하게 행한 죄를 회개하며 새사람의 삶을 살기를 다짐하는 기간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자신 안에 있는 어찌할 수 없는 죄성을 슬퍼함으로 옛사람(죄성)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의의 본성)의 옷으로 갈아 입는 성화의 삶을 훈련하는 기간이다(엡 4:22-24). 죄를 버리고 민족의 죄를 교회가 책임지는 자세로 기도해야 하겠다. 오늘 대한민국이 이러한 국론분열과 정치 사회적으로 국민간의 대립이 심화되는 속에는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서로 상대방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 비판하는 자세가 자리잡고 있다. 오늘의 나라의 혼란 속에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잘못과 책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죄와 잘못을 하나님 앞에서 깊이 회개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돌아서야 하겠다. 3. 탐욕, 과소비, 향락을 멀리하고 물질적 금식 뿐 아니라 문화적 금식을 실천하자. 역사 이래 대한민국이 오늘 시대만큼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세계 속에 우뚝 선 나라가 되었던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국민은 국가의 번영 가운데에서 행복을 느끼기보다는 일부는 자유 대한민국을 비판하고 “헬조선”이라고 부르면서 세계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 시대만큼 탐욕과 과소비 향락이 만연한 시대도 찾기 어렵다. 기독교인들은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던 대한민국이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기까지에는 기독교와 신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과 더불어 오늘날 대한민국에 만연한 국가적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교회의 책임의식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순절 기간동안 기독교인들은 금식과 특별새벽기도 등 영적인 절제와 청빈의 삶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 더해 음식과 의복 그리고 생활방식 등에서도 비싸고 화려한 것들을 피하는 등 육적인 절제와 청빈의 삶도 실천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육체적 쾌락과 만족을 구하는 오락이나 유흥 향락을 피하고 문화적 금식을 함으로 영적 육적 경건의 훈련을 하여야 한다. 휴대폰 사용도 절제하고,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곤 휴대폰 사용 유보, 인터넷 오락 사용 유보를 실천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도록 하자. 4. 가난한 이웃, 소외계층, 외국인, 탈북민을 돌아보아 구제에 힘쓰자. 사순절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과 낮아지심과 희생과 고난을 기억하는 기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에 있어서는 하나님이시지만 자신의 하나님 됨을 주장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 곧 죄로 더럽고 비참하고 하나님과 소외된 형편에 있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공감하심으로 자신을 우리와 동일시하신 것이다. 사순절 기간 동안 교회와 신자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낮아지심의 의미를 기억함으로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들을 돌아보아 그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기초생활수급자, 차상위계층, 실직자 가족 등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들; 고아, 독거노인, 가출 청소년, 청소년 가장, 노숙자, 쪽방촌 등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와 이주민, 탈북민 등 이러한 사회적 약자들과 소외계층에 있는 사람들 또는 이들을 지원하는 단체들을 찾아 사랑의 나눔과 구제를 실천하여야 한다. 그리고 전 세계에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우리의 작은 것들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야 하겠다. 5. 한국교회는 사순절 기간 동안 깊은 통회의 기도와 회개를 통해 세상의 빛으로 거듭나자 주님이 우리를 위해 받으신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사순절을 보내며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주님이 우리의 모습을 보시며 어떻게 생각하실지를 깊이 묵상해야 하겠다. 주님을 따라오려면 네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라 오라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십자가를 지기보다는 영광을 원했고 주님의 은혜 속에 우리의 꿈을 이루고자 노력한 모습을 회개해야 한다. 우리 주변의 연약한 자를 돌보기보다는 자신의 부를 쌓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회가 갈라지고 분열할 때 주님이 원하시는 희생과 사랑을 통한 연합의 길을 걷지 못했다. 한국교회는 진보와 보수가 애국심을 다르게 표시하여 찬성과 반대로 나누어져 기도회를 가졌다. 탄핵찬성파들은 반대파를 “극우들”이라고, 반대파들은 찬성파를 “빨갱이”라고 비방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를 향하여 하나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한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모습 때문에 주님이 이름이 조롱당했고 교회는 사회가 기대하는 신뢰를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길에서 벗어난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회개하며 주님의 참된 제자되기 위해 우리의 죄악된 모습을 회개해야한다. 우리는 다음같이 기도했으면 한다: ‘주님께서 긍휼을 베푸사 우리의 연합과 상호 신뢰를 회복시켜 주소서. 그리하여 한국교회가 절망과 아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소망의 등불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분열된 한국사회 안에 예수 샬롬과 화목을 이루는 모판(母板)이 되게 하옵소서.’ 2025년 3월 31일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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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02
  • [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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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1
  • [기고] 아무리 급해도(2)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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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9
  • [기고] 고신, 우이독경(牛耳讀經) 교단과 대학교
    지난 글에 대한 반론이 나왔습니다. 고신대학교 모 교수님이 쓴 글입니다. 반론이라는 말 자체는 없지만, 내용을 보면 반론이 확실합니다. 아무런 반응이 없을 것이라 짐작했던 터라 이 반론이 참 반갑기도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내용은 ‘우이독경(牛耳讀經)’,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지난 글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염려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본질을 흐리는 말싸움, 감정싸움으로 비치지 않길 바랍니다. 한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이번에 나온 반론도 ‘위기’, ‘골든타임’을 표면적으로는 인정하는 듯 보이니까 말입니다.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지난 글에서 지적하고자 했던 것은 간단합니다. “언제까지, 얼마가 필요한가?” 다시 설명해 드립니다. ‘골든타임’으로 접어든 ‘위기’의 고신대학교에 관한 교단 지도자들의 책임 있는 대안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교단 지도자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작금의 이런저런 노력이 귀하지 않다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와 성도를 설득해 기부금을 받는 정도의 방법이 주요 대안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본질을 해결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고신 내부의 큰 소리를 들어달라는 겁니다. 지금까지 고신교단의 교회는 고신대학교를 위해 헌신해 왔습니다. 그런데 ‘위기’와 ‘골든타임’이라는 상황에 다시 더 큰 기부금을 요청하며 걷고 있습니다. 기도회를 하면서 말입니다. 저의 제안은 언제까지, 얼마를 기부해야 하며,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묻는 것입니다.그것이 어떤 것이든, 이제는 정확한 판단과 분석이라는 것을 보고 싶고, 봐야 할 때라서 그렇습니다. 저는 저의 이 제안이 간단명료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론을 보니 제 제안이 어려운 모양입니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장황하지도 않은 장황한 역사만늘어놓았습니다. 2003년, 2014년, 2015년의 이야기가 지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본질을 흐리고 있습니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73회 총회가 드디어 제대로 된 대책을 내며 일을 시작했다는 생색뿐입니다. 과거의 장황한 역사를 꼬집은 것은 이 ‘생색’을 돋보이게 하는 양념이었군요. 책임져야 할 자들은 따로 있는데, 왜 ‘우리’(?)에게 말하느냐는 마음이 행간에 엿보입니다. 설명이 어려운 듯하여 다시 설명해 드립니다. 과거에는 전혀 기부금이 없었습니까? 역대 최고 수준의 기부금을 언급하는데, 이것이 고신대학교를 살릴 수 있습니까? 이 노력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된 판단과 분석을 토대로 노력하자는 겁니다. 본질을 흐리지 마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고신대학교의 상황에 관한 미화뿐입니다. 과거에는 전혀 기부금이 없었고, 과거에는 교직원들의 헌신이 없었습니까? 교수의 81%, 직원의 42%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면, 교수의 19%와 직원의 58%와는 갈등이 없습니까? 내부적으로 나오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겁니까? 아니면 듣기 싫은 겁니까? 지금 모든 지방 사립 대학은 연합 대학을 통해서라도 글로컬 대학에 진입하는 일에 대학의 사활을 걸고 있는데(참고, https://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558472), 글로컬 대학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주장은 도대체 어떤 근거와 데이터를 가지고 하는 말입니까? 대학에 몸담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본질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카테고리가 헷갈리거나, 아니면 호도(糊塗)하는 유희삼매(遊戱三昧)만있습니다. 교육부와 지자체가 발주하는 사업에 참여한 결과로 받은 금액이 64억 중 교직원 인건비, 학교 운영비로 지출된 금액이 1원이라도 있습니까? 이 금액은 그야말로 프로그램을 위한 비용입니다.혹시 64억을 받아 학교 살림이 나아졌는데도 ‘위기’와 ‘골든타임’에 동조하며 계속 모금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계시는 겁니까? 반론자도 고신대학교의 문제가 학령인구 감소와 그에 따른 재정위기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안으로 학생들이 공부와 자기 발전을 위해 열심히 하는 것을 제시하다니요? 또한, 구조조정을 언급하면서 실제적인 문제를 언급하는 일반적인 상식은 ‘세속적인 사고방식’으로 무시하면서 교직원 연봉의 십일조를 자발적으로 기부하는 것을 언급하다니요? 도대체 구조조정과 연봉의 십일조 기부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이것이 어떻게 전체 고신대학교를 위한 상생이 되는지요? 수익 구조 다각화에 대한 노력과 5년 재정 구조에 대한 정밀 시뮬레이션 완성? 좋습니다. 바로 이런 대책을 내놓으라는 겁니다. 본질을 흐리지 말고, 그 방법을 고신대학교를 위한 더 큰 헌신과 헌금을 요구하는 고신 교회 앞에 설명해 주십시오. “모금하다가 안 되면 할 수 없고”라는 식의 미봉책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동참하지 않는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의 염려와 중심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분들의 ‘고신 사랑’을 폄하하지 마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가짜 뉴스라는 지적만있습니다. “재학생 등록률과 신입생 충원 결과를 보면 1년 100억 적자가 날 것이 분명한 사실인데”라는 표현이 가짜 뉴스인가요? 제 나름대로 정보를 통해 파악한 금액입니다. 저의 부족함 때문에 계산상 조금의 오류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정확한 정보를 주는 이가 없으니 그럴 수 있지요. 그런데 이게 가짜 뉴스라고 지적받을 표현인가요? 그렇다면 반론자는 자료를 다루는 교수 아닙니까? 병원의 적자는 어떻습니까? 학교법인 고려학원의 적자가 100억 이상 나는 것이 가짜 뉴스라면, 본질을 흐리지 말고, 진짜 뉴스로 ‘정확한 적자 금액’을 분명히 밝혀주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오히려 가짜 뉴스만 있을 뿐입니다. “혹자는 의대와 복음병원을 헐값에 인수하려는 사람들과 모의를 벌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동안 위기라고 말만 하면서 오히려 잘못된 과장 정보로 위기를 부풀리기만 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면...”??? 신학교수인 반론자는 정말 신앙 양심에 화인을 맞았습니까? 십계명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동료를 향한 가짜 뉴스를 은근히 양산하는 말장난을 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잘못된 과장 정보로 위기를 부풀렸다면, 지금 반론자가 말하는 위기와 골든타임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이 정도 매너의 교수가 신학교수로 학교 강단에 있는 고신의 현실이 개탄스럽기까지 합니다. 본질을 흐리는 공격을 멈추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책임질 수도 없고, 책임질 생각도 없는 나팔수의 아부만 있을 뿐입니다. 도대체 교수님은 우리 고신교단과 고신대학교에서 어떤 책임 있는 자리에 있습니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개진하는 것은 신자 개인의 자유이나, 총회와 고신대학교를 대변하는 듯한 이런 주장으로 교단과 고신대학교를 갈라치기 하는 (파탄 내는) 논쟁으로 몰아가는 것은 나팔수의 아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이것이 극단적인 분리주의 사고방식인 것은 모르실 리 없겠지요. 본질을 흐린 채 말장난, 정중하고 정확한 논의를 촉구합니다. 정확한 사실을 제시하는 책임 질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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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7
  • [특별기고] 통합 기념 한마음교회 유감
    폭염입니다. 여름의 태양이 작열하는 계절! 이 여름에 우리 주님 다시 오신다면 태양처럼 뜨거운 신앙 열정을 가진 사람을 찾으실 것 같습니다. 사역의 현장마다 여름 태양보다 더 뜨거워서 주님의 칭찬을 받는 우리 교단 교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듯이 우리는 성공적인 교단통합을 이었습니다. 그 통합기념으로 한마음교회를 설립한 것입니다. 전국 노회와 교회들이 마음과 기도와 물질을 모아 세운 기념비적 통합기념교회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통합기념 한마음교회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는지요? 통합기념 한마음교회는 고신교단의 여러 어른들과 선배 목사님들 그리고 총회 임원들 그리고 (구)고려의 선배들과 임원들이 힘들게 이루어낸 통합의 금자탑이며 결정체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 교회의 지 교회가 되어있습니다. 교단통합을 하면서 기념으로 교회를 설랍(립)하되 (구)고려측의 목회자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설립한 교회가 바로 한마음교회입니다. 그런데 (구)고려측의 일대 한마음교회 전임목사는 당회장권 한번 갖지 못하고, 고초를 겪다가 사임하였습니다. 한마음교회 담임목사에게 이러저런 이유로 당회장권을 이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2년 동안 무려 6번이나 당회장을 바꾸면서 힘들게 했습니다. 이런 상식 밖의 이상한 일이 통합기념 한마음교회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안양일심교회 부목사로 사역했던 이 모 목사가 담임으로 있습니다. 안양일심교회가 물심양면으로 많은 부분을 헌신한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전국 노회와 교회의 헌금으로 세운 통합기념교회를 일심교회 40주년 지교회로 삼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결과론적으로 유감스럽게도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위한 목적헌금이 한 교회의 지교회를 설립하는데 사용되는 어처구니 없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교단 전체가 바로 알고, 바로 잡아야 하겠다는 결연한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우리가 하나의 교단으로 통합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처음의 약속과 결의가 깨짐으로 아름다운 통합정신이 훼손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지만, 특히 (구)고려 측 형제들에게 깊은 상처를 준 아픔이 된 것입니다. 이런 사태로 인해 안양일심교회와 당회장은 (구)고려 측 형제들로부터 신뢰를 잃었고,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미안했던지, 무마하려고 (구)고려의 어려운 분들을 후원하겠다고 접촉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고려 목사들은 의도가 순수하지 못한 후원금을 받을 리 없지 않습니까? 지난해부터 제안하는 후원금을 거부해 왔습니다. 올해 들어와서 또다시 (구)고려 동문회에 7천만원 정도를 후원하겠다고 제의를 해왔지만 코로나로 인해 어려운 교회와 선교사들이 많이 있었지만 통합기념교회를 세우려는 큰 뜻이 있기에 거절했던 것입니다. 급기야는 비공식 채널을 통해 기어코 후원을 했습니다. 공식적으로 거부했는데도 비공식체널을 통해 기어코 다수의 교회에 상당한 후원을 감행한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저도 부교역자 약 10년, 한 교회 담임목회를 27년째 하니 37년 사역을 하며 산전수전공중전까지 다 겪은 사람입니다. 교회의 내부 사정이 있어 그렇겠거니, 일면 이해가 가지만, 그렇지만 한마음교회의 문제는 양 교단 통합기념 교회인만큼 그냥 넘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전국 노회와 교회의 헌금은 통합기념교회를 설립하기 위한 목적 헌금입니다. 그 목적대로 쓰이지 않았다면 바로 잡는 것이 마땅합니다. 따라서 교단 70주년을 맞아 통합기념교회를 다시 세우려는 계획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국 노회와 교회의 후원금 13억여원은 교단통합의 정신과 기념을 담는 명실공히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위해 쓰여져야 할 것입니다. 안양일심교회는 고신교단의 대표적인 큰 교회 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당회장 김홍석목사님은 앞으로 총회에 큰 일을 감당해야할 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중대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고 교단의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안양일심교회 김홍석목사는 통합기념 교회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하는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보여할 것입니다. 이것이 (구)고려측 대부분 형제들의 일치된 생각입니다. “순교자의 고장! 진리의 파숫군! 경건자의 훈련소, 예수의 제자들이 일어나는 산실!” 그 교단이 우리 고신 입니다. 저는 우리 교단의 일원이고 교단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고신의 목사로 함께 사역함이 늘 감사합니다. 저는 고신인이 된 것이 좋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뒤를 이어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 정신을 이어가는 우리 교단이 좋고 자랑스럽습니다. 그 어떤 일보다도 고신과 고려의 통합이 자랑스럽습니다. 통합 후 (구)고려 동문들이 연합하여 학원이사로, 고신세계선교회 이사로, 이단사이비연구소장으로, 동문회 임원으로. 각 상비부에서... 각처에서 활약하는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운 하모니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통합입니다. 이렇게 배려해 주고, 사랑해주는 우리 ‘고신’이라는 이름이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따라서 통합기념교회가 다시 설립되어 통합정신이 훼손되지 않고 계승되어 아름다운 교단을 잘 보전하고, 또 더 아름답게 발전되기를 기원하는 바램을 담아 이 글을 씁니다. *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이행하라! * 전국 노회와 교회의 목적 헌금을 반환하라! 2022년 7월 중순 신앙 열정이 여름 태양처럼 뜨겁기를 기도하며... ※ 기고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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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02
  • [신재철 목사] 안녕, 대전(大田) : “전학왔니더”
    “푸를 청(靑), 소나무 송(松). 청송에서 대전으로 전학왔니더.” 전학 수속이 끝나고 들어간 교실. 담임 선생님께서 친구들에게 자기소개를 해보라 말씀하셨다. 나는 큰 소리로 나의 고향 이름을 소개하며 인사했다. 아이들이 나의 인사보다 더 크게 웃는다. 왜 웃을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선생님께서 정해주신 빈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와 다르게 아이들 얼굴이 뽀얗다. 우리 엄마가 읍내에서 사준 이랜드 옷이 촌스럽게 느껴졌다. 어쩐지 다들 공부도 잘 할 것 같다. 주눅과 함께 찾아든 두려움도 잠시. 쉬는 시간에 몰려든 아이들의 질문 세례에 정신이 없었다. 자꾸 말을 시킨다. 그리고 아이들은 더 크게 웃는다. 아마도 나의 사투리가 재미있고 신기했던 것 같다. 대놓고 놀리는 것은 아닌데 뭔가 찝찝하다. 촌놈 하나 전학 오니 신기해서 구경하러 온 느낌이다. “뭐여~ 내가 언제~” “니가 그랬잖여~ 왜그랴~” 나를 구경하러온 친구 무리와 떨어진 곳에서 조금 큰 소리가 난다. 제법 덩치 큰 남자 아이 둘이서 대화를 하고 있다. 내게 몰려든 아이들이 이제 그쪽으로 몰려간다. 아직은 인사도 제대로 못한 옆 짝에게 상황을 물어보았다. 큰소리로 대화하는 두 명의 친구, 그곳으로 몰려드는 아이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첫인상이 좋았던 짝은 웃으며 답한다. “응, 쟤들 싸우는 거야. 그래서 구경 간거지모.” 응? 싸우는 것이라고? 저렇게 느린 말로, 저렇게 너그러운 톤으로 싸움이 가능하단 말인가? 내가 있던 경상도에서는 싸움이 나면 일단 말로 여럿 죽인다. 목소리도 얼마나 큰지 말한 대로 곧 실천할 것 같은 위협이 느껴진다. 경상도 말은 나름 살가운 인사도 종종 살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오해를 받기도;; 뭔가 대전 친구들은 푸근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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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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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신사참배의 망령이 부활했는가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는 자들과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이사야 5:20) 지금 이 순간, 이란의 이슬람 독재 정권 아래서 10대 소녀들이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자유를 외쳤다는 이유로 짐승만도 못한 만행을 당하고 있다. "처녀는 곧장 천국에 간다"는 사탄적 논리로 강간을 자행해 정조를 빼앗고 교수형에 처하는 이 광기 어린 현장 앞에 전 세계가 경악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참혹한 것은, 이 피의 정권에 동조하며 자금을 대는 대한민국 이재명 정권과, 그 주역을 거룩한 강단에 세워 '용비어천가'를 부른 한국 교계 지도자들의 영적 간음이다. 1. 국익도 국민도 없는 이재명 정권의 '해괴망측'한 독재 원조를 규탄한다! 이재명 정권은 지금 레바논에 이어 이란에까지 '인도주의'라는 허울을 쓰고 혈세를 퍼붓고 있다. 이것이 과연 누구의 돈인가? 우리 청년세대들이 짊어져야 할 빚이며 국민의 혈세다. * 배신 외교의 극치: 미국과 이란이 전쟁 중인 상황에서 적대 세력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한미 동맹의 근간을 부정하는 자폭 행위다. * 독재의 군자금: 50만 달러라는 지원금이 민간인에게 갈 것이라 믿는 바보는 없다. 이는 결국 소녀들을 살해하고 시민을 탄압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군자금이 될 뿐이다. * 주객전도의 인권: 자국민 고물가 고통과 천안함 유족의 눈물은 외면하면서, 외부 독재 정권에만 '개폼' 잡으며 생색내는 것은 국익을 팔아 자신의 사법 리스크와 정치적 폼을 사려는 비겁한 굴욕 외교다. 2. 강단을 유린한 이영훈·소강석의 '아부의 향연'과 현대판 신사참배 2026년 부활절, 거룩한 하나님의 성회인 여의도순복음교회 강단에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올라섰다. * 배교적 찬양: 이영훈 목사는 이란 정권을 돕고 교회 탄압의 중심에 선 이를 향해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지신 분"이라며 찬양했다. 소강석 목사는 "박수 안 치는 사람 누구냐"며 성도를 협박하고, "아름답습니다"라는 망언으로 아부의 극치를 보였다. * 성도 유린: 권력자의 안위를 위해 성도의 노트북 비번을 풀게 하고 다이어리까지 뒤지는 만행은 이곳이 예배당인지 공산당 검문소인지 분간할 수 없게 했다. 이는 과거 일제 강점기 강단에 일장기를 걸고 천황에게 절하던 신사참배의 데자뷔다. 살아있는 우상에게 제사상을 차려준 이 목사들은 역사와 하나님 앞에 석고대죄해야 한다. 3. 고신 저항 정신의 파산: 김홍석 전 총회장과 '기독교보'의 비겁한 변절 일제의 칼날 앞에서도 신앙의 정조를 지켰던 고신의 저항 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 김홍석 전 총회장의 침묵: 이 참담한 광경을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도 손을 들어 축도한 행위는 악의 잔치에 하나님의 복을 비는 영적 배교다. * 기독교보의 궤변: 기독교보(2026.4.11)는 이 사태를 두고 "교단과 이념을 넘어", "교회의 연합과 일치"라 보도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좌파 독재 이념과 적그리스도적 행태가 '수용 가능한 이념'이 되었는가? 어찌 그리스도가 벨리알과 함께할 수 있는가? * 저항의 거세: "분열과 시대를 넘어"라는 표현은 자유민주주의와 교회를 지키기 위해 저항하는 성도들의 입을 막으려는 교묘한 술책이다. 고신의 기관지라는 기독교보가 독재 조력자를 비판하기는커녕 '은혜로운 예배'라고 미화하는 것은 고신 선배들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다. 4. 자칭 '고사모'의 선택적 정의와 위선을 고발한다! 손현보 목사가 강단에서 시대를 향해 선지자적 경고를 날릴 때는 '정교분리'와 '선거법'을 들먹이며 일간지에 광고까지 내어 정죄하던 자칭 '고사모' 목사들은 지금 어디에 숨었는가? * 손현보의 회개 촉구는 징계 대상이고, 이영훈·소강석의 굴종적 아부는 연합인가? * 거짓의 아비가 부활절 강단에 서서 성도들을 유린하는데도 '입꾹닫'하고 있는 당신들의 신학은 이미 파산했다. 당신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한상동 목사를 비판하던 가결자들과 다를 바 없는 비겁한 기회주의자들일 뿐이다. 결론: 주님, 이 땅의 촛대를 옮기지 마시옵소서! 이란의 소녀들이 처참하게 도살당하는 현실을 외면한 채, 권력자에게 강단을 팔아넘기고 '회복'과 '희망'이라는 거짓 평화를 노래하는 한국 교회는 심판의 대상이다. 이재명 정권은 즉각 독재 지원을 중단하라! 이영훈, 소강석, 김홍석과 고사모는 배교 행위를 회개하라! 기독교보는 저항 정신을 회복하고 위선적 보도를 중단하라! 우리는 거룩한 곳에 선 멸망의 가증한 것들을 향해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외쳐야 한다. 그것만이 고신이 살고, 한국 교회가 다시 일어서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촛대는 반드시 이 땅에서 옮겨질 것이다.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잠언 31:8)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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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17
  • [김경헌 목사] 총대 파송 하지 말자 – ‘부결’
    노회의 제일 중요한 사명은 목사를 양성하는 것과 그 사역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 보호하는 데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회기에 부총회장으로 세움을 받아 올해 총회장이 되어야 했던 김문훈 목사는 우리 부산서부노회에 속한 우리의 동역자입니다. 노회를 넘어 고신총회에서 현실적으로 가장 큰 일을 감당하던 포도원교회를 목회하는 우리 노회의 아들입니다. 세상에서도 내 자식이 분명히 잘못한 일이지만 부모가 일단 책임을 지고 모든 것을 안고 가는 것이 선행된 다음, 그 자녀의 잘잘못을 논합니다. 안타까웠던 것은 목사의 어머니 격인 노회도 책임을 지겠다는 생각보다는 세상 여론의 눈치를 보며 노회가 안게 될 부담부터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다 연약하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세상의 눈치를 본다는 것,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가 세상 눈치를 보고 세상의 인정을 받으려는 것을 마치 복음적인 사역처럼 생각하는데, 교회가 하나님의 인정보다 세상의 평가를 우선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안타까움을 넘어 참담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더럽혀지는 것과 교회가 어려움을 당하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데, 개인의 자리 욕심과 계파의 정치 논리로 동료 목사라는 자들이 공의와 정의라는 명분으로 동료 목사의 비리를 수집하고 세상에 발설하여, 한 목사의 잘못을 빌미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기에 빠뜨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공의와 정의를 주장하는 것 같지만 한 꺼풀만 벗기면 철저한 자기중심적인 욕심과 세상보다 더 비열한 정치 논리가 뱀이 꽈리를 틀 듯 그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피해를 입고 지금도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이용한 간교한 무리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실 것이며, 고신총회가 반드시 밝혀내리라 생각합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어려운 시대를 살며 목회하게 될 후배와 교회들을 위해서도 반드시 밝혀내어 교회를 위험에 빠뜨리는 전례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투서를 돌리고 연명하는 것조차 불법입니다. 특히 우리 고신은 세상 법정에 고발하는 문제 때문에 오랫동안 아팠던 역사가 있습니다. 교회를 정화하고 공의와 정의를 원했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성경에 기초한 교회법을 따라 정당한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현재 이 문제로 가장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포도원교회일 것입니다. 김문훈 목사도 오늘의 포도원교회가 없었다면 우리가 비난하는 일을 결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보다도 소중한 포도원교회를 사임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교회의 부름을 받아 목회하는 목사에게는 최고의 형벌입니다. 어려움과 위기에 처해 있는 포도원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포도원교회의 처절한 노력과 수고를 조금 더 지켜보십시다. 아마 많은 분이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여러 의견이 나오고 여러 제안이 있었던 것도 모두 어머니 노회로서의 책임감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저도 우리 노회 목사회원 1번으로서 같은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지금이라도 총회와 한국교회 앞에 우리 노회가 책임지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총회 총대로 나가고 총회에서 직분을 맡아 봉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노회의 추천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총회 총대를 추천한 노회는 총대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동시에 노회는 고신총회에 대한 책임도 있습니다. 노회가 책임을 지는데 눈 가리고 아웅하면 더 큰 웃음거리가 되고, 그렇다고 총회에 대한 책임도 회피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우리 노회는 올해 총회 회계로 수고하셔야 하는 장로님이 있고, 선출직 이사도 있으며, 특별국 국원도 있고, 총회를 운영하는 상임위원회 위원장도 있습니다. 고신총회의 장자로 자부하는 우리 부산서부노회가 총회 임원과 총회 선출직 이사, 특별국 국원과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제외하고 이번 총회 회기에는 총대를 파송하지 않는 것으로, 고신총회 앞에 최소한의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였으면 합니다. 이 안이 노회에서 받아들여진다면 저는 헌법위원회 특별국 국원이지만 총대로 가지 않겠습니다. 이상과 같이 총회 총대 선정에 대한 회의 진행 발언에 대해 정식으로 동의안을 냅니다. 이번 총회 회기에 우리 부산서부노회는 총회 임원 장로, 선출직 이사, 총회 특별국원, 총회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제외하고 총대를 파송하지 않기로 동의합니다.※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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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15
  • [연속기고7] 이만열의 이승만 대통령 비하와 김구 성역화의 위험한 이분법
    서론: 건국의 아버지를 지우고 실패한 낭만을 신격화하다 지난 연재를 통해 필자는 이만열 교수가 '친일 프레임'을 어떻게 악용하여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목들을 사상적으로 숙청했는지 폭로했다. 그러나 이만열 사관의 진정한 목적지는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인 이승만 대통령을 철저히 폄훼하고, 그 대척점에 서 있던 김구 선생을 신격화하여 성도들에게 그릇된 국가관을 심어주는 것이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는 대한민국을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로 낙인찍는 자학적 사관의 핵심 동력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상적 오염이 고신 교단 내부로 깊숙이 침투했다는 점이다. 소위 '고신을 사랑하는 모임(고사모)'을 자처하는 이들이 등장하고, 수많은 목회자나 심지어 총회장까지도 제주 4.3 사건의 본질 왜곡이나 현 이재명 정권의 정교분리 오독, 차별금지법 등에 대해 침묵하거나 동조하게 만드는 비극적 결과를 초래했다. 1. 김구의 독립 투쟁과 친북적 반(反)건국 행위 사이의 엄격한 구분 이만열은 백범 김구 선생이 일제강점기에 바친 고귀한 독립 투쟁의 헌신을 이용해, 1948년 건국 반대라는 명백한 정치적 실책까지 '민족적 정의'로 포장하는 논리를 펼친다. 그는 김구가 선택한 남북협상 노선을 분단을 막기 위한 유일한 민족적 정통성을 지닌 길로 평가하며, 반대로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노선은 분단을 고착화한 행위로 비판해 왔다. 그러나 김구 선생의 애국심은 오직 독립운동의 현장까지만 인정될 수 있는 것이며, 건국 과정에서의 친북적 행보는 결코 애국으로 미화될 수 없다. 1) 이만열의 주장 요지:그는 김구의 남북협상 노선이야말로 민족 분단을 막으려 했던 정통성 있는 대안이었다고 평가하며, 대한민국의 정통성 역시 이승만의 단독정부가 아닌 김구와 김규식이 추구했던 통일 정부 수립 노력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조: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 의식』 등) 2) [비평]:김구 선생의 독립운동 시기 헌신은 존경받아 마땅하나, 1948년 건국 과정에서의 행태는 단호히 비판받아야 한다. 당시 김구는 김일성이 쳐놓은 통일전선전술의 덫에 빠져 남북협상이라는 명분 아래 대한민국 건국을 노골적으로 방해했다. 이는 소련과 김일성의 적화 야욕에 이용당한 역사적 과오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이 세운 자유 민주의 기틀을 흔든 반건국적 행위에 가깝다. 이만열은 이러한 실체를 외면한 채 김구의 실패한 행보를 민족의 정통성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2. 제주 4.3 사건 왜곡: 공산 폭동을 ‘미군에 대한 항거’로 둔갑시키다 이만열식 사관이 낳은 가장 파괴적인 결과물은 제주 4.3 사건의 본질을 뒤바꾼 조직적 역사 공정이다. 그는 4.3을 단독 정부 수립에 저항한 민중들의 투쟁이자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의 국가 폭력에 의한 희생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사상은 고신 내 유력 목회자들에게까지 전염되었다. 필자는 과거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 원로)가 손봉호 교수의 영향을 받은 일부 유력 목회자들과 함께 제주 전적지를 탐방하며, "제주 4.3 사건은 미군의 말발굽 아래 희생당한 제주 도민들이 미군과 이승만 정권에 항거한 저항"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는 사실을 한 참석자로부터 직접 듣고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특히 4.3의 주동자 김달삼은 북한의 지령을 받고 1948년 4월 3일 새벽, 제주 전역의 경찰지소를 습격하며 무장 폭동을 일으켰고 수많은 경찰과 우익 인사, 양민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폭동 직후 북한으로 도주한 그는 김일성으로부터 '국기훈장 2급'을 수여받았다. 이후 6.25 전쟁 직전인 1949년 말, 다시 유격대장으로 남파되어 활동하다가 1950년 3월 20일 강원도 정선 승지골(일명 '김달삼 모가지 잘린 골')에서 광복군 출신 김관오 연대장이 이끄는 국군 제8사단에 의해 사살되었다. 김달삼이 일으킨 제주 4.3 사건이 어떻게 '민주 항쟁'인가? 이 명백한 반란 수괴를 미화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1) 이만열의 주장 요지:그는 제주 4.3을 통일 정부 수립을 갈망하던 민중들이 분단 노선에 저항하며 일어난 사건으로 규정하며, 그 비극의 책임을 이승만 정권과 외세인 미군에 돌린다. 또한 5.10 선거 거부를 민족 자결주의적 저항의 관점에서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조: 이만열, 『한국 현대사와 기독교』 등) 2) [비평]: 4.3의 본질은 공산 세력의 무장 반란이다. 특히 당시 공산 폭도들에 의해 자행된 '기독교 순교적 진실'을 이만열은 침묵한다. 제주 최초의 순교자 이도종 목사는 공산 폭도들에게 생매장당했고, 삼양교회 김임종 집사 등 수많은 성도가 살해되었다. 당시 제주 27개 교회 중 12개 교회가 소실된 이 참혹한 잔혹사를 외면하고 공산 반란군 주동자를 '민주 항쟁가'로 미화하는 것은 기독교 역사학자로서의 양심을 저버린 반역행위다. 이런 제주 4.3 사건을 민주항쟁이라며 전적지 순례를 한 이동원 목사 등 일부 귀가 얇은 복음주의 목회자들은 이만열식 역사왜곡에서 속히 벗어나기를 촉구한다. 3. 이승만의 통찰을 거부하는 좌파적 역사 공정 이만열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며, 이를 단순히 '정부 수립'으로 폄하한다. 그는 대한민국이 1919년 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이미 건국되었다고 주장하며 2019년을 '건국 100주년'으로 기념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쳐왔다. 그러나 이는 국제법상 국가의 3요소인 국민, 영토, 주권이 실재하지 않았던 임시정부의 한계를 무시한 감성적 민족주의에 불과하다. 만약 1919년에 이미 나라가 세워졌다면, 우리 선조들은 있지도 않은 나라를 찾기 위해 왜 그토록 피 흘려 독립운동을 했단 말인가? 건국된 나라를 되찾는 것은 '광복'이지 '독립운동'이 될 수 없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1) 이만열의 주장 요지 ①: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민족 분단을 선택한 인물이며, 친일 세력을 비호하여 건국 정통성을 훼손했다.” (출처: 『우리 역사 5000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만열의 주장 요지 ②: “대한민국은 1919년 기미독립선언과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미 건국되었다.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주장하는 것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부정하고 분단을 정당화하는 반역사적 행위다.” (출처: 이만열 기고 및 ‘건국 100주년’ 관련 강연 요지) 2) [비평]:이만열의 '1919년 건국설'은 듣기엔 그럴듯하나 치명적인 논리적 파탄에 직면한다. 만약 그의 주장대로 1919년에 이미 나라가 건국되었다면, 우리 선조들은 '이미 건국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왜 그토록 피 흘려 독립운동을 했단 말인가? 건국이 이미 완료되었다면 독립운동은 존재할 이유가 없으며, 이는 선조들의 고귀한 투쟁을 '이미 있는 것을 찾는' 무의미한 반복으로 격하시키는 궤변이다. 국제법적으로 국가는 국민, 영토, 주권이라는 3요소가 확립되어야 한다. 1919년 상해 임시정부는 말 그대로 나라를 세우기 위한 '준비 기구'였을 뿐, 실질적인 영토를 통치하거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1948년 8월 15일 건국은 한반도 내에 실체적인 국민이 구성되고, 영토에 대한 통치권이 확립되었으며, 대외적으로 주권을 선포한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실체가 완성된 기점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국가의 토대 위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세웠고, '한미동맹'과 '기독교 입국론'이라는 강력한 안전판을 구축했다.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이 북한의 공산 정권과 차별화되는 정통성의 근거다. 이만열은 이승만을 친일파 비호자로 매도하며 건국의 정통성을 깎아내리지만, 정작 북한 정권 핵심부에 포진했던 김영주, 강양욱, 정준택 같은 골수 친일 부역자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한다. 결국, 건국을 분단의 원죄로 몰아세우는 그의 억지는 집안에 불길이 닥칠 때 남은 가족이라도 살리려 방화문을 닫은 소방관을 향해, '왜 가족이 못 만나게 가로막느냐'며 불을 지른 방화범 대신 소방관을 꾸짖는 꼴이다. 결론: 거짓된 이분법을 깨고 건국 정신을 회복하라 이만열 교수가 쳐놓은 이승만과 김구의 거짓된 이분법, 그리고 제주 4.3 사건의 왜곡은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을 파괴하려는 사상적 덫이다. 이 덫에 걸린 상당수 복음주의 목회자들과 '자칭 고사모' 목사들은 고신의 순결한 정신을 좌경화의 도구로 전락시키고 있다. 우리는 김구 선생의 독립운동기 애국심은 존중하되, 1948년 건국 과정에서 김일성에게 철저히 이용당해 이승만의 건국을 방해한 그의 친북적 역사적 과오와는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자학 사관을 걷어내지 않는 한 고신과 한국 교회는 결코 바로 설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승만을 통해 허락하신 자유 대한민국과 고신 교회의 정통성을 지켜내기 위해 이만열의 왜곡된 역사인식과 선전선동의 칼날을 반드시 꺾어야만 한다. 그것만이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개혁주의 정절을 회복하는 길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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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14
  • [연속기고6] 이만열의 친일 프레임과 역사적 살인: 건국 주역들을 향한 사상적 테러
    서론:손봉호의 윤리가 씨앗이라면, 이만열의 사관은 그 독초의 토양이다 앞선 기고(1~5번)를 통해 필자는 손봉호 교수가 기독교 윤리라는 가면을 쓰고 한국 교회를 좌경화의 늪으로 어떻게 인도했는지 파헤쳤다. 그러나 손 교수의 윤리 담론이 고신과 SFC 내부에서 독버섯처럼 번질 수 있었던 결정적인 배경에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치욕의 역사로 규정한 이만열 교수의 왜곡된 역사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만열은 친일 청산이라는 도덕적 결벽증을 무기 삼아 건국의 정통성을 난도질했으며, 고신 정신의 본질인 순교 신앙을 좌파적 민족주의 투쟁으로 변질시킨 장본인이다. 1. 국가 상징과 호국 영웅을 향한 인격적 살인 이만열 교수가 주도한 『친일인명사전』은 객관적 사료에 근거한 학술적 결과물이 아니라 특정 이데올로기에 기반한 사상적 숙청이자 정치적 낙인찍기의 산물이다. 그는 역사의 입체성을 무시하고 오직 '친일'이라는 단일한 잣대만을 휘둘러 대한민국 건국의 기틀을 닦은 거목들을 사상적으로 매장하는 데 몰두하였다. 이만열의 주장 ①:“백선엽은 간도특설대 출신으로 독립군을 때려잡은 반민족 행위자다. 그의 공로를 기리는 것은 민족 정기를 훼손하는 일이다.” (출처: 이만열, 「백선엽의 친일 행적과 국립묘지 안장 문제」, 2020년 언론 기고 및 강연 요약) 이만열의 주장 ②: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는 친일파다. 친일 잔재인 애국가를 국가로 부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출처: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 의식』, 지식산업사, 1991) [비평]:이는 일제강점기라는 처절한 역사의 맥락을 무시한 처사이다. 6.25 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백선엽 장군을 간도특설대 경력만으로 단죄하는 것은 국군의 정통성을 파괴하려는 시도이다. 당시 간도특설대의 주요 토벌 대상은 독립군이 아닌 중공군과 팔로군이었으며, 1930년대 중반 이후 만주의 독립군 세력은 이미 궤멸되거나 소련으로 이동한 상태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철저히 묵살되었다. 또한 애국가를 공격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상징 자체를 부정하려는 고도의 사상적 테러이자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위험한 역사 부정주의이다. 2. 근대화의 선구자들을 향한 주홍글씨와 '선택적 단죄'의 이중성 이만열은 교육, 언론, 문학 등 각 분야에서 대한민국 근대화의 초석을 놓은 거인들을 모조리 친일 부역자로 매도하며 그들의 사회적 성취를 부정하였다. 그는 시대적 한계 속에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려 했던 선구자들의 고뇌는 외면한 채 결과론적인 비판만을 쏟아냈다. 이만열의 주장 ①: “김성수, 김활란 등은 일제에 협력한 반민족 인사들이다. 그들이 세운 교육·언론 기관은 친일의 토대 위에 서 있다.” (출처: 이만열,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역사적 의의」, 민족문제연구소 강연, 2009) 이만열의 주장 ②: “민족 지성이라 불리는 최남선과 이광수 역시 결국 변절한 부역자들에 불과하다.” (출처: 이만열, 『우리 역사 5000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바다출판사, 2000) [비평]:이들이 닦아놓은 근대 문명의 토대가 없었다면 오늘날 세계가 부러워하는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 없었다. 더욱 경악스러운 것은 이만열의 '선택적 단죄'이다. 대한민국 건국 세력의 행적은 현미경으로 파헤치면서도, 정작 북한 정권 핵심부에 포진했던 수많은 친일 인사들(김일성의 동생 김영주, 부주석 김차승 등)에 대해서는 기이할 정도로 침묵한다. 민족정기를 말하면서 북한의 노골적인 친일파 등용은 눈감아주는 그의 역사학은 공정한 학문이 아니라 특정 진영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역사를 흉기로 사용한 정치 선동일 뿐이다. 3. 순교 신앙을 민족 해방 투쟁으로 격하시킨 영적 범죄 이만열 교수의 가장 큰 해악은 고신의 자랑인 신사참배 반대 운동의 신앙적 성격을 왜곡하여 세속적 민족주의의 틀 안으로 가두어버린 데 있다. 그는 선배 목회자들이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 당했던 고난을 단순한 항일 운동의 일종으로 해석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초월적 가치를 훼손하였다. 이만열의 주장 ①: “신사참배 반대 운동은 민족 정기를 지키기 위한 민족주의적 항일 투쟁의 연장선에 있다.” (출처: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 의식』, 지식산업사, 1991) 이만열의 주장 ②: “한국 기독교의 역사적 사명은 민족의 고난과 함께하며 사회를 변혁하는 데 있다.” (출처: 이만열, 「기독교 역사관의 재정립」, 기독교역사연구소 세미나 강연, 2010) [비평]:고신 선배들의 저항은 민족주의 차원의 항일 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1계명을 지키기 위해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말씀을 수호하려 했던 거룩한 '신앙 수호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만열은 이를 세속적인 민족 해방 투쟁으로 격하시켜 신앙의 본질을 변질시켰다. 이러한 영적 왜곡은 SFC 간사들과 신학생들이 성경적 개혁주의 신학보다 좌파적 민중사관에 더 열광하게 만드는 사상적 통로가 되었다. 신앙의 선배들이 피로 지킨 제단 위에 이만열은 좌파 이데올로기의 향로를 피워 올린 것이다. 결론:고신의 심장을 겨눈 이만열의 칼을 꺾어야 한다 이만열 교수는 기독교 역사학자라는 학문적 권위를 누리며 정작 고신의 뿌리인 자유민주주의와 성경적 보수 신학의 기틀을 허무는 데 앞장서 왔다. 그의 사상은 성경이 말하는 절대 진리가 아니라 특정 정치 세력의 논리를 대변하는 변증법적 역사론에 불과하다. 손봉호의 윤리가 한국 교회의 손발을 묶었다면 이만열의 사관은 한국 교회의 머리와 심장을 좌경화로 세뇌시켰다. 이제 고신 총회와 깨어있는 성도들은 직시해야 한다. 이만열 식의 자학적 역사관을 단호히 배격하고 하나님께서 이승만 대통령을 통해 허락하신 자유 대한민국과 고신 교회의 정통성을 회복해야 한다. 이 거짓된 사슬을 끊어낼 때 비로소 고신의 순교 정신이 다시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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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14
  • [기고] "부활절 연합예배에서의 이영훈, 소강석의 망언과 이에 대해 침묵하는 자칭 고사모를 강력 규탄한다"
    고명길 목사 (고신애국지도자연합 전문위원장) 마태복음 24장,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하신 예수님의 경고가 오늘날 대한민국 강단에서 재현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2026년 4월 5일 부활절, 한국 교회의 심장부라 자부하는 여의도순복음교회 강단에서 우리는 거짓과 술수의 권력자가 등판하는 참담한 광경을 목도했다. 그러나 더 절망적인 것은, 평소 강단의 거룩함을 외치며 동료 목회자에게 돌을 던지던 자칭 고사모(고신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모임) 목사들의 굴욕적인 침묵이다. 1. 손현보 목사의 선지자적 외침: 고사모의 광기 어린 정죄 과거 세계로교회 손현보 목사는 강단에서 “이재명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고 외쳤다. 이는 특정 개인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거스르고 차별금지법 등을 통해 교회를 억압하려는 거대 세력에 대한 선지자적 경고였다. 또한 그는 예배 후 교육감 후보를 소개하며 기독교적 가치를 수호할 것을 독려했다. 당시 고사모 목사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선거법 위반과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강대상에서 정치적 발언을 했다고 손 목사를 총공격했다. 심지어 고신 총회 석상에서까지 나서서 손 목사를 비판하며 징계를 요구하고, 일간지에 광고를 내며 그를 신학적 타락자로 몰아세웠다. 그들에게 손현보의 워딩은 반드시 척결해야 할 정치 선동이었다. 2. 이영훈·소강석의 아부의 향연: 부활절 거룩한 성전의 참사 그렇다면 이번 부활절 연합예배 강단에서 벌어진 일은 무엇인가. 이영훈 목사와 소강석 목사는 차별금지법과 교회해체법을 주도하는 이재명을 강단에 세우고 아부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이영훈 목사는 이재명을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 가장 무거운 짐을 짊어지시고 한국을 이끌고 계신 분"이라고 찬양적 소개를 했다. 소강석 목사는 “박수 안치는 사람 누구예요. 이따 좀 남으라"고 윽박질렀고, "실개천 출신이지만 결코 그 개천을 잊지 않으시며 국민화합과 실용정치에 올인하는 모습이 한국 교회 보기에도 참 아름답습니다”라는 망언을 쏟아냈다. 수많은 사법적 의혹과 교회 탄압의 중심에 있는 인물을 향해 ‘무거운 짐을 짊어 지셨다’, ‘아름답습니다’ 라는 찬사를 보낸 것은 아부를 넘어선 영적 배교다. 3. 성도를 유린한 살벌한 검문과 신사참배의 데자뷔 강단 아래의 풍경은 더욱 처참했다. 현장 성도의 증언에 따르면, 교회 입구에서 권력자의 안전을 위해 성도의 개인 노트북 비밀번호를 강제로 풀게 하고 개인 다이어리까지 뒤지는 만행이 저질러졌다. 예배의 주인인 하나님보다 권력자의 안위가 우선시된 현장은 중국 공산당 치하의 예배와 다를 바 없었다. 이 모습은 과거 일제 강점기, 강단에 일장기를 걸고 천황을 향해 절하던 신사참배의 현장과 겹쳐진다. 당시 친일 목사들은 민족의 안녕과 평화를 명분으로 내세워 우상에게 무릎 꿇었다. 오늘날 이영훈·소강석 목사가 차별금지법과 교회해체법을 획책하는 권력자에게 강단을 내어준 것은, 형태만 다를 뿐 살아있는 우상에게 제사상을 차려준 현대판 신사참배와 다를 바 없다. 4. 고사모의 선택적 침묵: 당신들의 신학은 파산했다 우리는 묻는다. 손현보 목사의 직언에는 선거법 위반이라며 총회 석상에서까지 칼을 휘두르던 고사모 목사들은 왜 이 명백한 강단 유린 사건 앞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는가. 손현보의 회개 촉구는 징계 대상이고, 이영훈·소강석의 굴종적 아부는 연합인가? 교육감 후보 소개는 강단 오염이고, 거짓의 아비 이재명의 축사는 한국 교회의 영광인가? 이재명의 실체를 경고하는 손현보의 말은 정치라며 정죄하더니, 이재명이 아름답다며 박수를 강요하는 이영훈·소강석의 말에는 침묵하는 고사모. 당신들의 정교분리는 신학적 원칙이 아니라, 자신들의 반성경적 논리를 강요했던 비겁한 고무줄 잣대였음이 만천하에 증명되었다. 당신들이야말로 신사참배를 반대하던 한상동 목사 등을 비판한 신사참배 가결자들과 무엇이 다른가. 5. 고신 정신은 권력 앞의 비겁한 침묵이 아니다 고신 정신은 신사참배라는 거대 권력 앞에 목숨을 걸고 '아니오'를 외쳤던 선배들의 피 위에 서 있다. 교회 파괴자인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느라 성도들을 유린하고 강단을 팔아넘긴 이 못된 현대판 신사참배자들을 향해 입 닫고 침묵하는 것은 고신 정신과 선배들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다. 고사모 목사들에게 강력히 요구한다. 손현보 목사에게 퍼부었던 그 서슬 퍼런 비판의 잣대를 이영훈·소강석 목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라. 즉각 성명서를 내고 그들의 배교적 행태에 대한 회개와 책임을 요구하라. 그리고 그들의 교회 앞에도 가서 정교분리를 어겼다는 당신들의 논리대로 피켓과 현수막을 들고 가서 시위도 하고 기도회도 열라. 거짓의 아비가 부활절 강단에 선 이 엄중한 사태 앞에서 끝까지 '입꾹닫'하고 침묵한다면, 당신들은 더 이상 고신이라는 거룩한 이름을 입에 담을 자격도 없는 철부지 목사들이고 장로들일 뿐이다. 부활절 강단은 권력자의 무대가 결코 아니다. 오직 부활하신 주님만이 영광받을 거룩한 곳이다. 선지자적 외침이 사라지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강단은 더 이상 교회의 강단이 아니다. 우리는 거룩한 곳에 선 이재명과 그 무리들에 대해 “당신이 그 사람이라”, “저 여우에게 가서 이르라”는 경고의 말씀을 다 같이 강하게 외쳐야 한다. 그것만이 고신이 살고, 한국 교회가 다시 일어서는 길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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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10
  • [연속기고5] 손봉호의 신학적 이탈, 그 뿌리는 ‘칸트적 합리주의’인가?
    서론: 뿌리가 다르면 열매도 다르다 지난 호에서 필자는 손봉호 교수의 신학적 정체성이 정통 개혁주의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왜 그는 그토록 ‘윤리’를 신앙의 본질보다 앞세우며 복음을 도덕적 차원으로 격하시키는가? 그 해답은 그의 학문적 모태인 ‘칸트(Immanuel Kant) 철학’에 있다. 손 교수는 화란 자유대학교에서 칸트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철학자이며, 그의 사고 체계 전반은 칸트의 윤리학과 의무론적 사고방식, 합리주의적 도덕 철학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문제는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는 칸트의 철학이 하나님의 절대 계시를 다루는 기독교 신학과 만날 때, 신앙의 초월성이 파괴되는 비극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1. 칸트의 ‘이성의 한계’가 성경의 ‘초월성’을 가로막다 칸트는 인간의 인식 영역을 두 가지로 나누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경험할 수 있는 세계인 '현상계'와, 신이나 영혼처럼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영역인 ‘본체계(Noumena)’다. 칸트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결코 이 ‘본체계’를 들여다보거나 깨달을 수 없다는 ‘인식의 장벽’을 높이 세웠다. 즉, "하나님은 인간이 온전히 알 수 없는 분이니, 골치 아픈 신앙의 신비나 절대 진리는 제쳐두고 오직 인간의 머리로 이해 가능한 ‘도덕적 실천’에만 집중하자"는 논리다. 손봉호 교수는 이러한 칸트적 사고에 갇혀, 하나님의 초월적인 계시인 성경 말씀보다 우리 눈에 보이고 이성으로 납득되는 ‘시대적 대세’와 ‘사회적 합리성’을 신앙의 주인으로 모시는 위험한 우를 범하고 있다. 손봉호 ①: “동성애 반대 운동이 성경적이라 할지라도, 이미 세계적인 대세가 되어버린 흐름을 거스르기는 어렵다. 교회가 시대적 조류를 읽지 못하면 고립될 뿐이다.” (출처: 손봉호 교수 강연 및 언론 인터뷰 취지 요약) 손봉호 ②: “기독교가 아무리 신비한 체험을 강조해도, 그것이 보편적인 도덕적 합리성을 갖추지 못하면 세상을 설득할 수 없다.” (출처: 손봉호, 『기독교 윤리』 강연 중) [비평]:이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성경의 초월성을 ‘시대적 대세’라는 세속적 잣대 아래 굴복시키는 신앙적 변절이다. 성경은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손봉호는 ‘대세’를 운운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시대적 유행과 타협시키려 한다. 진리는 다수결이나 대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러한 손 교수의 사고방식은 시대정신을 계시보다 앞세우는 ‘자유주의(Liberalism)’의 전형이며, 성경의 절대적 가치를 상대화시키는 ‘세속적 합리주의’의 발로다. 그는 칸트의 안경으로 세상을 보느라 하나님의 불붙는 진노와 거룩한 법도를 보지 못하고 있다. 2. ‘정언명령’이 ‘복음의 은혜’를 대체하는 율법주의적 독소 칸트의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이란 어떤 조건이나 보상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이 세운 도덕 법칙이기에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무조건적 의무'를 뜻한다. 문제는 이 명령의 주체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이라는 점이다. 손봉호 교수는 이 칸트적 의무론을 기독교에 이식하여, 성도의 삶을 기쁨의 열매가 아닌 엄격한 도덕적 의무 수행으로 변질시켰다. 손봉호 ①: “그리스도인이라면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해야 한다. 그것이 기독교의 존재 이유다.” (출처: 손봉호 교수 다수 칼럼) 손봉호 ②: “윤리적 실천이 없는 신앙은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세상의 지탄을 받는 교회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다.” (출처: 방송 인터뷰 및 대담) [비평]:그리스도인의 정직과 윤리는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여 즐거이 맺는 성령의 열매이지, 이성적 법칙에 따른 의무적 고행이 아니다. 손 교수는 칸트의 정언명령을 성경의 은혜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복음을 무거운 도덕적 멍에로 바꾸어버렸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은혜로 시작하여 율법으로 마치게 하는 잘못된 가르침이다. 따라서 손봉호의 윤리지상주의는 5세기 교회가 배격했던 펠라기우스(Pelagianism)의 행위 구원론적 망령을 소환하는 것이며, 윤리를 구원의 판단 기준으로 제시함으로써 고신이 수호해 온 이신칭의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신율법주의(Neonomianism)’와 맥을 같이 한다. 3. 도덕적 주체자가 된 인간, 하나님을 조연으로 만들다 칸트 철학에서 인간은 스스로 도덕 법칙을 세우는 자율적 주체다. 손봉호 교수의 기독교 윤리 역시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구원의 역동성보다, ‘윤리적으로 완벽해지려는 인간의 노력’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손봉호 ①: “한국 교회의 문제는 신학의 부재가 아니라 윤리의 부재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바로 서야 교회가 산다.” (출처: 『현대 사회와 기독교 윤리』) 손봉호 ②: “하나님은 우리가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 때 비로소 우리와 함께하신다.” (출처: 기윤실 행사 강연) [비평]:교회의 문제는 윤리의 부재가 아니라 ‘복음의 실종’이다. 복음이 사라졌기에 윤리적 열매가 없는 것인데, 손봉호는 선후 관계를 뒤바꿔 인간의 도덕적 개혁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 이는 하나님을 인간의 도덕적 행위에 따라 움직이는 조연으로 격하시키는 오만방자한 발상이다. 인간의 자율성을 극대화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는 ‘자연주의적 인본주의’이며, 기독교를 단지 사회적 유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키는 세속주의 교회론의 결과물이다. 결론: 철학의 하녀가 된 인본주의 신학을 거부하라 손봉호 교수의 윤리 운동 이면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칸트의 이성을, 그리스도의 은혜보다 인간의 도덕적 의무를 앞세우는 위험한 철학적 기반이 자리 잡고 있다. 신학이 철학의 하녀가 될 때, 복음은 생명력을 잃고 도덕 교과서로 전락한다. 손 교수가 말하는 하나님은 칸트의 ‘이성의 한계’ 속에 박제된 무력한 신에 불과하다. 고신 총회와 한국 교회는 이제 손 교수의 율법 선생질 하는 ‘철학적 미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의 이성이나 상식을 뛰어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 앞에 무릎 꿇고, 행위가 아닌 오직 은혜로 얻는 구원의 감격을 회복해야 한다. 사람이 구원 받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고 성화되어 가는 것은 손봉호식 윤리적 실천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과 부활의 능력, 거듭나게 하시고 충만케 하시는 성령님과 말씀의 능력 때문임을 다시 한번 천명한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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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7
  • [연속기고4] 손봉호는 ‘윤리 선생’인가, 복음을 해체하는 ‘이단’인가?
    필자가 최근 손봉호 교수의 윤리적·정치적 좌경화에 관한 비판 글을 기고하자, 침례교 김요한 목사가 소논문 <손봉호 이단 정체>라는 글을 보내왔다. 이 논문은 손 교수를 ‘이단’으로 단호하게 규정하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손봉호 교수를 이단으로까지 성급하게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의 주장 속에 숨어있는 ‘이단적 요소’들이 우리 성도들의 신앙을 어떻게 병들게 하는지 경계하고자 이 글을 쓴다. 사실 그동안 우리는 손 교수의 편향된 정치 행보나 선택적 윤리에 대해서만 비판했을 뿐, 그의 신학적 뿌리까지는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다. 그러나 열매는 그 뿌리에서 결정되듯, 손봉호의 위험한 행보 역시 결국 그의 신학적 토양에서 비롯된 필연적 결과다. 필자는 손 교수가 전면에 내세운 ‘윤리’가 어떻게 성경적 복음을 훼손하고 있는지, 김 목사의 분석을 빌려 그 실체를 손 교수의 워딩을 따라 밝히고자 한다. 1. 계시론: 성경의 권위를 윤리라는 잣대 아래 굴복시키다 정통 개혁주의 신학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자기계시이며 모든 판단의 최종 규범이다. 그러나 손봉호는 성경의 권위를 인간의 윤리적 판단 아래 종속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결코 신의 영역(본체계)을 깨달을 수 없다는 ‘칸트적 합리주의’의 전형이다. 손봉호 ①: “성경에 기록된 문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지향하는 윤리적 정신이다. 문자적인 순종보다는 그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참된 신앙이다.” (출처: 손봉호 저, 『현대 사회와 기독교 윤리』, CUUP, 2010년판) 손봉호 ②: “성경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현대 사회의 보편적 상식과 윤리에 부합할 때 비로소 현대인들에게 그 권위가 살아나고 설득력을 얻게 된다.” (출처: 2012년 기윤실 주최 강연 ‘기독교 윤리 실천의 시대적 과제’ 중 발췌) [비평]:이는 성경의 무오성과 절대 권위를 흔드는 행위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상식을 심판하는 ‘기준’이지, 세상 상식에 의해 검증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다. 만약 성경이 인간의 상식에 맞을 때만 권위를 갖는다면, 죽은 자가 살아나고 동정녀가 출산하는 성경의 신비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결국 손 교수는 성경을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만족을 위해 적당히 골라 읽는 ‘도덕 지침서’로 격하시키고 있다. 이는 계시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한낱 수양 종교로 변질시키는 위험한 시도이며, 성경을 인간의 이성이라는 작은 상자 안에 가두려는 인본주의적 발상이다. 2. 구원론: 복음의 유일성을 윤리적 행위로 대체하는 위험 기독교 구원의 핵심은 오직 은혜, 오직 믿음(Sola Fide)이다. 그러나 손봉호의 신학 체계 안에서는 믿음보다 ‘윤리적 실천’이 구원의 징표나 조건처럼 강조된다. 이는 기독교 윤리의 본질인 '말씀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을 인간의 '도덕적 윤리'로 치환함으로써, 오직 은혜로 얻는 구원의 도리를 인본주의적 행위론으로 변질시키는 신학적 오류가 되고 만다. 손봉호 ①: “예수 믿는다는 입술의 고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직하게 세금을 내고 교통법규를 지키는 것과 같은 아주 기초적인 윤리적 삶이다. 이것이 없는 신앙은 허구다.” (출처: 2014년 CBS 강연 및 기윤실 정기 포럼 메시지 요약) 손봉호 ②: “윤리적으로 실패한 기독교는 그 자체로 가짜이며, 도덕적 열매가 없는 신앙은 구원의 증거가 될 수 없다.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구원 확신은 자기기만이다.” (출처: 손봉호 저, 『기독교 윤리』 및 관련 논문 ‘한국 교회의 윤리적 부패와 대안’ 중) [비평]:윤리적 삶은 구원받은 성도의 마땅한 결과이지, 구원의 본질을 규정하는 열쇠가 아니다. 성경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말씀한다. "도덕적 삶이 신앙고백보다 중요하다"는 논리는 은혜의 복음을 인간의 의지로 대체하려는 현대판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다. 만약 도덕적 완벽함이 구원의 증거라면, 십자가 옆의 한 편 강도는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다. 손 교수는 성도들에게 복음의 감격보다는 ‘윤리적 채찍’을 가함으로써, 기독교를 세상이 박수 치는 도덕적 넓은 길로 변질시키고 있다. 이는 복음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행위라는 가시나무를 심는 것과 다름없다. 3. 교회론: 교회를 사회 변혁의 도구로 전락시키다 손봉호가 이끄는 기윤실적 교회론은 교회의 영적 사명보다 사회적 공공성을 절대화한다. 그는 교회의 ‘영적 통치권’을 세상의 ‘시민 윤리’ 아래 종속시키려 한다. 손봉호 ①: “교회는 세상의 신뢰를 얻기 위해 세상이 요구하는 윤리적 기준을 뛰어넘어야 한다. 도덕적 권위를 잃은 교회는 존재할 이유가 없다.” (출처: 손봉호 저, 『기독교 윤리 실천의 과제』, 홍성사) 손봉호 ②: “교회의 공공성이 상실되고 사회에 해를 끼칠 때 교회는 그 존재 가치를 상실한다. 교회는 사회적 책임을 다할 때만 교회다울 수 있다.” (출처: 2015년 기윤실 사회적 책임 포럼 기조 강연 중) [비평]:교회의 본질은 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다.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에만 맞추는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의 빛이 아니라 세상의 하녀일 뿐이다. 교회가 사회적 유익을 줄 때만 가치가 있다는 논리는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주권을 부정하고 대중의 인기를 주권으로 삼는 인본주의다. 교회는 세상에 아부하는 곳이 아니라,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하늘의 소리를 내는 곳이어야 한다. 손 교수는 교회의 거룩함을 세상의 도덕적 평가 아래 둠으로써, 영적 구원의 방주를 한낱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시민단체로 전락시키고 있다. 결론: 윤리라는 이름의 이단적 미혹을 경계하라 필자는 손 교수를 이단으로 단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외치는 ‘윤리’가 성경의 권위를 누르고, 복음의 핵심인 ‘은혜’를 ‘행위’로 대체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를 단호히 경계해야 한다. 김요한 목사가 그를 ‘이단’이라 부르며 경종을 울린 것은, 그가 주장하는 윤리가 성경적 진리를 교묘하게 비트는 ‘트로이 목마’가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를 여전히 ‘도덕적 사부’로 여기는 40-50대 장년층과 젊은 목회자들은 환상에서 깨어나길 바란다. 윤리가 복음보다 앞설 때, 그것은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다. 우리는 ‘윤리 선생’ 손봉호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최종 권위가 되는 개혁주의 신앙의 기품과 본질을 잃지 말아야 한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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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7
  • [기고] 초고령사회 대한민국, 노인요양원 세례는 성경적일까?
    대한민국은 이미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2025년 기준 65세 이상 인구가 1,084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약 21%를 차지하면서 이제 국민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이 노인인 시대가 되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고령화 사회’라는 말이 낯설지 않았지만, 이제 한국 사회는 빠른 속도로 ‘초고령 요양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앞으로는 누구나 부모를 요양원에 모셔야 할 가능성이 높은 시대가 되었고, 동시에 우리 자신 역시 요양원의 돌봄을 받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복지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회의 선교 구조 자체를 바꾸는 사건이다. 과거 교회의 선교가 주일학교와 학생들, 교회당 중심이었다면, 앞으로의 선교는 병원과 요양원이라는 삶의 마지막 현장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신앙을 갖지 못한 부모 세대를 둔 자녀들에게는 “어디에 부모님을 모셔야 하는가”가 곧 영혼 구원의 문제로 이어지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전환 속에서 요양원에서의 예배와 성례, 특히 인지 기능이 약해진 어르신들에게 베푸는 세례가 과연 성경적인가 하는 질문은 더 이상 주변적인 문제가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가 함께 고민해야 할 중요한 목회적·신학적 질문이 되었다. 이번 부활주일에도 우리 요양원에서는 어르신 10명을 대상으로 세례식을 거행했다. 노인요양원 사역을 하다 보면 가끔 치매나 노환으로 인지 능력이 저하된 어르신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이 과연 성경적인가 하는 본질적인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세례의 자격은 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한 자 ② 일정 기간 학습교인으로 교회에 출석한 자 ③ 당회 문답으로 그 신앙을 확인받은 자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병원이나 요양원 현장에서 이러한 절차를 온전히 밟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그러다 보니 사리 분별이 어려운 치매 노인에게 세례를 주는 것이 자칫 형식적인 행위에 불과하다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요양원이라는 특수한 선교 현장에서 지난 27년 동안 수천 명의 어르신을 돌보고, 1,200명 이상의 임종을 지켜보며 줄곧 세례를 베풀어 왔다. 이유는 간단하다. 세례는 주님의 지상명령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세례는 인간의 인지 능력을 시험하는 절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언약 가운데 받아들이셨음을 외적으로 인치시는 표이기 때문이다(롬 4:11). 나는 일반적인 기준을 넘어선 요양원 세례식의 정당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여 온 룻과 보아스의 환대 요양원 세례의 강력한 성경적 모델로 나는 룻을 자주 인용한다. 이방 여인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들어왔을 때, 보아스는 그녀를 향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룻 2:12) 고 축복했다. 물론 룻은 베들레헴에 들어오기 전 이미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 라는 신앙고백을 했다. 보아스가 이 고백의 전모를 어디까지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베들레헴으로 들어온 룻을 향해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라고 축복한 환대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요양원에 입소하여 매일 예배의 자리에 머무는 어르신들이야말로 “주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여 온” 분들이다. 비록 질병에 밀려 이곳에 오셨을지라도 복음의 공동체가 운영하는 성읍에 머물며 찬송을 부르고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그 자체가 이미 거룩한 입성이다. 세례는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영혼을 향해 하나님의 자녀임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거룩한 환대이며 언약 공동체 안으로의 인치심이다. 2. 은혜의 보편적 휩쓸림: 출애굽 ‘잡족’의 홍해 세례 출애굽 사건에서도 중요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올 때 ‘중다한 잡족’이 함께 섞여 있었다(출 12:38). 그들이 모두 투철한 유일신 신앙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으나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구름 기둥 아래로 모으셨고 홍해로 인도하셨다. 사도 바울은 이 역사적 사건을 이렇게 해석한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고전 10:1–2) 바울은 홍해 통과 사건을 공동체적 ‘세례’라고 해석했다. 이렇게 세례를 받은 잡족들은 광야 교회 안에서 언약의 백성들과 함께 만나를 먹고 반석의 물을 마셨다. 물론 세례 자체가 곧 구원의 자동 보증은 아니다. 그러나 세례는 인간의 인지 능력의 완성도를 시험하는 절차이기보다 하나님께서 그를 언약 공동체 안으로 불러 들이시는 표지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의 파도는 신앙의 성숙도나 혈통을 따지지 않고 공동체 전체를 약속의 땅으로 이끄셨다. 복음의 대열에 합류한 어르신들이 비록 인지 기능이 낮을지라도 그들을 이 ‘홍해의 세례’에서 제외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3. 빌립과 에티오피아 내시: 즉각적인 은혜의 집례 사도행전 8장에서 빌립은 이사야서를 읽고 있으나 그 뜻을 알지 못하던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했다.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행 8:35) 말씀을 통해 복음을 깨달은 내시는 즉시 세례받기를 청했고 빌립은 지체 없이 세례를 베풀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절차의 무용성이 아니라 말씀을 통한 믿음의 반응 앞에서 은혜의 표를 불필요하게 지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치매 어르신들도 말씀을 들을 때 영혼 깊은 곳에서 반응하신다. 예배 참석 자체가 곧 “아멘”의 신앙고백이다. 인지적 계산이 아닌 영혼의 피난처로서 천국을 사모하는 그들에게 목사가 즉각적인 은혜의 방편인 세례와 성찬을 베푸는 것은 마땅한 사명이다. 4. ‘영적 유아’가 된 이들을 위한 언약적 수용: 유아세례의 원리와 칼빈의 성례 이해 우리는 스스로 고백할 수 없는 영아에게도 유아세례를 베푼다. 이는 아이의 의지보다 “내 언약을 너와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 영원한 언약을 삼겠다”(창 17:7) 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8장 4항 역시 세례의 대상이 신앙을 고백하는 자뿐 아니라 믿는 부모의 자녀들에게도 해당됨을 분명히 한다. 이는 세례가 인간의 의식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함을 보여준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4권 15장에서 세례를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 양심에 인치는 표”라고 설명하였다. 또한 그는 세례를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외적 표라고 말하며, 세례의 효력은 인간의 이해력이나 기억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성령의 역사에 달려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세례는 인간이 하나님을 얼마나 또렷하게 인식하고 있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자기 언약 안에서 기억하시고 붙드신다는 사실을 교회 앞에서 선언하는 은혜의 표지이다. 요양원에서 어르신들을 섬기다 보면 어린아이와 같이 되시는 분들이 많다. 특히 치매 어르신들은 인지적으로 유아와 같은 상태에 놓인다. 스스로를 표현하고 고백할 힘이 약해진 어르신들을 향한 세례는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해 온 가족과 공동체의 믿음을 담보로 한다. 어르신은 하나님을 잊었을지라도 하나님은 어르신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언약의 신실함에 의지하여 나는 오늘도 세례를 베푼다. 5. 장로교 헌법이 보여 주는 특수한 상황에서의 목회적 배려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헌법 예배지침은 세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로 씻는 성례로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음과 은혜 언약의 모든 유익에 참여함과 우리가 주님의 소유가 됨을 표하고 인치는 것이다.” 이 정의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세례는 인간의 지적 능력의 확인 절차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는 언약적 표이며 하나님의 소유 됨을 선언하는 성례이다. 또한 개혁주의 교회는 역사적으로 임종 직전 세례, 병상 세례, 위급한 상황에서의 세례와 같이 정상적인 문답 절차를 충분히 진행하기 어려운 경우에도 목사의 신중한 판단과 당회의 목회적 배려 아래 세례를 시행해 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8장 5항은 말한다. “세례의 효력은 그것이 시행되는 그 순간에만 제한되지 아니한다.” 이 고백은 세례가 인간의 인지 능력이나 기억의 지속성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과 성령의 역사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준다. 따라서 병상에 있거나 인지 능력이 약해진 어르신들에게 베풀어지는 요양원 세례 역시 장로교 헌법과 개혁주의 교회의 성례 이해 안에서 충분히 정당한 목회적 집례라고 할 수 있다. 결론: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신다 세례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노인들은 체계적인 성경공부보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천국을 소망한다. 나는 그 영적 신비를 현장에서 수도 없이 목격했다. 그래서 나는 지난 27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예배를 드렸다. 초창기 10년 동안은 하루 두 번씩 예배를 드렸다. 노인들은 밤사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수도 있는 분들이기 때문이다. 이번 부활절에도 세례문답을 진행하며 어르신들의 신앙 고백을 들었다. “하모 하모, 믿고 말고!” 이 고백 앞에서 어떻게 세례를 주저할 수 있겠는가? 치매는 인간의 기억을 지우지만 생명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사랑까지 지우지는 못한다. “내가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5) 요양원에서의 세례식은 어르신이 하나님을 붙잡는 예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어르신을 끝까지 붙잡고 계심을 선포하는 예식이다. 육신의 장막이 무너져 가는 마지막 순간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하는 것은 그 영혼이 본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입혀 드리는 가장 존엄한 예복이다. 인지를 넘어선 은혜, 그것이 우리가 요양원 세례를 멈추지 말아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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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6
  • [연속기고3] 손봉호 교수의 민낯, 최철호와의 ‘위험한 동행’
    그동안 필자는 두 차례에 걸쳐 ① ‘손봉호 교수는 한국 교회를 극우로 모는 좌파 본산인가’ ② ‘로잔 이후 한국 복음주의의 변질, 존 스토트에서 손봉호·SFC·기윤실까지’라는 글을 기고했다. 이번에는 세 번째로 ③ ‘손봉호 교수의 민낯, 최철호와의 위험한 동행, 단순 연대를 넘어선 사상적 융합의 실체’를 다루고자 한다. 서론: ‘도덕적 스승’의 가면 뒤에 가려진 인적 연계의 실체 손봉호 교수는 오랫동안 한국 교회 내에서 '윤리와 도덕'의 상징으로 추앙받아 왔다. 그러나 그가 구축한 도덕적 권위가 과연 성경적 보수주의를 지키기 위함이었는지, 아니면 특정 이념을 교회 내부로 이식하기 위한 ‘트로이 목마’였는지 이제는 냉정하게 물어야 한다. 그 의문의 핵심에는 ‘종북 주사파’ 논란의 중심에 선 최철호 목사(아름다운마을공동체 대표)와의 끈끈한 인적·사상적 연계가 자리 잡고 있다. 필자는 이번 연재를 통해 손 교수가 어떻게 종북적 색채를 가진 활동가들에게 ‘도덕적 세탁기’ 역할을 했는지 폭로하고자 한다. 1. 성서한국, ‘종북 논란’ 최철호와 ‘교계 원로’ 손봉호의 위험한 공생 독자들이 먼저 주목해야 할 인물이 있다. 바로 ‘아름다운마을공동체’를 이끄는 최철호 목사다. 그는 2005년 8월, 성서한국 영역별 준비위원 자격으로 금강산을 방문했을 당시 ‘21세기 태양 김정일 장군 만세’라는 현수막 아래서 기념사진을 찍어 교계 안팎에 큰 파문을 일으켰던 인물이다. 또한, 그가 운영하는 공동체 내부에서 김일성 찬가를 부르거나 교시를 인용했다는 구체적인 증언이 잇따르며 종북 주사파 논란의 중심에 섰다. 놀라운 사실은 이런 인물이 한국 복음주의 사회 선교의 총본산이라 불리는 ‘성서한국’의 핵심 이사로 오랫동안 활동했다는 점이다. 성서한국은 2002년 창립 초기 복음주의적 사회 참여를 기치로 내걸었으나, 점차 좌편향적 활동가들이 장악하며 교계를 좌경화하는 전략적 교두보가 되었다. 바로 이 단체의 얼굴이자 정신적 지주인 공동대표와 자문위원장 자리에 손봉호 교수가 10년 가까이 군림해 왔다. 손 교수는 최 목사의 이러한 이념적 편향성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를 ‘시대의 양심’으로 포장하며 교회 내부로 침투하는 길을 열어주었다. 손봉호의 발언 ①: 손 교수는 2011년 성서한국 전국대회 축사 등을 통해 “성서한국은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가장 순수한 복음주의 운동이며, 여기에 참여하는 활동가들은 시대의 양심이다”라고 공언했다. 손봉호의 발언 ②: 더 나아가 그는 최철호 목사의 공동체 운동을 두고 “자본주의의 탐욕을 극복하는 성경적 대안이며, 우리 시대가 본받아야 할 모델”이라며 극찬했다(2013년 아름다운마을공동체 관련 대담 등). [비평]:결국 손봉호라는 거대한 ‘도덕적 브랜드’가 최철호의 종북적 색채를 탈색해 주는 ‘세탁기’ 역할을 한 셈이다. 복음주의라는 이름의 양의 옷을 입고 들어온 이리에게 손 교수가 직접 목자의 지팡이를 쥐여준 격이며, 이는 한국 교회를 향한 치명적인 영적 배신행위다. 2. S.F.C.의 좌경화와 폐지론 사태: 고신의 심장에 박힌 독화살 손봉호 교수가 '복음주의적 멘토'로 군림하는 동안, 그와 동행한 최철호의 독소는 고신의 미래인 S.F.C.(학생신앙운동)의 뿌리까지 침투했다. 최철호는 2010년대를 전후하여 S.F.C. 간사들을 자신의 '마을공동체'로 불러들여 공동체 훈련이라는 명목하에 사회주의적 해방 담론과 반미 의식을 주입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사태의 심각성은 2016년 5월 18일, 당시 총회 SFC지도위원장이었던 안병만 목사가 코람데오닷컴에 기고한 충격적인 폭로를 통해 백일하에 드러났다. 안 목사는 해당 기고문에서 “북한 노동당 청년 적위대들이 부르는 노래인 ‘청춘’을 아무런 제지나 여과 없이 기독 청년들이 부르고 있는 공동체가 있다는 소식에 망연자실했다”고 일갈했다. 문제의 노래 가사 끝부분은 “어머니 당(노동당)을 위해 조국을 위해”로 끝난다. 고신의 청년들이 ‘하나님 나라’가 아닌 ‘어머니 당’을 노래하게 만든 이 영적 오염의 배후에 바로 최철호가 있었고, 그 최철호를 ‘우리 시대의 모델’이라며 고신 교회에 소개한 장본인이 바로 손봉호 교수다. 이로 인해 개혁주의 신앙으로 무장되어야 할 간사들이 제주 강정 해군기지 반대 시위(2012년) 등 정치 투쟁의 선봉에 서게 되었고, 급기야 2022년 고신 총회에서 SFC 폐지론이 제기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하게 되었다. 고신의 심장에 독화살을 쏜 자는 최철호지만, 그 활을 쥐여주고 사로(射路)를 열어준 자는 바로 손봉호다. 3. ‘평화’라는 이름의 굴종, 안보 해체의 선봉에 서다 손 교수의 좌편향성은 국가 안보 문제에서 그 민낯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는 최철호가 이끄는 생명평화연대 등과 손잡고 2014년 ‘키리졸브 중단’ 요구나 대북 제재 해제를 촉구하는 성명에 이름을 올리며 북한 정권에 유리한 여론을 형성해 왔다. 북한의 핵 위협에는 침묵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려는 훈련을 비난하는 것이 과연 그가 주장하는 ‘기독교 윤리’인가? 손봉호의 발언 ①: “한미 합동 군사훈련은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도발이며, 기독교인은 무조건적인 비폭력과 평화를 외쳐야 한다.” (대북 관련 시국 성명서 취지) 손봉호의 발언 ②: “한국 기독교가 북한 체제를 비판하기에 앞서 남한의 자본주의적 죄악과 안보 지상주의를 먼저 회개해야 한다.” (시국 강연 중) [비평]:적이 칼을 들고 위협하는데 방어 훈련을 하지 말라는 것이 어떻게 윤리가 될 수 있는가? 손 교수는 "남한의 죄악을 먼저 회개하라"는 논리로 북한의 악행에 대한 면죄부를 주었으며, 최 목사가 친북적 행보를 보일 때마다 그 곁에서 ‘기만적 평화주의(Pseudo-Pacifism)’라는 도덕적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결론: 이제는 ‘도덕적 방관’을 끝내고 고신 정신을 회복해야 할 때 불의한 권력에 저항하고 성경적 진리를 사수하는 것이 고신의 정신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곁의 ‘원로’는 특정 이념에 경도된 인사들과 손잡고 한국 교회를 좌경화의 늪으로 몰아넣고 있다. 손봉호 교수는 본인의 행보가 ‘인도주의’라고 강변하지만, 최철호라는 인물이 가진 종북적 색채를 알고도 그와 함께 강단에 서서 ‘공의’를 논했다면 이는 무지를 넘어선 사상적 공모다. 손 교수는 더 이상 '기윤실'과 '복음주의'라는 이름 뒤에 숨지 마라. 이제 우리 고신인들은 도덕이라는 가면 뒤에 숨은 그의 실체를 직시하고, SFC와 고신과 한국 교회를 건강하게 지키기 위한 교단적인 대책과 수습방안을 강력히 촉구 한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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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6
  • [연속기고2] 로잔 이후 한국 복음주의의 변질
    1. 로잔대회, 세계 복음주의의 분기점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세계 복음화 대회는 150개국 2,700여 명의 지도자들이 모여 세계 복음주의 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결정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대회의 결과로 발표된 로잔 언약은 성경의 권위와 복음 전도의 긴급성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하게 부각시켰다. 특히 로잔 언약 제5항은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을 명시하며 교회가 인간 사회 속에서 정의와 화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이 조항은 이후 복음주의 진영에서 사회 정의와 정치 참여를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근거로 널리 인용되었다. 이때 영국 복음주의 지도자 존 스토트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원래 빌리 그래함은 영혼 구원의 우선성을 강조한 초안을 준비했지만, 스토트는 이를 수정하여 “복음 전도와 사회적 책임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표현을 로잔 언약에 반영시켰다. 이 순간부터 복음주의 진영 안에는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었다. 영혼 구원 중심의 복음주의 운동이 사회 변혁과 인권 문제를 동시에 강조하는 사회 참여적 복음주의로 확장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변화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낳았다. 한편으로는 사회 문제에 무관심했던 보수 교회의 약점을 보완하는 역할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 참여가 복음보다 앞서는 현상이 나타나는 단초가 되었다. 2. 존 스토트의 신학적 변화와 복음의 초점 이동 존 스토트는 20세기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설교자이자 신학자로 존경을 받았지만 동시에 두 가지 논쟁적인 문제를 남겼다. 첫째, 사회적 책임 강조로 인해 복음의 중심이 약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교회의 사명이 전도와 사회봉사 모두에 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복음주의 운동의 흐름 속에서는 전도보다 사회개혁적 의제가 점점 더 강조되기 시작했다. 빈곤, 환경, 정의, 평화와 같은 사회 문제들이 교회의 주요 의제로 등장하면서 교회는 점차 NGO적 역할에 가까운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은 이후 WCC와 NCCK와 같은 에큐메니칼 진영이 복음을 사회운동으로 환원시키는 방향과 일정 부분 닮아 있다. 둘째, 그는 영혼멸절설을 수용하였다. 존 스토트는 불신자가 지옥에서 영원히 형벌을 받는다는 전통 교리를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밝히며 결국 불신자의 영혼은 영원히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소멸된다는 입장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교회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논쟁적이었던 사상이었으며 복음의 긴급성과 회개의 필요성을 약화시킨다는 비판을 받았다. 3. 손봉호, SFC, 기윤실 – 로잔 신학의 한국적 수용 로잔 운동의 이러한 흐름은 한국에도 빠르게 수용되었고 그 대표적 인물이 손봉호 교수였다. 그는 윤리와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복음주의 담론을 한국 교회와 대학가에 적극적으로 소개하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한 대표적인 조직이 SFC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다. SFC는 원래 캠퍼스 복음화와 제자훈련을 핵심 사명으로 출발한 학생 신앙운동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민주화 운동과 사회 변혁 담론의 확산 속에서 SFC 내부에서도 복음 중심 노선과 사회 참여 중심 노선 사이의 긴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부 간사와 학생들은 성경공부와 캠퍼스 전도보다 사회 문제와 정치 운동에 더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고 실제로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반대 시위에 SFC 간사들이 참여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SFC 내부에서도 복음 운동이 사회운동으로 변질되는 것 아니냐는 문제 제기가 제기되었고 일부 간사들은 조직을 떠나기도 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역시 같은 흐름 속에서 등장하였다. 1987년 손봉호 교수가 초대 이사장으로 참여하여 출범한 이 단체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과 공공 윤리 회복을 핵심 목표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로잔 언약이 강조한 ‘기독교인의 사회적 책임’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흐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기윤실의 활동은 특정 정치적 이슈에 편향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정의, 인권, 평화와 같은 의제에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면서도 다른 정치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선택적으로 침묵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특히 손현보 목사의 예언자적 외침을 극우로 규정하며 압수수색과 구속을 정당화하고 고신총회에 징계를 촉구하는 신문 광고와 기자회견을 주도한 사건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처럼 손봉호–SFC–기윤실로 이어지는 흐름은 한국 복음주의가 사회 참여 중심으로 이동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4. 고신과 한국교회에 주는 교훈 고신 교회는 일제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세워진 교회다. 교회는 언제나 불의한 권세 앞에서 진리를 외쳐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교단 안에서도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이름 아래 손봉호식 신학을 옹호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인권, 정의, 환경, 평화를 강조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복음의 중심을 대체할 수는 없다. 더 큰 문제는 선택적 윤리다. 손봉호와 기윤실은 문재인 정권의 귀순 어부 강제 북송 사건,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울산시장 선거공작 같은 중대한 국가적 불의 앞에서는 침묵했다. 이재명의 대장동 비리, 법인카드 유용, 쌍방울 대북송금 의혹 같은 사건들에 대해서도 교회의 양심을 대표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북한의 인권 유린, 시진핑 정권의 교회 탄압, 김정은 독재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문제 제기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면서도 미국의 트럼프와 트럼피즘에 대해서는 극우라는 이름을 붙이며 강하게 비판한다. 이것이 과연 성경적 정의인가. 아니면 정치적 선택에 따른 이중적 기준인가. 결론 1974년 로잔대회 이후 복음주의는 사회 참여적 복음주의라는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였다. 그 영향은 한국에서도 손봉호, SFC, 기윤실을 통해 나타났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은 사회 개혁이 아니라 영혼 구원이다. 그리고 사회와 국가에 대한 나침반 역할 또한 소홀히 할 수 없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는 복음이 다시 강단에서 울려 퍼질 때 고신과 한국교회는 다시 힘을 회복할 것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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