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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재철 목사] 안녕, 대전(大田) : “전학왔니더”
    “푸를 청(靑), 소나무 송(松). 청송에서 대전으로 전학왔니더.” 전학 수속이 끝나고 들어간 교실. 담임 선생님께서 친구들에게 자기소개를 해보라 말씀하셨다. 나는 큰 소리로 나의 고향 이름을 소개하며 인사했다. 아이들이 나의 인사보다 더 크게 웃는다. 왜 웃을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선생님께서 정해주신 빈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와 다르게 아이들 얼굴이 뽀얗다. 우리 엄마가 읍내에서 사준 이랜드 옷이 촌스럽게 느껴졌다. 어쩐지 다들 공부도 잘 할 것 같다. 주눅과 함께 찾아든 두려움도 잠시. 쉬는 시간에 몰려든 아이들의 질문 세례에 정신이 없었다. 자꾸 말을 시킨다. 그리고 아이들은 더 크게 웃는다. 아마도 나의 사투리가 재미있고 신기했던 것 같다. 대놓고 놀리는 것은 아닌데 뭔가 찝찝하다. 촌놈 하나 전학 오니 신기해서 구경하러 온 느낌이다. “뭐여~ 내가 언제~” “니가 그랬잖여~ 왜그랴~” 나를 구경하러온 친구 무리와 떨어진 곳에서 조금 큰 소리가 난다. 제법 덩치 큰 남자 아이 둘이서 대화를 하고 있다. 내게 몰려든 아이들이 이제 그쪽으로 몰려간다. 아직은 인사도 제대로 못한 옆 짝에게 상황을 물어보았다. 큰소리로 대화하는 두 명의 친구, 그곳으로 몰려드는 아이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첫인상이 좋았던 짝은 웃으며 답한다. “응, 쟤들 싸우는 거야. 그래서 구경 간거지모.” 응? 싸우는 것이라고? 저렇게 느린 말로, 저렇게 너그러운 톤으로 싸움이 가능하단 말인가? 내가 있던 경상도에서는 싸움이 나면 일단 말로 여럿 죽인다. 목소리도 얼마나 큰지 말한 대로 곧 실천할 것 같은 위협이 느껴진다. 경상도 말은 나름 살가운 인사도 종종 살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오해를 받기도;; 뭔가 대전 친구들은 푸근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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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1
  • 마음을 여는 시 [신광열 목사] 걱정
    사람이 없어 걱정이다 강 같은 어머니가 없고 산 같은 아버지도 없다 길 같은 선생님도 별 같은 지도자도 흙 같은 목회자가 없어 참으로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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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4
  • [신지균 목사포토묵상에세이]하루
    <하 루> 하루를 넘겼을 뿐인데 새해라고 한다. 하루를 넘겼을 뿐인데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 이렇게 하루하루 넘긴다면 주님 만난 날 있겠지 새해 마라나타 하루 만에 천국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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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04
  • 마음을 여는 시[신광열 목사] 응답 應答
    하나님은 누구에게 숨어 있을까 누구에게 하나님은 침묵하실까 누구에게 하나님은 꼼짝도 하지 않으실까 그리고 왜 누구에겐 기다리고 있었듯이 얼른 대답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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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9
  • [이상규 교수]초기 기독교는 낙태(落胎) 문제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시작하면서 임신 중절, 곧 낙태(落胎)는 우리 시대 현안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 형법 제269조 제1항과 제270조 제1항에서 비록 법의 규제가 실행되지 못했다하더라도 낙태죄를 명시하고 있는데, 2012년 8월 헌법재판소는 낙태죄의 합헌을 선고한 바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7년이 지난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헌법재판관 7:2로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2020년 12월 31일까지 낙태죄 개정을 권고했다. 이때까지 국회에서 개정하지 않으면 낙태죄 관련 조항은 2021년 1월1일부로 효력을 상실하고 자동 폐기된다.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 당시 단순 위헌 의견을 낸 재판관들은 임신 14주, 헌법 불합치 의견을 낸 재판관들은 22주를 인공임신중절 가능 기간으로 의견을 제시했다고 한다. 이에 정부는 10월 7일, 낙태죄 자체는 유지하되 임신 14주까지는 낙태를 허용하는 법률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이에 대해 법무부 자문기구인 양성평등정책위원회는 지난 8월 임신 주수(週數)에 따른 인공임신중절 허용이 아닌 낙태죄 전면 폐지를 권고했다고 한다. 또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단체연합 등이 참여하는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모낙폐)’도 지난 9월 23일 성명을 내고 “처벌 조항 존속은 국가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는 심각한 역사적 후퇴”라며 반발했다. 그런가 하면 로마 가톨릭교회는 원칙적으로, 복음주의 교회는 낙태는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살인행위라는 점에서 이를 반대하고 낙태죄 폐지를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태아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상호 대립적인 가치를 놓고 찬반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낙태죄는 현제 한국 사회의 심각한 현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낙태 혹은 낙태죄에 대한 의학적 혹은 법률적 문제를 검토하려는 것이 아니라 낙태가 허용되던 그레꼬-로만 사회에서 ‘초기 기독교회’은 낙태 문제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어떻게 대응했던가에 대한 역사적 사례를 제시하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초기 기독교’란 예루살렘에 교회가 설립된 이후 300년, 곧 첫 3세기를 칭하는 의미로 한정하고자 한다. 이런 교회사적 검토가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 교회를 비추는 거울이 되기를 바란다. 1. 낙태하는 사회 낙태란 태아가 모태로부터 자연분만 되기 이전에 인위적으로 태아를 모태에서 제거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를 의미하는데, 그레꼬-로만사회에서는 법적 규제 없이 자행되던 일상사였다. 이 시기 낙태는 이교도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었는데, 가난한 이들보다 부유한 계층이 더욱 빈번했다. 이미 고대 로마의 12동판법(The Twelve Tables, c 450BC)은 가장에게 여아의 유기를 허락하고 있었고, 성별과 관계없이 기형아의 유기를 허락하고 있었다. 플라톤(427-347BC)과 아리스토텔레스(384-322BC)는 낙태를 통한 가족계획을 권장한 바 있는데 이런 전통은 그 이후 헬라 로마사회에 영향을 주었고, 로마의 법은 태아를 인간(a human being)으로 보지 않고 내장(內臟)의 물질(material viscera)로 간주했다. 그래서 낙태는, 용이하지도 않았고 안전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동안 공공연하게 시행되고 있었다. 규제되지 않는 낙태는 결과적으로 성적 무질서와 출산율을 크게 저하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낙태의 방법은 다양했는데 상당한 위험을 안고 있었다. 가장 흔한 방법은 치사량에 약간 밑도는 독약을 복용하여 유산을 유발하는 것이었다. 또 태아를 죽이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독극물을 자궁내로 주입시키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상당한 위험을 안고 있어 태아와 산모 양자를 희생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특히 사망한 태아를 산모의 체외로 제거하지 못해 산모와 태아가 동반 사망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 다른 낙태법은 기구를 이용하는 방식인데, 긴 바늘과 갈고리 혹은 칼을 동원하여 태아를 토막 내 자궁을 통해 제거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낙태법이 산모에게도 상당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어 낙태가 여성의 주요 사망 원인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왜 낙태가 이처럼 횡행했는가?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째는 불륜에 의한 성행위 은폐가 가장 대표적인 경우였다. 또 경제적 이유나 재산 상속에 있어서 재산의 분산을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한다. 부유한 이들은 재산을 여러 후손들과 공유하기를 원치 않았고, 가난한 이들은 대가족을 부양하기 어려웠기에 낙태라는 수단을 이용한 것이다. 이런 경우 낙태를 원하는 경우는 여성이 아니라 가장인 남성이었다. 로마법은 가장인 남성(paterfamilias)이 집안 여성에게 낙태를 명할 권리를 포함한 집안 식구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런 권리를 파트리아 프로테스타스(patria protestas)라고 부른다. 사실상 가장인 아버지는 노예나 부인이나 자식을 죽이거나 신체를 훼손하거나 물건이나 소유물처럼 판매할 수 있었다. 도미티안(Domitian) 황제는 조카 줄리아(Julia)를 범해 임신하게 했는데, 그녀에게 낙태를 명했고, 줄리아는 낙태로 결국 사망했다. 남편에게 신생아의 유기를 명할 권한을 허용한 사회에서, 아내나 정부(情婦)의 낙태를 명할 권리가 남편에게 주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못된다. 이런 이유 외에도 부유한 여성들은 성적 매력(sex appeal)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낙태를 선택했다. 2. 초기 기독교회의 대응 이런 시대에 살았던 기독교인들은 영아살해는 물론이지만 낙태 또한 살인으로 보아 이를 강하게 거부했다. 초기 기독교는 특히 3가지 관점에서 낙태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째, 태아도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 둘째, 낙태는 명백한 살인이라는 점, 셋째, 낙태 행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따른다는 점이었다. 초기 기독교회는 태아도 인간이라고 보았고,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시139:13-16)을 확신했기에 태아라고할지라도 인위적으로 제거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비록 신약성경에서 직접적으로 ‘낙태’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낙태는 하나님에 대한에 대한 반역으로 여겼다. 낙태 거부는 인간생명을 중시하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응답이었다. 교회 지도자들도 이점을 강조하며 낙태를 금지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초기 기독교 문헌 중 낙태를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대표적인 1세기 말 혹은 2세기 초의 두 가지 문서가 디다케(Διδαχή, Didache)와 바나바서신(The Epistle of Barnabas)이다. 디다케는 흔히 ‘열두 사도가 이방인에게 전한 주의 가르침’ 혹은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Doctrina Duodecim Apostolorum)으로 번역되는데, 이 책 서두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으로서의 도덕규범을 ‘두 길’(Two ways)이라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두 길’이란 생명의 길(the way of life or light)과 사망의 길(the way of death or darkness)을 의미하는데, 이 두 길이라는 상호 대조 개념은 그 이후 기독교적 삶의 태도를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생명의 길’을 말하는 디다케 제2장 2항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두 번째 계명은 다음과 같다. 그대는 살인하지 말라. 그대는 간음하지 말라. 그대는 소년을 탐하지 말라. 그대는 음행을 피하라. 그대는 도덕질 하지 말라. 그대는 주술행위를 하지 말라. 그대는 낙태로 아이를 죽이지 말고, 영아도 죽이지 말라(οὐ φονεύσεις τέκνον ἐν φθορᾷ οὐδὲ γεννηθὲν ἀποκτενεῖς). 그대는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바나바서신 또한 디다케와 같은 방식으로 두 길을 제시하는데 디다케 보다 신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후일 아다나시우스는, 디다케는 초신자나 세례준비자들을 위한 훈련교법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데, 이것은 신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낙태 행위에 대한 거부를 가르쳐 준 것임을 알 수 있다. 디다케와 바나바서신에서 말하는 ‘사망의 길’은 영아살인과 하나님의 솜씨(workmanship of God)의 파괴자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또 2세기의 변증가 아데나고라스(Athenagoras)는 마쿠스 아울렐리우스는 황제에게 보낸 ‘청원 Plea’ 35항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낙태를 위해 약물을 사용하는 여성은 살인을 저질렀으며, 하나님께서는 낙태죄를 물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궁속의 태아조차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이 돌보시는 대상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생아를 유기하지 않습니다. 신생아를 내다버리는 이들은 유아 살해죄를 저지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낙태나 영아유기를 죄악시했고,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범죄행위로 간주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는 이런 행위를 일삼는 이교도를 비판했다. 2세기 말의 미니키우스 펠릭스(Minucius Felix)는 자신의 ‘변증서’(Octavius)에서 이렇게 썼다. “당신들은 한 때 태어난 자식들을 들짐승과 새들에게 유기했으며 아이들을 목을 조르거나 내던져 처참하게 죽였습니다. 당신들 중 어떤 여성은 약물을 마심으로써 복중에 있는 후일의 인간의 근원을 멸절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서 출산 전 존속 살해를 저지릅니다. 그리고 이런 형태는 당신들의 신들(gods)로부터 내려온 전통입니다. 사트루누스(Saturn)는 그의 자식들을 유기한 것이 아니라 잡아먹은 것입니다.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유아를 희생 재물로 바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기독교공동체는 낙태와 유아 유기를 금지했다. 이탈리아의 역사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인드로 몬타넬리(Indtro Montanelli)는 이렇게 썼다. “낙태와 유아 살해가 점점 심해지고 있는 사회풍토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의미에서 이것들은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는 신자들에게 고아들을 양자로 입양하고 기독교 교리에 따라서 교육 하도록 당부하고 있었다.” 이런 점이 기독교회가 보여준 생명 존중사상이자 생명 윤리였다. 결과적으로 기독교 공동체의 출산율은 이교 사회보다 상대적으론 높을 수밖에 없었다. 미니키우스 펠릭스는 자신의 변증서에서 “날마다 우리의 수는 증가일로에 있다,”며 그것은 “우리의 건실한 생활양식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기독교회는 혼인을 신성시했을 뿐 아니라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이자 상급으로(시127:3) 이해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성행위는 일차적으로 자녀출산을 위한 것으로 보았고 출산과 육아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다. 이런 가르침을 따랐던 초기 기독교는 생명 존중 사상을 보여 준 것이다. 이와같은 초기 기독교의 낙태 반대와 그 가르침은 그 이후 시기에까지 변함없이 중시되었다. 그래서 크리소스톰(Chrysostom, c. 347-407)이나 어거스틴(Augustine, 354-430) 같은 4세기 교부들도 낙태를 정죄했다. 낙태 문제에 대해 어거스틴 만큼 강하게 반대하고 어거스틴의 가르침만큼 비중 있게 영향을 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결혼과 성생활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자녀출산이라고 보았고, 쾌락을 위한 성행위를 반대했다. 성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다. 정리하면, 초기 기독교는 영아 유기나 낙태뿐만 아니라 산아제한도 반대했다. 구약의 오난의 체외 사정이 정죄되었듯이(창38:8-10) 의도적이거나 인위적인 산아제한은 부당한 것으로 인식했다. 교부들도 그렇게 가르쳤다. 예컨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이렇게 썼다. “인간의 번식을 위해 하나님이 고안한 정자를 헛되이 사정하면 안 되고 파괴하거나 허비해서도 안 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스토아학파의 경우처럼 결혼에서의 성 생활을 오직 출산만을 위한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도리어 유대적 전통을 따라 결혼생활에서의 부부간의 의무와 즐거움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러나 2세기 후반에 와서 변화를 보여 주었는데, 결혼 주된 목적, 그리고 성해위의 유일한 목적은 출산에 있다고 보았다. 이런 변화는 당시의 편만한 낙태 관행에 대한 거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부연하며, 기독교 공동체는 동성애(롬1:26), 항문성교, 구강섹스 등 당시의 난잡한 동생애나 성행위도 분명하게 반대했다. 초기 기독교 문서에서 이런 점에 대해서까지 언급하는 것을 보면 기독교 공동체에 엄격한 윤리적 기준을 제시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예컨대 바나바서신에서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너는 우리 귀에 들리는 것처럼 더러움을 위하여 입으로 불의를 행하는 남자들과 같이 되지 말라. 그들의 입으로 불의를 행하는 부정한 여인과 연합하지 말라.”(바나바 서신, 10).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기독교는 그 시대의 풍조에 맞서 영아 유기나 살해, 낙태, 동성애 등을 반대하면서 건실한 가정윤리를 강조하였고, 유아나 영아, 장애를 가진 아이라도 할지라도 인간 생명의 인위적 제거는 범죄라는 점을 가르치고,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고 양육했는데 이것이 초기 기독교가 보여준 생명윤리였다. 이 글에서는 소개하지 못했지만 초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검투사들의 격투기를 반대한 것이나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주의(pacifism)를 지행한 것도 생명 윤리에 근거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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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25
  • 마음을 여는 시[신광열 목사] 다대고병
    많아야 하고 크고 높아야한다 솔로몬처럼 처첩도 황금도 많아야한다 매머드처럼 누구보다 웅장하고 커야한다 바벨탑처럼 하늘에 닿도록 높아야한다 그래야 화려하게 망하고 위대하게 쓰러질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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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24

실시간 기고 기사

  • [기고] 고신 총회, 개회예배 성찬 예식 유감
    고신 총회가 지난 9월 28일부터 30일까지 김해중앙교회(강동명 목사)에서 제71회 정기총회를 개회했다. 코로나19 정국의 어려운 상황에서 총회 임원들과 김해중앙교회 강동명 목사와 당회원들이 김해시 지자체와의 코로나 방역지침 준수에 관한 어려운 협의과정을 거친 후 개최된 고신 총회는 복잡한 현안들을 처리하면서 심도있는 안건심의를 했다. 그 중 회무에 앞서 드린 개회예배에서 가진 성찬예식은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성찬은 주님이 직접 제정하신 것으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반드시 시행되어야 하고, 성도가 은혜받는 아주 중요한 방편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번 정기 총회 개회예배 시에 가진 성찬은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소위 '성찬키트'라는 것을 나누어 각자가 개봉하여 먹고 마심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형식을 취했다. 코로나19 방역 지침을 준수하면서 성찬을 드릴 수 있는 방편으로 성찬키트를 선택한 것은 알지만, 성찬키트를 통한 성찬이 이래도 되는가라는 의문점을 남기기도 했다. 물론 부득이한 상황에서 이를 수용하는 것 까지는 그 고충이 충분히 이해된다지만, 그 성찬의 진행과정을 얼마든지 은혜롭게 할 수 있는데, 이번 성찬키트를 이용한 성찬식의 진행과정은 일반적인 성찬식의 경건함에 미치지 못했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음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성찬을 나누는 과정에서 부목사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한 곳에서는 모자란다고 소리치면서 부르고, 조금 떨진 곳에는 손이 닿지 않는다고 키트를 던져 주기도 하고, 개봉하는 과정에서 개봉이 잘 되지 않는다고 옆사람이 개봉을 도와주기도하며 그러다 담긴 것이 엎질러지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이 어색한 총대들은 서로의 어색함이 표정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경건해야 할 성찬예식이,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깊이 묵상하고, 사죄의 은총에 눈물과 감격이 있어야 할 성찬이, 부끄러움과 하나님께 죄송함, 무례함에 가슴치며 눈물을 흘리며 성찬에 참여해야 하는 현실이 너무나 가슴아팠다. 하지만 이러한 성찬 예식에 대해 어느 총대들은 깊은 한숨을 쉬고 속으로만 눈물을 삼키지, 나서서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없었다. 다만, 이를 안타깝게 여긴 김경헌 목사가 성찬에 참여한 회중 앞에서 "우리가 주님이 주신 이 거룩하고도 은혜로운 예식을 이렇게 웃움거리가 되도록 해서 됩니까? 부득이 키트를 사용해야 한다면 이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은혜롭게, 주님의 은혜가운데 시행할 수 았는데, 이렇게 소란스럽게, 장난스럽게 성찬을 해야만 합니까? 저는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라며 울분을 토했다. 우리 고신은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주장하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장로교단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왔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런데 모든 회의에 앞서서 거행된 예배와 성찬은 이미, 사람들의 모임을 예시한 것은 아닌가라를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가장 중요한 본질을 소홀히 여기면서, 그 다음을 은혜롭게 하겠다고 그 길을 추구하는 것은 아해하기 어려운 문제풀이가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깊은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더 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다짐하며 총회 유감의 한 모습이며, 누구나 바른 길을 추구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야 할 것,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개혁주의가 아닌가를 생각하며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 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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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01
  • [신재철 목사] 빼빠, 맞거든요!
    유치원 다녀본 적 없고, 엄마와 한글도 익혀보지 못하고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나의 학업 성적은 부모님을 늘 만족시켰다. ‘왕년에 1등 못해본 사람 있나?’라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니다. 나도 그런 과거가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성격도 차분했으니 당시에 모든 친구들과 선생님은 나를 공부 잘하고 얌전한 모범생으로 보게 되었다. 즐거운 시험 시간이 다시 돌아왔다. ‘자연’이라는 과목이다. 늘 그랬듯 대부분의 문제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의 충고대로 문제를 천천히 다시 읽었다. ‘아닌 것은’ ‘맞는 것은’ 이 두 가지를 덤벙대며 읽어서 늘 아쉽게 문제를 틀린다며 엄마는 속상해 하셨다. 그렇게 100점을 향해 천천히 연필을 눌러 정답을 적었다. 이번 시험에서도 나는 100점을 확신했다. 그런데! 채점된 시험지를 받아보니 망설임도, 고민도, 함정도 없었던 문제가 빨간색 막대기로 그어져 있다. 단 한 문제. 정말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다. 다시 문제를 살피고, 상식을 동원해도 틀리지 않은 답이다. “아래 물체의 이름을 적으세요.” 너무 쉬운 문제였다. 그 물건은 우리 집에 널리고 널려 있었고 아버지의 현장에 늘 쓰이는 물건이다. 나무의 거친 면을 문질러서 곱게 만들고 그 위에 페인트를 칠하기도 했던 물건. “빼빠” 우리 가족은 모두 그것을 ‘빼빠’라고 불렀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사포’라는 이름을 붙이셨고 나로 하여금 가족을 불신하도록 만드셨다. 절대 인정 할 수 없다. 선생님께 수차례 항의했다. 잃어버린 100점이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아버지가 부정당하는 느낌에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선생님께서는 어머님과 면담을 하셨고 부모님께서 건설 현장에서 일하시는 것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어머님은 그렇게 ‘50원 대출’ 사건 이후로 두 번째 선생님과 면담을 하셨다. 선생님의 이해에도 불구하고 내 점수는 정정되지 못한 95점. 그렇게 나는 가정의 울타리 밖을 조금씩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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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30
  • [신재철 목사] “50원만 빌려주세요.”
    나는 유치원을 다녀보지 못했다. 아침에 노란 가방을 매고 내가 알지 못하는 곳을 향하던 소수의 친구들이 조금 부러웠다. 얼핏 구경을 해보니 유치원은 노래를 부르고, 놀이를 하고, 그림도 그리는 곳이었다. 나는 그 시간이 되면 동생과 함께 시장터를 누비고 다니거나 빈 땅에 구멍을 만들어 구슬을 던지고 놀았다. 하지만 나도 이제 정해진 시간이 되면 당당히 가방을 매고 갈 곳이 생겼다. 어머님께서 일 나가시기 전에 왼쪽 가슴에 달아주신 손수건. 자그마한 플라스틱 통에 밥과 반찬 두세 가지를 넣어 챙겨주신 도시락. 나는 이제 자랑스러운 ‘청송국민학교’ 학생이 된 것이다. 유치원을 다녔던 친구도, 나와 함께 동네를 누비던 친구도, 같은 동네 살면서도 얼굴을 잘 몰랐던 친구도. 이제는 같은 공간에 모여 함께 공부하고 노래하고 공을 찼다. 오늘은 엄마가 아프다. 늘 힘든 일을 하시더니 병이 나신 것 같다. 학교를 오기는 했는데 오늘은 도시락을 준비하지 못했다. 점심을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하다가 즐기지는 않지만 오늘은 빵으로 한 끼를 해결할까 싶다. 나의 플라스틱 필통은 수납공간이 많다. 버튼을 누르면 여기저기 문이 열린다. 늘 지우개를 넣어두던 그곳을 열어보니 50원이 나온다. 우유는 학교에서 받은 것이 있고, 빵만 사면 되는데 50원이 부족하다. “선생님요, 50원만 빌려주면 안돼요?” 교탁 옆 개인책상에 앉아계신 담임 선생님께 당당하게 요구했다. 어떤 자신감이고 무슨 여유였을까? 분명한 것은 선생님이라는 분은 그 정도 재력은 있다고 믿었고 나에게 빌려주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뻔뻔함도 늘 누울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었으니깐. 선생님께서는 50원의 용처를 물으셨고 역시나 당당하게 내가 가진 50원에 보태어 빵을 사먹으려고 한다고 대답했다. 50원은 내 손에 쥐어졌다. 성공. “선생님, 내일 엄마한테 받아서 꼭 갚을게요.” 그렇게 빵으로 한 끼를 해결하고 온 아들을 맞이하는 어머님 표정이 묘했다. 담임 선생님께서 집에 전화를 하셨단다. 어머님은 너무 부끄러웠다며 다음부터는 그러지 말라 타이르신다. 하지만 돈도 잘 갚고 내 배도 채운 아름다운 상황에서 나는 아직도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다. <삽화작가 : 김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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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8
  • [신재철 목사] 선생님요, 청소 다했니더
    이제 익숙해진다. 등굣길, 학교 앞 문방구, 버스타고 30여분 가면 나오는 시내라는 곳. 그리고 아이들의 사투리까지도. 요즘 나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절대 사투리를 배우지 않겠다는 것. 물론 지금 내가 사용하는 경상도 말도 사투리다. 하지만 이곳에서 다시 배우는 말은 사투리가 아니면 좋겠다. 그래서 결심했다. 표준어를 배우기로. 대전생활이 시작되었지만 이곳 말을 배우지 않기 위해 나는 좋은 표준어 선생님을 모셨다. “텔레비전”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서울말을 쓴다. 유심히 살펴보며 조용히 따라해 본다. ‘에잇 닭살!’ 어색하고 좀 부끄럽다. 경상도 사투리가 익숙한 내가 표준어 연습을 하고 있으니 스스로가 용서가 안 되는 느낌이다. 고향을 배신한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 삶을 바꿀 수 있는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계속 텔레비전 앞에서 자리를 지킨다. “기여?” - “그래요?” 대전에서 아이들이 자주 쓰는 말을 일부러 표준어로 바꿔서 다시 연습해 본다. 절대 “기여?” 이 말은 안 쓸 것이다. 이 말을 쓰는 순간 나는 그냥 충청도 사람이 되는 것이다. 반드시 이 기회에 표준어를 배우리라. 제법 학교 적응도 잘되고 있고, 염려했던 것들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학업 성적도 1-2등을 유지할 수 있었고... 물론 내 성적이 발표될 때 담임 선생님과 친구들이 많이 놀랐다. 조금 불쾌했다. 왜 놀라지? 나는 이제 ‘시골에서 전학 온 애’에서 ‘시골에서 전학 왔는데 공부 잘하는 애’가 되었다. 그리고 여자 아이들이 주번이라서 무거운 물주전자를 들고 오면 대신 들어주기도 하는 매너남이 되었다. 모든 아이들이 청소를 안 하고 도망가도 남아서 청소의 끝을 보는 성실남이 되어 있었다. 오늘도 함께 청소해야 하는 아이들은 도망갔고 기다란 학교 스탠드를 혼자 모두 쓸어냈다. 청소가 끝났으니 이제 교무실에 가서 검사를 받아야 한다. “선생님요~ 청소 다했니더.” 아, 나는 오늘도 말 한마디에 교무실 선생님들을 다 웃겨버렸다. 완벽한 표준어를 구사하셨던 텔레비전의 스승님들께 면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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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25
  • [신재철 목사] 안녕, 대전(大田) : “전학왔니더”
    “푸를 청(靑), 소나무 송(松). 청송에서 대전으로 전학왔니더.” 전학 수속이 끝나고 들어간 교실. 담임 선생님께서 친구들에게 자기소개를 해보라 말씀하셨다. 나는 큰 소리로 나의 고향 이름을 소개하며 인사했다. 아이들이 나의 인사보다 더 크게 웃는다. 왜 웃을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선생님께서 정해주신 빈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와 다르게 아이들 얼굴이 뽀얗다. 우리 엄마가 읍내에서 사준 이랜드 옷이 촌스럽게 느껴졌다. 어쩐지 다들 공부도 잘 할 것 같다. 주눅과 함께 찾아든 두려움도 잠시. 쉬는 시간에 몰려든 아이들의 질문 세례에 정신이 없었다. 자꾸 말을 시킨다. 그리고 아이들은 더 크게 웃는다. 아마도 나의 사투리가 재미있고 신기했던 것 같다. 대놓고 놀리는 것은 아닌데 뭔가 찝찝하다. 촌놈 하나 전학 오니 신기해서 구경하러 온 느낌이다. “뭐여~ 내가 언제~” “니가 그랬잖여~ 왜그랴~” 나를 구경하러온 친구 무리와 떨어진 곳에서 조금 큰 소리가 난다. 제법 덩치 큰 남자 아이 둘이서 대화를 하고 있다. 내게 몰려든 아이들이 이제 그쪽으로 몰려간다. 아직은 인사도 제대로 못한 옆 짝에게 상황을 물어보았다. 큰소리로 대화하는 두 명의 친구, 그곳으로 몰려드는 아이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첫인상이 좋았던 짝은 웃으며 답한다. “응, 쟤들 싸우는 거야. 그래서 구경 간거지모.” 응? 싸우는 것이라고? 저렇게 느린 말로, 저렇게 너그러운 톤으로 싸움이 가능하단 말인가? 내가 있던 경상도에서는 싸움이 나면 일단 말로 여럿 죽인다. 목소리도 얼마나 큰지 말한 대로 곧 실천할 것 같은 위협이 느껴진다. 경상도 말은 나름 살가운 인사도 종종 살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오해를 받기도;; 뭔가 대전 친구들은 푸근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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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1
  • [신재철 목사] 안녕, 청송(靑松) : 촌놈 유학을 떠나다
    1년에 한두 번, 외가댁에 갈 일이 아니면 지나지 않는 길이다. 오르락내리락, 구불구불, 휘청휘청. 아스팔트와 푸른 산만 보이는 이 길은 여전하다. 여전한 것이 또 하나 있다. 늘 그 지점이 되면 어머님이 아버지를 황급히 부르며 차를 세우신다. “차 좀 세워줘!” 참지 못하고 오늘도 엄마는 멀미의 끝을 보여주신다. 늘 같은 지점에서 그러는 엄마가 어린 내 눈에도 신기하다. 온 가족이 그런 엄마를 놀린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엄마가 차에 다시 타시고도 여전히 삼부자는 유일한 여성인 ‘한정혜’씨를 놀려먹는다. 차는 다시 그렇게 대전을 향해 출발한다. 나는 오늘 전학을 간다. 고향과 부모님과 이별을 하게 되었다. 두 살 어린 동생과 함께 대전이라는 낯선 곳에서 외할머니와 생활을 하게 되었다. 어머님은 그것을 유학이라고 하셨다. 입학 후 5학년까지 늘 최상위 학업성적을 유지하며 반장을 한 번도 놓치지 않은 아들이 시골에서 살기에는 아까우셨단다. “대전에서 동생과 같이 살 수 있겠어? 엄마, 아빠는 너희가 가서 공부도 잘하고 성공한 사람이 되면 좋겠어.” 우리 부모님은 인격적이시다. 우리에게 의견을 물어오셨고 나는 크게 망설임 없이 가겠다고 대답했다. 두렵지는 않았다. 가서도 공부 잘 할 자신이 있었고, 부모님이 보고 싶어서 징징거리지도 않을 것 같았다. 다만 전교어린이회장을 못해보고 떠나는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게 1톤 트럭은 어느 때 보다 가볍게 우리 네 식구를 태우고 열심히 달린다. 카세트에는 구수한 ‘김란영 카페음악’이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늘 나오던 노래였기에 나도 익숙함에 같이 흥얼거린다. ‘안녕, 청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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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8
  • [독자기고] ‘코미디 리그’ 같은 총동창회 임시총회
    정기총회의 공과 지난 5월 총동창회 정기총회는 그동안 총동창회를 위해 수고한 임원들의 공을 무시하거나 부인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이전까지의 특별한 사정으로 인해 간접추천, 추인 등의 절차를 따라 임원들이 세워질 수밖에 없었던 사정도 이해된다. 총동창회 회원들의 미온적인 협력이 결국은 그런 행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이해된다. 그러나 이제는 한 번 바꿔볼 때도 되었다. 마치 어느 특정한 그룹의 밀실 야합적인 모습으로 임원들을 줄 세우기식으로 추천하였고, 총동창회를 위해 적극적으로 일을 해 보고자 하는 회원들의 임원출마가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 이러한 절차를 따른 총동창회의 임원선거는 동창회의 발전적인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뜻있는 회원들이 공회 앞에 합법적인 발언 기회를 얻어 의제를 제시하였고, 의제에 대한 다양한 토론과 격론 끝에 상정된 의제를 표결에 붙여서 회칙이 수정되었다. 개정된 임원선거 규칙은 공천위원 추천제에서 본회에서 직접추천, 혹은 자원하는 방식으로 바꾼 것이다. 개정된 규칙에 따라 적법하게 임원선거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를 문제 삼는다면, 이는 분명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지 않는가? 아니나 다를까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특정인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정치적인 입김으로 이상한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정기총회를 통하여 선출된 회장을 불신임하는 형태를 취하고 다시 추대하여 보선한 초법적인 행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적법한 정기총회를 뒤집은 불법적인 임시총회 총동창회는 2021년 5월 24일 오후1시 신대원101호 강의실에서 개최한다고 공고하였고, 그 일정에 따라 총동창회 정기총회는 회집된 회원으로 개회되었다. 총회는 회순에 따라 적법하게 진행되었고 임원 개선과 안건을 다루고 폐하였다. 그런데 전임회장단은 총동창회 회칙 12조 2항에 수석부회장을 수정하지 않아 그대로 살아 있고, 13조 1항에 ‘수석부회장은 당연직으로 추대’로 전년도 총동창회 총회에서 받았는데, 이를 지키지 않은 것은 불법이라고 주장하면서 200여명의 서명을 받아 임시총회를 요구하였고, 그에 따라 총동창회 임원회는 임시총회를 받아 들여 공고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 정기총회를 불법적인 임시총회로 뒤집은 초유의 사태이다. 무엇보다 지난 정기총회는 수석부회장을 당연직으로 추대하는 것을 본회에서 직접 추천하여 투표하도록 개정하였기 때문에 적법한 절차를 밟은 것이다. 만일 그것이 부당하다면 당시 정기총회에서 의견을 개진하여 관철시켜야 마땅한데, 정기총회가 폐한 후에 문제를 삼아 임시총회를 요구한 것은 다분히 정략적이며 정당하지 못한 처사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임시총회를 적어도 1주일 전에는 공고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보에 7월10일자에 공고하여 절차에 문제가 있다. 그리고 임시총회 소집 요건에 보면 1)적법절차에 따른 임원 구성(보선)과 2)회칙보완 수정이라고 명시 했다, 그런데 어떻게 적법한 절차에 따라 선출된 회장을 다시 받을 수 있는가? 그 자체가 불법일 뿐 아니라 상정된 안건도 아니기 때문에 초법을 자행한 것이다. 따라서 이는 명백한 불법이다. 이렇게 볼 때, 불법적인 방법으로 선출된 현 회장은 그 정당성을 상실했다. 그리고 서명한 회원200명에 절반도 못 미치는 61명(전임회장 9명과 임원 14명, 담임목사, 부목사)이 참석하여 정기총회를 한지 불과 한 달 남짓 만에, 재론하여 회칙을 수정하고, 임원을 개선하는 불법적인 전횡을 저지른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임시총회소집이란 말은 이미 정기총회를 인정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임시총회를 주장하는 이들은 이미 스스로 정기총회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만약 정기총회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불법총회로 규정하고 정기총회 소집을 요구해야 마땅하지 않는가? 이상한 임시총회 사회 금번 총동창회 임시총회(21.07.16) 개회 시 지난 정기총회를 통해 선출된 회장으로 하여금 회의를 주재하게 한 것은 이미 정기 총회에서 선출된 회장을 인정한 것이다. 그런데 임시총회는 임원 개선에 들어가면서 정기총회에서 선출된 회장을 단상에서 내려오게 하고, 전임 회장이 회의를 진행하고 임원 개선을 했다. 이는 법과 상식을 뛰어넘는 불법적인 임시총회이다. 전임회장은 이미 정기총회를 통하여 그 실효가 상실되었다. 그런데 적법한 회장을 의장석에서 내리고 무슨 자격으로 버젓이 회의를 주재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권한남용이라는 말 자체를 사용하기도 부끄럽다. 그리고 전임회장이 의장석을 차지하고 회칙을 수정하는 것을 주재하였고, 임원을 개선하였다. 더욱이 해괴한 일은 다른 임원 개선한 것은 차제하고 전년도 회칙을 들어서 수석부회장으로 있었던 김홍석 목사를 회장으로 추대한 후에 본인이 출석하지 않았기에 사의한 것으로 하고 정기총회에서 선출된 회장을 다시 받았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이상한 임원개선이며, 이는 총동창회의 정기총회를 기만하였고, 또 총동창회 자체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회의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비상식적이며, 불법적인 처사임이 분명하다. 코미디 같은 이 회의 진행에 동의하고 박수를 친 회원들은 상식과 법을 어떻게 알고 동의한 것인지 진심으로 물어 보고 싶다. 전임회장들의 놀이터가 된 임시총회 어느 모임이든 전임회장들은 그 경륜으로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 영향은 미미하면 미미할수록 좋다. 한 교회에 원로목사는 담임목사가 전체적으로 교회를 이끌어나가도록 온전히 뒤에서 기도하며 도우는 것이 은혜로운 교회이고 정상적이 아닌가. 이런 상식과 윤리가 지켜지지 않고 문제되어 상당한 어려운 교회들을 종종 보게 된다. 마찬가지로 총동창회에서도 전임회장들은 그야말로 전임회장이어야 한다. 전임회장이 상왕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금번 임시총회 건에도 전임회장들이 소위 총동창회를 바르게 세운다는 미명 하에 도에 넘치는 개입으로 총동창회를 불법의 장으로 만들어 버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차하면 세력으로 임시총회를 요구하여 정기총회를 완전히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아주 나쁜 선례를 만들었다. 설령 지난 5월 개최된 정기총회가 본인들의 생각에 못 미치는 것이라 할지라도(결코 그렇지 않지만), 전례 없는 임시총회 개최를 조종하여 코로나 상황에서 진행한 행동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임시총회가 전임회장들 발언의 전유물처럼 여기고 전횡을 휘두르므로 총동창회의 격을 완전히 실추시켰다. 적어도 전임회장들이라면 정기총회에서 진행된 것을 존중하고, 문제점이 있을 때 그것을 차기 총회에서 정당하게 처리하도록 지도하는 것이 전임회장의 처신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총동창회 재정 통장 관리의 이중성 총동창회의 재정운영은 노회에 참여하는 목사회원들에게 소위 협동총무라는 굴레를 씌워 그들로 하여금 반강제적으로 각출하게 하여 회비를 수령하고 있다. 장학금 등으로 후배들과 신학교를 위해 사용한다니 대부분의 목사들은 아무런 반론 없이, 회비 각출에 순응하여 지불한다. 총동창회의 운영을 위한 수입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신대원 장학금 명목으로 전체 회원을 상대로 봄. 가을 노회 시마다 일년에 두 번씩 거두어 가는 회비이고, 둘째는, 임원들의 임원 회비이고, 셋째는, 총동창회 부부수련회를 위한 목사들과 전국교회 후원금이다. 이 세 종류의 수입에 관하여 정기총회에서 종류별로 상세하게 보고되지 않고 있다, 임원회비는 용인된다 할지라도, 총동창회 부부수양회 시에 전국 교회에서 부담한 후원금은 결국 총동창회의 공적인 재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재정의 지출에 대해 정기총회에서 공개적, 구체적, 객관적인 보고를 해야 할 것이다. 총동창회의 공식 행사에 대한 재정보고는 반드시 총회에서 보고되어야 할 것이다. 개정된 회칙은 즉시 발효되는 것이 통상이다. 어떤 회든지 개회가 선언되고, 절차에 따라 진행될 경우 회칙수정을 하고, 그 수정된 회칙에 따라 임원개선이나 사업 등이 논의된다. 회칙수정이 앞부분인 것은 그 수정된 것으로 회의를 진행하기 위한 것이 주 이유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정된 회칙은 즉시 발효한다고 것이 회칙의 통상이다. 그런데 즉시 발효하도록 개정한 것을 두고, 악의적인 프레임을 씌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한 회기, 아니 체 두 달이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몇 몇의 입김에 의해 종잇장 뒤집듯이 뒤집는 것은, 그야말로 전제정치가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고려신학대학원 총동창회는 어떤 특정한 그룹의 전유물이 아니다. 어떤 특별한 힘이 있는지 모르나 왜 이렇게 전임회장들이 그 입김을 행사하려고 하는지, 그것이 진정한 애정인지, 아니면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묻고 싶다. 순수한 친목 단체인 총동창회를 정치 단체로 이용하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한다. 어디든 완전한 것은 없다. 불완전한 것이라도 인정하고, 순리를 따라 시간을 갖는 것이 더 옳은 방법이다. 이번 임시총회는 코미디 중의 코미디를 보는 것 같았다. 이렇든 저렇든 원하는 바를 얻게 되었다고 자위하는 부류들도 있겠지만, 정말 안타까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차후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전임회장들이 행동한다면 향후 총동창회에 일어나는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인지해야 할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 ...... 코로나19의 변종으로 인해 교회의 예배가 위협을 받는 상황에, 당장 오는 주일 예배가 어떻게 될 지도 모르는 심각한 상황에 총동창회가 모여야 할 명분이 무엇인가? 예배를 지키기 위하여 헌법소원을 하며 사투를 벌이는 상황보다도 어떤 더 중요한 명분이 있는지를 묻고 싶다. 만약에 감염의 문제가 발생하면 학교와 고신교회의 치명적인 타격이 분명한데도, 예배보다도 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겁쟁이 고신의 목사들이 그렇게 용감하게 모여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렵다. ※ 기고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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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17
  • [기고] 고신 총동창회의 순수성이 그대로 유지되길 바라며
    총동창회 총회가 지난 4월26일 있었다. 이미 한 달이 지나갔다. 여러 가지 논란들이 지면상으로 오갔지만, 동창회원들의 각자의 판단에 맡기고 새롭게 출발한 임원들이 총동창회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도록 힘을 실어주어야 할 시점이다. 그런데 그 날 41회 총회가 어떻게 진행 되었는지 정확한 사실과 절차 과정을 직접 보지도 않고 제삼자와 지면으로만 접한 회원이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하고 있음에 진실로 총동창회를 위한 순수한 뜻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인지 그 저의가 의심스럽다. 그것이 사실인 것처럼 SNS상으로 퍼 날라 총동창회에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기에 부득이 엄중한 마음으로 총동창회의 순수성이 그대로 유지되길 바라며 당시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1. 41회 총동창회 총회는 적법한 절차에 따랐다. 총회는 상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회의 규칙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다. 그 적법한 절차에 의해서 진행되었기에 41회 총동창회는 매우 상식적이었다. 만약 총회 회의 진행상 어떤 불법이 있었다면 그 현장에서 불법성을 따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미 끝난 총회를 장외에서 진행 과정에 대해 시비를 거는 것은 그 자체가 다분히 다른 <정치적인> 의도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갖게 만든다. 총동창회 회칙의 임원 선출 1항에 보면 ‘수석부회장은 당연직으로 추대하여 총회에서 인준을 받는다.’ 고 규정하고 있는 것은 자동으로 회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추대하여 인준을 반드시 받아야 한다. 만약 인준을 받지 못하면 회장이 될 수 없다. 그리고 41총회는 회칙의 심의와 변경 절차를 거쳐서 “임원 선출 (1)회장 1인, 부회장 10명 내외, 총무1인, 부총무 약간 명, 서기1인, 부서기 1인, 회계1인, 부회계 1인으로 한다. (2) 모든 임원은 본회에서 추천을 받아 직접 선출한다.” 로 개정되었고, 그 개정된 회칙에 따라 회장이 선출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 현장에서 전년도 총회를 존중하여 수석부회장을 회장으로 추천했지만 본인이 본회 앞에서 고사한 것이다. 결코 그 당사자를 배제하지 않았다는 점을 밝혀 둔다. 차제에 아주 중요한 원칙을 밝혀 두고자 한다. 적법하게 개정된 신법은 구법에 우선하는 것이 신법 우선원칙이고 질서의 원칙이고 상식이다. 이러한 법리를 무시하는 그 자체가 지극히 비상식이며 이를 문제 삼는 것은 법질서를 범한 것에 준하므로 자숙하기 바란다. 2. 총회에서 회칙심의와 변경은 정상적인 절차인데, 이를 문제 삼는 것이 비정상이며,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닌지 강한 의구심이 든다. 제41회 총회에서 회칙 제13조 (임원의 선출) 1항 회장 1인, 부회장 10명 내외, 총무1인, 부총무 약간 명, 서기1인, 부서기 1인, 회계1인, 부회계 1인으로 한다고 개정되었기 때문에 “제12조 (임원) 2항은 해당 없으므로 자동으로 삭제되는 것이다. 그 조항이 그대로 있다면 수정 과정의 오류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를 근거로 ‘선거 결과 자체를 무효로 만들 만큼 심각한’ 흠결이 있는 것처럼 적시한 것은 매우 경솔하고 과장된 주장이며, 총동창회 총회의 권위를 훼손할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을 주지하기 바란다. 그리고 법이 개정되면 즉시 발효되는 것이 상식이다. 차기 총회부터 발효된다는 것은 결코 일반적인 것이 아니다. 이는 필시 의도하는 바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공천위원의 병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공천위원을 두는 것은 자기들만의 리그로 만들고 싶은 발상이었다고 본다. 그 대표적인 예가 수년간 실무임원으로 큰 과오 없이 헌신적인 봉사한 회원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사람을 세우기 위해 결격 사유가 없는데도 임원에서 제외했다. 이것이 바로 명백한 공천에 평형성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2012년 제32회 총동창회 이전과 제33회 총동창회 이후 임원선출회칙이 완전히 바뀌어졌다. 제32회 이전에는 총회에서 부회장을 직접 선출하고 그 중에 다 득표자가 수석부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런데 제33회부터는 전임회장단이 공천하여 총회의 인준을 받는 형식으로 변경되었다. 짐작컨대 제33회 그 당시에도 총동창회를 섬기고 싶은 마음에서 회원들의 지지를 받으려는 회원도 있었을 텐데, 회칙 수정됨으로 원천적으로 그 기회가 차단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잡음과 문제를 제기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신사적으로 수용했다는 빙거가 아닌가? 그것이 성숙한 모습이 아닌가? 그런데 왜 제41회 총회의 회칙 심의와 변경을 문제 삼는 것인가? 적법한 절차에 따라 개정된 회칙에 따라 진행된 총회의 임원 선출을 존중하고 협력하는 것이 성숙한 회원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를 제기하는 당사자는 순수한 마음이라 하더라도 이를 악용하여 본질을 호도하는 자들이 있음을 주지하시길 바라마지 않는다. 3. 이제 총동창회가 순수한 그 목적대로 그 임무를 감당하도록 협력해야 한다. 총동창회원은 각 노회 회기마다 협동총무들의 수고로 거의 대부분 회비를 납부했지만, 그 동안 총동창회에 대한 무관심으로 참석이 저조하여 임원선출에 어려움이 있어 부득불 종전의 회칙을 따라야 했던 점도 충분히 이해된다. 그리고 그간의 임원들의 노고와 헌신에 대하여 깊이 감사드리고 그 공을 인정한다. 또한 임원 선출과 배분을 부분적으로 노회와 신학교, 기수별로 안배하려고 고뇌 한 점도 높이 사고 충정을 이해해 드리고 싶다. 그렇지만 총동창회 운영상에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을 많은 회원들이 인식하고 있었지만 손댈 수 없는 성역처럼 되어 의견 개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폐쇄적인 임원 선거 구조를 개방적인 구조로 바꾼 것은 뜻이 있는 회원들이면 누구나 능동적으로 의견을 개진하고 헌신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번 총회에 ‘특정한 노회가 그동안 총회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은 목사들을 동원했다.’고 하면서 마치 참석할 자격이 없는 자가 한 참석 한 것처럼 호도하는 것은 유감이며 분명 선치 못하며, 설사 처음 참석한 회원이 다소 있었다 하더라도 문제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참석을 권장해야 옳지 않는지 되묻고 싶다. 이런 일련의 일을 두고 ‘동창회비 거부 운동’, ‘총회의 파행’, ‘사전모의나 편법’ 등을 운운하면서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다짐을 공적으로 선언하라는 식의 협박성 선동과 자극은 그 자체가 바로 정치꾼들이 던지는 화두가 아닌지 되물어 보고 싶다. 어떤 법이든 완벽한 것은 없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발전되고, 시정된다. 기도하면서 오늘의 부족한 것을 내일에 시정하고 보완하면 될 일이다. 차제에 당부 드리고 싶다. 총동창회가 동창회답게 회원들의 친목 도모와 모교의 발전을 위한 본래의 순수한 목적대로 움직여 가도록 현 임원진들을 응원하고 기도해 주는 것이 총동창회의 순수성을 지키는 길이니 적극 협력하자. 그리고 정확한 팩트도 아닌 것을 제기하여 여론을 호도하는 뻔히 보이는 속보이는 정치 행위를 즉각 중단하기 바란다. 끝으로 좀 더 슬기롭게, 좀 더 지혜롭게 좌우를 살펴서 의견을 개진하지 못하여 마음을 상하게 했다면, 이 점 대하여 회원의 일원으로서 유감을 표하며, 모든 동창들이 순수한 마음으로 총동창회에 적극 협력을 잘 하는 계기가 되길 소망한다. 김일영 목사(신광교회, 서울남부노회 서기) ※ 기고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1-05-29
  • [기고]고신, ‘개혁주의’를 절대 포기할 수 없다!
    <특별 기고> 필자는 고신포럼의 한 일원으로서 고신포럼의 이념구현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고신포럼으로부터 그 어떤 권위도 부여받지 않았기 때문에, 다음의 글은 철저히 필자 개인 의견이며, 그 책임은 전적으로 필자 개인에게 있음을 밝혀 두는 바이다. (그리고 장문이라 서두에 단락의 제목을 밝히고 그 순서에 따라 의견을 펼침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1) 우리는 개혁주의 노선을 추구한다. 우리 고신이 개혁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이유는, 지난날 종교적 혼합과 세속적 타락으로부터 오직 하나님 말씀 앞에서 반드시 걸어야 할, 말씀중심의 길을 끊임없이 찾고자 하는 선진들의 생명을 건 투쟁에서 비롯된 것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Protestant 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2) 개혁주의는 전 고신 인이 추구해야 할 정신이다. 그런데 이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이는 어떤 특정한 집단이나 인물만이 취급할 수 있는 전유물인양 주장하는 전제를 필자는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라면 누구나 이 점에 관하여 깨어있어야 하고, 특히 고신 인이라면 이 개혁주의 노선을 반드시 지켜야하고 그 길을 가야 할 길이 아닌가? 그래서 필자는 그 권위와 지위에 상관없이 누구든지 그것에 대하여 논하고 바른길을 찾는 것에는 예외일 수 없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3) 고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회복하는 길은 신학적 논리로 풀어야 한다. 그런데 최근 정00 목사가 고신의 정체성과 개혁주의 신앙과 관련하여 제기한 신학적 이슈에 관련하여, 첫째는 제기된 문제의 팩트를 확인하고, 둘째는 그 오류가 무엇인지 근거와 논리로 반박하고, 셋째는 그 제기된 문제가 분명 신학적 문제가 있다고 하면, 소위 목회적 경험과 전문적 지식을 가진 분들이 냉정한 판단을 통하여 바로잡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모 교수와 모 목사는 본질적인 문제 보다 비본질적인 문제로 접근하여 본질을 희석시키려고 정치 논리로 몰아가는 것이 아닌지 자못 염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결코 신학적 문제는 정치적 논리로 풀어서는 안 된다. 고신을 걱정하는 순수한 의도를 지닌 개혁주의 신앙을 걸어가는 자로서, 제시한 문제점들을 향하여 소위 ‘일개 목사’를 운운하면서 무시하는 처사는 결코 고신인답지 않는 처사이다. 적어도 고신포럼이 어떤 정치적인 사익을 챙기기 위한 것이었다면, 분명한 증거를 제시해야 할 것이며, 비도적인 집단으로 매도한 모 목사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개혁주의 신학적인 관점에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거기에 대한 오류를 수정해야지 어떤 정치적 프레임을 둘러씌워, 하나님 앞에서 불타는 열정을 가진 한 목사를 매도하거나, 더욱이 우리 교단에 소속된 수백 명의 회원을 가진 고신포럼을 아무 근거 없이 정치적으로 몰아 공격하고 있는 현실에 심히 우려가 되지 않을 수 없다. 4) 고신포럼은 고신의 그 이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고신포럼은 성경과 개혁주의 신앙고백의 가르침을 따라 개혁주의 교회 건설을 추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친목을 위한 소모임이 아니며, 엄연히 대표를 비롯한 조직을 갖추고 있어, 모 목사가 폄하할 정도가 결코 아님을 밝혀 둔다. 그런데 모 목사는 고신포럼에서 '고신' 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 근거로 ‘고신몰’ 폐쇄에 대한 이야기를 들고 있다.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고신몰은 고신교회와 성도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교회 관련 물품들을 공급하여 상생하는 길을 찾으려 하였으나 이용자가 너무 적어서 그 존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폐쇄하는 방향’으로 결정하고 내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모 목사의 말한 것처럼 따끔한 질책을 한 후에 폐쇄했다는 것은 명백한 오류이며, 이를 근거로 목사들의 학문토론을 지향하는 고신포럼의 폐쇄를 운운하는 것에 심히 우려를 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고신포럼의 주제와 강사선정까지 간섭하는 듯한 발언은 그 정도를 넘어선 발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고신포럼을 ‘정치모임, 자기편을 만드는 도구의 장, 정치화시키려는 장을 삼으려는 합리적 의심이 간다’는 식으로 폄하하는 정치적 프레임에 대해서야 말로 고신포럼이 엄중히 경고하고 사과를 받아야 할 사안이다. 일반적으로 어떤 단체의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할 경우에는 그 단체의 이름을 사칭하여 사리사욕을 취하거나, 그 단체의 이름을 사용함으로 명예를 훼손하고 심각한 폐회를 끼친 경우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고신포럼에서 고신의 이름에 어떻게 명예를 훼손했으며, 심각한 폐해를 끼쳤는지 그 근거를 들어 제시해야 할 것이며,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고신’, 그 자랑스러운 이름은 고신 인이라면 누구나 자랑스럽게 사용해야 할 것이며, 그것에 자부심을 가져야 마땅한 일이며 오히려 권장할 일이다. 물론 개혁주의 입장에서 학문적인 따끔하고 아픈 지적은 언제든지 겸허히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것은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랑스러운 ‘고신’의 이름을 가슴에 품고 전진하는 ‘고신포럼’ 을 향해, 자신의 생각이나 입맛에 맞지않다고 하여 고신포럼을 공격하는 것이야말로 정치 놀음이 아닌지 정말 안타까울 뿐이다. 5) 올바른 신학적 논쟁으로 고신 정체성을 회복하자 지금 우리는 시대 상황에 비추어 볼 때 교회가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위기를 극복하고 반석 위에 교회를 든든히 세워야 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선 우리 안으로부터 성숙한 신학적 논쟁으로 바른 신앙과 신학을 회복시켜 가야 할 시점이라고 본다. 그런데 ‘어떻게 아무런 알맹이 없는 발언으로 비난을 쏟아내는가?’, ‘어떻게 정당하게 신학적인 논쟁을 통해 해결할 생각보다는 정치적 논리로, 위협에 가까운 말들을 할 수 있는가?’를 되묻고 싶다. 그렇다. 존경과 공경은 중요한 윤리적인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치열하고 성숙한 논쟁은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하는 가치요 원칙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 교단에서 누가 보더라도 정치적인 인물일 수밖에 없는 목사의 글에서, 순수하게 학문적, 신학적 문제를 제기한 후배 목사를 향하여, 정치적 배경을 운운하는 것이야말로 적반하장이 아닌지 되묻고 싶을 뿐이다. 교단을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한 목사의 열정을 꺾어 버리고 상처를 준다면 교단의 미래가 불을 보듯 뻔하다. 이를 계기로 하나님 앞에서 누구나 자유롭게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고, 논쟁하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미래 지향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옳지 않는가? 비난이 아니라 생산적인 비평의 장, 정치적 프레임이 아니라 순수한 신학적 논쟁의 장, 권위의식으로 무시할 것이 아니라 겸허하게 수용하고 바로 잡고자 하는 것이 바로 개혁주의 정신의 장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장이 가감하게 마련되길 바란다. 6) 따라서 ‘교단신학과 정체성 회복을 위한 대토론회’ 를 제안한다. 제3회 고신포럼을 개최하면서 상당히 미묘한 주제라는 것을 인지한 준비위 측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주장을 가진 특정인에게도 동일한 시간을 배정하여 강의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개인적인 사정으로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통보받았다. 그리고 정상적인 절차를 따라 제안한 것은 아니지만, 모 목사가 ‘그렇다면 이슈의 중심이 된 모 목사와 정당하게 공개 토론의 장을 가져보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그 제안에 대해 ‘격이 떨어진다.’는 식의 회피성 발언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격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격을 인정받게 될 것인데, 그 논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 차제에 소위 말하는 고신 신학의 바른 정립을 위하여 격을 높여 한 번 진중하게 대내외적인 장에서 공개 토론을 하면 어떨까 제안한다. 발제자를 3-4명 정도로 하고, 발제 주제 전문을 발제 전에 다른 발제자들이 공유하게 하고, 그 발제 후는 ‘일대일’, 또 ‘일대다’의 형식으로 적어도 3차례의 반론기회를 부여하여 분명하게 대토론회를 가져보면 좋겠다. 이것을 고신포럼이 주최한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 코로나 시대에 한국교회에 신선한 충격을 줄 것이고, 누구든지 당당하게 신학을 논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모든 목회자들과 소위 젊은 신학자들에게 줄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그래도 배움에 자부심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얕은 신학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한 젊은 목사에게 완전히 굴복하고야 말았다. 그리고 너무나 뿌듯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적어도 필자에게 ‘고신신학이 이래서는 안 된다.’ 라는 것까지는 분명하게 알려주었다. 그렇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고신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지켜나가야 할 적기라고 생각한다. 이 일이 일부의 불필요한 오해와 왜곡된 시각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기를, 또한 고신 신학의 발전적인 기회를 놓치므로 후회할 일이 없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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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5-25
  • 마음을 여는 시 [신광열 목사] 걱정
    사람이 없어 걱정이다 강 같은 어머니가 없고 산 같은 아버지도 없다 길 같은 선생님도 별 같은 지도자도 흙 같은 목회자가 없어 참으로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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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음을 여는 시
    2021-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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