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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기고] 통합 기념 한마음교회 유감
    폭염입니다. 여름의 태양이 작열하는 계절! 이 여름에 우리 주님 다시 오신다면 태양처럼 뜨거운 신앙 열정을 가진 사람을 찾으실 것 같습니다. 사역의 현장마다 여름 태양보다 더 뜨거워서 주님의 칭찬을 받는 우리 교단 교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듯이 우리는 성공적인 교단통합을 이었습니다. 그 통합기념으로 한마음교회를 설립한 것입니다. 전국 노회와 교회들이 마음과 기도와 물질을 모아 세운 기념비적 통합기념교회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통합기념 한마음교회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는지요? 통합기념 한마음교회는 고신교단의 여러 어른들과 선배 목사님들 그리고 총회 임원들 그리고 (구)고려의 선배들과 임원들이 힘들게 이루어낸 통합의 금자탑이며 결정체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 교회의 지 교회가 되어있습니다. 교단통합을 하면서 기념으로 교회를 설랍(립)하되 (구)고려측의 목회자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설립한 교회가 바로 한마음교회입니다. 그런데 (구)고려측의 일대 한마음교회 전임목사는 당회장권 한번 갖지 못하고, 고초를 겪다가 사임하였습니다. 한마음교회 담임목사에게 이러저런 이유로 당회장권을 이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2년 동안 무려 6번이나 당회장을 바꾸면서 힘들게 했습니다. 이런 상식 밖의 이상한 일이 통합기념 한마음교회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안양일심교회 부목사로 사역했던 이 모 목사가 담임으로 있습니다. 안양일심교회가 물심양면으로 많은 부분을 헌신한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전국 노회와 교회의 헌금으로 세운 통합기념교회를 일심교회 40주년 지교회로 삼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결과론적으로 유감스럽게도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위한 목적헌금이 한 교회의 지교회를 설립하는데 사용되는 어처구니 없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교단 전체가 바로 알고, 바로 잡아야 하겠다는 결연한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우리가 하나의 교단으로 통합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처음의 약속과 결의가 깨짐으로 아름다운 통합정신이 훼손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지만, 특히 (구)고려 측 형제들에게 깊은 상처를 준 아픔이 된 것입니다. 이런 사태로 인해 안양일심교회와 당회장은 (구)고려 측 형제들로부터 신뢰를 잃었고,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미안했던지, 무마하려고 (구)고려의 어려운 분들을 후원하겠다고 접촉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고려 목사들은 의도가 순수하지 못한 후원금을 받을 리 없지 않습니까? 지난해부터 제안하는 후원금을 거부해 왔습니다. 올해 들어와서 또다시 (구)고려 동문회에 7천만원 정도를 후원하겠다고 제의를 해왔지만 코로나로 인해 어려운 교회와 선교사들이 많이 있었지만 통합기념교회를 세우려는 큰 뜻이 있기에 거절했던 것입니다. 급기야는 비공식 채널을 통해 기어코 후원을 했습니다. 공식적으로 거부했는데도 비공식체널을 통해 기어코 다수의 교회에 상당한 후원을 감행한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저도 부교역자 약 10년, 한 교회 담임목회를 27년째 하니 37년 사역을 하며 산전수전공중전까지 다 겪은 사람입니다. 교회의 내부 사정이 있어 그렇겠거니, 일면 이해가 가지만, 그렇지만 한마음교회의 문제는 양 교단 통합기념 교회인만큼 그냥 넘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전국 노회와 교회의 헌금은 통합기념교회를 설립하기 위한 목적 헌금입니다. 그 목적대로 쓰이지 않았다면 바로 잡는 것이 마땅합니다. 따라서 교단 70주년을 맞아 통합기념교회를 다시 세우려는 계획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국 노회와 교회의 후원금 13억여원은 교단통합의 정신과 기념을 담는 명실공히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위해 쓰여져야 할 것입니다. 안양일심교회는 고신교단의 대표적인 큰 교회 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당회장 김홍석목사님은 앞으로 총회에 큰 일을 감당해야할 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중대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고 교단의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안양일심교회 김홍석목사는 통합기념 교회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하는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보여할 것입니다. 이것이 (구)고려측 대부분 형제들의 일치된 생각입니다. “순교자의 고장! 진리의 파숫군! 경건자의 훈련소, 예수의 제자들이 일어나는 산실!” 그 교단이 우리 고신 입니다. 저는 우리 교단의 일원이고 교단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고신의 목사로 함께 사역함이 늘 감사합니다. 저는 고신인이 된 것이 좋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뒤를 이어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 정신을 이어가는 우리 교단이 좋고 자랑스럽습니다. 그 어떤 일보다도 고신과 고려의 통합이 자랑스럽습니다. 통합 후 (구)고려 동문들이 연합하여 학원이사로, 고신세계선교회 이사로, 이단사이비연구소장으로, 동문회 임원으로. 각 상비부에서... 각처에서 활약하는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운 하모니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통합입니다. 이렇게 배려해 주고, 사랑해주는 우리 ‘고신’이라는 이름이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따라서 통합기념교회가 다시 설립되어 통합정신이 훼손되지 않고 계승되어 아름다운 교단을 잘 보전하고, 또 더 아름답게 발전되기를 기원하는 바램을 담아 이 글을 씁니다. *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이행하라! * 전국 노회와 교회의 목적 헌금을 반환하라! 2022년 7월 중순 신앙 열정이 여름 태양처럼 뜨겁기를 기도하며... ※ 기고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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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02
  • [신재철 목사] 안녕, 대전(大田) : “전학왔니더”
    “푸를 청(靑), 소나무 송(松). 청송에서 대전으로 전학왔니더.” 전학 수속이 끝나고 들어간 교실. 담임 선생님께서 친구들에게 자기소개를 해보라 말씀하셨다. 나는 큰 소리로 나의 고향 이름을 소개하며 인사했다. 아이들이 나의 인사보다 더 크게 웃는다. 왜 웃을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선생님께서 정해주신 빈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와 다르게 아이들 얼굴이 뽀얗다. 우리 엄마가 읍내에서 사준 이랜드 옷이 촌스럽게 느껴졌다. 어쩐지 다들 공부도 잘 할 것 같다. 주눅과 함께 찾아든 두려움도 잠시. 쉬는 시간에 몰려든 아이들의 질문 세례에 정신이 없었다. 자꾸 말을 시킨다. 그리고 아이들은 더 크게 웃는다. 아마도 나의 사투리가 재미있고 신기했던 것 같다. 대놓고 놀리는 것은 아닌데 뭔가 찝찝하다. 촌놈 하나 전학 오니 신기해서 구경하러 온 느낌이다. “뭐여~ 내가 언제~” “니가 그랬잖여~ 왜그랴~” 나를 구경하러온 친구 무리와 떨어진 곳에서 조금 큰 소리가 난다. 제법 덩치 큰 남자 아이 둘이서 대화를 하고 있다. 내게 몰려든 아이들이 이제 그쪽으로 몰려간다. 아직은 인사도 제대로 못한 옆 짝에게 상황을 물어보았다. 큰소리로 대화하는 두 명의 친구, 그곳으로 몰려드는 아이들.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첫인상이 좋았던 짝은 웃으며 답한다. “응, 쟤들 싸우는 거야. 그래서 구경 간거지모.” 응? 싸우는 것이라고? 저렇게 느린 말로, 저렇게 너그러운 톤으로 싸움이 가능하단 말인가? 내가 있던 경상도에서는 싸움이 나면 일단 말로 여럿 죽인다. 목소리도 얼마나 큰지 말한 대로 곧 실천할 것 같은 위협이 느껴진다. 경상도 말은 나름 살가운 인사도 종종 살기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오해를 받기도;; 뭔가 대전 친구들은 푸근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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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1
  • 마음을 여는 시 [신광열 목사] 걱정
    사람이 없어 걱정이다 강 같은 어머니가 없고 산 같은 아버지도 없다 길 같은 선생님도 별 같은 지도자도 흙 같은 목회자가 없어 참으로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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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4
  • [신지균 목사포토묵상에세이]하루
    <하 루> 하루를 넘겼을 뿐인데 새해라고 한다. 하루를 넘겼을 뿐인데 나이를 한 살 더 먹었다. 이렇게 하루하루 넘긴다면 주님 만난 날 있겠지 새해 마라나타 하루 만에 천국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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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04
  • 마음을 여는 시[신광열 목사] 응답 應答
    하나님은 누구에게 숨어 있을까 누구에게 하나님은 침묵하실까 누구에게 하나님은 꼼짝도 하지 않으실까 그리고 왜 누구에겐 기다리고 있었듯이 얼른 대답하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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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9
  • [이상규 교수]초기 기독교는 낙태(落胎) 문제에 어떻게 대처했을까?
    시작하면서 임신 중절, 곧 낙태(落胎)는 우리 시대 현안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 형법 제269조 제1항과 제270조 제1항에서 비록 법의 규제가 실행되지 못했다하더라도 낙태죄를 명시하고 있는데, 2012년 8월 헌법재판소는 낙태죄의 합헌을 선고한 바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7년이 지난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헌법재판관 7:2로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2020년 12월 31일까지 낙태죄 개정을 권고했다. 이때까지 국회에서 개정하지 않으면 낙태죄 관련 조항은 2021년 1월1일부로 효력을 상실하고 자동 폐기된다.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 당시 단순 위헌 의견을 낸 재판관들은 임신 14주, 헌법 불합치 의견을 낸 재판관들은 22주를 인공임신중절 가능 기간으로 의견을 제시했다고 한다. 이에 정부는 10월 7일, 낙태죄 자체는 유지하되 임신 14주까지는 낙태를 허용하는 법률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이에 대해 법무부 자문기구인 양성평등정책위원회는 지난 8월 임신 주수(週數)에 따른 인공임신중절 허용이 아닌 낙태죄 전면 폐지를 권고했다고 한다. 또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단체연합 등이 참여하는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모낙폐)’도 지난 9월 23일 성명을 내고 “처벌 조항 존속은 국가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는 심각한 역사적 후퇴”라며 반발했다. 그런가 하면 로마 가톨릭교회는 원칙적으로, 복음주의 교회는 낙태는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살인행위라는 점에서 이를 반대하고 낙태죄 폐지를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태아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이라는 상호 대립적인 가치를 놓고 찬반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낙태죄는 현제 한국 사회의 심각한 현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낙태 혹은 낙태죄에 대한 의학적 혹은 법률적 문제를 검토하려는 것이 아니라 낙태가 허용되던 그레꼬-로만 사회에서 ‘초기 기독교회’은 낙태 문제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고 어떻게 대응했던가에 대한 역사적 사례를 제시하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초기 기독교’란 예루살렘에 교회가 설립된 이후 300년, 곧 첫 3세기를 칭하는 의미로 한정하고자 한다. 이런 교회사적 검토가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 교회를 비추는 거울이 되기를 바란다. 1. 낙태하는 사회 낙태란 태아가 모태로부터 자연분만 되기 이전에 인위적으로 태아를 모태에서 제거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행위를 의미하는데, 그레꼬-로만사회에서는 법적 규제 없이 자행되던 일상사였다. 이 시기 낙태는 이교도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시행되고 있었는데, 가난한 이들보다 부유한 계층이 더욱 빈번했다. 이미 고대 로마의 12동판법(The Twelve Tables, c 450BC)은 가장에게 여아의 유기를 허락하고 있었고, 성별과 관계없이 기형아의 유기를 허락하고 있었다. 플라톤(427-347BC)과 아리스토텔레스(384-322BC)는 낙태를 통한 가족계획을 권장한 바 있는데 이런 전통은 그 이후 헬라 로마사회에 영향을 주었고, 로마의 법은 태아를 인간(a human being)으로 보지 않고 내장(內臟)의 물질(material viscera)로 간주했다. 그래서 낙태는, 용이하지도 않았고 안전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동안 공공연하게 시행되고 있었다. 규제되지 않는 낙태는 결과적으로 성적 무질서와 출산율을 크게 저하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낙태의 방법은 다양했는데 상당한 위험을 안고 있었다. 가장 흔한 방법은 치사량에 약간 밑도는 독약을 복용하여 유산을 유발하는 것이었다. 또 태아를 죽이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독극물을 자궁내로 주입시키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상당한 위험을 안고 있어 태아와 산모 양자를 희생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특히 사망한 태아를 산모의 체외로 제거하지 못해 산모와 태아가 동반 사망하는 일이 빈번했다. 또 다른 낙태법은 기구를 이용하는 방식인데, 긴 바늘과 갈고리 혹은 칼을 동원하여 태아를 토막 내 자궁을 통해 제거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낙태법이 산모에게도 상당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어 낙태가 여성의 주요 사망 원인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왜 낙태가 이처럼 횡행했는가?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째는 불륜에 의한 성행위 은폐가 가장 대표적인 경우였다. 또 경제적 이유나 재산 상속에 있어서 재산의 분산을 막으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한다. 부유한 이들은 재산을 여러 후손들과 공유하기를 원치 않았고, 가난한 이들은 대가족을 부양하기 어려웠기에 낙태라는 수단을 이용한 것이다. 이런 경우 낙태를 원하는 경우는 여성이 아니라 가장인 남성이었다. 로마법은 가장인 남성(paterfamilias)이 집안 여성에게 낙태를 명할 권리를 포함한 집안 식구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런 권리를 파트리아 프로테스타스(patria protestas)라고 부른다. 사실상 가장인 아버지는 노예나 부인이나 자식을 죽이거나 신체를 훼손하거나 물건이나 소유물처럼 판매할 수 있었다. 도미티안(Domitian) 황제는 조카 줄리아(Julia)를 범해 임신하게 했는데, 그녀에게 낙태를 명했고, 줄리아는 낙태로 결국 사망했다. 남편에게 신생아의 유기를 명할 권한을 허용한 사회에서, 아내나 정부(情婦)의 낙태를 명할 권리가 남편에게 주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못된다. 이런 이유 외에도 부유한 여성들은 성적 매력(sex appeal)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낙태를 선택했다. 2. 초기 기독교회의 대응 이런 시대에 살았던 기독교인들은 영아살해는 물론이지만 낙태 또한 살인으로 보아 이를 강하게 거부했다. 초기 기독교는 특히 3가지 관점에서 낙태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째, 태아도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 둘째, 낙태는 명백한 살인이라는 점, 셋째, 낙태 행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따른다는 점이었다. 초기 기독교회는 태아도 인간이라고 보았고,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시139:13-16)을 확신했기에 태아라고할지라도 인위적으로 제거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비록 신약성경에서 직접적으로 ‘낙태’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낙태는 하나님에 대한에 대한 반역으로 여겼다. 낙태 거부는 인간생명을 중시하는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응답이었다. 교회 지도자들도 이점을 강조하며 낙태를 금지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초기 기독교 문헌 중 낙태를 명시적으로 금지하는 대표적인 1세기 말 혹은 2세기 초의 두 가지 문서가 디다케(Διδαχή, Didache)와 바나바서신(The Epistle of Barnabas)이다. 디다케는 흔히 ‘열두 사도가 이방인에게 전한 주의 가르침’ 혹은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Doctrina Duodecim Apostolorum)으로 번역되는데, 이 책 서두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으로서의 도덕규범을 ‘두 길’(Two ways)이라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두 길’이란 생명의 길(the way of life or light)과 사망의 길(the way of death or darkness)을 의미하는데, 이 두 길이라는 상호 대조 개념은 그 이후 기독교적 삶의 태도를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이 되었다. ‘생명의 길’을 말하는 디다케 제2장 2항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두 번째 계명은 다음과 같다. 그대는 살인하지 말라. 그대는 간음하지 말라. 그대는 소년을 탐하지 말라. 그대는 음행을 피하라. 그대는 도덕질 하지 말라. 그대는 주술행위를 하지 말라. 그대는 낙태로 아이를 죽이지 말고, 영아도 죽이지 말라(οὐ φονεύσεις τέκνον ἐν φθορᾷ οὐδὲ γεννηθὲν ἀποκτενεῖς). 그대는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바나바서신 또한 디다케와 같은 방식으로 두 길을 제시하는데 디다케 보다 신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후일 아다나시우스는, 디다케는 초신자나 세례준비자들을 위한 훈련교법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데, 이것은 신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에게 낙태 행위에 대한 거부를 가르쳐 준 것임을 알 수 있다. 디다케와 바나바서신에서 말하는 ‘사망의 길’은 영아살인과 하나님의 솜씨(workmanship of God)의 파괴자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또 2세기의 변증가 아데나고라스(Athenagoras)는 마쿠스 아울렐리우스는 황제에게 보낸 ‘청원 Plea’ 35항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낙태를 위해 약물을 사용하는 여성은 살인을 저질렀으며, 하나님께서는 낙태죄를 물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궁속의 태아조차도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이 돌보시는 대상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생아를 유기하지 않습니다. 신생아를 내다버리는 이들은 유아 살해죄를 저지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낙태나 영아유기를 죄악시했고,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범죄행위로 간주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는 이런 행위를 일삼는 이교도를 비판했다. 2세기 말의 미니키우스 펠릭스(Minucius Felix)는 자신의 ‘변증서’(Octavius)에서 이렇게 썼다. “당신들은 한 때 태어난 자식들을 들짐승과 새들에게 유기했으며 아이들을 목을 조르거나 내던져 처참하게 죽였습니다. 당신들 중 어떤 여성은 약물을 마심으로써 복중에 있는 후일의 인간의 근원을 멸절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서 출산 전 존속 살해를 저지릅니다. 그리고 이런 형태는 당신들의 신들(gods)로부터 내려온 전통입니다. 사트루누스(Saturn)는 그의 자식들을 유기한 것이 아니라 잡아먹은 것입니다.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유아를 희생 재물로 바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기독교공동체는 낙태와 유아 유기를 금지했다. 이탈리아의 역사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인드로 몬타넬리(Indtro Montanelli)는 이렇게 썼다. “낙태와 유아 살해가 점점 심해지고 있는 사회풍토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의미에서 이것들은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는 신자들에게 고아들을 양자로 입양하고 기독교 교리에 따라서 교육 하도록 당부하고 있었다.” 이런 점이 기독교회가 보여준 생명 존중사상이자 생명 윤리였다. 결과적으로 기독교 공동체의 출산율은 이교 사회보다 상대적으론 높을 수밖에 없었다. 미니키우스 펠릭스는 자신의 변증서에서 “날마다 우리의 수는 증가일로에 있다,”며 그것은 “우리의 건실한 생활양식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기독교회는 혼인을 신성시했을 뿐 아니라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이자 상급으로(시127:3) 이해했다.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성행위는 일차적으로 자녀출산을 위한 것으로 보았고 출산과 육아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다. 이런 가르침을 따랐던 초기 기독교는 생명 존중 사상을 보여 준 것이다. 이와같은 초기 기독교의 낙태 반대와 그 가르침은 그 이후 시기에까지 변함없이 중시되었다. 그래서 크리소스톰(Chrysostom, c. 347-407)이나 어거스틴(Augustine, 354-430) 같은 4세기 교부들도 낙태를 정죄했다. 낙태 문제에 대해 어거스틴 만큼 강하게 반대하고 어거스틴의 가르침만큼 비중 있게 영향을 준 사람도 없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결혼과 성생활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자녀출산이라고 보았고, 쾌락을 위한 성행위를 반대했다. 성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였다. 정리하면, 초기 기독교는 영아 유기나 낙태뿐만 아니라 산아제한도 반대했다. 구약의 오난의 체외 사정이 정죄되었듯이(창38:8-10) 의도적이거나 인위적인 산아제한은 부당한 것으로 인식했다. 교부들도 그렇게 가르쳤다. 예컨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이렇게 썼다. “인간의 번식을 위해 하나님이 고안한 정자를 헛되이 사정하면 안 되고 파괴하거나 허비해서도 안 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스토아학파의 경우처럼 결혼에서의 성 생활을 오직 출산만을 위한 것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도리어 유대적 전통을 따라 결혼생활에서의 부부간의 의무와 즐거움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러나 2세기 후반에 와서 변화를 보여 주었는데, 결혼 주된 목적, 그리고 성해위의 유일한 목적은 출산에 있다고 보았다. 이런 변화는 당시의 편만한 낙태 관행에 대한 거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부연하며, 기독교 공동체는 동성애(롬1:26), 항문성교, 구강섹스 등 당시의 난잡한 동생애나 성행위도 분명하게 반대했다. 초기 기독교 문서에서 이런 점에 대해서까지 언급하는 것을 보면 기독교 공동체에 엄격한 윤리적 기준을 제시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예컨대 바나바서신에서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너는 우리 귀에 들리는 것처럼 더러움을 위하여 입으로 불의를 행하는 남자들과 같이 되지 말라. 그들의 입으로 불의를 행하는 부정한 여인과 연합하지 말라.”(바나바 서신, 10).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기독교는 그 시대의 풍조에 맞서 영아 유기나 살해, 낙태, 동성애 등을 반대하면서 건실한 가정윤리를 강조하였고, 유아나 영아, 장애를 가진 아이라도 할지라도 인간 생명의 인위적 제거는 범죄라는 점을 가르치고,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고 양육했는데 이것이 초기 기독교가 보여준 생명윤리였다. 이 글에서는 소개하지 못했지만 초기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검투사들의 격투기를 반대한 것이나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주의(pacifism)를 지행한 것도 생명 윤리에 근거한 것이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0-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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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다시 성탄절 주후 2022년의 크리스마스입니다. 사전적 의미의 성스러운 사람의 탄생을 축하하는 명절이 크리스마스라고 말하지만 정작 이 날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에 대하여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9:2) 이 빛은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나심으로 임하시고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창3:15)이라는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여자에게서 나셨으며 그리스도의 본질을 순전하고 흠 없이 보전하기 위하여 아담의 허리로부터가 아닌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음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날이며 “때가 차매, 아버지가 정하신 결정적인 시간,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갈4:4) 하신 날입니다.” 모든 구약의 율법이 우리를 붙들어 그리스도를 뵈옵게 하심으로 우리를 지으신 분이 우리를 다시 지으신 날(딛3;4~7)입니다. 그러나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합니다.”(요1;5) 이 어둠의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빛이 비쳐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3;19) 즉 세상은 자기 생활방식을 사랑합니다. 인간이 어둠 속에 있을 뿐 아니라 어둠이 인간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는”(고전1:21) 우리에게 저녁 서늘한 무렵 하나님께서 동산에 내려오십니다. 그리고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즉 타락한 에덴동산에 빛이 비친 것입니다. 이 빛은 120년간 방주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호소한 노아의 빛으로 소돔과 고모라에서 탄식했던 롯의 빛으로 아브라함과 족장들, 이스라엘 민족과 선지자들, 믿음의 선진들을 통해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그 빛이 계속 비친 것입니다. 모든 빛은 그에게서 나오고 빛의 본질이 그에게 있습니다. 그 분이 빛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시기까지 사백여년의 어떤 선지자도 메시지도 없는 암흑시대를 지나 마침내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사9:6) 곧 진정한 빛, 주님이 우리에게 임한 방식입니다. 그리고 신약시대의 포문을 여는 첫 장 마태복음 1장의 1절의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펼쳐집니다.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열네 대,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 일곱 대가 여섯 번 있었고 그래서 예수님은 일곱 번째 일곱의 시작이 되십니다. 성경에서 7은 의미가 깊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의 일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고 모세의 율법에 따라 농부들은 일곱째 해마다 땅을 쉬게 하는 안식을 취했습니다. 레 25장의 일곱 번째 일곱 해 중에서 마지막 해인 49년째 되는 해는 희년으로 모든 노예가 해방되고 모든 빚이 탕감되는 해였습니다. 마태복음 1장은 낳고, 낳고, 낳고의 연속이지만 이 안식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온다는 것을 보여주며 문제는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만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안식을 함께 누릴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크리스마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을 강조하지만 어쩌면 이렇게 '내려오심'(강림)의 의미가 더 크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주목해볼 것은 이 족보에 상상할 수 없는 다섯 여인이 이름을 올려놓고 있습니다. -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 마리아' 그들은 성전에 들어가 예배조차 드릴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대부분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다말과 라합은 가나안 여인들이었고, 룻은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근친상간을 거론하는 다말, 물론 수혼제로 해석이 됩니다. 매춘부인 라합, 이름을 밝히지 않고 우리야의 아내라고 명시함으로 다윗의 치부를 여실히 드러내게 되는 밧세바, 사회 계층상 밑바닥에 가까웠던 겨우 15살의 어린 소녀 마리아... 심지어 헤롯왕이 그리스도께 보인 반응조차도 실은 이 모두가 다 우리의 영적 모습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어둠의 자식들이었고 세상에서 소망이 없던 자들이었습니다. 주일 하루 예배자의 모습을 드러내지만 교회 문을 나서기 바쁘게 세상과 영적 간음의 배교의 자식들이고 항상 내 생각이 아버지의 말씀 위에 두는 자들입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2:12) 이러한 우리에게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를 외면하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시고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찾아오시어 “우리가 누구였든지, 어떤 사람이었든지” 이전의 우리를 개의치 않으시고 주님의 자녀로 가족 삼아 주신다는 겁니다. 여기 다섯 명의 여인들 딱 중간에 룻이 자리하면서 에브라임지파와 유다지파를 하나로 모읍니다. 요셉은 유다지파 사람이고 고향이 베들레헴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나사렛에서 나셨을까 생각해 보게 합니다. 성경에서 유다에게는 하나님께서 왕의 축복을 해주셨고 에브라임에게는 장자의 축복을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한다면 이 두 축복을 다 가지고 있어야함을 봅니다. 신약시대의 시작을 예수님의 계보로 시작함은 복음은 삶의 도움이 되는 정도의 상담이나 충고 정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와 그의 모든 행하심에는 역사적 근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이야기가 그냥 영웅담이 아니듯이 예수님의 탄생, 그의 성육신은 허구가 아니라 실제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세계 방방곡곡의 크리스마스는 이제 연말 파티용으로 전락되어 우리끼리 먹고 마시는 금송아지 파티를 하고 있습니다. 다시, 크리스마스입니다.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는 우리에게 또 어김없이 빛이 비칩니다.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라”(눅 2:11)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성육신 하셨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가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 분이 우리 삶에 들어오시기 전까지는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는 스스로 알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마리아는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눅1:38) 고백함으로 십자가를 알기도 전에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성육신 하신 주님도 훗날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아갑니다. 전쟁과 기근과 역병이 돌고 돌아도 하늘의 문은 닫히지 않습니다. 유한하고 제한적인 땅으로부터 고개를 들어 영원한 하늘을 바라보며 위의 것을 찾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소망하며 코로나를 함께 겪어 나가며 불뱀에 물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처방은 최신의 백신이나 해독제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사9:6)된 이 은혜의 선물, 이 빛을, 나의 예수님을 우리 함께 온전히 받아 누리는 복된 크리스마스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글. 이정은 사모(부산 고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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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1
  • [이정은 사모] "악이여, 너는 나의 선이 될지어다''
    "악이여, 너는 나의 선이 될지어다'' 존 밀턴이 '실낙원'에서 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1:18) 제가 목사님을 통하여 가르침을 받은 바울 사도의 이 말씀은 그 순서가 매우 중요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건하지 않음'이 첫 번째이고 '불의'가 두 번째입니다. 이 순서를 깨닫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한 지난 세월의 실수들이 낳은 소위 위대한 사상가들 - 다윈, 헉슬리, 스펜서...복음의 어그러진 사상가들, 그 추종자들 또한 신앙의 확신이 없어 그들을 마땅히 책망하지 못하고 심지어 그들의 가르침이 교회의 메세지에까지 침투해 들어오도록 내버려둔 소심한 교회의 지도자들 - 우리는 그들을 숭배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은 그냥 자연 그대로일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여기에 사람의 의지가 들어갈 때 "사람은 자연보호” “자연은 사람보호”라는 말이 나옵니다. 성소수자들의 퀴어 축제, 동성애 차별금지법, 인간복제, 트랜스젠더, 그들의 인공 자궁이식, 할로윈파티, 여성목사안수...등등 문제는 “왜 이런 것이 시대마다 계속 되어져 나오고 목소리가 커져갈까? 왜 그리스로인들 마저 어정쩡한 모습일까?”입니다. 가만 살펴보면 어떤 이들이, 성경에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그 중에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요소들을 다 몰아내고 하나님을 실제 살아계신 분으로 믿지 않아도, 성경속에 너무나 훌륭한 도덕적, 윤리적 가르침은 얼마든지 지킬 수 있다는 겁니다. 경건과 도덕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것을 꼭 알아야합니다. 경건을 버리는 즉시 불의가 들어옵니다. 이것은 말씀이 우리를 깨우치게 해주는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세상은 법을 내세우지만 성경은 죄를 다룹니다. 세상이 죄의 개념에 반발하는 것입니다. 죄의 개념을 지워나가며 병적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점점 절대적 기준이란 없다고 못을 박습니다, 그럼 어디에서 기준을 찾습니까? 하나님도 몰아내고, 십계명도 몰아내면 대체 무엇으로 기준을 삼습니까? 이에 대한 사람들의 대답은 각자의 의견이 기준이라는 겁니다. 나와 다른 이들에게 최대의 행복을 주는 일이 곧 옳은 일임을 믿으라고 아주 진지하게 가르치며 반드시 행복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쾌락주의자들(Epicurianism)과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즉, 좋은가, 나쁜가, 옳은가, 그른가를 따지는 대신 전반적으로 효과가 있는가를 묻자는 공리주의자들(Utilitarianism), 여기에 더나아가 신학적 공리주의 교리는 “인간의 행동이 순전히 행복 추구”에 있다는 것입니다. 공리주의를 낳은 영국의 빅토리아인들이 광적으로 숭배한 존 스튜어트 밀은 그리스도인도 아니었고, 사상적으로는 니체와 반대사상을 가진 자였지만 그렇다고 유신론자라고도 할수 없는 자였습니다. 그저 그것이 유익한가, 효과가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공리주의를 나름 수정한것이 편의주의(Opportunism)인데 절대적인 기준 같은 것은 없다는 주의이고, 무엇이 효과가 있는지 판단해야하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즉 목적이 바람직하면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정당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대중적인 견해로 자리잡아 예수회(Society of Jesus)를 비롯한 여러 단체와 국가가 채택하고 있는 이론이기도 해서 '사회복지' 분야에서도 인기 있는 프레임입니다. 이 편의주의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 한다”면 “힘이 곧 정의다” “내 힘으로 원하는 목적을 이룰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도 된다”는 파시즘(Facism)의 철학이고 알다시피 여기서 아돌프 히틀러가 나왔습니다. 그는 편의주의의 창시자는 아니지만 그가 따른 철학은 편의주의였고 편의주의는 파시즘의 철학입니다. 히틀러를 비롯한 수많은 사례가 보여주듯이 고의적인 거짓말과 속임수를 국가의 합법적 수단으로 옹호하는 무서운 결과가 초래된 것입니다. 이러한 발상은 기준이 없기 때문에 훈육, 권징(discipline)에 대한 개념이 없어지고 그에 따른 벌(punishment)이라는 것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결국 상황이 훨씬 더 복잡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명하는 기본적이고 영원하고 절대적인 기준을 버린 탓에 '도덕 기준'이 시대에 따라 계속 바뀐다는 것입니다 정말 심각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폐하는 순간 각자 다른 기준을 갖게될 뿐만 아니라 공적인 기준 또한 바뀐다는 것입니다. 1957년 9월 영국의 '동성애 및 매춘 위원회'에서 제출한 울펜덴 보고서(Wolfenden Report)가 있습니다. 그것의 중대한 논지는 “항상 그 시대 사람들 다수의 견해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존 밀턴의 말이 생각나게 합니다. "악이여, 너는 나의 선이 될지어다!" 문제는 세상이 율법을 무시하도록 조장해온 복음주의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율법은 설교하지마라,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비난하지말고 그리스도께 나아오도록 초.청.만 하라” “하지 말라”라고 금하는 대신 "이렇게 하는 편이 훌륭하지 않겠는가? 옳지 않겠는가? 좋지 않겠는가?”라고 귄.하.라.는 겁니다. 비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한.테.나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라고 권하는 것은 성경의 진리를 부인하는 짓입니다. 정죄를 모르는 자들에게 은혜와 진리를 전하는 것은 치명적인 잘못입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렘17:9) 결국 비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적인 호소를 하는 것만큼 잘못된 일은 없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이 땅의 많은 성도(장로, 권사, 집사, 일반 성도)가 이 땅의 많은 목사, 신학자가 '하나님에 대한' 말은 많이 하지만 허나 ‘하나님께 나아가지는 않음’을 너무도 많이 보아왔습니다. 나라가 안정되고 고요하고 평온하고 질서가 있고 국민이 행복하고, 정부가 원하고, 편하게 목회하고 등등...그래서 동성애도 차별금지법도 여성안수도 더한 것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 이런 주장을 하는 목.사.님들도 분명 알 것이라 여깁니다. 궁극적으로 평화주의는 이단입니다. 평화주의는 비 그리스도인들에게, 어정쩡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적인 행동을 기대합니다. 중생치 못한 자들에게 그리스도가 가르치신 원리들을 적용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이단적인 생각입니다. 물론 다툼과 분쟁, 전쟁은 악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시람들이 은혜아래 들어 올때까지 율법 아래 가두어야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롬13:4) 기독교로 가장하고 있으나 사실은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거짓 이상주의에 현혹되지 않도록 목사님들은 저희들을 가르치고 가르치고 또 가르쳐야합니다. 사도 요한은 아니 성경 어느 책을 대하든 던지는 질문은 “이 복음서는, 이 말씀을 쓴 이유가 무엇일까?”입니다. 수많은 박해와 시련과 어려움에 직면해있는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님은 단순히 위로를 건네는 것이 아니라 물론 궁극적인 의미에서 교회는 위로를 줍니다. 그러나 교회는 심리치료를 받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교회는 깃발을 든 군대로써 말씀 기록자는 일반적인 위로를 건네지도, 호소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가.르.칩.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0:31) 말씀을 말씀으로 풀어주는 이가 없으면 가시채를 뒷발질합니다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행9:5, 26:14) 하나님의 율법과 싸우지 말라는 것, 하나님은 반드시 법을 집행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 형벌을 정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그대로 실행하시는 분입을 가르쳐 주십시오. 복음의 위로는 직접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간접적으로 오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말씀 사역자님들의 주된 임무는 감성적이고 감정적인 위로를 원하는 상냥한 사람들에게 한 스푼의 설탕을 맛보게 하는것이 아니라 형제보다 친밀한 친구께 이끌어 가는데 있습니다.(잠18:24) 말씀만 말씀하여 주옵소서. 말씀만 가르쳐 주옵소서 제발. 저희들이 듣겠나이다. 피렌체에서 한달살이를 하면서 이들 속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느끼는 것들은 너무 많지만 그 중에 특히 르네상스의 꽃으로 불리는 피렌체의 중심지에서 눈만 뜨면 들려오는 성당의 종소리와 수많은 아이콘들과 골목길을 들어서면 세상끝날까지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고 자태를 드러내는 두오모 대성당을 바라보며 장엄하고 웅장하며 화려함의 극치를 드러내었던 그 옛날의 대로마제국을 상상해보며 과연 저들 속에 하나님은 계신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헬라인들이 볼 때, 그의 죽음은 너무도 어리석은 것이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구원은 나무에 달려 죽는 사건으로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라 철학과 사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입니다 예수를 알지만 선생으로 존경하기는 하지만 영접하지는 않음을 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1:2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 깨닫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정은 사모 (고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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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2
  • [특별기고] 경남기독문화원 문화선교사 김태군 목사의 미주행전(2)
    아틀란타에서의 공식적인 일정이 마쳐지고 다시 짐을 꾸렸습니다. 짐을 꾸리며 들었던 생각은 ‘저 천국 갈 때는 이런 짐들이 아무것도 필요치 않을텐데’라는 생각에 하나님을 다시 한 번 묵상하며 과테말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6월 22일(수), 과테말라에 도착하니 들었던 이야기처럼 공항 근처에 힘든 분들이 포진이 되어있었고 여기 저기 눈을 돌리는 곳마다 시간이 거꾸로 간 것처럼 느껴지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주님의 섭리가 운행하심을 느끼며 일정들을 소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선한사마리아인교회에서 지원하고 후원하는 한미학교가 있습니다. 과테말라 높은뜻우리교회를 통해서 선교 사업을 진행하는데 학교를 지어서 교육열이 떨어지는 현지인들을 모아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서 과테말라 청소년과 청년들이 의식이 깨어나고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것을 도와주는 일들을 진행 중이었습니다. 학교는 거의 80%가 완공이 되었으며 임시로 쓰는 곳에서 학업에 전념하는 과테말라 학생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특별시간을 만들어서 제가 부족하지만 합창을 가르치는 시간들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뭔가를 만들어 낼 수는 없었지만 그들과의 소통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값지고 가치 있는 것임을 함께 나누고 돌아 왔습니다. 또한, 과테말라 청소년들 뿐 아니라 높은 뜻 우리교회에서는 현지에 있는 한인 청소년들을 모아서 합창을 배우는 시간들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연습한 합창곡을 26일(주일) 높은뜻우리교회 대예배때 특송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과테말라에서의 일정 가운데 아주 특별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홍속렬 선교사님을 만났습니다. 축구로 한 평생을 바친 분이신데 젊으셨을땐 국가대표 선수를 많이 만들어 배출시킨 분이셨습니다. 선교사님을 뵙고 느낀 점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입니다. 여든을 훌쩍 넘긴 연세에도 과테말라 한미학교 학생들을 가르치시고 훈련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존경을 금치 못했습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없으시냐고 여쭸더니 .축구화를 좀 보내 달라고 하시더군요. 그런데 때마침 창원 양곡교회에 시무하시고 축구에 남다른 사랑을 가지신 최문욱 장로님이 생각나서 연결을 했더니 축구화를 기증받아서 보내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언제나 사람들의 만남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새삼 깨닫고 기쁨의 순간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6월 27일(월) 오전, 이제...마지막 일정이 기다리는 LA로 출발. LA에서는 가기 전 경남기독문화원 이사장님 이신 구자천 장로님의 섬김을 통해서 라디오 인터뷰가 잡혀 있었고 그리고 돌아오는 날인 7월 3일(주일), 남가주 사랑의교회(노창수 목사) 1~3부 예배 찬양 간증 집회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SNS를 보신 그 지역에 계신 전도사님께서 이곳 저곳 저의 프로필을 소개 하시면서 생각지도 못한 남침례회 LA비전교회(김대준 목사) 금요기도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28일(화) GBC미주복음방송 친절한전도사의 Networking Today라는 프로그램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별빛교회와 섬기는 신곡리마 을과 출석하는 별빛친구들을 소개하고 경남기독문화원의 일들을 소개하며 인터뷰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루의 일정을 마칠 즈음 한인축제를 기획하시고 담당하시는 화랑청소년재단을 운영하시는 박윤숙 총재님과 연결이 되면서 수요일 만남을 가졌습니다. 화랑청소년재단은 비영리 재단으로써 2006년부터 LA에 본부를 두고 남가주, 북가주, 보스턴과 하와이, 애리조나 등 미 전역에 21개 지부를, 한국 등 11개국에 15개 지부를 각각 두고 운영이 되고 있습니다. 화랑재단은 세속오계를 바탕에 두고 가족 사랑, 나라 사랑, 이웃 사랑, 정의 사랑, 평화 사랑 등 사랑 5계를 실천하는 청소년단체입니다. 박 총재님을 만나서 또 다른 청소년과 청년들의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되었고 긴시간을 함께 나누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생겨날 크고 놀라운 일들을 서로 나누고 품고 돌아온 시간이었습니다. 저의 사역 가운데 별빛 청소년들에게 삶의 꿈과 희망을 나눌 수 있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런 일들로 채워지길 소망하고 기도하며 돌아왔습니다. 비단 저희 별빛교회 다음세대 뿐 아니라 원하는 모든 청소년 청년들에게 보다 큰 세상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아쉬운 만남은 더 큰 역사가 되어서 만들어 질 것이라는 믿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7월 1일(금) 지인 전도사님을 통해 만나게 된 LA비전교회(김대준 목사)에 금요기도회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 만남의 순간에 참으로 감사한 일들이 벌어 졌습니다. 꿈에도 생각도 못한 중학교 후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함께 학교를 다니진 못했지만 그 이국만리에서 동문을 만났다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배목사님을 통해서 더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매형이 목사님이신데 저와 중학교 동기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중학교 동기 목사의 사모는 저의 초등학교 동기인 것! 이 무슨 은혜의 순간인지요 정말 놀라고 감사한 만남의 복을 누렸습니다. 후배는 그 날 집회를 하는 교회 부목사로 섬기고 있었으며 중학교 동기와 초등학교 동기인 사모는 북가주에서 목회를 열심히 한다고 전화통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생각하기를 하나님께 참 감사한 순간이었습니다. 저의 삶의 방향이 완전히 바뀌면서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을 전파하는 일을 하는 목사가 된 것도 감사한 일인데 중학교와 초등학교 동기들이 그 먼 곳으로 이주를 하여 목사로 사모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 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일인지를 새삼스레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금요기도회가 시작되고 말씀과 찬양과 기도로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도록 은혜의 시간을 나누고 내려 왔습니다. 돌아온 지금도 LA비전교회 김대준 목사님과 소통을 이어가는 중입니다. 만남의 복을 마음껏 누리고 있는 것 입니다. 이제 마지막 일정인 7월 3일(주일) LA남가주사랑의교회 주일 1~3부 설교가 저의 어깨를 조금 무겁게 하는 시간들이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한국에서 출발 전 이 번 찬양간증집회의 주제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가지고 왔기에 담대하게 말씀과 찬양을 전하고 사랑의교회 온 성도님들과 은혜를 누리고 내려 왔습니다. 저에겐 두 번 다시 오지 못할 시간들이었습니다. 아니 그 시간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찬양하고 찬양했습니다. 그렇게 총 25일간의 일정이 마쳐지고 한국 시간 7월 5일 천국제공항으로 무사히 도착하였습니다. 이번 미주 찬양 간증 집회를 통해서 느낀 점은 세상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이뤄지기가 힘들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고 머리에 새로이 각인이 된 시간들이었습니다. 출발 전 저의 마음에 하나님 사랑이 곧 이웃 사랑이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주신 것은 남들에게 전하라는 섭리도 있었겠지만 최우선은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마음임을 다시 한 번 고백하게 됩니다. 어떤 것이 중요한지 분간이 잘 안되는 요즘 세상에서 우리들에게 분명한 메시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깊이 깨닫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라고 기도하며 25일 간의 주님과 동행을 나눕니다. 할렐루야!
    • 오피니언
    • 기고
    2022-08-23
  • [특별기고]김동식 목사의 〔‘통합기념 한마음교회 유감’에 대한 오해 바로잡기〕에 대한 반론
    먼저 고신 경기중부노회 지역에 속한 ‘통합기념 한마음교회’(이하 한마음교회)에 대한 경기중부노회의 행정 처리에 대하여 존중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통합기념 한마음교회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마음교회는 일반적인 교회가 아닙니다. 그 의미는 전적으로 경기중부노회에 소속된 교회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총회 차원에서 정책적인 지원과 헌금, 전국 교회의 협력이 들어간 명실공히 총회가 협력해서 세운 교회입니다. 따라서 경기중부노회의 바른 행정 처리들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총회가 결의한 사항과 통합 정신, 그리고 통합 준비위원회의 결의와 상반된 행정 처리에 대해서는 총회원 모두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교회임을 명백히 밝힙니다. 그리고 통합의 한 축인 (구)고려의 목사들이 행정처리가 잘못되었다며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명백한 권리입니다. 또 다시 분명히 밝히는 것은 이 이의제기가 경기중부노회에 대한 이의가 아님을 주장합니다. 김동식 목사가 기고한 <‘통합기념 한마음교회 유감’에 대한 오해 바로잡기>에 대한 재 반박문입니다. 그리고 통합기념교회의 잘못된 행태를 바로잡기 위한 주장입니다. 따라서 <‘통합기념 한마음교회 유감’에 대한 오해 바로잡기>라는 김동식 목사의 글에 대하여 이렇게 주장합니다. 1. 통합기념 한마음교회는 유일무이한 통합기념교회입니다. 2. 한마음교회는 안양일심교회 40주년기념교회나 지교회가 아닙니다. 라는 소제목 1과 2에 대한 반론 통합기념 한마음교회에 현판, 단체이름이 걸려있기 때문에 통합기념교회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글의 주장자는 이렇게 허울 좋은 겉모양밖에는 주장할 것이 없습니다. 현판과 단체 이름이 들어가 있으면 뭐합니까? 통합의 한 주체인 (구)고려는 통합이 아닌 상처만 가득한데 말입니다. 이유는 총회 통합추진위원회의 결의대로 (구)고려의 담임목사가 위임목사는커녕 당회장권도 한 번 받지 못한 교회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현재는 안양일심교회 부목사 출신을 후임목사로 보냈습니다. 통합기념교회의 통합정신을 단 1%라도 생각했다면, 이런 행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안양일심교회가 헌신을 많이 한 것이 아니라 안양일심교회가 세우고 싶은 교회에 총회가 헌금한 목적헌금을 가져다 쓴 결과 외에 달리 무엇이 있습니까? 통합추진위원회 제12차 회의 회의록에 보면, 1년 안에 위임목사로 세우는 것을 권고하기로 했는데, 위에 말한 대로 위임목사는커녕 당회장권도 한 번 받은 일이 없이, 안양일심교회 부목사에게 교회 담임권이 넘어갔습니다. <참고자료> 제12차 회의 : 2018 년 11 월 20 일(금) 오후 1시 한마음교회당(식당 ; 둥근상시골집) ⑦ 기념교회 이성용 목사를 1년 안에 위임목사로 세우는 것을 위원들이 좋게 여겨, 해 노회와 기념교회 임시당회장에게 시행하도록 권고하기로 결의하다. 3. 당회장권을 한 번도 준 적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라는 소제목 3에 대한 반론 3)-1의 주장은, 팩트체크-1대 담임목사와-결과 팩트가 아닌 거짓이라 반론 가치가 없습니다. 3)-2의 6가지 주장은, 이렇게 일심교회 당회가 결의했는데, 김홍석 목사가 통합기념교회에 이런 행동을 했다면, 오히려 김홍석 목사가 일심교회 당회의 결의를 위반한 것입니다. 1년만 당회장권을 달라고 했던 김홍석목사가 3개월 만에 당회장권을 다른 목사에게-그것도 1대 담임목사보다 후배목사에게-이임한 것을 보면 그 진위의 정당성이 판단됩니다. 그에 더하여 2년 동안 6회의 당회장권을 바꿨다는 것(팩트입니다)은, 기본상식에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모든 것이 명백한 팩트인데, 뭐가 행정적 근거와 사실이 아닌지 설명해야 합니다. 4. 옛 고려 측 목사가 담임하지 못하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라는 소제목 4에 대한 반론 한마음교회 ‘1대 담임목사의 과오’ 때문이라는 주장은 시각에 따라 달리 평가할 수 있으며, 재론의 여지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리고 1대 담임 이성용 목사는 수원사명교회(상가 15평, 3-4명의 교인)를 28년간 한결같이 목회했고 예배당을 건축하고 당회를 구성한 목사입니다. 큰 교회는 아니지만, 신실한 목회자임을 28년간의 목회에서 검증된 목사입니다. 그런 목회자가 2년 만에 당회장이 6번씩 바뀌는 상황에서 무너져 간 것이 누구의 책임이겠습니까? 4-2) 통합기념 한마음교회 제2대 담임목사 청빙에서, 지원자 21명 중 (구)고려 측 목회자가 단 한 명도 지원하지 않았던 사실에 대하여, 왜 그렇게 되었지 한 번이라도 생각하셨습니까? 굳이 밝히면 (구)고려 측 목사들의 상처와 반발이 얼마나 컸는지를 말해주는 메시지입니다. 5. 교단 70주년을 맞아 통합기념교회를 다시 세운다는 것은 역사의 역행입니다. 6. 무엇보다 이 문제는 고신 총회 제 71회 총회에서 모두 화합 하에 이미 처리 된 일입니다. 라는 소제목 5와 6에 대한 반론 제71회 총회에서 70주년 기념교회에 통합정신을 담아 경기북부노회 지역에 교회를 다시 세우기로 한 안건을 임원회에 맡겨 처리하도록 결의했습니다. 김동식 목사는 처리가 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처리가 되었으면 왜 이런 결의를 총회가 다시 했습니까? 총회 선거를 앞둔 마당에 정당한 근거가 없이 정치 이슈화했다고 합니다. 이 재 반박 글을 쓰면서도 저는 김홍석 목사의 거짓말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박 글을 쓰거나 고소, 고발은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분명히 했다고, 전임 총회장 CH목사와 전 통합추진위원 O목사에게 분명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약속을 파기하고 하루 만에 반박 글을 버젓이 신문에 게재했습니다. 이렇게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분이 부총회장 되면 고신 총회가 어디로 흘러가겠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분이 고신 총회 부총회장에 출마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고신의 앞날이 심히 우려됩니다. 손순호 목사 약력 현) 한강사랑의교회 개척 후 27년간 목회 (구)고려 경인지방 제3대 SFC 위원장 경인지방 SFC 간사 역임 서경노회 SFC 지도위원장 역임 (구)고려 경인노회서기 역임 경기서부노회 서기 역임 미주고신 복음대학교 목회학 박사(D.MIN) ※ 기고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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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고
    2022-08-13
  • [특별기고] ‘통합기념 한마음교회 유감’에 대한 오해 바로잡기
    ※ 본지는 반론권 보장을 사유로 김동식 목사의 반론문 게재를 수용하여 13일(토)에 기고문을 게재할 것을 약속하였으나 김동식 목사는 본지 편집인의 개인 휴대전화로 협박성 문자를 보내왔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속히(2022년 8월 12일 18시까지) 반론을 게재해 줄 것을 촉구하며, 반론이 게재되지 않을 경우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는 물론, 명예훼손과 정신적피해에 대한 민형사상의 책임을 반드시 물을 것임을..." 또한 타 기독 언론 매체를 통하여 본인의 기고글을 게재하는 과정에서 본지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악의적인 글을 실었다. 뿐만 아니라 타 기독 언론 매체 기사 입력 시간이 '2022년 8월 12일 12시 56분' 으로 김동식 목사가 본지에 게재를 요구하며 커트라인으로 제시한 '2022년 8월 12일 18시까지' 에 대한 약속은 스스로 지키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따라서 본지 경남기독신문은 향후 합당한 절차를 통하여 엄중히 대처할 것이다. 그러나 구독자의 알 권리와 정당한 논쟁을 보장해야 할 언론의 사명을 다하고자 요청한 반론문은 게제하는 바이다. <경남기독신문 편집인> 경남기독신문 2022년 8월 2일자 <[특별기고] 통합기념 한마음교회 유감>의 글은 행정적 근거와 사실과도 전혀 다른 사실입니다. 마치 ‘시뮬라크르-Simulacre’와 같이 본질을 복제한 가짜로 자신의 생각만을 주장한 허상의 글이기에 그 당시 직접 경험하고 개입된 일이기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어 경기중부노회 임원들의 의견도 듣고 이 글을 씁니다. 아울러 고신 총회 경기중부노회는 행정적 오류가 없음을 밝힘과 동시에 특별기고자는 한번도 노회나 한마음교회를 수습한 당시 임시당회장들에게 서류나 사실 확인을 위해 요청한 바가 없음은 일방적 생각과 주장으로 글을 기고하였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에 반론을 제기합니다. 1. 한마음교회는 유일무이한 ‘통합기념교회’입니다. 한마음교회가 세워지는데는 안양일심교회 J 안수집사의 13억 상당의 종교부지를 헌물한데서 시작됩니다. 2017년 12월 ‘총회통합기념교회 설립추진위원회-위원장 김성복 부총회장’의 요청으로 안양일심교회 당회는 기꺼이 통합기념교회로 드리기로 하여 세워졌고, 2019년 12월 22일 설립예배를 드려졌습니다. 지금도 현관 현판에 개인, 교회, 단체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교회 홈페이지에서도 확인되고 교회 주부에 ‘통합기념교회’에 기록되어 성도들이 자긍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2. 한마음교회는 안양일심교회의 40주년 기념교회나 지교회가 아닙니다. 안양일심교회 40주년 기념교회나 지교회라는 말은 말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물론 종교부지 헌물하였고, 성도들이 10억 헌금 하였지만 안양일심교회 주보, 교회요람, 교회연혁 등 어디에도 ‘40주년 기념교회’나 ‘지교회’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더구나 2018년에 설립되었고, 40주년은 2020년이기 때문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더구나 분명한 것은 노회에서도 한마음교회는 통합기념교회로 되어 있습니다. 3. 당회장권을 한번도 준 적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1) 한마음교회 1대 담임 목사가 선정되고 안양일심교회는 장로 2인과 성도들을 보내기로 하고 노력하였으나, 1대 담임 목사는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장로 2인이 가고 성도들이 함께 하였다면 당회장이 아니라 위임목사로 세워졌을 것입니다. 그렇지 몫해서 전도 목사로 파송되어 당회장을 맡지 못한 것입니다. 2) 첫 번째 당회장이었던 김홍석 목사는 한마음교회 1대 담임 목사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하였습니다. 2018년 12월 30일 첫 공동의회에서 당회장이 담임 목사에게 위임한 내용이 회의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성례권(학습, 세례, 입교, 유아세례)을 담임 목사에게 위임한다. (2) 제직회 일반 사무를 담임 목사에게 위임한다.(예산 편성권, 추가경정 예산 편성권, 예산에 관한 지출, 제직회를 경유한 각종 특별회계 지출) (3) 부목사 청빙을 제외한 교역자 및 임시직원(서리집사)의 임명을 담임 목사에게 위임한다. (4) 경기중부노회 및 총회를 제외하고 대외적으로 교회를 대표할 수 있도록 위임한다. (5) 본 교단 소속목사에 한하여 강도권을 담임 목사에게 위임한다. (6) 정직이하의 치리권을 담임 목사에게 위임한다 로 결의 명시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당회장과 같이 위임하여 준 것입니다. 3) 시찰회와 노회는 당회장권을 주려고 하였으나 담임 목사 사역 중 전임 사역교회에서 재정문제 등 여러 문제를 노회에 제기하게 되어 당회장권이 재론 되었습니다. 4. 옛 고려 측 목회자가 담임하지 못하는 불행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1) 1대 목사의 과오 때문입니다. 누구도 한마음교회 1대 담임 목사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목회 사역 과정에서 심각한 성도와의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겨우 화해와 봉합이 되었지만 2020년 2월 16일 제직회와 공동의회에서 다시 격화되어 내분이 확산 되었습니다. 2차 문제의 해결방법으로 J 당회장의 중재로 3가지 합의를 하였지만 담임 목사의 일방적 합의 파기와 함께 교회 출입 금지 시키고 참으로 고통스런 자살소동까지 이어져 교회는 끝없는 파국으로 빠졌습니다. 총회 재판국의 중재와 임시 당회장과 협조 당회의 결단으로 재정지원으로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2) 2대는 청빙은 교회의 고유한 행정권한입니다. 청빙위원회가 구성되었고 2020년 8월 기독교보에 ‘한마음교회 청빙공고’를 통해 공개적 청빙절차를 밟았습니다. 총 21명이 청빙서류를 제출하였고 그 중에는 옛 고려 측의 목회자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옛 고려 측의 목사가 제2대 한마음교회 담임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억지입니다. 21명의 지원자 중 2020년 9월 27일 청빙위원회에서 21명 중 4명으로 압축하고 면접자 2명을 최종 선정하였고 최종 결적을 내리지 못하고 1주일 기도 후 9월 26일 낮 12시 무기명 투표로 2대 담임 목사를 선정하였습니다. 3) 현재 한마음교회는 2대 담임 목사를 중심으로 회복되어 출석교인 130여 명에 이르는 은혜로 무너진 교회가 회복되어 있습니다. 5. 교단 70주년을 맞아 통합기념교회를 다시 세운다는 것은 역사의 역행입니다. 전국 노회와 교회의 후원금 13억을 말하는데 내야 할 분은 따로 있습니다. 1대 담임 목사를 잘못 세운 책임과 관계된 교회들과 우리 모두의 책임임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경기중부노회 소속 안양일심교회 김홍석 목사와 당회 그리고 성도들은 통합기념교회를 위해 종교부지 헌납, 10억 헌금, 1차 성도 파송, 2차 성도 파송하여 한마음교회를 살린 교회입니다. 이런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정치적 이슈화하여 거론하는 것은 목회자의 일이 아님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6. 무엇보다 이 문제는 고신 총회 제 71회 총회-2021년 9월 28일(화) 오후 1시 ~ 30일(목)-에서 모두 화합 하에 이미 처리 된 일입니다. 이것을 다시 거롢는 것은 총회의 결의를 번복하는 처사이고, 고신총회와 역행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본인이 총회에서 화합과 통합을 발표한 사람입니다. 아울러 총회 선거를 앞둔 마당에 정당한 근거 없이 정치적 이슈화하여 유포하는 것은 총회를 어지럽히는 것이고, 도리어 통합 정신을 고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반하는 것이라 사료됩니다. 고신 총회는 한국교회의 보루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로 총회를 어지럽히고 여론을 조장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김동식 목사 약력 · 현)충훈교회 담임 · 목회학 박사 · 전임 경기중부노회 노회장 · 미주목회 13년 · 말씀회복연구소 소장 · 월간 광야 발행인 · 칼럼리스트 · CMF 전문가정사역자 ※ 기고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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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3
  • [특별기고] 경남기독문화원 문화선교사 김태군 목사의 미주행전(1)
    여호와 샬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 고백한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저 역시 무엇 하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루어 질 수 없었던 미주초청 찬양집회를 다녀오게 되었고 그 짧지 않은 여정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자 이렇게 글을 씁니다. 별빛교회가 어떤 모습으로든지 신곡리를 섬기고 또한 출석하는 15명의 청소년들의 꿈과 소망을 키워 나가기 위해 교회 1층을 영업허가를 내어서 갤러리 카페로 준비하는 과정 속에서 몇 해 전 하나님의 은혜로 만나게 된 아틀란타 선한사마리아인교회 협동목회를 하시는 김춘곤 목사님과 서경훈 목사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로 기도의 동역자들로 힘을 나누고 지내다가 그 교회에서 선교를 하는 과테말라 높은뜻우리교회(배형근 목사)와 인연이 닿았습니다. 그렇게 연결이 되면서 과테말라 현지 청년들을 밀양으로 농업교육과 취업을 위해 이런 저런 절차들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김춘곤 목사님의 밀양 방문을 통해서 밀양 시장님과 만나게 되고 좀 더 구체적인 일들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일들이 점점 만들어 지는 가운데 과테말라 한인 청소년들이 아틀란타 선한사마리아인교회로 단기 선교를 오는 프로그램이 만들어졌고 아틀란타에서 연락이 오기를 저를 초청해서 부흥회와 문화선교에 관한 일들을 만들어갔으면 하는 일들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지난 6월 10일 인천을 통해 아틀란타로 가게 되었습니다. 가기 전 갤러리 카페를 오픈 하려고 했던 저의 계획은 밀양에 큰 불이 나는 바람에 오픈식도 못하고 그냥 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저런 갑갑함을 가지고 출발을 하려니 정말 모든 것이 손에 잡히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기도와 찬양 준비로 마음을 가다듬고 출국길에 올랐습니다. 처음엔 아틀란타와 과테말라만 가려고 했지만 이런 기회가 또 오겠나 싶어서 일정을 한 주간 더 늘려서 나오는 길은 LA를 통해서 나오려고 했고 그 일정을 통해 주께서 인도하심을 느끼고 온 시간들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6월 10일(금) 아틀란타에 도착 후 기회가 주어지는 순간마다 예배 찬양으로 영광 올려 드리며 걸어갔습니다. 금요기도회, 새벽기도회, 주일 일정 중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아틀란타였기에 순간순간을 알차게 보내려고 맘 먹고 기도하며 순종하며 나아갔습니다. 도착 후 첫 주일, 한인교회인 주은혜교회(강윤구 목사)에서 1부 찬양과 2부 땐 미국인교회인 Lord of Life Lutheran Church에서 특송을 하게 되었습니다. 공식적인 첫 사역이었습니다. 미국인 교회에서 “생명의 강물”을 부르게 되었는데, 한국말도 모르시는 미국인 성도님들께서 눈물을 흘리며 함께 찬양 속으로 빠져 드셔서 순간적으로 엄청 놀란 시간이었습니다. 예배가 마치고 난 뒤에도 다들 오셔서 눈시울을 붉히며 축복해 주셨습니다.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루어 질 수 없는 순간을 누리게 되었으며 가기 전 준비한 USB음반이 있었는데 전혀 알아듣지도 못하는 그 미국인 성도님들께서 음반을 사주시고 축복의 시간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은혜의 시간을 누리고 15일 수요일 양로원 데이케어 사역이 진행 되었습니다. 이민 가신 어르신들께서 아침에 오셔서 오후까지 지내시는 센터에서 예배와 미니콘서트를 가졌습니다. 고국에서 왔다고 다들 너무 반갑게 맞이해 주셨습니다. 마치고 함께 식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어르신들과 짧은 만남의 시간도 나누게 되었는데 모두가 하시는 말씀이 한국에 가면 꼭 만나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그 말씀은 정말 오시겠다는 말씀 이전에 고국을 그만큼 그리워하고 계신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저 또한 남은 시간들을 더욱 더 봉사하며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저 하늘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17일(금) 선한 사마리아인교회로 단기선교를 온 과테말라 한인 청소년들과 아틀란타 프라미스교회에서 금요기도회로 섬겼습니다. 과테말라 단기선교팀의 오카리나 연주와 저의 찬양간증집회를 은혜 가운데 마치게 되었습니다. 프라미스교회 담임목사님께서 안식월이라 뵙지는 못했지만 가족 같은 분위기의 프라미스교회는 참으로 따뜻한 교회임을 느끼고 왔습니다. 또한 프라미스교회를 섬기시는 집사님 부부를 만나서 고국의 청년들을 위해 프로그램을 준비해 보라는 말씀도 나누게 되었습니다. 집사님부부는 미국으로 이민을 한 후 열심을 다해서 살아가시면서 청소년과 청년들을 향한 남다른 마음이 있으셔서 저에게 고마운 충고를 해주시고 물심양면으로 섬겨 주셨습니다.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고 별빛교회 청소년들도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에 제대로 잘 준비해서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도록 기도하고 준비하는 비전을 품고 돌아왔습니다. 18일(토) 선한 사마리아인교회에서 부흥집회가 시작되었습니다. 토요일 오후 그리고 주일 오전과 오후 총 세 번의 집회 동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말씀의 주제를 가지고 은혜 가운데 모든 집회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미국도 마찬가지로 펜데믹 때문에 성가대가 모이지도 못하고 주일 예배 시 한 번도 찬양의 시간을 못했는데 이 번에 제가 인도한 부흥회에 아름다운 하모니로 성가대가 2년여 만에 예배 때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하시더군요. 참 감사하고 은혜로운 시간을 함께 누리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집을 숙소로 준비해 주신 선한 사마리아인교회 이 장로님과 집사님, 잊지 못할 순간이었습니다. 장로님 댁에서 지내면서 주님은 머리 둘 곳 조차 없으셨다고 하셨는데 나 같은 죄인이 이렇게 편한 곳에서 지낼 수 있다는 것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시간들이었습니다. 이제 주일이 지나고 과테말라로 떠나기 전날 급작스럽게 또 다른 데이케어에서 섭외가 들어왔습니다. 기쁨으로 찾아뵙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어르신들을 위해 찬양과 간증을 드리고 함께 은혜를 나누게 되었는데 마치고 그 어르신들께서 저에게 찾아 오셔서 두 손을 꼭 잡으시고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고국에 가게 되면 꼭 찾아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처음 갔던 센터처럼 그 어르신들의 마음엔 고국에 대한 간절함이 묻어 있었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이 계셨는데 환하게 웃으시면서 다가오신 백발의 어머님은 눈시울을 붉히시면서 “실은 제가 목사 사모입니다. 그런데 은퇴하신 목사님께서 작년에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천국 갈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시면서 빌려오신 헌금을 봉투에 담으셔서 “고국에 돌아가면 꼭 좋은 곳에 사용해 주십시오” 하시는 겁니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 사모님의 사랑의 마음을 신곡리 어르신들과 별빛 아이들에게 전하려고 굳게 맘을 먹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시간과 사람과 그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존재로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다음 호에 계속> 글. 김태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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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0
  • [특별기고] 통합 기념 한마음교회 유감
    폭염입니다. 여름의 태양이 작열하는 계절! 이 여름에 우리 주님 다시 오신다면 태양처럼 뜨거운 신앙 열정을 가진 사람을 찾으실 것 같습니다. 사역의 현장마다 여름 태양보다 더 뜨거워서 주님의 칭찬을 받는 우리 교단 교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듯이 우리는 성공적인 교단통합을 이었습니다. 그 통합기념으로 한마음교회를 설립한 것입니다. 전국 노회와 교회들이 마음과 기도와 물질을 모아 세운 기념비적 통합기념교회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통합기념 한마음교회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는지요? 통합기념 한마음교회는 고신교단의 여러 어른들과 선배 목사님들 그리고 총회 임원들 그리고 (구)고려의 선배들과 임원들이 힘들게 이루어낸 통합의 금자탑이며 결정체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 교회의 지 교회가 되어있습니다. 교단통합을 하면서 기념으로 교회를 설랍(립)하되 (구)고려측의 목회자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설립한 교회가 바로 한마음교회입니다. 그런데 (구)고려측의 일대 한마음교회 전임목사는 당회장권 한번 갖지 못하고, 고초를 겪다가 사임하였습니다. 한마음교회 담임목사에게 이러저런 이유로 당회장권을 이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2년 동안 무려 6번이나 당회장을 바꾸면서 힘들게 했습니다. 이런 상식 밖의 이상한 일이 통합기념 한마음교회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안양일심교회 부목사로 사역했던 이 모 목사가 담임으로 있습니다. 안양일심교회가 물심양면으로 많은 부분을 헌신한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전국 노회와 교회의 헌금으로 세운 통합기념교회를 일심교회 40주년 지교회로 삼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결과론적으로 유감스럽게도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위한 목적헌금이 한 교회의 지교회를 설립하는데 사용되는 어처구니 없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교단 전체가 바로 알고, 바로 잡아야 하겠다는 결연한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우리가 하나의 교단으로 통합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처음의 약속과 결의가 깨짐으로 아름다운 통합정신이 훼손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지만, 특히 (구)고려 측 형제들에게 깊은 상처를 준 아픔이 된 것입니다. 이런 사태로 인해 안양일심교회와 당회장은 (구)고려 측 형제들로부터 신뢰를 잃었고,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미안했던지, 무마하려고 (구)고려의 어려운 분들을 후원하겠다고 접촉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고려 목사들은 의도가 순수하지 못한 후원금을 받을 리 없지 않습니까? 지난해부터 제안하는 후원금을 거부해 왔습니다. 올해 들어와서 또다시 (구)고려 동문회에 7천만원 정도를 후원하겠다고 제의를 해왔지만 코로나로 인해 어려운 교회와 선교사들이 많이 있었지만 통합기념교회를 세우려는 큰 뜻이 있기에 거절했던 것입니다. 급기야는 비공식 채널을 통해 기어코 후원을 했습니다. 공식적으로 거부했는데도 비공식체널을 통해 기어코 다수의 교회에 상당한 후원을 감행한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저도 부교역자 약 10년, 한 교회 담임목회를 27년째 하니 37년 사역을 하며 산전수전공중전까지 다 겪은 사람입니다. 교회의 내부 사정이 있어 그렇겠거니, 일면 이해가 가지만, 그렇지만 한마음교회의 문제는 양 교단 통합기념 교회인만큼 그냥 넘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전국 노회와 교회의 헌금은 통합기념교회를 설립하기 위한 목적 헌금입니다. 그 목적대로 쓰이지 않았다면 바로 잡는 것이 마땅합니다. 따라서 교단 70주년을 맞아 통합기념교회를 다시 세우려는 계획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국 노회와 교회의 후원금 13억여원은 교단통합의 정신과 기념을 담는 명실공히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위해 쓰여져야 할 것입니다. 안양일심교회는 고신교단의 대표적인 큰 교회 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당회장 김홍석목사님은 앞으로 총회에 큰 일을 감당해야할 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중대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고 교단의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안양일심교회 김홍석목사는 통합기념 교회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하는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보여할 것입니다. 이것이 (구)고려측 대부분 형제들의 일치된 생각입니다. “순교자의 고장! 진리의 파숫군! 경건자의 훈련소, 예수의 제자들이 일어나는 산실!” 그 교단이 우리 고신 입니다. 저는 우리 교단의 일원이고 교단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고신의 목사로 함께 사역함이 늘 감사합니다. 저는 고신인이 된 것이 좋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뒤를 이어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 정신을 이어가는 우리 교단이 좋고 자랑스럽습니다. 그 어떤 일보다도 고신과 고려의 통합이 자랑스럽습니다. 통합 후 (구)고려 동문들이 연합하여 학원이사로, 고신세계선교회 이사로, 이단사이비연구소장으로, 동문회 임원으로. 각 상비부에서... 각처에서 활약하는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운 하모니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통합입니다. 이렇게 배려해 주고, 사랑해주는 우리 ‘고신’이라는 이름이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따라서 통합기념교회가 다시 설립되어 통합정신이 훼손되지 않고 계승되어 아름다운 교단을 잘 보전하고, 또 더 아름답게 발전되기를 기원하는 바램을 담아 이 글을 씁니다. *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이행하라! * 전국 노회와 교회의 목적 헌금을 반환하라! 2022년 7월 중순 신앙 열정이 여름 태양처럼 뜨겁기를 기도하며... ※ 기고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오피니언
    • 기고
    2022-08-02
  • [기자의 눈] 그리스도인의 '격' 있는 정치참여
    현재 우리나라는 아주 뜨거운 정치 쟁점 가운데 서 있다. 바로 대선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몇 사람이 모이면,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가장 바람직하고 행복한 삶을 위하여 정치가 필요하다. 따라서 질서, 협의, 상호존중을 위하여 정치라는 단어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부정할 수 없다. 정치라는 말은 오늘날 많은 사람이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원래 지니는 의미는 상당히 의미 있는 것이다. 정치의 사전적 의미는, '나라를 다스리는 일.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한다. 국민이 권력을 가지고 그 권력을 스스로 행사하는 제도. 또는 그런 정치를 지향하는 사상. 기본적 인권, 자유권, 평등권, 다수결의 원리, 법치주의 따위를 그 기본 원리로 한다.'라고 되어 있다. 국가권력의 차원만 아니라 인간이 속한 모든 영역에는 정치가 없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도 많은 국민이 혐오감을 가질 정도로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정치임에도 떠나서 살 수 없는 현실적인 구조에 놓여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 역시 한 국가나 단체의 일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정치에 관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당연히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며 분별력을 발휘하여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의무 중의 하나이다. 특히 성경은 통치 권력에 대하여 하나님이 부여하신 것이라고 말한다(롬13:1-2). 이 말은 하나님께서 모든 통치 권위를 인정하신다는 의미다. 그래서 다양한 방식으로 정부가 생기도록 허용하셨다. 하나님은 세상이 하나님의 정의로 가득 채워지기를 원하신다(시146:7-9). 그리스도인으로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세상에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는 책임을 수행하는 일이 바로 ‘정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정치를 바르게 세우는 사명을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관여할 때는 반드시 몇 가지 기준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첫째는 기독교인을 선택해야만 한다는 지나친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늘날에는 명목상 기독교인, 득표를 위한 형식적인 기독교인이라 이름 하는 이들 역시 적지 않다. 때로는 진실한 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비전과 국가경영에 관한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를,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선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치적인 면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이방인도 훌륭하게 쓰임을 받은 경우가 있다. 다만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억지로 거역하며, 하나님을 대적하며, 인간을 뻔히 보이는 파멸의 길로 인도할 가능성이 있는 자를 선택하는 무분별한 정치 행위는 금물이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에 참여하되 성경 말씀이 그 기준이 되어야 하며,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내어 자기가 지지하는 자를 드러내놓고 강요하는 행위는 금지되어야 마땅하다. 더욱이 성경을 이용하여 자기 배만 채웠던 이단자들과 같이, 자신의 억지 주장을 반증하기 위해 성경을 이용하는 반 기독교적인 성향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신대원 모 교수가 작성한 SNS의 글은 성경을 빗대어 특정한 후보를 마치 하나님께서 구별한 자라는 이미지를 주므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사안이며, 성경과 하나님의 권위를 모독하는 심각한 범죄 행위이다. 필자는 신학대학원의 교수라도 정치적 성향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고, 평소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드러내어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개인적인 성향이나 견해이므로 한편으로 이해하고 넘겼지만, 최근 SNS에 게재한 그의 성경을 빗댄 해석(?)은 결코 좌시할 수 없는 것이다. 고도의 네거티브 전략이라면 무서운 사상이고, 실수라면 납득할 수 있는 해명이 있어야 할 것이며, 평소의 사상이라면 교수직을 당장 내려놓아야 하는 상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가 지지한 후보에 대해 문제를 삼는 것은 삼가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라는 직임을 생각할 때 정도를 벗어난 것이기에 누가 보더라도 심각한 상황이다. 이 사안에 대하여 본인도 그 심각성을 고려하여 현재는 SNS를 차단하고, 글도 내린 상황이지만 그 여파는 상당히 커져 버렸기 때문에 본인과 관계기관에서는 이해할 수 있는 조치나 해명이 반드시 뒤따라야 할 것이다. 모 교수의 SNS에 상에 성경을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한 정치적 행위는 단순한 해프닝이나 해학을 넘어 계명을 범한 처사이다. 십계명의 제3계명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되어 있다. “망령되이”는 히브리어 ‘샤베’로 ‘무익한, 헛된, 거짓된, 가벼운, 경솔한’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가볍게, 거짓되게 부르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대요리문답』 제 113문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경우들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특히 그 중에서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거나 오용하거나 왜곡시켜 세속적으로 농담거리를 만들거나, 쓸데없이 문제를 삼거나 헛되게 말다툼하며, 거짓된 교리를 주장하는 것(벧후 3:16, 엡 5:4, 딤전 6:4-5, 딤후 2:14, 17), 하나님의 이름 아래 포함되어있는 피조물이나 어떤 것을 악용하여 부적을 만들거나 정욕과 죄악된 행위에 이용하는 것(신 18:10-11)>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거나 오용, 왜곡, 농담거리로 만들지 말 것을 적시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교수는 분명히 제3 계명을 어겼다. 우리의 신앙고백서의 내용을 어겼다. 단순히 ‘독자들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했다.’라는 해명은 어불성설이며 한낱 핑계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번 사태는 신대원 교수로서 십계명 중 3계명을 정면으로 거역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준엄한 조치가 반드시 따라야 할 것이다. 김현주 국장
    • 기자 수첩
    2022-01-17
  • [기고] 고신 총회, 개회예배 성찬 예식 유감
    고신 총회가 지난 9월 28일부터 30일까지 김해중앙교회(강동명 목사)에서 제71회 정기총회를 개회했다. 코로나19 정국의 어려운 상황에서 총회 임원들과 김해중앙교회 강동명 목사와 당회원들이 김해시 지자체와의 코로나 방역지침 준수에 관한 어려운 협의과정을 거친 후 개최된 고신 총회는 복잡한 현안들을 처리하면서 심도있는 안건심의를 했다. 그 중 회무에 앞서 드린 개회예배에서 가진 성찬예식은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성찬은 주님이 직접 제정하신 것으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반드시 시행되어야 하고, 성도가 은혜받는 아주 중요한 방편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번 정기 총회 개회예배 시에 가진 성찬은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여, 소위 '성찬키트'라는 것을 나누어 각자가 개봉하여 먹고 마심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형식을 취했다. 코로나19 방역 지침을 준수하면서 성찬을 드릴 수 있는 방편으로 성찬키트를 선택한 것은 알지만, 성찬키트를 통한 성찬이 이래도 되는가라는 의문점을 남기기도 했다. 물론 부득이한 상황에서 이를 수용하는 것 까지는 그 고충이 충분히 이해된다지만, 그 성찬의 진행과정을 얼마든지 은혜롭게 할 수 있는데, 이번 성찬키트를 이용한 성찬식의 진행과정은 일반적인 성찬식의 경건함에 미치지 못했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음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성찬을 나누는 과정에서 부목사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한 곳에서는 모자란다고 소리치면서 부르고, 조금 떨진 곳에는 손이 닿지 않는다고 키트를 던져 주기도 하고, 개봉하는 과정에서 개봉이 잘 되지 않는다고 옆사람이 개봉을 도와주기도하며 그러다 담긴 것이 엎질러지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이 어색한 총대들은 서로의 어색함이 표정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경건해야 할 성찬예식이, 주님의 십자가의 희생을 깊이 묵상하고, 사죄의 은총에 눈물과 감격이 있어야 할 성찬이, 부끄러움과 하나님께 죄송함, 무례함에 가슴치며 눈물을 흘리며 성찬에 참여해야 하는 현실이 너무나 가슴아팠다. 하지만 이러한 성찬 예식에 대해 어느 총대들은 깊은 한숨을 쉬고 속으로만 눈물을 삼키지, 나서서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없었다. 다만, 이를 안타깝게 여긴 김경헌 목사가 성찬에 참여한 회중 앞에서 "우리가 주님이 주신 이 거룩하고도 은혜로운 예식을 이렇게 웃움거리가 되도록 해서 됩니까? 부득이 키트를 사용해야 한다면 이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은혜롭게, 주님의 은혜가운데 시행할 수 았는데, 이렇게 소란스럽게, 장난스럽게 성찬을 해야만 합니까? 저는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라며 울분을 토했다. 우리 고신은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주장하고,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는 장로교단으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왔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런데 모든 회의에 앞서서 거행된 예배와 성찬은 이미, 사람들의 모임을 예시한 것은 아닌가라를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가장 중요한 본질을 소홀히 여기면서, 그 다음을 은혜롭게 하겠다고 그 길을 추구하는 것은 아해하기 어려운 문제풀이가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깊은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더 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다짐하며 총회 유감의 한 모습이며, 누구나 바른 길을 추구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어야 할 것, 그것이 우리가 추구하는 개혁주의가 아닌가를 생각하며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 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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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01
  • [신재철 목사] 빼빠, 맞거든요!
    유치원 다녀본 적 없고, 엄마와 한글도 익혀보지 못하고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나의 학업 성적은 부모님을 늘 만족시켰다. ‘왕년에 1등 못해본 사람 있나?’라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니다. 나도 그런 과거가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성격도 차분했으니 당시에 모든 친구들과 선생님은 나를 공부 잘하고 얌전한 모범생으로 보게 되었다. 즐거운 시험 시간이 다시 돌아왔다. ‘자연’이라는 과목이다. 늘 그랬듯 대부분의 문제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의 충고대로 문제를 천천히 다시 읽었다. ‘아닌 것은’ ‘맞는 것은’ 이 두 가지를 덤벙대며 읽어서 늘 아쉽게 문제를 틀린다며 엄마는 속상해 하셨다. 그렇게 100점을 향해 천천히 연필을 눌러 정답을 적었다. 이번 시험에서도 나는 100점을 확신했다. 그런데! 채점된 시험지를 받아보니 망설임도, 고민도, 함정도 없었던 문제가 빨간색 막대기로 그어져 있다. 단 한 문제. 정말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다. 다시 문제를 살피고, 상식을 동원해도 틀리지 않은 답이다. “아래 물체의 이름을 적으세요.” 너무 쉬운 문제였다. 그 물건은 우리 집에 널리고 널려 있었고 아버지의 현장에 늘 쓰이는 물건이다. 나무의 거친 면을 문질러서 곱게 만들고 그 위에 페인트를 칠하기도 했던 물건. “빼빠” 우리 가족은 모두 그것을 ‘빼빠’라고 불렀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사포’라는 이름을 붙이셨고 나로 하여금 가족을 불신하도록 만드셨다. 절대 인정 할 수 없다. 선생님께 수차례 항의했다. 잃어버린 100점이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 아버지가 부정당하는 느낌에 참을 수 없었다. 결국 선생님께서는 어머님과 면담을 하셨고 부모님께서 건설 현장에서 일하시는 것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어머님은 그렇게 ‘50원 대출’ 사건 이후로 두 번째 선생님과 면담을 하셨다. 선생님의 이해에도 불구하고 내 점수는 정정되지 못한 95점. 그렇게 나는 가정의 울타리 밖을 조금씩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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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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