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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10] 다시 고신의 야성으로: 자학 사관을 걷어내고 승리하는 보수 신앙을 재건하라!
서론: 무너진 성벽 위에서 파수꾼의 나팔을 불다 9회에 걸친 연재를 통해 우리는 한국 교회와 고신 교단을 소리 없이 잠식해온 손봉호의 인본주의 윤리와 이만열의 자학적 사관의 실체를 파헤쳤다. 그들이 뿌린 씨앗은 이제 고신의 심장부에서 좌경화라는 독버섯으로 자라나 교단의 정체성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이제 우리는 비겁한 침묵을 깨고 나와야 한다. 고신의 야성을 회복하고 무너진 신앙의 성벽을 재건하는 것,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이자 순교 선배들 앞에 부끄럽지 않은 유일한 길이다. 1. 손봉호·이만열 사상이 낳은 참담한 열매들: SFC에서 강정마을까지 그들의 가르침을 먹고 자란 소위 키즈들은 고신의 미래를 어둠으로 몰아넣었다.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을 잃어버린 학생신앙운동(SFC)은 복음 전파보다 좌파적 정치 구호에 경도되었고, 제주 강정 해군기지 반대 시위 현장에는 국가 안보를 저해하는 세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신의 청년들이 나타났다. 기윤실과 성서한국은 성경적 공의를 좌파적 평등으로 변질시켰으며, 교단 내에서는 자칭 고신을 사랑한다는 고사모(고신을 사랑하는 모임)가 출현하여 보수 신앙의 가치를 폄훼하고 좌파적 담론을 생산하는 전위대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이만열·손봉호의 폐해: “교회는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며 국가 안보와 건국 정통성을 부정하는 운동에 면죄부를 주었다.” (출처: 고신 내 좌경화 단체들의 활동 논거) [비평]: 이는 성경적 사랑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편향이다.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과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운동에 동참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손봉호의 윤리와 이만열의 사관은 고신인들에게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을 빼앗고, 대신 자학적 역사관과 좌경화된 정치 의식을 심어주었다. 그 결과 고신의 이름으로 국가의 정당한 국방 사업을 방해하고, 교단 내부를 사상적 갈등의 장으로 만든 것은 명백한 신학적 타락이자 영적 간음이다. 2. 총회의 비겁한 침묵과 기독교보의 방관을 규탄한다 더욱 개탄스러운 것은 고신 총회의 태도다. 국가적 위기와 교단 내 사상적 침투 앞에 총회는 중립이라는 미명 하에 비겁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불의한 정치 권력이 교회를 압박할 때 고신 총회는 어디에 있었는가? 또한 교단의 입인 기독교보는 단순한 홍보지로 전락하여 시대적 아픔과 불의한 정치 현실에 대해 벙어리가 된 지 오래다. 진리를 수호하고 성도들을 깨워야 할 언론이 권력의 눈치를 보며 침묵하는 사이, 성도들은 사상적 혼란 속에서 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다. 총회와 언론의 실태: “시국 설교를 배제하고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것이 경건인 양 포장하며, 교단 내 좌경화 인사들의 활동을 방치해 왔다.” (현 고신 총회 및 기독교보 비판 요지) [비평]: 성경적 중립은 불의에 눈감는 것이 아니다. 선지자들은 왕들의 불의를 향해 목숨 걸고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했다. 지금 고신 총회가 보여주는 모습은 성경적 경건이 아니라 책임 회피이며, 양 떼를 늑대에게 내어주는 비겁한 목자의 행태다. 기독교보 역시 교단의 자화자찬에만 열을 올릴 것이 아니라,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고 좌경화된 사상에 맞서 진리의 나팔을 불어야 한다. 침묵하는 총회와 언론은 결국 이만열·손봉호의 사상적 동조자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3. 독보리를 솎아내고 고신 정신을 회복하라: 징계 절차 착수 촉구 이제 고신 총회는 결단해야 한다. 거룩한 분노로 성경적 가치를 사수하며 애국 운동에 앞장서는 손현보 목사를 향해 극우라는 멸칭을 퍼부으며 징계를 요청한 자들이 누구인가? 권수경, 이세령 목사와 같은 자들이야말로 고신의 헌법과 정신을 정면으로 위반하고 있는 독보리들이다. 인공기를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라 부르는 망언자들을 방치하면서, 예배의 자유를 지키려는 목사를 징계하겠다는 발상은 고신 전체에 대한 모독이다. 결단 촉구: “총회는 즉시 손현보 목사 징계 청원자들에 대한 전수 조사와 강력한 징계 절차에 돌입해야 한다.” (결론적 요구 사항) [비평]: 고신은 신사참배에 항거하며 세워진 저항의 교단이다. 불의한 권력과 타협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피에 흐르는 DNA다. 총회는 더 이상 이만열·손봉호의 가스라이팅에 휘둘리지 말고, 교단 내부의 사상적 적들을 과감히 솎아내야 한다. 손현보 목사에 대한 부당한 공격을 막아내고, 오히려 그를 공격한 자들의 신학적 이단성과 사상적 불온함을 조사하여 징계하는 것이 고신 정신을 회복하는 첫걸음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오늘날 고신 총회에 명하시는 지엄한 명령이다. 결론: 다시 진리의 기치를 높이 들라 우리는 더 이상 속아서는 안 된다. 손봉호의 가짜 윤리와 이만열의 왜곡된 역사가 만들어낸 어둠의 사슬을 끊어내야 한다. 고신은 대한민국 건국과 성경적 보수 신학의 최후 보루다. 하나님께서 이승만 대통령을 통해 허락하신 자유 대한민국과, 한상동 목사님을 통해 지키게 하신 고신 교회의 정통성을 사수하라. 총회와 성도들이 깨어나 독보리(가라지)들을 솎아내고 진리의 깃발을 높이 들 때, 고신은 비로소 한국 교회의 영적 야성을 깨우는 승리의 나팔 소리가 될 것이다. 고신의 영광스러운 회복을 위해 우리 모두 함께 일어서자!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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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9] 자학적 사관의 종착역: 인공기 옹호와 북한 독재를 향한 신학적 굴복
서론: 이만열·손봉호의 가르침이 낳은 기형적 괴물들 지난 연재들을 통해 우리는 이만열의 역사 왜곡과 손봉호의 인본주의 윤리가 어떻게 고신의 뿌리를 갉아먹었는지 살펴보았다. 이제 그 독소들이 실질적으로 어떤 파멸적 결과를 낳았는지 직시해야 할 때다. 소위 이만열·손봉호 키즈라 불리는 이들은 이제 강단을 넘어 포럼과 SNS에서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심지어 기독교의 가장 잔혹한 박해자인 북한 정권의 상징을 미화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들의 외침은 단순한 개인의 견해가 아니라, 수십 년간 주입된 자학 사관이 고신의 심장부에서 터져 나온 사상적 고름이다. 1. 인공기를 하나님 나라의 상징으로 둔갑시킨 사상적 반역 최근 고신 내 일부 목회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지향한다는 상징으로 북한의 인공기를 달아야 한다”는 경악스러운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과 신앙의 자유를 상징하는 태극기를 민족주의적 우상으로 몰아세우면서, 정작 성경을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 신자를 처형하는 북한 전체주의의 깃발을 신앙적 가치로 치환하는 영적 간음이다. 이만열이 깔아준 “대한민국은 불의하게 세워진 나라”라는 전제가 없었다면, 감히 목사가 인공기를 하나님 나라와 연결하는 망언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세택: “태극기를 붙이고 있는 교회... 우리 교단 정신으로 보면 그게 정당한 겁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한다는 상징으로 붙일 국기가 하나 있습니다. 북한의 인공기입니다.” (출처: 2025.11.24. 고신 미래교회 포럼 발언) [비평]: 이는 신학·역사·국가관을 통째로 왜곡한 심각한 사상적 반역이다. 태극기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는 체제의 상징인 반면, 인공기는 십자가를 철거하고 목회자를 학살한 체제의 상징이다. 본인은 강연 중 비유로 인용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목사가 태극기를 우상숭배라 비난하면서 인공기를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이는 민족주의 비판을 빙자하여 자유민주주의 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김일성 일가주의를 신성화하는 종북적 사고의 극치다. 기독교인을 가장 잔혹하게 죽인 체제의 깃발을 교회에 걸자는 주장은 히틀러의 스와스티카를 십자가 옆에 달자는 것에 비견될 만큼 충격적인 발언이다. 2. 애국 목사를 ‘극우’로 몰아 징계를 요구하는 위선적 윤리 이만열·손봉호의 사상적 자녀들은 성경적 진리를 사수하며 국가적 위기 앞에 목소리를 내는 손현보 목사와 같은 애국 목회자들을 ‘극우’라는 낙인을 찍어 공격하고 있다. 권수경, 이세령 목사 등은 고신 총회에 손 목사에 대한 징계를 요청하며 교단 내 사상적 검증 요구를 제기했다. 올해 들어서는 전국을 순회하며 고사모 전국 순회 토론회까지 개최하고 있다. 정병오가 이끄는 기윤실도 이에 동조하며 보수적 신앙 가치를 수호하는 움직임을 ‘반윤리적’인 것으로 몰아세운다. 손봉호 교수는 이러한 이들의 외침을 정당한 비판인 양 비호하며, 정작 교단을 무너뜨리는 좌파적 탈선에는 침묵하고 있다. 손봉호 키즈(권수경, 이세령 등): “손현보 목사의 행보는 극우적이며 교단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있다. 총회 차원의 엄중한 징계가 필요하다.” (출처: 고신 총회 징계 요청 및 관련 기고문 요약) [비평]: 인공기를 달자는 자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면서, 차별금지법을 막고 예배의 자유를 지키려는 목사에게 ‘극우’ 딱지를 붙여 징계를 요구하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윤리인가? 이것이야말로 손봉호가 심어놓은 ‘선택적 도덕성’의 폐해다. 그들은 성경적 정의가 아니라 좌파적 이데올로기를 잣대 삼아 동료 목회자들을 사상적으로 숙청하려 하고 있다. 더구나 2026년 4월 2일 고신총회 임원회가 발표한 「목회자 및 교역자 윤리강령」 제9항은 교회가 “사회와 국가에 대한 책임”을 지며 “모든 구조적 악에 대해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분명히 선언하였다. 그렇다면 차별금지법, 교회 해체법, 설교의 자유 침해와 같은 구조적 문제 앞에서 외친 설교자를 향해 징계를 요구한 행위는 무엇인가. 이는 윤리강령의 정신을 실천한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거스른 것이다. 윤리강령 제9항을 문자 그대로 적용한다면, 예언자적 설교자를 징계하려 한 자들이야말로 먼저 윤리적·교회정치적으로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이다. 정당한 국가관과 신앙 수호 의지를 극우로 몰아세우는 행태는, 고신 총회를 좌경화된 시민단체의 하부 조직으로 만들려는 고도의 전략이다. 3. 전체주의를 옹호하며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신학적 실책 이만열 사관의 종착역은 결국 북한 정권에 대한 도덕적 면죄부와 대한민국 건국 정통성의 완전한 붕괴다. 이들은 성조기나 일장기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면서 인공기에 대해서는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라는 고귀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는 칼 마르크스와 레닌주의적 사유가 한국 교회 안에 스며든 전형적인 형태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의와 평강이 아닌, 사회주의적 평등과 전체주의적 통제로 오해하고 있다. 이로 인해 고신의 젊은 세대들은 대한민국을 지켜야 할 조국이 아닌 타도해야 할 불의한 세력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만열·손봉호 키즈들의 논리: “미국 중심의 세계관(성조기)에서 벗어나야 하며, 진정한 평화와 하나님 나라는 분단을 극복하는 북한과의 연대(인공기 상징)에 있다.” (출처: 성서한국 및 기윤실 포럼 주요 논지) [비평]: 하나님의 나라는 자유와 생명을 상징하지만, 인공기는 인권 말살과 세습 독재를 상징한다. 이 두 가치는 결코 화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인공기를 옹호하는 것은 그들의 신학이 이미 개혁주의 고신의 신학을 이탈했음을 증명한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골 2:8)는 말씀처럼, 이들은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며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놓은 자유의 토대를 허물고 인공기의 그늘로 들어가려는 이들의 시도는 영적 간음이자 역사적 자살 행위다. 결론: 고신 총회여, 독보리들을 솎아내고 신앙의 야성을 회복하라! 오세택 목사의 인공기 발언과 손현보 목사를 향한 권수경, 이세령 목사 등의 징계 요구는 현재 고신 총회가 직면한 위기가 얼마나 엄중한지를 보여준다. 이만열·손봉호가 심어놓은 독보리들이 이제는 아예 밭 전체를 차지하려 들고 있다. 고신 총회는 더 이상 우유부단하게 이들의 망언을 묵과해서는 안 된다. 인공기를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라 부르는 자들이 어떻게 고신의 강단을 지킬 수 있는가? 이제 우리는 이들의 오만하고 반성경적인 생각을 단호히 배격하고, 선배들이 피로 지킨 자유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개혁주의 신앙의 야성을 회복해야 한다. 회개하지 않는 사상적 침투 세력을 솎아낼 때 비로소 고신의 등불은 다시 켜질 것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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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8] 신사참배 저항 정신의 변질: 순교 신앙을 좌파 민족운동으로 오염시킨 죄
서론: 고신의 심장에 박힌 좌파 이데올로기의 독침 고신 교단은 일제의 강압적인 우상 숭배 앞에 무릎 꿇지 않았던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진 거룩한 공동체다. 우리 선배들의 저항은 정치적 투쟁이나 민족 해방을 위한 세속적 운동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수호하려는 영적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만열 교수는 이 거룩한 순교 신앙을 민족주의적 항일 투쟁의 틀 안으로 끌어들여 변질시켰다. 그는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한 투쟁을 좌파적 사회 변혁 운동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둔갑시켰으며, 이로 인해 이만열 교수는 고신의 청년들이 개혁주의 신학보다 좌파 민중사관에 더 열광하게 만드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사상적 숙주가 되었다. 1. 하나님의 주권 선포를 세속적 항거로 격하시킴 고신 신앙의 뿌리인 신사참배 반대는 철저히 제1계명을 지키기 위한 신앙적 결단이었다. 1938년 10월 24일, 부산 초량교회에서 한상동 목사가 선포한 메시지는 그 본질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는 총독부의 칼날 앞에서도 당당히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했으나, 이만열은 이를 민족 정기를 지키기 위한 민족주의적 저항으로 해석하며 그 영적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 1) 한상동 목사: “조선총독부는 정의 및 신의에 위반한 우상인 신사참배를 강요하니 오등은 굴하지 말고 이것에 절대로 참배해서는 못쓴다.” (1938년 10월 24일 부산 초량교회 설교 중) 2) 이만열의 주장 요지: 그는 신사참배 반대 운동이 기독교적 신앙 고백인 동시에 민족 정기를 수호하기 위한 민족주의적 항일 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강변한다. 특히 고신 선배들의 저항을 단순한 종교적 차원을 넘어 일제 식민 통치라는 불의한 구조에 대한 민중적 항거의 연장선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조: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 의식』, 『한국 기독교와 역사의식』 등) 3) [비평]: 한상동 목사님의 외침은 민족 해방을 위한 구호가 아니라 우상 숭배를 거부하는 신앙적 선언이었다. 그러나 이만열은 이를 세속적인 민족 해방 투쟁의 틀 안으로 끌어들여 신앙의 본질을 변질시켰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신앙적 절조는 곧 좌파적 사회 변혁 운동과 맥을 같이 하게 된다. 이러한 영적 왜곡은 고신의 제단 위에 이만열이 좌파 이데올로기의 향로를 피워 올린 격이다. 2. 순교 정신을 사회 참여의 명분으로 악용함 이만열은 고신 교단이 가진 순교자적 야성을 교묘하게 뒤틀어 교회를 사회 정치적 투쟁의 장으로 끌어들였다. 특히 이러한 영적 왜곡은 이만열 개인의 강연에 머물지 않고, 그와 궤를 같이하는 손봉호의 기윤실(기독교윤리실천운동), 그리고 그 사상적 수혜자들인 오세택, 권수경 등 소위 교단 내 소장파 지도자들을 통해 SFC 간사와 신학생들에게 독버섯처럼 번져 나갔다. 1) 이만열의 주장 요지: 한국 기독교의 순교 정신은 오늘날의 불의한 구조에 맞서 싸우는 실천적 사회 운동으로 열매 맺어야 한다. (참조: 『한국 기독교와 역사의식』 등) 2) [비평]: 순교 정신은 세상 권력을 향한 정치적 투쟁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죽음 앞에서도 진리를 타협하지 않는 영적 정절이다. 그러나 이만열이 놓은 사상적 토대 위에 손봉호의 '윤리'가 명분을 제공하고, 이를 추종하는 이들이 SFC와 교단 내에서 활동하며 복음의 본질을 '사회 변혁'으로 치환해 버렸다. 그 결과 고신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일부 세력들이 예배의 자유를 수호하는 일에는 침묵하면서, 광우병 선동이나 해군기지 반대 시위 등 좌파 진영의 논리를 대변하는 정치적 전위대로 전락하는 비극을 초래했다. 이만열은 고신 선배들의 거룩한 피를 좌파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잉크로 제공했고, 그의 추종자들은 그 잉크로 고신의 미래를 검게 물들였다. 3. SFC 좌경화의 사상적 자양분이 된 이만열-손봉호 라인 이만열이 뿌린 왜곡된 역사관은 70~80년대 대학가에 몰아친 민중사관과 결합하여 학생신앙운동(SFC)의 정체성을 붕괴시키는 결정적인 독소가 되었다. 당시 SFC와 대학생들이 손봉호의 윤리와 이만열의 좌경화된 역사 인식에 경도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흐름은 최철호 같은 인물들이 복음주의 운동 내에서 민중 중심의 역사관을 실천적으로 전파하는 토양이 되었으며, 결국 SFC가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 대신 좌파적 정치 구호를 드는 결과를 낳았다. 1) 이만열의 주장 요지: 청년 학생들이 이승만 중심의 건국 사관이나 지배층 중심의 역사를 극복하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역사를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적 저항 정신의 실천이다. (참조: 각종 학생 대상 강연 및 SFC 수련회 메시지 재구성) 2) [비평]: SFC는 학교와 가정, 사회를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학생 신앙 운동이다. 그러나 이만열은 이들을 사회 변혁의 투사로 길러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갈망해야 할 청년들이 이만열이 설계한 역사관에 갇혀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북한 정권에 대해 로맨틱한 환상을 가지면서 좌파 정치 투쟁의 선봉에 서게 된 것은 영적인 비극이다. 손봉호가 '윤리'라는 이름으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할 때, 이만열은 그 책임의 방향을 좌파적 민중 운동으로 향하게 했다. 고신 선배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지키려 했던 것은 자유 민주주의의 토양인 신앙의 자유였지, 교회를 사회주의 실험실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이 두 거두의 영향 아래 성장한 세력들이 오늘날 고신 교단 내에서 '개혁'을 빙자해 좌경화의 길을 닦고 있는 것이다. 이만열은 고신의 미래 세대를 향해 독이 든 사과를 먹인 범인이 아닌가? 결론: 이만열이 오염시킨 고신의 제단을 정결케 하라 이만열 교수는 기독교 역사학자라는 명성 뒤에서 고신의 심장부에 좌파 이데올로기의 독침을 놓았다. 그는 한상동 목사님을 비롯한 신사참배 반대 선배들의 거룩한 순결을 세속적 투쟁으로 격하시켰고, 그 결과 고신은 영적, 사상적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이만열 식의 자학적이고 왜곡된 역사관을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고신의 순교 정신은 좌파 운동의 도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는 영적 자산이다. 우리는 이 거짓된 사슬을 끊어내고 하나님께서 우리 선배들을 통해 세우신 고신의 정절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만이 고신이 다시 한국 교회의 영적 보루로 서는 유일한 길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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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아름다운 총회의 첫 단추, 누구에게나 공정한 선거관리가 되길
총회의 선거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총회를 섬기기 위해 출마를 결심한 분들의 용기와 헌신과 결단에 박수를 보내며, 선거 과정과 결과가 총회를 아름답게 세우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이번 선거에서는 불법과 편법, 비방과 흑색선전, 과장된 공약 홍보와 개인의 욕심에 이끌려 총회를 어지럽게 만드는 인사의 선출 등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특히 선거 조례에 맞추어 서류를 접수하고 후보를 추천해야 하는 노회 임원회와 노회에서 제출하는 각종 서류와 선거 과정 일체를 총괄하는 선거관리위원회는 공정성과 원칙을 최우선으로 삼을 때, 고신이 한국교회의 장자 교단으로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첫 단추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 주길 바랍니다. 아주 간단한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고신총회 선거 조례 제3장 입후보자의 자격 제6조 자격, 입후보자의 자격은 다음과 같다. 1, 임원 4)항은, 모든 입후보자는 임기 중에 항존 직원의 시무 정년(교회 헌법 정치 제32조)을 넘지 않는 자라야 한다”고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또 최근 발표된 제76회 총회 선출직 선거 공고에서도 입후보 자격의 첫 번째 기준이 “입후보자는 임기 중 70세 정년에 해당되지 않아야 한다.”라고, 입후보자의 자격에 관한 조항 중 가장 먼저 명시되어 있습니다. 선거관리위원회에서 공고한 후보자 자격의 첫 번째 기준은, 너무도 간단명료하고 명확하고 모두가 이해하기 쉽습니다. 이에 대해 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이미 제정된 선거 조례와 스스로 공고한 공보문에 따라 그대로 집행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에 대해 누구라도 시시비비할 이유가 없으며, 모든 출마자들은 반드시 지켜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요즈음 들어 이상하리만큼 유행하는 것 중 하나는, 노회 임원이 되고, 총회 상비부의 부원 정도가 되면, 위와 같은 너무도 상식적인 규정을 총회 법제부나 헌법위원회에 질의한다는 사실입니다. 또 그 명확한 조항을 반려하지 않고 재해석한다면, 앞으로 그 어떤 세칙이라도 이런 재해석을 통해 그 결과를 물어야 한다면 세칙은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간혹 노회나 상비부에서 이런 규정을 적용함에 있어 또 다른 문제가 파급되어 더 큰 어려움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책임을 맡은 자로서 소위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겠다”는 비겁한 직무 유기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직무 유기의 범위를 넘어서서, 그 일을 위해 부여된 기관이 그 조항을 적용하는 문제를 타 기관에 넘긴다면, 그 기관의 무능과 존재 문제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몇 차례 언급했지만, 지난 선거관관리위원회에서 고려학원 이사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바로 이 규정에 실수가 있었습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이 부분에 대해 총회 앞에 사과하고 원인 무효해야 합니다. 물론 본인도 살피지 못한 책임이 있기에, 교단의 규칙을 세우는 일과 개인의 책임을 통감하는 입장에서 스스로 물러나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단이 정한 법(선거 세칙)에 따라 합법으로 선출되지 않은 이사가 결정한 것이라면, 합법적으로 선출된 이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이후 학교법인 이사회에서 결정하는 그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합법적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잘못 선출된 이사가 결정에 동참한 것이기에 때문에, 이사회의 결의위 유효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제 개인적으로는 매우 곤혹스럽습니다. 사실 저는 그렇게 선출된 이사를 개인적으로 잘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문제를 제기하여 법대로 바르게 하자고 주장하면, 그분과 관계가 나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 고신을 사랑하는 목사로서 고신이 바르게 하자고 주장하는데 아무런 이유 없이 잘 알지도 못하는 분과 관계가 나빠져야 하고 학원 이사회에는 나쁜 사람으로 인식되어야 합니까? 이런 손해는 누가 보상해 줍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는, 총회가 정한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가장 기본적인 법, 가장 첫째 되는 법, 어린아이가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거관리위원회는 이러한 규정을 엄정하게 적용하여 선거를 관리해야 합니다. 실무자 개인의 판단이나 상황에 따른 예외가 아니라, 모든 실무자가 최소한의 기준과 원칙을 정확히 숙지하고 동일하게 적용해야 공정성이 확보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미 자격 기준에 어긋나는 사례가 발생했다면, 그 경위를 명확히 밝히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규정 위반을 묵인하거나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것은 총회 행정의 신뢰를 훼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선거관리위원회는 규정 해석과 적용에 있어 일관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명확한 규정이 있음에도 다른 부서의 판단에 의존하여 책임을 미루는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선거관리의 책임은 선거관리위원회에 있으며, 공정성과 신뢰를 지키기 위해 원칙에 따른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아울러 총회 임원회와 각 위원회도 모든 행정 과정에서 동일한 기준과 원칙을 적용해야 합니다. 상비부 배정이나 결원 보충 등 각종 인사 행정에서도 상황에 따라 기준이 달라지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총회는 공정한 선거와 원칙이 있는 행정 위에서 세워집니다. 모든 구성원이 납득할 수 있는 기준을 적용하고, 누구에게나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는 선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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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는 글] 거주하는 나그네: 초기 그리스도인의 라이프 스타일
시작하면서 : 초대교회사 속에서 발견한 ‘거주하는 나그네’ 초대교회사를 공부하면서 문득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 바로 어린 시절 텔레비전을 통해 보았던 영화 「벤허」이다. 거대한 경기장을 가득 채운 군중들의 함성, 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하는 전차들, 그리고 이기기 위해 서로를 무너뜨려야 했던 치열한 경쟁은 어린 나에게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에는 단순히 박진감 넘치는 명장면으로만 기억했지만, 초대교회사를 배우면서 그 장면이 로마제국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강한자만 살아남고 권력과 명예가 최고였던 로마 사회 속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전혀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초대교회사를 공부하면서 그리고 이상규 교수의 『초기 그리스도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읽으면서, 초기 교회의 진짜 힘은 정치적 영향력이나 사회적 권력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 자체’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가장 깊이 와닿은 표현은 ‘거주하는 나그네’라는 말이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제국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지만, 로마를 영원한 고향으로 여기지 않았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세상의 가치관에 자신을 맞추지 않았다. 이들은 이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를 소망했고, 이러한 정체성은 그들의 일상과 공동체 생활 전체에 깊이 스며 있었다. 이상규 교수는 이들을 가리켜 “몸은 이 땅에 있으나 마음은 천국에 있는 심리적 이민자”라고 설명한다. 이 표현은 초대교회를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들은 세상을 떠나 숨어 산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가면서도 세상의 가치관에 휘둘리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세상과 구별된 그들의 삶은 당시 로마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초대교회가 성장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 이 글에서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왜 자신들을 ‘거주하는 나그네’로 생각했는지 그 배경을 살펴보고, 그 정체성이 실제 일상과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더 나아가 초대교회의 삶을 거울삼아 오늘날 우리 교회와 소그룹 공동체가 회복해야 할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거주하는 나그네’ 정체성의 형성과 배경 주후 30년경 예루살렘에서 교회가 처음 시작되었다. 64년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본격적으로 박해하기 전까지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비교적 자유롭게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네로 황제의 잔인한 박해가 시작되면서 기독교인들은 공공장소를 떠나 숨어서 모여야만 했다. 이렇게 은밀하게 모이다 보니 비신자들은 기독교 모임에 올 이유가 없어졌고, 복음은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조용히 전해졌다. 이 때문에 당시 비판적인 철학자였던 켈수스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사회를 어지럽히는 ‘비밀단체’라고 부르며 비난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한 건물 대신 일반 가정집을 고쳐서 모이기 시작했다. 가정집에 모인 가장 큰 이유는 사적인 공간이어서 외부의 감시로부터 안전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기독교는 국가가 허락하지 않은 불법 종교였기 때문에 법적으로 재산이나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다. 게다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며 제자로 삼는 일이 너무나 시급했기 때문에, 다른 종교들 처럼 화려한 신전이나 신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이러한 박해는 249년 데키우스가 황제가 되면서 제국 전체를 무대로 하는 혹독하고 조직적인 탄압으로 변했다. 데키우스 황제는 로마 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증명서’ 소지 여부를 검사하며 기독교인들을 강하게 압박했다. 하지만 이렇게 모질게 탄압하는데도 기독교인들의 아름다운 삶을 통해 복음이 제국 전역으로 점점 더 퍼져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로마는 결국 박해를 중단하게 된다. 박해 이후 약 40년 동안 교회에 평화가 찾아왔고, 이때부터 조금씩 가정교회를 넘어선 독립된 예배당 건물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을 받으면서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탄압이 끝나고 당당하게 활동할 수 있게 된 교회는, 주 후 380년 데오도시우스 황제 때 이르러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는 엄청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처럼 역사 속에서 심한 박해가 있었지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은 멈추지 않았다. 177년 프랑스 골 지방에서 끔찍한 박해가 일어난 후, 그 고난을 견뎌낸 한 그리스도인은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비엔나와 골, 리용의 ‘거주하는 나그네’인 그리스도의 종들이 동일한 구원의 믿음과 희망을 품고 있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있는 형제들에게 편지합니다” 이 구절은 당시 성도들이 박해 속에서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2세기 후반의 유명한 변증서인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는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생활을 더 구체적으로 전해준다. “그리스도인들은 국가나 언어 또는 문화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만의 도시에서 살지도 않고 그들만의 독특한 대화 방법을 쓰지도 않는다. 삶의 방식도 특별한 것이 없다. 의복이나 음식, 그리고 다른 일상생활 방식에서도 그 지역 풍습을 따라 산다. 그들은 자신들의 국가에 살지만 ‘거주민이자 나그네’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시민으로 모든 일에 참여하지만, 외국인으로서 모든 것을 참고 산다. 모든 낯선 땅이 자신들의 조상 땅이라고 생각하지만 모든 조상의 땅이 또한 낯선 땅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결혼하고 자식을 낳지만, 자식을 버리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박해를 받는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많은 이들을 부요하게 한다. 간단하게 말해서 영혼이 육체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있다.” 이처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담을 쌓고 숨어 산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이 세상과 다르게 살았다. 로마 사회의 일원으로 성실하게 살았지만,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 나라에 두었다. 한 나라의 시민권자이지만 고국을 떠나 외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표현과 같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정체성을 표현했다. 2. 초대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일상을 살아갔을까? 고대 로마시대에는 황제들이 민심을 얻기 위해 대중적인 오락과 구경거리를 많이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5만 명이나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콜로세움 경기장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검투사들의 잔인한 싸움과 맹수 사냥 같은 자극적인 구경거리가 매일 열렸다. 이러한 스포츠는 부자 귀족부터 가난한 노예까지 모든 로마 사람들을 사로잡은 최고의 인기 오락이었다. 또한, 극장의 연극 공연도 크게 유행했다.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하면서 연극 문화가 로마로 넘어왔는데, 당시 무대에 오른 연극들은 주로 부도덕하고 음란하며 잔인한 내용이 대다수였다. 초기 기독교는 이 두 가지 대표적인 오락 문화에 대해 아주 단호하고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2세기 교부였던 테르툴리아누스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공연에 관하여』라는 책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올바른 삶의 기준을 제시했다. 당시 로마인들은 축제를 핑계 삼아 술을 마시고 광란의 밤을 보내곤 했는데,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러한 구경거리들이 본질적으로 우상 숭배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또한, 잔인하고 음란한 장면들이 사람의 감정을 자극해 성령님이 거하시는 마음의 평정심을 해친다고 경고했다. 이처럼 초기 교회는 세상의 타락한 문화에 휩쓸리지 않도록 분명한 기준을 가르쳤다. 또한, 당시 로마 사회에서 사람들이 가장 집착했던 것 중 하나는 외모를 꾸미는 일이었다. 화장하고, 화려하게 치장하고, 몸에 문신을 새기는 일은 고대 로마인들의 흔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초기 교부들은 외모를 지나치게 꾸미는 것을 영혼의 순결을 해치는 육신 적인 일로 보았다. 키프리아누스 교부는 『처녀의 복장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라고 말했다. 그는 외적인 화려함은 결국 내면의 영적인 가난함을 보여 줄 뿐이라며, 겉모습을 치장하기보다 마음속 세계를 돌보고 늘 검소하고 단정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뿐만 아니라 쾌락적인 목욕문화, 여행 등 오늘날과 다를 바 없는 화려한 로마의 일상 속에서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제국의 화려함 속에서도 신앙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특히 초대교회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빛을 발했던 가장 아름다운 전통은 바로 ‘손 대접’이었다. 지금처럼 안전한 숙박시설이 없던 시절, 낯선 나그네와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을 아무 대가 없이 자기 집으로 맞아들이고 대접하는 것은 기독교인들만의 특별한 라이프스타일이었다. 성도들은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면서 그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 아름다운 전통은 나중에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병원 제도의 역사적 모태가 되기도 했다. 아무것도 돌려받을 수 없는 약자들을 집으로 초대해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었던 이 삶의 방식은, 로마의 단단한 신분 장벽을 허물고 서로를 존중하게 만드는 위대한 배경이 되었다. 3. 초대교회의 삶을 통해 현대 교회가 회복해야 할 가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살펴보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교회의 본질이 건물이나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공동체에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를 말할 때 자연스럽게 예배당 건물을 떠올리지만, 초기 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에게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 자체였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교회 건물로 알려진 두라-유로포스 역시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 준다. 두라-유로포스에서 발견된 교회는 처음부터 교회당으로 건축된 건물이 아니라 일반 가정을 개조한 공간이었다. 이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것이 건물의 규모나 외형이 아니라 함께 모여 말씀을 나누고 교제하며 신앙을 실천하는 공동체였음을 보여 준다. 오늘날 한국교회 역시 건물 중심의 사고를 넘어 공동체 중심의 신앙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또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단순한 지식이나 교리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내용을 삶 속에서 실천하고자 하였다. 영아 유기와 낙태를 거부하고, 원수를 사랑하며,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돌보는 삶을 살아갔다. 알랜 크라이더(Allan Kreider)는 초기 교회의 성장이 화려한 전도 전략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삶의 방식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결국,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설교만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보며 복음의 진정성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현대교회 역시 프로그램과 행사 중심의 신앙을 넘어 삶으로 살아내는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예배와 교육도 중요하지만, 교회가 세상 속에서 영향력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복음을 말하면서도 삶으로 보여 주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거주하는 나그네’로 살아갔던 것처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의 가치관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된다. 특별히 현재 목장 공동체를 섬기고 있는 나에게 초기 교회의 모습은 큰 도전으로 다가왔다. 목장교회는 단순한 소모임이 아니라 초기 교회의 가정교회 정신을 현대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공동체라고 생각한다. 목장 안에서 성도들은 서로의 삶을 나누고 기도 제목을 공유하며 함께 신앙의 성장을 경험한다. 또한, 어려움 가운데 있는 목원을 돌보고 함께 기도하는 과정에서 초대교회의 공동체성을 경험할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가정에서 모여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여기며 살아갔던 것처럼, 오늘날의 목장 공동체 역시 단순한 모임을 넘어 삶을 함께 나누는 영적 가족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공동체가 세워질 때 현대교회는 초대교회가 보여 주었던 생명력과 영향력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4. 맺는말 : 오늘날로 이어지는 ‘거주하는 나그네’의 삶 세상 속에 살지만 ‘거주민이자 나그네’로 살아가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생생하게 다가 온다. 순수함과 원형적인 초대교회,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하여 나의 삶과 사역을 깊이 돌아볼 좋은 기회가 되었다. 초대교회사를 공부하면서 복음이 기독교적 가치를 잃지 않고 오늘날에 전파되기까지 수많은 박해와 고난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네로의 잔혹한 탄압과 데키우스의 조직적인 박해 속에서도 성도들이 ‘거주하는 나그네’의 정체성을 끝까지 지켜냈기에 복음의 순수성이 보존될 수 있었다. 2천 년의 시간을 뚫고 그 귀한 복음이 나에게까지 전파되고, 이제는 그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붙들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하다. 이는 단순한 역사적 지식의 습득을 넘어, 나를 복음의 빚진 자로 서게 만드는 영적 은혜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나의 삶과 교회 공동체에 비추어 무엇이 진짜 교회이며,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진다. 그들이 보여준 따뜻한 환대의 전통과 일상의 순수함은 현대 교회가 지향해야 할 소그룹 공동체와 다음 세대 신앙 교육 현장이 나아가야 할 분명한 이정표가 된다. 초기 기독교에 대해 공부하고 책을 읽으면서 나의 모든 삶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로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주일의 예배당 문을 나서 월요일의 세상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는 나의 모든 일상이 곧 초기 성도들이 보여준 거룩한 나그네의 삶이 되기를 기도한다. 소그룹 사역의 자리에서 이 아름다운 라이프스타일의 전통을 묵묵히 이어갈 때, 초대교회를 부흥케 하셨던 하나님의 신실하신 계획이 오늘날 우리 공동체 위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줄 믿는다. 글. 김주영 안수집사 (서울 더라이프지구촌교회) ※ 이 글은 이상규 교수(전 고신대학교 교수, 현 백석대학교 석좌교수)님의 추천으로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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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그래도 다시 한번
조선 태종 이방원이 남긴 「하여가」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원래 이 시는 권력을 향한 타협의 노래였지만, 오늘 우리 교단의 현실을 비추는 거울처럼 다가옵니다.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이 피곤해지고, 불의에 침묵하는 것이 지혜가 된 시대입니다. 비록, 이런 태도가 세상에서 흔할지는 모르나,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교를 자랑해 온 고신에서는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닙니다. 우리 교단에는 엄연히 헌법이 존재합니다. 헌법은 원칙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 헌법은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킬 때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게 되며, 최소한의 질서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총회 “재판국원은 교회법에 상당한 식견을 가진 자 중에서 선임하되, 목사는 임직 20년 이상 장로는 임직 7년 이상인 사람 중에서 각 노회에서 추천하고 공천위원회가 공천하며 총회가 선임한다.”(권징, 제 22조 2항)라는 항목은 원칙입니다. 총회 서기를 지낸 어떤 분은 스스로 자신을 특별국에 배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발언했으나, 결국 총회를 잘 아는 자가 특별국에 들어가야 한다는 모순적인 주장을 하며 자천하여 특별국원이 되었습니다. 특별국원이 되고 그다음에 총회장으로 가는 코스처럼 인식하는 듯합니다. 특별국을 나올 때는 당해 연도에는 다른 특별국으로 갈 수 없다는 기준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정해놓은 법이나, 기준, 혹은 약속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총회를 너무나 잘 알기에 기준을 무시하고 당당하게 다른 특별국으로 추천하기도 하고, 입성(?)하는 현실입니다. 총회장을 역임하고, 부총회장을 역임한 후 특별국이나 상임위원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도 그 어떤 시선도 전혀 개의치 않고 당당할 수 있는 것은 총회를 너무도 잘 아는 자가 총회 일을 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로 법을 초월할 수 있다는 인식 때문입니다. 총회의 근간을 세우고 법의 기준을 세워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조직이 헌법위원회와 재판국입니다. 그러므로 총회를 위해 맡겨진 중책 때문에라도 법이나 기준에 하자가 없는 자가 위원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가 위원이 되어야 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총회의 특별 부서 중 성경에 입각하여 법을 바르게 세워야 하는 자들이 법과 기준과 약속에 떳떳하지 않는데, 그런 자들이 해석하고 적용하고 결정하는 법과 기준과 약속에 어떤 정당성과 명분과 영적인 능력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총회의 중요한 부서가 이렇다 보니 고신대, 고려신학대학원, 복음병원을 운영하는 학원이사회도 말 그대로 꼴불견입니다. 이사회의 임원이 되기 위해 이력을 감추고, 개인의 정년을 늘리기 위하여 법을 개정하는데 입을 맞추고, 정당하게 선출된 감사를 탈락시키기 위해 수도 없이 거짓말을 하고, 시무 정년이 끝나도 이사를 할 수 있는 초법적인 행태가 위기의 때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미화되는 현실입니다. 문제가 제기되면 운영위원회에서 사과하고 나름 거액을 헌금하면 오히려 총회를 위한 위대한 헌신과 희생으로 둔갑되는 기가 찬 현실입니다. 노회, 공천위원회, 총회 임원회 가운데 어느 한 곳도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과거, 단 하루의 서류 발급일 차이로 자격을 박탈하던 교단이 아니었습니까? 몇 개월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후보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던 전례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 엄격함은 어디로 갔습니까? 원칙과 기준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적용될 때 원칙과 기준이 됩니다. 관대함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우리 선거 조례도 역시 선명합니다. 모든 입후보자는 임기 중 정년에 해당하지 않아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제3장, 6조 1-4항). 그런데 정년이 지난 상태에서도 이사직을 유지하는 사례가 생겼습니다. 이는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입니다. 적법하게 추천된 후보는 투표로 탈락시키면서, 자격이 명백히 부족한 인사에게는 ‘예외’라는 이름으로 길을 열어주는 모습은 공정이 아니라 편의이며, 원칙이 아니라 사적 판단입니다. 더 나아가 부정부패의 뿌리입니다. 우리 총회는 덮는 일에 능숙해진 공동체 같습니다. 양심적인 도예가는 불량품을 깨뜨립니다. 반면에 양심을 잃은 도예가는 그 위에 색을 칠해 시장에 내놓습니다. 문제가 있어 사용할 수 없는 인사를 ‘다른 자리’라는 핑계로 총회에 넘기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현실입니다. 과거의 중징계 이력이 제출 서류에서 빠졌음에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넘어갑니다. 이것은 과연 실수입니까? 아니면 의도적인 침묵입니까? 문제는 “모두에게 동일한가?”입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라는 말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된다면 그나마 덜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내 편에게는 관대하고, 내 편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한없이 엄격해집니다. 이중 잣대는 교회보다 세상에서 더 빠르게 신뢰를 무너뜨립니다. 지금 세상은 교회와 노회와 총회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덮고 넘어간 것들이 결국 교회의 얼굴이 됩니다. 고신의 힘은 제도가 아니라 양심이었습니다. 고신은 제도가 강해서 여기까지 온 교단이 아닙니다. 불리해도 원칙을 지켰고, 손해가 나도 바른길을 선택했던 양심의 역사가 오늘의 고신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변명이 아니라 회개이며, 침묵이 아니라 같은 원칙과 기준입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라는 말이 편리한 방패가 되는 순간, 고신은 스스로가 가장 경계해 왔던 모습과 닮아갈 것입니다. 이 글은 누구를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나는 내 허물에는 관대하고, 남의 허물에는 엄격하지 않았던가?” 이 질문 앞에서 정직해질 때, 고신은 다시 고신다워질 수 있습니다. 선관위원장이 교체되었습니다. 새로 선임된 선관위원장은 항상 바르게 법대로 규정대로 하겠다고 주장하셨던 분으로 기억됩니다. 그래서 2026년 올해 총회의 선관위에 그래도 다시 한번 기대를 걸어보고자 합니다. 이번 총회 역시 총회 임원 선출을 비롯하여 많은 이사와 부서에 필요한 사람들을 세우게 됩니다. 미진한 법들까지 찾고 연구해서 바르게 적용해야 함이 지당합니다. 그런데 선관위에서 기독교보에 게재한 규정들조차 바르게 적용하지 않고, 총회 법을 논하면 문교부 법으로 덮고, 문교부 법을 논하면 총회 법으로 덮는, 총회 총대들을 무식한 개돼지로 취급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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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9] 자학적 사관의 종착역: 인공기 옹호와 북한 독재를 향한 신학적 굴복
- 서론: 이만열·손봉호의 가르침이 낳은 기형적 괴물들 지난 연재들을 통해 우리는 이만열의 역사 왜곡과 손봉호의 인본주의 윤리가 어떻게 고신의 뿌리를 갉아먹었는지 살펴보았다. 이제 그 독소들이 실질적으로 어떤 파멸적 결과를 낳았는지 직시해야 할 때다. 소위 이만열·손봉호 키즈라 불리는 이들은 이제 강단을 넘어 포럼과 SNS에서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심지어 기독교의 가장 잔혹한 박해자인 북한 정권의 상징을 미화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들의 외침은 단순한 개인의 견해가 아니라, 수십 년간 주입된 자학 사관이 고신의 심장부에서 터져 나온 사상적 고름이다. 1. 인공기를 하나님 나라의 상징으로 둔갑시킨 사상적 반역 최근 고신 내 일부 목회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지향한다는 상징으로 북한의 인공기를 달아야 한다”는 경악스러운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과 신앙의 자유를 상징하는 태극기를 민족주의적 우상으로 몰아세우면서, 정작 성경을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 신자를 처형하는 북한 전체주의의 깃발을 신앙적 가치로 치환하는 영적 간음이다. 이만열이 깔아준 “대한민국은 불의하게 세워진 나라”라는 전제가 없었다면, 감히 목사가 인공기를 하나님 나라와 연결하는 망언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세택: “태극기를 붙이고 있는 교회... 우리 교단 정신으로 보면 그게 정당한 겁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한다는 상징으로 붙일 국기가 하나 있습니다. 북한의 인공기입니다.” (출처: 2025.11.24. 고신 미래교회 포럼 발언) [비평]: 이는 신학·역사·국가관을 통째로 왜곡한 심각한 사상적 반역이다. 태극기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는 체제의 상징인 반면, 인공기는 십자가를 철거하고 목회자를 학살한 체제의 상징이다. 본인은 강연 중 비유로 인용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목사가 태극기를 우상숭배라 비난하면서 인공기를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이는 민족주의 비판을 빙자하여 자유민주주의 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김일성 일가주의를 신성화하는 종북적 사고의 극치다. 기독교인을 가장 잔혹하게 죽인 체제의 깃발을 교회에 걸자는 주장은 히틀러의 스와스티카를 십자가 옆에 달자는 것에 비견될 만큼 충격적인 발언이다. 2. 애국 목사를 ‘극우’로 몰아 징계를 요구하는 위선적 윤리 이만열·손봉호의 사상적 자녀들은 성경적 진리를 사수하며 국가적 위기 앞에 목소리를 내는 손현보 목사와 같은 애국 목회자들을 ‘극우’라는 낙인을 찍어 공격하고 있다. 권수경, 이세령 목사 등은 고신 총회에 손 목사에 대한 징계를 요청하며 교단 내 사상적 검증 요구를 제기했다. 올해 들어서는 전국을 순회하며 고사모 전국 순회 토론회까지 개최하고 있다. 정병오가 이끄는 기윤실도 이에 동조하며 보수적 신앙 가치를 수호하는 움직임을 ‘반윤리적’인 것으로 몰아세운다. 손봉호 교수는 이러한 이들의 외침을 정당한 비판인 양 비호하며, 정작 교단을 무너뜨리는 좌파적 탈선에는 침묵하고 있다. 손봉호 키즈(권수경, 이세령 등): “손현보 목사의 행보는 극우적이며 교단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있다. 총회 차원의 엄중한 징계가 필요하다.” (출처: 고신 총회 징계 요청 및 관련 기고문 요약) [비평]: 인공기를 달자는 자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면서, 차별금지법을 막고 예배의 자유를 지키려는 목사에게 ‘극우’ 딱지를 붙여 징계를 요구하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윤리인가? 이것이야말로 손봉호가 심어놓은 ‘선택적 도덕성’의 폐해다. 그들은 성경적 정의가 아니라 좌파적 이데올로기를 잣대 삼아 동료 목회자들을 사상적으로 숙청하려 하고 있다. 더구나 2026년 4월 2일 고신총회 임원회가 발표한 「목회자 및 교역자 윤리강령」 제9항은 교회가 “사회와 국가에 대한 책임”을 지며 “모든 구조적 악에 대해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분명히 선언하였다. 그렇다면 차별금지법, 교회 해체법, 설교의 자유 침해와 같은 구조적 문제 앞에서 외친 설교자를 향해 징계를 요구한 행위는 무엇인가. 이는 윤리강령의 정신을 실천한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거스른 것이다. 윤리강령 제9항을 문자 그대로 적용한다면, 예언자적 설교자를 징계하려 한 자들이야말로 먼저 윤리적·교회정치적으로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이다. 정당한 국가관과 신앙 수호 의지를 극우로 몰아세우는 행태는, 고신 총회를 좌경화된 시민단체의 하부 조직으로 만들려는 고도의 전략이다. 3. 전체주의를 옹호하며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신학적 실책 이만열 사관의 종착역은 결국 북한 정권에 대한 도덕적 면죄부와 대한민국 건국 정통성의 완전한 붕괴다. 이들은 성조기나 일장기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면서 인공기에 대해서는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라는 고귀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는 칼 마르크스와 레닌주의적 사유가 한국 교회 안에 스며든 전형적인 형태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의와 평강이 아닌, 사회주의적 평등과 전체주의적 통제로 오해하고 있다. 이로 인해 고신의 젊은 세대들은 대한민국을 지켜야 할 조국이 아닌 타도해야 할 불의한 세력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만열·손봉호 키즈들의 논리: “미국 중심의 세계관(성조기)에서 벗어나야 하며, 진정한 평화와 하나님 나라는 분단을 극복하는 북한과의 연대(인공기 상징)에 있다.” (출처: 성서한국 및 기윤실 포럼 주요 논지) [비평]: 하나님의 나라는 자유와 생명을 상징하지만, 인공기는 인권 말살과 세습 독재를 상징한다. 이 두 가치는 결코 화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인공기를 옹호하는 것은 그들의 신학이 이미 개혁주의 고신의 신학을 이탈했음을 증명한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골 2:8)는 말씀처럼, 이들은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며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놓은 자유의 토대를 허물고 인공기의 그늘로 들어가려는 이들의 시도는 영적 간음이자 역사적 자살 행위다. 결론: 고신 총회여, 독보리들을 솎아내고 신앙의 야성을 회복하라! 오세택 목사의 인공기 발언과 손현보 목사를 향한 권수경, 이세령 목사 등의 징계 요구는 현재 고신 총회가 직면한 위기가 얼마나 엄중한지를 보여준다. 이만열·손봉호가 심어놓은 독보리들이 이제는 아예 밭 전체를 차지하려 들고 있다. 고신 총회는 더 이상 우유부단하게 이들의 망언을 묵과해서는 안 된다. 인공기를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라 부르는 자들이 어떻게 고신의 강단을 지킬 수 있는가? 이제 우리는 이들의 오만하고 반성경적인 생각을 단호히 배격하고, 선배들이 피로 지킨 자유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개혁주의 신앙의 야성을 회복해야 한다. 회개하지 않는 사상적 침투 세력을 솎아낼 때 비로소 고신의 등불은 다시 켜질 것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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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9] 자학적 사관의 종착역: 인공기 옹호와 북한 독재를 향한 신학적 굴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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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침묵 속에 핀 신앙의 꽃: 히라도와 나가사키 순례 기행
- *여정의 서막: 설렘으로 빚은 여섯 명의 기도 “경남 CBS 개국 25주년 기념 일본 순교지 순례”의 길을 떠나기 전, 우리 새누리 교회 6명의 일행은 마치 첫사랑을 기다리는 아이들처럼 가슴 설레는 마음으로 이번 순례길을 준비했습니다. 각자의 삶은 분주했지만, 일본 땅에 숨겨진 신앙의 발자취를 찾아 나선다는 공통의 목적 아래 우리는 하나가 되어 기도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그 옛날 척박한 땅에서 복음을 지켰던 이들의 뜨거움을 우리도 만나게 하소서”라는 간절한 고백은 순례길에 오르기 전부터 이미 우리 마음 속에 작은 불꽃을 지피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설렘과 기대로 가득 찬 새누리 교회 순례팀은 소망의 닻을 올리고 큐슈의 서쪽 끝, 히라도와 나가사키를 향해 발을 내디뎠습니다. *선상부흥회: 바다 위에서 울려 퍼진 영혼의 울림 이번 순례의 시작과 끝은 푸른 바다 위에서 드려진 “선상부흥회”로 더욱 특별했습니다. ‘이경은 목사님’과 ‘정태진 목사님’께서 이끄신 부흥회는 순례의 길목마다 우리 영혼의 지표가 되었습니다. 목사님들의 뜨거운 설교는 배 안을 성령의 뜨거운 열기로 가득 채웠으며 우리 일행 6명 모두는 일본 땅을 밟기 전 이미 성령의 뜨거운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망망대해에서 들려온 생명의 말씀은 우리가 순례지로 향하는 이유를 분명히 깨닫게 도와주었으며, 돌아오는 길에는 그 감동을 일상의 사명으로 승화시키는 귀한 영적 동력이 되었습니다. *히라도: 고난의 현장, “후미에”의 통곡과 “스즈타 감옥”의 침묵 둘째 날 순례 중 머문 “야이자 화형장”은 마음 한 구석이 칼로 오려내는 듯한 아픔의 현장이었습니다. 당시 신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후미에(성화상 밟기)” 체험 앞에 섰을 때, 생존과 신앙 사이에 갈등했을 그들의 처절한 고뇌가 전해져 발바닥에 닿는 못 판의 아픔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이어 다음 날 마주한 “오무라 스즈타 감옥터”는 순교의 역사가 얼마나 처절했는 지를 보여주었습니다. 두 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서 수십명의 신자가 갇혀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던 그곳, 서서 용변을 보며, 서서 잘 수 밖에 없던 그곳에서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악취와 추위 속에서도 서로를 격려하며 신앙을 고백했던 그들의 흔적을 묵상하며, 우리가 누리는 신앙의 자유가 얼마나 많은 선조의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인지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나가사키: 26인 성인, 고난 위에 피어난 영광의 찬미 1597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선교사와 일본인 신자 26명이 니시자카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한 곳으로, 추운 겨울날 귀가 잘린 채 800km를 맨발로 걸어 온 이들 중에는 12세, 13세의 어린 소년들도 있었습니다. 십자가형을 앞두고도 “천국이 가깝다”며 노래했던 12세 “루도비코 이바라키”, 이 소년들이 바로 일본 땅에 심겨진 가장 순결한 밀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흘린 피는 오늘날 일본 기독교 역사의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었음을 가슴깊이 새겼습니다. *나가사키 수요예배: “이 땅의 밀알이 되라”는 부르심 이번 순례의 영적 정점 중 하나는 나가사키에서 드린 “수요예배”였습니다. “후쿠오카 비전 처치”를 섬기시고 계시는 김주영 선교사님, “한 알의 밀알이 열어준 길 – 그분을 따라 이 땅의 밀알이 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수 백년 전 이 땅에 떨어져 썩어짐으로 무수한 신앙의 열매를 맺게 한 순교자들의 삶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알의 밀알”을 따른 길이었음을 깨달으며, 우리 일행은 단순히 유적을 돌아보는 관광객이 아닌 ‘복음의 빚진 자’로서 깊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귀국의 길: 풍랑 속에서 외친 간절한 기도 모든 일정을 마치고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을 때, 바다는 마치 우리의 믿음을 마지막으로 시험하려는 듯 거센 풍랑을 일으켰습니다. 배 안의 많은 사람이 극심한 멀미로 토하고, 어지러워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이 한계에 다다랐지만, 우리는 입을 모아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주여, 이 풍랑을 잠재워 주소서.” 갈릴리 호수의 풍랑을 잠재우셨던 주님을 의지하며 올린 그 밤의 기도는, 박해의 폭풍 속에서도 신앙을 지켰던 순교자들의 기도와 닮아 있었습니다. 그 간구 속에 거칠었던 파도는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고, 우리는 비로소 짧은 시간이지만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여정을 갈무리하며: 삶의 순례자로 다시 서기 5일간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우리 새누리 교회 6명의 마음에는 떠나기 전의 설렘보다 더 묵직하고 단단한 사명이 채워졌습니다. 순교자들이 밀알이 되어 열어 준 이 길을 이제는 우리가 이어가야 한다는 거룩한 부담감이었습니다. 야이자 화형장과 스즈타 감옥터의 통곡, 나가사키 수요예배에서 받은 말씀의 은혜, 26성인의 순교 현장 그리고 마지막 배 안에서의 간절했던 기도를 기억하며 이제 우리는 각자의 삶이라는 순례길로 다시 돌아갑니다. 이번 순례를 허락하시고 풍랑 속에서도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하신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2026. 0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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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침묵 속에 핀 신앙의 꽃: 히라도와 나가사키 순례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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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나비 논평] 2025년 사순절을 맞는 교회와 신자의 자세
- <2025년 사순절을 맞는 교회와 신자의 자세> 사순절 기간 한국교회는 문화적 회개, 금식, 휴대폰 절제를 통한 성화의 삶을 실천하자 사순절을 맞이하여 우리 욕망을 절제하며 사회적인 소외자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펼치자 사순절(四旬節, 영어: Lent)은 부활절을 맞이하기 앞서서 우리의 육체와 영혼을 정결하게 준비하기 위하여 주일을 제외한 40일간 갖는 금식과 금욕의 기간을 말하는데, 이 기간에 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우리의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주님의 낮아지심과 고난을 기억하면서 회개와 기도 등 영적 훈련에 힘씀으로 경건한 삶과 영적 성장을 위한 특별한 훈련의 기회를 가진다. 사순절은 초대교회 때부터 내려오는 교회의 전통이다. 일찍부터 초대교회는 부활절에 앞서 주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기간을 가지는 것이 신자들의 경건과 영성 훈련에 필요함을 인식하고 부활절 전 얼마의 기간을 정해 이를 실천해 오다가, 마침내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부활절과 더불어 사순절을 교회의 절기로 지킬 것이 결정되었다. 사순절은 비록 성경에 근거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아직 교회가 동.서방 교회로 분열되기 전 모든 교회가 하나로 연합하여 결정한 우주적 교회의 결정으로, 이는 교회적 권위를 가지는 보편교회의 규례이며, 기일과 방식에 다소간 차이가 있을지라도 동.서방 교회 모두가 지키는 교회적 전통이다. 매년 맞는 사순절이지만, 2025년의 사순절은 현직 대통령 탄핵 사태라는 사상 초유의 상황 속에서 연일 전국적인 대규모 찬반 집회가 이어지고 좌우진영간 극단적 대립이 지속되고 있는 국민적 분열의 상황이 우리로 하여금 그 어느 해와도 다른 사순절을 맞게 하고 있다. 이에 샬롬나비는 2025년의 특별한 사순절을 맞아 다음과 같이 우리의 입장을 밝힌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모든 교만을 내려놓고 겸비한 마음을 갖는 사순절이 되도록 하자. 사순절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겸손히 자신을 낮추신 것과 우리를 위하여 당하신 고난을 기억하는 절기이다. 성육신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본성(본체)으로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나 그러한 하나님의 지위를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발적으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 그가 이처럼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신 것은 죄인된 우리를 동정하셔서 자신을 우리와 동일시 하심이었다(빌 2:5-8).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 또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기 위하여 죄인된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허물과 죄를 마치 자신의 것처럼 짊어지신 것이었다. 사순절은 그리스도의 이러한 겸손과 고난의 의미를 묵상하는 절기이다. 그러므로 2025년 사순절을 맞아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더 낮은 마음과 가난한 마음을 갖는 자세를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대통령 탄핵 사태를 맞아 우리 사회 국민은 진보와 보수의 입장에 따라 탄핵 찬반으로 갈라진 채 상호 적대적 비방과 혐오의 수준이 도를 넘어서고 있으며, 향후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서는 자칫 불복(不服) 충돌 사태로까지 치달을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더해 날로 어려워져만 가는 국내외 경제 여건 속에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와 민생의 어려움은 서민들의 삶을 더욱 힘들게 하며 미래를 절망하게 함으로 사람들의 마음에는 온통 불안과 불만과 불평이 가득한 사회가 되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이념과 지역에 따른 편가르기, 서로를 향한 적개심과 투쟁 속에 나라가 질곡의 고통과 혼란 속에 있다. 이런 가운데 수많은 소시민들이 삶의 희망을 찾지 못한 채 충동적 살인과 자살이 증가하는 사회가 되고 있다. 사순절을 맞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적 사회적 갈등이 심화되는 이러한 상황 가운데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교만한 마음과 공격적 태도를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상대를 동정하는 삶을 실천해야 한다. 비록 겸손한 삶의 실천으로 자신이 억울한 손해를 보게 되더라도 죄 없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함으로 할 수 있는 대로 화평을 도모하며 사회적 화합과 통합을 이루는 일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 또한 우리는 같은 선상에서 헌법재판소에서 국회측과 대통령측이 이런 국민들의 고통과 혼란을 돌아봄으로 국가의 대의를 위하여 당사자들이 서로 겸손한 자세와 서로를 이해하려는 관용과 열린 마음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본다. 그리스도인 정치인들은 정치권 또한 여야가 상대 당에 대해 겸손한 자세를 가짐으로 상호 존중과 이해 속에 대화와 상생의 정치가 실현되게 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2.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의 삶을 사는 회개와 성화의 삶을 다짐하자. 사순절은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십자가 고난을 받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죄를 애통하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간절히 구함으로 신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기에 필요한 영적 변화와 성장의 기회를 가지는 기간이다. 특별히 그동안 죄의식을 가지면서도 해결하지 못하고 습관적으로 지나쳐 온 죄나 은밀하게 행한 죄를 회개하며 새사람의 삶을 살기를 다짐하는 기간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자신 안에 있는 어찌할 수 없는 죄성을 슬퍼함으로 옛사람(죄성)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의의 본성)의 옷으로 갈아 입는 성화의 삶을 훈련하는 기간이다(엡 4:22-24). 죄를 버리고 민족의 죄를 교회가 책임지는 자세로 기도해야 하겠다. 오늘 대한민국이 이러한 국론분열과 정치 사회적으로 국민간의 대립이 심화되는 속에는 자신을 돌아보기보다는 서로 상대방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 비판하는 자세가 자리잡고 있다. 오늘의 나라의 혼란 속에서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잘못과 책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죄와 잘못을 하나님 앞에서 깊이 회개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돌아서야 하겠다. 3. 탐욕, 과소비, 향락을 멀리하고 물질적 금식 뿐 아니라 문화적 금식을 실천하자. 역사 이래 대한민국이 오늘 시대만큼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세계 속에 우뚝 선 나라가 되었던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국민은 국가의 번영 가운데에서 행복을 느끼기보다는 일부는 자유 대한민국을 비판하고 “헬조선”이라고 부르면서 세계에서 가장 불행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오늘 시대만큼 탐욕과 과소비 향락이 만연한 시대도 찾기 어렵다. 기독교인들은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던 대한민국이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기까지에는 기독교와 신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과 더불어 오늘날 대한민국에 만연한 국가적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교회의 책임의식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순절 기간동안 기독교인들은 금식과 특별새벽기도 등 영적인 절제와 청빈의 삶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나 거기에 더해 음식과 의복 그리고 생활방식 등에서도 비싸고 화려한 것들을 피하는 등 육적인 절제와 청빈의 삶도 실천하여야 한다. 이를 위하여 육체적 쾌락과 만족을 구하는 오락이나 유흥 향락을 피하고 문화적 금식을 함으로 영적 육적 경건의 훈련을 하여야 한다. 휴대폰 사용도 절제하고,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곤 휴대폰 사용 유보, 인터넷 오락 사용 유보를 실천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도록 하자. 4. 가난한 이웃, 소외계층, 외국인, 탈북민을 돌아보아 구제에 힘쓰자. 사순절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과 낮아지심과 희생과 고난을 기억하는 기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에 있어서는 하나님이시지만 자신의 하나님 됨을 주장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 곧 죄로 더럽고 비참하고 하나님과 소외된 형편에 있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공감하심으로 자신을 우리와 동일시하신 것이다. 사순절 기간 동안 교회와 신자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과 낮아지심의 의미를 기억함으로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들을 돌아보아 그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기초생활수급자, 차상위계층, 실직자 가족 등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들; 고아, 독거노인, 가출 청소년, 청소년 가장, 노숙자, 쪽방촌 등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외국인 노동자와 이주민, 탈북민 등 이러한 사회적 약자들과 소외계층에 있는 사람들 또는 이들을 지원하는 단체들을 찾아 사랑의 나눔과 구제를 실천하여야 한다. 그리고 전 세계에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며 우리의 작은 것들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야 하겠다. 5. 한국교회는 사순절 기간 동안 깊은 통회의 기도와 회개를 통해 세상의 빛으로 거듭나자 주님이 우리를 위해 받으신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사순절을 보내며 한국교회와 성도들은 주님이 우리의 모습을 보시며 어떻게 생각하실지를 깊이 묵상해야 하겠다. 주님을 따라오려면 네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라 오라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십자가를 지기보다는 영광을 원했고 주님의 은혜 속에 우리의 꿈을 이루고자 노력한 모습을 회개해야 한다. 우리 주변의 연약한 자를 돌보기보다는 자신의 부를 쌓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회가 갈라지고 분열할 때 주님이 원하시는 희생과 사랑을 통한 연합의 길을 걷지 못했다. 한국교회는 진보와 보수가 애국심을 다르게 표시하여 찬성과 반대로 나누어져 기도회를 가졌다. 탄핵찬성파들은 반대파를 “극우들”이라고, 반대파들은 찬성파를 “빨갱이”라고 비방하였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를 향하여 하나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러한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의 모습 때문에 주님이 이름이 조롱당했고 교회는 사회가 기대하는 신뢰를 온전히 지키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길에서 벗어난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회개하며 주님의 참된 제자되기 위해 우리의 죄악된 모습을 회개해야한다. 우리는 다음같이 기도했으면 한다: ‘주님께서 긍휼을 베푸사 우리의 연합과 상호 신뢰를 회복시켜 주소서. 그리하여 한국교회가 절망과 아픔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소망의 등불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분열된 한국사회 안에 예수 샬롬과 화목을 이루는 모판(母板)이 되게 하옵소서.’ 2025년 3월 31일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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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나비 논평] 2025년 사순절을 맞는 교회와 신자의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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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 2007년부터 2020년까지 13년 동안 인구가 1.5% 증가한 반면, 고신교단은 17%정도 감소했습니다.(총회 촬요 참조) 특히 청소년 인구는 13년 동안 27% 감소했는데, 교신교단은 50% 감소했습니다. 13년 동안 감소한 것과 통계청에서 내놓은 미래 예측치를 대비해 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30년이 되면 고신교단의 청소년이 71% 감소한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2035년이 되면 통계적으로는 제로가 됩니다. 13년이 지나면 고신교단에서 청소년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계상 수치입니다. 총회 미래정책위원회가 SFC에 요청하여 받은 자료에 의하면 전도에 대해서는가장 전도를 많이 한 해에 운동원 1인당 0.03명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권역과 대학에서 전도한 결과는 0명입니다. 재정과 관련해서는10년 동안 SFC에 100억 이상이 투입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총회, 노회, 기관, 개채 교회, 개인적으로 후원하는 것 등을 다 하면 최대 200억까지 추산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더 심각한 것은 SFC의 근본정신이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인데 교회 중심이 되지 않으니 SFC 간사들이 강정마을에 가서 데모를 하는 것을 넘어 성경과 고신 신학에 위배 되는 주장을 하는 강사들을 초청하여 수련회나 세미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청소년의 수가 감소한 것이 SFC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SFC의 사역을 재정으로만 평가해서도 안 됩니다. 문제는 교회 중심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SFC 폐지라는 안건이 상정되기 전에, 총회 SFC 상임위원회에서 전국 35개 노회별 SFC 담당자들을 모아 SFC 발전을 위해서 연석회의를 하는 자리에 총회 미래정책위원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그때 모두 함께 머리를 맞대고 SFC의 변화와 혁신을 위하여 피터지게 토론하고 대안을 마련했더라면 SFC폐지라는 안건은 상정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날 회의는 본질과는 다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순수한 SFC 위원들은 모르는 물밑 의도와 충동질이 있었음을 충분히 예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두고 누군가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을 했고, “70년이 된 SFC를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우리 모두가 SFC인데 폐지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총회미래정책위원이 점령군이냐?”등의 고성이 오갔습니다. 회의의 본질을 흐리고 ‘감정’을 부추키는 발언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모임은 오히려 SFC 폐지를 상정하도록 충동질하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총회 미래정책위원회에서 2022년 7월 SFC 폐지 청원 건을 총회에 상정했습니다.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그렇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것 같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현재 고신대와 복음병원의 위기와 똑같습니다. 어쩌면 SFC는 고신의 정체성의 문제요, 미래에 대한 문제이기에 훨씬 더 심각한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SFC를 위해 총회상임위 두 기관과 35개 노회 SFC 담당자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 자리를 마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은커녕 선입견을 가지고 집중적인 성토의 장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SFC간사 중에서도 전도 및 학원복음화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왜 SFC는 차별금지법을 반대하지 않느냐는 총회의 질문에 끝까지 차별금지법 반대할 것이라고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습니다. 총회석상에서의 대답은 오늘날 SFC 정서는 대표간사의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탈교회의 극단적인 모습입니다. 수도권 SFC는 지방 SFC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다르다고 하는 대답이었습니다.(이 부분은 오히려 수도권 목회자들이 더 분개하는 부분입니다.) 일반 사회적 흐름에 반대되기 때문에 차별금지법을 반대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면 전도가 안 된다는 겁니다.(총회 회의록 참조) 학원복음화를 입에 대지도 않는 자들이 진리의 문제를 제기하니 전도를 핑계 삼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교회의 결과입니다. 이것이 교회중심이 되지 않는 조직은 불신앙으로 변질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학원 SFC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시작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빙산의 일각입니다. 그리고는 보란 듯이 총회임원선거를 앞두고 ‘김경헌 = 손현보 = SFC 폐지’라는 등식을 만들어 총대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이 정말 SFC를 사랑하는 사람의 행보입니까? SFC를 위하여 순수하게 헌신하는 분들을 돼지 떼에 넣어 비탈길을 달리게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미래요, 우리의 고향인 SFC를 인질로 잡아 사욕을 탐하는 짓을 더 이상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 가관인 것은 2023년 8월 중순에 SFC 출판부에 큰 재정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출판부 간사 중 한 사람이 수 천 만원의 재정 사고를 낸 것입니다.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출판부 정상화와 쇄신을 위한 전권위원회’가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에 이 일로 애매하게 어려움을 당할 위기에 처했던 출판부의 다른 간사의 SFC지도부를 향한 애절한 호소가 항간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개체교회에서 재정 비리사고가 나면 관련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SFC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불과 얼마 전 KPM에서 있었던 재정 사고가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은급재단은 어떤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당랑재후(螳螂在後)’란 말이 있습니다. 매미를 덮치려는 사마귀가 뒤에 참새가 노리고 있음을 몰랐다는 뜻으로, 눈앞의 욕심에만 눈이 어두워 뒤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름을 탄식하는 말입니다. 이미 참새의 부리가 쪼아버린 것 같은 먹먹한 심정이 저만의 느낌이 아니기를 바라며, SFC를 사랑하는 동지들이여 지금이라도 당랑재후(螳螂在後)하지 않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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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SFC 폐지(2), 당랑재후(螳螂在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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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 아무리 급해도(3) : 논문표절 최근 몇 년 사이 대학 총장과 총장 후보의 논문표절 문제가 자주 불거졌습니다. 인터넷에 “대학 총장 논문표절”이라고 검색하면, 국내외 많은 대학의 논란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경우 사퇴라는 절차를 밟았고, 이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와 같은 많은 논란 때문인지 교육부 역시 최근 연구 부정행위에 대해 아주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기로 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또한, 학교마다 ‘연구 윤리 진실성 위원회’ 같은 기구를 통해 특히 총장 후보에 관한 엄격한 자격 검증을 거치도록 합니다. 대학 총장은 교수들과 연구자들을 이끕니다. 연구에 부정행위가 있다면 한평생 연구로 씨름해 온 분들을 이끌 수 없는 것이 자명한 일입니다. 언론에 보도된 대로 신임 총장의 2004, 2005, 2007, 2008년 출판 논문들은 각각 심각한 수준의 표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중 게재, 자기표절, 논문 쪼개기, 덧붙이기 출판 등의 연구 부정행위가 있었다고 이미 알려졌습니다. 고려학원 이사회 역시 이 사실을 분명 알았으며, 그 심각성을 인지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총회 운영위에서도 논문표절에 관한 우려로 인해 반대의견이 나왔지만, 이사장은 “연구 윤리규정이 제정되기 전인 2017-18년 전에 자신의 논문을 표절한 것으로, 대법원은 이를 표절이라 보지 않는 판례가 있다”라며 설득했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표절은 인정하는데 대법원이 표절이라 보지 않으니 괜찮다는 겁니까? 이런 내용이 공개된 상황에서 기독교 대학을 자부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주장하는 고신대학교를 비롯한 고려학원이 이런 길을 걸어야 하겠습니까? 낯 뜨거워서 기도회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심각한 문제가 교육부를 통해 신임 총장의 전 소속 학교인 백석대학교에 의해 조사되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인간적인 관계로 인한 “눈 가리고 아웅”이 아닌 정확한 조사와 판단을 기대합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생활의 순결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급해도(4) : 교단 가입의 부당성 고신총회 헌법 제57조 다른 교단 목사의 가입에 보면 “다른 교단 소속 목사가 본 교단 노회에 가입하고자 하면 반드시 시무교회와 함께 가입하여야 하며 다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총회 어느 노회에선 이런 것을 살피지 않고 그냥 원래 출신이 지역의 교회니까 받자고 했다고 합니다. 타 교단 목사의 가입 절차가 총회 법에 어긋난다면 원인 무효입니다. 지금도 대다수의 노회에서는 타 교단 출신의 목사 가입을 엄격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이 전례가 되면 타 교단 목사 가입이 불법으로 노회마다 행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적은 글에 대해 고신대의 모 교수가 글로컬 대학을 비판하면서 소위 고신 정체성 운운했는데 이런 부당한 방법으로 교단 가입한 것은 고신 정체성과 일관성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신앙의 정통에 위배됩니다. 총장은 도덕성에 흠이 없어야 교직원들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가 있고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논문표절의 심각한 문제가 있는 총장이 다른 교수들, 직원들의 비도덕적인 면을 어떻게 지도할 것입니까?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려학원의 질서를 잘 세워 학교를 발전시킬 수 있겠습니까? 교단 가입 절차에 문제가 있는 목사가 교단의 정체성을 분명히 세울 수 있습니까? 대법원의 판례를 예로 들어 표절 문제를 넘어가려 한다면, 특정인을 선거에서 유리하도록 법을 개정하며 조치한 경우에 대해서 공직자 선거법 위반이 된다는 대법원 판례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현 총장의 선출과정에서 드러난 정관개정의 절차 문제나 교단 가입의 절차 문제를 사회법에서 다룬다면 원인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도덕적 결함을 지닌 총장이 학생들 앞에서 교단의 핵심 정신인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을 외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선임한 이사회와 총회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은 사람을 못 키운다는 말을 듣는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그대로 세워야겠다면 불법을 계획하고, 눈감고, 시행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논문표절은 본인이, 정관개정의 절차적 문제는 고려학원 이사들이, 그리고 노회 가입은 그 노회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총회 임원회 역시 이 모든 일을 방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런 것을 알고도 묵인하고 강행했다면 누군가는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야 고려학원이 삽니다. 기워야 할 옷이 있다면, 그리고 좋은 옷을 만들고자 한다면 제대로 해야지 아무리 급해도 바늘허리에 실을 매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총장이 열심히 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약점과 비합리적인 것과 비윤리 불법적인 모든 것을 덮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할 것입니다. 고신대의 어려운 재정 건전성 확보를 위해서는 교육부의 글로컬 대학 진입과 부산광역시의 라이즈(RISE)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데, 비즈니스맨이 되어야 할 총장이 장관이나 시장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모두가 손뼉 치고 따라갈까요? 선임된 총장을 위해서 한 일들 같습니까? 얼마든지 일 잘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는데 오히려 족쇄를 채워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까? 아니 족쇄를 채워 소신껏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을 넘어 사리사욕을 채우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아는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요? 비웃지는 않을까요? 개인 어느 누구를 비웃는 것이 아니라 출옥 성도의 ‘코람데오’ 신앙을 저버린 고신을 말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이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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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아무리 급해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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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신, 우이독경(牛耳讀經) 교단과 대학교
- 지난 글에 대한 반론이 나왔습니다. 고신대학교 모 교수님이 쓴 글입니다. 반론이라는 말 자체는 없지만, 내용을 보면 반론이 확실합니다. 아무런 반응이 없을 것이라 짐작했던 터라 이 반론이 참 반갑기도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내용은 ‘우이독경(牛耳讀經)’,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지난 글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염려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본질을 흐리는 말싸움, 감정싸움으로 비치지 않길 바랍니다. 한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이번에 나온 반론도 ‘위기’, ‘골든타임’을 표면적으로는 인정하는 듯 보이니까 말입니다.하지만 시간이 없습니다. 지난 글에서 지적하고자 했던 것은 간단합니다. “언제까지, 얼마가 필요한가?” 다시 설명해 드립니다. ‘골든타임’으로 접어든 ‘위기’의 고신대학교에 관한 교단 지도자들의 책임 있는 대안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교단 지도자들을 비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작금의 이런저런 노력이 귀하지 않다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와 성도를 설득해 기부금을 받는 정도의 방법이 주요 대안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본질을 해결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 고신 내부의 큰 소리를 들어달라는 겁니다. 지금까지 고신교단의 교회는 고신대학교를 위해 헌신해 왔습니다. 그런데 ‘위기’와 ‘골든타임’이라는 상황에 다시 더 큰 기부금을 요청하며 걷고 있습니다. 기도회를 하면서 말입니다. 저의 제안은 언제까지, 얼마를 기부해야 하며,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을 묻는 것입니다.그것이 어떤 것이든, 이제는 정확한 판단과 분석이라는 것을 보고 싶고, 봐야 할 때라서 그렇습니다. 저는 저의 이 제안이 간단명료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반론을 보니 제 제안이 어려운 모양입니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장황하지도 않은 장황한 역사만늘어놓았습니다. 2003년, 2014년, 2015년의 이야기가 지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본질을 흐리고 있습니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73회 총회가 드디어 제대로 된 대책을 내며 일을 시작했다는 생색뿐입니다. 과거의 장황한 역사를 꼬집은 것은 이 ‘생색’을 돋보이게 하는 양념이었군요. 책임져야 할 자들은 따로 있는데, 왜 ‘우리’(?)에게 말하느냐는 마음이 행간에 엿보입니다. 설명이 어려운 듯하여 다시 설명해 드립니다. 과거에는 전혀 기부금이 없었습니까? 역대 최고 수준의 기부금을 언급하는데, 이것이 고신대학교를 살릴 수 있습니까? 이 노력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된 판단과 분석을 토대로 노력하자는 겁니다. 본질을 흐리지 마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고신대학교의 상황에 관한 미화뿐입니다. 과거에는 전혀 기부금이 없었고, 과거에는 교직원들의 헌신이 없었습니까? 교수의 81%, 직원의 42%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면, 교수의 19%와 직원의 58%와는 갈등이 없습니까? 내부적으로 나오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겁니까? 아니면 듣기 싫은 겁니까? 지금 모든 지방 사립 대학은 연합 대학을 통해서라도 글로컬 대학에 진입하는 일에 대학의 사활을 걸고 있는데(참고, https://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558472), 글로컬 대학이 해결책이 아니라는 주장은 도대체 어떤 근거와 데이터를 가지고 하는 말입니까? 대학에 몸담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닌 것 같습니다. 본질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카테고리가 헷갈리거나, 아니면 호도(糊塗)하는 유희삼매(遊戱三昧)만있습니다. 교육부와 지자체가 발주하는 사업에 참여한 결과로 받은 금액이 64억 중 교직원 인건비, 학교 운영비로 지출된 금액이 1원이라도 있습니까? 이 금액은 그야말로 프로그램을 위한 비용입니다.혹시 64억을 받아 학교 살림이 나아졌는데도 ‘위기’와 ‘골든타임’에 동조하며 계속 모금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계시는 겁니까? 반론자도 고신대학교의 문제가 학령인구 감소와 그에 따른 재정위기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안으로 학생들이 공부와 자기 발전을 위해 열심히 하는 것을 제시하다니요? 또한, 구조조정을 언급하면서 실제적인 문제를 언급하는 일반적인 상식은 ‘세속적인 사고방식’으로 무시하면서 교직원 연봉의 십일조를 자발적으로 기부하는 것을 언급하다니요? 도대체 구조조정과 연봉의 십일조 기부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이것이 어떻게 전체 고신대학교를 위한 상생이 되는지요? 수익 구조 다각화에 대한 노력과 5년 재정 구조에 대한 정밀 시뮬레이션 완성? 좋습니다. 바로 이런 대책을 내놓으라는 겁니다. 본질을 흐리지 말고, 그 방법을 고신대학교를 위한 더 큰 헌신과 헌금을 요구하는 고신 교회 앞에 설명해 주십시오. “모금하다가 안 되면 할 수 없고”라는 식의 미봉책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동참하지 않는 수많은 교회와 성도들의 염려와 중심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분들의 ‘고신 사랑’을 폄하하지 마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가짜 뉴스라는 지적만있습니다. “재학생 등록률과 신입생 충원 결과를 보면 1년 100억 적자가 날 것이 분명한 사실인데”라는 표현이 가짜 뉴스인가요? 제 나름대로 정보를 통해 파악한 금액입니다. 저의 부족함 때문에 계산상 조금의 오류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정확한 정보를 주는 이가 없으니 그럴 수 있지요. 그런데 이게 가짜 뉴스라고 지적받을 표현인가요? 그렇다면 반론자는 자료를 다루는 교수 아닙니까? 병원의 적자는 어떻습니까? 학교법인 고려학원의 적자가 100억 이상 나는 것이 가짜 뉴스라면, 본질을 흐리지 말고, 진짜 뉴스로 ‘정확한 적자 금액’을 분명히 밝혀주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오히려 가짜 뉴스만 있을 뿐입니다. “혹자는 의대와 복음병원을 헐값에 인수하려는 사람들과 모의를 벌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동안 위기라고 말만 하면서 오히려 잘못된 과장 정보로 위기를 부풀리기만 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면...”??? 신학교수인 반론자는 정말 신앙 양심에 화인을 맞았습니까? 십계명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동료를 향한 가짜 뉴스를 은근히 양산하는 말장난을 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잘못된 과장 정보로 위기를 부풀렸다면, 지금 반론자가 말하는 위기와 골든타임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이 정도 매너의 교수가 신학교수로 학교 강단에 있는 고신의 현실이 개탄스럽기까지 합니다. 본질을 흐리는 공격을 멈추십시오. 호기롭게 반론은 제시했지만,책임질 수도 없고, 책임질 생각도 없는 나팔수의 아부만 있을 뿐입니다. 도대체 교수님은 우리 고신교단과 고신대학교에서 어떤 책임 있는 자리에 있습니까?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개진하는 것은 신자 개인의 자유이나, 총회와 고신대학교를 대변하는 듯한 이런 주장으로 교단과 고신대학교를 갈라치기 하는 (파탄 내는) 논쟁으로 몰아가는 것은 나팔수의 아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이것이 극단적인 분리주의 사고방식인 것은 모르실 리 없겠지요. 본질을 흐린 채 말장난, 정중하고 정확한 논의를 촉구합니다. 정확한 사실을 제시하는 책임 질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길 간절히 바랍니다. ※ 독자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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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고신, 우이독경(牛耳讀經) 교단과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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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10] 다시 고신의 야성으로: 자학 사관을 걷어내고 승리하는 보수 신앙을 재건하라!
- 서론: 무너진 성벽 위에서 파수꾼의 나팔을 불다 9회에 걸친 연재를 통해 우리는 한국 교회와 고신 교단을 소리 없이 잠식해온 손봉호의 인본주의 윤리와 이만열의 자학적 사관의 실체를 파헤쳤다. 그들이 뿌린 씨앗은 이제 고신의 심장부에서 좌경화라는 독버섯으로 자라나 교단의 정체성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 이제 우리는 비겁한 침묵을 깨고 나와야 한다. 고신의 야성을 회복하고 무너진 신앙의 성벽을 재건하는 것,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이자 순교 선배들 앞에 부끄럽지 않은 유일한 길이다. 1. 손봉호·이만열 사상이 낳은 참담한 열매들: SFC에서 강정마을까지 그들의 가르침을 먹고 자란 소위 키즈들은 고신의 미래를 어둠으로 몰아넣었다.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을 잃어버린 학생신앙운동(SFC)은 복음 전파보다 좌파적 정치 구호에 경도되었고, 제주 강정 해군기지 반대 시위 현장에는 국가 안보를 저해하는 세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신의 청년들이 나타났다. 기윤실과 성서한국은 성경적 공의를 좌파적 평등으로 변질시켰으며, 교단 내에서는 자칭 고신을 사랑한다는 고사모(고신을 사랑하는 모임)가 출현하여 보수 신앙의 가치를 폄훼하고 좌파적 담론을 생산하는 전위대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이만열·손봉호의 폐해: “교회는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며 국가 안보와 건국 정통성을 부정하는 운동에 면죄부를 주었다.” (출처: 고신 내 좌경화 단체들의 활동 논거) [비평]: 이는 성경적 사랑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편향이다.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과 국가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운동에 동참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손봉호의 윤리와 이만열의 사관은 고신인들에게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자부심을 빼앗고, 대신 자학적 역사관과 좌경화된 정치 의식을 심어주었다. 그 결과 고신의 이름으로 국가의 정당한 국방 사업을 방해하고, 교단 내부를 사상적 갈등의 장으로 만든 것은 명백한 신학적 타락이자 영적 간음이다. 2. 총회의 비겁한 침묵과 기독교보의 방관을 규탄한다 더욱 개탄스러운 것은 고신 총회의 태도다. 국가적 위기와 교단 내 사상적 침투 앞에 총회는 중립이라는 미명 하에 비겁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불의한 정치 권력이 교회를 압박할 때 고신 총회는 어디에 있었는가? 또한 교단의 입인 기독교보는 단순한 홍보지로 전락하여 시대적 아픔과 불의한 정치 현실에 대해 벙어리가 된 지 오래다. 진리를 수호하고 성도들을 깨워야 할 언론이 권력의 눈치를 보며 침묵하는 사이, 성도들은 사상적 혼란 속에서 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다. 총회와 언론의 실태: “시국 설교를 배제하고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것이 경건인 양 포장하며, 교단 내 좌경화 인사들의 활동을 방치해 왔다.” (현 고신 총회 및 기독교보 비판 요지) [비평]: 성경적 중립은 불의에 눈감는 것이 아니다. 선지자들은 왕들의 불의를 향해 목숨 걸고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했다. 지금 고신 총회가 보여주는 모습은 성경적 경건이 아니라 책임 회피이며, 양 떼를 늑대에게 내어주는 비겁한 목자의 행태다. 기독교보 역시 교단의 자화자찬에만 열을 올릴 것이 아니라,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고 좌경화된 사상에 맞서 진리의 나팔을 불어야 한다. 침묵하는 총회와 언론은 결국 이만열·손봉호의 사상적 동조자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3. 독보리를 솎아내고 고신 정신을 회복하라: 징계 절차 착수 촉구 이제 고신 총회는 결단해야 한다. 거룩한 분노로 성경적 가치를 사수하며 애국 운동에 앞장서는 손현보 목사를 향해 극우라는 멸칭을 퍼부으며 징계를 요청한 자들이 누구인가? 권수경, 이세령 목사와 같은 자들이야말로 고신의 헌법과 정신을 정면으로 위반하고 있는 독보리들이다. 인공기를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라 부르는 망언자들을 방치하면서, 예배의 자유를 지키려는 목사를 징계하겠다는 발상은 고신 전체에 대한 모독이다. 결단 촉구: “총회는 즉시 손현보 목사 징계 청원자들에 대한 전수 조사와 강력한 징계 절차에 돌입해야 한다.” (결론적 요구 사항) [비평]: 고신은 신사참배에 항거하며 세워진 저항의 교단이다. 불의한 권력과 타협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피에 흐르는 DNA다. 총회는 더 이상 이만열·손봉호의 가스라이팅에 휘둘리지 말고, 교단 내부의 사상적 적들을 과감히 솎아내야 한다. 손현보 목사에 대한 부당한 공격을 막아내고, 오히려 그를 공격한 자들의 신학적 이단성과 사상적 불온함을 조사하여 징계하는 것이 고신 정신을 회복하는 첫걸음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오늘날 고신 총회에 명하시는 지엄한 명령이다. 결론: 다시 진리의 기치를 높이 들라 우리는 더 이상 속아서는 안 된다. 손봉호의 가짜 윤리와 이만열의 왜곡된 역사가 만들어낸 어둠의 사슬을 끊어내야 한다. 고신은 대한민국 건국과 성경적 보수 신학의 최후 보루다. 하나님께서 이승만 대통령을 통해 허락하신 자유 대한민국과, 한상동 목사님을 통해 지키게 하신 고신 교회의 정통성을 사수하라. 총회와 성도들이 깨어나 독보리(가라지)들을 솎아내고 진리의 깃발을 높이 들 때, 고신은 비로소 한국 교회의 영적 야성을 깨우는 승리의 나팔 소리가 될 것이다. 고신의 영광스러운 회복을 위해 우리 모두 함께 일어서자!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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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10] 다시 고신의 야성으로: 자학 사관을 걷어내고 승리하는 보수 신앙을 재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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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9] 자학적 사관의 종착역: 인공기 옹호와 북한 독재를 향한 신학적 굴복
- 서론: 이만열·손봉호의 가르침이 낳은 기형적 괴물들 지난 연재들을 통해 우리는 이만열의 역사 왜곡과 손봉호의 인본주의 윤리가 어떻게 고신의 뿌리를 갉아먹었는지 살펴보았다. 이제 그 독소들이 실질적으로 어떤 파멸적 결과를 낳았는지 직시해야 할 때다. 소위 이만열·손봉호 키즈라 불리는 이들은 이제 강단을 넘어 포럼과 SNS에서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심지어 기독교의 가장 잔혹한 박해자인 북한 정권의 상징을 미화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들의 외침은 단순한 개인의 견해가 아니라, 수십 년간 주입된 자학 사관이 고신의 심장부에서 터져 나온 사상적 고름이다. 1. 인공기를 하나님 나라의 상징으로 둔갑시킨 사상적 반역 최근 고신 내 일부 목회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지향한다는 상징으로 북한의 인공기를 달아야 한다”는 경악스러운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 헌법과 신앙의 자유를 상징하는 태극기를 민족주의적 우상으로 몰아세우면서, 정작 성경을 소지했다는 이유만으로 신자를 처형하는 북한 전체주의의 깃발을 신앙적 가치로 치환하는 영적 간음이다. 이만열이 깔아준 “대한민국은 불의하게 세워진 나라”라는 전제가 없었다면, 감히 목사가 인공기를 하나님 나라와 연결하는 망언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오세택: “태극기를 붙이고 있는 교회... 우리 교단 정신으로 보면 그게 정당한 겁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한다는 상징으로 붙일 국기가 하나 있습니다. 북한의 인공기입니다.” (출처: 2025.11.24. 고신 미래교회 포럼 발언) [비평]: 이는 신학·역사·국가관을 통째로 왜곡한 심각한 사상적 반역이다. 태극기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는 체제의 상징인 반면, 인공기는 십자가를 철거하고 목회자를 학살한 체제의 상징이다. 본인은 강연 중 비유로 인용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어떻게 목사가 태극기를 우상숭배라 비난하면서 인공기를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이는 민족주의 비판을 빙자하여 자유민주주의 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김일성 일가주의를 신성화하는 종북적 사고의 극치다. 기독교인을 가장 잔혹하게 죽인 체제의 깃발을 교회에 걸자는 주장은 히틀러의 스와스티카를 십자가 옆에 달자는 것에 비견될 만큼 충격적인 발언이다. 2. 애국 목사를 ‘극우’로 몰아 징계를 요구하는 위선적 윤리 이만열·손봉호의 사상적 자녀들은 성경적 진리를 사수하며 국가적 위기 앞에 목소리를 내는 손현보 목사와 같은 애국 목회자들을 ‘극우’라는 낙인을 찍어 공격하고 있다. 권수경, 이세령 목사 등은 고신 총회에 손 목사에 대한 징계를 요청하며 교단 내 사상적 검증 요구를 제기했다. 올해 들어서는 전국을 순회하며 고사모 전국 순회 토론회까지 개최하고 있다. 정병오가 이끄는 기윤실도 이에 동조하며 보수적 신앙 가치를 수호하는 움직임을 ‘반윤리적’인 것으로 몰아세운다. 손봉호 교수는 이러한 이들의 외침을 정당한 비판인 양 비호하며, 정작 교단을 무너뜨리는 좌파적 탈선에는 침묵하고 있다. 손봉호 키즈(권수경, 이세령 등): “손현보 목사의 행보는 극우적이며 교단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있다. 총회 차원의 엄중한 징계가 필요하다.” (출처: 고신 총회 징계 요청 및 관련 기고문 요약) [비평]: 인공기를 달자는 자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면서, 차별금지법을 막고 예배의 자유를 지키려는 목사에게 ‘극우’ 딱지를 붙여 징계를 요구하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윤리인가? 이것이야말로 손봉호가 심어놓은 ‘선택적 도덕성’의 폐해다. 그들은 성경적 정의가 아니라 좌파적 이데올로기를 잣대 삼아 동료 목회자들을 사상적으로 숙청하려 하고 있다. 더구나 2026년 4월 2일 고신총회 임원회가 발표한 「목회자 및 교역자 윤리강령」 제9항은 교회가 “사회와 국가에 대한 책임”을 지며 “모든 구조적 악에 대해 예언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분명히 선언하였다. 그렇다면 차별금지법, 교회 해체법, 설교의 자유 침해와 같은 구조적 문제 앞에서 외친 설교자를 향해 징계를 요구한 행위는 무엇인가. 이는 윤리강령의 정신을 실천한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거스른 것이다. 윤리강령 제9항을 문자 그대로 적용한다면, 예언자적 설교자를 징계하려 한 자들이야말로 먼저 윤리적·교회정치적으로 책임을 물어야 할 대상이다. 정당한 국가관과 신앙 수호 의지를 극우로 몰아세우는 행태는, 고신 총회를 좌경화된 시민단체의 하부 조직으로 만들려는 고도의 전략이다. 3. 전체주의를 옹호하며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신학적 실책 이만열 사관의 종착역은 결국 북한 정권에 대한 도덕적 면죄부와 대한민국 건국 정통성의 완전한 붕괴다. 이들은 성조기나 일장기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면서 인공기에 대해서는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라는 고귀한 의미를 부여한다. 이는 칼 마르크스와 레닌주의적 사유가 한국 교회 안에 스며든 전형적인 형태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의와 평강이 아닌, 사회주의적 평등과 전체주의적 통제로 오해하고 있다. 이로 인해 고신의 젊은 세대들은 대한민국을 지켜야 할 조국이 아닌 타도해야 할 불의한 세력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만열·손봉호 키즈들의 논리: “미국 중심의 세계관(성조기)에서 벗어나야 하며, 진정한 평화와 하나님 나라는 분단을 극복하는 북한과의 연대(인공기 상징)에 있다.” (출처: 성서한국 및 기윤실 포럼 주요 논지) [비평]: 하나님의 나라는 자유와 생명을 상징하지만, 인공기는 인권 말살과 세습 독재를 상징한다. 이 두 가치는 결코 화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인공기를 옹호하는 것은 그들의 신학이 이미 개혁주의 고신의 신학을 이탈했음을 증명한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골 2:8)는 말씀처럼, 이들은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며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놓은 자유의 토대를 허물고 인공기의 그늘로 들어가려는 이들의 시도는 영적 간음이자 역사적 자살 행위다. 결론: 고신 총회여, 독보리들을 솎아내고 신앙의 야성을 회복하라! 오세택 목사의 인공기 발언과 손현보 목사를 향한 권수경, 이세령 목사 등의 징계 요구는 현재 고신 총회가 직면한 위기가 얼마나 엄중한지를 보여준다. 이만열·손봉호가 심어놓은 독보리들이 이제는 아예 밭 전체를 차지하려 들고 있다. 고신 총회는 더 이상 우유부단하게 이들의 망언을 묵과해서는 안 된다. 인공기를 하나님 나라의 상징이라 부르는 자들이 어떻게 고신의 강단을 지킬 수 있는가? 이제 우리는 이들의 오만하고 반성경적인 생각을 단호히 배격하고, 선배들이 피로 지킨 자유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개혁주의 신앙의 야성을 회복해야 한다. 회개하지 않는 사상적 침투 세력을 솎아낼 때 비로소 고신의 등불은 다시 켜질 것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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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9] 자학적 사관의 종착역: 인공기 옹호와 북한 독재를 향한 신학적 굴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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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8] 신사참배 저항 정신의 변질: 순교 신앙을 좌파 민족운동으로 오염시킨 죄
- 서론: 고신의 심장에 박힌 좌파 이데올로기의 독침 고신 교단은 일제의 강압적인 우상 숭배 앞에 무릎 꿇지 않았던 순교자들의 피 위에 세워진 거룩한 공동체다. 우리 선배들의 저항은 정치적 투쟁이나 민족 해방을 위한 세속적 운동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수호하려는 영적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만열 교수는 이 거룩한 순교 신앙을 민족주의적 항일 투쟁의 틀 안으로 끌어들여 변질시켰다. 그는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한 투쟁을 좌파적 사회 변혁 운동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둔갑시켰으며, 이로 인해 이만열 교수는 고신의 청년들이 개혁주의 신학보다 좌파 민중사관에 더 열광하게 만드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사상적 숙주가 되었다. 1. 하나님의 주권 선포를 세속적 항거로 격하시킴 고신 신앙의 뿌리인 신사참배 반대는 철저히 제1계명을 지키기 위한 신앙적 결단이었다. 1938년 10월 24일, 부산 초량교회에서 한상동 목사가 선포한 메시지는 그 본질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는 총독부의 칼날 앞에서도 당당히 하나님의 공의를 선포했으나, 이만열은 이를 민족 정기를 지키기 위한 민족주의적 저항으로 해석하며 그 영적 가치를 훼손하고 있다. 1) 한상동 목사: “조선총독부는 정의 및 신의에 위반한 우상인 신사참배를 강요하니 오등은 굴하지 말고 이것에 절대로 참배해서는 못쓴다.” (1938년 10월 24일 부산 초량교회 설교 중) 2) 이만열의 주장 요지: 그는 신사참배 반대 운동이 기독교적 신앙 고백인 동시에 민족 정기를 수호하기 위한 민족주의적 항일 투쟁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강변한다. 특히 고신 선배들의 저항을 단순한 종교적 차원을 넘어 일제 식민 통치라는 불의한 구조에 대한 민중적 항거의 연장선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참조: 이만열, 『한국 기독교와 민족 의식』, 『한국 기독교와 역사의식』 등) 3) [비평]: 한상동 목사님의 외침은 민족 해방을 위한 구호가 아니라 우상 숭배를 거부하는 신앙적 선언이었다. 그러나 이만열은 이를 세속적인 민족 해방 투쟁의 틀 안으로 끌어들여 신앙의 본질을 변질시켰다. 그의 논리에 따르면 신앙적 절조는 곧 좌파적 사회 변혁 운동과 맥을 같이 하게 된다. 이러한 영적 왜곡은 고신의 제단 위에 이만열이 좌파 이데올로기의 향로를 피워 올린 격이다. 2. 순교 정신을 사회 참여의 명분으로 악용함 이만열은 고신 교단이 가진 순교자적 야성을 교묘하게 뒤틀어 교회를 사회 정치적 투쟁의 장으로 끌어들였다. 특히 이러한 영적 왜곡은 이만열 개인의 강연에 머물지 않고, 그와 궤를 같이하는 손봉호의 기윤실(기독교윤리실천운동), 그리고 그 사상적 수혜자들인 오세택, 권수경 등 소위 교단 내 소장파 지도자들을 통해 SFC 간사와 신학생들에게 독버섯처럼 번져 나갔다. 1) 이만열의 주장 요지: 한국 기독교의 순교 정신은 오늘날의 불의한 구조에 맞서 싸우는 실천적 사회 운동으로 열매 맺어야 한다. (참조: 『한국 기독교와 역사의식』 등) 2) [비평]: 순교 정신은 세상 권력을 향한 정치적 투쟁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죽음 앞에서도 진리를 타협하지 않는 영적 정절이다. 그러나 이만열이 놓은 사상적 토대 위에 손봉호의 '윤리'가 명분을 제공하고, 이를 추종하는 이들이 SFC와 교단 내에서 활동하며 복음의 본질을 '사회 변혁'으로 치환해 버렸다. 그 결과 고신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일부 세력들이 예배의 자유를 수호하는 일에는 침묵하면서, 광우병 선동이나 해군기지 반대 시위 등 좌파 진영의 논리를 대변하는 정치적 전위대로 전락하는 비극을 초래했다. 이만열은 고신 선배들의 거룩한 피를 좌파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잉크로 제공했고, 그의 추종자들은 그 잉크로 고신의 미래를 검게 물들였다. 3. SFC 좌경화의 사상적 자양분이 된 이만열-손봉호 라인 이만열이 뿌린 왜곡된 역사관은 70~80년대 대학가에 몰아친 민중사관과 결합하여 학생신앙운동(SFC)의 정체성을 붕괴시키는 결정적인 독소가 되었다. 당시 SFC와 대학생들이 손봉호의 윤리와 이만열의 좌경화된 역사 인식에 경도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흐름은 최철호 같은 인물들이 복음주의 운동 내에서 민중 중심의 역사관을 실천적으로 전파하는 토양이 되었으며, 결국 SFC가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 대신 좌파적 정치 구호를 드는 결과를 낳았다. 1) 이만열의 주장 요지: 청년 학생들이 이승만 중심의 건국 사관이나 지배층 중심의 역사를 극복하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역사를 인식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적 저항 정신의 실천이다. (참조: 각종 학생 대상 강연 및 SFC 수련회 메시지 재구성) 2) [비평]: SFC는 학교와 가정, 사회를 복음으로 변화시키는 학생 신앙 운동이다. 그러나 이만열은 이들을 사회 변혁의 투사로 길러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갈망해야 할 청년들이 이만열이 설계한 역사관에 갇혀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북한 정권에 대해 로맨틱한 환상을 가지면서 좌파 정치 투쟁의 선봉에 서게 된 것은 영적인 비극이다. 손봉호가 '윤리'라는 이름으로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할 때, 이만열은 그 책임의 방향을 좌파적 민중 운동으로 향하게 했다. 고신 선배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지키려 했던 것은 자유 민주주의의 토양인 신앙의 자유였지, 교회를 사회주의 실험실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이 두 거두의 영향 아래 성장한 세력들이 오늘날 고신 교단 내에서 '개혁'을 빙자해 좌경화의 길을 닦고 있는 것이다. 이만열은 고신의 미래 세대를 향해 독이 든 사과를 먹인 범인이 아닌가? 결론: 이만열이 오염시킨 고신의 제단을 정결케 하라 이만열 교수는 기독교 역사학자라는 명성 뒤에서 고신의 심장부에 좌파 이데올로기의 독침을 놓았다. 그는 한상동 목사님을 비롯한 신사참배 반대 선배들의 거룩한 순결을 세속적 투쟁으로 격하시켰고, 그 결과 고신은 영적, 사상적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이만열 식의 자학적이고 왜곡된 역사관을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 고신의 순교 정신은 좌파 운동의 도구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을 높이는 영적 자산이다. 우리는 이 거짓된 사슬을 끊어내고 하나님께서 우리 선배들을 통해 세우신 고신의 정절을 회복해야 한다. 그것만이 고신이 다시 한국 교회의 영적 보루로 서는 유일한 길이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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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기고8] 신사참배 저항 정신의 변질: 순교 신앙을 좌파 민족운동으로 오염시킨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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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아름다운 총회의 첫 단추, 누구에게나 공정한 선거관리가 되길
- 총회의 선거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총회를 섬기기 위해 출마를 결심한 분들의 용기와 헌신과 결단에 박수를 보내며, 선거 과정과 결과가 총회를 아름답게 세우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이번 선거에서는 불법과 편법, 비방과 흑색선전, 과장된 공약 홍보와 개인의 욕심에 이끌려 총회를 어지럽게 만드는 인사의 선출 등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기를 기대합니다. 특히 선거 조례에 맞추어 서류를 접수하고 후보를 추천해야 하는 노회 임원회와 노회에서 제출하는 각종 서류와 선거 과정 일체를 총괄하는 선거관리위원회는 공정성과 원칙을 최우선으로 삼을 때, 고신이 한국교회의 장자 교단으로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첫 단추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 주길 바랍니다. 아주 간단한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고신총회 선거 조례 제3장 입후보자의 자격 제6조 자격, 입후보자의 자격은 다음과 같다. 1, 임원 4)항은, 모든 입후보자는 임기 중에 항존 직원의 시무 정년(교회 헌법 정치 제32조)을 넘지 않는 자라야 한다”고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또 최근 발표된 제76회 총회 선출직 선거 공고에서도 입후보 자격의 첫 번째 기준이 “입후보자는 임기 중 70세 정년에 해당되지 않아야 한다.”라고, 입후보자의 자격에 관한 조항 중 가장 먼저 명시되어 있습니다. 선거관리위원회에서 공고한 후보자 자격의 첫 번째 기준은, 너무도 간단명료하고 명확하고 모두가 이해하기 쉽습니다. 이에 대해 선거관리위원회에서는, 이미 제정된 선거 조례와 스스로 공고한 공보문에 따라 그대로 집행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에 대해 누구라도 시시비비할 이유가 없으며, 모든 출마자들은 반드시 지켜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요즈음 들어 이상하리만큼 유행하는 것 중 하나는, 노회 임원이 되고, 총회 상비부의 부원 정도가 되면, 위와 같은 너무도 상식적인 규정을 총회 법제부나 헌법위원회에 질의한다는 사실입니다. 또 그 명확한 조항을 반려하지 않고 재해석한다면, 앞으로 그 어떤 세칙이라도 이런 재해석을 통해 그 결과를 물어야 한다면 세칙은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간혹 노회나 상비부에서 이런 규정을 적용함에 있어 또 다른 문제가 파급되어 더 큰 어려움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책임을 맡은 자로서 소위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겠다”는 비겁한 직무 유기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직무 유기의 범위를 넘어서서, 그 일을 위해 부여된 기관이 그 조항을 적용하는 문제를 타 기관에 넘긴다면, 그 기관의 무능과 존재 문제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몇 차례 언급했지만, 지난 선거관관리위원회에서 고려학원 이사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바로 이 규정에 실수가 있었습니다. 선거관리위원회는 이 부분에 대해 총회 앞에 사과하고 원인 무효해야 합니다. 물론 본인도 살피지 못한 책임이 있기에, 교단의 규칙을 세우는 일과 개인의 책임을 통감하는 입장에서 스스로 물러나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단이 정한 법(선거 세칙)에 따라 합법으로 선출되지 않은 이사가 결정한 것이라면, 합법적으로 선출된 이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 이후 학교법인 이사회에서 결정하는 그 어떤 사안에 대해서도 합법적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잘못 선출된 이사가 결정에 동참한 것이기에 때문에, 이사회의 결의위 유효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제 개인적으로는 매우 곤혹스럽습니다. 사실 저는 그렇게 선출된 이사를 개인적으로 잘 모릅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문제를 제기하여 법대로 바르게 하자고 주장하면, 그분과 관계가 나빠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 고신을 사랑하는 목사로서 고신이 바르게 하자고 주장하는데 아무런 이유 없이 잘 알지도 못하는 분과 관계가 나빠져야 하고 학원 이사회에는 나쁜 사람으로 인식되어야 합니까? 이런 손해는 누가 보상해 줍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는, 총회가 정한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가장 기본적인 법, 가장 첫째 되는 법, 어린아이가 봐도 쉽게 알 수 있는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선거관리위원회는 이러한 규정을 엄정하게 적용하여 선거를 관리해야 합니다. 실무자 개인의 판단이나 상황에 따른 예외가 아니라, 모든 실무자가 최소한의 기준과 원칙을 정확히 숙지하고 동일하게 적용해야 공정성이 확보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미 자격 기준에 어긋나는 사례가 발생했다면, 그 경위를 명확히 밝히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규정 위반을 묵인하거나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것은 총회 행정의 신뢰를 훼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선거관리위원회는 규정 해석과 적용에 있어 일관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명확한 규정이 있음에도 다른 부서의 판단에 의존하여 책임을 미루는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선거관리의 책임은 선거관리위원회에 있으며, 공정성과 신뢰를 지키기 위해 원칙에 따른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아울러 총회 임원회와 각 위원회도 모든 행정 과정에서 동일한 기준과 원칙을 적용해야 합니다. 상비부 배정이나 결원 보충 등 각종 인사 행정에서도 상황에 따라 기준이 달라지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아름다운 총회는 공정한 선거와 원칙이 있는 행정 위에서 세워집니다. 모든 구성원이 납득할 수 있는 기준을 적용하고, 누구에게나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는 선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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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아름다운 총회의 첫 단추, 누구에게나 공정한 선거관리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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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는 글] 거주하는 나그네: 초기 그리스도인의 라이프 스타일
- 시작하면서 : 초대교회사 속에서 발견한 ‘거주하는 나그네’ 초대교회사를 공부하면서 문득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 바로 어린 시절 텔레비전을 통해 보았던 영화 「벤허」이다. 거대한 경기장을 가득 채운 군중들의 함성, 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하는 전차들, 그리고 이기기 위해 서로를 무너뜨려야 했던 치열한 경쟁은 어린 나에게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에는 단순히 박진감 넘치는 명장면으로만 기억했지만, 초대교회사를 배우면서 그 장면이 로마제국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강한자만 살아남고 권력과 명예가 최고였던 로마 사회 속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전혀 다른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초대교회사를 공부하면서 그리고 이상규 교수의 『초기 그리스도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읽으면서, 초기 교회의 진짜 힘은 정치적 영향력이나 사회적 권력이 아니라 성도들의 ‘삶 자체’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가장 깊이 와닿은 표현은 ‘거주하는 나그네’라는 말이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제국 안에서 살아가고 있었지만, 로마를 영원한 고향으로 여기지 않았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세상의 가치관에 자신을 맞추지 않았다. 이들은 이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 나라를 소망했고, 이러한 정체성은 그들의 일상과 공동체 생활 전체에 깊이 스며 있었다. 이상규 교수는 이들을 가리켜 “몸은 이 땅에 있으나 마음은 천국에 있는 심리적 이민자”라고 설명한다. 이 표현은 초대교회를 이해하는 아주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들은 세상을 떠나 숨어 산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서 살아가면서도 세상의 가치관에 휘둘리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세상과 구별된 그들의 삶은 당시 로마 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초대교회가 성장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 이 글에서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왜 자신들을 ‘거주하는 나그네’로 생각했는지 그 배경을 살펴보고, 그 정체성이 실제 일상과 공동체 속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더 나아가 초대교회의 삶을 거울삼아 오늘날 우리 교회와 소그룹 공동체가 회복해야 할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거주하는 나그네’ 정체성의 형성과 배경 주후 30년경 예루살렘에서 교회가 처음 시작되었다. 64년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본격적으로 박해하기 전까지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비교적 자유롭게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네로 황제의 잔인한 박해가 시작되면서 기독교인들은 공공장소를 떠나 숨어서 모여야만 했다. 이렇게 은밀하게 모이다 보니 비신자들은 기독교 모임에 올 이유가 없어졌고, 복음은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조용히 전해졌다. 이 때문에 당시 비판적인 철학자였던 켈수스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사회를 어지럽히는 ‘비밀단체’라고 부르며 비난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한 건물 대신 일반 가정집을 고쳐서 모이기 시작했다. 가정집에 모인 가장 큰 이유는 사적인 공간이어서 외부의 감시로부터 안전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기독교는 국가가 허락하지 않은 불법 종교였기 때문에 법적으로 재산이나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다. 게다가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하며 제자로 삼는 일이 너무나 시급했기 때문에, 다른 종교들 처럼 화려한 신전이나 신상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이러한 박해는 249년 데키우스가 황제가 되면서 제국 전체를 무대로 하는 혹독하고 조직적인 탄압으로 변했다. 데키우스 황제는 로마 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증명서’ 소지 여부를 검사하며 기독교인들을 강하게 압박했다. 하지만 이렇게 모질게 탄압하는데도 기독교인들의 아름다운 삶을 통해 복음이 제국 전역으로 점점 더 퍼져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로마는 결국 박해를 중단하게 된다. 박해 이후 약 40년 동안 교회에 평화가 찾아왔고, 이때부터 조금씩 가정교회를 넘어선 독립된 예배당 건물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가 공인을 받으면서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탄압이 끝나고 당당하게 활동할 수 있게 된 교회는, 주 후 380년 데오도시우스 황제 때 이르러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는 엄청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처럼 역사 속에서 심한 박해가 있었지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은 멈추지 않았다. 177년 프랑스 골 지방에서 끔찍한 박해가 일어난 후, 그 고난을 견뎌낸 한 그리스도인은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비엔나와 골, 리용의 ‘거주하는 나그네’인 그리스도의 종들이 동일한 구원의 믿음과 희망을 품고 있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있는 형제들에게 편지합니다” 이 구절은 당시 성도들이 박해 속에서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2세기 후반의 유명한 변증서인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는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생활을 더 구체적으로 전해준다. “그리스도인들은 국가나 언어 또는 문화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만의 도시에서 살지도 않고 그들만의 독특한 대화 방법을 쓰지도 않는다. 삶의 방식도 특별한 것이 없다. 의복이나 음식, 그리고 다른 일상생활 방식에서도 그 지역 풍습을 따라 산다. 그들은 자신들의 국가에 살지만 ‘거주민이자 나그네’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시민으로 모든 일에 참여하지만, 외국인으로서 모든 것을 참고 산다. 모든 낯선 땅이 자신들의 조상 땅이라고 생각하지만 모든 조상의 땅이 또한 낯선 땅이다. 다른 사람들처럼 결혼하고 자식을 낳지만, 자식을 버리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박해를 받는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많은 이들을 부요하게 한다. 간단하게 말해서 영혼이 육체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있다.” 이처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담을 쌓고 숨어 산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이 세상과 다르게 살았다. 로마 사회의 일원으로 성실하게 살았지만,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 나라에 두었다. 한 나라의 시민권자이지만 고국을 떠나 외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표현과 같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정체성을 표현했다. 2. 초대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일상을 살아갔을까? 고대 로마시대에는 황제들이 민심을 얻기 위해 대중적인 오락과 구경거리를 많이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5만 명이나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콜로세움 경기장이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검투사들의 잔인한 싸움과 맹수 사냥 같은 자극적인 구경거리가 매일 열렸다. 이러한 스포츠는 부자 귀족부터 가난한 노예까지 모든 로마 사람들을 사로잡은 최고의 인기 오락이었다. 또한, 극장의 연극 공연도 크게 유행했다.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하면서 연극 문화가 로마로 넘어왔는데, 당시 무대에 오른 연극들은 주로 부도덕하고 음란하며 잔인한 내용이 대다수였다. 초기 기독교는 이 두 가지 대표적인 오락 문화에 대해 아주 단호하고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2세기 교부였던 테르툴리아누스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공연에 관하여』라는 책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 할 올바른 삶의 기준을 제시했다. 당시 로마인들은 축제를 핑계 삼아 술을 마시고 광란의 밤을 보내곤 했는데,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러한 구경거리들이 본질적으로 우상 숭배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또한, 잔인하고 음란한 장면들이 사람의 감정을 자극해 성령님이 거하시는 마음의 평정심을 해친다고 경고했다. 이처럼 초기 교회는 세상의 타락한 문화에 휩쓸리지 않도록 분명한 기준을 가르쳤다. 또한, 당시 로마 사회에서 사람들이 가장 집착했던 것 중 하나는 외모를 꾸미는 일이었다. 화장하고, 화려하게 치장하고, 몸에 문신을 새기는 일은 고대 로마인들의 흔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초기 교부들은 외모를 지나치게 꾸미는 것을 영혼의 순결을 해치는 육신 적인 일로 보았다. 키프리아누스 교부는 『처녀의 복장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라고 말했다. 그는 외적인 화려함은 결국 내면의 영적인 가난함을 보여 줄 뿐이라며, 겉모습을 치장하기보다 마음속 세계를 돌보고 늘 검소하고 단정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뿐만 아니라 쾌락적인 목욕문화, 여행 등 오늘날과 다를 바 없는 화려한 로마의 일상 속에서도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제국의 화려함 속에서도 신앙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특히 초대교회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빛을 발했던 가장 아름다운 전통은 바로 ‘손 대접’이었다. 지금처럼 안전한 숙박시설이 없던 시절, 낯선 나그네와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을 아무 대가 없이 자기 집으로 맞아들이고 대접하는 것은 기독교인들만의 특별한 라이프스타일이었다. 성도들은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면서 그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 아름다운 전통은 나중에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병원 제도의 역사적 모태가 되기도 했다. 아무것도 돌려받을 수 없는 약자들을 집으로 초대해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었던 이 삶의 방식은, 로마의 단단한 신분 장벽을 허물고 서로를 존중하게 만드는 위대한 배경이 되었다. 3. 초대교회의 삶을 통해 현대 교회가 회복해야 할 가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살펴보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교회의 본질이 건물이나 제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공동체에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를 말할 때 자연스럽게 예배당 건물을 떠올리지만, 초기 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에게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 자체였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교회 건물로 알려진 두라-유로포스 역시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 준다. 두라-유로포스에서 발견된 교회는 처음부터 교회당으로 건축된 건물이 아니라 일반 가정을 개조한 공간이었다. 이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것이 건물의 규모나 외형이 아니라 함께 모여 말씀을 나누고 교제하며 신앙을 실천하는 공동체였음을 보여 준다. 오늘날 한국교회 역시 건물 중심의 사고를 넘어 공동체 중심의 신앙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또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을 단순한 지식이나 교리로 이해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는 내용을 삶 속에서 실천하고자 하였다. 영아 유기와 낙태를 거부하고, 원수를 사랑하며,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돌보는 삶을 살아갔다. 알랜 크라이더(Allan Kreider)는 초기 교회의 성장이 화려한 전도 전략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삶의 방식 때문이었다고 설명한다. 결국,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설교만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보며 복음의 진정성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현대교회 역시 프로그램과 행사 중심의 신앙을 넘어 삶으로 살아내는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예배와 교육도 중요하지만, 교회가 세상 속에서 영향력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복음을 말하면서도 삶으로 보여 주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거주하는 나그네’로 살아갔던 것처럼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의 가치관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된다. 특별히 현재 목장 공동체를 섬기고 있는 나에게 초기 교회의 모습은 큰 도전으로 다가왔다. 목장교회는 단순한 소모임이 아니라 초기 교회의 가정교회 정신을 현대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공동체라고 생각한다. 목장 안에서 성도들은 서로의 삶을 나누고 기도 제목을 공유하며 함께 신앙의 성장을 경험한다. 또한, 어려움 가운데 있는 목원을 돌보고 함께 기도하는 과정에서 초대교회의 공동체성을 경험할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가정에서 모여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여기며 살아갔던 것처럼, 오늘날의 목장 공동체 역시 단순한 모임을 넘어 삶을 함께 나누는 영적 가족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공동체가 세워질 때 현대교회는 초대교회가 보여 주었던 생명력과 영향력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4. 맺는말 : 오늘날로 이어지는 ‘거주하는 나그네’의 삶 세상 속에 살지만 ‘거주민이자 나그네’로 살아가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생생하게 다가 온다. 순수함과 원형적인 초대교회,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하여 나의 삶과 사역을 깊이 돌아볼 좋은 기회가 되었다. 초대교회사를 공부하면서 복음이 기독교적 가치를 잃지 않고 오늘날에 전파되기까지 수많은 박해와 고난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네로의 잔혹한 탄압과 데키우스의 조직적인 박해 속에서도 성도들이 ‘거주하는 나그네’의 정체성을 끝까지 지켜냈기에 복음의 순수성이 보존될 수 있었다. 2천 년의 시간을 뚫고 그 귀한 복음이 나에게까지 전파되고, 이제는 그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붙들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하다. 이는 단순한 역사적 지식의 습득을 넘어, 나를 복음의 빚진 자로 서게 만드는 영적 은혜이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나의 삶과 교회 공동체에 비추어 무엇이 진짜 교회이며,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진다. 그들이 보여준 따뜻한 환대의 전통과 일상의 순수함은 현대 교회가 지향해야 할 소그룹 공동체와 다음 세대 신앙 교육 현장이 나아가야 할 분명한 이정표가 된다. 초기 기독교에 대해 공부하고 책을 읽으면서 나의 모든 삶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로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주일의 예배당 문을 나서 월요일의 세상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는 나의 모든 일상이 곧 초기 성도들이 보여준 거룩한 나그네의 삶이 되기를 기도한다. 소그룹 사역의 자리에서 이 아름다운 라이프스타일의 전통을 묵묵히 이어갈 때, 초대교회를 부흥케 하셨던 하나님의 신실하신 계획이 오늘날 우리 공동체 위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줄 믿는다. 글. 김주영 안수집사 (서울 더라이프지구촌교회) ※ 이 글은 이상규 교수(전 고신대학교 교수, 현 백석대학교 석좌교수)님의 추천으로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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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읽는 글] 거주하는 나그네: 초기 그리스도인의 라이프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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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그래도 다시 한번
- 조선 태종 이방원이 남긴 「하여가」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 년까지 누리리라.” 원래 이 시는 권력을 향한 타협의 노래였지만, 오늘 우리 교단의 현실을 비추는 거울처럼 다가옵니다. 옳고 그름을 말하는 것이 피곤해지고, 불의에 침묵하는 것이 지혜가 된 시대입니다. 비록, 이런 태도가 세상에서 흔할지는 모르나,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교를 자랑해 온 고신에서는 결코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닙니다. 우리 교단에는 엄연히 헌법이 존재합니다. 헌법은 원칙입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 헌법은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킬 때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게 되며, 최소한의 질서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총회 “재판국원은 교회법에 상당한 식견을 가진 자 중에서 선임하되, 목사는 임직 20년 이상 장로는 임직 7년 이상인 사람 중에서 각 노회에서 추천하고 공천위원회가 공천하며 총회가 선임한다.”(권징, 제 22조 2항)라는 항목은 원칙입니다. 총회 서기를 지낸 어떤 분은 스스로 자신을 특별국에 배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발언했으나, 결국 총회를 잘 아는 자가 특별국에 들어가야 한다는 모순적인 주장을 하며 자천하여 특별국원이 되었습니다. 특별국원이 되고 그다음에 총회장으로 가는 코스처럼 인식하는 듯합니다. 특별국을 나올 때는 당해 연도에는 다른 특별국으로 갈 수 없다는 기준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정해놓은 법이나, 기준, 혹은 약속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총회를 너무나 잘 알기에 기준을 무시하고 당당하게 다른 특별국으로 추천하기도 하고, 입성(?)하는 현실입니다. 총회장을 역임하고, 부총회장을 역임한 후 특별국이나 상임위원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도 그 어떤 시선도 전혀 개의치 않고 당당할 수 있는 것은 총회를 너무도 잘 아는 자가 총회 일을 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로 법을 초월할 수 있다는 인식 때문입니다. 총회의 근간을 세우고 법의 기준을 세워 하나님의 공의를 실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조직이 헌법위원회와 재판국입니다. 그러므로 총회를 위해 맡겨진 중책 때문에라도 법이나 기준에 하자가 없는 자가 위원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가 위원이 되어야 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총회의 특별 부서 중 성경에 입각하여 법을 바르게 세워야 하는 자들이 법과 기준과 약속에 떳떳하지 않는데, 그런 자들이 해석하고 적용하고 결정하는 법과 기준과 약속에 어떤 정당성과 명분과 영적인 능력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총회의 중요한 부서가 이렇다 보니 고신대, 고려신학대학원, 복음병원을 운영하는 학원이사회도 말 그대로 꼴불견입니다. 이사회의 임원이 되기 위해 이력을 감추고, 개인의 정년을 늘리기 위하여 법을 개정하는데 입을 맞추고, 정당하게 선출된 감사를 탈락시키기 위해 수도 없이 거짓말을 하고, 시무 정년이 끝나도 이사를 할 수 있는 초법적인 행태가 위기의 때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미화되는 현실입니다. 문제가 제기되면 운영위원회에서 사과하고 나름 거액을 헌금하면 오히려 총회를 위한 위대한 헌신과 희생으로 둔갑되는 기가 찬 현실입니다. 노회, 공천위원회, 총회 임원회 가운데 어느 한 곳도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과거, 단 하루의 서류 발급일 차이로 자격을 박탈하던 교단이 아니었습니까? 몇 개월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후보 자격을 인정하지 않았던 전례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 엄격함은 어디로 갔습니까? 원칙과 기준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적용될 때 원칙과 기준이 됩니다. 관대함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우리 선거 조례도 역시 선명합니다. 모든 입후보자는 임기 중 정년에 해당하지 않아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제3장, 6조 1-4항). 그런데 정년이 지난 상태에서도 이사직을 유지하는 사례가 생겼습니다. 이는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신뢰의 문제입니다. 적법하게 추천된 후보는 투표로 탈락시키면서, 자격이 명백히 부족한 인사에게는 ‘예외’라는 이름으로 길을 열어주는 모습은 공정이 아니라 편의이며, 원칙이 아니라 사적 판단입니다. 더 나아가 부정부패의 뿌리입니다. 우리 총회는 덮는 일에 능숙해진 공동체 같습니다. 양심적인 도예가는 불량품을 깨뜨립니다. 반면에 양심을 잃은 도예가는 그 위에 색을 칠해 시장에 내놓습니다. 문제가 있어 사용할 수 없는 인사를 ‘다른 자리’라는 핑계로 총회에 넘기고, 그 사실을 알면서도 외면하는 현실입니다. 과거의 중징계 이력이 제출 서류에서 빠졌음에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넘어갑니다. 이것은 과연 실수입니까? 아니면 의도적인 침묵입니까? 문제는 “모두에게 동일한가?”입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라는 말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된다면 그나마 덜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내 편에게는 관대하고, 내 편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한없이 엄격해집니다. 이중 잣대는 교회보다 세상에서 더 빠르게 신뢰를 무너뜨립니다. 지금 세상은 교회와 노회와 총회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덮고 넘어간 것들이 결국 교회의 얼굴이 됩니다. 고신의 힘은 제도가 아니라 양심이었습니다. 고신은 제도가 강해서 여기까지 온 교단이 아닙니다. 불리해도 원칙을 지켰고, 손해가 나도 바른길을 선택했던 양심의 역사가 오늘의 고신입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변명이 아니라 회개이며, 침묵이 아니라 같은 원칙과 기준입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라는 말이 편리한 방패가 되는 순간, 고신은 스스로가 가장 경계해 왔던 모습과 닮아갈 것입니다. 이 글은 누구를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입니다. “나는 내 허물에는 관대하고, 남의 허물에는 엄격하지 않았던가?” 이 질문 앞에서 정직해질 때, 고신은 다시 고신다워질 수 있습니다. 선관위원장이 교체되었습니다. 새로 선임된 선관위원장은 항상 바르게 법대로 규정대로 하겠다고 주장하셨던 분으로 기억됩니다. 그래서 2026년 올해 총회의 선관위에 그래도 다시 한번 기대를 걸어보고자 합니다. 이번 총회 역시 총회 임원 선출을 비롯하여 많은 이사와 부서에 필요한 사람들을 세우게 됩니다. 미진한 법들까지 찾고 연구해서 바르게 적용해야 함이 지당합니다. 그런데 선관위에서 기독교보에 게재한 규정들조차 바르게 적용하지 않고, 총회 법을 논하면 문교부 법으로 덮고, 문교부 법을 논하면 총회 법으로 덮는, 총회 총대들을 무식한 개돼지로 취급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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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그래도 다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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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본향을 향한 영혼의 순례, 노래로 열어간 창원의 다음 50년
- 제2회 경남국제합창제는 단순히 여러 나라의 합창단이 차례로 무대에 오르는 국제 음악 행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분명한 주제와 흐름을 지닌, 매우 세련된 음악적 서사였다. 각 나라의 언어와 문화, 민속성과 현대성이 다르게 펼쳐졌지만, 그 모든 음악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여들었다. “인간은 어디에서 참된 안식을 얻는가?” 그리고 “우리는 어떤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가는가?” 이 질문이야말로 이번 합창제 전체를 관통하는 깊은 주제였다. 그 흐름은 첫 무대에서부터 이미 예고되었다. 해외팀 연합합창으로 불려진〈고향의 봄〉은 단순한 개막곡이 아니었다. 창원의 노래를 세계 여러 나라 합창단이 함께 부른다는 것 자체가 깊은 상징이었다. 고향은 각자 달랐지만, “고향”이라는 정서 앞에서 모든 목소리는 하나로 모였다. 그 순간 〈고향의 봄〉은 한국인의 향수를 넘어 인간 존재 깊은 곳에 있는 본향의 그리움을 깨우는 노래가 되었다. 마치 이번 합창제가 앞으로 펼쳐갈 음악적 여정의 서곡처럼, 고향과 순례, 안식과 평화의 주제가 조용히 문을 열었다. 오프닝 세레모니에서 구자천 GICF 조직위원장이 전한 인사도 이 흐름과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 그는 50년 전 시골 같던 창원이 산업화와 기계화를 거치며 “열심히 일하는 도시”로 성장했음을 회상했다. 그러나 앞으로의 50년은 합창과 예술로 열어가는 도시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특히 창원의 도심을 흐르는 강 위에 배를 띄우고 노래가 울려 퍼지기를 꿈꾼다는 말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도시 문화의 비전이 아니라, 기계의 소음과 산업의 효율을 넘어 인간의 영혼이 다시 노래하는 도시를 향한 희망이었다. 이번 합창제는 바로 그 꿈의 예술적 실현처럼 보였다. 첫 번째, Taipei Philharmonic Chamber Choir(대만 필하모닉 챔버 콰이어)팀의 무대는 이번 합창제의 주제를 가장 깊이 열어준 장면이었다. 〈My Final Resting Place〉는 선교사 조지 레슬리 매케이의 삶과 고백을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복음 때문에 사랑하게 된 땅에 나의 마지막 안식을 두고 싶다”는 고백을 품고 있었다. 이 곡은 단순한 선교의 노래가 아니라, 한 인간이 타인의 땅을 자기 생명의 자리로 받아들이는 성육신적 사랑의 노래였다. 이어진 대만 하카 민요는 그 사랑이 이제 그 땅 사람들의 언어와 정서 속에서 다시 노래되는 장면처럼 들렸다. 그리고 한국 가곡 〈청산에 살리라〉는 그 흐름을 동아시아적 본향의 정서로 확장시켰다. 대만 선교사의 마지막 안식, 하카 민족의 디아스포라적 그리움, 한국인의 청산에 대한 동경은 결국 하나의 질문을 품고 있었다. 인간의 마지막 집은 어디인가? 두 번째,인도네시아 Dux Stella voce(덕스 스텔라 보체)팀의 무대는 이 본향의 주제를 공동체의 생명력으로 이어갔다. 첫 곡 〈Pasltere〉는 신나는 안무와 역동적인 움직임 속에서 합창이 단순히 소리의 예술이 아니라 몸과 리듬, 공동체의 에너지까지 포함하는 살아 있는 예술임을 보여주었다. 이어진 Ken Steven의 〈Lisoi〉는 토착적 리듬과 대지의 감각을 통해 공동체의 숨결을 음악으로 끌어올렸다. 대만 팀이 “본향과 마지막 안식”을 노래했다면, 인도네시아 팀은 그 본향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의 삶의 리듬과 공동체적 생명력을 노래한 셈이다. 안식은 죽음 이후의 장소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함께 노래하고 함께 살아가는 삶 속에서도 경험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세 번째, The University of Mindanao Chorale(민다나오 대학합창단)팀의 무대는 그 여정 위에 거룩과 평화의 차원을 더했다. 첫 곡 〈Avinu〉는 마치 제의적 예식처럼 느껴졌다. 무대는 성소가 되었고, 합창단의 움직임과 음향은 제단 앞으로 나아가는 제사장들의 행렬을 연상시켰다. 인간이 거룩 앞에 서는 장면, 하늘 아버지를 향해 얼굴을 드는 공동체적 기도가 그 안에 있었다. 이어진 〈Pokpok Alimpako〉는 원초적 리듬과 토속적 에너지로 공동체의 심장 박동을 들려주었고, 마지막 〈Imagine〉은 그 모든 흐름을 평화와 희망의 꿈으로 수렴시켰다. 기도에서 시작해 공동체를 지나 평화로 나아가는 이 구성은, 음악이 어떻게 인간 공동체의 미래를 상상하게 하는지를 보여주었다. 네 번째,창원시립소년소녀합창단의 특별무대는 한국적 생명력과 축제성을 더했다. 〈쾌지나 탈출놀음〉과 <북청사자춤>의 이미지는 단순한 전통 재현을 넘어, 공동체의 한을 풀고 고통을 몰아내며 모두가 함께 살아나는 집단적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냈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의 목소리가 그 무대를 채웠다는 점은 중요하다. 그것은 과거의 전통이 단순히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의 몸과 소리 속에서 새롭게 살아난다는 상징이었다. 앞선 무대들이 본향과 순례, 기도와 평화를 노래했다면, 이 무대는 그 여정이 공동체의 해방과 환희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다섯 번째,일본 Seisen Youth Choir(세이센 유스 콰이어)팀은 전통 기모노를 입고 등장하여 일본 특유의 절제와 여백의 미학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Alleluia〉는 맑고 투명한 경건함으로 긴 순례 속의 짧은 기도처럼 들렸고, 〈Meciendo Ⅱ〉는 흔들림과 위로, 침묵과 내면의 떨림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마지막 〈Ondo no Funauta〉는 바다와 노동, 공동체의 리듬을 품은 일본 민요의 정서를 보여주었다. 일본 팀의 무대는 강한 외침보다 조용한 울림이 더 깊을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것은 소리 이후의 침묵, 환희 이후의 묵상처럼 이번 합창제의 정서를 한층 깊게 만들었다. 여섯 번째, 미국 마이애미의 Bel Armonia(벨아르모니아)팀은 현대적이고 개방적인 에너지로 무대의 결을 바꾸었다. Holst의 〈Ave Maria〉는 일반적인 정적 성가의 이미지와 달리 신나는 안무와 뮤지컬적 연출로 생동감 있게 펼쳐졌다. 이어진 〈Bridge Over Troubled Water〉는 Jacob Collier의 편곡답게 환상적인 화성과 현대 가스펠적 울림으로 홀을 감쌌다. 그 곡은 상처 입은 시대 위에 놓인 하나의 다리처럼 들렸다. 앞선 무대들이 본향과 순례, 공동체와 거룩을 노래했다면, 미국 팀은 “서로의 고통 위에 다리가 되어주는 사랑”을 노래했다. 일곱 번째,용인시립합창단의 무대는 이번 합창제 전체를 “비상과 안착”이라는 이미지로 정리했다. 위촉곡 〈날고 싶다〉는 새들처럼 날고 싶은 인간 영혼의 자유와 초월의 갈망을 노래했다. 이어진 Bengt Ollén의 〈Trilo〉는 장엄하면서도 편안한 쉼의 공간을 열었다. 특히 그 안에 조용히 스며든 아리랑 선율은 인간 영혼의 귀향과 안식을 섬세하게 일깨웠다. 마지막 〈사랑가〉는 그 모든 여정의 끝이 결국 사랑임을 웅장하게 선언했다. 본향을 찾고, 순례를 지나, 위로를 경험한 인간 영혼은 마침내 사랑 안에 안착한다는 메시지였다. 그리고 마지막 피날레로 모든 출연팀이 함께 부른 우효원 편곡의 〈아리랑〉은 이번 합창제 전체를 하나의 영적 공동체로 묶어낸 절정이었다. 송강수님의 북 연주는 장엄함 그 이상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리듬이 아니라 한 민족의 심장박동처럼, 슬픔과 희망, 떠남과 귀향, 분열과 화해를 동시에 울리는 소리였다. 여러 나라의 목소리가 하나의 아리랑으로 모이는 순간, 아리랑은 더 이상 한국만의 노래가 아니라 인류 공동의 평화와 화합의 노래가 되었다. 결국 제2회 경남국제합창제는 “주제가 있는 합창제”였다. 그것은 음악을 나열한 행사가 아니라, 치밀하게 구성된 하나의 서사였다. 〈고향의 봄〉으로 본향의 문을 열고, 대만의 마지막 안식, 인도네시아의 공동체적 생명력, 필리핀의 거룩과 평화, 한국 아이들의 해방과 환희, 일본의 절제와 여백, 미국의 위로와 사랑, 용인시립합창단의 비상과 안착을 지나, 마침내 〈아리랑〉으로 평화와 화합에 이르렀다. 이 합창제가 남긴 가장 깊은 울림은 이것이다. 산업화된 도시도 다시 노래할 수 있고, 서로 다른 민족도 하나의 본향을 함께 그리워할 수 있으며, 음악은 인간의 영혼을 다시 공동체와 사랑과 평화로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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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본향을 향한 영혼의 순례, 노래로 열어간 창원의 다음 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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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셨는가? 로마서 11장으로 반박하는 뉴스엔조이와 김영봉 목사의 위험한 신학
- 서론: 뉴스앤조이가 전한 김영봉 목사의 문제적 주장 최근 기독교 언론 <뉴스앤조이>는 2026년 5월 15일 자 기사에서 와싱톤사귐의교회 김영봉 목사의 설교를 비중 있게 보도했다. 김 목사는 해당 설교에서 현대 국가 이스라엘은 더 이상 구약성경의 선민 이스라엘과 동일한 존재가 아니며, 현재의 이스라엘은 “유대인 후손들이 세운 세속 국가”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이 제사장 나라로서의 사명에 실패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선민의 개념이 혈통 중심에서 믿음 중심으로 완전히 전환되었다고 설명했다. 나아가 오늘날의 교회가 새로운 이스라엘이며, 현대 국가 이스라엘을 성경의 언약 백성과 동일시하여 무조건 지지하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중동 분쟁을 언급하면서 현대 이스라엘의 군사 행동을 민수기의 ‘헤렘(진멸)’ 전쟁과 연결시켜 비판했고, 한국 보수교회와 광화문 태극기 집회에서 이스라엘 국기를 흔드는 현상까지 비판적으로 언급했다. 또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는다”는 보수 복음주의 진영의 해석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물론 어떤 국가도 성경 위에 설 수는 없다. 현대 이스라엘 역시 정치적·군사적 실책에 대해 비판받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뉴스앤조이>가 이런 설교를 단순 소개하는 차원을 넘어 적극 부각하며, 사실상 자유주의 신학과 대체신학적 세계관을 한국교회 안에 확산시키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욱이 <뉴스앤조이>는 오랫동안 한국교회 내 보수 개혁주의 노선을 공격하고, 손현보 목사를 비롯한 애국적 목회자들을 ‘정치 목회’ 프레임으로 비판해 온 대표적 매체다. 최근에는 손현보 목사 징계론을 주장하는 이른바 ‘자칭 고사모’ 진영의 논리를 사실상 대변하는 역할까지 감당하고 있다. 이번 김영봉 목사 설교 보도 역시 단순한 국제정세 논평이 아니다. 현대 이스라엘을 바라보는 성경적 종말론과 보수 개혁주의 흐름 자체를 우회적으로 해체하려는 신학적·정치적 메시지가 그 안에 담겨 있다. 1. 윤리적 비판과 언약 폐기는 전혀 다른 문제다 분명히 말하자. 현대 국가 이스라엘의 모든 행동이 의롭다는 말이 아니다. 가자지구 민간인 피해나 과도한 군사 행동은 성경적 공의의 기준으로 비판받을 수 있다. 성경은 역사상의 그 어떤 세속 국가도 무조건 면죄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뉴스앤조이>와 김영봉 목사의 논리가 단순한 윤리적 비판을 넘어, 결국 “이스라엘은 이미 구속사 속에서 끝난 민족”이라는 대체신학적 결론으로 흐른다는 점이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피해는 반복적으로 조명하면서도, 하마스에 의해 납치·학대·살해당한 이스라엘 여성들과 어린아이들의 처참한 현실에는 상대적으로 침묵한다. 이것은 균형 잡힌 인권 담론이 아니라 선택적 인권 감수성이다. 더 심각한 것은 현대 이스라엘의 정치적·군사적 문제를 근거로 성경이 약속한 언약적 이스라엘 개념 자체를 해체하려 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윤리 비판의 영역을 넘어선 심각한 신학적 왜곡이다. 2. 로마서 11장은 “이스라엘은 끝났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김영봉 목사의 핵심 문제는 교회의 언약 계승성만 편향되게 강조하고, 로마서 11장이 엄연히 선포하고 있는 혈통적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경륜을 사실상 무력화시키는 데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단호하게 선언한다.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롬 11:1)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신실하심을 못 박는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롬 11:29)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하고 완악해진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그 완악함은 폐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 잠시 꺾인 가지일 뿐, 하나님께서 장차 그 원가지를 다시 접붙이실 전능함과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단지 개인적 차원의 유대인 ‘남은 자’만 말하지 않는다. 그는 역사 속에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찬 이후에 일어날 ‘온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이라는 종말론적 신비를 함께 선포한다. 따라서 현대 이스라엘을 무조건 신성시하며 그들의 모든 정치적 행위에 신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세대주의적 극단’도 오류지만, 반대로 그 존재를 성경과 아무런 상관없는 단순한 세속 민족국가로 축소해 버리는 ‘대체신학적 극단’ 역시 성경적 균형을 잃은 것이다. 3. 뉴스앤조이와 자칭 ‘고사모’의 공통점 오늘날 <뉴스앤조이>와 자칭 ‘고사모’ 진영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첫째, 애국적 보수 개혁주의 목회자들을 ‘정치 목회’로 몰아세운다. 둘째, 정교분리라는 프레임을 악용하여 공적 영역에서의 기독교적 목소리를 침묵시키려 한다. 셋째, 자유주의 신학과 인권 담론을 앞세워 성경의 역사성과 종말론을 약화시킨다. 넷째, 민족·국가·문명 차원의 영적 전쟁을 철저히 정치사회학적 프레임으로만 제한한다. 결국 그들의 시각 속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적 구속사보다 인간 중심의 역사관이 더 앞서 가고 있다. 4. 왜 종말론적 ‘마라나타 신앙’의 복원이 시급한가 이런 영적 혼란의 시대 속에서 최근 교계 일각에서 추진되는 ‘2026 감람산 마라나타 대회’와 같은 움직임을 단순히 세대주의적 운동이나 정치적 친이스라엘 행사로만 폄하할 일은 아니다. 물론 개별 선교 단체의 구체적인 사역 방식이나 알리야 운동 등 방법론적 문제에 대해서는 보수 개혁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철저한 분별과 성경적 검토가 필요하다. 우리 고신 개혁주의 신학은 역사를 인위적으로 단절시키는 세대주의의 극단적 조급함을 단호히 경계한다. 그러나 이 대회가 던지는 핵심 화두, 즉 전쟁과 분쟁의 참화 속에서 인류의 정치적·윤리적 대안에만 매몰되지 않고 다시금 “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재림 신앙을 깨우고자 하는 본질적 외침만큼은 이 시대에 매우 시급한 영적 각성이다. 감람산은 주님께서 재림을 약속하신 장소이자 초대교회 종말 신앙의 상징적 현장이다. 우리가 지금 주목해야 할 것은 특정 단체의 사역 노선이 아니라, 로마서 11장이 말하는 하나님의 신비와 이스라엘을 포함한 열방의 회복, 그리고 역사를 마침내 완성하실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거대한 경륜이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은 종말론을 제거하고 기독교를 단순한 윤리운동으로 축소시키고 있다. 그러나 성경의 핵심은 단지 세상의 윤리 개혁이 아니라, 다시 오실 그리스도와 완성될 하나님 나라다. 결론: 교회는 시대의 영적 흐름을 분별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중요한 신학적 갈림길 앞에 서 있다. 이스라엘을 무조건 신격화하는 오류도 경계해야 하지만, 자유주의 신학과 대체신학의 거센 흐름 속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 가지신 언약과 종말론적 경륜 자체를 지워버리려는 시도 역시 단호히 경계해야 한다. 문제의 핵심은 단순한 중동의 국제정세가 아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다. 현대 이스라엘의 불의는 비판할 수 있고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실패가 하나님의 언약까지 폐기시켰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도 바울의 선언은 오늘도 서슬 퍼렇게 살아있다.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멈춰 선 이스라엘은 없다. 역사의 무대 뒤에서 하나님은 지금도 이스라엘과 열방을 함께 다루시며, 종말을 향한 구속사를 신실하게 이루어 가고 계신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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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셨는가? 로마서 11장으로 반박하는 뉴스엔조이와 김영봉 목사의 위험한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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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기독교보 사설을 비판한다: 잘못된 신학적 혼종과 양비론으로 고신 성도들을 오염시키지 마라
- 이번 주 기독교보에 게재된 사설 <근본주의 영향과 전도>는 한국 교회의 위기를 진단한다는 명목하에 신학적 정체성을 혼란케 하고, 위험한 기계적 양비론(兩非論)을 펼쳤다. 필자는 본 사설이 개혁주의의 이름으로 근본주의적 도피를 합리화하며 성도들을 혼돈케 하고 있음을 직시하고, 이를 강력히 비판하고자 한다. 1. 개혁주의와 근본주의를 혼동하여 교회의 사명을 왜곡하지 마라 이번 사설의 가장 심각한 오류는 한국 교회의 뿌리가 된 ‘개혁주의 정치신학’과 ‘미국식 근본주의’를 구분하지 못하고 교묘히 섞어놓은 데 있다. 개혁주의 신앙은 하나님의 주권이 영혼 구원을 넘어 정치, 경제, 사회 등 삶의 모든 영역에 임한다는 ‘영역 주권’을 강조한다. 반면, 근본주의는 교리 수호에는 철저하나 세상에 대해서는 이분법적이고 폐쇄적인 태도를 취하는 한계가 있다. 사설이 근본주의를 마치 우리가 수호해야 할 유일한 유산인 양 미화하고, 현실 참여를 ‘정치적 성향’으로 치부하는 것은 고신 교단의 찬란한 개혁주의 전통을 근본주의적 협소함 속에 가두는 처사다. 잘못된 신학적 혼종으로 성도들의 눈을 가리고 교회의 공적 사명을 위축시키는 행태를 즉각 중단하라. 2. 그리스도와 벨리알의 조화를 꾀하는 ‘가짜 평화’의 위험성 사설은 ‘고신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모임’과 ‘고신애국지도자연합’을 나란히 선상에 두고 양측 모두가 이념화되었다며 비판했다. 이것은 사안의 본질을 왜곡하는 기계적 중립론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조건적인 결합을 가르치지 않는다. 고린도후서 6장 15절은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라고 엄히 경고한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세력에 맞서 싸우는 ‘애국 신앙’과, 이를 정쟁으로 몰아세우며 방관을 권하는 태도가 어떻게 ‘복음’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가 될 수 있는가? 진리는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결단과 수호의 대상이다. 3. 편당(파당)을 통해 옳은 자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섭리 사설은 교단 내의 이견을 위기와 분열로 규정하며 침묵을 강요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고전11:19)고 했다. 지금 고신 교단 내에서 목소리가 갈리는 것은 무엇이 참된 고신 정신인지, 무엇이 이 시대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인지를 검증해가는 성경적 과정이다. 사설처럼 ‘하나 됨’이라는 허울 좋은 구호로 옳고 그름의 판단을 유보하게 만드는 것은 성도들의 영적 분별력을 마비시키는 ‘신앙적 직무유기’다. 4. 애국은 복음 전파를 위한 가장 거룩한 투쟁이다 사설은 “지금은 전도해야 할 때”라고 말하지만, 전도는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토양 위에서 꽃피는 것이다. 자유민주주의가 무너지고 교회를 압박하는 반기독교적 법안들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골방 전도’만 외치는 것은 무책임한 발상이다. 우리가 광장에서 외치는 이유는 우리 자녀들이 마음껏 찬양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신앙의 생태계’를 지키기 위함이다. 나라가 사라지면 교회도 존재할 수 없다. 애국은 복음과 분리된 정치 활동이 아니라, 이 시대 그리스도인에게 맡겨진 가장 시급한 사명 실천이다. 기독교보는 더 이상 오염된 논리와 비겁한 중립론으로 고신 교회와 성도들을 혼돈케 하지 마라. 순교 신앙으로 세워진 고신 교단은 적당한 타협을 추구하는 곳이 아니다. 기독교보는 고신교단의 정론지인만큼 불의한 시대 조류에 맞서 싸우는 성도들의 진심을 바르게 대변하고, 고신 정신으로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는 일에 앞장서기를 강력히 촉구한다. ※ 독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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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기독교보 사설을 비판한다: 잘못된 신학적 혼종과 양비론으로 고신 성도들을 오염시키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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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복음의 불모지에서 복음의 능력을 보다
- 순교의 피가 스민 땅 히라도(Hirado)에 도착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자비에르 기념 성당이었습니다. 에메랄드빛 외관이 아름다웠지만, 저의 시선은 성당 건물보다 그 뒤편으로 이어지는 기무라 집터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일본 최초의 신자 가문인 기무라 집안은 5대째 신앙을 지키다가 온 가족이 순교했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죽고, 아들이 죽고, 손자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생명보다 믿음을 더 귀히 여겼습니다. 그 터에 서서 저는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 질문이 가슴속에서 불꽃처럼 타올랐습니다. 나가사키로 이동하여 26성인 순교지(니시자카 언덕)를 찾았을 때, 저는 더욱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1597년, 오사카에서 나가사키까지 무려 950킬로미터를 걸어온 26명의 순교자들 — 그 중에는 어린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찬양을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린 도미니코 사비오는 형장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십자가를 찾아 직접 올라갔다고 전해집니다. 그 나이에, 그 믿음이라니... 저는 이십여 년 목회를 했다고 자부하던 제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오무라(Omura)에서는 또 다른 충격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즈타 감옥터, 처자 이별 바위, 그리고 머리무덤·몸통무덤. 순교자들의 부활을 막으려 했던 박해자들이 시신의 머리와 몸을 따로 묻었다는 이야기 앞에서, 저는 인간의 잔인함이 얼마나 깊을 수 있는지를 다시 한번 직면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잔인함 앞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신앙의 힘이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지도 함께 느꼈습니다. 박해자들은 부활을 막으려 했지만, 결국 막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부활의 소망은 사람의 손으로 나눌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요. 260년의 긴 겨울, 그리고 오늘의 현실 이 모든 순교의 역사 앞에서 저를 더욱 깊은 상념에 잠기게 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오늘 일본의 현실이었습니다. 그 많은 피와 눈물 위에 세워진 일본 교회가, 오늘날 전체 인구의 0.5%도 채 되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품고 있다는 현실. 무라카미 천주당의 웅장한 자태 앞에 섰을 때, 저는 아름다움과 슬픔이 동시에 밀려오는 묘한 감정을 경험했습니다. 원폭으로 완전히 무너졌다가 신도들의 눈물과 헌신으로 다시 세워진 저 성당은, 분명 부활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그 성당에 드나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려옵니다. 일본에는 '후미에(踏み絵)'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의 형상이 새겨진 판을 밟게 하여 신자를 가려내던 제도였습니다. 밟기를 거부하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신자들이 밟기를 거부했습니다. 그 결연한 발걸음이 오늘의 일본 교회에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가를 생각할 때, 저는 단순히 '일본이 복음에 굳게 닫혀 있다'고만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보다 더 깊고 복잡한 영적 상흔이 이 땅에 새겨져 있음을 느꼈습니다. 260년의 박해는 단순히 신자 수를 줄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일본인들의 영혼 깊은 곳에 '믿음을 고백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공포를 새겼고, 오늘날에도 그 그림자는 '전도에 대한 거부감', '집단 사회의 압박', '다원주의적 종교관'이라는 모습으로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저는 이 땅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본의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을 생각하며, 그분들의 수고가 얼마나 고독하고 또 얼마나 거룩한 싸움인지를 새롭게 깨달았습니다. 목회자로서의 고백 순례의 마지막 밤, 높은 파도에 흔들리는 배 안에서 저는 오래도록 하나님 앞에 제 마음을 내려놓았습니다. 한국에서 사역하는 저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가끔 '복음 전하기 쉬운 환경'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주일이면 성도들이 스스로 찾아오고, 교회 건물은 번듯하게 서 있고, 사회 곳곳에 신앙의 인프라가 갖춰진 한국의 환경. 그 안에서 저는 때로 복음의 능력보다 교회의 시스템에 의지하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전도의 열정보다 유지의 안정을 더 소중히 여기고 있지는 않았을까요? 히라도의 기무라 집터에서, 나가사키의 순교지에서, 오무라의 처형장에서 만난 그 신앙의 선배들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성당도 없었고, 조직도 없었고, 사회적 지원도 없었습니다.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불타는 믿음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 하나로, 그들은 250년이 넘는 혹독한 박해를 견뎌냈습니다. 잠복 신앙으로, 카쿠레의 형태로, 때로는 불교와 섞인 모습으로라도, 그 씨앗은 죽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환경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복음의 씨앗은 어떤 토양에 심겨도 결코 완전히 죽지 않는다는 것을. 일본이 '복음의 불모지'처럼 보이지만, 그 땅 밑에는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거름이 된 뿌리가 있습니다. 그 뿌리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부르심 사도행전 16장에서 마케도냐 사람이 바울에게 외쳤던 그 소리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가 오늘 일본으로부터 한국 교회를 향해 울려 퍼지고 있음을 저는 이 순례를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들었습니다. 일본은 한국으로부터 가장 큰 선교 혜택을 받은 나라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서 끌려간 신자들, 그 중에 고니시 유키나가 같은 인물들이 복음의 씨앗을 심었고, 그것이 오늘 우리가 순례하는 역사의 한 줄기를 이루었습니다. 이제 그 빚을 갚을 때가 되었습니다. 사랑의 빚, 복음의 빚을. 이번 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저는, 한 가지 결단을 했습니다. 내 목회지에서, 내가 선 자리에서, 조금 더 뜨겁게, 조금 더 담대하게, 그리고 조금 더 겸손하게 복음을 살아내겠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불모지처럼 보이는 그 땅에서, 저는 오히려 복음의 가장 순수한 능력을 보았습니다. 십자가는 여전히 부끄럼이 없고, 복음은 여전히 능력입니다. 그것을 확인하고 돌아온 이 가슴이, 오늘도 뜨겁게 뛰고 있습니다. “우리가 밟는 땅을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여호수아 1:3의 약속을 믿고 일본땅을 제 마음 한 켠에 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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