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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베스트관계목회(7)
관계 교육 공부하고 교육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관계에 대해 가르치고 교육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관계라는 렌즈를 끼고 읽고 공부해야 합니다. 성경은 ‘관계의 책’이라고 불릴 정도로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관계, 수많은 관계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관계의 하나님이십니다. 관계의 중요성 관계 맺는 비결 등 관계에 대해 성경을 공부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관계 특강, 관계 세미나 등 다양하게 관계에 대해 교육해야 합니다. 왜 관계가 깨지는지 연구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관계가 중요한데 관계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목회자는 관계를 가르치고 교육해야 합니다. 관계에 대해 가르치고 교육하는 지혜 중 하나가 좋은 관계 맺는 삶의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목회는 관계입니다. 관계가 잘 될 때 설교를 잘 듣고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평소에 교회와의 관계, 성도와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관계가 나쁘고 깨지면 설교를 듣지 않고 가르침 받는 것을 거절합니다. 목회에서 관계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사탄은 사소한 것 가지고 관계를 깨뜨립니다. 인간에 대해 기대치를 줄이고 사랑으로 대해 주어야 합니다. 관계를 배우고 교육해야 합니다. 관계 리더십의 핵심 ‘리더는 누구인가’가 중요하고 리더십이 중요합니다. 목회자는 ‘영적 리더’인데 리더십이 좋아야 합니다. 리더가 누구냐에 따라 공동체의 성패가 결정됩니다. 리더십은 영향력인데 목회자는 리더로서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리더요 최고의 리더십으로 최고의 영향을 끼쳤습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을 공부하고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섬김과 사랑의 리더십인데 한 마디로 관계의 리더십입니다. 사랑과 섬김으로 관계를 맺으시고 관계 리더십으로 많은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관계 리더십으로 많은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관계 리더십의 핵심은 세 가지입니다. 1. ‘준다’는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주는 헌신과 희생의 삶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다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주신 희생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관계 목회는 주는 것입니다. 마음과 시간 내어 주고 모든 것을 영혼 구원을 위해 주어야 합니다. 목회는 희생입니다. 2. ‘살린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살려 주는 리더십입니다. 병든 자, 낙심된 자, 죽은 자를 살려주신 예수님이십니다. 사탄은 도둑질을 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살아나는 기적이 있었습니다. 관계 리더십은 살려 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3. ‘세운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세우는 리더십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세우시고, 전도인을 세우시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관계 리더십은 세우는 것입니다. 사탄은 파괴자입니다. 예수님의 관계 리더십을 배워야 합니다. 관계 맺는 목적 관계 맺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인맥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한번 맺은 인연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좋은 사람과 관계 맺는 것이 축복입니다.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관계 맺은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관계가 잘되면 행복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관계가 무너지면 불행해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관계 맺는데도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관계 맺는 목적이 사람을 얻고 영혼 구원에 있어야 합니다. 만나서 관계 맺고, 먹고 마시고, 교제하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영혼 구원하는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관계 맺는 것이 전도여야 합니다 좋은 인간관계가 되면 전도가 됩니다. 사도바울도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서 융통성의 리더십을 가지고 한 영혼이라도 더 얻고자 했습니다. 사람을 실족시키지 말고 덕을 세우고 남에 대해 배려와 친절로 전도의 효과가 나타나야 합니다. 관계를 위해 시간을 내고, 섬기고, 대접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을 얻고 영혼 구원하는데 있어야 합니다. 좋은 인간관계는 전도의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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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나의 궁극적 관심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인간의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믿음의 감정적인 요소를 아주 중요하게 보았다. 실제로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감정적인 요소는 아주 중요하다. 인간의 감정은 대단한 힘과 추진력을 갖고 있다. 신앙의 지적인 요소는 정적이고 차갑다고 할 수 있지만 감정적인 요소는 동적이고 뜨거운 것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어떤 신자들은 아주 열정적이고 감정적이지만 어떤 신자들은 지적이고 다소 냉담하기까지 한 사람들도 있다. 어떤 교인들은 손뼉을 치면서 찬송하고, 말씀을 들으면서 ‘아멘!’, ‘할렐루야!’라고 반응하지만, 어떤 교인들은 조용히 찬송하고, 말씀을 듣고도 속으로는 동의하면서도 겉으로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교인들도 있다. 우리는 신앙의 두 요소들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느 것이 덜 중요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신앙에는 지적인 요소와 감정적인 요소가 모두 다 중요하다. 그러므로 프로이트가 믿음의 감정적 요소를 중요하게 간파한 것은 분명히 옳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을 감정으로만 축소한 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특정 교리에 대한 감정적 고백은 믿음의 필수적인 부분이지만 믿음은 감정적 요소로만 축소될 수는 없다. 프로이트의 전 동료이자 나중에 그의 경쟁자가 된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은 신앙의 핵심에 더 가까이 다가온 설명을 하고 있다. 융은 프로이트의 신앙관을 뒤집어 놓았다. 그는 믿음이란 어떤 것을 절대적이거나 이상적인 어떤 것으로 만들려는 충동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그는 믿음을 전지 전능, 전적인 희생과 사랑, 완전한 지혜의 관점에서 파악하려고 하였다. 융에 의하면 믿음은 어린이의 정서적 필요에 대한 성인 버전이 아니다. 오히려 아이는 아버지를 절대자로 생각함으로써 실제로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믿음을 설명함에 있어서 더욱 더 진리에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다. 그는 믿음을 '궁극적 관심'이라고 표현한다.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물이나 사람이다. 그것은 가장 높거나 가장 깊거나 가장 심각한 관심사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 시간, 에너지, 감정을 선점하기 때문에 '관심사'라고 할 수 있다. 종교심리학자인 제임스 파울러(James Fowler)는 궁극적인 관심에 대한 몇 가지 경쟁 관심들을 나열해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예를 들면, “일, 명예와 인정, 권력과 영향력, 부”와 같은 것들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가족, 대학, 국가, 교회 등에 투자될 수 있다. 사랑, 섹스, 사랑하는 파트너도 우리 모두의 궁극적 관심의 열정적인 중심이 될 수 있다.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우리가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사물, 사람, 또는 목표다. 폴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한 국가가 국가 자체의 생존과 성장을 궁극적인 관심사로 삼는다면 그 국가는 국민들의 경제적 복지, 건강과 생명, 가족, 미적 및 인지적 진실, 정의와 인간성 등 다른 모든 관심사를 희생할 것을 요구한다.” 자신의 궁극적인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약간의 연습을 해 볼 수 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잠시 성찰해 보기로 하자.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내 자신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소망은 무엇인가? 내가 이것 빼 놓고는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할 그런 것들은 과연 무엇인가? 아마도 자신의 가장 깊은 소망은 특정한 관계나 사람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자신의 직업일 수도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일 수도 있다. 자신에게 솔직해지도록 노력해 보자. 이제 세 개의 작은 종이조각을 가지고 자신의 궁극적 관심이 무엇인지 성찰하는 연습을 해 보도록 하자.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 3가지를 선택해 보기로 하자. 그것들을 종이에 적어 보자. 그리고 앞에 쓰레기통이 있다고 가상해 보자. 이 세 가지 가장 중요한 것 중 자신이 가장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적힌 종이를 찢어 쓰레기 통에 버리자. 두 번째 종이에도 똑같이 해 보자. 이제 종이 한 장만 남았다. 거기에는 나의 삶에서 내게 가장 중요한 것, 내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 내가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생각할 수 있는 것 한 가지가 적혀 있다. 이것은 협상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나에게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것은 궁극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너의 궁극적인 관심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찬송을 부른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예수 밖에는 없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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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승중 목사] 순교의 영성으로 설교하라
1. 들어가는 말: 위기에 놓인 한국교회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교회가 설립된 지 13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전 세계 선교 역사상 가장 놀라운 성장과 부흥을 하였고,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자유롭게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 역사의 줄기를 찾아 올라가 보면 그것은 피눈물과 땀에 얽히고설킨 고난의 연속이었다. 특별히 일제강점기 36년 동안의 그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 우리의 선배요 선각자였던 수많은 주의 종들이 순교라는 고난의 십자가를 지면서까지 하나님을 믿고 충성을 다했다. 그리고 그 고귀한 신앙의 유산을 우리에게 물려주었다. 진실로 한국교회는 초대 교부 터툴리안의 말처럼 순교자들의 피를 먹고 자란 교회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오늘 한국교회를 향한 세상의 시선이 싸늘하기만 하다. 싸늘한 정도가 아니라 교회를 향한 비판과 비난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많은 사람이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면서 비난을 퍼붓고 있다. 참 부당한 비난이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가 이 사회로부터 받고 있는 소리들이다. 그뿐인가? 그동안 놀라운 부흥을 거듭하던 한국교회의 성장은 멈추었고, 멈춘 정도가 아니라 숫자에 있어서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본 강의의 주제가 아니기에 더는 언급할 수는 없다. 다만 생각이 드는 것은 혹시 오늘 한국교회가 이제는 섬김을 받는 자가 되어 섬김의 자리를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피땀 흘리며 뿌린 씨앗의 열매를 따 먹으려고만 했지, 그것을 나누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닌지? 오늘 한국교회가 영광은 누리려고 하나, 그것에 앞서 반드시 먼저 져야 할 십자가는 외면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혹은 강단에서 외쳐지는 설교에서 십자가의 복음이 사라지고 교인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값싼 은혜만 전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다시 말해서 구약의선지자들과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같이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순교적 영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 교회의 설교가 물량주의와 성공 주의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다시 한국 초기 교회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조상들의 눈물과 희생과 헌신의 신앙생활을 돌이켜 보며, 그들의 순교적 신앙을 본받고, 또 그 순교적 신앙을 강단에서 우리의 후손들에게 계속해서 전달하고 가르쳐야 한다. 이를 위하여 본 강의는 한국교회에 귀한 신앙의 본을 보여주신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설교에 나타난 순교적 신앙을 돌이켜 보면서 한국교회 강단의 나아갈 방향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주기철 목사의 설교 중심의 목회 주 목사의 목회와 설교에 대해서 김인서 목사는 10중 7이 설교이고, 2가 심방이고, 나머지 1이 행정이었다고 말하면서, 주 목사의 목회는 설교에 주력하는 목회였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지적은 올바른 지적이었다. 주 목사는 개혁교회의 전통에 따라 설교의 중요성을 인식하였고, 월요일부터 설교를 준비하여 금요일까지 설교 작성을 완료하고, 토요일에는 설교를 위하여 기도하고 준비하였고, 주일에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다. 주 목사가 설교, 즉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역을 얼마나 중요시 했는가 하는 점은 이런 사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940년 어느 주일날 일본 경찰들은 산정현교회 예배당을 포위하고 주 목사에게 “오늘부터 설교하지 말라”고 하였을 때, 주 목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설교권을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하나님이 하지 말라 하시면 그만둘 것이요, 네 설교권은 경찰에서 받은 것이 아닌 즉 경찰서에서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소" "금지함에도 불구하고 설교하면 체포하겠소”, “설교하는 것은 내 할 일이요. 체포하는 것은 경관이 할 일이니 나는 내 할 일 하겠소”, “대 일본제국 경찰관의 명령에 불복하는가?”, “일본의 헌법은 예배 자유를 허락한 것이요, 당신들은 지금 예배 방해요 헌법 위반이오.” 그래서 권연호 목사는 『주기철 목사의 순교사와 설교집』 “서문”에서 “주 목사의 설교는 그의 신앙고백이요, 그의 생활이요, 그의 정신을 그의 피로 인친 것입니다”라고 기록한 것이다. 그만큼 주기철 목사는 설교 중심의 목회를 하였고, 하나님의 말씀 선포에 생명을 걸었던 설교자였다. 3. 설교자로서의 주기철 목사 주 목사의 설교와 글들은 여러 가지 잡지와 신문 등에 실렸는데, 그가 남긴 것은 소논문 1편, 기도문 2편, 응답문 1편, 설교문 37편이 전부다. 그리고 37편의 설교 중 15편이 「신생명」, 「기독신보」, 「종교시보」, 「복음시대」, 「새사람」, 「설교」, 「기도지남」 등에 실렸고, 22편은 김린서가 복원한 것이다. 김린서가 복원한 설교들은 그가 예배에 참석하여 주 목사의 설교를 듣고 메모해 두었던 것을 복원하여 해방 후에 정리 활자화한 것들이다. 우리는 그의 설교들과 기도 그리고 논문이 실린 잡지들이나 교계 신문 등을 통해서 설교가로서의 주기철의 면면을 엿볼 수 있게 된다. 그는 평양장로회 신학교 졸업반 시절인 1924년 7월 「신생명」을 통해 계몽주의 논문, "기독교와 여자 해방"을 발표하였고, 1928년 6월 부산 초량교회 목회 시절(1928년 6.6) 그가 존경했던 김영구 목사의 부음을 듣고 쓴 추모기도문이 「기독신보」에 실렸다. 이후 마산 문창교회 목회 시절인 1934년 그가 남대문교회 부흥회때 설교하였던 “은총과 책임”이 「종교시보」(1934.5)에 실렸다. 그 후에 장로교 기관지였던 「종교시보」에 “사의 준비”(1934.8) “천하에 복음을 전하라”(1935.2)는 설교가 실렸다. 그 외에도 그가 1935년 금강산 목사 수양회 때 했던 설교인 “목사직의 영광”이라는 설교가 「기독신보」에(1935.5) 실렸다. 그리고 1936년에 평양의 산정현교회로 목회지를 옮긴 이후에 12편의 설교와 기도문이 각종 잡지와 교계 신문에 발표되었는데,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무거운 짐 진 자여 예수께 오라”(「복음시대」, 1937.6) “전도의 사명”(「설교」, 1937.3) “성신과 기도”(「설교」, 1937.3) “마귀에 대하야”(「설교」, 1937.4) “이삭의 헌공”(「설교」, 1937.5)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설교」, 1937.6) “하나님 압헤 사는 생활”(「설교」, 1937.8) “십자가의 길노 행하라”(「기독교보」, 1937.9) “주의 재림”(「설교」, 1937.10) “하나님을 열애하라”(「설교」, 1938.3) “겸손하기 위하야”(「기도지남」, 1939.2). 그리고 그의 설교문이나 글들이 1939년 초를 지나서는 잡지나 교계 신문에 실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가 일제에 의해서 2차 검속을 당한 1939년 9월 이후에는 그의 설교나 글들의 지상 발표가 중단된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그의 설교와 글들이 실린 이런 시기를 보면 주 목사는 이미 마산 문창교회 시절부터 설교자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평양 산정현교회 시절에는 한국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설교자의 한 사람으로 두각을 나타냈음을 알게 된다. 교회사가 이덕주는 주기철 목사가 서울 남대문 교회 부흥회 때 행한 설교, " 은총과 감사"가 「종교시보」에 실린 것과 또한 주 목사가 1936년 금강산 기독교수양관에서 개최된 장로교 목사수련회에 주 강사로 초청되어 "목사직의 영광"이라는 제하의 설교를 한 것, 그리고 주 목사가 1937, 9월 대구 남성정제일교회(현 대구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 26회 총회에서 새벽기도회 설교를 도맡아 한 것을 예를 들면서 주 목사의 설교가 이미 그 당시에 한국교회에서 상당한 반응을 얻고 있었음을 방증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여 순교했던 순교자였을 뿐만 아니라, “나는 결코 다시는 설교하지 못할 듯이 설교했으며, 죽어가는 사람으로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설교한다”라고 고백했던 청교도 설교가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을 걸었던 설교자였던 것이다. 4. 주기철 목사의 설교에 나타난 신앙 1) 코람데오의 신앙 그는 불꽃 같은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을 가지고 살았던 신앙인이었다.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은 그의 설교와 목회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으며,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면전에서 행동하고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 신앙은 종교개혁가 존 칼빈이 강조한바 “코람 데오”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주 목사의 신전 사상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설교가 바로 1937년 산정현교회에서 행한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라” (창 17장)라는 설교이다. 7) 그는 이 설교에서 (1) 하나님 앞에서 경건함으로 완전하라 (2) 하나님 앞에서 정직함으로 완전하라 (3) 하나님 앞에서 태연함으로 완전하라고 외쳤다. 즉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에 경건해야 하는 것이고, 정직해야 하는 것이고, 태연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건의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하자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경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항상 하나님 앞에 있기에 우리의 마음도, 입도, 발도 다 하나님 앞에서 경건해야 한다고 발을 구르며 외쳤다. “마음도 경건하고, 입도 경건하고, 또한 말도 경건하여야 하나니, 이는 경건의 실천이다. 마음이 경건하면서 몸으로 실천하지 아니하면 이는 이교도적 공상에 불과한 것이니 모양으로만 경건한 체하고 마음이 불결하면 이는 바리새적인 외식보다 나을 것이 없다. 십자가를 자랑해야 할 강단에서 공공연히 자기를 자랑하며, 성도가 모인 좌석에서 불결한 논담을 토하는 것은 불경천만이요 무례 막심한 일이다…. 그런데 오늘 교회에 경건한 태도가 결여한 것은 두려운 일이다. 경건한 생활, 경건한 예배를 드림으로 완전한 신자가 돼라” 그는 이른바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이 범하기 쉬운 이원론적 사상을 거부했다. 믿음 따로, 삶 따로, 경건과 교리가 분리되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라는 신전 의식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 압헤 사는 생활”이라는 설교에서도 경건을 “하나님 앞에서”, 즉 신전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경건을 일상생활에서 부정직한 것을 버리는 것 등의 삶으로 설명한다. 그의 신전 의식은 또 다른 설교인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눅 12:5)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설교는 1937년 장대현 교회에서 열린 평양노회 사경회 때 행한 설교이다. 그 개요를 보면 1) 하나님은 사랑이신 동시에 또한 엄위하심 2) 의를 근원한 사랑 3)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의 받을 벌 4)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의 복. 그의 이 메시지는 율법적이거나 위협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는 이 설교에서 하나님은 사랑인 동시에 엄위하신, 즉 두려워할 하나님이심을 강조했다. 그런데 그의 설교에는 인간들은 우리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죄인들이지만 그리스도의 공로로 담대히 설 수 있는 은총의 복음이 동시에 선포되고 있다. 그의 설교를 좀 더 들어보자. “내 경험으로 보면 중생한 자는 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요. 그에게 복음의 은혜가 풍성하나, 거짓 선생은 두려워하지 아니하여(유다서 1:12) 그 소위가 흉악하다. 오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찬양대, 집사, 장로, 교인들과 너희 받을 형벌을 생각하여 보라. 사람이 보지 못하게 숨어서 행하는 일을 하나님은 보고 계신다. 사랑의 하나님을 알기 전에 먼저 의의 하나님을 알라. 구약의 신앙이 있은 후에 신약의 신앙이 있고,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은 연후에 복음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회개의 죽음이 있은 연후에 구원의 중생이 오는 것이다” 주 목사는 신전 의식을 갖고 산다는 것은 반드시 공포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더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그의 설교 전편에서 이러한 코람데오의 사상, 즉 신전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설교학자 김운용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의 삶, 즉 신전 의식은 그의 설교와 사역 전체를 관통하는 사상이었고, 모진 형극의 길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끝까지 달려가게 했던 힘으로 작용했다.”고 평가한다. 2) 예언자적인 신앙과 죽음의 준비 주기철 목사는 설교에서 불의한 권력에 대한 예언자적인 역할을 강조하고 신앙의 순결을 위한 “사(死)의 준비”를 강조하였다. 한국교회에 강요된 신사참배의 요구를 예언하면서 시작된 신앙의 순결에 대한 그의 예언자적인 선포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심화되어 가면서, 그 저항과 대결 또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예언자적인 신앙에 대한 주 목사의 설교는 1934년의 “죽음의 준비” 라는 설교에서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인생은 나는 날부터 죽음의 경주자”라는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면서, “누구나 한번 죽어 심판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죽음을 매일 준비하고 항상 준비해야 한다.” 고 역설했다. 그의 이 설교에는 예언자적인 선포와 함께 신앙을 위한 죽음의 준비에 대한 결단을 보여주고 있다. “...최후의 준비를 위하여는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엄숙한 만찬으로 준비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의 기도로 준비하셨다…. 예수의 자취를 따라가는 우리도 신자답게 죽어야 된다. 스데반의 최후는 얼마나 아름다우며, 바울의 죽음은 그 얼마나 장열한가?” 그는 이렇게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는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강력하게 외쳤다. 그런데 주 목사의 이런 죽음의 준비에 대한 것 역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한 간섭이요, 역사였다. 사실 주 목사는 개인적으로 1920년대 말부터 30년대 초에 가족들의 연속되는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다. 1927년에 삼남이었던 영묵이 병사하고, 1931년에는 사랑하는 유일한 딸 영덕이 병사한다. 그리고 1933년에 사모 안갑수 여사가 급서하고 말았다. 그리고 1934년 여름에는 부친인 주현성 장로가 별세한다. 이렇게 피붙이들의 계속되는 죽음 앞에서 그는 죽음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마침내 그는 그 유명한 “죽음의 준비”라는 설교를 하게 된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들의 연이은 죽음 앞에서, 죽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에 대해서 열변을 토한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소년 시대에는 방탕하여 늙을 때를 준비하지 못하니 매우 둔한 자이다. 한번 들어 가고 다시 나오지 못하는 죽음에 대하여 준비하지 않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대게 인생 일사는 정리라, 사람이 산다는 것은 죽음을 향하여 달려 나아가는 것이며, 하루를 살았다면, 사망의 문에 하루 길을 가까이 간 것이며, 지구의 운전은 인생을 싣고 1분도 정지함 없이 사망을 향하여 달리는 것이며, 시계의 똑딱이는 소리를 우리 인생의 생명이 끊어지는 소리이다…. 사람이 죽는 일을 홀연히 당하며, 주의 재림도 갑자기 되는 것이다. 아침에 건강하게 나가서 저녁에 죽음으로 이르는 일이 없는가? 죽음에 있어서는 빈부의 차별이 어디 있으며, 형편의 다름이 무슨 상관이며, 노소의 구별이 있는가 없는가…? 인생아 아는가 모르는가? 너의 사망할 일자를? 만일 모르거든, 사망이란 급박하고 용서 없음을 알아두라. 우리는 죄를 위하여 반 시간만 연기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애걸할 날이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여 10분만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내 죄를 청산하고 가기는 가겠나이다’라고 애걸복걸한들 용서하실까? 하나님의 예정한 시기는 절대로 용서가 없는 것이다. 사망 시에 모든 죄를 다 청산하고 가겠다고 하지 말라. 사망 시에는 있는 믿음도 도리어 잃기가 쉬울지언정, 없던 믿음을 그 때에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준비할 것이다…. 비애의 사람이 되지 않도록 준비할 것이다….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 사망 시 슬프지 않다…. 신자여! 준비하자. 죽음의 준비를” 이렇게 죽음의 준비에 대해서 외친 주 목사의 또 하나의 대표적인 예언자적인 설교는 바로 1936년 금강산 수양관에서 행한 "예언자의 권위"(마 3:1-13)라는 설교다. 1936년 5월 주 목사가 경남노회장 시절이었다. 지금 이북에 있는 금강산 온정리에 장로교 목회자들을 위한 수양관이 있었다. 이 수양관에서 하기 수련회가 개최되었는데, 전국 250여 명의 목회자가 참석한 가운데 강사로 초빙되었던 주 목사는 “예언자의 권위”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다. 이 설교의 요지는 이렇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자기의 조국 유다가 망하는 것을 보면서 눈물 흘리며 회개하라고 목청이 터져라 외쳐댔건만, 오늘의 목사님들은 왜 현세의 권력에 아부만 하고, 일본의 태평성대를 찬양하며, 눈물은커녕 오히려 이 사악한 시대와 어두운 현실에 아첨만 하고 있는가? 세례 요한은 왕에게도 말해야 하는 것을 삼가지 않았다. 동생의 아내를 취해서 부정한 결혼을 한 헤롯왕에게 ‘….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죄인이다. 결혼을 인정할 수 없다. 회개하라’고 나무랐다. 이렇게 부르짖은 세례 요한은 벌써 일사각오를 하고 있었다. 죽이고 살리는 권한을 한 손에 들고 있는 임금 앞에서 그 죄를 책망하는 세례 요한은 물론 일사각오였고, 나단이나 낙스도 일사각오였던 것이요, 루터도 일사각오를 했다, 일사각오를 한 사람이 예언을 하는 것이고, 일사각오를 해서 비로소 예언자의 권위가 서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님 여러분들은 강단 앞에서 하고자 하는 말을 못 하는가. 몰라서 말을 못 하는가. 알고도 모른 체하는 것인가. 왜 벙어리되어 떨고만 있는가? 목사도 일사각오를 한 연후에야 목사의 권위, 예언자의 권위가 서는 것이다. 그런데 일개 순사 앞에서 절절매고서야….” 감시하고 있던 일본 경찰에 의해서 주 목사의 설교는 여기서 중단됐다. 주 목사는 강단에서 강제로 끌어내려지고, 그날 모였던 250여 명의 목회자들은 다 강제로 해산당하고 말았다. 이 설교는 비록 해방 후에 김린서에 의해서 복원된 설교이긴 하지만, 그래서 그해(1936) 수양회 현장에서 주 목사의 설교를 들은 기자에 의해서 「기독신보」에 실린 “목사직의 영광” 이라는 설교와는 그 내용과 대지가 상당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핵심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불의한 권력에 대한 항거와 목회자의 예언자적인 역할을 강조하고, 이를 위하여 죽음을 불사하는 신앙을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주기철 목사의 예언자적인 신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설교라 하겠다. 그는 죽기를 각오하고 순교적 열성을 가지고 외쳤던 것이다. 오늘 우리 목회자들에게 이런 순교적 열성이 있는가? 3) 일사각오의 순교신앙 그러므로 이러한 주기철 목사의 신앙은 한 마디로 일사각오의 순교신앙이었다. 그의 이런 순교신앙은 그의 설교 전편에 흐르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설교가 평양신학교 사경회 때(1935년) 행한 “일사각오”(요 11:16)라는 설교이다. 그는 이 설교에서 3가지 일사각오, 즉 예수를 따라서 일사각오, 남을 위하여 일사각오, 그리고 부활 진리를 위하여 일사각오를 외쳤다. “부활의 복음이 우리에게 전파되어 이르기까지 많은 피가 뿌려졌다. 로마제국의 박해하에서 50만 성도의 피가 흐르고, 참 복음을 위하여 로마교황 악형 하에 백만 신자의 피가 뿌려졌다. 바티칸 궁중에 봉쇄된 성경을 개방하여 만민의 성경이 되기 위하여는 위클리프의 백골이 불에 타지고, 틴데일의 몸이 재가 되지 않았는가? 신학생 여러분, 제군이 읽는 성경은 피의 기록, 피의 전달이다. 피로서 전하여 온 부활의 복음을 우리 또한 피로 지키고, 피로 전하는 것이다. 일사각오를 한 도마는 부활의 복음을 위하여 인도 도상에서 피를 뿌렸다. 오오! 오늘날 우리에게도 부활을 복음을 위하여 일사각오를!” 그의 이러한 일사각오의 순교신앙은 그의 유언과도 같은 설교인 “5가지 종목의 나의 기도”(마 5:18, 롬 8:18, 31-39)23)에서 절정에 달하였는데, 이 설교에서 그는 5가지의 각오를 고백하였다. 주 목사는 마지막 5번째로 구속되면서, 이 설교를 유언과도 같이 남겼는데, 그는 이 설교를 눈물로 호소하듯이 하였고, 그날 2,000여 명의 평양 산정현교회의 성도들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1)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옵소서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닥쳐오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나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만물이 다 죽음 앞에 탄식하며, 무릇 숨 쉬는 인생은 다 죽음 앞에서 떨고 슬퍼합니다. 사망 권세는 마귀가 사람을 위협하는 최대의 무기인가 합니다. 죽기가 무서워서 의를 버리고, 죽음을 모면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일약 수사도 베드로도 죽음이 두려워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맹세하였으니 누가 감히 죽음이 무섭지 않다고 장담하겠습니까? 아담 이와 범죄 후에 사람은 다 죽습니다. 제왕 장상 제자 가인도 다 죽었고, 성현 군자 위인 걸사도 다 북망산에 갔습니다. 죄없이 억울하게 죽는 약자도 불쌍하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죽는 사람, 가엾은 아이를 두고 가는 어머니의 비참한 죽음도 허다합니다. 폐결핵 환자로 요양원에 눕지 아니하고, 예수의 종으로 감옥에 갇히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자동차에 치여 죽는 죽음도 있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사형장에 나가는 것은 그리스도인 최대의 영광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열 백번 죽어도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백 년 천 년 산다 한들 그 무슨 삶이겠습니까? 오 주여! 이 목숨 아껴 주님께 욕되지 않게 하옵소서. 이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도 주님 계명을 지키게 하옵소서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쏟으셨습니다. 주님 나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 주님을 모르는 체하오리 까? 다만 일사각오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 속에서 삼 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여! 나도 부활을 믿고 사망 권세를 내 발아래에 밟게 하옵소서. 사망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나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나도 부활하리로다. 아멘! 할렐루야!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시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 가, 지옥에 떨어지면 그 아니 두렵습니까? 한번 죽어 영원한 천국 복락 그 아니 즐겁습니까? 이 주 목사가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는 내 주님 밖에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살 수 없습니다. 더럽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주님을 따라 나의 주님을 따라서의 죽음은 나의 기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푸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 요한은 33세, 스데반은 청장년의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제물이 되어지이다” (2)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옵소서 고난의 명상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에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은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이제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께서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3)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4)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옵소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가 있습니다. 나라의 신민이 되어서는 충절의 의가 있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가 있습니다….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이 몸이 어려서부터 예수 안에서 자랐고, 예수께 헌신하기로 열 번 백번 맹세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밥 얻어먹고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된 오늘 이 몸이 어찌 구구도생이 말이 됩니까…?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영광의 네게서 떠나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다. 누가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5) 죽고 죽어 열 백번 죽어도 주님 향한 대의 정절 변치 아니하오리이다. 십자가, 십자가, 주님 지신 십자가 앞에 이 몸 드립니다. 우 리 초로인생 살면 며칠입니까? 인생은 짧고 의는 영원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삽시다. 의를 버리고 더구나 예수께 향한 의를 버리고 산다는 것은 개 짐승의 삶만 같지 못합니다. 여러분, 예수는 살아계십니다.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삽시다.” (5) 내 영혼을 주님께 의탁합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 내 목숨 끓어질 때 내 영혼 받으시옵소서. 아버지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는 나의 고향이로소이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 황금길에 걷게 하시고, 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나를 깨끗게 하사, 영광의 존전에 서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오늘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설교자들에게 이런 일사각오의 신앙이 있는가? 4)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 그의 설교에는 또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철저한 신앙이 드러나 있다. 그는 결국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었고, 오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대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담대하게 외쳤다. 그의 하나님의 주권 사상에 대한 철저한 신앙은 팔순의 노모와 처와 자식들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는 그의 간절한 기도와 그의 유언과도 같은 “5종목의 나의 기도”라는 설교 속에서 너무나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나는 80이 넘은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가 있고,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아들로서의 의무도 지중 하고, 가장으로서 아비된 책임도 무겁습니다…. 당신 어머님을 요한에게 부탁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도 부탁합니다. 불효한 이 자식의 봉양보다 무소불능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을 부탁하고, 나는 주님 자취를 따라가렵니다…. 나의 병든 아내도 주님의 손에 부탁하는 것이 이 못난 사람의 도움보다 좋을 줄 압니다. 나의 어린 자식들을 자비하신 주님의 품에 두는 것이 변변치 못한 아비의 손으로 기르는 것보다 복 될 줄로 믿습니다. 나의 양떼도 선한 목자 주님께 부탁합니다…. 나의 늙으신 어머님과 나의 병든 아내를 주님께 부탁하고 나의 어린 자식들과 나의 사랑하는 양 떼들을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합니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으로 이 산정현 강단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라, 주님을 따라 주님의 피 자취를 따라가려 합니다….” 그는 이 설교에서 참으로 비통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설교하였지만,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주님의 제단 앞에 바칠 것을 비장한 모습으로 설교하였고, 사랑하는 노모와 처자식들과 교인들을 오직 하나님의 손(주권과 다스림)에 맡겼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의 이 눈물의 설교(기도)를 들으시고 당신의 주권 하에 그의 후손들을 인도하시고 지켜주셨다. “고아였던 내가, 아무런 세상적인 힘도 권력도, 백도 없던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은 정말이지 기적이고, 하나님의 은혜였다.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의 피맺힌 기도를 들으셨기 때문이다”(주기철 목사의 막내아들 고 주광조 장로의 고백) 주기철 목사는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순교의 길을 가면서, “노모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과 양 떼들을 주님께 맡기는 기도”를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대로 응답하심으로 그의 후손들을 책임지시고 역사하셨다. 주기철 목사는 바로 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설교하였고, 선포하였던 것이다. 5. 나가는 말: 순교의 영성으로 설교하라 하나님의 은혜와 순교자들의 피를 먹고 자란 한국교회가 은혜를 상실하고 있다. 첫사랑의 순수성과 첫 믿음의 열정을 잃어버려 가고 있다. 그리고 물량주의와 배금주의, 교파주의, 그리고 교권주의에 휘둘리고 있다. 그래서 이 사회에서 소금과 빛을 역할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다. 교인들은 더 이상의 희생과 헌신을 꺼리며,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되어 최소한의 신앙생활로 만족하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도 교인들을 향해 값싼 은혜를 남발하면서 그들의 비위 맞추기에 급급하고 있다. 강단에서 외쳐지는 설교도 교인들의 귀를 즐겁게만 하는 그저 긍정적인 말, 기분 좋은 말만 전달되고 있다. 그래서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에서 십자가의 복음은 사라지고, 듣기에 편안하고 부담도 없는 철학적 에세이 같은 설교 아닌 설교가 환영을 받고 있다. 어쩌다가 설교자가 부정적인 이야기, 죄에 대해서 지적하고 회개를 외치면 교인들이 인상을 찌푸리고 부담스러워한다. 결국 십자가의 복음이 외쳐져야 할 강단에서 값싼 은혜만이 전달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 한국교회의 나아갈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시한번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의 조상들을 통해서 전해주신 순교신앙을 회복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한국교회 강단에서 십자가의 복음이 다시 힘차게 외쳐져야 한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순교의 영성으로 설교해야 한다. 그래야 100여 년 전 이 민족의 가장 고난의 순간에 임했던 거룩한 부흥의 역사가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다. 여기 주기철 목사가 감옥 안에서도 십자가의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에 늘 감격하면서 고백한 고난의 명상을 다시 한번 들어보자. 그리고 주님을 향한 우리의 일사각오를 다져보자.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에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囚獄)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 주기철 목사 순교 80주년 기념 제3회 소양학술회에서 강의 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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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하 원장] ‘조력존엄사 법률안’ 폐기를 앞두고 안락사와 조력존엄사를 돌아보기
I. 21대 국회와 ‘조력 존엄사’ 법률안 21대 국회 회기 중인 2022년 6월에 안규백 의원이 일명 '조력 존엄사 법안' 을 대표 발의했다. 국회의원 12명이 함께 서명한 이 법은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한 차 례 토론이 되었지만 그 이후 진전이 없이 법사위원회에 계류되어 있다. 이 법안은 21 대 국회가 폐회하는 5월 말에 자동으로 폐기될 것으로 예상된다. 20세기 후반기에 지구촌에서는 서구 선진국을 중심으로 불치의 병으로 시달리는 자들이 원할 경우 존엄사 혹은 안락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여론과 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2000년에 마침내 네덜란드가 이것을 허용하는 소위 안락사 법을 제정했고 2002년 4월부터 시행하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북미의 캐나다와 미국의 여러 주들이 시차를 두고 법 제정과 시행에 동참했다. 이 법은 지난 20여 년 간 지구촌에서 시행되어 오고 있지만 지금도 안락사는 여전히 국제적 뉴스로 등장하곤 한다. 한 달 전인 2월 11일에도 네덜란드의 전직 총리 판 아흐트(Dries von Agt)가 동갑내기 부인과 함께 동반 존엄사를 택해 9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 세계에 타전되었다. 한국에서도 제법 큰 뉴스거리가 되었는데, 최근 우리 사회에서 는 존엄사에 관련된 이런 저런 사건, 존엄사 관련 시사 프로그램 방영, 존엄사 문제를 짚어보는 영화가 개봉되면서 다시금 사회적 조명을 받은 바 있다. 현재 고령사회이고 내년이면 초고령사회가 되는 대한민국은 앞으로 안락사에 관련된 논의와 법제화 요구는 더욱 증가할 것임은 능히 예측되는 상황이다. 통계청은 2023년 12월 2022년 한국인의 기대 수명은 남자가 79.9세, 여자가 85.6세라고 발표했다. 불의의 사고나 불치의 병에 걸리지 않는다면 한국인은 평균 83세 정도는 사는 셈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80에 가까우면 대개 쇠약하고 병들고 고생하기 일쑤고 그러다가 죽음을 맞게 되는 점에서는 이젠 세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2030년 통계를 보면, 한국인들은 4명 가운데 3명이 병원에서 죽는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본인이 원한다면 안락사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갈수록 강해질 것이 능히 예측된다. 그리 고 이런 여론을 힘입어 22대 국회에서도 적극적인 안락사나 조력존엄사를 허용해야 한다는 법안이 발의될 것으로 예측된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교회는 안락사에 대한 바른 신학적 이해를 확립하여 성도들에게도 가르치고 또 사회적 대응을 적절하게 할 필요가 있다. II. 안락사/존엄사 그리고 조력존엄사 A. 안락사/존엄사 안락사(安樂死, euthanasia)는 좋은(eu) + 죽음(thanatos), 즉 편안한 죽음을 의미한다.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고 또 사회가 허용한다는 것은 회복 가능성이 없는 상태의 환자가 편안히 죽을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것이다. 안락사를 법으로 보장한다는 것은 회복이 불가역적 상태에서 심한 통증에 시달리는 환자가 극심한 고통을 연장 하지 않고 편안히 일찍 죽음을 맞게 해 줄 주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안락사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환자 본인 의지 여부에 따라 자원적 안락사와 비자발적 안락사로 둘째는 의사의 의료 행위 내용과 정도에 따라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로 나눈다. 현재 안락사를 허용하는 나라에서도 대부분 소극적 안락사를 허용하고 소수의 국가만 적극적인 안락사를 허용한다. 서구의 국가들이 먼저 이 법을 시행했고 아시아에서는 호주가 처음으로 이 법을 만들어 시행해 오고 있다. 그리고 작년 2023년 1월에 호주는 ‘자원적 안락사’도 허용하는 법을 발효시켰다. 그 동안 남호주 주가 이 법을 거부하다가 뒤 늦게 허용 했는데, 남호주 주가 자원적 안락사 법을 발효시킨지 2개월 만에 30여 명의 주민이 이것을 신청했고 이것이 일제히 지구촌에 큰 화제로 보도되기도 했다. B. 조력존엄사/조력자살 우리 언론에서는 “자원적 안락사”라고 보도했지만 호주에서 사용한 정확한 명칭은 ‘voluntary assisted dying’이다. 직역하면 ‘자원적 조력 사망’이다. 도움을 받아 사망하는 것으로 유럽에서 시행되어 오고 있는 이 제도는 일반적으로 “의사 조력 자살”(phlysician-assisted suicide) 제도이다. 호주는 이것을 ‘자원적 조력 사망’이라는 표현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만 내용은 서구의 ‘의사조력 자살법’과 동일하다. 그런데 2022년 한국에서도 국회의원 안규백 의원은 이와 유사한 내용을 지닌 법안을 발의했다. 발의된 법률안의 명칭은 ‘호스피스·완화 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 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 법률안’인데, 안 의원은 이것을 줄여서 ‘조력 존엄사’라는 명칭을 사용한 바 있다. 그것은 그 내용이 서구의 ‘의사 조력 자살’이나 호주의 ‘자원적 조력 사망’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C. 존엄사와 조력존엄사의 차이 그럼 안락사/존엄사와 의사조력자살 혹은 자원적 조력 사망 혹은 조력 존엄사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간략하게 설명한다면, 전자는 의사나 의료인이 환자의 생명을 끊는 행위를 직접적으로 하거나 간접적인 방법으로 하는 것이고, 후자는 의사가 아닌 환자 자신이 여 자신의 생명을 끊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의사나 의료인은 약물을 몸에 주입시키는 수단과 장치를 제공하지만 밸브를 내림으로 약물이 본인의 몸에 주입되게 하는 행동은 환자 본인이 하고 이어 곧 사망하는 것이다. III. 한국의 연명의료 결정법(2016) 그리고 일부 개정안(2022년 6월) 우리나라에서는 2016년에 안락사 법과 유사한 소위 ‘연명의료 결정법’이 제정 되어 2018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그리고 2022년에는 이 법이 허용하는 것을 조금 더 넘어 의사의 도움을 받지만 본인이 스스로의 목숨을 끊게 하는 행위를 허용하는 조력 존업사법이 연명의료결정법의 개정안의 형식으로 발의되었다. A. 세브란스 김 할머니 사건과 연령의료결정법 연명의료 결정법이 만들어지게 된 계기는 2009년에 의료 사고로 식물인간 상태 된 할머니의 가족들이 세브란스 병원에게 할머니에게서 산소 호흡기를 제거해 달라고 요청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신촌 세브란스 병원이 가족의 요청을 거부하자 가족들은 세브란스 병원을 대상으로 서울서부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 사건은 대법원까지 갔고 마침내 법원은 병원이 환자로부터 산소 호흡기를 제거하라고 판결했다. 소위 “세브란스 김 할머니 사건”으로 불려지는 이 사건 이후, 우리 사회에서 는 정부가 주도하여 사회의 각계의 전문가들과 시민들이 4-5년 동안 지속적으로 소 위 안락사를 법적으로 허용하는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마침내 합의를 도출하여 안을 만들었고 그것이 2016년에 마침내 ‘호스피스·완화 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이 긴 이름의 법은 흔히 줄인 말 인 ‘연명의료결정법’이라 불리우는데 2018년부터 효력이 발생하여 현재까지 시행되어 오고 있다. 이 연명의료결정법 내용의 핵심은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가 자기 뜻을 밝힌 경우, 혹은 대리인이 환자의 의사를 추정하여 밝힌 경우, 그에 따라 연명의료행위 즉 심폐소생술, 항암제 투약 등 생명을 연장시키려는 적극적 의료행위를 중단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B. '조력존엄사법' 그런데 언급한 바 있듯이 현재 이 법의 일부를 개정하려는 법안인 ‘호스피스·완화 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 법률안’이 2022년 6월에 안규백 의원에 의해 일명 ‘조력존엄사법’으로 발의되어 있는데, 이 법 이 이전 법과 다른 점은 첫째 대상이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에서부터 ‘말기환자’에 게로 확대되어 소위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게 하고, 둘째 의사의 도움으로 환자가 스스로 자기 생명을 끊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법안은 “말기 환자(末期患者)”를 이렇게 정의했다: “적극적인 치료에도 불구하고 근원적인 회복의 가능성이 없고 점차 증상이 악화되어 수개월 이내에 사망할 것으로 예상되는 진단을 받은 환자.” 그런데 이 법안의 특징과 핵심은 바로 조력존엄사를 허용하는 것이다. 의사가 약물이 들어 있는 주사기를 환자의 몸에 꽂아 두면 환자 본인이 밸브를 돌리거나 버튼을 눌러 약물이 자신의 몸에 주입되게 하여 자신이 죽는 것이다. 언급한대로 서구의 네덜란드와 스위스 등의 일부 국가들은 이를 허용 하고 있고, 그 가운데서 스위스는 외국인들에게도 이것을 허용한다. 안규백 의원은 이 법안을 발의한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사회적 여론이다. 그는 한국 성인의 약 80%가 안락사 혹은 의사 조력 자살을 찬성한다는 통계를 근거로 하여 국민의 정서를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국민의 기본권인 자기 결정권을 생명과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까지도 확대하여 증진시켜야 한다고 것이다. 그는 참기 힘든 고통가운데 있는 말기환자가 고통을 피하고 일찍 죽기를 원하는 의사를 지속적으로 밝히면 사회는 그 뜻을 존중하고 자기절정권을 존중해 주어야 한 다는 것이다. IV. 신학적 검토 자신의 생명과 삶의 종결에 관한 자기 결정권을 증진시키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에 법률안에 대해 신학적으로 몇 가지 생각해 보자 첫째. 성경은 하나님 이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즉 사람의 생명의 주인은 본인이 아니라 조물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뜻에 따라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피조물이고 생명의 위임자이지 주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구약의 욥기 서에 나오는 욥은 졸지에 자녀들이 죽고 엄청난 재난을 당했을 때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욥1:21)라고 고백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과 자녀의 생명을 포함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한 것이다. 또 욥은 12장 10절에서는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욥12:10)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리고 14장 4절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사람의 수명조차도 하나님이 정하셨다고 고백했다. “(주께서) 그 (사람)의 날을 정하셨고 그의 달 수도 주께 있으므로.”(욥14:5).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하신 날 수가 차면 즉 그의 수명이 다하면 그의 생명을 거두어 가신다고 욥은 말한 것 이다. 전도서 3장 1-2절에서도 솔로몬 왕은 이와 유사한 진술을 합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전3:1-2). 솔로몬 왕이 이 말은 표현만 약간 다를 뿐 내용은 욥의 고백과 동일하다. 이처럼 성경의 가르침은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이 모두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 정하신 바에 따르는 것이지 사람 개인이 자의적으로 결정하거나 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분명이 말한다. 이런 성경적 인식을 갖는다면 사람이 자기 생명의 주인이기에 마땅히 생명 과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가져야 하고 그에 따라 원하지 않는 고통스런 생명을 연 장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죽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과 조력존업사 법안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한국성인의 80% 이상이 이 법안을 지지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 시각에 벗어나는 이 법안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둘째, 고통 가운데 있는 말기과정에 있는 환자가 원한다면 그 뜻을 존중하여 빨리 죽게 해 주어야 한다는 이 조력존엄사 법이 통과되면 앞으로 생명을 존중하는 의식이 약화되는 결과를 넣게 된다. 물론 이 법안은 비록 “육체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말기 환자들에 한해서”라는 적용한다는, 단서를 달아 놓았지만, 일단 이것을 인정하게 되면 시간이 지나가면서 육체적 고통에서 정신적 고통으로 범위가 확대되어 가게 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네덜란드에서는 2002년 이 법이 시행되고 난 뒤 2017년도 한 해 동안 안락사와 의사 조력 자살로 6,585명이 사망 했는데, 그 중에서 정신적 고통을 이유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83명이나 포함되었다. 본래 안락사 제도는 존엄한 죽음을 위해 만든 것인데, 이렇게 되면 이 제도는 좀 더 쉽 게 죽게 만드는 법이 되어 도리어 인명경시의 풍조를 낳게 되는 악효과를 낳게 될 것 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어떻게 대응하고 행동해야 할 것인가, V.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대응 A. 고통의 최소화와 아닌 돌봄의 최대화 병상에 누워 고통스러워하는 말기 상태에 있는 부모나 가족의 보면, 자녀들과 가족들은 저렇게 고통 받으며 연명하는 것보다 고통 없이 일찍 죽는 것이 낫겠다.'라 고 생각하게 될 수 있다. 그런데 성도들은 가족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고, 해 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아울러 할 수 있는 영역의 일이 있고 또 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고통에 신음하는 부모님을 보고 고통을 덜어주고 싶어하는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환자를 일찍 죽게 함으로 그 고통을 종식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일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고 우리 소관 영역에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일은 오로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주인이신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우리 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은 환자의 고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최대한으로 돌보는 일이다. 다르게 말하면 ‘고통의 최소화가 아니라 돌봄의 최대화’라는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환자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은 인생이 피할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임을 아프지만 인정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인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또는 부모님이 병상에서 고통을 겪을 때에 그가 하나님의 더 의지하고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셔서 부모님이 그 기간을 주와 함께 보내게 되기를 더 간절히 기도하고 돌보는 일에 더 힘써야 한다. 이 고통의 문제는 비록 나의 지식으로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속한 것으로 인식하고, 사랑하는 이가 병상에서 힘들더라도 주의 손을 붙잡고 고통 없는 영원한 곳을 소망하면서 그 기간을 끝까지 소망으로 인내하며 나가도록 보살피고 기도해야 한다. B. 호스피스를 통한 고통완화와 편안한 임종 맞기 그러면 이런 돌봄과 기도 외에 실제적으로 환자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물론 있다. 그것은 환자를 완화 의료를 전문적으로 제공하는 호스피스 병원에 이전하여 그곳에서 전인적인 돌봄을 받으면서 남은 기간을 보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호스피스 병원은 통증완화를 위한 최적화된 의료 시설과 전문 지식을 의술을 갖춘 훈련된 의사와 간호사들이 말기 환자들에게 전문적인 의료와 아울러 전인적인 돌봄을 제공하는 병원이다. 성도들은 우리 사회가 조력존엄사를 제공하는 방법이 아니라, 호스피스 병원을 더 많이 설립하는 것을 통해 고통을 줄여주고 말기를 보낼 수 있도록 힘을 쏟을 필요가 있다. 실제로 우리 나라도 지난 정부 때인 2019년에 호스피스 서비스를 확대하는 내용의 1차 호스피스·연명 의료 종합계획(2019~2023년)을 만들어 발표한 바 있다. 2019년에는 호스피스를 원하는 환자 10명 가운데 2명 정도만이 호스피스에 입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일반적으로 적잖은 병원과 의료기관들은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호스피스 시설을 짓고 병원을 운영하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에 호스피스 병원이 매우 부족한 형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은 호스피스 병원에 들어가기 위해 대기하다가 사망하는 환자가 많다. 노인복지 차원에서도 나라는 호스피스 병원을 더 많이 세워 운영하도록 여론을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호스피스 팀이 환자의 집을 방문하는 가 정형 호스피스 제도가 2020년부터 시행되고 있는데 이 제도도 점점 확대해 가도록 그리스도인 법조인들과 위정자들 그리고 시민들은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VI. 나가면서: 이제 곧 폐기될 소위 조력존엄사법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의사 조력 자살’ 법으로 이 법이 폐기되는 것은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22대 23대 국회에서 이런 법은 계속 발의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우리 사회가 반기독교적 가치와 반생명적 제도가 인권의 이름으로 만들어져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더욱 준비하고 필요하면 함께 힘을 모아 효과적으로 대응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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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6)
관계공동체 (1) 가정과 교회 직장은 관계공동체입니다. 공동체가 주는 유익이 많습니다. 관계가 잘 되면 공동체가 성장하고 관계가 깨지면 공동체가 무너지기도 합니다. 공동체는 인간관계입니다. 공동체가 하나 되는 데는 좋은 관계에 있습니다. 공동체에서 관계를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 천국은 행복한 관계공동체입니다. 공동체는 외로움을 이기게 합니다. 관계공동체는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관계공동체는 축복의 공동체입니다. 좋은 관계공동체가 되려면 서로 겸손히 섬겨야 합니다. 섬김의 공동체가 건강한 관계공동체입니다. 섬김의 리더십은 예수님의 리더십입니다. 관계공동체에 죄가 끼지 않아야 합니다. 죄가 끼면 갈등이 생기고 관계공동체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거짓과 위선이 끼면 관계공동체에서 신뢰 관계가 깨집니다. 관계공동체에서 의와 성결, 정직이 있어야 합니다. 성결과 정직은 신뢰 얻게 되어 관계공동체가 건강하게 됩니다. 관계공동체에서 언어가 중요합니다. 말 한마디 때문에 관계공동체가 세워지기도 하고 깨지기도 합니다. 서로서로 선한 말, 덕을 세우는 말을 해야 합니다. 정죄하고, 비난하고, 거짓말을 하면 관계공동체가 깨질 수도 있습니다. 관계공동체적인 삶에 적응해야 합니다. 관계공동체 (2) 여러 종류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구역과 기관, 소그룹과 교회가 공동체입니다. 공동체에서 관계가 잘되어야 합니다. 관계가 깨지면 공동체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관계가 잘 되는 공동체는 성장합니다. 공동체에서 서로 좋은 관계를 맺도록 노력하고, 기도하고,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공동체의 리더는 관계의 중요성을 알고, 관계가 깨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공동체 훈련은 관계 훈련입니다. 좋은 관계의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공동체에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융통성의 리더십이 있어야 합니다. 관계공동체에서는 자기주장이 너무 강하면 안 되고 지나친 고집을 버려야 합니다. 누구와도 함께 어울릴 수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에서 관계가 소중합니다. 독불장군이 없습니다. 서로 하나 되는데 자신을 낮추고 양보해야 합니다. 공동체에서 서로 부딪치면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관계공동체의 힘은 좋은 관계에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관계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의리를 지키고 서로 섬겨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서로의 관계가 좋으면 교회에 가고 싶어지고 교회가 성장합니다. 지혜는 공동체에 소속되어 적응하고 관계를 잘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관계 속에 살고 목회는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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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4)
감정관리 관리가 중요합니다. 감정관리, 생각관리, 분노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감정관리 못 하면 다투게 되고 다투면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생각도 관리해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의 생각을 붙잡고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합니다. 생각을 관리해야 관계가 잘 됩니다. 분노관리 잘해야 합니다. 누구나 분노가 있습니다. 마음에 분이 가득할 때 기도해야 합니다. 분노와 혈기 때문에 인간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지켜야 분노를 관리하게 됩니다.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감정을 만져 주어야 합니다. 감정은 기분입니다. 기분에 죽고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의 상한 감정을 치유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감정이 상한 자들이 많습니다. 남의 상한 감정을 이해해야 합니다. 상한 마음과 감정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상한 감정이 있을 때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와 기도해야 합니다. 말조심해야 합니다. 나쁜 말로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 조심해야 합니다. 감정을 다스리고 관리해야 인간관계가 잘됩니다. 목회는 감정을 다루는 지혜입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한 자는 상처가 많은 자입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고 사는 자임을 이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순간마다 감정을 다스려야 합니다. 순간의 감정을 다스려야 합니다. 건강한 관계 ‘건강한 관계’가 있고 ‘병든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가 건강해야 합니다. ‘건강한 관계’는 진실한 관계, 변함없는 관계입니다. 관계가 건강하면 사탄이 틈탈 수 없습니다. 관계가 건강하면 행복합니다. 건강한 관계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관계가 건강하면 교회가 성장합니다. 관계가 건강하면 관계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건강한 관계의 기초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관계 중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면 병든 관계가 됩니다. 관계가 건강하면 관계의 위기를 이겨냅니다. 성령 충만하면 관계가 건강해집니다. ‘샬롬’ 평안은 건강한 관계의 표지입니다. 관계가 건강한 자는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가 적게 됩니다. 관계가 건강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관계가 건강하면 시기 질투가 적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누구나 만나고 싶어합니다. 사람을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인간관계를 맺게 됩니다. 관계가 건강하면 교회가 성장하고 가정이 행복해집니다. 관계 훈련, 관계 연습을 하면서 관계가 건강해집니다. 건강한 관계는 고독을 이깁니다. 은혜받으면 관계 맺기를 기뻐합니다. 건강한 관계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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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5)
- 격려와 관계 인간은 누구나 격려가 필요합니다. 격려해 주고 격려 받으면서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격려는 관계의 열쇠입니다. 관계 목회는 ‘격려’ 목회입니다. 격려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인생을 격려해 주십니다. 말씀으로 격려해 주십니다.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격려의 말씀입니다. 격려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목회자는 격려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히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격려는 식어 냉한 가슴에 불을 붙여줍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낙심했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인간은 약하고 병들고 고난이 있고 낙심하는 자이기에 격려가 필요합니다. 힘들고 지친 인생들을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따뜻한 말로 격려하고 섬겨주면서 격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리더’는 격려자입니다. 교회는 격려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격려는 관계의 열쇠이고 서로 격려해 주는 교회가 성장합니다. ‘성령’은 ‘격려의 영’입니다. 편지로 이메일로 전화나 문자로 격려해야 합니다. 서로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격려의 씨를 심어야 합니다. 격려가 없고, 서로 비난하는 교회는 침체 됩니다. 격려를 연습해야 합니다. 목회하면서 격려의 중요성을 가르쳐야 합니다. 관계 목회는 격려 목회입니다. 겸손과 관계 그리스도인은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이 인격이고, 최고의 덕목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겸손은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관계의 열쇠입니다. 교만하면 관계가 깨집니다. 목회자는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용하십니다. 겸손한 자는 누구나 좋아합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고 묵상해야 합니다. 겸손한 자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배우려 합니다. 모세는 수많은 연단을 받은 후에 겸손하고 온유해졌습니다. 사도바울도 모든 일에 겸손했고 겸손함으로 목회하고 선교했습니다. 겸손은 온유의 성품이고, 온유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다윗과 세례 요한은 겸손했습니다. 겸손이 인간관계, 관계 목회의 열쇠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베드로 사도도 겸손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벧전5:5-6)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겸손의 중요성을 가르쳐야 합니다. 겸손히 목회해야 목회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겸손의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겸손해야 인내하고,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이깁니다. 겸손한 자는 모든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존경합니다. 겸손한 자는 비난이나 정죄하는 것, 비판하지 않습니다.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선택해야 합니다. 겸손히 섬기고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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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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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리더에 대하여(8)
-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한다 리더는 가정생활에서 본이 되어야 합니다.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일부다처제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리더는 가정이 건전해야 합니다. 가정생활이 편하지 않거나 가정이 견고하지 않으면 리더로써 인정받기 힘듭니다. 가정이 깨어지면 좋은 리더가 될 수 없 습니다. 가정이 순결하고 하나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가정이 어떤가, 가정 생활에 충실한 가를 살펴보고 평가하게 됩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리더십이 무너집니다. 리더는 가정을 귀히 여기고 가정생활에 충실해야 합니다. 한 아내의 남편, 한 남편의 아내여야 합니다. 가정의 실패는 인생의 실패입니다. 리더는 가정에서 인정받아야 하고 가정생활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가정사역을 귀히 여겨야 하고 자녀들을 신앙으로 잘 양육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성공해야 삶의 성공자가 됩니다. 가정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사단은 가정을 깨뜨리나 성령님은 가정을 하나 되게 하십니다. 리더의 가정은 온 가족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리더는 하나님이 주신 가정을 귀히 여기고 가정생활에 성실해야 합니다. 가정생활이 복잡하고 가정이 무너지면 좋은 리더가 되지 못하고 리더십이 무너집니다. 가정의 리더, 영적인 리더로써 성적인 순결을 지켜야 합니다. 성적인 순결이 무너지고 음란하여 음행하면 가정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리더로써 인정받지 못합니다. 가정을 지키는 자가 리더입니다. 자기 집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담대하라 인간은 담대하지 못하고 두려움이 많습니다. 성경은 두려워하지 말라, 담대해야 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은 부드러우시면서 어떤 때는 담대하셨습니다. 담대해야 적극적으로 관계를 맺고 리더십을 가질 수 있습니다. 담대하지 못하고 소심하고 두려움이 많으면 관계가 잘 안되고 깨지기도 하여 관계 리더가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강하고 담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에 두려움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향해 담대히 죄를 회개하라고 외치셨습니다. 오늘날 담대해야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을 향해서 독사의 새끼라고 담대히 꾸짖고 책망하셨습니다.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합니다. 죄가 있고 약점이 잡히면 담대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담대함입니다. 담대하지 못하면 십자가의 죽음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담대하게 가르치시고, 전도하시고, 설교하셨습니다. 리더는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담대히 사단마귀를 내어 쫓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사단마귀를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은 사단마귀 앞에서 담대히 꾸짖고 명령하셨습니다. 담대해야 사단마귀를 이깁니다. 사단마귀도 자기를 두려워 하는 소심한 자를 비웃고 우습게 여깁니다. 성령 충만하고 기도하는 자, 의롭게 말씀대로 사는 자가 담대할 수 있습니다. 담대해야 리더가 되고 관계가 잘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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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리더에 대하여(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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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16)
-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가르쳐 주십니다. 인간은 어리석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감사할 줄 모릅니다. 성령님의 역사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천국을 준비하시고, 재림하십니다. 우리의 편이 되시어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을 위하지 않으시고 나를 위하여 모든 것 행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죄성, 이기심은 나를 위하여 사는 이기주의적인 삶입니다.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아낌없이 주게 됩니다.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 구원과 영생을 선물로 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가장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시고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정죄하지 않으시고 죄인을 의롭다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심판하거나 정죄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를 사랑해서 다시 사신 예수님입니다.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동기가 사랑이십니다.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마무리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넉넉히 이기게 됩니다. 사랑으로 이깁니다. 사랑은 승리의 열쇠입니다. 어떤 것도, 어느 누구도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해서 부르시고 선택하신 하나님의 자녀를 하나님과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약하여 범죄 했을 때 사단 마귀가 하나님께 참소한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자녀의 사랑의 관계를 누구도 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 변하지 않으시는 신실한 사랑입니다.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안전하고 행복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의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이 제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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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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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6)
- 하나님을 아는 자는 사랑한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미움은 사단에게 속한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아는 자는 사랑하면서 사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사랑하지 못하며 미움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알고 거듭난 자, 은혜받은 자는 사랑의 중요성을 알고 사랑하면서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것이 미워하는 것보다 더 쉽고 즐겁습니다. 사랑은 선택이 아니고 필수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고 하나님 자녀의 삶은 사랑의 삶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거짓말하는 것이고 거짓 된 신앙인격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의 사랑은 지식적으로만 아는 사랑이 아니고, 마음과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행동하는 사랑, 실천하는 사랑, 행함과 진실함으로 실천합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한다고 하고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거짓 사랑이요 위선입니다. 잘 가르치고 설교를 잘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위선이요 가짜입니다. 참된 사랑은 행동으로 보여주고 실천에 옮기는 사랑입니다. 리더는 사랑의 불을 붙여주는 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는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미움은 살인입니다. 사랑하며 사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자요 하나님께 속한 자입니다.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미움은 사망이요 사랑은 생명입니다. 사랑은 자신도 살고 남고 살리는 생명 사역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는 자요 미워하 는 자는 어둠에 있는 자입니다. 말세는 사랑이 식어진다 예수님은 말세의 여러 가지 징조를 말씀하시면서 말세는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진다고 예언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예언은 이루어집니다. 미움으로 가득차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말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이 없습니다. 냉정하고 마음이 따뜻하지 못합니다. 말세는 자 기를 사랑합니다. 사랑이 없는 삶은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말세는 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이 식어지고, 세상을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합니다. 이기주의 자신만 사랑할 때 삶이 삭막해지고 관계가 깨어집니다. 사랑이 식어지고 사람들이 사납고 악합니다. 정죄하고, 고소하고, 죽이는 일까지 행합니다. 사랑이 식어진 가정과 교회는 행복하지 못 합니다. 사랑이 부흥과 화목, 행복의 열쇠가 됩니다. 말세의 징조, 사랑이 식어진 시대에 첫 사랑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성령 받아 사랑의 열매 맺고 사랑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이 없는 삶, 미움이 가득 찬 삶은 잘못된 영, 악령의 지배를 받는 삶입니다. 이단의 특징 중의 하나가 악하고, 사납고, 거짓되고, 미움이 가득하고, 사랑이 없습니다. 이단의 잘못된 점을 알고 빠져 나올려고 할 때 협박합니다. 만물의 마지막때, 말세에 정신 차리고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말세에 적극적으로 더욱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사랑만이 모든 문제의 해결 열쇠입니다. 사랑이 제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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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사랑의 리더십에 대하여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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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콘서트[정연철 목사] 복된 사람의 비결(6)
- 하나님의 사람이 모인 곳에 복이 있다. 은혜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우리는 말합니다. 왜냐하면 가시적으로 은혜가 있는 사람이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의 삶을 가만히 살펴보면 모든 생활이 한결같이 복됩니다. 하나님께도 잘하지만 사람들에게도 잘합니다. 우리가 긴 신앙의 여정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한 일을 한 가지라도 한 것이 있다면 인생의 역경을 만났을 때 “하나님, 옛날에 제가 행한 그 일을 기억하셔서 저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원합니다. 이 역경 또한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라는 담대한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복된 이유는 이들에게는 이전에 신실하게 은혜로 다가오신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있어서 무슨 일을 만나든 신실하심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은혜 받은 사람들은 한결 같이 주님이 주신 비전을 품고 있기 때문에 역경이 닥쳐와도 세상 사람처럼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다시금 은혜의 자리로 돌아와 주님께 매달립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꿈을 가진 자는 아무리 어려움이 오더라도 넘어지거나 포기하지 않으며, 주님이 주신 꿈 때문에 때로는 밟히고 눌림을 당해도 절대 소중한 인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참으로 건강하고 그 교회는 부흥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복을 몰고 오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에 경북 의성에 있는 어떤 교회에 집회를 간 적이 있습니다. 그해는 너무 가물어서 마늘밭, 고추밭, 사과밭이 모두 타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의 많은 교인들이 과수원을 하고 있었는데, 너무 가물어서 열매가 전부 시들시들해져 상품이 될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교회에 기도를 선포하셨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비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도 들으시고 비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번 한 주간을 비를 달라고 기도하는 기도주간으로 선포합니다.” 그리고 온 교인들이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기도를 마치는 날 하나님께서 소낙비를 내려주셨는데 그 교회 교인들이 사는 그곳에만 내려 주신 것입니다. 교인들이 다른 곳을 가보니 땅에 먼지만 나고 어디에도 비가 내린 곳이 없더랍니다. 여기저기를 다 돌아보아도 자기 교인들의 과일 밭에만 비를 주셨지 다른 곳에는 한군데도 비를 주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교회 교인들의 기도소리를 들으시고 은혜를 베푸사 믿겨지지 않는 기적적인 복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엘리야가 비 오지 않기 위해서 기도하면 비가 오지 않았고, 비를 달라고 기도하면 비가 내렸습니다. 이것이 ‘때를 따라 돕는 은혜’입니다. 은혜를 받는 사람이란 이처럼 복이 보장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은혜’란 절대적인 것입니다. 아무리 비싸고 좋은 새 차라 할지라도 기름이 떨어지면 그 차는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고철덩어리가 되는 것처럼 믿는 사람에게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게 부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능력 있는 사람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하나님의 은혜에 푹 젖어들어 있습니다. 약 100명의 자원하는 성도들과 함께 철야기도회를 40일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은혜로 인하여 육신이 피곤한 줄도 모릅니다. 어떤 때에는 두세 시간 밖에 자지 못해도 피곤한 줄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 친구 목사님이 저에게 이름을 바꾸라고 했습니다. ‘연철’이 아니라 ‘강철’이라고 말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이렇게 유신을 뛰어넘게 할 정도로 강력한 힘으로 작용합니다. 우리 장로님들은 저에게 “목사님 체력은 대관절 어떤 체력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우리 부목사님들이 저를 못 따라옵니다. 저는 심방을 하루에 많게는 25가정을 심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침 9시부터 저역 10시까지 심방을 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일찍 일어나 새벽기도를 인도합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남다르게 건강의 복을 주신 것 같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태어나서 지게에 짐을 지고 다녔고 보릿단과 볏단을 날랐으며 산 속 깊이 들어가서 장작을 해왔습니다. 또 작은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직접 노를 저어가며 투망으로 고기를 잡기도 했습니다. 아마 어린 시절부터 이런 일들을 하면서 체력을 쌓아왔던 것 같습니다. 청년기에는 7년간 산에서 살면서 좋은 공기를 마시고 그 곳에서 밤이나 낮이나 찬송을 부르고 다녔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을 위해서 그런 시간들을 통해 건강한 체력을 만들어주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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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콘서트[정연철 목사] 복된 사람의 비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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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콘서트[정연철 목사]복된 사람의 비결(5)
- 하나님을 만나야 하늘 문이 열린다. 웃시야 왕은 16세에 왕이 되어 52년 동안이나 왕위를 지킨 행운아입니다. 역대하 26장을 보면 웃시야 왕에 대해 상세히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웃시야 왕은 겸손과 순종으로 하나님을 섬김으로 국력을 든든하게 만들었습니다. 나라도 상당히 부강해졌습니다. 그러나 웃시야 왕은 말년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채 온갖 교만과 불순종으로 가득 찬 인생으로 전락했습니다. 제사장만이 분향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다 나병에 걸려 비참하게 말년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이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부름받은 이사야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깨닫게 됐습니다. 첫 번째로 깨달은 것은 우선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부정부패로 썩어져 가는 사회를 돌아보면 살 소망이 없어집니다. 진실 되고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어려움에 처하고, 힘 있고 돈 많은 부정한 자들이 큰 소리를 치는 시대가 돼 가는 듯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바라보며 “하나님, 어찌하여 이런 불의 한 자들을 이대로 두십니까?”라는 한탄의 소리가 절로 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왕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깨닫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5절을 보면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웃시야의 죽음을 통하여 이사야는 교만한 자의 말로가 어떠한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아는 대로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싫어하십니다. 한때 존귀한 위치에서 크게 쓰임 받았어도 교만해지면 하나님이 버리신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요 섭리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인생들은 시편 49편 20절의 말씀대로 “존귀하나 멸망하는 짐승”과도 같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왕의 죽음으로 인하여 이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52년 장기 집권하던 왕이지만 하나님께 버림받자 일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목도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공의가 분명히 살아 있음을 믿고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세상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공의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정직하고 신실하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이 땅을 공의로 다스리시며 치료하실 것을 깊이 마음에 새기며 살아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두 번째로 깨달은 것은 인생의 허무함입니다. 52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리며 굳건한 왕위를 지켰던 웃시야 왕이지만 하나님이 버리시자 순식간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지켜본 이사야는 인생의 허무함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 삶을 돌아보면서 이러한 ‘인생의 허무’를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을 한 발짝 귀에서 잠시 돌아보면, 인간의 삶이란 것이 사실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길어야 80년 남짓 살다 가는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런 허무한 인생의 참된 가치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새롭게 정립돼야만 합니다. 한 사람의 인생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정립됐을 때에는 존경받는 인생으로 평가받게 되지만,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없이 살다 간 인생은 허무한 인생이 되고 맙니다. 이 중요한 인생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초대 왕 사울이 자만과 죄악 속에서 무너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윗이 침상을 눈물로 적시며 기도한 내용은 하나님의 성령을 거두어가지 말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기도한 이유는 그가 인생의 허무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도 제법 나이를 먹어가면서 인생이 참으로 보잘것없다는 것을 더 깊이 절간하고 있습니다. 이 긴 목회의 여정 속에서 참으로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지 않았다면 여러 어려운 고비 때마다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느 날 저는 제 자신을 깊이 성찰하는 시간을 갖게 됐습니다. 20년 동안 한 교회에서만 목회를 하다 보니 그야말로 저는 탈진 상태에 빠진 적도 있습니다. 부산의 모 교회에서 교사 부흥회를 인도한 적이 있는데,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부흥회를 마치고 집에 갈 때는 엉금엉금 기어갈 정도로 영육이 메마른 상태를 지나온 적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하나님께 힘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메마른 풀과 같은 저의 영혼과 육신에 힘을 주시옵소서. 저의 영혼과 육신을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셔서 회복시켜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며 새 힘을 달라고 주님께 매달리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고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그 어는 누구라도 우리 인생을 쓸데없이 버려진 메마른 풀과도 같은 존재로 전락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쓸데없다 하시고 버리시면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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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콘서트[정연철 목사]복된 사람의 비결(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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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베스트관계목회(7)
- 관계 교육 공부하고 교육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관계에 대해 가르치고 교육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관계라는 렌즈를 끼고 읽고 공부해야 합니다. 성경은 ‘관계의 책’이라고 불릴 정도로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관계, 수많은 관계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관계의 하나님이십니다. 관계의 중요성 관계 맺는 비결 등 관계에 대해 성경을 공부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관계 특강, 관계 세미나 등 다양하게 관계에 대해 교육해야 합니다. 왜 관계가 깨지는지 연구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관계가 중요한데 관계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목회자는 관계를 가르치고 교육해야 합니다. 관계에 대해 가르치고 교육하는 지혜 중 하나가 좋은 관계 맺는 삶의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목회는 관계입니다. 관계가 잘 될 때 설교를 잘 듣고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평소에 교회와의 관계, 성도와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관계가 나쁘고 깨지면 설교를 듣지 않고 가르침 받는 것을 거절합니다. 목회에서 관계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사탄은 사소한 것 가지고 관계를 깨뜨립니다. 인간에 대해 기대치를 줄이고 사랑으로 대해 주어야 합니다. 관계를 배우고 교육해야 합니다. 관계 리더십의 핵심 ‘리더는 누구인가’가 중요하고 리더십이 중요합니다. 목회자는 ‘영적 리더’인데 리더십이 좋아야 합니다. 리더가 누구냐에 따라 공동체의 성패가 결정됩니다. 리더십은 영향력인데 목회자는 리더로서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리더요 최고의 리더십으로 최고의 영향을 끼쳤습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을 공부하고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섬김과 사랑의 리더십인데 한 마디로 관계의 리더십입니다. 사랑과 섬김으로 관계를 맺으시고 관계 리더십으로 많은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관계 리더십으로 많은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관계 리더십의 핵심은 세 가지입니다. 1. ‘준다’는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주는 헌신과 희생의 삶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다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주신 희생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관계 목회는 주는 것입니다. 마음과 시간 내어 주고 모든 것을 영혼 구원을 위해 주어야 합니다. 목회는 희생입니다. 2. ‘살린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살려 주는 리더십입니다. 병든 자, 낙심된 자, 죽은 자를 살려주신 예수님이십니다. 사탄은 도둑질을 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살아나는 기적이 있었습니다. 관계 리더십은 살려 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3. ‘세운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세우는 리더십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세우시고, 전도인을 세우시고,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관계 리더십은 세우는 것입니다. 사탄은 파괴자입니다. 예수님의 관계 리더십을 배워야 합니다. 관계 맺는 목적 관계 맺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인맥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한번 맺은 인연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좋은 사람과 관계 맺는 것이 축복입니다. 만남은 우연이 아닙니다. 관계 맺은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관계가 잘되면 행복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관계가 무너지면 불행해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관계 맺는데도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인간관계 맺는 목적이 사람을 얻고 영혼 구원에 있어야 합니다. 만나서 관계 맺고, 먹고 마시고, 교제하는 것으로 끝나지 말고 영혼 구원하는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관계 맺는 것이 전도여야 합니다 좋은 인간관계가 되면 전도가 됩니다. 사도바울도 사람들과의 인간관계에서 융통성의 리더십을 가지고 한 영혼이라도 더 얻고자 했습니다. 사람을 실족시키지 말고 덕을 세우고 남에 대해 배려와 친절로 전도의 효과가 나타나야 합니다. 관계를 위해 시간을 내고, 섬기고, 대접하는 것도 결국은 사람을 얻고 영혼 구원하는데 있어야 합니다. 좋은 인간관계는 전도의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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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베스트관계목회(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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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나의 궁극적 관심은 무엇인가?
-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인간의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믿음의 감정적인 요소를 아주 중요하게 보았다. 실제로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감정적인 요소는 아주 중요하다. 인간의 감정은 대단한 힘과 추진력을 갖고 있다. 신앙의 지적인 요소는 정적이고 차갑다고 할 수 있지만 감정적인 요소는 동적이고 뜨거운 것이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어떤 신자들은 아주 열정적이고 감정적이지만 어떤 신자들은 지적이고 다소 냉담하기까지 한 사람들도 있다. 어떤 교인들은 손뼉을 치면서 찬송하고, 말씀을 들으면서 ‘아멘!’, ‘할렐루야!’라고 반응하지만, 어떤 교인들은 조용히 찬송하고, 말씀을 듣고도 속으로는 동의하면서도 겉으로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는 교인들도 있다. 우리는 신앙의 두 요소들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느 것이 덜 중요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신앙에는 지적인 요소와 감정적인 요소가 모두 다 중요하다. 그러므로 프로이트가 믿음의 감정적 요소를 중요하게 간파한 것은 분명히 옳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을 감정으로만 축소한 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특정 교리에 대한 감정적 고백은 믿음의 필수적인 부분이지만 믿음은 감정적 요소로만 축소될 수는 없다. 프로이트의 전 동료이자 나중에 그의 경쟁자가 된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은 신앙의 핵심에 더 가까이 다가온 설명을 하고 있다. 융은 프로이트의 신앙관을 뒤집어 놓았다. 그는 믿음이란 어떤 것을 절대적이거나 이상적인 어떤 것으로 만들려는 충동이라고 보았다. 다시 말하면, 그는 믿음을 전지 전능, 전적인 희생과 사랑, 완전한 지혜의 관점에서 파악하려고 하였다. 융에 의하면 믿음은 어린이의 정서적 필요에 대한 성인 버전이 아니다. 오히려 아이는 아버지를 절대자로 생각함으로써 실제로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믿음을 설명함에 있어서 더욱 더 진리에 가까이 다가간 사람은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다. 그는 믿음을 '궁극적 관심'이라고 표현한다.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물이나 사람이다. 그것은 가장 높거나 가장 깊거나 가장 심각한 관심사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 시간, 에너지, 감정을 선점하기 때문에 '관심사'라고 할 수 있다. 종교심리학자인 제임스 파울러(James Fowler)는 궁극적인 관심에 대한 몇 가지 경쟁 관심들을 나열해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예를 들면, “일, 명예와 인정, 권력과 영향력, 부”와 같은 것들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가족, 대학, 국가, 교회 등에 투자될 수 있다. 사랑, 섹스, 사랑하는 파트너도 우리 모두의 궁극적 관심의 열정적인 중심이 될 수 있다.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은 우리가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사물, 사람, 또는 목표다. 폴 틸리히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한 국가가 국가 자체의 생존과 성장을 궁극적인 관심사로 삼는다면 그 국가는 국민들의 경제적 복지, 건강과 생명, 가족, 미적 및 인지적 진실, 정의와 인간성 등 다른 모든 관심사를 희생할 것을 요구한다.” 자신의 궁극적인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약간의 연습을 해 볼 수 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잠시 성찰해 보기로 하자.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내 자신의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소망은 무엇인가? 내가 이것 빼 놓고는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할 그런 것들은 과연 무엇인가? 아마도 자신의 가장 깊은 소망은 특정한 관계나 사람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자신의 직업일 수도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일 수도 있다. 자신에게 솔직해지도록 노력해 보자. 이제 세 개의 작은 종이조각을 가지고 자신의 궁극적 관심이 무엇인지 성찰하는 연습을 해 보도록 하자.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 3가지를 선택해 보기로 하자. 그것들을 종이에 적어 보자. 그리고 앞에 쓰레기통이 있다고 가상해 보자. 이 세 가지 가장 중요한 것 중 자신이 가장 쉽게 버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적힌 종이를 찢어 쓰레기 통에 버리자. 두 번째 종이에도 똑같이 해 보자. 이제 종이 한 장만 남았다. 거기에는 나의 삶에서 내게 가장 중요한 것, 내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 내가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고 심지어 죽음까지도 생각할 수 있는 것 한 가지가 적혀 있다. 이것은 협상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나에게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것은 궁극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너의 궁극적인 관심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찬송을 부른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예수 밖에는 없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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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논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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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나의 궁극적 관심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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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승중 목사] 순교의 영성으로 설교하라
- 1. 들어가는 말: 위기에 놓인 한국교회 이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고, 교회가 설립된 지 139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전 세계 선교 역사상 가장 놀라운 성장과 부흥을 하였고,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자유롭게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 역사의 줄기를 찾아 올라가 보면 그것은 피눈물과 땀에 얽히고설킨 고난의 연속이었다. 특별히 일제강점기 36년 동안의 그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 우리의 선배요 선각자였던 수많은 주의 종들이 순교라는 고난의 십자가를 지면서까지 하나님을 믿고 충성을 다했다. 그리고 그 고귀한 신앙의 유산을 우리에게 물려주었다. 진실로 한국교회는 초대 교부 터툴리안의 말처럼 순교자들의 피를 먹고 자란 교회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오늘 한국교회를 향한 세상의 시선이 싸늘하기만 하다. 싸늘한 정도가 아니라 교회를 향한 비판과 비난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많은 사람이 기독교를 '개독교'라고 부르면서 비난을 퍼붓고 있다. 참 부당한 비난이다. 그러나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가 이 사회로부터 받고 있는 소리들이다. 그뿐인가? 그동안 놀라운 부흥을 거듭하던 한국교회의 성장은 멈추었고, 멈춘 정도가 아니라 숫자에 있어서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 문제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본 강의의 주제가 아니기에 더는 언급할 수는 없다. 다만 생각이 드는 것은 혹시 오늘 한국교회가 이제는 섬김을 받는 자가 되어 섬김의 자리를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피땀 흘리며 뿌린 씨앗의 열매를 따 먹으려고만 했지, 그것을 나누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닌지? 오늘 한국교회가 영광은 누리려고 하나, 그것에 앞서 반드시 먼저 져야 할 십자가는 외면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혹은 강단에서 외쳐지는 설교에서 십자가의 복음이 사라지고 교인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값싼 은혜만 전하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다시 말해서 구약의선지자들과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같이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순교적 영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고, 교회의 설교가 물량주의와 성공 주의를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다시 한국 초기 교회의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조상들의 눈물과 희생과 헌신의 신앙생활을 돌이켜 보며, 그들의 순교적 신앙을 본받고, 또 그 순교적 신앙을 강단에서 우리의 후손들에게 계속해서 전달하고 가르쳐야 한다. 이를 위하여 본 강의는 한국교회에 귀한 신앙의 본을 보여주신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설교에 나타난 순교적 신앙을 돌이켜 보면서 한국교회 강단의 나아갈 방향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2. 주기철 목사의 설교 중심의 목회 주 목사의 목회와 설교에 대해서 김인서 목사는 10중 7이 설교이고, 2가 심방이고, 나머지 1이 행정이었다고 말하면서, 주 목사의 목회는 설교에 주력하는 목회였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지적은 올바른 지적이었다. 주 목사는 개혁교회의 전통에 따라 설교의 중요성을 인식하였고, 월요일부터 설교를 준비하여 금요일까지 설교 작성을 완료하고, 토요일에는 설교를 위하여 기도하고 준비하였고, 주일에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다. 주 목사가 설교, 즉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역을 얼마나 중요시 했는가 하는 점은 이런 사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940년 어느 주일날 일본 경찰들은 산정현교회 예배당을 포위하고 주 목사에게 “오늘부터 설교하지 말라”고 하였을 때, 주 목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설교권을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하나님이 하지 말라 하시면 그만둘 것이요, 네 설교권은 경찰에서 받은 것이 아닌 즉 경찰서에서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소" "금지함에도 불구하고 설교하면 체포하겠소”, “설교하는 것은 내 할 일이요. 체포하는 것은 경관이 할 일이니 나는 내 할 일 하겠소”, “대 일본제국 경찰관의 명령에 불복하는가?”, “일본의 헌법은 예배 자유를 허락한 것이요, 당신들은 지금 예배 방해요 헌법 위반이오.” 그래서 권연호 목사는 『주기철 목사의 순교사와 설교집』 “서문”에서 “주 목사의 설교는 그의 신앙고백이요, 그의 생활이요, 그의 정신을 그의 피로 인친 것입니다”라고 기록한 것이다. 그만큼 주기철 목사는 설교 중심의 목회를 하였고, 하나님의 말씀 선포에 생명을 걸었던 설교자였다. 3. 설교자로서의 주기철 목사 주 목사의 설교와 글들은 여러 가지 잡지와 신문 등에 실렸는데, 그가 남긴 것은 소논문 1편, 기도문 2편, 응답문 1편, 설교문 37편이 전부다. 그리고 37편의 설교 중 15편이 「신생명」, 「기독신보」, 「종교시보」, 「복음시대」, 「새사람」, 「설교」, 「기도지남」 등에 실렸고, 22편은 김린서가 복원한 것이다. 김린서가 복원한 설교들은 그가 예배에 참석하여 주 목사의 설교를 듣고 메모해 두었던 것을 복원하여 해방 후에 정리 활자화한 것들이다. 우리는 그의 설교들과 기도 그리고 논문이 실린 잡지들이나 교계 신문 등을 통해서 설교가로서의 주기철의 면면을 엿볼 수 있게 된다. 그는 평양장로회 신학교 졸업반 시절인 1924년 7월 「신생명」을 통해 계몽주의 논문, "기독교와 여자 해방"을 발표하였고, 1928년 6월 부산 초량교회 목회 시절(1928년 6.6) 그가 존경했던 김영구 목사의 부음을 듣고 쓴 추모기도문이 「기독신보」에 실렸다. 이후 마산 문창교회 목회 시절인 1934년 그가 남대문교회 부흥회때 설교하였던 “은총과 책임”이 「종교시보」(1934.5)에 실렸다. 그 후에 장로교 기관지였던 「종교시보」에 “사의 준비”(1934.8) “천하에 복음을 전하라”(1935.2)는 설교가 실렸다. 그 외에도 그가 1935년 금강산 목사 수양회 때 했던 설교인 “목사직의 영광”이라는 설교가 「기독신보」에(1935.5) 실렸다. 그리고 1936년에 평양의 산정현교회로 목회지를 옮긴 이후에 12편의 설교와 기도문이 각종 잡지와 교계 신문에 발표되었는데, 그것들은 다음과 같다. “무거운 짐 진 자여 예수께 오라”(「복음시대」, 1937.6) “전도의 사명”(「설교」, 1937.3) “성신과 기도”(「설교」, 1937.3) “마귀에 대하야”(「설교」, 1937.4) “이삭의 헌공”(「설교」, 1937.5)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설교」, 1937.6) “하나님 압헤 사는 생활”(「설교」, 1937.8) “십자가의 길노 행하라”(「기독교보」, 1937.9) “주의 재림”(「설교」, 1937.10) “하나님을 열애하라”(「설교」, 1938.3) “겸손하기 위하야”(「기도지남」, 1939.2). 그리고 그의 설교문이나 글들이 1939년 초를 지나서는 잡지나 교계 신문에 실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가 일제에 의해서 2차 검속을 당한 1939년 9월 이후에는 그의 설교나 글들의 지상 발표가 중단된 것을 알 수 있다. 아무튼 그의 설교와 글들이 실린 이런 시기를 보면 주 목사는 이미 마산 문창교회 시절부터 설교자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고, 평양 산정현교회 시절에는 한국 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설교자의 한 사람으로 두각을 나타냈음을 알게 된다. 교회사가 이덕주는 주기철 목사가 서울 남대문 교회 부흥회 때 행한 설교, " 은총과 감사"가 「종교시보」에 실린 것과 또한 주 목사가 1936년 금강산 기독교수양관에서 개최된 장로교 목사수련회에 주 강사로 초청되어 "목사직의 영광"이라는 제하의 설교를 한 것, 그리고 주 목사가 1937, 9월 대구 남성정제일교회(현 대구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 26회 총회에서 새벽기도회 설교를 도맡아 한 것을 예를 들면서 주 목사의 설교가 이미 그 당시에 한국교회에서 상당한 반응을 얻고 있었음을 방증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여 순교했던 순교자였을 뿐만 아니라, “나는 결코 다시는 설교하지 못할 듯이 설교했으며, 죽어가는 사람으로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설교한다”라고 고백했던 청교도 설교가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을 걸었던 설교자였던 것이다. 4. 주기철 목사의 설교에 나타난 신앙 1) 코람데오의 신앙 그는 불꽃 같은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을 가지고 살았던 신앙인이었다.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은 그의 설교와 목회 전반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으며,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면전에서 행동하고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 신앙은 종교개혁가 존 칼빈이 강조한바 “코람 데오”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주 목사의 신전 사상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설교가 바로 1937년 산정현교회에서 행한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라” (창 17장)라는 설교이다. 7) 그는 이 설교에서 (1) 하나님 앞에서 경건함으로 완전하라 (2) 하나님 앞에서 정직함으로 완전하라 (3) 하나님 앞에서 태연함으로 완전하라고 외쳤다. 즉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에 경건해야 하는 것이고, 정직해야 하는 것이고, 태연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건의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하자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경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항상 하나님 앞에 있기에 우리의 마음도, 입도, 발도 다 하나님 앞에서 경건해야 한다고 발을 구르며 외쳤다. “마음도 경건하고, 입도 경건하고, 또한 말도 경건하여야 하나니, 이는 경건의 실천이다. 마음이 경건하면서 몸으로 실천하지 아니하면 이는 이교도적 공상에 불과한 것이니 모양으로만 경건한 체하고 마음이 불결하면 이는 바리새적인 외식보다 나을 것이 없다. 십자가를 자랑해야 할 강단에서 공공연히 자기를 자랑하며, 성도가 모인 좌석에서 불결한 논담을 토하는 것은 불경천만이요 무례 막심한 일이다…. 그런데 오늘 교회에 경건한 태도가 결여한 것은 두려운 일이다. 경건한 생활, 경건한 예배를 드림으로 완전한 신자가 돼라” 그는 이른바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이 범하기 쉬운 이원론적 사상을 거부했다. 믿음 따로, 삶 따로, 경건과 교리가 분리되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라는 신전 의식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 압헤 사는 생활”이라는 설교에서도 경건을 “하나님 앞에서”, 즉 신전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으로 규정하면서, 경건을 일상생활에서 부정직한 것을 버리는 것 등의 삶으로 설명한다. 그의 신전 의식은 또 다른 설교인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눅 12:5)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설교는 1937년 장대현 교회에서 열린 평양노회 사경회 때 행한 설교이다. 그 개요를 보면 1) 하나님은 사랑이신 동시에 또한 엄위하심 2) 의를 근원한 사랑 3)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의 받을 벌 4)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의 복. 그의 이 메시지는 율법적이거나 위협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그는 이 설교에서 하나님은 사랑인 동시에 엄위하신, 즉 두려워할 하나님이심을 강조했다. 그런데 그의 설교에는 인간들은 우리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죄인들이지만 그리스도의 공로로 담대히 설 수 있는 은총의 복음이 동시에 선포되고 있다. 그의 설교를 좀 더 들어보자. “내 경험으로 보면 중생한 자는 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요. 그에게 복음의 은혜가 풍성하나, 거짓 선생은 두려워하지 아니하여(유다서 1:12) 그 소위가 흉악하다. 오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찬양대, 집사, 장로, 교인들과 너희 받을 형벌을 생각하여 보라. 사람이 보지 못하게 숨어서 행하는 일을 하나님은 보고 계신다. 사랑의 하나님을 알기 전에 먼저 의의 하나님을 알라. 구약의 신앙이 있은 후에 신약의 신앙이 있고,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은 연후에 복음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회개의 죽음이 있은 연후에 구원의 중생이 오는 것이다” 주 목사는 신전 의식을 갖고 산다는 것은 반드시 공포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더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그의 설교 전편에서 이러한 코람데오의 사상, 즉 신전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설교학자 김운용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의 삶, 즉 신전 의식은 그의 설교와 사역 전체를 관통하는 사상이었고, 모진 형극의 길에서도 주저앉지 않고 끝까지 달려가게 했던 힘으로 작용했다.”고 평가한다. 2) 예언자적인 신앙과 죽음의 준비 주기철 목사는 설교에서 불의한 권력에 대한 예언자적인 역할을 강조하고 신앙의 순결을 위한 “사(死)의 준비”를 강조하였다. 한국교회에 강요된 신사참배의 요구를 예언하면서 시작된 신앙의 순결에 대한 그의 예언자적인 선포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심화되어 가면서, 그 저항과 대결 또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예언자적인 신앙에 대한 주 목사의 설교는 1934년의 “죽음의 준비” 라는 설교에서 뚜렷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인생은 나는 날부터 죽음의 경주자”라는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면서, “누구나 한번 죽어 심판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죽음을 매일 준비하고 항상 준비해야 한다.” 고 역설했다. 그의 이 설교에는 예언자적인 선포와 함께 신앙을 위한 죽음의 준비에 대한 결단을 보여주고 있다. “...최후의 준비를 위하여는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엄숙한 만찬으로 준비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의 기도로 준비하셨다…. 예수의 자취를 따라가는 우리도 신자답게 죽어야 된다. 스데반의 최후는 얼마나 아름다우며, 바울의 죽음은 그 얼마나 장열한가?” 그는 이렇게 신앙의 절개를 지키기 위해서는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강력하게 외쳤다. 그런데 주 목사의 이런 죽음의 준비에 대한 것 역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한 간섭이요, 역사였다. 사실 주 목사는 개인적으로 1920년대 말부터 30년대 초에 가족들의 연속되는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다. 1927년에 삼남이었던 영묵이 병사하고, 1931년에는 사랑하는 유일한 딸 영덕이 병사한다. 그리고 1933년에 사모 안갑수 여사가 급서하고 말았다. 그리고 1934년 여름에는 부친인 주현성 장로가 별세한다. 이렇게 피붙이들의 계속되는 죽음 앞에서 그는 죽음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마침내 그는 그 유명한 “죽음의 준비”라는 설교를 하게 된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들의 연이은 죽음 앞에서, 죽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지에 대해서 열변을 토한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소년 시대에는 방탕하여 늙을 때를 준비하지 못하니 매우 둔한 자이다. 한번 들어 가고 다시 나오지 못하는 죽음에 대하여 준비하지 않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대게 인생 일사는 정리라, 사람이 산다는 것은 죽음을 향하여 달려 나아가는 것이며, 하루를 살았다면, 사망의 문에 하루 길을 가까이 간 것이며, 지구의 운전은 인생을 싣고 1분도 정지함 없이 사망을 향하여 달리는 것이며, 시계의 똑딱이는 소리를 우리 인생의 생명이 끊어지는 소리이다…. 사람이 죽는 일을 홀연히 당하며, 주의 재림도 갑자기 되는 것이다. 아침에 건강하게 나가서 저녁에 죽음으로 이르는 일이 없는가? 죽음에 있어서는 빈부의 차별이 어디 있으며, 형편의 다름이 무슨 상관이며, 노소의 구별이 있는가 없는가…? 인생아 아는가 모르는가? 너의 사망할 일자를? 만일 모르거든, 사망이란 급박하고 용서 없음을 알아두라. 우리는 죄를 위하여 반 시간만 연기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애걸할 날이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여 10분만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내 죄를 청산하고 가기는 가겠나이다’라고 애걸복걸한들 용서하실까? 하나님의 예정한 시기는 절대로 용서가 없는 것이다. 사망 시에 모든 죄를 다 청산하고 가겠다고 하지 말라. 사망 시에는 있는 믿음도 도리어 잃기가 쉬울지언정, 없던 믿음을 그 때에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사망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준비할 것이다…. 비애의 사람이 되지 않도록 준비할 것이다….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 사망 시 슬프지 않다…. 신자여! 준비하자. 죽음의 준비를” 이렇게 죽음의 준비에 대해서 외친 주 목사의 또 하나의 대표적인 예언자적인 설교는 바로 1936년 금강산 수양관에서 행한 "예언자의 권위"(마 3:1-13)라는 설교다. 1936년 5월 주 목사가 경남노회장 시절이었다. 지금 이북에 있는 금강산 온정리에 장로교 목회자들을 위한 수양관이 있었다. 이 수양관에서 하기 수련회가 개최되었는데, 전국 250여 명의 목회자가 참석한 가운데 강사로 초빙되었던 주 목사는 “예언자의 권위”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다. 이 설교의 요지는 이렇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자기의 조국 유다가 망하는 것을 보면서 눈물 흘리며 회개하라고 목청이 터져라 외쳐댔건만, 오늘의 목사님들은 왜 현세의 권력에 아부만 하고, 일본의 태평성대를 찬양하며, 눈물은커녕 오히려 이 사악한 시대와 어두운 현실에 아첨만 하고 있는가? 세례 요한은 왕에게도 말해야 하는 것을 삼가지 않았다. 동생의 아내를 취해서 부정한 결혼을 한 헤롯왕에게 ‘….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죄인이다. 결혼을 인정할 수 없다. 회개하라’고 나무랐다. 이렇게 부르짖은 세례 요한은 벌써 일사각오를 하고 있었다. 죽이고 살리는 권한을 한 손에 들고 있는 임금 앞에서 그 죄를 책망하는 세례 요한은 물론 일사각오였고, 나단이나 낙스도 일사각오였던 것이요, 루터도 일사각오를 했다, 일사각오를 한 사람이 예언을 하는 것이고, 일사각오를 해서 비로소 예언자의 권위가 서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목사님 여러분들은 강단 앞에서 하고자 하는 말을 못 하는가. 몰라서 말을 못 하는가. 알고도 모른 체하는 것인가. 왜 벙어리되어 떨고만 있는가? 목사도 일사각오를 한 연후에야 목사의 권위, 예언자의 권위가 서는 것이다. 그런데 일개 순사 앞에서 절절매고서야….” 감시하고 있던 일본 경찰에 의해서 주 목사의 설교는 여기서 중단됐다. 주 목사는 강단에서 강제로 끌어내려지고, 그날 모였던 250여 명의 목회자들은 다 강제로 해산당하고 말았다. 이 설교는 비록 해방 후에 김린서에 의해서 복원된 설교이긴 하지만, 그래서 그해(1936) 수양회 현장에서 주 목사의 설교를 들은 기자에 의해서 「기독신보」에 실린 “목사직의 영광” 이라는 설교와는 그 내용과 대지가 상당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핵심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불의한 권력에 대한 항거와 목회자의 예언자적인 역할을 강조하고, 이를 위하여 죽음을 불사하는 신앙을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주기철 목사의 예언자적인 신앙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설교라 하겠다. 그는 죽기를 각오하고 순교적 열성을 가지고 외쳤던 것이다. 오늘 우리 목회자들에게 이런 순교적 열성이 있는가? 3) 일사각오의 순교신앙 그러므로 이러한 주기철 목사의 신앙은 한 마디로 일사각오의 순교신앙이었다. 그의 이런 순교신앙은 그의 설교 전편에 흐르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설교가 평양신학교 사경회 때(1935년) 행한 “일사각오”(요 11:16)라는 설교이다. 그는 이 설교에서 3가지 일사각오, 즉 예수를 따라서 일사각오, 남을 위하여 일사각오, 그리고 부활 진리를 위하여 일사각오를 외쳤다. “부활의 복음이 우리에게 전파되어 이르기까지 많은 피가 뿌려졌다. 로마제국의 박해하에서 50만 성도의 피가 흐르고, 참 복음을 위하여 로마교황 악형 하에 백만 신자의 피가 뿌려졌다. 바티칸 궁중에 봉쇄된 성경을 개방하여 만민의 성경이 되기 위하여는 위클리프의 백골이 불에 타지고, 틴데일의 몸이 재가 되지 않았는가? 신학생 여러분, 제군이 읽는 성경은 피의 기록, 피의 전달이다. 피로서 전하여 온 부활의 복음을 우리 또한 피로 지키고, 피로 전하는 것이다. 일사각오를 한 도마는 부활의 복음을 위하여 인도 도상에서 피를 뿌렸다. 오오! 오늘날 우리에게도 부활을 복음을 위하여 일사각오를!” 그의 이러한 일사각오의 순교신앙은 그의 유언과도 같은 설교인 “5가지 종목의 나의 기도”(마 5:18, 롬 8:18, 31-39)23)에서 절정에 달하였는데, 이 설교에서 그는 5가지의 각오를 고백하였다. 주 목사는 마지막 5번째로 구속되면서, 이 설교를 유언과도 같이 남겼는데, 그는 이 설교를 눈물로 호소하듯이 하였고, 그날 2,000여 명의 평양 산정현교회의 성도들은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1)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옵소서 “나는 바야흐로 죽음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닥쳐오고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한 나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 아니 할 수 없습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만물이 다 죽음 앞에 탄식하며, 무릇 숨 쉬는 인생은 다 죽음 앞에서 떨고 슬퍼합니다. 사망 권세는 마귀가 사람을 위협하는 최대의 무기인가 합니다. 죽기가 무서워서 의를 버리고, 죽음을 모면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일약 수사도 베드로도 죽음이 두려워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를 부인하고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맹세하였으니 누가 감히 죽음이 무섭지 않다고 장담하겠습니까? 아담 이와 범죄 후에 사람은 다 죽습니다. 제왕 장상 제자 가인도 다 죽었고, 성현 군자 위인 걸사도 다 북망산에 갔습니다. 죄없이 억울하게 죽는 약자도 불쌍하지만,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죽는 사람, 가엾은 아이를 두고 가는 어머니의 비참한 죽음도 허다합니다. 폐결핵 환자로 요양원에 눕지 아니하고, 예수의 종으로 감옥에 갇히는 것은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자동차에 치여 죽는 죽음도 있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사형장에 나가는 것은 그리스도인 최대의 영광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열 백번 죽어도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백 년 천 년 산다 한들 그 무슨 삶이겠습니까? 오 주여! 이 목숨 아껴 주님께 욕되지 않게 하옵소서. 이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도 주님 계명을 지키게 하옵소서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쏟으셨습니다. 주님 나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을 무서워 주님을 모르는 체하오리 까? 다만 일사각오 있을 뿐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 속에서 삼 일 만에 부활하신 주님,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여! 나도 부활을 믿고 사망 권세를 내 발아래에 밟게 하옵소서. 사망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나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고 나도 부활하리로다. 아멘! 할렐루야!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답게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마시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끼다 가, 지옥에 떨어지면 그 아니 두렵습니까? 한번 죽어 영원한 천국 복락 그 아니 즐겁습니까? 이 주 목사가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는 내 주님 밖에 다른 신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살 수 없습니다. 더럽게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고 또 죽어,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 합니다. 주님을 따라 나의 주님을 따라서의 죽음은 나의 기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각오가 있을 뿐입니다. 소나무는 죽기 전에 찍어야 시푸르고, 백합화는 시들기 전에 떨어져야 향기롭습니다. 세례 요한은 33세, 스데반은 청장년의 뜨거운 피를 뿌렸습니다. 이 몸도 시들기 전에 주님 제단에 제물이 되어지이다” (2)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옵소서 고난의 명상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에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은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이제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께서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3) 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4)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옵소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가 있습니다. 나라의 신민이 되어서는 충절의 의가 있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가 있습니다…. “못합니다.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이 몸이 어려서부터 예수 안에서 자랐고, 예수께 헌신하기로 열 번 백번 맹세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밥 얻어먹고 영광을 받다가, 하나님의 계명이 깨어지고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게 된 오늘 이 몸이 어찌 구구도생이 말이 됩니까…?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영광의 네게서 떠나도다. 모란봉아 통곡하라. 대동강아 천백에 흘러가며 나와 함께 울자. 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목숨이나마 주님께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나는 저 칼날을 향하여 나아가리다. 누가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환난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5) 죽고 죽어 열 백번 죽어도 주님 향한 대의 정절 변치 아니하오리이다. 십자가, 십자가, 주님 지신 십자가 앞에 이 몸 드립니다. 우 리 초로인생 살면 며칠입니까? 인생은 짧고 의는 영원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삽시다. 의를 버리고 더구나 예수께 향한 의를 버리고 산다는 것은 개 짐승의 삶만 같지 못합니다. 여러분, 예수는 살아계십니다.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삽시다.” (5) 내 영혼을 주님께 의탁합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옥중에서나 사형장에서 내 목숨 끓어질 때 내 영혼 받으시옵소서. 아버지 집은 나의 집, 아버지의 나라는 나의 고향이로소이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어서 나로 하여금 하늘나라 황금길에 걷게 하시고, 죄악 세상에서 부대끼던 나를 깨끗게 하사, 영광의 존전에 서게 하옵소서.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나이다” 오늘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설교자들에게 이런 일사각오의 신앙이 있는가? 4)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앙 그의 설교에는 또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철저한 신앙이 드러나 있다. 그는 결국에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과 섭리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었고, 오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과 공의대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담대하게 외쳤다. 그의 하나님의 주권 사상에 대한 철저한 신앙은 팔순의 노모와 처와 자식들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는 그의 간절한 기도와 그의 유언과도 같은 “5종목의 나의 기도”라는 설교 속에서 너무나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나는 80이 넘은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가 있고,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아들로서의 의무도 지중 하고, 가장으로서 아비된 책임도 무겁습니다…. 당신 어머님을 요한에게 부탁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도 부탁합니다. 불효한 이 자식의 봉양보다 무소불능하신 주님께 내 어머님을 부탁하고, 나는 주님 자취를 따라가렵니다…. 나의 병든 아내도 주님의 손에 부탁하는 것이 이 못난 사람의 도움보다 좋을 줄 압니다. 나의 어린 자식들을 자비하신 주님의 품에 두는 것이 변변치 못한 아비의 손으로 기르는 것보다 복 될 줄로 믿습니다. 나의 양떼도 선한 목자 주님께 부탁합니다…. 나의 늙으신 어머님과 나의 병든 아내를 주님께 부탁하고 나의 어린 자식들과 나의 사랑하는 양 떼들을 자비하신 주님께 부탁합니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으로 이 산정현 강단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을 따라, 주님을 따라 주님의 피 자취를 따라가려 합니다….” 그는 이 설교에서 참으로 비통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설교하였지만,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주님의 제단 앞에 바칠 것을 비장한 모습으로 설교하였고, 사랑하는 노모와 처자식들과 교인들을 오직 하나님의 손(주권과 다스림)에 맡겼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의 이 눈물의 설교(기도)를 들으시고 당신의 주권 하에 그의 후손들을 인도하시고 지켜주셨다. “고아였던 내가, 아무런 세상적인 힘도 권력도, 백도 없던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은 정말이지 기적이고, 하나님의 은혜였다.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의 피맺힌 기도를 들으셨기 때문이다”(주기철 목사의 막내아들 고 주광조 장로의 고백) 주기철 목사는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순교의 길을 가면서, “노모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과 양 떼들을 주님께 맡기는 기도”를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대로 응답하심으로 그의 후손들을 책임지시고 역사하셨다. 주기철 목사는 바로 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설교하였고, 선포하였던 것이다. 5. 나가는 말: 순교의 영성으로 설교하라 하나님의 은혜와 순교자들의 피를 먹고 자란 한국교회가 은혜를 상실하고 있다. 첫사랑의 순수성과 첫 믿음의 열정을 잃어버려 가고 있다. 그리고 물량주의와 배금주의, 교파주의, 그리고 교권주의에 휘둘리고 있다. 그래서 이 사회에서 소금과 빛을 역할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다. 교인들은 더 이상의 희생과 헌신을 꺼리며,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되어 최소한의 신앙생활로 만족하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도 교인들을 향해 값싼 은혜를 남발하면서 그들의 비위 맞추기에 급급하고 있다. 강단에서 외쳐지는 설교도 교인들의 귀를 즐겁게만 하는 그저 긍정적인 말, 기분 좋은 말만 전달되고 있다. 그래서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에서 십자가의 복음은 사라지고, 듣기에 편안하고 부담도 없는 철학적 에세이 같은 설교 아닌 설교가 환영을 받고 있다. 어쩌다가 설교자가 부정적인 이야기, 죄에 대해서 지적하고 회개를 외치면 교인들이 인상을 찌푸리고 부담스러워한다. 결국 십자가의 복음이 외쳐져야 할 강단에서 값싼 은혜만이 전달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 한국교회의 나아갈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시한번 하나님께서 우리 믿음의 조상들을 통해서 전해주신 순교신앙을 회복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한국교회 강단에서 십자가의 복음이 다시 힘차게 외쳐져야 한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순교의 영성으로 설교해야 한다. 그래야 100여 년 전 이 민족의 가장 고난의 순간에 임했던 거룩한 부흥의 역사가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다. 여기 주기철 목사가 감옥 안에서도 십자가의 복음과 하나님의 사랑에 늘 감격하면서 고백한 고난의 명상을 다시 한번 들어보자. 그리고 주님을 향한 우리의 일사각오를 다져보자.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에 내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오리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당하는 수옥(囚獄)을 내가 피하였다가 이다음 주님이 ‘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이제 피하였다가 이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 주기철 목사 순교 80주년 기념 제3회 소양학술회에서 강의 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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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피니언
- 논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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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승중 목사] 순교의 영성으로 설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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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하 원장] ‘조력존엄사 법률안’ 폐기를 앞두고 안락사와 조력존엄사를 돌아보기
- I. 21대 국회와 ‘조력 존엄사’ 법률안 21대 국회 회기 중인 2022년 6월에 안규백 의원이 일명 '조력 존엄사 법안' 을 대표 발의했다. 국회의원 12명이 함께 서명한 이 법은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한 차 례 토론이 되었지만 그 이후 진전이 없이 법사위원회에 계류되어 있다. 이 법안은 21 대 국회가 폐회하는 5월 말에 자동으로 폐기될 것으로 예상된다. 20세기 후반기에 지구촌에서는 서구 선진국을 중심으로 불치의 병으로 시달리는 자들이 원할 경우 존엄사 혹은 안락사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여론과 운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2000년에 마침내 네덜란드가 이것을 허용하는 소위 안락사 법을 제정했고 2002년 4월부터 시행하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벨기에, 룩셈부르크, 등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북미의 캐나다와 미국의 여러 주들이 시차를 두고 법 제정과 시행에 동참했다. 이 법은 지난 20여 년 간 지구촌에서 시행되어 오고 있지만 지금도 안락사는 여전히 국제적 뉴스로 등장하곤 한다. 한 달 전인 2월 11일에도 네덜란드의 전직 총리 판 아흐트(Dries von Agt)가 동갑내기 부인과 함께 동반 존엄사를 택해 9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 세계에 타전되었다. 한국에서도 제법 큰 뉴스거리가 되었는데, 최근 우리 사회에서 는 존엄사에 관련된 이런 저런 사건, 존엄사 관련 시사 프로그램 방영, 존엄사 문제를 짚어보는 영화가 개봉되면서 다시금 사회적 조명을 받은 바 있다. 현재 고령사회이고 내년이면 초고령사회가 되는 대한민국은 앞으로 안락사에 관련된 논의와 법제화 요구는 더욱 증가할 것임은 능히 예측되는 상황이다. 통계청은 2023년 12월 2022년 한국인의 기대 수명은 남자가 79.9세, 여자가 85.6세라고 발표했다. 불의의 사고나 불치의 병에 걸리지 않는다면 한국인은 평균 83세 정도는 사는 셈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80에 가까우면 대개 쇠약하고 병들고 고생하기 일쑤고 그러다가 죽음을 맞게 되는 점에서는 이젠 세대와 크게 다르지 않다. 2030년 통계를 보면, 한국인들은 4명 가운데 3명이 병원에서 죽는다. 이런 시대 상황에서 본인이 원한다면 안락사를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갈수록 강해질 것이 능히 예측된다. 그리 고 이런 여론을 힘입어 22대 국회에서도 적극적인 안락사나 조력존엄사를 허용해야 한다는 법안이 발의될 것으로 예측된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교회는 안락사에 대한 바른 신학적 이해를 확립하여 성도들에게도 가르치고 또 사회적 대응을 적절하게 할 필요가 있다. II. 안락사/존엄사 그리고 조력존엄사 A. 안락사/존엄사 안락사(安樂死, euthanasia)는 좋은(eu) + 죽음(thanatos), 즉 편안한 죽음을 의미한다. 안락사를 선택할 수 있고 또 사회가 허용한다는 것은 회복 가능성이 없는 상태의 환자가 편안히 죽을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것이다. 안락사를 법으로 보장한다는 것은 회복이 불가역적 상태에서 심한 통증에 시달리는 환자가 극심한 고통을 연장 하지 않고 편안히 일찍 죽음을 맞게 해 줄 주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다. 안락사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째는 환자 본인 의지 여부에 따라 자원적 안락사와 비자발적 안락사로 둘째는 의사의 의료 행위 내용과 정도에 따라 적극적 안락사와 소극적 안락사로 나눈다. 현재 안락사를 허용하는 나라에서도 대부분 소극적 안락사를 허용하고 소수의 국가만 적극적인 안락사를 허용한다. 서구의 국가들이 먼저 이 법을 시행했고 아시아에서는 호주가 처음으로 이 법을 만들어 시행해 오고 있다. 그리고 작년 2023년 1월에 호주는 ‘자원적 안락사’도 허용하는 법을 발효시켰다. 그 동안 남호주 주가 이 법을 거부하다가 뒤 늦게 허용 했는데, 남호주 주가 자원적 안락사 법을 발효시킨지 2개월 만에 30여 명의 주민이 이것을 신청했고 이것이 일제히 지구촌에 큰 화제로 보도되기도 했다. B. 조력존엄사/조력자살 우리 언론에서는 “자원적 안락사”라고 보도했지만 호주에서 사용한 정확한 명칭은 ‘voluntary assisted dying’이다. 직역하면 ‘자원적 조력 사망’이다. 도움을 받아 사망하는 것으로 유럽에서 시행되어 오고 있는 이 제도는 일반적으로 “의사 조력 자살”(phlysician-assisted suicide) 제도이다. 호주는 이것을 ‘자원적 조력 사망’이라는 표현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만 내용은 서구의 ‘의사조력 자살법’과 동일하다. 그런데 2022년 한국에서도 국회의원 안규백 의원은 이와 유사한 내용을 지닌 법안을 발의했다. 발의된 법률안의 명칭은 ‘호스피스·완화 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 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 법률안’인데, 안 의원은 이것을 줄여서 ‘조력 존엄사’라는 명칭을 사용한 바 있다. 그것은 그 내용이 서구의 ‘의사 조력 자살’이나 호주의 ‘자원적 조력 사망’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C. 존엄사와 조력존엄사의 차이 그럼 안락사/존엄사와 의사조력자살 혹은 자원적 조력 사망 혹은 조력 존엄사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간략하게 설명한다면, 전자는 의사나 의료인이 환자의 생명을 끊는 행위를 직접적으로 하거나 간접적인 방법으로 하는 것이고, 후자는 의사가 아닌 환자 자신이 여 자신의 생명을 끊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의사나 의료인은 약물을 몸에 주입시키는 수단과 장치를 제공하지만 밸브를 내림으로 약물이 본인의 몸에 주입되게 하는 행동은 환자 본인이 하고 이어 곧 사망하는 것이다. III. 한국의 연명의료 결정법(2016) 그리고 일부 개정안(2022년 6월) 우리나라에서는 2016년에 안락사 법과 유사한 소위 ‘연명의료 결정법’이 제정 되어 2018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그리고 2022년에는 이 법이 허용하는 것을 조금 더 넘어 의사의 도움을 받지만 본인이 스스로의 목숨을 끊게 하는 행위를 허용하는 조력 존업사법이 연명의료결정법의 개정안의 형식으로 발의되었다. A. 세브란스 김 할머니 사건과 연령의료결정법 연명의료 결정법이 만들어지게 된 계기는 2009년에 의료 사고로 식물인간 상태 된 할머니의 가족들이 세브란스 병원에게 할머니에게서 산소 호흡기를 제거해 달라고 요청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신촌 세브란스 병원이 가족의 요청을 거부하자 가족들은 세브란스 병원을 대상으로 서울서부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 사건은 대법원까지 갔고 마침내 법원은 병원이 환자로부터 산소 호흡기를 제거하라고 판결했다. 소위 “세브란스 김 할머니 사건”으로 불려지는 이 사건 이후, 우리 사회에서 는 정부가 주도하여 사회의 각계의 전문가들과 시민들이 4-5년 동안 지속적으로 소 위 안락사를 법적으로 허용하는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마침내 합의를 도출하여 안을 만들었고 그것이 2016년에 마침내 ‘호스피스·완화 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 이 긴 이름의 법은 흔히 줄인 말 인 ‘연명의료결정법’이라 불리우는데 2018년부터 효력이 발생하여 현재까지 시행되어 오고 있다. 이 연명의료결정법 내용의 핵심은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가 자기 뜻을 밝힌 경우, 혹은 대리인이 환자의 의사를 추정하여 밝힌 경우, 그에 따라 연명의료행위 즉 심폐소생술, 항암제 투약 등 생명을 연장시키려는 적극적 의료행위를 중단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B. '조력존엄사법' 그런데 언급한 바 있듯이 현재 이 법의 일부를 개정하려는 법안인 ‘호스피스·완화 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 법률안’이 2022년 6월에 안규백 의원에 의해 일명 ‘조력존엄사법’으로 발의되어 있는데, 이 법 이 이전 법과 다른 점은 첫째 대상이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에서부터 ‘말기환자’에 게로 확대되어 소위 연명의료를 중단할 수 있게 하고, 둘째 의사의 도움으로 환자가 스스로 자기 생명을 끊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 법안은 “말기 환자(末期患者)”를 이렇게 정의했다: “적극적인 치료에도 불구하고 근원적인 회복의 가능성이 없고 점차 증상이 악화되어 수개월 이내에 사망할 것으로 예상되는 진단을 받은 환자.” 그런데 이 법안의 특징과 핵심은 바로 조력존엄사를 허용하는 것이다. 의사가 약물이 들어 있는 주사기를 환자의 몸에 꽂아 두면 환자 본인이 밸브를 돌리거나 버튼을 눌러 약물이 자신의 몸에 주입되게 하여 자신이 죽는 것이다. 언급한대로 서구의 네덜란드와 스위스 등의 일부 국가들은 이를 허용 하고 있고, 그 가운데서 스위스는 외국인들에게도 이것을 허용한다. 안규백 의원은 이 법안을 발의한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 사회적 여론이다. 그는 한국 성인의 약 80%가 안락사 혹은 의사 조력 자살을 찬성한다는 통계를 근거로 하여 국민의 정서를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국민의 기본권인 자기 결정권을 생명과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까지도 확대하여 증진시켜야 한다고 것이다. 그는 참기 힘든 고통가운데 있는 말기환자가 고통을 피하고 일찍 죽기를 원하는 의사를 지속적으로 밝히면 사회는 그 뜻을 존중하고 자기절정권을 존중해 주어야 한 다는 것이다. IV. 신학적 검토 자신의 생명과 삶의 종결에 관한 자기 결정권을 증진시키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에 법률안에 대해 신학적으로 몇 가지 생각해 보자 첫째. 성경은 하나님 이 인간을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즉 사람의 생명의 주인은 본인이 아니라 조물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뜻에 따라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허락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피조물이고 생명의 위임자이지 주인이 아니라는 말이다. 구약의 욥기 서에 나오는 욥은 졸지에 자녀들이 죽고 엄청난 재난을 당했을 때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욥1:21)라고 고백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과 자녀의 생명을 포함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주인임을 인정하고 고백한 것이다. 또 욥은 12장 10절에서는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욥12:10)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리고 14장 4절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사람의 수명조차도 하나님이 정하셨다고 고백했다. “(주께서) 그 (사람)의 날을 정하셨고 그의 달 수도 주께 있으므로.”(욥14:5).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하신 날 수가 차면 즉 그의 수명이 다하면 그의 생명을 거두어 가신다고 욥은 말한 것 이다. 전도서 3장 1-2절에서도 솔로몬 왕은 이와 유사한 진술을 합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전3:1-2). 솔로몬 왕이 이 말은 표현만 약간 다를 뿐 내용은 욥의 고백과 동일하다. 이처럼 성경의 가르침은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이 모두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 정하신 바에 따르는 것이지 사람 개인이 자의적으로 결정하거나 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분명이 말한다. 이런 성경적 인식을 갖는다면 사람이 자기 생명의 주인이기에 마땅히 생명 과 삶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가져야 하고 그에 따라 원하지 않는 고통스런 생명을 연 장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죽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과 조력존업사 법안에 동의하기가 어렵다. 한국성인의 80% 이상이 이 법안을 지지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 시각에 벗어나는 이 법안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둘째, 고통 가운데 있는 말기과정에 있는 환자가 원한다면 그 뜻을 존중하여 빨리 죽게 해 주어야 한다는 이 조력존엄사 법이 통과되면 앞으로 생명을 존중하는 의식이 약화되는 결과를 넣게 된다. 물론 이 법안은 비록 “육체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말기 환자들에 한해서”라는 적용한다는, 단서를 달아 놓았지만, 일단 이것을 인정하게 되면 시간이 지나가면서 육체적 고통에서 정신적 고통으로 범위가 확대되어 가게 될 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네덜란드에서는 2002년 이 법이 시행되고 난 뒤 2017년도 한 해 동안 안락사와 의사 조력 자살로 6,585명이 사망 했는데, 그 중에서 정신적 고통을 이유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83명이나 포함되었다. 본래 안락사 제도는 존엄한 죽음을 위해 만든 것인데, 이렇게 되면 이 제도는 좀 더 쉽 게 죽게 만드는 법이 되어 도리어 인명경시의 풍조를 낳게 되는 악효과를 낳게 될 것 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어떻게 대응하고 행동해야 할 것인가, V.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대응 A. 고통의 최소화와 아닌 돌봄의 최대화 병상에 누워 고통스러워하는 말기 상태에 있는 부모나 가족의 보면, 자녀들과 가족들은 저렇게 고통 받으며 연명하는 것보다 고통 없이 일찍 죽는 것이 낫겠다.'라 고 생각하게 될 수 있다. 그런데 성도들은 가족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고, 해 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아울러 할 수 있는 영역의 일이 있고 또 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고통에 신음하는 부모님을 보고 고통을 덜어주고 싶어하는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환자를 일찍 죽게 함으로 그 고통을 종식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일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니고 우리 소관 영역에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일은 오로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주인이신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우리 가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은 환자의 고통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최대한으로 돌보는 일이다. 다르게 말하면 ‘고통의 최소화가 아니라 돌봄의 최대화’라는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환자가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은 인생이 피할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임을 아프지만 인정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인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또는 부모님이 병상에서 고통을 겪을 때에 그가 하나님의 더 의지하고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셔서 부모님이 그 기간을 주와 함께 보내게 되기를 더 간절히 기도하고 돌보는 일에 더 힘써야 한다. 이 고통의 문제는 비록 나의 지식으로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속한 것으로 인식하고, 사랑하는 이가 병상에서 힘들더라도 주의 손을 붙잡고 고통 없는 영원한 곳을 소망하면서 그 기간을 끝까지 소망으로 인내하며 나가도록 보살피고 기도해야 한다. B. 호스피스를 통한 고통완화와 편안한 임종 맞기 그러면 이런 돌봄과 기도 외에 실제적으로 환자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물론 있다. 그것은 환자를 완화 의료를 전문적으로 제공하는 호스피스 병원에 이전하여 그곳에서 전인적인 돌봄을 받으면서 남은 기간을 보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호스피스 병원은 통증완화를 위한 최적화된 의료 시설과 전문 지식을 의술을 갖춘 훈련된 의사와 간호사들이 말기 환자들에게 전문적인 의료와 아울러 전인적인 돌봄을 제공하는 병원이다. 성도들은 우리 사회가 조력존엄사를 제공하는 방법이 아니라, 호스피스 병원을 더 많이 설립하는 것을 통해 고통을 줄여주고 말기를 보낼 수 있도록 힘을 쏟을 필요가 있다. 실제로 우리 나라도 지난 정부 때인 2019년에 호스피스 서비스를 확대하는 내용의 1차 호스피스·연명 의료 종합계획(2019~2023년)을 만들어 발표한 바 있다. 2019년에는 호스피스를 원하는 환자 10명 가운데 2명 정도만이 호스피스에 입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일반적으로 적잖은 병원과 의료기관들은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호스피스 시설을 짓고 병원을 운영하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에 호스피스 병원이 매우 부족한 형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은 호스피스 병원에 들어가기 위해 대기하다가 사망하는 환자가 많다. 노인복지 차원에서도 나라는 호스피스 병원을 더 많이 세워 운영하도록 여론을 만들어야 한다. 동시에 호스피스 팀이 환자의 집을 방문하는 가 정형 호스피스 제도가 2020년부터 시행되고 있는데 이 제도도 점점 확대해 가도록 그리스도인 법조인들과 위정자들 그리고 시민들은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VI. 나가면서: 이제 곧 폐기될 소위 조력존엄사법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의사 조력 자살’ 법으로 이 법이 폐기되는 것은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22대 23대 국회에서 이런 법은 계속 발의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우리 사회가 반기독교적 가치와 반생명적 제도가 인권의 이름으로 만들어져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더욱 준비하고 필요하면 함께 힘을 모아 효과적으로 대응해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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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하 원장] ‘조력존엄사 법률안’ 폐기를 앞두고 안락사와 조력존엄사를 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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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6)
- 관계공동체 (1) 가정과 교회 직장은 관계공동체입니다. 공동체가 주는 유익이 많습니다. 관계가 잘 되면 공동체가 성장하고 관계가 깨지면 공동체가 무너지기도 합니다. 공동체는 인간관계입니다. 공동체가 하나 되는 데는 좋은 관계에 있습니다. 공동체에서 관계를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 천국은 행복한 관계공동체입니다. 공동체는 외로움을 이기게 합니다. 관계공동체는 서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관계공동체는 축복의 공동체입니다. 좋은 관계공동체가 되려면 서로 겸손히 섬겨야 합니다. 섬김의 공동체가 건강한 관계공동체입니다. 섬김의 리더십은 예수님의 리더십입니다. 관계공동체에 죄가 끼지 않아야 합니다. 죄가 끼면 갈등이 생기고 관계공동체의 위기가 찾아옵니다. 거짓과 위선이 끼면 관계공동체에서 신뢰 관계가 깨집니다. 관계공동체에서 의와 성결, 정직이 있어야 합니다. 성결과 정직은 신뢰 얻게 되어 관계공동체가 건강하게 됩니다. 관계공동체에서 언어가 중요합니다. 말 한마디 때문에 관계공동체가 세워지기도 하고 깨지기도 합니다. 서로서로 선한 말, 덕을 세우는 말을 해야 합니다. 정죄하고, 비난하고, 거짓말을 하면 관계공동체가 깨질 수도 있습니다. 관계공동체적인 삶에 적응해야 합니다. 관계공동체 (2) 여러 종류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구역과 기관, 소그룹과 교회가 공동체입니다. 공동체에서 관계가 잘되어야 합니다. 관계가 깨지면 공동체가 무너질 수 있습니다. 관계가 잘 되는 공동체는 성장합니다. 공동체에서 서로 좋은 관계를 맺도록 노력하고, 기도하고,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공동체의 리더는 관계의 중요성을 알고, 관계가 깨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공동체 훈련은 관계 훈련입니다. 좋은 관계의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공동체에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융통성의 리더십이 있어야 합니다. 관계공동체에서는 자기주장이 너무 강하면 안 되고 지나친 고집을 버려야 합니다. 누구와도 함께 어울릴 수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에서 관계가 소중합니다. 독불장군이 없습니다. 서로 하나 되는데 자신을 낮추고 양보해야 합니다. 공동체에서 서로 부딪치면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관계공동체의 힘은 좋은 관계에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관계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의리를 지키고 서로 섬겨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서로의 관계가 좋으면 교회에 가고 싶어지고 교회가 성장합니다. 지혜는 공동체에 소속되어 적응하고 관계를 잘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삶은 관계 속에 살고 목회는 관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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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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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5)
- 격려와 관계 인간은 누구나 격려가 필요합니다. 격려해 주고 격려 받으면서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격려는 관계의 열쇠입니다. 관계 목회는 ‘격려’ 목회입니다. 격려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인생을 격려해 주십니다. 말씀으로 격려해 주십니다. ‘근심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격려의 말씀입니다. 격려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목회자는 격려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히10:24-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격려는 식어 냉한 가슴에 불을 붙여줍니다. 엘리야 선지자가 낙심했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인간은 약하고 병들고 고난이 있고 낙심하는 자이기에 격려가 필요합니다. 힘들고 지친 인생들을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따뜻한 말로 격려하고 섬겨주면서 격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리더’는 격려자입니다. 교회는 격려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격려는 관계의 열쇠이고 서로 격려해 주는 교회가 성장합니다. ‘성령’은 ‘격려의 영’입니다. 편지로 이메일로 전화나 문자로 격려해야 합니다. 서로서로 격려해야 합니다. 격려의 씨를 심어야 합니다. 격려가 없고, 서로 비난하는 교회는 침체 됩니다. 격려를 연습해야 합니다. 목회하면서 격려의 중요성을 가르쳐야 합니다. 관계 목회는 격려 목회입니다. 겸손과 관계 그리스도인은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이 인격이고, 최고의 덕목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겸손은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관계의 열쇠입니다. 교만하면 관계가 깨집니다. 목회자는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용하십니다. 겸손한 자는 누구나 좋아합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배우고 묵상해야 합니다. 겸손한 자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배우려 합니다. 모세는 수많은 연단을 받은 후에 겸손하고 온유해졌습니다. 사도바울도 모든 일에 겸손했고 겸손함으로 목회하고 선교했습니다. 겸손은 온유의 성품이고, 온유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다윗과 세례 요한은 겸손했습니다. 겸손이 인간관계, 관계 목회의 열쇠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와 함께 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베드로 사도도 겸손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벧전5:5-6)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겸손의 중요성을 가르쳐야 합니다. 겸손히 목회해야 목회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겸손의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겸손해야 인내하고,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이깁니다. 겸손한 자는 모든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존경합니다. 겸손한 자는 비난이나 정죄하는 것, 비판하지 않습니다. 교만을 버리고 겸손을 선택해야 합니다. 겸손히 섬기고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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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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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4)
- 감정관리 관리가 중요합니다. 감정관리, 생각관리, 분노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감정관리 못 하면 다투게 되고 다투면 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생각도 관리해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의 생각을 붙잡고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긍정적인 생각을 해야 합니다. 생각을 관리해야 관계가 잘 됩니다. 분노관리 잘해야 합니다. 누구나 분노가 있습니다. 마음에 분이 가득할 때 기도해야 합니다. 분노와 혈기 때문에 인간관계가 깨지게 됩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지켜야 분노를 관리하게 됩니다.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감정을 만져 주어야 합니다. 감정은 기분입니다. 기분에 죽고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의 상한 감정을 치유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감정이 상한 자들이 많습니다. 남의 상한 감정을 이해해야 합니다. 상한 마음과 감정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상한 감정이 있을 때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와 기도해야 합니다. 말조심해야 합니다. 나쁜 말로 남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 조심해야 합니다. 감정을 다스리고 관리해야 인간관계가 잘됩니다. 목회는 감정을 다루는 지혜입니다. 감정의 기복이 심한 자는 상처가 많은 자입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상처를 받고, 상처를 주고 사는 자임을 이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순간마다 감정을 다스려야 합니다. 순간의 감정을 다스려야 합니다. 건강한 관계 ‘건강한 관계’가 있고 ‘병든 관계’가 있습니다. 관계가 건강해야 합니다. ‘건강한 관계’는 진실한 관계, 변함없는 관계입니다. 관계가 건강하면 사탄이 틈탈 수 없습니다. 관계가 건강하면 행복합니다. 건강한 관계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관계가 건강하면 교회가 성장합니다. 관계가 건강하면 관계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건강한 관계의 기초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되는 것입니다. 수많은 관계 중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면 병든 관계가 됩니다. 관계가 건강하면 관계의 위기를 이겨냅니다. 성령 충만하면 관계가 건강해집니다. ‘샬롬’ 평안은 건강한 관계의 표지입니다. 관계가 건강한 자는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가 적게 됩니다. 관계가 건강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관계가 건강하면 시기 질투가 적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누구나 만나고 싶어합니다. 사람을 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인간관계를 맺게 됩니다. 관계가 건강하면 교회가 성장하고 가정이 행복해집니다. 관계 훈련, 관계 연습을 하면서 관계가 건강해집니다. 건강한 관계는 고독을 이깁니다. 은혜받으면 관계 맺기를 기뻐합니다. 건강한 관계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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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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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3)
- 감사 제목 감사가 식어지는 말세입니다. 감사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죄성은 감사보다 불평을 잘합니다. 감사는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관계의 열쇠입니다. 천국은 감사가 넘치는 곳이고 지옥은 불평이 넘치는 곳입니다. 날마다 감사하면 세상에서도 천국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이유가 많습니다.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기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사탄은 악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사탄은 미움입니다. 선한 목자이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고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 주십니다. 우리를 사랑하되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나를 무조건 사랑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자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감사하지 아니하고 불평하는 자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은혜를 모르고 감사하지 못하고 배은망덕한 자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감사냐 불평이냐 감사를 선택해야 합니다. 감사 제목만 찾아 감사하고 감사로 기도해야 합니다. 사건 사고가 많은 위험한 세상인데 하나님이 지켜주어 안전하다면 감사 제목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불평 제목만 찾아 불평합니다. 감사는 건강과 행복의 열쇠입니다. 감사는 긍정적인 언어이고 적극적인 삶입니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자가 행복하고 감사가 넘칩니다. 감사는 영육의 건강에 유익합니다. 감사합니다. thank you라는 인사를 잘하는 자는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게 됩니다. 날마다 하나님께 세 가지로 고백해야 합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감사는 인격이고 인격의 성숙이고 건강한 믿음입니다. 시험에 넘어진 자 병든 자가 불평합니다. 불평은 삶을 불행으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교회에서 여러 가지로 섬길 수 있다는 것이 감사 제목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을 충성되이 여겨 사도의 직분을 주어 감당하게 하시니 감사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자의 마지막을 해피앤딩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경외했지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는 고난이 있었지만 감옥에서 꿈을 해몽하게 되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믿을 때 감사하게 됩니다. 우연은 없습니다. 참새 한 마리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범사에 감사하라 하나님의 감사 명령입니다. 순종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의미는 모든 상황 가운데 감사하라는 의미입니다. 힘들고 스트레스받고 고난의 때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고난이 유익이고 고난을 통해 배우게 되고 겸손해질 수 있기에 고난 중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고난당할 때는 왜 내가 고난당하는지 알 수 없는데 지나고 보면 고난이 유익이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삶의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를 방해하고 불평하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욕심과 비교의식 시기 질투 열등의식 때문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욕심 버리고 마음 비우면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골로새서 2: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해야 합니다. 감사는 믿음과 관계가 있습니다. 믿음 만큼 감사합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불평합니다. 사도바울과 예수님은 범사에 감사했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것 가지고 감사했습니다. 감사기도 후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했습니다. 냉수 한잔 마시며 감사해야 합니다. 가정이 있고 직장이 있고 사업 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죽은 나사로 앞에서 감사했습니다. 절망의 환경에서 감사한 후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감사하는 곳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시편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빌립보서 4:6-7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감사로 예배드리고 감사로 기도해야 합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헌금을 드려야 합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십니다. 감사로 찬송부르고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지혜와 영감을 주십니다. 저는 글을 쓰고 책을 만들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영감을 얻고 감사했습니다. 수많은 글을 썼는데 때마다 하나님이 영감을 주어 기록했는데 다시 그 글을 쓰라고 하면 똑같은 글을 쓰는 것이 힘들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습니다. 글을 써서 책으로 남긴다는 것이 감사 제목입니다. 하나님께 감사 교회에 감사 교회에 나아와 마음껏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이 감사 제목입니다. 무조건 감사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하기로 결정해야 합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감사할 때 사탄이 떠나게 됩니다. 불평은 사탄의 친구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 주의 종과의 만남 성도들과의 만남 만남에 대해 감사해야 합니다. 건강해서 하나님의 교회에 나아와 예배드리고 기도할 수 있다는 것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건강한 것, 병고침 받는 것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는 병을 고치고 우울증을 치유하는 최고의 약입니다. 날마다 감사해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아무것도 없어도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욥은 망하고 나서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차 감사의 말을 해야 합니다. 모든 것 하나님께 맡기고 감사해야 합니다. 감사는 힘이고 영성입니다. 감사하는 자가 믿음이 성장합니다. 감사가 성공의 비결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복 받고 쓰임 받은 비결은 다윗의 감사입니다. 역대상 29:13-14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나와 내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고 즐겁게 헌금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역대상 29:27-28 이스라엘을 다스린 기간은 사십 년이라 헤브론에서 칠 년간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을 다스렸더라 그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를 누리다가 죽으매 그의 아들 솔로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다윗은 늙도록 부하고 존귀를 누리다가 죽었습니다. 감사가 넘치는 가정이 행복하고 감사가 넘치는 교회가 성장합니다.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한 것 회개해야 합니다. 감사가 주는 유익이 많습니다. 감사는 절망과 스트레스를 이깁니다. 감사는 인간관계의 열쇠입니다. 감사하는 자는 인정 받고 사랑받습니다. 감사는 삶의 지혜요 처세술입니다. 감사하면서 일해야 삶이 행복합니다. 감사 제목도 많고 불평해야 할 제목도 많습니다. 감사 제목만 찾아 감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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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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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2)
- 갈등 누구에게나 갈등이 있습니다. 갈등을 해결해야 관계가 잘 됩니다. 교회 안에서 갈등이 있습니다. 사소한 것 가지고 갈등이 생깁니다. 갈등을 키우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의 죄성 욕심 이기심 때문에 갈등이 생깁니다. 날마다 욕심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조카 롯 사이에 소유 문제 때문에 갈등이 생겼지만 아브라함이 양보함으로 갈등을 처리했습니다. 양보한 아브라함이 복을 받았습니다. 갈등이 심해지면 관계가 깨집니다. 천국에는 갈등이 없습니다. 갈등과 관계는 연결됩니다. 잘못된 언어와 행동 때문에 갈등이 생깁니다. 가까운 부부관계 친구 관계에서도 갈등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갈등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지혜는 관계의 열쇠입니다. 지혜의 하나님께 날마다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갈등을 일으키고 갈등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대화 부족 오해 때문에 갈등이 생깁니다. 대화는 소통의 능력 관계의 힘입니다. 평소에 대화해야 합니다. 갈등이 생기면 피하지 말고 빨리빨리 해결해야 합니다. 두려움과 소심함 소극적인 태도가 갈등을 키우게 됩니다. 사탄은 사소한 것 가지고 갈등이 생기게 합니다. 날마다 성령 충만을 구하고 성령 받아야 은혜가 넘치고 마음이 넓어 사람에 대한 이해심이 깊어지고 사랑의 마음이 있기에 갈등을 일으키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감사와 관계 감사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감사하면서 목회해야 관계가 잘됩니다. 감사는 긍정의 삶입니다. 골로새서 2: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감사는 관계의 비결입니다. 감사하는 자는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관계가 잘됩니다. 받은 은혜 감사하고 배은망덕하지 않아야 합니다. 적은 것에도 감사해야 하며 감사가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하며 은혜를 아는 자가 관계를 잘하게 됩니다. 감사는 인격의 성숙함입니다. 배은망덕하고, 불평하는 자는 관계를 깨뜨립니다. 목회자는 감사의 중요성을 알고, 감사에 대해 가르치고, 설교해야 합니다. 감사는 인간관계의 비결입니다. 감사 제목만 찾아, 감사 기도해야 합니다. 감사는 관계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감사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고 불평합니다. 사탄은 불평하는 자의 친구입니다. 사탄은 관계를 깨는 자입니다. 감사하면 관계가 좋아집니다. 감사는 경건의 연습입니다. 감사는 긍정의 언어요. 긍정의 삶입니다. 인간은 부정적인 자보다 긍정적인 자를 좋아합니다. 받은 은혜만 기억하면 감사가 넘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고 설교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해서 감사가 넘쳐 목회하고 설교해야 합니다. 감사는 인간관계의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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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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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1)
- 가인과 아벨의 관계 가인과 아벨은 나쁜 관계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형제 관계인데 가인의 시기 질투 분노 때문에 아벨을 죽이는 살인사건으로 관계의 비극을 볼 수 있습니다. 가까운 가족 형제 관계도 깨질 수 있습니다. 관계의 깨짐은 사탄의 역사입니다. 사탄은 관계 파괴자입니다. 성령은 하나가 되게 하고 하나님은 좋은 관계 맺기를 원하십니다. 가인과 아벨의 비극적인 관계는 가인의 시기 질투 때문입니다.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시고 가인의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았을 때 가인이 아벨을 시기하여 죽이게 되는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시기 질투는 관계를 깨뜨립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관계를 세웁니다. 시기 질투를 버리고 넓은 마음으로 배려하고 덕을 세워야 합니다. 시기 질투는 인간의 죄성입니다. 인간의 죄성 때문에 관계가 깨집니다. 관계의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관계가 잘 되면 행복하고 깨지면 불행해집니다. 사울은 다윗에 대해 시기 질투하고 죽이려 하다가 스스로 관계를 깨뜨리고 사울 자신이 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관계를 깨뜨립니다. 가룟유다도 사탄이 들어가니 스승인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가룟유다의 마지막은 자살로 그 인생이 끝납니다. 사탄은 관계를 깨뜨립니다. 가정과 인간관계 가정은 하나님이 만드신 축복의 센터입니다. 가정이 중요하며 가정생활에 성공해야 합니다. 사탄은 가정을 공격합니다. 가정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가정생활의 성공이 삶의 성공 목회의 성공입니다. 가정이 평안해야 목회가 안정적입니다. 가정이 흔들리면 목회가 흔들리고 가정의 위기는 목회의 위기입니다. 가까운 가정에서 신뢰 얻어야 합니다. 가족식구들과 관계가 좋아야 합니다. 사탄은 가정에서의 인간관계가 깨지게 합니다. 사탄은 관계를 깨뜨리는 자이고 파괴자입니다. 가까운 관계가 깨지기 쉽습니다. 가정에서 인간관계가 깨지면 상처가 크고 고통이 큽니다. 가정의 화목은 관계의 지혜입니다. 가정에서의 인간관계가 좋으면 삶이 행복하고 목회가 행복합니다. 사탄은 계속 관계를 공격합니다. 가정이 하나되어야 합니다. 성령님은 하나되게 하십니다. 가정에서의 식구들이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충만은 인간관계의 열쇠입니다. 가정은 모든 것의 기초이고 뿌리입니다. 가정목회에 성공해야 합니다. 가정에서의 인간관계 승리는 목회의 승리입니다. 가정에서 예의 지키고 진실해야 합니다. 스트레스를 극복하고 매력을 개발하여 싫증나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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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대식 목사] 베스트 관계 목회(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