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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분기탱천(憤氣撐天) 의미를 되새기며
사람이나 짐승이나 공통점이 있다면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세계나 동물 세계에 불합리한 일들로 인하여 분한 감정이 하늘을 찌를 듯이 올라와 극한의 대립 상태가 되어 크고 작은 전쟁이 되는 것이다. 분함의 예를 보면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 분노가, 판결의 불공평을 볼 때, 권력 남용으로 인한 불이익이 주어졌을 때, 약자로 눌림을 당할 때, 개인 사적인 이익을 위해 탐욕 품는 것을 볼 때 등등 분노가 일어나게 된다. 그 분함의 정도가 극에 도달한 상태를 사자성어로 “분기탱천(憤氣撐天)”이라고 하는데 탱(撐)의 의미는 받쳐 올리다, 버티다, 찌르다의 의미를 가진다. 고로 “분한 기운이 하늘을 찌르듯 최고조의 상태에 이름”을 뜻하는 말이다. 중국 삼국 시대(위, 촉한, 동오)에 유비가 당시 형주(지금의 후베이성)를 발판으로 정치적 야망을 키우려고 했지만 그곳 관리들은 유비를 끝까지 지지하지 못해 형주를 잃게 되었고 정치적 야망도 사라지게 되었다. 유비는 형주가 자기를 배신했다고 생각하여 분기탱천하게 되었고 복수의 날을 기다렸다. 진(秦)나라의 영정도 신하들에 의하여 배신당하였을 때 그 마음이 크게 분노하여 천지를 뒤흔들 정도였다고 한다. 요즘 우리 대한민국이 북중미 월드컵을 보면서 축구 국가대표팀의 32강 탈락이라는 결과 때문에 각계각층 사람들이 분기탱천하고 있다. 경로당 할머니 할아버지들까지도 분개할 정도면 그 여파가 어느 정도 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원인이야 무엇이든지 간에 현실의 기분이 그렇다는 것이다. 분노는 두 가지로 나눈다. 개인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사적인 분노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분노, 일명 의로운 분노도 있다. 출 32:19에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 숭배에 빠졌을 때 모세는 분노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의분(義憤)이었다. 민 25:11에 이스라엘 거룩한 공동체 속에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들어와 음행의 모습을 보였을 때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와 분노를 대신하여 그 음행한 남자 시므리와 미디안 여인 고스비를 죽였다. 거룩한 분노인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질투와 분노를 가지고 음행 당사자를 죽인 일에 대하여 칭찬하며 평화의 언약으로 그의 후손들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허락하였다. 느 5:7, 13장에 느혜미야의 거룩한 분노가 나온다. 당시 유다의 귀족들 민장들이 가난한 자들의 것을 착취하고 있었으며, 백성들은 안식일을 더럽히고 이방 문화가 성전에 들어온 것에 대하여 의분을 발했다. 예수님께서도 성전 정화를 위해 의분을 발하셨고 외식하는 바리새인 서기관들을 향하여서도 의분을 발하셨다. 의분이 되려면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며 하나님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인생을 살다가 보면 우리의 삶 속에 분노의 대부분은 나의 교만과 나의 자랑과 과시와 욕심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에게 면에서 교훈하고 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20), 분노의 시대에 마음을 잘 다스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분노에는 앞장을 서고, 자신의 유익을 위한 분노는 다스려 가는 지혜자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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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어리석은 자가 되라
지혜의 사람인 바울은 (고전3:18)에서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는 모호한 말씀을 하였다. 과연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바울의 행간이 궁금해진다. 바울은 생생한 어구를 사용하면서 지혜로운 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어리석은 자가 되라고 권면한다. 그것은 겸비하게 배우는 자가 되라는 권면을 신선하게 표현한 것이다. 더욱이 벌써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에게는 아무도 무엇을 가르칠 수 없다. 플라톤은 ‘자기는 지혜를 배우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인간이다’ 라는 철학적인 말을 남겼다. 쿠인틸리안 역시 ‘자기들의 학식에 대해 그처럼 자신을 가지지 못했더라면 틀림없이 훌륭한 학자들이 되었을 터인데’ 라고 한 제자에게 말한 적이 있다. 또한 서양 속담에 ‘무지하면서도 자기의 무지를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피하라. 무지하지만 자기의 무지를 아는 사람은 지혜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가르쳐주라’ 는 말도 있다. 그러므로 지혜있는 사람이 되는 유일한 길은 자기가 어리석은 자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혜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자기의 무지를 고백하는 것이다. 옛 선비들에게도 이러한 어리석음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었다. 영등포 가리봉동을 지나 시흥에 이르는 중간지점, 왼편에 그리 높지 않는 야산이 있다. 그 산 이름이 독산(禿山, 민둥산)이며, 이 산 이름이 연유가 되어 그 인근 마을을 독산동이라고 한다. 이 산은 예부터 벌거벗었기로 그 같은 슬픈 이름을 얻은 것 같다. 그런데 조선시대 초기에 이곳에 살았던 유명한 선비 강의(姜艤)의 호가 독산(禿山)이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강의를 찾아와 자네가 호를 독산이라고 한 것은 살고 있는 지명을 따른 것인가 아니면 딴 뜻이라도 있는 것인가 하고 물었다. 이에 그는 자기 호가 왜 독산이라고 지었는지 늘어놓았다. ‘내 집 지은 곳에 산 하나가 있는데 활딱 벗겨져서 나무가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독산이라 한다. 어찌 이 산은 본래부터 나무가 없어 그러하리오. 한성 외곽에 자리잡은 까닭으로 도끼로 찍히고 소나 염소 따위에게 먹히는 것이 나날이 심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이 산 밑에서 성장하면서 개연히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탄식하면서 그 독산의 처지와 나의 처지를 비교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의 본성도 또한 이 산의 나무와 같은 것인데 진실로 그 마음을 바로 다스리지 못하면 뭇 사욕이 엄습해 오는 것과 바로 이 산의 나무를 도끼와 소나 염소가 해치는 그것과 같다. 감히 이것으로 표준하여 스스로 나의 마음을 경계하는 것이다’ 마음에 나무가 없다는 독산의 말은 어쩌면 현대인에게 공통된 상황의 날카로운 지적으로 보인다. 사욕의 도끼날에 남벌되어 메마르고 벌거숭이가 되어버린 민둥산, 너도 독산이요, 나도 독산이다. 우리 옛 선조들은 이 같은 마음의 벌거숭이, 마음의 어리석음을 자처하는 것으로 사리에 겸손하게 대하는 정신적 전통을 지니고들 살아왔던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도 이 같은 어리석음의 가치를 두는 인간을 찾아볼 수 있다. 삼성산이 시흥 쪽으로 뻗어오다가 부러질 듯 단절된 목에 형세가 뛰어나갈 것 같은 험한 바위가 바로 호암이다. 범이 달리는 형세의 바위라 그 기세를 누리기 위해서 호압사를 짓고, 다시 그 북쪽에 호랑이를 위업하는 사자암을 지은 것이다. 지금도 그 지점에 호압사며, 사자암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애써 어리석음에 가치를 두었던 흔적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율법에 능통하였던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참 진리를 발견한 이후에 이전에 자기가 알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지혜를 포기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혀지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의를 포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바울처럼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립보서3:8-9),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 젊은 시절 한 때 ‘성경박사가 아니라 성경밖에 모르는 바보’ 라는 좌우명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그 시절이 그립다. 세상의 수많은 때가 묻어있는 나 자신을 볼 때 심히 부끄러움을 금치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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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무속 신앙에서 유래된 용어들 2: 용어의 의미로 본 무교의 명칭
1. 서언(序言) 우리 말에는 종교적으로 영향받은 용어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다. 이는 오랜 역사 동안 뿌리내린 불교, 유교, 도교 등의 영향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건국 신화인 단군신화와 여기에 등장하는 용어들도 실제로는 무속적인 내용이 많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기고를 했으며, 또한 이런 용어들은 우리의 기독교 언어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기도 하다. 본 기고에서는 이를 발췌하여 비교 분석하면서 사용할 수 있는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을 구분하여 올바른 우리의 기독 언어생활을 도모하고자 한다. 2. 무속 신앙을 표현하는 여러 용어 1) 샤머니즘(shamanism): 이 말은 무속 신앙을 대변하는 전 세계적인 통용어로서 종교학자들이 무속 신앙을 종교적인 관점에서 독립된 종교로 존중하려는 의도에서 주로 사용해 오는 말이다. 본래 이 말은 17세기에 시베리아 퉁구스계 민족이 주술사를 의미하는 샤만(Shaman)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유럽의 독일 지역으로 전해졌다가 영어권에서 shamanism으로 정착된 말로 유추하고 있다. 뜻은 퉁구스의 어원인 샤(scha)의 의미인“생각하다, 알다, 이해하다”로 보고 있으며, 또한 샤먼은 초자연적 힘을 가진 사람이나 신령(神靈)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 사람으로서 질병 치료사, 마술사의 역할도 한다고 여기고 있다. 2) 한국에서의 용어 : 전통적 용어는 무속(巫俗), 무교(巫敎), 무(巫)라고 하는데, 무속(巫俗)은 불교학자 이능화가 이를 전통적인 관습으로 이해하여 처음 사용한 말이며, 지금은 국문학자들과 민속학자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다. 무교(巫敎)는 개신교 신학자 유동식 교수가 처음 사용한 말로 우리 기독교에서 주로 사용하는 말이다. 무(巫)는 인류학자 조흥윤이 사용한 말이며, 한국의 샤머니즘을 독특한 개성을 가진 전통으로 존중한다는 뜻이 있다. 또는 무술(巫術)은 신적인 존재를 불러들이는 무당(巫堂)을 중심으로 한 신앙 체계이며, 이들은‘이상 심리 상태’에서 신령이나 정령 등 초자연적 존재와 직접 교류하고, 이 사이에 예언, 탁선, 복점, 치병, 제의 등을 행하여 샤머니즘 신앙의 중심이 되는 말이다. 3) 한국의 무속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용어: 우리나라의 무속인들은 과거부터 자신들을 당골, 당골네, 당골 애미로 호칭되기를 좋아했다. 그 이유는 당골은 제정일치 사회였던 고조선 시대의 단군(檀君)과 고대 신라 왕의 명칭인 차차웅(次次雄)의 어원을 가진 역사적인 말로서, 무속인 스스로 자신들을 그 시대처럼 신의 대리인으로 선택받은 귀한 존재임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다. 3. 맺는말과 제언 불교적 용어에 비해서 무속적인 말들은 과거부터 무속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 때문에 일반 용어에서 구분이 힘들 정도의 용어들이 많은 것은 아니다. 앞서 소개한 샤머니즘이나 무속 등의 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용어들은 그들의 종교적이거나 신앙적인 용어들로 치부하고 다소 비판적인 말로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문제 의식을 가지고 구분할 말도 아니다. 그래도 이런 용어들을 분석하고 소개하는 것은, 이런 말들의 실체와 이런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적시하고자 하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으로, 앞으로도 계속 이러한 무속적인 용어를 논하면서 우리 믿음의 정체성과 소중성을 밝히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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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나는 누구인가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며 살아갑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학력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직업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재산과 성공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이런 것들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건강도 잃을 수 있고, 재산도 없어질 수 있으며, 명예도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존재가 이런 것들 위에 세워져 있다면 우리는 늘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전혀 다른 정체성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종교를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매우 놀라운 선언입니다. 우리가 지혜를 얻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지혜가 되십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기 위해 스스로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의가 되십니다. 우리가 거룩해지기 위해 자신의 힘으로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거룩함이 되십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구속이 되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하나님께 인정받을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바라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은혜를 믿는 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그리스도인의 자랑은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내 능력이 아닙니다. 내 열심이 아닙니다. 내 공로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은 교만을 버리고 비굴하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담대한 삶을 살라는 초청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우리의 능력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실수해도 소망을 잃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신분이 우리의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묻습니다. “너는 무엇을 가졌는가?” “너는 얼마나 성공했는가?” 그러나 복음은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너는 누구 안에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립니다. 자신을 증명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남과 비교하며 살지 않습니다.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지혜가 되시고, 나의 의가 되시며, 나의 거룩함이 되시고, 나의 구속이 되셨음을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복음이 주는 새로운 삶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입술에 이런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나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합니다. 그분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 고백이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참된 능력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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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경남교회가 새 교육감에게 거는 기대
6·3 지방선거가 끝나고 지자체별로 선출 단체장들의 취임식과 함께 새로운 지방자치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경남 지역에서는 특별히 교육 현장의 수장 경남도교육감 선거에 관심을 끌었다. 대부분 교회에서 새 교육감 선출에 더한 관심이 있었다. 왜냐하면 지난 12년 동안 진보 성향의 교육감이 선출되어 교육행정을 펴왔다. 이에 따라 교회와 일부 갈등의 부분이 있었던 기간이 있었다. 광역지자체 교육감 선출은 정당 공천이 없다. 다만 보수와 진보의 정책 색깔을 분명히 하면서 선거를 하고 있고 교육행정을 펴고 있다. 그래서 선출된 이후에도 정책 성향이 뚜렷이 다르게 적용되어 왔다. 지난 12년 동안 경남도교육감은 진보 교육정책을 많이 폈다. 교사의 인권보다 학생 인권을 중시하고 교실에서 경쟁보다 협력을 중시하는 진보 교육정책이 많이 도입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수월성 교육을 지양하고 평등과 협력을 중시함으로써 평균 기초학력이 떨어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학생 인권을 중시함으로써 교육 현장에 참다운 인성교육이 하향했다는 지적도 많았다. 무엇보다 학생 인권을 중요시함으로써 나쁜 문화가 학생들에게 파고들 때 제어 기능이 약화되는 역기능이 생겨나는 일을 낳기도 했다. 경남 교육 현장에서는 지난 2019년 경남학생인권조례 제정 추진을 두고 특히 교회가 연합하여 반대 운동을 펼쳤다. 경남에서 유일하게 반대 투쟁을 통해 무산시킨 사례를 만들었다. 당시 교회는 경남도교육청이 추진하는 학생인권조례 제정이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첫째는 학생 인권 중시의 현장에 교회의 보편적 복음 활동을 하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에게 마음껏 복음을 전하고 학교 담장 밖 교회에서 복음을 듣고 인격을 도야할 수 있는 지금껏 한국 사회의 보편적 인격 양성의 사회적 기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교회가 더욱 걱정하는 부분은 진보 교육의 학생 인권 중시에서 학교폭력을 막을 수 있다고 하지만 자못 역기능을 낳을 수 있는 점도 중요하다. 학교폭력을 막기 위해서는 교회 활동 등 신앙생활을 통해 인격을 성숙해 가는 과정을 만들 수 있다. 셋째, 마약, 동성애 등 나쁜 문화 물결이 학교 현장으로 침투할 때 학생 인권이 이를 제어하는 데 힘들게 된다. 젠더 문화의 확산이 우리의 가족 문화, 더 나아가 전통적 가정의 문화를 파괴하는 현장이 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이미 건강한 경쟁 문화를 통해 인재를 발굴하고 첨단으로 치닫는 소위 AI 산업 문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경남은 특히 역사적으로 선각자들이 많고 구국에 몸을 던진 거장들이 많았던 곳이다. 이에 나라를 사랑하고 세계를 선도할 수 있는 글로벌 인재를 키우는 요람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다. 이에 따라서 경남의 청소년 교육 현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짐작할 수 있다. 경남의 새 교육감은 이러한 보편적 교육 지향점 앞에서 교육정책 수립에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보여진다. 진보 성향의 교육정책을 깡그리 무시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권순기 교육감은 그동안 수월성 교육을 받고 최고의 학력을 이수한 경남의 큰 인재이시다. 국립대학교 총장을 두 번 역임하고 과학자로서 인문학에 조예를 갖춘 교육 현장의 지도자로 손색이 없는 분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경남 지역 교회가 그동안 경남 지역 교육 현장이 더욱 건강해지도록 많은 애를 쓴 사례들을 이해하고 있을 줄 알고 있다. 교회가 단순히 학교 현장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제반 여건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가 아님을 알고 있을 것이다. 교회 복음이 들어가고 교회와 소통하는 교육 현장이야말로 나라의 미래 동량들을 양성하는 지름길이 된다는 사실을 지난 우리의 역사에서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130여 년 전 캄캄한 조선 땅에 선교사들의 교육사업 헌신과 사랑의 섬김이 오늘의 대한민국 자양분이 되었다는 점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청소년 한 생명의 바른 교육이 나라의 미래 큰 비전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새로운 교육정책을 펼쳐주시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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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왜 십자가여야 하는가
우리는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더 좋은 환경, 더 많은 소유, 더 높은 자리에서 삶의 만족을 얻고 싶어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합니다. "높아져야 성공이다. 강해져야 살아남는다. 남보다 앞서야 행복하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른 길을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오직 십자가뿐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실패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권력을 가지지 않으셨고, 세상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조롱당하며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묻습니다. "왜 하나님은 하필 십자가를 선택하셨을까?" 그 이유를 알려면 인간의 가장 깊은 문제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사탄은 하와를 유혹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죄의 시작은 단순히 선악과를 먹은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마음, 더 높아지고 싶었던 욕망이 죄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인간의 역사는 그 욕망의 역사였습니다. 가인은 동생보다 높아지고 싶었습니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높이려고 했습니다. 나라와 나라가 싸우는 것도, 사람과 사람이 다투는 것도, 가정과 사회의 갈등도 깊이 들어가 보면 결국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고린도교회는 많은 은사와 축복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가장 먼저 그들의 분쟁을 지적합니다.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속하였다." 사람들은 자기 편을 만들고 자신이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문제는 바울도 아니고 아볼로도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신앙생활조차 나를 높이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것도, 성경을 많이 아는 것도, 봉사를 열심히 하는 것도, 자칫하면 나를 자랑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교만을 끝내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은 분이셨지만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8절은 말씀합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세상은 올라가야 산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내려오심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예수님의 죽음이 아닙니다. 내 교만이 죽는 자리입니다. 내 자랑이 끝나는 자리입니다. 내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는 착각이 무너지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복음은 우리를 더 큰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하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내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내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내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붙드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오늘날 세상은 여전히 우리에게 더 강해지라고 말합니다. 더 성공하라고 말합니다. 더 높아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조용히 우리를 부릅니다. "내게로 오라." 그곳에서 우리는 새로운 진리를 발견합니다. 내가 높아져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붙드시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내가 강해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나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완전해야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죄인 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참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에는 미련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이 십자가 앞에 서기를 원합니다. 그곳에서 우리의 교만은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며,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참된 복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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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눈물의 의미
- 눈물은 단순한 슬픔이나 기쁨 같은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우리 눈을 보호하고 건강상태를 유지하는 생체방어 시스템이기도 하다. 눈물은 겉보기에는 투명한 물 같지만, 사실은 우리 눈의 건강을 지탱하는 복합적인 액체이다. 눈물의 주성분은 98%가 물이며, 나머지 2%가 눈을 보호하고 영양을 공급하는 핵심성분들로 채워져 있다. 또한 눈물은 발생원인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한다. (1) 기본눈물은 눈을 촉촉하게 하고 각막에 영양을 공급하며, 이물질과 박테리아로부터 눈을 하루 종일 보호하는 필수적인 눈물이다. (2) 반사눈물은 눈에 들어온 유해한 이물질이나 자극 물질을 씻어내기 위해 다량으로 분비된다. 항체 성분이 포함되어 감염방지에도 도움이 된다. (3) 감정눈물은 심리적으로 스트레스 호르몬 배출을 돕고, 사회적으로는 도움을 요청하거나 유대감을 촉진하는 신호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같은 눈물이라도 이 감정눈물에는 교감신경의 활성화로 인해 염분 농도가 더 많아서 짠맛을 잘 느낀다. 흥미로운 것이 있는데 우리 선조들은 흐르는 눈물과 고여 있는 눈물을 구분하였다. 흐르는 눈물은 누(㴃)자를 쓰고, 고여 있는 눈물은 누(泪)자를 썼다. 왜 같은 음인데 구지 다른 단어를 사용했을까? 흐르는 눈물을 뜻하는 누(㴃)자는 상형(象形)으로 미루어 흐르는 눈물 형상이다. 눈 모양의 호(戶)자 아래에 눈물방울을 연상시키는 점이 있고, 그 점 아래 큰 대(大)자가 크게 흐르는 눈물 자국과 같은 복합된 인상을 준다. 그래서 줄줄 흐르는 눈물의 누(㴃)인 것이다. 이에 반해 고여 있는 눈물을 뜻하는 누(泪)는 물 수(水)변이 눈물을 흐르지 않는 상형으로서 누(泪)인 것이다. 즉 눈물이 나긴 나는데, 눈의 경계를 넘어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상태의 그런 눈물이다. 서울 서대문 밖에 ‘눈물의 다리’란 옛 지명이 남아 있다. 지금은 복개되었지만 작은 개천에 나무다리가 걸려 있었고, 그 다리를 예로부터 눈물의 다리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눈물의 다리가 한자어로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눈물을 뜻하는 누교(泪橋)로 표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교(泪橋)는 어떤 사연의 다리이기에 그 다리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게 울어야 했던 것인가? 이 누교 건너편은 바로 서소문 형장(刑場)이었다. 1801년, 1838년 그리고 1866년에 걸친 천주교 박해 때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던 바로 그 형장이다. 그 순교자의 가족이나 친지들은 이 다릿목에서 이별을 해야 했다. 그 처절한 죽음의 비명 소리에 귀를 막고 몸부림을 치던 바로 그곳이다. 처형이 끝나고 다리 쪽으로 실려오는 시체를 향해 달려가 쓰러져 울고 또 울던 그런 다리이다. 산 자와 죽은 자의 한계를 그었던 다리,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잠시 후 피범벅이 된 시신으로 돌아와서 맞이해야만 하는 그런 눈물의 다리였다. 그런데 그 눈물의 다리가 왜 흐르는 눈물이 아닌, 고여 있는 눈물을 뜻하는 누교(泪橋)라고 표기한 것일까? 왜 정든 자와 사별하는 그런 극한 상황에서까지 눈물을 속으로만 흘려야 했던가? 옛날 우리의 어머니들은 결코 눈물을 흘리며 울지 않았다. 고여 있는 눈물을 닦을 때도 손수건이 아닌, 옷고름이나 행주치마 끝으로 살며시 눌렀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눈물이 아닐까? 회개가 사라진 지 오래 되었고, 천국과 지옥에 대한 설교를 들으려고도, 하려고도 하지 않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무감각한 시대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11:17)에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우리들은 다윗의 기도를 익히 알고 있다. (시편 56:8)에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사오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 땅에서 우리들은 많이 울어야 할 것이다. 왜 그런가? 천국에는 더 이상이 눈물이 없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21:4)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라고 말씀한다. 오늘 하루 ‘하나님이여 나에게 누(泪)가 아닌 누(㴃)의 눈물을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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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눈물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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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영적 싸움에 “VICI(이겼노라)”가 있는가?
- 전쟁에는 반드시 이겨야 하듯, 영적 싸움에도 반드시 승리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종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로마 제국 시대 율리어스 카이사르(Jullius Caesar – 영어표기 시저. 성경표기 가이사)는 전쟁을 스포츠처럼 즐겼던 사람이다. 그가 남긴 명언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The dice(die) is cast. 주사위는 던져졌다. 폼페이우스가 로마 원로원과 음모를 꾸며 카이사르를 죽이려고 로마로 복귀할 때 루비콘강을 건너기 전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오라고 하였다. 명령을 받은 카이사르가 생각해 볼 때 가만히 있으면 자신은 파멸될 것이고, 무기를 들고 루비콘 강을 건너오면 로마의 역적이 될 것이므로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 카이사르는 고민하였다. 이래도 죽을 상황이고 저래도 죽을 상황인데 “죽을 때 죽더라고 싸우고 죽자” 결단을 내리고 무기를 들고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명언을 남겼는데 “주사위는 던져졌다”고하였다. 이때부터 특별한 결단을 하여 어떤 일을 할 때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왔노라[VENI-고대 라틴 발음(웨니), 현대 라틴 발음(베니), I came] 보았노라[VIDI-고대 라틴 발음(위디), 현대 라틴 발음(비디), I saw] 이겼노라[VICI-고대 라틴 발음(위키), 현대 라틴발음(비키,비치), I conquered] 이 문구는 B.C 47년 카이사르가 소아시아 파르나케스를 격파한 후 원로원에 보냈던 전승 보고서 첫 줄이다. 이 문구를 우리 한국인들이 체육대회나 단합대회 때 원문을 약간 변경하여 “왔노라 싸웠노라 이겼노라”로 사용하기도 한다. 어쨌든 인간적으로 카이사르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 그는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폭군(暴君)이 아닌 성군(聖君)의 모습으로 부하들을 다스리며 덕(德)의 정치를 했다. 카이사르의 인생철학이 있었는데 “강자에게 영예를 양보하고, 약자에게 필수품을 양보하라”였다. 인생철학 그대로 그는 전리품들을 자신이 챙기지 않고 부하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고 개인적 재산을 가지고 법률사무소, 마켓, 편의시설을 지어 제공함으로 많은 사람의 신뢰를 쌓아갔으며 자신은 검소한 삶을 살아 타인들로하여금 인정받는 지도자였다. 또한 유머 감각이 있어 부하들에게 마음의 안정을 주었고. 외부 적군들을 정복하기보다 더 힘든 내국 통치를 덕(德)의 정치로 이끌었던 지도자였다. 하지만 죄의 성향을 가진 인간들은 선한 정치를 하는 카이사르를 온전하게 두지 않았다. 카이사르와 친했던 부하 브루투스를 배신자로 만들어 음모를 꾸며 살해하도록 하였다. 믿었던 부하에게 배신당해 칼에 찔려 죽어가면서 마지막 남긴 말이 “브루투스 너마저...!” 인생 허무함으로 막을 내렸다. 훗날 카이사르에 대한 평가를 할 때에 일부 부정적 평가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좋은 평가를 하는데 로마에 수많은 지도자가 있었지만 카이사르를 “로마가 낳은 창조적 천재”라고 결론지었다. 신앙의 싸움을 하고 최후 주님 만나는 그날 주님께서 주신 사역의 현장인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VICI(이겼습니다)” 이렇게 승전 보고를 한다면 멋진 인생을 산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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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영적 싸움에 “VICI(이겼노라)”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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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다시 논하다
- 지난 9월 3일 전국 신문 1면 톱뉴스를 장식한 중국 베이징에서 보내온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중국 전승절 8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중국 시진핑, 러시아 푸틴, 북한 김정은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서늘한 기운으로 다가왔다. 마치 한반도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음흉한 모습이랄까. 아무튼 중국 전승절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답답하지만, 중국은 한 장의 사진으로 대한민국을 비롯한 서방권 제국들에게 도전하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작금의 세계 정세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후 강한 드라이브로 관세폭탄을 세계 각국에 던지면서 ‘강한 미국’을 시현하고 있다. 이에 대한 사회주의 동맹의 이들 세 나라는 단합의 자세를 즉각 보이는 것으로,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한참 국민 정서를 흐트려놓았다. 문제는 이날 사진 한 장에서 세계는 지금 경제전쟁과 이념패권이 깊어지고 있다는 진단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세계를 주도하는 미국의 경제력에 부단히 따라붙고 있는 중국을 미국은 본격 견제하기 시작했다. 세계 각국 언론사 탐사취재팀은 오늘의 중국이 시진핑의 장기집권을 비판하면서 위기로 치닫고 있다는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반면에 중국의 건재함을 진단하면서 미국의 경제력을 압도해 간다는 보도를 내기도 한다. 세계 새로운 산업 트렌드인 AI 산업시대는 중국이 세계를 이끌 것이라는 학자들의 진단도 있다. 등소평 후 개혁개방의 대전환이 이제 자본주의의 현장 미국을 넘어설 것인가. 아니면 공산사회주의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이끄는 데 한계가 왔다는 주장이 맞을 것인가. 쉽게 전망할 수 없는 형편 아니겠는가. 상황의 전개가 어찌되든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야욕에 대해 쉽게 시선을 돌릴 수 없다.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북한의 3각 대응이 우리에게는 조선 말 위기의 한반도가 되지 않을까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해방 후 좌우 대립에서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가 아닌가. 주변 강대국이 새롭게 이념전쟁화하는 신냉전시대, 우리는 갈 길을 모르고 깊은 내전(內戰)에 휩싸여 있다. 필자는 얼마 전 우리의 근대사 영웅 안중근이 1907년 하얼빈에서 원수 일본 총리 이토를 쓰러뜨린 후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주창했던 이야기를 영화 《하얼빈》을 통해 소개한 바 있다. 다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오버랩된다.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은 이 비상하고 위험한 정세일지라도 복음의 실크로드를 열심히 닦아내는 것이다. 이 사명의 복음운동에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의 길이 열릴 것이다. 사형집행을 앞둔 차디찬 감옥 바닥에서 그는 5가지의 평화제안을 했다. 첫째, 조선·일본·청나라 3국이 연합하여 협력공존의 협력기구를 만들자. 둘째, 3국이 공동은행을 설립·운영하자. 셋째, 3국이 공동연합하여 서양 침입에 공동대처하자. 넷째, 3국의 경제개발 지혜를 일본에서 배우자. 다섯째, 상호 존중하고 평화를 유지하자. 어쩌면 굴욕 같지만 일본에 대해 조선을 식민지화하지 말고 아시아를 평화의 공동지대로 만들자는 혁신적 제안이었다. 일본에 36년간 식민지 지배를 받고 해방되어 6·25를 겪으며 처참한 빈국이 되었던 나라, 이 나라가 자유민주의 자본시장경제의 기틀에서 세계 10위 내 경제 강국으로 성장했다. 성공과 부흥 끝에 다가오는 또 다른 위기인가. '경제 보물섬'이 되어버린 지금의 대한민국에 대해 눈독으로 가득 찬 주변 나라들을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한국교회가 강력한 복음운동으로 나가야 한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동아시아에 새롭게 심도록 해야 한다는 논지이다. 먼저 동아시아 복음평화운동으로 한반도의 복음통일을 이루는 데 부단한 사명 수행이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동아시아 복음평화운동에 주변 모든 나라의 교회가 연합하는 새로운 역사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약관의 나이에 오직 식민지를 꿈꾸는 적장을 총탄으로 쓰러뜨리고 위대한 동양평화론을 주창할 수 있었을까. 젊은 영웅이 피를 토하듯 던진 이 어록(語錄)을 깊게 되새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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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다시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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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숙 권사] 다시 뛰게 하시는 하나님
- 지금, 다시 일어서야 할 누군가에게 우리는 모두 한 번쯤, 삶의 무게에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 설명할 수 없는 억울함, 그리고 말하지 못한 상처가 마음을 짓누를 때, 어디서 다시 힘을 얻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그런 때를 겪은 사람들에게도 말을 건넵니다. 이사야서 33장은 그런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주전 8세기 말, 남유다 왕국은 앗수르 제국의 위협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당대의 앗수르는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고 조공을 강요하며 공포로 지배하던 강대국이었습니다. 남유다 또한 그들의 침공 앞에서 불안에 떨고 있었고, 때때로 생존을 위해 조공을 바쳐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그 위기의 시기에, 이사야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황충의 때 같이 사람이 너희의 노략물을 모을 것이며, 메뚜기가 뛰어오름 같이 그 위로 뛰어오르리라.”(이사야 33:4) 이 구절에서 ‘사람’은 바로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 곧 지금까지는 억눌리고 침묵했던 남유다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고난을 겪고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되찾는 주체로 바뀝니다. 반대로 ‘너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앗수르 제국을 지칭합니다. 그들이 강제로 빼앗고 축적한 부와 권세는 결국 하나님의 공의로 인해 무너지게 될 운명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노략질했던 것들이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회복의 선언입니다. 또한 ‘메뚜기’는 그 당시 중동에서 파괴력 있는 집단 행동의 상징이었지만, 여기서는 회복된 유다 백성의 힘찬 움직임과 생동감 있는 회복의 이미지로 사용되었습니다. 작고 연약한 메뚜기처럼 보였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제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다시 일어나는 존재로 변모합니다. 마지막으로 ‘그 위’는 앗수르가 차지하고 있었던 권세와 재물, 전리품이 놓여 있던 자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위로 뛰어오른다는 것은 단지 물리적 회복이 아니라 위치의 역전, 즉 억압에서 회복으로의 전환을 뜻하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던 자들이 결국 무너지고, 그들이 빼앗은 것들을 백성들이 되찾게 되는 회복의 약속입니다. 황충과 메뚜기, 작고 연약한 존재 같지만 그들이 몰려올 때 그 힘은 대단합니다. 하나님은 그 이미지를 사용하셔서 “나의 백성들이 마침내 일어나 다시 뛰게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십니다. 혹시 지금 억울한 일을 겪고 계신가요? 말 못 할 상처나, 기대했던 것이 무너져 침묵 속의 눈물을 흘리고 계신가요? 사람들은 몰라도, 주님은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회복시키겠다. 네가 빼앗긴 것을 다시 뛰어오르게 하겠다.” 이사야 33장 4절은 단순한 문학적 이미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회복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억압을 꺾으시고, 넘어진 자들을 다시 일으키십니다. 사람 눈에는 우리가 작은 메뚜기처럼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우리는 회복의 주인공이 됩니다. 오늘도 믿음으로 이렇게 고백해 봅시다. “주님, 제가 다시 일어서겠습니다. 주님이 회복하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백을 들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뛰는 날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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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숙 권사] 다시 뛰게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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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왜 7을 행운의 숫자로 보는가?
- 1. 서언(序言) 오래전의 본지의 기고에서 동양권에서 주로 기피하는 숫자 4(四)와 서양권에서 기피하는 13과 13일의 금요일에 관하여 기술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런 기피하는 숫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행운으로 여기는 숫자도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7이다. 본 호에서는 왜 7을 행운의 숫자로 보는지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유래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숫자 7을 왜 행운으로 여기는 유래와 의미 (1) 고대 문명과 종교에서 유래한 신성한 숫자 1) 고대 메소포타미야 문명과 이집트 문명의 7일 주기: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보는 이곳에서 7은 매우 중요한 숫자였다. 특히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은 태양과 이를 자전과 공전으로 움직이는 행성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그 주기성을 통해 계절 변화와 농업에 적용했다. 이런 관계로 7행성을 신으로 여기는 동시에 하늘과 지구를 연결하는 중요한 요소로 간주했다. 또한 이 천체를 기준으로 일주일이란 시간이 나왔고, 이는 고대 이집트도 마찬가지였다. 이들도 7을 한 주간으로 삼았고, 농업과 계절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7을 좋아하고 행운의 숫자로 여긴 것이다. 2) 종교적인 상징성: 종교에서도 7은 매우 중요한 숫자였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6일간 세상을 창조하시고, 7일째 안식하셨으며, 요한계시록을 비롯한 성경 전반에서 7이 자주 나오며, 이를 신성함과 완전수로 여긴다. 불교에서도 석가모니가 태어날 때 7걸음을 걸었다는 전설과 칠각(七角) 등의 7을 중요시했다. 이슬람교는 하늘을 7층으로 믿었고, 메카를 도는 순례 의식도 7회로 했다. 이런 면에서 7은 종교 전반에 걸쳐 신성한 숫자로 여겨왔다. (2) 자연현상과 관련된 특별함 : 앞에서 고대 메소포타미야 문명과 이집트 문명에서 태양과 행성의 연관성으로 7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했는데, 이는 다른 자연현상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자연현상 속에도 7은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면, 무지개의 7가지 색깔도 그러하고, 기본적으로 음악의 7음계도 이와 연관되었으며, 인간의 감각도 7가지로 분류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자연의 질서나 구조에서 7을 완전함과 조화를 상징하는 숫자로 여겼다. (3)문화와 전통에서 7의 특별함 : 다양한 문화권에서도 7은 행운을 상징하는 숫자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이를 세분화해서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1) 서양 문화에서의 Lucky 7: 미국과 서양 문화에서는 7을 ‘럭키 세븐(Lucky Seven)’으로 인식하면서 7은 길흉을 결정하는 중요한 숫자로 여겼다. 슬롯머신 같은 도박에서도 777을 잭팟으로 하고 있다. 즉 7은 곧 행운과 성공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이다. 2) 동양 문화의 경우: 동양에서는 숫자 8이 주로 복을 상징하지만, 7 역시 귀신을 쫓는 행운의 숫자로 여겼다. 예를 들면 중국은 7이 하늘과 땅, 인류와 자연을 연결하는 중요한 숫자로 인식하며, 인간과 우주의 조화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한국에서는 7일장을 치른다거나, 칠석(七夕)처럼 7이 들어간 풍습이 많이 있다. (4) 7의 완벽함과 심리적인 영향 : 심리학자인 조지 밀러의 ‘매직 넘버 세븐’ 이론으로, 인간은 7개의 정보를 가장 효율적인 숫자로 여겼고, 사람의 인지능력에 가장 좋은 숫자라고 했다. 피타고라스도 7을 완벽한 숫자라고 했으며, 일반적으로 7은 시각적으로는 가장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독립적이고 특별한 느낌을 준다는 심리적 요인이 있다는 분석도 했다. 3. 기독교인으로서의 관점 및 결어 이상으로 볼 때 숫자 7이 행운의 숫자로 여기는 이유는 역사적, 종교적, 문화적, 심리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다시 말하면 고대 초기 메소포타미야 문명과 이집트 문명에서 시작된 태양계 행성의 주기가 실질적 생활에 좋은 영향을 주었고,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등 긍정적인 요인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면이 잘못된 종교와 문화적 인식으로 변하여서 오늘날에도 ‘행운’을 주는 주술적 숫자로 인식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특히 우리 기독교의 관점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숫자 7을 행운으로 여기는 일은 반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이다. 오늘날과 같은 현대 문명에서 아직도 이러한 미신적 사고가 계속된다는 점이 안타깝다. 하지만 이를 바로잡아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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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왜 7을 행운의 숫자로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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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선교영화 ‘무명’ 에서 받은 동북아 ‘복음평화론’
- 가족과 함께 선교 다큐멘터리 영화 '무명(無名)'을 관람했다. 선교방송 CGN이 제작한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 무명은 일제 강점기 일본 땅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와 복음을 전한 이야기다. 조선인보다 조선을 더욱 사랑했던 두 선교사의 예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영토 강점이란 원수지간의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복음으로 사랑과 용기를 보여준 선교사의 눈물 담긴 이야기다. 1863년 일본 마쓰야마에서 태어난 노리마츠 마사야스 선교사는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일본 공사 미우라에 의해 처참히 시해된 을미사변 사건을 보고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한다. 이듬해 1896년 노리마츠 선교사는 수원 땅에 들어와 조선인이 되기로 마음먹고 청년 조덕성을 만나 한글을 배우고 복음을 전했다. 지독한 핍박 속에서도 예수 사랑을 실천하며 아내 사토와 함께 경기도 수원에서 수원동신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이어갔다. 얼마나 고난의 나날이었을까. 세 자녀를 낳아 키우면서 오직 조선인을 사랑하는 복음 정신으로 목회를 이어갔다. 불행히도 사모 사토는 세 자녀를 낳고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러나 노리마츠 선교사는 자녀들과 함께 조선 땅에서 한평생 선교사의 삶을 살다 1921년, 58세의 일기로 소천한다. 1896년에 조선에 입국한 오다 나라지 선교사는 불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노리마츠 선교사의 조선 선교를 보고 조선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오다 선교사는 1896년에 조선 땅에 들어와 이름을 전영복이라 바꾸고 북한 땅과 호남 지역을 돌며 복음을 전했다. 오다 선교사는 특히 일본에 반하는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라고 설파하고 복음을 전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연유로 체포되고 심한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정확한 연도는 모르지만 일본 땅으로 강제 추방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다 나라지 선교사는 조선인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조선 청년 박중학이 오다 선교사의 영향을 받아 회심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영화에 담기도 했다. 영화 무명은 국내 전국 영화관에서 상영하고 있지만 관람은 미미하다. 그러나 기독교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이 땅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를 알 수 있는 탁월한 다큐 영화였다는 느낌을 필자는 받았다. 일제 36년, 역사와 신앙 사이에서 숨겨져 있던 고뇌의 복음 이야기를 체험할 수 있는 관람의 은혜였다. 문화 선교와 미디어 복음에 사명을 감당하는 CGN방송이 광복 80주년, 한일 국교 정상화 60년을 맞아 제작한 작품이다. 필자는 영화를 관람하고 크고 깊은 은혜를 받았다. 오늘날 한·중·일의 동북아 지역은 갈등이 심화된 국제 정세 속에 있다. 이 갈등의 깊은 곳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일방적 힘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다. 예수 사랑의 복음만이 ‘평화’의 땅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쏴 살해했다. 그리고 감옥에 있으면서 일본에 보내는 ‘동양평화론’을 주창했다. 안중근은 서슬 퍼런 일본 제국이 침략 야욕을 버리고 아시아의 평화 공동체를 만들자고 호소했다. 영웅의 주창은 당시 많은 일본인들이 감동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일본이 이를 받아들일 리 있겠는가. 일본은 이듬해 을사늑약으로 조선을 삼키고 조선 찬탈에 성공, 36년간 압정을 했지만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에 의해 패망하고 말았다. 지금 동북아는 한·중·일, 그리고 북한, 미국, 러시아의 지정학적 초갈등 속에 긴장의 도는 더해 가고 있다. 날로 선교가 어려워지고 있는 일본 땅과 중국 땅에 복음의 씨를 뿌리는 데 더욱 힘을 쏟아야 하며, 우리도 오직 예수 사랑으로 일본 두 선교사의 조선 사랑을 실천했던 것처럼 우리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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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선교영화 ‘무명’ 에서 받은 동북아 ‘복음평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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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분기탱천(憤氣撐天) 의미를 되새기며
- 사람이나 짐승이나 공통점이 있다면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세계나 동물 세계에 불합리한 일들로 인하여 분한 감정이 하늘을 찌를 듯이 올라와 극한의 대립 상태가 되어 크고 작은 전쟁이 되는 것이다. 분함의 예를 보면 억울한 누명을 썼을 때 분노가, 판결의 불공평을 볼 때, 권력 남용으로 인한 불이익이 주어졌을 때, 약자로 눌림을 당할 때, 개인 사적인 이익을 위해 탐욕 품는 것을 볼 때 등등 분노가 일어나게 된다. 그 분함의 정도가 극에 도달한 상태를 사자성어로 “분기탱천(憤氣撐天)”이라고 하는데 탱(撐)의 의미는 받쳐 올리다, 버티다, 찌르다의 의미를 가진다. 고로 “분한 기운이 하늘을 찌르듯 최고조의 상태에 이름”을 뜻하는 말이다. 중국 삼국 시대(위, 촉한, 동오)에 유비가 당시 형주(지금의 후베이성)를 발판으로 정치적 야망을 키우려고 했지만 그곳 관리들은 유비를 끝까지 지지하지 못해 형주를 잃게 되었고 정치적 야망도 사라지게 되었다. 유비는 형주가 자기를 배신했다고 생각하여 분기탱천하게 되었고 복수의 날을 기다렸다. 진(秦)나라의 영정도 신하들에 의하여 배신당하였을 때 그 마음이 크게 분노하여 천지를 뒤흔들 정도였다고 한다. 요즘 우리 대한민국이 북중미 월드컵을 보면서 축구 국가대표팀의 32강 탈락이라는 결과 때문에 각계각층 사람들이 분기탱천하고 있다. 경로당 할머니 할아버지들까지도 분개할 정도면 그 여파가 어느 정도 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원인이야 무엇이든지 간에 현실의 기분이 그렇다는 것이다. 분노는 두 가지로 나눈다. 개인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사적인 분노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분노, 일명 의로운 분노도 있다. 출 32:19에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 숭배에 빠졌을 때 모세는 분노하였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의분(義憤)이었다. 민 25:11에 이스라엘 거룩한 공동체 속에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들어와 음행의 모습을 보였을 때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와 분노를 대신하여 그 음행한 남자 시므리와 미디안 여인 고스비를 죽였다. 거룩한 분노인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질투와 분노를 가지고 음행 당사자를 죽인 일에 대하여 칭찬하며 평화의 언약으로 그의 후손들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허락하였다. 느 5:7, 13장에 느혜미야의 거룩한 분노가 나온다. 당시 유다의 귀족들 민장들이 가난한 자들의 것을 착취하고 있었으며, 백성들은 안식일을 더럽히고 이방 문화가 성전에 들어온 것에 대하여 의분을 발했다. 예수님께서도 성전 정화를 위해 의분을 발하셨고 외식하는 바리새인 서기관들을 향하여서도 의분을 발하셨다. 의분이 되려면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며 하나님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인생을 살다가 보면 우리의 삶 속에 분노의 대부분은 나의 교만과 나의 자랑과 과시와 욕심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에게 면에서 교훈하고 있다.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20), 분노의 시대에 마음을 잘 다스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거룩한 분노에는 앞장을 서고, 자신의 유익을 위한 분노는 다스려 가는 지혜자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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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분기탱천(憤氣撐天) 의미를 되새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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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어리석은 자가 되라
- 지혜의 사람인 바울은 (고전3:18)에서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는 모호한 말씀을 하였다. 과연 어리석은 자가 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바울의 행간이 궁금해진다. 바울은 생생한 어구를 사용하면서 지혜로운 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어리석은 자가 되라고 권면한다. 그것은 겸비하게 배우는 자가 되라는 권면을 신선하게 표현한 것이다. 더욱이 벌써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에게는 아무도 무엇을 가르칠 수 없다. 플라톤은 ‘자기는 지혜를 배우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인간이다’ 라는 철학적인 말을 남겼다. 쿠인틸리안 역시 ‘자기들의 학식에 대해 그처럼 자신을 가지지 못했더라면 틀림없이 훌륭한 학자들이 되었을 터인데’ 라고 한 제자에게 말한 적이 있다. 또한 서양 속담에 ‘무지하면서도 자기의 무지를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피하라. 무지하지만 자기의 무지를 아는 사람은 지혜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가르쳐주라’ 는 말도 있다. 그러므로 지혜있는 사람이 되는 유일한 길은 자기가 어리석은 자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혜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자기의 무지를 고백하는 것이다. 옛 선비들에게도 이러한 어리석음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었다. 영등포 가리봉동을 지나 시흥에 이르는 중간지점, 왼편에 그리 높지 않는 야산이 있다. 그 산 이름이 독산(禿山, 민둥산)이며, 이 산 이름이 연유가 되어 그 인근 마을을 독산동이라고 한다. 이 산은 예부터 벌거벗었기로 그 같은 슬픈 이름을 얻은 것 같다. 그런데 조선시대 초기에 이곳에 살았던 유명한 선비 강의(姜艤)의 호가 독산(禿山)이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강의를 찾아와 자네가 호를 독산이라고 한 것은 살고 있는 지명을 따른 것인가 아니면 딴 뜻이라도 있는 것인가 하고 물었다. 이에 그는 자기 호가 왜 독산이라고 지었는지 늘어놓았다. ‘내 집 지은 곳에 산 하나가 있는데 활딱 벗겨져서 나무가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독산이라 한다. 어찌 이 산은 본래부터 나무가 없어 그러하리오. 한성 외곽에 자리잡은 까닭으로 도끼로 찍히고 소나 염소 따위에게 먹히는 것이 나날이 심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이 산 밑에서 성장하면서 개연히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탄식하면서 그 독산의 처지와 나의 처지를 비교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람의 본성도 또한 이 산의 나무와 같은 것인데 진실로 그 마음을 바로 다스리지 못하면 뭇 사욕이 엄습해 오는 것과 바로 이 산의 나무를 도끼와 소나 염소가 해치는 그것과 같다. 감히 이것으로 표준하여 스스로 나의 마음을 경계하는 것이다’ 마음에 나무가 없다는 독산의 말은 어쩌면 현대인에게 공통된 상황의 날카로운 지적으로 보인다. 사욕의 도끼날에 남벌되어 메마르고 벌거숭이가 되어버린 민둥산, 너도 독산이요, 나도 독산이다. 우리 옛 선조들은 이 같은 마음의 벌거숭이, 마음의 어리석음을 자처하는 것으로 사리에 겸손하게 대하는 정신적 전통을 지니고들 살아왔던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도 이 같은 어리석음의 가치를 두는 인간을 찾아볼 수 있다. 삼성산이 시흥 쪽으로 뻗어오다가 부러질 듯 단절된 목에 형세가 뛰어나갈 것 같은 험한 바위가 바로 호암이다. 범이 달리는 형세의 바위라 그 기세를 누리기 위해서 호압사를 짓고, 다시 그 북쪽에 호랑이를 위업하는 사자암을 지은 것이다. 지금도 그 지점에 호압사며, 사자암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애써 어리석음에 가치를 두었던 흔적을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율법에 능통하였던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참 진리를 발견한 이후에 이전에 자기가 알았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지혜를 포기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혀지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의를 포기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도 바울처럼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립보서3:8-9),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 젊은 시절 한 때 ‘성경박사가 아니라 성경밖에 모르는 바보’ 라는 좌우명을 가진 적이 있었는데 그 시절이 그립다. 세상의 수많은 때가 묻어있는 나 자신을 볼 때 심히 부끄러움을 금치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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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어리석은 자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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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무속 신앙에서 유래된 용어들 2: 용어의 의미로 본 무교의 명칭
- 1. 서언(序言) 우리 말에는 종교적으로 영향받은 용어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다. 이는 오랜 역사 동안 뿌리내린 불교, 유교, 도교 등의 영향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건국 신화인 단군신화와 여기에 등장하는 용어들도 실제로는 무속적인 내용이 많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기고를 했으며, 또한 이런 용어들은 우리의 기독교 언어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기도 하다. 본 기고에서는 이를 발췌하여 비교 분석하면서 사용할 수 있는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을 구분하여 올바른 우리의 기독 언어생활을 도모하고자 한다. 2. 무속 신앙을 표현하는 여러 용어 1) 샤머니즘(shamanism): 이 말은 무속 신앙을 대변하는 전 세계적인 통용어로서 종교학자들이 무속 신앙을 종교적인 관점에서 독립된 종교로 존중하려는 의도에서 주로 사용해 오는 말이다. 본래 이 말은 17세기에 시베리아 퉁구스계 민족이 주술사를 의미하는 샤만(Shaman)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유럽의 독일 지역으로 전해졌다가 영어권에서 shamanism으로 정착된 말로 유추하고 있다. 뜻은 퉁구스의 어원인 샤(scha)의 의미인“생각하다, 알다, 이해하다”로 보고 있으며, 또한 샤먼은 초자연적 힘을 가진 사람이나 신령(神靈)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 사람으로서 질병 치료사, 마술사의 역할도 한다고 여기고 있다. 2) 한국에서의 용어 : 전통적 용어는 무속(巫俗), 무교(巫敎), 무(巫)라고 하는데, 무속(巫俗)은 불교학자 이능화가 이를 전통적인 관습으로 이해하여 처음 사용한 말이며, 지금은 국문학자들과 민속학자들이 즐겨 사용하고 있다. 무교(巫敎)는 개신교 신학자 유동식 교수가 처음 사용한 말로 우리 기독교에서 주로 사용하는 말이다. 무(巫)는 인류학자 조흥윤이 사용한 말이며, 한국의 샤머니즘을 독특한 개성을 가진 전통으로 존중한다는 뜻이 있다. 또는 무술(巫術)은 신적인 존재를 불러들이는 무당(巫堂)을 중심으로 한 신앙 체계이며, 이들은‘이상 심리 상태’에서 신령이나 정령 등 초자연적 존재와 직접 교류하고, 이 사이에 예언, 탁선, 복점, 치병, 제의 등을 행하여 샤머니즘 신앙의 중심이 되는 말이다. 3) 한국의 무속인들이 주로 사용하는 용어: 우리나라의 무속인들은 과거부터 자신들을 당골, 당골네, 당골 애미로 호칭되기를 좋아했다. 그 이유는 당골은 제정일치 사회였던 고조선 시대의 단군(檀君)과 고대 신라 왕의 명칭인 차차웅(次次雄)의 어원을 가진 역사적인 말로서, 무속인 스스로 자신들을 그 시대처럼 신의 대리인으로 선택받은 귀한 존재임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다. 3. 맺는말과 제언 불교적 용어에 비해서 무속적인 말들은 과거부터 무속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 때문에 일반 용어에서 구분이 힘들 정도의 용어들이 많은 것은 아니다. 앞서 소개한 샤머니즘이나 무속 등의 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용어들은 그들의 종교적이거나 신앙적인 용어들로 치부하고 다소 비판적인 말로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인들이 문제 의식을 가지고 구분할 말도 아니다. 그래도 이런 용어들을 분석하고 소개하는 것은, 이런 말들의 실체와 이런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적시하고자 하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면으로, 앞으로도 계속 이러한 무속적인 용어를 논하면서 우리 믿음의 정체성과 소중성을 밝히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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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무속 신앙에서 유래된 용어들 2: 용어의 의미로 본 무교의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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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나는 누구인가
-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며 살아갑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학력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직업을 자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재산과 성공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이런 것들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습니다. 건강도 잃을 수 있고, 재산도 없어질 수 있으며, 명예도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존재가 이런 것들 위에 세워져 있다면 우리는 늘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전혀 다른 정체성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가장 잘 설명하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종교를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매우 놀라운 선언입니다. 우리가 지혜를 얻기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지혜가 되십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기 위해 스스로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의가 되십니다. 우리가 거룩해지기 위해 자신의 힘으로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거룩함이 되십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구속이 되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를 이루어야 하나님께 인정받을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을 바라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은혜를 믿는 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그리스도인의 자랑은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내 능력이 아닙니다. 내 열심이 아닙니다. 내 공로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은 교만을 버리고 비굴하게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담대한 삶을 살라는 초청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우리의 능력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실수해도 소망을 잃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신분이 우리의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묻습니다. “너는 무엇을 가졌는가?” “너는 얼마나 성공했는가?” 그러나 복음은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너는 누구 안에 있는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립니다. 자신을 증명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남과 비교하며 살지 않습니다.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지혜가 되시고, 나의 의가 되시며, 나의 거룩함이 되시고, 나의 구속이 되셨음을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복음이 주는 새로운 삶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입술에 이런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나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합니다. 그분이 나의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 고백이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참된 능력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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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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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경남교회가 새 교육감에게 거는 기대
- 6·3 지방선거가 끝나고 지자체별로 선출 단체장들의 취임식과 함께 새로운 지방자치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경남 지역에서는 특별히 교육 현장의 수장 경남도교육감 선거에 관심을 끌었다. 대부분 교회에서 새 교육감 선출에 더한 관심이 있었다. 왜냐하면 지난 12년 동안 진보 성향의 교육감이 선출되어 교육행정을 펴왔다. 이에 따라 교회와 일부 갈등의 부분이 있었던 기간이 있었다. 광역지자체 교육감 선출은 정당 공천이 없다. 다만 보수와 진보의 정책 색깔을 분명히 하면서 선거를 하고 있고 교육행정을 펴고 있다. 그래서 선출된 이후에도 정책 성향이 뚜렷이 다르게 적용되어 왔다. 지난 12년 동안 경남도교육감은 진보 교육정책을 많이 폈다. 교사의 인권보다 학생 인권을 중시하고 교실에서 경쟁보다 협력을 중시하는 진보 교육정책이 많이 도입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수월성 교육을 지양하고 평등과 협력을 중시함으로써 평균 기초학력이 떨어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학생 인권을 중시함으로써 교육 현장에 참다운 인성교육이 하향했다는 지적도 많았다. 무엇보다 학생 인권을 중요시함으로써 나쁜 문화가 학생들에게 파고들 때 제어 기능이 약화되는 역기능이 생겨나는 일을 낳기도 했다. 경남 교육 현장에서는 지난 2019년 경남학생인권조례 제정 추진을 두고 특히 교회가 연합하여 반대 운동을 펼쳤다. 경남에서 유일하게 반대 투쟁을 통해 무산시킨 사례를 만들었다. 당시 교회는 경남도교육청이 추진하는 학생인권조례 제정이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첫째는 학생 인권 중시의 현장에 교회의 보편적 복음 활동을 하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에게 마음껏 복음을 전하고 학교 담장 밖 교회에서 복음을 듣고 인격을 도야할 수 있는 지금껏 한국 사회의 보편적 인격 양성의 사회적 기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교회가 더욱 걱정하는 부분은 진보 교육의 학생 인권 중시에서 학교폭력을 막을 수 있다고 하지만 자못 역기능을 낳을 수 있는 점도 중요하다. 학교폭력을 막기 위해서는 교회 활동 등 신앙생활을 통해 인격을 성숙해 가는 과정을 만들 수 있다. 셋째, 마약, 동성애 등 나쁜 문화 물결이 학교 현장으로 침투할 때 학생 인권이 이를 제어하는 데 힘들게 된다. 젠더 문화의 확산이 우리의 가족 문화, 더 나아가 전통적 가정의 문화를 파괴하는 현장이 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이미 건강한 경쟁 문화를 통해 인재를 발굴하고 첨단으로 치닫는 소위 AI 산업 문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경남은 특히 역사적으로 선각자들이 많고 구국에 몸을 던진 거장들이 많았던 곳이다. 이에 나라를 사랑하고 세계를 선도할 수 있는 글로벌 인재를 키우는 요람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다. 이에 따라서 경남의 청소년 교육 현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짐작할 수 있다. 경남의 새 교육감은 이러한 보편적 교육 지향점 앞에서 교육정책 수립에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보여진다. 진보 성향의 교육정책을 깡그리 무시하자는 것은 아닐 것이다. 권순기 교육감은 그동안 수월성 교육을 받고 최고의 학력을 이수한 경남의 큰 인재이시다. 국립대학교 총장을 두 번 역임하고 과학자로서 인문학에 조예를 갖춘 교육 현장의 지도자로 손색이 없는 분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경남 지역 교회가 그동안 경남 지역 교육 현장이 더욱 건강해지도록 많은 애를 쓴 사례들을 이해하고 있을 줄 알고 있다. 교회가 단순히 학교 현장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제반 여건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가 아님을 알고 있을 것이다. 교회 복음이 들어가고 교회와 소통하는 교육 현장이야말로 나라의 미래 동량들을 양성하는 지름길이 된다는 사실을 지난 우리의 역사에서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130여 년 전 캄캄한 조선 땅에 선교사들의 교육사업 헌신과 사랑의 섬김이 오늘의 대한민국 자양분이 되었다는 점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청소년 한 생명의 바른 교육이 나라의 미래 큰 비전이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새로운 교육정책을 펼쳐주시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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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경남교회가 새 교육감에게 거는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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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왜 십자가여야 하는가
- 우리는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더 좋은 환경, 더 많은 소유, 더 높은 자리에서 삶의 만족을 얻고 싶어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합니다. "높아져야 성공이다. 강해져야 살아남는다. 남보다 앞서야 행복하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른 길을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통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오직 십자가뿐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십자가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실패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권력을 가지지 않으셨고, 세상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조롱당하며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묻습니다. "왜 하나님은 하필 십자가를 선택하셨을까?" 그 이유를 알려면 인간의 가장 깊은 문제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사탄은 하와를 유혹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 죄의 시작은 단순히 선악과를 먹은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마음, 더 높아지고 싶었던 욕망이 죄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인간의 역사는 그 욕망의 역사였습니다. 가인은 동생보다 높아지고 싶었습니다.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은 자기 이름을 높이려고 했습니다. 나라와 나라가 싸우는 것도, 사람과 사람이 다투는 것도, 가정과 사회의 갈등도 깊이 들어가 보면 결국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고린도교회는 많은 은사와 축복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가장 먼저 그들의 분쟁을 지적합니다.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속하였다." 사람들은 자기 편을 만들고 자신이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문제는 바울도 아니고 아볼로도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로는 신앙생활조차 나를 높이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것도, 성경을 많이 아는 것도, 봉사를 열심히 하는 것도, 자칫하면 나를 자랑하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교만을 끝내는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높은 분이셨지만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 8절은 말씀합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세상은 올라가야 산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내려오심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십자가는 단순히 예수님의 죽음이 아닙니다. 내 교만이 죽는 자리입니다. 내 자랑이 끝나는 자리입니다. 내가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는 착각이 무너지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어서 말합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복음은 우리를 더 큰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의지하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내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내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내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붙드는 삶으로 인도합니다. 오늘날 세상은 여전히 우리에게 더 강해지라고 말합니다. 더 성공하라고 말합니다. 더 높아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조용히 우리를 부릅니다. "내게로 오라." 그곳에서 우리는 새로운 진리를 발견합니다. 내가 높아져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붙드시기 때문에 행복한 것입니다. 내가 강해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나의 힘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완전해야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죄인 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참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에는 미련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이 십자가 앞에 서기를 원합니다. 그곳에서 우리의 교만은 내려놓고,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며,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는 참된 복음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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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왜 십자가여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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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견금여석
- 고려의 명장 최 영(1316-1388) 장군을 잘 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금화 보기를 돌과 같이 하라’는 ‘견금여석(見金如石)’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 말을 가슴 깊이 새긴 그였기에 후에 대성하여 국정을 잡아 위엄을 떨친 후에도 털끝만큼도 남에게서 취하지 않고, 작은 집에 만족하며 살았다. 이 같은 우리 조상들의 재물관은 물질과 정신의 상관관계에서 정신을 우위에 두어왔던 기본적 차이에서 재물로부터 인간과 인격을 구제할 수 있었다. 장지연이 쓴 일사유사(逸士遺事)에 한국인의 재물관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적혀있다. 김학성의 어머니는 과부였다. 어머니는 바느질품을 팔아서 살았고, 두 아들은 선생에게 보내서 글공부를 하게 했다. 비 오는 날 처마에서 물이 떨어지는데 그 물 떨어지는 소리가 별나게 들렸다. 메아리처럼 약간의 울림이 있곤 해서 이상하게 여기고 그 처마 밑을 파 보았더니 가마솥 하나가 묻혀 있었다. 그 솥뚜껑을 열어보니 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은행이 없던 당시에 재물이 많은 집에서는 마당에 재물을 숨기곤 했다. 그러던 중 당사자가 죽으면 그 땅에 묻힌 재물은 영원히 묻혀 있게 마련이고, 이처럼 우연한 기회에 발굴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할 일 없는 사람을 두고 빗대어 하는 말이 ‘강화도에 가서 산이나 뒤져라’는 속담까지 생겨났던 것이다. 처마 밑에 있던 보물을 본 김학성의 어머니는 그 집을 팔고 먼 곳으로 이사를 갔다. 세월이 흘러 과부는 남편의 제삿날에 친정 오빠를 불러서 오래 전에 있었던 보물 이야기를 했다. 그 말에 모두가 놀라 왜 그 같은 횡재를 버렸는가를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이에 어머니는 ‘재(財)는 곧 재(災)인데 무고히 큰 재물을 얻으면 반드시 뜻밖의 재앙이 있는 법이다. 만약 그 재물을 탐하였다면 두 아들이 이렇게 바르게 자라지 못했을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슬기로운 조상들은 ‘재(財)는 곧 재(災)다’는 관념을 가졌다. 자기 분수에 맞는 재물에 만족하지 않고 여분의 재물을 축적하면 재앙이 따른다고 여겼다. 그 재(災)란 재(財)에 따라 붙게 마련인 불행의 요소이다. 비단 도둑이 넘나본다는 그런 일차원적인 재앙뿐만 아니라 재가 형성됨으로써 비례해서 늘어가는 과욕이 형성시키는 재앙이다. 지나친 재물은 부모형제의 인정까지도 갈라놓을 수 있다. 또한 명예와 인덕을 크게 소중히 여겼던 시절에 이 같은 과분한 재는 곧 그것을 손상시키는 가장 손쉬운 도구이기도 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누군지를 아는가? 한 나라를 다스리던 왕이 있었다. 이 왕은 부러울 것이 없었으나 마음이 언제나 불안하여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어느 날 왕은 원로회의를 소집하여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다. 그러자 한 원로가 ‘폐하의 병은 이 나라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속옷을 입으면 나을 수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왕은 즉시 신하들에게 그런 사람을 찾아오라고 명령했다. 며칠 후 왕이 만난 사람은 평범한 농부였다. 그런데 농부는 속옷을 달라는 왕의 말에 당황하며 말했다. “폐하, 저는 속옷을 입지 않고 지내는 천민입니다” 바로 이것이다. 재물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야만 유지가 가능하다. (욥기20:15)에 “그가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토할 것은 하나님이 그의 배에서 도로 나오게 하심이니” 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시편39:6)에도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라고 경고한다. 재물이 많으면 자연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보이는 재물을 의지하게 된다. (시편52:7)에 “이 사람은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며” 라고 말씀한다. 그렇다면 성도의 바람직한 재물관은 어떠해야 할까? 여기에 성경은 해답을 준다. (잠언30:8)에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나는 과연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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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견금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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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플러스와 마이너스
- 내 앞의 땅바닥에 플러스와 마이너스 숫자가 다 있는 아주 크고 긴 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리고 내가 지금 그 자의 중간인 0의 자리에 서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자리에서 오른쪽으로 나아가면 1, 2, 3, 4, 5 …… 그렇게 나아갑니다. 반대로 왼쪽으로 계속 나아가면 -1, -2, -3, -4, -5 …… 그렇게 나아갑니다. 이것을 이렇게 비유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오른쪽 플러스 숫자로 나아가는 것은 의의 길로 가는 것이고, 반대로 왼쪽 마이너스 숫자로 나아가는 것은 죄의 길로 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필자가 이렇게 비유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이란 0의 자리에 서 있으면 계속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인간 속의 죄 된 본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서서히 마이너스의 자리로 가게 만들어 버립니다. 즉 0의 자리에 서 있으면 마이너스 1로 가기 쉬워지고, 마이너스 1로 가면 또 마이너스 2로 가기 쉬워지고, 마이너스 2로 가면 또 마이너스 3, 4로 가기 쉬워지고, 그래서 계속해서 더 심한 마이너스의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즉 점점 더 돌이키기 어려운 죄의 상태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사람이 0의 자리에서 경건의 노력을 하여서 플러스의 자리로 계속해서 나아가면, 즉 0에서 1로, 1에서 2로, 2에서 3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더욱더 성화되어 갑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렇게 더 높은 플러스의 자리로 나아가다보면 뒤돌아서서 마이너스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쉽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꾸준한 기도와 말씀의 경건의 노력으로 중단 없이 더 높은 신앙의 플러스 자리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 악한 세상에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경 디모데전서 4장 7절 후반부에서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라고 말씀하심은 바로 그것을 명하는 것입니다. 도둑의 삶을 살다가 주님을 만나고 회개한 사람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그 사람이 다시는 그러한 죄에게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그저 도둑질 하지 않고 살 것이라는 결심만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언제 내 속의 죄의 본성은 다시 이전의 죄를 부추길지 알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변화된 삶을 살고자 한다면 이제는 내가 내 손으로 돈을 벌어서 가난한 이웃과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비로소 이전의 죄 된 생활은 나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에베소서 4장 28에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라고 말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저 나쁜 짓을 안 해야지, 죄를 짓지 않아야지 하는 생각만으로는 죄 된 생활을 온전히 청산할 수 없습니다. 이제 적극적으로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그 주님의 뜻을 받들어서 선을 행하며 살아갈 때에 비로소 진정으로 죄에서 자유 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예를 더 들어보면, 에베소서 4장 29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인은 더러운 쌍욕을 하지 않는 데서 만족하지 말고 더 나아가서 덕을 세우는 아름답고 선한 말을 하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에 내가 속한 곳에 은혜를 끼치는 성화된 참 그리스도인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저 그런 0의 자리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명하시는 영적 플러스의 거룩한 자리로 힘차게 발걸음을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죄의 자리인 마이너스에서 점점 멀어지고, 오히려 점점 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참 그리스도인으로 성화되어 갑니다. 힘차게 걸어가십시오. 영적 플러스의 자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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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플러스와 마이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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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무속 신앙에서 유래된 용어들 1: 무속(巫俗: shamanism) 신앙과 용어
- 1. 서언(序言) “기독교인의 생활 용어”란 제목으로 기고를 시작한 지 10년이 넘는다. 부족한 내용이지만 경남기독신문의 배려로 계속 기고할 수 있었고, 지난해 11월에는 이를 정리해서 책으로 출간할 수도 있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는 책의 내용에서 기술하지 못한 불교에서 유래된 다른 용어들을 계속 논하여 왔다. 본 호부터는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신앙이라 볼 수 있는 무속 종교에서 유래된 용어들을 발췌하여 논하고자 한다. 하지만 이런 무속적인 용어들은 도교와 전통적인 세시풍속과 다른 종교 용어들과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 논해왔던 용어들과 중복되는 면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본 호부터는 이러한 용어들의 근원이 된 무속 신앙이 무엇인지를 논하고자 한다. 여기에 대한 내용은 필자가 다른 매체의 기고에서 이미 기술한 내용을 요약해서 기고함을 먼저 밝혀둔다. 2. 무속 신앙이란 무엇인가? 1) 사전적 의미와 유래 국어사전에는 ‘무당을 중심으로 하여 민간에 전승되고 있는 토속신앙’이라 했고, 위키백과에 의하면 무속은 샤머니즘(영어: shamanism)으로, 신적인 존재를 불러들이는 무당(巫堂), 곧 샤먼(shaman)을 중심으로 한 신앙 체계이며, 샤먼은 이상 심리 상태에서 신령이나 정령 등 초자연적 존재와 직접 교류하면서 예언, 탁선, 복점, 치병, 제의 등을 행하여 샤머니즘 신앙의 중심이 된다고 했다. 또한 이 말은 퉁구스계 족에서 주술사를 의미하는 사만(Saman)과 사문(沙門)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의 시라마나(Sramana)나 팔리어의 사마나(samana), 페르시아어의 셰멘(shemen, 우상), 중국의 한자에서는 사당을 의미하는 사(祠)와 무(巫, 여성) 및 격(覡, 남성)이란 말을 사용한다. 이러한 사전적인 의미를 볼 때 이는 각기 다른 말이 아니라 하나의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도 유추할 수 있다. 2) 신앙적인 유래 필자는 오랫동안 신학교에서 비교종교학을 가르치면서 무속의 근원과 유래를 밝히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으나 아직은 너무 미흡하다. 그 이유는 신학에서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그 유래를 선사시대부터라고는 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결과적으로 무속 신앙의 근원과 유래가 언제부터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유추해서 본다면 다음과 같다. (1) 무속 신앙의 시작 요인: 앞에서 기술한 대로 일반적인 관점으로는 인류의 시작과 함께였다고 보고 있다. 이는 주로 선사시대(약 3만 년 전의 구석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동굴 벽화에 새겨진 주술적 이미지들이나 신석기 시대의 신상이나 제사 시의 기구들의 발견을 통해서 유추하고 있다. 이는 주로 해·달·별 같은 눈에 보이는 자연 현상이나 인간으로서 불가항력적인 죽음과 질병, 각종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초자연적인 힘에 의존했다. 또한 여기에서 신적인 개념인 영혼과 정령이 있다고 믿으면서 숭배했고, 인간과 신을 중재하는 샤먼(무당)이 등장했으며, 이러한 과정으로 무속 신앙의 형태로 정착된 것으로 보고 있다. (2) 발달 과정: 가장 먼저는 원시 수렵 사회에서 동물과의 교감이나 자연에 대한 경외심으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다음은 농경 사회로 전환되면서 농업과 관련된 풍요를 위해 신에게 기원하는 의례와 제사가 행해졌다. 예를 들면, 무생물 숭배로는 천상(天象) 숭배, 암석(巖石), 산(山)과 물(川), 불(火) 숭배 등이다. 생물 숭배로는 식물과 동물 숭배 등이 있으며, 특히 동물 숭배는 부족의 수호자로 섬기는 토템(totem) 신앙 등이 있다. 3. 맺는말과 제언 이상에서 볼 수 있는 대로 무속 신앙은 그 유래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진 원시적인 종교 형태이다. 그러다 보니 이러한 신앙은 그 이후에 생성된 거의 모든 종교에 영향을 끼쳤다. 불교, 유교, 도교, 특히 우리 한국의 건국 신화인 단군신화도 실제로는 무속적인 내용이다. 이러한 일은 모든 용어 사용에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제례 의식과 이에 따른 용어 사용은 무속 신앙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생활의 언어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이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용어들이 많다. 이러한 사실은 앞에서 수없이 많이 논한 타 종교에서 온 용어들과 마찬가지로 일반 사회생활 용어뿐만 아니라 우리의 기독교 언어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 본 기고에서는 이를 발췌하여 비교 분석하면서 사용할 수 있는 말과 그렇지 않은 말을 구분하여 올바른 우리의 기독 언어생활을 도모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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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무속 신앙에서 유래된 용어들 1: 무속(巫俗: shamanism) 신앙과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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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6·25 전후 북한 공산정권의 교회 탄압 역사를 반추해 본다
- 지난 6월 13일, 올해 창립 125주년을 맞는 마산 문창교회에서 특별한 행사가 있었다. 지역에서 가장 오랜 교회 역사를 품고 있는 교회로서 역사관을 건립하여 이날 개관예배를 드렸다. 역사관 개관을 위해 부산경남기독역사연구회가 함께했으며, 이날 또한 정기발표회 행사가 있었다. 이날 발표회에 배포된 정기 발간 연구지에는 눈에 띄는 논문 제목이 있었다. 부경역사연구회를 창립한 이상규 백석대 석좌교수가 쓴 ‘북한 공산정권 수립과 기독교 탄압’이라는 제목의 논문이 눈에 들어왔다. 올해 6·25 76주년을 맞았다. 날로 6·25 기념행사가 퇴색되지만 교회에서는 각 지역별로 구국특별성회를 갖는다. 여기에는 한국전쟁 전후 이뤄진 교회에 대한 북한 공산당의 잔인한 탄압의 역사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날 배포된 논문 발간지 이 교수의 논문에도 이러한 사실(史實)들이 실렸다. 한반도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큰 기쁨이 있었지만, 당시 소련의 개입과 신탁통치라는 새로운 불행이 시작됐다. 이때 북한 땅에서 정치권력을 주도하게 된 소련군은 우선하여 북한 내 교회를 말살하기 위한 정책 수행에 돌입한다. 마르크스·레닌 공산주의는 교회를 철저히 부정하기 때문이다. 소련군이 북한에 들어와서 권력체계를 탐내고 있을 때 북한 기독교 지도자 조만식 장로가 주축이 되어 ‘건국준비평남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되어 기독교 정신의 건국운동에 들어갔다. 소련군이 가만있겠는가. 처음에는 조만식 선생의 명성을 이용하려고 했지만 타협이 가능했겠는가. 급기야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군중대회를 열고 33살의 김일성을 꼭두각시로 세워 공산주의 권력을 세우게 된다. 이때부터 북한 땅의 교회 말살 정책이 시작됐다. 이상규 교수는 논문에서 이 점을 강조하는 듯했다. 한평생 고신대에서 교회사를 연구하면서 한반도 선교 역사를 깨알처럼 정리하신 분이다. 이 논문에서 북한 땅에서의 공산정권이 교회를 탄압한 역사를 정리함으로써 지금 한국교회에 던지는 울림이 되었다. 어떤 사회현상이 다가오더라도 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을 불러일으키는 데 큰 메시지가 있었다. 당시 북한의 인구는 940만 명, 기독교 인구는 20만에서 25만이었다. 김일성 정권은 겉으로는 신앙의 자유를 말하면서도 교회 탄압의 수순에 들어갔다. 토지개혁이란 명분으로 교회 토지를 몰수했다. 일부 기독교에서는 조만식 장로를 비롯해 기독교 정당을 만들어 북한에서의 신앙 자유를 찾으려고 몸부림쳤다. 1945년 12월 26일 전후(戰後) 처리를 두고 미·영·소의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신탁통치 반대 결의가 되었으나 공산당은 찬탁으로 돌변했다. 소련군 사령관 로마넨코 소장은 조만식 장로에게 신탁통치안을 찬성할 것을 협박했다. 조만식 장로는 일거에 거절하고 19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감금된다. 북한 여기저기서 반탁·반공운동이 일어났다. 신의주 지역에서 당시 한경직 목사 등이 주도해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창당하고 기독교 정신의 민주정부를 수립하자는 운동이 생겨났다. 급기야 조만식 장로는 감금 후 실종되어 1950년 10월 피살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46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옥내 집회를 막고 강단 설교를 감시하는 데까지 탄압이 넓혀져 갔다. 논문의 극히 단면을 들여다보더라도 얼마나 북한 공산정권의 교회 탄압이 포악했는가를 알 수 있다. 많은 북한 교회 지도자들이 남한으로 오게 된 이유를 여기에서도 알 수 있다. 6·25 전쟁 속에 북한교회는 말살됐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지금 지하에서 신앙을 지켜가고 있는 성도들이 있다는 소식도 있기는 하다. 지금 한국교회는 무엇보다 지난날 북한 땅에서의 공산정권 교회 탄압 역사를 정확히 돌아보아야 한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 전해야 한다. 철저히 우리가 회개하며 하나님께 기도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다시 복음통일을 이뤄 하나님께 이 한반도를 올려드리기를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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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6·25 전후 북한 공산정권의 교회 탄압 역사를 반추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