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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영적 싸움에 “VICI(이겼노라)”가 있는가?
전쟁에는 반드시 이겨야 하듯, 영적 싸움에도 반드시 승리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종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로마 제국 시대 율리어스 카이사르(Jullius Caesar – 영어표기 시저. 성경표기 가이사)는 전쟁을 스포츠처럼 즐겼던 사람이다. 그가 남긴 명언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The dice(die) is cast. 주사위는 던져졌다. 폼페이우스가 로마 원로원과 음모를 꾸며 카이사르를 죽이려고 로마로 복귀할 때 루비콘강을 건너기 전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오라고 하였다. 명령을 받은 카이사르가 생각해 볼 때 가만히 있으면 자신은 파멸될 것이고, 무기를 들고 루비콘 강을 건너오면 로마의 역적이 될 것이므로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 카이사르는 고민하였다. 이래도 죽을 상황이고 저래도 죽을 상황인데 “죽을 때 죽더라고 싸우고 죽자” 결단을 내리고 무기를 들고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명언을 남겼는데 “주사위는 던져졌다”고하였다. 이때부터 특별한 결단을 하여 어떤 일을 할 때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왔노라[VENI-고대 라틴 발음(웨니), 현대 라틴 발음(베니), I came] 보았노라[VIDI-고대 라틴 발음(위디), 현대 라틴 발음(비디), I saw] 이겼노라[VICI-고대 라틴 발음(위키), 현대 라틴발음(비키,비치), I conquered] 이 문구는 B.C 47년 카이사르가 소아시아 파르나케스를 격파한 후 원로원에 보냈던 전승 보고서 첫 줄이다. 이 문구를 우리 한국인들이 체육대회나 단합대회 때 원문을 약간 변경하여 “왔노라 싸웠노라 이겼노라”로 사용하기도 한다. 어쨌든 인간적으로 카이사르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 그는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폭군(暴君)이 아닌 성군(聖君)의 모습으로 부하들을 다스리며 덕(德)의 정치를 했다. 카이사르의 인생철학이 있었는데 “강자에게 영예를 양보하고, 약자에게 필수품을 양보하라”였다. 인생철학 그대로 그는 전리품들을 자신이 챙기지 않고 부하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고 개인적 재산을 가지고 법률사무소, 마켓, 편의시설을 지어 제공함으로 많은 사람의 신뢰를 쌓아갔으며 자신은 검소한 삶을 살아 타인들로하여금 인정받는 지도자였다. 또한 유머 감각이 있어 부하들에게 마음의 안정을 주었고. 외부 적군들을 정복하기보다 더 힘든 내국 통치를 덕(德)의 정치로 이끌었던 지도자였다. 하지만 죄의 성향을 가진 인간들은 선한 정치를 하는 카이사르를 온전하게 두지 않았다. 카이사르와 친했던 부하 브루투스를 배신자로 만들어 음모를 꾸며 살해하도록 하였다. 믿었던 부하에게 배신당해 칼에 찔려 죽어가면서 마지막 남긴 말이 “브루투스 너마저...!” 인생 허무함으로 막을 내렸다. 훗날 카이사르에 대한 평가를 할 때에 일부 부정적 평가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좋은 평가를 하는데 로마에 수많은 지도자가 있었지만 카이사르를 “로마가 낳은 창조적 천재”라고 결론지었다. 신앙의 싸움을 하고 최후 주님 만나는 그날 주님께서 주신 사역의 현장인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VICI(이겼습니다)” 이렇게 승전 보고를 한다면 멋진 인생을 산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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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속담은 쉽고 간결한 말로 선조들의 지혜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전해주므로, 익혀두면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아무리 쉬운 일이라도 혼자 하는 것보다는 여럿이 힘을 합하면 더욱 쉽다는 의미의 우리말 속담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가 있다. 사자성어로도 비슷한 단어가 있는데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 해서 ‘한 손으로는 소리를 낼 수 없다’라는 뜻이다. 비슷한 의미의 영어 속담도 있는데 ‘Two heads are better than one’ 두 사람의 지혜가 한 사람의 지혜보다 낫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협력(協力)’을 뜻하는 문장이 많다. 그런데 이렇게 귀한 단어가 성경전체에 딱 한 번 나온다. (빌1:27)에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그리고 협력(協力)과 비슷한 단어로 합력(合力)이 있는데 이 단어 역시 성경에 두 번 등장한다. (삼상22:17)에 “왕이 좌우의 호위병에게 이르되 돌아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그리고 (롬8:28)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놀라울 따름이다. 그만큼 ‘협력’이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함께 일을 할 신실한 동역자도 구하기 힘들다. 정말 내 마음에 꼭 맞는 사람, 평생을 두고 백지장을 맞들 한 사람을 구하기 힘들다. 사람은 많지만 정말 좋은 사람을 찾아내기 힘들다. 예수님에게도 12명의 제자가 있었다. 바울에게는 신실한 제자 디모데가 있었다. 엘리야에게는 영적인 아들 엘리사가 있었다. 이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다.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는 만능인도 없다. 함께 동역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이 잘못 되었을 때에는 ‘내 책임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동역이다. 무언가 좀 잘 했을 때에는 ‘우리가 해 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동역이다. 무언가 아주 잘 했을 때에는 ‘너희들이 해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동역이다. 추운 겨울을 남쪽 나라로 보내기 위해 달밤을 날아가는 기러기 떼는 “ㅅ”자 형으로 줄을 지어서 날아간다. 과학자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를 밝혀냈다. 모든 새들이 날기 위해 날개를 퍼덕거리면 그 뒤에 있는 새에게 양력(揚力)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ㅅ”자 대형으로 날면 혼자 가는 것보다 71% 더 날아간다고 한다. 기러기 떼 중에서 뒤에서 우는 소리를 내는 기러기가 있는데 그것은 힘들어서가 아니라 바로 앞에 가는 새에게 힘을 돋아 주기 위해 하는 ‘추임새’와 같다는 것이다. 바울은 노년에 평생의 동역자인 디모데를 보고 싶어서 (딤후4:9)에서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고 말했다. 너무도 감사한 것은 우리에게는 정말 귀한 동역자가 계신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성경이 그렇다고 말한다. (고전3:9)에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무 귀하다.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시편121:4)에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라고 약속한다. 이제 우리에게는 함께 백지장을 맞들 분이 계신다. 그의 이름은 바로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렘51:19)에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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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바울은 솔직했다.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솔직하게 표현한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낼 수 있단 말인가?”라고 탄식함을 우리는 잘 안다. (로마서 7: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그는 이 죄를 바울이 아니라고 두 번이나 말한다. 얼마나 이상한 말인가? 이것이 복음이다. (로마서 7: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로마서 7: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우리는 절대 탄식 속에서만 살아서는 안 된다. 해결의 방법이 있다. 해결 방법은 아주 쉽다. 항상 사로잡아오는 죄의 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대박이다. 한 없이 사로잡아 오는 죄의 법에서 어떻게 빠져 나와 참 평안과 영원한 행복의 삶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바울도 온전한 복음을 알고 복음의 핵심을 말한 후 로마서 7장과 8장에서 말한다. 로마서 8장의 시작을 보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선포한다. (로마서 8장1절) 우리는 이 선포를 그대로 받아 감사해야 할 일이다. 거듭난다는 것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다. 거듭났는가? 거듭났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새 생명을 소유했다. 바울은 결코 정죄함이 없는 자임을 알려주고 있다. 다음과 같이 받아들이고 주장해 보라. "나에게 새 생명이 있다. 나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했다" 로마서를 가지고 많이 기도하라. 1장부터 16장을 읽으며 영의 기도를 하는 시간은 신이 난다. 하나님께 고백하고 감사한다. 또 자신에게 말해 준다. “주님, 저에겐 생명이 있습니다. 저는 결코 정죄 받지 않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저를 해방했습니다.”라고 주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일을 50번도 100번도 올려 드려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기도의 시간이 될 것이다. 나에게도 말해 줘라. “너는 참으로 행복한 놈이구나. 너의 죄가 사해졌어. 너를 정죄할 그 누구도 없어. 너도 너를 이제부터는 정죄 하지 마! 너는 성령의 법으로 해방 된 자야!”라고 반복해서 나 자신에게 말해 보라. 얼마나 신나고 행복한 시간인지, 흥분되는 일이다. 능력으로 살 수 있는 지름길이 성경대로 나를 주장하고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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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고귀한 기독문화 유산 보호의 길 찾자
얼마 전 지역 유력 일간지를 통해 경남도의 싱크탱크인 경남연구원 김진형 연구원의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100년 후 보물급 문화유산을 보호할 수 있는 ‘미래유산제도’를 만들어가자는 취지의 주장이었다. 김 연구원의 주장을 다시 살펴보면, 곳곳에 산재한 국가문화유산을 미래유산으로 지정하고 동판을 붙여 보호하자는 논지다. 국가유산으로 등록되기 전 ‘미래유산제’를 설치해 함부로 유실되지 않도록 하자는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하고 있다. 필자는 이 칼럼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우리 교회도 기독교 문화유산 보호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싶다. 그동안 경남 지역 각 교회를 돌아볼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독교의 고귀한 문화유산이 제대로 보호되지 못하고 유실되고 있는 실정을 목도했다. 한국 기독교가 선교 140년을 맞았으며, 국내 1천만에 달하는 기독교 인구로 인해 ‘기독교 강국’, ‘선교 강국’이 되었다. 여러 지역의 100년 이상 된 초대교회를 방문해보면 국가보물급이 될 만한 유산들이 흩어져 있으나, 체계적인 보호의 손길 없이 유실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가까운 경남 지역만 하더라도 100년 이상의 역사를 품은 교회가 100여 개소에 달한다. 1888년 캐나다 제임스 게일 선교사와 미국 북장로교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 이후, 당시 경남 부산 지역에는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이 줄을 이어 들어와 부산·마산·진주 등 경남 전역 마을마다 교회를 세웠다. 경남성시화운동본부는 10여 년 전 호주 선교사 역사관을 마산에 세우고 여러 유산을 모아 성역화해 놓았다.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진주 지역은 올해 선교 120년을 맞아 서부경남 부흥의 비전을 세우는 연합집회와 학술세미나를 이어 개최하고, 진주지역 기독역사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역사관을 짓고 유산을 모아 보관·관리하는 길도 매우 좋은 일이다. 그러나 정작 보물급 기독유산들은 각 지역 교회가 관리하거나 흩어져 방치되고 있는 경우가 수없이 많다. 먼저 각 교회가 관리하고 소장한 유무형의 유산들을 정리하고 집대성하여, 국가기관의 미래유산제도에 편입시켜 제도적 보호장치를 마련하는 길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의 고귀한 유산이 단번에 국가유산으로 등록되어 영구히 보호받는 길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취지에서 선교 120년을 맞은 진주 지역의 초대교회, 진주교회를 찾아 유산이 될 만한 소장·관리 유물을 살펴봤다. 당장 눈에 띄는 유물이 있었다. 120년 전 호주 커렐 선교사가 진주교회를 세우고 교회가 부흥했으나, 곧 일제의 침탈을 당했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 전국의 교회들이 분연히 일어섰던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다. 1919년 3월 18일 진주 고을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날 때, 일제히 모이는 신호가 당시 진주교회 종탑에서 울렸다. 얼마나 위대하고 엄청난 복음의 숨결이 있었던가. 나라를 살리기 위해 초대교회 종탑의 종이 진주 고을 백성을 모아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 종이야말로 국보급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구국의 종이 이후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다. 다행히 현재 천안의 고신대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국민적 공감대를 모아 국가유산으로 등재하고, 국가 차원의 보호를 받아야 함이 당연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3·1운동 참여 등 역사 발전의 굴절마다 교회의 흔적이 위대한 역사 속 숨결로 숨어 있다. 이것은 하나의 중요한 예에 불과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경남·부산 선교 140년이 다가오고 있다. 이 즈음에 기독교 문화유산을 집대성하고 고증을 거쳐, 국가 미래유산제도와 유산등록의 정책적 관리를 위해 능동적으로 나서야 하지 않을까 하는 강한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지역 교계가 한마음으로 뭉치고, 이 일을 함께 살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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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죽을 사(死)를 아십니까?
80-90년대에 중,고등학교 수학여행 코스에 반드시 들어가는 곳이 천년고도(千年古都) 경주이다. 아직도 가이드 누님의 설명이 남아 있는 유적지가 있는데 바로 ‘에밀레 종’이다. 경주 국립박물관 앞마당에는 동종(銅鐘)하나가 놓여 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최고, 최대의 종으로 이는 통일신라 성덕왕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 경덕왕이 만들기 시작하여 손자인 혜공왕이 완성한 국보 29호이다. 따라서 이 종의 공식 이름은 [성덕대왕 신종]이지만 흔히 [에밀레 종]이라고 불린다. 경덕왕은 선왕의 기리기 위해서 구리 20만근을 들여 종을 만들기 시작했다. 종을 만드는 재료가 부족하여 스님들은 집집마다 시주를 받으려 다녔다. 한 스님이 쓰러져가는 집을 방문했을 때 한 아기의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저희 집에는 아무 것도 시주할 것이 없습니다. 이 아이라고 괜찮으시면 받아주십시오” 드디어 종이 완성되어 타종하여 보았으나 이상하게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날 밤, 스님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산 아기를 넣어 종을 만들어야 소리가 난다” 고 말했다. 꿈을 깬 스님은 지난 번 그 여인을 찾아갔다. 그러자 여인은 “부처님과의 약속이니 기꺼이 아이를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 아이는 곧 뜨거운 쇳물에 넣어졌고, 마침내 종이 완성되었다. 타종을 하자 종에서는 이제껏 들을 수 없었던 웅장한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는 그 종소리가 마치 아기가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 ‘에밀레-’로 들렸다. 이로부터 그 종은 ‘에밀레 종’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종의 특이한 것은 바로 옆에는 듣는 소리나 저 멀리서 듣는 소리가 거의 같은 크기로 들리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모든 사람이 다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거부하거나 회피하거나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반드시 죽음은 불청객처럼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사람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일 수도 있겠다. 미국 시카고 대학병원에서 30년 이상 환자들을 돌보았던 저명한 여의사 ‘엘리자벳 퀴블러로스’는 그의 저서 <인간의 죽음>에서 모든 환자들이 다섯 단계로 죽음을 맞이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1단계(죽음에 대한 부정), 2단계(분노), 3단계(인정), 4단계(우울증), 5단계(죽음에 대한 인정)이다. 1단계인 ‘죽음에 대한 부정’에서 시작해서 5단계인 ‘죽음에 대한 인정’으로 마친다. 죽음에 대한 한자어를 보자. 죽을 사(死)를 풀이하면 ‘한 일(一) / 저녁 석(夕) / 화살촉 비(匕)’가 된다. 즉 “어느 날 밤에 비수(匕首)가 날아 온다” 가 된다. 우리가 잘 아는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말씀에서 (눅12:20)에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라는 구절이 있는데 바로 이 단어가 ‘죽을 사(死)’ 글자 그대로이다. (잠27:1)에서도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라고 말한다. 그렇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이 구절을 우리는 잘 새겨들어야 한다. “도로 찾다”는 말은 ‘잠시 빌려준 것을 다시 거두어 들인다 / 회수한다’ 라는 뜻이다. 우리의 목숨, 우리의 영혼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꾸어온 것이지, 자신의 것이나 부모님의 것도 아니다. 영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성경이 그렇다고 되어 있다. (겔18:4)을 보니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라고 영혼의 주인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해 두고 있다. 어느 대학교 도서관 화장실에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다’ 라는 의미 있는 낙서가 있다고 한다.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 지난 밤도 죽음의 비수가 나를 빗겨간 것에 감사하면서 하루를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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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불교에서 유래된 용어들: 천생연분(天生緣分)과 천생연분(千生緣分)이란?
1. 서언(序言) “저 부부는 정말 천생연분이야, 정말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 틀림없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이는 정말 좋은 덕담이요 칭찬의 말로서 결혼이나 연인 관계에서 흔히 사용되며, 서로가 운명적으로 맺어진 관계임을 강조할 때 이런 말을 한다. 즉, 서로가 지극한 사랑과 잘 맞는 관계를 확인한 연인이나 부부의 연을 ‘천생연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을 어떤 자리와 어떤 관점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기독교인으로서는 합당한 말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천생연분(天生緣分)과 불교에서 말하는 천생연분(千生緣分)은 다르기 때문이다. 본 호에서는 이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2. 일반적인 천생연분(天生緣分)이란? 1) 한자어의 뜻과 일반적인 의미: 하늘에서 정해준 연분이란 뜻으로, 하늘 천(天)과 날 생(生), 가장자리·묶음 연(緣)과 나눌 분(分)으로 하늘에서 정해준 연분이란 뜻이다. 속담으로는 ‘천생연분에 보리개떡’이 있다. 이는 ‘보리개떡을 먹고 살 정도로 가난해도 부부가 의좋게 산다.’는 말이다. 또한 서로를 위해 태어난 것처럼 잘 맞는 사람들이나 성격과 가치관, 삶의 방향 등이 잘 조화를 이루는 관계를 뜻하기도 한다. 서양에서는 이런 이상적인 연인이나 부부 관계를 ‘소울메이트’(soulmate)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2) 심리적인 면에서의 의미: 이는 아름답고 잘 맺어진 관계라도 하늘에서 정해주는 것이 아닌, 사람의 마음과 의식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는 것이다. 즉, 서로 상호 간의 마음으로 연결된 조건의 충족으로 신이 아닌 인위적으로 형성된 관계라는 것이다. 3. 불교적인 천생연분(千生緣分)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천생연분은 하늘 천(天)의 天生緣分이 아니라 숫자 일천 천(千)의 千生緣分을 의미한다. 이는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 중 하나인 연기론(緣起論)의 인연(因緣)에서 유래된 말로서, 원인(因)과 조건(緣)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인간의 힘으로는 끊을 수 없는 깊은 관계를 의미한다. 이를 부부 관계로 보면, 남녀가 만나서 부부가 되는 것은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생(生)의 인연이 쌓여서 된다는 것으로 본다. 예를 들면 한 부부가 이루어지려면 전생부터 이어진 남자 500생과 여자 500생의 인연이 합쳐져서 1,000생이 될 때 만나게 되면 千生緣分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부가 오욕락(五欲樂: 식욕, 수면욕, 색욕, 재물욕, 명예욕)을 함께해야 되는데, 이 중에서 하나라도 깨어지면 잡귀가 틈타 들어와서 부부 간의 신뢰가 깨어지면서 갈등이 시작되고 千生緣分이 무너지게 된다고 했다. 또한 이 천생연분은 부부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 간에는 600생, 형제자매는 700생, 스승과 제자는 800생이 지나야 만나기 때문에 부부 간의 인연보다 더 깊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보면, 불교의 千生緣分은 전생의 업(業)으로 인해 맺어진 깊은 인연을 의미하기 때문에 좋은 업을 쌓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화합과 신뢰로 함께하는 오욕락의 조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4. 기독교적 관점의 천생연분(天生緣分)과 결론 및 제언 기독교에서 "천생연분"이라는 표현을 할 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소 신학적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첫째로, 천생연분(天生緣分)은 ‘천상배필(天上配匹)’이라고도 하는데, ‘하늘이 정해준 관계’라는 점에서는 결혼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안에서 맺어졌다고 믿는 기독교적 관점과 비슷하다. 하지만 연분(緣分)이란 말은 불교의 연기론의 인연을 연상하기 때문에 오해를 가져올 수 있어 주의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 불교적인 용어인 천생연분(千生緣分)은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될 말이다. 그 이유는 앞에서 기술한 대로 전생과 인연 등의 전형적인 불교적인 용어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제언할 것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천생연분(天生緣分)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앞서 기술한 대로 우리말로는 오해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게 하셨다”는 섭리와 인도로 표현하는 것이 더 나은 표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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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영적 싸움에 “VICI(이겼노라)”가 있는가?
- 전쟁에는 반드시 이겨야 하듯, 영적 싸움에도 반드시 승리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종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로마 제국 시대 율리어스 카이사르(Jullius Caesar – 영어표기 시저. 성경표기 가이사)는 전쟁을 스포츠처럼 즐겼던 사람이다. 그가 남긴 명언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The dice(die) is cast. 주사위는 던져졌다. 폼페이우스가 로마 원로원과 음모를 꾸며 카이사르를 죽이려고 로마로 복귀할 때 루비콘강을 건너기 전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오라고 하였다. 명령을 받은 카이사르가 생각해 볼 때 가만히 있으면 자신은 파멸될 것이고, 무기를 들고 루비콘 강을 건너오면 로마의 역적이 될 것이므로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 카이사르는 고민하였다. 이래도 죽을 상황이고 저래도 죽을 상황인데 “죽을 때 죽더라고 싸우고 죽자” 결단을 내리고 무기를 들고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명언을 남겼는데 “주사위는 던져졌다”고하였다. 이때부터 특별한 결단을 하여 어떤 일을 할 때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왔노라[VENI-고대 라틴 발음(웨니), 현대 라틴 발음(베니), I came] 보았노라[VIDI-고대 라틴 발음(위디), 현대 라틴 발음(비디), I saw] 이겼노라[VICI-고대 라틴 발음(위키), 현대 라틴발음(비키,비치), I conquered] 이 문구는 B.C 47년 카이사르가 소아시아 파르나케스를 격파한 후 원로원에 보냈던 전승 보고서 첫 줄이다. 이 문구를 우리 한국인들이 체육대회나 단합대회 때 원문을 약간 변경하여 “왔노라 싸웠노라 이겼노라”로 사용하기도 한다. 어쨌든 인간적으로 카이사르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 그는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폭군(暴君)이 아닌 성군(聖君)의 모습으로 부하들을 다스리며 덕(德)의 정치를 했다. 카이사르의 인생철학이 있었는데 “강자에게 영예를 양보하고, 약자에게 필수품을 양보하라”였다. 인생철학 그대로 그는 전리품들을 자신이 챙기지 않고 부하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고 개인적 재산을 가지고 법률사무소, 마켓, 편의시설을 지어 제공함으로 많은 사람의 신뢰를 쌓아갔으며 자신은 검소한 삶을 살아 타인들로하여금 인정받는 지도자였다. 또한 유머 감각이 있어 부하들에게 마음의 안정을 주었고. 외부 적군들을 정복하기보다 더 힘든 내국 통치를 덕(德)의 정치로 이끌었던 지도자였다. 하지만 죄의 성향을 가진 인간들은 선한 정치를 하는 카이사르를 온전하게 두지 않았다. 카이사르와 친했던 부하 브루투스를 배신자로 만들어 음모를 꾸며 살해하도록 하였다. 믿었던 부하에게 배신당해 칼에 찔려 죽어가면서 마지막 남긴 말이 “브루투스 너마저...!” 인생 허무함으로 막을 내렸다. 훗날 카이사르에 대한 평가를 할 때에 일부 부정적 평가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좋은 평가를 하는데 로마에 수많은 지도자가 있었지만 카이사르를 “로마가 낳은 창조적 천재”라고 결론지었다. 신앙의 싸움을 하고 최후 주님 만나는 그날 주님께서 주신 사역의 현장인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VICI(이겼습니다)” 이렇게 승전 보고를 한다면 멋진 인생을 산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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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영적 싸움에 “VICI(이겼노라)”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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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다시 논하다
- 지난 9월 3일 전국 신문 1면 톱뉴스를 장식한 중국 베이징에서 보내온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중국 전승절 8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중국 시진핑, 러시아 푸틴, 북한 김정은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서늘한 기운으로 다가왔다. 마치 한반도를 바라보면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음흉한 모습이랄까. 아무튼 중국 전승절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답답하지만, 중국은 한 장의 사진으로 대한민국을 비롯한 서방권 제국들에게 도전하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작금의 세계 정세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후 강한 드라이브로 관세폭탄을 세계 각국에 던지면서 ‘강한 미국’을 시현하고 있다. 이에 대한 사회주의 동맹의 이들 세 나라는 단합의 자세를 즉각 보이는 것으로,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한참 국민 정서를 흐트려놓았다. 문제는 이날 사진 한 장에서 세계는 지금 경제전쟁과 이념패권이 깊어지고 있다는 진단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세계를 주도하는 미국의 경제력에 부단히 따라붙고 있는 중국을 미국은 본격 견제하기 시작했다. 세계 각국 언론사 탐사취재팀은 오늘의 중국이 시진핑의 장기집권을 비판하면서 위기로 치닫고 있다는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반면에 중국의 건재함을 진단하면서 미국의 경제력을 압도해 간다는 보도를 내기도 한다. 세계 새로운 산업 트렌드인 AI 산업시대는 중국이 세계를 이끌 것이라는 학자들의 진단도 있다. 등소평 후 개혁개방의 대전환이 이제 자본주의의 현장 미국을 넘어설 것인가. 아니면 공산사회주의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이끄는 데 한계가 왔다는 주장이 맞을 것인가. 쉽게 전망할 수 없는 형편 아니겠는가. 상황의 전개가 어찌되든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야욕에 대해 쉽게 시선을 돌릴 수 없다.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북한의 3각 대응이 우리에게는 조선 말 위기의 한반도가 되지 않을까 걱정되지 않을 수 없다. 해방 후 좌우 대립에서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가 아닌가. 주변 강대국이 새롭게 이념전쟁화하는 신냉전시대, 우리는 갈 길을 모르고 깊은 내전(內戰)에 휩싸여 있다. 필자는 얼마 전 우리의 근대사 영웅 안중근이 1907년 하얼빈에서 원수 일본 총리 이토를 쓰러뜨린 후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주창했던 이야기를 영화 《하얼빈》을 통해 소개한 바 있다. 다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오버랩된다. 한국교회가 해야 할 일은 이 비상하고 위험한 정세일지라도 복음의 실크로드를 열심히 닦아내는 것이다. 이 사명의 복음운동에 동아시아의 진정한 평화의 길이 열릴 것이다. 사형집행을 앞둔 차디찬 감옥 바닥에서 그는 5가지의 평화제안을 했다. 첫째, 조선·일본·청나라 3국이 연합하여 협력공존의 협력기구를 만들자. 둘째, 3국이 공동은행을 설립·운영하자. 셋째, 3국이 공동연합하여 서양 침입에 공동대처하자. 넷째, 3국의 경제개발 지혜를 일본에서 배우자. 다섯째, 상호 존중하고 평화를 유지하자. 어쩌면 굴욕 같지만 일본에 대해 조선을 식민지화하지 말고 아시아를 평화의 공동지대로 만들자는 혁신적 제안이었다. 일본에 36년간 식민지 지배를 받고 해방되어 6·25를 겪으며 처참한 빈국이 되었던 나라, 이 나라가 자유민주의 자본시장경제의 기틀에서 세계 10위 내 경제 강국으로 성장했다. 성공과 부흥 끝에 다가오는 또 다른 위기인가. '경제 보물섬'이 되어버린 지금의 대한민국에 대해 눈독으로 가득 찬 주변 나라들을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한국교회가 강력한 복음운동으로 나가야 한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동아시아에 새롭게 심도록 해야 한다는 논지이다. 먼저 동아시아 복음평화운동으로 한반도의 복음통일을 이루는 데 부단한 사명 수행이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동아시아 복음평화운동에 주변 모든 나라의 교회가 연합하는 새로운 역사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약관의 나이에 오직 식민지를 꿈꾸는 적장을 총탄으로 쓰러뜨리고 위대한 동양평화론을 주창할 수 있었을까. 젊은 영웅이 피를 토하듯 던진 이 어록(語錄)을 깊게 되새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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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다시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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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숙 권사] 다시 뛰게 하시는 하나님
- 지금, 다시 일어서야 할 누군가에게 우리는 모두 한 번쯤, 삶의 무게에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나아지지 않는 현실, 설명할 수 없는 억울함, 그리고 말하지 못한 상처가 마음을 짓누를 때, 어디서 다시 힘을 얻어야 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놀랍게도, 성경은 그런 때를 겪은 사람들에게도 말을 건넵니다. 이사야서 33장은 그런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주전 8세기 말, 남유다 왕국은 앗수르 제국의 위협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당대의 앗수르는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고 조공을 강요하며 공포로 지배하던 강대국이었습니다. 남유다 또한 그들의 침공 앞에서 불안에 떨고 있었고, 때때로 생존을 위해 조공을 바쳐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그 위기의 시기에, 이사야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황충의 때 같이 사람이 너희의 노략물을 모을 것이며, 메뚜기가 뛰어오름 같이 그 위로 뛰어오르리라.”(이사야 33:4) 이 구절에서 ‘사람’은 바로 회복된 하나님의 백성, 곧 지금까지는 억눌리고 침묵했던 남유다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고난을 겪고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되찾는 주체로 바뀝니다. 반대로 ‘너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앗수르 제국을 지칭합니다. 그들이 강제로 빼앗고 축적한 부와 권세는 결국 하나님의 공의로 인해 무너지게 될 운명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이 노략질했던 것들이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회복의 선언입니다. 또한 ‘메뚜기’는 그 당시 중동에서 파괴력 있는 집단 행동의 상징이었지만, 여기서는 회복된 유다 백성의 힘찬 움직임과 생동감 있는 회복의 이미지로 사용되었습니다. 작고 연약한 메뚜기처럼 보였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제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다시 일어나는 존재로 변모합니다. 마지막으로 ‘그 위’는 앗수르가 차지하고 있었던 권세와 재물, 전리품이 놓여 있던 자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위로 뛰어오른다는 것은 단지 물리적 회복이 아니라 위치의 역전, 즉 억압에서 회복으로의 전환을 뜻하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던 자들이 결국 무너지고, 그들이 빼앗은 것들을 백성들이 되찾게 되는 회복의 약속입니다. 황충과 메뚜기, 작고 연약한 존재 같지만 그들이 몰려올 때 그 힘은 대단합니다. 하나님은 그 이미지를 사용하셔서 “나의 백성들이 마침내 일어나 다시 뛰게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십니다. 혹시 지금 억울한 일을 겪고 계신가요? 말 못 할 상처나, 기대했던 것이 무너져 침묵 속의 눈물을 흘리고 계신가요? 사람들은 몰라도, 주님은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회복시키겠다. 네가 빼앗긴 것을 다시 뛰어오르게 하겠다.” 이사야 33장 4절은 단순한 문학적 이미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와 회복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억압을 꺾으시고, 넘어진 자들을 다시 일으키십니다. 사람 눈에는 우리가 작은 메뚜기처럼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우리는 회복의 주인공이 됩니다. 오늘도 믿음으로 이렇게 고백해 봅시다. “주님, 제가 다시 일어서겠습니다. 주님이 회복하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백을 들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시 뛰는 날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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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숙 권사] 다시 뛰게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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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왜 7을 행운의 숫자로 보는가?
- 1. 서언(序言) 오래전의 본지의 기고에서 동양권에서 주로 기피하는 숫자 4(四)와 서양권에서 기피하는 13과 13일의 금요일에 관하여 기술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런 기피하는 숫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행운으로 여기는 숫자도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7이다. 본 호에서는 왜 7을 행운의 숫자로 보는지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유래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숫자 7을 왜 행운으로 여기는 유래와 의미 (1) 고대 문명과 종교에서 유래한 신성한 숫자 1) 고대 메소포타미야 문명과 이집트 문명의 7일 주기: 인류 최초의 문명으로 보는 이곳에서 7은 매우 중요한 숫자였다. 특히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은 태양과 이를 자전과 공전으로 움직이는 행성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그 주기성을 통해 계절 변화와 농업에 적용했다. 이런 관계로 7행성을 신으로 여기는 동시에 하늘과 지구를 연결하는 중요한 요소로 간주했다. 또한 이 천체를 기준으로 일주일이란 시간이 나왔고, 이는 고대 이집트도 마찬가지였다. 이들도 7을 한 주간으로 삼았고, 농업과 계절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7을 좋아하고 행운의 숫자로 여긴 것이다. 2) 종교적인 상징성: 종교에서도 7은 매우 중요한 숫자였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6일간 세상을 창조하시고, 7일째 안식하셨으며, 요한계시록을 비롯한 성경 전반에서 7이 자주 나오며, 이를 신성함과 완전수로 여긴다. 불교에서도 석가모니가 태어날 때 7걸음을 걸었다는 전설과 칠각(七角) 등의 7을 중요시했다. 이슬람교는 하늘을 7층으로 믿었고, 메카를 도는 순례 의식도 7회로 했다. 이런 면에서 7은 종교 전반에 걸쳐 신성한 숫자로 여겨왔다. (2) 자연현상과 관련된 특별함 : 앞에서 고대 메소포타미야 문명과 이집트 문명에서 태양과 행성의 연관성으로 7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했는데, 이는 다른 자연현상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자연현상 속에도 7은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면, 무지개의 7가지 색깔도 그러하고, 기본적으로 음악의 7음계도 이와 연관되었으며, 인간의 감각도 7가지로 분류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자연의 질서나 구조에서 7을 완전함과 조화를 상징하는 숫자로 여겼다. (3)문화와 전통에서 7의 특별함 : 다양한 문화권에서도 7은 행운을 상징하는 숫자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이를 세분화해서 기술하면 다음과 같다. 1) 서양 문화에서의 Lucky 7: 미국과 서양 문화에서는 7을 ‘럭키 세븐(Lucky Seven)’으로 인식하면서 7은 길흉을 결정하는 중요한 숫자로 여겼다. 슬롯머신 같은 도박에서도 777을 잭팟으로 하고 있다. 즉 7은 곧 행운과 성공의 상징으로 여기는 것이다. 2) 동양 문화의 경우: 동양에서는 숫자 8이 주로 복을 상징하지만, 7 역시 귀신을 쫓는 행운의 숫자로 여겼다. 예를 들면 중국은 7이 하늘과 땅, 인류와 자연을 연결하는 중요한 숫자로 인식하며, 인간과 우주의 조화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한국에서는 7일장을 치른다거나, 칠석(七夕)처럼 7이 들어간 풍습이 많이 있다. (4) 7의 완벽함과 심리적인 영향 : 심리학자인 조지 밀러의 ‘매직 넘버 세븐’ 이론으로, 인간은 7개의 정보를 가장 효율적인 숫자로 여겼고, 사람의 인지능력에 가장 좋은 숫자라고 했다. 피타고라스도 7을 완벽한 숫자라고 했으며, 일반적으로 7은 시각적으로는 가장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독립적이고 특별한 느낌을 준다는 심리적 요인이 있다는 분석도 했다. 3. 기독교인으로서의 관점 및 결어 이상으로 볼 때 숫자 7이 행운의 숫자로 여기는 이유는 역사적, 종교적, 문화적, 심리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다시 말하면 고대 초기 메소포타미야 문명과 이집트 문명에서 시작된 태양계 행성의 주기가 실질적 생활에 좋은 영향을 주었고,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등 긍정적인 요인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면이 잘못된 종교와 문화적 인식으로 변하여서 오늘날에도 ‘행운’을 주는 주술적 숫자로 인식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특히 우리 기독교의 관점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숫자 7을 행운으로 여기는 일은 반기독교적인 사고방식이다. 오늘날과 같은 현대 문명에서 아직도 이러한 미신적 사고가 계속된다는 점이 안타깝다. 하지만 이를 바로잡아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이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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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왜 7을 행운의 숫자로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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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선교영화 ‘무명’ 에서 받은 동북아 ‘복음평화론’
- 가족과 함께 선교 다큐멘터리 영화 '무명(無名)'을 관람했다. 선교방송 CGN이 제작한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 무명은 일제 강점기 일본 땅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와 복음을 전한 이야기다. 조선인보다 조선을 더욱 사랑했던 두 선교사의 예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영토 강점이란 원수지간의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복음으로 사랑과 용기를 보여준 선교사의 눈물 담긴 이야기다. 1863년 일본 마쓰야마에서 태어난 노리마츠 마사야스 선교사는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일본 공사 미우라에 의해 처참히 시해된 을미사변 사건을 보고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하기로 결심한다. 이듬해 1896년 노리마츠 선교사는 수원 땅에 들어와 조선인이 되기로 마음먹고 청년 조덕성을 만나 한글을 배우고 복음을 전했다. 지독한 핍박 속에서도 예수 사랑을 실천하며 아내 사토와 함께 경기도 수원에서 수원동신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이어갔다. 얼마나 고난의 나날이었을까. 세 자녀를 낳아 키우면서 오직 조선인을 사랑하는 복음 정신으로 목회를 이어갔다. 불행히도 사모 사토는 세 자녀를 낳고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러나 노리마츠 선교사는 자녀들과 함께 조선 땅에서 한평생 선교사의 삶을 살다 1921년, 58세의 일기로 소천한다. 1896년에 조선에 입국한 오다 나라지 선교사는 불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노리마츠 선교사의 조선 선교를 보고 조선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오다 선교사는 1896년에 조선 땅에 들어와 이름을 전영복이라 바꾸고 북한 땅과 호남 지역을 돌며 복음을 전했다. 오다 선교사는 특히 일본에 반하는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라고 설파하고 복음을 전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연유로 체포되고 심한 고문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정확한 연도는 모르지만 일본 땅으로 강제 추방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다 나라지 선교사는 조선인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조선 청년 박중학이 오다 선교사의 영향을 받아 회심하고 독립운동에 헌신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영화에 담기도 했다. 영화 무명은 국내 전국 영화관에서 상영하고 있지만 관람은 미미하다. 그러나 기독교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이 땅에 대해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지를 알 수 있는 탁월한 다큐 영화였다는 느낌을 필자는 받았다. 일제 36년, 역사와 신앙 사이에서 숨겨져 있던 고뇌의 복음 이야기를 체험할 수 있는 관람의 은혜였다. 문화 선교와 미디어 복음에 사명을 감당하는 CGN방송이 광복 80주년, 한일 국교 정상화 60년을 맞아 제작한 작품이다. 필자는 영화를 관람하고 크고 깊은 은혜를 받았다. 오늘날 한·중·일의 동북아 지역은 갈등이 심화된 국제 정세 속에 있다. 이 갈등의 깊은 곳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일방적 힘으로 해결할 일이 아니다. 예수 사랑의 복음만이 ‘평화’의 땅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쏴 살해했다. 그리고 감옥에 있으면서 일본에 보내는 ‘동양평화론’을 주창했다. 안중근은 서슬 퍼런 일본 제국이 침략 야욕을 버리고 아시아의 평화 공동체를 만들자고 호소했다. 영웅의 주창은 당시 많은 일본인들이 감동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일본이 이를 받아들일 리 있겠는가. 일본은 이듬해 을사늑약으로 조선을 삼키고 조선 찬탈에 성공, 36년간 압정을 했지만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에 의해 패망하고 말았다. 지금 동북아는 한·중·일, 그리고 북한, 미국, 러시아의 지정학적 초갈등 속에 긴장의 도는 더해 가고 있다. 날로 선교가 어려워지고 있는 일본 땅과 중국 땅에 복음의 씨를 뿌리는 데 더욱 힘을 쏟아야 하며, 우리도 오직 예수 사랑으로 일본 두 선교사의 조선 사랑을 실천했던 것처럼 우리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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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선교영화 ‘무명’ 에서 받은 동북아 ‘복음평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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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기독사학이 살아야 대한민국 미래가 있다
- 교육강국 대한민국의 초석을 놓은 근대 선각자 세분을 꼽으라면 우남 이승만, 도산 안창호, 남강 이승훈 선생을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이승만 건국 대통령에 대해서는 붙여 얘기할 필요가 있겠는가. 치적의 하나인 토지개혁을 단행하면서 대지주들에게 땅을 사립학교 설립에 유도하고 평생 운영을 맡겼다. 바로 대한민국 인재를 양성한 사학제도이다. 한국 공교육을 폄하하지 않는다. 한데 한국 사학들이 70년대 이후 뜨거운 교육열 속에 향학의 경쟁문화를 통해 수많은 인재양성 바로 산업일꾼들을 키워냈다. 근대역사 속에 독립 운동가이자 교육자 도산 안창호 선생은 미국등지 유학을 통해 선진문화를 보고 조국의 교육진흥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후세들을 위해 배워야 만 살아갈 수 있다는 연설을 당시 후학들에게 설파했다. 자신의 호 도산(島山)을 지은 것도 태평양 바다 속 우뚝 솟은 하와이를 보고 교육을 상징하는 의미로 지었다고 한다. 신민회 조직은 물론 지금까지 이어오는 흥사단 등 독립운동과 조국의 미래를 위해 교육을 강하게 주창한 선각자이다. 남강 이승훈 선생은 유명한 오산학교를 설립했으며 3.1운동 33인의 한분으로 독립운동을 하신분이다. 거장 세분의 선각자는 모두 기독교 이념의 서구교육으로 조국 발전의 밑자락을 놓은 선각자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학 중 광복이후에도 많은 선교사를 비롯 교회에서 기독사학을 설립했다. 그리고 건학이념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건강한 교육을 선양해왔다. 산업화 민주화과정에서도 기독사학들이 인재양성에 많은 기여를 하면서 명성 있는 사학들을 육성했다. 그리고 상시 채플시간 교목들의 복음 활동을 통해 80년대 한국기독교 부흥에 한축 기둥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기독사학들이 급격히 사양의 길을 걷고 있다는 분석이 모두를 안타깝게 한다. 광역단체 교육수장들이 선출직이 되면서 다양한 교육이념의 정책이 도입되고 있다. 획일적 교과서에 다양성을 도입하고 있다. 학생인권을 우선시하는 인권시대의 권리남용이 교육현장을 어지럽히고 있다는 슬픈 현실이다. 우선 교목들의 복음채플시간이 크게 줄고 있다는 최근 비공식 통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전국 사립중은 632개, 사립고는 945개소이다. 이중 기독사학을 보면 기독사학중학교가 135개, 고등학교가 185개소이다. 이 중 교목을 둔 기독사학은 중학교 79개, 고등학교 139개 학교로 알려졌다. 기독사학들이 갈수록 교목을 두지 않거나 계속 줄여나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왜 일까. 진보정치성을 띤 교육수장들이 보이지 않게 기독사학들의 복음 활동을 억압하고 있다는 말이다. 교육청에서 지원하는 학교지원예산을 들고 직간접으로 묘한 억압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기독사학의 건학 이념에 채플참여 의무시간이 있다. 이것도 자율 선택권을 두어 채플 의무시간을 자유하게 하는 추세다. 한국 기독교가 복음의 큰 사명 앞에 슬픈 현실이 되고 있다. 그동안 사학에 투자한 많은 기독사학의 주인들이 학교를 넘기거나 포기하는 사례까지 생겨나고 있다. 조국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게 한 교육의 원천이 되었던 기독사학들이 겪는 이 아픔이 아픔이 아니다. 기독사학이 무너지면 조국의 미래를 생각할 수 없다. 기독사학이 온 세상 구원의 지경을 확장하는 역할을 했던 것만 아니다. 중고를 비롯 대학의 현장까지 젊은이들이 가져야하는 건강한 정신을 함양하는데 기독사학들이 희생해왔다. 이러한 교육원천이 조국 대한민국의 비전이자 미래이다. 그러나 한국기독사학의 사양화는 다시말해 조국의 미래를 말할 수 없게 한다는 점이다. 모두가 한 번 더 새겨보고 강구책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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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기독사학이 살아야 대한민국 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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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호숙 목사] 영적 싸움에 “VICI(이겼노라)”가 있는가?
- 전쟁에는 반드시 이겨야 하듯, 영적 싸움에도 반드시 승리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의 종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로마 제국 시대 율리어스 카이사르(Jullius Caesar – 영어표기 시저. 성경표기 가이사)는 전쟁을 스포츠처럼 즐겼던 사람이다. 그가 남긴 명언들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The dice(die) is cast. 주사위는 던져졌다. 폼페이우스가 로마 원로원과 음모를 꾸며 카이사르를 죽이려고 로마로 복귀할 때 루비콘강을 건너기 전 모든 무장을 해제하고 오라고 하였다. 명령을 받은 카이사르가 생각해 볼 때 가만히 있으면 자신은 파멸될 것이고, 무기를 들고 루비콘 강을 건너오면 로마의 역적이 될 것이므로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 카이사르는 고민하였다. 이래도 죽을 상황이고 저래도 죽을 상황인데 “죽을 때 죽더라고 싸우고 죽자” 결단을 내리고 무기를 들고 루비콘 강을 건너면서 명언을 남겼는데 “주사위는 던져졌다”고하였다. 이때부터 특별한 결단을 하여 어떤 일을 할 때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말을 하게 되었다. *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왔노라[VENI-고대 라틴 발음(웨니), 현대 라틴 발음(베니), I came] 보았노라[VIDI-고대 라틴 발음(위디), 현대 라틴 발음(비디), I saw] 이겼노라[VICI-고대 라틴 발음(위키), 현대 라틴발음(비키,비치), I conquered] 이 문구는 B.C 47년 카이사르가 소아시아 파르나케스를 격파한 후 원로원에 보냈던 전승 보고서 첫 줄이다. 이 문구를 우리 한국인들이 체육대회나 단합대회 때 원문을 약간 변경하여 “왔노라 싸웠노라 이겼노라”로 사용하기도 한다. 어쨌든 인간적으로 카이사르에게서 배울 점이 많다. 그는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폭군(暴君)이 아닌 성군(聖君)의 모습으로 부하들을 다스리며 덕(德)의 정치를 했다. 카이사르의 인생철학이 있었는데 “강자에게 영예를 양보하고, 약자에게 필수품을 양보하라”였다. 인생철학 그대로 그는 전리품들을 자신이 챙기지 않고 부하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고 개인적 재산을 가지고 법률사무소, 마켓, 편의시설을 지어 제공함으로 많은 사람의 신뢰를 쌓아갔으며 자신은 검소한 삶을 살아 타인들로하여금 인정받는 지도자였다. 또한 유머 감각이 있어 부하들에게 마음의 안정을 주었고. 외부 적군들을 정복하기보다 더 힘든 내국 통치를 덕(德)의 정치로 이끌었던 지도자였다. 하지만 죄의 성향을 가진 인간들은 선한 정치를 하는 카이사르를 온전하게 두지 않았다. 카이사르와 친했던 부하 브루투스를 배신자로 만들어 음모를 꾸며 살해하도록 하였다. 믿었던 부하에게 배신당해 칼에 찔려 죽어가면서 마지막 남긴 말이 “브루투스 너마저...!” 인생 허무함으로 막을 내렸다. 훗날 카이사르에 대한 평가를 할 때에 일부 부정적 평가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좋은 평가를 하는데 로마에 수많은 지도자가 있었지만 카이사르를 “로마가 낳은 창조적 천재”라고 결론지었다. 신앙의 싸움을 하고 최후 주님 만나는 그날 주님께서 주신 사역의 현장인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 “VICI(이겼습니다)” 이렇게 승전 보고를 한다면 멋진 인생을 산 것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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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속담은 쉽고 간결한 말로 선조들의 지혜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전해주므로, 익혀두면 여러모로 쓸모가 많다. 아무리 쉬운 일이라도 혼자 하는 것보다는 여럿이 힘을 합하면 더욱 쉽다는 의미의 우리말 속담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가 있다. 사자성어로도 비슷한 단어가 있는데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 해서 ‘한 손으로는 소리를 낼 수 없다’라는 뜻이다. 비슷한 의미의 영어 속담도 있는데 ‘Two heads are better than one’ 두 사람의 지혜가 한 사람의 지혜보다 낫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협력(協力)’을 뜻하는 문장이 많다. 그런데 이렇게 귀한 단어가 성경전체에 딱 한 번 나온다. (빌1:27)에서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그리고 협력(協力)과 비슷한 단어로 합력(合力)이 있는데 이 단어 역시 성경에 두 번 등장한다. (삼상22:17)에 “왕이 좌우의 호위병에게 이르되 돌아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그리고 (롬8:28)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놀라울 따름이다. 그만큼 ‘협력’이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함께 일을 할 신실한 동역자도 구하기 힘들다. 정말 내 마음에 꼭 맞는 사람, 평생을 두고 백지장을 맞들 한 사람을 구하기 힘들다. 사람은 많지만 정말 좋은 사람을 찾아내기 힘들다. 예수님에게도 12명의 제자가 있었다. 바울에게는 신실한 제자 디모데가 있었다. 엘리야에게는 영적인 아들 엘리사가 있었다. 이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다. 혼자서 모든 일을 처리하는 만능인도 없다. 함께 동역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이 잘못 되었을 때에는 ‘내 책임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동역이다. 무언가 좀 잘 했을 때에는 ‘우리가 해 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동역이다. 무언가 아주 잘 했을 때에는 ‘너희들이 해냈다’ 라고 말하는 것이 동역이다. 추운 겨울을 남쪽 나라로 보내기 위해 달밤을 날아가는 기러기 떼는 “ㅅ”자 형으로 줄을 지어서 날아간다. 과학자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를 밝혀냈다. 모든 새들이 날기 위해 날개를 퍼덕거리면 그 뒤에 있는 새에게 양력(揚力)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ㅅ”자 대형으로 날면 혼자 가는 것보다 71% 더 날아간다고 한다. 기러기 떼 중에서 뒤에서 우는 소리를 내는 기러기가 있는데 그것은 힘들어서가 아니라 바로 앞에 가는 새에게 힘을 돋아 주기 위해 하는 ‘추임새’와 같다는 것이다. 바울은 노년에 평생의 동역자인 디모데를 보고 싶어서 (딤후4:9)에서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고 말했다. 너무도 감사한 것은 우리에게는 정말 귀한 동역자가 계신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성경이 그렇다고 말한다. (고전3:9)에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무 귀하다.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시편121:4)에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라고 약속한다. 이제 우리에게는 함께 백지장을 맞들 분이 계신다. 그의 이름은 바로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렘51:19)에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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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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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바울은 솔직했다.
-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솔직하게 표현한다.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낼 수 있단 말인가?”라고 탄식함을 우리는 잘 안다. (로마서 7: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그는 이 죄를 바울이 아니라고 두 번이나 말한다. 얼마나 이상한 말인가? 이것이 복음이다. (로마서 7:17)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로마서 7:20)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우리는 절대 탄식 속에서만 살아서는 안 된다. 해결의 방법이 있다. 해결 방법은 아주 쉽다. 항상 사로잡아오는 죄의 법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대박이다. 한 없이 사로잡아 오는 죄의 법에서 어떻게 빠져 나와 참 평안과 영원한 행복의 삶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바울도 온전한 복음을 알고 복음의 핵심을 말한 후 로마서 7장과 8장에서 말한다. 로마서 8장의 시작을 보라.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선포한다. (로마서 8장1절) 우리는 이 선포를 그대로 받아 감사해야 할 일이다. 거듭난다는 것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다.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이다. 거듭났는가? 거듭났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새 생명을 소유했다. 바울은 결코 정죄함이 없는 자임을 알려주고 있다. 다음과 같이 받아들이고 주장해 보라. "나에게 새 생명이 있다. 나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했다" 로마서를 가지고 많이 기도하라. 1장부터 16장을 읽으며 영의 기도를 하는 시간은 신이 난다. 하나님께 고백하고 감사한다. 또 자신에게 말해 준다. “주님, 저에겐 생명이 있습니다. 저는 결코 정죄 받지 않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저를 해방했습니다.”라고 주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일을 50번도 100번도 올려 드려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기도의 시간이 될 것이다. 나에게도 말해 줘라. “너는 참으로 행복한 놈이구나. 너의 죄가 사해졌어. 너를 정죄할 그 누구도 없어. 너도 너를 이제부터는 정죄 하지 마! 너는 성령의 법으로 해방 된 자야!”라고 반복해서 나 자신에게 말해 보라. 얼마나 신나고 행복한 시간인지, 흥분되는 일이다. 능력으로 살 수 있는 지름길이 성경대로 나를 주장하고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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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바울은 솔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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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고귀한 기독문화 유산 보호의 길 찾자
- 얼마 전 지역 유력 일간지를 통해 경남도의 싱크탱크인 경남연구원 김진형 연구원의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100년 후 보물급 문화유산을 보호할 수 있는 ‘미래유산제도’를 만들어가자는 취지의 주장이었다. 김 연구원의 주장을 다시 살펴보면, 곳곳에 산재한 국가문화유산을 미래유산으로 지정하고 동판을 붙여 보호하자는 논지다. 국가유산으로 등록되기 전 ‘미래유산제’를 설치해 함부로 유실되지 않도록 하자는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하고 있다. 필자는 이 칼럼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우리 교회도 기독교 문화유산 보호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싶다. 그동안 경남 지역 각 교회를 돌아볼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독교의 고귀한 문화유산이 제대로 보호되지 못하고 유실되고 있는 실정을 목도했다. 한국 기독교가 선교 140년을 맞았으며, 국내 1천만에 달하는 기독교 인구로 인해 ‘기독교 강국’, ‘선교 강국’이 되었다. 여러 지역의 100년 이상 된 초대교회를 방문해보면 국가보물급이 될 만한 유산들이 흩어져 있으나, 체계적인 보호의 손길 없이 유실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가까운 경남 지역만 하더라도 100년 이상의 역사를 품은 교회가 100여 개소에 달한다. 1888년 캐나다 제임스 게일 선교사와 미국 북장로교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 이후, 당시 경남 부산 지역에는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이 줄을 이어 들어와 부산·마산·진주 등 경남 전역 마을마다 교회를 세웠다. 경남성시화운동본부는 10여 년 전 호주 선교사 역사관을 마산에 세우고 여러 유산을 모아 성역화해 놓았다. 참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진주 지역은 올해 선교 120년을 맞아 서부경남 부흥의 비전을 세우는 연합집회와 학술세미나를 이어 개최하고, 진주지역 기독역사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역사관을 짓고 유산을 모아 보관·관리하는 길도 매우 좋은 일이다. 그러나 정작 보물급 기독유산들은 각 지역 교회가 관리하거나 흩어져 방치되고 있는 경우가 수없이 많다. 먼저 각 교회가 관리하고 소장한 유무형의 유산들을 정리하고 집대성하여, 국가기관의 미래유산제도에 편입시켜 제도적 보호장치를 마련하는 길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의 고귀한 유산이 단번에 국가유산으로 등록되어 영구히 보호받는 길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취지에서 선교 120년을 맞은 진주 지역의 초대교회, 진주교회를 찾아 유산이 될 만한 소장·관리 유물을 살펴봤다. 당장 눈에 띄는 유물이 있었다. 120년 전 호주 커렐 선교사가 진주교회를 세우고 교회가 부흥했으나, 곧 일제의 침탈을 당했다. 1919년 3·1독립운동 때 전국의 교회들이 분연히 일어섰던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다. 1919년 3월 18일 진주 고을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날 때, 일제히 모이는 신호가 당시 진주교회 종탑에서 울렸다. 얼마나 위대하고 엄청난 복음의 숨결이 있었던가. 나라를 살리기 위해 초대교회 종탑의 종이 진주 고을 백성을 모아 독립만세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 종이야말로 국보급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구국의 종이 이후 제대로 관리되지 않았다. 다행히 현재 천안의 고신대학교에서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국민적 공감대를 모아 국가유산으로 등재하고, 국가 차원의 보호를 받아야 함이 당연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3·1운동 참여 등 역사 발전의 굴절마다 교회의 흔적이 위대한 역사 속 숨결로 숨어 있다. 이것은 하나의 중요한 예에 불과하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경남·부산 선교 140년이 다가오고 있다. 이 즈음에 기독교 문화유산을 집대성하고 고증을 거쳐, 국가 미래유산제도와 유산등록의 정책적 관리를 위해 능동적으로 나서야 하지 않을까 하는 강한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지역 교계가 한마음으로 뭉치고, 이 일을 함께 살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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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철 장로] 고귀한 기독문화 유산 보호의 길 찾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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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죽을 사(死)를 아십니까?
- 80-90년대에 중,고등학교 수학여행 코스에 반드시 들어가는 곳이 천년고도(千年古都) 경주이다. 아직도 가이드 누님의 설명이 남아 있는 유적지가 있는데 바로 ‘에밀레 종’이다. 경주 국립박물관 앞마당에는 동종(銅鐘)하나가 놓여 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최고, 최대의 종으로 이는 통일신라 성덕왕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그의 아들 경덕왕이 만들기 시작하여 손자인 혜공왕이 완성한 국보 29호이다. 따라서 이 종의 공식 이름은 [성덕대왕 신종]이지만 흔히 [에밀레 종]이라고 불린다. 경덕왕은 선왕의 기리기 위해서 구리 20만근을 들여 종을 만들기 시작했다. 종을 만드는 재료가 부족하여 스님들은 집집마다 시주를 받으려 다녔다. 한 스님이 쓰러져가는 집을 방문했을 때 한 아기의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저희 집에는 아무 것도 시주할 것이 없습니다. 이 아이라고 괜찮으시면 받아주십시오” 드디어 종이 완성되어 타종하여 보았으나 이상하게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날 밤, 스님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서 “산 아기를 넣어 종을 만들어야 소리가 난다” 고 말했다. 꿈을 깬 스님은 지난 번 그 여인을 찾아갔다. 그러자 여인은 “부처님과의 약속이니 기꺼이 아이를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 아이는 곧 뜨거운 쇳물에 넣어졌고, 마침내 종이 완성되었다. 타종을 하자 종에서는 이제껏 들을 수 없었던 웅장한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성들에게는 그 종소리가 마치 아기가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 ‘에밀레-’로 들렸다. 이로부터 그 종은 ‘에밀레 종’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종의 특이한 것은 바로 옆에는 듣는 소리나 저 멀리서 듣는 소리가 거의 같은 크기로 들리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모든 사람이 다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거부하거나 회피하거나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반드시 죽음은 불청객처럼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사람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일 수도 있겠다. 미국 시카고 대학병원에서 30년 이상 환자들을 돌보았던 저명한 여의사 ‘엘리자벳 퀴블러로스’는 그의 저서 <인간의 죽음>에서 모든 환자들이 다섯 단계로 죽음을 맞이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1단계(죽음에 대한 부정), 2단계(분노), 3단계(인정), 4단계(우울증), 5단계(죽음에 대한 인정)이다. 1단계인 ‘죽음에 대한 부정’에서 시작해서 5단계인 ‘죽음에 대한 인정’으로 마친다. 죽음에 대한 한자어를 보자. 죽을 사(死)를 풀이하면 ‘한 일(一) / 저녁 석(夕) / 화살촉 비(匕)’가 된다. 즉 “어느 날 밤에 비수(匕首)가 날아 온다” 가 된다. 우리가 잘 아는 어리석은 부자에 대한 말씀에서 (눅12:20)에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라는 구절이 있는데 바로 이 단어가 ‘죽을 사(死)’ 글자 그대로이다. (잠27:1)에서도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라고 말한다. 그렇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이 구절을 우리는 잘 새겨들어야 한다. “도로 찾다”는 말은 ‘잠시 빌려준 것을 다시 거두어 들인다 / 회수한다’ 라는 뜻이다. 우리의 목숨, 우리의 영혼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꾸어온 것이지, 자신의 것이나 부모님의 것도 아니다. 영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성경이 그렇다고 되어 있다. (겔18:4)을 보니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라고 영혼의 주인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해 두고 있다. 어느 대학교 도서관 화장실에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다’ 라는 의미 있는 낙서가 있다고 한다.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 지난 밤도 죽음의 비수가 나를 빗겨간 것에 감사하면서 하루를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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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죽을 사(死)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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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불교에서 유래된 용어들: 천생연분(天生緣分)과 천생연분(千生緣分)이란?
- 1. 서언(序言) “저 부부는 정말 천생연분이야, 정말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 틀림없어.”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이는 정말 좋은 덕담이요 칭찬의 말로서 결혼이나 연인 관계에서 흔히 사용되며, 서로가 운명적으로 맺어진 관계임을 강조할 때 이런 말을 한다. 즉, 서로가 지극한 사랑과 잘 맞는 관계를 확인한 연인이나 부부의 연을 ‘천생연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말을 어떤 자리와 어떤 관점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기독교인으로서는 합당한 말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천생연분(天生緣分)과 불교에서 말하는 천생연분(千生緣分)은 다르기 때문이다. 본 호에서는 이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2. 일반적인 천생연분(天生緣分)이란? 1) 한자어의 뜻과 일반적인 의미: 하늘에서 정해준 연분이란 뜻으로, 하늘 천(天)과 날 생(生), 가장자리·묶음 연(緣)과 나눌 분(分)으로 하늘에서 정해준 연분이란 뜻이다. 속담으로는 ‘천생연분에 보리개떡’이 있다. 이는 ‘보리개떡을 먹고 살 정도로 가난해도 부부가 의좋게 산다.’는 말이다. 또한 서로를 위해 태어난 것처럼 잘 맞는 사람들이나 성격과 가치관, 삶의 방향 등이 잘 조화를 이루는 관계를 뜻하기도 한다. 서양에서는 이런 이상적인 연인이나 부부 관계를 ‘소울메이트’(soulmate)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2) 심리적인 면에서의 의미: 이는 아름답고 잘 맺어진 관계라도 하늘에서 정해주는 것이 아닌, 사람의 마음과 의식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는 것이다. 즉, 서로 상호 간의 마음으로 연결된 조건의 충족으로 신이 아닌 인위적으로 형성된 관계라는 것이다. 3. 불교적인 천생연분(千生緣分)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천생연분은 하늘 천(天)의 天生緣分이 아니라 숫자 일천 천(千)의 千生緣分을 의미한다. 이는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교리 중 하나인 연기론(緣起論)의 인연(因緣)에서 유래된 말로서, 원인(因)과 조건(緣)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인간의 힘으로는 끊을 수 없는 깊은 관계를 의미한다. 이를 부부 관계로 보면, 남녀가 만나서 부부가 되는 것은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생(生)의 인연이 쌓여서 된다는 것으로 본다. 예를 들면 한 부부가 이루어지려면 전생부터 이어진 남자 500생과 여자 500생의 인연이 합쳐져서 1,000생이 될 때 만나게 되면 千生緣分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부가 오욕락(五欲樂: 식욕, 수면욕, 색욕, 재물욕, 명예욕)을 함께해야 되는데, 이 중에서 하나라도 깨어지면 잡귀가 틈타 들어와서 부부 간의 신뢰가 깨어지면서 갈등이 시작되고 千生緣分이 무너지게 된다고 했다. 또한 이 천생연분은 부부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식 간에는 600생, 형제자매는 700생, 스승과 제자는 800생이 지나야 만나기 때문에 부부 간의 인연보다 더 깊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보면, 불교의 千生緣分은 전생의 업(業)으로 인해 맺어진 깊은 인연을 의미하기 때문에 좋은 업을 쌓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한 화합과 신뢰로 함께하는 오욕락의 조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4. 기독교적 관점의 천생연분(天生緣分)과 결론 및 제언 기독교에서 "천생연분"이라는 표현을 할 수 있는가? 결론적으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소 신학적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첫째로, 천생연분(天生緣分)은 ‘천상배필(天上配匹)’이라고도 하는데, ‘하늘이 정해준 관계’라는 점에서는 결혼이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안에서 맺어졌다고 믿는 기독교적 관점과 비슷하다. 하지만 연분(緣分)이란 말은 불교의 연기론의 인연을 연상하기 때문에 오해를 가져올 수 있어 주의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 불교적인 용어인 천생연분(千生緣分)은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될 말이다. 그 이유는 앞에서 기술한 대로 전생과 인연 등의 전형적인 불교적인 용어이기 때문이다. 셋째로, 제언할 것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천생연분(天生緣分)은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앞서 기술한 대로 우리말로는 오해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게 하셨다”는 섭리와 인도로 표현하는 것이 더 나은 표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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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불교에서 유래된 용어들: 천생연분(天生緣分)과 천생연분(千生緣分)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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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옛 본성은 죽었다.
- 옛 본성이 죽었다고 믿고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성경에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죄를 짓지 아니한다고 했다.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이다(요일3:9, 5:18). 이 씨는 예수의 생명을 말한다. 예수와 동일한 생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임했고, 우리 안에 임마누엘 하셨다는 말이다. 임마누엘은 죄가 없을 때 가능한 놀라운 기적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길을 여신 것은 하나님 자신도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당신 스스로를 위해 하신 일이라고 하신다. 이사야 43장 25절에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라고 하신다. 로마서3장 26절에도 같은 말씀을 하셨다.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셨다. 그렇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영원히 함께 있고 싶은 열망의 결과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함께 해 달라고 간구하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먼저 손을 내 미시고 깨끗하게 하신 후 믿음으로 받기만 하라고 하신다. 우리는 이미 주님과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영원토록 임마누엘 하신다. 우리를 영원토록 의롭게 하셨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히 임마누엘하시기 위한 계획을 세우시고 이루셨다.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완전히 청산하셨다. 그리고 임마누엘 하셨다. 미래의 죄까지도 해결 해 두셨기에 우리는 죄를 짓지 아니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한일서 3장9절)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요한일서 5장18절) 임마누엘은 영원한 하나님과의 연합이다. 보리를 볶아 물을 넣고 끓이면 보리차가 된다. 볶은 보리와 물이 완전히 다른 보리차가 된 것이다. 이것이 연합의 비밀이다. 하나님과 우리는 연합되어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임마누엘을 씨로 표현했다. 씨는 성장해야 한다. 임마누엘을 계발해야 한다. 우리가 거듭날 때 받은 생명은 주님과 똑 같은 생명이다. 우리에게 본성이 두 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의 본성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은 아니다. 하나님의 본성이 있음을 믿음으로 인정하는 훈련을 하라. 놀라운 결과가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옛 본성을 죽이려는 헛된 싸움을 멈춰야 한다. 옛 본성을 죽이려는 것은 모든 종교가 하는 일이다. 옛 본성을 죽이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새 본성, 새 생명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기독교다. 임마누엘의 생명에 전력을 다해 초점을 맞추어 감사와 감격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초점을 맞춘다는 말은 집중적으로 생각하고, 믿고, 이정하고, 묵상해야 한다는 말이다. 옛 본성을 죽이려 하지 말고 본성이 죽었다는 것을 믿어라. 로마서 6장 전체는 옛 본성이 죽었고, 부활한 본성으로 연합했다는 말씀을 한다. 당신의 옛 본성은 죽었다. 옛 본성을 죽이는 신앙생활을 멈추고, 믿음으로 인정하라. 옛 본성이 죽었음을 믿음으로 받아 들여라. 더 이상 옛 본성을 죽이는 신앙생활은 멈추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함께 죄의 본성은 십자가에 이미 못 박혔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놀라운 기적이다. 이해가 완전히 안되더라도 좀 더 읽어 나가라. 분명한 것은 옛 본성을 죽이려는 헛된 싸움을 그만 두고 새 본성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기적의 삶이 일어난다. 의인의 삶이 되어지는 것을 볼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말씀한다. (로마서 8장1절,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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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위대한 일
- 어느 날, 영국의 한 시골 병원에 초라한 행색의 부인이 찾아와 애원을 했습니다. “의사선생님, 지금 제 남편이 다 죽어갑니다. 제발 오셔서 살려 주세요.” 의사는 그 부인의 간절한 애원을 듣고는 하는 일을 멈추고 서둘러 왕진 가방을 챙겨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은 의사의 눈치를 살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저는 가진 돈이 한 푼도 없습니다.” 그 말에 의사는 “그게 무슨 대수라고, 사람부터 살려야지요.”라고 말을 하면서 부인을 재촉하여서 길을 나섰습니다. 이윽고 어느 낡고 초라한 집에 도착했습니다. 집으로 들어가 보니 쓰러져 누워 있는 그 부인의 남편이 보였습니다. 의사는 서둘러 그를 진찰했습니다. 그리고 말을 했습니다. “부인, 큰 병은 아니니 안심하세요.” 부인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드렸습니다. 의사는 부인을 병원까지 다시 데려가서는 부인에게 작은 상자를 건넸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이 상자는 반드시 집에 돌아가서 열어 보세요. 그리고 이 상자 안에 적힌 처방대로 하면 남편의 병은 금방 나을 것입니다.” 부인은 의사가 시키는 대로 집에 돌아와 그 상자를 열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상자 안에는 처방약 대신에 여러 장의 지폐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봉된 작은 쪽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처방전입니다. 남편 분은 영양실조 상태입니다. 이 돈으로 뭐든지 드시고 싶은 음식을 사 주십시오.” 부인은 그 처방전을 보고는 울컥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떨어뜨리며 한참 동안 그 처방전을 바라봤습니다. 부인에게 이 처방전을 써 준 사람은 일생동안 사랑의 인술(仁術) 을 펼친 영국의 유명한 의사 ‘올리버 골드 스미스’였습니다. 우리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대단한 일을 보면서 위대한 일이라고 칭송하지만 사실 위대한 일은 우리 눈앞에서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금방 말씀드린 역사 속의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훨씬 더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손을 뻗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돕는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고, 또한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한 영혼을 구원하고자 섬김과 헌신의 수고를 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무슨 뜻일까요? 어떤 주석가는 이 말씀을 “구제했다는 것은 자신에게도 알리지 말라.”라고 주석했습니다. 또 어떤 주석가는 “네가 한 일을 잊어버려라.”라고 주석했습니다. 둘 다 주님의 의도를 정확히 읽어낸 잘 한 주석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내가 행한 선행과 헌신을 내 스스로는 잊어버리기를 원하십니다. 왜요? 내 스스로가 기억하고 있으면 그 일을 자꾸 내 공로로 삼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그 선행과 헌신을 나만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하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억하는 위대한 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에는 위대한 일로 기억될지 모르지만 우리 주님은 반대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해서 선행과 헌신을 하는 사람에 대해서 산상수훈을 가르치면서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세상에서 상 다 받았으니 하나님께는 더 받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상 주시는 위대한 일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내가 행한 선행과 헌신을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우리는 전혀 억울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불꽃같은 눈으로 속속들이 다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세상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이 보시는 일이야말로 하나님이 상 주시는 진정으로 위대한 일이 됩니다. 어쩌면 지금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바로 그 위대한 일의 주인공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세상은 몰라도 하나님이 속속들이 다 보시고 아시는 그 일을 묵묵히 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에 우리가 하는 일은 진정으로 위대한 일이 되고, 그래서 성경에서 약속한 하나님이 주시는 찬란한 상급이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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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석 목사] 위대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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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자녀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
- 그리스 신화에서 ‘오딧세이’는 [트로이] 전쟁에 출정하기 직전 친구인 ‘멘토’에게 자신의 아들인 ‘텔레마코스’를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한다. ‘멘토’는 친구의 간곡한 부탁을 충실히 이행해서 전쟁에 나간 ‘오딧세이’ 대신해서 ‘텔레마코스’ 왕자를 지혜롭고 현명한 왕으로 키워낸다. ‘오딧세이’가 전쟁에서 돌아오기까지 무려 10여년 동안 ‘멘토’는 왕자의 친구, 선생님, 상담자, 때로는 아버지가 되어 그를 잘 돌보아 주었다. 이후로 ‘멘토’라는 이름은 지혜와 신뢰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 주는 스승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땅에 이는 모든 부모는 자식을 잘 키우기를 원한다. 거의 본능에 가깝다. 하지만 자식농사는 말처럼 쉽지 않다. 부모가 어떤 고생을 하더라도 자식만 잘 되면 고생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자식교육은 돈으로도 되지 않는다. 한 재벌총수가 이렇게 고백하였다. 돈으로 안 되는 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는 골프이고, 한 가지는 자식농사다. 교육학자는 나름대로 자신의 실력을 뽐내기라도 하듯 현란한 용어를 구사하면서 나름대로의 교육철학을 펼친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성경 속에서 지혜를 찾아야 한다. 유대인들은 정말 성경을 최고의 교본으로 삼고 있다. 성경보다 더 중요한 가르침은 없다고 확고히 믿고 있다. (딤후3:16)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 말씀을 그들은 확고히 믿고 있다. 유대인의 자녀교육법은 세계가 인정한다. ‘우리에게는 토라가 있다’ 이 문장이 유대인의 자랑거리요가 되어 왔다. (신6:7-9) 말씀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 길에 행할 때에든지 / 누웠을 때에든지 /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탁월한 수재들을 유달리 많이 배출한 유대인의 교육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유대인들은 어릴 적부터 구약성경을 철저히 외우는 훈련을 하고 자란다. 말씀을 수없이 암송하는 가운데 그 아이 속에 숨어 있는 잠재력이 솟아나는 것이다. 우리도 오래 전 그런 시절이 있었다. 고구려의 어머니는 아이가 말을 배우면 맨 먼저 [고구려]라는 단어를 가르치고 그 다음으로 [송화강]이라는 단어를 가르친다고 한다. 아이가 조금 자라서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하면 [을지문덕 이야기]와 [광개토대왕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한다. 청교도 신앙으로 무장된 미국 역시 교육의 뿌리는 성경이다. 미국 북동부의 6개 주(州)를 [뉴잉글랜드]라고 부르는데 그 곳에서는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글씨를 가르칠 때 읽는 문장은 놀랍게도 ‘아담의 타락으로 우리 모두 죄를 범했다’ 라고 한다. 아직까지 순수한 아이들이기에 그것을 마음에 그대로 받아들인다. 성경이 모든 교육의 기초이자 기둥이자 저력이 되어야 한다. 옛날 먹으로 그림을 그리는데 [난]을 그릴 때에 어떻게 가르치냐면 난을 치는 데는 마땅히 왼쪽으로 치는 법을 먼저 익혀야 한다. 왼쪽으로 치는 것이 익으면 오른쪽으로 치는 것은 바로 따라간다. 그러니까 신앙교육이 제대로만 되면 다른 교육은 덤으로 따라오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우리는 성경의 가치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는가? 미국 스탠포드 대학원에서 [문학과 문명]이라는 주제로 세미나가 열렸다. 거기에서 한 발표가 있었는데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은 무엇인가?” 5위/다윈(종의 기원), 4위/마키아벨리(군주론), 3위/마르크스(자본론), 2위/루소(선집), 1위/하나님(성경) 다시금 성경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부모된 우리들이 하나님께 당당하게 ‘성경 하나 제대로 가르치고 왔습니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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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승 목사] 자녀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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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불교(佛敎)에서 유래된 용어들: 번뇌(煩惱)와 백팔번뇌(百八煩惱)는?
- 1. 서언(序言) ‘무슨 불교 용어가 이렇게 많은가?’이런 기고를 하면서 계속 가지는 필자 나름의 한탄과 아쉬움의 소리이다. 그 이유는 계속 언급하는 말이지만, 이는 불교의 오랜 역사와 영향력 때문이었다. 불교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아시아권에서 옛날부터 신앙과 사상적 지주로서 사고와 의식과 문화를 지배해왔으며, 일상 언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호에서는 불교의 교리 중의 하나인 번뇌와 108번뇌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2. 번뇌(煩惱)란? 1) 번뇌의 일반적인 뜻과 의미: 번은 괴로워할 번(煩)으로 번거롭고 답답한 상태를 의미하며, 뇌는 괴로워할 뇌(腦)로서 괴로운 상태를 의미한다. 일반적인 뜻은 마음의 괴로운 생각에 시달려서 오는 고통을 의미하며, 이는 불안, 걱정, 근심, 짜증 등으로 인한 마음의 불편함과 불안정한 상태를 뜻한다. 2) 불교적인 의미: 번뇌는 불교에서 유래한 용어로 뜻은 마음이나 몸을 괴롭히는 모든 망념(妄念), 즉 욕망·노여움·어리석음 등을 통하여 발생하는 마음의 생각에서 발생하는 괴로움을 의미한다. 좀 더 구체적 번뇌는 인간의 몸과 마음을 괴롭히고 혼란과 미혹을 가져오며, 불교의 이상을 방해하는 요인으로 여긴다. 이의 주요 원인은 인간의 탐욕, 분노, 무지 등 본능적인 감정들이며, 이는 곧 인간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며, 올바른 사고와 행동을 방해하면서 인간의 행복과 평화를 저해하며, 마음의 고통을 가져온다고 했다. 3. 백팔번뇌(百八煩惱)란? 1) 백팔번뇌의 의미: 불교에서는 인간이 겪는 번뇌를 108가지로 분류하며, 이를 백팔번뇌라고 한다. 이는 우리가 겪는 모든 고민, 고통, 불안, 욕망 등이며, 108은 이런 번뇌가 많음과 다양성을 의미하고 있다. 결국 이 많은 번뇌는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며 괴롭히는데 이를 극복해야만 영적 성장과 해탈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다. 2) 백팔번뇌의 이유: 주로 두 가지로 나누는데 첫 번째는 육근(六根)이다. 이는 눈, 귀, 코, 혀, 몸, 생각 등의 사람의 여섯 가지 감각을 말하며, 두 번째는 육진(六塵)이다. 이는 육근이 가져오는 감각들이 접하는 여섯 가지 대상인 색깔, 소리, 냄새, 맛, 감각, 법 등을 말한다. 그리고 이들의 상호작용으로 좋음, 나쁨, 그저 그런 상태의 3가지 인식 작용으로 36가지 번뇌가 발생하며, 이것이 과거, 현재, 미래로 확장되어 6x6x3=108번뇌가 된다고 했다. 또 다른 견해는 견혹(見惑; 잘못된 지식이나 편견) 88가지와 수혹(修惑; 정서적, 의지적 번뇌) 10가지, 또 다른 10전(十纏; 무참함, 질투 등)을 합쳐서 108번뇌로 보기도 한다. 3) 백팔번뇌를 해결하는 방법: 첫째로는 108번뇌를 의미하는 108개의 염주 알을 돌리면서 삼보(三寶) 즉 불(佛)·법(法)·승(僧)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제거하고 마음의 회복을 위하면 이를 끊을 수 있다고 했다. 또 하나의 방법은 108가지 번뇌를 제거하기 위해서 기도 및 절을 108번 올리는 108배를 하면서 느끼는 그 고통으로 번뇌를 제거하는 방법이다. 또한 절에서는 아침과 저녁에 종을 108번 치는데 이일도 그런 방법중 하나이다. 이상으로 볼 때 108번뇌는 인간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각가지 번뇌와 집착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를 제거하는 방법이 바로 염주를 돌리거나 절을 하며 수행하는 것이다. 4. 결론 및 제언 지금까지의 내용으로 볼 때 번뇌와 이를 108가지로 나누고 이를 제거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잘못된 일은 아니다. 또한 이런 번뇌는 불교뿐만 아니라 종교와 모든 인종을 초월하여 인류의 공통적인 과제이기 때문에 이를 제거하기 위한 방법은 모두에게 유익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일을 위하여 부처를 신으로 여기고 믿고 의지하면서 수행하는 일은 기독교적 관점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성경에도 번뇌란 단어가 자주 나온다.(전1:8, 잠12:25, 욥3:2, 19:2 등), 그러나 그 뜻은 일반적인 의미이지 불교적인 의미는 아니다. 결론적으로 볼 때 번뇌란 말은 할 수 있으나 108번뇌는 사용할 말이 아니다. 또한 번뇌의 해결 방법도 성경에는 수도 없이 많이 나온다. 예를 들면‘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주님은 수많은 해결책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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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목사] 불교(佛敎)에서 유래된 용어들: 번뇌(煩惱)와 백팔번뇌(百八煩惱)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