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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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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 [신재철 목사] 만화냐, 봉고차냐. 그것이 문제로다
    ‘덕스럽게 하자!’ 담임목사님 방에서 나오며 혼자 중얼거려 본다. 개척 계획과 사임 시기를 의논하며 조금 미루기로 결정했다. 교회 내부 사정과 담임목사님의 안식년 문제로 그리하기로 했다. 물론 고집부리며 사임하고 개척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는 신호를 주시지 않았는데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모든 것을 덕스럽게 하자며 마음을 다독여 본다. 결과적으로는 계획보다 많이 미루어졌지만 괜찮다. 좋아하는 목사님 곁에서 행복한 부목사로 살았으니 이 정도 욕구는 잠시 접을 수 있다. 급히 사임하지 않고 부목사로 사역하며 개척을 준비할 시간을 배려받은 것은 득이 되었다. 쫓기지 않고 기도하며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워볼 수 있고 다른 교회 사례를 살펴보며 탐방도 하고 차근히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여유롭게 교회 개척을 주변에 알리며 기도와 후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다. 개척 시기를 연기시킨 것은, 하나님의 큰 그림이었을까? 담임 목사님의 배려였을까? “만화책 좀 채워주세요.” 마음먹었던 ‘만화방 교회’ 프로젝트를 지인들과 공유하며 후원을 요청했다. 누군가에게는 황당한 이야기였겠지만 간절했던 나의 마음이 전달되었나 보다. 지인들을 통해 크고 작은 후원이 이어졌다. 보던 만화책을 교회로 보내주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만화책 구매에 도움이 되면 좋겠다며 후원금을 주시는 분도 생겼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며 평생 만져보지 못한 재정이 쌓였다. 「만화책? 봉고차?」 2천만 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후원금을 쥐게 된다. 내 마음이 흔들린다. 개척하면 승합차 하나는 필요할 건데, 이 돈이면 깨끗한 중고차 한 대를 살 수 있는데. 만화책 사라고 주신 분도 있지만, 개척을 응원하며 주신 분도 있기에 승합차 한 대 구매한다고 따져 물을 사람도 없다. 욕심이 생긴 걸까? 고민이 깊어진다. ‘그래, 결심했어!’ 만화책이 승리했다. 봉고차는 앞으로 필요하면 하나님 주실 날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화책은 지금 못 사면 만화방 교회 프로젝트가 어그러질 것 같았다. 그리고 만화는 우리 교회의 소중한 선교 도구가 될 것이라는 확신도 들었다. ‘만화로 선교하는 게 맞나?’ 확신은 있는데 고개는 왜 갸웃거려질까. 여하튼 그런 확신으로 우리 교회는 책장을 짜고 2천 권이 넘는 만화를 채우게 된다. 그리고 개척교회 목사에게 큰 꿈이 생겼다. “대한민국에서 만화책 가장 많이 가진 교회가 되리라!” 에필로그 개척 1년 후, 우리 교회는 차량을 구매하게 된다. 하얀색 카니발은 지금 우리 교회의 발이 되어 잘 쓰임 받고 있다. 물론 5년 할부라는 족쇄가 너무 무겁기도 하지만 카니발은 할부 갚는 내 마음도 모른 체 잘만 달린다. 만화도 봉고차도 모두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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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 [박동철 장로] 비판할 자격 있는가?
    최근 모정당(중립 견지에서 모 정당이라 함)의 전당대회 돈 봉투 살포 사건이 일파만파로 확산될 조짐이다. 소위 80년대 군사독재 정권에 항거했던 운동권 86그룹이라는 정치인 중심의 모 정당은 진보를 내세우고 민주와 깨끗함을 유전자로 삼고 있다. 실제 이들의 민주화 운동은 그 공로를 높이 인정할 수 있다. 80년대 인권이 짓밟히고 군사독재의 서슬 퍼런 때 용감하게 거리에서 민주화를 외쳤고 또한 감옥살이까지 하면서 고난을 겪은 분들도 많다. 그분들이 그동안 민주화를 거치면서 국회에 많이 진출하고 이제 한국 정치의 중심에서 나라를 이끌고 있다고 봐야한다. 이념의 교체에 따라 몇 차례 집권을 하기도 했다. 진보 이념으로 국가를 발전해 보자는 주창도 이들을 통해 많이 들었다. 보다 보편적 평등사회를 만들자는 주장도 너무 무시할 수는 없다. 문제는 진보 이념을 주창하는 이들이 오늘날 한국의 정치 중심에서 방향을 잃고 위선적 정치판을 만들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이번에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은 앞으로 검찰 수사 과정에서 밝혀지겠지만 전망컨대 아수라장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민주와 깨끗함의 기치가 깡그리 무너질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이다. 국민들 시각에서 그래도 대한민국이 선진국 초입에서 정치가 성숙되길 기대한다. 그리고 보편적 균형의 사회 안정을 위해 진보 이념의 정치인들이 보수 정치인들과 견제와 경쟁으로 나라를 이끌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국민의 이러한 기대와는 달리 진보 이념의 정치인들이 그동안 도덕적 우월감만 갖고 바리새인 같은 선민의식에서 많은 착각을 보여왔다. 친북좌파로 흐르고 지나친 인본주의 문화와 노동투쟁 쟁취의 문화를 양산했던 것 부정할 수 없다. 문제는 이번 전당대회 돈 봉투 살포와 같은 조직적 지능적 부패 관리로 권력을 잡으려는 추한 모습들이 이들에게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으니 슬픈 생각이 든다. 모든 국민의 바람은 나라 지도자들이 부패문화를 없애고 공의가 살아있는 사회를 만들어주길 기대한다. 선진국이 되는 길에서 서민들의 바람은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래서 이번 사건을 보면서 그동안 운동권 정치인들에 우려가 있었지만 정말로 한국 사회에는 빛과 소금 역할을 할 리딩 그룹이 없는 걸까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영적 삶의 현장 기독교 사회는 어떨까. 교회와 교계의 지도자들은 우리 사회의 모본(模本)이 될 만큼 정결하고 건강할까. 우리가 냉정히 진단하고 회개의 기회를 삼아야 되지 않을까 싶다. 얼마 전 필자는 교계발행 신문 한 칼럼 제목을 보고 언뜻 이해가 안 되는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다. 칼럼의 제목은 ‘목사장로님들 신사임당을 좋아하지 마소서’였다. 난데없이 신사임당의 단어가 뭔가? 읽고 보니 교계뉴스와 관련 총회를 앞두고 금전이 오가는 악한 문화를 없애자는 비평의 칼럼이었다. 필자는 교계 지도자들이 총회 선거철만 되면 관행의 금전 문화가 있음을 일정 들은 바는 있다. 그러나 칼럼을 읽고 우리 기독교 교계에도 세상의 정치문화처럼 선거 때 ○○억을 써야 당선 되고 천만 원만 적게 쓰도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런 자괴 어린 푸념들이 목사·장로님들 속에서 회자될 일인가. 이만큼 슬픈 일이 있을까. 필자도 노회 총대, 총회 총대로 참석해 본 적 있으나 세세한 속을 알 수가 없다. 정치판이라고 다 그래서 될 일인가. 지금 대한민국은 정치판이 건강해지면 선진국이 되는 길은 눈 앞에 와있다고 본다. 그래서 이번과 같은 정당의 돈 봉투 살포 사건을 보고 기독교 교계 지도자들은 강한 비판과 함께 감시의 눈을 더욱 크게 떠야할 것이다. 기독교 지도자들이 한국 정치를 비판할 자격을 잃으면 나라는 암울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타락하여 바벨론에 노예로 보내야 할 때 ‘공의’를 가장 강조했던 팩트를 우리는 성경에서 보았다. 교회가 사회 구원을 위한 길은 이웃에게 쌀 한 포대 전달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공의를 전하는 일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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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29
  • [박봉석 목사] 이러한 때에도 나를 믿겠느냐?
    한 미국인 선교사 부부가 남미의 아우카라는 곳의 인디언 마을에 가서 선교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선교지의 사정상 한 동안 서로 떨어져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으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받았습니다. 남편이 선교하는 인디언 지역에 대홍수가 나서 그 지역은 완전히 물바다가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1년 동안 온 힘을 다해서 건축하여 거의 완성단계에 있던 선교교육센터가 몽땅 홍수에 무너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부인 엘리자베스는 남편이 1여 년 동안 이 선교센터를 짓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그 모든 노력과 수고의 결실을 볼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마지막 즈음에 송두리째 물에 휩쓸려가 버렸던 것입니다. 남편이 얼마나 실망할까 생각을 하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이 소식을 접하고는 망연자실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제 남편이 무슨 잘못을 한 것입니까? 아니면 제가 무엇을 잘못한 것입니까? 제가 이해할 수 있게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런데 얼마 후 남편으로부터 소식이 왔습니다. 남편은 지금 그곳의 상황을 이야기 하면서 소식의 끝을 이렇게 맺고 있었습니다. “절망의 눈으로 선교교육센터를 무너뜨리고 도도히 흘러가는 홍수의 물결을 보고 있는데 주님이 음성이 들려왔소. ‘나의 종아, 이러한 때에도 나를 믿겠느냐?’ 바로 그 때 내 심령이 열리며 나는 감격하여 무릎을 꿇었소. ‘주여, 내가 믿나이다.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주님을 향하여 그렇게 고백할 수 있었소.” 독자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습니까? 믿는다면 어떤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까? 내 기대대로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순적하게 이루시는 하나님만을 믿었던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내가 원하는 대로 전혀 안 될 때에도, 내가 계획했던 것과 다르게 일이 이루어져 갈 때에도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까?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기대와 소망이 다 무너질 때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지식과 지혜를 가진 존재라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온전히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존재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유한한 인간은 결코 무한하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온전히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이해되어지는 신은 신이 아니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무한 세계의 존재이고 우리는 유한세계의 존재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은 인간과는 다른 무한한 존재임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에서 나를 이해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나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으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무한한 존재인 하나님에 대하여 할 일은 따지고 증명하여서 다 이해해보려는 교만이 아니라 어떠한 때에도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내가 모르고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있지만 내가 믿는 하나님은 그것을 다 아시고 계십니다. 그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삶의 상황 가운데서도 낙망하지 않고 그 하나님을 믿고 묵묵히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이러한 때에도 나를 믿겠느냐” 그 하나님의 물음에 “예, 하나님 믿습니다. 어떠한 때에도, 아니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때에도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 대답이 독자 여러분의 대답이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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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27
  • [박동철 장로] 교회를 넘보는 마약이 판치는 세상
    ‘마약’판치는 세상, 이를 우습게 여기는 요즘 정치권 지난해 연말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의 의정 활동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 급증하고 있는 마약사범 관련 잘잘못을 따지는 가운데 볼썽사나운 모습이 있었다.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위가 열려 따가운 질의응답이 있는 중, 이태원 참사를 사전에 막지 못한 원인이 마약 단속 때문이라는 의원의 질문이 있었다. 당시 경찰이 마약단속에 대거 동원되는 통에 사고가 커졌다고 따지는 야당의원들의 발언이었다. 사고 발생 후에도 이런 발언들이 정치권에서 요란하더니 국정조사 과정에서도 불거져 나왔다. 이태원 참사의 불행했던 사정을 폄하할 수 없지만 당시 공권력이 마약 단속에 너무 쏠렸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사고조사를 접근하는 태도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대한민국에 급격히 퍼지는 마약 실태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마약중독의 실상이 심각해졌다는 통계가 속속 발표되고 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마약상습 중독자들의 문제가 있었지만 쉽게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만에 마약 구하기가 아주 쉽고 이에 주변 마약중독자가 폭증하고 있다. 단적인 예가 최근 5년 동안 관세청에서 대마 밀수량이 500배로 늘어났다는 공식통계가 있다. 필로폰 코카인등 치명적 중독성 마약이 옛날에도 있어왔지만 구하기가 어렵고 아주 고가였다. 최근에는 이러한 마약유통이 너무 흔해졌고 세계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유통문화가 되어버렸다. 최근 검찰청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전국 마약 단속령을 내리면서 검찰총장이 설명하는 내용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청소년들도 피자 한 판 값이면 쉽게 중독성 마약을 구해서 집단으로 마약을 즐긴다(?)고 했다. 그래서 마약사범 중 30%가 20대들이라는 통계를 설명했다. 그야말로 마약이 세상에 판치는 요즘이 되어버렸다. 마약의 유행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온라인 구매가 쉽고 급속도로 세계로 확산되는 이 세상의 마약 풍속도를 어떻게 해야 할까. 마약의 세상 유행은 곧 교회를 넘보게 된다. 교회가 열린 세상에서 가장 경계의 대상을 꼽는다면 동성애와 마약 등 사회악을 초래하는 원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 세상 동성애 합법화가 세계 대부분의 나라로 퍼지고 마약사범이 온 사회를 뒤덮어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교회는 이를 방어할 한계를 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 끔찍한 세상의 미래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는 진단이다. 성경 창세기 30장에 야곱의 가족 레아와 라헬이 신랑 야곱을 차지하기위해 합환채라는 마약성 최음제를 두고 다툼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합환채는 당시 이롭게 쓰였는지 알 수 없지만 학자들은 최음제로 설명한다. 아무튼 이로 인해 야곱의 복잡한 가정이 분란의 씨가 되었는지 또한 알 수 없으나 야곱의 가족은 자녀들 속에 복잡한 삶의 이야기에 들어간다. 사람은 절대 주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야하는 우리의 운명에 순종하지 못하는 죄 성이 있다. 그래서 틈만 나면 타에 쉽게 의존하고자 하는 습관이 나온다. 마약이 대중화하는 데는 인간이 약물에 의존하면서 고통을 잊고자하는데 있다. 여기에 가장 빠르게 약효를 내어주는 것이 요즘 유행하는 중독성 마약이다. 이러한 마약은 극히 일부 중병의 치료에도 쓰이지만 음란한 성문란 행위에 쓰이면서 중독되고 사회 전반을 병들게 한다. 더더욱 위험한 것은 마약의 중독성은 치명적이다. 주로 폭력배 강도행각 성행위에 쓰이면서 마약이 판치는 문화가 심각하다는 데 있다. 마약이 유행하는 사회를 정화시키는 데는 국가 공권력이 강력한 행사를 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저변 치료와 치유의 기능이 살아있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일정 부문 복음의 대상이 되어 치유의 전파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에 홍수처럼 범람하는 마약의 사회악이 교회를 되려 넘보고 있는 세태가 너무나 무섭고 걱정이다. 마약의 형편이 한계를 잃고 있을 때 하나님이 이를 포기해버릴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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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25
  • [박동철 장로] 감림산 기도원 ‘유엔 평화마을’ 꿈 이뤄지길
    양산 ‘감림산 기도원’ 하면 한국 기독교 교계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저변에 잘 알려져 있다. 감림산 기도원은 경부고속도로 양산 구간 서쪽 영취산 자락에 자리한 국내서 범교단 큰 규모의 개신교 기도원이다. 오가는 길 눈에 잘 띄고 많은 집회가 연중 열리는 등 모범이 되는 기도원으로 유명하다. 감림산기도원이 더욱 이름난 것은 이옥란 원장의 헌신적 기도원운영으로 한국 개신교 교계에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가족과 함께 가끔 휴가 겸 기도원 집회에 몇 번 참석한 기억이 있다. 최근 들어 감림산 기도원 새로운 소식을 접하고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오랫동안 기도원을 헌신적으로 섬기고 있는 지인을 통해서이다. 이옥란 원장의 근황과 앞으로 기도원이 세계 복음화를 위해 계획하고 있는 프로젝트 계획을 들을 수 있었다. 감림산기도원이 계획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기도원 주변에 소유하고 있는 2만여 평의 부지를 출연하여 ‘유엔 평화마을’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지나가는 소식으로 들을만했다. 감림산 기도원의 비전을 구체적으로 듣게 된 것은 기도 후원을 요청하는 지인과 함께 기도원을 방문한 자리에서다. 그리고 이 대형 사업이 꼭 성공하기를 바라는 소망이 생겼다. 며칠 전 기도원 방문자리에서 이옥란 원장을 만날 수 있었고 지인들과 차담을 두어 시간 가졌다. 이 원장은 50년 넘게 사역하며 팔순을 훨씬 넘긴 할머니인데도 불구 그 자리서 열정적으로 그동안의 기도원 사역을 설명해주었다. 자서전도 냈고 전국의 유명 부흥강사목사들이 칭찬하는 기도원원장이라 많이 알려져 있지만 필자가 이 원장의 지나온 사역의 발자취를 듣고 은혜가 되었다. 그리고 남은 여생 계획하고 있는 ‘유엔평화마을’ 조성의 취지를 듣고 감동을 받았다. 이 원장은 55년 전 1968년 10월 당시 수도사로서 평생 나환자를 섬기며 살기로 했다. 어느 날 양산 영취산을 바라보고 지나면서 생각 없이 산으로 들어가 세 평 정도의 땅을 얻어 기도로 무작정 기도원사역을 시작했다고 한다. 55년 기도원사역을 돌아보면서 한 날도 한 시간도 예수님 생각을 잊어본 적이 없고 나라 사랑의 마음을 놓쳐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러한 원장의 믿음이 마지막 사역 ‘유엔평화마을을 조성해보자’는 뜻이라고 밝혔다. 55년 기도원 사역기간동안 수많은 어려움과 함께 기도와 눈물의 광야였지만 80년부터 뜨겁게 몰려오는 기도의 사람들과 함께 큰 규모의 공동체가 되어 복지원과 청소년사역 해외 선교지등의 사역의 열매를 얻었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이 원장은 불타는 나라 사랑의 소망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온 세상이 물질로만 풍요하고 감사가 사라져가고 있다는 영적양심의 마음으로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을 토로했다. 이 원장은 지금껏 하나님이 주신 기도원 주변 넓은 땅을 출연하여 감사해야할 우선순위를 소망하고 있다고 했다. 바로 6.25 참전 나라의 참전 용사와 후손들에게 감사의 공동체를 만들어보자는 마음을 솔직히 설파했다. 이곳에 ‘유엔평화마을’을 만들어 한국전쟁에 헌신해준 16개국에 감사할 수 있는 시스템과 공동체를 조성한다는 계획이었다. 팔순을 넘은 할머니가 어마어마한 이러한 계획을 생각하다니 혼돈이 되었다. 이 원장은 설명 한마디 한마디에 물러섬이 없었다. 6.25 전쟁 70년 국민소득 4만 불을 바라 본 선진국이 된 이 나라가 전쟁 참전국과 당사들에게 감사한 것이 없는 것이 늘 맘 아프다고 했다. 이 프로젝트는 반듯이 나라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질문에 이원 장은 10년이 지나도 이 나라는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민간차원에서 이들 참전국을 섬기고 후손들에게 다시 복음의 정신으로 다가가자는 소망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재산 출연과 함께 정부에 법인 설립 요청을 했으나 별관심이 없음을 개탄하기도 했다. 한 평생 기도원 사역을 통해 한국기독교 부흥의 밀알이 되었고 기도원사역이 점차 사라져가는 이때 일 년 내내 매일 기도집회를 지금껏 잇고 있는 이옥란 원장의 유엔평화마을 섬김의 꿈이 꼭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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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02

실시간 칼럼 기사

  • [박봉석 목사]무엇이 소중한가?
    화려한 옷과 보석 명품들을 좋아하는 유럽의 귀부인이 있었습니다. 온몸에 화려한 보석 장신구들을 치렁치렁 달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귀부인이 아프리카로 여행을 갔다가 모래폭풍을 만나서 사막에서 낙오가 됐습니다. 그래서 며칠을 길을 잃고 헤매었습니다. 그녀는 너무 목이 말라서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갑자가 저 앞쪽에서 한 물병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녀는 미친 듯이 달려가서 그 물병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물병일 줄 알았던 것이 가까이 가서 보니 몇 캐럿은 되어 보이는 다이아몬드였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탄식을 토했습니다. “아, 겨우 다이아몬드란 말인가?” 무엇입니까? 평소 같으면 눈이 뒤집혔을 그 진귀한 다이아몬드가 사막에서는 한 모금의 물보다 못했던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소속이 바뀌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 된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파송 받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 18절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소속이 바뀌고 나서 여러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믿기 전에 가장 소중한 것이 예수님 믿고 나서도 여전히 소중하다면 도대체 구원 받은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전에는 돈이 가장 소중하고 세상의 입신양명이 소중했다 하더라도 예수님 믿어 구원 받고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 된 지금은 달라야 합니다. 이제는 영혼이 소중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소중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소중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이전에 내가 소중히 여기던 그것들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기꺼이 드리고 헌신할 줄 아는 참된 하나님의 나라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이미 가진 사람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억만 죄악을 사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가진 사람들이기에 다른 세상의 것들은 그것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꺼이 내가 가진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그분을 전하고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드리고 헌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진짜 내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맞습니까? 빌립보서 3장 7-8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무슨 말입니까? 자신이 자랑하던 그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는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것을 이렇게 설명해 보겠습니다. 깜깜한 밤하늘에 아름답게 반짝이던 별빛이 아침녘에 찬란한 해가 솟아오르면 그 반짝거림이 빛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세상의 좋은 것들도 예수님과 비교하면 배설물의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최고의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다른 세상의 귀한 것을 견주어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상대적으로 배설물의 수준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것을 다 잃는다고 하더라도 예수님만은 잃을 수가 없고, 그 예수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나의 것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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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1
  • [오성한 목사] 말씀과 귀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잠4:20-22)라고 했다.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고 반복해서 말씀하신다. 우리의 귀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하나님 말씀에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 반복법을 사용하고 있다. 같은 말이다. 주의하는 것이나 귀를 기울이는 거나 같은 말을 다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고별 설교가 있는 곳은 요한복음 14장에서 16장까지 이다. 성령님에 대하여 기도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말씀하셨는데 중요한 마지막 부탁을 반복하심을 볼 수 있다. 기도에 대한 말씀을 8번이나 표현을 달리 하시면서 반복하신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반복 말씀하신다. 반복하는 것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말씀에 집중하는 일은 믿음 생활에 중심이다. 말씀을 묵상해서 깨달아지면 입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그 깨달음이 마음에서 폭발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치료하시는 하나님임이 틀림없음을 묵상하다가 깨달아 지면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는 말씀으로 인해 손을 올리고 싶어지고 마음이 뜨거워 질 수밖에 없다. 당신의 귀를 무엇을 향해 기울이라고 했나? “내가 말하는 것에….” 귀를 하나님이 말에 열라. 자동차 엔진이 시끄러워도 이상한 소리가 나서 집중하면 그 소리가 들린다. 생명이 탄생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생명의 신비는 설명할 수 없다. 말씀은 생명이다. 그러기에 이 말씀에 집중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죄의 법이 나를 사로잡아오기 때문에 주야로 묵상해야 한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어떻게 하나님의 치유하심이 역사하는지, 방언을 하는지, 거듭나는지 말할 수도 없다. 그러나 무엇이 신유를 일으키는지는 알고 있다. 믿음이 그렇게 한다. 믿음이 하나님의 병 고침을 일어나게 한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8). 말씀을 먹고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믿음은 무의식적으로 당신의 영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거듭날 때 온전한 믿음을 이미 주셨다(엡2:8). 말씀을 먹으면 믿음이 스트롭(stirrup)된다. 스트롭은 아래 가라앉아 있는 것을 휘 저어서 아래에 숨어 있는 것을 끌어 올리는 것을 말한다. 옛날에는 소죽을 끊일 때 설거지물을 받아 두었다가 휘 저어서 끊였다. 우리에게 이미 예수를 믿을 때 놀라운 믿음이 다 와있다. 이미 와 있는 믿음을 스트롭하는 것이 뭐냐?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넣고 “아멘”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아멘하면 스트롭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이다. 성경의 말씀대로 믿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은혜에 의하여 믿음이 선물로 주어졌음을 믿고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보여도 그렇게 여겨야 한다. 의로움이란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셨다. 우리는 의롭게 된 자들이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믿음이 우리에게 있음을 믿어야 한다. 아가페의 사랑이 우리에게 넘쳐 남을 믿어야한다. 우리가 온전한 자가 되었음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잘 살았기 때문에 온전하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가 온전하게 되었음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 됨을 믿어야 한다. 의롭지 못하게 되는 것은 선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 아님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해도 좋을 것이다.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의로움이 상실 되었다. 주님이 이루어 주신 놀라운 사실로 풍성한 사람은 행함이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고 믿음의 행함은 저절로 되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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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1
  • [오태열 목사] 우정과 은행가의 역설우정은 사랑과 다르다
    우정과 은행가의 역설우정은 사랑과 다르다. 사랑은 종족 번식을 위한 필수적인 감정이다. 마음에 드는 여성을 만나면 마음이 설레고 얼굴이 붉어지며 심장이 뛴다. 친구를 만나면 이런 감정은 없다. 호르몬 분비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정은 첫눈에 반해서도 운명적 만남도 아니다. 한 동네 학교 직장에서 우연히 만나 오래 두고 정겹게 사귀어 온 벗이다. 그러나 우정에는 강력한 감정이 있어 목숨까지 바친다. 인류학자 J, Tooby와 진화심리학자 L. Cosmides 부부의 공동연구인 “우정과 은행가의 역설”(Friendship and the Banker`s Paradox)에서 우정과 은행이 닮은 점이 있다고 하였다. 은행이란 돈을 빌려주어야 이익을 남기는 곳이다. 은행은 모든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심사를 통해 재산이 많고 신용이 좋은 부자들에게 저금리로 빌려준다. 부자들은 생계 목적이 아닌 투자목적으로 돈을 빌린다. 정작 돈이 필요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먹고살기 위해 돈을 빌리려 한다. 그러나 은행은 돈을 떼일 우려 때문에 신용과 재산이 없다는 이유로 이들을 외면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는 대출금을 무자비하게 회수해 버리는 사람들이 은행가들이다. 돈이 필요 없을 때는 제발 돈 좀 빌려 쓰라 하던 그들은 막상 돈이 필요할 때는 입을 싹 닦고 매정하게 회수해 가버린다. 우정도 은행가들의 그것과 닮은 구석이 있다. 잘 나갈 때는 친구 사이에 우정도 호의도 넘쳐흐른다. 그런데 우정이 가장 절실하고 도움이 간절할 때 친구로부터 외면당한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인류가 사회를 만드는 순간, 구성원들 사이에 우정의 네트워크가 생기는 것은 사냥과 우정과 은행가의 역설153부족 간의 전쟁 시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 하였다. 인간은 “이익 가치 중심적 사고”를 가졌기에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신을 도와줄 친구를 찾는다. 사회구성원들 가운데는 힘이 세고 사냥을 잘하는 강한 사람, 힘이 없고 사냥을 못 하는 약한 사람이 있다. Net Work를 구성할 때 사람들은 누구와 친구를 하고 싶을까? Tooby는 사회적 강자 중심으로 우정이 형성된다고 하였다. 수렵을 잘못하는 사람일수록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데 오히려 친구가 되는 일에서 배제된다. 정작 생존을 위해 우정이 절실한 사람은 사회적 약자들인데 힘센 사람들에게 집중된다는 것이 우정의 역설이다. 우리 사회에 은행가의 역설을 잘 보여주는 것이 관피아, 특히 검찰 집단이다. 역사적으로 검사는 늘 재벌과 보수 세력들이 형성한 강자들의 우정 네트워크에 이름을 올렸다. 이들은 검찰 개혁에 목숨을 걸고 저항한다. 가진 힘을 지키기 위해서다. 검찰 개혁은 강자들의 네트워크를 와해하고 그들이 독점한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행복 경제학의 창시자 J. F. Walliel은 행복의 6가지 조건을 돈, 건강, 자주적 삶의 선택권, 공동체성, 우정, 사회의 투명성이라 하였다. 이 중 우정을 행복의 조건 중 제일로 들었다. 웰리엘이 말하는 우정은 잘 나갈 때의 친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친구를 말한다. 이런 친구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바닷물에 빠진 친구에게 밧줄이나 구명튜브는 얼마든지 던져줄 수 있지만 허우적대는 친구를 구하기 위해 생명의 위험을 감수하고 직접 물에 뛰어드는 친구, 일시적 어려움에 처한 친구는 얼마든지 구해줄 수 있지만, 친구를 구하기 위해 내 소중한 것을 포기해야 할 정도로 비용을 치러야 한다면 그때부터 계산은 달라진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말처럼 위기의 순간이 닥쳐야 그때 비로소 우리는 안다. 옛이야기 한 토막이 생각난다. 아버지가 주색잡기를 일삼고 친구 많다고 자랑하는 아들을 일깨워 주기 위해 돼지 한 마리를 잡아 거적에 말고 아들과 함께 지게에 지고 아들 친구들 집마다 찾아가서 실수로 살인하여 시체를 암매장하려는데 도와 달라고 했더니 하나같이 핑계를 대며 외면하더라는 그 이야기 말이다. 우리는 먼 길을 가야 하는 인생이다. 혼자 가면 외롭고 힘이 든다. 함께 동행해줄 친구가 필요하다. 고난에 처할 때 함께 해주는 친구, 이런 친구가 없는 현대인들은 그래서 더욱 고독하다. 맹수사냥을 하러 함께 나갈 때 내 옆자리를 지켜주는, 다른 부족과 전쟁을 할 때 자신을 던져가며 내 생명을 지켜줄 수 있는 그런 우정이 없어 고독하다. 망년회, 신년회, 동창회라는 각종 모임을 빙자해서 친구들을 만나고 해외여행을 가도 본질적인 외로움은 떨쳐낼 수가 없는 것은 왜일까? 강도, 폭행, 살인, 약탈 등, 그 모든 위험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던 든든한 친구의 역할을 이젠 경찰이 대신한다. 한해 농사를 망쳐 처자식을 굶기게 되면 곳간을 털어주던 우정 역시 복지제도가 대신하고 있다. 조상이 살던 환경보다 훨씬 더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럴수록 더 불안에 떨고 고독해 한다. 진정한 우정이란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잘 나가던 어제의 내가 아니라, 실패하여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오늘의 나를 기꺼이 지켜줄 친구가 있을까?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또 누가 나에게 그런 친구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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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1
  • [조희완 목사] 에녹의 신앙 (창5:21-24)
    53억 원을 내고 점심 한 끼를 먹는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것도 여러 사람이 서로 그 돈을 내려고 경쟁을 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온라인 경매 사이트인 eBay에서 <워랜 버핏>과의 점심 식사를 경매에 붙이고 있는데, 금년에는 무려 460만 달러(약53억 원)에 낙찰이 되었습니다. 암호 화폐인 트론 CEO 중국계 미국인 <저스틴 선>씨가 결정되었습니다. 그는 4명의 친구들을 데리고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워랜 버핏>과 함께 한 끼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지난 2000년부터 <워랜 버핏>은 매년 자신과의 한 끼 점심 식사를 경매에 부쳐서 그 수익금 전액을 노숙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해 오고 있습니다. 그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하면서까지 그와 함께 한 끼의 점심 식사를 하려는 것은 이 시대에 그가 그만큼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본래 가난한 집 안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투자하는 것마다 대박을 터뜨리면서 일명 “투자의 귀재”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 천문학적인 돈을 내고 그와 함께 한 끼의 점심 식사를 하려고 하는 것을 볼 때 그는 분명 이 시대에 최고의 VIP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도 역시 그가 최고의 VIP인지는 생각해 볼 일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최고의 VIP로 인정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인정하고 우러러 보는 VIP보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의 VIP가 더 중요한 사람입니다. 죄악이 관영한 시대에 하나님의 시선과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에녹>입니다. 신앙의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들이 주목해야 할 믿음의 인물로 여겨집니다. 첫째로, 그는 불의한 시대에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입니다.(창5:21-22) 둘째로,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사람입니다.(히11:5-6) 셋째로,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한 사람입니다.(유1:14-15) 우리 모두 에녹의 신앙을 본 받아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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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1
  • [신재철 목사] 늦은 밤까지, 교회를 떠날 수 없더라
    개척의 세팅이 어느 정도 되었다. 테이블, 책장, 조명, 음향 등. 이제 성도만 있으면 된다. 말은 쉬운데, 가장 큰 어려움이 사람 채우는 것 아닐까? 교회 안에 성도가 채워지는 세워지는 것은 내 노력, 능력, 환경으로 장담할 수 없다. 지인들에게 농담처럼 하는 말이 있다. “야근한다고 해서 부흥이 된다면 나는 일주일의 칠일을 야근했을 것이다.” 개척교회에 사람이 들고 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제 교회 외형이 갖추어졌고 난 개척교회 목사가 되었다. 멋진 선배 목사님들의 간증처럼 밤새 기도하며 이곳을 지키면 된다. 그렇다. 나는 요즘 늦은 밤까지 교회를 지키고 있다. 행정적으로 정리할 것이 많아서? 열정적인 기도로? 전문서적을 뒤적이며, 눈을 비벼가며 만드는 좋은 설교 작성으로? 아니다. 만화에 푹 빠졌다. 이 글을 쓰면서도 조금 민망하고 부끄럽다. 예배당 세팅이 끝나고 공간을 둘러보니 온통 만화책이다. 처음에는 내가 좋아하던 만화 위주로 채우다 보니 이곳은 어느덧 천국이 되어 있었다. 내가 10대 때 좋아했던 그 책, 최근에 유행하는 웹툰까지. 만화가 가득하다. 게다가 어릴 적에는 비싸서 사지도 못했던 책이 전질로 줄을 지어 서 있다. 밤이 맞도록 만화 속 주인공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즐거움을 누린다. “이번 주는 어떤 책을 정주행 할까?” 개척교회 목사인 내게 두려움은 없다. 적어도 지금은. 오늘은 소년 만화, 내일은 소녀 만화, 그리고 드라마 원작인 웹툰까지. 대학부터 치열하게 달려온 나의 삶에 하나님께서 개척의 시점에 이렇게 잠시 쉼을 허락하셨다. ‘개척했는데 진짜 만화 보고 있어도 되나?’ 나를 무겁게 누르던 약간의 불편함을 외면하며 일단은 책장을 넘긴다. 늦은 밤까지, 결코 교회를 떠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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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1
  • [박동철 장로] 교단정치하는 목사 장로님들 경건하시길 기도합니다.
    대한민국 기독교 300여 교단이 있지만 70여개 교단 정치의 꽃이 피는 총회기간이다.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등 대부분 교단들이 9월과 10월 총회를 열고 총회장과 임원 등 총회 사역자들을 뽑는다. 그리고 1년 동안 집행할 중요 헌의안을 결정한다. 정말 하나님이 통치할 대한민국 6만 여 교회 정책을 위임받아 행하는 엄숙한 정치현장이 벌어진다. 교단마다 다르지만 3-4일 기간 동안 엄청난 의사결정과 일꾼들을 선임하는 복잡하고도 엄숙한 일정이 펼쳐진다. 필자는 몇 년 전 잠시 노회 총회총대를 맡아 참석한 경험이 있다. 세상의 정치판을 객관적 눈으로 살펴본 경험에서 곳곳을 관심 있게 취재를 해봤다. 교단 총회 기간이 한꺼번에 몰려있고 집중화해 있어 제대로의 정치 기능을 살리기 어렵다는 느낌이 많았다. 전문화하고 분산해 합리적 정치 기능을 살려야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이나 평신도일지라도 변하지 않는 소망은 성총회(聖總會)의 정치현장이 되길 기도한다. 우려 되는 것은 지역의 노회나 총회시즌에 대부분 개교회가 함께 기도 하지 않고 정치판이 열리는 점이다. 교회에서의 믿음과 교단 정치판 믿음이 따로 노는 듯 현장에 가면 듣지 말아야 하고 보지 말아야 하는 장면들을 볼 수 있다. 성(聖)총회·성(聖)노회를 위한 성찬과 기도와 예배로 시작하지만 회무의 시간에 고성과 야유 세속의 정치 문화가 그대로 재현된다. 무엇보다 교단 정치판에서 나타나는 직분에 대한 과잉 경쟁이 큰 문제이다. 그리고 있을 수 없는 선거 문화 등 예수 복음의 정치판에 돈이 횡행하고 모함과 지역 감정 등 정말 세상보다 못한 교단 정치 선거 문화가 지도자들의 심령 속에 파고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교단 정치사에서 여러 영성 깊은 한국 대표적 목회자들이 교단 정치를 섬기다가 실족하거나 영성을 잃고 낙심해 버린 지도자들도 있다고 한다. 심지어는 각 교단 총회 시즌이 오면 깨끗한 선거를 올해 이뤄보자는 오피니언의 글들이 실리고 있다. 사람 사는 곳에 몇 사람에 불과할지라도 정치 기능이 없으면 안 된다. 개 교회는 교회대로, 노회는 노회대로, 총회는 총회대로 정치판이 열리지만 세상 정치판보다 못하다는 평가는 받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위임한 양떼를 돌보는 예수 복음에 생명 건 지도자들이 펼치는 정치 행태가 오늘날 교계에서 우선으로 혁신해야할 분야이다. 언젠가 목사·장로 몇 분과 연합회 모임자리에서 교단 총회 총회장의 임기 대부분 1년으로 해마다 나눠 먹기 하는데 대해 토론을 한 적이 있다. 필자는 그 자리에서 총회장에 선출되면 교회 담임을 내려놓고 4년 정도는 임기에 최선을 다해서 교단 발전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이러한 담론이 담론으로 끝나버리는 우리 기독교 정치혁신이 한 발짝도 못나가는 아쉬움이 크지 않을 수 없다. 목회자들이 강단에서 설교할 때 가장 많이 부르짖는 워딩(wording)이 교회 세속화에 대한 경계이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크게 강조한 설교가 바리세인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말씀이다. 구원 받은 자들이 죄악과 싸우고 마귀를 대적하며 진보적 삶을 살아가는 이유는 예수 앞에 성화의 몸을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신앙의 지도자들이 모본(模本)이 되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 첫 현장이 교단 정치의 현장이 되어야 할 것은 불을 보듯 하다. 그런데 아직껏 교단 총회가 열릴 때마다 슬픈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간혹 세상의 언론매체에 부끄러운 장면이 보도 될 때도 있다. 올해는 대한민국 모든 교단 총회가 성총회가 되어 온 교회가 박수치는 정말 은혜의 모범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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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13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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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 [최호숙 목사] A.Q(Adversity Quotient-역경지수)를 높여라
    미국은 다종족 국가이다. 그렇다 보니 우월한 민족과 열등한 민족 간에 비교의식이 생기게 되었다. 여러 민족 중에 유대인들이 정치, 경제, 문화, 교육, 과학 등 모든 분야에서 월등히 두각을 나타내 보였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조사해보니 I.Q(Inteligence Quotient-지능지수)가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래서 타민족도 아이큐를 높였다. 그래도 여전히 유대인들에 비하여 열등했다. 재조사 결과 아이큐 문제가 아니라 E.Q(Emotional Quotient-감성지수)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동일하게 E.Q도 높여 보았지만 여전히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전문가들의 새로운 연구결과 유대인들은 타민족에 비하여 S.Q(Spiritual Quotient-영성지수)가 높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름대로 자신들의 신앙관을 가지고 영성을 키워 보았다. 그래도 유대인들을 따라 잡을 수 없었다. 최종 결과 유대인들에게는 타민족에서 찾을 수 없는 A.Q(Adversity Quotient-역경지수)가 높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역경지수가 높기 때문에 성공할 확률이 훨씬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역경지수란 무엇인가? 미국의 커뮤니케이션 이론가 폴 스톨츠(Paul G. Stoltz, 1960~ )가 만든 용어로 역경과 고난에 굴하지 않고 합리적인 판단으로 목표를 성취하는 능력을 말한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사람들은 세 가지 반응을 보이는데 첫째, 퀴터(quitter-포기하는 자)로 산에 오르다가 힘들거나 장애물을 만나면 그냥 등반을 포기하는 사람들을 역경지수가 낮은 퀴터라 부른다. 둘째, 캠퍼(camper-안주하는 자)로 장애나 어려움을 만나면 뚜렷한 대안을 찾지 못하고 현상 유지 정도로 적당히 안주하는 사람을 캠퍼라 부른다. 셋째는, 클라이머(climber-등반하는 자)로 역경을 만나면 자신의 모든 능력과 지혜를 동원하여 기어코 이를 이겨내려고 하는 역경지수가 높은 사람을 말한다. 예전에 웬반 티오 월남 대통령이 한국 청와대를 방문했다가 청와대에 활짝 핀 목련화를 보고 감탄하였다. 우리 정부는 부러워하는 티오 대통령에게 목련화를 선물하였다. 티오 대통령은 기쁨으로 목련화를 받아 자신의 사저(私邸)에 심었다. 1년이 지나도 꽃은 피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긴 티오 대통령이 전화를 걸어 “선물 받은 목련화가 자라기는 잘 자랐는데 꽃이 피지 않는다”고 하였다. 서울대 농대 교수에게 자문을 구한 결과 “목련화는 반드시 추운 겨울을 통과해야 만 꽃이 핀다”는 답변을 받았다고 한다. 코로나 후유증 이후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로 견해의 차이는 있지만 많은 국민이 침체 상태에 있다. 이 고난의 시대를 잘 극복해야 좋고 아름다운 세상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영적인 삶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그냥 영광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 후에 영광이 있음을 말한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라고 바울을 말하였다. 삶의 시련과 역경을 체험한 욥도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한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고 하였다. 영어의 격언에 “No cross, No crown” 이라는 말이 있는데 “고난의 십자가가 없으면, 영광의 면류관도 없다”는 말이다. 이와 비슷한 말에는 “No sweat, No sweet” 땀이 없으면, 달콤한 삶도 없다. “No pain No gain” 고생 없는 수확의 결과는 없다는 뜻이다. 종교개혁자들이 이런 원리를 가지고 사역에 임하였듯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역경지수를 높여 귀한 열매들을 거두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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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 [조희완 목사] 언제나 항상 (벧전3:13-16)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가장 큰 스님으로 존경을 받는 분이 바로 성철스님이십니다. 그가 입적하시기 전에 남긴 법어 중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법어의 내용은 알 듯 모를 듯한 유명한 말로 회자되고 있습니다. 산을 산이라고 하고 물을 물이라고 하는 것은 유치원생들도 표현할 수 있는 말인데, 그 말이 왜 그렇게 유명한 말로 회자되는 것일까요? 불교의 가장 큰 스님인 그가 유치원생 수준의 말을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너무나 변화무상한 세상을 꼬집어서 한 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산은 항상 산이어야지 물이 되면 안 됩니다. 물은 항상 물이어야지 산으로 변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산을 산으로만 보아야지 물이 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되고, 물을 물로만 보아야지 산이 되기를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산이 산으로 있지 않고 물이 되거나 물이 물로 있지 않고 산이 되면 이 세상은 난장판으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지금의 세상은 너무나 급변하는 세대입니다. 그래서 변화하지 않거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은 시대에 뒤 떨어진 사람으로 취급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변하는 것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다 변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변화무상한 세상에서 성도들이 고집스럽게 변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입니다. 신앙이 변하면 모든 것이 다 끝이기 때문입니다. 변하지 않는 신앙의 기초 위에서 우리가 항상 노력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성경 말씀 가운데 “항상”이란 단어가 따라 붙는 말씀이 의외로 많습니다. 우리가 소홀히 하지 않고 항상 준비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항상 대답할 소망의 말을 준비해야 합니다.(벧전3:15) 둘째는, 항상 말씀에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빌2:12) 셋째는, 항상 언제나 깨끗한 양심을 지켜야 합니다.(행24:16) 변화무상한 세상에서 분명한 믿음의 정체성을 가지고 일관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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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 [오성한 목사] 말씀에 주의하라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물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살기로 했다. 첫째, “내 말에 주의해야”한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내가 말하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하지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의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잠4:20-22)라고 했다. 주의하는 것이 무엇인가? 운전을 오래하다 보면 차에 이상이 생기면 작은 소리도 들린다. 초보운전을 할 때는 안 들린다. 차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운전을 반복해서 한 능숙한 사람은 들린다. 다른 소리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들을 수 있는 것이 주의하는 것이다. 반복해서 차 소리를 들었던 사람은 아무리 시끄러워도 이상한 소리를 구별할 수 있다. 시끄러움 속에서도 이상이 있어 나는 소리만 크게 듣는 것이다. 그것이 주의하는 것이다. 세상 소리가 시끄럽다. 환경이 시끄럽다. 주변이 시끄럽다. 혼란스럽다. 아무리 시끄러워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가 익은 사람은 들린다. 말씀에 주의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시끄러워도 하나님의 말씀이 크게 들린다. 단체사진을 찍은 아이들 중에 내 아이가 있으면 내 아이만 뚜렷하게 보지 않는가! 이것이 주의하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집중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저절로 주의하여 집중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만 밝고 맑게 보인다. 내가 보려고 하는 것만 툭 튀어 오른다. 이렇게 되게 하는 것이 주의하는 것이다. 내 말에 ‘주의하다(attend)’라는 것은 우선권을 둔다는 말이다. 치유를 원한다면 치유에 대한 말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말씀에 관심이 있어야 한다. “아!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얻었다고 하는구나! 그렇구나! 창조주 그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얻었구나!” 주변의 다른 소리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내 마음에 말씀이 있게 된다. 말씀이 이미 이루어진 불 믿고 내 것으로 딱 와 있게 된다. 치유의 말씀에 주의하지 않는 사람의 특징을 말하자면 치유를 원하면서도 몸의 치유에 대한 가르침에 관심을 가지 않는다. 자신에게 기도를 해 주기만을 원하지만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고 찬송가를 뒤적이거나 마음이 집중되지 않는 경우를 본다. 기도 받기를 원하면서도 눈빛이 다른 곳에 있다. 초점이 다른 곳에 있다. 그냥 “기도한번 해줘보세요. 효과가 있으면 다행입니다.”는 태도로 굉장히 성의가 없다. 성의가 없는 모습을 보면서도 기도를 안 해주면 안 될 상황이기 때문에 기도를 해 주지만 지도하는 자의 마음에도 확신이 없는 기도를 할 수 밖에 없다. 예수님도 죽은 자를 살리시러 들어가실 때도 제자 세 명과 부모만 데리고 들어갔다. 다른 사람은 데려 들어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 일도 하실 수가 없었다(마가복음 6장). 고향에 가셔서는 아무 일도 하실 수가 없었다고 했다. 믿음으로 해야 한다. 주의하라고 했다. 기도 받으면서 자신은 믿음을 가지지 않고 기도해 주는 사람의 믿음으로만 해라는 식의 태도는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다. 이런 태도를 가져선 안 된다. 많은 분들이 기도를 그냥 한 번 해 보는 정도로 한다. 의사 앞에 가도 태도가 달라지는데 안 그런가? 의사 앞에서도 우리의 태도가 달라진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기대나 태도가 어떠해야겠는가?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한다.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2:2). 아기가 배가 고프면 어떤가? 손가락만 가까이 가도 입을 갖다 댄다. 그러면 배고픈 줄 알게 된다. 이것이 사모하는 것이다. 갓난아이처럼 사모하라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으로 성장해서 기도생활과 말씀 생활에 발전하여 스스로 서길 원하신다. 다른 사람이 시켜서 “이렇게 하세요. 저렇게 하세요.”가 아니라 스스로 서길 원하신다. 믿음의 리더들은 건축할 때 비계와 같습니다. 건축을 마친 후 비계가 필요하지 않다. 성도들을 세운 후 걷어치우는 것이다. 성도들도 다른 사람을 세울 때 비계와 같은 자가 되어야 한다. 그 사람을 세운 후 철수해야 한다. 내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비계와 같은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을 세워가는 스스로 설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하신다. 성장해서 다른 사람의 비계가 되길 원한다. 스스로 서고 능력 있는 주의 종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세워 놓고 가시길 원하셨다. 그래서 스스로 서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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