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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기고] 통합 기념 한마음교회 유감
    폭염입니다. 여름의 태양이 작열하는 계절! 이 여름에 우리 주님 다시 오신다면 태양처럼 뜨거운 신앙 열정을 가진 사람을 찾으실 것 같습니다. 사역의 현장마다 여름 태양보다 더 뜨거워서 주님의 칭찬을 받는 우리 교단 교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듯이 우리는 성공적인 교단통합을 이었습니다. 그 통합기념으로 한마음교회를 설립한 것입니다. 전국 노회와 교회들이 마음과 기도와 물질을 모아 세운 기념비적 통합기념교회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통합기념 한마음교회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는지요? 통합기념 한마음교회는 고신교단의 여러 어른들과 선배 목사님들 그리고 총회 임원들 그리고 (구)고려의 선배들과 임원들이 힘들게 이루어낸 통합의 금자탑이며 결정체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 교회의 지 교회가 되어있습니다. 교단통합을 하면서 기념으로 교회를 설랍(립)하되 (구)고려측의 목회자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설립한 교회가 바로 한마음교회입니다. 그런데 (구)고려측의 일대 한마음교회 전임목사는 당회장권 한번 갖지 못하고, 고초를 겪다가 사임하였습니다. 한마음교회 담임목사에게 이러저런 이유로 당회장권을 이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2년 동안 무려 6번이나 당회장을 바꾸면서 힘들게 했습니다. 이런 상식 밖의 이상한 일이 통합기념 한마음교회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안양일심교회 부목사로 사역했던 이 모 목사가 담임으로 있습니다. 안양일심교회가 물심양면으로 많은 부분을 헌신한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전국 노회와 교회의 헌금으로 세운 통합기념교회를 일심교회 40주년 지교회로 삼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결과론적으로 유감스럽게도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위한 목적헌금이 한 교회의 지교회를 설립하는데 사용되는 어처구니 없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교단 전체가 바로 알고, 바로 잡아야 하겠다는 결연한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우리가 하나의 교단으로 통합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처음의 약속과 결의가 깨짐으로 아름다운 통합정신이 훼손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지만, 특히 (구)고려 측 형제들에게 깊은 상처를 준 아픔이 된 것입니다. 이런 사태로 인해 안양일심교회와 당회장은 (구)고려 측 형제들로부터 신뢰를 잃었고,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미안했던지, 무마하려고 (구)고려의 어려운 분들을 후원하겠다고 접촉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고려 목사들은 의도가 순수하지 못한 후원금을 받을 리 없지 않습니까? 지난해부터 제안하는 후원금을 거부해 왔습니다. 올해 들어와서 또다시 (구)고려 동문회에 7천만원 정도를 후원하겠다고 제의를 해왔지만 코로나로 인해 어려운 교회와 선교사들이 많이 있었지만 통합기념교회를 세우려는 큰 뜻이 있기에 거절했던 것입니다. 급기야는 비공식 채널을 통해 기어코 후원을 했습니다. 공식적으로 거부했는데도 비공식체널을 통해 기어코 다수의 교회에 상당한 후원을 감행한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저도 부교역자 약 10년, 한 교회 담임목회를 27년째 하니 37년 사역을 하며 산전수전공중전까지 다 겪은 사람입니다. 교회의 내부 사정이 있어 그렇겠거니, 일면 이해가 가지만, 그렇지만 한마음교회의 문제는 양 교단 통합기념 교회인만큼 그냥 넘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전국 노회와 교회의 헌금은 통합기념교회를 설립하기 위한 목적 헌금입니다. 그 목적대로 쓰이지 않았다면 바로 잡는 것이 마땅합니다. 따라서 교단 70주년을 맞아 통합기념교회를 다시 세우려는 계획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국 노회와 교회의 후원금 13억여원은 교단통합의 정신과 기념을 담는 명실공히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위해 쓰여져야 할 것입니다. 안양일심교회는 고신교단의 대표적인 큰 교회 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당회장 김홍석목사님은 앞으로 총회에 큰 일을 감당해야할 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중대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고 교단의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안양일심교회 김홍석목사는 통합기념 교회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하는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보여할 것입니다. 이것이 (구)고려측 대부분 형제들의 일치된 생각입니다. “순교자의 고장! 진리의 파숫군! 경건자의 훈련소, 예수의 제자들이 일어나는 산실!” 그 교단이 우리 고신 입니다. 저는 우리 교단의 일원이고 교단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고신의 목사로 함께 사역함이 늘 감사합니다. 저는 고신인이 된 것이 좋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뒤를 이어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 정신을 이어가는 우리 교단이 좋고 자랑스럽습니다. 그 어떤 일보다도 고신과 고려의 통합이 자랑스럽습니다. 통합 후 (구)고려 동문들이 연합하여 학원이사로, 고신세계선교회 이사로, 이단사이비연구소장으로, 동문회 임원으로. 각 상비부에서... 각처에서 활약하는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운 하모니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통합입니다. 이렇게 배려해 주고, 사랑해주는 우리 ‘고신’이라는 이름이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따라서 통합기념교회가 다시 설립되어 통합정신이 훼손되지 않고 계승되어 아름다운 교단을 잘 보전하고, 또 더 아름답게 발전되기를 기원하는 바램을 담아 이 글을 씁니다. *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이행하라! * 전국 노회와 교회의 목적 헌금을 반환하라! 2022년 7월 중순 신앙 열정이 여름 태양처럼 뜨겁기를 기도하며... ※ 기고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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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02
  • [박동철 장로] 인공위성 누리호의 승천(昇天)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昇天)
    지난 6월 21일 쏘아 올린 인공위성 누리호 2호가 정상궤도에 안착하여 쌍방향 교신에 성공했다. 이로써 지난해 10월 21일 1차 발사의 3단계 과정에서 실패로 정상궤도 오르지 못하고 절반의 성공에 그쳤던 누리호의 인공위성은 이번 2차 발사 성공으로 우리 자체 기술로 세계 7번째로 인공위성 성공의 나라가 되었다. 필자는 2주 전 6월 21일 오후 4시 누리호 2차 발사 장면을 지켜보며 감동을 가누지 못했다. 굉음과 함께 무려 1톤의 무게를 가진 쇳덩이가 공중으로 승천(昇天)하는 모습을 보고 인간이 만들어낸 과학기술에 경외감을 느꼈다. 순간 스치는 우리의 심령에서 울어대는 2천 년 전 예수그리스도의 승천(昇天) 모습이 떠올랐다. 예수그리스도의 위대했던 승천. 누가복음 24장 말미에 “축복하실 때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라”라고 부활 후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 1장 9절에도 “저희가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그리스도의 승천모습을 당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리워 가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 숫자는 70명의 제자들이라고도 하고 500명의 제자들에게 일시에 보이셨다고 한다.(고전15:6) 승천을 본 사람의 숫자가 중요하랴. 부활하신 예수가 하늘 승천하심은 분명하고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다시 재림하여 우리에게 구원의 완성을 이루시고 이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밝히고 있다.(마:24:30) 다시 우리가 인공위성 누리호의 발사 승천을 지켜본 그림으로 돌아가 보자. 이날 누리호의 승천을 지켜본 숫자는 대한민국 국민 5천만 명이다. 5천만 백성은 가슴 졸이며 누리호의 승천 장면을 지켜보고 환호했지만 700Km 우주상공 궤도의 한계를 얼마나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후 우리의 우주과학 기술이 더욱 발전하여 경제를 발전시키고 우리를 먹여 살리는데 크게 기여했으면 하는 마음이 전부일 것이다. 혹여 달나라 혹은 화성에 우주도시 건설이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감뿐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하늘로 올리었다는 기적의 그림은 제자들은 물론 지금 우리가 함께 느끼는 감탄과 경외 그리고 감동의 차원을 크게 넘은 위대한 복음의 깨달음을 던져준다. 먼저 예수그리스도의 승천은 이 땅에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이고 구원의 마지막 사역까지 이루겠다는 증표이기도 하다. 더욱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요한복음 16장에 기록되어 있다. 부활 후 제자들에게 땅끝까지의 복음 사명을 당부한 후 중요한 말씀을 남긴다. 16장 7절의 말씀이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했다. 무슨 말씀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이 세상에 대해, 우리 모두에 대해 마지막까지 감당해야할 시공(時空)의 사역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는 가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혼돈한다. 왜 삼위일체일까. 삼위일체의 분명한 주님의 사역을 선포하는 말씀이다. 승천하시고 마지막 사역 재림과 심판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죄와 싸우고 마귀와 대적하는 일이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의 좋은 일만 도우시는 착각에 빠질 때가 많다. 아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 우리는 보혜사성령의 도우심으로 죄에서 자유하고 성화(聖化)하고 영화하여 주님을 만날 시간과 공간을 보장받은 것이다. 인공위성 누리호의 발사승천을 보고 문득 예수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 그리고 보혜사 성령을 깊게 만나게 된 순간이 되었다. 그 은혜는 수천억 원이 투입된 누리호의 가치가 너무 싸게 계산이 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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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06
  • [조희완 목사] 동행의 조건 (창5:21-24)
    얼마 전 TV뉴스 중에 전국에 꿀벌이 사라지고 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습니다. 활발하게 활동을 해야 할 꿀벌들이 죽거나 흔적 없이 사라지고 벌통이 텅 빈 채로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고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미국은 전체 벌의 약 40%가 사라졌고, 유럽은 약 70%가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자연재해 때문인지 아니면 바이러스 때문인지 명확한 원인 규명을 밝혀내질 못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물리학자였던 <아인슈타인>이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꿀벌이 사라지는 날 인류는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을 한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꿀벌이 사라지는 것을 단순한 자연 현상으로 보지 않고 종말의 징조로 보는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과연 <아인슈타인>의 예언대로 인류의 종말이 가까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분명 종말이 임박한 것 같습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환경적으로 종말이 임박했음을 알 수 있는 징조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종말이 임박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다면 이 시대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종말의 때에 합당한 삶의 자세는 바로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늘로 동행할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하늘로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산창교회 성도들 모두가 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든든한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 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 믿음이 있어야 동행할 수 있습니다.(창5:21-24) 둘째로, 결단이 있어야 동행할 수 있습니다.(민10:29-32) 셋째로, 순종이 있어야 동행할 수 있습니다.(창22:6-14) 금년에 우리 모두 하나님과 동행하시므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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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31
  • [신재철 목사] 술 권하는 교회 친구
    “야간 자율학습. 학원. 교회. 집” 고등학생 때 내 동선의 전부다. 누가 봐도 바른학생의 모습이다. 물론 나를 돌보고 계신 이모님 입장에서는 교회라는 곳이 늘 눈에 가시였겠지만. 그날도 루틴에 충실했다. 부족한 과목을 메우기 위해 학원을 가고 있었다. 학원 빌딩 바로 앞에는 작은 포장마차가 있다. 어묵과 떡볶이도 있지만 가볍게 소주 한잔 기울이는 사람들도 섞여 있는 곳이다. 별 생각 없이 바라 본 포차에 익숙한 사람이 보인다. 그도 나를 보았고 내게 손짓한다. 교회에서 찬양인도를 하는 친구. 여자 후배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친구. 늘 우러러 보며 동경했던, 교회친구다. “어디가? 한잔 하고 가.” 친구 주변에는 다른 교회 친구들도 있었고 청년부 형도 있었다. 정겹게 교제(?)를 나누는 모습에 더해진 술 한 잔이 내게는 너무 어색하게 다가왔다. 그냥 어벌쩡 핑계를 대며 자리를 피했다. 마치 내가 몰래 술 마시다 걸린 듯 얼굴이 뜨거워졌다. 친구들 표정은 정말 평온한데. 교회에서 다시 만난 친구들은 여전히 평안하다. 찬양인도를 하고, 헌금 위원을 하고, 대표기도를 한다. 내가 문제일까? 친구들이 누리는 극강의 평안이 이상해 보인다. 예배 후 사적인 교제들이 이어진다. 어떤 아이들은 피아노 앞에 삼삼오오 모여 찬양을 부르고, 어떤 경건파 친구들은 지하로 내려가 기도를 한다. 집안의 눈치를 보며 교회 다니던 내게는 그런 2부 행사가 쉽지 않았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려는 내게 포장마차의 무리들이 나를 부른다. “00형 집에 갈 건데, 같이 갈래? 잠깐 놀다 가라.” 포장마차에서 모임을 주도하던 청년부 형의 자취집에 가자는 친구의 권유였다. 부담도 있었지만 그래도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에 걸음을 함께 한다. 부엌 하나에 작은 방 하나. 그곳에 남자 여럿이 모였다. 익숙하게 어떤 것을 꺼내 입에 문다. 단체 흡연이 시작된 것이다. 소주를 권했듯 친구는 나를 챙기며 따뜻한 미소로 한 대 권한다. 머리가 좀 복잡하다. 신앙이 아니라도 술과 담배는 학생이 할 것이 아니라고 배워왔는데, 지금 내게 던져진 이 숙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를 모르겠다. 겸연쩍 웃으며 부드럽게 거절하고 적당히 어울리다 집으로 돌아왔다. 나름 극강의 보호막을 치며 친구들의 문화를 거절했지만 나도 변하고 있었다. 헐렁한 양복바지, 하얀색 셔츠. 머리에는 과한 무스. 당시 오랜만에 만났던 내 초등학교 친구들은 나를 멀리하기도 했다. 내가 좀 이상해 졌다는 말이 오랜 친구들 사이에서 돌았다는 이야기를 성인이 된 후 듣게 되었다. “너 그때 완전 날라리였어.” 어떤 친구의 직설에 웃음이 나온다. 나는 그렇게 교회 다니는 날라리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흡연과 음주” 지금 생각해 보면 신앙의 핵심은 아니지 싶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두 가지를 하지 않는다. 누군가 목사라서 안하냐는 질문을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꼭 맞는 말은 아니다. 일단 맛도 없고 돈이 들고 건강에 유익도 없는 것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첫째 이유다. 굳이 신앙적인 이유를 꼽아 보자면, 많은 성경의 가르침을 다 따르지 못하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하지 말자는 신념이다. 믿음으로 포장해보지만 역시나 맛없는 것에는 유혹이 되지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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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31
  • [신재철 목사] 교회를 끊다
    # 교회를 끊다. 앞집, 방 한 칸에 혼자 사는 아저씨. 나는 그 아저씨를 ‘농협 아저씨’라고 불렀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 아저씨가 농협에 출근하고 있었기 때문. 시골 살이, 재미있는 게 별로 없었던 내게 자주 놀러오라는 아저씨 말에 민폐인줄도 모르고 거의 매일 문을 두드렸다. 거기에는 맛있는 빵도 있고 뭔가 분위기 있는 음악이 흐르는 라디오가 있었다. 우리 집과 다르게 연탄 따위는 아끼지 않는 훈훈함이 있었고 이불 위에서 뒹구는 여유는 어린 내게도 충분히 쉼이 되었다. 분위기 최고다. “재철아, 교회 가보지 않을래?” 함께 교회 다녀보지 않겠냐는 제안.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인데 두렵기 보다는 뭔가 모를 설렘에 냉큼 엄마에게 물어본 후 허락을 받았다. 그렇게 나는 주일학교 예배를 참석하게 되었다. 교회는 농협 아저씨 방보다 더 좋았다. 친절했던 농협 아저씨 같은 사람들이 무지하게 많았다. 화장품 향 짙었던 선생님. (알고 보니 그 선생님은 화장품 방문판매 일을 하시는 분이었다.) 뭔가 분위기 있는 양복 입은 부장 선생님. 앞에서 멋지게 노래 부르는 선생님까지. 커다란 종이에 그려진 악보를 보며 큰 소리로 따라 부르던 노래도 재미났다. 교회에서 보고 들은 것을 집에 와서 재잘거리자 엄마는 100원을 주시며 예배에는 헌금이 필요하다는 말씀과 함께 남들 다 하는데 가만히 있지 말고 꼭 헌금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교회에 다녔더니 100원이 생겼다. 그것도 매주. 매 주 100원 들고 향하는 교회. 중간에 잠시 오락실 들러 50원은 오락 한 판하고, 남은 50원은 헌금하고. (엄마 죄송해요. 사실 하나님보다 엄마에게 더 미안하다.) 마룻바닥에서 나는 것인지, 방석에서 나는 것인지 모를 그 냄새도 참 좋았다. “흰 구름 뭉게뭉게 피는 하늘에!” 힘차게 한 곡 부르고 나면 간식도 먹고 몇 명씩 모여 성경을 공부했다. 성경 말씀을 듣고 공부하는 시간이 내게는 제법 묵직하게 다가왔다. 부모님 따라 교회 나오는 친구들을 보면 설교든, 공부시간이든 늘 장난스러웠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린 것들... “아, 믿음이 이렇게 자라는 것인가?” 시간이 흘러... 교회 앞마당에 들어서는 내 발걸음은 당당했고 능숙하게 신발장에 신을 넣고 방석을 깔고 앉아 기도를 한다. 기도 내용은 별 거 없다. “하나님, 저 왔어요.” 선생님이 그렇게 하면 된다고 하셨다. 뭔가 대단한 아이들이나 하는 것으로 보였던 헌금 위원 순번에 들어가게 되었다. 성경공부 시간에 선생님과 나누는 이야기도 많아졌다. 그렇게 교회 생활도 익숙해지고 있었다. 교회 다니며 맞는 첫 성탄절, 우리 주일학교는 분주하게 연극을 준비했다. “마구간에 오신 예수님” 이야기를 친구들과 함께 연극으로 꾸며야 했다. 각 자에게 배역이 주어지는 시간. 별 거 없는 아기 예수님 역할 (이 역은 진짜 그냥 누워만 있으면 된다.), 그냥 뒤에 탈을 쓰고 서 있으면 되는 동물들, 동방박사, 목자들, 그리고 요셉과 마리아. 누가 봐도 주인공은 요셉과 마리아다. 최근 교회 인싸로 등극한 나는 배역에 욕심이 생겼다. 요셉까지는 아니라도 박사 역할 정도는 주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동물 3” 내게 주어진 역할이다. 얼굴도 나오지 않는다. 대사도 없다. 그냥 탈을 쓰고 잘 서 있으면 된단다. 쓰린 속과 다르게 최대한 웃으며 첫 연습에 참여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일정을 소화했다. 나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니깐. 그리고 성탄 행사가 잘 끝나고 나는 교회를 끊었다. 더 이상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많은 친구들과 선생님의 연락에도 더 이상 교회에 가지 않았다. “아, 믿음이 이렇게 별거 없구나.” epilogue 고향집 방문할 때면 조용히 그 교회를 찾습니다. 지금은 현대식으로 바뀐 예배당에 들어가 잠시 기도하고, 주변을 괜히 살피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 추억 한 자락 있을까 싶은 마음일까요. 그러다가 고향교회 담임목사님을 만나 초등학교 시절 1년 출석했던 주일학교 학생이라고, 지금은 목회를 하고 있다며 어색한 인사를 합니다. 그 목사님은 제가 교회를 다닐 당시 첫 부임하신 아주 젊은 목사님이셨는데 지금은 은퇴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궁금해서 이름도 모르는 농협 아저씨를 아시는지 목사님께 여쭈었습니다. 어디 계신지는 모르지만 지금 어느 시골에서 목회를 하시고 계시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보고 싶습니다. 그 아저씨가. 꼭 감사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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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7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9
    I. 서언(序言) 언젠가 모 교단의 노회장이 정기노회 개회예배 설교 시에‘명문노회가 되는 길’이란 제목으로 설교했다. 어떤 신문에서 이를 기사화 하면서‘명품노회 되기 위한 노력 다짐’이란 제목을 달았다. 같은 내용을 말하면서 왜 다른 용어로 표기했을까? 또 어떤 대선 후보를 지지하는 글에‘명품을 통해 명인으로 인정받고, 명품은 장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에 답하는 그 대선후보는‘명품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함께하겠다.’는 말을 했다. 여기에서의 ‘명품 대한민국’이란 말은 옳은 용어인가? 또한 어떤 도시에서는 발전하자는 표어를 내걸면서 ‘명품 00 도시를 만들자’고 했고, 또 어떤 도시는‘명품 도시’가 아닌, ‘명문 00 도시’라고 했다. 창원시의 경우도 ‘명품 창원시’라고 했다. 이러한 표현들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이름 있는 목회자는 자신의 위임식 때 감사인사를 하는 자리에서‘본 교회와 교인은 명품이지만 저는 평범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겸손한 모습의 말로서 좋아 보이지만, 명품이란 말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게 느껴진다. 이에 본 호에서는 이 두 용어의 차이점을 논하여 보고자 한다. II. 명품(名品)과 명문(名門)의 차이점 두 용어를 분석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명품’이란 단어이다. 한자의 뜻으로는 이름 名(명)과 물건 혹은 품위 品(품)자 이다. 사전적인 뜻은‘뛰어나거나 이름난 물건이나 작품’등을 말한다. 즉, 명품은 주로 사람을 대상으로 사용되는 말이 아니라 사물 등의 뛰어난 것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용어인 것이다. 두 번째는‘명문’이란 단어이다. 한자의 뜻을 보면, 이름 명(名), 집의 두 문을 의미하는 문 문(門)자 이다. 사전적인 뜻은 ‘이름 있는 문벌(門閥), 문벌이 있는 집안, 명가(名家)’를 의미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명문은 사물이 아닌, 사람의 모임으로 이루어진 가정이나 가문, 모임, 단체 등의 뛰어남을 말할 때 사용되어지는 말인 것이다. 이상으로 볼 때 평소 자주 사용하는 명문과 명품의 구별은 분명하다. 하지만, 실제로 사용되어지는 경우들을 보면 이 두 용어의 차이를 큰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다. 앞에서 예를 든 경우가 다 그러하다. 심지어 대선후보 진영에서나 각 도시들에서도, 또 교계의 중진들까지도 이를 명확하게 잘 구분하지 못하고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뿐 아니라 이와 비슷한 의미의 용어들도 많이 있다. 명성이 있는 가문을 뜻하는 명가(名家), 명문에 속한 집안을 뜻하는 명문가(名文家), 정치를 잘하는 이름 있는 관원을 뜻하는 명관(名官), 문화를 높이고 정치를 잘하는 군주를 뜻하는 명군(名君), 이름난 선비를 말하는 명사(名士), 문벌이 좋은 집안을 뜻하는 명벌(名閥) 등 비슷하거나 뜻을 같이하는 여러 용어들이 있다. III . 결 어(結語)와 제언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명품과 명문의 경우처럼 왜 사람들은 단어의 뜻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면서도 이런 용어들을 자주 사용하는 것일까? 란 의문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언어문화 사대주의 사상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한문을 선호하고 국어를 경시하는 풍조는 훈민정음을 만든 세종대왕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한글 창제에 있어서 당시 집현전 학자였든 ‘최만리’, ‘정창손’등은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물론 나름대로의 시대적인 분위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문 선호 사상은 조선시대 5백 년 동안 뿐 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그 잔재는 계속 남아 있다. 그렇다고 한자어를 사용하지 말자는 말은 절대로 아니다. 그 이유는 한자어를 알지 못하고는 우리의 일상용어를 바로 분석하고 알기는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의 두 용어처럼 애매모호한 말이나 뜻도 알지 못하면서 사용하는 용어들은 순수한 우리말이나 알기 쉬운 용어로 사용하면 좋지 않을까 라는 제언을 해본다. 예를 들면, 위의 두 용어 대신 ‘좋은 가문’, ‘좋은 노회’, ‘좋은 도시’, ‘좋은 대한민국’등이나 ‘이름 있는’, ‘아름다운’등의 표현을 쓰면 어떠할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 일컬어지는 현대에서는 알기 쉽게, 듣기 좋게, 보기 좋게 쓰는 말이 더 아름답고 좋은 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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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17

실시간 칼럼 기사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17
    I. 서언(序言) “복음의 메카(Mecca)는 예루살렘이다.”란 말을 어떤 칼럼에서 읽어본 적이 있다. 아무리 이해하면서 보려고 했지만 정말 이건 잘못된 말이었다. 흔히들 어떤 중심지를 말하고자 할 때 메카란 말을 많이 쓴다. 근래에 본 각 언론사에서 이 말을 사용한 것을 나열해 보면, ‘경제 문화의 메카OOO’, ‘게임의 메카’, ‘유기농 산업의 메카’, ‘패션의 메카 밀라노’등이었다. 이런 말은 이미 사회적 통용 언어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경우에는 어쩔 수 없다. 이는 ‘나락’, ‘야누스’등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기독교 단체와 성도들이 사용 할 말은 아니다. 이에대하여 이 용어들의 어원을 논하고자 한다. II. ‘메카’,‘나락’,‘야누스’의 의미와 유래 1. 메카(Mecca)의 유래 : ‘메카’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도시 이름이며,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Muhammad)’의 고향인 동시에 이슬람교의 발생지이며 중심지이다. 또한 ‘무함마드’ 이전에도 메카는 다신 숭배의 중심지였다. 이런 이유로 흔히들 중심지를 말할 때는 무슬림(Muslim)들 뿐만이아니라 일반인들도 ‘메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서두에서 논한 대로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는 일이다. 더군다나 ‘복음의 중심은 예루살렘이다.’라고 해야 될 것을 좀 더 유식하게 말한다고 ‘복음의 메카는 예루살렘이다.’라고 표현한 것은 너무 잘못된 말이다. 2. 나락(那落, 奈落, naraka)의 유래 : 얼마 전에 어떤 책임 있는 기독교계 방송국에서 ‘오늘날 교회의 신뢰도가 나락으로 떨어졌다.’라는 보도를 했다. 여기의 나락이란 말도 흔히 사용하는 국어사전에 등제되어 있는 용어이기 때문에 이 말을 방송용어로 사용한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락(那落, 奈落)이란 말의 유래를 안다면, 기독교계 용어로서는 옳지 않는 말이다. 나락이란 말은 원래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의 ‘나라카’(naraka)를 음역한 말로, 본래 ‘밑이 없는 구멍’을 뜻하며, 지옥(地獄) 또는 괴로움을 받는 곳을 말하는 전형적인 불교 용어이다. 또 이 말은 일반적인 지옥의 의미보다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극한적인 상황을 비유해서 설명할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이로 볼 때 이런 완전한 불교의 교리적 용어를 교회적인 사항을 이야기를 할 때 사용하는 것은 옳지 않는 일이다. 3. 야누스(Janus)의 유래 : 오래전 ‘욕망의 두 얼굴’이란 영화가 개봉된 적이 있다. 내용은 바로이 두 얼굴의 양면성을 나타내는 ‘야누스’ 이야기이다. 그 어원을 구체적으로 논한다면, ‘야누스’는 로마의 출입문과 아치형의 다리를 지키는 신의 이름이다. 또한 이 신은 양면(兩面)의 얼굴과 머리 혹은 4개의 얼굴을 가진 형상도 있다. 하지만, 이중에서 어떤 얼굴을 보느냐에 따라 행운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불운을 주기도 한다고 믿고 있다. 또한 이 말에서 한해의 끝과 시작이라는 의미에서 'Janualy'란 1월 달의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이로 볼 때 이 말도 로마 신화에 나오는 미신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인이 즐겨 사용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III . 결 어(結語) 이상으로 몇 가지 용어들을 논하면서 느끼는 것은 ‘왜 사람들은 단어의 뜻을 명확히 구분하지못하면서도 이런 용어들을 자주 사용할까?’라는 의문을 가져 볼 때가 많다. 그 중요한 이유 중의하나는 우리나라의 고질적인 언어 사대주의 사상이 아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과거부터 중국의 한문을 선호해 온 것이나 현대에선 영어권이나 외래어를 선호하는 것과 아예 우리 국어를 경시하는 풍조가 이런 애매모호한 용어들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타종교적인 용어들의 역사가 길게는 수천 년에 이르고, 거기에 비례해서 그 용어들이 우리말에 너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구분해서 사용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대로 그 유래와 뜻도 모르면서 계속 사용해서는 안 될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복음의 메카(Mecca)는 예루살렘이다.’라고 하거나, ‘오늘날 교회의 신뢰도가 나락으로 떨어졌다.’, ‘야누스의 두 얼굴’이란 신앙적인 용어가 아닌 말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 있는 말이 아니라면, 될 수 있는 대로 신앙적으로 알맞은 용어들을 알기 쉽게, 듣기 좋게, 보기 좋게 사용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가장 아름답고 좋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언어의 품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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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 [오성한 목사] 성령충만(2/3)과 죄의 법
    믿음이 좋은 사람에게도 죄의 법은 우리에게 계명을 지킬 수 있는데 못 지켰다고 속이며 부담을 안겨 온다. 그것으로 나를 죽인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롬7:11).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강조한다. 신앙생활은 나의 행위를 고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다. 행위를 고치려는 신앙생활에서 빨리 빠져 나와서 자유 하라.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믿는 것이다. 생수의 근원되신 주님을 버리고,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파선 안 된다(렘2:13). 예레미야서의 주제다. 성경 전체의 주제이기도하다. 생수의 근원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신앙생활이지 내가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를 파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다. 나를 고치려고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님을 발견하라.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것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이 신앙생활임을 발견하라. 당신은 이미 성령의 임재 안에 있으며 성령충만함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생명의 풍성함을 얻는다. 참 자유를 만끽하며 능력의 삶을 산다. 자신을 보며 죄책감과 죄의식을 가지느냐,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을 믿음으로 바라보느냐가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실수할 대마다 “나의 모습이 이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구나!” “오늘도 나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되겠구나! 감사하다.”는 깨달음을 가져야 한다. 보혈 앞에서는 철면피가 되어야 한다. 자신을 보면 “이래가지고 되겠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책감 죄의식 속에 사로잡히길 원하시지 않으신다. 내 속에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마음대로 잘 안 된다. 내 지체 속에는 다른 법도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의 법으로 항상 나를 사로잡아 온다. 죄의 법은 절망이다. 사망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라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 사망의 법에서 건짐을 받는 길을 발견하고 걸어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죄의 법이 주는 생각을 묵상하지 않고 임마누엘을 묵상하는 것이 성령충만으로 출발하는 길이다. 당신 안에 잠자는 성령의 능력을 깨우는 길이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라고 탄식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바울을 보라. 죄의 법에서 해결 받았음을 선포하며 생각하라고 한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5)하면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라고 하는 환희를 보는가? 펄쩍펄쩍 뛰는 바울의 모습을 보는가? 이것이 나의 모습니다. 해방이다. 죄의 법에서 완전히 벗어남을 받아들이는 것이 성령충만으로 출발하는 삶이다. 성경 전체가 그렇지만 특히 로마서 전체엔 놀라운 복음이 숨어져 있다. 로마서 전체가 그렇다. 로마서 5장에서도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고 이 은혜가 많은 사람에게 넘쳤다고 고백한다(롬5:15). 이제 은혜가 왕 노릇한다고 한다(롬5:21). 성경 전부가 이 이야기다. 율법적인 눈을 걷어 버리고 은혜의 복음, 예수의 복음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한다. 생수의 근원되신 주님을 버리고, 가둘 수 없는 터진 웅덩이를 파는 일이 예레미야 시대만의 일이 아니다. 정말 안타깝다. 통탄할 일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왔다 가셨는데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이 부족하단 말인가? 우리는 주님과 하나 되어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났다(로마서 6장). 예수님과 함께 보좌 우편에 앉혔다(엡2:6).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하심을 공간의 어떤 다른 우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영의 세계는 공간과 시간과 물질의 세계가 아니다. 이해 할 수 없는 일 같지만 그렇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김 집사 몸에도, 박 집사 몸에도, 오 목사 몸에도 계신다. 나누어져 계신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의 모든 몸에 온전하게 계신다. 이것은 공간 계념이 아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우리가 사는 다른 우주적인 공간으로 승천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우리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다. 우리 몸에 성령께서 계신다. 우리 몸에 하나님이 거하신다. 우리 몸이 성전이다. 이사야가 본 보좌가 우리 몸에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몸이 하늘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무리 일까?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위쪽만 하늘이 아니다. 옆쪽도 하늘이고 밑쪽도 하늘이다. 하늘이라는 개념이 3차원적인 공간 계념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면 하나님 계신 곳이 하늘이다.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면 예수님의 승천으로 우리 몸으로 승천하셨다고 이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승천이 우리 몸으로 하셨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 우편에 앉히심을 이해하기 위한 설명이라고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며 읽어 주길 바란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6)라는 말씀을 좀 더 생생하게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아 설명해 본 것이다. 믿음은 이것을 묵상하고 믿는 것이다. 스스로의 삶을 고치려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니다. 우리의 삶은 바른 복음을 알고 살 때 저절로 따라오는 열매임을 보아야만 한다. 회개는 나를 고치려는 것이 회개가 아니다. 회개는 예수님께서 해 두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는 나를 고치려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예수를 믿어야 한다. 우리는 전에는 어두움이었다. 이제는 빛이다. 빛의 자녀들처럼 받아들이고 행하면 된다. 우리가 실수했을 때 회개하면 된다.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이런 또 실수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의 실수로 인해 죄책감에 쌓이지 않겠습니다. 용서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새 힘을 얻습니다. 주님이 승리했습니다. 주님의 승리가 저의 승리이다. 제가 오늘도 철저히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러면서 자꾸 십자가로 돌아가면 된다. 주님과 함께 부활하여 예수님과 함께 하늘 에 앉혔음을 믿는 것이 성령충만으로 출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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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 [오태열 목사] 진짜에는 눈물이 있다
    세상에는 진짜가 있으면 가짜가 있기 마련이다. 실체와 그림자, 알곡과 가라지가 쌍생하듯, 진짜와 가짜는 항상 쌍생한다. 진짜가 가짜처럼, 가짜가 진짜처럼 보일 때가 참으로 많다. 가짜는 진짜처럼 흉내 낼 수는 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곧 탄로 나고 만다. 그러나 진짜는 끝까지 간다. 가짜는 언제까지 속일 수가 없다. 왜냐면 시간이 지나면 가짜인 열매가 맺히기 때문이다. 진짜와 가짜의 열매는 각각 다르다. 신앙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다. 진짜 성도인지 가짜 성도인지의 구별은 눈물의 기도에 있다. 진실한 신앙인에게는 눈물의 기도가 있지만, 가짜 성도에게는 눈물의 기도가 없다. 눈물의 기도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눈물을 흘리는 척은 할 수 있으나 지속적인 눈물의 기도는 할 수 없다. 가짜라 해도 지속적인 눈물의 기도가 있다면 진짜가 된다. 지속적인 눈물은 절대로 가짜로 만들어 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게 어느 순간부터 눈물의 기도가 사라졌다면 가짜 성도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께 눈물로 부르짖는 지속적인 기도가 있는 사람은 진실 된 신앙인이다. 다니엘은 평탄할 때도, 사자 굴에 들어가는 위기 앞에서도 정한 시간 습관에 따라 하루 세 번씩 기도하였다. 이 일로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이 무사함으로 그의 신앙이 진실임을 보여준다. 예레미야 선지자 당시에는 애국, 애족한다는 가짜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나라와 민족을 위한 눈물의 기도가 없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눈물의 기도를 통하여 애국, 애족의 선지자임을 보여주었다. 예레미야애가 3:48-49절에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라고 하였다. 교회를 사랑하며 위한다고 말하면서 교회가 교회답지 못함을 비난한다. 현재 교회에 대한 실망으로 가나안 교인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점은 교회를 위한 눈물의 기도가 없다는 것이다. 정말 교회를 위하고 사랑한다면 교회를 위한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 불신자의 가족, 친척, 친구들의 영혼을 위하여 뜨거운 눈물의 기도가 있을 때, 그 영혼을 구원시킬 수 있다. 진짜 신앙인의 눈에는 영혼의 가련함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야지 군중으로 보여서는 안 된다.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기도할 때 두루뭉실 기도하지 않는다. 이름을 부르며 구구절절이 간절히 기도한다. 전도의 대상자를 놓고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 전도할 때 앵무새처럼 달달 외워서 전할 것이 아니라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운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말로서 전해야 한다. 전도에는 예수 믿고 체험한 구원의 즐거움과 변화된 나의 삶, 받은 축복 등, 자기만의 간증이 있어야 한다. 진짜와 가짜가 확연히 나타나는 열매 맺는 계절이다. 예수께서 마태복음 7:18절에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하시고 20절에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안다’ 하였다. 나는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내 신앙과 애국 애족, 교회 사랑과 영혼 사랑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맺고 있는 열매가 진위를 증명하여 준다. 진짜가 되어야 한다. 눈물의 기도가 꼭 있어야 한다. 눈물의 기도가 없다면 내 신앙과 교회와 영혼 사랑, 애국 애족도 모두 가짜임을 명심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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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 [박봉석 목사] 가로등을 끄는 이유
    미국에는 팜 스프링스라는 사막 지역의 도시가 있습니다. 이곳은 많은 노인들이 사는 실버타운으로서 유명한 휴양 도시입니다. 그런데 이곳을 가보면 이 도시만의 특별한 것을 경험하게 되는 데 그것은 특별한 구간을 제외하고는 밤에 모든 가로등의 불빛을 끈다는 것입니다. 아니 얼마든지 가로등을 환하게 켤 수 있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도시인데 왜 캄캄한 밤에 가로등을 끄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막 지대의 가장 아름다운 자연은 밤하늘입니다. 밤하늘에 아름답게 수놓은 별들을 선명하게 보기 위해서 이곳 주민들은 모두의 합의 하에 그렇게 가로등을 끄는 것입니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은 그곳 주민들의 그런 결단을 듣고는 모두가 놀란다고 합니다. 높은 하늘의 반짝이는 별들을 잘 보기 위해서 그보다 훨씬 낮은 곳에 있는 가로등을 끄는 불편을 감수하는 주민들의 결단이 결코 예사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정의를 할 수 있지만 이런 정의는 어떻습니까?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서 낮은 가치를 포기할 줄 아는 사람” 바로 이 정의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치이동’을 한 사람입니다.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서 그보다 낮은 가치를 버릴 줄 아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높은 가치를 위해서 나의 이익과 명예를 기꺼이 포기할 줄 압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물질도 시간도 포기하고 내 위신과 자존심도 버릴 줄 압니다. 사도 바울이 성경 빌립보서 3장 7-8절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보다 높은 가치를 위해서 그보다 낮은 가치를 포기하는 결단을 말하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영혼 구원을 위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주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 무엇을 포기했습니까? 낮은 가치를 포기하고 높은 가치를 선택할 줄 아는 사람, 땅의 것을 포기해서 하늘의 것을 얻기를 기뻐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고 기꺼이 마구간 말구유에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사람입니다. 봄이 되면 비슷한 시기에 피는 꽃이 있는데 벚꽃과 목련꽃입니다. 그 중에 벚꽃은 활짝 만개했다가도 질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나무 가지에서 다 떨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목련꽃은 시들어서 색깔이 변해서 거무칙칙한 색을 띠기까지 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습니다. 실제로 꽃이 질 때쯤에 목련꽃을 가까이 가서 보면 색이 바래기 까지 시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생애가 다가도록 놓아야 할 것,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인생들의 모습과 닮았다고 하겠습니다. 파스칼은 말하기를, 인간의 마음속에는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은 오직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많은 인간들은 그 공간마저 돈과 권력과 명예로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빈 공간은 더욱 커지며 허무와 고독으로 몸서리치게 됩니다. 이 세상 많은 인생들은 포기하지 못하고 붙잡고 있는 것들 때문에 더 중요하고 존귀한 것들을 놓치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손에 꼭 쥐고 있어서 정작 하나님이 주시려는 선물은 다 받지 못하고 사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지요. 독자 여러분, 인생의 끄트머리까지 놓지 않고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지금 붙들고 있지 않아야 하는 데 꼭 붙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기도하며 살펴보십시오. 그 붙들고 있는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포기하면 생각지 못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 진짜 내게 필요했던 신령한 복이 내게 임하는 것을 볼 것입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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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 [신재철 목사] 잘못된 만남
    잘못된 만남 복학 후 교내 크고 작은 예배 모임과 지역교회 집회에 초대받아 함께 예배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 인근에 있는 대학에서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예배특강 요청을 받기도 했다. 신학대학원 학생들을 상대로 찬양 콘티 작성법과 예배 인도법에 관한 2시간짜리 특강이다. 마침 신혼여행 일정과 맞물려 고민이 되었는데 선하신 아내님의 허락으로 여행을 1주일 미루고 참여할 수 있었다. 교회 사역을 포함해서 일주일에 찬양 인도를 다섯 번 이상은 고정으로 하는 것 같다. 학교에 수업을 들으러 다니는 것인지 찬양을 섬기러 다니는 것인지 모를 정도의 일정에 고단함도 있지만 좋다. 철가방, 방범대원, 대리운전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교회 청년부예배 강사로 초대를 받았다. 찬양과 말씀을 함께 섬겨달라는 요청이다. 초청해주신 교회의 청년들과 찬양을 연습하며 집회를 준비하는데 담당 교역자가 슬며시 다가와 귓속말을 한다. 부장 집사님 집에서 간단히 식사하고 집회를 시작하자는 제안이 왔다. 강사로 사역을 섬길 때 식사 초대는 여러모로 부담이 있다. 무엇보다 시간이 여유롭지 못함이 가장 큰 이유다. 찬양팀과 맞춰야 할 시간도 부족하고, 배가 부르면 사역에 불편함이 생겨 대부분 식사는 정중히 거절한다. 하지만 난감해하는 청년부 사역자를 보며 식사 자리에 함께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만난 부장 집사님은 이미 안면이 있는 분이다. 칼국수 집에서 일하며 철가방을 들고 다니던 시절. 대부분 배달처는 대학병원이나 사무실이었다. 가정집 배달이 있지만 얼마 되지 않았다. 그중 늘 불평이 많고 배달원을 함부로 대했던 손님. 그 집 배달 요청이 오면 늘 불편했고 인상부터 찌푸려졌다. 피하지 못해 배달을 가 현관문을 열면 ‘예수만 섬기는 집’임을 드러내는 상징이 많았다. ‘벽의 그림, 말씀 액자. 테이블에 올려둔 십자가.’ 은혜로운 셋팅과 다르게 집주인은 고약했다. 늘 음식 타박에 배달원을 무시하는 말투. “예수 믿고도 저 모양이니 예수님이 욕을 먹지.” 빈 배달통을 들고나오며 늘 혀를 찼던 기억이 난다. 배달 일을 그만둔 지가 벌써 몇 년인데 나는 그 아저씨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 내가 다시 이 집에 오게 될 줄이야!’ 둘은 단박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고약한 집주인과 배달부. 아니 이제는 청년부 부장집사와 집회 강사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더 무슨 말을 할까? 형식적인 말들로 식사 자리를 채운다. 애매하고 묘한 감정을 애써 감추며 식사가 시작되었다. “요즘도 칼국수 좋아하세요?” 이 말을 하고 싶었지만 꾹 눌러 담았다. 우리는 잘못된 만남이었다. 한 상 잘 차린 식사도, 오가는 은혜로운 말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이미 서로의 민낯을 보았기에 잔뜩 꾸며진 겉치레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집회 시작을 앞두고 잡힌 식사였기에 긴 시간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짧은 시간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예배는 시작되었고 찬양은 참 은혜로웠다. 청년들은 적극적으로 반응했고 나 역시 행복했다. 찬양, 말씀, 기도. 모든 것이 은혜였고, 행복했고, 감사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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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 [조희완 목사] 봉사의 자세 (벧전4:7-11)
    옛날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제(1825년-1855년)가 나라를 다스리던 때 그 나라에 한 충성된 군인 장교가 있었는데 이런 저런 일로 인해서 사람들에게 많은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막사(幕舍)에서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갚아야 할 빚의 액수를 종이에 적어보다가 액수가 너무 많아서 자기 능력으로는 도저히 그 빚을 갚을 수가 없음을 알고 크게 낙담을 했습니다. 그래서 빚의 액수를 적은 끝에다가 “이 태산 같은 빚을 누가 갚아 줄 이가 있겠는가?”라고 탄식(歎息)하는 글귀를 적어 놓고 잠자리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니콜라이> 황제가 종종 군대를 시찰하고 다녔는데, 마침 황제가 그 부대를 시찰하다가 사병들의 막사를 둘러보던 중에 그 장교가 책상 위에 적어 놓은 탄식하는 글귀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태산 같은 빚을 누가 갚아 줄 이가 있겠는가?”라는 글귀를 읽고 감동이 되어서 그 밑에다가 “니콜라이 황제”라고 적어 놓고 나갔습니다. 이튿날 아침 그 장교가 일어나서 종이 위에 적혀있는 황제의 이름을 보고 크게 놀랐습니다. 바로 그날 밤에 <니콜라이> 황제가 다시 그 부대를 찾아와서 그 장교가 걱정하고 탄식하던 빚을 다 갚을 만 한 돈을 하사해 주었습니다. 그 장교는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황제와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남은 생애를 다 바쳐서 충성을 했습니다. -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그 보다 더 충성된 믿음으로 헌신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보다 더 엄청난 관심과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달은 사람은 반드시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싶은 마음과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봉사를 하되 어떻게 봉사해야 할까요? 첫째는, 겸손한 마음으로 봉사해야 합니다.(벧전4:10-11) 둘째는, 받은바 은사대로 봉사해야 합니다.(롬12:4-8) 셋째는, 믿음의 분량대로 봉사해야 합니다.(눅10:40-42) 우리 모두 봉사하는 아름다운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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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 [박동철 장로] 고르바초프의 죽음과 러시아의 복음화
    소련 연방 제국의 마지막 공산당 서기장 미하엘 고르바초프가 지난달 30일 세상을 떠났다. 애칭 고르비의 죽음이 세상에 던지는 여러 얘기에 많은 관심이 끌린다. 지난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세계 냉전체제가 화해로 돌아서게 된 것은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당시 공산 사회주의의 맹주 소련이 무너져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서독이 통일되자 소련의 당시 서기장 고르비는 권력의 통제에도 힘을 잃어갔다. 이후 미국 레이건 대통령은 고르비와 대화 시스템을 갖추고 미소 냉전을 끝내고 대화의 파트너로 전환하게 된다. 드디어 1988년 5월 소련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는 UN에서 연설을 통해 대결에서 협력의 시대를 선언하게 된다. 사실상 공산 사회주의를 포기하는 선언이었다. 동유럽 소련 연방 제국들은 독립을 선언하고 소련은 러시아로 돌아가게 된다. 필자는 이 무렵 일선 기자생활 할 때라 생생한 기억들이 있다. 당시 우리는 80년대 신군부의 군사정권이었지만 노태우가 6.29선언으로 다시 정권을 잡아 6공화국 시대를 구가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군사정권의 연장에서 북방 정책을 표방하고 소련과의 외교에 힘을 쏟았다. 노 대통령은 90년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그리고 고르비의 답방형식으로 91년 5월 제주도에서 역사적인 한·소 정상회담을 갖는다. 우리나라가 동토의 땅 소련의 문을 열게 되는 역사를 기록하고 지금도 러시아는 우리의 중요한 통상 파트너가 되고 있다. 당시 가끔 특별한 기자회견 취재 중 노 대통령은 소련과의 외교 정상화의 북방 외교를 늘 치적으로 앞세우는 모습들을 보아왔다. 사실 이후 러시아로 정치체제가 바뀌면서도 우리와의 외교는 발전해 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후 기독교 복음화가 급격히 확장 됐다는 점이다. 고르바초프의 큰 덕택이자 하나님의 큰 역사로 봐야 할 것이다. 러시아는 오랫동안 동방 종교의 대표격인 정교(正敎)가 종교의 영역이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정교는 공산당 권력 아래에서 권력의 시녀 역할을 하면서 기독교 이단의 기능에서 머물러 있었다. 러시아 정교는 로마의 분열과 함께 동방 정교로 발전하여 러시아에서 교세를 떨쳤지만 러시아 혁명과 함께 교리 상 예수 십자가 복음에 이르지 못하고 공산당 최고 권력에 묻혀있는 유사 기독교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20년간 선교사로 사역하신 한 목회자는 소련 개방과 함께 우리 기독교가 선교하는데 큰 계기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공산당 문화가 가시지는 안 했지만 러시아 정교의 불간섭하는 정서 속에 지금은 한국 교회서도 많은 선교사들이 복음사역에 사명을 다하고 있다. 기독교 국가라고 하는 러시아의 정교는 국교화하여 85% 이상의 인구를 가졌지만 개신교는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우리 한국 교회 선교사는 현재 400여 가정이 러시아 곳곳에서 복음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고 한다. 故 조용기 목사님이 이후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역사적 대 집회를 갖고 복음의 바람을 일으킨 적도 있다. 이제 또 러시아는 푸틴의 독재 권력하에서 제국의 탐욕에 불타고 있다. 고르비의 죽음도 국장으로 치르지 않고 장례식에 불참하는 등 고르비의 소련 제국화 포기에 불만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전쟁을 일으키고 온 세계에 호전의 야욕을 드러내고 있다. 북방의 괴물 푸틴의 러시아를 순화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복음임을 깨닫게 한다. 일찍이 에스겔 선지자는 예언했다. 적그리스도 북쪽이라는 표현 아래 곡과 마곡이 이스라엘을 깊이 괴롭힐 때 하나님이 그들을 가만두지 않겠으며 이스라엘을 구원하겠다고 설파했다. 에스겔 38장과 39장의 말씀은 우리에게 사명과 소망을 던져주고 있다. 공산 사회주의의 본거지 러시아를 두고 말하는 것 같다. 역사의 깊은 곳에 복음의 행함이 함께 깊이 자리를 잡아 나가야 할 것 같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간절한 소망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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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13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16: 추석(秋夕)에 대한 분석과 기독교적 입장
    I. 서언(序言) 어렸을 때, 동심에 젖은 설레임으로 설날과 함께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 있었다면 바로 추석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불신자였든 필자로서는 이 추석은 세시풍속(歲時風俗)의 하나인 차례(茶禮)를 지내는 일로인해 많은 부담감을 가진 날이기도 했다. 바로 오는 10일이 우리나라 고유 명절의 하나인 추석이다. 이에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과 함께 기독교인으로서 이 추석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를 논하고자 한다. II. 추석(秋夕)이란 말의 의미와 유래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중추절(仲秋節) 혹은 중추가절(仲秋佳節), 가위, 한가위로 불리어 진다. 원래는 한가위라고 했는데 ‘한’이란 말은‘크다’라는 뜻이고, 가위’란 말은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유리왕 때 배를 짜는 여인들이 ‘길쌈’을 하며 놀이를 하는 ‘가배(嘉俳)’에서 유래된 말로서 나중에‘가위’라는 말로 변형되었다. 또한 ‘가배’란 말은 한자어로서 가운데 중(中) 또는 반(半)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한가위를 가을(秋)의 반, 즉 중추(中秋)의 의미를 담아 중추절 혹은 중추가절로 바꾸어 부르게 된 것이다. 또한 음력으로 8월 15일 중추의 저녁에 가장 크고 밝은 보름달이 뜬다는 의미에서 달과 연관된 저녁 석(夕)자를 포함하여 추석(秋夕)이라고 한 것이다. 또한 이때는 온 들판에 오곡백과가 무르익어 가는 시절이다. 그래서 풍년을 기원하는 마음과 첫 곡식을 거둔 기쁜 마음에서 만월인 8월 15일에 길쌈놀이의 유래와 함께 기쁘고 즐거운 날의 명절로 지켜지게 된 것이다. III. 추석의 세시풍속(歲時風俗)인 차례(茶禮) 추석의 의미와 그 유래로 볼 때에는 우리 기독교인으로 볼 때에도 전혀 거부감을 가질 이유는 없다. 오히려 아주 아름다운 날로 장려할 만한 명절이다. 하지만 이 추석 절기에 행해지는 세시풍속에는 성도들이 그대로 행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이런 면에서 추석에 행하는 세시풍속과 용어들을 논하고자 한다. 추석의 세시풍속으로는 성묘(省墓)와 차례 등이 있다. 그러나 성묘에 대해서는 본고의 장례 용어에서 논한 바가 있어서 생략하고 차례에 대해서만 논하기로 하겠다. 차례를 논하기에 앞서 먼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우리나라 제사제도에 대한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와 정사는 아니지만 환단고기(桓檀古記)등을 보면, 우주를 창조하고 운행하는 천신(天神)혹은 상제(上帝)가 있음을 믿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고구려의 음력 10월에 지낸 동맹(同盟), 부여의 12월의 영고(迎鼓), 동예의 10월에 술과 춤을 추며 지낸 무천(舞天) 등이 그러하다. 바로 이런 제천(祭天)행사가 지금의 추석에 차례를 지내는 일의 유래가 된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제사 행위는 고려시대까지 말 그대로 천신에 대한 제천행사였다. 즉, 오늘날과 같이 죽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었다. 현재의 조상숭배와 제사는 조선시대의 유교 사상의 영향으로 정착된 것으로 같은 문화 영향권 아래 있는 중국과 일본에도 없는 극히 한국적인 제사 형식이다. 차례라는 말도 그 어원을 살펴보면 한자어 표현 그대로 다례(茶禮)라는 말이다. 지금은 제사상에 술을 올려놓지만 원래는 차를 올렸기 때문에 다례 혹은 차례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조상에 대한 제사에는 조상의 죽은 날을 기억하며 윗대로 4대까지 지내는 기제사(忌祭祀)가 있다. 반면 명절에 지내는 차례는 모든 조상을 향한 제사이고, 또 시제(時祭)라는 제사도 있는데 이는 4대 이상의 조상의 묘를 직접 찾아가서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IV. 기독교적 입장과 맺는 말 앞에서 논한 대로 추석의 근본적인 유래와 의미는 하늘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추수감사절의 의미와 다를 바가 없다. 간혹 어떤 교회들에서는 추석을 전후해서 추수감사절기로 지키는 경우들도 있는데, 이는 바로 추석과 추수감사절의 근본적인 배경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추석은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감사절이요 아름다운 명절이다. 하지만 이것이 우상숭배의 모습으로 바뀌어 진 차례를 행하는 세시풍속은 받아들일 수는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교회도 이제 130여년의 역사 속에서 추석을 아름다운 기독교문화로 바꿀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필자의 어린 시절이나 현재의 짝 믿음 가진 성도들에게 더 이상 명절이 괴롭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며, 온전히 하나님께 감사하고 온 가족과 일가친척들과의 아름다운 화목의 장을 만들어 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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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7
  • [최호숙 목사] 진정한 유토피아를 찾아서
    육신을 가진 인간은 누구나 이상향(理想鄕)을 꿈꾼다. 인간의 욕망은 언제나 복잡하고 어지러운 현실로부터 벗어나 평화로움 속에서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곳에서 원망과 시비 갈등 없이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전쟁의 위협과 질병의 위협과 경제적 빈곤의 위협, 인간 사이의 갈등과 대립 그리고 번민과 고뇌가 끊이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동서양을 불문하고 일어나는 공통된 양상일 것이다. 이처럼 완벽하고 아름다운 세계 이상향(理想鄕)을 중국 대표 시인 도연명( 陶淵明, 365~427년)은 도원경(桃源境)을 그리며 인간이 현실 세계에서 찾을 수 없는 곳을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고 했다. 무릉도원의 유래를 보면 한 가난한 어부가 배를 타고 무릉 마을의 계곡 강줄기를 따라 올라 가다가 복숭아꽃이 만발한 진경을 보게 되었고 동굴 하나가 있어 들어가 보았더니 처음 보는 별천지 세계가 있더라는 것이다. 그 사람들에게 “왜 여기서 사느냐?”고 물었더니 전쟁 난리를 피해 이곳에 와서 사는데 바깥세상 속세의 인연을 끊고 산다는 것이다. 그곳은 꽃들과 새소리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곳, 인정이 넘치는 곳, 그들로부터 어부는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곳을 나오려고 할 때 그들의 요구가 “바깥세상에 나가면 이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절대 말하지 말라”는 부탁이었다. 어부는 나오면서 다시 찾아오기 위하여 중간에 표시해놓고 와서는 고을 태수에게 이런 사실을 알렸고 함께 다시 이 마을을 찾으려 했지만 그 아름다운 세계를 다시는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찾을 수 없는 아름다운 세계를 “무릉도원”(武陵桃源)이라고 한다. 서양에서는 무릉도원을 유토피아(Utopia)란 용어로 사용하는데 유토피아(utopia)는 영국의 사상가 토머스 모어가 1516년에 만들어낸 것으로 “현실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회”를 일컫는 말이다. 원래 이 단어의 유래는 헬라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헬라어의 ~을 부정하고 없음을 뜻하는 (ού)와, 장소를 뜻하는 (τόπος)를 합하여 “없는 장소 곧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인간들은 현실 세계에 인간의 자력으로 이룰 수 없는 유토피아를 건설하려고 무단히 노력을 해왔다. 대표적 인물이 공산주의 창시자 ‘칼 막스-(Karl Marx)’이다. 그는 공산주의를 통해 유토피아적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인간이 건설할 수 없고 찾을 수 없는 유토피아적 세계를 성경은 분명히 있다고 설명한다. 그 세계는 인간의 자력으로 갈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믿음으로 갈 수 있는 곳이다. 성경은 분명히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시길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계21:4) 이루지 못할 세상 유토피아를 세우려 한다거나, 이루어 놓은 알량한 물질의 만족 때문에 행복에 겨워 진정한 천국을 사모하지 못한다면 올바른 성도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믿음으로 천국을 바라보며 사모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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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7
  • [오성한 목사] 성령충만(1/3)
    성령충만에서 출발하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앞에서도 다루었지만 더 강조하여 다루려고 한다. 나는 오래 동안 성령충만 하려고 목표를 세웠다. 성령충만을 믿고 믿음으로 출발해야한다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고 노력해야 성령충만 할 수 있다고 여겼다. 많은 노력을 해 보기도 했지만 성령충만을 확신할 수 없었다. 늘 부족의식이 있을 뿐이었다. 당신은 당신 안에 성령의 능력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는가? 예수를 믿는 자이면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 성령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은 완전한 성령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완전하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함께하시면 완전하신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더 오셔야 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도 우리에게 계시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완전하신 성령님이 계신다. 더 오셔야 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이 조금 와 계신 것이 아니라 생수의 강으로 넘치도록 들어와 계신다. 어떤 사람에겐 적게 와 계시고 어떤 사람에겐 많이 와 계신 것이 아니다. 차별이 없다. 요한복음 7장 37절에서 39절에 말씀하셨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하셨다. 오늘부터 기도를 매일 3시간 이상 하면 생수의 강이 넘칠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누구든지 마시기만 하면 생수의 강이 흘러넘친다. 영적 전쟁은 우리의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이다.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이 아니다. 어떤 시험이 오면 다른 방법으로 이기려고 한다. 생각을 사로잡아서 “아,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구나! 내가 몰랐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멘입니다.”하고 자꾸 환영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스스로 의롭게 되려고 돌아가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고 하면서 돌아선다. 워낙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돌아서는 것이 더 편하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돌아서면 안 된다. 주님이 우리를 이미 해방시켜 놓으심을 믿고 감사하자. 당신 안에 생수의 강이 넘치고 있다는 생각을 갖지 못하고 산다면 철저하게 회개해야 한다. 회개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스스로 뭘 하려고 돌아가서는 절대로 안 된다. 유다 백성들에게 “후에 그들의 뜻이 변하여 자유를 주었던 노비를 끌어다가 복종시켜 다시 노비로 삼았더라”(렘34:11)라고 했다. 돌아간 그들은 하나님의 굉장한 진노의 대상이 되었다. 노비들을 하나님의 때에 풀어 주게 되어 있는데 노비를 풀어주고 나니 여러 가지 불편했다. 그러니 다시 노비를 데려다가 노비로 삼았다. 우리도 죄의 몸에서 하나님을 믿고 변화된 후 습관이 안 그렇고, 생각이 안 그렇기 때문에 다시 가져와서 다시 종노릇하면 안 된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6:6)라고 하셨다. 옛사람은 죽었다. 나의 옛사람은 예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음으로 이미 장사 되었다(롬6:4). 이것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이 말은 옛사람을 죽이려고 사는 신앙생활에 초점 맞추지 말라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옛 자아를 죽이고, 나를 고치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신앙생활하면 어떤 결과가 일어나는가? 패배감과 좌절감 밖에 올 수 밖에 없다.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다. 죽은 자임을 믿고 다른 소리를 듣지 않고 예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영적 전쟁이다. 예수님이 이미 하셨다. 예수님이 하신 것을 또 하려고 그러니까 불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예수님이 해 놓으셨다. 물론 실수한다. 넘어진다. 이때 깨닫고 감사하야 한다. 율법은 범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율법으로 우리를 보면 언제나 범죄가 드러난다는 말이다. 율법의 목적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해 예수의 필요성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율법을 통해 죄를 철저히 깨닫는 것은 복이다. 죄를 깨닫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했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5:20)라고 한 것이다. 율법이 없으면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산다. 자신이 최고인줄 알고 큰 소리 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법 없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다”는 말도 한다. 율법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살아서 그렇다.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7:9). 율법을 깨닫기 전에는 “내가 산다.”고 아우성들이다. 계명이 이를 때는 죄가 살아난다. 나는 법 없어도 살 수 있다는 자만심은 죽는다.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롬7:12). 그러나 율법에 머문다면 절망이다. 살아 보려고 할수록 절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 율법에 머물러 “나는 왜 이것 밖에 못할까”라는 식에 빠져 죄의식과 죄책감을 생각 밑바닥에 깔고 살면 절대 안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으셨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왔다 가셨음을 잊지 말라. 죄가 발견되면 은혜를 더 깨달아라. 우리의 힘으로 안 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셨고 십자가를 지셨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 크게 깨달지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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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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