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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수 총장] 밤은 어둡고 깊어만 가는데. . .
    세월이 참 빠르게 지나갑니다. 한 해를 시작한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가을을 맞고 있습니다. 한 해를 시작할 때마다 무언가 달라지겠지 하는 기대와 소망으로 시작하지만 실망과 후회로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하는 것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오늘날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이제는 새로운 기대와 소망을 가지는 것 자체가 사물을 잘못 보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갖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과 과학기술의 발달이 인류를 새로운 유토피아로 인도해 줄 것으로 기대하면서 진보 그 자체에 대한 신앙도 가졌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욱 방황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발달과 문명의 진보가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해 준 점도 많이 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인류 전체가 멸망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조성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인간은 스스로가 발전시킨 과학기술 앞에 벌벌 떨고 있는 무력한 모습을 보이며, 자기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현대인은 과학과 과학기술이라는 새로운 우상 앞에 노예가 되어 꼼짝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인간의 이러한 지식과 기술이 인간의 삶의 질과 가치를 고양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저급한 욕구 충족과 도덕과 윤리의 퇴폐적 생활로 끊임없이 인도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찍이 자연주의 철학자 루소(J.J. Rousseau)는 드죵의 현상 논문을 통해서 인간의 과학과 문화의 발전이 인간 사회를 도덕적으로 고양시키기보다는 오히려 타락하게 만든다고 주장하면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갈파하였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확실히 어두움을 향해서 계속해서 질주해 가고 있습니다. 청소년의 일탈 행동은 갈수록 폭력과 퇴폐성으로 얼룩지고 있고, 기성사회는 정신적인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언론을 통해서 보도되는 모든 사회적 현상들은 희망보다는 실망과 좌절감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도무지 소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시대상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날이 임박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언제 주의 날이 우리에게 임하도록 계획되어 있는지 말하지 않지만 주의 날에 관해서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날이 밤에 도적같이 임할 것이라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 진술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주의 날이 해가 떠 있는 낮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캄캄한 밤에 올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밤에 올 것이라고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고 있지만 그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님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영적으로 어두운 밤에 재림할 것이라는 사실을 바울은 밤에 임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아무리 과학의 빛이 찬란하게 빛난다고 할지라도 도덕적, 영적인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의 삶은 더욱 더 어두운 밤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점점 더해져 가는 어두움이 시야를 가리우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죄와 불의가 점점 더 깊어 가는 흑암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습니다. 주님은 영적인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가 밤 12시를 치기까지 기다리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빛들이 꺼지고 죄악이 극도로 관영할 때까지 인내하면서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의 저녁 시간즈음에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두움이 점점 더 깊어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알리는 시계가 밤 12시를 알리기까지 얼마 남아있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는 모든 장소들, 극장과 술집, 환락가들이 사람들로 가득 차 붐비고, 인간이 만든 조명들이 찬란하게 빛날 그 때에, 사람들이 자신들이 이룩한 과학 기술 문명의 발전을 스스로 찬양하면서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말하고 있을 바로 그 때에 주님은 홀연히 재림하실 것입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주의 날(DAY of the Lord)이 밤(Night)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 얼마나 놀라운 대조인가!! 하늘과 땅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위대한 날에, 어두움이 흑암을 뒤덮고 있을 그 때에 하나님은 “빛이 있어라!”고 다시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그 날에는 밤이 낮이 될 것입니다. 이제 이 날은 다시는 밤이 찾아오지 않는 영원한 낮이 될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다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뒤덮지 못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이 주의 날은 캄캄한 밤에 빛과 같이 오게 된다고 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빛은 어두운 모든 구석을 다 비추며, 어두운 구석에 감추어져 있던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드러나도록 만들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을 정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진솔한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나의 가정과 나의 마음의 모든 구석이 어두움이 없이 낮의 광명한 빛이 찬란하게 비치고 있는가? 우리가 악의 장막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아직도 이 악의 장막에 속하고 있지는 않는가? 언약의 물로 씻음 받기는 했지만 아직도 여전히 어두움의 자녀로 남아있지는 않는가? 밤은 어둡고 깊어만 가는데 우리 주님의 은혜의 빛이 나의 삶에 드리워져 있는 죄악의 어두움을 대항해 싸워서 그 어두움을 깨뜨리도록 살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화가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어두운 시대에 빛의 자녀들로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을 소원합니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에반겔리아 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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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8
  • [김성수 총장] 그리스도인 정치가들에게 바란다!
    경남기독신문 독자들 중 혹 기억하고 계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재임 당시에 ‘Again 1907 in Seoul - 서울에서 예루살렘까지’라는 기독청년집회에 참석하여 “서울을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서”를 낭독한 것이 언론에 기사화되어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청계천 복원과 함께 이명박 전 시장의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당시 서울시 교통체계개편에 따른 혼란과 함께 이 시장을 이중으로 아주 곤혹스럽게 만들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이 시장은 “흐르는 역사 속에서 서울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하심에 감사와 영광을 돌리면서,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거룩한 도시이며, 서울의 시민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서울의 교회와 기독인들은 수도 서울을 지키는 영적 파수꾼임을 선포하며, 서울의 회복과 부흥을 꿈꾸고 기도하는 서울 기독 청년들의 마음과 정성을 담아 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합니다”는 내용의 봉헌서를 ‘서울특별시장 이명박 장로 외 서울의 부흥을 꿈꾸며 기도하는 서울 기독 청년 일동’의 이름으로 낭독하였습니다. 이 내용이 〈오마이뉴스〉를 통해 보도되자 네티즌들의 비난이 봇물을 쳤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역시 규탄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이 시장의 사과를 요구하였고, 정치인들은 호기를 놓칠세라 무참한 정치적 일격을 가하였습니다. 당시에 유인태 의원은 “그나 저나 서울이 이제 하나님 것이 됐으니 수도를 옮기긴 옮겨야 겠어요”라고 정치적 폄하 발언을 하였고, 임채정 의원은 “사람 땅으로 옮겨야지요”라고 응답하였습니다. 배기선 의원은 “아니 자기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좋은데 왜 자기 것도 아닌 걸 바친다고 하느냐”고 비아냥거렸다. 급기야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도 이 시장의 발언이 “사려 깊지 못한 처사”라는 공식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건을 대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좀더 성숙한 신앙생활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램과 함께, 언론계와 정치계와 종교계를 망라한 우리 사회 전반이 말초적이고 지엽적인 것보다는 보다 더 본질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 의연하고 성숙한 사회가 될 수 없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사실 당시 기도집회는 도덕과 윤리가 붕괴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이 사회가 복음으로 회복되기를 간구하면서 기독청년들로서의 책임을 통감하며 회개하는 순수한 기도모임이었습니다. 이 집회에서 이명박 당시 서울 시장은 행사 주최측이 작성한 내용을 주최측의 요구로 그대로 읽었을 뿐입니다. 집회에 참석하여 ‘서울 봉헌서’의 내용을 처음 본 이 시장이 그대로 낭독하겠다고 동의한 것도 집회 자체가 정치적인 모임이 아니라 기독청년들의 순수한 기도 모임임을 알았기 때문이며, 동시에 봉헌서의 내용도 정치적 의미가 담긴 것이 아니라 서울이라는 도시의 가치관과 문화가 도덕과 윤리적 가치 차원에서 바뀌어야 한다는 공통의 바램을 표현한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도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한다”는 표현도 서울 시장으로서 자신이 주체가 되어 서울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표현으로 해석해서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하지말고, 서울을 기독교적 가치관에 입각하여 깨끗하고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드는데 진력해 달라는 기독청년들의 마음을 서울 시장에게 전달하는 지극히 종교적이며 수사학적인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사건을 다시금 회고해 보면서 진솔한 자기 성찰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기도하는 모임이나 연합 집회를 정치화하거나 이벤트화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과 이웃의 죄와 허물로 인해 애통하며 사죄의 은총을 구하는 제사장의 모습과, 지도자들의 죄를 지적하며 공의를 요구하는 선지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종교적 행사를 통해 권력자들을 위무하고 그들의 잘못에 면죄부를 부여해주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모습이 거침없이 나타나고 있음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젊은이들의 순수한 기도회에 참석하여 “서울시 봉헌사”를 낭독한 이명박 장로가 혹시라도 당시 행사를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한 홍보의 장으로 활용하려는 의도를 가졌다고 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오산이었을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한 정치인이 단순히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표를 몰아줄 정도로 유치한 수준에 머물어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 정치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조찬기도회 개최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에서 자신의 신앙을 어떻게 표출할 것인가하는 고민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또한 건전한 사회 질서와 건강한 사회라는 한계 내에서 다른 사람들의 신념과 종교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리차드 마우(Richard Mouw)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무례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성과 세상의 도성이 지상에서 자유롭게 공존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월터스톨프(Wolterstorff)의 표현대로 모든 것을 기독교화해야 하는 ‘성례적 사회’(sacral society) 또는 중립적인 삶에 종교를 추가하는 ‘중립적 사회’(neutral society)가 아니라, 종교적으로 헌신된 다양한 집단과 기관이 공평하게 취급을 받는 ‘다원주의적 사회’(pluralistic society)를 추구해야 합니다. 당시 서울 시장 이명박 장로의 서울시 봉헌 발언이 정치판에서 필요이상으로 폄하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내년 3월 대선을 앞두고 대선후보들은 물론 가족들의 일거수일투족까지 우리 모두의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다.이 중대한 시점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 세계관의 틀을 통해서 후보들의 인물됨과 자질을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온갖 종류의 왜곡, 거짓 선동, 음모에 현혹되지 않아야 합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인 정치가들도 이제는 자신의 정치적 역량을 통해서 자신이 믿고 고백하는 신앙을 제도교회의 문턱을 넘어 공의와 평강을 추구하는 합리적인 정책으로 구현해내어 국민들로부터 좋은 평가와 지지를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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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11
  • [이정희 목사] 장례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
    I. 서언(序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장 절실한 의문이요 관심사는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란 대 명제일 것이다. 이에 우리 기독교인의 장례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고자 했으나, 이보다 우선 되어야 될 것은 장례 용어에 대한 역사와 그 문화적인 배경이 먼저 일 것 같았다. 이에 그동안 장례문화에 대한 동서양과 성경역사적인 고찰이 먼저라는 관점에서 계속 이에 대해서 논해 오고 있다. 이번 호부터는 성경 속에 나오는 장묘문화에 대한 역사를 논하면서 기독교적인 장묘문화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를 논하고자 한다. 그러나 앞에서 논한 바 있지만, 아쉽게도 이에 대한 기독교적 역사적 고증이나 신학적 연구와 분명한 장묘에 관한 구체적 예식에 대한 선행연구가 별로 많지 않다. 필자도 실천신학을 전공했고 장례용어에 대한 기고와 강의도 많이 했지만, 아직은 역부족이다. 이렇게 많지 않은 연구 속에서 구약학 교수로서 장로회 신학대학 총장을 역임했으며, 진해교회 출신인 김중은 교수의‘기독교적 장묘문화에 대한 고찰’은 정말 반가웠다. 이에 김중은 교수가 연구한 내용을 축약하고 여기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3~4회 정도 피력하고자 한다. II. 김중은 교수의 성경적 장묘문화의 서론 신구약 성경 본문에는 장묘문화에 관해 상세하고 체계적인 정보가 없기 때문에, 여러 시대의 서로 다른 역사적 배경에서 주어지는 단편적인 정보들로써 우리는 만족해야 한다. 한편 지난 19세기말부터 비교적 활발하게 진행되어온 성서 고고학 발굴의 결과로 성경의 역사현장인 가나안 지역과 고대 중동지역에서 수많은 무덤들이 발굴된 것이 사실이다. 그 결과는 대부분의 경우 이스라엘인들의 무덤과 이방인들의 무덤이 확연히 구별될 만큼 그 차이가 드러나지 않았다. 이 지역의 무덤, 유해나 유골의 형태, 부장품들을 보아서 그 민족이나 종교적 특성을 가려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지금까지 고고학적인 지식만으로는 이스라엘 장묘문화의 특징을 확인하기가 어렵다. 아마도 성경의 이스라엘은 자신의 야훼 유일신 신앙과 큰 갈등 없이 가 시대마다 고대 가나안과 그 인근지역에서 행해지던 장묘문화에 동참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성경본문이 단편적으로 알려주는 정보에서도 알 수 있는바 나름대로 신앙생활과 연관하여 어느 정도는 자신의 장묘문화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예컨대, 신 14:1 이하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이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위의 털을 밀지 말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또 신약시대에는 “유대인의 장례법”이 있었고, 예수의 시신도 이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장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요 19:40 참조; “... according to the burial custom of the Jews", NRSV). 유대교에서는 역사적으로 오늘날까지 나름대로의 장묘문화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이 글에서는 신구약 성경본문에 나타나는 장묘문화를 중심으로 살표보는 데에 국한하기로 한다. 그러나 먼저 성경의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 이스라엘이 각 시대에 보편적으로 공유했다고 생각되는 장묘문화에 관해 성서 고고학적인 견해를 요약해서 살펴본 후, 성경본문에 나타나는 장례문화의 내용을 간추려 정리하고자 한다. III. 김중은 교수의 성경시대의 보편적 장묘문화 고찰 전통 민속신앙과 근대로 오면서 유교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한국의 상례(喪禮)에서는 상당히 복잡한 장묘문화의 방식과 절차를 볼 수 있다: 1)초종(初終) 2)습(襲): 소렴(小殮)과 대렴(大斂) 3)성복(成服) 4)조석전(朝夕奠)과 상식(上食) 5)치장(治葬)과 천구(遷柩) 6) 발인(發靷)과 반곡(反哭) 등 여기에 죽은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다양한 제사절차까지 포함된다. 그러나 위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의 신구약 각 시대에 이러한 체계적이고 일관된 장례법은 재구성할 수 없다. 다만 고고학적인 시대구분에 따라 각 시대에 나타나는 장묘문화를 이스라엘도 어느 정도 보편적으로 공유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1. 팔레스틴에서 확인되는 가장 오래된 장례는 중기 구석기 시대(주전 15,000년경 이전)의 것으로 갈멜산의 지하 동혈들에서 발견된다. 시신을 지하 구덩이에 넣고 그위에 돌들을 얹어 놓는 형식이며, 시신은 무릎과 양손이 가슴에 닿도록 웅크린 자세이다. 2. 중석기 시대(주전 15,000-8,300 년경) 에는 역시 지하 동혈들을 사용하였고, 시신은 옆으로 눞여 웅크린 자세가 나타나며, 두개골만 매장한 경우도 있다. 매장은 개인적 또는 집단적으로 이루어지며, 피장자가 여성일 경우는 조개껍질, 뼈, 돌로 가공된 장신구들이 함께 드러난다. 무덤위에는 돌을 세워 표시를 해 두었다. VI. 중략하고 맺는 말 김중은 교수의 연구 발표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갈 것이지만, 지면 관계상 이번 호에서는 여기에서 중략한다. 여기까지 볼 수 있는 것은 본인이 저명한 구약 학자이지만, 여기에 대한 전문적 연구가 아직은 미흡하다는 솔직한 지적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이에 대한 계속적인 연구와 노력으로 진정한 우리 기독교적인 장묘문화를 이루어 나가야 되겠다는 많은 이들의 학구적인 사명감이 있다면 이는 분명히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이정희 목사(진해영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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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07
  • [이상규 교수] 코로나 환경에서의 국가와 교회
    1. 시작하면서 2019년 11월 중국 우한(武汉)에서 발원한 바이러스(COVID19)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단지 질병의 문제이거나 집단감염 혹은 역병에 의한 치사(致死)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영향을 주고 있다. 개인은 물론이지만 국가 경제에 어려움을 더해 주고 있고, 사회적 불안이 조장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함께 어울려 사는 집단 사회구조를 비대면사회로 만들어 가고, 비대면적 구조를 새로운 정상으로 받아드리는 이른바 뉴 노멀 사회를 만들어 가고 있다. 이런 비대면 구조는 종교생활에도 영향을 주고 있어 정기적인 집회나 종교 활동이 제약을 받고 있다. 특히 모이기를 힘썼던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모범이나(행2:46), “모이기를 힘쓰라”(히10:25)는 권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모이기를 자제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코로나19가 가져온 보다 심각한 문제는, 방역 혹은 집단 감염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개인의 자유가 침해되고 있고 국가의 공권력이 과도하게 행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교회 집회에 대해서도 행정명령이라는 이름으로 집회를 제한하거나 금지하고 있다. 이런 오늘의 현실에서 국가권력 기관이 교회 집회에 대해 간섭하거나 집회를 제한할 수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 되고 있다. 국가, 혹은 국가권력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는 현실이 되었다. 국가는 기원에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시민의 안녕과 복지를 해결해 주는 주체였는가 하면, 과도한 권력 행사를 통한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제한하거나 폭력의 주체이기도 했다. 일제하에서의 조선총독부나 지금의 북한 정권이 이에 해당한다. 이는 국가라는 권위에 의한 폭력이었다. 이런 현실에서, 이 글에서는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에 대하여 고찰하고 국가 권력은 종교활동을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 잇는가에 대해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역사적’이란 서구 기독교사회에서의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 정교분리 혹은 저항권 사상 등에 대해 교회사적인 고찰을 의미한다. 2. 문제점 제기(Problem stated): 정부기관의 집회 제한 및 대면예배 금지 조치 코로나가 확산되자 대한의사협회는 2020년 1월 26일, 중국으로부터의 감염원 차단 제안을 포함한 대정부 권고안을 발표한 바 있으나 중국인의 입국이 금지되지 않았고, 다른 요인들과 함께 확진자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2월 중순에는 이단집단인 신천지 신도들을 통해 확진자가 크게 증가되자 사회적 거리 두기가 강조되고 각종 집회에 대해서도 자제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특히 기독교회의 집회 자제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이재명 경기도 지사는 2020년 3월 17일, 일부교회에 대하여 주일예배 밀접집회 제한 행정명령을 발동했고, 또 행정명령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80조 제7호에 따라 3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할 방침이라고 했다. 박원순 서울시장도 비슷한 조치를 취했다. 그러자 대통령은 종교집회에 대해 두 지방자치단체장이 취하고 있는 조치를 적극 지지한다고 했다. 그런가 하면 정세균 총리는 3월 21일 대국민담회를 통해 집단감염 위험이 높은 종교시설 체육시설 유흥시설은 보름동안 운영을 중단해 줄 것을 강력히 권고하고, 준수 사항을 지키지 않을 경우 행정 명령을 발동하여 집회를 금지시키겠다고 했다. 총리 담화 후 첫 주일인 3월 22일부터 경찰이 동원되었는데, 전국경찰서장 255명 전원을 출근시켜 경찰관과 지자체 공무원들이 교회를 해당지역 방문하고 권고 준수 여부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이런 조치에 대해 서울과 경기도 일부 교회는 4개 항의 응대 메뉴얼을 만들어 대처했다고 한다. 교회가 방역 지침을 준수하고 바이러스 확산에 대처하려는 정부의 노력에 대해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정부의 이런 조치는 국가권력 기구가 종교 집회에 강제권을 행사하는 것은 정당한 일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여러 밀착 집회 집단 시설 중 유독 기독교교회에 대해서만 선택적으로 강제한 일은 헌법이 보장한 종교자유에 대한 침해라는 지적이 제기되는 시작이 되었다. 코로나 환경이 지속되자 국가기고나의 교회에 대한 제제조치가 보다 심화되었다. 2020년 7월 8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 참석한 정세균 총리는 사찰이나 성당 등과는 달리 기독교회에 대해서만 핵심방역 수칙을 의무화한다고 발표하고, 7월 10일부터 “교회의 정규예배 이외의 각종 모임과 행사, 식사제공이 금지되고 출입명부 관리도 의무화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예배 시에 찬송가와 통성기도를 지양하라고 했다. 이를 위반할 경우 3백만 원 이하의 벌금과 집합금지 조치가 시행될 수 있다고 했다. 교회 밖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식사하고 담소를 나누는 현실에서 교회에서 교인끼리의 식사는 금지하는 것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형평성을 잃은 조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초치가 기독교회에 대한 탄압이라는 비난이 일자 2주 후인 7월 22일 모인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국무총리는 24일부터 교회 방역강화 조치를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지방자치단체별 행정조치가 가능하다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기도 구리시는 7월 13일 시장 명의로 종교시설 관리자 및 이용자가 방역수칙을 위반할 시 신고자에게 포상금을 지급하겠다는 공문을 보낸 일이 있다. 또 14일에는 순천 울산 등 다른 지자체도 포상제도, 신고제도 도입을 발표했다. 그런가 하면 전국초중고 가정통신문에 ‘코로나 예방을 위한 방역 강화 안내’를 하면서 교회만 특칭하여 집단감염집단으로 오인하도록 만들고 잠재적 가해자로 간주했다. 이 당시의 한국의 전체 확진자 1만3천293명(7월 9일자) 가운데 교회 관련 확진자는 310명으로 2.3%에 지나지 않았고, 전체 기독교 인구 970만 명에 비하면 극히 소수에 불과했으나 교회만을 지목해 포상금까지 주겠다는 발상은 교회에 대한 불만과 불신을 야기하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2020년 8월 휴가철 이후 코로나 확진자가 증가하자 그 증가가 교회의 집회와의 관련성에 대한 과학적 검토도 없이 정부는 8월 19일 0시를 기해 서울과 수도권 모든 교회는 비대면 예배만 드리도록 하면서 각종 소모임을 전면 금지했다. 종교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를 제한한 것이다. 이에, ‘정부의 교회 정규예배 이외 행사 금지를 취소해 달라’는 취지의 국민청원을 올렸고, 총 42만 7470명이 서명했으나 청와대는 “국민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불가피하게 하는 것”이라며 철회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와중에서 8월 23일 주일, 경남 함양군 서상면의 두 교회에서는 주일 예배에서 기도하거나 설교하는 중에 공무원이 찾아와 교회 비대면 예배전환 행정명령서를 전달하고 서명을 요구하는 등 예배를 방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8월 27일에는 청와대에서 16인의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문재인 대통령과의 간담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장인 김태영 목사는 정부가 교회나 사찰, 성당 같은 종교단체를 영업장이나 사업장 취급을 하지 말아줄 것을 요청하고 종교의 자유를 너무 싶게 제한하거나 예배 중단을 명령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9월 1일에는 전 세계 57개국 266개 인권단체들이 “한국 정부가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교회를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며 문 대통령 앞으로 항의 서한을 보냈다. 이들 인권단체들은 성명에서 “최근 수개월 동안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 정부는 코로나19 확산의 원인에 대한 책임을 교회에만 돌리고 있다.”고 항의했다. 그 동안 교회당 크기와 상관없이 20명 미만만 예배당 입장이 허용되어 왔으나, 9월 20일부터 300석 이상 예배실을 보유한 경우 최대 50명까지 현장 예배참석이 가능하도록 완화되었다. 그러나 비대면 예배 해제 조치는 허락하지 않았다. 300명 미만 좌석 보유교회는 대면 예배 허용 인원은 여전히 20명 미만으로 제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은 9월 21일 발표한 논평에서, “정부는 코로나 방역 실패와 재 확산 (책임)을 방역에 협력하는 한국교회에 전가하지 말라”며 “비대면 예배를 강제한 정부의 조치는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교회에 대한 정부의 각종 규제는 코로나 바이러스 출현 1년 6개월이 지난 현제까지 계속되고 있고, 한국교회는 종교행위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현실이 국가권력의 신교행위에 대한 제한이 정당한가에 대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런 질문에 대해 답해보고자 한다. 3. 국가와 교회: 국가기관의 종교 집회 제한은 정당한가? 그렇다면 국가기관이 종교의 자유에 속하는 예배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 있는가? 이 점을 교회사를 참고하여 검토하되, 교회와 국가 간의 양자 관계를 통해서, 그리고 정교분리론의 관점에서, 마지막으로 저항권의 관점에서 검토해 보고자 한다. 1) 국가와 교회의 관계 교회와 국가, 혹은 국가와 교회 간의 문제는 오랜 역사를 지닌 난해한 문제였다. 지난 2천년간 세속권(Regnum)과 교황권(Sacerdotium)은 타협과 제휴, 갈등과 대립을 겪으면서 고심했고 결과적으로 네 가지 형태의 교회-국가 간의 관계를 보여주었다. 첫째는 국가와 교회의 통합론(unity)인데, 국가와 교회의 경계가 허물어진 속화된 크리스텐덤(christendom)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형태는 4세기 이후의 국가와 교회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교회가 국가의 상호 결합되어 있어 교회의 정체성이 분명하지 못했다. 이런 형태를 강력하게 반대한 그룹이 16세기 재세례파였다. 이런 형태는 교회를 속화시키고 참된 교회가 되지 못하게 하는 형태인 동시에 국가도 본래의 신적 기원에서 이탈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둘째는 교회와 국가의 배타적 분리론(total separation)인데, 교회와 국가의 완전한 분리를 주장하는 입장이다. 첫 번째의 경우와 정반대 입장인데, 초기 기독교회 혹은 16세기 재세례파의 입장이었다. 세속정부와 교회는 별개의 기원을 가지며, 세속정부가 영적인 일에, 반대로 교회가 세속적인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국가 정치에 대한 교회의 무관심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국가가 교회 문제에 개입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것은 국가 정치에 대한 교회의 무관심을 의미하며, 정치적 문제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셋째는 교회우선주의 혹은 교회 지상주의(clericalism)인데, 이것은 국가를 교회의 일부로 보고 국가에 대한 교회의 우위를 주장한다. 즉 교회가 국가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서 이를 교황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것이 중세교회의 입장이었고, 로마 가톨릭의 견해였다. 예수께서 첫 교황이라고 간주하는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셨음으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은 영적인 영역만이 아니라 세속 영역에서도 통치권이 주어졌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교회가 시민사회에서도 권위(civil authority)를 행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넷째는 국가지상주의(erastianism)인데, 교회를 국가의 일부로 보고 국가가 교회를 지배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를 에라스티안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스위스의 철학자 에라스투스(Thomas Erastus, 1524-1583)의 견해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은 세속 황제가 기독교의 수장보다 상위의 권위를 가지므로 종교문제에 대해서도 국가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교황주의(皇帝敎皇主義, caesaropapism)와 같은 입장이다. 앞의 두 상반된 입장은 교회-국가 간의 거듭된 권력욕에 노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적인 제도가 아니라는 점이 인정되어 왔다. 이것은 교회에 대한 국가의 우위를 주장하며, 국가가 교회 문제에 개입하거나 간섭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영국교회(성공회)가 이런 입장을 따랐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의 4가지 유형은 국가와 교회 간의 이상적인 관계로 볼 수 없었음으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국가와 교회에 대한 바른 관계를 규정하려고 힘썼는데, 그것은 교회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지만 국가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라고 보았다. 그 결과 개혁자들은 각기 자신의 교회-국가관을 피력했는데, 루터나 츠빙글리 그리고 칼빈 간에 작은 차이가 있지만 다 같이 인정하는 바는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교회와 국가는 하나님이 내신 기관이지만 각기 다른 기능과 역할을 감당하는 신적 기관이라는 점이었다. 둘째, 국가도 하나님이 내신 선한 기관이며, 국가 기관의 위정자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대리자로 보아 하나님이 주신 직무를 수행해야 하고, 백성들은 순복해야 한다는 점, 셋째는 국가기관의 사명 혹은 역할을 규정했는데, 국가는 참된 종교와 종교생활을 공적으로 보존하게 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 좀 더 부연하면, 루터는 두 왕국론을 말하면서 두 기관의 기능과 목적을 지나치게 구분하여 오른손 왕국은 오직 그리스도인들만 관련되고, 왼손 왕국은 오직 불신자들에게만 관련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두 왕국의 기능적 차이를 말한 것이다. 루터는 왼쪽 왕국, 곧 국가는 평화를 유지하고 죄를 벌하고 악인을 견제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보았다. 칼빈은 루터와 마찬가지로 ‘두 왕국’(duplex... regimen) 개념에 근거하여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를 이해했는데, 영적인 정부인 교회는 물론이지만 세속적인 정부인 국가도 하나님이 세우셨다고 보았다. 하나님이 세우신 세속적 정부는 두 가지 기능을 지니는데, 첫째는 참된 종교를 보호하고 하나님의 의를 증진 시키는 일이며, 둘째는 백성의 복지를 도모하고 증진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칼빈은 이렇게 말한다. “시민정부의 목적은 우리가 사람들 가운데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께 드리는 외적인 예배를 지원하고 보호하며 경건에 대한 건전한 교리와 교회의 위치를 변호하며 우리의 삶을 사람들의 사회에 적응시키며, 우리의 시민적 관습을 시민적 의에 따라서 형성하며, 우리들 서로 간에 화목하게 하며, 공공의 화평과 평안을 육성하는 데 있다” 즉 정부는 하나님에 대한 외적인 예배를 소중히 여기고 보호해 주며 경건한 교리와 교회를 방어하고 ... 평화와 안정을 진작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정부의 기능은 “참된 종교를 공적으로 보존케 하며, 인간성이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인식이 17세기 이후 근대적 의미의 국가-교회 간의 관계, 곧 국가의 교회 지배권을 인정하지 않는 근대 사회개념을 형성하게 되었고,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종교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폭넓게 법제화 되었다. 종교의 자유는 시민이 권리(Bürgerrecht)이기 전에 인간의 권리(Menschenrecht)로 간주되었고, 종교의 자유라고 말할 때 이 말은 두 가지를 포괄하는데, 신앙의 자유(Glaubensfreiheit)와 종교행위의 자유(Religionsausübungsfreiheit)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신앙의 자유’란 구체적으로 어떤 종교를 신봉하거나 그 종교를 변경하거나 모든 종교를 신봉하지 않을 자유를 포함하며, 자신의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하거나 자기의 신앙에 대하여 침묵할 자유를 포함한다. 그리고 ‘종교행위의 자유’란 종교적 행사의 자유, 종교적 집회, 결사의 자유, 종교교육의 자유, 전도 혹은 선교의 자유 등으로 세분화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독일의 법학자 콘라드 헤세(Konrad Hesse, 1919-2005)는 신앙의 자유, 예배의 자유, 종교적 결사의 자유를 종교적 자유의 본질적 요소라고 말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개혁교회 전통과 서구사회의 역사에서 볼 때, 국가권력이 신교(信敎)의 자유나 신앙행위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금지하는 것은 정당하다 할 수 없다. 교회의 예배나 집회는 교회의 권세에 속한 영역이고, 신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은 국가의 권세에 속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리는 원칙에 따라 예배 모임에 대한 국가의 명령에 대해서는 복종할 의무가 없다. 그런데 국가의 권세에 속한 국민의 생명, 건강 보호의 의무와 교회의 자율권이 충돌할 경우는 어떻게 할 것이냐의 문제가 대두된다. 이런 경우 교회의 권세가 우선적으로 적용되어 원칙적으로 국가가 규제할 수 없다. 다만 사후적으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매우 제한적인 국가의 개입은 인정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은 국가와 가정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교육 제도를 수립하고 학교를 세우는 일은 국가의 의무라고 할 수 있지만, 국가는 부모의 자녀양육이나 가정사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가정이라는 영역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다만 아동 학대 등과 같은 특별한 사정이 발생한 경우에 한하여 국가가 개입할 수 있다. 개인 가정의 일이나 교회의 일에 대한 국가 권력의 과도한 개입은 사적 자유 혹은 종교자유에 대한 침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의 예배나 집회에 대해서는 국가는 규제할 수 없으며 교회가 자율적으로 결정할 문제이다. 다만 교회에서 공공의 이익이나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건이 발생한 경우에는 필요한 최소한도의 개입은 인정된다고 할 수 있다. 또 교회는 자신의 관할 영역인 예배 모임의 시행 여부를 국가의 판단에 맡겨서는 안 되며 스스로 합당하게 판단하여 이를 결정하고 실행하여야 한다. 현실적으로 국가권력기관은 현장 예배의 가치에 대한 신학적 판단을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예배 모임의 실행 여부를 결정할 자리에 있지 않다. 국가권력은 교회와 관련된 고유의 가치에 대해 결정할 권세를 위임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권력이 종교문제에 개입하거나 침해하는 사례가 있어 17세기 이후 근대적 의미의 국가-종교(교회) 관의 관계를 규정했는데, 그것이 정교분리론이었다. 2) 정교분리 유럽인의 이민으로 이루어진 미국이라는 나라는 처음부터 정교분리론을 받아드렸다. 정교분리(政敎分離)라는 말은 미국 헌법이 만들어질 때 ‘국교’를 부인하는데서 시작되었지만 이 개념의 연원은 17세기 잉글랜드의 청교도적 배경에서 시원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국가권력으로부터의 종교의 자유문제는 16세기 종교개혁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오늘 우리가 말하는 ‘정교분리’는 사실상 잉글랜드의 에라스티안적인 제도에 대한 반발,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의 언약도들(Covenanters)의 경험에서 기원하였다고 할 수 있다. 청교도 운동은 엘리자베스(Elizabeth I, 1533-1603) 치하에서 시작된 신앙 운동으로서, 영국 교회(Ecclesia Anglicana, 聖公會를 의미함)에 여전히 남아 있는 로마 가톨릭의 잔재를 제거하고 명실상부한 개혁을 추진했으나 심각한 탄압을 받았다. 교회에 대한 국가 권력의 우위를 인정하는 에라스티안적인 제도 하에서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누리지 못한 것이다. 특히 분리주의적 청교도들은 더욱 그러했다. 종교 혹은 신앙 문제에 대한 국가 권력의 과도한 침해를 경험했던 이들이 새로운 이주지 북미대륙에서 정교분리를 말하게 된 것이다. 17세기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난 ‘언약도’ 운동 또한 잉글랜드의 청교도들과 동일하게 국가권력의 과도한 종교 자유의 침해를 경험했다.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가 1603년 사망하자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James VI)는 제임스 1세라는 이름으로 잉글랜드의 왕이 되는데, 장로교적 배경에서 지낸 그가 잉글랜드의 국교회 제도를 선호하여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를 국교회 제도로 전환하기 위해 장로교회를 탄압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신앙 운동이 언약도들이었다. 제임스 1세(1603-1625)에 이어 그의 아들 찰스 1세(1625-1649),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1660-1685), 찰스 2세의 동생 제임스 2세(1685-1688)로 이어지는 긴 기간 동안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유린당하고, 예배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탄압받았던 경험이 바탕이 되어 새로운 대륙에서의 정교분리를 선언하게 된 것이다. 정교분리론은 역사적 추이에서 볼 때 근본적으로 국가 권력의 종교 혹은 신앙 문제 개입이나 간섭에 대한 거부에서 출발했다. 그래서 유럽인의 이민으로 이루어진 미국에서는 처음부터 정교분리를 중시했고, 새로운 정착지에서 정교분리를 통해 신교(信敎)의 자유를 누리고자 했다. 그 첫 사례가 1647년 5월 포츠머쓰에 모인 4개 처 정착지 대표들이 모여 합의한 헌법이었다. 이것이 로드아일랜드라는 단일 식민지의 기초를 놓게 되는데, 여기서 두 가지 중요한 사항을 포함시켰다, 그 첫째가 양심의 자유였고, 둘째가 종교와 정치의 분리(the separation of religion and politics)였다. 침례파가 다수였던 이곳에서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동시에 다른 종파에 대해서도 관용해야 한다는 결정이었다. 또 세속 권력의 종교 문제에 대한 간섭을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런 사상은 로저 윌리암스(Roger Williams, 1603-1683)의 영향인데, 그는 교회와 국가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권위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엄격히 분리되어야 하며, 상호지배나 간섭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국가는 국민이 위임해 준 범위 안에서 지위, 명예, 위엄을 지니며 민간업무를 담당하지만, 종교와 관련된 업무에서는 교회가 국가보다 우위에 있다고 보아 신교의 자유와 국가권력의 교회 간섭을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유럽인의 뉴잉글랜드 이민과 정착으로부터 약 150여 년이 지난 1776년 7월, 13개주의 식민지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이때 독립선언문을 기초했던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은 정교분리를 3가지 측면에서 이해했다. 첫째, 세속 정부는 교회를 탄압할 수 없다. 둘째, 세속 정부는 교회에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 셋째, 세속 정부의 수장은 교회의 수장이 될 수 없다. 제퍼슨은 신앙의 완전한 자유와 함께 국가교회 형태를 거부한 것이다. 그동안 ‘국가연합’의 형태로 있었으나, 1789년에는 ‘연합헌장’(Articles of Confederation)을 수정한 헌법을 비준하고 연방 정부를 수립했다. 헌법 본문에서 미흡하게 반영된 사항은 수정조항으로 보충되었는데, 1791년 권리장전(Bill of Rights)이 헌법에 추가되었고, 또 10개의 수정 조항이 추가되었다. 그런데 1791년 12월 15일 비준된 미국의 수정헌법 제1조(First Amendment)가 정치와 종교에 대한 사항을 규정했다. “연방 의회는 어떤 종교를 국교로 정하거나 종교의 자유로운 시행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으며 언론, 출판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국민들이 평화적으로 집회할 권리와 불만의 시정을 정부에 청원할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을 제정할 수 없다.” 우리가 말하는 ‘정교분리론’은 바로 여기서 출발했는데, 핵심은 두 가지이다. 국교를 정하거나 종교 활동의 자유를 금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법을 제정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못 박고 있다. 다시 말하면 국가 권력이 종교 문제, 곧 신교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런 법률을 제정하는 것 자체를 금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수정헌법 제1조의 정신이다. 미국에서 말하는 국교 금지는 어떤 특정 신앙이나 교파가 아니라, 여러 종교나 교파가 균등한 신앙의 자유를 향유하게 한다는 것이고, 성도나 교회는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 아니라, 국가 권력이 종교문제에 대해 간섭하거나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말한다. 이런 법률적 장치는 앞에서 지적했지만, 유럽에서 국가권력의 신앙 자유 제한이나 교회 간섭에 대한 경험적 폐해에서 나온 금지 규정이었다. 종교의 자유라고 할 때 여기에는 두 가지가 포함되는데, ‘신앙(信敎)의 자유’와 ‘종교 행위의 자유’가 그것이다. 종교 행위의 자유라고 할 때 그것이 집회의 자유, 예배의 자유, 종교 행사의 자유, 종교 교육의 자유, 소모임의 자유 등을 포함한다. 종교적 입장에서 행하는 모든 행위는 원칙적으로 종교의 자유로 보장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점을 고려해 볼 때 국가권력이 집회를 금지하거나 예배를 제한하거나 제재하는 것은 17세기 이후 근대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수용되어 왔던 정교분리의 원칙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종교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고 할 수 있다. 3) 저항권 사상 국가권력이 공권력을 동원하여 성경의 가르침에 명백하게 위반되는 요구나 강요에 대해서는 저항할 수 있다는 이른바 저항권(Right of resistance) 사상은 중세 유럽 사회의 법체계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사실상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을 통해 제시되어 근대적인 개념으로 전개되어 왔다. 이와 관련하여 3가지 성경 본문이 주로 인용되어 왔는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22:21)는 정치와 종교의 경계를,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순종하라.”(롬13:1)는 하나님이 세우신 위정자들에게 복종하라는 가르침으로,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백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될 경우에는 저항할 수밖에 없다는 가르침으로 이해해 왔다. 루터는 하나님의 왼손 왕국인 세속권에 대한 복종의 의무를 강조했지만 무조건적인 복종을 가르친 것은 아니었다. 세속권은 영생의 법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부가 신앙에 반하는 요구를 할 경우 저항할 수 있다는 점을 말했고, 루터파의 아우구스부르크신앙고백서 16조의 말미에도 “사람에게 복종하기보다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기” 때문에 관헌에 대한 복종은 무조건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저항권 이론은 칼빈에게 와서 보다 선명하게 제시되었는데, 그의 저항권 이론은 『기독교강요』 Ⅳ권 20장 31-32항에 기술되어 있다. 여기서 칼빈은 국가 권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위탁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권력자가 하나님께 반역할 경우에 한하여 저항하는 것은 정당한 일일 뿐만 아니라 의무라고 지적한다. 위정자에 대한 복종보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저항, 그 자체가 권력화(權力化)되기 때문에, 저항 역시 하나님으로부터의 위탁에 근거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칼빈이 죽은 후 프랑스 개혁파 교회에서는 보다 적극적인 저항권 사상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논리를 주장하는 이들을 ‘모나르코마키’(monarchomachi), 곧 ‘군주와 싸우는 자’라고 불렀는데 모두가 프로테스탄트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대표적인 인물은 칼빈파 인물들이었다. 프랑스 개혁파의 정치적 견해가 당시 이러한 형태로 표출된 것이다. 이것은 칼빈의 저항권 사상이 변화된 정치적 상황 가운데서 새롭게 전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의 저항권 이론을 보다 적극적으로 전개한 이가 칼빈의 후계자였던 베자(Theodor de Beze, 1519-1605)였다. 베자는 『위정자의 신민에 대한 권리와, 시민의 위정자에 대한 의무에 관하여』에서 부당한 국가 권력에 대한 저항은 정당한 것으로 주장했다. 이 책은 바돌로메 날의 대학살(1572)을 경험한 이후 저술된 책인데, 이 책이 가져 올 충격을 고려하여 익명으로 출판한 것이다. 베자는 이 책에서 어디까지 복종하고 어디서 저항할 것인가는 각자 그리스도인의 ‘양심’이란 저울에 달아 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후 프랑스에서 저항권 사상은 현저한 진전을 보이는데, 스코틀랜드인 조지 부케년(J. Bucanan), 칼빈의 문하생인 존 낙스(John Knox), 모나르코마키(Monarchomachi)들과 교섭이 있었던 스코틀랜드인으로 프랑스에서 교사로도 활동했던 존 메이져(John Major 1470-1550)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렇게 볼 때 칼빈은 저항권 사상의 원류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저항권 사상은 스코틀랜드를 거쳐 장로교 전통에서 수용되는데, 그것은 17세기 스코틀랜드의 언약도들(Covenanters)의 경험이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장로교 신앙을 지키려는 이들이 국가 권력으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고 신교(信敎)의 자유를 유린당했을 때 국가권력에 대한 저항의 정당성을 숙고한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상에서 서구 교회에서 오랜 기간 동안 전개되어 온 저항권 이론을 소개했는데, 이는 근대사회에서 널리 수용되었다. 국가권력이 부당하게 종교의 자유, 신교의 자유, 혹은 예배의 자유를 침해할 경우 저항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한 한국교회의 인식이 매우 부족한 것으로 판단된다. 4) 한국에서의 정교분리론 미국연방헌법은 현행 성문법 중 가장 역사가 오랜 문서로, 정교분리 조항 등은 이후 세계적으로 일반화되어 갔다. 18세기 말부터 북미에서부터 유럽 국가들도 정교분리를 법제화하기 시작했고, 20세기에는 상당수 비서구 국가들도 이런 흐름에 동참했다. 우리나라도 1948년 7월 17일 공포된 제헌 헌법에서부터 정교분리가 명문화 되었다. 우리나라 헌법 제20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하여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 제2항은 “국교는 인정되지 않으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 된다”라고 하여 국교의 부정과 정교분리를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정교분리론은 기독교 복음과 더불어 한국에 소개되었다. 북미 출신 선교사들은, 기독교를 외세에 의한 침략세력으로 규정하고 선교사들의 활동을 의심하던 조선 정부에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선교의 자유를 누리고자 했다. 조선의 정치문제에는 관여하지 않고 오직 복음만 전하겠다는 점에서 정교분리를 제시한 것이다. 복음전파를 위한 전략이라고 좋게 해석할 수 있지만, 이것은 정교분리라는 의미를 국가의 입장에서 받아드려 정부에 순응하겠다고 자처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 정교분리의 근본정신은 그 이후에도 곡해되었다. 일제치하에서 조선총독부는 정교분리론을 앞세워 선교사들의 활동을 제한하고자 했다. 정교분리의 근본정신은 국가권력의 교회 간섭을 금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정치참여를 금지한 것으로 호도하여 외국 선교사들이나 조선인들의 정치 관여를 금기시 한 것이다. 효과적인 식민지배를 위해 정교분리론을 이용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1운동과 같은 반일 만세 운동이 일어난 것은 국가 권력의 신교(信敎)의 자유 부정과 교회 탄압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1935년부터 시작된 신사참배 강요는 국가권력의 교회 탄압이자 정교분리 원칙의 심각한 위반이었다. 국가권력이 신앙의 자유를 억압할 뿐 아니라 우상숭배를 강요한 것이다. 한국교회는 이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점차 저항은 약화되었고 후에는 심각한 훼절에 이르게 되지만, 이 일로 2천여 명이 투옥되고 40여 명은 옥중에서 죽음을 맞기까지 국가권력에 저항했다. 이른바 일제가 말하는 정교분리론에 저항 한 것이며, 신교의 자유에 대한 투쟁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주기철 목사였다. 1939년 8월 일제경찰이 그에게 설교 금지령을 내렸을 때, “나의 설교권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니 경찰서에서 하지 말라 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설교를 그만 두지 않으면 체포한다.”고 협박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설교는 내가 할 일이고, 체포는 당신이 할 일이다.” 비록 짧은 응대였으나 국가권력의 한계를 분명하게 선언한 것이다. 국가권력은 신교의 자유, 곧 설교권을 박탈 할 권리가 없다는 점을 제시한 것이다. 국가 권력자들은 정교 분리를 교회의 정치 불관여로 간주하여 정부정책을 비판하지 말라는 의미로 받아드리지만, 미국의 수정헌법 제1조에서 말한 정교분리의 의미는 국가권력의 종교자유 침해 금지를 규정한 것이다. 맺으면서 이상에서 코로나 환경에서의 국가와 교회와의 관계에 대해 개혁교회 전통과 서구사회 역사에 비추어 살펴보았다. 특히 정부의 방역 지침과 기독교회에 대한 집회 제한 조치에 대한 경과, 그리고 교회의 집회에 대한 국가권력의 행정명령이 정당한가에 대하여, 교회와 국가, 정교분리, 저항권의 문제를 통해 검토해 보았다. 앞에서 지적했지만, 교회는 방역 수칙을 준수하고 국민건강과 역병으로부터의 안전을 위해 협력하고 협조해야 한다. 이런 기독교회의 적극적인 조치에도 불구하고, 국가기관이 사전 협의나 양해 없이 일방적으로 특정한 기간에 대한 언급 없이 전국교회에 대하여 행정명령을 하달하는 것은 코로나환경, 혹은 방역 지침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의 자유와 신교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교회를 통한 감염이 미미함에도 불구하고 전국 교회에 대하여 획일적인 지침을 강제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할 수 없다. 지난 3월 27일 기준으로 볼 때 국내 감염자 중 교회를 통한 감염은 1.5% 불과하다고 한다. 98.5% 확진자는 교회와 무관한 감염경로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예배에 대해 밀접 집회 제한 행정명령을 발동하는 것은, 한국교회 언론회의 지적처럼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며 교회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고조하려는 의도”로 의심을 살 수 있다. 교회가 정부의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한 지침을 준수하고 협조하는 일은 당연한 의미이지만, 종교 집회의 자유를 제한 할 수 있는 예배금지, 교회당 폐쇄, 구상권 청구 같은 조치는 기독교에 대한 탄압일 수 있다는 점이다. 유독 기독교회의 집회에 대해서만 제한을 강제하는 것은 공정한 처사라고 할 수 없다. 또 특정 교회를 지칭하여 집회 금지를 명령하는 것은 의도적인 정치방역으로 오해될 수 있는 소지가 있다. 정부는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는 교회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면 교회 지도자들에게 그 필요성을 고지하고 협조를 요청할 수 있고, 교회는 자율적으로 일정 기간 집회를 제한하거나 축소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기독교계가 국가기관의 행정명령을 통한 대면예배 제한이나 금지 조치에 대해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보건복지부장관과 서울시장을 상대로 ‘행정명령 집행정지’ 가처분 소송을 제기한 일은 소극적 저항권의 행사라고 할 수 있으나, 전교회적인 특별한 저항 없이 이를 받아들인 것은 방역 지침에 순응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 종교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는 안이한 대응이자 교회의 자율권에 대한 포기라고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의 경우, 주 정부가 코로나 방역을 위해 예배를 제한하는 행정명령을 내린 바 있으나, 해당 교회는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예컨대, 2020년 5월 18일 노스캐롤라이나의 로이 쿠퍼(Roy Cooper) 주지사는 야외에서 10명 이상의 모임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교회 집회에 대해서도 예외 없이 이를 적용했다. 이에 대해 윈스턴 살렘의 베리안침례교회와 그린빌의 침례교회는 기독교 단체인 리턴 아메리카와 더불어 미국연방법원에 노스캐롤라이나주를 상대롤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제임스 데버 판사는 “미국 헌법이나 수정헌법 제1항의 종교의 자유권 보장은 전염병에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코로나 확산을 막기 위한 공공보건의 이유보다 종교자유 침해를 더 심각하게 여긴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저명한 법률가인 켄 스타(Ken Starr) 박사가 코로나 바이러스 전염병이 수정헌법 제1조에서 보장한 종교의 자유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고 말하면서 종교자유의 위기(Religious Liberty in Crisis: Exercising your faith in an age of uncertainty)라고 말한 것을 보면 국가권력에 의한 종교자유 침해는 국제적인 문제로 제기되고 있고, 우리의 성찰이 요구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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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07
  • [김성수 총장] 오늘도 그분의 임재하심 안에서…
    김성수 목사(전 고신대학교 총장,현 미국 에반겔리아 대학교 총장) ‘세계관’(worldview)이란 문자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세계관의 관건은 어떤 관점에서 이 세상을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을 올바로 구분하고 올바로 대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세상과의 관계를 올바로 알지 못하면 이 세상을 올바로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비교할 다른 창조주가 없는 오직 한 분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느9:6).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아무것도 없는 상태 즉, ‘무에서’(ex. nihilo)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이미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태초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창조관의 특징입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는 많은 창조 설화들이 있었습니다. 헬라의 철학자인 플라톤(Plato)도 ‘데미우르고스’(Demiourgos)라는 창조의 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데미우르고스’는 없는 것으로부터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신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바꾸는 신을 말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우주의 창조신은 무질서(chaos, 혼돈)로 해체되는 성형을 지닌 물질을 원형인 이데아에 맞춰서 질서(cosmos)를 지닌 존재자로 만들어 내는 것을 창조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하나님도 이미 존재했던 어떤 영원한 질료를 원료로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이러한 이단들에 대항해야 했습니다. 이교적인 신화와 사상에 영향을 받아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는 이 선언은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 2절의 말씀 즉,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는 표현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혼돈’이라는 의미 즉, ‘어떤 사물이나 생각들이 뒤엉켜 있는 무질서의 상태’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질서한 혼돈의 상태’로부터 질서 있는 우주(cosmos)를 만들어 내는 분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에서 질서를 만드시는 분이며,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무질서한 혼돈 상태를 정돈하여 질서 있는 상태로 만들어 주신다고 힘주어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너무 피상적인 해석이며 잘못된 적용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그 창조된 하늘과 땅의 상태가 혼돈하고 무질서하며, 아무런 의미가 없이 공허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혼돈과 무질서와 무의미를 창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질서의 하나님입니다. 창세기 1:1-2절의 말씀은 지상의 질서를 향한 첫 번째 단계를 묘사한 것입니다. ‘혼돈하다’는 것은 아직 ‘모양이 없다’(formless) 또는 ‘모양이 주어지지 않았다’(unformed)는 뜻이지 ‘모양이 왜곡되었다’(deformed)는 뜻이 아닙니다. 비유하건데 그것은 앞으로 더 구체적인 세부 사항을 채워 넣고 색상을 칠해야 할 화가의 스케치와도 같은 것입니다. 또 다른 비유를 든다면 골조 공사만 끝나고 마무리 공사와 내장 공사를 기다리고 있는 신축 건물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 11:3)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지어졌다”로 번역된 단어는 다른 곳에서 진흙 덩어리로 토기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의 행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모양이 아직 주어지지 않은 땅으로 장인의 걸작을 빚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는 처음부터 혼돈이나 무질서가 아니라 질서와 의미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자신이 창조하신 우주 만물을 질서 있게 보존하며 통치하고 계십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을 구분한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드신 세계와 언제나 저 멀리 동떨어진 곳에 계시면 피조물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고 이 세상이 그냥 자동으로 굴러가도록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이신론자들(deists)들은 시계를 만든 후에 그 시계가 감아 놓은 태엽에 따라 돌아가도록 버려두고 잠자고 있는 시계공 할아버지처럼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이신론의 신관은 창조 세계가 존속하는데 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이 필요 없게끔 하나님이 창조 세계 속에 ‘자연법’을 내장해 놓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붙들고 계시며, 세상에는 그분의 임재와 영광과 능력과 계시가 충만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과 그 안의 만물을 창조하셨고, 모든 인간에게 생명과 호흡과 그 밖의 모든 것을 주시고, 역사를 주관하고 다스리시며, 모든 나라를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그러한 활동을 하심은 만백성이 그분을 구하고, 그분께 손을 내밀고 그분을 찾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에게 가까우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8). 세상이 하나님의 임재로 흠뻑 젖어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성경적 세계관의 한 기초석입니다.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의 표현대로 하나님은 워낙 깊이 창조 세계와 관계하시고 그 안에 임재하시고 그것을 섭리하시고 감화하시고 그 속에 영향을 미치시므로 그분을 조금이라도 묵상하지 않고는 창조 세계를 제대로 묵상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주에 임재하신다면 세상은 그분의 영광과 위엄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 하나님의 창조 세계 속에서 그분의 지혜와 솜씨를 바라보면서 그분의 임재하심 안에서 살아가는 진정한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영위해 가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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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4
  • [오성한 목사] 당신은 전도자다
    당신은 전도자임을 발견해야 한다. 당신이 전도자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이다. 전도자인 것을 믿지 못하는데 전도자로 살 수 없다. 소개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는 전도자입니다.”라고 소개할 수 있을 정도로 전도자라는 의식 속에 잠겨야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아는 것은 그런 삶이 나오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예수 믿은 자가 이 땅을 사는 이유는 유일하다. 전도하기 위해 이 땅을 사는 것이다. 어디를 가든지 전도자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전도를 많이 해야 전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태복음 4:19)라고 하셨다. 우리는 말씀에 기록한 대로 나는 보고 믿어야 한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사람 낚는 어부다. 임마누엘을 인정하며 복음의 감격으로 열심히 숨 쉬고 살기만 하면 전도하는 것임을 알자. 요셉을 보라. 요셉은 이집트로 혼자 팔려갔다. 우울증에 걸릴 조건은 충분했다. 그러나 그는 임마누엘의 기쁨이 있었다. 모여서 예배를 하거나 함께 찬양을 할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지만, 임마누엘을 만끽하며, 열심히 살았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자체가 전도자의 삶이다. 성령 충만의 임마누엘의 사람은 요셉에게 하나님과 함께함을 보았던 사람들처럼 세상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임을 보게 될 것이다. 전도는 내가 전도자임을 알 때 삶이 재미있고 행복할 것이다. 다시 한번, 기억하라. 내가 노력해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된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었더니, 주님께서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셨다. 그래서 당신은 전도자다. 전도자임을 기도로 부르짖고 주장하며 전도자라고 말하며 이 땅을 사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시골교회 담임으로 갔다. 당시 나는 성경 읽기와 기도로 불이 붙어 있었다. 예배당 바로 옆집에 인사도 드리고, 전도하러 갔다. 옆집 아저씨는 교회 욕을 하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시끄럽다는 둥, 여름에 문을 못 연다는 둥,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며 나를 공격하는데 전도하러 갔던 나는 언어장애인 되어 버렸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하면서 전도해야 할지 몰라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쫓겨나다시피 돌아왔다. 너무나도 비참했다. 전도할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전도 못 하는 장애인 같아 보였다. “주님, 저는 전도 못 하는 영적 장애인입니다.”라고 부르짖어 기도하며, 전도 훈련이라도 시켜달라고 답답한 마음으로 기도한 일이 있다. 전도할 줄 아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전도 현장에서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교회 한 번 와 보세요.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을 하고 나서는 더 할 말이 없었고, 상대방의 공격적인 말에 정신마저 몽롱해졌다. 상대방의 강한 어조에 멍해진 것이다. 넋 놓고 돌아와서는 주님 앞에 울기 시작했다. “주님 저는 전도할 줄 아는 줄 알았는데, 전도할 줄 모르는 영적 불구입니다.” “주님, 저를 전도 훈련 좀 시켜주세요.”라고 통곡을 했던 일이 있다. 돌이켜 보니 그때는 전도자라고 생각하고 살지 못했다. 당시 성령의 만지심이 있고 난 뒤 3년을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만 읽는다고 정신이 없었던 기간이었으니 마음만 뜨거웠던 것 같다. 전도 훈련받을 곳을 찾기 시작했다. C.C.C에서 교역자를 대상으로 NLTC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너무 반가웠다. 처음 받아보는 전도 훈련이었다. 사영리를 철자 한자 안 틀리게 암송하며, 훈련을 받고 현장을 나갔다. 훈련을 받는 내내 마음에 올라오는 감격이 있어 마음으로 울면서 전도 훈련을 받았던 것 같다. “주님, 신학교에 전도 훈련이 없습니다. 이런 전도 훈련이 신학교에도 들어가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수없이 했던 것이 기억난다. 마음에 흐르는 눈물은 다른 사람이 볼 수는 없었지만, 나에겐 감동의 시간이었다. 그 이후 많은 전도 훈련을 받았다. 수천 명에게 전도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일 천명 이상에게 예수님을 영접시켜, 하나님의 자녀로 살도록 도와줄 수 있었는데 너무 감사한 일이다. 나는 오늘도 전도자임을 알고 산다. 기회만 있으면 전도자임을 믿기에 전도하며 산다. 우리 교회 안에도 여러 사람이 나를 통해 예수를 믿게 된 분들이 있다. 그분들을 뵐 때마다 감사한 간증 거리가 된다. 당신이 전도 훈련을 받지 못했어도 당신은 전도자다. 주님께서 전도자로 만드셨다. 전도자임을 믿어라. 철저하게 전도자임을 인정하라. 전도자임을 믿는 것이 전도의 출발이다. 손을 뻗어 전도자임을 취하라. 천국은 손을 뻗어 취하는 자의 것이다. 또 전도 훈련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기회를 내어 전도 훈련도 받을 수 있으면 받아보라. 도움이 될 수 있다. 가장 좋은 전도 훈련은 직접 전도하는 것이다. 전도엔 왕도가 없다. 간절한 마음만 있으면 성령께서 전도를 도와주시고, 천사들도 도와준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전도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전도자임을 알고 전도하다 보면 나만의 전도 방법이 생김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 전도자다. 전도자임을 알고, 믿고, 깨닫고, 살면 억지로 전도하지 않는다 해도 전도의 기회가 온다. 준비된 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내게 좌우명같이 여기는 말이 있다. “기회는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지나간다. 기회는 준비된 자만 볼 수 있고, 잡을 수 있다.”라는 말이다. 당신도 전도자임을 알고, 마음으로 준비하고, 훈련의 기회를 만들어 준비하라. 전도자임을 알고 기도로 준비하고 있으면, 전도의 기회는 반드시 온다. 또 전도할 때 성령께서 도우실 것이다. 전도자라는 생각을 잊지 말라. 당신을 통해 전도할 때 역사하실 성령님을 기대하라. 전도하는 것에 겁을 내지 말라. 전도는 내가 아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가장 좋다. 내가 아는 사람, 내가 만난 사람에게 예수 믿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가지고, 기도해 보라. 나는 일대일 전도의 기회를 제일 좋아한다. 제일 열매가 좋기 때문이다. 전도는 이러한 성경에서 말하는 분명한 믿음, 당신이 전도자라는 믿음을 가질 때 저절로 전도하는 당신을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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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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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상규 교수] 호주 장로교회의 형성과 경남지역 선교
    1. 시작하면서 오늘 이렇게 뜻 깊은 2021년 경남선교의 날 감사예배에 초청해 주신 점에 대하여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부산경남 지방에 기독교 복음을 전해준 호주장로교와 미국북장로교 선교부의 활동을 소개하되, 특히 부산경남지방 선교를 꿈꾸며 이 곳에 왔던 첫 호주 선교사들의 경남지역에서의 선교활동에 대해 소개할까 합니다. 저는 이 분야 최초의 연구자로서 호주의 여러 도서관, 고문서관을 다니며 각종 문헌을 섭렵하였고 여러 자료를 수집하였으므로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리고 싶지만 오늘은 편안한 마음으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는 미국 북장로교회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였고 주로 부산 경남지역에서 활동했는데, 이들의 활동에 대해 말씀 드리기 전에 먼저 부산과 경남 지역에서의 기독교의 연원을 소개하고, 어떻게 부산경남 지방은 호주장로교와 미국북장로굫회의 공동선교구역이 되었는가를 말씀리고자 합니다. 그 후에 호주 선교부를 중심으로 이 지방에서의 활동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2. 부산, 경남지방으로 전래되는 기독교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성경반포사업 부산을 포함한 경상남도 지방에 복음을 전하려는 최초의 노력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가 시도한 성경반포사업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는 1882년 심양(瀋陽)의 문광셔원에서 로스역(Ross Version) 『예수 셩교 누가복음 젼셔』와 『예수셩교 요안나 복음젼셔』를 각각 3,000권씩 출판했는데 이중 3분의 1을 일본 요꼬하마 주재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총무인 톰슨(J. Austin Thomson)에게 보내어 조선에 반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본주재 동 성서공회는 1883년 일본인 나가사까(長坂)를 부산에 파견하여 성경반포사업을 시작했는데, 이 일은 이 지방에서의 최초의 복음운동이었습니다. 이때의 반포사업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때의 결실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월푸의 조선선교 시도 부산과 경남지방에서의 두 번째 기독교 복음과의 접촉은 영국성공회의 영국교회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 소속 월푸(Archdeacon John R. Wolfe) 선교사를 통해서였습니다. 월푸는 중국에서 사역한지 22년이 지난 1884년, 청불(淸佛)전쟁으로 야기된 불안한 정세 하에서 건강이 좋지 못해 의사로부터 일정기간 휴양을 권고 받고 일본 나가사끼(長埼)를 방문한 후, 1884년 10월 24일경 부산을 방문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당시 부산에는 약 2천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었고, 일본인 거주지 내에 은행과 병원, 그리고 학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푸초로 돌아간 후 ‘남지나 선교회’(The South China Mission) 연례 지방대회에서 조선방문의 결과를 보고하면서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호소가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885년 11월 말경 두 사람의 중국인 전도자와 함께 다시 부산에 왔습니다. 이것이 이 지방에서의 선교를 위한 두 번째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선교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고 아무런 기록도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때는 아직 기독교 선교가 금지되어 있었고 활동도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선교활동이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의 부산 방문은 후일 두가지 결실을 가져오는데, 첫째는 한국에서의 성공회 선교운동의 한 동기를 부여하였고, 둘 째는 호주 장로교의 한국 선교의 길을 열였습니다. 즉 월푸는 조선 방문 후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서신을 보냈는데, 이 편지는 멜버른의 코필드(Caulfield)에 위치한 성 메리교회(St. Mary Church)의 메칼트니(H. B. Macartney) 목사가 편집, 방행하는 「국내 국외 선교」(The Missionary at Home and Abroad)에 발표되었고, 이 호소는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의 내한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습니다. 게일과 하디의 부산에서의 선교 우리 지방에 왔던 세 번째 개신교 전도자는 캐나다인 게일(James Scarta Gale, 奇一, 1863-1937)이었습니다. 그는 토로토대학 YMCA의 파송으로 내한하여 1889년 7월부터 1891년 봄까지 부산에서 사역하였는데, 그는 한국의 역사와 언어, 풍습에 관한 주목할 만한 저서를 남겼던 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게일이 부산에서 일했던 기간 중의 선교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당시 상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의 부산 체류기간이 짧았고 특히 부산에서 체류 기간 중에는 한국어 공부에 전념했던 점을 고려해 볼 때 선교를 위한 구체적인 노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단지 부산에 주제한 첫 개신교 선교사로써 부산과 경남 지역 선교를 위한 탐색과 연구의 기간을 보낸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 뒤 역시 캐나다 출신 의사인 하디 의사(Dr. Robert A. Hardie) 부부가 부산지방에서의 의료 활동을 했습니다. 토론토 의과대학 출신인 그는 내한하여 1892년 11월 부산을 떠나 원산으로 가기까지 약 2년 동안 부산에 체류하며 게일과 함께 선교사역에 종사하였습니다. 이들이 부산지방의 초기 선교사들이었습니다. 데이비스의 내한, 부산도착, 죽음 그러다가 1889년 10월 2일 호주 장로교 출신인 해리 데이비스(Rev. J. H. Davies, 1856-1890)가 부산으로 오게 되는데, 이것이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의 한국 선교의 시작이 됩니다. 이 때는 알렌이 입국한지 5년이 지난 때였는데, 데이비스는 누나인 메리와 함께 1889년 8월 21일 멜버른을 떠나 한국으로 향했는데, 10월 2일 부산을 거쳐, 10월 4일 인천에 도착했고, 그 다음날 오후 늦게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때로부터 5개월 간 서울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인천, 과천, 수원, 공주를 경유하여 경상도 땅을 지나 1890년 4월 4일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20여일 간에 걸쳐 약 500km에 달하는 긴 여행을 마치고 목적지인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무리한 도보 여행으로 인해 폐렴에 감염되었고 천연두까지 겹쳐 마지막 5일간은 아무 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데이비스가 부산에 도착한 날은 1890년 4월 4일 금요일이었는데, 그 다음날인 4월 5일, 오후 1시경 부산에서 사망합니다. 한국에 온지 6개월 된 때였습니다. 부산지방 선교의 꿈을 안고 부산으로 내려왔으나 그 꿈은 그 자신의 생애 속에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의 죽음은 호주 장로교회의 한국선교, 곧 부산, 경남지역 선교의 동기가 됩니다. 이런 점에 대해서는 조금 후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미국 북장로교 부산지역 선교 그렇다면 미국북장로교는 어떻게 부산에서 선교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을까요? 본래 미국북장로교 선교부의 초기 선교사들은 서울에 정착하였습니다. 알렌이나 언더우드, 헤론 등이 그들입니다. 그런데 선교사 수가 많아지자 서울 외의 다른 지역에도 선교지부를 설치하기로 하고 두 지역을 개척하기로 했는데, 그 지역이 평양과 부산이었습니다. 평양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사무엘 마펫(Rev. Samuel Moffett)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부산지부를 개척하기 위해 파송된 사람이 윌리엄 베어드(Rev. William Baird)였습니다. 그래서 마펫은 1891년 평양으로 가서 사역한 결과 1893년 평안도 지방 최초의 교회인 장대현교회가 설립되었고, 후에 장대현 교회에서 평양야서문밖교회, 평양남문밖교회, 창동교회,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산정현교회가 1906년 개척된 것입니다. 부산으로 파송된 윌리엄 베어드는 19891년 9월 부산으로 와 부산 영선현에서 두 필지 땅을 사서 선교관을 건축하고 선교하기 시작하여 미국북장로교 선교부도 부산에서 사역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부산은 미국 북장로교와 호주장로교 공동선교구역이 된 것입니다. 물론 양 선교부 간의 협의와 합의를 거쳐 선교지역 분담이 이루어졌습니다만, 호주 선교부는 부산진, 고관을 거쳐 경남동부지역, 곧 해운대 기장 언양 양산 울산 등지를, 미국북장로교회는 부산의 서부지역인 부산 중앙동 영도 남포동 김해 밀양 등지에서 활동했습니다만 그 후에 선교지역 더 확대됩니다. 참고로 북장로교 부산경남지방 선교에 대해 더 말씀드리면, 베어드에 이어 두 번째로 부산에 부임한 북장로교선교사는 휴 브라운(Dr. Hugh M. Brown) 의사 부부였습니다. 이들은 1891년 12월에 부산에 와서 자기 집에 작은 시약소(dispensary)를 설치하고 의료선교사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였으나 브라운 의사의 예기치 못한 결핵의 감염으로 부산에 온지 2년 후인 1894년 1월 8일 귀국했고, 본국으로 돌아간 후 2년이 못 되어 1896년 1월 6일 뉴욕에서 병사했습니다. 1893년 11월에는 어빈의사(Dr. Charles. H. Irvin, 漁乙彬)가 내한했는데, 이듬해 3월 부산으로 와 브라운의 뒤를 이어 의료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어빈은 이때로부터 1911년까지 약 17년간 선교사로 일하고, 그해 4월 1일자로 선교사직을 사임합니다. 그러나 그는 동광동 5가 영선고개에 어을빈의원을 개원하고 계속 부산에 체류하였습니다. 1895년 5월 29일에는 아담스(Rev. James E. Adams, 安義窩) 부부가 부산에 파견되었는데, 그가 1897년 대구로 옮겨가 대구지부를 개척하였고, 1923년까지 한국선교사로 일했습니다. 그 후에 부산에는 미국북장로교의 로스목사 부부(Rev. Cyril Ross, 盧世永, 1897-1902), 시더보탐 목사(Rev. Richard H. Sidebotham, 史保淡, 1900-1909) 부부, 스미스 목사(Rev. Walter E. Smith, 沈翊舜, 1902-1912) 부부, 윈목사(Rev. George H. Winn, 魏喆治, 1909-1914) 목사 등이 활동했는데, 북장로교는 1913년 말까지 일하고 부산경남지방에서 완전히 철수합니다. 호주 선교사 수가 많아지니 북장로교는 구태어 부산경남지방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동안 미국 북장로교가 부산 경남지방에 파송한 선교사 수는 21명이었는데, 1914년 이후에는 부산과 경남 전 지역이 호주 선교부 관할이 되었고 호주 선교의 영향 하에 있게 됩니다. 저는 어떻게 경남지방이 호주장로교와 미국북장로교 공동 지역이 되었는가를 말씀 드린 것입니다. 2.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PCV)의 형성 영국인의 이민으로 시작된 호주는 사회의 모든 분야가 영국의 영향권 하에 있었고, 특히 장로교회의 경우 모교회(母敎會)라고 할 수 있는 스코틀랜드교회의 역사와 유산을 답습, 계승하고 있습니다. 빅토리아주의 경우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해 온 첫 목사는 제임스 클로우(James Clow) 목사였는데, 그는 1837년 10월 24일 빅토리아주에서의 첫 예배를 인도하였고, 그 다음해인 1838년 1월 28일 시드니로부터 멜버른으로 이주해온 제임스 폽스(James Forbes, 1823-1851) 목사는 멜버른에 정착하여 공식적으로 목회를 시작한 첫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공식적인 첫 예배 인도는 1839년 2월 3일이었다. 이때로부터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여러 교파의 목사와 신자들이 이주해 와서 각기 다른 교회조직을 유지해 오다가 1850년대에는 이들 교회 조직들 간의 교단 통합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빅토리아에는 대표적인 세 개의 장로교회(敎團)이 있었는데, 첫째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The Established Church of Scotland)를 계승한 교회로서 1840년부터 1854년까지는 ‘호주대회’(Synod of Australia)로 불리다가 1854년 4월 ‘빅토리아대회’(Synod of Victoria)란 이름으로 독립한 교회, 둘째는 스코틀랜드에서 1843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서 분립하여 ‘스코틀랜드자유장로교회’(Free Church of Scotland)가 형성되자 이로부터 3년 후인 1846년 호주 빅토리아주에서도 ‘호주대회’부터 분립하여 조직된 ‘빅토리아 자유 장로교회’(Fre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 셋째로는 1847년 이래로 스코틀랜드의 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 of Scotland)의 목사들이 빅토리아로 이주해 옴으로 1850년 1월 22일 조직된 ‘빅토리아 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가 그것입니다. 이 세 장로교단은 약 10년간의 교회연합을 위한 토의와 회합 거쳐 1859년 4월 7일 드디어 ‘빅토리아 장로교회’라는 이름하에 통합하게 됩니다. 물론 세 교단의 완전한 통합은 아니었지만 매우 획기적인 연합이었습니다. 이렇게 조직된 교회가 빅토리아주 장로교회(Th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인데 간단하게 PCV라고 부릅니다. 이 교회는 호주 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장로교단이 되었고 후일 경남선교를 주도한 교단이 된 것이다. 비록 PCV는 1859년에 구성되지만, 그 연원은 제임스 클로우(James Clow) 목사가 호주 빅토리아주에서 첫 예배를 인도했던 1837년이기 때문에 과거 호주장로교회는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1937년 호주 장로교 100주년 해사를 했고, 당시 경남지방의 대표적인 목회자였던 이약신 목사를 초청하여 강연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곡 50년이 지난 1987년 제가 멜버른 교외의 하이델베르그라는 곳의 장로교회에 갔을 때 70세가 넘으신긴 장로님이 저 더러 “약신 리를 아느냐”고 물었는데 그 분은 청년 때 이약신 목사의 설교와 강연을 들었다고 이야기 하여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그런데 근년에 와서는 PCV가 조직된 1859년을 기점으로 2009년 호주장로교회가 150주년 행사를 했는데 부족한 저를 초청해 주어 짧은 인사를 하고, 또 저의 영어 책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바 있습니다. 3. 빅토리아장로교회의 선교운동과 한국선교의 동기 저명한 교회사학자인 케네스 라토렛(K. S. Latourette, 1884-1968)은 19세기는 의심할 여지없이 ‘기독교 선교의 위대한 세기’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 시기의 선교운동은 특히 독일 경건주의 운동, 모라비안들의 선교 열정, 앵글로 색슨 세계의 영적 각성이 아우러져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비기독교 세계로 혹산되었습니다. 그래서 19세기 이후 선교운동이 큰 영향을 기쳤고 여러나라에 영향을 주었는데, 호주교회는 이런 19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선교사상 혹은 선교운동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빅토리아 장로교회(PCV)가 총회 내에 해외선교부(Foreign Mission Committee)를 조직했을 때는 교단이 조직된 이듬해인 1860년이었습니다. 당시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동기에서 선교운동이 시작되었는데 당시만 하더라고 ‘해외선교’(Foreign Mission)란 말보다는 ‘이교도 선교’(Heathen Mission)란 말이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빅토리아 장로교회는 크게 두개 지역, 곧 지금은 바누아투(Vanuatu)라고 불리는 뉴 헤브리디즈(New Hebrides)와 호주 원주민 선교에 치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850년대 소위 골드 러쉬로 인한 중국인의 대거 유입 이후에는 빅토리아주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에 대한 선교가 제3의 선교로 대두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빅토리아 장로교회가 조직된 지 약 30 여년 후인 1889년 데이비스를 한국에 파송하게 되는데, 이때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선교운동에 영향을 몇 사람의 영웅적인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존 게디(John Geddie), 하겐아우어(F. A. Hagenaur), 존 페이톤(John Paton, 1824-1907) 같은 선교사였습니다. 이들이 빅토리아 선교운동의 선구자들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페이톤은 선교지의 사회개량운동에도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선교사역과 활동은 빅토리아 교회의 선교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가 1865년 선교기금 확보를 위한 일환으로 영 연방에 속한 여러 국가들을 순방하던 중 멜버른을 방문했는데, 이때의 강연과 집회를 통해 호주 교회에 선교에 대한 각성과 선교적 책임을 환기시켜 주었고, 유능한 선교사들을 발굴하는 개기가 됩니다. 후일 부산에 와서 나병환자들을 위해 일한 매켄지(J. N. Mackenzie), 마산 창신학교 교장을 지낸 리알(D. M. Lyall), 마산에서 의신여학교 월영유치원에서 가르치며 문창교회 주일학교 와 반주자로 일한 엘리스(C. Ellis) 등은 페이톤의 영향으로 선교사로 자원하였던 이들입니다. 1925년 이전까지 경남도청 소재지였던 진주에 세워진 ‘배돈병원’은 페이톤의 아내였던 마가렛 화이트크로스를 기념한 병원(Mrs. Margaret Whitecross Paton Memorial Hospital)이었습니다. 페이튼이라는 여어이름을 한국말로 적당히 취음하여 배돈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선구적인 선교사들의 활동과 선교보고, 선교운동은 1890년대 호주장로교회에도 큰 영향을 주었고 이후 한국선교를 가능케 했던 정신적 동력이 된 것입니다. 호주교회가 한국선교를 시작하게 된 보다 직접적인 동기는 해리 데이비스(J. H. Davies)의 자원과 한국에서의 짧은 사역, 그그리고 그의 갑작스런 죽음이었습니다. 호주장로교회는 한국선교에 대한 아무런 계획이 없었습니다. 오직 바누아투, 빅토리아 주에 거주한 중국인, 그리고 호주 원주민들이 선굣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데이비스가 난데없이 한국선교를 자원하였을 때 빅토리아 장로교회는 한국에 대해 알지도 못했고 선교 구상도 없었습니다. 한국은 호주 기독교 세계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고, 조선은 여전히 입국이 허락되지 않는 땅(terra incognito), 은둔국(Hermit nation)이었습니다. 그래서 데이비스가 조선으로 가겠다고 하니 그를 선교사로 인준은 했으나, 선교비를 지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재정적으로 후원해 준 이는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휘하 조직인 몇몇 청년연합회 회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데이비스의 자원과 내한(1889년 10월 2일), 그의 갑작스런 죽음(1890년 4월 5일)은 호주장로교회가 한국에 선교사역을 시작하는 중요한 동기가 된 것입니다. 한 사람의 헌신과 죽음이 교회의 선교 방향을 바꾸게 된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데이비스는 어떻게 조선을 생각하게 되었을까요? 데이비스가 한국선교를 자원한 배경에는 중국 복주(福州, Foochow)에서 선교하던 월푸(John R. Wolfe) 주교의 영향이 컸습니다. 영국교회 선교단체인 ‘영국교회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 소속 선교사였던 월푸는 1885년과 1887년 한국 부산을 방문한 일이 있는데 그는 한국방문 결과를 보고하면서 한국선교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호소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씨 엠 에스 선교관계자의 관심을 얻지 못했고, 그의 편지는 호주로 보내졌는데 당시 멜버른의 코필드에 있는 성 메리교회의 메칼트니(H. B. Macartney) 목사가 편집, 발행하는 『국내·국외선교』(The Missionary at Home and Abroad)에 발표되었습니다. 당시 데이비스는 카오필드에 있는 성 메리교회(성공회)에 출석하면서 메칼트니 목사와 깊은 친교를 맺고 있었습니다. 월푸의 이 편지가 데이비스에게 한국에 대한 관심과 소명을 갖게 한 것입니다. 인도에서 단기간(1876-1878) 선교사로 일한 바 있는 데이비스는 본래 인도로 돌아가려했으나 월푸의 편지를 읽고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이다. 데이비스가 읽고 조선 선교를 자원하게 했던 그 편지를 제까 연전에 「기독공보」에 소개한 바 있습니다. 데이비스가 한국에 오고 사망 한 이후 불과 10여년이 지난 191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은, 한국보다 50년 앞서 시작된 뉴 헤브리디즈나 중국인 혹은 원주민 선교를 제치고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가장 성공적인, 가장 중요한, 가장 역점을 두는 선교지역(mission field)이 되었고, 1920년대에는 빅토리아장로교회의 해외 선교비의 70% 상당이 한국 선교를 위해 사용될 정도가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산배분은 한국선교의 성과와 관심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한국, 아니 부산경남선교운동이 시작되었고, 이 선교운동이 유지, 계승, 확장되는 과정에서 빅토리아장로교회 ‘해외선교부’와 함께 선교사 파송단체였던 ‘청년연합회’(Young Men's Fellowship Union)와 ‘여전도회연합회’(Presbyterian Women's Missionary Union)의 기여와 역할이 지대하였습니다. 4. 첫 선교사 데이비스의 내한 이제 내한한 첫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호주 빅토리아장로교회의 데이비스와 그의 큰 누나 메리(Mary T. Davies)는 미국 북장로교회의 알렌 의사가 입국한지 5년 후인 1889년 10월 2일 부산항으로 입국합니다. 이때로부터 호주장로교회는 1945년 해방이전까지 78명이, 해방 이후 1947년에 다시 한국선교를 계시하였고, 1977년 이후에는 호주 연합교회가 한국선교를 계승하고 있습니다. 데이비스가는 영국에서 온 이민자인데, 1856년 뉴질랜드 왕가라이(Wangarai)에서 출생하였습니다. 4살 때인 1860년 부모를 따라 호주 빅토리아주로 이주했습니다. 1876년, 곧 그의 나이 20세 때 호주 CMS(영국교회 선교회) 파송으로 인도 선교사로 인도에서 21개월간 일했습니다. 그러나 건강상의 이유로 1878년 5월 21일 멜버른으로 돌아왔고, 그 후 멜버른대학에서 수학하고 1881년 4월에는 코필드문법학교(Caulfield Grammar School)을 설립하여 1888년까지 교장으로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 인도로 돌아가기를 원했으나 앞서 언급한 월푸의 편지를 읽고 조선이 더 시급한 선교지라고 확신하고 조선선교를 자원하게 된 것입니다. 성공회 신자였던 그는 한국 선교사가 되기 위한 목적으로 성공회를 떠나서 빅토리아주 장로교회로 이적하였는데, 이때 투락이란 지역의 투락장로교회의 젊은 목사였던 이윙(John F. Ewing)의 역할이 컸습니다. 그는 데이비스를 장로교회로 인도하였고, 1888년 11월 22일 장로교 총회에 전(前)일본 선교사였던 딕슨(W. G. Dixon)과 맥크라렌(S. G. McLaren)을 포함하여 17명의 지도급 총대원들의 서명을 받아 데이비스를 한국 선교사로 갈 수 있도록 인준을 요청한 것입니다. 그 결과 데이비스가 목사안수에 필요한 기본교육을 마치고 시험에 합격하면 목사로 안수하기로 가결하게 됩니다. 데이비스는 ‘멜버른남노회’의 목사후보생으로 허입되었고, 안수에 필한 공부를 하기 위해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로 갔고 에딘버러의 뉴칼리지(New College)에서 6개월간의 신학공부를 합니다. 필요한 과정을 마치고 1889년 5월 13일 멜버른으로 돌아왔고, 멜보른 남노회가 실시한 목사고시에 합격합니다. 그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빅토리아주 장로교회 설립 50주년을 기념한 특별기간 중인 1889년 8월 2일 청년연합회의 지원을 약속받고 8월 5일에는 목사안수를 받게 됩니다. 목사안수를 받고 선교사로 임명된 그는 청년연합회의 재정지원 하에 한국선교사로 향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의 누나인 메리(Mary T. Davies)도 동행하였다. 많은 이들이 메리가 데이비스의 동생이라고 말하는데 동생이 아니라 누나입니다. 메리는 뜻있는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된 ‘멜보른교외기독교연합회’(Suburban Christian Union)의 지원 하에 함께 한국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데이비스 남매는 1888년 8월 16일 금요일 저녁 멜버른 시내 YMCA홀에서 거행된 환송회를 끝으로 8월 21일 멜버른을 떠나 시드니로 갔고, 그곳에서 며칠을 보낸 후 다시 8월 28일 증기선 ‘치난(S. S. Tsinan)호로 시드니를 떠나 한국으로 향하는 긴 여정에 올랐습니다. 이로부터 40여일 간에 걸친 항해를 끝내고 10월 2일 이른 아침 부산항에 입항한 것입니다. 항해 도중 데이비스 남매는 일시 본국에 귀국했다가 다시 임지인 서울로 돌아가는 당시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였던 벙커(D. A. Buncker) 내외를 만나 한국의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벙커의 안내로 부산을 둘러본 후 다시 출항하여 4일 오전 11시에 제물포에 도착하였습니다. 다음날 아침 말을 타고 인천을 떠나 그날 오후 늦게 서울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때로부터 북장로교의 언더우드와 함께 거하면서 서울에서 5개월을 지내게 되는데, 이 5개월간 데이비스는 한국어 공부에 주력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변 지역을 순회하고 어더우드와 같이 전도여행을 다닌 일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조선어 공부에 열중하였고 그 때 공부한 노트 일부를 제가 복사하여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조선말 공부에 바빠 가족들에게 편지 쓸 시간조차 없다”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약 5개월 후 일상의 대화가 가능하게 되었을 때 그는 누나는 서울에 남겨두고 부산으로의 여행을 시작합니다. 그는 바울의 선교 원리를 따라 일단 선교사가 없는 지역으로 가서 일하기로 작정하고, 한때는 군산지방으로 가서 선교할 것을 신중히 고려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만일 군산으로 갔었다면 호주교회의 한국 선교의 판도가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데이비스는 1890년 3월 14일, 어학 선생과 하인, 그리고 매서할 문서와 약간의 약품 등을 준비하여 서울을 떠나 수원, 과천 등 경기도 지방과 공주 등 충청도 지방을 거쳐 경상도 지방까지 300마일에 이르는 약 20일 간의 답사여행을 마치고 4월 4일(금) 목적지인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천연두에 감염되었고, 곧 폐렴이 겹쳐 부산 도착 다음 날인 4월 5일 34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조선 땅을 밟은 지 6개월,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183일만이었습니다. 그 부산에 체제하던 게일은 데이비스의 시신을 부산항이 굽어보이는 부산 동광동 뒷산인 복병산에 안장하였습니다. 이 때의 상황을 서울에 남아 있는 메리에게 알리는 게일의 긴 편지가 남아 있습니다. 데이비스의 죽음과 함께 그의 누나 메리도 폐렴으로 얼마간 고생했으나 헤론 의사의 치료로 회복한 다음 한국을 떠나 그해 7월 18일 멜버른으로 돌아감으로써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한국선교는 끝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데이비스의 죽음은 호주 교회의 한국선교를 시작하는 동기가 됩니다. 선교사는 살아서도 일하지만 죽어서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5. 선교사파송기관 호주 장로교회의 한국선교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데이비스의 개인적인 자원과 결단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이후의 한국선교는 빅토리아장로교회 ‘청년 연합회’(YMFU)와 ‘여전도히연합회’(PWMU)의 후원과 지원으로 계승됩니다. 빅토리아장로교 총회 해외선교부는 이들 두 기관보다 후기에 한국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하고, 두 선교기관을 관장하게 됩니다. 청년연합회의 창립과 첫 선교사의 파송 먼저 청년연합회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청년연합회는 맥길리버리(McGillivray) 씨의 발의로 1888년 조직되었습니다. 처음에는 Young Men's Sabbath Morning Fellowship Uniond라고 불렸는데 1876년 뉴 사우스웰즈(NSW)주에서 처음 조직되었고, 그후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는데 빅토리아주에서는 1888년 7월 27일 준비모임이 소집되어 회칙 초안 등 총회 조직준비에 착수하였고, 동년 8월 17일에는 11개 개체교회 청년들을 창립위원으로 하여 역사적인 빅토리아주 청년연합회를 조직하게 됩니다. 이때 로버트 길레스피(Robert Gillespie)는 회장으로 선임되었고, 빅토리아주 장로교 신학교의 초대교수였던 렌틀(J. Laurence Rentoul), 투락교회의 이윙 목사(J. F. Ewing), 호손(Hawthorn)장로교회 장로 던칸 러브(Duncan Love), 그리고 첫 제안자였던 맥길리버리(M. McGillivary)는 부회장으로 피선되었고, 후일 뉴 사우스 웰즈주에서 장로교회 목사가 된 스틸(James Steels)씨는 총무가 됩니다. 조직 당시는 남․여 혼성으로 구성되었으나 후일 여전도회연합회가 창립된 이후 점차 남 청년들의 연합체로 발전되었습니다. 이 모임은 원래 주일 아침 함께 모여 성경공부와 기도 등을 통해 영적 성장을 도모하고 친목과 교제를 위한 운동으로 시작되었으나, 데이비스를 한국에 파송, 지원하는 일을 계기로 선교운동단체로 발전하였고, 주일 아닌 평일에 회합하는 경우가 많아짐에 따라 이 연합체의 이름도 후일 Young Men's Fellowship Union으로 변경되었고, 후에는 The Presbyterian Fellowship of Victoria로 변경됩니다. 이 모임이 처음 조직될 당시에는 11개 교회 청년들로 구성되었으나, 일년 안에 598명의 회원을 가진 26개 교회연합체로 성장하였고, 1889년 8월 2일 장로교 창립 50주년 기념대회 기간 중에 모인 특별회의에서는 한국선교사로 자원한 데이비스 목사를 지원하기로 정식 결의하게 된 것입니다. 청년연합회는 1889년 데이비스를 파송한 이래 1891년에는 멕카이(James Mackay) 목사 부부를, 1894년에는 아담슨(Andrew Adamson) 목사 부부를, 1903년에는 커를(Dr. H. Currell) 의사 부부를, 1910년에는 왕대선(R. D. Watson) 목사 부부를, 1916년에는 도별익(F. J. Thomas) 목사 부부를, 1929년에는 부오란(F. T. Borland) 목사 부부를 각각 파송하고 지원하였습니다. 특히 1921년 도별익 목사가 사임한 후 마산 창신학교 교사였던 김호열 씨를 초청하여 멜버른대학에서 유학토록 지원하였으나, 건강 악화로 수년 후 사망하여 좋은 결실을 얻지 못했습니다. 김호열은 호주에서 유학한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여전도회연합회의 창립과 한국선교 지원 데이비스의 죽음은 ‘여전도회연합회’(PWMU) 창립에도 중요한 동기를 부여하였습니다. 여전도회 연합회는 호주교회의 선교사 파송기관 중 가장 많은 수의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였고 한국선교를 지원했던 영향력 있는 단체였습니다. 여전도회 연합회는 딘우디(C. Dinwoodie) 양이 익명으로 헌금한 50파운드, 한국선교사를 지원하는 사람을 위해 써 달라고 50파운드를 기증한 메리 데이비스(Mary T. Davies), 한국선교가 재개되기를 바란다며 역시 50파운드를 기증한 쿠리부인(Mrs Currie)의 숨은 공로와 함께 여전도회의 조직을 위한 여러 갈래의 시도가 어우러져서 1891년 여전도회연합회를 공식적으로 창립하게 됩니다. 멜버른시에서는 1890년 7월 29일 투락교회에 출석하던 하퍼 부인의 집에서 이방 여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장로교 여전도연합회 창립의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한 모임이 회집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여성연합회 조직을 위한 일련의 노력은 빅토리아주의 3개 지역에서 동시에 일어났는데, 이는 당시 교회여성들의 선교에 대한 일반적인 의식을 반영하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즉 멜버른에서의 준비 모임과 더불어 발라랏에서는 케언스(Mrs. Cairns) 부인이, 질롱에서는 데이비스(Mrs J. Davies) 부인이 각기 별도의 조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상과 같은 이 일련의 움직임이 어우러져서 1890년 8월 25일 멜버른 시내의 장로교 총회회관(Assembly Hall)에서 정식으로 여전도회연합회를 조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첫 내한 선교사가 데이비스의 두 여동생과 제수씨가 이 조직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는 점이다. 발라랏의 케언주 부인은 데이비스의 여동생이었고, 질롱의 데이비스 부인은 첫 선교사 데이비스의 동생 존 데이비스의 부인이었으니 첫 서뇨사 데이비스의 재수씨였습니다. 이 점은 데이비스의 한국에서의 죽음이 가져온 분명한 영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전도회연합회가 조직된 다음 해인 1891년 멘지스(Miss Belle Menzies), 페리(Miss Jean Perry), 그리고 퍼셋(Miss Fawcett) 등 3 미혼여선교사를 부산으로 파송하였고, 이때부터 해방 전까지 35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는데, 이는 동일기간 내한한 호주선교사 총수의 60%에 달합니다. 이들 중에는 데이비스의 두 조카인 마가렛 데이비스(Miss Margaret Davies, 대마가례, 사역기간, 1910-1940년)와 진 데이비스의사(Dr Jean Davies, 대지안, 1918-1941년)도 약 30년간 한국선교사로 일했다. 두 조카라 바로 첫 선교사 데이비스의 동생 존 데이비스의 딸입니다. 총회 해외선교부 헌국에 선교사를 파송했던 또 하나의 기관이 빅토리아장로교 해외선교부(Foreign Mission Committee)였습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선교사의 인준과 관리 등 총회 해외 선교부가 총괄하였으나 초기에는 청년연합회와 여전도회 연합회가 직접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재정적 지원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00년대 이후부터 총회 선교부가 직접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청년연합회의 경우 자체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는 일은 점차 총회선교부 사역 속에 흡수되었습니다. 6. 선교지부의 설치, 선교사들의 활동, 선교정책 첫 선교사의 내한과 죽음, 1891년의 제 2진 선교사 5명의 내한, 그리고 초기 소규모의 인적 구성과 내분, 선교사의 사임 혹은 사망 등 여러 어려움이 있었으나 1900년대를 거쳐 가면서 주한 호주선교부의 활동이 정착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그 동안 부산,경남지역은 호주장로교선교부와 미국북장로교 선교부의 공동선교지역이었습니다. 예양협정(禮讓協定)에 따라 양 선교부가 함께 부산과 경남지역에서 사역한 것입니다. 물론 호주선교부는 부산 초량과 부산진 좌청동을 비롯하여 경남 동부지역을, 북장로교 선교부는 지금의 중앙동, 영도를 비롯하여 김해 등 서부지역을 맡습니다만 1901년 이래로 양 선교부 간의 계속적인 대화와 경남지역에서의 선교지역 분담과 재조정이 있어왔습니다. 그러다가 1913년 말에는 미국 북장로교선교부가 부산, 경남지방에서 완전히 철수함으로서 1914년 이후에는 경남지역 전역은 호주 장로교 선교부의 관활 하에 있게 됩니다. 당시 부산과 경상남도의 인구는 약 150만으로 추산되는데, 더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 호주장로교 해외선교부는 1910년 ‘전진운동’(Forward Movement)을 전개하여 1910년에서 1914년 어간에 8명의 남자(목사, 의사) 선교사와 9명의 미혼여선교사를 부산 경남지방에 파송하였습니다. 그동안 호주장로교선교부는 부산진과 초량 등 부산지부(1891) 중심으로 사역했으나 곧 이어 진주(1905), 마산(1911), 통영(1913)과 거창(1913)에 선교지부(Mission Station)를 열었고 이 5개 지부를 중심으로 경남지역 전역에서 사역하였는데, 이들 선교지부의 관활 지역을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부산(진)지부: 초량일원, 동래, 기장, 언양, 울산 양산, 김해, 울릉도, 밀양, 영산, 창녕, 진주지부: 진주일원, 사천, 곤양, 하동, 남해, 삼가, 산천, 의령 마산지부: 마산일원, 함안, 창원, 웅천, 칠원 거창지부: 거창일원, 안의, 함양, 합천, 초계 통영지부: 통영일원, 거제, 고성, 진해, 용남 호주선교부는 이들 5개 지역에서 만이 아니라 평양과 서울에서도 활동했는데, 왕길지(Gelson Engel)선교사는 1906년부터 평양신학교 강사로, 1919년부터 은퇴할 때인 1935년까지는 신학교의 교수로 봉사하였습니다. 평양신학교는 주한 4 선교부의 연합교육기관이었으므로 호주선교부는 왕길지 선교사를 교수로 파송하였던 것입니다. 또 의료선교사인 마라연(Dr Charles McLaren)는 당시 한국에서의 유일한 신경정신과 의사였는데, 1923년부터 1938년까지 세브란스병원과 의전(醫專)에서 진료와 교육을 담당하였습니다. 호주선교부도 사도시대 이후 선교사역의 가장 주요한 전도, 교육, 의료 등 3대 분야에서 활동하였고, 한가지 더하여 자선과 구제 사역을 전개하였습니다. 한국에서 사역하는 동안 네비우스 정책을 존중했고, 순회 게척전도를 중시하였습니다. 전도사역은 목사 선교사들과 미혼 여선교사들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었고, 이 사역은 선교지부를 중심으로 관할지역을 정해 순회전도와 양육, 교회 돌봄, 동사(同事) 혹은 당회장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선교사들은 6개월을 단위로 해 관할지역을 순회하고 양육과 교육, 성례를 담당하였습니다. 호주선교부의 중요한 정책이 교육활동인데, 특히 부녀자와 아동 교육을 강조하였고, 여성교육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 점은 호주 선교부에서 미혼 여성선교사율이 높았기 때문에 부녀자와 아동 등 여성교육을 강조하게 된 것입니다. 해방 전 호주 선교사 총 78명 중 남성은 24명, 선교사 부인 19명을 포함하여 여성은 54명이었습니다. 이중 미혼 여선교사는 35명이었는데 전체 선교사의 60%에 달했습니다. 이런 여선교사 비율은 다른 선교부보다 훨씬 높은 비율이었습니다. 경남지방은 경기 이북지방에 비해 보수적이었음으로 여성교육에 대한 무관심이 더욱 심했습니다. 그래서 여성 교육은 시급했고 이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호주선교부는 각 선교지부에 남, 여 학교를 설립하였는데, 남자학교는 정상 궤도에 오르면 해 지역 교회에 경영권을 넘겨주는 것을 고려했으나 여자학교는 선교부가 운영하도록 했습니다. 특히 호주선교부는 부산의 일신여학교(1895), 진주 시원여학교(1906), 마산 의신여학교(1913), 통영에 진명여학교(1914)를 설립하고 여성교육에 힘썼는데, 일신(日新)여학교는 한강 이남에서 가장 오래된 여자 학교로서 명성을 얻었고, 지금은 동래 여자중고등학교로 존속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통영과 동래에 실업학교(Industrial, Vocational 혹은 Farm school)를 설립하여 가난한자, 장애인, 혹은 불우한 여인들의 생계를 위한 직업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호주선교사들은 근대적 의미의 교육활동, 곧 교육은 특수한 일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교육이 대상이며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는 점, 또 그 교육의 목표는 과거급제나 공직에 나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건실한 사회인, 교양 있는 그리스도인의 인격을 함양하는 것이라는 점을 고양하고 유치원 교육, 여성교육을 중요시하고 또 실용적인 직업교육을 통해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이들에게 삶의 길을 제시한 것은 큰 공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호주선교부의 의료 활동은 타 선교부에 비해 미진하였습니다. 78명의 내한 호주선교사 중에서 목사 선교사는 20명에 달했으나, 의료선교사는 11명에 불과했습니다. 이 중 의사는 4명이었고 간호사는 7명이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호주 장로교회는 다방면의 의료활동을 전개할 만큼 재정적으로 부유하지 못했기 때문에 진주를 의료 활동의 중심지로 삼고 그곳에 배돈(培敦)병원을 설립하였습니다. 이 병원은 경남지방의 유일한 병원으로 이 지방민들에게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 대신 부산과 통영에는 아동 건강관리소(Baby Welfare Center)를 운영하였다. 특히 통영지부에서는 작은 선박을 이용하여 위급한 섬사람들을 진주로 후송하여 치료받도록 배려하였습니다. 호주선교부의 의료 혹은 자선사업 중에서 중요한 한 가지는 부산의 나환자 보호병원(Leprosy Asylum)을 운영한 일었습니이다. 이 일은 1910년부터 시행되었는데, 수용시설의 책임자는 매견시(J. N. MacKenzie) 목사였습니다. 그는 단기간 의학교육을 받았던 목사였고, 후일에는 독학으로 의학 공부를 이수하고 의사자격을 얻기도 했는데, 인간이 당하는 가장 큰 고통을 가슴에 안고 사랑으로 이들을 보살폈습니다. 그의 이러한 기여 때문에 일본 천황과 조선총독으로부터 몇 차례 훈, 표창을 받기도 했고, 귀국 후 1939년에는 호주빅토리아장로교 총회장으로 추대되기도 했습니다. 부산의 일신병원을 설립한 매혜란, 매혜영은 바로 매견시 선교사의 장녀와 차녀입니다. 7. 선교사들의 철수 1939년은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가 데이비스에 의해 시작된 지 50주년이 되는 해 이지만 불행하게도 이 해는 선교사들의 내키지 않는 철수가 시작되었던 해였습니다. 일제의 탄압은 심화되었고, 일제는 대동아권공영권이라는 이름으로 침략 야욕을 드러내고 이 강산에 전운이 감돌았습니다. 한국인들과 서구인들의 접촉이 감시의 대상이 되었고, 호주선교사 유영완(Rev Esmond New)는 영국 간첩이라는 소문과 함께 그는 특별 감시를 받았습니다. 그는 내한하기 전 해군장교로 근무한 바 있었기 때입니이다. 호주선교부에 의해 설립된 유구한 역사를 지닌 진주교회는 일제의 끈질긴 요구와 협박 때문에 “진주교회가 보내는 선언문”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호주선교부를 배척하고 관계를 단절한다는 선언과 함께, 소위 일본적 기독교를 추구하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문서를 발표한 일도 있었습니다. 등사판으로 만든 이 문서는 일제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일제의 한국교회에 대한 탄압 또한 심화되었습니다. 설교는 제한을 받았고, 찬송가 중에서도 일부는 부를 수 없도록 금지되었습니다. 집회도 제한적으로 허용되었고, 배교행위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1940년 9월에 이르러서는 선교는 크게 제한되었습니다. 미국 영사관은 모든 미국인의 철수를 명하였고, 11월 16일에는 미국 정부가 특별히 준비한 마리포사(S. S. Mariposa)호로 미국인 선교사와 자녀들 219명이 한국을 떠났습니다. 호주선교사들에게도 철수가 권장되었고, 어떤 이는 안식년으로 본국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나오지 못했습니다. 1940년 말에는 이미 90%의 외국 선교사들이 다 한국을 떠났습니다. 예견했던 대로 1940년 12월 선교사역의 종말이 왔습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서 태평양 전쟁(대동아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호주선교사들도 다 돌아가고 마지막 5명이 남았는데, 그들이 마라연(Dr McLaren), 예원배 부부(Rev & Mrs Wright), 나례인 부부(Rev & Mrs Lane)였습니다. 이들은 가택연금 되었다가 1942년 6월 2일 일본으로 추방되었고, 일본에서 2개월 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포로교환 형식으로 포르투갈 영 동부 아프리카를 거쳐 호주로 돌아갔습니다. 결국 호주장로교회의 한국선교는 1941년으로 원치 않게도 중단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호주 장로교회의 한국선교에 대한 이 개괄적인 안내가 부산 경남 지역에서의 기독교의 기원을 헤아리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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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18
  • [김성수 총장]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사셨고, 성령으로 인치신 주님께 속하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사회 어떤 조직과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독특한 공동체는 성령의 변화시키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별과 신분, 빈부와 지식, 언어와 종족의 장벽을 넘어 ‘오직 하나님의 은혜’(Sola gratia)라는 수단에 의해서 이곳 저곳에서 불러냄을 받은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고 약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Lordship)과 성령님의 역사하시는 사역 위에 설립되지 않은 “교회”를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오직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이 곳 저 곳에서 불러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라는 말은 원래 ‘불러내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에클레시아(ekklesia)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에클레시아, 즉 모임 또는 회집의 기능과 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모임이 없는 교회를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모여야 합니다. 동서남북으로부터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하고 찬양하며 친교하고 교육받는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더욱 더 돈독하게 키워 나가야 합니다. 모여서 예배하는 일을 등한시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 집단을 교회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모이는 일에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우리는 모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물론 교회는 감염예방준칙을 철저히 지키면서 집단감염의 진원지가 되지 않도록 예방수칙을 준수하는데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마치 교회의 예배가 바이러스 감염의 주범인 것처럼 매도하는 것은 사실과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잘못된 이유를 근거로 예배 모임 자체를 획일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교회가 ‘정치 방역’으로 의심을 받을 수도 있는 정부의 요구에 너무 쉽게 굴복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모이는 교회가 아무리 중요해도 그 모임이 자기 만족과 자기 봉사에만 스스로를 진력해 버리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모이는 교회는 다시금 이웃과 지역사회를 봉사하고 흩어지는 디아스포라(diaspora)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흩어져서 이웃을 봉사하고 지역사회를 섬기는 사회적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는 어두움 속에 헤매고 있는 이웃과 세상을 향해 예수 그리스도안에만 있는 진리의 빛을 비추고, 절망 속에 있는 인간에게 하늘의 소망을 심어주며,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선포하는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오늘날과 같은 장수 시대에는 노인대학을 통해서 지역사회를 봉사하는 사역이 세상을 향하여 기독교신앙을 변증하고 전하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에서의 짧은 사역이후 자신을 비방하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향해 어떤 깊이 있는 신학적 변증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하여 자신의 삶 자체가 어떠했는가를 회상시켜주는 아주 단순한 방법으로 자신을 변호하였습니다. 세상은 더 이상 이론적 논증과 장황한 설교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세상은 여전히 그리스도인의 삶과 생활, 행동에서 나오는 살아있는 설교를 듣고자 하는 귀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더 이상 우리의 율법과 고백을 듣지 않으려고 해도 세상은 여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증거에 주의를 기울이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모이는 교회로서의 에클레시아가 개인적 차원의 구속적 삶에 관심을 둔다면 흩어지는 교회로서의 디아스포라는 사회적 차원의 구속적 삶에 관심을 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보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을 모이는 교인과 흩어지는 제자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교인의 형태와 제자의 형태, 이 둘의 기능과 책무는 어느 하나가 우선될 수 없고 동일한 비중의 중요성과 관심을 가지고 수행되어야 합니다. 모이는 교회와 흩어지는 교회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개인적 차원에서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이웃과 지역사회를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수 십년동안 지역사회를 효과적으로 봉사해 오던 프로그램을 교회의 당회가 주도적으로 폐쇄해 버리고도 전도 프로젝트를 운운하는 교회가 있다면 지탄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한국교회는 그 동안 개인적 차원에서의 신앙은 잘 감당해 왔을지 모르지만 사회적 차원에서의 책무는 잘 감당하지 못해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회가 교회를 보는 눈이 비판적인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모이는 교회가 흩어지는 비전을 가지지 못하면 자기 도취적인 만족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러한 교회는 자기들만의 개교회주의와 같은 형태로 교회의 담을 높이 쌓고 이기적인 신앙으로 폐쇄적인 집단으로 전락하기가 쉽습니다. 이러한 교회는 결코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이아닙니다.교회는 모이는 교회로만 존재할 수도 없고 흩어지는 교회만으로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교회의 참된 모습은 마치 우리의 심장과도 같아서 새로운 피는 생산하여 계속적으로 유기체로 내보내고 더러운 피는 정화하는 역할을 감당해 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참된 역할입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열심히 모여서 모이는 교회를 이룩해야 합니다. 함께 모여서 열심을 다해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양하고 말씀을 배우며 교제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흩어지는 교회로서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지역사회 속에서 제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기적인 자기치장과 자기 만족의 삶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포효하는 사자처럼 세속화의 거센 바람을 집어삼키고 정화시키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인은 많으나 제자가 없고, 모이는 교회는 있으나 흩어지는 교회가 없는 이때에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한 신앙 고백적인 결단과 희생이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절실히 필요합니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현 미국 에 반겔리아 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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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30
  • [안동철 목사]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지난 주 한 편의 시를 읽는데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인데, 이 시의 시작부터가 아주 도발적입니다.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연탄이 우리의 겨울을 따뜻하게 하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겨울이면 연탄가스로 생명을 잃은 사람들의 아픈 이야기가 방송과 신문지상에 끊이지 않았습니다. 잠시 방심하는 사이 연탄이 꺼져 한겨울의 추위를 온몸으로 받아내어야만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시인은 사람들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고 생각되는 연탄재조차도 함부로 차지 말라고 합니다. 그 연탄처럼 누군가를 위해 한 번이라도 뜨겁게 자신을 불사른 사람이 있느냐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더구나 연탄은 마지막 순간까지 겨울 빙판길에 뿌려져서 길을 걷는 사람을 보호하는 사명을 다하였으니 이런 연탄을 함부로 차지 말라고 한 시인의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은 어떻습니까? 이곳저곳에서 내 생각을 따라 함부로 마치 연탄재를 차듯이 사람들을 차댑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절대 틀린 법이 없다는 듯이 말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의 가슴에는 이런 저런 깊은 멍이 들어버렸습니다. 이런 시인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성경의 한 장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죽이려고 돌을 든 사람들이 있는 살벌한 현장입니다. 모두가 그 여인을 벌레처럼 보고 있을 때 주님은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종교적 위선의 탈을 쓴 사람들은 주님의 이 말씀을 듣고는 양심에 가책을 느껴 그 자리를 떠나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떠나간 후 주님은 범죄한 여성을 향해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분노로 가득찬 이 세상의 수많은 복잡한 문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연약한 자를 향해, 그리고 내 생각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일지라도 함부로 연탄재를 차듯이 차지 마십시오. 당신이 그렇게 함부로 차대는 사람이 주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버리시면서까지 찾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마음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으려고 99마리의 양을 산에 두고 떠나는 사랑에 눈먼 하나님의 마음 말입니(마 18:12). 사람들이 대책 없는 사랑이라고 말하는 그 하늘 아버지의 사랑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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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30
  • [조희완 목사] 평안하게 삽시다.(시122:1-9)
    여러분이 만약 죽었다가 잠깐 다시 살아난다고 가정을 할 때,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 것입니까? 사람에 따라서 하는 말들이 다를 수 있을 것인데, 아마 살아생전에 가슴에 한이 맺혔던 말씀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자녀들에게 “제발 예수를 믿어라”고 하실 분도 있을 것이고, “제발 다투지 말고 화목하게 지내라”고 하실 분들도 있을 것이고, “아프지 말고 건강해라”고 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을 때 자기를 따르던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두 번이나 연거푸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요20:19,21) 다른 하실 말씀이 참으로 많으셨을 법한데 평강을 말씀하신 것은 곧, 평소에 예수님께서 가장 원하셨던 것이 바로 평안과 평강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평안은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샬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평안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평안하기를 원하시는지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했습니다.(살후3:16)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우리가 평안을 누리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 날 사람들이 이 소중한 평안을 다 빼앗겨 버리고 불안하고 불편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평안이 가득해야 할 곳에 평안은 사라지고 대신 반목과 다툼과 불협화음이 가득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너무나 흔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평강의 왕이셨던 것처럼, 그 분을 믿는 우리도 평안을 도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영역 중에서 어떤 곳이 평안하기를 힘써야 할까요? 첫째로, 교회가 평안해야 합니다.(시122:6-7) 둘째로, 가정이 평안해야 합니다.(잠17:1, 21:9) 셋째로, 나라가 평안해야 합니다.(딤전2:1-4) 우리 모두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고 평안을 도모하는 자들로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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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8
  • [오성한 목사] 생수의 근원
    예레미야서 1장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부르셨다. 2장부터 25장까지를 12번의 설교로 분류할 수 있다. 26장은 12번의 설교를 마치니 “죽여라”라고 소리친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27장에서 “설교로 부족하구나. 시청각으로 보여 줄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레미야가 나무 멍에를 메고 나갔더니 부러뜨려 버렸다. 그러니 부러뜨릴 수 없는 메고 나가라고 하신다. 28장이다. “쇠 멍에를 메고 나가라”고 하신 것이다. 이제 29장은 “편지를 써서 읽게 하라”고 하신다. 30장부터 33장까지는 약속하시며, 34장부터 52장은 인간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상태임을 상세히 보여 주고 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 때부터 유다가 멸망한 후까지 사역한 선지자이다. 5번째 설교인 13장에서 유다 멸망의 원인을 “교만”이라고 지적을 하고 있다. 베 띠를 바위틈에 감추었다가 다시 가보라고 하신다. 다시 가보니 베 띠가 놀랍게도 완전히 썩어 있었다. 유다의 교만을 이렇게 썩게 하겠다고 하신다. 이때 “교만”이라는 단어를 짧은 구절 속에 4번 사용하신다(렘13장). 유다는 교만으로 인해 망했다. 무엇이 교만인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겠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 교만이다. 예레미야서를 좀 더 설명해 보겠다. 12번의 설교가 2장부터 25장 사이에 있는데 첫 번째 설교가 12번의 설교의 주제라고 볼 수 있다. 첫 설교를 하신 다음 하나님은 반복해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성경은 많은 분량이 있는 것 같지만 단순한 임마누엘의 비밀을 반복하고 있다. 예수라는 말은 구원이라는 말인데, 구원이란 임마누엘이라고 나시기 전에 지어주신 이름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 설교는 예레미야 2장에 기록한다. 2장 13절을 12번의 설교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예레미야서의 핵심이라고 보면 좋다. 두 가지 악을 지적한다. 두 가지 악을 지적하지만, 결국 한가지라고 볼 수 있는데, 생수의 근원을 버리면 인간은 자연히 엉뚱한 웅덩이를 파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생수의 근원인 하나님을 버린다는 것이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라고 하셨다. 생수의 근원을 버려선 안 된다. 생수의 근원을 버린 것이 “교만”이라고 계속 지적하신다. 생수의 근원 되신 예수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버리지 않을 수 있는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에게 성취해 주신 모든 것을 믿음으로 그대로 믿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찾아오셔서 약속해 주시고 이미 이루신 것을 믿기만 하면 된다(렘11장). 이 약속을 깨뜨리게 되면, 바알을 섬기게 된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찾아오셨다. 세상을 사랑하셔서 오셨다. 누구든지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다른 것을 더 할 필요가 없다. 믿으면 된다. 약속을 잡으면 된다. 예수를 믿는 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면 된다. 내가 무엇을 더 하려고 하는 것은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터진 웅덩이를 파는 것과 같다. 무조건 십자가의 은혜를 믿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의 약속을 깨뜨리지 않는 방법은 믿음이다. 내가 믿어 드리면 된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4) 나는 말을 바꾸었다. “하나님 저는 생수의 강이 내 안에 있음을 믿습니다. 주님이 주신 생수의 강이 오늘도 흘러넘칩니다. 저는 생수를 마십니다. 정말 시원합니다.”라고 날마다 고백하며 산다. 또 나에게도 말한다. “성한아, 너는 샘물을 가진 놈이란다. 너는 오늘도 생수의 강이 흘러넘친단다. 너는 성령의 사람이란다. 성한아,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란다”라고 수십 번도 더 말해 주고 선포해 주며 행복해한다. 감격이 일어난다. 춤이 춰진다. 나 같은 자를 사랑해 주신 신랑이 좋다. 나의 사랑 신랑을 생각하면 자주 눈물이 난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신랑에게 감격을 눈물을 보이는 것을 아끼지 않는다. 나에게 늘 감격의 눈물이 있다. 지금도 나는 눈물을 흘리며 이 고백을 하고 있다. 왜 이렇게 눈물이 많은지, 눈물과 함께 콧물도 흐른다. 호주머니에도, 성경책에도 휴지를 늘 넣고 다닌다. 휴지가 없는 날은 곤란할 때가 많다. 옷마다 휴지가 많이 들어 있는 이유가 있다. 이렇게 감격으로 산다. 감사하다. 정말 감사하다.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나는 많이 울었다. 지금도 운다. 지금도 눈물이 흘러내려 뺨을 타고 떨어진다. 흐느껴 감격하며, 감사하며, 자주 우는 것이 습관이 된 것 같다. 내 사랑, 나의 신랑에게 감사하다. 내 안에는 사랑의 시가 있다. 당신의 언어로 충만함을 깨워라. “나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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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8
  • [박봉석 목사] 은메달 예찬
    약 한 달 전에 코로나로 어수선한 가운데서도 지구촌의 잔치인 도쿄 올림픽이 개최되어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약 2주 동안 매스컴에서는 올림픽 기사가 계속 올라왔습니다. 필자는 금메달을 딴 선수의 기사보다 4위를 한 여자배구대표팀과 다이빙의 우하람 선수의 기사를 유심히 봤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노력을 칭송하는 기사에 흐뭇해했습니다. 사실 올림픽 때만 되면 필자는 매스컴에 불만을 가졌습니다. 왜냐하면 매스컴이 대부분 주목하는 것은 금메달이었기 때문입니다. 금메달을 딴 것에 대해서만 특종 기사로 다루고 신문도 대서특필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도 역시 금메달에만 주목합니다. 그러나 금메달을 딴 사람만이 아니라 은메달, 동메달을 딴 사람 또한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땀과 피를 흘리고 수고를 했을까요? 아니 아예 메달을 따지 못한 사람 또한 그들이 흘린 땀과 피는 금메달을 딴 사람보다 오히려 더 많은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그런 과정보다 결과에만 집중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참 좋으신 분이신 것은 하나님은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달란트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다섯 달란트를 받아서 다섯 달란트 남긴 종에게나, 두 달란트 받아서 두 달란트 남긴 종에게 똑같이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칭찬하며 상급을 선포하신 것은 하나님은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맡긴 만큼 얼마나 최선을 다해서 충성했느냐 그 과정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교회를 섬기는 우리도 결과 지상주의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결과보다 하나님이 맡기시는 일에 최선을 다해 충성하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숙한 교회를 이루어 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결과 때문에 실망하고 실족하는 일이 없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충성이란 결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과정으로 판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달란트 비유에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성경에는 2등의 중요성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모세에게 아론은 2등이었습니다. 다윗에게 요나단은 2등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바나바는 2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2등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일이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 1등이 못하는 일을 2등이 잘 감당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1등이 아니어도 묵묵히 충성하는 2등을 기뻐하시고 쓰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바나바는 그 2등의 사명을 정말 훌륭히 감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 처음에는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의 이름을 거명할 때에 늘 “바나바와 바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항상 바나바의 기사를 먼저 기록하고, 뒤에 바울의 기사를 기록하고 있음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바나바와 바울의 순서가 바뀌기 시작합니다. 어느 시점부터는 “바울과 바나바”로 기록이 되고, 또한 바울이 중요하게 부각되어서 사도행전이 기록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제 복음과 선교사역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나바가 그에 대해서 불평과 원망을 한 흔적이 성경에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묵묵하게 바울을 조력하는 자로서 훌륭하게 자신의 사역을 감당하는 모습을 사도행전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때가 되어서 바울을 전면에 내세워서 선교사역을 이루어 가시려는 주님의 뜻을 알고 거기에 철저히 순종하며 자신이 감추어지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그렇게 숭고한 신앙과 인격을 지닌 훌륭한 2등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은메달리스트였습니다. 하늘에서는 그 누구보다 찬란한 금메달을 받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금메달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은메달 또한 중요합니다. 사람들 앞에 칭송받는 1등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2등이 되십시오. 주님의 일을 하면서 결코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내게 주신 재능과 은사를 따라 최선을 다해 충성하는 은메달리스트들이 되십시오. 그런 사람이 결국에는 저 하늘의 금메달리스트들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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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8
  • [김성수 총장] 밤은 어둡고 깊어만 가는데. . .
    세월이 참 빠르게 지나갑니다. 한 해를 시작한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가을을 맞고 있습니다. 한 해를 시작할 때마다 무언가 달라지겠지 하는 기대와 소망으로 시작하지만 실망과 후회로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하는 것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오늘날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이제는 새로운 기대와 소망을 가지는 것 자체가 사물을 잘못 보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까지 갖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과 과학기술의 발달이 인류를 새로운 유토피아로 인도해 줄 것으로 기대하면서 진보 그 자체에 대한 신앙도 가졌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욱 방황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발달과 문명의 진보가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해 준 점도 많이 있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인류 전체가 멸망하게 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조성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인간은 스스로가 발전시킨 과학기술 앞에 벌벌 떨고 있는 무력한 모습을 보이며, 자기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현대인은 과학과 과학기술이라는 새로운 우상 앞에 노예가 되어 꼼짝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인간의 이러한 지식과 기술이 인간의 삶의 질과 가치를 고양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저급한 욕구 충족과 도덕과 윤리의 퇴폐적 생활로 끊임없이 인도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찍이 자연주의 철학자 루소(J.J. Rousseau)는 드죵의 현상 논문을 통해서 인간의 과학과 문화의 발전이 인간 사회를 도덕적으로 고양시키기보다는 오히려 타락하게 만든다고 주장하면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갈파하였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확실히 어두움을 향해서 계속해서 질주해 가고 있습니다. 청소년의 일탈 행동은 갈수록 폭력과 퇴폐성으로 얼룩지고 있고, 기성사회는 정신적인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언론을 통해서 보도되는 모든 사회적 현상들은 희망보다는 실망과 좌절감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도무지 소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시대상을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주의 날이 임박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언제 주의 날이 우리에게 임하도록 계획되어 있는지 말하지 않지만 주의 날에 관해서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 날이 밤에 도적같이 임할 것이라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이 진술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주의 날이 해가 떠 있는 낮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캄캄한 밤에 올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밤에 올 것이라고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고 있지만 그것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님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영적으로 어두운 밤에 재림할 것이라는 사실을 바울은 밤에 임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아무리 과학의 빛이 찬란하게 빛난다고 할지라도 도덕적, 영적인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의 삶은 더욱 더 어두운 밤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점점 더해져 가는 어두움이 시야를 가리우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죄와 불의가 점점 더 깊어 가는 흑암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습니다. 주님은 영적인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가 밤 12시를 치기까지 기다리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주님은 모든 빛들이 꺼지고 죄악이 극도로 관영할 때까지 인내하면서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의 저녁 시간즈음에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두움이 점점 더 깊어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알리는 시계가 밤 12시를 알리기까지 얼마 남아있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세상의 쾌락을 추구하는 모든 장소들, 극장과 술집, 환락가들이 사람들로 가득 차 붐비고, 인간이 만든 조명들이 찬란하게 빛날 그 때에, 사람들이 자신들이 이룩한 과학 기술 문명의 발전을 스스로 찬양하면서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말하고 있을 바로 그 때에 주님은 홀연히 재림하실 것입니다.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주의 날(DAY of the Lord)이 밤(Night)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 얼마나 놀라운 대조인가!! 하늘과 땅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위대한 날에, 어두움이 흑암을 뒤덮고 있을 그 때에 하나님은 “빛이 있어라!”고 다시 말씀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그 날에는 밤이 낮이 될 것입니다. 이제 이 날은 다시는 밤이 찾아오지 않는 영원한 낮이 될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다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뒤덮지 못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이 주의 날은 캄캄한 밤에 빛과 같이 오게 된다고 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빛은 어두운 모든 구석을 다 비추며, 어두운 구석에 감추어져 있던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드러나도록 만들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을 정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진솔한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나의 가정과 나의 마음의 모든 구석이 어두움이 없이 낮의 광명한 빛이 찬란하게 비치고 있는가? 우리가 악의 장막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아직도 이 악의 장막에 속하고 있지는 않는가? 언약의 물로 씻음 받기는 했지만 아직도 여전히 어두움의 자녀로 남아있지는 않는가? 밤은 어둡고 깊어만 가는데 우리 주님의 은혜의 빛이 나의 삶에 드리워져 있는 죄악의 어두움을 대항해 싸워서 그 어두움을 깨뜨리도록 살지 못한다면 우리에게 화가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어두운 시대에 빛의 자녀들로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을 소원합니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에반겔리아 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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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8
  • [최호숙 목사] 교만과 겸손의 상관관계
    겸손(謙遜)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낮추는 태도가 있음을 겸손이라고 한다. 유교의 경전 중 하나인 “주역(周易)”에서는 겸손을 “지산겸(地山謙)으로 풀고 있다. 이 의미는 산이 땅 위에 있어야 마땅하지만 땅 아래에 산이 겸손하게 엎드려 있음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사람으로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갖추고 있고, 세상적으로 잘난 사람이지만 못난 사람 밑에서 섬기며 사는 삶을 말한다. 겸손에 대한 헬라어 표현이 다양하지만 그중에 ‘타페이노프로쉬네’는 우리 속에 일어나는 감정을 억제하며 짓누르며 낮은 자세로 임하는 상태를 말한다. 구약 히브리어로 ‘겸손’이란 단어는 ‘아나브’이다. 이 단어의 뜻은 ‘응답하다’란 단어 ‘아나’에서 ‘아나브’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적 겸손은 우리 속에 일어나는 사악한 감정을 억누르고 주님이 부르실 때 응답하는 그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다.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가 아는 모세는 무능력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다혈질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아나브’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세상적 개념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관적인 판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반응하는 사람이었기에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이다. 바그완 슈리 라즈니쉬(Bhagwan Shree Rajneesh)는 “겸손은 신이 사람에게 내린 최고의 덕이다.”고 하였다. 장수를 구분하면 용장(勇將)보다 지장(智將)이 낫고, 지장보다는 덕장(德將)이 위대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겸손을 소유한 덕장으로 산다는 것은 위대한 것이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교만과 겸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아간다. 내 속에 교만이 있음에도 교만인지를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 참다운 겸손은 인간의 의도적 행위에서 분출되는 것이 아니라 겸손의 주체이신 주님이 내 안에 계셔서 나를 통제 해야 참다운 겸손을 이룰 수가 있다. 인위적 겸손인지 판단해 보면 “저는 미천합니다.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는 말속에 “자신의 자아와 자기 높임”이 숨어 있다면 그것은 교만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나은 달란트가 있고 장점을 발견하여 자신이 원하는 자아가 충족되지 못할 때 나오는 열등감이 교만의 극치가 될 수 있다. 타인의 뛰어남을 못마땅하게 여겨 비판하고 그 사람의 단점을 발견하여 깎아내리며 질투하는 것도 교만의 일종이다. 또한 자신의 결점이 드러나지 않으려고 보호하기 위해 변명하고 합리화하는 행위도 교만에 속한다. 이러한 내면적 모습들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을 원치 않고 두려워하여 자신의 마음 문을 열지 않는 폐쇄적인 상태도 교만이라 할 수 있다. 겸손의 주체이신 주님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자는 교만한 자요, 온유하신 주님께 배워 통제를 받으면 겸손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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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26
  • [박무열 목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자
    몇 일전 아는 지인 목사님이 교회에 방문하셨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어가다가 목사님 어떻게 하면 목사님처럼 후원을 받을 수 있는지 방법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다. 순간 생각이 멈춰지며 할 말을 잊어 버렸다. 내가 하는 말을 다 들으시며 내가 행동하는 모든 것을 달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목사님의 신앙의 자리가 어떠했는가를 먼저 성찰함이 선행되어져야 한다. 무엇을 구하기 전에 내 마음과 삶을 온전히 드리기를 먼저 배워야 한다. 나를 드리는 것이 믿음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살아 있는 예배다. 교회에 다니는 것은 하나님으로 부터 서비스를 받으려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나의 필요를 공급받고 삶의 위로를 얻기 위함도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이나 환경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세상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만 무릎 꿇는 인생을 원하신다. “기도 외에는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 믿음으로 기도하고 인내하면 하나님의 때에 아름답게 이루어주시는 만남의 복을 허락하시고 그 만남을 통하여서 기도하고 간구한 일들을 이루게 하신다. 모든 일에는 준비 과정이 있고 또한 일정한 시간과 땀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그 과정이 믿음의 기도요, 인내의 수고인 것이다. 우리는 수고와 인내의 시간이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것이 세상 이치이듯이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이다. 나는 목사님에게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도하시면 됩니다. 서로가 사는 삶의 환경과 각자의 받은 은사가 다르기 때문에 자기에게 맞는 옷을 입으려고 노력해야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데칼코마니”는 아니기 때문이다. 내게 주신 은혜와 그분 목사님에게 주시고자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분명코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왜 남의 옷을 빌려 자기의 옷으로 살려고 하는가. “아닌 것 아닌 거여, 자꾸 거시기하려고 하는 가” 정말 답답하다. 말씀 따라 가면 인생길이 시온의 대로와 같이 분명하게 펼쳐 보일 것이다. 자기를 드리지 않고서는 좋은 인생의 결과물을 얻을 수 없다. 소금이 맛을 내려면 녹아져야 하고 촛불은 자신의 녹여 불사를 때에 어두움을 물리치고 밝음을 드러내는 것처럼 하나님은 나의 희생과 헌신과 사랑이 끝까지 순수하기를 원하신다. 희생하고 헌신하면서 내게 돌아올 보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라. 오늘을 희생하고 내일을 보장받자. 고인 물은 흘러내야 흘러들어온다. 계산적인 인생이 되지 말라. 왜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고 매사에 부정적이고 습관적인 불평을 쏟아 내는가? 그것은 자신이 희생과 헌신 없이 계산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반증이다. 가끔 힘든 현실이 펼쳐져도, 삶을 되돌아보면 죄와 허물이 많은 내게 하나님의 은혜는 늘 생각보다 풍성했다. 삶에 위기도 있었지만 그 이상의 위로가 있었음을 생각하며 범사에 감사하며 희생적인 삶을 새롭게 다짐한다. 코로나19로 비대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도울 동역자를 보내주셔서 마을에 섬김과 복음을 전하는 귀한 사역을 창원 산성교회를 통하여 토요일에 실시했다. 정말 곰팡이가 가득 피어있는 벽지를 교체하고 희미한 전등을 LED 등으로 교체와 동시에 낡은 전선을 교체하며 주변을 정리하는 성도님들의 수고와 한 영혼을 사랑해서 선물 꾸러미를 준비하여 호우주의보가 내려져 장대비가 내리는데 온몸을 비에 젖으면서 가가호호 방문하여 주의 복음을 전하는 성도의 열정이 주민들의 마음을 녹이며 연신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어르신의 눈가에 맺힌 이슬을 바라보게 되니 거저 감사할 뿐이다. 부족한 종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렇게 천사들을 보내 주셔서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니 감사할 뿐이다. 주일날 담임목사님과 선교팀들이 함께 예배를 드리고 전도하여 4명의 주민이 예배에 참석하는 은혜의 시간을 가졌다. 저들이 돌아간 후의 텅 빈 예배당에 홀로 앉아 십자가를 바라본다. 밀물처럼 왔다가 설 물처럼 빠져나가고 오직 하나님과 대면해 있는 내 모습은 언제나 코람데오..... 주님. 부족한 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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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26
  • [이정희 목사] 장례용어에 대한 문제 제기
    I. 김중은 교수의 성경본문에서 보는 장묘문화와 결론(4) 1. 구약 성경에서 보는 장묘문화 구약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을 대 전제로 하고 있다.(창3:19). 이런 전제하에 구약 성경에는 두 집단의 장례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첫째는 족장들의 장례에 관한 것이고(창25:8-10; 35:29; 49;29-32 등),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의 장례에 관한 것이다(왕상14:31; 16:28등). 또한 모세 율법에서 시체는 부정한 것으로 규정되었으며(레22:4; 민9:6-7,10; 민19:11-22 참조), 대제사장을 비롯한 제사장들은 시체에 접촉해서는 안 된다(레21:1, 11 이하)고 규정하고 있다. 2. 무덤의 종류 1) 가족묘: 아브라함의 가족묘인 헤브론의 막벨라 굴은 자연 동혈을 이용한 것으로서 중기 청동기 시대의 무덤양식이다. 또한 기드온(삿8:32), 삼손(삿16:31), 아사헬(삼하2:32), 아히도벨(삼하17:23), 기스(삼하21:14) 등의 가족묘(왕상13:22 참조)가 언급되고 있다. 2) 일반 평민의 묘: 평민들은 주로 평지에 토장했다. 예루살렘의 경우는 주로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공동묘지에 매장한(왕하23:6; 렘26:23; 쿰란의 경우 등 참조)것으로 나온다. 3)왕들의 묘: 주로 수도 성읍 안에(유다의 경우: 왕상2:10; 11:43 등; 이스라엘의 경우: 왕상16:6, 28; 22:37; 왕하10:35등; 비교, 대하 16:14; 21:20; 24:25; 28:27; 느3:16; 행2:29 등)묘실을 두었다 . 3. 무덤의 위치: 일반적으로 거주지 밖에 있었다. 예를 들면, 동굴(창23), 나무 밑(창35:8, 상수리나무 아래; 삼상 31:13, 에셀나무 아래)을 사용했으며, 성읍 내, 평지 밭(수24:30, 32), 집터 아래(삼상25:1)등에 두었다. 이사야는 바위에 새 무덤을 파놓은 셉나를 경고했는데(사22:16) 이는 장소보다는 화려한 무덤을 판 것을 책망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예수님의 무덤은 골고다 근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정원에 파 놓은 묘실이었는데(마27:60; 요19:41; 20:5, 입구는 돌을 굴려 닫는 식이었고(막15:46), 시신을 안치하는 석상(시신 대)을 설치(막16:5-6; 요20:12 등)한 것을 볼 수 있다. 4. 장례식: 죽은 자의 눈을 아들이 손으로 감겨 준(창46:4) 경우를 볼 수 있고, 야곱과 요셉의 경우는 애굽식의 미이라(창 50:1-14; 50:26)장례였으나, 나중에 야곱은 막벨라에 묻혔고, 요셉(수24:32)과 라헬(창35:20)은 각기 다른 곳에 묻혔다. 시신은 일종의 들 것 상여에 실어서 무덤으로 운반했고(삼하3:31;눅7:12),수의는 로마시대부터 사용되었기 때문에(마27:59; 요11:44; 19:40 등) 그 이전에는 평상복을 입혔다. 묘비의 경우는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석을 세운(창35:20)일과 압살롬이 죽기 전에 자신의 기념비를 세운(삼하18:18)것이나 웃시야 왕의 돌로 된 뼈 상자나 셉나의 바위 묘실에 피장자의 이름을 새기고“열지 말라”는 경고문이 새겨져있는 것 등으로 볼 수 있다. 애곡하는 일은, 가족이나 특히 여자들과 전문 애곡인이 동원 되었다(암5:16-17; 렘9:17-22 등). 또한“키나”(3+2)율에 따른 애가(조가)를 불렀다(삼하1:19-27; 3:33이하; 대하35:24-25). 애곡기간은 30일(신34:8), 7일간(삼상31:13) 등이었고, 옷을 찢음(창37:34, 상복 착용(왕하6:30), 두건과 신발 벋음(겔24:17), 수염을 가림(겔24:17), 얼굴을 가림(삼하19:5), 머리에 흙먼지를 뿌림(수7:6), 머리털과 수염을 깎음(암8:10), 자해(렘16:6), 칠일 금식(삼상31:13)을 하기도 하고, 상가 음식(렘16:7)을 따로 하기도 했다. 구약시대의 장례식은 가능한 한 임종 당일에 행해졌고, 특별한 매장 준비는 없어 보인다. 범죄자도 처형 후 장례를 허락했다. 또한 매장되지 못하는 것은 저주받은 것으로 여겼다(신28:26; 왕상21:23이하; 사34:3; 66:24; 렘7:33 등). 신약시대의 장례식은 시신을 씻었고(행9:37), 예수님의 시신은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싸고, 기름과 향유를 발랐다(요19:39이하; 눅23:52-56 등). 일반적으로 관을 사용하지는 않았고, 입관은 애굽 풍속이다(창50:26). 하지만 팔레스틴에서(특히 페니키아 지역)에서는 석관이 사용했고, 불레셋 지역은 사람 형태의 토관을 사용했으며, 어린이의 시신은 옹관묘에 매장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부터 점차 시신을 관에 넣은 경우가 증가하며, 대략 1년 후 살이 내리면 유골을 모아 석기 골함에 넣어 보관했다. II. 중략하고 맺는 말 이상의 내용은 김중은 교수의 견해를 소개하면서 약간의 수정 보완을 한 것이다. 여기까지의 내용을 보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장묘문화는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인다. 이에 대해 필자는 지난 주간 장례예식에 대한 내용을 집필한 어떤 신학대학의 예배학 교수에게 이에 대한 견해를 물었더니 역시 동일한 내용으로 대답했다. 이는 앞으로도 좀 더 논하면서 독자 제위와 함께 나름대로의 결론을 맺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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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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