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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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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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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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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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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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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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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박동철 장로] 이승만의 기독신앙과 제임스게일 선교사 이야기
    영화 건국전쟁에서 이어지는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재조명이 더욱 확산되고 있다. 그동안 정치적 공과(功過)가 무시되고 독재 부정선거의 역사에 매몰되어 왔다. 이로 인해 건국의 역사까지 국민담론애서 우왕좌왕해 왔다. 이제 정확한 역사 이해를 위한 국민정서가 확산되면서 이승만 기념관 건립 또한 추진되고 있어 고무적인 일이다. 물론 반대적 의견도 있겠지만 나라 최고 지도자에 대한 정확한 역사이해를 통해 나라의 미래 그리고 비전을 세워나가는 일이야말로 중요한 일이다. 필자는 2024년 10월을 맞으면서 특히 이승만의 기독신앙에 깊은 관계성을 품고 있는 제임스 게일 선교사 이야기를 함께 풀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겨난다. 역사 기록을 읽고 종합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서 태어난 출생기록을 두고 있다. 어릴 때 한성부로 이주한 이승만은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한학으로 과거급제의 꿈을 꾸고 살았다. 망해가는 조선의 역사격동기에 과거등급의 기회가 없었다. 20세 때 아펜젤러 선교사가 세운 배제학당에 입학한게 큰 역사의 반전이다. 한때 신학문에 불만을 가지기도 했다. 영어에 탐닉하면서 서구 신학문에 앞서나갔다. 이때 무능한 조선 왕정에 저항감을 품고 여러 주장으로 주목을 받았다. 당대 선각자 이상재 선생을 따르며 나중에 입헌군주제의 만민공동회 운동에 참여하면서 체포돼 한성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이때 제임스 게일선교사와 운명적 만남으로 국가 최고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 첫걸음이 된다. 이승만은 영양대군 16대손의 전주 이씨인데도 조선의 썩은 왕조로서는 나라가 망할 것을 예언하고 강한 진보적 주장을 쏟아냈다. 1895년 배제학당을 졸업하고 민주공화정 이념의 만민공동회 적극 활동으로 1898년 한성감옥에 수감된다. 여러 동지들과 한성감옥에 있는 동안 게일선교사의 복음 활동이 왕성했다. 게일선교사는 기라성 같은 미래 지도자들을 모두 감옥에서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주로 출옥과 함께 연못골교회 지금의 연동교회 교인으로 동록케 했다. 이승만은 늦게 1904년 러일전쟁과 함께 출옥하기까지 게일선교사와 깊은 교분을 가졌다. 옥중에서 함께 기도하면서 사실상 이승만과 사역을 함께했다. 옥중 진리학교 옥중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게일선교사는 1863년 캐나다서 출생 1884년 토론토대학 입학하여 학생으로서 1888년2월15일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부산에 들어온다. 곧 황해도까지 가서 선교역사의 소래마을에서 서상윤, 이창직과 함께 조선어 공부를 하면서 한글 한국역사문화에 매료되어버린다. 인문학 천재의 기질에 따라 게일은 한국인보다 한글을 더 사랑하고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욱 사랑하는 선교사가 되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한글로 번역하고 구운몽을 영어로 번역하는 등 조선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데 온몸을 던졌다. 게일은 옥중 이승만을 주목했다. 거장은 거장을 알아봤다. 장차 조선을 이끌 지도자가 될 것을 예상하고 1904년 이승만이 출옥하자 미국 유학을 권했다. 이승만 또한 인문학 천재 게일선교사를 멘토로 하여 미국유학을 알선하도록 했다. 이승만이 워싱턴대학 하버드 대학 유학길을 터주고 현지 학자금지원 받을 수 있는데도 도움을 줬다. 이승만이 미국서 유학중 게일과 편지소통을 계속 했다. 그리고 1910년 귀국 후 이승만이 YMCA에 일할 수 있도록 게일선교사가 주선을 하기도 했다. 청년 이승만이 조선말 격동기 그리고 일정시기 독립운동에 참여하는데 게일선교사가 밑자락을 깔았다. 중요한 것은 이승만이 성령을 받고 회심하고 기독교 청도교 정신으로 대한민국 건국의 자리를 깔아나가는데 제임스 게일 선교사의 풍성한 이야기가 있다. 게일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칼빈주의 복음훈련을 받은 선교사였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건국이념을 깔아내는데 하나님의 대역을 했던 것이다. 10월7일부터 창원문화원에서 경남바른가치수호연합회 주최 이승만 사진전이 열린다. 이승만의 역사 특강행사도 열린다. 그리고 오는 10월9일은 578돌 한글날이다. 이승만과 게일선교사의 위대한 복음역사를 알게하는 하나님의 시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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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30
  • [박동철 장로] 한라에서 백두까지,백두에서 땅끝까지
    2024년9월8일 오후. 부산해운대 한국 최대 광활한 백사장에는 일찍부터 인파가 몰리기 시작했다. 2024년 9.8 해운대성령대집회현장. 가을 날씨의 계절을 잊은 듯 35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이 계속됐다. 마침 성령의 바람이듯 먼 바다에서 파도를 타고 불어오는 옅은 바람이 백사장 집회를 견딜만하게 했다. 10킬로에 가까운 먼 거리 군데군데 설치된 대형 영상이 현장감 있게 찬양의 열기를 끌어올렸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백두에서 땅끝까지’ 슬로건을 실감하듯 탄성과 외침 부르짖음, 기도의 열기가 초입부터 온 땅을 뒤덮었다. 한반도 복음화의 초석이 되었던 1907년 평양 대부흥의 현장이 오버랩 되며 점차 찬양과 기도가 뜨거워졌다. 이 땅의 우상은 무너지고 주님만 높이는 나라 되게 하소서. 대집회가 열릴 때 마다 주최 측은 마음이 졸인다. 과연 10만 명이 모여들 것인가? 예배의 시작시간 광활했던 백사장은 인파로 뒤덮였다. 부산광역시 1800여 교회가 참여하고 부·울·경 교회들이 함께하면서 인파의 열기, 기도의 열기, 감동의 시간 시간들로 이어졌다. 예람워십과 제이어스 오프닝 찬양과 부산 18000교회 연합찬양으로 뜨거운 찬양의 시간이 끝나고 말씀선포의 시간. 분당 우리교회 이찬수 목사님의 ‘너희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제하의 설교가 이어지는 시간 10만 성도들은 숨소리 죽이고 광야가 조용해졌다. 말씀 선포의 권능이 한라에서 파도처럼 일어나 해운대 앞바다를 밀려와 일어나는듯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주님향한 처음 사랑을 잊어버리는것’이라고 강조했다. 회개의 기도가 터지고 일제히 모래밭에 무릎을 꿇었다. 회심의 탄성이 터지고 다시 대한민국 부흥의 소망을 외쳤다. 이어서 제주 성안교회 류정길목사님의 '흐름이 바뀌다'제하의 설교에서 ‘우리가 죄에서 회개하고 주님 앞으로 돌아가자’고 외치고 ‘영적 어둠의 시대를 끝내고 새시대를 열어간 사무엘처럼 다음세대를 일으키자’고 외쳤다. 해운대성령대집회는 10년 전 2014년 개최된 후 두 번째 큰 집회로 열린 대회이다. 부산성시화본부(이사장 이규현 목사, 본부장 박남규 목사)가 주최하고 부산지역과 경남 울산지역 교회들이 적극 참여한 이번 대집회는 1907년 평양대부흥회를 이어간다. 이날은 날로 위축되고 있는 오늘의 한국교회를 살리고 이어 복음통일을 위한 불쏘시개가 되길 선포한 날이다. 이날 말씀을 통해서 선언문을 통해서 한국교회의 하나 됨을 선언하고 복음통일의 완성을 이어가자는 대선포의 장이었다. 3시간여 진행된 시간 속에 다섯 번 뜨거운 기도의 물결 속에서 어둠이 내려앉아도 10만 성도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이것이 성령님의 역동이었다. 드디어 마지막 온성도가 함께한 ‘9.8 해운대 선언’과 ‘7가지 약속’이 선포됐다. 전문을 다 할 수 없지만 소개하고자한다. 우리는 한국교회와 민족죄악을 회개하며 진정한 변화와 부흥만이 회복임을 천명한다. 지난 1907년 평양대부흥의 은혜를 잊고 한국교회는 세속화했으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망각했다. 진정한 변화를 통해 우리는 하나가 되어 한국교회가 통일시대를 대비하는 우리 모두 한국교회가 되길 선언한다. 2024년 9월8일 해운대를 뜨겁게 달군 이날 대성령집회는 거룩한 한국교회 기도의 방파제가 되어 나아가길 이날 선언문에 담았다. 한나절 대집회가 무슨 힘이 날까. 아니다. 이제 저 옛날 미스바 광장의 기도가 이스라엘 미래를 꿈꾸었듯이 이제 성경대로 더욱 성숙하는 한국사회를 이끄는 시작이 될 것이 분명함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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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9
  • [박동철 장로] 손원일 선교센터 후원회 1박2일 수련회 참가기
    지난 8월 20일부터 1박 2일 일정으로 진해 손원일선교센터 후원자 비전트립 행사가 있었다. 우리 지역 경남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이창교 목사를 비롯 임원 목사 장로들과 후원자 관계자 등 40여명이 참석, 해군관리 휴양소 진해 저도에서 일정을 가졌다. 첫날 오후 진해 제황산 아래 새롭게 단장한 손원일선교센터를 방문 역사관을 둘러보고 센터사역목표인 소그룹리더양성의 생활관도 함께 보았다. 손원일선교센터는 광복 후 곧이어 해군을 창설하고 군 복음화를 제도화한 손원일 제독의 선교정신을 이어가기위해 태동했다. 지난 74년 해군 장교 군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옥포 다락방이란 공간을 마련 예배로 시작된 연대기가 오늘의 손원일선교센터이다. 손원일 제독을 두고 군 복음화 공로를 어떻게 말해야할까. 이후 국방장관까지 역임한 손원일은 아버지 손정도 목사(서울정동교회 담임, 항일독립운동 참여,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역임)의 나라 사랑과 하나님 사랑의 강력한 복음정신에 기인한다. 기독 사명자 손정도 목사·손원일 장로 부자는 광복 전·후 격동의 시대 믿음의 사람으로 교회와 애국에 온몸을 던진 선각자들이다. 손원일선교센터는 그동안 열정으로 군 복음화를 위해 김덕수 예비역 소장을 중심으로 크리스찬 믿음의 형제들이 개인이 출연하고 모금 운동을 통해 많은 교회들이 동참해서 오늘까지 이어왔다. 재단법인 손원일선교재단이 서울에서 운영되면서 서울의 유수 교회들이 참여하는등 3년여 동안 선교센터를 완공하는데 함께 땀을 흘렸다. 이제 완공 운영에 들어간 손원일선교센터는 바다에 떠있는 함정과 잠수정에서 예배를 인도할 리더를 양성하는데 사역의 목표를 두고 있다. 200개함정에 500명의 소그룹리더 파송자를 양성해내자는데 분명한 목표를 두고 있다. 그동안 선교센터를 완공하는데 거액을 헌금한 최영수 장로(주식회사 크레텍 회장)를 비롯 기도와 헌신하신 지역의 후원자들을 위해 이번 수련회를 갖게 된 것이다. 일행들은 첫날오후 해군기지를 방문 군함과 잠수정을 견학했다. 현장을 돌아보면서 장병들의 나라지킴을 위한 헌신이 대견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저 넓은 바다 위 비좁은 함정공간에서 영육의 고독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은 복음정신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 뿐이다. 참여자 모두 무거운 마음으로 함정견학을 마치고 저도휴양기지에 입도했다. 주변 환경을 돌아본 후 저녁 세미나를 가졌다. 첫날 피로도 잊고 모든분들이 손원일선교센터 운영을 위해 의견을 쏟아냈다. 이제부터 많은 교회가 연합하고 성도들이 군 복음화의 사명을 깨닫는다면 더욱 선교센터는 복음의 열정으로 가득찰 것이다. 선교센터 완공과 함께 숙식을 원하는 군 지휘관리더들이 늘고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이들이 생활관에서 숙식하면서 일정기간 리더교육을 받고 함정으로 파송된다. 이후 함정에서 예배를 인도할 때도 복음을 위한 기도와 후원이 필요하다. 이제부터 더욱 열정으로 해군 복음화에 사명을 받은 선교센터로서 빛을 발해야할 때임을 강하게 느꼈다. 또한 지역에서 손원일선교센터를 일정 개방하여 다음세대 청소년들의 기독교 세계관을 체험할 수 있는 기능도 살려야할 것이다. 손원일은 신앙인이자 6.25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위인이기도하다. 그래서 창원특례시도 선교센터 주변도로를 ‘손원일도로’로 명기하는 일도 검토되고 있다.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는 말씀을 깨닫는 유익한 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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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2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 하느님인가, 하나님인가?(1)
    I. 서언(序言) 어떤 용어이든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말들의 유래는 한자이거나 이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것이다. 이는 우리 기독교 용어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용어는 원래 구약은 히브리어, 신약은 헬라어로 되어 있었지만, 이를 각국의 언어로 번역하였고, 우리 한국교회의 용어는 주로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영어권 용어들이 많다. 또한 이를 전통적인 한자로 번역하다 보니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기독교 용어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용어들이 신학적으로나 한글의 문법적으로 적절하지 않은 경우들도 많다. 이런 이유로 때로는 그 적절성을 두고 논란이 일어나는 경우들도 많다. 그중의 하나가 지난 호에서 언급한 귀신 신(神)자였고, 또 이번 호에서 논하고자 하는 하나님과 하느님도 마찬가지이다. 이에 본 호에서는 의미는 거의 같으나 사용은 다른 이 두 용어의 유래와 그 적법성을 논하고자 한다. 먼저 이하의 내용들은 서울 장로회 신학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김중은 교수의 “하느님인가, 하나님인가?”와 기타 몇 가지 자료를 참조하면서 필자의 소견을 더하였음을 밝혀 둔다. II. 두 용어의 국어 사전적 의미 두 용어 다 어원은 같으며, ‘하늘’의 옛말인 ‘하ᄂᆞᆯ’에 ‘-님’이 더해져 나타났다. 본디 지역을 가리지 않고 ‘하ᄂᆞ님’이라고 하였으나 아래아(ㆍ)가 소멸함에 따라 '하나님'과 ‘하느님’으로 분화한 것이다. ①하느님 1)범 종교적-신앙의 대상. 인간을 초월한 위력을 가진 절대자로서 명명(冥冥)한 가운데 존재하며 우주를 창조하고 주제(主帝)하며 불가사의한 능력으로 인간의 善과 惡을 판단하고, 화복(禍福)을 내리는 존재. 2)가톨릭- 전지 전능하고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로 다스리는 유일한 주제자이다. ②하나님: 하느님과 어원이 같으며, ‘하늘’의 옛말인 ‘하ᄂᆞᆯ’에 ‘-님’이 더해져 나타났다. 원래는 구분없이 ‘하ᄂᆞ님’이라고 하였으나 아래아(ㆍ)가 소멸함에 따라 ‘하나님’과 ‘하느님’으로 분화되었다가 개신교의 용어로 정착됐다. III. 한글 성경 번역사에서 본 하나님의 명칭의 유래 한국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신(神)의 명칭 중에 하느님은 가톨릭과 정교회, 성공회 등이고, 개신교는 하나님을 사용한다.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그 유래와 의미를 논하면 다음과 같다. 1. 1882년 스코틀랜드 출신 선교사이며, 한글 띄어쓰기를 최초로 도입한 이는 존 로스이다. 그가 번역한 최초의 한글 성경인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서”에서 처음 사용한 神의 명칭이 바로 ‘하늘의 님’이란 뜻의 ‘하느님’이었다. 이는 당시 중국어 성경이 상제(上帝)였던 것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에 큰 의미가 있다. 그다음 1883년부터는 ‘하나님’으로, 1887년부터의 발행에서는 공식적인 명칭으로 ‘하나님’이라고 했다. 2. 1884년 이후 언드우드 등의 본격적인 선교활동과 성경번역 활동이 새롭게 시작되었다. 이는 그동안의 로스와 이수정의 역본이 개인적인 성격이 강했다면, 1893년 ‘공인번역위원회’의 출범 후부터는 공식적인 역본이 되면서 ‘하ᄂᆞ님’이라고 했다. 하지만 언드우드는 위원으로서 ‘하ᄂᆞ님’을 반대하고 ‘샹뎨, 샹쥬, 턴쥬, 챰신’등으로 표기했으나 1906년 런던의 영국성서공회가 한국어 성경에는 ‘하ᄂᆞ님’을 사용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대해서 위원이었던 ‘게일’ 선교사는 ‘하ᄂᆞ님’의 의미는 ‘하늘의 주’(主)란 의미와 ‘하나’와 ‘크다’란 의미로 ‘유일하신 창조주’란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했다. 이러한 명칭으로 계속 되어오다가 1938년 출간한 “셩경개역”에서 ‘개혁철자법’을 적용해서 ‘하ᄂᆞ님’을 하나님으로 표기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IV. 한글 성경 번역사에서 본 하느님의 명칭과 결어(結語) 이상에서 논한 대로 하느님과 하나님의 명칭은 가톨릭의 ‘천주’와 함께 같이 사용했으나, 대한성서공회가 1977년 구교와 신교가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성서에서 ‘천주’도 ‘하나님’도 아닌 제3의 어휘인 ‘하느님’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당시의 공동번역성서를 채택한 천주교와 한국 성공회와 한국 정교회도 '하느님'을 표준 용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수정의 神자에 대한 논란이나 “하느님”과 “하나님”의 논란 등은 결국 어원적으로는 동일하기 때문에 이러한 논쟁은 불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다음호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논하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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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2
  • [오성한 목사] 나에게 능력이 있다!
    이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안에서부터 정복한 모습을 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요5:19)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다. 우리와 동일한 사람으로 오셨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표적과 기사를 베풀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셨다. 믿음으로 하신 것이다. 믿음으로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먼저 보셨다. 보신 것을 그대로 따라 하셨다. 하나님의 뜻은 복잡하지 않다. 단순하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을 먼저 보신 후 행하셨다. 우리도 먼저 보여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충격을 주기 전에 먼저 내가 충격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먼저 보면 그렇게 된다. 우리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먼저 본다면 믿음과 담대함이 말씀으로 풀어지게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 믿음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는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육의 눈에는 안 보여도, 영의 세계는 현실과 동일하다. 지금도 우리 곁에 천사들이 즐거워하고 있다. 하나님의 보좌는 우리 몸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는 임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 살고 있다. 나는 자주 자주 이 세계를 그려 본다. 실재이기에 믿음으로 실재를 본다. 바른 정체성의 회복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임마누엘의 정체성은 필수다. 영원히 함께하시는 성령의 사람인 바른 정체성 말이다. 어떤 것을 명할 때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생긴다. 당연히 생겨야 된다. "아, 내가 부족한데 될까"라는 생각이 없어지고, 오히려 분명한 확신이 온다. 의심을 품고 기도하는 것은 바다 물결이 요동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응답을 기대하지 말라고 했는데 온전한 복음을 만나면 의심이 사라져 버린다. 너무 간단한 것 같지만 사실이다. 기도하면 기도한대로 모든 것이 움직이게 되어 있다. 복음이 믿어지면 온전한 정체성과 더불어 자녀에게 주신 권세를 알게 되고, 예수 믿는 것은 실재가 된다. 십자가와 부활로 이루어 놓으신 것을 분명히 믿고, 받아들이게 되면 정체성이 분명해 지는데 바른 정체성은 우리를 능력 있는 크리스천이 되게 한다. 십자가 부활로 이루신 온전한 복음의 소식을 얻은 사람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을 보고 행한다. 이 땅에서 예수를 믿고 능력 있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다. 꼭 그렇게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정체성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자녀가 아닌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렇지만 우리가 어떤 자녀인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이 땅에서 삶이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것이다. 자녀에게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을 보라고 하신다. 보고 너도 따라하라고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삶이다. 그렇다면 이제 바른 정체성을 갖고, 능력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에겐 엄청난 능력이 있다. 예수능력은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의 능력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누구이며, 무엇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되면 이 땅의 삶이 아주 명랑하고, 밝고, 사회에 나가서도 주눅 들지 않고,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원활해진다. 자신이 가진 능력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정체성이 좋은 어린이는 인사도 잘한다.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에게 친구처럼 다가온다. 명랑하다. 담대함이 있다. 밝은 얼굴이 있다. 세계적인 글로벌리더가 될 수가 있고, 뛰어난 리더십을 가지고 세계를 이끌어 갈 수 있다. 이것은 ‘공부를 잘하느냐, 못하느냐’와는 다른 문제다. ‘많이 가졌는가, 가난한가?’와도 다른 문제다. ‘지금 내가 부자인가, 가난한가?’와는 다른 이야기다. 잘 살고 못 살고가 정체성의 기준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흔들리지 않는 정체성이 필요하다. 그래야 이미 주신 능력의 삶을 살 수 있다. 자신이 자신을 아는 정체성과 남들이 나를 알아주는 정체성은 항상 변한다. 시간과 환경에 따라 항상 바뀐다.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는 것을 기반으로 둔 정체성은 흔들리지 않는다. 날이 갈수록 더욱 확고해 지고 믿음이 더 생긴다. 감사와 감격의 삶을 살게 하고, 승리의 깃발을 흔들며 살게 한다. 거듭난 정체성을 말한다.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아는 정체성이다. 항상 힘이고 능력이 있다. 정체성을 바로 알고 확신할 때 능력 있는 크리스천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새롭게 새우신 새 언약을 통해 내가 하나님과 하나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바른 정체성이 더욱 확고해 진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을 통해서 새 언약을 맺으셨다. 바른 정체성을 갖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새 언약의 비밀을 몰라서 그렇다. 새 언약의 비밀을 깨달으면 어떤 일 앞에서도 하나님의 완벽한 인도를 보고 담대해 진다. 어떤 질병 앞에서도 담대해 진다. 질병 앞에서 ‘어떻게 할까’가 아니다. 가난 앞에서도 담대해 진다. 항상 자유를 누린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실재가 된다. 기쁨과 감사와 환희가 마음에서 항상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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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2
  • [박봉석 목사] 율법과 예수님
    A라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B라는 남자와 오랫동안 사귀다가 결혼을 하여서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B라는 남자는 완벽주의자로서 모든 면에서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A라는 여인은 처음에는 이런 남편의 모습이 존경스러웠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남편이 두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가정생활을 하면서 규칙을 제정하고, 그 규칙을 깨뜨린 식구에게는 그 규칙에 따른 엄격한 벌칙을 적용했습니다. 아내는 잘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실수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남편이 두렵고 남편 앞에서 가식적이 되어갔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점차 모든 면에서 자신감을 잃어가고 마침내 삶의 의욕을 상실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남편이 사고로 죽었습니다. 남편이 죽은 지 몇 년 후에 직장 친구의 소개로 C라는 남자를 만나서 교제했고 그리고 그와 재혼하게 되었습니다. 이 C라는 남자는 사고로 거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경험 탓에 그는 매사에 사람을 향한 이해심이 많았고 동정심도 많았습니다. 아내가 실수할 때에도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늘 따뜻한 위로를 베푸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남편과의 관계 속에서 이 여인은 점차 잃었던 자신감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규칙이 없어도 그녀의 새 가정에는 따뜻한 사랑의 질서가 있었고, 그것으로 인해서 이전에 없던 행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율법과 예수님 그리고 우리의 관계에 대한 비유입니다. A라는 여인은 우리를 말하고 그리고 전 남편인 B라는 사람은 율법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새롭게 만난 남편인 C라는 사람은 예수님을 뜻합니다. 유대인들은 B라는 완벽한 남편처럼 완벽한 율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이 세상 그 어느 민족보다도 종교적,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 율법을 대하면 대할수록 또 노력하면 할수록 그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죄인 된 자신들을 보게 되었고, 그런 자신들을 감추고 안 그런 척 하려니까 점점 더 가식적이고 외식적인 모습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라는 새로운 남편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이런 고민을 한꺼번에 해결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으니, 이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죄의식에 사로잡혀 살 필요가 없었고 그리고 가식과 외식으로 살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제는 죄인이면서도 죄인이 아닌척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이런 죄인을 의인되게 하신 예수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자랑하고 증거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분이 바로 그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병원에 가야 합니다. 병원에 가면 치료부터 하지 않고 검사부터 합니다. 여러 가지 검사를 통해서 어디에 어떻게 무슨 병이 있는가를 먼저 알아낸 후에 치료에 들어갑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를 치료하고 구원을 얻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비유하자면 마치 엑스레이와 같습니다. 사고로 뼈가 부러졌을 때에 우리는 먼저 엑스레이를 찍습니다. 우리는 그 엑스레이를 통해서 어느 뼈가 얼마나 어떤 모양으로 부러졌는지 알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엑스레이의 기능은 끝입니다. 엑스레이로 뼈를 붙일 수 없습니다. 엑스레이로 사람을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이 바로 그 기능을 했습니다. 자신들이 치료받아야 할 죄, 즉 하나님께 사함 받아야 할 죄가 무엇인지 알게 했습니다. 자신들의 영적인 병이 무엇인지 알게 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엑스레이가 병을 진단할 수는 있어도 병을 치료하지는 못하는 것처럼, 율법 또한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지만 죄를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죄를 사함 받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죄를 사함 받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구약에서 끊임없이 시행되던 동물 제사는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사역의 그림자였고 예표였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해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내가 죄인 됨을 깨달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와야 하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비로소 내 모든 죄를 사함 받고 구원을 받습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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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9-12
  • [최호숙 목사] 치유 회복을 갈망하는 존재
    인생은 연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인생을 표현할 때 풀과 같고 이슬과 같은 초로(草露)의 인생 이라고 한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한 대로 인생은 상한 갈대와 같은 연약한 존재이다. 육적으로 영적으로 연약하기 때문에 병들고 나약해지면 어떤 통로를 통해서든지 치유 받고 건강하게 되어 행복한 삶을 누리려고 한다. 그래서 well-being 식품, well-being 제품을 선호하는 이유이며, 건강을 위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하는 것이 연약한 인간의 심리이다. 치유 방법 중에 “피톤치드(Phytoncide) 치유법”이 있다. 피톤치드는 러시아의 생화학자 보리스 페도로비치 토킨(Boris Petrovich Tokin)이 붙인 이름이다. 이 단어의 뜻은 ‘식물’을 의미하는 라틴어 피톤(Phyton)과 ‘죽이다’를 의미하는 치드(cide)의 합성어이다. 편백 나무를 비롯한 여러 나무가 자신을 위협하는 세균들과 해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 내는 천연 물질 성분이 숲속의 향을 만들어 내는데 그 향이 피톤치드인 것이다. 사람들은 피톤치드 치료를 통해 건강한 삶을 회복하기 위해 우거진 숲을 찾아 휴양을 한다. 이처럼 육을 위한 피톤치드 요법이 있듯이 영적인 삶을 회복하기 위한 치료법도 있어야 한다. ‘회복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포카디스테미(ἀποκαθίστημι)’이다. ‘아포카디스테미’는 두 개의 단어가 결합 된 것인데, ‘아포(ἀπό)’는 ‘~ 로부터’ 떨어지게 하다.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이며, 카디스테미(καθίστημι)는 임명하다, 되게 하다, 원래 상태로 돌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회복은 이전의 악한 상태를 떠나 원래 상태로 되돌아오는 것을 회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경 역사를 볼 때 위대한 지도자들도 연약한 모습을 지닌 회복의 대상이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은 나이 많아 늙었고,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받았을 때 달변이 아닌 자신의 어눌함과 애굽과 바로에 대한 ‘트라우마(trauma)’로 하나님의 소명을 거듭 부정했던(출 4:10-17) 사람이었고, 다윗은 간음했을 뿐 아니라 온갖 가정 문제를 갖고 있었으며, 육체의 가시(고후 12:7)라는 질병을 포함한 신체적 연약함(갈 4:14), 그리고 능하지 못한 언변에 대한 타인의 지적(고후 10:10)을 스스로도 인정해야 했던(고후 11:6) 사도 바울, 즉흥적이고 성격이 급한 불같았던 베드로 등등... 이런 약점이 있으면 당연히 열등감으로 연결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하나님의 사역을 위대하게 이끈 능력자들이었다. 왜냐하면 약하고 부족한 이들 안에서 역사하시는(고후 13:3) 하나님은 그 약함을 강함으로 선용(고후 12:9)하실 뿐 아니라 우리 안의 손상되고(broken) 손실된(lost) 부분까지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회복의 주체는 우리 주님이시다. 주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회복도 기대할 수 없다.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숲에서 주님의 향기를 맛보며 살아가면 회복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 회복을 위한 기도를 하였다.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난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시 39:13)” 이 기도를 응답해 주셨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날까지 왕의 직분을 견고하게 감당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에게 회복을 주시는 이유는 먼저 회복된 우리가 주위 사람들의 회복 과정에 동참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주님 안에서 치유 회복되고 주의 일에 전념하는 복된 종들이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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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14
  • [조희완 목사] 준행의 결과 (레26:3-13)
    그 동안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후보자들이 내건 슬로건을 보면 “가족 행복시대”를 열겠다고 했고, “국민 성공시대”를 열겠다고 했습니다. 그 분들이 말하는 대로 가족이 행복하고 국민이 성공하는 시대가 열리기를 기대했지만 지금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한 것처럼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걱정하게 하는 일들만 가득합니다. 미국의 경제잡지인 포브스(Forbes)가 세계적인 억만 장자들의 명단을 발표했습니다. 그 중에는 이름이 익숙한 빌게이츠를 비롯해서 홍콩의 억만장자 리카 싱, 일본의 억만장자 히로시 야마우치, 호주의 억만장자 마이클 블룸버거등, 그야말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부자들의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들 모두가 “행복하냐?”는 질문에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가정 문제로, 자녀들 문제로, 건강 문제로 어려움을 겪거나, 아니면 도덕적인 문제로 따가운 눈총을 받는 이들도 있습니다. 포브스지는 그들을 가리켜서 세계적인 부자들이라고 했지, 세계적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보면 인생의 행복은 돈이 많거나 재산이 많은데 있는 것이 아닌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 새로운 접근 방법을 추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은 행복을 위한 새로운 접근 방법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면 삶이 행복해 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면 인생을 성공합니다. 말씀을 준행하는 자에게 어떤 일들이 주어지는지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면 물질 축복을 주십니다.(3-5)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면 삶의 평안을 주십니다.(6-10) 셋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면 친히 함께해 주십니다.(11-13)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표준이 되고 기준이 되는 줄 알고 준행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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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14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43 : 하나님을 ‘귀신 神’자로 표기할 수 있는가?
    I. 서언(序言) 히브리어로 된 여호와(Jehovah)를 우리 한국 기독교에서는 어떻게 호칭할까? 지금은 아무 거리낌 없이 하나님, 유일신이라고 부르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나 神으로 용어를 정리하기까지는 많은 논란과 과정이 있었다. 최초의 선교사인 언더우드는 처음에 중국의 번역인 ‘샹뎨’라고 했고, 천주교는 ‘천주’,‘하느님’으로, 우리 개신교는 ‘하나님’으로 결정했다. 하나님에 대한 또다른 공통적 용어 중에 하나는 바로 본 호에서 논하고자 하는 神이란 호칭이다. 이는 일본에서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에서 일본식 이름인 ‘귀신 神’으로 표기한 때부터 비롯됐다. 하지만 하나님을‘귀신 神’자로 호칭하는 것이 옳으냐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많다. 본 호에서는 이를 논해보고자 한다. II. 귀신 신(神)자를 사용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견해 약 11년 전 2013년 6월 12일자 국민일보에 이종화, 이귀형 목사 등이“하나님을 귀신 神자로 호칭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면서‘하나님 신’자 제정운동을 펼치고 있다는 기사가 게제되었다. 필자의 경우도 오래전부터 이런 면으로 의문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이런 관점에서 먼저 그들의 의견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귀신을 포함한 잡신도‘神’자를 쓰고, 유일신이신 하나님도 똑같이 神자를 쓰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또한 이 神자는 성경 외의 다른 기독교 용어에도 유일신(唯一神), 신령(神靈), 신성(神聖), 신학(神學) 등의 神자가 들어가는 경우가 너무 많다. 이는 잘못된 것으로서 합당한 용어로 바꾸어야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대안으로 귀신‘신(神)’자를‘하나님 신’자로 바꿔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즉 ‘귀신 신’(神)자의 부수인‘보일 시(示)’대신 하늘‘천(天)’자를 넣으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국 교계는 이에 대한 어떤 반응도 없다고 했다. III. ‘귀신 신’(神)자와 ‘하나님 신’(天+申)의 의미 1. 귀신‘신(神)’자의 의미: 이는 한자 구성의 육서(六書)중 하나인 회의(會意)문자로서 이를 파자(破字) 해보면, 보일 시(示)자와 펼친다, 보여준다, 아홉째, 원숭이 등 다양한 뜻을 가진 신(申)자와의 합성어이다. 또한 한자 사전의 뜻은“모든 것을 펼쳐서(申) 보여주는(示)존재가 신(申)이다”라고 했다. 이는 고대 중국인들이“신은 모든 것을 보여주는 존재”라고 인식하고 있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2. 한자를 기독교적 산물로 보는 견해에서의 귀신‘신(神)’자의 의미: 근래에 와서 한자의 유래는 수메르 문명 등의 고대의 상형문자와 설형문자와 연관이 있으며, 많은 한자들이 성경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알이랑 민족”의 저자인 유석근 목사가 대표적이며, 유진한, 정학진 목사 등이 그러하다. 이들의 주장은 창조의 내용부터 시작해서 많은 내용들이 한문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본 호에서 논하고 있는 神자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원래 神자의 시(示)는 맨 위의 一은 하늘이고, 아래의 一는 땅이며, 아래의 小는 삼위일체를 말한다고 했다. 옆의 申은 에덴동산을 뜻하는 밭 田자에다 하늘에서 내려온 1로 구성되어 있다고 했다. 그래서 神자는 원래 하나님을 뜻하였는데 나중에 여러 잡신들이나 한국어의 귀신의 의미로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볼 때 神자는 원래부터 우리 기독교적 용어였기 때문에 고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IV. 결 어(結語) 이상에서 논한 대로 神자 하나를 두고도 여러 견해들로 인해 뚜렸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두 가지 주장이 다 일리가 있으나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결론 내리기는 쉽지 않다고 본다. 한자의 유래가 성경이라는 주장도 일리는 있으나 아직은 더 검정을 거쳐야 하고, ‘하나님 신’(天+申)이란 글도 한자어에는 없는 단어이다. 존재하지 않는 한자어를 억지로 만들어 사용할 수도 있겠지만, 여러 가지 무리수가 있다. 필자의 좁은 소견으로는 神자를 귀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유일신이신 하나님 神으로 이해 한다면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다. 하나님에 대한 호칭의 문제는 다음 호에서 좀 더 논하기로 하고 오늘의 기고문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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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14
  • [신재철 목사] 그만 울어버렸다.
    몇 개월, 얼마간의 시간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 하나님의 몰아가심, 누군가의 아픔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웠다. 무엇이 문제인지도 몰랐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무능함을 드러내며 금식했다. 어디 토할 곳이 없어서 기도했다. 손 벌릴 곳이 없어서 그분께 시선을 드렸다. 경건해서가 아니다.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에 그렇게 뿐 할수 밖에 없었다. 「교회 이전」 정말 버티고 버텼는데 결국에는 하나님 앞에 순종을 결단한다. 어렵게 모인 지금의 성도님들에게 아픔을 줄까 봐, 혹시나 흩어질까 봐 절대 교회 이전을 하지 않겠다고 버텨보았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 뜻대로 일은 진행되고 있었다. 반면에 현실에서 겪어야 할 폭풍은 매서웠다. 믿음이 없으니 계속 불안했고 안전하게 놓여 있는 돌다리도 자꾸만 두드리는 바보가 되었다. “어디로 가지?” “대출은 과연 될까?” “우리 성도님들이 반대하지 않을까?” 하지만 내 염려와 달리 순종의 결단 이후 고속도로의 슈퍼카 질주처럼 일은 진행되었다. 교회 식구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고 우리가 생각했던 금액으로 두 배 큰 공간을 소개받게 된다. 개척교회는 1금융권 은행은 물론 2금융권 대출도 어렵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1금융권에서 좋은 조건으로 대출이 진행되었다. 계약하고 등기를 하고. 일이 진행되는 과정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아내의 조직검사」 아내는 3년 전 암으로 보이는 섬유종을 제거한 이력이 있다. 그때 얼마나 놀라고 긴장했는지 모른다. 남편의 속도 모르고 아내는 자신에게 문제가 생기면 아이들을 친정으로 보낼까, 시댁으로 보낼까를 고민하고 있었느니 제법 무거웠던 상황이었다. 그 후 6개월, 1년 단위로 추적하며 살펴보는 어느 날. “몸에 뭐가 있어요. 조직검사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의사는 담담히 말했지만, 나는 그때의 공포가 떠올랐다. 아니 오히려 더 두려웠다. 결과가 나오는 열흘간 두려운 만큼 더욱 소리 내어 기도하게 되었다. 전혀 티 내지 않고 덤덤한 척 있었는데 아내가 나를 ‘툭’ 친다. “엄청 티나. 너무 걱정하지마.” 하지 말라고 하면 마법처럼 걱정이 사라지겠니. 나는 염려하며 기도하는 믿음 없는 그런 목사였다. 열흘 후, 감사하게도 음성판정을 받게 된다. 하지만 다른 성도의 아픔에 나의 기쁨은 묻어두어야 했다. 「성도의 재발」 아내의 조직검사 직전에 교회 성도님의 암 재발 소식을 듣게 되었다. 교회를 개척하고 첫 예배에 소리도 없이 자리를 지켜주던 분이다. 첫 번째 질병 소식에는 온 교회가 열심히 기도하고 치료도 받으며 잘 이겼다. 그렇게 다 끝났다 생각한 어느 날, 다른 곳으로 전이가 된 것 같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의사는 재발한 것이 확실하다며 조직검사 결과를 듣기 전에 이미 항암치료를 위해 약을 처방하고 있었다. 「반신반의」 솔직한 내 심정이다. 상황을 뒤집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한다. 하나님의 섭리나 계획 따위는 모르겠다. 성도의 아픔에 그냥 빌고 빈다. 하지만 확신이 서지 않는다. 두렵고, 마음이 아리고 무너짐을 느낀다. 그리고 그날 새벽에도 그런 반신반의 기도를 여전히 이어가고 있었다. “목사님, 수술하며 절제한 부분은 양성이고, 나머지 조직검사용으로 뗀 부분에서는 음성 나왔다고 하네요.” 덤덤한 카톡을 받고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 수 없어 전화를 드렸다. 말인즉슨, 안 좋아 보이는 부분은 제거했고 의심이 되는 부분은 검사를 위해 떼어냈는데 그것은 암과 무관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분명 의사는 조직검사 결과가 나오기 전에 암(재발/전이)이라 확신하며 이미 약물치료까지 시작했는데, 상황이 뒤집힌 것이다. “아, 집사님. 제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세요. 집사님 어찌 될까 봐.” 필터링 되지 못한 부끄러운 말이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계속 눈물이 흐른다. 무슨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너무 좋기도 하고, 감사하고, 안도하는 마음. 목사의 울음에 성도님도 처음에는 당황하시더니 같이 운다. 우리는 얼마간 그렇게 울고,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각자의 표현대로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올려드렸다. 비슷한 시기에 아내와 성도가 암인지 확인하기 위해 조직검사를 받았다. 아내는 결과가 좋게 나왔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성도는 아픈데, 목회자 가정은 무탈하다고 기뻐할 수 없었다. 아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차라리 목회자 가정이 어려운 일 당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교회 이전을 진행하는데 성도는 아프고, 목사의 아내도 아프다. “교회 이전을 멈춰야 할까?” “내 죄가 많아서 주변 사람들이 아픈 것일까?” 신학을 하며 하나님의 속성을 배운들 무엇하고 금식과 기도를 이어가면 무엇 할까? 나는 그렇게 무너지고 있었고 두려웠다. 하지만 모든 일을 봉합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니 부끄러움이 몰려온다. 그리고 감사의 고백이 올려진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 생활’에서 교수가 학생에게 이런 말을 했다. “여기는 3차 병원이야. 환자가 여기까지 왔다는 건 더는 방법이 없다는 뜻이야.” 개척교회 목사에게 들려지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린다. “여기는 개척교회야. 성도가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그 삶이 쉽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야.” 지금 나와 함께하는 교회 가족들. 어쩌면 가장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 나와 만났을지 모른다. 그래, 같이 울어주며 살자. “하나님, 그래도 성도를 보면서 울 수 있는 목사라서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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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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