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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수 총장] 오늘도 그분의 임재하심 안에서…
    김성수 목사(전 고신대학교 총장,현 미국 에반겔리아 대학교 총장) ‘세계관’(worldview)이란 문자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세계관의 관건은 어떤 관점에서 이 세상을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을 올바로 구분하고 올바로 대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세상과의 관계를 올바로 알지 못하면 이 세상을 올바로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비교할 다른 창조주가 없는 오직 한 분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느9:6).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아무것도 없는 상태 즉, ‘무에서’(ex. nihilo)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이미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태초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창조관의 특징입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는 많은 창조 설화들이 있었습니다. 헬라의 철학자인 플라톤(Plato)도 ‘데미우르고스’(Demiourgos)라는 창조의 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데미우르고스’는 없는 것으로부터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신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바꾸는 신을 말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우주의 창조신은 무질서(chaos, 혼돈)로 해체되는 성형을 지닌 물질을 원형인 이데아에 맞춰서 질서(cosmos)를 지닌 존재자로 만들어 내는 것을 창조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하나님도 이미 존재했던 어떤 영원한 질료를 원료로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이러한 이단들에 대항해야 했습니다. 이교적인 신화와 사상에 영향을 받아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는 이 선언은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 2절의 말씀 즉,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는 표현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혼돈’이라는 의미 즉, ‘어떤 사물이나 생각들이 뒤엉켜 있는 무질서의 상태’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질서한 혼돈의 상태’로부터 질서 있는 우주(cosmos)를 만들어 내는 분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에서 질서를 만드시는 분이며,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무질서한 혼돈 상태를 정돈하여 질서 있는 상태로 만들어 주신다고 힘주어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너무 피상적인 해석이며 잘못된 적용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그 창조된 하늘과 땅의 상태가 혼돈하고 무질서하며, 아무런 의미가 없이 공허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혼돈과 무질서와 무의미를 창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질서의 하나님입니다. 창세기 1:1-2절의 말씀은 지상의 질서를 향한 첫 번째 단계를 묘사한 것입니다. ‘혼돈하다’는 것은 아직 ‘모양이 없다’(formless) 또는 ‘모양이 주어지지 않았다’(unformed)는 뜻이지 ‘모양이 왜곡되었다’(deformed)는 뜻이 아닙니다. 비유하건데 그것은 앞으로 더 구체적인 세부 사항을 채워 넣고 색상을 칠해야 할 화가의 스케치와도 같은 것입니다. 또 다른 비유를 든다면 골조 공사만 끝나고 마무리 공사와 내장 공사를 기다리고 있는 신축 건물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 11:3)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지어졌다”로 번역된 단어는 다른 곳에서 진흙 덩어리로 토기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의 행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모양이 아직 주어지지 않은 땅으로 장인의 걸작을 빚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는 처음부터 혼돈이나 무질서가 아니라 질서와 의미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자신이 창조하신 우주 만물을 질서 있게 보존하며 통치하고 계십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을 구분한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드신 세계와 언제나 저 멀리 동떨어진 곳에 계시면 피조물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고 이 세상이 그냥 자동으로 굴러가도록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이신론자들(deists)들은 시계를 만든 후에 그 시계가 감아 놓은 태엽에 따라 돌아가도록 버려두고 잠자고 있는 시계공 할아버지처럼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이신론의 신관은 창조 세계가 존속하는데 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이 필요 없게끔 하나님이 창조 세계 속에 ‘자연법’을 내장해 놓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붙들고 계시며, 세상에는 그분의 임재와 영광과 능력과 계시가 충만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과 그 안의 만물을 창조하셨고, 모든 인간에게 생명과 호흡과 그 밖의 모든 것을 주시고, 역사를 주관하고 다스리시며, 모든 나라를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그러한 활동을 하심은 만백성이 그분을 구하고, 그분께 손을 내밀고 그분을 찾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에게 가까우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8). 세상이 하나님의 임재로 흠뻑 젖어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성경적 세계관의 한 기초석입니다.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의 표현대로 하나님은 워낙 깊이 창조 세계와 관계하시고 그 안에 임재하시고 그것을 섭리하시고 감화하시고 그 속에 영향을 미치시므로 그분을 조금이라도 묵상하지 않고는 창조 세계를 제대로 묵상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주에 임재하신다면 세상은 그분의 영광과 위엄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 하나님의 창조 세계 속에서 그분의 지혜와 솜씨를 바라보면서 그분의 임재하심 안에서 살아가는 진정한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영위해 가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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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4
  • [오성한 목사] 당신은 전도자다
    당신은 전도자임을 발견해야 한다. 당신이 전도자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이다. 전도자인 것을 믿지 못하는데 전도자로 살 수 없다. 소개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는 전도자입니다.”라고 소개할 수 있을 정도로 전도자라는 의식 속에 잠겨야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아는 것은 그런 삶이 나오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예수 믿은 자가 이 땅을 사는 이유는 유일하다. 전도하기 위해 이 땅을 사는 것이다. 어디를 가든지 전도자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전도를 많이 해야 전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태복음 4:19)라고 하셨다. 우리는 말씀에 기록한 대로 나는 보고 믿어야 한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사람 낚는 어부다. 임마누엘을 인정하며 복음의 감격으로 열심히 숨 쉬고 살기만 하면 전도하는 것임을 알자. 요셉을 보라. 요셉은 이집트로 혼자 팔려갔다. 우울증에 걸릴 조건은 충분했다. 그러나 그는 임마누엘의 기쁨이 있었다. 모여서 예배를 하거나 함께 찬양을 할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지만, 임마누엘을 만끽하며, 열심히 살았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자체가 전도자의 삶이다. 성령 충만의 임마누엘의 사람은 요셉에게 하나님과 함께함을 보았던 사람들처럼 세상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임을 보게 될 것이다. 전도는 내가 전도자임을 알 때 삶이 재미있고 행복할 것이다. 다시 한번, 기억하라. 내가 노력해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된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었더니, 주님께서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셨다. 그래서 당신은 전도자다. 전도자임을 기도로 부르짖고 주장하며 전도자라고 말하며 이 땅을 사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시골교회 담임으로 갔다. 당시 나는 성경 읽기와 기도로 불이 붙어 있었다. 예배당 바로 옆집에 인사도 드리고, 전도하러 갔다. 옆집 아저씨는 교회 욕을 하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시끄럽다는 둥, 여름에 문을 못 연다는 둥,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며 나를 공격하는데 전도하러 갔던 나는 언어장애인 되어 버렸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하면서 전도해야 할지 몰라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쫓겨나다시피 돌아왔다. 너무나도 비참했다. 전도할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전도 못 하는 장애인 같아 보였다. “주님, 저는 전도 못 하는 영적 장애인입니다.”라고 부르짖어 기도하며, 전도 훈련이라도 시켜달라고 답답한 마음으로 기도한 일이 있다. 전도할 줄 아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전도 현장에서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교회 한 번 와 보세요.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을 하고 나서는 더 할 말이 없었고, 상대방의 공격적인 말에 정신마저 몽롱해졌다. 상대방의 강한 어조에 멍해진 것이다. 넋 놓고 돌아와서는 주님 앞에 울기 시작했다. “주님 저는 전도할 줄 아는 줄 알았는데, 전도할 줄 모르는 영적 불구입니다.” “주님, 저를 전도 훈련 좀 시켜주세요.”라고 통곡을 했던 일이 있다. 돌이켜 보니 그때는 전도자라고 생각하고 살지 못했다. 당시 성령의 만지심이 있고 난 뒤 3년을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만 읽는다고 정신이 없었던 기간이었으니 마음만 뜨거웠던 것 같다. 전도 훈련받을 곳을 찾기 시작했다. C.C.C에서 교역자를 대상으로 NLTC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너무 반가웠다. 처음 받아보는 전도 훈련이었다. 사영리를 철자 한자 안 틀리게 암송하며, 훈련을 받고 현장을 나갔다. 훈련을 받는 내내 마음에 올라오는 감격이 있어 마음으로 울면서 전도 훈련을 받았던 것 같다. “주님, 신학교에 전도 훈련이 없습니다. 이런 전도 훈련이 신학교에도 들어가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수없이 했던 것이 기억난다. 마음에 흐르는 눈물은 다른 사람이 볼 수는 없었지만, 나에겐 감동의 시간이었다. 그 이후 많은 전도 훈련을 받았다. 수천 명에게 전도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일 천명 이상에게 예수님을 영접시켜, 하나님의 자녀로 살도록 도와줄 수 있었는데 너무 감사한 일이다. 나는 오늘도 전도자임을 알고 산다. 기회만 있으면 전도자임을 믿기에 전도하며 산다. 우리 교회 안에도 여러 사람이 나를 통해 예수를 믿게 된 분들이 있다. 그분들을 뵐 때마다 감사한 간증 거리가 된다. 당신이 전도 훈련을 받지 못했어도 당신은 전도자다. 주님께서 전도자로 만드셨다. 전도자임을 믿어라. 철저하게 전도자임을 인정하라. 전도자임을 믿는 것이 전도의 출발이다. 손을 뻗어 전도자임을 취하라. 천국은 손을 뻗어 취하는 자의 것이다. 또 전도 훈련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기회를 내어 전도 훈련도 받을 수 있으면 받아보라. 도움이 될 수 있다. 가장 좋은 전도 훈련은 직접 전도하는 것이다. 전도엔 왕도가 없다. 간절한 마음만 있으면 성령께서 전도를 도와주시고, 천사들도 도와준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전도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전도자임을 알고 전도하다 보면 나만의 전도 방법이 생김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 전도자다. 전도자임을 알고, 믿고, 깨닫고, 살면 억지로 전도하지 않는다 해도 전도의 기회가 온다. 준비된 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내게 좌우명같이 여기는 말이 있다. “기회는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지나간다. 기회는 준비된 자만 볼 수 있고, 잡을 수 있다.”라는 말이다. 당신도 전도자임을 알고, 마음으로 준비하고, 훈련의 기회를 만들어 준비하라. 전도자임을 알고 기도로 준비하고 있으면, 전도의 기회는 반드시 온다. 또 전도할 때 성령께서 도우실 것이다. 전도자라는 생각을 잊지 말라. 당신을 통해 전도할 때 역사하실 성령님을 기대하라. 전도하는 것에 겁을 내지 말라. 전도는 내가 아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가장 좋다. 내가 아는 사람, 내가 만난 사람에게 예수 믿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가지고, 기도해 보라. 나는 일대일 전도의 기회를 제일 좋아한다. 제일 열매가 좋기 때문이다. 전도는 이러한 성경에서 말하는 분명한 믿음, 당신이 전도자라는 믿음을 가질 때 저절로 전도하는 당신을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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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4
  • [조희완 목사] 확신하며 삽시다.(요5:19-29)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에 미국 대표로 참가했던 토비 도슨 선수가 한국에 있는 친 아버지를 찾아서 만났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그는 세살 때 길을 잃어버렸는데 부산의 한 보육원에서 생활을 하다가 미국 콜로라도에서 스키 강사로 일하는 사람의 집으로 입양이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열렸던 동계 올림픽에 미국 대표선수로 참가했다가 동메달을 땄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국에 살고 있는 친 부모를 찾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보도가 나가자 우리나라 전국에서 약 25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자신이 친 아버지라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자기가 친 아버지라고 주장을 했지만 막상 DNA(유전자)검사를 실시하자고 했을 때 선뜻 나서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산에서 시내버스 기사로 일하고 있는 김재수 씨 만큼은 달랐습니다. DNA검사를 하나마나 토비 도슨은 분명히 자기 아들이라고 자신 있게 주장을 했습니다. 그가 확신한 바대로 토비 도슨은 그의 아들임이 입증이 되었고, 서울에서 극적으로 상봉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재수 씨가 토비 도슨을 보고 “저 아이는 틀림없는 내 아들이다”라고 확신한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실 때 “누가 뭐라고 해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확신하실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네가 과연 내 아들인지 아닌지 아주 많이 헷갈린다.”라고 하신다면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 사랑하는 자녀들로 확신하시려면, 먼저 우리에게 몇 가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확신이 있으면 틀림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첫째는,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요5:19-29) 둘째는, 천국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요14:1-3) 셋째는, 응답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요일5:14-15)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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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4
  • 기독교 세계관[김성수 총장] 복음의 총체성
    우리 모두가 끼고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 니고데모의 안경 즉,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이 말씀을 사랑하며, 읽고 묵상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 성경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기초가 되고 지도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잘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세속적인 세상은 과학과 종교, 사실과 가치, 객관적인 지식과 주관적인 감정의 분리를 주장하며 교육해 왔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잘못된 이분법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고 사고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 곧 신념 체계는 단지 개인적인 감정이나 경험일 뿐, 객관적인 사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으로 치부하면서 복음의 포괄적이고 광대한 범위와 능력을 특정 영역으로 제한시키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경건과 헌신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자들은 이런 협의적인 이분법적 견해에 아주 취약합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헌신은 복음주의 운동의 가장 큰 힘이 되었고, 수백만의 사람들을 그리스도와의관계로 불러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찰스 콜슨(Charles Colson)과 낸시 피어시(Nancy Pearcey)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영적 여정의 어딘가에 톱날 같은 상처의 흔적들을 가지고 있으며,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 때 그리스도를 만나 죄사함의 확신을 얻지 않았다면 나는 내자신의 범죄에서 나는 악취로 인해 이미 질식해 버렸을 것이고, 내 영혼은 결코 안식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들 가운데도 아마 많은 분들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개입하지 않으셨다고 한다면 나는 아마도 소위 세상적으로는 안락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을런지는 몰라도 내 마음 속 깊은 어딘가에는무엇인가 채워지지 않은 공허함을 지닌 채 살았을 것이며, 영혼의 만족함을 누리지 못하고,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지 못하는 어두움의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 복음주의의 장점인 동시에 또한 가장 큰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와 같은 관점이 우리로 하여금 개인의 영혼 구원이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전체를 위해 준비하신 놀랍고 원대한 계획을 볼 수 없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구원과 신앙은 개인의 영혼 구원, 개인 경건, 교회 출석, 성경 연구, 자선 활동 등으로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 훨씬 그 이상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영혼 구원과 개인적인 경건,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교리의 체계를 믿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관(worldview)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해서 기독교 신앙이란 단지 개인적인 신념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개인의 구원문제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어주어야 합니다. 현대생활에서 사람들이 겪고 있는 분명한 문제들에 대해 눈을 감아버리고 단지 영적인 것, 성경공부, 복음전도 등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이야 말로 인류가 오랫동안 가져온 질문들, 즉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가, 이런 잘못에 대한 치유책은 무엇인가, 인생에는 어떤 의미와 목적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모두 답할 수 있는 총체적인 삶의 체계임을 보어주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유일하고도, 이성적으로 변증할 수 있는 확실한 대답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만이 물리적 질서와 도덕적 질서 모두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합니다. 기독교 신앙만이 삶과 사상의 모든 영역, 곧 피조세계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통합적인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만이 우리가 현실세계에 맞추어 올바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모든 진리의 원천이며 현실의 모든 측면을 이해하는 ‘포괄적인 틀’(comprehensive framework)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복음은 총체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삶 전체를 향한 총체적인 틀이며 능력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네덜란드의 수상을 지낸 18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기독교 진리의 지배적인 원칙은 구원론이 아니라, 우주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주 전체는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카이퍼는 칼빈주의(Calvinism)를 어떤 기독교의 교리나 명제의 체계가 아니라 ‘삶의 체계’(life system)라고 강조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삶의 체계, 혹은 세계관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복음의 총체성이라는 성경적 관점을 가지지못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와 문화의 여러 영역에서 절름발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과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에 이런 문제들이 이미 생겨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문화를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는 어떤 기준이나 틀(frame)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인해서 이미 부모들은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겪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의문들에 대해서도 대답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친구들이나 이웃들에게 우리가 왜 믿는지를 설명할 수 없게 되었고, 우리 신앙을 변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 주변세계의 영향을 받아 어떤 일들을 결정하면서도 우리의 삶을 바르게 꾸려나가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심오한 아름다움과 의미들을 놓치고 있습니다. 자연의 미묘함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기쁨이나, 위대한 교향악의 연주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능력, 질서가 잘 잡힌 공동체의 조화속에서 하나님의 품성을 깨닫을 수 있는 능력도 상실해 버렸습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을 우리의 삶과 우주에 대한 총체적인 진리의 틀로 이해하면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 문화까지도 복음으로 채색하고 변혁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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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4
  • [김성수 총장] 니고데모의 안경으로 세상 읽기
    경남기독신문 애독자 여러분안녕하십니까? 고신대학교에서 38년을 봉사한 후 지금은 미국 LA 앤하임에 소재하고 있는 에반겔리아 대학교(Evangelia University)에서 총장으로 봉사하고 있는 김성수 목사입니다. 세월의 흐름은 정말 화살과도 같음을 실감합니다. 2020년도를 시작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21년도를 맞았습니다. 새로운 한 해를 맞으면서 먼저 경남기독신문 애독자 여러분들 모두 건강하시고, 가정과 일터에도 하나님의 복 주심이 풍성하시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특별히 여러분의 소중한 언약의 자녀들이 믿음으로 잘 살고, 악에 물들지 아니하며, 지혜롭고 건강하게 하나님의 소중한 보물들로 복되고 형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번 호부터 저는 여러분과 함께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와 문화 현상들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세계관(worldview)의 문제입니다. 세계관이란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사물을 바라보는 ‘안경’(spectacles)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세상을 바라보는 나름대로의 ‘관점’(perspective)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관점도 갖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해석하고 평가하며 행동합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자신이 의식을 하던지 하지 못하던지 간에 나름대로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고평가하며 거기에 따라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색깔있는 안경을 끼고 있으면 그 안경의 색깔에 따라 사물이 다르게 채색되어 보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은 지도(map)나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동일한 사물과 현상을 대하면서도 서로 다른 가치판단을 하게 되고서로 다르게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공동체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의 삶을 살기를 소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곧 세계관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영위하는 신앙의 삶은 단순히 예배, 찬양, 기도, 성경공부, 교제, 그리고 약간의 봉사와 전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와 같은 협의적인 의미의 신앙생활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런 생활을 등한시하면서 세계관의 문제를 논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은 좁은 의미의 경건생활만 신앙의 삶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런 일에만 전념하고 만족하면서 그것이 마치 신앙적인 삶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 신앙은 개인적이며 사적인 것(private)이 되고,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게 되면 기독교는 우리 사회와 문화로부터 점점 더 변두리로 밀려나 주변화되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안경을 끼고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인생과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인생과 세상이 확연하게 달라지게 되고, 지역 사회 속에서 감당하는 교회의 사명과 역할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찰스 콜슨(Charles Colson)과 낸시 피어시(Nancy Pearcey)가 말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구상에서 지옥을 만드는 데 조력하고 있거나, 아니면 천국을 미리 맛보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더 많은 상처를 받는데 일조할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사역에 참여하여 이 세상을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실현되도록 변화시키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지배를 강화시킬 수도 있고,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어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선택은 우리가 끼고 바라보는 안경 곧 우리의 세계관에 따라 확연하게 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올바로 바라보고 평가할 수 있는 안경을 껴야 합니다. 초점이 맞지 않는 안경을 끼거나 깨어진 안경을 끼고는 세상을 올바로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정확무호한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안경을 끼고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경은주일 하루 예배 시간에만 필요한 책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등불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이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고 했습니다. 시편 기자도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도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성경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인식해야 합니다. 지난 세기 동안, 세속적인 세상은 과학과 종교, 사실과 가치, 객관적인 지식과 주관적인 감정의 분리를 주장해 왔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도 이러한 잘못된 이분법으로 사고하는 경우가 많았고,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단지 개인적인 감정이나 경험일 뿐, 우리의총체적인 삶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으로 치부되었습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합니다. 2021년도 새해를 맞으면서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변화되어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니고데모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확장에 의미 있게 기여하는 보람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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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1-29
  • [문보민 목사] 다른 복음을 매력적으로 느끼는 기독교인들에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익숙한 것보다 새로운 것에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그 이유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보다 가지고 있지 않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것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습과 같이, 교회에서도 유일한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주어졌음에도, 영적 목마름과 공허함을 새로운 것으로부터 채우려는 모습으로 인해, 이단들의 비성경적 가르침과 메시지에 성도들이 미혹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교회에 주어진 유일한 진리가 아닌 새로운 것을 추구하다 다른 길에 빠진 성도들에게 간절한 마음을 담아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1.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신천지에 빠진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확신에 찬 모습으로 가르치는 신천지 강사들의 모습에 큰 매력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성도들에게 구원의 확신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심과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다는 진리를 확신할 때 신앙이 더욱 견고해지고 실제적 삶의 태도가 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구원의 확신 없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번에 해결하시고 이루셨음을 확신함으로 고백되어져야 합니다. 2.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합니다. 화려하고 멋진 스포츠카의 성능을 결정하는 것은 경쟁사보다 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가 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빠르더라도 목적지에 가지 못하는 자동차는 실생활에서 무용지물입니다. “교회를 얼마나 일찍 출석했는지-얼마나 성경을 빠르게 많이 읽었는지-얼마나 빨리 직분을 받았는지-얼마나 봉사를 빨리 시작했고 많이 했는지”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신앙의 목적지를 향한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입니다. 이단들은 종교적 열심이 매우 강합니다. 그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포교-선교-구제’와 다양한 사회적 활동들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열심과 믿음이 대단할 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방향성을 잃어버린 길은 멸망의 길일뿐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증거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3. 진리의 싸움은 소속의 싸움입니다. 신천지에 소속된 신도들은 교주의 말에 절대 복종합니다. 다른 이단의 신도들도 자신이 속한 단체가 진리라 여기며 교주의 말에 절대 복종합니다. 우리의 소속은 어디인가요?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존재이기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절대 진리입니다. 유명 강사 혹은 타인의 말이 진리가 될 수 없으며, 타인의 체험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할 수 없습니다. 진리의 기준은 성경이 되어야 하며,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집중해야 합니다. 목회자들은 성경을 기준으로 진리를 분명히 전하고 가르쳐야 하며, 성도들은 성경을 기준으로 자신의 신앙과 믿음을 철저히 돌아보며 점검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진리를 바로 세우고 진리로 무장하여 우는 사자와 같이 할 수 있으면 믿는 자라도 넘어뜨리고 삼키려는 이단들을 대처해야 합니다. 새롭게 들리고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다른 복음으로 우리를 미혹하고 유혹하는 이단들을 단호히 뿌리치고 예수 그리스도에 속함으로 끝까지 승리하며 나아가는 우리 되길 함께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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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30

실시간 칼럼 기사

  • [김성수 총장] 오늘도 그분의 임재하심 안에서…
    김성수 목사(전 고신대학교 총장,현 미국 에반겔리아 대학교 총장) ‘세계관’(worldview)이란 문자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세계관의 관건은 어떤 관점에서 이 세상을 바라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을 올바로 구분하고 올바로 대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세상과의 관계를 올바로 알지 못하면 이 세상을 올바로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비교할 다른 창조주가 없는 오직 한 분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느9:6).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아무것도 없는 상태 즉, ‘무에서’(ex. nihilo)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이미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태초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창조관의 특징입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는 많은 창조 설화들이 있었습니다. 헬라의 철학자인 플라톤(Plato)도 ‘데미우르고스’(Demiourgos)라는 창조의 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데미우르고스’는 없는 것으로부터 있는 것을 만들어내는 신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바꾸는 신을 말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우주의 창조신은 무질서(chaos, 혼돈)로 해체되는 성형을 지닌 물질을 원형인 이데아에 맞춰서 질서(cosmos)를 지닌 존재자로 만들어 내는 것을 창조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하나님도 이미 존재했던 어떤 영원한 질료를 원료로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이러한 이단들에 대항해야 했습니다. 이교적인 신화와 사상에 영향을 받아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하는 이 선언은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1장 2절의 말씀 즉,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라는 표현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혼돈’이라는 의미 즉, ‘어떤 사물이나 생각들이 뒤엉켜 있는 무질서의 상태’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질서한 혼돈의 상태’로부터 질서 있는 우주(cosmos)를 만들어 내는 분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에서 질서를 만드시는 분이며,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면 무질서한 혼돈 상태를 정돈하여 질서 있는 상태로 만들어 주신다고 힘주어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너무 피상적인 해석이며 잘못된 적용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그 창조된 하늘과 땅의 상태가 혼돈하고 무질서하며, 아무런 의미가 없이 공허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혼돈과 무질서와 무의미를 창조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질서의 하나님입니다. 창세기 1:1-2절의 말씀은 지상의 질서를 향한 첫 번째 단계를 묘사한 것입니다. ‘혼돈하다’는 것은 아직 ‘모양이 없다’(formless) 또는 ‘모양이 주어지지 않았다’(unformed)는 뜻이지 ‘모양이 왜곡되었다’(deformed)는 뜻이 아닙니다. 비유하건데 그것은 앞으로 더 구체적인 세부 사항을 채워 넣고 색상을 칠해야 할 화가의 스케치와도 같은 것입니다. 또 다른 비유를 든다면 골조 공사만 끝나고 마무리 공사와 내장 공사를 기다리고 있는 신축 건물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 11:3)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지어졌다”로 번역된 단어는 다른 곳에서 진흙 덩어리로 토기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의 행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모양이 아직 주어지지 않은 땅으로 장인의 걸작을 빚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는 처음부터 혼돈이나 무질서가 아니라 질서와 의미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지금도 변함없이 자신이 창조하신 우주 만물을 질서 있게 보존하며 통치하고 계십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을 구분한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드신 세계와 언제나 저 멀리 동떨어진 곳에 계시면 피조물과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고 이 세상이 그냥 자동으로 굴러가도록 버려두지 않았습니다. 이신론자들(deists)들은 시계를 만든 후에 그 시계가 감아 놓은 태엽에 따라 돌아가도록 버려두고 잠자고 있는 시계공 할아버지처럼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이신론의 신관은 창조 세계가 존속하는데 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이 필요 없게끔 하나님이 창조 세계 속에 ‘자연법’을 내장해 놓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붙들고 계시며, 세상에는 그분의 임재와 영광과 능력과 계시가 충만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과 그 안의 만물을 창조하셨고, 모든 인간에게 생명과 호흡과 그 밖의 모든 것을 주시고, 역사를 주관하고 다스리시며, 모든 나라를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이 그러한 활동을 하심은 만백성이 그분을 구하고, 그분께 손을 내밀고 그분을 찾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에게 가까우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8). 세상이 하나님의 임재로 흠뻑 젖어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성경적 세계관의 한 기초석입니다. 존 헨리 뉴먼(John Henry Newman)의 표현대로 하나님은 워낙 깊이 창조 세계와 관계하시고 그 안에 임재하시고 그것을 섭리하시고 감화하시고 그 속에 영향을 미치시므로 그분을 조금이라도 묵상하지 않고는 창조 세계를 제대로 묵상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우주에 임재하신다면 세상은 그분의 영광과 위엄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 하나님의 창조 세계 속에서 그분의 지혜와 솜씨를 바라보면서 그분의 임재하심 안에서 살아가는 진정한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영위해 가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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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4
  • [오성한 목사] 당신은 전도자다
    당신은 전도자임을 발견해야 한다. 당신이 전도자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이다. 전도자인 것을 믿지 못하는데 전도자로 살 수 없다. 소개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저는 전도자입니다.”라고 소개할 수 있을 정도로 전도자라는 의식 속에 잠겨야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아는 것은 그런 삶이 나오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예수 믿은 자가 이 땅을 사는 이유는 유일하다. 전도하기 위해 이 땅을 사는 것이다. 어디를 가든지 전도자라는 의식을 가져야 한다. 전도를 많이 해야 전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태복음 4:19)라고 하셨다. 우리는 말씀에 기록한 대로 나는 보고 믿어야 한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사람 낚는 어부다. 임마누엘을 인정하며 복음의 감격으로 열심히 숨 쉬고 살기만 하면 전도하는 것임을 알자. 요셉을 보라. 요셉은 이집트로 혼자 팔려갔다. 우울증에 걸릴 조건은 충분했다. 그러나 그는 임마누엘의 기쁨이 있었다. 모여서 예배를 하거나 함께 찬양을 할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지만, 임마누엘을 만끽하며, 열심히 살았다. 우리는 이 땅에 사는 자체가 전도자의 삶이다. 성령 충만의 임마누엘의 사람은 요셉에게 하나님과 함께함을 보았던 사람들처럼 세상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임을 보게 될 것이다. 전도는 내가 전도자임을 알 때 삶이 재미있고 행복할 것이다. 다시 한번, 기억하라. 내가 노력해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된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었더니, 주님께서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셨다. 그래서 당신은 전도자다. 전도자임을 기도로 부르짖고 주장하며 전도자라고 말하며 이 땅을 사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시골교회 담임으로 갔다. 당시 나는 성경 읽기와 기도로 불이 붙어 있었다. 예배당 바로 옆집에 인사도 드리고, 전도하러 갔다. 옆집 아저씨는 교회 욕을 하기 시작했다. 새벽부터 시끄럽다는 둥, 여름에 문을 못 연다는 둥,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며 나를 공격하는데 전도하러 갔던 나는 언어장애인 되어 버렸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하면서 전도해야 할지 몰라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쫓겨나다시피 돌아왔다. 너무나도 비참했다. 전도할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전도 못 하는 장애인 같아 보였다. “주님, 저는 전도 못 하는 영적 장애인입니다.”라고 부르짖어 기도하며, 전도 훈련이라도 시켜달라고 답답한 마음으로 기도한 일이 있다. 전도할 줄 아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전도 현장에서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교회 한 번 와 보세요. 예수 믿으세요.”라는 말을 하고 나서는 더 할 말이 없었고, 상대방의 공격적인 말에 정신마저 몽롱해졌다. 상대방의 강한 어조에 멍해진 것이다. 넋 놓고 돌아와서는 주님 앞에 울기 시작했다. “주님 저는 전도할 줄 아는 줄 알았는데, 전도할 줄 모르는 영적 불구입니다.” “주님, 저를 전도 훈련 좀 시켜주세요.”라고 통곡을 했던 일이 있다. 돌이켜 보니 그때는 전도자라고 생각하고 살지 못했다. 당시 성령의 만지심이 있고 난 뒤 3년을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만 읽는다고 정신이 없었던 기간이었으니 마음만 뜨거웠던 것 같다. 전도 훈련받을 곳을 찾기 시작했다. C.C.C에서 교역자를 대상으로 NLTC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너무 반가웠다. 처음 받아보는 전도 훈련이었다. 사영리를 철자 한자 안 틀리게 암송하며, 훈련을 받고 현장을 나갔다. 훈련을 받는 내내 마음에 올라오는 감격이 있어 마음으로 울면서 전도 훈련을 받았던 것 같다. “주님, 신학교에 전도 훈련이 없습니다. 이런 전도 훈련이 신학교에도 들어가게 해주십시오.”라는 기도를 수없이 했던 것이 기억난다. 마음에 흐르는 눈물은 다른 사람이 볼 수는 없었지만, 나에겐 감동의 시간이었다. 그 이후 많은 전도 훈련을 받았다. 수천 명에게 전도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일 천명 이상에게 예수님을 영접시켜, 하나님의 자녀로 살도록 도와줄 수 있었는데 너무 감사한 일이다. 나는 오늘도 전도자임을 알고 산다. 기회만 있으면 전도자임을 믿기에 전도하며 산다. 우리 교회 안에도 여러 사람이 나를 통해 예수를 믿게 된 분들이 있다. 그분들을 뵐 때마다 감사한 간증 거리가 된다. 당신이 전도 훈련을 받지 못했어도 당신은 전도자다. 주님께서 전도자로 만드셨다. 전도자임을 믿어라. 철저하게 전도자임을 인정하라. 전도자임을 믿는 것이 전도의 출발이다. 손을 뻗어 전도자임을 취하라. 천국은 손을 뻗어 취하는 자의 것이다. 또 전도 훈련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기회를 내어 전도 훈련도 받을 수 있으면 받아보라. 도움이 될 수 있다. 가장 좋은 전도 훈련은 직접 전도하는 것이다. 전도엔 왕도가 없다. 간절한 마음만 있으면 성령께서 전도를 도와주시고, 천사들도 도와준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전도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전도자임을 알고 전도하다 보면 나만의 전도 방법이 생김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다 전도자다. 전도자임을 알고, 믿고, 깨닫고, 살면 억지로 전도하지 않는다 해도 전도의 기회가 온다. 준비된 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내게 좌우명같이 여기는 말이 있다. “기회는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지나간다. 기회는 준비된 자만 볼 수 있고, 잡을 수 있다.”라는 말이다. 당신도 전도자임을 알고, 마음으로 준비하고, 훈련의 기회를 만들어 준비하라. 전도자임을 알고 기도로 준비하고 있으면, 전도의 기회는 반드시 온다. 또 전도할 때 성령께서 도우실 것이다. 전도자라는 생각을 잊지 말라. 당신을 통해 전도할 때 역사하실 성령님을 기대하라. 전도하는 것에 겁을 내지 말라. 전도는 내가 아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가장 좋다. 내가 아는 사람, 내가 만난 사람에게 예수 믿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가지고, 기도해 보라. 나는 일대일 전도의 기회를 제일 좋아한다. 제일 열매가 좋기 때문이다. 전도는 이러한 성경에서 말하는 분명한 믿음, 당신이 전도자라는 믿음을 가질 때 저절로 전도하는 당신을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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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1-03-24
  • [조희완 목사] 확신하며 삽시다.(요5:19-29)
    2006년 토리노 동계 올림픽에 미국 대표로 참가했던 토비 도슨 선수가 한국에 있는 친 아버지를 찾아서 만났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그는 세살 때 길을 잃어버렸는데 부산의 한 보육원에서 생활을 하다가 미국 콜로라도에서 스키 강사로 일하는 사람의 집으로 입양이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열렸던 동계 올림픽에 미국 대표선수로 참가했다가 동메달을 땄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국에 살고 있는 친 부모를 찾고 싶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보도가 나가자 우리나라 전국에서 약 250여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자신이 친 아버지라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자기가 친 아버지라고 주장을 했지만 막상 DNA(유전자)검사를 실시하자고 했을 때 선뜻 나서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산에서 시내버스 기사로 일하고 있는 김재수 씨 만큼은 달랐습니다. DNA검사를 하나마나 토비 도슨은 분명히 자기 아들이라고 자신 있게 주장을 했습니다. 그가 확신한 바대로 토비 도슨은 그의 아들임이 입증이 되었고, 서울에서 극적으로 상봉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재수 씨가 토비 도슨을 보고 “저 아이는 틀림없는 내 아들이다”라고 확신한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실 때 “누가 뭐라고 해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라고 확신하실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네가 과연 내 아들인지 아닌지 아주 많이 헷갈린다.”라고 하신다면 정말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 사랑하는 자녀들로 확신하시려면, 먼저 우리에게 몇 가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확신이 있으면 틀림없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첫째는,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요5:19-29) 둘째는, 천국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요14:1-3) 셋째는, 응답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요일5:14-15)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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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 칼럼
    2021-03-24
  • 그루터기 칼럼[김영리 목사]이단 대책 : 한 교회가 한 가정의 회심을 돕자!
    이단은 역사 속에 함께 해온 교회의 아픔니다. 그런데 교회의 아픔은 곧 하나님의 아픔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본래 우리와 동일하게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양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우리 밖에 있지만 이들도 다시 주님의 우리 안에 들어와야 할 양들이기에 포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5장에서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통해 한 마리 양을 위해 찾고 찾으러 다니는 목자의 심정을 말씀하셨습니다. 필자는 이들을 위해 교회에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찾아 나아가려는 목적으로 이단상담소를 겸한 카페형 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은 정통교회는 멸망할 것이고, 이단상담소는 영이 죽는 곳이라고 세뇌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는 정통교회나 교회 분위기를 풍기는 이단상담소에 발을 들여놓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편하게 찾아와 접촉하며 교제하고 하나님에 대해 나눌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데 카페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해줄 수 있습니다. 카페는 누구에게나 열려있어 스스로 찾아올 수 있는 공간이며, 그곳에서의 대화, 상담, 만남 등을 통해 잃어버린 신앙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동안 신천지가 카페를 복음방으로 사용해왔었는데, 이제 그 방식을 역이용하는 것이어서 그들에게는 부담없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장소만 준비된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역을 펼쳐갈 수 있도록 후속적인 재정적 지원도 필요합니다. 특별히 필자의 교회 개척을 지원해준 모(母)교회는 이를 위해 성도 한 가정(또는 여러 가정)이 이단에 미혹된 한 가정의 회심에 필요한 경제적 지원을 돕기로 하였습니다. 이단상담 사역의 현장에서 느끼는 한 가지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전문적인 상담이 아니고서는 회심이 거의 불가능한데 경제적으로나 상황적으로 어려운 가정에서는 상담을 중도에 포기하는 사례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단상담은 일정한 교육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의 회심이 이뤄질 때까지 기약 없이 진행됩니다. 더군다나 상담 기간 중 자해하거나 이탈을 할 수도 있어 온 가족이 24시간 함께 기거하며 교대로 상황을 살피면서 상담 프로그램에 참여해야만 하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가족 중 한 사람을 회심시키기 위해서는 온 가족이 일정 기간 동안 생업을 내려놓아야만 합니다. 이러한 재정적인 이유로 상담의 첫 단계부터 아예 포기하거나 주저하려는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단상담과 관련된 사람들만이 영혼을 구원하는 책임과 사명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격언이 있습니다. 서로 힘을 합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한 영혼, 한 가정이 주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며 올바른 믿음 안에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은 특별한 사명이 있는 사람들만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모든 교회의 사명입니다. 이단에 미혹되었다가 회심하는 한 영혼은 단순히 한 명이 아닙니다. 그 한 명에게는 여러 가족이 엮여 있습니다. 그리고 회심한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은 교회를 섬기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따라서 각 교회마다 많은 재정을 들여서 보여주기 식의 전도행사를 진행하기보다는 이단에 미혹된 영혼이 속해있는 한 가정의 재정적인 부분을 회심이 이뤄지기까지 일정기간 책임져주는 것은 귀한 헌신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그 가정과 교회에 불어오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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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11
  • [박무열 목사] 부스러기의 은혜에도 감사하자
    코로나19로 인하여 무심코 보내었든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의 주어진 모든 것이 당연하게 여기며 내 안에 주어진 복을 생각하지 못하고 내게 없는 것들을 추구하며 감사하지 못했던 지난날을 돌이켜 후회해 보며 소소한 일상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해본다. 우리는 큰 은혜들을 추구하며, 작은 것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은 것에 감사함이 곧 큰 것의 감사함에 이르게 하는 지름길 이라고 생각한다. 2021년 들어서면서 더욱 필자의 삶에는 사소한 은혜들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들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다. 교회적으로는 함께 섬겨갈 성도들을 보내 주시고 개인적으로는 삶의 필요들을 채워 주셔서 감사함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마을의 주 농사가 봄에 딸기와 가을에는 감이다. 요즘은 딸기 철이라 딸기가 집에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나눌 수 있어 감사하다. 마을 어르신들이 포장하고 남는 자투리들을 담아서 가져오신다. 요즘 가격이 비싼데 팔지 않고 주십니까? 라고 반문하면 목사님 비쌀 데 잡수셔야 맛이 좋은 법입니다. 라고 하신다. 뿐만 아니라 공장에 점심을 배달하시는 다른 교회 성도님은 매일 배달하고 가시면서 교회에 들러 기도하고 남은 음식을 사택에 들러 주시고 가신다. 내게는 없지만 사람들을 통해 매일 풍족하게 주셔서, 이웃 어르신들과 나눌 수 있어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하다. 매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대할 때마다 부스러기의 은혜를 갈망했던 성경 마태복음15:27-28절에 기록된 여인의 신앙고백을 생각해 본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나는 더 좋은 것, 더 귀한 것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왔고 그것을 자랑하며 자긍심을 갖고 살아왔던 나 자신의 민낯을 들춰내게 하신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 어리석고 부질없는 것이었다. 농촌에 목회를 하면서 점점 나를 낮아지게 하시고 겸손하게 하시며 일상의 주어진 사소한 삶에도 감사하게 하는 하나님의 치유하심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신다. 시편 23편 다윗의 고백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 되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삶으로 부족한 종을 이끌어 가심에 날마다 감사할 뿐이다. 사자성어 “지족지부(知足知富) 족한 것을 알고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은 부자” 라는 말처럼 현재 주어진 삶에 감사며 만족할 수 있는 나는 참 부자이다. 일상의 욕심을 내려놓고 부스러기의 은혜에 감사하며 마음을 비우니 마음이 이렇게 평안할 수가 없다. 왜 그렇게 붙들려고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아등바등 그렇게 살았을까? 후회스러움, 만감이 교차한다. 사치와 허영을 멀리하라 영혼의 허전함을 사치와 허영으로 채우려는 것은 물질로 영혼의 허전함을 채우려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인은 더욱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사치와 허영에 감정을 이입해 대리만족에 빠지는 삶은 불신앙적인 태도다. 목양의 길에서 사치와 허영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현재의 고난과 역경에 얽매이지 말고 또한 스쳐 가버린 과거의 삶에 연연하지 말고 다가올 미래의 삶을 연상하라. 절망 중에도 희망의 꽃을 피울 수 있는 그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현재의 삶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려면 사치와 허영을 멀리하고 부스러기의 은혜에도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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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19
  • [최호숙 목사] 뇌피셜 지피셜에 만족하는 사람
    누구나 보편적으로 대화가 소통하는 사회가 아름다운 사회다. 그러나 요즘 시대는 기성세대와 신세대 사람들과 소통이 잘 안 되는 시대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신세대들은 사전에도 없는 국적불명의 외래어(外來語)이거나, 은어(隱語)를 신조어(新造語)로 만들어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성세대 사람들이 어휘력에 아무리 유식해도 소통이 안 된다. 요즘 방송 토크 쇼나 유튜브 방송을 보면 많이 듣는 용어가 있는데 오피셜, 뇌피셜, 지피셜,네피셜등이다. 오피셜은 영어 ‘official’인데 사전적 의미는 “공식적인, 공인된...”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신뢰할 수 있도록 공인 인증된 사안이라는 뜻이다. 뇌피셜은 한자어 ‘뇌(腦)’와 영어 ‘official’을 조합해서 만들어낸 단어이다. 객관적 근거도 없이 자기 머리에서 나온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생각이 마치 사실이나 검증된 것처럼 말하는 것을 뜻한다. 지피셜은 ‘지인’과 ‘official’이 결합한 용어다. 지인에게서 들었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얘기가 사실임을 주장하는 행위다. 네피셜은 ‘네이버’와 ‘official’의 합성어다. 어떤 사실을 알기 위하여 네이버 검색창을 이용하는데 네이버를 통해 알게 된 입증되지도 않은 정보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말하는 행위를 뜻한다. 자신이 상상한 것이든 지인에게 들었든 그것이 사실이라면 별 문제가 없지만 사실과 다르다면 큰 문제인 것이다. 코로나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시대에 유튜브 방송을 통해 고추나무 대를 삶아서 차로 먹으면 효과가 있다는 방송을 보았다. 그 방송에는 유명한 교회 목사님이 나와서 홍보를 하였기 때문에 100% 신뢰가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예방·치료 된다고 광고한 한의사 1명과 업체 14곳을 적발해 <식품위생법>과 <식품등의 표시·광고에 관한 법률>을 위반 혐의로 행정처분 및 수사 의뢰했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요즘 젊은 시대의 표현대로 ‘헐~’ 검증되지 아니한 한의사 개인적인 뇌피셜이었다는 사실이다. 또 요즘 방송가에 요리, 식당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장악하고 있는 요리사 백00 씨의 진행 레시피(recipe)를 보면 맛을 내기 위해 백설탕을 듬뿍 듬뿍 넣는 것을 보았다. 필자가 볼 때 저 요리법이 과연 건강에 좋은 것인지 과학적 근거가 있으며, 영양학적으로 타당한 것인지 의문이 갈 때가 있다. 단순히 요즘 사람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한 개인적인 뇌피셜이라면 문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로 인하여 교회를 혐오집단으로 몰아가며 지탄의 대상이 되어 전도가 더 어려워졌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적 사건들이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성경 저자들의 뇌피셜 정도, 또는 단순 경험을 통해 들은 것을 기록한 지피셜 정도로 생각한다. 역으로 성경적 진리를 왜곡하는 그들도 개인적 생각인 뇌피셜일 뿐이다. 신대원 시절 설교학 교수가 “가짜 약을 파는 약장수들도 힘있게 외치는데 진짜 약(신·구약)을 전하는 목회자들의 외침에 힘이 없어서야 되겠느냐”는 강의가 생각이 난다. 다른 것은 몰라도 성경은 2000년 기독교 역사에 변함없이 세계의 사람들로 하여금 인정받은 오피셜 성경(official scripture)이다. 진리인 성경을 통해만 만족 얻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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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며 생각하며
    2021-02-19
  • [조희완 목사] 감동하며 삽시다.
    충청북도 단양군에 90세가 넘어 한글 깨치기에 도전한 하신 <장영옥>할머니가 계십니다. 이 할머니는 옛날에 학교를 다니지 못해서 글씨를 모르고 평생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써보는 것이 소원이셨습니다. 그런데 수 해 전, 자기 손으로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쓰고 너무 감격해서 울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하나를 배우면 둘을 잊어버리는 할머니가 매일 경로당에 나가서 670시간 동안 교육을 받았는데 드디어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쓰고 너무 감격해서 울었다는 것입니다. 그 할머니의 다음 목표는 ‘남편의 이름과 자식들의 이름을 배워보는 것’이라고 인터뷰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할머니의 경우를 보면서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자기 이름 석 자를 쓰고 그렇게 감격하셨다면, 오늘 우리는 더 감격하고 감동할 일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손으로 우리의 이름을 쓸 줄 아는 것뿐만 아니라, 죄인 되었던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감사의 차원을 넘어서 감격할 일입니다. 만왕의 왕 되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섬기게 된 것은 매일매일 감격하고 감동할 일입니다. 마11:16-17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의 감정이 메말라서 도무지 감동이 없고 감격할 줄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감사가 없고 감격이 없고 감동이 메마른 시대를 살고 있지만,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감사하고, 감격하고, 감동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알면 알수록 감동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실 감동할 수밖에 없는 것들인데 그 동안 우리가 너무 몰라서 소홀히 여긴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우리가 교회를 알면 감동하게 됩니다.(스1:1-6) 둘째는, 우리가 말씀을 알면 감동하게 됩니다.(느8:5-9) 셋째는, 우리가 지옥을 알면 감동하게 됩니다.(막9:45-49) 우리 모두 날마다 감동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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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19
  • 기독교 세계관[김성수 총장] 복음의 총체성
    우리 모두가 끼고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 니고데모의 안경 즉, 기독교 세계관의 기초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이 말씀을 사랑하며, 읽고 묵상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 성경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기초가 되고 지도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잘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세속적인 세상은 과학과 종교, 사실과 가치, 객관적인 지식과 주관적인 감정의 분리를 주장하며 교육해 왔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잘못된 이분법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고 사고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 곧 신념 체계는 단지 개인적인 감정이나 경험일 뿐, 객관적인 사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으로 치부하면서 복음의 포괄적이고 광대한 범위와 능력을 특정 영역으로 제한시키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경건과 헌신을 강조하는 복음주의자들은 이런 협의적인 이분법적 견해에 아주 취약합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헌신은 복음주의 운동의 가장 큰 힘이 되었고, 수백만의 사람들을 그리스도와의관계로 불러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찰스 콜슨(Charles Colson)과 낸시 피어시(Nancy Pearcey)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영적 여정의 어딘가에 톱날 같은 상처의 흔적들을 가지고 있으며,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 때 그리스도를 만나 죄사함의 확신을 얻지 않았다면 나는 내자신의 범죄에서 나는 악취로 인해 이미 질식해 버렸을 것이고, 내 영혼은 결코 안식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들 가운데도 아마 많은 분들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개입하지 않으셨다고 한다면 나는 아마도 소위 세상적으로는 안락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을런지는 몰라도 내 마음 속 깊은 어딘가에는무엇인가 채워지지 않은 공허함을 지닌 채 살았을 것이며, 영혼의 만족함을 누리지 못하고,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지 못하는 어두움의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 복음주의의 장점인 동시에 또한 가장 큰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와 같은 관점이 우리로 하여금 개인의 영혼 구원이라는 차원을 뛰어넘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전체를 위해 준비하신 놀랍고 원대한 계획을 볼 수 없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구원과 신앙은 개인의 영혼 구원, 개인 경건, 교회 출석, 성경 연구, 자선 활동 등으로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 훨씬 그 이상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은 영혼 구원과 개인적인 경건,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교리의 체계를 믿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계관(worldview)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해서 기독교 신앙이란 단지 개인적인 신념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개인의 구원문제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보어주어야 합니다. 현대생활에서 사람들이 겪고 있는 분명한 문제들에 대해 눈을 감아버리고 단지 영적인 것, 성경공부, 복음전도 등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이야 말로 인류가 오랫동안 가져온 질문들, 즉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가, 이런 잘못에 대한 치유책은 무엇인가, 인생에는 어떤 의미와 목적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모두 답할 수 있는 총체적인 삶의 체계임을 보어주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유일하고도, 이성적으로 변증할 수 있는 확실한 대답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만이 물리적 질서와 도덕적 질서 모두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합니다. 기독교 신앙만이 삶과 사상의 모든 영역, 곧 피조세계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통합적인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만이 우리가 현실세계에 맞추어 올바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모든 진리의 원천이며 현실의 모든 측면을 이해하는 ‘포괄적인 틀’(comprehensive framework)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복음은 총체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의 삶 전체를 향한 총체적인 틀이며 능력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네덜란드의 수상을 지낸 18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는 기독교 진리의 지배적인 원칙은 구원론이 아니라, 우주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주 전체는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카이퍼는 칼빈주의(Calvinism)를 어떤 기독교의 교리나 명제의 체계가 아니라 ‘삶의 체계’(life system)라고 강조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삶의 체계, 혹은 세계관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복음의 총체성이라는 성경적 관점을 가지지못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와 문화의 여러 영역에서 절름발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방식과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에 이런 문제들이 이미 생겨나고 있습니다. 교회가 문화를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는 어떤 기준이나 틀(frame)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인해서 이미 부모들은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겪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의문들에 대해서도 대답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친구들이나 이웃들에게 우리가 왜 믿는지를 설명할 수 없게 되었고, 우리 신앙을 변호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 주변세계의 영향을 받아 어떤 일들을 결정하면서도 우리의 삶을 바르게 꾸려나가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심오한 아름다움과 의미들을 놓치고 있습니다. 자연의 미묘함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기쁨이나, 위대한 교향악의 연주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능력, 질서가 잘 잡힌 공동체의 조화속에서 하나님의 품성을 깨닫을 수 있는 능력도 상실해 버렸습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을 우리의 삶과 우주에 대한 총체적인 진리의 틀로 이해하면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 문화까지도 복음으로 채색하고 변혁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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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4
  • [최호숙 목사] 뇌피셜 지피셜에 만족하는 사람
    누구나 보편적으로 대화가 소통하는 사회가 아름다운 사회다. 그러나 요즘 시대는 기성세대와 신세대 사람들과 소통이 잘 안 되는 시대이다. 왜 그런가 하면 신세대들은 사전에도 없는 국적불명의 외래어(外來語)이거나, 은어(隱語)를 신조어(新造語)로 만들어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성세대 사람들이 어휘력에 아무리 유식해도 소통이 안 된다. 요즘 방송 토크 쇼나 유튜브 방송을 보면 많이 듣는 용어가 있는데 오피셜, 뇌피셜, 지피셜,네피셜등이다. 오피셜은 영어 ‘official’인데 사전적 의미는 “공식적인, 공인된...”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신뢰할 수 있도록 공인 인증된 사안이라는 뜻이다. 뇌피셜은 한자어 ‘뇌(腦)’와 영어 ‘official’을 조합해서 만들어낸 단어이다. 객관적 근거도 없이 자기 머리에서 나온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생각이 마치 사실이나 검증된 것처럼 말하는 것을 뜻한다. 지피셜은 ‘지인’과 ‘official’이 결합한 용어다. 지인에게서 들었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얘기가 사실임을 주장하는 행위다. 네피셜은 ‘네이버’와 ‘official’의 합성어다. 어떤 사실을 알기 위하여 네이버 검색창을 이용하는데 네이버를 통해 알게 된 입증되지도 않은 정보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말하는 행위를 뜻한다. 자신이 상상한 것이든 지인에게 들었든 그것이 사실이라면 별 문제가 없지만 사실과 다르다면 큰 문제인 것이다. 코로나로 인하여 고통당하는 시대에 유튜브 방송을 통해 고추나무 대를 삶아서 차로 먹으면 효과가 있다는 방송을 보았다. 그 방송에는 유명한 교회 목사님이 나와서 홍보를 하였기 때문에 100% 신뢰가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예방‧치료 된다고 광고한 한의사 1명과 업체 14곳을 적발해 「식품위생법」과 「식품등의 표시‧광고에 관한 법률」을 위반 혐의로 행정처분 및 수사 의뢰했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었다. 요즘 젊은 시대의 표현대로 ~헐~~ 검증되지 아니한 한의사 개인적인 뇌피셜이었다는 사실이다. 또 요즘 방송가에 요리, 식당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장악하고 있는 요리사 백00 씨의 진행 레시피(recipe)를 보면 맛을 내기 위해 백설탕을 듬뿍 듬뿍 넣는 것을 보았다. 필자가 볼 때 저 요리법이 과연 건강에 좋은 것인지 과학적 근거가 있으며, 영양학적으로 타당한 것인지 의문이 갈 때가 있다. 단순히 요즘 사람들의 입맛을 맞추기 위한 개인적인 뇌피셜이라면 문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로 인하여 교회를 혐오집단으로 몰아가며 지탄의 대상이 되어 전도가 더 어려워졌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적 사건들이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성경 저자들의 뇌피셜 정도, 또는 단순 경험을 통해 들은 것을 기록한 지피셜 정도로 생각한다. 역으로 성경적 진리를 왜곡하는 그들도 개인적 생각인 뇌피셜일 뿐이다. 신대원 시절 설교학 교수가 “가짜약을 파는 약장수들도 힘있게 외치는데 진짜약(신구약)을 전하는 목회자들의 외침에 힘이 없어서야 되겠느냐”는 강의가 생각이 난다. 다른 것은 몰라도 성경은 2000년 기독교 역사에 변함없이 세계의 사람들로 하여금 인정받은 오피셜 성경(official scripture)이다. 진리인 성경을 통해만 만족 얻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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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3
  • [박무열 목사] 부스러기의 은혜에도 감사하자(농촌목회 스토리)
    코로나 19로 인하여 무심코 보내었든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의 주어진 모든 것이 당연하게 여기며 내 안에 주어진 복을 생각하지 못하고 내게 없는 것들을 추구하며 감사하지 못했던 지난날을 돌이켜 후회해 보며 소소한 일상의 은혜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해본다. 우리는 큰 은혜들을 추구하며, 작은 것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은 것에 감사함이 곧 큰 것의 감사함에 이르게 하는 지름길 이라고 생각한다. 2021년 들어서면서 더욱 필자의 삶에는 사소한 은혜들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들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다. 교회적으로는 함께 섬겨갈 성도들을 보내 주시고 개인적으로는 삶의 필요들을 채워 주셔서 감사함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마을의 주 농사가 봄에 딸기와 가을에는 감이다. 요즘은 딸기 철이라 딸기가 집에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나눌 수 있어 감사하다. 마을 어르신들이 포장하고 남는 자투리들을 담아서 가져오신다. 요즘 가격이 비싼데 팔지 않고 주십니까? 라고 반문하면 목사님 비쌀 데 잡수셔야 맛이 좋은 법입니다. 라고 하신다. 뿐만 아니라 공장에 점심을 배달하시는 다른 교회 성도님은 매일 배달하고 가시면서 교회에 들러 기도하고 남은 음식을 사택에 들러 주시고 가신다. 내게는 없지만 사람들을 통해 매일 풍족하게 주셔서, 이웃 어르신들과 나눌 수 있어 참으로 감사하고 행복하다. 매일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대할 때마다 부스러기의 은혜를 갈망했던 성경 마태복음15:27-28절에 기록된 여인의 신앙고백을 생각해 본다.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나는 더 좋은 것, 더 귀한 것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왔고 그것을 자랑하며 자긍심을 갖고 살아왔던 나 자신의 민낯을 들춰내게 하신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 어리석고 부질없는 것이었다. 농촌에 목회를 하면서 점점 나를 낮아지게 하시고 겸손하게 하시며 일상의 주어진 사소한 삶에도 감사하게 하는 하나님의 치유하심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신다. 시편 23편 다윗의 고백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 되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삶으로 부족한 종을 이끌어 가심에 날마다 감사할 뿐이다. 사자성어 “지족지부(知足知富) 족한 것을 알고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은 부자” 라는 말처럼 현재 주어진 삶에 감사며 만족할 수 있는 나는 참 부자이다. 일상의 욕심을 내려놓고 부스러기의 은혜에 감사하며 마음을 비우니 마음이 이렇게 평안할 수가 없다. 왜 그렇게 붙들려고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아등바등 그렇게 살았을까? 후회스러움, 만감이 교차한다. 사치와 허영을 멀리하라 영혼의 허전함을 사치와 허영으로 채우려는 것은 물질로 영혼의 허전함을 채우려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인은 더욱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사치와 허영에 감정을 이입해 대리만족에 빠지는 삶은 불신앙적인 태도다. 목양의 길에서 사치와 허영이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현재의 고난과 역경에 얽매이지 말고 또한 스쳐 가버린 과거의 삶에 연연하지 말고 다가올 미래의 삶을 연상하라. 절망 중에도 희망의 꽃을 피울 수 있는 그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현재의 삶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려면 사치와 허영을 멀리하고 부스러기의 은혜에도 감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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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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