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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동철 장로] 감림산 기도원 ‘유엔 평화마을’ 꿈 이뤄지길
    양산 ‘감림산 기도원’ 하면 한국 기독교 교계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저변에 잘 알려져 있다. 감림산 기도원은 경부고속도로 양산 구간 서쪽 영취산 자락에 자리한 국내서 범교단 큰 규모의 개신교 기도원이다. 오가는 길 눈에 잘 띄고 많은 집회가 연중 열리는 등 모범이 되는 기도원으로 유명하다. 감림산기도원이 더욱 이름난 것은 이옥란 원장의 헌신적 기도원운영으로 한국 개신교 교계에서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가족과 함께 가끔 휴가 겸 기도원 집회에 몇 번 참석한 기억이 있다. 최근 들어 감림산 기도원 새로운 소식을 접하고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오랫동안 기도원을 헌신적으로 섬기고 있는 지인을 통해서이다. 이옥란 원장의 근황과 앞으로 기도원이 세계 복음화를 위해 계획하고 있는 프로젝트 계획을 들을 수 있었다. 감림산기도원이 계획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기도원 주변에 소유하고 있는 2만여 평의 부지를 출연하여 ‘유엔 평화마을’을 조성한다는 계획이다. 지나가는 소식으로 들을만했다. 감림산 기도원의 비전을 구체적으로 듣게 된 것은 기도 후원을 요청하는 지인과 함께 기도원을 방문한 자리에서다. 그리고 이 대형 사업이 꼭 성공하기를 바라는 소망이 생겼다. 며칠 전 기도원 방문자리에서 이옥란 원장을 만날 수 있었고 지인들과 차담을 두어 시간 가졌다. 이 원장은 50년 넘게 사역하며 팔순을 훨씬 넘긴 할머니인데도 불구 그 자리서 열정적으로 그동안의 기도원 사역을 설명해주었다. 자서전도 냈고 전국의 유명 부흥강사목사들이 칭찬하는 기도원원장이라 많이 알려져 있지만 필자가 이 원장의 지나온 사역의 발자취를 듣고 은혜가 되었다. 그리고 남은 여생 계획하고 있는 ‘유엔평화마을’ 조성의 취지를 듣고 감동을 받았다. 이 원장은 55년 전 1968년 10월 당시 수도사로서 평생 나환자를 섬기며 살기로 했다. 어느 날 양산 영취산을 바라보고 지나면서 생각 없이 산으로 들어가 세 평 정도의 땅을 얻어 기도로 무작정 기도원사역을 시작했다고 한다. 55년 기도원사역을 돌아보면서 한 날도 한 시간도 예수님 생각을 잊어본 적이 없고 나라 사랑의 마음을 놓쳐본 적이 없다고 했다. 이러한 원장의 믿음이 마지막 사역 ‘유엔평화마을을 조성해보자’는 뜻이라고 밝혔다. 55년 기도원 사역기간동안 수많은 어려움과 함께 기도와 눈물의 광야였지만 80년부터 뜨겁게 몰려오는 기도의 사람들과 함께 큰 규모의 공동체가 되어 복지원과 청소년사역 해외 선교지등의 사역의 열매를 얻었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이 원장은 불타는 나라 사랑의 소망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온 세상이 물질로만 풍요하고 감사가 사라져가고 있다는 영적양심의 마음으로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을 토로했다. 이 원장은 지금껏 하나님이 주신 기도원 주변 넓은 땅을 출연하여 감사해야할 우선순위를 소망하고 있다고 했다. 바로 6.25 참전 나라의 참전 용사와 후손들에게 감사의 공동체를 만들어보자는 마음을 솔직히 설파했다. 이곳에 ‘유엔평화마을’을 만들어 한국전쟁에 헌신해준 16개국에 감사할 수 있는 시스템과 공동체를 조성한다는 계획이었다. 팔순을 넘은 할머니가 어마어마한 이러한 계획을 생각하다니 혼돈이 되었다. 이 원장은 설명 한마디 한마디에 물러섬이 없었다. 6.25 전쟁 70년 국민소득 4만 불을 바라 본 선진국이 된 이 나라가 전쟁 참전국과 당사들에게 감사한 것이 없는 것이 늘 맘 아프다고 했다. 이 프로젝트는 반듯이 나라가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질문에 이원 장은 10년이 지나도 이 나라는 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민간차원에서 이들 참전국을 섬기고 후손들에게 다시 복음의 정신으로 다가가자는 소망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재산 출연과 함께 정부에 법인 설립 요청을 했으나 별관심이 없음을 개탄하기도 했다. 한 평생 기도원 사역을 통해 한국기독교 부흥의 밀알이 되었고 기도원사역이 점차 사라져가는 이때 일 년 내내 매일 기도집회를 지금껏 잇고 있는 이옥란 원장의 유엔평화마을 섬김의 꿈이 꼭 이뤄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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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02
  • [박동철 장로] 2022년 성탄절 “신앙의 우울증”
    2022년 성탄절을 보냈다. 교회는 온종일 성탄 예배를 통해 기쁘고 감사했다. 세상 사람들도 성탄일에는 이 땅 예수 탄생의 의미를 한 번쯤 생각해 본다. 올해는 주일과 겹쳐 성탄절이 공휴일 대접을 받지 못했다. 교회도 성탄 예배의 특별함을 맛보지 못했지만 세상 사람들도 특별한 휴일의 특혜를 누리지 못했다. 어김없이 성탄절이 달력에 새겨져있고 거리에도 캐럴이 울리고 있다. 예수 탄생의 역사를 어떻게 다시 설명하랴. 이 땅과 우주 만상의 창조주가 말씀으로 이 땅에 강림하신 로고스(Logos)의 역사이다. 이 위대한 역사의 중심이 예수 탄생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에 예수가 태어나서 병들고 약한 자 억압받는 자들을 위로하고 해방 시킨 성인으로 존경을 보낸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 강림의 위대함에 이해가 다르다. 이 땅이 죄악으로 가득 차 멸망의 길로 가는 순간을 예수가 돌이켜 놓은 것이다. 창조주 본인 예수그리스도가 말씀으로 인카네이션(incarnation 成肉身)하셔서 인류의 대역사(大役事)를 쓰게 된 것이다. 우리는 단지 예수의 이 땅 탄생에 흥분하고 문화적으로 즐기고 있다. 예수의 탄생과 공생애 3년에서 남긴 메시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의 도를 행하셨던 과정, 그리고 부활의 길을 우리 마음에서 우려내야 한다. 성탄절의 기쁨과 함께 십자가의 도를 생각해야 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 말하고 있다. 인류는 온통 죄악의 현장이 되어버린 이곳을 바꿀 수가 없었다. 사람은 불가능한 일이다. 창조주 본인이 직접 내려와 세상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실행이 십자가의 도(道)이다. 당시 시대상이 말해주고 있다. 예수의 육적 동족 이스라엘을 둘러싼 배경은 악(惡)의 최악이었다. 로마제국의 모든 억압과 학정에 이스라엘 민족이 모두 눌리어 있었다. 예수는 그 속으로 태어나 로마를 뒤집는 말씀을 전파했다. 당연히 예수는 십자가에 달릴 수밖에 없었다. 최고의 형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다. 예수는 이 땅에 온지 33년 삼 일 만에 세상 바꿈을 단번에 이루었다. 예수의 십자가도의 역사는 발전해갔다. 천년 제국 로마가 서서히 망하고 세기의 역사는 예수로 바뀌었다. 바로 복음의 역사에 세계 역사가 얽혀 발전해 왔다. 사람 사는 온 세상에 눈물이 있고 고난과 기쁨은 있어왔다. 그러나 역사는 교차하면서 복음의 역사는 계속 쓰여가고 있다. 유럽의 복음은 문예부흥과 산업혁명을 이끌어냈다. 유럽의 기독교는 타락하고 순교의 종교개혁으로 발전하고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영국에서 탈출한 청교도는 신대륙에 미주의 프로테스탄트를 이뤄냈다. 미국의 개신교 프로테스탄트는 미국을 민주주의 나라 세계의 중심국이 되게 했다. 130년 전 대한민국에 닿은 20대 벽안의 젊은 선교사들의 발길은 복음 전파와 순교의 역사를 쓰면서 캄캄한 한반도를 깨웠다. 우상과 게으름 나태한 문화 속에 나라마저 강탈당한 한반도 이 땅이 복음의 눈을 뜨고 예수 십자가의 도를 깨달았다. 광복과 동족상잔의 전쟁을 겪고 서서히 일어선 이 나라는 복음이 능력이 되었다. 산업화의 기회, 강력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국민 갈등의 위기에서 민주화를 이루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은 복음을 이룬 가나안에서 보이지 않는 전쟁의 나라가 되었다. 두 동강 난 나라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뤘지만 통일의 한반도기적을 앞두고 복음을 침탈하고 있다. 온갖 악령의 문화들이 교회를 공격하고 악한 공산 사회주의 이념과 전쟁이 계속된다. 인본주의 문화가 홍수처럼 양산되고 있다. 정치적 이념 대립이 교회와 기독교 교계에서 공격적 적대를 하고 있다. 이것이 2022년 성탄절에 느껴지는 우울증이다.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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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와 세상
    2022-12-27
  • [특별기고] 통합 기념 한마음교회 유감
    폭염입니다. 여름의 태양이 작열하는 계절! 이 여름에 우리 주님 다시 오신다면 태양처럼 뜨거운 신앙 열정을 가진 사람을 찾으실 것 같습니다. 사역의 현장마다 여름 태양보다 더 뜨거워서 주님의 칭찬을 받는 우리 교단 교회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듯이 우리는 성공적인 교단통합을 이었습니다. 그 통합기념으로 한마음교회를 설립한 것입니다. 전국 노회와 교회들이 마음과 기도와 물질을 모아 세운 기념비적 통합기념교회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 통합기념 한마음교회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는지요? 통합기념 한마음교회는 고신교단의 여러 어른들과 선배 목사님들 그리고 총회 임원들 그리고 (구)고려의 선배들과 임원들이 힘들게 이루어낸 통합의 금자탑이며 결정체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 교회의 지 교회가 되어있습니다. 교단통합을 하면서 기념으로 교회를 설랍(립)하되 (구)고려측의 목회자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설립한 교회가 바로 한마음교회입니다. 그런데 (구)고려측의 일대 한마음교회 전임목사는 당회장권 한번 갖지 못하고, 고초를 겪다가 사임하였습니다. 한마음교회 담임목사에게 이러저런 이유로 당회장권을 이양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2년 동안 무려 6번이나 당회장을 바꾸면서 힘들게 했습니다. 이런 상식 밖의 이상한 일이 통합기념 한마음교회에서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안양일심교회 부목사로 사역했던 이 모 목사가 담임으로 있습니다. 안양일심교회가 물심양면으로 많은 부분을 헌신한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전국 노회와 교회의 헌금으로 세운 통합기념교회를 일심교회 40주년 지교회로 삼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결과론적으로 유감스럽게도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위한 목적헌금이 한 교회의 지교회를 설립하는데 사용되는 어처구니 없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교단 전체가 바로 알고, 바로 잡아야 하겠다는 결연한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우리가 하나의 교단으로 통합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처음의 약속과 결의가 깨짐으로 아름다운 통합정신이 훼손된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지만, 특히 (구)고려 측 형제들에게 깊은 상처를 준 아픔이 된 것입니다. 이런 사태로 인해 안양일심교회와 당회장은 (구)고려 측 형제들로부터 신뢰를 잃었고, 지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미안했던지, 무마하려고 (구)고려의 어려운 분들을 후원하겠다고 접촉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고려 목사들은 의도가 순수하지 못한 후원금을 받을 리 없지 않습니까? 지난해부터 제안하는 후원금을 거부해 왔습니다. 올해 들어와서 또다시 (구)고려 동문회에 7천만원 정도를 후원하겠다고 제의를 해왔지만 코로나로 인해 어려운 교회와 선교사들이 많이 있었지만 통합기념교회를 세우려는 큰 뜻이 있기에 거절했던 것입니다. 급기야는 비공식 채널을 통해 기어코 후원을 했습니다. 공식적으로 거부했는데도 비공식체널을 통해 기어코 다수의 교회에 상당한 후원을 감행한 저의가 무엇인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저도 부교역자 약 10년, 한 교회 담임목회를 27년째 하니 37년 사역을 하며 산전수전공중전까지 다 겪은 사람입니다. 교회의 내부 사정이 있어 그렇겠거니, 일면 이해가 가지만, 그렇지만 한마음교회의 문제는 양 교단 통합기념 교회인만큼 그냥 넘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전국 노회와 교회의 헌금은 통합기념교회를 설립하기 위한 목적 헌금입니다. 그 목적대로 쓰이지 않았다면 바로 잡는 것이 마땅합니다. 따라서 교단 70주년을 맞아 통합기념교회를 다시 세우려는 계획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국 노회와 교회의 후원금 13억여원은 교단통합의 정신과 기념을 담는 명실공히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위해 쓰여져야 할 것입니다. 안양일심교회는 고신교단의 대표적인 큰 교회 중의 하나입니다. 또한 당회장 김홍석목사님은 앞으로 총회에 큰 일을 감당해야할 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중대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고 교단의 지도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안양일심교회 김홍석목사는 통합기념 교회 문제를 책임지고 해결하는 지도자로서의 모습을 보여할 것입니다. 이것이 (구)고려측 대부분 형제들의 일치된 생각입니다. “순교자의 고장! 진리의 파숫군! 경건자의 훈련소, 예수의 제자들이 일어나는 산실!” 그 교단이 우리 고신 입니다. 저는 우리 교단의 일원이고 교단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고신의 목사로 함께 사역함이 늘 감사합니다. 저는 고신인이 된 것이 좋습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뒤를 이어 ‘신앙의 정통’과 ‘생활의 순결’ 정신을 이어가는 우리 교단이 좋고 자랑스럽습니다. 그 어떤 일보다도 고신과 고려의 통합이 자랑스럽습니다. 통합 후 (구)고려 동문들이 연합하여 학원이사로, 고신세계선교회 이사로, 이단사이비연구소장으로, 동문회 임원으로. 각 상비부에서... 각처에서 활약하는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운 하모니입니다. 정말 아름다운 통합입니다. 이렇게 배려해 주고, 사랑해주는 우리 ‘고신’이라는 이름이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따라서 통합기념교회가 다시 설립되어 통합정신이 훼손되지 않고 계승되어 아름다운 교단을 잘 보전하고, 또 더 아름답게 발전되기를 기원하는 바램을 담아 이 글을 씁니다. * 통합기념교회 설립을 이행하라! * 전국 노회와 교회의 목적 헌금을 반환하라! 2022년 7월 중순 신앙 열정이 여름 태양처럼 뜨겁기를 기도하며... ※ 기고 글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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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02
  • [박동철 장로] 인공위성 누리호의 승천(昇天)과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昇天)
    지난 6월 21일 쏘아 올린 인공위성 누리호 2호가 정상궤도에 안착하여 쌍방향 교신에 성공했다. 이로써 지난해 10월 21일 1차 발사의 3단계 과정에서 실패로 정상궤도 오르지 못하고 절반의 성공에 그쳤던 누리호의 인공위성은 이번 2차 발사 성공으로 우리 자체 기술로 세계 7번째로 인공위성 성공의 나라가 되었다. 필자는 2주 전 6월 21일 오후 4시 누리호 2차 발사 장면을 지켜보며 감동을 가누지 못했다. 굉음과 함께 무려 1톤의 무게를 가진 쇳덩이가 공중으로 승천(昇天)하는 모습을 보고 인간이 만들어낸 과학기술에 경외감을 느꼈다. 순간 스치는 우리의 심령에서 울어대는 2천 년 전 예수그리스도의 승천(昇天) 모습이 떠올랐다. 예수그리스도의 위대했던 승천. 누가복음 24장 말미에 “축복하실 때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라”라고 부활 후 행적을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 1장 9절에도 “저희가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예수그리스도의 승천모습을 당시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리워 가셨다고 말하고 있다. 그 숫자는 70명의 제자들이라고도 하고 500명의 제자들에게 일시에 보이셨다고 한다.(고전15:6) 승천을 본 사람의 숫자가 중요하랴. 부활하신 예수가 하늘 승천하심은 분명하고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다시 재림하여 우리에게 구원의 완성을 이루시고 이 세상을 심판하시겠다고 밝히고 있다.(마:24:30) 다시 우리가 인공위성 누리호의 발사 승천을 지켜본 그림으로 돌아가 보자. 이날 누리호의 승천을 지켜본 숫자는 대한민국 국민 5천만 명이다. 5천만 백성은 가슴 졸이며 누리호의 승천 장면을 지켜보고 환호했지만 700Km 우주상공 궤도의 한계를 얼마나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후 우리의 우주과학 기술이 더욱 발전하여 경제를 발전시키고 우리를 먹여 살리는데 크게 기여했으면 하는 마음이 전부일 것이다. 혹여 달나라 혹은 화성에 우주도시 건설이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감뿐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 하늘로 올리었다는 기적의 그림은 제자들은 물론 지금 우리가 함께 느끼는 감탄과 경외 그리고 감동의 차원을 크게 넘은 위대한 복음의 깨달음을 던져준다. 먼저 예수그리스도의 승천은 이 땅에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이고 구원의 마지막 사역까지 이루겠다는 증표이기도 하다. 더욱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요한복음 16장에 기록되어 있다. 부활 후 제자들에게 땅끝까지의 복음 사명을 당부한 후 중요한 말씀을 남긴다. 16장 7절의 말씀이다.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고 했다. 무슨 말씀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이 세상에 대해, 우리 모두에 대해 마지막까지 감당해야할 시공(時空)의 사역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우리는 가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혼돈한다. 왜 삼위일체일까. 삼위일체의 분명한 주님의 사역을 선포하는 말씀이다. 승천하시고 마지막 사역 재림과 심판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죄와 싸우고 마귀와 대적하는 일이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의 좋은 일만 도우시는 착각에 빠질 때가 많다. 아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 우리는 보혜사성령의 도우심으로 죄에서 자유하고 성화(聖化)하고 영화하여 주님을 만날 시간과 공간을 보장받은 것이다. 인공위성 누리호의 발사승천을 보고 문득 예수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 그리고 보혜사 성령을 깊게 만나게 된 순간이 되었다. 그 은혜는 수천억 원이 투입된 누리호의 가치가 너무 싸게 계산이 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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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06
  • [조희완 목사] 동행의 조건 (창5:21-24)
    얼마 전 TV뉴스 중에 전국에 꿀벌이 사라지고 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습니다. 활발하게 활동을 해야 할 꿀벌들이 죽거나 흔적 없이 사라지고 벌통이 텅 빈 채로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고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미국은 전체 벌의 약 40%가 사라졌고, 유럽은 약 70%가 사라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자연재해 때문인지 아니면 바이러스 때문인지 명확한 원인 규명을 밝혀내질 못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물리학자였던 <아인슈타인>이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꿀벌이 사라지는 날 인류는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을 한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꿀벌이 사라지는 것을 단순한 자연 현상으로 보지 않고 종말의 징조로 보는 학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과연 <아인슈타인>의 예언대로 인류의 종말이 가까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분명 종말이 임박한 것 같습니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환경적으로 종말이 임박했음을 알 수 있는 징조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종말이 임박한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다면 이 시대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종말의 때에 합당한 삶의 자세는 바로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늘로 동행할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하늘로 동행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산창교회 성도들 모두가 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든든한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 할 수 있을까요? 첫째로, 믿음이 있어야 동행할 수 있습니다.(창5:21-24) 둘째로, 결단이 있어야 동행할 수 있습니다.(민10:29-32) 셋째로, 순종이 있어야 동행할 수 있습니다.(창22:6-14) 금년에 우리 모두 하나님과 동행하시므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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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31
  • [신재철 목사] 술 권하는 교회 친구
    “야간 자율학습. 학원. 교회. 집” 고등학생 때 내 동선의 전부다. 누가 봐도 바른학생의 모습이다. 물론 나를 돌보고 계신 이모님 입장에서는 교회라는 곳이 늘 눈에 가시였겠지만. 그날도 루틴에 충실했다. 부족한 과목을 메우기 위해 학원을 가고 있었다. 학원 빌딩 바로 앞에는 작은 포장마차가 있다. 어묵과 떡볶이도 있지만 가볍게 소주 한잔 기울이는 사람들도 섞여 있는 곳이다. 별 생각 없이 바라 본 포차에 익숙한 사람이 보인다. 그도 나를 보았고 내게 손짓한다. 교회에서 찬양인도를 하는 친구. 여자 후배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친구. 늘 우러러 보며 동경했던, 교회친구다. “어디가? 한잔 하고 가.” 친구 주변에는 다른 교회 친구들도 있었고 청년부 형도 있었다. 정겹게 교제(?)를 나누는 모습에 더해진 술 한 잔이 내게는 너무 어색하게 다가왔다. 그냥 어벌쩡 핑계를 대며 자리를 피했다. 마치 내가 몰래 술 마시다 걸린 듯 얼굴이 뜨거워졌다. 친구들 표정은 정말 평온한데. 교회에서 다시 만난 친구들은 여전히 평안하다. 찬양인도를 하고, 헌금 위원을 하고, 대표기도를 한다. 내가 문제일까? 친구들이 누리는 극강의 평안이 이상해 보인다. 예배 후 사적인 교제들이 이어진다. 어떤 아이들은 피아노 앞에 삼삼오오 모여 찬양을 부르고, 어떤 경건파 친구들은 지하로 내려가 기도를 한다. 집안의 눈치를 보며 교회 다니던 내게는 그런 2부 행사가 쉽지 않았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려는 내게 포장마차의 무리들이 나를 부른다. “00형 집에 갈 건데, 같이 갈래? 잠깐 놀다 가라.” 포장마차에서 모임을 주도하던 청년부 형의 자취집에 가자는 친구의 권유였다. 부담도 있었지만 그래도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에 걸음을 함께 한다. 부엌 하나에 작은 방 하나. 그곳에 남자 여럿이 모였다. 익숙하게 어떤 것을 꺼내 입에 문다. 단체 흡연이 시작된 것이다. 소주를 권했듯 친구는 나를 챙기며 따뜻한 미소로 한 대 권한다. 머리가 좀 복잡하다. 신앙이 아니라도 술과 담배는 학생이 할 것이 아니라고 배워왔는데, 지금 내게 던져진 이 숙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를 모르겠다. 겸연쩍 웃으며 부드럽게 거절하고 적당히 어울리다 집으로 돌아왔다. 나름 극강의 보호막을 치며 친구들의 문화를 거절했지만 나도 변하고 있었다. 헐렁한 양복바지, 하얀색 셔츠. 머리에는 과한 무스. 당시 오랜만에 만났던 내 초등학교 친구들은 나를 멀리하기도 했다. 내가 좀 이상해 졌다는 말이 오랜 친구들 사이에서 돌았다는 이야기를 성인이 된 후 듣게 되었다. “너 그때 완전 날라리였어.” 어떤 친구의 직설에 웃음이 나온다. 나는 그렇게 교회 다니는 날라리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흡연과 음주” 지금 생각해 보면 신앙의 핵심은 아니지 싶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두 가지를 하지 않는다. 누군가 목사라서 안하냐는 질문을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꼭 맞는 말은 아니다. 일단 맛도 없고 돈이 들고 건강에 유익도 없는 것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첫째 이유다. 굳이 신앙적인 이유를 꼽아 보자면, 많은 성경의 가르침을 다 따르지 못하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하지 말자는 신념이다. 믿음으로 포장해보지만 역시나 맛없는 것에는 유혹이 되지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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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 칼럼
    2022-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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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동철 장로] 교회를 넘보는 마약이 판치는 세상
    ‘마약’판치는 세상, 이를 우습게 여기는 요즘 정치권 지난해 연말 국회에서 국회의원들의 의정 활동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 급증하고 있는 마약사범 관련 잘잘못을 따지는 가운데 볼썽사나운 모습이 있었다.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위가 열려 따가운 질의응답이 있는 중, 이태원 참사를 사전에 막지 못한 원인이 마약 단속 때문이라는 의원의 질문이 있었다. 당시 경찰이 마약단속에 대거 동원되는 통에 사고가 커졌다고 따지는 야당의원들의 발언이었다. 사고 발생 후에도 이런 발언들이 정치권에서 요란하더니 국정조사 과정에서도 불거져 나왔다. 이태원 참사의 불행했던 사정을 폄하할 수 없지만 당시 공권력이 마약 단속에 너무 쏠렸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사고조사를 접근하는 태도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요즘 대한민국에 급격히 퍼지는 마약 실태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마약중독의 실상이 심각해졌다는 통계가 속속 발표되고 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마약상습 중독자들의 문제가 있었지만 쉽게 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만에 마약 구하기가 아주 쉽고 이에 주변 마약중독자가 폭증하고 있다. 단적인 예가 최근 5년 동안 관세청에서 대마 밀수량이 500배로 늘어났다는 공식통계가 있다. 필로폰 코카인등 치명적 중독성 마약이 옛날에도 있어왔지만 구하기가 어렵고 아주 고가였다. 최근에는 이러한 마약유통이 너무 흔해졌고 세계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유통문화가 되어버렸다. 최근 검찰청이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전국 마약 단속령을 내리면서 검찰총장이 설명하는 내용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청소년들도 피자 한 판 값이면 쉽게 중독성 마약을 구해서 집단으로 마약을 즐긴다(?)고 했다. 그래서 마약사범 중 30%가 20대들이라는 통계를 설명했다. 그야말로 마약이 세상에 판치는 요즘이 되어버렸다. 마약의 유행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온라인 구매가 쉽고 급속도로 세계로 확산되는 이 세상의 마약 풍속도를 어떻게 해야 할까. 마약의 세상 유행은 곧 교회를 넘보게 된다. 교회가 열린 세상에서 가장 경계의 대상을 꼽는다면 동성애와 마약 등 사회악을 초래하는 원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요즘 세상 동성애 합법화가 세계 대부분의 나라로 퍼지고 마약사범이 온 사회를 뒤덮어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교회는 이를 방어할 한계를 넘어버리고 말 것이다. 이 끔찍한 세상의 미래가 우리 앞으로 다가왔다는 진단이다. 성경 창세기 30장에 야곱의 가족 레아와 라헬이 신랑 야곱을 차지하기위해 합환채라는 마약성 최음제를 두고 다툼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합환채는 당시 이롭게 쓰였는지 알 수 없지만 학자들은 최음제로 설명한다. 아무튼 이로 인해 야곱의 복잡한 가정이 분란의 씨가 되었는지 또한 알 수 없으나 야곱의 가족은 자녀들 속에 복잡한 삶의 이야기에 들어간다. 사람은 절대 주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살아야하는 우리의 운명에 순종하지 못하는 죄 성이 있다. 그래서 틈만 나면 타에 쉽게 의존하고자 하는 습관이 나온다. 마약이 대중화하는 데는 인간이 약물에 의존하면서 고통을 잊고자하는데 있다. 여기에 가장 빠르게 약효를 내어주는 것이 요즘 유행하는 중독성 마약이다. 이러한 마약은 극히 일부 중병의 치료에도 쓰이지만 음란한 성문란 행위에 쓰이면서 중독되고 사회 전반을 병들게 한다. 더더욱 위험한 것은 마약의 중독성은 치명적이다. 주로 폭력배 강도행각 성행위에 쓰이면서 마약이 판치는 문화가 심각하다는 데 있다. 마약이 유행하는 사회를 정화시키는 데는 국가 공권력이 강력한 행사를 해야 한다. 그리고 사회저변 치료와 치유의 기능이 살아있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일정 부문 복음의 대상이 되어 치유의 전파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에 홍수처럼 범람하는 마약의 사회악이 교회를 되려 넘보고 있는 세태가 너무나 무섭고 걱정이다. 마약의 형편이 한계를 잃고 있을 때 하나님이 이를 포기해버릴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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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25
  • [안동철 목사] 성도의 슬기로운 명절 생활
    우리나라 최고의 명절인 설 명절입니다. 그동안 바쁘게 살면서 잊고 있었던 가족과 친척을 돌아볼 수 있는 행복한 때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사탄과 그의 졸개인 귀신들이 성도와 가정을 공격하는 ‘특별부흥회’(?)로 모이는 때입니다. 많은 가정이 이런 명절을 전후에 위기를 맞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우리 가정을 깨뜨리려는 사탄의 집중적인 공격이 있을 것을 생각하고 명절을 보내야 하겠습니다. 명절을 어떻게 보낼지 몇 가지로 정리해 봅니다. 첫째, 제사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조상의 은덕을 기리는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로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제사는 중국에서 건너온 중국문화로, 유교, 특별히 성리학이 지배한 조선의 500년의 역사를 통해 이 땅에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 근본 정신을 살펴보면 거짓과 신분 상승에 대한 인간의 탐욕이 결탁된 제도입니다. 기독교는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섬기고, 나아가 죽은 자가 아닌 살아 있는 부모와 어른을 공경할 것을 명령합니다(출 20:12). 제사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가지고 겸손하되, 당당히 대처하십시오. 둘째, 명절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을 해야 합니다. 구약 율법의 해설서인 <미드라쉬>에 의하면 “험담은 세 사람을 죽인다. 말하는 사람, 험담의 대상이 되는 사람, 그리고 듣는 사람이다.”라고 합니다. 슬기로운 명절 생활을 위해서는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말, 정치 이야기, 돈 이야기, 신변잡기 이야기, 결혼과 취업 등의 이야기는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 말이 우리 모두를 죽입니다. 명절에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사람을 격려하고 살리는 말입니다. 셋째, 명절 일은 함께 분담해서 해야 합니다. 명절의 많은 일들을 여성에게만 맡기고 남성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결코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지 않습니다. 성경은 남자와 여자, 주인과 종, 어른과 아이,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과 차별이 없음을 선포합니다(갈 3:28). 우리 모두는 주 안에서 하나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존재입니다(엡 2:22). 그렇기에 모든 명절 일은 분담하여 함께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연약한 성도를 돌아보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명절이 되면 더욱 외로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작은 선물을 보내거나 따뜻한 문자를 보내봅시다. 병원에 있는 분들에게 사랑의 전화를 합시다. 고향교회를 방문하여 축복하고, 헌금을 하는 것도 좋습니다. 오늘 한국의 도시교회는 시골교회의 눈물과 희생으로 세워진 것을 잊지 마십시다. 행복한 설명절, 주님 안에서 안전하고 행복하게 보내시기를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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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20
  • [박봉석 목사] 깊은 곳과 오른쪽
    신약 성경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갈릴리 바다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두 군데 나옵니다. 첫 번째는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것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을 때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밤이 새도록 갈릴리 바다에서 그물질을 했지만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한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그의 배를 빌려 타시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물고기를 잡으라.”고 말씀을 하셨지요.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서 갈릴리 바다를 손바닥 보듯이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의 그 말씀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순종하였고 그래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그는 그 길로 예수님 앞에 부복하고 예수님을 따라 제자의 길로 갔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요한복음은 21장에 나오는 사건으로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난 후에 실망하여서 원래 자신들이 하던 어부의 일로 돌아갔던 베드로와 몇 명의 제자들은 밤 시간에 물고기를 잡으러 갈릴리 바다로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밤도 그랬습니다. 갈릴리 바다에 대해서 잘 아는 전문 어부였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역시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인간이란 그런 것입니다. 제 아무리 뭔가에 대해서 뛰어나고 탁월하다 해도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불완전성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의 일에 대해서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의 그 실패의 현장에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예수님의 말씀에 역시 그대로 순종하였고 그로 인해서 그물을 들 수가 없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있었던 이 사건을 곁에서 보았던 갈릴리의 다른 어부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어부는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사건을 보고는 “나도 이제부터는 깊은 데로만 가서 그물을 내려 물고기를 잡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어부는 요한복음 21장에 나오는 예수님 부활 후의 사건을 보고는 “나는 이제부터 배 오른편에만 그물을 던져서 물고기를 잡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독자 여러분, 만일에 진짜 이런 결심을 한 어부들이 있었다면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분명히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어떤 곳에 던졌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던지라는 곳에 던진 그 순종으로 말미암아 많은 물고기를 잡은 것인데 오히려 그물을 던진 장소가 사람들에게 중요하게 인식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한 장소가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는 깊은 데가, 또 어떤 사람에게는 오른편이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장소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이 나라 기독교 안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경험한 신앙체험이 진리가 되어버린 경우가 있었습니다. 한 병든 사람이 어떤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여서 병이 나았더라는 소문이 나면 그 기도원은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기도를 명하신 주님 말씀에 순종하여서 나음을 얻은 것인데 오히려 기도한 장소가 마치 성지처럼 중요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십자바위(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있는 무학산의 한 바위)에 올라가서 기도해서 아들의 취업에 대한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소문이 난다면 아마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 십자바위에 올라가서 기도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뭡니까? 기도를 명하신 주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 아니라 기도한 장소가 기도 응답의 통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한국 교회 역사 가운데는 그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독자 여러분, 어디서 기도한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언제 기도했는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성경에서 가르쳐 주시는 기도의 지침과 방법을 잘 배워서 그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바로 그것이 주님 약속대로 응답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체험에 의존하는 신앙생활은 위험합니다.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 말씀을 의지하여 그 말씀에 대한 순종의 길로만 가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그리스도인의 최선의 길이 있습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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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25: 설날의 세시풍속과 용어들의 고찰
    I. 서언(序言) ‘까치 까치설날은 어저께고요’ 올해도 벌써 우리나라 고유의 명절인 설날이 눈앞에 다가왔다. 이런 날들이 되면 어렸을 때의 설레는 마음으로 손꼽아 기다리든 그 날에 대한 추억들이 아련하게 떠오르곤 한다. 하지만, 필자의 경우는 당시 부모님들이 불신자였기 때문에 차례를 지내는 일들이나 믿음에 배치되는 세시풍속들 때문에 어린 마음에도 갈등이 있기도 했다. 이런 경우는 짝 믿음을 가진 현재의 성도들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오늘은 설날을 전후한 세시풍속과 이에 대한 용어들에 대해서 우리 기독교적인 입장에서는 어떻게 볼 것인가를 논하고자 한다. II. 설날의 유래와 어원과 뜻 1. 뜻과 어원: 설날의 사전적인 뜻은 ‘새해의 첫날’이다. 또 음력 정월 초하룻날이기 때문에 원단(元旦), 세수(歲首), 정초(正初)라고도 한다. 또한‘사린다. 사간다’에서 온 말로 ‘조심하다’란 뜻도 있다. 또 이 말은 ‘섧다. 슬프다’란 말에서 왔다고도 한다. 이러한 뜻은 다소 의외로 보여 지기도 하지만, 이는 설이란 그저 기쁜 날로 들뜨기 보다는 한 해의 첫날부터 모든 일에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첫발을 내 딛는 것이 좋다는 의미에서 설날을‘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란 뜻의 신일(愼日)이라고도 한다. 이런 뜻으로 볼 때 설날이란 말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사용해도 전혀 문제가 없는 용어이다. 2. 유래: 설날의 유래에 관하여는 시작이 언제부터인지 아직 분명하지는 않다. 하지만,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이 달의 주기로 만든 태음력(太陰曆)과 이집트인들이 지구가 태양을 회전하는 주기로 만든 태양력(太陽曆)이 사용되든 때부터 일 것으로 추측한다. 그 이유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해의 시작 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기념하는 것은 거의 동일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설날을 지키는 직접적인 영향은 중국의 춘절(春節)일 것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춘절은 우리의 설날과 거의 비슷한 형태로 지켜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7세기경 중국의 역사서에‘신라에서 지켜진 설날에 대한 기록’이라는 데서 찾아 볼 수 있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 고이왕(A.D 238년) 정월에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현대의 설날로 볼 수는 없으나 새해를 맞이하여 지냈든 제사라고 볼 때 비슷한 경우로 볼 수 있다. 이로 볼 때 설은 아주 옛날부터 이어져온 민족의 명절인 것을 알 수 있다. 근래에 와서는 처음에는 양력의 1월 1일과 구분하여 민속의 날로 정했으나, 1989년부터 본래 이름인 설날로 다시 정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III. 설날의 세시풍속과 용어들 설날에 행해지는 각종 세시풍속은 주로 차례(茶禮), 복조리 달기, 한 해 운수를 점치는 토정비결(土亭秘訣), 청참(聽讖), 설빔, 세찬(歲饌), 세주(歲酒), 세화(歲畵), 음복(飮福), 덕담, 새해 성묘 등 많은 세시풍속들과 용어들이 있다. 이 중에는 사회적인 아름다운 미풍양속으로 충분히 계승하고 장려할 일들도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설날을 전후하여 행해지는 세시풍속에는 성도들이 그대로 행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는 일들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차례의식이다. 차례는 원래 하늘에 천신(天神)혹은 상제(上帝)의 존재를 믿고 제사를 지낸 천신제사였다가 조선시대에 와서 유교의 영향으로 죽은 조상제사(자신으로부터 4대위 조상까지)로 바뀌어졌다. 이는 같은 문화 영향권 아래 있는 중국과 일본에도 없는 극히 한국적인 제사 형식이다. 또한 차례의 어원은 원래 다례(茶禮)였다. 지금은 제사상에 술을 올려놓지만 원래는 차를 올렸다. 그래서 다례 혹은 차례라고 한 것이다. IV. 결어와 제언 이상에서 논한 설 명절에 대한 우리 기독교인의 입장은 어떠해야 할까? 먼저는 앞에서 논한 대로 설은 새 출발을 뜻하는 날이기 때문에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야 될 것이다. 또한 부모와 어른들을 섬기는 세배나 서로 덕담을 나누는 풍습은 교회 속에서도 더 계승 발전시켜나가야 할 좋은 미덕이다. 하지만 이것이 조상숭배의 모습으로 바뀌어 진 불신자의 세시풍속 많 큼은 결코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교회도 이제 선교 140주년에 가까운 역사 속에서 설날을 아름다운 기독교문화로 바꿀 필요가 있다. 그래서 명절이 성도들에게 더 이상 고민과 갈등을 주는 것이 아닌, 온전히 하나님께 감사하고 온가족과 일가친척들 간의 아름다운 화목의 장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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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오성한 목사] 영의 생각이 능력이다(1)
    우리가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은 영의 생각을하는 것이다. 로마서 8장은 생각이 믿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죄의 법이 사로잡아 오지만 사로잡으려하는 죄의 법에 묶이면 안 된다. 죄의 법이 사로잡아 올 때 그 실패의 생각을 묵상하지 말고 회개한 후 영의 생각을 더 깊게 해야 한다. 예수님의 간절한 소원은 이루어졌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그대로를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믿어야 한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17:21-23). 예수님은 우리로 알게 하시기를 소원하신다. 주님과 부부로 사는 그 자체가 초자연적인 삶이다. 당신은 초자연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키가 작은 사람이 키가 커지는 것만이 초자연적인 역사가 아니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삶을 살고 있다. 초자연적인 삶을 살고 있음을 믿고 살 때 초자연적인 역사도 현실로 나타난다. 믿음대로 되기 때문이다. 모든 부분이 그렇다.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죄라고 생각하는 죄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죄는 다르다.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다. 우리는 죄에서 벗어났다. 죄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주님을 믿는 말이다. 주님이 해 놓으신 모든 것이 내 것으로 믿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든 문제는 해결 되었다. 믿음으로 받아 들이여야 한다. 여러분은 죄에서 벗어났다.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가 단순히 죄일 뿐이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6:9).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14:23). 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믿지 않고 행하는 모든 것은 죄다.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는 죄는 죄 일뿐이다. 죄는 동사가 아니라 명사다. 죄는 죄로 존재하는 것이다. 어두움은 어두움이다. 우리는 생각이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은 나쁜 일을 많이 해서 더 어두워진다는 착각한다. 아니다. 세상은 나쁜 일을 더 하기 때문에 더 어두워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좀 착한 일을 하면 조금 밝아지는 것도 아니다. 어두움은 어두움이다. 착한 일을 하고 세상이 도덕적인 세상이 되었다고 밝아진 세상이 아니지 않는가? 죄인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인이 될 수 있다. 거듭남으로 의인이 된다. 어떤 착한 행위로는 절대로 의로워질 수 없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고 세상을 대하는 경우를 본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 다른 길은 없다. 믿음은 그 사람의 생각에 있다. 믿음의 성장은 생각의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5~8). 영의 생각을 하라. 영의 생각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신앙훈련은 생각의 훈련이다. 생각차이가 믿음 차이다. 영의 생각이 중요하다. 영의 생각을 하려면 생각 속에 말씀을 많이 집어넣어야 한다. 다른 방법이 없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해야 한다. 주야로 묵상해야 한다. 살리는 것은 주님이 이른 말씀이기 때문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 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육은 무익하다. 무익한 육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육신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는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 할 수도 없다. 나는 로마서 8장을 암송하며 선포하며 나의 것을 심는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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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오태열 목사] 작은 자에 대한 관심
    신부이며 작가인 H. Nouwen(1932-1996년)은 현대인의 불행은 무관심과 분노에서 온다고 하였다. 어떤 목자에게 양 100마리가 있는데 한 마리의 양이 낙오가 되었다. 내버려두면 사나운 짐승의 밥이 될 수밖에 없다. 목자는 남아 있는 99마리를 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 헤매게 된다. 이것이 길 잃은 양에 대한 예수님의 마음이요 사랑이다. 목자의 마음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게 있었다. 99마리의 양이 있다고 위안을 삼지 않았다. 현대인들은 오히려 하나에 관심을 쏟는 것을 비판하고 분노해 버린다. 하나 때문에 전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면 하나를 쉽게 포기한다. 사람은 숫자에 매인다. 긍휼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불행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은 잃어버린 그 하나에 있었다. 이는 숫자의 개념도, 재산의 문제도 아닌 마음의 문제다. 현대인은 어느새 물질화, 물량화, 숫자화, 경영화 되어 하나를 소중히 여기려는 마음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사회가 살벌해진다. 목자는 무리를 떠난 양에게 정죄와 책망, 책임도 묻지 않았다. 사랑이란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는 조건을 거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멜로 영화의 고전인 러브스토리에서 여자주인공은 아버지를 미워하여 단절하고 있는 남자친구에게 화해를 권면하면서,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과 그 주변 환경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라고 충고한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이다. 한 마리의 양은 이유야 어떠하였든 목자와 무리를 떠남으로 길을 잃어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왜 그랬느냐고 물을 필요가없다. 물어서도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왜 그랬느냐? 그러면 되겠느냐며 따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조건과 까닭을 묻지 말아야 한다. 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집 떠나, 유흥비로 돈을 다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는 왜냐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죽은 이내 아들이 살아 돌아왔다고 기뻐하며 동네잔치를 베푼다. 이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는다. 내 모습 이대로 받으시고 사랑한다. 예수께서 세리 마태가 회개할 때 제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세관 현장에서 그 모습대로 부르셨다. 그리고 그의 집에 들어가 식사하실 때,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다고 비난하면서 죄인의 친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죄인이 죄인과 함께하면 죄를 더 지을 수밖에 없지만, 의인과 함께하면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7:14절에 ‘믿지 않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않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적인 사랑이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데 사랑받을 수 있는 자격자로 만드시고, 사랑한다. 마태는 훗날 마태복음의 저자가 되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교만한 의인보다 겸손한 죄인을 더 사랑하신다”고 하였다. 부모는 병들어 아파하는 자식을 더 사랑하듯, 예수님은 고난 당하고 병든 영혼에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베푸신다. 사회 약자들인 고아와 과부, 지극히 작은 소자들, 이들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까지라 하였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찾아 헤매시고 찾아서 벗들과 함께 기뻐하는 목자,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다. 목사인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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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조희완 목사] 성장의 기쁨 (벧전2:1-10)
    성경에서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시127:3) 그런데 저는 첫 번째 아이를 낳았을 때 그 말씀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가 정상적으로 태어나지 않고 난산에다 미숙아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보통 첫 아이가 태어나면 기쁘다는데 저는 몸무게가 2kg도 채 못 되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기쁨은커녕 이 아이가 과연 살 수 있을 것인가 죽을 것인가 그것이 궁금할 뿐이었습니다. 인큐베이터에 아이를 넣어야 하는데 그 당시 제가 가난한 신학생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막대한 병원비를 감당해야 하는 것이 큰 부담이었습니다. 병원 측에서 저의 형편을 알고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믿음으로 키우라고 했을 때, 이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과연 살 릴 수가 있을 것인지 몹시도 걱정이 되고 낙담이 되었습니다.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린 줄을 알고 그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정말 눈물의 기도로 키웠습니다. 우유를 먹일 때마다 혹시 이 아이가 숨이 넘어갈까봐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아이의 몸무게가 드디어 2kg을 넘어설 때 얼마나 대견하고 기쁘던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상적인 아기들은 태어날 때 몸무게가 3kg이 넘지만 우리 아이는 태어난 지 100일이 다 되어서야 드디어 몸무게가 3kg을 넘어섰을 때 얼마나 대견하고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지금은 키가 169cm나 되는 큰 아이로 자랐고, 결혼을 해서 잘 살고 있습니다. 저는 아이를 키우면서 성장의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체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그렇게 성장되어야 합니다. 믿음이 성장하는 것은 대견한 것이고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믿음이 성장할 수가 있을까요? 첫째로, 버릴 것을 버려야 믿음이 성장합니다.(1) 둘째로, 먹을 것을 먹어야 믿음이 성장합니다.(2) 셋째로, 힘쓸 것을 힘써야 믿음이 성장합니다.(9)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우리의 믿음이 자라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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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최호숙 목사] 주의 말씀이 삶의 원칙이 되도록 하라
    주의 말씀이 삶의 원칙이 되도록 하라 우리는 보통 연말연시(年末年始)가 되면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한해가 지나고 새해가 밝았다는 표현을 한다. 그 말이 정말로 실감이 나는 2022년 한해였다. 정치적 혼란과 교계적으로 교회들이 코로나로 인하여 위축되고 회복을 위한 몸부림으로 달려온 영적 위기의 한해였고 경제적 곤핍으로 인하여 고통 속에 달려온 한해였다. 이제는 시온의 영광이 밝아오듯 이 땅에도 시온의 영광이 밝아온 것이다. 영어에서 정월을 ‘January’라고 하는데 이 말은 로마의 쌍면신(神) ‘야누스’에서 시작된 말이다. 로마 사람들은 정월이 되면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야누스’의 신을 수문장으로 세운다. 뒤에 있는 얼굴은 지나간 해를 돌아보는 회고(回顧)의 얼굴이요, 앞에 있는 얼굴은 새해를 전망(前望)하는 계획의 얼굴이라고 한다. 인간은 과거를 돌아보는 회고와 미래를 바라보는 지혜의 눈이 필요하다. 그리고 앞을 향하여 달려가는 추진력이 필요하다. 한국 속담에 “시작이 반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영국 속담에도“시작이 좋으면 반은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격언이 있고, 독일 격언에는 “입구에 들어서는 첫 발자국이 가장 힘들다”는 격언이 있다. 우리는 2023년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벌써 첫발을 내디뎠다. 로마인들처럼 야뉴스 신에게 내 인생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전능의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였을 때 초장에 홍해의 장애물이 놓였던 것처럼 우리 인생길에는 순탄대로만 있을 수 없다. 홍해가 있고, 광야길이 있고, 춥고 배고픔이 있고, 목마름이 있는 현실임을 직시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 뒤에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이런 하나님을 신뢰하고 출발해야 한다. 아직도 마음과 삶에 시작이 없다면 2월이 오더라도 다시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작 없는 끝은 있을 수가 없다. 광야 길 출발이 있어야 가나안 도착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국을 향한 힘찬 출발이 있어야 도착이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시작할 때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히 3:14 ). 또한 우리는 한 해를 걸어가면서 성경(聖經)을 성경(聖鏡)되게 하여야 한다. 어감이 이상하지만 성경을 단순한 인생 교양을 위한 글(經)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의 영혼과 육신의 거울(鏡)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했으면 내 삶 속에서 경건의 삶을 실천하며 영성 회복을 위한 노력이 필요하며,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으면 기도의 줄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며, “서로 사랑하라”했으면 사랑의 폭이 넓어져 가야하고, “화 분내지 말라” 했으면 자기 절제 통제가 필요하며, “교만하지 말라” 했으면 하나님 앞에 교만을 버려야 하고, “땅끝까지 증인이 되라”고 했으면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다윗은 고백하기를“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시119:105).”고 하였다. 삶의 원칙이 하나님 말씀이라는 뜻이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말씀대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기록하였다. 새해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원칙이 되는 2023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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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8
  • [박동철 장로] “죄와 벌”, 정말 양심이 움직이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고전 명작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제목이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명쾌하다. 죄에 따르는 벌과 이를 넘으려는 심리의 갈등을 그린 세계명작이다. 스토리를 논하기는 여백이 부족하여 제목이 던지는 직관적 메시지를 음미하면서 얘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사람이 지은 모든 명작을 넘은 성경에도 ‘죄와 벌’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중에 인간에게 던진 예수의 마지막 한마디는 세상의 죄를 찢어버리는 거대한 함의가 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에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면서 “다 이루었다”고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있다. 사복음서 중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예수는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하신 모든 일은 세상 구원을 위한 헌신이었다. 그리고 죗 값의 벌(罰), ‘죽음’이었다. 바로 사람의 죄로 인해 멸망해버린 세상의 죄를 ‘십자가 벌’로서 해결한 것이다. 예수는 그 긴 여정 33년의 마지막 날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철저히 처벌받은 것이다. 마지막 남긴 말씀이 ‘다 이루었다’는 거룩하고 거대한 음성이다. 창조주와 인간의 죄 사이에 있는 억만의 골을 인간이 벌로 해결할 수 없으니 당신이 스스로 벌을 받음으로써 ‘죄’가 해결되는 역사(役事)가 일어났다. 이것이 예수와 세상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가장 위대한 아름다운 이야기다. 죄와 벌을 이야기할 수 있는 한 토막이 있다. 1982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1947년 사망한 미국 정치인이자 법조인 피오렐로 라과디아의 이야기다. 라과디아가 판사로서 법조인 시절 재판 과정에서 눈물겨운 아름다운 판결을 내린다. 한 할머니가 손자에게 빵 한 조각을 주기 위해 가게서 빵을 훔친다. 그리고 법정까지 오게 된 할머니에게 라과디아 판사는 할머니에게 벌금 10달러를 판결한다. 그리고 벌금 10달러는 판사인 자기가 부담하겠다고 말했다. 그 이후 따라붙는 판결이 중요하다. 라과디아 판사는 이날 할머니 벌금 판결에 참석한 검사 변호사 방청객 모두에게 벌금 50달러를 선고한다. 우리 모두는 할머니가 손자를 위해 빵 한 조각을 훔치는데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한 죄가 있다고 판결이유를 밝혔다. ‘죄와 벌’에 대한 양심이 주체할 수 없이 작동한 아름다운 판결이다. 이 판결은 긴 역사 동안 회자되며 죄와 벌을 해결하는 양심의 판례가 되고 있다. 죄와 벌에 우리는 누구나 자유로울 수 없다. 죄를 지을 수 있고 억울한 누명을 쓸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모든 죄를 해결한 하나님의 판례를 보고 우리는 최소한 양심의 작동을 살려내야 한다. 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세상에 살면서 말이다. 요즘 우리 사는 세상에서 죄와 벌을 위해 거대한 사회 작동이 움직이고 있다. 많은 법정이 성수기를 맞은 듯 오일장날처럼 복잡하다. 그중에서도 온 국민의 시선을 끌고 있는 한 국가지도자의 죄와 벌을 두고 국민을 피곤케 하는 다툼이 가관스럽다. 판사의 마지막 판결까지는 많은 시간이 있다. 그러나 죄와 벌을 해결해 가는 과정에서도 작은 양심의 작동으로 나타나는 순리가 작은 아름다움이다. 검사와 판사가 공히 ‘죄 의혹’에 따른 법적인 절차를 진행하는데, “그건 조작이요”하고 진영 스크럼을 짜고 정치인 특유의 ‘국민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는 대응은 너무 가관이다. 차라리 이건 분명 사실이 아니고 이건 잘못이 있으니 공직은 내려놓겠다는 정도의 양심 작동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거대하게 보이는 듯한 정치적 방패를 만들다 썩은 동아줄처럼 국민을 위한 정당정치마저 허물어질까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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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3
  • [오성한 목사] 정체성(2)
    만약 말씀이 아닌 것 같고 잘 맞지 않는 것 같은 부분이 있다면 아직 내가 계시가 열리지 않아서 그렇거나 내 생각이 틀려서 그렇다고 믿어야 한다. 요한일서 3장 9절에는 하나님으로 부터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데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있고 죄를 짓지 않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 구절에 세 번이나 믿는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강조를 한다. 이런 말씀을 보고 나 자신을 볼 때 수용이 잘 안 될 수도 있다. 내 생각에 안 맞고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이 틀린 것이 아니다. 말씀의 조명이 덜 열려서 그렇다고 받아 들여야 한다. 또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혀 죽었다고 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나의 옛 사람이 죽었다는데 나 자신을 볼 때 죽은 것 같지가 않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럴지라도 일단 성경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믿는 자다. 나의 생각이나 경험을 믿는 자가 아니다. 나의 모습을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그대로 믿는 자다. 나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해 놓으신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 길을 지나가면서 "엄마 저것 뭐예요?"하고 자꾸 질문한다. 그러면 "저건 자동차란다"하고 말하지, 저 차는 3,000CC이고, 가격이 얼마이고, 차 길이는 얼마이고, 등등을 가르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지 않는다. 자동차의 구조를 다 몰라도 “그렇구나.” 하고 지나간다. 그게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다. 하나가지고 따지고 들어가 "내 생각은 이런데 그러면 내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할꼬?"한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를 믿다가 무너지기 쉽다.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는 육적인 고집에서 우리가 벗어나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하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6-9). 우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다. 영의 생각은 주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을 생각하는 것이다. 거듭난 자의 영은 흠도 점도 없는 그리스도와 하나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라는 말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신부로 삼았다고 이해하면 된다.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에베소서에서 이야기를 하면서 "이 비밀이 크구나. 이것은 교회에 대해서 한 말씀이다."는 결론을 맺는다. 부부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교회에 대한 말씀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네 아내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해라." 하나님이 교회를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라"는 말이 나온다. 어떤 분들은 "아니 아내만 복종해야 합니까?"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 말은 그 말만이 아니다. 뒤에 보면 "이 비밀이 크도다. 교회에 대한 말씀이라"고 말씀했다. 이것이 교회의 비밀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부다. 우리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런 표현을 해 놓았다. 우리는 거룩한 신부이다. 주님이 우리를 거룩한 신부로 만드셨다. 우리는 거룩한 신부가 되어가는 것이 아니다. 점점 거룩한 신부로 나아가다가 딱 죽을 때 거룩한 신부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미 우리는 거룩한 신부가 되었다. 입술의 표현이 부족하지만 단순한 반복된 고백이 사랑을 더욱 깊게 만든다. 이전엔 나는 거룩한 신부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삶을 살았다. 이제는 믿음으로 거룩한 신부임을 믿고 출발해야 한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기초임을 알았다. 너무 신이난다. 좋은 신부는 신랑과 같이 있는 자체가 행복이다. 신랑과 함께 하는 자체가 축복이다. 예수님과 부부가 된 자체가 복이다. 오늘도 주님과 함께 있는 자체를 행복하다고 고백한다. 나는 많이 행복하다. 행복하다고 신랑 되신 예수님께 고백한다. 나의 최고의 신랑이라고 고백한다. "주님 난 주님으로 인해 너무 행복해요."라고 자주 고백한다. 때로는 너무 행복해 눈물이 흐르기도 한다. 주님께 더 잘 표현 해 드리고 싶은데 입술의 표현력이 너무 부족한 것 같다. 좀 더 고상하고 더 훌륭한 표현을 하고 싶은데 어제 했던 말만 또 되풀이 한다. 부부가 살다 보면 아내를 "사랑해요"라는 표현도 특별한 표현 외에 특별한 표현을 못하듯 주님께도 그러하다. 표현이 부족해도 난 주님이 좋다. 이미 이루어 주신 십자가의 사랑이 너무 감사하다. 십자가는 나를 해방했다. 서로 "여보 사랑해"라는 간단한 표현을 자주 할 수 있다면 참 좋은 부부이듯 주님과 좋은 부부가 되고 싶다. 시랑과 친밀한 대화를 원하는가? 주님과 깊은 대화를 하고 싶은가? 깊은 대화를 잘 하려면 단순한 이야기 자주 하면 된다. "나의 신랑 되신 주님, 사랑해요."라고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서 말씀드렸다. 아침에 일어나서 마음으로 너무 많이 이야기하다가 새벽기도시간인데 늦을 뻔 했다. "주님 잘 잤습니다. 오늘도 나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오늘도 나는 성령으로 충만하게 살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제 부족과 연약함도 다 짊어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오늘도 주님 생각 더 많이 하길 원합니다." 이러는데 나도 모르게 방언기도가 나오고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새벽에 늦을 뻔 했다. 짧은 대화가 밝고 명랑하게 잘 되면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등의 대화가 자유로 와야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다. 학교에 가면서도 아무 말이 없고 언제 학교에서 왔는지 모르게 집에 들어온다면 관계가 끊어진 것이다. 짧은 대화가 잘 안 되는 관계에서 긴 대화를 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환영하고 영접해 주셨다. 우리와 친근하고 인격적인 삶을 살길 원하신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14:20)라고 하시지 않는가? 이것을 깨달은 바울처럼 우리도 깨달아 고백하며 사는 사람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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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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