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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동철 장로] 기독사학이 살아야 대한민국 미래가 있다
    교육강국 대한민국의 초석을 놓은 근대 선각자 세분을 꼽으라면 우남 이승만, 도산 안창호, 남강 이승훈 선생을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이승만 건국 대통령에 대해서는 붙여 얘기할 필요가 있겠는가. 치적의 하나인 토지개혁을 단행하면서 대지주들에게 땅을 사립학교 설립에 유도하고 평생 운영을 맡겼다. 바로 대한민국 인재를 양성한 사학제도이다. 한국 공교육을 폄하하지 않는다. 한데 한국 사학들이 70년대 이후 뜨거운 교육열 속에 향학의 경쟁문화를 통해 수많은 인재양성 바로 산업일꾼들을 키워냈다. 근대역사 속에 독립 운동가이자 교육자 도산 안창호 선생은 미국등지 유학을 통해 선진문화를 보고 조국의 교육진흥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후세들을 위해 배워야 만 살아갈 수 있다는 연설을 당시 후학들에게 설파했다. 자신의 호 도산(島山)을 지은 것도 태평양 바다 속 우뚝 솟은 하와이를 보고 교육을 상징하는 의미로 지었다고 한다. 신민회 조직은 물론 지금까지 이어오는 흥사단 등 독립운동과 조국의 미래를 위해 교육을 강하게 주창한 선각자이다. 남강 이승훈 선생은 유명한 오산학교를 설립했으며 3.1운동 33인의 한분으로 독립운동을 하신분이다. 거장 세분의 선각자는 모두 기독교 이념의 서구교육으로 조국 발전의 밑자락을 놓은 선각자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사학 중 광복이후에도 많은 선교사를 비롯 교회에서 기독사학을 설립했다. 그리고 건학이념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건강한 교육을 선양해왔다. 산업화 민주화과정에서도 기독사학들이 인재양성에 많은 기여를 하면서 명성 있는 사학들을 육성했다. 그리고 상시 채플시간 교목들의 복음 활동을 통해 80년대 한국기독교 부흥에 한축 기둥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최근 들어 기독사학들이 급격히 사양의 길을 걷고 있다는 분석이 모두를 안타깝게 한다. 광역단체 교육수장들이 선출직이 되면서 다양한 교육이념의 정책이 도입되고 있다. 획일적 교과서에 다양성을 도입하고 있다. 학생인권을 우선시하는 인권시대의 권리남용이 교육현장을 어지럽히고 있다는 슬픈 현실이다. 우선 교목들의 복음채플시간이 크게 줄고 있다는 최근 비공식 통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전국 사립중은 632개, 사립고는 945개소이다. 이중 기독사학을 보면 기독사학중학교가 135개, 고등학교가 185개소이다. 이 중 교목을 둔 기독사학은 중학교 79개, 고등학교 139개 학교로 알려졌다. 기독사학들이 갈수록 교목을 두지 않거나 계속 줄여나가고 있다는 반증이다. 왜 일까. 진보정치성을 띤 교육수장들이 보이지 않게 기독사학들의 복음 활동을 억압하고 있다는 말이다. 교육청에서 지원하는 학교지원예산을 들고 직간접으로 묘한 억압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기독사학의 건학 이념에 채플참여 의무시간이 있다. 이것도 자율 선택권을 두어 채플 의무시간을 자유하게 하는 추세다. 한국 기독교가 복음의 큰 사명 앞에 슬픈 현실이 되고 있다. 그동안 사학에 투자한 많은 기독사학의 주인들이 학교를 넘기거나 포기하는 사례까지 생겨나고 있다. 조국 대한민국의 오늘이 있게 한 교육의 원천이 되었던 기독사학들이 겪는 이 아픔이 아픔이 아니다. 기독사학이 무너지면 조국의 미래를 생각할 수 없다. 기독사학이 온 세상 구원의 지경을 확장하는 역할을 했던 것만 아니다. 중고를 비롯 대학의 현장까지 젊은이들이 가져야하는 건강한 정신을 함양하는데 기독사학들이 희생해왔다. 이러한 교육원천이 조국 대한민국의 비전이자 미래이다. 그러나 한국기독사학의 사양화는 다시말해 조국의 미래를 말할 수 없게 한다는 점이다. 모두가 한 번 더 새겨보고 강구책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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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15
  • [박동철 장로] 3일천하 ‘갑신정변 140년’ 이 땅 복음의 큰길 열었다
    1884년 12월 4일 밤 10시경. 이날은 최초로 지금의 체신청 우정국 개청식이 있는 날이었다. 행사를 마친 후 내·외 귀빈이 함께하는 저녁 연회가 열리던 시각. 갑자기 ‘불이야’ 하는 소리와 함께 총소리가 들리고 비명소리가 진동했다. 당시 김옥균, 홍영식, 서재필 등 젊은 엘리트 개화파 세력들이 정변을 일으킨 현장의 이야기다. 고종 즉위 20년 되는 해 일본은 개화 후 나날이 발전하고 중국과 서양 제국들이 조선의 개화와 통상압박을 하던 혼돈의 시기였다. 조선 26대 왕 고종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은 갈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급진개화를 주장하는 김옥균 파와 점진적 개화를 주장하던 민영익 등 세력 간 갈등 속에 급진개화파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정변이었다. 올해 12월 4일은 갑신정변 1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갑신년 쿠데타는 성공하는 듯 했으나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개입 3일 만에 평정하고 주모자들은 멸문지화 되거나 일본으로 도피했다. 갑신정변은 당시 일본의 지원으로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갑신정변이 성공했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됐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운명이 외세 강국에게 점령당할 수밖에 없는 비운의 상황이었다고 사가들은 말하고 있다. 역사적 평가와 상황을 접어두고 당시 사건의 현장을 통해 하나님이 이 나라 복음을 위해 위대한 계획을 펼치고 있었던 은혜를 찾아 보고자한다. 불을 지르고 쿠데타 세력들이 반대세력들에게 총을 쏘며 공격을 하는 통에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칼에 난자되어 중상을 입었다. 죽을 수 밖에 없던 상황에 연회에 참석했던 미국 루시어스 푸트(Lucius H. Foote) 공사가 긴급히 미국에서 두 달 전에 선교사로 입국한 한사람을 찾는다. 바로 최초의 의사선교사 호러스 알렌 선교사를 찾아 치료함으로써 민영익은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알렌 선교사는 누구인가? 우리의 기독교사에 거장으로 남아있는 알렌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중국으로 파송되었다. 이즈음 1882년 조미(朝美)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선교사의 마음에 조선의 선교사가 되고 싶어 자원한다. 갑신정변 두 달 전 1884년 10월 6일에 한양으로 입국한 선교사이다. 알렌의 치료로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살아남으로써 3일 천하정변은 끝이 나고 고종의 권력은 유지 될 수 있었다. 민영익을 살린 알렌에게 고종은 무엇을 원하냐고 물었다. 당연히 알렌은 병원을 지어 달라고 했다. 고종에게는 너무 쉬운 요청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변의 주동자 홍영식의 가족들이 처단되고 폐허된 집을 병원으로 개원하게 했다. 바로 최초의 병원 광혜원(나중 제중원)이다. 알렌선교사가 병원을 짓고 자유롭게 선교를 하게 되는 큰길이 열리게 된다. 하나님의 역사는 벼락처럼 전개 된다고 했다. 1885년 봄 일본에 머물러있던 아펜젤러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함으로써 조선 땅의 예수 복음이 날개를 달았다. 언더우드는 오늘의 연세대와 알렌 선교사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을 세우는 엄청난 일을 했다. 아펜젤러는 이승만을 탄생케 한 배제학당을 세운다. 뒤이어 스크렌턴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와 이화학당을 세우고 천대받던 조선의 여성들이 눈을 뜨게 했다. 조선역사가 망해가던 시기 비운의 시간표가 돌았지만 선교사들을 통해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게 하는 복음의 역사(役事)가 역동 했던 것이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축복이다. 한 나라를 부흥 발전시키는 무한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조선 5백 년의 역사는 정말 캄캄한 세상이었다. 사대부들이 타락한 유풍(儒風)의 문화 속에서 백성을 착취하고 나라의 발전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나라가 망해가는 때 나라를 살리고자 급진개혁세력들이 일으킨 정변은 사람의 위대한 뜻에도 불구하고 3일천하로 끝난다. 뒤이은 역사는 결국 일본의 36년 종살이해야 하는 비운의 역사를 겪어야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70년 종살이 후 회복의 역사를 썼다. 우리는 140년 전 위대한 영적 거장 몇 분의 선교사들이 오늘의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들어내는 초석을 낳았던 역사를 돌아본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가. 세계 10대강국을 자랑한다. 희망 속에 겪는 사회문화의 심각한 갈등을 보면 나라가 망할 것 같은 위기다. 이런 위기 때 그때의 역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야 할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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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5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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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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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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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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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실시간 칼럼 기사

  • [조희완 목사] 필요한 준비 (왕하4:1-7)
    그렇게 무덥던 여름이 가고 어느새 가을이 다가왔습니다. 계절의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옛날 어른들이 말씀하시던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다는 말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가을이 오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지나가 버리고 찬바람이 부는 겨울이 다가왔습니다. 한국에 오면 가을 단풍을 실컷 구경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는데 어느 새 다 지나가버려서 아쉬운 마음이 큽니다. 여름 내내 푸르고 무성하던 나뭇잎들이 왜 가을이 되면 색깔이 노란색으로 빨간색으로 바뀌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기온이 떨어지면서 나뭇잎의 주성분 인 엽록소(葉綠素)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나뭇잎의 색깔이 바뀌는 것을 보고 단풍이 물들었다고 감탄하고 좋아하지만, 나무는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서 월동(越冬)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추운 겨울을 무사히 견뎌내기 위해서 무성하게 달려있던 잎을 다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차가운 겨울에는 나무가 얼지 않고 무사히 추위를 버텨내기 위해서 일부러 가지 끝까지 물을 공급하질 않습니다. 그러다가 봄이 되면 겨울 내내 메말랐던 나무 가지마다 물이 오르게 해서 새싹을 틔우게 됩니다. 이른 봄에 바람이 많이 부는 이유는 바로 나무를 흔들어서 가지마다 물이 오르게 해서 싹을 틔울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 이처럼 인격이 없는 한 그루의 나무도 계절의 변화에 따라서 철저하게 자신의 삶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야 말로 시대의 변화를 알고 내일을 준비하는 삶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준비하는 사람이 은혜 받는 주인공이 될 수 있고, 준비하는 사람이 내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준비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첫째로, 항상 은혜 받을 그릇을 준비해야 합니다.(왕하4:3-6) 둘째로, 항상 받은 은혜를 증거 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벧전3:15) 셋째로, 항상 주님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눅12:35,36) ※ 칼럼은 작성 시기는 현 시간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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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2
  • [정우승 목사] 악하고 게으른 종아
    (잠언6:6)에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고 말씀한다. 우리 주위에 아주 게으른 사람과 아주 부지런 사람을 쉽게 볼 수 있다. 부지런한 사람은 하루 24시간이 모자라고, 게으른 사람은 (잠언26:14) “문짝이 돌쩌기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 말씀처럼 하루 종일 뒹굴뒹굴 하면서 지루한 시간을 보낸다. 그렇다면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달란트 비유를 생각해 보자. 한 주인이 먼 나라로 떠나가면서 종들에게 각기 다른 분량의 달란트를 주었다.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난다. 세월이 흘러 주인이 다시 돌아왔을 때 다섯 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겼고, 두 달란트 받았던 종은 두 달란트를 더 남겼다. 그래서 그들은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주인으로부터 책망을 받았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주인에게 받은 한 달란트를 땅 속에 묻어두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주인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라고 책망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의 반대가 바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이처럼 “게으른” 것과 “악한” 것을 같은 선상해 두고 있다.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게으름은 하나님 앞에서 죄악이다. 미국의 작가 <라이플리>가 쓴 <믿거나 말거나 / believe or not>에 보면 한 미국인에 관한 아주 재미있는 글이 있다. “그는 최초의 미국인 철학자였다. 그는 최초의 미국 대사였다. 그는 하모니카를 발명했다. 그는 가로등을 발명했다. 그는 최초의 정치 만화가였다. 그는 당시 최고의 수영 선수였다. 그는 처음으로 이동 순회도서관을 만들었다. 그는 걸프 해류를 발견했다. 그는 처음으로 피뢰침을 발명했다. 그는 서머타임 제도를 최초로 도입했다. 그는 펜실베니아 주지사를 네 번이나 역임했다. 그는 우편을 통한 배달을 처음으로 제도화시켰다. 그는 처음으로 미국 동북부 지역의 폭풍 경로를 그림으로 그렸다. 그는 청소과를 처음으로 조직적으로 창설시켰다. 그는 참으로 부지런했다. 그의 이름은 ‘벤자민 프랭클린’이다” 한 사람이 이 정도의 업적을 남기려면 부지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만약 게을렀다면 이 한 사람을 통해 일어났던 위대한 생산적인 일들은 도무지 불가능했을 것이다. 벤자민 프랭클린과 필적한 만한 부지런한 이가 한국에도 있었다. 이규완(李圭完, 1862-1946)하면 생소한 이름이긴 하지만 가장 이상적인 한국적 인간상으로 근세 백 년 동안에 근검절약과 성실함으로 대표할만한 인물이다. 그는 갑신정변 때 행동대장으로 활약했고, 젊은 시절은 일본과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보낸 다음 43세에 강원도 관찰사, 함경도 관찰사로 근 20년간 관직생활을 했던 분이다. 강원도 관찰사로 배임을 받아서 근무 하던 중 직제개편으로 강원도 장관으로 이름만 바뀐 채 유임되어 11년간 춘천에서 장관을 지냈다. 강원도 장관시절 춘천 우수리에 있는 어느 승지(承旨)의 집을 방문했다. 장관을 반기기 위해 만찬을 베풀자 그는 차후에는 이런 일을 삼가라고 주의를 주고는 ‘나는 어디를 가든지 폐를 끼치게 되면 반드시 답례를 하는 것이 나의 주의요, 지금부터 귀댁의 가사를 조력하겠고’ 라고는 장관이 손수 지게를 짊어지고 퇴비 운반을 시작했다. 집 주인은 당황하여 만류했지만 막무가내였고 석양이 되도록 일을 계속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이규완 장관을 대접할 때는 반찬 세 가지를 넘는 법이 없는 소찬으로 마련하는 것이 상식이 되어 버렸다. 그는 잠깐 기다리는 시간은 물론 식사 기다리는 시간, 화장실에 머무는 시간마저도 쉬는 법이 없이 노끈을 꼬거나 어망을 들고 다니며 그물을 얽는 일을 평생 잊어본 일이 없었다. 유명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게으름을 ‘무슨 일을 하고자 하는 에너지가 거의 고갈되었거나 잃어버린 상태’ 라고 정의했다. 그렇다면 게으름의 처방이 무엇인가? 게으름의 처방은 부지런해지자는 결심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게으름을 치료하려면 내 안에 있는 불꽃을 다시 발견하면 된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열정적인 설교가로 알려진 조지 휫필드(1714-1770)는 이런 명언을 남겼다. “썩어서 죽기보다는 닳아서 사라지고 싶다” 휫필드는 당시 4개월이나 소요되는 대서양을 건너 북미대륙을 무려 7번이나 방문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는 익세티 마을에서 (고전13:5)의 본문으로 마지막 말씀을 전하고 숙소에 돌아와서는 바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는 죽기 몇 시간 전까지 설교를 하였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우리도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듣지 못하더라고,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절대 들어서는 안 되겠다. 예수님의 다짐을 들어보라. (요한복음5:17)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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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2
  • [이정희 목사] 일상생활 속에 있는 불교적 용어들: 아귀다툼(餓鬼)과 아사리판(阿闍梨判)
    I. 서언(序言) 그동안 기독교인의 생활용어란 제목으로 믿는 우리들이 흔히 사용하는 신앙적 용어들에 대해서 논하였다. 사정상 당분간은 이를 멈추고, 타종교 용어 및 일상적인 말 중에 우리가 구분해야 할 내용들을 오래전 논하지 않았던 내용들을 추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그동안의 내용을 책으로 집필하는 과정에서 더 보충하려는 필자의 개인적 사정 때문이다. 양해를 구하면서 본호에서는 흔히 사용하는 불교적인 용어 아귀다툼과 아사리판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아귀다툼에 대해서 1. 사전적인 뜻: 먼저 한자어 표기로는, 주릴 아(餓)와 귀신 귀(鬼)자인데, 불교적인 의미는 계율을 어기거나 악업을 저질러 아귀도에 빠진 굶주림과 탐심으로 가득한 귀신이 늘 먹을 것을 위해 다투는 것을 뜻한다. 이런 아귀는 36가지가 있는데, 그중에는 집채만 한 몸에 작은 입과 긴 목을 가지고 있어 늘 주린 배를 움켜쥐고 먹을 것을 찾으러 돌아다니는 아귀도 있다고 한다. 그다음 일반적인 의미는‘염치없이 먹을 것이나 탐하는 사람’,‘성질이 사납고 탐욕스러운 사람’, ‘먹을 것과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죽을 듯이 사는 사람’을 통칭하기도 한다. 비슷한 말은‘서로 남의 것을 뜯어먹으려고 덤비는 판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각다귀판’이 있다. 2. 용어의 적용: 아귀(餓鬼)는 몸이 앙상하게 마르고 배가 수미산보다 큰 데 반해 목구멍은 바늘구멍처럼 작아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늘 굶주림으로 괴로워한다고 한다. 따라서 아귀는 성질이 사납고 지독하게 탐욕스러운 사람을 비유하고, 아귀다툼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싸우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또 한 가지는 사찰에서 승려가 식사하고 난 그릇인 발우(鉢盂)을 씻은 물을 청수(淸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고춧가루 등 음식물 찌꺼기가 있으면 안 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아귀가 바로 이 청수를 먹는데 목구멍이 너무 좁아서 음식물의 찌꺼기가 아귀의 목에 걸리면 고통스러워 날뛰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한다. III. 아사리판(阿闍梨判) 대해서 1. 사전적인 뜻: 먼저 국어 사전의 뜻을 보면, 범어인 아사리(acarya)는 스승이 될 만한 덕이 높은 승려를 의미하며, 판(判)은 일이 벌어진 자리 또는 그 장면을 뜻한다. 하지만, 이 두 단어가 합쳐져서 아사리판이 되면, 질서가 없고 제 주장만 난무하는 어지러운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2. 아사리판의 유래: 앞의 뜻에서 본대로 덕망 높은‘아사리’들은 그들의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다같이 모여서 함께 의견을 나눈다. 하지만, 각자 의견이 다를 때 격렬한 토론이 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아사리’들이 모인 장소가 때로는 소란스럽고 무질서한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이를 두고 현재는 질서 없이 자신의 주장만 난무하는 어지러운 상태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이상으로 볼 때 아사리는 덕이 높은 스승 혹은 덕망 높은 스님을 일컫는 말로서 좋은 말이지만,‘판’이라는 단어와 합쳐져서‘서로 잘났다고 떠드는 어지러운 현장‘으로 변질된 용어가 된 것이다. IV. 맺는말 및 제언 이상의 아귀다툼과 아사리판은 서로 다른 용어들이지만, 부정적인 말로 사용되는 것은 동일하다. 특히 아사리는 덕이 높은 승려들을 칭하는 좋은 의미지만 토론의 장이 열리면, 덕이 높은 승려라 할지라도 서로의 주장만이 난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변질된 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두 말은 사용하지 못할 말은 아니지만, 이 사회에 경각심을 주는 용어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현재 사회의 정치 경제, 문화 할 것 없이 좋은 일들이지만, 각종 이기주의적인 아귀다툼과 아사리판이 난무하는 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기독교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란 점에서 경종을 울려주는 말들로 여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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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2
  • [오성한 목사] 화평
    우리가 누구인지, 어떻게 우리가 의롭게 되었는지, 어떻게 믿음을 얻을 수 있는지, 자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확신만 할 수 있다면 화평을 누리게 된다. 앞으로 천국 가서 누릴 영광만을 많이 생각하는 편이다.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가득하다. “이 땅에선 이래도 천국 가면 안식할 거야.” “천국 가면 완전 승리할 거야.” “천국 가면 영원한 정복자가 될 거야.” “천국 가면 화평이 있고 더 이상 실패는 없을 거야.” “이 땅은 실패와 좌절과 비참함과 연약함만 있을 따름이야.” 이러한 사고는 우리로 담대한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하게 한다. 우리가 바른 정보와 바른 지식을 갖는다면 바른 믿음을 가질 수 있다. 말씀의 분명한 확답을 가지면 바른 믿음으로 초자연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려야 한다.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고 한다. 로마서 1장에서 모든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보이지만 믿으려 하지 않는 그들은 모두 죄인이라고 선포한다. 로마서 2장은 유대인들도 모두 죄인이라는 것을 판정한다. 3장에서는 예수를 믿는 모든 이들도 다 죄인이라고 선언을 하면서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 한다”고 선언한다. 그런 후 반전이 일어나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율법 외에 한 다른 법을 내셨는데,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의를 주시는데 이 의는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거저 주시는 의다.”고 선언한다.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린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을 알고, 예수님께서 이루신 일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십자가에서 함께 죽고, 함께 부활했으며. 함께 승천했고, 함께 보좌 우편에 앉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드러나는 우리의 습관이나 모습과는 상관이 없다. 주님이 실재로 그렇게 하신 것이다. 믿으면 구원을 주시겠다고 한 언약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해 주신 것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 누리는 것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고 하신다. 우리는 언제 모든 것을 이긴다는 말인가, 지금인가, 나중에 인가? 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로마서 8:1)하고 하셨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정죄함이 없게 되는가, 지금인가 더 노력한 미래인가? 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한다. 지금 화평을 누리자는 말인가, 미래 천국 가서 누린다는 말인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하여 화평을 누려야 한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것을 그대로 지금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다. 천국 가서 누리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의 것이다. 죽고 난 다음에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믿고 사는 것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함을 믿고 사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고후5:21). 죽어서 천국에 들어가면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말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어야할 이유가 있다. 그래야 임마누엘 할 수 있으시기 때문이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고 싶으셔서 먼저 이 일을 하셨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와 함께 하고 싶으셔서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를 의롭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아직 하나님을 모를 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이 일을 이루어 놓으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필요로 하셔서 완벽하게 나를 속량하셨다.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3:26)고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우리를 의롭게 했다. 임마누엘하시기 위해 값을 지불하셨다. 놀라운 일이다. 임마누엘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의롭게 하셨다. 예수를 믿는 것은 임마누엘을 믿고 사는 것이다. 할렐루야! 우리에게 넘치는 기쁨으로 그 영광 앞에 온전한 신부로 서게 하셨다(유24절). 천국 가서가 아니다. 지금이다. 지금 우리는 주님의 신부요, 그분 앞에 기쁨으로 설 수 있고, 천국 가서도 기쁨으로 설 수 있다. 이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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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2
  • [박봉석 목사] 성경 인물 바로 보기
    필자는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성경을 읽고 배우기 시작하면서 시험에 들 뻔 했던 적이 있습니다. 창세기 38장을 보니 야곱의 아들이었던 유다라는 사람이 자기 며느리인 다말과 동침한 기사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어떻게 성경인데 이런 기사가 기록될 수 있다는 말인가?” 고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노아, 아브라함, 다윗 등 여러 성경의 인물들의 기사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그렇게 칭송하는 인물들이건만 비겁하고 치졸하고 나약한 모습들을 볼 수 있고, 또한 중대한 죄악을 범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히 실망스러울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처음 예수님을 믿고 얼마동안은 성경의 인물들을 아주 위대하게 보고 추앙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결코 성경 인물들의 삶의 모습을 무조건 미화하여 보여주지 않습니다. 성경을 조금만 주의하여 읽어봐도 굉장한 믿음의 용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어처구니없는 실수와 허물과 죄악이 등장하는 것을 꽤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포도주에 만취하여 하체를 다 드러내므로 말미암아 자신의 아들에게 씻을 수 없는 저주를 물려준 노아의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분명한 약속을 받고도 자기가 혹 해를 당할까봐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일 뿐이라고 속였던 아브라함의 모습도 나옵니다. 유부녀를 간통하고 그녀의 남편이며 또 자기의 충복이었던 사람을 살인교사까지 했던 다윗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와 같이 성경은 성경 인물들의 허물과 죄악상을 결코 미화시키거나 정당화시키지 않고 그것 그대로를 발가벗기듯이 벗겨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성경은 그런 기사를 기록한 것일까요? 그것은 성경은 결코 인간의 위대함을 보이려는 책이 아니라 그런 허물 많고 죄 많은 인간을 부르시고 구원하시고 쓰시는 하나님을 증거 하려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기록된 궁극적인 목적이며,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인물들을 그런 관점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관점을 아는 사람은 결코 성경의 인물 때문에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사람을 구원하시고 쓰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임페리얼 박물관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림 한 점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 황제가 예배당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주교가 막아서는 내용을 묘사한 그림입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데살로니가 시민을 1,500명이나 학살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교회는 로마 황제에게 엄한 권징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밀라노에 와서 아무렇지도 않게 예배당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당시 밀라노의 주교였던 암브로시우스가 예배당 정문 앞에 버티고 서서 “절대 들어갈 수 없습니다.”라고 황제에게 선언을 합니다. 이 분은 어거스틴을 기독교로 개종시킨 유명한 분이었습니다. 목숨을 건 암브로시우스의 이러한 태도 앞에서 황제는 얼떨결에 “성경에 보면 다윗 왕도 큰 죄를 지은 죄인이었지 않습니까?”라고 대꾸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다윗도 그랬으니 자기에게도 이렇게까지 냉혹하게 대할 것은 없지 않느냐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암브로시우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황제께서는 다윗의 죄를 본 받으신 것입니까? 그렇다면 다윗의 회개는 왜 본 받지 않으십니까? 다윗처럼 회개를 하십시오!” 황제는 그 말에 기가 질려서 땅바닥에 엎디고 맙니다. 바로 그것이 그 그림의 내용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죄를 보면서 “다윗도 그랬는데, 베드로도 그랬는데.”하면서 은근히 내가 지은 죄를 합리화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본 받으라고 그 인물들의 행적을 성경에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적으로 방심하면 누구든지 죄에 넘어질 수밖에 없음을 알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들의 그 후의 철저한 회개의 모습을 본 받아 복된 길로 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속의 어떤 인물의 죄를 보고는 나는 그 죄에 빠지지 않아야 하겠다고 결심을 한다면 성경을 잘 본 것이고, 그리고 그 후의 그의 회개의 모습을 보고 나 또한 아직도 온전히 회개하지 못한 것을 회개한다면 성경을 가장 잘 본 것이며 새 은혜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성경, 바르게 읽고 바르게 봐야 하겠습니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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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2
  • [특별기고] 이규철 목사 : 거짓말 사회에 던지는 어거스틴의 일성(一聲)
    2023년 영국 ‘레가툼 연구소’(Legatum Institute)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조사 대상167개국 중 개인과 국가제도에 대한 신뢰정도를 반영하는 사회자본 지수가 107위에 그쳤다.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혹은 정치적으로나 사법적 영역에서 정직하지 않고 거짓말에 대해 관대하고 거짓말을 하며 살아간다는 방증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어거스틴(354-430)이 살던 시대, “(로마의)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로마서 3: 13-14)했다. 거짓말로 도포된 사회를 개탄스럽게 여긴 어거스틴은 세계 최초로 거짓말에 대한 두 권의 책을 저술했다. 하나는 ????거짓말에 관해서????(De mendacio, 394-395)이고 다른 하나는 ????콘센시우스에게 보낸 거짓말 배척론????(Contra mendacium ad Consentium, 420)이다. 어거스틴은 ‘모든 거짓말은 죄’(Omnia mendacia sunt peccata)라고 집약한다. 어거스틴은 거짓말에 대한 정의를 내리지는 않았지만, 모든 종류의 거짓말은 유해하다는 전제하에 소위 거짓말의 ‘4범주’와 ‘8정도(程度)’를 검토한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거짓말의 첫 번째 범주는 ‘부당하고 무익(無益)한 거짓말’이다. 남에게 부당하게 해를 끼치고 유용하지 못한 거짓말은 거짓말을 하는 자신에게도 해가 된다. 두 번째 범주는 ‘남을 위하는 거짓말’이다. 비록 가난한 사람을 위한 의도라고 해도, 도둑이 항상 죄인이듯 거짓증인 또한 역시 죄인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범주는 거짓말의 가장 심각한 형태인 ‘종교적 거짓말’이다. 종교적 거짓말은 비록 여타 사람에게 육체적 위해(危害)를 가하지 않았다고 해도 사람의 영혼을 혼탁케 하는 심각한 거짓말이다. 네 번째 범주는 ‘휘무스’를 예로 든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거짓말’이다. 로마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을 때 ‘휘무스’ 주교는 몇몇 기독인을 숨겨주어 로마 황제로부터 심한 고문을 당하였고 자백을 강요받았다. 이때 휘무스는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을 할 수 없습니다”라며 모진 고문과 취조를 견뎠다. 휘무스의 이 결연한 모습에 감동을 받은 황제는 휘무스와 그가 보호하던 성도를 사면해 주었다. 어거스틴은 비록 선의의 거짓말이 이웃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거짓말 그 자체는 죄이기에 이웃의 생명을 구하려 한다면 거짓말이 아니라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어거스틴은 ‘거짓말의 8대 정도’를 검토한다. 어거스틴이 보기에 가장 심각한 첫 번째 거짓말은 거짓된 종교적 가르침이다. 두 번째는 특정인에게 부당한 해를 끼치는 거짓말이다. 세 번째는 어느 특정인에게는 유익하나 다른 사람에게는 무익한 거짓말이다. 네 번째는 사람들이 그저 해보는 악의 없는 거짓말이다. 다섯 번째는 사람들끼리의 대화를 부드럽게 하기 위한 거짓말이다. 여섯 번째는 어떤 사람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도 어느 특정인을 유익하게 하는 거짓말이다. 일곱 번째는 어떤 사람에게도 잘못을 행하지 않으면서도 특정인에게는 유효한 거짓말이다. 무죄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거짓말의 경우이다. 여덟 번째는 어떤 이가 범죄에 빠지게 되는 것을 막고 동시에 그를 건지기 위한 거짓말이다. 어거스틴은 인간사 거짓말이 일반적이고 상황에 따른 정도의 차이를 보인다고 하여 거짓말에 관대한 우리들에게 권고한다. “젊은이에게 악마가 속삭이는 소리는 그럴듯한 낚시 밥이 된다. 그 대신에 진리가 속삭이는 소리는 죽음에 이르는 독약처럼 들릴 것이다. 정의가 처음부터 젊은이에게 맛보여 주는 쓰디 쓴 환멸은 어쩌면 쓴 약과도 같다. 그것은 청년층에서 장년층으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약이다. 불성실은 겉으로만 달콤하고 젊은이를 빠뜨리는 올가미에 불과하다. 거짓이 악마를 불러들이는 초인종이라면, 진실은 악마를 쓸어내는 빗자루이다.” <목사 이규철 Ph. D. / 안동성결교회, 한국군선교신학회 신학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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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1
  • [최호숙 목사] 영적 위여누란(危如累卵)의 교훈
    위여누란(危如累卵)이란 고사성어가 있는데 그 뜻은 “계란을 쌓아놓은 것처럼 위태로운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춘추전국시대 진나라의 영공은 향락에 빠져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규모 인력과 물자를 동원하여 향락을 위한 9층 돈대(누각, 별장)를 세우게 하였다. 신하들이 반대할 것을 염려하여 이 사업에 반대하는 자는 목을 벨 것이라 선포하였다. 이때 순식이라는 관리가 나라의 위태함을 보다 못해 임금을 찾아가 깨달음을 주려고 9개의 장기알을 받침대로 하여 그 위에 12개의 계란을 쌓아 올리는 재주를 보였다. 이 사실을 보고 있던 영공이 계란을 쌓아 갈 때마다 “아이구 저런, 위태로워! 위태로워!”하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때 순식은 말을 하였다. “이것이 뭐가 그렇게 위태롭습니까? 이것보다 더 위태로운 일이 있습니다. ” “아니 더 위태로운 일이 있다니 그것이 무엇이오?” “향락에 빠지고 9층 돈대를 세우느라 나라 안이 어지러워 이웃 나라에서 우리나라를 침략하려고 지략을 짜내고 있습니다. 나라가 망하느냐 흥하느냐 달려있는데 이 위기 상황보다 무엇이 더 위태롭단 말씀이십니까? 영공은 깨닫고 위기의 삶을 모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삶을 보면 정치적 혼란으로 인하여 위태한 상황을 만나게 되었다. 정치적 혼란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한국 교회와 교회에 속한 가정의 영적 위태함이다. 가정의 위기와 침체가 교회의 위기와 침체로 이어져 위태로움을 보이고 있다. 그 위기와 침체는 분주함과 조급함에서부터 오는 현상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골든 맥도날드는 말하기를 현시대 그리스도인의 삶을 ‘쫒기는 인생(driven life)’과 ‘소명의 인생(called life)’으로 설명한 바 있다. 불행히도 소명의 인생을 사는 사람은 적고, 대부분은 쫒기는 인생을 살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 결과로 맥도날드는 우리가 내면의 영성을 상실한 채 살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별히 목회자의 삶을 조명해 보면 하나님을 위한 분주함보다는 나를 위한 이기적 분주함이 더 많음을 보게 되었다. 필자의 삶을 조명해 보면 목회 초년부터 은퇴가 가까이 온 지금 시점에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는 똑같은 삶이었음을 고백한다. 어느 목회자의 아들이 아빠에게 “아빠는 나빠는 아니지만 바빠!”했다고 한다. 비본질적 분주함의 스케줄에 쫒기는 목회자 가정들에 대한 적절한 풍유가 아닐까 한다. 또 다른 위태함이 있다면 번영신학(prosperity theology)의 문제점이다. 번영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의 본질을 번영에 두고, 번영하지 못하면 죄요, 번영하면 축복이라는 등식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위태함과 위기는 현대 문물이 낳은 스마트 폰에 지배당하여 노예로 살아간다는 슬픈 현실이다. 인터넷과 현실의 구분이 어려워졌고 SNS가 현실의 인간관계와 감정까지 악영향을 쉽게 끼치게 되는 상황이 초래되었고,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며 상대적 박탈감을 쉽게 느끼게 되었다. 삶의 위기와 영적 위태함을 극복하려면 나를 세워주실 말씀이 필요하다. 날마다 경건의 삶을 통해 말씀을 묵상하고 성령님의 통제를 받으며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이 삶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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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1
  • [정우승 목사]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우리나라는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2016년 9월 28일부터 시행되고 있다. 이미 경제 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이 미국을 능가하는 선진국이 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부패’라는 말도 있다. 국제투명성기구(TI)는 1993년 피터 아이겐이 설립한 NGO 단체인데 매년 각국의 공무원이나 정치인이 얼마나 부패를 조장하는지 부패지수를 산출하고 있다. 2024년 국가별 부패인식지수 결과에 따르면 국가 청렴도는 덴마크가 1위이고 우리나라는 180개국 중 32위를 기록했다. 청렴도가 높은 국가들은 행정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바탕으로 구제사회에서 높은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다. (출애굽기23:8)에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라고 말씀한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를 보여주는 본문이 있는데 참 흥미롭다. (신명기10:17)에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 가운데 신이시며 주 가운데 주시오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라고 말씀한다. 또한 부패한 관리를 지적하는 대목에서도 뇌물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사야1:23)에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 라고 말씀한다. 지금보다 훨씬 어두운 옛 시대였지만 그 중에서도 몇몇 강직하고 뇌물을 멀리하였던 선비들도 있었다. 고려 때 최석(崔碩)이 부사(府使)로 재직할 때에 청령하기로 이름이 났다. 순천에서는 부사(府使)가 임기를 마치고 떠날 때에는 반드시 말 여덟 마리를 선사하면서 마음대로 선택하게 하였다. 최석이 임기가 차서 돌아갈 때에 고을 사람들이 말을 바치면서 좋은 것을 택하라고 하니 최석은 ‘말이 서울에까지 갈 수 있으면 족하지 선택은 무엇하러 하느냐’ 하면서 집에 돌아와서는 그 말을 돌려 보냈다. 고을 사람들이 받지 아니하니 최석은 ‘내가 너희 고을에 부사로 있을 때에 암말이 새끼를 낳았는데 내가 지금 데리고 있으니 이것 마저도 나의 욕심이라’ 하고 그 망아지마저 돌려보냈다. 그 뒤로부터 말을 바치는 폐단이 드디어 없어졌다. 그 후 고을 사람들이 최석의 덕을 칭송하여 비석을 세워서 팔마비(八馬碑)라고 칭하였다. 이 덕담은 여지승람(與地勝覽)에 전해진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대마도에 사신으로 갔을 때 대마도 수령이 위로하는 연회를 베풀고 선물로써 그림부채, 패도, 호초, 단향을 주었다. 이에 정약용은 일행이 받은 것을 다 거두어 한 그릇에 봉하여 두었다가 돌아올 때에 선물들을 아랫 사람에게 주어 대마도 수령에게 도로 보내었다. 그 뒤에 수령이 특별히 사람을 보내어 그 선물들을 서울까지 가지고 와서 사신으로 갔던 일행에게 나누어주기를 청하므로 임금이 그 청하는 대로 허락하였더니, 정약용은 ‘신이 거기에 있을 때에 받지 아니하였다가 여기에 이르러 받는다면 전후에 마음이 다른 것이 되니 진실로 원하지 아니합니다’ 라고 하자 임금이 정약용의 말의 감동되어 먼 길을 찾아온 대마도 사신에게 선물을 도로 주어서 보냈다고 한다. 성종 임금이 하루는 뒤뜰을 산보하는데 우연히 까치가 종이쪽지 하나를 물어다가 임금 앞에 떨어뜨렸다. 주워서 보니 바닷가에 있는 한 수령이 좌승지에게 선물로 보낸 물품 목록이었다. 임금이 그 종이 쪽지를 소매 속에 넣고 경연에 나와서 여섯 승지를 불러 ‘만약 외방의 수령이 선물을 자네들에게 선물로 보내면 예의를 돌아보지 않고 받겠느냐’고 하였다. 여러 승지는 어찌 감히 받겠느냐고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는데 좌승지는 자리를 피하여 앞에 엎디면서 ‘신은 그렇지 못합니다. 90세 노모가 있는데 전부터 잘 아는 한 수령이 해물을 신에게 보내었기에 신이 받았습니다’ 하였다. 이 솔직한 행동을 임금은 가상하게 여기고 전보다 더 신임이 두터웠다고 한다. 청백(淸白)에는 시련이 따르고 그 시련은 관직에 붙은 벼슬덤을 둔 유혹을 극복하는 데 있다. 사회의 고위 지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적적 의무, 사회에 대한 책임을 기리키는 용어로서 프랑스어로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는 용어가 있다. 즉 ‘귀족의 의무’라는 뜻이다. 특히 상류층이 전쟁에 참여하거나 빈민을 구제하는 등에 앞장서는 행동을 말한다. 이러한 행동은 단순히 의무를 넘어서 자신이 가진 권력과 부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성도의 당연한 의무 중의 하나가 뇌물을 받지 않는 것임을 깊이 인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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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1
  • [오성한 목사] 이전의 우리가 아니다.
    바울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된다는 것을 계속 설명을 한 후에 한 말임을 기억하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고 했기 때문이다. 의롭게 되는 것이 사람의 노력이나 행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죽었다는 의미가 율법에 대해 죽었음을 분명히 밝힌다. 율법에 대해 죽은 자신이 이제 사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산다고 말한 후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고백한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19-20)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는 말은 19절에서 말씀한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표현을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죽여야 한다는 표현이 아니다. 로마서 6장의 십자가에 나와 함께 죽었다는 것이 실감이 되지 않았다. 도저히 아닌 것 같다. 나는 살아 있었다. 그런데 주님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성한아, 그래도 나는 너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단다. 너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니?” 사랑하는 주님의 음성이었다. 그것을 믿는 일이 이론은 되는데 실재는 아닌 것 같았다. 믿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초등학생 수준이었다. 배가 고픈데 밥을 빨리 차려주지 않아도 짜증이 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밥 먹기 전에 화를 내곤 했으니 소화가 잘 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자주 채한 원인이 되기도 한 것 같다. 나는 나의 수준을 스스로 생각하곤 한심한 생각이 들었지만 고칠 수가 없었다. 화를 내고 나면 괴롭다. 화 낸 것 때문에 더 화가 났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웃기는 일이다. 화를 내게 만들었다고 또 화를 냈다. 이런 수준 낮은 나에게 주님은 “너는 죽었어.”라는 것이다. 나는 믿기로 했다. 나는 자상한 편이다. 자상하면서도 급할 땐 이상해진다. 주일 아침에 와이셔츠가 맘에 거슬렸다.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그런데 주님은 “너는 죽었단다. 속지 마. 나와 함께 죽었음을 믿겠다고 했지, 너는 죽었단다. 너는 나로 산다고 했었지. 그렇단다. 너는 죽고 내가 네 안에 산단다. 나는 네가 빨리 사과하길 원해.”라고 하셨다. 금방 화를 냈는데 사과를 못할 것 같았다. 아내의 얼굴도 상기된 모습이다. 순종해 본다. “여보, 미안해. 내가 성격이 급해서...” 진심으로 사과하고 얼른 돌아섰다. 억지로 그렇게 하던 것이 점점 고쳐진 모습을 본다. 물론 또 화를 내더라도 나는 죽었다고 고백 할 것이다. 나는 나에게 너는 십자가에 죽었다고 자주 알려준다. 주님이 사시는 몸이라고 각인 시키는 고백을 자주 한다. “오성한, 너는 주님이 함께 하셔. 나는 죽고 주님이 살아. 너는 행복 자야.”라고 알려준다. 나는 나를 나의 행동을 보고 나의 모습을 믿지 않기로 했다. 주님이 만들어 놓으신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그것이 믿음임을 발견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다. 믿음대로 된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다. 우리는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은 후는 완전히 다르다. 우리는 초자연적인 사람이다. 우리는 실제로는 초자연적 삶을 살고 있다. 창조주가 우리 몸에 들어와 그분이 사시니 초자연적인 삶이다. 믿음으로 확증을 하고, 믿음의 의식이 바뀔 때 엄청난 영적 성장이 있다. 곧 날 올 책인 “복음으로 춤추는 삶을 살라”에서 우리의 놀라운 초자연적인 삶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믿으면 그대로 된다. 믿음대로 된다. 옛 사람이 살아 있는 것 같이 보여도 믿음으로 우리의 옛사람은 죽었음을 인정하라. 믿음은 산을 들어 옮긴다. 맞다. 성경은 사실이다. 우리는 더 이상 예전의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슈퍼맨이다. 슈퍼맨은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지만 우리가 누구인지를 깨닫는 것은 슈퍼맨이 되는 것보다 더 초자연적인 사람임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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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21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 석탄일과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란?
    I. 서언(序言) 우리나라의 국교가 불교인가? 라고 할 정도로 온 거리에 연등이 나열되어 있다. 이는 매년 석탄일(초파일)이 되면 겪는 일이기도 하고, 성탄절에도 트리 장식이 부분적으로 있기 때문에 이를 탓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규모 면으로는 너무 큰 차이가 나기 때문에, 다소의 불편한 마음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즈음에 어떤 목회자의 설교에서 “어떤 전해져 오는 말 중에‘천상천하유아독존’이란 말이 있다.”라고 했다. 문제가 되는 표현은 아니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 목회자가 이런 석탄일이 가까운 시기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은, 이 말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잘 모르고 사용한 것 같았다. 이에 이 용어의 시작이 되는 석탄일과 석가모니의 출생 첫 마디라고 알려진 천상천하유아독존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석가모니와 석탄일(초파일: 初八日) 이란? 그의 출생은 BC 564년 음력 4월 8일에‘카빌라바스투’(지금의 네팔의 타라이)지역의 정반왕과 마야 부인의 왕자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뜻의 ‘싯타르타’이며, 성(姓)은 ‘고타마’였기 때문에‘싯타르르타 고타마’라고 했다. 그 이후 BC 533년(혹은 534년), 그의 나이 29세 때에 인생의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괴로움을 느끼고, 왕자와 가정을 떠나서 고행의 길로 들어섰다. 6년 후인 35세 때에 이 문제를 해결하고 ‘깨달은 자’(붓다/ Buddha=부처)의 위치에 서게 된다. 이런 이유로 그를 석가(Sakya)족이기 때문에‘석가’라는 말과 또 다른 깨달은 자란 뜻의 ‘모니’(Muni)를 합쳐서 ‘석가모니’라고 했다. 또 다른 이름은 세상에서 존귀한 자란 뜻의 ‘석가세존’(世尊, Bhagavat), 석가가 전생에서 다시 왔다고 해서 석가여래(如來)라고 하기도 한다. 석탄일이 언제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음력 2월 8일로 보는 견해도 있고, 네팔과 스리랑카에서는 양력 5월 15일로, 인도와 우리 한국에는 음력 4월 8일로 지키고 있으며, 사월 초의 팔 일째 되는 날이라고 해서 지금까지 ‘사월 초파일’이라고 부르고 있다. III.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란? 이 말은 석가모니의 탄생게(誕生偈)로서 그가 어머니의 옆구리를 통해 태어날 때, 바로 사방으로 칠보를 걸으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 요도 중생 생로병사(天上天下 唯我獨尊 要度衆生 生老病死)”라고 했다는 것이다. 뜻은‘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존귀하고 삼계(三界)가 생로병사의 고통 속에 있으니 내가 마땅히 평안하게 하리라’는 말이다. 이러한 탄생게는 불교의 여러 경(經)에서 언급하고 있다. 특히 불교의 선종 계열에서 공안(公案)의 하나로 정착되기도 했다. 장아함경(長阿含經),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란 문헌과 현장(玄奘)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등에도 나온다. 구체적인 내용으로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은 하늘 위와 땅 아래에서 오직 나만이 독존한다는 뜻으로, 자신이 가장 존귀하다는 의미이다. 요도중생(要度衆生)은 중생을 구재해야 한다는 뜻으로 모든 생명을 돌보고 구제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생로병사(生老病死)는 인생 전체의 태어남, 늙음, 병듦, 죽음 등의 네 가지 인간의 고통을 의미한다. 또한 자신의 내적인 문제를 모두 해결하여 완전한 해탈(解脫)과 궁극의 열반(涅槃)을 얻었고, 인간과 천신들에게 가르침으로 자유와 행복을 얻게 하는 가장 가치 있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의의와 평가로는 이는 실제적인 일이 아닌 것을, 불교가 종교화되면서, 그를 신성시하려는 의도에서 탄생게로 만들어 낸 이야기이다. 또한 이는 석가모니가 깨닫고 가르친 본 정신과는 이율배반적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한 사람의 깨달은 자로서 위대한 성인이다. 하지만 이러한 탄생게는 그를 오히려 독선적인 자로 격하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IV. 결어(結語)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볼 때, 위대한 성인으로 선각자의 길을 걸은 석가모니의 석탄일은 축하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를 신성화하여 우상숭배의 대상으로 만든 변질된 불교의 모습이나 ‘천상천하유아독존’이란 탄생게로 그를 독선적인 인물로 만든 것은 불자가 아닌 일반인의 관점에서도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수많은 연등을 길거리에 내 걸어서 축하의 의미를 담는 것은 좋지만, 이를 수익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석가모니가 바라는 본뜻은 전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누구를 탓하겠는가? 우리 교계 자체나 나 자신의 모습에도 이런 요인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돌아보면서 자성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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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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