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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동철 장로] 3일천하 ‘갑신정변 140년’ 이 땅 복음의 큰길 열었다
    1884년 12월 4일 밤 10시경. 이날은 최초로 지금의 체신청 우정국 개청식이 있는 날이었다. 행사를 마친 후 내·외 귀빈이 함께하는 저녁 연회가 열리던 시각. 갑자기 ‘불이야’ 하는 소리와 함께 총소리가 들리고 비명소리가 진동했다. 당시 김옥균, 홍영식, 서재필 등 젊은 엘리트 개화파 세력들이 정변을 일으킨 현장의 이야기다. 고종 즉위 20년 되는 해 일본은 개화 후 나날이 발전하고 중국과 서양 제국들이 조선의 개화와 통상압박을 하던 혼돈의 시기였다. 조선 26대 왕 고종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은 갈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급진개화를 주장하는 김옥균 파와 점진적 개화를 주장하던 민영익 등 세력 간 갈등 속에 급진개화파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정변이었다. 올해 12월 4일은 갑신정변 1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갑신년 쿠데타는 성공하는 듯 했으나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개입 3일 만에 평정하고 주모자들은 멸문지화 되거나 일본으로 도피했다. 갑신정변은 당시 일본의 지원으로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갑신정변이 성공했으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됐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운명이 외세 강국에게 점령당할 수밖에 없는 비운의 상황이었다고 사가들은 말하고 있다. 역사적 평가와 상황을 접어두고 당시 사건의 현장을 통해 하나님이 이 나라 복음을 위해 위대한 계획을 펼치고 있었던 은혜를 찾아 보고자한다. 불을 지르고 쿠데타 세력들이 반대세력들에게 총을 쏘며 공격을 하는 통에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칼에 난자되어 중상을 입었다. 죽을 수 밖에 없던 상황에 연회에 참석했던 미국 루시어스 푸트(Lucius H. Foote) 공사가 긴급히 미국에서 두 달 전에 선교사로 입국한 한사람을 찾는다. 바로 최초의 의사선교사 호러스 알렌 선교사를 찾아 치료함으로써 민영익은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알렌 선교사는 누구인가? 우리의 기독교사에 거장으로 남아있는 알렌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 파송 선교사로 중국으로 파송되었다. 이즈음 1882년 조미(朝美)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선교사의 마음에 조선의 선교사가 되고 싶어 자원한다. 갑신정변 두 달 전 1884년 10월 6일에 한양으로 입국한 선교사이다. 알렌의 치료로 민비의 조카 민영익이 살아남으로써 3일 천하정변은 끝이 나고 고종의 권력은 유지 될 수 있었다. 민영익을 살린 알렌에게 고종은 무엇을 원하냐고 물었다. 당연히 알렌은 병원을 지어 달라고 했다. 고종에게는 너무 쉬운 요청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변의 주동자 홍영식의 가족들이 처단되고 폐허된 집을 병원으로 개원하게 했다. 바로 최초의 병원 광혜원(나중 제중원)이다. 알렌선교사가 병원을 짓고 자유롭게 선교를 하게 되는 큰길이 열리게 된다. 하나님의 역사는 벼락처럼 전개 된다고 했다. 1885년 봄 일본에 머물러있던 아펜젤러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함으로써 조선 땅의 예수 복음이 날개를 달았다. 언더우드는 오늘의 연세대와 알렌 선교사와 함께 세브란스병원을 세우는 엄청난 일을 했다. 아펜젤러는 이승만을 탄생케 한 배제학당을 세운다. 뒤이어 스크렌턴 선교사가 조선에 들어와 이화학당을 세우고 천대받던 조선의 여성들이 눈을 뜨게 했다. 조선역사가 망해가던 시기 비운의 시간표가 돌았지만 선교사들을 통해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게 하는 복음의 역사(役事)가 역동 했던 것이다.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축복이다. 한 나라를 부흥 발전시키는 무한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조선 5백 년의 역사는 정말 캄캄한 세상이었다. 사대부들이 타락한 유풍(儒風)의 문화 속에서 백성을 착취하고 나라의 발전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나라가 망해가는 때 나라를 살리고자 급진개혁세력들이 일으킨 정변은 사람의 위대한 뜻에도 불구하고 3일천하로 끝난다. 뒤이은 역사는 결국 일본의 36년 종살이해야 하는 비운의 역사를 겪어야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70년 종살이 후 회복의 역사를 썼다. 우리는 140년 전 위대한 영적 거장 몇 분의 선교사들이 오늘의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들어내는 초석을 낳았던 역사를 돌아본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가. 세계 10대강국을 자랑한다. 희망 속에 겪는 사회문화의 심각한 갈등을 보면 나라가 망할 것 같은 위기다. 이런 위기 때 그때의 역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야 할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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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1-25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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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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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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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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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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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실시간 칼럼 기사

  • [조희완 목사] 침묵의 유익 (수6:8-11)
    “침묵이 좋은 몇 가지 이유”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침묵은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는 것을 도와줍니다. 침묵은 입에서 나오는 거친 말을 예방합니다. 침묵은 후회할 말들을 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침묵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 줄 수 있게 합니다. 침묵은 언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바로 기도하게 해줍니다. 침묵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합니다. 침묵은 당신이 무식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합니다.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을 잘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것이 훨씬 더 무게가 있고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 공동체에서의 모든 문제들은 다 말 때문에 발생합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 연산군은 모든 신하들에게 “구시화지문 설시참신도”(口是禍之門 舌是斬身刀 / 입은 화를 초래하는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라는 글이 새겨진 목패(木牌)를 목에 걸고 궁중 출입을 하도록 엄명을 했다고 합니다. 그 만큼 말로 인하여 조정에 혼란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에 예방차원에서 그런 조치를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이목구비(耳目口鼻)를 만드실 때 눈도 귀도 두 개씩을 만들어 주신데 반해서 입은 한 개만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보는 것과 듣는 것에 비해서 말을 조금씩 하라는 뜻이고, 꼭 필요한 말만 하면서 살라고 하신 의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뿐인 입으로 너무 많은 말을 하고 너무 불필요한 말을 하려다 보니까 오해가 생기고, 문제가 생기고, 시끄럽고 혼란한 일들이 많이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많은 말을 해도 될 때가 있지만 지금은 우리가 말을 절제하고 침묵해야 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왜 침묵이 필요하고 유익한 것일까요? 첫째는, 침묵은 질서유지의 비결입니다.(수6:10) 둘째는, 침묵은 지혜로운 삶의 비결입니다.(잠17:28) 셋째는, 침묵은 원수를 대적하는 비결입니다.(사53:7) 사회적으로 혼란한 일이 많은 이때에 침묵하며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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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12
  • [정우승 목사] 15년을 더 산 사람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히스기야 왕의 스토리는 참으로 흥미롭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생명을 15년 더 연장해 주셨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이사야 선지자는 병든 히스기야 왕에게 찾아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한다. (왕하20:1)에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느낌을 왕은 받았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형선고를 받은 히스기야 왕은 얼굴을 벽으로 향한 다음에 사력을 다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왕하20:3)에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 라고 말씀한다. 왕은 살려달라는 직접적인 표현 대신 주 앞에서 진실되게 살아온 것을 기억해 달라고 간구했다. 이런 자신만만한 기도는 평생을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진실되게 살려고 애쓴 자만이 할 수 있는 기도로 보인다. 이 기도 후에 곧바로 하나님의 응답이 이사야 선지자에게 임한다. (왕하20:5-6)에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라고 말씀하셨다. 절대절명의 위기 앞에서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 앞에 내 놓은 카드는 지금까지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왔던 선한 행실이었음을 기억하자. 우리나라 야사(野史)에도 히스기야 왕처럼 15년을 더 살았던 인물이 전해진다. 조선 명종 때 유명한 맹인 점장이, 홍계관(洪繼寬)이란 이가 있었다. 그가 사람의 앞날에 대해서 일러주는 족족 다 맞았기에 고관대작들이 앞 다투어 그를 극진히 대접하고, 자신의 앞날을 물어보곤 하였다. 당시 높은 벼슬에 있는 상진(尙震) 정승은 홍계관에게 자신의 죽을 해를 점쳐 알고 있었다. 그가 예언한 죽을 해를 당하여 상진 정승은 신변을 정리하고 재산처분을 한 다음 조용히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해가 다 지나도록 아무런 변고가 없었다. 새해가 들어서면서 홍계관이 매우 이상하게 생각해서 상진 정승을 찾아갔다. 상진 정승은 “내가 너의 점괘를 믿고 작년에 명이 다할 줄 알고 기다렸는데 어찌 맞지 않는가?” 라고 물었다. 이에 홍계관은 “혹 음덕(陰德)으로 수명을 연장할 수 있으니 대감께서도 반드시 그런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라고 대답을 하였다. 음덕(陰德), 다시 말해서 남모를 큰 선행을 뜻한다. 상진 정승은 옛날 자기가 수찬(修撰) 벼슬에 있을 때 큰 잘못을 범한 대전 수랏간 별감을 용서해 준 일을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난 후 홍계관은 ‘대감의 수명이 연장된 것은 반드시 이 음덕으로 응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을 하였다. <연려실기술>이라는 문헌에 상진 정승의 증조부인 상영부(尙英孚)가 재물이 많아서 주위 사람들에게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었는데 말년에 차용증서들을 다 불태웠다. 그렇게 한 마음의 동기를 묻자 ‘혹 이 선행으로 후손들이 잘 될는지 누가 알겠소?’ 라고 대답했고, 얼마 후에 상진(尙震)이 태어났다고 한다. 서양 사람들은 기독교 윤리에 입각해서 자선을 하고 봉사를 하지만 우리 한국인은 덕을 쌓고, 그 음덕으로 복과 영달을 누린다고 생각했다. 곧 서양 사람은 내세에서 자신의 선행으로 보상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반면, 동양 사람들은 현세에서 보상을 받거나 아니면 후손이 대신 보상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성경도 선행에는 반드시 보상이 있다고 말한다. (잠언19:17)에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또한 성도의 선행은 하나님께서 다 보신다. (딤전5:25)에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선행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라. (마태5:16)에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라는 말씀을 꼭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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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12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52 : 연기설(緣起說)의 인연(因緣)은 쓸 수 있는 말인가?
    I. 서언(序言) 얼마 전 몇 사람의 목회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인연(因緣)이란 말을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실제로 우리 교인들도 흔히 인연이란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이 말은 불교의 가장 중심적인 교리 중의 하나인 연기설에서 나온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면서도 인연이란 말은 수도 없이 많이 한다. 그렇지만 이런 말들의 유래와 그 근본 의미를 안다면, 이는 반드시 금지해야 할 용어이다. 이에 본 호에서는 인연의 모체가 되는 연기설과 인연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II. 연기설(緣起說)이란?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교리 중의 하나는 바로 연기설이다. 이는 ‘세상 만물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영원불변한 실체는 아무것도 없다’는 이론이다. 또한 연기설에는 세 가지의 근본 원리가 있는데, 첫째는 ‘인과(因果)의 법칙’으로서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에 의해서 반드시 결과가 온다는 이론이다. 둘째는 ‘인연의 법칙’으로서 세상 만물의 변화에는 인과 연, 즉 원인과 조건의 작용에 의한다고 했다. 셋째는 ‘상호 관계성의 법칙’인데 개개의 사물들은 서로 의존하여 존재하는 관계에 있다는 이론이다. 이상의 연기설은 세계와 인생의 모든 현상을 12연기(十二緣起)로 설명하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과거에 지은 업(業)에 따라 현재의 과보(果報)를 받게 되며, 현재의 업에 따라서 미래의 고(苦)를 받으면서 12가지 인연을 맺게 된다. 곧, 무명(無明)·행(行)·식(識)·명색(名色)·육근(六根)·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노사(老死) 등으로서 이를 십이 인연(十二因緣), 십이지(十二支)라고도 한다. 특히 11번째의 생(生)은 업(業)의 인연으로 미래의 생을 받게 된다는 이론으로 전생과 관계가 있다. III. 인연(因緣)이란? 앞에서 논한 연기론의 세 가지 근본 원리 중에서 두 번째의 ‘인과(因果)의 법칙’중에 ‘인연의 법칙’이 있다. 한자어로는 원인 인(因), 묶음 연(緣)이며, 국어사전의 뜻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사람이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원인인 因과 간접적인 원인인 緣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말은 서론에서 언급한 대로 불교의 가장 기본적 교리인 연기론(緣起論)에서 유래된 용어이다. 불교에서는 인연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인연은 어떤 결과를 만드는 조건으로서, 직접적인 조건은 因으로서 원인을 이루는 근본 동기가 되며, 간접적인 조건은 緣으로서 원인을 도와서 결과가 생기게 하는 조건이라고 한다.’ 즉, 여러 가지 원인 중에서 주된 것은 因이고, 보조적인 것을 緣으로 여긴다. 결국 모든 사물은 이러한 인과 연의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만 변화한다는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우리가 흔히 쓰는 말 중에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란 말이 있다. 이는 서로의 인연이 맺어지기 위해서는 전생에서 두 사람이 무려 3천 번의 인연이 있어야 되는데, 그 직접적인 조건은 因이고, 옷깃을 스치는 것은 간접적인 조건인 緣이라고 했다. IV. 적절성과 대안적인 용어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인연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은 불교의 세계관인 전생(前生)을 인정하는 경우가 될 뿐 아니라 연기론, 즉 인연 사상을 그대로 인정하는 결과가 된다. 결국 인연이란 우리 기독교인은 반드시 삼가야 될 말인 것이다. 그렇다면 대안적인 용어는 무엇인가? 우리 기독교에서는 불교적인 인연의 관계는 일단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대안적인 용어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국어사전적인 인연의 의미는 ‘수많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원인과 결과’를 말하기 때문에 불교적인 요소를 제외한다면 인연은 사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연의 한자어나 우리말이 불교의 용어와 동일하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것이 더 좋다. 기독교적 용어를 굳이 찾는다면, ‘하나님께서 자연과 인간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원리와 법칙’을 의미하는 ‘섭리’를 말할 수 있으나 그 말도 인연과 반드시 같은 말은 아니다. 이상으로 볼 때 인연은 전통적으로 모두 다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말할 수는 있지만, 이는 분명히 금지해야 할 불교의 교리적인 용어로 반기독교적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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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12
  • [오성한 목사] 생각
    성령님의 하시는 일 중 가장 큰 일은 우리의 생각을 바꾸시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영과 육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 안에 만끽하며 살도록 생각을 바꾸시는 일을 하신다.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셔서 하나님과 함께 살도록 만드셨다. 성령님은 하나님을 떠나 버린 인간의 생각을 바꾸어, 하나님과 함께 삶을 깨닫게 하는 일이 주사역이시다. 예수께서 임마누엘로 오셨다. 성령님은 예수님을 소개하고, 기억나게 하시고, 알게 하여 임마누엘을 누리게 하신다. 성경의 핵심인 로마서 8장을 통해 크게 깨달았다. 믿음은 생각이라고 말하고 있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란다. 성경 전체를 통해 설명해 놓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벽하게 재창조하신 세상에 우리를 옮겨 놓으셨다고 반복해서 설명하신다. 나는 이 말씀에 큰 믿음을 가지고 큰 믿음이 있다고 고백하며 부르짖는다. 주님께도 말씀드리고 나에게도 말을 한다. 나는 기도하는 시간을 그렇게 보낸다. 나는 “영의 생각”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나는 기도가 재미있는 것 같다. 말씀에 있으면 크게 믿는다고 하나님께도 고백하고 나에게도 인식시키는데 집중한다. “성한아, 너는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이야! 그래 맞아 나는 영의 생각을 하는 성한이야!”라고 주장한다. 나는 나에게 “성한아, 너는 예수님을 통해 완벽한 영의 세상에 옮겨졌으니 마음껏 그 안에서 살아라. 알겠지.”라고 말해 준다. 우리는 생명을 얻어 풍성한 삶을 살도록 이미 마련되었다. 이미 그 안에 모든 것이 있다고 말씀 하신다. 성령님은 우리가 영의 세계에 태어났음을 알도록 성령님은 도우신다. 성령님은 예수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을 바르게 받아들이도록 도우신다.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시는 음성에 반응해야 한다. 나는 성령의 사람이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 기록된 성령의 음성에 반응한다. “주님, 저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이미 영생이 있습니다.” “주님, 풍성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풍성합니다.” “주님, 항상 임마누엘 합니다.” “성령님, 저에게 임마누엘의 생각으로 살라고 하시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한다. 이러한 고백들이 나의 힘이다. 성령님의 주 사역이 로마서 8장의 “영의 생각”을 하게 한다고 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했다. 성령의 주 사역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성령님의 사역에 반응하는 것을 항상 즐기려 한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성령님은 믿음을 더해 주신다. 영의 생각을 더해 주신다. 그러니 나는 영의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또 주장하며 살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자주 정말 자주 쉬지 않고 사로잡아오는 죄의 법이 아닌 영의 생각,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음”을 큰 믿음으로 인정하고 선포한다. 감사와 신나는 시간이다. 성령님과 함께 딩구는 시간이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능력의 사람이 되는 이유다. 성령님은 바른 생각을 하게 하신다. 성경에 기록하여 뚜렷이 말씀하신다. 반응을 적극적으로 하라. 믿음이 적다고 말하는 것은 굉장한 실례의 말이다. 믿는다고 말하라. 크게 믿는다고 선포하라. 영의 생각을 한다고 주장하라. 그것이 성령님께 반응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크게 기뻐하실 것이다. 성령님은 십자가에서 이미 모든 것이 성취되었음을 믿게 하신다. 크게 믿는다고 고백하라. 나는 그렇게 하는데 너무 좋다. 믿음이 더 생김을 본다. 이것이 영의 생각이다. 성경의 핵심인 로마서 8장 말씀은 “이 생각이 믿음이라”고 강조한다. 성령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당신의 생각을 영의 생각을 하도록 바꾸시는 작업을 하신다. 성령님의 작업에 적극적인 반응했더니 너무 신바람이 난다. 적극적으로 권한다. 해보라. 필요하시면 기사와 표적도 저절로 주시기도 하신다. 성령님의 주 사역인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역해 보라. 신나는 일이다. 사단의 주 사역도 생각을 변화시켜 성령의 일을 적극적으로 방해 한다. 사단은 “육의 생각”을 하도록 전력을 다 한다. 죄의 법으로 사로잡아 육의 생각을 하게하면 사단은 성공한 것이다. 생각만 바뀌면 믿음에서 떠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고 한다. 생명의 근원이 마음, 즉 생각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단은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을 제시한다. “이 땅이 네가 처한 세상이다. 너는 이 세상 중심으로 살 때 문제가 해결된다”라고 다른 해결책을 제시한다. 예수님께도 천하만국을 보이며 세상을 택하게 하려 했다. 생각을 속인다. 육지에서 활보하며 공기를 마시며 살면 되는데 물속이 신비롭고, 좋다고 속인다. 물속에서 눈을 떠보면 물속의 세상이 신비롭기까지 하다. 그러나 잠시 뿐이다. 자유롭지도 못하고 숨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만약 물속에서 올라 올 수 없다면 고통은 극에 달하게 된다. 곧 생명을 잃고 말 것이다. 사단이 주는 쾌락은 순간적일 뿐이다. 그 결과는 비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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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12
  • [박봉석 목사] 진짜 부족한 것이 맞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주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나 또는 다른 교우들과 대화를 할 때에 내 자신의 부족함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하나님, 이 부족한 종을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는 “나 같은 부족한 사람을 구원해 주시고 써 주시니 참 감사하지.” 뭐 그런 말들을 합니다. 그런데 솔직히 내 자신을 돌아보며 생각해 봅시다. 진짜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해서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저 내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에게 겸손하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말은 아닙니까?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십시오.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을 믿었고 또 한 사람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불신 친구가 예수님을 믿는 친구를 찾아갔는데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불현듯 지금 이 시간쯤이면 친구가 교회당에서 기도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당으로 달려갔습니다. 정말 그 친구는 교회당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보니 그 친구는 이렇게 진지하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부족한 놈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 부족한 사람을 구원해 주신 은혜가 너무나 크고 감사합니다.” 불신 친구는 그 기도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네가 부족하다고, 진짜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한 번 테스트 해볼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불신 친구는 교회당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기도를 끝내고 나오는 친구를 붙들고는 “야 이 부족한 놈아!”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자마자 그 예수님을 믿는 친구가 뭐라고 말을 했을까요? “뭐 어째, 야 이 놈아, 내가 뭐가 부족해? 너보다는 백 배 천 배 낫지.”라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 글을 읽는 우리의 대부분의 모습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자신이 부족하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이 대단한 신앙과 인격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더 나아가서 우리는 늘 내 자신이 죄인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누가 나를 보고 죄인 취급하면 그것을 못 견뎌하지는 않습니까? 그저 말이나 모양내기만이 아니라 내 평소의 삶의 모습이 진정으로 나의 부족을 알고 또 내가 죄인 됨을 아는 모습일 때에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진정한 겸손으로 여겨주시고 은혜를 내려 주실 것입니다. 음악의 귀재였던 모차르트에게는 많은 사람이 음악을 배우려고 찾아왔다고 합니다. 모차르트는 그 사람들에게 한 가지 질문을 반드시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당신은 음악을 잘 알고 있습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재능 있는 젊은이가 자신만만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쳤고 바이올린도 10년 이상 배웠습니다.” 모차르트는 그 청년에게 정해진 수업료보다 두 배를 내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한 젊은이가 면접을 보았는데, 이 청년은 자신이 음악을 잘 모르지만 열심히 하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모차르트는 그에게는 수업료의 반값만 내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것을 알고는 먼저 온 청년이 부당한 처사라며 모차르트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그러자 모차르트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음악을 좀 안다는 사람을 가르칠 때는 그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인식시키고 그것을 바로잡아 주는 데 더 많은 힘이 들어간다네. 그러나 스스로 음악을 잘 모른다고 생각하고 처음부터 바르게 배우려는 사람은 가르치는 것이 쉽지.” 철학자 소크라테스는“나는 다른 이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늘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 다른 이들과의 차이점이다.”라고 말을 했습니다. 자기의 것을 굳게 쥐고 있는 사람은 더 높은 차원의 것을 배우기가 매우 어렵듯이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기란 참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내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그저 말로만이 아니라 나의 삶과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는 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래야 겸손한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비로소 내게 임하게 됩니다. 독자 여러분, 진짜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진심이면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십시오. 마산중부교회 박봉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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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12
  • [박동철 장로] 영화 하얼빈,영웅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을 공부하다
    국내 전역에서 절찬리에 상영 중인 영화 ‘하얼빈’을 가족과 함께 보았다. 우리의 가슴 아픈 역사 속에 있는 기록영화 하얼빈은 지금 우리가 맞은 이즈음 던지는 메시지가 컸다. 영웅 안중근의 역사·문화적 관련 작품이 많이 나와 실제 역사 스토리를 음미할 기회가 많았지만 이번 영화를 감상하면서 우리들에게 엄청난 과제를 던져주는 느낌을 받았다. 탑배우 현빈이 분장한 영화의 스토리는 일제 36년 조선 땅 강점의 시작의 역사초기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이토 히로부미의 시대를 구가하던 때 러일전쟁까지 일본이 승리를 이끌면서 사실상 조선 땅 지배가 시작되었다. 일본의 주인공은 총리내무대신 이토 히로부미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일제는 당시 대한제국 국모 명성황비를 시해하고 고종을 강제 폐위하는 잔인한 짓거리를 일삼고 있었다. 그 주인공이 이토 히로부미 총리다. 이 자가 러시아 땅을 둘러보고 뤼순으로 가는 일정이 있었다. 만주 땅 이역만리에서 독립운동에 온몸을 던지고 있던 안중근이 동지들과 이토를 잡는 스토리의 영화다. 동지들과 벌이는 극중 휴먼스토리가 있지만 역사의 시간표에 집착한다. 1909년 1월 26일 오전9시 하얼빈 역에서 일본인들의 환영을 받기위해 이토는 열차에서 내렸다. 손을 들어 근엄하게 환영인파에 답했다. 잠복해있던 영웅 안중근은 좀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오른손을 들었다. 벨기에산 권총으로 정확히 세발로 원수 이토를 쓰러뜨렸다. ‘늙은 도적’ 이토는 쓰러졌다. ‘코레아 우라!’ 러시아어로 ‘대한제국 만세’를 영웅은 외쳤다. 영화의 전말을 꾸미는 여러 스토리가 있지만 영화를 본 후 가슴을 아프게 하고 영화에서 얘기 못한 역사를 성급하게 찾아보고 싶었다. 약관 30세에 조국 대한제국을 찬탈한 이토를 죽이고 교수형을 받기까지 영웅은 뤼순 감옥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눈물 흘리게 하고 남긴 감동의 스토리가 있다. 이 젊은 청년이 짧은 몇 달 동안 조국과 세계에 던지고 간 엄청난 메시지가 있다. 당시 누구도 상상 못할 ‘동양평화론’이다. 영웅은 교수형을 받기 전 잠시 간수들에게 몇 가지 남기고 싶은 묵필과 저서를 쓸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때 주옥같은 강한 필치 200여 편의 묵필과 완성하지 못한 저서 ‘동양평화론’을 남겼다. 영화를 즐긴 후 서재에서 역사서를 찾아 뒤적였다. 영웅은 미완의 저서 동양평화론에 무엇을 적었을까. 자료를 찾아 읽어가는 순간 가슴을 멎게 했다. 어렴풋이 알고 있던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에는 엄청난 논지의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당시 아시아 전 지역을 점령하고 대한제국을 침탈하고 있던 일본제국에 대해 영웅은 크고 깊은 제안을 던졌다. 몇 가지를 추려본다. 첫째 조선·일본· 청나라 3국이 협력 공존하는 협력기구를 만들자. 둘째 3국이 공동은행을 설립 공동운영할 것. 셋째 3국이 연합하여 서양 침입에 공동대처할 것. 넷째 3국의 경제개발을 일본에서 배우자 다섯째 상호주권을 존중하고 평화적 관계 유지할 것. 다섯 개 항의 동양평화론을 주창했다. 이른바 이웃나라를 침탈하지 말고 선린으로 공동체로 공존하자라는 제안이다. 얼마나 위대한 평화주의자인가. 위대한 제안을 일본제국이 받을 리 있겠는가. 그러나 이후 많은 일본인들이 영웅의 동양평화론에 감동했다. 그리고 일본전역에 안중근 현상이 있었다고 역사서는 적고 있다. 오늘날 한반도 대한민국이 겪고 있는 혼란의 지경이 5천 5백만의 국민가슴을 찢고 있다. 일정36년 억압의 역사를 극복하고 6.25의 비극으로 비록 남북이 갈라졌지만 ‘할 수 있다 하면 된다’의 한국민 근성으로 위대한 역사를 이뤘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고 세계 탑 클라스의 경제 강국이라는 대한민국이 성숙한 사회발전으로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120여 년 전과 같은 강대국 사이에서 동양의 평화는커녕 동북아는 추악한 패권 전쟁 속에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동양평화론의 희망을 찾아야한다. 영웅이 부르짖었던 동양평화론을 교회에서 찾아야한다. 곧 바로 강력한 복음운동이다. 한국교회가 세속화되고 많은 교회지도자들이 비판받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교회만이 위대하신 하나님의 권능으로 가능하다. 복음의 평화공동체를 위해 신발을 벗고 무릎을 꿁고 외쳐야할 때임이 분명하다. 정답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갖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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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18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 고찰 51 : 2025년 을사년(乙巳年) 뱀띠란 말은 적합한가?
    I. 서언(序言) 송구영신의 나날들, 이런 때가 되면 필자의 기고도 때에 맞춘 용어나 세시풍속에 따른 주의해야 될 용어 분석을 할 때가 많다. 본 호에서도 이런 의도에서 새해에 삼가야 할 용어들과 기독교인으로서의 바른 말들을 논하고자 한다. 이는 매년 비슷한 내용으로 드리기 때문에 과거의 내용들과 중복될 수도 있음을 먼저 말씀드린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계속 이런 내용을 드림으로서 바른 용어에 대한 켐페인을 하고자 함이다. 이런 면으로 본 호에서는 요즈음 모든 매체나 카렌다 등에서 말하고 있는 “2025년 을사년(乙巳年) 뱀띠”에 대해서이다. 이는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말이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이 사용하기로는 적절하지 못한 말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논하면 다음과 같다. II. 연호와 12간지에 대한 고찰 1) 연호의 일반적인 고찰: 연호는 범세계적으로 사용하며, 자신의 나라와 민족에 따라 의미와 용어는 각각 다르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단기(檀紀)나 육십갑자(六十甲子)로 계산하는 육갑연호를 사용해 왔다. 일본의 경우는 전통적으로 명치(明治)라는 연호를 사용했지만, 서양의 영향으로 서력기원(西曆紀元)의 뜻인 ‘서기’라는 연호를 병행했다. 우리나라도 일제치하에서는 그들과 같이 사용했고, ‘서기’는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2) 기독교의 연호인 B.C(Before Christ)와 A.D(Anno Domini): 이는 기독교적 연호이지만, 현재 세계적인 공통 연호로 사용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주님 오시기 전(主前)을 의미하는 B.C와 주님 오신 후(主後)를 말하는 라틴어인 A.D가 있다. 먼저 이 연호의 처음 사용은 주후 6세기경의 동로마 황제인 ‘저스틴 1세’때부터였다. 그때 그는 당시의 유명한 수도원 성직자인 ‘디오니시우스’로 하여금 세계에서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연호를 연구하게 했다. 이에 디오니시우스는 이 일에 대한 깊은 명상 중에 주님이 이 땅에 오신 해를 그 기원으로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를 보고받은 황제는 즉시로 성탄을 기점으로 주님 오시기 이전은 before Christ의 약자인 B.C로, 이후는 주님 오신 후란 뜻의 Anno Domine의 약자인 A.D를 하기로 선포했다. 그 이후 오늘날까지 우리 기독교뿐만 아니라 세계 모든 나라들의 공식 연호가 되게 되었다. 3)육십갑자의 연호 : 이는 유교의 경전 중의 하나인 주역(周易)에서 나온 연호로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치는 주술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갑자년, 을축년, 올해의 을사년 등의 연호는 하늘의 줄기로 보는 천간(天干)의 10글자(十干)와 땅의 가지를 뜻하는 12개의 지지(地支)인 각종 띠를 합쳐서 만든 육십갑자 연호이다. 또한 이는 60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오기 때문에 누구든지 출생 후 60년이 되면 육갑연호가 다시 돌아오는 환갑(還甲)이 된다. 이때는 사주팔자(四柱八字)에도 나오지 않기 때문에 과거에는 생일의 마지막이라 해서 축하연을 행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은 우리 민족의 민속적인 의미는 있겠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믿음과는 전혀 관계없는 미신적인 것이다. III. “을사년(乙巳年) 뱀띠”에 대한 고찰 앞서 논한 육십갑자 연호로 볼 때 올해는 간지(干支) 체계에 따라 하늘의 기운을 의미하는 천간(天干) 10간 중 두 번째에 해당하며, 나무를 상징하는 을(乙)과 땅의 기운을 의미하는 12지지(地支)중 여섯 번째인 뱀과 불을 상징하는 사(巳)를 합친 해이다. 그래서 올해의 연호는 을사년 뱀띠해이며 또한 이런 연호의 성격으로 한해의 길흉화복의 점을 치기도 한다. 올해는 싹트는 생명력과 성장의 가능성과 부드럽고 유연한 성격을 가진 해로 여긴다. IV. “을사년(乙巳年) 뱀띠”에 대한 기독교적인 입장과 결론 매년 연초에는 항상 각 연호의 좋은 면을 해석하기 때문에 덕담으로 들릴 수도 있고, 또한 우리 민족의 민속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에 좋은 연호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바른 신앙과는 전혀 관계없는 유교와 도교와 불교적인 신앙이 혼합된 미신적인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연호와 12간지로부터 온 띠 등을 이유로 결혼이나 인간 중대사의 길흉화복을 점치고 말하는 것은 정말 배격해야 할 잘못된 행위이다. 그렇다면 우리 개신교는 어떤 연호를 사용해야 할까? 이는 당연히 ‘서기’의 근본적인 뜻인 주후(主後), 주전(主前)이란 용어이다. 실제 이 연호는 이미 교회에서 널리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 의미를 바로 알고 연호를 사용함으로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계속 이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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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09
  • [조희완 목사] 친절의 결과 (창24:10-20)
    우리나라의 기업체들이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마케팅>구호가 있는데, 그 <마케팅>구호가 흐르는 세월에 따라 약간씩 바뀌었습니다. 1970년대는 “고객 우선”이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고객 확보 경쟁을 벌였습니다. 그러나다 1980년대에 와서는 “고객만족”이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고객 확보 경쟁을 벌였고, 1990년대 이후에는 “우선”이나 “만족”정도로는 부족하다는 인식으로 “고객 감동”이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고객 확보 경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고객 감동이라는 구호에 걸맞게 요즘 한국에서 관공서나 기업체에서 고객을 맞이하는 태도가 그 전에 비해 많이 달라졌습니다. 옛날에는 관공서에 볼일이 있어서 가면 아주 고압적인 자세로 고객을 대하였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고객의 입장에서 눈높이를 맞추고 최대한 친절하고 신속하게 민원을 해결해 주려고 합니다. 관공서가 그렇게 친절하기 때문에 일반 기업체들은 정말 고객의 마음을 감동시킬 정도로 친절합니다. 지금은 “무한 경쟁 시대”이기 때문에 친절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가거에는 기업체들이 생산된 제품만 상품이라고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소비자들을 대하는 친절한 자세가 더 중요한 상품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무원들도 불친절하면 퇴출을 당하고, 기업체들이 만들어 내는 물건이 아무리 좋은 제품이라도 친절로 고객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제대로 팔리지 않습니다. 치열한 경쟁 시대에 친절이야 말로 아주 중요한 상품이고 그 상품을 팔 수 있는 경쟁력(競爭力)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덕목 중에 한 가지가 바로 “친절”이라는 것입니다. 친절은 그리스도인들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야 합니다. 첫째로, 친절하면 만남의 축복을 받습니다.(창24:10-20) 둘째로, 친절하면 성취의 축복을 받습니다.(왕하4:8-17) 셋째로, 친절하면 회복의 축복을 받습니다.(행28:7-10) 항상 친절한 모습으로 모든 사람을 상대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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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09
  • [정우승 목사] 영향력 있는 사람입니까?
    우리가 학교에서 배울 때 세계는 ‘5대양 6대주’로 이루어졌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5대양 7대주’라고 한다. 그 일곱 번째 대륙은 ‘사이버 대륙’ 즉 과학문명과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서 온라인 상에서 이루어지는 그 가상공간이 일곱 번째 대륙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는 컴퓨터의 발달로 전 세계를 하나로 묶을 수 있게 되었다. 온라인 주소가 ‘WWW’ 이렇게 시작을 하는데 <World Wide Web>의 약자이다. 스마트폰이 발달되면서 생긴 신조어 중에 하나가 바로 인플루언서(Influencer)이다. 인플루언서는 사회나 대중에게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란 뜻이다. 2004년에 페이스북이 시작되었고, 2006년에 유튜브, 그리고 2010년에 시작된 인스타그램 등 다양한 SNS(Social Networking Service)들이 활성화 되었다. 한 사람의 파급효과는 실로 어머어마하게 커져 버렸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와 성도의 영향력이 궁금해진다. 한국교회 초창기에는 교회와 성도의 역할이 실로 대단했다.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났다. 민족대표 33인 중에서 16명이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 당시 기독교인이 전 국민의 1.6% 라고 한다. 그렇지만 한국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였다. 또한 만세운동 일어났던 지역의 75%가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기독교는 실로 한국의 근대화를 이끈 일등공신이었다. 성경 속에 한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사건들이 많다. (왕상18:17)에 “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엘리야를 만난 아합 왕의 첫 마디이다. 가뭄의 원인을 엘리야 때문이라고 외치고 있다. 정작 가뭄의 원인은 아합의 우상숭배였지만, 아합의 생각에는 엘리야 한 사람 때문에 온 이스라엘이 괴롭다는 의미이다. 다음 구절은 더 놀랍다. (왕상18:18)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왕 앞에서 그의 잘못을 조목조목 들추는 엘리야에게 왕보다 더 큰 권세가 느껴진다. 신약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이 보인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반대자들에게 고발이 되어서 벨릭스 각하 앞에 서게 된다. 이 때 바울을 향한 반대자들의 고발 내용이 이렇다. (행전24:5)에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라 천하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다 소요하게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우두머리라” 오늘날 한국의 교회와 목회자들이 세상으로부터 이런 평가를 받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코로나 전염병을 겪어보았다. 지금도 전염병이 무섭지만 바이러스의 정체를 모르던 옛날에는 어떠했을까?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삽시간에 퍼지고 사람들은 공포 속에 죽어갔다. 그런데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눈에는 바울이 악성 바이러스 전파자와 다를 바 없었다. 유대인들에게는 바울을 통해 전파되는 복음이 전염병이 퍼지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 당시 바울 한 사람이 전파한 복음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짐작하게 하는 표현이다. 바울을 그냥 내버려 두면 바울이 돌아다니는 곳마다 복음이 전염병처럼 전파되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바울의 영향력에 대한 공정한 평가이다. 고발자의 입장에서는 바울은 당장 처단해야 할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의 입장에서 보면 바울은 본받아야 할 모델임에 틀림이 없다. 프랑스의 한 귀족이 영국을 여행하던 중 한 상점에서 맥주를 사려고 했다. 그러나 그 상점에서는 맥주를 팔지 않았다. 다른 상점을 찾았으나 그곳에서도 역시 맥주를 팔지 않았다. 여러 가게를 찾아다녔지만 맥주를 구할 수 없었다. 귀족은 길가에 있는 한 농부에게 물었다. “왜 이 마을에는 맥주를 팔지 않습니까?” 그러자 농부는 “100년 전 요한 웨슬리가 우리 마을에서 한 주간 부흥회를 했는데 그 이후로 지금까지 우리 마을에는 맥주를 팔지 않습니다” 라고 대답을 하였다. 이 글을 읽는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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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09
  • [오성한 목사] 보이지 않는 세계
    보이는 세계와 안 보이는 세계는 하나다. 히스기야 왕이 기도할 때 185,000명의 앗수르 군대가 모두 다 시체가 되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일로 인해 앗수르는 망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영적인 세계에서의 일이 보이는 육적인 세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하나임을 보여주는 예이다. 보이는 세계에서 하는 일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기쁨이 되기도 하고, 슬픔이 되기도 함을 볼 때,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분리해서 보지 말아야 한다. 만약 보이지 않는 세계의 원리를 바르게 알고 사용할 수만 있다면 놀라운 일이 있을 것이다. 두 세계가 하나임을 알 때 영적인 초자연적인 역사들을 끌어 올 수 있다. 안 보이는 세계를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성경을 보면 된다. 하늘보좌도 기록되어 있다. 천상의 세계와 영적인 세계가 그려져 있다. 나는 성경에 기록된 세계를 실제로 보는 훈련을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 그 세계를 그대로 인정하며 강하게 주장한다. 예수님이 사역 하실 때 하신 말씀을 그대로 따라하려고 외우고 묵상한다. 외워 주장하고 상상하며 기도하곤 한다. 한 두 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시간을 그렇게 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지만 보이는 세계 속에도 실재임을 믿고 외치며 말한다. 그대로 이루어짐이 보이도록 말씀을 주장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신이 난다. 내가 그 현장에 있는 것 같고, 그 현장을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킬 것 같아진다. 정말 흥분이 된다. 그리고 감사하다고 고함을 치기도 한다. 당신도 한 번 해보라. 성령님께서 기뻐하심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원리를 그대로 살고 있다. 공기를 마시고 살게 만드신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그냥 그 안에 살면 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왜 꼭 땅에서만 살아야 하느냐, 나는 물속에서 살 거야!”하고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물속에서 살려고 한다면, 1분 정도는 물속에 신기하고 재미있을 것이다. 그러나 곧 호흡이 가쁘고 빨리 물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면 불행의 결과를 맞이하고 말 것이다. 영적인 세계도 하나님께서 다 만들어 놓으셨다. 거부하지 말고 그냥 그 안에 살면 행복의 문이 열린다. 나는 예수께서 이루신 영적인 일들을 내 것으로 주장하고, 외우고, 나 자신에게 소리 질러 주장하는 일을 자주하는데 이 일 또한 신난다. “와우! 성한아,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 성한아, 너는 예수님의 신부다. 성한아, 너 안에 성령님이 항상 계신다. 성한아, 그래서 너는 성령의 사람이다.”고 나에게 말해 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생생하게 나에게 말해 준다. 실재라고 말한다. 저자 소개에서 나는 성령의 사람이라고 당당히 말하는 것이 이런 것에 근거를 둔 말이다. 나는 예전에는 “나는 성령의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교만인줄 알았다. 교만한 말이 아니다. 성령의 사람이라는 말은 오히려 겸손한 말이다. 성령님 없이는 못사는 사람이라는 표현이다. 성령님만 생각한다는 사랑의 고백이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나는 당신만 생각합니다. 나는 당신으로 충만합니다.”라는 말은 교만이 아니다. 당연히 그렇게 말해야 한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나는 당신도 좀 생각했지만 옆집 아가씨도 좀 생각을 했습니다.”라고 하면 안 된다. 사랑하는 성령님께 “나는 성령님으로 충만합니다.”라고 고백하며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 교만이 아님을 나는 알게 되었다. 나는 이런 고백을 즐긴다. “저는 믿음이 큰 사람입니다”는 말도 예전엔 교만한 말인 줄 알았다. 절대 교만한 말이 아니다. 속은 것이다. 담대하게 당신은 믿음이 큰 사람이라고 말해야 한다. 예수님을 정말 믿는다고 고백하라는 말이다. 우리가 사람에게도 “저는 목사님에 대한 믿음이 큽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목사님께 “목사님, 저는 목사님에 대한 믿음이 적습니다. 믿음을 갖도록 믿을 수 있는 일을 좀 하세요.”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혹시 그런 마음이 있어도 그렇게 말하면 싸움을 거는 말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예사로 “믿음이 없으니, 믿을 수 있는 짓을 좀 해서 나로 믿게 해보시오”라고 항의를 하는 것과 같은 발언을 한다. 나는 믿음이 큰 사람이라고, 주님께도 말하고 사람들에게도 말하고 싶어 한다. 물론 사람들이 나를 오해할까봐 설명을 덧붙이기도하고, 설명을 하며 그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주님께도, 사람들 앞에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크다고 고백해야 함은 마땅한 일이다. 이해가 된다면 이제부터 당신도 믿음이 큰 사람이라고 주장하라. 성령의 사람이라고 주장하라. 이것을 보고 은혜 속에 산다고 말한다. 은혜는 공짜를 말한다. 은혜 속에 산다는 말은 공짜로 주신 것을 그대로 믿는다는 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사는 방법도 역시 창조주의 창조원리를 따라 그대로 믿는 큰 믿음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살면 된다. 회복된 영은 풍성하고, 밝고, 맑고, 생명력과 환희와 기쁨이 넘친다. 우리의 영을 하나님은 이미 완전하게 만들어 놓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벽하게 다 이루어 놓으셨다. 주님이 완벽하게 만들어 주셨다. 새로운 피조물인 나를 그대로 믿는 큰 믿음의 사람임을 선포하라.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면 누릴 수 없다. 주님 주신 것을 발견하고 믿음으로 그 안에 있기만 하면 모든 것을 다 누릴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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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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