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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수룡 장로] 자 유
    다니엘 기도회 때 정요한 집사와 김예나 집사의 간증집회에서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에 온 것을 간증하는 것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소위 금수저 집안의 아들딸인데도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 목숨 건 탈출로 자유 찾은 기쁨을 간증할 때 자유가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보통 자유라 하면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영어에서 말하는 Liverty는 사회적 권리로서의 자유를 말하고, Freedom은 본질적인 개인의 자유에 해당한다고 정의한다. 시민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들은 만민평등 사상에 입각하여 개인의 권리를 당연한 기본권리(Liberalism)로 주장한 것이다. 북한의 주민들이 사선을 넘어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양의 언저리에서 서식하는 앨버트로스라는 새는 폭풍우를 뚫고 대양을 가로질러 수 만 킬로를 이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새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고향하늘과 고향의 숲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탈북하여 자유를 찾은 정요한 집사 역시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사람으로 조부인 장로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잘 하시던 조부님이 손자인 정요한 집사를 어릴 때부터 ‘너는 하나님의 귀한 백성이다.’라고 가르쳐 주면서 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하며 축복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북한에서 명문가정에 태어나 좋은 학교를 거쳐 최고의 코스를 마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김정일 전용악단 단장을 맡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마음속에 조부께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고향하늘과 숲을 그리워하면서 자유의 나래를 펼치도록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셨던 것이다. 독일에 교환교수로 출장 중에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어떤 교수가 얼굴색이 좋지 못하니 교회에 한 번 가보라는 말씀을 듣고 간 것이 수 만 킬로를 가로질러 자유 대한민국의 하늘과 숲으로 날아 와 둥지를 틀은 것이다. 우리가 볼 때에는 우연이라 생각할 줄 몰라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정요한 집사가 자유를 찾도록 길을 열어주신 것이라 믿는다. 서울 사람이 작곡한 사향가와 샤르사테곡을 연주하여 온 회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간증 중에 3800여 개의 교회를 훼파하고 그 자리에 김일성 동상을 세워 놓았으니 하나님께서 엄청 슬퍼하고 계실 텐데 하루 빨리 모든 자유가 회복되어 교회당을 다시 세우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금도 수많은 북한의 지하교인이 억압 속에서 해방과 자유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그들은 죽지 못해 살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눈물을 지우는 것을 목격했다. 자유 대한민국에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넘어온 탈북민 33,000여 명이나 되는 그 새터민들에게도 사랑과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 날 카네기 홀이나 세종 문화 회관에서도 도저히 감상할 수 없는 귀한 부부 집사의 현란한 기악연주를 선물로 받고 큰 감동을 받았다. 우리가 감동받은 이상으로 자유를 갈망하는 많은 탈북민들은 북한 땅이 하루바삐 자유의 물결로 하나님의 사랑과 빛과 생명으로 채워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북한의 백성들이 진리를 알고 진리가 그들을 자유하게 함을 알도록 평화의 복음을 힘써 전하여 그 땅이 해방과 자유가 넘치도록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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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설
    2020-11-25
  • [하수룡 장로] 3분 기적
    2020년 들어 온 나라를 뒤집어 놓은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미스터트롯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아 온 국민이 집안에서 TV만을 친구삼아 살아가던 그 때에 미스터트롯이란 신생아가 나타나 두 시간 반 동안 어린아이를 비롯한 전 국민의 시선을 떼지 못하도록 사로잡은 것이다. 요즘같이 마음을 위로해 줄 것이 없는 시기에 얼마나 좋은 청량음료인지 고마운 프로라 생각하게 되었다. 항상 어떤 일을 해보면 그 속에 주인공을 비롯한 인기 있는 화제의 인물이 탄생되는 것이 일반 법칙이다. 최고의 스타가 나오고 그와 못지않게 멋진 인물이 나타나 자기와 딱 맞는 사람에게 관심을 지대하게 가지게 되는 것이다. 화제의 인물은 TOP7인데 그들은 겸손할 뿐만 아니라 트롯이면 무슨 장르의 노래라도 잘 소화하여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단 3분간의 짧은 시간을 노래로 보답하는데 관중이 매료되어 노래에 빠지고 결국 특정 가수를 그 어떤 분보다 좋아하며 섬기게 되는 것이다.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서울에서 게릴라 팬 미팅을 가지면 공간의 한정으로 정한 수만 받았는데 뜨거운 태양이 내려쬐는 것도 아무런 불평도 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남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베트남에서 일하던 어떤 분은 서울에서 암 수술을 한 뒤 우울증과 인생을 포기한 상태로 있었으나‘나는 살고 싶다.’로 바뀌었고, 부부가 이혼하기로 결심하고 법원으로 가는 도중에 차안에서 노래 한 곡을 듣고 이혼을 포기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도 있었다. 제주도에서 첫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도착한 후 렌트카로 어린아이처럼 들뜬 기분으로 축하장에 도착하여 만남을 가졌고, 나이는 어리지만 내가 최고로 존경하는 분으로 손수 초상화를 그려 선물하기도 했고, 어떤 한 가정은 4대가 모두 팬이 되어 축하를 해주는 모습을 보고 딱 3분의 짧은 노래가 대단하다 못해 기적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다. 끝없는 축하와 사랑으로 팬 미팅은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으나 아무런 불평 없이 감격하여 울고 기쁨의 함성을 지르는 기적의 현장이 되었다. 3분 기적의 주인공은 팬에게 보답을 하듯 겸손하게‘한 분 한 분이 나의 보약 같은 존재.’라고 진실한 마음을 전했다. 3분은 짧은 시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수가 부르는 3분 정도의 노래에 열광하듯 하나님의 말씀에 매일 3분만 집중하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잘 아는 천지창조의 미켈란젤로는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끌어안고 슬퍼하는 ‘피에타’상을 제외하고는 어느 작품에도 사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시고도 어디에도 자신의 솜씨라고 흔적을 남기지 않았는데 나는 기껏 작은 벽화 하나 그려놓고 나를 자랑하려 서명을 하다니... .’이것은 평소 매일 성경에 집중하고 잠간 묵상했던 말씀이 바로‘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였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가도 잠간의 말씀 묵상으로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 깨닫고 이를 잘 실천하였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주님의 제자다. 그 분의 말씀에 매일 단 3분만 집중하여 묵상하고 기도하면 기적은 분명히 일어난다. 그리고 반드시 나를 높여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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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04
  • [하수룡 장로] 소 원
    실제 말기 암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예쁜 부인과 사랑스런 자녀인 남매를 두어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갑자기 찾아온 중병으로 유전적이고 환경적인 요인을 물려준 부모애 대한 원망이 가득 차 있었다. 왜 하필이면 내가 중병으로 죽어야 하며 이런 병에 걸리도록 어릴 때 극한 환경에서 자라도록 한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했다. 아버지의 젊은 날에는 날마다 술과 세상의 열락으로 가정을 돌보지 않아 성장기에 스트레스를 준 것이 원인임을 확신하게 된다. 물론 어머니의 가출에 대한 실망감도 증오의 대상이 되어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빠를 찾는 어린 자식들에게는 ‘아빠는 소풍 가셨다.’고 둘러대며 달래어 보았지만 중병은 시간이 갈수록 상태가 악화되어만 간 것이다. 이제 위기의 순간에 이별의 시간이 가까이 와 있음을 직감하고 지난 일들을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섭섭하고 미운 생각만 주마등처럼 지나갔으나 그래도 죽기 전에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뭔가를 남기고 가야한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살날이 짧지만 자기가 위로받고 가족들에게 오랫동안 기념이 될 만한 일이 하나라도 있어야 되겠다는 강렬한 욕구가 그를 사로잡았다.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인생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마음이 더해 왔던 것이다. ‘나는 왜 이리 복도 없을까?’하고 탄식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갑자기 죽음이 몰려 왔을 때 ‘정말 꼭 남기고 가야할 것이 없을까?’하고 무언가를 골몰히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나 특별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새벽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지금까지 부모님과 대화와 사랑을 나누며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었던 것을 기억해 낸 것이다. ‘그렇다! 다정한 모습을 하고 있는 가족사진을 만드는 것이다.‘ 그 날 이후 자기를 중심으로 가족사진을 촬영하는 일을 최고의 소원으로 삼고 이 역사적인 일을 추진하였다. 웬만한 가정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것이지만 주인공인 말기 환자에게는 최고의 소원이 된 것이다. 의료진과 협력하여 소원을 이루기 위해 온힘을 다 쏟았다. 이혼한 부모님은 이제 죽음을 앞둔 자식에게 꼭 소원을 풀어 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이혼하여 서먹한 관계였지만 사랑으로 꽉 찬 모습으로 보일 수 있도록 가족사진을 만드는 일에는 한마음이 되었다. 그 아들의 소원을 이루는 날에 이혼한 부모와 죽음을 앞둔 아들, 세 사람 모두 그 동안 참고 있었던 눈물보가 터져버려 사진관이 온통 눈물바다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제대로 된 일반 가정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사소한 일이지만 ‘가족사진’이 소원이 된 이 가정에는 특별하고도 안타까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인생의 마지막 위기가 찾아 왔을 때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면 진정 우리의 소원은 무엇이 되어야 할지 도전을 받게 된다. 인생의 장막이 무너지는 순간이 오기 직전에 말기 암 환자는 ‘가족사진’이 최고의 소원이었지만 믿는 기독 신자인 우리는 인생의 종점에서 꼭 실현해야 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귀한 일을 성취할 수 있도록 신실한 종으로서 ‘기도의 제물’이 되고자하는 소원이 가장 좋은 소원 중의 소원이 되어야 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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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5
  • [하수룡 장로] 신발
    인류의 조상 아담이 태어난 시기에는 옷은 물론 신을 신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신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1700년경 이집트에서 발견된 끈 달린 샌들이다. 아마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에게서 소명을 받을 때와 비슷한 시기라 역사적으로도 증명되는 내용이다. 이집트를 비롯한 그리스시대에도 사람들은 짐승의 가죽이나 나무, 풀잎에다 끈을 달아 발에 걸었다. 고대에 샌들을 신었던 사람들은 주로 사제나 귀족층이었고 서민들은 식물의 줄기로 만든 신발을 신거나 맨발로 다녔다. 예수님이 오신 당시에도 샌들은 질긴 가죽으로 바닥을 만들어 가죽 끈을 고정시켰고 유대인들은 우리의 풍습과 마찬가지로 집안에서는 신을 신지 않았다. 이동할 때만 신발을 사용한 한 것이다 신발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오늘에서 내일로, 익숙한 곳에서 낯선 곳으로 움직여 변화해 주길 원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신발을 만들어 신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분명한 것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어떤 좋은 신발도 인생의 죽음에서 다 끝이 나고 만다는 사실이다. 신발은 인간의 몸을 땅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최초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발을 신고 다닐 때 값진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발을 벗는 것은 잘못 살아온 과거에서부터 탈출한다는 의미가 있고 곧 옛사람을 버린다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죽음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때 묻은 신발을 꼭 벗어야 할 때에는 오직 순종으로 그 분의 뜻을 겸손하게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모세에게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구절에 신발을 벗는 행위는 하나님의 소명에 부응하여 예의를 갖추어 하나님에 대한 절대 경외심을 표시한 것이다. 또한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와에게 신을 벗으라고 했을 때 선 곳이 전능자의 거룩하심을 나타나는 장소라 생각하여 말씀에 순종하고 따른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이다. 돌아온 탕자에게 종을 시켜 가장 좋은 옷과 신발을 신기라는 부친의 명에서 아들이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포함되어있다. 신발을 신는다는 것은 신체를 보호하는 의미 외에도 변화를 바라고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의 기원이나 거듭난 삶을 살라는 깊은 뜻이 있다. 반면 신을 벗는다는 행위는 절대 순종하겠다는 의미나 경건한 자세로 상대방을 절대 존중하겠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신데렐라와 콩쥐의 이야기에서 신발 때문에 인생이 달라지는 것처럼 하나는 본인을 증명하는데 사용되고 다른 하나는 인생을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인생으로 변화시키고 영원한 복을 누릴 수 있는 구원의 신발을 신겨주셨다. 인간은 평안의 신발을 신고 안락한 생활을 하는 탓에 현실에 안주하려는 속성이 있어 신발을 계속 신고 벗으려 하지 않는다. 다른 신발을 바꾸어 신어야 할 때가 되면 그에 따른 행동이 우선되는 것이 맞다. 거룩한 곳에서 부름이 있을 때에는 옛 신발을 벗고 그 분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오직 순종해야 하고, 우리에게 명하는 말씀이 임하면 사명의 신발을 신고 오로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수룡 목사(마산회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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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9
  • [하수룡 장로] 초심
    얼마 전에 큰아들 내외와 손자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유명한 고깃집에 간적이 있다. 번호표를 받아 먹을 정도로 손님들이 많은 이유가 가격이 저렴하고 질과 서비스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지인들과 일부러 그 식당을 찾았을 때엔 우리가 처음 갔던 것과는 너무 달라 실망을 한 적이 있었다. 주인의 처음 먹었던 마음이 사라진 것 때문에 어느 회사의 상품명같이 ‘처음처럼’이 계속 생각이 났다. 초심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다는 진리를 안다면 처음에 마음먹고 세웠던 뜻을 한결같이 밀고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 것이다. 우리 인생에 도움이 되는 사자성어가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초심불망’은 처음에 다져진 마음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가슴에 와 닿는다. 처음 세운 뜻을 이루려고 꾸준하게 나아가든지 처음에 품었던 뜻을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변함없이 밀고 나가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만큼 처음 내세운 다짐이나 마음이 강하게 자리 잡혀 있어야만 나중에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처음 먹었던 마음이 변치 않고 좋은 미래를 향해 전진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삼심(三心)은 초심과 열심과 뒷심이다. 이 셋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초심이다. 초심은 처음 시작이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순수하게 모든 일에 접근하기 때문에 깨끗하고 욕심이 없다. 우리의 어릴 적을 생각해 보면 부모님의 심부름을 할 때나 교회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의 마음은 정말 때 묻지 않은 흰 백지 상태였음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는 거짓말하고 변명하여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못된 심성이 발동되어짐을 부인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초심은 일을 시작할 때 처음 품은 마음으로 첫사랑의 마음과 흡사하다. 사랑을 하게 되면 누구나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상대방을 좋게 해 주고 늘 자기의 마음에서 떼어놓지 않으려는 심리를 갖고 있다. 이래서 초심은 상대방을 생각하고 그를 알아 가려고 노력하는 것은 물론 배려하려는 순수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믿음 생활도 영원한 초심자로 살아가면 세상에서는 가장 지혜로운 자가 되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내가 무엇을 조금 이루어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위기의 때를 맞이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늘 앓아오던 질병에서 이제 다 나았다고 안심하면 초심의 망각으로 재발하기 쉽고, 자신이 이 정도면 잘 살고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자고한 마음이 생기면 초심을 잃고 모든 일을 안이하게 대처하여 낭패를 당한다. 이렇게 되면 열정이 식어지고 겸허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처음 마음, 즉 초심은 열심과 뒷심이 담겨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것은 처음사랑과 같아서 애완견과 예쁜 꽃을 가꾸듯이 늘 관심과 애정으로 키워야 한다. 날마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늘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처음 먹었던 마음이 무너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오로지 매일 기도하면서 우리 속을 들여다보고 나의 처음 먹었던 마음을 점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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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15
  • [김민호 목사] 전광훈 목사 발언에 대한 원론적 접근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텍스트는 별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들의 주관이다. 텍스트가 어떤 것이라고 해도 듣는 사람이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면 좋은 것이고 나쁘게 받았으면 나쁜 것이라고 한다.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선한 의도로 ‘아름답다’고 해도 그 여자가 기분 나쁘게 받아들였으면 의도(중심)와 관계없이 성희롱으로 곤욕을 치르게 된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해체주의’라고 한다.최근 전광훈 목사의 발언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입장에도 동일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심각한 신성모독이라고 침을 튀긴다. 반대쪽은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혼란스러워한다.해체주의자들처럼 “텍스트의 흐름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가일 뿐이다”라고 보아야 하는가? 또는 “그의 중심이 중요하다. 표현을 문제시하지 말라”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 애석하게도 이 둘의 입장은 정확하게 해체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런 입장으로 이 문제를 해석하고 평가한다면 불신자들과 아무런 구별됨이 없다. 성경적 관점에서 본다면 문제의 핵심은 회중들이 어떻게 느꼈는가가 아니다. 제3계명처럼 결코 망령되게 일컬어서는 안 될, 하나님의 거룩한 성호와 관련된 문제라는 원론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원론적 접근에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광야교회에 나가서 열정적으로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기도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아마 대부분 “신앙의 자유를 수호하고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다”라고 할 것이다. 또 질문을 던져보자. “신앙의 자유를 위협받고 나라가 극도의 위기에 처한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은 왜 이런 위기를 우리에게 허락하셨는가?” 이 질문들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한다.자문해 볼 질문이 더 있다. 우리가 광장에 모여 추운 바닥에서 목이 터져라 기도하는 의도가 ‘진심으로’ 하나님만이 이 위기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인가? 아니면 정권을 향한 공포심을 유발하기 위한 보여주기식의 퍼포먼스인가? 만약 기도의 의도가 후자에 기울어져 있다면 대중의 단합된 힘이 하나님 노릇해 줄 것이라고 믿고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 촛불이 아니라 기도 소리로 위협을 할 뿐이다.오해하지 말라. 광장에 모이지 말라거나,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이 모습 자체는 귀하다. 그러나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냉철하게 점검해 보자는 말이다.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는 듯하다.“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 도다”(시 147:10-11)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군중의 숫자가 아니다. 또는 앞에서 무리를 이끌어 가는 사람의 카리스마가 아니다. 딱 하나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핵심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전광훈 목사의 발언에 대한 회중들의 반응 속에서 우리는 과연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자들의 특징으로 반응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광장에서 추위에 떨며 눈물로 목이 쉬도록 기도하지만, 우리에게 얼마나 하나님 경외함과 인자하심을 바라보는지 묻고 싶다. 전광훈 목사의 발언을 아무리 좋은 의도로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분명히 그 표현은 분명히 하나님의 거룩한 성호에 대한 모독이다. 온갖 궤변으로 합리화하지 말자. 또 이런 궤변적 선동에 경건한 성도들이 부화뇌동하지 말았으면 한다. 현실적으로 위기의 상황이기 때문에 덮어놓고 가자는 말에도 현혹되지 말았으면 한다. 전광훈 목사가 사라지면 이 나라는 끝나는가? 하나님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은 두렵지 않고 전광훈 목사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은 두려운가? 전 목사의 표현에 따르면 이 나라의 주관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전 목사다. 그는 하나님을 마치 알리딘의 마술램프의 지니처럼 취급하는 듯하다.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표현을 문제 삼지 말자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은 분명히 중심을 보신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을 좀 더 정확히 읽어보자. 이 말씀은 여기에 사용될 말씀이 아니다. 신명기 10:17을 보면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며”라고 했고, 사무엘상 16:7도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한다.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의 핵심은 “외모를 보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 말씀이지, ‘행위’나 ‘말’을 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도리어 성경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우리의 말과 행위를 심판하신다고 한다. 시편 기자는 “그들의 입술의 말은 곧 그들의 입의 죄라”(시 59:12)고 한다. 또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4)고 한다. 사도 야고보의 말처럼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약 1:26)이다.무엇보다 전광훈 목사는 평신도가 아니다. 목사다. 목사이기 때문에 이런 표현은 더 심각하게 여겨져야 마땅하다. 바울이 한 말을 떠올려보자. 그는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 8:13)는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다. 그는 이런 태도를 가르쳐야 할 위치에 있는 직분자가 아닌가?이런 글을 쓰면 어떤 사람은 좌익으로 전향했느냐고 광분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을 공격하면 적으로 간주하는 태도는 전체주의로 가는 지름길이다. 잘 하고 있는 전광훈 목사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다. 잘하면 잘한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잘못한다면 잘못한다고 반응해야 민주주의가 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안 되면 대의 민주정치는 죽는다. 하나님과 법이 사는 나라가 아니라, 인기 영합과 선동이 판치는 세상이 된다. 이 영역은 좌익의 영역만이 아니다. 우익 진영도 다를 바 없다. 독일을 히틀러도 이렇게 권력을 잡았다. 국민이 잘잘못을 무서울 정도로 냉철하게 판단하는 풍토가 되어야 한다. 이런 풍토에서 법치와 민주주의는 비로소 꽃을 피우게 된다.작금의 현실을 바라보며 링컨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편에 서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 오피니언
    • 논설
    202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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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수룡 장로] 올림픽 선수
    고대올림픽은 주전 776년에 그리스에서 제1회로 시작하여 주후 393년까지 거의 1천2백 년 동안 4년마다 개최된 체육대회가 293회에 이르렀다. 이것이 제우스 신역인 올림프스 산기슭에서 행해졌다고 해서 올림피아라 했다. 391년 로마 황제 데오도시우스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올림피아를 이교인 제우스신에게 봉납하는 제전이기 때문에 금지시켜 293회를 마지막으로 고대올림픽은 막을 내렸다. 올림피아 신전은 훼파되고 제우스 신상은 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뜰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렇게 고대올림픽이 1천5백 년 동안 중단되었다가 1894년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를 결성하여 1896년에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서 제1회 근대올림픽 대회가 열렸다. 4년마다 세계 각 도시에서 개최되었는데 1,2차 대전 중에는 3번 중단되었으나 세계 청년들의 우호를 돈독히 하고 국제 평화를 위해 정기적으로 개최되어 세계인의 환호를 자아내고 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올림픽 선수로 참전하여 경험한 내용을 토대로 올림픽을 비유를 들었기 때문에 올림픽의 종주국인 그리스인들도 심오하기 이를 데 없는 기독교의 진리를 터득하기가 쉬웠을 것이란 결론에 도달한다. 먼저 누구든지 월계관을 받아쓰려면 올림픽 선수로 택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승리한 영광의 면류관도 쓸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이 천 년 전에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인류 문화의 기원은 고대올림픽에서 시작되었고 전 세계가 공통으로 쓰고 있는 기원은 예수가 탄생한 해로부터 잡고 있다. 그런데 예수의 조국인 이스라엘은 2천 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리스도인이 전체인구의 1%도 되지 못하는데 이방인의 나라 그리스는 90%가 훨씬 넘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니 인간적으로는 정말 이해가 안 된다. 아마 신약의 절반 이상을 저술한 바울 본인이 올림픽에 직접 참가하여 승리의 영예를 누려본 경험을 올림픽과 연계하여 그 내용을 성경에 기록했기 때문에 올림픽의 종주국인 그리스인들이 기독교의 진리를 알고 어렵지 않게 예수를 받아들인 것이 틀림없다. 인간의 구원은 먼저 올림픽에서 바울처럼 선수로 선택되어야 하듯이 믿는 자 모두가 확실하게 자비하신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야 한다. 그러면 달려갈 길을 마음껏 달려가고 절제하면서 말씀으로 승리를 얻으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행복한 천국의 올림픽 선수로 선택을 받았다. 선수는 푯대만 향하여 능하신 심판자인 하나님의 말씀대로 규칙을 지키며 달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격이고 모든 것이 허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우린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올림픽 선수다. 월계관은 아무에게나 씌어 주지 않는다. 규칙을 어기지 않고 전력을 다해 달려가야 주어진다. 바울은 많은 비유를 들면서 올림픽 선수에게 땀과 눈물과 피의 고된 대가로 받은 금메달로만 만족하면 안 되고 내세에도 빛나는 면류관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간곡한 권면을 한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육체의 훈련보다 더한 경건한 생활로 현세와 내세의 월계관까지 하나님에게서 확실한 약속을 받자.
    • 오피니언
    • 논설
    2023-01-19
  • [하수룡 장로] 기 쁨
    노년이 되면 크게 웃을 일이 없는 것이 정상이다. 그래도 부부가 같이 살아가면 그런대로 웃을 일을 만들고 웃게 되는 경우가 있으나 노후에 혼자되면 그렇게 기뻐할 일이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즐거움은 쾌의 감정으로 낙이란 감각적 차원의 쾌감이지만 기쁨은 즐거움이 동반된 쾌감으로 다분히 영적인 요소가 짙다. 즐거움은 쉽게 사라지지만 기쁨은 오래 지속된다. 오래전에 필자는 영남사람으로 여수에 사는 호남인을 전도하여 현재 집사에 이르게 된 분이 있는데 다른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만큼 기쁨 속에서 친밀하게 잘 지내고 있다. 서로의 삶이 일그러진 오이지의 모습이 아니라 확 펴진 보름달처럼 늘 즐겁고 웃는 모습을 유지하며 살려고 노력한다. 오랜 교분 동안 통화가 되면 상대방의 목소리만 들어도 기분이 좋고 몸이 아프다가도 저절로 회복될 정도로 서로가 쾌유의 은총을 누리기도 한다. 이것은 예수 안에서 찐 사랑의 대화를 나누기 때문에 기쁨이 최고조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좋은 날이거나 보고 싶으면 직접 상대방의 가정을 방문하여 며칠 쉬기도 하고 중간 위치의 만나기 쉬운 곳을 정하여 음식을 나누거나 차를 마시면서 기쁨을 나눈다. 만나기만 하면 누가 보든 상관 않고 부부가 교차로 안고 춤을 추며 뛰고 난리다. 처음 계획에는 2박 3일간 동해안 여행을 떠났다가 4박 5일로 연장하여 여행하기도 했다. 서해안과 남해안 여행도 2박 3일의 여행을 떠나 즐거움을 가득 안고 돌아와 기쁨이 넘치는 생활로 행복하게 산다. 이것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우리만이 누리는 최고의 기쁨이다. 게다가 마음을 담아 택배로 유기농 열매를 호남에서 보내기도 하고 철에 맞는 열매를 영남에서 사랑을 담아 보낼 때가 있다. 여수 땅을 방문할 계획이면 벌써 며칠 전에 낚시하여 맛있는 고기를 냉동고에 준비해 놓기도 한다. 그곳에 당도하면 낚시할 도구가 준비되어 오랜 시간 동안 낚시터에서 세월을 낚기도 한다. 좋은 자연환경 속에서 좋은 사람과 어울려 시간을 보내는 그 기쁨은 그 누구도 맛보지 않고는 모른다. 오직 사랑의 끈으로 연결된 정 때문에 즐거움이 꽉 찬 쾌감이 서로에게 최고의 기쁨을 생산하게 만든다. 주님으로 인하여 만남이 성사되었고 그 사귐이 일회성이 아닌 10여 년간 지속 되어 상대방을 서로 신뢰하고 좋은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챙겨주고 싶은 관계가 된 것은 최고의 기쁨이고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서로가 항상 좋은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나의 것을 아끼지 않고 마음을 다해 베푼다. 사진만 보여줘도 행복한 결과가 얻어진다는 데레사 효과(Theresa Effect)처럼 가정에서 일어나는 좋은 일이나 생활에서 생기는 아름다운 일들을 서로 소개하고 보여주어 진심으로 축하하며 기쁨에 찬 행복감을 맛보기도 한다. 믿음은 나 중심에서 주님 중심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주님 중심은 주님을 잘 섬긴다는 것이다. 주님 섬김은 결국 형제를 정성으로 잘 섬기는 것이다. 그 열매는 전도한 사람과 전도된 사람을 한 형제로 살아가는 기쁨을 누리고 행복하게 해 주신다. 영하의 날씨 속에서도 우리 주님의 훈기가 가득한 남향집에서 해마다 보내주는 맛있는 여수 갓김치의 냄새를 마음껏 누리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기쁨이 틀림없다.
    • 오피니언
    • 논설
    2022-12-27
  • [하수룡 장로] 낙 엽
    인생의 황혼기를 보통 낙엽에 비유할 때가 많다. 나무가 새싹이 나고 푸른 잎으로 무성해지는 기간을 지나 열매를 맺고 나면 나무의 할 일은 거의 마무리되고 떨어지는 낙엽으로 가득 차게 된다. 새로 이사를 온 후 마트에 가보면 유독 혼자 다니는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노인이 마트의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수년 동안 보았는데 요즘은 통 보이지 않아 천국으로 가셨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나이가 들면 노인들이 갈 곳이 없다. 그래도 친구가 있고 용돈이라도 있으면 나으련만 그렇지 못하고 식당이나 시식하는 코너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모습은 처량하다 못해 불쌍한 느낌마저 드는 것은 필자의 지나친 측은지심 때문일까? 늙은이가 병으로 고통당하지 않고 노후를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이 살아가면서 주님 의지하며 자녀들과 소통을 통하여 외롭지 않으면 정말 축복을 받은 삶이라 말할 수 있다. 게다가 노탐이라 할까 아니면 노욕을 버리면 그보다 더 좋은 이상적인 삶은 없다. 일본에서는 나이가 든 주부들이 정년퇴직을 하고 집안에서 죽치고 들어앉은 늙은 남편을 ‘오치 누레바’라고 부른다고 한다. 우리말로 ‘젖은 낙엽’이라는 뜻으로 늙은 남편이 집에 딱 붙어 나가지 않아 부담스러운 존재로 비유한 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당사자인 노인들에게는 심히 모욕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현대사적으로 우리나라는 오랜 시간 동안 남편이란 존재의 의미는 가족을 위해 밤잠을 모르고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그 주역들이 바로 오늘날의 늙은이들이다. 이웃 나라 일본과는 사뭇 다른 문화를 가진 우리나라이기 때문에 일본처럼 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은 있다. 국민소득 50달러에서 이제 3만 달러로 600배로 성장시킨 주역이 바로 현재의 노인들이 아닌가! 이제는 세계 유력한 이름 있는 기구에서 한국을 개도국에서 선진국으로 격상시킨다는 뉴스가 나오자 전 세계가 놀라고 칭찬을 보낸 사실을 기억하자. 노인은 세월이 흘러 주름이 많이 생긴 것은 틀림이 없으나 계절이 끝나 쓸모없이 버려지는 낙엽은 분명 아니다. 그 동안 피땀 흘려 이루어 놓은 업적이 얼마나 많은지를 생각하고 노인들을 절대 홀대하거나 폄하해서는 안 된다. 나이든 나뭇잎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가을 산에 단풍이 되어 울긋불긋하게 물들었을 무렵 비에 젖었을 때이다. 저녁노을이 드리어 질 때 물든 낙엽은 신비하기도 하고 보석처럼 아름다워 흥분하기도 한다. 정말 쓸모없는 찌꺼기도 없고 깨끗한 순수함 그 자체다. 늙은이를 가을 노을에 물든 낙엽이라고 말하고 싶다. 허리가 굽도록 새벽별을 보고 나가 저녁달이 뜰 때 돌아왔던 노인들을 먼저 가족들이 그 노고를 알아주어야 한다. 믿는 자이면 더욱 배우자가 손을 더 내밀어야 하고 자녀들이 존경의 마음으로 다가서야 한다. 늙었다고 기죽지 말고 주님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 내가 살아 있는 인생으로 살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한다. 누가 뭐라 해도 인생의 노년은 경륜으로 젖은 단풍처럼 찬란하게 빛난다. 그래서 노인은 낙엽이라도 노을에 물든 단풍처럼 귀히 여김을 받고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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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11
  • [하수룡 장로] 장로는 목사안수에 손을 얹을 수 없는가?
    몇 년 전에 우리 노회에서 장로 부 노회장이 목사 안수하는 곳에 올라가 안수하는 일에 참여했다고 원로목사에게 노회석상에서 혼쭐이 나고 노회장도 문책을 받아야 한다고 해 노회가 술렁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장로들은 불합리하고 너무 형평성에 맞지 않다고 이구동성으로 불평했다. 우리 고신 총회는 초창기부터 미국 북.남 장로교회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목사와 장로가 동등한 장로라는 것을 전제하였으나 1992년과 2011년 교회정치에서는 목사, 장로, 집사 세 직분을 엄격하게 구별하였다. 이것은 목사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일은 목사가 하고 장로는 어디까지나 치리장로로만 존재하게 하여 장로들에게 큰 불만을 안겨주었다. 기관이나 모든 회의 책임자도 목사가 하도록 정해 놓은 것이 문제다. 고신총회 헌법해설서에서 장로가 목사 안수에 참여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디모데 전서 4:14의 ‘장로의 회에 목사를 포함하여 지금의 장로가 포함될 수 있는가?’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디모데 전서 3장에 나오는 '감독은 목사만 가리키는가? 장로도 포함되는가?' 가 관건이다. 이제는 장로를 목사와 동등의 위치에 놓고 부부관계로 협력을 유지하는 것이 현실적이 아닌가 싶다. 성경적인 직분 관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한 미국정통장로교회와 미국장로교회들은 장로를 목사와 동일한 감독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교파는 우리 고신총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 장로도 장로회의 동등한 일원으로서 목사와 함께 목사안수에 참여하는 것이 마땅한 일로 여긴다. 사도들이 일곱 집사를 안수하였고 장로들이 디모데에게 안수했으며 바울 장로가 디모데에게 안수하는 등 임직은 사도와 장로가 했다. 목사와 장로는 부부관계로 목사는 장로가 협력을 해 주길 바라지만 형평성이 없는 불만이 있는 가운데 장로는 어쩔 수 없는 입장에서 같이 따라가고 있는 형편이다. 장로가 목사와 협력하여 주의 뜻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게 현실에 맞게 헌법을 다시 만드는 것이 옳다. 고신총회에 ‘목사안수에 장로가 손을 얹을 수 없다’는 것을 법이니까 그대로 따르는 것이 순리라고 고집할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지 않는 한 장로를 목사와 같이 목사안수에 동참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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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05
  • [하수룡 장로] 후손
    내가 섬기는 교회에 믿음이 좋은 장립집사님이 한 분 계시는데 아들을 장가보낸 뒤에 손자를 기다리는 마음이 남달리 급한 것을 볼 수 있었다. 보통 분들은 손자이든 손녀이든 무엇이든 주시는 대로 감사하겠다고 말하는데 이 분은 꼭 손자를 주셔야하고 주실 것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에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헌금을 했다. 어떤 의미로 손자를 기다리는 사람은 조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금보다 귀한 손자를 좀 더 고상한 말로는 후윤이라고도 하는 것을 보아도 후손은 정말 귀중하다. 어느 기업체에서 독립운동가의 후손 가정의 노후 된 집들을 개보수해 주는 것을 보고 참으로 뜻 깊은 훌륭한 사업이라 생각했다. 친일을 한 사람의 후손은 호의호식하며 잘 배워 지금은 잘 살고 있지만 독립투사의 후손은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나라를 지킨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가진 것이 없어 배움의 기회가 상실된 상처뿐인 삶으로 100년을 살아온 것이다. 이들 후손들은 아버지에게서 가훈의 교육은커녕 경제적 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세월이 한참 흐른 오늘에야 조상이 가치 있는 독립운동의 주체적인 사람으로 후손들에게는 존경받는 인물로 존재하는 것은 참 잘된 일이다. 가인은 악을 선택하여 사탄의 종이 되어 아벨을 살해하고 땅의 저주를 받는 최악의 후손으로 전략하였다. 오늘날도 가인처럼 자기만의 성을 쌓으면서 선하신 하나님과 교제는 단절하고 자기의 영역이 침범 당할까봐 늘 염려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아담은 의로운 후손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여 셋을 허락하심으로 큰 기쁨을 얻는다. 아벨 대신 다른 의로운 씨로 아들을 내려주신 것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며 악을 다스리라는 깊은 뜻이 있다. 또한 하나님을 잘 섬기는 믿음의 가문으로 후손을 잘 가르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잘 알아야 한다. 요즘 믿음의 친구들이 모이면 간절히 바라는 공통분모가 자녀 손들이 믿음으로 잘 살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마음이다. 자녀들이 어릴 때에는 좋은 대학을 진학하고 선망의 직업을 가지는 것만이 간절한 소원이었지만 막상 세월이 지나 만족한 직업을 가진 후에는 제대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믿음의 자녀들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죄악이 관영한 시대에 믿음의 조상격인 부모가 자기 후손에게 하나님을 공경하고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정상적인 신앙인의 믿음이고 올바른 생각이라 믿는다. 이스라엘은 후손교육 실패로 부패하고 타락하여 강대국으로부터 침략당하고 왕을 비롯하여 백성들이 이방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는 치욕을 겪었다. 손자가 탄생된 기쁨보다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는 믿음을 갖고 지혜롭게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기독교인이 많은 내 나라, 나의 자녀손들이 사는 이 땅에 올바른 후손교육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안전을 보장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로 잘 가르치고 어떤 것이 더 가치가 있는지를 가르치면 성공한 후손들의 모습을 오랫동안 늘 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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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 [하수룡 장로] 욱 여 쌈
    '욱여쌈'이란 말은 바울이나 요셉에게 어울리는 말로 정말 헤어 나오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을 때 사용하면 적격이다. 이 말은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는 말로 ‘안쪽으로 조금 우그러져 있다.’는 형용사‘욱다’와 ’싸다‘라는 동사와 어울려 만들어진 순수한 우리나라의 말로 물건을 안에 넣고 보이지 않게 씌어 가리거나 둘러 말다는 뜻이다. 물건이나 물체가 아닌 사람이 욱여쌈을 당한다면 포도즙을 짤 때 포도를 짓누르는 것과 같이 엄청난 고통을 당하여 사방이 캄캄하고 터질 것 같은 답답함으로 생을 포기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통 욱여쌈을 당한 사람하면 조선시대 이 순신 장군을 떠올리게 된다. 조정은 조정대로 위태한 나라를 위해 적극 힘을 보태주지 못하여 방해꾼이 되었고 아군은 아군대로 지도자가 자기의 공을 드러내기 위해 싸움은 뒤로한 채 허위보고와 헐뜯는 일에 몰두하여 적군 아닌 적군이 되었다. 지원군인 명나라도 일본과의 약은 정치로 군대 해산과 적대 행위 종료와 귀향을 명령하여 돕는 아군이 아니라 방해하는 적군이 되어버린 것이다. 진짜 적군인 왜군은 어찌하든지 이 순신 장군을 죽이고 조선 수군을 멸하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던 것이다. 돕는 이 하나 없는 이 순신 장군은 아마 온 천지가 적들에게 포위되어 욱여쌈을 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왜군과 명군은 돌아갈 고향이 있었으나 아군은 돌아갈 고향이 없다고 탄식했던 것이 아닐까? 결국‘죽으면 살리라.’라는 담대한 마음으로 적의 종자를 멸할 것을 명령하여 왜란을 승리로 이끌게 되어 역사의 한 장을 기록한 것이다. 작금에 우리나라의 형편은 국내외적으로 욱여쌈을 당한 형국에 처해졌다. 정파는 정파대로 교파는 교파대로 편을 나누어 국론이 통일되지 못하여 유대나라처럼 온통 찢어진 상태로 분열된 느낌이다. 북한은 시간만 나면 무력으로 남한을 접수하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주위의 강대국들은 한국이 부강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아 보이지 않게 방해 공작을 멈추지 않는다. 특히 젊은이와 믿는 백성들까지도 방황하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많은 것을 포기하려 한다. 게다가 기상이변과 코로나까지 더 심해져 어려운 형국을 맞아 일제강점기의 최악의 순간처럼 도저히 미래가 암담하다. 일자리는 줄어들어 일하고 싶어도 일할 자리가 없어 직장도 결혼도 미루거나 포기한다. 한국이 선진국에 진입했다고 축하하지만 시국적으로 현재는 어려운 시기로 개인도 국가도 욱여쌈을 당하여 어려운 상태에 처해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순신 장군도 바울도 요셉도 욱여쌈을 당하여 도저히 인간적으로 ‘바람 앞의 등불’같이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죽기로 각오하면 살리라.’하고 상황을 대처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살려 주시고 높여 주셨다. 우리의 현실은 지금 가정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모든 분야에 욱여쌈을 당한 상태로 어려운 위기의 비상상황임을 기독교인이 먼저 절감해야 한다. 우선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내가 진정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빛이 되었는지 자성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개체인 나라는 존재는 극히 작지만 예수님은 어떤 일도 다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분임을 믿어야 한다. 성질이 날 때 내가 나를 죽이고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도 나를 죽여야 한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고 불평과 불만의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와도 나를 죽이자. 그리하면 그 분이 내 안에 계셔서 크게 역사해 주시고 위기에서 구해 주신다. 지금은 온 세계가 코로나와 전쟁 때문에 경제 침체의 욱여쌈을 당하여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상황이다. 다른 방법이 없다.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나만 죽으면 전능자는 삽니다. 나 자신을 죽이세요. 그 분이 모든 환난을 감당하십니다.’라고 외쳐야 한다.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해도 그 분이 환난을 능히 감당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절대 필요한 때다. 위기는 또 하나의 기회임을 명심하자. 2022.08.22. 경남기독신문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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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23
  • [하수룡 장로] 존재감
    2010년경부터 빛나는 조연이 등장하면서 장면마다 엄청난 존재감을 내뿜는 바람에 갈수록 이들의 가치는 커지고 있다. 폭발력 있는 개성적 캐릭터는 주연보다 조연이 매력적으로 구현되어 환호를 낳게 된다. 식상함이 없는 신선함으로 주연과 주변 인물을 섬기는 자세로 연기할 때 그 존재감으로 명품조연이 탄생되는 것은 틀림없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개성과 자존감이 남다르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을 ‘인싸’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로 존재감이 남다른 사람이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받아 선택받은 자로 구별되게 선민이 된 것이다. 우리가 거룩한 백성이 된 것은 내가 잘나서 결코 아니다. 왕이신 주님이 최고의 주연이 되셔서 우리를 조연으로 뽑아 잘 받들며 섬기라고 명하였기에 존재감이 있는 사람으로 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구원받은 주의 자녀로 천국을 갈 수 있다는 자긍심은 있지만 하나님이 선택한 가장 귀한 존재라는 것을 잊고 살 때가 많다. 종종 기독교인들이 당당하게 존재감을 자랑스럽게 드러내지 못하고 선한 영향력을 펼치지 못한 상태로 살아가는 모습을 목격할 때가 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되어 성할 때 ‘그래도 예수쟁이는 믿을 수 있어.’라는 말로 불신자에게서도 존재감을 인정을 받았다. 선진국이 된 오늘날 모든 것이 풍족해서인지 나의 정체성과 존재감마저 망각하고 소명감 없이 살고 있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분명히 나라는 존재가 그리스도의 조연으로 주와 남을 섬기고 산다면 존경심이 담긴 존재감이 드러날 사람이 될 것이 틀림없는 사실인데 말이다. 요즘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나의 존재감은 어떠한지 자문해보자. 물론 존재감을 키우기 위해 학력의 스펙, 각종 자격증과 세상 지위로 무장할 수 있지만 이런 것들을 무조건 쫓아가면 나중 될 자가 많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진정한 성도의 존재감은 그리스도를 주연으로 모시고 기꺼이 자신을 모든 사람의 종으로 섬기기 시작할 때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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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27
  • [하수룡 장로] 보험
    현대인은 일상생활 가운데 화재나 자동차 등에 큰 어려움이 생겼을 때 보상받을 수 있는 손해보험이나 생사와 관계되는 모든 것을 보장을 받기 위해 생명보험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다. 의료나 건강을 위해 보험을 넣는 경우와 직장을 잃어 곤란을 당할 때 도움을 받는 사회보장에도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그렇지만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의 앞날의 안위를 알아보기 위해 철학관이나 점쟁이를 찾는 것은 참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의 보험의 역사는 개항 이후 영국 보험회사가 설립되었고 일본도 1880년 동경 보험 주식회사가 제일은행 부산지점에 대리점을 개설했다. 그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다가올 자기의 인생에 대한 걱정과 염려를 덜어주는 보험 제도에 관심을 가진 것은 사실이다. 요즘은 의료발전으로 고령화 시대가 되면서 세월이 흐를수록 오래 살아서 좋은 것보다 문제가 많이 발생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예견하고 있다. 장수는 축복이지만 한편으로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오랜 시간 무엇을 먹고 살며 혹시 병이 들어 장시간 고통을 당하며 살지 않을까하는 걱정도 하게 된다. 의료 혜택으로 수명이 늘었다고 좋아하지만 그 수명이 늘어난 만큼 걱정과 염려도 비례하여 늘어나는 법이다. 그러나 믿는 자의 특권인 생사화복의 주체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버리고 살면 해결되는데 왜 걱정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 할지라도 세상의 제도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한낱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자기의 건강과 수명에 대해 세상 보험에 기대는 것은 당연하지만 신자는 보호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만이 우리가 사는 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호흡이 끝나는 날까지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만이 세상의 어떤 보험보다 든든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누구든지 형식적으로 바치는 충성이 아니라 나를 위해 큰돈을 보험에 투자를 하는 것과 같이 제대로 투자하고 살면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모두 책임을 지신다. 세상에 걸쳐 살던 삶을 과감하게 청산하고 믿음으로 결단하여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보자. 전능자의 이름을 확실하게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분명히 누리고 질병도 이기고 사망도 이긴다. 세상의 권세를 믿고 의지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고 식언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머뭇거리지 말고 큰 믿음으로 아낌없이 보험에 투자해보자. 분명 주님의 말씀에 의거한 보증 보험에 투자한 삶은 결코 헛되지 않다. 그 분의 뜻대로 살기만 하면 정말 생각지도 않은 사람도 붙여주시고 불치의 병도 낫게 해 주신다.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불가능한 길도 열어 주시고 미래의 안위도 책임져 주는 보험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확실한 보장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충실하게 투자하는 보험만이 살길이다.
    • 오피니언
    • 논설
    2022-06-28
  • [하수룡 장로] 순 교 자
    한 초등학생이 자기 어머니에게 순교가 옛날에 믿음이 좋은 어른이 자기 믿음을 지키려다 돌아가신 것이란 것을 알고 자기 엄마에게 대뜸 “엄마, 엄마도 순교자 처럼 순교할 수 있어?”라고 묻는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님을 말하고 대화를 마무리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도 요즘같이 실제 보기에 평화스러운 시대에는 순교자가 나타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먼저 잘 안다. 그러나 지금도 이슬람 국가에서 기독교인의 박해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놀랍게 일어나는 순교의 현장을 목도하고 그저 우리의 마음만 아파할 뿐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순교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하여 죽임을 당하거나 말이나 행위로 자신 의 신앙을 부인하기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행위를 말하고 대의명분을 위해 순 교한 사람을 순교자라고 부른다. 역사적으로 오랜 박해를 받아온 유대교에서 순교 의 이상적 형태가 전승되어 왔었는데 기독교나 이슬람교에 영향을 크게 미친 것은 사실이다. 여러 종교들이 이를 교육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웃에 순교자의 삶을 살고 간 분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함안 부봉 교회의 이현속 전도사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그 분은 일제 강점기에 한상동 목사나 주남선 목사처럼 유명하진 못했으나 젊은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신사참배를 거부 하고 생명을 버리기까지 일제에 맞섰던 것은 정말 존경할 만한 일이다. 일본 순사의 혹독한 고문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여 주님을 배반하지 않 은 것은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을 발휘한 최고의 순교자요 변치 않는 믿음의 훌륭 한 선배라 하겠다. 훌륭하고 이름 있는 목회자가 아니었지만 젊은 나이에 변절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순교한 것은 그 어떤 분보다 훌륭한 것이기에 재조명 받아야 마땅하다. 끝까지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에도 굽히지 않고 버티다가 평양 형 무소로 이송되어 간 뒤 해방을 불과 3개월 앞두고 순교하신 것은 슬프다. 지금은 평양 돌박산 기독교 공원묘지에 잠들어 계신다고 하니 정말 가슴이 아프다. 요즘은 부모도 교역자도 순교자의 값진 순교의 삶을 교육하기보다 늘 축복에만 치중하다 보니 회개와 순교란 말씀을 듣기 힘들다. 국가에서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분을 쉽게 애국자로 인정하지도 않는다. 최근에는 순교자들을 위한 순교지 성역화 작업은 놀라운 규모를 자랑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고신총회나 재건 총회 이외에는 개신교의 대부분이 신사에서 참배했으며 전쟁을 지지하고 배교했던 것은 지울 수 없는 부끄러운 사실이다. 그런 역사적 사실이 있음에도 참회는 고사 하고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당한 순교한 자들을 입으로만 높임으로써 마치 자신들이 후예인 양 자랑하는 모순을 연출하고 있는 것은 위선 이다. 특히 외국 선교사 묘지도 단장하고 그 역사를 소유하여 자기의 업적을 높이 거나 상술에 이용되는 것은 순교자를 다시 한 번 욕보이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2000년이 되면서 교회가 쇠퇴하기 시작하자 경쟁하듯이 역사실과 박물관을 건립 하여 유적지 지정에 힘을 쓴다. 100년 넘는 교회들은 왜곡까지 하면서 자기 교회 역사를 거룩하게 미화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의 뼈를 탑에 넣고 모시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선배의 순교신앙을 정기적으로 교육하여 그 정신을 이 어 받고 순교신앙을 이어받는 뼈대 있는 신앙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야 몰락의 위기에 서있는 기독교의 쇠퇴기를 이길 수 있고 혼란기에 겪고 있는 죄악의 불감증을 치유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목회자와 부모는 함께 즐거운 하 루를 보내고 축복을 말하는 것도 좋지만 가까이 있는 순교지에 들러 순교자의 숭고 한 믿음을 이어가도록 학습지를 제공하거나 목회자는 정기적으로 순교에 관한 내용을 설교 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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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논설
    2022-05-31
  • [하수룡 장로] 사나래
    세월이 흘러 다 성장한 손자들을 보면 이제는 아들의 아들이나 딸도 부모를 떠나 짝을 찾아 독립할 때가 다 되어 뿌듯함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조부모가 줄 수 있는 사랑을 어릴 때 다 쏟아 부어 그렇게 딱 붙어 있는 껌처럼 밀착되어 좋아하던 그 모습은 손자들은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손자와 같이 놀아 주었던 조부모들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추억을 먹으면서 종종 행복해 하며 웃음을 지우곤 한다. 엄마의 젖을 빨며 엄마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울었던 아이가 건장한 청년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든든한 국군 용사가 되었고 손녀는 결혼할 나이만큼 성장해 있는 모습은 정말 대견스럽다. 어려서 부모나 조부모의 사랑을 잘 느끼지만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고 그냥 사랑만 먹고 성장하여 건강하게 잘 커는 것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했는데 자기가 받은 사랑을 놀랍게 표현하는 것을 보고 정말 사랑은 위대함을 발견하게 된다. 조부모는 손자 어릴 때의 콩딱콩딱 뛰며 꽉 안겨 떨어지지 않는 그 따뜻하고 행복한 느낌을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그림으로 남아 영원히 가슴에 그려져 있다. 어머니의 끊임없는 훈계 때문에 불만으로 차 있을 때 조부모의 말 한마디가 큰 위로를 받는 것이 틀림없다. 엄마보다 더 엄마 같은 할머니가 청년 손자의 가슴에 오랫동안 남아있는 것은 항상 사나래 같은 포근함으로 감싸주는 끊임없는 조모의 사랑 때문이다. 할머니가 손자를 더 깊이 사랑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기에 성인이 다된 아이들이 조부모를 보는 순간 거침없이 달려와 가슴이 터지도록 아낌없이 포옹하게 만든다.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손자들의 예쁘고 아름다운 추억은 지워지지 않고 더 선명하게 떠오르기 마련이다. 하나님을 믿는 노인의 추억 속에 세 네 살 때 손자와 함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제대로 말을 못하던 어린 아이가 ‘우리 하바, 좋은 하바, 우리 하바, 좋은 하바.’하면서 스스로 작사 작곡을 하여 목청껏 노래를 불렀던 것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엄청난 기쁨과 감동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연세든 노인에게 손자가 감사한 마음을 특별한 날 쭉 써온 편지의 내용을 꺼내보면 더욱 감동하여 만족스럽고 흐뭇하다. ‘늘 저희들을 사랑해 주시고 맛있는 것과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셔서 감사해요.’‘할머니 사랑해요. 100세까지 건강하게 사세요.’‘은퇴하시면 건강도 챙기시고 행복하십시오.’‘열심히 공부하여 꼭 보답하겠습니다.’‘저희들의 앞날을 위해 항상 기도해 주심을 감사드려요.’‘제가 잘되어 꼭 좋은 차를 꼭 사드릴게요.’등을 다시 읽어보면 가슴이 찡해온다. 항상 주님이 우릴 안아 주시는 것처럼 할머니의 포근한 사랑의 사나래가 손자들을 늘 품어 주셨기 때문이리라. 손자는 할머니가 사나래가 있는 천사가 틀림이 없다고 확신한다. 손자의 성난 상태를 당신의 지혜로 다스리시고 미운 투정에 달콤한 사랑의 케이크로 달래 주신다고 믿는다. 쭈글쭈글한 나이든 손마저 아름답고 따뜻하다고 칭송한다. 어여쁜 당신 나의 할머니, 부디 나의 곁에서 오래오래 머물러 달라고 간절하게 노래한다. 조부모도 부모와 다름없다. 손자도 아들의 아들이기 때문에 조부모가 사나래를 활짝 펴 그들을 아낌없이 감싸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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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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