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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경배
주일이면 하나님께 예배드리려고 교회당을 찾아 찬양도 하고 조용히 묵상하며 예배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상례다. 정신없이 쫓아다니다가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보이는 예복도 갖추지도 않고 드려야 할 헌금조차도 챙기지 않은 상태로 허둥지둥 교회로 갔다면 삶이 제대로 예배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 예배 시간에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만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예배 시간 전에 잡담하고 웃고 인사를 나누거나 심지어 장난을 치면 옳은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오늘날 예배는 다분히 너무 형식적으로 외형적 모습을 중시하는 나머지 보이기 위한 예배로 치우쳐 가슴이 아프다. 엄청난 존경심과 경외감과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께 경의를 표하는 것이 경배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갖게 해 주시고 사랑스런 자녀들을 주신 것은 더없는 행복이다. 충분한 먹을거리와 잘 수 있는 안락한 공간, 활동하며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양호한 건강과 함께 갈 수 있는 친구를 주신 것은 정말 감사해야 할 부분이다. 사람들은 이것들이 모두 자기의 힘으로 마련한 것으로 당연하게 여기고 사는 경향이 있어서 문제가 된다. 물론 감사함을 실천하고 하나님께 충분한 경외와 존경심을 표시하는 분들도 많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받은 축복들을 주의 깊게 헤아려 보는 것이 중요하고 또한 그것이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절대 잊으면 안된다. 그것을 기억하고 감사를 실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첫걸음이다. 야곱은 모든 일이 잘 풀릴 때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한다고 했다. 세상 일이 인간 마음대로 잘 되지 못할 때가 많고 원하는 대로 자녀들의 앞날이 안풀려 낙심이 되는 경우가 많다. 분명한 것은 세상의 것을 노래하는 것보다 주님을 찬송하여 그분을 찬양하는 것이 그분을 높이는 결과로 결국 나를 높여 준다는 사실이다. 예배를 드리기 전에 온 마음을 모아 기도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찬송을 드리기 위해 머릿속의 잡다한 생각도 버려야 한다. 교회당에서 예배드리기 전에 모여서 잡담을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경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특히 구약시대에는 예배드리기 전에 성도끼리 고개 숙여 인사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부르고 높이며 찬송하는 이유가 그분께 지혜와 권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면 하루에 한 번 이상은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 무언가 달라고 하지 않고 우리에게 행하신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하며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그분을 경배히는 것이다. 예배는 찬양과 경배가 그 자체임을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경배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예배의 모델은 하늘의 예배가 근본인 것이다. 살아있는 경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친밀함을 추구하고 이를 위해 우리의 가슴을 활짝 열어 하나님을 모셔야 한다. 주일마다 깨끗한 헌물로 감사헌금을 드리고 오직 하나님만으로 기뻐하며 우리의 사랑을 고백해보자. 정직함과 진실함만이 그분의 마음을 움직인다. 오로지 그분께 존경, 그리고 감사를 온전히 드려야 한다. 진실한 나의 삶의 전부를 바치는 것이 경배임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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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빈둥지
둥지란 주로 새가 알을 낳거나 깃들이는 곳을 말하지만 사람이 사는 집을 말하거나 사랑을 말할 때 강한 자의 품을 말하기도 한다. 보통 새들은 자기 가족을 위해 높은 나무의 파인 곳의 안쪽에 둥지를 틀기도 하고 어떤 새들은 바위 암초 위에 짓기도 하며 또 다른 새들은 땅 위나 굴 안에 둥지를 짓 는다. 부부가 자기 새끼를 낳아 기를 때에는 서로 번갈아 가며 돌보기도 하 여 잘 성장시킨 후에는 모두 독립시켜 멀리 날려 보내고 빈 둥지만 남아 있 는 것을 주위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신문에서 철원 동소 읍에 있는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천연기념물이지만 멸종 위기에 있는 두루미를 위해 인공 황새 둥지를 세웠다는 보도를 보았다. 이날 세워진 황새 둥지는 높이만 11미터로 지주대 위에 철제 육각형 상판으로 제작됐다. 철원을 찾는 황새를 위해 둥지 만들기 사업 취지를 공감하는 철원 지역 주민 59명이 자발적으로 모금한 자금을 갖고 황새 둥지를 만든 것이다. 철새들이 갈 곳이 없어 멸종 위기에 빠진 것을 철원주민이 서식하도록 배려한 것이다. 다른 곳에서 방사한 암컷 황새 한 마리가 많은 알을 산란하여 번식시켜 텃새화를 위해 운동을 시작한 것이 황새 가족들이 함께 모여 사는 스위트 홈을 만든 쾌거를 이룬 것이다. 물론 이곳에 사는 황새도 철새이기 때문에 조금 지내다가 훌쩍 떠나면 많이 붐비던 둥지도 빈 둥지로 남아있을 것이 확실하다. 올해 48세의 주부가 외동딸을 애지중지하여 긴 시간 동안 올인할 정도로 기쁨을 맛보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잘 키워 대학을 보내고 나니 집안이 텅텅 비워있는 빈집으로 마음이 허전하여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불혹의 나이에 자식 하나라도 이런 허전한 마음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는데 이순이나 고희의 나이에 많은 자식들과 같이 살다가 대학 진학이나 결혼으로 인하여 모두 멀리 떠나가 있다면 그 마음은 오죽할까? 아이들이 장성했기 때문에 짝을 찾아 떠나고 다 큰 성인으로 학업에 매진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 생각한다. 물론 자식들이 다 떠난 텅 빈 집은 빈둥지처럼 어떤 사람이든 허전하고 공허한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언제든지 건강하게 잘 키운 자식들은 둥지에서 떠나 독립하는 것이 맞고 자기네끼리 오순도순 잘 살아가는 것이 순리이고 행복이라 믿는다. 사람의 둥지는 가정을 이루었던 집이 최고의 보금자리라 할 것이다. 전적으로 인간의 건축물에다 둥지를 짓는 제비는 그 보금자리에서 새끼들과 잘 산다. 어느 날 갑자기 훌쩍 따뜻한 남쪽 나라로 날아 가버리고 나면 그 시끄러웠던 둥지는 빈 채로 홀로 동그마니 남아있게 마련이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인간도 마찬가지다. 자식들을 키웠던 칠순이 넘은 부모님은 더더욱 텅 빈 집에서 허전함을 느낄 것이 틀림없다. 자식들이 훌쩍 떠나버린 둥지가 텅 빈 허전함이 있다 할지라도 기쁨으로 변화시키는 믿음이 절대 필요하다. 자녀들이 잘 성장하여 하나님을 잘 섬기며 건강하게 살면서 교회를 충성되이 잘 봉사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보람은 없다. 그래서 자식 떠난 빈 둥지는 누구에게든지 행복이요 기쁨이며 감사라 여기고 사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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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상수리 나무
2000년 초 성지순례 중에 주일을 맞아 성도 일행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갈멜산에 올랐다. 성경에서는 산이라 했지만 작은 언덕에 불과할 정도로 나지막해서 예배드리기가 좋아 참으로 감사했다. 게다가 큰 상수리나무가 많고 공기가 신선하여 주일에 성도가 예배를 드릴 장소로 최적 장소였다. 성도 일행이 말로만 듣던 성경 속의 갈멜산에서 예배를 드리니까 은혜가 넘치는 감격의 시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예배를 드린 후 나무 밑을 살펴보았더니 온통 상수리나무 열매뿐이었다. 그것도 우리나라의 것보다 배 이상의 큰 열매인데 기념으로 가져온 것이 지금도 잘 보관되어 있다. 성경에 상수리나무가 많이 등장하여 관심을 가진 것이 사실이지만 귀한 나무에 비하면 별로 값진 나무는 아닌데 왜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지 궁금해 한 것은 사실이었다. 미디안과의 경계를 나타내는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요아스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않고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한 것을 보아도 땅의 경계를 표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기 전에 모든 이방 신상과 개인의 귀고리를 받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다 묻은 것을 주목해야 한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한 것은 매장지로 사용했었고 바산 상수리나무로 노를 만들고 깃딤성 황양목에 상아로 꾸며 갑판을 만들기도 했다. 상수리나무로 신상을 만들어 숭배하며 행음하는 음란 장소로도 쓰였다고 하니 귀가 찰 노릇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상수리나무 아래 앉은 것을 보고 마귀가 유혹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만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려고 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악한 사회와 다를 바 없다. 성경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신 것은 축복의 대장정임이 틀림없다. 아모리 사람은 키가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와 같았으나 그 열매와 뿌리를 진멸하신 하나님의 손길은 대대로 감사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잊어버렸고 심지어 선지자가 나타나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회개를 외쳤으나 감사는커녕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조차 거역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인간적으로 기뻐하는 상수리나무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고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레바논의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같이 교만한 지도자나 타락한 백성에게 임하셔서 그들을 분명히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귀담아듣지 않고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엄청난 고난과 수모를 당한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흔한 상수리나무의 주변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셨음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큼을 깨닫고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잘 살아야만 나라가 살고 나의 사랑하는 자녀 손과 형제자매가 산다. 사회가 어둡고 악하여 살기 어려울 때일수록 종교지도자가 먼저 교권과 좋은 자리 탐함을 버리고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여호와께 기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은 패역한 백성을 심판하시되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게 하시고 물 없는 동산같이 황폐화시킨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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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하모니
오래전 큰아들이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을 때의 일이다. 휴가로 교회 앞에서 기쁨과 감사로 가족 찬송과 더불어 악기 연주를 했는데 큰아들은 플롯, 딸은 바이올린을 맡기로 했으나 막내아들은 초등학교 갓 입학해 악기 연주가 불가능하니까 “나를 빨리 낳지... .”하고 불평했다. 형과 누나와의 나이 차로 온전히 주께 감사와 가족의 화평을 노래하는 본질적인 하모니를 이루지 못해 어린 마음에 불만을 토로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오늘날 빈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는 독일의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평가받는다. 처음부터 대중의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다. 왕족 등의 높으신 분들의 전유물이었지만 본질적인 것이 아니면 양보하여 상설적인 콘서트로 발돋움하게 했다. 새로 만든 콘서트에는 프로는 물론 아마추어 음악가들로 하모니를 이루었다. 1824년 베토벤 교향곡 9번 초연 때 모든 것을 초월한 오케스트라의 조직에서부터 1842년 지휘자 니콜라이의 주도하에 빈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는 악기들을 총동원하여 아름다운 하모니를 자랑하는 연주로 자리 잡게 되어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에서 고려를 하나로 모아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이끈 고려 황제 현종과 고려의 총사령관인 강감찬의 이야기에서 제3의 인물인 양규와의 아름다운 하모니는 칭송의 대상이다. 역사학자들은 양규를 이순신 장군과 비견될 만큼 뛰어난 전략가로 평가하고 있다. 거란과의 전쟁에서 세 사람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면 자기 소리를 내지 않고 오케스트라처럼 호흡이 멋진 완벽한 하모니가 되어 거란 전쟁을 승리로 끝낸 것은 우리의 가슴을 충분히 뛰게 하고 남는다. 성경에서도 소아시아 7교회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에서 바리새파에서 나온 거짓교사들의 어지럽힘을 바나바와 바울의 하모니에서 이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는 절대 양보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다는 사실이다. 신앙의 본질에 대한 타협은 절대 없었고 비본질적인 것은 사랑과 관용의 아름다운 하모니로 어지러운 교회의 형편을 질서 있게 잘 처리하여 화평을 이룬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가정이든 교회든 국가이든 간에 본질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자기를 비우고 양보하면 하모니를 이루게 되고 어떤 어려운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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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어머니
어머니가 천국 가신지가 벌써 몇 년이 흘렀다. 95세 연세로 끈질긴 민들레처럼 사시다가 소천하셨기에 문득문득 어머니가 고생한 가슴 아픈 옛날 모습들이 떠올라 어떤 때는 늦게까지 잠 못 이룰 때가 있다. 어릴 때는 먹을 것이 없어 어둑한 저녁까지 어머니만 오시기만을 무조건 기다렸다. 맛있는 것도 아니고 배만 채울 수 있는 것만 가져오셔도 좋은데 그렇지 않을지라도 캄캄한 밤 긴 기다림 속에서 어머니만 오시면 대만족이었다. 가방도 아닌 함티 속에서 눈깔사탕 하나만 주셔도 좋아서 춤추던 때가 생각난다. 6.25 전쟁 때도 비행기가 날아오니까 아버지는 짐보따리 안고 논두렁으로 피했지만 어머니는 자식을 안고 방패막이 되어주었다는 얘기를 가끔 듣는다. 시골 마을에 닭장에 불이 났는데 진압된 뒤에 들어가 보았더니 암탉이 병아리를 품은 채 새까맣게 타 죽었지만 병아리는 모두 살아 있었다는 실화가 전해지는 것만 보아도 동물의 모성애는 대단하다. 위대한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암탉의 그것에 감히 견주어 비교할 수 있으랴. 당신은 배고파도 잡수지도 않고 자식들 먹일 것이라고 잔칫집에서 떡 하나를 때 묻은 손수건에 싸 가지고 와 나눠 맛있게 먹었다는 감동적인 글도 보았다. 오늘날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때에는 정말 그 떡 한 조각이 귀했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다 품어주시고 모든 것을 다 주고도 기억하시지 않는 정말 좋으신 분이다. 어릴 때는 없어서는 안 되는 디딤돌과 같은 존재로 기다림의 연속이었지만 가정을 가지고 자식이 생겨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내 생활에 걸림돌과 같은 존재로 여기며 산 것이다. 어머니는 영원한 나의 안식처로 자식 바라보고 기다리는 고향 같은 분이었지만 언젠가부터 고인돌같이 예사롭게 여기며 살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사는 땅 위에서 생명이 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세상에서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셨던 분이 어머니이셨는데 진정 그걸 모르고 살면 배은망덕한 사람이 따로 없다. 여자가 어릴 때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결혼해선 외출한 자식을 기다린다고 했다. 어머니의 기다리는 마음은 사랑이고 특히 자식을 기다리는 상대로 여기며 사는 것을 행복이라 여기셨다. 그런 어머니를 병들었다고 시장 바닥에 내버려 경찰이 양로원에 입원시켰다는 뉴스가 우리를 분노케 한다. 놀라운 것은 그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과 사는 곳을 절대 모른다고 입을 닫는다. 자식은 어머니를 버려도 어머니는 절대 자식을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머니! 옛날에는 기다림이었고 지금은 그리움에 사무치는 분이다. 그 어머니는 모든 사람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고향 같은 존재다. 모든 것을 품어주시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주고도 보답을 바라지 않는 분이 바로 어머님임을 기억하자. 누구든 천국 가신 어머니가 새삼 그리운 것은 평소 효도를 다 하지 못한 잘못이 자꾸만 부끄럽다는 마음이 더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릴 때나 성인이 된 후에도 일평생을 나보다 나를 더 사랑했던 그분이 바로 그리운 어머니였었는데 그걸 늦게 깨달았으니 지나온 우리의 삶이 한심하여 후회가 막심할 뿐이다. 어머님이 천국에 가시기 전 이 땅에 살아계실 때 시간 내어 찾아뵙고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참 효도임을 꼭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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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희생
우리는 봄이 오면 마음이 들떠 어디론가 꽃구경을 가기를 원하고, 늘 가는 곳이라 할지라도 봄꽃이 핀 곳이면 가족들이 나들이하는 경우가 많다. 4월 초순에 비가 오는 산복도로를 거쳐 교회에 가는 도중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벚꽃을 바라보는 순간 “아! 이렇게 아름답게 핀 꽃을 비바람이 망치면 어떻게 하지?”하는 걱정이 앞선다. 내 집 정원의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벚꽃을 비바람 때문에 망치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통상 벚꽃은 일본의 나라꽃이라 생각하고 별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데 실상은 원산지가 우리나라 제주도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나라의 꽃이니까 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잎도 피우지 않고 살얼음이 언 메마른 땅속에서 뿌리를 내려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겨울 내내 자기의 몸을 단단히 무장하여 정한 시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 바로 벚꽃이라는 데서 관심이 더 가고 피어있는 그 자체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가정집 정원에 있는 꽃나무들은 그래도 춥다고 싸주기도 하고 거름도 하며 옮겨주기도 하고 가지치기도 하지만 벚꽃은 차가 많이 다니는 길가나 산 중에서 전혀 무관심 속에 홀로 자립하여 이른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 너무 장하고 아름다울 뿐이다. 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일주일도 안 되기에 항상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게 고생하여 잠간 동안을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위해 정말 희생한 벚꽃의 수명이 좀 오래 지속 되면 얼마나 좋으랴. 게다가 벚꽃이 질 때에도 벚 눈을 내려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아무 불평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마치 눈이 오는듯한 모습으로 꽃눈이 낙화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적인 아름다움의 자체가 아닐까? 흰 꽃잎이 떨어진 것은 분명히 하얀색인데 바람이 불어 모인 블럭 바닥은 분홍색 꽃눈으로 소복하게 쌓인다. 눈은 밟으면 ‘뽀드득’이란 소리라도 내지만 떨어진 꽃눈은 아무리 밟아도 소리를 내지 않고 인간의 발과 자동차의 바퀴에 짓밟히며 휘날릴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종하여 이렇게 끝까지 희생하는 것이 바로 벚꽃이라는 것에 나는 감동을 받는다. 우리 주위에도 다른 사람의 아무런 도움이 없이 주님이 말씀하신 일들을 잘 수행하여 사회에 귀감이 된 아름다운 모습이 매스컴에 등장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분들은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미션을 좌우를 살피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나아갔기 때문에 큰일을 해내었을 것이다. 한낱 미물과 같은 식물도 말없이 자기를 희생하고 아름다움을 선물하는데 우리가 기대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지 못하면 실망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벚꽃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봄꽃으로 인간인 우리에게 잠간 보여주기 위해 동한의 춥고 쓰라린 고통을 다 견뎌내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변함없이 희생한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과 이웃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정말 벚꽃처럼 나를 희생하고 말없이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면 우리가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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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3초 미학
- 코로나 때문에 산업현장이 마비되어 어려워진 때가 있었다. 몇 년 전 강원도의 한 농촌에서 수확한 많은 양의 감자의 판매 길이 막혀 큰 걱정을 했을 때 방송이 나간 직후 바로 주문이 들어와 30분 만에 감자가 다 팔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러나 어떤 한 가정에서 감자를 전화로 구입하려고 머뭇거리다 잠깐 사이에 판매가 방금 마감되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넘 아쉬움만 더했다. 강원도 감자가 순식간에 주문이 완료되어 구입 기회를 놓친 것이다. 3초만 더 빨리 전화기의 버튼을 눌렸다면 상황이 바뀌었을 텐데. 시간 중에 초 단위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으나 3초 빨리 서두는 것과 3초를 더 기다리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3초를 빨리 서두르면 큰 일을 성사시킬 수도 있지만 3초를 기다리고 행동할 때 더 좋은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조금 성격이 급한 경향이 있어 생각할 여유도 없이 바로 말하거나 행동을 하기 때문에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행동하기 전에 하나, 둘, 셋 동안 잠깐 생각하고 말하면 저절로 좋은 분위기가 만들어진다고 믿어진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다. 대화를 할 때 짧은 시간인 3초만 참다가 부드러운 말을 하면 부부싸움도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살다 보면 한 사람이 툭 내뱉는 말 때문에 상처를 입고 마음이 상하여 오랜 시간 동안 냉전이 지속되는 것이다. 요즘같이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시기에는 사소한 작은 것 하나 때문에 흥분하며 욕을 하는 경우가 있다. T.V에서 특정 인물이 나오면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를 하는 상대방을 보고 이제 ‘3초만 참고 말하기’를 약속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입에서 정화된 말이 나오지 못하면 사회는 저절로 욕설로 오염되어 사회가 온통 엉망이 될 것이 틀림없다. 차 운행할 때도 참아야 한다. 현직에 있을 때 여자직원이 자기 어린 아들을 태우고 차를 운행하면서 상대방 차가 난폭하게 운전하든지 끼워들기를 하면 ‘개**’ 라고 하는 말을 무심코 했던 것이다. 시어머니인 할머니가 오셔서 차를 같이 타고 마트에 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끼워드는 차를 보자 어린 손자가 ‘엄마, 또 개** 라고 해’라고 하는 바람에 부끄러워 낯이 뜨거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린아이라 잘 감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예사롭게 내뱉은 말을 아이가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적어도 3초만 참았다가 품격에 맞는 말을 했다면 그런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에서도 교인들이 목회자의 설교가 끝나면 친한 사람들끼리 비평을 하게 되는 것을 종종 목격할 때가 있다. 부정적인 말을 하기 전에 3초만 생각하고 지혜롭게 말을 하든지 침묵하면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터인데 정말 안타까울 뿐이다. 3초 미학. 3초만 꾹 참자! 툭 내뱉지 말고 잠깐만 참으면 후회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말하고 싶어도 3초만 참고 생각해서 온유한 말을 하든지 말하지 않으면 은혜로운 분위기가 틀림없이 조성된다. 3초는 하나, 둘, 셋 하면 끝나는 정말 짧은 시간이다. 말하기 전에 3초만 기다렸다가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격에 맞는 품위 있는 말과 행동을 하자. 즉시 말하는 습관을 버리고 3초를 참았다가 말하는 행동을 실천하기만 하면 아름답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 가는 주인공이 바로 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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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3초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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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일견
- 재미있게 쓴 좋은 글 중에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두 마리의 개를 키운다고 한다. 물론 한자어는 다르지만 하나는 선입견이고 또 다른 하나는 편견이라 말한다. 인간은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거대한 감옥 속에서 살아간다고 했다. 이 두 마리의 개를 쫓아버리는 특별한 한 마리의 개가 바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말했다. 직접 보지 않고 들은 얘기로 상대를 판단하면 큰 실수를 범하게 된다고 했다. 물론 한자어는 전혀 다르지만 일견을 키우면서 상대를 바르게 보는 혜안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도 제대로 된 일견을 가지지 못하여 실수할 때가 많다. 우리의 실수 중 가장 큰 과오는 부모의 신앙이나 자녀의 직업과 외모만 믿고 일을 추진하는 경우다.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일을 추진해야 마땅한데 그렇지 못한데서 큰 문제가 발생한다. 분명히 부모와 자녀의 신앙은 다른데 응당 어른이 좋으니까 자녀가 좋을 것이라는 막연한 선입견이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새 신자가 찾아와 자리를 잡을 때쯤 되면 자신이 드려온 예배의 형식이나 용어가 다를 경우에는 이단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선입견을 가진 것도 문제가 된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부터 인상이 다른 사람에 비해 좋다고 여겨지면 좋은 사람으로 여기고 그를 무조건 인정하는 주관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우린 얼마나 다른 사람을 흠담하길 좋아하고 좋은 내용이든 나쁜 내용이든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는 선입견을 가진 특별한 민족이 아니던가! 이런 환경 속에서 사는 우리는 자연적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선입견이 마음속에 자리를 잡게 되어 잘못된 편견으로 불공정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성경에서도 잘못된 일견으로 주님을 실망시키는 제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주님께서 도마에게 찾아와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시고 상처 난 손을 보여주시므로 부활의 확신을 심어주셨다.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배하는데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도 있었다. 꼭 보아야 믿겠다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별수 없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한낱 연약한 인간임을 알 수 있다. 신앙의 관점에 어떤 이는 보지 않고도 믿고, 어떤 이는 도마처럼 보여주어도 믿지 못한다. 주님이 주신 일견으로 무엇이든지 먼저 정확하게 보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공정하고 정의로움이 드러나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면 믿을 만한 것이 도저히 없다. 믿음으로 바라보는 눈이 절대 필요한 시기가 오늘날이 아닐까? 선입견과 편견의 오염으로 공의롭지 못한 세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면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성경에서 명령하고 계신다. 세상에서는 한 번 보고 도저히 믿을 만한 것이 없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은 오직 일견으로 충분하다. 우리의 일생을 주님의 한 말씀을 일견으로 믿고, 또 다른 말씀을 일견으로 확신하면서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것이 최고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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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일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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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자 유
- 다니엘 기도회 때 정요한 집사와 김예나 집사의 간증집회에서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에 온 것을 간증하는 것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소위 금수저 집안의 아들딸인데도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 목숨 건 탈출로 자유 찾은 기쁨을 간증할 때 자유가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보통 자유라 하면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영어에서 말하는 Liverty는 사회적 권리로서의 자유를 말하고, Freedom은 본질적인 개인의 자유에 해당한다고 정의한다. 시민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들은 만민평등 사상에 입각하여 개인의 권리를 당연한 기본권리(Liberalism)로 주장한 것이다. 북한의 주민들이 사선을 넘어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양의 언저리에서 서식하는 앨버트로스라는 새는 폭풍우를 뚫고 대양을 가로질러 수 만 킬로를 이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새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고향하늘과 고향의 숲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탈북하여 자유를 찾은 정요한 집사 역시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사람으로 조부인 장로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잘 하시던 조부님이 손자인 정요한 집사를 어릴 때부터 ‘너는 하나님의 귀한 백성이다.’라고 가르쳐 주면서 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하며 축복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북한에서 명문가정에 태어나 좋은 학교를 거쳐 최고의 코스를 마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김정일 전용악단 단장을 맡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마음속에 조부께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고향하늘과 숲을 그리워하면서 자유의 나래를 펼치도록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셨던 것이다. 독일에 교환교수로 출장 중에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어떤 교수가 얼굴색이 좋지 못하니 교회에 한 번 가보라는 말씀을 듣고 간 것이 수 만 킬로를 가로질러 자유 대한민국의 하늘과 숲으로 날아 와 둥지를 틀은 것이다. 우리가 볼 때에는 우연이라 생각할 줄 몰라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정요한 집사가 자유를 찾도록 길을 열어주신 것이라 믿는다. 서울 사람이 작곡한 사향가와 샤르사테곡을 연주하여 온 회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간증 중에 3800여 개의 교회를 훼파하고 그 자리에 김일성 동상을 세워 놓았으니 하나님께서 엄청 슬퍼하고 계실 텐데 하루 빨리 모든 자유가 회복되어 교회당을 다시 세우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금도 수많은 북한의 지하교인이 억압 속에서 해방과 자유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그들은 죽지 못해 살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눈물을 지우는 것을 목격했다. 자유 대한민국에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넘어온 탈북민 33,000여 명이나 되는 그 새터민들에게도 사랑과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 날 카네기 홀이나 세종 문화 회관에서도 도저히 감상할 수 없는 귀한 부부 집사의 현란한 기악연주를 선물로 받고 큰 감동을 받았다. 우리가 감동받은 이상으로 자유를 갈망하는 많은 탈북민들은 북한 땅이 하루바삐 자유의 물결로 하나님의 사랑과 빛과 생명으로 채워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북한의 백성들이 진리를 알고 진리가 그들을 자유하게 함을 알도록 평화의 복음을 힘써 전하여 그 땅이 해방과 자유가 넘치도록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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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자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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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3분 기적
- 2020년 들어 온 나라를 뒤집어 놓은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미스터트롯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아 온 국민이 집안에서 TV만을 친구삼아 살아가던 그 때에 미스터트롯이란 신생아가 나타나 두 시간 반 동안 어린아이를 비롯한 전 국민의 시선을 떼지 못하도록 사로잡은 것이다. 요즘같이 마음을 위로해 줄 것이 없는 시기에 얼마나 좋은 청량음료인지 고마운 프로라 생각하게 되었다. 항상 어떤 일을 해보면 그 속에 주인공을 비롯한 인기 있는 화제의 인물이 탄생되는 것이 일반 법칙이다. 최고의 스타가 나오고 그와 못지않게 멋진 인물이 나타나 자기와 딱 맞는 사람에게 관심을 지대하게 가지게 되는 것이다. 화제의 인물은 TOP7인데 그들은 겸손할 뿐만 아니라 트롯이면 무슨 장르의 노래라도 잘 소화하여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단 3분간의 짧은 시간을 노래로 보답하는데 관중이 매료되어 노래에 빠지고 결국 특정 가수를 그 어떤 분보다 좋아하며 섬기게 되는 것이다.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서울에서 게릴라 팬 미팅을 가지면 공간의 한정으로 정한 수만 받았는데 뜨거운 태양이 내려쬐는 것도 아무런 불평도 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남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베트남에서 일하던 어떤 분은 서울에서 암 수술을 한 뒤 우울증과 인생을 포기한 상태로 있었으나‘나는 살고 싶다.’로 바뀌었고, 부부가 이혼하기로 결심하고 법원으로 가는 도중에 차안에서 노래 한 곡을 듣고 이혼을 포기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도 있었다. 제주도에서 첫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도착한 후 렌트카로 어린아이처럼 들뜬 기분으로 축하장에 도착하여 만남을 가졌고, 나이는 어리지만 내가 최고로 존경하는 분으로 손수 초상화를 그려 선물하기도 했고, 어떤 한 가정은 4대가 모두 팬이 되어 축하를 해주는 모습을 보고 딱 3분의 짧은 노래가 대단하다 못해 기적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다. 끝없는 축하와 사랑으로 팬 미팅은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으나 아무런 불평 없이 감격하여 울고 기쁨의 함성을 지르는 기적의 현장이 되었다. 3분 기적의 주인공은 팬에게 보답을 하듯 겸손하게‘한 분 한 분이 나의 보약 같은 존재.’라고 진실한 마음을 전했다. 3분은 짧은 시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수가 부르는 3분 정도의 노래에 열광하듯 하나님의 말씀에 매일 3분만 집중하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잘 아는 천지창조의 미켈란젤로는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끌어안고 슬퍼하는 ‘피에타’상을 제외하고는 어느 작품에도 사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시고도 어디에도 자신의 솜씨라고 흔적을 남기지 않았는데 나는 기껏 작은 벽화 하나 그려놓고 나를 자랑하려 서명을 하다니... .’이것은 평소 매일 성경에 집중하고 잠간 묵상했던 말씀이 바로‘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였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가도 잠간의 말씀 묵상으로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 깨닫고 이를 잘 실천하였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주님의 제자다. 그 분의 말씀에 매일 단 3분만 집중하여 묵상하고 기도하면 기적은 분명히 일어난다. 그리고 반드시 나를 높여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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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3분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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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소 원
- 실제 말기 암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예쁜 부인과 사랑스런 자녀인 남매를 두어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갑자기 찾아온 중병으로 유전적이고 환경적인 요인을 물려준 부모애 대한 원망이 가득 차 있었다. 왜 하필이면 내가 중병으로 죽어야 하며 이런 병에 걸리도록 어릴 때 극한 환경에서 자라도록 한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했다. 아버지의 젊은 날에는 날마다 술과 세상의 열락으로 가정을 돌보지 않아 성장기에 스트레스를 준 것이 원인임을 확신하게 된다. 물론 어머니의 가출에 대한 실망감도 증오의 대상이 되어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빠를 찾는 어린 자식들에게는 ‘아빠는 소풍 가셨다.’고 둘러대며 달래어 보았지만 중병은 시간이 갈수록 상태가 악화되어만 간 것이다. 이제 위기의 순간에 이별의 시간이 가까이 와 있음을 직감하고 지난 일들을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섭섭하고 미운 생각만 주마등처럼 지나갔으나 그래도 죽기 전에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뭔가를 남기고 가야한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살날이 짧지만 자기가 위로받고 가족들에게 오랫동안 기념이 될 만한 일이 하나라도 있어야 되겠다는 강렬한 욕구가 그를 사로잡았다.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인생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마음이 더해 왔던 것이다. ‘나는 왜 이리 복도 없을까?’하고 탄식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갑자기 죽음이 몰려 왔을 때 ‘정말 꼭 남기고 가야할 것이 없을까?’하고 무언가를 골몰히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나 특별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새벽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지금까지 부모님과 대화와 사랑을 나누며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었던 것을 기억해 낸 것이다. ‘그렇다! 다정한 모습을 하고 있는 가족사진을 만드는 것이다.‘ 그 날 이후 자기를 중심으로 가족사진을 촬영하는 일을 최고의 소원으로 삼고 이 역사적인 일을 추진하였다. 웬만한 가정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것이지만 주인공인 말기 환자에게는 최고의 소원이 된 것이다. 의료진과 협력하여 소원을 이루기 위해 온힘을 다 쏟았다. 이혼한 부모님은 이제 죽음을 앞둔 자식에게 꼭 소원을 풀어 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이혼하여 서먹한 관계였지만 사랑으로 꽉 찬 모습으로 보일 수 있도록 가족사진을 만드는 일에는 한마음이 되었다. 그 아들의 소원을 이루는 날에 이혼한 부모와 죽음을 앞둔 아들, 세 사람 모두 그 동안 참고 있었던 눈물보가 터져버려 사진관이 온통 눈물바다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제대로 된 일반 가정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사소한 일이지만 ‘가족사진’이 소원이 된 이 가정에는 특별하고도 안타까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인생의 마지막 위기가 찾아 왔을 때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면 진정 우리의 소원은 무엇이 되어야 할지 도전을 받게 된다. 인생의 장막이 무너지는 순간이 오기 직전에 말기 암 환자는 ‘가족사진’이 최고의 소원이었지만 믿는 기독 신자인 우리는 인생의 종점에서 꼭 실현해야 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귀한 일을 성취할 수 있도록 신실한 종으로서 ‘기도의 제물’이 되고자하는 소원이 가장 좋은 소원 중의 소원이 되어야 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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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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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신발
- 인류의 조상 아담이 태어난 시기에는 옷은 물론 신을 신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신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1700년경 이집트에서 발견된 끈 달린 샌들이다. 아마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에게서 소명을 받을 때와 비슷한 시기라 역사적으로도 증명되는 내용이다. 이집트를 비롯한 그리스시대에도 사람들은 짐승의 가죽이나 나무, 풀잎에다 끈을 달아 발에 걸었다. 고대에 샌들을 신었던 사람들은 주로 사제나 귀족층이었고 서민들은 식물의 줄기로 만든 신발을 신거나 맨발로 다녔다. 예수님이 오신 당시에도 샌들은 질긴 가죽으로 바닥을 만들어 가죽 끈을 고정시켰고 유대인들은 우리의 풍습과 마찬가지로 집안에서는 신을 신지 않았다. 이동할 때만 신발을 사용한 한 것이다 신발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오늘에서 내일로, 익숙한 곳에서 낯선 곳으로 움직여 변화해 주길 원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신발을 만들어 신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분명한 것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어떤 좋은 신발도 인생의 죽음에서 다 끝이 나고 만다는 사실이다. 신발은 인간의 몸을 땅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최초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발을 신고 다닐 때 값진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발을 벗는 것은 잘못 살아온 과거에서부터 탈출한다는 의미가 있고 곧 옛사람을 버린다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죽음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때 묻은 신발을 꼭 벗어야 할 때에는 오직 순종으로 그 분의 뜻을 겸손하게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모세에게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구절에 신발을 벗는 행위는 하나님의 소명에 부응하여 예의를 갖추어 하나님에 대한 절대 경외심을 표시한 것이다. 또한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와에게 신을 벗으라고 했을 때 선 곳이 전능자의 거룩하심을 나타나는 장소라 생각하여 말씀에 순종하고 따른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이다. 돌아온 탕자에게 종을 시켜 가장 좋은 옷과 신발을 신기라는 부친의 명에서 아들이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포함되어있다. 신발을 신는다는 것은 신체를 보호하는 의미 외에도 변화를 바라고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의 기원이나 거듭난 삶을 살라는 깊은 뜻이 있다. 반면 신을 벗는다는 행위는 절대 순종하겠다는 의미나 경건한 자세로 상대방을 절대 존중하겠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신데렐라와 콩쥐의 이야기에서 신발 때문에 인생이 달라지는 것처럼 하나는 본인을 증명하는데 사용되고 다른 하나는 인생을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인생으로 변화시키고 영원한 복을 누릴 수 있는 구원의 신발을 신겨주셨다. 인간은 평안의 신발을 신고 안락한 생활을 하는 탓에 현실에 안주하려는 속성이 있어 신발을 계속 신고 벗으려 하지 않는다. 다른 신발을 바꾸어 신어야 할 때가 되면 그에 따른 행동이 우선되는 것이 맞다. 거룩한 곳에서 부름이 있을 때에는 옛 신발을 벗고 그 분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오직 순종해야 하고, 우리에게 명하는 말씀이 임하면 사명의 신발을 신고 오로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수룡 목사(마산회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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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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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경배
- 주일이면 하나님께 예배드리려고 교회당을 찾아 찬양도 하고 조용히 묵상하며 예배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상례다. 정신없이 쫓아다니다가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보이는 예복도 갖추지도 않고 드려야 할 헌금조차도 챙기지 않은 상태로 허둥지둥 교회로 갔다면 삶이 제대로 예배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 예배 시간에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만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예배 시간 전에 잡담하고 웃고 인사를 나누거나 심지어 장난을 치면 옳은 것은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오늘날 예배는 다분히 너무 형식적으로 외형적 모습을 중시하는 나머지 보이기 위한 예배로 치우쳐 가슴이 아프다. 엄청난 존경심과 경외감과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께 경의를 표하는 것이 경배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가정을 갖게 해 주시고 사랑스런 자녀들을 주신 것은 더없는 행복이다. 충분한 먹을거리와 잘 수 있는 안락한 공간, 활동하며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양호한 건강과 함께 갈 수 있는 친구를 주신 것은 정말 감사해야 할 부분이다. 사람들은 이것들이 모두 자기의 힘으로 마련한 것으로 당연하게 여기고 사는 경향이 있어서 문제가 된다. 물론 감사함을 실천하고 하나님께 충분한 경외와 존경심을 표시하는 분들도 많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받은 축복들을 주의 깊게 헤아려 보는 것이 중요하고 또한 그것이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절대 잊으면 안된다. 그것을 기억하고 감사를 실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첫걸음이다. 야곱은 모든 일이 잘 풀릴 때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한다고 했다. 세상 일이 인간 마음대로 잘 되지 못할 때가 많고 원하는 대로 자녀들의 앞날이 안풀려 낙심이 되는 경우가 많다. 분명한 것은 세상의 것을 노래하는 것보다 주님을 찬송하여 그분을 찬양하는 것이 그분을 높이는 결과로 결국 나를 높여 준다는 사실이다. 예배를 드리기 전에 온 마음을 모아 기도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찬송을 드리기 위해 머릿속의 잡다한 생각도 버려야 한다. 교회당에서 예배드리기 전에 모여서 잡담을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경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특히 구약시대에는 예배드리기 전에 성도끼리 고개 숙여 인사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부르고 높이며 찬송하는 이유가 그분께 지혜와 권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면 하루에 한 번 이상은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 무언가 달라고 하지 않고 우리에게 행하신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하며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그분을 경배히는 것이다. 예배는 찬양과 경배가 그 자체임을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경배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예배의 모델은 하늘의 예배가 근본인 것이다. 살아있는 경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친밀함을 추구하고 이를 위해 우리의 가슴을 활짝 열어 하나님을 모셔야 한다. 주일마다 깨끗한 헌물로 감사헌금을 드리고 오직 하나님만으로 기뻐하며 우리의 사랑을 고백해보자. 정직함과 진실함만이 그분의 마음을 움직인다. 오로지 그분께 존경, 그리고 감사를 온전히 드려야 한다. 진실한 나의 삶의 전부를 바치는 것이 경배임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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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경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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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빈둥지
- 둥지란 주로 새가 알을 낳거나 깃들이는 곳을 말하지만 사람이 사는 집을 말하거나 사랑을 말할 때 강한 자의 품을 말하기도 한다. 보통 새들은 자기 가족을 위해 높은 나무의 파인 곳의 안쪽에 둥지를 틀기도 하고 어떤 새들은 바위 암초 위에 짓기도 하며 또 다른 새들은 땅 위나 굴 안에 둥지를 짓 는다. 부부가 자기 새끼를 낳아 기를 때에는 서로 번갈아 가며 돌보기도 하 여 잘 성장시킨 후에는 모두 독립시켜 멀리 날려 보내고 빈 둥지만 남아 있 는 것을 주위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신문에서 철원 동소 읍에 있는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천연기념물이지만 멸종 위기에 있는 두루미를 위해 인공 황새 둥지를 세웠다는 보도를 보았다. 이날 세워진 황새 둥지는 높이만 11미터로 지주대 위에 철제 육각형 상판으로 제작됐다. 철원을 찾는 황새를 위해 둥지 만들기 사업 취지를 공감하는 철원 지역 주민 59명이 자발적으로 모금한 자금을 갖고 황새 둥지를 만든 것이다. 철새들이 갈 곳이 없어 멸종 위기에 빠진 것을 철원주민이 서식하도록 배려한 것이다. 다른 곳에서 방사한 암컷 황새 한 마리가 많은 알을 산란하여 번식시켜 텃새화를 위해 운동을 시작한 것이 황새 가족들이 함께 모여 사는 스위트 홈을 만든 쾌거를 이룬 것이다. 물론 이곳에 사는 황새도 철새이기 때문에 조금 지내다가 훌쩍 떠나면 많이 붐비던 둥지도 빈 둥지로 남아있을 것이 확실하다. 올해 48세의 주부가 외동딸을 애지중지하여 긴 시간 동안 올인할 정도로 기쁨을 맛보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잘 키워 대학을 보내고 나니 집안이 텅텅 비워있는 빈집으로 마음이 허전하여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불혹의 나이에 자식 하나라도 이런 허전한 마음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는데 이순이나 고희의 나이에 많은 자식들과 같이 살다가 대학 진학이나 결혼으로 인하여 모두 멀리 떠나가 있다면 그 마음은 오죽할까? 아이들이 장성했기 때문에 짝을 찾아 떠나고 다 큰 성인으로 학업에 매진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라 생각한다. 물론 자식들이 다 떠난 텅 빈 집은 빈둥지처럼 어떤 사람이든 허전하고 공허한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언제든지 건강하게 잘 키운 자식들은 둥지에서 떠나 독립하는 것이 맞고 자기네끼리 오순도순 잘 살아가는 것이 순리이고 행복이라 믿는다. 사람의 둥지는 가정을 이루었던 집이 최고의 보금자리라 할 것이다. 전적으로 인간의 건축물에다 둥지를 짓는 제비는 그 보금자리에서 새끼들과 잘 산다. 어느 날 갑자기 훌쩍 따뜻한 남쪽 나라로 날아 가버리고 나면 그 시끄러웠던 둥지는 빈 채로 홀로 동그마니 남아있게 마련이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인간도 마찬가지다. 자식들을 키웠던 칠순이 넘은 부모님은 더더욱 텅 빈 집에서 허전함을 느낄 것이 틀림없다. 자식들이 훌쩍 떠나버린 둥지가 텅 빈 허전함이 있다 할지라도 기쁨으로 변화시키는 믿음이 절대 필요하다. 자녀들이 잘 성장하여 하나님을 잘 섬기며 건강하게 살면서 교회를 충성되이 잘 봉사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보람은 없다. 그래서 자식 떠난 빈 둥지는 누구에게든지 행복이요 기쁨이며 감사라 여기고 사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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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빈둥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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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상수리 나무
- 2000년 초 성지순례 중에 주일을 맞아 성도 일행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갈멜산에 올랐다. 성경에서는 산이라 했지만 작은 언덕에 불과할 정도로 나지막해서 예배드리기가 좋아 참으로 감사했다. 게다가 큰 상수리나무가 많고 공기가 신선하여 주일에 성도가 예배를 드릴 장소로 최적 장소였다. 성도 일행이 말로만 듣던 성경 속의 갈멜산에서 예배를 드리니까 은혜가 넘치는 감격의 시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예배를 드린 후 나무 밑을 살펴보았더니 온통 상수리나무 열매뿐이었다. 그것도 우리나라의 것보다 배 이상의 큰 열매인데 기념으로 가져온 것이 지금도 잘 보관되어 있다. 성경에 상수리나무가 많이 등장하여 관심을 가진 것이 사실이지만 귀한 나무에 비하면 별로 값진 나무는 아닌데 왜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지 궁금해 한 것은 사실이었다. 미디안과의 경계를 나타내는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요아스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않고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한 것을 보아도 땅의 경계를 표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기 전에 모든 이방 신상과 개인의 귀고리를 받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다 묻은 것을 주목해야 한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으매 벧엘 아래 상수리나무 밑에 장사한 것은 매장지로 사용했었고 바산 상수리나무로 노를 만들고 깃딤성 황양목에 상아로 꾸며 갑판을 만들기도 했다. 상수리나무로 신상을 만들어 숭배하며 행음하는 음란 장소로도 쓰였다고 하니 귀가 찰 노릇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상수리나무 아래 앉은 것을 보고 마귀가 유혹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게 만들어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려고 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악한 사회와 다를 바 없다. 성경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 가나안을 정복하게 하신 것은 축복의 대장정임이 틀림없다. 아모리 사람은 키가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와 같았으나 그 열매와 뿌리를 진멸하신 하나님의 손길은 대대로 감사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잊어버렸고 심지어 선지자가 나타나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회개를 외쳤으나 감사는커녕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조차 거역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인간적으로 기뻐하는 상수리나무로 인하여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고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레바논의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같이 교만한 지도자나 타락한 백성에게 임하셔서 그들을 분명히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귀담아듣지 않고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엄청난 고난과 수모를 당한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흔한 상수리나무의 주변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셨음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큼을 깨닫고 제대로 정신을 차리고 잘 살아야만 나라가 살고 나의 사랑하는 자녀 손과 형제자매가 산다. 사회가 어둡고 악하여 살기 어려울 때일수록 종교지도자가 먼저 교권과 좋은 자리 탐함을 버리고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여호와께 기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나님은 패역한 백성을 심판하시되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게 하시고 물 없는 동산같이 황폐화시킨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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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상수리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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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하모니
- 오래전 큰아들이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을 때의 일이다. 휴가로 교회 앞에서 기쁨과 감사로 가족 찬송과 더불어 악기 연주를 했는데 큰아들은 플롯, 딸은 바이올린을 맡기로 했으나 막내아들은 초등학교 갓 입학해 악기 연주가 불가능하니까 “나를 빨리 낳지... .”하고 불평했다. 형과 누나와의 나이 차로 온전히 주께 감사와 가족의 화평을 노래하는 본질적인 하모니를 이루지 못해 어린 마음에 불만을 토로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오늘날 빈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는 독일의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평가받는다. 처음부터 대중의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다. 왕족 등의 높으신 분들의 전유물이었지만 본질적인 것이 아니면 양보하여 상설적인 콘서트로 발돋움하게 했다. 새로 만든 콘서트에는 프로는 물론 아마추어 음악가들로 하모니를 이루었다. 1824년 베토벤 교향곡 9번 초연 때 모든 것을 초월한 오케스트라의 조직에서부터 1842년 지휘자 니콜라이의 주도하에 빈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는 악기들을 총동원하여 아름다운 하모니를 자랑하는 연주로 자리 잡게 되어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에서 고려를 하나로 모아 거란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이끈 고려 황제 현종과 고려의 총사령관인 강감찬의 이야기에서 제3의 인물인 양규와의 아름다운 하모니는 칭송의 대상이다. 역사학자들은 양규를 이순신 장군과 비견될 만큼 뛰어난 전략가로 평가하고 있다. 거란과의 전쟁에서 세 사람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면 자기 소리를 내지 않고 오케스트라처럼 호흡이 멋진 완벽한 하모니가 되어 거란 전쟁을 승리로 끝낸 것은 우리의 가슴을 충분히 뛰게 하고 남는다. 성경에서도 소아시아 7교회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에서 바리새파에서 나온 거짓교사들의 어지럽힘을 바나바와 바울의 하모니에서 이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는 절대 양보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다는 사실이다. 신앙의 본질에 대한 타협은 절대 없었고 비본질적인 것은 사랑과 관용의 아름다운 하모니로 어지러운 교회의 형편을 질서 있게 잘 처리하여 화평을 이룬 것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가정이든 교회든 국가이든 간에 본질적인 것을 제외하고는 자기를 비우고 양보하면 하모니를 이루게 되고 어떤 어려운 문제도 해결할 수 있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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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하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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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어머니
- 어머니가 천국 가신지가 벌써 몇 년이 흘렀다. 95세 연세로 끈질긴 민들레처럼 사시다가 소천하셨기에 문득문득 어머니가 고생한 가슴 아픈 옛날 모습들이 떠올라 어떤 때는 늦게까지 잠 못 이룰 때가 있다. 어릴 때는 먹을 것이 없어 어둑한 저녁까지 어머니만 오시기만을 무조건 기다렸다. 맛있는 것도 아니고 배만 채울 수 있는 것만 가져오셔도 좋은데 그렇지 않을지라도 캄캄한 밤 긴 기다림 속에서 어머니만 오시면 대만족이었다. 가방도 아닌 함티 속에서 눈깔사탕 하나만 주셔도 좋아서 춤추던 때가 생각난다. 6.25 전쟁 때도 비행기가 날아오니까 아버지는 짐보따리 안고 논두렁으로 피했지만 어머니는 자식을 안고 방패막이 되어주었다는 얘기를 가끔 듣는다. 시골 마을에 닭장에 불이 났는데 진압된 뒤에 들어가 보았더니 암탉이 병아리를 품은 채 새까맣게 타 죽었지만 병아리는 모두 살아 있었다는 실화가 전해지는 것만 보아도 동물의 모성애는 대단하다. 위대한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암탉의 그것에 감히 견주어 비교할 수 있으랴. 당신은 배고파도 잡수지도 않고 자식들 먹일 것이라고 잔칫집에서 떡 하나를 때 묻은 손수건에 싸 가지고 와 나눠 맛있게 먹었다는 감동적인 글도 보았다. 오늘날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때에는 정말 그 떡 한 조각이 귀했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다 품어주시고 모든 것을 다 주고도 기억하시지 않는 정말 좋으신 분이다. 어릴 때는 없어서는 안 되는 디딤돌과 같은 존재로 기다림의 연속이었지만 가정을 가지고 자식이 생겨나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내 생활에 걸림돌과 같은 존재로 여기며 산 것이다. 어머니는 영원한 나의 안식처로 자식 바라보고 기다리는 고향 같은 분이었지만 언젠가부터 고인돌같이 예사롭게 여기며 살았던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가 사는 땅 위에서 생명이 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세상에서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셨던 분이 어머니이셨는데 진정 그걸 모르고 살면 배은망덕한 사람이 따로 없다. 여자가 어릴 때는 아버지를 기다리고 결혼해선 외출한 자식을 기다린다고 했다. 어머니의 기다리는 마음은 사랑이고 특히 자식을 기다리는 상대로 여기며 사는 것을 행복이라 여기셨다. 그런 어머니를 병들었다고 시장 바닥에 내버려 경찰이 양로원에 입원시켰다는 뉴스가 우리를 분노케 한다. 놀라운 것은 그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과 사는 곳을 절대 모른다고 입을 닫는다. 자식은 어머니를 버려도 어머니는 절대 자식을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어머니! 옛날에는 기다림이었고 지금은 그리움에 사무치는 분이다. 그 어머니는 모든 사람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고향 같은 존재다. 모든 것을 품어주시고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주고도 보답을 바라지 않는 분이 바로 어머님임을 기억하자. 누구든 천국 가신 어머니가 새삼 그리운 것은 평소 효도를 다 하지 못한 잘못이 자꾸만 부끄럽다는 마음이 더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릴 때나 성인이 된 후에도 일평생을 나보다 나를 더 사랑했던 그분이 바로 그리운 어머니였었는데 그걸 늦게 깨달았으니 지나온 우리의 삶이 한심하여 후회가 막심할 뿐이다. 어머님이 천국에 가시기 전 이 땅에 살아계실 때 시간 내어 찾아뵙고 즐겁게 해 드리는 것이 참 효도임을 꼭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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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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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희생
- 우리는 봄이 오면 마음이 들떠 어디론가 꽃구경을 가기를 원하고, 늘 가는 곳이라 할지라도 봄꽃이 핀 곳이면 가족들이 나들이하는 경우가 많다. 4월 초순에 비가 오는 산복도로를 거쳐 교회에 가는 도중에 아름답게 피어있는 벚꽃을 바라보는 순간 “아! 이렇게 아름답게 핀 꽃을 비바람이 망치면 어떻게 하지?”하는 걱정이 앞선다. 내 집 정원의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벚꽃을 비바람 때문에 망치게 하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통상 벚꽃은 일본의 나라꽃이라 생각하고 별로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데 실상은 원산지가 우리나라 제주도라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나라의 꽃이니까 더 사랑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 믿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잎도 피우지 않고 살얼음이 언 메마른 땅속에서 뿌리를 내려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한겨울 내내 자기의 몸을 단단히 무장하여 정한 시간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 바로 벚꽃이라는 데서 관심이 더 가고 피어있는 그 자체가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 가정집 정원에 있는 꽃나무들은 그래도 춥다고 싸주기도 하고 거름도 하며 옮겨주기도 하고 가지치기도 하지만 벚꽃은 차가 많이 다니는 길가나 산 중에서 전혀 무관심 속에 홀로 자립하여 이른 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이 너무 장하고 아름다울 뿐이다. 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일주일도 안 되기에 항상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게 고생하여 잠간 동안을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선사하기 위해 정말 희생한 벚꽃의 수명이 좀 오래 지속 되면 얼마나 좋으랴. 게다가 벚꽃이 질 때에도 벚 눈을 내려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고 아무 불평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따뜻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마치 눈이 오는듯한 모습으로 꽃눈이 낙화한다. 그것이 바로 자연적인 아름다움의 자체가 아닐까? 흰 꽃잎이 떨어진 것은 분명히 하얀색인데 바람이 불어 모인 블럭 바닥은 분홍색 꽃눈으로 소복하게 쌓인다. 눈은 밟으면 ‘뽀드득’이란 소리라도 내지만 떨어진 꽃눈은 아무리 밟아도 소리를 내지 않고 인간의 발과 자동차의 바퀴에 짓밟히며 휘날릴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순종하여 이렇게 끝까지 희생하는 것이 바로 벚꽃이라는 것에 나는 감동을 받는다. 우리 주위에도 다른 사람의 아무런 도움이 없이 주님이 말씀하신 일들을 잘 수행하여 사회에 귀감이 된 아름다운 모습이 매스컴에 등장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분들은 오직 자기에게 주어진 미션을 좌우를 살피지 않고 오직 앞만 바라보고 나아갔기 때문에 큰일을 해내었을 것이다. 한낱 미물과 같은 식물도 말없이 자기를 희생하고 아름다움을 선물하는데 우리가 기대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지 못하면 실망하고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벚꽃은 자기의 아름다움을 봄꽃으로 인간인 우리에게 잠간 보여주기 위해 동한의 춥고 쓰라린 고통을 다 견뎌내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변함없이 희생한 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믿음의 형제들과 이웃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정말 벚꽃처럼 나를 희생하고 말없이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데 최선을 다하면 우리가 사는 곳이 얼마나 아름다워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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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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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지팡이
- 스틱은 뾰족해서 산이나 땅에서나 쓸 수 있고 지팡이는 끝이 넓고 접착력이 우수하여 의지가 될 수 있어 노인이나 장애인이 주로 사용한다. 특히 부부가 늙으면 지력이나 체력이 떨어져 지팡이와 같은 존재로 서로 의지하며 산다고 한다. 신라시대에는 왕이 장수한 노인에게 ‘청려장’이란 지팡이를 하사해 몸을 의지하여 오래 살도록 하는 풍습이 있었고 지금은 그것이 노인의 날에 대통령의 명의로 100세 노인에게 주어진다. 20세기 초중반까지는 정장 외에 그에 어울리는 모자와 지팡이가 없으면 다 차려입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간소화되어 필수 목록에서 빠졌지만 셜룩 홈즈나 지킬 박사와 하이드 등 해당 시대를 묘사한 작품을 보면 호신을 위해 사용한 것으로 지팡이는 꼭 필요했다. 유럽에서는 귀족 여성이 즐겨 사용한 시기도 있었는데 지팡이 안에 향수와 악세서리 등을 넣어 몸을 치장하며 실용적인 도구로 활용한 것으로 보아 그것은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흰색 지팡이 역시 시각 장애인에게 가장 적합한 도구라 한다면 진정 지팡이는 그의 인생을 안전하게 인도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려는 신앙인에게는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해 전진하고자 하는 의지가 바로 모세의 손에 잡혀있는 지팡이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가 지팡이를 잡으라고 했을 때 그것으로 이적을 일으킬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세의 지팡이는 정말 능치 못할 것이 없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 것이었다. 지팡이를 뻗어 땅을 치거나 던져도, 어떤 것을 가리켜도 지팡이가 각종 동물이 되기도 하고 번갯불을 불러오기도 했다. 또한 바위에서 물이 펑펑 쏟아지는 샘물이 되기도 했다.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바로 능력의 지팡이가 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푯대를 향하기만 하면 분명 능력의 지팡이를 손에 잡을 수 있다. 현대인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도 않고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한숨 쉬고 쉽게 일을 포기하려는 자가 얼마나 많은지 정말 안타깝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를 강하게 가지고 주께로 나아간다면 문제가 없는데 말이다. 우리가 향하는 확고한 목표 지점이 하나님이면 그분께서 우리의 원하는 바를 100% 다 들어 주신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매일 기도하고 삶의 모습을 제대로 드리지 못하면서 그 분께서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시기만 바라는 마음으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나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진정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면 비록 우리는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전능자께서 모든 것을 기억하시고 다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믿어야 한다. 지금 당장 우리에게 주신 귀중한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살펴보자. 하나님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수많은 시간을 무심하게 살아온 것은 아닐까? 진정 그분을 의지하지 않고 살아온 것은 영혼이 없이 산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의 실체를 내 마음에 모시지 않고 내가 주인이 되면 안 된다. 나의 인생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셔야 한다. 그리하면 엄청난 주님의 능력의 지팡이를 모세같이 사용할 수 있음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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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지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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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비 나 리
- 비나리라는 말은 잘 사용하지는 않지만 노래나 옛날부터 비나리패가 놀이의 마지막 과정에서 덕담으로 기원할 때 사용하는 순수한 우리말로 행복을 빈다는 뜻으로 좋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걱정과 근심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행복을 빌고 미래를 소망한다. 아름다운 인생을 염원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특히 기독교인들에겐 참 좋은 말이라 생각된다. 몇 년 전 아내의 칠순 때 우리 부부가 중국 태항산을 여행한 적이 있다. 산은 험했지만 규모나 아름다운 대협곡은 과히 미국의 그랜드 캐년에 비할 수 있을 정도로 절경이었다. 우리가 만선산과 왕망령을 오가는 터널 길을 지날 때 놀라운 사실을 알고 감탄했다. 오랜 옛날 오지 중에 오지인 이곳을 외부와의 소통을 위해 13명의 청년들이 무려 21년 동안을 삽과 괭이로만 절벽을 뚫어 만든 길이 1250m 동굴 도로이다. 소위 ‘괘백공로’인데 그 당시에 작업에 참여한 분은 다 돌아가시고 지금은 연로한 한 분만 생존하여 그때 상황을 증언하는 것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존경스러운 것은 자기 자녀들이 바깥 큰 세상으로 나아가 새로운 것을 배워 제대로 된 사람이 되길 바랐기 때문에 긴 시간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험난한 길을 거의 맨손으로 동굴 길을 완성했다는 사실이다. 비록 선배는 부족하나 후손이 훌륭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마음이었기에 희망의 노래를 부르며 만든 길이 바로 비나리길인데 큰 의미뿐만 아니라 감동 그 자체였다. 우리나라에도 마을 사람들이 지게 짐을 지고 다니던 옛길을 군민과 도시민의 건강을 위해 증평군과 청원군 미원면을 잇는 길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 길이 바로 소망을 올리는 증평 비나리 길이다. 도로가 생기기 전엔 솟점말, 밤티, 삼기 등 세 마을 모두 율리 마을이라고 했는데 옛날 여기 사람들 모두 고개 너머에 방앗간에 방아 찧으러 넘어 다닌 길이다. 소달구지가 오르기는 어림도 없어서 지게 짐을 지고 다녀야 하는 고단한 길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산림공원과 세 곳의 쉼터를 마련해 놓았다. 1008개의 계단을 만들어 한 계단 한 계단을 오르면서 소원을 비는 아름다운 비나리길이 된 것이다. 신선한 숲의 공기를 마시며 근심을 내려놓고 길의 끝에서 소망을 갖고 기도할 수 있는 풍광이 된 것은 절대 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고 인생의 힘든 언덕을 오르며 기도하며 사는 것과 다름이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행복과 평안을 구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항상 인생의 가파른 고갯길을 오르면서 이웃과 더불어 잘 살아가길 소원하면서 살아간다. 그래서 중국의 태항산 대협곡과 가까운 이웃인 증평에 자녀의 앞날을 위해 거의 맨손으로 동굴 길을 만들었고 소달구지도 못 다니는 길을 내가 사는 이웃들과 더불어 잘 살아가기 위해 아름다운 희망의 길을 만들어 놓은 것이리라. 오죽하면 소원을 비는 마음으로 길의 이름도 비나리길로 명명하였으랴. 우리가 하나님께 소원을 빌고 오늘도 숨을 헐떡거리며 고달픔을 꾹 참고 비나리길을 오르는 것은 미래에 자녀들과 이웃의 작은 행복을 위해 간절한 소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 믿는다. 2024.02.19. 경남기독신문 초장컬럼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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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비 나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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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3초 미학
- 코로나 때문에 산업현장이 마비되어 어려워진 때가 있었다. 몇 년 전 강원도의 한 농촌에서 수확한 많은 양의 감자의 판매 길이 막혀 큰 걱정을 했을 때 방송이 나간 직후 바로 주문이 들어와 30분 만에 감자가 다 팔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러나 어떤 한 가정에서 감자를 전화로 구입하려고 머뭇거리다 잠깐 사이에 판매가 방금 마감되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넘 아쉬움만 더했다. 강원도 감자가 순식간에 주문이 완료되어 구입 기회를 놓친 것이다. 3초만 더 빨리 전화기의 버튼을 눌렸다면 상황이 바뀌었을 텐데. 시간 중에 초 단위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으나 3초 빨리 서두는 것과 3초를 더 기다리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3초를 빨리 서두르면 큰 일을 성사시킬 수도 있지만 3초를 기다리고 행동할 때 더 좋은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조금 성격이 급한 경향이 있어 생각할 여유도 없이 바로 말하거나 행동을 하기 때문에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행동하기 전에 하나, 둘, 셋 동안 잠깐 생각하고 말하면 저절로 좋은 분위기가 만들어진다고 믿어진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다. 대화를 할 때 짧은 시간인 3초만 참다가 부드러운 말을 하면 부부싸움도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살다 보면 한 사람이 툭 내뱉는 말 때문에 상처를 입고 마음이 상하여 오랜 시간 동안 냉전이 지속되는 것이다. 요즘같이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시기에는 사소한 작은 것 하나 때문에 흥분하며 욕을 하는 경우가 있다. T.V에서 특정 인물이 나오면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를 하는 상대방을 보고 이제 ‘3초만 참고 말하기’를 약속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입에서 정화된 말이 나오지 못하면 사회는 저절로 욕설로 오염되어 사회가 온통 엉망이 될 것이 틀림없다. 차 운행할 때도 참아야 한다. 현직에 있을 때 여자직원이 자기 어린 아들을 태우고 차를 운행하면서 상대방 차가 난폭하게 운전하든지 끼워들기를 하면 ‘개**’ 라고 하는 말을 무심코 했던 것이다. 시어머니인 할머니가 오셔서 차를 같이 타고 마트에 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끼워드는 차를 보자 어린 손자가 ‘엄마, 또 개** 라고 해’라고 하는 바람에 부끄러워 낯이 뜨거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린아이라 잘 감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예사롭게 내뱉은 말을 아이가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적어도 3초만 참았다가 품격에 맞는 말을 했다면 그런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에서도 교인들이 목회자의 설교가 끝나면 친한 사람들끼리 비평을 하게 되는 것을 종종 목격할 때가 있다. 부정적인 말을 하기 전에 3초만 생각하고 지혜롭게 말을 하든지 침묵하면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터인데 정말 안타까울 뿐이다. 3초 미학. 3초만 꾹 참자! 툭 내뱉지 말고 잠깐만 참으면 후회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말하고 싶어도 3초만 참고 생각해서 온유한 말을 하든지 말하지 않으면 은혜로운 분위기가 틀림없이 조성된다. 3초는 하나, 둘, 셋 하면 끝나는 정말 짧은 시간이다. 말하기 전에 3초만 기다렸다가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격에 맞는 품위 있는 말과 행동을 하자. 즉시 말하는 습관을 버리고 3초를 참았다가 말하는 행동을 실천하기만 하면 아름답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 가는 주인공이 바로 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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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3초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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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수룡 장로] 끄트머리
- 대한민국 사람이면 김밥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가족이 나들이하면 꼭 준비하는 것이 김밥인데 보통 김밥을 썰 때 누구나 먼저 김밥의 끄트머리를 집어 들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 끝부분이 맛이 좋기 때문이다. 한가운데보다 끄트머리 부분이 속 재료가 풍부하여 우리에게는 맛이 좋을 거란 기대 속에 결국 기쁨을 맛보게 된다. 김밥의 끄트머리든 일의 마지막은 항상 긴장의 연속으로 기대와 두려움으로 가득 차게 한다. 하루가 저물어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밤은 그 마지막이 분명히 다가오기 마련이다. 눈 덮인 땅에서 추위로 벌벌 떠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절망의 끄트머리에서 추위를 녹여 줄 햇빛이 빛나는 아침을 고대하고, 병마로 슬픔에 빠진 이들의 끝에서는 나음받을 특효약이나 기적을 가져다줄 광선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산다. 그래서 전능자께서 우리에게 어둠의 끄트머리에서 희망을 안고 살아가도록 먼동이 트는 새벽을 허락해 주신 것이라 믿는다. 전과 16범인 김용수라는 분은 자기 인생의 끄트머리에서 청송 보호감호소에 수감 되어 있을 때 한 수녀를 만나 주님의 사랑에 눈을 뜨고 자기의 간을 떼주어 간암의 끄트머리에 선 분을 구하고 또 신장의 한 부분을 떼주어 두 생명을 살리는 큰일을 했었지만 그 분은 항상 마음 한구석의 무거운 짐을 더는 듯해 감사할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이처럼 모든 일엔 끄트머리가 있고 한 해와 인생도 끄트머리가 있음을 기억하며 사는 것이 좋다. 우리 조상들은 끝을 단순히 어떤 일의 마무리로만 여기지 않고 새로운 시작의 전환점으로 생각하여 늘 새벽이 온다고 믿었기 때문에 오늘을 있게 만든 것이라 믿는다. 끄트머리는 끝이 아니고 곧 다른 시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끝은 피리어드(period)가 아니고 컴마(comma)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끄트머리인 것 같으나 컴마의 상황에서 다시 다음 단계로 연결해 가는 것이다. 컴마의 상태는 분명히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메시지가 된다. 라틴어로 카르페 디엠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교사가 학생들에게 한 말로 자기에게 주어진 한 날 한 날에 충실하게 살라는 뜻이다. 사람은 언제인지는 몰라도 인생의 끄트머리에서 죽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니까 죽음을 기억하고 살되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고 신나게 사랑하며 살라는 아모르 파티가 되는 것이 인생의 순리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순간마다 최선을 다해 인생을 기쁨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어느새 2023년이 한 해의 끄트머리에 와있다. 영어에 commencement라는 단어의 의미가 우리말 끄트머리와 상통한다. commencement는 졸업과 시작이라는 의미가 더해져 있는데 그 뜻이 절묘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지금의 어려운 끄트머리의 상태를 잘 극복해야 다음 단계인 좋은 시작으로 이어지게 된다. 새롭게 시작하는 새벽의 먼동을 바라며 새로운 시작을 노래하자. 우리들의 마음속에 피어있는 365개의 꽃송이가 밤의 끄트머리에서 시들기 전에 희망의 새벽을 맞아 생기가 돋고 싱싱하게 피어나도록 최선을 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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