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5-24(화)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논설

실시간뉴스
  • [하수룡 장로] 자 유
    다니엘 기도회 때 정요한 집사와 김예나 집사의 간증집회에서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에 온 것을 간증하는 것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소위 금수저 집안의 아들딸인데도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 목숨 건 탈출로 자유 찾은 기쁨을 간증할 때 자유가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보통 자유라 하면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영어에서 말하는 Liverty는 사회적 권리로서의 자유를 말하고, Freedom은 본질적인 개인의 자유에 해당한다고 정의한다. 시민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들은 만민평등 사상에 입각하여 개인의 권리를 당연한 기본권리(Liberalism)로 주장한 것이다. 북한의 주민들이 사선을 넘어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양의 언저리에서 서식하는 앨버트로스라는 새는 폭풍우를 뚫고 대양을 가로질러 수 만 킬로를 이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새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고향하늘과 고향의 숲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탈북하여 자유를 찾은 정요한 집사 역시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사람으로 조부인 장로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잘 하시던 조부님이 손자인 정요한 집사를 어릴 때부터 ‘너는 하나님의 귀한 백성이다.’라고 가르쳐 주면서 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하며 축복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북한에서 명문가정에 태어나 좋은 학교를 거쳐 최고의 코스를 마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김정일 전용악단 단장을 맡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마음속에 조부께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고향하늘과 숲을 그리워하면서 자유의 나래를 펼치도록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셨던 것이다. 독일에 교환교수로 출장 중에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어떤 교수가 얼굴색이 좋지 못하니 교회에 한 번 가보라는 말씀을 듣고 간 것이 수 만 킬로를 가로질러 자유 대한민국의 하늘과 숲으로 날아 와 둥지를 틀은 것이다. 우리가 볼 때에는 우연이라 생각할 줄 몰라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정요한 집사가 자유를 찾도록 길을 열어주신 것이라 믿는다. 서울 사람이 작곡한 사향가와 샤르사테곡을 연주하여 온 회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간증 중에 3800여 개의 교회를 훼파하고 그 자리에 김일성 동상을 세워 놓았으니 하나님께서 엄청 슬퍼하고 계실 텐데 하루 빨리 모든 자유가 회복되어 교회당을 다시 세우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금도 수많은 북한의 지하교인이 억압 속에서 해방과 자유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그들은 죽지 못해 살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눈물을 지우는 것을 목격했다. 자유 대한민국에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넘어온 탈북민 33,000여 명이나 되는 그 새터민들에게도 사랑과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 날 카네기 홀이나 세종 문화 회관에서도 도저히 감상할 수 없는 귀한 부부 집사의 현란한 기악연주를 선물로 받고 큰 감동을 받았다. 우리가 감동받은 이상으로 자유를 갈망하는 많은 탈북민들은 북한 땅이 하루바삐 자유의 물결로 하나님의 사랑과 빛과 생명으로 채워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북한의 백성들이 진리를 알고 진리가 그들을 자유하게 함을 알도록 평화의 복음을 힘써 전하여 그 땅이 해방과 자유가 넘치도록 기도해야 한다.
    • 오피니언
    • 논설
    2020-11-25
  • [하수룡 장로] 3분 기적
    2020년 들어 온 나라를 뒤집어 놓은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미스터트롯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아 온 국민이 집안에서 TV만을 친구삼아 살아가던 그 때에 미스터트롯이란 신생아가 나타나 두 시간 반 동안 어린아이를 비롯한 전 국민의 시선을 떼지 못하도록 사로잡은 것이다. 요즘같이 마음을 위로해 줄 것이 없는 시기에 얼마나 좋은 청량음료인지 고마운 프로라 생각하게 되었다. 항상 어떤 일을 해보면 그 속에 주인공을 비롯한 인기 있는 화제의 인물이 탄생되는 것이 일반 법칙이다. 최고의 스타가 나오고 그와 못지않게 멋진 인물이 나타나 자기와 딱 맞는 사람에게 관심을 지대하게 가지게 되는 것이다. 화제의 인물은 TOP7인데 그들은 겸손할 뿐만 아니라 트롯이면 무슨 장르의 노래라도 잘 소화하여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단 3분간의 짧은 시간을 노래로 보답하는데 관중이 매료되어 노래에 빠지고 결국 특정 가수를 그 어떤 분보다 좋아하며 섬기게 되는 것이다.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서울에서 게릴라 팬 미팅을 가지면 공간의 한정으로 정한 수만 받았는데 뜨거운 태양이 내려쬐는 것도 아무런 불평도 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남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베트남에서 일하던 어떤 분은 서울에서 암 수술을 한 뒤 우울증과 인생을 포기한 상태로 있었으나‘나는 살고 싶다.’로 바뀌었고, 부부가 이혼하기로 결심하고 법원으로 가는 도중에 차안에서 노래 한 곡을 듣고 이혼을 포기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도 있었다. 제주도에서 첫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도착한 후 렌트카로 어린아이처럼 들뜬 기분으로 축하장에 도착하여 만남을 가졌고, 나이는 어리지만 내가 최고로 존경하는 분으로 손수 초상화를 그려 선물하기도 했고, 어떤 한 가정은 4대가 모두 팬이 되어 축하를 해주는 모습을 보고 딱 3분의 짧은 노래가 대단하다 못해 기적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다. 끝없는 축하와 사랑으로 팬 미팅은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으나 아무런 불평 없이 감격하여 울고 기쁨의 함성을 지르는 기적의 현장이 되었다. 3분 기적의 주인공은 팬에게 보답을 하듯 겸손하게‘한 분 한 분이 나의 보약 같은 존재.’라고 진실한 마음을 전했다. 3분은 짧은 시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수가 부르는 3분 정도의 노래에 열광하듯 하나님의 말씀에 매일 3분만 집중하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잘 아는 천지창조의 미켈란젤로는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끌어안고 슬퍼하는 ‘피에타’상을 제외하고는 어느 작품에도 사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시고도 어디에도 자신의 솜씨라고 흔적을 남기지 않았는데 나는 기껏 작은 벽화 하나 그려놓고 나를 자랑하려 서명을 하다니... .’이것은 평소 매일 성경에 집중하고 잠간 묵상했던 말씀이 바로‘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였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가도 잠간의 말씀 묵상으로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 깨닫고 이를 잘 실천하였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주님의 제자다. 그 분의 말씀에 매일 단 3분만 집중하여 묵상하고 기도하면 기적은 분명히 일어난다. 그리고 반드시 나를 높여 주신다.
    • 오피니언
    • 논설
    2020-09-04
  • [하수룡 장로] 소 원
    실제 말기 암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예쁜 부인과 사랑스런 자녀인 남매를 두어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갑자기 찾아온 중병으로 유전적이고 환경적인 요인을 물려준 부모애 대한 원망이 가득 차 있었다. 왜 하필이면 내가 중병으로 죽어야 하며 이런 병에 걸리도록 어릴 때 극한 환경에서 자라도록 한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했다. 아버지의 젊은 날에는 날마다 술과 세상의 열락으로 가정을 돌보지 않아 성장기에 스트레스를 준 것이 원인임을 확신하게 된다. 물론 어머니의 가출에 대한 실망감도 증오의 대상이 되어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빠를 찾는 어린 자식들에게는 ‘아빠는 소풍 가셨다.’고 둘러대며 달래어 보았지만 중병은 시간이 갈수록 상태가 악화되어만 간 것이다. 이제 위기의 순간에 이별의 시간이 가까이 와 있음을 직감하고 지난 일들을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섭섭하고 미운 생각만 주마등처럼 지나갔으나 그래도 죽기 전에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뭔가를 남기고 가야한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살날이 짧지만 자기가 위로받고 가족들에게 오랫동안 기념이 될 만한 일이 하나라도 있어야 되겠다는 강렬한 욕구가 그를 사로잡았다.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인생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마음이 더해 왔던 것이다. ‘나는 왜 이리 복도 없을까?’하고 탄식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갑자기 죽음이 몰려 왔을 때 ‘정말 꼭 남기고 가야할 것이 없을까?’하고 무언가를 골몰히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나 특별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새벽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지금까지 부모님과 대화와 사랑을 나누며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었던 것을 기억해 낸 것이다. ‘그렇다! 다정한 모습을 하고 있는 가족사진을 만드는 것이다.‘ 그 날 이후 자기를 중심으로 가족사진을 촬영하는 일을 최고의 소원으로 삼고 이 역사적인 일을 추진하였다. 웬만한 가정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것이지만 주인공인 말기 환자에게는 최고의 소원이 된 것이다. 의료진과 협력하여 소원을 이루기 위해 온힘을 다 쏟았다. 이혼한 부모님은 이제 죽음을 앞둔 자식에게 꼭 소원을 풀어 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이혼하여 서먹한 관계였지만 사랑으로 꽉 찬 모습으로 보일 수 있도록 가족사진을 만드는 일에는 한마음이 되었다. 그 아들의 소원을 이루는 날에 이혼한 부모와 죽음을 앞둔 아들, 세 사람 모두 그 동안 참고 있었던 눈물보가 터져버려 사진관이 온통 눈물바다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제대로 된 일반 가정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사소한 일이지만 ‘가족사진’이 소원이 된 이 가정에는 특별하고도 안타까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인생의 마지막 위기가 찾아 왔을 때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면 진정 우리의 소원은 무엇이 되어야 할지 도전을 받게 된다. 인생의 장막이 무너지는 순간이 오기 직전에 말기 암 환자는 ‘가족사진’이 최고의 소원이었지만 믿는 기독 신자인 우리는 인생의 종점에서 꼭 실현해야 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귀한 일을 성취할 수 있도록 신실한 종으로서 ‘기도의 제물’이 되고자하는 소원이 가장 좋은 소원 중의 소원이 되어야 할 것이라 믿는다.
    • 오피니언
    • 논설
    2020-06-25
  • [하수룡 장로] 신발
    인류의 조상 아담이 태어난 시기에는 옷은 물론 신을 신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신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1700년경 이집트에서 발견된 끈 달린 샌들이다. 아마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에게서 소명을 받을 때와 비슷한 시기라 역사적으로도 증명되는 내용이다. 이집트를 비롯한 그리스시대에도 사람들은 짐승의 가죽이나 나무, 풀잎에다 끈을 달아 발에 걸었다. 고대에 샌들을 신었던 사람들은 주로 사제나 귀족층이었고 서민들은 식물의 줄기로 만든 신발을 신거나 맨발로 다녔다. 예수님이 오신 당시에도 샌들은 질긴 가죽으로 바닥을 만들어 가죽 끈을 고정시켰고 유대인들은 우리의 풍습과 마찬가지로 집안에서는 신을 신지 않았다. 이동할 때만 신발을 사용한 한 것이다 신발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오늘에서 내일로, 익숙한 곳에서 낯선 곳으로 움직여 변화해 주길 원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신발을 만들어 신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분명한 것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어떤 좋은 신발도 인생의 죽음에서 다 끝이 나고 만다는 사실이다. 신발은 인간의 몸을 땅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최초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발을 신고 다닐 때 값진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발을 벗는 것은 잘못 살아온 과거에서부터 탈출한다는 의미가 있고 곧 옛사람을 버린다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죽음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때 묻은 신발을 꼭 벗어야 할 때에는 오직 순종으로 그 분의 뜻을 겸손하게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모세에게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구절에 신발을 벗는 행위는 하나님의 소명에 부응하여 예의를 갖추어 하나님에 대한 절대 경외심을 표시한 것이다. 또한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와에게 신을 벗으라고 했을 때 선 곳이 전능자의 거룩하심을 나타나는 장소라 생각하여 말씀에 순종하고 따른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이다. 돌아온 탕자에게 종을 시켜 가장 좋은 옷과 신발을 신기라는 부친의 명에서 아들이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포함되어있다. 신발을 신는다는 것은 신체를 보호하는 의미 외에도 변화를 바라고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의 기원이나 거듭난 삶을 살라는 깊은 뜻이 있다. 반면 신을 벗는다는 행위는 절대 순종하겠다는 의미나 경건한 자세로 상대방을 절대 존중하겠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신데렐라와 콩쥐의 이야기에서 신발 때문에 인생이 달라지는 것처럼 하나는 본인을 증명하는데 사용되고 다른 하나는 인생을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인생으로 변화시키고 영원한 복을 누릴 수 있는 구원의 신발을 신겨주셨다. 인간은 평안의 신발을 신고 안락한 생활을 하는 탓에 현실에 안주하려는 속성이 있어 신발을 계속 신고 벗으려 하지 않는다. 다른 신발을 바꾸어 신어야 할 때가 되면 그에 따른 행동이 우선되는 것이 맞다. 거룩한 곳에서 부름이 있을 때에는 옛 신발을 벗고 그 분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오직 순종해야 하고, 우리에게 명하는 말씀이 임하면 사명의 신발을 신고 오로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수룡 목사(마산회원교회)
    • 오피니언
    • 논설
    2020-02-19
  • [하수룡 장로] 초심
    얼마 전에 큰아들 내외와 손자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유명한 고깃집에 간적이 있다. 번호표를 받아 먹을 정도로 손님들이 많은 이유가 가격이 저렴하고 질과 서비스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지인들과 일부러 그 식당을 찾았을 때엔 우리가 처음 갔던 것과는 너무 달라 실망을 한 적이 있었다. 주인의 처음 먹었던 마음이 사라진 것 때문에 어느 회사의 상품명같이 ‘처음처럼’이 계속 생각이 났다. 초심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다는 진리를 안다면 처음에 마음먹고 세웠던 뜻을 한결같이 밀고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 것이다. 우리 인생에 도움이 되는 사자성어가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초심불망’은 처음에 다져진 마음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가슴에 와 닿는다. 처음 세운 뜻을 이루려고 꾸준하게 나아가든지 처음에 품었던 뜻을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변함없이 밀고 나가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만큼 처음 내세운 다짐이나 마음이 강하게 자리 잡혀 있어야만 나중에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처음 먹었던 마음이 변치 않고 좋은 미래를 향해 전진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삼심(三心)은 초심과 열심과 뒷심이다. 이 셋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초심이다. 초심은 처음 시작이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순수하게 모든 일에 접근하기 때문에 깨끗하고 욕심이 없다. 우리의 어릴 적을 생각해 보면 부모님의 심부름을 할 때나 교회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의 마음은 정말 때 묻지 않은 흰 백지 상태였음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는 거짓말하고 변명하여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못된 심성이 발동되어짐을 부인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 초심은 일을 시작할 때 처음 품은 마음으로 첫사랑의 마음과 흡사하다. 사랑을 하게 되면 누구나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상대방을 좋게 해 주고 늘 자기의 마음에서 떼어놓지 않으려는 심리를 갖고 있다. 이래서 초심은 상대방을 생각하고 그를 알아 가려고 노력하는 것은 물론 배려하려는 순수한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믿음 생활도 영원한 초심자로 살아가면 세상에서는 가장 지혜로운 자가 되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내가 무엇을 조금 이루어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위기의 때를 맞이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늘 앓아오던 질병에서 이제 다 나았다고 안심하면 초심의 망각으로 재발하기 쉽고, 자신이 이 정도면 잘 살고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자고한 마음이 생기면 초심을 잃고 모든 일을 안이하게 대처하여 낭패를 당한다. 이렇게 되면 열정이 식어지고 겸허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처음 마음, 즉 초심은 열심과 뒷심이 담겨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것은 처음사랑과 같아서 애완견과 예쁜 꽃을 가꾸듯이 늘 관심과 애정으로 키워야 한다. 날마다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늘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처음 먹었던 마음이 무너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오로지 매일 기도하면서 우리 속을 들여다보고 나의 처음 먹었던 마음을 점검해야 한다.
    • 오피니언
    • 논설
    2020-01-15
  • [김민호 목사] 전광훈 목사 발언에 대한 원론적 접근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텍스트는 별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들의 주관이다. 텍스트가 어떤 것이라고 해도 듣는 사람이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면 좋은 것이고 나쁘게 받았으면 나쁜 것이라고 한다.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선한 의도로 ‘아름답다’고 해도 그 여자가 기분 나쁘게 받아들였으면 의도(중심)와 관계없이 성희롱으로 곤욕을 치르게 된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해체주의’라고 한다.최근 전광훈 목사의 발언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입장에도 동일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심각한 신성모독이라고 침을 튀긴다. 반대쪽은 긍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혼란스러워한다.해체주의자들처럼 “텍스트의 흐름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듣는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였는가일 뿐이다”라고 보아야 하는가? 또는 “그의 중심이 중요하다. 표현을 문제시하지 말라”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 애석하게도 이 둘의 입장은 정확하게 해체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런 입장으로 이 문제를 해석하고 평가한다면 불신자들과 아무런 구별됨이 없다. 성경적 관점에서 본다면 문제의 핵심은 회중들이 어떻게 느꼈는가가 아니다. 제3계명처럼 결코 망령되게 일컬어서는 안 될, 하나님의 거룩한 성호와 관련된 문제라는 원론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원론적 접근에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광야교회에 나가서 열정적으로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기도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아마 대부분 “신앙의 자유를 수호하고 위기에 처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다”라고 할 것이다. 또 질문을 던져보자. “신앙의 자유를 위협받고 나라가 극도의 위기에 처한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하나님은 왜 이런 위기를 우리에게 허락하셨는가?” 이 질문들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해 보아야 한다.자문해 볼 질문이 더 있다. 우리가 광장에 모여 추운 바닥에서 목이 터져라 기도하는 의도가 ‘진심으로’ 하나님만이 이 위기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인가? 아니면 정권을 향한 공포심을 유발하기 위한 보여주기식의 퍼포먼스인가? 만약 기도의 의도가 후자에 기울어져 있다면 대중의 단합된 힘이 하나님 노릇해 줄 것이라고 믿고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다. 촛불이 아니라 기도 소리로 위협을 할 뿐이다.오해하지 말라. 광장에 모이지 말라거나, 기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이 모습 자체는 귀하다. 그러나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냉철하게 점검해 보자는 말이다.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는 듯하다.“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는 도다”(시 147:10-11)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군중의 숫자가 아니다. 또는 앞에서 무리를 이끌어 가는 사람의 카리스마가 아니다. 딱 하나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핵심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전광훈 목사의 발언에 대한 회중들의 반응 속에서 우리는 과연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자들의 특징으로 반응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광장에서 추위에 떨며 눈물로 목이 쉬도록 기도하지만, 우리에게 얼마나 하나님 경외함과 인자하심을 바라보는지 묻고 싶다. 전광훈 목사의 발언을 아무리 좋은 의도로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분명히 그 표현은 분명히 하나님의 거룩한 성호에 대한 모독이다. 온갖 궤변으로 합리화하지 말자. 또 이런 궤변적 선동에 경건한 성도들이 부화뇌동하지 말았으면 한다. 현실적으로 위기의 상황이기 때문에 덮어놓고 가자는 말에도 현혹되지 말았으면 한다. 전광훈 목사가 사라지면 이 나라는 끝나는가? 하나님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은 두렵지 않고 전광훈 목사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은 두려운가? 전 목사의 표현에 따르면 이 나라의 주관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전 목사다. 그는 하나님을 마치 알리딘의 마술램프의 지니처럼 취급하는 듯하다.하나님은 중심을 보시기 때문에 표현을 문제 삼지 말자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은 분명히 중심을 보신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성경을 좀 더 정확히 읽어보자. 이 말씀은 여기에 사용될 말씀이 아니다. 신명기 10:17을 보면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며”라고 했고, 사무엘상 16:7도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한다.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의 핵심은 “외모를 보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 말씀이지, ‘행위’나 ‘말’을 보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도리어 성경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우리의 말과 행위를 심판하신다고 한다. 시편 기자는 “그들의 입술의 말은 곧 그들의 입의 죄라”(시 59:12)고 한다. 또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4)고 한다. 사도 야고보의 말처럼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약 1:26)이다.무엇보다 전광훈 목사는 평신도가 아니다. 목사다. 목사이기 때문에 이런 표현은 더 심각하게 여겨져야 마땅하다. 바울이 한 말을 떠올려보자. 그는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전 8:13)는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다. 그는 이런 태도를 가르쳐야 할 위치에 있는 직분자가 아닌가?이런 글을 쓰면 어떤 사람은 좌익으로 전향했느냐고 광분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지지하는 사람을 공격하면 적으로 간주하는 태도는 전체주의로 가는 지름길이다. 잘 하고 있는 전광훈 목사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다. 잘하면 잘한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잘못한다면 잘못한다고 반응해야 민주주의가 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안 되면 대의 민주정치는 죽는다. 하나님과 법이 사는 나라가 아니라, 인기 영합과 선동이 판치는 세상이 된다. 이 영역은 좌익의 영역만이 아니다. 우익 진영도 다를 바 없다. 독일을 히틀러도 이렇게 권력을 잡았다. 국민이 잘잘못을 무서울 정도로 냉철하게 판단하는 풍토가 되어야 한다. 이런 풍토에서 법치와 민주주의는 비로소 꽃을 피우게 된다.작금의 현실을 바라보며 링컨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하나님이 우리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편에 서게 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 오피니언
    • 논설
    2020-01-01

실시간 논설 기사

  • [하수룡 장로] 사나래
    세월이 흘러 다 성장한 손자들을 보면 이제는 아들의 아들이나 딸도 부모를 떠나 짝을 찾아 독립할 때가 다 되어 뿌듯함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조부모가 줄 수 있는 사랑을 어릴 때 다 쏟아 부어 그렇게 딱 붙어 있는 껌처럼 밀착되어 좋아하던 그 모습은 손자들은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손자와 같이 놀아 주었던 조부모들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추억을 먹으면서 종종 행복해 하며 웃음을 지우곤 한다. 엄마의 젖을 빨며 엄마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울었던 아이가 건장한 청년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든든한 국군 용사가 되었고 손녀는 결혼할 나이만큼 성장해 있는 모습은 정말 대견스럽다. 어려서 부모나 조부모의 사랑을 잘 느끼지만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고 그냥 사랑만 먹고 성장하여 건강하게 잘 커는 것만으로 감사하게 생각했는데 자기가 받은 사랑을 놀랍게 표현하는 것을 보고 정말 사랑은 위대함을 발견하게 된다. 조부모는 손자 어릴 때의 콩딱콩딱 뛰며 꽉 안겨 떨어지지 않는 그 따뜻하고 행복한 느낌을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그림으로 남아 영원히 가슴에 그려져 있다. 어머니의 끊임없는 훈계 때문에 불만으로 차 있을 때 조부모의 말 한마디가 큰 위로를 받는 것이 틀림없다. 엄마보다 더 엄마 같은 할머니가 청년 손자의 가슴에 오랫동안 남아있는 것은 항상 사나래 같은 포근함으로 감싸주는 끊임없는 조모의 사랑 때문이다. 할머니가 손자를 더 깊이 사랑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기에 성인이 다된 아이들이 조부모를 보는 순간 거침없이 달려와 가슴이 터지도록 아낌없이 포옹하게 만든다.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손자들의 예쁘고 아름다운 추억은 지워지지 않고 더 선명하게 떠오르기 마련이다. 하나님을 믿는 노인의 추억 속에 세 네 살 때 손자와 함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제대로 말을 못하던 어린 아이가 ‘우리 하바, 좋은 하바, 우리 하바, 좋은 하바.’하면서 스스로 작사 작곡을 하여 목청껏 노래를 불렀던 것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엄청난 기쁨과 감동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연세든 노인에게 손자가 감사한 마음을 특별한 날 쭉 써온 편지의 내용을 꺼내보면 더욱 감동하여 만족스럽고 흐뭇하다. ‘늘 저희들을 사랑해 주시고 맛있는 것과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셔서 감사해요.’‘할머니 사랑해요. 100세까지 건강하게 사세요.’‘은퇴하시면 건강도 챙기시고 행복하십시오.’‘열심히 공부하여 꼭 보답하겠습니다.’‘저희들의 앞날을 위해 항상 기도해 주심을 감사드려요.’‘제가 잘되어 꼭 좋은 차를 꼭 사드릴게요.’등을 다시 읽어보면 가슴이 찡해온다. 항상 주님이 우릴 안아 주시는 것처럼 할머니의 포근한 사랑의 사나래가 손자들을 늘 품어 주셨기 때문이리라. 손자는 할머니가 사나래가 있는 천사가 틀림이 없다고 확신한다. 손자의 성난 상태를 당신의 지혜로 다스리시고 미운 투정에 달콤한 사랑의 케이크로 달래 주신다고 믿는다. 쭈글쭈글한 나이든 손마저 아름답고 따뜻하다고 칭송한다. 어여쁜 당신 나의 할머니, 부디 나의 곁에서 오래오래 머물러 달라고 간절하게 노래한다. 조부모도 부모와 다름없다. 손자도 아들의 아들이기 때문에 조부모가 사나래를 활짝 펴 그들을 아낌없이 감싸 주어야 한다.
    • 오피니언
    • 논설
    2022-05-03
  • [하수룡 장로] 탓할 데가 없는 자
    필자기 어릴 때만 하더라도 장로라 하면 보통 사람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훌륭한 인품과 선하고 뛰어난 행동으로 탓할 데가 없는 분으로 신불신간 존경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다. 잘 아는 예화 중에 평양 산정현교회의 조만식 장로와 주기철 목사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두 분은 사제기간으로 제자를 담임목사로 모신 것이다. 초대 조선일보 사장인 조만식 장로가 급한 일로 주일 예배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도착하여 문제가 생긴 것이다. 보통 목사라면 그냥 넘어 갈 일이지만 주목사는 강단에서 단호하게 말했다. 입구에 들어서는 조장로에게 “장로님 거기 서서 예배드리시지요.” “장로님이 예배시간에 늦으면 성도들이 무엇을 본받겠습니까?” 명한대로 예배를 다 드린 후에 “목사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이 못된 장로를 용서해 주세요.”하고 울먹이니까 온 교인들이 같이 울어 순식간에 은혜의 바다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믿는 우리에게 지금까지 두고두고 아름다운 교훈이 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 고신총회만 하더라도 장로의 숫자는 엄청 많다. 세상에서 좋은 것을 즐기고 그야말로 부귀영화를 다 누리던 분이 돈이나 세상명예를 가지고 장로가 되어 옛날의 것을 다 끊어버리지 못하고 장로의 직을 수행한다면 정말 교회가 시끄럽게 된다. 술 담배를 즐겼던 자는 과감히 끊어야 하고 해외여행 가서 불건전한 골프나 마사지를 즐겼던 장로이면 회개하고 이제는 그만 두어야 한다. 특히 교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기를 중심으로 당을 만들어 교회를 어지럽힘은 죄악임을 깨닫고 훼파해야 한다. 서울의 대형교회 어느 장로는 형제간에 부모의 재산 때문에 원수가 되어 사회법정에서의 치열한 싸움은 정말 부끄럽다. 어린 성도들이 장로는 목사를 쫒아내는 주역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것 또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장로선택의 맹점은 교회의 형편이나 조직의 방침대로 장로를 뽑게 되니까 수준이하의 장로가 탄생되어‘장로가 왜 저 모양이이지.’라고 손가락질을 받는다. 보통 장로 장립할 때에는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충성되이 살 것을 다짐하는 모습은 든든하고 희망적이었음을 기억한다. 오랫동안 장로의 일을 수행하면서 배우고 익혀 탓할 데가 없는 장로로 거듭나는 것이 정상인데 해가 갈수록 헌신보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누림과 권위의식에 젖어들어 교회의 귀중한 일도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것 때문에 교회의 질서가 무너지는 현실이 안타깝다. 좋은 장로는 청지기의 삶으로 교회의 밑거름이 되고 목회자의 동역자가 되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장로의 역할은 매우 귀하고 교회의 부흥을 위해 꼭 필요한 직분이 아닐 수 없다. 매일 내가 장로의 자격이 있는지 자문하고 주님께 탓할 데가 없는 좋은 장로의 자질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 내가 교회 안에서 성도들에게 덕을 끼치는 장로로 성도들에게 존경과 신뢰를 받고 살아가는지를 스스로 평가하고 또한 질서 있게 당회를 잘 섬기는 장로가 되었는지 자성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보통 목사와 장로는 부부관계라고 말하는데 목회자의 비전이 무엇인지 알고 목회자가 어떤 것을 필요로 하는지를 살피고 섬기는 것이 당연하다. 진정 장로가 할 일이 무엇인지 나의 직무를 찾으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분별력도 절대 필요하다. 어느 대통령 후보가 국민을 섬기는 머슴이 되겠다고 외치는 소리에 공감한 적이 있다. 교회 장로는 머슴같이 섬기는 위치에 서있어야지 대우받는 감독의 자리에 있으면 안 된다. 모름지기 세상적인 것은 버리고 낮은 자의 자세로 탓할 데가 없는 자로 성도를 사랑으로 보살피는 역할에 충실해야한다. 보통 목사는 좋은 장로를 만나는 것이 목회의 행복이고 장로는 목사를 잘 만나는 것이 신앙의 승리라고 말한다. 작금에 병들어 시들어가는 한국교회를 올곧게 성장시키려면 장로가 바로 서야한다. 장로가 탓할 데가 없이 바로 서야 교회와 나라가 산다는 것을 명심하자.
    • 오피니언
    • 논설
    2022-04-05
  • [하수룡 장로] 진정한 목회자
    요즘 신학교 입학은 재수는 필수이고 보통 삼수를 하는 것이 상례라고 알려져 있는데 양질의 우수한 목사를 양육하여 배출하는 것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신학 공부를 시작할 때와 다 마치고 목사가 된 후의 모습의 차이로 많은 성도들의 기대감에 부응하지 못하여 분쟁 속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새마을 운동이 한참이던 때만 하더라도 목회자의 사례가 형편없었다. 가정을 가진 목회자는 자녀교육과 더불어 경제적으로 너무 힘든 환경이었지만 어려움을 잘 극복하며 수많은 교인들을 영적으로 잘 이끌어 갔기 때문에 존경의 대상이 충분히 되고 남았다. 그 당시의 목회자들은 오늘날처럼 학력이 높은 것도 아니고 성지순례도 하지 않았지만 그 분들은 영적 아버지로서 성도들을 잘 가르쳤고 경건생활을 제대로 하도록 잘 양육한 것이 사실이다. 목회자는 교회 안팎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여 성도의 신앙생활을 이끌어 주는 존경을 받는 분이지만 작금에는 이구동성으로 진정한 목회자는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한 설문 조사에서 청년들이 꼽는 한국교회의 큰 문제점은 ‘목회자의 언행 불일치’였다. 청년 사역자들은 성도가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여’ ‘교회의 비상식적인 모습’ 이었다. 최근에 어느 교회의 목사가 개척한 교회를 눈물로 부흥시켰지만 결국 자만하여 성도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만드는 주역이 되어 주를 사랑하는 성도들을 분노케 했다. 목회자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고자 하는 목회보다 자기의 욕심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 목회를 진행했기 때문에 교회는 빛을 잃고 성도는 실망과 혼란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또한 진정한 목회자가 되지 못한 목사를 소수의 추종자들이 건설적으로 비판하는 성도를 험담하고 욕하여 결국 교회를 떠나게 만든다. 따라서 그런 목사가 진정한 목회자로 존경을 받을 수 없고 교회는 생명력을 잃게 된다. 사회가 혼란하고 미래가 불확실하여 희망이 없다할지라도 나라와 교회와 성도를 가슴에 품고 눈물로 기도하는 진정한 목회자가 있을 때에 교회의 분열이 있을 수 없고 비로소 모든 것이 바로 선다고 확실히 믿는다. 의지할 곳이 없는 혼돈한 지금은 수백만 성도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전 국민의 귀감이 될 존경 받을 만한 진정한 목회자 한 사람이 절대 필요한 시기다.
    • 오피니언
    • 논설
    2022-03-08
  • [하수룡 장로] 파랑새
    작년 봄 창가에 앉아 있으니까 갑자기 이상한 그림자가 나타나는 것 같아 눈을 돌렸더니 파랑새 같은 큰새 한 마리가 날아와 베란다 꽃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파랑새는 활엽수가 많은 인가 부근에 서식하며 높은 나무에 앉는데 우리 집이 산중턱에다 아파트라 이 새를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행복이나 사랑을 노래할 때 파랑새가 많이 등장한다. 실제 이 새는 둥지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격렬하게 싸우고 욕심이 많은 새로 날씬하거나 예쁜 새는 아닌데 노래나 소설에서는 이상적인 새로 표현되는 것은 참 신기할 따름이다. 파랑새가 일제 강점기에는 녹두꽃을 짓밟은 위협적인 새로 등장하고 화랑세기에는 사다함이 미실을 엄청 사랑했는데 전장에서 돌아왔더니 이미 궁중으로 시집을 가버려 임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며 파랑새가 날아와 그녀의 마음을 전해 주기를 바라는 내용을 보면서 짠한 마음을 가진 적이 있다. 반대로 어느 60대의 문맹자인 초등학교 교장의 사모는 가족들에게 무시당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해 초중고까지 검정고시를 합격했지만 대학은 가지 못한 채 암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훌쩍 날아간 한 마리의 파랑새가 되어버린 것은 참으로 애틋하고 맘 아프다. 벨기에 작가 마테를 링크의 동화인 파랑새에도 가난한 나무꾼 아이인 남매가 마법사의 병든 딸을 위해 파랑새를 찾아달라는 부탁으로 온갖 고생을 한다. 결국 꿈을 깨어보니 바로 머리맡 새장 속에 그 새가 있음을 발견하고 병을 낫게 해주는 명약도 바로 가까이 있음을 알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결코 먼 곳이 아니고 내 곁에 있다는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나와 내 주위의 사람들을 과소평가하고 소문만 듣고 멀리 있는 잘 모르는 어느 누구가 능력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가 많다. 어떤 문제를 자기가 스스로 해결하기보다 자기보다 우수하거나 잘난 사람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풀어가려는 잘못된 습성을 과감히 버리고 고쳐야 한다. 현대인의 문제점 중에 가장 큰 것이 자신이 처한 현실에 만족감을 갖지 못하고 산 넘어 먼 곳에 내가 만족할만한 좋은 파랑새가 존재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있는 것이다. 늘 이상적인 직장이나 자신이 만든 부푼 희망으로 자기가 만든 허울에 갇혀 방황을 하고 있는 것은 더 큰 문제다. 게다가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로 가득한 방송 드라마가 우울증과 자괴감에 빠져들게 만든다. 남이 볼 때에는 좋은 직장인데도 그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성공인생을 찾으려는 파랑새 증후군이 많은 사람을 실망시키고 만다. 지금도 파랑새 증후군의 사람들이 현실성이 없는 파랑새의 행복과 행운을 바라고 기다리며 사는 것이 사실이다. 현실에 대한 불만은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관계되는 모든 분들과 환경을 황폐하게 만든다. 현실 부정보다 주어진 모든 여건을 감사하며 가족들과 더불어 활기차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행운의 파랑새가 내게 오기를 바라기보다 현실을 주님께 감사하면서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가족과 더불어 서로 대화하면서 그분과 함께 더 많은 것을 꿈꾸자. 그리하면 나무꾼 아이처럼 가정의 울타리 안에 파랑새가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 틀림없다.
    • 오피니언
    • 논설
    2022-02-08
  • [하수룡 장로] 천국 환송 콘서트
    늦은 가을에 94세를 향유하시고 생을 마감하신 어머니를 천국으로 보내드리고 남은 온 가족이 지상천국을 경험했다. 장례식장에서 오랫동안 도우미로 섬겼던 분들의 말씀이 한결같이 한 가정의 장례는 식장에서 ‘모가 아니면 도’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의 장례가 주일이 끼어 4일장 치루는 동안에 옆 상가에서 고성이 오갔고 새벽까지도 시끄러워 눈을 붙일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됨을 목도했다. 분명한 것은 사람이 죽기 전에 금전 문제와 복잡한 문제 등을 내려놓으면 되는데 그 쉬운 것을 꽉 쥐고 있기 때문에 사후에 시끄러운 결과를 낳게 된다. 보통 어른들은 사후에 남아있는 후손들의 가정의 평안과 형제우애로 가정천국을 원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사실 경제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재산이 존재하지 않으면 사후에 큰 걱정이 없다. 우리 가정에도 막내 남동생에게 어머니가 천국환송이 되기 전에 소유한 적은 재산을 모두 내어 주었더니 노환으로 고생하실 것을 미리 알고 효심을 발휘하여 모든 형제자매를 안심시킨 것이다. 진심으로 고생한다고 격려해주었고 다른 형제에게도 우리가 할 일을 대신함으로써 직장생활과 가정생활이 한결 용이하게 되었음을 깨닫게 하여 고마운 마음을 갖게 했다. 늘 어머니는 병상에서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라 찬송하셨고 크게 배우지는 못했지만 성경을 필사하신다고 최선을 다하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놀라운 사실은 노환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입관 예배를 드릴 때 유가족이 망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모두들 인자한 모습에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얼마나 평안하셨던지 천사의 얼굴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30년 동안 장로로 시무하면서 돌아가신 많은 분들의 얼굴을 보았지만 이렇게 맑고 온화한 모습을 처음 접한 것이다. 유능한 목회자도 돌아가실 때 천국이 없는 것처럼 절규하였고, 유명한 장로도 마지막에 병석에서 벌떡 일어나 ‘예수고 뭐고 다 귀찮소.’라고 말하고 숨을 거두었는데 한낱 이름 없는 평신도의 마지막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아마 막내아들의 효심과 사랑이 어머니를 만족하게 했고 성령 하나님의 위로와 역사하심이 분명했다. 어머니의 주검을 자랑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유가족이 어머니가 천국으로 환송된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함으로 내세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소유한 것이다. 어머니는 네 자녀와 일곱 손자들을 남겨두고 만족한 마음으로 천국 가셨다. 모두들 기쁜 마음으로 어머니의 천국환송 길을 배웅하였다. 발인 전날 저녁에 자연스럽게 가족이 모여 어머니의 천국환송을 축하하는 콘서트가 열린 것이다. 뮤지컬 배우인 외손녀가 축하 송을 시작으로 유일하게 아직 예수를 영접하지 못한 둘째아들의 ‘참 아름다워라’가 모인 회중을 압도하고 감동을 주었다. 한 달 동안을 연습했단다. 때를 놓치지 않고 이제는 예수를 영접하도록 권유하여 믿기로 약속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 날 천국환송 콘서트의 열기 속에서 자녀 손들과 도우미들까지 입을 모아 천국 환송곡을 부르면서 지상천국을 맛보았다. 35년 전에 천국가신 아버지의 한 줌의 흙을 모셔와 어머니와 함께 상복원에 나란히 모셨다. 천국시민권을 가진 우리는 천국환송을 위한 아름다운 환경을 꼭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잊지 말자.
    • 오피니언
    • 논설
    2021-11-18
  • [하수룡 장로] 눈물
    인생으로 사는 날 동안 괴로운 일이나 너무 기쁜 일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만 이런 눈물이 감정에 의해 나지 않는 것은 괴롭고 불행한 일이다. 그 보다도 더욱 괴로운 것은 흘리고 싶어도 도저히 흐르지 않는 눈물 때문에 원망스러울 때가 있다. 보통 남자가 온갖 말을 다하여도 여자가 흘리는 한 방울의 눈물에는 당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성별을 떠나 눈물은 진심이 담겨있어서 그 자체가 중요하다. 그래서 눈물을 흘릴 줄 모르는 사람에게 좋은 상황을 넘겨준다 할지라도 금방 실망으로 끝나버리고 말 것이다. 보편적으로 눈물이 있는 사람은 인정이 많은 특성을 갖고 있고 마른 눈을 가진 사람은 내면이 건조하고 부드럽지 못한 딱딱한 마음을 가진 무정한 사람이라 여겨질 수 있다. 사람에 있어서 눈물만큼 사람의 마음을 잘 대변해 주는 것은 아마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고대 서양 전설에서 나일 강에 사는 악어는 사람을 잡아먹고 난 뒤에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린다고 하는데 악어의 눈물은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눈물샘의 신경과 입을 움직이는 신경이 같아 먹이를 삼키기 좋게 수분을 보충시켜 주기 위한 것이다. 다분히 사람의 눈물과는 비교해서는 안 되는 거짓의 위선적인 눈물이다. 사람의 눈물 중에서 치명적인 병이 든 히스기야의 통곡의 눈물은 최고의 눈물 중의 눈물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네 눈물의 기도도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고 말씀하시고 그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생명까지도 연장시켜 주셨다. 이와 같이 눈물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보물 같은 것으로 제대로 역할을 감당하는 충실한 일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절하게 흘리는 눈물은 영적 기능을 제대로 하도록 이끌어 주는 안내자임이 분명하다. 스위스의 어느 시골에 양치는 목동이 양들을 이끌고 작은 개울을 건너가려고 하였다. 개울에는 징검다리와 같은 불편한 다리로는 물을 싫어하는 양들이 건너가기가 매우 힘든 일이다. 목동이 아무리 양들을 다그쳐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목동은 하는 수 없이 어미양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젖먹이 새끼 어린 양을 안고 물을 건너 버렸다. ‘안돼!’하는 순간 어미양은 어린 자식을 잃었다는 위기감으로 세상을 다 뺏겼다는 절박한 심정이 되었다. 피눈물을 흘리며 오직 새끼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사력을 다해 개울을 뛰어 건넜던 것이다. 미물인 양도 절박한 위기가 닥쳤을 때 머뭇거리지 않고 눈물을 뿌리며 온 힘을 다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려 한다. 한낱 짐승도 그런 위기 땐 목숨을 걸고 새끼를 구하려고 하는데 하물며 어찌 인간이 극한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보고 평안히 안일한 길만 갈 수 있으랴. 지금 이 땅은 기쁨이나 웃음보다 어린새끼를 빼앗긴 어미처럼 통곡의 눈물이 절대 필요한 절박한 위기의 때다. 히스기야처럼 먼저 죄를 범한 나 자신을 위해 울고 자녀의 앞날을 위해 울자. 어려움에 처한 나라와 이 백성을 위해 울고 북한 땅에서 인간 이하의 피폐한 삶을 살고 있는 우리 형제를 위해 통곡하자. 그리하면 위기의 때에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의 눈물을 기억하시고 살려 주신다.
    • 오피니언
    • 논설
    2021-11-11
  • [하수룡 장로] 용 돈
    보통 말하는 용돈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돈으로 자기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을 말한다. 자기가 벌지 않아도 생기는 돈, 즉 불로소득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용돈은 주로 아직 어린 미성년자거나 경제적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적은 금액의 돈을 용돈이라 한다. 옛날 어렵던 시절에는 어릴 때 용돈을 받아 본 적이 없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요즘은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정기적으로 쓸 수 있는 용돈이나 학용품 살 돈을 준다. 어릴 때부터 용돈을 관리할 능력을 키우거나 독립심을 키우도록 교육적으로 용돈을 주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옷이나 장신구를 위해 사용하도록 용돈을 주거나 대학생 정도의 청년이면 교통비는 물론 교제비나 영화를 볼 수 있는 용돈을 주는 것은 일반적인 일이다. 대학생 된 아이들이 방학 때가 되면 자기 힘으로 아르바이트 해서 자기 용돈과 학비까지도 벌어 쓸 뿐만 아니라 저축까지 하는 것은 정말 칭찬할만한 일이다. 옛날 형편이 어려울 때에 부모가 경제적 능력이 없는 자녀들에게 용돈을 주는 것은 진정 사랑을 베푸는 큰 은혜라 할 것이다. 부모님이 어렵게 벌어서 사용하라고 주신 용돈을 향토장학금이라 하여 신나게 썼던 기억이 난다면 정말 철없이 소비했다는 마음으로 부끄러워해야 한다. 진정 자녀가 성장하여 경제적인 능력을 가지게 되면 가난한 시절에 부모님이 사랑의 진액을 다 바쳐 우리에게 주신 용돈은 은총임을 기억하고 이제는 치사랑으로 약해진 어른들께 감사함을 담아 용돈이 역으로 이어지는 것이 마땅하다. 필자가 잘 알고 있는 친구 중에 자녀가 다 잘 성장하여 경제적인 어려움이나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자녀결혼, 직장 문제나 손자를 걱정함이 없이 잘 살아가는 분이 있다. 항상 얼굴에는 기쁨으로 가득 차 감사함으로 늘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 우리를 늘 편안하게 해 주는 분이다. 그런데 어느 날 파안대소하여 점심식사를 쏜다고 해서 나갔더니 큰아들이 아파트를 팔고 중도금 일부를 아버지에게 용돈이라 하면서 일금 일천만 원을 통장에 입금을 시켰다고 했다. 요즘 이런 자식을 찾아볼 수 없는데 보기 힘든 효도를 실천한 참 귀한 아들이라 생각되었고 정말 부러웠다. 친구의 아들은 새집으로 이사해야 하고 자기 자녀를 키우려면 얼마나 쓸 곳이 많을 텐데 부모에게 용돈을 그렇게 많이 주다니... . 난 그 순간 감동을 받아 한참동안 그 친구가 부러워 존경스러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친구의 아들이지만 하나님이 복을 주고도 남음이 있겠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뿌듯했다. 용돈은 주로 아이들에게 주는 돈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이렇게 자녀가 경제적 능력이 없어진 부모에게 쓸 돈을 챙겨서 드리는 것은 마땅하고 귀한 일이다. 일천만 원이나 되는 큰돈도 돈이지만 아버지에게 용돈을 드리는 것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진정한 효심에서 출발한 것이라 믿어진다. 사실 옛날에는 부모가 자녀를 키운다고 제대로 먹거나 입지도 못 하고 자녀를 키우는 일에만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노후대책은 생각도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늙어 경제적 능력이 없어진 부모님에게 큰돈은 아니더라도 용돈을 챙겨드리는 자녀들이 많아지면 존경과 사랑, 그리고 축복이 공존할 것이다.
    • 오피니언
    • 논설
    2021-09-08
  • [하수룡 장로] 연리지
    일본을 여행할 때 큐슈에 있는 산사 앞에 수백 년 된 연리지가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하는 묘한 모습으로 서있는 것을 본적이 있다. 큰 나무의 가지가 서로 얼싸 안고 있는 모습이 너무 신기하여 그 매력으로 마음을 뺏긴 것은 사실이다. 주로 연리지라 함은 같은 종류의 나뭇가지가 서로 붙어 의지하고 있는 모습을 한 상태로 남녀 간의 사랑이나 부부간의 금실, 선비의 우정 등을 나타낸다고 한다. 고금을 막론하고 연리지의 출현은 희귀하고 경사스러운 일로 여기고 귀한 나무로 대우받고 있는 것이다. 큰 나무 줄기가 이어지면 연리목이라 하고 나뭇가지가 이어지면 연리지라고 한다. 가지가 맞닿으면 바람에 의해 서로 비벼지는 상태가 되어 산불이 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땅속의 붙어있는 뿌리 덕분에 나무가 죽지 않고 오랫동안 같이 잘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맞닿은 두 나무의 줄기나 가지는 각각 해마다 새로운 나이테를 만들어 지름이 점점 굵어지면서 서로가 심하게 눌리므로 제일 먼저 껍질이 압력을 견디지 못해 찢어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나무의 세포들이 직접 맨살로 맞부딪치게 되어 운명적인 만남이 완성된다. 이것은 남녀가 만나 부부가 되는 경우와 흡사하지만 나는 우리 주님의 원가지에 상처 난 우리 인생의 작은 가지가 접붙임을 당한 연리지와 유사하여 정말 의미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무의 연리현상은 아무 가지나 서로 맞닿는다고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고 동질의 나무라야 가능하다. 소나무나 참나무는 수십 년 붙어있어도 연리지와 같이 결합되지 않는다고 한다. 근본이 서로 달라 돕는 것보다 맞닿을 때마다 서로에게 상처만 준다고 한다. 분명한 것은 상처받지 않고 항상 위로해 주시고 감싸 주시는 우리 주님의 큰 나무에 연리지로 붙어있어야만 잘 생장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오래 전에 태안 꽃박람회에서 크기가 같은 원 가지가 붙어있는 벤자민을 부부나무라 칭하여 20년 동안 잘 키워 큰 나무로 성장시켰다. 두 나무처럼 각각 성장하는 것 같았으나 나중에는 가지가 붙어버린 연리지가 되어 모두들 신기하게 생각하고 기뻐하였다. 부부일체의 사랑을 나타내는 모습처럼 연리지가 되어버렸으나 분명한 것은 부부의 사랑은 영원하지 않고 주님과의 연리지 사랑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알았다. 영국 작가 루이는 ‘인간은 에로스에 의해 성장하고, 스톨게에 의해 양육되고, 아가페에 의해 완성된다.’고 한 것처럼 인간이 가진 사랑은 역시 미완성일 뿐이다. 세상은 수많은 사람들이 남녀 간의 사랑, 부부간의 사랑,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을 외치고 연리지처럼 서로 변하지 않기를 염원한다. 심지어 가요까지도 연리지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모두 사랑의 홍수 속에 빠져 살아가고 있지만 진정 사랑의 갈증을 해소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우릴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우리 가운데 참 나무이신 포도나무로 보내 주셨다. 원가지이신 주님에게 상처 난 연한 포도나무의 순이 되어 접붙임이 되어야만 참 연리지 같은 삶이 전개된다. 세상에서 상처받은 연약한 가지가 주님의 큰 가지에 붙어살면 치유와 함께 연리지의 사랑을 맛보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자.
    • 오피니언
    • 논설
    2021-08-11
  • [하수룡 장로] 처음과 나중
    처음 30여 년 전 1991년 5월 18일은 필자가 장로로 장립을 받은 날로 내 생애 최고의 역사적인 날이다. 이 때 이웃에 살던 예수님을 잘 모르는 형님 부부가 장로로 세움 받는 것이 귀하고 좋은 일인 줄 알고 중동에서 근무할 때 사온 비디오카메라로 나의 기념될만한 모습들을 촬영하셨다. 이 분은 고박사라 불릴 만큼 최고의 기술자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이 잘 사는 하나님을 잘 모르는 선한 이웃이다. 부인은 열심 있는 불도였지만 어릴 때 주일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이 가정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두 가정의 아이들도 학교 선후배로 잘 지냈고 주요 과목을 과외지도를 하듯이 잘 가르쳐 주곤 했다. 자녀들을 데리고 좋은 곳으로 소풍을 가기도 하고 먼 곳으로 여행하기도 했다. 부부끼리도 여러 밤을 같이 보내면서 여행의 즐거움을 맛보고 친근하게 잘 지내면서 관계를 돈독히 했다. 작은 아들의 진로도 색맹으로 원하던 사범계열을 가지 못하게 되자 차선책으로 법학을 전공하도록 권유하여 현재는 검찰 쪽 공무원으로 잘 근무하고 있다. 자녀의 결혼 때에도 먼 거리를 혼주인 형님 내외와 어른들을 내 차로 모시고 행복한 결혼식을 잘 마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것을 기억한다. 가정에 어려운 일이 있거나 힘든 일은 찾아가 위로해드리고 해결 방법도 제시하여 지금까지 좋은 관계를 잘 유지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 생각한다. 시간이 잠간 흐른 뒤 부인은 과감하게 절을 버리고 주님을 잘 섬기는 집사가 되어 기쁨으로 헌신하는 그 모습이 정말 아름다움 그 자체다. 반면 고 박사님은 좀처럼 예수를 영접하지 않은 상황에 못 된 담배 때문에 폐에 문제가 생기게 되어 온 가족이 걱정꺼리가 된 것이다. 자녀도 결혼하여 이제 손자도 보았고 부인도 건강하여 큰 걱정이 없는데 칠순이 넘어 생각지도 못한 말기 암이라는 인생의 폭풍이 이 가정에 휘몰아친 것이다. 그러나 큰 불행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나을 수 있다는 강한 확신을 주신 것이다. 담임 목사가 간절히 안수기도하면 아멘으로 화답했고 본인도 끊임없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낫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결국 나중에는 예수님 때문에 천국 간다고 시인하였고 지금은 아버지의 집에서 안식하고 계신다. 처음 꼭 30년 전 이 가정은 나의 장로 장립식 때에는 예수를 잘 몰랐으나 사랑이라는 끈으로 묶여 살아가던 중 예수를 영접하여 많은 변화를 겪고 인생의 굴곡을 맛보게 된다. 이런 가운데 신기한 기적 같은 일이 우리들 앞에서 일어나 도저히 인간의 생각으론 이해하지 못한 일을 경험한 것이다. 개인적으론 30년 동안 장로로 섬길 수 있도록 해 주셨고 그 사이에 이웃 불신 형님 부부가 예수를 믿고 같이 모신 친정어머니도 천국백성이 된 것이다. 나중 30년 후에는 부인되는 집사님이 처음 장로 장립식 때와 똑같이 2021년 4월 25일 나의 은퇴와 원로장로 추대식에 참석하여 축하해 주는 놀라운 기적 같은 현실을 목도했다. 남편은 물론 친정어머니도 예수 믿고 천국 가심을 감사하며 집사로 살아가는 부인은 비록 혼자가 되었으나 자기 가정을 전도한 분의 마지막 직을 처음 장립 때를 회상하며 묘한 감정으로 지켜보면서 형제애로 축하한 사실은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실 것이 틀림없다.
    • 오피니언
    • 논설
    2021-06-09
  • [하수룡 장로] 고 백
    어떤 연애인이 자기의 과거 행적을 깨끗하게 털어놓지 않아 상대방의 불신이 커져 사랑했던 두 사람의 믿음이 깨어져 이별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우리 주위에 자주 일어날 수 있는 고백 중 가장 자주 목격되는 것은 사랑에 관계되는 고백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비밀을 다 공개를 해도 문제가 되지만 꼭꼭 숨겨놓고 말하지 않는 것 때문에 상대방을 신뢰하지 못하여 결별의 순서를 밟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의지하는 친구 되신 주님께 과거의 잘못을 제대로 고백하면 품어주시고 긍휼과 자비의 옷으로 입혀 주시기 때문에 변질되어지는 인간의 사랑과는 비교가 안 된다. 고백은 자기의 뜻을 하나님께 아뢰는 행위로 특히 자기의 죄를 용서를 비는 것을 뜻할 때 자주 사용하는데 참회라고도 한다. 신자들이 죄를 고백하면 그 죄를 사할 권리가 있다고 여겨지는 사제가 속죄해 주는 천주교의 고해성사를 들 수 있다. 성공회에서는 고백을 성사적 예식으로 여기며 성사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총을 보이는 것으로 표현한다. 가장 신비스러운 것으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성육신한 사건인데 예수 그리스도가 근원적 성사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은 은총이며 그 은총을 은혜로 의식하는 일에 바쳐지는 모든 일이 성사라 믿는다. 개신교애서는 만인제사장론에 따라 죄의 고백을 하나님께만 하는 것으로 사죄를 특권층에만 부여하는 고해성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장로교에서는 예배 중에 죄의 고백을 순서에 넣어 죄를 고백하는 시간을 가지는데 그 중에 대표기도의 주요기도 제목으로 죄의 용서를 비는 시간을 갖는 것은 참 복된 일이다. 최근 어떤 신문에서 결혼을 꿈꾸는 남녀가 가장 싫어하는 고백은 무엇일까를 묻는 설문에서 다른 사람을 통한 대리고백이 최고를 차지했다. 이와 같이 사람들 사이에도 타이밍에 맞춰 직접적으로 확신에 찬 고백을 해야만 좋은 관계를 잘 유지할 수 있다. 원치 않는 간접적인 고백을 받았을 때에는 상대방의 마음은 고맙지만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우릴 사랑하시는 주님은 어떤 내용이라도 적시에 우리가 직접 나아가 솔직하게 남김없이 고백해야만 기뻐하시고 문제를 잘 해결해 주신다는 사실이다. 유명한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가 쾌락의 길로 걸었던 생활을 청산하고 ‘이제부터 유일한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뿐이다.’라고 고백했지만 늘 남아있는 자신의 죄악의 찌꺼기 때문에 회개를 통한 고백보다 더 진한 인간의 행위를 포루티운쿨라 교회의 장미정원에서 알몸으로 뒹굴며 용서를 구하였다. 그의 진정한 회개를 통해 용서를 베푸셨고 축복의 증표로 장미의 가시까지도 없애주었다는 실화가 있다. 이곳의 가시 없는 장미를 타지로 옮겨 심으면 살지 못한다고 하니 진실한 고백이 있는 곳만이 생명이 있음을 증명한다.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고백은 경우에 따라 약도 되고 독이 된다. 그러나 좋으신 우리 하나님은 씻지 못할 죄악이라도 솔직하게 고백하기만 하면 기뻐하시고 조건 없이 용서하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아주 사소한 것 하나라도 모조리 하나님께 고백하자. 그리하면 우리 주님은 불변의 사랑으로 놀라운 은총을 우리의 가슴에 채워주신다.
    • 오피니언
    • 논설
    2021-04-16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