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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수룡 장로] 3초 미학
    코로나 때문에 산업현장이 마비되어 어려워진 때가 있었다. 몇 년 전 강원도의 한 농촌에서 수확한 많은 양의 감자의 판매 길이 막혀 큰 걱정을 했을 때 방송이 나간 직후 바로 주문이 들어와 30분 만에 감자가 다 팔리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러나 어떤 한 가정에서 감자를 전화로 구입하려고 머뭇거리다 잠깐 사이에 판매가 방금 마감되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넘 아쉬움만 더했다. 강원도 감자가 순식간에 주문이 완료되어 구입 기회를 놓친 것이다. 3초만 더 빨리 전화기의 버튼을 눌렸다면 상황이 바뀌었을 텐데. 시간 중에 초 단위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으나 3초 빨리 서두는 것과 3초를 더 기다리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3초를 빨리 서두르면 큰 일을 성사시킬 수도 있지만 3초를 기다리고 행동할 때 더 좋은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조금 성격이 급한 경향이 있어 생각할 여유도 없이 바로 말하거나 행동을 하기 때문에 가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행동하기 전에 하나, 둘, 셋 동안 잠깐 생각하고 말하면 저절로 좋은 분위기가 만들어진다고 믿어진다.. 부부 사이도 마찬가지다. 대화를 할 때 짧은 시간인 3초만 참다가 부드러운 말을 하면 부부싸움도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살다 보면 한 사람이 툭 내뱉는 말 때문에 상처를 입고 마음이 상하여 오랜 시간 동안 냉전이 지속되는 것이다. 요즘같이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시기에는 사소한 작은 것 하나 때문에 흥분하며 욕을 하는 경우가 있다. T.V에서 특정 인물이 나오면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를 하는 상대방을 보고 이제 ‘3초만 참고 말하기’를 약속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입에서 정화된 말이 나오지 못하면 사회는 저절로 욕설로 오염되어 사회가 온통 엉망이 될 것이 틀림없다. 차 운행할 때도 참아야 한다. 현직에 있을 때 여자직원이 자기 어린 아들을 태우고 차를 운행하면서 상대방 차가 난폭하게 운전하든지 끼워들기를 하면 ‘개**’ 라고 하는 말을 무심코 했던 것이다. 시어머니인 할머니가 오셔서 차를 같이 타고 마트에 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끼워드는 차를 보자 어린 손자가 ‘엄마, 또 개** 라고 해’라고 하는 바람에 부끄러워 낯이 뜨거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린아이라 잘 감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예사롭게 내뱉은 말을 아이가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적어도 3초만 참았다가 품격에 맞는 말을 했다면 그런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에서도 교인들이 목회자의 설교가 끝나면 친한 사람들끼리 비평을 하게 되는 것을 종종 목격할 때가 있다. 부정적인 말을 하기 전에 3초만 생각하고 지혜롭게 말을 하든지 침묵하면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터인데 정말 안타까울 뿐이다. 3초 미학. 3초만 꾹 참자! 툭 내뱉지 말고 잠깐만 참으면 후회하는 일이 생기지 않는다. 말하고 싶어도 3초만 참고 생각해서 온유한 말을 하든지 말하지 않으면 은혜로운 분위기가 틀림없이 조성된다. 3초는 하나, 둘, 셋 하면 끝나는 정말 짧은 시간이다. 말하기 전에 3초만 기다렸다가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격에 맞는 품위 있는 말과 행동을 하자. 즉시 말하는 습관을 버리고 3초를 참았다가 말하는 행동을 실천하기만 하면 아름답고 좋은 환경을 만들어 가는 주인공이 바로 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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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7
  • [하수룡 장로] 일견
    재미있게 쓴 좋은 글 중에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두 마리의 개를 키운다고 한다. 물론 한자어는 다르지만 하나는 선입견이고 또 다른 하나는 편견이라 말한다. 인간은 선입견과 편견이라는 거대한 감옥 속에서 살아간다고 했다. 이 두 마리의 개를 쫓아버리는 특별한 한 마리의 개가 바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말했다. 직접 보지 않고 들은 얘기로 상대를 판단하면 큰 실수를 범하게 된다고 했다. 물론 한자어는 전혀 다르지만 일견을 키우면서 상대를 바르게 보는 혜안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생활 속에서도 제대로 된 일견을 가지지 못하여 실수할 때가 많다. 우리의 실수 중 가장 큰 과오는 부모의 신앙이나 자녀의 직업과 외모만 믿고 일을 추진하는 경우다.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일을 추진해야 마땅한데 그렇지 못한데서 큰 문제가 발생한다. 분명히 부모와 자녀의 신앙은 다른데 응당 어른이 좋으니까 자녀가 좋을 것이라는 막연한 선입견이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새 신자가 찾아와 자리를 잡을 때쯤 되면 자신이 드려온 예배의 형식이나 용어가 다를 경우에는 이단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선입견을 가진 것도 문제가 된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부터 인상이 다른 사람에 비해 좋다고 여겨지면 좋은 사람으로 여기고 그를 무조건 인정하는 주관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게다가 우린 얼마나 다른 사람을 흠담하길 좋아하고 좋은 내용이든 나쁜 내용이든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는 선입견을 가진 특별한 민족이 아니던가! 이런 환경 속에서 사는 우리는 자연적으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선입견이 마음속에 자리를 잡게 되어 잘못된 편견으로 불공정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성경에서도 잘못된 일견으로 주님을 실망시키는 제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주님께서 도마에게 찾아와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시고 상처 난 손을 보여주시므로 부활의 확신을 심어주셨다. 제자들이 갈릴리로 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배하는데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도 있었다. 꼭 보아야 믿겠다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별수 없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한낱 연약한 인간임을 알 수 있다. 신앙의 관점에 어떤 이는 보지 않고도 믿고, 어떤 이는 도마처럼 보여주어도 믿지 못한다. 주님이 주신 일견으로 무엇이든지 먼저 정확하게 보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공정하고 정의로움이 드러나는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면 믿을 만한 것이 도저히 없다. 믿음으로 바라보는 눈이 절대 필요한 시기가 오늘날이 아닐까? 선입견과 편견의 오염으로 공의롭지 못한 세상 속에서 허우적거리면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성경에서 명령하고 계신다. 세상에서는 한 번 보고 도저히 믿을 만한 것이 없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은 오직 일견으로 충분하다. 우리의 일생을 주님의 한 말씀을 일견으로 믿고, 또 다른 말씀을 일견으로 확신하면서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것이 최고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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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5
  • [하수룡 장로] 자 유
    다니엘 기도회 때 정요한 집사와 김예나 집사의 간증집회에서 자유를 찾아 대한민국에 온 것을 간증하는 것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소위 금수저 집안의 아들딸인데도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 목숨 건 탈출로 자유 찾은 기쁨을 간증할 때 자유가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보통 자유라 하면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영어에서 말하는 Liverty는 사회적 권리로서의 자유를 말하고, Freedom은 본질적인 개인의 자유에 해당한다고 정의한다. 시민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들은 만민평등 사상에 입각하여 개인의 권리를 당연한 기본권리(Liberalism)로 주장한 것이다. 북한의 주민들이 사선을 넘어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것도 개인의 자유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양의 언저리에서 서식하는 앨버트로스라는 새는 폭풍우를 뚫고 대양을 가로질러 수 만 킬로를 이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새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고향하늘과 고향의 숲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탈북하여 자유를 찾은 정요한 집사 역시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한 사람으로 조부인 장로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다.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잘 하시던 조부님이 손자인 정요한 집사를 어릴 때부터 ‘너는 하나님의 귀한 백성이다.’라고 가르쳐 주면서 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하며 축복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북한에서 명문가정에 태어나 좋은 학교를 거쳐 최고의 코스를 마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김정일 전용악단 단장을 맡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마음속에 조부께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고향하늘과 숲을 그리워하면서 자유의 나래를 펼치도록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셨던 것이다. 독일에 교환교수로 출장 중에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어떤 교수가 얼굴색이 좋지 못하니 교회에 한 번 가보라는 말씀을 듣고 간 것이 수 만 킬로를 가로질러 자유 대한민국의 하늘과 숲으로 날아 와 둥지를 틀은 것이다. 우리가 볼 때에는 우연이라 생각할 줄 몰라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 정요한 집사가 자유를 찾도록 길을 열어주신 것이라 믿는다. 서울 사람이 작곡한 사향가와 샤르사테곡을 연주하여 온 회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간증 중에 3800여 개의 교회를 훼파하고 그 자리에 김일성 동상을 세워 놓았으니 하나님께서 엄청 슬퍼하고 계실 텐데 하루 빨리 모든 자유가 회복되어 교회당을 다시 세우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금도 수많은 북한의 지하교인이 억압 속에서 해방과 자유를 위해 기도하고 있으며 그들은 죽지 못해 살고 있음을 강조하면서 눈물을 지우는 것을 목격했다. 자유 대한민국에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넘어온 탈북민 33,000여 명이나 되는 그 새터민들에게도 사랑과 관심을 쏟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 날 카네기 홀이나 세종 문화 회관에서도 도저히 감상할 수 없는 귀한 부부 집사의 현란한 기악연주를 선물로 받고 큰 감동을 받았다. 우리가 감동받은 이상으로 자유를 갈망하는 많은 탈북민들은 북한 땅이 하루바삐 자유의 물결로 하나님의 사랑과 빛과 생명으로 채워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북한의 백성들이 진리를 알고 진리가 그들을 자유하게 함을 알도록 평화의 복음을 힘써 전하여 그 땅이 해방과 자유가 넘치도록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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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25
  • [하수룡 장로] 3분 기적
    2020년 들어 온 나라를 뒤집어 놓은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미스터트롯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아 온 국민이 집안에서 TV만을 친구삼아 살아가던 그 때에 미스터트롯이란 신생아가 나타나 두 시간 반 동안 어린아이를 비롯한 전 국민의 시선을 떼지 못하도록 사로잡은 것이다. 요즘같이 마음을 위로해 줄 것이 없는 시기에 얼마나 좋은 청량음료인지 고마운 프로라 생각하게 되었다. 항상 어떤 일을 해보면 그 속에 주인공을 비롯한 인기 있는 화제의 인물이 탄생되는 것이 일반 법칙이다. 최고의 스타가 나오고 그와 못지않게 멋진 인물이 나타나 자기와 딱 맞는 사람에게 관심을 지대하게 가지게 되는 것이다. 화제의 인물은 TOP7인데 그들은 겸손할 뿐만 아니라 트롯이면 무슨 장르의 노래라도 잘 소화하여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단 3분간의 짧은 시간을 노래로 보답하는데 관중이 매료되어 노래에 빠지고 결국 특정 가수를 그 어떤 분보다 좋아하며 섬기게 되는 것이다. 영화 속의 주인공처럼 서울에서 게릴라 팬 미팅을 가지면 공간의 한정으로 정한 수만 받았는데 뜨거운 태양이 내려쬐는 것도 아무런 불평도 없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남이 이어지는 것을 보고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베트남에서 일하던 어떤 분은 서울에서 암 수술을 한 뒤 우울증과 인생을 포기한 상태로 있었으나‘나는 살고 싶다.’로 바뀌었고, 부부가 이혼하기로 결심하고 법원으로 가는 도중에 차안에서 노래 한 곡을 듣고 이혼을 포기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것도 있었다. 제주도에서 첫 비행기를 타고 공항에 도착한 후 렌트카로 어린아이처럼 들뜬 기분으로 축하장에 도착하여 만남을 가졌고, 나이는 어리지만 내가 최고로 존경하는 분으로 손수 초상화를 그려 선물하기도 했고, 어떤 한 가정은 4대가 모두 팬이 되어 축하를 해주는 모습을 보고 딱 3분의 짧은 노래가 대단하다 못해 기적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했다. 끝없는 축하와 사랑으로 팬 미팅은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으나 아무런 불평 없이 감격하여 울고 기쁨의 함성을 지르는 기적의 현장이 되었다. 3분 기적의 주인공은 팬에게 보답을 하듯 겸손하게‘한 분 한 분이 나의 보약 같은 존재.’라고 진실한 마음을 전했다. 3분은 짧은 시간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수가 부르는 3분 정도의 노래에 열광하듯 하나님의 말씀에 매일 3분만 집중하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가 잘 아는 천지창조의 미켈란젤로는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끌어안고 슬퍼하는 ‘피에타’상을 제외하고는 어느 작품에도 사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시고도 어디에도 자신의 솜씨라고 흔적을 남기지 않았는데 나는 기껏 작은 벽화 하나 그려놓고 나를 자랑하려 서명을 하다니... .’이것은 평소 매일 성경에 집중하고 잠간 묵상했던 말씀이 바로‘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였기 때문이다. 위대한 예술가도 잠간의 말씀 묵상으로 진정한 겸손이 무엇인지 깨닫고 이를 잘 실천하였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주님의 제자다. 그 분의 말씀에 매일 단 3분만 집중하여 묵상하고 기도하면 기적은 분명히 일어난다. 그리고 반드시 나를 높여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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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04
  • [하수룡 장로] 소 원
    실제 말기 암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한 젊은이가 있었다. 예쁜 부인과 사랑스런 자녀인 남매를 두어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지만 갑자기 찾아온 중병으로 유전적이고 환경적인 요인을 물려준 부모애 대한 원망이 가득 차 있었다. 왜 하필이면 내가 중병으로 죽어야 하며 이런 병에 걸리도록 어릴 때 극한 환경에서 자라도록 한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으로 가득했다. 아버지의 젊은 날에는 날마다 술과 세상의 열락으로 가정을 돌보지 않아 성장기에 스트레스를 준 것이 원인임을 확신하게 된다. 물론 어머니의 가출에 대한 실망감도 증오의 대상이 되어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빠를 찾는 어린 자식들에게는 ‘아빠는 소풍 가셨다.’고 둘러대며 달래어 보았지만 중병은 시간이 갈수록 상태가 악화되어만 간 것이다. 이제 위기의 순간에 이별의 시간이 가까이 와 있음을 직감하고 지난 일들을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섭섭하고 미운 생각만 주마등처럼 지나갔으나 그래도 죽기 전에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뭔가를 남기고 가야한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살날이 짧지만 자기가 위로받고 가족들에게 오랫동안 기념이 될 만한 일이 하나라도 있어야 되겠다는 강렬한 욕구가 그를 사로잡았다.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인생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마음이 더해 왔던 것이다. ‘나는 왜 이리 복도 없을까?’하고 탄식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갑자기 죽음이 몰려 왔을 때 ‘정말 꼭 남기고 가야할 것이 없을까?’하고 무언가를 골몰히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나 특별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새벽 깊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지금까지 부모님과 대화와 사랑을 나누며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었던 것을 기억해 낸 것이다. ‘그렇다! 다정한 모습을 하고 있는 가족사진을 만드는 것이다.‘ 그 날 이후 자기를 중심으로 가족사진을 촬영하는 일을 최고의 소원으로 삼고 이 역사적인 일을 추진하였다. 웬만한 가정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하찮은 것이지만 주인공인 말기 환자에게는 최고의 소원이 된 것이다. 의료진과 협력하여 소원을 이루기 위해 온힘을 다 쏟았다. 이혼한 부모님은 이제 죽음을 앞둔 자식에게 꼭 소원을 풀어 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이혼하여 서먹한 관계였지만 사랑으로 꽉 찬 모습으로 보일 수 있도록 가족사진을 만드는 일에는 한마음이 되었다. 그 아들의 소원을 이루는 날에 이혼한 부모와 죽음을 앞둔 아들, 세 사람 모두 그 동안 참고 있었던 눈물보가 터져버려 사진관이 온통 눈물바다가 되어 버린 것이다. 제대로 된 일반 가정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사소한 일이지만 ‘가족사진’이 소원이 된 이 가정에는 특별하고도 안타까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인생의 마지막 위기가 찾아 왔을 때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면 진정 우리의 소원은 무엇이 되어야 할지 도전을 받게 된다. 인생의 장막이 무너지는 순간이 오기 직전에 말기 암 환자는 ‘가족사진’이 최고의 소원이었지만 믿는 기독 신자인 우리는 인생의 종점에서 꼭 실현해야 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귀한 일을 성취할 수 있도록 신실한 종으로서 ‘기도의 제물’이 되고자하는 소원이 가장 좋은 소원 중의 소원이 되어야 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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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25
  • [하수룡 장로] 신발
    인류의 조상 아담이 태어난 시기에는 옷은 물론 신을 신는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신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1700년경 이집트에서 발견된 끈 달린 샌들이다. 아마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에게서 소명을 받을 때와 비슷한 시기라 역사적으로도 증명되는 내용이다. 이집트를 비롯한 그리스시대에도 사람들은 짐승의 가죽이나 나무, 풀잎에다 끈을 달아 발에 걸었다. 고대에 샌들을 신었던 사람들은 주로 사제나 귀족층이었고 서민들은 식물의 줄기로 만든 신발을 신거나 맨발로 다녔다. 예수님이 오신 당시에도 샌들은 질긴 가죽으로 바닥을 만들어 가죽 끈을 고정시켰고 유대인들은 우리의 풍습과 마찬가지로 집안에서는 신을 신지 않았다. 이동할 때만 신발을 사용한 한 것이다 신발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오늘에서 내일로, 익숙한 곳에서 낯선 곳으로 움직여 변화해 주길 원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신발을 만들어 신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분명한 것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어떤 좋은 신발도 인생의 죽음에서 다 끝이 나고 만다는 사실이다. 신발은 인간의 몸을 땅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최초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발을 신고 다닐 때 값진 일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신발을 벗는 것은 잘못 살아온 과거에서부터 탈출한다는 의미가 있고 곧 옛사람을 버린다는 뜻이 있다. 그러므로 죽음인생은 하나님 앞에서 때 묻은 신발을 꼭 벗어야 할 때에는 오직 순종으로 그 분의 뜻을 겸손하게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모세에게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는 구절에 신발을 벗는 행위는 하나님의 소명에 부응하여 예의를 갖추어 하나님에 대한 절대 경외심을 표시한 것이다. 또한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와에게 신을 벗으라고 했을 때 선 곳이 전능자의 거룩하심을 나타나는 장소라 생각하여 말씀에 순종하고 따른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의 표현이다. 돌아온 탕자에게 종을 시켜 가장 좋은 옷과 신발을 신기라는 부친의 명에서 아들이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포함되어있다. 신발을 신는다는 것은 신체를 보호하는 의미 외에도 변화를 바라고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의 기원이나 거듭난 삶을 살라는 깊은 뜻이 있다. 반면 신을 벗는다는 행위는 절대 순종하겠다는 의미나 경건한 자세로 상대방을 절대 존중하겠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신데렐라와 콩쥐의 이야기에서 신발 때문에 인생이 달라지는 것처럼 하나는 본인을 증명하는데 사용되고 다른 하나는 인생을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인생으로 변화시키고 영원한 복을 누릴 수 있는 구원의 신발을 신겨주셨다. 인간은 평안의 신발을 신고 안락한 생활을 하는 탓에 현실에 안주하려는 속성이 있어 신발을 계속 신고 벗으려 하지 않는다. 다른 신발을 바꾸어 신어야 할 때가 되면 그에 따른 행동이 우선되는 것이 맞다. 거룩한 곳에서 부름이 있을 때에는 옛 신발을 벗고 그 분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오직 순종해야 하고, 우리에게 명하는 말씀이 임하면 사명의 신발을 신고 오로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수룡 목사(마산회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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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장칼럼
    2020-02-19

실시간 초장칼럼 기사

  • [하수룡 장로] 원 가 지
    호야라는 식물을 거제 동생집에서 가져와 꺾꽂이를 해 심어놓았던 것이 잘 자라더니 갑자기 시들시들해지기 시작했다. 가만히 살펴보았더니 작은 벌레들이 호야를 괴롭히면서 크지도 않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극단의 조치를 취해 원가지를 사정없이 다 쳐버리고 약간의 음지인 뒷 베란다에 놓아 두고 일 년을 키웠더니 잘랐던 원가지 옆 부분에서 곁가지가 나와 엄청 무성하게 잘 자라 이젠 예쁜 꽃까지 피워 우릴 즐겁게 해 주고 있다. 매일 물과 거름도 넉넉히 주었더니 더 충실하여 어떤 식물보다 관심을 더 가지게 되어 주인인 우리 부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잘려 버리게 된 참 감람나무의 원가지인 유대인이 떨어져 나가고 그 덕택으로 곁가지 이방인인 우리가 풍성한 구원의 은혜의 복을 누리고 잘 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후 천육백 년이란 역사의 소용돌이가 지나간 후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고 그동안의 소회를 말씀하셨으나 피폐한 삶을 살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답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 다소 냉소적이며 원망이 가득한 반응을 보인 것을 알았다. 아마도 유일하게 선택한 원가지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답에 하나님은 큰 충격을 받으신 것이 틀림이 없다 그 후 하나님은 4백 년 동안을 침묵하셨다. 갑갑한 세월이 흐른 후 하나님은 원가지인 이스라엘 항변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 .’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세상에 보내주셨다. 하나님께 감정의 골이 깊어서인지 그들은 수많은 선지자의 예언과 예수님의 기적과 표적을 보았는데도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기는 커녕 십자가에 못 박고 만 것이다. 많은 민족 중에 열악한 환경 속에 살아가던 유대민족을 감람나무의 원가지로 선택하셨으나 그들의 실족 때문에 큰 덕을 본 사람은 바로 돌감람나무의 곁가지로 접붙임을 받은 이방인인 우리들이 아닌가! 이방인 사도로 큰 쓰임을 받은 바울은 동족에 대한 안타까움이 늘 가슴 속에 있어 돌감람나무 이방인인 우리에게 ‘교만치 말라.’라고 줄곧 경고하고 있는 음성에 귀를 기울려야 한다. 예수를 믿는 돌감람나무인 우리는 참 감람나무의 찍혀버린 그 자리에 접붙임 받은 것을 망각하고 하나님이 처음으로 선택한 원가지인 것처럼 내가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곁가지로 하나님의 복을 받은 우리가 한 번쯤 믿음으로 돌아보아야 할 때임을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하고 제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안타까운 것은 참감람나무 원가지인 유대인들은 아직까지도 주님 오신지 2천 년이 지난 현재에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모세에게만 붙들여 있다는 사실이다. 돌감람나무였던 곁가지인 구원받은 우리 역시 세상 것을 더 사랑하고 자기가 가장 잘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이 문제다. 2026년 새해에는 다른 사람이 아닌 구원받은 내가 야생 기질을 지닌 못 먹는 곁가지 돌감람나무임을 꼭 깨닫고 세상을 위해 작은 선행이라도 하면 주님이 기뻐하실 것이다. 참감람나무 원가지에서 올라오는 진액을 마음껏 흡수하여 푸른 잎과 꽃, 그리고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고 은혜를 베푸신 우리 하나님만 바라보고 늘 감사하고 찬양을 돌리면 참 좋겠다. 2026.01.06. 경남기독신문 초장컬럼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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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장칼럼
    2026-01-08
  • [하수룡 장로] 종 점
    어느 가수가 불렀던 종점이라는 노래는 오랜 시간까지 사랑을 받고 불리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개인이나 단체에 생명이나 직분에 언젠가는 꼭 오고 마는 마지막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노래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공감을 준 것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지 모든 것이 단계 단계마다 분명히 마지막이 있어 종점이라는 말이나 노래에 관심을 갖고 이것을 자기의 처지와 형편에 견주어 보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슈베르트의 마지막 3개의 피아노 소나타는 죽음이 오기 전 두 달 전에 완성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당시 불치병이던 매독이 악화되어 죽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인생의 종점에 장기와 중추신경계가 무너져 내리는 고통 속에서도 이전에 없었던 엄청난 속도로 작품을 썼던 것이다. 그의 친구에게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면서 오히려 나는 죽음을 반긴다고 했다. 그러나 고통은 두렵다고 했다. 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소나타를 비롯한 여러 개의 작품들이 우리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는 것은 슈베르트의 슬픈 장조에 늘 눈물방울이 맺혀있기 때문일까? 한없이 나약하고 헛되이 보이는 한 개인의 삶의 종점에서 그의 마지막을 끝이라 보지 않고 공포와 고통이 오히려 시작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가 쓴 작품들이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이라 믿어진다. 요즘 들어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자꾸만 나의 마음에 와닿아 잠간 멈칫하는 때가 간혹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새벽에 일어나 내가 자주 사용하는 물건들을 쳐다보면서 내가 없어지면 이것들은 어떻게 될까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직장을 그만 둘 때에는 그런 마음이 없었는데 30년 동안 봉사한 장로의 직을 마감하여 은퇴한 후에 나의 머릿속이 복잡했었다. 그러나 누구든지 분명히 종착점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준비하는 습관만 있으면 그것 때문에 동력을 얻고 인생의 종점이 와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인생의 종착점이 이르기 전에 내가 낳은 자녀들이 경건한 가정을 이루어 제대로 모든 생활을 잘 감당하고 후손들을 잘 키우면 그것으로 감사해야 한다. 정말 인생은 아름답고 만족스럽다고 할 때 머릿속의 행복감과 뿌듯한 가슴속의 기쁨은 그 속도감이 매우 빨라 그야말로 잠간이라는 사실이다. 노년에 감사의 나날로 일상을 보낼 시기가 되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하루하루가 엄청난 속도감으로 비명을 지를 정도다. 이제 곧 마지막이 올 것이라는 느낌마저 다가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인생이기 때문이다. 소위 종점이란 다 마무리하고 그 단계에서는 마지막의 시간에 도달했다는 의미다. 마지막에 이르기 전에 참 좋은 날이 많아 행복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오랫동안 유지하고 싶은 욕망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기억하고 싶은 모든 순간은 예쁜 모래를 가득 채운 모래시계처럼 계속 유지하고 싶지만 잠간이면 모두 흘려 내리고 만다. 그것을 허무로 돌릴 것이 아니라 슈베르트처럼 인생의 종점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인생의 마지막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생각으로 모든 일에 임하면 불안감이나 두려움이 없어질 것이다. 마지막을 시작처럼, 그 시작을 마지막처럼 생각하고 살면 나의 존재감이 더욱 두드려지게 나타나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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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2
  • [하수룡 장로] 친 구
    진정한 친구가 세 명만 있어도 그 사람의 삶은 성공한 것이라고 한다. 친구 사이의 우정은 나눔과 공유를 통해서 자기의 성공을 더욱 빛나게 하고 어려움을 덜어 주는 것이다. 우정은 길과 같아서 자주 다니지 않으면 잡초가 우거지고, 책과 같아서 끝까지 읽어야만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독일 속담에 친구를 칭찬할 때는 널리 알도록 하고, 친구를 책망할 때는 남이 모르게 해야 한다고 했다. 정말 상대방에게 기대하기보다 오히려 주어야만 제대로 친구 사이의 관계가 잘 유지되고 우정이 돈독해지는 것이다. 성경에서도 참된 친구는 변치 않는 것이라 했는데 많은 친구를 원하는 자는 오히려 해를 당하게 되는 위험을 지니고 있다고 했다. 친구의 종류에는 오래전부터 사귀어 온 옛 친구가 있고,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처럼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는 격려의 친구가 있다. 우리에게는 나를 유익하게 해 주는 친구가 절대 필요한 때이지만 그렇지 못한 현실을 보면서 시대가 악함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친구가 없는 시대에 살고 있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진실한 우정을 나눈 다윗과 요나단은 정말 전무후무한 친구의 정을 나눈 것이다. 다윗이 어려움을 당하여 죽게 되었을 때도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다고 했다. 반대로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과 함께 망하였을 때에도 다윗은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라고 슬퍼하는 것을 보아도 두 사람의 우정은 천하에서 제일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끊임없는 우정을 나눈 사람도 성경에는 많이 나온다. 시모 나오미와 룻의 사랑과 우정이 오래오래 전하여 역사적 사실로 남은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오미가 아무런 희망이 없는 곳에 있지 말고 돌아가라 했을 때 ‘어머니 가시는 곳에 내가 가고...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라고 한 것을 보아도 두 사람은 고부관계라기 보다 오히려 친구 사이의 틈새가 없는 우정 관계로 표현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머물러 있도록 했으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않겠나이다.’ 하여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간 사제간의 우정은 과히 스승이 없는 현세에 귀감이 되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잘 알고 의심 많은 도마도 마지막에는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한 것은 주님을 자기의 최고의 친구로 믿고 목숨까지도 마다한 것은 큰 교훈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서 매우 친하다고 생각한 친구도 자기의 이익과 생각이 차이가 나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모두 변하는 것이 친구 모습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살기만 하면 예수님은 자기가 스스로 변치 않는 친구가 되겠다고 약속하셨다. 진리이신 예수님이 명하신 대로 살아가자. 우리의 변치 않는 영원한 친구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분만 바라보고 목말라 하자. 그리하면 정말 멋진 인생이 전개되는 것임을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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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12
  • [하수룡 장로] 우리
    TV에서나 일상적인 대화에서 ‘우리 남편’ ‘우리 마누라’라는 말을 예사로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 고쳐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다. 왜 ‘내 남편’이고 ‘내 마누라’ 인데 ‘우리’라는 말을 붙여 사용하는지 그 까닭을 몰라 우리의 어원을 살펴보았더니 울다의 ‘울’과 사람이라는 ‘이’가 합성하여 ‘울이’가 우리로 변하였는데 특별히 한국 사람이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만일 외국인에게 자기 남편을 our husband로 소개한다면 부인이 여럿이 있다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약소국이라 외세의 침략을 수백 번 당하여 개인이 불행한 일을 맞게 되면 정말 자기를 위해 울어 줄 사람이 필요해서 운명공동체의 용어인 우리가 절대 필요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남편, 우리 마누라라는 말은 어떻게 보면 같이 살아가는 동반자로 어떤 어려움이나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되면 나를 대변하고 울어 줄 사람으로 생각하고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것이 아닐까. 내 입장을 변명해 주는 대변자가 ‘우리’라고 생각하면 상대를 위해 크게 울부짖는 자, 새가 노래한 것처럼 나를 위해 즐겁게 노래하는 자, 즉 자기를 위하여 주장하는 자가 바로 우리인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가 노래를 부를 때 노래를 부르는 자와 즐기는 자가 하나 되는 것과 똑같은 이치가 ‘우리’가 되는 것이라 믿어진다. 한 가정에 외동딸이나 외동아들도 혼자지만 우리 아빠, 우리 엄마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도 아빠와 엄마는 하나님과 같이 전능자는 아니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같이 울어주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가장 가까운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리라. 성경의 주기도문 속에서도 ‘우리’라는 말이 6번이나 나온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 하나님은 모두 ‘우리’가 되는 것이다. 그 세 분의 우리는 공동체인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 모든 악에서 구하여 주시는 것이다. 성삼위 하나님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나 사람에게 있어서나 모든 것이 그분의 뜻 안에 있기 때문에 그분이 원치 않는다면 그분의 마음을 따라가는 것이 마땅하다. 성삼위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따르게 되면 완전 사랑이 되고 능력이 될 수 있다. 성삼위의 하나님께서 인간인 우리에게 어울리는 아름다운 것을 그렇게 많이 창조하여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한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분으로 인간인 우리의 행위에 따라 삼위 하나님이 웃을 수도 있고 슬퍼하여 울 수도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인간인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울어주시는 성령님이 계신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사람을 위해 울어 줄 사람만 있어도 든든한데 성삼위 하나님이 우릴 위해 마음 아파 울어주시는데 우리는 그분 안에 살면서 그분에게 집중하는 것이 마땅하다. 주님이 원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생명이 없고 아무런 가치가 없다. 하나님의 뜻대로 그분과 내가 하나 되어 우리가 되는 것만이 그 어떤 것에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것이 됨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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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6
  • [하수룡 장로] 석린성시(惜吝成屎)
    오래전에 이웃에 금슬이 좋은 퇴직한 교장 부부가 살고 있었다. 퇴직 후 사모는 그동안 아이들 키우고 사느라 쉽게 살 수 없는 좋은 그릇 등을 고급으로 사들이고 그것을 엄청 아꼈지만 진열해놓고 잘 사용하지는 않았다. 보통 좋고 비싼 그릇들은 귀한 손님이 오시거나 모처럼 행하는 행사에 사용하느라 아끼고 잘 사용하지 않는 것이 상례다. 남편이 먼저 가시고 일 년 더 사시다가 이내 따라가셨다. 장례 후에 며느리가 시어머님이 평소 아끼며 소중히 여기고 애지중지하게 여긴 물건들을 구식일 뿐만 아니라 자기 취향에 맞지 않는다고 시어머니의 값비싼 그릇들을 내다 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 광경을 직면한 뒤에 아깝기도 하고 마음이 편하지 않았음을 숨길 수 없었다. 어른이 귀하게 생각하고 아끼던 것들이 모두 폐기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소중히 여기고 아낀 것들이 하루아침에 바깥 바닥에 버려지는 것을 보고 옛날 어른들이 말씀하시던 ‘아끼면 똥 된다.’는 말이 생각났다. 물론 비유가 될는지 모르지만 아끼고 아끼다가 단번에 쓸모가 없어지는 것을 그렇게 말했나 보다. 사자성어에도 아끼면 똥 된다는 석린성시란 말이 있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나라를 불문하고 그런 말을 사용하는가 보다. 필자 역시 스위스 산 마사이 신발을 비싼 가격으로 사서 잘 보관했다가 올해 봄에 모처럼 신으려고 꺼내보니 바닥과 신위의 부분은 괜찮았으나 옆부분이 완전히 녹아버려 아까워도 버려야 했던 기억이 난다. 이같이 아껴둔 옷이나 물건을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곰팡이가 생길 수 있고 녹아 사용할 수도 없는 경우가 생긴다. 돈, 돈 하면서 넘 절약하는 일에만 신경쓰다가 자기가 병들어 소중한 건강을 놓쳐버린 것을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돈을 아끼고 모으는 데에만 집중하다 보면 건강도, 시간도, 소중한 사람도 다 놓치고 살아가는 인생이 된다. 아끼는 것에 대한 지나친 강조보다는 돈이든지 물건이든지 적절한 때에 잘 사용하고 마음을 열어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잘 아는 고등학교 선배의 경우를 보고 정말 아끼다 똥이 되는 것을직접 목격했다. 그 선배는 고등학교만 겨우 졸업했으나 손재주가 뛰어나 부산에서 선박을 수리를 해주는 기술이 있어 돈을 엄청 잘 벌었다. 집도 넉넉했지만 자식 하나 잘 키워 성공시켜보겠다는 일념으로 모으는 일에만 열중하다가 갑자기 폐암으로 쓰러져 일 년도 못살고 세상을 떠났다. 남기고 간 많은 재산을 자식이 잠간 사이에 사업 실패로 다 날려 버린 것이다. 선배 부인은 울고 또 울면서 돈 한 번 내 가족과 다른 사람을 위해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다 날려 보냈다고 토로하였다. 이것이 바로 ‘석린성시’ 즉 아끼면 똥 된다는 말과 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현재보다 미래가 더 중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 집에 쌓아 둔 값비싼 그릇이나 옷들을 아끼는 것은 다가올 내일을 대비할 것이라고 믿는다. 돈 역시 다음을 준비하여 잘 살기 위해 저축한다고 말할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쓸 곳이 있으면 개인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아낌없이 사용하는 것이 옳다. 진정 현재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면 다가올 미래가 현재가 되어도 즐길 수 없다. 지나치게 아끼지 말고 석린성시를 꼭 기억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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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09
  • [하수룡 장로] 참 부 자
    보통 옛날 부자라 함은 백만장자를 부의 대명사로 쓰였으나 돈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21세기에는 억만장자가 되어야만 부자의 대열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부모를 잘 만나 불로소득으로만 평생 돈 걱정 없이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을 부자라고도 한다. 그래서 어린아이도 돈 많은 사람을 부러워하고 열심히 노력하여 부자가 될 꿈을 가지기도 하는 것이다. 경주를 여행하는 중에 교촌이란 마을에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이 마을은 신라 신문왕 때 최초의 국립대학인 국학이 세워지고 고려 때는 향학, 조선 때는 향교로 이어진 곳이다. 특히 향교와 고택이 많이 있었지만 참 부자의 모습을 보여 준 최 부자의 고택이 있어 마을이 더욱 고귀하고 빛났다. 가진 재물을 12대 400년 동안 만석의 재산을 지켰고 9대 진사를 배출한 가문으로도 유명하다. 가난한 소작인을 나의 진정한 이웃으로 사랑하고 사회에 책임을 다한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귀한 집안이다. 물론 그 시대는 기독교가 없었지만 원래 타고날 때부터 천성이 선한 사마리아인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성경에 어리석은 부자와 부유한 관원 등은 모두 그들의 가진 것에 대한 욕심 때문에 베풀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부요치 못한 자가 된 것이다. 자기가 가진 것을 헌신적으로 버리고 예수를 쫓으라고 했지만 물질의 노예가 되어버려 걱정 근심만 하다가 인생을 마감한 사실이 안타깝다. 자기 소유의 땅을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는 이기적인 행동을 한 사람도 베드로가 성령을 속인다고 책망하니 혼이 떠나 버리는 참극이 벌어지는 것을 보면서 가진 부를 가지고 잘못하면 결국 망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물론 경주 최부자 집안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그네를 잘 대접하고 백리 안에 굶어죽는 자가 없게 해야 한다고 가훈을 삼을 정도로 선행을 한 것이 참부자의 모습이었다. 최부자 댁이 처음부터 부자로 산 것은 아니다. 중세시대 지주에게 8할을 바치는 것을 5할로 낮춰 준 것이 오히려 부를 더 불러오는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한 해의 소출이 만석 이상이 되면 그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고, 흉년에는 어려운 사람의 땅을 사서 늘리는 일이 없도록 엄격하게 제한했다. 벌써 수백 년 전에 이미 최부자 집은 예수님의 베품의 원리를 스스로 알고 애민정신으로 사랑을 실천한 것은 우리에게는 큰 교훈으로 다가온다. 최부자의 중시조도 나라에서 내리는 큰 벼슬을 사양한 것이 집안 전통으로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않았고, 시집온 며느리는 3년 간 무명옷을 입는 것이 가풍이었다. 집안 어른들의 호 역시 대우헌이나 둔차를 쓰면서 부자이지만 항상 겸손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다. 최 부자 댁은 1700년경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99칸으로 알려진 사랑채에는 항상 수많은 손님들이 머물렀으며 흉년이 들면 굶주린 백성을 위해 곳간을 열어 두었다고 한다. 교촌마을 최 부자 집안의 구석구석 빛바랜 곳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흔적을 발견하면서 신자인 우리도 참 부자가 되어 겸손함과 이타적인 행동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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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7-23
  • [하수룡 장로] 돈
    일선 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종종 앞으로의 꿈을 말하기도 한다.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돈을 엄청 벌어서 큰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아이들도 많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그것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까 그런 꿈을 말할 수 있으나 부모님들이 일상생활에서 돈의 힘과 가치가 경제적으로 생활에 미치는 것이 얼마나 큰지를 아이들에게 자연적으로 습득하게 만들어 돈의 중요성과 위력을 알게 한 것이라 생각된다. 성경에 나오는 것과 같이 돈 때문에 아버지가 자식을 팔아 자기의 탐욕을 채운 사실을 알고 얼마나 분노했는가! 이스라엘 무능한 왕이 자기 백성 중의 부자에게 토색한 은금을 앗수르 왕에게 주어 멸망을 피한 사실을 알고 얼마나 허망했던가. 뇌물을 받고 유죄한 자를 도와 힘으로 무죄로 판정하는 재판관을 얼마나 증오했던가. 또한 한 달란트 받은 자가 불만하여 땅에 묻어 그대로 감추어 둔 사실 때문에 많은 사람이 분개한 것도 사실이다. 목회자가 안수하여 성령을 받았으니 기뻐하기보다 돈을 요구했다면 과연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실까? 분명히 베드로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돈을 주고 사면 은과 함께 망한다고 했다. 부정한 방법으로 벌었거나 부정직하게 번 돈을 사용하면 결국 패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은 뻔한 일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취하여 자기 집에 숨긴 것이 탄로가 나 엘리사에게 책망을 받고 나아만의 문둥병이 그에게 들어가 그 병이 자손 대대로 영원토록 저주를 받은 것을 잘 알고 있다. 이것은 돈에 눈이 멀어 남을 속이고 착복하여 자기의 배를 채우는 악한 자의 마지막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교훈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돈을 정당한 방법으로 많이 버는 것이 절대 필요하고 제대로 잘 사용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예수님께서도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쫓아내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 이것은 성도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교회 안에서 상행위를 자행하거나 돈을 모으는 계 등을 만들지 말라고 경고하시는 것과 똑같다. 특히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도 절대 엄금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믿음이 부족한 초신자가 돈에 대한 욕심으로 돈에 관심이 많은 중직자와 돈거래를 하여 한 때 교회가 큰 혼란에 빠졌던 사실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 우리가 돈의 욕심에 빠지기 쉽게 탐욕과 탐심의 사단이 우리를 항상 오라고 손짓하며 유혹하고 있다. 내가 가진 힘으로 막벨라 굴을 내 소유지로 만들면 안 된다. 자기가 수고하여 번 돈으로 양식을 사 먹고 물을 마셔야 한다. 요아스가 제사장들에게 여호와 전에 드린 모든 은전을 성전의 어느 곳이든지 퇴락한 것을 보거든 그것으로 수리하라고 했다. 그 돈으로 나팔이나 그릇을 만들지 말고 오직 그것으로 여호와의 전을 수리하여 하나님께 신실함을 인정받아야 한다. 가이사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마땅하므로 정당한 소득의 돈을 십일조를 드려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온 권속이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해야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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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6-12
  • [하수룡 장로] 떠나 보내는 마음
    미국의 소설가이자 에세이 작가인 대프니 머킨이 자신의 고통스런 어린 시절과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린 성년 이후의 삶을 설득력 있게 그려낸 작품 ‘우울증을 떠나 보내며’ 읽고 크게 공감했던 것을 기억한다. 사랑받지 못한 유년기의 박탈감에서 출발해 고도로 가능한 삶을 살면서 우울증이 치유되지 못해도 관리할 수 있는 현재까지 이어짐을 그려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겪지만 좀처럼 말하지 않는 외로움과 슬픔을 더할 나위 없이 솔직하게 다루고 있음을 보았다. 우울증이라는 것과는 비교할 수는 없지만 우리 부부가 소중히 여기며 사랑했던 것이 사라졌다는 상실감, 그것도 실내에서 얼어 죽으면서 누렇게 몸이 시들어 가는 모습 때문에 큰 실망감에 빠져 한동안 그 생각에 빠져나오지 못했던 것을 숨길 수 없었다. 어떤 이들은 13여 년간 타던 차를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타던 거라 떠나 보내는 마음이 너무 무겁다고 했다. 영혼이 있거나 사람처럼 생각도 없는 한낱 기계장치일 뿐인데 본인도 모르는 사이 정이 들어서인지 다른 곳으로 떠나보내는 마음이 서운하여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물론 동물과 사물은 아니지만 일 년 중 가을과 겨울이 교차하는 시기가 되면 아름답고 찬란했던 단풍의 시기는 다 가고 찬바람이 부는 계절이 되어 와!와! 하며 감탄사를 불러왔던 그 단풍이 누른빛의 낙엽이 되어 떠나버려 고왔던 순간을 보고 싶어 그리워하며 눈물짓는 감성어린 소녀와 같은 사람들도 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아니지만 애지중지한 꽃식물과 이별이기 때문에 몇 날을 두고 마음 아파했던 기억을 지울 수 없다. 몇 년 전에 필자가 장로은퇴와 30년 동안의 무흠으로 원로장로 추대식 때 귀하신 분이 나에게 사랑과 존경의 의미로 예쁜 난을 기념으로 선물을 했던 것이기에 소중하여 이별이 싫었던 것이 사실이다. 더욱 마음 아픈 것은 성도에게서 선물로 받고 해마다 집에서 잘 키워 예쁜 꽃이 핀 것을 하나님이 계신 교회당에 가져다 놓았는데 관리를 잘못해 추운 겨울에 얼어 회생하지 못하고 죽어갔다는 것이 넘 가슴이 아플 뿐이다. 그렇다고 필자가 동물 애호가나 식물 애호가는 아니지만 뜻있는 꽃이기에 애착과 관심이 컸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교회당에서 집으로 죽어가는 누렇게 변한 난을 가지고 오는 것도 마음이 아팠지만 하룻밤을 자고 났을 때 제일 큰 꽃잎이 떨어져 방바닥에 벌렁 누워 있는 것이 더 고통으로 다가왔다. 사랑했던 꽃과의 이별이 시작되었다는 아픔이 밀려온 것이다. 작년에 천국 가신 김집사님과의 이별처럼 마음이 아프고 허전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큰 봉오리에서 작은 예쁜 봉오리까지 다 떨어지는 데 혼자 외롭게 지내는 홀아비 같으면 엉엉 울었을 것이다. 계속하여 이별한다는 허전함이 몰려오는데 그것을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우리 인생 역시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도 언젠가는 모두 떠나보내야 하는 아픔을 겪는 것은 필연이다. 이번 사건으로 사랑하는 것에 대해 지나친 애착은 마음의 회복을 지연시킬 수 있음을 알았다. 보낸 난 때문에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애타게 그리워하는 마음보다 새로운 시작의 기회를 가지는 것이 더 소중함을 깨달았다, 슬픈 경험을 긍정적인 생각으로의 전환이 떠나 보내는 이에게 큰 도움 됨을 가르쳐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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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5-08
  • [하수룡 장로] 딸
    옛날에는 여자인 딸은 인구수에도 넣지 않고 크게 중요한 존재로 취급하지 않았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에도 중동 이슬람 나라에서는 여자가 바깥 활동은 물론 얼굴을 노출 시킴을 금지하는 것을 보아도 얼마나 폐쇄적인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도 여자를 귀히 여기거나 공부를 많이 하도록 하여 국가사회에 이바지하는 인물로 키우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가정에서 좋은 분위기를 만들거나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일은 대부분 딸인 여자가 선행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전북 익산에 40여 년 동안 소아마비로 누워만 있던 한 딸은 초등학교 문턱은 밟았지만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상태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오른손 엄지손가락뿐으로 컴퓨터를 만질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다. 최악의 몸 상태지만 감사하게도 머리 부분이 작동되어 2년 만에 초중고를 검정고시로 합격한 것이다. 소위 식물인간의 수준의 딸이지만 원망하거나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 날 낳아주시고 함께해 주시는 것을 무한 행복이라 말하면서 얼굴에는 항상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이 딸은 자신을 부모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해주시는 전능자이심을 믿고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믿음 있는 예쁜 딸로 소문나 있다. 성경에서 소알 땅의 롯의 두 딸은 자기가 사는 땅에는 배필 될 남자가 없으므로 우리가 아버지에게 술을 먹이고 동침하자고 큰딸이 제의하여 아버지로 인하여 인종을 전파하였다. 오랜 시간 동안 두 딸은 아버지에게 술을 먹여 번갈아 가며 동침하여 많은 자손을 퍼뜨려 큰딸은 아들의 이름을 모압이라 하여 오늘날 모압 자손의 조상이요 작은딸도 아들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자손의 조상이 된 것이다. 이것은 신앙인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폐륜이다. 사울 왕의 딸 미갈을 살펴보자. 남편인 다윗을 한낱 하찮은 목동이라 생각하며 다윗을 무시하고 멸시한 결과 그 딸은 평생 자기 자녀를 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친 것을 기억한다. 결국 폐륜과 교만은 자신을 망치고 후손에게도 절망을 가져온다는 사실이다. 놀랍게도 입다의 딸은 어떠한가? 입다는 여호와께서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아 주심에 너무 감격한 나머지 열정적인 맹세로 경솔한 행동을 했다. 모세의 법에는 인간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는데도 딸을 제물로 드린 것은 하나님이 그 제사를 기쁘게 받았을 리가 없었다. 입다의 딸은 아버지의 뜻에 절대 순종하여 처녀로 죽임을 당하면서까지 애곡한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사실이다. 오늘날 소수의 자녀로 딸이라도 공주처럼 잘 살도록 분에 넘치도록 투자한다. 폐륜으로 점철된 롯의 딸들과 남을 무시하며 자기밖에 모르는 사울의 딸 미갈의 행동은 닮지 말아야 할 나쁜 악행이다. 입다의 딸처럼 희생의 제물은 없어져야 마땅하지만 순종의 미는 아름답다. 익산의 딸은 부모님을 하나님처럼 받들고 살지만 작금의 딸들은 지나친 사랑으로 상상할 수 없는 정도의 이탈로 사는 경우도 많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성령의 딸인 룻처럼 어머님 계신 곳에 나도 있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된다고 말하는 믿음있는 시온의 딸을 원하고 계심을 잊지 말자. 2025.03.17. 경남기독신문 초장컬럼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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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4-02
  • [하수룡 장로] 첫사랑의 선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어릴 때나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마음을 주어 좋아하거나 사랑을 나누었던 경험은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첫사랑은 맨처음 느끼거나 맺은 사랑으로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쉽게 말할 수 없겠지만 상대가 주님이든 사람이든 인생의 제일 처음 순수하게 사랑했던 마음을 잊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상대방을 사랑하게 되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은밀히 속삭인다. 온 세계를 다 얻은 느낌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서 하늘에 떠 있는 별도 따 와서 선물할 것처럼 모든 것을 상대방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언약을 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핑크빛 미래를 말하면 그 순간만은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내 것 인양 나만이 가지는 이 세상의 최고의 행복과 인생의 아름다움을 만끽한다고 착각한다. 세상엔 영원한 것은 없고 늘 새로운 것이 아니기에 분명히 변하기 마련인 것을! 처음에 기대하고 믿었던 상대방은 변질되어 열애 때의 그 마음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헤어짐의 결론에 도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동안 사랑했던 마음은 완전히 사라지고 원망하며 증오 속에 미련과 후회만 남기고 이별을 하는 것이 첫사랑이다. 꿈결 같은 열애의 시간에는 얼마나 멋지고 희망에 부푼 가슴으로 그 사람만 바라보고 보랏빛 미래를 꿈꾸고 살지 않았던가! 나중에는 순결한 첫사랑이 이별로 끝나버려 세상을 다 잃어버린 느낌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경우도 있다. 처음 시작할 때는 큰 기대에 찼었으나 사랑의 마지막 선물은 후회와 상처만 남아 아픈 기억으로 인생 속에 녹아있는 것이 인간들의 첫사랑이다. 우리 주님과의 첫사랑은 세상의 것과는 전혀 다르다. 살아가고 있는 지금까지 우리는 잊고 살지라도 시종 변함없이 안아 주시고 위로를 선물해주시는 사랑의 주님은 존경할 위대한 분이시다. 우리가 주님을 처음 만나 첫사랑을 경험한 것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모태신앙이건 체험으로 늦게 첫사랑의 주님을 만난 분이건 간에 그때 주님의 뜨거운 가슴을 느끼며 구원과 은혜의 선물을 받고 사랑에 얼마나 감격하여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가! 주님을 향한 뜨겁고 고마운 순수한 마음으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 역시 우릴 얼마나 뜨거운 가슴으로 안아 주시지 않았던가! 주님과의 첫사랑은 정말 깨끗하고 순결하여 세상의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는 잡히지 않는 순수 결정체다. 그때 주님의 사랑은 세상의 어떤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감격스럽고 정말 내가 가진 목숨까지도 다 내어놓고 싶은 거룩한 마음이 아니었던가! 그분을 생각만 해도 늘 기쁨과 감사가 넘치고 그분의 이름만 들어도 무조건 행복한 마음이 저절로 생성된 것이 사실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초월하여 나의 몸과 나의 가진 모든 것이 그분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 도리이다. 남녀 간의 첫사랑은 어떠한 좋은 선물로 증표를 주고 맹세해도 언젠가는 변질되어 그리움과 상처만 남는다. 그러나 주님과의 첫사랑은 새 생명을 선물의 증표로 주시고 끊임없는 은혜로 사는 날 동안 늘 변함없이 첫사랑의 선물이 제공되고 있음을 잊으면 안 된다. 내가 바로 주님의 첫사랑의 대상이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주님은 절대 변하지 않으신다. 오직 불변하시는 첫사랑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만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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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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