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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놀라운 감사 (합3:16-19)
KBS TV에서 방영되는 <생로병사의 비밀>이라는 프로가 있는데 건강 상식에 관한 의학정보를 다루고 있는데 매우 유익한 내용입니다. 그 방송 내용 중에 “100세 인생 건강관리 방법”이라는 내용을 관심 있게 시청을 했습니다. 100세까지 건강을 유지할 수 잇는 방법 주에 첫째는, 규칙적인 생활 둘째는, 긍정적인 마음 셋째는, 적당한 운동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두 번째로 말한 긍정적인 마음이란 감사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감사는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행복해지고 싶으면 감사의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에는 마귀가 불행의 씨를 뿌리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비록 불행한 일이 닥쳐왔어도 감사하는 말을 계속할 때 불행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물러가게 됩니다. 모든 최상의 조건 속에서 살아도 불평하는 사람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좋은 형편이 아니어도 감사하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북한에 억류되었던 캐나다에서 이민목회를 하시던 임현수목사님이 949일 만에 석방이 되어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곳에서의 억류생활을 한 마디로 최악의 상황이었고 북한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돕다가 강제로 억류되었기 때문에 억울함과 배신감이 컸습니다. 언제 풀려날 수 있을는지 기약이 없는 캄캄한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곳에서 매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날마다 감사했습니다. 그 결과 949일 만에 석방되어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감사는 불행이 물러가게 하고 기적을 불러옵니다. 행복한 사람들의 비밀은 긍정적인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많은 것을 가졌어도 불평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작은 것을 인하여도 감사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박국>선지자가 놀라운 감사의 사람인 까닭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고통 중에 감사했기 때문입니다.(16) 둘째는 없는 중에 감사했기 때문입니다.(17) 셋째는 소망 중에 감사했기 때문입니다.(19) 감사가 식어져 가는 이 시대에 감사하므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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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음주의 결과 (잠23:29-35)
우리나라의 <진로>라는 회사에서 <참이슬>이라는 소주를 출시한지 10주년 만에 무려 140억병이 팔렸다고 합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계산을 하자면, 한 달에 1억1천7백만 병이 팔렸고, 하루에 384만병이 팔렸고, 1초에 44병씩 팔리고 있습니다. 어른 한 명당 400병씩을 마신 것이고, 그 소주병을 한 줄로 깔아놓으면 서울 부산을 무려 3,516번을 왕복할 수 있는 길이가 됩니다. 세계에서 술 소비 1위 국가답게 참으로 엄청난 량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또 술을 마시되 1차, 2차, 3차를 거치면서 인사불성이 되도록 취해서 혀가 꼬부라질 때까지 마시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나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어야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국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셔대니까 당연히 세계에서 술 소비량이 1등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가리켜서 <음주공화국>이라고 합니다. 도시마다 길거리에 어둠이 덮이고 나면 술 취해서 비틀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너무나 흔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전국적으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서 비틀거리는 모습을 너무나 흔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사는 동안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전혀 볼 수가 없어서 너무나 좋았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술을 마시더라도 신사적으로 마시고, 적당하게 마시고, 마시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실례나 부담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런 좋은 음주문화를 본받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술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져야 하고, 술을 자제하고 거부할 줄 아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음주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첫째는, 음주는 성경이 금지하고 있습니다.(잠23:31,32) 둘째는, 음주는 실수의 원인이 됩니다.(창9:20,21) 셋째는, 음주는 반드시 패망을 초래합니다.(사5:11,22) 그러므로 술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고 절대 술을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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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비방의 함정 (민12:1-10)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초고속 인터넷 최강국이라고 합니다. 독서량은 세계에서 꼴찌이지만 인터넷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강국입니다. 이런 인터넷 강국이라는 이면에 심각한 부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인터넷 상에 악플(악성 댓글)이 넘쳐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근거가 없거나 사실성이 없는 악성 댓글이 인터넷을 타고 수많은 사람들에게로 전달이 되고 있습니다. 그 악성 댓글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정부차원에서 그런 악성 댓글을 차단시키기 위해서 두 가지 새로운 법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인터넷에 댓글을 달 때는 반드시 실명제로 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근거가 없는 악성 댓글을 다는 사람들은 법적으로 형사처벌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법이 제정되면 아무래도 악성 댓글을 함부로 달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법이 기각되고 말았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반드시 실명제로 댓글을 달아야 한다는 것과 악성 댓글을 다는 사람에 대해서 형사 처벌하는 것을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함부로 악성 댓글을 유포시키는 행위는 일종의 남을 비방하는 것인데 나쁜 것입니다.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로 인터넷 상에서 남을 비방하는 것은 정말 비열한 행동입니다. 그런 악성 댓글을 달거나 비방하는 것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고 있고, 또 심지어는 정신적인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서 목숨을 끊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할 말이 있으면 합법적으로 떳떳하게 해야지 뒤에 숨어서 남을 비방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남을 비방하는지, 그리고 남을 비방할 때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지에 대해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비방은 시기심에서 비롯됩니다.(1-2) 둘째로, 비방은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1-2) 셋째로, 비방하면 반드시 징계하십니다.(9-10) 비방과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시대에 선한 삶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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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방탕의 손실 (눅21:34-36)
한때 우리나라에 <아침형 인간>이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너도나도 아침형 인간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에 반대되는 <저녁형 인간> 예찬론자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저녁형 인간이란, 낮과 밤을 바꾸어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낮과 밤을 바꾸어서 생활을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사는 것이 정상적인 것 같이 여겨지고 있습니다. 밤 열두시가 초저녁인 것처럼 생활을 하고, 낮 열두시가 한 밤중인 것처럼 생활을 하는 이런 저녁형 인간에 대해서 도덕주의자들은 비판을 감추지 않고 있습니다. 도덕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성경적으로 볼 때도 저녁형 인간의 삶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고대 로마 제국은 밤거리가 화려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저녁마다 술집과 도박장이 초만원을 이루었고, 밤마다 홍등가(紅燈街)에는 환락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로마제국은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저녁형 인간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문화가 바뀌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주장을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창조 질서에 맞지 않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문화가 바뀌었어도 인간은 창조 질서에 순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창조질서에 역행하면서 사는 것이 바로 방탕한 생활입니다. 창조질서를 역행하면서 방탕한 생활을 할 때 우리의 삶에 많은 부작용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방탕한 삶을 살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창조질서에 역행하는 온갖 문화가 우리를 방탕한 삶으로 유혹을 하고 있습니다. 방탕한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첫째는, 방탕하면 마음이 둔하여집니다.(눅21:34) 둘째는, 방탕하면 감각이 둔하여집니다.(엡4:19) 셋째는, 방탕하면 생활이 궁핍해집니다.(눅15:13) 방탕한 삶으로 유혹하는 이 시대에 더욱 창조질서에 순응하며 거룩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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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방심은 금물 (창33:10-20)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려서 이륙을 하는 데는 3분이 걸리고, 목적지에 도착을 해서 활주로에 착륙을 하는 데는 8분의 시간이 걸립니다. 이 시간을 가리켜서 마(魔)의 11분이라고 하는데, 조종사들이 가장 긴장을 하는 시간이 바로 그 마(魔)의 11분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항공기 사고의 약 75%가 그 마의 11분대에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조종사들이 그 시간에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조종사들만 그 시간에 긴장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일반 승객들도 그 시간에는 긴장을 합니다. 비행기를 이용할 때 조종사가 얼마나 노련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비행기가 활주로에 착륙할 때 알아 볼 수가 있습니다. 초보자의 경우는 비행기가 활주로에 착륙할 때 동체가 요란하게 흔들리고 소음이 심하게 나고 사고가 날까봐 불안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노련한 조종사의 경우는 동체 흔들림이 거의 없고 소음도 별로 없고 아주 자연스럽게 착륙을 합니다. 비행기 조종사들은 마(魔)의 11분때에 긴장을 하지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는 평생이 마(魔)의 시간이기 때문에 한 순간도 긴장을 풀거나 방심할 수가 없습니다. 영적으로 긴장이 풀리고 방심하면 사단 마귀는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우리를 유혹하거나 공격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그 순간까지 방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 때 하나님을 잘 믿었던 사람들이 방심하다가 사단의 쳐 놓은 올무에 걸려서 넘어진 경우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신앙생활에 영원한 천하장사(天下壯士)는 없습니다. 방심하면 다 넘어지게 됩니다. 오늘은 우리가 신앙생활에 왜 방심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방심하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방심하면 곁길로 가게 됩니다.(창33:13-14) 둘째로, 방심하면 실패를 하게 됩니다.(수7:3-5) 셋째로, 방심하면 결국이 비참합니다.(삿8:33-35) 마지막이 아름다우려면 방심하지 말고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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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타협의 내용 (출8:25-32)
미국이라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첨단 과학과 산업문명을 달리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 미국에서 모든 현대문명을 거부한 채로 300년 전 생활상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가리켜서 <아미쉬>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미국에는 약 18만 명의 <아미쉬>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자동차, 전화, 컴퓨터, TV, 라디오, 신문 등 모든 과학 문명의 이기를 멀리한 채로 농사를 지으면서 자연과 더불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의 모습 속에서 현대문명의 모습은 일체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교통수단으로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 옛날 마차를 타고 다니거나 아니면 걸어서 다닙니다. 농사를 지을 때도 트랙터나 발달된 첨단 농기구를 일체 사용하지 않고 멍에를 맨 말이 끄는 쟁기로 밭을 일굽니다. 남자들의 복장은 검정색 양복을 입고 턱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고, 여자들은 짙은 자주색 원피스 차림에 쪽진 머리 모양을 하고 그 위에 하얀 스카프를 두르고 다닙니다. 음식은 순수 무공해 유기농자연식을 먹습니다. 그 <아미쉬>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둘러보면서 제 마음에 강하게 와 닿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쉽게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미쉬>사람들처럼 모든 현대 문명을 거부하는 정도 까지는 아닐지라도 죄악이 관영한 세상과 분리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도들이 지향해야 할 삶은 세속화 되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악한 사단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실패하게 하기 위해서 가장 흔하고 쉽게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타협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타협하다보면 결국 신앙생활을 실패하게 됩니다. 첫째로, 편하게 믿으라고 타협합니다.(출8:25) 둘째로, 적당히 믿으라고 타협합니다.(출8:28) 셋째로, 형식만 믿으라고 타협합니다.(출10:24) 마귀의 타협에 걸려 넘어지거나 신앙생활을 실패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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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칭찬이 보약 (마15:21-28)
- 오랫동안 목회를 하시던 목사님과 총알택시 운전사가 천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자기가 당연히 총알택시 운전사 보다 훨씬 더 칭찬을 받을 것으로 기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보다 총알택시 운전사를 더 칭찬하셨습니다. 목사님은 너무도 어이가 없어서 하나님께 “왜 총알택시 운전사를 더 칭찬하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그 동안 설교를 하면서 항상 사람들을 졸게 했지만 이 총알택시 운전사는 그 동안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긴장시키고 기도하게 했기 때문 이니라”고 말씀하시더랍니다. 저는 이다음에 하나님께 칭찬받는 목사가 되기를 원합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인간의 욕구 중에 생리적인 욕구 다음으로 강한 욕구가 바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학생은 선생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성도는 목사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고, 목사는 성도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께서 <수로보니게>여인을 보시고 믿음이 크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자존감이 낮아져 있던 그가 얼마나 자존감이 높아지고 행복했을까요? 믿음이 칭찬을 받은 결과 그의 고민거리가 해결되었고, 자기 힘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께 칭찬 받은 그날을 그는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칭찬은 사람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삶의 활력을 불어 넣어 줍니다. 칭찬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이 정말 대단합니다. 첫째는, 칭찬은 귀로 먹는 보약입니다.(잠언16:24절) 둘째는 칭찬은 사람을 춤추게 합니다.(전8:15) 셋째는 칭찬은 사랑의 비타민입니다.(잠15:23) 우리 모두 칭찬 보약을 많이 먹고, 칭찬 비타민을 많이 먹고, 건강한 인생 춤추는 인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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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칭찬이 보약 (마15: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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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 우리나라는 옛날 조선시대부터 자주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는 일이 있었습니다. 나라에 가뭄이나 홍수 같은 천재지변이 일어나거나, 왕실의 주요 인물이 병에 걸릴 경우, 억울하게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쳐서 재앙이 발생한다는 생각 때문에 사면령을 내렸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즉위를 할 때는 광범위하게 죄를 용서하는 대 사면령이 시행되었습니다. 단 살인, 강도, 강간 같은 인륜에 관련된 죄는 사면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인이나 강도나 강간 같은 죄가 아니면서도 사면 대상에서 무조건 제외되는 죄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폭언을 일삼는 죄였습니다. 특히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참형(斬刑;목을 베는 형벌)에 처하도록 했습니다. 과거 조선시대 대왕 실록에 의하면 실제로 부모를 구타하거나 부모에게 욕을 하다가 참수형에 처한 사례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 부모를 구타하거나 욕하는 행위는 용서 받을 수가 없는 중대한 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오늘 이 시대에 참수형에 처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구타하는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서울시 중고등학생들 547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한 결과 약 1/4에 해당하는 130여명이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가하면 자기 부모를 굶겨서 죽이는 자식들이 있고, 또 자기 부모를 제주도나 해외여행을 시켜 준다고 속여서 데리고 가서는 버리는 천벌을 받을 자식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모는 단지 우릴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위치에 있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부모에게 불효를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로,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신21:18) 둘째로,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이 불효입니다.(겔22:7) 셋째로, 부모를 근심케 하는 것이 불효입니다.(잠17:21,25) 모두 부모님께 효도해서 복을 받아 누리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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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이것이 불효 (신2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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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유다 다대오(Jude Thaddaeus'Behind Stories)-동역의 사도
-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요14:22). 성경에 유다란 이름을 가진 자가 많으나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은 세 명이었다. 첫째, 예수의 동생 유다이다. “이는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마13:55). 그는 초기에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았다. 예수님과 한 형제이지만, 같은 배에서 나왔으나 씨가 다른 형제였다. 그가 어린 시절에는 형 예수에 대해 잘 몰랐다. 그래서 예수님이 공생애를 위해 집을 나갔을 때 많은 박해를 했다. 그러다가 부활하신 후에 형 예수가 메시야이심을 믿었고 비록 사도는 아니었지만 명분상 사도적 반열에 참여하여 예수가 메시야라는 언약의 복음 유다서를 기록했다. 둘째, 예수를 판 가룟 유다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유다의 이름 앞에 꼭 붙이는 한 단어가 있는데 예수를 판 자 라는 말이다.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마10:4),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막3:19),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눅6:16). 요한은 가룟인 아닌 유다가 라고 하였다(요14:22). 가룟 유다는 이 땅에서 가장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남긴 불행한 자였다. 마지막 셋째, 본문에 나오는 다대오 유다이다. 마태와 마가는 다대오라고 불렀다. 요한은 왜 유다를 가룟이 아닌 유다라고 불렀을까? 신약성경이 쓰여 질 때 예수를 판 가룟 유다 때문에 유다란 치욕스러운 이름이 되어 버렸다. 그 이전 구약에서 유다 이름의 뜻은 찬송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많은 자들이 유다라는 이름으로 불러지기를 좋아했다. 예수님도 유다의 가문을 통해서 오셨다. 그러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이후로 유다란 이름은 치욕스러운 이름이 되어 버렸다. 그 이후로 아무도 유다란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 그 이름을 가진 자들도 가룟 유다와 구별하여 불렀다. 다대오 유다는 시몬과 함께 열심당원이었다. 주님의 고민에 동참한 다대오 주님의 구원사역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그러나 제자들도 주님의 죽으심을 잘 모르고 있다. 그래서 주님은 그의 괴로운 심정의 비밀을 토로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요13:21). 이제 주님이 마지막 십자가 지실 사실을 말씀하셨다. 이것이 너무도 가슴 아픈 심령의 괴로움이었다. 물론 십자가 지는 육체적인 고통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이지만 그보다 더 큰 아픔과 괴로움은 이 사실을 곁에 있는 제자들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일은 외부에서 일어날 일이 아니고 조직 내에서 반역자가 생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개적으로 떠벌려 말하기도 곤란하여 지금까지 미루어 왔던 것이다. 이젠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 이 사실을 말씀하셨다. 할 수 없이 조직 내에 반란자가 있음을 애기했다.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 이는 제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삼년 동안 훈련하여 준비해 왔는데 그것도 외부에서가 아닌 조직 내에서 반동분자가 일어났다는 사실은 앞으로 조직의 붕괴마저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떠나가는 것도 문제이지만 자신이 떠난 이후 제자들이 서로 분쟁하여 붕괴될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이 더욱 가슴 아픈 일이었다. 이것은 제자들 상호간에 불신을 조장하는 공동체의 마비현상이 생길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요13:22). 당장에 이 같은 징조가 나타나고 있다. 그때 성미 급한 베드로가 단호하게 말했다.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요13:24). 그는 분노하여 누가 감히 그런 일을 꾸미느냐 하고 분개했다. 그때 가룟 유다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내가 떡 한 조작을 적셔서 주는 자가 그니라”고 하시면서 가룟 유다에게 주셨다. 유다는 그때가 회개 할 절호의 기회였으나 오히려 괴심한 생각을 품어 주님을 팔 생각을 했다. 그때 사단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곳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요13:27). 유다는 그 조각을 받고 나간 그날이 영원한 밤이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요13:30). 다대오 유다는 이 같은 주님의 아픈 마음을 다 헤아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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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권철 목사] 유다 다대오(Jude Thaddaeus'Behind Stories)-동역의 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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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큐티[황권철 목사] 전도에 불을 붙이라
- 교회는 전도함으로 존재한다 호주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소녀가 골수염으로 두 다리를 자르게 되었는데 병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손으로 옮겨져 두 손까지 자르게 되었다. 겨우 생명은 건졌으나 죽은 사람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두 팔과 두 다리를 잃어 몸통만 남게 된 그는 남의 도움이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죽고 싶으나 죽을 수도 없었다. 이 세상에서 이보다 더 비참한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 소녀가 복음을 받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후 새로운 생명력이 움트기 시작했다. 생명이 있는 동안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전도편지를 쓰기로 결심했다. 그 날부터 그녀는 팔뚝에 연필을 매어 글쓰기를 연습했다. 피나는 연습 끝에 누워서 편지 쓰는 법을 배웠다. 그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시작으로 감사편지를 쓰게 되었다. 교회에 출석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예배에 참석하도록 복음편지를 썼다. 온 몸을 다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쓴 편지에 감동받은 수많은 영혼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왔다. 오늘은 마가복음 6장을 함께 읽고 묵상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본문은 주님이 하신 갈릴리갈릴리 전도사역을 통해서 사명자의 전도훈련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특별히 본문은 다양한 삶의 환경에서 전도자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고향에서 선지자의 사명 예수님이 자신의 고향인 나사렛에 갔다. 이전에 자신을 잡아가려 하던 자들이 이젠 많이 변한 것 같다. 아마 버린 자식으로 체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때 주님을 따랐던 열두 제자들도 동행했다. 어찌 보면 이들은 패거리 건달과 비슷했다. 이들이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바로 그곳에는 그의 친동생들과 나사렛 주변 사람들이 와 있어 그의 가르침과 권능을 보고 심히 놀랐다. 그때 그 동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바로 목수 집안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 동생들이 지금 우리와 함께 있는데 어디서 저런 권능을 행하느냐고 했다. 그때 주님이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선지자가 고향과 친척과 자기 집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왜 선지자가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가? 첫째, 혈통적인 뿌리 때문이다. 고향이란 핏줄로 얽혀진 공동체이다. 나의 핏줄이고 집안이고 친척이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선지자를 나와 동일시함으로 존경심이 사라진다. 그래서 주님은 구원이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둘째,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전통이 강하게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강하다. 변화를 통해서 그 동안 쌓아 놓은 기득권을 상실하기 때문에 수하에 어리고 젊은 자를 선지자로 모신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다. 셋째, 유대의 율법적인 전통 때문이다. 유대 사회에서 율법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일은 서기관이나 율법학자들의 몫으로만 알았다. 그런데 예수가 성전에서 율법을 가르치는데 그 권능이 서기관들과 비교할 수 없으니 주님을 더욱 시기했다. 그래서 주님은 그곳을 떠나 갈릴리 여러 촌으로 두루 다니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기억할 사실이 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하는 것처럼 가정의 복음화가 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자에게 가장 큰 선물로 주신 것이 가정 구원의 사명이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세상을 향한 전도의 사명 주님은 제자들을 불러서 둘씩 둘씩 전도하러 보냈다. 먼저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들린 자를 내어 쫓는 권세를 주셨다. 우리는 영혼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복음을 들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 우리 시대에도 그러하지만 주님이 오셨던 그 시대에는 특별히 더러운 귀신 들린 자들이 너무 많았다. 메시야가 직접 이 땅에 오셨으니 사단 권세가 발악했다. 그래서 주님은 가는 곳마다 귀신 들린 자들을 온전케 하셨다. 그러면서 주님은 전도자가 금해야 할 몇 가지를 당부했다. 양식과 돈, 그리고 두벌 옷이다. 이것은 나그네에게 의식주의 대용품으로 여행자로서 반드시 지참해야 할 최소한의 생활필수품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금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도자는 이미 주님께 부름 받은 자로서 소속과 신분이 다른 자이다. 하나님은 구약에 레위 지파에게 땅의 기업을 주지 않았다. 군사로 부름을 받은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적절히 공급해 주신다. 바울은 전도 여행을 통해서 수 없이 많은 이 같은 사례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면 전도자가 명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하여는 마태가 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어떤 성이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할 것이요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 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첫째, 성에서 복음의 합당한 자를 찾는 일이다. 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지만 충성된 사명자가 있다. 전도자는 충성된 청지기를 먼저 찾아야 한다. 둘째, 어느 집이나 성으로 들어가면서 먼저 평안을 빌라. 그들이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면 은혜를 입어서 다시 베풀 것이요 거절하면 그 평안이 자신에게로 돌아와 성령의 도우시는 위로를 받게 된다. 셋째, 거절할 때는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라. 그 성이나 집이 복음을 받지 않으면 그 곳을 떠날 때 발에 먼지를 떨어버려 심판 때에 증거를 삼으라고 했다. 주님은 전도자가 금해야 할 몇 가지를 당부했다. 양식과 돈, 그리고 두벌 옷이다. 이것은 나그네에게 의식주의 대용품으로 여행자로서 반드시 지참해야 할 최소한의 생활필수품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것을 금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전도자는 이미 주님께 부름 받은 자로서 소속과 신분이 다른 자이다. 하나님은 구약에 레위 지파에게 땅의 기업을 주지 않았다. 군사로 부름을 받은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적절히 공급해 주신다. 바울은 전도 여행을 통해서 수 없이 많은 이 같은 사례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면 전도자가 명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여기에 대하여는 마태가 보다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마10:11-14) 첫째, 성에서 복음의 합당한 자를 찾는 일이다. 다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지만 충성된 사명자가 있다. 전도자는 충성된 청지기를 먼저 찾아야 한다. 둘째, 어느 집이나 성으로 들어가면서 먼저 평안을 빌라. 그들이 그것을 받기에 합당하면 은혜를 입어서 다시 베풀 것이요 거절하면 그 평안이 자신에게로 돌아와 성령의 도우시는 위로를 받게 된다. 셋째, 거절할 때는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라. 그 성이나 집이 복음을 받지 않으면 그 곳을 떠날 때 발에 먼지를 떨어버려 심판 때에 증거를 삼으라고 했다. 악한 세력 앞에서 순교의 사명 주님이 갈릴리 각 지역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며 능력을 행하시니 헤롯 왕가에 이상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서 왔다고 했다. 이 사실이 헤롯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래서 헤롯은 필요 이상의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헤롯이 듣고 이르되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 이것이 범죄한 죄인에게 고발하는 선한 양심의 소리이다. 세례 요한은 비록 짧게 살고 비참한 죽음을 죽었으나 가장 값지고 고귀한 삶을 살았다. 우리는 순교자 세례 요한을 통해서 전도자의 사명을 배우게 된다. 첫째, 그는 광야의 소리로 살았다. 그는 당시 세속적으로 누릴 수 있는 아주 좋은 가문에 태어나 출세할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을 타고났다. 그러나 그는 지명예루살렘예루살렘 성과 성전과 율법적인 권위를 버리고 광야의 소리로 복음을 위해 이슬로 사라졌다. 둘째,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다. 광야는 도시와 같이 길이 있는 곳이 아니다. 누가 만들기 전에는 걸어갈 수 없는 너무도 불편한 곳이다. 그는 주님을 위하여 친히 이 길을 닦았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헤롯 왕들은 주님의 길을 막는 세력들이다. 이런 자들과 싸워서 주님의 길을 평탄케 하셨다. 셋째, 그는 주님만이 흥하기를 소원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 한 마디가 세례 요한의 신앙과 생활의 고백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사명자로 세례 요한의 고백을 배워서 우리도 이런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양 무리를 위한 긍휼의 사명 먼저 제자들은 전도의 현장에서 돌아와 주님께 사역의 보고를 한다. 보고를 받고 주님은 얼마간 쉼을 얻기 위해서 한적한 곳으로 가게 했다. 그런데 무리들이 먼저 알고 모든 고을에서 걸어서 앞서 가셨다. 주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오병이어로 장정만 오천 명을 먹였다. 이 사건은 너무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복음서 기자가 한 분도 빠트림이 없이 다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한 영적 비밀한 계시가 무엇인가? 이 사건이 구원사역에서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첫째, 무리를 불쌍히 여기는 목자의 마음이다. 주님은 이들의 영적 목마름을 보셨다.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들이라고 했다. 헤롯이나 가이사 황제나 당시 대제사장들은 그들의 진정한 목자가 아니다. 그들은 양 무리의 피를 빨아먹는 이리와 같은 자들이다. 주님은 그들의 목자로 오셔서 그들만이 먹을 수 있는 비유로 천국의 비밀을 말씀해 주셨다. 둘째, 오병이어의 헌신이다. 이를 주님에게로 가져온 자는 어른도 아닌 어린 아이였다. 그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고 질병에서 치유함을 받았으나 정작 주님이 요구하실 때 헌신하는 무리는 없었다. 이 소년이 바친 오병이어는 그가 받은 은혜일뿐 아니라 그의 신앙고백이었다. 자신의 손에서는 오병이어이지만 주님의 손에서는 200데나리온 보다 더 풍성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셋째, 온전한 순종이다. 때가 저물고 빈들이라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나가면 반드시 기적은 일어난다. 오병이어를 주님에게 가져간 제자는 계산에 능한 빌립이 아니라 어리석게 보이는 안드레였다. 사역자의 제일가는 사명은 온전한 순종이다. 마지막 넷째, 다 배불리 먹이심이다. 주님이 베푼 잔치에는 모자람이 없다. 연회장에 준비된 가나 혼인잔치에는 포도주가 떨어졌으나 주님이 계신 곳에는 넉넉함이 있다. 모든 무리가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작이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셨다. ‘다’ 배불리 먹고, ‘남은’ 떡 조각과, 바구니에 ‘차게’거두었으며 라고 하심은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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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큐티[황권철 목사] 전도에 불을 붙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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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주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
- 또 산에 오르사 주님은 구원역사를 위해서 어떤 구체적인 방법을 사용하셨는가? 주님은 지상교회를 세우시고 가장 본질적인 목양 사역으로서 제자훈련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다.(막3:13-16) 그렇다면 제자훈련의 목적은 무엇인가? 첫째, 자신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제자훈련은 지식을 전달하는 단순한 학습훈련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변화를 주는 인격적 사역훈련이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과 같이 있으면서 24시간 주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대로 보고 생활 속에서 삶을 배우는 인격훈련이었다. 세인들처럼 삶을 베일에 가려 놓고 교안만 가져와서 세미나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생활하면서 앞장서서 본을 보이는 모범적인 삶이었다. 둘째, 세상을 향한 파송이다. 오늘날 교회는 부르는 초청에는 관심이 많으나 세상을 향해 내어 보내는 파송에는 너무도 인색하다. 이제 우리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처 땅 끝까지 가야 한다. 목숨을 요구하는 사역의 현장에라도 가야한다. 이것이 전도자의 사명이다. 주님은 하늘보좌를 버리고 이곳까지 오셨다. 셋째, 귀신들을 내어 좇는 권세이다. 주님은 우리를 보내실 때에 거저 보내지 않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주어서 보내셨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주님은 우리에게 사단의 권세를 제압하는 능력을 주어서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자로 나아가면 사단의 권세가 우리 앞에 굴복하게 된다. 집에 들어가시니 마지막으로 이제 주님은 하산하여 어느 집으로 들어가셨다. 주님이 어디를 가든지 가는 곳마다 무리들이 모여 들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들은 주님을 체포하러 온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은 다름 아닌 주님의 친족들이다. 이들은 주님을 알기로 가정을 버리고 방랑자처럼 떠돌아다니는 미친 자로 알았다. 사실 주님의 구원사역이 얼마나 외롭고 고달픈 길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사명자의 길은 이처럼 외로운 것이다. 주님이 전도현장에서 받은 몇 가지 아픔들은 어떠했는가? 첫째, 무리들에 의한 쉼 없는 사역이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식사할 틈이 없을 정도로 분주한 사역이니 한 순간도 쉴 틈이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제자로서 목양 사역에 수종을 들다보면 때로는 밤과 낮의 구분이 안 될 때가 많다. 둘째, 친족들에 대한 오해와 불신이다.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막3:21)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 그리고 가까운 친척들이 주님을 데리려 왔다.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난 때 집안의 장남인 주님이 공생애 사역으로 전도하려 나오니 이를 이해하지 못한 동생들과 친족들이 예수를 미쳤다고 오해했다. 그러나 주님은 거룩한 구원사역을 혈육의 정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다. 셋째, 성령을 훼방하는 사역이다. 주님이 이 본문에서 말씀하신 성령 훼방 죄가 무엇인가? 지금 더러운 귀신이 주님을 보는 순간에 무릎을 꿇고 항복을 하면서 하나님의 아들 됨을 고백하고 떠나간다. 그런데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도 잘 아는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고 사단의 사역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거룩한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므로 이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죄악이라고 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런 서기관들의 잘못이 우리의 마음에 도사리고 있을 때가 많다. 아무리 하나님의 아름답고 큰 역사라도 나와 좋은 관계에 있지 아니한 자가 행한 것이면 비판하고 정죄하여 사단의 역사로 몰아붙이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훼방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지체와 동역자들의 거룩한 사역을 칭찬하고 격려하고 협력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 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의 형제와 자매 본 문단은 앞 문단과 연결되어 있다. 20-21절에서 예수의 가족이 등장한다. 그들은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들 듣고 예수를 잡으러 가버나움으로 향했다. 예수를 오해한 혈통적인 가족들이 서기관과 바알세불 논쟁을 벌이고 있는 현장에 나타났다. 그때 무리들 중에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당신을 찾는다고 했다. 주님은 자신을 찾는 가족들을 향해 참 가족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어떤 분이 가족이란 영어 단어 이니셜을 따서 이렇게 풀이 했다. “아빠 엄마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성경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주님은 구약의 율법을 사랑이란 새 계명 하나로 다 이루셨다. 십자가는 사랑의 결정체이다. 주님은 십자가라는 고통의 쓴 잔을 앞에 높고 자신의 의지가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소원했다. 저자의 허락에 의해 일부 요약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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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주님은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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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예수를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라
- 미국 하버드대학교 폴 케네디교수는 “한국이 21세기의 세계 중심국가가 될 수밖에 없는 5가지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첫째, 한의 문화이다. 한 민족은 5천년 역사 속에서 수많은 외침으로 고통을 당해왔다. 그래서 민족의 저변에 한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한이 1919년 3월 1일 태극기로 독립만세운동을 하게 했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배후에 촛불혁명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둘째, 가족 문화이다. 가족 중심의 정문화가 감수성에 예민한 민족으로 만들었다. 특별히 어머니 품에서 모유를 먹고 자란 세대는 감성이 풍부하다. 21세기를 감성의 시대라고 말한다. 이런 때 한민족의 효 문화가 세계 열방을 선도할 강점이 되었다. 셋째, 엘리트 의식이다. 한 민족은 어떤 민족보다 자부심이 강한 민족이다. 이런 자부심이 하나의 긍정적인 목적으로 작용할 때 놀라운 힘을 발휘하게 된다. 넷째, 모험정신이다. 적극적인 모험정신은 어떤 일이든 신속하게 해 낼 수 있는 최고의 경쟁력이다. 마지막 다섯째, 단일민족의 정체성이다. 단일민족 단일 언어로 뭉쳐진 공동체의 저력은 다이나믹한 폭발력을 발휘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폐쇄적일 수도 있으나 이를 긍정적인 목적을 향해 나아갈 때 쉽게 공감대를 형성하므로 폭발적인 에너지를 결집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오늘은 마가복음 2장의 말씀을 함께 나누면서 은혜를 받고자 한다. 예수님은 모든 인생의 주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 고장 난 인생이 새롭게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난다. 우리에게도 이런 변화가 일어나길 바란다. 예수를 만나면 모든 문제에서 해결을 받는다. 인간은 사고뭉치이다. 중풍병자가 예수를 만남으로 참 자유를 얻었다. 마태는 세관에서 돈으로 얻을 수 없었던 참 평안을 예수를 만남으로 누렸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얽매여 억지 금식을 했으나 주님은 그들에게 금식을 통한 참된 기쁨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음을 보고 정죄한 바리새인들에게 참 안식이 무엇인지도 가르쳐 주셨다. 가버나움의 중풍병자 본문 1절에서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고 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서북 지역의 해변가에 있는 마을이다. “수 일 후에”라고 하심은 성구막 1:21막 1:21절에서 예수님이 안식일에 가버나움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가르치시고 동네에서 복음을 전한 후 갈릴리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전도했다. 그러다가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갔던 때가 다음 안식일이 이르기 전이었다. 주님이 가버나움에 온 이후로 온 동네에 대 소동이 일어났다. 열병으로 앓아 누었던 자가 일어나고, 귀신들린 자들이 온전해지고, 각색 병든 자가 와서 많은 사람이 고침을 받았다. 소문을 들은 온 동네 사람들이 주님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때 주님이 다시 오시자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그때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다. 이런 상황에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를 달아 내렸다. 그때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다. 우리는 중풍병자를 데리고 주님에게로 나온 그들의 믿음을 배워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어떤 믿음을 가졌는가? 첫째,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다. 그들은 주님이 일차 가버나움을 다녀간 이후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주님이 오셨고 그들은 병자를 침상에 메고 주님을 만나러 왔다. 오늘날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이와 같이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둘째, 불가능한 환경 앞에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이 중풍병자를 매고 가는 사이에 벌써 사람들이 먼저 와서 꽉 들어 차 있어 문 앞까지 들어 설 틈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이런 불가능한 환경 앞에 뒤로 물러서거나 포기하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셋째, 적극적으로 길을 찾는 것이다. 동서사방으로 다 막혀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구멍을 내어 환자를 달아 내리기로 했다. 매사에 적극적으로 임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길이 열린다. 넷째, 지붕에 구멍을 뚫는 일이다. 사실 이 일은 아주 심각한 사건이다. 우선 남의 재산권을 침해하고 가옥을 파괴하는 범죄행위가 될 수 있는 일이다. 만일 위험한 사태가 발생하면 구속도 될 수 있는 엄청난 위험부담까지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중풍환자를 주님에게로 지명인도인도하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고자 하는 온전히 헌신된 마음이 있었다. 우리가 영혼구원을 위해서 이런 헌신과 희생을 한다면 어떤 중풍병자라도 주님에게로 지명인도인도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들의 혼연일체 된 마음이다. 그들이 지붕으로 올라갈 때도 그러했지만 최후의 순간 환자를 주님 앞으로 달아 내릴 때는 한 순간의 방심도 용납할 수 없는 초긴장 된 순간이었다. 이렇게 해서 중풍환자가 주님 앞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주님은 바로 그들이 가진 이런 믿음의 행위를 보셨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이런 중풍병자가 많이 있다. 제 발로 걸어서 주님 앞으로 나아올 수 없는 자들은 다 영적 중풍병자이다. 이들을 위해 공동체가 합동작전을 해야 한다. 땀 흘리는 수고와 함께 물질적인 헌신도 감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중풍병자를 말씀 앞으로 지명인도인도할 수 있다. 중풍병자는 주님을 만나는 순간 죄에서 자유 함을 얻고, 질병에서 고침을 받아 예수를 그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변화된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세리 마태 집에서 주님은 다시 갈릴리 바닷가로 나갔다. 가버나움에서 세관을 지나가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니 그는 즉시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다. 나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가정과 직장을 한 순간에 버리고 온전히 주님을 따를 수 있었을까? 우리는 이런 사건의 배후에 숨겨진 사실들을 알아야 한다. 본문 14절에 “알패오의 아들 레위”란 말씀에 주목해 보라 알패오란 분이 그의 아들의 이름을 「레위」라고 지었다. 레위는 자라서 그 이름에 어울리지 않은 세관에 앉아 사역하면서 그 마음에 수많은 영적 고민과 갈등을 겪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레위란 “하나님과 연합”이란 뜻이다. 알패오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레위라 지었을 때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쓰임받기를 원해서 그런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레위는 세관에 앉은 세리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은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으므로 세리는 로마 권력의 하수인 노릇하는 매국 행위를 행하므로 창기보다 더 추한 직업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알패오와 그 아들 레위의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다. 그래서 레위는 언제든지 때가 되면 이 직업에서 떠날 것을 생각하고 있던 차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래서 레위는 미련 없이 세관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그와 그 아버지 알패오는 너무도 감사하여 주님을 청하여 식사를 대접했다. 이를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증오하여 주님이 죄인과 같이 식사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 이때 주님은 복음의 놀라운 비밀을 가르쳐 주셨다. 첫째, 나는 죄인의 구주로 이 땅에 왔다고 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주님은 세관에서 하나님과 연합하기를 소원하는 자를 부르기 위해서 오셨다. 세리와 창기와 같은 죄인들의 구주로 오셨다. 둘째, 기쁨과 감격을 주기 위한 혼인집 신랑으로 오셨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동안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는 금식이 필요 없다. 주님은 율법적 제약에 얽매여 있는 부자유한 신부들에게 참 자유를 주기 위해 오신 복음의 신랑이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서 신랑을 빼앗기는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이 공중 권세 잡은 자가 득세하는 이 세상의 모습이다. 이때는 금식하지 않을 수 없다. 금식의 능력으로 흉악한 결박을 풀어서 승리해야 한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주중에 2일 이상 규칙적으로 금식했다. 그러나 신랑과 함께 하는 혼인집에 가면 이런 금식의 법에서 자유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축제의 자유를 준 영적 신랑이다. 셋째, 새 가죽부대에 담긴 새 포도주로 오셨다.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당시 바리새인들이 붙들고 있는 장로들의 유전이나 랍비적인 전통은 생명력이 없으므로 변화에 신축성이 없는 묵은 포도주와 낡은 가죽부대와 같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지명그리스의 복음은 생명력을 가진 운동하는 신축성이 있는 새 가죽부대와 새 포도주였다. 주님은 죄인의 구주로 오셨다. 죄로 인하여 병든 인생은 영적 대 의사 되신 주님 앞에 나와서 고침을 받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신랑 되신 주님을 만난 감격의 기쁨으로 축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생베 조각의 복음적인 가치를 낡은 구습과 전통에 붙여서는 안 된다. 새 술은 새 가죽부대에 넣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지명그리스의 생명의 복음은 어떤 언어와 문화적인 삶도 극복해 갈 수 있다. 안식일에 밀밭 가에서 안식일에 주님과 제자들이 길을 갔다. 분주하게 서두르다 보니 식사 할 때를 놓친 것 같다. 시장한 그들은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가 밀 이삭을 손으로 잘라먹었다. 이것이 용케도 바리새인의 렌즈에 잡혔다. 요즘 같으면 그들이 신문지상에 대서특필해서 보도 했을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안식을 범했다는 주장이다. 그들은 이렇게 비약해서 말씀하고 있다. 밀 이삭을 손으로 자르는 것은 추수하는 행위이며, 그 이삭을 손바닥으로 비비는 것은 정미소에서 방아 찢는 것이며, 껍질을 날리기 위해서 입으로 분 것은 타작마당에서 가라지를 날리는 키질행위라고 했다. 이 같은 일은 당시 안식일에는 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주님은 다윗이 대제사장 아비아달의 집에서 행했던 것을 말씀하셨다. 아비아달은 사울 왕에게 쫓겨 온 다윗에게 베풀 항용 떡이 없음을 보고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 떡을 주어 먹게 했다. 우리는 여기에서 주님은 안식을 어떻게 지켰는가를 알아야 한다. 첫째,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일을 하셨다. 구약의 율법에서는 안식일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소극적인 금지법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안식일에 적극적으로 회당과 동네를 다니면서 천국 복음을 전파했다. 둘째, 안식의 근본정신은 사람을 위함이다.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하나님이 창조질서에서 안식일을 주신 것은 인간에게 참된 쉼을 주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안식은 철저히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사람이 없다고 하면 안식일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셋째, 그런데 그 안식일에 주인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 지명그리스이다.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날을 어떻게 지키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행위인가? 주님이 기뻐하는 일을 해야 한다. 주님은 은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죄와 사망권세에서 구원하기 위해 전도하러 오셨다. 그래서 주님은 복음전도를 위해 행하신 제자들의 행위를 정죄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농부가 추수할 때 밭이랑에 이삭 얼마를 남겨 두어 길가는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의 양식이 되게 하셨다. 주님은 친히 금식하여 주려 죽는 아픔을 체휼해 보았으므로 배고픈 자들의 아픔을 다 헤아리고 계신다. 우리는 안식일을 유대 지명유대인 전통을 계승하는 소극적인 금지법을 따를 것이 아니라 안식일에 주인 되신 주님이 기뻐하시는 전도자의 삶을 사는 복음전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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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큐티[황권철 목사] 예수를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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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놀라운 감사 (합3:16-19)
- KBS TV에서 방영되는 <생로병사의 비밀>이라는 프로가 있는데 건강 상식에 관한 의학정보를 다루고 있는데 매우 유익한 내용입니다. 그 방송 내용 중에 “100세 인생 건강관리 방법”이라는 내용을 관심 있게 시청을 했습니다. 100세까지 건강을 유지할 수 잇는 방법 주에 첫째는, 규칙적인 생활 둘째는, 긍정적인 마음 셋째는, 적당한 운동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두 번째로 말한 긍정적인 마음이란 감사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감사는 행복의 문을 여는 열쇠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행복해지고 싶으면 감사의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에는 마귀가 불행의 씨를 뿌리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비록 불행한 일이 닥쳐왔어도 감사하는 말을 계속할 때 불행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물러가게 됩니다. 모든 최상의 조건 속에서 살아도 불평하는 사람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좋은 형편이 아니어도 감사하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북한에 억류되었던 캐나다에서 이민목회를 하시던 임현수목사님이 949일 만에 석방이 되어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곳에서의 억류생활을 한 마디로 최악의 상황이었고 북한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돕다가 강제로 억류되었기 때문에 억울함과 배신감이 컸습니다. 언제 풀려날 수 있을는지 기약이 없는 캄캄한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곳에서 매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날마다 감사했습니다. 그 결과 949일 만에 석방되어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감사는 불행이 물러가게 하고 기적을 불러옵니다. 행복한 사람들의 비밀은 긍정적인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많은 것을 가졌어도 불평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작은 것을 인하여도 감사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박국>선지자가 놀라운 감사의 사람인 까닭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고통 중에 감사했기 때문입니다.(16) 둘째는 없는 중에 감사했기 때문입니다.(17) 셋째는 소망 중에 감사했기 때문입니다.(19) 감사가 식어져 가는 이 시대에 감사하므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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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놀라운 감사 (합3: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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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음주의 결과 (잠23:29-35)
- 우리나라의 <진로>라는 회사에서 <참이슬>이라는 소주를 출시한지 10주년 만에 무려 140억병이 팔렸다고 합니다. 이를 구체적으로 계산을 하자면, 한 달에 1억1천7백만 병이 팔렸고, 하루에 384만병이 팔렸고, 1초에 44병씩 팔리고 있습니다. 어른 한 명당 400병씩을 마신 것이고, 그 소주병을 한 줄로 깔아놓으면 서울 부산을 무려 3,516번을 왕복할 수 있는 길이가 됩니다. 세계에서 술 소비 1위 국가답게 참으로 엄청난 량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술을 너무 많이 마시고, 또 술을 마시되 1차, 2차, 3차를 거치면서 인사불성이 되도록 취해서 혀가 꼬부라질 때까지 마시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나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되어야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국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셔대니까 당연히 세계에서 술 소비량이 1등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가리켜서 <음주공화국>이라고 합니다. 도시마다 길거리에 어둠이 덮이고 나면 술 취해서 비틀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너무나 흔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전국적으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인사불성이 되어서 비틀거리는 모습을 너무나 흔하게 볼 수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사는 동안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전혀 볼 수가 없어서 너무나 좋았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술을 마시더라도 신사적으로 마시고, 적당하게 마시고, 마시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실례나 부담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런 좋은 음주문화를 본받을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술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져야 하고, 술을 자제하고 거부할 줄 아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음주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첫째는, 음주는 성경이 금지하고 있습니다.(잠23:31,32) 둘째는, 음주는 실수의 원인이 됩니다.(창9:20,21) 셋째는, 음주는 반드시 패망을 초래합니다.(사5:11,22) 그러므로 술에 대한 바른 인식을 가지고 절대 술을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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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음주의 결과 (잠23:2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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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비방의 함정 (민12:1-10)
-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서 초고속 인터넷 최강국이라고 합니다. 독서량은 세계에서 꼴찌이지만 인터넷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강국입니다. 이런 인터넷 강국이라는 이면에 심각한 부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인터넷 상에 악플(악성 댓글)이 넘쳐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근거가 없거나 사실성이 없는 악성 댓글이 인터넷을 타고 수많은 사람들에게로 전달이 되고 있습니다. 그 악성 댓글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정부차원에서 그런 악성 댓글을 차단시키기 위해서 두 가지 새로운 법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인터넷에 댓글을 달 때는 반드시 실명제로 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근거가 없는 악성 댓글을 다는 사람들은 법적으로 형사처벌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법이 제정되면 아무래도 악성 댓글을 함부로 달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법이 기각되고 말았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반드시 실명제로 댓글을 달아야 한다는 것과 악성 댓글을 다는 사람에 대해서 형사 처벌하는 것을 찬성하는 입장입니다. 함부로 악성 댓글을 유포시키는 행위는 일종의 남을 비방하는 것인데 나쁜 것입니다.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로 인터넷 상에서 남을 비방하는 것은 정말 비열한 행동입니다. 그런 악성 댓글을 달거나 비방하는 것 때문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상처를 받고 있고, 또 심지어는 정신적인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서 목숨을 끊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할 말이 있으면 합법적으로 떳떳하게 해야지 뒤에 숨어서 남을 비방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남을 비방하는지, 그리고 남을 비방할 때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지에 대해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비방은 시기심에서 비롯됩니다.(1-2) 둘째로, 비방은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1-2) 셋째로, 비방하면 반드시 징계하십니다.(9-10) 비방과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시대에 선한 삶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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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비방의 함정 (민1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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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분노의 감정 (갈5:19-24)
- 독일의 <히틀러>는 머리가 명석하고 관찰력이 깊고 예리한 판단력과 비상한 통치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비해서 그는 화를 잘 내고 분노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비위를 약간만 건드려도 화를 내고 분노를 폭발하는 마치 화약고와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부하들이 상황 보고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그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것도 바로 그의 그런 성격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연합군이 <노르망디>작전을 감행할 때 그는 마침 낮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부하들이 연합군의 <노르망디>상륙을 감행하는 것을 감지를 했지만 그에게 상황을 보고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낮잠을 잘 때는 그 누구도 그를 깨우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만약 낮잠을 자고 있는 데 깨우게 되면 예외 없이 분노를 폭발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지는 과격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부하들이 그를 깨울 수가 없었고 전시상황 보고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는 이미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완전히 상륙을 해서 진지를 구축한 뒤였습니다. 아무리 두뇌가 명석하고 예리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파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기의 감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성(城)을 지키는 용사보다 더 낫다"고 했습니다. 분노의 감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분노와 혈기를 잘 다스리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성공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분노가 어떤 것이며, 분노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째로 분노는 명백한 육체의 일입니다.(갈5:19,20) 둘째로, 분노는 성령을 근심되게 합니다.(엡4:30,31) 셋째로, 분노는 서둘러 해소해야 합니다.(엡4:26,27) 요즘은 사회적으로 분노 조절장애로 여길 만큼 분노의 감정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분노의 감정을 잘 해소하므로 유익한 인생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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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분노의 감정 (갈5: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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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방탕의 손실 (눅21:34-36)
- 한때 우리나라에 <아침형 인간>이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너도나도 아침형 인간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에 반대되는 <저녁형 인간> 예찬론자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저녁형 인간이란, 낮과 밤을 바꾸어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낮과 밤을 바꾸어서 생활을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사는 것이 정상적인 것 같이 여겨지고 있습니다. 밤 열두시가 초저녁인 것처럼 생활을 하고, 낮 열두시가 한 밤중인 것처럼 생활을 하는 이런 저녁형 인간에 대해서 도덕주의자들은 비판을 감추지 않고 있습니다. 도덕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성경적으로 볼 때도 저녁형 인간의 삶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고대 로마 제국은 밤거리가 화려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저녁마다 술집과 도박장이 초만원을 이루었고, 밤마다 홍등가(紅燈街)에는 환락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로마제국은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저녁형 인간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문화가 바뀌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고 주장을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창조 질서에 맞지 않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변하고 문화가 바뀌었어도 인간은 창조 질서에 순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창조질서에 역행하면서 사는 것이 바로 방탕한 생활입니다. 창조질서를 역행하면서 방탕한 생활을 할 때 우리의 삶에 많은 부작용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방탕한 삶을 살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창조질서에 역행하는 온갖 문화가 우리를 방탕한 삶으로 유혹을 하고 있습니다. 방탕한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첫째는, 방탕하면 마음이 둔하여집니다.(눅21:34) 둘째는, 방탕하면 감각이 둔하여집니다.(엡4:19) 셋째는, 방탕하면 생활이 궁핍해집니다.(눅15:13) 방탕한 삶으로 유혹하는 이 시대에 더욱 창조질서에 순응하며 거룩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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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방탕의 손실 (눅21:3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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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방심은 금물 (창33:10-20)
-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려서 이륙을 하는 데는 3분이 걸리고, 목적지에 도착을 해서 활주로에 착륙을 하는 데는 8분의 시간이 걸립니다. 이 시간을 가리켜서 마(魔)의 11분이라고 하는데, 조종사들이 가장 긴장을 하는 시간이 바로 그 마(魔)의 11분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항공기 사고의 약 75%가 그 마의 11분대에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조종사들이 그 시간에 긴장을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조종사들만 그 시간에 긴장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일반 승객들도 그 시간에는 긴장을 합니다. 비행기를 이용할 때 조종사가 얼마나 노련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비행기가 활주로에 착륙할 때 알아 볼 수가 있습니다. 초보자의 경우는 비행기가 활주로에 착륙할 때 동체가 요란하게 흔들리고 소음이 심하게 나고 사고가 날까봐 불안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노련한 조종사의 경우는 동체 흔들림이 거의 없고 소음도 별로 없고 아주 자연스럽게 착륙을 합니다. 비행기 조종사들은 마(魔)의 11분때에 긴장을 하지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는 평생이 마(魔)의 시간이기 때문에 한 순간도 긴장을 풀거나 방심할 수가 없습니다. 영적으로 긴장이 풀리고 방심하면 사단 마귀는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우리를 유혹하거나 공격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그 순간까지 방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 때 하나님을 잘 믿었던 사람들이 방심하다가 사단의 쳐 놓은 올무에 걸려서 넘어진 경우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신앙생활에 영원한 천하장사(天下壯士)는 없습니다. 방심하면 다 넘어지게 됩니다. 오늘은 우리가 신앙생활에 왜 방심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방심하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방심하면 곁길로 가게 됩니다.(창33:13-14) 둘째로, 방심하면 실패를 하게 됩니다.(수7:3-5) 셋째로, 방심하면 결국이 비참합니다.(삿8:33-35) 마지막이 아름다우려면 방심하지 말고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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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방심은 금물 (창33: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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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타협의 내용 (출8:25-32)
- 미국이라는 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첨단 과학과 산업문명을 달리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 미국에서 모든 현대문명을 거부한 채로 300년 전 생활상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가리켜서 <아미쉬>사람들이라고 합니다. 미국에는 약 18만 명의 <아미쉬>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자동차, 전화, 컴퓨터, TV, 라디오, 신문 등 모든 과학 문명의 이기를 멀리한 채로 농사를 지으면서 자연과 더불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의 모습 속에서 현대문명의 모습은 일체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교통수단으로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 옛날 마차를 타고 다니거나 아니면 걸어서 다닙니다. 농사를 지을 때도 트랙터나 발달된 첨단 농기구를 일체 사용하지 않고 멍에를 맨 말이 끄는 쟁기로 밭을 일굽니다. 남자들의 복장은 검정색 양복을 입고 턱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이고, 여자들은 짙은 자주색 원피스 차림에 쪽진 머리 모양을 하고 그 위에 하얀 스카프를 두르고 다닙니다. 음식은 순수 무공해 유기농자연식을 먹습니다. 그 <아미쉬>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둘러보면서 제 마음에 강하게 와 닿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쉽게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세상과 타협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미쉬>사람들처럼 모든 현대 문명을 거부하는 정도 까지는 아닐지라도 죄악이 관영한 세상과 분리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성도들이 지향해야 할 삶은 세속화 되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악한 사단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실패하게 하기 위해서 가장 흔하고 쉽게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타협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타협하다보면 결국 신앙생활을 실패하게 됩니다. 첫째로, 편하게 믿으라고 타협합니다.(출8:25) 둘째로, 적당히 믿으라고 타협합니다.(출8:28) 셋째로, 형식만 믿으라고 타협합니다.(출10:24) 마귀의 타협에 걸려 넘어지거나 신앙생활을 실패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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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타협의 내용 (출8: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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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험담 부작용 (잠26:20-28)
-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동물의 왕인 사자가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숲속에 살고 있는 모든 동물들이 문병을 왔는데 여우만 오질 않았습니다. 그러자 평소에 여우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늑대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지금이 바로 여우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사자에게 “숲속의 왕이시여, 여우가 문병을 오지 않은 것은 필경 사자님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벌을 내리셔야 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때 마침 여우가 도착을 했습니다. 사자가 크게 노를 발하면서 “네 이놈, 왜 이리 늦었느냐? 네가 나를 무시하는거냐?”하고 호통을 쳤습니다. 그러자 눈치가 빠른 여우가 분위기를 파악하고 꾀를 냈습니다. “예, 제가 이렇게 늦은 것은 우리 사자님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는 약을 알아보느라고 늦었습니다.” 그러자 사자가 “그래, 그 약이 무엇이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우가 “예, 늑대의 가죽을 벗겨서 그것을 뒤집어쓰시면 병이 금방 낫게 된답니다.” 그러자 사자는 앞에 있던 늑대를 잡아서 가죽을 벗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 담겨있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남을 험담하거나 중상모략을 하면 반드시 자기 자신이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남을 칭찬하면 반드시 칭찬이 돌아오게 되고, 내가 남을 험담하면 반드시 험담이 돌아오게 됩니다. 마치 부메랑을 던지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처럼 내 입에서 나간 말은 반드시 내게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남을 중상모략하거나 험담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말을 지나치게 많이 하는 것이나, 험담하는 것이나, 중상모략 하는 것을 삼가라고 말씀합니다. 험담이 가져오는 결과가 나쁘고 부작용이 너무 큽니다. 첫째로, 험담은 다툼을 일으키는 원인입니다.(잠26:20,21) 둘째로, 험담은 비밀을 누설하는 원인입니다.(잠20:19) 셋째로, 험담은 사이를 갈라놓는 원인입니다.(잠16:27,28) 불필요한 말로 인한 공해가 너무 극심한 이 시대에 험담을 줄이도록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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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험담 부작용 (잠26: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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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의심은 금물 (창3:1-8)
-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누구를 의심하거나 누구로부터 의심을 받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누구를 의심하는 것도 괴로운 일이고 누구로부터 의심을 받는 것도 괴로운 일입니다. 고려시대 학습교재로 날려진 명심보감(明心寶鑑)에 보면, “사람을 의심하거든 쓰지를 말고, 사람을 썼거든 의심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을 의심한다는 것은 참 불행한 일입니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의심한다면 아무 것도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가정이 행복하려면 부부간에 의심이 없어야 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의심하면 의처증이 되고, 아내가 남편을 믿지 못하면 의부증이 됩니다. 그렇게 서로를 의심하다 보면 가정이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의심을 하면 서로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불행하게 만듭니다. 대구의 한 여중생은 반 친구들로부터 의심을 받다가 너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뛰어내려서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의심은 인생을 파괴시키는 무서운 마귀의 술책임을 알아야 합니다. 서로를 믿고 신뢰해야 평안하고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이민생활을 하면서 참 안타깝게 여겨졌던 것은,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을 믿지 못하고 서로에 대해서 의심을 한다는 것입니다. 머나먼 타국에서 같은 한국 사람을 만나면 반갑고 기뻐야 하는데 그렇질 않고 일단 의심을 하게 됩니다. 왜 그런가 하고 살펴보았더니 타국에 와서 정착하는 과정에 같은 한국 사람들로부터 사기를 당하고 배신을 당한 아픔들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이고 불행한 일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의심이 없어야 합니다. 즐겁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특별히 다음과 같은 일을 당할 때 의심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첫째로, 말씀을 받을 때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창3:1) 둘째로, 고난을 당할 때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욥23:10) 셋째로, 응답이 없을 때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합2:1,3) 밀려오는 의심을 잘 극복하시고 행복한 신앙생활을 이루어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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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의심은 금물 (창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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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걱정과 근심 (요14:1-6)
- 미국에 <수면학회>라는 단체에서 발표한 바에 의하면, 미국 인구 3억 5천 만 명 중 약 1/10에 해당하는 3천 5백 만 명이 만성 불면증 내지는 수면 장애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1년 동안에 소비되는 수면제가 자그마치 700억 알이나 된다고 합니다. 잠을 이루지 못해서 수면제를 찾는 인구가 해가 갈수록 급증을 하고 있는 추세라고 합니다. 그래서 각 제약회사들이 수면제를 팔아먹기 위해서 1년에 자그마치 6억불이라는 천문학적인 돈을 수면제광고비로 지출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의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바로, 갈수록 삶의 스트레스로 인한 마음에 근심 걱정이 너무나 많아서 그런 것입니다.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고 뼈를 마르게 한다고 했는데, 인간들이 이루어 놓은 찬란한 현대 문명은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지 못하고 도리어 스트레스를 가중시키고 많은 근심과 걱정을 끼쳐서 심령을 상하게 하고 뼈를 마르게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이기기 위해서 신경 안정제를 찾고, 불면증을 이기기 위해서 수면제를 복용합니다. 그런데 신경 안정제를 먹으면 모든 신경을 둔화시켜서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수면제를 복용하면 신체적으로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켜서 우리를 해롭게 합니다. 그래서 FDA에서는 수면제 약 통에다가 “이 약을 먹으면 심각한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는 강력한 경고문을 써 붙이도록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신경안정제나 수면제를 먹지 않고도 근심 걱정을 이길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로, 믿음은 걱정과 근심을 이기게 합니다.(요14:1,27) 둘째로, 소망은 걱정과 근심을 이기게 합니다.(요14:2,3) 셋째로, 기도는 걱정과 근심을 이기게 합니다.(시107:28-30) 이런 방법으로 걱정과 근심을 이기고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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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완 목사] 걱정과 근심 (요1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