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행연월일 2026-04-2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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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수 총장] 칼빈의 추억 한 토막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 인상 깊은 장면을 회상한 것은 기록되어 있다. 테아 반 힐세마(Thea B. Van Halsema)가 저술한 『This was John Calvin(이 사람 존 칼빈)』이라는 책을 보면, 칼빈은 어머니와 함께 짧은 순례길을 걸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골짜기를 따라 두 시간을 걸은 끝에 도착한 곳은 예수의 외할머니로 여겨지는 성 안나의 유골이 안치된 사당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들어 올려, 금으로 장식된 관 안에 누워 있는 유골에 입을 맞추게 했다. 사당 안은 촛불로 밝고 향기로웠으며, 숭배하는 순례자들의 눈빛은 경건으로 가득했다. 어린 칼빈에게 그것은 아마 신비롭고 감동적인 체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이 장면을 바라볼 때,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정서 이상의 것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말 세 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성당의 종소리가 울린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성읍 생활의 중심이 되었던 중세 말 교회의 풍경은 단지 아름답고 경건한 외양만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신앙의 본질이 흐려진 채 형식과 외적 숭배에 몰두한 영적 타락이 도사리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의 형식주의와 권위주의, 성유물의 과도한 숭배, 그리고 성직자들의 탐욕은 교회의 영적 본질을 흐리고 있었다. 성 안나의 유골만이 아니라, 세례 요한의 머리카락, 예수의 치아, 오병이어 사건의 빵 부스러기, 가시관 조각과 구약시대 만나의 조각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성유물이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교회는 이러한 유물들을 통해 기적을 기대하고 은총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자극했고, 성직자들은 이를 통해 물질적 이익과 권력을 얻었다. 더 나아가 성당과 수도원은 특정 유물의 진위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다투었으며, 이 논쟁은 지역의 종교적 경쟁심을 자극했고, 프랑스 의회조차 이를 조정하지 못할 정도였다. ‘성인’의 이름을 붙인 성당이나 수도원은 유골을 소유한 장소로서의 권위를 주장했고, 이는 종종 종교적 신비주의를 이용한 경쟁과 탐욕의 장이 되었다. 말하자면, ‘거룩’은 거래되고, ‘은혜’는 판매되었으며, ‘경건’은 형식으로 포장되었다. 이 모든 모습은 한마디로 ‘거룩함의 상업화’였고, 진리 대신 형식과 기적, 외적 경건에 목을 매던 교회의 실상이었다. 이러한 부패는 개혁자들로 하여금 교회의 본질을 되묻게 했고,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잉태하게 했다. 칼빈은 단지 교리의 개혁자가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을 지닌 영적 개혁자였다. 그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함을 외쳤고, 유골과 형상과 건물 안에서가 아니라, 성령의 조명 아래 말씀과 신앙의 참된 삶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신학과 실천은 교회의 본질을 새롭게 정의했다. 교회는 권위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충실한 선포와 성례의 정당한 시행이 있는 곳이며, 무엇보다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믿는 자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문제는 과거의 부패가 오늘날에도 형태만 달리하여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교회는 더 이상 성인의 유골을 입맞추지 않지만, 또 다른 유물들을 만들어 숭배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화려한 예배당, 웅장한 무대, 감정을 자극하는 조명과 음악, 유명 목회자에 대한 절대적 의존, 그리고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역 성과들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성유물이 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때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인간의 욕망을 투영한 현대판 형식주의일 수 있다. 교회는 언제나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가시관 조각’이 있다. 그것은 더 멋진 무대, 더 화려한 예배당, 더 대형화된 사역과 같은 것들이다. 물론 이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중심이 되어 하나님을 도구화하고, 복음을 수단화하며, 인간의 만족을 위한 종교 행위로 전락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촛불 아래에서 거룩을 잃고 있는 것이다. 칼빈이 외친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는 외침은 시대를 초월한다. 이는 단지 제도 개혁의 구호가 아니라,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한 끊임없는 성찰과 순종을 요구하는 외침이다. 칼빈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은 단지 과거의 회고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거울과 같은 통찰이다. 그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성유물 앞에서 입을 맞췄던 기억은, 우리가 누구의 손에 이끌려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묻는 물음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순례 중이며, 여전히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 길 위에 서 있다.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무엇을 숭배하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멈추어 서는 것, 그리고 다시금 본질로 되돌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종교개혁의 정신이요, 오늘의 교회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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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30
  • [김성수 총장] 무관심의 절정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 “멍 때린다”는 표현이 있다. 고유한 우리말인 이 표현은 “아무 생각 없이 한곳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의식이 잠시 멈춘 듯한 상태로 가만히 있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아무 뉴스에도 반응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한 적이 있을 것이다. 어느새 멍하니 휴대폰을 스크롤하고 있지만, 거기 담긴 전쟁과 죽음, 기후 위기와 삶의 절망적인 광경 앞에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현상을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현대 사회는 너무 많은 것을 너무 자주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감정이 교묘하게 조작되며, 반응은 형식화된다. 심지어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피곤한 시대다. 바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그 시점이다. 이것을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무관심의 절정’이라고 불렀다. 이 무관심은 감정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감정을 과잉 소비한 끝에 마비된 상태다.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을 이미지화하고, 의미로 포장하고,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한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많은 자극과 너무 많은 반응이 반복되다 보면 오히려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감정이 남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관심이 있던 자리에 무감각이 남고, 연대하려던 마음은 차가운 피로감으로 굳어버린다. 오늘 우리는 매일같이 뉴스, 광고, SNS, 알림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지구 반대편의 절망도, 이웃의 눈물도 잠시 울컥했다가 이내 다른 화면으로 스치듯 지나간다. 더군다나 진짜는 없고 이미지만 판을 친다. 이제는 인간의 슬픔도, 정의도, 연대도 모두 기호화된 감정이다. 그것은 진짜처럼 보이지만 반복되고 조작되고 연출된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이것이야말로 현대인의 감정 소진이며, 이 무감각이야말로 가장 극단적인 무관심이라고 말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감정 소진 상태가 점점 자연스러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무관심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여긴다. 냉소와 피상적 반응은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 된다. 지금 이 시대는 누군가를 위해 슬피 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슬퍼 보이는 모습”을 공유하는 것으로 충분한 시대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도다 함과 같도다.”(마태복음 11:16-17) 보드리야르가 진단한 것은 이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것이다. 사회가 감정을 조작하고, 욕망을 설계하며, 공감의 언어마저 포장하는 구조 속에서 우리는 반응하는 법을 잃고 느끼는 법을 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조가 너무 익숙해져서 더 이상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 진짜 위기가 시작된다. “무관심의 절정”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각성해야 한다. 피로한 감정이 일상이 되었고, 감정 없는 반응이 습관이 되었을 때 우리는 진지하게 성찰하고 질문해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아니, 나는 아직도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가? 희망은 물음에서 시작된다. 감정을 회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감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아파할 수 있는 능력, 누군가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일 수 있는 여백, 눈물이 마르지 않은 마음을 회복하는 것, 기호와 이미지에 휩쓸리지 않고 실재를 붙들 수 있는 용기를 갖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아직도 누군가의 고통 앞에 멈출 수 있다면 완전히 늦은 것은 아니다. 무관심의 절정 한가운데서 우리는 다시 ‘느끼는 연습’이 필요하다. 다시 사랑하고, 다시 분노하고, 타인의 고통에 다시 공감하고 연대하는 감정의 회복, 그것은 거창한 변혁이 아니라 아주 작은 감각의 틈에서 시작된다. 눈앞의 사람을 다시 바라보는 것, 뉴스 속 타인을 내 삶 안으로 초대하는 것, 멀리 있는 고통을 내 언어로 말해보는 것, 그렇게 우리는 다시 공감의 감정을 살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우리를 조금씩 움직이게 한다. 반응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다시 붙들게 한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자리에서 다시 울컥하게 만들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게도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지금, 우리는 감정을 회복해야 할 시간 한가운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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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09
  • [김성수 총장 ] 교육에 숨어든 문화 막시즘
    우리는 지금까지 학교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유용한 참된 지식을 배우는 곳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지난 수세기 동안 교육에 대한 이와 같은 신념에 대해 수많은 비판들이 제기되어 왔다. 이와 같은 비판들 중에는 교육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키는 비판들도 있었고, 교육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비판들도 있었다. 특히 교육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 과정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을 배우게 하는 것이라는 중요한 통찰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현대 교육이 그렇게도 중요하게 강조하는 이 ‘생각하는 방식’의 교육이 지켜야 할 경계선을 넘어서고 있는 것을 보면서 염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방식’은 때로 우리가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가치들, 예를 들면 가정, 신앙, 성, 국가, 책임과 같은 소중한 가치들과 충돌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것을 단지 ‘세상이 변했다’고 넘기기 쉽지만, 그 이면에는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온 하나의 사상적 흐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문화 막시즘’(Cultural Marxism)이다. 문화 막시즘은 한마디로 말해서 교육과 문화를 통해 세상의 기존 질서를 바꾸려는 시도다. 이들은 정치 혁명보다 문화 혁명을 중요하게 여긴다. 고전 막시즘이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다면, 문화 막시즘은 “억압받은 소수자여, 깨어나라”고 말한다. 경제 계급 대신 젠더, 인종, 종교, 가족, 성적 지향 등 다양한 정체성이 투쟁의 중심이 된다. 그리고 그 가장 좋은 전파 수단이 바로 ‘학교’라는 교육의 현장이다. 한 초등학교 사례를 보자.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공립초등학교에서, 1학년 학생들에게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단지 신체 구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느끼는 정체성이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교육이 시행되었다. 아이들은 “나는 남자지만 여자일 수 있고, 여자지만 남자일 수 있다”라고 적힌 그림책을 읽는다. 성경적 창조 질서에서 벗어난 이 가르침은, 아직 성 정체성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큰 혼란을 준다. 문제는 이 교육이 ‘포용성과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당연시된다는 점이다. 이런 교육에 반대하는 학부모는 ‘차별주의자’로 낙인찍힌다. 이것이 문화 막시즘의 특징이다. 표면적으로는 자유와 평등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이념만을 강요한다. 또 다른 예는 역사 교육이다. 과거에는 학생들이 학교 교육을 통해 미국 건국의 이상이나 민주주의의 발전, 인류 보편 가치에 대해 배웠다면, 오늘날에는 ‘식민주의’, ‘인종차별’, ‘억압의 역사’라는 틀로 모든 역사를 해석하는 시각을 학습하고 있다. 물론 경직화된 전통적인 교육에 대한 이러한 비판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균형이 무너지면서 또 다른 세계관을 주입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이러한 교육으로 인해 학생들은 ‘자신의 문화와 조상은 억압자였고, 자신은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죄책감 속에서 자라게 된다. 이는 건강한 시민의식이 아니라 분노와 분열을 키우는 왜곡된 교육이다. 이 역시 문화 막시즘의 전략이다. 공동체를 해체하고, 소속감보다는 투쟁심을 주입하는 방식의 이념적인 학습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교육 현장에서 종교적 표현은 점점 더 배척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한 공립 고등학교에서 한 학생이 발표 시간에 “하나님은 나의 인생의 방향을 이끄신다”고 말했을 때, 교사는 “종교적 언급은 교실에서 부적절하다”며 중단시켰다. 그러나 같은 수업에서 “성소수자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발표는 장려된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검열되고, 특정 이념은 보호되는 이중잣대는 교육이 중립성을 가장한 왜곡된 편향이다. 이런 학습은 교육을 ‘무신론적 포용성’의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문화 막시즘은 이처럼 표면적으로는 평등과 자유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전통을 해체하고 하나님을 배제하는 세계관을 퍼뜨리고 있다. 그리고 그 핵심 무대는 바로 다음 세대의 영혼이 형성되는 자리인 학교다. 학교는 언약의 자녀들이 단지 수학과 과학, 언어만을 배우는 장소가 아니라, 무엇이 ‘정상’인지, 무엇이 ‘옳은 가치’인지, 어떤 것을 ‘꿈꾸어야’ 하는지를 배우는 장소다. 학교는 문화 막시즘이 침투하여 장악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세계관의 전쟁터다. 교육은 ‘억압의 고발’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귀하게 만들고, 공동체를 세우며, 창조 세계를 잘 돌보도록 양육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 교육자들과 부모, 그리고 교회 공동체는 이제 깨어 있어야 한다. 문화 막시즘은 더 이상 대학 강의실에서만 머무는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자녀들의 교과서에, 동화책에, 학교 행사에, 교사 연수 프로그램에 은밀하게 침투해 있다. 우리는 교육의 자리를 다시 복음과 창조 질서의 언어로 채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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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13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2) (민12:11-16)
    미리암은 위대한 믿음의 여인이 맞습니다. 하지만 여선지자라는 위대한 칭호를 받은 후 신앙이 제자리걸음을 했습니다. 미리암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역사에 발맞추지 못하고 여전히 애굽에서의 사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모세가 없는 40년 동안 여자로서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진짜 지도자인 줄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진짜 지도자인 모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교만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40년 만에 나타난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기절초풍할 일들을 일으킵니다. 세계 최강의 애굽과 바로도 모세 앞에 쩔쩔맵니다. 애굽을 초토화 시켜버렸고, 애굽의 장자를 죽여 씨를 말려버렸습니다. 여호와의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임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만 대면하시고 바다까지 갈라 마른 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미리암은 40년 동안 여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을 영도해 왔지만 40년 만에 갑자기 등장한 모세의 위용 앞에서 입도 벙긋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선지자의 위치에서 볼 때 비록 인간적으로는 누나요 동생이지만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적 권위를 지닌 모세였기에 고개 들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교회들끼리, 특히 목회자들끼리 묘한 질투심과 경쟁심이 있습니다. 곁의 교회가, 다른 교회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갖습니다. 잘못되면 입은 안타깝다고 하면서 속은 이유 없이 고소하고 상대적인 만족을 얻습니다. 교회의 주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망각한 무서운 죄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이 교인들 사이에서도 발생합니다. 곁의 성도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잘못되면 입은 위로하는 것 같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자신의 신앙과 믿음이 좋은 것으로 위로받고 착각합니다. 아주 나쁜 모습입니다. 악한 모습입니다. 교만의 극치입니다. 어쩌면 이것보다 더한 것이 목회자들끼리의 보이지 않는 견제와 경쟁입니다. 주변의 교회가 갑자기 성장하면 상대적 박탈감을 가집니다. 사람이다 보니 비교가 안 될 수 없습니다. 특히 가까운 교회에서 독보적인 성장을 보이면 심각한 스트레스까지 받습니다. 목사 자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의 중직자들이나 성도들도 자연스럽게 목회자에게 압박을 가합니다. 자신은 1년이 가도 전도 한 명 하지 않으면서 교회 부흥을 입에 올립니다. 십일조나 감사헌금은 고사하고 선교나 불우이웃이나 개척교회, 농어촌교회, 은퇴하신 목사님, 가난한 신학생들을 위해 특별헌금 한 푼도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재정을 입에 올립니다. 더 심각한 것은 설교자들의 교만입니다. 설교하는 사람이다 보니 설교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설교자의 훌륭한 설교에 은혜받기는커녕 허점과 잘못을 찾기에 바쁩니다. 그러니 설교에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현상은 모세를 대적하는 미리암의 아류들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땀방울 하나, 눈불 방울 하나 다 주의 것입니다. 우리는 비교 대상도 아니요, 경쟁상대도 압니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며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자들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특히 목회자들은 아바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평생 잊어선 안 됩니다. 물론 아바타라 하지만 예수님의 아바타니 영광스럽습니다. 진짜 선지자, 진짜 목회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미리암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사실 미리암은 누구보다도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몰라서 범한 죄도 무섭지만, 알고도 범하는 죄는 더 무섭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단순히 그 사람의 성향이나 기질을 나타내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모세의 통치를 방해했고, 이스라엘의 진행을 가로막았습니다. 감히 모세의 영적 권위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감히 같은 선지자였지만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교만은 이 모든 영적 권위 앞에서도 원망과 비방의 고개를 들게 합니다. 호시탐탐 모세의 허점과 실수를 염탐합니다. 교회도 은혜를 계산하는 성도가 있고, 실수와 잘못을 찾아내는 성도가 있습니다. 기회가 왔습니다. 구스 여자가 돌아왔습니다. 이전에 이미 정리된 문제인데도 교만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영적분력을 상실했습니다. 미리암은 십보라가 돌아오자 속에 숨겨놓았던 원망과 불평을 표출합니다. 원망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사실까지 망각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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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07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1)
    성경 어디에도 미디안의 제사장 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는데 문제 삼은 장면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실에 대해 그 어디에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하는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사건 때문에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백성들이 구스 여인 십보라를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통치에 십보라를 문제 삼지 못하도록 아예 입도 벙긋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버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명을 주셨고, 그 사명 감당하기 위해 애굽으로 오는 길에 느닷없이 모세를 죽이시려고 한 것은 구스 여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임이 분명합니다. 분명한 이유는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것에 있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 같은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발견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려 하셨습니다. 완전한 모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이셨습니다. 완전히 죽이셨습니다. 그래도 십보라는 할례언약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긴박한 순간에 할례를 행하면 남편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과 비교도 되지 않는 신분입니다. 단순히 액면가로 볼 때 우리는 시아버지와 관계한 여인입니다. (마1:3)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우리는 우상의 신전에서 몸을 팔던 기생이었습니다. 우리는 과부요,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남편을 사지로 몰고 왕과 간음한 유부녀였습니다. (마1:5-6)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인데 죄인인 줄도 모르는 죄인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답도 없으면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제 딴에 잘 사는 줄 알지만 무익한 인생이요, 단 하나도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혀에는 속임만 있습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입에는 저주와 악독만 가득합니다. (롬3:10-14)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런 우리가, 그런 우리의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도 달렸고, 예수님의 부활에 나도 부활했다고 고백합니다. 사탄이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의를 제기하고 문제 삼을 것이 수두룩한 우리입니다. 아니 우리는 문제 그 자체들입니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합니다. 십보라가 할례 언약을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십보라가 할례를 행하여 남편을 살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불가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입으로 시인합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보라가 할례언약을 아는 것과 할례를 행하는 것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서십니다. (마10: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눅12: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합니다. 문제 제기도 못합니다. 입도 벙긋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의 예배 자리에, 예수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앉혀주십니다. (계12:22-23)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이런 은혜를 받은 성도입니다. 그래도 원망하고 비방하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완전한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할례를 시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에 거하며, 주일마다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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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0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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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2

실시간 설교/강의 기사

  • [최성은 목사] 양심을 따라 섬기는 사명자 (행 23:1-11)
    사도행전 23장은 바울의 인생 가운데 가장 긴박한 순간 중 하나를 보여준다. 3차 전도여행을 마친 바울은 성령의 경고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결국 그는 체포되어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된다.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바울이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오늘 본문의 핵심이다. 목사와 장로의 자리는 세상이 주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명의 자리이다. 연약한 사람이 그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의 선한 양심에 있다. 바울은 공회 앞에서 “나는 범사의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고백한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을 때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음을 의미한다. 양심이란 하나님이 아시는 것처럼 자신을 아는 것이다. 곧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인식이다. 바울은 평생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워 두고 살아왔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선한 양심을 따라 사는 사역자는 사람의 평가나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과 판단을 기준으로 살아간다. 이러한 선한 양심은 곧 거짓 없는 믿음이며, 사역의 출발점이다. 영적 침체에 빠진 디모데에게 바울이 권면한 것도 바로 이 청결한 양심의 회복이었다. 세상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이 곧 회복이고 부흥이다. 그러나 양심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인간의 양심은 죄와 세상의 영향으로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대제사장을 향해 강하게 말한 후, 그가 대제사장인 것을 알고 즉시 태도를 바꾼 것은 말씀에 대한 순종 때문이었다. 출애굽기의 말씀처럼 지도자를 비방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태도를 바로잡은 것이다. 이 사건은 중요한 원리를 보여준다. 양심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위에 있다는 사실이다. 선한 양심은 말씀에 의해 점검되고 바로 세워져야 한다. 양심을 빌미로 자신의 확신이나 경험, 고집을 따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세상과 타협하여 무뎌진 양심도 문제이지만, 자기 확신으로 굳어진 양심 역시 위험하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앙의 핵심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복음의 본질을 붙드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죽은 자의 부활로 인해 심문을 받고 있다고 증언한다. 그는 공회 앞에서뿐 아니라 총독과 왕 앞에서도 동일하게 부활을 증거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바울의 사명이었고 그의 존재의 본질이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고백처럼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복음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핵심이다. 바울은 위기의 순간에도 이 복음에 더욱 충실했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지키시고 사명을 이어가게 하셨다. 오늘의 사역 현장 속에서도 동일한 질문이 던져진다. 우리는 복음의 본질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성공이라는 이름 아래 십자가와 부활을 뒤로하고 있지는 않은가.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의 사역의 중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어야 한다. 바울의 삶에는 깊은 밤이 찾아왔다. 육체적 피로와 두려움, 사역의 결과에 대한 고민과 미래에 대한 염려가 겹친 시간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밤에 주님이 찾아오셨다. 주께서는 바울 곁에 서서 담대하라고 말씀하시며, 예루살렘에서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하게 될 것이라는 더 큰 사명을 주셨다. 인생의 가장 어두운 밤에 주님의 위로와 약속이 임했다. 바울이 품고 있던 로마 선교의 비전은 바로 그 밤에 다시 확증되었다. 하나님은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 위로와 격려, 그리고 새로운 비전을 주신다. 오늘 이 기도회 역시 그러한 시간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회복하고, 말씀으로 자신을 점검하며,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를 세우시고, 맡기신 사명을 감당할 힘을 주실 것이다. 세상의 인기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 경험이나 고집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가는 삶, 세상적 방법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붙드는 삶이야말로 사명자의 길이다. 이러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인생의 깊은 밤에도 찾아오시는 주님의 위로를 경험하며,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게 될 것이다. ※ 위 설교문은 2026년 4월 2일 고신총회 특별기도회 설교를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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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3
  • [김경헌 목사] 빈 무덤과 사랑받는 제자(요20:1-8)
    부활의 아침, 우리는 요한복음 20장에서 한 장면 앞에 서게 된다. 아직 해가 완전히 떠오르지 않은 이른 새벽, 누군가는 울며 달려왔고, 두 제자는 그 소식을 듣고 다시 달려간다. 숨이 차오를 만큼 급하게, 마음이 무너질 듯한 상태로, 그들은 빈 무덤을 향해 달려간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기록한 요한은 끝내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숨기고, 한 가지 이름만 남긴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이 이름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고백이다. 동시에 초대다.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의 품에 기대던 자리(요13:23), 십자가 아래에서 끝까지 떠나지 않던 자리(요19:26-27), 두려움 속에서도 빈 무덤을 향해 달려가던 자리(요 20:2-8), 그리고 부활하신 주를 가장 먼저 알아보던 자리(요 21:7). 그 모든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는 같은 이름으로 서 있다. “사랑받는 제자!” 요한은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그 자리를 비워 둔다. 그리고 우리를 그 자리에 앉힌다. 그래서 이 복음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서게 된다. 우리가 예수의 품에 기대는 자가 되고, 우리가 십자가 아래에 서 있는 자가 되며, 우리가 눈물로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자가 된다. 빈 무덤 앞에 도착했을 때, 사랑받는 제자는 베드로보다 먼저였다. 더 빨랐고, 더 간절했다. 그러나 그는 멈춘다. 무덤 안을 들여다보면서도, 들어가지 않는다. 숨을 고르며, 기다린다. 뒤늦게 도착한 베드로가 먼저 들어간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사랑받는 제자가 들어간다. 이 짧은 순간은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을 남긴다. 더 빨리 달려온 자가 먼저 들어가지 않는다. 더 뜨거운 마음을 가진 자가 스스로를 앞세우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열심을 내려놓고, 사도적 질서 앞에 선다. 신앙은 단순히 뜨거움이 아니다. 눈물이 많다고 해서, 더 빨리 달린다고 해서, 더 깊은 믿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종종 열심을 믿음으로 착각한다.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고 앞서 나아가는 것이 신앙의 깊이인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전혀 다른 길을 보여준다. 참된 믿음은 질서 안에 있으며, 사도들의 증언 위에 서 있다. 때로는 멈추는 것이 믿음이고,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다. 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무덤은 어디에나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무덤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단 하나의 무덤만이비어 있다. 단 하나의 무덤만이생명을 품고 있다. 만일 우리가 사도들의 증언을 떠나, 교회의 고백을 떠나, 스스로의 열심만을 붙잡고 달려간다면, 우리는 다른 무덤에 도착할 수도 있다. 그곳은 여전히 죽음이 머무는 자리다. 아무리 열심히 달려갔어도, 그 끝이 죽음이라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16:18)라고 말씀하신 것은, 교회가 사도적 고백 위에 세워진 공동체임을 드러낸다. 우리의 신앙은 개인의 열심이나 감정이 아니라, 사도들의 증언과 교회의 고백 위에 세워져야 한다. 영적으로 보면, 베드로보다 먼저 무덤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다. 그것은 믿음의 열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이고 무질서한 신앙일 수 있다. 사도들의 질서를 떠나 스스로 길을 찾는다면, 우리는 잘못된 무덤에 들어갈 위험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배운다. 믿음은 속도가 아니라, 어디에 서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부활의 아침, 우리는 다시 그 질문 앞에 선다.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나는 정말 사도의 고백 위에 서 있는가? 아니면 나의 생각과 열심이 나를 다른 곳으로 이끌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회의 질서를 신뢰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것을 넘어 스스로 길을 만들고 있는가? 교회의 방법보다 나의 방법이 더 맞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혹시 나는 도리어 베드로에게 교회를 가르치려고 하는 자의 자리에 서 있지는 않은가? 믿음이 전혀 없는 것도 위험하지만, 잘못된 믿음 또한 치명적이다. 전자는 어떤 무덤에도 이르지 못하지만, 후자는 잘못된 무덤으로 이끈다. 그러나 복음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기다림 끝에, 사도적 질서 안에서, 베드로의 증언을 따라, 사랑받는 제자는 마침내 무덤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단순히 빈 공간만을 본 것이 아니다. 그는 보았고, 믿었다. 부활은 설명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부활은 믿음으로 열린다. 눈으로 확인하기 이전에,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건이다. 그 믿음이 절망을 생명으로 바꾸고, 눈물을 소망으로 바꾼다. 그래서 이 아침, 우리도 그 자리에 서게 된다. 달려왔고, 멈추었고, 기다렸고, 이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복음은 우리에게도 같은 고백을 남긴다. 사랑받는 제자가 들어가 보고 믿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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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1
  • [김경헌 목사] 강도의 소굴 (눅19:45-46)
    고난주간, 우리는 다시 한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주님의 발걸음을 따라간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던 환호 속에서, 마태복음 21장에 기록된 그 장면은 왕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 환호의 열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그분이 마주하신 것은 찬양이 아니라 뒤틀린 예배의 모습이었다. 주님은 성전을 보시고 이렇게 선언하신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이 말씀은 단순히 성전 앞에서 장사하던 행위를 향한 도덕적 비판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이 사건을 “교회에서 장사하면 안 된다”는 교훈이나 탐심에 대한 경고로 축소시킨다. 그러나 질문은 더 깊어야 한다. 왜 그들은 성전 앞에서 장사를 했는가? 그곳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기 때문에 장사가 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들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 필요한 짐승과 물품을 제공함으로써 예배를 “더 쉽게”, “더 편리하게” 만들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의 행위는 예배를 방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돕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것을 “강도의 소굴”이라 부르셨다. 왜일까? 그 이유는 예배의 본질이 인간의 편리함에 의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점점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이동할 때, 그 예배는 더 이상 거룩한 예배가 아니다. 편리함은 어느 순간 거룩함을 대체한다. 효율은 경외를 밀어낸다. 그렇게 성전은 기도의 집에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공간으로 변질된다. 이 장면 앞에서 우리는 오늘의 교회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교회는 얼마나 “편리한 예배”를 추구하고 있는가? 예배 시간은 성도들의 일정에 맞춰지고, 예배 순서는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조정되며, 설교는 듣기 좋은 메시지로 다듬어진다. 교회의 공간과 구조 역시 성경적 상징과 신학적 의미보다는 실용성과 효율성에 의해 결정된다.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져 온 예배에 대한 경외와 철학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실 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다. 대제사장조차 1년에 단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의 거룩함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예배 가운데 그 거룩함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과연 영적인 신을 벗고 하나님 앞에 서고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이미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단지 상인들의 행위를 지적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방식 자체를 뒤엎으셨다. 만약 오늘 주님께서 우리의 교회를 방문하신다면 어떨까? 우리의 예배와 신앙생활을 보시고 책망하시며 우리의 삶의 방식을 뒤엎으신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자리에 남아 있을까? 아니면 많은 이들이 떠나가게 될까? 불과 며칠 전까지 “호산나”를 외치던 무리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 이 극적인 변화는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처럼 살아가지 못한다. 오히려 백 데나리온을 붙들고 놓지 못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은혜를 받았지만 여전히 자기중심적이다. 모든 것이 우리 마음에 맞아야 한다. 예배조차 우리가 편해야 하며,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쉽게 외면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인가? 바로 우리가 그 “강도”이다. 그러나 고난주간의 메시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또 다른 장면을 본다.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강도들이 달려 있었다. 그들은 분명 죄인이었고, 심판받아 마땅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중 한 강도는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고백한다.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때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신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것이 은혜다. 우리가 아무리 강도와 같은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우리가 만든 예배가 아무리 왜곡되었다 할지라도, 십자가 앞에서 주님을 향해 돌아서는 자에게는 여전히 길이 열려 있다. 강도의 소굴 속에서도 은혜의 통로는 막히지 않는다. 고난주간, 우리는 묻는다. 나는 지금 호산나를 외치고 있는가, 아니면 십자가를 외치고 있는가? 나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아니면 소비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을 중심에 두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의 끝에서, 우리는 다시 십자가를 바라본다. 그곳에서 강도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은혜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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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31
  • [김경헌 목사] 나귀 새끼를 타고 십자가를 향해 (요21:6-9)
    1. 종려나무 가지를 든 손, 일주일 뒤에는 무엇을 들었는가? 종려주일은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을 여는 문이다. 환호로 시작되지만, 곧 침묵과 배신, 그리고 십자가로 이어지는 주간이다. 교회는 이날을 맞아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지만, 동시에 마음 한편이 무거워진다. 왜냐하면 이 환호가 오래가지 않았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던 날,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외쳤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그러나 불과 며칠 뒤, 같은 성 안에서 다른 외침이 울려 퍼진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무엇이 이토록 급격한 변화를 만들었을까. 2. 환호의 이유는 믿음이었을까, 표적이었을까?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설명하면서 한 사건을 반복해서 언급한다. 바로 나사로의 부활이다.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이미 썩고 있던 나사로를 예수님께서 살리셨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 표적 때문에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이전까지 예수님은 유대 땅에서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돌에 맞아 죽을 뻔한 일이 두 번이나 있었고, 제자들조차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런데 나사로 사건 이후, 돌을 들던 손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게 된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한 이유가 그분이 누구신지에 대한 깊은 고백이었는지, 아니면 죽음까지도 뒤집는 능력에 대한 기대였는지다. 3.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각자의 메시아를 기다렸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거부한 것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자기들이 상상한 메시아가 아닌 예수님을 거부했다. 그들이 기다리던 왕은 분명했다. 로마를 무너뜨릴 힘 있는 지도자, 억눌린 현실을 단숨에 바꿔 줄 정치적 구원자, 전쟁의 말을 타고 입성하는 승리의 왕. 그러나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오셨다.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처럼, 그 왕은 병거를 끊고 전쟁의 활을 꺾으며 평화를 선포하는 분이었다. 사냥꾼처럼 정복하러 오신 왕이 아니라, 사냥을 끝내기 위해 오신 왕이었다. 예수님은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길을 거부하셨다. 오히려 심판의 활을 자신에게로 돌리시며,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다. 4. 참된 왕은 사냥하지 않고, 사냥당하신다. 성경은 니므롯을 “용감한 사냥꾼”이라 부른다. 그는 힘으로 나라를 세웠고, 빼앗고 정복하며 다스렸다. 이것이 인간이 반복해서 꿈꿔 온 왕의 모습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의 길을 가신다. 그분은 빼앗지 않고 내어주셨고, 죽이지 않고 대신 죽으셨으며, 군중 위에 서지 않고 군중에 의해 버림받으셨다. 종려주일의 왕은 결국 가시관을 쓰신 왕이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십자가가 있었다. 5. 종려주일은 질문이다. 종려주일은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다. 이 날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어떤 예수님을 원하고 있는가? 내가 원하는 왕이 예수님인가, 아니면 예수님이 진정 내 왕인가? 우리는 예배의 자리에서는 쉽게 “호산나”를 외친다. 그러나 삶의 자리에서도 그 고백이 유지되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주일에는 예수를 왕으로 모시지만, 월요일이 되면 다시 내가 왕이 되어 살고 있지는 않은가. 문제는 우리가 예수를 몰라서가 아니다. 예루살렘의 사람들처럼, 우리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너무나 잘 안다. 문제는 그분이 우리의 기대와 다른 방식으로 왕이 되실 때 드러난다. 6. 고난주간의 문 앞에서 종려주일은 고난주간의 문턱이다. 이제 교회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침묵과 기다림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끝에서 부활을 맞이한다. 그러나 부활은 십자가를 통과한 이들에게만 의미가 있다. 나귀를 타신 왕을 끝까지 따라간 이들에게만, 사냥당하신 어린 양을 왕으로 고백한 이들에게만. 종려주일, 우리는 다시 종려나무 가지를 든다. 그러나 그 손이 고난주간의 침묵 속에서도 주님을 놓지 않기를, 환호가 사라지고 십자가만 남는 자리에서도 여전히 순종이 남아 있기를 조용히 우리 자신에게 묻게 된다. 그리고 부활절 아침,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단지 무덤이 비어 있다는 소식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따랐는지에 대한 대답일 것이다. 나귀를 타신 왕을 끝까지 왕으로 고백한 자만이 부활의 기쁨 앞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나귀 새끼를 타고 시작해 십자가를 지나 부활에 이르는 이 거룩한 여정 속에서, 우리는 다시 선택의 자리에 선다. 예수님을 이용하는 신앙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 순종하는 제자의 삶으로 나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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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30
  • [김성수 총장] 교회는 기업이 아니다!
    요즘 교회의 사역 현장에서 자주 들리는 말들이 있다. 그것은 비전, 전략, 성과, 시스템, 그리고 효율성과 같은 단어들이다. 이런 단어들은 이제 교회에서도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교회는 계획을 세우고, 목표를 정하고, 사역을 평가하며, 더 효과적인 운영을 고민한다. 이러한 노력 자체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교회도 질서가 필요하고, 사역에는 지혜로운 운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진지하게 던져 보아야 한다. 교회는 운영되어야 할 조직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신앙 공동체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단순한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본질에 관한 질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설명하는 언어 방식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성도는 ‘인력’이 되고, 사역은 ‘프로젝트’가 되고, 목회는 ‘운영’이 되고, 성장은 ‘성과’라는 단어로 대체되고 있다. 이러한 언어는 조직 관리에는 적합하지만, 신앙 공동체를 설명하는 데는 적절한 언어가 아니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백성, 성령의 전,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것이라고 너무나도 고귀한 호칭으로 부르고 있다. 이것은 관리의 언어가 아니라 생명의 언어이다. 언어가 바뀌면 생각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면 교회의 방향도 바뀐다. 교회 경영화의 가장 큰 변화는 목회자의 역할에서 나타나고 있다. 목회자는 원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고, 영혼을 돌보는 목자이며, 기도하는 지도자이다. 그러나 점점 목회자는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 조직을 관리하는 책임자, 성과를 만들어야 하는 경영자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 문제는 교회의 건강이 목회자의 영성보다 리더십 능력과 경영 능력으로 평가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는 교회를 이끄는 CEO가 아니라, 말씀과 기도로 공동체를 섬기는 종이다. 경영화된 교회는 자연스럽게 결과를 측정하려 한다. 출석 인원, 등록 성도 수, 헌금 규모, 건물 확장 등이 교회의 성공 기준이 된다. 그러나 교회의 성공 기준은 양적인 크기가 아니라 신실함이다. 성장은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는가이다. 경영화된 교회에서는 성도가 점점 소비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성도를 소비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 왕 같은 제사장, 하나님의 동역자로 부른다. 교회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아니라, 함께 십자가를 지는 공동체이다. 경영의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효율이다. 그러나 복음의 길은 언제나 효율적인 길이 아니었음을 교회의 역사가 잘 보여주고 있다. 숫자가 본질을 대신하고, 성도가 고객이 되고, 효율성이 신실성을 대신하게 되는 현상이 나타나면 다시금 교회의 본질을 진지하게 성찰해 볼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회복해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성과 중심에서 신실함 중심으로, 관리 중심에서 목양 중심으로, 프로그램 중심에서 말씀 중심으로, 리더 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교회는 사람이 성장시키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시는 공동체이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전략이 아니라 말씀이며, 시스템이 아니라 성령이며, 경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통치이다. 목회자가 이와 같은 교회의 본질을 고수하게 되면 외형의 성장은 늦어질 수 있을지 몰라도, 더 깊고, 더 건강하고, 더 오래 가는 교회가 세워질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교회를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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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26
  • [설교문] 이창교 목사, “주의 지팡이를 붙들라”
    사랑하는 장로님 여러분, 우리 주님이 희망입니다. 다시 한 번 고백합니다. 주님 안에 있는 우리가 이 세상의 희망인 줄로 믿습니다. 제가 한 가지 경험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전에 교인들과 함께 지리산 천왕봉을 올라간 적이 있습니다. 올라갈 때는 차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속으로 ‘이거 별거 아니네’ 생각했습니다. 정상에 올라가 사진도 찍고 여유 있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내려올 때는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내려왔습니다. 그때부터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올라갈 때는 몰랐는데 내려오는 길이 그렇게 힘든 줄 몰랐습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몇 번이나 주저앉을 뻔했습니다. 중간에 쉬었다가 또 내려오고, 쉬었다가 또 내려오고,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그래서 길에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 중에 조금 굵은 것을 하나 주워서 지팡이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그 지팡이 하나가 제 몸을 끝까지 지탱해 주었습니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제 힘듦을 다 받아주고, 넘어지지 않도록 붙들어 주었습니다. 그때 저는 지팡이의 도움을 얼마나 확실하게 받았는지 모릅니다. 오늘 말씀에도 지팡이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지팡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닙니다. 누가 들고 있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연약한 사람이 들면 몸을 지탱하는 도구가 되고, 죄를 범한 사람에게는 징계의 도구가 되며, 지도자의 손에 들리면 통치의 도구가 됩니다. 그리고 목자의 손에 들리면 양을 인도하고 보호하는 지팡이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지팡이 가운데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모세의 지팡이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부르셨을 때, 모세에게는 큰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불신이었습니다. 첫째, 자기 자신을 믿지 못했습니다. ‘내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나이도 많고, 이미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둘째, 백성들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나를 믿고 따라줄 것인가.’ 셋째,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확신도 부족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모세는 자기 동족을 믿지 못했습니다. 과거에 애굽 사람을 죽이고 민족을 위해 뭔가 해보려 했을 때, 오히려 동족이 그 일을 드러냈습니다. 그 경험 때문에 ‘이 사람들과 함께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불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물으십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모세가 말합니다. “지팡이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지팡이를 통해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 그 이후 모세가 그 지팡이를 들고 믿음으로 순종할 때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열 가지 재앙이 나타나고, 홍해가 갈라지고, 광야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났습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이 지팡이를 통해 모세의 불신을 해결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회복시키시고, 모세와 백성 사이의 불신도 해결하셨습니다. 백성들이 모세의 지팡이를 보면서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장로님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도 지팡이를 주셨습니다. 그것이 물질일 수도 있고, 사회적인 위치일 수도 있고, 무엇보다 장로라는 직분일 수 있습니다. 이 직분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입니다. 교회가 인정하고 세운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지팡이를 어디에 사용하느냐입니다. 이 지팡이는 나를 위해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교회를 위해, 성도를 섬기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모든 직분이 그렇습니다. 목사의 직분도 자기 자신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교회를 섬기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장로의 직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 지팡이를 잘못 사용한 사건이 있습니다. 무리바에서 물이 없다고 백성들이 원망할 때 하나님은 반석에 명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내가 이 지팡이로 너희에게 물을 내리라.” 그리고 반석을 쳤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여전히 그 백성을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셨는데, 모세는 자신의 분노를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지팡이는 내 감정을 표출하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지팡이가 있습니다. 다윗의 지팡이입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지팡이는 보호입니다. 그런데 막대기는 징계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막대기까지도 자신을 살리는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다윗의 인생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 그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많은 징계를 받았습니다.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은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아들을 통해 고통을 겪게 하시고, 삶 속에서 많은 어려움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막대기가 나를 살리는구나.’ 그 징계가 없었다면 자신은 하나님을 떠났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하나님의 막대기가 있습니다. 때로는 이해되지 않는 어려움이 있고, 고통이 있고, 실패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는 은혜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냥 두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을 보면 돈을 많이 버는 사람도 있고, 한순간에 잃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달 만에 수십억을 벌고, 어떤 사람은 한 달 만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세상의 것은 이렇게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들이 정말 안전한 것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돈이 나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권력이 나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사람도 끝까지 나를 책임져주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장로님 여러분, 이 세상의 것은 다 썩은 지팡이입니다. 우리가 의지했던 것들이 우리를 배신한 경험이 얼마나 많습니까. 물질도, 사람도,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지팡이는 오직 하나입니다. 주의 지팡이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엘더스쿨을 왜 합니까. 더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더 잘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지팡이를 어떻게 바르게 사용할 것인가를 배우기 위해서입니다.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합니다. 많이 알수록 더 겸손해지고, 더 배우려고 해야 합니다. 내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때부터 무너집니다. 그러나 배우려는 사람, 낮아지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사랑하는 장로님 여러분, 하나님께서 맡기신 이 지팡이를 끝까지 붙드시기 바랍니다. 이 지팡이를 가지고 교회를 섬기고, 성도를 섬기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귀한 직분 잘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 본 설교문은 경남노회 장로회 창립 50주년 감사예배에서 전한 이창교 목사의 설교를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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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6-03-23
  • [김성수 총장] 인간 없는 세상
    만약 인간이 지금 이 순간 지구에서 사라진다면, 이 행성은 어떤 표정을 되찾게 될까. 멈출 줄 모르는 기후의 극단화, 눈앞에 닥친 해수면 상승, 끝없이 반복되는 산불과 홍수는 이 질문을 더 이상 공상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우리는 지금 인간의 탐욕과 무절제한 개발이 만들어 낸 생태계 붕괴의 한복판에 서 있다. 어느 지역에서는 기록적인 폭염이, 또 다른 지역에서는 이례적인 한파와 폭설이 일상이 되었고, 가뭄과 집중호우는 계절의 질서를 무너뜨린 채 번갈아 지구를 강타한다. 숲은 불타고 강은 범람하며, 바다는 서서히 육지를 삼킨다. 태평양의 작은 섬나라들은 해마다 국토가 줄어드는 현실 앞에서 국가의 존립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산불과 홍수는 더 이상 예외적인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간 문명이 스스로 불러온 구조적 재앙이 되었다. 기후 재난은 더 이상 먼 미래의 예측이 아니다. 바다 속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는 산호초, 남극에서 빠르게 녹아내리는 빙하, 해수면 상승으로 물속에 잠기고 있는 투발루와 몰디브 같은 섬나라들. 이들은 단지 생태계의 피해자가 아니다. 오히려 인류가 지금 이 순간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를 증언하는 현실의 경고장이다. 공장은 멈추지 않고, 플라스틱은 바다를 뒤덮으며, 벌목과 댐 건설은 야생 생물의 터전을 송두리째 파괴하고 있다. 우리가 누리는 편리함의 이면에서, 창조 세계는 조용히 무너지고 있다. 이 모든 장면은 우리에게 하나의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지구가 이렇게 아픈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중심에 인간은 어떤 존재로 서 있는가. 앨런 와이즈먼(Alan Weisman)은 그의 책 『인간 없는 세상』에서 하나의 가정을 제시한다. “만약 인간이 지금 이 순간 지구에서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 질문은 단순한 공상과학적 상상이 아니다. 인간의 손길이 끊긴 체르노빌 지역에서 자연이 놀라운 회복을 이루는 모습을 통해, 그는 역설적으로 말한다. “인간 없는 지구는 오히려 살아날 수 있다.” 이 문장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인간이 존재하는 지구는 왜 이렇게 아픈가. 문제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대답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인간이 창조 세계를 돌보는 청지기의 자리를 망각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셨고(창 1:28), 동시에 “에덴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게”(창 2:15) 하셨다. ‘정복’은 파괴가 아니라 책임 있는 관리이며, ‘지킴’은 무제한적 개발이 아니라 보호를 전제로 한 사명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명령을 오해했고, 오용했으며, 결국 외면해 버렸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 병든 지구의 얼굴이다.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다음 세대의 것이며, 피조물 전체의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만을 위해 지구를 창조하지 않으셨다. 시편 기자는 “주의 손으로 지으신 이 세계가 주의 영광을 선포한다”고 노래했다(시 19:1).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그 영광을 드러내는 자리에 서 있는가, 아니면 가리는 자리에 서 있는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개이다. 플라스틱 컵 하나, 무심코 켜 둔 전등 하나, 소비 중심의 삶의 방식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조금씩 무너뜨리고 있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 환경 운동은 ‘의식 있는 시민’만의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신앙적 응답이다. 생태계를 돌보는 일은 전문가들만의 영역이 아니다. 땅을 지키는 사람, 바다를 치유하는 사람, 동물과 나무를 아끼는 사람 모두가 하나님의 공동 청지기다. 지금은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때다. “땅이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고”(창 3:17). 그러나 성경은 동시에 회복의 약속도 전한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계 21:1). 하나님은 파괴의 하나님이 아니라 회복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그 회복의 동역자로 부르신다. 우리 모두 땀 흘려 땅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설교를 듣는 데서 멈추지 않고, 쓰레기를 줄이며, 나무를 심고, 에덴의 청지기로 다시 서야 한다. 창조는 하나님의 선물이고, 우리는 그 선물의 관리인이다. 병든 지구를 고치는 일은 거창한 정치 선언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 내 손에 들린 종이컵 하나를 내려놓는 작은 행동에서 시작된다. 회개는 말이 아니라 실천으로 증명될 때, 비로소 진짜가 된다. 이 준엄한 청지기적 소명에 내가 봉사하고 있는 탄자니아 아프리카연합대학교가 신실하게, 순종적으로 응답할 수 있기를 오늘도 기도한다. 김성수 목사 (탄자니아 아프리카 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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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11
  • [김성수 총장] 완전한 기초 위에 세워진 불완전한 교회
    사도행전 1장 후반부는 교회의 탄생을 준비하는 놀라운 장면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가룟 유다의 배신과 죽음 이후, 사도단은 11명이 되었고,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제자들은 기도하며 맛디아를 제비 뽑아 사도의 수를 다시 열두 명으로 회복시킨다. 얼핏 보면 단순한 결원 보충처럼 보일 수 있으나, 이 사건은 구속사적으로 매우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12’라는 숫자는 단순한 수량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상징하는 완전수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처음 제자들을 부르실 때 열두 명을 택하신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구약의 열두 지파를 계승하여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 즉 새 이스라엘을 세우시려는 의도였다. 따라서 사도들의 수가 11명인 상태는 구속사적으로 ‘기초가 결핍된’ 상태였고, 교회를 세우기 위한 완전한 구조가 준비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하나님은 결코 불완전한 기초 위에 교회를 세우지 않으신다. 그래서 베드로는 시편 말씀을 인용하여 유다의 직분을 누군가가 대신 맡아야 함을 말했고, 제자들은 기도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구하였다. 그렇게 해서 맛디아가 뽑힌다. 이로써 사도단은 다시 12명으로 완성되며, 오순절 성령 강림을 맞이할 준비가 갖추어진 것이다. 여기까지가 사도행전 1장의 역사적이고 구속사적인 의미라면, 이제 우리는 이 사건을 오늘날 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오해가 자주 일어난다. 예컨대 어떤 이들은 말한다. “우리 교회에는 아직 한 사람이 부족합니다. 그래서 완전하지 않습니다. 이 하나를 채워야 성령이 역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 본문에 대한 잘못된 적용이다. 왜냐하면 맛디아를 뽑아 ‘12’를 채우는 일은 단회적인 구속사적 사건이지, 반복 가능한 모델이 아니기 때문이다. 맛디아가 뽑힌 이유는 그가 예수님의 공생애를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증인이었기 때문이며,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사도직의 유일한 자격 조건이었고,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질 교회의 기초석이었다. 계시록은 이 열두 사도의 이름이 새 예루살렘 성의 기초석에 새겨져 있다고 말한다(계 21:14). 그러므로 이 기초는 한 번 놓이면 더 이상 반복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 중 그 누구도 다시 사도가 될 수는 없고, 그 자리에 들어갈 수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본문을 오늘 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답은 분명하다. 우리는 기초석이 아니라, 그 위에 세워진 살아 있는 지체들이라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다. 교회의 기초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을 통해 완성되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엡 2:20) 이처럼 우리는 완전한 기초 위에,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살아 있는 돌들이다(벧전 2:5).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은, 기초를 다시 놓는 것이 아니라, 이미 놓인 기초 위에서 자신의 자리를 충실히 감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역설이 성립한다. 바로 이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면서도, 이 땅에서 여전히 불완전하다는 역설이다. 교회는 존재론적으로는 이미 완성되었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았고, 성령의 내주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었으며, 하늘에 속한 자로 불림받았다. 이 점에서 교회는 완전하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는 지상에서 여전히 연약하며, 죄와 싸우고, 분열과 갈등, 냉소와 나태, 무관심과 죄악이 공존하는 현실 안에 있다. 이 점에서 교회는 불완전하다. 교회는 지금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가야 하는”(엡 4:13) 존재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교회를 바라볼 것인가? 그것은 비판과 이상화라는 두 극단을 넘어서는 시선이다. 교회를 향한 실망은 반드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신실한 눈으로 치유받아야 하며, 교회를 향한 맹목적 이상화도 회개와 진리 앞에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고, 우리는 그 몸 안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섬기는 지체일 뿐이다. 우리는 지금 완전한 기초 위에 세워진 불완전한 교회 속에서, 여전히 완전함을 향해 부르심을 받은 지체된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누가 빠졌느냐보다, 나는 지금 나의 자리를 충실히 감당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성령은 인원수가 갖춰졌기 때문에 임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주권에 따라 임하셨다. 오늘도 성령은, 교회가 완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공동체이기에 역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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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2
  • [김경헌 목사] 반드시 내가(사43:18-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이 말씀은 인간 존재의 목적을 단정적으로 선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지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도의 존재 이유는 자기 실현이나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찬송에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본문에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목적을 이루시겠다는 열심의 선언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인간의 의지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으로 붙들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열심’은 단순한 부지런함이나 성실함이 아닙니다. 끓어오르는 열정, 자신을 소진해 버릴 만큼 강렬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삼킨다’는 표현은 완전히 사로잡혀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성경은 먼저 하나님의 열심을 강조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9:7)라는 말씀처럼, 구원의 역사도 하나님의 열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질투와 사랑이 죄와 사망을 집어삼켰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사건은 이 열심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요한은 이를 두고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시69:9)라고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왜곡되는 것을 그대로 두지 않으시는 거룩한 열정, 그 열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의 길로 이끌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언제나 자기희생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열심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흔히 열심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것을 행합니다. 그러나 그 출발점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일 때, 그 열심은 쉽게 변질됩니다. 내 감정, 내 정의감, 내 분노, 내 의욕이 앞설 때 열심은 오히려 교만이 됩니다. 열왕기상 18장에서 바알 선지자들은 밤낮으로 외치며 제단 주위를 뛰었습니다. 피가 흐르기까지 몸을 상하게 하며 격렬한 열정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무 응답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열심은 아무리 뜨거워도 공허할 뿐입니다. “너는 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창12:1)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창12:4) 믿음의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에 고향을 떠났습니다. 계산과 안전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에 사로잡힌 순종이었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고, 예수님은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단순히 행위를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을 요구하셨습니다. 특히 물질은 인간이 가장 쉽게 붙드는 영역입니다. 그래서 물질을 향한 태도는 신앙의 실제를 드러내는 거울과 같습니다.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다면, 물질은 목적이 아니라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열심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물질은 언제든지 우상이 됩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히11:4) 성경은 혈통상 장자인 가인이 아니라, 믿음으로 제사를 드린 아벨을 의로운 자로 증언합니다. 기준은 ‘하나님의 열심에 사로잡혔는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외형이 아니라 중심을 보십니다. 그 중심이 하나님께 향해 있을 때, 비로소 열심은 거룩해집니다. 오늘 우리의 가장 큰 위기는 모든 판단의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된 데 있습니다. 설교가 내 마음에 맞으면 은혜롭고, 맞지 않으면 은혜가 없다고 합니다. 교회가 내 기대를 충족시키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실망합니다. 신앙의 기준이 말씀과 교회가 아니라, 나의 기분과 취향이 되어 버렸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그러나 주님은 지금도 예배와 말씀을 통해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시선을 받아들이고 통곡했지만, 가롯 유다는 외면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동일하게 임하지만, 반응은 다릅니다. 그 시선을 받아들이는 자는 깨어지고, 외면하는 자는 굳어집니다. 참된 열심은 나를 드러내는 열정이 아니라, 나를 무너뜨리는 열정입니다. 자존심과 계산, 체면과 고집이 허물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열심이 우리를 삼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신 그 약속은, 우리를 억지로 끌고 가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변화시키시겠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게 하소서. 내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열심에 사로잡히게 하소서. 나를 높이는 열정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는 열정에 소진되게 하소서.’ 하나님의 열심에 사로잡힌 삶, 그것이 성도의 길입니다. 그 열심 안에서 자신을 부인하고, 교회를 사랑하며, 복음을 위하여 기꺼이 소진되는 삶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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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12
  • [박영선 목사] 욥기 30:16-23
    욥기 42장입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배웁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죄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기의 전체 내용은 신앙인들이 꼭 한번 확인하고 가야 될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둥과 같은 내용으로 성립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설교를 하기 전에 잠깐 말씀드릴 게 있고 집중하게 하겠습니다. 지금 교회 밖에서도, 또 교회 안에서조차 저에 대한 공격이 많아서 설명할 길도 없고, 무슨 대답을 하면 전부 악의적으로 반응이 오니까 손해를 교인들이 보더라고요. 교회가 다들 오기 싫어지고, 다른 교회로 가고 하는 일들이 생겨서 제가 이 짐을 지고 그만두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결심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제 이름으로 우리 교회까지 망신당하는 자리엔 가지 말게 하자 하는 게 결심이고, 또 하나의 부탁은 그러니까 오늘 마지막으로 하는 설교니까 처절하고 진지하게 집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자, 그럼 욥기의 결론을 봅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었는데 이제는 눈으로 봅니다.” 무슨 말일까요? 귀로 듣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의 차이를 아십니까? 귀로 들으려면 순서대로 들어야 되고, 보는 건 한꺼번에 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 속에서 우리가 신앙을 쌓아갈 때 시간 속에서 쌓아간다는 사실 때문에 어느 정도 단계에 이르면 다음 단계가 나타나서 이제껏 가졌던 신앙으로는 답이 되지 않는 일을 만나게 됩니다. 거기서 발전해야 되는데 다음 단계로 발전해야 되는데, 한국 교회는 교회사가 짧은 관계로 미처 그 다음 설명, 해설을 하는 일을 아직까지 잘 못 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제가 이 인물을 맡아서 여기까지 오늘 하게 돼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욥은 아시는 바와 같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당대의 최고의 의인입니다. 복을 받고 있고 사람들한테 존경을 받는 사람인데 하루아침에 느닷없이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자녀들이 죽고 본인은 병들어 눕게 됩니다. 그가 당한 불행에 대하여 본인도 이해할 수 없고 주변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자 먼 곳에서 친구들 셋이 찾아와서 그를 위로하려고 했지만 너무 실상이 처참해서 위로를 못 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근데 그 기다리는 모습에서 뭔지 욥이 화를 내기 시작합니다. 욥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히 이겁니다. “하나님, 제가 뭘 잘못했길래 이러십니까?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 말을 하는 게 된 동기는 그 옆에 와서 들어온 친구들의 눈빛이 편을 들어오는 게 아니라 “야, 너… 빨리 회개해라. 잘못한 거 회개하면 형통해진다” 그 말로 째려봤으니까, 이제 욥이 분통을 터뜨려서 화를 내고 “죽여 주십시오”까지 갑니다. 그 친구들이 “너 그건 말이 되냐? 하나님이 어찌 네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화를 내리시겠느냐? 너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 봐라.” 욥은 “난 잘못한 거 없다.” 그러자 “그 다음으로 말하는 것만 봐도 너는 교만한 거다.” 이렇게 되지요. 그러는 과정에서 7장에 집에 가서 보시면 “하나님, 내가 뭐길래 이렇게 나한테 집중하십니까? 하나님 더 큰 일 보시고 나는 버려 두십시오. 내가 죽으면 어떻고 내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덕이 되겠습니까? 내버려 둬 주십시오.” 이렇게까지 얘기를 해서, 제가 즐겨 사용했던 본문에 의하면 “어찌 나 같은 것을 침 삼킬 동안도 놓아두지 않으십니까?” 이게 제가 신학교 들어갔을 때 처지였습니다. 근데 하나님이 이제 앞으로 답을 주십니다. 그래서 그 세 친구가 돌아가면서 그를 궁박하고 도전하고 또 (회개를) 얻어내려고 하는데 도무지 말을 안 듣자 나중에 나가떨어지고 그 다음 타자로 엘리후가 등장합니다. 엘리후는 뭘 가지고 욥을 구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너에게 주인이시며 너는 그가 만든 한 작품에 불과한데 네가 어떻게 전능자한테 감히 누가 맞냐 따져보자 그런 말을 할 수 있냐, 말이 되는 소리냐”라고 권세와 지위의 차이로 욥을 항복시키려고 합니다. 그러자 38장에 하나님이 이렇게 등장하십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동이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이게 누구한테 호통을 치는 것 같습니까? 욥의 불평에 대해서 호통을 치는 것 같습니까? 욥을 공박하는 친구들에 대해서 호통을 치는 것 같습니까? 이것은 친구들에게 하는 호통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답을 내려고 하지 마라.” 그리고 욥에겐 뭐라고 얘기해요?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동이고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라.” 무슨 뜻이죠? 욥은 그의 목적이고 그의 첫 번째 대상이고, 하나님이 그에게 하나님이 되시고, 그가 하나님의 자녀요 복된 존재인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다른 말, 잘잘못으로, 규칙으로 그를 심판하고 권세로 그를 심판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쳐 들어오시는 것이 “폭풍 가운데”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욥에게 자신을, 혹은 욥의 지금 현실을 어떻게 납득시키느냐 하면 38장과 39장 두 장에 걸쳐서 창조 세계를 보이십니다. 창조 세계의 장엄함을 보라. 그 무궁무진한 존재들의 가치와 그 존재들의 영광을 보라. 그리고 그들의 존재에 있는 질서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보라. 이게 38장과 39장의 얘기입니다. 그리고 나서 40장 1절.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이르시되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내가 나와 싸우자 그러고 네가 옳고 내가 틀리다 그러는데, 할 말 있으면 해 봐라”라고 얘기하자 욥의 답이 신기합니다. “겁 주시면 저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한테 기회를 주셔야지 공간 협박으로 저를 짓눌러 버리시겠다고요?” 이렇게 답을 합니다. 신기하죠? 그래서 6절에 “그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이르시되” 다시 폭풍 가운데서 벼락같이, 38장에서 친구들의 말이 안 되는 증거를 쳐 보신 것처럼, 욥의 침묵으로 말미암는 반항과 항복하지 않는 고집을 내려면서 뭐라고 말을 하느냐 하면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동이고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할지니라.”라고 대화를 드십니다. 굉장하죠. 그러니까 욥에겐 겁을 주고 그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욥을 세우기 위해서 앞에서 친구들을 후려치신 하나님이 폭풍 가운데서 “네가 전능자와 다투겠단 말이냐? 너 그럴 수 있느냐?” 하니까, “맘대로 하세요. 저는 그렇게 항복 못 합니다”라고 하자, 그의 허리띠를 잡아 일으켜 세우면서 “너만 내 자식이야. 내가 말할 테니까 들어봐.” 이렇게 그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폭풍 가운데서 임하시는 하나님의 현전이요 임재요, 우리의 질문에 답하시는 주인이십니다. 10절부터 보시죠. “너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지니라. 너의 넘치는 노를 비우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모두 낮추되… 악인을 그들의 처소에 짓밟을지니라…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묘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 영광을 입어라. 존귀해져라. 그리고 도덕을 지켜라. 그리고 악당들을 다 심판해라.”라고 얘기하십니다. 우리 세상 살면서, 우리 역사 속에서 듣는 하나님의 질문이 바로 이겁니다. 우리는 언제나 현실에 불의가 많고 부패가 많고 거짓이 많아서 정의를 원합니다. 평등을 원합니다. 하나님이 이걸 약속하셨고, 우리도 우리 인생 속에서 이걸 만들고 싶어 해서 언제나 부패한 정권은 뒤집어집니다. 그때 뒤집는 세력이 언제나 내거는,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명분이 뭐냐 하면 “정의를 실현하자”입니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에서 보듯이 부패한 정권을 없애고 혁명이 일어나자 무엇부터 합니까? 악당들을 다 죽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영광을 얻고 우리가 도덕을 지킴으로써 받는 보상은, 악당을 죽이는 것 외에는 다른 보상이 없지 않느냐, 라고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무슨 얘기를 하느냐 하면 하마와 악어 얘기를 길게 하는데, 하마와 악어 얘기가 왜 길어지냐면 “너 하마를 길들여서 밭을 갈 수 있느냐? 너 악어를 길들여서 집에 반려…(반려를) 삼겠느냐?” 그렇게 묻습니다. “모든 것을 힘으로 평정하거나 답을 얻을 수 없느니라.”라고 얘기함으로써, 욥이 이제 항복하는 42장에 이릅니다.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창조 세계와 우리가 조작할 수 없는 힘의 실체들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을 보는 것 같이, 우리가 우리의 인생과 우리가 소원하는 것을 힘으로 만들어낼 재주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뭐라고 말하죠?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린 자가 누구니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나도 이해가 안 가서 그렇습니다. 내가 소원하는 것이 뭔지조차 정할 수가 없습니다. 밤낮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서만 헤어나게 해 주십시오. 이 문제만 해결해 주십시오.” 이게 우리 인생의 소원인데, 내가 얼마나 인간답고 존재 가치가 있는가는 상상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결론이 뭐냐면 “답을 얻었다”가 아니라 “물어보겠습니다. 가르쳐 주십시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죄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가 무슨 말이냐면, 내가 아는 건 나 하나에게도 답이 되지 못합니다. 나는 다 타버린 재와 같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나셨고 나를 하나님 믿게 하셨으니 내가 묻고 하나님 답해 주십시오. 그것이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결론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뭘 묻고 뭘 답을 얻었는지는 건너뛰고 7절로 갑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대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친구들은 하나님 대신에 규칙이었고, 하나님 대신 권력이었습니다. 욥은 끝까지 상대로 하나님을 모셨습니다. 여기가 다른 겁니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답을 찾고 있는 겁니다.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수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뭐죠? 답이 “용서”하랍니다. 일차적으로 네 분노를 풀려고 하지 말고 용서부터 배워라. 용서부터 배우라는 게 무슨 뜻이죠? 화해해라. 너와 네 친구들이 왜 싸우게 되었느냐?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로 싸우게 됐는데, 싸워서 등 돌리지 말고 제대로 알아서 화해해라.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하나님의 자기 증명은 이 욥기에서도, 집에 가서 보세요. “하나님께 내가 묻겠사오니 겁 주지 마시고 대답 좀 해 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이 대답을 안 하셔서, 23장에 가면 “내가 하나님을 찾고 찾으나 앞으로 가도 없고 오른쪽으로 가도 없고 뒤돌아서도 없더라.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것인가.” 이게 욥의 고난, 고통입니다. 친구들은 “빨리 회개하라.” 엘리후는 “빨리 무릎꿇어라.”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그게 아니라 “나를 알아라. 나를 알아라. 그리고 네가 나에게 누구인가 알아라.”입니다. 우리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 모든 질문의 시작은 뭐냐 하면, 우리 모두가 겪는 것 같이 인생을 살면서 당하는 말이 안 되는 고난 속에서 이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난 뭐야? 나라는 존재는 뭐야?” 예수를 믿으니까 그다음 질문이 나오죠.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왜 이렇게 하십니까? 어쩌란 말입니까?” 현실은 어떻죠? 그 둘을 이을 수가 없죠. 왜 이을 수가 없죠? 내 기대와 다르니까. 정성을 바쳐도, 모든 종교 행위를 해도 바라는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약 성경 내내 왜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겼지요? 자기가 원하는 걸 해 주는 신을 만들었지요. 하나님은 안 해 주시니까. 왜 안 하시죠? 하나님이 목적한 것이 우리의 운명이니까, 내가 해 달라는 것으로 타협하거나 떼울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자, 우리 다 아는 구절들이니까 신약의 설명들이 이 배경 속에서 어떻게 터지나 봅시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빌립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보여 주시면 족하겠나이다.” 왜 그런 질문이 나왔죠? 예수님이 죽은 자도 살리고 폭풍도 가라앉히고 문둥병도 고치고 소경의 눈도 뜨게 하셨는데, 로마를 뒤집지 않아요. 세상 권력이 되질 않아요. 자기에게 필요한 현실적 해답이 되시질 않아요. “아버지를 보여 주옵소서.” 답이 뭐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아버지가 십자가에 죽는 모습으로 우리 편을 들고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대상과 목적으로 만들겠다가 예수의 성육신입니다. 신이 인간이 되어 인간 보고 신성에 참여하라고 붙잡으러 온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 확신이 중요한 눈금이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어디까지 밀고 올라가야 되냐? 이런 정체론, 존재론, 그리고 현실—하나님이 나를 만들어 가는 현실에 대하여 분별과 지혜로 우리에게 열매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오심은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이렇게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에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제발 형통, 안심, 승부에서 이기는 것에 팔아먹지 말라고 말합니다. 잘 아시는 요한복음 3장 16절은 뭐였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믿으면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를 선포하고 있는 겁니다. “안 믿어도 됩니다. 안 믿고 못 배기게 하겠다.” 17절.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인하여 세상이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내가 믿지 않아도 된다”라고 왜 고함을 질러야 했느냐? 믿었으니까 “다다” 그러고 있지 말고 그러란 말이에요. 믿은 자의 변화와 새 사람과 새 생명이 되란 말이에요. 꼭 고함을 질러야 돼요. 누가복음 22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자리에서 누가 더 크냐?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때 누가 좌편에 앉고 누가 오른편에 앉을 것인가 싸웁니다. “하나님 나라는 섬기는 나라다. 세상은 다스리는 나라지만 하나님 나라는 섬기는 나라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에 함께한 자들인즉 하나님이 내게 그 나라를 맡기신 것처럼 내가 너희에게 하늘 나라를 맡기노라.” 예수님의 시험은 뭐였습니까? 십자가에서 보여줬죠. “네가 남은 살렸으면서 너는 왜 못 살리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내려와 보라.”를 겪으십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여기에 와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복음 17장에 있었던 이 중요한 말씀: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시옵고 사랑하신 것을 알게 하옵소서.” 이게 교회입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손가락질하는 일 맞지 마시고, 끌어안는 일로 여러분의 인생과 여러분 자신의 존재에 명예와 영광을 담으셔서 하나님 영광의 찬송이 되시기 바랍니다. ※ 위 설교문은 남포교회 주일예배 (26.02.01) 설교를 남포교회 유튜브를 통해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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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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