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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수 총장] 칼빈의 추억 한 토막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 인상 깊은 장면을 회상한 것은 기록되어 있다. 테아 반 힐세마(Thea B. Van Halsema)가 저술한 『This was John Calvin(이 사람 존 칼빈)』이라는 책을 보면, 칼빈은 어머니와 함께 짧은 순례길을 걸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골짜기를 따라 두 시간을 걸은 끝에 도착한 곳은 예수의 외할머니로 여겨지는 성 안나의 유골이 안치된 사당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들어 올려, 금으로 장식된 관 안에 누워 있는 유골에 입을 맞추게 했다. 사당 안은 촛불로 밝고 향기로웠으며, 숭배하는 순례자들의 눈빛은 경건으로 가득했다. 어린 칼빈에게 그것은 아마 신비롭고 감동적인 체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이 장면을 바라볼 때,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정서 이상의 것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말 세 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성당의 종소리가 울린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성읍 생활의 중심이 되었던 중세 말 교회의 풍경은 단지 아름답고 경건한 외양만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신앙의 본질이 흐려진 채 형식과 외적 숭배에 몰두한 영적 타락이 도사리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의 형식주의와 권위주의, 성유물의 과도한 숭배, 그리고 성직자들의 탐욕은 교회의 영적 본질을 흐리고 있었다. 성 안나의 유골만이 아니라, 세례 요한의 머리카락, 예수의 치아, 오병이어 사건의 빵 부스러기, 가시관 조각과 구약시대 만나의 조각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성유물이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교회는 이러한 유물들을 통해 기적을 기대하고 은총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자극했고, 성직자들은 이를 통해 물질적 이익과 권력을 얻었다. 더 나아가 성당과 수도원은 특정 유물의 진위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다투었으며, 이 논쟁은 지역의 종교적 경쟁심을 자극했고, 프랑스 의회조차 이를 조정하지 못할 정도였다. ‘성인’의 이름을 붙인 성당이나 수도원은 유골을 소유한 장소로서의 권위를 주장했고, 이는 종종 종교적 신비주의를 이용한 경쟁과 탐욕의 장이 되었다. 말하자면, ‘거룩’은 거래되고, ‘은혜’는 판매되었으며, ‘경건’은 형식으로 포장되었다. 이 모든 모습은 한마디로 ‘거룩함의 상업화’였고, 진리 대신 형식과 기적, 외적 경건에 목을 매던 교회의 실상이었다. 이러한 부패는 개혁자들로 하여금 교회의 본질을 되묻게 했고,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잉태하게 했다. 칼빈은 단지 교리의 개혁자가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을 지닌 영적 개혁자였다. 그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함을 외쳤고, 유골과 형상과 건물 안에서가 아니라, 성령의 조명 아래 말씀과 신앙의 참된 삶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신학과 실천은 교회의 본질을 새롭게 정의했다. 교회는 권위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충실한 선포와 성례의 정당한 시행이 있는 곳이며, 무엇보다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믿는 자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문제는 과거의 부패가 오늘날에도 형태만 달리하여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교회는 더 이상 성인의 유골을 입맞추지 않지만, 또 다른 유물들을 만들어 숭배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화려한 예배당, 웅장한 무대, 감정을 자극하는 조명과 음악, 유명 목회자에 대한 절대적 의존, 그리고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역 성과들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성유물이 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때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인간의 욕망을 투영한 현대판 형식주의일 수 있다. 교회는 언제나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가시관 조각’이 있다. 그것은 더 멋진 무대, 더 화려한 예배당, 더 대형화된 사역과 같은 것들이다. 물론 이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중심이 되어 하나님을 도구화하고, 복음을 수단화하며, 인간의 만족을 위한 종교 행위로 전락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촛불 아래에서 거룩을 잃고 있는 것이다. 칼빈이 외친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는 외침은 시대를 초월한다. 이는 단지 제도 개혁의 구호가 아니라,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한 끊임없는 성찰과 순종을 요구하는 외침이다. 칼빈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은 단지 과거의 회고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거울과 같은 통찰이다. 그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성유물 앞에서 입을 맞췄던 기억은, 우리가 누구의 손에 이끌려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묻는 물음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순례 중이며, 여전히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 길 위에 서 있다.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무엇을 숭배하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멈추어 서는 것, 그리고 다시금 본질로 되돌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종교개혁의 정신이요, 오늘의 교회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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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30
  • [김성수 총장] 무관심의 절정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 “멍 때린다”는 표현이 있다. 고유한 우리말인 이 표현은 “아무 생각 없이 한곳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의식이 잠시 멈춘 듯한 상태로 가만히 있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아무 뉴스에도 반응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한 적이 있을 것이다. 어느새 멍하니 휴대폰을 스크롤하고 있지만, 거기 담긴 전쟁과 죽음, 기후 위기와 삶의 절망적인 광경 앞에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현상을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현대 사회는 너무 많은 것을 너무 자주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감정이 교묘하게 조작되며, 반응은 형식화된다. 심지어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피곤한 시대다. 바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그 시점이다. 이것을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무관심의 절정’이라고 불렀다. 이 무관심은 감정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감정을 과잉 소비한 끝에 마비된 상태다.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을 이미지화하고, 의미로 포장하고,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한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많은 자극과 너무 많은 반응이 반복되다 보면 오히려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감정이 남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관심이 있던 자리에 무감각이 남고, 연대하려던 마음은 차가운 피로감으로 굳어버린다. 오늘 우리는 매일같이 뉴스, 광고, SNS, 알림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지구 반대편의 절망도, 이웃의 눈물도 잠시 울컥했다가 이내 다른 화면으로 스치듯 지나간다. 더군다나 진짜는 없고 이미지만 판을 친다. 이제는 인간의 슬픔도, 정의도, 연대도 모두 기호화된 감정이다. 그것은 진짜처럼 보이지만 반복되고 조작되고 연출된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이것이야말로 현대인의 감정 소진이며, 이 무감각이야말로 가장 극단적인 무관심이라고 말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감정 소진 상태가 점점 자연스러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무관심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여긴다. 냉소와 피상적 반응은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 된다. 지금 이 시대는 누군가를 위해 슬피 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슬퍼 보이는 모습”을 공유하는 것으로 충분한 시대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도다 함과 같도다.”(마태복음 11:16-17) 보드리야르가 진단한 것은 이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것이다. 사회가 감정을 조작하고, 욕망을 설계하며, 공감의 언어마저 포장하는 구조 속에서 우리는 반응하는 법을 잃고 느끼는 법을 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조가 너무 익숙해져서 더 이상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 진짜 위기가 시작된다. “무관심의 절정”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각성해야 한다. 피로한 감정이 일상이 되었고, 감정 없는 반응이 습관이 되었을 때 우리는 진지하게 성찰하고 질문해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아니, 나는 아직도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가? 희망은 물음에서 시작된다. 감정을 회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감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아파할 수 있는 능력, 누군가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일 수 있는 여백, 눈물이 마르지 않은 마음을 회복하는 것, 기호와 이미지에 휩쓸리지 않고 실재를 붙들 수 있는 용기를 갖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아직도 누군가의 고통 앞에 멈출 수 있다면 완전히 늦은 것은 아니다. 무관심의 절정 한가운데서 우리는 다시 ‘느끼는 연습’이 필요하다. 다시 사랑하고, 다시 분노하고, 타인의 고통에 다시 공감하고 연대하는 감정의 회복, 그것은 거창한 변혁이 아니라 아주 작은 감각의 틈에서 시작된다. 눈앞의 사람을 다시 바라보는 것, 뉴스 속 타인을 내 삶 안으로 초대하는 것, 멀리 있는 고통을 내 언어로 말해보는 것, 그렇게 우리는 다시 공감의 감정을 살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우리를 조금씩 움직이게 한다. 반응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다시 붙들게 한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자리에서 다시 울컥하게 만들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게도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지금, 우리는 감정을 회복해야 할 시간 한가운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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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09
  • [김성수 총장 ] 교육에 숨어든 문화 막시즘
    우리는 지금까지 학교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유용한 참된 지식을 배우는 곳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지난 수세기 동안 교육에 대한 이와 같은 신념에 대해 수많은 비판들이 제기되어 왔다. 이와 같은 비판들 중에는 교육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키는 비판들도 있었고, 교육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비판들도 있었다. 특히 교육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 과정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을 배우게 하는 것이라는 중요한 통찰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현대 교육이 그렇게도 중요하게 강조하는 이 ‘생각하는 방식’의 교육이 지켜야 할 경계선을 넘어서고 있는 것을 보면서 염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방식’은 때로 우리가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가치들, 예를 들면 가정, 신앙, 성, 국가, 책임과 같은 소중한 가치들과 충돌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것을 단지 ‘세상이 변했다’고 넘기기 쉽지만, 그 이면에는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온 하나의 사상적 흐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문화 막시즘’(Cultural Marxism)이다. 문화 막시즘은 한마디로 말해서 교육과 문화를 통해 세상의 기존 질서를 바꾸려는 시도다. 이들은 정치 혁명보다 문화 혁명을 중요하게 여긴다. 고전 막시즘이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다면, 문화 막시즘은 “억압받은 소수자여, 깨어나라”고 말한다. 경제 계급 대신 젠더, 인종, 종교, 가족, 성적 지향 등 다양한 정체성이 투쟁의 중심이 된다. 그리고 그 가장 좋은 전파 수단이 바로 ‘학교’라는 교육의 현장이다. 한 초등학교 사례를 보자.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공립초등학교에서, 1학년 학생들에게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단지 신체 구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느끼는 정체성이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교육이 시행되었다. 아이들은 “나는 남자지만 여자일 수 있고, 여자지만 남자일 수 있다”라고 적힌 그림책을 읽는다. 성경적 창조 질서에서 벗어난 이 가르침은, 아직 성 정체성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큰 혼란을 준다. 문제는 이 교육이 ‘포용성과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당연시된다는 점이다. 이런 교육에 반대하는 학부모는 ‘차별주의자’로 낙인찍힌다. 이것이 문화 막시즘의 특징이다. 표면적으로는 자유와 평등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이념만을 강요한다. 또 다른 예는 역사 교육이다. 과거에는 학생들이 학교 교육을 통해 미국 건국의 이상이나 민주주의의 발전, 인류 보편 가치에 대해 배웠다면, 오늘날에는 ‘식민주의’, ‘인종차별’, ‘억압의 역사’라는 틀로 모든 역사를 해석하는 시각을 학습하고 있다. 물론 경직화된 전통적인 교육에 대한 이러한 비판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균형이 무너지면서 또 다른 세계관을 주입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이러한 교육으로 인해 학생들은 ‘자신의 문화와 조상은 억압자였고, 자신은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죄책감 속에서 자라게 된다. 이는 건강한 시민의식이 아니라 분노와 분열을 키우는 왜곡된 교육이다. 이 역시 문화 막시즘의 전략이다. 공동체를 해체하고, 소속감보다는 투쟁심을 주입하는 방식의 이념적인 학습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교육 현장에서 종교적 표현은 점점 더 배척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한 공립 고등학교에서 한 학생이 발표 시간에 “하나님은 나의 인생의 방향을 이끄신다”고 말했을 때, 교사는 “종교적 언급은 교실에서 부적절하다”며 중단시켰다. 그러나 같은 수업에서 “성소수자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발표는 장려된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검열되고, 특정 이념은 보호되는 이중잣대는 교육이 중립성을 가장한 왜곡된 편향이다. 이런 학습은 교육을 ‘무신론적 포용성’의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문화 막시즘은 이처럼 표면적으로는 평등과 자유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전통을 해체하고 하나님을 배제하는 세계관을 퍼뜨리고 있다. 그리고 그 핵심 무대는 바로 다음 세대의 영혼이 형성되는 자리인 학교다. 학교는 언약의 자녀들이 단지 수학과 과학, 언어만을 배우는 장소가 아니라, 무엇이 ‘정상’인지, 무엇이 ‘옳은 가치’인지, 어떤 것을 ‘꿈꾸어야’ 하는지를 배우는 장소다. 학교는 문화 막시즘이 침투하여 장악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세계관의 전쟁터다. 교육은 ‘억압의 고발’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귀하게 만들고, 공동체를 세우며, 창조 세계를 잘 돌보도록 양육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 교육자들과 부모, 그리고 교회 공동체는 이제 깨어 있어야 한다. 문화 막시즘은 더 이상 대학 강의실에서만 머무는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자녀들의 교과서에, 동화책에, 학교 행사에, 교사 연수 프로그램에 은밀하게 침투해 있다. 우리는 교육의 자리를 다시 복음과 창조 질서의 언어로 채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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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13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2) (민12:11-16)
    미리암은 위대한 믿음의 여인이 맞습니다. 하지만 여선지자라는 위대한 칭호를 받은 후 신앙이 제자리걸음을 했습니다. 미리암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역사에 발맞추지 못하고 여전히 애굽에서의 사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모세가 없는 40년 동안 여자로서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진짜 지도자인 줄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진짜 지도자인 모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교만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40년 만에 나타난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기절초풍할 일들을 일으킵니다. 세계 최강의 애굽과 바로도 모세 앞에 쩔쩔맵니다. 애굽을 초토화 시켜버렸고, 애굽의 장자를 죽여 씨를 말려버렸습니다. 여호와의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임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만 대면하시고 바다까지 갈라 마른 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미리암은 40년 동안 여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을 영도해 왔지만 40년 만에 갑자기 등장한 모세의 위용 앞에서 입도 벙긋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선지자의 위치에서 볼 때 비록 인간적으로는 누나요 동생이지만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적 권위를 지닌 모세였기에 고개 들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교회들끼리, 특히 목회자들끼리 묘한 질투심과 경쟁심이 있습니다. 곁의 교회가, 다른 교회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갖습니다. 잘못되면 입은 안타깝다고 하면서 속은 이유 없이 고소하고 상대적인 만족을 얻습니다. 교회의 주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망각한 무서운 죄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이 교인들 사이에서도 발생합니다. 곁의 성도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잘못되면 입은 위로하는 것 같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자신의 신앙과 믿음이 좋은 것으로 위로받고 착각합니다. 아주 나쁜 모습입니다. 악한 모습입니다. 교만의 극치입니다. 어쩌면 이것보다 더한 것이 목회자들끼리의 보이지 않는 견제와 경쟁입니다. 주변의 교회가 갑자기 성장하면 상대적 박탈감을 가집니다. 사람이다 보니 비교가 안 될 수 없습니다. 특히 가까운 교회에서 독보적인 성장을 보이면 심각한 스트레스까지 받습니다. 목사 자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의 중직자들이나 성도들도 자연스럽게 목회자에게 압박을 가합니다. 자신은 1년이 가도 전도 한 명 하지 않으면서 교회 부흥을 입에 올립니다. 십일조나 감사헌금은 고사하고 선교나 불우이웃이나 개척교회, 농어촌교회, 은퇴하신 목사님, 가난한 신학생들을 위해 특별헌금 한 푼도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재정을 입에 올립니다. 더 심각한 것은 설교자들의 교만입니다. 설교하는 사람이다 보니 설교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설교자의 훌륭한 설교에 은혜받기는커녕 허점과 잘못을 찾기에 바쁩니다. 그러니 설교에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현상은 모세를 대적하는 미리암의 아류들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땀방울 하나, 눈불 방울 하나 다 주의 것입니다. 우리는 비교 대상도 아니요, 경쟁상대도 압니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며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자들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특히 목회자들은 아바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평생 잊어선 안 됩니다. 물론 아바타라 하지만 예수님의 아바타니 영광스럽습니다. 진짜 선지자, 진짜 목회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미리암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사실 미리암은 누구보다도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몰라서 범한 죄도 무섭지만, 알고도 범하는 죄는 더 무섭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단순히 그 사람의 성향이나 기질을 나타내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모세의 통치를 방해했고, 이스라엘의 진행을 가로막았습니다. 감히 모세의 영적 권위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감히 같은 선지자였지만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교만은 이 모든 영적 권위 앞에서도 원망과 비방의 고개를 들게 합니다. 호시탐탐 모세의 허점과 실수를 염탐합니다. 교회도 은혜를 계산하는 성도가 있고, 실수와 잘못을 찾아내는 성도가 있습니다. 기회가 왔습니다. 구스 여자가 돌아왔습니다. 이전에 이미 정리된 문제인데도 교만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영적분력을 상실했습니다. 미리암은 십보라가 돌아오자 속에 숨겨놓았던 원망과 불평을 표출합니다. 원망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사실까지 망각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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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07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1)
    성경 어디에도 미디안의 제사장 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는데 문제 삼은 장면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실에 대해 그 어디에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하는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사건 때문에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백성들이 구스 여인 십보라를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통치에 십보라를 문제 삼지 못하도록 아예 입도 벙긋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버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명을 주셨고, 그 사명 감당하기 위해 애굽으로 오는 길에 느닷없이 모세를 죽이시려고 한 것은 구스 여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임이 분명합니다. 분명한 이유는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것에 있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 같은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발견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려 하셨습니다. 완전한 모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이셨습니다. 완전히 죽이셨습니다. 그래도 십보라는 할례언약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긴박한 순간에 할례를 행하면 남편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과 비교도 되지 않는 신분입니다. 단순히 액면가로 볼 때 우리는 시아버지와 관계한 여인입니다. (마1:3)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우리는 우상의 신전에서 몸을 팔던 기생이었습니다. 우리는 과부요,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남편을 사지로 몰고 왕과 간음한 유부녀였습니다. (마1:5-6)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인데 죄인인 줄도 모르는 죄인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답도 없으면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제 딴에 잘 사는 줄 알지만 무익한 인생이요, 단 하나도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혀에는 속임만 있습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입에는 저주와 악독만 가득합니다. (롬3:10-14)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런 우리가, 그런 우리의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도 달렸고, 예수님의 부활에 나도 부활했다고 고백합니다. 사탄이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의를 제기하고 문제 삼을 것이 수두룩한 우리입니다. 아니 우리는 문제 그 자체들입니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합니다. 십보라가 할례 언약을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십보라가 할례를 행하여 남편을 살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불가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입으로 시인합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보라가 할례언약을 아는 것과 할례를 행하는 것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서십니다. (마10: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눅12: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합니다. 문제 제기도 못합니다. 입도 벙긋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의 예배 자리에, 예수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앉혀주십니다. (계12:22-23)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이런 은혜를 받은 성도입니다. 그래도 원망하고 비방하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완전한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할례를 시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에 거하며, 주일마다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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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0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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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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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수 총장] 칼빈의 추억 한 토막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 인상 깊은 장면을 회상한 것은 기록되어 있다. 테아 반 힐세마(Thea B. Van Halsema)가 저술한 『This was John Calvin(이 사람 존 칼빈)』이라는 책을 보면, 칼빈은 어머니와 함께 짧은 순례길을 걸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골짜기를 따라 두 시간을 걸은 끝에 도착한 곳은 예수의 외할머니로 여겨지는 성 안나의 유골이 안치된 사당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들어 올려, 금으로 장식된 관 안에 누워 있는 유골에 입을 맞추게 했다. 사당 안은 촛불로 밝고 향기로웠으며, 숭배하는 순례자들의 눈빛은 경건으로 가득했다. 어린 칼빈에게 그것은 아마 신비롭고 감동적인 체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이 장면을 바라볼 때,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정서 이상의 것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말 세 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성당의 종소리가 울린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성읍 생활의 중심이 되었던 중세 말 교회의 풍경은 단지 아름답고 경건한 외양만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신앙의 본질이 흐려진 채 형식과 외적 숭배에 몰두한 영적 타락이 도사리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의 형식주의와 권위주의, 성유물의 과도한 숭배, 그리고 성직자들의 탐욕은 교회의 영적 본질을 흐리고 있었다. 성 안나의 유골만이 아니라, 세례 요한의 머리카락, 예수의 치아, 오병이어 사건의 빵 부스러기, 가시관 조각과 구약시대 만나의 조각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성유물이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교회는 이러한 유물들을 통해 기적을 기대하고 은총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자극했고, 성직자들은 이를 통해 물질적 이익과 권력을 얻었다. 더 나아가 성당과 수도원은 특정 유물의 진위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다투었으며, 이 논쟁은 지역의 종교적 경쟁심을 자극했고, 프랑스 의회조차 이를 조정하지 못할 정도였다. ‘성인’의 이름을 붙인 성당이나 수도원은 유골을 소유한 장소로서의 권위를 주장했고, 이는 종종 종교적 신비주의를 이용한 경쟁과 탐욕의 장이 되었다. 말하자면, ‘거룩’은 거래되고, ‘은혜’는 판매되었으며, ‘경건’은 형식으로 포장되었다. 이 모든 모습은 한마디로 ‘거룩함의 상업화’였고, 진리 대신 형식과 기적, 외적 경건에 목을 매던 교회의 실상이었다. 이러한 부패는 개혁자들로 하여금 교회의 본질을 되묻게 했고,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잉태하게 했다. 칼빈은 단지 교리의 개혁자가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을 지닌 영적 개혁자였다. 그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함을 외쳤고, 유골과 형상과 건물 안에서가 아니라, 성령의 조명 아래 말씀과 신앙의 참된 삶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신학과 실천은 교회의 본질을 새롭게 정의했다. 교회는 권위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충실한 선포와 성례의 정당한 시행이 있는 곳이며, 무엇보다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믿는 자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문제는 과거의 부패가 오늘날에도 형태만 달리하여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교회는 더 이상 성인의 유골을 입맞추지 않지만, 또 다른 유물들을 만들어 숭배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화려한 예배당, 웅장한 무대, 감정을 자극하는 조명과 음악, 유명 목회자에 대한 절대적 의존, 그리고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역 성과들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성유물이 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때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인간의 욕망을 투영한 현대판 형식주의일 수 있다. 교회는 언제나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가시관 조각’이 있다. 그것은 더 멋진 무대, 더 화려한 예배당, 더 대형화된 사역과 같은 것들이다. 물론 이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중심이 되어 하나님을 도구화하고, 복음을 수단화하며, 인간의 만족을 위한 종교 행위로 전락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촛불 아래에서 거룩을 잃고 있는 것이다. 칼빈이 외친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는 외침은 시대를 초월한다. 이는 단지 제도 개혁의 구호가 아니라,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한 끊임없는 성찰과 순종을 요구하는 외침이다. 칼빈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은 단지 과거의 회고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거울과 같은 통찰이다. 그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성유물 앞에서 입을 맞췄던 기억은, 우리가 누구의 손에 이끌려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묻는 물음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순례 중이며, 여전히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 길 위에 서 있다.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무엇을 숭배하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멈추어 서는 것, 그리고 다시금 본질로 되돌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종교개혁의 정신이요, 오늘의 교회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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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30
  • [김경헌 목사] 땅의 소산 (창세기 4장 3절)
    “Why is the Firstborn Blessing Given to the Firstborn?” “왜 장자의 축복은 처음 태어난 자에게 주어지나요?” 지난 주일 설교를 들은 투코 집사님의 질문은 뜻밖이었습니다. “왜 첫째 아들이 장자여야 합니까?” 처음엔 다소 생뚱맞게 들렸지만, 곱씹을수록 그 질문은 제 마음을 크게 흔들었습니다. 그동안 성경에서 말하는 장자와 장자권에 대해 나름 분명한 기준을 갖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알고 보니 그 기준의 출발이 상식이었습니다. ‘장자라면 당연히 첫째 아들’이라는 세상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성경을 본다고 자신했지만, 출발점은 여전히 인간 중심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열네 살 많은 이스마엘을 제치고 이삭에게 장자의 축복을 전했습니다. 이삭은 쌍둥이 형 에서가 아니라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주었고, 야곱은 열두 아들 중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을 장자로 세웠습니다. 이런 장면을 읽을 때마다 우리는 종종 이상하게 느낍니다. 왜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신 장자의 원리를 스스로 따르지 않으실까 하는 의문이 들지요. 그러나 그 생각의 출발 자체가 이미 인간적인 상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장자’는 단순히 먼저 태어난 자를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원을 성취하는 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가족을 책임지는 자를 의미합니다. 완전한 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생명을 버리심으로 하나님의 가족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장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구원을 완성하는 직분이며, 그 직분은 사람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여하시는 소명입니다. 장자는 자신이 원해서 먼저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부모가 먼저 낳았고, 다른 이들이 ‘장자’라 불러주었을 뿐입니다. 본인은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것이라”고 하셨으니 장자이고, 하나님께서 “장자”라 부르셨으니 장자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 처음 태어난 것은 사람이든 짐승이든 다 내게 속하였음은 내가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태어난 자를 치던 날에 그들을 내게 구별하였음이라”(민 8:17)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준이 곧 장자의 기준입니다. 이 사실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믿음의 조상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에서 대신 야곱에게, 야곱이 요셉에게 축복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믿음으로’ 행한 일이라 증거합니다(히 11:20-21). 이렇게 보면 오히려 이삭이나 야곱, 요셉이 장자가 되는 것이 너무도 당연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볼 때는 아무런 모순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우리에게 의심과 원망이 생기는 이유는 언제나 기준이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장자로 세우셨지만, 그 뜻을 혈육의 서열로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장자로 부르셨으나, 그는 하늘의 예배보다 땅의 소산에 몰두했습니다. 제물을 받으시지 않자 그는 분노했고, 그 분노는 결국 동생 아벨을 죽이는 죄로 이어졌습니다(창 4:5, 8).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불신앙이며, 그 불신앙의 결과는 언제나 땅의 소산입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장자로 세우신 본래의 사명, 즉 예배의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장자는 가족을 대표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존재인데, 그는 예배보다 자신의 열심과 수확을 앞세웠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이 기준이 되었고, 결국 영적 교만과 타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깨닫게 된 것은, 우리가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이라고 외치면서도 실상은 상식과 서열, 인간의 기준으로 말씀을 판단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조금만 어긋나도 우리는 하늘의 소산이 아니라 땅의 소산을 거두게 됩니다. 투코 집사님의 질문은 그 당연하다고 여겼던 기준이 얼마나 인간적이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도 제자들을 형제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분의 믿음의 결단이 오늘의 교회로 이어졌습니다. 함께 묵상하던 송동호 목사님이 이런 글을 남기셨습니다. “The blessing of the firstborn is not a privilege of birth, but the portion of the one who bows before God first.” “장자의 축복은 태어남의 특권이 아니라 하나님께 먼저 무릎 꿇는 자의 몫이다.” 그는 곧 이어 이렇게 정정했습니다. “The blessing of the firstborn is not a privilege of birth, but the portion of the one whom God leads to bow before Him first.” “장자의 축복은 태어남의 특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무릎 꿇게 하신 자의 몫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무릎 꿇게 하시는 자, 그가 바로 장자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은혜로 장자의 자리로 불림받았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까지 믿음으로 주어진 장자의 자리를 지키며, 하늘의 소산을 거두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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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30
  • [김성수 총장] 삶 전체가 예배이긴 하지만…
    “삶 전체가 예배다.” 이 강렬한 개혁신학의 외침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의 거룩한 반란에서 비롯되었다. 요한 칼빈(John Calvin)은 인간의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살아가는 소명임을 선포했다. 성직자만 거룩하고 평신도는 영적 2등 시민으로 여겨지던 중세 교회의 위계 구조 속에서, 종교개혁자들은 가정, 직장, 시장, 농장, 사무실 등 모든 일상적 삶의 자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공간이 될 수 있음을 선언했다. 이는 캐나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가 말한 “일상의 삶의 성화(the sanctification of ordinary life)”를 의미한다. 이 위대한 개혁 정신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인물 중 한 사람이 바로 네덜란드의 신학자이자 정치가인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라 선언하지 않은 영역은 창조 세계의 단 1인치도 없다”고 외쳤고, 하나님의 주권은 모든 영역에 미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이론은 훗날 ‘카이퍼주의(Kuyperianism)’로 발전했고, 교회는 ‘제도적 교회(church as institute)’와 ‘유기적 교회(church as organism)’로 구분되어 설명되었다. 즉, 교회는 주일에 예배당에 모여 말씀과 성례를 통해 형성되며, 동시에 세상 속에서 문화와 교육, 정치, 예술의 영역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구현한다. 그런데 오늘날 ‘삶 전체가 예배다’라는 이 고상하고 심오한 구호가 아이러니하게도 원래의 본질적 의미를 상실한 채 오용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제임스 K. A. 스미스(James K. A. Smith)는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예배를 단지 ‘표현(expression)’으로 축소하면서 공예배의 자리는 점점 사라지고, 예배당은 ‘선택 사항’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실험실이나 산속의 일출, 책 읽는 순간, 일상의 루틴이 예배당보다 더 진정성 있는 예배의 장소처럼 여겨지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오해는 종종 왜곡된 카이퍼주의, 즉 “카이퍼보다 더 카이퍼적인 태도”에서 비롯된다. 삶의 다양한 ‘영역들(spheres)’을 강조하다 보니 오히려 각 영역 사이의 경계를 지나치게 감시하며, 예배당에서의 공동체적 예배는 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마치 ‘진짜 사역’은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교회의 공적인 예배 모임은 형식적 종교 활동에 불과한 것처럼 치부된다. 그러나 이것은 카이퍼의 본래 정신을 벗어난 것이다. 오히려 카이퍼는 ‘유기적 교회’는 반드시 ‘제도적 교회’로부터 양육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배는 단지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시간이 아니다. 오히려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하시는 시간이다. 말씀과 성례를 통해 성령께서 우리를 ‘형성’하신다. 이 형성의 과정 없이는 아무리 열정적인 문화 변혁도 기독교적 소명의 진정성과 지속성을 잃게 된다. 교회는 바로 이 전인적인 신앙 인격 형성의 장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을 위해 준비되는 영적 훈련소다. 이것은 단순히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보수적 반동이 아니다. 오히려 ‘일상의 성화’라는 종교개혁의 유산을 올바르게 계승하려는 본질적인 지향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시는 일에 참여하길 원한다. 정의를 세우고, 문화 속에서 복음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길 원한다. 그러나 그 모든 소명이 제대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 안에서 성화되는 훈련이 필요하다. 바로 그것이 공동체적 예배다. ‘삶 전체가 예배’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먼저 예배당에서 예배를 배우는 것이다. 우리가 공예배 속에서 말씀과 성찬에 참여하고, 공동체와 더불어 하나님을 찬양하며, 성령의 임재 속에 다시 세워질 때 우리는 세상 속에서 그분의 대사로 살아갈 수 있는 힘과 방향을 얻게 된다. 세상은 여전히 거칠고 불완전하다. 그래서 우리는 매주 예배당으로 돌아온다.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고, 다시 세상으로 파송 받는다. 종교개혁의 정신은 ‘모든 삶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외치면서도, 그 삶이 예배를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빚어져야 함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제임스 스미스 교수가 힘주어 강조하는 바와 같이, 삶 전체가 예배가 되려면 우리는 반드시 삶을 예배로 형성하는 그 거룩한 공간, 곧 예배당(sanctuary)으로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탄자니아 아프리카연합대학교에서 모든 교직원들과 학생들에게 주일 공예배를 중시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유다. 김성수 목사 (탄자니아 아프리카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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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5-10-16
  • [김경헌 목사] 브엘세바(열왕기상 19:3-5)
    엘리야가 죽기를 구한 이유가 ①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② 자신의 사역에 대한 허탈감과 번아웃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것만으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틈만 나면 하나님께 “죽여달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엘리야의 심정이 그러했다면, 실제로 능력을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하셨을까? 이스라엘의 심판은 불을 보듯 훤하다. 결론에 가서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대한 심판도 예고된다. 선지자의 행동은 메시아를 예표한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는 아예 죽기 위해 오셨다. ‘브엘세바’는 유다 남부의 블레셋 땅과 인접한 광야에 있던 성읍으로,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성읍은 이스라엘 전 영토의 남방 경계에 해당하였다. ‘브엘세바’는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의 분쟁을 종결짓고 언약을 다짐한 자리로, 판 우물과 관련하여 ‘맹세의 우물’이라는 뜻을 가진다. 또한 아브라함과 이삭이 판 우물의 수와 관련하여 ‘일곱 우물’이라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이곳 브엘세바는 엘리야가 머물렀던 이스르엘로부터 약 142km나 떨어진 곳이다. 엘리야는 자기의 사환을 그곳에 머물게 하고, 혼자만 단독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나아갔다. 이는 선지자 사역을 포기하거나 죽음을 각오한 결단으로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엘리야는 브엘세바로 도망갔을까? 그곳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우물 문제로 언약을 맺은 곳이었다.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창세기 21:31)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창세기 26:33) 브엘세바는 ‘언약이 있는 곳’이었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이름이기도 하고, 그의 열두 아들로 구성된 나라다. 지금 불신앙에 빠져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이스라엘, 바로 그 이스라엘의 출발점이 브엘세바였다. 야곱은 애굽으로 내려가기 전, 이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창세기 46:1)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약속을 주셨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세기 46:3) 엘리야는 바로 그 약속이 있는 브엘세바로 내려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해 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야곱에게 약속하셔서 시작하게 하신 지금의 이스라엘을 기억해 달라는 호소였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엘리야. 공의로우시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을 너무 사랑하셨던 그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았던 엘리야는,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셨고 시작하게 하신 것 아니냐”며 나부터 죽여달라고 투정을 부렸다. 이런 엘리야의 의도를 다 아셨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손을 거두시고, 오히려 엘리야를 어루만지셨다. 그리고 친히 숯불에 떡을 구워 먹이시고, 한 병의 물을 마시게 하셨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았던 엘리야.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니,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려고나 할까? 시도 때도 없이 내 마음 알아달라고만 발버둥 치고 있는 우리는 아닐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는 순간까지, 그 모든 공생애의 목적이 하나님의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태복음 26:39)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가복음 14:36) 하나님께서는 이런 의미를 담고 브엘세바를 찾은 엘리야를,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아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부르짖었던 그 광야의 엘리야를 호렙산으로 인도하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성도들의 브엘세바다. 주일마다 드려지는 예배는 성도들이 광야에서 “나를 죽여달라”고 울부짖는 시간이다. 그런 성도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산 호렙으로 인도해 주신다. 이런 예배의 근본정신이 파괴되어 위로나 감동이 목적이 되고, 자기 만족이 목적이 된 오늘날의 교회. 과연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는 교회가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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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16
  • [김성수 총장] 하나의 그림, 두 개의 ‘현실’
    1892년 독일 잡지에 처음 등장한 ‘오리-토끼 그림’은 보기에는 단순하지만,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를 묻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이 그림은 한 번 보면 오리처럼 보이기도 하고, 다시 보면 토끼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보다 더 깊은 진실을 품고 있다. 이 하나의 도형은 단지 착시 현상을 유발하는 시각 장난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식이 얼마나 ‘보는 것’ 이상이며, ‘해석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 준다. 심리학자 조제프 야스트로(Joseph Jastrow)는 이 그림을 통해 인간의 지각이 단순히 눈으로 들어오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과정이 아니라, 기존의 지식, 경험, 기대, 심지어 감정과도 연결된 능동적 해석의 과정임을 보여주었다. 같은 그림을 놓고 어떤 사람은 오리를 먼저 보고, 어떤 사람은 토끼를 본다. 심지어 어떤 이는 오리에서 토끼로, 토끼에서 오리로 전환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어떤 이는 둘 다를 동시에 볼 수 없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대상 자체인가, 아니면 그것을 해석한 나의 정신인가?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이 그림을 『철학적 탐구』에서 논의하며 “seeing as(무엇으로서 보기)”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그는 이 그림을 통해 ‘보는 것(seeing)’과 ‘~로 보는 것(seeing as)’은 다르다고 지적한다. 전자는 단순히 외부 세계를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지만, 후자는 그 감각 정보를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다. 즉, ‘토끼로 보인다’는 것은 단지 토끼의 형상을 눈으로 본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정신이 ‘이것은 토끼다’라는 틀을 씌운다는 뜻이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의 인식이 언제나 이 두 번째 방식, 곧 ‘틀 속에서 보기’를 통해 작동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날마다 수많은 사람, 사건, 정보를 마주하지만, 그 모든 것은 중립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우리의 가치관, 세계관, 정체성은 우리가 보는 세상을 구성하고 재구성한다. 때로는 그 틀 덕분에 세상이 이해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틀이 우리의 눈을 가리고 왜곡하기도 한다. 교육과 사회, 심지어 신앙의 영역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선입견의 틀’과 마주한다. 정치적 성향이 다른 두 사람은 같은 뉴스를 보고도 전혀 다른 해석을 내리고, 종교적 배경이 다른 사람들은 같은 성경 구절조차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다. 심지어 동일한 가정 안에서도 자녀는 부모의 말과 행동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기억한다. 사실보다 해석이, 현실보다 인식이 인간 삶에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이 오리-토끼 그림은 이러한 인간 인식의 복잡성과 동시에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단 하나의 도형이 오리이기도 하고 토끼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우리의 현실도 단일하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뉴스 한 장면을 보고도 어떤 이는 정의라고 말하고, 또 다른 이는 억압이라고 판단한다. 누군가는 절망 속에서 빛을 보고, 누군가는 성공 속에서 허무를 본다. 같은 사건을 두고 누군가는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고, 또 누군가는 부조리한 세상을 탓한다. 세상은 하나지만, 해석은 수없이 많다. 중요한 것은 ‘어떤 현실을 살아가느냐’가 아니라, ‘그 현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이다. 그래서 때로는 ‘현실을 바꾸는 것’보다 ‘해석의 틀을 바꾸는 것’이 훨씬 더 큰 변화를 만든다. 예수님은 단지 육체의 눈이 아니라, 영적 인식의 능력, 곧 진리를 향한 해석의 능력을 말씀하셨다.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혼돈 속에서도 질서를, 절망 속에서도 소망을, 미움 속에서도 사랑을 볼 수 있다. 똑같은 현실이지만 믿음의 시선이 그것을 완전히 다르게 보게 한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나는 이 현실을 어떤 해석의 렌즈로 보고 있는가? 이웃을 향한 시선, 일터에서의 해석, 고난과 질병을 바라보는 관점, 죽음을 대하는 마음, 이 모든 것이 성경의 진리 위에 있는가? 아니면 세상의 기준과 감정, 편견과 습관 위에 있는가? 성령께서 우리 모두의 눈을 열어 주시면 세상은 더 이상 착시가 아니라, 복음의 시선으로 해석된 진실로 다가올 것이다. ※ 오리-토끼 그림 (Duck-Rabbit Illusion) -최초 등장: 1892년 독일 잡지 Fliegende Blätter에 실린 삽화. -원문 질문: “Welche Thiere gleichen einander am meisten?” (어떤 동물들이 서로 가장 닮았는가?) -원문 답변: “Kaninchen und Ente.” (토끼와 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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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25
  • [고신총회 개회예배- 최성은 목사]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 (에베소서 2:19-22)
    사랑하는 총대 여러분,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제75회 총회를 열며, 에베소서 2장 19-22절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라는 주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는 3차 전도여행 중 이곳에서 무려 2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난 후 교회 안에는 긴장이 생겨났습니다. 유대인 출신 성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우월감을 드러냈고, 이방인 성도들은 여전히 죄인이라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 갈등의 한복판에서 바울은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2). 교회의 본질은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원수 된 담을 허무시고,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서 가족으로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1952년 고신총회가 시작될 때, 한상동 목사님은 “사랑도, 돈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312개 교회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2200여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단과 교회를 함께 세워오셨다는 증거입니다. 왜 우리는 함께 지어져 가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가족이기 때문입니다(엡 2:19). 이전에는 서로 낯설고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녀로 연결되었습니다. 교회가 상생하는 것은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략이며, 무너진 창조 질서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성경은 이 진리를 반복해서 증언합니다. 시편 133편 1절은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 했습니다. 함께하는 그 자체가 이미 선하고 아름다운 일입니다. 전도서 4장은 “혼자보다 둘이 낫고, 함께할 때 승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연합할 때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악한 영과의 싸움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상생을 실현할 수 있을까요?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잇돌로 삼아야 합니다. 모퉁잇돌이 건물의 기초와 방향을 결정하듯,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기초와 기준이 되십니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은 성전을 이루는 작은 돌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결될 때 비로소 교회는 든든히 세워지고, 삶 속에서 예수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둘째,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8). 인간의 힘으로는 갈등을 해결할 수 없지만,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십니다. 견해의 차이와 방법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성령을 의지할 때 교회는 하나 되어 상생할 수 있습니다. 셋째, 겸손과 희생, 연합의 신앙 전통을 회복해야 합니다. 금산교회의 이야기는 이를 잘 보여줍니다. 부유한 지주 조덕삼과 머슴 출신 이자익이 한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투표에서 머슴이던 이자익이 장로로 뽑혔을 때, 조덕삼은 “비록 우리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지만 신앙은 나보다 훨씬 깊다”고 고백했습니다. 나중에 그는 목회자가 되어 조덕삼과 함께 교회를 섬겼습니다. 주인과 종이 함께 장로와 목회자로 섬긴 이 사건은 복음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상생의 역사였습니다. 사랑하는 총대 여러분, 오늘 우리는 손현보 목사(부산 세계로교회)가 구속되는 아픔을 보았습니다. 그는 30년간 한 지역을 지켜온 목회자입니다. 그의 가정과 교회를 위해 주님의 위로와 긍휼이 함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돈도, 사람도 없었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붙들며 총회를 세웠습니다. 그들의 희생과 헌신, 그리고 상생의 전통을 오늘 우리가 이어받아야 합니다. 이번 총회가 다시 한번 하나님 나라를 함께 세워가는 상생의 운동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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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25
  • [김성수 총장] 무관심의 절정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 “멍 때린다”는 표현이 있다. 고유한 우리말인 이 표현은 “아무 생각 없이 한곳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의식이 잠시 멈춘 듯한 상태로 가만히 있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아무 뉴스에도 반응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한 적이 있을 것이다. 어느새 멍하니 휴대폰을 스크롤하고 있지만, 거기 담긴 전쟁과 죽음, 기후 위기와 삶의 절망적인 광경 앞에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현상을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현대 사회는 너무 많은 것을 너무 자주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감정이 교묘하게 조작되며, 반응은 형식화된다. 심지어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피곤한 시대다. 바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그 시점이다. 이것을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무관심의 절정’이라고 불렀다. 이 무관심은 감정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감정을 과잉 소비한 끝에 마비된 상태다.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을 이미지화하고, 의미로 포장하고,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한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많은 자극과 너무 많은 반응이 반복되다 보면 오히려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감정이 남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관심이 있던 자리에 무감각이 남고, 연대하려던 마음은 차가운 피로감으로 굳어버린다. 오늘 우리는 매일같이 뉴스, 광고, SNS, 알림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지구 반대편의 절망도, 이웃의 눈물도 잠시 울컥했다가 이내 다른 화면으로 스치듯 지나간다. 더군다나 진짜는 없고 이미지만 판을 친다. 이제는 인간의 슬픔도, 정의도, 연대도 모두 기호화된 감정이다. 그것은 진짜처럼 보이지만 반복되고 조작되고 연출된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이것이야말로 현대인의 감정 소진이며, 이 무감각이야말로 가장 극단적인 무관심이라고 말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감정 소진 상태가 점점 자연스러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무관심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여긴다. 냉소와 피상적 반응은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 된다. 지금 이 시대는 누군가를 위해 슬피 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슬퍼 보이는 모습”을 공유하는 것으로 충분한 시대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도다 함과 같도다.”(마태복음 11:16-17) 보드리야르가 진단한 것은 이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것이다. 사회가 감정을 조작하고, 욕망을 설계하며, 공감의 언어마저 포장하는 구조 속에서 우리는 반응하는 법을 잃고 느끼는 법을 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조가 너무 익숙해져서 더 이상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 진짜 위기가 시작된다. “무관심의 절정”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각성해야 한다. 피로한 감정이 일상이 되었고, 감정 없는 반응이 습관이 되었을 때 우리는 진지하게 성찰하고 질문해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아니, 나는 아직도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가? 희망은 물음에서 시작된다. 감정을 회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감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아파할 수 있는 능력, 누군가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일 수 있는 여백, 눈물이 마르지 않은 마음을 회복하는 것, 기호와 이미지에 휩쓸리지 않고 실재를 붙들 수 있는 용기를 갖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아직도 누군가의 고통 앞에 멈출 수 있다면 완전히 늦은 것은 아니다. 무관심의 절정 한가운데서 우리는 다시 ‘느끼는 연습’이 필요하다. 다시 사랑하고, 다시 분노하고, 타인의 고통에 다시 공감하고 연대하는 감정의 회복, 그것은 거창한 변혁이 아니라 아주 작은 감각의 틈에서 시작된다. 눈앞의 사람을 다시 바라보는 것, 뉴스 속 타인을 내 삶 안으로 초대하는 것, 멀리 있는 고통을 내 언어로 말해보는 것, 그렇게 우리는 다시 공감의 감정을 살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우리를 조금씩 움직이게 한다. 반응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다시 붙들게 한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자리에서 다시 울컥하게 만들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게도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지금, 우리는 감정을 회복해야 할 시간 한가운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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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09
  • [김경헌 목사] 땅의 소산 (창세기 4:3)
    가인은 동생 아벨을 찾아가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잘못된 것을 고했습니다. 자신의 제사를 받아주지 않으신 하나님의 결정에 불만을 품고, 아벨이 그 원망에 동조하도록 간청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아벨이 가인의 말을 따르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성도들에게 사탄의 말이라고 하면 넘어갈 사람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니 혹하는 것입니다. 목사라고 하니, 장로라고 하니 신뢰가 가는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을 받았다"고 하니 그 말을 안 들으면 벌받을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니 아무 말도 못 하고 대꾸조차 못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가인이 아벨에게 고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고하는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창세기 4장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류가 이 땅에서 처음 기록한 사건을 보여줍니다. 한마디로 인류 역사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 곧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역사는 곧 예배의 역사입니다. 예배를 떠난 역사는 더 이상 역사가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 역사를 기록하고, 역사의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류 최초의 역사는 예배에 실패하여 살인자가 된 가인의 기록으로 시작합니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지만, 완전한 승리자이신 하나님께서 성경에 반역의 역사를 기록하셨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첫째, 성도 개인적으로는 가인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배에 실패하면 가인처럼 반역의 역사를 쓰게 됩니다. 둘째, 실패의 역사 가운데서도 빛을 밝히는 아벨이 되라는 것입니다. 완전한 아벨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믿음으로 예배드리는 자는 구원과 생명의 역사에 동참하게 됩니다. 성경은 분명히 가인의 말을 듣고 있으면 죽는다고 강조합니다. 동조해도 죽고, 동조하지 않아도 죽습니다. 원망의 결과는 반드시 죽음입니다. 특히 예배에 대한 원망은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아벨은 가인의 원망에 동조하지 않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억울하게 죽지만, 결국에는 믿음으로 살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증거하게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경이 아벨의 대답을 한마디도 기록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벨은 분명히 형에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말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는 아벨이 믿음으로 반응한 방법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아벨은 가인과 입을 섞지 않았고, 그 결과 죽임을 당했지만 하나님 앞에서 승리했습니다. (눅 23: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원망은 이렇게 원수도 친구로 만듭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예수의 사랑 안에서도 심심찮게 원수가 되곤 합니다. 교회 안에서 원망과 불신앙으로 친구가 되는 경우는 대부분 헤롯과 빌라도처럼 얄팍한 동맹에 불과합니다. 원망은 안 듣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그러나 교회 사명을 감당하다 보면 원망을 듣게 됩니다. 문제는 그 원망이 전염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원망을 들은 내가 죽어야 합니다. 아벨이 가인의 원망에 동조하지 않고 죽은 것처럼, 우리도 원망에 대해 자신이 죽어야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시도 때도 없이 죽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사람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딤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원망의 최종 목표는 하나님을 향해 있기 때문에, 감사는 원망을 막아내는 최고의 영적 무기요 능력입니다. 성도가 감사 대신 원망을 택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버리고 사탄의 사술을 사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원망은 창세기 3장의 뱀의 미혹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뱀이 하와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 3:1)라고 물었을 때, 하와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창 3:2-3)라고 답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먹지 말라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고 하셨습니다. 말씀에 토를 단 것이 곧 원망의 시작이었습니다. 사탄은 지금도 성도를 향해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고 속이며, 원망을 통해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원망은 코로나19보다 더 무섭고 불치병과 같습니다. 성경은 아벨의 죽음을 통해 교훈합니다. 원망을 들었을 때 성도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가 죽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사는 것입니다(벧전 2:24). 장로님들이 성도들의 원망을 듣고도 목회자를 돕는 것은, 그 원망에 동조하지 않고 죽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장로님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결국 원망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원망을 들은 내가 죽는 것이며, 이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아벨의 죽음은 억울한 죽음이 아니라 의로운 죽음, 믿음으로 죽은 죽음입니다. (히 12:24)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눅 11:50-51)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마 23: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아벨의 죽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합니다. 주님은 죄와 사망과 지옥의 모든 원망을 다 들으시고,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아벨의 죽음을 완성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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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5-09-09
  • [김성수 총장 ] 교육에 숨어든 문화 막시즘
    우리는 지금까지 학교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유용한 참된 지식을 배우는 곳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지난 수세기 동안 교육에 대한 이와 같은 신념에 대해 수많은 비판들이 제기되어 왔다. 이와 같은 비판들 중에는 교육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키는 비판들도 있었고, 교육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비판들도 있었다. 특히 교육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 과정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을 배우게 하는 것이라는 중요한 통찰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현대 교육이 그렇게도 중요하게 강조하는 이 ‘생각하는 방식’의 교육이 지켜야 할 경계선을 넘어서고 있는 것을 보면서 염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방식’은 때로 우리가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가치들, 예를 들면 가정, 신앙, 성, 국가, 책임과 같은 소중한 가치들과 충돌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것을 단지 ‘세상이 변했다’고 넘기기 쉽지만, 그 이면에는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온 하나의 사상적 흐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문화 막시즘’(Cultural Marxism)이다. 문화 막시즘은 한마디로 말해서 교육과 문화를 통해 세상의 기존 질서를 바꾸려는 시도다. 이들은 정치 혁명보다 문화 혁명을 중요하게 여긴다. 고전 막시즘이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다면, 문화 막시즘은 “억압받은 소수자여, 깨어나라”고 말한다. 경제 계급 대신 젠더, 인종, 종교, 가족, 성적 지향 등 다양한 정체성이 투쟁의 중심이 된다. 그리고 그 가장 좋은 전파 수단이 바로 ‘학교’라는 교육의 현장이다. 한 초등학교 사례를 보자.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공립초등학교에서, 1학년 학생들에게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단지 신체 구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느끼는 정체성이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교육이 시행되었다. 아이들은 “나는 남자지만 여자일 수 있고, 여자지만 남자일 수 있다”라고 적힌 그림책을 읽는다. 성경적 창조 질서에서 벗어난 이 가르침은, 아직 성 정체성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큰 혼란을 준다. 문제는 이 교육이 ‘포용성과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당연시된다는 점이다. 이런 교육에 반대하는 학부모는 ‘차별주의자’로 낙인찍힌다. 이것이 문화 막시즘의 특징이다. 표면적으로는 자유와 평등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이념만을 강요한다. 또 다른 예는 역사 교육이다. 과거에는 학생들이 학교 교육을 통해 미국 건국의 이상이나 민주주의의 발전, 인류 보편 가치에 대해 배웠다면, 오늘날에는 ‘식민주의’, ‘인종차별’, ‘억압의 역사’라는 틀로 모든 역사를 해석하는 시각을 학습하고 있다. 물론 경직화된 전통적인 교육에 대한 이러한 비판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균형이 무너지면서 또 다른 세계관을 주입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이러한 교육으로 인해 학생들은 ‘자신의 문화와 조상은 억압자였고, 자신은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죄책감 속에서 자라게 된다. 이는 건강한 시민의식이 아니라 분노와 분열을 키우는 왜곡된 교육이다. 이 역시 문화 막시즘의 전략이다. 공동체를 해체하고, 소속감보다는 투쟁심을 주입하는 방식의 이념적인 학습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교육 현장에서 종교적 표현은 점점 더 배척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한 공립 고등학교에서 한 학생이 발표 시간에 “하나님은 나의 인생의 방향을 이끄신다”고 말했을 때, 교사는 “종교적 언급은 교실에서 부적절하다”며 중단시켰다. 그러나 같은 수업에서 “성소수자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발표는 장려된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검열되고, 특정 이념은 보호되는 이중잣대는 교육이 중립성을 가장한 왜곡된 편향이다. 이런 학습은 교육을 ‘무신론적 포용성’의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문화 막시즘은 이처럼 표면적으로는 평등과 자유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전통을 해체하고 하나님을 배제하는 세계관을 퍼뜨리고 있다. 그리고 그 핵심 무대는 바로 다음 세대의 영혼이 형성되는 자리인 학교다. 학교는 언약의 자녀들이 단지 수학과 과학, 언어만을 배우는 장소가 아니라, 무엇이 ‘정상’인지, 무엇이 ‘옳은 가치’인지, 어떤 것을 ‘꿈꾸어야’ 하는지를 배우는 장소다. 학교는 문화 막시즘이 침투하여 장악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세계관의 전쟁터다. 교육은 ‘억압의 고발’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귀하게 만들고, 공동체를 세우며, 창조 세계를 잘 돌보도록 양육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 교육자들과 부모, 그리고 교회 공동체는 이제 깨어 있어야 한다. 문화 막시즘은 더 이상 대학 강의실에서만 머무는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자녀들의 교과서에, 동화책에, 학교 행사에, 교사 연수 프로그램에 은밀하게 침투해 있다. 우리는 교육의 자리를 다시 복음과 창조 질서의 언어로 채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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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13
  • [김경헌 목사] 땅의 소산(3) (창4:3)
    교회 생활, 신앙생활에 가끔 사사건건 똑똑해서 시끄러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펄펄 살아 있어 매사에 할 말이 많습니다. 여기서 말이 많은 사람은 단순히 수다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가인처럼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일에 말이 많은 사람, 신앙생활과 교회 생활에 말이 많은 사람을 뜻합니다.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제물을 받아주시지 않자 분노하고 안색이 변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들었고 책망도 받았지만, 여전히 할 말이 많았습니다(창4:8). 하나님 앞에서 낯도 들지 못하는 사람이 할 말이 많았고, 결국 동생 아벨을 쳐 죽여 자신도, 부모도, 가족도 다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는데도 말이 많았습니다. 가인은 번지수를 잘못 찾았습니다. 아벨에게 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엎드렸어야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결정에 분노했지만 하나님께 변명조차 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드린 말은 동생을 죽이고 발각된 후 구차한 변명과 형벌에 대한 불평뿐이었습니다(창4:9). 왜 첫째 아들, 장자입니까? 우리나라에 있었던 아들 선호사상은 사실 장자 선호사상에 가깝습니다. 성경은 장자를 아버지를 대신하는 자로 세우셨습니다. 장자는 가정을 위해 목숨을 버릴 자이기 때문에 두 몫을 받습니다(신21:16-17). 훗날 야곱이 죽을 때 가족을 위해 목숨을 내놓았던 유다를 장자로 축복했고(창49:8), 메시아는 유다의 가문으로 오셨습니다(마1:1). 요셉은 가족을 살렸기에 두 몫의 기업을 받았습니다(겔47:13). 야곱이 손자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팔을 엇바꾸어 축복한 것은 요셉을 형님으로 모시는 믿음의 결단이었고, 완전한 장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를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제자를 “네 어머니라”(요19:27) 하시며 형제로 승격시키셨고, 제자들이 장자가 되어 주님의 기업을 잇게 하셨습니다(요14:12). 예수님은 아벨처럼 죽임을 당하면서도 억울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판결을 불공평하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아버지를 걱정하시고, 온 가족을 살리는 장자로서의 사명에만 충실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4:9)고 물으셨습니다. 모르셔서 물으신 것이 아니라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아벨에게 가서 말하고 그를 죽였습니다(창4:8). 하나님의 판결에 말이 많은 자는 동생을 죽이는 자이고, 하나님께 말씀드려야 할 때 사람에게 말하는 자는 가인입니다. 성도로서 해야 할 말을 하는 자는 선을 행하며 하늘의 소산을 드리는 자이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는 자는 악을 행하며 땅의 소산을 드리는 자입니다. 입조심은 성경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말은 마음을 드러내며,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무익한 말로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고(마12:36-37),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습니다(막7:20-23). 하나님이 가인에게 물으신 것은 다 아시면서 묻는 것이었습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가 몰라서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은 그 사람 중심까지 알고 묻습니다. 설교가 나를 치는 것 같을 때가 바로 하나님이 가인에게 물으시는 시간입니다. 그때는 회개하고 하나님께 엎드려야 합니다. 동생을 죽이는 죄를 지었더라도, 깨진 그릇처럼 회복 불가능해 보여도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가인의 전철을 밟습니다. 가인은 장자의 사명을 원망했습니다. 예배는 영광스러운 직분이지만 그는 공로로 여겼습니다. 주일을 지켰다는 자기 공로에 사로잡혀 하나님이 예배를 받지 않자 분노했습니다. 책망을 받자 아벨에게 가서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았고, 결국 그를 죽였습니다(창4:8). 신앙생활에서 하나님께 못 할 말을 다른 성도에게 말하는 자, 성도에게 원망과 불평을 하는 자는 가인입니다. 원망과 불평을 들은 아벨은 죽습니다. 귀에는 덮개가 없어 듣기 쉽기에 성경은 무엇을, 어떻게 들을지 삼가라 경고합니다(눅8:18, 막4:24, 잠4:20-21, 잠19:27, 딤후4:3-4). 가인의 원망을 들으면 죽습니다. 원망은 항상 거칠고 노골적인 모습으로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예배를 세우는 것처럼 포장되어 다가옵니다. 찬송과 기도로 은혜를 나눈 직후에도 원망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그 원망이 더욱 정당해 보이고, 심지어 공동체를 세우는 일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원망을 따라가면 마라의 쓴물처럼 결국 믿음의 공동체를 병들게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우리는 원망의 내용만이 아니라, 그 말이 흘러나오는 마음과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겉모습이 아무리 경건해 보여도, 하나님보다 사람을 향한 불평이라면 그것은 가인의 길입니다. 신앙생활·교회생활은 방법이 아닌 본질의 문제입니다. 목회도 상황이나 성향이 아니라 말씀의 기준을 따지는 본질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어렵지만, 본질에 목숨만 걸면 단순하고 쉽습니다. 목회는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바르게 세우는 일이며, 십자가라는 죽음의 위기가 따릅니다.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목회는 팔이 밖으로 굽어야 합니다(갈5:16-17). 예수님도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러 오셨고, 심지어 가족 간의 분쟁까지 말씀하셨습니다(마10:34-36, 눅12:51-53). 귀에 덮개가 없는 것은 말씀을 항상 들으라는 뜻입니다. 설교자는 나팔이며, 성도는 나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사18:3, 렘6:17, 겔33:4). 듣기 싫어하는 자는 마지막 날 하나님의 나팔 소리도 듣지 못할 것입니다(살전4:16-17). 원망하면 동생을 죽이고, 원망을 들으면 형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지금 내가 원망하고 있다면 동생을 죽이는 것이고, 원망이 내 귀에 들린다면 아벨처럼 맞아 죽는 것입니다. 가인의 불신앙을 성경은 “땅의 소산”이라 표현합니다. 완전한 장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오늘도 그 부활에 참여하여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함으로 하늘의 소산을 하나님께 드리는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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