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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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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2
  • [김성수 총장]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
    모든 사람은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지 간에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worldview)을 가지고 있다.세계관은 개인이 소유하지만 공동체적으로 공유하기도 한다.우리는 세계관의 틀(framework)을 통해서 사물을 바라보고 행동한다.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세계관은 삶의 양식으로 표출되는데 이것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그러므로 한 개인과 공동체가 어떤 세계관을 소유하고 공유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삶의 양태가 나타나고, 한 사회의 문화와 제도도 생성하고 발전하며 쇠퇴하기도 한다. 인간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의 역할은 역사를 통해서 확연히 볼 수 있다.이것은 근대 문화 형성의 근간이 되는 로마의 역사와 문화에서는 잘 나타나고 있다.기독교 세계관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일찍이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시대부터 노예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법률이 통과되었다. 영아 살해의 관습 역시 십자가형과더불어,보다 더 극적으로는 낙태와 함께 금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검투사 시합도 종말을 고했는데, 그 이유는 텔레마코스(Telemachus)라는 용감한 수도승이검투 경기에서 일어나는 잔인한 살인을 막으려고 경기장 바닥으로 내려갔고,그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로마 사회의 변화는 비록 점진적이긴 했지만 로마 제국 전역에서 인간 생명의 가치가 점점 더 인식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로마 제국 자체는 결국 곤경에 처해 있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을 지배했떤 세속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세계관으로 말미암아 로마 사회는 너무 오랜 세기 동안 쾌락과 반 출생주의적인 비성경적 삶의 양태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물론,이와 같은 저 출산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소위 그들이 야만인이고 불렀던 비게르만족들을 향한 이민문호를 폭넓게 개방하기는 했지만 이민에 대한 높은 의존도가 로마 사회의 인구 격차를 메우기에 역부족이었다.여기에 행정적, 군사적 실수가 결합되어 이주하는 인근의 다른 부족들에게도 제국의 국경을 활짝 열어 놓게 되었다.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부 지역에서 로마의 권위는 자신의 무능함과 게르만 부족의 공격으로 붕괴되었다. 로마, 게르만, 그리고 기독교 전통의 궁극적인 융합은 비록 완만한 전환의 과정이긴 했지만 중세 유럽에 새로운 문화와 세계관의 출현을 가져왔다. 우리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의 역할에 대해서 한 가지 예를 더 살펴 보기로 하자.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삶을 영위하기를 소망한다.그런데 영적인 삶의 영위에 향한 우리의 소망과 삶의 양태 역시 영적인 삶에 대한 관점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예를 들어,인간의 정신은 고상하고 거룩하고 선한 반면에 육체는 저급하고 속되고 악하다고 보는 이원론적 인간관을 견지하게 되면 육체적 고행이 하나님과 더 연합하는 삶이라고 보게 되고,따라서 우리가 신앙적이고 영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한 육체적인 본능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역사적으로 보면,결국 이러한 종류의 인간관에 기초한 금욕적 실천은 사람들이 '생활의 법칙'에 따라 공동체로 살아가는 수도원주의(monasticism)로 발전했다. 수도원은 일반적으로 독신 생활과 엄격한 생활 방식을 요구했다.수도승과 수녀는 체계적인 기도, 연구, 그리고 생산적인 노동의 삶을 영위하였다. 수도승과 수녀들에게는 관상기도의 기초로서 연구 활동이 특별히 중요했다. 이미 5세기 초에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라는 로마 원로원 의원은 자신이 비바리움(Vivarium)에 설립한 수도원에서 기독교와 이교 사상가들에 대한 텍스트 복사와 연구를 수도원 생활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삼았다. 카시오도로스와 그의동료들은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그 연구는 영적 발전의 길이라고 믿었다. 모든 초기 수도원들이 카시오도루스의 관점을 따른 것은 아니지만, 몇 세기 안에 그의 사상과 독서 목록은 수도원 영성의 중추를 제공하게 되었다. 수도승들은 기도나 연구와 같은 보다 분명한 “영적인 활동”들과 함께, 생산적인 노동에도 참여해야 했다. 로마 사회의 세계관 노동을 비하하고 노예들에게 노동을 강요했을지 모르지만 수도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비록 부분적으로는 겸비의 덕을 장려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수도승이 일해야 한다는 생각은 주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성경적 사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도 역시 일해야 한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었다. 창세기에서 아담은 죄를 짓기 전에 동산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므로 일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행하도록 만들어진 한 부분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은 삶의 목적에 대한 현저하게 다른 견해로 이어지게 되었다. 세계관 변화의 이러한 특별한 요인은나중 서구의 경제적 성공과 활력의 토대를 놓았다. 저출산,도덕성의 일탈,경제 문제,환경 파괴,정치 불신과 혐오 현상,남북간의 긴장 등 이 모든 문제들의 근본 뿌리는 왜곡된 세계관이다. 2024년도 새해를 맞았다.올 한 해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형성하는 올바른 세계관의 정립 운동이 범 국민 운동으로 펼쳐지기를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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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9
  • [김성수 총장]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요즘 언론을 통해 중국의 시진핑과 러시아의 푸틴, 그리고 북한의 김정은과 같은 독재자 한 사람의 잘못된 가치관과 이로 인한 횡포로 인해 그들 자국 인민들이 겪는 불행과 고통은 물론, 예측할 수 없이 소용돌이치는 국제 정세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번씩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를 떠 올리게 된다. 시진핑, 푸틴, 김정은과 같은 악랄한 독재자 대신 기독교 신앙에 좀 우호적인 지도자가 등장하면 자국민들도 좀 더 행복할 것이고 세계 질서도 달라질 것인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앞으로 한 두 번 정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황제에 대해서 잠시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주후 313년에 밀라노 칙령(the Edict of Milan)을 발표하면서 로마 제국 내에서는 기독교의 상황과 법적 지위가 획기적으로 바뀌어졌다. 일 년 전, 밀비안 다리 전투(the Battle of the Milvian Bridge) 직전에 콘스탄티누스는 하나님으로부터 환상을 보았는데 예수께서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그가 해야 할 일을 설명하셨다고 주장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병사들에게 방패에 기독교 상징을 그리게 했고, 적의 우세한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을 때 이를 하나님의 표징으로 받아들여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 후 곧 바로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만드는 밀라노 칙령이 공포되었다. 이 칙령은 이교(paganism)를 불법화하거나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콘스탄틴의 개종으로 인해 확실히 기독교는 박해 받던 위치에서 선호 받는 종교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이 진짜였는지 아니면 정치적 계산의 산물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당시 기독교는 도시를 중심으로 고도의 조직성을 갖춘 성장하는 종교였다. 따라서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가 의지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할 수 있었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인기가 없었으며, 추산에 따르면 로마 세계의 약 10~15%에 불과했다. 이는 결코 압도적인 숫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은 313년 이전에도 군대에 복무했다는 증거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평화주의자였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포용함으로써 실질적인 정치적 이점이 있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황제로서 콘스탄티누스의 행동은 그의 개종에 대한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우선, 그는 아버지 하나님을 자신이 총애했던 “정복되지 않는 태양”(the Unconquered Sun)인 솔 인빅투스(Sol Invictus)와 구분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태양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세상의 빛, 또는 의의 태양 등으로 예수를 묘사하는 기독교인들의 관습에 영향을 받아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또한 자신의 "개종" 후에도 거의 한 세기 동안 자신의 주화에 이교 신들을 계속 사용했으며, 나중에 교황이 차지한 로마 이교 대제사장의 칭호인 폰티펙스막시무스(Pontifex Maximus)라는 칭호도 유지하고 있었다. 기독교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우 일찍부터 개입했다. 첫 번째 도전은 도나투스파(Donatists)와 관련이 있는데, 이들은 박해 중에 굴복하고 배교했던 사제들은 박해 중에도 믿음을 지키며 신실하게 남아 있었던 주교의 승인과 용서를 받지 않는 한 진정한 사제들이 아니라고 믿었던 집단이다. 법정과 콘스탄틴은 이에 대응하여 폭동을 일으킨 도나투스파에 대해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무력으로 보복했다. 그는 탄압이 효과가 없다고 보고 그 후 도나투스파에 적대적인 법령을 철회했지만, 그의 행동은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강압의 선례를 남겼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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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1
  • [김성수 총장] 복음의 능력과 문화의 변혁
    서기 303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별로 매력적이지 못하고 변방 종교였던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이 박해는 처음에는 기독교도들의 예배 처소인 교회당을 파괴하고 기독교 서적을 불태우는 것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성직자들을 투옥하고, 고문하며, 때로는 잔혹하게 사형에 처하는 등 성직자들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평신도들에게도 이러한 공격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박해가 시작된 지 불과 10년 후인 313년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서 이전처럼 범죄 집단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독교는 오히려 로마 제국 안에서 다수의 종교가 되었고, 결국 로마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후기 로마 제국의 세계관을 형성하여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과 삶의 방식을 변화시켰다. 복음의 능력이 사람들의 세계관을 변혁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이렇게도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으로 나타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졌던 성경적 세계관, 특별히 성경적 신관이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당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로마제국 내에서 독특한 신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로마에 있던 다른 인종 집단들이 견지하고 있었던 신관 사이의 명백한 차이점은 유대인들은 급진적인 일신론자라는 점이었다. 이들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라는 구약의 성경적 신앙을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믿고 섬기며 경배하는 신이 유일신이냐 아니면 다신론이냐는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섬기는 신이 어떤 본성과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믿느냐는 문제였다. 모든 이방 종교는 신 또는 신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신의 기원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 유대교적 또는 성경적 신관은 이런 이방 종교의 신관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떤 다른 것에서 기원한 존재가 아니라 단순히 영원부터 존재하셨고 지금도 계시고 영원히 계실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존재하는”(I Am who I Am)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과 별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자연계의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섭리자요 주권자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연신”(nature god)이나 “자연의 힘과 관련된 신”(god associated with the forces of nature)이 아니라 오히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 응답해야 하는 창조주시다. 이와 같은 신관은 얼핏 신 플라톤적(Neoplatonic)인 신관과 흡사해 보이기도 한다. 피상적으로 보면, 성경의 하나님이 마치 존재의 위계를 형성하는 “단일자”(One)로부터 유출된 만물의 기원이며, 초월적 존재인 “하나” 곧 단일자(One)를 신이라고 보는 신 플라톤적 개념과 다소 비슷해 보일 수도 있다. 사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와 같은 일부 유대인 사상가들은 플라톤 철학의 렌즈를 통해 유대교를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적 신관과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신 개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신 플라톤주의자들의 신은 의지가 없는 비인격적인 신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며 자발적인 행위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또한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우주는 영원하다. “단일자”(One)라는 신이 존재하는 동안 우주도 존재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우주 만물은 비인격적인 신으로부터 유출된 것이 아니라, 역사의 특정한 시점에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말씀으로 지은 바 된 피조물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인격적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독특한 성경적 인간관을 형성해 준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 세계를 보호하고 다스리며 감독하는 청지기적 사명을 주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 자신을 대신하여 에덴의 동산을 다스리는 사명을 인간에게 부여해 주셨다. 창조 질서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이와 같은 고유한 위치는 인간에게 특별하고 고귀한 가치를 부여해 주고 있다. 하나님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하나님의 섭정자인 인간을 공격하는 행위는 하나님 자신을 공격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들은 당시 로마의 쾌락 문화 사회에서 공공연히 행해졌던 영아 살해 행위,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Tacitus)가 “불길하고 역겨운” 일이라고 묘사했던 영아 살해 행위를 단호하게 거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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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08
  • [김성수 총장] 불가능한 사람들
    11세기 베네딕트 수도회의 개혁가 피터 다미안(1007-1073)을 일컬어 사용된 표현이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교회는 타락하고 부패가 기승을 부렸다. 성직자와 교회 지도자, 일반 성도까지 도덕적으로, 신학적으로 부패했다. 이에 맞서 다미안은 성직 매매와 성직자들 사이에 용인되던 동성애와 소아성애, 남색을 강도 높게 비난하며 개혁을 촉구했다. 그는 예수님께 충성하고 복음의 진리를 지키고자 헌신한 사람이었다. 그가 모든 형태의 부패와 부도덕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좌시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 안에 있는 열정 때문이었다. 그는 어떤 방해와 반대에도 흔들리지 않고 맞섰다. 오직 예수께 헌신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이 얼마나 불같았던지 그는 ‘조종 불가능한 사람’, ‘뇌물이 안 통하는 사람’, ‘아무도 말릴 수 없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조지 오웰의 표현대로 그는 ‘도무지 한 패거리로 끼워 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비록 소수였지만 시대마다 이런 소위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느부갓네살의 신상 앞에 아무 생각 없이 한번만 절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음에도, 산채로 불태워 죽인다는 위협에 굴하지 않고 우상 숭배를 거부했다. 다니엘은 창문 하나만 닫고 커튼만 쳐도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음에도 사자의 먹이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향을 피우는 흉내만으로도 목숨을 건질 수 있었음에도, 시저를 주로 인정하기를 거부함으로 야수의 저녁 먹잇감이 되었다. 황제와 왕비와 전 제국에 맞서는 것이 터무니없는 만용으로 여겨졌음에도, 아타나시우스는 세상에 맞서 진리를 대변했고 그 신실함으로 다섯 번이나 유배 생활을 했다. 양심을 따라 전통의 합의에 맞서는 마틴 루터를 사람들은 교만하다거나 미쳤다고 말했지만, 그는 화형대에서 죽어간 얀 후스의 순교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켰다. 학문이라는 미래의 중대한 일을 위해 목숨을 보존하라는 절친한 친구들의 만류에도, 디트리히 본 회퍼는 히틀러의 소굴로 다시 들어가 두려운 교수대의 위협에 맞섰다. 한상동, 주남선, 조수옥 권사도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믿음으로 모진 고문과 옥중 생황을 감내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허다한 구름 같은 증인들과 순교자들의 빛 안에 살고 있는가? 아니면 발전된 현대 세계의 안락한 분위기에 젖어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가? 기독교 역사상 지금의 서구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부당한 취급을 당하거나 기독교 수정주의가 득세한 적이 없다. 오늘날처럼 기독교의 성경 해석이 이렇게 자의적이고, 설교가 이렇게 타협적이며, 신앙인의 행실이 이렇게 방탕한 때가 있었는가? 오늘날처럼 아무 고민 없이 세상과 타협하고 쉽게 신앙을 저버리면서도 그 수치를 모르는 이렇게 천박한 적이 또 있었는가?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시대의 도전 앞에 맥없이 굴복하고 있다. 우리의 복음 증거는 날카로운 예리함을 잃어 가고 있으며, 예수의 주되심과 권세는 배반을 당하고 있다. 이제 이 상황을 되돌려 우리 주님께 합당한 태도를 취할 때가 되었다. 온 열방의 우리형제 자매들이 믿음을 지키려고 목숨으로 대가를 치르고 있는 이때, 서구의 세대는 우리 주를 배신했다는 쓰라린 후회만을 남기지 전에 어서 서둘러야 한다. 오스기니스(Os Guinness)가 잘 설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개혁가 피터 다미안, 그는 오직 한 청중만을 생각하고 말하고 글을 쓰고 행동했다. 그 외 다른 목소리는 그를 제지할 수 없었다.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신실했다. 그의 믿음은 강철같이 강했다. 그는 난공불락의 사람이었다. 우리에게는 바로 이런 기독교 지도자들이 필요하다. 우리 역사 ‘불가능한 사람들’(Impossible People)이 되어야 한다. 연민으로 눈처럼 녹을 수 있는 가슴을 가졌으나 강철과 부싯돌처럼 단호한 얼굴과 의지로 어떤 압력과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고 농락당하지 않으며 뇌물이 통하지 않는 그리스도인, 그럼에도 우리 주님의 온유함과 자비와 은혜와 따뜻함을 잃지 않는 그리스도인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보다 오직 예수께만 흔들림 없는 충성을 바쳐야 한다. “예수는 주님이시다”가 우리의 고백이자 권위이며 기준이고 인생의 법칙이 되어야 한다. 그분을 부정하는 사람이나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는 굳건히 맞서야 한다. 또 다시 오스 기니스의 표현을 빌린다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깨가 튼튼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위해 지셨던 주님의 십자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어야 만들어지는 어깨이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3-04-19
  • [김경헌 목사] 지팡이니이다!(출4:1-4)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심장부에 넣어 보호하셨습니다. 보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위용을 갖추게 하셨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출범할 하나님의 시간이 도래했습니다. 출애굽이란 성도 개인에게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출애굽이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게는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의 출범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80년 전에 구체적으로 그 일을 진행하셨습니다. 성경은 모세를 “아름답다, 잘 생겼다”고 기록하면서 하나님의 소명을 나타내고 있습니다.(출2:1-2) 모세의 어머니와 누나의 치밀한 계획 하에 모세를 바로의 궁정에 침투시키게 됩니다. 4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모세는 어느 정도 완벽에 가까운 준비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출애굽이라는 거사를 실행에 옮겨야 할 상황이 되었는데 모세는 상상도 못했던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다름이 아니라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대였습니다. 불 신앙과 반역의 역사는 항상 에덴동산 안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대가 두려워 미디안으로 도망을 가게 되고, 그곳에서 또 다른 40년 동안의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고, 하나님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못하겠다고 버팁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시기 위하여 보여주신 표적이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과 손에 문둥병이 생긴 것입니다. 얼핏 보면 모세가 빼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께 확인에, 확인을 하는 장면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지팡이가 뱀이 되고, 뱀의 꼬리를 잡으니 지팡이가 되는 표적을 보여주십니다. 애굽의 요술사들도 그들의 요술로 할 수 있는 요술이요, 마술입니다. 이스라엘을 탈출시키는, 해방시키는, 출애굽시키는, 우리의 입장에서 구원이 시작되는 장면에 하나님께서는 왜 애굽의 요술사도 할 수 있는 표적을 모세에게 보이고 있을까요? 모세의 사역 전부는 지팡이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작부터 지팡이, 10가지 재앙도 지팡이, 출애굽할 때 홍해를 가르던 지팡이의 장관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습니다.(출14:16) 지팡이가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지팡일 뿐입니다. 그런데 그 지팡이가 모세의 손에서 떨어지니 뱀이 되었습니다. 구지 성경은 땅에 던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던지면 당연히 땅에 떨어질 것인데 성경이 왜 불필요하게 땅에 던졌다고 표현하고 있을까요? 땅은 뱀의 주 무대입니다.(창3:14) 자신을 지키는 지팡이가 땅에 떨어지는 순간 자신을 물고, 자신을 죽이는 뱀이 되었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에서 떨어져 땅으로 가는 순간 뱀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이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이 목사를 잡을 때, 목사는 성도들을 물어 죽이는 뱀이 됩니다. 장로가 목사를 잡을 때 목사는 장로들을 물어 죽이는 뱀이 됩니다. 목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삼위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시행하는 것입니다. 그런 중요한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지팡이가 될 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하십니다.(출4:4) 뱀 꼬리를 잡았다가는 순식간에 물려 죽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독이 센, 가장 위험한 뱀이었던 우리의 꼬리를 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물려 죽으셨다. 말씀을 선포하고 목회하는 것은 목숨을 걸고 뱀꼬리를 잡는 사역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뱀이었던 성도들이 목회자의 손에 들려지면 지팡이가 됩니다. 목회자는 성도라는 지팡이, 교회라는 지팡이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목회자들을 향한 매우 무서운 경고가 있음도 잊어선 안 됩니다. 모세는 이 지팡이를 잘못 사용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심판을 받았습니다.(민20:11-13) 목회자가 손에 들려진 성도라는 지팡이를 맘대로 사용했다가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죽습니다. 목회자의 손에 들려진 교회라는 지팡이를 맘대로 사용했다가는 목회자는 하나님의 손에 죽습니다. 목회자는 주님의 손에 들려진 지팡이입니다. 모든 능력은 주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지팡이는 지팡일 뿐입니다. 주님의 손에 들려질 때 주님의 지팡이가 되고,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하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의 지팡이였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루신 구원은 완전합니다. 오늘의 목회자들은, 교회를 위해 세움 받은 자들은 주님의 손에 들려진 구원의 지팡이입니까? 땅에 떨어져, 땅을 기어 다니며 성도들을 물어 죽이는 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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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2-28

실시간 설교/강의 기사

  • [김성수 총장] 이원론적 관점의 근원적인 뿌리
    헬라의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은 인간의 본성이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요소, 즉 지성으로 식별되는 순수한 불멸의 영혼과 불순한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정했다. 그래서 그는 구원이라는 것은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육체의 사슬에서 영혼이 해방’함으로서 온다고 믿었다. 인간 본성에 대한 현대적 관점, 즉 인간의 지성을 모든 진리의 중재자의 위치로 격상시키는 세속적 관점은 플라톤의 저술이 담고 있는 한 중요한 관점이다. 플라톤은 인간의 과업은 육체로부터 영혼을 순수하게 정화시키는 것이라고 보았다. 플라톤을 따라서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도 인간의 지성을 ‘신성’(divine)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여기에 깊은 영향을 받은 기독교인들도 인간의 구원을 “천국을 위해 영혼을 구원”하는 관점에서 보았다. 육체와 관련된 것들에 저항하고, ‘진리’에 대한 지적인 명상에 전념함으로써 영혼의 구원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헬라의 이교적인 관점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어서 성경을이와 같은 이교적인 틀에 맞추어 해석하는 ‘기독교화’된 버전이 나타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육신”과 관계되는 일을 피하고 개인적인 경건을 추구하는 데 전념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는 생활을 강조하는 비 성경적인 가르침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플라톤은 아마도 우리가 때때로 이 땅의 것들을 멸시하고, 허무하고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며 진리에 대해 사색하며 영원한 것 만을 추구하는 노래를 부를 때 아주 만족해 할 것이다. 플라톤의 견해가 아직도 여전히 기독교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또 다른 증거는 사도 바울이 사용한 ‘‘육체’와 ‘영’이라는 용어를 우리가 오해하는 방식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바울은 이 용어들을육체와 영혼을 분리시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우리의 육신의 삶이 하나님의 영(성령)에 의해 지배와 영향을 받는 삶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등지는 우상의 거짓 영에 의해 지배와 영향을 받는 삶인지를 지칭하기 위해 이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심지어 어떤 영어 번역 성경까지도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육체”와 “영”을 “높은 것”(Higher)과 “낮은 것”(Lower)으로 잘못 번역하고 있다. 성경신학자 레안드캑(Leander Keck)이 말했듯이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것은 이것이 아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영혼’이라는 용어는 ‘자아’(self)를 의미하는 시적 용어이다. 마리아가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누가복음 1:46)라고 말할 때, ‘나, 라는 의미는 자신의 온 존재로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뜻이다. 시편 기자가 “나의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만 안식을 찾나이다…”(시 62:1)라고 말할 때 그는 “나 곧 나의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쉼을 얻는다”는 의미다. 플라톤은 실제로 삶에 대한 현대의 분열된 관점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을 그가 창안한 것은 아니다. 플라톤 당시에는 이미 삶에 대한 이와 같은 분열된 관점이 사회 전반에 팽배해 있었다. 그는 단지 여기에 철학적인 표현을 했을 뿐이다. 신약성경 신학자 조지 엘돈 래드(George Eldon Ladd)는 자신의 저서 <신약성서 진리의 패턴>(The Pattern of New Testament Truth)에서 플라톤이 오르페우스파 신학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기원전 6세기부터 이 신학은 그리스 세계와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오르페우스 신학은 황소 자그레우스(Zagreus)의 종교 신화에 구현되어 있다. 자그레우스는 위대한 신 제우스의 아들이었다. 제우스의 사악한 적인 타이탄과의 전투에서 자그레우스는 황소로 변했다. 타이탄은 그를 갈가리 찢어서 먹었다. 분노한 제우스는 하늘에서 벼락을 내려 타이탄들을 쳐서 잿더미로 만들었는데, 바로 이 잿더미 속에서 인간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자그레우스의 신성한 부분인 영혼과 타이탄의 사악한 부분인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결국, 플라톤의 사상에서 그 뿌리를 찾아볼 수 있고, 또한 우리 삶에 너무나도 만연해 있는 삶에 대한 분열된 관점은 종교적 신화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음이 참으로 놀랍기도 하다. 우리는 다음 호에서 이것이 갖는 중요한 의미를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한다. 김성수 목사 (탄자니아 아프리카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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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0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1)
    성경 어디에도 미디안의 제사장 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는데 문제 삼은 장면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실에 대해 그 어디에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하는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사건 때문에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백성들이 구스 여인 십보라를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통치에 십보라를 문제 삼지 못하도록 아예 입도 벙긋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버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명을 주셨고, 그 사명 감당하기 위해 애굽으로 오는 길에 느닷없이 모세를 죽이시려고 한 것은 구스 여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임이 분명합니다. 분명한 이유는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것에 있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 같은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발견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려 하셨습니다. 완전한 모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이셨습니다. 완전히 죽이셨습니다. 그래도 십보라는 할례언약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긴박한 순간에 할례를 행하면 남편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과 비교도 되지 않는 신분입니다. 단순히 액면가로 볼 때 우리는 시아버지와 관계한 여인입니다. (마1:3)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우리는 우상의 신전에서 몸을 팔던 기생이었습니다. 우리는 과부요,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남편을 사지로 몰고 왕과 간음한 유부녀였습니다. (마1:5-6)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인데 죄인인 줄도 모르는 죄인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답도 없으면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제 딴에 잘 사는 줄 알지만 무익한 인생이요, 단 하나도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혀에는 속임만 있습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입에는 저주와 악독만 가득합니다. (롬3:10-14)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런 우리가, 그런 우리의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도 달렸고, 예수님의 부활에 나도 부활했다고 고백합니다. 사탄이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의를 제기하고 문제 삼을 것이 수두룩한 우리입니다. 아니 우리는 문제 그 자체들입니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합니다. 십보라가 할례 언약을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십보라가 할례를 행하여 남편을 살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불가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입으로 시인합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보라가 할례언약을 아는 것과 할례를 행하는 것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서십니다. (마10: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눅12: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합니다. 문제 제기도 못합니다. 입도 벙긋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의 예배 자리에, 예수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앉혀주십니다. (계12:22-23)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이런 은혜를 받은 성도입니다. 그래도 원망하고 비방하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완전한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할례를 시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에 거하며, 주일마다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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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0
  • [김성수 총장] 왜곡된 이원론의 뿌리
    오늘 우리 사회와 문화에는 육체와 영혼을 분리하고, 따라서 영적인 일과 육적인 일, 세상과 교회, 하나님의 일과 나의 일, 신앙과 이성, 종교와 과학의 영역을 잘못 분리하는 이원론적 사고가 팽배해 있다. 이와 같은 문제점을 배경으로 우리는 왜곡된 이원론이 어디에 연유해서 오늘 우리의 사회 문화 전반에 스며들어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대 철학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에이어(A.J. Ayer)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종교인들의 주장은 타당할 수도 없고, 타당하지 않을 수도 없다. 이들은 세상에 대해 전혀 말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이 설령 거짓된 말이나 근거가 부족한 말을 한다고 해서 정당하게 비난받을 수 없다.” 에이어는 신이 없다고 말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는 단순히 과학적 실험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신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를 논의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그의 관점은 사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르네 데카르트(Rene Decartes) 역시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하였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또한 작가 칼 스턴(Karl Stern)이 ‘두려운 소외’(a fearful estrangement)라고 부르는 상황으로 이끌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마음, 또는 영혼은 비유하자면 마치 하나의 ‘기계와 같은 거대한 세계”에 내장되어 있는 어떤 것과 같다고 보았다. 인간의 영혼은 인간의 육체라는 기계 안에 집을 지어 둥지를 틀고 자리를 잡고 있는 어떤 것으로 보았다. 칼 스턴 역시 스스럼없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연을 실험적으로 분해하고, 수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고, 또 실행할 수 있지만 모든 통일성을 상실한 하나의 거대하고 확장된 영혼 없는 기계에 불과하다고 생각해보라!” 칼 스턴은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관점에 대해서 데카르트의 개인적인 성경과 생활이 어떤 영향을 미쳤다는 흥미 있는 주장을 하고 있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신체적인 조건, 자신의 감정, 그리고 특히 여성과의 관계가 전혀 편안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지성에서 피난처를 찾도록 강요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항상 감기 때문에 대해 고생을 하고 있었고 불평하고 있었다. 사실 그는 몸을 따뜻하게 유지하려고 ‘난로 곁에 앉아’ 있는 동안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지적 발견을 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데카르트는 여성과의 관계에서 결코 만족스럽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스웨덴의 크리스티나(Christina) 여왕에게 수학을 가르치던 중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수업을 시작하기 위해 선생이 추운 아침 시간에도 일어나도록 강요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의 이원론적인 현대 과학의 세계관이 부분적으로 한 사람의 신경증에서 유래했을 수도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생각이다! 우리는 삶에 대한 분열된 관점이 기독교 세계와 비기독교 세계에 만연해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현상을 보다 더 완전하게 이해하려면 이러한 관점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 인용문이 핵심이다. “우리의 육체는 단지 음식이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우리에게 끝없는 문제를 야기한다. 우리의 육체는 또한 참된 존재를 추구하는 우리를 덮치고 방해하는 질병에도 걸리기 쉽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를 삶과 정욕, 두려움과 온갖 종류의 공상과 끝없는 어리석음으로 가득 채우고, 실제로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리에게서 사고의 능력 자체를 전혀 앗아 간다. 전쟁과 다툼과 파벌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이 육체와 육체의 정욕이 아니고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전쟁은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발생하며, 돈은 육체를 위해, 그리고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 획득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장애물들 때문에 우리는 사고하는 ‘철학적 활동’에 전념할 시간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여가 시간을 갖고 어떤 사고에 몰두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육체는 항상 우리에게 침입하여 우리의 탐구에 혼동과 혼란을 야기하고, 우리를 너무나도 놀라게 하여 진실을 볼 수 없게 만든다.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한 순수한 지식을 가지려면 육체를 떠나야 한다는 것이 경험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대신에 이제는 영혼이 그 자체로 모든 것을 보아야 한다. 김성수 목사 (탄자니아 아프리카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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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6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0)
    (출4:24)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먼저는 모세가 많이 놀랐을 것입니다. 떨기나무에 불로 임재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이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갑니다. 애굽으로 가는 길에 숙소를 들리게 되는데 밑도 끝도 없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려고 한 이유는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모세를 죽이시려고 하신 것에 분명 다른 목적이 있겠지만 이런 장면에서도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은 자들은 방심하면 안 됩니다.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사명을 맡겼으니 그 어느 누구도 함부로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함부로 못하시겠지라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차 하는 순간에 목이 날아갑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맡은 자의 목은 그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지만 동시에 사명을 맡은 자의 목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잊어선 안 됩니다. 그래서 사명자는 다른 사람과 상황과 형편과 처지를 보기 전에 먼저 항상 하나님의 기색을 살펴야 합니다. 동시에 원수 사탄 마귀 역시 우리의 시선을 빼앗기 위해 끊임없이 집요하게 달려듭니다. (벧전5:8)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그래서 틈을 주어선 안 됩니다. (엡4:27)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틈을 주지 말라”는 것은“발 디딜 곳을 주지 마라”는 뜻입니다. 원수 사탄 마귀의 눈치를 보거나 겁내는 순간 틈을 주게 되고 이미 패배한 것입니다. 원수 사탄 마귀는 대적의 대상입니다. (벧전5:9-10)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성도는,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은 자들은 그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 항상 원수 마귀로부터 잠깐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에 하나님께서는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사명자는 반드시 승리하게 됩니다. 이 말씀에 또 하나 중요한 적용이 있습니다. 사탄은 교회와 성도의 궁극적인 대적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느 누구라도 사탄의 편에 서는 순간 그 사람은 교회와 성도의 대적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문제는 자신이 사탄의 편에 서 있으면서도 대부분이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줄 착각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불신앙에 사로잡혀 반역을 주도하는 무리들이 백성들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충분한 명분을 제시하여 현혹하기 때문입니다. (민12:2)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민16:3)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그래서 교회 안에서의 분쟁과 싸움이 극렬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분쟁과 싸움을 하는 양 진영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와 복음과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한다고 주장합니다. 비슷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주장이 아예 극과 극, 전부가 다 반대입니다. 그런데 명분 하나만은 동일합니다. 소용돌이 속에 있는 성도들은 대부분이 한쪽에 속해 있지만 갈등합니다. 하나님과 성경과 복음과 성도를 위한다는 똑같은 명분을 주장하지만 자신들이 서 있는 위치는 극과 극 대치점입니다. 분명한 것은 한쪽은 하나님 편이고, 한쪽은 사탄 편입니다. 사람들은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는 명확하고 단호하십니다. (민16:2)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 성경은 모세를 반대한 자들이 잘못되었다고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꽤나 이름이 있는 지휘관들입니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라 이백오십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뜻을 모았습니다. 이 정도 되면 누가 봐도 그들의 주장에 일리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얼마나 많은 모임과 회의를 거듭하고 수많은 연구에 연구를 거쳐 백성들이 동의하고 인정할 만한 안건을 들고나오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많은 사람이 동조했습니다. (민16:35)여호와께로부터 불이 나와서 분향하는 이백오십 명을 불살랐더라 (민16:49)고라의 일로 죽은 자 외에 염병에 죽은 자가 만 사천칠백 명이었더라 그들은 모세를 거스르는 것인 줄 알았는데,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을 불살라버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세 치 혀에 미혹 받아 불신앙과 반역의 편에 섰던 14700명을 염병으로 죽여버리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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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4-06-26
  • [김성수 총장] 현대 문화 속에 만연해 있는 이원론적 사고
    지난 호에서 다룬 바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삶을 영위하려고 노력하면서도 잘못하면 왜곡된 영성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성공적인 기독교 음악가는 단순히 기독교 하위 문화 내에서 세속적인 생활 방식과 가치관을 모방하거나 기독교인의 삶은 서로 다른 두 세계에 각각 발을 딛고 살아가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제시하게 된다. 이 모든 왜곡된 영성 전략의 근본적인 문제는 ‘영적’(spiritual)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단순히 성경 읽기, 기도, 신앙 고백, 그리고 전도와 같은 종교적 활동을 의미한다는 잘못된 가정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영성을 이런 종류의 활동만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관점은 자신이 로마서 12장 1절과 같은 구절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도무지 맞지 않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가르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몸’은 우리의 ‘영혼’과 구별되는 ‘육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 전체’ 또는 총체적인 ‘자아’를 의미한다. 바울의 강조하는 요점은 우리의 삶 전체, 즉 우리의 모든 활동이 영적인 예배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만이 삶에 대해 분열된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현대 작가 어니스트 베커(Ernest Becker)는 그의 수상작품인 『죽음의 부정(The Denial of Death)』에서 다음과 같이 인간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묘사하고 있다: “인간은문자 그대로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인간은 첨탑과 같이 우뚝 솟은 위엄을 가지고 자연 밖으로 튀어나오는 자신의 찬란한 독특함을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맹목적이고도 멍청하게 땅속으로 몇 피트 돌아가 영원히 썩고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이 사라지는 존재 안에 있어야 하고 또 그와 더불어 함께 살아야하는 것은 무서운 딜레마입니다.” 베커(Becker)는 문화를 발생시키는 것은 인간 본성의 이중성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건축, 사회제도, 예술은 우리보다 오래 지속될 업적을 통해 우리 자신을 불멸로 만들려는 시도라고 그는 주장한다. 이와 같은 정신적이며 문화적인 활동과 성취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육신 자체가 우리가 죽을 운명임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소위 ‘자기 치유’의 문제를 다루는 많은 책자들이 출판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주제를 다루는 많은 저자들은 거의 공통적으로 이원론적 인간관에 기초하여 자신들의 관점과 이론들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 인간의 본질이며 실체인 ‘영혼’은 불멸하며, 우리가 일시적이며 덧없는 부분이라고 의식하는 육체는 비유하자면 여행을 위해 타는 말이나 사용하는 도구처럼 일시적인 것'이라는 세계관적 관점에 기초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서구사회는 물론 특별히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종속은 부분적으로는 ‘세속적 육체’로부터 ‘성스러운 영혼’을 분리시키는 이원론적 관점이 배경이 되고 있다. ‘성스러운 영혼’이라는 부분은 일반적으로 지성으로 식별되며, 동시에 보다 우수한 남성 자질로 간주되고, ‘세속적 육체’라는 다른 한 부분은 일반적으로 욕정과 관능으로 식별되며, 보다 열등한 여성 자질로 간주된다. 이와 같은 관점을 견지하게 되면 우리는 당연히 모든 것을 다 얻는다고 해도 ‘영혼을 잃어버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작가 수잔 그리핀(Susan Griffin)에 의하면 심지어 포르노물의 핵심도 알고 보면 남성이 여성에게 자신의 신체에 대한 두려움과 경멸을 투사하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과학과 기술 문명의 극치를 자랑하는 현대 문화는 인간을 총체적인 존재가 아니라 단순히 육체라는 두 다리 위에 달려 있는 ‘머리’만을 중시하고 있다. 현대 문화 속에 만연해 있는 이와 같은 비 성경적인 인간관은 이미 고대 헬라 사회로부터 기원하여 특별히 지성과 신체를 근본적으로 분리한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1596-1650)에 의해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완전히 객관적일 때만 세상에 대한 진실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육체로부터 마음을 들어’ 내어야만 진정한 객관성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야만 우리는 주변 세계에서 얻은 모든 주관적이고 잘못된 믿음, 의견, 감각적 인상으로부터 우리의 생각을 정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객관성’은 현대 문화와 과학의 분명한 외침이 되었지만 이로 말미암아 소위 ‘객관적’인 과학과 ‘주관적’인 종교 사이에는 또 다른 분열이 생겨났다. 그래서 과학자는 이렇게 외친다. ‘필요하다면 주관적인 종교적 신념을 가지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진리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과학만이 참과 거짓의 문제를 다룰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우리 모두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대 문화 속에 만연해 있는 이와 같은 이원론적 세계관을 니고데모의 안경을 통해서 분별하고 문화를 거스르고 변혁하는 성경적인 지혜자의 삶을 영위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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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4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9) (민12:1-3, 신24:9)
    오랜 시간은 미리암의 원망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모세가 비워둔 40년의 세월, 이스라엘에 있어서 가장 힘들었을 40년의 세월을 훌륭하게 소화해 낸 위대한 여 선지자 미리암입니다.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세례요한과 같은 인물이 미리암입니다. (출15:20)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그런데 안타깝게도 미리암은 이스라엘이 행진하는 믿음의 길에 원망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신24:9)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할지니라 우리는 미리암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아니 이미 미리암일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미리암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소지가 있는 사람이 바로 우리입니다. 미리암이 여 선지자였으니 어쩌면 오늘날 목사를 비롯하고 교회에 중직을 맡은 자들이 이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살전5:18)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감사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구지 감사하라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감사할 일이라면 감사하라고 하지 않아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본질은 물에 빠져 죽을 사람 구해 줬는데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는 사람들이니 어쩌면 감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는 완전한 원망의 사람 미리암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살아야 할 우리가 안타깝게도 완전한 미리암이 될 가능성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그것을 증명하기에 결코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원망의 아이콘인 미리암이 되지 않도록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리도 미리암의 한계를 벗어나기 불가능하지만, 더 문제는 사탄이 우리의 원망, 우리의 미리암으로 끊임없이 우리의 발목을 붙잡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감사의 탈을 쓴 미리암이 되지 않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은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미리암을 빌미로 사탄이 우리 발목에 올무를 걸지 못하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눅5:32)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눅13:3)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엑소시스터라는 영화를 보면 사탄이 사람 몸에 들어가고, 그 사탄과 싸우는 신부가 등장합니다. 그때 신부는 계속해서 사탄은 우리의 죄를 물고 늘어질 것이라고 말하면서 사탄과 싸우기 전에 먼저 자신의 죄를 고해, 회개합니다. 신부 두 명 서로 고해를 받아주고 용서를 선포합니다. 그랬는데도 사탄은 신부의 숨겨진 죄를 들추어내어 정신을 흩트리려고 합니다. 그때 신부는 사탄에게 그 죄는 이미 종결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그 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받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는 회개의 능력이 대단한 것 아닙니다. 우리의 하찮은 회개, 기가 찬 회개, 뻔뻔한 회개지만 그 회개를 받아 용서해 주시고, 씻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대단합니다. 눈 감고 기도할 때마다 회개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하십시오. 그래야 사탄의 미혹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항상 우리의 죄를 이용하여 우리를 다스리려고 합니다. (창4: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할 때 사탄은 우리의 죄를 다 알고 있고, 미혹하지만 그 죄로 우리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아니 우리가 죄를 범한 것은 분명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했기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때문에 사탄이 죄를 이용하여 우리를 다스리지 못합니다. 우리의 회개가 대단해서 사탄이 꼼작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때문에 사탄이 꼼짝을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회개하십시오.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용서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사탄이 우리의 죄를 빌미로 미혹해 올 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그 죄를 용서받았노라고 당당히 선포하십시오. 원망과 불평을 가슴 속에 넣어두면 사탄의 올무에 걸립니다. 사탄이 우리를 다스릴 빌미를 주게 됩니다. 원망과 불평을 가슴 속에 넣어두면 안타깝게도 마지막 순간에 미리암처럼 됩니다. 직분과 사명의 완성(은퇴)이라는 위대하고 복된 옷을 입어야 하는 순간에 원망과 불평이라는 자신의 옷을 입은 미리암과 같은 성도가 되어선 안 됩니다. 주일에 드려지는 예배의 강단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지 못할 때, 강단에는 바벨탑이 세워지게 될 것이고, 금송아지가 만들어지게 될 것이고, 느부갓네살의 금신상이 우뚝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주일, 예배의 시간에 하나님을 나타내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지 못할 때 내가 바벨탑이 되고, 금송아지가 되고, 금신상이 될 것입니다. 평생토록 교회 다니고 직분을 맡아 “자기의 소견에 틀린 대로”가 아니라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그리스도와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사노라고 다짐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이 금송아지가 되는 완전한 미리암의 길을 가는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이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시34:18)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마음을 보시고, 마음의 소리를 들으시고,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순간순간을 통회하는 자세로 살 때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우리의 걸음을 미리암의 걸음이 되지 않도록 선히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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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4
  • [김성수 총장] 영적인 삶을 위한 왜곡된 전략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은 세상과 유리된 삶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세상을 통해, 그리고 세상을 위한 삶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이야말로 영적인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며 지금도 세상 속에서 일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세상과 세속적인 삶의 영역에 관심을 갖고 계시는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세속적인 삶의 영역에 전혀 관심이 없으시거나, 심지어는 세속적인 삶의 영역에 적대적이라고 믿게 되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과 멀어지게 된다. 우리 모두는 천사가 아니라 인간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일상적인 삶의 대부분을 ‘세속적’ 활동에 시간을 보내며 살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세상을 떠나 세상 도피적인과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의 세상과 멀어지게 된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정치, 예술, 록 음악, 댄스 등에 관심을 갖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삶의 영역에 관여하지 않는 삶을 영적인 삶으로 잘못 생각하게 되면 문화적인 삶에 대해서는 무능하게 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문화 건설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게 된다. 이렇게 되면 아이러니하게도, 세상 문화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 관점과 수동적인 태도를 통해 우리는 암묵적으로 잘못된 의미의 세상을 사랑하게 된다. 왜냐하면 세상 문화에 대한 우리의 수동성은 우리가 현재의 방식에 만족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세상과 분리된 세상 도피적인 삶을 영적인 삶으로 생각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동료 인간 상호 관계에서도 소외된 삶을 살게 된다. 삶에 대한 이분법적 관점은물질 세계와 관계 있는 삶을 질적으로 낮은 단계의 비 영적인 삶으로 판단하고 가능하면 이와 같은 삶의 영역을 무시하거나 회피하려고 한다. 따라서 인간의 감정과 육체의 욕구는 영적 또는 도덕적으로잘못된 삶이라는 왜곡된 인식을 하고 금기시하게 된다. 이를 극복하고 더 영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한 전략은 더 많은 기도와 경건 생활, 그리고 도덕적 회개의 생활에 전심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적인 삶의 영위를 위한 이와 같은 잘못된 관점은 결국 피조물로서의 인간됨의 진정한 필요를 충족시켜주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자기 자신과 인간 상호 관계로부터의 소외감을 가중시키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에 대한 잘못된 관점에서 생겨나는 이와 같은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구사하는 몇 가지 전략이 있다. 첫째는 소위 ‘균형 유지’ 전략이다. ‘세속적인’ 활동을 너무 많이 하지 말고, '영적인' 활동을 충분히 하려고 노력하는 전략이다. 운동을 너무 많이 하지 말고, 기도와 성경 읽기를 충분히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교회 일도 너무 많이 하지 말고 친구나 가족과도 함께 충분한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삶의 다른 중요한 활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 한 영적인 일을 영위하는 균형 유지 전략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략은 내면의 심적 긴장과 갈등만 잠시 완화시킬 뿐 실제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만약 우리가 특정한 활동을 ‘영적’이라고 규정하게 되면, 우리가 다른 어떤 일을 할 때마다 결과적으로 ‘비영적’인 활동을 하게 되는 샘이 된다. 축구나 댄스는 저급한 육체의 필요와 관련이 있고, 기도와 성경 읽기는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영적인 삶으로 규정하게 되면 우리는 육체적인 활동을 때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과 가까워지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이다. 영적인 삶의 영위를 위한 두 번째 왜곡된 전략은 삶의 다른 모든 측면을 ‘영적’인 삶의 영위를 위한 ‘통로’ 또는 ‘도구’로 활용하려고 시도하는 전략이다. 그리스도인 화가의 경우 자신이 가능한 한 종교적인 주제를 소재로 삼고, 그리스도인 음악가의 경우 음악을 복음을 전파하는 기회나 도구로 삼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 전략 역시 영적 딜레마를 해결하는 데 유용한 전략이 되지 못한다. 영적인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단순히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일반적인 삶의 영역에 영적인 삶의 조각을 덧붙이는 것이 아니다. 창조와 타락과 구속이라는 성경적 세계관의 틀을 통해 인생과 사물을 바라보면서 세상 문화에 대한 변혁적인 접근, 그리고 문화 변혁에 대한 의식과 열정이 없이 단순히 세속적인 문화를 교회 봉사, 복음전도, 하나님 찬양이라는 소위 ‘영적인 삶’을 위한 도구로 삼으로는 시도는 그리스도인의 통전적 삶의 영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왜곡된 전략임을 알아야 한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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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2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8) (민12:1-3, 신22:12)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겉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라고 하십니다. (신22:12)입는 겉옷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겉옷 네 귀에 술을 달 때 하늘을 상징하는 청색 끈을 더하라고 하셨습니다. (민15:38)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대대로 그들의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겉옷 규례는 결론적으로 그리스도로 옷 입은 성도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 하늘 백성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옷단 네 귀에 청색 끈을 첨가하여 술을 달라고 하지 않고 술을 만들라고 하는 부분도 많은 묵상을 하게 합니다. 성경은 네 귀라고 규정합니다. 네 귀를 연결하면 4각형이라는 영역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영역이 만들어집니다. 이 명령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실 때 정해주신 땅, 영역이 구체화 되고 있습니다. (창12: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 땅,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 언약의 땅으로 가야 아브라함의 자손이 됩니다. 하늘 백성이라는 표시를 내는 겉옷의 네 귀가 만든 영역 안에 들어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이 언약의 땅은, 이 영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완성되었습니다. 이런 뜻을 잘 알았던 믿음의 선조들이 4라는 글자를 넉 사 四로 만든 것 같습니다. 네모 안에, 정해진 구역 안에 사람이 들어 있습니다. (갈3:27)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그리스도의 날개옷을 입고,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땅에, 하나님의 보좌가 계신 천상에, 교회에 훨훨 날아올라 예배에 참여하는 자입니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로 옷 입은 자는 구원의 백성이요, 하늘 백성입니다. 겉옷 규례의 옷단 4 귀를 연결한 그 사각형, 영역은 하늘나라를 상징하고, 그 사각형 속에, 영역 속에 들어온 자는 구원의 백성이요, 하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숫자 4는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40은 이런 4에 10을 곱한 완전수입니다. 노아홍수 40주야, 40일이 지나서 노아가 방주의 창문을 열었습니다. 이삭은 40세에 리브가를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모세는 나이가 40이 되매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났습니다. 40일 정탐과 40년 광야 생활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만나를 먹었습니다.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 40일 40야를 산에 있었습니다. 엘리가 제사장이 된 지 40년 만에 죽었습니다. 사울이 40세에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30세에 왕이 되어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솔로몬이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 40일을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살아 계심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40일 동안 보여주셨습니다.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동맹한 자가 40여 명이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5) 번 맞았습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4, 40이라는 수가 부여하는 영적 의미는 무궁무진합니다. 4, 40에 대한 수의 의미가 무궁무진하다고 해도 결론은 간단합니다. 결론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삼위 하나님께서 이루신 우리의 구원입니다. 성도에게 있어 4라는 숫자의 결정타는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살아난 것입니다 (요11:17)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왜 성경이 이런 숫자를 반복하여 기록하고 있겠습니까? 구지 비가 40주야 내린 것을 몰라도, 노아 홍수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구지 40이라는 숫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40이라는 수의 의미는 그리스도로 옷 입은 사람, 그리스도의 날개옷을 입고 하늘이란 영역을 살게 될 것을 뜻하는 4라는 숫자의 완전수입니다. 그런데 미리암은 이제 40년 동안의 여선지자의 사명을 완수하고 아름다운 은퇴를 하는순간에 자기 자신으로 옷을 입어버렸던 것입니다. 은퇴는 영적인 의미에 있어 40이라는 완전을 맞이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에게 주어졌던 직분과 사명의 옷이 완성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속에서 은퇴로 인하여 발생하는 많은 문제는 직분과 사명이 완성되는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옷으로 바꿔 입어버리기 때문입니다. 40년 동안 입었던 직분과 사명의 옷을 입었던 습관과 타성에 젖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신이라는 옷을 입어버립니다. 올바른 은퇴를 하지 못한 미리암은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고,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현장에서 자기 자신이라는 옷을 입고 하나님의 통치 방법에 반역했던 것입니다. 자신의 옷을 입고 그리스도와 복음과 교회를 위한다는 구호를 외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교회의 관심보다도 자신의 관심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이 주장하는 것도 그리스도와 복음과 교회를 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자신도 전혀 잘못된 줄을 모릅니다. 아니 옳은 일을 하는 줄 압니다. (삿21:25)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자기 소견에 틀린 대로 하지 않고, 옳은 대로 하니 그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은 바르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주장이 옳은지 틀린 지는 그 결과가 감사와 원망으로 확실하게 구분됩니다. (민12:1)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성도가 교회의 행진에 걸음을 맞추지 못하면 약속의 땅으로 가는 방향과는 무관한 행동이 되며, 미리암의 결말과 같아집니다. 미리암은 40년 동안 여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을 돌보다 보니 타성에 젖을 수 있습니다. 미리암의 방법은 애굽에서의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한 방법입니다. 출애굽과 약속의 땅을 향하여 나아가는 모세의 방법이 미리암이 애굽에서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한 방법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옷을 벗는 위대한 은퇴식에 자신의 옷으로 바꿔입고 모세를 빙방하여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는 이스라엘에 원망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상황은 아주 사소한 것부터 매우 중요한 것까지 쉽게 발견됩니다. 쉽게는 부모들의 세대가 하는 방식이 자식들의 세대와는 다를 수 있습니다. 세대가 달라진 것도 있지만 사실 사람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용하셔서 구원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그러니 사용하시는 사람에 따라 방법이 다른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지고, 사람이 달라지고, 방식이 달라진다 해도 그 중심에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목적과 방법이 있으면 결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얼핏 보아서는 방법에 문제가 있어 보이는 것 같지만 실상은 목적에 문제가 있습니다. 대부분이 목적에 문제가 있는데 방법은 한결같이 좋아 보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현혹을 당하고 미혹 받아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혹 방법은 달라 보여도 목적에 문제가 없고, 목적이 동일하면 간혹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어도 쉽게 해결됩니다. 방법이 좀 달라 보여도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목적으로 삼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께로 갈 때, 그 어떤 난관도, 어려움도, 희생과 고난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히12:2)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미리암은 그럴듯한 방법을 제시했지만 목적이 달랐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눈앞에서 펼쳐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적들 앞에서 바로 왕과 애굽 사람조차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리암도 입을 벙긋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미리암의 속은 완전한 선지자인 모세에게 밀려난다는 서운함과 불신앙으로 원망이 싹을 피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위하여 주신 사명, 직분에 대한 미리암의 반역과 불신앙은 모세의 출현으로 시작된 10가지 재앙과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 앞에서 원망의 고개를 들게 하는 시작이 되었던 것입니다. 눈앞에 여호와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우뚝 서 있고, 내 목구멍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려가는데 40년간 선지자로 살았던 미리암은 비방과 원망으로 그 입을 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음의 사명을 맡은 자들은 이 사실을 결단코 잊어선 안 됩니다. 성도들이 기도할 때마다 회개의 순간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부분입니다. 특히 직분을 맡은 자들과 직분을 은퇴하는 자는 깊이 명심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속의 말을 듣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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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2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7) (민12:1-3, 신22:12, 창4:7)
    40년 동안 이스라엘의 여 선지자로서 사명을 감당했던 미리암이 40년 만에 돌아온 진짜 선지자 모세의 등장으로 적지 않는 갈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리암은 40년이라는 선지자의 세월을 살면서 자기도 모르게 선지자라는 직분과 그것에 따르는 사명이 하나님께서 주신 부여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가 되어버렸습니다. 오늘 목사로, 장로로, 성도로 거룩한 직분과 사명을 받은 우리는 이 장면을 결코 잊어선 안 됩니다. 받은 사명 다할 때까지, 죽을 때까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면 우리의 결말도 교회의 역사에서 원망의 아이콘 미리암으로 남게 됩니다. (신24:9)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미리암에게 행하신 일을 기억할지니라 40년이라는 세월이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닙니다. 예수 믿은 지 40년이 된 성도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서는 우리 교회 나온 지 40년 된 성도도 있을 것입니다. 40이 불혹이라는 것은 그 정도 세월이 흘렀으면 이제 안 변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40년이라는 세월도 대단하고 크지만, 영적으로 주는 의미는 더 중요합니다. 그냥 성경 속에서 40이라는 수를 생각만 해도 쉽게 그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겉옷규례를 명하셨습니다. (신22:12)너희는 너희가 입는 겉옷의 네 귀에 술을 만들지니라 겉옷 규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출을 할 때 입는 옷에 대한 규례입니다. 그 옷을 입고 있으면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옷을 입고 있는 자신도, 그 옷을 보는 다른 사람도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하는 용도입니다. 이 장면은 성도의 목적, 교회의 목적과 그 맥을 같이 합니다. 소교리문답 제1문에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교회는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아니,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냥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만유의 주인이시오, 창조주이십니다. 그런데 피조물이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나타낸다고 하면 그것 자체가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하셨습니다. (창1:1:27-28)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똑같은 피조물인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땅 위의 모든 것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반대로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내지 못할 때 가장 추하고 더러운 존재가 됩니다. (마5: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세상 사람들이야 이 사실을 모르니 당연히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자신을 바베탑으로, 금송아지로, 금신상으로 높이 쌓아 올리고 화려하게 금칠을 해야 위대하고 존귀한 줄 압니다. 그런데 성도는 사람의 창조목적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사람답고, 가장 존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명하신 겉옷규례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상실한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의 모습을 복구시켜 주시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단순히 어떤 옷을 입으라고 하는 정도의 명령이 아니라 겉옷 하나에도 우리를 향하신 삼위 하나님의 구원이 담겨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와 성도들은 규례, 명령이라는 단어에 국한되어 마치 옷도 내 맘대로 못 입게 하느냐는 식의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통탄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오해하는 기가 찬 노릇입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교회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낼 때 가장 성도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교회라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주일이라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성도는 예배라는 옷을 입을 때 가장 아름답고 존귀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 얻은 성도들이 주일에 교회로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은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는 최고로 존귀한 모습이요, 장엄한 현장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위하여 부여받은 직분을 자기의 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미리암의 전철을 밟게 됨을 한시도 잊어선 안 됩니다. 미리암은 완전한 선지자 모세가 오기까지 출애굽이라는 위대한 사명을 위해 준비하기 위하여 세움받은 여선지자였습니다. 여선지자로서의 미리암은 모세가 오기까지였습니다. 그런데 미리암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직분과 사명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고, 그 순간 자신은 바벨탑이 되어버렸고, 금송아지가 되어버렸고, 두라 평지에 세워진 금신상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미리암의 말을 듣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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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9
  • [김성수 총장] 인간 삶에 대한 통합된 성경적 관점
    만약 우리가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에서 전심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전담 봉사’(full-time service)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특정한 직업에 종사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이 부르심에 응답해 왔다. 그래서 목사나 선교사가 되거나 선교단체에 가입하는 것이 우리의 최우선 순위였다. 어떤 이유로 이러한 선택이 우리에게 열려 있지 않다고 느끼면, 우리는 ‘차선’의 선택에 만족하고 간호사, 의사 또는 사회복지사가 되거나 다른 돌봄 직업 중 하나의 직업에 종사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부르심에 응답한다는 생각을 해 왔다. 그러나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이미 소위 ‘세속적인’ 직업에 확고히 자리잡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비록 ‘전담 기독교 사역’에 대한 관심이 커질 때도 많이 있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이 겪는 격변이 너무 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결국 현재 자신이 종사하고 있는 일에 만족해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 주님을 섬기기로 결심하게 되고, 우리의 직장은 우리의 선교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선교 활동은 두 가지 주요 목표로 구성된다. 그것은 개인의 도덕적 행동에 있어서 흠잡을 데 없는 기준을 유지하는 것(또는 적어도 우리의 도덕적 결점을 숨기는 것!)과 모든 기회를 활용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주로 천국에 가기 위해 영혼을 구원한다는 관점에서 이해했다. 그런데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선교적 활동의 결과가 실망스러웠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는 때로 직장 동료들을 우리 자신과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완전히 패배하지 않기 위해서 직장에서의 근무 시간 외에 소위 ‘주님의 일’(Lord’s work)을 하려고 노력했다. 우리는 성경 공부 그룹을 인도하고, 교회가 제공하는 모든 교회 활동에 참여한다. 그런데 지난몇 세기 동안 하나님을 섬기는 이러한 전통적인 방식에 도전하는 새로운 세대의 기독교인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편협하게 도덕적이고, 그리고 우리가 죽을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관심사와는 동떨어져 있는 기독교처럼 보이는 신앙 방식을 거부했다. 이들은 주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가 특정 직업과 활동을 보다 더 영적인 것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해 왔다. 이들은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여호와의 것’이므로 지금 이 순간의 삶을 향유해야 한다고 강조해 왔다. 나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이와 같은 관점이 더 성경적인 관점이라고 확신한다.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개인의 도덕성과 복음 전도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 신앙의 초점은 오로지 내세에만 맞추어져서는 안되며, 직업은 영성의 위계 질서에 속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 ‘세상에’ 있을지라도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 삶이 되어야 한다. 소위 경건주의자들이 지적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에 너무 속하고 굴복하여 독특한 기독교 신앙의 메시지를 상실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신앙적인 삶이냐 아니면 세상에 속하는 삶이냐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면서 선택을 강요하는 것은 부적절한 선택지를 놓고 선택을 강요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인간의 삶을 소위 ‘거룩한’것과 ‘세속적’인 삶이라는 두 가지 양립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나누는 잘못된 전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우리는 경건주의자들과 함께 세상에서 신성한 영역으로 물러나 문화적으로 무관하게 되거나, 아니면 현대 세속주의자들의 관점과 함께 세상에 굴복하고 영적으로 무기력하게 되는 삶을 영위해서는 안 된다. 이 두 가지 극단적인 관점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간의 삶을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으로 나누지 않는 통합된 성경적 관점이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영적인 주권 아래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통합하는 관점이 필요하다. 기독교 신앙은 문화적으로 적절하고 독특한 메시지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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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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