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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수 총장] 칼빈의 추억 한 토막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 인상 깊은 장면을 회상한 것은 기록되어 있다. 테아 반 힐세마(Thea B. Van Halsema)가 저술한 『This was John Calvin(이 사람 존 칼빈)』이라는 책을 보면, 칼빈은 어머니와 함께 짧은 순례길을 걸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골짜기를 따라 두 시간을 걸은 끝에 도착한 곳은 예수의 외할머니로 여겨지는 성 안나의 유골이 안치된 사당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들어 올려, 금으로 장식된 관 안에 누워 있는 유골에 입을 맞추게 했다. 사당 안은 촛불로 밝고 향기로웠으며, 숭배하는 순례자들의 눈빛은 경건으로 가득했다. 어린 칼빈에게 그것은 아마 신비롭고 감동적인 체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이 장면을 바라볼 때,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정서 이상의 것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말 세 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성당의 종소리가 울린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성읍 생활의 중심이 되었던 중세 말 교회의 풍경은 단지 아름답고 경건한 외양만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신앙의 본질이 흐려진 채 형식과 외적 숭배에 몰두한 영적 타락이 도사리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의 형식주의와 권위주의, 성유물의 과도한 숭배, 그리고 성직자들의 탐욕은 교회의 영적 본질을 흐리고 있었다. 성 안나의 유골만이 아니라, 세례 요한의 머리카락, 예수의 치아, 오병이어 사건의 빵 부스러기, 가시관 조각과 구약시대 만나의 조각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성유물이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교회는 이러한 유물들을 통해 기적을 기대하고 은총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자극했고, 성직자들은 이를 통해 물질적 이익과 권력을 얻었다. 더 나아가 성당과 수도원은 특정 유물의 진위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다투었으며, 이 논쟁은 지역의 종교적 경쟁심을 자극했고, 프랑스 의회조차 이를 조정하지 못할 정도였다. ‘성인’의 이름을 붙인 성당이나 수도원은 유골을 소유한 장소로서의 권위를 주장했고, 이는 종종 종교적 신비주의를 이용한 경쟁과 탐욕의 장이 되었다. 말하자면, ‘거룩’은 거래되고, ‘은혜’는 판매되었으며, ‘경건’은 형식으로 포장되었다. 이 모든 모습은 한마디로 ‘거룩함의 상업화’였고, 진리 대신 형식과 기적, 외적 경건에 목을 매던 교회의 실상이었다. 이러한 부패는 개혁자들로 하여금 교회의 본질을 되묻게 했고,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잉태하게 했다. 칼빈은 단지 교리의 개혁자가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을 지닌 영적 개혁자였다. 그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함을 외쳤고, 유골과 형상과 건물 안에서가 아니라, 성령의 조명 아래 말씀과 신앙의 참된 삶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신학과 실천은 교회의 본질을 새롭게 정의했다. 교회는 권위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충실한 선포와 성례의 정당한 시행이 있는 곳이며, 무엇보다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믿는 자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문제는 과거의 부패가 오늘날에도 형태만 달리하여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교회는 더 이상 성인의 유골을 입맞추지 않지만, 또 다른 유물들을 만들어 숭배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화려한 예배당, 웅장한 무대, 감정을 자극하는 조명과 음악, 유명 목회자에 대한 절대적 의존, 그리고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역 성과들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성유물이 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때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인간의 욕망을 투영한 현대판 형식주의일 수 있다. 교회는 언제나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가시관 조각’이 있다. 그것은 더 멋진 무대, 더 화려한 예배당, 더 대형화된 사역과 같은 것들이다. 물론 이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중심이 되어 하나님을 도구화하고, 복음을 수단화하며, 인간의 만족을 위한 종교 행위로 전락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촛불 아래에서 거룩을 잃고 있는 것이다. 칼빈이 외친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는 외침은 시대를 초월한다. 이는 단지 제도 개혁의 구호가 아니라,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한 끊임없는 성찰과 순종을 요구하는 외침이다. 칼빈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은 단지 과거의 회고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거울과 같은 통찰이다. 그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성유물 앞에서 입을 맞췄던 기억은, 우리가 누구의 손에 이끌려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묻는 물음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순례 중이며, 여전히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 길 위에 서 있다.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무엇을 숭배하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멈추어 서는 것, 그리고 다시금 본질로 되돌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종교개혁의 정신이요, 오늘의 교회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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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30
  • [김성수 총장] 무관심의 절정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 “멍 때린다”는 표현이 있다. 고유한 우리말인 이 표현은 “아무 생각 없이 한곳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의식이 잠시 멈춘 듯한 상태로 가만히 있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아무 뉴스에도 반응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한 적이 있을 것이다. 어느새 멍하니 휴대폰을 스크롤하고 있지만, 거기 담긴 전쟁과 죽음, 기후 위기와 삶의 절망적인 광경 앞에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현상을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현대 사회는 너무 많은 것을 너무 자주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감정이 교묘하게 조작되며, 반응은 형식화된다. 심지어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피곤한 시대다. 바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그 시점이다. 이것을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무관심의 절정’이라고 불렀다. 이 무관심은 감정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감정을 과잉 소비한 끝에 마비된 상태다.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을 이미지화하고, 의미로 포장하고,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한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많은 자극과 너무 많은 반응이 반복되다 보면 오히려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감정이 남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관심이 있던 자리에 무감각이 남고, 연대하려던 마음은 차가운 피로감으로 굳어버린다. 오늘 우리는 매일같이 뉴스, 광고, SNS, 알림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지구 반대편의 절망도, 이웃의 눈물도 잠시 울컥했다가 이내 다른 화면으로 스치듯 지나간다. 더군다나 진짜는 없고 이미지만 판을 친다. 이제는 인간의 슬픔도, 정의도, 연대도 모두 기호화된 감정이다. 그것은 진짜처럼 보이지만 반복되고 조작되고 연출된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이것이야말로 현대인의 감정 소진이며, 이 무감각이야말로 가장 극단적인 무관심이라고 말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감정 소진 상태가 점점 자연스러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무관심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여긴다. 냉소와 피상적 반응은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 된다. 지금 이 시대는 누군가를 위해 슬피 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슬퍼 보이는 모습”을 공유하는 것으로 충분한 시대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도다 함과 같도다.”(마태복음 11:16-17) 보드리야르가 진단한 것은 이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것이다. 사회가 감정을 조작하고, 욕망을 설계하며, 공감의 언어마저 포장하는 구조 속에서 우리는 반응하는 법을 잃고 느끼는 법을 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조가 너무 익숙해져서 더 이상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 진짜 위기가 시작된다. “무관심의 절정”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각성해야 한다. 피로한 감정이 일상이 되었고, 감정 없는 반응이 습관이 되었을 때 우리는 진지하게 성찰하고 질문해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아니, 나는 아직도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가? 희망은 물음에서 시작된다. 감정을 회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감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아파할 수 있는 능력, 누군가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일 수 있는 여백, 눈물이 마르지 않은 마음을 회복하는 것, 기호와 이미지에 휩쓸리지 않고 실재를 붙들 수 있는 용기를 갖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아직도 누군가의 고통 앞에 멈출 수 있다면 완전히 늦은 것은 아니다. 무관심의 절정 한가운데서 우리는 다시 ‘느끼는 연습’이 필요하다. 다시 사랑하고, 다시 분노하고, 타인의 고통에 다시 공감하고 연대하는 감정의 회복, 그것은 거창한 변혁이 아니라 아주 작은 감각의 틈에서 시작된다. 눈앞의 사람을 다시 바라보는 것, 뉴스 속 타인을 내 삶 안으로 초대하는 것, 멀리 있는 고통을 내 언어로 말해보는 것, 그렇게 우리는 다시 공감의 감정을 살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우리를 조금씩 움직이게 한다. 반응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다시 붙들게 한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자리에서 다시 울컥하게 만들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게도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지금, 우리는 감정을 회복해야 할 시간 한가운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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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09
  • [김성수 총장 ] 교육에 숨어든 문화 막시즘
    우리는 지금까지 학교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유용한 참된 지식을 배우는 곳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지난 수세기 동안 교육에 대한 이와 같은 신념에 대해 수많은 비판들이 제기되어 왔다. 이와 같은 비판들 중에는 교육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키는 비판들도 있었고, 교육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비판들도 있었다. 특히 교육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 과정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을 배우게 하는 것이라는 중요한 통찰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현대 교육이 그렇게도 중요하게 강조하는 이 ‘생각하는 방식’의 교육이 지켜야 할 경계선을 넘어서고 있는 것을 보면서 염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방식’은 때로 우리가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가치들, 예를 들면 가정, 신앙, 성, 국가, 책임과 같은 소중한 가치들과 충돌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것을 단지 ‘세상이 변했다’고 넘기기 쉽지만, 그 이면에는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온 하나의 사상적 흐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문화 막시즘’(Cultural Marxism)이다. 문화 막시즘은 한마디로 말해서 교육과 문화를 통해 세상의 기존 질서를 바꾸려는 시도다. 이들은 정치 혁명보다 문화 혁명을 중요하게 여긴다. 고전 막시즘이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다면, 문화 막시즘은 “억압받은 소수자여, 깨어나라”고 말한다. 경제 계급 대신 젠더, 인종, 종교, 가족, 성적 지향 등 다양한 정체성이 투쟁의 중심이 된다. 그리고 그 가장 좋은 전파 수단이 바로 ‘학교’라는 교육의 현장이다. 한 초등학교 사례를 보자.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공립초등학교에서, 1학년 학생들에게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단지 신체 구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느끼는 정체성이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교육이 시행되었다. 아이들은 “나는 남자지만 여자일 수 있고, 여자지만 남자일 수 있다”라고 적힌 그림책을 읽는다. 성경적 창조 질서에서 벗어난 이 가르침은, 아직 성 정체성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큰 혼란을 준다. 문제는 이 교육이 ‘포용성과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당연시된다는 점이다. 이런 교육에 반대하는 학부모는 ‘차별주의자’로 낙인찍힌다. 이것이 문화 막시즘의 특징이다. 표면적으로는 자유와 평등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이념만을 강요한다. 또 다른 예는 역사 교육이다. 과거에는 학생들이 학교 교육을 통해 미국 건국의 이상이나 민주주의의 발전, 인류 보편 가치에 대해 배웠다면, 오늘날에는 ‘식민주의’, ‘인종차별’, ‘억압의 역사’라는 틀로 모든 역사를 해석하는 시각을 학습하고 있다. 물론 경직화된 전통적인 교육에 대한 이러한 비판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균형이 무너지면서 또 다른 세계관을 주입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이러한 교육으로 인해 학생들은 ‘자신의 문화와 조상은 억압자였고, 자신은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죄책감 속에서 자라게 된다. 이는 건강한 시민의식이 아니라 분노와 분열을 키우는 왜곡된 교육이다. 이 역시 문화 막시즘의 전략이다. 공동체를 해체하고, 소속감보다는 투쟁심을 주입하는 방식의 이념적인 학습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교육 현장에서 종교적 표현은 점점 더 배척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한 공립 고등학교에서 한 학생이 발표 시간에 “하나님은 나의 인생의 방향을 이끄신다”고 말했을 때, 교사는 “종교적 언급은 교실에서 부적절하다”며 중단시켰다. 그러나 같은 수업에서 “성소수자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발표는 장려된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검열되고, 특정 이념은 보호되는 이중잣대는 교육이 중립성을 가장한 왜곡된 편향이다. 이런 학습은 교육을 ‘무신론적 포용성’의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문화 막시즘은 이처럼 표면적으로는 평등과 자유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전통을 해체하고 하나님을 배제하는 세계관을 퍼뜨리고 있다. 그리고 그 핵심 무대는 바로 다음 세대의 영혼이 형성되는 자리인 학교다. 학교는 언약의 자녀들이 단지 수학과 과학, 언어만을 배우는 장소가 아니라, 무엇이 ‘정상’인지, 무엇이 ‘옳은 가치’인지, 어떤 것을 ‘꿈꾸어야’ 하는지를 배우는 장소다. 학교는 문화 막시즘이 침투하여 장악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세계관의 전쟁터다. 교육은 ‘억압의 고발’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귀하게 만들고, 공동체를 세우며, 창조 세계를 잘 돌보도록 양육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 교육자들과 부모, 그리고 교회 공동체는 이제 깨어 있어야 한다. 문화 막시즘은 더 이상 대학 강의실에서만 머무는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자녀들의 교과서에, 동화책에, 학교 행사에, 교사 연수 프로그램에 은밀하게 침투해 있다. 우리는 교육의 자리를 다시 복음과 창조 질서의 언어로 채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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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13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2) (민12:11-16)
    미리암은 위대한 믿음의 여인이 맞습니다. 하지만 여선지자라는 위대한 칭호를 받은 후 신앙이 제자리걸음을 했습니다. 미리암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역사에 발맞추지 못하고 여전히 애굽에서의 사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모세가 없는 40년 동안 여자로서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진짜 지도자인 줄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진짜 지도자인 모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교만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40년 만에 나타난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기절초풍할 일들을 일으킵니다. 세계 최강의 애굽과 바로도 모세 앞에 쩔쩔맵니다. 애굽을 초토화 시켜버렸고, 애굽의 장자를 죽여 씨를 말려버렸습니다. 여호와의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임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만 대면하시고 바다까지 갈라 마른 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미리암은 40년 동안 여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을 영도해 왔지만 40년 만에 갑자기 등장한 모세의 위용 앞에서 입도 벙긋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선지자의 위치에서 볼 때 비록 인간적으로는 누나요 동생이지만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적 권위를 지닌 모세였기에 고개 들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교회들끼리, 특히 목회자들끼리 묘한 질투심과 경쟁심이 있습니다. 곁의 교회가, 다른 교회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갖습니다. 잘못되면 입은 안타깝다고 하면서 속은 이유 없이 고소하고 상대적인 만족을 얻습니다. 교회의 주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망각한 무서운 죄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이 교인들 사이에서도 발생합니다. 곁의 성도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잘못되면 입은 위로하는 것 같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자신의 신앙과 믿음이 좋은 것으로 위로받고 착각합니다. 아주 나쁜 모습입니다. 악한 모습입니다. 교만의 극치입니다. 어쩌면 이것보다 더한 것이 목회자들끼리의 보이지 않는 견제와 경쟁입니다. 주변의 교회가 갑자기 성장하면 상대적 박탈감을 가집니다. 사람이다 보니 비교가 안 될 수 없습니다. 특히 가까운 교회에서 독보적인 성장을 보이면 심각한 스트레스까지 받습니다. 목사 자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의 중직자들이나 성도들도 자연스럽게 목회자에게 압박을 가합니다. 자신은 1년이 가도 전도 한 명 하지 않으면서 교회 부흥을 입에 올립니다. 십일조나 감사헌금은 고사하고 선교나 불우이웃이나 개척교회, 농어촌교회, 은퇴하신 목사님, 가난한 신학생들을 위해 특별헌금 한 푼도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재정을 입에 올립니다. 더 심각한 것은 설교자들의 교만입니다. 설교하는 사람이다 보니 설교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설교자의 훌륭한 설교에 은혜받기는커녕 허점과 잘못을 찾기에 바쁩니다. 그러니 설교에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현상은 모세를 대적하는 미리암의 아류들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땀방울 하나, 눈불 방울 하나 다 주의 것입니다. 우리는 비교 대상도 아니요, 경쟁상대도 압니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며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자들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특히 목회자들은 아바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평생 잊어선 안 됩니다. 물론 아바타라 하지만 예수님의 아바타니 영광스럽습니다. 진짜 선지자, 진짜 목회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미리암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사실 미리암은 누구보다도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몰라서 범한 죄도 무섭지만, 알고도 범하는 죄는 더 무섭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단순히 그 사람의 성향이나 기질을 나타내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모세의 통치를 방해했고, 이스라엘의 진행을 가로막았습니다. 감히 모세의 영적 권위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감히 같은 선지자였지만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교만은 이 모든 영적 권위 앞에서도 원망과 비방의 고개를 들게 합니다. 호시탐탐 모세의 허점과 실수를 염탐합니다. 교회도 은혜를 계산하는 성도가 있고, 실수와 잘못을 찾아내는 성도가 있습니다. 기회가 왔습니다. 구스 여자가 돌아왔습니다. 이전에 이미 정리된 문제인데도 교만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영적분력을 상실했습니다. 미리암은 십보라가 돌아오자 속에 숨겨놓았던 원망과 불평을 표출합니다. 원망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사실까지 망각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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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07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1)
    성경 어디에도 미디안의 제사장 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는데 문제 삼은 장면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실에 대해 그 어디에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하는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사건 때문에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백성들이 구스 여인 십보라를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통치에 십보라를 문제 삼지 못하도록 아예 입도 벙긋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버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명을 주셨고, 그 사명 감당하기 위해 애굽으로 오는 길에 느닷없이 모세를 죽이시려고 한 것은 구스 여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임이 분명합니다. 분명한 이유는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것에 있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 같은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발견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려 하셨습니다. 완전한 모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이셨습니다. 완전히 죽이셨습니다. 그래도 십보라는 할례언약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긴박한 순간에 할례를 행하면 남편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과 비교도 되지 않는 신분입니다. 단순히 액면가로 볼 때 우리는 시아버지와 관계한 여인입니다. (마1:3)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우리는 우상의 신전에서 몸을 팔던 기생이었습니다. 우리는 과부요,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남편을 사지로 몰고 왕과 간음한 유부녀였습니다. (마1:5-6)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인데 죄인인 줄도 모르는 죄인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답도 없으면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제 딴에 잘 사는 줄 알지만 무익한 인생이요, 단 하나도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혀에는 속임만 있습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입에는 저주와 악독만 가득합니다. (롬3:10-14)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런 우리가, 그런 우리의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도 달렸고, 예수님의 부활에 나도 부활했다고 고백합니다. 사탄이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의를 제기하고 문제 삼을 것이 수두룩한 우리입니다. 아니 우리는 문제 그 자체들입니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합니다. 십보라가 할례 언약을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십보라가 할례를 행하여 남편을 살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불가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입으로 시인합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보라가 할례언약을 아는 것과 할례를 행하는 것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서십니다. (마10: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눅12: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합니다. 문제 제기도 못합니다. 입도 벙긋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의 예배 자리에, 예수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앉혀주십니다. (계12:22-23)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이런 은혜를 받은 성도입니다. 그래도 원망하고 비방하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완전한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할례를 시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에 거하며, 주일마다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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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0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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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2

실시간 설교/강의 기사

  • [박영선 목사] 욥기 30:16-23
    욥기 42장입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배웁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죄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욥기의 전체 내용은 신앙인들이 꼭 한번 확인하고 가야 될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둥과 같은 내용으로 성립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설교를 하기 전에 잠깐 말씀드릴 게 있고 집중하게 하겠습니다. 지금 교회 밖에서도, 또 교회 안에서조차 저에 대한 공격이 많아서 설명할 길도 없고, 무슨 대답을 하면 전부 악의적으로 반응이 오니까 손해를 교인들이 보더라고요. 교회가 다들 오기 싫어지고, 다른 교회로 가고 하는 일들이 생겨서 제가 이 짐을 지고 그만두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결심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제 이름으로 우리 교회까지 망신당하는 자리엔 가지 말게 하자 하는 게 결심이고, 또 하나의 부탁은 그러니까 오늘 마지막으로 하는 설교니까 처절하고 진지하게 집중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자, 그럼 욥기의 결론을 봅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었는데 이제는 눈으로 봅니다.” 무슨 말일까요? 귀로 듣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의 차이를 아십니까? 귀로 들으려면 순서대로 들어야 되고, 보는 건 한꺼번에 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 속에서 우리가 신앙을 쌓아갈 때 시간 속에서 쌓아간다는 사실 때문에 어느 정도 단계에 이르면 다음 단계가 나타나서 이제껏 가졌던 신앙으로는 답이 되지 않는 일을 만나게 됩니다. 거기서 발전해야 되는데 다음 단계로 발전해야 되는데, 한국 교회는 교회사가 짧은 관계로 미처 그 다음 설명, 해설을 하는 일을 아직까지 잘 못 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제가 이 인물을 맡아서 여기까지 오늘 하게 돼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욥은 아시는 바와 같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당대의 최고의 의인입니다. 복을 받고 있고 사람들한테 존경을 받는 사람인데 하루아침에 느닷없이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자녀들이 죽고 본인은 병들어 눕게 됩니다. 그가 당한 불행에 대하여 본인도 이해할 수 없고 주변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자 먼 곳에서 친구들 셋이 찾아와서 그를 위로하려고 했지만 너무 실상이 처참해서 위로를 못 하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근데 그 기다리는 모습에서 뭔지 욥이 화를 내기 시작합니다. 욥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히 이겁니다. “하나님, 제가 뭘 잘못했길래 이러십니까?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 말을 하는 게 된 동기는 그 옆에 와서 들어온 친구들의 눈빛이 편을 들어오는 게 아니라 “야, 너… 빨리 회개해라. 잘못한 거 회개하면 형통해진다” 그 말로 째려봤으니까, 이제 욥이 분통을 터뜨려서 화를 내고 “죽여 주십시오”까지 갑니다. 그 친구들이 “너 그건 말이 되냐? 하나님이 어찌 네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화를 내리시겠느냐? 너 뭘 잘못했는지 생각해 봐라.” 욥은 “난 잘못한 거 없다.” 그러자 “그 다음으로 말하는 것만 봐도 너는 교만한 거다.” 이렇게 되지요. 그러는 과정에서 7장에 집에 가서 보시면 “하나님, 내가 뭐길래 이렇게 나한테 집중하십니까? 하나님 더 큰 일 보시고 나는 버려 두십시오. 내가 죽으면 어떻고 내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덕이 되겠습니까? 내버려 둬 주십시오.” 이렇게까지 얘기를 해서, 제가 즐겨 사용했던 본문에 의하면 “어찌 나 같은 것을 침 삼킬 동안도 놓아두지 않으십니까?” 이게 제가 신학교 들어갔을 때 처지였습니다. 근데 하나님이 이제 앞으로 답을 주십니다. 그래서 그 세 친구가 돌아가면서 그를 궁박하고 도전하고 또 (회개를) 얻어내려고 하는데 도무지 말을 안 듣자 나중에 나가떨어지고 그 다음 타자로 엘리후가 등장합니다. 엘리후는 뭘 가지고 욥을 구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너에게 주인이시며 너는 그가 만든 한 작품에 불과한데 네가 어떻게 전능자한테 감히 누가 맞냐 따져보자 그런 말을 할 수 있냐, 말이 되는 소리냐”라고 권세와 지위의 차이로 욥을 항복시키려고 합니다. 그러자 38장에 하나님이 이렇게 등장하십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동이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이게 누구한테 호통을 치는 것 같습니까? 욥의 불평에 대해서 호통을 치는 것 같습니까? 욥을 공박하는 친구들에 대해서 호통을 치는 것 같습니까? 이것은 친구들에게 하는 호통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답을 내려고 하지 마라.” 그리고 욥에겐 뭐라고 얘기해요?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동이고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하라.” 무슨 뜻이죠? 욥은 그의 목적이고 그의 첫 번째 대상이고, 하나님이 그에게 하나님이 되시고, 그가 하나님의 자녀요 복된 존재인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다른 말, 잘잘못으로, 규칙으로 그를 심판하고 권세로 그를 심판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쳐 들어오시는 것이 “폭풍 가운데”라고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욥에게 자신을, 혹은 욥의 지금 현실을 어떻게 납득시키느냐 하면 38장과 39장 두 장에 걸쳐서 창조 세계를 보이십니다. 창조 세계의 장엄함을 보라. 그 무궁무진한 존재들의 가치와 그 존재들의 영광을 보라. 그리고 그들의 존재에 있는 질서의 아름다움과 신비를 보라. 이게 38장과 39장의 얘기입니다. 그리고 나서 40장 1절. “여호와께서 또 욥에게 이르시되 트집 잡는 자가 전능자와 다투겠느냐? 하나님을 탓하는 자는 대답할지니라.”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 내가 한 번 말하였사온즉 다시는 더 대답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면, “내가 나와 싸우자 그러고 네가 옳고 내가 틀리다 그러는데, 할 말 있으면 해 봐라”라고 얘기하자 욥의 답이 신기합니다. “겁 주시면 저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한테 기회를 주셔야지 공간 협박으로 저를 짓눌러 버리시겠다고요?” 이렇게 답을 합니다. 신기하죠? 그래서 6절에 “그때에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이르시되” 다시 폭풍 가운데서 벼락같이, 38장에서 친구들의 말이 안 되는 증거를 쳐 보신 것처럼, 욥의 침묵으로 말미암는 반항과 항복하지 않는 고집을 내려면서 뭐라고 말을 하느냐 하면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동이고 내가 네게 묻겠으니 내게 대답할지니라.”라고 대화를 드십니다. 굉장하죠. 그러니까 욥에겐 겁을 주고 그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욥을 세우기 위해서 앞에서 친구들을 후려치신 하나님이 폭풍 가운데서 “네가 전능자와 다투겠단 말이냐? 너 그럴 수 있느냐?” 하니까, “맘대로 하세요. 저는 그렇게 항복 못 합니다”라고 하자, 그의 허리띠를 잡아 일으켜 세우면서 “너만 내 자식이야. 내가 말할 테니까 들어봐.” 이렇게 그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폭풍 가운데서 임하시는 하나님의 현전이요 임재요, 우리의 질문에 답하시는 주인이십니다. 10절부터 보시죠. “너는 위엄과 존귀로 단장하며 영광과 영화를 입을지니라. 너의 넘치는 노를 비우고 교만한 자를 발견하여 모두 낮추되… 악인을 그들의 처소에 짓밟을지니라… 그리하면 네 오른손이 너를 구원할 수 있다고 내가 인정하리라.” 묘한 말씀을 하십니다. “네 영광을 입어라. 존귀해져라. 그리고 도덕을 지켜라. 그리고 악당들을 다 심판해라.”라고 얘기하십니다. 우리 세상 살면서, 우리 역사 속에서 듣는 하나님의 질문이 바로 이겁니다. 우리는 언제나 현실에 불의가 많고 부패가 많고 거짓이 많아서 정의를 원합니다. 평등을 원합니다. 하나님이 이걸 약속하셨고, 우리도 우리 인생 속에서 이걸 만들고 싶어 해서 언제나 부패한 정권은 뒤집어집니다. 그때 뒤집는 세력이 언제나 내거는,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명분이 뭐냐 하면 “정의를 실현하자”입니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에서 보듯이 부패한 정권을 없애고 혁명이 일어나자 무엇부터 합니까? 악당들을 다 죽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영광을 얻고 우리가 도덕을 지킴으로써 받는 보상은, 악당을 죽이는 것 외에는 다른 보상이 없지 않느냐, 라고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무슨 얘기를 하느냐 하면 하마와 악어 얘기를 길게 하는데, 하마와 악어 얘기가 왜 길어지냐면 “너 하마를 길들여서 밭을 갈 수 있느냐? 너 악어를 길들여서 집에 반려…(반려를) 삼겠느냐?” 그렇게 묻습니다. “모든 것을 힘으로 평정하거나 답을 얻을 수 없느니라.”라고 얘기함으로써, 욥이 이제 항복하는 42장에 이릅니다. “주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사오며…” 창조 세계와 우리가 조작할 수 없는 힘의 실체들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을 보는 것 같이, 우리가 우리의 인생과 우리가 소원하는 것을 힘으로 만들어낼 재주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뭐라고 말하죠?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린 자가 누구니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나도 이해가 안 가서 그렇습니다. 내가 소원하는 것이 뭔지조차 정할 수가 없습니다. 밤낮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서만 헤어나게 해 주십시오. 이 문제만 해결해 주십시오.” 이게 우리 인생의 소원인데, 내가 얼마나 인간답고 존재 가치가 있는가는 상상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결론이 뭐냐면 “답을 얻었다”가 아니라 “물어보겠습니다. 가르쳐 주십시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죄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가 무슨 말이냐면, 내가 아는 건 나 하나에게도 답이 되지 못합니다. 나는 다 타버린 재와 같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나셨고 나를 하나님 믿게 하셨으니 내가 묻고 하나님 답해 주십시오. 그것이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결론이 어디로 가느냐 하면, 뭘 묻고 뭘 답을 얻었는지는 건너뛰고 7절로 갑니다.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대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친구들은 하나님 대신에 규칙이었고, 하나님 대신 권력이었습니다. 욥은 끝까지 상대로 하나님을 모셨습니다. 여기가 다른 겁니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답을 찾고 있는 겁니다.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수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뭐죠? 답이 “용서”하랍니다. 일차적으로 네 분노를 풀려고 하지 말고 용서부터 배워라. 용서부터 배우라는 게 무슨 뜻이죠? 화해해라. 너와 네 친구들이 왜 싸우게 되었느냐?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로 싸우게 됐는데, 싸워서 등 돌리지 말고 제대로 알아서 화해해라. 우리가 성경에서 보는 하나님의 자기 증명은 이 욥기에서도, 집에 가서 보세요. “하나님께 내가 묻겠사오니 겁 주지 마시고 대답 좀 해 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이 대답을 안 하셔서, 23장에 가면 “내가 하나님을 찾고 찾으나 앞으로 가도 없고 오른쪽으로 가도 없고 뒤돌아서도 없더라.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것인가.” 이게 욥의 고난, 고통입니다. 친구들은 “빨리 회개하라.” 엘리후는 “빨리 무릎꿇어라.” 그런데 하나님의 대답은 그게 아니라 “나를 알아라. 나를 알아라. 그리고 네가 나에게 누구인가 알아라.”입니다. 우리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 모든 질문의 시작은 뭐냐 하면, 우리 모두가 겪는 것 같이 인생을 살면서 당하는 말이 안 되는 고난 속에서 이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난 뭐야? 나라는 존재는 뭐야?” 예수를 믿으니까 그다음 질문이 나오죠.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왜 이렇게 하십니까? 어쩌란 말입니까?” 현실은 어떻죠? 그 둘을 이을 수가 없죠. 왜 이을 수가 없죠? 내 기대와 다르니까. 정성을 바쳐도, 모든 종교 행위를 해도 바라는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약 성경 내내 왜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겼지요? 자기가 원하는 걸 해 주는 신을 만들었지요. 하나님은 안 해 주시니까. 왜 안 하시죠? 하나님이 목적한 것이 우리의 운명이니까, 내가 해 달라는 것으로 타협하거나 떼울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자, 우리 다 아는 구절들이니까 신약의 설명들이 이 배경 속에서 어떻게 터지나 봅시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빌립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아버지를 보여 주시면 족하겠나이다.” 왜 그런 질문이 나왔죠? 예수님이 죽은 자도 살리고 폭풍도 가라앉히고 문둥병도 고치고 소경의 눈도 뜨게 하셨는데, 로마를 뒤집지 않아요. 세상 권력이 되질 않아요. 자기에게 필요한 현실적 해답이 되시질 않아요. “아버지를 보여 주옵소서.” 답이 뭐죠?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아버지가 십자가에 죽는 모습으로 우리 편을 들고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를 대상과 목적으로 만들겠다가 예수의 성육신입니다. 신이 인간이 되어 인간 보고 신성에 참여하라고 붙잡으러 온 것이 구원입니다. 구원 확신이 중요한 눈금이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어디까지 밀고 올라가야 되냐? 이런 정체론, 존재론, 그리고 현실—하나님이 나를 만들어 가는 현실에 대하여 분별과 지혜로 우리에게 열매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오심은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이렇게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에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제발 형통, 안심, 승부에서 이기는 것에 팔아먹지 말라고 말합니다. 잘 아시는 요한복음 3장 16절은 뭐였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믿으면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를 선포하고 있는 겁니다. “안 믿어도 됩니다. 안 믿고 못 배기게 하겠다.” 17절.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심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인하여 세상이 구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니까 “내가 믿지 않아도 된다”라고 왜 고함을 질러야 했느냐? 믿었으니까 “다다” 그러고 있지 말고 그러란 말이에요. 믿은 자의 변화와 새 사람과 새 생명이 되란 말이에요. 꼭 고함을 질러야 돼요. 누가복음 22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자리에서 누가 더 크냐?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실 때 누가 좌편에 앉고 누가 오른편에 앉을 것인가 싸웁니다. “하나님 나라는 섬기는 나라다. 세상은 다스리는 나라지만 하나님 나라는 섬기는 나라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에 함께한 자들인즉 하나님이 내게 그 나라를 맡기신 것처럼 내가 너희에게 하늘 나라를 맡기노라.” 예수님의 시험은 뭐였습니까? 십자가에서 보여줬죠. “네가 남은 살렸으면서 너는 왜 못 살리냐?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내려와 보라.”를 겪으십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여기에 와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복음 17장에 있었던 이 중요한 말씀: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시옵고 사랑하신 것을 알게 하옵소서.” 이게 교회입니다. 이게 신앙입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손가락질하는 일 맞지 마시고, 끌어안는 일로 여러분의 인생과 여러분 자신의 존재에 명예와 영광을 담으셔서 하나님 영광의 찬송이 되시기 바랍니다. ※ 위 설교문은 남포교회 주일예배 (26.02.01) 설교를 남포교회 유튜브를 통해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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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3
  • [김성수 총장] 예배 공동체의 신비와 은혜
    성도들은 주일이 되면 아버지 되신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는 예배의 자리로 나아온다. 이 복된 자리로 나아오는 우리의 발걸음은 분명 가볍고 즐거운 걸음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예배당으로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이 언제나 경쾌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복잡한 내면을 안고 있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길 때도 많이 있다.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는 자들이 완전한 이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 흔들리고, 사랑이 미약하며,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영적 감각이 둔해진 상태로 예배당의 문턱에 들어선다. 마음속에는 여전히 죄의 흔적이 요동치며, 영적 실패의 기억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영적으로 깊은 사람일수록 자신의 부패와 결함을 더 예민하게 감지하며 스스로를 정죄하는 고통 속에 빠져들기도 한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곧 ‘성도’라 불리지만 그 이름을 감당하기엔 자신이 너무도 부적합하다고 여길 때가 많이 있다. “성도”라고 불리지만, 본능적으로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성도’에 포함될 수 있단 말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묻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배의 자리에 모인 이 무리는 바로 “성도의 교제”라는 사실이다. 이 모순은 신학적으로 실로 깊은 신비를 품고 있다. 사도 바울은 각 지역 교회를 향하여 서신을 쓸 때마다, 그들이 비록 수많은 문제와 결함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로 호칭한다. 고린도 교회처럼 분열과 음행, 영적 혼란이 만연한 교회조차도 여전히 하나님의 성도들로 불렸다. 에베소, 골로새, 그리고 데살로니가의 교인들이 만약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고 그들과 하나라면 사도는 어떻게 이들을 “거룩한 백성”이라고 부를 수 있었는가? 그 근거는 너무도 분명하다. 이는 곧 ‘성도됨’이 인간의 도덕적 완성이나 경건의 성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분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신학적 긴장을 목도하게 된다. 눈에 보이는 회중은 죄 많고 연약한 사람들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들은 거룩한 무리요,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다. 이 긴장은 인간의 자기 인식과 하나님의 선언 사이의 충돌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자기 안의 죄악과 결핍을 바라보며 “나는 성도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너는 내 거룩한 백성”이라고 선언하신다. 이러한 긴장은 단지 심리적 불편함이 아니라, 복음의 본질이 드러나는 자리다. 왜냐하면 인간의 자격이 아닌, 그리스도의 공로와 은혜가 회중을 성도로 세우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요,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예배는 완전한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가 아니라, 불완전한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신비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대속의 죽음, 부활, 그리고 하늘 성소로의 승천은 회중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열어 주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며, 화목제물이시고, 교회의 머리이시다. 회중은 오직 이 한 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묶이며, 그분의 피로 정결케 되며, 그분을 통해 아버지께 인도함을 받는다. 이 신학적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예배의 본질을 다시 보게 만든다. 예배는 감정적 고양의 시간이 아니며, 단순한 종교 행위도 아니다. 예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배로운 피로 거룩함을 받은 회중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나아가는 신비로운 은혜의 시간이다. 회중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와 예배가 이루어질 수 있는 근거는 단 하나,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이 신비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으며,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역은 우리 눈앞에 드러나지 않지만, 매 예배 속에서 그는 여전히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끌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과 회중의 결함을 보며 낙심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중보를 바라보며 소망해야 한다. 진정한 회중은 도덕적 엘리트의 집합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모인 죄인들의 교제이며, 그 안에서 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의 거룩한 백성을 세우시고 영광을 받으신다. 예배는 회중이 그리스도 안에서 화해된 존재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행위다. 우리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성도로 부르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함께 모이게 하신다. 이 신비는 우리에게 참된 겸손과 동시에 무한한 은혜와 큰 용기를 준다. 그러기에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모든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 은혜를 따라, 믿음의 눈을 들어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안에서 진정한 ‘화해된 회중’으로 담대하게 하나님께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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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6-01-29
  • [신년 묵상] 최성은 목사 - 상생의 아름다움과 복(시133: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26년 새해를 맞아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역 위에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새해를 시작하며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큰 은혜요, 기적이며, 하나님의 기쁨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지난 한 해 수많은 어려움과 위험한 순간들을 지나 이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과정을 통과해 함께 예배드리는 이 시간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특별히 지난 한 해는 정치·경제·사회적으로 갈등과 불안이 가중된 시간이었고, 경북 산불과 경남 집중호우 등 여러 자연재해가 겹쳐 찾아온 해였습니다. 현장을 직접 보며 막막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가 함께 예배의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본문 시편 133편은 ‘성전에 오르는 노래’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이 노래는 시편 120편,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라는 고백으로 시작됩니다. 곧 성전에 오르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수많은 혼란과 환난을 이기고 예배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입니다. 시편 133편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터져 나오는 시인의 감격의 탄성입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이 감격과 감사가 오늘 우리에게도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지난 한 해의 환란을 지나 2026년을 새롭게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 찬양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시편 133편은 세 절에 불과한 짧은 시이지만, 하나님께서 연합하여 동거하는 교회 공동체에 주시는 복, 곧 상생의 복을 가장 아름답게 노래하는 말씀입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의 공동체가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 연합의 공동체, 상생의 공동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형제 된 우리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보시고 상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것을 이처럼 아름답게 보시고 복을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연합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연합은 단순히 한 집안의 형제들이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 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은 열두 지파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그 출신 배경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본부인의 자녀도 있었고, 여종의 몸에서 난 자녀도 있었으며, 요셉 지파는 애굽 여인에게서 태어난 후손이었습니다. 분열하기에 너무나 쉬운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 곧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배하는 하나님은 성부·성자·성령, 한 분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연합은 그들이 예배하는 하나님을 닮은 연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교회를 세우시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우리가 하나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고, 사도 바울 역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권면했습니다. 형제의 연합은 하나님께 선한 것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형제가 함께 동거하며 상생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의 본질입니다. 탐욕과 이기주의가 만연한 이 시대에, 하나님을 닮은 교회들이 연합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셔서 복음의 영광을 이 땅에 드러내실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연합한 공동체에 주시는 복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회복의 복입니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라는 말씀은 대제사장의 임직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대제사장은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용서와 회복을 선포하는 존재였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하는 모습을 대제사장의 임직에 비유한 것은, 함께하는 곳에 회복의 능력이 임한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풍성한 생명의 복입니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물이 귀한 이스라엘 땅에서 헐몬산의 이슬은 온 땅을 적셔 생명과 열매를 맺게 하는 은혜였습니다. 시인은 형제가 함께하며 상생하는 모습을 이 헐몬의 이슬에 비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 되는 곳, 상생하는 공동체에 임하셔서 풍성한 생명의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초대교회가 언제 강한 교회로 세워졌습니까? 거대한 건물이나 체계적인 조직이 있어서가 아니라, 함께 모여 한마음으로 기도할 때였습니다. 한 마음으로 예배하고, 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상생으로 함께할 때 오늘도 성령 하나님께서 교회 위에 풍성한 생명의 능력을 부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설 수 없다.” 말씀을 맺습니다. 지난 경남 지역 집중호우 당시, 총회 긴급구조단이 산청의 한 피해 현장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물에 잠긴 비닐하우스와 진흙에 뒤덮인 작물을 보며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그 현장의 한 장로님께서 오히려 “괜찮습니다. 천국 소망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위로하러 갔던 우리가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경험하고 돌아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지난 한 해의 모든 시련을 믿음으로 통과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새해를 맞아 형제 되어 함께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회복의 복과 풍성한 생명의 복을 더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2026년,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으로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보시는 교회, 상생으로 세상을 섬기는 성도 여러분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위 설교문은 1월 2일, 고신 지도자 초청 신년 인사회에서 최성은 목사의 설교를 옮긴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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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6-01-12
  • [김성수 총장] 인생은 짧다, 그러나 깊을 수 있다
    어린 시절 어른들이 어깨춤을 추며 흥겹게 부르던 노래 한 구절이 문득 생각난다.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가 “인생은 짧다”(카르페 디엠/carpe diem)는 의미로 남긴 짧은 라틴어 구절은 수천 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오늘날 우리에게 아직도 익숙하게 들린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또 얼마나 진지하게 삶에 적용하고 있는지 새해를 맞으면서 한 번쯤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로만 크르즈나릭(Roman Krznaric)의 베스트셀러 『인생은 짧다, 카르페 디엠』은 바로 이 질문을 우리 앞에 던진다. 그는 ‘카르페 디엠’이라는 말이 오늘날 얼마나 얄팍하게 오해되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우리 삶을 다시 본질로 되돌아보게 만든다. 현대 사회에서 ‘카르페 디엠’은 종종 “하고 싶은 건 지금 해!”, “지금 즐기자!”라는 소비주의적 문구로 탈바꿈했다. ‘욜로’(YOLO, You Only Live Once)라는 유행어가 대표적이다. 이 구호는 짜릿한 여행이나 과감한 소비, 충동적인 행동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며, 정작 삶의 본질을 성찰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피상적인 시간 속으로 우리를 밀어 넣는다. 크르즈나릭은 이를 “카르페 디엠의 납치”라고 말한다. 그는 잊혀져 가는 이 삶의 기술을 다시 우리 손에 되찾아주고자 한다. 그가 제안하는 ‘카르페 디엠’은 단순한 쾌락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의식적 선택과 자기 결단, 타자와의 관계, 죽음에 대한 명상 속에서 피어나는 삶의 태도다. 그는 다섯 가지 유형의 ‘카르페 디엠’을 제시한다. 즉흥적인 기회를 붙잡는 삶(Opportunism), 감각을 통해 삶을 음미하는 쾌락형(Hedonism), 억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추구하는 해방형(Liberation), 사회 정의를 위한 참여로 드러나는 정치적 형태(Political), 그리고 타자를 위한 헌신으로 드러나는 윤리적 삶(Ethical)이다. 이 모두는 “오늘이라는 시간 안에, 내가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라는 단 하나의 메시지를 지향한다. 이 질문을 기독교 신앙의 언어로 바꾸면 “오늘 나는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표현될 수 있다. 우리가 유한한 존재임을 기억하고, 언젠가 반드시 마주하게 될 죽음을 직면할 때, 오늘을 살아가는 방식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죽음을 의식하는 삶은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삶의 지혜로 이끈다. 시편 기자는 말한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 크르즈나릭은 자기 결정권을 회복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더 이상 소비자의 삶이 아니라, 창조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 외침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깊은 울림을 준다. 우리는 세상의 유혹과 무기력 속에서 하루를 흘려보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이 땅을 책임 있게 살아가는 ‘소명자’다. 아프리카 오지와 지구촌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며,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인재들을 양성하는 선교사의 하루도 그러하고, 세속화된 현대 도심의 심장부에서 성경적 가치관을 구현하며 다니엘처럼 오늘을 살아가려고 고민하는 평범한 성도의 하루 삶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동일하게 소중한 ‘카르페 디엠’의 시간이다. 영원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관점이 없으면 “인생은 짧다”고 하는 이 말은 우리의 삶을 한없이 허무하게 만들고 불안하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노세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화무는 십일홍이요 달도 차면 기우나니 얼씨고 절씨고 차차차 지화자 좋구나 차차차 …”라는 노래 소리로 한 해를 보내고 또 맞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짧은 인생이기에 이제는 남은 날을 헤아리면서 주님의 몸 된 교회와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게 해 달라는 우리의 기도는 짧은 인생을 더 위대하고 역동적이며 견고하게 만들어 준다. 짧은 인생이기에 더 깊이 있게 살아야 한다. 매 순간 순간을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온전히 신실하게 응답하며 살아야 한다. 한 해를 보내고 또 한 해를 맞는 우리 모두에게 “카르페 디엠”은 단지 ‘순간을 즐기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붙들고 소명적인 삶에 신실하라’는 우리 주님의 자비로운 초대일 수 있다. 김성수 목사(탄자니아 아프리카 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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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6-01-08
  • [강영구 목사] 마지막에 남는 것(벧전 4장 7–11절)
    무엇이든 끝이 있다는 사실은 사람을 진지하게 만들고 마음을 숙연하게 합니다. 연말이 되면 한 해의 끝을 생각하게 되고, 오늘과 같은 총회 자리에 서면 분주하게 달려온 시간들이 마무리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끝을 앞에 두고 돌아보면, 그때는 그냥 그렇게 살아도 되는 줄 알았던 삶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끝이 가까워질수록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가 더욱 분명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끝을 앞에 두게 되면 사소한 것과 끝까지 남을 소중한 것이 구분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가 보면, 정말 붙들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무려 2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반복되어 온 말씀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도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고 했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틀린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재림의 때를 비밀로 감추어 두셨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시대의 성도들이 “오늘 밤이라도 끝이 올 수 있다”는 긴장감 속에서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끝이 멀다고 생각하면 사람은 대충 살게 됩니다. 의미 없는 것에도 마음을 빼앗기고, 중요하지 않은 일에 힘을 쏟게 됩니다. 그러나 끝이 가까이 왔다고 생각하면 함부로 살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가치만 붙들게 됩니다. 본문은 그 ‘끝까지 남는 핵심 가치’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첫째는 기도입니다.“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기도는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대화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사람도, 돈도, 명예도, 권세도 떠나갑니다. 그러나 끝까지 남아 계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붙들어야 할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끝까지 남습니다. 직분이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자동으로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직분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소홀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끝이 가까울수록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더 나아가야 합니다. 더 깊이 만나고, 더 친밀해지는 데 힘써야 합니다. 둘째는 사랑입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만물의 마지막에 가서 남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계명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설 때, 이 땅에서 이룬 업적이나 성취를 가지고 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모두 이 땅에 남겨 두고 가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한 것은 가지고 갑니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주님은“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며 먹이고 입히고 돌본 것, 용서하고 덮어준 것, 화해한 것—이 모든 것은 세상 역사가 끝나도 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말합니다. 끝이 오기 전에, 사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는 봉사와 섬김입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봉사는 자기 힘이나 자기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그 봉사는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이 말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섬길 때, 그 섬김은 끝까지 남습니다. 봉사와 섬김은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하지 않아도 될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을 위해 드리는 봉사와 섬김은 만물의 마지막이 와도 남을 일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창원기독교총연합회를 위해 묵묵히 섬긴 모든 수고와, 앞으로 세워질 임원들의 섬김 또한 영원히 남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오실지, 우리가 먼저 주님께로 갈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 우리의 마지막이 오더라도, 기도와 사랑과 섬김이라는 이 소중한 핵심 가치를 붙들고 살아가는 주님의 종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본 설교문은 2025년 12월 10일 창원기독교총연합회 총회 예배에서 전한 강영구 목사의 실제 설교를 바탕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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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4
  • [김성수 총장]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성탄
    탄자니아에서 맞는 성탄은 한국이나 서구에서 경험하는 성탄과는 전혀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눈 내리는 겨울도 없고, 벽난로도 없고, 진한 핫초코를 마시며 캐럴을 듣는 풍경도 없다. 대신 뜨거운 햇살과 붉은 흙, 해풍이 스치는 코코넛나무들, 먼지 날리는 도로를 따라 걸어가는 아이들의 웃음이 성탄의 배경이 된다. 계절은 여름이고 기온은 높지만, 이 땅의 성탄은 놀라울 정도로 따뜻하고 깊다. 그 이유는 성탄을 구성하는 중심이 문화적 장식이나 상업적 분위기가 아니라 공동체와 생명, 그리고 은혜이기 때문이다. 탄자니아의 교회들은 12월이 되면 더욱 분주해진다. 사람들은 화려한 옷을 꺼내 입고 한 해 동안 받은 은혜를 되돌아보며 감사의 찬송을 준비한다. 찬양대가 부르는 캐럴은 서구 전통과 다르다. 북과 춤, 손뼉과 화음이 어우러지며 마치 성탄의 기쁨이 온몸으로 흘러넘치는 듯한 생동감을 준다. 아프리카의 리듬 속에서 ‘Immanuel – God with us’라는 복음은 단지 교리적 문장이 아니라 실제 살아 있는 현실로 느껴진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이곳 사람들은 삶의 온도와 표정으로 고백한다. 성탄은 탄자니아 사람들에게 단순히 예수님의 탄생을 기억하는 날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가난한 자들과 함께하시고 낮고 천한 곳을 찾으시는 분이라는 메시지를 새롭게 경험하는 날이다. 이 나라의 많은 이들은 여전히 물과 전기가 부족한 채 살아가고 도로는 정비되지 못한 곳이 많으며 병원 시설이나 교육 환경도 열악하다. 그러나 바로 그 현실 한가운데서 성탄은 더 깊은 울림을 갖는다. 예수께서 화려한 궁전이 아니라 초라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처럼, 하나님은 오늘도 이 땅의 낮고 고단한 자리들 속에서 조용히 빛을 비추고 계시다. 탄자니아의 성탄에서 인상적인 것은 나눔의 정신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작은 선물이 되고자 하는 마음, 가지지 못한 이웃을 먼저 기억하는 공동체적 감수성은 성탄의 본래 정신을 되살린다. 가난한 이웃과 함께 음식을 나누고 길을 가다 만난 아이들에게 사탕 하나를 쥐여 주는 일상적 사랑이 성탄의 풍경을 만든다. 이곳에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말이 교회 강단 위의 문장이 아니라 삶의 현실이 되어 있다. 성탄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의 재점화다.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사람들은 성탄을 맞으며 다시 고백한다. “Mungu yu mwema / 하나님은 선하시다.” 성탄은 눈에 보이는 조건이 좋기 때문에 기뻐하는 축제가 아니라 어느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누리는 기쁨이다. 탄자니아의 성탄이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탄자니아의 성탄을 경험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탄생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성탄은 화려함이 아니라 임재의 사건이며, 풍성함이 아니라 은혜의 증거이며, 배부름이 아니라 함께함의 기적이다. 붉은 흙먼지와 강렬한 햇살 아래에서 맞는 성탄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신다면, 우리는 누구와 함께할 것인가?” 탄자니아의 성탄은 우리를 다시 복음의 중심으로 데려간다. 인간의 힘과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보내신 그 아들의 은혜가 우리의 진짜 기쁨이라는 사실을 말없이 일깨운다. 그래서 이 땅의 성탄은 조용하지만 뜨겁고, 소박하지만 깊으며, 가난하지만 찬란하다. 하늘의 기쁨이 땅 위에서 피어나는 순간, 그것이 바로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성탄이다. 김성수 목사 (탄자니아 아프리카 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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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5-12-24
  • [김성수 총장] 다니엘처럼 오늘을 살아가기
    믿음의 영웅 다니엘이 보여준 사자굴에서의 믿음은 누구나 감탄할 만큼 눈부시다. 다니엘이라는 이름이 떠오를 때마다 우리는 자동적으로 굶주린 맹수들 앞에서 드러낸 신앙의 용기를 연상한다. 그러나 정작 다니엘의 신앙이 시작된 곳은 사자굴이 아니었다. 그것은 매일의 식탁, 왕의 진미가 차려진 바벨론 궁전의 식당이었다. 다니엘서 1장은 우리에게 중요한 신앙의 교훈을 들려준다. 다니엘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제공한 음식과 포도주를 거부하였다. 이것은 단순한 음식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언약을 지키기 위한 결단이었다. 당시 바벨론의 음식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종교 의례의 일부였고, 이방 신들에게 바쳐진 제물과도 같았다. 이는 단지 먹고 마시는 문제를 넘어 바벨론화의 전략이며 상징이었다. 다니엘은 이 작은 식탁의 문제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일상적인 식사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지키고자 결단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단 1:8). 이것이야말로 참 신앙이다. 평범한 식탁에서 결단하고,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 이것이 진짜 믿음의 시작이다. 오늘 우리에게 사자굴 같은 시험은 잘 오지 않는다. 그러나 바벨론의 식탁은 언제나 우리 삶 가까이에 놓여 있다. 우리는 매일 거실과 사무실, 시장과 은행, 교실과 회의실, 인터넷과 스마트폰 속에서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에 선다. 그 선택이 비록 작아 보일지라도 그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앙이 검증되는 현장이다. 생활 속의 신앙은 “거룩한 분별력”에서 비롯된다. 세상의 관습이 아무리 그럴듯해 보일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기준 삼아 살아가야 한다. 다니엘은 그러한 삶을 유연하면서도 지혜롭게 실천했다. 그는 환관장에게 정중히 요청하고, 거절당하자 부드럽게 감독관에게 다시 부탁하며 10일간의 실험을 제안한다. 이처럼 믿음은 융통성 없는 고집이 아니라, 원칙을 지키되 타인을 배려하는 지혜와 함께 가야 한다. 이러한 분별된 거룩함은 수도원적인 은둔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세상 속에서, 바벨론 문화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지는 거룩함이다. 음식을 먹을 때, 집을 지을 때, 거래를 할 때, 인간관계를 맺을 때, 우리가 과연 성경적 가치관과 하나님의 영광을 기준 삼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바벨론 사람들도 그들 신의 영광을 위해 살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짜 하나님 백성으로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있는지 끊임없이 자문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시대의 바벨론은 과거보다 더 세련되었고 더 친근하다. 하지만 다니엘은 오늘 우리에게 “작은 일에서 신앙을 실천하지 않으면, 큰 시험 앞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교회에서는 장로요 집사지만,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는 세속적 사고로 돌아서는 삶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는지 진지하게 성찰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신앙은 제도 교회의 예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 앞에 두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우리의 식탁에 다시금 물과 채소를 올려놓는 결단을 해야 한다. 그것은 단지 식습관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중심과 본질을 되찾는 상징이다. 용서와 사랑을 실천하고, 소외된 이웃에 관심을 가지며, 고통받는 지구촌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아파하며 나눔을 실천하는 삶,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먹고 살아야 할 ‘음식’이다. 우리 모두 하늘의 아버지께서 차려 주시는 음식을 외면하고 바벨론의 진미에 길들여지고 있으면서 춤추고 노래 부르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찬송가 430장의 고백처럼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참으로 그렇다. 그러나 그 길은 때로 사자굴이 아니라 식탁에서 시작된다. 우리 모두 다니엘처럼 뜻을 정하고 생활 속의 신앙을 온전히 실천하는 소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소망해 보자. 그것이 오늘 우리의 사명이며, 내일의 사자굴에서도 담대히 설 수 있는 순교자의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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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5-12-12
  • [김경헌 목사] 먼저 나신 자니(골1:13-20)
    일반적으로 먼저 태어난 아들을 장자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장자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말씀하시는 장자는 단순히 먼저 태어난 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출생이라는 것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며, 장자라고 부르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라고 불러 주셔야 사람이 되고, 하나님께서 장자라고 부르셔야 장자가 됩니다.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창 5:2). 초태생, 맏아들, 첫째… 이는 출생의 순서가 맞습니다. 그러나 그 순서조차도 하나님의 몫입니다. 먼저 태어났다고 당연히 장자라고 생각하는 것은 인본적입니다. 세상의 장자는 첫째 아들, 즉 출생 서열이지만 성경적 장자는 거듭남, 중생, 새로 태어난 서열로 정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참된 영적 장자이십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골 1:15). 예수님께서는 새로 태어난 서열에서 처음 나신 분입니다. 장자의 축복은 태어남의 특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무릎 꿇게 하는 자의 몫입니다. 이러한 장자는 하나님께서 오늘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가는 기초가 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끊임없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장자의 축복이 계승되어야 합니다. 장자의 축복은 야곱에서 최고봉을 이룹니다. 그러나 목회자가 야곱과 같이 축복하는 데에 가장 큰 난관은 다름 아닌 목회자 자신입니다. 목회자 자신의 눈에도 엘리압이 장자이고 압살롬이 장자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조차 엘리압에게 기름을 부으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삼상 16:6). 사무엘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교회 속에서 장자를 인정하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실상은 어떻습니까? 목사 자신도 자신의 판단에 맞는 사람을 장자로 세우려 하고, 성도들도 목회자가 기름을 붓고 채색옷을 입히면 인간적 관점으로 색안경을 끼고 보며 시기하고 미워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는 방법을 허무는 총체적 난관에 봉착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섭리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직분을 받은 자들이 세상적 논리, 혈과 육의 기준을 넘어서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영적 권위를 상실하게 됩니다. 직분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정체성을 잃고,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를 인간적 권위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직분에 자신의 기준을 접목시키면 직분은 결국 인간적 권위로 전락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영적 권위가 상실되는데 직분의 권위가 세워질 수 있겠습니까? 영적 권위가 사라지면 결국 그 권위를 주신 하나님의 권위까지 무시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을 반역한 사탄의 전략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권위는 그 사람의 권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분에 부여하신 권위입니다. 예를 들어 “김문훈 목사님”이라 할 때, 김문훈이라는 사람의 권위가 아니라 뒤에 따라오는 목사라는 직분의 권위입니다. 그런 그에게 부총회장이라는 직분이 또 부여되었습니다. 똑같은 사람이라 해도 직분이 부여되면 사명과 책임, 위상과 위치가 달라집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영적 권위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속 직분을 가볍게 여기는 행위는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불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영적 권위를 인정할 때에만 겸손이 있습니다. 이럴 때 직분의 권위는 더 빛나고 아름다워집니다. 반대로 그 권위를 자신의 공로로 착각하면 교만해지고 권위는 상실됩니다. 교회 속에서 주어진 직분에 따르는 영적 권위를 인정하고 세워갈 때, 결국 그 권위를 부여하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직분과 사명은 내가 하고 싶다고 하고, 하기 싫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태도 자체가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하는 불신앙이 되기 때문입니다. 직분자가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권위로 일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과 기준으로 일하려 하면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게 됩니다. 결국 선악과를 따먹는 길로 나아가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장자권은 하나님 나라, 곧 교회를 세우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장자권은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장자’라고 하면 세상적 의미의 맏아들로 오해합니다. 이는 단순한 착각이 아니라, 사탄이 구원의 길을 흐리기 위해 사용하는 교묘한 수법입니다. 믿음의 족장들은 이러한 미혹에 흔들리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신앙의 관점이 흐트러지기 시작했고 예수님 시대에 와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고전 15:50). 혈과 육의 방법은 하나님 나라를 얻지 못합니다. 장자는 단순한 서열이 아니라 예배를 주관하는 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권한을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장자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입니다. 창세기 4장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가인은 첫째 아들이었지만 성경은 단순히 ‘첫째’라는 사실이 아니라 장자의 사명과 권위가 부여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4:1)는 고백은 아들이 내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나타냅니다. 자녀를 내 권위로 키우면 그 이상 자라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권위를 인정할 때 자녀도 복을 받습니다. 성경은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다”(4:2)고 덧붙여 장자의 위치와 동생의 순복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가인의 제사가 먼저 언급되지만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습니다(4:3-4). 겉으로 보기에는 가인이 아버지 아담의 일을 계승한 것 같지만, 사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잃고 농사를 지었고, 그 안에 영적 권위가 없었습니다. 반면 아벨은 양치는 일이었지만 아버지 아담이 받은 사명과 정신을 이어받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장자라 해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놓치면 가인처럼 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맏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밤늦도록 밭에서 일했지만 아버지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돌아온 동생을 위해 달려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도 기뻐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눅 15:28). 그는 누구를 위해 일한 것입니까? 에서는 분노했지만 아버지 때문이라도 참았는데(창 27:41), 누가복음의 맏아들은 오히려 아버지께 화를 냅니다. 신앙생활과 예배는 최소한 하나님 아버지를 먼저 의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관심은 우리가 그분과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의 피까지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목숨보다도 아버지를 먼저 생각하셨고, 그래서 십자가도 순종하셨습니다. 성경은 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장자”라고 증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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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12
  • [김성수 총장]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
    오늘날 ‘선교’라는 단어는 그 본래의 깊이와 폭을 회복해야 할 중요한 전환점에 서 있다. 과거 수세기 동안 많은 교회들과 선교 단체들은 ‘선교’, ‘선교사’, ‘선교지’와 같은 용어를 주로 지리적 확장의 관점에서 이해해 왔다. 즉, 서구 기독교가 비(非)서구 세계로 복음을 확장해 나가는 일방향적인 운동으로 선교를 정의한 것이다. 이 개념 속에서 ‘선교사’는 복음을 확장하는 주체요, ‘선교지’는 그 확장의 수혜 대상인 미개척지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선교 개념은 더 이상 시대와 현실을 설명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 특별히 두 가지 결정적인 요인이 전통적인 선교 이해방식의 수정과 재정립을 요구하고 있다. 첫째, 이전 시대에 선교 대상으로 여겨졌던 지역 교회의 급속한 성장이다. 과거에는 복음의 수혜자로 간주되던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교회들이 이제는 전 세계 기독교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필리핀, 인도, 나이지리아, 케냐 같은 나라들은 과거에는 선교사의 활동 무대였으나 이제는 적극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들로 전환되고 있다. 2021년 세계 복음주의 연맹(WEA)의 보고에 따르면, 전 세계 타문화 선교사 중 약 40% 이상이 이제 비서구권 국가들에서 파송되고 있으며, 특히 브라질, 인도, 필리핀, 나이지리아는 선교사 파송국 상위 10위 안에 포함되어 있다. 또한 아프리카 대륙의 복음주의 교회는 지난 100년간 1900년 약 900만 명에서 2020년 기준 약 6억 명 이상으로 성장하였으며, 이는 기독교 전체 인구 증가율보다 훨씬 빠른 속도이다. 이러한 수치는 선교를 '서구에서 비서구로'의 흐름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둘째, 서구 교회의 급격한 쇠퇴이다. 기독교 통계학자 데이비드 바렛(David Barrett)에 따르면, 1980년대에 서구 교회는 매일 7,600명의 신자를 잃고 있었고, 오늘날도 그 추세는 가속화되고 있다. 미국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의 2021년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인의 기독교 신앙 소속 비율은 2007년 78.4%에서 2021년 63%로 급격히 감소했고, 무종교(종교 없음, 비신자) 인구는 같은 기간 동안 16.1%에서 29%로 증가하였다. 유럽도 마찬가지다. 영국 국교회(Anglican Church)는 성찬례 참여율이 10년 사이에 절반 이하로 떨어졌으며, 독일과 프랑스에서는 기독교가 문화적으로는 남아 있지만 실질적인 신앙 참여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게다가 서구 교회 내의 많은 신자들이 세속주의와 인본주의 세계관에 쉽게 타협하고 있으며, 타문화 선교에 대한 헌신 역시 현저히 감소하고 있다. 미국 내 선교 단체의 보고에 따르면, 코로나 팬데믹 이후 선교사 지원금은 평균 20% 이상 감소했으며, 신규 선교사 헌신도 줄어들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로 하여금 ‘선교지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지게 만든다. 복음의 빛이 희미해진 유럽의 도시들, 종교적 냉소주의가 만연한 북미 사회, 그리고 다양한 문화 속에서 정체성을 잃어가는 서구 사회야말로 오늘날의 ‘선교지’일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선교의 정의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한다. 선교는 단순한 ‘지리적 확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을 구속하고 회복하시는 사역에 동참하는 거룩한 부르심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회복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교회는 그 구속의 역사에 동참하는 증언 공동체다. 이 관점에서 선교는 특정 지역이나 사람만의 책임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과 모든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이다. 물론, 19세기와 20세기의 선교운동이 이룬 열매를 폄하해서는 안 된다. 복음이 한 번도 전해지지 않은 지역에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과 헌신은 여전히 오늘날 선교의 중심적인 동력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정신을 이어가되, 형태와 방향에 있어서는 더욱 성숙하고 성경적인 선교 이해를 정립해야 한다. 결국 선교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가시는 사역이며, 하나님은 국경과 문화, 인종과 언어를 초월하여 모든 민족 가운데서 일하고 계신 분이다. 교회는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세상의 어느 곳이든 복음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어떤 문화든지, 어떤 계층이든지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새롭게 받아야 할 선교의 이해이다. 김성수 목사 (탄자니아 아프리카 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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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6
  • [김성수 총장] ‘모’(Meaux)의 우물
    물 한 모금이 목마른 자에게 생명을 주듯,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의 갈증을 해갈하게 한다. 16세기 유럽에서 개혁의 불씨가 타오르던 그 시절, 사람들의 심령은 메마른 광야와 같았고,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다시 솟아난 생명의 샘물이었다. 프랑스의 작은 읍 ‘모’(Meaux)에서 일어난 감동적인 말씀 회복의 역사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다시금 성경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 중세 천년 동안 성경은 성직자들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일반 신자들은 말씀을 직접 접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1516년 에라스무스가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출간하며 ‘잃어버린 책’이 세상에 다시 나타났다. 이 책은 종교개혁의 불쏘시개가 되었고, 말씀의 회복은 곧 교회의 회복으로 이어졌다. 스위스 취리히에서는 울리히 츠빙글리가 면죄부 장사를 비판하며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한 설교를 시작했다. 사람들은 그때까지 들어본 적 없는 생생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잊혀졌던 성경이 다시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도 말씀이 일으킨 놀라운 일이 있었다. 파리 소르본 대학의 노교수 자크 르페브르는 70세에 이르러 성경의 진리를 재발견하고, 바울 서신들의 라틴어 번역과 주석을 출간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오직 은혜로 구원을 베푸신다”고 외쳤다. 그를 따르던 젊은 제자 파렐은 “모든 것이 은혜일 뿐”이라는 스승의 말을 듣고 회심했다. 그날 이후로 그는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파렐은 거침없고 열정적인 복음 전도자가 되었고, 르페브르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장차 세상을 개혁하실 텐데, 자네는 살아서 그것을 보게 될 걸세”라고 말했다. 이런 말씀이 변화의 바람을 몰고 간 곳이 바로 파리 근교의 ‘모’(Meaux)였다. 브리소네 주교는 성경을 열어 새로운 답을 발견했고, 자기에게 속한 회중을 개혁하기 시작했다. 교황의 교회에서는 들을 수 없던 하나님의 진리를 설교했고, 놀랍게도 왕의 누이 마르가리타가 복음을 받아들였다. 브리소네는 성경을 그녀의 손에 들려주며 말씀을 가까이하게 했다. 르페브르는 신약 성경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일반 민중들이 직접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했고, 그 역시 ‘모’에서 활동했다. 파렐도 그곳에 와서 복음을 열심히 전했다. 직조공, 농부, 포도 재배자들 모두가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서로 이야기했다. 교회가 바뀌었고, 사람들의 삶이 바뀌었다. 성경이 실제로 그들을 새롭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성경을 믿는 신앙으로 개종한 이들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는 ‘모’의 우물을 마셨다.” 이 표현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생명의 말씀이 실제로 그들의 영혼을 적셨고, 삶을 변화시켰다는 고백이었다. 그들에게 성경은 선택적인 신앙의 참고서가 아니라, 삶의 중심이자 방향이었고, 사랑이자 능력이었다. 그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시작했고, 그 결과 교회는 다시 교회가 되었고, 신자는 다시 살아 있는 신자가 되었다. 말씀이 빠진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가르치고, 살아내는 공동체만이 참된 교회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중심이 될 때, 이제는 더 이상 세상의 논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사람의 삶을 이끌어 가게 된다. 말씀은 단순히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새롭게 빚어낸다. 르페브르가 말한 “모든 것이 은혜일 뿐”이라는 고백은, 말씀이 인간의 자랑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주권만을 드러낸다는 믿음의 고백이었다. 오늘 우리는 다시 말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디지털 미디어와 소셜 네트워크가 우리의 귀를 어지럽히는 이 시대, 우리는 다시 ‘모의 우물’을 파야 한다. 말씀을 가까이하는 사람,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순종하는 사람만이 이 혼탁한 세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 교회는 다시 말씀이 중심이 될 때에만 진짜 교회로서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다. ‘모의 우물’에서 일어난 말씀의 기적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도 말씀은 살아 있으며, 듣는 자에게 생명을 주고, 따르는 자의 삶을 새롭게 한다. 우리가 다시 그 우물을 마신다면, 우리 안에서 시작된 개혁은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까지 번져 나갈 것이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 119:105) 그 등불을 다시 손에 들 때, 우리의 길은 다시 생명으로 연결된다. ‘모의 우물’을 마신 이들처럼, 오늘 우리도 말씀을 마시고 말씀대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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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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