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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탄자니아, 아름다움 속의 상처와 우리의책임
하나님의 강권적인 인도하심으로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와서 사역을 시작한지도 벌써 한 해가 흘러가고 있다. 처음에는 더위와 말라리아 등 열악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견딜 수 있겠나 막막하기만 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곳으로 나를 인도하시는지 불평도 참 많이 해 보았다. 그러나 일 년이 지나면서 나는 이 나라에 대해서 점점 더 매력을 느끼고 빠져들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의 아름다움과 상처, 그리고 우리가 감당해야 할 책임까지도 볼 수 있는 것 같다. 탄자니아는 대자연의 신비와 깊은 역사, 그리고 다양한 문화가 조화를 이루는 땅이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킬리만자로, 세계적인 야생동물 보호구역인 세렝게티 국립공원, 그리고 인도양의 보석이라 불리는잔지바르-탄자니아는 그 자체로 하나의 경이로운 세계다. 그러나 탄자니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대륙은 오랜 세월 동안서방제국들로부터 약탈당한 땅이다. 응고롱고로 분화구와 같은 천혜의 자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시대 동안 외부의 힘에 의해 자원을 빼앗겼고, 오늘날에도 다국적 기업과 강대국들의 경제적 지배 속에서 풍요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아름다운 휴양지 잔지바르는 단순한 휴양지가 아니다. 이곳은 과거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노예무역 중심지 중 하나였다. 스톤 타운(Stone Town)의 골목길을 걷다 보면, 화려한 건축물 뒤에 감춰진 아프리카인들의 아픔과 눈물의 역사를 느낄 수 있다.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이곳에서 납치되어 중동과 유럽, 아메리카로 팔려 나갔다.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착취 중 하나였던 노예무역은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탄자니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국가들이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격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아직도 아프리카 국가들은 강대국들의 경제적 착취 속에서 자국의 자원을 온전히 활용하지 못하고 단순히 원자재를 공급하는 역할에 머물러 있으며, 정작 그 자원의 이익은 외부로 흘러가고 있다. 아프리카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의식한다면 탄자니아를 단순한 관광지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곳은 대자연과 인간의 역사가 맞닿은 곳이며, 희망과 도전이 공존하는 땅이다. 탄자니아는 약탈당한 대지이지만, 결코 무너진 나라가 아니다. 이제 우리가 손을 내밀어야 한다. 더 이상 탄자니아를 약탈의 땅으로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함께 성장할 수 있으며,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 진정한 아프리카를 경험하고 싶다면, 단순한 여행자가 아닌 이들의 친구, 협력자, 그리고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단순한 원조를 넘어, 이들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면서 탄자니아와 아프리카 대륙의 국가들은 더 이상 약탈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성장할 파트너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 이곳을 아름다움을 소비하는 단순한 여행자의 관점이 아니라, 이 나라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함께 고민하는 동반자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탄자니아의 자연과 문화를 보호하면서도, 현지인들이 직접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공정한 무역과 지속 가능한 관광을 촉진해 줄 수 있어야 한다. CTS(한국기독교텔레비전)가 지향하는 교육 선교와 미디어 선교, 그리고 보건 의료 선교를 확장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탄자니아와 함께 나아가야 할 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를 단순히 동정심을 가지고 ‘도와주어야 할 대상’ 정도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방적인 시각이다. 탄자니아는 우리가 함께 배우고 함께 성장해야 할 동반자이며,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회복해야 할 땅이다. 아름다움과 상처가 공존하고 있는 아프리카 대륙의 모든 나라들이 단순히 경제적 성장을 넘어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넘쳐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어야 한다. 복음 송 가사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이 땅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아직도 이 땅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상처도 깊지만 아름다움도 깊은 탄자니아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공의를 회복하는 그날까지, 내가 총장으로 봉사하고 있는 <탄자니아 아프리카 연합대학교>(The United African University of Tanzania>는 오늘도 기도를 쉬지 않고, 찬양을 멈추지 않고, 예배에 집중하며, 말씀을 붙잡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한 분 하나님만 바라보며 나아갈 것이다. 김성수 목사 (탄자니아 아프리카 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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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일상의 삶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임재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기를 소망한다. 날마다 순간마다 그분과 동행하기를 원하며, 그분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복을 누리기를 소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분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마귀의 거짓말’에서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잠언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잠9:10).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길 때,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성경 말씀과 신앙 공동체를 통해 양육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더 잘 인식하기 시작한다. 예수님은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요10:4)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는 무생물 속에서도 분별할 수 있다. 시편 기자는 푸른 나무, 겨울에 내리는 흰 눈, 비바람과 폭풍우 속에서도 이 모든 것들을 존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감지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과학적 세계관을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스스로 설명할 수 있는 닫힌 체계로 간주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오래 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읽는 경향이 있다. 현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시작하시고 난 후 이제는 자연이 스스로의 ‘자연 법칙’에 따라 움직이도록 만들고 자신은 창조 세계의 무대 뒤로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이 매일, 매 순간 계속해서 창조 사역을 이루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의 명령을 땅에 보내시니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눈을 양털 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 같이 흩으시며 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뿌리시나니 누가 능히 그의 추위를 감당하리요”(시147:15-17). 우리는 시편 기자가 보았던 성경적 안복으로 창조 세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쉽게 감지하지 못하는 것은 성경과 이질적인 세계관이나 믿음의 강력한 영향력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무와 동물을 보면서 그것들이 ‘자연’이라는 자율적 실체에 속한다고 여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매 순간, 숨결처럼 우리 가까이 계셔서 그것들을 생명으로 부르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 그것들이 창조 세계에 존재함으로써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과학과 기술이 압도하는 세계관에 매몰된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와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기 위해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구약성경 시대 살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다. 성경적 세계관은 과학적 탐구를 조롱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물에 신실하시기 때문에 과학이 견고한 기초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 세계를 약속하신 대로 계속해서 질서 있게 유지하시고 보존하실 것이다(시148:1-6). 인간 삶에 대한 이원론적 관점은 하나님과 세상을 양립할 수 없는 두 영역으로 나누려고 한다. 신체적 치유의 경우를 한 예로 들어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이 일반적인 의학적 방법을 통해 치유되면 우리는 이를 ‘자연적’ 치유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안수 기도를 통해 치유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를 ‘초자연적’으로 치유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현실을 단순히 자연적 영역과 초자연적 영역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친구 디도가 단순히 자신을 방문했을 때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고후7:6). 바울은 디도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조종되는 꼭두각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디도가 자신의 ‘자연적인’ 자유 의지로 방문을 결심하고 준비했음을 알았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손길이 그 방문 뒤에 있었음을 알았다. 이것은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동시에 둘 다였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모든 치유를 어떤 수단이든 ‘초자연적’이면서도 동시에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한 신학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이스라엘에게는 단 하나의 경험 세계만 있었다. 세상의 경험은 항상 하나님의 경험이기도 했고, 하나님의 경험은 세상의 경험이기도 했다.” 우리 모두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풍성하게 경험하는 복을 향유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원한다. 김성수 목사 (아프리카 탄자니아 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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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엘리압(4) (삼상17:28-40)
그렇다면 엘리압은 누구처럼 살아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다름이 아닌 이삭처럼, 므낫세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이삭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아직 수혼 제도가 세워지기도 전입니다. 자신을 대신할 동생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 아브라함이 다시 아들을 낳아 자신의 이름을 끊어지게 하지 않을 방법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삭은 순종했습니다. 엘리압은 어떻습니까? 일곱 명의 동생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일곱이란 의미를 우리는 잘 압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엘리압은 수혼 제도를 통해서 자신의 이름이 영영토록 끊어지지 않을 보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일곱 명의 동생 중에는 하나님께서 기름까지 부어주신 동생 다윗도 있었습니다. 엘리압은 부활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엘리압은 부활의 신앙을 가졌던 완전한 아버지 아브라함의 언약을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이 자신의 이름 속에 담겨 있습니다. 엘리압의 형제가 몇 8명입니다. 안식후 첫날, 주일, 부활의 날, 할례할 8일 이 모든 의미가 엘리압이라는 이름 속에, 엘리압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야말로 엘리압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름이 끊어지지 않고, 죽어도 살아나는 부활의 약속으로 겹겹이 둘러 싸여져 있었습니다. 자신이 이름으로도, 자신의 형제들로도 장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함에 눈곱만큼도 하자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엘리압은 골리앗 앞에서 겁에 질려 기가 죽어있었다 해도 다윗의 등장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신앙과 본분을 찾았어야 했습니다. 엘리압은 자신의 이름 속에 있는 뜻처럼 당당히 이삭의 길을 갔어야 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엘리압이 골리앗 앞으로 가야 했습니다. 이삭이 자신의 발로, 아니 아버지 아브라함을 도와 모리아산 제단 위로 올갔던 것처럼 엘리압은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있는 다윗의 등장으로 정신을 차리고 골리앗 앞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세움받은 목사와 장로들은, 먼저 된 자들은 정신 바짝 차리고 이 장면을 죽을 때까지 잊어선 안 됩니다. 부족하여 엘리압처럼 골리앗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었다 해도, 순간적으로 자신의 사명과 직분의 이름을 망각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는 다윗의 등장으로 반드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다윗의 등장 앞에서 자신의 오랜 경륜과 경험과 연륜과 위치를 가지고 화를 내고, 지적하고, 억 박 지르는 엘리압이 되어선 안 됩니다. 자기가 부인되지 않으면, 자기가 죽지 않으면 엘리압이 됩니다. 먼저 된 자는, 교회의 진정한 장자는 먼저 죽는 자입니다. 교회 안에서 진정한 장자는 누구입니까? 먼저 된 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자기를 태워 죽일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으로 오르는 자입니다. 제 발로 죽음의 제단 위로 올라가는 자입니다. 이 사실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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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일상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지혜와 부르심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인간됨의 한 본질이다.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적으로 응답함으로써 인간됨의 본질을 유지할 수도 있고 하거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불순종적으로 응답함으로써 인간됨의 본질을 왜곡시키거나 상실할 수도 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책임 없는 다국적 기업을 통해 약소국들을 짓밟거나, 하나님은 없고 인간이 과학과 기술을 통해서 만물을 다스리는 주인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며, 경제적 탐욕으로 창조세계를 오염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창조세계를 경작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을 수는 없는 존재다. 어느 작가의 말처럼, 인간은 문화적 활동과 창조세계의 발전을 통해 하나님께 주어진 지구를 다스리는 권세를 증명한다. 이것은 우리가 단지 종교적 행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삶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함을 의미한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창조 세계 안에서 인간과 함께 걸으셨음을 보여주고 있다(창3:8).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위해 세상을 떠나 어떤 내면의 성소로 도피할 필요가 없음을 알려준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가장 평범한 일들 속에서도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이사야 선지자는 농부가 씨를 심고 타작하는 지혜조차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말한다(사28:24-29). 농사를 짓는 기술조차 하나님의 지혜에서 비롯된다면,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과 관계 맺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현실 세계를 떠나 성경 속 인물들과 함께 마치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이 있다. 이는 성경을 오용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현실 세계 속에서 하나님을 찾도록 인도하는 삶의 지침이다. 잠언은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의 일상, 우리의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들려올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잠8:1-3). 하나님은 가장 예상치 못한 장소와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기도 하신다. 선지자 이사야는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을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부르며, 하나님께서 이교도 왕의 정치적 행동 속에서도 일하신다고 선언한다(사45:1). 심지어 잠언 30장에는 비이스라엘 왕의 지혜가 기록되어 있고, 민수기에는 발람의 나귀조차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듣는 모든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사상가든 작가든 예술가든 정치인이든, 하나님은 다양한 도구와 사람을 통해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물론, 모든 것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지혜롭지 않다. 잠언은 세상에 지혜뿐 아니라 어리석음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 있다(잠9:14-16). 참 된 지혜는 오직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어리석음은 우리의 잘못된 선택과 욕망에서 비롯될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분별력 있는 태도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일상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하는 영성이다. 인공지능이 가르쳐 주는 의미 있는 예화를 하나 소개해 보고자 한다. 한 작은 마을에 빵집을 운영하는 한 신실한 크리스천 주인이 있었다. 그는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반죽을 만들고 빵을 구우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곤 했다. 어느 날, 그는 목사님을 찾아가 자신의 일상이 하나님께 의미 있는 일인지 물어 보았다. “목사님, 저는 매일 빵을 굽는 단순한 일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어떤 가치가 있을까요? 저는 성경을 가르치거나 선교를 다니는 분들처럼 거룩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목사님은 잠시 빵집 주인의 손을 바라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당신의 빵을 먹고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당신의 손은 성전의 제사장이 드리는 예물처럼 하나님께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빵을 통해 이웃을 섬기는 것을 통해도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날 이후로 빵집 주인은 자신의 일을 하나님이 주신 부르심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는 단지 빵을 구울 때조차도 기도하며, 빵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나누는 삶을 살았다. 이 빵집은 단순히 빵을 사는 곳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와 평안을 경험하는 장소가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우리를 부르신다. 그분은 단지 종교적 의식 속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직업, 인간관계, 문화 활동, 창조세계 속에서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분별력으로 세상의 모든 음성을 경청하며, 창조세계를 경작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쁨으로, 그리고 순종적으로 응답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기독교인의 삶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영적인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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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창조’(Creation)의 풍요한 의미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는 식물, 동물,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창조로 우리를 안내한다. ‘있으라, 생겨라’와 ‘그 종류대로’라는 반복되는 구절은 지음 받은 모든 것에 대한 창조주의 주권적 권능뿐만 아니라, 창조 세계의 다양성과 다원성에 대한 창조주의 지혜와 신비함을 남겨 주고 있다. 더욱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구절의 반복은 이 다양성의 선함과 아름다움을 확증해 주고 있다. 창조된 생명의 다양성은 개별 창조물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한 그루의 나무를 생각해 보자. 우리가 나무가 생명을 가지고 자라는 것을 본다. 나무의 색깔과 여름의 풍성한 잎사귀, 겨울의 앙상한 가지도 우리로 하여금 다른 감정과 기분을 갖게 만든다. 새가 가지에 앉고, 우리는 나무를 사용하여 집을 지을 수 있다. 나무 한 그루조차 그냥 단순하지 않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훨씬 더 많은 것이 나무 한 그루를 구성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는 구절의 풍요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창조에도 생명의 다양성이 나타난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피조물이 믿고, 느끼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놀고, 노래하고, 춤추고, 성장하고, 창조하고, 물건을 사고팔며, 양심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대상을 예배하는 등 수 많은 활동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인간 본성에 대한 이러한 그림은 자그레우스의 신화에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그림과 현저히 대조된다. 거기에서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은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다. 이 신화의 영향을 받아 일부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함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특정한 차원을 과소평가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이들은 놀이가 신앙과 개인적 도덕성만큼 좋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 피조물에게 부여해 주신다소 익살스러운 ‘장난기’를 표현할 수 있도록 축하, 노래, 춤, 축제적 활동의 즐거움과 아름다음을 기록하고 있다(출15:20; 레23:39-41; 눅15:25-32). 기독교 철학자 칼빈 시어벨트(Calvin Seerveld)가 말했듯이, “주님은 유머 감각, 날개 달린 말에 대한 환상, 아이들이 ‘집에서 놀 때’와 같이 꾸며낸 이야기의 재미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이 좋다고 보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또한 느끼고 생각하고 성장하고 창조하는 공간을 마련하셨고, 하나님께서는 이것들도 좋다고 보셨다고 덧붙일 수 있다. 창조 세계서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 본성의 일부 측면을 열등한 위치로 격하하는 것은 나무의 선함이 아름다움보다는 건물을 짓는 데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는 창조 세계의 일부 측면이나 인간 본성을 다른 측면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라는 가르침을 결코 주지 않는다. 창조 이야기는 오히려 우리의 인간 본성을 구성하는 모든 창조된 측면이 좋다고 확언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피조물성의 한 가지 중요한 차원은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창조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임무를 주셨다는 사실이다.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아담, 즉 ‘땅의 사람’은 창조물을 가꾸고 경작하고 돌보라는 사명을 부여 받았다(창1:28, 2:15). 우리에게 주어진 이 하나님의 부르심은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창조된 인간 본성의 한 본질적인 측면이기 때문이다. 선하든 악하든 우리는 창조물을 경작할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이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의 역사다. 인간의 문화는 인간이 창조물을 돌보고 경작한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정부, 만찬, 우리가 입는 옷, 교회, 술집, 축구 경기장, 원자 폭탄 등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좋든 나쁘든 창조물을 경작하고 돌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의 증거다. 이는 또한 참된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그 결과가 어떠해야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동시에, 삶의 모든 차원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적으로 응답하지 못한 결과가 얼마나 파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새로운 안목으로 볼 수 있도록 도전하고 있다. 김성수 목사 (탄자니아 아프리카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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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엘리압(2)
골리앗과 싸우려고 하는 다윗을 향해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엘리압과 사울을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살펴보십시다. 엘리압은 누구입니까? 엘리압은 이새의 장자입니다. 사무엘이 기름을 붓기 위하여 이새의 집에 갔을 때 엘리압을 보자마자 이 사람이다 싶을 정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삼상16:6)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하지만 결과는 기름부음 받을 사람이라고 모두가 생각지도 않았던 다윗에게 사무엘은 기름을 붓게 됩니다. (삼상16:12)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 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이런 상황에서 가장 불쾌할 것 같은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물론, 일곱 형들이 다 기분 나쁘겠지만 누가 봐도 제일 적임자요, 당연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장자 엘리압일 것입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우리는 에브라임의 형 므낫세의 믿음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창48:13-14)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이 장면을 본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팔을 옮기려고 시도했습니다. (창48:18-20)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하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므낫세 입장에서는 영문도 모르는 일이요, 억울하기 그지 없는 상황입니다. 또 아버지 요셉이 나서서 오히려 자신을 두 번 죽이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에서 이런 장면이 나타나면 대부분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니 일상 교회생활이나 신앙생활에 쉽게 발생하는 일이며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구지 설명하지 않아도 어떻게 나타나는지 잘 압니다. 그러다보니 믿음의 족장 야곱에 대한 평가도 부정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에 전혀 언급이 없고, 성경의 맥락과도 맞지 않은 야곱의 트라우마를 거론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므낫세는 단 한마디의 부정적인 반응도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엘리압도 막내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골리앗이라는 대적으로 인해 나라의 존폐라는 위기 앞에서 생뚱맞게 표출된 엘리압의 분노를 봤을 때 엘리압은 자신에게 기름을 붓지 않은 사무엘 선지자와 그것을 결정하셨던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평을 가슴에 담았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교회생활 가운데 쉽게 가질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과연 과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므낫세와 엘리압은 똑같은 상황을 만났고, 당시에는 두 사람다 아무 말 없이 똑같은 반응을 보였지만 두 사람이 가졌던 마음은 정반대였고 그 결과도 정반대였습니다. 두 번 죽임을 당한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므낫세는 어떤 자세였는지 그 결과가 므낫세의 믿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계7:5-8)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므낫세의 이름은 여섯 번째로 아버지 요셉보다 먼저 기록되어 있습니다. 므낫세의 이름은 아버지와 큰아버지들과 작은 아버지 베냐민과 어깨를 나란히 함께하며 당당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므낫세 자신과 동생 에브라임을 앉혀놓고 벌어졌던 할아버지 야곱과 아버지 요셉의 일방적인 행동이 정작 므낫세 자신에게는 어떠했을까요? 단 한마디 반응이 없지만 이 장면을 직접 당하는 므낫세, 그 후 동생 에브라임과 성장하면서 이 사건은 순간순간 므낫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훗날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도 므낫세 지파는 요단강을 경계로 므낫세 반지파는 이곳, 므낫세 반지파는 저곳으로 나누어져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하지만 계시록에 완성된 12지파의 이름에 므낫세가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는 장면으로 오늘날 믿음으로 므낫세와 같이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무한한 감사와 감동의 장면임이 분명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는 장면에서 므낫세의 순종을 완성해 주셨습니다. [행8:32]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우리의 신앙생활, 교회생활 저변에 깔려있는 비교의식이 얼마나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지도 발견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뒤바뀐 순서만 비교하다보니 므낫세가 얻은 비교할 수 없는 복과 특권을 보는 눈이 어두워져버린 것입니다. 동생에게 형의 자리를 빼앗긴 것이 큽니까? 아버지와 같은 향렬, 아버지의 형제가 된 것이 큽니까? 에브라임의 형이라는 위치가 위대합니까? 이스라엘의 12지파 중 하나라는 자리가 위대합니까? 오늘날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와 원망은 이 눈이 어두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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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2) (민12:11-16)
- 미리암은 위대한 믿음의 여인이 맞습니다. 하지만 여선지자라는 위대한 칭호를 받은 후 신앙이 제자리걸음을 했습니다. 미리암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역사에 발맞추지 못하고 여전히 애굽에서의 사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모세가 없는 40년 동안 여자로서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진짜 지도자인 줄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진짜 지도자인 모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교만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40년 만에 나타난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기절초풍할 일들을 일으킵니다. 세계 최강의 애굽과 바로도 모세 앞에 쩔쩔맵니다. 애굽을 초토화 시켜버렸고, 애굽의 장자를 죽여 씨를 말려버렸습니다. 여호와의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임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만 대면하시고 바다까지 갈라 마른 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미리암은 40년 동안 여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을 영도해 왔지만 40년 만에 갑자기 등장한 모세의 위용 앞에서 입도 벙긋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선지자의 위치에서 볼 때 비록 인간적으로는 누나요 동생이지만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적 권위를 지닌 모세였기에 고개 들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교회들끼리, 특히 목회자들끼리 묘한 질투심과 경쟁심이 있습니다. 곁의 교회가, 다른 교회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갖습니다. 잘못되면 입은 안타깝다고 하면서 속은 이유 없이 고소하고 상대적인 만족을 얻습니다. 교회의 주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망각한 무서운 죄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이 교인들 사이에서도 발생합니다. 곁의 성도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잘못되면 입은 위로하는 것 같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자신의 신앙과 믿음이 좋은 것으로 위로받고 착각합니다. 아주 나쁜 모습입니다. 악한 모습입니다. 교만의 극치입니다. 어쩌면 이것보다 더한 것이 목회자들끼리의 보이지 않는 견제와 경쟁입니다. 주변의 교회가 갑자기 성장하면 상대적 박탈감을 가집니다. 사람이다 보니 비교가 안 될 수 없습니다. 특히 가까운 교회에서 독보적인 성장을 보이면 심각한 스트레스까지 받습니다. 목사 자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의 중직자들이나 성도들도 자연스럽게 목회자에게 압박을 가합니다. 자신은 1년이 가도 전도 한 명 하지 않으면서 교회 부흥을 입에 올립니다. 십일조나 감사헌금은 고사하고 선교나 불우이웃이나 개척교회, 농어촌교회, 은퇴하신 목사님, 가난한 신학생들을 위해 특별헌금 한 푼도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재정을 입에 올립니다. 더 심각한 것은 설교자들의 교만입니다. 설교하는 사람이다 보니 설교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설교자의 훌륭한 설교에 은혜받기는커녕 허점과 잘못을 찾기에 바쁩니다. 그러니 설교에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현상은 모세를 대적하는 미리암의 아류들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땀방울 하나, 눈불 방울 하나 다 주의 것입니다. 우리는 비교 대상도 아니요, 경쟁상대도 압니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며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자들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특히 목회자들은 아바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평생 잊어선 안 됩니다. 물론 아바타라 하지만 예수님의 아바타니 영광스럽습니다. 진짜 선지자, 진짜 목회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미리암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사실 미리암은 누구보다도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몰라서 범한 죄도 무섭지만, 알고도 범하는 죄는 더 무섭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단순히 그 사람의 성향이나 기질을 나타내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모세의 통치를 방해했고, 이스라엘의 진행을 가로막았습니다. 감히 모세의 영적 권위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감히 같은 선지자였지만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교만은 이 모든 영적 권위 앞에서도 원망과 비방의 고개를 들게 합니다. 호시탐탐 모세의 허점과 실수를 염탐합니다. 교회도 은혜를 계산하는 성도가 있고, 실수와 잘못을 찾아내는 성도가 있습니다. 기회가 왔습니다. 구스 여자가 돌아왔습니다. 이전에 이미 정리된 문제인데도 교만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영적분력을 상실했습니다. 미리암은 십보라가 돌아오자 속에 숨겨놓았던 원망과 불평을 표출합니다. 원망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사실까지 망각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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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2) (민1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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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1)
- 성경 어디에도 미디안의 제사장 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는데 문제 삼은 장면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실에 대해 그 어디에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하는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사건 때문에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백성들이 구스 여인 십보라를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통치에 십보라를 문제 삼지 못하도록 아예 입도 벙긋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버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명을 주셨고, 그 사명 감당하기 위해 애굽으로 오는 길에 느닷없이 모세를 죽이시려고 한 것은 구스 여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임이 분명합니다. 분명한 이유는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것에 있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 같은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발견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려 하셨습니다. 완전한 모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이셨습니다. 완전히 죽이셨습니다. 그래도 십보라는 할례언약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긴박한 순간에 할례를 행하면 남편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과 비교도 되지 않는 신분입니다. 단순히 액면가로 볼 때 우리는 시아버지와 관계한 여인입니다. (마1:3)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우리는 우상의 신전에서 몸을 팔던 기생이었습니다. 우리는 과부요,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남편을 사지로 몰고 왕과 간음한 유부녀였습니다. (마1:5-6)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인데 죄인인 줄도 모르는 죄인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답도 없으면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제 딴에 잘 사는 줄 알지만 무익한 인생이요, 단 하나도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혀에는 속임만 있습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입에는 저주와 악독만 가득합니다. (롬3:10-14)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런 우리가, 그런 우리의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도 달렸고, 예수님의 부활에 나도 부활했다고 고백합니다. 사탄이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의를 제기하고 문제 삼을 것이 수두룩한 우리입니다. 아니 우리는 문제 그 자체들입니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합니다. 십보라가 할례 언약을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십보라가 할례를 행하여 남편을 살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불가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입으로 시인합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보라가 할례언약을 아는 것과 할례를 행하는 것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서십니다. (마10: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눅12: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합니다. 문제 제기도 못합니다. 입도 벙긋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의 예배 자리에, 예수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앉혀주십니다. (계12:22-23)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이런 은혜를 받은 성도입니다. 그래도 원망하고 비방하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완전한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할례를 시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에 거하며, 주일마다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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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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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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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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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
- 모든 사람은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지 간에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worldview)을 가지고 있다.세계관은 개인이 소유하지만 공동체적으로 공유하기도 한다.우리는 세계관의 틀(framework)을 통해서 사물을 바라보고 행동한다.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세계관은 삶의 양식으로 표출되는데 이것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그러므로 한 개인과 공동체가 어떤 세계관을 소유하고 공유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삶의 양태가 나타나고, 한 사회의 문화와 제도도 생성하고 발전하며 쇠퇴하기도 한다. 인간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의 역할은 역사를 통해서 확연히 볼 수 있다.이것은 근대 문화 형성의 근간이 되는 로마의 역사와 문화에서는 잘 나타나고 있다.기독교 세계관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일찍이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시대부터 노예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법률이 통과되었다. 영아 살해의 관습 역시 십자가형과더불어,보다 더 극적으로는 낙태와 함께 금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검투사 시합도 종말을 고했는데, 그 이유는 텔레마코스(Telemachus)라는 용감한 수도승이검투 경기에서 일어나는 잔인한 살인을 막으려고 경기장 바닥으로 내려갔고,그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로마 사회의 변화는 비록 점진적이긴 했지만 로마 제국 전역에서 인간 생명의 가치가 점점 더 인식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로마 제국 자체는 결국 곤경에 처해 있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을 지배했떤 세속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세계관으로 말미암아 로마 사회는 너무 오랜 세기 동안 쾌락과 반 출생주의적인 비성경적 삶의 양태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물론,이와 같은 저 출산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소위 그들이 야만인이고 불렀던 비게르만족들을 향한 이민문호를 폭넓게 개방하기는 했지만 이민에 대한 높은 의존도가 로마 사회의 인구 격차를 메우기에 역부족이었다.여기에 행정적, 군사적 실수가 결합되어 이주하는 인근의 다른 부족들에게도 제국의 국경을 활짝 열어 놓게 되었다.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부 지역에서 로마의 권위는 자신의 무능함과 게르만 부족의 공격으로 붕괴되었다. 로마, 게르만, 그리고 기독교 전통의 궁극적인 융합은 비록 완만한 전환의 과정이긴 했지만 중세 유럽에 새로운 문화와 세계관의 출현을 가져왔다. 우리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의 역할에 대해서 한 가지 예를 더 살펴 보기로 하자.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삶을 영위하기를 소망한다.그런데 영적인 삶의 영위에 향한 우리의 소망과 삶의 양태 역시 영적인 삶에 대한 관점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예를 들어,인간의 정신은 고상하고 거룩하고 선한 반면에 육체는 저급하고 속되고 악하다고 보는 이원론적 인간관을 견지하게 되면 육체적 고행이 하나님과 더 연합하는 삶이라고 보게 되고,따라서 우리가 신앙적이고 영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한 육체적인 본능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역사적으로 보면,결국 이러한 종류의 인간관에 기초한 금욕적 실천은 사람들이 '생활의 법칙'에 따라 공동체로 살아가는 수도원주의(monasticism)로 발전했다. 수도원은 일반적으로 독신 생활과 엄격한 생활 방식을 요구했다.수도승과 수녀는 체계적인 기도, 연구, 그리고 생산적인 노동의 삶을 영위하였다. 수도승과 수녀들에게는 관상기도의 기초로서 연구 활동이 특별히 중요했다. 이미 5세기 초에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라는 로마 원로원 의원은 자신이 비바리움(Vivarium)에 설립한 수도원에서 기독교와 이교 사상가들에 대한 텍스트 복사와 연구를 수도원 생활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삼았다. 카시오도로스와 그의동료들은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그 연구는 영적 발전의 길이라고 믿었다. 모든 초기 수도원들이 카시오도루스의 관점을 따른 것은 아니지만, 몇 세기 안에 그의 사상과 독서 목록은 수도원 영성의 중추를 제공하게 되었다. 수도승들은 기도나 연구와 같은 보다 분명한 “영적인 활동”들과 함께, 생산적인 노동에도 참여해야 했다. 로마 사회의 세계관 노동을 비하하고 노예들에게 노동을 강요했을지 모르지만 수도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비록 부분적으로는 겸비의 덕을 장려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수도승이 일해야 한다는 생각은 주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성경적 사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도 역시 일해야 한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었다. 창세기에서 아담은 죄를 짓기 전에 동산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므로 일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행하도록 만들어진 한 부분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은 삶의 목적에 대한 현저하게 다른 견해로 이어지게 되었다. 세계관 변화의 이러한 특별한 요인은나중 서구의 경제적 성공과 활력의 토대를 놓았다. 저출산,도덕성의 일탈,경제 문제,환경 파괴,정치 불신과 혐오 현상,남북간의 긴장 등 이 모든 문제들의 근본 뿌리는 왜곡된 세계관이다. 2024년도 새해를 맞았다.올 한 해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형성하는 올바른 세계관의 정립 운동이 범 국민 운동으로 펼쳐지기를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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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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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요즘 언론을 통해 중국의 시진핑과 러시아의 푸틴, 그리고 북한의 김정은과 같은 독재자 한 사람의 잘못된 가치관과 이로 인한 횡포로 인해 그들 자국 인민들이 겪는 불행과 고통은 물론, 예측할 수 없이 소용돌이치는 국제 정세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번씩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를 떠 올리게 된다. 시진핑, 푸틴, 김정은과 같은 악랄한 독재자 대신 기독교 신앙에 좀 우호적인 지도자가 등장하면 자국민들도 좀 더 행복할 것이고 세계 질서도 달라질 것인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앞으로 한 두 번 정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황제에 대해서 잠시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주후 313년에 밀라노 칙령(the Edict of Milan)을 발표하면서 로마 제국 내에서는 기독교의 상황과 법적 지위가 획기적으로 바뀌어졌다. 일 년 전, 밀비안 다리 전투(the Battle of the Milvian Bridge) 직전에 콘스탄티누스는 하나님으로부터 환상을 보았는데 예수께서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그가 해야 할 일을 설명하셨다고 주장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병사들에게 방패에 기독교 상징을 그리게 했고, 적의 우세한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을 때 이를 하나님의 표징으로 받아들여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 후 곧 바로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만드는 밀라노 칙령이 공포되었다. 이 칙령은 이교(paganism)를 불법화하거나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콘스탄틴의 개종으로 인해 확실히 기독교는 박해 받던 위치에서 선호 받는 종교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이 진짜였는지 아니면 정치적 계산의 산물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당시 기독교는 도시를 중심으로 고도의 조직성을 갖춘 성장하는 종교였다. 따라서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가 의지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할 수 있었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인기가 없었으며, 추산에 따르면 로마 세계의 약 10~15%에 불과했다. 이는 결코 압도적인 숫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은 313년 이전에도 군대에 복무했다는 증거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평화주의자였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포용함으로써 실질적인 정치적 이점이 있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황제로서 콘스탄티누스의 행동은 그의 개종에 대한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우선, 그는 아버지 하나님을 자신이 총애했던 “정복되지 않는 태양”(the Unconquered Sun)인 솔 인빅투스(Sol Invictus)와 구분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태양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세상의 빛, 또는 의의 태양 등으로 예수를 묘사하는 기독교인들의 관습에 영향을 받아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또한 자신의 "개종" 후에도 거의 한 세기 동안 자신의 주화에 이교 신들을 계속 사용했으며, 나중에 교황이 차지한 로마 이교 대제사장의 칭호인 폰티펙스막시무스(Pontifex Maximus)라는 칭호도 유지하고 있었다. 기독교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우 일찍부터 개입했다. 첫 번째 도전은 도나투스파(Donatists)와 관련이 있는데, 이들은 박해 중에 굴복하고 배교했던 사제들은 박해 중에도 믿음을 지키며 신실하게 남아 있었던 주교의 승인과 용서를 받지 않는 한 진정한 사제들이 아니라고 믿었던 집단이다. 법정과 콘스탄틴은 이에 대응하여 폭동을 일으킨 도나투스파에 대해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무력으로 보복했다. 그는 탄압이 효과가 없다고 보고 그 후 도나투스파에 적대적인 법령을 철회했지만, 그의 행동은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강압의 선례를 남겼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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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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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복음의 능력과 문화의 변혁
- 서기 303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별로 매력적이지 못하고 변방 종교였던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이 박해는 처음에는 기독교도들의 예배 처소인 교회당을 파괴하고 기독교 서적을 불태우는 것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성직자들을 투옥하고, 고문하며, 때로는 잔혹하게 사형에 처하는 등 성직자들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평신도들에게도 이러한 공격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박해가 시작된 지 불과 10년 후인 313년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서 이전처럼 범죄 집단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독교는 오히려 로마 제국 안에서 다수의 종교가 되었고, 결국 로마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후기 로마 제국의 세계관을 형성하여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과 삶의 방식을 변화시켰다. 복음의 능력이 사람들의 세계관을 변혁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이렇게도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으로 나타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졌던 성경적 세계관, 특별히 성경적 신관이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당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로마제국 내에서 독특한 신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로마에 있던 다른 인종 집단들이 견지하고 있었던 신관 사이의 명백한 차이점은 유대인들은 급진적인 일신론자라는 점이었다. 이들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라는 구약의 성경적 신앙을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믿고 섬기며 경배하는 신이 유일신이냐 아니면 다신론이냐는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섬기는 신이 어떤 본성과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믿느냐는 문제였다. 모든 이방 종교는 신 또는 신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신의 기원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 유대교적 또는 성경적 신관은 이런 이방 종교의 신관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떤 다른 것에서 기원한 존재가 아니라 단순히 영원부터 존재하셨고 지금도 계시고 영원히 계실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존재하는”(I Am who I Am)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과 별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자연계의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섭리자요 주권자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연신”(nature god)이나 “자연의 힘과 관련된 신”(god associated with the forces of nature)이 아니라 오히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 응답해야 하는 창조주시다. 이와 같은 신관은 얼핏 신 플라톤적(Neoplatonic)인 신관과 흡사해 보이기도 한다. 피상적으로 보면, 성경의 하나님이 마치 존재의 위계를 형성하는 “단일자”(One)로부터 유출된 만물의 기원이며, 초월적 존재인 “하나” 곧 단일자(One)를 신이라고 보는 신 플라톤적 개념과 다소 비슷해 보일 수도 있다. 사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와 같은 일부 유대인 사상가들은 플라톤 철학의 렌즈를 통해 유대교를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적 신관과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신 개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신 플라톤주의자들의 신은 의지가 없는 비인격적인 신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며 자발적인 행위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또한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우주는 영원하다. “단일자”(One)라는 신이 존재하는 동안 우주도 존재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우주 만물은 비인격적인 신으로부터 유출된 것이 아니라, 역사의 특정한 시점에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말씀으로 지은 바 된 피조물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인격적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독특한 성경적 인간관을 형성해 준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 세계를 보호하고 다스리며 감독하는 청지기적 사명을 주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 자신을 대신하여 에덴의 동산을 다스리는 사명을 인간에게 부여해 주셨다. 창조 질서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이와 같은 고유한 위치는 인간에게 특별하고 고귀한 가치를 부여해 주고 있다. 하나님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하나님의 섭정자인 인간을 공격하는 행위는 하나님 자신을 공격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들은 당시 로마의 쾌락 문화 사회에서 공공연히 행해졌던 영아 살해 행위,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Tacitus)가 “불길하고 역겨운” 일이라고 묘사했던 영아 살해 행위를 단호하게 거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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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복음의 능력과 문화의 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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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탄자니아, 아름다움 속의 상처와 우리의책임
- 하나님의 강권적인 인도하심으로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아프리카 탄자니아에 와서 사역을 시작한지도 벌써 한 해가 흘러가고 있다. 처음에는 더위와 말라리아 등 열악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견딜 수 있겠나 막막하기만 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곳으로 나를 인도하시는지 불평도 참 많이 해 보았다. 그러나 일 년이 지나면서 나는 이 나라에 대해서 점점 더 매력을 느끼고 빠져들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의 아름다움과 상처, 그리고 우리가 감당해야 할 책임까지도 볼 수 있는 것 같다. 탄자니아는 대자연의 신비와 깊은 역사, 그리고 다양한 문화가 조화를 이루는 땅이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높은 킬리만자로, 세계적인 야생동물 보호구역인 세렝게티 국립공원, 그리고 인도양의 보석이라 불리는잔지바르-탄자니아는 그 자체로 하나의 경이로운 세계다. 그러나 탄자니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대륙은 오랜 세월 동안서방제국들로부터 약탈당한 땅이다. 응고롱고로 분화구와 같은 천혜의 자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시대 동안 외부의 힘에 의해 자원을 빼앗겼고, 오늘날에도 다국적 기업과 강대국들의 경제적 지배 속에서 풍요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아름다운 휴양지 잔지바르는 단순한 휴양지가 아니다. 이곳은 과거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큰 노예무역 중심지 중 하나였다. 스톤 타운(Stone Town)의 골목길을 걷다 보면, 화려한 건축물 뒤에 감춰진 아프리카인들의 아픔과 눈물의 역사를 느낄 수 있다.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이곳에서 납치되어 중동과 유럽, 아메리카로 팔려 나갔다.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착취 중 하나였던 노예무역은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탄자니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국가들이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격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아직도 아프리카 국가들은 강대국들의 경제적 착취 속에서 자국의 자원을 온전히 활용하지 못하고 단순히 원자재를 공급하는 역할에 머물러 있으며, 정작 그 자원의 이익은 외부로 흘러가고 있다. 아프리카의 상처를 조금이라도 의식한다면 탄자니아를 단순한 관광지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곳은 대자연과 인간의 역사가 맞닿은 곳이며, 희망과 도전이 공존하는 땅이다. 탄자니아는 약탈당한 대지이지만, 결코 무너진 나라가 아니다. 이제 우리가 손을 내밀어야 한다. 더 이상 탄자니아를 약탈의 땅으로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함께 성장할 수 있으며,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 진정한 아프리카를 경험하고 싶다면, 단순한 여행자가 아닌 이들의 친구, 협력자, 그리고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 단순한 원조를 넘어, 이들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면서 탄자니아와 아프리카 대륙의 국가들은 더 이상 약탈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성장할 파트너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 이곳을 아름다움을 소비하는 단순한 여행자의 관점이 아니라, 이 나라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함께 고민하는 동반자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탄자니아의 자연과 문화를 보호하면서도, 현지인들이 직접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공정한 무역과 지속 가능한 관광을 촉진해 줄 수 있어야 한다. CTS(한국기독교텔레비전)가 지향하는 교육 선교와 미디어 선교, 그리고 보건 의료 선교를 확장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탄자니아와 함께 나아가야 할 길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를 단순히 동정심을 가지고 ‘도와주어야 할 대상’ 정도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일방적인 시각이다. 탄자니아는 우리가 함께 배우고 함께 성장해야 할 동반자이며,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회복해야 할 땅이다. 아름다움과 상처가 공존하고 있는 아프리카 대륙의 모든 나라들이 단순히 경제적 성장을 넘어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가 강물처럼 넘쳐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어야 한다. 복음 송 가사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아직도 이 땅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아직도 이 땅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상처도 깊지만 아름다움도 깊은 탄자니아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공의를 회복하는 그날까지, 내가 총장으로 봉사하고 있는 <탄자니아 아프리카 연합대학교>(The United African University of Tanzania>는 오늘도 기도를 쉬지 않고, 찬양을 멈추지 않고, 예배에 집중하며, 말씀을 붙잡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한 분 하나님만 바라보며 나아갈 것이다. 김성수 목사 (탄자니아 아프리카 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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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탄자니아, 아름다움 속의 상처와 우리의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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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일상의 삶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임재
-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기를 소망한다. 날마다 순간마다 그분과 동행하기를 원하며, 그분이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복을 누리기를 소원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분별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마귀의 거짓말’에서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잠언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잠9:10).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길 때,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성경 말씀과 신앙 공동체를 통해 양육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더 잘 인식하기 시작한다. 예수님은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요10:4)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는 무생물 속에서도 분별할 수 있다. 시편 기자는 푸른 나무, 겨울에 내리는 흰 눈, 비바람과 폭풍우 속에서도 이 모든 것들을 존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감지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과학적 세계관을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스스로 설명할 수 있는 닫힌 체계로 간주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오래 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읽는 경향이 있다. 현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시작하시고 난 후 이제는 자연이 스스로의 ‘자연 법칙’에 따라 움직이도록 만들고 자신은 창조 세계의 무대 뒤로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이 매일, 매 순간 계속해서 창조 사역을 이루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의 명령을 땅에 보내시니 그의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눈을 양털 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 같이 흩으시며 우박을 떡 부스러기 같이 뿌리시나니 누가 능히 그의 추위를 감당하리요”(시147:15-17). 우리는 시편 기자가 보았던 성경적 안복으로 창조 세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쉽게 감지하지 못하는 것은 성경과 이질적인 세계관이나 믿음의 강력한 영향력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무와 동물을 보면서 그것들이 ‘자연’이라는 자율적 실체에 속한다고 여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매 순간, 숨결처럼 우리 가까이 계셔서 그것들을 생명으로 부르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 그것들이 창조 세계에 존재함으로써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 과학과 기술이 압도하는 세계관에 매몰된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와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기 위해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구약성경 시대 살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다. 성경적 세계관은 과학적 탐구를 조롱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물에 신실하시기 때문에 과학이 견고한 기초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 세계를 약속하신 대로 계속해서 질서 있게 유지하시고 보존하실 것이다(시148:1-6). 인간 삶에 대한 이원론적 관점은 하나님과 세상을 양립할 수 없는 두 영역으로 나누려고 한다. 신체적 치유의 경우를 한 예로 들어 생각해 보자. 어떤 사람이 일반적인 의학적 방법을 통해 치유되면 우리는 이를 ‘자연적’ 치유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안수 기도를 통해 치유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를 ‘초자연적’으로 치유하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현실을 단순히 자연적 영역과 초자연적 영역으로 구분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친구 디도가 단순히 자신을 방문했을 때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고후7:6). 바울은 디도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조종되는 꼭두각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디도가 자신의 ‘자연적인’ 자유 의지로 방문을 결심하고 준비했음을 알았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손길이 그 방문 뒤에 있었음을 알았다. 이것은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동시에 둘 다였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모든 치유를 어떤 수단이든 ‘초자연적’이면서도 동시에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한 신학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이스라엘에게는 단 하나의 경험 세계만 있었다. 세상의 경험은 항상 하나님의 경험이기도 했고, 하나님의 경험은 세상의 경험이기도 했다.” 우리 모두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풍성하게 경험하는 복을 향유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원한다. 김성수 목사 (아프리카 탄자니아 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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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일상의 삶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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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엘리압(4) (삼상17:28-40)
- 그렇다면 엘리압은 누구처럼 살아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다름이 아닌 이삭처럼, 므낫세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이삭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아직 수혼 제도가 세워지기도 전입니다. 자신을 대신할 동생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 아브라함이 다시 아들을 낳아 자신의 이름을 끊어지게 하지 않을 방법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삭은 순종했습니다. 엘리압은 어떻습니까? 일곱 명의 동생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일곱이란 의미를 우리는 잘 압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엘리압은 수혼 제도를 통해서 자신의 이름이 영영토록 끊어지지 않을 보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일곱 명의 동생 중에는 하나님께서 기름까지 부어주신 동생 다윗도 있었습니다. 엘리압은 부활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엘리압은 부활의 신앙을 가졌던 완전한 아버지 아브라함의 언약을 생각했어야 했습니다. 바로 그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이 자신의 이름 속에 담겨 있습니다. 엘리압의 형제가 몇 8명입니다. 안식후 첫날, 주일, 부활의 날, 할례할 8일 이 모든 의미가 엘리압이라는 이름 속에, 엘리압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야말로 엘리압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름이 끊어지지 않고, 죽어도 살아나는 부활의 약속으로 겹겹이 둘러 싸여져 있었습니다. 자신이 이름으로도, 자신의 형제들로도 장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함에 눈곱만큼도 하자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엘리압은 골리앗 앞에서 겁에 질려 기가 죽어있었다 해도 다윗의 등장으로 자신의 정체성과 신앙과 본분을 찾았어야 했습니다. 엘리압은 자신의 이름 속에 있는 뜻처럼 당당히 이삭의 길을 갔어야 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 앞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엘리압이 골리앗 앞으로 가야 했습니다. 이삭이 자신의 발로, 아니 아버지 아브라함을 도와 모리아산 제단 위로 올갔던 것처럼 엘리압은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있는 다윗의 등장으로 정신을 차리고 골리앗 앞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세움받은 목사와 장로들은, 먼저 된 자들은 정신 바짝 차리고 이 장면을 죽을 때까지 잊어선 안 됩니다. 부족하여 엘리압처럼 골리앗 앞에서 두려워 떨고 있었다 해도, 순간적으로 자신의 사명과 직분의 이름을 망각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는 다윗의 등장으로 반드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다윗의 등장 앞에서 자신의 오랜 경륜과 경험과 연륜과 위치를 가지고 화를 내고, 지적하고, 억 박 지르는 엘리압이 되어선 안 됩니다. 자기가 부인되지 않으면, 자기가 죽지 않으면 엘리압이 됩니다. 먼저 된 자는, 교회의 진정한 장자는 먼저 죽는 자입니다. 교회 안에서 진정한 장자는 누구입니까? 먼저 된 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자기를 태워 죽일 나무를 지고 모리아 산으로 오르는 자입니다. 제 발로 죽음의 제단 위로 올라가는 자입니다. 이 사실을 죽을 때까지 잊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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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엘리압(4) (삼상17: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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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탄자니아 아름다움과 상처가 공존하는 나라
- 작년 2월부터 아프리카 탄자니아라는 나라의 다르 에스 살람(Dar es Salsaam)에 소재하고 있는 <탄자니아 아프리카 연합대학교>(The United African University of Tanzania)에서 총장으로 1년을 봉사하면서 직접 또는 간접으로 경험한 일들은 나에게 깊은 기쁨과 동시에 큰 고민을 안겨주고 있다. 이 나라는 말 그대로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이 넘쳐나는 땅이다. 사람들은 순수하고 따뜻하며, 정이 많다. 광활한 대지와 끝없이 펼쳐진 자연 자원은 이 나라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현실은 매우 무겁게 느껴진다. 심각한 빈부격차는 사회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가난한 이들은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이를 숙명처럼 받아들인다. 반대로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이어간다. 이 극단적인 현실의 간극은 나를 깊은 갈등과 고민에 빠뜨리고 있다. 더욱 가슴아픈 사실은 사람들 사이에서 거짓말이 너무 쉽게 오간다는 점이다. 문자그대로거짓말을 밥먹듯이 한다. 거짓말을 하고 들통이 나도 진심으로 사과하거나 책임을 지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에 만연한 이 잘못된 관행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어서 무감각해 보이기도 한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다”는 말이 진리처럼 통용되는 곳이다. 공무원, 경찰, 심지어 정의를 지켜야할 법정마저도 부패의 사슬에 얽매여 있다. 뇌물은 정의를 왜곡 시키고 억울한 자를 더욱 억울하게 만들 뿐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기독교 대학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열정은 때로 깊은 번민과 회의감으로 바뀌곤 한다. 이곳 대학 직원들조차 “여기 탄자니아에서는 그 어떤 사람도 믿지 말라”는 조언을 해 올 때면 더욱 더 그러하다. 이런 조언을 해주는 이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내가 갈등하는 문제의 무게를 한 층 더 더해주고 있다. 여기에서 또 다른 고민이 생겨난다. 선교를 위해 이곳에 와 있는 한국인들 중 일부 역시 이곳의 부정적인 관행에 너무도 익숙하게 물들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가슴이 먹먹해 진다. 선교지에서조차 믿음과 정직이 흔들리고 있다면, 과연 이곳에서 하고자 하는 나의 조그마한 봉사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지 묻게 된다.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꼴이 아닌가? 이러한 고민들은 내가 이곳에 온 이유를 다시 금 떠올리게 만든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왜 이 아름답지만 열악한 환경으로 부르셨을까? 이 땅에서의 사역과 봉사가 과연 나에게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으며,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 일까? 내가 이 땅에서 배운 것은 단순히 이들 탄자니아 사람들의 필요와 문제뿐만 아니라, 나 자신 역시 다시 금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시간이 갈수록 인간의 연약함과 나 자신의 부족함만 느낄 뿐이다. 탄자니아는 여전히 아름답다. 세렝게티 사파리의 초원은 여전히 푸르고 사자와 표범은 여전히 먹이를 찾고있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 속에는 치유해야 할 상처가 너무도 분명히 큰 자리를 잡고 있다. 이 상처를 마주하며,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이 땅 가운데 어떻게 드러날 수 있을지 묻는 것은 내게 남은 과제일 것이다. 오늘도 나는 한없이 왜곡되어 있는 이 땅의 현실 앞에서 다시 금 하나님께 무릎 꿇는다. 하나님, 부족한 나를 이곳에 보내신 당신의 오묘한 뜻을, 당신의 지혜를 간구합니다. 주여! 도우소서! 아멘 하나님께서 부족한 나를 감싸 안으며 친히 말씀하시는 것 같다. “여기 아프리카에도 내가 사랑하는 나의 백성들이 있음을 네가 보았지? 네가 좀 어렵다고 이들을 외면할 수 있겠니? 이 땅에서의 봉사는 그저 너의 능력이나 의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란다. 인간의 약점과 한계를 넘어, 내가 나의 영광과 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는 그 현장에 네가 계속 발걸음을 옮겨 갈 수 있어야지! 탄자니아의 아름다움과 상처를 품으며, 나의 부름에 신실하게 봉사하기 바란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너에게 용기를 주고 너의 무릎을 일으켜 줄 것이다!” 주여! 제가 여기 있습니다. 부족한 나를 보내소서! 순종하겠나이다! 아멘!!! 김성수 목사 (탄자니아 아프리카 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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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탄자니아 아름다움과 상처가 공존하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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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일상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지혜와 부르심
-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인간됨의 한 본질이다. 인간은 하나님께 순종적으로 응답함으로써 인간됨의 본질을 유지할 수도 있고 하거나, 하나님의 부르심에 불순종적으로 응답함으로써 인간됨의 본질을 왜곡시키거나 상실할 수도 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책임 없는 다국적 기업을 통해 약소국들을 짓밟거나, 하나님은 없고 인간이 과학과 기술을 통해서 만물을 다스리는 주인이 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며, 경제적 탐욕으로 창조세계를 오염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창조세계를 경작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을 수는 없는 존재다. 어느 작가의 말처럼, 인간은 문화적 활동과 창조세계의 발전을 통해 하나님께 주어진 지구를 다스리는 권세를 증명한다. 이것은 우리가 단지 종교적 행위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삶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함을 의미한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창조 세계 안에서 인간과 함께 걸으셨음을 보여주고 있다(창3:8).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위해 세상을 떠나 어떤 내면의 성소로 도피할 필요가 없음을 알려준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가장 평범한 일들 속에서도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이사야 선지자는 농부가 씨를 심고 타작하는 지혜조차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라고 말한다(사28:24-29). 농사를 짓는 기술조차 하나님의 지혜에서 비롯된다면,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과 관계 맺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현실 세계를 떠나 성경 속 인물들과 함께 마치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이 있다. 이는 성경을 오용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현실 세계 속에서 하나님을 찾도록 인도하는 삶의 지침이다. 잠언은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의 일상, 우리의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들려올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잠8:1-3). 하나님은 가장 예상치 못한 장소와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기도 하신다. 선지자 이사야는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을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부르며, 하나님께서 이교도 왕의 정치적 행동 속에서도 일하신다고 선언한다(사45:1). 심지어 잠언 30장에는 비이스라엘 왕의 지혜가 기록되어 있고, 민수기에는 발람의 나귀조차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듣는 모든 말과 행동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사상가든 작가든 예술가든 정치인이든, 하나님은 다양한 도구와 사람을 통해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물론, 모든 것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지혜롭지 않다. 잠언은 세상에 지혜뿐 아니라 어리석음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 있다(잠9:14-16). 참 된 지혜는 오직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어리석음은 우리의 잘못된 선택과 욕망에서 비롯될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분별력 있는 태도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일상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하는 영성이다. 인공지능이 가르쳐 주는 의미 있는 예화를 하나 소개해 보고자 한다. 한 작은 마을에 빵집을 운영하는 한 신실한 크리스천 주인이 있었다. 그는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반죽을 만들고 빵을 구우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곤 했다. 어느 날, 그는 목사님을 찾아가 자신의 일상이 하나님께 의미 있는 일인지 물어 보았다. “목사님, 저는 매일 빵을 굽는 단순한 일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어떤 가치가 있을까요? 저는 성경을 가르치거나 선교를 다니는 분들처럼 거룩한 일을 하지 않습니다.” 목사님은 잠시 빵집 주인의 손을 바라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당신의 빵을 먹고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당신의 손은 성전의 제사장이 드리는 예물처럼 하나님께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빵을 통해 이웃을 섬기는 것을 통해도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날 이후로 빵집 주인은 자신의 일을 하나님이 주신 부르심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는 단지 빵을 구울 때조차도 기도하며, 빵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를 나누는 삶을 살았다. 이 빵집은 단순히 빵을 사는 곳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와 평안을 경험하는 장소가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현장에서 우리를 부르신다. 그분은 단지 종교적 의식 속에만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직업, 인간관계, 문화 활동, 창조세계 속에서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분별력으로 세상의 모든 음성을 경청하며, 창조세계를 경작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기쁨으로, 그리고 순종적으로 응답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기독교인의 삶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영적인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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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일상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지혜와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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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창조’(Creation)의 풍요한 의미
- 창세기 1장의 창조 이야기는 식물, 동물,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창조로 우리를 안내한다. ‘있으라, 생겨라’와 ‘그 종류대로’라는 반복되는 구절은 지음 받은 모든 것에 대한 창조주의 주권적 권능뿐만 아니라, 창조 세계의 다양성과 다원성에 대한 창조주의 지혜와 신비함을 남겨 주고 있다. 더욱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구절의 반복은 이 다양성의 선함과 아름다움을 확증해 주고 있다. 창조된 생명의 다양성은 개별 창조물에서도 나타난다. 예를 들어 한 그루의 나무를 생각해 보자. 우리가 나무가 생명을 가지고 자라는 것을 본다. 나무의 색깔과 여름의 풍성한 잎사귀, 겨울의 앙상한 가지도 우리로 하여금 다른 감정과 기분을 갖게 만든다. 새가 가지에 앉고, 우리는 나무를 사용하여 집을 지을 수 있다. 나무 한 그루조차 그냥 단순하지 않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훨씬 더 많은 것이 나무 한 그루를 구성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는 구절의 풍요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창조에도 생명의 다양성이 나타난다. 우리는 인간이라는 피조물이 믿고, 느끼고, 생각하고, 상상하고, 놀고, 노래하고, 춤추고, 성장하고, 창조하고, 물건을 사고팔며, 양심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대상을 예배하는 등 수 많은 활동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인간 본성에 대한 이러한 그림은 자그레우스의 신화에서 우리에게 제시되는 그림과 현저히 대조된다. 거기에서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은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다. 이 신화의 영향을 받아 일부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함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해 주신 특정한 차원을 과소평가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이들은 놀이가 신앙과 개인적 도덕성만큼 좋지 않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 피조물에게 부여해 주신다소 익살스러운 ‘장난기’를 표현할 수 있도록 축하, 노래, 춤, 축제적 활동의 즐거움과 아름다음을 기록하고 있다(출15:20; 레23:39-41; 눅15:25-32). 기독교 철학자 칼빈 시어벨트(Calvin Seerveld)가 말했듯이, “주님은 유머 감각, 날개 달린 말에 대한 환상, 아이들이 ‘집에서 놀 때’와 같이 꾸며낸 이야기의 재미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이 좋다고 보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또한 느끼고 생각하고 성장하고 창조하는 공간을 마련하셨고, 하나님께서는 이것들도 좋다고 보셨다고 덧붙일 수 있다. 창조 세계서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 본성의 일부 측면을 열등한 위치로 격하하는 것은 나무의 선함이 아름다움보다는 건물을 짓는 데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는 창조 세계의 일부 측면이나 인간 본성을 다른 측면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라는 가르침을 결코 주지 않는다. 창조 이야기는 오히려 우리의 인간 본성을 구성하는 모든 창조된 측면이 좋다고 확언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피조물성의 한 가지 중요한 차원은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창조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임무를 주셨다는 사실이다.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아담, 즉 ‘땅의 사람’은 창조물을 가꾸고 경작하고 돌보라는 사명을 부여 받았다(창1:28, 2:15). 우리에게 주어진 이 하나님의 부르심은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창조된 인간 본성의 한 본질적인 측면이기 때문이다. 선하든 악하든 우리는 창조물을 경작할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이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의 역사다. 인간의 문화는 인간이 창조물을 돌보고 경작한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정부, 만찬, 우리가 입는 옷, 교회, 술집, 축구 경기장, 원자 폭탄 등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좋든 나쁘든 창조물을 경작하고 돌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의 응답의 증거다. 이는 또한 참된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그 결과가 어떠해야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동시에, 삶의 모든 차원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적으로 응답하지 못한 결과가 얼마나 파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새로운 안목으로 볼 수 있도록 도전하고 있다. 김성수 목사 (탄자니아 아프리카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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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창조’(Creation)의 풍요한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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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엘리압(2)
- 골리앗과 싸우려고 하는 다윗을 향해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엘리압과 사울을 통해 성경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살펴보십시다. 엘리압은 누구입니까? 엘리압은 이새의 장자입니다. 사무엘이 기름을 붓기 위하여 이새의 집에 갔을 때 엘리압을 보자마자 이 사람이다 싶을 정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삼상16:6)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하지만 결과는 기름부음 받을 사람이라고 모두가 생각지도 않았던 다윗에게 사무엘은 기름을 붓게 됩니다. (삼상16:12)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 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이런 상황에서 가장 불쾌할 것 같은 사람은 누구겠습니까? 물론, 일곱 형들이 다 기분 나쁘겠지만 누가 봐도 제일 적임자요, 당연한 권리를 가지고 있는 장자 엘리압일 것입니다. 바로 이 장면에서 우리는 에브라임의 형 므낫세의 믿음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창48:13-14)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이 장면을 본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팔을 옮기려고 시도했습니다. (창48:18-20)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하였으나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므낫세 입장에서는 영문도 모르는 일이요, 억울하기 그지 없는 상황입니다. 또 아버지 요셉이 나서서 오히려 자신을 두 번 죽이는 결과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에서 이런 장면이 나타나면 대부분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니 일상 교회생활이나 신앙생활에 쉽게 발생하는 일이며 그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구지 설명하지 않아도 어떻게 나타나는지 잘 압니다. 그러다보니 믿음의 족장 야곱에 대한 평가도 부정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에 전혀 언급이 없고, 성경의 맥락과도 맞지 않은 야곱의 트라우마를 거론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므낫세는 단 한마디의 부정적인 반응도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엘리압도 막내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하지만 골리앗이라는 대적으로 인해 나라의 존폐라는 위기 앞에서 생뚱맞게 표출된 엘리압의 분노를 봤을 때 엘리압은 자신에게 기름을 붓지 않은 사무엘 선지자와 그것을 결정하셨던 하나님을 향한 원망과 불평을 가슴에 담았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교회생활 가운데 쉽게 가질 수 있는 우리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과연 과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므낫세와 엘리압은 똑같은 상황을 만났고, 당시에는 두 사람다 아무 말 없이 똑같은 반응을 보였지만 두 사람이 가졌던 마음은 정반대였고 그 결과도 정반대였습니다. 두 번 죽임을 당한 것과 마찬가지였지만 므낫세는 어떤 자세였는지 그 결과가 므낫세의 믿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계7:5-8)유다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요 르우벤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갓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아셀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납달리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므낫세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시므온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레위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잇사갈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스불론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요셉 지파 중에 일만 이천이요 베냐민 지파 중에 인침을 받은 자가 일만 이천이라 므낫세의 이름은 여섯 번째로 아버지 요셉보다 먼저 기록되어 있습니다. 므낫세의 이름은 아버지와 큰아버지들과 작은 아버지 베냐민과 어깨를 나란히 함께하며 당당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므낫세 자신과 동생 에브라임을 앉혀놓고 벌어졌던 할아버지 야곱과 아버지 요셉의 일방적인 행동이 정작 므낫세 자신에게는 어떠했을까요? 단 한마디 반응이 없지만 이 장면을 직접 당하는 므낫세, 그 후 동생 에브라임과 성장하면서 이 사건은 순간순간 므낫세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훗날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도 므낫세 지파는 요단강을 경계로 므낫세 반지파는 이곳, 므낫세 반지파는 저곳으로 나누어져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하지만 계시록에 완성된 12지파의 이름에 므낫세가 당당하게 이름을 올리는 장면으로 오늘날 믿음으로 므낫세와 같이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무한한 감사와 감동의 장면임이 분명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지시는 장면에서 므낫세의 순종을 완성해 주셨습니다. [행8:32]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우리의 신앙생활, 교회생활 저변에 깔려있는 비교의식이 얼마나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지도 발견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뒤바뀐 순서만 비교하다보니 므낫세가 얻은 비교할 수 없는 복과 특권을 보는 눈이 어두워져버린 것입니다. 동생에게 형의 자리를 빼앗긴 것이 큽니까? 아버지와 같은 향렬, 아버지의 형제가 된 것이 큽니까? 에브라임의 형이라는 위치가 위대합니까? 이스라엘의 12지파 중 하나라는 자리가 위대합니까? 오늘날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와 원망은 이 눈이 어두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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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엘리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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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이 같이 놀라운 창조와 구원
-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과 그로 인해 철저하게 오염된 창조 세계를 그대로 내 버려 두시지 않고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놀라운 일을 하셨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유일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타락한 인간과 만물을 구속하셨고, 자신과 화해시키는 일은 실로 엄청나고도 신비한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도 놀라는 고백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원하시고 그가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인도하셨으니, 우리는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다. 하나님은 그의 충만함이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흘린 그의 피로 화평을 이루심으로써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그를 통하여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셨다(골1:13-20). 우리 모두의 궁극적인 관심사가 제기하는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답은 창조(Creation), 타락(Fall),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Redemption through Jesus Christ)이라고 하는 우주적 드라마를 기록하고 있는 성경에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신실하게 살기를 소원하는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창조, 타락, 구속의 의미와 그 상호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왜곡되고 불완전한 삶은 많은 경우 성경이라는 드라마의 기본적인 틀을 잘못 이해하는데 많이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먼저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언제나 창조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구원을 창조의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고 단순히 죽음 이후에 누리는 어떤 복락으로만 생각하게 되면 그것은 구원에 대해서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전부가 아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은 하나님이시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를 통하여 만물이 만들어졌고 그가 없이는 만들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요1:1-3). 요한복음의 서두 구절은 창세기의 서두 구절에서 극적으로 이야기되는 창조 이야기를 다시 포착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창조한 동일한 말씀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너희의 구속주, 너희를 모태에서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 나는 만물을 지으신 여호와요, 홀로 하늘을 펴신 이요, 나 홀로 땅을 펴신 이니라. 땅 끝까지 다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요,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사44: :24, 45:22)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우리를 만드신 분이시다. 성경은 창조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신약성경에서는 이 가르침을 재확인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삶에 대한 이원론적이며 분열된 견해에 너무 사로잡혀서 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너무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그 진정한 의미를 간과하고 있다. 그래서 구원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 세상을 건강과 새 생명으로 회복하는 관점보다는 세상에서 도피하는 관점에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함으로써 창조와 구원 사이의 관계에 쐐기를 박아버린다. 사도 바울 역시 구원을 창조 세계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가르치고 있다. 창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창조물 자체도 썩어짐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로 인도될 것이다(롬8:19-21). 세상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고 따라서 구원받을 수 없는 곳이 아니다. 세상은 선하고 아름다운 곳이며 지금도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인간의 타락과 창조 세계의 본질을 분명히 분리해야 한다. 타락과 창조 세계를 동일시하거나 하나를 다른 것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본질적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창세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세상을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인식하게 되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구원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남아있는 유일한 선택은 세상을 가라앉는 배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는 이 세상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이 세상을 넘어선 피안의 세상만을 기대하는 종교로 전락한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구원을 창조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일부 현대 신학자들처럼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창조, 또는 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삶 자체가 구원은 아니다. 구원을 오로지 ‘삶의 과정에 따라 흐르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면, 끊임없는 변화와 성장을 구원의 핵심으로 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여정을 인도할 초월적인 창조주는 사라지고 피조물인 인간이 삶에 대한 자체 규칙과 신념을 만들고 변경해야 한다. 창조와 구원의 의미는 참으로 놀라고 신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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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이 같이 놀라운 창조와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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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엘리압(1) (삼상17:28-40)
- 본문 앞장에서 하나님의 명을 받은 사무엘은 다윗에게 왕의 기름을 붓습니다. (삼상16:12-13)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 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성경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예고라도 하듯이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아 여호와의 영, 성령으로 크게 감동되는 동시에 사울에게서 여호와의 영이 떠나가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하16:14)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쉽게 입에 올리고 실생활가운데서도 빗대어 표현할 정도로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내용압나다. 오늘 본문은 다윗과 골리앗이 싸움을 벌이 전에 발생한 일압나다. 그런데 의외로 그 장면을 성경은 매우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냥 쉽게 본문을 접하면 소위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이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기적과 같은 승리로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통해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단순히 세상살이에서 골리앗과 같은 상황을 기적과 같이 이기게 되는 복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직전에 전개된 오늘 본문의 기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그 구원을 향한 성도들의 믿음과 오늘날 성도들의 일상생활, 신앙생활, 교회생활 가운데서 쉽게 발생할 수 있는 일들과 상황들을 발견하게 합니다. 먼저 성경은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는 일에 앞서 엘리압과 사울을 등장시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앞서 등장하는 엘리압과 사울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엘리압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화를 냅니다. (삼상17:28)큰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그런데 엘리압의 말을 한 번만 더 들여다보면 철부지한 막내 동생의 어리석음을 꾸짖거나 동생이 무모한 싸움에서 목숨을 잃을 까봐 걱정을 해서 하는 말 같지는 않습니다.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뭔가 다윗에게 쌓인 것이 많은 투입니다. 엘리압은 동생 다윗에 대해 평소 생각보다 욱한 심정을 많이도 눌러 왔던 것 같아 보입니다. 사울의 반응은 엘리압과 정반대로 보입니다. 철부지한 어린 다윗을 타이르는 듯 해 보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떼를 쓰는 다윗에게 못 이긴 듯 최선을 다해 배려하는 듯합니다. (삼상17:37하반절-38)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 투구를 그의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 나라의 존망이 걸려 있는 상황입니다. 골리앗이라는 거대한 이방 장군 앞에 하나님 나라의 군대가 쩔쩔매고 있습니다. 아니 곧 패배하고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이 망할 상황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십대 소년이 나타나 그 위급한 상황을 주도한다는 설정 자체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당나라 군대라고 해도 이런 상황은 전개될 수 없습니다. 더 가관인 것은 엘리압과 사울의 행동입니다. 얼핏보면 엘리압은 이치에 맞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동생 다윗의 목숨 때문에 화를 내는 것 같지 않습니다. 평소에 장남으로서 동생 다윗에게 자격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엘리압 자신이 전쟁을 구경하고 있으면서 동생 다윗에게 나라의 존패가 걸린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의 울분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사울은 왕으로서 많은 배려를 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군복과 놋 투구와 갑옷 까지 입혀주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은 전쟁이 일어나면 말을 타고 제일 앞장을 서는 사람입니다. 이런 장면은 훗날 다윗이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는데도 출전을 하지 않고 궁전에 머물다가 밧세바와의 사건이 터진 것을 발견하기에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엘리압과 사울의 행동이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똑같습니다. 엘리압은 하나님 나라가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고, 이 전쟁의 결과에 따라 자신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그 전쟁을 빌미로 숨겨두었던 자신의 감정을 다윗에게 불같은 화로, 진노로 표출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마치 다윗을 걱정하고 위하는 것처럼 하지만 결국 다윗을 사지로 내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인간적인 배려를 가면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왕의 사명을 자진해서 어린 소년 다윗에게 이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군대로 부름을 받은 성도들 중 특히 오늘날 목사와 장로, 집사와 권사, 중직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그리스도와 복음과 교회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철저히 자기자신의 감정을 우선시 합니다. 항상 자신이 교회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을 다하는 것처럼 떠들다가도 막상 위급한 상황이 발생한다거나 부담스운 부분을 담당해야 할 때는 대단한 아량과 선심을 베푸는 것처럼 위장하여 자신이 해야 마땅한 사명을 다른 사람에게 짐지우는 경우가 교회 안에서 허다이 발생합니다. 평소 교회 안에서 먼저된 자로서, 장자이면서 장자답지 못한 행동으로 동생에게 밀려나 말은 못하지만 분노를 쌓아오다가 어느 순간 교회의 위기, 교회에 문제가 닥치면 교회는 안중에도 없으면서 그것을 빌미로 분노와 악감정을 드러내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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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엘리압(1) (삼상17: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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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우리의 궁극적 관심과 소망
-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1:21-15) 성경은 우리의 신앙의 문제, 다시 말하면 우리가 누구를 섬기고 예배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조금의 타협도 허용하지 않는다. 인간의 필연적 본성인 신앙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선택권만 있을 뿐이다. 우리의 궁극적 관심사는 창조주 하나님, 곧 그분의 유일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해 주신 참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거나 아니면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모든 피조물을 섬김과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우상 숭배적 행위뿐이다. 바울이 나열한 우상을 금수와 새, 파충류 등 버러지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울이 살았던 시대의 우상은 오늘 우리가 섬기는 우상과는 달랐지만 오늘 우리가 섬기는 우상도 바울 시대와 마찬가지로 살아 있고 건장하다. ‘예배’라는 단어의 본질적인 의미에 대해서도 우리는 잘 알아야 한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속적인 사회 문화의 분위기에서 우상 숭배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마도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자신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필연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이 믿음은 곧 예배의 행위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바울이 로마서 12장 1-2절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예배는 우리의 온 존재가 관여하는 행위다. 그것은 참된 신이신 하나님이나 아니면 온갖 종류의 거짓된 신을 섬기는 예배 행위에 의해서 형성되는 우리 삶의 모습이다. 우리가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과 예배의 대상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성경 말씀이 약속 하는 바 그대로 이 땅의 삶에서도 형통하고 충만한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과 예배의 대상을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피조물 중에서 선택한다면, 우리는 결국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이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뿐만 아니라 영적인 죽음이며, 하나님의 모든 축복에서 끊어지고 영원한 사망에 이르는 길이 있을 뿐이다(신30:16-19). 성경은 우리의 유일하고 참된 경배의 대상이며 소망이 되시는 참 되신 하나님께 믿음으로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이 신성의 충만함이라고 가르치고 있다(고전1:19).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14:6).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나사렛에서 자라나고,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역사적 예수는 성령을 통해 오늘도 살아 계시고 활동하시고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우리 그리스도 모두의 궁극적 관심이요 소망이다. 우리가 공유하고 그 안에서 내주하고 있는 우리는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적 사실이 된다. 우리가 그분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릴 때, 우리가 탐구하고 있는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독특한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된다. 그 때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와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심을 것을 알게 된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또한 인간을 포함한 만물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소외되었음을 알게 된다.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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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우리의 궁극적 관심과 소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