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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이 같이 놀라운 창조와 구원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과 그로 인해 철저하게 오염된 창조 세계를 그대로 내 버려 두시지 않고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놀라운 일을 하셨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유일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타락한 인간과 만물을 구속하셨고, 자신과 화해시키는 일은 실로 엄청나고도 신비한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도 놀라는 고백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원하시고 그가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인도하셨으니, 우리는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다. 하나님은 그의 충만함이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흘린 그의 피로 화평을 이루심으로써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그를 통하여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셨다(골1:13-20). 우리 모두의 궁극적인 관심사가 제기하는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답은 창조(Creation), 타락(Fall),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Redemption through Jesus Christ)이라고 하는 우주적 드라마를 기록하고 있는 성경에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신실하게 살기를 소원하는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창조, 타락, 구속의 의미와 그 상호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왜곡되고 불완전한 삶은 많은 경우 성경이라는 드라마의 기본적인 틀을 잘못 이해하는데 많이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먼저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언제나 창조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구원을 창조의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고 단순히 죽음 이후에 누리는 어떤 복락으로만 생각하게 되면 그것은 구원에 대해서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전부가 아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은 하나님이시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를 통하여 만물이 만들어졌고 그가 없이는 만들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요1:1-3). 요한복음의 서두 구절은 창세기의 서두 구절에서 극적으로 이야기되는 창조 이야기를 다시 포착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창조한 동일한 말씀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너희의 구속주, 너희를 모태에서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 나는 만물을 지으신 여호와요, 홀로 하늘을 펴신 이요, 나 홀로 땅을 펴신 이니라. 땅 끝까지 다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요,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사44: :24, 45:22)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우리를 만드신 분이시다. 성경은 창조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신약성경에서는 이 가르침을 재확인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삶에 대한 이원론적이며 분열된 견해에 너무 사로잡혀서 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너무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그 진정한 의미를 간과하고 있다. 그래서 구원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 세상을 건강과 새 생명으로 회복하는 관점보다는 세상에서 도피하는 관점에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함으로써 창조와 구원 사이의 관계에 쐐기를 박아버린다. 사도 바울 역시 구원을 창조 세계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가르치고 있다. 창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창조물 자체도 썩어짐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로 인도될 것이다(롬8:19-21). 세상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고 따라서 구원받을 수 없는 곳이 아니다. 세상은 선하고 아름다운 곳이며 지금도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인간의 타락과 창조 세계의 본질을 분명히 분리해야 한다. 타락과 창조 세계를 동일시하거나 하나를 다른 것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본질적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창세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세상을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인식하게 되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구원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남아있는 유일한 선택은 세상을 가라앉는 배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는 이 세상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이 세상을 넘어선 피안의 세상만을 기대하는 종교로 전락한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구원을 창조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일부 현대 신학자들처럼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창조, 또는 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삶 자체가 구원은 아니다. 구원을 오로지 ‘삶의 과정에 따라 흐르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면, 끊임없는 변화와 성장을 구원의 핵심으로 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여정을 인도할 초월적인 창조주는 사라지고 피조물인 인간이 삶에 대한 자체 규칙과 신념을 만들고 변경해야 한다. 창조와 구원의 의미는 참으로 놀라고 신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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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엘리압(1) (삼상17:28-40)
본문 앞장에서 하나님의 명을 받은 사무엘은 다윗에게 왕의 기름을 붓습니다. (삼상16:12-13)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 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성경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예고라도 하듯이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아 여호와의 영, 성령으로 크게 감동되는 동시에 사울에게서 여호와의 영이 떠나가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하16:14)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쉽게 입에 올리고 실생활가운데서도 빗대어 표현할 정도로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내용압나다. 오늘 본문은 다윗과 골리앗이 싸움을 벌이 전에 발생한 일압나다. 그런데 의외로 그 장면을 성경은 매우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냥 쉽게 본문을 접하면 소위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이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기적과 같은 승리로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통해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단순히 세상살이에서 골리앗과 같은 상황을 기적과 같이 이기게 되는 복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직전에 전개된 오늘 본문의 기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그 구원을 향한 성도들의 믿음과 오늘날 성도들의 일상생활, 신앙생활, 교회생활 가운데서 쉽게 발생할 수 있는 일들과 상황들을 발견하게 합니다. 먼저 성경은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는 일에 앞서 엘리압과 사울을 등장시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앞서 등장하는 엘리압과 사울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엘리압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화를 냅니다. (삼상17:28)큰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그런데 엘리압의 말을 한 번만 더 들여다보면 철부지한 막내 동생의 어리석음을 꾸짖거나 동생이 무모한 싸움에서 목숨을 잃을 까봐 걱정을 해서 하는 말 같지는 않습니다.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뭔가 다윗에게 쌓인 것이 많은 투입니다. 엘리압은 동생 다윗에 대해 평소 생각보다 욱한 심정을 많이도 눌러 왔던 것 같아 보입니다. 사울의 반응은 엘리압과 정반대로 보입니다. 철부지한 어린 다윗을 타이르는 듯 해 보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떼를 쓰는 다윗에게 못 이긴 듯 최선을 다해 배려하는 듯합니다. (삼상17:37하반절-38)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 투구를 그의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 나라의 존망이 걸려 있는 상황입니다. 골리앗이라는 거대한 이방 장군 앞에 하나님 나라의 군대가 쩔쩔매고 있습니다. 아니 곧 패배하고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이 망할 상황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십대 소년이 나타나 그 위급한 상황을 주도한다는 설정 자체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당나라 군대라고 해도 이런 상황은 전개될 수 없습니다. 더 가관인 것은 엘리압과 사울의 행동입니다. 얼핏보면 엘리압은 이치에 맞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동생 다윗의 목숨 때문에 화를 내는 것 같지 않습니다. 평소에 장남으로서 동생 다윗에게 자격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엘리압 자신이 전쟁을 구경하고 있으면서 동생 다윗에게 나라의 존패가 걸린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의 울분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사울은 왕으로서 많은 배려를 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군복과 놋 투구와 갑옷 까지 입혀주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은 전쟁이 일어나면 말을 타고 제일 앞장을 서는 사람입니다. 이런 장면은 훗날 다윗이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는데도 출전을 하지 않고 궁전에 머물다가 밧세바와의 사건이 터진 것을 발견하기에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엘리압과 사울의 행동이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똑같습니다. 엘리압은 하나님 나라가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고, 이 전쟁의 결과에 따라 자신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그 전쟁을 빌미로 숨겨두었던 자신의 감정을 다윗에게 불같은 화로, 진노로 표출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마치 다윗을 걱정하고 위하는 것처럼 하지만 결국 다윗을 사지로 내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인간적인 배려를 가면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왕의 사명을 자진해서 어린 소년 다윗에게 이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군대로 부름을 받은 성도들 중 특히 오늘날 목사와 장로, 집사와 권사, 중직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그리스도와 복음과 교회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철저히 자기자신의 감정을 우선시 합니다. 항상 자신이 교회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을 다하는 것처럼 떠들다가도 막상 위급한 상황이 발생한다거나 부담스운 부분을 담당해야 할 때는 대단한 아량과 선심을 베푸는 것처럼 위장하여 자신이 해야 마땅한 사명을 다른 사람에게 짐지우는 경우가 교회 안에서 허다이 발생합니다. 평소 교회 안에서 먼저된 자로서, 장자이면서 장자답지 못한 행동으로 동생에게 밀려나 말은 못하지만 분노를 쌓아오다가 어느 순간 교회의 위기, 교회에 문제가 닥치면 교회는 안중에도 없으면서 그것을 빌미로 분노와 악감정을 드러내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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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우리의 궁극적 관심과 소망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1:21-15) 성경은 우리의 신앙의 문제, 다시 말하면 우리가 누구를 섬기고 예배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조금의 타협도 허용하지 않는다. 인간의 필연적 본성인 신앙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선택권만 있을 뿐이다. 우리의 궁극적 관심사는 창조주 하나님, 곧 그분의 유일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해 주신 참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거나 아니면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모든 피조물을 섬김과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우상 숭배적 행위뿐이다. 바울이 나열한 우상을 금수와 새, 파충류 등 버러지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울이 살았던 시대의 우상은 오늘 우리가 섬기는 우상과는 달랐지만 오늘 우리가 섬기는 우상도 바울 시대와 마찬가지로 살아 있고 건장하다. ‘예배’라는 단어의 본질적인 의미에 대해서도 우리는 잘 알아야 한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속적인 사회 문화의 분위기에서 우상 숭배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마도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자신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필연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이 믿음은 곧 예배의 행위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바울이 로마서 12장 1-2절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예배는 우리의 온 존재가 관여하는 행위다. 그것은 참된 신이신 하나님이나 아니면 온갖 종류의 거짓된 신을 섬기는 예배 행위에 의해서 형성되는 우리 삶의 모습이다. 우리가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과 예배의 대상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성경 말씀이 약속 하는 바 그대로 이 땅의 삶에서도 형통하고 충만한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과 예배의 대상을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피조물 중에서 선택한다면, 우리는 결국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이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뿐만 아니라 영적인 죽음이며, 하나님의 모든 축복에서 끊어지고 영원한 사망에 이르는 길이 있을 뿐이다(신30:16-19). 성경은 우리의 유일하고 참된 경배의 대상이며 소망이 되시는 참 되신 하나님께 믿음으로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이 신성의 충만함이라고 가르치고 있다(고전1:19).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14:6).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나사렛에서 자라나고,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역사적 예수는 성령을 통해 오늘도 살아 계시고 활동하시고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우리 그리스도 모두의 궁극적 관심이요 소망이다. 우리가 공유하고 그 안에서 내주하고 있는 우리는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적 사실이 된다. 우리가 그분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릴 때, 우리가 탐구하고 있는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독특한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된다. 그 때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와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심을 것을 알게 된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또한 인간을 포함한 만물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소외되었음을 알게 된다.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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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7) (민12:3, 마5:5, 11:29)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7) (민12:3, 마5:5, 11:29) 자기 입에 있는 자신의 혀도 씹을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으니 의견도 다양하고 의견이 다양한 만큼 주장도 다를 수 있습니다. 주장이 다르고 의견이 충돌하다 보면 분쟁도 생기고 간혹 언성도 높아집니다. 이럴 때는 너무 상대를 몰아붙이지 마십시다. 나와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십시다.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더 좋은 방안을 찾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하십시다. 그리고 뜻이 모아지도록 노력하고, 뜻이 모아지면 함께 하십시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우리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데 딴짓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이 눈 앞에서 펼쳐지는데도 자기 기준, 자기 생각, 자기의 입장을 따라 원망 불평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교회를 건축하는 것은 성도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집을 짓는 일입니다. 크게 짓고 싶은 사람, 작게 짓고 싶은 사람, 높게 짓고 싶은 사람, 낮게 짓고 싶은 사람, 동그랗게 짓고 싶은 사람, 네모로 짓고 싶은 사람, 수많은 방법은 있습니다. 그것 하나 하나가 다 교회를 위하는 일이고, 소중한 생각들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를 건축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방법들 때문에 교회 건축이 중단되고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면서 이런 결과를 도출해서 안 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와 기적 같은 능력을 확신하며 온 성도가 마음과 뜻을 모아 기도하고 헌신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있는데 교회 건축과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를 긁어 원망의 입을 모은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실 수 없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일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토론하고, 논쟁하고, 의논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결정에 따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와 능력이 분명하게 나타날 때는 그 앞에서 다른 생각, 다른 마음, 다른 말조차도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반역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도, 다른 마음, 다른 말을 하다가도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면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순종해야 합니다. 코로나19를 지나고, 교회를 건축하는 동안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와 사랑, 능력이 우리 고신교회와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 어린아이들조차 코로나19 가운데서도 예배드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감사 제목이 줄을 이었습니다. 교회를 이전하고 건축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코로나19 가운데서도 예배드렸던 우리들을 향하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 기적이라고, 모든 성도들이 고백하고 감사했습니다. 코로나19 가운데서 예배드렸던 일, 일사천리로 교회를 매각 이전 건축한 모든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요, 기적이라는 사실을 우리 고신교회 성도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우리 교회의 소식을 들은 다른 교회, 다른 성도들이 더 놀라고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강력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는데, 10가지 기적 같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한쪽 구석에서 이스라엘이 나아가는 출애굽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로, 자기 자신의 생각과 기분과 감정에 따라 원망과 불평의 소리를 낸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냥 넘어가 주실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잘 몰라도, 사람들이 들을 때는 타당성이 있어 보여 미혹에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말을, 그 원망과 불평의 말을” 분명히 들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이 나타나고 온 회중이 그 역사를 체험하고 찬송하는데 한쪽 귀퉁이에서 출애굽과 전혀 상관없는 문제로 원망의 싹을 내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문둥이로 만들어, 진영으로부터 격리시켜버리실 정도로 하나님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무서운 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코로나19를 지나면서 예배드렸던 일에 원망한 성도가 있으면 회개하십시오. 기적과 같은 은혜로 교회를 건축하는 중에 원망한 성도가 있으면 회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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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존재의 본성으로서의 신앙
우리 모두는 분주한 인생사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기에 특별한 사건이나 환경에 접하지 않으면 삶의 의미나 죽음, 내세의 존재 여부 등 보다 더 깊고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깊은 성찰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종 인생의 어떤 위기 지점이나 단계에서 우리는 궁극적인 관심사를 생각하고 평가하게 된다. 예를 들면, 어린 시절과 성인 사이의 중간기인 청소년기에 들어서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할 때, 대학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집을 떠나 자신과 매우 다른 신념을 가진 또래 집단의 사람들을 알게 될 때, 중년에 이르러 우리가 젊었을 때 가졌던 생각했던 대로 내 힘으로 세상을 뒤집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친구나 사랑하는 가족이 세상을 떠날 때, 심각한 병에 걸릴 때, 사랑의 실패를 경험할 때, 심지어는 웅장한 대 자연의 위엄 앞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극히 작게 느껴질 때에도 우리 모두는 과연 나라는 인간 존재가 과연 무엇인지,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와 같은 문제를 성찰해 보게 된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궁극적인 관심사를 고려한다고 해서 곧 바로 자신의 삶에 어떤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결단을 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진솔한 해답을 얻는 두려움 때문에 궁극적인 관심사에 대한 질문을 더 이상 제기하는 것이 너무 불안해서 이 문제를 더 이상 오랫동안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결코 이와 같은 질문을 하고 해답을 모색해야 하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삶의 궁극적인 질문에 직면하고자 하는 용기의 실패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와 문화에 내재된 답, 즉 현재의 나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가치관을 조금의 성찰도 없이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물질적 번영, 직업, 명예 등에 만족하는 삶을 지속적으로 영위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삶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은 결국 신앙의 문제이며, 이 신앙의 문제는 삶의 다른 차원으로 축소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프로이트는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제기하고 받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 자체가 감정 이상의 인간 본성의 차원임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신앙을 감정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을 지적인 차원으로만 이해해서도 안 된다. 신앙을 특정 교리에 대한 믿음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사랑하다’와 같은 어원을 가진 ‘믿는다’는 단어는 본래 어디에 나의 ‘마음을 두다’는 뜻이다. 이 의미는 궁극적인 관심사로서의 신앙에 실제로 더 가깝다. 그런데 이 단어의 의미가 지금은 근본적으로 바뀌어져 버렸다. 지금은 신앙을 지적인 표현으로 보는 경향성이 있다. 내가 지금 이론적으로 ‘궁극적인 관심사’에 대해서 성찰한다면, 나는 나의 신앙을 종이에 적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나의 신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단순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며, 이것은 신앙의 핵심이 아니다. 그런데, 믿음을 감정이나 신념으로 축소될 수 없다는 사실이 지식과 엄격하게 구별해야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과학적 지식을 포함한 모든 지식은 사실상 믿음에 기초하고 있으며, 믿음 자체도 지식의 한 형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믿음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1:7)이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고 성경은 가르친다. 믿음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믿음의 반대가 의심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의심은 사실 믿음의 중요한 부분이다. 의심 없이 우리는 믿음 안에서 자라날 수가 없다. 믿음의 반대는 ‘허무주의’다. 믿음의 반대는 삶의 큰 질문에 대한 답을 전혀 찾을 수 없는 전적인 무능이다. 허무주의적 삶은 방향과 목적이 없고, 정체성도 없고, 확실성도 없는 완전히 무의미한 삶이다. 허무주의는 ‘살아있는 죽음’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불가피하게 신앙을 가질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는 궁극적인 관심사를 가지고 있고, 삶의 위대한 의미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신앙은 호흡, 감정, 사고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기에 ‘당신은 신앙을 갖고 있고,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이 무엇 또는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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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6) (민12:3, 마5:5, 11:29)
모세를 살리는 일에 직접 앞장을 섰던 미리암입니다. 항상 모세 곁에서 모세의 그림자와 같은 삶을 살았던 미리암입니다. 모세가 비우고 간 40년의 세월을 선지자가 되어 메꾸었던 미리암이었습니다. 미리암이 대신했던 40년의 세월은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어렵고 힘든 세월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미리암이 출애굽을 하고 약속의 땅으로 가는 시작의 장면에서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그렇다면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이 일어나고 있을 때 미리암은 무엇을 했을까요? 미리암의 비방은 순간 충동으로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제법 긴 시간 모세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결과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미리암의 마음에서 원망과 불만이 싹트고 있을 때가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가 10가지 재앙으로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바로 왕도, 애굽 사람들도 살아계신 하나님과 능력을 인정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어쩌면 그 일을 가장 학수고대했던 사람이 미리암입니다. 40년 동안 여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며 모세가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사람이 미리암입니다. 그런데 정작 모세가 돌아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며 출애굽의 역사를 주도하자 미리암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사명을 망각하게 됩니다. 사명에 대한 경계선 이탈입니다. 사명의 대한 월권입니다. 사명에 대한 경계선을 이탈과 월권은 곧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연결됩니다. 성령님께서 강림하여 세워진 완전한 이스라엘, 신약의 이스라엘인 교회의 역사에서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시작의 장면에서 동일한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일어났던 10가지 재앙과 비교할 수 없는 성령 하나님께서 직접 강림하셔서 위대한 일들을 친히 이루시는 현장이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에 감화 감동했던 성도들은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역사가 펼쳐지는 반면, 한쪽 구석에서는 원망과 불평의 싹을 틔우고 있었습니다. (행6:1)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삼위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와 은혜가 넘쳐나 완전한 출애굽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 다른 한 편에서는 원망과 불평의 불신앙이 쓴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희생하고 헌신하고 도움을 주는 쪽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도움을 받고, 혜택을 보고 있는 쪽에서 말입니다. 일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잘 아는 선지자 미리암이 말입니다.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인생이라지만 너무도 많은 상황과 일들이 발생합니다. 그렇다 보니 일상생활에서 연약한 우리는 원망, 불평, 비방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고집을 피우고, 억지를 부릴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세를 비방한 미리암의 사건이 심각했던 이유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데도 자기 자신이라는 감옥에 갇혀 원망과 불평을 가슴 속에 키워왔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으로 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지도하는 모세는 단순히 모세의 방법, 모세의 통치가 아닙니다. 모세를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러니 미리암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방법에 대해 비방하며, 정면 도전했던 것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미리암의 비방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10가지 재앙이라는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는 바로 그때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용납하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장막을 떠나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미리암에게 문둥병이라는 심판, 진영으로부터 격리되는 심판을 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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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2) (민12:11-16)
- 미리암은 위대한 믿음의 여인이 맞습니다. 하지만 여선지자라는 위대한 칭호를 받은 후 신앙이 제자리걸음을 했습니다. 미리암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역사에 발맞추지 못하고 여전히 애굽에서의 사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모세가 없는 40년 동안 여자로서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진짜 지도자인 줄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진짜 지도자인 모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교만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40년 만에 나타난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기절초풍할 일들을 일으킵니다. 세계 최강의 애굽과 바로도 모세 앞에 쩔쩔맵니다. 애굽을 초토화 시켜버렸고, 애굽의 장자를 죽여 씨를 말려버렸습니다. 여호와의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임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만 대면하시고 바다까지 갈라 마른 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미리암은 40년 동안 여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을 영도해 왔지만 40년 만에 갑자기 등장한 모세의 위용 앞에서 입도 벙긋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선지자의 위치에서 볼 때 비록 인간적으로는 누나요 동생이지만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적 권위를 지닌 모세였기에 고개 들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교회들끼리, 특히 목회자들끼리 묘한 질투심과 경쟁심이 있습니다. 곁의 교회가, 다른 교회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갖습니다. 잘못되면 입은 안타깝다고 하면서 속은 이유 없이 고소하고 상대적인 만족을 얻습니다. 교회의 주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망각한 무서운 죄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이 교인들 사이에서도 발생합니다. 곁의 성도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잘못되면 입은 위로하는 것 같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자신의 신앙과 믿음이 좋은 것으로 위로받고 착각합니다. 아주 나쁜 모습입니다. 악한 모습입니다. 교만의 극치입니다. 어쩌면 이것보다 더한 것이 목회자들끼리의 보이지 않는 견제와 경쟁입니다. 주변의 교회가 갑자기 성장하면 상대적 박탈감을 가집니다. 사람이다 보니 비교가 안 될 수 없습니다. 특히 가까운 교회에서 독보적인 성장을 보이면 심각한 스트레스까지 받습니다. 목사 자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의 중직자들이나 성도들도 자연스럽게 목회자에게 압박을 가합니다. 자신은 1년이 가도 전도 한 명 하지 않으면서 교회 부흥을 입에 올립니다. 십일조나 감사헌금은 고사하고 선교나 불우이웃이나 개척교회, 농어촌교회, 은퇴하신 목사님, 가난한 신학생들을 위해 특별헌금 한 푼도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재정을 입에 올립니다. 더 심각한 것은 설교자들의 교만입니다. 설교하는 사람이다 보니 설교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설교자의 훌륭한 설교에 은혜받기는커녕 허점과 잘못을 찾기에 바쁩니다. 그러니 설교에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현상은 모세를 대적하는 미리암의 아류들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땀방울 하나, 눈불 방울 하나 다 주의 것입니다. 우리는 비교 대상도 아니요, 경쟁상대도 압니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며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자들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특히 목회자들은 아바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평생 잊어선 안 됩니다. 물론 아바타라 하지만 예수님의 아바타니 영광스럽습니다. 진짜 선지자, 진짜 목회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미리암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사실 미리암은 누구보다도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몰라서 범한 죄도 무섭지만, 알고도 범하는 죄는 더 무섭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단순히 그 사람의 성향이나 기질을 나타내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모세의 통치를 방해했고, 이스라엘의 진행을 가로막았습니다. 감히 모세의 영적 권위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감히 같은 선지자였지만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교만은 이 모든 영적 권위 앞에서도 원망과 비방의 고개를 들게 합니다. 호시탐탐 모세의 허점과 실수를 염탐합니다. 교회도 은혜를 계산하는 성도가 있고, 실수와 잘못을 찾아내는 성도가 있습니다. 기회가 왔습니다. 구스 여자가 돌아왔습니다. 이전에 이미 정리된 문제인데도 교만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영적분력을 상실했습니다. 미리암은 십보라가 돌아오자 속에 숨겨놓았던 원망과 불평을 표출합니다. 원망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사실까지 망각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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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2) (민1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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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1)
- 성경 어디에도 미디안의 제사장 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는데 문제 삼은 장면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실에 대해 그 어디에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하는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사건 때문에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백성들이 구스 여인 십보라를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통치에 십보라를 문제 삼지 못하도록 아예 입도 벙긋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버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명을 주셨고, 그 사명 감당하기 위해 애굽으로 오는 길에 느닷없이 모세를 죽이시려고 한 것은 구스 여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임이 분명합니다. 분명한 이유는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것에 있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 같은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발견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려 하셨습니다. 완전한 모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이셨습니다. 완전히 죽이셨습니다. 그래도 십보라는 할례언약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긴박한 순간에 할례를 행하면 남편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과 비교도 되지 않는 신분입니다. 단순히 액면가로 볼 때 우리는 시아버지와 관계한 여인입니다. (마1:3)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우리는 우상의 신전에서 몸을 팔던 기생이었습니다. 우리는 과부요,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남편을 사지로 몰고 왕과 간음한 유부녀였습니다. (마1:5-6)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인데 죄인인 줄도 모르는 죄인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답도 없으면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제 딴에 잘 사는 줄 알지만 무익한 인생이요, 단 하나도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혀에는 속임만 있습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입에는 저주와 악독만 가득합니다. (롬3:10-14)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런 우리가, 그런 우리의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도 달렸고, 예수님의 부활에 나도 부활했다고 고백합니다. 사탄이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의를 제기하고 문제 삼을 것이 수두룩한 우리입니다. 아니 우리는 문제 그 자체들입니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합니다. 십보라가 할례 언약을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십보라가 할례를 행하여 남편을 살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불가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입으로 시인합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보라가 할례언약을 아는 것과 할례를 행하는 것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서십니다. (마10: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눅12: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합니다. 문제 제기도 못합니다. 입도 벙긋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의 예배 자리에, 예수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앉혀주십니다. (계12:22-23)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이런 은혜를 받은 성도입니다. 그래도 원망하고 비방하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완전한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할례를 시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에 거하며, 주일마다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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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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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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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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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
- 모든 사람은 의식적이든지 무의식적이든지 간에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관(worldview)을 가지고 있다.세계관은 개인이 소유하지만 공동체적으로 공유하기도 한다.우리는 세계관의 틀(framework)을 통해서 사물을 바라보고 행동한다.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세계관은 삶의 양식으로 표출되는데 이것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그러므로 한 개인과 공동체가 어떤 세계관을 소유하고 공유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삶의 양태가 나타나고, 한 사회의 문화와 제도도 생성하고 발전하며 쇠퇴하기도 한다. 인간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의 역할은 역사를 통해서 확연히 볼 수 있다.이것은 근대 문화 형성의 근간이 되는 로마의 역사와 문화에서는 잘 나타나고 있다.기독교 세계관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일찍이 로마제국의 콘스탄틴 시대부터 노예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법률이 통과되었다. 영아 살해의 관습 역시 십자가형과더불어,보다 더 극적으로는 낙태와 함께 금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검투사 시합도 종말을 고했는데, 그 이유는 텔레마코스(Telemachus)라는 용감한 수도승이검투 경기에서 일어나는 잔인한 살인을 막으려고 경기장 바닥으로 내려갔고,그 과정에서 스스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로마 사회의 변화는 비록 점진적이긴 했지만 로마 제국 전역에서 인간 생명의 가치가 점점 더 인식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로마 제국 자체는 결국 곤경에 처해 있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을 지배했떤 세속적이며 인본주의적인 세계관으로 말미암아 로마 사회는 너무 오랜 세기 동안 쾌락과 반 출생주의적인 비성경적 삶의 양태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물론,이와 같은 저 출산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소위 그들이 야만인이고 불렀던 비게르만족들을 향한 이민문호를 폭넓게 개방하기는 했지만 이민에 대한 높은 의존도가 로마 사회의 인구 격차를 메우기에 역부족이었다.여기에 행정적, 군사적 실수가 결합되어 이주하는 인근의 다른 부족들에게도 제국의 국경을 활짝 열어 놓게 되었다.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부 지역에서 로마의 권위는 자신의 무능함과 게르만 부족의 공격으로 붕괴되었다. 로마, 게르만, 그리고 기독교 전통의 궁극적인 융합은 비록 완만한 전환의 과정이긴 했지만 중세 유럽에 새로운 문화와 세계관의 출현을 가져왔다. 우리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의 역할에 대해서 한 가지 예를 더 살펴 보기로 하자.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삶을 영위하기를 소망한다.그런데 영적인 삶의 영위에 향한 우리의 소망과 삶의 양태 역시 영적인 삶에 대한 관점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다.예를 들어,인간의 정신은 고상하고 거룩하고 선한 반면에 육체는 저급하고 속되고 악하다고 보는 이원론적 인간관을 견지하게 되면 육체적 고행이 하나님과 더 연합하는 삶이라고 보게 되고,따라서 우리가 신앙적이고 영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한 육체적인 본능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역사적으로 보면,결국 이러한 종류의 인간관에 기초한 금욕적 실천은 사람들이 '생활의 법칙'에 따라 공동체로 살아가는 수도원주의(monasticism)로 발전했다. 수도원은 일반적으로 독신 생활과 엄격한 생활 방식을 요구했다.수도승과 수녀는 체계적인 기도, 연구, 그리고 생산적인 노동의 삶을 영위하였다. 수도승과 수녀들에게는 관상기도의 기초로서 연구 활동이 특별히 중요했다. 이미 5세기 초에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라는 로마 원로원 의원은 자신이 비바리움(Vivarium)에 설립한 수도원에서 기독교와 이교 사상가들에 대한 텍스트 복사와 연구를 수도원 생활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삼았다. 카시오도로스와 그의동료들은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이며, 그 연구는 영적 발전의 길이라고 믿었다. 모든 초기 수도원들이 카시오도루스의 관점을 따른 것은 아니지만, 몇 세기 안에 그의 사상과 독서 목록은 수도원 영성의 중추를 제공하게 되었다. 수도승들은 기도나 연구와 같은 보다 분명한 “영적인 활동”들과 함께, 생산적인 노동에도 참여해야 했다. 로마 사회의 세계관 노동을 비하하고 노예들에게 노동을 강요했을지 모르지만 수도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비록 부분적으로는 겸비의 덕을 장려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수도승이 일해야 한다는 생각은 주로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성경적 사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그분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도 역시 일해야 한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었다. 창세기에서 아담은 죄를 짓기 전에 동산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그러므로 일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행하도록 만들어진 한 부분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은 삶의 목적에 대한 현저하게 다른 견해로 이어지게 되었다. 세계관 변화의 이러한 특별한 요인은나중 서구의 경제적 성공과 활력의 토대를 놓았다. 저출산,도덕성의 일탈,경제 문제,환경 파괴,정치 불신과 혐오 현상,남북간의 긴장 등 이 모든 문제들의 근본 뿌리는 왜곡된 세계관이다. 2024년도 새해를 맞았다.올 한 해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의 양식과 문화를 형성하는 올바른 세계관의 정립 운동이 범 국민 운동으로 펼쳐지기를 소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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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삶의 양식과 문화를 바꾸는 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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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요즘 언론을 통해 중국의 시진핑과 러시아의 푸틴, 그리고 북한의 김정은과 같은 독재자 한 사람의 잘못된 가치관과 이로 인한 횡포로 인해 그들 자국 인민들이 겪는 불행과 고통은 물론, 예측할 수 없이 소용돌이치는 국제 정세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 번씩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를 떠 올리게 된다. 시진핑, 푸틴, 김정은과 같은 악랄한 독재자 대신 기독교 신앙에 좀 우호적인 지도자가 등장하면 자국민들도 좀 더 행복할 것이고 세계 질서도 달라질 것인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앞으로 한 두 번 정도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 황제에 대해서 잠시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주후 313년에 밀라노 칙령(the Edict of Milan)을 발표하면서 로마 제국 내에서는 기독교의 상황과 법적 지위가 획기적으로 바뀌어졌다. 일 년 전, 밀비안 다리 전투(the Battle of the Milvian Bridge) 직전에 콘스탄티누스는 하나님으로부터 환상을 보았는데 예수께서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그가 해야 할 일을 설명하셨다고 주장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병사들에게 방패에 기독교 상징을 그리게 했고, 적의 우세한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을 때 이를 하나님의 표징으로 받아들여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 후 곧 바로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만드는 밀라노 칙령이 공포되었다. 이 칙령은 이교(paganism)를 불법화하거나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공식” 종교로 만들지는 않았지만, 콘스탄틴의 개종으로 인해 확실히 기독교는 박해 받던 위치에서 선호 받는 종교가 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이 진짜였는지 아니면 정치적 계산의 산물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당시 기독교는 도시를 중심으로 고도의 조직성을 갖춘 성장하는 종교였다. 따라서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가 의지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제공할 수 있었다. 반면에,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인기가 없었으며, 추산에 따르면 로마 세계의 약 10~15%에 불과했다. 이는 결코 압도적인 숫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기독교인들은 313년 이전에도 군대에 복무했다는 증거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평화주의자였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포용함으로써 실질적인 정치적 이점이 있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황제로서 콘스탄티누스의 행동은 그의 개종에 대한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우선, 그는 아버지 하나님을 자신이 총애했던 “정복되지 않는 태양”(the Unconquered Sun)인 솔 인빅투스(Sol Invictus)와 구분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것은 태양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세상의 빛, 또는 의의 태양 등으로 예수를 묘사하는 기독교인들의 관습에 영향을 받아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또한 자신의 "개종" 후에도 거의 한 세기 동안 자신의 주화에 이교 신들을 계속 사용했으며, 나중에 교황이 차지한 로마 이교 대제사장의 칭호인 폰티펙스막시무스(Pontifex Maximus)라는 칭호도 유지하고 있었다. 기독교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우 일찍부터 개입했다. 첫 번째 도전은 도나투스파(Donatists)와 관련이 있는데, 이들은 박해 중에 굴복하고 배교했던 사제들은 박해 중에도 믿음을 지키며 신실하게 남아 있었던 주교의 승인과 용서를 받지 않는 한 진정한 사제들이 아니라고 믿었던 집단이다. 법정과 콘스탄틴은 이에 대응하여 폭동을 일으킨 도나투스파에 대해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무력으로 보복했다. 그는 탄압이 효과가 없다고 보고 그 후 도나투스파에 적대적인 법령을 철회했지만, 그의 행동은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강압의 선례를 남겼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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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의 합법화(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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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복음의 능력과 문화의 변혁
- 서기 303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별로 매력적이지 못하고 변방 종교였던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를 시작하였다. 이 박해는 처음에는 기독교도들의 예배 처소인 교회당을 파괴하고 기독교 서적을 불태우는 것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성직자들을 투옥하고, 고문하며, 때로는 잔혹하게 사형에 처하는 등 성직자들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평신도들에게도 이러한 공격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박해가 시작된 지 불과 10년 후인 313년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에서 이전처럼 범죄 집단으로 취급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독교는 오히려 로마 제국 안에서 다수의 종교가 되었고, 결국 로마를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후기 로마 제국의 세계관을 형성하여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과 삶의 방식을 변화시켰다. 복음의 능력이 사람들의 세계관을 변혁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를 이렇게도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으로 나타나도록 만든 것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당시 유대인들이 가졌던 성경적 세계관, 특별히 성경적 신관이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당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로마제국 내에서 독특한 신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과 로마에 있던 다른 인종 집단들이 견지하고 있었던 신관 사이의 명백한 차이점은 유대인들은 급진적인 일신론자라는 점이었다. 이들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라는 구약의 성경적 신앙을 확고하게 견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믿고 섬기며 경배하는 신이 유일신이냐 아니면 다신론이냐는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섬기는 신이 어떤 본성과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믿느냐는 문제였다. 모든 이방 종교는 신 또는 신들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신의 기원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시 유대교적 또는 성경적 신관은 이런 이방 종교의 신관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어떤 다른 것에서 기원한 존재가 아니라 단순히 영원부터 존재하셨고 지금도 계시고 영원히 계실 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스스로 존재하는”(I Am who I Am)유일하게 참된 하나님이시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신과 별개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자연계의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섭리자요 주권자다. 성경의 하나님은 “자연신”(nature god)이나 “자연의 힘과 관련된 신”(god associated with the forces of nature)이 아니라 오히려 만물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하나님께 응답해야 하는 창조주시다. 이와 같은 신관은 얼핏 신 플라톤적(Neoplatonic)인 신관과 흡사해 보이기도 한다. 피상적으로 보면, 성경의 하나님이 마치 존재의 위계를 형성하는 “단일자”(One)로부터 유출된 만물의 기원이며, 초월적 존재인 “하나” 곧 단일자(One)를 신이라고 보는 신 플라톤적 개념과 다소 비슷해 보일 수도 있다. 사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Philo of Alexandria)와 같은 일부 유대인 사상가들은 플라톤 철학의 렌즈를 통해 유대교를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적 신관과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신 개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신 플라톤주의자들의 신은 의지가 없는 비인격적인 신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인격적이시며 자발적인 행위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또한 신 플라톤적인 관점의 우주는 영원하다. “단일자”(One)라는 신이 존재하는 동안 우주도 존재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우주 만물은 비인격적인 신으로부터 유출된 것이 아니라, 역사의 특정한 시점에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말씀으로 지은 바 된 피조물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인격적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독특한 성경적 인간관을 형성해 준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시고 하나님 자신이 창조하신 모든 창조 세계를 보호하고 다스리며 감독하는 청지기적 사명을 주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 자신을 대신하여 에덴의 동산을 다스리는 사명을 인간에게 부여해 주셨다. 창조 질서에서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이와 같은 고유한 위치는 인간에게 특별하고 고귀한 가치를 부여해 주고 있다. 하나님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아 하나님의 섭정자인 인간을 공격하는 행위는 하나님 자신을 공격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로마 제국에 흩어져 살았던 유대인들은 당시 로마의 쾌락 문화 사회에서 공공연히 행해졌던 영아 살해 행위,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Tacitus)가 “불길하고 역겨운” 일이라고 묘사했던 영아 살해 행위를 단호하게 거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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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복음의 능력과 문화의 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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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이 같이 놀라운 창조와 구원
-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인간과 그로 인해 철저하게 오염된 창조 세계를 그대로 내 버려 두시지 않고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놀라운 일을 하셨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유일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타락한 인간과 만물을 구속하셨고, 자신과 화해시키는 일은 실로 엄청나고도 신비한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도 놀라는 고백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원하시고 그가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인도하셨으니, 우리는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다. 하나님은 그의 충만함이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흘린 그의 피로 화평을 이루심으로써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그를 통하여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셨다(골1:13-20). 우리 모두의 궁극적인 관심사가 제기하는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답은 창조(Creation), 타락(Fall),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Redemption through Jesus Christ)이라고 하는 우주적 드라마를 기록하고 있는 성경에 분명히 제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신실하게 살기를 소원하는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창조, 타락, 구속의 의미와 그 상호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의 왜곡되고 불완전한 삶은 많은 경우 성경이라는 드라마의 기본적인 틀을 잘못 이해하는데 많이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먼저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언제나 창조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구원을 창조의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고 단순히 죽음 이후에 누리는 어떤 복락으로만 생각하게 되면 그것은 구원에 대해서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전부가 아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은 하나님이시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를 통하여 만물이 만들어졌고 그가 없이는 만들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요1:1-3). 요한복음의 서두 구절은 창세기의 서두 구절에서 극적으로 이야기되는 창조 이야기를 다시 포착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창조한 동일한 말씀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너희의 구속주, 너희를 모태에서 지으신 이가 이르시되 나는 만물을 지으신 여호와요, 홀로 하늘을 펴신 이요, 나 홀로 땅을 펴신 이니라. 땅 끝까지 다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요,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사44: :24, 45:22)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우리를 만드신 분이시다. 성경은 창조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신약성경에서는 이 가르침을 재확인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삶에 대한 이원론적이며 분열된 견해에 너무 사로잡혀서 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너무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그 진정한 의미를 간과하고 있다. 그래서 구원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 세상을 건강과 새 생명으로 회복하는 관점보다는 세상에서 도피하는 관점에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함으로써 창조와 구원 사이의 관계에 쐐기를 박아버린다. 사도 바울 역시 구원을 창조 세계의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가르치고 있다. 창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창조물 자체도 썩어짐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로 인도될 것이다(롬8:19-21). 세상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고 따라서 구원받을 수 없는 곳이 아니다. 세상은 선하고 아름다운 곳이며 지금도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인간의 타락과 창조 세계의 본질을 분명히 분리해야 한다. 타락과 창조 세계를 동일시하거나 하나를 다른 것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본질적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창세 세계를 인정하지 않고 세상을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인식하게 되면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구원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되면 남아있는 유일한 선택은 세상을 가라앉는 배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는 이 세상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이 세상을 넘어선 피안의 세상만을 기대하는 종교로 전락한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구원을 창조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일부 현대 신학자들처럼 둘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창조, 또는 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삶 자체가 구원은 아니다. 구원을 오로지 ‘삶의 과정에 따라 흐르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게 되면, 끊임없는 변화와 성장을 구원의 핵심으로 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여정을 인도할 초월적인 창조주는 사라지고 피조물인 인간이 삶에 대한 자체 규칙과 신념을 만들고 변경해야 한다. 창조와 구원의 의미는 참으로 놀라고 신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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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이 같이 놀라운 창조와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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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엘리압(1) (삼상17:28-40)
- 본문 앞장에서 하나님의 명을 받은 사무엘은 다윗에게 왕의 기름을 붓습니다. (삼상16:12-13)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 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성경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예고라도 하듯이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아 여호와의 영, 성령으로 크게 감동되는 동시에 사울에게서 여호와의 영이 떠나가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하16:14)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한지라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쉽게 입에 올리고 실생활가운데서도 빗대어 표현할 정도로 너무도 잘 알려져 있는 내용압나다. 오늘 본문은 다윗과 골리앗이 싸움을 벌이 전에 발생한 일압나다. 그런데 의외로 그 장면을 성경은 매우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냥 쉽게 본문을 접하면 소위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이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는 기적과 같은 승리로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통해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단순히 세상살이에서 골리앗과 같은 상황을 기적과 같이 이기게 되는 복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 발견할 수 있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직전에 전개된 오늘 본문의 기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그 구원을 향한 성도들의 믿음과 오늘날 성도들의 일상생활, 신앙생활, 교회생활 가운데서 쉽게 발생할 수 있는 일들과 상황들을 발견하게 합니다. 먼저 성경은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는 일에 앞서 엘리압과 사울을 등장시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앞서 등장하는 엘리압과 사울의 반응은 극과 극으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엘리압은 말도 되지 않는다고 화를 냅니다. (삼상17:28)큰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그런데 엘리압의 말을 한 번만 더 들여다보면 철부지한 막내 동생의 어리석음을 꾸짖거나 동생이 무모한 싸움에서 목숨을 잃을 까봐 걱정을 해서 하는 말 같지는 않습니다.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뭔가 다윗에게 쌓인 것이 많은 투입니다. 엘리압은 동생 다윗에 대해 평소 생각보다 욱한 심정을 많이도 눌러 왔던 것 같아 보입니다. 사울의 반응은 엘리압과 정반대로 보입니다. 철부지한 어린 다윗을 타이르는 듯 해 보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떼를 쓰는 다윗에게 못 이긴 듯 최선을 다해 배려하는 듯합니다. (삼상17:37하반절-38)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이에 사울이 자기 군복을 다윗에게 입히고 놋 투구를 그의 머리에 씌우고 또 그에게 갑옷을 입히매 나라의 존망이 걸려 있는 상황입니다. 골리앗이라는 거대한 이방 장군 앞에 하나님 나라의 군대가 쩔쩔매고 있습니다. 아니 곧 패배하고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이 망할 상황입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십대 소년이 나타나 그 위급한 상황을 주도한다는 설정 자체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당나라 군대라고 해도 이런 상황은 전개될 수 없습니다. 더 가관인 것은 엘리압과 사울의 행동입니다. 얼핏보면 엘리압은 이치에 맞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동생 다윗의 목숨 때문에 화를 내는 것 같지 않습니다. 평소에 장남으로서 동생 다윗에게 자격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엘리압 자신이 전쟁을 구경하고 있으면서 동생 다윗에게 나라의 존패가 걸린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의 울분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사울은 왕으로서 많은 배려를 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군복과 놋 투구와 갑옷 까지 입혀주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은 전쟁이 일어나면 말을 타고 제일 앞장을 서는 사람입니다. 이런 장면은 훗날 다윗이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는데도 출전을 하지 않고 궁전에 머물다가 밧세바와의 사건이 터진 것을 발견하기에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엘리압과 사울의 행동이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똑같습니다. 엘리압은 하나님 나라가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고, 이 전쟁의 결과에 따라 자신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인데도 그 전쟁을 빌미로 숨겨두었던 자신의 감정을 다윗에게 불같은 화로, 진노로 표출하고 있습니다. 사울은 마치 다윗을 걱정하고 위하는 것처럼 하지만 결국 다윗을 사지로 내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인간적인 배려를 가면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왕의 사명을 자진해서 어린 소년 다윗에게 이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군대로 부름을 받은 성도들 중 특히 오늘날 목사와 장로, 집사와 권사, 중직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그리스도와 복음과 교회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철저히 자기자신의 감정을 우선시 합니다. 항상 자신이 교회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을 다하는 것처럼 떠들다가도 막상 위급한 상황이 발생한다거나 부담스운 부분을 담당해야 할 때는 대단한 아량과 선심을 베푸는 것처럼 위장하여 자신이 해야 마땅한 사명을 다른 사람에게 짐지우는 경우가 교회 안에서 허다이 발생합니다. 평소 교회 안에서 먼저된 자로서, 장자이면서 장자답지 못한 행동으로 동생에게 밀려나 말은 못하지만 분노를 쌓아오다가 어느 순간 교회의 위기, 교회에 문제가 닥치면 교회는 안중에도 없으면서 그것을 빌미로 분노와 악감정을 드러내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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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엘리압(1) (삼상17: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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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우리의 궁극적 관심과 소망
-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1:21-15) 성경은 우리의 신앙의 문제, 다시 말하면 우리가 누구를 섬기고 예배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조금의 타협도 허용하지 않는다. 인간의 필연적 본성인 신앙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선택권만 있을 뿐이다. 우리의 궁극적 관심사는 창조주 하나님, 곧 그분의 유일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해 주신 참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거나 아니면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모든 피조물을 섬김과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 우상 숭배적 행위뿐이다. 바울이 나열한 우상을 금수와 새, 파충류 등 버러지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울이 살았던 시대의 우상은 오늘 우리가 섬기는 우상과는 달랐지만 오늘 우리가 섬기는 우상도 바울 시대와 마찬가지로 살아 있고 건장하다. ‘예배’라는 단어의 본질적인 의미에 대해서도 우리는 잘 알아야 한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속적인 사회 문화의 분위기에서 우상 숭배에 대해 말하는 것은 아마도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자신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필연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이 믿음은 곧 예배의 행위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바울이 로마서 12장 1-2절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예배는 우리의 온 존재가 관여하는 행위다. 그것은 참된 신이신 하나님이나 아니면 온갖 종류의 거짓된 신을 섬기는 예배 행위에 의해서 형성되는 우리 삶의 모습이다. 우리가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과 예배의 대상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성경 말씀이 약속 하는 바 그대로 이 땅의 삶에서도 형통하고 충만한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궁극적인 관심과 예배의 대상을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피조물 중에서 선택한다면, 우리는 결국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이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뿐만 아니라 영적인 죽음이며, 하나님의 모든 축복에서 끊어지고 영원한 사망에 이르는 길이 있을 뿐이다(신30:16-19). 성경은 우리의 유일하고 참된 경배의 대상이며 소망이 되시는 참 되신 하나님께 믿음으로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는 것이 신성의 충만함이라고 가르치고 있다(고전1:19).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14:6).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태어나 나사렛에서 자라나고,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역사적 예수는 성령을 통해 오늘도 살아 계시고 활동하시고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우리 그리스도 모두의 궁극적 관심이요 소망이다. 우리가 공유하고 그 안에서 내주하고 있는 우리는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적 사실이 된다. 우리가 그분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릴 때, 우리가 탐구하고 있는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독특한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된다. 그 때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와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심을 것을 알게 된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1:16).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또한 인간을 포함한 만물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소외되었음을 알게 된다.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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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우리의 궁극적 관심과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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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7) (민12:3, 마5:5, 11:29)
-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7) (민12:3, 마5:5, 11:29) 자기 입에 있는 자신의 혀도 씹을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으니 의견도 다양하고 의견이 다양한 만큼 주장도 다를 수 있습니다. 주장이 다르고 의견이 충돌하다 보면 분쟁도 생기고 간혹 언성도 높아집니다. 이럴 때는 너무 상대를 몰아붙이지 마십시다. 나와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십시다.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더 좋은 방안을 찾기 위한 노력이라고 생각하십시다. 그리고 뜻이 모아지도록 노력하고, 뜻이 모아지면 함께 하십시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우리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데 딴짓을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이 눈 앞에서 펼쳐지는데도 자기 기준, 자기 생각, 자기의 입장을 따라 원망 불평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교회를 건축하는 것은 성도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집을 짓는 일입니다. 크게 짓고 싶은 사람, 작게 짓고 싶은 사람, 높게 짓고 싶은 사람, 낮게 짓고 싶은 사람, 동그랗게 짓고 싶은 사람, 네모로 짓고 싶은 사람, 수많은 방법은 있습니다. 그것 하나 하나가 다 교회를 위하는 일이고, 소중한 생각들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를 건축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방법들 때문에 교회 건축이 중단되고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면서 이런 결과를 도출해서 안 됩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와 기적 같은 능력을 확신하며 온 성도가 마음과 뜻을 모아 기도하고 헌신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있는데 교회 건축과는 전혀 상관없는 문제를 긁어 원망의 입을 모은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실 수 없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일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토론하고, 논쟁하고, 의논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결정에 따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와 능력이 분명하게 나타날 때는 그 앞에서 다른 생각, 다른 마음, 다른 말조차도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반역이 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도, 다른 마음, 다른 말을 하다가도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면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순종해야 합니다. 코로나19를 지나고, 교회를 건축하는 동안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와 사랑, 능력이 우리 고신교회와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 어린아이들조차 코로나19 가운데서도 예배드릴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감사 제목이 줄을 이었습니다. 교회를 이전하고 건축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코로나19 가운데서도 예배드렸던 우리들을 향하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 기적이라고, 모든 성도들이 고백하고 감사했습니다. 코로나19 가운데서 예배드렸던 일, 일사천리로 교회를 매각 이전 건축한 모든 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요, 기적이라는 사실을 우리 고신교회 성도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우리 교회의 소식을 들은 다른 교회, 다른 성도들이 더 놀라고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강력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는데, 10가지 기적 같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한쪽 구석에서 이스라엘이 나아가는 출애굽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로, 자기 자신의 생각과 기분과 감정에 따라 원망과 불평의 소리를 낸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냥 넘어가 주실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잘 몰라도, 사람들이 들을 때는 타당성이 있어 보여 미혹에 넘어갈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말을, 그 원망과 불평의 말을” 분명히 들으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이 나타나고 온 회중이 그 역사를 체험하고 찬송하는데 한쪽 귀퉁이에서 출애굽과 전혀 상관없는 문제로 원망의 싹을 내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문둥이로 만들어, 진영으로부터 격리시켜버리실 정도로 하나님의 통치에 불만을 품은 무서운 죄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코로나19를 지나면서 예배드렸던 일에 원망한 성도가 있으면 회개하십시오. 기적과 같은 은혜로 교회를 건축하는 중에 원망한 성도가 있으면 회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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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7) (민12:3, 마5:5,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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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존재의 본성으로서의 신앙
- 우리 모두는 분주한 인생사를 살아가고 있다. 그러기에 특별한 사건이나 환경에 접하지 않으면 삶의 의미나 죽음, 내세의 존재 여부 등 보다 더 깊고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깊은 성찰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종 인생의 어떤 위기 지점이나 단계에서 우리는 궁극적인 관심사를 생각하고 평가하게 된다. 예를 들면, 어린 시절과 성인 사이의 중간기인 청소년기에 들어서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할 때, 대학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집을 떠나 자신과 매우 다른 신념을 가진 또래 집단의 사람들을 알게 될 때, 중년에 이르러 우리가 젊었을 때 가졌던 생각했던 대로 내 힘으로 세상을 뒤집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친구나 사랑하는 가족이 세상을 떠날 때, 심각한 병에 걸릴 때, 사랑의 실패를 경험할 때, 심지어는 웅장한 대 자연의 위엄 앞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극히 작게 느껴질 때에도 우리 모두는 과연 나라는 인간 존재가 과연 무엇인지, 내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와 같은 문제를 성찰해 보게 된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궁극적인 관심사를 고려한다고 해서 곧 바로 자신의 삶에 어떤 극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결단을 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진솔한 해답을 얻는 두려움 때문에 궁극적인 관심사에 대한 질문을 더 이상 제기하는 것이 너무 불안해서 이 문제를 더 이상 오랫동안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결코 이와 같은 질문을 하고 해답을 모색해야 하는 책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삶의 궁극적인 질문에 직면하고자 하는 용기의 실패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와 문화에 내재된 답, 즉 현재의 나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가치관을 조금의 성찰도 없이 수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물질적 번영, 직업, 명예 등에 만족하는 삶을 지속적으로 영위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삶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성찰은 결국 신앙의 문제이며, 이 신앙의 문제는 삶의 다른 차원으로 축소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프로이트는 궁극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제기하고 받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 자체가 감정 이상의 인간 본성의 차원임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우리는 신앙을 감정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을 지적인 차원으로만 이해해서도 안 된다. 신앙을 특정 교리에 대한 믿음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사랑하다’와 같은 어원을 가진 ‘믿는다’는 단어는 본래 어디에 나의 ‘마음을 두다’는 뜻이다. 이 의미는 궁극적인 관심사로서의 신앙에 실제로 더 가깝다. 그런데 이 단어의 의미가 지금은 근본적으로 바뀌어져 버렸다. 지금은 신앙을 지적인 표현으로 보는 경향성이 있다. 내가 지금 이론적으로 ‘궁극적인 관심사’에 대해서 성찰한다면, 나는 나의 신앙을 종이에 적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나의 신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신앙은 단순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며, 이것은 신앙의 핵심이 아니다. 그런데, 믿음을 감정이나 신념으로 축소될 수 없다는 사실이 지식과 엄격하게 구별해야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과학적 지식을 포함한 모든 지식은 사실상 믿음에 기초하고 있으며, 믿음 자체도 지식의 한 형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믿음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1:7)이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고 성경은 가르친다. 믿음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믿음의 반대가 의심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의심은 사실 믿음의 중요한 부분이다. 의심 없이 우리는 믿음 안에서 자라날 수가 없다. 믿음의 반대는 ‘허무주의’다. 믿음의 반대는 삶의 큰 질문에 대한 답을 전혀 찾을 수 없는 전적인 무능이다. 허무주의적 삶은 방향과 목적이 없고, 정체성도 없고, 확실성도 없는 완전히 무의미한 삶이다. 허무주의는 ‘살아있는 죽음’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그리고 불가피하게 신앙을 가질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는 궁극적인 관심사를 가지고 있고, 삶의 위대한 의미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신앙은 호흡, 감정, 사고와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기에 ‘당신은 신앙을 갖고 있고,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이 무엇 또는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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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존재의 본성으로서의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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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6) (민12:3, 마5:5, 11:29)
- 모세를 살리는 일에 직접 앞장을 섰던 미리암입니다. 항상 모세 곁에서 모세의 그림자와 같은 삶을 살았던 미리암입니다. 모세가 비우고 간 40년의 세월을 선지자가 되어 메꾸었던 미리암이었습니다. 미리암이 대신했던 40년의 세월은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어렵고 힘든 세월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미리암이 출애굽을 하고 약속의 땅으로 가는 시작의 장면에서 모세를 비방했습니다. 그렇다면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이 일어나고 있을 때 미리암은 무엇을 했을까요? 미리암의 비방은 순간 충동으로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제법 긴 시간 모세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결과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미리암의 마음에서 원망과 불만이 싹트고 있을 때가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가 10가지 재앙으로 가장 많이 나타나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바로 왕도, 애굽 사람들도 살아계신 하나님과 능력을 인정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어쩌면 그 일을 가장 학수고대했던 사람이 미리암입니다. 40년 동안 여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며 모세가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던 사람이 미리암입니다. 그런데 정작 모세가 돌아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며 출애굽의 역사를 주도하자 미리암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신의 사명을 망각하게 됩니다. 사명에 대한 경계선 이탈입니다. 사명의 대한 월권입니다. 사명에 대한 경계선을 이탈과 월권은 곧 하나님에 대한 반역으로 연결됩니다. 성령님께서 강림하여 세워진 완전한 이스라엘, 신약의 이스라엘인 교회의 역사에서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시작의 장면에서 동일한 안타까움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 일어났던 10가지 재앙과 비교할 수 없는 성령 하나님께서 직접 강림하셔서 위대한 일들을 친히 이루시는 현장이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에 감화 감동했던 성도들은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역사가 펼쳐지는 반면, 한쪽 구석에서는 원망과 불평의 싹을 틔우고 있었습니다. (행6:1)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삼위 하나님의 강력한 역사와 은혜가 넘쳐나 완전한 출애굽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 다른 한 편에서는 원망과 불평의 불신앙이 쓴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희생하고 헌신하고 도움을 주는 쪽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도움을 받고, 혜택을 보고 있는 쪽에서 말입니다. 일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잘 아는 선지자 미리암이 말입니다. 100년도 안 되는 짧은 인생이라지만 너무도 많은 상황과 일들이 발생합니다. 그렇다 보니 일상생활에서 연약한 우리는 원망, 불평, 비방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고집을 피우고, 억지를 부릴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세를 비방한 미리암의 사건이 심각했던 이유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데도 자기 자신이라는 감옥에 갇혀 원망과 불평을 가슴 속에 키워왔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으로 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지도하는 모세는 단순히 모세의 방법, 모세의 통치가 아닙니다. 모세를 세우셔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그러니 미리암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방법에 대해 비방하며, 정면 도전했던 것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미리암의 비방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10가지 재앙이라는 놀라운 역사를 나타내는 바로 그때부터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용납하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장막을 떠나가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미리암에게 문둥병이라는 심판, 진영으로부터 격리되는 심판을 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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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6) (민12:3, 마5:5,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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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일상사, 세계관, 그리고 신앙의 문제
- 지난 호에서 문화 인류학자 마가렛트 미드(Margaret Mead)가 1959년에 제작한 영화에 나오는 인상 깊은 장면 즉, 일본과 캐나다의 아기 목욕 문화에 대해서 잠시 언급한 바 있다. 이 두 가정의 장면에서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가치관이 표현되어 아이들에게 전달된다. 영화에 나오는 일본 가정의 경우를 먼저 생각해 보자. 여기서는 의존성, 온화함, 자기 희생과 같은 가치관이 두드러지게 표출된다. 반면, 캐나다 가정의 경우는 독립성, 자기 주장 및 자신의 관심사와 유익과 같은 가치관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이러한 가치관들 뒤에는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종교적 신앙이 기초해 있음을 추적해 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불교, 신토주의, 그리고 유교적 신앙의 결합이 가족과 국가의 통합적 정체성에 대한 믿음을 생겨나게 한다. 개인은 집단의 충성된 구성원이 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다. 조화는 이타심과 유순함에서 생겨난다. 이기심, 독립심, 그리고 자기 주장과 같은 가치관은 이러한 공동체의 조화를 파괴한다고 믿는다. 캐나다에서는 계몽주의적 인본주의로 물들어진 기독교를 통해 하나님은 개인을 돌보시며, 인류의 본성과 운명은 자율적인 각자 개인의 성취에 달려 있으며, 개인의 자기 유익과 관심이 이와 같은 성취를 가능하게 하는 자연스러운 수단이라고 믿는다. 일본의 할머니와 캐나다의 어머니에게 왜 그들이 자신들의 특별한 방법으로 아기를 목욕시키는지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그들은 아마도 선뜩 이유를 대지 못할 것이다. 아기를 그런 방식으로 목욕시키는 것은 상식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들이 아기를 목욕시키는 방식이고 지금까지 항상 그렇게 해 오고 있는 방식이라고 말할 것이다. 가치관과 그 가치관 뒤에 숨어 있는 종교적 신념은 우리가 속해 있는 사회가 암묵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어떤 것이다. 이와 같은 가치와 신념은 수년에 걸쳐 우리가 언제나 초점을 맞추는 핵심적인 인식에서 벗어나서 삶의 한 방식으로 구현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가치와 신념은 당대뿐만 아니라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에 걸쳐 대대로 전승되고 이어진다. 마가렛트 미드의 영화는 또한 우리가 그 신앙을 완전히 인식하든 인식하지 않든지 간에 종교적 신앙이 우리가 자녀를 양육하는 방식을 포함하여 일상생활의 가장 일상적인 활동을 어떻게 강력하게 지시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종교적으로 영감을 받은 충성심, 의존성, 소속감이라는 동일한 충동은 현대 일본의 여러 회사에서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노동자와 경영진이 경쟁 권력 집단으로 서로 대립하지 않는다. 관리자들은 현대 서구 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방식으로 근로자들의 개인적, 사회적, 종교적 필요를 돌보아 준다. 실제로 회사는 기업이라기보다는 확대된 대가족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의존성, 충성심, 소속감이라는 종교적 영감을 받은 가치는 자신들의 관습에 맞게 옷과 헤어스타일을 신중하게 선택하여 함께 찍는 동양 문화의 가족사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가족 구성원들 각자가 자신의 개성과 독립성을 표현하기 위해 옷과 헤어스타일을 선택하는 서양 문화의 가족사진과 대조해 보는 것도 흥미 있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의 삶을 모든 면에서 아주 강력한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믿음이라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종교적 신앙이란 실제로 감정적 필요의 투영이라고 주장했다. 인간은 어린 아이일 때는 아버지가 곁에 있으면 안전하다고 느끼고, 아버지가 없으면 두려움을 느낀다. 그런데 아이가 커가면서 아이는 자신의 삶에 다가오는 불안과 두려움이 때로는 너무 커서 아버지조차도 도와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런 다음 아이는 강력한 대리 아버지 형상을 '하늘로' 투사한다. 이처럼 아버지도 도와줄 수 없을 정도의 불안과 두려움에 대처하려면 인간은 신이 존재한다는 환상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들은 믿음을 성육신이나 삼위일체, 인간의 타락,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과 같은 특정 교리에 대한 믿음이나 지적 동의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견해에 따르면 믿음은 과학적 지식과는 대조가 된다. 과학적 지식은 우리에게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을 제공한다고 생각된다. 반면에 신앙은 의지의 행위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종교적 교리는 과학적 증거에 개방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서 이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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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일상사, 세계관, 그리고 신앙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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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4) (민12:11-16)
- (민12:15)이에 미리암이 진영 밖에 이레 동안 갇혀 있었고 백성은 그를 다시 들어오게 하기까지 행진하지 아니하다가 미리암이 고침을 받는 동안 이스라엘의 진행이 멈추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세움 받은 자들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기록은 “미리암이 진영 밖에 이레 동안 갇혀 있었고”입니다. 진영 안에 갇힌다는 표현이 맞습니까? 진영 밖에 갇힌다는 표현이 맞습니까?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집을 떠나면 자유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혹 성도들 가운데서도 교회를 떠나면 자유라고 생각하시는 분 없습니까? 가끔 자녀들은 부모가 출타하면 자유하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교회가 감옥처럼 여겨지는 분은 없습니까? 주일 지키는 것을 감옥 가는 것으로 생각하시는 분은 없습니까? 교회가 세상 속에 갇힌 것이 아니라 세상이 감옥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주일은 6일 동안 세상에 갇혀 있다가 자유를 얻는 날입니다. 성도는 주의 날을 맞아 세상의 감옥에서 특별사면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맛집 찾는다고 정신들이 없는 것 같습니다. 수십 년, 평생을 교회 다니고 교회를 사랑한다면서도 자기 입맛에 안 맞으면 평생을 살아왔던 신앙생활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오늘날 성도들이라고 한다면 너무 과한 표현이겠습니까? 이러니 교회가 세상과 똑같아 져버렸습니다. 오늘날 교회 속에는 애굽 제국과 같은 세상 제국이 세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에 들어와서도 제각기 자기라는 바벨탑을 우뚝우뚝 세우고 있습니다. 자기만의 방법으로 하늘에 닿을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아니 자기만의 방법이 하늘에 닿은 유일한 길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다른 사람들을 현혹하며, 더 높이 바벨탑을 쌓자고 충동질합니다. 바벨탑에 갇히는 결과가 되지만, 더 무서운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임합니다. (창11:9)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말씀을 혼잡하게 하셨습니다.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설교가 들리지 않습니다. 온갖 혼잡한 소리들만 귀에 들립니다. 이 소리에 기우뚱, 저 소리에 기우뚱 좌우로 치우치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라는 바벨탑을 쌓는 교만한 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저주요 심판입니다. 미리암은 자기라는 감옥에 갇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까지도 망각해버렸습니다. 그런 미리암은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고, 진영 밖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혹시 진영 밖이 자유로운 분은 없습니까? 진영 밖에 갇혀 있는데도, 진영 밖으로 풀려난 것으로 착각하시는 분은 없습니까? 교회 오면 갇히는 것 같고, 세상으로 가면 자유로운 분은 없습니까? 집에 가면 갇히는 것 같고, 집 밖으로 나가면 자유로운 분은 없습니까? 부모님이 있으면 갇히는 것 같고, 부모님이 없으면 자유로운 분은 없습니까? 무서운 저주와 심판 가운데 있는 상태입니다. 불신앙의 바벨탑을 쌓은 결과입니다. 교만이라는 바벨탑을 쌓은 결과입니다. 모세가 미리암을 고쳐달라고 기도했던 주일은 교회로 와서 예배의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문둥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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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4) (민12: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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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믿음, 우리 모두의 궁극적 관심사
- 종교적 신화는 생명의 기원과 의미에 관한 이야기다. 종교적 신화는 삶에 대해서 우리 모두가 근본적으로 제기하는 ‘큰 질문’, 곧 세계관적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해 주려고 한다.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가? 잘못된 것을 치유해 줄 수 있는 해결책은 무엇인가?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와 같은 삶의 근원적인 질문과 해답이다. 예를 들어 황소 자그레우스(Zagreus)의 신화에 의하면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는 천상의 신들 사이의 우주적 전투의 결과로 이곳에 왔다고 말한다. 인간의 삶에서 잘못된 것은 근본적으로 악이 우리 인간 본성의 육체적 측면에 내재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철학자 플라톤이 나중에 철학적으로 정교한 것과 같이, 우리의 신성한 부분인 영혼이 신들과 함께 진정한 본향으로 돌아갈 때 곧 우리가 죽을 때까지 우리의 육체의 악한 본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함을 의미한다. 삶에 대한 세계관적 ‘큰 질문’들에 대한 답은 그 어떠한 언어 형태로도 적절하게 답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주로 이야기 형태로 구현된다. 과학적인 언어는 이와 같은 근본적인 질문들과 대답을 제공하기에는 확실히 부적절하다. 종교적 신화는 삶에 관한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과학적인 의미에서 진실 또는 거짓으로 검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세계의 본질을 다른 세계의 기원과 비교하기 위해 과학적 실험을 고안해 낼 수가 없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세계는 하나뿐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어떤 특정 신화에 매력을 느끼고 끌릴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우리의 궁극적 관심사인 믿음의 행위로 그것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지난호에서 생각해 본 바와 같이 삶에 대한 분열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가 믿음의 행위로 황소 자그레우스의 신화를 받아들인다는 의미인가? 그렇지 않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모두가 종교적 신화 이야기를 앞에 두고 앉아서 그것을 믿을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태어난 사회 속에서 우리가 성장하고 교육을 받는 등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을 통해 인생의 큰 질문에 대해서 종교적 신화가 제공하고 있는 해답을 흡수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주변의 공기로부터 이러한 대답을 들이마시며 성장하고 살아가고 있다. 개인으로서 우리는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세계관의 근본적인 신화에 대해서 의식적인 신앙 헌신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의식하던 못하던 간에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사회가 우리를 대신해서 그런 일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돌이 가라앉은 후에도 오랜 시간 동안 잔물결이 계속해서 물을 가로질러 움직인다.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종교적 신화의 파문은 신화가 잊혀진 후에도 오랫동안 인류 역사를 통해 계속해서 움직인다. 자그레우스 신화의 경우, 이제는 오랫동안 잊혀진 이 고대 신화가 수많은 세대에 걸쳐 사람들이 삶을 바라보는 분열된 방식을 계속해서 형성해 왔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삶에 대해 이러한 분열된 관점을 계속해서 견지하고 있는 한, 비록 이 믿음이 현재 암묵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유지되고 있더라도, 그것은 바로 우리가 그것을 묵인함으로써 실제로는 원래의 그 종교적인 근본 신화에 믿음을 두는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무의식적이며 암묵적으로 견지하는 믿음이 한 사회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리고 그에 따른 세계관이 어떻게 세대를 거쳐 전달되는지에 대한 놀라운 예는 인류학자 마가레 미드(Margaret Mead)가 1959년에 제작한 영화에서 잘 볼 수 있다. 이 영화는 인도, 프랑스, 일본, 그리고 캐나다의 네 가족들이 하루를 보내는 삶에 관한 이야기고 구성되어 있다. 영화의 한 부분은 아기의 목욕 시간에 관한 내용이다. 일본 가정에서는 어머니가 할머니에게 아기를 맡긴다. 큰 욕조에 앉아 있는 할머니는 아이를 가슴에 꼭 안고 물을 떠 올려준다. 나중에 아이는 가정의 모든 아이들이 함께 소유하고 공유하는 매우 섬세한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나중에는 자장가 소리를 들으며 가족 침실에 잠자리에 든다. 이와 대조적으로 캐나다에서는 엄마가 아이 스스로 욕조에 들어가게 한다. 엄마와 아이 사이에 목욕 수건을 사용하는 작은 줄다리기 게임이 진행되다가, 아기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체계적으로 문지른다. 그 다음에 아이는 자신의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자기 침실에서 잠자리에 든다. 이제 불이 꺼지고 방문이 닫힌다. 다음 호에서는 이와 같은 두 종류의 이야기가 어떻게 서로 다른 가치관을 전수하고 세계관을 형성하며, 궁극적 관심사인 믿음의 문제로 연결되는지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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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총장] 믿음, 우리 모두의 궁극적 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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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2) (민12:11-16)
- 미리암은 위대한 믿음의 여인이 맞습니다. 하지만 여선지자라는 위대한 칭호를 받은 후 신앙이 제자리걸음을 했습니다. 미리암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역사에 발맞추지 못하고 여전히 애굽에서의 사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모세가 없는 40년 동안 여자로서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진짜 지도자인 줄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진짜 지도자인 모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교만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40년 만에 나타난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기절초풍할 일들을 일으킵니다. 세계 최강의 애굽과 바로도 모세 앞에 쩔쩔맵니다. 애굽을 초토화 시켜버렸고, 애굽의 장자를 죽여 씨를 말려버렸습니다. 여호와의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임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만 대면하시고 바다까지 갈라 마른 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미리암은 40년 동안 여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을 영도해 왔지만 40년 만에 갑자기 등장한 모세의 위용 앞에서 입도 벙긋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선지자의 위치에서 볼 때 비록 인간적으로는 누나요 동생이지만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적 권위를 지닌 모세였기에 고개 들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교회들끼리, 특히 목회자들끼리 묘한 질투심과 경쟁심이 있습니다. 곁의 교회가, 다른 교회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갖습니다. 잘못되면 입은 안타깝다고 하면서 속은 이유 없이 고소하고 상대적인 만족을 얻습니다. 교회의 주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망각한 무서운 죄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이 교인들 사이에서도 발생합니다. 곁의 성도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잘못되면 입은 위로하는 것 같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자신의 신앙과 믿음이 좋은 것으로 위로받고 착각합니다. 아주 나쁜 모습입니다. 악한 모습입니다. 교만의 극치입니다. 어쩌면 이것보다 더한 것이 목회자들끼리의 보이지 않는 견제와 경쟁입니다. 주변의 교회가 갑자기 성장하면 상대적 박탈감을 가집니다. 사람이다 보니 비교가 안 될 수 없습니다. 특히 가까운 교회에서 독보적인 성장을 보이면 심각한 스트레스까지 받습니다. 목사 자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의 중직자들이나 성도들도 자연스럽게 목회자에게 압박을 가합니다. 자신은 1년이 가도 전도 한 명 하지 않으면서 교회 부흥을 입에 올립니다. 십일조나 감사헌금은 고사하고 선교나 불우이웃이나 개척교회, 농어촌교회, 은퇴하신 목사님, 가난한 신학생들을 위해 특별헌금 한 푼도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재정을 입에 올립니다. 더 심각한 것은 설교자들의 교만입니다. 설교하는 사람이다 보니 설교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설교자의 훌륭한 설교에 은혜받기는커녕 허점과 잘못을 찾기에 바쁩니다. 그러니 설교에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현상은 모세를 대적하는 미리암의 아류들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땀방울 하나, 눈불 방울 하나 다 주의 것입니다. 우리는 비교 대상도 아니요, 경쟁상대도 압니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며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자들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특히 목회자들은 아바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평생 잊어선 안 됩니다. 물론 아바타라 하지만 예수님의 아바타니 영광스럽습니다. 진짜 선지자, 진짜 목회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미리암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사실 미리암은 누구보다도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몰라서 범한 죄도 무섭지만, 알고도 범하는 죄는 더 무섭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단순히 그 사람의 성향이나 기질을 나타내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모세의 통치를 방해했고, 이스라엘의 진행을 가로막았습니다. 감히 모세의 영적 권위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감히 같은 선지자였지만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교만은 이 모든 영적 권위 앞에서도 원망과 비방의 고개를 들게 합니다. 호시탐탐 모세의 허점과 실수를 염탐합니다. 교회도 은혜를 계산하는 성도가 있고, 실수와 잘못을 찾아내는 성도가 있습니다. 기회가 왔습니다. 구스 여자가 돌아왔습니다. 이전에 이미 정리된 문제인데도 교만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영적분력을 상실했습니다. 미리암은 십보라가 돌아오자 속에 숨겨놓았던 원망과 불평을 표출합니다. 원망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사실까지 망각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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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2) (민12: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