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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원시 기독교 연합회 6.25 구국성회 설교문
    1. 코로나 펜데믹이 18개월 동안 계속되고 있고 아직도 끝이 안 보인다. 국가도 어렵고,기업도 어렵고, 국민들도 어렵고 교회도 어렵고 성도들의 어려움도 말이 아니다. 혹자는 6.25 전쟁 때보다 더 어렵고 힘든 것 같다고 한다(?) ① 그런데 이런 끔찍한 일이 왜 생기게 됐을까? 잠6: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셨는데 거기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 ㄱ.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믿음으로 깨어 있으라고 하셨다. 벧전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ㄴ.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와 교회안에 알곡을 고르시는 것이다. 마3: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을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② 코로나 펜데믹이 무엇 때문에 왔던지 우리는 하나님께 회개해야 산다. 눅13: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 ㄱ.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a. 교회와 성도가 “소금의 맛”을 잃어버려 세상의 소금이 못되고 사람들에게 버림 받고 땅에 떨어져 짓밟히게 됨을 회개하라 눅14:34~35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땅에도 거름에도 쓸데 없어 내어 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하시니라.아멘 b. 천국소망,부활소망을 잃어버리고 육신의 것,세상의 것만 위해 살고 있음을 회개해야 한다. 골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셨느니라.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떠한 죄를 범했어도 하나님 전에 나가서 진실하게 회개하면 들으시고 다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그 모든 고통에서 구해 주신다.필독(왕상8:37~40) 2. 그리고 우리나라는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시33:12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로 자기에 하나님으로 삼았다는 것은? ①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섬기는 것이다. ②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③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하나님께만 구하는 것이다. (1) 황송하게도 “대한민국”은 이 믿음 위에 세우주신 나라이다. ① 구한말 세계 열강속에 이 나라가 망해갈 때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이 들어왔다. 나라가 망하고 소망이 없을 때 0.8% 밖에 안되는 기독교는 이 나라를 살렸다. 3.1 운동, 상해임시정부 수립,독립운동,문맹퇴치,계급철폐,남녀차별철폐,미신타파,물산장려운동,농촌계몽,거룩운동(금연,축첩폐지,정직) ② 일제 치하에서 해방시켜 주신 후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만들어 주셨다. ㄱ. 1948.5.31. 제헌국회에서 198명의 의원 중 이윤영 의원(목사)이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고 시작하였다. ㄴ. 1948.7.27.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만들어 주셨다. ㄷ. 1948.8.15. 대한민국의 설립을 공포하였다. 1270년 몽골침략 이후 680년 만에 독립국가 된 것이다. ③ 그러나 유엔과 국제사회에서 독립국가로 인정받는 과정은 매우 힘들었지만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으로 축복해 주셨다. 1948.9.21.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유엔 총회에서 인준을 받으려고 장면,모윤숙,김활란,장기영,정일형을 파송함. 그러나 소련 대표의 집요한 반대 공작과 위성 국가들의 “필리버스터”로 유엔 총회가 폐회되기 전날까지 승인도 못 받고 분위기가 최악이었다. 그러자 장면 대표와 모윤숙이 새벽에 교회에 나가 눈물로 간절하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였는데 그 날 소련 대표가 발언을 하다가 목이 아파 밖으로 나가고 즉시 투표하여 찬성 48, 반대 6, 기권 1표로 대한민국이 한반도에 유일한 합법적인 국가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 이것이 2년 후 소련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 중 유엔이 참석 후 처음으로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결의하여 1950.7.7일 한국에 유엔군을 파견하게 된 것이다. ④ 이 기적도 6.25 발발 7일 후 7월 2일에 부산으로 피난 온 이승만 대통령이 모든교회와 성도들이 나라를 위해 비상기도를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초량교회와 모든 교회가 철야,새벽,금식 기도를 하고 시민들은 해운대 백사장에서 기도를 하였는데 7.7일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놀라운 축복을 주신 것이다.아멘! ⑤ 인천상륙작전도 금식기도의 응답이었다.(1950.9.15~19)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장로님이셨는데 세계 상륙사를 살펴보니 500번 상륙에 성공은 단 하나 ‘노르망디’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배 위에서 3일 동안 하나님께 금식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전쟁을 역전시킨 것이다.아멘! 이 외에도 이런 기적은 대한민국에 계속되었다. 1973년 빌리그래함 전도대회 때 ~ 남,북이 국가 경쟁력이 역전 됨 1974년 엑스플로74 ~ 땅굴 발견,안보를 튼튼하게 됨 1977년 민족복음화 대회 ~ 4,300만석(쌀) 100억불 수출 1980년 세계복음화 대회 ~ 88 올림픽을 유치하게 하심 1984년 한국기독교 100주년 ~ 대한민국이 중진국이 됨 1975~1985 10년 동안 기독교는 350% 성장 경제는 980% 성장함 이것은 세계 역사에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기적)이었다.아멘! 이 외에도 모든 것을 열거하려면 시간이 부족해서 그치려고 한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① 이 나라와 민족이 사는 길은 예수님을 구주로 잘 믿고 오직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나라가 살고 우리와 자손 만대가 사는 길이다. 그러므로 더욱 예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려고 힘쓰는 모두가 되자.아멘! ② 그리고 오늘도 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간절히 기도하고 교회에 돌아가서는 오늘과 같은 기도를 쉬지 않고 하도록 하자. ③ 그리고 빨리 이 나라가 복음화 되도록 예수님을 부지런히 전파하자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이 나라와 한국교회 그리고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에게 영원히 계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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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3
  • 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모든 대적을 멸하시는 하나님
    인생의 삶에 우리를 해하려고 하는 자, 원수, 대적자를 만나기도 합니다. 사단 마귀가 우리의 대적자입니다. 다윗의 삶에도 다윗을 해하려고 하는 대적자들이 많았습니다. 모든 대적을 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의 이름 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대상 17:8)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사단과의 영적전쟁입니다. 사단은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활동합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의롭게 살고 믿음으로 사는데도 원수, 대적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를 해하려고 하는 대적과 다투거나 싸우지 않아야 합니다. 서로 다투거나 싸우면 서로 망합니다. 대적 원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대적을 멸하여 다윗이 승리하게 해주셨습니다. 남을 해하려고 하고 대적하는 자의 삶은 악인의 삶이고 악인의 마지막은 멸망이요 심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남을 살리고 남에게 선을 행해야 합니다. 다윗의 대적을 하나님께서 다 처리해 주셨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대적, 사울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정리해 주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적에서 상을 베풀어 주셨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7-21) 우리의 삶에 원수가, 대적들이 있어 우리를 해하고 죽이려고 하지만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대적들을 처리해주시고 해결하여 주십니다. 의인은 일곱 번째 넘어져도 여덟 번째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십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8-10) 믿음으로 살고 의롭게 살려고 했던 요셉도 그의 삶에 대적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대적들을 해결해 주시고 요셉을 높이 세워주셨습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려는 대적들, 하나님께서 멸하여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기도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처리해 주십니다. 대적을 멸하여 주시고 존귀한 자로 세워주십니다. 이기게 해주십니다.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매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대상18:13) 양대식 목사(진주성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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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4
  • 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꾸지 아니하게 하시는 하나님
    돈을 빌려 주면서 사는 자가 있고, 돈을 빌려 달라고 하면서 사는 자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행을 통해 돈을 빌려 쓰면서 살아갑니다. 빚을 지면서 사는 것은 큰 부담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복 주셔서 서서히 은행 빚을 갚아가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으면 꾸어줄지라도 꾸지 아니하고 살아갑니다. 꾸지 아니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통치할지라도 너는 통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신15:6)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신28:12) 하나님께서 재물의 복을 주시면 가난한 자가 없어집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신15:4-5) 가난이 죄는 아니지만 축복은 아닙니다. 가난을 원하는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재물의 복을 주시면 빚지지 아니하고, 꾸지 아니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살다보면 빚지기도 합니다. 은행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빚을 다 갚고 꾸어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꾸어주고 나누어주고 사는 삶이 축복입니다. 꾸어주고 살지언정 꾸지 아니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꾸지 아니하고 살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반드시 복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꾸어주면서 살지언정 꾸지 아니하고 살 수 있는 은혜와 축복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꾸어주며 나누면서 살아갈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사람들에게 덕이 됩니다. 남에게 꾸어달라고 구걸하면서 살 때 전도문이 막히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 수 있게 됩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7-9) 하나님께 복을 받아야 합니다. 축복을 받으면 꾸지 아니하고, 꾸어주고 나누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복 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에게 다양한 복을 주십니다.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축복의 내용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복 주시는 하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칼럼의 완본은 gncnews.net 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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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9
  • 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늦은 비, 이른 비를 적당히 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막 지대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고, 물이 없어 죽기도 하고 고통을 겪게 됩니다. 비는 물이요, 생명처럼 귀합니다. 비, 많은 양의 물을 사람이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주셔야 합니다.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신11:14)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 들에 풀이 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신11:15)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 심판하실 때, 비를 내리지 아니하시기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이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신11:17) 지나친 가뭄도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비가 오랫동안 오지 않으면 농사도 망하고, 심각한 문제가 일어납니다. 비가 내릴 때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신다고 믿고 비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적당히 내리는 비가 축복의 비입니다. 비가 너무 적게 내려도 안 되고, 너무 많이 내려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적당한 비를 내려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시고, 은혜의 단비, 신령한 비도 내려주십니다. 성령의 단비도 내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자연을 사랑해서 살려주고, 풍요롭게 해 주시려고 비를 내려주십니다. 엘리야 선지자 때, 비가 오지 않아 하나님께 비를 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주셨습니다. 가뭄의 때에 비를 내려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약:17-18) 비가 와야 농사가 되고, 열매 맺고, 풍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비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전11:3)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신2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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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25
  • 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낮추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높이시기도 하시고 낮추시기도 하십니다. 낮추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시18:27) 하나님이 높여 주셔야 높아집니다. 하나님이 높여 주는 자는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겸손한 자를 때가 되면 높여주십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2:7) 하나님은 누구를 낮추실까요? 교만한 자를 낮추십니다. 교만은 죄성입니다.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했던 웃시야, 느부갓네살 왕, 사울 왕을 낮추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심판하십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교만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교만한 눈으로 사람들을 쳐다보지 않아야 합니다. 교만하면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가 깨집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높아지고자 하면 낮아지고 낮아지고자 하면 높아진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버리십니다.(사울왕) 겸손한 다윗을 왕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교만은 사단의 속성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순간마다 교만하지 않도록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교만한 태도로 남과 비교하면서 기도했던 바리새인의 기도를 주님은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기도를 기뻐하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겸손한 세리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겸손했던 세례요한을 예수님은 칭찬해 주시고 높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신다.” 낮추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낮추시면 누구도 막을 수 없고 하나님이 낮추시면 부끄럼 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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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24
  • 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상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해주십니다. 잘한 자를 칭찬해 주시고 상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상주시는 하나님은 격려, 칭찬, 응원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상급 신앙이 성경적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내게 갚으셨으니”(시18:20)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보상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칭찬해주시는 것도 상 받는 것입니다. 축복을 상급으로 주시기도 합니다. 명예, 지혜, 재물도 하나님이 주시는 상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상주신다고 가르쳐 줍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 다윗은 하나님께서 억울함, 고난 속에서 인내로 믿음 지키게 하시고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원수 갚는 최선의 길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많이 받는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제거해 주시고 나의 삶이 축복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상입니다. 다윗은 수많은 고난 있었지만 인생의 마지막이 더 잘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는 삶이었습니다. 늙도록 존귀하게 살았습니다. 노년의 축복,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상입니다. 바울은 상급에 대한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딤후4:7-8 ) 하나님께서 의의 면류관을 예비해 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끝까지 믿음 지킨 자에게 상 주십니다. 죽도록 충성한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 상을 주십니다. 충성된 자가 복된 자입니다. 하나님은 충성된 자에게 상주십니다. 양무리의 본이 되고 목양을 잘한 자에게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상을 준비하시고 상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전도 열심히 하여 많은 영혼을 구원한 자에게 상주십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잘 섬기는 자에게 상주십니다. 요셉은 섬김의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 높여주시고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상 주신 것입니다. 좋은 명예를 남기는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 자에게 세상에서도 축복받는 축복의 상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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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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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수 총장] 끝없이 고르기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는 인간을 자율적인 존재(autonomous being)로 규정하며, ‘자율성’을 가장 고귀한 가치로 숭상하고 있다. ‘자율’(autonomy)이라는 단어는 ‘auto’(자동/스스로)와 ‘nomus’(규범/법)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다. 인간이 자율적인 존재라는 말은 인간은 자기 스스로가 규범이 되고 법이 되는 존재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오늘 우리는 자신의 말이 법이고, 자신의 행동이 규범이라고 주장하는 사회를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권위를 제외한 모든 형태의 권위를 허물어뜨리고, 모든 반응은 단순히 선호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런 행위를 표현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로 포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권위의 지배를 받는 존재”에서 자신이 선호하는 것을 “끝없이 고르는 존재”가 되도록 인도해 가고 있다. 기독교 신앙에는 권위의 문제가 핵심이다. 창조주 되신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권위들이 머리를 숙여야 하는 절대지고의 권위이며 세상 모든 권위의 원천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속력을 갖고 있는 권위 있는 진리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읽던 성경에는 “가라사대”라는 표현이 있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예수님이 가라사대-”라는 말씀을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였다. 구약 레위기의 많은 교훈들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명하시되”라는 세 구절로 시작하며, 이 구절은 모든 사랑과 친근감의 어조를 띄지만 반박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위를 강조한다. 오스기니스(Os Guinness)가 말한바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권위 아래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초월적 위대하심 앞에서 그분의 권위와 말씀의 권위를 기꺼이 인정하고 신뢰하며 그런 삶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 창조된 존재가 아니며, 따라서 자아 충족적이지 않고 스스로가 자신에게 법이 되는 자율적인 존재가 아님을 기쁘게 인정한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권위에 대한 이와 같은 시각을 경직되고 낡은 고루한 생각으로 치부해 버린다. 현대성은 교묘하지만 체계적인 수많은 방법으로 이런 시각을 도무지 인정할 수 없는 잘못인 양 만들어 버린다. 심지어는 성경의 신적 권위를 지고의 권위로 고백하며 가르쳐야 할 신학교의 교수들 중에도 “아직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느냐? 아직도 성령의 존재를 믿느냐? 성령이 있으면 한번 가져와서 보여 보아라!”고 순박한 신학생의 신앙을 송두리째 망가뜨리고 있는 패역한 시대다. 신적 권위를 비롯하여 그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자율적인 개인의 선택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추구한다. 오늘 우리가 선택해야 할 수많은 것들이 있다면 내일은 훨씬 더 많아질 것이며, 이런 사회가 바로 인류 모두가 바라는 유토피아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수많은 선택 거리는 슈퍼마켓이나 쇼핑몰에 가면 확연히 드러난다.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끝없는 선택과 쉴 새 없는 변화가 확대되고 증가해 가는 선택의 부추김은 이제 소비 시장의 담장을 뛰어넘어 광범위한 영역으로 확산되었다. 고급 레스토랑의 뷔페식단에서부터 인생의 자립을 돕는 기법과 철학들에 이르기까지 우리 앞에는 끝없는 선택이 놓여있다. 코로나 시대에는 교회에 가서 대면예배를 드리며 설교를 듣지 않아도 집에서 안락한 소파에 편하게 앉아서 소위 유명 설교자들의 설교를 취향에 따라 골라가며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하나님도 소비자의 한 선택 품목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끝없이 고르기가 미덕이고 지혜가 되는 세상에서는 한 가지 선택을 고수하는 행위는 더 이상 지적 확신의 문제가 아니라 어리석고 소심하다는 증거다. 현대인의 자유는 선택의 옳고 그름이나 어리석고 우둔함에 관계없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선택이다. 진리, 선함, 권위는 선택이라는 핵심적 행위와 아무 상관이 없다. 주권적 선택자로서 당신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선택하고 또 선택할 수 있는 주권적 권리를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다. 다원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선택하고 결단하는 행위를 한다. 누군가는 이런 선택을 하고 또 누군가는 저런 선택을 한다. 우리는 모두 다르게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은 본질적으로 세상의 선택과는 다른 선택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선택은 주권적 선택자는 격상시키고 선택 내용은 가치절하해서 선택을 선호의 문제로 만들어 버리는 “끝없는 고르기식”의 선택이 아니다. 믿음의 걸음은 선택과 결단의 걸음이다. 그러나 결단의 행위로써 선택을 과도하게 강조하면 선택이라는 행위 자체가 전부가 된다. 그럴 경우, 믿음의 선택도 수많은 현대적 선택의 숙명처럼 구속력을 갖지 못하고 쉽게 바꾸어도 상관없는 상태로 쪼그라들 수 있다. 믿기로 선택한다는 이유로 믿음을 결단한 사람들은 반대 상황이 될 때 그만큼 쉽게 믿음을 저버릴 수 있다. 오늘날 “끝없는 고르기”식의 선택은 구속력이 없어 편리할 수 있지만 우리가 해야 하는 믿음의 선택은 다르다. 자신을 예수님께 바치는 것이므로 큰 대가를 각오해야 하는 언약적 선택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여기까지 왔고 더 이상 돌아갈 길이 없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원래 선택하는 백성(choosing people)이 아니라 선택된 백성(chosen people)이다. “끝없이 고르기”가 미덕이 되어가는 세상에서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우리를 골라 선택해 주신 그분의 대속적 선택을 생각하면서 무게 없는 우리의 경박한 선택 행위를 다시금 성찰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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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김성수 총장] 교회를 향한 새해의 기대
    세월은 정말 화살처럼 빨라 2022년을 시작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023년 새해를 맞았다. 비록 전도자의 가르침과 같이 하늘아래 새 것이 없고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진리를 세월과 더불어 실감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는 이렇게 한 해를 보내고 또 새로운 한 해를 맞을 때 마다 새로운 소망과 기대를 가지고 기도하면서 출발한다. 새해를 맞을 때 마다 우리 모두에게는 자신을 향한 기대와 다짐도 있고, 사랑하는 가족을 향한 기대와 다짐도 있을 것이다. 번번이 우리를 실망시키고 좌절감을 갖게 하지만 사회와 정부를 향한 기대와 소망도 있을 것이다. 2023년 새해를 맞으면서 나는 한국 교회를 향한 기대를 새롭게 가지면서 기도의 제목으로 삼고 싶은 강한 소망과 기대를 가져 본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한국 교회도 엄청난 어려움을 겪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의 성장과 저력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한때는 기독교 국가라고 말할 정도로 청교도 신앙 정신을 계승하고 교육과 문화, 심지어는 정치 영역에서도 기독교적 가치관을 반영해 오던 미국 사회는 안타깝게도 이제 더 이상 기독교적 가치관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세속화되어 버렸다. 구주 성탄을 축하하는 성탄의 계절에도 ‘Merry-Christmas’ 는 사라지고 ‘Happy Holiday’라는 단어가 대신하고 있다. 크리스마스 트리도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다. 외양만 보면 한국이 더 기독교 국가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을 처음 방문하는 외국인들 가운데는 도심지 곳곳에 세워져 있는 교회의 십자가를 보고 마냥 놀라워한다. 붉은 네온사인의 십자가 불빛은 한국이 마치 기독교 국가라는 착각을 갖게 할 정도다. 기독교 선교 2세기를 맞는 한국 교회는 그동안 급격한 양적 성장을 하였다. 이와 같은 양적 성장과 더불어 한국사회 초창기의 교회는 문맹 퇴치와 교육, 선진 과학 기술의 보급, 의료사업을 통한 사회 봉사, 여성의 인권 고양 등 사회를 계몽하고 인도하는 사회 봉사적 기능을 잘 수행하였다. 어두운 사회 구석을 밝히며, 차원 높은 윤리 의식을 고양하는 등 그야말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였다. 그러나 언제부터 인지 모르지만 교회가 더 이상 이러한 사회 선도적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자성의 소리들이 교회 안 밖으로부터 들려오고 있다. 교회가 사회를 향해 주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기껏해야 각종 모임으로 인한 교통 혼란과 소음, 교회 인근의 집 값 하락뿐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문제를 인식한 의식 있는 교회들은 노인대학 운영, 노숙자 보살피기, 소년소녀 가장 돕기와 같은 사회 봉사활동을 통해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 교회로 자리 매김 하려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새해에는 이런 의식 있는 교회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본다. 청소년들을 위한 건전한 문화 행사, 독서 교실, 주차장 개방, 결혼식장 제공 등을 통해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일에 앞장서는 교회가 많아져야 한다. 잘 운영되던 노인대학 프로그램을 없애 버리고 자기들만의 폐쇄적인 예배 공간을 만들어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는 교회는 지역사회를 향해 던져줄 선지자적 메시지를 선포하지 못한다. 이런 신앙공동체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람직한 신앙공동체의 모습이 아니다. 가난하고 소외 받는 자들의 이웃이 되는 교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교회의 바람직한 모습일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이 세계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세계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환경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식목일에 나무를 심고, 낙동강과 수영천을 살리는 일은 구청에서 관심을 갖기 전에 교회가 먼저 관심을 갖고 앞장서서 실천해야 한다. 환경을 가꾸고 보존하는 운동과,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 재활용을 위한 쓰레기 분리 수거 운동은 교인들이 솔선수범해야 할 일이다. 교회 건물을 좀더 환경 친화적인 건물로 아름답게 건축하는 일에도 이제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신들의 사례금에서 소득세를 자진 신고하여 세금을 납부하는 목회자들이 있다면 교회는 정말 사회를 인도하는 지도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신앙의 의미를 협의적 의미의 경건 생활 또는 교회 생활에만 제한시키지 않고 정치와 사회, 경제, 교육, 예술 등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구현해야 한다는 의식의 전환이 있다면 교회는 사회를 향해 고상한 두려움을 주는 독특한 신앙 공동체가 될 것이다. 이런 교회가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성장하는 교회가 될 것이다. 교회는 더 이상 지역 주민들의 관심과 유리된 채 지역 사회 속의 고립된 섬처럼 존재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들은 “세상 속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 삶”(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을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을 향해 문을 열어야 한다. 폐쇄적인 교회는 자기 집단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익 단체로 전락할 뿐이다. 2023년 새해 벽두에 한국교회가 성경적 세계관을 구성원들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구현하도록 인도하는 의식 있는 신앙 공도체로 성장해 갈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 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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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1-19
  • [김성수 총장] 평강의왕, 예수 그리스도
    오늘날 국내외 정세를 보면 우리 모두는 마음의 진정한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갈등과 긴장, 미움과 질투, 싸움과 전쟁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권력, 물질, 지식, 명예가 아니라 상처받은 마음을 다듬고 감싸주며, 우리의 존재 자체를 부요하게 해 주는 하늘의 평화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평화는 오직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 제공해 줄 수 있다. 그런데 이 분이 주시는 평화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인가? 단순히 긴장이 없고 전쟁이 없는 상태의 평화인가? 성경이 말하는 하늘의 평화는 무엇보다도 관계의 문제다. 평화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동료 인간과의 관계에서, 자연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에서 긴장과 갈등, 막힌 것이 없고 오직 ‘누림’(enjoy)이 넘쳐나는 삶이다. 성경이 말하는 평화 또는 평강은 단순히 긴장과 적대감,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평화는 관계 속에서의 ‘즐김’(enjoyment)이다. 한 국가는 주변 다른 국가와 평화로울 수는 있지만 그 속에서 가난으로 비참할 수 있다. 평화 속에 거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을 즐기는 것이며, 물리적 환경 속에 사는 것을 즐기는 것이며, 인간 동료와 함께 거하는 것을 즐기는 것이며, 자신과의 삶을 즐기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막힌 것이 없다고 해서 우리가 평안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이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삶이 평안을 누리는 삶이다. 예배, 기도, 말씀, 선한 행위가 단순히 의무가 아니라 즐거움으로 누릴 수 있을 때 하늘의 평강이 임하게 된다. 시편 기자의 표현과 같이 평화 안에는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며 사랑하는 삶이 평안을 누리는 삶이다. 평화는 또한 자연과의 올바르고 조화로운 관계와 물리적 환경 속에 거하는 기쁨을 포함한다. 평화는 우리가 노동으로 세계를 형성하고 그렇게 하는데서 성취감을 발견하고 그 결과에 기쁨을 발견할 때 찾아온다. 그래서 선지자는 평화의 날을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 백성들이 화평한 집과 안전한 거처와 종용히 쉬는 곳에 있을” 그 날(사32:18)에는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사25:6)라고 말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조화와 풍성한 이미지를 담은 평화-짐승들 사이의 조화, 인간과 짐승 사이의 조화(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에 대해 가장 잘 알려진 구절을 인용했다. 그런데 그 구절은 다음 구절에 의해 도입된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에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 하시리니-”(사 11:1-2). 이새의 줄기란 천사가 탄생을 축하하여 노래한 “그분”이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그는 스가랴가 말한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실”(눅1:79) 분이시다. 또 시므온이“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눅2:29)고 말한 분이시다. 베드로는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화평의 복음”(행10:36)을 이스라엘에게 전파하신 분이라고 했다.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에게 말하면서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신 분”(엡 2:17)이라고 말했다. 또 이사야가 “평강의 왕”(사 9:6)이라고 부른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평화는 이 세상 속에 일하는 하나님의 이유이며 우리 인간의 소명이다. 평화가 역사 속에 완전히 도래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 선물이지 인간이 성취해 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 이따금씩 찾아드는 평화도 또한 하나님의 선물의 차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사역하고,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은 바로 이 평화의 성취다. 우리는 팔짱을 끼고 주위에 둘러서서 평화가 오기만을 기다려서는 안된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이유를 위한 사역자, 즉 평화를 위한 사역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명은 우리의 사명이다.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우리의 사역은 인간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정의를 위한 헌신적 삶과, 세상을 지배하려는 계속적인 노력의 추구라는 두 가지 면을 가진다는 것이다. 평화가 더 가까이 다가오기를 원한다면 삶의 두 차원 모두가 함께 필요하다. 우리의 사명은 인류의 유익을 위해 세상을 정복하라는 문화적 명령과 함께 죄의 사슬에 결박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자유케 함과 누리게 해 주는 사역을 함께 신실하게 감당하는 것이다.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의 줄을 꺽는 것….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사 58:6-7)사역이다. 하늘의 평강을 누리게 하는 사역은 모든 그리스도의 궁극적 비전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에는 분열보다는 화합이, 긴장보다는 편안함이, 억압보다는 풀어줌의 삶이 나타나야 한다. 구주 성탄을 맞아 축하하며 기뻐하는 계절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이시다. 평강의 왕으로 오신 그분의 오심을 축하하면서 우리 모두 평강의 사역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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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27
  • [김성수 총장] 성탄의 계절에 ‘주는 사랑’을!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고 싶어 한다. 이 세상에 아름다운 말들이 많이 있지만 ‘사랑’(Love)이라는 말만큼 아름다운 말도 없을 것이다. 사랑은 결코 “눈물의 씨앗”이 아니다.그런데 우리는 사랑이 진정 무엇인지를 이해하거나 사랑을 실천하기 보다는 오히려 사랑에 관해서 말을 하기를 좋아한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또 어떤 사람과 더불어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을 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자기들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애국자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나라 사랑을 맹세하며 노래한다. 낭만적인 시인들도 사랑이 가득 찬 용어들을 구사하며 사랑을 노래한다. 이런 사랑들은 모두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랑이다. 그러나 이 모든 종류의 사랑은 결국 따지고 보면 두 가지 종류의 사랑으로 나뉘어 진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필요에 의한 사랑’(need-love)이고, 다른 하나는 ‘주는 사랑’(gift-love)이다. 필요에 의한 사랑은 우리가 어떤 것 또는 어떤 사람이 없이는 지낼 수가 없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사랑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나의 필요를 채워주고, 나를 안전하게 해주고, 나를 행복하게 해 준다고 느낄 때 그 사람을 필요로 하고 사랑한다. 필요에 의한 사랑의 대표적인 경우는 낭만적인 사랑이다. 두 사람이 서로 사랑에 빠져 있을 때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간 느끼는 낭만적인 사랑은 ‘필요에 의한 사랑’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러나 ‘주는 사랑’은 이와는 거의 정반대의 사랑이다. ‘주는 사랑’은 내가 아니라 상대방을 완전하게 해 주고,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 그 사람에게 가치 있는 어떤 것을 가져다주기를 원할 때 우리가 느끼는 종류의 사랑이다. 필요에 의한 사랑은 자기 자신의 필요에만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주는 사랑은 다른 사람의 필요에 관심을 갖는다. 필요에 의한 사랑은 충족되어도 결국 공허하며, 더 충족되기를 원하는 사랑이다. 그러나 주는 사랑은 넘쳐나는 사랑이며, 비어있다고 생각하는 다른 사람을 채워주기를 원하는 사랑이다. 필요에 의한 사랑은 받기를 원하는 사랑이다. 그러나 주는 사랑은 계속해서 주기를 원하며, 베풀기를 원하는 사랑이다. 필요에 의한 사랑은 다른 사람을 강렬하게 갈망하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가지고 자기를 꾸며주기를 바라는 사랑이다. 그러나 주는 사랑은 다른 사람을 돌보는 능력이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꾸며주기를 원하는 사랑이다. 건전한 인간관계는 이 각각의 사랑을 모두 조금씩 가지고 있다. 사실 두 종류의 사랑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사람은 결코 유아독존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 교제하기를 원하며,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 존재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질 때, 또는 가족이나 이성을 그리워할 때, 이러한 그리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원하게 만드신 것은 무엇이나 선한 것이다. ‘주는 사랑’ 역시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하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가도록 하셨으며, 하나님은 이러한 사랑의 본을 실제로 보여주셨다. 성탄을 기념하며 축하하는 계절을 맞고 있다.성육신하신 일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를 이 세상에 선물로 주신 ‘주는 사랑’의 가장 완전하며 대표적인 사건이다. 속죄사역 역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죄인을 위해 희생 제물로 아낌 없이 내어 주신 사랑의 사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조금이라도 행하는 모든 ‘주는 사랑’의 원형이다. 우리의 사랑은 단지 인간적인 복사판일 뿐이다. 그러나 이 복사품과도 같은 우리의 ‘주는 사랑’도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온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이라고 요약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며, 이웃을 우리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십계명은 바로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순종과 충성과 헌신적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공의롭게 행하는 것과 주는 사랑은 동일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빚을 지고 있다. 우리는 이것 이상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다른 인간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하는 것 이상을 줄 수 있다. 5계명부터 마지막 10계명까지는 이것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두 가지 사실들을 의미하고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 공평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그들을 돌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그들을 꾸며주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정한 사랑은 단순히 공평하게 대하는 정도를 한 걸음 더 넘어서 ‘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6계명은 우리가 살인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 경우에 있어서 공의란 나의 이웃의 삶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처받은 나그네를 그냥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공의롭게 행동했다. 이들은 그 나그네를 헤치지 않았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사랑을 보여주었다. 그는 나그네를 보살펴 주었다. 그는 나그네에게 시간과 에너지와 물질을 베풀어주는 일을 하였다. 공의는 나로 하여금 도적질을 하지 않게 해 준다. 그러나 사랑은 이러한 공의를 넘어서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물질을 베풀어주는 일을 한다. 공의는 나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지 않게 지켜준다. 그러나 사랑은 공의를 넘어 나로 하여금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수 있게 인도해 준다. ‘필요에 의한 사랑’은 자연적으로 온다. 사람들에게 사랑에 빠지도록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그냥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주는 사랑’은 반드시 배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법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이유이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 자신의 하나 뿐인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 주신 성탄의 계절에 우리 모두 ‘주는 사랑’을 조금이라도 배우고 실천하면 우리 사회는 더욱 더 훈훈해 질 것이다.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 공동체는 ‘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모범적인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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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2-12-07
  • [김성수 총장] 당신의 마음을 감사로 채우십시오
    몇 주 전에 플로리다(Florida)주에서 열린 미국 학위인증기구인 TRACS(Transnational Association of Christian Colleges and Schools) 연례 모임에 참석했을 때 칼빈대학교 커뮤니케이션 학과 교수인 쿠엔틴 슐츠(Quentin Schultz) 박사의 “섬김의 가르침”(Servant Teaching)이라는 책을 소개받고 읽으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 교사와 목회자는 물론 우리 모두가 이 내용들을 깊이 묵상하고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 자체가 섬기는 사역이 될 수 있음을 확신하기에 우리의 일상의 사역을 성찰해 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앞으로 몇 회에 걸쳐서 슐츠 박사의 글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이번 호에서는 우리의 마음을 감사로 채워보기를 바라며 제1장의 내용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나는 학생들에게 만나서 반갑다고 말하면서 매 수업을 시작한다. 나는 그들에게 수업에 와줘서 고맙다는 말로 모든 수업을 마친다. 한 학생이 나에게 그렇게 하는 이유를 물었다. 나는 “여러분들이 수업에 올 때마다 나는 영광스럽고 축복받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그 학생은 자신은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나 역시 섬기는 교사로서의 소명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다. 섬기는 교육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감사다. 우리의 마음이 감사로 가득 차 있을 때, 우리는 학생들과 우리의 일을 멋진 선물로 보게 된다. 우리는 학문의 세계를 감염시킬 수 있는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태도에 대한 면역성을 구축하고 있다. 감사는 기독교 교육학의 책에서 놓치고 있는 첫 번째 장이라고 생각한다. 가르치는 기술을 연마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마음을 준비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일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을 하나님의 선물로 보는 대신 우리에게 부과된 부담으로 여길 수도 있다. 우리의 일이 선물이라기보다는 의무에 가깝고, 모험이 되기보다는 매너리즘에 빠지는 일상에 가까워지고 있다. 우리로 하여금 섬길 수 있는 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또한 우리 학생들, 우리를 고용한 기관,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 우리의 능력, 우리를 도와주는 교직원들, 학위를 취득할 수 있도록 도와준 교사와 저자, 멘토, 우리를 지원하고 격려하는 동료들로 인해서 주님께 감사하자. 심지어는 실수할 수 있는 자유에 대해서도 감사하자.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다 더 큰 그림을 그려 보자. 다시 말하면, 우리를 구원하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고 있는 자들이다. 우리는 동일한 언약적 사랑에 접 붙여진 사람들을 가르치도록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알면 알수록 우리는 우리 학생들을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다. 요한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심이라”(요일4:19)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구원의 기쁨을 잃으면 우리 자신이 기쁨이 없는 스승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학생들은 이것을 감지한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말과 비언어적으로 우리 자신을 제시하는 방식은 그들이 배우는 동작을 하는 것처럼 우리가 단순히 가르치는 동작을 하고 있음을 의미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선한 은사에 비추어 우리의 마음을 지속적으로 새롭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생활 실천이 필요하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또 다른 삶의 날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나는 그날이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 생각은 다가오는 시간의 집안일과 스트레스로 향하게 된다. 그리고 내 기도는 송영 없는 단순한 간구가 되어 버린다. 나는 캠퍼스 입구 표지판을 하나님의 선하심과 연관시킨다. 매일 매일 하루를 시작하면서 나는 모든 건물과 가르침과 배움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되새긴다. 나는 나의 일터 그곳에 하나님으로부터 초청 받은 사람으로 부름을 받고 준비되어 있다. 캠퍼스 간판을 보면 나의 마음은 설레어지고 봉사를 위한 준비로 고양된다. 나는 집 서재에 ‘감사 게시판’을 하나 만들었다. 코르크 판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격려의 글, 성경 말씀, 사진, 아이디어, 찬송가, 티켓, 그리고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상기 시켜 주는 다른 여러 기념 조각들을 붙여 놓는다. 그 중 한 장의 사진은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의 무덤에서 아버지의 학대를 용서하는 나를 보여주는 사진도 있다. 아버지에 대한 원한을 극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다. 나는 ‘감사 게시판’ 아래 소파에서 낮잠을 자며 게시판에 있는 것들을 음미하며 잠이 든다. 나는 서재를 나설 때마다 잘 볼 수 있는 벽에 감사 게시판을 걸어 두었다. 연구실에서 무엇을 하고 있든, 퇴근할 때는 하나님께서 나를 책임지고 계시며 내 삶을 축복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다. 결국, 감사 게시판은 내가연구실을 나설 때,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내 방을 나선다는 사실을 상기 시켜 주는 이른바 나를 향한일종의 축복 기도의 역할을 한다. 여러분과 나는 많은 선물을 받은 사랑받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이것을 더 많이 인식하면 인식할수록 우리는 학생들을 위해 봉사하는 데 더 감사하면서 우리의 삶을 바칠 수 있을 것이다. Clairvaux의 Bernard(1090-1153)는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수록 사랑에 대한 보답을 더 쉽게 찾을 수 있다.”라고 말하였다. 감사는 쇠렌 키에르케고르(Soren Kierkegaard)가 배은망덕의 "질병"이라고 부르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예”라고 말하는 우리의 방법이다. 감사는 섬김의 가르침을 키워준다. 비밀 공식은 없다. 우리의 감사는 온 마음을 다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다. (빌4:4). 구속주를 향한 우리의 태도에 감사가 부족하다면 학생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그러할 것이다. 시편 기자는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라고 묻고 있다(시116:12). 우리는 섬기는 교사가 될 수 있는 기회를 포함하여, 모든 좋은 선물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응답한다. 감사하는 섬김의 교사가 되는 데 도움이 되는 실천 사항은 무엇이며, 당신의 감사 게시판에는 어떤 항목을 붙여 놓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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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2-11-23
  • [김성수 총장] 주님의 뜻에 대한 상반된 반응
    주님의 뜻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상반된 두 사람의 반응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엘리 제사장의 경우다. 그는 주님의 뜻 앞에서 전적으로 순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무엘이 세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니라”. 엘리는 실로의 대제사장이었는데, 그의 두 아들들도 역시 제사장들로서 봉사하였다. 이 두 아들들도 성경에 기록될 정도로 걸출한 인물들이었는데, 그것은 이들의 경건한 행동 때문이 아니라, 비할 수 없는 악행과 불경스런 행동들 때문이었다. 물론, 엘리제사장은 이들의 악한 행동에 동참하지 않았고, 이들의 행동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 아들들이 그러한 길에서 돌이키도록 단순히 훈계하는 정도의 행동을 취했을 뿐 그 행동을 중단시키려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이제 엘리의 집을 심판하실 날을 세기 시작했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선지가가 전했을 때도 엘리는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제 엘리 제사장이 아주 늙고 시력이 좋지 않아 잘 보지도 못할 때에 그는 성전에서 자기를 도우는 사무엘이라는 소년을 두었다. 주님은 어느 날 밤에 이 사무엘을 불러서 그를 통해 엘리에게 마지막 경고를 주었다. 엘리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었다. “가로되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삼상 3:17).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에게 말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의 가정을 영영토록 심판하시겠다는 메시지를 무거운 마음으로 전했다. 그런데 이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에 대해서 엘리 제사장은 놀라울 정도의 무감각한 반응을 보였다. 아마도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장 무감각한 반응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반응이었는가? “사무엘이 세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 엘리의 이 말이 무슨 말인가? 그것은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질지어다“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을 행하시도록 계획하시든지 간에 엘리에게는 괜찮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그것이 자신과 자기 가족의 파멸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태도다. 이 얼마나 감히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무관심이 아닌가? 주님의 뜻은 엘리 제사장의 가정을 파멸시키는 것이었다. 우리는 엘리의 가정의 일어난 무서운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엘리의 두 아들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엘리가 이 소식을 듣고 의자에서 넘어져서 목이 부러져 죽었다. 그의 며느리 역시 아기를 낳는 과정에서 죽었다. 그녀는 죽으면서 “이가봇”-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울부짖었다. 엘리 제사장이 말한 “주님의 뜻대로 될지어다”는 말은 절대로 우리가 따라야 할 경건의 본보기가 되지 못한다. 왜 그렇게 수동적인 자세를 취했는가? 왜 그는 자기 자신의 영적 상태와 자기 아들들의 영적 상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가?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해서 명확하게 답변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아는 것은 엘리 제사장에게는 자기 자신이 따를 수 있었던 한 모범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엘리 제사장만이 징계와 파멸과 실망스런 메시지를 들어야 했던 유일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모세의 경우를 보면 주님의 뜻에 대한 반응에 있어서 엘리 제사장의 경우와 엄청난 대조를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큰 죄악에 빠졌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무서운 죄악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조롱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이 곧은 백성들이라고 불평하면서 모세에게 말하기를,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 32:10)고 하셨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모세는 경건하게 머리를 숙이고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고 말하지 않았다. 결코 그렇게 하지 않다. 모세는 주님께 빌었다. 주님께 사정했다. 주님께서 마음을 돌이키도록 빌었던 것이다. 모세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논증을 하면서 사정을 하였다. 모세의 이런 간청 때문에 하나님은 마침내 그 뜻을 돌이키셨다. 모세를 향한 주님의 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이르렀을 때 그들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전에 죽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이러한 심판에 대해서 단순히 경건하게 머리 숙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질 지어다”라고 하지 않았다. 모세를 향한 주님의 뜻은 쓰라린 실망이었다. 그래서 모세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호소하였다. 모세의 이런 완강한 간청 때문에 모세는 느보산의 꼭대기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볼 수 있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고 언약의 후예로서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리와 특권을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호소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모세는 성경에서 위대한 선지자로 칭찬받고 있는 것이다. 주님의 뜻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기계적으로 따라야만 하는 어떤 것인가? 엘리제사장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파멸하려고 하시는 주님의 메시지를 받고, 그 앞에서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는 수동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모세는 그렇지 않았다. 주님께 매달리고 간구하면서, 오히려 뜻을 돌려 달라고 논증하고 따지고 간청했다. 주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어떠해야 할지를 너무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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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11
  • [김성수 총장] 주님의 뜻, 무엇인가?
    김성수 총장(에반겔리아대학) 주님의 뜻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관심사가 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다. 신실한 성도들은 언제나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찾고, 그 뜻을 순종하는 일에 최우선권을 부여해야 한다. 그런데, 주님의 뜻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올바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있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어려운 어떤 일을 당할 때 주님의 뜻을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성도들이 나그네의 삶과도 같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어떤 위기나 슬픔의 순간을 당했을 때 주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믿음을 강화시키려고 하는 노력은 전적으로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갑작스런 어떤 사고나 질병, 사업의 실패, 또는 가까운 친구나 친지의 죽음과 같은 일들을 당해서 우리는 자주 주님의 뜻을 이야기할 때가 많이 있다. 이런 경우 우리는 종종 자신을 향해서나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그것은 주님의 뜻이었습니다”고 말하고 위로를 받는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뜻과 관계해서 어떤 오해를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서 모든 것이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으로 주님의 뜻을 보는 관점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어떤 책이 있는데,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악과 실망스러운 일들도 모두가 결국은 이 책에 기록된 대로 일어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잘못이다. 이런 잘못된 시각에 가장 잘 인용되는 성경 귀절이 바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29-31)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 말씀이 마치 하나님께서 허락해야 참새 한 마리도 죽고,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성공과 실패 등 모든 것을 일일이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가르치는 것으로 잘못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참새가 날개가 부러져 죽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날개로 하늘을 훨훨 나르는 것이다. 마태복음 10장 전체의 내용을 볼 때, 우리는 이 말씀을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거기에도 하나님이 계신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없이 참새 한 마리도 떨어지지 않는데 머리털까지 세실 정도로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너희와 함께 하시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누가복음은 이 내용을 더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다.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떨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그런데,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그 곳에도 계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그 때에는 아들과 함께 하시지 않았다. 그래서 주님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아버지, 아버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부르짖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그것은 아들을 십자기에 죽게 하시면서까지 우리를 버리지 않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며,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이다. 성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주님의 뜻을 어떤 숙명주의, 팔자소관, 또는 운명주의와 같은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주님의 뜻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릉도원과 같은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다스림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뜻대로 이 창조 세계를 다스리고 있다. 주님은 달과 별, 태양, 바위, 강, 바다, 바람과 같은 무생물의 세계를 자신의 뜻대로 다스리고 있다. 주님은 또한 동식물의 세계를 자신의 뜻대로 다스리고 있다. 만약 이 세계가 주님의 뜻대로 다스려지지 않으면 정말 문제가 생겨나게 될 것이다. 주님은 또한 우리의 가정, 학교, 교회, 직장, 국가에 대해서도 자신의 뜻을 가지고 계시며, 이 모든 사회와 문화 현상들이 주님의 뜻대로 운영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 학교, 교회, 직장, 국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게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주님의 뜻은 질서와 조화, 평강과 즐거움, 선함과 거룩함과 같은 것이지 무질서와 분쟁, 괴로움, 악함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건강하고 영원히 즐겁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 실패하고 병들고 죽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비극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침입자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마지막 날에 다시금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나라를 만드시고, 우리로 하여금 실패와 고난과 시련이 없이 건강하고 즐겁게 영원토록 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주의 뜻이 이루어질지어다”라고 말하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현 미국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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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2-10-19
  • [김성수 총장] 주 너를 지키리
    오늘날 현대인들은 수많은 걱정과 근심에 사로 잡혀 생활하고 있다. 과학과 기술문명이 최고도로 발달한 시대에 엄청난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실상은 온갖 종류의 고민과 번민, 염려, 걱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부터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심지어는 잠자리에서도 수많은 걱정거리들을 안고 단잠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돈에 대한 걱정, 인간관계에 대한 걱정, 자신의 외모에 대한 고민과 근심, 건강에 대한 걱정,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에 대한 걱정, 자녀들에 대한 걱정, 부모에 대한 걱정, 논문 지도 교수에 대한 걱정 등 이루 열거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걱정과 염려에 사로잡혀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문자 그대로 죽을 정도로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걱정하다가 걱정 속에 죽는 인생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러한 걱정과 근심, 염려는 우리의 정신적인 질병의 원인이 되며, 육체적인 질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미국에는 이러한 현대인의 정신적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한 방법들이 많이 발달되어 있다. 명상요법에서부터 상담, 심리치료, 음악치료 등 수 많은 방법들을 동원해서 현대인들이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한다. 미국의 명문 줄리아드 음대를 졸업한 맥 퍼린(Mcfurrin)이라는 한 흑인 가수가 노래를 취입했는데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출·퇴근 길에 이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들으면서 아주 행복하고 기쁘게 운전하며 출퇴근을 하는 모습들을 보았다. 이 노래의 제목은 “염려하지 말고 행복해라!”(Don't Worry, Be Happy)라는 것이다. 가사가 복잡하지도 않고 계속적으로 “Don't Worry, Be Happy"라는 말이 반복되는 노래다. 이 노래의 내용을 조금 더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의 모든 삶에는 걱정거리들이 조금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 걱정하면 오히려 그 만큼 걱정거리를 만들어 내는 꼴이 된다. 집세가 밀려도, 현찰이 없어도, 스타일이 엉망이고 여자친구가 없어도 걱정하지 말아라. 걱정은 오히려 얼굴에 주름살이 지게 만들고 다른 사람의 기분마저 침울하게 만든다. 걱정하지 말고 행복해라!” 이런 내용들이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노래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 노래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수많은 걱정거리와 근심에서부터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었다. 우리 나라에도 이러한 노래들이 많이 불리던 때가 있었다. “걱정을 모두 벗어 버리고서 스마일, 스마일 스마일...” 같은 노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걱정과 근심, 불안과 염려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러한 염려와 걱정에 대해서 배워야 할 많은 내용들이 있다. 첫째는, 우리 인간의 통제 능력과 통제 범위를 넘어서는 어떤 일들에 대한 우리의 염려다. 사실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일들 중에는 우리의 통제 능력과 범위를 넘어서는 일들이 많이 있다. 이런 일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염려하고 노력을 한다고 해도 아무런 효과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종류의 염려에 대한 해결책은 우리 스스로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단순히 수용할 줄 아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사에 있어서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빨리 단념하고 포기할 줄 아는 지혜와 기술을 배워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에서 자족하고, 만족하고, 감사할 줄 아는 방법과 지혜를 배워야 한다. 둘째는, 실제로는 문제가 되지 않는 일들에 대한 우리의 염려다.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일들 중에는 따지고 보면 실제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일들이 많이 있다. 인간 관계에 있어서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얽혀있는 것이 아닌 데도 혼자서 온갖 걱정을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가 염려하고 걱정하는 많은 일들 중에는 실제로는 의식주의 문제와 같이 그렇게 염려하고 걱정할 만한 가치가 없는 일들도 많이 있다. 이러한 종류의 염려거리들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먹고 입는데 필요한 모든 것들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하여 주신다. 셋째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들에 대한 우리의 염려다.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는 일들 중에는 따지고 보면 실제로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공연스레 앞질러서 염려하고 걱정하는 일들이 많이 있다. “만약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하느냐?”하고 가정해서 하는 염려와 걱정이다. 이러한 염려와 공포에 대해서 해결책은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하루하루의 삶을 충실하고 성실하게 살아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결코 내일 일에 대해서 “될 대로 되어라”는 식의 삶을 살라는 말씀이 아니라, 오늘 하루의 삶을 신중하고 성실하게 살고 내일 일은 하나님께 의지하고 맡겨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당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일들에 대해서 염려해야 한다. 우리의 삶에는 우리가 실제로 걱정하고 염려하는 일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의, 식, 주와 같이 물질적인 필요와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이러한 일들 마저도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들은 하늘 아버지께서 완전히 돌보시고 공급해 주시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진정으로 먼저 추구하면 우리의 모든 필요들을 충족시켜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정신적인 것이 아니다. 단순히 머리로 생각만 하는 일도 아니고 가슴으로 느끼는 일만도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방식을 의미한다. 산상수훈에서 가르치는 삶,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는 삶, 형제를 사랑하고 화목하는 삶, 음욕을 품지 않는 삶, 헛된 맹세를 하지 않는 삶, 이웃을 사랑하는 삶, 외식하지 않는 진실된 삶, 구제하는 삶, 은밀한 중에 기도하는 삶,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는 삶, 형제를 비판하지 않는 삶, 한 마디로 말로 요약해서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의 삶을 현재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한다. 이러한 삶이 바로 우리의 인생 집을 모래위에 짓지 아니하고 반석위에 짓는 삶이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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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0-05
  • [김성수 총장] 하나님 없는 종교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잘 알려져 있고,많은 가정의 거실 벽에 결려 있기도 하지만 그 본래의 의미가 완전히 상실되어질 위험에 있는 성경 귀절들이 많이 있다.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는 아모스 선지자의 말씀이 그 중 하나이다.이와 같은 귀절들의 의미는 거기에 나오는 단어들의 아름다움에 가려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아모스 선지자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를 열심히 찾고 있었던 같아 보인다.벧엘에 세워졌던 성소가 그렇게 분주한 적도 없었다.아모스시대 만큼 그렇게 많은 동물들이 희생 제물로 바쳐진 적이 없었다.사람들은 여호와를 찾기 위해 벧엘에만 간 것이 아니라 더 멀리 길갈에까지 갔었다.길갈은 거기에서 할례가 행해졌기 때문에 여호수아 시대 이후로 아주 거룩한 장소로 여김을 받는 곳이었다.그런데 이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 것처럼 수많은 순례자의 무리들이 정기적으로 브엘세바로 순례를 떠나기도 했다. 이것은 북 이스라엘로부터 온 순례자들에게는드고아를 지나야 브엘세바로 갈 수 있는 여정이었다.브엘세바는 유다의 최남단에 있었기 때문에 이 여정은 이스라엘 국경 밖으로 나가는 긴 여정이었다.그러나 순례자들은 여기에 대해서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다.브엘세바는 성지가 아닌가!여호와께서 거기서 오래 전에 이삭과 야곱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던가!어떤 가치있는 전통이 브엘세바와 관련되어 있지 않는가!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조망해 볼 때 이스라엘이여호와를 찾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종교적 열정,희생 제물,그리고 순례는 오히려 이들이 영적으로 건강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그러나 이 모든 행동은 “하나님 없는 종교”의 한 부분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하나님은 벧엘,길갈,그리고 브엘세바와 관계된 그 어떤 것도 원치 않으셨다.거기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아니었다.하나님은 인간들이 그들의 설계에 따라 하나님을 위해 지은 집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집에 거하셨다.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만든 종교들을 인정하기를 거절하시는 분이다.그것들은 하나님의 눈에 가증스러운 것일 뿐이다. 아모스는 가능한 한 가혹하게 심판을 알리기 위해 예리한 대조를 하고 있다: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리라.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아모스5:5). 이스라엘의 겉치레뿐인 경건은 하나님을 진정으로 구하는 경건과는 완전히 정반대였다.그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얼굴을 돌리는 것을 의미했다.우리의 종교를 우리 자신에게 맞도록 바꾸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에 대해서 이보다 더 날카로운 비판은 없을 것이다. 벧엘,길갈, 그리고 브엘세바에서 드리는 제사는 여호와를 찾는 참된 경건의 행위가 아니라 단지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이교적 행위였을 뿐이다.의식 중심의 모든 종교는 신들의 총애를 얻기 위해서 희생 제물을 드린다는 이교적 원리에 의존해 있다.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속에 있던 생각도 바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빚을 지게 하는 것이었다.다시 말하면 여호와께 많은 헌물을 드림으로써 그들 자신의 소원의 수레에 여호와를 얽매이게 하는 것이었다.이런 생각은 여호와의 사랑을 받는 경건의 모습에 접근해 가고자 함이 아니고 단지 그분의 은사를 나누어 갖고자 함이었다.이것이 그들이 훌륭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한 종교의 모습이었다.이런 종교는 실제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다.하나님은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돌보실 것이라고그들은 믿었다.하나님은 자신에게 바쳐진 많은 희생 제물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이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중심에 하나님이 없는 종교를 개발했던 것이다. 종교적 열심과 종교는 전적으로 범주가 다른 두 가지 행위라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교훈이다.예배에 단순히 참석하고 헌물을 드리며, 위계적 직분을 감당하는 행위가 여호와를 전심으로 찾는 경건의 행위와 같을 수가 없다.전자는 후자가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우리 시대에 넘쳐 나는 교회당에서 우리는 실제로는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서도 교회와 교단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많은 말을 할 수가 있다.교회와 교단, 심지어는 선교지에서도 많은 종교적 활동을 하고 있지만 여호와를 찾는 모습만 가질 뿐 실제로는 이기심을 채우는 하나님 없는 종교적 행위에 몰두할 수도 있다.분주하게 희생 제물을 드리고 기도하는 열렬한 종교적 활동 가운데서 우리 모두는 여호와를 대신하여 말씀하는 아모스 선지자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벧엘을 찾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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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3
  • [김성수 총장] 고난 앞에서 음미해 보는 하박국의 노래
    세계행복 지수 순위를 보면 미국, 영국, 독일, 스위스와 같은 소위 선진국들 보다도 방글라데시, 피지, 바누아투, 콜롬비아, 코스타리카와 같은 나라들이 너 높게 나오고 있다. 이것은 행복이라는 것이 반드시 재산과 지식을 많이 소유하는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재산과 지식이 많으면 오히려 스트레스와 근심을 더해 주기도 한다. 복지시설에 있는 지적장애인들이 오히려 걱정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이들이 건강한 머리결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가진 것이 많다고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박국의 노래는 바로 이런 문제에 대해서 명쾌한 설명을 해 주고 있다. 하박국 선지자가 기원전 7세기경에 하박국서를 기록했을 당시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제 상태가 좋지 못했다.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와 감람나무에 수확이 없고, 곡식의 수확도 없었다. 양과 소도 없었다. 이런 불행의 이유는 아마도 갈대아인들의 침공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침공으로 모든 것을 약탈당했고, 설상가상으로 기근까지 들었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을 참기는 좀 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잘 살던 사람들이 실패해서 겪게 되는 가난은 어떤 면에서 견디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스라엘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이때 하박국은 예기치 않은 반응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하박국의 노래다. 하박국이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라고 했다. 하박국 선지자에게는 모든 것이 없어졌을지라도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기뻐했다. 원수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었지만 하나님을 빼앗아갈 수는 없었다. 하박국의 노래가 위대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진정한 기쁨의 원천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진리를 가르쳐주고 있다. 경제적으로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는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없어져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다. 하박국이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바로 알았기 때문이다. 하박국은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심을 알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은 광야생활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환난가운데서 인도하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다. 이방민족들의 침략을 당할 때 마다 하나님은 기적적인 도움의 손길로 이들을 구원해 주셨다. 하박국 선지자가 이 노래를 지었을 때도 갈대아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몹시도 괴롭혔다. 그래도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해 주실 것을 알았다. 이와 같은 확신 때문에 하박국은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사슴은 위험한 곳에서도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동물이다. 하박국은 지금은 비록 가난해도 구원의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시면 나를 사슴과 같이 가난과 고통과 온갖 위험 속에서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실 것을 믿었다. 하나님을 구원의 여호와로 알았기 때문에 모든 재산을 다 빼앗기고 빈 털털이가 되어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찬양할 수 있었다. 오늘 우리는 하박국 선지자보다도 구원의 하나님을 더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재신 하나님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흘려 기도하시고 갈보리 산 위에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이룩하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도 알고 있다. 하박국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울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았지만 오늘 우리는 기록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의 하나님을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구약시대의 하박국 선지자보다도 구원의 하나님을 더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 하박국의 노래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진정한 소망과 기쁨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라는 진리다. 곡식과 가축과 재물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이 성도의 참된 기쁨이라는 사실이다. 신앙 생활을 한다고 어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성도들의 생활에도 어려움이 있다. 하박국 선지자에게는 극심한 가난의 어려움이 있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남에게 다 털어놓을 수도 없는 온갖 종류의 어려움들이 산적해 있다. 자식으로 인한 문제, 남편으로 인한 문제, 질병으로 인한 문제, 가난으로 인한 문제 등 앞이 캄캄할 정도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산적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구원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 그 분이 내 곁에 계시고, 내가 이 구원의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면 하박국 선지자가 노래한 그 하나님은 언젠가 나를 사슴과 같이 가볍게 높은 곳에 다닐 수 있게 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해야 한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구원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을 지켜주실 것을 더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어려움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셔서 더 큰 축복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다. 비록 오늘 우리의 발걸음이 무거워도 내가 구원의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나의 발을 사슴의 발과 같이 가볍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김성수 목사 (전 고신대학교 총장,현 Evangelia University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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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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