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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원시 기독교 연합회 6.25 구국성회 설교문
    1. 코로나 펜데믹이 18개월 동안 계속되고 있고 아직도 끝이 안 보인다. 국가도 어렵고,기업도 어렵고, 국민들도 어렵고 교회도 어렵고 성도들의 어려움도 말이 아니다. 혹자는 6.25 전쟁 때보다 더 어렵고 힘든 것 같다고 한다(?) ① 그런데 이런 끔찍한 일이 왜 생기게 됐을까? 잠6: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셨는데 거기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 ㄱ.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믿음으로 깨어 있으라고 하셨다. 벧전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ㄴ.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와 교회안에 알곡을 고르시는 것이다. 마3: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을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② 코로나 펜데믹이 무엇 때문에 왔던지 우리는 하나님께 회개해야 산다. 눅13: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 ㄱ.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a. 교회와 성도가 “소금의 맛”을 잃어버려 세상의 소금이 못되고 사람들에게 버림 받고 땅에 떨어져 짓밟히게 됨을 회개하라 눅14:34~35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땅에도 거름에도 쓸데 없어 내어 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하시니라.아멘 b. 천국소망,부활소망을 잃어버리고 육신의 것,세상의 것만 위해 살고 있음을 회개해야 한다. 골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셨느니라.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떠한 죄를 범했어도 하나님 전에 나가서 진실하게 회개하면 들으시고 다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그 모든 고통에서 구해 주신다.필독(왕상8:37~40) 2. 그리고 우리나라는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시33:12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로 자기에 하나님으로 삼았다는 것은? ①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섬기는 것이다. ②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③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하나님께만 구하는 것이다. (1) 황송하게도 “대한민국”은 이 믿음 위에 세우주신 나라이다. ① 구한말 세계 열강속에 이 나라가 망해갈 때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이 들어왔다. 나라가 망하고 소망이 없을 때 0.8% 밖에 안되는 기독교는 이 나라를 살렸다. 3.1 운동, 상해임시정부 수립,독립운동,문맹퇴치,계급철폐,남녀차별철폐,미신타파,물산장려운동,농촌계몽,거룩운동(금연,축첩폐지,정직) ② 일제 치하에서 해방시켜 주신 후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만들어 주셨다. ㄱ. 1948.5.31. 제헌국회에서 198명의 의원 중 이윤영 의원(목사)이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고 시작하였다. ㄴ. 1948.7.27.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만들어 주셨다. ㄷ. 1948.8.15. 대한민국의 설립을 공포하였다. 1270년 몽골침략 이후 680년 만에 독립국가 된 것이다. ③ 그러나 유엔과 국제사회에서 독립국가로 인정받는 과정은 매우 힘들었지만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으로 축복해 주셨다. 1948.9.21.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유엔 총회에서 인준을 받으려고 장면,모윤숙,김활란,장기영,정일형을 파송함. 그러나 소련 대표의 집요한 반대 공작과 위성 국가들의 “필리버스터”로 유엔 총회가 폐회되기 전날까지 승인도 못 받고 분위기가 최악이었다. 그러자 장면 대표와 모윤숙이 새벽에 교회에 나가 눈물로 간절하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였는데 그 날 소련 대표가 발언을 하다가 목이 아파 밖으로 나가고 즉시 투표하여 찬성 48, 반대 6, 기권 1표로 대한민국이 한반도에 유일한 합법적인 국가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 이것이 2년 후 소련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 중 유엔이 참석 후 처음으로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결의하여 1950.7.7일 한국에 유엔군을 파견하게 된 것이다. ④ 이 기적도 6.25 발발 7일 후 7월 2일에 부산으로 피난 온 이승만 대통령이 모든교회와 성도들이 나라를 위해 비상기도를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초량교회와 모든 교회가 철야,새벽,금식 기도를 하고 시민들은 해운대 백사장에서 기도를 하였는데 7.7일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놀라운 축복을 주신 것이다.아멘! ⑤ 인천상륙작전도 금식기도의 응답이었다.(1950.9.15~19)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장로님이셨는데 세계 상륙사를 살펴보니 500번 상륙에 성공은 단 하나 ‘노르망디’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배 위에서 3일 동안 하나님께 금식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전쟁을 역전시킨 것이다.아멘! 이 외에도 이런 기적은 대한민국에 계속되었다. 1973년 빌리그래함 전도대회 때 ~ 남,북이 국가 경쟁력이 역전 됨 1974년 엑스플로74 ~ 땅굴 발견,안보를 튼튼하게 됨 1977년 민족복음화 대회 ~ 4,300만석(쌀) 100억불 수출 1980년 세계복음화 대회 ~ 88 올림픽을 유치하게 하심 1984년 한국기독교 100주년 ~ 대한민국이 중진국이 됨 1975~1985 10년 동안 기독교는 350% 성장 경제는 980% 성장함 이것은 세계 역사에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기적)이었다.아멘! 이 외에도 모든 것을 열거하려면 시간이 부족해서 그치려고 한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① 이 나라와 민족이 사는 길은 예수님을 구주로 잘 믿고 오직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나라가 살고 우리와 자손 만대가 사는 길이다. 그러므로 더욱 예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려고 힘쓰는 모두가 되자.아멘! ② 그리고 오늘도 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간절히 기도하고 교회에 돌아가서는 오늘과 같은 기도를 쉬지 않고 하도록 하자. ③ 그리고 빨리 이 나라가 복음화 되도록 예수님을 부지런히 전파하자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이 나라와 한국교회 그리고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에게 영원히 계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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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6-23
  • 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모든 대적을 멸하시는 하나님
    인생의 삶에 우리를 해하려고 하는 자, 원수, 대적자를 만나기도 합니다. 사단 마귀가 우리의 대적자입니다. 다윗의 삶에도 다윗을 해하려고 하는 대적자들이 많았습니다. 모든 대적을 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의 이름 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대상 17:8)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사단과의 영적전쟁입니다. 사단은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활동합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의롭게 살고 믿음으로 사는데도 원수, 대적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우리를 해하려고 하는 대적과 다투거나 싸우지 않아야 합니다. 서로 다투거나 싸우면 서로 망합니다. 대적 원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대적을 멸하여 다윗이 승리하게 해주셨습니다. 남을 해하려고 하고 대적하는 자의 삶은 악인의 삶이고 악인의 마지막은 멸망이요 심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남을 살리고 남에게 선을 행해야 합니다. 다윗의 대적을 하나님께서 다 처리해 주셨습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대적, 사울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정리해 주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원수의 목적에서 상을 베풀어 주셨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7-21) 우리의 삶에 원수가, 대적들이 있어 우리를 해하고 죽이려고 하지만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대적들을 처리해주시고 해결하여 주십니다. 의인은 일곱 번째 넘어져도 여덟 번째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십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8-10) 믿음으로 살고 의롭게 살려고 했던 요셉도 그의 삶에 대적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대적들을 해결해 주시고 요셉을 높이 세워주셨습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려는 대적들, 하나님께서 멸하여 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기도하고 인내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처리해 주십니다. 대적을 멸하여 주시고 존귀한 자로 세워주십니다. 이기게 해주십니다. “다윗이 에돔에 수비대를 두매 에돔 사람이 다 다윗의 종이 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대상18:13) 양대식 목사(진주성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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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4
  • 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꾸지 아니하게 하시는 하나님
    돈을 빌려 주면서 사는 자가 있고, 돈을 빌려 달라고 하면서 사는 자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행을 통해 돈을 빌려 쓰면서 살아갑니다. 빚을 지면서 사는 것은 큰 부담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복 주셔서 서서히 은행 빚을 갚아가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으면 꾸어줄지라도 꾸지 아니하고 살아갑니다. 꾸지 아니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신 대로 네게 복을 주시리니 네가 여러 나라에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하겠고 네가 여러 나라를 통치할지라도 너는 통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신15:6)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신28:12) 하나님께서 재물의 복을 주시면 가난한 자가 없어집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신15:4-5) 가난이 죄는 아니지만 축복은 아닙니다. 가난을 원하는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재물의 복을 주시면 빚지지 아니하고, 꾸지 아니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살다보면 빚지기도 합니다. 은행 빚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빚을 다 갚고 꾸어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꾸어주고 나누어주고 사는 삶이 축복입니다. 꾸어주고 살지언정 꾸지 아니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꾸지 아니하고 살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반드시 복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꾸어주면서 살지언정 꾸지 아니하고 살 수 있는 은혜와 축복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꾸어주며 나누면서 살아갈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사람들에게 덕이 됩니다. 남에게 꾸어달라고 구걸하면서 살 때 전도문이 막히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 수 있게 됩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30:7-9) 하나님께 복을 받아야 합니다. 축복을 받으면 꾸지 아니하고, 꾸어주고 나누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복 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에게 다양한 복을 주십니다. 신명기 28장에 나오는 축복의 내용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복 주시는 하나님을 묵상해야 합니다. 칼럼의 완본은 gncnews.net 을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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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2-09
  • 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늦은 비, 이른 비를 적당히 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막 지대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고, 물이 없어 죽기도 하고 고통을 겪게 됩니다. 비는 물이요, 생명처럼 귀합니다. 비, 많은 양의 물을 사람이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주셔야 합니다.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신11:14)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 들에 풀이 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신11:15)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때, 심판하실 때, 비를 내리지 아니하시기도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여 땅이 소산을 내지 않게 하시므로 너희가 여호와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속히 멸망할까 하노라”(신11:17) 지나친 가뭄도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비가 오랫동안 오지 않으면 농사도 망하고, 심각한 문제가 일어납니다. 비가 내릴 때 우연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신다고 믿고 비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적당히 내리는 비가 축복의 비입니다. 비가 너무 적게 내려도 안 되고, 너무 많이 내려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적당한 비를 내려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시고, 은혜의 단비, 신령한 비도 내려주십니다. 성령의 단비도 내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자연을 사랑해서 살려주고, 풍요롭게 해 주시려고 비를 내려주십니다. 엘리야 선지자 때, 비가 오지 않아 하나님께 비를 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비를 내려주셨습니다. 가뭄의 때에 비를 내려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약:17-18) 비가 와야 농사가 되고, 열매 맺고, 풍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비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구름에 비가 가득하면 땅에 쏟아지며 나무가 남으로나 북으로나 쓰러지면 그 쓰러진 곳에 그냥 있으리라”(전11:3)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여시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신2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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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11-25
  • 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낮추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높이시기도 하시고 낮추시기도 하십니다. 낮추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시18:27) 하나님이 높여 주셔야 높아집니다. 하나님이 높여 주는 자는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겸손한 자를 때가 되면 높여주십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4:10)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삼상2:7) 하나님은 누구를 낮추실까요? 교만한 자를 낮추십니다. 교만은 죄성입니다.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십니다. 하나님은 교만했던 웃시야, 느부갓네살 왕, 사울 왕을 낮추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심판하십니다. 교만은 하나님이 싫어하십니다. 교만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교만한 눈으로 사람들을 쳐다보지 않아야 합니다. 교만하면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가 깨집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높아지고자 하면 낮아지고 낮아지고자 하면 높아진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버리십니다.(사울왕) 겸손한 다윗을 왕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교만은 사단의 속성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순간마다 교만하지 않도록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교만한 태도로 남과 비교하면서 기도했던 바리새인의 기도를 주님은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기도를 기뻐하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겸손한 세리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겸손했던 세례요한을 예수님은 칭찬해 주시고 높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신다.” 낮추시는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낮추시면 누구도 막을 수 없고 하나님이 낮추시면 부끄럼 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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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9-24
  • 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상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해주십니다. 잘한 자를 칭찬해 주시고 상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상주시는 하나님은 격려, 칭찬, 응원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상급 신앙이 성경적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내게 갚으셨으니”(시18:20)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보상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칭찬해주시는 것도 상 받는 것입니다. 축복을 상급으로 주시기도 합니다. 명예, 지혜, 재물도 하나님이 주시는 상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상주신다고 가르쳐 줍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 다윗은 하나님께서 억울함, 고난 속에서 인내로 믿음 지키게 하시고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원수 갚는 최선의 길은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많이 받는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제거해 주시고 나의 삶이 축복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상입니다. 다윗은 수많은 고난 있었지만 인생의 마지막이 더 잘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는 삶이었습니다. 늙도록 존귀하게 살았습니다. 노년의 축복,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상입니다. 바울은 상급에 대한 말씀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딤후4:7-8 ) 하나님께서 의의 면류관을 예비해 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끝까지 믿음 지킨 자에게 상 주십니다. 죽도록 충성한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 상을 주십니다. 충성된 자가 복된 자입니다. 하나님은 충성된 자에게 상주십니다. 양무리의 본이 되고 목양을 잘한 자에게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상을 준비하시고 상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전도 열심히 하여 많은 영혼을 구원한 자에게 상주십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을 잘 섬기는 자에게 상주십니다. 요셉은 섬김의 삶을 살았을 때 하나님께서 높여주시고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상 주신 것입니다. 좋은 명예를 남기는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사는 자에게 세상에서도 축복받는 축복의 상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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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교/강의
    2020-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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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수 총장] 문화변혁을 위한 그리스도인
    오늘 우리 사회를 거듭난 심령을 가진 니고데모의 안경을 통해 바라보면서 저는 우리 사회의 문화 전반이 우리가 믿고 전파하는 복음으로 좀 바뀌어 졌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램을 가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최근 주요 언론의 사회면에 연일 보도되고 있는 아동학대, 성폭행, 패거린 정치 행태 등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들을 보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이 우리 사회의 어두운 구석구석을 좀 밝혀주고 바꾸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램을 갖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와 오늘을 비교해 보면 교회당 수나 교인 수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교회당 수와 교인 수의 증가에 비례하여 부정과 부패가 줄어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오히려 더 악해진 것 같고 어두움은 더 깊어만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수는 많지만 우리 삶의 정치와 경제와 교육과 문화 등 인간 삶의 핵심영역을 복음의 능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너무나도 소수인 것 같고 그 영향력도 아주 미미한 것 같습니다.  미국의 경우도 보면, 미국인의 절대 다수가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또 많은 사람들이 복음주의 교회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미국 사회 전반에 걸쳐 기독교 신념과 가치관은 현저하게 감소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미국의 대도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존재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영화, 신문, 잡지들을 보면 마치 복음이 전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해도 그저 낯설고 미미하게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복음의 영향력이 이렇게 미미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한 가지 이유는 문화변혁적 그리스도인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주요 대학교에서 가르치거나 텔레비전 혹은 영화 산업에서 일하거나, 주요 일간지에 글을 쓰거나, 방송 매체에 참여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의 비율은 겨우 3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문화와 사회의 주요 유형들은 거의 그리스도인이 부재한 현실 속에서 형성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와 문화에 뭔가 영향력을 미치려고 하면, 다른 누군가가 이미 제안하고 만들어 놓은 것에 대해 비판하는 부정적인 반응만 하게 되는 경우가 비일 비재하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책이나 영화가 기독교 신앙을 비하시키면 우리는 그것을 비기독교적인 것이라고 비판하고 보이코트하는 운동을 펼칩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응방식은 우리 자신들을 더욱더 우리만의 폐쇄적인 껍질 속으로 밀어 넣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렇게 부정적인 대응방식에 익숙해져 가고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는 내어 놓을 만한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공동체는 우리의 사회 문화적인 현실에 대해 이제 보다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대처하고 대안을 제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어둡다고 불평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촛불을 밝힌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사회가 어둡다고 불평은 엄청나게 하면서도 촛불은 거의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흑암이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는 그리스도와 문화를 대립적인 관계로 인식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과업은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활동을 수행하는 것 외에는 복음을 선포하고 자비를 행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문화를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어거스틴(St. Augustine) 역시 인간은 이 변화무상한 세상으로부터 눈을 돌려서, 가능한 한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영원불변한 하나님에게만 시선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은 문화가 이방 신상 앞에 바쳐지는 방식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문화를 그리스도에게 다시금 바쳐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가장 기본적인 문화적 활동 외에는 모든 문화적 활동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분리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문화의 관계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동산을 다스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문화 명령을 무효화 시키지 않고 오히려 보완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세계 전체를 하나님의 원래 의도대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모든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권위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구속 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문화적 과업의 전체 범위에서 하나님을 봉사하는 삶으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문화와 대립하는 그리스도’나 ‘문화와 그리스도’가 아니라 ‘문화를 통한 그리스도’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제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대응 방식의 흐름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복음은 진정으로 생명력이 있고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변화시킬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을 세상의 탁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문화변혁적 일꾼들로 기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수동적으로 죄를 피하려는 데만 관심을 갖는 자녀들이 아니라, 보다 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자녀들로 양육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경기 규칙을 위반하지 않으려고 안전한 플레이만 하다가, 그만 졸전을 벌이고 마는 자녀들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을 가지고 세상을 바꾸어가는 십자가 군병들로 양육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2-06-14
  • [김성수 총장] 나그네 인생
    우리는 종종 이 세상은 우리의 본향이 아니요, 우리는 그저 나그네 인생을 살 뿐이라는 말을 합니다.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라는 노래도 한 때 유행을 했습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발붙이지 않고 나그네 인생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경은 아브라함과 신앙의 열조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히 11:9). 아브라함도 헤브론에 있는 헷 족속에게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우거한 자”(창 23:4)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약속의 땅 가나안 아브라함의 ‘우거하는 땅’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창 17:8). 이 땅은 또한 이삭과 야곱이 우거하는 땅이기도 했습니다(창 28:4, 37:1). 우리도 이들을 모범으로 삼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상급을 생각하며 짧은 인생 나그네처럼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그네처럼 사는 삶이란 어떤 모습일까요? 이 땅은 허망한 것이니 오직 영원한 하늘 나라만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삶일까요? 나그네 삶을 살았던 아브라함과 열조들이 언제나 소위 내세의 영적인 문제에만 사로잡혀 생활 했을까요? 아브라함의 가슴을 환희와 즐거움으로 채워준 위대한 약속이 단지 하나님과 천군 천사들과 더불어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것뿐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누렸던 축복은 오히려 땅의 기름진 축복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창세기 12장에서 이 내용을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은 이 지구 전체 모든 족속을 향한 큰 축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생육하고 번창하여 큰 민족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실제로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축복이었습니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왜 이 땅에서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성경은 약간의 대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창 12:6)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에 이미 거하고 있던 시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나안 족속들의 죄악과 사악함이 이미 하늘에 들렸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 땅의 거민들과는 거리를 두고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가나안 거민들은 결국 이 약속의 땅에서 물러가야 하는데 아직 그런 때가 되지 않았기에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은 그들 가운데 거하면서도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아모리 족속이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않았던 것입니다(창 15:16). 가나안 족속이 약속의 땅에 살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았다고 한다면 다윗의 시대에는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다윗이 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때에 드린 그의 아름다운 기도를 생각해 봅시다: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대상 29:15). 여호수아와 사사기의 기록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하여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거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시대에도 가나안 족속들이 아직도 그 땅에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왕으로서의 모든 권리와 축복을 누리면서도 자신을 열조와 다름없이 나그네요 우거한 자로 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아가는 이 삶이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의 신분이어야 합니까?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이 땅은 나의 본향이 아니다”라고 노래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만을 소망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일까요? 우리는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살지 않았느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눅8:20)라고 하지 않았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래서 우리도 본향을 사모하며 이 땅에서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창조 세계의 회복을 소망하고 도래할 새 예루살렘과 새 땅을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 다른 질문을 해 보아야 합니다. 산업화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아직도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우거하고 있는가?”라고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는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살지 않으니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인종적으로 가나안 사람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종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셈, 함, 야벳 족속을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세계는 지금 국제결혼과 문화적 교류, 그리고 세계화를 통해서 하나가 되는 지구촌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가나안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종적으로나 지리적인 구분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가나안 사람들에 저주가 임하도록 기도할 수 없습니다. 대신에 우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명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과업은 인종적으로 가나안 사람들과 거리를 두며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땅 끝까지 모든 민족과 방언과 모든 족속들을 향해 하나님 나라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세상 모든 족속과 민족과 방언을 향해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그네요 우거자라는 의미를 새롭게 생각해야 합니다. 인종적으로 가나안인 민족들을 향해서 저주하거나 미워하거나 두려워하는 삶이 아니라 구원과 용서와 사랑을 주기 위한 그리스도의 초대를 선포하면서 다가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들을 이미 우리에게 임했고 앞으로 온전히 임하게 될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도록 초대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함께 죄악된 삶의 영역에서 본토인이 아니라 진정 나그네요 우거자로 살면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진정한 왕이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땅 끝까지 선포하면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2-05-31
  • [김성수 총장]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삶
    성경적 세계관의 한 특징은 창조와 타락과 구속의 의미를 우주적, 포괄적, 보편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해 보면, “창조의 지평은 타락의 지평이며 그것은 곧 구속의 지평”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결과이며, 인간의 타락은 이 모든 것에 영향을 미쳤고, 그리스도의 구속은 이 모든 것을 새롭게 회복한다는 것입니다. 창조 세계의 그 어떤 것도 인간 타락의 범위밖에 있지 않습니다. 오염된 물이 깨끗한 연못을 오염시키듯이, 타락의 유해한 영향은 창조 세계의 모든 영역을 더럽혔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세상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이 아니라는 그것이니라.”(약 1:27).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벧후2:20).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 그런데, 문제는 이런 성경 구절들을 잘못 이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의 ‘세속적인’ 생활 양식에 대한 거부를 마치 ‘타계적’(他界的)인 생활 양식을 권면하는 것처럼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범주에 기본적으로 교회, 개인적 경건, 그리고 ‘거룩한 신학’으로 이루어지는 ‘성스러운’ 영역 밖에 있는 모든 것을 포함시켜서 창조 세계를 소위 ‘거룩한 영역’과 ‘세속인 영역’으로 잘못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많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세속적인’ 영역들을 세속주의적 세력에 내어 주게 만들었습니다. 월터스(Albert Wolters)의 지적과 같이 이런 ‘두 영역 이론’에 물든 교회야말로 서구의 급속한 세속화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장본인이라는 비판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만일 정치와 산업, 예술, 언론을 본질적으로 ‘세속적’, ‘세상적’, ‘속된’ 영역으로, 또 ‘자연적 영역’의 일부로만 낙인 찍는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문화에서 인본주의의 물결을 더 이상 효과적으로 막아 내지 못하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적인 문제는 이들 성경 본문에서 말하는 세상(world)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용어는 성경에서 실제로 여러 가지의 상이한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세상은 우주(universe), 육지(earth), 사람이 거주하는 지구(inhabited earth) 또는 지구의 대부분의 사람들(most people on the earth)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부정적인 의미의 세상은 신학자 헤르만 리델보스가 말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 밖에서 죄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구속되지 못한 삶의 총체”(the totality of unredeemed life dominated by sin outside of Christ)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죄성이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굽게 하거나 비틀거나 왜곡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세상이라는 의미입니다. 부정적인 의미의 세상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죄에 오염되어 있는 창조 세계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오염되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라는 것은 일부 크리스챤들, 예컨대 애미쉬(Amish)와 같은 일부 수도사들이 하는 것처럼 사회로부터 은둔하는 삶을 살거나 문화와 접촉을 최소화 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창조 세계를 왜곡시킨 모든 것을 인식하고 여기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저항하면서 사회를 변혁시키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적 세계관은 마치 종교가 개인구원의 문제와 같이 하나님과 관련된 인간의 사적 생활에만 관계가 있고, 인간과 인간의 사회 관계와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종교와 사회 생활이 분리될 수 있다고 결코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적 관점은 개인 생활은 물론 사회 생활 전체가 하나님께 속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임무는 사회에 완전히 속한 자로서의 삶을 살거나, 아니면 사회로부터 절연된 금욕적인 수도자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 생활의 소용돌이 한 복판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누리고 즐기며 살아가되 그리스도의 통치권을 높이며, 복음의 변화시키는 능력이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누룩과 같이 내부로부터 나타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삶의 양태를 종교개혁자들은 한 마디로 “우리는 이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은 아니다”(We are 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과 다른 여러 가지의 가정적 미덕들, 자신이 할 일에 충실하는 것, 우애, 충성, 검소, 정직 등과 같은 수많은 사회적 미덕들은 사실상 그리스도인들이 사회변혁적인 삶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방법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독특한 달란트를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가능한 한 최고 정도까지 개발할 소명과 특권, 책임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2-04-20
  • [김성수 총장] 영유아가 나라의 미래다!
    몇 년 전 미래 사회의 모습을 그린 영국의 한 소설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내용인 즉 현대사회의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로 인해서 인형과 유모차 제조 산업이 각광받는 미래 산업으로 각광받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초롱초롱한 눈빛의 아이들이 없는 텅 빈 학교 교실과 해맑은 웃음을 머금고 뛰노는 순박하기 그지없는 아이들이 없는 학교 운동장과 동네 놀이터는 조용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느껴집니다. 결혼한 젊은 부부가 유모차에 인형을 싣고 산책하는 모습을 그린 장면은 읽는 이로 하여금 소름을 끼치게까지 만듭니다. 애기를 출산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기를 갖고 양육하고 싶어 하는 모성애마저 제거할 수는 없으니 애기를 대체할 수 있는 인형산업과 유모차 산업이 각광을 받게 된다는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이 공상적인 이야기가 우리 사회에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동네 곳곳에 산아제한을 독려하는 표어들이 많이 붙어 있었습니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덮어 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하나씩만 낳아도 삼천리는 초만원!”이 당시에는 우리 나라의 합계출산율(가임 여성 1명이 평생 낳는 자녀수)이 6.0명이었습니다. 한 여성이 평균 6명씩 아기를 낳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끔찍한 출산제한 구호가 등장할 만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구호가 등장한지 반세기만에 우리 사회는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과 가장 빠른 인구 고령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한국개발연구원의 한 보고서에 의하면 우리 사회의 합계출산율은 1970년 4.53에서 1980년 초 인구 대체율인 2.1 이하로 떨어진 후, 계속된 출산 감소로 2004년 1.15명, 2017년 1.05명, 2018년에는 0.98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합계출산율이 0명대인 국가는 우리 나라가 유일하다고 합니다. 출산율 하락은 곧 다시 학령인구 감소로 이어지게 됩니다. 학생이 없어 문을 닫는 학교가 많아지게 되고 생산연령인구 또한 감소하게 되는 암울한 전망이 현실이 되고 가고 있습니다. 학령인구가 줄어들면서 앞으로 2년 뒤에는 전국 대학 70곳 이상이 폐교 위기에 처할 것으로 교육부는 전망하고 있습니다. 의과대학과 간호대학 등 취업이 비교적 잘 되는 학과를 제외하고는 많은 학과들이 정원을 채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는 또한 건강보험 및 연금 등 과중한 노인부양 문제를 야기 시킬 뿐만 아니라, 경제성장을 뒷받침할 젊은 노동인력의 부족 등 심각한 사회 문제를 야기 시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는 다양한 방법으로 출산을 장려할 수 있는 정책을 개발해 내어야 합니다. 소득수준이나 노동시장 참여 등의 조건 없이 5세 이하의 자녀가 있는 가정에 일정액의 양육보조금을 제공하거나 출산친화적 세제 도입, 출산 및 육아 휴직 등의 방법은 출산과 노동공급을 동시에 장려하는 방안이라는 보고서도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자녀가 있는 경우 자녀수에 따라 과세표준을 낮춰 주는 소득공제나 세액을 감면해 주는 출산 친화적 세제는 출산 장려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방안으로 적극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세제의 경우 피부양자 공제 및 교육비 공제 등으로 자녀수에 따른 공제 혜택을 주고 있으나 그 혜택은 매우 한정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이제는 미국의 자녀 및 피부양자 세액공제와 근로소득장려세제, 영국의 자녀세액공제와 근로소득장려세제 등 출산친화적 세제와 같은 다양한 방법을 도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정책 등은 정책 비교를 위한 모의실험에서도 모두 긍정적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사회 문제들은 정치권이 관심을 가지고 해결해 내야 할 본질적인 문제들입니다. 그런데도 곧 물러나야 할 현직 대통령과 앞으로 5년간 국사를 맡아야 할 당선인의 힘 겨루기 모습은 국민들을 답답하게 만들고 때로는 속이 터지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대통령 집무실을 옮겨야 할 피치못할 이유가 있으면 국민들에게 좀 소상히 밝혀서 왜곡되거나 과장된,또는 가짜 뉴스가 떠 돌지 않도록해야 합니다. 봄 벗 꽃이 피기 전에 청와대를 국민들에게 돌려주지 않아도 되니까 좀 더 본질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대통령 부인 의상이 178벌이니 구두가 몇 컬레라는 허접스러운 뉴스도 정말 우리를 짜증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대통령 부인이면 더 검소한 생활 모습을 보이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등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온갖 소리들이 다 들립니다. “평생에 옷 몇 벌 갖고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마르코스 부인 이멜다하고 꼭 같네…”, “운동화한 개 사면 2년은 신는데…”, “육영수 여사가 한복 입으면 우아하기라도 한데…”, “대통령이 왜 사채는 빌려 쓰느냐?”. 정치인들의 언행도 너무 저질스럽습니다. 청와대 이전을 반대하면서 청와대 지붕을 붉은 색으로 물들여 페이스 북에 올리는 모습도 참 치졸하고, 여당과 야당 대변인들의 담화에도 합리성과 고상함이 없습니다. 이제는 정치인들은 물론 우리 모두가 좀 품격이 있는 대화를 나누고 우리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함께 고민하며 해결책을 모색하는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혼란한 국제정세를 보면서 공의와 샬롬의 가치를 구현하는 정책을 구상하고 젊은 이들이 일자리를 마련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회, 오염된 하수를 식수로 사용해야 하는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생각하고 가난과 질병에 허덕이는 지구촌의 어려운 나라 백성들을 가슴에 품을 줄 아는 선진사회의 가치관을 구현해 나가야 합니다. 출산장려의 보다 근본적인 정책도 결국은 영유아에 대한 국민 모두의 가치관 변화를 모색하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아동학대와 낙태, 어린이 유괴와 영유아 살해와 같은 생명경시 풍조를 흉악한 범죄로 단정하고 추방해야 합니다. 모든 종교는 가정을 중요시하고 자식을 귀하게 여기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자식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고 했으며,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에 있는 화살과 같아서 이것이 그의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며 성문에서 원수와 담판할 때에도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CTS(기독교TV)가 벌이는 “영유아가 나라의 미래다!”는 출산장려운동은 찬사를 보낼만합니다. 이제 한 달 안에 178벌의 옷을 정리해야 하는 대통령 부인과, 청와대 집무실 이전을 위해 예비비를 받아내야 하는 대통령 당선인 모두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젊은이들이 직장을 갖고 결혼을 하여 애기를 가지고 단란한 가정을 꾸밀 수 있는 소망 있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 지 진지하게 한번 구상해 볼 수 있기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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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05
  • [김성수 총장] 공의가 하수 같이…
    현대사회는 과학과 과학 기술 등 여러 면에서 굉장한 승리를 쟁취한 사회이면서도 동시에 전례 없는 부정과 부패, 불공정, 불의, 고통 그리고 비극에 깊이 빠져있는 세계이기도 합니다. 방대한 선택의 범위를 구가하면서 자국의 시민들은 거대한 자유를 누리게 하는 바로 그 정부가 전 세계적으로 수십억에 달하는 사람들을 영속적인 가난의 상태에 머물도록 만들고,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정치테러와 고문이 그들의 항존적 환경이 되도록 지원하거나 그러한 불의를 자행하는 부정의한 현실이 바로 현대사회의 한 심각한 비극이기도 합니다. 우크라이나의 비극을 보면서 우리 모두는 함께 분노하고 가슴 아파하며 하나님의 공의가 하수 같이 흐르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하늘의 평강(샬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공의가 없이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평강의 삶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기쁨과 떨림과 환희가 있는 샬롬은 공의로운 상태 하에서만 피어날 수 있습니다. 평화를 깨뜨리는 많은 조건들과 상황들은 공의도 마찬가지로 깨뜨려 버립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공의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상호간의 의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회는 공의를 추구하는 사회입니다. 이와 같은 사회는 언제나 샬롬의 사회를 지향합니다. 그러나 공의를 추구하지 않는 사회는 샬롬의 성취를 가로막습니다. 예를 들어, 방직 공장 안에 어린아이들을 가두고, 자연 자원들을 함부로 낭비함으로 후손들로부터 그것을 착취하며, 자국 영토의 확장을 위해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국가는 불의한 국가이며, 이와 같은 사회와 국가는 공의를 파괴하며 필연적으로 샬롬의 성취를 가로막는 흑암의 세력입니다. 그렇다면 공의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공의라는 단어를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냉담하고 원칙을 고수하는 비인간적인 어떤 것으로 생각합니다. 공의와 관련하여 연상되는 것은 재판 과정, 법적 절차, 감옥 등과 같은 단어들입니다. 그러나 공의는 본질상 권리와 관계가 있습니다. 공의와 권리는 사실상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자신의 권리를 향유할 수 있을 때 그 사회는 공의로운 사회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권리라는 단어 역시 공의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다소 냉담하고 비인간적인 어떤 것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권리와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연상하는 것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 천부적 인권, 유엔 회원국의 권리, 권리 헌장 등과 같이 다소 추상적이며 고양된 권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권리의 의미를 공의와 관련하여 아주 다른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 개인이 어떤 것에 대해 권리를 가진다라고 할 때 그것은 윤리적으로 합법적인 권리, 그것을 실제로 향유함에 대한 주장, 그리고 그 어떤 것을 누림에 있어서 직면할 수 있는 위협으로부터 보장받을 것에 대한 주장을 의미합니다. 권리는 다른 이에 대해 윤리적으로 합법적인 권리입니다. 권리는 다른 이에 대해 의무와 책임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모든 책임이 권리와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모든 권리는 책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권리는 또한 그것을 실제로 누림에 대한 주장입니다.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된다고 하더라도 그 권리를 실제로 향유하지 못하면 그 법은 공허한 것입니다. 그리고 권리는 그 어떤 것을 누릴 때에 일반적이거나 심각한, 그러나 고쳐질 수 있는 위협으로부터의 사회적보장을 주장합니다. 위협에 대해서 보장하라는 주장을 권리로 보는 것은 권리가 사회에서 약자와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구상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권리를 우리는 자기 방어의 권리, 자유의 권리, 발언과 참여의 권리, 그리고 안전과 생계의 권리라는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안전과 생계의 권리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안전과 생계권은 그것이 없다면 모든 다른 권리가 의미가 없어지며, 기본적인 삶을 보장하는 권리라는 의미에서 기본적인 권리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서구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대부분의 다른 권리들보다 더 근본적입니다. 언론의 자유는 그것이 얻어지는 만큼 삶에 유익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이도 많은 다른 권리를 즐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안전과 생계권보다는 임의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전과 가난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관용의 문제가 아니라 권리의 문제임을 알아야 합니다. 안전을 위협받는 자들과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은 살롬의 성취를 위한 필수적인 조건과 같은 것입니다. 부유한 자가 기아에 있는 허덕이고 있는 사람들을 알고 도울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는 육체적으로 그 어려운 자를 공격하는 것만큼 그 주린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인식한다는 것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겠지만, 이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공의에 관한 책입니다. 구약의 모세 오경과 선지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공의를 요구하시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서 공의에 대해 말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사람들은 고아와 과부들, 나그네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한 사회에 공의가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실제적 원칙은 공의가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미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공의가 요구하는 것은 고아와 과부들, 나그네들, 그리고 가난한 자들과 같이 한 사회의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그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가지고 자신의 공정한 몫을 갖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해하는 공의의 본질은 현대 서구사회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공의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우리는 공의와 권리의 문제를 인간 존재의 아주 섬세한 조직과 같이 가장 근원적인 것에서부터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무참하게 짓밟히고 있는 작금의 국내외 정세를 보면서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희생 제물이나 감언이설의 의식이 아니라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흐르게 하라”(암 5:24)는 것임을 갈파했던 아모스 선지자의 호소를 다시금 가슴에 새길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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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22
  • [김성수 총장] 경향성 학습의 의미와 중요성
    미국 그랜드 래피즈(Grand Rapids) 주 미시간(Michigan)에 소재하고 있는 칼빈대학교(Calvin University)의 이념적 기초를 놓은 학자로 존중받고 있는 니콜라스 월터스톨프(Nicholas Wolterstorff) 박사는 1970년대에 경향성 학습(Tendency Learning)을 강하게 주창한바 있습니다. ‘경향성’이란 나타나 있는 어떤 모습이라기 보다는 숨어 있는 속성입니다. 이것은 평소에는 표면적으로 잘 나타나지 않지만 어떤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나타나는 특성과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면,설탕을 물에 넣으면 설탕이 녹고, 유리에 압력이나 충격을 가하면 유리가 깨어지며, 자석에 쇠붙이를 가까이 하면 자석은 그 쇠붙이를 끌어 당깁니다. 이때 ‘녹는 성질’, ‘깨어지는 성질’, ‘끌어당기는 성질’ 등이 바로 경향성이라는 속성입니다. 경향성 학습이란 ‘학습이나 훈련 과정의 결과로 학습자편의 이와 같은 어떤 경향성을 증진시키거나 감소시키는 학습’을 의미합니다. 월터스톨프가 경향성 학습을 주창한 이유는 교육의 목적은 단순히 관점이나 사고를 형성해 주는 것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형성해 주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외형적 표식을 떠벌리거나 자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 시장으로 재직 당시 부산지역 교계 지도자 초청만찬회에 강사로 초청된 자리에서 “커피 한 잔 놓고 오랫동안 기도하는 분들 중에 신뢰할 수 있는 분은 주변에서 별로 보지 못했다”고 말하여 폭소를 자아낸 적이 있습니다. 평소 바쁜 일정 속에 시장실에 찾아 온 교계 인사 가운데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길게 기도할 때는 정말 답답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냥 흘러듣기에는 무엇인가 뼈가 있는 말처럼 들립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유별스럽게 표시를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을 실천해야 하는 어떤 상황이 갖추어졌을 때 그리스도인 됨의 숨은 속성을 어김없이 나타내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풀어 준 사마리아인에 대한 주님의 비유는 바로 우리의 신앙이 행동하는 경향성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중요하게 제기되는 문제는 인간의 행동 경향성을 어떻게 책임적으로 형성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월터스톨프에 의하면 여기에는 훈육, 모델링, 그리고 이유 제공이라는 세 가지 중요한 전략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의 행동 방식에 영향을 주기를 원한다면, 긍정적인 행동에는 보상을 주고 부정적인 행동에는 불유쾌한 결과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 분명히 도움이 됩니다. 또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모범적인 행동은 학습자의 경향성을 형성하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는 이유와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방법 역시 경향성 형성에 도움을 줍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문제들 중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전체 인구의 25%를 차지하고 교회 수도 날마다 늘어가고 있는데 우리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교회의 영향력은 점점 더 감소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미국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넓고 깊은 바닷물을 짜게 하는 것은 0.3%의 소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독교를 표방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나 행사가 없어도 신앙을 실천해야만 하는 어떤 상황에 부딪쳤을 때 자신의 신앙을 삶 속에서 어김없이 구현할 수 있는 행동 경향성을 나타내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어야 부패해가는 사회와 문화를 변혁시킬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사회가 차세대를 향해서 이와 같은 행동 경향성을 형성시켜줄 수 있는 효율적인 학습 전략을 구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성세대는 다음 세대를 훈육할 수 있는 권위를 상실해 버렸으며, 말과 행동에서 모범을 보여줄 수 있는 모델링으로서의 역할도 상실했고, 또 왜 그런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거나 행동하지 않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는 능력도 상실해 버렸습니다. 지금은 언약의 자녀들을 위한 신앙교육에 관심을 갖는 부모와 교사된 우리들이 경향성 학습의 의미와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할 때입니다. 현대교회는 특별히 세상을 향해서 잘못된 행동을 꾸짖고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선지자적 용기와 권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삶의 현장 속에서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모델링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우리의 신앙은 세상과 절연되거나 세상도피적인 삶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그리고 세상을 통해서 구현되어야 합니다. 우크라이나 백성들이 악마와도 같은 한 사람 독재자로 인해 어린아이들을 포함해서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금 받은 고귀한 생명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모델링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여주어야 우리의 언약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유별나게 떠벌리지 않아도 자신들의 신앙을 구현해야 하는 상황에 부딪치게 되면 그리스도인 됨의 정체성을 어김없이 드러낼 수 있는 신앙의 용사들로 양육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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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3-08
  • [양대식 목사] 원망을 들으시는 하나님
    인간은 누구나 원망하면서 살아갑니다. 원망은 인간의 죄성입니다. 원망보다 감사해야 합니다. 원망도 습관입니다. 원망을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기 16:8-9, “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잊어버리고 지금 힘들다,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하였습니다.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모세를 원망하는 것은 모세를 세우신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하게 된 이유 중의 하나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입니다. 우리가 불평하고 원망하는 말을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원망은 전염됩니다. 가정에서 한 사람이 원망하면 나중에 모든 사람들이 원망하게 됩니다. 욕심이 많은 자가 원망을 많이 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원망은 불신앙입니다. 믿음이 적어질 때,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원망 대신 감사하는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감사하는 말도 들으십니다. 감사의 말, 감사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감사할 때 원망을 버리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시험에 들고, 시험에 들면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원망은 부정적인 삶이고, 감사는 긍정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원망이 없는 삶 전체이셨습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감사하셨습니다. 출애굽기 16:7,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원망하느냐” 원망 제목을 찾지 말고 감사 제목을 찾아야 합니다. 믿음이 병들고 식어질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원망하고, 환경을 원망합니다. 빌립보서 2: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베드로전서 4: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고린도전서 10:10,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야고보서 5: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주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원망을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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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11
  • [양대식 목사]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인생의 삶에 수많은 사건, 고난, 즐거움 등이 있는데 지나고 보면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의 삶에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셨지만 수많은 고난도 있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서의 삶, 억울하게 누명쓰고 감옥에 들어가고, 가까운 형제들에 의해 구덩이에 빠져 죽게될 위기, 애굽으로 팔려 간 일...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고난이 오히려 요셉의 삶에 유익을 얻게 된 것을 요셉은 깨달았습니다.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합니다. 요셉은 수많은 고난 후에 리더십이 견고해졌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는 어려움 때문에 죄수들을 만나게 되고 꿈을 해몽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계기가 되어 총리가 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이때 요셉의 깨달음은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시구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체험하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속에 고난을 당할 때는 “왜 내게 이런 고난이 있는가?” 원망하기도 하는데 지나고 보면 그때 고난이 내게 유익했구나!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신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삶속에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나중에 하나님께서 합동하여 유익을 이루시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지막 결과를 더 유익하게 해주십니다. 요셉의 신앙,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요셉이 자기를 구덩이에 빠뜨려 죽이려고 했던 형제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비결은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 어떤 반응을 나타내게 될까요? 마음이 넓어지며 용서하게 됩니다. 미움보다 사랑하게 됩니다. 긍정적으로 되며 매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염려가 적어지게 됩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안이 임합니다.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합동하여 유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고난도 지나고 보면 감사제목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믿는 자는 자기를 힘들게 한 사람까지 위로해주고 격려해 줍니다. 창세기 50: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고난중에 있는 요셉의 삶을 위로해 주시고 총리가 되는 상을 주셨습니다. 요셉이 축복받음으로 요셉을 죽이려고 했던 형제들도 잘 사는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선하고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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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8
  • 쉴만한 물가[양대식 목사] 범사에 형통하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형통의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삶을 범사에 형통하게 해 주셨습니다. 범사에 형통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복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은 큰 은혜가 됩니다.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형통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형통의 복을 주십니다. 형통은 성공입니다. 성공하는 인생이 있고, 실패하는 인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공을 주셔야 합니다. 전도서 10:10, “철 연장이 무디어졌는데도 날을 갈지 아니하면 힘이 더 드느니라 오직 지혜는 성공하기에 유익하니라”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어 성공하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지혜가 제일입니다. 시편 1:1-3, “1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는 의미는 하는 일마다 성공한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수아 1:7-9, “7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9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사는 자에게 형통, 성공의 복을 주십니다. 형통의 의미가 성공이라고 영어 성경은 가르쳐 줍니다. 형통은 고난이 없는 것이 아니고 고난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는 것이 형통입니다. 요셉이 고난당하고 누명 쓰고 감옥에 있을 때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셨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는 것이 형통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해 주시니 고난을 잘 견뎠습니다. 위기에서 건짐 받고, 감옥에서도 꿈을 해몽하고, 꿈과 비전을 가지고 감사하면서 살았습니다. 주인 보디발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워주셨습니다. 애굽의 종이었던 자가 애굽의 총리까지 됩니다. 천대까지의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머리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심이 범사에 형통하게 되는 삶의 축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범사에 형통하게 해 주셨습니다. 범사에 형통한 축복을 받은 자는 자신만 복 되게 살지 않고 축복의 유통자가 되는 삶입니다. 요셉 때문에 애굽 사람들이 복을 받았습니다. 참된 형통의 복은 받은 복을 나누면서 사는 삶입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잘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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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8-26
  • 창원시 기독교 연합회 6.25 구국성회 설교문
    1. 코로나 펜데믹이 18개월 동안 계속되고 있고 아직도 끝이 안 보인다. 국가도 어렵고,기업도 어렵고, 국민들도 어렵고 교회도 어렵고 성도들의 어려움도 말이 아니다. 혹자는 6.25 전쟁 때보다 더 어렵고 힘든 것 같다고 한다(?) ① 그런데 이런 끔찍한 일이 왜 생기게 됐을까? 잠6: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국가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하셨는데 거기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 ㄱ.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믿음으로 깨어 있으라고 하셨다. 벧전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ㄴ.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와 교회안에 알곡을 고르시는 것이다. 마3: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을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② 코로나 펜데믹이 무엇 때문에 왔던지 우리는 하나님께 회개해야 산다. 눅13: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 ㄱ.우리는 하나님께 무엇을 회개해야 하는가? a. 교회와 성도가 “소금의 맛”을 잃어버려 세상의 소금이 못되고 사람들에게 버림 받고 땅에 떨어져 짓밟히게 됨을 회개하라 눅14:34~35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땅에도 거름에도 쓸데 없어 내어 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하시니라.아멘 b. 천국소망,부활소망을 잃어버리고 육신의 것,세상의 것만 위해 살고 있음을 회개해야 한다. 골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으셨느니라.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떠한 죄를 범했어도 하나님 전에 나가서 진실하게 회개하면 들으시고 다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그 모든 고통에서 구해 주신다.필독(왕상8:37~40) 2. 그리고 우리나라는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시33:12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로 자기에 하나님으로 삼았다는 것은? ①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섬기는 것이다. ②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③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하나님께만 구하는 것이다. (1) 황송하게도 “대한민국”은 이 믿음 위에 세우주신 나라이다. ① 구한말 세계 열강속에 이 나라가 망해갈 때 선교사들을 통해 복음이 들어왔다. 나라가 망하고 소망이 없을 때 0.8% 밖에 안되는 기독교는 이 나라를 살렸다. 3.1 운동, 상해임시정부 수립,독립운동,문맹퇴치,계급철폐,남녀차별철폐,미신타파,물산장려운동,농촌계몽,거룩운동(금연,축첩폐지,정직) ② 일제 치하에서 해방시켜 주신 후에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만들어 주셨다. ㄱ. 1948.5.31. 제헌국회에서 198명의 의원 중 이윤영 의원(목사)이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고 시작하였다. ㄴ. 1948.7.27.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만들어 주셨다. ㄷ. 1948.8.15. 대한민국의 설립을 공포하였다. 1270년 몽골침략 이후 680년 만에 독립국가 된 것이다. ③ 그러나 유엔과 국제사회에서 독립국가로 인정받는 과정은 매우 힘들었지만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으로 축복해 주셨다. 1948.9.21.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유엔 총회에서 인준을 받으려고 장면,모윤숙,김활란,장기영,정일형을 파송함. 그러나 소련 대표의 집요한 반대 공작과 위성 국가들의 “필리버스터”로 유엔 총회가 폐회되기 전날까지 승인도 못 받고 분위기가 최악이었다. 그러자 장면 대표와 모윤숙이 새벽에 교회에 나가 눈물로 간절하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였는데 그 날 소련 대표가 발언을 하다가 목이 아파 밖으로 나가고 즉시 투표하여 찬성 48, 반대 6, 기권 1표로 대한민국이 한반도에 유일한 합법적인 국가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 이것이 2년 후 소련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 중 유엔이 참석 후 처음으로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결의하여 1950.7.7일 한국에 유엔군을 파견하게 된 것이다. ④ 이 기적도 6.25 발발 7일 후 7월 2일에 부산으로 피난 온 이승만 대통령이 모든교회와 성도들이 나라를 위해 비상기도를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초량교회와 모든 교회가 철야,새벽,금식 기도를 하고 시민들은 해운대 백사장에서 기도를 하였는데 7.7일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놀라운 축복을 주신 것이다.아멘! ⑤ 인천상륙작전도 금식기도의 응답이었다.(1950.9.15~19)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장로님이셨는데 세계 상륙사를 살펴보니 500번 상륙에 성공은 단 하나 ‘노르망디’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배 위에서 3일 동안 하나님께 금식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전쟁을 역전시킨 것이다.아멘! 이 외에도 이런 기적은 대한민국에 계속되었다. 1973년 빌리그래함 전도대회 때 ~ 남,북이 국가 경쟁력이 역전 됨 1974년 엑스플로74 ~ 땅굴 발견,안보를 튼튼하게 됨 1977년 민족복음화 대회 ~ 4,300만석(쌀) 100억불 수출 1980년 세계복음화 대회 ~ 88 올림픽을 유치하게 하심 1984년 한국기독교 100주년 ~ 대한민국이 중진국이 됨 1975~1985 10년 동안 기독교는 350% 성장 경제는 980% 성장함 이것은 세계 역사에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기적)이었다.아멘! 이 외에도 모든 것을 열거하려면 시간이 부족해서 그치려고 한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① 이 나라와 민족이 사는 길은 예수님을 구주로 잘 믿고 오직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나라가 살고 우리와 자손 만대가 사는 길이다. 그러므로 더욱 예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려고 힘쓰는 모두가 되자.아멘! ② 그리고 오늘도 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간절히 기도하고 교회에 돌아가서는 오늘과 같은 기도를 쉬지 않고 하도록 하자. ③ 그리고 빨리 이 나라가 복음화 되도록 예수님을 부지런히 전파하자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이 나라와 한국교회 그리고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에게 영원히 계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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