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행연월일 2026-07-2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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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수 총장] 칼빈의 추억 한 토막
    종교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 인상 깊은 장면을 회상한 것은 기록되어 있다. 테아 반 힐세마(Thea B. Van Halsema)가 저술한 『This was John Calvin(이 사람 존 칼빈)』이라는 책을 보면, 칼빈은 어머니와 함께 짧은 순례길을 걸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골짜기를 따라 두 시간을 걸은 끝에 도착한 곳은 예수의 외할머니로 여겨지는 성 안나의 유골이 안치된 사당이었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들어 올려, 금으로 장식된 관 안에 누워 있는 유골에 입을 맞추게 했다. 사당 안은 촛불로 밝고 향기로웠으며, 숭배하는 순례자들의 눈빛은 경건으로 가득했다. 어린 칼빈에게 그것은 아마 신비롭고 감동적인 체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이 장면을 바라볼 때, 그것은 단순한 종교적 정서 이상의 것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의 입에서 나오는 말 세 마디가 끝나기도 전에 성당의 종소리가 울린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성읍 생활의 중심이 되었던 중세 말 교회의 풍경은 단지 아름답고 경건한 외양만이 아니었다. 그 속에는 신앙의 본질이 흐려진 채 형식과 외적 숭배에 몰두한 영적 타락이 도사리고 있었다. 가톨릭 교회의 형식주의와 권위주의, 성유물의 과도한 숭배, 그리고 성직자들의 탐욕은 교회의 영적 본질을 흐리고 있었다. 성 안나의 유골만이 아니라, 세례 요한의 머리카락, 예수의 치아, 오병이어 사건의 빵 부스러기, 가시관 조각과 구약시대 만나의 조각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성유물이 사람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교회는 이러한 유물들을 통해 기적을 기대하고 은총을 얻으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자극했고, 성직자들은 이를 통해 물질적 이익과 권력을 얻었다. 더 나아가 성당과 수도원은 특정 유물의 진위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다투었으며, 이 논쟁은 지역의 종교적 경쟁심을 자극했고, 프랑스 의회조차 이를 조정하지 못할 정도였다. ‘성인’의 이름을 붙인 성당이나 수도원은 유골을 소유한 장소로서의 권위를 주장했고, 이는 종종 종교적 신비주의를 이용한 경쟁과 탐욕의 장이 되었다. 말하자면, ‘거룩’은 거래되고, ‘은혜’는 판매되었으며, ‘경건’은 형식으로 포장되었다. 이 모든 모습은 한마디로 ‘거룩함의 상업화’였고, 진리 대신 형식과 기적, 외적 경건에 목을 매던 교회의 실상이었다. 이러한 부패는 개혁자들로 하여금 교회의 본질을 되묻게 했고,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잉태하게 했다. 칼빈은 단지 교리의 개혁자가 아니라, 당시의 시대적 현실에 대한 깊은 통찰을 지닌 영적 개혁자였다. 그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함을 외쳤고, 유골과 형상과 건물 안에서가 아니라, 성령의 조명 아래 말씀과 신앙의 참된 삶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함을 강조했다. 그의 신학과 실천은 교회의 본질을 새롭게 정의했다. 교회는 권위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의 충실한 선포와 성례의 정당한 시행이 있는 곳이며, 무엇보다 복음이 살아 움직이는 믿는 자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문제는 과거의 부패가 오늘날에도 형태만 달리하여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교회는 더 이상 성인의 유골을 입맞추지 않지만, 또 다른 유물들을 만들어 숭배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 보아야 한다. 화려한 예배당, 웅장한 무대, 감정을 자극하는 조명과 음악, 유명 목회자에 대한 절대적 의존, 그리고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사역 성과들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성유물이 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때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실상은 인간의 욕망을 투영한 현대판 형식주의일 수 있다. 교회는 언제나 스스로를 돌아봐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 안에도 ‘가시관 조각’이 있다. 그것은 더 멋진 무대, 더 화려한 예배당, 더 대형화된 사역과 같은 것들이다. 물론 이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중심이 되어 하나님을 도구화하고, 복음을 수단화하며, 인간의 만족을 위한 종교 행위로 전락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촛불 아래에서 거룩을 잃고 있는 것이다. 칼빈이 외친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는 외침은 시대를 초월한다. 이는 단지 제도 개혁의 구호가 아니라, 매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위한 끊임없는 성찰과 순종을 요구하는 외침이다. 칼빈의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은 단지 과거의 회고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거울과 같은 통찰이다. 그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성유물 앞에서 입을 맞췄던 기억은, 우리가 누구의 손에 이끌려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지를 묻는 물음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여전히 순례 중이며, 여전히 방향을 선택해야 하는 길 위에 서 있다.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지금 누구를, 무엇을 숭배하고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멈추어 서는 것, 그리고 다시금 본질로 되돌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종교개혁의 정신이요, 오늘의 교회가 회복해야 할 신앙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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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0-30
  • [김성수 총장] 무관심의 절정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말 중에 “멍 때린다”는 표현이 있다. 고유한 우리말인 이 표현은 “아무 생각 없이 한곳을 멍하니 바라보거나, 의식이 잠시 멈춘 듯한 상태로 가만히 있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아무 뉴스에도 반응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한 적이 있을 것이다. 어느새 멍하니 휴대폰을 스크롤하고 있지만, 거기 담긴 전쟁과 죽음, 기후 위기와 삶의 절망적인 광경 앞에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이런 현상을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현대 사회는 너무 많은 것을 너무 자주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감정이 교묘하게 조작되며, 반응은 형식화된다. 심지어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피곤한 시대다. 바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그 시점이다. 이것을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무관심의 절정’이라고 불렀다. 이 무관심은 감정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감정을 과잉 소비한 끝에 마비된 상태다. 현대 사회는 모든 것을 이미지화하고, 의미로 포장하고, 감정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한다. 그런데 문제는, 너무 많은 자극과 너무 많은 반응이 반복되다 보면 오히려 아무것도 느낄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감정이 남아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관심이 있던 자리에 무감각이 남고, 연대하려던 마음은 차가운 피로감으로 굳어버린다. 오늘 우리는 매일같이 뉴스, 광고, SNS, 알림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지구 반대편의 절망도, 이웃의 눈물도 잠시 울컥했다가 이내 다른 화면으로 스치듯 지나간다. 더군다나 진짜는 없고 이미지만 판을 친다. 이제는 인간의 슬픔도, 정의도, 연대도 모두 기호화된 감정이다. 그것은 진짜처럼 보이지만 반복되고 조작되고 연출된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이것이야말로 현대인의 감정 소진이며, 이 무감각이야말로 가장 극단적인 무관심이라고 말한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감정 소진 상태가 점점 자연스러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의 무관심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고 여긴다. 냉소와 피상적 반응은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 된다. 지금 이 시대는 누군가를 위해 슬피 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슬퍼 보이는 모습”을 공유하는 것으로 충분한 시대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도다 함과 같도다.”(마태복음 11:16-17) 보드리야르가 진단한 것은 이것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것이다. 사회가 감정을 조작하고, 욕망을 설계하며, 공감의 언어마저 포장하는 구조 속에서 우리는 반응하는 법을 잃고 느끼는 법을 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조가 너무 익숙해져서 더 이상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 진짜 위기가 시작된다. “무관심의 절정”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각성해야 한다. 피로한 감정이 일상이 되었고, 감정 없는 반응이 습관이 되었을 때 우리는 진지하게 성찰하고 질문해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느끼고 있는가? 아니, 나는 아직도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가? 희망은 물음에서 시작된다. 감정을 회복한다는 것은 단순히 감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아파할 수 있는 능력, 누군가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일 수 있는 여백, 눈물이 마르지 않은 마음을 회복하는 것, 기호와 이미지에 휩쓸리지 않고 실재를 붙들 수 있는 용기를 갖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아직도 누군가의 고통 앞에 멈출 수 있다면 완전히 늦은 것은 아니다. 무관심의 절정 한가운데서 우리는 다시 ‘느끼는 연습’이 필요하다. 다시 사랑하고, 다시 분노하고, 타인의 고통에 다시 공감하고 연대하는 감정의 회복, 그것은 거창한 변혁이 아니라 아주 작은 감각의 틈에서 시작된다. 눈앞의 사람을 다시 바라보는 것, 뉴스 속 타인을 내 삶 안으로 초대하는 것, 멀리 있는 고통을 내 언어로 말해보는 것, 그렇게 우리는 다시 공감의 감정을 살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 감정은 우리를 조금씩 움직이게 한다. 반응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다시 붙들게 한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자리에서 다시 울컥하게 만들고,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게도 만든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지금, 우리는 감정을 회복해야 할 시간 한가운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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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9-09
  • [김성수 총장 ] 교육에 숨어든 문화 막시즘
    우리는 지금까지 학교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유용한 참된 지식을 배우는 곳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지난 수세기 동안 교육에 대한 이와 같은 신념에 대해 수많은 비판들이 제기되어 왔다. 이와 같은 비판들 중에는 교육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키는 비판들도 있었고, 교육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비판들도 있었다. 특히 교육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 과정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을 배우게 하는 것이라는 중요한 통찰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현대 교육이 그렇게도 중요하게 강조하는 이 ‘생각하는 방식’의 교육이 지켜야 할 경계선을 넘어서고 있는 것을 보면서 염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방식’은 때로 우리가 전통적으로 믿어왔던 가치들, 예를 들면 가정, 신앙, 성, 국가, 책임과 같은 소중한 가치들과 충돌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것을 단지 ‘세상이 변했다’고 넘기기 쉽지만, 그 이면에는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온 하나의 사상적 흐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문화 막시즘’(Cultural Marxism)이다. 문화 막시즘은 한마디로 말해서 교육과 문화를 통해 세상의 기존 질서를 바꾸려는 시도다. 이들은 정치 혁명보다 문화 혁명을 중요하게 여긴다. 고전 막시즘이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다면, 문화 막시즘은 “억압받은 소수자여, 깨어나라”고 말한다. 경제 계급 대신 젠더, 인종, 종교, 가족, 성적 지향 등 다양한 정체성이 투쟁의 중심이 된다. 그리고 그 가장 좋은 전파 수단이 바로 ‘학교’라는 교육의 현장이다. 한 초등학교 사례를 보자.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공립초등학교에서, 1학년 학생들에게 “남자와 여자의 차이는 단지 신체 구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느끼는 정체성이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교육이 시행되었다. 아이들은 “나는 남자지만 여자일 수 있고, 여자지만 남자일 수 있다”라고 적힌 그림책을 읽는다. 성경적 창조 질서에서 벗어난 이 가르침은, 아직 성 정체성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큰 혼란을 준다. 문제는 이 교육이 ‘포용성과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당연시된다는 점이다. 이런 교육에 반대하는 학부모는 ‘차별주의자’로 낙인찍힌다. 이것이 문화 막시즘의 특징이다. 표면적으로는 자유와 평등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이념만을 강요한다. 또 다른 예는 역사 교육이다. 과거에는 학생들이 학교 교육을 통해 미국 건국의 이상이나 민주주의의 발전, 인류 보편 가치에 대해 배웠다면, 오늘날에는 ‘식민주의’, ‘인종차별’, ‘억압의 역사’라는 틀로 모든 역사를 해석하는 시각을 학습하고 있다. 물론 경직화된 전통적인 교육에 대한 이러한 비판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균형이 무너지면서 또 다른 세계관을 주입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이러한 교육으로 인해 학생들은 ‘자신의 문화와 조상은 억압자였고, 자신은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죄책감 속에서 자라게 된다. 이는 건강한 시민의식이 아니라 분노와 분열을 키우는 왜곡된 교육이다. 이 역시 문화 막시즘의 전략이다. 공동체를 해체하고, 소속감보다는 투쟁심을 주입하는 방식의 이념적인 학습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교육 현장에서 종교적 표현은 점점 더 배척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한 공립 고등학교에서 한 학생이 발표 시간에 “하나님은 나의 인생의 방향을 이끄신다”고 말했을 때, 교사는 “종교적 언급은 교실에서 부적절하다”며 중단시켰다. 그러나 같은 수업에서 “성소수자의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발표는 장려된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검열되고, 특정 이념은 보호되는 이중잣대는 교육이 중립성을 가장한 왜곡된 편향이다. 이런 학습은 교육을 ‘무신론적 포용성’의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문화 막시즘은 이처럼 표면적으로는 평등과 자유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전통을 해체하고 하나님을 배제하는 세계관을 퍼뜨리고 있다. 그리고 그 핵심 무대는 바로 다음 세대의 영혼이 형성되는 자리인 학교다. 학교는 언약의 자녀들이 단지 수학과 과학, 언어만을 배우는 장소가 아니라, 무엇이 ‘정상’인지, 무엇이 ‘옳은 가치’인지, 어떤 것을 ‘꿈꾸어야’ 하는지를 배우는 장소다. 학교는 문화 막시즘이 침투하여 장악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세계관의 전쟁터다. 교육은 ‘억압의 고발’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귀하게 만들고, 공동체를 세우며, 창조 세계를 잘 돌보도록 양육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기독교 교육자들과 부모, 그리고 교회 공동체는 이제 깨어 있어야 한다. 문화 막시즘은 더 이상 대학 강의실에서만 머무는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자녀들의 교과서에, 동화책에, 학교 행사에, 교사 연수 프로그램에 은밀하게 침투해 있다. 우리는 교육의 자리를 다시 복음과 창조 질서의 언어로 채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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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08-13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2) (민12:11-16)
    미리암은 위대한 믿음의 여인이 맞습니다. 하지만 여선지자라는 위대한 칭호를 받은 후 신앙이 제자리걸음을 했습니다. 미리암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역사에 발맞추지 못하고 여전히 애굽에서의 사명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모세가 없는 40년 동안 여자로서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이 진짜 지도자인 줄 착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진짜 지도자인 모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교만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40년 만에 나타난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기절초풍할 일들을 일으킵니다. 세계 최강의 애굽과 바로도 모세 앞에 쩔쩔맵니다. 애굽을 초토화 시켜버렸고, 애굽의 장자를 죽여 씨를 말려버렸습니다. 여호와의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임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만 대면하시고 바다까지 갈라 마른 땅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미리암은 40년 동안 여 선지자로서 이스라엘을 영도해 왔지만 40년 만에 갑자기 등장한 모세의 위용 앞에서 입도 벙긋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선지자의 위치에서 볼 때 비록 인간적으로는 누나요 동생이지만 감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영적 권위를 지닌 모세였기에 고개 들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교회들끼리, 특히 목회자들끼리 묘한 질투심과 경쟁심이 있습니다. 곁의 교회가, 다른 교회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상대적인 박탈감을 갖습니다. 잘못되면 입은 안타깝다고 하면서 속은 이유 없이 고소하고 상대적인 만족을 얻습니다. 교회의 주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망각한 무서운 죄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이 교인들 사이에서도 발생합니다. 곁의 성도가 잘 되면 배가 아프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잘못되면 입은 위로하는 것 같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상대적으로 자신의 신앙과 믿음이 좋은 것으로 위로받고 착각합니다. 아주 나쁜 모습입니다. 악한 모습입니다. 교만의 극치입니다. 어쩌면 이것보다 더한 것이 목회자들끼리의 보이지 않는 견제와 경쟁입니다. 주변의 교회가 갑자기 성장하면 상대적 박탈감을 가집니다. 사람이다 보니 비교가 안 될 수 없습니다. 특히 가까운 교회에서 독보적인 성장을 보이면 심각한 스트레스까지 받습니다. 목사 자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의 중직자들이나 성도들도 자연스럽게 목회자에게 압박을 가합니다. 자신은 1년이 가도 전도 한 명 하지 않으면서 교회 부흥을 입에 올립니다. 십일조나 감사헌금은 고사하고 선교나 불우이웃이나 개척교회, 농어촌교회, 은퇴하신 목사님, 가난한 신학생들을 위해 특별헌금 한 푼도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재정을 입에 올립니다. 더 심각한 것은 설교자들의 교만입니다. 설교하는 사람이다 보니 설교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설교자의 훌륭한 설교에 은혜받기는커녕 허점과 잘못을 찾기에 바쁩니다. 그러니 설교에 발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현상은 모세를 대적하는 미리암의 아류들입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땀방울 하나, 눈불 방울 하나 다 주의 것입니다. 우리는 비교 대상도 아니요, 경쟁상대도 압니다. 성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며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가는 자들임을 잊어선 안 됩니다. 특히 목회자들은 아바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평생 잊어선 안 됩니다. 물론 아바타라 하지만 예수님의 아바타니 영광스럽습니다. 진짜 선지자, 진짜 목회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미리암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사실 미리암은 누구보다도 이런 사실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몰라서 범한 죄도 무섭지만, 알고도 범하는 죄는 더 무섭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단순히 그 사람의 성향이나 기질을 나타내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미리암의 교만은 모세의 통치를 방해했고, 이스라엘의 진행을 가로막았습니다. 감히 모세의 영적 권위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감히 같은 선지자였지만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교만은 이 모든 영적 권위 앞에서도 원망과 비방의 고개를 들게 합니다. 호시탐탐 모세의 허점과 실수를 염탐합니다. 교회도 은혜를 계산하는 성도가 있고, 실수와 잘못을 찾아내는 성도가 있습니다. 기회가 왔습니다. 구스 여자가 돌아왔습니다. 이전에 이미 정리된 문제인데도 교만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영적분력을 상실했습니다. 미리암은 십보라가 돌아오자 속에 숨겨놓았던 원망과 불평을 표출합니다. 원망에 사로잡힌 미리암은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사실까지 망각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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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8-07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1)
    성경 어디에도 미디안의 제사장 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는데 문제 삼은 장면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사실에 대해 그 어디에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하는 목소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사건 때문에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백성들이 구스 여인 십보라를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암과 아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통치에 십보라를 문제 삼지 못하도록 아예 입도 벙긋하지 못하도록 못을 박아버리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사명을 주셨고, 그 사명 감당하기 위해 애굽으로 오는 길에 느닷없이 모세를 죽이시려고 한 것은 구스 여인 십보라를 이스라엘 백성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임이 분명합니다. 분명한 이유는 할례를 행하여 모세를 살린 것에 있습니다. 이 장면은 오늘날 우리 같은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이의를 달지 못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를 발견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시려 하셨습니다. 완전한 모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이셨습니다. 완전히 죽이셨습니다. 그래도 십보라는 할례언약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 긴박한 순간에 할례를 행하면 남편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미디안 제사장의 딸과 비교도 되지 않는 신분입니다. 단순히 액면가로 볼 때 우리는 시아버지와 관계한 여인입니다. (마1:3)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우리는 우상의 신전에서 몸을 팔던 기생이었습니다. 우리는 과부요,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우리는 남편을 사지로 몰고 왕과 간음한 유부녀였습니다. (마1:5-6)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우리는 죄인입니다. 죄인인데 죄인인 줄도 모르는 죄인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답도 없으면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제 딴에 잘 사는 줄 알지만 무익한 인생이요, 단 하나도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입니다. 혀에는 속임만 있습니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습니다. 입에는 저주와 악독만 가득합니다. (롬3:10-14)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런 우리가, 그런 우리의 입이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도 달렸고, 예수님의 부활에 나도 부활했다고 고백합니다. 사탄이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의를 제기하고 문제 삼을 것이 수두룩한 우리입니다. 아니 우리는 문제 그 자체들입니다. 그런데 삼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합니다. 십보라가 할례 언약을 아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십보라가 할례를 행하여 남편을 살리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불가능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라고 입으로 시인합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것은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보라가 할례언약을 아는 것과 할례를 행하는 것과는 비교 자체가 안 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서십니다. (마10: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눅12: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받아들이는데 그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합니다. 문제 제기도 못합니다. 입도 벙긋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의 예배 자리에, 예수님께서 친히 집례하시는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앉혀주십니다. (계12:22-23)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이런 은혜를 받은 성도입니다. 그래도 원망하고 비방하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은 완전한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할례를 시행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인 교회에 거하며, 주일마다 하늘의 성찬의 자리에 참여하는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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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10
  • [김경헌 목사]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15) (민12:1-3, 마5:5)
    하나님의 통치 방법을 비방하며 반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게는 영육 간에 문둥병에 걸리는 심판과 진영으로부터 격리의 심판이 주어집니다. 더 큰 문제는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하나님께서 떠나가시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에게도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가는 행진의 발걸음이 중단되어 버리는 심판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 얼핏 보면 하나님께서 공평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미리암의 비방이었는데, 그럼 미리암만 심판을 받으면 되는데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가시고, 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이스라엘의 행진을 중단시키셨는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으로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미리암은 먼저 아론을 끌어들였고, 그다음에 누구를 끌어들였을 것 같습니까? 미리암의 비방에 아론과 함께 70장로들이 동참을 한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모세의 짐을 함께 담당하도록 세움 받은 70장로들이 미리암의 원망에 동조하여 비방과 반역의 깃발을 함께 들었던 것입니다. 비방을 주도한 사람은 미리암이지만 아론을 비롯하여 모든 지도자들이 미리암의 비방에 동참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외톨이가 되어버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외톨이가 되어버린 모세를 향하여 온유한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온유에 대한 이해를 잘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니 온유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기록을 우리의 일상적인 기준과 선입견으로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입니다. 사전은 온유를 “사람의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움”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들도 성경에 기록된 온유를 그 정도에서 이해해 버립니다. (사32:7)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하는 가련한 자가 바로 온유한 자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온유한 자는 바른말을 해서 악한 자들로부터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당하는 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모세를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 하더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비방할 때 모세는 그 비방에 굴하지 않고 바른말을 했다는 뜻입니다. 미리암을 필두로 아론과 70장로들과 백성들이 함께 동조하여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했지만 모세는 바른 말로 그들과 맞서 싸웠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자란 거짓으로 공격하는 자들에게 바른말 하는 자를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온유한 자란 표정이나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의 거짓된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천국 복음을 선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마11:29)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를 배울 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이 온유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는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 주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온유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는 말씀은 모세는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는 뜻입니다. 다윗에게는 37 용사가 있었습니다. (삼하23:39)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총수가 삼십칠 명이었더라 이 정도 되었으니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통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주권적인 역사를 이루시는데 다윗의 37 용사를 사용하셨습니다. 다윗은 37 용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성취시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시18:1-3)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계획된 거짓으로 공격을 해도 굴하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비방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5:5)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여호와께서는 미리암과 함께 한 반역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는 악한 자들이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멸하려 해도 바른말을 하는 가난한 자의 말도 들으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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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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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수 총장] 한국 교회와 정치적 언어의 오용
    오늘날 한국 사회와 교회 안에서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적 언어가 일상적인 대화와 판단의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용어들이 언제부터,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었는지를 묻지 않고,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도 못한 채, 마치 영적 분별력의 기준이라도 되는 것처럼 남을 판단하고 선 긋는 데 활용되는 현실은 심각한 문제를 내포한다. 더구나 이런 언어들이 복음의 본질을 흐리게 하거나 신자의 정체성을 정치적 진영 논리로 가둬 버리는 일까지 발생하고 있음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교회 안에서 “보수”는 종종 정통 신앙, 바른 신학, 성경 중심이라는 뜻으로 등치되며, 동시에 정치적 “우파”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반면 “진보”는 자유주의 신학이나 교회 해체적 사상과 동일시되며, 정치적 “좌파”와 혼합되어 경계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있으며, 성경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렵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시의 정치 진영(열심당,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 모든 정치적·종교적 진영 논리를 초월하여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선포하셨다. 예수님의 메시지는 종종 당시 사회 구조의 근간을 흔들었고, 때로는 보수적 전통을 해체하며, 때로는 율법의 정신을 더욱 깊이 회복시키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그는 복음으로 급진적이셨고,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질서 안에서 거룩한 보수주의자이기도 하셨다. 이처럼 복음은 좌우 이념의 잣대로 포섭될 수 없는 초월성과 급진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 “좌파”와 “우파”는 프랑스 대혁명 시기의 국회 좌석 배치에서 기원한 분류로,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복지, 경제 정책, 국가 권력의 역할, 젠더 이슈, 외교안보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나뉜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는 상대적이며 문화적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미국에서 진보적이라 여겨지는 가치가 유럽에서는 보수에 속하기도 하고, 한국에서는 특정한 역사적 경험(예를 들면, 6·25 전쟁과 반공주의, 군사독재와 민주화 운동)을 통해 더욱 복합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이러한 정치적 용어를 성경과 신앙에 무비판적으로 이식하게 되면, “우리는 우파니까 하나님 편”이라는 착각, 혹은 “진보가 약자 편이니까 교회도 좌파여야 한다”는 이념적 오류에 빠지기 쉽다. 한국 교회 안에서도 이러한 오류가 나타난다. ‘보수 교회’는 종종 교리적 정통성과 정치적 반공주의를 동일시하고, ‘진보 교회’는 사회 참여나 인권 감수성을 복음 실천으로 등치시킨다. 그러나 복음은 이 두 영역 모두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보수주의가 가진 물질주의적 탐욕, 국가주의적 배타성,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관심은 성경의 정의와 자비의 명령에 어긋나며, 진보주의가 갖는 도덕적 상대주의, 인간 중심주의, 성 윤리 해체는 창조 질서와 성경적 인간관에 반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라고 말씀하시며, 정치 권위에 대한 순종과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동시에 선언하셨다. 사도 바울 역시 국가 권위를 인정하면서도, ‘하늘에 시민권을 둔 자’로서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삶을 강조한다. 이는 기독교 신앙이 정치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회피하라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진영 논리에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모든 이념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시험하고 분별하라는 뜻이다. 따라서 교회는 성경에 비추어 좌파의 가치도, 우파의 가치도 모두 복음의 관점에서 비판하고 수용해야 한다. 이는 ‘중립적’이라는 말과는 다르다. 교회는 언제나 예언자적이어야 하며, 권력과 체제에 대해 진리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세상의 좌우 이념을 넘어서는 복음의 길을 제시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명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첫째, 정치적 언어를 사용할 때 반드시 맥락과 정의를 분명히 하고, 성경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둘째, 교회가 정치 참여를 할 때는 정당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자비, 창조 질서의 회복이라는 목적에 따라 선택과 행동을 해야 한다. 셋째, 좌우를 가르는 진영 논리로 사람을 분별하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보는 믿음을 회복해야 한다. 넷째, 신학교와 교회 교육 현장에서 ‘정치신학’과 ‘공공신학’에 대한 성경적 토대를 세워야 하며, 신자들이 비판적으로 세상 담론을 바라볼 수 있도록 지적 분별력을 길러 주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지금, 복음을 정치 이념의 도구로 사용하는 유혹 앞에 서 있다. 그러나 교회가 회복해야 할 정체성은 ‘우파 교회’도, ‘진보 교회’도 아닌 ‘하나님 나라의 백성 공동체’다. 이 공동체는 정의와 평화, 진리와 은혜로 세상을 비추되, 어느 정치 진영에도 복속되지 않는다. 그 길은 외롭고 손해 보는 길일 수 있으나, 바로 그 길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가신 십자가의 길이며, 참된 자유와 소망이 있는 길이다. 김성수 목사(탄자니아 아프리카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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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7-17
  • [김성수 총장] 진정한 화해와 포용의 삶
    어릴 적 비 오는 날 우산 세 개가 함께 걸어가는 동요가 문득 떠오른다. 유명한 동요 「우산」(작사: 윤석중, 작곡: 이계석)이라는 노래이다.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파란 우산, 깜장 우산, 찢어진 우산 좁다란 학교길에 우산 세 개가 이마를 마주 대고 걸어갑니다” 가난한 시절의 어린이들이 좁은 학교길을 함께 걸어가며 서로 어깨를 맞대고 우정을 나누는 정겨운 모습을 담고 있는 노래이다. “찢어진 우산”이 함께 걸어가는 장면은 마음을 참 따뜻하게 만들어 주면서, 화해와 포용과 ‘하나 됨’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사도 바울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4–16)고 설파했다. 초대교회의 가장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 중 하나인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해’를 다루고 있다. 초대교회는 대부분 유대인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중심이었고, 그들은 율법, 할례, 정결 규례 등을 고수해 왔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이방인들도 교회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들에게 그들도 자기들처럼 할례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요구했고, 이방인들은 그런 것 없이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다고 주장했다. 이 긴장과 갈등은 마치 ‘중간에 막힌 담’처럼 교회 공동체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고,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에는 이방인이 더 이상 들어올 수 없는 담이 존재했다. 그 담에는 “이 담을 넘는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는 경고문까지 붙어 있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물리적·사회적·영적 장벽을 향해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시다. 그리스도께서 그 담을 허무셨다.” 이것은 단지 종교의 벽을 허문 사건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 민족과 민족 사이, 자아와 타자 사이의 적대와 단절을 깨뜨리는 복음의 선포였다. 크로아티아 출신의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는 자신의 조국 발칸 반도에서 벌어진 끔찍한 내전을 지켜본 뒤, 『배제와 포용』이라는 책을 통해 현대 세계가 타자를 대하는 두 가지 왜곡된 방식, 즉 연결의 부정과 분리의 부정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연결의 부정’은 “나는 너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태도다. 인간은 본래 서로 얽혀 살아가는 관계적 존재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는 이 연결을 불편해하고 두려워하며 끊어내려 한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이 크로아티아인과의 수백 년간의 역사적 연결을 부정하고, 민족 정체성의 순수함을 유지하려 하면서 결국 학살에까지 이른 것이 그 대표적 예이다. 오늘날 우리도 “이민자와 나는 상관없다”, “저런 문화는 나와 상관없다”, “저런 사람은 교회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타인과의 연결을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공동체성과 인간다움을 함께 잘라내는 행위이다. ‘분리의 부정’은 이와 반대로, “네가 나와 다르면 안 된다. 나처럼 되어야만 받아들여 줄 수 있다”는 태도이다. 교회 안에서도 “당신이 우리처럼 예배하고, 우리처럼 옷 입고, 우리처럼 말할 수 있어야 가족으로 받아주겠다”는 보이지 않는 기준이 작동할 때가 있다. 이것은 포용이 아니라 동일성을 강요하는 폭력이다. 예수님은 억지로 유대인을 이방인처럼 만들지 않으셨고, 이방인을 유대인처럼 만들지도 않으셨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찢으심으로써, 두 존재가 그대로 존재하면서도 하나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교회는 바로 이 복음 위에 세워진 공동체이다. 다름이 위협이 되지 않고, 연결이 짐이 되지 않으며, ‘하나 됨’이 억압이 되지 않는 공동체,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진정한 ‘포용’이다. 우리 모두 타인의 다름을 지우거나 연결을 끊는 방식이 아니라, 경계를 인정하면서도 열린 공간을 내어주는 포용의 삶을 영위해 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원한다. 김성수 목사(탄자니아 아프리카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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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6-25
  • [이창교 목사]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자(빌2:12-18)
    얼마 전 6월 6일 현충일이 있었습니다. 6·25전쟁 당시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 땅에서 피를 흘리며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 냈습니다. 우리나라의 젊은이들뿐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젊은이들도 이 땅에 와서 땀과 눈물을 흘렸고,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놓았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수많은 희생 위에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그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살아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노인이 된 라이언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은 전우들의 묘비 앞에 섭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살았습니다. 당신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우리도 이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시면서까지 저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살았습니다. 비록 온전하지는 못했지만,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이 헛되지 않도록,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갈 책임이 있습니다. ### 하나님의 소원이 나의 소원이 되게 하라 빌립보서 2장 13절은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소원을 주시고, 그 소원을 따라 살아가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소원은 하나님의 소원이면서 동시에 나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나의 소원입니다. 나의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자신의 소원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필요한 것을 구하고,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성숙해질수록 기도의 내용은 달라집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찾게 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소원을 품게 됩니다. 하나님의 소원과 나의 소원이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 어떤 조건을 만족시킨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위로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이미 구원받았다는 사실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날마다 죄와 싸우며 믿음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험에 빠지지 않고, 선한 일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않으며, 죄 앞에 무릎 꿇지 않기 위해 영적 싸움을 계속해야 합니다.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애쓰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알고 계십니다. 때로는 이 사실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성숙해지면 이 부담은 ‘거룩한 부담감’이 됩니다. “성령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거룩한 부담감이 기쁨으로 다가오고, 즐거움으로 다가오고, 행복함으로 다가올 수 있을 때 이것이 신앙의 성숙함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말과 행동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부담감은 우리를 더욱 성숙한 믿음으로 이끌어 갑니다. ###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삶 저희 교회에 김필주 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장로님은 93세에 하나님 나라로 가셨습니다. 임종을 앞두고 제가 심방을 갔을 때, 장로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저 잘 죽을 겁니다. 93년간 주님 덕분에 잘 살았습니다. 이제 제가 할 일은 잘 죽는 것만 남았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죽느냐도 중요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천국을 소망하는 모습이야말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이와 같은 믿음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습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기 위해 애쓴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도 담대하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언젠가 주님 앞에 서는 날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에 부끄럽지 않게 살아 보려고 애썼습니다. 부족하고 온전하지 못했지만 최선을 다하다가 왔습니다.” ### 선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마태복음 5장 16절은 말씀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세상 사람들은 성도의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요셉의 주인이었던 보디발은 요셉을 통해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요셉은 종의 신분이었지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성실하게 섬겼고, 모든 일의 주어를 하나님으로 삼았습니다. 성도는 말보다 삶으로 복음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신앙생활을 잘하라고 말하면서 정작 삶으로 본을 보이지 못한다면 자녀는 부모의 믿음을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먼저 믿은 사람이 먼저 변화되어야 합니다. 영적 지도자가 먼저 성숙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먼저 믿은 우리가, 또 신앙의 영적 지도자들이 먼저 변화되고 먼저 선한 행실을 보여 주면 교인들도 믿고 따라오지 않겠습니까?”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많은 말이 아닙니다. 잔소리와 강요로 사람을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내가 먼저 바뀌고, 내가 먼저 사랑하고, 내가 먼저 섬길 때 사람의 마음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 받는 기쁨에서 나누는 기쁨으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다고 해도 기뻐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의 기쁨은 무엇인가를 얻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내어줄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쁨이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얻어서 기쁜 게 아니에요. 내가 줄 수 있어서 기쁜 겁니다.” 우리의 기쁨의 조건도 성숙해져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뻐하는 데서 머물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 더 많이 섬길 수 있어서 기쁘고, 이웃을 위해 더 많이 나눌 수 있어서 감사해야 합니다. 교회는 완전한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도 허물이 있고, 때로는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교회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맡기신 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형편이 부족하다고 미루지 말고, 부족한 가운데에서도 순종하고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편보다 중심을 보십니다. ###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자녀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녀가 건강하게 살아가고, 믿음 안에서 바르게 서며, 자신의 길을 잘 걸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부모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은혜를 기억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더 많이 나누고 더 많이 베풀며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나의 소원이 되고, 나의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온전히 이루어 드림으로 하나님의 자랑스러운 자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위 설교문은 경남기총 6월 미스바성회에서 전 대표회장 이창교 목사(상남교회)가 전한 설교를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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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6-12
  • [김성수 총장] 세상을 뒤집는 기독교
    기독교의 특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오늘날 ‘세상을 뒤집는다’라는 표현을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직장에서 일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질서를 뒤흔드는 증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과 거의 다르지 않고, 삶의 방식에서도 하등 차이를 찾아보기 어렵다. 소위 “그리스도인 정치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 역시 조금도 다르지 않다. 기존 체제의 일부가 되어 다른 정치인들과 똑같은 언어를 쓰고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권력을 다룬다. 주일에 교회에 나가 예배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사회와 정부는 교회를 결단코 위협적인 존재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우습게 바라볼 정도다. 교회가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집단으로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대교회 당시에는 상황이 달랐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을 두고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자들”(행 17:6), 다시 말하면 “세상을 뒤엎은 자들”이라 불렀다. 복음은 그만큼 강력하게 기존 질서를 흔드는 힘이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은 기업의 본분은 주주들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이익을 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만약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 한다면, 그것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기반을 뒤흔드는 위험한 발상이라고까지 말했다. 그는 철저히 자유시장 논리 속에서 기업의 역할을 규정했다. 그러나 그의 논리를 따라가 보면, 이웃을 사랑하고 공동선을 추구하며 노동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기독교 경제관은 그에게 분명히 불편하고 위험한 사상으로 비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프리드먼의 경제 논리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의 주장 속에서 암묵적으로 드러나는 역설적 진실, 곧 기독교가 세상의 질서를 뒤흔드는 힘을 지녔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프리드먼이 두려워한 바로 그 지점이 사실은 기독교의 본질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단순한 종교적 위로나 도덕적 교훈에 머물지 않는다. 기독교는 사회와 경제, 문화의 기반을 흔들며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는 운동이다. 현대의 세속 문화 속에서도 이러한 특성은 여전히 선명하다. 자본주의 사회는 노동을 고통스러운 의무로 여기고, 소비를 행복의 조건으로 찬양한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로 말한다. 노동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며,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고귀한 행위다. 노동은 이웃을 섬기고 창조세계를 돌보는 청지기의 소명이다. 따라서 노동은 선하다. 반면 소비와 서비스가 언제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기독교는 세상의 지배 신념에 도전하게 된다. 오늘의 산업자본주의는 더 많은 상품을 더 빠르게 만들어 내도록 우리를 몰아붙인다. 그 과정에서 생산품의 질은 떨어지고, 노동은 소모품이 되며, 자원은 고갈된다. 그런데 교회가 “노동은 존귀하다”라고 가르치고 “소비는 절대적 가치가 아니다”라고 선포한다면, 그것은 곧 체제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복음은 세상의 근본 질서를 뒤흔드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십자가 자체를 “걸림돌”이라 부른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로마 제국의 권력과 논리를 무너뜨렸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이 세상의 권력, 부, 쾌락 중심적 가치들을 무력화시키고 방향을 바꾸라고 요구한다. 그렇기에 복음은 언제나 기득권자들에게는 불편한 진리가 되지만, 새로운 세상을 여는 희망의 등불이 된다. 복음은 세상을 변혁하는 능력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본질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문화와 사회의 근본 질서를 새롭게 정의하고, 모든 권력과 가치 체계를 향해 “방향을 돌리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선포한다. 기독교는 오늘도 세상을 뒤집는 운동이다. 오늘의 교회는 단순히 “예수 믿고 복 받는다”는 기복 신앙의 메시지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복음은 우리의 안위를 약속하는 값싼 위로가 아니라, 세상 권력과 질서 앞에서 불편한 진리를 외치는 선포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선포해야 할 메시지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도전이며,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오늘의 교회는 바로 이런 불편한 진리를 담대히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따르며 살아가는 성도들을 길러 내야 한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정과 직장과 사회 속에서 “세상을 뒤집는” 증인이 될 때, 비로소 교회는 초대교회가 그러했던 것처럼 세상에 걸림돌이자 동시에 희망이 될 수 있다. 김성수 목사(탄자니아 아프리카 연합대학교 총장)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6-06-11
  • [김성수 총장] 대양 컨베이어 벨트와 창조세계의 신비
    우리는 보통 바다를 볼 때 표면만 본다. 파도, 해변, 푸른 수평선, 때로는 폭풍우 정도를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만드신 바다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거대한 질서를 품고 있다. 지구의 바다 밑에는 인간의 눈에 거의 보이지 않는 거대한 흐름이 있다. 과학자들은 이것을 “대양 컨베이어 벨트”(The Great Ocean Conveyor Belt)라고 부른다. 마치 거대한 컨베이어 벨트처럼 바닷물이 지구 전체를 천천히 순환하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 거대한 순환이 단지 물의 움직임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흐름은 열과 산소와 영양분을 나르고, 생명을 유지하는 질서를 운반한다. 적도 부근의 따뜻한 물은 북쪽으로 이동한다. 그러다가 차가운 지역에 이르면 식고 무거워져 깊은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다. 이 물은 다시 오랜 세월 동안 깊은 바다를 따라 흐르다가 먼 곳에서 다시 올라온다. 어떤 물방울은 이 긴 여행을 마치는 데 수백 년이 걸리기도 한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참 경이롭다. 인간은 최근에야 이 흐름을 조금 이해하기 시작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거대한 순환 질서를 창조 속에 넣어 두셨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노래한다.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것들을 다 지으셨나이다”(시편 104:24). 정말 그렇다. 우리는 창조세계를 볼 때 종종 단순한 “자연” 정도로 생각하지만, 성경은 세상이 우연히 굴러가는 시스템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가 스며 있는 질서라고 말한다. 대양 컨베이어 벨트는 마치 지구의 혈관과도 같다. 우리 몸에 피가 흐르지 않으면 생명이 유지될 수 없듯이, 바다의 흐름이 멈추면 지구의 기후와 생태계도 심각한 영향을 받게 된다. 깊은 바다에 산소가 공급되는 것도, 바다 생물들이 살아가는 것도 이 거대한 순환과 연결되어 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온 세상을 붙들고 있는 질서가 있는 것이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그분 안에 함께 서 있다(골 1:17). 이 사실은 우리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통찰을 준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신다고 느낀다. 기도 응답이 더디게 느껴질 때도 있고, 세상이 혼란스럽게만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바다 밑의 흐름처럼,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대부분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랑도, 믿음도, 은혜도, 소망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들이 세상을 움직인다. 대양 컨베이어 벨트도 조용히 흐른다. 소리치지 않고,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 흐름이 지구를 살린다. 어쩌면 성도의 삶도 그래야 하는지 모른다. 요란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도, 하나님 안에서 조용히 흘러가는 믿음의 사람들. 가정에서, 학교에서, 교회에서, 일터에서 묵묵히 사랑과 진실과 선함을 흘려보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결국 세상을 살린다. 오늘날 현대 문명은 자연을 단지 ‘탐욕적 개발’을 위한 “자원”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다. 바다는 개발의 대상이 되고, 숲은 경제적 가치로만 계산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세계를 단순한 소비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 바다는 단순한 물 덩어리가 아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와 질서가 흐르고 있다. 그래서 자연을 깊이 바라보는 일은 단순한 과학적 호기심을 넘어 영적 경험이 될 수 있다. 현미경과 망원경은 때때로 인간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도구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더 깊이 감탄하게 만드는 창문이 된다. 깊은 바다 속 보이지 않는 흐름까지 설계하신 하나님, 수백 년 동안 순환하는 바닷물의 길을 만드신 하나님, 그리고 지금도 그 질서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 우리가 그 하나님 앞에 설 때 결코 교만할 수가 없다. 창조세계를 깊이 바라볼수록, 우리는 결국 감탄하게 된다. “세상은 우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놀라운 지혜 안에서 붙들려 있구나.” 그리고 그 순간, 과학은 신앙의 적이 아니라 경이로움의 문이 된다. 내가 봉사하고 있는 아름다운 나라 아프리카 탄자니아에서는 창조세계의 이와 같은 경이로움을 날마다 경험하게 된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6-05-14
  • [이창교 목사] 함께 달리는 믿음의 사람들 (고전9:24)
    세상과 교회가 구별되는 기준이 있습니다. 같은 체육대회라 해도 세상에서 하는 체육대회와 교회가 하는 체육대회는 다릅니다.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교회와 노회, 남선교회가 함께하는 체육대회는 단순히 경쟁하여 이기기 위한 자리가 아닙니다. 서로 화합하고, 사랑하고, 섬기며 하나 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세상은 경쟁에서 살아남고 이겨야 하며, 세상이 주는 상을 얻기 위해 힘씁니다. 그러나 교회가 함께 모이는 자리는 달라야 합니다. 주 안에서 함께하는 모임은 서로를 세우고, 하나 됨을 이루며, 사랑과 섬김을 나누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교회 안에서 진행되는 체육대회에서도 때로는 지나친 승부욕 때문에 다치는 일이 생깁니다. 화합을 위한 자리에서 경쟁심이 앞서면 본래의 목적을 잃게 됩니다. 체육대회는 서로를 넘어뜨리는 자리가 아니라 서로를 격려하고 세우는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세상적 경쟁에서 이겨 상을 받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상은 믿음의 경주 끝에 하나님 앞에서 받는 상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믿음의 경주를 합니다. 성도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며, 믿음을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그 길에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돕고, 섬기고, 격려하며 함께 걸어갑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믿음을 지키고 결승선을 통과하는 일은 각자의 책임입니다.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홀로 감당하는 길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믿음의 동역자들이 있고, 함께 기도하고 섬기는 형제자매들이 있습니다. 또한 노회와 남선교회 안에서 서로 협력하고 섬기는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이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받을 상 가운데 중요한 것은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힘쓰는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매우 귀하지만, 교회가 먼저 하나 되지 못한다면 복음의 증거에도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서로 다투고 나뉘어 있으면, 세상은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기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실 때 하나 됨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교회의 하나 됨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중요한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섬기고, 용납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된 공동체를 세워가야 합니다. 남선교회 회원들이 하나 되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마음을 모으고, 힘을 보태고, 섬김을 더할 때 공동체는 더욱 건강하게 세워집니다. 우리가 사랑과 섬김으로 하나 됨을 이루기 위해 드리는 모든 수고를 하나님께서 기억하십니다. 체육대회 역시 그 목적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모두가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마치는 것이 참으로 성공적인 체육대회입니다. 승패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경쟁보다 중요한 것은 배려입니다.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주 안에서 함께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체육대회의 목적은 하나 됨에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 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경쟁심보다 양보와 배려를 앞세우고, 승부욕보다 사랑과 섬김을 앞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오늘의 체육대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복된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잘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함께 달리는 동역자들을 사랑하고 섬기며,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해 힘쓰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받을 상을 바라보며 끝까지 믿음의 길을 달려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본 설교문은 예장(통합) 경남노회 남선교회연합회 제26회 친선체육대회에서 부노회장 이창교 목사(상남교회)가 전한 설교를 옮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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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계
    2026-05-11
  • [김성수 총장] 성경적 영성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는 “영성”이라는 말을 자주 듣고 사용한다. 서점에는 명상과 치유, 내면 회복과 에너지 상승을 말하는 책들이 넘쳐난다. 인터넷에는 마음의 평안을 얻는 방법, 자신을 발견하는 훈련, 우주의 힘과 연결되는 길을 소개하는 콘텐츠가 끊임없이 올라온다. 교회 안에서도 영성이라는 단어는 자주 등장한다. 뜨거운 찬양, 깊은 기도 체험, 특별한 집회, 감동적인 간증을 영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질문은 따로 있다. 성경이 말하는 영성이란 무엇인가? 성경적 영성은 먼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노력보다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시작하시는 은혜의 역사이다. 많은 사람들은 영성을 자신을 단련하여 어떤 높은 신비로운 경지에 오르는 과정으로 생각한다. 더 오래 기도하고, 더 깊이 묵상하고, 더 강렬한 감정을 느껴야 영적인 사람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가는 길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려오시는 은혜를 먼저 말한다. 죽은 영혼을 살리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죄인을 자녀로 삼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적 영성은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성령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둘째로, 성경적 영성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이다. 영성은 막연한 종교적 감정이 아니며, 이름 없는 신비한 존재와 연결되는 상태도 아니다. 성경적 영성은 창조주 아버지를 알고,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총체적인 삶의 방식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참된 영적인 삶은 하나님을 추상적으로 말하지 않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원의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이다. 셋째로, 성경적 영성은 교회당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삶의 모든 자리에서 드러나는 영성이다. 많은 사람들은 영성을 특별한 시간과 특별한 장소에서만 찾는다. 새벽기도 시간, 수련회 현장, 기도원, 눈물의 예배당에서만 영성을 생각한다. 물론 그런 시간은 귀하다. 그러나 성경은 영성을 어떤 특정 공간에만 가두지 않는다. 성경적 영성은 식탁에서 나타난다. 감사함으로 밥을 먹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다. 가정에서 나타난다. 배우자와 자녀를 사랑으로 섬기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다. 직장에서 나타난다. 정직하게 일하고 맡은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다. 사회 속에서도 나타난다. 문화와 교육, 경제와 정치, 예술과 이웃 사랑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사람이 영적인 사람이다. 불의한 곳에서 정의를 말하고, 거짓된 곳에서 진실을 지키며, 메마른 곳에서 사랑을 흘려보내는 것 역시 영성이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했다. 이 말씀은 영성이 삶의 일부가 아니라 삶 전체임을 보여 준다. 주일 예배만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월요일의 노동도, 화요일의 가정생활도, 금요일의 결정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성경적 영성은 교회당에서는 뜨겁고 세상에서는 냉랭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루 전체를 살아내는 삶이다. 넷째로, 성경적 영성은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을 감사함으로 누리고 기뻐하는 삶이다. 많은 사람들은 영성이라고 하면 금욕적이고 무거운 분위기, 눈물의 회개, 세상 즐거움을 멀리하는 삶만 떠올린다. 물론 회개와 경건한 슬픔은 신앙 안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성경은 영성을 슬픔과 눈물만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아름다운 창조 세계를 주셨고, 음식의 맛을 주셨으며, 가족의 사랑과 우정의 기쁨, 노동의 보람과 안식의 평안을 선물하셨다. 전도서는 사람이 수고함 가운데 기쁨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 말하며,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신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성경적 영성은 세상의 좋은 것을 죄책감으로 거절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탐닉을 버리고 하나님 안에서 감사함으로 바르게 즐기는 삶이다. 감사하며 식사하는 일, 가족과 함께 웃는 일,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일, 정직한 노동 뒤에 쉼을 누리는 일, 이웃과 기쁨을 나누는 일도 모두 영적인 삶의 일부다. 얼굴이 늘 어둡고 삶의 기쁨을 잃어버린 경건만이 거룩함은 아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고, 주신 복을 감사히 누리며, 그 기쁨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삶 역시 깊고 건강한 성경적 영성이다. 김성수 목사 (탄자니아 아프리카 연합대학교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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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5-06
  • [최성은 목사] 양심을 따라 섬기는 사명자 (행 23:1-11)
    사도행전 23장은 바울의 인생 가운데 가장 긴박한 순간 중 하나를 보여준다. 3차 전도여행을 마친 바울은 성령의 경고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결국 그는 체포되어 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게 된다.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바울이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오늘 본문의 핵심이다. 목사와 장로의 자리는 세상이 주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명의 자리이다. 연약한 사람이 그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의 선한 양심에 있다. 바울은 공회 앞에서 “나는 범사의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고백한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을 때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음을 의미한다. 양심이란 하나님이 아시는 것처럼 자신을 아는 것이다. 곧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 인식이다. 바울은 평생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워 두고 살아왔다. 그러므로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선한 양심을 따라 사는 사역자는 사람의 평가나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선과 판단을 기준으로 살아간다. 이러한 선한 양심은 곧 거짓 없는 믿음이며, 사역의 출발점이다. 영적 침체에 빠진 디모데에게 바울이 권면한 것도 바로 이 청결한 양심의 회복이었다. 세상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이 곧 회복이고 부흥이다. 그러나 양심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인간의 양심은 죄와 세상의 영향으로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대제사장을 향해 강하게 말한 후, 그가 대제사장인 것을 알고 즉시 태도를 바꾼 것은 말씀에 대한 순종 때문이었다. 출애굽기의 말씀처럼 지도자를 비방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태도를 바로잡은 것이다. 이 사건은 중요한 원리를 보여준다. 양심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위에 있다는 사실이다. 선한 양심은 말씀에 의해 점검되고 바로 세워져야 한다. 양심을 빌미로 자신의 확신이나 경험, 고집을 따르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세상과 타협하여 무뎌진 양심도 문제이지만, 자기 확신으로 굳어진 양심 역시 위험하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앙의 핵심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복음의 본질을 붙드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죽은 자의 부활로 인해 심문을 받고 있다고 증언한다. 그는 공회 앞에서뿐 아니라 총독과 왕 앞에서도 동일하게 부활을 증거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은 바울의 사명이었고 그의 존재의 본질이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고백처럼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복음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핵심이다. 바울은 위기의 순간에도 이 복음에 더욱 충실했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지키시고 사명을 이어가게 하셨다. 오늘의 사역 현장 속에서도 동일한 질문이 던져진다. 우리는 복음의 본질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성공이라는 이름 아래 십자가와 부활을 뒤로하고 있지는 않은가.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의 사역의 중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어야 한다. 바울의 삶에는 깊은 밤이 찾아왔다. 육체적 피로와 두려움, 사역의 결과에 대한 고민과 미래에 대한 염려가 겹친 시간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밤에 주님이 찾아오셨다. 주께서는 바울 곁에 서서 담대하라고 말씀하시며, 예루살렘에서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하게 될 것이라는 더 큰 사명을 주셨다. 인생의 가장 어두운 밤에 주님의 위로와 약속이 임했다. 바울이 품고 있던 로마 선교의 비전은 바로 그 밤에 다시 확증되었다. 하나님은 사명을 감당하는 자에게 위로와 격려, 그리고 새로운 비전을 주신다. 오늘 이 기도회 역시 그러한 시간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회복하고, 말씀으로 자신을 점검하며,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를 세우시고, 맡기신 사명을 감당할 힘을 주실 것이다. 세상의 인기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 경험이나 고집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가는 삶, 세상적 방법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붙드는 삶이야말로 사명자의 길이다. 이러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인생의 깊은 밤에도 찾아오시는 주님의 위로를 경험하며,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게 될 것이다. ※ 위 설교문은 2026년 4월 2일 고신총회 특별기도회 설교를 정리한 것입니다.
    • 오피니언
    • 설교/강의
    2026-04-03
  • [김경헌 목사] 빈 무덤과 사랑받는 제자(요20:1-8)
    부활의 아침, 우리는 요한복음 20장에서 한 장면 앞에 서게 된다. 아직 해가 완전히 떠오르지 않은 이른 새벽, 누군가는 울며 달려왔고, 두 제자는 그 소식을 듣고 다시 달려간다. 숨이 차오를 만큼 급하게, 마음이 무너질 듯한 상태로, 그들은 빈 무덤을 향해 달려간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기록한 요한은 끝내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숨기고, 한 가지 이름만 남긴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 이 이름은 단순한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고백이다. 동시에 초대다.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의 품에 기대던 자리(요13:23), 십자가 아래에서 끝까지 떠나지 않던 자리(요19:26-27), 두려움 속에서도 빈 무덤을 향해 달려가던 자리(요 20:2-8), 그리고 부활하신 주를 가장 먼저 알아보던 자리(요 21:7). 그 모든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는 같은 이름으로 서 있다. “사랑받는 제자!” 요한은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그 자리를 비워 둔다. 그리고 우리를 그 자리에 앉힌다. 그래서 이 복음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그 자리에 서게 된다. 우리가 예수의 품에 기대는 자가 되고, 우리가 십자가 아래에 서 있는 자가 되며, 우리가 눈물로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자가 된다. 빈 무덤 앞에 도착했을 때, 사랑받는 제자는 베드로보다 먼저였다. 더 빨랐고, 더 간절했다. 그러나 그는 멈춘다. 무덤 안을 들여다보면서도, 들어가지 않는다. 숨을 고르며, 기다린다. 뒤늦게 도착한 베드로가 먼저 들어간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사랑받는 제자가 들어간다. 이 짧은 순간은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을 남긴다. 더 빨리 달려온 자가 먼저 들어가지 않는다. 더 뜨거운 마음을 가진 자가 스스로를 앞세우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열심을 내려놓고, 사도적 질서 앞에 선다. 신앙은 단순히 뜨거움이 아니다. 눈물이 많다고 해서, 더 빨리 달린다고 해서, 더 깊은 믿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종종 열심을 믿음으로 착각한다.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고 앞서 나아가는 것이 신앙의 깊이인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전혀 다른 길을 보여준다. 참된 믿음은 질서 안에 있으며, 사도들의 증언 위에 서 있다. 때로는 멈추는 것이 믿음이고,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다. 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무덤은 어디에나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무덤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단 하나의 무덤만이비어 있다. 단 하나의 무덤만이생명을 품고 있다. 만일 우리가 사도들의 증언을 떠나, 교회의 고백을 떠나, 스스로의 열심만을 붙잡고 달려간다면, 우리는 다른 무덤에 도착할 수도 있다. 그곳은 여전히 죽음이 머무는 자리다. 아무리 열심히 달려갔어도, 그 끝이 죽음이라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16:18)라고 말씀하신 것은, 교회가 사도적 고백 위에 세워진 공동체임을 드러낸다. 우리의 신앙은 개인의 열심이나 감정이 아니라, 사도들의 증언과 교회의 고백 위에 세워져야 한다. 영적으로 보면, 베드로보다 먼저 무덤에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다. 그것은 믿음의 열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이고 무질서한 신앙일 수 있다. 사도들의 질서를 떠나 스스로 길을 찾는다면, 우리는 잘못된 무덤에 들어갈 위험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배운다. 믿음은 속도가 아니라, 어디에 서 있는가에 관한 것이다. 부활의 아침, 우리는 다시 그 질문 앞에 선다.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나는 정말 사도의 고백 위에 서 있는가? 아니면 나의 생각과 열심이 나를 다른 곳으로 이끌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사도들의 가르침과 교회의 질서를 신뢰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것을 넘어 스스로 길을 만들고 있는가? 교회의 방법보다 나의 방법이 더 맞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혹시 나는 도리어 베드로에게 교회를 가르치려고 하는 자의 자리에 서 있지는 않은가? 믿음이 전혀 없는 것도 위험하지만, 잘못된 믿음 또한 치명적이다. 전자는 어떤 무덤에도 이르지 못하지만, 후자는 잘못된 무덤으로 이끈다. 그러나 복음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기다림 끝에, 사도적 질서 안에서, 베드로의 증언을 따라, 사랑받는 제자는 마침내 무덤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단순히 빈 공간만을 본 것이 아니다. 그는 보았고, 믿었다. 부활은 설명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부활은 믿음으로 열린다. 눈으로 확인하기 이전에,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건이다. 그 믿음이 절망을 생명으로 바꾸고, 눈물을 소망으로 바꾼다. 그래서 이 아침, 우리도 그 자리에 서게 된다. 달려왔고, 멈추었고, 기다렸고, 이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복음은 우리에게도 같은 고백을 남긴다. 사랑받는 제자가 들어가 보고 믿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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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4-01
  • [김경헌 목사] 강도의 소굴 (눅19:45-46)
    고난주간, 우리는 다시 한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주님의 발걸음을 따라간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던 환호 속에서, 마태복음 21장에 기록된 그 장면은 왕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그 환호의 열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그분이 마주하신 것은 찬양이 아니라 뒤틀린 예배의 모습이었다. 주님은 성전을 보시고 이렇게 선언하신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 이 말씀은 단순히 성전 앞에서 장사하던 행위를 향한 도덕적 비판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이 사건을 “교회에서 장사하면 안 된다”는 교훈이나 탐심에 대한 경고로 축소시킨다. 그러나 질문은 더 깊어야 한다. 왜 그들은 성전 앞에서 장사를 했는가? 그곳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였기 때문에 장사가 잘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들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 필요한 짐승과 물품을 제공함으로써 예배를 “더 쉽게”, “더 편리하게” 만들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의 행위는 예배를 방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돕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것을 “강도의 소굴”이라 부르셨다. 왜일까? 그 이유는 예배의 본질이 인간의 편리함에 의해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점점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으로 이동할 때, 그 예배는 더 이상 거룩한 예배가 아니다. 편리함은 어느 순간 거룩함을 대체한다. 효율은 경외를 밀어낸다. 그렇게 성전은 기도의 집에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공간으로 변질된다. 이 장면 앞에서 우리는 오늘의 교회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교회는 얼마나 “편리한 예배”를 추구하고 있는가? 예배 시간은 성도들의 일정에 맞춰지고, 예배 순서는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조정되며, 설교는 듣기 좋은 메시지로 다듬어진다. 교회의 공간과 구조 역시 성경적 상징과 신학적 의미보다는 실용성과 효율성에 의해 결정된다.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져 온 예배에 대한 경외와 철학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모세를 부르실 때,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하셨다. 대제사장조차 1년에 단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었던 지성소의 거룩함을 우리는 기억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예배 가운데 그 거룩함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과연 영적인 신을 벗고 하나님 앞에 서고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이미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단지 상인들의 행위를 지적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방식 자체를 뒤엎으셨다. 만약 오늘 주님께서 우리의 교회를 방문하신다면 어떨까? 우리의 예배와 신앙생활을 보시고 책망하시며 우리의 삶의 방식을 뒤엎으신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자리에 남아 있을까? 아니면 많은 이들이 떠나가게 될까? 불과 며칠 전까지 “호산나”를 외치던 무리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 이 극적인 변화는 단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처럼 살아가지 못한다. 오히려 백 데나리온을 붙들고 놓지 못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은혜를 받았지만 여전히 자기중심적이다. 모든 것이 우리 마음에 맞아야 한다. 예배조차 우리가 편해야 하며,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쉽게 외면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인가? 바로 우리가 그 “강도”이다. 그러나 고난주간의 메시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또 다른 장면을 본다.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강도들이 달려 있었다. 그들은 분명 죄인이었고, 심판받아 마땅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중 한 강도는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고백한다.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때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신다.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것이 은혜다. 우리가 아무리 강도와 같은 삶을 살았다 할지라도, 우리가 만든 예배가 아무리 왜곡되었다 할지라도, 십자가 앞에서 주님을 향해 돌아서는 자에게는 여전히 길이 열려 있다. 강도의 소굴 속에서도 은혜의 통로는 막히지 않는다. 고난주간, 우리는 묻는다. 나는 지금 호산나를 외치고 있는가, 아니면 십자가를 외치고 있는가? 나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아니면 소비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가, 아니면 나 자신을 중심에 두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의 끝에서, 우리는 다시 십자가를 바라본다. 그곳에서 강도였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는 은혜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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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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