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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별기획] 기독 문화유산을 지키자(5) - 진해 경화교회 최초 당회록
    창원특례시 진해구 경화동 117번지에 우뚝 선 십자가 아래 경화교회의 큰 간판이 있다. 장복산을 등에 업고 진해군항을 바라보며 도심 정중앙에 위치한 경화교회는 지난 1905년에 설립된 진해 최초의 개신교회이다. 당시 시대 상황은 조선 말 대한제국 고종 47년이었다. 전년 1904년,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이듬해 러일전쟁에서도 승기를 잡고 있었다. 대한제국이 위기를 맞았다. 한반도를 보호하겠다는 명분을 세워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해간 을사늑약이 체결된 때이다. 진해 지역의 상황도 일본이 밀고 들어오는 때였다. 1904년 일본은 거제도를 통해 ‘진해만 요새사령부’를 설치, 일본군항을 세울 계획이었다. 이렇게 나라의 사정이 위란지경이었을 때 복음의 생명 기운이 진해로 전파됐다. 1905년 11월 8일로부터 경화교회의 복음 태동 소리가 생겨났다. 당시 생생한 일기는 초대 당회서기로 장립된 안정순 장로가 기록한 당회록이 지금껏 경화교회에서 숨 쉬고 있다. 대부분 초기 개신교 교회들은 이즈음 당회록 등 기록이 유실되거나 보관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경화교회는 이 보물 같은 최초 당회 기록이 당회실에 경외롭게 관리되고 있었다. 최초의 경화교회 당회록은 1920년 2월 1일, 경화교회가 우여곡절 끝에 당시 경남노회(당시 노회장 라대벽 선교사)의 허락을 받고 안정순 장로가 초대 장로로 장립되면서 작성됐다. 안 장로는 이전 경화교회 태동 시기인 1905년부터 정식 당회가 조직되기까지의 15년 역사를 이때 상세히 당회록에 기록하는 큰 공로를 세웠다. 그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면 당시 위란의 시대에 교회가 설립되는 눈물겨운 사실(史實)을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감동이었다. 살아 있는 고귀한 기독교 문화유산, 보호돼야 할 생명록이었다. 당시 15년 역사의 이야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경화교회 100년사 29페이지에 기록된 대로 옮겨본다. “예수를 믿으시오. 예수를 믿으면 군항 토지를 내줘도 보상비를 많이 타 지금 여러분이 사는 것보다 훨씬 잘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를 많이 믿어서 교회당을 크게 짓고 십자가를 높이 세우면 저 일본 놈들의 군항도 꼼짝없이 물러갈 줄 압니다. 여러분 한숨만 푹푹 쉬지 말고 예수 믿고 희망을 가집시다.” 1905년 11월 8일이라고 기록돼 있는 해, 통영에서 최한주라는 전도자가 진해에 와서 전파하고 안정순 등 신도들이 모여 이곳에서 예배를 시작했던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안정순 장로가 15년 후 초창기 기록을 상세히 정식 교회 조직 후 기록한 사실도 중요하고, 그 기록이 지금껏 교회 자체적으로 잘 관리돼 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교회 당회실에 함께 취재 갔던 박시영 부경기독교역사연구회 회장도 감탄했다. 안내해 준 경화교회 천영철 선임장로, 그리고 경남기독문화원 원장 이상칠 장로는 함께 기록물의 권위 앞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회실 기록물을 살펴본 후 1층 카페에서 차를 들면서 눈에 들어오는 코너에 서 있는 범상한 종에 눈길이 갔다. 안내해 준 선임장로 또한 보기 드문 동(銅)으로 제조된 종의 연혁을 알 수 없다고 설명했다. 120년 교회 역사 속에 언제 이 구리로 제조된 종이 교회에 있었는지 모른다고 덧붙였다. 역사학자 박시영 목사는 일정 시대에 들여온 유물일 것 같다며 감정 기관에 의뢰하겠다고 밝혔다. 진해 경화교회는 지난해 창립 120주년 기념일을 보냈다. 초기부터 당회록을 한 점도 유실하지 않고 관리하고 있는 점 또한 교회를 칭찬하고 싶었다. 글. 박동철서머나교회은퇴장로 자문 이상규 백석대 석좌교수 박시영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 회장 천명철 경화교회 선임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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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2-02
  • [기획-선교보고] 빗줄기도 막지 못한 복음의 행진, "다음 세대, 세계를 품다"
    지난 2015년, 다음 세대를 향한 작은 씨앗 하나가 필리핀 땅에 심겼다.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2026년 1월, 그 씨앗은 울창한 숲이 되어 한국과 필리핀의 청소년들을 '형제'로 묶어내고 있었다. 경남노회 남선교회 연합회(회장 전병태 장로)가 주관하는 '다음 세대를 위한 제8차 단기선교 영어캠프'가 지난 1월 4일부터 1월 16일까지 12박 13일간의 일정으로 필리핀 퀘존주 룩반기독학교(Lucban Christian School)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이번 캠프에는 남선교회 회원 9명과 인솔 교사 1명, 꿈을 품은 11명의 학생 등 총 21명이 참가해 믿음의 여정을 함께했다. 이번에는 특별히 노회장 신종주 장로님과 함께하였고, 남선교회 회원들은 1월8일 귀국하기까지 4박 5일간의 짧은 단기선교이지만 은혜롭고 강렬했다. 12년의 뚝심, "오직 다음 세대를 위하여" 이번 선교 캠프는 단순한 해외여행이 아니다. 경남노회 남선교회가 '친선체육대회'와 '선교대회'를 통해 모은 기금으로 학생들의 항공료와 인솔교사는 전액 지원하는, 그야말로 '사랑의 결정체'다. 특히 2023년에는 룩반기독학교 학생들을 한국으로 초청하며 선교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당시 한국을 다녀갔던 현지 학생들이 이제는 어엿한 시니어 고등학생(한국 고2에 해당)이 되어, 이번 8차 방문단을 뜨겁게 맞이했다. 이는 일방적인 지원을 넘어 서로의 문화를 존중하고 교류하는 진정한 '양방향 선교'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준다. Day 1~2: 역사의 현장에서 선교의 현장으로 지난 1월 4일 주일 저녁, 김해공항을 출발한 선교팀은 5일 새벽 마닐라에 도착하며 본격적인 일정을 시작했다. 톤톤(Tonton) 교장 목사의 환대 속에 시작된 이튿날은 마닐라의 역사 탐방으로 문을 열었다. 스페인 통치 400년의 흔적과 호세 리잘(Jose Rizal)의 독립 투혼이 서린 리잘 공원, 그리고 2차 대전의 상흔이 남은 유적지를 돌아보며 참가 학생들은 필리핀의 아픈 역사 속에 흐르는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했다. 이 과정에서 전병태 회장이 과학박물관 투명 유리문에 부딪히는 '열정적인(?)' 해프닝이 있었으나, 다행히 큰 부상 없이 웃음으로 넘기며 여정의 활력소가 되기도 했다. 오후 6시, 룩반기독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드려진 무사도착 감사예배는 감동 그 자체였다. 특히 학생들은 현지 가정으로 흩어져 2인 1조로 홈스테이를 시작했다. 낯선 문화, 낯선 언어 속으로 겁 없이 뛰어드는 아이들의 뒷모습에서 '글로벌 리더'의 새싹이 보였다. Day 3: "우리는 하나입니다" 뜨거운 환영식 1월 6일, 룩반기독학교 교정은 200여 명 재학생들의 환호성으로 가득 찼다. 본회가 증축하여 기증한 4층 대강당에서 열린 공식 환영식은 양국의 국기가 나란히 게양된 가운데 엄숙하고도 활기차게 진행되었다. 전병태 회장과 신종주 노회장의 특별 메시지는 학생들에게 비전을 심어주었고, 이선우 안수집사가 전달한 장학금은 현지 학생들의 학구열에 불을 지폈다. 이날 오후, 비록 우천으로 인해 'Mother's Wonder Land(마더스 원더랜드)' 방문은 무산됐지만, 아름다운 정원에서의 힐링 타임은 빡빡한 일정 속 쉼표가 되어주었다. 돌아오는 길에 룩반 시청을 방문하여 새로 이전 건축한 시청 내부 여러 사무실을 둘러보고 끝으로 시장을 접견하였다. Day 4: 빗속을 뚫고 울려 퍼진 "바이블 데이"의 함성 이번 선교 여행의 백미는 단연 1월 7일 'Bible Day(성경의 날)' 퍼레이드였다. 아침부터 추적추적 내리는 비에 행사가 취소될까 우려했지만, 복음을 향한 열정을 식힐 수는 없었다. 성경의 날 퍼레이드 행사 전에 특별한 '준공식'도 있었다. 지난 해 태풍으로 룩반기독학교 채플실 지붕이 파손되어 누수가 심각하다는 소식을 접한 남선교회는, 지체 없이 약 800만 원의 긴급 복구비를 지원했었다. 말끔하게 리모델링된 채플실에서 개최된 테이프 커팅식은 단순한 건물의 복구를 넘어, 아이들의 영적 보금자리를 지켜냈다는 안도감과 감사가 교차하는 자리였다. 이어서 룩반기독학교에서 시내를 지나 행사장까지 거리 퍼레이드가 진행 되었다. 선두에 경찰차의 에스코트와 함께 제복을 입은 현지 학생들의 밴드가 웅장한 연주를 시작하자, 빗줄기는 오히려 축복의 단비처럼 느껴졌다. 멈추어 선 여러 차량과 시민들은 손을 흔들며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행사장에 도착한 후에 실내 행사는 500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축제의 장이 펼쳐졌다. 하이라이트는 한국 학생들의 무대였다. 낯선 땅에서 갈고닦은 기타, 드럼, 신디사이저 연주와 합창이 울려 퍼지자 현지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기립 박수로 화답했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 '찬양'으로 하나 된 순간이었다. 성경의 날 행사를 모두 마치고 룩반 시내 투어로 필리핀의 성지순례로 유명한 ‘카마이 니 히수스(Kamay Ni Hisus)'에서 노아 방주와 아주 큰 예수상도 보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일정의 마지막 만찬은 특별했다. 한국에서 10년간 일하고 돌아온 현지인이 운영하는 '무한리필 삼겹살' 식당. 비록 된장찌개는 없었지만, 한국의 맛을 재현하려는 현지 사장님의 정성과 'K-푸드'를 사랑하는 현지인들의 북적임 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형태의 한류를 체험했다. Day 5: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이 아니기에" 1월 8일, 4박 5일간의 짧은 일정을 마치고 떠나는 남선교회 회원들을 배웅하는 자리는 아쉬움과 기약으로 가득 찼다. 톤톤 목사님의 환송 예배 후에 목사님 사모와 아들 소리엘 군이 공항까지 배웅해주었다. 아들 소리엘에게 알고 있는 한국어를 물으니 “감사합니다” 말 밖에는 아는 말이 없었다. 앞으로 소리엘에게 화상통화로 한국어를 가르쳐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마닐라 국제공항에서 헤어졌다. 단기선교팀 학생들을 필리핀에 남겨두고 우리 남선교회 회원만 오후3시경 마닐라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오후7시30분경에 김해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전병태 회장의 가족들이 준비한 환영 플래카드로 반가이 우리를 맞아 주었고, 그리고 1차 선교의 주역 김종욱 장로와 3차 선교를 이끌었던 배병호 장로의 마중은 '선교의 바통 터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1차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대 회장님들의 헌신과 기도가 있었기에 오늘의 8차가 있었고, 앞으로 9차, 10차의 미래가 이어질 것이다. 경남노회 남선교회 연합회의 이 아름다운 선교사역은 앞으로 격년제 상호 방문(한국 학생 파송 ↔ 필리핀 학생 초청)으로 확대될 예정이다. 양국 간에 다음 세대 모두를 '글로벌 크리스천 리더'로 세우기 위한 거룩한 행진에 경남노회 산하 많은 교회의 더 많은 관심과 기도가 필요한 때다. <자료제공=경남노회 남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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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15
  • [특별기획] 기독문화유산을 지키자(4)
    부산 초량교회 초대교회 기록물·강대상·선교사 유품 빛난 모습 한국 근대화의 문이 열리고 기독교 선교사들이 첫발을 디뎠던 부산 땅. 1884년 9월 14일 알렌 선교사, 1885년 4월 3일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함으로써 이 땅의 복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미국 북장로교는 1891년 9월 부산에 선교기지를 설치한다. 그 책임자가 베어드, 한국명 배위량이다. 베어드가 당시 부산 영선현(현 초량)에 세 필지의 땅을 매입함으로써 선교 거점이 시작됐다. 초기 영선현교회, 이어 영주동교회로 불리다 지금의 초량교회로 역사를 이었다. 초량교회 100년사에는 “초량교회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가 파송한 윌리엄 베어드 목사에 의해 1892년 11월에 설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써 초량교회가 부산·경남 기독교 역사 140년을 이끌었다. 한국 남녘 땅에서 기독교 요람이 된 초량교회는 부산광역시 중구 초량동에 지금껏 자리 잡고 복음의 사역과 기독교 역사의 횃불이 되고 있다. 초량교회는 최근 교회 역사관을 단장하고, 부산의 명소가 된 장기려박사기념관이 있는 ‘부산 이바구길’ 언덕길에 아늑히 그리고 엄숙하게 세계의 관문 부산항을 바라보고 있다. 필자의 취재길에 눈에 들어온 첫 모습은 이바구길 벽에 붙어 있는 부산 출신 인물 벽의 인물 이야기들이었다. 허정 초대 정부 내각수반, 가수 나훈아, 연예인 이경규, 장기려 박사 등의 부산 인물들이 인물 조각과 함께 이야기로 벽에 붙여져 있고, 이 언덕길에 예배당과 기독 역사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가 교회 위탁을 받아 단아하게 정리한 역사관 내부를 돌아보다 감동을 받았다. 잘 정리된 초대교회 엄청난 기록물들이 쏟아져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초량교회가 항도 부산을 발전시켜 온 정신적·문화적 요람이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었다. 그동안 교회를 담임했던 기독교 역사 속 중요 영적 거장들이 초량교회를 거쳤다는 사실(史實)들이 살아 있는 듯 눈에 띄었다. 선교사로는 배위량 선교사와 호주 선교부 손안로 선교사가 초량교회를 거쳤고, 초대 한덕룡 목사, 3대 주기철 목사, 4대 이약신 목사, 6대 한상동 목사 등의 거장들이 초량교회에서 한국 기독교를 튼튼히 세웠다는 사실들이 있었다. 평신도 인물로는 초대 부산시장 양성봉 장로, 9대 부산시장 이근용 장로 등의 얼굴이 보였다. 부산의 큰 인물들을 양성한 교회가 초량교회였다. 중요한 문화유산은 이들의 손때가 묻어 있는 교회 사역의 기록물들이다. 베어드 선교사의 사모 애니 베어드 선교사가 작사한 찬송가에 수록된 ‘멀리 멀리 갔더니’, ‘나는 갈 길 모르니’ 등의 근대 유산이 될 수 있는 자료가 빛을 내고 있었다. 당시 초대 선교사들이 쓰던 피아노, 라디오, 언더우드 타자기 등 유품들도 많았다. 특히 한국 선교에 재정 후원에 공을 세운 언더우드 선교사 타자기와 이들이 쓰던 여행용 가방, 트렁크 등이 눈에 띄었다. 3대 주기철 목사가 쓰던 원목 공예의 가치가 높은 강대상도 눈에 들어왔다. 한국학 연구의 선구자였던 제임스 게일 선교사, 백산상회를 통해 임시정부와 독립군을 지원한 윤현진·윤현태 형제 집사, 이들 형제를 돕다 옥고를 치른 장덕생 목사, 한국의 조지 뮬러로 불린 고아들의 아버지 이약신 목사, 3·1운동과 신사참배 반대에 앞장선 조수옥, 손명복, 문순복 등의 발자취와 일부 손때 묻은 유품들이 있다. 근대 유산의 가치가 높은 당회록과 생명록의 빛바랜 기록물들이 숨을 쉬고 있는 듯 눈에 들어왔다. 이 중 생명록의 기록물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제적부로서 당시 성도의 제적부를 생명록이라고 적혀 있다. 이렇듯 초량교회 역사관에 소장된 근대 문화유산들이 향후 어떻게 보호되고 사료의 가치를 발할 수 있을까. 더 이상 유실되지 않도록 하는 게 급선무다. 그동안 당회록은 관리의 어려움으로 일부 유실되고 없어졌다. 다행히 초량교회는 문화유산 등록을 위해 준비하고 있다고 역사관을 관리하고 있는 정충권 장로께서 설명했다. 지금도 많은 탐방객들이 역사관을 찾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숙원이 현실화되고 제도화되어서 보물 같은 기독교 문화유산이 보호되고 지켜져 가야 할 것이다. 글 │ 박동철 장로(서머나교회 은퇴) [자문] 이상규 백석대 석좌교수 박시영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 회장 정충권 초량교회 장로(기독역사관 책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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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01-07
  • 은혜로교회 120주년, 일본 선교의 새로운 좌표를 세우다
    설립 120주년을 맞은 은혜로교회(담임목사 김은태)가 일본 아이치현 도코나메 지역에 선교교회를 개척하며, 일본 선교의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다. 이번 선교 개척은 단순한 해외 교회 설립을 넘어, 공동체 중심·현지 체류형 선교 모델을 본격적으로 적용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김은태 목사는 감사예배에서 “수많은 세대가 이어온 믿음의 여정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향한 헌신의 역사가 오늘의 선교 비전을 가능하게 했다”며 “작은 시작일지라도 기도와 헌신으로 모인 손길은 반드시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도 가운데 열린 방향 전환, 일본 도코나메로 은혜로교회는 당초 러시아 연해주 북방선교를 준비해 왔으나, 전쟁과 항공편 단절로 인해 약 1년간 선교 방향을 재검토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김은태 목사는 기도 중 반복적으로 ‘도코나메’라는 지명이 떠올랐고, 실제 지도에서 해당 지역을 확인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하게 됐다고 밝혔다. 김 목사는 “교회가 전무한 지역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 당회와 성도들에게 비전을 나누었고,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일본 선교에 동참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도코나메는 나고야 국제공항에서 차량으로 10분 거리에 위치한 항공·산업도시로, 유동인구가 많지만 복음의 공백이 큰 지역이다. “하나님께서 올바른 선교지를 보여주셨다” 이번 선교 일정에는 김은태 목사를 비롯해 시무장로와 집사 등 총 18명이 참여했으며, 10월 31일부터 11월 1일까지 현지 부지 매입과 감사예배가 진행됐다. 서준원 장로는 “도코나메 선교지를 다시 방문하며 하나님께서 교회를 바른 길로 인도하고 계심을 깊이 느꼈다”며 “121년 전 은혜로교회를 세우신 성령님께서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심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그는 “감사예배 가운데 내린 비마저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였다”고 덧붙였다. 정길용 장로 역시 “설립 100주년 당시 연해주에 교회를 세웠던 경험을 바탕으로, 120주년을 맞아 일본 땅에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우게 됐다”며 “부지 계약 전 과정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단기 방문이 아닌 ‘머무는 선교’ 공동체 체류형 선교 모델 도입 은혜로교회는 도코나메 선교를 위해 3층 규모의 예배당 건립을 계획하고 있다. 1층은 예배당, 2층은 숙소로 조성해 성도들이 상시 체류하며 선교에 참여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이는 단기선교 중심의 방문형 사역을 넘어, 교회 공동체 전체가 선교의 주체가 되는 구조다. 김은태 목사는 “한두 사람이 감당하는 선교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함께 머물며 현지와 삶을 나누는 선교를 지향한다”며 “복음을 전하는 것을 넘어, 현지와 함께 살아가는 선교가 목표”라고 밝혔다. 김현배 장로는 “전 성도가 함께 동참할 수 있는 구조라 더욱 감사하다”며 “이번 부지 감사예배를 계기로 도코나메에도 하나님께 예배하는 공동체가 세워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상 문화가 깊게 뿌리내린 일본 땅에 복음의 예배당이 세워지는 것은 마지막 시대를 향한 중요한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총회·노회·교회가 함께한 연합 선교 이번 도코나메 선교 개척은 은혜로교회의 단독 사역을 넘어, 고신총회 전국남전도회연합회와 부산서부노회남전도회연합회가 함께 참여하며 연합 선교의 모델을 보여주었다. 김은태 목사는 “총회와 노회, 지역 교회가 한마음으로 참여하는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상징”이라며 “도코나메 개척은 한국 교회가 연합과 협력으로 새로운 선교 모델을 세워가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교회는 내년 6월 기공예배를 드리고, 2026년 11월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입당예배에는 100명 이상의 성도가 현지를 방문해 전도와 봉사 사역에 참여할 계획이다. 문화·비즈니스 선교로 확장되는 비전 도코나메 지역의 특산품인 도자기 공방과 연계한 ‘문화·비즈니스 선교 모델’도 추진된다. 현지 공방 제품을 한국에서 전시·판매해 교류를 확대하고, 자립형 선교 기반을 마련한다는 구상이다. 김은태 목사는 “선교는 단순한 전달이 아니라, 삶과 문화를 함께 세워가는 과정”이라며 “도코나메에 세워질 교회가 아시아와 열방을 향한 복음의 통로가 되길 소망한다”고 밝혔다. 은혜로교회의 이번 일본 선교 개척은 120년의 역사를 과거의 기념에 머물게 하지 않고, 다음 세대를 향한 선교의 씨앗으로 이어가려는 실천적 결단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도코나메에서 시작된 작은 부지는, 연합과 협력으로 새로운 선교 지평을 열어가는 한국 교회의 가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자료제공=은혜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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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2-26
  • [특별기획] 기독문화유산을 지키자(3)
    창신학교·문창교회 함께 의신여학교 설립 55세 급성 심장병으로 소천 유일 묘비만 남겨 1889년 데이비스 선교사가 경남 부산 지역에 최초로 들어와 복음을 전하다 1년 만에 순교한 후에도 호주에서 연이어 선교사들이 이 땅에 들어온다. 주로 여선교사들이 잇달아 들어와 여성들에게 복음 전파가 시작되었다. 호주 빅토리아주 탈봇(Talbot)에서 교사인 두갈피 맥피 가정에서 1881년 태어난 아이다 맥피(이후 한국 이름 미희) 선교사가 1911년 10월 30일 교육 선교사로 명을 받고 부산으로 들어와 주일에는 부산진교회를 섬겼다. 1913년 맥피는 마산으로 이주, 당시 마산포교회 지금의 문창교회에서 선교 사역을 시작했다. 마산포교회의 문창교회는 당시 160명의 어린이들이 출석했고 창신학교의 교육을 받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 창신학교의 발자취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창신학교는 경남 지역 마산에서 최초로 출발한 기독학교이다. 그 배경이 문창교회 100년사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100년사 75페이지 이후를 보면 당시 마산포교회 목회자 손안로 선교사가 10여 명의 생도를 중심으로 독서숙(讀書塾)을 설치한 것이 효시다. 1906년 5월 17일이었다. 교인 중 이승규(이후 장로)가 독서숙에 열정을 갖고 문창교회 중심 교육에 힘을 쏟았다. 이승규는 노산 이은상의 부친이다. 문창교회 독서숙은 교육기관화하면서 교회와 함께 어린이 교육을 이어갔다. 초대 교장은 손안로 선교사였다. 손안로 교장은 교육의 문맹지 조선에 남녀공학의 제도를 이어가려고 했으나 학부모들의 반대가 컸다고 기록되었다. 손안로 교장은 조선의 여성들에게 글을 알게 하고 신교육을 통해 복음 확장을 하기 위해 비전을 세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여러 가지 초기 창신학교를 둘러싼 갈등이 있다가 손 교장은 여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호주선교회 도움을 받고 문창교회 여전도회 일부 출연으로 여학교를 세운 것이 의신여학교이다. 의신여학교는 마산 노비산 언덕 위 선교사 사택 일부와 주변을 사용하면서 창신학교와 자매학교가 되면서 마산 최초 여학교가 된 것이다. 의신여학교 초대 교장에 맥피 선교사가 부임하게 된다. 1913년 4월 17일 개교된 의신여학교는 39명의 여학생과 5개 반으로 4명의 교사가 배치되었다. 맥피 선교사 교장은 교육 전문가로서 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민족 교육과 여성 교육에 중점을 두고 참교육의 요람이 되었다. 1939년 7월 일본의 신사참배에 반대하다 결국 폐교 사태를 맞았다. 해방과 함께 의신여학교는 재건되어 존속하다 지금은 의신여중으로 존재해 있다. 1919년 3·1운동 시에 독립운동에도 참여했고 이후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이러한 최초 여학교로 시작된 의신여학교는 맥피 선교사에 의해 우리나라 여성 교육의 요람이 되었다. 맥피 교장은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학생들 교육에 온 힘을 쏟았다. 1936년 맥피는 한국 선교 25년을 맞아 축하를 받는다. 문창교회 의신여학교 졸업생 동창회 의신유치원 자모회 연합 기념축하연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문창교회 장년부 교장, 유년주일학교 여자 학감, 소년면려회 총무 지도자, 청년부 교사 등의 이력을 돌아보며 감사의 말씀이 오고갔다. (91년 발간 호주선교사 열전 마산·거창편) 이러한 일이 있었던 다음 해 1937년 3월 맥피 교장은 갑자기 건강이 나빠졌다. 진주 배돈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3월 15일 55세의 일기로 소천한다. 1937년 4월 19일 당시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가 있다. “마산 의신여학교 설립자 겸 교장인 미희(55세) 양은 3월 14일 갑자기 심장병에 걸려 그동안 배돈병원에서 치료받던 중 불행히도 지난 13일 오후 0시 필경 장서하고 말았다는 비보를 접한 마산여학교와 기독회원들은 비통해하고” 이렇게 게재되었다. 당시 맥피 선교사가 의신여학교에서 큰 공로를 세웠음을 나타내고 있다. 문창교회와 의신여학교는 25년간 헌신한 맥피 교장 장례를 치르고 무학산 자락에 묻었다. 그리고 100년 가까이 사람이 찾지 않는 가운데 폐무덤화되고 있었다. 당시 정성을 들여 세운 묘비마저 유실될 뻔했다. 산자락 개발과 함께 묘지 이장이 불가피한 때 경남성시화본부가 호주 선교 120년을 맞아 호주선교사 유해 성역화 사역을 시행했다. 다행히 맥피 선교사의 유해와 묘비는 창원시 진동면 창원공원묘지 호주선교사 공원묘지에 이장·보호되고 있다. 다시 한번 맥피 선교사의 발자취를 더듬고 싶다. 호주장로교 선교위원회가 남긴 메모가 알려졌다. “그녀의 삶은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의 감동이었다. 친절한 성격과 많은 사람들에게 관대한 마음씨는 모든 사람들에게 끼쳤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맥피를 닮고자 했다.”(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 자료 참조) 묘비에 맥피의 어록이 새겨져 있다. ‘예수 갈아사대(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이 귀한 맥피의 단 하나의 유물 묘비를 국가유산으로 남김이 마땅할 것이다. 글. 박동철 장로(서머나교회 은퇴) [자문] 이상규 백석대 석좌교수 박시영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 회장 배병호 문창교회 역사관 건립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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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25
  • [특별기획] 기독문화유산을 지키자 (2)
    문창교회 석조예배당 기초석(2) 위엄 있는 예배당 자태 본건물은 사라지고 ‘문창교회’ 새겨진 기초석만 남아 현재 예배당 머릿돌 미래유산 가치 높아 1919년, 한국기독교 개척자 거장 한석진 목사가 교인과 함께 석조 예배당 건립 창원특례시 마산회원구 추산동 노비산 자락 아래 경남의 초대교회 문창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130년 복음의 역사를 품고 있는 문창교회에서는 요즘 박진규 담임목사를 비롯해 당회원들이 문창교회 기독역사관 건립에 열정을 쏟고 있다. 필자는 며칠 전 취재를 위해 교회를 방문해 역사관 건축 현장을 돌아보니 감동이 북받쳐 오름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시 1901년 마산포를 넘어 경남 부산 전역으로 복음을 확장시킨 조선 땅 초대교회 복음의 숨소리를 듣는 듯했다. 문창교회는 지난 2001년 「문창교회 100년사」를 편찬·발간했다. 그렇다면 정확히 설립은 언제 되었나 궁금해진다. 역사적 시대 상황을 찾아보자. 1889년 5월 1일, 적막한 마산 어촌이 개항장으로 공포되고 발족된다. 바로 마산항의 시작이다. 나라 밖으로 눈을 뜨게 된다. 그해 10월 호주장로회 데이비스 선교사가 최초로 여동생 메리 데이비스와 함께 부산·경남 지역에 복음의 씨를 뿌린다. 웬일인가, 데이비스는 1년 만에 병약하여 소천한다. 호주장로교는 조선 땅을 포기하지 않고 많은 선교사들을 이후 줄줄이 경남 땅에 파송한다. 경남 땅 초기 복음의 역사이다. 그래서 급속히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면서 창신학숙이 세워져 학교와 함께 예배드리는 처소가 생긴 것이 마산포교회이다. 호주장로교, 미국,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들이 복음활동을 하면서 장로교 합동공의회가 생기고 예배당이 설립된다. 첫 장소는 교육선교의 장 창신학숙에서의 예배처소, 지금의 문창교회 전신 마산포교회이다. 그래서 마산포교회의 시작은 1901년으로 본다. 연대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정식 교회는 1912년 마산포교회 당회 설립을 법정 설립으로 볼 수 있다고 「문창교회 100년사」에서 적고 있다. 초대 담임목사는 호주 선교사 손안로 목사, 그리고 장로 3인으로 출발했다고 한다. 오늘 문창교회에서의 문화유산 찾기는 석조예배당이다. 그래서 문창교회 석조예배당의 역사를 찾아보고자 한다. 문창교회의 석조예배당은 지난 1980년대까지 마산 지역의 명물이었다. 3·15의거 등 창동 시위 거리의 끝자락에 서 있던 돌교회는 세상에 묵직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던지는 듯한 위품이 있었다. 이 석조예배당은 역사 속 또 한 분의 영적 거장 한석진 목사가 1916년 4월 문창교회에 부임하여 건립한 것이다. 여기에 많은 교훈적 이야기와 메시지가 있다. 한석진 목사는 조선 땅 초대교회 시절 제대로 신학을 한 7분 중 한 분, 최초의 목사였다고 한다. 한 목사는 부임 후 일성으로 “조선의 교회가 부흥하려면 선교사에 의존하는 사대사상을 버리고 ‘자진전도, 자력운영, 자주치리’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예배당이 없음을 보고 성도들에게 견책했다. 이에 당시 이승규, 손덕우, 이상소 등 여러 장로들이 “이제껏 예수를 헛믿었다”고 회개하고 목사님의 가르침에 따라 당시 큰돈 1만6천 원을 연보하여 건축을 시작하였다. 무학산 기슭에서 교인들의 손으로 돌을 떠 옮겨 전국에서 손색없는 교회를 지음으로써 예배당이 한국교회 석조예배당의 효시가 된 것이다. 이후 국내 많은 곳에 석조예배당이 세워졌다. 한석진 목사는 석조예배당을 완성하지 못하고 이임했다. 그러나 ‘문창교회’라는 이름은 1919년 신축 예배당으로 옮기면서 명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문창교회 100년사」 98쪽, 1930년대 채필근 목사의 저서 「한국기독교 개척자 한석진 목사와 그 시대」 발췌). 문창교회는 돌교회를 계속 증·개축해왔으나 지금은 현대적 건축공법에 따라 예배당이 세워져 있다. 그러나 교회는 당시 돌교회의 머릿돌이 된 기초석을 보호·관리하여 본교회의 기초석으로 삼아 본당 벽면에 붙여놓고 있다. 이 기초석은 1950년 2차 증축했을 때 쓰였던 머릿돌이라고 한다. 앞으로 문창교회 역사관이 완공되면 다음 세대들의 산교육장으로 널리 활용될 것이다. 여기에 한국 석조예배당 기초석이 살아 국가유산이 된다면 크게 손색이 없을 것이다. 글. 박동철 장로(서머나교회 은퇴) [자문] 이상규 백석대 석좌교수 박시영 부산경남기독교역사연구회 회장 배병호 문창교회 역사관 건립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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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11-14
  • [사진으로 보는] 2023년 기독교연합회 성탄 트리
    각 시군구 기독교연합회에서 성탄 트리를 밝혀 사진으로 아름다운 성탄 트리의 빛을 감상하시길 바랍니다.
    • 기획
    • 기획기사
    2023-12-05
  • [박동철 장로] 우상 神道의 나라 일본 땅에서 예수 생명을 보았다
    2023년 10월22일 주일 저녁. 주일 예배를 마치고 창원특례시기독교장로총연합회(대표 최주철 장로, 이하 창기장총) 장로들과 부인 등 30여 명이 일본 땅 선교여행을 위해 부산서 카페리호에 몸을 실었다. 연초부터 창기장총 임원회가 일본 성지순례 계획을 세웠다. 희망자를 모집, 일본 땅 기독교 유적코스를 탐색, 현지를 돌아보고 복음의 현실을 살펴보자는 취지였다. 갈릴리 여행사 안내로 밤 9시 넘어 밤배는 부산 여객 터미널을 출발했다. 출발시간부터 부산 앞바다의 야경을 감상하며 삼삼오오 모여 여행의 기대와 일본 복음화의 사전 정보 등 소담한 시간을 보내고 단체 방에서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8시경 시모노세키 항 하선과 함께 가이드의 인솔로 잠시 옛 영주들의 성이 있던 성하(城下)마을을 둘러보고 나가사키로 3시간 달려 성지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첫 장소는 나가사키 남쪽 히라도. 1549년 스페인출신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히라도에 첫발을 내딛고 선교의 시작종을 울림으로써 일본에 복음의 씨가 뿌려졌다. 잠시 당시 역사적 개관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로마 카톨릭은 유럽전지역에 전파되면서 면죄부 등으로 타락했으나 마틴 루터가 1517년 종교개혁을 단행 천주교의 개혁 신앙이 널리 퍼져갈 때라고 보아진다. 루터 종교개혁 후 30년이 흘러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신부는 포르투갈 가톨릭 수도회 예수회의 파송으로 일본 땅 히라도에 들어온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관점에서 당시 일본에 들어온 카톨릭은 매우 복음적이고 타락의 신앙에서 개혁된 카톨릭이었을 것으로 보여 진다. 막부전성기 서양문물과함께 복음 상륙 같은 시대 일본 땅은 막부권력시대였다. 당시 오다 노부나가의 쇼군이 강력한 영주가 되어 사무라이 권력을 휘두를때이다. 처음 프란시스코와 동행한 토레스 신부 등이 오다 노부나가와 친한 관계가 되었다. 그 이유는 포르투갈에서 조총이 들어옴에 따라 일본의 권력자들은 서양문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작용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시대 역사를 살펴보자. 오다 노부나가에 이어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권력을 잡고 초기 서양종교를 받아들이게 된 것 또한 서양 무기도입에 배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592년 도요토미는 조선을 침략한다. 서양조총을 들고 중국 명나라를 갈테니 길을 내어달라며 조선 땅을 침략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만들었다. 일본의 초기 복음의 전파가 우리에게 회한을 던져준다. 우리 땅의 천주교역사는 이때 임진왜란과 함께 일본에서 선교사들이 들어왔으나 뿌리 내리지 못했다. 이후 한참 뒤 중국에서 카톨릭 선교사들이 들어와 뿌리를 내렸다.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조총 등 신무기를 들고 우리 땅에 먼저 들어왔다면 우리의역사가 어떻게 됐을까? 항상 우리는 주님의 깊은 뜻을 알 수 없다는데 순종해야한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 하에서 우리는 지금 복음의 강국이 되었고 일본은 복음이 약하기 그지없는 땅이 되었다. 아무튼 일본 땅 첫 복음지 히라도에는 프란체스코 하비에르 신부가 처음세운 교회당 터만 남아있고 그곳을 성지로 성역화해 가꾸고 많은 순례자들이 다녀가고 있다. 아울러 당시 기거하던 집터 기무라와 기념공원도 볼 수 있었다. 500여 년 전 이곳에 복음의 씨를 뿌린 하나님. 그 복음의 향기가 히라도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히라도에서 온천욕을 즐기며 일 박한 후 다음날 일행은 나가사키로 이동했다. 규수지역 복음지경 확장 ‘작은 로마’ 규수지역의 넓은 땅 중 나가사키에 또한 많은 옛 선교지를 볼 수 있었다. 히라도에서 복음의 씨가 자라 나가사키로 지경이 확장되면서 곳곳에 성당이 들어서고 작은 로마라 일컬어질 정도로 부흥했다. 당시 일본 땅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막부시대 천하통일을 하고 조선 땅 침략을 꿈꾸고 있을 때 이다. 도요토미는 초기 서양각국과 교류를 위해 교회를 인정하다 세력이 갑자기 커지는데 불안을 느끼고 본격 탄압을 시작했다고 한다. 도요토미가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고 탄압한 원인은 당시 스페인 선교사들이 일본에 들어와 결국 일본을 점령한다는 소문에 더욱 격노하여 가혹한 교인 색출에 나섰다. 곳곳에 숨어 지내던 성도들을 한마을에서 밀고함으로서 26명을 한꺼번에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나가사키 니시자카의 언덕에서다. 1597년 2월 5일이라고 순교 터에 적혀있다. 도요토미는 자기가 일으킨 임진왜란이 우리의 이순신 장군에게 패전으로 끝나갈 때 급사한다. 임란 역사서에는 도요토미가 천주교신자로 기록되어있지만 실제 부하 고니시 유키나가가 신실한 신도로 알려져 있다. 다음 권력을 잡은 쇼군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즈음부터 200년 동안 일본은 기독교를 탄압하는 시대 수많은 순교자들이 생겨났다. 열도의 나라 뜨거운 100도 온천수가 나는 곳에 성자들을 밀어 넣고 불에 태우는 처참한 순교의 현장이 26성좌 순교를 비롯 나가사키 일대에 산재해 있다. 여러 공원에서 볼 수 있었다. 곳곳에 후일 세워진 순교자 위령비에 한국인 13명의 명단도 있어 마음이 짠함을 느꼈다. 200년 추방 탄압에 못이겨 산속으로 숨어 살다 나가사키에 다시 복음의 그루터기에서 새 생명이 피었다. 200년 동안 믿음의 생명들은 산속에서 지하에서 숨어 기도하는 시간이 흘렀다. 일본에는 막부시대가 가고 메이지 유신과 함께 종교 개방책에 따라 나가사키에 교회가 세워진다. 바로 국보로 지정된 오우라 천주당. 흩어졌던 신자들이 성당에 높이 세워진 십자가를 보고 몰려들었다고 안내 책에 기록되었다. 5백여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일본은 기독교 인구가 1퍼센트도 안되지만 나가사키 일대에 대부분 모여 이 지역에 10%를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순교의 피의 역사는 곧 주님의 은혜의 골짜기가 된다는 진리를 입증하고 있었다. 성지 순례를 마무리하면서 나가사키 우에노마치에 있는 원폭피해자 나가이 타카시박사의 원폭상처를 노래하는 기념관을 방문했다. 1945년 8월 14일 2차 대전 말 연합군은 일본 히로시마에 이어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다. 이로써 2차 대전이 끝나고 우리나라 또한 치욕의 일제 36년에서 해방한다. 이 거대한 역사의 반전에 원폭 피해의 이야기가 눈물겹다. 당시 의학박사로 두 자녀와 행복했던 타가시박사는 아내를 그 자리에서 잃고 본인은 백혈병 등 10가지 넘는 온몸이 찢어지는 장애인이 되었다. 그러나 박사는 일본의 잘못을 자백하며 다시는 원폭의 역사가 없도록 용서와 화해의 노래를 하고 43세에 세상을 떠난 이야기를 장식한 나가이 타가시 기념관을 찾았다. 마음이 무거웠다. 눈에 들어오는 벽에 그린 사랑의 노래가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에게 남기는 메시지. “네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너희들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이 말씀으로 시작하고싶다. 끝도 이 말씀으로 맺고 결국 모두가 이 말씀으로… 사랑하는 아이들아” 긴 여운을 던졌다. 오늘의 일본, 전범국으로서 경제 강국이다. 무장해제 된 나라이지만 자위대의 위력이 무섭다. 정직하고 정결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나라 일본을 보고 깊은 생각을 한다. 또다시 속을 알 수 없는 나라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으로 다가가야 할 것이다. 그래도 일본 땅에서 지금 예수생명의 씨를 볼 수 있었다는데 있다. 귀가길 성지 순례한 일행 모두의 생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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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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