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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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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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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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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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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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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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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기독교인의 생활 용어 바로잡기[이정희 목사] 스님과 목사님이란 호칭의 분석
    1. 서언(序言) 절의 승려(僧侶)를 일컫는 중(衆)이란 말은 무엇이며, 승려라는 말은 어떤 뜻일까? 또 평소 언론이나 일반인들의 언어생활에서 승려에게는 깍듯이 존칭 접미사를 붙여 스님이라고 부기도 한다. 종교편향에 대한 논란이 격화되면서 이런 호칭과 존칭어에 대한 질문과 논의가 아주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에 본 호에서는 스님과 목사님이란 호칭에 대해서 논해보고자 한다. 2. 존칭접미사 “님”자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 세계의 언어 중에서 존칭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나라는 우리나라이다. 이러다보니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용어도 존칭어이다. 이런 차원에서 존칭어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를 종합하여 먼저 논하고자 한다. 일반 사전적인 어법으로 볼 때, 스님이란 표현은 존칭어를 사용해야 하는 특별한 자리가 아니라면, 존칭접미사 “님”자를 붙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심지어 “예수님, 성령님”도 공식적인 문자 표기나 방송에서는 ‘님’자를 붙이지 않고 예수, 성령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물론 일부 교단(예장 통합)에서는 공식적인 표현에도 예수님, 성령님이라는 존칭 접미사를 붙이자고 총회에서 결의한 바가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결의도 일반 사회에서 통용되는 것은 아니다. 공식적인 문자 표기에는 앞에서 말한 대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존칭을 붙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유독 절의 승려의 경우만은 스님이라고 일관되게 호칭하고 있다. 3. 스님과 목사님에 대한 호칭 불교에서는 흔히 도를 닦는 수행자들을 스님, 승(僧), 승려(僧侶), 사미(소년), 사미니(소녀) 또는 중(衆), 또는 화상(和尙), 법사(法師)라고 호칭 한다. 이로 보면 ‘스님’이란 존칭은 공적인 용어로는 적합하지 않다. 그런데 왜 스님이란 존칭어만이 일반화 되었을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유래가 있으나 모두 확실치는 않고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인도의 고대 말인 산스크리트어(梵語)의 “스와미” 또는 “샹카(sanp ha)"라는 말이 중국으로 건너와 “승” 혹은 “사미”라는 말로 바뀌어져 이를 존칭으로 부를 때 ‘스님’으로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또 하나의 견해는 한자에서 스승을 뜻하는 ‘사(師)’자가 중국에서는 ‘스’로 발음되기 때문에 한자 발음의 ‘스’와 우리말의 존칭 접미사인 ‘님’이 합쳐져서 ‘스님’으로 호칭하게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또 승려를 낮추어 중(衆)이라고도 한다. 이 말은 ‘수행하는 무리들’이란 뜻으로 “사부대중(四部大衆)”이란 말이 어원이고, 나중에 대중(大衆)으로 부르다가 더 축소하여 중으로 호칭하게 되었다. 이상으로 볼 때 중이란 말은 결코 낮추어 부르는 말이 아니었다. 단지 조선시대에 숭유배불(崇儒排佛)정책을 쓴 유학자들이 승려들을 부를 때 ‘중’이라고 했기 때문에 낮춤말로 인식이 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유래로 보든지 현재의 ‘스님’이란 호칭은 존칭어로 사용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어법상으로나 일반적인 표기나 공식적인 호칭어로는 ‘스님’이 아닌, ‘승’, 혹은 ‘승려’로 호칭하는 것이 가장 무난한 것이다. 이상의 논리로 본다면, 목사를 목사님으로 부르는 것은 어떠한가? 이 경우도 역시 위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존칭어로 사용하는 자리라면 당연히 스님으로 하듯이 동일하게 목사님으로 해야 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공식적인 표기로는 ‘목사’라고 하는 것이 올바르다. 그렇지만 교인들조차 일상적인 대화에서 승려는 스님이라 하면서 목사님은 목사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이는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이란 존칭어도 마찬가지이다. 4. 결어(結語) 교인들만이라도 공식적인 표기가 아닌 일반적인 자리에서는 존칭접미사 ‘님’을 붙여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따라서 때와 장소에 따라 보통 호칭과 존칭어는 구분해야 되지만, 용어 하나로 우리 자신을 스스로 비하 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이정희 목사(진해영광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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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2
  • [김문훈 목사] 저주의 쓴물을 멈추고 축복의 단물을 흘려보내라
    강원도 태백에 삼수령이 있다. 하늘에서 방울 세 개가 떨어져서 하나는 금용소로 들어가서 한강 1300리 물길을 이루어 서해로 흘러간다. 또 하나는 황지연못으로 들어가서 1300리 굽이굽이 낙동강을 이루어 남해로 흘러간다. 또 하나는 오십천을 타고 동해로 들어간다. 가정에도 흐름이 있다. 한 사람이 결단하고 나서면 언젠가는 족보를 이룬다. 사무엘상 초반에는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 가정과 제사장 엘리 가정이 등장한다. 엘가나 가정에는 기도하는 아내 한나가 있었다. 가장보다도 기도하는 한 여인이 사무엘상에 물줄기를 갈라놓았다.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공과가 있고 명암이 있다. 백 점짜리 의인은 하나도 없다. 하난에게도 자식을 낳지 못하는 아픔이 있었다. 그것 때문에 기도하다가 마지막 사사요 이스라엘의 사울과 다윗 두 왕을 세운 킹메이커인 사무엘을 낳았다. 엘리 집안에는 가정 교육의 문제가 있었는지 두 아들이 불량했고 부모님의 훈육이 없었다. 엘리의 아들 비느하스의 아내는 패가망신하는 집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이가봇을 외치며 종지부를 찍었다. 한나의 기도는 말씀이 희귀하던 시대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들을 낳고 사무엘의 말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사무엘은 자식 농사에 실패했다. 그의 두 아들들이 말썽을 일으키니 백성들은 다른 열방과 같은 왕을 구하였다. 그래서 사울 왕과 다윗 왕이 등장한다. 사울 왕은 처음에는 겸손했지만 나중에는 변질이 되어서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제사를 드리고 선지자가 죄악을 지적할 때도 변명으로 일관했다.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여 좋은 것을 따로 챙겼다. 하나님께 묻지를 않고 신접한 여자를 찾아서 하나님께 진노를 쌓았다. 그의 집안에 시므이는 다윗에게 저주의 쓴물을 쏟아내었다. 평생을 사람을 원망하고 밖에서 해답을 찾다가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찾아오고 하나님의 집인 성전을 지르려고 많이 준비하였다. 하나님을 노래하고 시를 적고 악기를 연주하며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되었다. 다윗의 때에 예배가 회복되었다. 마침내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펼쳐졌다. 흐름을 맑고 힘차게 하자! 김문훈 목사(포도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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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2
  • [선교] 일본의 새로운 선교방향
    1. 일본의 기독교 선교일본에 기독교가 전파된 시기는 고대(원시~1190), 중세(1190~1865), 근현대(1869~)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경교라는 기독교의 한 종파로 전파되었는데, 경교의 흔적은 문서가 남아있지 않기에 역사적으로 뒷받침하기에는 어렵지만, 일본의 여러 축제(祭り)의 모습을 통해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일본이 처음부터 신도중심의 국가였던 것이 아니며, 일본을 향한 선교는 오래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예수회 소속인 프란시스코 자비에르 신부가 1549년 8월 15일에 가고시마를 거쳐 나가사키에 도착한 16세기입니다. 당시는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지만,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해외 선교에 관심을 가질 만한 때가 아니었습니다. 이에 카톨릭 교회는 개신교의 전도에 대항하며, 동양으로 선교사를 보낸 것입니다. 자비에르는 포루투칼 선장을 통해 일본인을 소개받고, 일본에 오게 되는데, 1년 간의 전도로 1백 50명의 신자가 생겼다고 합니다. 이들의 전도로 당시 기독교인의 수는 일본 전체 인구의 3%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특히, 이 시대에 일본에서 기독교가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오다노부나가가 무로마찌막부의 쇼군(장군)을 몰아내고 전국을 통일하는데, 오다의 집권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크리스천 다이묘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토요토미로 정권이 바뀌면서, 일본은 서구 열강의 식민정책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금교령을 내립니다. 당시의 기독교를 포루투칼어로 ‘키리시탄’으로 불렸는데, 키리스탄은 신의 나라인 일본에 방해가 되는 종교라는 명목으로 전국에 금교령을 내리고, ‘후미에’와 ‘5인조 제도’와 같은 작업으로 키리스탄을 색출하면서, 심한 박해와 고문을 행합니다. 이에 30만명 이상의 키리스탄들이 순교하고 이후로도 약 250년 동안이나 박해와 금교령은 지속됩니다. 그러면서 근대에 들어와 미국의 문호개방 강요에 의해 일본선교는 세 번째 기회를 맞이하게 됩니다. 1854년 미일화친조약이 체결되고, 1859년에 개신교 선교사가 일본에 입국을 합니다, 1872년에는 첫 개신교 교회가 세워지고, 1873년에 금교령이 해제되면서 신교의 자유가 선포됩니다. 하지만, 1889년에 일본의 일왕이 국가의 수호신이라는 대일본제국헌법이 제정되고, 종교단체법이라는 조건이 붙는 데, 신교의 자유에는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방해하지 않고, 신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게 됩니다. 이 법에 의해 1941년에는 일본 안의 모든 기독 교회가 일본 기독교단으로 모두 통합되고, 패전일인 1945년 8월 15일까지 일본교회는 일본의 정부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2. 소외된 기독교 한국보다 먼저 복음이 전해졌지만 한국교회에 비해 일본의 교회 수는 양적으로 질적으로 큰 진전이 없습니다. 선교를 어렵게 하는 여러 요인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하나를 꼽으면 16세기 이후로 일본국가와 일본사회에서 기독교가 소외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교 소속 선교사를 통해 전해졌을 당시에는 전국에 80만명이 넘는 성도들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기독교 금교령 이후에 박해와 탄압으로 인해 일본의 기독교는 점점 일본에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그 후 250여년이 지나고 다시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고, 선교사가 들어왔을 때에 숨어서 신앙생활을 계속했던 카쿠레키리스단(숨은 그리스도인)이 나타나자 세계가 놀랐습니다. 그러나 말씀 없이 형식만 지키고 있었기에 이들의 기독교는 토속신앙으로 변질된 형태로 남았습니다. 근대 이후 개신교 선교사들에게 모인 청년들은 메이지 유신으로 입신출세의 희망을 잃고 몰락한 무사 출신자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선교사들을 통해 학문을 배우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지식층이 되어 일본 학교의 교직자가 되거나 일본 관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가르침과 사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서민들이 접하기에는 문턱이 높은 주로 지식층 중심이 되었고, 일본 정부는 일왕을 천왕이라고 명하여 국가와 국민을 결속하는 정신적인 지주로 삼고 군국주의 체제와는 맞지 않다는 이유로 1945년 8월 15일 패전이 되기 전까지 기독교를 사회에서 소외시켜 왔습니다. 3. 새로운 선교 방향 (계속되는 일본 선교) 아직도 기독교 인구가 0.1%도 되지 않는 일본이지만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의 말씀을 따라 일본 선교는 여전히 진행 중에 있습니다. 일본인에게는 ‘야오료로즈의 카미’(八百万の神:팔백만의 신)라고 하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많은 신들이 존재합니다. 일본에는 일왕이 신이 될 수 있었듯이, 사람과 동물도 자연의 그 어떤 것도 카미(신)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기독교의 하나님과 카미(신) 개념의 차이로 현지 선교사들은 많은 고심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여러 카미(신)와는 다른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기에 일본 선교는 여전히 희망이 있습니다. 일본 사회에서는 개인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전체의 의견과 다른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데는 소극적입니다. 이러한 성향은 기독교 금교령 이후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일본국가와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15년 전, 한 영혼의 유해를 가족에게 전달하면서 시작한 일이 나가사키 순교지 방문으로 이어지고, 계속된 방문 가운데 나가사키의 순교지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가 되면서, 나가사키현의 공무원들이 CBS를 찾아와 감사패를 전달하고, 나가사키 지역 공무원들이 CBS의 일들을 돕기 시작한 것은 매우 놀랍고 감사한 일입니다. 두드러지면 안 되는 일본의 사회 속에서 공무원들이 기독교를 돕는 일은 오랜기간 동안 소외시 되어 왔던 기독교가 일본 사회 속에 다시 자리를 잡아가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CBS가 목표로 하는 미디어 선교가 이러한 관계 속에서 향후 나가사키지역에서 방송 선교로서 자리를 굳게 잡게 된다면, 복음이 일본 전역으로 전해지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CBS가 일본 행정당국의 협조를 얻어 길을 내기 시작했다면 이제는 한국교회와 일본교회가 함께 손을 잡고 복음을 위해 협력할 때가 온 것이라 볼 수가 있습니다. 선교사의 무덤이라고 일컬어지는 일본이지만,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일본선교에 함께 동역할 사람들을 주님은 여전히 찾고 계십니다! 김주영 선교사(후쿠오카 비전교회, K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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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12
  • [아침묵상] 엘리야의 집중기도
    예언자 엘리야는 이스라엘 왕국의 아합-이세벨 시대에 활약하였던 예언자입니다.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이 바알을 섬기는 왕가의 딸로 이스라엘에 시집을 올 때에 바알 신앙을 전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왔습니다. 어리석은 왕 아합은 왕후의 감언이설에 말려들어, 여호와 하나님 신앙을 떠나 바알 신앙을 퍼뜨리는데 이용당하였습니다. 이세벨 왕후는 바알 제사장들의 배후가 되어 그들을 지원하면서, 여호와 신앙을 지키는 제사장들을 죽이고 가두고 핍박하며 씨를 말리려 하였습니다. 여호와 신앙의 투사 엘리야가 그녀에게는 공공의 적 1호였습니다. 그에게 사람을 보내어 내일이면 네가 죽을 차례라 통보하였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살 길을 찾아 사막으로 들어가 로뎀나무 그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호소하였습니다. 차라리 자신이 죽게 해 달라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리고 나무에 기대어 잠이 들었습니다. 그가 잠을 깨니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로 상을 마련해 주시고는 일렀습니다. “엘리야야 일어나 먹고 마셔라, 아직 너가 하여야 할 일이 많으니라”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떡은 말씀을 상징합니다. 물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엘리야가 낙심하고 기진맥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숯불에 구운 떡과 같은 말씀의 떡과 한 병 물과 같은 성령의 위로로 그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용기를 얻은 엘리야는 40일 밤낮을 걷고 걸어 호렙산 굴을 찾았습니다. 굴에 엎드려 그는 목숨을 걸고 기도 드렸습니다. 목숨을 걸고 집중하여 기도 드렸습니다. 엘리야의 목숨을 걸고 드리는 집중기도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시어 물었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열왕기상 19장 13절)”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라를 일으키는 길을 일러 주었습니다. 목숨을 건 집중기도는 예나 지금에나 막힌 담을 헐고 기적이 일어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지금은 나라를 위해, 교회를 위해 목숨 걸고 기도 드릴 때입니다. 그래서 두레수도원은 4월 13일에서 17일까지 목숨 걸고 기도 드리는 집중기도훈련을 열고자 합니다. 김진홍 목사(아침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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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06
  • [박성규 목사] 우리가 선교해야 하는 이유
    지난 한 주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신경을 많이 쓰셨지요? 감염된 분들의 조속한 치유를 기원합니다. 우리 교우들 모두 이 기간 강건하시길 기원합니다. 2월 2일 주일은 부전교회의 ‘2020 선교헌신주일’입니다. 부전교회는 지난해에 2천 명이 넘는 성도님들의 헌신으로 100여 곳의 선교지를 도울 수 있었습니다. 성도들의 고귀한 헌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요즘 우리나라 경기도 좋지 않은데 선교 헌신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궁금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우리는 왜 선교사님들을 도와야 할까요? 첫째 선교는 예수님의 유언이자 최고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마지막 유언이자 명령이 있습니다. 그것을 지상명령(至上命令)이라고 부릅니다. 지극히 높은 명령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요, 군인으로서 그분의 명령을받들어야 합니다. 어떤 설교자는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이 지상태만(The Great Ommission)이 되었다고 지적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명령에 불복종한 태만의 죄를 지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둘째 선교는 내가 받은 빚을 갚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좋은 여건에서 구원받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130여 년 전 이 땅에 왔던 해외에서 온 선교사님들 덕분입니다. 그분들은 자신들의 나라보다 불편한 이 땅에 왔습니다. 서울 양화진과 광주 양림동 언덕과 창원 공원 묘원 등에 있는 선교사들의 묘비를 보십시오. 가슴에 진한 감동이 몰려오지 않습니까? 묘비에는 풍토병으로 숨진 어린 자녀를 이 땅에 묻어가면서, 아내와 남편을 묻어가면서도 그들이 우리 민족을 향한 선교를 포기하지 않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들은 어린 아들과 딸을 거기에 묻으면서도,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를 거기에 묻으면서도 지상명령이 지상태만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선교했습니다. 그 땀과 눈물과 피 위에 오늘 우리 교회와 우리의 신앙이 서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셋째 선교는 우리에게 선교사의 상을 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41절에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선교는 마땅히 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선교하는 성도와 교회를 복 주십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역사의 무대에 쓰임 받게 하십니다. 교회의 진정한 크기는 본당의 좌석수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선교사를 보내고 후원하는 선교후원자가 많은 가로 결정됩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차원에서 큰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박성규 목사(부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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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06
  • [최호숙 목사] 경적필패(輕敵必敗) 그러나 선주필승(先主必勝)
    1년은 일생의 축소판이라는 말이 있다. 마지막 날은 하루의 출발부터 시작되어 이르게 되는 것이다. 출발이 중요하지만 어떻게 마지막까지 성공적으로 도착하느냐 이것이 더 중요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 길 출발을 하였다. 출발한 장정 60만(어린이, 노약자, 여인, 포함하면 약 250만 명 추정)의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를 가칭 “광야교회”라 부르고 있는데 이 광야교회 교인들이 출발은 잘하였으나 가나안 도착까지는 여러 어려운 문제들이 많았다. 바울은 광야교회 실패의 요소들을 네 가지로 지적하면서 고린도교회에 교훈의 편지를 썼는데 그 네 가지 원인이 무엇인가? 첫째로 우상의 문제(고전 10:7) 둘째로 음행의 문제(고전 10:8) 셋째로 주를 시험하는 문제(고전 10:9) 넷째로 원망의 문제(고전 10:10) 이 실패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본보기(거울)로 삼아 성공적인 성도들이 되라는 교훈을 주면서 마지막 남긴 말이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하였다. 사탄은 지금도 천성문을 향하여 달려가는 성도들을 대상으로 광야교회를 파멸시킨 네 가지의 강력한 무기로 우리를 계속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대처법이 필요하다.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네 종류의 인간유형을 보게 된다. 첫째 유형, 아무생각 없이 사는 무상무념(無想無念)의 인간 둘째 유형, 모든 사물을 우상(偶像)삼아 위로받고 사는 범신론(汎神論)적 인간 셋째 유형, 오직 인간의 지혜와 자신의 능력을 믿고 사는 인본주의(人本主義)적 인간 넷째 유형,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본주의(神本主義)적 인간이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양에 비유하고 세상을 이리(마 10:16)로 표현하였고, 베드로 사도는 우리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 사자로 표현하였다(벧전 5:8). 이 표현의 핵심은 적군은 강하고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적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전능자이며 삶의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분을 앞세워 나가야 승리할 수 있다는 결론임을 알 수 있다. 손자병법에 경적필패(輕敵必敗)라는 말이 있다. 적군을 우습고 가볍게 여기면 반드시 패하게 된다는 뜻이다. 유사어로는 교병필패(驕兵必敗)가 있는데 마찬가지로 군사력을 믿고 교만하면 반드시 패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대처방법은 무엇인가? 우리의 승리 비결은 선주필승(先主必勝)이다. 즉 주님을 먼저 앞세우면 반드시 승리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 원리를 알았던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만군의 여호와 이름을 앞세워 나갔던 것이다. 그래서 삶의 체험을 통해 고백한 말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18:1). 2020년 한해 선주필승(先主必勝)하기를 바란다. 최호숙 목사(인평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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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06
  • [어깨동무 칼럼] 시험지옥
    地(땅 지) 獄(가둘 옥) 하나님의 질서가 죄로 인해 파괴된 공간인 땅에 가두는 것. 그것이 바로 지옥인 것이다. 지옥같은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품고 그것을 실현하는 존재가 바로 크리스천인 것이다. 수능이 끝나고 고3 학생들은 면접과 합격발표를 기다리며 휴식 아닌 휴식을 취한다. 하지만 그 날로부터 큰 부담과 스트레스의 직격탄을 맞아 새벽같이 일어나 새벽별을 보고 집에 오는 학생이 바로 고2학생들이다. 시험지옥에 좀 더 깊숙이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의 존재가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인데 우리아이들은 지옥속에 살아간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그곳으로 밀어넣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학교에 보내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네’ 찬송가의 가사처럼 같은 공간 같은 제도속에 살지만 결코 그곳이 시험지옥이 아닌 하나님이 덮어주시고 하나님 안에서 기쁜 생활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와 관계하며 지냈던 많은 다음세대에게 말해주었던 나의 생각은 ‘공부의 주인공이 되라.’ 이다. 공부는 내가 하고 싶어서 하고 내가 원해서 하며 나의 목표와 계획속의 한가지 도구일 뿐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것이 공부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 억지로 먹이는 음식이 있다고 해보자 내 입맛이나 내가 먹고 싶은 것이 아닐때는 아무리 맛있다고 소문난 음식이라도 그것은 고문이고 고통일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지옥일지도 모른다. 내가 먹고 싶을 때 먹어야 하고 먹고 싶은 것을 먹어야 맛있고 배 부른 것이다. 교회에 새신자가 오면 새신자 훈련총서로 9년간 교육해왔다. 첫 교육하는 날 강의계획서와 함께 마지막 시간에 시험이 있다고 말하면 다들 부담스러워 하고 교회다니기가 이렇게 힘든것이냐? 이런이야기를 한다. 그때 제가 생각하는 시험의 목적을 알려주면 다들 안심을 하곤 했다. 그 목적을 나눔으로 글을 마치려 한다. “여러분 제가 생각하는 시험의 목적은 내가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를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다시 찾아봄으로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험을 치고 제가 확인후 빈곳을 집에 가셔서 채워서 만점을 만들어 오시면 시험이 끝납니다.” 이런 시험을 치르는 곳이 있다면 그곳은 시험지옥이라 부르지 않을 것 같다. 줄세우기식 교육제도와 등급을 나누어 우리 아이들을 판단하는 그런 제도안에서 우린 과연 시험지옥을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쩔수 없이 새벽별보고 시험지옥에 사는 아이들이 아니라 별을 보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고 경배하기 위해 먼 길을 온 동방박사들처럼 가장 귀한 것을 예수님께 드리고 경배하는 아이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시험지옥에서 아이들을 건지기 위해 교회와 가정과 학교가 어깨동무하여 고민하여야 할 것이다. 진연욱 목사(진해 어깨동무학교 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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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06
  • [조희완 목사] 부요할 내용 (창26:12-22)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들을 때 기분이 좋은 인사말이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한국 “부자특성연구회”(富者特性硏究會) 회장을 맡고 있는 <문성렬>박사의 저서 <부자일지> <한국부자 세븐파워의 비밀>에 참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한국의 대표적인 부자들의 특성을 연구한 결과 다음과 같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부자들은 전문가를 100% 신뢰하지 않는다(자기주관). 2.부자들은 아침 형 인간이 많다(부지런). 3.부자는 얼굴에 부자 라인이 있다(웃음). 4.부자는 가구나 가전제품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절약). 5.부자는 옷차림이 수수하다(검소). 6.부자는 붉은 색을 좋아한다(열정). 7.부자는 주말보다 평일 쇼핑을 좋아한다(대우). 8.부자는 남향(南向)집을 선호한다(서울 강남의 최고급 아파트인 타워팰리스의 경우 남향집은 모두 부자들 소유). 9.부자는 겨울에 태어난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12-1월, 이와 같은 통계는 세계 적인 경제 전문 잡지인 <포천>에서도 거의 같은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10.자녀 교육에 투자하는 성향이 강하다. 사람들 중에 대부분이 다 부자(富者)가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땀 흘려서 일하고 아끼고 절약하는 것은 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가난하게 사는 것보다는 부자로 사는 것이 훨씬 더 좋습니다. 부자가 되어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큰일도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큰 부자가 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큰일을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어떤 면으로 큰 부자가 되어야 할까요? 성경에 보니까 우리의 삶 가운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부요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이 부요해야 합니다.(약2:5) 둘째는, 재물이 부요해야 합니다.(창26:12,13) 셋째는 선행이 부요해야 합니다.(딤전6:18,19) 우리 모두 아름다운 부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조희완 목사(산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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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05
  • [이정희 목사] 불교에서 유래된 용어들 : 화두(話頭)
    1. 서언(序言)우리의 일상 생활용어 중에는 타 종교로부터 온 용어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어떤 불교계의 언어학자는 이를 연구하여 우리말 어휘 630여 단어가 불교 권에서 유래한 용어로 분석하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에 불교가 전래 된지 2천년이 가까운 세월 속에 불교적 용어들이 모든 종교와 사회의 일반 언어 속에 녹아들어져 있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모든 용어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할 것이 아니라 바로 알고 잘 구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논한 대로 우리의 용어들 중에는 기독 신앙인으로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용어들이 있다. 그것은 타 종교의 교리적인 용어들로서, 우리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위협하는 상당수의 용어들이다. 이러한 용어들은 아무리 일반화 되고, 듣기 좋고, 어감이 좋고 말하기 좋다 할지라도 교인으로서는 사용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화두(話頭)”라는 말의 뜻과 본래의 사용 용도를 보면, 정치권이나 다른 일반 사회 용어, 특히 교회 용어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말임을 알 수 있다. 국어사전에 보면, 한자어의 뜻을 그대로 풀이하면 “이야기의 말머리”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사전의 뜻풀이 그대로 신년 초나 어떤 말의 서두를 잡을 때 화두라는 말을 한다. 사전적인 의미로 볼 때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일반 사회적인 통용 언어의 관점에서는 이 말에 시시비비를 가릴 이유는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용어자체의 유래를 보거나 본격적인 사용처를 보면 완전한 불교에서 유래된 용어일 뿐 아니라 기독교 교리에도 맞지 않는 말이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본다면 이 용어는 불교의 선문답(禪門答)이나 오도(悟道)이야기의 핵심용어중의 하나이다. 즉, 이 말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불교의 수행자들에게 조실 승려(祖室: 큰 절의 최고 어른 승려)나 스승 승려가 뜻이 무엇인지를 풀어보라고 던져주는 과제 혹은 문제를 말한다. 이 과제를 받은 수행자는 이 화두를 연구하면서 참선 수행을 하게 된다. 이러한 화두는 약 1,700여 가지가 될 정도로 아주 많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화두는 무(無), 마른 똥 막대기, 뜰 앞의 잣나무, 동산이 물위로 간다, 경상도 사투리의 하나인 “이 뭐꼬?” 등이 있다. 예를 들어 스승 승려가 “불법(佛法)이 뭐꼬?”라고 질문하면, 수행자가 연구 끝에 “불법이란 뜰 앞의 잣나무입니다.”라고 대답했다면, 바로 이런 질문이 화두이고 답변인 것이다. 수행자는 이렇게 화두의 말을 듣고 그것을 해석해 보려고 배전의 노력을 하는 가운데서 차츰 불교의 교리에 익숙해져 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로 본다면 106문항으로 된 ‘요리문답’과 비슷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 화두란 말은 일반적인 말이 아닌 순수한 불교 입문단계의 질문들인 것이다. 물론 어떤 풀어야 할 과제가 있을 때 스승이나 책임자가 다른 학습자에게 연구해보라고 던져주는 말을 화두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본래의 의미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더군다나 우리 교인들이 일상적인 생활 용어에서 이런 말을 사용 할 이유는 전혀 없는 것이다. 3. 결어(結語)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보면, 화두란 말은 일반 사회에서도 그 내용 자체를 잘 모르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우리 교인들은 더욱 더 그러하다. 아무튼 이미 일반화 된 생활용어에 대해 타종교적인 말이라 하여 무작정 사용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다소의 문제가 있다. 그러나 앞에서 기술한대로 이런 말 자체가 우리의 믿음과 배치되는 타 종교의 교리적인 용어라면 경우가 다르다. 그러므로 “화두”라는 용어는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삼가야 될 용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 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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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2-05
  • [오성한 목사] 나는 나에게 복음을 선포한다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 하나님께 고백하며 나에게 이야기를 해 준다. 당신도 그렇게 해 보라. 놀라운 확신과 힘을 갖고 살 수 있을 것이다. “성한아, 너는 의인이란다. 너는 하나님의 의로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며, 복음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이 있단다. 너는 성령의 사람이란다. 너의 배에서는 생수의 강이 철철 흘러넘친단다. 자고 일어나도 네 머리엔 하나님의 영광이 있단다. 너는 주님 안에 주님은 너 안에 있단다. 너의 몸은 성전이란다. 너는 보좌를 품은 자란다. 너는 보좌 앞에 언제나 있단다.”라고 수도 없이 주장하며 나에게 알려 주었다. “성한아, 너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란다. 네 몸 안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네 생물과 24 장로와 함께 보좌로 언제든지 나가야 하고, 언제든지 나갈 수 있단다.”라고 나 자신에게 믿어지기까지 알려주고, 말해 주었다. 나는 임마누엘의 영광이 내 머리 위에 항상 있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나에게 말해 주는 일을 부지런히 한다. 이것을 모르고 산 시간이 안타까워 다시는 속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반복하며 이 일을 한다. 내가 이것을 몰랐다면 계속 죄책감과 자괴감으로 지금도 살아갈 것이다. 나 자신이 이 사실이 믿지 않는다면 능력으로 전해질 수 없고, 능력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복음의 조명이 밝아지지 않았다면 성령 충만하기를 평생 간청만 하고, 한 번도 완전한 성령 충만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살았을 것을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다. “전에는” 어둠이었지만 “이제는” 빛이라는 것을 인정하자. 나는 빛이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빛이 이르렀고 하나님의 영광이 내 머리에 머물러 있는 것을 믿기 시작한 후 변화된 나를 보면서 스스로 놀랄 수밖에 없다. 그렇게도 고쳐보려고 힘쓰던 일이 저절로 되는 것이었다. 항상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저절로 고쳐진다는 것이 깨달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께서 해 놓으신 일을 진심으로 인정해 드리기만 하면, 저절로 열매가 맺혀짐을 보았다. 나의 모습을 보면서 낙망하고, 좌절하고, 죄책감을 가지던 생각을 내려놓았다. 내려놓음이 무엇이며,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주님께서 나에게 이루어 놓으신 것을 감사하며, 나에게 말해 줄 때마다 신바람이 난다. 기도하다가 자주 기쁨의 함성을 지르게 된다. 몸을 흔들며 기뻐하기도 한다. 팔을 힘껏 돌리며 기쁨을 감출 수 없어 혼자서 춤을 추기도 한다. 웃기도 한다. 너무 행복하다. 나 자신에게 주님이 이미 이루신 복음을 말할 선포할 때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고 그동안 내가 잠재운 성령의 능력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있다는 것이 믿어진다. 나는 스스로 열매를 맺길 원했었지만,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예수께서 이미 열매를 맺는 자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열매를 맺고 있는 자였다.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신다”(요한복음 15:2)라고 하시면서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다”(요한복음 15:3)라고 하신 것이 깨달아졌고, 나 자신에게 너는 열매 맺는 자라고 알려주고, 나 스스로 감사하며 열매 맺는 자임을 고백한다. 열매 맺는 가지는 깨끗하게 하신다고 하셨는데 이미 깨끗해졌다고 하시는 말씀을 믿게 되었다. 열매 맺으려고 노력하라는 말이 아니라 열매 맺고 있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감격의 말씀이었다. 이제 나는 내가 열매 맺으려는 노력을 내려놓았다. 저절로 열매가 맺어짐을 본다. ‘저절로’보다 쉬운 일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열매 맺는 것은 저절로 맺는 쉬운 일임을 알게 되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다”라는 말씀을 알게 되었다. 그래야만 열매를 맺을 수 있지 나의 노력으로는 절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열매를 맺는 가지다. 그래서 더 맺게 하려 하셨다. 나는 오늘도 열매 맺는 자임을 나 자신에게 알려 주며 선포한다. 오성한 목사(웅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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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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