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 교수] 신교(信敎)의 자유와 정치 참여의 문제
시작하면서
현재 우리 사회는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정치인들이나 국회, 사법부를 보면 그렇다. 이해할 수 없는 이들이 반복된다. 교계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 신앙이 위협당하고 신앙의 자유가 제한을 받고 있지만 위기 의식이 없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동성애와 동성혼, 포괄적차별금지법과 같은 반기독교적이고 비기독교적인 사안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를 주창하고 자신의 정치적 과제로 여기는 이들을 기독교인들이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성혼이 합법화되고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성경의 가르침을 설교할 수 없는 상황이 오게 되는 것이 분명하고, 신앙의 자유가 심각하게 제한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유럽의 나라에서 경험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저지하기 위한 조직적 운동(정치참여)을 경원시하고 있고, 이런 비기독교적인 주장에 반대하고 싸우는 이들을 비난하거나 공격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오늘의 현실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신교의 자유, 곧 종교의 자유와 종교행위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이는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을 지키며, 예견되는 신앙의 자유와 신앙행위의 자유가 침해받거나 제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 소중한 자유를 제도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노력도 필요하다. 이를 정치참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종교의 자유 혹은 신교(信敎)의 자유를 말하면 로마제국에서의 박해와 같은 정치적 탄압만 생각하기 쉽지만 오늘 우리 사회에도, 심지어 종교의 자유를 말하는(헌법 제20조 1항) 오늘 우리 시대에서도 진정한 의미의 종교의 자유가 훼손될 위험에 직면해 있다. 우리나라 헌법 제20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종교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규정하여 종교의 자유를 헌법상의 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는데, 종교의 자유는 자신이 선택한 종교를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믿는 자유를 말한다. 여기에는 내면적인 종교적 양심의 자유를 비롯하여 종교적 신념을 외부적으로 표현하는 예배의 자유, 종교적 집회와 결사의 자유, 종교적 표현의 자유, 선교의 자유, 종교교육의 자유 등이 포함된다. 그러나 반 기독교적인 입법이 이루어지만 이런 자유가 훼손될 수 있다. 이런 현실에서 역사적으로 신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어떤 투쟁을 해 왔는가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신교의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읺았다.
기독교 역사는 신앙의 자유, 신교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 신앙의 자유는 거져 주어지지 않았다. 기원 30년경 예루살렘에서 기독교회가 세워진 이후 첫 30년간은 유대교의 박해를 받았고, 64년 이후에는 로마제국의 정치적인 박해를 받았다. 250년 데키우스(Decius) 황제 이후에는 보다 조직적인 탄압을 받았기에 신앙의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된 4세기 이후에는 기독교가 신교의 자유를 누렸는가? 기독교권의 교권체제 하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그래서 중세시대에도 파리의 존, 마르실리오, 윌리엄 옥캄, 위클리프나 얀 후스, 프라하의 제롬 같은 이들이 목숨 바쳐 싸웠다. 16세기에는 종교개혁자들은 이교적 교권주의, 교황체제, 전제군주와 교황의 전권사상(Plenitudo Potestatis)에 대항하여 신교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 그렇다면 17세기 이후는 진정한 자유를 누렸는가? 합리주의, 계몽주의, 이신론 혹은 그 이후의 서구사회에서 성경적인 기독교 신앙, 혹은 개혁주의 신앙은 끝임없이 공격을 받고 제한을 강요당해 왔다. 뒤돌아보면 기독교는 신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투쟁했고, 그 결과로 오늘의 기독교 신앙을 지키고 계승하게 된 것이다. 권력자의 요구에 묵종하고 순응했다면 오늘의 기독교회로 발전할 수 있었을까?
2. 스코틀랜드에서의 경험
오늘 우리가 지난 역사를 다 살펴볼 시간이 없다. 장로교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스코틀랜드의 경우를 살펴보자. 거두절미하고, 존 낙스는 1559년 유럽에서의 10여 년간의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조국 스코틀랜드로 돌아갔다. 그날이 5월 2일이었으니 466년 전 오늘이었다. 그는 1560년 4월부터 에딘버러의 성 가일(St. Giles)교회 설교자가 되었고, 그의 설교는 개혁의 수단이었다. 그는 학개서를 강해하면서 스코틀랜드 개혁교회의 이상을 설교하면서 8월에는 라틴어 미사를 금지하고 감독제를 거부하고, 6명의 존(John)으로 구성된 신앙고백 준비위원회가 4일만에 작성한 신앙고백서를 8월 17일 채택했다. 이것이 25개 항으로 구성된 ‘스코틀랜드신앙고백서’이다. 1647년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채택되기 이전까지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였다. 그리고 1560년 12월에는 스코틀랜드장로교 총회를 구성했다. 세계 최초의 장로교 총회였다. 이로써 스코틀랜드는 세계장로교회의 모국이 된 것이다. 이게 그냥 쉽게 된 일인가? 거저 주어진 일인가? 그렇지 않다. 국가 권력과 싸우면서 로마교 지지자들과 대결하면서 쟁취한 것이다. 불가피하게 정치에 참여하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정치적 행동을 불사한 것이다.
그가 제네바에서 3년간 체류하면서 칼빈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낙스는 개혁을 단행하고 ‘스코트랜드 개혁교회’(Reformed Church in Scotland)라고 명명하지 않고 장로교주의(Pesbyterianism)를 지향했다. 왜 그랬을까? 일차적으로는 인접한 잉글랜드의 감독제와 다른 장로제의 교회라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 교회의 자율과 독립을 중시했기에 국가의 수장이 교회의 수장이 되는 감독제와는 다른 대의제도 곧 ‘장로교 제도’의 교회를 지향한 것이다. 장로교 제도는 원천적으로 교회 밖의 권력 기구나 국왕이나 의회나, 지방 제후가 교회 문제에 개입하거나 간섭하지 못하는 제도이다. 이게 장로교 제도이다. 국가 권력의 끊임없는 교회 간섭을 거부한 것이다. 그래서 치리법원으로 불리기도 한 당회(kirk session)를 두게 된 것이다.
그런데 1561년 8월 19일, 프랑스에 가 있던 부재국왕 메리 스튜어트(1542-1587)가 13년간의 프랑스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다. 그날이 토요일이었다. 귀국한 첫 일요일이 8월 20일이었는데, 미사를 드리겠다고 고집했다. 이것은 단순한 개인의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개혁 이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낙스에게 저항했던 로마교 세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메리는 단순한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바른 신앙의 대적이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낙스는 성가일 교회당에서 메리의 미사를 비난하는 우레와 같은 설교를 발하였고, 강단에서 메리의 이름을 거명하면서 메리의 미사를 ‘새 이세벨(new Iezebel)의 우상숭배’라고 공격한 것이다. 그가 강단에서 열거했던 정치인은 메리만이 아니라 그랜지, 하민턴가의 사람들, 카스틸리안 등이다.
낙스는 위대한 설교가였다. 그는, 설교를 ‘하나님의 나팔을 대신 부는’ 행위로 규정했다. 이런 점에서 스탠포드 리이드(Standford Read)는 낙스의 전기를 출판하면서 “하나님의 나팔수”(Trumpeter of God)라는 제목을 붙였다. 낙스는 연속설교, 혹은 강해설교를 지향했는데 신약보다는 구약에 강조를 두었고, 본문의 의미를 제시한 이후 그 본문이 주는 교훈을 직접적으로 당시 정치적 상황과 관련시켰다. 그의 설교는 상당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설교는 “로마교의 가지를 치는 정도였다면, 낙스의 설교는 로마교의 뿌리는 흔드는 것”이었다고 리이드는 평가했을 정도였다.
낙스는 불의한 정치권력, 곧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는 권력과 권력자를 공격했다. 그가 살았던 환경은 한가한 세월이거나 안거위락(安居爲樂)을 구할 상황이 아니었다. 로마교의 사슬이 가까이 있었고 국가권력의 도전 앞에서 신교의 자유를 지켜야 하는 상황에서 그는 설교를 통해 때로 정치지도자들을 책망하고 경고했던 것이다. 그래서 낙스는 메리 여왕과 싸웠는데, 성 가일교회는 메리가 있는 왕궁으로부터 1km 거리에 있었다. 왕을 비판하자 왕궁에서는 낙스에게 본문에 충실한 설교를 할 것을 요구했다. 이때 낙스는 “나는 설교자로서 의무를 다할 뿐이라”고 대답했다. 메리는 낙스를 소환하여 경고했으나, 낙스는 존 메이저(John Major)의 이론을 따라 만일 국왕이 박해할 경우 국민들에게는 항쟁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말하자면 국민저항권을 말한 것이다. 불행한 일이지만 메리는 자신의 부덕한 일로 국민적 신임을 잃고 폐위되었고 영국으로 도피했으나 거기서도 방자한 일로 19년간 유폐되어 있다가 1587년 2월 8일 런던 답에서 처형되었다.
낙스가 1572년 11월 24일 사망한 이후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이 후계자가 되어 교회를 이끌게 되지만 또 다시 국가 권력의 간섭과 통제를 받기 시작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국가권력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그 국가 권력이 정당하게 권력을 행사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국왕 제임스 6세는 반(反)장로교주의자로서 그의 치하에서 ‘암흑법’(Black Acts)이 제정되었고 엔드류 멜빌 등 20여 명은 국외로 추방된다. 암흑법은 스코틀랜드에 주교제를 도입하고, 국왕의 교회 지배권을 허용한 법안이었다. 1592년에는 ‘황금법’(Golden Acts)가 제정되어 교회의 자유와 특권, 세속 정부의 불간섭을 규정했지만 교회의 자율과 독립을 저해하는 요소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제임스 6세는 제임스 1세라는 이름으로 잉글랜드의 왕이 되고 그의 뒤를 이어 찰스1세가 왕이 되는데 다시 교회를 탄압하고 박해했다. 이런 상황에서 ‘언약도 운동’(Covenanters)이 일어났다.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찰스 2세, 찰스 2세를 이어 동생 제임스 2세가 왕이 된다. 교회에 대한 간섭과 박해가 심화되었고, 반기독교적인 법률이 제정된다. 그는 청교도들과 대립했는데, 국왕은 모든 교회와 설교자들에게 기독교 신앙에 반하는 법령을 보내고 그것을 회중 앞에서 낭독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이 명령에 복종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 청교도 목사는 예배 때 이렇게 광고했다.
“저는 이 교회당 안에서 국왕이 보낸 법률을 낭독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을 반드시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배를 폐하고 교인들은 다 돌아갔다. 교인들은 목사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 차렸던 것이다. 그때 목사는 텅빈 예배당에서 혼자 그 법안을 읽었다.
신교의 자유가 박탈된 슬픈 역사의 한 토막이다. 악한 국가 권력은 끊임없이 신교의 자유를 제한하고 교회마저 지배하려고 했다. 그래서 이들이 정교분리를 말하게 되었고 그것은 일차적으로 국가권력의 교회 간섭을 부정하는 원리였다. 그래서 기독교회는 정치 현실에 무관심할 수 없는 것이다.
3. 한국에서의 종교의 자유 혹은 신교의 자유문제
우리가 ‘종교의 자유’라고 말할 때 두 가지를 포함한다. 첫째는 신앙의 자유(Glaubensfreiheit)를 말하고, 둘째는 종교행위의 자유(Religionsausübungsfreiheit)를 의미한다. 종교행위의 자유는 종교적 행사의 자유, 종교적 집회와 결사의 자유, 종교교육의 자유, 전도 혹은 선교의 자유 등으로 세분화할 수 있다. 종교적 행사의 자유란 그 믿는 바를 외부적으로 표현하는 각종 예배나 종교의식의 자유, 곧 거기에 참가하거나 참가하지 않을 자유를 의미한다. 이처럼 예배의 자유는 종교의 자유에 속한 근원적이고도 기본적인 자유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독일의 법학자 콘라드 헤세(Konrad Hesse, 1919-2005)는, 신앙의 자유, 예배의 자유, 종교적 결사의 자유를 종교의 자유의 본질적 요소라고 말한 바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예배는 종교행위의 자유일 뿐 아니라 신앙의 대상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으로써 교회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사명으로 일컬어져 왔다. 일반적으로 교회의 4가지 사명을 말하는데, 예배(라트레이아)를 비롯하여 증거(마르튀리아), 교육(파이데이아), 봉사(디아코니아)가 그것이다. 이 네 가지 사명은 교회의 본질과 관련되며, 교회의 존재 이유가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집회와 예배를 소중하게 여겨 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의 자유와 함께 집회의 자유는 한국에서도 거부되거나 침해를 받아왔고, 예배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하기도 했다. 전제주의나 공산주의 혹은 독재정권 하에서만이 아니라 오늘 한국에서도 코로나 방역이라는 이름으로 집회를 금지하거나 예배를 제한하고, 심지어는 교회를 폐쇄한 일도 발생하였다. 이런 현실에서,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집회와 예배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어떤 투쟁을 해왔을까? 이 점에 대해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면서 신교의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1) 일제의 집회 및 예배 방해
국가권력이 공권력을 동원하여 예배를 방해한 대표적인 경우가 일제하에서의 집회 방해였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병탄했을 당시 조선에는 20만 신도, 300개 이상의 기독교학교, 3만 명 이상의 학생, 1,900여 개소의 집회소, 270여 명의 외국인 선교사, 2천3백 명의 조선인 교직자를 거느린 집단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일제가 파악한 교세는 실제보다 부풀려진 것이지만 이런 기독교 집단을 통제하고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것이 식민 지배를 위한 필수적 요소라고 파악하고 식민통치 전(全) 기간동안 기독교를 적대시하고 위험시했다. 일제는, 종교의 자유 혹은 신교(信敎)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해 행정적인 통제, 교리에 대한 통제, 종교적 전향의 강요, 그리고 탄압 입법의 제정을 시도했는데, 이를 통해 기독교를 탄압하고 집회의 자유를 제한하고자 했다. 이들은 일본의 천황제 파시즘의 핵심 사상인 팔굉일우(八紘一宇)의 기치 아래 어능위(御稜威)라는 절대적 권위로 성전(聖戰)을 이루는 대과업을 위해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총후보국(銃後報國)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집회를 제한하거나 금지시켰다. 통감부는 조선에만 적용되는 외지법(外地法)을 제정하였는데, 특히 보안법, 조선형사령, 치안유지법, 불경죄 등을 근거로 집회를 제한하고 예배를 감시하고 설교를 통제했다. 1939년 9월 8일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8회 총회에 보고한 경남노회의 상황보고를 보면, “교회가 시국 문제로 심히 어려운 중에 있고,” “시국 문제로 폐쇄된 교회가 많았으며, 따라서 교역자와 신자 수가 감소하였다”라고 말하고 있다. 교회의 폐쇄는 예배의 자유에 대한 침해였다. 그런가 하면, 방공(防空)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야간 집회를 제한하고 시국인식(時局認識)이라는 이름으로 목회자들의 종교활동을 통제했다. 심지어는 민족해방을 말하는 출애굽 사건이나, 절망 중에 소망을 주는 에스겔서 37장 등은 설교할 수 없는 금지된 본문이었다.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등과 같은 찬송은 금지곡으로 지정되었다. 집회 방해이자 예배 방해였다. 일제 말기에는 교회를 통폐합시켰다. 예컨대, 1942년(소화 17년 4월 현재) 당시 경남지방에는 325개 처 교회가 있었다. 그런데 일제는 108개 교회를 통폐합이라는 이름으로 폐쇄시키고, 217개 교회만 존립케 하여 교회수를 3분지 1로 축소시켰다. 일부는 군수창고로 전용했다. 폐쇄는 파괴로 이어졌다. 교역자의 자격을 심사하여 유자격자와 무자격자로 구분하고 무자격자의 설교를 금지했다. 노회장이 앞장서서 “현 존립교회는 반드시 유자격교역자로 목회케 할 것”이라고 통보하고 있었다. 이는 심각한 종교탄압이자 예배 방해였다. 이때 다수의 교회 지도자들은 ‘시국인식’이란 이름으로 일제의 요구에 슨응하고 굴복했다. 그러나 소수의 지도자들은 일제의 정책에 저항하며 투옥을 감내하며 예배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그래서 일제하에서도 교회가 존립하며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김일성 정권의 ‘주일’ 총선거
북한에서는 예배 방해 정도가 아니라 종교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므로 기독교는 처음부터 탄압의 대상이었다. 해방 당시 북한에는 3,000개 처의 예배당, 2천5백여 명의 교직자, 30만 명의 신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북한 김일성 정권은 이른바 미신타파돌격기간(1946.11.24-30)을 설정하고 전 지역에서 영아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신자 명단을 작성했다. 이들은 은밀한 제거의 대상이었다. 4년이 지난 1949년에는 기독교 신자는 10만 명이 감소되어 20만 명으로 축소되었다. 교직자는 900명으로 감소되었다. 그러나 6.25를 거치면서 기독교는 거의 멸절되었다. 북한에서 기독교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첫 번째 조치가 집회 제한 및 예배 방해였다. 그 분명한 사례가 1946년 11월 3일 주일 실시된 도·시·군인민위원회 위원선거였다. 10월 12일 소련군이 북한으로 진주할 당시 ‘북조선 주둔 소련 25군사령관 성명’을 통해 “교회에서 예배하는 일을 허가한다”라고 선포한지 한 달도 안되 주일 예배를 방해한 것이다.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모인 해방 후 첫 3.1절 기념행사(1946. 3. 1)는 기독교계와 공산정권 곧,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간의 첫 충돌이었고, 11월 3일 거행된 선거는 기독교를 탄압하려는 계획적인 음모였다. 3.1절 기념행사로 충돌한 이후 김일성 공산집단은 중요한 행사는 의도적으로 주일에 거행하고, 기독교인들의 참석을 강요하고, 교회당에서 정치 강연을 실시함으로서 계획적으로 기독교 집회를 방해하였다. 북한에서의 11월 3일 선거도 이런 취지에서 의도된 것이었다. 이에 북한지역 장로교 총회라고 할 수 있는 ‘이북5도연합노회’는 주일 선거가 발표되자 10월 20일 회합하여 대책을 논의하고 주일 선거를 거부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발표했다.
결의문
북한의 2천 교회와 30만 기독교 신도들은 신앙의 수호와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다음 5개 항의 교회 행정의 원칙과 신앙 생할의 규범을 결정 실시 중에 있사온 바 자(玆)에 귀 위원회의 적극적인 협조를 바라마지 않는 바입니다.
1. 성수 주일을 생명으로 하는 교회는 주일에는 예배 이외의 여하한 행사에도 참가하지 않는다.
2. 정치와 종교는 이를 엄격히 구분한다.
3. 교회당의 신성을 확보하는 것은 교회의 당연한 의무요 권리이다. 예배당은 예배 이외에는 여하한 경우도 이를 사용함을 금지한다.
4. 현직 교역자로서 정계에 종사할 경우에는 교직을 사면해야 한다.
5. 교회는 신앙과 집회의 자유를 확보한다.
교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일성 집단은 주일 선거를 강행하였고, 이를 거부한 교회와 지도자들은 수난에 직면하였다. 이때로부터 교회에 대한 탄압, 예배 방해는 노골화되었다. 의도적으로 주일 행사를 강행하고 학생들을 등교시키고, 주일에도 출근케 하는 이른바 ‘일요일 소집령’을 내렸다. 집회 및 예배 방해였다. 불응하는 이들에게는 물리적 처벌과 심리적 고통이 뒤따랐다. 북한에서의 반기독교 정책은 집회 방해로부터 시작되었고 결국 기독교는 서서히 멸절되어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권력자에게 굴복하지 않고 믿음을 지켜 온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기독교신앙은 지하교회 형태로 유지되고 있을 따름이다.
3) 남한에서의 ‘주일’ 선거계획 변경
북한에서의 주일 선거와는 달리 남한에서의 총선거는 1948년 5월 10일 월요일 시행되었지만 사실은 5월 9일 주일 시행할 예정이었다. 해방 후 엄청난 혼란과 함께 3년간의 미군정기를 보내고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선거를 하게 되었을 미군청의 하지 장군(John Reed Hodge, 1893-1963)은 총선거일을 5월 9일 주일로 정하고 이를 공표하였다. 이때 성도들과 전국의 교회 지도자들이 일제히 주일 선거를 반대했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의의 자유 보통 비밀 선거를 시행하는 일은 자랑스러운 일이지만 주일날 실시되는 선거는 동의할 수 없었다. 이는 성수 주일을 헤친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교회 지도자들은 연희전문에서 가르치던 남감리교 선교사 피시아(James E. Fisher) 박사를 통해 하지 장군과의 면담을 요청하고 주일 선거를 피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때의 일을 피시아 선교사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목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나에게 하지 중장을 만나 주일 선거를 반대하는 의견을 말할 수 있도록 약속을 잡아 줄 것을 부탁했다. 시간이 정해지고 지도적 교회목사들과 몇몇 평신도 지도자들이 장군의 사무실에 모였다. 그들은 그들의 입장을 대변하며 만약 선거가 주일에 이루어진다면 수 천 명의 기독교인들이 그들이 선량한 시민이라는 점과 상관없이 기독교적 양심에 따라 투표권을 버릴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하지 장군은 그들의 입장을 매우 정중하고 인내심 있게 듣고 난 후, 선거일은 이미 정해졌고 전국에 공표되었다고 말했다. 그날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업에 메이지 않고 투표소에 가서 선거를 하기 충분한 시간이 있는 날이며 유럽의 많은 기독교 국가의 선거도 일요일에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매우 유감스럽지만 만약 날짜가 바뀐다면 상대적으로 소수인 기독교인들 보다 일반 대중들이 매우 혼란스러울 것이라고 대답했다. 또한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기독교인들을 정규적인 예배도 드리고 동시에 선거에도 참여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교회 지도자들은 실망했고 이전에 장군에 대해 가졌던 존경과 경외심을 버린 채로 헤어졌다.”
하지 중장은 교회 지도자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주일 선거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때 한부선 선교사도 주일 선거를 반대하고, 미군목단의 고위 인물인 와일드만(Wildman) 대령을 만나 주일 근무, 국기 경례 문제 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의견을 나누었다. 1948년 3월 10일과 4월 2일에는 미군정 사령관 딘(William Dean) 소장에게 편지를 보내 선거일 변경을 호소하기도 했다. 그는 부인에게 보낸 3월 10일자 편지에서 딘 소장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주일에 선거를 하지 않는다는 점, 한국이 기독교 국가가 아니지만 공직에 있어서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매주 안식일을 지키는 서양 방식을 따르고 있다는 점, 그리고 서양인들이 한국인들에게 관습을 바꾸라고 제안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기독교회와 교회 지도자들 또한 주일 선거계획 반대운동을 철회하지 않았다. 강력한 반대에 직면하자 하지 중장은 선거를 꼭 2주일 앞두고, 5월 9일 주일 선거를 포기하고 하루 늦춘 5월 10일 월요일 총선거를 실시하게 된 것이다. 이때 남한의 인구는 약 2천만 명이었고, 기독교신자는 약 10만 명으로 전체인구의 0.52%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은 0.52% 인구의 의견을 존중하여 선거일을 변경한 것이다. 이때 하지 장군의 결단에 영향을 끼친 것은 기독교인들의 반대 외에도, 5월 9일 정오쯤에 일식(日蝕)이 있을 것이라는 발표였다고도 하지만 주일 선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순응했다면 그 이후 한국교회는 주일행사 반대를 줄기차게 주창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좌익단체는 선거 자체를 거부했지만 하지 중장은 기독교인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주일 선거를 피하고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하게 한 것이다. 그 결과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의 감시하게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198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다. 그 결과 5월 31일에는 역사적인 국회를 개원하게 된 것이다. 이때 임시국회의장으로 추대된 이승만은 “대한민국 독립 민주 국회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선언하고, 감리교 목사 이윤영 의원에게 기도를 부탁한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남한에서는 주일 선거를 피하게 된 것이다.
4) 해방 후 성수 주일을 위한 교회의 노력
어느 시대나 종교의 자유나 종교행위의 자유, 곧 집회나 예배의 자유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성수주일 여건은 이를 확보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였다. 일제하에서 집회의 자유를 침해받았던 경험 때문에 해방 이후 한국교회(장로교회)는 이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첫 흔적이 1947년 4월 18-22일 대구제일교회당에서 개최된 33회 총회(제2회 남부총회)였다. 이때 총회는 “공사립을 막론하고 주일에 취학(就學)치 않도록 당국에 교섭하기로 했고” 입법위원회에 “공창을 폐지할 것, 음주흡연을 제한할 것, 아편 재배와 취급을 제한 할 것”과 함께 “주일날은 공휴일로 지정하여 실시할 것”을 요청했다. 당시만 해도 주일에도 등교하는 일이 적지 않았고 일요일이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행위의 자유가 침해되고 있었다. 1948년 4월 20-23일 서울 새문안교회당에서 개최된 34회 총회는 “각 학교에서 주일에 행하는 일체 행사를 금지하기 위하여 당국과 교섭하기로”결의했다. 주일 예배가 방해받지 않도록 시정을 요청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 시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1949년 4월 19일-23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개최된 총회에서는 종교행사 이외의 주일 행사에는 참여하지 않기로 하는 한편, 정부에 “주일 성수를 위하여 대표를 정부 관계 당국에 교섭하여 주일에는 각 관공서에서 일체 행사를 금지하도록 하고, 특히 문교 당국에 교섭하여 학교 행사 일체를 금하도록”요청하기로 했다. 총회가 이런 결정을 하게 된 것은 주일 예배가 방해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여러 노회의 헌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군산노회는 노회장 이상귀 명의로 ‘주일날 등교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헌의했다. “경향 각지에서 주일날 학생들의 등교를 요구하는 학교가 종종 있으므로 이런 일이 없도록 정부에 교섭하여 주기를 헌의하나이다.” 같은 내용의 헌의가 전북노회(노회장 김병구)로부터 제기되었다. 이상과 같은 계속적인 헌의와 정부 당국과의 교섭을 통해 집회의 자유를 확보하고 예배의 자유가 침해받지 않게 된 것이다. 이른바 기독교적 정부였다고 일컬어지는 이승만 정부 하에서 조차도 주일예배의 온전한 자유는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5) 6.25 전쟁기
6.25 전쟁기 교회 집회나 주일 성수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북한이나 공산치하에서의 집회는 외부적 요인에 의해 제한을 받지만 집회의 완전한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할지라도 전선에서의 예배는 용이하지 않았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집합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전쟁 발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어 6월 28일 이후 인민군이 서울을 장악했다. 28일 새벽 3시경에는 한강 철교가 폭파되었다. 수많은 이들이 피난을 선택했다. 이런 상황에서 긴장과 두려움이 예배를 방해한 것이다. 전쟁이 발발한 후 맞는 첫 주일인 7월 2일 주일, 이날 서울에서는 예배를 못 드린 교회가 많았고, 예배를 드려도 출석인원은 평소의 20% 이하로 떨어졌다. 강원용의 회고록에 의하면 7월 2일 주일 경동교회에 모인 인구는 30명 정도였고, 평소의 5분지 1에도 못 미치는 인원이었다고 한다. 영락교회의 경우 한경직 목사는 타의에 의해 대전으로 피난한 이후였고, 7월 2일 예배는 박동엽 장로의 인도로 수십명의 어린이들과 몇 명 안 되는 부인들이 예배를 드렸을 뿐이다. 전쟁이 시작된 6월 25일 주일 낮 4천여 명이 모였던 교회였다. 그 다음 주일 영락교회는 인민군들이 점거했고, 부득불 예배 장소를 옮겼으나 곧 예배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남대문교회의 경우, 인민군의 위협을 피해 김치선 목사는 삼각산으로 피신하였고, 남아있던 교회의 부목사와 교회는 기독교연맹에 가입하여 존립하고자 했으나 잠시뿐이었다. 북에서 온 기독교연맹은 자기들의 지배하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허용하겠다고 선전했으나 사실상 공산군 점령하에서 교회는 폐쇄되고 예배는 불가능했다.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은 인천(7. 3) 수원(4) 천안(6)을 차례로 점령하고 공주(15) 대전(24)을 장악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7월 말에는 목포와 지주를 점령하고 8월 초에는 김천 포항을 점령했다. 9월에는 경상도 전라도 대부분의 지역을 수중에 넣어 남한지역의 90% 이상을 장악하였다. 전쟁기간 중 남한의 1,078개 처 교회가 파손되었는데, 이중 35%는 완전 소실되었다. 전쟁 중 학살된 신원이 밝혀진 교역자만 176명, 납북된 교직자는 240명에 달했다. 의의 피난처라고 불린 부산과 인근지역을 제외한 지역에서 사실상 예배가 불가능했고 집회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담보한 예배를 드린 교회와 성도들이 없지 않았고, 기독교신자라는 이름만으로 죽임을 당한 이들은 1만 명 이상으로 추산되는데, 이들은 예배 중에 끌려가거나 주일 성수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경남의 경우, 거창 가천의 박기천 전도사는 27세의 나이로, 경남 합천 관기리의 배추달 집사는 24세의 나이로 예배드리고 주일을 성수하려는 이유 때문에 무참히 살해되었다. 함안 사촌교회 조용석 장로는 배교를 거부하여 총살당했다. 전라남도 영광의 염광교회와 야월교회 성도들의 집단적 순교는 널리 알려져 있다. 죽임`을 당하면서까지 예배를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에 의해 순교적 신앙정신은 오늘 우리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전쟁이 시작된 후 12일이 지난 7월 8일 첫 포로가 생겨나고 대전, 대구, 부산으로 전전하던 포로수용시설은 포화상태였다. 인천상륙작전 후 인민군 포로가 5만 명이 넘었고, 1950년 10월 말까지 국군 및 유엔군이 관리하는 포로수는 11만7천여 명에 달했다. 12월 3일에는 14만6천135명으로 불어났다. 1950년 10월 25일 이후 중공군 포로까지 수용되기 시작하자 포로수용시설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1951년 2월 거제도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하게 된 것이다. 그해 6월 말에는 거제도에 수용된 포로 수가 14만 명을 넘었다. 이곳의 포로들을 위해 전도하고 예배를 인도했던 선교사가 옥호열(Harold Voelkel, 1898-1984) 목사였다. 포로수용소는 또 하나의 전쟁터였다. 생존의 기로에서 이념적 대립은 폭력과 살인을 동반했다. 이런 곳에서도 간이 천막을 치고 전도하면서 집합 예배를 인도한 이가 있었다. 그가 포로로 잡혀 왔던 임한상(任漢祥) 목사였다. 그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주일 예배를 실시하였고, 처음에는 위난한 환경에서 집합 예배를 무모한 짓거리라고 기독교 신자들조차도 비난했으나 점차 신뢰를 얻었고, 1950년 성탄절에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혹한에서도 울타리 없는 야외에서 4천 명의 포로들과 함께 감동적인 성탄 예배를 드렸다. 예배의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았다. 옥호열 선교사가 거제도로 왔을 때가 성탄 예배 직후였다. 목숨을 건 예배가 결국 포로 선교의 기초가 되었고, 포로 중 인민군 회심자는 6천 명, 세례받은 인민군 출신 포로는 2,266명이었다고 한다. 포로 중 장로교 감리교 혹은 성결교 신학교에 입학하려는 자가 642명에 달했는데, 이중 신학교에 진학한 130명을 월드비전이 학비를 지원했다. 임한상 목사와 옥호열 선교사의 전도와 예배 인도로 반공 기독교인 포로가 증가하였고, 이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1953년 6월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과감한 정책을 감행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6) 코로나 방역을 빙자한 예배 제한 조치
종교의 자유, 집회와 예배 등 종교행위의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명목상 종교의 자유, 종교 행위의 자유를 인정하는 경우에도 사실상 제한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최근 한국교회는 코로나 방역이라는 이름으로 종교행위의 자유가 제한되거나 방해 받았다. 교회당 수용면적과 관계없이 예배 인원을 제한하거나 이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예배당을 폐쇄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러면서도 천주교나 불교 등 타 종교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한을 두고 있지 않았다. 이런 편파적인 법적용과 불합리한 행정 명령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종교행위의 자유를 확보하려는 의지 없이 통상적인 예배를 포기하고 묵종하였고, 어떤 교회나 단체는 집합예배 드린 일에 대해 사과한다거나 대리 사과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까지 발생했다. 교회에 대해서만의 부당한 제한에도 불구하고 부당하다고 말 한마디 못하고 돌아선 것이다.
윤태호 중앙사고수습본부 방역총괄반장은 2021년 2월 1일 “대면예배를 통한 감염이 사실상 지금까지는 거의 없었다.”라고 발표했고, 보건복지부 중앙사고수습본부 사회전략반장도 “예배 환경이 밀집도가 상당히 낮고, 마스크 착용, 손 씻기, 사전방역조치 등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교회에서의 대면 예배를 통한 감염은 사실상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라고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언론은 마치 교회가 집단감염의 진원지인 것처럼 몰아세웠다. 교회발 코로나 프레임을 씌워 교회를 탄압해온 것이다(FN Today, 2021. 2. 9). 거짓 뉴스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사실 확인(Fact Check)도 없이 묵종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부당한 문제인 정부와 대결하면서 신교의 자유 예배의 자유를 확보한 이를 징계하자거나 치리하자는 주장은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이다. 일제하에서 예배 제한 조치를 당할 때 ‘시국인식’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 예배의 자유를 포기했던 이들이 한국교회를 지켜왔는가? 모두가 그러했다면 천황제에 굴복하여 전시지원종교국이 되었던 일본교회처럼 되었을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예배 제한 조치가 방역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에 대해서만 강요한 부당한 조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저항의 사유가 된다. 심지어는 성가대 연습을 어떻게 하라든가, 교회 식당을 운영하지 말라든가 하는 신앙행위의 자유까지 침범했다. 문제는 성당이나 시장이나 전철이나 다른 기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 이것은 균형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비과학이다. 유독 개신교회에 대해서만 강제한 것은 부당한 제한 조치였다는 점이다. 정리하면, 언제든 어느 사회이든 집회와 예배를 포함한 종교행위의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4. 정치참여 문제
우리 그리스도인이 볼 때 가장 이상적인 사회는 진정한 의미의 종교의 자유, 신교의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사회일 것이다. 기독교 복음 전파,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라면 가장 이상적인 사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기독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신교의 자유가 침해 받지 않도록 하는 일련의 집단적 활동을 할 수밖에 없다. 신교의 자유가 유린되거나 제한될 때, 신앙행위의 자유가 훼손되거니 침해될 때 굴종할 것인가 아니면 저항할 것인가? 아니면 조직적이고도 합법적인 노력을 경주할 것이가? 우리는 조직적인 활동을 정치참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참여형태가 어떠하며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논의하고자 한다. 우선 정치참여가 무엇이며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서부터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사회적 책임인가, 문화적 사명인가 아니면 문화명령인가? 이런 점은 1974년의 로잔대회에서 논의된 바 있고, 비록 ‘사회·정치적 활동’(social-political activity)이라는 이름으로 기술되었지만 로잔 언약에서도 논의된 바 있다. 정치 참여가 social ministries인가, 아니면 social responsibility, social assistance, social service, social action, social justice인가?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헬라·로마적 환경에서 정치(政治)를 의미하는 폴리테이아(Politeia)라는 개념은, 로마사회사 학자 에드윈 저지(Edwin Judge)의 지적처럼 지금의 정치(politics)만이 아니라 인간 삶의 전 영역을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미 우리는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