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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성한 목사] 분명한 정체성(1)
    첫째, 우리는 영이다. 영이 진짜 우리다. 만약에 어떤 사고로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 육이 잘려져 나가도 우리는 우리다. 팔다리가 없어도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다. 만약 육신이 사람이라면 팔이 떨어져 나가고, 다리가 떨어져 나가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간을 잘라 낸다고 해도 사람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사람이라고 하는가? 영이 사람이다.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다. 그래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사람을 보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후5:16)고 고백한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다. 우리는 영(하나님의 생명)으로 혼을 가지고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영은 더 이상 좋아질 필요도, 깨끗해질 필요가 없다. 우리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항상 깨끗하다. 우리는 이런 온전한 영이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이 우리다. 우리는 영이기에 온전하다. 혼과 육은 훈련되는 대로 인식한다. 어릴 때 늑대에게 훈련받은 소년은 늑대로 혼과 육이 훈련되었다. 그래서 늑대인 줄 안다. 우리의 영이 우리인 줄 알고 우리의 혼과 육을 영으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신앙훈련이라고 한다. 영의 생각을 하라. 당신은 영이다. 성령님과 하나 된 영이다. 둘째,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가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공로로 우리의 영은 안식에 들어갔다. 인간은 창조하자마자 안식을 산 존재다. 그러나 타락해 버린 후 안식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안식을 찾았다. 안식은 피곤해서 쉬는 것이 아니다. 안식은 완성된 작품에 점이라도 찍으면 버려지기 때문에 붓을 놓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상태다. 부족함이 없어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안식이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안식하는 자다. 어떤 일에도 우리는 부족함이 없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영은 더 좋아지지 않고 좋아질 필요가 없다. 이제 우리의 영은 예수님 안에서 안식이다(창2장). 하나님 보시기에 보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회복되었다(창1장). 복음은 회복의 복음이다. 회복 그 이상의 복음이다. 이제 모든 것을 해결 받았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자녀가 “우리 집”이라고 할 때 그 집은 아버지 집을 말한다. 아버지 집이 우리 집이다. 아버지의 것이 우리 것이다. 아버지는 만왕의 왕이시다. 우리도 이 시대를 사는 천년 왕국의 왕이다. 왕권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다. 우리의 왕권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우리의 왕권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다. 왕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를 버리시지도 떠나시지도 않으신다(히13:5). 임마누엘의 정체성을 바로 가질 때 왕권을 행세할 수 있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하셨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벧전2:9)는 자들이다. 넷째,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예전에 없던 우리다. 우리의 생각에서 나온 우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계획하시고, 작정하셨던 우리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우리란 말이다. 우리는 영의 생각을 하며 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이다. 영의 생각이 믿음이다. 영의 생각은 능력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육의 생각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한다. 육의 생각은 사망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이제 더 이상 육신으로 우리를 알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자다. 예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었다. 예수 권세가 내 권세가 되었다. 예수 능력이 내 능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도, 우리 자신도 육체를 따라 알지 아니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우리는 새것이다! 하하하하!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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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6
  • [박동철 장로] 도파밍(Dopaming) 문화 트랜드
    모 채널에서 인기 방송 중인 정신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의 '금쪽이 상담'프로그램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다. 상당한 기간 방송이 되는 가운데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우리사회 각 가정에서 겪는 금쪽이 같은 어린자녀들의 정신신경성 문제를 상담하고 치료하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상담 영역을 넘어 부부 관계 여러 사람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트러블을 치유하는 족집게 의사의 진단과 치료처방이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프로그램을 유심히 보면 대부분의 정신적 신경성 문제가 병적화하여 가정에 눈물의 골짜기가 되는 사례들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우리사회에 새로운 문화 트랜드가 등장하면서 문제가 되는 과제가 있다. 신조어 도파밍(dopaming)이란 문화 트랜드에 많은 문제를 실어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도파민(dopamin)이라는 인체 신경 전달물질이란 단어와 파밍(farming)이란 수집한다는 뜻의 합성어다. 다시 말해 도파민이라는 인체 흥분전달 호르몬을 자극할 수 있는 수집체가 문화상품으로 사람의 생활 속에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는 진단이다. 이 시대는 농경시대 계몽시대를 넘어 현대 포스트모던 사회에 진입했다. 이 시대에는 집단 공동체의 윤리나 통제의 작동이 어렵다. 개인의 취향 권리에 작동되어 문화가 형성되어간다고 전문학자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 시대는 홍수처럼 범람하는 미디어 디지털 스마트폰 같은 문명기기와 여행 골프 다양한 스포츠 등 개개인의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양산하고 있다. 대표적 아젠다는 스마트폰의 중독이 사회 병폐화에 큰 몫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중독의 질환에 빠져가고 있다. 전문가들은 청소년들의 마약중독을 우려한다. 한편 이러한 현상적인 마약중독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문화의 중독현상이다. 그 양상을 보면 모든 사람이 겪는 스마트폰 속에 도파밍을 형성하는 중독성 콘텐츠들을 방어할 수 없다. 그리고 중독 상황을 치유하기 어려운 형편에 놓였다. 더더욱 깊게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사람들의 뇌신경을 자극하는 또 다른 문화 상품들이다. 대중미디어속의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그러한 드라마를 찾기 때문이다. 요즘 TV드라마를 보면 이혼 불륜의 스토리를 훨씬 넘었다. 복수의 짜릿한 이야기가 없으면 흥행이 안 된다. 스포츠의 프로 리그와 점수에 온통 정신을 뺏겨가고 있다. 여행이 삶의 목적이라고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문화 트랜드에 의해 사람들의 개개인 정신세계는 도파밍의 울에 가두게 된다. 중독사회로 가는 길이 된다는 문제이다. 술 담배기호는 옛날이야기이다. 커피에 매몰되어 커피공화국이라는 평가를 받고있다. 일상의 생활 속에서도 수없이 등장하고 있는 도파밍의 울이다. 포스트모던사회 더욱 개개인의 취향을 가지려고 하는 시대 이 같은 문화 트랜드에 따른 병폐는 심각하다. 우울증환자가 급격히 늘고 있다는 증거이다. 치매나 파킨슨 등 뇌신경성 질환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여러 통계가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회현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가르치고 치료하고 전파하는 우리 교회가 정결문화를 세워 더욱 힘을 내야하는 숙제이기도하다. 문제는 날이 갈수록 기독교문화가 우리사회에서 홀대받고 있는 시대이다. 이 또한 포스트모던사회에서 교회가 공격받는 시대의 흐름에 놓여있다. 기독교 문화가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서양 유럽 기독교가 아직껏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은 기독교 문화가 지켜왔다는 주장이다. 한국사회에 기독교 문화의 클래식 음악마저 홀대받고 자꾸 뒷자리로 밀려나고 있다. 우리 교회가 가르치고 전파하는 주님의 명령에 우선 따라야하는 길은 사회 병적 현상을 치료하는 사명이다. 그러나 교회가 날로 치료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 이 시대 도파밍 문화 트랜드를 잡을 수 있는 사역에 힘을 내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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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4
  • [오태열 목사] 도파민 이야기
    도파민(Dopamine)은 신경전달물질의 하나로 뇌 신경세포의 흥분을 몸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뇌가 몸이 즐거운 자극을 받으면 도파민을 분비해준다. 뇌가 몸에 주는 선물이다. 그래서 도파민을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에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한다. 도파민의 분량이 많고 적음에 따라 인체에 이상을 가져다준다. 도파민이 적게 분비되면 우울증, 파키슨병(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세포들이 손상돼 발생하는 질환)을 유발한다. 반대로 과도하게 분비되면 躁症(조증, Mania)이 발생할 수 있다. 조증이란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고양되어 충동적 폭력적인 행동이나, 논리적 비약 등이 나타나는 정신적 상태를 말한다. 새해가 되면 금연을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대개 작심삼일로 끝난다. 금연하기가 매우 힘든 이유는 니코틴이 유발하는 중독성 때문이다. 흡연을 하면 담배에 함유되어있는 니코틴이 뇌에 자극을 주어 다량의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하고 머리를 맑게 해준다. 흡연을 하지 않으면 도파민 분비가 되지 않아 기분이 다운이 되고 마음이 불안해진다. 그래서 계속 피우게 되고, 피울수록 도파민 분비가 감소함으로써 더 많이 피우게 된다. 많이 피우다 보니 중독되어 금연이 어려워진다. 마약, 음주, 성관계 시는 평소의 2배. 폭식,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스포츠나 여행 좋아하는 일을 할 때도 도파민이 평소보다 많이 분비된다. 그 외에 나쁜 사람을 응징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정의감과 의로운 행동에 뇌가 칭찬해주고 도파민을 분비시켜 기분을 좋게 한다. 가진 자들이 갑질을 할 때도 도파민이 분비된다.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가 약자에게 갑질을 계속하는 이유는 갑질을 할 때,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기에 기분이 좋아지고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남을 위해 희생할 때도 도파민이 많이 분비된다. 힘들고 어렵지만 즐겁고 행복하다. 권력도 마찬가지다.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감정 심리학 교수인 D. Keltner가 도파민 분비를 전제로 한 유명한 “쿠키몬스터 실험”을 하였다. 권력을 타인의 상태에 영향을 미침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으로 규정하고, 권력이 사람을 얼마나 바꿀 수 있느냐에 대한 연구였다. 켈트너는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도 중독성이 있다. 도파민 분비 상태와 권력을 가졌다는 느낌은 코카인 같은 약물에 중독되어 한바탕 광기가 휘몰아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하다. 두 상태는 충동적이며, 비도덕적인 행위를 유발하고, 자기 망상적인 사고에 빠진다. 더할 나위가 없다는 기분, 영향을 미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데서 비롯된 기분은 순간 과도한 상태에 빠질 수 있다. 권력의 역설은 늘 가까이 도사린다 라고 하였다. 우리는 어떤 도파민에 중독되어야 하는가? 중독 여부에 따라 괴물이 되기도 천사가 되기도 한다. 나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조현아, 조현민, 조현태, 이명희, 양진호 씨와 같이 약자를 괴롭히는 갑질하는 괴물이 되고, 선한 도파민에 중독된다면, 테레사 수녀와 같이 약자들에게 정의롭고 착한 일을 하는 천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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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8
  • [박동철 장로] 지금 이스라엘 전쟁 성경 어디쯤 왔나?
    이스라엘-블레셋전쟁(3) 지난해 10월 7일 이스라엘 가자지구 자치령에서 하마스 무장단체가 이스라엘을 폭격함으로써 발생한 중동전쟁이 2023년을 넘기고 3개월에 접어들고 있다. 중과부적으로 생각되던 하마스의 공격이 며칠도 못갈 것으로 예상했으나 쉽게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이어가고 있다. 양쪽 사망자만도 하마스 1500명, 이스라엘 1200명으로 발표되고 엄청난 부상자와 폭격으로 인한 재산피해가 발생하고 있다. 21세기 중동전쟁이라고 하는 이 전쟁이 왜 이렇게 예상을 빗나가고 장기전이 되고 있는가? 여기에 영적인 접근과 국제정치 사회적 역학관계가 얽혀있다. 이스라엘-블레셋전쟁(2)편에서 살펴본바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후손 팔레스틴과의 혼합을 원치 않는다는 예단을 우리가 할 수 있었다. 약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중동 이슬람 제국가와 항상 대척점에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순교적 공격이었다. 이의 연유는 긴 역사에서 볼 때 지금의 이스라엘 땅을 잃어버린 데 대한 한(恨)의 도전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종족의 가자 서안 지역 팔레스틴 자치족을 이스라엘 땅 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자 인도하심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중동지역의 유대인과 이슬람제국과의 혼합되지 않는 끝없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밝히고 있는 성경 이야기는 어떤가? 성경의 창세기후 구약의 모든 이야기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한 중동이 주 무대이다. 하나님은 중동 여러 지역을 통찰하시면서 아브라함에게 지금 이스라엘 땅 가나안으로 가라 지시했다. 이후 애굽의 모세에게도 이스라엘을 지명하여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땅을 창조한 4000년 후 이스라엘 땅에서 자기의 본체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하게 했다. 하나님은 이후 2000년 동안 이스라엘의 종족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흩어지게 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시온이즘 정신으로 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땅을 회복하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그 땅에 살던 실효지배민족 팔레스틴들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2000년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뼛속깊이 새겨야할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 초림하신 예수님은 33년 동안 이스라엘 땅에서 메시아 사역을 하신 후 승천하시면서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시고 이 땅을 심판하신다는 새땅 새 하늘의 미래를 밝히셨다. 위대하신 예수님의 미래 그랜드 비전이 우리가 이 땅 전쟁을 보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어느 시간표에 있는가를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예수 다시 오실 어느 시공(時空)에 있을까. 성경곳곳에 많은 말씀을 밝히고 있다.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거대한 역사는 창조와 예수십자가, 교회시대, 예수님 재림, 심판과 새 하늘 새 땅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성경 속에서 제일 관심 끌리는 곳은 다시 오시는 재림의 시간표이다. 이후 휴거와 7년 환난 천년왕국시대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의 미래 하나님의 날을 설교가들은 선포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 중동전쟁과 하나님의 온 세상 통치의 타임라인은 어떻게 연결되어있을까. 앞서 전편에서 이야기 나눴듯이 하나님은 이방인의 구원이 이뤄지고 유대인 구원역사를 진행하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심과 세상의 거대한 심판의 시간표를 갖고 계신다. 그 가운데 세상곳곳에는 전쟁과 기근 각종 역병이 난무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것이 세상 심판의 징조라고 설파했다.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제자들과의 대화에서 미리 말씀하셨다. 그때가 지금일까.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온 땅의 주인 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다시 오실 그 약속의 시간표가 좀 급히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의 구름을 보고 우리는 비올 날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준비해야한다. 기도하고 경건훈련과 더욱 죄와 싸우는 날마다의 시간에 몰두해야 할 때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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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신재철 목사] 이럴 생각 없었는데
    - 이럴 생각 없었는데 - 개척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좋은 목사님 만나 평생 사역을 돕다가 그분과 함께 은퇴하고 싶은 로망이 있었다. 하지만 사역 연차가 더할수록 다른 마음이 생긴다. 욕심이 아니라 부담이다. 크지 않아도 좋으니 행복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꾸려보고 싶은 마음. 하지만 여전히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컸기에 하나님의 신호를 애써 외면한다. “여보, 우리가 부산 온 지 벌써 얼마냐. 연고지도 아닌데, 참 오래도 있었네. 우리 그냥 여기서 개척할까?” 광안대교를 넘어가며 아내에게 묻는다. 나는 이미 하나님의 시그널에 확신을 품고 있었다. 평생 동역자인 아내가 좋다고 하면 확정이다. 좌불안석, 불편한 나의 질문에 아내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좋겠네. 난 괜찮아요.” 충청도에서 평생 살던 여자가 아기 둘을 안고 내려와 낯선 곳에서 고생했는데. 부산에서 한 번 더 자리를 펴자는 제안에 동의해 준다. 늘 고맙다. 그렇게 씨앗은 심기고 우리는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리」 부산은 광역시인데 ‘동(洞)’이 아니라 ‘리(里)’가 있다. 내리는 교회 차량 운행 코스에서 가장 먼 마지막 코스. 하나님께서 자꾸 이곳에 마음을 주신다. 밤에도 가고, 새벽에도 가고, 낮에도 여유 있으면 들렀다.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한참을 걸어보기도 한다. 아주 한적한 동네다. 많은 차량이 눈짓 한 번 주지 않는 지나는 길목이다. 흔한 목욕탕 피시방 하나 없다. 그런데 자꾸 마음이 간다. 물리적으로 큰 교회는 절대 꿈꿀 수 없는 지역을 나이 마흔의 목사에게 주셨다. 하나님 또 이러신다. “지금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개척을 하시려고요?” “젊은 사역자가 왜 시골로 가요? 꿈을 가지고 도시 목회하셔야지.” “위치가 좀 그런 거 아닌가요?” 나의 개척 계획이 알려지며 다양한 반응이 나타났다. 안타깝게도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냐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부터 (이 교회에 전임으로 만 7년을 있었는데) 젊은 사람이 그런 시골로 왜 가냐는 비웃음도 들린다. 모두 그럴만한 이야기. 걱정도 비난도 이해가 된다. 어쩌겠는가. 하나님 주신 마음이 있고 나는 이미 하나님의 제안에 매료되어 눈이 멀어버렸는걸. 만화방 교회를 준비한다는 이야기에 어르신들의 불편한 기색은 더 짙어진다. “신 목사님은 잘할 겁니다. 큰 도움이 못 되어 미안합니다.” 여러 불편한 상황에서도 덤덤하게 격려하시는 담임목사님. 이분이 하시는 이야기에는 늘 가식이나 꾸밈이 없다. 표현이 많지 않지만 늘 지지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다. 이분 곁에서 평생 사역 돕다 은퇴하실 때 나도 조용히 물러날까 생각도 했었다. 참 좋으신 분. 개척이지만 떠난다는 말씀드리는 내 맘이 편치 않다. 그렇게 개척은 진행되고 있었다. ‘성경? 누가 물어볼까 겁난다.’ ‘인격? 온순한 편이나, 목회자 깜은 아니다.’ ‘행정? 큰 교회 경험이 없다.’ ‘기도? 새벽기도 때 종종 졸았다.’ 돈의 문제가 아니다. 승부를 볼 수 있는 뭐가 없다. 작은 개척교회는 담임목사가 강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과연 나는 무엇으로 목회할 수 있을까? 준비되지 못한 나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무거운 고민이 개척의 두려움을 더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면서도 이렇게 믿음의 바닥을 드러낸다. ‘이거 맞는 걸까?’ 삽화작가 강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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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이정희 목사] 형제자매와 그 배우자의 호칭(呼稱)과 지칭(指稱)의 고찰(2)
    I. 서언(序言) ‘사돈인가, 사둔인가, 목사님이라 부를까?’ 이런 고민은 지난주에 필자 자신이 가진 순간적인 고민이었다. 이유는 둘째 사돈이 목사이기 때문에 가끔 한 번씩 어떻게 호칭할까를 고민하곤 한다. 어떤 이는 사돈의 사투리인 ‘사둔’이라고도 호칭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미안하지 않게 같이 사둔이라 부른다는 사람도 있다. 필자의 경우는 상대방 사돈이 필자에게 ‘목사님’이라 호칭하기 때문에 같이 ‘목사님’이라고 호칭하고 있다. 이렇게 잘 아는 것 같아도 상황과 상대방의 호칭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적당한 호칭이나 지칭어가 생각나지 않거나 당황할 때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도 우리가 늘 사용하는 가장 가까운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를 남성의 경우에는 어떠할까를 논하고자 한다. II. 형제자매(兄弟姉妹)간의 호칭어와 지칭어(남성의 경우) 1. 동기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형, 누나, 오빠, 동생을 일컫는 형제자매간과 그 배우자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 중에서 남성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이에 대한 호칭어와 지칭어도 쉽지는 않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 집사는 형과 누나, 남동생과 여동생 모두 합쳐 일곱 명의 동기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큰 형, 둘째 형, 셋째 형, 누나, 동생으로 부르면 되었기 때문에 호칭과 지칭 문제에서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물론 옛날에는 큰 형은 백씨(伯氏), 둘째 형은 중씨(仲氏), 그 밑의 형들은 모두 사형(舍兄)으로 불렀고 동생은 사제(舍弟)라고 불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그 남자 집사처럼 부르는 것이 거의 통일되어 있다. 문제는 형제자매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자녀들이 태어났을 경우이다. 그 이후부터는 이 호칭과 지칭이 애매하고 어려워지게 된다. 필자의 경우도 집안의 행사들로 오랜만에 일가친척들을 만났을 때, 어린 조카와 손자 손녀들에게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호칭하고 지칭해야 할지를 순간적으로 고민할 때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바르게 호칭하고 지칭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 보면 다음과 같다. 2. 형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 보통 동생이 형을 부를 때는 일반적으로‘형’, ‘형님’으로 호칭한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형을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생략하고 그냥 ‘형’이라고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을 가리킬 때에는 자녀의 입장에서 ‘큰 아버지’, ‘큰 아버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형의 아내에 대한 호칭은 ‘형수님’, ‘아주머님’, ‘아주머니’로 부를 수 있으나 현재는 ‘형수님’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형의 아내를 부모님 앞에서 지칭 할 때는 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님’을 사용하지 않고 ‘형수’라고 해야 하고,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형수를 가리킬 때에도 자녀의 입장에서 ‘큰 어머니’, ‘큰 어머님’이라고 지칭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 남동생과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남동생에 대한 호칭은 미혼 때는 그냥 이름을 부르거나 ‘아우’, ‘동생’으로 부른다.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이름을 부르는 것 보다는 ‘아우’, ‘동생’으로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남동생의 아내에게는 지난 호에서 잠시 논한 대로 ‘제수(弟嫂)씨’, ‘계수(季嫂)씨’라고 부르고, 자신의 자녀에게는‘너의 작은 어머니’, ‘숙모’로 호칭하게 해야 한다. 4. 누나와 그 배우자에 대한 경우: 누나를 부르는 보통 말은 ‘누나’, ‘누님’ 으로 부른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누나를 가리켜 말할 때는 존칭인 ‘님’자를 빼고 그냥 ‘누나’라고만 해야 한다. 또한 ‘누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여동생과 누나를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자기 자녀에게 자신의 누나를 소개할 때는 자녀의 입장에서 ‘고모’, ‘고모님’이라고 지칭해야 한다. 누나의 남편에 대한 호칭은 ‘매형(妹兄)’, ‘매부(妹夫)’, ‘자형(姉兄)’등의 여러 가지이다. 이렇게 여러 말이 되게 된 이유는 중부지방에서는 누나의 남편을 매형이라 했고, 매부는 누나와 여동생의 남편에게 동시에 사용했다. 반면 자형이란 말은 남부지방에서 누나의 남편을 부를 때 주로 사용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두를 다 표준 용어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용어를 사용해도 무방하다. III. 결 어 이상으로 볼 때 흔히 사용하기도 하고 잘 알고 있는 말들이지만, 원칙을 따지면서 살펴보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또한 이에 대한 개념과 체계가 시대적인 현상에 의해 무너진 현대에 있어서 이를 일일이 구분하여 사용한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남녀노소 구분 없이 또한 가족과 일가친척이 함께하여 다수를 이룬 교회공동체 안에서의 적절한 바른 호칭어와 지칭어는 교회안의 아름다운 언어문화 창달에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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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6

실시간 칼럼 기사

  • [조희완 목사] 깨끗할 이유 (사1:10-17)
    <부자의 운명으로 갈아타라>는 책(매일경제신문사)이 있습니다. 이 책은 티벳 불교의 풍수지리학을 근거로 집필된 책인데 전 세계에 번역 출시가 되어서 대단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빌 클린턴> 전 미국대통령이 풍수지리학자의 조언을 받아서 백악관 사무실을 개조하고,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부인 <셰니 블레어> 여사는 다우닝가에 있는 총리 관저를 꾸밀 때 풍수 지리전문가들을 초빙하여 그들의 조언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티벳 불교의 풍수지리학에는 다섯 가지의 원리가 있는데, 그 중에 제 1원리는 “사무실이나 집안의 출입구를 깨끗이 하라”는 것입니다. 출입구인 현관은 좋은 기(氣)가 안으로 들어오는 통로이기 때문에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입구에 폐품이나 여러 가지 잡동사니들이 쌓여 있으면 기의 흐름이 굴절되거나 차단이 되어서 좋은 에너지를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가 되려면 출입구에 거미줄이나 먼지를 제거하고 깨끗이 하라고 강조합니다. 풍수지리학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생각을 해도 출입구가 깨끗한 것은 좋은 것입니다. 깨끗함에 관해서는 다른 어떤 경전들이나 교리들보다 성경이 훨씬 더 많은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출입구가 깨끗할 때 좋은 기(氣)가 들어온다면, 우리의 영혼이 깨끗할 때 복 있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주홍 같이 붉은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예수그리스를 믿으면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 같이 붉은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예수그리스도를 믿으면 양 털과 같이 깨끗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죄 사함 받고 깨끗한 사람이 되면 복 있는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마음이 깨끗해야하고, 손이 깨끗해야하고, 행실이 깨끗해야 합니다. 우리가 왜 영 육간에 깨끗한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첫째는, 깨끗해야 응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사1:15,16) 둘째는, 깨끗해야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요15:1,2,8) 셋째는, 깨끗해야 쓰임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딤후2:20,21) 거짓과 불법이 성행하는 이 시대에 우리 모두 깨끗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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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3
  • [신재철 목사] 황금샤프 : 내 것을 내 것이라 증명하기
    생일의 꽃은 선물이다. 내가 너무 세속적인가? 지역마다, 시기마다 유행하던 선물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 내 고향, 내 친구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선물은 ‘샤프 펜슬’이다. 연필을 사용하던 국민학생이 어느 때가 되면 풀리는 금기 중 하나가 샤프의 허용이다. 관리하지 않아도 늘 뾰족한 샤프는 저학년의 희망이다. 연필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 생일 선물의 인기 품목은 샤프였다. 친구의 생일초대를 받으면 문방구에서 플라스틱 케이스에 들어 있는 샤프를 구입했다. 문방구 아저씨가 무료 포장지 몇 종류를 보여주시면 그 중 선택해 포장까지 하면 제법 멋이 묻어난다. “은색으로 할까, 금색으로 할까?” 가장 인기 있는 샤프는 ‘제도’라는 이름으로 세 종류가 나왔다. 심플하면서 가장 저렴한 가격의 블랙. 케이스가 없다. 그냥 만만하게 사용하기 좋은 물건. 두 번째는 고급스런 분위기를 내고 있는 은색. 케이스도 있고 뭔가 고급스러움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선물로 사용하기에 손색이 없다. 세 번째는 번쩍이는 금색. 케이스는 당연하고 국민학생 선물용으로 과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금색 샤프부터는 문방구 사장님이 서비스 하시는 포장지도 다른 곳에서 나온다.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장 큰 단점은 너무 비싸다는 것. 그래서 선물을 준비하는 대부분 친구들은 은색과 금색 사이에서 잠시 고민을 한다. 하지만 선택은 은색. 금색은 ‘넘사벽’이다. 주기도 어렵고 받기도 어렵다. 내 생일을 맞아 동네빵집에서 만든 크림 케이크와 떡볶이, 김밥, 과자가 준비되었다. 초대한 친구들도 하나하나 집으로 오기 시작한다. 좋아하는 친구들과 집에서 맛있는 것을 먹는 생일파티는 즐겁다. 하지만 거듭 강조하지만 생일의 꽃은 선물이다. 식순이 없어서 타이밍을 잡지 못한 친구들의 선물이 하나씩 쑥스럽게 상 위로 올라온다. 양말부터 조립 로봇까지 다양한 선물이 내 품에 안겨온다. 그리고 속을 알 수 없는 포장지로 싸여진 물건들도. 하지만 한 물건은 포장지로 싸여 있지만 샤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규격, 포장지 느낌 적당한 흔들림과 소리. 딱 문방구 아저씨가 포장한 샤프이다. 친구들 보는 앞에서 포장지가 벗겨진다. 충격이다. 아무나 받지 못하고, 누구에게 주기도 어렵다는 황금 샤프이다. 그 친구가 나를 얼마나 아끼는지를 알 수 있는 증거품이다. 얼마간 이 샤프는 내게 보물이 된다. 필통에서도 가장 아끼는, 꼭 필요할 때만 꺼내 사용하는 귀중품이다. 학교에서 가장 착하고 너그럽다고 소문 나있던 내가 유일하게 빌려달라는 요청을 거절하는 품목이 생겼다. “어? 어디 갔지?” 없어졌다. 어디에서든 눈에 띄던 황금 샤프가 사라졌다. 실수로 바닥에 떨어져도, 가방에 굴러다녀도 눈에 잘 보이던 녀석인데 보이지 않는다. 샤프가 보이지 않던 수업시간부터 정신줄을 놓고 있다가 쉬는 시간이 되어 본격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바닥은 물론이고 가장 뒷자리의 쓰레기통까지 뒤져가며 찾아보지만 보이지 않는다. 약간 넋을 놓은 나를 친구들은 이상하게 본다. 어떤 친구는 걱정이 되었는지 안부를 물어온다. 주변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결국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며칠 후, 어느 날. 친구의 손에서 반짝 반짝, 황금샤프가 보인다. “설마?” 아닐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친구의 손을 자세히 보니 내 샤프가 친구 손에 있었다. ‘이걸 어떻게 말해야 하나? 내 것이라 말을 어떻게 하지?’ 많은 고민을 하다가 샤프가 내 것과 같다고, 혹시 주웠냐고 물었다. 주웠냐는 물음은 내가 친구에게 베푼 기회이자 은혜였다. 친구는 갑자기 화를 내며 자기 것이라고 소리를 지른다. 아니다. 분명 내 것이다. 나는 안다. 끝부분이 살짝 까져 황금색이 벗겨진 것까지 같다. 내가 가장 불편해 하는 말다툼을 샤프를 위해 해야만 했다. 나름의 비장의 카드. 끝부분의 까짐을 이야기 했다. 하지만 친구는 샤프를 보더니 자기 것도 이 부분이 벗겨졌다고 우기기 시작한다. 결국 나는 얼마 쓰지 못한 황금 샤프를 포기하게 되었다. “진짜 내꺼 맞는데.” 사실인데 설명이 안 된다. 억울하고 답답한데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못하다. 앞으로 살아가며 얼마나 이런 일들이 많을까? 그때마다 포기하며 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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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3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3 : 사회자와 인도자, 당회장과 위임 및 담임목사
    I. 서언(序言) 어떤 말이 바른 말일까? 또 어떤 용어가 우리 기독교적일까? 연구를 거듭 할수록 어렵게 느껴진다. 여러 선행연구들을 살펴보아도 아직까지는 이런 용어 정리가 완전히 정착되지 않고 있고, 또 저마다 견해가 다른 경우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런 면으로 언젠가 필자는, 본 교회 예배순서지의 내용을 보다가 깜짝 놀란 일이 있었다. 이유는 필자 자신이 전공을 살려 예배학적 근거 하에 정한 예배순서인데도 잘못 쓰고 있는 용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습관 속에 젖어 있다 보니 국문학과 실천신학 전공자이면서도 틀린 용어들을 쓰고 있었든 것이다. 이때 발견한 용어는 다름 아닌‘사회자’,‘개회기도 및 폐회기도’,‘개회찬송과 폐회찬송’등의 순서였다. 혹자는 이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나? 고 반문 할 수도 있지만 이러한 용어는 각종 회의를 할 때 사용하는 말이지 예배용어로는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본 호에서는 이런 논란이 되거나 적합하지 않은 몇 가지 용어들을 논하고자 한다. II. 사회자와 인도자, 당회장과 위임 및 담임목사 1. 사회자와 인도자: 보통 여러 교회들의 주보의 예배순서에 보면, 사회자라고 표기되어 있는 경우를 본다. 하지만 사회자의‘사회(司會)’는‘모일 회’자로 회의용 단어이지 예배용어가 아니다. 그래서 예장 통합 교단에서는 1998년 총회에서 사회자는‘인도자(引導者)’로, 성례전과 같은 예전의 경우는 집례자(執禮者)로 표기하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또 다른 견해는, 인도(引導)란 말은 불교적 배경을 가진‘갈 길을 알지 못하는 중생을 이끌어 오도(悟道)에 들게 함’이란 뜻이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따라서 인도자 보다는‘예배 진행자(進行者)’란 말이 적합하다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서로 다른 견해들 앞에서 현재로서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다만 독자 제위의 판단에 맡길 따름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회의 용어인‘회’자가 들어가는 사회자란 말이나 개회 찬송, 폐회기도라는 용어는 그냥 ‘찬송’,‘기도’로 하든지 영접과 파송의 뜻을 가진‘송영(送迎)’으로 하는 것이 더 바람직 할 것이다. 2. 당회장과 위임목사와 담임목사: 보통 주보라고 말하는 예배 순서지에 시무하는 목사를‘당회장(堂會長)’이나‘담임(擔任)목사’로 표기하고 있다. 또 어떤 교단은 위임목사와 담임목사(과거의 임시목사)에 대한 제도적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구별하기 위해서‘위임목사’라고 표기한 경우들도 흔히 볼 수 있다. 또한 어떤 교회는 대표기도 할 시나 일상적인 대화중에서도 종종‘우리 당회장 목사님’이라고 호칭하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다. 이런 다양한 호칭들 때문에 어느 말이 옳으냐는 질문도 자주 받을 때가 있다. 앞서 논한 용어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먼저, 담임목사라는 말은 교단별 차이는 있지만, 단어의 의미로는 맡을 담(擔), 맡을 임(任)자이다. 이는 그 교회의 전체 목회적 업무를 담당하는 대표자라는 의미를 가진 직책의 용어이다. 반면 당회장이란 말은 교회의 조직적인 면에서 교회의 모든 치리의 역할을 담당하는 행정적인 대표를 의미한다. 또한 이 역할의 주 업무는 시무 목사와 장로가 모여 회의하는 당회에 있으므로‘당회장’이라 명명한 것이다. 앞서 논한 위임목사와 담임목사란 구분도 마찬가지이다. 이 또한 제도적 위치에서 논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예배 순서지에 위임목사라고 표기하는 것은 적절하지는 않다고 본다. 이상에서 볼 때 이러한 여러 가지 명칭은 여러 가지 기능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의 단어로 통일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구분한다면, 일상적인 교회의 업무와 교회를 대표하는 명칭어로는 목회적 신분인 ‘담임목사’란 말이 옳으며, 노회나 당회 및 각종 회의적인 기능과 기타 행정 업무에 있어서는 행정기능의 신분인‘당회장’이란 명칭이 맞는 말이다. 또한 예배순서지나 교회를 대표하는 명칭에는 당회장이란 용어보다는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담임목사’로 표현하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III. 결 어(結語) 이상과 같은 내용들을 살펴 볼 때 우리가 아무 거리낌 없이 흔히 쓰는 교회적인 용어인데도 구체적으로 보면 문제가 되는 용어들이 아주 허다하다. 그 많 큼 이런 면으로는 우리 교계가 우리 자체의 언어 통일에 너무 무심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신앙생활에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자체 내의 모순을 가져다주는 용어들 많 큼은 구분하여 사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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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3
  • [최호숙 목사] 삶의 수수께끼가 있을 때에
    B.C 2500년 소포클레스의 작품에 나오는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괴물 스핑크스가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수수께끼를 내고 그것을 풀지 못하는 사람들을 잡아 먹었다. 그 수수께끼의 내용은 “아침에는 네 발, 점심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은 무엇인가?” 다수의 사람이 이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여 죽임을 당했다. 급기야 여왕 이오카스테는 선전포고를 했다. “이 괴물을 죽이는 자에게 왕위는 물론, 나 자신까지도 바치겠노라.” 이 어려운 수수께끼를 푼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오이디푸스” 였다. 그가 맞춘 정답은 “인간”이었다. 어릴 때는 기어서 네 발로 다니고, 성장하면 두 발, 늙게 되면 지팡이를 짚는 관계로 세 발이 된다. 정답을 맞혔기에 스핑크스는 골짜기로 뛰어내려 죽어버리고, 오이디푸스는 테바의 왕이 되었다. 인간의 삶 가운데는 수많은 수수께끼가 있다. 수수께끼라는 것은 해답을 알면 쉬운 것이지만 알기 전에는 어려운 것이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해답을 알면 쉬운 삶이 되지만 해답을 모르면 어려운 것이다. 우리 인생들이 삶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모르고 나름대로 이것이 정답일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살고 있다. 그래서 남의 일에는 명 재판관이 되지만, 자신의 문제에는 우왕좌왕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할 때가 있다. 남의 일에는 명 처방을 다 해 주면서 자신의 일에는 바보 같은 모습으로 어리석은 결정을 할 때가 많다. 우리 인생이 바른 삶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께 물어야 하고, 하나님 안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예수님을 본받아 사는 것이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인 것이다. 예수님처럼 생각하며, 예수님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아야 하며, 예수님처럼 지혜롭게 말하고, 인격적으로 말하고, 예수님처럼 타인의 아픔을 들어주고, 예수님처럼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 아름다운 삶을 살 수 가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답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답은 하나님만이 알고 계신다. 그래서 인간인 우리는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순간순간 지혜와 총명을 달라고 기도해야 하며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가야 하는 것이다. 다윗은 유다 왕이 되었을 때 삶의 처신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여호와께 묻는 신앙을 가졌다.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삼하 2:1)”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이유는 그가 허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죄를 지으면 회개하고 하나님을 전적 신뢰하고 그분께 묻는 신앙을 소유하였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 가운데 풀기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기도하면서-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골1:9)” - 인생길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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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23
  • [박동철 장로] 키루스(고레스)같은 나라 지도자
    2022년 새해, 바야흐로 대한민국 정치 대경연의 한해 문이 열렸다. 오는 3월9일 대통령선거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됐고, 6월1일 지방선거의 일정에 일제히 돌입했다. 주일이면 교회를 찾는 정치인들의 발길이 분주함을 볼 수 있다. 교회서도 정치의 계절이 오면 조국을 위해 더욱 기도하고 단골기도문 주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지도자로 선출되기를 소망하기도 한다. 더욱 성경적으로 들어가서 구약의 한시대를 풍미했던 페르시아 초대 왕 고레스(키루스)같은 대통령, 그리고 국가지도자가 선출되기를 소망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올린다. 왜 성경상 고레스, 아람어로 키루스 대왕인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점령했던 페르시아의 초대왕 키루스는 고대 근동역사에도 기록이 생생히 있다. 전략에 뛰어나고 훌륭한 치세가였다는 기록이다. 당시 제국 바빌로니아를 점령하고 제국이 되어서도 인근 속국들에게 덕을 많이 베푼 왕으로 알려져 있다. 성경에도 고레스 왕으로 선지서에 많은 기록이 있다. 주전 600년경 당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남유다를 점령하고 3차에 걸쳐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으며 유대인들은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처참히 포로의 삶을 살았다. 비슷한 시대 메대 바사라는 두 나라가 있었는데 시대의 영웅 키루스가 통일하여 페르시아제국을 건국하고 바벨론을 점령함으로써 페르시아는 근동의 새로운 제국으로 서게 된다. 통일 페르시아 제국의 초대 왕이 바로 고레스 왕이다. 여기서 우리는 고레스 왕이 선정을 베풀고 포로로 잡혀있는 유대 백성을 이스라엘로 귀환시키는 하나님의 은혜의 주역이 된데 시선이 간다. 더욱 놀라울 일은 성경에서 고레스 왕에 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말해주고 있다. 이사야 44장28절에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 지리라 하는 자니라”라고 기록돼 있다. 주전 539년 바벨론에 포로 된 이스라엘 민족이 해방되기 170년 전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의 음성을 듣고 예언한 말씀이다. 말씀에서 당황케 하는 대목은 먼 훗날 이방 왕이 될 자를 예언하고 그에 대해 ‘내 목자’라고 칭하고 그로 하여금 자기백성을 구원케 하는 여호와의 놀라운 섭리와 계획을 우리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한사람의 지도자를 뽑는데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음이 경외로운 일이다. 대통령이 선출되고 지방자치 지도자를 뽑아야 하는 정치계절에 공통의 기도 제목이 될 수밖에 없다. 여호와는 이방인과 함께 세계경영을 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정치를 속세의 정쟁으로만 치부할 일이 아니다. 모든 곳에 미치는 여호와의 손길을 찬양하며 비록 하나님의 이 땅을 향한 구원의 계획을 모를지라도 국가의 지도자는 창조주 하나님의 세계관을 이해하고 믿음의 백성들을 존중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춘 지도자라야 함을 웅변하고 있는 말씀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물질의 풍요 속에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이단의 문화들이 밀려들고 있다. 교회를 공격하는 정치세력, 그리고 복음을 가로막는 악법들, 이들에 대한 바른 교회관의 시각을 갖고 나라를 통치할 수 있는 국가지도자가 필요한 때다. 또한 본격 지방 시대 지역을 잘 이끌 수 있는 훌륭한 지도자를 뽑아야 하는 절체절명의 때가 되고 있다. 나라를 살리고, 교회를 살려야 하는 중차대한 이때 고대 키루스 대왕 같은 아니 모세와 요셉 같은 훌륭한 지도자를 찾는 기도의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권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잠시 부여받은 것이다. 권력이 사욕으로 사용되어서는 아니 됨을 알고 진정 백성을 헤아리는 안목 있는 지도자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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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16
  • [박봉석 목사] 구원 받았다는 것의 의미
    이 세상 사람들은 누구든지 삶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두려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런 인간의 두려움의 심리를 이용해서 오늘날에 발달한 것이 바로 보험입니다. 자동차가 많아지면서 사고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동차 보험이 생겨났고, 건강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서 건강보험이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경영하는 공장이 불이 나거나 도둑이 들 것을 우려해서 화재보험이나 도난보험을 들기도 합니다. 유럽의 유명한 축구 스타들은 다리가 생명이기 때문에 거액의 다리 보험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고, 한 유명한 피아니스트는 손 보험을 들었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유형의 보험 가운데서 가장 중한 보험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생명보험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보험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보험 들기를 주저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첫째는 자기가 죽을 때를 기다리는 보험이니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것이고, 그리고 둘째는 이 보험은 들어봤자 지금 현실의 삶에서는 내게 뭔가 혜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가 있는데 그 들의 생각이 그런 것입니다. 나중에 갈 천국은 놔두고 그 복음이라는 것이 바로 지금 현실의 삶에서는 무슨 필요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기독교의 복음이 저 세상을 보장해주는 것은 맞다 하더라도 지금 이 세상에서는 무엇을 보장해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 왜 많은 사람들이 무당을 찾아가고 점쟁이를 찾아갑니까? 대부분은 저 세상의 일로 찾아가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삶에서 다가올 구체적인 현실의 문제를 타파하고자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는 기독교 복음은 과연 저 세상에 대한 보장만 있고 이 세상에서의 보장은 없는 것일까요? 만약 우리가 믿는 복음이 저 세상에서의 보장만 하고 이 세상에서의 보장은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보험처럼 불완전한 복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에는 그런 보험이 출시된다고 하지요. 죽음 후의 보상은 물론이고 살아있는 동안에 사고를 만나거나 질병에 걸렸을 때도 보장하는 종합보험 말입니다. 우리가 믿는 복음 역시 굳이 세상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종합보험입니다 저 세상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삶에서도 역사하는 복음입니다. 바로 그 복음을 믿을 때에 내가 믿는 복음은 염세적인 복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도 살아 역사하는 참 복음이 됩니다. 독자 여러분, 우리가 믿는 복음은 미래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의 영생을 우리에게 보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구원의 미래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그 복음은 또한 현재의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도 역사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그 복음으로 인해서 지금 세상에서도 기쁨과 감사함으로 살 수 있고, 그 복음 때문에 삶의 고난과 어려움이 있어도 얼마든지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구원의 현재성이라고 말을 합니다. 즉 구원이란 죽어서 저 천국 가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구원의 삶을 누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구원의 온전한 의미이며, 내가 바로 그러한 구원의 삶을 누릴 때에 미래만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도 역사하는 복음을 믿는 참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독자 여러분,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어떤 복음입니까? 미래만을 보장하는 반쪽자리 복음입니까? 아니면 미래만이 아니라 현재의 나의 삶의 모든 부분에 역사하고 나의 삶을 이끌어가는 복음입니까? 구원 받았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내가 믿는 복음이 미래만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도 역사하는 복음임을 체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진짜 구원 받은 자로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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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8
  • [신재철 목사] 재철이 건드리지마!
    재철이 건드리지마! 태어나면서부터 친구. 내게는 그런 아이가 있다. 부모님끼리 친구였기에 우리는 엄마에게 안겨있을 때도 친구라 불렸다. 내 기억의 가장 처음부터 그 친구는 존재했다. 강에서 더운 줄 모르고 땡볕 아래 이상한 것들을 함께 채집했다. 돌은 물론이고, 이끼, 흙, 가재, 종종 이상한 벌레도 잡아다 함께 소꿉놀이 주방을 꾸몄다. 발바닥 아픈 줄 모르고 슬리퍼 끌고 돌밭을 누비며 재밌게도 놀았다. 때가 되면 친구네 집에 예쁘게 맺은 앵두도 어지간히 먹었다. 학교 가기 전까지 우리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하긴, 친구가 내게는 별로 없었다. 우리는 함께 어엿한 국민학생이 되었다. 비록 반은 갈라졌지만 친구는 우리 반을 줄기차게 드나들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길지 않은 쉬는 시간이면 찾아와 이런저런 말로 재잘거리던 아이, 목소리도 웃음소리도 커서 1학년 여자아이가 이렇게 호탕할 수 있나 싶을 정도다. 여하튼 반 친구들에게 그녀는 ‘재철이의 절친’이었다. 학교에 들어와서는 분명 선택지가 생겼는데 여전히 그녀는 내게 거의 유일한 친구였다. 나는 매력 있는 사람이 아니다. 키 작고, 깡마르고, 피부 톤은 저 세상 레벨이다. 하지만 주변과 평화롭게 지내기를 원했기에 가능하면 친구들의 요구를 받아주며 조용하게 지냈다. 다행스럽게도 학업성적은 좋았기에 친구들은 나를 ‘착한 재철이’로 불러주며 모든 아이들과 잘 지내는 편이었다. 친구가 많아졌다.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지만 여자아이들에게 인기가 제법 많았다.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야! 신재철 내꺼다. 아무도 건드리지 마라!” 어느 쉬는 시간, 교실 문이 ‘드르륵’ 급하게 열리더니 나의 그녀가 교탁 옆에 서서 일갈을 외쳤다. 목청은 어느 때보다 컸고 얼굴은 약간 화가 나 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불편했나보다. 큰 사자후와 함께 그 친구는 우리의 관계(?)를 아이들에게 선포한 후 올 때처럼 급하게 사라졌다. ‘이게 무슨 일인가!’ 나는 너무 부끄러웠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민망함을 겪어야 하는가. 반 친구들도 당황했는지, 아니면 그녀의 모습에 공포를 느꼈는지 나를 놀리지도 않았다. 집에 돌아온 후 엄마에게 상황을 이야기하고 울어버렸다. 너무 부끄러워서 학교 가기 싫다고. 그렇게 35년이 지났다. 나의 그녀는 개그우먼이면서 훌륭한 방송인이 되었다. 유명 개그맨과 결혼 후 알콩달콩 살아가는 모습이 텔레비전에 종종 비친다. 방송을 보고 있자니 입담과 목청의 여전함에 웃음이 난다. 전처럼 자주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인터넷 뉴스를 통해 친구 소식을 더 자주 접한다. 가끔 휴대폰 메시지와 전화로 소식을 알려주는 친구가 고맙다. 카톡 울림과 함께 전달된 서른한 가지 이상의 맛을 줄 수 있다는 아이스크림 선물. 여전히 살뜰히 챙겨주는 친구의 마음이 고맙다. “날이 더워. 조카들이랑 시원하게 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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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8
  • [김성수 총장] 대선 주자들의 “하나님 찬양”
    3월 9일 대선이 가까워 옴에 따라 유력 대선 주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대선 주자들의 토론은 절대 다수 국민들의 화두가 되고있고, 여야 모두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는 일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치인들이 자연스럽게 또 교회를 기웃거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여권의 모 대선 후보는 국가조찬기도회에서 인사말을 하면서,“지난해 돌아가신 제 어머님도 권사님이셨고, 아내도 아주 오래 전부터 교회 반주를 했던 독실한 성도여서, 저도 분당우리교회에서열심히 주님 모시고 있다”는 발언을 하였고, 이에 담임 목사는 담당교역자들과 함께그분은 “우리 교회에 등록을 하였으며, 현재 제적되어 있는 상태”임을 공적으로 밝히고, ‘제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교회가 직접적으로 세상 정치에 관여하기 보다는 성도님들이 성경적인 가치관으로 세상을 잘 분별하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부연 설명까지 하기도 했습니다. 야권의 모 대선 후보도이와 비슷한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는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마련된 고 조용기 목사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였고, 이때 기독교계 목사들이 단체로 그에게 안수 기도를 하는 모습이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그의 권유로 부인이 기독교 원로 김장환 목사를 만나 기도와 위로를 받았다는 소식도 보도된 바 있습니다. 이들이 어떤 동기에서 소위 “신앙적인” 행동을 표출했는지 모르지만, 이런 유의 행동들은 선거때마다 있었고, 또 앞으로도 계속 볼 수 있는 행동들이기에 양식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등 감동을 받거나 의아스럽게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이들이 자신들의 종교적인 말이나 행동에 감동을 받아 교인들이 표를 줄 것이라고 계산했다면 이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의 정치의식 수준을 너무 우습게 보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성도들은 정치인들의 가식적이며 위선적인 종교 행위에 역겨움과 측은지심을 가질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행동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놀라운 사건이 다니엘 당시에 있었습니다. 이방의 느부갓네살 왕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고 하는 광경이야말로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라 평지의 금신상 앞에 백성들, 나라들, 각 방언하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경배하도록 명령을 내린 바로 그 권력자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고“... 각 백성과 각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가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찌니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단3:29)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모든 우상 숭배 행동을 조직하고 공표한 그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할지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섬기던 우상을 곁에 두고 다른 신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변덕을 만족시키는 어떤 신들도 경배한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하나님이 놀라운 어떤 일을 하셨기 때문에, 이 하나님 역시도 자신의 범신전에 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의 자리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할지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깊은 헌신에서가 아니라 단지 자기 유익에서 그렇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유다 청년들의 하나님과 가까이 하면 어떤 유익이 있을지 누가 아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느부갓네살 왕의 찬송이 불순하고 위선적인 이유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지금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지만 자신이 실제로 먼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한 금 신상을 끌어 내리고 부수는 일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금신상은 여전히 두라의 평지에 서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은 바로 이 우상적인 금신상의 발 아래였습니다. 느부갓네살에게는 이 금신상을 파괴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더 잘 경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그 어떤 사람도 처형할 준비가 되어 있으나 두라의 평야에 우상 금신상을 세워 놓고 우상 숭배적이며 하나님 모독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자신에게 분노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벨론에서 일어났던 일이고, 이러한 역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많은 신들 가운데 한 분이 아니라 유일하게 참 신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외에는 천하에 그 어떤 다른 이름으로도 구원받을 길이 없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증스런 느부갓네살 왕의 찬양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라 다니엘과 세 친구들의 목숨을 바치는 신앙의 실천을 통한 찬양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거대한 권력을 가진 왕의 입술을 통해서가 아니라, 죽음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14세 청소년들의 신앙을 통해서 찬양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느부갓네살의 위선적인 선포에 감동을 받을 것이 아니라, 이 일을 가능하게 한 유다의 청소년들이 가졌던 신실한 믿음을 보아야 합니다. 국가의 운명이 달려 있는 대선을 앞두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벨론의 역사를 배경으로 대선 후보들의 종교적인 행위나 현란한 언어 구사에 감동을 받거나 현혹되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이들이 정직한 품성과 인격을 갖고 있는지, 자신과 패거리들의 집단 이익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과 소외된 자들의 복지에 관심을 갖고, 공의를 추구할 비전과 능력을 갖고 있는지를 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빠짐없이 투표하고 만에 하나라도 부정한 방법의 투개표가 획책 되지 않도록 두 눈을 부릅떠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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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8
  • [이정희 목사] 기독교 용어들에 대한 고찰 2 : 축제와 연조, 헌금 용어들
    I. 서언(序言) “기독교인의 생활 용어 바로잡기”라는 대명제 아래 지난 호부터는 우리 기독교인들 스스로 잘못 사용하고 있거나 한 번쯤 생각해보아야 할 교회 용어들을 논하고 있다. 우리 기독교의 적합하고 좋은 용어로 알고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그 일은 우리 스스로가 자가당착에 빠진 경우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지난 호에 이어 이번에는 흔히 말하는 축제와 헌금 용어들에 대해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II. 교회에서 축제(祝祭)라는 말을 쓸 수 있느냐? 이 질문은 어떤 신학교 학생으로부터 강의 시간에 받은 질문이다. ‘축제’, 이 말은 현재 일반 사회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는 말이기도 하고 교회 안에서도 흔히 사용하고 있는 일상적인 말이다. 예를 들면, 성탄절 축제, 부활절 축제, 감사절 축제 등등 이런 용어들을 아무 꺼리 낌 없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 어원의 내용을 보면 그냥 생각 없이 단순하게 교회에서 사용하기로는 다소 문제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워낙 많이 사용하고 있다 보니 사용여부에 대하여 관련학자들 사이에도 찬반양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에 축제란 용어에 대한 서로 다른 찬반양론들을 논하고자 한다. 1.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일부의 견해 : 사용불가의 이유는 이 단어 자체가 기독교적인 말이 아니라 서양과 일본 등에서 유입된 미신적 행위와 민속적인 언어라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원래 이 말은 일본인들이 서양의 페스티벌(Festival)과 같은 행사를 보고 자신들이 행하는 조상신을 섬기는 제사와 비슷하다 하여 그 제사를 ‘축제’라고 한 말에서 유래 되었다. 즉, 축제는 원래 큰 소리로 노래하고 춤추는 형식의 일본의 고유한 민속 제사였던 것이다. 마치 출애굽 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던 모습을 연상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축제는 글자 그대로 “축하하며 제사를 지낸다.”는 뜻으로, 신에게 제사를 드린다는 말이기 때문에 우리 교회 용어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2. 사용해도 무방하다는 견해 : 원래적 의미는‘신에게 드리는 제사’이긴 하지만,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축제라는 말은 우상을 섬기는 제사적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별한 날을 축하 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3. 두 견해 차이를 어떻게 해야 될까? : 필자의 견해로는 먼저 이런 말을 하는 자를 정죄하거나 잘못 말하는 자로 인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 분별없이 사용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이 말은 약 60년 전인 1961년 이희성의 국어대사전에 처음으로 등제되었고, 전통적으로 전해져 온 말이 아닌 근대에 일본의 영향으로 처음 사용된 용어인 것이다. 그렇다고 볼 때, 다소의 문제가 있는 용어를 계속 사용하기 보다는 순수한 우리말인 잔치, 명절, 절기의 날 등의 말로 바꾸어 사용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III. 혼돈하기 쉬운 헌금 용어들 헌금 용어 중에는 봉헌, 예물 봉헌, 헌물, 연보 등의 여러 낱말들이 있다. 의미가 거의 비슷해서 구분을 잘 하지 못할 때가 있다. 이에 한두 가지 헌금 용어들을 구분해 본다. 1. 연보 : 한자어 뜻으로 보면 덜 연(捐), 도울 보(補)로 되어 있다. 말의 의미는 내 물질로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후서에 5-6회 정도 사도바울이 언급하고 있는데, 원어로는 ‘하드로테스’등의 몇 가지 용어로 되어 있다. 이는 모두 당시의 어려운 교인들을 도울 때 십시일반으로 모은 구제금을 낼 때 사용했던 말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연보라는 말은 일반 헌금이 아닌 구제 모금을 할 때 사용하는 말이었다. 2. 헌금이란? : 헌금은 바칠 헌(獻), 돈 금(金)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것을 말한다. 즉,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연보는 이웃을 돕기 위해서 내는 성금 형식의 예물인 것이다. 이에 의미상으로 본다면 이 두 말은 동일하게 쓸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용도에 따라서 달리 써야 될 말이다. 또한 어떤 견해들에 의하면 헌금이란 말도 단순히 돈을 바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이 말도 너무 협의적인 용어라고 지적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래서 헌금보다 좀 더 포괄적인 용어인 ‘봉헌’이란 말이 더 합당하다고 보는 이도 있다. 또 성경에는 예물(禮物)이라는 좋은 말이 많이 명시 되어 있기 때문에, ‘예물 봉헌’이라는 용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IV. 결 어(結語) 이상으로 볼 때 전통 종교의 영향을 받은 우리의 언어나, 국한문, 또한 영어까지 동시에 사용함으로서 오는 혼란, 또한 근거와 실체를 알 수 없는 인터넷 언어까지 범람하는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 교회 용어의 바른 정립은 매우 필요한 일이다. 그래서 표현되는 말도, 마음도, 우리의 신앙의 자세도 늘 주님께 드려지는 진정한 봉헌이 되어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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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8
  • [박동철 장로] 태영호의원이 던진 통일희망 메시지
    태영호의원이 던진 통일희망 메시지 지난 1월25일 창원극동포럼(회장 조우성장로)이 주관한 제5회 창원극동포럼에서 북한 고위외교관 출신 탈북자 태영호국회의원 초청 특강이 창원극동방송에서 있었다. 이날 특강을 맡은 태영호국회의원은 지난 2016년까지 유럽에서 북한의 주요외교관으로 활동하다 대한민국으로 망명하여 국회의원까지 된 우리들에게 친숙한 인물이다. 이날 특강에서 태의원은 요즘 대한민국 국민이 되어 자본주의 덕을 제일 많이 보고 살아가고있다는 덕담으로 강연의 문을 열고 강의를 열정적으로 이끌어갔다. 자본주의 덕이라는 덕담의 내용은 빠진 머리카락을 이식하여 포스포슬한 헤어스타일을 자랑하면서 설명하는 것이었다. 태의원은 망명후 북한의 실상을 알리고 통일을 향한 우리의 소망을 갖는데 큰 역할을 하고있고 서울 강남 갑에서 제21대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왕성히 의정활동을 하고있다. 더더욱 반가운 일은 그동안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목사님으로 부터 전도받아 지금은 서울 모교회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한다. 참 감사할일이다. 이날 태의원은 강의에서 세가지 키워드를 제시하며 우리의 소원 통일을 전망했다. 먼저 우리의 통일은 빠른 시일내 오기어렵다는 전망을 전제했다. 그러나 통일은 반듯이 올수밖에 없다는 밝은 미래를 던졌다. 서울 부산 열차 2시간20분 걸리는 같은거리 평양 청진간의 열차시간이 4일걸리는 그야말로 낙후된 북한에서 40세도 안된 최고지도자 김정은을 둘러싼 1세대 군부참모들이 왕조의 절대권력을 쥐고 그 기득권을 포기할수 없게 돼있는 정치구조가 통일지연의 큰원인이라는 진단이다. 그러나 북한에도 자본주의 문화와 문명의 이기가 들어가 다음세대들이 몰래몰래 향유하기 시작한 세대의 변천이 북한왕조를 서서히 무너뜨리고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절대빈곤 해결의 마지막 수단이 되는 장마당이 단속속에서도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있는 점이 첫째 키워드이다. 둘째는 이미 세계를 선도하고있는 우리의 K팝문화에 북한 젊은이들에게 익숙해져가고있다는 점이다. 남한의 문화가 덮어질때 남북한의 동질을 회복하는 광장이 되고 결국통일의 길이 열리게된다는 진단이다. 셋째는 진정한 세대의 교체기간이 적어도 30여년이 지나야하는 시간적계산을 해야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1세대의 측근 참모들이 물러가고 다음세대의 진정한 삶과 문화에의 향기에 함께한자들이 북한사회를 주도할때가 통일의 기회라는것이다. 가장 중요한 전망과 소망은 복음의 물결이 일제히 북한의 땅을 덮어내어야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대한민국 교회가 지금 준비하고있는 그랜드플랜인것과 일치하는 점이다. 하나님은 준비하고있을것임이 틀림없다고본다. 1907년 평양대부흥의 깃발을 다시 꽂을 준비를 해야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준 귀중하고 특별한 시간이었다. 옷을 찢지말고 마음을 찢고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주님의 큰음성이 들리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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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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