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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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진해 웅천교회)

 우리의 신앙생활은 내가 죄를 짓지 않는데, 내가 실수하지 않으려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그것 때문에 실패하고 좌절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뭐냐? 임마누엘하심, 그 분의 십자가의 결론, 임마누엘하시고 나와 성령으로 함께하시고 성령 충만한 나임을 초점 맞추어야 한다. 성령충만하려고 신앙생활하지 말고, 성령충만함을 믿음으로 믿고 출발해야 한다.

죄를 짓지 않는데 초점을 맞추려 하지 말라. 예수 믿는 것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 예수 믿는 것이다. 예수님과 연합되었음에 초점을 맞춰라. 성령님과 하나 되어 당신 안에 성령이 가득함을 믿음으로 출발해야 한다. 성령의 생각에 내 생각이 연합되는 것이다.

늘 고백해야 한다. “저는 주님과 함께 삽니다.” 혹 실수 하더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 “하나님 제가 이런 부분에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진짜 회개하고, 주님이 해 놓으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당신은 성령충만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죄가 이미 사해졌다. 그러나 “잘못했다”는 표현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우리의 기도에 대해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다니엘이 70년 후에 해방 시켜 주신다는 것을 책을 통해 알게 된다. 이미 약속을 주셨다. 그것을 깨달은 다니엘은 즉시 그 민족을 위해 구체적으로 회개하는 모습을 본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회개한 후 해방 될 것을 믿는다고 고백한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당신의 삶이 완전해 보이지 않더라도 당신의 부족을 묵상하지 말고 당신 안에 충만하게 계신 성령님을 묵상하라. 성령충만의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출발하라. 항상 당신은 성령으로 충만함을 주님께 고백하며 인정하며 그렇게 여기고 믿음의 행동을 하라.

 

다시 율법의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당신은 성령충만함을 믿고 모든 것을 출발해야 한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당신의 애씀이 성령충만의 결과를 가져 온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주셨고 성령님은 영원히 우리 안에 계신 것이다. 율법으로 돌아가지 말라. 당신은 성령의 사람이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갈4:9)

 

초등학문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무엇인가? 예를 들어 “오늘 외출하시면서 세수 하셨나요?” “세수했습니까?”는 질문은 어른에게는 맞지 않다. 어른에게 “너 오늘 세수했냐?”고 농담으로 할 수는 있어도 진담으로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린이들에게는 뭐라고 하는가? 엄마가 묻고 점검해야 한다. “너 오늘 세수했니? 양치질 했니?"라는 질문을 한다.

성경에 바울 사도가 그랬다. “내가 단단한 음식으로 하지 아니하고 너희들에게 젖으로 한다. 너희가 어른이 되어야하는데 어린아이다. 어른으로 못 대하고 어린아이같이 대한다.”고하면서 바울은 성경을 기록한다. 초등학문은 “미워하지 마라. 사랑해라. 서로 도와라. 어려운 일이 있으면 이래라. 이웃을 사랑해아.”는 식은 다 초등학문이다. 성장하고 나면 그 정도의 수준이 아니다. 성장하면 안다. “아,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시구나.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신 것이 감사하다. 효도를 해야겠구나.” “나의 삶을 통해 세상에 기여를 해야겠구나. 꿈을 가지고 열심히 하면 세계적인 일을 할 수 있구나. 나도 열심히 이 땅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야 되겠구나.” 등의 생각을 하는 것은 성장한 사람이 하는 생각이다. 성장한 사람에게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묻거나 강조하지 않는다. “세수했냐? 밥을 먹을 땐 입을 다물고 씹어라.” 등을 한다면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중요한 말이다. 물론 초등학생에게는 좋은 생활이 되도록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성경도 많은 가르침이 있는 것이다. 배우게 되면 마땅히 할 일을 깨달아 기쁨으로 하게 되는 것이 성령충만한 자의 삶이다.

 

왼손을 쓰는 아이가 오른손으로 바꾸어 훈련을 하려면 불편하고 어려움이 있다. 우리가 복음으로 바꾼다는 것이 불편하다. 말도 불편하다. 생각도 불편하다. 남과 이야기하다가 “아차” 싶지만 입을 닫기도 힘이 든다.

나는 처음 복음을 깨닫고 난 후 기도를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경험을 했다. 기도할 때마다 복음적인 기도가 안 되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게 입에 익은 습관 된 기도가 자꾸 나왔다.

예를 들면, 주님이 항상 함께 하심을 감사하고 싶은데 입은 저절로 “오늘도 함께 하여 주시옵고, ...”라고 자동으로 이어져 나오는 것이었다. 옛 습관대로 살던 것을 갑자기 바꾸는 일은 얼마나 불편한지 모른다.

기분이 상당히 상하고 안에서 울화통이 터져 나오고 힘이 드는데 “주님이 다 이루셨다. 나는 풍성하고 평안하다.”라고 받아들일 수가 있느냐 말이다. 오히려 성내고 사는 것이 더 편할 수 있다. 욕하고, 고함지르고, 윽박지르면 더 편한 것 같기도 하다. 참으려니 더 울화통이 터진다. 그 때 누가 옆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품어야지.”라고 하면 “지금 하나님 사랑 찾을 때냐?”면서 오히려 더 뒤집어진다. 혹 우리가 이런 실수를 한다고 할지라도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절대로 되돌아가는 자가 아니다.

생각과 말과 습관을 바꾸기 힘들지만 당신은 성령충만하다고 고백하며 출발해야 한다. 따라해 보라. 고백하며 고함치며 그렇게 살아야 한다.

 

“나는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지금만 아니라 항상 성령으로 충만함을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으로 가득한 사람입니다.”

 

 

 

 

“나는 성령의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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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성령충만(3/3)과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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