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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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진해 웅천교회)

 주님의 말이 영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 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영의 생각을 하려면 그래서 주님의 말씀이 있어야 한다. 주님의 말이 나의 생각이 되도록 훈련해야 한다. 이것은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수밖에 없는 이유다. 묵상은 주야로 하는 것이고 기도는 부르짖어 하는 것이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생명과 평안이 넘치는 길을 탣ㄱ하라. 생명과 평안이 오늘도 넘쳐난다. 육신의 법이 사망인 이유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할 수도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계속해서 나를 사로잡아 오는 죄의 법에 잡혀 살면 탄식만 나올 뿐이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2-24)라고 했다. 탄식의 삶에서 감탄의 삶으로 나가 길이 끊임없이 사로잡아 오는 죄의 법인 육신의 생각에 집중하지 않고 영의 생각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8:1, 7). 육신의 생각은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말씀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 할 수도 없다. 영의 생각은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말씀을 감격으로 받아 탄식의 삶이 아닌 감격의 삶을 살게 한다.

 

우리의 죄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청산되었다. 과거의 죄가 청산되었다고 믿으면서 미래에는 우리의 힘으로 선을 이루어야 한다면 가망이 없다. 미래를 잘 못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과거 현재는 용납하셨지만 미래는 네가 하는 것에 달렸어. 네가 잘 살아야돼"라고 마귀는 속삭인다. "미래에는 우리가 죄 안 짓고 살아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의롭다고 하실 거야"라는 게 사단의 소리다.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셨다. 만약 하나님께서 과거의 죄만 용서하시고 “미래에는 너의 힘으로 살라”고 하셨다면 우리는 가망 없다. 당신은 가망이 있는가?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은가? 미래는 “네가 네 힘으로 살라”고 한다면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말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청산했다는 말이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는 미래의 죄까지 용서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주님의 말씀이 영이다. 영의 생각으로 이해가 되야 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 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요일3:9).

나는 예전에 이 구절이 이해가 안 돼 고민을 많이 했다. 미래의 죄까지 용서받았음이 믿어질 때 받아들일 수 있는 말씀이었다. 이 말씀이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의미이다. 미래에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는 미래의 죄가 용서 받았다는 의미다. 과거의 죄가 흰 눈보다 더 희게 청산 된 것과 마찬가지로 미래의 죄도 흰 눈보다 더 희게 청산 되었다. 육신을 가진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의 개념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께는 시간이 없으시다.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의 미래의 삶은 아름답다. 감격의 삶 속에 언제 어디서나 능력의 사람을 살 수 있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용서의 복음은 주야로 묵상할 핵심의 말씀이다. 두 손을 들고 “할렐루야” 외치며 노래할 복음이다. 나는 이 글을 쓰다 멈추고 두 손을 들고 흔들며 춤을 추었다.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 드린다. “주여! 주님 감사합니다.”

 

신앙생활을 좀 더 잘 사는데 초점을 두는 것은 잘못 된 것이다. 죄 짓지 않는 삶에 조점을 두는 것도 잘 못 된 것이다. 실천하는 것에 초점을 두기 전에 먼저 할 일은 생각의 변화다. 영의 생각으로 충만하게 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생각이 그러하면 그 사람이 그러하다.

 

생각은 아는 것에서 온다. 주님은 우리가 알기를 원한다고 많이 이야기 하셨다. 바울 사도가 지혜와 계시의 눈이 열리기를 기도했다(엡1:17-23). 지혜의 계시의 눈이 열리도록 케네스 헤긴 목사는 6개월을 집중 기도했다고 했다. 6개월의 기간에 특별히 2박3일을 구별하여 집중 기도하기도 했단다. 그이 책 “믿는 자의 권세”라는 책에서 기록하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여러 번 읽으면서 나도 기도했다. 처음에는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눈이 열리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나도 6개월을 기도하면 될까하는 답답함 까지 생겼다. 새번역 성경으로도 읽으며 기도했다. 과연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이 되고 계시의 문이 가장 명확하게 열리도록 한다. 나는 바울의 기도를 나의 기도록 붙잡고 성경을 읽으면서 선포하며 기도하다가 눈이 번쩍 뜨였다. 그렇게 많이 반복해서 읽었건만 그 날은 달랐다. 에베소서 1장 19절이었다. 이것이 지혜와 계시의 눈이 열리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했다. 새번역 성경에는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알기를 바랍니다.”(엡1:19, 새번역)라고 기록한다. 나는 이 구절을 대하면서 함성을 질렀다. “주님, 저는 알기로 결정했습니다. 저는 압니다.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고 큰지를 압니다. 제 안에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이 있음을 믿습니다.”라고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혼자 기도하는 시간이었는데 너무 기뻤다. 지혜와 계시의 눈이 열린 것이다. 이것이 지혜와 계시가 열린 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상태와 상관없이 영의 생각을 항상 하는 것이 신앙생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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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한 목사] 영의 생각이 능력이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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